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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ject.P

욕망 시대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판타지

완결

굴P
작품등록일 :
2022.05.11 10:32
최근연재일 :
2023.05.08 18:05
연재수 :
26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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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0.31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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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쪽

터닝 포인트(10) - 죄악감

DUMMY

#1


눈을 떴을 때, 산은 바닷속에 있었다.


고개를 내리자 둥실둥실 뜬 채 물결에 흐느적거리는 몸이 보였다. 그 아래엔 회색 모래가 쌓인 바닥이었다.


꽤나 깊은 곳이지만 어둡진 않았다. 하지만 그건 물결에 부서지는 햇빛 때문이 아니라, 온통 칙칙한 잿빛의 바닷물이 자신을 확고하게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산은 이곳이 시라비아의 잿빛 바다 아래라는 걸 깨달았다. 늘 한결같은 바다였기에 잘못 볼 리는 없었다.


그의 맞은편. 회색 모래 위로 수북하게 쌓인 덩어리들이 있었다. 그 덩어리는 작은 언덕을 이룰 정도로 거대했고 이 잿빛 바다에 잠겨 떠오르는 일도 없었다.


꺼림칙한 검은 언덕을 이루고 있는 건 모두 머리가 없는 사람이었다. 누군가에게 머리가 잘려나간 불우한 인간들.

범인이 누구인가는 굳이 설명이 필요 없었다. 그들을 참수한 건 산이었으며, 처형인의 대부였고, 시라비아의 처형인들이었다.


처형인에게 필요한 건 오로지 머리뿐이다.

그래서 처형인들은 머리를 자른 후, 쓸모가 없어진 몸은 주로 바다에 버렸다. 시라비아의 잿빛 바다는 삼킨 시체를 다시 뱉지 않았기 때문이다.


머리가 없는 채 가라앉아 있는 것들을 바라보던 산은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그는 위를 향해 헤엄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허우적거려도 산은 수면 위에 도달할 수 없었다. 나아갈 수도, 올라갈 수도, 반대로 내려가는 것도 불가능했다.


마치 그의 몸이 이 자리에 고정된 듯싶었다. 이상하게도 숨이 막히진 않았다. 산은 호기심에 입술에 손을 가져갔다.


하지만 그의 손은 아무것도 없는 곳을 휘저었다. 그게 의미하는 바를 무심코 깨달아버린 산이 두 손으로 얼굴을 만졌다.


손에 닿는 감촉이 없었다. 더욱 손을 휘적이던 끝에 목 언저리가 닿았지만 기묘한 단면의 감촉에 산은 황급히 손을 떼버렸다.


‘머리가 없어.’


당연히 있어야 할 것을 잃어버린 산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동시에 무언가가 그의 다리를 잡아끌었다. 머리 없는 시체가 창백한 손을 뻗어 그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손은 점점 늘어났다. 덜컥 겁이 나 손을 뿌리친 산이 반사적으로 나이프를 뽑아 휘둘렀다.

썩둑 잘린 창백한 팔의 단면에선 또다시 손이 자라나 그를 붙잡았다. 산은 그대로 모래에 파묻혀갔다.


잿빛 바다가 그를 삼키고 있었다.


소리를 지르며 머리 위로 손을 뻗자, 누군가가 그의 손을 맞잡았다. 산은 숨을 삼키며 위를 보았다.


그곳에 있는 것은 황금빛 눈에 검은 머리를 가진 여자였다. 그녀의 도움으로 산은 모래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하늘하늘한 순백의 드레스와 검은 머리칼이 바닷속 물결에 맞춰 화려하게 움직였다.

그녀는 산의 손을 잡은 채 점점 수면 위로 올라갔다.


조금 전까지 있던 끔찍한 일들은 모두 잊었다는 듯, 산은 멍하니 그녀의 눈동자에 빠져들었다.

그녀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알아들을 수 없는 미성(美聲)이 산의 정신을 옭아맸다.


