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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ject.P

욕망 시대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판타지

완결

굴P
작품등록일 :
2022.05.11 10:32
최근연재일 :
2023.05.08 18:05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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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07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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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3쪽

삼류 악당

DUMMY

#1


알람시계가 요란하게 울렸다. 한참을 뒤척거리던 끝에 손을 뻗었다. 휴대전화 알람은 금방 꺼버려서 시계로 바꿨더니, 이젠 시계가 손에 잡히질 않았다.


“에잇..”


쥐가 날 정도로 손을 뻗고 나서야 알람시계가 손에 잡혔다. 알람을 눌러 끄고, 다시 베개에 얼굴을 묻으며 이불을 애벌레처럼 돌돌 말았다. 5분만 더의 시간이다.


하지만 그런 날 내버려둘 생각은 없는지, 벌써부터 자박자박 거리는 맨발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방문이 벌컥 열렸다. 발소리는 이젠 내 침대 바로 옆까지 다가왔다.


“배고파. 아침 먹어.”

“..그냥 네가 알람시계 해라.”

“?”


알산나가 머리에 물음표를 띄웠다. 오늘도 5분만 더는 실패다.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키자 알산나가 먼저 종종걸음으로 거실로 향했다.


비틀비틀 일어서 나도 거실로 나갔다. 테이블 위엔 커다란 고깃덩어리가 담긴 접시가 있었다. 한쪽은 생고기. 한쪽은 바싹 구워진 고기. 난 구워진 쪽에 앉았다.


맞은편에 앉아 기다리던 알산나는 내가 앉는 걸 보고 나서야 접시 위의 생고기를 뜯어 먹기 시작했다. 피도 덜 빠진 고기를 먹는 건 여전히 야만스럽지만 이젠 포크와 나이프를 사용해 처음보단 봐줄 만하다.


난 내 접시 위에 놓인 고기를 내려다보았다. 눈 뜨자마자 기름진 고기인 것도 그렇지만, 메뉴가 풀때기라곤 전혀 없는 고기 한 덩어리가 끝이라는 것도 조금 그렇다. 게다가 소스도, 맛을 더할 다른 첨가물도 없는 고기는 겉이 거의 새까맣게 그을린 수준이었다.


“..이거 탄 거 아니지?”

“몰라.”


짧은 대꾸에 한숨이 나오면서도 웃음이 같이 나왔다. 그래도 많은 발전이다. 기르던 용이 내가 먹을 아침 식사를 차려준다니. 가르친 보람이 있다.


늘 그렇듯 오른손으로 포크와 나이프를 집으려던 난 한 박자 늦게 오른팔이 텅 비어있다는 걸 떠올렸다. 왼손으로 포크를 집어 고깃덩어리를 푹 찔렀다. 손이 하나뿐이라는 건 꽤나 불편하다. 일단, 썰어 먹는 게 불가능해서 알산나처럼 뜯어먹어야 한다.


‘질겨.’


이빨로 뜯으려니 힘들다. 역시 굽는 법은 더 가르쳐야겠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씻은 뒤, 내 방에서 출근 준비를 시작했다.


새로 장만한 정장을 빼입고 거울 앞에 섰다. 이젠 까맣게 되돌아온 머리를 대충 정리했지만 여전히 부스스하게 뜨는 머리들이 있어 대충 하고 포기했다.


“나 이거 해줘.”


넥타이를 둘러 알산나에게 내밀었다. 그래도 한 손보단 두 손 달린 용한테 가르쳤더니 이젠 내 넥타이를 매어주는 방법도 안다. 처음엔 목을 졸라 죽일 기세여서 큰일 날 뻔 했다. 썩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다.


“흠.”


거울에 비치는 내 모습을 객관적으로 평가해본다. ‘제법 말끔한 20대 초반의 잘 나가는 신입 팀장.’ 나쁘지 않다. 이 정도면 얼굴도 봐줄 만하고. 돈도 잘 번다.


예전엔 이렇게 차려입은 양복쟁이들을 싫어했는데, 이젠 내가 그들처럼 입고 다닌다는 게 우스웠다. 심지어 막상 입어보니 그럭저럭 나쁘지 않다는 것도 재밌다.


