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글로번 님의 서재입니다.

마음을 울리는 음악

웹소설 > 작가연재 > 팬픽·패러디, 현대판타지

김현우
작품등록일 :
2015.04.16 13:27
최근연재일 :
2015.06.01 17:02
연재수 :
52 회
조회수 :
370,664
추천수 :
7,576
글자수 :
4,296,480

작성
15.04.16 18:20
조회
4,244
추천
82
글자
314쪽

마음을 울리는 음악 103장-105장

DUMMY

제103장 합종연횡




“그럼 한국에서 다시 봐.”

“네, 서울에서 만나요.”

뮤직비디오 촬영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윤아의 표정은 싱글벙글이다. 그에 반해 창현의 표정은 검게 죽어 있었다.

자신의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입가에 미소를 지은 윤아는 활기 넘치게 손을 흔들어 보인 뒤, 차를 타고 이동한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그녀는 소녀시대 윤아로서 활동을 재개할 것이다.

“하아. 미치겠네.”

“어쩔 수 없었잖아.”

한숨을 내쉬는 창현을 보며 세희가 위로의 말을 건넨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위로가 될 리 없다. 그만큼 창현의 머릿속은 어지러웠다.

“난리가 나겠죠?”

“아무래도? 드라마 할 때 어리다는 이유로 피했는데 불과 반 년만에 그러면 말이 나올 수밖에 없지. 게다가 네 인지도도 생각해야지. 현재 윤아도 인기를 누리고 있으니 더 커질 테고…….”

“각오를 단단히 해야겠네요?”

“당연하지!”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예상되어 창현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세희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대한민국에서 난리가 나더라도 그뿐이다. 앞으로 가수로서 활동하면 이러한 수위 촬영은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이제라도 익숙해져야 하는 게 세희였지만… 왠지 모르게 점잖 빼는 창현을 보며 눈이 가늘게 변했다.

“그래도 좋았지?”

“좋았긴요.”

“아니야, NG를 외칠 때마다 입가에 미소가 걸리는 걸 봤어. 분명히 좋았을 거야.”

“아니라니까요.”

“알았어, 그렇다고 해줄게.”

“그렇다고 해주는 거라뇨. 정말로 좋지 않았다니까요.”

“그러셔? 윤아가 실망하겠네. 하.나.도. 안 좋았던 창현이와 달리 윤아는 무척 좋아한 게 눈에 보였거든. 우리 윤아 불쌍해서 어떻게 하나.”

졸지에 여자의 순정을 짓밟은 놈이 되어버리자 창현이 당황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윤아의 돌주먹을 맛볼 수도 있는 노릇이다. 어디로 가나 외통수라는 걸 깨달은 창현은 체념의 빛을 띠며 말했다.

“…물론 싫지는 않았어요.”

“흐응? 그랬구나.”

“크윽.”

이래나 저래나 뒤집어쓰는 건 자신이지. 그래도 너그러이 넘어갈 수 있는 이유는 세희의 말마따나…….

‘나쁘지는 않았으니까.’

연신 들려오던 테일러 스위프트의 NG 선언과 함께 되감기를 한 것 마냥 반복되는 키스신 촬영. 처음에는 수줍은 듯 눈조차 제대로 마주하지 못하던 것이, 나중이 되어서는 잡아먹을 듯한 기세로 달려든다.

남자 입장에서는 나쁘지 않은 순간이었다.

“후후…….”

그때를 생각하니 절로 미소가 흘러나왔다.

“…정말 좋았나 보네.

창현의 반응에 세희는 넋 나간 표정으로 지었다.

지금 상황은 마치 아무것도 모를 거라 굳게 믿고 있던 아들이 방에서 야한 동영상을 보고 있는 순간을 포착한 것과 비슷했다.

언제나 순수할 거라 생각하던 창현도 이제는 어느 정도 즐기는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히히! 히히히!”

비행기에 탑승한 윤아는 입가에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짧은 기간 머물렀지만 며칠간 머문 미국 생활은 그녀에게 잊지 못할 추억을 안겨다주었다.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운 줄 알았더라면 좀 더 의미 있게 살았을 텐데.

입술을 매만지는 그녀의 입 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옆에 앉아있던 매니저는 그 모습을 보고 결국 혀를 찼다.

“쯧쯧! 그렇게 좋으니?”

“언니라면 안 좋을 것 같아요?”

“그, 그건…….”

윤아의 예리한 역공에 매니저가 버벅거린다. 솔직히 같은 여자 입장에서 부러워 미쳐 돌아가실 지경이었다. 그 점을 눈치 채고 있기라도 하듯 비집고 들어오니, 할 말이 없어지는 게 당연했다.

매니저를 격침 시킨 윤아는 여유 있는 자태로 입술을 매만진다.

“좋았었지.”

그때 그 순간이 떠올라 다시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평생 잊기 힘든 추억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형언할 수 없는 순간을 오랫동안 간직하고자, 씻을 때 입술 주변은 터치하지 않을 정도였다.

비록 연인 사이에서 우러나오는 입맞춤은 아니었지만 일단 이 정도만으로도 윤아는 만족했다.

테일러 스위프트의 협력(?)으로 무려 서른세 번의 키스신을 감행할 수 있었으니까. 매순간마다 떨리는 마음으로 임했기에 어떻게 지나갔는지 알기 힘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으로 윤아는 확실하게 사전 연습을 하게 되었다.

이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입맞춤을 할 때 어떻게 하면 휘어잡을 수 있을지 깨달았다.

“내 현란한 테크닉으로 녹여주면 더 빠져들겠지? 히히!”

떡줄 사람은 생각도 하지 않고 있지만 생각만 해도 행복한 것은 사실이었다.

한동안 히죽거리던 윤아는 중대한 사실을 깨닫고 매니저에게 말한다.

“아 맞다! 언니, 한국에 돌아가면 그냥 뮤직비디오 촬영만 했다고 하세요!”

“뭐? 그럼 다른 이야기를 해?”

“행여나 언니들하고 막내가 물어보면 그렇게만 이야기 해줘요! 알았죠?”

“아, 알았어.”

살벌한 윤아의 기세에 매니저는 고개를 끄덕이며 약속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겁에 질린 그녀의 모습을 본 윤아는 회심의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뒤처리도 말끔하게 했고.’

생각지 못한 범주였지만 미국산 마왕을 조력자로 둔 윤아는 뒤처리마저도 깔끔하게 해놓을 수 있었다.


장시간 비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윤아는 곧바로 숙소에 돌아왔다. 잠금을 해제하고 안으로 들어서자, 멤버들이 일제히 그녀를 반겨주었다.

“윤아야, 어서 와라!”

“선물을 내놓으시오!”

“혼자 미국물 먹고! 좋겠다!”

“언니, 어서 오세요.”

투박한 말, 상냥한 인사 등 여러 말이 흘러나왔지만 그 속에 내재된 감정은 모두 따뜻한 것이었다.

며칠 떨어져 지냈건만 반겨주는 것은 흡사 이산가족 상봉하는 것 마냥 절절하다. 눈물이 왈칵 솟아날 뻔한 윤아는 물기 어린 목소리로 대답한다.

“언니들! 그리고 막내야, 나 왔어. 그런데 다들 숙소에 있네? 설마 날 기다려준 거야?”

“그렇쥐! 그래서 파티 준비까지 완료!”

“오늘 신나게 놀자, 헤헤! 다이어트 때문에 스트레스 쌓였는데.”

“삼촌이 윤아 온다고 해서 특별히 하루 휴가를 주셨어! 그래봤자 내일부터 다시 부지런히 움직여야 해.”

리더인 태연이 앞으로 나서면서 들떠있는 멤버들에게 적당한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그 말을 들은 소녀들은 김이 샌 표정을 지었지만 풀어질 대로 풀어져서 내일 스케줄에 지장을 주는 것보다는 나았다.

왁자지껄 떠들면서 선물 증정식이 이어지고, 미리 준비해놓은 과자와 음료수를 늘어놓았다.

라디오 DJ로 풍부한 진행 경험을 쌓은 태연이 진행을 맡아 잔을 높이 들었다.

“자! 그럼 즐겁게 즐기자! 윤아의 귀환을 축하하며!”

“축하하며!”

“오늘 파티를 기념하며!”

“기념하며!”

“완벽한 리더 태연이를 찬양하며!”

“찬양하며! 에? 태연이 너…….”

“왜? 뭐 잘못됐어?”

얼떨결에 태연을 찬양하게 되었지만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짓는 태연이다. 따지려던 소녀들만 어안이 벙벙하여 따질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위하여!”

잔이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즐거운 파티가 시작되었다.

과자와 음료수가 전부인 조촐한 파티였지만 그것마저도 즐거운 소녀들이었다.

짝짝!

한참 즐겁게 웃고 떠들다가 수영이 박수를 치자 자연스럽게 시선이 집중된다.

“생각해보니까 오랜만에 귀국한 윤아한테 아무 말도 안 해줬잖아? 각자 마음에 담아둔 말을 해주는 게 어때?”

“오! 괜찮은데? 어때?”

옆에 앉아있던 효연이 호응하자, 다른 멤버들도 괜찮다는 식의 반응을 보였다. 마지막까지 앉아 침묵하고 있던 수연이 입을 열었다.

“촛불 대화랑 비슷한 거 아냐?”

“아니지. 이건 우리가 윤아에게 궁금했던 걸 일방적으로 물어보는 질문이거든.”

가만히 듣고 있던 윤아는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뭔가 훈훈한 이야기가 오고가는 상황을 기대했는데 이건 영락없는 추궁 아닌가?

“자, 잠깐만요, 언니!

황급히 제지하려 했지만 이미 분위기는 기울어져 있었다.

“좋아, 재미있겠네.”

“…….”

당대 권력자 수연마저 수락하니 윤아는 뭐라 반론을 할 수 없었다.

순식간에 자신을 둘러싼 소녀들의 눈에 번뜩이는 광기를 보면서 윤아는 처신을 잘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잘못하면 난 죽어.’

“질문은 각자 하나씩 하기야.”

어느새 MC의 위치를 점한 수영.

번들거리는 눈빛에 위기를 느낀 윤아가 묻는다.

“마, 만약 묵비권을 행사하면요?”

“그럴 줄 알고 미리 다 준비해뒀지.”

히죽 웃음을 지은 수영이 눈짓하자, 효연도 마주 웃으면서 냉장고로 달려간다. 불안함이 증폭되는 걸 느낀 윤아가 바짝 얼어 있을 때, 효연이 양손에 각각 맥주와 소주병을 들고 나타난다. 뒤이어 사발을 가져오는 걸 보고는 윤아의 얼굴에 경악이 서린다.

“서, 설마…….”

“그 설마가 맞지요. 흐흐!”

“우리가 쉽게 넘어갈 거라 생각했나? 케케케!”

‘히익! 저건 살기야! 분명 살기라고!’

효연과 수영의 맞장구를 보며 극도의 공포에 사로잡혀가는 윤아. 도망고자 슬그머니 엉덩이를 내뺐지만 뒤에 묵직한 무게가 느껴졌다.

움찔한 윤아가 고개를 위로 들자, 그곳에는 유리가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서 있었다.

“흐응, 재미있겠네. 기대할게. 너도 기대되지, 윤아야?”

‘절대 아니에요!’

목구멍 끝까지 절규가 흘러나왔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선전포고를 한 이상 홀로 서기를 해야 한다. 약한 모습을 보이는 초식 동물은 잡아먹힐 뿐이다.

“기, 기대 되네요.”

“그렇지? 후후!”

“자! 특제 벌칙 폭탄 완성이오!”

그 사이 효연, 수영이 제조한 폭탄이 완성되었다. 맥주와 소주 5:5비율로 섞은 후, 콜라 몇 방울로 화룡정점을 찍은 뒤 흔들어보였다.

“자, 이제 질문을 해볼까? 질문은 어떻게 할까?”

“나이순으로 하자!”

“그래, 어린 순으로.”

“커헉!”

MC의 권위를 빼앗긴 태연이 정권 탈취를 시도했지만 수영은 입 꼬리를 말아 올리며 뭉개버린다.

“넌 안 돼, 꼬맹아.”

모든 의도를 꿰뚫고 있는 듯, 자신보다 위에 서서 머리에 손을 얹는 수영을 보며 태연의 고개가 푹 떨어졌다.

“부, 분하다!”

“자 그럼 시작하자, 막냉이부터.”

“네? 저, 저부터요?”

“그래, 세게 해도 좋으니까 묻고 싶은 거 마음껏 물어봐! 물론 윤아가 미국에 간 것에 관련된 것이어야 해.”

“알았어요.”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인 주현이 윤아를 바라본다. 효연과 수영이 주도적으로 나서는 걸 보면서 무언가 모종의 모의가 있었다는 걸 느낀 그녀다. 갑작스러웠지만 자신에게 찾아온 기회를 놓칠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강한 걸로 할 거야.’

기회가 기회인 만큼 각오를 굳게 다지는데, 그녀를 바라보는 윤아 또한 눈을 빛내며 마음을 굳혔다.

‘세게 나가야겠어.’

“언니, 그럼 질문할게요.”

“응, 얼마든지 해봐.”

“네, 우선 미국까지 가서 스케줄 소화하시느라 고생하셨어요. 가서 재미있으셨어요?”

“응, 물론 재미있었지.”

의례적인 안부 묻기로 가볍게 준비운동을 한다. 강하게 한 방 먹이기 미안해서일까? 아니면 좀 더 깊게 파고들기 위함일까? 방금 전 안부로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가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부러워요. 저도 가고 싶었는데. 그럼 제 질문은…….”

“잠깐.”

막 질문을 하려던 찰나 윤아가 손을 들어 제지한다. 주현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윤아가 입가에 미소를 띠더니 말한다.

“방금 재미있었냐고 질문했잖아? 그러니 막내는 질문 끝!”

“에,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여기 있어. 언니들, 제 말이 틀려요?”

“아, 아니.”

당돌하게 묻는 윤아의 모습에 압도된 것 마냥 모두 고개를 저었다.


“…….”

간단하게 주현을 격침시킨 윤아를 보며 소녀들은 침묵했다.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고개를 든 그녀는 자신만만한 눈으로 주변을 훑었다.

‘훗!’

입가에 저절로 지어지는 미소. 손쉽게 막내를 격파했다는 뿌듯한 마음이 온몸을 지배해나갔다.

평소 뛰어난 지략을 자랑하던 미영과 유리가 그토록 부러웠던 윤아였다. 늘 그녀들에게 당하는 입장이었던 윤아는 본격적인 선포를 하게 됨으로써 더 이상 당하는 역할을 하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하게 되었다.

그리고 미국에 가서 마왕 테일러 스위프트에게 집중 수련을 받음으로써 한 단계 성장할 수 있게 되었다.

‘나도 이제 지략 캐릭터라고! 쉽게 당하지 않아!’

눈에 힘을 주고 뒤이어 가해질 공격에 대비한다.

테일러 스위프트가 자신에게 해주었던 말이 귓가에 아른거렸다.

“넌 머리를 쓰는 타입이 아니야. 하지만 쉽게 당하지 않는 방법 정도는 가르쳐줄게. 그 정도가 네 한계야.”

‘휘둘리지만 않으면 돼. 나머지는 다 내가 이겨.’

다음으로 나서는 사람은 수영이다. 지략 캐릭터는 아니지만 만만치 않은 패기(?)를 지닌 존재. 자신과 죽이 잘 맞지만 그렇기에 조심해야 하는 존재였다.

“윤아 너 제법이다?”

“저도 쉽게 당할 생각이 없다고요.”

“그래, 그래야 재미있겠지. 후후! 재미있고 말고.”

입가에 짙은 미소를 띤 수영은 낮게 웃음을 지으며 윤아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잡아먹을 듯한 그녀의 기세에 위축되는 걸 느꼈지만 애써 태연함을 위장했다. 그녀 뒤에는 일곱 명의 야수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다. 그렇기에 정신을 바짝 차리는 게 관건이다.

“내가 할 질문은 간단해. 미국에 간 게 창현이랑 뮤직비디오 촬영 때문이잖아?”

“이거 질문이죠?”

“아니, 어허, 어디서 그런 무서운 말씀을. 나도 막내처럼 당할 수 있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창현이랑 뮤직비디오 촬영하면서 찐한 애정신이 있었어, 없었어?”

말 그대로 직구 승부였다. 모든 시선이 윤아에게 집중되었다. 그녀를 혼자 미국으로 보내고 가장 큰 불안함을 느꼈던 것이 바로 이 문제였다.

“없었어요.”

“정말이야?”

“정말이에요.”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하는 윤아의 모습에 수영이 눈을 가늘게 떴지만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 결국 포기한 수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한 발자국 물러섰다.

“진심인가 보네.”

서른세 번이나 키스신을 촬영해놓고 한 점 표정 변화가 없는 윤아.

그녀의 속은 이러했다.

‘미국에서 진한 거면 베드신 정도겠지. 키스신 정도는 일상다반사잖아? 그러니까 결코 진한 게 아니야.’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을 굳히고 감정을 숨기는 것도 능수능란해졌다.

간단하지만 가장 예민한 질문을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뒤이어 핵심을 찌르는 유리의 질문에 윤아는 노코멘트를 하며 벌주를 마셨다.

정신이 핑 도는 걸 느꼈지만 윤아는 이를 꽉 물고 참았다.

‘아직은 들키면 안 돼. 아직은 안 돼…….’

술기운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 허벅지를 꼬집으며 참아냈다.

그 다음 질문자는 효연. 앞으로 나선 그녀는 수영과 시선이 마주쳤는데, 고개를 살짝 젓자, 고개를 끄덕이며 소프트한 질문을 하고 물러선다.

질문 타임을 주도하던 두 사람이 맥없이 물러나자 그 다음 전개도 지지부진했다.

의례적이고 간단한 질문에 윤아가 모두 대답하자, 파티는 그대로 쫑났고, 뒤처리는 내일 하기로 한 채 각자 흩어져서 잠자리에 들었다.

모두가 잠든 밤, 은밀하게 회동하는 두 사람이 있었다.

바로 효연과 수영이었다.

어지러워진 거실을 주섬주섬 치우며 효연이 수영에게 묻는다.

“너무 쉽게 물러난 거 아닐까?”

“어쩔 수 없잖아. 윤아 기세가 보통이 아니었는데.”

“에휴! 그건 그렇지. 원래는 이렇게 전개되어서는 안 되는데.”

한숨을 내쉬는 효연. 눈빛으로 의사를 전달하는 걸 보면 무슨 내막이 있는 듯하였다.

“윤아도 보통이 아니야. 사람은 진화의 동물이라더니, 미영이랑 유리한테 자주 이용당하면서 스킬이 많이 늘었어.”

“이렇게 되면 우리 계획이 어긋난 거 아니야?”

“어긋나긴. 성과를 거두지 못했을 뿐이지.”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하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묻는 것이 마치 자신에게 기대는 것 같아 수영이 버럭했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내가 유리냐? 걔가 워낙 특이한 거야. 일단 상의를 해보자.”

“알았어.”

어떻게 두 사람이 손을 잡게 된 것일까.

그것은 윤아가 숙소에 도착하기 세 시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대로는 안 돼.”

윤아가 뮤직비디오 촬영을 위해 미국으로 갔다는 소식을 전해 듣자 초조함을 감추지 못한 수영은 결국 특단의 조치를 취한다.

과자를 사오겠다는 핑계로 외출 준비를 하는 수영. 그리고 짐꾼으로 쓰기 위해 태연을 상대로 장난치던 효연을 강제로 끌고 나온다. 김열살이라는 별명답게 칭얼거리는 효연을 데리고 간 곳은 과자를 사는 대형마트가 아닌 인근 커피 전문점이었다.

이해가 안 되는 목적지에 효연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묻는다.

“여긴 왜?”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나랑 손 잡자.”

“손을 잡자고? 무슨 뜻이야? 아항, 미영이 놀려주는 거? 얼마든지 협력하겠어. 나도 요즘 와룡파니 됐다고 으스대는 걸 보니 한 방 먹여주고 싶었거든. 후후!”

장난기가 번들거리는 눈빛에 수영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니야! 난 지금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거야, 김효연.”

“무슨 진지한 이야기인데?”

“창현이에 관련된 이야기야”

“으음.”

침음성이 흘러나오며 효연의 표정이 진지하게 변한다. 윤아의 선전포고 이후, 이어 터져 나온 창현의 불륜 스캔들(?) 때문에 언급이 상당히 난감해진 상태였다.

“왜 나랑 손을 잡자는 건지 이해가 안 되는데.”

한동안 침묵하던 효연이 입을 열었다. 수영이 손을 잡으려 하는 의도는 이해가 되었으나 자신과 손잡으려는 이유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간단해. 우리 둘이 후발주자라는 점 때문이야.”

“후발주자?”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가장 불리한 건 우리 둘이야. 우리 둘은 창현이가 데뷔 한 이후에 친해졌어. 이 점은 데뷔하기 전 친분을 쌓은 다른 애들에 비해서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할 거야.”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 그래서 힘을 합치자고?”

수영의 말을 듣고 의욕적인 자세를 보이는 효연. 내색하지 않았지만 그녀 또한 그 부분에 대해 일말의 불안함을 지니고 있었다.

“응, 부족한 만큼 서로 힘을 보태야지. 어때, 나의 제안이?”

“난 찬성이야. 서로 힘을 합치면 다른 애들보다 더 나을 테지.”

“우리가 다른 애들을 무찌를 때까지 동맹이야. 알았지?”

“오케이.”

그렇게 효연과 수영은 동맹을 맺게 되었다. 그리고 첫 임무는 미국에서 온 윤아를 집중 포화로 어지럽게 만든 뒤 정보를 캐내는 것! 하지만 미국물을 먹은 윤아가 상당히 강해졌기에 아쉽게도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

동맹을 맺은 뒤, 과자를 사서 숙소로 귀환한 수영은 분주히 움직였다.

과자 꾸러미와 음료수를 들고 방안으로 들어간다. 다분히 파티 전 과자를 먹으려는 행동으로 보였지만 모든 건 계획적이다.

‘3, 2, 1… 들어오겠지?’

“언니!”

아니나 다를까, 날카로운 목소리와 함께 방안으로 주현이 들어온다. 눈 꼬리를 치켜 올린 채 방안으로 들어선 그녀는 순간 멈칫하고 만다. 과자를 개봉하여 음료수와 함께 흡입(?)하고 있어야 할 수영이 너무나 이성적인 모습으로 주현을 맞이한 것이다.

“이리 앉아 봐.”

“무슨 일이에요?”

“앉으면 이야기를 해줄게.”

고개를 갸웃거린 주현은 순순히 수영의 말에 따랐다. 그리고 이어진 그녀의 이야기에 눈이 커지기 시작했다.

수영의 말은 효연에게 했던 것과 비슷했다. 자신과 동맹을 맺자는 것. 그리고 두 사람이 남을 때까지 무조건적인 협력을 하자는 식의 내용이었다.

곰곰이 생각에 잠겨있던 주현은 고민 끝에 수영의 제안을 수락했다. 혼자서 여덟 명을 상대하는 것보다 두 명이서 일곱 명을 상대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었다.

‘됐어.’

주현이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이자, 입가에 미소를 짓는 수영이었다. 창현과 가장 가까운 접점을 가진 그녀와 동맹을 맺는다면 자신에게 더 많은 찬스가 찾아올 것임이 분명했다.

‘효랭이는 아무래도 못 미더우니 보험으로 써야지.’


같은 시각, 다른 방에서도 음모의 향연이 피어나고 있었다.

“내 제안을 받아들이는 거야?”

“물론이야. 애들은 효연이 네가 접점이 낮으니 금방 포기할 거라 생각할 거야. 애들의 집중 포화를 견뎌내어 시간을 벌어준다면 만들어준다면 네게도 기회를 주겠어.”

“오오, 물론이지. 앞으로 잘 부탁한다고, 율 상병.”

“물론이야, 후후!”

수영이 주현을 찾은 것처럼 효연이 찾은 것은 바로 유리. 안무 연습 회의를 핑계로 유리를 불러들인 효연은 수영이 말했던 것을 빌려 유리에게 동맹을 제안했다. 멤버들 중 가장 귀계에 능한 그녀와 손을 잡는다면 기회가 더 많이 찾아올 거란 생각에서였다.

예상대로 유리가 제안을 받아들이자, 효연은 낮게 웃었다.

‘내가 널 본 게 몇 년인데, 쉽게 믿지 않을 거야.’


시간을 현재 시점으로 돌려보자.

효연과 수영은 회의를 하면서 더 나은 방향을 찾을 수 있었다. 접점이 낮은 두 사람이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한 사람이 희생 플레이를 펼침으로써 다른 한 명이 기회를 갖는 형식이었다.

구두상 합의가 되고, 결론이 도출되자, 수영이 밝은 표정을 지었다.

“역시! 효연이 너와 함께 하니까 완전 잘풀리는데?”

“나도 그런 것 같아. 오오! 우리 둘이 천생연분?”

“앞으로도 쭉 가자!”

“좋지!”

밝은 표정으로 악수를 하며 영원한 동맹을 맹세하는 두 사람.

하지만 그 속내는 각각 달랐다.

‘흥! 수영이 널 본 게 몇 년인데, 먹을 것도 아니고 남자 문제를 믿으라고? 뿡이다.’

‘김열살을 완전히 신뢰할 수 없지. 협력하더라도 결정적인 순간에 뒤통수를 칠 게 분명해.’

서로에 대해 너무 잘 알아서 문제였다.


창현의 귀국은 극비리에 이루어졌다. 철통 보안을 위해 미국 활동을 다 마친 뒤, 곧바로 출국할 수 있게 조치를 취했다. 혹시나 말이 새어나가는 것을 위해 주변 사람을 먼저 출국 시킨 뒤 창현 홀로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2중 3중 수준이 아니라 거의 10중에 달하는 연막을 쳐놓았기에 누구도 창현의 귀국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기자라는 귀찮은 짐을 덜 수 있었지만 그에 대한 반대급부도 존재했다. 여태까지 다른 사람과 함께 돌아온 경우가 많았기에 혼자서 장거리 비행을 하는 것은 무척 어색했다.

“그러고 보니 주현 누나 졸업식 때 혼자 왔었지.”

예전 기억을 떠올리며 창현은 미소 지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무리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강행군을 펼쳐 졸업식에 참여했다. 무리라고 생각했지만 주현을 비롯하여 졸업생들의 환호성은 여전히 귓가에 아른거렸다.

“환호해주는 사람이 있기에 내가 있는 거겠지. 에휴!”

새삼 자신의 무대에 환호해주는 팬들이 존재한다는 걸 생각하자 미소가 지어지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한 창현이었다.

자신이 그토록 힘들어할 때 음향총서를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지금 생각하면 등골이 서늘할 정도로 무서운 순간이었다.

“돌아가면 무엇을 해야 하나.”

대략적인 틀은 잡혀 있지만 세세한 일정은 잡아두지 않았기에 창현은 부지런히 머리를 굴렸다. 돌아가면 곧장 석규를 보게 될 것이고, 향후 일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될 것이 분명하다. 사적으로 아버지이지만 공적으로 소속사 사장이기에 석규는 창현의 휴식을 최소화 한 뒤 곧바로 앨범 작업에 착수하길 바랄 것이다.

여기에서 창현은 아버지인 석규와 협상을 벌여야 하는 위치에 서게 된다.

‘대중성에 초점을 둔 앨범을 내보았으니 이젠 다른 걸 내보고 싶은데.’

