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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ject.P

욕망 시대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판타지

완결

굴P
작품등록일 :
2022.05.11 10:32
최근연재일 :
2023.05.08 18:05
연재수 :
26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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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수 :
3,417
글자수 :
1,991,941

작성
23.03.28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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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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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쪽

개벽(34) - 찾아온 영웅, 떠나는 영웅

DUMMY

#1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베르나데트를 확인한 나는 여전히 서버실 구석에서 노트북을 두들기는 엠마에게 향했다. 그녀는 날 보더니 굉장히 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왜 그래요?”

“..당신 괜찮아요?”

“나요? 괜찮은 것 같은데.”


엠마가 이렇게 묻는 걸 보니 내 꼴이 말이 아닌가 보다. 베르나데트와 맞붙으며 힘을 좀 많이 쓴 건 있었는데, 그게 겉으로도 드러나는 모양이다.


“돌아가면 병원부터 갈게요.”


그렇게 대답했더니 엠마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곤 노트북을 두드리며 말했다.


“코핀 서버에 바이러스를 흘렸어요. 아베스타 드라이브랑 베르나데트의 활동을 정지시키는 데 성공했어요. 다만.. 역시 베르나데트라고 해야 하나. 꽤 성가신 바이러스를 정통으로 먹였는데도 이미 복구 작업을 시작했어요.”

“음.. 그래서요?”

“한동안 베르나데트는 움직이지 못하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이전처럼 기능을 회복할 거예요. 이 속도로만 봐선.. 어림잡아 1년 뒤겠네요.”


1년이라.. 해방군에겐 기회가 될지도 모를 1년일 것이다. 1년 동안 얼마나 베르나데트에게 대비하느냐가 결국 이 시대의 결말을 정하겠지.


그 뒷일은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난 이 시대 사람이 아니다. 이 이상 관여할 생각은 없었다.


“고마워요. 덕분에 시간은 벌었네요.”


노트북을 소리나게 닫은 엠마는 몸을 일으키더니 내게 악수를 청했다. 난 어깨를 으쓱하며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그녀가 히죽 웃었다.


“그리고 이걸 어떻게 기록해야 할지도 생각해봐야겠어요.”

“있는 그대로 하면 되지 않아요?”

“음.. ‘거울 연못에서 과거의 노페이스 팀장이 넘어와 해방군을 도왔다.’ 누가 믿겠어요?”

“하긴.”

“걱정 마요. 나도 눈치는 있으니까. 당신이 복잡한 일에 얽혀있다는 건 알아요. 대충 둘러댈게요.”


난 끄덕였다. 엠마는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사실 이 시대의 산 팀장은 사람들에겐 정말 엄청난 악당이에요. 만약 눈밭에 쓰러져 있는 당신을 발견한 게 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아마 그 자리에서 당신을 죽였을지도 몰라요.”

“그쪽은 날 안 죽인 이유가 있어요?”

“가능성에 걸어봤죠. 뭐든지 전환점이란 건 있는 거니까요. 그리고 난 틀리지 않았어요. 적어도 내가 지금 마주하고 있는 산 팀장은 악당보단 영웅이니까.”


영웅.. 영웅이라니. 여기까지 와서 또 그 소릴 듣게 될 줄은 몰랐다. 능글맞은 연합 부총장의 얼굴이 떠올랐다.


“돌아가는 방법은 찾았어요?”

“지하로 갈만한 길이 있더라고요. 바닥을 뚫고 들어가려고요.”

“무슨 굴착기도 아니고... 뭐, 그래도 당신이 지금 벌인 일을 보니 불가능할 것도 없겠죠.”


때마침 서버실 외부 계단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을린 검댕을 잔뜩 묻힌 시카가 터덜터덜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엠마가 여기까지 올 수 있던 건 시카가 길을 터준 덕분이었다.


정작 그 시카에게 난 잔인한 진실을 말해줘야 할지 고민했다. 베르나데트가 초재생을 거두지 않은 게 아니라, 거두지 못했다는 사실은 그녀가 영원히 초재생으로 고통받아야 한다는 끔찍한 선고나 다름이 없었다.


어느새 메인 서버실에 발을 들인 시카는 널브러진 베르나데트와 기능을 정지한 기계 장치를 둘러보더니 무뚝뚝한 얼굴로 날 보았다.