산은 손을 더 꽉 쥐었다. 이대로 위로 올라가면 그녀가 사라져버릴 것 같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녀는 산을 향해 고혹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떨어지고 싶지 않다는 폭력적인 욕망만이 그의 머릿속을 헤집었다.


마침내 수면 위로 솟아오름과 동시에 여자의 몸은 흩어지기 시작했다.

산은 여자의 이름을 부르며 그녀를 꽉 껴안았다.



#2


“어머.”


와락 끌어안은 가느다란 허리. 튀어나온 놀란 목소리에 눈이 번쩍 뜨였다.

은은한 향기가 부드럽게 코끝을 자극했다. 희미하게 꽃향기 같기도 했고, 달달한 과일의 향 같기도 했다.


“어..”


슬쩍 시선을 위로 돌리자 헤이카의 내려다보는 얼굴이 보였다. 헤이카는 조금 놀란 듯 커다란 눈을 깜빡이고 있었지만 금세 미소를 지었다.

조금 전에 보았던 그 미소였다. 난 당혹감에 숨을 쉬는 것조차 잊고 있었다.


“괜찮아. 원하는 만큼 이러고 있어도 돼.”


‘괜찮다.’ 라는 허락에 마음이 풀어졌다. 떨어져야 한다는 생각도 이젠 들지 않아서 그냥 몸에 힘을 빼고 헤이카의 무릎에 축 늘어졌다.

헤이카의 손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부드럽고 따뜻한 감촉. 작은 숨소리. 옅은 체온. 불안감이 물에 씻기듯 사라졌다.


“무서운 꿈 꿨어?”

“..어떻게 알았어요?”

“아픈 강아지처럼 낑낑거렸거든.”

“악몽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랬구나.”


헤이카의 손이 내 눈가를 만졌다. 촉촉하게 젖은 눈가를 닦아주는 손이었다.

내가 이런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다니. 하지만 수치심보단 묘한 안도감이 더 컸다. 괜히 응석 부리는 아이처럼 굴고 싶었다.


“헤이카..”

“드디어 이름으로 불러주는 거야?”

“..대표님.”

“그냥 이름으로 불러주면 좋을 텐데.”


어딘가 아쉬운 얼굴을 한 헤이카가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엄연히 회장님인데, 이름으로 막 부르는 건...


‘상관없나.’


여기까지 와서 그런 걸 따지는 나 자신이 조금 우스웠다. 난 슬며시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알았어요. 헤이카.”

“응. 착하네. 머리는 안 아파? 어디 불편한 곳은?”

“괜찮은 것 같습니다.”


별다른 이상은 느껴지지 않았다. 현기증이나 두통도 없었고 숨이 차지도 않았다.

헤이카의 어깨너머로 보이는 푸른 하늘을 보아하니 여긴 아디마 케티르 산의 정상이 맞다. 그런데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다는 건 신기했다.


“여긴 특별한 곳이야. 정상까지 오는 길은 평범한 고산 지대랑 같은데, 막상 이곳에 올라오면 지상과 하나도 다를 게 없어.”

“희한한 곳이네요..”

“그렇지. 근데 네가 여긴 무슨 일로 왔어?”


헤이카의 물음에 난 여전히 그녀의 무릎 위에서 머리를 부비며 대답을 고민했다.

‘뭐 때문에 왔더라?’ 고민해보았지만 돌아보니 딱히 이유가 있어서 온 것도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오고 싶어서.’ 혹은 ‘와야 할 것 같아서.’ 였다.


“그냥요.”

“나 보고 싶었구나?”

“그렇게 되는 건가?”

“그렇게 되는 거지.”


부드러운 미소로 말하는 헤이카였다. 난 천천히 헤이카의 허리를 놓고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이제보니 바닥에 깔린 건 두툼한 야외용 매트였다. 하긴, 돌 바닥에서 퍼질러 자고 있었다면 진작에 등이 아파서 눈을 떴을 테고 헤이카의 무릎에도 상처가 가득했을 거다.


