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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ject.P

욕망 시대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판타지

완결

굴P
작품등록일 :
2022.05.11 10:32
최근연재일 :
2023.05.08 18:05
연재수 :
26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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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024
추천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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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941

작성
22.10.28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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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쪽

터닝 포인트(9) - 땅의 창끝

DUMMY

#1


바스락하는 풀잎을 밟는 소리에 자리만의 권총이 총구를 삐죽 내밀었다.

나무 사이로 미끄러지듯 걸어나오는 산의 모습에 권총을 쥔 자리만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역시 네 짓이었나.”


바이저 너머로 노기가 서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산은 다소 의외라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자리만이 화내는 건 처음 보네. 이젠 형제라고 부르지도 않고.. 섭섭하게.”


자리만은 당장에라도 방아쇠를 당길 수 있었다. 아직 남은 대원들도 근처에 있으니 총성을 들으면 수 초 내에 달려올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발밑에 널브러진 대원을 생각했다. 슈트 내부에서부터 터지는 폭발에는 아무리 콥스 바탈리온이라도 대응의 여지가 없었다.


“무슨 짓을 한 거지?”


자리만은 산에게 겨눈 총구를 까딱거리며 물었다. 지금 그에겐 이 상황에 대한 정보가 더 필요했다.


“뭐긴. 안에서 시원하게 두들겨주는 폭탄이야.”

“처음부터 우릴 신뢰하지 않았군.”

“그건 그쪽도 마찬가지 아닌가?”

“...”


어깨를 축 늘어뜨린 자리만은 권총을 내렸다. 산도 쥐고 있던 카르마 나이프를 아래로 향했다.

산과 자리만 사이에 짧은 침묵이 흘렀다. 서로를 향한 탐색. 관찰. 자기 자신의 실책을 곱씹는 시간이었다.


풀벌레 소리조차 없는 곳에서 한동안 흐르던 침묵은 야차의 곤봉이 나무를 두드리는 소음에 깨졌다. 자리만의 바이저가 산의 어깨너머 야차를 바라보았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냐? 안 올라가?”

“올라가야지.”


산이 대답했다. 자리만은 깊은숨을 내쉬며 두 자루의 권총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자리만은 헬멧을 벗었다. 아까 전과 다를 바 없는 앙상한 두개골이 드러나자 산의 뒤에 있던 야차와 시카, 사무엘의 표정에서 당혹감이 드러났다.


오로지 한 사람. 산은 무뚝뚝하게 자리만의 기괴한 얼굴을 받아들였다.

처음엔 그렇다 쳐도, 두 번째부턴 그다지 놀랄 일도 아니었다. 산은 여태껏 얼굴 없는 사내와 함께 해왔으니 말이다.


“이제 와서 얼굴은 왜 또 까?”

“숨김없는 대화를 위해서.”

“흠. 해봐.”


자리만의 윗니와 아랫니가 ‘딱’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마지막으로 아까의 질문을 반복하겠다. 만약 저 위에 있는..”

“헤이카가 세상 말아먹으면 어떻게 할 거냐고? 몇 번을 물어도 똑같은 대답일 것 같은데.”


자리만의 두개골이 고개를 저었다. 그의 공허한 시선이 널브러진 대원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여전히 너와 난 적이다. 미안하지만 우린 처음부터 헤이카 미켈런의 감시를 목적으로 공업에 붙어있었다.”

“헤이카가 이상한 짓 하면 막으려고 있던 거란 소리지? 너희 설마 세계 연합 소속이었어?”

“말할 수 없다.”


예상한 대답이라는 듯 산은 입맛을 다시며 끄덕였다. 그는 카르마 나이프를 접어 코트 안에 집어넣곤 성큼 자리만을 향해 거리를 좁혀왔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너희 지금 내가 손가락만 까딱해도 전멸이야.”

“...”

“죽고 싶어 안달 난 놈들이니 이런 개죽음은 더더욱 바라지 않겠지. 입장의 차이를 조금은 이해했나?”


그렇게 자리만의 코앞에 멈춰선 산이 손을 내밀었다. 마치 악수를 하자는 듯한 모양새에 자리만의 뻥 뚫린 눈구멍이 잠시 그 손을 바라보다 물었다.


“뭘 하자는 거지?”

“진솔한 대화. 그리고 재계약.”


산의 입가에 음흉한 미소가 번졌다.



