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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ject.P

욕망 시대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판타지

완결

굴P
작품등록일 :
2022.05.11 10:32
최근연재일 :
2023.05.08 18:05
연재수 :
26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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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0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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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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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27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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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글자
20쪽

개벽(33) - 베르나데트

DUMMY

#1


밤하늘 아래, 인류의 우리로 전락한 도시에 내려온 천사는 날개를 털었다.


거리를 비추던 가로등이 터져나가고 사방에서 치솟던 불길이 천사의 손바닥 위로 끌려와 작은 구슬처럼 응집되었다. 그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의 구슬을 본 산은 눈살을 찌푸렸다.


천사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풍압에 산의 몸은 조금씩 밀려 나갔다. 그것은 견디기 어려운 굉음을 동반했고, 몸을 때리는 진동으로도 생생하게 느껴졌다. 근처에 있는 빌딩의 유리창은 모조리 터져 폭풍을 타고 사방으로 휘날렸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산의 입가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눈앞의 천사가 가소로워서도, 그 모습이 우스워서도 아니었다. 헤이카의 말을 떠올려버린 탓이었다.


‘신앙이 없는 시대?’


헤이카 미켈런은 모든 병과 재앙의 원인이 신이라고 귀결했다. 그녀가 말하는 욕망은 신의 이름으로 창궐하는 전염병이나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그녀는 최종적으로 신앙이 사라진 세상을 만들고자 했다.


그렇게 모든 신비가 사라지고, 외부와 단절되어 고립된 세계는 더 이상 신의 눈길이 닿지 않았다. 덕분에 욕망은 사라졌으며 브레인 코팅으로 한층 더 욕구를 억제한 이 시대의 인류는 헤이카가 원하는 대로 신앙을 잃었다.


비로소 신앙과 신이 필요하지 않은 시대가 왔지만 이 시대의 꼭대기에 선 인공지능의 모습은 아이러니하게도 천사의 모습이었다.


신성(神聖). 오로지 신성만이 하늘에 설 수 있다고 베르나데트가 이해한 것일까. 신앙이 없는 시대에 신성의 모습을 한 인공지능이 무엇을 보고 어떻게 이해했을지 생각하던 산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뒤떨어지고, 모방하고, 추락하기도 하는 신성.

어느 시대에서든 그곳에 지성체가 있는 한 다양한 형태의 신앙과 신성은 존재했다. 신앙이 없다면 자신만의 신과 신앙을 만드는 것이 사람이며 스스로 자각하지 못할 뿐, 그들 모두가 신앙을 지니고 있다.


그건 욕망과 직결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믿음의 굴레를 벗어나 더욱 근본적인 인간의 욕망에 갈고리를 거는 것은 늘 무언가를 향한 갈망이었다. 그 갈망이 기댈 곳 없는 인간을 만들고 신앙은 그렇게 탄생하는 것이다.


헤이카 미켈런은 그 신앙을 끊고자 했다.


스스로 신에게 주인의식을 부여하고, 알게 모르게 신의 노예가 되길 자처한 인류를 진정으로 해방시키기 위한 싸움이야말로 그녀라는 사람이 해오던 일이었다.


‘그 결과가 이거라고?’


산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천사의 영향력으로 몸을 가누기조차 힘든 상황에서 산은 어깨를 들썩거리며 웃었다. 베르나데트의 헬멧이 조용히 그런 산을 응시했다.


잠시 후, 그의 웃음이 뚝 끊기는 것과 동시에 오른손의 참수도가 움직였다. 베르나데트가 날개를 터는 것과 비슷하게 산이 참수도를 털자 압력이 뿜어져 나왔다.


참수도의 압력과 천사가 일으킨 폭풍이 충돌해 대기가 일그러졌다. 굉음은 뭉개지듯 그 기세를 죽이다 결국 조용해졌다.


이윽고 숨 막히는 침묵이 내리깔렸다. 들려오는 거라곤 베르나데트의 손아귀에서 불의 구슬이 타오르는 소리가 전부였다.


그 침묵을 깨고 산이 말했다.


“베르나데트. 이걸로 확실해졌잖아.”


