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Project.P

욕망 시대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판타지

완결

굴P
작품등록일 :
2022.05.11 10:32
최근연재일 :
2023.05.08 18:05
연재수 :
264 회
조회수 :
83,027
추천수 :
3,417
글자수 :
1,991,941

작성
22.11.17 18:05
조회
219
추천
10
글자
19쪽

식사 접대

DUMMY

#1


“오오..”


눈 앞에 놓인 비싸 보이는 접시와 초밥에 군침이 절로 돌았다. 회나 밥알이나 모두 반들반들하게 윤기가 좔좔 흘렀다.


종류별로 모인 초밥 중엔 내가 처음 보는 것도 있었다. 가게 분위기도 그렇고, 주변에 앉아있는 사람들도 그렇고, 메뉴판을 확인해보니 역시 비싼 가게가 맞았다.


“정말 이거 다 먹어도 되는 거죠?”

“그래. 다 먹어도 돼.”

“으흐흐.”


하나를 입에 넣자 사르르 녹는 것 같았다. 편의점에서 가끔 보이던 싸구려 초밥 도시락에 비하면 역시 갓 만든 비싼 초밥은 차원이 다르다.


그래. 인생은 결국 다 먹고 살려고 아득바득 일하는 것 아니던가.

이 욕망 시대의 일꾼으로 살아가는 이상, 이런 작은 행복 하나를 소중히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걸 잠시 잊고 있었다.


“..잘 먹네.

“먹는 게 좋거든요. 그쪽도 얼른 안 먹으면 제가 다 먹을 겁니다?”

“많이 먹어. 그렇게 먹는 것도 젊을 때 먹어야지, 나처럼 나이 먹은 아저씨 되면 먹는 것도 귀찮고 힘들어져.”

“전 나이 먹어도 잘 먹을 것 같은데요?”

“그럼 좋고. 잘 먹는 게 최고야.”


맞은편에 앉은 루저는 초밥 하나를 깨작거리며 그렇게 말했다. 언제 봐도 피로에 찌든 회사원이란 분위기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랑 서로 죽일 기세로 싸웠던 상대라기엔 꽤나 미묘한 상황.

아까부터 경계를 늦추지 않고는 있지만, 정작 상대는 경계심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어 보였다. 내 부상을 보고 여유라도 부리는 거라면.. 뭐, 그럴 만도 했다.

난 초밥 하나를 입에 쑤셔 넣고 물었다.


“그쪽이 ‘굴착기’ 라고 들었는데, 맞아요?”

“그렇게 불리기도 하지. 별로 마음에 드는 별명은 아니야. 난 공사 장비가 아니라 공무원이니까.”

“그럼.. 아시리아에 겁나 큰 구멍 뚫었다는 것도 진짭니까?”


루저는 오묘한 표정으로 턱을 만지작거렸다. 까슬까슬한 수염이 서걱서걱 밀리는 소리가 났다.


“뚫긴 했지.”

“와.”

“그렇게 놀랄 일인가? 거 젊은 친구도 전적을 따지고 보면 꽤 화려한데.”

“저야 뭐 망나니 같은 칼잡이죠. 근데 그쪽은 혼자서 전쟁을 끝내버렸잖아요. 그건 좀 멋지지.”

“뭘. 구멍 하나 뚫은 거로. 멋대로 자기들끼리 싸우다 항복한 거야. 그리고 정작 그 아시리아도 지금은 날아가고 없잖아. 누가 싸움판을 벌여놔서.”


여기서 그걸 찔러오다니. 내가 좀 더 양심적인 사람이었다면 초밥을 낚아채는 젓가락이 멈췄을 거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난 아시리아에서 내가 한 일에 대해 딱히 후회하지 않는다. 헤이카를 막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말이다.


난 기업인이나 정치인이 아니다. 그러니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는, 거기서 뭘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는 내 몫이 아니다.

당장 눈앞의 이득을 좇아 필요한 일을 찾아서 하는 일꾼이란 얘기다. 혜니 씨나 횟집 사장님, 미나가 위험에 처했던 건 분명 가슴 철렁한 일이었지만 결과적으론 누구 하나 죽은 사람도 없다.