#2


“그러니까 지금 이 황성 이곳저곳에 ‘아우터’ 라는 괴물이 튀어나오는 커다란 ‘문’ 이 있는데, 그게 열리지 않도록 감시하고 있었다. 여기까지 내가 이해한 게 맞나?”

“일단은.. 그렇다.”


자리만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산은 턱을 긁적거리며 생각을 정리하는 듯 말이 없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자리만이 말했던 ‘아우터’ 라는 괴물의 울음소리였다. 산은 그 울음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럼 저 괴물들이..”

“역시 정정하지. 아우터는 괴물이 아니다.”

“허 참. 생긴 건 괴물 맞구만. 이상한 데서 고집이 있네. 아까 그 스님도 그렇고.”

“괴물이 아니다. 그들을 모욕해선 안 돼. 존중받아야 할 존재다.”


정작 그 괴물을 총으로 쏴죽이고, 창으로 찔러 죽이는 이들이 말하는 존중의 방식을 산은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들의 깊숙한 사정 따윈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산은 그 부분을 가볍게 넘겨짚으며 말했다.


“그래. 아우터라 부르자. 요컨대 지금 이 아디마 케티르 산 정상엔 커다란 문이 있는데, 헤이카가 그걸 벌컥 열어서 아우터가 쏟아져 나온다는 얘기지?”

“그렇다.”

“너희는 그걸 막기 위해 헤이카를 암살할 셈이고?”

“...그렇다.”


자리만은 잠시 뜸을 들이고 답했다. 산이 나이프를 뽑을지도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산은 카르마 나이프를 뽑는 대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황토색 하늘이 조금씩 검은 밤하늘로 바뀌고 있었다. 모래 폭풍이 물러가고 있는 것이다.


“사실 아까는 내가 잃을 게 없다고 말하긴 했지만, 나도 세상이 쫄딱 망하는 건 별로 안 내켜.”


산은 그런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자리만의 공허한 시선이 약간의 기대감을 품었다. 물론, 뼈밖에 없는 그의 얼굴에서 표정이 드러날 일은 없었지만 말이다.


“기왕 망할 거면 나 뒤진 다음에 망했으면 좋겠다. 이런 꼬라지가 됐어도 난 잘 먹고 잘 살다 죽고 싶거든.”

“그렇다면 헤이카 미켈런을 막아야 한다.”

“헤이카를 막으면 문이 닫혀?”

“...안 닫힌다.”


산이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안 닫히는데 헤이카는 왜 잡아?”

“문을 닫는 건 다른 이의 몫이다. 문을 연 헤이카를 잡는 게 우리의 역할이다.”

“그럼 헤이카가 다시 문을 닫으면?”


입을 연 자리만이었지만 그는 기묘한 신음만 흘리며 대답하지 못했다.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산이 자리만의 두개골을 노크하듯 두드렸다.


“이봐요. 해골 아저씨. 왜 대답이 없어? 헤이카가 다시 문을 닫으면 어떻게 할 건데?”

“..그런 경우는 생각해본 적 없다. 보통 문을 연 죄인은 닫을 생각까진 하지 않..”

“그럼 그거로 가자.”


두개골을 두드리던 산이 손을 털었다. 이를 부딪치며 소리를 낸 자리만의 시선이 기울어졌다.


“내가 올라가서 헤이카랑 얘기해볼게. 문 다시 닫아달라고 하면 되잖아.”

“그렇게 쉽게 들어줄 리가 없다.”

“아니. 들어줄 거야. 헤이카는 내가 말하는 건 뭐든지 들어준다고 했거든.”


산의 말투에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그 근거 없는 자신감 하나로 자기 일을 방해받는다는 사실이 자리만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의 표정이 한껏 찌푸려졌지만, 산이 자리만의 얼굴에서 표정을 읽을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는 태연하게 물었다.


“어떻게 할래? 여기서 전멸하던가, 나랑 재계약하던가.”

“..정말 문을 닫게 할 수 있나?”

“아마도. 만약 실패하면 그건 그때 가서 얘기하자고.”


자리만은 고민 끝에 두개골을 끄덕였다. 산과 자리만이 서로의 손을 맞잡았다.


“깔끔하게 지금까지 일은 잊고 새로 시작하는 거다? 죽은 네 형제들은 좀 안타깝지만..”