마지막으로 혜니가 새로 해준 겨울용 코트를 걸치고 벽에 기대어둔 길쭉한 가방을 어깨에 멨다. 이 안에 사람 목 치는 칼이 있다는 걸 평범한 사람들은 절대 모르겠지.


“가자.”


손목 시계를 확인하고, 평소보다 기운차게 집을 나섰다.


오늘은 내 마지막 출근이니까.



#2


그날.

내가 다른 시대에서 돌아오고, 헤이카의 계획을 망가뜨리면서, 어머니와 마지막으로 작별하게 된.. 여러모로 많은 일이 있던 ‘그날’ 을 지금 세상 사람들은 꽤 특별한 기념일처럼 부르고 있다.


{ ‘리버스 데이’ 가 지나고 오늘로 정확히 30일쨉니다. 네. 한 달이 지난 거죠. 그리고 여전히 전 세계는 혼란에 빠진 그대롭니다. }


{ 세계 연합은 발 빠른 대처를 약속했지만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피해에 대응하기엔 터무니없이 인력이 부족합니다. 결국, 각국 군과 에이전트가 움직여야 하는 상황입니다만, 이마저도 부족한 나라들은 너무나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죠. }


{ 그리고 세계 경제의 타격은 이로 말할 수 없는 수준입니다. 특히 아시리아의 하늘 전쟁 이후 레니드 금융가가 아직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


차량 라디오에선 남자의 목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뭔가 어려운 얘기가 시작됐지만 정리하자면 결국 한 문장이 끝이다.


세상이 망했다.


원래도 시들시들하던 세상이 이젠 절찬리에 망하기 시작했다. 이대로 몇 년이나 갈 수 있을지 야차와 내기를 해봤는데, 난 나름 희망적으로 10년을 걸었지만 야차는 3년 안에 세상이 폭삭 망한다에 걸었다.


그리고 이제 보니 야차가 이긴 것 같았다. 고작 30일이 지나고 전 세계가 개판이 됐다. 3년은커녕 1년 뒤면 쑥대밭이 될 것 같다.


연합에선 ‘리버스 데이’ 라고 공표한 그날, 헤이카의 계획이 실패한 여파는 황성 전체에 영향을 끼쳤다.


내가 아주 중요한 타이밍에 아디마 케티르 정상에 강제로 거울 연못을 열고 넘어와 버린 게 원인이었다. 전 세계의 거울 연못이 폭주하면서 머스칼이 말했듯, 열려선 안 될 문까지 모조리 열려버렸다.


내 오른팔을 포함해 꽤 큰 희생을 거쳐 모든 문을 닫긴 했다만 잠깐이나마 열렸던 문의 영향으로 지금 세상엔 들어와선 안 될 것이 들어와 섞였다.


“미사일..”


조수석에 앉아 창 밖을 가리킨 알산나가 말했다. 슬쩍 보니 불덩이가 하늘을 날아 저 멀리 떨어졌다. 커다란 불꽃이 일었고, 조금 뒤에 ‘꽝’ 하는 묵직한 소리와 함께 이곳까지 모래바람이 후두둑 들이닥쳤다.


“쯧. 차에 상처 나게..”


방금처럼 출근 중에도 어렵지 않게 미사일이 날아가 터지는 걸 볼 수 있는 상태다. 미사일이 뭘 노리고 날아갔느냐면, 성깔 더럽고 무식하게 큰 괴물이다.


‘아우터.’


나는 그 괴물이 다른 시대에선 ‘아우터’ 라 불린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모른다. 그래서 그냥 이름 그대로 괴물이라 부른다.


이 시대에 들이닥친 건 바로 저 괴물들이다. 찔끔 수준이 아니라 아우터 대군락이 통째로, 전 세계에 섞여든 탓에 지금 세상은 개판이 됐다. 첫날엔 쉴 새 없이 들이닥치는 괴물들 때문에 하루아침에 대도시 수십 개가 쑥대밭이 됐을 정도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인류의 멍청한 욕심이 지금은 도움이 되기 시작했다는 거다. 안 그래도 서로 으르렁거리며 냉전과 무력 충돌을 반복하던 바보들은 어지간한 약소국이 아닌 이상엔 군의 훈련도 꽤 되어있고, 병기든 에이전트든 준비된 게 많았다.