헤이카는 무릎을 잡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차분하게 내려온 머리칼을 털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맞춰 그녀의 머리칼과 옷이 나풀나풀 흔들렸다.

그 광경을 보던 난 멍하니 중얼거렸다.


“드레스도 좋았는데..”

“뭐라고 했어?”

“아뇨. 헛소리예요. 잠이 덜 깨서.”


헤이카는 ‘풋’ 하고 웃으며 끄덕였다.


“산아. 여기서 쉴래? 아니면 따라다닐래?”

“어디 가세요?”

“일하러. 이제 곧이거든.”


하늘을 가리킨 헤이카의 손가락. 그리고 타이밍 좋게 푸른 하늘 위를 검은 헬기가 가로질렀다.

헬기는 두꺼운 와이어로프를 아래로 축 늘어뜨리고 그곳에 무언가를 매달고 있었다. 커다란 상자 같았다.


“따라갈게요.”

“그럴 줄 알았어.”


헤이카는 내게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코렌에서 난동부렸다면서?”


뒷짐을 진 채 앞서 걷던 헤이카가 물었다. 그 뒤를 따라가던 난 흠칫 몸을 떨었다.

말한 적이 있었나? 아니, 없었다.


‘닐라구나.’


닐라는 헤이카의 비서실장이다. 코렌에서 있던 일, 나와 관련된 모든 일을 헤이카에게 보고했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예.. 죄송합니다.”

“아니야. 잘했어. 자기 몸이 우선이지. 코렌의 에이전트가 반토막이 난 건 좀 예상외의 사태지만.. 괜찮을 거야.”

“...”

“그리고 시라비아에서도 잘 해줬어. 설마 거기까지 해줄 줄이야.”


헤이카는 시라비아에서 있던 일까지 전부 보고받은 모양이었다.

난 재빠르게 시라비아에서 했던 일들을 떠올렸다. 뭔가 찔리는 일이라도 있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다행히 문제가 될 만한 건 없었다. 오히려 난 닐라와 함께 그렘린 공장을 날려버렸고, 스토커와 사무엘이라는 든든한 아군도 만들었다.


“우리 산이가 이젠 혼자서도 잘하네. 내가 없어도 되겠어.”

“없어질 사람처럼 말하지 마세요.”

“그렇게 내가 중요해?”

“당연하죠.”

“왜?”


왜라니, 그야 당연히 이클립스의 회장님이고 내 월급을 줄 사람인데다가..

그 외의 것들을 생각하려던 난 침을 꼴깍 삼켰다. 얼굴이 살짝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그, 그보다 여기 일은 잘 돼가요?”


황급히 화제를 바꾸자 헤이카는 슬며시 웃더니 끄덕였다.


“응. 수월해. 문제없어. 오히려 네가 이 타이밍에 온 게 엄청난 행운이야. 생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광경을 보게 될 테니까.”

“..?”

“산아. 이리 와서 좀 볼래?”


어느새 정상 가장자리에 선 헤이카가 넓은 구멍을 바라보며 내게 손짓했다. 희뿌연 연기가 피어오르는 곳. 화산의 분화구로 생각되던 구멍이었다.

헤이카의 옆에서 조심스럽게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난 재빨리 몸을 뒤로 뺐다. 이 구멍은 오금이 저릴 정도로 엄청난 깊이였다.


“무서울 만도 하지. 이 구멍은 아디마 케티르 지하까지 통하니까.”


가까이 가고 싶은 마음도 안 드는 곳이건만, 헤이카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조금 뒤, 헤이카는 하늘을 향해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그리고 묘한 손짓을 하자 공업의 헬기에 달려 있던 상자의 아랫부분이 덜컹 열렸다.


그곳에서 쏟아지기 시작한 건 새빨간 피와 살덩어리였다. 뒤이어 같은 헬기가 우르르 몰려와 차례차례 피와 살덩어리를 분화구 안쪽으로 쏟아붓고 있었다.


