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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 시대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판타지

완결

굴P
작품등록일 :
2022.05.11 10:32
최근연재일 :
2023.05.08 18:05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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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21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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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쪽

욕망 시대(8) - 일방적 계약

DUMMY

#1


“흣차!”


군용 간이 의자의 다리가 삐걱거리며 위태로운 비명을 질렀다. 그 광경을 보던 오염구역 봉쇄기지 감독관 크흐텔 소령은 생각했다. ‘오늘을 못 버티겠군.’


그렇게 죽어가는 군용 의자에 앉아있는 남자는 세계 연합 본부 부총장인 어셔 스콧이었다.


스콧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올챙이처럼 튀어나온 배를 쓰다듬으며 한 손엔 콜라가 든 수통을 자주 홀짝거렸다. 그를 지켜보던 크흐텔 소령은 한숨을 내쉬었다.


“부총장 각하. 이제 그만 돌아가셔야 하지 않습니까? 집에 가족분들이···.”

“응? 내 장기 출장은 다들 익숙해서 괜찮네. 그보다 자네는 내가 빨리 돌아갔으면 하는 눈치구만. 내가 귀찮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크흐텔 소령은 차마 연합의 부총장씩이나 되는 거물이 2주 넘게 오염구역 봉쇄기지에 눌러앉아 있는 게 불편하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물론, 그런 불편한 기색을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긴 했다.


하지만 어셔 스콧은 그의 생각보다 뻔뻔한 남자였고, 오히려 크흐텔 소령이 쩔쩔매는 모습을 내심 즐기는 수준이었다.


“그래도 2주가 넘었습니다. 아직까지 되돌아오지 않았다는 건 저 오염구역 안에서 끝내 빠져나오지 못했다는 뜻이겠죠.”

“다른 곳으로 나갔을 가능성은 없나?”

“아시겠지만 오염구역의 경계선은 아주 촘촘하게 감시되고 있습니다. 어디에도 그들이 빠져나간 모습이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크흐텔 소령은 높은 봉쇄벽을 바라보았다.


“저 벽 너머로 들어가서 멀쩡히 되돌아온 사람은 없었습니다. 하물며 2주나 지났다면, 죽었다고 봐야겠죠.”


그건 크흐텔 소령이 이 오염구역 봉쇄기지의 감독관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저 벽 너머 오염구역은 그 어떤 생명도 살아갈 수 없는 곳이다. 무생물인 기계조차 백사에 오염되어 고장을 일으키는 곳에서 산 사람이 살아나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을 막지 못한 처벌은 흔쾌히 받겠습니다. 감독관으로서 제가 부족했다는 증거니까요. 그러니 이젠 돌아가 주십시오. 벽 너머라곤 하나, 이곳도 완전히 안전한 곳은 아닙니다.”

“정말 그들이 저 안에서 죽었을 거라 생각하나?”

“예.”


크흐텔 소령의 대답은 확신에 차있었다. 수통 속 콜라를 들이켠 스콧은 히죽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난 살아 나올 거라 생각하네. 생각해보게. 안에 들어간 건 괴물들이야. 델라리온 머스칼, 공업의 산 팀장. 자네는 그들이 평범한 사람처럼 보이던가?”

“···아무리 비정상적인 감응자들이라도 백사병 앞에선 무력합니다. 이렇게 기다리셔 봤자 저들이 돌아오는 일은 없을 겁니다.”

“단호하구만.”

“설령 그들이 나온다고 해도, 저희는 그들을 구속할 겁니다. 심각하게 오염된 백사병 감염자가 멋대로 활개치게 둘 순 없으니까요.”

“막을 자신은 있고?”

“목숨을 바쳐서라도 막아야죠. 이곳은 인류의 최전선입니다. 이 봉쇄선이 무너진다면 황성은 과거 지구가 그랬듯 백사병으로 뒤덮이게 됩니다. 그런 재앙을 저와 제 부하들의 목숨으로 막을 수 있다면야 기꺼이 이 목숨을 내놓을 수 있습니다.”


그의 대답에 스콧은 감탄했다. 크흐텔 소령은 군인으로서, 이 인류의 최전선을 지키는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자신이 맡은 사명을 잘 알고 있었다.


“박수라도 쳐주고 싶군. 여기서 근무하고 얼마나 받나?”