아무리 괴상하게 생기고 몸집 거대한 괴물이라도 인류의 수백만 기술자가 머리 모아서 만든 문명의 힘에는 못 당하는지, 총알 박으면 죽고 미사일을 쏴도 우수수 죽는다. 전차가 불을 뿜을 때마다 커다란 괴물의 대가리가 날아가곤 한다.


이렇게만 본다면 인류에게 아우터는 그다지 문제가 아니겠지만 아우터의 수는 인류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많았다. 가장 큰 문제는 언제, 어디서 튀어나오는지조차 전혀 예측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그야말로 전 세계를 무대로 인류와 괴물의 게릴라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화력이 아무리 좋아도 끝도 없이 튀어나오는 괴물을 상대하다 보면 결국 무기 창고는 바닥을 보이기 마련이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그날의 여파로 황성 이곳저곳의 지형이 바뀌었다. 없던 산이 생겨났다던지, 있던 산이 날아가 버리고 그곳에 괴상한 유적이나 숲이 생겼다던지. 세계 지도를 다시 그려야 할 정도였다.


그렇게 혼란스러워진 세상에서 인류는 궁지에 몰렸다.


그리고 따지고 보면 인류를 멸망으로 몰고 간 장본인은 나였다.


“푸흐흐..”


웃음이 절로 나왔다. 예전에 만화책에서만 보던 '너희 세상을 멸망시켜주마.' 라고 주절거리던 삼류 악당이 내가 됐다.


비록 만화 속 악당의 세계 멸망 계획은 주인공들에게 저지당하지만, 유감스럽게도 현실 세계엔 모두가 주인공이고 동시에 모두가 엑스트라다.


정의의 사도, 영웅이라는 놈들마저 코빼기도 안 보이는 이 상황에 극적으로 전 세계의 재앙을 막아줄 기적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 그러고 보니 이클립스 공업의 대응도 또 흥미로운 사안이죠. }


라디오 진행자는 한참 주절거리던 게스트의 어려운 경제 얘기를 마무리하려는 듯 화제를 넘겼다. 난 살짝 라디오 볼륨을 키웠다.


{ 예. 그렇죠. 이클립스 공업의 전 세계적인 구호 활동과 괴물 구제 작업이 상당히 효과를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클립스를 필두로 전 세계에 퍼진 공업사들과의 연계가 구축된 게 실제로 대단한 도움이 되고 있다는군요. }


{ 물론, 이건 모두 얼마 전 새로 구성된 이클립스 공업 임원회의 ‘자리 잡기’ 라고 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어찌 됐든 리버스 데이의 주범이 이클립스의 헤이카 미켈런 전 대표라는 의혹이 뚜렷한 상황에서 새로 구성된 임원들은 어떻게든 이클립스 공업을 지켜내야 하니까요. 속된 말로.. 예. 세탁이죠. 하하하! }


{ 아하하하! }


나도 피식하며 웃음이 나왔다. 세탁이라니. 하긴 세상이 망하게 생겼는데, 말 가려서 할 필요도 없다. 지극히 옳은 말씀이다.


{ 그런데 실종된 헤이카 전 대표는 아직도 소식이 없는 겁니까? }


{ 예. 수색은 계속하고 있지만 헤이카 전 대표가 아시리아에서 실종된 이후 지금까지 어떤 소식도 없습니다. 그녀를 목격했다는 소문조차 없더군요. }


{ 그럼 헤이카 전 대표도 아시리아의 재해에 휘말린 거라고 볼 수 있을까요? }


게스트는 잠시 고민하는 듯 ‘음..’ 하더니 말을 이었다.