내 주변인만 괜찮으면 된다는 건 꽤 이기적인 얘기겠지.

그래도 어쩌겠는가. 얼굴도 모르는 타인의 죽음에 애도하는 건 나보다 더 감성적인 사람에게나 어울리는 일이다.

지금도 세상 어딘가에선 범죄든 병이든 사고든 사람은 죽고 그건 내가 애도할 일이 아니다.


“그건 유감이네요. 뭐, 싹 쓸렸으니 새 도시 세우겠죠. 재개발이라 합시다.”

“헤이카 미켈런은 어쩌고 있지?”


초밥 하나를 우물거리며 지나가듯 루저가 물었다. 슬슬 본심을 드러내는 모양이다.

그래. 아무 이유도 없이 내게 이런 비싼 초밥을 사줄 리가 없지.


“오후에 일정이 있던 것 같던데요.”

“코렌에 돌아와서도 바쁜 모양이군.”

“그건 그래요. 볼 때마다 어디 출장 가 있거나, 회의실에 있거나.. 예전엔 가끔 쉬는 건 봤었는데. 요즘엔 쉬는 모습을 한 번도 못 봤죠. 퇴근은 언제 하려나 몰라.”

“흠. 델라리온 머스칼은?”

“거기서부턴 추가 비용입니다~”


난 메뉴판에서 다른 초밥 세트를 슬쩍 가리켰다. 가격표를 본 루저의 눈썹이 움찔했지만 이내 자포자기하고 세트를 추가 주문했다.


“머스칼은 본사에 있어요. 아시리아에서 돌아온 뒤로 평소보다 조용하길래 얘기도 몇 마디 안 했죠.”

“그런가. 그 팔은 아가레스와 싸우면서 날아갔나?”

“그렇죠. 팔 하나로 끝난 게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어차피 어깨가 너덜너덜했거든요.”

“흠.”

“혹시 그런 쓸데없는 근황이나 물으려고 밥 먹자고 한 겁니까?”

“아니. 위에서 보냈어.”


기어코 내 젓가락이 멈췄다. 불룩한 볼 속의 초밥을 우물거리며 루저의 얼굴을 슬쩍 확인했다.


설마 진짜로 체포하려고 접근한 건가? 이 아저씨 능력은 손에 닿는 걸 죄다 부숴버리는 거고, 지금 거리를 생각하면.. 위험하긴 한데.


“체포하려고 온 거 아니니까 표정 풀어. 젊은 친구. 이런 곳에서 칼부림하면 내가 아니라 경찰이 체포하니까.”

“..위에서 보냈다는 건 뭐, 무슨 뜻입니까?”

“말 그대로야. 내 윗사람이 보냈어. 헤이카에게 접근하는 건 무리니 그 밑에 사람들한테 접근해서 어떻게 뭐, 좋은 인상을 심어보라더군.”

“응??”


생각했던 거랑 정반대의 얘기였다. 루저는 피곤하다는 듯 무거운 눈꺼풀을 끔뻑거리며 말했다.


“그쪽 보스. 헤이카 미켈런이 세계 연합이랑 담판을 지었지. 자기를 포함해서 공업 직원들을 연합의 블랙리스트에서 내려달라는 조건을 걸었어. 그럼 공업의 항공 전력으로 구조 작업을 지원하겠다더군.”

“그건 대충 들었어요.”

“그리고 이미 눈치 깠겠지만 코렌 정부는 결국 연합이 한 마디만 해도 고개 숙이고 굽실거리는 놈들이야. 이 나라 대통령에겐 아무런 힘도 없어.”

“뭔 소린지 알겠네요.”


요컨대 세계 연합이 우릴 더 이상 적으로 보지 않는다는 건, 코렌 정부도 우릴 적대할 수 없게 된다는 뜻이다.


“솔직히 국민들 시선이 그렇게 좋진 않아. 아가레스의 재해로 이곳저곳 난장판이 됐지. 며칠 전엔 그 짐승 새끼들이 난리를 쳐서 작은 도시는 흔적도 없이 날아갔어.”