“기밀입니다. 하지만 돈 때문에 이곳에 붙어 있는 건 아니라고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깟 돈도 결국 세상이 망하면 종이쪼가리에 불과하니까요.”

“그건 그렇지. 하하하.”


다시 수통을 꺼낸 스콧이었지만 그의 수통은 입가에 닿기 전에 멈췄다. 스콧은 선글라스를 올리곤 벽을 노려보았다.


“하나 더 물어보겠네. 만약 그들이 백사병에 감염되지 않은 채로 돌아 나온다면?”


크흐텔 소령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가능성은 없습니다.”

“그 가능성이 저기 있구만.”


그의 말과 동시에 기지의 경보음이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크흐텔 소령은 창백한 얼굴로 봉쇄벽을 바라보았고, 벽 너머로부터 귀환한 이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스콧은 기분 좋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간이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역시 세상 일은 모르는 법이지.”




···




“아직도 목구멍이 타는 것 같아···.”


산의 중얼거림에 머스칼의 후드가 그를 돌아보았다. 머스칼의 한쪽 어깨엔 알산나가, 다른 쪽엔 헤카테, 그리고 등에는 기절한 파일럿 커너를 짊어지고 있었다.


“산. 너까지 짊어지라는 건 아니겠지.”

“남자한테 업히긴 싫네요.”

“그보다 군인들이 왔습니다.”


레토 신부가 정면을 가리키며 말했다. 사이렌 소리와 함께 우르르 몰려든 봉쇄기지의 군인들은 순식간에 그들을 포위하고 총구를 내밀었다. 그들은 마치 방호복처럼 두꺼운 옷으로 무장하고 있었는데, 백사 오염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들은 오염을 막는 인류 최전선의 군인들이다. 오염구역에서 빠져나온 산 일행을 막아서는 건 산도 예상하고 있던 바였다.


“문이 열렸는지 확인해!”

“문은 닫혀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넘어온 거지?”

“저 위로 벽 넘어서. 머스칼이 있으니까.”


산은 태연하게 말하며 한 걸음 나섰다. 군인들의 총구가 산을 향했다.


‘근데 뭐라고 설명하지?’


막상 나서긴 했지만 백사에 오염되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는 것부터가 문제였다. 들어갔을 때처럼 무력을 쓰는 것도 방법이지만, 공교롭게도 지금은 새로운 수송기가 오기 전까진 움직이기도 어려운 상태였다.


그렇게 산이 고민이 길어지는 동안 군인들 뒤로 호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길 좀 비켜보시게!”


간만에 다시 보는 스콧의 얼굴이었지만 산은 썩 반갑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산에게 있어서 세계 연합은 귀찮게 구는 상대 정도라는 인식만 남아있었다. 부총장인 어셔 스콧에 대해선, 더더욱 그랬다.


“콜라 영감님?”

“하하. 자네들 마중하려고 기다리고 있었지. 얼마나 오래 기다렸는지 모르겠어. 안에선 며칠이나 지났나?”

“글쎄요? 3일 지났나? 5일?”


산 일행을 포위한 군인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스콧은 씩 웃으며 말했다.


“밖에선 2주가 넘게 지났네. 역시 바깥과 안쪽은 시간도 뒤틀려있구만. 예전에 어떤 레베스타 대학교수가 내놨다가 무시당한 논문이 딱 이거였는데, 이제라도 증명이 되었구만 그래.”

“···.”

“자자! 다들 총 내리고···!”

“부총장 각하!”


뒤따라온 크흐텔 소령은 방독 마스크와 방호 장갑을 낀 상태였다. 그리고 서둘러 스콧에게도 방독 마스크를 건넸다.


“어서 쓰십시오. 그리고 아무리 각하라도 이 봉쇄기지의 지휘관은 접니다. 죄송하지만 물러나 주십시오.”

“저기 백사에 오염된 사람이 있어 보이나? ···하얀 게 하나 있긴 하구만. 그래도 저 아이를 빼면 다 멀쩡해 보이지 않나?”

“눈에 보이는 변화만이 백사 감염자는 아닙니다. 백사 오염 수치를 확인하기 전까진 모두 지시에 따라주십시오. 지시에 불응할 시 발포하겠습니다.”


산과 머스칼, 그리고 레토 신부가 서로 시선을 교차했다. 산은 한숨을 내쉬며 손을 머리 위로 들었다.