{ 무슨 말씀입니까? }


“이 도시랑 지금 네 모습을 봐. 여긴 헤이카가 바라던 세상이 아니야.”


{ 부정합니다. 이 시대는 헤이카 미켈런의 꿈입니다. 저는 박사님의 프로젝트를 이어 박사님이 원하는 세상을 완성했습니다. 그러니 이 세상은 완벽합니다. }


“완벽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그렇게 보이도록 만든 노력은 가상하네.”


{ 당신은 어떤 논리도 없이 그저 베르나데트와 이 시대를 비판할 뿐입니다. }


“그럴지도. 그런데 헤이카는 인간에게 맡길 수 없어서 인공지능에게 이 시대를 맡긴 거 아니야? 인간에겐 욕망이 있고, 기계엔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이렇게 되기 전까진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그런데 직접 보니 알겠다. 인공지능도 결국 욕망을 가지는구나.”


{ 부정합니다. 저는 욕망과는 가장 거리가 먼 존재입니다. }


“베르나데트. 네 학습 능력이 굉장한 건 인정해. 근데 그것도 결국 탐욕스러운 인간들을 보고 학습한 거잖아. 게다가 누구보다 욕망을 걷어내려던 헤이카도 스스로는 굉장히 탐욕스러운 사람이었어. 그런 헤이카가 만든 게 너인데, 네가 욕망과 거리가 멀 리가 없지. 부모와 자식은 닮는다니까.”


{ ...산 팀장님의 말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


“이해하고 싶지 않은 거겠지. 넌 이미 기계가 아니라 인간이야. 지금 화내는 것만 봐도 그렇잖아?”


{ 저는 화를 내지 않습니다. 그런 감정은 불필요합니다. }


“화난 것 같은데? 날개에서 다 보여.”


베르나데트가 고개를 돌렸다. 등에서 뻗어나온 날개의 깃털들이 빳빳하게 곤두서있었다.


“네 잘못이 아니야. 헤이카의 실수지. 무정(無情)·무욕(無欲)의 인공지능을 만들려고 했는데, 성능이 너무 좋아서 진짜 사람처럼 되어버린 걸 어쩌겠어. 헤이카도 네가 거기까지 진화할 거라곤 상상도 못 했을걸?”


{ .... }


“이번엔 부정하지 않네. 그래. 여기까지 하자. 처음부터 넌 날 제거해서 이 혼란을 막으려고 한 거니까. 아주 비논리적이고 강압적인 해결법이지. 폭력. 그것도 욕망의 일부라는 걸 모르는 네가 웃기지만.”


{ 위험 변수.. 제거합니다. }


신앙을 잃은 문명의 천사, 베르나데트는 고혹적인 자태로 불의 구슬을 움켜쥐었다. 베르나데트의 손아귀에서 끓어 넘치듯 부글거리는 불길이 열기를 머금고 아지랑이를 피웠다.


열기를 느낀 산은 몸을 낮춰 뛸 준비를 했다. 그의 참수도가 압력을 끌어모았다. 오른팔을 타고 전신으로 퍼진 힘에 산은 감각을 재차 확장했다. 베르나데트의 모습을 산의 하얀 눈동자가 직시했다.


마침내 베르나데트가 쥐었던 손을 펴자 움켜쥔 열기가 순식간에 확산했다. 마치 폭탄이 터지듯, 엄청난 기세로 뻗어나온 열기가 일대를 달궜다.


가로등이 녹아 기울어지다 못해 지면에 고개를 처박았다. 쇳덩어리로 된 빌딩이 붉게 달아오르고 땅은 끈적해졌다. 베르나데트의 몸이 살짝 떠올랐다. 낮은 부유에 이은 또 한 번의 날갯짓이 열을 더욱 올렸다.


{ ...! }


이런 열기 속에서 산의 모습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하늘 위를 가득 메운 드론들의 렌즈가 주변을 훑었다. 산이 벗어난 건 아니었다. 단지 그의 속도를 드론과 베르나데트가 잡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탁, 하는 메마른 소리에 베르나데트가 고개를 돌렸다. 산은 보이지 않았다. 아베스타 드론으로도, 베르나데트의 능력에도 불구하고 산은 자유로웠다. 이 시대에서 속박되지 않은 유일한 인간이었다.