인지도를 얻어 탄탄한 팬 층을 확보해두는 점이 이럴 때 좋다. 그가 내놓은 작품을 통해 작품 자체가 아닌 창작자 자체를 좋아하게 됨으로써 그의 작품을 모두 좋아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대중성에 맞춘 앨범을 발매했던 창현으로서는 또 다른 시도를 해보고 싶은 마음에 부풀어 있었다.

‘일단 차근차근 구상만 해두자.’

한국에 돌아가면 머리 아픈 일은 충분히 있으니 비행기 안에서라도 편히 휴식을 취하고 싶었다.


사방으로 덫을 쳐놓아 관심을 따돌려놓은 탓인지 공항을 벗어나는 창현을 맞이하는 기자는 없었다. 훤칠한 라인과 가려도 드러날 수밖에 없는 이목구비 라인 덕분에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끌었지만 재빠르게 움직인 탓에 그를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회사에서 준비한 차에 탑승한 그는 곧바로 AA엔터테인먼트로 향했다. 그를 가장 먼저 맞이한 것은 역시나 아버지인 석규였다.

“어서 와라.”

“네, 오랜만에 뵈어요.”

“오랜만은 무슨 그래, 미국 스케줄은 잘 했고?”

“저야 잘 했죠. 특별히 어려운 것도 없었고요.”

“특별히 어려운 것이 없었다고? 후후! 그랬던 것이로군.”

입가에 묘한 미소를 띠는 것이 불길한 느낌을 물씬 풍겼지만 창현은 억지로 티를 내지 않았다. 여기에서 틈을 보이면 단숨에 물어 뜯겨 놀림거리로 전락하게 될 것임이 분명했다.

“그랬던 거죠.”

“흐음, 너무 빈번하게 놀렸나? 걸려들지를 않는군. 뭐 좋아, 스케줄을 잘 해냈다니 나로서도 만족이다. 오랜만에 돌아왔으니 휴식을 취하는 것이 좋을 듯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저야 좋죠. 안 그래도 편히 휴식을 취하면서 다음 앨범에 대한 구상을 하고 싶었으니까요.”

“좋다, 그 정도면 충분하겠지. 그 부분에 대해서는 다른 말을 안 하마.”

“정말인가요?”

예상을 벗어나는 말에 창현의 얼굴에 의외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그의 모습에 석규는 아직 어린애라는 느낌을 받으며 피식 미소를 지었다.

“정말이다마다. 미국에서 활동했으니 다음 무대는 국내 아니겠느냐. 여기에서 네 활동을 재촉해봤자 미국에서 벌어들이는 것보다 못하다. 차라리 푹 쉬고 확실한 작품이 나오는 걸 기다리는 게 더 이득이겠지. 대신 무한정 쉬게 할 수는 없다. 어느 정도 쉬고 싶으냐?”

“짧으면 한 달에서 늦으면 세 달까지 생각하고 있어요. 그 정도는 쉬고 구상을 쌓아둔 다음에 작업에 들어가야 할 것 같거든요. 빠르면 초여름에서 늦으면 가을쯤이 될 것 같네요.”

“가을이라, 어차피 네가 앨범을 냈을 때가 그때즈음이니 나쁠 것은 없겠군. 모든 스케줄을 최소화하되 그 기간 동안 예능 프로그램 한두 개 정도와 CF 출연 정도를 하는 것으로 하지.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 정도면 제 휴식에도 방해가 될 것 같지 않네요.”

일종의 타협이었다. 석규가 자신의 의견을 존중해준 만큼 창현 또한 그의 생각을 존중하였다. 신비주의보다 고급화 전략을 사용하는 만큼 자주 얼굴을 비추지 않더라도 꾸준히 비출 필요는 있었다.

“그렇게 알고 있도록 하지.”

“…저기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어떤 거냐?”

“제가 미국에서 촬영한 뮤직비디오에 관련된 내용이요. 그거 파장이 만만치 않을 것 같은데 달리 생각이 있으신가요?”

“뭐? 하하!”

걱정 어린 창현의 물음에 석규는 웃음을 터뜨렸다. 의연한 그의 태도에 모든 각오를 마친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라 애써 태연을 가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불퉁하게 변하는 창현을 보며 웃음을 그친 석규는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하하, 미안하다. 그래,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고?”

“네, 솔직히 궁금해서요. 파장이 만만치 않을 것 같은데.”

“음! 네가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을 테지. 세계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너와 현재 대한민국에서 탑클래스에 올라선 여자 아이돌, 그것도 얼굴 마담이라 불리는 아이와 진한 키스신이 담긴 뮤직비디오를 촬영했으니 말이야.”

“…….”

“신나게 떠들면 이렇게 말해주고 싶구나. “어쩌라고?” 라고.”

“네?”

무언가 타개책이 존재하리라 생각하던 석규의 입에서 대책 없는 말이 흘러나오자 창현은 황당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럴 듯한 방법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막나가자는 식이 아니던가.

“그래서 걔들이 어쩔 수 있는데? 이미 벌어진 일 가지고 뭐라 하는 건 마음에 들지 않아. 어차피 미국에서 활동하게 되면 그 정도는 기본이라 할 정도로 더 진한 애정신이 있을 거다. 그 정도도 생각 안해봤나?”

“생각은 했지만 아직 제 나이도 있고 그러니까…….”

“네가 어린 건 알고 있긴 있구나? 이 애늙은이.”

말끝을 흐리는 창현을 보며 석규가 피식했다. 그에 미간을 지그시 모으며 똑바로 응시한 채 진지하게 말했다.

“전 장난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고요.”

“장난이 아니라면 나도 진심으로 말해줘야겠지. 잔인한 말이겠지만 사태가 벌어지면 다급해지는 것은 우리가 아니다. 바로 SM엔터테인먼트지. 그곳에서 알아서 행동을 할 것이고, 우리는 그것에 장단만 맞춰주기만 하면 되는 거다.”

“손해 보는 게 그쪽이라고요?”

“우리나라는 원래 이런 쪽에 있어서는 여자가 더 피해를 보는 법이지. 아니라 말할 수 있느냐?”

“…….”

할 말이 궁해진 창현은 침묵을 지켰다. 그의 말마따나 깊은 애정신이 들어가면 손해를 보는 것은 여성 측이지 남성 측이 아니다. 더군다나 창현의 인기는 세계적인 수준이기에 그 파장은 더욱 클 터였다.

‘이거 괜히 미안해지네.’

입맛이 쓴 창현이었다.

“그럼 가만히 있을 생각이신가요?”

“일단은 그래야겠지. 괜히 저쪽에 나서기 전에 이쪽에서 어설프게 나서면 이도 저도 아니게 되지 않겠느냐. 게다가 언론 플레이도 우리보다 저쪽이 더 잘하니 우리는 가만히 있다가 맞장구 쳐주는 방향으로 가는 게 옳겠지. 아마 그쪽도 그러길 바랄 테고.”

“어렵네요, 어른들의 세계란.”

“어렵지. 그리고 더럽기도 하고. 사적으로 친하더라도 공적으로 냉정해져야 하는 것이 바로 어른들의 세계다. 너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알아둬야 할 것이다.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때로는 더 큰 화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네 명심할게요.”

입국하자마자 필요한 걸 하나 배운 느낌이었다. 창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만족의 미소를 지은 석규가 소파에 몸을 묻었다.

“그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를 마쳤으니 돌아가 쉬도록 하여라. 아직 일이 끝나지 않아서 손을 봐야 할 게 많이 남아 있거든. 너도 귀국해서 몸이 피곤할 테니 좀 쉬도록 해라.”

“그렇게 할게요. 그럼 일 보세요.”

“그래.”

자리에서 일어난 창현이 고개를 숙인 뒤 사장실을 벗어났다. 회사를 나선 그는 매니저의 벤을 타고 곧장 녹음실로 향했다. 팬들에게 위치가 알려진 숙소보다 아직까지 다른 사람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은 녹음실에서 푹 쉬고 싶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녹음실에 도착한 창현은 먼지 한 톨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관리는 깔끔하게 잘 했네.”

기본적으로 생활할 공간이 모두 준비되어 있기에 간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소파에 누웠다. 침대 부럽지 않은 푹신함을 만끽하며 눈을 감은 그의 머릿속을 지배하는 것은 다음 앨범에 대한 구상이었다.

“편하게 살아가기는 글러버린 것 같군. 이건 뭐 계속 앨범에 관한 생각밖에 나질 않으니.”

기본적인 구상을 해놓은 상황이지만 말 그대로 뼈대만 세워놓았을 뿐 살을 붙이는 것은 단 하나도 해놓지 않은 상태였다. 꽤 오래 전에 4집 앨범을 발매하면서 곡 작업에 대한 일을 미뤄두게 되자 당장이라도 곡 작업에 몰두하고 싶을 만큼 일에 목이 마른 상황이었다.

“몸이 피곤해야 잡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것도 싫고.”

곡에 대한 모든 생각은 자신에게 있어 소중한 것이다. 사소한 잡생각 하나에서 찰나의 깨달음을 머금고 있기에 일상생활에서 얻는 영감은 버리기 힘든 것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창현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고 결정을 내린다.

“좋아, 한 번 일을 저질러보자. 이럴 땐 생소한 경험도 하나의 자극이 되어주는 법이지. 운이 좋으면 좋은 영감을 얻을 수도 있을 테고.”

모자를 쓴 창현은 노트와 펜을 들고 녹음실을 나섰다. 자신만 존재하는 정적인 공간보다 사람들이 많은 동적인 공간에 스스로를 놓아둠으로써 새로운 자극을 받아보려는 생각이었다.

그가 향한 곳은 녹음실에서 불과 5분여 거리 떨어진 커피숍이었다. 내심 자신의 정체가 들키면 어떻게 할지 고민하면서 한편으로는 들킬 경우 벌어질 곤란함에 스릴을 느끼며 생과일주스를 주문했다. 다행히 들키지 않았지만 괜히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것 같아 가슴이 조마조마하게 변하는 걸 느꼈다.

자리를 잡고 앉은 창현은 밖의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며 이따금 생과일주스를 한 모금씩 마셨다. 사람들 사이에 떡하니 모습을 드러낸 긴장감과 생소한 환경에 대한 이질감이 그로 하여금 새로운 자극을 느끼게 하였다.

“이런 것도 나쁘지 않은데?”

세상과 자신이 괴리된 듯한 기분은 그에게 한 줄기 영감을 가져다주었다.

흐릿한 눈으로 밖을 응시하던 그의 눈동자가 또렷하게 변하더니 챙겨온 노트에 무언가를 미친 듯이 적기 시작한다. 커피숍에는 요즘 유행하는 노래가 울려 퍼지고 있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온전히 그만의 노래가 새로 정립되어 한편의 음악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빠른 속도로 떠오른 영감을 노트에 옮기는 작업을 하던 창현은 마무리까지 끝낸 뒤 고개를 들었다. 그의 입가에는 만족의 미소가 진하게 걸려 있었다.

“역시 내 선택은 틀리지 않았어.”

즉흥적인 행동 하나로 곡 하나를 만들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합리적인 선택인가. 귀국으로 지쳐 있던 몸과 세상과 나의 괴리감이 새로운 자극을 줌으로써 얻게 된 곡은 창현의 마음을 흡족케 하였다.

“응?”

주변에 신경 쓸 여력이 없던 창현은 자신의 옆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는 두 사람의 인기척을 느끼고는 몸이 석고상처럼 굳었다. 커피숍 구석에 위치한 자신의 자리까지 찾아올 정도라면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해나갔다.

‘어떻게 해야 하지?’

‘모른 척을 해야 하나?’

‘비밀로 해달라고 하고 간단하게 팬 서비스를 해드릴까?’

어떤 것이 정답인지 선뜻 떠오르지 않았고 설마 자신을 알아볼까 싶어 여유를 부렸던 것이 후회가 되기도 하였다. 여러 생각이 교차하는 가운데 창현의 고개가 돌아갔고, 옆에 서 있는 두 여인을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창현의 얼굴을 본 두 여인의 눈도 순간 커졌다가 이내 원래대로 돌아오며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두 여인 중 키가 작은 여인이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안녕, 창현아? 우연이네.”

인사를 건네는 여인은 다름 아닌 효연이었다. 그 옆에 서 있는 사람은 수영이었다.


두 사람이 커피숍으로 오게 된 것은 지극히 우연에 비롯된 일이다. 연합 전선을 구축한 두 사람은 후발주자로서 다른 멤버들을 따돌리고 우위에 설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힘을 모으는 방법을 취했지만 서로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는 나머지 보험을 들어두는 방법을 취했다. 그러면서 겉으로 티를 내지 않은 채 돈독한 동맹을 다지겠답시고 간식거리를 구입하기 위해 함께 나온 상황이다.

“일단 접점을 늘리는 게 급선무야.”

선언하듯 강하게 말하는 수영이었다. 후발주자인 그녀들이 가장 부족한 것은 지난 시간 동안 쌓아온 친분이었다. 데뷔 전부터 창현을 알아온 다른 멤버들은 그녀들과 비교해 몇 발자국 앞서 있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 접점을 어떻게 늘릴 생각인데?”

“그러게 말이야. 나도 그걸 잘 모르겠네.”

“뭐야? 그것도 생각해보지 않은 채 접점 늘리자고 한 거야?”

“그럼 나보고 어쩌라고! 내가 띨파니나 깝율도 아닌데.”

효연의 타박에 수영이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버럭 외쳤다. 서로가 필요에 의해 연합 전선을 구축했지만 결정적으로 상황을 예측하고 계획해나가는 부분이 부족했다. 그녀의 외침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효연이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말했다.

“소리를 지르지 말고 방법을 연구해보자고. 우리 둘이 힘을 합치면 걔네들 정도는 감당할 수 있을 거 아냐?”

“으으, 내가 언제부터 걔네들보다 부족하게 된 거지? 크으윽!”

띨띨함의 대명사와도 같던 미영과 깝치기의 정석을 보여주던 유리에게 두뇌 게임에서 밀리게 되자 자괴감이 이만저만이 아닌 수영이었다. 인정하기 싫은 사실이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 그 사실이 더욱 현실감 있게 다가왔기에 자괴감은 더욱 컸다.

“에휴! 그러게 말이야. 옛날에 돌연변이들이 왜 살아남았는지 알 것 같다. 그 돌연변이들. 최근에는 윤아도 돌연변이가 되는 것 같던데.”

“그러니까 빨리 방법을 강구하자고. 우리가 하는 건 멤버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니까.”

“그렇지. 그래야겠어.”

멤버들의 돌연변이화를 막겠다는 말도 안 되는 자기합리화를 펼치며 두 사람이 상가에 도착했을 무렵이다.

접점을 늘려야 한다면서 웅얼거리던 수영과 달리 주변을 휘휘 둘러보던 효연은 어느 한 곳에 시선을 고정하더니 눈이 커지기 시작했다.

“어, 어어?”

“왜 그래, 못 볼 거 본 것처럼?”

“저기 저거 창현이 아냐?”

“뭐?”

2층 창가를 가리키며 효연이 말하자 놀란 표정을 지은 수영도 고개를 들어 시선을 옮겼다. 그곳에는 모자를 눌러쓴 소년이 분주히 펜을 놀리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슬쩍 드러난 옆태가 보통 외모가 아니란 걸 느끼게 하였지만 창현이라 확신하기에는 미진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창현이 맞아? 아닐 것 같은데.”

“맞을 것 같아. 내 감은 그렇게 외치고 있어.”

“그놈의 감은 무슨. 창현이가 귀국했다는 기사가 뜬 적은 없었다고.”

“너 바보냐? 창현이가 귀국하겠다고 하면 기자들이 우르르 공항에 몰려갈 것이 분명한데 그 사실을 왜 말하냐? 당연히 조용히 귀국하는 방법을 선택하겠지. 게다가 이곳은 창현이가 살고 있는 곳이라고. 멀지 않은 곳이 녹음실도 있겠다, 닮은 꼴이면 창현이가 유력하지 않겠어?”

“그, 그렇긴 하지.”

논리정연한 효연의 말에 수영은 더듬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평소 윤아와 더불이 초딩 캐릭터를 지니고 있던 그녀의 갑작스러운 변화는 적응하기 힘든 것이었다.

‘설마 이것도 돌연변이로 진화하는 건 아닐 테지?’

그렇게 생각하니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이 느껴졌다.

불확실한 사실을 가진 채 커피숍으로 올라간 두 사람은 창현으로 추정되는 소년이 앉아있는 구석진 자리로 향했다.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두 여인은 모자를 푹 눌러쓴 소년이 창현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평범한 사람이 도저히 낼 수 없는 그만의 아우라는 물론, 공책에 빠른 속도로 채워지는 악보의 향연은 노래를 듣지 않음에도 무엇을 의미하는지 파악될 정도로 진한 의미가 풍겼다.

두 여인은 경건하기까지 한 그의 작업을 조용히 지켜보기만 하였다.

작업을 끝마친 듯 펜을 놓은 창현은 이쪽을 보았는지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였다. 방금 전까지만 하여도 범접하기 힘든 그의 모습과 다른 빈틈 많은 모습에 두 여인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안녕, 창현아? 우연이네.”

“아, 안녕하세요. 누나였네요.”

놀란 표정을 짓던 창현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효연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잠깐 앉아도 될까?”

“네, 앉으세요. 그런데 이곳에는 어떻게 오셨어요?”

“우연히 지나치다가 봤어. 널 닮은 사람이 있어서 왔다가 워낙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것 같아서 방해도 못하고 조용히 서 있었지.”

“그래요? 그건 잘 하셨어요. 그런데 제가 기다리게 했으면 그냥 돌아가시지 그러셨어요. 기다려주지 않으셔도 되는데요.”

“에이, 이렇게 봤는데 그냥 보내는 것도 그렇지.”

너스레를 떨며 자연스럽게 창현의 맞은편에 앉는 효연이었다. 능수능란하게 상황을 주도하는 그녀의 행동에 수영은 얼떨떨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옆에 앉았다.

“누나들도 차 한 잔 하세요.”

“응? 그럴까. 목이 별로 마르지 않았는데 갑자기 작업하는 걸 보니 목이 마르네.”

“제가 작업하는 건 왜요?”

“그렇게 열정적으로 하면 이쪽도 가만히 있을 수 없잖아. 세계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가수는 역시 다르단 말이야. 국내에서 인기 좀 있다고 느슨해지려는 걸 다잡게 되는 것 같아. 그 점이 참 고마워.”

“하하하, 그렇게 봐주시니 저도 좋네요.”

“뭘, 사실인데.”

웃음을 짓는 창현에게 쿨하게 대응하는 모습은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대화의 주도권을 놓치게 된 수영은 효연이 눈부신 속도로 창현과 대화 나누는 모습을 보자 소외감과 동시에 위기감이 들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자신이 뒤처질 수 있다는 생각에 효연의 팔을 잡아끌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맹 관계이기는 해도 자신보다 한참 앞서나가는 것은 사양이었다.

“그럼 우리는 차를 주문하고 올게.”

“네, 그러세요.”

자리에서 일어난 두 여인은 카운터에서 주문을 한 뒤 간단히 말을 주고받았다.

“너 뭐야?”

“뭐가?”

“후발주자니 뭐니 해서 어색한 줄 알았는데 대화하는 걸 보니 장난이 아니잖아.”

“그 정도면 아직 부족한 수준이지 뭐. 더 친해져야 뭐라도 해볼 수 있지 않겠어? 아직 부족해, 아주 많이.”

“…….”

있는 놈이 더하다는 말이 새삼 실감나는 수영이었다. 동맹 관계를 구축하면서 자신과 비슷한 관계라 생각했던 그녀는 한참이나 앞서나가려는 효연의 행동에 애가 닳았다.

‘이대로는 안 돼.’

지금 상황이 지속되면 자신은 효연의 영양분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생각에 수영은 특단의 조치를 내리기로 결정을 내리고 눈을 빛냈다. 효연은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난 화장실 좀 들렸다 갈게. 내 것도 좀 같이 갖다 놓아줘.”

“그러지 뭐.”

수영이 사라지면 자신이 창현과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난다는 뜻일 터. 효연은 순순히 봉사를 가장한 단독 찬스를 획득했다.

‘네가 수작을 부려도 나한테는 안 돼.’

주도권을 내주고 초조해하는 수영의 모습을 발견한 효연은 코웃음을 쳤다.

동맹 관계였지만 그녀들도 어디까지나 적을 물리치기 위해 적과의 동침을 하는 중이었다.


효연의 주도 하에 이루어지던 일방적인 분위기는 한 사람의 등장으로 인하여 송두리째 흔들렸다. 한참 동안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던 효연의 귓가에 들려서는 안될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창현이?”

“에? 주현 누나?”

놀라움이 가득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창현의 얼굴에 놀라움과 반가움이 동시에 서렸다. 책 여러 권을 품에 든 주현이 눈을 동그랗게 든 채 창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는 어떻게?”

“책 읽으려고 왔어. 가끔씩 여기 와서 책을 읽거든. 여기 자주 앉는데 사람이 앉아 있어서 누구인지 살짝 보려고 했는데 여기 있었네.”

“그래요? 이런 우연이.”

“그러게, 우리 첫 만남부터 해서 참 인연이 많은 것 같아.”

싱글벙글 미소 지으며 주현이 말하자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효연의 미간이 지그시 모아진다. 묘한 미소를 짓고 있던 수영의 표정도 살며시 굳어갔다.

“생각해보면 인연이 많았죠. 아, 여기 앉으세요.”

주현이 다가오자, 창현은 비어있는 자신의 옆자리를 가리켰다. 자연스럽게 옆자리에 착석하자 졸지에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신세가 되어버린 두 여인의 표정은 더더욱 좋지 않게 변한다.

“고마워.”

책이 든 가방을 옆에 내려놓으며 주현은 수영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보였다. 그녀의 행동에 수영은 얼음이 되어버렸고, 진의를 알아차린 효연의 눈이 쭉 찢어지더니 매서운 눈으로 노려보다가 창현의 시선을 느끼고는 재빨리 표정을 바로 하였다.

“언제 돌아온 거야?”

“오늘이요. 회사에 들렸다가 녹음실에 돌아와서 잠깐 기분 전환 겸 들렸던 거예요.”

“그럼 말하지 그랬어, 우리라도 환영해주었을 텐데.”

“하하! 미안해요. 경황이 없었고 오늘은 좀 쉬고 싶었거든요. 어쩌다 보니 우연이 닿아 이렇게 만나게 되었지만요. 인연은 인연인가 봐요.”

“미안하긴, 푹 쉬어야 하는 걸 붙잡는 것 같아서 이쪽이 미안한 걸. 인연은 확실히 인연인 것 같아. 비록 다른 사람이 만들어준 인연이라고 해도 그게 어디겠어? 후훗!”

주현의 말이 이어질수록 효연의 표정이 날카로워졌고 수영의 얼굴은 흙빛으로 변해갔다.

영문을 모르는 창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말이에요?”

“아무것도 아니야. 그런 일이 있어서 한 말이야. 오늘 귀국했으면 많이 피곤하겠네?”

“음, 그렇겠죠? 피곤한 것 같긴 해도 좋은 일이 있어서 그런지 전혀 피곤이 느껴지지 않네요.”

“좋은 일? 무슨 일인지 물어봐도 돼?”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묻자, 창현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여기서 좋은 영감을 얻어서 한 곡 뽑아낼 수 있었거든요. 다음 앨범을 어떻게 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많은 도움이 된 것 같아 기분이 좋네요.”

“정말? 잘 됐다! 축하해! 아무래도 이 자리에 앉아서 그런 것 같아. 나도 책을 읽을 때 여기서 읽으면 집중이 잘 되더라고.”

“고마워요.”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이었다. 이미 대화의 주도권은 주현에게 넘어간 지 오래였고, 졸지에 겉절이로 전락한 효연과 수영은 멍한 표정으로 막내의 반란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너 이렇게 나오기지?’

‘내가 뭘?’

‘막내를 끌어들여놓고 발뺌하기지? 네가 신의 관계를 지키지 않고 술수를 부린다면 내게도 방법이 있어.’

‘아! 나도 몰라! 막내가 저렇게 할 줄 누가 알았냐. 나도 모르겠으니까 배 째!’

‘째라고? 좋아, 째주지!’

자고로 외세를 끌어들인 국가의 운명은 비참하기 그지없었다. 효연이라는 내부의 강력한 적을 제거하고자 외부의 강력한 구원군을 투입하였지만 그 구원군은 검은 속내를 감춘 여우였다.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나오는 수영의 행동에 발끈한 효연은 협종연횡이고 자시고 동맹관계를 잊어버린 채 곧바로 핸드폰으로 연락을 시도했다.

“여보세요, 유리야?”

“……!”

수영과 주현이 몸에 경기를 일으키며 효연을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은 채 순식간에 말을 이어나갔다.

“지금 시간 있지? 음, 있어야 할 거야. 지금 내가 창현이랑 같이 있거든. 어, 여기 어디냐고? 숙소 앞에 커피숍 있지. 거기로 오면 돼. 응, 빨리 와.”

탁!

쿨하게 핸드폰을 닫은 효연은 경악의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두 여인에게 히죽 웃음을 지어보였다.

이곳은 곧 전쟁터가 될 것이다.

/

효연의 콜을 받은 유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커피숍에 도착했다. 주현의 주도 하에 이루어지던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채 커피숍 안은 폭풍전야처럼 고요함이 감돌고 있었다.

커피숍 안으로 들어선 유리는 기이한 분위기에 움찔했지만 창현을 비롯한 세 여인의 대립 구도를 보고는 단번에 상황 파악을 한 듯 입가에 묘한 미소를 띠며 인사를 건넸다. 숙소에서는 깝율이지만 이곳에서는 모든 상황을 주재하는 불세출 지략가 사마율이자 남자를 단번에 홀려버릴 매혹적인 서큐버스 조신율이다.

“어머! 정말 창현이가 있네? 잘 지냈어?”

“네, 저야 잘 지냈죠, 누나는 질 지내셨어요?”

“나야 늘 잘 지냈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도 더 멋있어졌는걸?”

“누나도요.”

“그래? 빈말이라도 고맙네.”

“빈말일 리가 없잖아요.”

방금 만났건만 자연스럽게 대화의 물꼬를 트는 두 사람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네 사람의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 틈을 교묘하게 파악한 유리의 공세가 주효한 셈이다.

졸지에 망부석이 되어버린 세 여인은 이를 부득 갈 뿐이다.

‘불러놨더니 지 혼자 희희낙락거리기냐?’

‘저걸 그냥…….’

‘언니, 그렇게 노골적으로 나오면 모난 돌이 정 맞을뿐이에요.’

세 여인의 불타는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리는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이야기를 나눴지만 상황을 어떻게 주도해야 할지 면밀히 지켜보고 있었다.

‘이거 힘든데.’

세 명의 적의가 뚜렷할 정도로 느껴지고 있었기에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하고 창현과 더 돈독한 친목을 쌓을지 고민했다.

‘나야 선택의 폭이 넓지만 이 기회는 좀 아깝지.’

여덟 명의 공적이 동시에 생겨났으니 창현을 만나는 기회가 흔치 않았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어머님(?)을 공략함으로써 돈독한 반석을 깔아놓은 유리였지만 이 기회를 통해 경쟁자들에게 자신의 우월함을 백일하에 증명해보고 싶은 욕심이 들었다.

‘물론 날 불러준 효연이한테 지분 좀 나눠주고.’

그러면서 궁리에 궁리를 거듭했지만 선뜻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창현 옆에는 주현이 앉아 있어 철벽 방어 수준을 자랑하고 있었으며 효연과 수영은 저쪽에서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는 중이다.

