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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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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굴P
작품등록일 :
2022.05.11 10:32
최근연재일 :
2023.05.08 18:05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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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18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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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쪽

욕망 시대(5) - 악룡과 용사

DUMMY

#1


“으아아아···! 죽고 싶지 않아! 죽고 싶지 않아아···!”


기어코 머리를 감싸 쥐고 주저앉은 수송기 파일럿이 소리를 질렀다. 그를 지켜보던 머스칼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서두르던 걸음을 멈춰야만 했다.


“당신은 죽지 않아. 커너 씨.”

“주, 죽을 거예요! 죽을 거라고요! 아아아!! 집에 가고 싶어···. 으흐흑···.”


기습으로 수송기가 추락하는 와중에도 가장 먼저 조종석으로 달려가 파일럿을 구한 머스칼이었다. 그렇게 어떻게든 목숨은 건진 파일럿 커너였지만, 문제는 몸이 아니라 정신이었다.


이곳은 사람이 살아나갈 수 없다는 오염구역 한복판. 이동 수단은 잃었고, 사방에선 안개 너머로 괴물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으니 평범한 사람에 불과한 그의 정신이 버틸 리가 없었다.


“커너 씨. 가족이 있습니까?”


그런 그에게 다가와 묻는 건 레토 신부였다. 커너는 덜덜 떨며 끄덕였다.


“아내랑 아들이···.”

“그럼 더더욱 돌아가셔야겠군요. 제가 반드시 돌아가게 해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여긴 오염구역이잖습니까···.”

“걱정 마시길.”


레토 신부가 가슴에 손을 얹자 머리 위로 빛나는 고리가, 등에선 빛나는 날개가 스르륵 생겨났다. 그 모습을 본 커너의 떨림이 멎었다.


“천사···.”

“자, 가시죠. 커너 씨.”


극한의 상황에 처한 인간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천사. 커너의 눈에는 전에 없던 경외심이 깃들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던 머스칼은 약간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며 팔짱을 꼈다. 그래도 레토 신부를 방해하진 않았다. 지금 상황에선 커너가 포기하고 주저앉는 것보단 그에게 살 의지를 주고 일으켜 세우는 게 우선이었다.


설령 그게 월교의 비틀어진 천사라 할지라도 말이다.


“일어났으면 가지. 어서 산을 찾아야 해.”


얼굴에 드러날 일은 없지만 후드 속 머스칼의 목소리는 초조함을 숨기지 못했다. 레토 신부는 그런 머스칼을 바라보았다.


“델라리온 머스칼. 이 오염구역에서 섣불리 움직이는 게 위험하다는 건 체이서인 당신이 가장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알고 있지. 하지만 산이 우리랑 떨어졌잖아. 맨몸으론 이런 곳에서 오래 버티지 못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조금 전에 반응이 느껴졌습니다. 이 땅에 저 말고 사도가 들어왔군요. 바르바로사 곁에서 그를 돕고 있을 겁니다.”


레토 신부의 말에 걸음을 멈춘 머스칼이 부러진 검자루를 잡았다. 그의 주변 공기가 조금씩 일그러지기 시작하자 레토 신부가 안경 너머 눈을 가늘게 떴다.


“상황이 너무 딱 맞게 굴러가는군. 혹시 처음부터 산을 이곳에서 고립시키는 게 목적이었나?”

“모르겠군요. 어쩌면 저도 판 위의 말 중 하나일지도.”

“무슨 뜻이지?”

“저도, 이곳에 온 사도도 스스로의 의사보단 다른 누군가의 유도로 움직인 겁니다. 여기까지 도달한 이야기가 누군가가 준비한 거대한 체스판 위 게임일지도 모른단 얘기죠.”

“헛소리.”


머스칼의 주변 땅의 작은 돌조각들이 바스러졌다. 그런 머스칼과 천사 사이에 낀 커너는 이리저리 눈치만 살폈다.


레토 신부는 한숨을 쉬며 먼 하늘을 가리켰다. 머스칼은 그가 가리킨 하늘을 확인하곤 숨을 들이켰다.


“바다로군.”

