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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ject.P

욕망 시대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판타지

완결

굴P
작품등록일 :
2022.05.11 10:32
최근연재일 :
2023.05.08 18:05
연재수 :
26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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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22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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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쪽

개벽(30) - 행복을 쫓던 사내

DUMMY

#1


마치 좀도둑처럼 비와 밤의 어둠을 틈타 우리는 병원에 도착했다.


‘이게 병원이야?’


주변에 있는 것과 별다를 것 없는 높은 초고층 빌딩. 꼭대기는 보이지도 않고, 빽빽하게 들어찬 게 여전히 답답한 느낌을 줬다. 시카는 이 빌딩 전체가 의료 시설이라고 했다. 조금 과한 게 아닌가 싶지만, 베르나데트의 임무가 ‘인류 보존’ 이라는 걸 생각하면 의료 시설에 가장 많은 투자를 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사람을 마주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함께 로비에 들어섰지만 사람은 없었다. 접수대에 있는 건 그저 모니터 스크린 몇 개가 전부.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내 어깨를 엠마가 톡톡 두드렸다.


“그렇게 경계하지 않아도 돼요. 이 시설에서 일하는 사람은 없거든요. 늦은 밤이니 돌아다니는 환자도 없을 거고.”

“응? 의료진이 없어요?”

“그 의료진이 전부 로봇이거든요. 진료도, 수술도, 치료나 모든 의료 업무에 관련된 건 베르나데트가 만들어낸 인공지능이 맡고 있어요.”

“면회 허가 났어요. 가요.”


모니터 스크린을 두드리던 시카가 말하더니 앞장섰다. 눈치 볼 것도 없이 이렇게 터치 몇 번으로 해결될 줄이야. 묘한 기분을 느끼며 시카를 뒤따랐다.


이번에도 엘리베이터는 높게 올라갔다. 무려 60층 블록. 이렇게 높은 곳에 환자가 있어도 되나 의문도 들었지만 첨단 기술로 떡칠 된 이 의료 시설을 생각하면 별 상관없을 것 같았다.


불투명한 자동문이 복도 좌우로 길게 나타났다. 문 하나가 병실 하나인 모양이다. 시카는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질렀다.


곧 사무엘의 병실을 찾을 수 있었다. 불투명했던 자동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병실 내부의 모습은 내가 익히 아는 그런 병실이었다. 온통 하얗고, 깨끗하기만 한 곳이다.


침대는 하나. 그 침대에 누워있는 남자가 있었다. 자글자글한 주름이 얼굴에 가득하고, 퀭한 눈을 반쯤 뜨고 있는 그는 우리가 들어와 인기척을 내도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핸들러.”


그의 곁으로 다가간 시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도 그 옆으로 가서 섰다.


‘이게 사무엘이라고..?’


내가 알던 말끔하고 잘난 체하는 양복쟁이는 이곳에 없었다. 그래도 계속 보니 희미하게 얼굴에서 사무엘이 보이긴 했다. 다만 그는 초점 없이 여전히 천장을 보고 있을 뿐, 시카에겐 눈길도 주지 않았고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핸들러. 산 팀장이 돌아왔어요.”

“...”

“사무엘.”


코드 네임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불러도 그는 반응이 없었다. 그저 누워서 숨만 쉬는 게 전부인 식물인간 같았다. 엠마는 답답한 표정으로 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이봐요. 박민욱 씨. 사람이 부르면 대답 좀 해봐요.”

“그런 이름도 있었지..”

“이래도 반응이 없네요. 전직 노페이스 팀장이 이런 꼴이 되다니. 단순히 캔들 후유증이라고 생각하기엔 어려운데요. 내가 본 캔들 복용자들도 이 정돈 아니었는데.”

“캔들이 아직도 있어요?”


내가 묻자 엠마는 찝찝하단 얼굴로 말했다.


“세상에 감응자는 사라졌지만 캔들은 남았어요. 그리고 캔들은 사람을 감응자로 만들어주는 약이죠. 한때 베르나데트에게 반기를 들었던 해방군도 그 캔들을 복용해 감응자가 돼서 베르나데트와 싸웠죠. 지금도 암암리에 돌고 있다는 소문은 있어요.”

