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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 시대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판타지

완결

굴P
작품등록일 :
2022.05.11 10:32
최근연재일 :
2023.05.08 18:05
연재수 :
26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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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14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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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8쪽

개벽(24) - 문

DUMMY

#1


‘좀 추운데.’


한겨울이나 다름없는 기온. 차가운 빗줄기. 거기에 하늘 위를 날고 있자니 추위에 몸이 후들후들 떨리기 시작했다. 난 코트를 더 조였다.


“보인다. 슬슬 내려가자.”


이런 높이에서도 시커먼 구멍은 훤히 보였다. 철조망으로 빙 둘러싸여 있는 저 구멍에 담긴 흉흉한 이야기들이 떠올랐다.


머리가 없는 시체를 던져 넣었더니 멀쩡하게 머리가 달려서 나온다던지. 저 아래엔 시라비아보다 훨씬 살기 좋은 땅이 있다던지. 황성 이전 공백의 10년의 비밀이 저 아래에 있다던지.


물론, 난 저 아래에 있는 게 뭔지 알고 있다. 지난번에 저 구멍에서 기어나오기도 했고 키란 샤토에게서 직접 듣기도 했으니까.


‘시라비아의 검은 구멍 아래에도 거울 연못이 숨겨져 있다.’


키란 샤토는 그렇게 말했다. 거울 연못의 성질에 대해서도 전부 술술 불었다.


거울 연못은 다른 세상과 통하는 문. 아우터라는 괴물들은 그 문을 통해 나타나는 것. 여기까진 나도 아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문이 다른 거울 연못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건 처음 알았다.


알산나의 날개가 펄럭 움직이며 지상에 착지했다. 커다란 구덩이의 가장자리였다. 그녀의 등에서 내리자 알산나는 날개를 쑥 집어넣었다.


“..오염된 냄새가 나.”


그리고 구덩이를 향해 코를 킁킁거리던 알산나가 말했다. 나도 덩달아 냄새를 맡아보았다. 비와 퀴퀴한 먼지 냄새에 섞여 비린내가 있었다. 잿빛 바다에서나 맡을 법한 역한 비린내였다.


“이 비린내 말하는 거야?”

“오염은 바다처럼 고여 있어. 그래서 혼돈의 바다라고 불러. 모타벨이 그렘린을 만드는 데 쓰던 재료가 ‘바닷물’ 이라 불린 것도 거기서 유래한 거야.”

“..뭐야? 그렘린에 대한 것도 알고 있었어?”

“키란 샤토의 기억에 있었어.”


키란 샤토의 몸뚱이를 먹었다고 놈의 기억까지 자기 걸로 만든다는 얘긴가? 그건 몰랐는데.


“근데 난 전에 이런 냄새 못 맡았는데.”

“네 코가 좋아진 거야. 짐승은 코가 좋으니까.”

“그렇구나. 심장을 먹었으니.. 어쨌든 키란 샤토는 이 아래에 거울 연못이 있다고 했으니 내려가자.”

“기다려.”


내 옷깃을 잡은 알산나였다. 항상 고분고분 말을 듣던 녀석이 이렇게 의견을 내는 건 오랜만이었다.


“왜?”

“이 아래에 거울 연못이 있는 건 맞아. 그런데 뭘 하려고?”

“거울 연못이 통로라면서? 다른 거울 연못이랑도 다 연결됐다 그랬고.. 아시리아에도 거울 연못이 있지.”


이곳에 있는 거울 연못을 타고 아시리아의 거울 연못으로 빠져나올 생각이다. 어처구니가 없는 발상이지만, 돌이켜보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지난번 피스칼에서도 크루아틀 때문에 난 지하로 추락했다. 하지만 빠져나왔을 땐 시라비아의 구덩이였다. 그때는 대체 무슨 영문인지 몰랐지만 키란 샤토의 말대로 모든 거울 연못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면 말이 된다.


“아시리아로 가려는 거야?”

“헤이카가 거기 있으니까.”

“만나러 갈 이유가 없어.”