“다 끝났어요. 이번에 우리가 이겼어요.”


엠마가 날 대신해 말했다. 시카는 끄덕이더니 곧바로 쓰러진 베르나데트를 살폈다. 만들어진 천사의 몸에서도 그녀가 찾는 안식은 없겠지만.


난 아까 확인해둔 곳으로 돌아가 다시 바닥을 두드렸다. 참수도 너머로 ‘퉁퉁’ 하는 속 빈 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을 뚫고 내려가면 아마 사무엘이 보여준 그 지하로 갈 수 있을 것이다. 말라붙은 거울 연못이 있는 곳이다.


카르마 나이프로 바닥을 찔렀다. 그리고 종이를 오리듯 나이프를 쭉 그었다. 몇 번 반복하자 쇳덩어리로 된 바닥이 열리고 텅 빈 어둠이 나타났다. 어느새 다가온 엠마가 그 구덩이를 보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정말 여기로 내려갈 수 있어요?”

“따라오게요?”

“제 계획은 성공했어요. 하지만 완벽한 승리라고 보긴 어렵잖아요. 이젠 아버지가 남긴 걸 봐야죠. 정말 거울 연못이 열리고, 그 너머에서 영웅이 찾아올지 궁금해졌어요. 배웅도 할 겸.”

“..나도 갈께요.”


어느새 시카도 내 뒤에 서 있었다. 배웅은 필요 없지만, 본인들이 원한다면야 말리진 않을 생각이다.


난 오른손을 들어 손가락으로 천장을 가리켰다. 거기서 뻗어 나간 회로가 알산나에게 닿았다. 몇 초가 지났을까, 나와 베르나데트가 뚫고 내려온 천장의 구멍으로 알산나가 떨어졌다.


착지한 알산나는 멍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비틀거렸다. 아까는 내 의수가 주입한 마력 덕에 잠시 시력을 되찾았지만, 내가 마력을 거두자 알산나는 또다시 시력을 잃었다.


알산나에겐 미안하지만 안전을 위함이었다. 지금의 나조차도 용의 시선은 여전히 정면으로 마주 볼 자신이 없었다.


“알산나. 지하까지 뚫어봐. 이 밑에 거울 연못이 있어.”


알산나는 끄덕이더니 내가 열어놓은 구덩이 앞에 섰다. 우리는 조금 거리를 두고 물러섰다. 땅 파는 용이라니, 상상만 해도 꽤 과격할 것 같으니까.


예상대로 건물 전체가 흔들릴 정도의 진동을 일으키며 알산나는 구덩이를 크게 넓혀갔다. 이름 그대로 굴착기나 다름없이 지하로 향하는 길을 뚫어 구덩이는 상당히 커졌다.


알산나의 그런 모습에 엠마는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몰라도 되는 거예요. 엠마.”

“..알았어요. 저분에 관해선 안 물어볼게요.”

“좋아요. 갑시다.”


참수도의 압력을 조절했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 다치지 않게 조절하는 건 생각보다 까다로웠다. 그래도 몇 번 해보니 요령이 생겨 우린 둥둥 떠다니는 느낌으로 지하로 내려갔다.


한동안 새까만 구덩이를 지나던 끝에 갑자기 주변의 공기가 바뀌는 게 느껴졌다. 난 오른팔을 휘둘러 이 지하 전체에 회로를 뻗었다. 뻗어 나간 오른팔의 회로가 은빛으로 빛났다.


그렇게 우린 밝아진 지하에 착지했다. 미리 내려온 알산나는 말라붙은 땅의 흙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이게 거울 연못인가?’


겉보기엔 평범한 흙바닥이다. 습기로 흙이 축축하지도 않았다. 바싹 마른 흙을 보니 정말 제대로 거울 연못을 없애버린 모양이다.


오른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그리고 회로를 뻗어 말라붙은 거울 연못으로 감각을 넓혔다. 무언가 느껴지는 건 있지만, 그게 무어라고 말하긴 어려웠다. 평범한 땅이 아니라는 건 확실했다.


“...파볼까.”


사무엘이 보여준 미래대로 땅을 파기 시작했다. 오른손으로 긁어내는 마른 흙은 파내면 파낼수록 차가웠다. 난 땅을 파는 것과 동시에 의수의 마력을 흘려보기도 했고, 성역을 한점에 집중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이 메마른 연못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땅만 파던 중, 마른 흙에 피가 뚝뚝 떨어졌다.


