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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 시대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판타지

완결

굴P
작품등록일 :
2022.05.11 10:32
최근연재일 :
2023.05.08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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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01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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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쪽

라푸스 벤데르드

DUMMY

#1 욕망의 이름


인생은 고난의 연속이다.

어딘가에서 들은 말을 떠올리며 산은 긴 숨을 내쉬었다.


그 고난을 해결하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양하다. 인내하거나, 스스로 해결하거나, 다른 길을 찾거나, 혹은 무너지거나.


그 중에서도 산이라는 남자는 고난을 느낄 새도 없이 빠르게 달리길 선택했다.


모든 일은 지나가는 법이며, 고난 또한 마찬가지리.

누구보다 빠르게 달릴 수 있다면 그 고난도 뛰어넘으면 될 것이다.


지금 욕망의 목으로 떨어지는 구릿빛 궤적처럼.


“이럴 줄 알았지.”


떨어진 욕망의 머리는 모래사장 위에 하얀 피를 흘렸다.


“정말 궁지에 몰린 놈이라면 내가 없는 틈에 본진을 칠 것 같았어.”


산은 처형검을 털었다. 뚝뚝 묻어 흐르는 피가 튀었다. 모래사장에 뿌려진 피는 마치 새하얀 꽃처럼 피어났다.


“알산나가 그쪽 냄새를 기억해서 다행이야. 교주님.”

“아, 그렇죠. 알산나는 코가 좋았어요.”


잘린 머리가 말했다. 산은 이젠 대수롭지 않다는 듯 그 머리를 향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시선을 맞췄다.


다른 이들처럼 혐오감이나 구역질 따윈 없었다.

이유야 있겠지만, 지금은 그다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댁도 안 죽는 쪽이야? 아니면 못 죽는 쪽?”

“저는 불사자는 아닙니다. 어느 쪽이냐면··· 죽음에게 미움받았습니다. 아시겠지만 사람들은 제 얼굴만 봐도 구역질을 하고, 화를 내고, 심하면 정신을 잃죠.”

“죽음도 그래?”

“죽음이라고 예외는 아니더군요. 절 거둘 생각도 없나 봅니다.”


‘그럼 못 죽는 쪽이네.’ 산이 말했다. 모래사장에 덩그러니 놓인 블라다카의 머리가 미소를 머금었다.


“그럼 널 어떻게 해야 할까?”

“누가 절 죽이라고 하던가요?”

“세계 연합.”

“아아.”


산은 숨김없이 답했다. 처음부터 숨길 생각도 없었다.


“죽음이 반기지는 않아도 몸이 사라지면 없어지는 거 아닌가?”


널브러진 블라다카의 몸을 보며 떠올린 생각이었다. 블라다카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나왔다.


“아마 다른 사람의 몸에 들어갈 겁니다. 다음은 누가 될지 모르겠네요.”

“그건 더 최악이네.”


산의 하나 남은 손이 처형검을 거두었다. 죽일 수 없다면 더 검을 뽑고 있을 이유도 없었다.


대신 몸을 돌린 산은 여전히 휠체어에 의지한 헤이카를 보았다. 처음엔 놀란 눈을 치켜뜨고 산을 바라보던 그녀도 지금은 어째선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블라다카와 헤이카.

엉망진창이 된 채 쓰러진 사무엘.


방금 도착한 산이었지만 조금만 생각해봐도 상황을 이해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다친 곳 없어요?”

“응···.”


헤이카는 애써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오래간만에 왔는데, 인사도 안 해주기예요?”

“···미안.”

“블라다카가 몹쓸 짓 한 건 아니죠?”

“얘기를 좀 나눴을 뿐이야.”


헤이카의 대답에 산은 블라다카의 머리를 보았다. 블라다카의 머리는 끄덕이고 싶은지 살짝 꿈틀거렸다. ‘손을 대진 않았다.’ 라고 말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내가 몰라야 되는 얘기?”

“그건···”

“알아야 하는 얘기겠죠. 헤이카 미켈런.”