“해방군이라..”

“다만 캔들 후유증이라고 해도 약으로 치료할 수 있을 정도예요. 그런데 이런 첨단 의료 시설에서 최고의 의료 혜택을 받는 사람이 캔들 후유증을 이겨내지 못할 리가 없어요. 뭔가 다른 문제가 있어 보이는데요.”


엠마의 시선은 시카를 향했다. 씁쓸한 얼굴을 한 시카가 끄덕이며 말했다.


“캔들 후유증뿐만이 아니에요. 미래 관측은 뇌에 부담을 주고, 그게 누적되어 핸들러는 노페이스 팀장으로 일할 때도 정신이 온전치 못했어요. 과거의 감응자들처럼 자주 환각, 환청에 시달렸어요. 그러다 어느 순간 정신을 놓아버렸죠.”

“살아... 나 살아..”

“!”


사무엘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나와 엠마는 그의 말에 집중했지만 그는 알 수 없는 소리를 반복하기만 했다. 조금 시간이 지나서야 난 그게 별 의미가 없는 헛소리임을 깨달았다.


“이런 상태에선 뭘 묻기도 어렵네요. 하아.. 역시 다른 플랜으로 가죠. 거울 연못은 포기하고, 제가 준비해둔 걸로요.”

“..그 베르나데트를 망가뜨릴 바이러스라고 했던가? 그거요?”

“네.”

“그런 거 있으면 진작에 망가뜨리지 왜 이제 와서?”


엠마는 조금 우물쭈물하다가 대답했다.


“일단 제 바이러스를 베르나데트에게 확실하게 주입하려면 아베스타 서버와 직접 연결된 도시 청사로 들어가서, 숨겨진 서버실에 잠입해야 하거든요. 보통은 서버실 구경도 못하고 총 맞죠.”

“난 베르나데트가 어찌 되든 관심 없고 돌아가고 싶거든요. 조금만 더 있어보죠. 잠깐 정신이 돌아올지도 모르잖아요.”

“휴우.. 아까 그렇게 설명하긴 했지만 난 여전히 아버지의 연구가 허무맹랑한 망상이라고 생각해요. 현재 거울 연못을 되살리는 건 불가능해요. 설령 이 전직 노페이스 팀장이 뭔가 정보를 던져준다 해도, 그걸 아버지의 연구에 접목해서 거울 연못을 열 때까진 또 연구하고, 테스트를 거치고.. 꽤 시간이 걸리겠죠. 현실적이지 못해요.”


엠마의 말들이 푹푹 날아와 꽂혔다. 틀린 말 하나 없다는 게 더 화났다. 어깨가 자꾸만 축 처지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속절없이 시간이 흘렀다. 10분, 20분, 30분.. 투덜거리던 엠마도 구석에 앉아 노트북을 두드렸고 시카와 난 사무엘의 곁에서 그를 기다렸다. 사무엘은 이따금 입을 열었지만, 그때마다 별 의미 없는 말들만 뱉어냈다.


그의 눈은 날 보고 있지 않았다.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나뿐만이 아니라 시카도. 어쩌면 이 세상 전부를 보려고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아는 사무엘은 이곳에 없었다.


‘행복이라고 했던가.’


사무엘은 내게 자신의 속내를 숨김없이 드러냈다. 굳이 헤이카가 아니라 내게 붙어 있는 이유까지 모두 설명했다.


행복해지기 위해서. 바뀐 세상에서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자신의 미래를 보았기에 그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사무엘은 행복과는 영 거리가 멀었다.


이게 그가 바라던 행복인가? 여기까진 내다보지 못했던 걸까? 이젠 물어도 대답해줄 상태가 아니었다.


또 시간이 흘렀다. 어느덧 병실에 들어온 지 한 시간이 되어가고 있었다. 바깥은 여전히 어두웠고, 만들어진 비가 뿌려지고 있었다. 깊은 밤이었기에 돌아다니는 사람도 없었다.