난 알산나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초점 없는 시선을 정면으로 둔 채 말하고 있었다. 평소엔 어딘가 늘 맹 하던 표정이 지금은 느낌이 달랐다.


“자객 문제를 먼저 해결하려면 시라비아 마피아를 장악하는 게 우선이야. 목적지는 아시리아가 아니라 피스칼이어야만 해. 그곳에 쿠스카라는 네 적이 있으니까.”

“...갑자기 말이 많아졌네?”

“키란 샤토를 먹여준 덕분에. 한동안 제대로 된 걸 못 먹어서 머리가 안 굴러갔어.”

“흐음.”


이렇게 날카로운 지적을 해올 줄은 몰랐다. 그리고 틀린 말도 아니었다. 딱히 할 말이 없었으니까.


“잠깐 얼굴만 보고 돌아오면..”

“정말 자객들이 포기할 거라 생각해? 고작 키란 샤토의 머리를 잘라 걸어다 놓은 걸로?”

“..근데 이젠 크루아틀 심장도 다 소화했고, 자객한테 쉽게 당할 것 같진 않은데?”

“글쎄.”


알산나의 한쪽 날개가 불쑥 튀어나와 내 등 뒤를 가렸다. 날개막 너머로 무언가가 날아와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날개가 내려가자 빗줄기 너머로 녹색 군용 우의를 두른 녀석들이 있었다.


“저것들 뭐더라?”

“아르마 부대. 오염을 사냥하는 늑대들. 봐. 내가 안 막았으면 방금 머리통이 날아갔을 거야.”


알산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역시 이번에도 할 말이 없었다. 카르마 나이프를 뽑아 놈들을 향해 돌아섰다.


그때 놈들과 내 사이로 검은 코트를 입은 젊은 남자가 불쑥 끼어들었다. 지난번 미다스 정부 청사에서 날 습격해온 놈들 중 하나. 별로 하는 것도 없이 구경만 하던 놈이다.


녀석은 내 쪽과 아르마 부대 놈들 사이에서 손을 펼쳤다.


“다들 멈추시오. 감염자는 칼을 내리고, 늑대는 총구를 내리시오.”


생긴 거랑 다르게 별난 말투를 쓰는 놈이었다. 그러자 아르마 부대에서 가장 앞에 있던 남자가 먼저 저벅저벅 거리를 좁혀왔다. 여전히 부하로 보이는 놈들은 이쪽을 향해 총구를 겨눈 채였다.


남자는 후드 아래로 마치 시카처럼 수면 부족으로 가득한 눈을 내게 향하고 있었다. 무감정한 눈. 저런 눈으로 사람을 죽이는 놈들이 위험한 놈들이란 걸 난 알고 있다.


“방해하지 말고 꺼져. 너까지 잡아버리기 전에.”

“동업자끼리 그런 말은 너무하군. 저쪽에서도 변화를 보였으니 여기선 대화를 먼저 해보는 게 어떻소?”

“감염자는 처분한다. 그게 원칙이다.”

“그 원칙대로라면 잡을 게 너무 많지 않소? 놓친 것도 많고.”


한쪽은 기분 나쁜 미소를, 한쪽은 신경질적인 시선으로 서로를 주시하고 있었다. 아르마 부대 쪽 남자가 한 걸음 물러섰다. 젊은 남자는 히죽 웃으며 내 쪽으로 걸어왔다.


녀석은 내게 다섯 걸음 정도의 거리를 두고 멈춰 섰다.


“감염자. 귀는 멀쩡하시오?”


녀석이 물었다. 난 여전히 카르마 나이프를 앞으로 겨눈 채 피식 웃었다.


“어. 잘 들려.”

“그거 다행이군. 그럼 지금부터 몇 가지 질문하겠소. 키란 샤토를 죽인 건 그쪽이 한 짓이오?”

“내가 했는데.”

“흐음. 옆에 있는 건 월교의 사도로 보이는데, 내분이라고 보면 되는 거요?”


그렇구나. 그렇게 오해할 수 있겠지. 사도였던 알산나가 사도직을 버리고 내 쪽에 붙은 걸 상대도 당연히 알 거라고 생각한 게 오산이었다.