“..저거 뭡니까?”

“아가레스의 피랑 살점이야. 아, 잠깐 뒤로 가자!”


헤이카가 서둘러 내 어깨를 잡으며 반대편으로 달려갔다. 갑자기 왜 그러나 했는데, 그 이유를 곧 알 수 있었다.


하늘에서 갑자기 아가레스가 떨어졌다. 그것도 너덜너덜해져 파도처럼 대량의 피를 뿜어내는 아가레스였다.

아가레스는 그대로 거대한 분화구 안쪽으로 떨어졌다. 난 떡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분화구로 아가레스를 던져 넣은 괴물을 바라보았다.


그건 얼굴이 없는 델라리온 머스칼이었다. 분화구 위에 둥둥 떠 있는 그는 검은 외투가 아가레스의 피로 엉망이었고 살짝 지쳐 보였다.


“왜 여기다 아가레스를..?”

“사실 지금 하늘에 둥둥 떠다니는 아가레스들은 모두 어린 개체야. 성체는 한 마리도 없어.”


그 거대한 놈들이 새끼라니. 이건 또 충격적인 얘기였다.


“성체가 된 아가레스가 극히 일부라서 그럴 텐데, 조사한 바로는 몇 안 되는 성체는 수많은 아가레스를 낳는다고 해. 여왕이라는 얘기지. 여왕벌, 여왕개미랑 비슷한 느낌.”

“..그래서요?”

“신기한 건 새끼들이 성체가 되기 전에 모체가 죽으면 그 모체가 낳은 새끼들은 ‘하늘을 나는 능력’ 을 상실한다고 해. 줄 끊어진 인형처럼 그냥 바닥으로 추락해버리는 거지. 더 이상 하늘에 오를 수 없어.”


또다시 몰려온 헬기가 아가레스를 쏟아부었다.

곧, 머스칼도 또 다른 아가레스를 분화구 안쪽으로 날렸다.


난 서서히 이 섬뜩한 행위의 의미를 깨닫고 있었다.


‘이건 문이다.’


아디마 케티르 산의 정상에는 문이 있다. 아우터라는 괴물이 쏟아져 나왔다는 문.

지금 그 문에다 아가레스의 피와 살점을 쏟아붓고 있는 것이다.


“아가레스에게 모성애 같은 건 별로 기대할 수 없지만, 이쪽의 아가레스들은 형제들의 피 냄새에 민감하게 반응해. 그리고 그건 모체의 영향을 받아서 그래.”

“...”

“자기 새끼의 피랑 살 냄새를 이 정도로 맡으면 기어나오지 않을 수가 없지.”


헤이카는 어미를 부르고 있었다. 새끼를 죽여 피와 살점을 흩뿌리면서.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를 내며 헤이카는 가장자리를 아슬하게 걸어 다녔다. 그 위태로운 모습에 서둘러 그녀를 뒤따랐다.


“이 아래에 있는 건 ‘거울 연못’ 이라 불려. 거울처럼 맑고 투명한 연못. 하지만 그 정체는 다른 세상을 들여다볼 수 있고, 다른 세상으로 통하는 문이야.”


시라비아에서 병문안을 갔을 때, 혜니한테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녀는 거울처럼 맑은 연못의 모습을 한 문에 관해 얘기했었다. 그 문을 헤이카가 조사하고 있었다는 것도 말이다.


“공존하지만 인지하지 못하던 세상. 과거, 미래, 가지에서 뻗어나온 평행 세계도 아닌 완전히 다른 시대.”

“비유하자면 옆집이랄까? 벽과 울타리, 공간을 사이에 둔 이웃집. 그리고 거울 연못은 그 이웃집으로 단번에 연결되는 비밀 통로인 셈이지.”


헤이카의 간결한 비유에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믿기는 어려운 얘기였지만..