#2


봉쇄 기지에 있는 건 군인들뿐만이 아니었다. 기지에 머무르며 백사병에 대해 연구하는 연구진들은 오염구역 안에서 되돌아나온 우리 소식을 듣자마자 엄청난 속도로 검사를 준비했다.


뭔가 대단한 걸 준비한 것치곤 검사 자체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피와 머리카락을 채취하고, 결과가 나오기 전까진 철저하게 외부와 차단된 격리 공간에 갇혀 있을 뿐이었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데?’


창문 하나 없는 격리 공간이었지만, 상당히 깨끗하고 기본적으로 있을만한 건 있었다.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건 조금 딱딱해도 누울만한 침대가 있다는 점이었다.


그 침대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던 난 뒤늦게 찾아오는 피로에 조금씩 눈이 감겼다. 최근 제대로 쉬어본 기억이 없었다. 이럴 때라도 제대로 쉬어두고자 생각하며 난 완전히 눈을 감았다.


하지만 잠에 빠지기 직전, 격리되었던 문이 벌컥 열리는 바람에 내 눈은 다시 떠졌다.


“부총장 각하!”

“괜찮다니까. 검사 결과 나왔잖나? 백사병 아니지?”

“그, 그건 그렇습니다만 피의 상태가···.”

“그거까진 신경 쓰지 말게. 백사병만 아니면 되지. 잠시 얘기 좀 할 테니 자리 좀 비켜주게.”


무작정 격리 공간에 쳐들어온 평소의 어셔 스콧과 방호복으로 완전 무장한 연구원 사이의 실랑이는 그 이후로도 조금 더 이어졌다. 그 광경을 보던 난 한숨을 쉬며 다시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조금 뒤, 협상이 끝났는지 문이 닫히고 방 안에는 스콧의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오, 생각보다 잘 되있구만.”

“···피곤하니까 나중에 합시다. 콜라 영감님.”

“어려운 얘기 하러 온 건 아닐세. 피곤하면 그렇게 누워서 듣기만 해도 돼.”

“어차피 또 프로젝트니 뭐니 얘기하러 온 거잖아요. 관심 없어요.”


스콧은 격리소 구석에 박혀 있는 의자를 내 침대 옆으로 끌고 와 앉았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벨트에 매어둔 수통을 들어 안에 든 콜라를 술처럼 들이켰다.


“지난번에 자네는 말했지. 헤이카 미켈런의 계획이 우리의 영웅 계획보다 훨씬 낫다고.”


역시 그 얘기를 먼저 꺼낸다. 솔직히 할 말이 없었다. 헤이카의 계획은 제대로 실패했고, 막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세상은 끔찍한 꼴을 맞이했을 터였다.


“비웃으려면 비웃어요.”

“도전자의 실패를 비웃는 건 무례한 일일세. 난 그렇게 무례한 인간이 아니야.”

“그럼 뭡니까?”

“생각의 변화가 있는지 듣고 싶구만. 아직도 우리 계획이 바보 같다고 생각하나?”


스콧의 질문은 내겐 고민의 여지도 없었다.


“예. 똑같이 바보 같은 계획이라 생각하는데요.”


차라리 세상이 망했으면 망했지 헤이카의 계획이 실패했어도 영웅을 발굴해 세상을 구한다는 어딘가 나사 빠진 프로젝트에 몸을 맡길 생각은 없었다.


“그럼 지금 세상이 망해가는 걸 그냥 보고만 있을 셈인가?”

“글쎄요. 세상이 망하든 흥하든 난 별로 관심 없어서. 나만 잘살면 되거든요.”

“그 말을 자네 자식들에게도 할 수 있나?”


토끼같은 자식들을 갖고 싶다는 건 내 꿈의 일부긴 했지만 내 자식들이 살아갈 세상에 대해선 생각해본 적도 없다. 난 고개를 저었다.


“알아서들 살겠죠. 자식이 생길지 안 생길지도 모르는데, 그런 것부터 걱정하는 건 좀 그러네요.”

“그렇겠구만. 그럼··· 방향성을 조금 바꿔보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네. 우린 블라다카를 잡을 걸세.”


다시 감았던 눈이 또 뜨였다. 난 천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힘내봐요. 응원합니다.”