그녀의 말을 블라다카가 가로챘다. 산이 찌릿한 시선을 보내자 블라다카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내가 알아야 하는 얘기면 말해줘요.”


초조하게 입술만 움찔거리는 헤이카는 말을 망설이고 있었다.


산은 재촉하지 않고 그저 기다렸다.

항상 빠르게 달리던 걸음을 멈춰야만 할 때가 있다면, 그건 늘 헤이카를 기다려주기 위함이었다.


겨울의 추위를 머금은 바다는 먹구름 아래 조용히 파도쳤다.

‘시라비아에 이런 바다가 있던가?’ 산은 바다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곳은 미다스의 잿빛 바다가 아니었다. 비교적 오염이 적어 아직 바다의 푸른 색이 감돈다.

코렌에서 보던 만큼 깨끗한 풍경은 아니지만 적어도 시라비아에서 바다를 감상한다면 적당히 나쁘지 않은 장소였다.


“···내 몸을 고치러 다녀온 거야?”

“네.”


조용히 파도 소리를 듣던 산이 대답했다.


“방법이 있었어?”

“잘은 모르지만 방법은 있다더라고요.”

“그 방법을 쓰면 난 죽지 않고 살 수 있는 거야?”


그녀의 물음에 산은 헤이카의 망설임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싫어요?”

“날 살리면 끔찍한 일이 벌어질 거야.”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산이 예상했던 말이었다.


삶이 아닌 죽음을.

지금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변덕은 아닐 테지. 그렇게 생각한 산은 자연스럽게 블라다카를 노려보았다. 그녀의 마음을 흔들어놓은 것이 이 욕망의 남자라는 건 불 보듯 뻔했다.


“그녀가 살아남으면 큰 전쟁이 벌어집니다.”


산의 눈빛을 받은 블라다카가 말했다. 헤이카는 떨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무슨 전쟁?”

“7년 뒤, 황력 171년 6월 13일. 피스칼 땅에 ‘에덴’ 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탑이 세워집니다. 헤이카 미켈런의 계획하에 이클립스 공업의 기술력이 들어간 탑이죠.”


산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곤 다시 바다로 시선을 두었다.


“이 탑은 이클립스 공업의 인류 보존 정책을 위해 세워진 탑입니다. 인류 보존 정책은 이클립스가 쌓아올리는 에덴 탑에 황성의 전 인류를 이주시켜 새로운 보금자리로 하고 인류를 효율적으로 보존, 관리한다는 계획입니다.”

“그리고 이에 반대하는 세력에 의해 황력 171년 12월 15일. 전쟁이 시작됐습니다.”


헤이카의 어깨가 흠칫했다. 산은 조용히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려주었다.


“왜?”

“그게 인류니까요.”


애매모호한 대답이었지만, 명확한 답이기도 했다.


전세계 인류를 공업이 세운 탑으로 이주하는 계획이다. 죽어가는 지상에 비하면 탑의 생활은 훨씬 안락할 수도 있겠지만, 그 탑 안의 삶을 모두가 만족할 리는 없었다.


“탑이라는 존재가 있는 한 황성 개척의 의지가 흔들린다며 빅토리아를 중심으로 새로운 세계 연합이 탄생하고, 이들은 탑을 부수고자 결심합니다. 그렇게 전 세계를 무대로 한 전쟁이 오래··· 아주 오래 이어집니다.”


블라다카는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전쟁은 황력 198년 4월 12일, 황성 개척을 꿈꾸던 빅토리아 인류 연합의 패배로 끝납니다. 다만 이 유례없는 전쟁으로 발생한 사상자는 9천만 명 이상. 또한, 황성의 남은 땅마저 대부분 오염되는 큰 재앙을 남깁니다.”

“교주님도 미래를 보거나 하나?”

“미래를 볼 방법이야 많죠. 당신도 거울 연못으로 미래를 다녀오시지 않았습니까?”