“이 오염구역이라면 이상한 일도 아니죠.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곳’ 이니까요. 그리고 저 이변이 나타났다는 건 저 근처에 바르바로사께서 계신다는 뜻입니다.”

“그럼 저쪽으로···.”

“아니요. 저희는 저희대로 목적지로 향하죠. 바르바로사께서도 분명 그러고 계실 테니까요.”


머스칼의 후드가 레토 신부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이내 부러진 검을 내리고 돌아선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 그렇겠지. 산이라면 우릴 신경 쓰기보다 헤이카를 먼저 신경 쓸 테니까.”


머스칼은 한 손을 들어 허공을 움켜쥐었다. 동시에 안개를 뚫고 날아든 쇠말뚝은 빈 깡통처럼 구겨져 바닥에 떨어졌다.


“쉬이이이익-!”


가시처럼 뾰족한 쇠말뚝이 등에 솟은 괴물이 안개 너머에서 움직였다. 커너는 기겁하며 레토 신부의 뒤로 숨었고, 레토 신부는 머스칼에게 눈빛을 보냈다.


“결국 또 궂은 일은 내 몫이군.”


머스칼은 투덜거리며 주변 공기를 바꿨다.



#2


하늘에서 쏟아지는 화살비. 그 뒤를 뒤따르는 거대한 불덩이. 좀비처럼 달려드는 기사들.


휴식을 전혀 허락하지 않는 전투는 이젠 저들의 말처럼 전쟁이나 다름이 없어졌지만, 오히려 압박감을 느끼고 있는 건 기사들이었다.


{ 더···! 더 줘···! }


이성을 잃고 떠돌기만 하던 불사(不死)의 기사들조차 움찔하게 만드는 괴물의 음성. 그건 용이었다. 그리고 용의 목소리에 기사들은 그 어느 때보다 혼탁한 정신이 번뜩 깨어났다. 오래전 잃어버렸던 낡은 기억이 그들의 본능에서 깨어난 것이다.


“용···! 용이다!”

“악룡! 재앙의 용을 막아라! 반드시 전선을 사수해라!”


거대한 방패를 세운 기사들이 알산나를 포위했다. 그러자 하늘에서 화살과 불덩이가 날아와 그녀의 위에 쏟아졌다.


{  ̄ !!!! }


이글거리는 불길 속에서 용의 포효가 터져 나왔다. 불길과 화살은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손쉽게 흩어졌고, 그 속에서 다시금 고개를 든 알산나의 눈이 번뜩였다.


과도한 포식 탓인지, 아니면 이 오염구역의 환경 때문인지 그녀의 눈은 빛을 되찾은 상태였다. 용의 소름 끼치는 시선에 기사들은 얼어붙었다. 알산나는 굳어버린 기사들을 덮쳤다.


그녀에겐 이제 사람의 형상보단 용의 형상이 더 많았다. 길고 날카로운 발톱과 피로 흠뻑 젖은 이빨이 끝없는 굶주림을 원동력으로 돌진했다. 기사들은 무서운 속도로 용에게 짓밟히고, 갈가리 찢겼다.


알산나의 이빨이 기사의 갑옷을 뚫고 살덩어리를 찢었다. 강철과 뼈를 씹어 먹는 소리가 공포로 내리깔린 침묵 속에서 적나라하게 들렸다. 그녀의 날개는 더욱 커졌고, 날개에서 솟은 두꺼운 가시가 기사들을 꿰뚫어 대롱대롱 매달고 다녔다.


용의 눈길이 향하는 곳마다 시체가 늘어났다. 비록 그들은 죽음으로부터 해방될 수 없는 자들이지만 죽어도, 죽어도 그 죽음은 끝나지 않았다. 짓밟는 용의 발톱과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공포의 눈동자가 기사들을 집어삼켰다.


그럼에도 알산나의 허기는 달래지지 않았다. 그녀의 폭식은 끝을 모르고 기사들을 향했다. 그 모습에 기사들은 본능적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용의 거대한 날개는 빠른 속도로 그들의 뒤를 쫓았다.


기사들을 유린한 발톱과 이빨에는 죽은 자들의 살점이 걸려있었다. 뒤에서 활에 화살을 먹이던 기사들도 그 모습에 공포에 질려 뒷걸음질쳤다.