“얜 이제 월교 아니야. 내 애완 용이야.”

“그렇다면 그쪽은 월교와는 무슨 관계요?”

“짝사랑 관계? 난 저쪽을 싫어하는데, 저쪽에선 날 못 데려가서 안달이던데.”


녀석은 한참이나 턱을 만지작거리며 말이 없었다. 천둥이 한 차례 울고, 잦아들었을 때쯤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걸 증명할 수 있소?”

“굳이 증명할 필요가 있어? 사실일 뿐인데. 믿기 싫으면 그냥 깔끔하게 한바탕 하던가.”

“난 믿고 싶은데, 저쪽의 늑대 대장은 다를 것 같아서 말이오. 칼보단 대화로 끝내는 게 좋지 않소?”


녀석은 등 뒤를 엄지로 가리켰다. 늑대.. 아르마 부대 쪽 남자가 여전히 차가운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약을 보여줘.”


그때 알산나가 말했다. 그녀는 내 코트 안주머니를 가리켰다.


“디안 켄트의 약. 그걸로 증명해.”

“그런 걸로 돼?”

“내 말대로 해.”

“...”


기르던 애완 용한테 지시받는 상황이라니. 찝찝한 기분 속에서 난 안주머니의 약통을 꺼내 녀석에게 던졌다.


녀석은 날아간 약통을 잡아채 확인했다. 그리곤 오묘한 표정을 짓더니 입꼬리를 히죽 올렸다.


“이걸 어디서 구했소?”

“의사 선생 본인이 직접 줬어.”

“직접? 흠. 잠시 빌리겠소.”


녀석은 약통을 들고 휘적휘적 걸어가더니 아르마 부대를 향해 약통을 내보였다. 그러자 녀석들의 표정이 심각하게 바뀌는 게 여기서도 보였다.


“늑대 대장. 디안 켄트가 미치지 않고서야 월교를 도울 린 없지. 게다가 조만간 죽을 백사병 감염자에게 약을 줄 리도 없고. 그렇지 않소?”

“..쳇.”


늑대 대장이라는 남자가 손을 들자 뒤에서 총구를 들고 있던 놈들이 일제히 총을 내렸다.


“감염자.. 아니. 계속 이렇게 부르는 것도 좀 그렇군. 이름으로 불러도 되겠소?”

“산.”

“산. 나는 절망이오.”

“응?”

“내 이름이오. 절망.”


늑대 대장에 절망. 하나같이 별난 이름이구나, 라고 생각하며 끄덕였다.


“마지막 질문이오. 꿈이 뭐요?”

“꿈?”

“그렇소. 꿈. 목표. 원하는 결말이라고도 할 수 있겠군.”


뻔한 걸 묻는다. 내가 바라는 건 늘 같다.


“이 거지 같은 세상에서도 잘 먹고 잘 살다 가는 거.”

“..그게 전부요?”

“기왕이면 내 취향의 여자랑 연애도 하고, 결혼하고, 귀여운 자식들도 낳고, 비싸고 커다란 저택에서 오래오래 사는 거지. 늙어 죽을 때도 침대에서 편하게 잠들듯 죽는 거야.”

“그만한 힘을 가지고도 그게 전부라고?”


늑대 대장이란 놈이 물었다.


“그럼 뭐? 세계 정복이라도 꿈꿔야 하나? 그건 귀찮은데?”

“...”

“하하하! 봤소? 늑대 대장? 이번엔 사냥감을 잘못 고른 것 같소만.”


절망은 내게 약통을 돌려주며 말했다. 그러는 사이 늑대 대장이라는 놈은 등을 돌려 멀어지고 있었다. 아르마 부대의 다른 녀석들도 빗속에서 물러나고 있었다.


‘사라졌어?’


멀어지는 군용 우의가 아지랑이처럼 일렁거리더니 이내 먼지처럼 사라졌다. 저렇게 흔적도 없이 사라지다니, 단체로 마법이라도 쓰나?