{ 그렇게 보는 편이 타당하긴 하죠. 아시리아는 이번 리버스 데이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본 곳이고, 헤이카 전 대표의 마지막 행보는 그 아시리아였으니까요. 이클립스 내부에서 온 익명의 제보에 따르면 공업의 구조팀도 사실상 헤이카 전 대표의 구조 작업에선 손을 놓아버린 상황이라고 합니다. }


{ 그럼 역시 헤이카 전 대표는 아시리아에서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겠군요. }


{ 하하. 그래도 그건 너무 이른 판단이라 생각합니다. 세기의 천재라고 불리던 사람이니 혹시 모르지 않습니까? 아시리아로 간 것부터가 모두 계획된 연막이고, 사실은 어딘가에 숨어 조용히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꼬리가 길면 결국 잡히게 될 겁니다. }


“오. 예리한데.”

“뭐가?”

“반은 맞췄잖아.”

“으응.”


알산나는 관심 없다는 듯 대충 끄덕였다. 어느덧 우리는 본사 주차장에 들어섰다.


“수고했다. 내 애마.”


핸들을 툭툭 두드리며 시동을 껐다. 팔이 하나뿐인 관계로 최근엔 자동 주행 기능을 켜서 출근하고 있다. 처음엔 못 미더웠는데 몇 번 타다 보니 꽤 성능이 좋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게 내 애마 케스팔그에서 내려 예전에 사무엘에게서 받은 선글라스를 꺼내 썼다.


멋내기 용도도 있지만 이게 생각보다 표정을 감추는 데 쓸만하다. 난 뭘 하든 표정에서 다 드러나는 인간이니 최근 들어 밖에선 이렇게 선글라스라도 쓰며 신경 쓰고 있다.


우린 곧장 건물 로비로 들어섰다. 로비엔 말끔한 차림새의 양복쟁이가 기다렸다는 듯 내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도중에도 직원들은 나를 향해 살갑게 인사를 해줬다. 처음에 돌던 ‘사람으로 회 뜨는 신입 팀장.’ 같은 흉흉한 소문도 이젠 잦아들었는지, 이젠 사내에서도 날 무서워하는 사람은 그다지 없다.


띵-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꼭대기 층에 멈췄다. 문이 열리자 조용하고 깨끗한 복도가 날 반겼다.


“먼저 내 사무실에 가 있어.”

“알았어.”


이젠 나도 이 꼭대기 층에 개인 사무실이 생겼다. 알산나를 그쪽으로 보내놓고 난 가장 안쪽에 마련된 임원실 문을 발칵 열었다.


“으힛!?”


안에 있던 닐라는 화들짝 놀라 동그란 안경 너머로 이쪽을 쏘아보고 있었다. 난 씩 웃으며 선글라스를 벗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닐라 씨.”

“..전에도 말씀드렸는데, 노크 좀 해주실래요?”

“아. 까먹었네. 익숙하질 않아서요.”

“그리고 여기선 괜찮지만 남들 앞에선 대표라고 불러주세요. 일단은 임원대표니까.”

“네. 네.”


헤이카의 비서실장이던 닐라는 뜻하지 않게 새로 조직된 공업의 임원회 대표가 되었다. 그리고 공식적인 자리에서 그녀는 늘 헤이카를 적나라하게 씹어대는 포지션이기도 하다. 그래야만 이 살벌한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박사님 옥상에 계시니까 좀 데리고 내려와 줘요. 오늘은 날씨가 추우니 올라가지 마시라고 했는데.. 제 말은 여전히 한 귀로 듣고 흘리시기만 하네요. 하아.. 어째 더 어린애처럼 굴으셔요.”


물론, 뒤에선 누구보다 헤이카를 걱정하는 사람이다.


“헤이카 고집 알잖아요. 이젠 공업 회장도 아니니까 마음대로 하고 싶은 거죠. 간만의 자유잖아요.”

“괜히 그러다 민간 기자가 날린 드론에 찍히기라도 하면요?”

“이클립스 본사에 드론을 날릴 정도로 겁대가리 없는 기자가 아직 있어요?”

