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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ject.P

욕망 시대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판타지

완결

굴P
작품등록일 :
2022.05.11 10:32
최근연재일 :
2023.05.08 18:05
연재수 :
26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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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23.03.09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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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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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1쪽

개벽(21) - 마지막 조각

DUMMY

#1


눈을 떠보니 난 천장을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숨은 거칠었고 베개가 땀으로 축축했다.


“...”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뺨을 타고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이 흘러내렸다. 아마 눈물인 것 같았다. 입고 있던 옷도 흠뻑 젖어있었다.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옆을 보니 테이블에 앉아 고기를 먹고 있는 여자가 있었다.


“너 뭐야?”

“알산나.”

“..그렇지.”


알산나라는 이름을 떠올리자 다른 것도 떠올랐다. 사람을 먹는 용, 사도였던 것.


“또 소리를 질렀어.”


알산나가 말했다. 얼마 전에도 같은 말을 들었었다. 내가 자면서 비명을 지르고, 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정작 난 기억에 없지만 이런 몰골로 눈을 뜬 걸 보니 헛소리는 아니었다.


“왜 안 깨웠어?”

“깨우라고 안 했으니까.”

“..다음부턴 깨워줘.”

“알았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알산나였다. 난 몸을 일으켜 곧장 욕실로 향했다.


뜨거운 물이 머리부터 쏟아졌다. 이따금 오른팔이 멋대로 꿈틀거렸다. 평소엔 괜찮지만 칼을 쥐고 있을 땐 위험했다. 여기가 코렌이었다면 본사에서 점검이라도 받아봤을 텐데.


천천히 몸을 씻고 나왔더니 식사를 끝낸 알산나가 의자에 다소곳이 앉아있었다. 창 밖은 우울한 하늘이 여전히 비를 뿌리는 중이었다. 끝도 없이 내렸다.


시계를 보니 아직 이른 오전이었다. 사실 시간은 그다지 신경 쓸 필요도 없었다. 지금도 난 딱히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리모컨을 집어들고 구석에 있던 낡은 TV를 켰다.


TV에선 낯선 얼굴의 중년인이 덤덤하게 속보를 전하고 있었다. 뉴스 앵커였다. 소식은 대부분 아우터에 관한 얘기였다.


정체불명의 괴물들이 세계 곳곳에서 출현하고 있다는 보도. 출현 빈도도 훨씬 높아졌고 몸집도 큰 놈들이 활개치기 시작했으니 사무엘의 말대로 더 이상 아우터에 관한 걸 숨기는 건 불가능했다.


그렇게 결국 어젯밤 세계 연합의 루터스 총장은 ‘아우터’ 라는 존재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대응책을 마련하겠다 약속했다. 당장은 연합의 평화 유지군과 에이전트들을 움직여 아우터 사태에 대응하겠다는 뻔한 얘기였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이 아우터 사태의 원인을 따지는 창끝은 이클립스 공업을 향했다.


{ 괴물들의 출현 시기는 이클립스 공업의 아가레스 토벌과 겹칩니다. 하늘의 아가레스들이 사라진 직후, 세계 곳곳에서 아우터라는 괴물들이 나타나고 있는 겁니다. }


{ 하지만 이클립스 공업의 헤이카 회장은 여전히 어떤 입장도 내놓지 않고 있습니다. 이젠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지금이라도 헤이카 미켈런을 연합의 국제법으로.. }


로먼 데일. 주름진 얼굴과 두꺼운 콧수염이 유독 돋보이는 그 중년 남자는 레베스타의 유명 대학 교수로 반공업파의 대표적인 얼굴이기도 했다. 공업과 헤이카를 찬양하는 측에 하만 박사가 있다면, 반공업파엔 로먼 데일 교수가 당당히 자리를 잡고 서로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고 있다.


사람들의 반응도 제각각이다. 단순한 흥미 위주로 양측의 충돌을 즐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공업파와 친공업파로 나뉘어 자기들도 덩달아 다투는 부류도 있었다.