차가운 바닷바람 속에서 산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 전쟁으로 황성은 사실상 끝을 맞이합니다. 남은 인류의 대부분은 이클립스의 탑에 들어가 삶을 보내지만, 그곳도 백사병으로부터 자유롭진 않습니다. 감염자일수록 하층에, 그렇지 않은 자들은 상층에 거주하게 되고 이는 곧 탑 내부의 새로운 싸움으로···”

“됐어. 그만 들을래.”


블라다카는 오묘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산은 검은 머리를 쓸어넘기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한숨 소릴 들은 헤이카의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난 이미 미래 본다는 사람한테 한 번 속은 적이 있는데.”

“늘 그렇듯 믿을지 말지는 선택입니다. 그리고 제 말이 거짓인지 아닌지는 헤이카 미켈런 본인이 더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어느새 머리만 남았던 블라다카는 멀쩡한 모습으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산은 그를 노려보았지만 칼을 뽑진 않았다.


기억 속에서도, 지금 이곳에서도 산은 이 욕망의 남자에게 적의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기에.


“근데 왜 이런 얘기를 해줘?”


그러니 산은 물어야만 했다.

이 욕망뿐인 남자가 무슨 꿍꿍이로 미래의 재앙을 예언하는지.


“네 진짜 목적이 뭐야?”


무엇을 위해 이 자리에 나타났는지.


“사람의 인생은 크게 놓고 보면 한 편의 영화와 비슷하답니다.”


블라다카는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고 말했다.

산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깨닫고 보니 어느새 그는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전 사람의 욕망을 보는 걸 좋아하지요.”

“그들이 욕망을 이루는 과정. 그 삶을 지켜본다면 전 관객이 되는 겁니다.”


그의 모습은 노인이 되었다. 허리 굽은 백발의 노인. 깊은 주름살로 가득한 눈가가 산을 향해 웃고 있었다.


“어째서 저런 욕망을 품었는가? 욕망을 위해 어디까지 할 수 있는가? 욕망을 이룬 뒤엔 어떻게 되는가?”


다음은 아이의 모습이었다. 아이지만 아이의 발랄한 귀여움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꺼림칙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리고 영화를 보다 보면 이런 생각을 하지 않나요? ‘이런 장면도 있으면 좋겠는데.’ 라던지. ‘이렇게 했으면 더 재밌을 텐데.’ 라던지.”

“···.”

“있는 그대로의 작품을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저란 사람 또한 그런 욕망을 견디지 못합니다. 그래서 종종 지금처럼 무대 위에 올라 개입하죠.”


여전히 아이의 모습인 채 블라다카는 말했다.


“그렇구나.”


욕망하는 건 인류.

그리고 이 괴물은 단순히 그런 욕망을 감상하는 관객.


블라다카는 누구보다 탐욕스러운 존재가 아니라 순수하게 욕망을 즐기는 부류였다.

오히려 욕망의 크기로 비교하자면 그는 거의 비어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아니라 타인의 욕망을 지켜보기만 하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짓으로 자신의 삶을 채우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전 강요하지 않아요. 선택 또한 욕망의 결과잖아요? 선택지를 하나 늘려주고, 어떤 선택을 할지 지켜보는 것도 즐겁죠.”


아이의 모습을 한 블라다카가 한 걸음 물러섰다. 반대편에 있던 용이 으르렁거리며 날개의 가시를 꿈틀거렸다.


블라다카는 그 용을 슬쩍 흘겨보았다.


“제가 이상하다고 느끼겠지만 비틀린 건 당신도 마찬가지예요. 산. 당신은 누구보다 탐욕스럽지만 무의식적으로 그 탐욕에 타인의 욕망까지 끼워 넣죠.”

“당신은 모두의 욕망을 짊어지고 있어요. 전지전능한 신도 아닌 주제에, 타인의 소망까지 들어주려고 하죠. 오만한 걸로 치면 용에 견줄 정도예요.”


아이는 알산나를 눈으로 가리켰다.


“보세요. 폭식의 병자에 불과했던 알산나가 진정한 욕망을 찾았어요. 그녀는 스스로 용임을 증명했고 진정한 용으로 거듭났잖아요. 당신 덕분에.”