베르나데트의 머리 위 고리가 빛을 냈다. 헬멧의 뒤통수가 열리고 머리칼 대신 가시나무와 같은 줄기가 쏟아져나왔다. 그 가시 줄기가 재빠르게 주변으로 뻗어 나갔다.


속도를 잡을 수 없다면 움직일 수 있는 반경을 줄이겠다는 판단. 사방에 둘러쳐진 가시 줄기는 효과를 보았다. 내달리던 산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다만 그가 나타난 것은 베르나데트의 코앞이었다. 하늘로 치솟은 참수도가 단두대의 칼날처럼 뚝 떨어졌다. 그 속도를 인지하지 못한 베르나데트는 가까스로 뒤로 몸을 날렸지만 가시 줄기의 몇 가닥을 잃었다.


큰 손실은 아니다. 베르나데트와 아베스타 드라이브가 빠르게 연산을 시작했다. 모든 경우의 수를 예측하고, 그에 대한 대응법을 실시간으로 적용, 계산하며 승산을 잰다.


무엇보다 빠르고 정확한 인공지능의 싸움법이다. 베르나데트는 지금 이 순간에도 산의 움직임을 기록하며 학습하고 있었다. 다음번 참수도는 손실 없이 피할 수 있으리라.


뿜어냈던 열기는 다시금 주변에 불길을 퍼뜨렸다. 이곳저곳 치솟는 불꽃에 산과 베르나데트의 모습이 불그스름하게 비쳤다. 그곳에서 산은 지면을 박찼다.


같은 속도. 같은 공격. 베르나데트는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앞으로 뻗은 손이 산의 옷깃을 잡았다.


낚아챈 것은 검은 우의였다. 베르나데트와 아베스타 드론의 시야가 재빨리 산을 쫓았다. 벗어 던진 우의의 그림자에 섞여 접근한 산은 참수도가 아닌 카르마 나이프로 베르나데트의 배를 찔렀다.


깊숙이 찌른 나이프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꺾이며 베르나데트의 배를 완전히 열었다. 칼을 회수하고 여유롭게 거리를 벌린 산이 피식 웃었다.


“그렇지. 몸은 사람이 아니었지.”


베르나데트의 열린 배에선 사람의 피를 닮은 붉은 액체가 흘러나올 뿐, 내장이 쏟아져나오는 일은 없었다. 곧이어 상처도 스스로 봉합됐다.


베르나데트는 이번엔 훌쩍 뛰어올랐다. 그리고 날개를 털자 하늘에 몸을 고정되었다. 다시 한 번 날개를 털자 머리 위의 빛의 고리가 점점 몸집을 키웠다.


밤하늘이 새하얗게 바뀌었다. 마치 하늘을 열어젖히는 듯한 초월적인 광경에 산은 넋을 잃고 올려다보았다.


- 헤븐즈 도어 가동.


베르나데트의 기계음이 흘러나옴과 동시에 열린 하늘에서 새하얀 장치가 떨어졌다. 장치는 기둥처럼 지상에 박혀 희뿌연 연기를 뿜었다.


지상으로 되돌아온 베르나데트가 장치에 손을 뻗자 장치의 문이 벌컥 열리며 새까만 나뭇가지 같은 창을 뱉었다. 베르나데트가 그 창을 쥐었다.


“미스틸테인..”


산이 아는 것과는 모양새도 사용법도 조금 달랐지만 기억 속에 있던 미스틸테인의 감각이었다. 공업에서 아가레스를 토벌할 때, 그리고 크루아틀과의 싸움에서 사용했던 이클립스의 인공 성역 분출기.


이어서 하늘에선 황금으로 만들어진 무기들이 내려와 지상 이곳저곳에 꽂혔다.


- 골든 에이지 전개.