애매한 위치에 서한 유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렸다.

그녀의 고민을 알아차리기라도 한듯 창현이 제안을 해온다.

“다섯 명이 앉기에는 좀 모자란 것 같은데 일어설까요?”

“버, 벌써?”

옆에 앉아 우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주현이 안타까움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히죽 웃음을 지은 창현이 은근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이대로 헤어지기는 좀 아쉽나 봐요?”

“응? 아, 으응, 아무래도 그렇지.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는 일이고…….”

“그렇죠? 안 그래도 저도 그렇게 생각하던 차에요. 그래서 그런데, 제 녹음실에 가지 않으시겠어요?”

“녹음실에?”

뜻밖의 제안에 네 여인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상황을 도모하고자 하였던 유리마저도 의외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리둥절하는 그녀들을 보며 창현은 손에 쥐고 있는 노트를 보여주었다.

“제가 방금 곡 하나를 완성했거든요. 마침 들어보고 감상평을 말해줄 분이 필요해서요. 어때요?”

네 여인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서로가 서로를 견제해야 하는 입장이지만 지금만큼은 모두가 한 마음 한 뜻으로 뭉쳤다.

“우리야 좋지!”

“좋아요, 그럼 가도록 하죠. 아참, 기왕이면 다른 누나들도 부르는 건 어때요? 바쁘지 않을까요?”

다시 허공에서 마주하는 네 쌍의 시선.

바쁘냐고? 평소라면 바빴겠지만 오늘은 모처럼 쉬는 날이어서 숙소에서 빈둥거리며 TV나 보고 있을 것임이 분명했다.

부른다면 당장 올 멤버들이었지만 탐스러운 먹이(?)를 눈앞에 두고 맹수를 불러들일 만큼 그녀들은 어리석지 않았다.

혼자서 먹어도 부족할 판에 적 세 명과 경합을 벌여야 하는 입장 아닌가.

그녀들은 다시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창현에게 외쳤다.

“걔네들 바빠!”

일단 다섯 명을 떨어뜨려놓고 경쟁을 벌일 생각이다.


“여긴 여전하네.”

“관리가 잘 되었어.”

“좋은데?”

쏜살같이 녹음실 안으로 들어와 두리번거리는 세 악동 언니들을 보며 한숨을 길게 내쉰 주현이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아휴! 언니들, 그렇게 후다닥 안으로 들어가면 어떻게 해요. 실례하겠습니다.”

“실례하기는, 아무도 없는데.”

“그래도 주인이 여기 있잖아요.”

주현의 시선이 창현에게 향하자 세 여인도 긴장했다. 경쟁자를 떨어뜨리고 1차 관문에 입성했다는 쾌감에 잠시 넋을 놓고 있었다.

“음, 저렇게 발랄한 모습도 나름대로 볼 만하겠네요. 하지만 카메라가 있을 때는 그러시면 안 됩니다. 알겠죠?”

“응!”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은 채 말하자 긴장이 풀린 그녀들은 하나가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그녀들을 꾸짖는 포지션이었던 주현만이 안타까운 한숨을 내쉴 따름이었다.

“하아.”

“걱정하지 마세요. 누나들도 이제 성인인데 설마 아직도 초등학생처럼 장난을 치고 다니겠어요.”

의젓한 막내인 주현이 속앓이 하는 게 못내 걱정이 되었는지 창현이 위로의 말을 건넸지만 그 말 그대로 행동하고 있는 언니들을 보아오고 있는 그녀로서는 평소 행실을 낱낱이 고하고 싶은 충동에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자신을 매섭게 노려보며 경고하니 나오려던 말도 쏙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으응, 그렇지.”

“그렇죠? 하하!”

“…….”

언니들의 실체에 대해 모른 채 마냥 좋게 생각하는 창현이가 안쓰러운 주현이다. 아울러 언니들의 가증스러운 내숭은 그녀로 하여금 더욱 굳게 마음을 먹게 하였다.

‘내가 아니면 언니들의 이중적인 모습에서 창현이를 구해낼 수 없어!’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었지만 그녀는 자신의 사랑스러운 후배인 창현을 구해내기 위해서는 자신이 분발하는 수밖에 없다 생각하였다.

문제는 다른 멤버들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창현을 노리는 악독한 여인들에게서 구해내겠다는 발칙한 생각!

이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늑대 앞 먹음직한 초식동물이 되어버린 그는 구석에 놓여있던 기타를 가지고 온 뒤 조율을 마치고 자리를 잡으며 말했다.

“기타 조율도 끝났으니 한 번 들어보시겠어요?”

서로 견제하는 것도 잠깐이었다.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우르르 몰려든 그녀들은 소파에 다소곳이 앉아 창현의 연주가 시작되길 기다린다.

맞은편 의자에 앉은 창현이 세심하게 기타줄을 만지고 있자, 그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휘어잡는 치명적인 마력을 내뿜고 있었다.

‘멋있어.’

어쩜 행동하는 것 하나하나가 모두 화보와도 같을까.

고개를 숙인 채 살짝 눈을 감고 기타줄을 튕기는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보지 못했던 몽환적이고 따뜻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화악.

“가, 갑자기 덥네.”

가장 냉정한 이성을 가지고 있다 자부하던 유리조차 창현의 모습을 보고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손부채로 열을 식히고자 하였다. 보통 이럴 때는 고개를 돌려 외면할 법도 하였지만 그녀의 시선은 끝까지 창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이런 실시간 화보를 놓치는 것은 바보나 하는 짓이다.

주변을 슬쩍 둘러보니 다른 멤버들도 비슷한 반응이었다.

‘칫, 지금 같은 구도만 아니었으면 가장 독주하는 건 나였는데.’

혀를 차보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기에 상황을 되돌릴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아쉬움 가득한 표정으로 효연을 바라보며 입 꼬리를 말아 올렸다.

‘내가 먼저 움직이지 않아도 스스로 움직여줄 효랭이가 있으니까.’

묘한 빛이 담긴 눈으로 바라보니, 효연이 눈에 힘을 팍 주고 유리를 노려보았다. 창현과 함께 하는 지금 이 시간이 즐거웠지만 예상치 못한 방해자들의 등장은 그로서도 달갑지 않았다.

‘특히 유리랑 막내.’

수영이 주현을 부르는 바람에 맞불 작전을 놓게 되었지만 결과적으로 최악의 한 수가 되어버린 순간이다. 그녀도 그것을 느끼고 있는지 미간을 지그시 모으고 있다가 효연의 시선을 받고는 고개를 돌려 눈을 마주하더니 나직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지 않아도 뜻이 통한 것!

서로가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있다 보니 보험을 들어놓았다가 된통 당해버린 셈이다.

‘우린 할 이야기가 더 있지?’

‘거절하지 않겠어.’

불러들인 외세(유리, 주현)에게 주도권을 빼앗긴 것을 절절히 느끼고 있었기에 두 사람은 심각한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눈빛으로 두 사람이 모종의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창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시작할게요.”

“…….”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눈을 빛내며 어서 창현의 연주가 시작되길 기다릴 뿐이었다.

집중력을 끌어 올리는 그녀들을 보며 미소 지은 창현은 방금 전 완성한 곡을 천천히 연주하기 시작한다.

‘고립’이라는 가제를 붙인 이 노래는 세상과 나의 단절을 뜻하며 청소년기 한 번쯤 겪었던 방황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살아가며 자아정체성을 성립할 때 누구나 한 번쯤 ‘내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그 속에서 세상과 나의 관계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답을 구하며 걷잡을 수 없는 심리적 방황을 겪게 된다.

세상과 나 사이에 존재하는 괴리감.

미끄러지면 당장이라도 추락할 것 같았던 위태로운 상황에서 절절하게 느껴졌던 이질적인 감각이 그의 입과 손끝에서 흘러나오는 멜로디에 의해 지배되었다.

멜로디만 완성했기에 가사는 존재하지 않았다. 연주를 하면서 즉흥적으로 흘러나오는 감성을 흥얼거리며 들려주는데 열중했다.

곡의 느낌을 전달하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노래를 흥얼거리던 창현은 문득 떠오른 의문에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연예인이 되기 전 난 사람들과 완전히 녹아들었을까?’

막상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대인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여 나 홀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지 않았던가. 사람과 사람의 친밀했던 관계와 세상 사람들과 내가 다르지 않다는 평범하다는 생각을 느껴보지 못했던 만큼 괴리감을 느끼는 강도가 다를 것이다.

‘하지만 난 철저하게 혼자였어, 이건 내 스스로 바랐던 것이었지.’

외로울 것 같지만 막상 또 그렇지 않았다. 자신을 응원해주는 팬들이 있고 같은 길을 걷는 동료가 있기 때문. 남들이 그토록 바라는 화려한 길을 걷고 있음에도 평범함을 동경하는 건 인간의 이기적인 욕심이 때때로 고개를 불쑥 치켜들기 때문이다.

‘초심으로 돌아가 이런 몰입을 해보자. 그거면 충분할 것 같아.’

전력으로 달려왔으니 한 번쯤 쉬어주고 다시 달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주를 멈춘 창현은 조용히 고개를 들어 반응을 살폈다.

멍한 표정으로 그의 연주를 듣고 있던 소녀들은 자신들의 반응을 깨닫고는 눈에 띄게 움찔하며 박수를 치기 시작하였다.

“고마워요, 어땠어요?”

“최, 최고였어. 너 대단한데?”

떨리는 마음을 간신히 다잡고 수영이 엄지 손가락을 추켜 세우자 다른 소녀들도 앞을 다투어 칭찬하기 바빴다. 그녀들 입장으로서는 창현이 직접 작곡했다는 프리미엄이 있지만 그것을 뛰어넘을 정도로 뛰어난 몰입감을 주었다는데 점수를 주고 있었다.

“정말 좋았었어. 절대적인 몰입감은 마치 내가 세상과 단절되어 있는 느낌이 물씬 풍겼거든. 마치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던 연습생 때가 떠오르는 것 같기도 해서 찡하네.”

곡을 만든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유리의 감상평이었다.

그 평을 듣자 기타를 놓아둔 창현이 눈을 빛내더니 한달음에 유리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으며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

“누나 말이 맞아요! 그걸 알아줄 줄이야. 정말 기쁜데요?”

그의 돌발 행동에 다른 소녀들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당사자인 유리의 입 꼬리는 살며시 말려 올라가 있었다.


말 한 마디가 천 냥 빚 갚는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유리의 감상평은 창현의 호감을 사는데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 여세를 모는 거야.’

“그런데 노래를 듣다 보니 너무 자기 세계에만 빠져 있는 느낌이 들더라고.”

“그래요? 그런 면이 있기야 하죠.”

“응, 세상과 나의 단절을 이야기 하는 건 좋은데 너무 분위기 하나로 몰아가는 기분이랄까?”

“한 가지 분위기는 단조로움이니까… 아! 잠시만요.”

유리의 말에 무언가 떠오른 듯 눈을 번뜩인 창현이 옆에 놓인 노트를 집어 들더니 펜으로 무언가를 분주히 적어나가기 시작한다. 소녀들은 작업에 몰두하는 그를 멍한 눈동자로 바라보았다.

약 5분 정도 지났을 무렵 입가에 만족의 미소를 지은 창현이 고개를 들며 말했다.

“만족스러운 게 탄생했네요, 정말 감사해요, 유리 누나.”

“응? 아니야, 난 그저 느낀 대로 말한 것뿐인 걸.”

지대한 공을 세웠음에도 겸양의 말을 하는 유리였다. 그것이 사람의 호감을 더욱 산다는 걸 알고 있기라도 하듯 그녀의 그러한 태도는 창현으로 하여금 더욱 고마운 마음을 들게 하였다.

“아니에요, 정말 고마워서 그런 거라니깐요. 음! 그럼 제가 누나 부탁을 하나 정도 들어드릴게요, 어때요?”

“……!”

창현의 말에 다른 소녀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자신들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음에도 이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독주하는 유리를 보며 그들은 두 눈 뜨고 당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유리의 눈에도 한순간 이채가 스쳐지나갔지만 그녀의 그 짧은 사이 계산은 이미 머나먼 곳을 향해 나아가는 중이었다.

“아니야, 난 괜찮아.”

“에? 어째서요?”

여태까지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하면 거절하지 않는 사람이 대부분이었기에 유리의 대답은 생경한 것이었다.

“부탁을 하게 되면 내가 대가를 바라고 말한 게 되잖아? 난 그런 마음으로 그런 게 아니니까 거절하는 게 당연하지.”

“아, 그렇군요. 죄송해요.”

자신의 호의가 그렇게 비춰질 수 있다는 것이 충격이었는지 창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동시에 그의 가슴 속에 유리는 속이 깊고 상대를 배려할 줄 아는 여자가 되었다.

이 모든 것이 유리의 노림수였지만 창현은 그걸 알지 못했다.

“뭘, 그럴 수도 있는 거지. 후후.”

“누나가 이렇게 속이 깊은 분인 줄 몰랐어요. 다른 누나들이 매번 깝율이라고 부르셔서 장난기가 다분한 줄 알았는데 많이 놀랍네요.”

빠직.

순간 유리의 이마에 사거리 마크가 생겨났지만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창현에게 들려주고 싶지 않은 과거(?)였지만 그마저도 그녀는 훌륭한 패로 활용할 수 있었다.

“어쩔 수 없지, 애들이 보는 눈이 그러한 걸.”

“에휴, 다른 누나들이 누나의 진면목을 보지 못하셔서 그런 것 같네요. 어떻게 누나가 깝율이라는 건지.”

“그렇지? 원래 애들이 보고 싶은 면만 보는 거니깐, 사실 고생이 많아.”

“누나가 고생하시네요.”

졸지에 다른 소녀시대 멤버들은 속 깊고(?) 따뜻한(?) 유리를 음해한 사람들이 되어버렸다. 반박이 나올 법도 하였지만 다른 세 소녀는 유리의 변화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있는 중이었다.

“음, 염치가 없지만 한 가지 부탁을 더 해도 될까요?”

“부탁? 나한테 부탁할 게 있어?”

“네, 방금 전에 누나 말을 듣고 노래를 완성할 수 있었거든요.”

“정말? 많이 달라졌으려나.”

세계적으로 퍼져 나갈 그의 노래에 자신이 지분을 넣었다는 사실이 흥분되었던지 유리의 안색이 살짝 상기되었다. 피식 웃음을 지은 창현은 그녀에게 자신이 말하려던 바를 말했다.

“누나가 영감을 준 부분이 있어서 몇 파트만 피처링으로 참가해주시면 안 될까요?”

“으응? 내, 내가?”

이건 예상하지 못한 바였기에 유리의 안색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네. 누나가 해주시는 게 적합할 것 같아서요.”

“내가 해도 돼? 너도 알겠지만 내 보컬 실력이 두드러지는 것도 아니고 네가 청하면 해줄 사람이 줄을 서고 달려들 텐데…….”

몸을 쓰는 부분(?)에서는 적극적으로 도울 의향이 있지만 보컬 부분에는 자신감이 약한 유리였다.

축 처진 그녀를 보며 창현은 걱정하지 말란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노래를 듣고 중심을 바로 짚어낸 건 누나잖아요. 누나의 도움으로 완성된 곡이니 누나가 가장 잘 이해하고 표현해주실 것 같아서요. 그리고 제가 부탁드리는 건 보컬 부분이 아니라 읊조리듯 중얼거리는 파트거든요. 보컬 실력보다는 노래 전체의 맥락을 파악하고 표현해주는 게 중요해요.”

“내가 잘할 수 있을까?”

“누나만큼 잘 해낼 사람이 없어서 제가 청하는 거예요. SM측에다가는 제가 잘 말해놓을 테니까 도와주세요. 따로 사례도 할 테니까요.”

그가 이리도 청하는 것은 그녀에게 절호의 기회. 하지만 노련한 책략가인 그녀는 환호하며 단숨에 받아들여 자신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그 틈에도 노련하게 창현의 애를 닳게 만들며 뜸을 들이던 그녀는 다른 세 소녀가 보기에 가증스러울 정도로 순수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내가 도울 수 있다면 얼마든지 도와야지. 대신 나중에 근사하게 밥 한 번 사주기다?”

“더한 것도 해드릴 수 있어요. 하하!”

명확한 범위를 정해놓지 않았기에 더 큰 것을 취하는 유리였다.

‘와! 저거 진짜 대단하네.’

경쟁자들이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취할 걸 다 취하는 유리를 보며 효연은 혀를 내둘렀다.

연적이지만 배울 점은 많았다.


“파트는 그리 많지 않거든요. 이 정도만 해주시면 되요.”

내친 김에 녹음실로 유리를 데려간 창현은 짧은 시간 완성된 내레이션 파트를 건네주었다. 그의 말처럼 분량은 그리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세 줄 정도 되는 분량은 전체 글자가 서른 자도 되지 않았다.

“정말 별로 안 되네?”

“네, 누나의 내레이션으로 노래가 끝나는 거예요.”

“이렇게 끝내도 되는 거야?”

“완벽하게 끝내는 것보다 여운이 남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세상에 철저하게 고립된 가운데 막바지에 들려오는 여인의 내레이션은 한 줄기 기대감과 색다름을 선사해줄 것 같더라고요.”

“난 잘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그럼 내가 어떻게 하면 되는 거야?”

“일단 누나도 세상에 괴리되었다는 감정을 실어야 해요. 그러면서 마지막에는 약간 꾸짖는 듯한 느낌을 실으면 되요. 좀 어렵죠?”

“바로 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어려울 것 같기도 하고. 일단 한 번 해볼게.”

의욕적으로 임하는 유리를 보며 고개를 끄덕인 창현은 곧바로 녹음에 임했다. 몇 번이나 끊어내며 주문을 했고, 유리는 차근차근 고쳐나간 끝에 약 30분이 걸려서야 모든 것을 끝낼 수 있었다.

“수고하셨어요. 정말 고마워요.”

“뭘,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도 않던 걸. 어렵지도 않고.”

“누나가 노래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계셔서 그래요. 좋은 노래가 나올 것 같은데요.”

“그래? 앨범 나오면 나한테 가장 먼저 주기다?”

“언제 나올지 모르지만 그 정도는 어렵지 않죠, 후후.”

훈훈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는 두 사람의 사이가 점점 심상치 않게 변하는 것이 예리하게 갈고 닦인 주현의 센서에 감지되었다.

눈 뜨고 당할 수 있다는 긴장감에 그녀는 시간을 확인하고는 유리를 재촉했다.

“언니! 이제 가야 할 것 같아요.”

“음! 그래야겠네.”

평소라면 주도권을 놓치지 않기 위해 발악이라도 했을 테지만 오늘은 원하는 바를 모두 이룬 승자라는 걸 알고 있어서일까. 시간을 확인한 유리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채 태연하게 응했다.

“차, 창현아 그럼 다음에 다시 올게.”

말을 꺼낸 주현이 오히려 더 안색이 흐려지며 인사를 건넸다.

이 자리를 처음 주도했던 효연과 수영은 말문조차 제대로 떼지 못하고 있었다.

“오늘 고마웠어요, 누나들. 귀국하자마자 한 건 해내서 좋네요. 하하.”

입가에 미소 지은 창현은 녹음실 앞까지 나와 그녀들을 마중했다. 숙소로 향하는 동안 그녀들은 한 마디 말도 꺼내지 않았다.

띠잉!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안으로 들어서자, 주현이 유리에게 말을 건넸다.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 언니.”

“뭐가?”

“설마 그런 식으로 창현이와 친분을 쌓을 줄 상상도 못했거든요. 근래 들어 노래를 많이 들으시던 언니가 창현이의 감성을 정확하게 파악해내는 것도 놀랍고요.”

“후후! 이 정도쯤은 기본 아니겠어? 노력하지 않는 자는 도태되기 마련이야. 난 승자가 되고 싶지, 패자가 되고 싶지 않거든.”

날카로운 말을 태연자약하게 받아치는 유리였다.

그 말을 들은 그녀는 분한 듯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말했다.

“오늘은 졌지만 다음에는 쉽지 않을 거예요. 창현이랑 가장 가까운 사람은 다름 아닌 저니까요.”

“과연 그럴까? 후후! 열심히 해봐. 대신 나중에 상처 받기는 없기야.”

“제가 드릴 말이에요.”

띠잉!

때마침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주현이 가장 먼저 나서며 숙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여유가 넘치는 유리는 느릿하게 걸음을 옮기며 전쟁에서 승리한 개선장군 마냥 당당히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뒤를 조용히 따르던 효연과 수영은 동시에 멈춰서더니 서로를 바라보았다. 말을 하지 않았지만 서로에게 할 이야기가 있다는 뜻은 명확하게 전달되었다.


저쪽 세계에서 치열한 신경전과 국가 동맹전을 방불케 하는 치열한 물밑 작업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사정을 모르는 창현으로서는 귀국하자마자 마음에 드는 곡 하나를 완성했다는 사실에 희희낙락하는 중이었다.

“이런 추세라면 괜찮겠는데? 정규 앨범 수록곡이 대략 10곡이 넘으니까 벌써 한 곡을 뽑아냈고.”

앨범에 대한 테마를 정해놓았지만 아직 구체적인 것은 아니다. 이것을 정하는데 창현에게 모든 결정권이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막상 이야기를 파고 들어가 보면 그것은 아니라 할 수 있다.

AA엔터테인먼트에 꾸려진 기획팀과 상의를 하고 충분한 상업성을 검토한 뒤 본격적인 앨범 컨셉을 정하는 것이다.

그동안 석규와 창현이 상의를 하는 것으로 모든 절차를 일단락했지만 회사의 규모가 차츰 커짐에 따라 기획부가 생겨나고, 좀 더 치밀한 기획력을 바탕으로 앨범을 발매하게 되었다.

물론 이와 같은 부서가 존재하더라도 가장 큰 입김을 발휘하는 것은 창현이라는 게 분명했다.

“일단 이 곡의 이름은 <괴리>로 하자.”

곡의 이름까지 일사천리로 정한 창현은 자신이 구상한 테마에 대해 윤곽을 잡아나갔다. 보통 앨범 수록곡 전체를 관통하는 테마를 잡아놓고 그 다음 곡작업에 들어가지만 이번만큼은 약간 달랐다.

막연하게 자신이 하고 싶은 음악이라는 토대를 잡아놓은 뒤 우연치 않게 몰입을 하게 되어 한 곡을 만들어놓았던 것이다.

창현은 이 <괴리>라는 곡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앨범 테마 자체를 이 곡을 중심으로 맞춰놓는 한이 있어도 수록하고 싶은 욕심에 휩싸인 상태였다.

“내 어려웠던 시절을 떠올리게 해주었고, 희미해지던 초심을 다잡게 해주었어.”

다른 사람들이 듣는다면 퀄리티가 뛰어난 현의 곡 중 하나라 생각하기 쉽겠지만 그의 첫 미니 앨범인 <Go&Stop>부터 들어온 열성팬이라면 그의 변화에 대해 눈치 챌 수 있을 것임이 분명하다.

뭐든지 처음 내놓은 자신의 성과물이 가장 순수한 노력의 집합체인 법이다. 가요계를 모른 채 막연히 가수를 꿈꿔오며 마음을 울리는 음악을 만들겠답시고 만들었던 그의 곡은 미숙하지만 열정이 깃들어 있었으며, 산만하지 않고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몰입을 만들어냈다.

곡의 완성도로 따지자면 근래 들어 내놓은 곡이 더 뛰어날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강렬한 이미지로 다가간 곡은 첫 곡일 것임이 분명했다.

긴 시간 동안 가요계에 살아남으면서 창현은 스스로 발전해왔고, 그 발전의 바탕으로 그는 성숙해졌음이 분명하나 노련했을지언정 처음만큼의 열정을 쏟아 부었다고 하기는 힘들다.

늘 초심을 찾는 창현은 이 부분에 대해 고민했고, 상업성을 떠나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막연한 환상을 꿈꾸었다.

그것이 오늘에서야 조금씩 꼬리를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마음에 들긴 한데 내가 너무 어려운 길을 선택한 것은 아니려나. 으음, 일단 해봐야 하긴 하는데 좀 어려운 시도일지도.”

시간이 넉넉히 주어졌다고 하여 빈둥빈둥 놀며 구상을 할 생각 따위는 예전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쇠는 달아오를 때 두들기라는 말처럼 조금이나마 초심의 끈을 잡은 지금 좀 더 열중하고 그때 그 희열을 맛보고 싶은 것이 창현의 솔직한 마음이다.

“그러니까 일단 곡 작업에 몰두해보자고.”

유리의 내레이션이 담겨있는 <괴리>를 들으며 창현은 미소를 지었다.

일단 곡 하나를 완벽하게 만들어놓은 뒤 석규에게 성과물을 내놓고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생각이었다.


“그러니까 이번 앨범은 네 색을 담고 싶다고?”

“네, 어려울까요?”

“으음, 어려운 건 아니겠지만 상업적인 면에서는 잘 모르겠구나.”

“저도 어느덧 정규 4집 앨범까지 낸 가수가 되었어요. 이 정도면 나름대로 기반을 닦고 본격적으로 나만의 색을 낼 수 있는 위치라고 생각해요.”

“너만의 색이라? 흐음, 너만의 색이라.”

아버지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사장이기도 한 석규는 냉정하게 창현에 대해 분석했다. 현의 가창력은 이미 세계적인 인기를 바탕으로 두고 있기에 평가하는 것 자체가 모욕이었다. 하나하나 만들어내는 곡 또한 뛰어났으며 약점으로 지적받았던 퍼포먼스도 장점으로 승화하여 어디 하나 흠잡을 곳 없는 뮤지션으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막상 현의 색이라니?

성공에 성공을 거듭하고 있어 크게 의미를 두고 있지 않던 부분이지만 막상 이야기를 들으니 제법 심각한 사안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으음, 그러고 보니 그렇구나.”

현! 이라고 하면 무엇이 떠오를까?

노래를 잘하는 가수? 이 기준은 무얼까? 풍부한 감성? 폭발적인 가창력? 아니면 노래 전체를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기교?

어느 것 하나 부족한 면이 없다. 모든 면이 완벽했고, 이러한 가수들은 흔치가 않다. 그랬기에 현에게는 자신을 대표하는 뚜렷한 색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것은 제법 심각한 사안이다. 데뷔를 한지 벌써 5년차에 들어가며 정규 앨범도 4집까지 낸 가수가 아직까지 자신의 색채를 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긴 시간 동안 롱런을 할 수 있는 토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런, 제법 심각한 사안이었군.”

“심각하기까지 해요?”

“그래, 팬들은 너의 완벽한 모습을 좋아하지만 자칫 잘못하면 이도저도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될 것이다. 너무 완벽해서 인간미가 떨어지면 그것이 대중을 뒤돌아서게 만드는 요소로도 충분하니까. 이 부분을 고려했어야 했는데 너무 잘하고 있어서 미처 간파를 못하고 있었구나.”

“이제라도 간파했으면 된 거죠.”

“그래, 그런 거겠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 석규는 창현의 장점을 무엇으로 내세워야 할지 고민했다.

뛰어난 비쥬얼? 아니, 그렇게 하면 그의 가치가 떨어진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렇다면 가창력으로? 아니면 풍부한 가사 전달력? 대부분의 실력파 가수들이 내세우는 요소들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아쉬움이 느껴졌다. 한 가지 장점을 내세우기에는 그의 장점이 너무 많은 탓이다.