이어서 아이의 손가락이 산의 가슴을 가리켰다.


“짐승 대제 크루아틀은 인간이 되길 원했지만 결국 당신의 피와 살, 심장에 흐르는 피가 됨으로써 당신이라는 인간이 되었고 그렇게 소망을 이루었어요.”

“아즈라엘은 사랑해선 안 될 인간에게 사랑을 품었고 그녀의 아들에게 그 사랑을 대신 쏟을 겁니다. 천사의 사랑을 받는다는 건 절대 흔한 일이 아니에요.”


아이가 빙긋 웃었다. 무해하기 짝이 없는 미소엔 여전히 적의가 없었다.


“그리고 당신은 여전히 욕망을 탐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이들이 당신을 통해 욕망의 끝에 도달할 거예요.”

“대체 당신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욕망의 왕? 아니면 당신도 사도라고 불러도 되지 않을까요? 무언가 적당한 이름을 주고 싶어요.”


이루고자 하고 이루어주고자 하는 남자.

그리고 어느덧 많은 것을 이루어내고도 여전히 갈증을 느끼는 남자.


사무엘과 같이 길 잃은 자들마저 기대게 하는 그에게 블라다카는 훌륭한 이름을 주고 싶었다.

하지만 쉽사리 떠오르지 않는지 아이는 어울리지 않게 깊은 한숨을 쉬었다.


“라푸스 벤데르드.”


산이 대답했다.


그리고 아이는 남자가 되었다. 처음의 하얀 남자로 되돌아온 블라다카가 휘둥그렇게 놀란 눈을 떴고, 떡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게 댁이 좋아 죽는 욕망의 신이라며.”


블라다카는 관객이나, 동시에 신을 모시는 사제이기도 했다.


“그럼 그 이름도 내가 가져갈래.”


그런 신실한 신도 앞에 모시는 신의 이름을 가져가려는 남자의 태도에 블라다카는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거 혹시 신성 모독인가? 교주님?”

“신성 모독 수준으로 끝날 게 아닌 것 같습니다만···.”

“그럼 그걸로 할래. 방금 네 표정이 마음에 들었어. 얼빠진 너구리 같은 게.”

“···.”


한동안 말이 없던 블라다카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생에 이토록 웃은 적이 있던가, 싶을 정도로 마음껏 소리 내 웃는 블라다카는 찢어지듯 웃는 얼굴로 산을 노려보았다.


‘내가 저런 얼굴이었지.’ 한때 웃는 처형인이라 불리던 산은 그의 표정이 익숙했다.


“다른 건 몰라도, 그 이름은 그렇게 쉽게 가져갈 수 없어요.”


고장난 전구가 깜빡거리듯, 그의 모습이 새까만 그림자로 덮였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그림자가 드리울 때마다 온 세상이 검게 소등되는 것 같았다. 거대한 푸른 불꽃이 블라다카의 등에 날개처럼 솟아나고 그의 한쪽 눈알을 태울 기세로 이글거렸다.


“예. 그건 절대 못 드립니다.”

“하하. 드디어 본성이 나오는구나.”


가볍게 웃으며 산은 새까만 카르마 나이프를 쥐었다.


드디어 적의를 드러낸 욕망의 대주교는 분노와 흥분, 동시에 즐거움과 슬픔을 함께 움켜쥐어 이 모든 걸 장작으로 자신의 불꽃을 키우고 있었다.


“이 블라다카야말로 오멸(汚衊)이 아닌 신의 이름에 가장 어울리는 존재니까!”



#2 피의 맛


헤이카는 이 싸움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싸움이라고 부를 수조차 있을까?


스스로 싸움에 뛰어드는 일은 있어도, 직접 싸움이란 것을 경험한 적은 거의 없던 헤이카였다.

하지만 그런 그녀라도 지금 상황이 말도 안 되게 일방적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고작 시라비아에서 시작된 칼잡이.

그리고 아득한 세월을 살아온 악성(惡性)의 존재.


그 거대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칼잡이는 모든 상황을 통제하고 있었다.


“으헉!”


압도적.