여전히 바닥에 널브러진 콥스 바탈리온 대원을 힐끗 살피던 산은 말꼬리를 흐렸다. 그의 눈살을 찌푸려졌다.

폭발에 박살 났던 대원의 두개골이 느리지만 확실하게 서로를 끌어당기며 붙고 있던 것이다.


“뭐야.. 뼈가 왜 붙어? 자석이야?”

“우리는 주군이 허락하기 전까진 안식에 들 수 없다. 그러니 이런 꼴을 당하더라도 시간만 있다면 다시 움직일 수 있지.”


50명 남짓의 콥스 바탈리온이 여태껏 빈 머릿수를 어떻게 채우는가에 대한 비밀이 밝혀진 순간이었다. 산은 헛웃음을 흘리며 턱을 긁적거렸다.


“서로서로 보험은 있던 거구만. 그럼 너희 쪽 손실은 없던 걸로 쳐도 되겠지?”


산이 손가락으로 버튼을 누르는 시늉을 하며 물었다. 그 손을 바라보던 자리만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 정도 손상이라면 뼈가 붙을 때까진 일주일은 걸린다. 지금 우리에겐 별다른 선택지가 없군.”

“좋아. 계약 끝. 자리만. 너희 대원들 데리고 아까 그 사찰로 돌아가.”


자리만은 말없이 공허한 시선만으로 설명을 요구했다. 산은 몸을 돌려 사찰이 있는 방향을 가리켰다.

이미 꽤 거리가 벌어졌지만, 사찰에서 피워올린 커다란 불은 여기서도 훤히 보였다. 사찰의 승려들은 아직도 싸우고 있었다.


“말은 이렇게 했어도 너희가 헤이카를 보자마자 총질할 수도 있으니 당연히 떨궈놔야지. 겸사겸사 저 사찰도 좀 도우라고. 저대로 두면 오늘 밤을 못 넘겨.”

“...우릴 여전히 못 믿는군.”

“한 번 뒤통수 맞았는데, 재계약했다고 넙죽 믿겠어? 몰래 올라와도 폭탄으로 위치 전부 파악되니까 얌전히 사찰로 돌아가. 가서 괴물.. 아니, 아우터나 잡으라고.”

“우린..”

“이건 명령이야. 자리만 콥스.”


할 말이 많아 보이던 자리만이었지만 산은 또다시 엄지를 까딱거리며 히죽 웃었다.

자리만은 거칠게 이를 부딪쳤다. 그리고 벗어두었던 바이저 헬멧을 머리에 쓰자 바이저 중앙에 붉은빛이 되돌아왔다.


“지금은.. 시키는 대로 해주지.”


퉁명스럽게 대답한 자리만이 널브러진 대원을 들쳐메고 올라왔던 산길을 다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의 신호에 주변에 포진해 있던 콥스 바탈리원 대원들도 뒤늦게 자리만의 뒤를 따랐다.



...



자리만과 대원들이 내려가는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산은 자리만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고 나서야 몸을 돌렸다.


아까부터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나길 기다리던 야차가 시카와 함께 줄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그 옆에선 사무엘이 나무에 기대 눈을 감고 있었다.


“어차피 떨구고 갈 거라면 그냥 다 폭사시켰어도 됐던 거 아니냐?”


야차가 물었다. 산은 담배 연기를 손으로 걷어내며 피로가 가득한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콥스 바탈리온은 쓸 데가 많아서 내 밑에 둬야 해. 크루아틀을 생각하면 필요한 전력이야.”

“크루아틀? 그 짐승 놈은 왜?”

“아가레스와의 전쟁이 끝난 뒤엔 늦든 빠르든 크루아틀이 싸움을 걸어올 거야. 그 미친 짐승은 진심으로 세계 정복을 꿈꾸는 놈이니까. 언젠간 공업과 충돌하게 되어있어. 닐라 비서실장도 그걸 걱정했고.”


야차는 한껏 얼굴을 찌푸리며 연기를 뿜었다.


“이제 와서 드는 생각인데, 나 줄을 잘못 탄 것 같다.”

“그럼 예전처럼 연방 양아치들이랑 놀던지.”

“쩝. 그것도 안 내켜. 근데 그 짐승 놈들은.. 좀 그렇단 말이지.”