“이봐요! 피! 코피 나오고 있잖아요!”


엠마가 호들갑을 떨었다. 별거 아니다. 오른팔을 너무 많이 쓴 탓이었다. 지금은 그게 느껴졌다. 이 오른팔이 내 몸에 어떻게 부담을 주고 있는지 훤히 보였다. 게다가 난 중증 백사병 감염자인데다 이 시대에 오고부터 몸이 약해졌다.


약해진 몸을 강제로 깨워 날뛰던 것이다. 그 반동이 오지 않는 게 이상했다. 아마 돌아가면 바로 정신을 잃고 또 한동안은 널브러져 잠들 게 뻔하다.


“음?”


내 코피를 머금은 흙이 빛나기 시작했다.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건가 싶어 참수도의 칼날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손바닥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흙에 닿자 흙이 하얗게 변하며 빛을 냈다.


“찝찝한 구조네.”


사람 피로 열어야 하는 문이라니. 원리는 몰라도 꺼림칙하다. 그래도 별수 없었다. 난 몸을 일으켜 나이프로 오른팔을 푹 찔렀다.


그 광경에 엠마가 짧은 비명을 질렀다. 난 그녀에게 괜찮다는 얼굴로 피식 웃어 보였다. 사실은 감각이 연결된 탓에 더럽게 아팠다.


팔에서 줄줄 흘러나오는 피가 흙과 섞였다. 하얗게 변하는 흙바닥은 내 피를 토해내듯 맑은 물을 뿜었다. 그 물이 조금씩 고이기 시작했다.


내가 아는 그 거울 연못이었다. 마치 거울처럼 내 모습을 비춰주는 물이 이젠 발목까지 차올랐다. 쏟아낸 피는 이 정도가 아니었지만, 뿜어져 나오는 물이 훨씬 많았다.


이젠 마구 솟구치기 시작하는 물에 난 조금 물러났다. 메마른 연못을 채우는 물은 무릎높이까지 차오르고도 멈추지 않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끝도 없이 솟구치던 거울 연못의 맑은 물은 더 이상 불어나지 않았다. 아마 내가 파 내려간 것까지 생각하면 꽤 많은 물이 차올랐을 것이다. 난 연못에 비친 내 모습을 보았다.


엠마가 괜찮냐고 물어볼 만 했다. 말라붙은 핏자국에, 얼굴은 퀭했고 눈에도 피로가 쌓인 듯 핏줄이 서 있었다. 슬슬 백사병의 환청도 다시 들려오고 있었다.


“이게 거울 연못이구나..”


엠마는 신기한 듯 연못을 들여다보았다. 연못이 사라지고 36년이나 지났으니, 그녀는 생에 처음으로 거울 연못을 보는 것이다. 신기할 만도 했다.


“후..”


깊은 숨을 내쉬었다. 호흡에도 피로가 가득 쌓여있었다. 알산나는 그런 내 곁에 섰다. 입을 다물곤 있지만 알산나는 어지간히도 이 시대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은지 얼굴에 초조함이 드러났다.


“이제 가는 거예요?”


엠마가 물었다. 난 그녀를 향해 끄덕였다. 엠마는 이리저리 눈알을 굴리며 뜸을 들이다 말했다.


“당신이 있던 시대엔 제가 태어나지도 않았을 거예요. 대신 아버지가 살아계시겠죠.”

“케니 노리스였던가요.”

“네. 아마.. 헤이카 미켈런과 함께 있을 가능성이 높아요. 만나는 건 어렵지 않을 거라 생각해요.”


안부 인사라도 전해달라는 건가. 태어나지도 않은 미래의 딸이 전하는 메시지라니. 나였다면 절대 안 믿었을 거다.


“마지막으로.. 물어볼께요. 당신은 돌아가서 헤이카 미켈런에게 이 시대가 잘못됐다고 말할 거예요?”

“예. 여기가 헤이카가 바라던 세상이 아니라는 건 확실히 알겠거든요.”

“만약.. 만약 지금 이 세상이 정말 그 사람이 바라던 세상이라면요? 계획을 강행하려 한다면, 당신은 그녀를 막을 수 있어요?”


내게 두 번이나 물었던 질문이다. 그리고 지금으로 세 번째다.


“내가 막아봤자..”