“자세한 건 모르지만 자네도 많은 경험을 했겠지. 그러니 자네도 슬슬 깨달은 게 많을 거라 생각해. 월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사이비 광신교.”

“교주 블라다카에 대해선?”

“죽어 마땅한 놈.”


그놈의 이름을 들을 때마다 자꾸 어머니의 기억 속에서 본 블라다카가 떠올랐다.


반드시 복수를 하고 싶다느니, 그런 수준의 증오를 품은 건 아니지만 만약 블라다카가 내 눈앞에 있다면 모가지 정도는 살포시 자르고 싶다 생각하는 나였다.


“우리랑 같이 블라다카를 잡을 생각은 없나?”

“세계 연합이 고작 사이비 교주 하나에 그렇게 신경을 쓰는 이유가 있어요?”

“그 괴물이 ‘고작’이라 불릴 정도가 아니라는 건 자네도 알 텐데.”


부정할 수 없었다. 난 피로를 잠시 걷어내고 몸을 일으켜 앉았다.


“전에 말했듯이 이 세상은 오래가지 못하네. 그리고 우린 세상이 망해가는 원인 중 하나로 죄화를 짚었지. 자네가 아는지 모르겠지만, 죄화는 월교에서 뿌리고 있는 걸세. 블라다카가 없어지면 죄화는 더 이상 늘어나지 않아.”


스콧의 말을 의심하진 않는다. 기억 속 블라다카는 죄화를 부렸고 죄화의 씨앗이라는 명백한 물증도 있었다.


“하지만 블라다카는 인간이 아닐세. 그런 괴물에게 법이라는 인간의 줏대를 들이밀어 봤자 아무것도 바뀌지 않겠지. 그러니 조금 과격한 방법을 쓰는 걸세.”

“그게 당신네가 뽑은 영웅이 사이비 교주를 죽이는 일이고, 그래서 그 영웅을 칼날이라 부른다?”

“제대로 이해했군.”

“당신네가 말하는 그 영웅조차 괴물이라는 자각은 있는 거죠?”


스콧은 말없이 미소 짓기만 했다.


어머니껜 참으로 미안한 일이지만 난 내가 평범한 인간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평범한 인간은 나처럼 다리가 빠르지 못하고, 짐승의 심장을 먹지도 않으며, 용의 피를 마시고도 멀쩡할 리 없다.


유감스럽게도 난 이미 인간의 범주를 벗어난 괴물이라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


그리고 얼핏 보면 연합의 영웅 프로젝트는 인간찬가를 꿈꾸는 계획이지만 괴물을 잡기 위해 저들이 선정한 영웅 또한 괴물이라는 모순이 존재한다. 결국 인간들의 세상을 멸망시키는 것도, 구하는 것도 똑같은 괴물이다.


아무리 괴물을 인간들의 영웅으로 포장해봤자 괴물의 정체는 달라지지 않는다.


인류의 영웅이라 굳게 믿던 대상이 사실은 괴물이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 시민들의 반응은 불 보듯 뻔하다.


“나 말고 다른 후보 없어요?”

“자네가 가장 유력한 후보야. 혹시 이것 좀 보겠나. 나한텐 보여주진 말고.”


스콧은 꽤 꼼꼼하게 밀봉된 서류 봉투를 건넸다. 받아서 뜯어보니 안에는 더 작은 봉투가 있었고, 그걸 뜯고 나서야 한 장의 사진이 튀어나왔다.


“이건···.”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하얀 20대 중반 정도의 남자. 남자의 얼굴은 어머니의 기억 속에서 봤던 그 얼굴이었다.


‘블라다카.’


그냥 봐선 역시 중증 백사병 감염자라는 걸 제외하면 특출난 건 없는 외모다. 누가 봐도 사람 좋아 보이는 낯짝으로 신도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는 그런 타입이다.


“어떤가? 혹시 속이 안 좋거나 기분이 나빠지거나 하진 않나?”

“그런 건 없네요.”

“그래서 자네가 가장 유력한 후보라는 거야.”

“···아.”


어머니의 기억 속, 블라다카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 볼 수 있던 사람은 없었다. 그때의 기분, 감정, 올라오는 구역질은 내 것이 아니지만, 내 머릿속에 기억처럼 저장되어있었다.