그러나 어찌 됐든 저 혼란의 중심에 있는 게 헤이카라는 건 변함이 없었다.


“헤이카..”


그녀가 걱정됐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만 해도 헤이카는 꽤 지쳐있었다. 그런데 아우터 출현이 잦아지며 헤이카의 어깨는 점점 더 무거워지고 있었다.


누구의 잘못인가를 따지기 이전에 난 공업의 팀장이었고 헤이카가 철석같이 믿어주는 사람이었다. 이제 와서 내가 착한 놈이란 생각은 하지도 않는다. 남들이 뭐라고 하든 난 헤이카의 편에서 손을 들어줄 생각이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으란 거야.”


문제는 여기선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거다. 마음만 같아선 반공업파 놈들을 죄다 찍어 누르고 싶지만, 내가 움직였다간 숨어 있던 자객들이 단번에 몰려들 게 뻔하다.


게다가 놈들의 수법은 대범했다. 어쩌면 내가 헤이카 곁으로 돌아갔다가 헤이카마저 휘말릴 수 있었다. 무엇보다 사무엘과 에콰가 봤다는 그 미래를 아직 해결하지 못했다.


난 내 손을 내려다보며 사무엘의 말을 떠올렸다. 이 손으로 헤이카를 쏜다고? 다시 생각해봐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헤이카를 쏠 이유도, 그리고 내가 그 총구를 스스로 내 머리에 겨눌 이유도 도무지 짐작 가는 게 없었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아가.”

“..뭡니까?”

“준비가 끝났단다.”


가슴이 쿵쿵 뛰었다. 근질근질하던 몸을 드디어 움직일 수 있었다. 난 벌컥 문을 열었다. 그러자 늘 밖에서 보던 옷차림을 한 에콰가 날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그럼.. 이제 쿠스카를 잡는 거죠?”

“그래. 흐름이 이쪽으로 옮겨왔어. 쿠스카가 밑작업도 해놨더구나. 지금 쿠스카를 치우고 그 자리를 꿰차면 피스칼 땅도 들어올 거야.”

“밑작업?”


에콰는 내게 간결하게 설명했다. 쿠스카가 피스칼 땅을 어떻게 집어 삼키려 했는지, 그 비열한 수단에 대해서였다.


결국은 피스칼에 돌아온 난민들에게 호의를 베푸는 척하면서 그들에게 파고드는 수법이다. 이미 붕괴한 피스칼 정부를 다시 세우는 건 난민들의 몫이지만, 그 한 축에 끼어 함께 피스칼 정부를 다시 세운다면 쿠스카의 계획은 성공이나 다름없다.


몇몇 사람을 자기 쪽 사람으로 만들고 새로운 피스칼 정부의 핵심 인물로 세우면 나중에 피스칼 정부가 딴소리를 해도 내부에서부터 휘어잡을 수 있다. 그렇게 천천히 시라비아 마피아의 뿌리를 피스칼 땅에 내려 마피아의 지배권에 넣을 셈이었다.


쿠스카다운 수법이었다. 아마 피스칼 난민측 대표도 그건 알고 있을 거다. 하지만 거절할 상황이 아니다. 쑥대밭이 된 도시는 사막화를 막을 기본적인 시설조차 남아있지 않을 테고, 그걸 복구하기 위해선 꽤 많은 돈과 인력이 들어간다.


거기서 시라비아 마피아의 거침없는 지원이 쏟아진 것이다. 당장 급한 불을 끄기 위해 그들은 쿠스카의 호의가 독이란 걸 알면서도 받아들였을 터. 선택지는 애초에 없었다.


“그런데 쿠스카가 뿌려놓은 놈들이 우리한테도 협조적일까요?”

“쿠스카는 플뤼테와 달라. 자기 부하들도 언제든지 잘라낼 수 있는 냉혹한 인간이야. 밑에 있는 것들도 똑같지.”