“저들의 초시공 기술이오. 신기하지 않소? 장소와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원하는 곳에, 원하는 시간대에 나타날 수 있다니.”

“..그래서 그쪽은 뭐하는 자객인데?”

“난 자객이 아니오. 그리고 오해도 풀렸으니 그렇게 경계할 필요 없소. ...이렇게 말해봤자 경계하는 게 당연한가? 괜찮소. ‘낯선 이방인에겐 늘 칼이 숨겨져 있다네.’ 그런 말도 있으니까.”


들어본 적 없지만 대꾸할 생각도 없었다. 난 뽑은 나이프를 거두지 않은 채 구덩이의 가장자리로 향했다. 그런 날 알산나가 멈춰 세웠다.


“아직도 가려는 거야? 방금 봤으면서. 자객들은 포기하지 않았어.”

“아르마 부대는 물러났잖아. 저 이상한 놈도 지금은 날 안 노리고. 그러니 쿠스카는 에콰한테 맡기자고. 아시리아에 갔다가 돌아오면 바르바로사 자리도 준비됐겠지.”

“그건..”

“그렇게 하시오. 겁먹은 용의 말대로 할 필요는 없소.”


절망이 말했다. 이건 조금 위험하지 않을까 생각한 찰나, 역시나 내가 지시하지도 않았는데 알산나가 튀어 나가 절망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


알산나의 손톱은 그를 상처입히지 못했다. 닿기도 전에 먼저 알산나의 손목이 붙잡혔다.


날개를 뿜은 알산나는 날개를 굽혀 절망의 등을 노렸다. 하지만 찌르기 직전, 알산나는 갑자기 뒤로 훌쩍 뛰어 내 곁으로 돌아왔다. 잔뜩 찌푸린 얼굴로 입술을 잘근잘근 깨무는 게 뭔가 잘 안 풀리는 모양이다.


“좋은 판단이오. 역시 지혜로운 용이로군. ‘절망을 쑤시는 건 벌집을 찌르는 것과 같노라.’ 그런 말도 있지.”

“...”

“산. 지금 아시리아엔 헤이카 미켈런이 있소. 그녀를 만나고 싶은 것 아니오?”

“..그렇지.”

“합리적인 이유를 찾을 필욘 없소. 만나고 싶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이유지. ‘욕망에 충실해야 한다.’ 블라다카가 자주 하던 말이오. 그 대주교는 싫지만, 경험상 그의 말은 늘 도움이 되었소.”

“저 말 듣지 마!”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한 알산나를 믿느냐, 저 정체 모를 놈을 믿느냐. 잠시 고민하던 난 둘 다 내치기로 했다. 믿는 건 나 자신이면 된다. 헤이카를 만나고 싶었다.


에콰의 미래? 다 헛소리다. 자객? 어떻게든 되겠지. 온 세상이 헤이카를 점점 짓누르고 있다. 그녀가 짓눌려 사라지기 전에 곁에 있어주고 싶었다.


난 구덩이의 가장자리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으로 빗줄기가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전에 이런 곳을 기어 올라왔었다니, 이젠 믿기지 않는다.


“이 아래는 싫어..”


내 옷깃을 잡은 알산나가 작게 중얼거렸다. 왜 계속 날 막으려던 건가 싶었는데 역시 이유가 따로 있었구나.


“무서워서 내려가기 싫은 거야?”

“아니야! 난 무서운 거 없어!”

“그럼 가자.”

“으.. 으으..”


우물쭈물거리는 알산나였다. 두고 간다는 선택지는 없다. 이 용은 내 거니까. 이제 내 것을 더 이상 놓아버릴 생각은 없다.


난 알산나의 어깨를 끌어안고 훌쩍 구덩이를 향해 뛰었다. 이건 예상치 못했는지 알산나의 얼굴이 경악으로 바뀌었다.


“행운을 빌겠소. 욕망.”


그런 목소리를 뒤로하고 구덩이 속 검은 어둠은 이내 시야를 완전히 삼켰다.



#2


눈앞이 온통 암흑으로 물든 이후, 한참을 추락했다. 체감상 몇 분 동안 떨어지기만 했다.