“알아요. 당신 시대의 과거를 바꾼다고 지금 이 시대가 바뀌진 않을 거라 생각해요. 하지만 이런 세상이 또 하나 늘어나는 건 내키지 않아요. 또 다른 내가 똑같이 이 고생을 한다고 생각하니까.. 좀 그렇거든요.”

“...”

“그래서 대답은요? 막아줄 거죠?”

“막기보단 다른 방향으로 갈 겁니다.”


엠마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게 무슨 차이가 있느냐는 눈빛이었다.


“헤이카는 영웅을 동경하는 거거든요. 세상을 바꾸는 것 말고 영웅이 되는 길은 많죠.”


막아선다면 헤이카와 난 적이 된다. 하지만 다른 길을 제시하고, 그녀와 함께 걸어가길 택한다면 적이 될 필요도 없다. 엠마는 그런 내 말뜻을 알아들었는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끄덕여주었다.


“그럼 아버지가 후회하지 않도록 해주세요. 아버지는 끝까지 후회만 하다 돌아가셨으니까.. 그 세상에서만큼은 행복하게 오래 사셨으면 좋겠어요.”

“말은 해보죠.”

“고마워요. 잘 가요.”


엠마는 한 걸음 물러섰다. 거울 연못이 아까보다 더 빛을 내고 있었다. 문이 열렸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 연못을 내려다보던 난 시카를 돌아보았다. 평소엔 무뚝뚝하던 그녀가 지금은 얼굴에 복잡한 감정이 드러나고 있었다. 난 그녀의 앞에서 잠시 고민했다.


‘..그래도 말해주는 게 좋겠지.’


있지도 않은 희망을 좇는 것보단 나으리라 생각했다. 그렇게 내가 입을 땐 순간, 거울 연못의 수면이 흔들리며 무언가가 불쑥 튀어나왔다.


수면을 딛고 올라선 것은 수려한 금발을 가진 아름다운 남자였다. 남자는 형형색색으로 빛나는 신비로운 눈동자로 우리를 훑었다. 그리고 나와 눈을 마주쳤다. 난 그를 알고 있었다.


“또 보네. 산.”


능글맞은 얼굴로 인사하는 남자는 헤이카가 동경하는 동화 속 영웅이었다.


“칼리프..?”


무한의 눈을 가진 마법사다.



#2


“답은 찾았어?”


별안간 거울 연못에서 튀어나온 저 재수 없을 정도로 잘생긴 마법사는 다짜고짜 그렇게 물었다. 난 벙찐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뭘 말하는 거지?’


“음. 까먹은 모양이네. 하지만 답은 코앞에 둔 것 같아. 진전이 있어서 다행이야.”

“...”

“여.. 영웅..? 진짜로..?”


넋이 나간 듯 엠마는 칼리프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엠마의 아버지가 했다는 연구는 결국 거울 연못에서 영웅을 불러온다는, 내가 생각해도 터무니없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 터무니없는 계획이 지금 눈앞에 벌어졌다. 내가 거울 연못을 열자마자 저 마법사가 튀어나온 것은 분명 우연이 아닐 것이다.


칼리프는 엠마를 향해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 살인적인 미소에 엠마는 얼굴을 붉히며 입을 꾹 다물었다. 그제야 칼리프는 다시 내게 말했다.


“산. 묻고 싶은 게 많겠지만 신경 쓸 필요 없어. 난 우연히 거울 연못 너머를 산책하던 몹시 한가로운 마법사야. 너무 심심해서 곤란에 빠진 세상을 구해버릴지도 모를 마법사지.”

“...”

“어쨌거나 네가 바라던 대로 문은 열렸어. 원래 네 세상으로 돌아갈 문이야.”


마치 내가 여기까지 와서 문을 열 것도 모두 예상했다는 듯 칼리프는 태연하게 말했다.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네 동료들은 걱정하지 마.”

“..시카?”

“그래. 그녀는 원하던 것을 이루게 될 테니까. 행복을 쫓던 남자도 말이야.”


칼리프는 시카와 눈을 마주치며 그녀에게도 들리도록 말했다. 마법사의 허풍은 아닐 것이다. 지금 눈앞의 마법사는 진짜였고 그의 말 한마디에 담긴 것들은 저마다 의미가 있었다. 난 그를 향해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시카에게 돌아섰다.