“..없을걸요. 아마. 그것보다 아직 수술 끝난 지도 얼마 안 됐으니 걱정하는 거예요. 좀 살만해졌다고 막 돌아다니시는데, 조심하라고 누누이 말씀드려도 듣지도 않고..”


이대론 닐라의 잔소리가 끝도 없이 이어질 것 같았다. 난 재빨리 손을 내밀어 그녀의 말을 끊었다.


“옙. 제가 가볼게요.”

“부탁드려요. 참, 이것도 받아가요.”


닐라는 내게 하얀 편지 봉투를 내밀었다. 돈봉투라기엔 안 어울리고, 요즘 같은 시대에 직접 손 편지를 보내는 놈이 어디 있을까 싶지만 이건 전통 같은 거라 나도 어찌할 수가 없었다.


편지 봉투를 받아 귀퉁이에 찍힌 문양을 확인했다. 닐라는 이 편지를 내게 전할 때마다 꺼림칙한 표정을 짓는다. 이 문양을 보면 이해 못 할 것도 아니다.


“잘 받았어요.”

“..그거 그냥 메시지나 전화로 하면 안 돼요? 꼭 편지로 해야 하는 건가요?”

“조직 전통이라서요. 바르바로사는 편지로만 받아야 하거든요.”

“진짜 고리타분하네요. 어떻게 좀 해주세요. 시라비아 마피아의 편지 배달부가 된 느낌이에요. 게다가 지금처럼 민감한 시기에 공업 임원 대표 사무실 책상에 마피아의 편지가 있다는 게 걸리면...”

“옙. 주의하라고 해두겠습니다.”


잔소리가 재개되기 전에 냉큼 임원실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편지 봉투를 다시 확인했다. 시라비아 마피아의 상징인 해골마와 가시덩굴 인장. 주마다 오는 정기 보고 같은 거다.


지금은 먼저 할 일이 있었다. 난 편지를 코트 주머니에 챙기곤 이 꼭대기 층에만 있는 별개의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옥상으로 가려면 이 엘리베이터를 이용해야만 했다.


그렇게 옥상에 도착하자 차가운 공기에 입김이 바로 나왔다. 어째 하늘이 먹먹하다 싶었는데, 눈까지 내리고 있다.


그런 옥상의 한가운데에서 휠체어에 앉은 헤이카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헤이카.”


그녀를 부르며 다가갔지만 헤이카는 반응이 없었다. 더 가까이 다가가 어깨에 손을 올리고서야 헤이카는 흠칫하며 날 바라보았다.


“아, 왔구나? 못 들었어.”


헤이카는 무릎담요 위에 놓아둔 보청기기를 귀에 꽂으며 말했다.


이전에도 말랐지만 지금의 헤이카는 더 말랐다. 그리고 늘 귀에는 보청 장치를 끼고 이젠 다리를 쓸 수 없어 휠체어 없인 돌아다닐 수도 없다.


그런 것들을 제외하면, 헤이카는 헤이카인 그대로였다. 윤기가 흐르는 검은 머리칼이나 황금빛이 도는 커다란 눈동자. 항상 베시시 웃는 입가는 내가 기억하는 헤이카 그대로다.


오늘도 그녀는 변함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서야 마음이 놓였다.


“혹시 닐라가 잔소리해서 나 데리러 왔어?”

“도망 온 거예요. 잔소리 엄청 해서요. 수술 끝난지 얼마나 됐다고, 추운데 왜 옥상에 올라가시느냐, 내 말은 한 귀로 듣고 흘려서 속상하다, 뭐 이런 거. 저한테까지 잔소리 불똥이 튀길래 냉큼 도망왔죠.”

“아하.. 미안. 나 때문에 산이도 잔소리 듣네.”

“괜찮아요. 다 걱정해서 하는 소리니까. 오히려 엄청 바쁠 텐데 아직도 우리 내치지 않고 신경 써주는 게 고맙죠.”


충신이라면 닐라만큼 충직한 충신도 없을 거다. 자기네 회사 대표가 세상을 말아먹게 만들었는데, 대신 욕받이가 되어주면서도 헤이카를 계속 도와주고 있는 게 대단하다.