“이 와중에 군인들을 죽이고 에이전트를 죽인 걸로도 모자라 에이전트 본부 건물까지 테러로 날려버린 공업에게 사실상 어떤 책임도 묻지 않는다는 건 아무래도 납득하기 어려운 사람이 많겠지.”


한참을 우물거리던 초밥을 꿀꺽 넘긴 루저가 한숨을 푹 쉬었다. 바닥에 쩍쩍 들러붙는 한숨이었다.


“게다가 헤이카 미켈런을 광적으로 추종하는 놈들이 섞여서 나라가 아주 난장판이야. 이 사람도 없고 힘도 없는 나라가 이젠 망할 때가 됐나 싶을 정도지.”

“흐음. 그나마 살기 좋은 나라였는데.”

“아직 망했다는 건 아니야. 그냥 그런 느낌이 든다는 것뿐이지. 그걸 윗선에서도 느꼈는지 참 어이없는 지시를 해오더군.”

“공업한테 꼬리 쳐라?”


루저가 끄덕였다. 난 웃음이 터지려는 걸 꾹 참고 초밥을 쑤셔 넣었다.


“약자는 결국 강자에게 붙을 수밖에 없어. 이 별 볼 일 없는 나라에 그나마 있던 자랑거리는 ‘이클립스 공업’ 뿐이니까. 그러니 이참에 줄을 다시 선거지.”

“그래서 저한테 이런 거 사주는 건가 보네요. 참.. 뭐라 말하기 뭐하네. 애초에 이런 접대가 에이전트까지 움직일 일인가?”

“아무도 맡으려고 안 했거든. 칼 하나로 전차도 회치는 괴물이랑 누가 밥상머리에 앉고 싶어 하겠어?”

“아아.”


꿀꿀한 기분에 분위기가 가라앉을 때쯤, 타이밍 좋게 새 세트메뉴가 나왔다. 그리고 루저의 앞에 차가운 맥주도 놓였다. 아까 주문할 때 같이 주문한 모양이다.

루저는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 시원한 목 넘김이 무슨 맥주 광고라도 보는 것 같았다.


“크흐.. 어쨌든 그런 이유야.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내가 개인적으로 그쪽이랑 얘기를 나눠보고 싶었던 것도 있고.”

“흐음. 우리 전에 서로 죽이려 했던 거 기억은 하는 거죠?”

“사람과 사람의 관계라는 건 늘 바뀌는 법이야. 당시 내겐 지켜야 할 후배들이 있었고 그쪽은 눈깔 돌아간 살인귀였으니까. 당연히 부딪칠 수밖에 없었지.”

“그래도 서로 안 죽어서 다행이네요. 솔직히 별로 악감정은 없었으니까.”

“그건 이쪽도 그래.”


다시 맥주잔을 기울인 그는 단숨에 남은 맥주를 싹 비웠다. 텅 빈 잔에 맺힌 물방울이 또르르 흘러내려 테이블을 적셨다.


“그럼 슬슬 중요한 걸 하나 확인하지. 공업은 월교와 무슨 관계지?”

“무슨 관계라고 할 것도 없는데요. 대판 싸울 기세라서.”

“무슨 일이 있어도 월교와 손을 잡을 생각은 없다. 그렇게 이해해도 되나?”

“절대 손은 안 잡을 겁니다.”


월교와 손을 잡아? 그 사이비 광신도에 괴물들만 모인 놈들이랑 같이 일하느니 촌구석에 처박혀서 회나 써는 게 훨씬 나을 것 같다.


“헤이카 미켈런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나?”

“...음..”


물론, 여기까진 내 개인적인 생각에 불과하다.

헤이카가 월교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굳이 깊숙이 따져본 적도, 물어본 적도 없었다.


그래도 헤이카는 죄화를 죄다 태워버리겠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 죄화를 유용하게 써먹는 월교니 서로 타협점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크루아틀도 이미 우리랑 한판 할 생각으로 가득하고. 헤이카도 크루아틀을 그냥 둘 생각은 없다. 고민할 필요도 없이 적대적인 관계다.