고개를 들자 건너편 빌딩의 꼭대기가 보였다. 그 위에는 하늘을 새까맣게 덮을 정도로 많은 드론이 벌떼처럼 돌아다녔다. 아베스타였다. 여전히 아베스타는 저 드론을 중심으로 연결망을 구축해 도시를 관리, 감독하고 있는 모양이다.


“산 팀장님..”


그때 들려온 목소리에 창가에 서 있던 난 급히 몸을 돌렸다. 사무엘의 눈이 정확히 날 바라보고 있었다. 시카와 엠마도 놀란 눈을 치켜떴다.


“사무엘?”

“오셨습니까..”

“나, 나 알아보겠어요?”

“예.. 떠나실 때 모습.. 그대로군요...”


난 시카와 눈빛을 교환했다. 시카가 끄덕였다. 기다리던 보람이 있던 걸까. 사무엘의 정신이 잠깐 돌아온 것이다.


이러다가도 언제 다시 정신을 놓아버릴지 모를 일이었다. 매정하지만 사무엘과 편하게 얘기를 나눌 시간은 없었다. 난 그에게 물었다.


“사무엘. 내가 여기 오는 미래를 봤죠? 난 과거에서 왔어요. 거울 연못을 타고. 다시 돌아가고 싶어요. 어떻게 해야 하죠? 내가 돌아가는 미래도 봤어요?”

“.....”

“사무엘..?”


사무엘의 눈가에 고인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의 주름진 얼굴이 웃는 듯, 우는 듯 일그러졌다.


“팀장님.. 죄송합니다..”

“예? 뭘..”

“저는 행복을 쫓고 있었습니다.. 행복을요.. 행복해지고 싶어서..”


그는 깡마른 손을 내게 뻗었다. 난 순순히 손을 내주었다. 내 손을 꽉 쥔 사무엘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제가 본 미래에서.. 전 웃고 있었습니다... 그 미소가 본 적 없는 미소여서 분명 행복을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습니다.. 아니었어요.. 팀장님... 제가 본 미래에서, 웃고 있던 저는.. 견디지 못해 포기했던 겁니다.. 흐.. 으흐흐..”


사무엘의 입꼬리가 히죽 올라갔다. 행복을 찾은 남자의 미소라고는 볼 수 없었다.

그 일그러진 미소는 실성에 가까웠다.


“행복은 없었어요.. 팀장님.. 어디에도 행복은 없었어...”

“...”

“죄송합니다.. 쭉 사과하고 싶었습니다.. 난 당신을 구하려는 선택을 하지 않았습니다. 내 행복을 위해서였습니다.. 그게 잘못된 선택이란 것도 모르고.. 결국 에콰가 옳았던 겁니다..”


난 숨을 삼켰다. 갑자기 그 이름이 나올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신을 구해야만 했어... 에콰는 당신을 구하려고 했는데.. 난 당신을 이용하려고만 했습니다.. 그래서 에콰가 아닌 블라다카를 선택했습니다.. 줄곧 사과하고 싶었습니다.. 절 용서해주십시오. 팀장님.. 절..”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에콰는 왜..? 블라다카? 월교 교주?”

“핸들러. 거울 연못을 다시 열어야 해요.”


시카의 목소리에 사무엘은 얕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는 축 늘어진 내 오른팔을 가리켰다.


“산 팀장이 떠나기 전에.. 제게 말했습니다. 자신의 오른팔이 열쇠라고..”

“오른팔? 이 의수요? 이쪽의 내가 그렇게 말했어요?”

“당신은 욕망을 잃고 망가졌습니다.. 다른 축복의 아이들과 달랐죠.. 뒤늦게 알았습니다.. 당신은 축복의 아이가 아니었다고..”


월교가 뿌린 죄화의 씨앗을 삼킨 시라비아의 아이들. 나도 그 중 하나다. 적어도 난 지금까지 그렇게 알고 있었다. 월교도 날 축복의 아이라 불렀으니까.


“당신은 신의 아이입니다.. 헤이카 미켈런은 알고 있었을 겁니다.. 당신이 그렇게 될 것도 전부..!”