{ !!!!!! }


거대한 포효에 도망치던 기사들이 나자빠지고 비명을 질렀다. 질척거리는 피 웅덩이가 된 바닥을 기어서 도망치던 기사들은 등이 밟혀 터졌다. 그 피로 목을 축이고 살점을 취한 알산나가 긴 숨을 토했다.


뜨거운 입김이 새어나왔다. 용의 눈이 환하게 빛났다. 뼈가 자라나는 소리와 함께 알산나의 날개와 꼬리가 더욱 커졌다.


그리고 이 무자비한 학살의 공로자는 한 사람이 더 있었다.


질척한 피웅덩이 위를 아무렇지도 않게 걸어오는 검은 옷의 산이 흉흉한 검을 늘어뜨렸다. 기사들이기에 더더욱 그들은 저 검의 용도를 잘 알고 있었다. 저건 그들이 찾는 명예나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있는 검이 아니라 단순하게 사람의 목을 잘라내기 위한 처형검이었다.


포악한 용이 마구잡이로 기사들을 찢어 죽일 때, 산은 조용히 그 그림자에 섞여 기사들의 목을 떨궜다. 이따금 처형검을 지면에 꽂아넣고선 검은 먹으로 그림을 그리듯 주변을 휩쓸곤 했지만, 기사들의 눈으론 그가 대체 무얼 하는지 볼 수 없었다.


“아직 배고파?”


{ 배고파. }


“그래. 더 먹어. 무한 뷔페다.”


무엇보다 저 난폭한 용과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를 나누는 그의 모습에서 기사들은 더한 의문을 느꼈다. 눈에 보이는 건 죄다 죽이고 잡아먹는 용이 오로지 산의 말에는 철저하게 복종하고 있었다.


알산나의 끝도 없는 포식 행위가 계속되는 동안 산은 더 깊숙이 기사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기사들은 모두 참수도의 압력에 땅바닥에 딱 붙어 꼼짝도 하지 못했다.


무자비한 처형식이 시작됐다.



#3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밤낮의 구분조차 없는 곳인지, 하늘은 여전히 기분 나쁜 검푸른 색에 바다가 위에 있었다. 난 그런 하늘을 올려다보며 약간의 피로감을 느꼈다.


“으헤···.”


알산나는 만취한 사람처럼 휘청거렸다. 기사의 머리를 들고 마치 과일처럼 베어먹고 있는데, 눈에도 빛이 돌아왔지만 상태가 정상은 아니었다.


“알산나. 이제 그만 먹어. 그보다 용은 어디 있어?”


{ 내가!!! 용이다!!! }


“너 말고.”

“저~쪽.”


알산나는 휘청거리며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 방향대로 조금 걷자 어느새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던 백사의 안개가 옅어지고 훤히 드러난 초원이 우리를 맞이했다.


조금 전부터 기사들은 더 이상 덤벼오지 않았다. 알산나는 허기가 가시지 않은 듯 날개 가시에 대롱대롱 꿰여 흔들리는 기사들을 하나씩 먹어치우며 걷고 있었다.


“에휴. 저런 악룡과 용사님이 같은 편이라니. 이야기가 이상해지겠어요.”


여전히 내 등에 업힌 헤카테는 포식 중인 알산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지금 생각난 건데, 여기 있는 거 다 오염된 거 아냐? 먹여도 돼?”

“저 용은 원래부터 심각하게 오염되어 있었어요. 근데 멀쩡한 걸 보니 아마 기원종의 힘이겠죠.”

“기원종?”

“모든 생물은 그 피를 거슬러 올라가면 가장 최초의 모습이 있어요. 그걸 기원종이라 하죠. 저 용의 기원종이 특별한 거예요. 오염된 걸 저렇게 목구멍에 집어넣는데, 아직까지 죽지 않은 게 이상하거든요.”

“흐음.”


용이면 다 같은 용인 줄 알았더니 저것들 안에서도 나름의 혈통빨이 있는 모양이다. 어딜 가나 부모를 잘 만나야 하는구만.