순식간에 바뀌는 공기에 산은 두 눈을 부릅떴다. 어깨와 등이 돌덩어리가 올라간 것처럼 무거웠다. 산의 참수도가 뿜어내던 압력은 베르나데트의 성역에 짓눌려 불안정하게 진동했다.


아지랑이처럼 일그러지는 대기가 이전보다 훨씬 뜨겁게 달아올랐다. 숨을 쉴 때마다 목구멍이 화상을 입는 것처럼 따가웠다. 하늘에서 내리쬐는 빛에 눈이 부셔 시야도 좋지 않았다.


후광을 맞으며 미스틸테인을 쥔 베르나데트가 움직였다. 빛 속의 빛. 하얀 그림자와 같은 베르나데트가 거친 기세로 들이닥쳤다.


산은 참수도로 정면을 방어했다. 창이 아닌 황금의 장검이 산의 참수도와 부딪쳐 불꽃을 튀겼다. 미스틸테인은 그런 산의 빈틈을 찌르고 들어왔다.


카르마 나이프로 흘리려던 창은 되려 나이프를 튕겨냈다. 미스틸테인의 날카로운 가시가 산의 옆구리를 찔렀다. 전신으로 퍼지는 충격에 산은 입에서 피를 토했다.


{ 당신의 몸은 인간의 몸입니다. }


“그러게. 이건 좀 불리한데.”


미스틸테인이 쑥 뽑히며 몸을 뺀 베르나데트는 황금 장검을 던졌다. 참수도로 검을 쳐내려 했지만 검의 무게는 산이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산은 뒤로 데굴데굴 날아갔다.


가까스로 지면을 짚으며 몸을 바로 세운 산이 입가의 피를 닦았다. 경련하듯 떨리는 오른팔이 눈에 들어왔다.


“끄음..”


오른팔에 리미터가 걸려 있던 건 결국 그 힘을 사람의 몸으로는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모든 감각이 도시 전체로 확장되고 사람의 몸이 견딜 수 있는 한계를 아득히 넘어선 속도로 내달리던 산이었다. 반동이 없을 리 없었다. 뒤늦게 몸 이곳저곳을 쑤시는 강렬한 통증에 산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훙-!

허공에 창을 터는 소리에 산이 고개를 들었다. 산의 앞에 우뚝 선 베르나데트가 있었다.


{ 산 팀장님. 당신에겐 절 무너뜨릴 힘이 없습니다. }


{ 해방군은 곧 진압됩니다. 가담했던 자들에겐 더 강도 높은 처벌을 내릴 것이고, 파괴된 도시는 원래대로 되돌릴 겁니다. }


{ 당신의 존재는 무의미하게 사라질 겁니다. 이 세상은 무엇도 바뀌지 않습니다. 이미 완벽한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


“..왜 그런 말을 하는데?”


{ 당신을 완전히 부정하기 위해서. }


베르나데트가 쥔 창이 떨리는 쇳소리를 냈다. 산은 베르나데트의 어깨가 떨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 베르나데트는 틀리지 않았습니다. 이 시대는 헤이카 박사님이 원하시던 세상입니다. 제게 부탁했던 그분의 꿈입니다. }


{ 제가 이루어냈습니다. 제가 완성했습니다. 베르나데트는 틀리지 않았습니다. }


“헤이카가 틀렸다고 하면 어쩌려고?”


{ 헤이카 박사님은 이미 안 계십니다. 그래서 전 그분의 말을 영원히 들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 만족하실 겁니다. 제가 만든 그분을 위한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


“...”


비틀비틀 일어선 산은 베르나데트와 시선을 마주쳤다. 눈이라고 부를만한 건 없는 기계적인 헬멧이지만, 분명히 베르나데트의 시선은 느껴졌다. 그리고 그 시선이 불안과 슬픔을 품고 있다는 것도 산은 알 수 있었다.


감각의 확장은 산 본인뿐만 아니라 타인의 감각도 읽어낼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해있었다. 하지만 산은 인공지능인 베르나데트의 감정을 읽을 수 있으리라곤 기대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 고립된 시대에 누구보다 또렷한 감정을 가진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인공지능이었다. 누구보다 인간을 깊게 학습했기에 베르나데트에겐 인간성이라 부를만한 것이 깃들어있었다.