“...”


힘겹게 몸을 일으킨 사무엘은 내 오른팔을 잡았다.


“팀장님. 당신은 가능성입니다.. 제 잘못을 돌이킬 수 있는 마지막 기회입니다..”

“어떻게 하면 돌이킬 수 있어요? 이 오른팔로 뭘 해야 하죠?”

“문을 여십시오.. 그날 헤이카 미켈런이 닫아버린 문을 열어서.. 모든 걸.. 비틀어서...”


공기가 흐트러졌다. 파장이었다. 사무엘의 두 눈동자에 빛의 고리가 둘러졌다.


내 시야도 바뀌었다. 병실은 차갑고 더러운 거리로. 뼈저린 추위가 스며드는 곳으로 바뀌었다. 나뿐만이 아니라 시카와 엠마도 똑같이 바뀌는 풍경을 보고 있는 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과거의 시라비아..”


미래는 아니었다. 이 시대의 시라비아는 이미 남아있지 않았으니까. 사무엘은 여전히 내 손을 꽉 쥔 채 눈을 빛내고 있었다.


잿빛 바다로부터 새하얀 남자가 시라비아로 올라섰다. 얼굴엔 마치 하얀 물감을 마구 덧칠해놓은 듯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목에서 흔들리는 것은 분명한 월교의 상징이었다.


“블라다카.”


시카의 중얼거림을 들었다. 남자가 손을 쥐었다 펴자 그의 손바닥 위에는 새까만 콩과 같은 씨앗이 솟아났다. 그 씨앗은 시라비아의 불우한 아이들 손에 들어갔다.


죄화의 씨앗이다. 저 씨앗을 먹은 아이들은 월교가 말하는 축복의 아이가 되며 특별한 능력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아이들의 씨앗은 싹을 틔우기도 전에 검은 옷의 사람들에게 잘려나갔다. 시라비아 마피아였다.


월교가 시라비아에 침투하는 걸 막기 위해 시라비아 마피아는 씨앗을 삼킨 아이들을 모조리 제거했다. 그리고 난 그 참극의 유일한 생존자라고 들었다.


하지만 내가 없었다. 씨앗을 받은 기억도, 삼킨 기억도 없었기에 내가 모르는 새에 에콰가 내게 먹였으리라 생각했는데, 지금 내가 보는 시라비아는 훨씬 이전이었다.


그때 한 소녀와 눈이 마주쳤다. 잿빛 머리칼을 가진 소녀는 씨앗을 삼키고 있었다. 그 눈빛이 익숙했다.


차가운 날붙이처럼 소름 끼치는 눈동자. 늘 나를 내려다보던 그 눈이었다.


모든 게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피투성이가 된 소녀는 비틀비틀, 핏덩이를 안고 어디론가 걸어갔다. 핏덩이가 울음을 터뜨렸다. 소녀의 얼굴은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또다시 시간이 빠르게 흘러간다. 독기로 가득 찬 눈을 가진 꼬마가 피투성이 칼을 휘둘렀다. 두 눈이 멀쩡한 오코넬이 칼을 받아냈다. 저 꼬마는 나였다.


‘다리를 찔렀었지.’


꼬마는 오코넬의 다리를 찔렀다. 지금 보면 충분히 막을 수 있었던 공격이다. 하지만 오코넬은 그 칼을 받았다. 움직이지 못한다는 듯 한쪽 무릎을 꿇었다. 꼬마는 빠르게 도망쳤다.


도망치는 작은 등을 보며 오코넬은 몸을 일으켰다. 그는 웃고 있었다.


방황하던 꼬마는 조금씩 성장했다. 그리고 익숙한 동네에 발을 들였다. 코렌의 바닷가 촌구석, 필라드였다.


‘그는 필라드에 있습니다.’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우린 사무실처럼 보이는 곳에 있었다. 의자에 앉아있는 여자는 헤이카였다. 그녀에게 사진이 끼워진 서류를 내민 건 헤이카의 부하인 '나이트' 였다.