그 순간, 분화구 안쪽에서 역으로 튀어나온 검은 놈이 있었다. 날 수 있는지, 날개를 활짝 펼치자 흉측한 얼굴의 짐승의 머리가 보였다.


그건 머리와 날개밖에 없는 괴물이었다.

아우터라 불리던 괴물이다.


투다다당!

요란한 총성이 재빠르게 이어졌다. 그러자 아우터는 온몸에서 피를 뿜으며 다시 분화구 안쪽으로 추락했다.


총을 쏜 것은 멀지 않은 곳에 자리를 잡은 군인들이었다. 본 적 없는 군복. 아시리아 정부군도, 연합의 평화 유지군도 아니었다.


‘하늘 탈환군..’


아시리아의 군인이 공업의 군대를 그렇게 부른 게 떠올랐다. 그들을 지휘하고 있는 남자는 지난번에 본 적 있는 남자였다.

‘나이트’ 라 불리던 공업의 직원. 아마 감응자다.


“문을 열어버린 탓에 다른 것도 좀 튀어나오고 있지만.. 모체가 나오기만 하면 돼. 모체를 잡으면 새끼들은 모두 지상으로 추락할 테고, 위험성은 현저하게 떨어지지. 그럼 전쟁은 내가 이긴 거나 마찬가지야.”


헤이카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걸친 채 말했다.

이후에도 몇 번이나 아우터가 기어 올라왔고 일부는 산 아래로 내려갔지만, 대부분은 이클립스의 병력에 사냥당했다.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면서도 헤이카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저기 헤이카?”

“응? 왜?”

“그 문이란 거.. 닫을 수도 있는 거죠?”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진 헤이카는 휘둥그렇게 뜬 눈으로 날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난 입을 다물었다.


“왜 그런 게 궁금해?”

“자리만과 약속한 게 있어서요. 자리만이 사실..”

“알아. 콥스 바탈리온이 날 감시하고 있었다는 거.”


헤이카는 태연하게 말했다.


“하지만 죽은 사람이 산 사람들의 미래를 결정지을 권한은 없어. 시체들은 얌전히 관에나 들어가라지. 왜 남의 세상에 참견이야?”

“자리만이 헤이카를 암살하려고 했어요. 제가 막지 않았더라면..”

“내가 죽었을까 봐? 고작 그런 떨거지들한테?”


자만일지도 모른다.

머스칼에게도 약점이 있다는 건 이젠 확실해졌으니, 만약 자리만이 그 약점을 이용할 줄만 안다면 헤이카를 암살하는 것도 불가능하진 않다.


그러나 헤이카는 자리만이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투로 말하고 있었다.


“여기서 쏟아져 나오는 괴물들이 산 아래까지 퍼지고 있는 건 어떻게 하시려고요?”

“그건 알아서들 정리할 거야. 세계 연합은 그런 걸 위해 존재하는 거니까. 하지만 결국엔 열세에 몰릴 테고, 내 도움을 바라겠지. 세계 연합은 나와 이클립스 공업을 내칠 수 없어.”

“그럼 그동안 나오는 희생은요..?”


헤이카는 걸음을 멈췄다. 구두가 빙글, 돌며 날 마주 보았다.


“내가 왜 그런 것까지 신경 써야 해?”


잠시 잊고 있었다.

이 사람, 헤이카 미켈런은 끔찍한 인류 혐오자였다는 걸.


전쟁을 증오하고, 그 전쟁의 발단이 되는 인류를 증오한다. 그러면서도 세상을 바꾸고자 노력하는 건 인류를 위해서가 아니다.


‘자네도 영웅 후보인가?’


어째선지 스콧의 말이 갑자기 떠올랐다. 영웅이란 단어가 머릿속에서 맴돌며 입안으로 올라왔다.


미나도 말했었다. 헤이카는 자신이 세상을 떠받치려 한다고.

그건 이 시대의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헤이카가 그러고 싶어서 하는 그녀의 개인적인 욕망이다.