“하긴 플뤼테처럼 형제자매 하진 않겠죠. 쿠스카가 죽어버리면 이쪽에 붙는 게 이득이란 건 당연히 알고 있을 테고. 잠깐 기다려요. 금방 챙겨서 나갈 테니..”

“넌 남아있으렴. 아가.”


뒤돌아 코트를 챙기려 했더니 에콰가 그렇게 말했다. 난 잠시 멍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피스칼까지 가는 길은 멀어. 그리고 그 도중에 습격받지 않을 거란 보장이 없어. 알고 있잖니?”

“공업의 수송기라도 빌리죠. 어쨌든 전 아직 공업 팀장이니까 별문제는..”

“넌 더 싸우지 않아도 돼.”


어느새 에콰는 내 손을 잡고 있었다. 미적지근한 체온이 전해졌다.


“차기 바르바로사가 될 인간이 마마보이라는 소문이라도 내려는 겁니까?”

“그럴 일은 없어. 네가 바르바로사가 되면 난 네 부하가 되는 거니까. 미리 해두는 거라고 생각하렴.”

“..그때까지 또 여기 가만히 박혀 있으라고요? 그놈의 빌어먹을 미래가 그러랍니까?”

“더 이상 칼을 쥐지 않아도 돼.”


나도 모르게 에콰의 손을 뿌리쳤다.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것과 동시에 화가 치솟았다.


“이제 와서?”

“..아가.”

“뒷골목에 버린 애새끼 주워다가 칼잡이로 길러놓고, 이제 와서 그딴 소릴 해요?”

“...”

“대체 버려놓고 신경은 왜 쓴 겁니까? 사람은 왜 보냈어요? 거지 영감도 당신이 뒷배 봐주면서 날 기르라고 한 거라면서요? 굶어 죽으라고, 들개한테 뜯어먹히라고 버린 거 아니었어요?”

“아니야.”

“그럼 왜 버렸어요? 왜 다시 주워왔고?”

“.....”


에콰는 굳게 닫힌 입은 열릴 기미가 없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익숙한 두통에 손바닥으로 머리를 툭툭 쳤다. 하지만 두통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월교 놈들이 뭐라는지 압니까? 나더러 축복의 아이래요. 그 징그러운 꽃에서 나온 씨앗을 삼켜서 괴물같은 능력을 가진 놈이라고 그러던데요. 나한테 그 씨앗 먹인 것도 당신이죠? 처형인으로 굴리려고 먹였어요?”

“...”

“뭐라고 변명이라도 해봐요. 예?”


마지막까지 입을 꾹 닫은 채 에콰는 몸을 돌렸다. 또각또각하는 구두굽 소리가 금방 멀어졌다. 난 멍청하게 서서 멀어지는 그 등을 바라보다 이를 악물었다.


말 잘 듣는 도구. 그런 취급을 받으며 살아왔고 견디지 못해 시라비아를 뛰쳐나왔다. 그리고 여전히 더러운 세상을 마주했지만, 시라비아와는 다른 세상도 만났다.


그렇게 이 자리까지 올라온 것이다. 그런데 지금 난 또다시 시라비아에 발이 묶여 있었다. 저 악독한 여자의 저택에.. 그 시절과 다를 게 없었다.


저택 정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서야 난 문을 쾅 닫았다. 그리고 창가로 성큼성큼 걸어가 밖을 보았다. 에콰가 탄 검은 차량이 곧 출발했다.


‘미래를 봐?’


이젠 의심이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헤이카를 쏘고, 내 머리에 총을 쏠 이유가 없다. 그런 말도 안 되는 미래를 보았다는 말 하나만 믿고 이곳에 묶여있었다.


그게 전부 꾸며낸 헛소리라면? 날 여기에 묶어두고 바르바로사로 만들기 위한 계획이라면? 사무엘도 내 의지보단 내 미래를 먼저 생각하는 쪽이다. 에콰와 한통속이거나, 혹은 에콰에게 이용당하는 걸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니 모든 게 맞춰졌다. 미다스 정부 청사에서 약속이라도 한 듯 날 습격한 자객들은 왜 하필 거기서 날 노렸을까? 시라비아 마피아의 깐깐한 검문도 뚫고 숨어 있던 자객들이 사실 에콰가 준비한 배우들이라면?