‘필라드에 괜찮은 아파트를 찾아줘.’

‘직접 접촉하시는 건 위험합니다. 회장님. 그는 전직 시라비아의..’

‘알아. 하지만 끌어들이려면 내가 직접 얼굴을 트는 게 가장 좋아.’


사진 속 내 모습을 보며 헤이카는 말했다. 나와 만나기 이전의 헤이카였다. 그녀는 처음부터 필라드에 살던 게 아니었다. 바다가 좋아서 온 것도 아니었다.


또다시 모든 게 빠르게 흘렀다. 지금의 나처럼 하얗게 병든 내 모습이 보였다. 다만 다른 점은 나와 하얀 남자가 함께 있었다. 저건 블라다카였다.


블라다카는 무언가를 속삭였다. 나는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고 여느 때보다 경쾌한 발걸음을 내디뎠다. 저 소름 끼치는 모습이 나라는 걸 믿을 수 없었다.


마치 목줄이 풀린 것처럼 난 모든 걸 탐하기 시작했다. 돈, 권력, 여자. 온갖 악행도 서슴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블라다카는 늘 내 곁에서 욕망을 부추기는 말을 속삭였다.


‘당신을 방해하려는 사람들이 있군요.’


블라다카의 속삭임에 난 칼을 들었다. 그렇게 그가 가리킨 사람들을 찔렀다. 오코넬과 에콰였다.


그러자 블라다카는 뭐가 그리 좋은지 박수를 쳤다. 난 그에게 웃어 보였다.


아디마 케티르의 정상. 하늘에 아가레스는 없었다. 그곳에 헤이카가 서 있었고 그녀의 맞은편엔 소름 끼치는 미소를 지으며 내가 서 있었다. 나와 헤이카 사이를 만신창이가 된 머스칼이 가로막았다.


이번에도 블라다카는 머스칼을 가리켰다. 그리고 난 거침없이 머스칼의 가슴에 칼을 찔러넣었다. 카르마 나이프는 너무나도 쉽게 머스칼의 가슴을 꿰뚫었다.


‘헤이카를 내놔.’


그런 말을 중얼거리며 난 나이프를 비틀었다. 완전히 열린 머스칼의 가슴에서 피가 쏟아져나왔다. 그는 기우뚱하며 아디마 케티르의 구멍으로 떨어졌다. 피투성이가 된 내 손이 얼어붙은 헤이카를 포옹했다.


이 광경을 지켜본 블라다카는 이번에도 박수를 쳤다. 그의 박수 소리가 아디마 케티르 정상에 퍼져 나갔다.


“쿨럭! 크흡.”


세상이 흔들렸다. 고개를 내리니 늙은 사무엘이 피를 토했다. 그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사무엘. 이러다간..”

“아직..”


사무엘은 다시 한 번 파장을 터뜨렸다. 세상이 흐른다. 빠르게 흐르는 시간에 병실 침대에서 잠들듯 눈을 감은 헤이카가 있었다.


이게 그녀의 죽음의 순간이라는 걸 난 알 것 같았다. 이제 막 눈을 감은 그녀의 곁에서 나라는 인간은 여전히 비틀어진 미소를 짓고 있었다.


헤이카가 세상을 떠난 뒤, 나와 노페이스 팀은 끝까지 헤이카의 계획을 수행했다. 공업은 성목을 베었고 우린 베르나데트에게 거역하는 집단을 무력으로 짓밟았다.


그렇게 마침내 세상이 바뀌었다. 하얀 남자, 블라다카는 이제 없었다. 헤이카도, 머스칼도, 욕망도 이 세상엔 남지 않았다. 남은건 사람을 흉내 내는 베르나데트와 사육당하는 인간들이 전부였다.


그런 세상의 꼭대기에 내가 섰다. 난 더 이상 웃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갈 곳 잃은 폐인처럼 끔찍한 몰골이었다. 그런 나는 곧 도시를 떠났다.


곧 일부의 사람들이 베르나데트에게 반기를 들며 일어섰다. 그들은 무자비하게 학살당했다.


