종장 에필로그 03
"... 하아..."
편지에 마침표를 찍은 메리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자신이 적은 글을 쭉 읽었다. 살면서 이런 식으로 편지를 써본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그녀라도 자신이 쓴 글이 많이 엉망진창인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제 딴에는 아빠를 보고 싶다는 마음을 열심히 적은 편지였기에 새하얀 편지 봉투에 곱게 접어 담은 후, 밀봉하기 위해 풀을 찾았다.
똑똑똑!
"메리~? 혹시 아직 준비가 덜 끝났어?"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방문이 활짝 열리며 천아가 들어왔다. 그녀는 평소의 캐주얼한 복장이 아닌 단정한 드레스 차림에 간단하게 화장까지 한 상태였다.
"도와줄까?
이제 가야 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다 준비 끝났데!
오늘은 절~대로 늦으면 안 된다고!"
"아, 죄송해요. 천아 언니. 준비는 다 끝났어요. 금방 나갈게요."
메리는 다른 이들이 준비 끝났다는 소리에 허둥대다가 어차피 보내지도 못하는 편지에 더 시간 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고 그대로 편지를 놔둔 채 방을 나섰다.
천아와 함께 거실을 나오자 그곳엔 오늘 결혼식의 주인공인 론과 라니, 그리고 루시아를 제외한 나머지 일행들이 전부 모여있었다. 그들 역시 평소의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남성진은 아담까지 포함해서 전부 멀끔한 정장 차림, 여성진은 천아와 비슷한 드레스나 수수한 블라우스와 스커트 차림이었다.
"메리가 지각하는 건 오랜만이군."
"아, 죄송해요. 운룡 오라버니. 조금 다른 일을 하고 있다가 그만..."
"허허- 제자여, 그리 늦지도 않았건만 그리 눈치를 주느냐."
"... 딱히 눈치 줄 생각은 없었습니다."
운룡 때문에 의연 숙소에서 잠시 지내고 있던 황룡이 히죽이며 그에게 농을 걸어댔다. 그리고 정말 오랜만에 멀끔한 모습으로 방 밖으로 나와 있던 아담이 조급한 표정으로 일행들에게 말했다.
"빨리 좀 가자. 진짜 오랜만에 밖에 갈 수 있게 됐다고."
<... 아담? 밖에 나가고 싶었어요? 원한다면 밖에서ㄷ...>
"네가 말하는 건 '야외'에서도 하자는 거잖아. 난 좀 쉬고 싶다고. 아무 것도 안하고 말이야."
<네? 하지만 저랑 약속했잖아요. 생길 때까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게 해준다고요. 오늘도 라니의 결혼식이 아니라면 절대로 나올 생각 없었어요.>
"적당히 해야 할 거 아니야! 그리고, 애초에 넌 아이가 목적 아니잖아? 너 일부러 그러는 거잖아! 다 안다고!"
<그럴리가요. 아담의 심증일 뿐이에요. 물증은 전혀 없어요.>
"그런데 안 생기는 이유가 뭐냐고 도대체!"
<글쎄요? 아담이 더 힘을 내면 생길 지도요?>
"뭘 어떻게 더 힘을 내라는 거야! 도대체 어떻게! 지금보다 어떻게!"
<저를 안는 게 싫으신가요?>
"그...! 그, 그건 아니지만, 이렇게 미친 듯이 할 필욘 없잖아!"
아담과 이브가 티격대는 모습을 크리스와 독설화가 소파에 앉은 채 바라봤다.
"아담이 밖을 나가고 싶다고 할 정도면 정말... 도대체 얼마나 쥐여짜이는 걸까요. "
"흐음... 본녀도 알고 싶구나. 나중을 위해서라도 미리 공부를 해둬야 하는데 말이지."
"... 설화? 무슨 공부를 하신다는 걸까요...?"
본능적으로 독설화가 좋지 않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은 크리스가 얼굴에 그림자를 만들며 조심스레 물었다. 독설화는 딱히 숨길 생각도 없다는 듯이 평범하게 그에게 답했다.
"뭐, 별거 아니니라. 그녀라면 분명히 여기 있는 그 누구보다 밤일에 대해 잘 알 터. 본녀와 그대에게 분명히 도움이 되겠지."
"제겐 전혀 도움이 안 될 거 같아요."
"그리 단언하지 말거라. 혹시 모르지 않느냐."
"아니요. 그럴 리 없어요."
크리스는 자신이 법적으로 결혼할 수 있게 되는 나이를 마음속으로 세보며 어떻게 하면 독설화가 이브와 위험한 이야기를 나누지 않게 할 수 있을지 생각보다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근처에서 보고 있던 화향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언니를 쳐다봤다.
"언니야. 아무리 그래도 이브한테 뭔가를 배울 생각을 하는 건 그리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응? 하지만 딱히 물어볼 인물이 이곳엔 한 명도 없지 않느냐."
"여긴 없지만, 무적공이라거나 욕망... 아니. 무적공에게만 물어보면 될 거야."
"아, 그렇구나. 그러고 보니 욕망공도 있었구나."
"어, 언니야? 나는 무적공이라고 말했는... 데?"
"흐음~ 언제 한 번 3명이서 모일 기회를 만들어 봐야겠구나."
이미 자신의 말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는 설화를 보며 화향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메리의 곁으로 갔다.
"언니도 많이 변했네. 연애는 전혀 관심도 없던 사람이 이렇게 바뀔 줄이야..."
"아하하... 이번 생에는 그럴 여유가 생겼으니까요. 전생과 다르게 자신의 행복도 찾을 수 있을 정도의 여유를요."