그 한 단어로 표현이 가능한 상황에 헤이카는 일말의 긴장감조차 느낄 수 없었다.


“이것밖에 안 돼?”


기세 좋게 본색을 드러냈던 블라다카는 벌써 수백 번의 참수를 경험하는 중이었다.


팔다리가 날아가는 건 기본이고, 목이 잘릴 때마다 블라다카의 미소는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난 기대 많이 했는데. 교주님. 그 괴물 같은 사도들을 거느리는 대장이래서 말이야.”


먹을 머금은 붓으로 그림을 그리듯 새까만 카르마 나이프가 궤적을 남길 때마다 블라다카의 머리는 하늘을 날았다.


이젠 그가 뿌린 하얀 피로 바닷가의 모래는 흥건했다. 그러면서도 산의 몸에는 하얀 피가 한 방울도 튀지 않았다.


“이거 몸이 아니라 주둥이로 휘어잡는 타입이었나 보네.”

“감히!”


분노는 거듭해 커지지만 산의 나이프는 쉴 새 없이 블라다카를 죽이고 있었다.


“신의 이름, 을! 가져, 가, 려, 하! 다니!”


그의 말이 뚝뚝 끊길 때마다 목이 날아갔다.


머리가 잘릴 때마다 멀쩡하게 붙어 되돌아오는 블라다카였지만 그의 얼굴에선 점점 초조함이 서렸다.


‘확실히 시카랑은 다른데.’


나이프를 휘두르며 산은 생각했다.


초재생과는 다른 되돌림. 정말로 죽음이 이 남자를 거부하려는 듯, 죽음이란 결말 자체가 없던 것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크루아틀의 심장. 거기에 더해 용의 피.

지금의 산은 아마 작정하고 한다면 며칠, 혹은 몇 주는 거뜬하게 이 짓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만 이 무의미한 처형의 반복이 어디까지 계속될지 알 수 없던 산이었다. 거뜬하게 해낼 수 있다는 것과 언제까지 하느냐는 또 다른 문제였다.


지금의 산은 해야만 하는 일이 있었다.

삶이 아닌 죽음으로 마음을 굳힌 헤이카를 되돌리고 그녀의 약해진 몸을 일으켜 세워야만 했다.


“교주님. 바쁘니까 속도 좀 올리자고.”


누구보다 빠르게 달릴 수 있기에 고난을 뛰어넘고자 하던 남자.


그는 남들에게 맞추던 걸음걸이를 그만두고 자신만의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세상이 길게 늘어지는 감각 속에서 블라다카는 마치 멈춰버린 것처럼 정지했다. 정확히는 끔찍할 정도로 느렸기에 멈춰버린 것처럼 느껴졌다.


이게 산이라는 남자의 세상이었다.

세상 모든 욕망을 거머쥐기 위해선 항상 시간이 부족한 법이다.

그러니 시간의 흐름보다도 빠르게 달리고자 했다.


그렇게 헤이카가 눈 한 번을 깜빡이는 동안 블라다카의 죽음은 천문학적인 숫자를 넘어서고 있었다.


“내가 이 땅의 왕이고.”


검은 궤적은 이젠 지워지지 않는 낙서처럼 블라다카의 그림자를 물들였다.


“짐승들의 대제이면서.”


블라다카의 몸이 기울어졌다. 그 짧은 시간에도 그의 목은 셀 수도 없을 만큼 잘려나갔다.


“네 신이다.”


마침내 널브러진 블라다카가 꿈틀거렸다. 하지만 카르마의 궤적은 나자빠진 블라다카를 여전히 놓아주지 않았다.


“그리고 용을 애완동물로 기르는 잘 나가는 공업의 젊은 팀장이지.”

“커헉!”

“먹어!”


산의 한 마디에 기다렸다는 듯 굶주린 용이 달려들었다.


그의 몸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도록 조절하며 용은 블라다카의 몸뚱이를 포식했다.


그와중에도 머리는 여전히 잘려나가고 있었다. 이젠 머리와 몸이 붙어있는 시간보다 나뉜 시간이 더 많았다.