“뭘 밀어붙여야 할지 모르겠구나. 우선 지금처럼 활동하며 다른 이미지를 발견해내는 것이 어떻겠느냐?”

“나쁘지 않은 제안이지만 이번에는 욕심이 생겨서요.”

“네 장점으로 내세우려는 것이 무엇인데 그러는 것이냐.”

“마음을 울리는 음악이겠죠?”

“마음을 울리는 음악? 풍부한 감성을 말하는 게냐?”

“아니요, 그것보다 위에 단계라 할 수 있어요. 풍부한 감성은 자신의 감성을 타인에게 전하는 거잖아요. 마음을 울리는 음악은 말 그대로 자신의 감성으로 타인의 마음을 울리는 거예요. 내 것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내 것으로 듣는 이의 마음을 끌어내는 것이죠.”

“오묘하군.”

“오묘한 거죠.”

고려시대 음악가인 최지평이 남긴 음향총서에서 음악가가 마지막으로 추구해야 하는 것이 바로 마음을 울리는 음악을 하는 것이라 하였다.

하여 창현의 목표 또한 마음을 울리는 음악으로 맞춰놓은 것이다.

“마음을 울리는 음악이라.”

“이 부분에 대해서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은 절 믿어달라는 말밖에 없어요.”

“그것뿐이냐?”

“거창하게 말해놓고 실망시키기는 싫으니까요.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걸 아버지도 잘 알고 계시잖아요.”

“그랬지. 흐음, 널 믿고 기다리는 건, 예전이라면 쉬웠겠지만 지금은 쉽지 않은데.”

난감함이 담긴 석규의 중얼거림에 창현이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미소를 지었다.

“그래요? 그렇다면 어쩔 수 없네요.”

“어쩔 수 없다니?”

그 미소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었던 석규가 얼떨떨한 안색으로 묻자, 창현은 다리를 꼬고 거만하게 의자에 몸을 묻으며 목소리를 깔았다.

“이 회사 최대 주주가 누구였죠?”

“…….”

석규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현의 5집 앨범은 창현이 전권을 쥔 채 그의 뜻대로 진행되기로 결정되었다.


“일단 한 고비 넘겼고.”

지분 행사로 뜻을 관철시켰지만 창현에게는 아직 많은 난관이 존재했다. 거창하게 마음을 울리는 음악이라는 타이틀을 사용했지만 아직까지 자신의 감성으로 타인의 감성을 끌어내는 경지에 오르지 못했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는 사안이었다.

그럼에도 고집을 부린 것은 이번 앨범을 발전에 대한 또 다른 도전으로 삼고 싶었기에 그렇다.

“여태껏 다른 앨범도 도전의 연속이었지만 이번은 조금 다르지.”

어찌 보면 정규 1집부터 4집까지는 창현으로서 선택의 폭을 넓혀주었다고 할 수 있지만 진정으로 그의 발전에 도움이 되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가수로서 더 넓은 영역을 개척했지만 더 나은 실력을 위한 시도로는 보기 힘들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에 반해 이번 시도는 그에게도 각별했다.

“발전을 위해서는 끊임없이 도전해야 하니깐.”

미국을 경험하고 든 생각이었다.

다양한 색깔을 지닌 뮤지션들을 보며 자신만의 색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고, 그것을 위해서는 생소한 것들을 받아들이기보다 자신이 지니고 있던 것을 완벽하게 소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직까지 자신만의 뚜렷한 색을 내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다른 색을 가지려 노력한들 그것이 제대로 소화가 되겠는가.

그러한 생각과 다소 대중성에 치우쳤던 4집 앨범을 제작하면서 자신만의 앨범을 만들겠다는 욕심이 생겨 고집 아닌 고집을 부린 것이다.

대중들의 기대가 높다는 걸 인터넷을 통하여 파악했지만 창현은 이번만큼은 그 기대보다는 자신의 실력을 발전시키는데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잘 되겠지 뭐.”

다소 대책 없이 편안한 마음을 가진 채.


회사를 벗어나 그의 목적지는 SM엔터테인먼트였다. 석규와 합의를 본 뒤 창현은 곧바로 수만과 연락하여 약속을 잡은 것이다. 점심 약속이 있다 하여 근처에서 점심을 해결한 창현은 약속 시간이 되자 곧바로 그곳으로 향했다.

빠르게 절차를 마무리 한 뒤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로 올라간 그는 수만과 대면했다.

“아직 한국에 왔다는 소식을 못 들었는데 일찍 왔군.”

“소식이 알려지면 이만저만 귀찮은 게 아니라서요. 여러 덫을 치고 몰래 왔어요.”

“고생이 심하겠군.”

“제가 고생하나요, 다른 분들이 고생하는 거죠. 미안하지만 너무 시달리면 휴식을 취하려던 계획이 말짱 도루묵이 될 것 같아서요.”

“그것도 그럴 테지, 극성인 기자들이 많을 테니. 차는 뭐로 할 텐가? 생강차를 좋아한다고 해서 좋은 걸 들여왔는데.”

“정말인가요? 그럼 생강차로 할게요. 맛있게 마시겠습니다.”

“너무 기대는 하지 말게나. 음, 커피 한 잔하고 생강차 한 잔.”

차를 주문한 수만은 소소한 근황을 묻는 것으로 대화를 주도해나갔다. 창현이 이곳까지 왔다는 것은 무언가 할 말이 있다는 걸 뜻했기에 나름대로 계산을 하며 그의 말을 기다렸다.

급하지 않은 사람이 급한 사람에게 먼저 굽히고 들어가는 것은 바보나 하는 짓, 천천히 여유를 부리며 창현의 말을 기다렸다.

몇 마디 주고받으며 분위기가 좋게 형성되면서 차가 나왔고, 생강차 한 모금을 마신 창현이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음, 맛이 좋네요.”

“그런가? 입맛에 맞다니 다행이군. 아직 난 생강차의 맛을 잘 몰라서 말이지.”

“실은 저도 잘 모릅니다. 그냥 아버지랑 같이 마시다 보니 어느새 입맛에 익어버려서요. 먹다 보니 계속 마시게 되더라고요.”

“뭐든 익숙해지면 장점과 단점이 보이기 마련이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자, 다시 차를 한 모금 마신 창현이 용건을 꺼내들었다.

“돌려말한다는 게 상당히 어렵네요. 실은 제가 회장님과 만나길 청한 것은 한 가지 부탁을 드리고 싶어서입니다.”

“부탁? 현이 내게 부탁을 할 게 있단 말인가?”

“예, 그게 본의 아니게 이미 저질러놓은 일이라서요. 하하! 아무래도 수습을 하려면 회장님이 허락을 해주셔야 할 것 같아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무슨 일인데 그러나?”

“실은 제가 어제 귀국했습니다. 낮에 귀국해서 아버지와 먼저 만나고 집에 돌아가지 않고 녹음실에 들렸다가 휴식차 커피숍에 들렸거든요.”

“…….”

수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그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아직까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몰랐기에 조용히 귀를 기울이며 이야기를 듣고 있을뿐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영감을 얻어서 곡을 하나 뽑게 되었습니다. 제 마음에 쏙 드는 곡을요.”

“그런가? 축하하네.”

“네, 감사합니다. 그런데 제 숙소랑 소녀시대 숙소가 가깝잖아요? 커피숍에서 우연히 소녀시대 누나들을 만나게 되었어요?”

“그 아이들을? 흐음, 어제 스케줄이 없었으니 그랬을 수도 있지.”

“오랜만에 만나게 되어서 인사를 나누고 제 곡에 대해 감상도 들어볼 겸해서 들려줬는데요.”

“그래서?”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경우의 수가 빠른 속도로 맞춰졌다가 분리되길 반복하며 수만은 눈을 빛냈다. 그가 언급한 말에서 우연적인 만남이든 계획적인 만남이든 간에 그것은 그가 알 바 아니었다. 그 정도 자잘한 처신 정도는 본인 스스로 잘하고 있을 거라 믿었기에 굳이 터치하고자 하지 않았다.

다만 창현의 곡 언급이 맛있는 냄새를 솔솔 풍겼다.

“유리 누나가 제 곡에 대한 감상평을 정확하게 말해주시더라고요. 제가 의도한 바를 어찌나 정확하게 짚어내던지, 놀라서 그 자리에서 작사까지 모두 끝내게 되었습니다.”

“그런가? 대단하군.”

곡 하나를 5분만에 뽑아낸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작곡에 어울리는 가사까지 단시간에 해치워버린다는 말은 경악을 하게 하였다.

다른 작곡가들도 가능할 신기인지 모르나 그의 곡은 그 자체만으로 프리미엄이 붙지 않은가.

“그래서 제가 유리 누나에게 부탁을 했어요. 이대로 진행되면 너무 단조로울 것 같으니 피처링을요.”

“유리에게 피처링을? 제 자식 욕하는 것 같지만 유리는 피처링을 맡기에 손색이 있을 텐데?”

“그렇게 비하하지 않으셔도 되는 걸요. 제가 부탁한 부분은 보컬 파트가 아니라 내레이션 파트입니다. 곡의 분위기 상 유리 누나만큼 잘 이해하고 해낼 사람이 없다고 해서요. 그 부분 때문에 부탁했는데 제 생각 이상으로 잘해주셨더라고요.”

“그런가? 흐음, 그렇다면 이미 파트는 정해놓은 셈이군.”

“네, 그렇죠. 일을 벌인 다음 말씀 드려 죄송합니다.”

“죄송하기는, 오히려 우리 측에서 고마워해야 할 일이지. 다만 일이 이렇게 진행될 경우 자칫 잘못하면 책을 잡힐 수도 있으니 다음에는 절차를 거쳐주면 되네. 우리야 현의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으면 얼마든지 환영하는 바이니.”

그것이 솔직한 마음이었지만 절차라는 것은 사람들이 살아감에 있어 정해놓은 중요한 규칙이었다. 그 뜻을 이해한 창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분배는 어떤 방식으로 할까요?”

“그건 AA엔터테인먼트 측에서 알아서 해주도록 하고, 실례가 안 되면 곡을 한 번 들어봐도 될까?”

“예, 어렵지 않습니다. 자리를 옮길까요?”

“그러도록 하지.”

수만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창현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은 곧장 녹음실로 향하였다.


“…….”

곡 전체가 끝나자 수만은 할 말을 잃은 채 침묵을 지켰다. 방금 전 들은 곡의 여운이 그를 강렬하게 휘감았던 것이다. 곡을 들려준 창현은 묵묵히 그의 다음 반응을 기다렸다.

“이것 참, 대단하군. 이런 곡이 나올 줄이야.”

한참 후에야 나온 감탄사였다. 한시름 놓은 창현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감사의 인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아니, 내가 굳이 극찬을 하고 자시고가 필요 없군. 이런 곡이 있을 줄이야, 허어.”

연신 감탄사를 흘리는 수만이었다. 아는 만큼 본다는 말이 있듯이 소녀시대 멤버들이 이 곡을 들을 당시 곡이 가져다주는 분위기와 몰입감에 놀랐지만 그는 그 이상의 면을 곡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너무나 놀라운 것이어서 감탄사가 그치지 않았다.

‘사람의 감성을 끌어내는 곡이라니. 이런 곡을 만들 수 있었단 말인가.’

풍부한 감수성으로 듣는 이들을 매료시키는 노래는 종종 등장하고는 한다. 실제로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들은 노래를 듣고 노래에 동화되어 슬픔과 기쁨을 느끼고는 한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노래라는 매개체가 주는 것에 동화되어서 그럴 뿐이다. 한데 창현이 작곡한 노래는 그 단계를 뛰어넘었다. 곡에 동화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내면에 숨겨진 면을 끌어당겨 노래가 마치 현실의 자신 이야기처럼 느끼게끔 하는 것이다.

작은 차이인 것 같지만 이 차이는 좁힐 수 없는 절대적인 격차가 존재했다.

‘만약 세상을 저주하고 떠나고 싶은 느낌의 곡을 쓴다면?’

누구나 한 번쯤 자살을 생각해본다. 그 감성을 창현의 곡이 완벽하게 끌어낸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생각만 해도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이 느껴졌다. 만약 그렇게 되면 수많은 사람이 노래 하나 때문에 자살을 하게 될 지도 모르는 일이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노래로군. 이런 앨범이라면…….’

그나마 낫다면 마지막 파트에 유리의 내레이션이 들어가 있다는 점이다. 그녀 또한 훌륭한 감성으로 노래를 장식했지만 창현의 절대적인 몰입감을 흩어놓아 사람들이 노래에 취하는 불상사를 미연에 방지해주었다.

“이 곡을 낼 생각인가?”

“일단 마음에 드는 곡이어서요. 이번 앨범에 실험을 해보고 싶은 것도 있고 해서 이 곡과 비슷한 종류의 곡들을 써볼 생각입니다.”

“정말 대단한 곡이로군. 주제가 넘지만 이 곡을 들어본 사람으로서 한 가지 충고를 하면 안 되겠나?”

“경청하겠습니다.”

“기운이 강한 약은 종종 독약으로 변모하기 십상이지. 노래의 몰입감이 너무 강해 잘못하면 상하는 사람이 생길 수도 있으니 가급적이면 듣는 이의 마음을 기쁘게 만드는 곡을 썼으면 좋겠군.”

“아…! 조언 감사합니다. 참고하도록 하겠습니다.”

“내 조언이 도움이 되었다면 무척 기쁘겠구먼.”

“예, 안 그래도 고민하던 부분이었거든요.”

기획사 회장이기도 하지만 선배 가수이기도 하였기에 고민했던 부분이 어느 정도 풀려나가는 것을 느꼈다. 입가에 미소 지은 수만은 무언가 떠오른 듯 눈을 빛내더니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그래? 그렇다면 내 부탁 한 가지를 들어줄 생각이 없는가?”

“어떤 부탁입니까.”

“강 사장님에게 듣자하니 대규모 오디션을 기획하고 있다 하던데, 그곳에 심사위원으로 나간다는 걸 들었네.”

“아, 그때 한 번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같이 협력하기로 하셨었죠?”

케이블 방송국을 인수한 뒤 SM엔터테인먼트와 연계하여 사업을 할 계획이라는 것을 들었기에 창현은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그랬지, 그렇게 되면 심사위원으로 나가게 될 텐데 해본 적이 있나?”

“생각해보니 없네요. 사실 제가 다른 사람을 평가한다는 것 자체가 무척 어렵게 느껴지기도 하고요.”

“뭐든지 해봐야 느는 법이지. 그래서 말인데 심사위원을 해볼 생각이 없나?”

“제가 심사위원을요?”

“한 번 해보면 나중에 실력이 더 늘지 않겠나.”

“그것도 그렇죠. 뭐든지 경험해봐야 경험치가 늘어나는 법이니까요.”

“그럼 내 제안을 수락하겠나?”

수만의 물음에 잠시 고민하던 창현은 대답을 내놓지 않은 채 의문을 표했다.

“그런데 갑자기 심사위원이라니, 좀 혼란스러운데요.”

“후후! 오늘이 바로 SM엔터테인먼트 공개 오디션이 있는 날이라네. 가수를 꿈꾸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날이기도 하지.”

“아! 그러고 보니 공개 오디션을 열었었죠.”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깨달은 창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공개 오디션이라면 당연히 오디션을 보는 사람들에게 정확한 지적과 조언을 해줄 심사위원이 필요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일단 제가 심사위원을 한다는 건 좀 갑작스럽네요. 참관 정도로 하면 안 될까요?”

“보는 것도 하나의 경험이니 나쁘지 않겠지. 지금쯤이면 슬슬 준비가 끝났을 테니 같이 가보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창현은 수만의 뒤를 따라 오디션 장소로 향했다.

/

수만과 창현이 향한 곳은 공개 오디션이 열리고 있는 곳이었다. 관계자 통로로 이동하였지만 부산한 분위기가 물씬 느껴졌다.

“응시생이 많은가 보네요.”

“적다고 할 수 없지. 동방신기와 슈퍼주니어가 데뷔하면서 응시하는 남자들이 많아졌고, 올해에는 소녀시대가 성공을 거두면서 응시하는 여자들이 늘어났지.”

“그런가요?”

“연예인을 꿈꾸는 학생들이 많아. 전보다 더 과열되다 보니 선택의 폭이 넓어졌지. 그런 만큼 실력이 뛰어난 사람들도 많이 발굴하게 되었지만 반대로…….”

“실력이 모자란 사람도 있겠군요.”

뒷말을 눈치 챈 창현이 덧붙이자 수만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듯 말을 덧붙였다.

“물론 그것이 끝이 아니지. 처음부터 완벽한 실력자를 뽑는 거라면 기존에 데뷔한 가수들을 영입하면 되거든. 하지만 그렇게 되면 수지가 맞지 않게 되지. 여기에서 중요한 것이 심사위원의 역할일세. 비록 지금은 실력이 모자라나 갈고 닦으면 찬란하게 빛을 발할 수 있는 원석, 우리는 그것을 보고자 하는 것이지.”

“으음. 그렇군요.”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었기에 창현은 고개를 끄덕여 납득했다. 창현은 다른 사람에게 말할 때 그릇을 키워야 한다고 한다. 그릇은 잠재력을 말하며 그 안에 담기는 물은 실력을 뜻한다. 지금 보기에 물이 많이 차 있어서 실력이 뛰어나다고 하지만 그릇이 작으면 그 수준에 영원히 머물 수밖에 없다. 반대로 내용물이 적더라도 그릇이 큰다면 내용물이 늘어남에 따라 잠재력은 무궁무진하게 뻗어나갈 가능성이 높다.

수만은 내용물이 부족하되 그릇이 큰 인물을 발굴하고자 하는 것이다.

“한 번 보도록 하지.”

SM엔터테인먼트에 들어오면서 썼던 모자를 깊게 눌러 쓰며 수만을 따라 오디션장 안으로 들어섰다. 심사를 보고 있던 위원들과 응시생은 수만의 등장에 놀라며 그 옆에 서 있는 창현을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오디션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심사위원을 보고 있던 사람 중 한 명은 창현을 보고 화들짝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다가 옆에 앉은 심사위원에게 한 소리 듣고 말았다.

“태연 양, 심사를 봐야지요.”

“네? 아, 네! 죄송합니다.”

더 넓은 폭의 시야를 기르기 위해 오늘 보조 심사위원을 맡은 태연은 수만 옆에 서 있는 창현을 보고 경악을 감추지 못하던 중이었다. 모자를 깊게 눌러 써 다른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했지만 매의 눈을 지닌 그녀는 그의 정체를 단번에 알아차린 상황이었다.

‘창현이가 어떻게? 귀국을 했었나? 나한테 연락도 안 해주고.’

섭섭한 마음이 물밀듯 밀려왔지만 그것도 잠시, 그의 폭발적인 인기를 감안하여 최대한 신중을 기했을 거란 생각을 하게 되자 원망스러운 마음은 빠르게 사라졌다. 그 다음 그녀의 마음을 지배한 것은 바로 멋진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하는 다짐이었다.

열심히 노래와 춤을 펼치는 응시생을 보며 태연이 심사평을 내놓았다.

“노래와 춤 실력이 일정 수준에 오른 것 같아요. 하지만 호흡이 부족해서 힘이 실리지 못하는 느낌이 들어요. 부족한 호흡을 보완한다면 더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심사위원으로 치면 아직 병아리 수준이었기에 그녀는 독한 심사평을 내놓지 않았다. 다만 자신이 느꼈던 점을 분석하고 확실한 점을 캐치하여 응시생에게 도움이 될 만한 조언을 해주고는 하였다.

그리고 옆에 앉아있는 심사위원들의 평가를 경청한다. 눈앞의 응시생에 대한 것이지만 그들의 평가는 자신이 보지 못한 것을 깨닫게 해주는 소중한 시간이다.

태연의 평을 들은 창현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과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은 평가네. 부족한 점과 장점을 적절하게 짚어준 것 같아. 하지만 저렇게 해서 응시생이 깨달을까?’

부족할 것 없는 평가였지만 창현은 그 이상이 되길 바랐다. 분명 부족할 것 없는 조언이지만 사람들은 주변에서 많은 조언을 해주고는 한다. 받아들이는 사람이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역량이 더욱 커지고 안 되고가 결정된다.

‘깨닫게 할 방법이 없을까?’

고민에 잠겨드는 창현이다.

그것을 모른 채 힐끗힐끗 그를 곁눈질하던 태연은 작게 고개 끄덕이는 것을 보고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후후, 멋있는 모습을 보였당께.’

흐뭇했다.

내 남자에게 멋진 모습을 보이는데 성공한 그녀는 날아갈 듯한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뒤이어 들어오는 응시생을 보며 기분을 가다듬었다. 한 번 반짝이 아니라 연이어 멋진 누나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쉽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주변 환경 변화로 인하여 태연은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한 채 연신 힐끔거리며 창현을 훔쳐보았던 것이다. 마음속으로는 담담한 척, 멋진 누나의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고 되새기고 있지만 머리와 가슴이 따로 놀고 있었기에 그녀를 혼란케 하였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어지던 심사평은 제대로 흘러나오지 못했다.

“흐음.”

창현의 입에서 나직이 흘러나온 소리를 듣는 순간 태연은 머릿속에서 천둥이 울려 퍼지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그리고는 심사에 집중하지 못하는 자신을 자책했다.

‘이 정도도 다스리지 못하면!’

성공을 위해 수많은 유혹과 싸워오며 단련된 자신이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했던 것에 스스로 엄히 꾸짖은 그녀는 응시생에게 집중하기 시작했다. 지적하는 점은 더욱 날카로워졌고, 장점을 부각시키며 적절한 균형을 이끌어냈다.

지켜보고 있던 창현은 뒤바뀐 태연을 보며 감탄 섞인 목소리를 흘렸다.

“상당하네요.”

“심사하는 모습은 오늘 처음 보는데 제법이군.”

“처음에는 어떻게 할까 걱정이 되었는데 막상 보니 다르네요. 훌륭한 심사평인 것 같아요.”

“아는 만큼 보는 법이고, 배울 때와 가르칠 때가 다른 법이지. 태연이는 뛰어난 가창력을 지니고 있지만 아직 살아온 세월이 짧아 경험이 부족해. 이렇게 심사위원을 맡게 되면 그녀가 보는 시야도 더욱 넓어질 테지.”

“그런 의도가 숨어 있었군요.”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창현이다. 그 또한 배울 때와 가르칠 때가 다르다는 걸 잘 알고 있는 사람 중 한 명이다. 배우는 것이 습득이라면 가르치는 것은 복습이다. 이미 알고 있던 것을 타인에게 전함으로써 놓치고 있던 깊은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그것을 제외하더라도 태연은 이미 훌륭히 심사를 보고 있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응시하는 사람들이 다 심사를 볼 무렵, 수만이 넌지시 창현에게 권유했다.

“자네도 한 번 심사를 볼 텐가?”

“제가요?”

“여기까지 와서 구경만 하다 가는 건 아무래도 좀 그렇지 않나.”

“음, 그래도 제가 한국에 왔다는 게 밝혀지면 좀 난감해서요.”

“그러고 보니 그런 문제가 있었군.”

창현이 한국으로 귀국한 사실이 아직 비밀이라는 걸 알아차린 수만은 그를 등장시킴으로써 두 회사의 관계가 더욱 돈독하다는 걸 외부에 알리려던 계획을 접어두었다. 강권하게 되면 오히려 독이 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앓고 있는 그였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다음에 한 번 오면 되죠.”

“그렇게 말해주는 것만으로도 고맙지. 하하!”

어느덧 심사가 모두 끝나고 각각 수만에게 인사를 건넸다. 초롱초롱한 눈으로 인사를 건넨 태연은 창현의 정체를 알아차리지 못한 척했다.

수만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창현을 바라보는 심사위원들에게 그를 소개했다.

“여기 있는 분은 며칠 전 귀국한 현이라네.”

“안녕하세요, 현입니다.”

“오오!”

창현의 등장에 심사위원들은 나직이 감탄사를 흘렸다. 설마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설마하니 현일 줄은 그들도 미처 생각지 못했다.

태연과 시선이 마주친 창현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 모습을 본 그녀가 미간을 지그시 모으자,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다.

‘아, 귀여워.’

화난 척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좋아서 어쩔 줄 몰랐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저녁을 함께 하고 싶지만 조용히 쉬는 게 좋겠지.”

“예, 아무래도 그렇죠.”

“그럼 잘 가게.”

붙잡고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애써 그를 붙잡지 않았다. 앞으로 그와 만날 날은 더욱 많이 남았기에 기회는 천천히 노리면 되는 법이다.

창현과 일별하려던 수만은 무언가 떠오른 듯 그에게 말했다.

“아! 혹시 집으로 가는 길이면 태연이를 좀 부탁해도 되나?”

“제가요?”

“현이라면 스캔들 걱정없이 믿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네. 지금 회사에서 동원 가능한 차량이 모두 나가 있는 중이라 택시를 태워 보내기도 불안하고.”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하지만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격 아닌가요?”

“자네를 믿으니 하는 말이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할게요.”

흔쾌히 수락하는 창현을 보며 수만은 감사의 인사를 하였다.

하지만 그는 모르고 있었다.

창현이 고양이가 아니지만 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는 정말로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겼다.


‘으흐! 으흐흐흐!’

태연은 속에서 올라오는 음흉한 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녀는 지금 자신에게 벌어진 모든 상황에 신께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역시 될 사람은 되는 법이제!’

개별 활동을 하고 있는 멤버들로 인하여 숙소로 돌아갈 교통편이 막혀버렸던 그녀였다. 택시를 타고 돌아가야 하나 싶었는데 수만이 그녀의 귀를 쫑긋하게 만드는 매력적인 제안을 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창현의 차를 타고 함께 숙소로 가라는 것!

자신의 재능을 인정해주고 솔로로서의 역량을 시험해줄 때보다 더 환호했다.

‘그동안 우리 굴린다고 속으로 욕했던 거 죄송해요, 삼촌!’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하며 태연은 옆에 앉은 창현을 힐끗거렸다. 운전을 하고 있는 로드 매니저 때문에 본성(?)을 내비칠 수 없었지만 자신에게 다가온 찬스를 놓칠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회사에 왔던 거야?”

“회장님하고 나눌 이야기가 있어서요. 그나저나 누나가 심사위원이라니, 상당히 의외였어요.”

“으응, 아직 나도 그럴 역량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 삼촌이 자꾸 해보라고 하셔서, 그러면 조금 더 역량이 향상될 거라 하시더라고.”

“회장님의 판단이 옳다고 생각해요. 가수가 노래만 잘 불러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노래를 듣는 귀도 중요한 만큼 배우는 입장과 가르치는 입장을 모두 겪어보아야 더 발전할 수 있죠.”

“그럴까? 나는 아직 잘 모르겠네.”

“어려운 과제니까요. 사실 저도 잘 몰라요.”

“으응.”

그 후로 차에 내려앉은 것은 무거운 침묵이었다. 창현이 말문을 열지 않자 태연은 은근한 불안감에 휩싸였다. 이대로 가다가는 수만이 자신에게 해준 절묘한 어시스트(?)를 받아먹지 못한 채 숙소로 배송(?)될 위기에 처한 것이다.

고양이가 생선 가게를 그냥 지나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법이다.

‘그건 안 돼!’

잘 먹으라고 절묘하게 기회까지 만들어준 마당에 그것을 놓치는 어리석은 우를 범하기 싫었다. 순간 빠른 속도로 머리를 굴리던 그녀는 방금 전 얼렁뚱땅 넘어간 부분이 있다는 걸 파악해내고는 이야기의 흐름이 끊어지지 않게 하였다.