“그러게. 난 닐라를 믿지 않았었는데.”


당연한 얘기지만 헤이카의 인류 혐오는 자기 부하들이 상대라도 예외가 아니었다. 자기한테 정말 충성을 다하는 부하 직원들에게도 헤이카는 절대 마음을 전부 열어주지 않았다.


100% 믿지도 않고, 늘 경계하며 그들과 자기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을 세운다. 아마 상대도 헤이카가 벽을 세운다는 건 느꼈을 거다. 그럼에도 닐라는 여전히 헤이카의 곁에 있었다.


헤이카도 그 사실이 꽤나 충격인지, 이젠 조금씩 마음을 열고 있었다. 그 진심이 통한 걸까. 닐라의 잔소리가 심해진 것도 그때부터였다. 즉, 좋은 잔소리다.


“춥지 않아요?”

“그다지.”


추위에 귀와 뺨이 발갛게 달아오른 헤이카였지만 추위를 느끼는 몸의 기능도 고장이 났는지, 본인은 춥거나 더운 걸 잘 몰랐다. 난 그런 헤이카에게 코트를 벗어 이불처럼 덮어주었다.


헤이카는 슬며시 웃으며 내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다.


“오늘 라디오에서 그러더라고요. 헤이카가 사실 어딘가에 살아있을 거라고. 법의 심판을 피하려고 숨어있는 거라면서요.”

“오. 예리하네. 그러다 정말 살아있으면 어쩌려고 그런 위험 발언을 하는 걸까나.”


헤이카는 남의 일처럼 말했다.


“제가 가서 겁 좀 주고 올까요?”

“농담이야. 얘도 참. 그리고 뭐.. 그 사람 말고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많을 거야.”


난 휠체어를 밀어 옥상 가장자리로 향했다. 넓게 펼쳐진 코렌 수도 수한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나 때문에 사람들은 많은 걸 잃었어. 고향, 가족, 연인, 친구, 재산.. 뭐 이것저것 많겠지. 그런 사람들은 처음엔 슬퍼하고, 절망하고, 화를 내지만 시간이 지나서 남는 건 결국 증오뿐이거든. 누군가를 탓하지 않고선 견디기 어려워지는 게 인간이야.”

“그렇죠.”

“그런데 탓해야 할 상대가 갑자기 어디선가 꼴까닥 죽어버리면 너무 허망하잖아. 아마 내가 그 사람들이었더라도 헤이카 전 대표가 죽지 않고 어딘가에 숨어 있을 거라 생각할 거야. 그리고 더 증오를 키우겠지. 그게 그나마 마음 편하니까.”


헤이카의 미소가 겨울의 추위처럼 차가워졌다. 그녀의 시선이 저 밑에 바쁘게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향했다. 이런 높이에서 보면 개미처럼 작게 보이는 시민이다.


“인류는 멍청하다고 생각했어. 욕망으로 자멸 밖에 할 줄 모른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나도 그들과 다를 거 하나 없다는 걸 깨닫고 나니, 이젠 정말 뭘 싫어하는지, 뭘 좋아하는지도 잘 모르겠어.”

“적어도 날 싫어하진 않잖아요.”

“싫어하게 될 수도?”


헤이카는 짓궂은 농담을 하며 입꼬리를 올렸다. 난 그녀에게 마주 웃어주었다.


“음? 이건.. 시라비아 마피아네? 또 정기 연락이야? 열어봐도 돼?”

“네.”


내가 덮어준 코트 주머니에서 삐져나온 편지가 헤이카의 눈에 보인 모양이다. 헤이카는 편지를 꺼내더니 겁도 없이 뜯었다. 시라비아 마피아라면 닐라처럼 벌벌 떠는 게 일반적인 상식이건만, 역시 헤이카는 그런 상식이 부족한 사람이다.


“우와.. 생각보다 제대로 된 보고서구나. 어려운 말도 많이 있고. 여기 적힌 거 다 알아들어?”

“아뇨. 형식적으로 보내는 것뿐이에요. 실제로 일 처리하는 건 그쪽 간부랑 정치인들이니까요. 그냥 신문처럼 생각하면 돼요.”