“산···.”

“괜찮아.”


나지막이 그를 부르는 헤이카의 곁엔 어느새 머스칼이 있었다.


무덤덤하게 팔짱을 낀 그의 검은 후드가 셀 수도 없이 죽어가는 블라다카를 주시했다. 새까만 얼굴에선 표정을 볼 수 없었지만, 헤이카는 어째선지 그가 미소 짓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헤이카. 넌 산이 저렇게까지 하는 이유를 알고 있겠지.”

“···.”

“그리고 너라면 산이 어떤 선택을 할지도 이미 알 거야.”

“산은 그깟 미래 따위 신경 쓰지도 않겠지.”


머스칼이 피식 웃으며 끄덕였다.


“지금도 산에게 똑같이 말할 텐가? ‘날 살리면 끔찍한 일이 벌어질 거야!’ 라고?”

“모르겠어. 머스칼. ···내가 어떻게 해야 해?”

“음. 내가 아는 헤이카 미켈런은 다른 사람 눈치 따윈 보지 않았는데.”

“난 나를 잘 알아. 블라다카가 말한 미래의 계획도, 사실 이미 아베스타와 함께 검토하던 계획이었어. 난···.”


헤이카는 자신의 무릎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난 이 지경이 되면서도 내 욕망을 놓지 못해. 세상을 구한 영웅이 되고 싶어.”

“네가 동경하던 동화책 속 영웅처럼?”

“···맞아. 그러니 블라다카가 말한 건 사실이야. 난 세상을 또 한 번 혼란에 빠뜨릴 거야. 엄청난 사람이 죽을 거고···! 그러니 차라리 여기서··· 여기서 끝나는 게··· 나을지도 몰라.”


그녀는 고개를 떨궜다. 흐느끼며 떨리는 어깨를 내려다보며 머스칼은 콧방귀를 뀌었다.


“그럼 산에게 똑같이 말해봐. 뭐라고 할지 궁금하네. 재밌는 소릴 할 거 같은데.”


어느새 블라다카의 비명이 바닷가 하늘 높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의 몸을 잘근잘근 씹어대는 용은 블라다카를 무한하게 늘어나는 고깃덩어리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블라다카와 용의 포식을 뒤로하고 산이 다가왔다. 헤이카는 그와 눈을 마주치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산··· 나는 차라리 여기서···!”

“인류 멸망 - !”


헤이카의 말을 끊어버린 산이었다. 헤이카는 멍하니 눈을 깜빡거렸다.


“망할 인류. 잘 살게 해준다니까 자기들끼리 싸우기만 하고. 그냥 망하게 두죠.”

“산···.”

“내가 아는 헤이카는 최악의 인류 혐오가였어. 사람 구하려는 거 아니잖아요?”


그녀가 구하려는 건 사람이 아닌 세상.

자멸하는 인류를 증오하기에 대신 세상을 구하고자 했던 사람이었다.


“이제 와서 착한 사람 노릇 하기엔 저도, 헤이카도 늦었어요. 그러니 기왕 한 번뿐인 인생 배짱부리며 살자고요. 하고 싶은 거 다 해버리고. 멋 부리면서.”


카르마 나이프를 치운 산은 혀를 삐죽 내밀곤 앞니로 씹어 피를 냈다.


“난 헤이카랑 그렇게 살다 가고 싶거든요.”


혀를 씹은 고통에도 씨익 웃은 산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렇게 맞춰진 입술로 산이 흘린 피가 헤이카의 입으로 들어갔다.


쇠처럼 비린 피의 맛.

그 피에 섞인 용의 잔향을 느끼며 헤이카는 눈을 감았다.


작가의말

 오늘도 일찍!


 늘 감사합니다. 벌써 5월이 왔네요.