“헤이카도 똑같이 생각하겠죠. 월교랑 손을 잡을 린 없을 겁니다. 전쟁 준비를 하면 모를까.”

“그럼 일단은 안심이군.”

“줄타기 제대로 했나 보는 건가.. 월교에 붙을지 공업에 붙을지?”

“아니. 그냥 확인이야. 월교는 선을 넘었어. 크루아틀인지 하는 그 짐승 새끼 고삐가 풀려버렸으니까. 너희가 그런 놈들한테 붙으면 곤란하거든.”


그놈이 날뛰어준 덕분에 세계 연합과 다시 우호적 관계로 돌아온 공업으로선 감사해야 할 일이지만.


루저는 초밥 하나를 더 집어 먹곤 탁탁 손을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갑니까?”

“노페이스 팀장이랑 식사 한 번 했다고 하면 위에서도 더 귀찮게 안 굴겠지. 계산은 하고 갈 테니 남은 거 천천히 먹고 들어가.”

“저 하나 더 시키고 싶은데.”

“...그래.. 얼른 시켜라.”


이 아저씨 생각보다 괜찮을지도.



#2


가게를 나온 루저는 가장 먼저 담배를 입에 물었다. 피로에 찌들어 무겁던 몸이 조금은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얘기는 잘 끝내셨습니까?”


멍하니 칙칙한 하늘을 올려다보던 루저는 정면에서 우뚝 서 있는 사무엘을 발견했다. 루저가 피식 웃었다.


“네 팀장 건드릴까 봐 미행이라도 했냐?”

“선배님 능력을 알고 있으니까요. 산 팀장이 가루가 되는 건 곤란합니다.”

“농담도. 저놈 가루로 만들려면 나도 죽을 각오 해야돼.”


루저는 진지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사무엘에겐 그마저도 겸손처럼 들렸다. 그는 뚜벅뚜벅 다가와 루저의 옆에 섰다.

먹구름이 가득 낀 묵색의 하늘이 우르릉 울었다. 또 비가 쏟아질 것 같았다.

그 하늘에 시선을 고정한 채 사무엘이 말했다.


“후배들은 모두 무사한 것 같더군요. 테러에 휘말리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네가 왜 우리 애들을 신경 써?”

“저도 한때는 코렌의 에이전트였습니다. 제 자리였던 선배님 옆을 대신하는 후배들인데, 관심이 갈 수밖에 없죠.”

“헛소리. 나한텐 몰라도 겨울이나 우리 막내한테 괜히 치근덕거리지 마라.”

“예. 저도 그 정도 눈치는 있습니다.”


사무엘도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루저가 눈살을 찌푸렸다.


“너 담배 끊은 거 아니었냐?”

“지금은 여유가 좀 생겼으니까요.”

“허, 공업에 붙더니 아주 살판났구만. 박민욱.”

“솔직히 말하면, 맞습니다. 레베스타에서 일할 때보다 훨씬 힘들지만 적어도 마음은 편합니다.”


탁, 하며 라이터의 불이 담배에 옮겨붙었다. 빨갛게 달아오른 담뱃불에 사무엘의 입술 사이로 뿌연 연기가 흘러나왔다.


“그래서.. 원하는 건 알아내셨습니까?”

“대강은. 공업은 월교와 적대적인 관계다. 그거 하난 확실한 것 같더군.”

“아시겠지만 지난번 테러는 크루아틀의 선전포고입니다. 곧 크루아틀 정복군이 본격적으로 침공을 개시하겠죠. 더 무서운 건..”

“그 침공이 어디서 시작될지 전혀 모른다는 거겠지.”


연기를 뿜으며 사무엘이 끄덕였다.


“그렘린에 대해서도 조사하신 모양이더군요.”

“별걸 다 아는구만. 그래. 조사했다. 키란 샤토가 그 약이 뭔가 있다는 듯 말했으니까.”

“어디까지 알아내셨습니까?”