“그래도 바르바로사가 되니 기분은 어때?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게 하는 시라비아 마피아의 보스가 됐잖아. 그 커다란 시라비아 땅의 주인이 된 건데.”

“별 느낌 없네요.”


헤이카의 말대로 지금 난 바르바로사가 됐다.


‘어머니가 해둔 거겠지.’


돌아가시기 전에 뭘 한 건진 모르겠지만, 쿠스카는 버젓이 살아있음에도 갑자기 바르바로사 자리를 포기하고 주도권을 내게 완전히 넘겼다.


그 뒤는 순식간이었다. 스토커의 입 발린 소리. 시라비아로 잠깐 가서 별거 없는 형식적인 의례를 마치고 나니 난 바르바로사가 되어 있었다.


정작 지금 난 시라비아를 떠나 코렌에 있지만, 이렇게 정기적으로 바르바로사가 받아야 할 보고서가 편지 봉투에 담겨 날아온다. 그리고 내 지시대로 시라비아 마피아도 움직이고 있다.


“음. 초대장도 있네. 무슨 식사 초대를 이렇게 번지르르하게 보낸담. 그러고 보니 슬슬 갈 때구나? 내일이었나?”


헤이카가 물었다. 편지를 한참 들여다보던 나는 그녀에게 끄덕였다.


“네. 내일이요.”

“정말 갈 거야?”

“가야죠. 살기 좋은 땅 만들러.”


오늘이 마지막 출근인 이유는 내가 코렌에 머무는 게 오늘까지기 때문이다. 내일 아침 비행기로 난 시라비아로 떠난다.


그렇다고 공업에서 떨어져 나오는 건 아니다. 이건 오히려 장기 출장에 가깝다. 그리고 공업의 중대한 사업 확장이 내 손에 달려있었다.


“시라비아 개발 사업.. 온 세상이 망해가는 와중에 공업이 이미 죽은 땅을 살리려 한다니. 이걸 기자들이 알게 되면 아주 득달같이 물어뜯겠네.”

“과연 시라비아 마피아가 얽혀 있는데 물어뜯을 놈이 있을까요?”

“하긴. 그렇겠네.”


편지를 집어넣고 난 헤이카 앞에 마주 보며 섰다. 그녀도 생글생글 웃으며 날 올려다보았다.


“시라비아 엄청 싫어했잖아. 정말 괜찮아?”

“혼자였으면 절대 싫었을 거예요.”

“그래? 같이 지낼 곳은 찾아놨어?”

“어머니 저택이 생각보다 많이 낡았더라고요. 사람들 시켜서 저택을 좀 손봤어요. 저희 둘이 살기엔 딱 좋을 겁니다.”


그리고 헤이카도 내일 나와 함께 코렌을 떠난다.


의료 시설을 생각하면 코렌이 훨씬 낫겠지만, 이 차가운 도시는 결국 헤이카를 물어뜯기 위한 늑대들의 우리다.


라디오의 남자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헤이카가 어딘가에 살아있다는 건 제대로 맞췄다. 하지만 헤이카를 찾아낸다는 건 결국 불가능한 일이다.


시라비아 마피아와 이클립스 공업은 이젠 나뿐만 아니라 헤이카를 지킬 성벽이 되어줄 것이기에.


“내려가죠. 이러다 슬슬 닐라가 직접 올라오겠어요.”

“응. 내려가자.”


난 헤이카의 휠체어를 밀어 옥상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코렌의 대도시 풍경을 눈에 담았다.


씁쓸한 미소가 흘러나왔다. 남들이 보기엔 이렇게 도망치는 꼴이 우습겠지.