앞뒤, 위아래의 구분도 없이 모두 새까맣다. 이런 상태에서 착지를 준비하는 건 조금 골치 아팠다.


난 나이프 하나를 꺼내 아래로 집어 던졌다. 날아가던 나이프가 어느 순간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멈췄다. 지면에 꽂힌 것이다. 곧 지상이라는 뜻이었다.


가까워지는 나이프를 보고 거리를 가늠해 착지했다. 사실 착지라고 해봤자 그냥 두 다리로 딛는 것뿐이었다. 예전 같으면 다리가 부러졌을 충격이지만 지금의 내 몸으론 충분히 버틸 수 있었다.


“바닥에 오긴 했는데..”


위를 올려다보니 엄청난 높이라는 건 알겠다. 하지만 해골 아저씨랑 왔었던 그 어두컴컴한 장소와는 느낌이 좀 달랐다. 더 공허하고 차갑다. 그러고 보니 빗줄기는 여기까지 내려오지 않았다.


몸을 낮춰 지면을 더듬거렸다. 알산나는 여전히 내 옆에 붙어있었다. 그녀를 바라보다 뭔가 이상함을 깨달았다. 이렇게 어두운데 알산나는 또렷하게 잘 보였다.


‘여긴 어두운 게 아니야.’


그저 새까맣게 칠해져 있을 뿐, 어둠이 아니다. 어두웠다면 내가 던진 나이프도 보일 리 없고, 내 손을 내려다볼 수도, 겁에 질린 알산나의 얼굴을 볼 수도 없었을 테니까.

난 알산나를 향해 물었다.


“거울 연못이 이 아래에 있다면서? 지금 우리가 딛고 있는 이거 맞아? 그냥 새까만데.”

“아니야.. 여긴 아무것도 아니야.. 흘러나온 공백이야..”

“그럼 거울 연못은 어디 있어?”


알산나의 손가락이 어딘가를 가리켰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가락 끝에는 희미한 빛이 보였다. 저 앞에 무언가 있었다.


“돌아가자.. 여긴 위험해..”

“그래. 얼른 가자.”


알산나의 손을 잡고 성큼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처음엔 조금 저항하던 알산나도 이내 포기했는지 휘청거리며 내 손에 끌려왔다.


희미한 빛이 점점 뚜렷해졌다. 가까워진다는 의미였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빛의 정체가 우뚝 선 연못이라는 걸 인지하기까진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렇다. 우뚝 선 연못. 연못이 세로로 선 채로 있었다. 거울처럼 맑고 투명해서 나와 알산나를 비추는 연못이었다. 이게 거울이 아니라 연못이라고 확신한 건 손가락으로 건드릴 때마다 물결이 일었기 때문이다.


“거울 연못. 이름값 하네. 여기 물 마셔도 되는 거야?”

“뭐? 뭐??”

“마셔봐야지.”


일단은 연못이니까 마실 수 있지 않을까? 그런 호기심에 손으로 연못의 물을 떠올렸다. 우뚝 선 연못에서 물을 뜨는 모양새라, 물을 뜬다기보단 떼어낸다는 말이 더 어울렸다.


손바닥 안에 고인 물은 여전히 거울처럼 맑았다. 난 별생각 없이 그걸 마셨다. 비린내. 쇠 맛. 단맛. 쓴맛. 그런 맛들이 뒤섞였다.


“더럽게 맛없네.”

“..거울 연못을 마실 생각을 한 건 네가 처음이야.”

“그래? 궁금해서 다들 한 번쯤은 마셔보지 않을까 했는데. 그래서 이거 어떻게 들어가? 그냥 이 안으로 뛰어들면 돼?”


알산나는 고개를 저었다.


“싫어. 가기 싫어.”

“다른 거울 연못이랑 이어져 있다면서? 금방 지나가면 되잖아.”

“거울 연못은 불규칙해. 같은 문으로 들어가더라도 항상 너머에 있는 게 달라. 시간도 달라지고, 규칙도 달라져. 혼돈의 바다로 통할 수도 있어. 그.. 그랬다간 끝장이야..”