“...”


두통이 가라앉고 흥분으로 가득하던 머리도 깨끗해졌다. 이런 단순한 걸 이제서야 깨달았다는 게 오히려 바보 같았다. 그래. 전부 백사병 탓이다.


난 벽에 걸어놓은 코트를 두르고 참수도를 챙겼다.


“가자.”


가만히 앉아 있던 알산나가 일어섰다. 어디로 가는지는 묻지 않는다. 녀석은 군말 없이 날 따라다니기만 하니까. 지금의 내게 가장 필요한 녀석은 알산나면 충분했다.


“나 덮치는 놈 있으면 죄다 먹어.”

“알았어.”


사무엘이 알아차리면 분명 막을 게 뻔하다. 그러니 그 전에 빠르게 움직일 생각이다.


우산을 챙겨 알산나와 함께 저택을 나섰다. 차가운 빗줄기가 후두둑 우산을 두드리는 소리에 섞여 마당을 가로질렀다. 기차역은 가깝다. 그리고 아직 시간은 있었다.



#2


검은 차량의 문이 열리고 뒷좌석에서 헤이카가 내렸다. 그녀가 내리자마자 머스칼은 그녀의 곁에서 우산을 들고 섰다.


공항에 미리 모여 있던 기자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그 기자들을 막은 건 클레멘타인의 크롬벨 팀원들이었다. 총과 첨단 장비로 무장한 크롬벨 팀의 대열에 기자들은 흠칫하며 멈춰 섰다.


하지만 그들의 카메라는 쉴 새 없이 헤이카를 향했고 목소리를 높여 묻기도 했다. 대부분은 아우터 출현에 대한 공업의 입장을 물었고, 일부는 아가레스 토벌로 희생된 희생자들에 대한 보상을, 또 누군가는 아직도 고통받고 있는 그렘린 중독자들의 후유증에 대한 얘기를 했다.


그런 따가운 질문 공세에도 헤이카는 무표정하게 걸었다. 그녀는 최대한 표정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굳게 닫힌 입이 열리는 일도 없었다.


기자들의 행렬 너머엔 반공업파의 시위대가 있었다. 그들의 거친 욕설들이 기자들의 질문 공세에 섞여 쏟아졌다. 헤이카는 여전히 굳은 얼굴로 걸었다.


그렇게 그녀는 공항에 대기 중이던 전용기에 올랐다. 그건 공업의 신형 수송기였다. 이전 수송기가 탑승자의 안전과 비행 효율만 생각하던 군용이었다면 신형 수송기는 탑승자의 편의까지 생각하는 여객기에 가까웠다.


전용기 문이 닫히고 바깥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고서야 헤이카는 긴 한숨을 쉬었다. 곁에 앉은 머스칼은 그녀의 초췌한 얼굴을 향해 말했다.


“쉬어둬. 아시리아까진 좀 걸리니까.”

“도착하기 전에 해둬야 할 게 많아.”

“앞으로의 일들을 위해서라도 지금은 네 몸을 신경 쓰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내 몸이 신경 쓰이면 산을 데려와 줄래?”

“그건..”


머스칼의 애매한 대답에 헤이카는 배시시 웃었다. 그 미소에도 예전과 같은 기세는 없었다.


“어련하시겠어. 델라리온 머스칼이 안 된다는데 어쩔 수 없지.”

“여전히 날 못 믿는 건가?”

“믿어. 미래를 보는 관측 능력은 사무엘이 직접 증명했으니까. 시라비아의 모르스 에콰가 같은 능력을 가진 건 의외였지만.”

“..그렇지.”