또 시간이 흐르고 거대한 기계 장치를 향해 야차가 달려들었다. 그의 앞을 가로막은 건 베르나데트가 보낸 거대한 쇳덩어리였다. 쇳덩어리는 야차를 갈기갈기 찢었다. 그의 죽음을 지켜보던 시카가 무너졌다.


내리는 인공호우 속, 길거리 한복판에 멍하니 선 젊은 사무엘은 실성한 사람처럼 웃기 시작했다. 그의 주변엔 그의 손으로 직접 처분한 해방군의 시신으로 가득했다.


분쟁과 진압을 반복하는 세상은 점차 침묵에 잠겼다. 누구도 말을 하지 않았고 누구도 베르나데트에게 거역하지 않았다. 거대한 기계 장치는 어두컴컴한 공간에서 여전히 빛을 냈다. 그렇게 기계가 지배하는 세상은 침묵으로 얼어붙었다.


그 세상의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섰다. 그건 나와 알산나였다. 그 뒤는 내가 아는 일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곧, 비로소 우린 미래라고 부를만한 시간대에 도달했다.


불길로 가득 찬 도시에서 베르나데트의 기계들이 움직였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고 도시가 무너지고 있었다. 난 메마른 흙바닥에 주저앉아 오른팔로 그 흙을 파내고 있었다. 마치 말라붙은 연못 바닥을 긁어내는 듯이 보였다.


거기서 세상이 멈췄다. 필름이 끊기듯 뚝 끊어져 병실로 되돌아왔다. 코피를 줄줄 흘리는 늙은 사무엘이 몸을 구부리고 있었다.


“사무엘!”


가쁜 숨을 몰아쉬는 사무엘의 손이 경련하는 것처럼 떨렸다. 그는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비틀어야 합니다.. 전부.. 전부 비틀어야만.. 용서하십시오.. 용서..”


사무엘은 정신을 잃고 축 늘어졌다. 동시에 병실 문이 열리더니 바퀴 달린 로봇팔들이 병실로 재빠르게 들어섰다.


그 로봇팔들은 사무엘을 눕히고 바쁘게 이것저것 하기 시작했다. 아마 치료라고 부를만한 것이었다.


손을 내려다보았다. 사무엘이 쥐었던 손의 감촉이 남아있었다. 그가 보여준 것들도 또렷하게 기억에 새겨졌다.


멀리서부터 들리던 부우웅 하는 소음이 가까워졌다.


“어.. 뭐야!? 이거 눈치챈 거 아니에요!?”


엠마가 창 밖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하늘 높이 머물던 검은 드론들이 고도를 낮춰 의료시설에 접근하고 있었다.


“일단 튑시다.”

“네? 이, 이대로 가요!? 오른팔이 뭐 어쨌는데요! 아직..”

“뭔지 알 것 같아요.”


사무엘의 기억을 본 탓인지 멍하니 굳어버린 시카의 손을 잡아당기고 달렸다. 그 뒤를 엠마가 뒤따랐다. 어느새 병원 복도에도 웅웅거리는 드론의 구동음이 가까워졌다.


곧 복도 양 끝에서 드론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총이 달린 드론들의 렌즈에 새빨간 빛이 점멸했다. 재빠르게 좌우를 살폈다. 난 카르마 나이프로 닫힌 병실 문 하나를 찍어 내렸다.


절삭력은 사라졌지만 그래도 내구성은 여전했다. 자동문이 와장창 깨지고 빈 병실에 들어섰다. 다시 한 번 달려 커다란 창문을 내리쳤다. 강화 유리인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시카!”


멍하니 있던 시카는 내 부름에 눈을 깜빡였다. 뒤따라오는 드론들을 본 그녀가 칩을 유리창에 던졌다.


작은 폭발이지만 유리창을 깨부수기엔 충분한 위력이었다. 세차게 들이치는 비바람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래를 슬쩍 내려다본 엠마가 재빨리 뒷걸음질쳤다.


“저기.. 여, 여기 60층인 거 알죠..?”

“알아요. 나 믿고 뛰어봐요.”

“미친 거 아니죠?”