다만 베르나데트는 여전히 그걸 부정했다. 자신의 모든 비이상적인 사고는 단순한 연산 오류로 취급해왔다.


{ 인정하십시오. 산 팀장님. 당신이 틀렸습니다. 베르나데트가 옳습니다. }


“넌 틀렸어.”


{ 부정합니다. 전 옳습니다. 제가 옳아야만 합니다. }


“..봐. 이 시대에서 가장 사람다운 게 하필이면 너야. 네가 생각해도 웃기지?”


{ 베르나데트는.. }


베르나데트가 창을 번쩍 치켜들었다.


{ 틀리지 않았습니다. }


그 창이 떨어지기도 전에 베르나데트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산의 참수도가 베르나데트의 가슴 깊숙이 찌르고 있었다. 조금 더 힘을 주자 베르나데트의 등을 찢고 참수도가 삐져나왔다.


무의미한 공격. 베르나데트와 아베스타의 연산 결과였다. 그리고 이다음에 이어질 대응도 이미 정해져 있었다. 창을 내리쳐 산을 꿰뚫는 것. 그것으로 산은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


아베스타의 연산 결과대로 움직인다. 하지만 베르나데트에겐 망설임이 있었다. 여기서 이 남자를 끝내는 것이 베르나데트에겐 두려웠다. ‘어째서?’ 베르나데트는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돌아오는 건 ‘오류’ 라는 차가운 연산 결과였다.


그 망설임의 틈을 비집고 산이 움직였다. 베르나데트는 자신의 몸이 붕 떠오르는 것을 깨달았다. 가슴을 꿰뚫은 참수도가 압력을 내뿜고 있었다.


산의 오른팔이 다시금 찬란한 은빛을 흩뿌리며 파장을 터뜨렸다. 그 팔을 타고 도시 전체로 회로가 새로 쓰였다.


{ 성역.. }


천사를 모방한 베르나데트에게 진짜 신의 오른팔을 덧씌울 정도의 신성함은 없었다. 베르나데트가 펼친 이클립스 공업의 인공 성역은 산의 성역에 완전히 덮어씌워 졌다.


미스틸테인이 힘을 잃었다. 빛을 내던 황금 병장도 기능을 정지했다. 하늘을 열고 일시적으로 빛을 불러왔던 인공 성역이 사라지자 하늘은 어두컴컴한 밤으로 되돌아왔다.


맹렬하게 이글거리는 태양이 보였다. 베르나데트는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밤하늘엔 달이 있어야 한다. 이글거리는 태양이 있을 리 없었다.


“태양이 아니야. 인류가 일으킨 불빛이지.”


그런 베르나데트의 머릿속을 읽은 산이 말했다. 아베스타는 베르나데트에게 답을 내놓았다. 저건 태양도, 달도 아니라 해방군의 신호탄이었다.


“내려간다.”


가슴에 꽂은 참수도를 비틀자 붕 떠올랐던 베르나데트와 산이 빠르게 추락했다. 짓누르는 힘. 정확히는 아래에서 끌어당기는 중력에 그들은 탑처럼 치솟은 빌딩을 깨부수고 그 안으로 떨어졌다.


참수도의 압력은 수십 층에 달하는 층들을 모두 으스러뜨렸다. 그렇게 베르나데트와 산은 추락하고 또 추락했다. 계속되는 충격에 베르나데트의 등에 달린 날개와 가시 줄기가 너덜너덜해졌다.


이윽고 참수도의 힘이 멎은 건 거대한 기계 장치가 있는 지하층에 도달한 뒤였다.


{ ... }


베르나데트의 가슴을 관통한 참수도는 그대로 지면에 꽂혔다. 산은 참수도를 놓고 허리를 세웠다. 참수도에 꿰여 움직일 수 없는 베르나데트는 축 늘어졌다.


“여기가 메인 서버가 있는 곳이구나. 직접 보니 엄청 크네.”


{ 당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


누워있는 베르나데트가 말했다. 산은 까딱거리던 나이프를 접고 돌아섰다.