손가락 사이에 끼운 담배를 까딱거리던 루저는 잠시 뜸을 들이다 말했다.


“그렘린은 어떤 부작용도 없으면서 효과가 좋아 그쪽 업계에서 꽤 주목받던 신약이다. 마하카리타 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의 음지에선 이미 꽤나 나돌고 있더군.”

“하지만 이 약엔 부작용 이상의 문제가 있었지. 단 한 번이라도 이 약을 접했던 인간은 크루아틀의 손아귀에 들어간다는 것. 크루아틀이 신호를 보내면 그 사람은 이성을 잃고 짐승으로 변한다.”

“이 그렘린의 아이디어 제공자는 키란 샤토였고 생산은 아시리아의 키아룬 모타벨이 담당했다. 그리고 이건 최종적으로 크루아틀의 전쟁을 위한 포석이었지.”


루저는 씁쓸한 얼굴로 혀를 찼다. 그의 얼굴에 짙은 어둠이 내리깔렸다.


“선을 넘어도 한참을 넘었어. 약에 빠진 놈들을 옹호하고 싶진 않지만, 사람을 괴물로 만드는 약을 이렇게 잔뜩 풀어놓는 건 인도적이라는 범주를 너무 벗어났다. 미치광이들이 아니고서야 이런 짓을 벌일 리가 없어.”

“예. 하지만 월교는 선배가 생각하는 그 미치광이들의 모임이죠. 키란 샤토, 키아룬 모타벨, 크루아틀. 세 명의 사도도 그렇고 남은 사도나 블라다카 교주도 그럴 겁니다.”

“쳇. 어쨌거나 상황이 심각해. 그렘린이 대체 어디까지 퍼졌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 약을 접했는지 정확히 알아낼 방법이 없거든. 아마 며칠 전 세계 이곳저곳에서 벌어진 테러는 일종의 맛보기였을 거다.”


약을 접한 인간이 짐승으로 변해 날뛰기 시작하는 것.

만약 크루아틀이 세계 곳곳에 퍼진 그렘린 중독자들에게 동시에 신호를 보낸다면 이전의 테러와는 규모 자체가 다른 재앙이 벌어질 게 뻔했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 조차 현재로선 막을 수단이 전혀 없었다.


“생산 담당이던 키아룬 모타벨이 공업의 손에 들어갔고, 그렘린 생산 공장도 전부 박살 났으니 그렘린이 더 만들어지진 않겠지. 문제는 이미 만들어진 그렘린이 여전히 나돌고 있다는 거다.”

“지금으로선 방법이 없군요. 그렘린을 조사하는 건 어떻습니까? 짐승으로 변하는 원리를 알아내면 막을 방법이 있을 수도 있잖습니까.”

“이미 해봤어. 온갖 전문가들도 두 손 두 발 다 들더군. 원재료도, 원리도 전혀 알아낼 수 없다고.”


루저의 한숨은 점점 무거워졌다.


“젠장. 크루아틀이 지랄하기 시작하면 분명 전쟁이 터질 테고, 그럼 나도 전쟁터로 움직일 게 뻔하지. 귀찮아 죽겠네. 망할 짐승 새끼.”

“헤이카 회장이라면 방법이 있을 겁니다.”

“..아무리 공업이라도 이 상황에 무슨 방법이 있다는 거냐? 전세계 그렘린 중독자들만 골라서 찾아낼 방법부터가 문젠데.”

“아, 뭐야? 왜 갑자기 이게 나와?”


그때, 루저는 지나가던 한 학생이 휴대전화를 향해 투덜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갑자기 나도 이거 나오는데?”

“나도.”

“누가 채널 돌렸나?”


그 학생뿐만이 아니었다.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던 주변 사람들도 표정이 바뀌었다. 그가 나온 초밥집 안에서도 가게에 달린 TV를 보던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근처 빌딩에 달린 광고 스크린도 갑자기 화면이 바뀌었다. 루저와 사무엘은 멍하니 그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긴급 기자회견?’


기자들이 잔뜩 모이고, 빈 단상을 향해 또각거리는 굽 소리가 들렸다.