크루아틀의 짐승을 상대로 벌써 두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던 야차였다. 그리고 그건 산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크루아틀과 대치했던 경험까지 포함하면 산은 세 번의 고비를 넘긴 셈이었다. 승산이라곤 전혀 안 보이는 상대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전력이 필요하다. 특히나 콥스 바탈리온이 아무리 때려 부숴도 부활하는 무적의 용병들이라는 걸 알게 된 지금. 그들은 놓치기 아까운 전력이었다.


‘묻고 싶은 것도 남았고.’


지금 캐물을 건 아니라 생각했기에 넘어갔던 것들도 있었다.

세계 곳곳에 있다는 문이나, 그 안에서 튀어나오는 괴물들. 그리고 그들의 슈트 안쪽에 있던 게 움직이는 백골이라는 것까지.

이 모든 건 상식적인 얘기는 아니었다. 시간을 들여 조사할 필요가 있었다.


어느덧 새벽의 찬 기운이 싸늘하게 느껴졌다. 산은 코트를 탁탁 털며 어두컴컴한 산길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3


지구와 황성은 엄연히 따지자면 같은 행성이다.

무언가의 비유가 아니라 지구와 황성은 별개가 아닌 완벽히 같은 행성이라는 의미다. 황성은 여전히 둥글고, 같은 태양계에 있으며, 지구와 똑같은 속도로 시간이 흐른다.


그곳에 사는 생물도 그렇다. 환경의 변화로 그 종의 가짓수는 줄었지만, 황성의 땅 위에 살아가는 건 여전히 지구에서부터 살아남은 동식물과 인류다.


하지만 같은 행성임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인류는 지구와 황성을 명백하게 구분 짓는다.


그들은 황성의 시작을 새로운 기년법(紀年法)의 기준으로 삼았고, 황력(晃曆)이라는 새로운 연호를 사용했다.

기존 국가의 틀을 뒤엎고 새로운 나라를 세웠으며 그에 맞춰 새로운 민족과 새로운 정치성이 나타났다.


더군다나 어떤 학술적 토론에서도 황성과 지구를 같은 범주에 두진 않는다.

그 이유는 상당히 많고 복잡하지만 가장 대표적으로 손꼽히는 이유는 바로 환경의 변화 때문이다.


산이 깎여나가고, 새로운 산이 생겨나고, 없던 바다와 없던 땅이 생겨났다.

살 수 있던 땅은 메마른 사막이 되었으며 원래 사막이 있던 자리에선 갑자기 물이 솟구치곤 했다.


기존의 지구를 설명하던 세계 지도가 무의미해질 정도로 황성의 땅은 많은 것이 바뀌었다.

마치 전혀 다른 행성이 되어버린 것처럼 말이다.


아디마 케티르 또한 그러한 황성의 변화 중 하나였다.


기존의 산이 깎이거나 통째로 사라지는 와중에 아디마 케티르는 기존의 산맥이 더욱 솟아올라 황성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다시 태어났다.


하늘과 가장 가까운 지(地)의 창끝.


아시리아의 종교인들은 아디마 케티르를 그렇게 설명하곤 한다.

이 산은 황성이 하늘 너머에 있다는 신들에게 닿기 위해 그렇게 높고 가파른 형태로 완성된 것이라고.


다만 그게 ‘창끝’ 이라 불린다는 점에서 신들을 향한 순종적 경외심보단 적대감이 더 도드라지는 건 종파마다 다른 설명을 내놓는다.


물론, 난 그런 다양한 주장에 대해선 별 관심이 없었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후우..”


고도가 높은 산은 정상이 가까워질수록 기온이 낮아 눈이 녹지 않고 남아있다는 얘길 들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슬슬 주변에 낀 서리와 저 새하얀 눈이 보이기 시작했으니, 정상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건 확실했다.


“씨이.. 발.. 죽겠다..”


뒤에선 거친 숨을 토하며 욕을 지껄이는 야차가 낑낑거리며 기어오고 있었다.

녀석은 말 그대로 정말 기어 다녔다. 작은 부상도 아닌데, 사찰에 남겨두는 게 낫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야차는 꼴에 자존심이 더럽게 센 놈이다.


“...끄흐..”


야차의 뒤로도 비틀비틀하는 시카가 신음을 토하고 있었다. 후들거리는 다리는 툭 건드리면 뒤로 나자빠질 것처럼 보였다.

아무리 초재생이니 뭐니 해봤자 근본적으로 체력이 무한이란 얘기는 아니다. 이런 가파른 산을 밤새 오르는 강행군에 시카는 기진맥진해 녹초가 되어있었다.