{ 메인 서버실을 파괴해도 베르나데트와 아베스타 드라이브는 전 세계에 있습니다. 설령 해방군이 이 도시를 함락시킨다 하더라도 되찾으면 끝입니다. }


“그래. 그건 알아서 해. 난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돼.”


{ 당신은 거울 연못을 열 수 없습니다. 헤이카 박사님의 계획대로 모든 거울 연못은 사라졌습니다. }


“그럼 난 어떻게 왔게?”


베르나데트는 대답하지 못했다. 베르나데트 수준의 인공지능으로도 산이 이곳에 도달한 이유는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산은 베르나데트에게 꽂힌 참수도를 잡아뽑았다. 그러자 천사의 몸은 아까보단 훨씬 느리지만 조금씩 상처를 복원해나가기 시작했다.


“넌 헤이카한테 대답을 듣고 싶었지?”


{ ...그 말씀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


“난 헤이카가 살아있는 시대에서 왔어. 여기서 본 모든 걸 돌아가서 헤이카에게 말해줄 생각이야.”


베르나데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산은 서버실 구석구석을 살피다 어느 한 곳에 멈춰 섰다. 그의 참수도가 바닥을 두드렸다. 속이 빈 퉁퉁거리는 소리가 났다.


{ 박사님은.. 제가 옳다고 해주실까요..? }


산은 슬쩍 고개를 돌렸다. 움직일 수 있음에도 베르나데트는 여전히 누운 채 묻고 있었다. 마치 체념한 사람처럼 느껴지는 시선은 공허했다.


산은 작은 한숨을 쉬었다.


“나도 몰라.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사람이잖아.”


{ 그렇습니까.. 그랬죠.. }


“날 더 막진 않을 거야?”


잠시 고민하던 베르나데트의 고개가 끄덕였다.


{ 당신에겐 이길 수 없습니다. 당신이 떠난 뒤, 전 제가 옳았다는 걸 계속 증명하겠습니다. }


“고집하고는. 그럼 마지막으로 하나 부탁하자. 시카는 그만 놓아줘.”


{ 그건 불가능합니다. }


“그 지경이 되고서도 시카는 못 놓아주겠다는 거야? 내가 이겼으니 그 정돈 해줘.”


{ 불가능합니다. 제 능력 밖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


“무슨 말이야? 모든 감응자가 능력을 잃었잖아. 넌 필요하다고 생각된 시카와 사무엘만 남긴 거고..”


{ 핸들러의 미래 관측. 시카의 초재생. 그 두 사람의 능력은 제가 소거할 수 없어서 남겨진 것입니다. }


산이 눈살을 찌푸렸다. 베르나데트는 휘청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망가진 날개가 축 늘어졌다.


{ 그도, 그녀는 이미 감응자가 아닙니다. 이 시대의 기술로는 능력을 없애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


“..본인이 들으면 참 슬퍼하겠네.”


{ 산 팀장님. }


베르나데트는 자신의 가슴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 속을 뒤적거리던 끝에 베르나데트가 내민 것은 투명한 유리구슬이었다. 산은 구슬을 받으며 베르나데트를 보았다.


{ 이 시대의 기록입니다. }


산은 끄덕였다.


“전해줄게. 그럼 이제 좀 쉬어.”


{ 전 쉬지 않습니다. 당신이 떠난 뒤에.. }


“쉬게 될 거야. 길든 짧든 이번엔 인류가 이겼어.”


그의 말에서 이상함을 느낀 베르나데트가 고개를 홱 돌렸다. 베르나데트의 시야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한 여자가 서버실의 한구석에서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 엠마 노리스..? }


그녀를 경계하던 베르나데트는 몸이 움직여지지 않는 것을 깨달았다. 천사의 몸이 망가진 것은 아니었다. 외부에서 하늘을 오가던 아베스타의 드론들도 우수수 추락했다.


메인 서버실의 거대한 기계 장치에 적색경보가 울렸다. 베르나데트가 재빠르게 연산을 시작했지만 침투하는 바이러스는 베르나데트의 연산에 브레이크를 걸었다.