"그렇지. 그건 좋은 거야. 부디 잘못된 방향으로 가지만 않으면... 나중에 욕망공에게 미리 말해서 부탁 좀 해야겠어. 언니에게 이상한 거 가르치지 말라고 말이야."
"저도 할머니께 부탁드려서 욕망공이 이상한 말 하지 못하게 말해 달라고 해볼게요."
"저기~?
우리 이제 가야 한다니까?
라니랑 론이 기다린다고~
거기다 우리 중엔 그냥 하객이 아닌 사람들도 있잖아~"
천아의 말에 소란스럽던 거실이 금세 조용해졌다. 그리고는 천아의 말대로 더이상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백은교의 신전으로 이동하기 위해 숙소를 나섰다.
그런데 다 같이 현관을 나가다가 황룡이 갑자기 문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 스승님? 왜 그러십니까."
"크흠. 짐은 잠시 화장실을 들렀다 가겠다. 너희 먼저 가거라."
"에... 지금까지 아무 말도 없다가 이제 와서 그러는 겁니까. 그냥 좀 참으시죠. 딱히 못 참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어허. 자고로 이런 중요한 행사엔 몸을 깨끗이 하고 가야 하는 법이니라. 절대 늦지 않을 거니 걱정 말고 먼저 가거라."
"하아... 그야 늦진 않겠죠. 시간은 충분하니... 알겠습니다. 저희 먼저 가겠습니다. 너무 늦게 오시면 스승님께서 변비에 걸리셨다고 소문이 날 테니 빨리 오십시오."
"쓰읍! 알았다니까!"
황룡의 외침과 동시에 현관이 닫혔다. 황룡은 화장실을 간다는 말이 정말 농담이 아니었는지 곧바로 화장실로 향했다.
따뜻한 변기 시트에 엉덩이를 붙이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려는 순간,
갑자기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황룡은 운룡이 장난을 치기 위해서 다시 돌아온 거라고 생각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숙소로 다시 돌아온 누군가가 복도를 뛰어서 지나는 소리가 들리고, 방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는 다시 문이 열리고 복도로 나온 누군가가 빠른 속도로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타다다다...! 닷!
뛰는 소리가 화장실 문앞에서 멈추더니,
똑똑똑.
누군가가 화장실 문을 두드렸다.
"... 쯧!"
"아, 황룡. 정말로 화장실에 있으시네요."
"...응? 뭐냐. 메리인가."
문을 두드린 사람은 황룡의 예상과 다르게 메리였다. 황룡은 숙소를 나서자마자 다시 돌아온 그녀에게 왜 돌아왔냐고 물었다.
"오늘 결혼식에서 론 오빠와 라니에게 선물할 예정이었던 꽃다발을 까먹고 놓고 갈 뻔해서요."
"꽃다발인가. 그렇구나. 그건 잊어선 안될 것이지."
"천천히 오세요. 저 먼저 가볼게요."
그리 긴 이야기를 나눌 장소도, 상황도 아니었기에 메리는 간단하게 말하며 숙소를 나갔다.
황룡은 이제는 좀 편히 볼일을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 그러나 잠시 후.
끼이익...
또다시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황룡은 설마 또 메리가 뭔가를 놓고 간 건가 생각했지만, 이번 발걸음은 그리 급한 게 아닌지 복도를 천천히 지나갔다.
정체불명의 손님은 화장실을 지나 복도 중간에 멈추더니 어느 방문을 열고 안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방을 나오더니 숙소 곳곳을 누비기 시작했다.
변기에 앉은 채 기척을 읽고 있던 황룡은 숙소에 들어온 존재가 메리나 일행들이 아닌 예정되지 않은 불청객이라고 판단했다.
"끄응... 도대체 어떤 멍청한 존재란 말인가. 이곳이 '주인공'의 숙소라는 걸 모르는 존재가 있나? 아니면 알고서도 이런 짓을 벌이는 건가... 말을 해서 쫓아내는 건... 허나 쫓아냈다가 뭔가를 잃어버리면 짐의 책임이겠지?"
한창 해피 타임을 보내고 있던 황룡은 화장실을 나가고 싶지 않았고 말을 해서 불청객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것도 그리 내키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의 기운을 폭사시켰다.
숙소 전체에 자신의 강대한 기운을 내뿜었다.
멍청한 불청객을 기절시키기 위해서, 지금 이 집이 텅 빈 보물창고가 아니라 용이 숨어있는 던전이라는 걸 깨닫게 하기 위해서.
그는 오랜만에 자신의 기운을 강하게 뿜어냈다.
하지만,
뚜, 벅..... 뚜벅뚜벅뚜벅뚜벅.
아주 잠깐,
황룡의 기운을 느낀 불청객의 발소리가 멈추는 듯하더니, 이내 아무런 상관없다는 듯이 계속해서 움직였다.
"뭐...? 내 기운을 버티는 녀석이라고? 도대체 누구지?"
예상과 다르게 불청객을 막을 수 없자 살짝 당황한 황룡은 지금 자신과 함께 숙소에 있는 존재가 누군지 확인하기 위해서 뒷정리를 시작했다.
그 사이 발걸음은 볼일을 다 봤다는 듯이 현관을 향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자, 잠깐...! 잠깐 기다려라! 누구냐!"
황룡은 최대한 빠른 속도로 뒷정리를 마치고 화장실 문을 박차고 나와 현관을 확인했다.
그러나 현관엔 원래부터 아무도 없었다는 듯이 잠금장치도 제대로 채워진 채 굳게 닫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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