그렇게 초원을 가로질러 걷다 보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옅은 안개에 섞인 엄청난 크기의 뼈였다.


“무슨 뼈지?”


평범한 짐승은 아니었다. 긴 등뼈와 그 등뼈를 타고 무수히 많은 갈비뼈가 지상에 탑처럼 꽂혀 등뼈를 지탱하고 있었다. 그 뼈는 굉장히 오래됐는지 녹색의 무성한 풀이 뒤덮여있었고 중간중간 갈비뼈가 끊어진 곳도 있었다.


게다가 뼈는 초원의 지평선 너머까지 쭉 뻗어 그 엄청난 길이를 가늠하기도 어려웠다. 적어도 난 황성에 이런 크기의 생명체가 있다는 얘길 들어본 적은 없다.


“보아하니 아가레스 모체네요. 용사님이 죽인 아가레스는 아니고 다른 개체 같아요.”


등에 업힌 헤카테가 뼈를 가리키며 말했다. 난 천천히 걸으며 뼈를 유심히 관찰했다. 이제 보니 뼈 사이사이엔 상당히 오래 돼 보이는 유적들도 있었다. 그야말로 고고학자들이 이 광경을 봤다면 눈을 까뒤집고 달려들 광경이었다.


“잘 아네. 혹시 여기 있는 용이 뭔지도 알아?”

“몰라요. 이곳에 용이 있었다는 것도 용사님이 말해서 알았는걸요.”

“그럼 무작정 내가 있는 곳으로 온 거야? 배짱 죽이네.”

“용사님은 절 구해줄 유일한 사람이니까요.”

“애초에 날 용사라고 부르는 건 너뿐이거든? 난 그렇게 착한 놈이 아닌데.”

“그래도 용사님이에요.”


헤카테는 히죽거리며 내 목을 감싸 안았다.


“너도 나한테 뭐 바라는 거 있지? 뭐가 목적이야? 미리 말해.”

“용사님은 날 해방시켜줄 거예요. 이제 그만 살고 싶거든요.”

“···너도 그 소리냐. 못 죽어서 안달 난 놈들이 왜 이렇게 많아?”


시카의 얼굴이 떠올랐다. 떠올리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처음엔 좋을지 몰라도 영원히 산다는 건 꽤 끔찍한 일이에요. 용사님도 이 고통을 맛보면 아실 텐데.”

“그래? 난 기분 좋게 살 수만 있다면 영원히 살아도 괜찮을 것 같은데.”

“좋아하던 사람들은 나이를 먹고, 늙고, 언젠가 죽는데 나만 그대로야. 생각만 해도 끔찍하잖아요. 그런 경험을 계속하다 보면 정신이 먼저 망가져요.”

“주변 사람도 영원히 살게 하면 되잖아?”

“와. 진짜 악랄한 발상이네요.”


헤카테는 치가 떨린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녀의 말에 다시 한 번 곰곰이 생각해봤지만, 역시 결론은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왜 그 생각을 못했나 싶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도 나랑 같이 영원히 살면 최고 아니야?”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그럼 그 외의 사람들은요? 적당히 친한 친구라던지.”

“아쉬운 사람들도 그냥 영원히 살게 하자고. 난 환생이니 그런 거 안 믿어. 죽으면 전부 끝이라고 생각해. 그러니 기왕이면 오래 살고 싶은데, 영생이면 주저할 것도 없지.”


헤카테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뭐, 본인에게 살 의지가 없다면 어쩔 수 없겠지.


“그보다 난 죽지 않는 놈들을 죽이는 법은 모르는데.”

“용사님은 방법을 찾아낼 거예요. 예언에서 그랬어요.”

“무슨 예언?”

“음. 한 번만 할 테니 잘 들어요.”


끄덕이자 목을 가다듬은 헤카테는 갑자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진지한 감상을 늘어놓자면 녀석의 노래는 꽤 대단했다. 가끔 듣던 유명 가수의 히트곡과는 비교도 안 되게 훨씬 잘 부르는 것 같았다. 이런 재주가 있으면 평생 살면서 가수나 할 것이지.