칼리프의 이야기를 들은 시카는 조금 놀란 얼굴이었다. 난 그녀에게 말했다.


“시카. 가볼게요. 사무엘을 잘 부탁해요.”

“...또 가버리는 건가요. 이번에도 날 두고..”

“돌아가는 거예요. 저쪽에도 외로운 시카가 있으니까.”


의수로 얻은 감각의 확장 덕분에 이젠 알 수 있었다. 그 눈밭에서 시카와 재회했을 때, 그녀가 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리며 내게 안겼던 건 단순히 반가워서가 아니었음을.


36년이란 세월을 모두를 떠나보내고 홀로 남아 외롭게 자신의 저주와 싸우던 그녀였다. 그렇게 주변에 남은 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기에 예고 없이 불쑥 찾아온 내 모습에 쌓인 게 터져버린 것이다.


붙잡고 싶다. 시카는 그런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내가 특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아는 몇 안 되는 동료였기 때문이다. 난 칼리프를 눈짓했다.


“사기꾼처럼 생겼지만 진짜 마법사거든요. 나도 전에 도움을 받았으니 시카에게도 도움이 될 거예요. 그러니 이쪽은 낯선 마법사에게 맡기고, 저쪽의 시카는 내가 어떻게든 해볼게요.”


시카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아쉬움, 기대, 간절함이 뒤섞인 얼굴로 입술을 움찔거리던 시카는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전 외로움을 많이 타요.”

“신경 써줄게요.”

“그럼 마지막으로..”


시카는 와락 날 껴안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날 놓아준 시카는 젖은 눈가를 닦았다. 난 그녀에게 웃어주고 몸을 돌렸다.


연못 옆에 선 칼리프는 기다렸다는 듯 내게 말했다.


“많이 달라졌네. 여기선 족쇄가 풀린 덕분인가.”

“족쇄?”

“저쪽에서 넌 항상 누군가의 노예였으니까. 하지만 곧 저쪽에서도 해방될 거야. 네 족쇄를 부수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여전히 알아듣기 어려운 말만 해댄다. 마법사나, 마법사에 관련된 족속은 다 이러는 모양이다.


난 도시 전체에 뻗은 회로를 다시 오른팔로 거두었다. 은빛을 내던 팔이 사람의 팔로 되돌아왔다. 거울 연못은 손짓하는 것처럼 일렁거렸다. 나와 알산나는 그 연못에 발을 들였다.


연못의 물은 무릎 언저리까지 잠겼다. 조금 나아가자 수심이 더 깊어졌다. 마지막으로 엠마와 시카를 돌아보았다. 엠마가 내게 손을 흔들며 무어라 말했다. ‘또 봐요.’ 라는 입모양이었다.


연못은 가슴까지 차올랐다. 그러자 수면 위에 가볍게 올라서며 칼리프가 다가왔다. 그는 몸을 숙여 내 귀에다 속삭였다.


“산. 내가 했던 말 기억해? 욕망이란 원래 끝이 없는 법이야.”

“그게 늘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다?”

“그래. 기억해줬구나. 그럼 마음 단단히 먹어. 지금 네가 하는 건 아주 엄청난 짓이니까.”

“불안하게 왜 그딴 소릴..”


칼리프는 피식 웃으며 내 등을 밀었다. 그 덕에 기울어진 몸이 연못에 완전히 잠겼다.




...




온통 새하얀 공간을 넘어간다. 곧이어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듯 풍경이 주변을 뒤덮었다. 가파른 산길. 눈 덮인 바위를 넘어서 도착한 정상은 마치 화산의 분화구처럼 커다란 구멍의 가장자리였다.


‘아디마 케티르!’


아가레스 토벌 과정에서 사라졌던 아디마 케티르 산이 멀쩡하게 되돌아와 있었다. 설마 시간대가 틀렸나? 하지만 하늘에 아가레스는 없었고, 공업의 수송기가 날고 있는 게 보였다.


이윽고 풍경이 완성되고 아디마 케티르 정상의 거친 바람이 들이닥침으로써 거울 연못을 완전히 빠져나왔다는 걸 깨달았다. 등 뒤엔 아무것도 없었다. 일시적으로 열었던 거울 연못의 출구는 금방 사라지는 모양이다.


“...돌아왔나?”

“돌아왔어. ...아.”