“아니면 저 드론들한테 벌집이 되던가, 뇌가 코팅 당하던가.”

“...”


엠마는 창백한 얼굴로 입술만 오물거렸다. 그녀의 말대로 짐승의 힘도, 재빠르게 움직이는 다리도, 알산나도 없는 상황에 이 높이에서 뛰어내리는 게 정신 나간 짓이라는 건 알고 있다.


그래도 확신이 있었다. 사무엘이 일깨워준 게 있었다.


나이프로 우의의 오른팔을 쭉 그었다. 축 늘어진 오른팔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이 시대는 마법이 없으니, 마법으로 움직이던 오른팔이 멈춰버린 것이다.


‘오른팔. 오른팔이 열쇠다.’


숨을 들이마시고, 난 깨진 유리창으로 뛰어내렸다. 등 뒤로 엠마의 비명이 터져 나온 걸 보니 날 믿고 뛰어준 모양이다.


난 늘어진 오른팔을 잡아 지상으로 겨눴다.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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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 욕망 시대(6) - 정복자 23.04.19 163 9 16쪽
250 욕망 시대(5) - 악룡과 용사 +1 23.04.18 160 9 17쪽
249 욕망 시대(4) - 오염구역 탐사 +2 23.04.17 159 8 14쪽
248 욕망 시대(3) - 죽음의 땅 +2 23.04.14 172 9 13쪽
247 욕망 시대(2) - 위험한 여행 +1 23.04.13 155 9 13쪽
246 욕망 시대(1) - 탐욕의 바르바로사 +1 23.04.12 178 9 13쪽
245 죄인 +2 23.04.11 158 8 15쪽
244 급류(急流) +2 23.04.10 177 9 13쪽
243 삼류 악당 +2 23.04.07 180 10 23쪽
242 우는 아이 +1 23.04.06 161 8 15쪽
241 에콰(5) - 일그러진 미소 아래 +2 23.04.05 184 9 15쪽
240 에콰(4) - 핏덩이 +1 23.04.04 178 9 17쪽
239 에콰(3) - 욕망죄화(欲望罪花) +1 23.04.03 184 10 27쪽
238 에콰(2) - 모르스 에콰 +1 23.03.31 168 9 13쪽
237 에콰(1) - 소녀 +1 23.03.30 166 9 14쪽
236 개벽(35) - 문을 닫다. +1 23.03.29 169 9 15쪽
235 개벽(34) - 찾아온 영웅, 떠나는 영웅 +1 23.03.28 174 9 21쪽
234 개벽(33) - 베르나데트 23.03.27 163 9 20쪽
233 개벽(32) - 자유를 향해 +2 23.03.24 164 9 18쪽
232 개벽(31) - 데이케트람 23.03.23 168 9 18쪽
» 개벽(30) - 행복을 쫓던 사내 +1 23.03.22 169 8 21쪽
230 개벽(29) - 침묵의 도시 23.03.21 166 8 17쪽
229 개벽(28) - 가능성 +1 23.03.20 172 9 17쪽
228 개벽(27) - 시카 23.03.17 166 9 17쪽
227 개벽(26) - 36년 +1 23.03.16 234 9 17쪽
226 개벽(25) - 빛바랜 세상 +1 23.03.15 167 9 13쪽
225 개벽(24) - 문 23.03.14 175 9 18쪽
224 개벽(23) - 본보기 +1 23.03.13 166 9 16쪽
223 개벽(22) - 옛 동료 +1 23.03.10 177 10 16쪽
222 개벽(21) - 마지막 조각 +1 23.03.09 182 10 21쪽
221 개벽(20) - 흐름 23.03.08 173 10 16쪽
220 개벽(19) - 시라비아의 햇빛 23.03.07 180 10 15쪽
219 개벽(18) - 영웅 증후군 23.03.06 205 10 16쪽
218 개벽(17) - 친구인가 적인가 23.03.03 184 10 16쪽
217 개벽(16) - 습격 23.03.02 183 10 14쪽
216 개벽(15) - 헤르그부르 23.02.28 191 10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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