그나마 나은 건 사무엘이었다. 역시 에이전트라 그런지 체력이 대단했다. 심지어 정장 구두를 신고도 잘도 이런 산을 성큼성큼 올라왔다.


“ ─ !!!! “


머리 위로 아가레스가 울었다. 평소 같았으면 기겁을 했겠지만 여기까지 올라오는 길에 아가레스의 울음소리는 지겹도록 들었다.


그것 뿐이랴. 그 스님이나 자리만은 ‘괴물이 아니다.’ 라고 하지만 아우터는 그냥 괴물이었다. 온갖 괴상망측한 놈들이 튀어나와 우리의 등산길을 방해했다.

그때마다 칼질에 몽둥이질. 이따금 떨어지는 아가레스의 가시나 하늘에서 펑펑 터져대는 공업 전투기의 미사일에 여기까지 올라오는 내내 우린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엄청난 압박감과 스트레스에 머리가 아팠다. 정상이 가까워지니 공기도 희박한 탓에 어지럽기까지 했다. 난 위를 한 번 올려다보고, 힘겹게 다시 걸음을 내디뎠다.


“..이제... 안돼...”

“야..! 비켜..! 비키라고.. 컥!”


그렇게 몇 걸음 가기도 전에 결국 시카가 야차의 등 위로 엎어졌다. 덕분에 기어오던 야차는 시뻘겋게 피가 쏠린 얼굴로 버티다가 힘이 빠져 축 늘어졌다.


그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사무엘이 내 쪽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

원래대로라면 여긴 산소통이라도 달고 와야 하는 곳이다. 게다가 점점 차가워지는 공기는 살을 얼릴 정도로 차가워졌다. 저 세 사람이 맨몸으로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평균 이상의 인간이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여기까지였다.


“야차. 여기서 대기해. 이쯤 되면 괴물도 안 나올 것 같으니까.”

“내가.. 여기까지 어떻게.. 올라왔는데..”


눈에 얼굴을 파묻고 말하는 야차는 어떻게든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축 늘어진 시카가 다시 야차를 눌렀다.

시카는 이미 야차를 반쯤 침대로 생각하고 있는 건지, 그 위에서 내려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


“시카만 버려두고 갈 순 없잖아. 너라도 남아야지.”

“이 여자 어차피 안 죽잖아... 그냥 내버려둬도..”

“좀 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문제야. 이런 곳에 탈진한 여자 혼자 내버려두는 건 신사답지 못하잖아.”

“너 이 새끼.. 언제부터.. 그딴.. 거.. 따졌다고..”


말은 이렇게 했지만, 어차피 시카와 야차는 적당한 곳에 대기시켜둘 생각이었다. 그리고 사무엘에게도 눈을 마주쳤다.


“여긴 제게 맡기셔도 좋습니다.”


사무엘은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이 위에 있을 헤이카와의 대면을 방해할 생각은 없다는 듯 그도 근처의 바위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난 사무엘에게 끄덕이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혜니의 코트 덕에 추위엔 그럭저럭 버틸 수 있었지만 부족한 공기에 숨이 턱 밑까지 차올랐다.


‘조금만 더.’


그래도 악착같이 걸었다.

코 앞에 있는 고지. 저 능선만 넘으면 일단 어떻게든 될 거라는 일념으로 걷고, 또 걸었다.


그리고 걸음은 날 배신하지 않았다. 능선을 넘자 평평한 평지가 날 맞이했고, 난 그곳에 쓰러지듯 무릎을 꿇었다.


“헉.. 허억..”


역시 체력의 한계였다. 무엇보다 숨이, 공기가 너무 부족했다.


핑 도는 머리와 함께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끔찍한 현기증에 바닥을 짚었다.


“...”


바닥엔 눈이 없었다. 어째선지 온기가 느껴지기까지 했다. 설마 산소 부족으로 뇌가 어떻게 돼버린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고개를 들었을 때, 뺨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에도 온기가 있었다. 정면에선 엄청난 양의 뿌연 연기가 하늘 높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난 야차처럼 기어서 평지를 나아갔다. 그리고 조금 뒤, 이 온기의 정체를 깨달았다.


“이거 화산인가..?”


확신은 없었지만,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얘기였다. 바로 앞에는 커다란 구멍이 있었는데, 내가 있는 곳은 그 구멍의 가장자리였다.