갑자기 신음을 흘린 알산나가 크게 휘청거렸다. 앞으로 고꾸라지려는 걸 재빠르게 붙잡았다.


“이번엔 왜 이래?”

“또 멍청해질 것 같아.. 제대로 된 걸 너무.. 못 먹었어..”

“..그럼 뭐 좀 먹자. 우선 내려가서..”


그때, 산 정상이 진동했다. 중심을 잡기 힘들 정도의 진동에 나와 알산나는 엉덩방아를 찧었다.


‘뭐지?’


지진처럼 계속되는 진동이 점점 심해졌다. 거울 연못이 있을 거대한 구덩이 안쪽에선 마치 화산이 폭발할 것처럼 연기가 솟구쳤다. 상황이 뭔가 심상치 않다는 걸 깨달을 때쯤, 내 시야에 누군가 들어왔다.


맨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헤이카였다. 반가움 마음이 드는 것도 잠시, 그녀의 표정이 본 적 없을 정도로 창백해졌음을 깨달았다.


난 알산나를 부축하며 몸을 일으켰다. 우선 헤이카와 대화를 나눌 생각이었다. 그런 내 앞을 누군가가 가로막았다.


검은 코트와 후드. 그 후드 아래엔 얼굴을 대신해 새까만 어둠만이 있었다. 델라리온 머스칼이었다.


그는 만신창이었다. 서 있는 것조차 힘겨워 보일 정도로 휘청거리면서, 피를 줄줄 흘리고 있었다. 부러진 검을 쥔 손이 덜덜 떨리기까지 했다.


“머스칼? 괜찮..”

“어째서 여기 있지? 이건 네 짓인가?”


그럼에도 머스칼의 목소리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의 부러진 검이 천천히 올라와 날 겨누었다.


“무슨 말이에요?”

“네가 여기 있으면 헤이카가 목숨을 잃는다. 그런 미래였다.”


에콰가 보았다던 그 미래를 말하는 모양이다. 난 그 미래 따윈 믿지 않는다. 날 붙잡아두려는 에콰의 속셈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지금도 여전했지만, 머스칼은 달랐다.


일부러 떨어뜨려 놓았던 내가 그 미래의 배경이 되는 아디마 케티르에 나타난 것이다. 머스칼의 경계심이 곤두서는 것도 이해하지 못할 건 아니었다.


“머스칼. 에콰가 봤다는 미래는 다 거짓말입니다. 난 지금 헤이카를 쏠 생각도 없고, 내가 죽을 생각은 더더욱 없어요.”

“그럼 왜 이런 짓을 했지?”

“이런 짓이라니. 아까부터 뭘 말하는 겁니까?”

“네가 전부 망쳤어!”


머스칼의 목소리에 증오와 노기가 서렸다. 지진은 점점 심해졌다. 머스칼의 어깨너머로 주저앉은 헤이카는 어느새 날 보고 있었다. 그녀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피를 흘리는 머스칼의 주변 공기가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지그시 어깨를 누르는 압력에 난 재빨리 참수도를 뽑아 대응했다. 두 힘이 부딪치며 쇠가 찌그러지는 듯한 괴상한 소리가 났다.


“닫으려던 문이 열리고, 열려선 안 될 문까지 모조리 열려버렸다. 모든 시대를 관통하고 있어. 이게 네 계획이었군. 산.”

“...”

“가장 중요한 단계에서 헤이카의 계획을 전부 망치는 것. 그거였어.. 대체 왜? 누가 이런 일을 사주했지? 넌 대체 누구냐?”


머스칼은 여전히 알아듣기 어려운 말을 하고 있었다. 난 문을 열고 이쪽으로 넘어온 것밖에 없는데, 무슨 문이 열렸다는 말인가?


‘마음 단단히 먹어. 지금 네가 하는 건 아주 엄청난 짓이니까.’


그 마법사가 했던 말이 갑자기 떠올랐다. 난 알산나를 조심스럽게 놓아주고 자세를 잡았다.


“공업의 산 팀장입니다.”

“네 진짜 정체를 물었다.”

“그러니까 공업의..”

“아직도 그딴 소릴!”


분노로 점칠 된 머스칼이 달려들었다. 나도 몸을 움직였다. 일단 때려눕히고 생각하기로 했다. 이렇게 흥분한 머스칼을 달래려면 그것뿐이었다.