자존심 따윈 버리고 이젠 스스로 무섭다고 하는 걸 보니 진짜로 겁먹은 모양이다. 그렇다고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이번에도 알산나의 어깨를 붙잡았다.


“돌아가면 맛있는 거 사줄께.”


그렇게 달래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일단은 연못이니 숨을 못 쉴 것도 염두에 두었다. 도리질을 반복하는 알산나와 함께 연못으로 발을 들였다.


정말로 물에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막상 들어가고 보니 물속과는 거리가 멀었다. 호흡도 자유로웠고, 움직임도 방해가 없었다.


온통 새하얀 공간. 그곳이 잠깐 이어지다 그림이 그려지듯 풍경이 멀리서부터 바뀌었다. 내가 딛고 있던 하얀 바닥은 어느새 쇠로 된 지면이 되었고, 살짝 나던 비린내는 물러가고 차가운 공기가 내리깔렸다.


‘눈?’


깨닫고보니 눈이 내리고 있었다. 이리저리 쌓인 눈 사이로 뚜렷하게 존재감을 드러내는 쇳덩어리들이 있었다. 그건 전부 사람이 만든 구조물이었다.


얼어붙은 파이프관. 끊어진 다리. 버려진 빌딩들. 그런 폐허로 가득한 곳이다. 조금 걷자 저 멀리 도시가 보였다.


차가움 밖엔 느껴지지 않는 쇳덩어리 도시. 하늘엔 셀 수도 없이 많은 검은 드론들이 날고 있었고, 도시는 커다란 강철의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 벽에는 익숙한 로고가 박혀 있었다.


‘이클립스 공업..’


알산나가 했던 말의 의미를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여긴..”


여긴 미래였다.


헤이카의 계획이 실현된 황성의 미래.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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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3 마법사의 보답 +2 23.05.05 154 10 13쪽
262 광야(曠野) 헤이카 미켈런 +2 23.05.04 174 12 15쪽
261 재회 +1 23.05.03 166 11 15쪽
260 사막, 괴물, 어린 칼잡이들 +3 23.05.02 161 11 12쪽
259 라푸스 벤데르드 +2 23.05.01 168 9 20쪽
258 욕망 시대(13) - 사무엘(Samuel) +2 23.04.28 169 8 17쪽
257 욕망 시대(12) - 눈 내리는 날 +1 23.04.27 163 8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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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5 욕망 시대(10) - 강철의 기사 23.04.25 154 9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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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2 욕망 시대(7) - 길을 잃고 +1 23.04.20 164 9 15쪽
251 욕망 시대(6) - 정복자 23.04.19 163 9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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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7 욕망 시대(2) - 위험한 여행 +1 23.04.13 155 9 13쪽
246 욕망 시대(1) - 탐욕의 바르바로사 +1 23.04.12 178 9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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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 에콰(4) - 핏덩이 +1 23.04.04 178 9 17쪽
239 에콰(3) - 욕망죄화(欲望罪花) +1 23.04.03 184 10 27쪽
238 에콰(2) - 모르스 에콰 +1 23.03.31 168 9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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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6 개벽(25) - 빛바랜 세상 +1 23.03.15 167 9 13쪽
» 개벽(24) - 문 23.03.14 175 9 18쪽
224 개벽(23) - 본보기 +1 23.03.13 166 9 16쪽
223 개벽(22) - 옛 동료 +1 23.03.10 176 10 16쪽
222 개벽(21) - 마지막 조각 +1 23.03.09 181 10 21쪽
221 개벽(20) - 흐름 23.03.08 173 10 16쪽
220 개벽(19) - 시라비아의 햇빛 23.03.07 179 10 15쪽
219 개벽(18) - 영웅 증후군 23.03.06 205 10 16쪽
218 개벽(17) - 친구인가 적인가 23.03.03 183 10 16쪽
217 개벽(16) - 습격 23.03.02 183 10 14쪽
216 개벽(15) - 헤르그부르 23.02.28 191 10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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