올라오는 연기는 구멍 안에선 펄펄 끓는 가스였다. 고약한 악취가 나는 가스다.


설마 이 구멍에서 용암이 터져 나오진 않겠지.

약간의 불안감은 있었지만 지금은 얼려버릴 것처럼 차가웠던 공기가 다시 온기를 머금었다는 사실에 몸이 축 늘어졌다. 딱딱한 바닥이 뜨끈해서 기분이 좋았다.


“너 뭐 하니?”

“...?”


목소리에 흐느적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누군가 내 옆에 서 있었다.

낑낑거리며 몸을 돌려 등을 아래로 하고 눕자 맑은 하늘과 함께 그 하늘을 배경으로 삼은 듯한 그림 속 여자가 보였다.


쭉 뻗은 다리를 휘감은 스타킹. 단정하게 빚어내린 검은 머리.

마치 의사들이 입을 법한 가운은 어째선지 까맣고 짙은 금색의 자수가 새겨져 있다.

그 사이엔 검은 와이셔츠와 금색 넥타이 한줄기가 쭉 내려와 있었다.


그리고 황금빛을 품은 커다랗고 아름다운 눈동자. 마치 빠져들 것만 같은 그 눈이 물끄러미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림 좋네...”

“음.. 칭찬이야?”

“그림이 말한다..”


혼미한 정신 속 그림 속 여자가 손을 뻗더니 내 뺨을 찰싹찰싹 때렸다. 그 가벼운 자극에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이제보니 눈앞에 있는 건 그림이 아니었다. 살아있는 사람이었다. 여자였고, 대표님이었으며, 헤이카였다.


“드디어 만났네..”


히죽, 웃자 헤이카도 날 향해 미소 지었다.

그 미소를 마지막으로 난 쏟아지는 졸음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편안한 주말 보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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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6 욕망 시대(1) - 탐욕의 바르바로사 +1 23.04.12 178 9 13쪽
245 죄인 +2 23.04.11 157 8 15쪽
244 급류(急流) +2 23.04.10 176 9 13쪽
243 삼류 악당 +2 23.04.07 179 10 23쪽
242 우는 아이 +1 23.04.06 161 8 15쪽
241 에콰(5) - 일그러진 미소 아래 +2 23.04.05 183 9 15쪽
240 에콰(4) - 핏덩이 +1 23.04.04 178 9 17쪽
239 에콰(3) - 욕망죄화(欲望罪花) +1 23.04.03 184 10 27쪽
238 에콰(2) - 모르스 에콰 +1 23.03.31 167 9 13쪽
237 에콰(1) - 소녀 +1 23.03.30 166 9 14쪽
236 개벽(35) - 문을 닫다. +1 23.03.29 169 9 15쪽
235 개벽(34) - 찾아온 영웅, 떠나는 영웅 +1 23.03.28 173 9 21쪽
234 개벽(33) - 베르나데트 23.03.27 163 9 20쪽
233 개벽(32) - 자유를 향해 +2 23.03.24 163 9 18쪽
232 개벽(31) - 데이케트람 23.03.23 168 9 18쪽
231 개벽(30) - 행복을 쫓던 사내 +1 23.03.22 168 8 21쪽
230 개벽(29) - 침묵의 도시 23.03.21 165 8 17쪽
229 개벽(28) - 가능성 +1 23.03.20 171 9 17쪽
228 개벽(27) - 시카 23.03.17 165 9 17쪽
227 개벽(26) - 36년 +1 23.03.16 233 9 17쪽
226 개벽(25) - 빛바랜 세상 +1 23.03.15 167 9 13쪽
225 개벽(24) - 문 23.03.14 174 9 18쪽
224 개벽(23) - 본보기 +1 23.03.13 166 9 16쪽
223 개벽(22) - 옛 동료 +1 23.03.10 176 10 16쪽
222 개벽(21) - 마지막 조각 +1 23.03.09 181 10 21쪽
221 개벽(20) - 흐름 23.03.08 173 10 16쪽
220 개벽(19) - 시라비아의 햇빛 23.03.07 179 10 15쪽
219 개벽(18) - 영웅 증후군 23.03.06 204 10 16쪽
218 개벽(17) - 친구인가 적인가 23.03.03 183 10 16쪽
217 개벽(16) - 습격 23.03.02 182 10 14쪽
216 개벽(15) - 헤르그부르 23.02.28 190 10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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