“그건 블라다카의 진짜 얼굴인 것 같더군. 그리고 무슨 능력인진 모르겠지만 블라다카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 볼 수 있는 건 내가 아는 한 신도들을 제외하면 자네밖에 없네. 나머지는 얼굴을 보자마자 이성을 잃거나, 주저앉아 기절할 때까지 속을 게워내지.”

“혐오감 때문이겠죠. 딱히 혐오스럽게 생긴 건 아닌 것 같은데, 흠. 마법인가?”


어느새 선글라스를 벗은 스콧의 눈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단어가 이 영감의 스위치를 눌러 버린 것 같다.


“자네도 마법을 믿는군?”

“그냥 그런 것 같다고요. 그보다···.”


블라다카의 사진을 침대에 툭 내던지자 갑자기 스콧은 구석에 있는 변기로 달려가 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저 영감은 제대로 못 버틴다는 걸 잠깐 잊었다.


“죄송.”

“괘, 괜찮네···! 하하! ···일단 사진부터 좀 집어넣어 주게.”


그의 요청대로 사진을 다시 꼼꼼히 집어넣어 건네주었다.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은 스콧이 깊은숨을 내쉬며 끄덕였다.


“그보다 이걸 어떻게 잡으려고요?”

“모르지. 자네 칼로 그냥 쑤시던가.”

“···진짜 무책임하네.”

“농담일세. 블라다카는 사실 지금 궁지에 몰려 있어.”


내가 고개를 갸우뚱하자 스콧은 입꼬리를 당기며 날 가리켰다.


“시라비아 마피아가 블라다카가 있는 곳을 계속 들쑤셨거든. 게다가 블라다카의 장난감도 차례차례 부수고 다녔지.”

“시라비아 마피아가? 난 그런 거 시킨 적 없는데?”

“자네 말고 모르스 에콰의 짓이야.”


또다시 나온 그 이름에 헛웃음이 나왔다.


“내가 보기엔 모르스 에콰는 블라다카를 죽이려다 실패한 모양이야, 그래도 나름의 성과는 있었네. 마피아들에게 계속 쫓기던 블라다카의 세력이 꽤 줄었어. 아, 여기서 말하는 세력이란 신도들이 아니라 월교에 있는 괴물들을 말하는 걸세. 옆방의 사도들 말고도 블라다카를 호위하는 괴물들이 좀 있더군.”


이 영감은 레토 신부와 헤카테의 정체도 어렴풋이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역시 푸근하게 생긴 것과 다르게 연합 부총장이라는 직위는 폼은 아닌 모양이다.


“아깐 농담처럼 말했지만 계획의 끝은 결국 자네야. 블라다카를 정면에서 마주 보고도 멀쩡한 자네가 블라다카를 끝장내기만 하면 돼.”

“그놈도 죽지 않는 놈일 가능성은?”

“충분히 있지. 하지만 아닐 수도 있고. 그 가능성을 검토해보는 것만으로도 이득일세.”

“···그거 증명하고 내가 블라다카한테 죽어도 똑같은 소리 할 겁니까?”


스콧은 피식하는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난 그의 얼굴을 향해 말했다.


“우선 조건 하나. 당장 여기서 우리를 내보내 줘요.”

“사실 자네들 이런 격리소 정도는 다 부수고 나갈 수 있잖나?”

“그럼 여기 군인들은 시라비아까지 쫓아올 기세라서요. 가능하면 좋게 좋게 끝내고 싶은데.”


수염을 만지작거리던 스콧이 끄덕였다.


“뭐, 그 백사병 걸린 여자아이를 제외하면 신기하게도 다들 백사 오염은 없더군. 아마 곧 나갈 수 있을 걸세.”

“여자아이라면 헤카테인가···. 그 여자애도 포함. 걔 백사병은 왜인지 전염 안 돼요. 내가 저 안에서 걜 업고 다녔거든요.”

“흠. 어떻게든 해보지.”


난 바로 다음 조건을 내밀었다.


“조건 둘. 앞으로 시라비아 마피아가 하는 사업에 세계 연합은 일체 간섭하지 말 것.”

“···대체 뭘 하려고 그러나?”

“돈 벌어야죠.”


이번에도 떨떠름한 표정이 되긴 했지만 스콧은 다시 끄덕였다.


“조건 셋. 헤이카에 대해선 죽은 사람처럼 취급할 것.”

“역시 헤이카 미켈런이 자네 쪽에 숨어있었군.”