그녀에게 인류애 따윈 애초부터 없었다.


“코렌에서.. 혜니가 부상을 당했어요. 죽을 뻔했죠.”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러자 헤이카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약간 안심했다. 그래도 역시 친한 사람의 소식에는 제대로 된 반응을..


“혜니가 갖고 있던 물건은? 혹시 잃어버렸어?”

“..물건이요?”

“혜니한테 중요한 걸 맡겼었거든. 잃어버리면 안 되는 건데..”


난 주머니에서 혜니가 맡겼던 물건을 꺼내 보였다. 헤이카가 지난번에 운석이라고 했던 작은 돌덩이였다.

헤이카의 얼굴에 안도감이 피어났다. 그녀는 운석을 냉큼 가져가 챙겼다.


“다행이다. 응. 이거면 됐어.”


혜니의 안위도 헤이카에겐 별로 중요하지 않아 보였다.


“...필라드 앞바다에도 아가레스가 떨어졌어요.”

“다 쓸려버렸겠네. 아쉽지만 새집을 찾는 수밖에 없겠어.”


횟집 사장이 바보같이 웃는 얼굴이 떠올랐다.

잠깐이지만 함께 지냈던 미나의 모습도 떠올랐다.

별로 친하진 않았지만, 고양이 베디도 있었다.


하지만 헤이카는 그들에 대해선 전혀 묻지 않았다.


“성체를 잡으면.. 새끼들이 비행 능력을 잃는다고 했죠?”

“응.”

“날던 녀석들이 한꺼번에 떨어진다는 뜻인 거죠?”

“그렇겠지.”

“그럼 그 밑에 있는 사람들은..”


얼굴에 물음표를 띄운 것 같은 표정의 헤이카였다.


또각. 또각. 구두가 가까워졌고 어느새 내 어깨엔 헤이카의 손이 올라왔다.


“뭐가 그렇게 무서워?”


뱀처럼 목을 휘감는 손. 뺨을 어루만지며 가까워진 얼굴이 그렇게 물었다.


“난 세상을 위해 일하는 거야. 인류가 마땅히 지배했어야 할 하늘을 되찾기 위해서. 이해했니?”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깟 하늘 때문에 사람이 죽어나가고 있습니다.’


아시리아 정부군의 하칸 중령이란 사람은 수많은 피난민들 앞에서 내게 말했다.

피난민들, 군인들의 증오로 가득 찬 고함과 시선이 떠올랐다. 지금도 귓가에 들려오는 것 같았다.


난장판이 된 아시리아의 참상도 눈앞에 보였다. 깔리고, 짓이겨져 죽은 사람들. 죽어가는 사람들이다.


‘각오한 일이었잖아.’


그렇게 자신을 타일렀다. 헤이카와 같은 길을 걷기로 다짐한 순간부터 각오했던 일이다.

세상이 헤이카에게 보내는 증오는 너무나 크고 무겁다. 나마저도 그녀를 증오한다면, 헤이카는 무너져버릴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기에 함께 하기로 했다.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던 날 헤이카가 끌어안았다.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산 자의 심장 박동이 들려오지 않았다.


“산아. 넌 누구 편이야?”

“...헤이카의 편이요.”

“다행이다.”


날 놓아준 헤이카는 몇 걸음 물러나며 다시 미소를 되찾았다. 빠져들 것만 같은 눈동자를 깜빡이던 그녀가 돌아섰다.

작은 등이 조금씩 멀어졌다. 난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 ─ !!!!! }


하지만 그 순간, 땅을 뒤흔드는 엄청난 굉음에 몸이 휘청거리며 뒤로 나자빠졌다.


귀가 먹먹하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하늘과 땅이 마구 흔들렸다.

이건 아가레스의 울음소리지만 지금까지 들어왔던 어떤 것보다도 강렬했다.


고통에 찬 아가레스의 단말마 같은 게 아니다.

그렇다고 분노에 찬 포효도 아니었다.