머스칼은 후드 아래 얼굴을 긁적였다. 헤이카를 설득하는 건 머스칼이 예상했던 것보다 어렵진 않았다. 그는 숨김없이 에콰와 나눴던 이야기를 헤이카에게 털어놓았고 헤이카는 머스칼의 의견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다만 머스칼은 아직 의문이 남아있었다. 헤이카의 성격상 산을 이렇게 쉽게 놓아줄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녀는 머스칼에게 늘 모든 걸 털어놓진 않았다.


그런 머스칼의 의문에 답하듯 헤이카가 말했다.


“머스칼. 내게 있어 산은 소중한 사람이야. 그곳에서 산이 안전하다면 적어도 이 일이 끝날 때까지는 산을 시라비아에 두는 네 판단이 맞아. 내 목숨이 아까워서가 아니야. 산의 목숨이 나보다 훨씬 중요하니까 머스칼의 의견대로 한 거야.”

“산은 네게 있어 뭐지? 네 목숨보다 중요하게 여길 이유가 있나?”

“진솔한 대답을 원해? 아니면 늘 하던 대로 거짓말을 할까?”


머스칼은 잠시 굳어있었다. 그녀가 이렇게 직접적으로 물어온 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민은 길지 않았다.


“진솔한 대답.”

“인간은 다들 욕망에 충실해. 하지만 그중에서도 산은 훨씬 욕망스러운 인간이야. 당연하겠지. 욕망을 먹고 피어나는 죄화에서 태어난 게 산이니까. 그리고 내가 만들 세상에선 사람의 욕망이 억제돼.”


누구보다 욕망에 충실한 인간. 그리고 욕망이 억제되는 세상. 머스칼은 두 가지가 섞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의 생각에 거기까지 도달한 시점에서 머스칼은 무언가를 깨달았다.


욕망이 억제된 세상에서 누구보다 욕망에 충실한 인간이 욕망하길 멈춘다면, 그건 그녀가 성공했다는 증명이 될 터였다.


“산은 네 증명의 수단이었군.”


헤이카가 미소 지었다. 머스칼은 작은 신음을 흘렸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달라졌어. 결국 나도 욕망이 있는 사람이었던 거지. 세상 모두에게 미움받는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난 외로웠나 봐.”

“..네가?”

“언제부턴가 산이 끝까지 내 곁에 있어줬으면 좋겠단 생각을 했어. 그런데 욕망이 사라진 세상에서도 과연 산이 날 원할까? 그런 의문이 생겼어. 조금 무서워졌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서 멈출 순 없잖아? 오히려 산이 날 원하지 않게 되면 그건 내가 성공했단 확실한 증명이 되겠지.”

“헤이카. 산의 그건 사랑이 아니야.”

“알아. 그건 욕망에서 비롯된 단순한 소유욕이지. 산은 아마 그걸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모양이지만.. 나도 산에게 순수한 애정을 품은 건 아니니 서로 똑같다고 봐.”


머스칼은 무뚝뚝하게 끄덕였다. 그녀는 결국 끝까지 곁에서 배신하지 않을 사람이 필요했다. 그게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에 머스칼은 섭섭한 마음은 들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머스칼과 헤이카는 서로에게 있어 이용당하고 이용하는 관계에 불과했다. 처음부터 그런 계약이었다. 머스칼이 힘을 쓰면 헤이카는 무언가를 잃는다. 그 대가로 헤이카는 머스칼의 힘을 원하는 곳에, 원할 때 행사할 수 있다.


그 계약의 시작은 더 깊은 이야기가 얽혀있지만 이제 와선 중요하지 않았다. 헤이카는 여전히 머스칼을 도구로 생각했다. 그녀의 목숨을 이용하는 머스칼은 그 일방적인 관계에 토를 달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네가 살았으면 좋겠어.’


그런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머스칼은 끝내 토해내지 못했다. 그렇게 머스칼은 작은 한숨만 내쉬었다.


머스칼의 시선이 헤이카의 어깨너머를 향했다. 뒤늦게 전용기에 오른 한 남자가 두 사람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검은 피부를 가진 그 중년의 흑인 남자는 말끔한 차림새를 하고 있었지만 얼굴은 긴장으로 잔뜩 일그러져있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회장님.”