“그런데 회장님하고 나눈 이야기가 뭐야? 나한테 말하기 힘든 거야?”

“별 거 아니에요. 제 다음 앨범에 관련해서 나눌 이야기가 있어서요.”

“다음 앨범? 벌써 다음 앨범 내려고?”

“미리 준비해서 나쁘지 않잖아요. 게다가 어제 영감을 얻어서 앨범의 기본 골자가 될 수 있는 테마를 잡고 한 곡 작곡할 수 있었거든요.”

순간 그의 머리를 들여다보고 싶은 충동이 불쑥 든 그녀다. 4집 앨범이 나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5집 앨범 구상에 들어간 것일까. 제대로 휴식기조차 보내지 못한 채 귀국해놓고 벌써 다음 앨범이라니, 정말 부러우면서 존경스러웠다.

“정말? 와! 축하해. 나도 한 번 들어볼 수 없을까?”

“누나가요? 스케줄 있지 않나요?”

“어차피 지금 숙소에 들어가면 특별히 할 일도 없거든. 저녁에 라디오만 하면 돼.”

허락을 바라는 눈으로 창현을 바라보는 태연의 눈빛 공격은 강렬했다. 그녀의 열망에 압도되는 걸 느낀 그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뭐 어려울 건 없지. 와도 되요.”

“창현이 너, 조심해야 하는 거 알면서 그러냐?”

몇 달 전에 새로 입사한 로드 매니저는 창현이 태연의 제안에 흔쾌히 응하자 걱정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여태까지 제가 얼마나 조심했는지 알면서 그러세요?”

“그래도…….”

“사고 같은 거 치지 않을 테니 형은 조용히 눈감아주세요.”

“에휴! 내가 무슨 힘이 있겠냐. 알았다. 그럼 녹음실에 내려주면 되지?”

“네, 고마워요.”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하하!”

창현에게는 제법 모질게 나왔지만 태연의 인사에 금세 풀어져 헤벌쭉한 모습을 보였다. <Gee>가 히트치면서 제대로 남성 호르몬이 흐르는 남자치고 소녀시대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에휴!”

극과 극을 달리는 반응에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짓던 창현은 포기했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잠시 후, 녹음실 앞에 도착하자 매니저가 사람들의 시선이 미치지 않은 주차장에 차를 댔고, 두 사람이 내리는 걸 보자 곧바로 회사에 돌아갔다.

“폐가 되는 거 아냐?”

“폐는 무슨요. 대신 제가 바래다드리기는 힘들어요. 여기서 나오면 집으로 가는 건 누나 혼자서 OK?"

“그 정도쯤이야!”

스물한 살 성인인 자신에게는 일도 아니다!

어깨를 쭉 편 채 대답하자, 피식 웃음을 지은 창현이 참 잘했어요라고 하며 그녀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은 뒤 도망치듯 녹음실 안으로 들어갔다.

“너…….”

졸지에 당한 어린 아이 취급에 눈에 불을 킨 태연이 뒤를 따랐다.


안으로 들어선 태연은 곧바로 녹음실에 들어갔다. 그의 작업실에 종종 놀러온 적이 있던 그녀였으나 녹음실 안에 들어가자 알 수 없는 긴장감에 몸을 지배해나가는 것을 느꼈다. 이곳은 가수 현의 공개되지 않은 수많은 창작물이 숨쉬고 있는 곳이라는 걸 잘 알고 있어서 그런 듯했다.

“주스 한 잔 마시세요.”

“응, 고마워.”

들어올 땐 씩씩거렸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미소 지으며 잔을 받아든 태연은 주스를 한 모금 홀짝였다.

“듣고 소감 말해줘야 해요.”

“알았어, 내가 모든 역량을 동원해서 말해줄게. 이래보여도 나 심사하는 여자라고!”

어깨에 잔뜩 힘을 주며 으스대자 피식 웃음을 지은 창현은 능숙하게 기계를 조작하더니 노래를 재생하였다.

발끈하려던 태연은 어정쩡한 표정을 짓다가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하자 집중을 시작했다.

처음부터 음울하게 깔리는 멜로디는 자꾸 그녀의 마음속 한줄기 불안함을 자극했다. 이어 흘러나오는 노래는 여태껏 들어왔던 현의 노래 중 겪어본 적 없던 새로운 것이었다. 세상에 철저히 고립된 소년의 독백은 너무나 현실성이 있어 송곳으로 후벼 파내는 것처럼 가슴이 아려왔다.

동감이 되었기에 자기도 모르게 몰입이 되었고, 세상에 홀로 동떨어져 있다는 것을 자각했을 때 느꼈던 지독한 외로움이 온몸을 휘감았다.

‘이런 노래일 줄은.’

여태껏 보였던 것과 장르를 달리하는 노래에 태연은 가슴 속에서 일어나는 전율을 느끼며 힐끗힐끗 그를 살피기 여념 없었다.

노래가 클라이막스에 달하고 끝맺음을 할 때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신없이 몰두하고 있던 태연은 화들짝 놀랐다.

‘뭐야? 언제 만들었는데 벌써 여자 피처링까지? 그런데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 같은데, 그래도 감정 이입은 정말 잘하네.’

창현의 보컬을 훼손하지 않는 내레이션은 소년의 잔혹한 독백을 중화시키면서 한편으로는 이 이야기가 노래만의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한 번쯤 겪을 법한 것이란 걸 상기시켜주었다.

노래가 끝나고 정신이 깬 태연이 창현을 바라보자 기대감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어떤 것 같아요?”

“대단해, 이런 곡이 있을 줄 상상도 못했어.”

어찌나 몰입했던지 꾹 참고 있던 숨결을 토해내며 태연은 엄지 손가락을 추켜세웠다. 두 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대단한 곡이었다.

“누나가 칭찬해주니 다행이네요.”

“내 칭찬이 뭐 그리 중요하다고.”

자신을 추켜 세워주는 말에 쑥스럽지만 기분은 좋은 태연이다. 이렇게 대답해주는 것 자체가 자신에 대한 그의 사랑(?)이라는 걸 뜻했으니 의도하지 않아도 입이 귀 끝까지 말려 올라갈 정도였다.

“하하, 너무 겸손하네요.”

“겸손한 건 너지. 그런데 노래에 내레이션이 들어갔네? 만든 지 얼마 안 되었다고 하더니 빠르다.”

“그렇죠? 하하!”

스스로 생각해도 신기할 지경이어서 창현은 웃음을 지었다. 영감을 얻어 노래를 완성하기 무섭게 만난 소녀시대 누나들. 그리고 그곳에서 더 발전된 방향을 제시받고 생각한 것과 딱 맞는 내레이션을 얻게 되었다.

‘행운의 부적이라도 되는 건가? 후후!’

아귀가 딱딱 맞아떨어지는 상황에 창현은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누가 내레이션 한 거야? 노래랑 딱 맞아떨어지던데.”

“그렇죠? 역시 알아보시네요.”

태연 딴에는 살짝 꼬아서 내레이션을 한 사람의 정체에 대해서 물어보았지만 그는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당사자인 그녀는 다르게 해석했다.

‘음, 창현이가 말해주질 않네. 말해주기 어려운 건가? 아니, 아직 공개되지 않은 걸 감안하면 그럴 수밖에 없지. 김태연 이 바보.’

섭섭함이 들었다가 아직 미완성 곡이니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생각해 자신의 무례를 꾸짖는 태연이다. 이렇게 스스로 꾸짖어야 나중에 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을 것이다.

아직 여자 친구가 된 것도 아닌데 앞서 나가면 언젠가 큰 코 다칠 수 있는 노릇이었다. 쟁쟁한 경쟁자들이 즐비하니 스스로 행동을 자제할 줄 알아야 했다.

“그렇지! 내가 보는 안목이 좀 있지.”

“막상 그렇게 말하니 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칫! 칭찬을 좀 더 해주면 안 되나. 야박하기는.”

“그것도 그러네요. 어쨌든 누나도 좋게 평가해주니 한결 마음이 놓이네요. 아까 회장님에게 들려드리니 좋게 말해주시더라고요.”

“삼촌이? 당연히 그래야지! 여태까지 내가 들어본 곡 중에 가장 몰입도가 높았어. 연습생 때 힘들었던 시절이 떠올라서 우울할 뻔 했으니.”

“그렇군요.”

태연의 말에서 수만이 해주었던 충고를 떠올리는 창현이다. 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음악은 그 자체만으로 축복이지만 용도에 따라 복이 되기도 하고 화도 되는 법이다. 그것이 모두 뼈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이라 생각하며 실수를 범하지 않게 되새겼다.

그에 반해 태연은 아까 전 자신의 궁금증을 풀지 못한 게 떠올라 지나가듯 창현에게 물었다.

“그런데 회사는 무슨 일로 왔던 거야? 노래를 우리 회사에 유통을 맡기려는 것도 아닐 테고.”

“아, 그거요? 방금 들었던 곡 내레이션 있죠? 그거 유리 누나가 해주셨거든요. 어제 만나서 조언을 들었거든요. 게다가 노래의 분위기도 잘 이해하고 계셔서 도움을 청했는데 훌륭한 작품이 나왔어요. 회장님한테 그에 대한 문제를 매듭 지었던 거예요. 후후.”

“…….”

스스로 일을 해결했다는 생각에 흐뭇한 미소를 짓는 창현이었지만 이야기를 듣고 있는 태연은 머리를 한 방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정보가 창현에게서 흘러들어왔던 것이다. 그녀의 귀에 천둥처럼 울려 퍼진 것은 유리에게 노래를 들려주었고 도움을 받아 곡을 완성했다는 점이다. 오늘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창현이 귀국했다는 사실을 몰랐던 태연으로서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가 아닐 수 없다.

남녀 관계가 앞서나가고 뭐고 그녀의 머릿속에서 사라진지 오래였다. 순식간에 상황 판단을 마친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것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도장(?)을 찍고 지나간 유리를 향해 발산되는 맹렬한 분노였다.

짝사랑 하던 옆집 오빠가 친언니와 진한 스킨십을 목격한 것과 비슷한 경우였다.

“지금 말한 거 다시 말해보랑께!”

폭발하는 태연, 분노로 붉게 변한 그녀의 얼굴이 숙소의 풍경을 암시했다.

피바람, 피바람이 불 것이다.


분노에 가득 찬 태연은 앞뒤 가릴 것 없이 앞으로 돌진했다. 걱정스러운 창현의 목소리가 옆에서 들리기도 했지만 그녀의 눈앞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였고 그대로 숙소를 향해 돌진했지만 그녀를 반기는 것은 처절하게 발려야 할 유리가 아니라 텅 빈 숙소였다.

그제야 자신의 착오를 알아차린 그녀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처럼 시간이 흐를수록 속안에 타오르는 분노가 사라져야 했지만 그 시간은 오히려 그녀의 분노를 더욱 키우는 악영향을 발휘하였다.

라디오를 하면서 그 분노를 더욱 키워나간 그녀는 자정 무렵, 마침내 스케줄을 끝내고 안으로 들어온 유리를 향해 폭발시켰다.

“권유리!”

“뭐, 뭐야? 사람 놀라게.”

미영과 함께 안으로 들어오던 유리는 다짜고짜 소리를 지르며 달려드는 태연을 보고서는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답을 바라는 눈으로 먼저 도착한 멤버들에게 눈짓을 하였다.

하지만 먼저 스케줄을 끝내고 들어온 멤버들조차도 태연의 반응을 이해하지 못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문을 표하고 있을뿐이었다.

“뭐야, 왜 저래?”

“권유리 네 이년! 네 죄를 네가 알렷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그래?”

다시 황당한 표정을 짓는 그녀. 죄라고 할 법한 짓을 저지른 기억이 없는데 자신을 죄인으로 몰아넣는 행동에 의문을 느꼈다.

‘내가 무슨 짓을 저질렀나?’

평소라면 화를 내어 기를 꺾었을 테지만 실행으로 옮기지 않은 이유는 태연의 눈이 뒤집힌 것을 보아서 그렇다. 절대권력을 발휘하며 서열 최정점에 위치하던 수연조차도 눈이 뒤집힌 태연에게 발릴 만큼 저 상태는 위험했다.

흥분한 맹수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냉정함을 유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할 터. 태연이 화를 낼수록 유리는 침착한 마음을 유지하고자 노력했다.

“너! 어제 창현이 만났지?”

“으응?”

침착하려던 것이 무색하게 당황해버렸다.

사태를 흥미롭게 관람하던 몇몇 멤버들은 태연의 말에 눈에 띄게 표정이 굳어갔고, 창현을 만나지 못했던 멤버들의 눈이 가늘게 찢어지며 유리를 탐색하는 분위기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급변하는 분위기 속에서 졸지에 대역 죄인이 되어버린 유리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말했다.

“무슨 말이야?”

“거짓말 치려고 해도 소용없어. 오늘 내가 창현이를 만나서 모든 사실을 확인했으니까?”

“너도 창현이를? 넌 혼자 만났던 거구나. 그것도 혼자서. 후후.”

적에게 절호의 찬스를 내준 것과 다름없었지만 유리는 빠르게 침착함을 되찾으며 입가에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자신은 여럿이서 만났지만 혼자서 만난 태연은 그 어떠한 것으로도 씻을 수 없는 범죄 현장을 포착당한 셈이다.

“어, 어쨌든! 너 창현이 곡에 참여했다면서? 사실이야?”

“사실인데?”

망설일 것 없이 인정하는 태도에서 멈칫한 태연은 다시 눈에 쌍심지를 켰다.

“이익!”

“그렇게 보면 눈 상하겠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그러는데? 오히려 소녀시대 일원으로서 창현이 곡에 참여한 건 대단한 성과 아니야?”

“…….”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린 태연은 무시무시한 눈으로 유리를 노려보았다. 논리에서 완벽하게 지고 들어갔지만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그게 아니라는 것은 여기 있는 모든 멤버들이 알고 있는 사항이었다.

“권유리 너…….”

할 말이 없으니 그저 이를 바득바득 갈며 노려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흉흉하게 변해가는 분위기 속에서 나선 것은 미영이었다.

유리와 함께 숙소로 돌아와 상황 파악이 덜되던 그녀는 두 사람의 대화에서 흘러가는 상황을 포착하고는 앞으로 나서며 중재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단짝 태연이 아닌 유리의 편을 들어주었다.

“난 유리의 행동이 잘못되지 않았다고 생각해?”

“뭐, 뭐라고? 미영이 네가 어떻게…….”

배신감으로 물드는 태연의 얼굴을 보며 마음은 아팠지만 이미 시작된 죽음의 레이스는 그들이 멈출 수 없을 만큼 진행되고 있는 중이었다.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미영은 태연을 바라보고, 그 후 다른 멤버들을 둘러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지 않아? 예전이라면 추궁했을 사항이지만 지금은 아니야. 태연이 네가 창현이의 여자 친구인 것도 아니잖아, 안 그래?”

“…….”

정곡을 찌르고 들어오는 말에 입술을 꾹 다물었다. 분한 마음이 여기까지 전해져오는 것이 느껴졌지만 오늘 같은 상황을 확실히 정리해두지 않으면 모두에게 여파가 미칠 것 같아 미영은 거침없이 말을 이어나갔다.

“여자 친구가 아닌 이상 그가 어떤 여자를 만나던 터치할 수 없는 부분이야. 오히려 기회를 훌륭히 포착한 유리가 대단한 거라 생각해. 소녀시대 이름으로 앨범에 참여했다면 더더욱 대단하고.”

“하지만 그렇게 하면 스캔들을…….”

“궁색하게 그러지 말자, 태연아. 네가 화를 내는 게 그 이유가 아니라는 건 여기 모두가 알고 있어. 같은 논리라면 오늘 창현이를 만난 너도 우리에게 추궁 당해야 해.”

“크윽.”

논리에서 뒤처진 태연은 절망에 빠져들며 좌절했다. 몇마디로 그녀를 침몰시킨 미영은 오연한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음속으로 찔리고 있던 멤버들은 그녀의 시선을 외면하였고, 비슷한 마음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호응의 눈길을 보냈다.

미영이 분위기를 만들어놓자 당사자인 유리가 마무리를 위해 나섰다.

“미영이 말이 옳아. 제대로 선전포고를 한 마당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는 것이 웃긴 꼴이지. 경쟁을 하되 의가 상하지 말자던 그때의 말은 유효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쉽게 양보할 거라 생각했다면 오산이야. 방해하려면 얼마든지 해봐. 최후의 승자는 내가 될 테니까.”

반짝반짝 빛나는 그녀의 눈빛은 마주치기 겁날 정도로 강렬했다. 지략에 능통한 그녀의 당당한 선전포고는 마치 숨겨둔 패를 두고 있는 것 같아 다른 멤버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고 있는 가운데 분위기를 확 깨는 미영의 한 마디가 보태졌다.

“한 마디로 먼저 도장 찍으면 장땡이라는 말이야, 헤헤!”

띨파니의 한 마디가 모든 상황을 정리했다.


하루 푹 쉰 창현은 자신을 노려보는 석규를 보며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뜻대로 일을 밀어붙이기 위해 강압적인 방법을 사용하긴 했지만 후폭풍이 이런식으로 다가올 줄 몰랐다.

“하하.”

웃음으로 모면해보려 했지만 그를 바라보는 석규의 표정은 더욱 못마땅하게 변했다.

“대주주의 위엄이 상당하군.”

“죄송해요.”

“죄송할 것까지야. 그나저나 그렇게 일을 처리해버리면 이쪽이 매우 곤란해진다고. 사회의 시스템이라는 것이 괜히 생겨난 게 아니니 다음부터는 지키는 게 좋다. 알겠지?”

“알았어요, 죄송해요.”

“아니, 죄송할 건 없다. 회사 내에서도 네가 내고픈 앨범을 한 번쯤 내는 게 좋을 거라는 결정이 나왔으니까. 대신! 이번 앨범은 너만의 색깔을 지닌 곡인만큼 대중적인 면에서 상당히 부족할 거란 게 우리들의 생각이다. 맞나?”

“아무래도 그렇겠죠?”

“그래서 마케팅적 측면에서 적극적인 공세보다는 소극적인 면모를 보일 예정이다. 물론 이건 임시적인 결정일 뿐, 네 앨범이 나오게 되면 다시 결정할 사안이긴 하지만.”

“음,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네요. 대중적인 게 아니라면 자칫 잘못해서 엎어질 수 있으니까요.”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석규는 고개를 저으며 말을 덧붙였다.

“그게 끝이 아니다. 일단 네 입장에서는 마음에 들지 않겠지만 회사 내에서는 항상 조심할 수밖에 없다. 주력 연예인이 너와 라샤밖에 없는 시점에서 네 앨범이 엎어지게 되면 회사에도 엄청난 타격을 입거든. 그러니 좋든 싫던간에 네가 좋지 않은 성적을 거둘 때를 대비할 수밖에 없다.”

“…….”

“기분 나쁘겠지만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예전 같이 우리들이 다 해먹는 곳이라면 상관없겠지만 이제는 식구들도 꽤 늘어났으니 말이야.”

“그렇겠죠. 그래도 기분은 좀 그러네요.”

자신의 작품이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분이 좋을 리 없다. 하지만 그것이 이곳 세상의 냉정한 판단이었고,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허우적거릴 것이라면 혼자 틀어박혀 자위용으로 만드는 것이 낫다.

대중들의 환호를 받아야 하는 작품을 만드는 입장에서 창현은 오로지 자신만의 세계보다는 현실과 맞물리는 작품을 만들어야 했고, 자신의 색을 추구하려는 지금 시점에서도 피할 수 없는 명제였다.

자신이 추구하는 것과 대중성을 녹여내는 것. 어찌 보면 뮤지션이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사안이라 볼 수 있다.

“아직 작품을 내놓지 않았으니 그렇게 평가할 수밖에 없겠지. 그들의 우려를 불식시키고 싶으면 상상을 뛰어넘는 곡을 가지고 오면 되고.”

창현을 부채질 하듯 실실 웃음을 지으며 자극하는 석규였다.

평상시 잘하는 모습을 보이다 큰 무대에서 어이없이 무너져 내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큰 무대에서 자신의 역량 이상의 것을 발휘하는 사람이 있는 법이다. 여태껏 큰 무대를 거쳐온 창현은 후자에 속하는 인물로서 석규는 그가 자신만의 색을 담은 앨범을 발매하겠다고 말할 때 위기임과 동시에 기회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였다.

‘모든 예술가들이 그러한 편이지. 대중성으로 성공을 거두면 자신의 색을 입히고 싶어 하니까. 창현이는 다른 뮤지션들과 달리 모든 방면에서 두드러진 모습을 보였기에 이제야 이런 문제가 불거진 거지.’

적당한 자극을 통해 다시 한 번 한계를 뛰어넘어 비상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것이 석규의 바람이었다.

그의 의도가 먹혀들었는지 창현은 잔뜩 기합이 들어간 표정으로 말했다.

“기대하라고요!”

“기대하고 말고.”

“이상한 소리 한 사람들의 콧대를 눌러주겠어요.”

“그러면 좋고 말고. 아참, 그러고 보니 말하지 못한 게 있는데 말이다.”

“……?”

“너 아직 지영이한테 연락을 하지 않았던데.”

“크흑!”

창현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석규의 말에 깨달음을 얻은 창현이 지영에게 연락하여 자신의 잘못을 싹싹 빌고 있을 때, 수연은 자신의 여동생인 수정에게 신나게 깨지고 있는 중이었다.

스케줄을 끝내고 안무 연습을 위해 회사 연습실로 향한 그녀는 곧 데뷔 준비를 위해 연습하던 수정과 만날 수 있었고, 몇 마디 대화를 나누다가 타박을 들어야만 했다.

“언니! 이 바보!”

“왜, 왜 그러는데?”

“지금 상황 파악이 안 돼? 기간이 얼마나 지났는데 아직까지 진전이 없는 거야. 그래서! 현 오빠랑 어떻게 된 건데? 진전이라도 있는 거야?”

“…….”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수연은 입을 벙긋거릴 뿐 다른 반응을 보이지 못했다. 그녀의 말마따나 아직까지 이렇다 할 성과가 없고 지지부진했던 것이다.

아니, 지지부진이 아니라 오히려 퇴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뜩이나 견제를 잔뜩 받던 상황에서 윤아의 폭탄 발언 이후 여덟 명의 적들이 공개적으로 활동하겠다고 천명하였기에 기회를 붙잡기 더더욱 힘들어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왜 말을 못해?”

“네 말대로라서 그래. 나 어떻게 하지, 수정아? 힝…….”

태연을 끌어내면서 하찮탱으로 만들고 다시 권력의 최정점에 오른 그녀였지만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 불안함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 어제 태연의 발언으로 인해 유리가 남몰래 앞서 나가고 있다는 점과 미영의 먼저 도장 찍으면 장땡이라는 발언은 전운을 한 층 고조되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그 사이에 낀 수연은 자신이 가장 앞서 나갔다고 자부하고 있었지만 은연중 어떻게 행동을 개시해야 할지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권력자로서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없었기에 의연한 척 했는데 여동생의 타박 앞에 맥없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였다.

“으이구! 이 바보 언니.”

“나 어떻게 해야 해? 애들이 너무 강력해서 엄두가 안 나.”

아홉 명 중 승리를 쟁취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한 사람뿐이다.

아니, 애초에 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창현을 노리는 여자는 한둘이 아니었다. 아홉 명 중 한 명이라 칭한 것도 범위를 극도로 축소시켜서 한 말이다.

쟁쟁한 경쟁자들을 볼 때마다 수연은 마음이 약해졌다.

‘특히 파니랑 유리, 걔네들은 괴물이잖아.’

치열한 접전 속에서 능력을 각성하며 진화한 두 사람의 면모는 놀라울 지경이다. 연습생 시절부터 지켜본 두 사람은 전혀 지략과 관련 없는 사람들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가장 두려운 존재가 되어버렸다.

“엄두가 나지 않아도 달려들어야지! 아니, 언니가 깔끔하게 포기하면 오히려 나을지도? 더 이상 이렇게 끙끙 앓지 않아도 되잖아.”

“그럴까? 정말 그게 나은 걸까?”

“응, 대신에 현 오빠 곁에는 다른 여자가 있겠지만. 가령 파니 언니라던가…….”

은근슬쩍 미영을 언급하는 수정이었다. 승산이 희박한 싸움에 전의를 잃어버린 수연은 순간 마음속에서 포기라는 단어가 떠올랐지만 이어진 수정의 말에 정신이 깨는 걸 느끼며 머리가 차갑게 식어갔다.

무려 7년 동안 연습생 생활을 견뎌내며 마침내 데뷔의 꿈을 이룬 자신이 물러선다고? 그리고 자신의 것(?)이 되어야 할 자리에 미영이 헤실거리며 서 있고?

‘헤헤! 제시, 우리 잘 어울려?’

수연의 상상 속에서 미영은 예의 띨띨한 웃음을 지으며 옆에 선 창현의 팔짱을 낀 모습이 연상되었다.

사그라 들고 있던 전의는 그 미소 하나에 다시 활활 타오르기 시작하였다.

빠드득!

‘절대 물러설 수 없어.’

같은 해외파였기에 은연중 경쟁심을 갖고 있던 수연은 절대 질 수 없다는 의욕과 함께 전의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아직 포기하지 않았지?”

“절대 파니에게는 질 수 없어.”

“좋아! 그 기세야, 내가 힘껏 도울게, 언니. 우리 함께 방법을 강구해보자.”

“OK."


정자매가 서로를 위로하고 용기를 복돋아주고 있을 무렵, 효연은 오랜만에 반가운 재회 자리를 갖고 있었다.

“효연아!”

“네, 언니! 이렇게 불러주셔서 고마워요.”

입가에 미소 지은 그녀가 고개를 꾸벅 숙이자 테이블에 앉아있던 세 여인이 입가에 미소 지은 채 살갑게 맞아주었다. 효연이 비어 있는 자리 한 쪽에 앉자, 옆에 앉은 여인이 수저와 젓가락을 세팅해주며 물었다.

“그동안 잘 있었어?”

“저야 잘 있었죠, 언니는요?”

“우리야 뭐 그렇지. 그나저나 인기 장난 아니던데? 잠깐 외국에 갔다 왔을 뿐인데 완전 소녀시대 천하가 되어 있어.”

“뭘요. 미란 언니도 인기 많으시잖아요.”

대수롭지 않은 듯 대답했지만 효연의 입가에 맺힌 미소에는 자부심이 넘쳐 흘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미란은 어깨를 으쓱했다.

“이젠 그것도 잘 모르겠어. 주변에 워낙 괴물같은 것들만 있어서 체감할 겨를이 있어야지.”

“그래요? 아하하!”

웃음을 터뜨린 그녀는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시린과 헤룬과도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갓 귀국한 라샤의 술자리에 초대를 받아 이렇게 오게 된 것이다. 평소에 돈독한 친분관계를 유지하였기에 그녀는 자신을 불러준 그녀들에게 무척 고마움을 느꼈다.

“그런데 창현이랑 비슷한 시기에 귀국했네요? 그것과 관련 있는 건가 봐요?”

“그렇겠지?”

“비밀이에요? 에이, 섭섭해라.”

“비밀 정도는 아니고, 같은 소속사다 보니 공백기에는 같이 움직이려고.”

섭섭한 기색을 보이는 효연의 모습에 미란이 재빨리 대답해주었다. 그녀의 그런 사소한 배려마저도 고마운 효연이었다.

“요즘 많이 힘들지? 인기가 많아지면 고생이 심할 텐데.”