두 검이 부딪쳤다.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1

  • 작성자
    Lv.52 K.S
    작성일
    23.03.29 18:54
    No. 1

    머스칼을 죽인 게 이 시점이구나.. 어?
    근데 연못 너머 산도 머스칼에게 의심을 살 사건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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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2 광야(曠野) 헤이카 미켈런 +2 23.05.04 174 12 15쪽
261 재회 +1 23.05.03 166 11 15쪽
260 사막, 괴물, 어린 칼잡이들 +3 23.05.02 161 11 12쪽
259 라푸스 벤데르드 +2 23.05.01 169 9 20쪽
258 욕망 시대(13) - 사무엘(Samuel) +2 23.04.28 169 8 17쪽
257 욕망 시대(12) - 눈 내리는 날 +1 23.04.27 163 8 15쪽
256 욕망 시대(11) - 죽음이 아닌 삶을 바라게 될 때까지 +1 23.04.26 157 7 14쪽
255 욕망 시대(10) - 강철의 기사 23.04.25 155 9 15쪽
254 욕망 시대(9) - 소리 없는 침식 +1 23.04.24 166 9 11쪽
253 욕망 시대(8) - 일방적 계약 +1 23.04.21 169 9 20쪽
252 욕망 시대(7) - 길을 잃고 +1 23.04.20 164 9 15쪽
251 욕망 시대(6) - 정복자 23.04.19 163 9 16쪽
250 욕망 시대(5) - 악룡과 용사 +1 23.04.18 160 9 17쪽
249 욕망 시대(4) - 오염구역 탐사 +2 23.04.17 159 8 14쪽
248 욕망 시대(3) - 죽음의 땅 +2 23.04.14 172 9 13쪽
247 욕망 시대(2) - 위험한 여행 +1 23.04.13 155 9 13쪽
246 욕망 시대(1) - 탐욕의 바르바로사 +1 23.04.12 178 9 13쪽
245 죄인 +2 23.04.11 158 8 15쪽
244 급류(急流) +2 23.04.10 177 9 13쪽
243 삼류 악당 +2 23.04.07 180 10 23쪽
242 우는 아이 +1 23.04.06 161 8 15쪽
241 에콰(5) - 일그러진 미소 아래 +2 23.04.05 184 9 15쪽
240 에콰(4) - 핏덩이 +1 23.04.04 178 9 17쪽
239 에콰(3) - 욕망죄화(欲望罪花) +1 23.04.03 184 10 27쪽
238 에콰(2) - 모르스 에콰 +1 23.03.31 168 9 13쪽
237 에콰(1) - 소녀 +1 23.03.30 166 9 14쪽
236 개벽(35) - 문을 닫다. +1 23.03.29 169 9 15쪽
» 개벽(34) - 찾아온 영웅, 떠나는 영웅 +1 23.03.28 174 9 21쪽
234 개벽(33) - 베르나데트 23.03.27 163 9 20쪽
233 개벽(32) - 자유를 향해 +2 23.03.24 164 9 18쪽
232 개벽(31) - 데이케트람 23.03.23 168 9 18쪽
231 개벽(30) - 행복을 쫓던 사내 +1 23.03.22 168 8 21쪽
230 개벽(29) - 침묵의 도시 23.03.21 166 8 17쪽
229 개벽(28) - 가능성 +1 23.03.20 171 9 17쪽
228 개벽(27) - 시카 23.03.17 166 9 17쪽
227 개벽(26) - 36년 +1 23.03.16 234 9 17쪽
226 개벽(25) - 빛바랜 세상 +1 23.03.15 167 9 13쪽
225 개벽(24) - 문 23.03.14 175 9 18쪽
224 개벽(23) - 본보기 +1 23.03.13 166 9 16쪽
223 개벽(22) - 옛 동료 +1 23.03.10 176 10 16쪽
222 개벽(21) - 마지막 조각 +1 23.03.09 182 10 21쪽
221 개벽(20) - 흐름 23.03.08 173 10 16쪽
220 개벽(19) - 시라비아의 햇빛 23.03.07 180 10 15쪽
219 개벽(18) - 영웅 증후군 23.03.06 205 10 16쪽
218 개벽(17) - 친구인가 적인가 23.03.03 184 10 16쪽
217 개벽(16) - 습격 23.03.02 183 10 14쪽
216 개벽(15) - 헤르그부르 23.02.28 191 10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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