이내 화면에 모습을 드러낸 건 이클립스 공업의 회장. 헤이카 미켈런이었다.


{ 안녕하세요? 코렌 국민 여러분. 전 세계에 계신 모든 분들. 이클립스 공업의 헤이카 미켈런입니다. }


최근 가장 큰 이슈가 되던 공업의 회장이 모든 방송사 채널을 잡아먹고 갑자기 나타난 것이다.

길을 걷던, 가게 안에서 투덜거리던 사람들도 다들 조용해졌다. 루저와 사무엘도 그 중 하나였다.


{ 갑작스럽지만 여러분께 급히 알려 드릴 일이 있어서 이렇게 끼어들게 됐습니다. }


화면 속 헤이카는 투명한 비닐 팩을 잘 보이도록 내밀었다. 그걸 본 루저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 얼마 전, 전세계 이곳저곳에 괴생명체가 나타나 날뛰는 테러가 발생했습니다. 일명 ‘짐승 테러’ 라고 불리고 있는 그 사건이죠. }

{ 그 테러의 주범은 바로 이 ‘그렘린’ 이라 불리는 약입니다. }

{ 마약의 일종이고 음지를 통해 전 세계로 은밀하게 퍼져 나가던 약인데,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이 약에는 심각한 부작용이 있습니다. }

{ 지금부터 보실 화면은 조금 충격적인 화면입니다. 그래도 부디 꼭 봐주셨으면 합니다. }


그녀의 등 뒤 스크린에서 온갖 영상이 주르륵 떠올랐다.


“..이게 무슨...”


멀쩡하던 사람이 짐승으로 변하는 장면이 적나라하게 영상에서 재생되고 있었다.

그렇게 크루아틀의 수인병(獸人兵)이 된 희생자가 날뛰며 사람을 공격했다. 어떤 검열도 없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참상에 그 화면을 바라보던 사람들과 기자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 짐승화가 시작되면 더 이상 사람으로서의 이성이 남지 않습니다. 말 그대로 이성 잃은 짐승이 되어 무차별적으로 날뛰게 될 뿐이죠. }

{ 지금 이 회견은 전 세계에 동시 송출되고 있겠지만, 혹시 보지 못한 분들을 위해서라도 이 영상을 널리 퍼뜨려주시기 바랍니다. }

{ 그리고 한 번이라도 그렘린을 접한 분들을 저희 이클립스 공업에서 무상으로 치료하겠습니다. 짐승화는 사전에 막을 수 있습니다.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각국에 지정된 저희 공업 소유의 의료시설로.. }


루저는 멍하니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지금까지 자신이 해오던 고민을 저 화면 속 여자는 너무나 간단하게, 그리고 압도적인 영향력으로 해결해버리고 있었으니까.


“이거 참...”

“...”

“저 여자가 저렇게 나오면 지금까지 난 뭐하러 고민하고 뛰어다니던 거냐?”


루저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그는 어느새 다 탄 담배를 비벼 끄고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웃음소리에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그러거나 말거나, 루저는 시원하게 웃었다. 찌든 피로를 날려버릴 기세로.


그렇게 한참을 배를 잡고 웃던 그는 찔끔 나온 눈물을 훔쳤다.


“하아.. 빌어먹을. 이래서 돈 많고 힘 있는 놈들은 못 이긴단 소리가 나오는 거겠지.”


루저는 새 담배를 물었다. 사무엘이 그를 향해 불 들어온 라이터를 내밀었다.


“..미리 말해두는데, 위로하지 마라.”

“크흠.”


뭔가 말하려던 사무엘이 헛기침을 하며 입을 다물었다. 피식하는 미소를 지은 루저가 담배 끝을 빨갛게 물들였다.