 좋은 하루 되세요! :)


* [욕망 시대] 는 곧 마무리 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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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 시대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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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완결 공지 +3 23.05.08 146 0 -
264 욕망 시대(完) +3 23.05.08 204 9 24쪽
263 마법사의 보답 +2 23.05.05 154 10 13쪽
262 광야(曠野) 헤이카 미켈런 +2 23.05.04 174 12 15쪽
261 재회 +1 23.05.03 166 11 15쪽
260 사막, 괴물, 어린 칼잡이들 +3 23.05.02 161 11 12쪽
» 라푸스 벤데르드 +2 23.05.01 169 9 20쪽
258 욕망 시대(13) - 사무엘(Samuel) +2 23.04.28 169 8 17쪽
257 욕망 시대(12) - 눈 내리는 날 +1 23.04.27 163 8 15쪽
256 욕망 시대(11) - 죽음이 아닌 삶을 바라게 될 때까지 +1 23.04.26 157 7 14쪽
255 욕망 시대(10) - 강철의 기사 23.04.25 155 9 15쪽
254 욕망 시대(9) - 소리 없는 침식 +1 23.04.24 166 9 11쪽
253 욕망 시대(8) - 일방적 계약 +1 23.04.21 169 9 20쪽
252 욕망 시대(7) - 길을 잃고 +1 23.04.20 164 9 15쪽
251 욕망 시대(6) - 정복자 23.04.19 163 9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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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9 욕망 시대(4) - 오염구역 탐사 +2 23.04.17 159 8 14쪽
248 욕망 시대(3) - 죽음의 땅 +2 23.04.14 172 9 13쪽
247 욕망 시대(2) - 위험한 여행 +1 23.04.13 155 9 13쪽
246 욕망 시대(1) - 탐욕의 바르바로사 +1 23.04.12 178 9 13쪽
245 죄인 +2 23.04.11 158 8 15쪽
244 급류(急流) +2 23.04.10 177 9 13쪽
243 삼류 악당 +2 23.04.07 180 10 23쪽
242 우는 아이 +1 23.04.06 161 8 15쪽
241 에콰(5) - 일그러진 미소 아래 +2 23.04.05 183 9 15쪽
240 에콰(4) - 핏덩이 +1 23.04.04 178 9 17쪽
239 에콰(3) - 욕망죄화(欲望罪花) +1 23.04.03 184 10 27쪽
238 에콰(2) - 모르스 에콰 +1 23.03.31 168 9 13쪽
237 에콰(1) - 소녀 +1 23.03.30 166 9 14쪽
236 개벽(35) - 문을 닫다. +1 23.03.29 169 9 15쪽
235 개벽(34) - 찾아온 영웅, 떠나는 영웅 +1 23.03.28 173 9 21쪽
234 개벽(33) - 베르나데트 23.03.27 163 9 20쪽
233 개벽(32) - 자유를 향해 +2 23.03.24 164 9 18쪽
232 개벽(31) - 데이케트람 23.03.23 168 9 18쪽
231 개벽(30) - 행복을 쫓던 사내 +1 23.03.22 168 8 21쪽
230 개벽(29) - 침묵의 도시 23.03.21 166 8 17쪽
229 개벽(28) - 가능성 +1 23.03.20 171 9 17쪽
228 개벽(27) - 시카 23.03.17 166 9 17쪽
227 개벽(26) - 36년 +1 23.03.16 234 9 17쪽
226 개벽(25) - 빛바랜 세상 +1 23.03.15 167 9 13쪽
225 개벽(24) - 문 23.03.14 175 9 18쪽
224 개벽(23) - 본보기 +1 23.03.13 166 9 16쪽
223 개벽(22) - 옛 동료 +1 23.03.10 176 10 16쪽
222 개벽(21) - 마지막 조각 +1 23.03.09 182 10 21쪽
221 개벽(20) - 흐름 23.03.08 173 10 16쪽
220 개벽(19) - 시라비아의 햇빛 23.03.07 180 10 15쪽
219 개벽(18) - 영웅 증후군 23.03.06 205 10 16쪽
218 개벽(17) - 친구인가 적인가 23.03.03 184 10 16쪽
217 개벽(16) - 습격 23.03.02 183 10 14쪽
216 개벽(15) - 헤르그부르 23.02.28 191 10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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