“연합의 정보로 모를 리가 없는데, 지금까지 용케 입 다물고 있었다는 건 어차피 나한테 협상 카드로 내놓으려던 거잖아요?”


그러니 이쪽에서 선수를 친다. 연합에서 ‘헤이카 미켈런이 살아있다.’ 라는 말만 해도 세계가 발칵 뒤집힐 테니, 그런 일은 사전에 차단해야 한다.


“좋네. 받아들이지. 그 대가로 자네가 우리 프로젝트에···.”

“조건 넷. 그 프로젝트 안 합니다.”

“···그럼?”

“내가 블라다카를 정리하고 싶은 건 개인적인 일도 겹쳐 있거든요. 당신네들의 영웅이 아니라 그냥 제 개인으로서 이번 일을 끝내고 싶네요. 어차피 다를 건 없잖아요? 내가 영웅이든, 마피아 보스든 블라다카만 죽여주면 결과는 똑같겠죠.”


이번엔 스콧의 고민이 꽤 길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스콧은 입을 열었다.


“알겠네. 일단 그렇게 하지. 혹시 더 있나?”

“당장은 없는데 생각나면 추가하려고요.”

“거 참 일방적인 계약이구만.”

“나 아니면 할 사람 없는데? 불만이면 없던 얘기로 합시다.”


스콧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래. 지금은 자네 말대로 하지. 선택지가 없으니 원.”

“계약서는 우리 쪽에서 만들어서 보내죠. 당장은 다른 일이 있으니 움직이는 시기도 제가 정합니다. 정보만 계속 제공해줘요.”

“그렇게 하지.”


난 스콧의 손을 맞잡았다. 그의 입가가 처음처럼 히죽거리기 시작했다.


“참 콜라 영감님. 저 벽 안에 뭐 있는지 알아요?”

“들어가서 볼 수도 없는데 괜히 말해주지 말게. 나 그런 거 못 참아.”

“겁나 큰 용이 있더라고요.”

“···젠장.”


이제야 스콧의 얼굴이 꽤 볼만하게 일그러졌다.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편안한 주말 보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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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 에콰(5) - 일그러진 미소 아래 +2 23.04.05 184 9 15쪽
240 에콰(4) - 핏덩이 +1 23.04.04 178 9 17쪽
239 에콰(3) - 욕망죄화(欲望罪花) +1 23.04.03 185 10 27쪽
238 에콰(2) - 모르스 에콰 +1 23.03.31 168 9 13쪽
237 에콰(1) - 소녀 +1 23.03.30 166 9 14쪽
236 개벽(35) - 문을 닫다. +1 23.03.29 169 9 15쪽
235 개벽(34) - 찾아온 영웅, 떠나는 영웅 +1 23.03.28 174 9 21쪽
234 개벽(33) - 베르나데트 23.03.27 163 9 20쪽
233 개벽(32) - 자유를 향해 +2 23.03.24 164 9 18쪽
232 개벽(31) - 데이케트람 23.03.23 168 9 18쪽
231 개벽(30) - 행복을 쫓던 사내 +1 23.03.22 169 8 21쪽
230 개벽(29) - 침묵의 도시 23.03.21 166 8 17쪽
229 개벽(28) - 가능성 +1 23.03.20 172 9 17쪽
228 개벽(27) - 시카 23.03.17 166 9 17쪽
227 개벽(26) - 36년 +1 23.03.16 234 9 17쪽
226 개벽(25) - 빛바랜 세상 +1 23.03.15 167 9 13쪽
225 개벽(24) - 문 23.03.14 175 9 18쪽
224 개벽(23) - 본보기 +1 23.03.13 166 9 16쪽
223 개벽(22) - 옛 동료 +1 23.03.10 177 10 16쪽
222 개벽(21) - 마지막 조각 +1 23.03.09 182 10 21쪽
221 개벽(20) - 흐름 23.03.08 173 10 16쪽
220 개벽(19) - 시라비아의 햇빛 23.03.07 180 10 15쪽
219 개벽(18) - 영웅 증후군 23.03.06 205 10 16쪽
218 개벽(17) - 친구인가 적인가 23.03.03 184 10 16쪽
217 개벽(16) - 습격 23.03.02 184 10 14쪽
216 개벽(15) - 헤르그부르 23.02.28 191 10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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