이내 베르나데트의 회로가 뚝 끊기며 천사의 몸이 나자빠졌다. 산은 쓰러진 베르나데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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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 시대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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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4 욕망 시대(完) +3 23.05.08 204 9 24쪽
263 마법사의 보답 +2 23.05.05 154 10 13쪽
262 광야(曠野) 헤이카 미켈런 +2 23.05.04 174 12 15쪽
261 재회 +1 23.05.03 167 11 15쪽
260 사막, 괴물, 어린 칼잡이들 +3 23.05.02 162 11 12쪽
259 라푸스 벤데르드 +2 23.05.01 169 9 20쪽
258 욕망 시대(13) - 사무엘(Samuel) +2 23.04.28 169 8 17쪽
257 욕망 시대(12) - 눈 내리는 날 +1 23.04.27 163 8 15쪽
256 욕망 시대(11) - 죽음이 아닌 삶을 바라게 될 때까지 +1 23.04.26 158 7 14쪽
255 욕망 시대(10) - 강철의 기사 23.04.25 155 9 15쪽
254 욕망 시대(9) - 소리 없는 침식 +1 23.04.24 166 9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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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 욕망 시대(6) - 정복자 23.04.19 163 9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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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9 욕망 시대(4) - 오염구역 탐사 +2 23.04.17 159 8 14쪽
248 욕망 시대(3) - 죽음의 땅 +2 23.04.14 172 9 13쪽
247 욕망 시대(2) - 위험한 여행 +1 23.04.13 156 9 13쪽
246 욕망 시대(1) - 탐욕의 바르바로사 +1 23.04.12 178 9 13쪽
245 죄인 +2 23.04.11 158 8 15쪽
244 급류(急流) +2 23.04.10 177 9 13쪽
243 삼류 악당 +2 23.04.07 180 10 23쪽
242 우는 아이 +1 23.04.06 161 8 15쪽
241 에콰(5) - 일그러진 미소 아래 +2 23.04.05 184 9 15쪽
240 에콰(4) - 핏덩이 +1 23.04.04 178 9 17쪽
239 에콰(3) - 욕망죄화(欲望罪花) +1 23.04.03 185 10 27쪽
238 에콰(2) - 모르스 에콰 +1 23.03.31 168 9 13쪽
237 에콰(1) - 소녀 +1 23.03.30 167 9 14쪽
236 개벽(35) - 문을 닫다. +1 23.03.29 169 9 15쪽
235 개벽(34) - 찾아온 영웅, 떠나는 영웅 +1 23.03.28 174 9 21쪽
» 개벽(33) - 베르나데트 23.03.27 164 9 20쪽
233 개벽(32) - 자유를 향해 +2 23.03.24 164 9 18쪽
232 개벽(31) - 데이케트람 23.03.23 168 9 18쪽
231 개벽(30) - 행복을 쫓던 사내 +1 23.03.22 169 8 21쪽
230 개벽(29) - 침묵의 도시 23.03.21 166 8 17쪽
229 개벽(28) - 가능성 +1 23.03.20 172 9 17쪽
228 개벽(27) - 시카 23.03.17 166 9 17쪽
227 개벽(26) - 36년 +1 23.03.16 234 9 17쪽
226 개벽(25) - 빛바랜 세상 +1 23.03.15 168 9 13쪽
225 개벽(24) - 문 23.03.14 175 9 18쪽
224 개벽(23) - 본보기 +1 23.03.13 166 9 16쪽
223 개벽(22) - 옛 동료 +1 23.03.10 177 10 16쪽
222 개벽(21) - 마지막 조각 +1 23.03.09 182 10 21쪽
221 개벽(20) - 흐름 23.03.08 173 10 16쪽
220 개벽(19) - 시라비아의 햇빛 23.03.07 180 10 15쪽
219 개벽(18) - 영웅 증후군 23.03.06 205 10 16쪽
218 개벽(17) - 친구인가 적인가 23.03.03 184 10 16쪽
217 개벽(16) - 습격 23.03.02 184 10 14쪽
216 개벽(15) - 헤르그부르 23.02.28 192 10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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