쭈뼛거리며 헤이카와 머스칼 곁으로 다가온 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니에요. 케니 박사님. 저희도 방금 왔는걸요.”


헤이카는 붙임성 있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중요한 사람을 대할 때 나오는 헤이카의 얼굴이었다.


머스칼은 케니 박사를 다시 한 번 훑었다. 그는 커다란 배낭을 메고 있었는데, 안에는 뭐가 든 것인지 무게 때문에 가방이 축 처져있었다. 헤이카도 그의 가방을 보더니 말했다.


“혹시 그 안에 있는 게 ‘열쇠’ 인가요?”

“아, 예! 그렇습니다.”


케니 박사는 다소 서두르는 모양새로 가방을 열어 안에 든 걸 꺼냈다. 커다란 강화 유리관 안에 새까만 돌덩이가 있었다. 그 돌덩이는 위아래로 잡아 늘린 것처럼 뾰족했고 보는 각도에 따라 반짝거리는 빛을 내곤 했다


“정말 만들었네요. 음. 그럴듯해요. 생긴 건 열쇠처럼 안 생겼지만.”

“조.. 조형에는 자신이 없어서..”

“농담이에요. 운석 덩어리들을 모아서 이렇게 만들어 준 것만 해도 대단한 거죠. 저도 이렇게는 못 해요. 박사님이라 가능했던 거지.”

“회장님께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무엇보다 조각을 모아준 것도 회장님이셨으니까요. 여기에 회장님께서 가지고 계신 마지막 조각을 넣으면 완성입니다.”


케니 박사는 유리관 안쪽에 있는 돌덩이의 한구석을 가리켰다. 그곳엔 마치 이빨이 빠진 것처럼 작게 파여 있는 곳이 있었다. 헤이카는 품속에서 작은 돌멩이를 꺼내 손바닥 위에 올렸다.


검은 돌. 하지만 그것 또한 운석이라 부르는 외부의 것이었다. 계획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열쇠 조각. 혜니와 산을 거쳐 헤이카의 손에 돌아온 물건이었다.


그 조각을 바라보는 헤이카의 얼굴이 좋지 않았다. 케니 박사는 그녀의 기분이 상하기라도 했을까 잔뜩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다만..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열쇠만으론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열쇠에는 맞는 구멍이 있어야..”

“열쇠 구멍이라..”

“예..”


케니 박사가 우물쭈물 대답했다. 그에겐 달갑지 않은 답답한 침묵이 다시 이어졌다. 그렇게 케니 박사가 땀을 삐질거릴 때쯤, 뒤쪽 화물칸 문이 열리며 클레멘타인과 시카가 들어섰다.


“끝났어요?”

“네. 적재는 모두 끝났습니다. 곧 이륙할 예정입니다.”

“고마워요.”


케니 박사는 그쪽을 보았다. 그리고 훨씬 긴장한 얼굴로 침을 꿀꺽 삼켰다.


“왔어요..”


여전히 퀭한 얼굴을 한 시카가 말했다. 헤이카는 그녀를 보더니 싱긋 웃었다.


“늦었네요. 시카.”

“길을 막는 사람들이 많아서..”


시카는 작은 칩을 손안에서 굴리며 말했다. 그녀가 누군지 알고 있는 케니 박사는 아까보다도 훨씬 긴장한 얼굴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여객기와 폭탄마는 유쾌한 조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인사해요. 박사님이 말한 열쇠 구멍을 찾아줄 사람이에요. 마지막 조각이죠.”

“..예?”


케니 박사는 시카를 멀뚱멀뚱 바라보며 되물었다. 초재생 능력을 가진 감응자. 폭탄마로 유명했던 전직 쥐잡이. 그녀가 이 거대한 계획의 마지막 조각이라는 게 무슨 이야긴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말씀하신대로 열쇠를 쓰려면 당연히 맞는 구멍이 필요하죠. 가장 유력한 곳은 아디마 케티르 산이었지만 주저앉아버렸고.”