다만 그 노래는 죄다 내가 못 알아먹는 언어라 내용은 전혀 알 수 없었다.


“하아···. 휴.”


마침내 헤카테의 노래가 끝났다. 박수라도 쳐주려 했지만 유감스럽게도 팔이 하나였다. 돌아가면 의수부터 해야지 다짐했다.


“어때요? 잘 들었죠?”

“어. 근데 못 알아들었어. 어디 말이야 그거?”

“아. 이런. 히스칼어 못하면 말을 해야죠. 괜히 불렀잖아요.”

“뭔데 그게···.”


녀석은 뾰로통한 얼굴로 투덜거렸다. 히스칼어라니, 들어본 적도 없다.


“고대 언어예요. 하긴 의무 교육도 안 받은 용사님이 고대 언어를 아는 게 이상하긴 하네요.”

“교육받은 놈도 모를 것 같은데···.”

“어쨌든 예언의 끝이 대충 이래요. 이 이야기는 한 명의 용사가 모두를 구원하는 죄의 이야기로 완성되리라.”


‘그게 왜 난데?’ 라는 표정을 지었더니 헤카테가 히죽거리며 빨간 눈을 빛냈다.


“그 용사는 세상에서 가장 탐욕스러운 사람이래요. 용사님만큼 욕심 많은 인간이 어디 있겠어요?”

“고작 그런 걸로 용사 자격이 있으면 개나 소나 인류는 용사겠네. 연방 암시장에 약장사 하는 애들도 되게 욕심 많고, 코렌에서 땅값으로 장난치는 놈들도 욕심이 엄청나.”

“용사님에 비하면 별거 아니죠. 용사님은 탐욕에 미친놈이잖아요.”


욕인지 칭찬인지 모를 얘기에 할 말이 없었다. 내가 욕심 많은 놈이라는 것도 부정하진 않으니까.


“있다···.”


그때 앞에서 개처럼 킁킁거리며 나아가던 알산나가 우뚝 멈춰 섰다. 녀석은 먹던 기사의 팔까지 휙 내던지곤 갑자기 달리기 시작했다. 멈춰 세우기엔 너무 늦어 나도 지면을 박찼다.


얼마나 달린 지도 모르겠지만 주변 풍경이 바뀌기 시작했다. 희뿌연 안개와 거대한 뼈가 자리 잡은 초원에서 붉은 안개와 검은 이끼가 자란 뼈로. 바닥에 무성하게 피어있던 녹색 풀들은 이전보다 훨씬 생명력이 넘쳤지만 이파리가 검붉은 색으로 불길했다.


“용사님. 여기서부턴 호흡을 천천히 해요. 이 빨간 안개··· 백사 바이러스보다 위험해요.”

“많이 마시면 어떻게 돼?”

“반쪽짜리 도마뱀이 될 거예요.”


농담이면 좋겠는데, 헤카테의 얼굴은 무서울 정도로 진지했다. 난 최대한 호흡을 느리게, 그리고 얕게 가다듬으며 보폭을 크게 넓혔다. 알산나는 이젠 네 발로 짐승처럼 달려가고 있었다.


‘이거 피 냄새···.’


붉은 안개가 진해질수록 역겨운 피비린내가 더 심해졌다. 이 정도로 피안개가 필 정도라면 이 앞에 있는 게 범상치 않은 놈인 건 분명했다.


이윽고 달리던 알산나가 멈췄다. 그러더니 또다시 바닥에 얼굴을 박고 흙을 핥아 먹기 시작했다. 흙은 피를 머금어 붉고 축축했다.


“알산나. 용은 어딨어?”

“···여기.”


입가에 붉은 흙을 닦아내며 알산나가 허리를 폈다. 그녀의 손이 바로 앞의 거대한 벽을 어루만졌다.


‘이건 벽이 아니야.’


울퉁불퉁한 검붉은 비늘 피부. 끝도 없이 위로 솟은 육중한 몸.


“내 아버지가 여기 있었어.”


하얗던 알산나의 눈이 붉은빛을 내며 날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 위로 거대한 눈꺼풀이 뜨였다.


알산나와 같은 용의 눈이 날 내려다보았다.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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