“생각보다 그렇게 힘들지는 않아요. 언니들과 달리 저희는 멤버 숫자가 많잖아요. 아직까지 인기도 편중되어 있는 감이 없지 않아 있고요. 그래서 단체 스케줄 이외에는 그리 바쁘지 않아요.”

입가에 걸린 그녀의 미소는 보는 사람마저도 쓰게 느껴질 정도였다. 즐거워야 할 자리가 자신으로 인해 분위기가 착 가라앉자 실수를 깨달은 효연이 사과했다.

“아, 죄송해요, 분위기가 가라앉게 하려고 한 게 아닌데. 어차피 그룹이란 게 그럴 수 있는 거잖아요? 언젠가는 제 시대가 올 수도 있을 테고.”

“그래? 일단 벌주 한 잔!”

“넵!”

잔을 권하자, 군기가 바짝 든 얼굴로 곧장 소주를 한 잔 꼴깍 마시는 그녀였다. 독한 소주 맛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자 인상이 살짝 찌푸려졌지만 그 열기마저도 지금 머릿속을 지배하는 생각과 일치하여 거부감이 없었다.

“너무 비관적으로 생각하지 마. 인기란 건 돌고 도는 거잖아.”

“그렇겠죠? 그럴 거라 생각해요. 그렇지 않으면 좀 억울할 것 같아서요.”

“그렇지. 효연이 넌 춤을 잘 추잖아. 그걸로 밀고 나가보는 건 어때?”

“그럴까 싶기도 했지만 유리도 춤을 잘 춰서요.”

포지션이 겹치고, 인기도 갈라 먹는 상황이기에 그마저도 쉽지 않은 것이 그녀의 상황이었다. 여러 가지 위로의 말을 건네는 라샤의 멤버들이었지만 번번이 지적 당하며 침몰하게 되자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칫! 차라리 우리 그룹으로 들어오는 게 어때? 그럼 춤 컨셉으로 팍팍 밀어줄 수 있을 텐데.”

“그래요? 아하하! 그렇게만 해주시면 저야 감사하고 또 감사할 따름이죠.”

잔이 오가면서 취기가 얼큰하게 오른 효연은 입가에 헤실헤실 미소를 지으며 미란의 말을 받았다. 소녀시대 내에서 주량 1, 2위를 다투는 그녀였지만 빠른 속도로 술을 마시다 보니 취기가 바짝 올라 있었다.

“그럼 정말 우리 라샤에 들어오지 않을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후훗! 그러니깐 말이지…….”

“세룬이 너! 읍! 읍읍!”

말을 아끼며 상황을 지켜보던 세룬이 입을 열자 시린이 뭐라 말하려 했지만 미란이 자리에서 일어나 재빨리 그녀의 입을 봉인했다. 몸을 바동거리며 벗어나려는 그녀였지만 힘에 부치는 지 크게 저항하지 못했다.

“우리가 귀국한 이유 중 하나가 창현이랑 관련 있는 거거든.”

“그래요?”

“그런데 우리가 한 가지 스케줄을 하게 되었는데…….”

은근한 어조로 말하며 세룬이 손가락을 까딱이자 의미를 알아차린 효연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그녀에게 귀를 가까이 가져다 댔다. 묘한 미소를 지은 그녀가 귓속에다가 몇 가지 사실을 알려주자, 효연의 눈이 점점 크게 변하더니 왕방울만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그녀는 술이 확 깨는 걸 느끼며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저, 정말이에요, 언니?”

“물론이야, 어때, 재미있는 기회가 될 것 같지 않아?”

“다, 당연하죠! 그런데 정말 저도 같이 해주시는 건가요?”

“그럼, 우리 친한 동생 효연이가 같이 하는 건데 그 정도도 못해주게? 마침 우리도 친분 있는 동생들이 필요했으니 와준다면 오히려 이쪽에서 땡큐지.”

“그럼 참가할게요! 꼭 참가할게요.”

“좋아, 그럼 준비해놓기다? 다른 준비는 우리가 알아서 해줄 테니까.”

“알았어요.”

세룬의 말을 들은 효연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걸렸다.

그때까지도 시린은 미란에게 잡혀 있을 따름이다.

효연과 술자리를 끝내고 숙소로 돌아온 라샤 멤버들의 분위기는 흉흉했다. 특히 리더인 시린은 여태까지 보이지 않았던 날카로운 표정을 지은 채 상황을 자초한 세룬을 추궁했다.

“어쩌자고 그런 제안을 한 거야?”

“왜, 재미있을 것 같잖아.”

“너 정말 진심으로 하는 이야기야?”

“당연히 진심 아니겠어? 연예 활동을 하는 동안 연애는 가급적 삼가자던 누군가의 유지를 이어받아 행동하는 건데 말이야.”

“…….”

히죽 웃음을 짓는 세룬의 행동에 시린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맞아! 보니까 아주 푹 빠져있던데?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음에도 여전히 인기로 인해 고민이 많은 여인의 모습! 당연히 애절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어. 안 그래?”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말이 아니면 또 뭔데? 말이 되니 내가 이렇게 말하는 거잖아.”

“그럼 난 뭐가 되는데?”

“이미 마음을 접은 거 아니었어?”

“그건 나도 잘 모르겠어. 하지만 기분이 매우 나빠. 아무래도 너희들의 행동 때문인 것 같아. 그러니 아직 좋아하는 게 맞는 것 같아.”

미란의 물음에 시린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데뷔 전부터 그녀의 마음속에는 줄곧 한 사람만 자리하고 있었다. 과거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생각했지만 최근 들어 그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이 그녀로 하여금 혼란스럽게 하였다.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세룬이 입을 열었다.

“잘 들어. 넌 창현이를 사랑하는 게 아냐.”

“뭐?”

“우리는 줄곧 함께 해왔잖아. 그런 만큼 너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자부해. 넌 창현이를 사랑하는 게 아니야. 데뷔 전 누구보다 힘들어하던 널 저 높은 곳으로 이끌어준 게 창현이지. 넌 너를 정상으로 이끌어준 그에게 감사함과 존경을 느끼면서 혼란을 느낀 거야.”

“거짓말 하지 마.”

“나도 단번에 설득이 될 거라 생각지 않았어. 하지만 내가 지켜본 바로는 그래. 만약 네가 진정으로 사랑했다면 몇 년 동안 미지근한 반응을 보였을까? 아니야, 사랑했다면 오늘 효연이처럼 진흙탕도 마다하지 않은 채 참전하려 했을 거야. 수동적이고 뒤늦게 반응하는 그 부분 자체가 사랑하지 않는다는 증거야.”

“…….”

세룬의 말에 시린은 입을 꾹 다물었다. 막연하게 느껴졌던 혼란이 그녀의 말을 들으면서 구체화 되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아직 그녀가 판단하기에는 시기상조처럼 여겨졌다.

“바로 이해할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으니까. 천천히 생각해봐.”

“…피곤해서 잘래.”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시린은 그대로 방에 들어갔다.

그 모습을 안타까운 눈초리로 지켜보던 미란이 세룬에게 말했다.

“너무 직설적으로 말한 거 아냐?”

“언젠가는 해야 할 말이었어. 사랑을 하더라도 제대로 된 사랑을 해야지 사랑이 아닌 것을 사랑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만큼 불쌍한 게 또 어디 있겠어.”

“그래도 안쓰러운데.”

“아픈 만큼 성장한다고 하잖아. 그러니 믿고 지켜보자.”

“에휴! 괜히 마음만 복잡하게 변하는 기분이네.”

“별 수 없잖아. 저 상태가 오래 가면 일단 합류하지 않는 걸 기본 베이스로 깔고 가자. 어차피 이쪽에서는 그걸 상쇄하고도 남을 빅딜이 준비되어 있으니.”

“그냥 네가 소속사를 차리지 그래? 기획부터 협상까지 혼자 다 해먹네.”

“다재다능한 사람의 능력이라 생각해줘.”

“에휴!”

미란의 한숨이 깊어만 갔다.


“…….”

한쪽에서 폭풍이 몰아치고 있는 동안 숙소로 돌아온 효연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은 채 이 거센 박동을 가라앉히기 바빴다. 많은 양의 술을 빠른 속도로 마신 그녀였지만 몸은 전혀 알콜의 영향을 받지 않은 듯 머리는 빠른 속도로 돌아가고 있었다.

“…꿈은 아니겠지?”

특별히 무언가를 바라고 간 것은 아니다. 시간이 비어 있고, 오랜만에 귀국했기에 반가운 마음에 나갔을 뿐. 그런데 예상치 못한 횡재를 하게 되자 효연은 급기야 현실인지 꿈인지 분간하지 못하는 상태에 접어들었다.

“아직 모든 상황이 끝난 게 아니야. 넘어야 할 벽이 많아. 하지만…….”

입가에 저절로 맺히는 미소. 몇가지 일들만 해결하면 그녀에게 주어지는 것은 그야 말로 절호의 찬스였다.

그 누가 공개석상에서 이러한 기회를 부여잡을 수 있겠는가. 하늘은 준비된 자에게 기회를 내려주는 것처럼 효연은 자신에게 찾아온 기회를 붙잡고자 총력을 기울여야 할 때란 걸 느꼈다.

덜컹.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어?”

“으응? 아니.”

방안으로 들어오며 질문을 건네는 수연의 행동에 효연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 오늘따라 그녀가 묘하게 활기차다는 걸 느낀 효연은 눈을 가늘게 떴다. 몇 년 동안 보아왔기에 단지 씻어서 그랬다는 것이 아니란 걸 알아차렸다.

“흐음?”

“뭐, 뭐야? 왜 그러는데.”

“아니, 오늘따라 우리 시카 양이 의욕적인 것 같아서 말이지.”

“내가 언제 그랬다고…….”

말은 그렇게 하지만 움찔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수세에 몰려있던 수연의 눈이 돌연 날카롭게 변하더니 효연을 노려보았다.

“술 냄새! 너 술 마셨어?”

“응? 술 마셨는데 왜?”

“알콜 냄새! 당장 씻어!”

“왜애! 기분도 좋은데.”

“도대체 누구랑 마셔서 술을 마신 거야? 너 지금 냄새 장난 아니거든?”

“라샤 언니들이랑 마셨어.”

“그 언니들이랑? 외국에 계속 있던 게 아니라?”

“오늘 귀국했거든. 난 스케줄이 없어서 술자리에 참여했지롱.”

약 올리는 말투에 수연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지만 빠른 속도로 되돌아왔다. 참여하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오늘 안무 연습으로 인해 만나게 된 수정의 덕택으로 다시 한 번 칼날을 벼려놓을 수 있었다.

‘갔으면 술 마셔서 다이어트 때문에 머리가 아팠을 거야.’

그렇게 스스로 위안을 삼아보지만 부러운 마음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칫! 나도 안무 연습 없었으면 가는 건데.”

“후후! 그러니 평소에 열심히 했어야지. 날 봐! 안무 연습도 빠질 수 있는 이 우월함을!”

“죽을래? 누굴 약 올려!”

주먹을 들며 위협하자 본능적은 위협을 느낀 효연이 장난을 그만두었다. 그리고는 오늘 술자리에서 얻어낸 수확을 떠올리며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하기야, 오늘 같이 갔으면 나한테 좋지 않았을 테지.”

“뭐 좋은 거라도 얻었나 봐?”

“하하! 혼자 간 덕택에 내가 바로 절호의 기회를 얻었다는… 헉!”

아직 술기운이 완벽하게 해소되지 않았던 효연은 은근히 부추기는 목소리에 자기도 모르게 진실을 발설하고 말았다. 옆에 앉아 있던 수연은 그녀의 말이 무엇을 암시하는지 깨닫고는 눈을 빛내며 다가왔다.

“절호의 기회가 무엇인지 무척 궁금한데?”

“마, 말해도 모를 거야.”

“말해도 모르는 건 내가 들은 다음에 결정할 테니 일단 이야기를 나눠볼까? 아주 진하게. 후후!”

“살려줘!”

필사의 탈주를 감행해보는 효연이었지만 어느새 뒷덜미를 붙잡은 수연은 그녀를 그대로 침대에 던져버리더니 달려들었다.


폭풍과도 같은 시간이 흘러갔다. 내일 스케줄이 있다는 것조차 잊은 채 수연과 효연은 침대에 뒤엉켜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하아! 하아! 끈질기네.”

“후욱! 훅!”

거칠게 숨을 몰아쉰 효연은 몸을 웅크리며 방어를 극대화시켰다. 끝까지 버텨내는 그녀의 태도에 눈살을 찌푸린 수연은 자리에 주저앉았다. 긴 시간 괴롭혔지만 끝까지 입을 열지 않는 효연의 행동으로 인해 반쯤 포기 지경이었다.

“독한 것.”

“너도 마찬가지야.”

“흥! 정말 말 안 해줄 거야?”

“내가 말해주면 방해하려고?”

“아, 아니야!”

“너 방금 말 더듬었거든?”

가늘어진 효연의 눈이 자신에게 향하자 움찔한 수연은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그녀의 말마따나 진실을 이야기 해줄 경우 방해하지 않을 거라 장담하지 않았다.

“씨이! 알려줘.”

결국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고집을 부리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효연의 태도는 강경했다.

“내가 획득한 기회인데 그걸 왜 말해주냐? 미영이가 말했던 거 기억 못해? 먼저 도장 찍으면 장땡이라고, 그때까지는 모두 연적이야.”

“…애들한테 말할 거야.”

“얼마든지 말해! 너희들이 알아내려고 해도 알아낼 수 없을 테니까.”

그리고는 입 꼬리를 말아 올리는 것이 무척 비열하게 느껴졌다. 분을 참지 못한 수연이 씩씩거리자 효연이 한 마디 조언을 덧붙였다.

“아참, 라샤 언니들에게 물어봐도 대답 안해줄 거야. 이미 단단히 함구 시켜놨지롱.”

“두고 봐. 오늘 일을 후회하게 될 거야.”

“과연 누가 후회할까. 난 씻으러 간다, 크크!”

수연을 발라버린 효연은 입가에 웃음을 짓더니 그대로 방을 나섰다.


효연의 행동은 빨랐다. 결국 수연은 폭탄선언을 하며 멤버들에게 알렸지만 능청을 부리며 모른 척을 하자 다른 멤버들도 그녀를 강경하게 추궁하지 못한 채 한 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동맹 관계인 수영이 은근한 어조로 알려줄 것을 요구해왔지만 그녀가 그럴 리 없었다.

멤버들의 견제를 벗어난 그녀가 향한 곳은 회사였다. 평소 안무 연습에 성실히 임하는 그녀이기에 회사 측에서 상당한 여유 시간을 제공하고는 하였지만 오늘 만큼은 남달랐다.

회사에 도착한 그녀는 기획실장을 찾아 세룬이 했던 제안에 대해 설명했다.

“뭐? 그게 정말이냐?”

“아직 아무 곳에도 알려지지 않은 소스에요, 어때요?”

“어떻게 하긴! 완전 대박이지. 어디 보자! 그날 스케줄이 없네?”

“네, 때마침 저만 없더라고요.”

“그래? 으음! 다른 애들도 같이 나가면 더 좋을 것 같긴 한데.”

“안 돼요! 스케줄을 바꾸면 이미지가 나빠지잖아요. 게다가 우리 멤버들이 너무 많으면 또 욕을 먹을 수도 있고요. 아마 세룬 언니도 그것까지 염두에 두고 제게 이야기하신 걸 거예요.”

“그러려나?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다. 안 그래도 자주 엮인다는 이야기는 종종 들었으니.”

멤버들을 위하는 척하며 은근슬쩍 혹시나 있을 방해공작을 미연에 차단해버리는 센스를 발휘했다. 그러면서 향후 여파에 대해 전문가의 의견을 구했다.

“실장님이 보시기에는 어때요?”

“괜찮은 것 같다. 안 그래도 회사 측에서 네 인기를 올리기 위해 여러 가지 방안을 검토 중이었는데 이런 곳에 나간다면 개인적인 장기를 선보일 수도 있으니 나쁘지 않겠지.”

“네, 저도 좋죠.”

“그럼 나가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자. AA엔터테인먼트에 연락해서 확인해 봐도 괜찮지?”

“그게 확실하니까요.”

“좋아! 그럼 연락해보고 곧장 결정하도록 하마. 아주 큰 건을 가져왔어. 네게 나쁘지 않을 게다. 결정되면 여러 가지 편의를 요구할 수도 있고.”

자칫 기분 나쁠 수도 있는 사안을 쿨하게 넘겨주자 기획실장은 미소 지으며 최대한 그녀를 배려해주는 말을 하였다.

“네, 그럼 부탁드릴게요. 아참! 그리고 스케줄이 결정되더라도 애들에게는 말하지 말아주세요.”

“왜?”

“깜짝 놀라게 해주려고요. 그 정도는 가능하잖아요.”

“어렵지 않지, 좋아, 아직 확실하지도 않으니 비밀로 해주마.”

“네, 감사합니다.”

고개를 숙인 효연은 곧장 사무실을 벗어났다. 연습실로 향하는 그녀의 입가에는 함박 미소가 걸려 있었다.

‘후후! 모든 준비가 끝나가는군.’




제104장 스타의 친구를 소개합니다




귀국하면서 향후 스케줄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석규는 그녀들을 불러 인사를 나누다가 깜짝 계획을 듣고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창현이 몰래 진행하자는 게냐?”

“네.”

“걔가 기분 나빠할 것은 염두에 두지 않고?”

“설마 기분 나빠 하려고요. 저희가 준비한 깜짝 파티 개념으로 생각하면 더 좋지 않을까요?”

“왠지 너희들이 거기에 나가겠다고 할 때 묘한 느낌이 들더만, 설마 그런 계획을 세웠을 줄 몰랐다.”

석규는 라샤가 귀국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스케줄이 잡히자 이상함을 느꼈지만 이런 일을 위한 안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자 미란이 앞으로 나서며 소리쳤다.

“사장님! 저희가 모두 책임질 테니 결정만 내려주세요.”

“너희들이 책임지겠다고?”

“그 정도도 못하겠어요? 천하의 현을 낚는 일인데.”

“그래, 너희들이 책임을 지겠다면 나도 한결 마음이 놓이는구나. 만약 창현이가 낚여서 기분 나쁠 경우 추후 앨범에 들어갈 파트가 파격적으로 줄어 든다거나 그럴 수도 있다는 건 알고 있겠지? 경우에 따라서는 엄청 힘든 것만 골라서…….”

“사, 사장님 잠시만요! 그렇게 되면 이야기가 틀려지는데요.”

석규의 말에 미란의 안색이 급변하며 다급히 중지를 외쳤다. 호기롭게 나섰지만 막상 상황이 그렇게 흘러가게 되면 그녀로서도 곤란했다. 가뜩이나 라샤 노래 중 파트가 가장 적은 것이 자신인데 거기에서 더 줄어들게 되면 이보다 더 치명적인 것은 없다.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세룬은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짓다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에휴! 그 정도 가지고 화낼 창현이가 아닌 걸 알면서. 사장님, 책임은 제가 모두 질 테니 진행해주세요. 낚는 것은 저희가 알아서 할게요.”

“그렇다면야.”

“좋은 생각이야!”

냉큼 받아들이는 석규와 미란이었다. 빠르게 진행되는 것을 보면서 침묵하고 있던 시린은 무언가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Gee>가 대박을 터뜨리면서 최절정의 인기 가도를 달리게 된 소녀시대에게 낮과 밤, 평일과 주말의 구분이 무의미해졌다. 사람들이 삼삼오오 놀러가는 토요일인 오늘에도 그녀들은 스케줄로 인해 아침부터 숙소가 부산스러웠다.

“으아아아 오늘도 스케줄!”

“좀 더 자고 싶은데. 힝!”

“우리에게 휴가는 언제쯤 주어진단 말인가!”

스케줄이 없더라도 안무 연습으로 이어지는 나날에 지친 그녀들이지만 힘든 시절을 겪은 뒤 찾아온 인기였기에 진심으로 불만을 터뜨리지 않았다. 목이 말라야 차가운 물의 고마움을 아는 것처럼 그녀들은 지금의 인기가도에 몸은 힘들지언정 정신적으로는 모두 즐겁게 즐기는 경지에 다다라 있었다.

스케줄 준비로 인해 부산스럽던 분위기가 어느 정도 가라앉게 되자, 스케줄 표를 보고 있던 태연은 소파에 앉아 정성스럽게 머리를 말리고 있는 효연을 보고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 효연이 너 왜 깨어 있어?”

“나? 오늘 스케줄 있어서.”

“스케줄 없지 않아?”

그녀들이 일어난 시간은 새벽 6시였다. 세 명 세 명 두 명씩 나눠서 스케줄이 있기에 그녀들은 준비를 하다가 깨어 있는 효연을 보면서 하나둘씩 의아한 표정을 짓고 모여들었다.

자신에게 집중되는 시선에 효연은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오늘 갑자기 스케줄이 잡혔지 뭐야?”

“그래?”

“너희들 모두 스케줄이 잡혀 있잖아. 그러니 나라도 스케줄을 해야지. 혼자서 숙소에 있는 거나 연습실 가는 것도 처량하고. 안 그래?”

“그건 그렇지.”

효연의 말에 한순간 분위기가 숙연하게 변했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에 서려있는 기대감을 읽은 수연의 표정이 매섭게 변하며 날카로운 어조로 물었다.

“정말 스케줄뿐이야?”

“그렇고 말고, 스케줄뿐이지. 후후!”

“저번에 말했던 기회가 아니고?”

“그럴 수도 있고?”

어깨를 으쓱하며 여유로운 태도를 보이자 그제야 이상함을 느낀 소녀들이 하나둘씩 걱정된 표정을 지운 채 의문 부호를 그려냈다.

이미 모든 게 정해진 마당에 시간 낭비할 생각이 없었던 효연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궁금하면 방송으로 보고. 난 준비를 더 해야겠으니 너희들은 스케줄이나 잘 하셔. 후후, 후히히!”

사람의 의문을 한껏 자극하는 웃음을 남긴 채 방안으로 사라지는 효연이었다.

“뭔가 있어, 분명히 뭔가가 있어.”

수상한 눈으로 노려보는 수연이었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극히 한정되어 있었다.

“후우!”

눈 뜨고 당하는 것 같아 더욱 착잡한 그녀였다.


스튜디오 분위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좀처럼 보기 힘들었던 초호화 게스트진을 보며 진행하는 남자 MC 휘재는 들뜬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의 눈은 라샤의 멤버인 세룬과 미란, 그리고 카라의 하라와 지영에게 고정되어 떨어질 줄 몰랐다.

“오늘 정말 눈이 호강하는 날이 맞군요. 라샤와 카라가 함께 출연하다니! 제가 꿈꾸고 있는 건 아니겠죠?”

“아닌 것 같아요, 휘재 삼촌.”

“컥! 사, 삼촌?”

커다란 비수가 가슴을 후벼 파내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휘재가 몸을 비틀거렸다.

“장난이에요, 휘재 오빠.”

“오, 오빠! 후우! 살아있길 잘했어.”

삼촌이라는 죽일 놈의 호칭에서 오빠라는 아름다운 호칭을 얻게 된 휘재는 싱글벙글 웃음을 짓고 있었다.

“주책이야.”

옆에 있던 현영이 눈을 흘기며 휘재의 옆구리를 툭 쳤다. 그러자 정신을 차린 듯하던 휘재는 반대쪽에 서 있는 하라와 지영을 보며 실실 웃음을 짓더니 친근한 어조로 말했다.

“먼저 소개하죠, 카라의 하라와 지영!”

“안녕하세요, 카라입니다.”

하라와 지영이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꾸벅 숙였다. 전 멤버가 탈퇴하고 새로 합류한 이후, 나날이 인기가 고공행진을 거듭하고 있었다.

“두 분은 아직 스친소에 나오기에 이른 나이 아닌가요?”

“네! 그래서 저희가 언니들에게 멋진 남성분들을 소개시켜드리기 위해 나왔습니다. 사실 제가 소개 받고 싶었는데…….”

침울한 표정을 짓는 하라의 모습에 MC들은 물론 게스트로 참석한 사람들도 웃음을 지었다. 옆에 앉은 지영이 하라의 옆구리를 콕콕 찌르는 모습도 또 하나의 구경거리였다.

“지영 양은요?”

“네? 네, 저는 아직 어리다고 언니들이 입에 침 바르고 소개나 하라고 하셔서요.”

“그게 사실입니까?”

“네? 아, 아니에요! 방금 한 말 모두 거짓말이에요.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기습적인 질문에 당황한 표정으로 무심코 진실을 말하던 지영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리고는 황급히 수습을 시도했지만 눈치 빠른 휘재는 단호하게 말을 끊으며 결정을 내렸다.

“알겠습니다. 규리 씨와 승연 씨, 니콜 씨가 그렇게 했단 말이군요. 아! 여기 있는 하라 씨도 그랬을 수 있겠군요.”

“저, 전 아니에요! 그런 적 없어요.”

“알겠습니다. 지영 양은 무서운 언니들과 함께 살고 계시군요.”

“아닌데…….”

울상을 짓는 지영의 모습이 귀엽게 느껴져서 사람들은 엄마 미소를 지은 채 바라보았다. 같은 멤버인 하라도 웃고만 있을 뿐 딱히 도와줄 생각이 없었다.

오늘 카라 멤버들이 소개할 명단이 발표되자, 휘재는 다음 게스트를 소개했다.

“오늘 게스트는 라샤와 카라가 온다는 소식에 득달같이 달려온 앤디 씨입니다.”

“아니, 무슨 말을 그렇게…….”

“뭐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꽃들과 함께 있다는 것에 만족하세요.”

“두고 보세요. 오늘 제가 최강의 킹카를 데려와서 여기 있는 분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어줄 테니까.”

“제 친구가 맨 마킹을 해드리죠.”

옆에 앉은 붐의 말에 앤디의 표정이 팍 일그러지며 침몰했다.

남자 게스트 따위(?)는 간단하게 소개를 마친 휘재는 기다리고 기다렸던 마지막 게스트를 소개하였다.

“어렵사리 모셨습니다. 해외 활동을 마치고 귀국한 라샤 세룬, 미란!”

“안녕하세요, 라샤입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두 사람이 공손하게 인사를 하였다. 좌우로 두 사람을 보며 소개 멘트를 날리며 현영이 특유의 콧소리를 내며 미란에게 말했다.

“오늘 소개시켜줄 분은 라샤의 리더 시린 양인가요?”

“아니요, 시린이는 특별히 휴가를 받아 쉬고 있어요.”

“그럼 오늘 누구를 소개시켜줄 생각이신가요?”

“제가 무척 아끼는 동생이에요. 특별한 매력을 지니고 있음에도 고민이 많은 동생이죠.”

“그래요? 누구인지 정말 기대가 되는데요.”

“잔뜩 기대해주세요.”

싱긋 미소를 지으며 자신만만한 기세를 보이자 고개를 끄덕인 현영은 문득 세룬이 반대편에 앉아 있는 것을 깨닫고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여성분을 소개시켜줄 세 분이 확정되었으니 세룬 양은 그럼……?”

“네! 저는 아주 멋진 남성분을 소개시켜드릴 생각입니다.”

“정말인가요? 무슨 사이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눈을 반짝이는 것은 비단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휘재는 물론 붐과 앤디, 그리고 하라와 지영마저도 세룬이 소개시켜주겠다는 남자가 누구인지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말 그대로 친한 동생이에요. 제 은인이라고 할 수 있죠.”

“멋집니까?”

“세상에서 가장 멋지죠.”