“예..”

“다른 곳을 찾는 것도 번거로우니 그냥 초재생으로 되돌릴 생각이에요.”


케니 박사는 ‘헤’ 하며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시카를 보았다. 다친 부위를 신속하게 치료하는 초재생 능력이 폭삭 주저앉은 거대한 산을 되돌린다는 건 그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케니 박사에게 헤이카는 설명을 시작했다. 초재생이라는 이름에 가려져 있던 능력의 진짜 정체. 그 힘의 무시무시함을 듣게 된 케니 박사는 시시각각 표정이 변화했다.


하지만 끝에선 결국 케니 박사도 위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또한 사람이었다. 미지를 향해 나아간다는 두려움은 흥분으로, 기대로, 지식을 탐구하는 그의 욕망을 만족시킬 수단으로 바뀌었다.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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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 욕망 시대(6) - 정복자 23.04.19 163 9 16쪽
250 욕망 시대(5) - 악룡과 용사 +1 23.04.18 159 9 17쪽
249 욕망 시대(4) - 오염구역 탐사 +2 23.04.17 158 8 14쪽
248 욕망 시대(3) - 죽음의 땅 +2 23.04.14 172 9 13쪽
247 욕망 시대(2) - 위험한 여행 +1 23.04.13 155 9 13쪽
246 욕망 시대(1) - 탐욕의 바르바로사 +1 23.04.12 178 9 13쪽
245 죄인 +2 23.04.11 157 8 15쪽
244 급류(急流) +2 23.04.10 177 9 13쪽
243 삼류 악당 +2 23.04.07 180 10 23쪽
242 우는 아이 +1 23.04.06 161 8 15쪽
241 에콰(5) - 일그러진 미소 아래 +2 23.04.05 183 9 15쪽
240 에콰(4) - 핏덩이 +1 23.04.04 178 9 17쪽
239 에콰(3) - 욕망죄화(欲望罪花) +1 23.04.03 184 10 27쪽
238 에콰(2) - 모르스 에콰 +1 23.03.31 168 9 13쪽
237 에콰(1) - 소녀 +1 23.03.30 166 9 14쪽
236 개벽(35) - 문을 닫다. +1 23.03.29 169 9 15쪽
235 개벽(34) - 찾아온 영웅, 떠나는 영웅 +1 23.03.28 173 9 21쪽
234 개벽(33) - 베르나데트 23.03.27 163 9 20쪽
233 개벽(32) - 자유를 향해 +2 23.03.24 163 9 18쪽
232 개벽(31) - 데이케트람 23.03.23 168 9 18쪽
231 개벽(30) - 행복을 쫓던 사내 +1 23.03.22 168 8 21쪽
230 개벽(29) - 침묵의 도시 23.03.21 165 8 17쪽
229 개벽(28) - 가능성 +1 23.03.20 171 9 17쪽
228 개벽(27) - 시카 23.03.17 166 9 17쪽
227 개벽(26) - 36년 +1 23.03.16 233 9 17쪽
226 개벽(25) - 빛바랜 세상 +1 23.03.15 167 9 13쪽
225 개벽(24) - 문 23.03.14 175 9 18쪽
224 개벽(23) - 본보기 +1 23.03.13 166 9 16쪽
223 개벽(22) - 옛 동료 +1 23.03.10 176 10 16쪽
» 개벽(21) - 마지막 조각 +1 23.03.09 182 10 21쪽
221 개벽(20) - 흐름 23.03.08 173 10 16쪽
220 개벽(19) - 시라비아의 햇빛 23.03.07 179 10 15쪽
219 개벽(18) - 영웅 증후군 23.03.06 205 10 16쪽
218 개벽(17) - 친구인가 적인가 23.03.03 184 10 16쪽
217 개벽(16) - 습격 23.03.02 183 10 14쪽
216 개벽(15) - 헤르그부르 23.02.28 191 10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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