하지만 삼류 악당은 꼴사납게 도망치는 게 이야기의 정석이다.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편안한 주말 보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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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 시대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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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완결 공지 +3 23.05.08 146 0 -
264 욕망 시대(完) +3 23.05.08 204 9 24쪽
263 마법사의 보답 +2 23.05.05 153 10 13쪽
262 광야(曠野) 헤이카 미켈런 +2 23.05.04 174 12 15쪽
261 재회 +1 23.05.03 166 11 15쪽
260 사막, 괴물, 어린 칼잡이들 +3 23.05.02 161 11 12쪽
259 라푸스 벤데르드 +2 23.05.01 168 9 20쪽
258 욕망 시대(13) - 사무엘(Samuel) +2 23.04.28 169 8 17쪽
257 욕망 시대(12) - 눈 내리는 날 +1 23.04.27 162 8 15쪽
256 욕망 시대(11) - 죽음이 아닌 삶을 바라게 될 때까지 +1 23.04.26 157 7 14쪽
255 욕망 시대(10) - 강철의 기사 23.04.25 154 9 15쪽
254 욕망 시대(9) - 소리 없는 침식 +1 23.04.24 165 9 11쪽
253 욕망 시대(8) - 일방적 계약 +1 23.04.21 169 9 20쪽
252 욕망 시대(7) - 길을 잃고 +1 23.04.20 164 9 15쪽
251 욕망 시대(6) - 정복자 23.04.19 162 9 16쪽
250 욕망 시대(5) - 악룡과 용사 +1 23.04.18 159 9 17쪽
249 욕망 시대(4) - 오염구역 탐사 +2 23.04.17 158 8 14쪽
248 욕망 시대(3) - 죽음의 땅 +2 23.04.14 171 9 13쪽
247 욕망 시대(2) - 위험한 여행 +1 23.04.13 155 9 13쪽
246 욕망 시대(1) - 탐욕의 바르바로사 +1 23.04.12 178 9 13쪽
245 죄인 +2 23.04.11 157 8 15쪽
244 급류(急流) +2 23.04.10 176 9 13쪽
» 삼류 악당 +2 23.04.07 180 10 23쪽
242 우는 아이 +1 23.04.06 161 8 15쪽
241 에콰(5) - 일그러진 미소 아래 +2 23.04.05 183 9 15쪽
240 에콰(4) - 핏덩이 +1 23.04.04 178 9 17쪽
239 에콰(3) - 욕망죄화(欲望罪花) +1 23.04.03 184 10 27쪽
238 에콰(2) - 모르스 에콰 +1 23.03.31 167 9 13쪽
237 에콰(1) - 소녀 +1 23.03.30 166 9 14쪽
236 개벽(35) - 문을 닫다. +1 23.03.29 169 9 15쪽
235 개벽(34) - 찾아온 영웅, 떠나는 영웅 +1 23.03.28 173 9 21쪽
234 개벽(33) - 베르나데트 23.03.27 163 9 20쪽
233 개벽(32) - 자유를 향해 +2 23.03.24 163 9 18쪽
232 개벽(31) - 데이케트람 23.03.23 168 9 18쪽
231 개벽(30) - 행복을 쫓던 사내 +1 23.03.22 168 8 21쪽
230 개벽(29) - 침묵의 도시 23.03.21 165 8 17쪽
229 개벽(28) - 가능성 +1 23.03.20 171 9 17쪽
228 개벽(27) - 시카 23.03.17 165 9 17쪽
227 개벽(26) - 36년 +1 23.03.16 233 9 17쪽
226 개벽(25) - 빛바랜 세상 +1 23.03.15 167 9 13쪽
225 개벽(24) - 문 23.03.14 174 9 18쪽
224 개벽(23) - 본보기 +1 23.03.13 166 9 16쪽
223 개벽(22) - 옛 동료 +1 23.03.10 176 10 16쪽
222 개벽(21) - 마지막 조각 +1 23.03.09 181 10 21쪽
221 개벽(20) - 흐름 23.03.08 173 10 16쪽
220 개벽(19) - 시라비아의 햇빛 23.03.07 179 10 15쪽
219 개벽(18) - 영웅 증후군 23.03.06 205 10 16쪽
218 개벽(17) - 친구인가 적인가 23.03.03 183 10 16쪽
217 개벽(16) - 습격 23.03.02 183 10 14쪽
216 개벽(15) - 헤르그부르 23.02.28 191 10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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