자신 있게 말하자, 장내에서 오오! 하는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휘재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세룬을 바라보며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세상에서 가장 멋질 정도라면 반했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엉뚱한 연애전선을 만들려는 휘재의 노력이 빛을 발하려 했지만 갑자기 끼어들며 오열하는 척하는 미란으로 인해 무산되었다.

“반하고 자시고, 저희는 스물다섯 이전까지 연애를 하지 않기로 피의 맹세를 한 몸이에요. 흑흑!”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휘재의 표정에 미란은 장난으로 우는 시늉을 하였다.

“활동에 주력하자면서 시린이가 강제로 시켰어요. 전 이대로 늙어가야 하나 봐요. 흑흑!”

“이런 천인공노할 일이! 하지만 팬 분들은 무척 좋아하실 것 같은데요?”

“그것 때문에 참는 거예요. 그것만 아니면 그냥 콱…….”

“네? 하하!”

이리저리 돌변하는 미란의 변화무쌍한 모습에 휘재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녀의 장난스러운 행동에 방금 전 한 말도 장난이라 여긴 듯했다.

“어쨌든 저희는 지금 활동에 주력하고 싶어서 연애 부분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이 없어요. 오늘 주선자로 나왔지만 정작 소개는 안 받잖아요?”

“그것도 그렇군요.”

일리가 있는 말이라며 휘재가 호응해주자 세룬의 난감한 상황도 어느 정도 가시게 되었다.

이어 앤디와 붐도 각자 자신이 소개시켜줄 남자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았다. 각자 소개시킬 사람에 관련된 정보 공개가 끝나자 본격적으로 오늘 소개할 친구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먼저 지영 양이 소개시켜줄 분이죠?”

“네? 네!”

“지영 양을 그렇게 압박한 분이 누군지 무척 궁금하네요.”

“그, 그런 거 아니에요!”

“아니긴요, 이미 세상에 다 밝혀졌는 걸요. 자, 어떤 분이 착한 지영 양을 그렇게 괴롭혔는지 모두 한 번 봅시다!”

“아닌데…….”

어떻게든 상황을 뒤집어보고자 고군분투하던 그녀였지만 말을 할수록 수렁에 빠져드는 것을 깨닫고는 입을 다문 채 고개를 숙였다. 숙소에 돌아가면 된통 깨질 것 같다는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을 지배해나갔다.

“아! 규리 씨네요.”

지영의 친구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규리였다. 그녀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말에 장내는 다시 한 번 웃음이 터졌고, 본의 아니게 그녀를 웃음거리로 만든 지영은 더욱 의기소침하게 변했다.

간단한 미션을 클리어 한 규리는 보무당당하게 안으로 들어왔고, 뒤이어 하라가 소개시켜주는 것으로 된 승연도 간단하게 미션을 성공한 뒤 안으로 들어왔다.

“자! 이제 마지막분이죠? 미란 씨가 소개시켜주실 분은 누구십니까?”

“요즘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그룹의 멤버입니다. 최고의 춤 실력을 지녔지만 안타깝게도 조명을 받지 못하고 있는 친구죠.”

“그 친구라면?”

“저기 걸어오는 걸요?”

화면에 모습을 드러내는 여성을 가리키자, 일제히 그곳으로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여자의 정체를 확인한 사람들은 탄성을 터뜨렸다.

“소녀시대 효연!”

“효연 씨와도 친분이 있었습니까?”

“물론이죠, 저희는 소녀시대 멤버들이랑 무척 친한 걸요.”

“그렇습니까? 아! 도착했군요.”

약속 장소에 도착한 것이 보이자 곧바로 전화를 연결했다. 컬러링으로 설정된 <Gee>가 발랄하게 울려 퍼지더니 효연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효연아, 나야!”

-아! 언니! 오늘 주의해야 할 점이 뭔가요? 빨리 말씀해주셔야 제가 준비를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순간 미란의 얼굴에 황당함이 서렸다. 주변을 둘러보니 아직 촬영이 시작된 걸 눈치 채지 못하는 효연의 행동이 여러 사람이 소리죽여 웃음을 짓고 있었다.

“하하! 이미 촬영 시작 했는데?”

-네에? 그, 그래요? 흠흠! 안녕하세요, 소녀시대의 효연입니다.

“푸하하하!”

“아이고 웃겨!”

당황하던 그녀가 목소리를 깔며 자기소개를 하자 급변하는 그녀의 태도에 웃음을 참지 못한 몇몇 사람이 폭소를 터뜨렸다.

“그래도 방송 분량은 확실히 뽑았네, 축하해.”

-좋아해야 하는 거죠? 뭐 그럼 저도 같이 기뻐하죠.

“에휴! 어쨌든 미션을 해야지? 미션은 광장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휘어잡을 정도로 멋진 춤을 선보이는 거야. 어때, 간단하지?”

-간단하지는 않지만 최선을 다할게요.

음악과 함께 춤을 추는 거라면 어렵지 않지만 무반주로 춤을 추는 것은 자칫 무안할 수 있다. 하지만 효연은 한 치도 망설이지 않은 채 통화가 끝나자말자 가볍게 리듬을 타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와아!”

점점 거세어지는 그녀의 몸놀림을 보며 지나가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약 삼 분여의 시간이 지나자 서른 명이 넘는 사람들이 그녀의 춤을 보며 박수를 치고 있었다. 고개를 꾸벅 숙여 감사를 표한 효연이 스테이지 안으로 들어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소녀시대 효연입니다.”

“소녀시대 효연을 환영합니다!”

박수 소리가 울려 퍼지며 그녀의 방문을 환영했다. 평소와 확연히 다르게 마치 자신이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이 나쁘지 않았던 그녀는 입가에 함박 미소를 짓더니 미란의 곁에 앉았다.

“자, 그럼 여성분들이 모두 오셨으니 남자 손님들을 소개해야겠죠?”

“카라와 소녀시대 멤버분들이 온 곳입니다. 이분들의 격을 떨어뜨리지 않으려면 대단한 분들이 와야 해요. 세룬 씨, 앤디 씨, 붐 씨 모두 마음의 각오가 되셨나요?”

장난기가 담긴 휘재의 물음에 세 사람은 자신감 있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가장 먼저 붐의 친구가 등장했다. 훤칠한 키와 미소가 인상 깊은 남자는 여태까지 그가 소개했던 남자들 중 최상위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멋진 모습을 보였다.

카라 멤버들의 환호를 받으며 등장한 붐의 친구는 좋은 점수를 받았고, 이에 뒤질세랴 앤디의 친구도 보는 여성진이 흡족할 정도로 뛰어난 외모와 매너를 보여주었다.

카라, 소녀시대 멤버들의 격을 낮추지 않는 남성 출연진에 현영은 혀를 내둘렀다.

“오늘 정말 대단한데요? 한 5년만 어렸으면 제가 나가고 싶었을 정도에요.”

“5년이 웬말입니까? 한 10년은 적어야지.”

“왜 10년이에요! 저 나이 그렇게 많지 않거든요?”

“알겠습니다. 그렇다고 치고요.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세룬 씨가 소개할 남자분입니다. 자신 있으십니까?”

“네, 자신 있습니다.”

“상상 이상으로 뛰어난 분들이 오셨는데도 자신감을 보이시니 기대해보겠습니다.”

은근한 휘재의 말에 미소 지은 세룬이 핸드폰을 들어 연락을 취했다. 통화가 연결되고 잠시 후, 화면으로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앞서 모습을 드러낸 두 남자와 달리 적당한 패션에 모자와 안경을 쓰고 있어 구체적으로 얼굴 확인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카메라가 클로즈업하면서 남자의 얼굴을 비추자 장내에 모인 사람들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어?”


“어휴, 왔으면 그냥 녹음실이나 숙소에서 만나면 되지 왜 여기까지 날 불러내는 거야?”

걸음을 옮기는 창현의 표정은 불퉁했다. 휴식을 취하며 최소 반경으로 움직이며 곡에 대한 구상을 하려 했는데 갑작스러운 라샤의 귀국 소식은 그마저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오늘 밖에서 만나자는 세룬의 성화에 창현은 한사코 거부했지만 서운하다며 짐짓 울먹이는 그녀의 어조에 어쩔 수 없이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평소 즐겨 입는 간단한 옷을 입고 모자와 뿔테 안경으로 애써 모습을 감춘 그는 힐끗 주변을 둘러보며 입을 삐죽였다.

“이렇게 하면 못 알아보기는 해도 삐끗하면 바로 들킬 텐데. 게다가 여기는 사람이 많은 대학로잖아? 도대체 누나는 무슨 생각인 거야.”

눈앞에 있다면 머리를 열어보고 싶은 충동이 들 정도로 세룬의 행동은 대책이 없었다.

한숨이 흘러나오는 걸 참아내며 창현은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목적지에 거의 도착했을 무렵, 핸드폰 벨소리가 들려왔다. 주머니에서 꺼내 전화한 사람의 이름을 살피니 세룬의 이름이 떡하니 자리하고 있었다.

왠지 모를 불안함이 느껴졌지만 약속 장소에 거의 다 도착했기에 창현은 순순히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어디야? 도착했어?

“다 왔어. 그런데 왜 이곳으로 부른 건데? 사람이 많아서 잘못하면 정체가 들킬 수도 있잖아.”

-어쩔 수 없어. 여기에서 만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거든.

“누나, 왜 그래? 누나는 그러지 않았잖아.”

세룬은 연습생 시절 연습을 하면서 외고를 다녔을 정도로 머리가 좋았다. 행동하는 것도 합리적이고 이성적이어서 은연중 믿고 있는 사람 중 하나였는데 갑작스러운 이러한 행동은 그로 하여금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그러지 않긴. 오늘 중요한 일이 있어서 그곳으로 부른 거야. 장식물 보이지? 거기 앞에 서봐.

“도착했는데? 그런데 내가 이곳에 있는 거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지금 날 지켜보고 있기라도 한 건가? 어, 잠깐만?”

순순히 지시에 따라 앞에 도착한 창현은 고개를 갸웃하며 의문을 표하다가 이 장소가 묘하게 익숙하다는 것을 느끼고는 표정을 굳히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핸드폰 너머로 엄청난 함성이 터져 나오며 귀를 아프게 하였다. 인상을 살짝 찡그린 창현이 핸드폰을 멀리 떼자, 세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여기 스친소 촬영이거든? 장식물 뒤에 있는 젬베로 멋지게 노래 한 곡 부르고 들어와 줘. 그러면 미션 클리어야!

그 말과 함께 통화가 뚝 끊겼고 졸지에 낚인 물고기 신세가 된 창현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멍한 표정을 짓다가 헛웃음을 흘렸다.

“뭐야, 완전히 낚여버린 건가? 그것 참.”

딱히 화를 낼 마음도 들지 않았다. 속았다는 배신감보다는 수많은 사람이 지나다니는 곳에서 다짜고짜 노래를 불러야 하는 자신의 입장이 새롭게 느껴졌다. 오히려 이러한 새로운 자극이 기대되는 것을 느끼며 장식물 뒤에 비치된 젬베를 꺼내들었다.

“내가 최근에 연습하는 건 또 어떻게 알아서.”

친절하게도 앉을 수 있는 의자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의자를 먼저 설치한 뒤 젬베를 끼고 몇 번 튕겨봤자. 연습하던 소리가 그대로 울려 퍼지자 왠지 모를 편안함을 느끼며 두드리기 시작했다.

현란한 것도 아니고 소리가 큰 것도 아니었지만 그의 손끝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는 묘한 마력을 담아 주변에 퍼져 나갔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다짜고짜 젬베를 두드리는 창현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그를 중심으로 퍼져 나가는 강렬한 존재감에 하나둘씩 걸음을 멈추기 시작했다.

짧은 전주로 감각을 익힌 창현은 이 낯설고 설레는 상황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더니 그대로 노래를 시작하기 시작했다.

낯설고 새로운 느낌이 가장 강렬했던 자신의 데뷔곡 <Go&Stop>이었다.

와아아!

흘러나오는 노래와 드러난 얼굴이 보이는 순간 모여 있던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함성을 질렀다. <Go&Stop>을 완벽하게 소화하는 실력과 모자, 안경 속에 가려진 그의 외모를 단번에 알아본 것이다.

순식간에 관객 모드가 되어버린 사람들을 보며 미소를 지어준 창현은 흐트러짐 없이 노래를 이어나갔다. 음향 기기가 설치된 것도 아니건만 그의 웅혼하기까지 한 목소리는 주변 반경을 뒤덮으며 거침없이 퍼져나갔다.

소년의 고난과 역경, 그리고 극복 과정을 담은 <Go&Stop>은 당시 강렬한 임팩트를 위해 넓은 음역을 사용하였기에 창현이 아니고서는 곡을 완벽하게 소화하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어려운 곡이었다. 때로는 잔잔하게, 때로는 애절하게, 가끔씩 낮고 강렬하게 임팩트를 주며 노래가 지루할 틈 없이 사람들의 귀를 그의 뜻대로 희롱했다.

그리고 그 노래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은 모든 고난을 뛰어넘은 소년의 환호. 낮은 곳에서 한 걸음씩 올라가 산 정상을 정복하는 것 마냥 천천히 올라가는 고음은 듣는 이에게 절로 경이감을 느끼게 하였다.

짝짝짝짝!

와아아아아!

노래가 끝나자 우레와도 같은 박수 소리와 함성이 터져 나왔다. 뒤이어 앙코르 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창현은 정중히 거부하며 의자를 접고 젬베를 놓아둔 뒤 살짝 고개를 숙여보이고는 스태프의 뒤를 따라 스테이지로 향했다.


파격적인 무대가 끝나고 잠깐의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충격은 가라앉지 않았다. 진행 MC로서 가까스로 가장 먼저 정신을 수습한 휘재는 떨림이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세룬에게 물었다.

“서, 설마 현이었습니까? 세룬 씨가 데려온다던 남자분이?”

“네, 맞아요.”

“어떻게 현 씨가 이곳에 있는 거죠? 아직 미국에 있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휴식을 취하겠다고 몰래 귀국했더라고요. 할 일 없이 푹 쉬는 것보다 여러 경험을 해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이렇게 데려오게 되었습니다.”

“통화 내용을 들어보니 현 씨는 전혀 모르던 눈치던데요?”

“네, 제가 촬영이 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거든요. 그러니 저런 차림으로 온 거죠.”

세룬의 말은 혹시나 짜고 치는 고스톱일까 싶은 확률을 미연에 방지해주었다. 미리 알려주고 불렀다면 최대한 멋있게 보이도록 준비했을 테지, 설마하니 집안에 있는 평범한 옷과 모자, 안경을 쓰고 나오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엄청난 노래를 부른 지금은 그마저도 하나의 매력 포인트로 작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현 씨를 왜 이곳에 출연시킨 것입니까?”

“아직 어리고 여러 가지 경험을 해보면 좋을 것 같아서요. 현이 여자를 사귀어보지 못한 것은 여자에게 특별한 관심이 없는 것도 있지만 주변에서 상황을 만들어주지 않은 것도 있거든요.”

“주변에서 상황이 만들어지지 않았다고요?”

“말도 안 돼요! 현같은 사람이 주변에 있다면 저 같은 경우 죽자 살자 매달렸을 텐데.”

그 외침에 눈총을 받았지만 현영은 당당했다. 슬쩍 미소를 지은 세룬은 그녀의 말에 동의하면서 몇 마디 덧붙였다.

“맞는 말씀이지만 그 정도가 조금 심해서요. 주변에서 보기에는 워낙 완벽해보이니 오히려 이성이 접근하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요? 현을 좋아하는 여성 팬들에게는 이 점이 좋겠지만 작곡가로서 앞으로 다양한 곡을 작곡하기 위해서는 이런 생소한 경험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데려오게 되었습니다.”

행여나 낚시에 대한 비판 여론을 합리적인 이유로 그를 끌어들이게 되었음을 어필함으로써 미연에 방지하는 세룬의 화술이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사람들은 그녀의 말에 정말 걱정해주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느낄 정도였다.

“오늘 최고의 게스트를 데려왔으니 재미있게 해봤으면 좋겠네요.”

그 말을 끝으로 세룬은 침묵했다.


와아아아!

창현이 모습을 드러내자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함성을 질렀다. 화면 너머로 지켜보고 있었지만 그의 라이브를 보면서 자기도 모르게 빠져든 그들은 경이로운 광경에 절로 경외감을 느꼈다.

각양각색의 스타일을 자랑하는 번화가의 패션에 비하면 무난할 정도로 평범했지만 그 차림새와 얼굴을 가리고 있는 모자와 안경마저도 매력 포인트로 느껴질 정도로 그의 노래가 가져다주는 마력은 대단했다.

스테이지 안에 있는 사람들의 열렬한 환영에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지은 창현은 고개 숙여 정중히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현입니다.”

“반가워요”

“어서 오세요!”

여성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서는 창현은 일찍이 없었던 강렬한 등장 탓에 효연을 비롯하여 규리와 승연은 눈이 몽롱해질 정도로 하염없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에 비례하게 오늘 출연한 남자들은 죽을 맛이었다.

나름대로 자신 있는 외모를 최대한 살리며 장기 발휘를 위해 몇 주, 몇 달을 고생하며 준비했는데 한순간에 묻혀버린 것이다.

어느 정도 대적할 정도의 수준이라면 의욕을 불태우며 뒤집기를 생각하거나 와신상담하는 마음으로 복수를 다짐했을 테지만 워낙 압도적인 라이브 무대를 본 탓에 그들은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상대는 세계를 상대로 노래하는 월드 스타다. 누가 감히 그에게 대적할 수 있으며 의욕을 불태울 수 있겠는가.

지금 이 순간 남자들의 머릿속을 지배한 것은 공통된 생각이었다.

‘망했다.’

상대가 너무 나빴다.


분위기가 한껏 달아올랐다. 호화 게스트와 그에 어울리는 친구들의 등장은 흥미진진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분위기의 화룡점정을 찍은 것이 바로 창현의 등장이었다.

‘설마 했지만 정말로 현일 줄이야? 이건 대박이다.’

사전에 현이 나올 수도 있다고 들었지만 그럴 확률이 그리 높지 않다는 말에 내심 김칫국을 마시지 않고자 했던 PD와 작가들이었다. 아직 귀국하지도 않은 그가 어떻게 스케줄이 참가한단 말인가. 내심 믿지 못하던 PD는 귀국 소식이 알려지지 않던 현이 등장하자 패닉으로 빠져들면서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자, 빨리빨리 움직이라고.”

가장 먼저 재촉해야 할 사람들은 작가들이었다. 현의 등장에 얼빠진 표정을 짓던 그들은 PD의 채근에 고개를 끄덕이며 급히 대본 수정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방송에서 만나기 힘든 인물의 등장이니 만큼 최대한 많은 것을 뽑아내어 시청률에 보탬이 되게 하는 것이 그들이 해야 할 일이었다. 기본적인 코너가 존재했지만 대본 수정을 하고 MC의 역량이 바탕이 되면 작은 수정도 큰 여파가 되어 나타날 것이다.

“허! 평소랑 너무 다르잖아?”

군기가 바짝 든 이등병 마냥 빠릿하게 움직이는 작가들을 보며 PD는 혀를 내둘렀다. 참고로 작가들 대부분이 여자였다.

자기도 모르게 감탄사를 터뜨리던 그는 옆에서 툭툭치는 느낌에 고개를 돌렸다가 눈을 좁혔다. 노총각인 자신이 호시탐탐 노리던 작가 중 한 명이었다. 과하지 않은 화장으로 귀여운 외모를 한껏 살린 그녀는 자신의 장점을 살려 PD에게 초롱초롱한 눈빛을 발사하며 말했다.

“PD님! 오늘 회식하면 안 되나요?”

“갑자기 왜? 평소에는 하자고 해도 안 하더니?”

종종 회식을 하자며 추파를 던졌지만 퇴짜를 맞았던 그다. 그로 인해 노총각의 심통을 부려 회식을 거의 하지 않게 된지 오래다. 뒤에서 노총각의 히스테리니 뭐니 하는 말이 들려오면서 정말로 노총각의 히스테리가 무엇인지 알려주겠다는 생각 하에 회식을 하지 않았었다.

“그야, 오늘 귀한 손님이 많이 왔으니까요.”

“그래?”

아닌 척 했지만 순간 눈알을 굴려 자리에 앉는 현을 바라보는 걸 발견한 PD였다. 가슴속에서 질투가 불쑥 치솟았지만 그것도 잠시, 먼저 다가와 제안을 하는 그녀의 행동에 그는 입가에 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 나쁘지는 않겠어. 오랜만에 회식을 거하게 하는 것도 괜찮을 테니까. 일단 오늘 메인 게스트인 현에게 먼저 이야기를 해봐야겠군. 그렇지?”

“네? 네! 그렇게 해주신다면 좋죠.”

“그렇겠지.”

선뜻 대답하는 모습에 눈썹을 꿈틀거렸지만 틈새시장은 얼마든지 존재하였기에 PD는 입 꼬리를 말아 올리며 수긍해주었다.

“좋아, 이따 쉬는 시간에 한 번 말해보도록 하지.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말고, 상대는 스타라고, 무슨 말인지 알지?”

“네, 물론이죠! 말만 해주세요.”

“좋아, 대신 빠질 생각들 말라고.”

호기롭게 소리친 PD는 멀어지는 그녀를 보며 입 꼬리를 말아 올렸다.


한쪽에서 치열한 대본 수정과 회식 자리를 잡고 있는 사이, 창현은 MC의 환영 멘트와 시선 집중을 받으며 세룬 옆에 앉았다.

자기소개를 한 그는 당장 세룬에게 따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카메라가 집중되면서 그마저도 시도해보지 못한 채 웃음을 짓고 있었다.

“쿡쿡!”

그의 속내를 읽은 세룬은 낮게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을 들은 창현의 이마에 사거리 마크가 불쑥 튀어나오더니 입은 웃으면서 복화술로 그녀에게 말했다.

“누나, 우리 나중에 할 이야기가 많을 거예요.”

“할 이야기라니? 난 잘 모르겠는 걸?”

“나중에 알게 될 거예요. 녹음할 때 말이죠. 후후.”

“윽, 봐주면 안 돼?”

창현의 기세가 보통이 아니란 걸 느꼈는지 바로 꼬리를 마는 그녀였다. 모든 패널티를 감수하겠다고 호기롭게 말한 적이 있지만 사실은 그리 자신이 없었다.

“봐주면 제가 서운하죠. 이래 보여도 이제 제법 머리도 컸는데.”

“다 널 위해서 그런 건데도?”

“절 위해서지만 제가 낚였다는 게 문제죠. 아주 거하게 보답할게요.”

“으윽.”

뒤끝을 예고하자 그녀의 입에서 저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 사이 진행 멘트를 날리고 있던 휘재는 두 사람 사이에 무언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는 불쑥 물었다.

“아! 현 씨와 세룬 씨가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계시네요.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나요?”

“간단한 근황을 주고 받았습니다. 귀국하고 따로 연락을 하지 못했었거든요.”

담담한 어조로 상황을 설명하는 창현이었지만 세룬은 달랐다. 갑자기 울상이 된 그녀는 고개를 푹 떨구며 처량한 어조로 말했던 것이다.

“흑! 제가 낚아서 불러왔다고 현이 다음 앨범에 제 파트를 줄여버리겠데요.”

“예? 그게 사실입니까?”

훈훈하게 넘어가려던 상황이 삽시간에 일파만파 퍼져 나가자 휘재는 물론이고 다른 게스트들의 얼굴에 호기심이 서렸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미란의 안색은 좋지 않게 변해갔다.

‘뭐, 뭐야? 정말로 패널티를 주는 거였어?’

“예, 사실입니다.”

“속고 속일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설마 그걸로 복수를 하는 것이겠습니까?”

“복수하는 게 아닙니다. 요즘 세룬 누나가 트레이닝을 좀 게을리 하는 것 같아서 안부 인사를 전하는 김에 한 말입니다. 파트가 줄어들지 않으려면 부지런히 연습을 해야 한다고요.”

“하지만 세룬 씨의 실력은 대단하던데…….”

“제자리 걸음 말고 진보를 위해서는 항상 실력을 갈고 닦아야죠.”

“그렇군요. 정말 멋진 말입니다.”

능수능란한 창현의 말에 넘어간 휘재는 감탄사를 터뜨리며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웠다. 현상유지에 급급한 게 아니라 언제나 발전을 지향하는 그의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도 감탄사가 나왔다.

졸지에 연습을 게을리 하는 사람이 되어버린 세룬은 입을 떡 벌린 채 창현을 바라볼 따름이었다. 황당한 그녀의 눈빛을 깔끔하게 무시한 창현은 성실하게 방송에 임할뿐이었다.

그 사이 그의 첫 인상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졌고, 당연하게도 만점을 내며 스친소 사상 최고점을 기록하게 되었다.

간단한 근황을 주고받는 것으로 오프닝을 마친 뒤 본격적인 진행이 되었다.

“자! 그럼 본격적으로 게스트분들의 장기를 보는 시간이 되겠습니다. 먼저 여성 게스트분들의 매력을 보는 시간이 되겠습니다.”

가장 먼저 장기를 보이게 된 것은 카라의 승연이었다. 쭈뼛거리며 앞으로 나온 그녀는 음악이 흘러나오자 본격적으로 섹시 댄스를 추기 시작했다. 하지만 워낙 귀여운 매력이 가득한 그녀였기에 섹시하기보다는 귀여운 조카의 재롱을 보는 듯하였다.

다른 남성 게스트들을 거쳐 창현에게 온 그녀는 온 힘을 다해 춤을 췄지만 귀여운 여동생이 춤을 추는 것 정도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잔뜩 긴장한 그녀의 움직임을 느낀 창현은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지으며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었다.

“……!”

“앗! 지금 뭐하는 건가요.”

깜짝 놀란 승연이 춤을 멈추며 놀란 눈으로 창현을 바라보고 현영이 한 층 높아진 톤으로 그의 행동 진위에 대해 물었다.

재빨리 손을 뗀 창현은 어깨를 으쓱했다.

“아, 죄송합니다. 너무 귀엽게 느껴져서.”

자신보다 네 살이나 많은 여자였지만 귀엽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 말에 얼굴을 붉힌 승연은 고개를 푹 숙이며 자리로 돌아갔다.

“아, 승연 씨! 한 방에 넘어가는 건가요.”

은근한 어조로 러브라인을 조장하려는 휘재였지만 창현은 아무 말도 안한 채 어깨를 으쓱하지 거기에서 시도는 거기에서 그치고 말았다.

다음으로 나선 것은 규리였다. 턱을 들고 도도하게 앞으로 나선 그녀도 춤을 추기 시작하였다. 다만 섹시 댄스를 추었던 승연과 달리 그녀는 하늘하늘거리는 몸짓으로 도도한 여왕님의 콘셉트를 살렸다. 창현 앞에 선 그녀는 시선을 마주한 채 부드러운 손짓으로 춤을 춰 보이며 도도하게 고개를 돌린 채 그대로 돌아갔다.

“마지막으로 소녀시대 효연!”

마지막으로 효연이 나서자 강렬한 사운드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어깨를 들썩이며 리듬을 탄 그녀는 자신을 위해 마련된 무대에서 거침없이 춤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강렬함이 물씬 풍기는 그녀의 춤을 보며 남자 게스트들은 입을 떡 벌린 채 다물 줄 몰랐다. TV에서 보던 것을 막상 눈앞에서 보게 되자 작은 체구에 압도된 듯한 느낌을 받아야 했다.