후두둑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욕망 시대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완결 공지 +3 23.05.08 146 0 -
264 욕망 시대(完) +3 23.05.08 203 9 24쪽
263 마법사의 보답 +2 23.05.05 153 10 13쪽
262 광야(曠野) 헤이카 미켈런 +2 23.05.04 174 12 15쪽
261 재회 +1 23.05.03 166 11 15쪽
260 사막, 괴물, 어린 칼잡이들 +3 23.05.02 161 11 12쪽
259 라푸스 벤데르드 +2 23.05.01 168 9 20쪽
258 욕망 시대(13) - 사무엘(Samuel) +2 23.04.28 169 8 17쪽
257 욕망 시대(12) - 눈 내리는 날 +1 23.04.27 162 8 15쪽
256 욕망 시대(11) - 죽음이 아닌 삶을 바라게 될 때까지 +1 23.04.26 157 7 14쪽
255 욕망 시대(10) - 강철의 기사 23.04.25 154 9 15쪽
254 욕망 시대(9) - 소리 없는 침식 +1 23.04.24 165 9 11쪽
253 욕망 시대(8) - 일방적 계약 +1 23.04.21 169 9 20쪽
252 욕망 시대(7) - 길을 잃고 +1 23.04.20 164 9 15쪽
251 욕망 시대(6) - 정복자 23.04.19 162 9 16쪽
250 욕망 시대(5) - 악룡과 용사 +1 23.04.18 159 9 17쪽
249 욕망 시대(4) - 오염구역 탐사 +2 23.04.17 158 8 14쪽
248 욕망 시대(3) - 죽음의 땅 +2 23.04.14 171 9 13쪽
247 욕망 시대(2) - 위험한 여행 +1 23.04.13 155 9 13쪽
246 욕망 시대(1) - 탐욕의 바르바로사 +1 23.04.12 178 9 13쪽
245 죄인 +2 23.04.11 157 8 15쪽
244 급류(急流) +2 23.04.10 176 9 13쪽
243 삼류 악당 +2 23.04.07 179 10 23쪽
242 우는 아이 +1 23.04.06 161 8 15쪽
241 에콰(5) - 일그러진 미소 아래 +2 23.04.05 183 9 15쪽
240 에콰(4) - 핏덩이 +1 23.04.04 178 9 17쪽
239 에콰(3) - 욕망죄화(欲望罪花) +1 23.04.03 184 10 27쪽
238 에콰(2) - 모르스 에콰 +1 23.03.31 167 9 13쪽
237 에콰(1) - 소녀 +1 23.03.30 166 9 14쪽
236 개벽(35) - 문을 닫다. +1 23.03.29 169 9 15쪽
235 개벽(34) - 찾아온 영웅, 떠나는 영웅 +1 23.03.28 173 9 21쪽
234 개벽(33) - 베르나데트 23.03.27 163 9 20쪽
233 개벽(32) - 자유를 향해 +2 23.03.24 163 9 18쪽
232 개벽(31) - 데이케트람 23.03.23 168 9 18쪽
231 개벽(30) - 행복을 쫓던 사내 +1 23.03.22 168 8 21쪽
230 개벽(29) - 침묵의 도시 23.03.21 165 8 17쪽
229 개벽(28) - 가능성 +1 23.03.20 171 9 17쪽
228 개벽(27) - 시카 23.03.17 165 9 17쪽
227 개벽(26) - 36년 +1 23.03.16 233 9 17쪽
226 개벽(25) - 빛바랜 세상 +1 23.03.15 167 9 13쪽
225 개벽(24) - 문 23.03.14 174 9 18쪽
224 개벽(23) - 본보기 +1 23.03.13 166 9 16쪽
223 개벽(22) - 옛 동료 +1 23.03.10 176 10 16쪽
222 개벽(21) - 마지막 조각 +1 23.03.09 181 10 21쪽
221 개벽(20) - 흐름 23.03.08 173 10 16쪽
220 개벽(19) - 시라비아의 햇빛 23.03.07 179 10 15쪽
219 개벽(18) - 영웅 증후군 23.03.06 204 10 16쪽
218 개벽(17) - 친구인가 적인가 23.03.03 183 10 16쪽
217 개벽(16) - 습격 23.03.02 182 10 14쪽
216 개벽(15) - 헤르그부르 23.02.28 190 10 15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