비통하고 애절하게 슬픔을 자아내는 비명.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 이 울음소리는 그러했다.


“역시! 드디어 나오는구나!”


헤이카의 입꼬리가 히죽 올라가며 위험한 미소가 번졌다. 지면에 쩍쩍 살벌하게 금이 가고 있었다. 난 서둘러 달려가 헤이카의 팔을 붙잡았다.


“헤이카! 여기서 벗어나야..”

“왔어. 산아. 드디어 녀석이 왔어.”

“이, 이러다 죽어요!”


무너지는 지반에 저 구멍 아래로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그러나 헤이카는 도저히 내게 협조해주지 않았다.

차라리 안아 들고 뛰자는 생각이 들 때쯤, 기어코 발아래가 푹 꺼졌다.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헤이카와 난 추락했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헤이카는 미소를 잃지 않은 채,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얼굴 없는 괴물의 이름을.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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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 욕망 시대(6) - 정복자 23.04.19 162 9 16쪽
250 욕망 시대(5) - 악룡과 용사 +1 23.04.18 159 9 17쪽
249 욕망 시대(4) - 오염구역 탐사 +2 23.04.17 158 8 14쪽
248 욕망 시대(3) - 죽음의 땅 +2 23.04.14 171 9 13쪽
247 욕망 시대(2) - 위험한 여행 +1 23.04.13 155 9 13쪽
246 욕망 시대(1) - 탐욕의 바르바로사 +1 23.04.12 177 9 13쪽
245 죄인 +2 23.04.11 157 8 15쪽
244 급류(急流) +2 23.04.10 176 9 13쪽
243 삼류 악당 +2 23.04.07 179 10 23쪽
242 우는 아이 +1 23.04.06 161 8 15쪽
241 에콰(5) - 일그러진 미소 아래 +2 23.04.05 183 9 15쪽
240 에콰(4) - 핏덩이 +1 23.04.04 178 9 17쪽
239 에콰(3) - 욕망죄화(欲望罪花) +1 23.04.03 184 10 27쪽
238 에콰(2) - 모르스 에콰 +1 23.03.31 167 9 13쪽
237 에콰(1) - 소녀 +1 23.03.30 166 9 14쪽
236 개벽(35) - 문을 닫다. +1 23.03.29 169 9 15쪽
235 개벽(34) - 찾아온 영웅, 떠나는 영웅 +1 23.03.28 173 9 21쪽
234 개벽(33) - 베르나데트 23.03.27 163 9 20쪽
233 개벽(32) - 자유를 향해 +2 23.03.24 163 9 18쪽
232 개벽(31) - 데이케트람 23.03.23 168 9 18쪽
231 개벽(30) - 행복을 쫓던 사내 +1 23.03.22 168 8 21쪽
230 개벽(29) - 침묵의 도시 23.03.21 165 8 17쪽
229 개벽(28) - 가능성 +1 23.03.20 171 9 17쪽
228 개벽(27) - 시카 23.03.17 165 9 17쪽
227 개벽(26) - 36년 +1 23.03.16 233 9 17쪽
226 개벽(25) - 빛바랜 세상 +1 23.03.15 166 9 13쪽
225 개벽(24) - 문 23.03.14 173 9 18쪽
224 개벽(23) - 본보기 +1 23.03.13 165 9 16쪽
223 개벽(22) - 옛 동료 +1 23.03.10 175 10 16쪽
222 개벽(21) - 마지막 조각 +1 23.03.09 180 10 21쪽
221 개벽(20) - 흐름 23.03.08 172 10 16쪽
220 개벽(19) - 시라비아의 햇빛 23.03.07 178 10 15쪽
219 개벽(18) - 영웅 증후군 23.03.06 203 10 16쪽
218 개벽(17) - 친구인가 적인가 23.03.03 182 10 16쪽
217 개벽(16) - 습격 23.03.02 181 10 14쪽
216 개벽(15) - 헤르그부르 23.02.28 189 10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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