춤을 추던 효연은 돌연 입 꼬리를 씨익 말아올리더니 창현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붙잡아 무대 중앙으로 끌고 왔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그는 장난기 가득한 그녀의 표정을 보더니 함께 춤을 추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동시에 춘 것은 마이클 잭슨의 문워크였다. 잠깐이지만 피나는 연습으로 춤을 완벽하게 마스터 한 창현은 효연이 먼저 문워크로 다가오며 손짓하자, 마주 미소를 지어보이며 반대편으로 문워크를 시전했다.

와아아아아!

찰떡처럼 착착 맞아떨어지는 두 사람의 호흡에 사람들이 감탄사를 터뜨렸다.

“정말 멋진 춤인데요?”

“네! 정말 멋졌어요.”

“이거 반칙 아닌가요? 이렇게 잘해버렸는데 또 장기자랑을 하게 되면…….”

여자 게스트가 장기자랑하는 곳에서 여과없이 끼를 발휘하자 그것이 불공평하게 여겨졌는지 붐이 불평을 하였지만 휘재는 간단하게 말했다.

“현 씨가 나온 것만으로도 이미 반칙인데요?”

“…….”

할 말이 없었다.


“자! 그럼 이제 남자들의 장기를 보겠습니다!”

여자 게스트들의 댄스 실력에 대해 감탄사를 늘어놓은 휘재는 본격적으로 남자들의 장기자랑의 시작을 알렸다. 아무래도 창현의 등장 자체가 다른 남자들의 존재감을 죽여 놓았기에 휘재는 먼저 다른 두 남자의 장기를 선보이게 하여 균형을 맞췄다.

먼저 나선 붐의 친구는 현란한 손놀림으로 마술을 선보였다. 여자들의 호감을 사는데 있어 마술만큼 대단한 것이 없었기에 보는 여성 게스트들은 감탄사를 터뜨리며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냈다.

뒤이어 나선 앤디의 친구는 현란한 격파 시범을 보이며 훈훈한 외모만큼 뛰어난 무술 실력을 선보였다. 상반되었지만 둘 모두 남자의 매력을 어필하기에 부족함이 없어 분위기가 한껏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남은 창현은 어색한 표정으로 볼을 긁적였다.

“전 갑자기 나오게 되어서 따로 준비한 게 없는데요. 노래를 하기에는 식상한 것 같고…….”

말끝을 흐리자 현영이 무언가 생각난 듯 큰 목소리로 외쳤다.

“그럼 그거 보여주세요! 다른 사람 목소리 흉내 내는 거!”

“에? 그거면 되나요?”

“되고말고요! 방송에서 보고 얼마나 신기했는데요!”

“방송에서 여러 번 해서 식상할 것 같아 안 하려 했는데.”

여전히 어색한 표정을 짓는 창현을 보며 현영은 순간 버럭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렇게 훌륭한 개인기를 가지고 있음에도 식상한 것으로 치부할 줄이야.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똑같이 낼 수 있는 개인기면 삭막한 이곳 예능계에서도 롱런이 가능할 것임이 분명했다.

“전혀 식상하지 않아요! 한 번 보여주세요.”

“네, 그럴게요.”

“헉?”

입가에 미소를 지은 창현이 목소리를 똑같이 따라하자 현영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누구 목소리인지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같은 목소리였던 것이다.

“정말 똑같아요!”

“이 정도야 기본이죠.”

그녀 말고도 다른 사람들도 모두 신기해하는 기색이 가득하여 창현은 자기도 모르게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그런 그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던 휘재가 무언가 떠오른 듯 권유했다.

“그럼 즉석으로 여기 계신 여성 게스트분들의 목소리를 따라해 보는 건 어떨까요?”

“어떤식으로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던 현영이 흥미를 보이자, 휘재가 재빨리 말했다.

“직접 눈을 마주하고 따라하는 겁니다. 간단한 대화를 같은 목소리로 나누는 거죠. 어떻습니까?”

“음, 괜찮으시다면요.”

“여성분들 어떻습니까?”

휘재의 물음에 규리와 승연, 효연은 모두 고개를 끄덕여 승낙을 표했다. 가장 먼저 나선 것은 승연이었는데, 아까 전 헤프닝도 있고, 정면으로 시선을 응시하기에는 그의 후광이 너무나 눈부셔 감히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결국 포기 선언을 해버린 그녀를 보며 휘재는 안타까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아! 이러면 이야기 진행이 되질 않는데요.”

“현 씨를 직접 마주하고 자신과 똑같은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을 거라 생각해요.”

옆에서 현영이 말해준 덕분에 승연은 망신을 피하고 자리로 돌아갈 수 있었다.

다음으로 나선 것은 카라의 여왕님 규리였다. 그녀는 승연이 어떻게 침몰(?)하는지 똑똑히 목격하였기에 초반부터 기 죽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자 도도하게 고개를 들어 그의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그리고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생각.

‘눈이 부시다.’

단순히 잘생겨서 그런 느낌을 받는 것이 아니다. 무수히 잘생긴 사람들이 있음에도 현이 외모로 극찬을 받는 이유는 생긴 것 이외에 그의 주변에 은은하게 서려 있는 아우라 때문이다. 주변을 부드럽게 사로잡는 그의 은은한 아우라는 마주하고 있는 여성들로 하여금 잊혀졌던 소녀감성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훌륭했다.

규리 또한 마음이 약해지는 걸 느꼈지만 카라의 리더로서 참아내며 도도하게 말을 이었다.

“미국에서 활동 잘 봤어요. 정말 대단하던 걸요?”

“저도 카라의 활동 흥미 깊게 지켜보고 있습니다.”

“정말요? 우리가 세계적인 스타분이 우리를 지켜봐주신다니 기분이 좋네요.”

“그런가요? 그렇게 생각해주시니 기분이 좋네요.”

낯설었다. 그리고 점점 이성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정면으로 마주보는 것만으로도 힘들어죽겠는데 자신과 똑같은 목소리로 대답해오니 마치 벽에 걸려있는 브로마이드를 바라보며 혼자서 대화를 하는 기분이었다.

몇 마디 더 주고받던 규리는 결국 얼굴이 토마토처럼 붉게 변한 채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그 모습을 본 휘재가 탄성을 터뜨렸다.

“아! 카라의 규리 씨마저도…….”

“그래도 잘 버티셨어요. 너무 버티셔서 얼굴이 붉어졌지만요.”

평소라면 맞대응 했을 테지만 창현을 마주보고 있느라 모든 기력을 소모한 그녀는 토마토처럼 붉어진 얼굴로 자리로 돌아가 심호흡하기에 바빴다. 그 모습을 보며 휘재와 현영은 입가에 왠지 모를 미소를 지은 채 상황을 부추기기 바빴다.

“자, 그럼 다음은…….”

“잠깐만요!”

“왜 그러나요, 지영 양?”

다음 차례인 효연을 지목하려던 휘재는 갑자기 들려온 지영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저, 저도 해보면 안 될까요?”

“호오! 이건 또 무슨 전개인가요.”

“그러니까… 저도 현 님의 무척 팬이라서요. 데뷔하면서 꼭 한 번 뵙고 싶기도 했고 대화도 나눠보고 싶기도 해서…….”

첫 사랑에 빠진 소녀 마냥 부끄러워하며 몸을 배배 꼬는 그녀였다. 풋풋한 행동에 휘재는 흘러나오는 웃음을 참아내며 자리를 권했다.

“아, 그 정도쯤이야 어렵지 않지요. 다음 차례인 효연 씨도 너그러이 인정해주실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네? 네에.”

자신의 차례를 빼앗긴 효연은 기분이 그리 좋지 않았지만 지영이 현의 열렬한 광팬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너그러이 양보하는 모습을 보였다.

감사의 인사를 한 지영이 창현의 맞은편에 앉아 수줍게 인사했다.

“아, 안녕하세요, 카라의 강지영입니다.”

“네, 반갑습니다, 제 동생과 이름이 같으시네요?”

“그, 그런가요?”

“네, 그래서인지 더 친숙하게 느껴지네요.”

“감사합니다. 저기, 촬영이 끝나면 사, 사진 촬영이랑 싸인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물론이죠, 어려운 것도 아니고요.”

이름도 같고, 지영과 나이도 같았기에 마치 여동생을 보는 것 같아 창현은 목소리도 변조하지 않은 채 친근하게 지영을 대해주었다. 졸지에 팬과 스타의 만남이 되어버렸지만 행복한 표정을 하고 있는 지영의 모습에 누구도 제지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아! 제가 너무 시간을 끌었네요. 죄송합니다.”

신나게 말을 주고받던 지영은 뒤에서 느껴지는 따가운 시선이 고개를 돌렸다가 매서운 왕언니들(규리, 승연)의 시선에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황을 멍하니 지켜보고 있던 휘재는 지영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말했다.

“아, 차마 방해할 엄두도 내지 못했네요. 그럼 다음은…….”

다음 차례로 넘어가려던 휘재의 의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지영이 제자리로 돌아오기 무섭게 조용히 상황을 관망하고 있던 하라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우사인 볼트 못지않은 엄청난 속도로 달려와 창현의 맞은편에 자리잡았던 것이다.

모두가 멍하니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위축되지 않은 채 오히려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불공평해요! 현 님이 나오시는 걸 알았더라면 언니들에게 맞을 걸 각오해서라도 제가 나오는 거였는데. 막내도 이야기를 나눠봤으니 저도 가능하죠? 휘재 삼촌?”

“어, 어렵지 않지. 그런데 삼촌 호칭은 좀…….”

갑작스럽게 뒤바뀌는 상황에 어안이 벙벙하던 휘재는 삼촌 호칭에 즉각 반응하며 수정을 요구했지만 하라의 반응은 담담했다. 그 눈빛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알아차린 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지영 양도 했으니 해도 되겠지. 하라 양도 워낙 현 씨의 팬이니. 가능하겠죠?”

“예? 물론이죠.”

상황 돌아가는 걸 흥미롭게 바라보던 창현은 미소 지은 채 흔쾌히 수락했다. 그러자 하라의 입가에 함박웃음이 걸리며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고맙습니다, 휘재 오빠, 현 님. 저도 지영이처럼 데뷔하면 꼭 한 번 뵙고 싶었어요. 정말 궁금했는데, 여태까지 여자 친구를 한 번도 사귀어보지 않았다는 게 사실인가요?”

변화무쌍한 태도와 더불어 당돌한 질문에 창현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만.”

“정말요? 그럼 저 같은 스타일은 어떤가요?”

인형 같은 외모에 어울리지 않는 당돌한 질문의 연속이었다. 예상치 못한 그녀의 돌발행동에 스튜디오에는 황당함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생각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네요.”

“그래요? 그럼 지금 생각해보시면 어때요?”

몇 년 동안 이어온 방송 경험으로 능구렁이 담 넘어가듯 넘어가려 했지만 하라는 쉽게 넘어갈 기색이 아니었다.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 그녀의 눈은 답을 말해주지 않으면 절대 물러설 것 같지 않았다.

“하라 양 같이 예쁘신 분이면 저를 좋아해주시면 좋죠.”

“정말인가요?”

“하지만 전 연애라는 걸 쉽게 하는 성격이 아니라서요. 음, 사실 이 말도 아직 제가 나이가 어려서 쉽게 할 수가 없어요. 하지만 제 연애관은 자주 만나고 그 사람에 대해 알아가면서 자연스럽게 인연이 되는 게 좋다고 생각하거든요.”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지만 그 속에 담긴 의미는 아직 서로 만난 것이 많지 않으니 좋고 나쁘고 따지기가 이르다는 완곡한 표현이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하라는 기분 좋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럼 앞으로 자주 만나보면 되겠네요! 제가 말하기 부끄럽지만 저, 나름대로 괜찮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가요?”

물러설 기색을 보이지 않는 모습에 웃음을 흘리는 창현이다. 그 모습을 보며 하라는 황홀하다는 듯 몽롱한 시선을 하였다. 뒤통수로 언니들과 막내의 시선이 따끔거릴 정도로 강하게 느껴졌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코웃음을 쳤다.

‘흥! 감정을 솔직하게 말하지 밝히지 못하는 언니들이랑 막내가 바보인 거야. 좋아하는 걸 좋아한다고 밝히는 게 뭐가 잘못 됐어? 기회는 찾아오는 게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거라고.’

아이돌로서 자각이 부족한 행동이긴 했지만 데뷔 전부터 꿈꿔 오던 왕자님을 잠깐 만나고 스쳐지나갈 생각은 눈꼽 만큼도 없었다.

그러면서 간절한 눈으로 휘재와 현영을 바라보며 애원했다.

“휘재 오빠! 현영 언니! 저도 참가하면 안 되나요?”

“뭐? 지금 제 정신으로 하는 말이야?”

“네? 지금요?”

당돌한 발언을 연속으로 하는 그녀의 행동에 휘재와 현영이 당혹감 담긴 목소리를 흘렸다. 게스트들도 그녀의 모습에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네! 제가 정말 꼭 한 번 뵙고 싶었거든요. 이렇게 만나뵐 수 있는 기회도 많지 않은데 놓치고 싶지 않아요. 안 될까요?”

“음! 안 될 것 같은데. 남자 게스트를 하나 더 데려오지 않는 이상은.”

“그래요? 칫! 아쉽네요.”

강하게 밀어붙이는 것과 달리 그녀의 태도는 의아할 정도로 깔끔하게 포기를 선언했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창현도 의아한 표정을 지을 정도였다.

하라는 정면에 있는 창현을 보며 속으로 미소 지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모든 것이 계산한 대로였다. 방송 경험이 오래되지 않았지만 시스템 룰 자체를 바꾸는 게 쉽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이렇게 권유한 것은 창현에 대한 자신의 마음이 이 정도로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아마 이것으로 인해 카라의 구하라라는 자신의 이름은 창현의 뇌리에 뚜렷이 남았을 거란 게 그녀의 생각이다.

‘같은 연예인이니까 종종 마주칠 기회가 생길 거야.’

오늘 뽕을 뽑지 않고 뒷일을 기약하는 것은 방송활동으로 소녀시대와 상당한 친분을 쌓았다는 것을 보아서 그렇다. 이미 소녀시대와 상당한 친분을 쌓아놓은 그녀는 추후 소녀시대 멤버들과의 친분을 통해 창현을 만날 계획까지 차곡차곡 세워놓았다.

‘언니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제가 맛있는 거 잔뜩 사드릴게요.’

그 꿀이 있는 곳에는 아주 강한 침을 지니고 있는 벌이 득실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녀가 이용하려는 소녀시대라는 존재는 이미 창현에게 넘어간 지 오래이며, 그곳에서는 삼국지의 천재 지략가들이 펼치던 기상천외한 전쟁 못지않은 암투가 펼쳐지고 있다는 사실을.


‘하라 저게!’

졸지에 붕 떠버린 효연은 하라의 난입에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잔잔한 분위기로 상황을 주도해나가려던 계획이 그녀로 인해 산산이 부서지는 걸 느꼈다.

게다가 서슴없이 이상형을 물어보고 참전을 원하는 말을 하다니! 그녀 입장에서 보면 뜬금없고 화가 났지만 자신이 지금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자 신기하게도 머리가 차갑게 식어갔다.

‘저 방법, 의외로 훌륭해.’

냉정하게 생각할 수 있으니 하라의 행동이 대단하게 여겨지는 그녀였다. 일련의 행동이 계획된 것이라 장담할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 창현에게 ‘구하라’라는 이름을 강렬하게 각인시키는데 성공한 것이다.

얼핏 보면 아이돌로서 본분을 망각하는 행동일 수 있으나 연애를 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팬의 입장에서 궁금해 하는 것이며 한 사람의 여성으로서 당연히 물어볼 수 있는 사항들이었다. 아이돌이라서 연애에 관심이 없을 수 없는 것도 아니었고, 그녀가 묻는 것은 그녀가 꼽고 있는 이상형에 대한 호기심과 대중들의 요구에 부합하는 절묘함이 합쳐져 있다.

그것을 모두 간파한 것은 아니지만 효연은 자칫 꼬리에 불 붙은 망아지 마냥 날뛰는 것처럼 보일 법한 그녀의 행동이 실제로는 크게 책잡히지 않을 행동이란 것에 주목했다.

직접 저러한 계획을 세우는 건 불가능했지만 이미 같은 그룹에 제갈파니와 사마율이라는 걸출한 지략가의 행동을 여러 차례 보아왔기에 안목만큼은 훌륭했다.

어떻게든 창현에게 파고들려는 행동이 괘씸했지만 방법 자체만을 보면 나쁘지 않은 것이란 게 그녀의 생각이었다.

‘온고지신이라는 말이 있지. 저 방법, 나쁘지 않아.’

후발주자로서 어떻게 강력한 임팩트를 줘야 할지 고민하던 효연은 하라의 행동을 보며 뇌리를 강하게 강타하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하라라는 듣보잡(?)의 난입이 거슬렸지만 그로 인해 중대한 사실을 배워갈 수 있었다.

향후 앞서 가는 멤버들을 위협할 아주 강력한 무기를.


하라는 지금 이 자리가 무척이나 아쉬웠다. 오늘 스케줄에서 주선자와 소개팅 배역의 차이가 크지 않아 순순히 언니들의 뜻에 따랐건만 이렇듯 극명한 차이가 날 줄 몰랐다.

‘칫! 현이 나오는 줄 알았으면 맞는 한이 있어도 하는 건데. 메이크업도 더 예쁘게 하고 해서…….’

이것저것 따져보니 하나부터 열까지 안 아쉬운 게 없었다. 하라는 오늘 강력한 임팩트를 준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마음 같아서는 더 대화를 나누고 싶었지만 뒤에서 노려보는 언니들의 눈길로 인해 홀라당 타버릴 것 같았다.

“다음에 뵈면 아는 척 해주세요!”

“네, 물론입니다.”

“아! 잠시만요!”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는 하라였다. 그녀가 꺼낸 것은 메모장과 펜. 저걸 항상 들고 다니는 그녀의 행동이 의아하게 여겨졌지만 굳이 터치 하지 않고 조용히 지켜보았다.

무언가를 빠른 속도로 적은 하라는 메모지를 터프하게 찢더니 창현의 주머니에 쏙 넣었다.

“제 번호에요, 다음에 뵈면 앨범에 싸인 해주기에요?”

“알겠습니다.”

입가에 미소 지어주는 모습에 하라는 세상을 다 가진 표정으로 자리에 돌아왔지만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초열지옥이었다.

“구하라! 너 숙소에서 봐!”

“곱게 넘어가기 힘들 거야.”

유혈 사태를 예고하는 규리와 승연의 모습에 기뻐하던 것도 잠시, 양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고개를 숙이는 그녀였다.

“다음은 효연!”

카라 두 막내의 막간을 이용한 반란이 끝나자, 본격적인 진행이 시작되었다.

마지막 주자로 나선 효연은 위풍당당한 걸음으로 창현의 맞은편에 앉았다.

“하이, 창현?”

“하이, 효연 누나.”

장난스러운 그녀의 인사에 창현도 미소를 지으며 인사로 화답해주었다. 물론 목소리는 그녀의 것과 한 치도 틀리지 않았다.

“와!”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똑같이 흉내 내는 모습에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규리와 승연은 여기에서 감탄과 창현에 대한 경외심에 잠식되어 휘말리는 모습을 보였지만 그에 대한 내성을 갖고 있는 효연은 전혀 개의치 않은 채 말을 이어나갔다.

“귀국했으면 즉각 연락을 했어야지요? 여기서 깜짝 등장해서 귀국 사실을 알게 만드나요?”

“편히 휴식을 취하려고 한 거니 이해해주셔야죠.”

방송이라 존댓말을 하고 며칠 전 만남 사실을 숨기는 두 사람이었다. 하지만 평소에 친하다는 사실을 증명하듯 주고받는 말은 자연스러웠고 친밀감이 묻어났다.

몇마디 말을 주고 받던 창현이 불쑥 물었다.

“가수로서 꿈을 이뤘으니 다른 꿈은 또 없나요?”

“꿈? 다른 꿈이 또 있지요.”

“뭔지 물어봐도 되요?”

“현모양처가 되고 싶은 걸요?”

“충분히 가능할 거라 생각해요.”

응원의 메시지를 들었지만 그녀가 바라는 것은 응원이 아니라 그를 위한 현모양처가 되는 것이다. 둔탱이 면모를 겪게 된 효연은 부아가 치미는 걸 느꼈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그의 그러한 면모가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뒤늦게 합류한 자신에게 오늘의 기회가 돌아왔을 리 만무했다.

‘웃자, 이럴수록 웃는 거야.’

차분히 화를 식힌 그녀는 미영의 모습을 떠올렸다. 헤실헤실 웃는 모습과 어벙한 행동으로 띨파니라는 변명까지 얻었지만 그녀의 진면목은 소녀시대 멤버들을 벌벌 떨게 만드는 지략가였다. 친숙한 가면으로 상대의 방심을 유도하고 자신만의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속이 끓었지만 효연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뭐든지 경험이 중요하지 않겠어요? 그래서 말인데 현모양처 수업을 도와주실 수 없나요?”

“네?”

상상을 뛰어넘는 말에 창현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라움을 표했다. 설마하니 그녀가 이토록 당돌한 제안을 해올지 몰랐던 것이다.

그는 효연의 목소리를 흉내내는 것도 잊어버린 채 놀라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후후, 어려울까요?”

“에, 그게 그러니까…….”

“이거 점점 흥미진진해지는데요?”

도움을 요청하는 눈으로 휘재를 바라보았지만 오히려 불을 지필 뿐 도와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눈을 빛내며 그가 무슨 대답을 할지 기대하는 눈빛이었다.

집중되는 시선에 부담감을 느낀 창현은 고개를 살짝 돌리며 말했다.

“오늘 잘 된다면요.”

승낙이라기에 뭐하고 거절이라기도 뭐했지만 창현이 해줄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이었다.

“거기까지.”

더 지켜보고 싶었지만 시간이 시간이기에 중간에 끊어놓는 휘재였다.

“효연 씨의 구애 잘 봤습니다.”

“네? 구, 구애는 아닌데요.”

태연함을 가장하고 있던 그녀는 휘재의 말에 담긴 의미를 깨닫고는 놀라 해명하려 했지만 노련한 MC답게 묘한 뉘앙스에서 끊어버림으로써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그렇게 남녀 모두의 장기를 선보인 뒤 본격적인 식사 타임을 갖게 되었다.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것은 당연히 창현이었다.

“잠시 쉬겠습니다!”

음식 준비를 위해 중간 휴식 시간이 주어졌다. 창현의 등장으로 인해 졸지에 엑스트라로 전락한 게스트들은 딱 봐도 지쳤다는 기색을 풍기며 축 늘어져 있었다.

의자에 앉은 창현이 물 한 모금 마시며 목을 축이고 있을 때 옆에 앉아있던 세룬이 조심스러운 어조로 물어왔다.

“창현아, 아까 전에 한 말 진심이야?”

“뭐가요?”

다 알고 있음에도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되묻는 창현을 보며 세룬은 울컥했지만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비롯된 일이기에 반론하지 못하고 물었다.

“그러니까, 아까 전에 말했던 파트 부분…….”

“아아, 그거요? 글쎄요, 아직도 생각 중이라서요.”

라샤 멤버들이 파트 부분에 있어 욕심이 대단한 것을 잘 알고 있는 창현이다. 침착한 그녀로서도 그 부분을 피해갈 수 없기에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생각 중이라는 말에 세룬이 안절부절 못했다.

‘날 속인 대가는 비싸다고.’

입 꼬리를 말아 올린 창현이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물을게요. 왜 저를 여기로 데려온 거죠?”

“그건…….”

말하기 곤란한 듯 입을 열지 않은 세룬은 결심을 굳힌 듯 고개를 나직이 끄덕이며 말했다.

“그동안 사람 만나는 것도 등한시 했고, 이성과의 접촉도 많지 않았잖아? 곡을 쓰기 위해서 사랑도 해보면 곡의 깊이가 더 깊어질 것 같아서 초대했어.”

“정말이에요?”

“정말이야, 믿어줘.”

“흐음, 좋아요, 믿어드리죠. 하지만 다음에도 이렇게 낚시를 하면 좋지 않을 거예요. 차라리 면전에서 직접 말해주세요. 속으니까 기분이 좋지 않아요.”

“알았어, 미안해.”

“그 정도면 됐어요, 오랜만에 누나를 충분히 혼낸 것 같고.”

“뭐? 너어…….”

그제야 창현의 분위기가 장난스럽다는 걸 깨달은 세룬이 눈을 날카롭게 떴지만 그는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저 멀리 사라진 후였다.

“형 오랜만이에요.”

“요! 뵙기 힘든 월드 스타께서 아는 척 해주시니 기분이 좋은데?”

창현의 인사를 건네받은 붐이 미소를 지으며 반겨주었다. 그의 팬 미팅 MC를 봐준 적이 있기에 안면을 터놓고 말을 놓을 정도의 사이가 되었다.

“붐! 혼자 알지 말고 소개 좀 시켜줘.”

“나도나도.”

지켜보고 있던 휘재와 현영이 은근슬쩍 끼어들더니 자연스럽게 묻어갔다. 붐의 주도하에 창현은 두 사람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그들은 창현이 미국에서 어떻게 활동하는지 무척 궁금해하였다. 여러 가지 질문이 나오면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성의껏 대답해주었다.

그때 그에게 다가오는 한 사람이 있었다.

“저기, 잠시 시간되시는지?”

“아, 인사를 드리지 못했네요. 안녕하세요, 현입니다.”

다가온 사람이 PD인 것을 확인한 창현은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의 뒤를 바짝 따라온 여러 명의 여자들에게도 간단한 목례를 해주자 “꺄아!”하며 자지러지는 소리를 냈다.

눈가를 미미하게 찌푸린 PD가 뒤따라온 작가들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조용, 그렇게 떠들면 할 말도 못하지 않나.”

평소에는 땅에 떨어진 PD의 권한이었지만 창현이란 거물을 회식에 끌어들여야 하는 만큼 지금 이 순간 그는 절대권력을 자랑했다.

“오늘 현 씨가 와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귀국하셨는지도 몰랐는데 한국에 계실 줄 몰랐습니다.”

“예, 하하! 솔직히 저도 얼떨떨하네요, 세룬 누나한테 속아서 왔거든요.”

“그렇습니까?”

“그래도 나쁘지 않네요, 저도 여러 번 시청하고 있어서 한 번쯤 나가보면 어땠을까 생각해보고는 했거든요. 다행히 만족스럽고요.”

“아!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혹시 오늘 스케줄 끝나고 시간이 되시는지?”

“시간은 왜 물어보시는지?”

“월드스타께서 와주셨으니 기념 회식을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실은 여기 애들이 현 씨의 열렬한 팬이어서 제발 같이 회식을 하게 해달라고 애원하더군요. 하하하!”

어떻게 돌려 말할지 막막했던 PD는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어버리는 기분이 느껴지자 어색하게 웃음을 지으며 자신이 접근한 전모에 대해 자세히 말했다. 순간 뒤에 서 있던 작가들에게서 야유가 터져 나왔지만 두 눈은 초롱초롱 빛나며 창현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전 술을 마시지 못해서 회식을 하더라도 재밌게 어울리지 못할 것 같은데…….”

“와주시는 것만으로도 영광일 것입니다. 그렇지?”

“네! 맞아요!”

“오셔서 자리 좀 빛내주세요!”

PD의 선동에 작가들이 그의 의도를 눈치 채고 재빨리 소리쳤다. 그들의 행동에 창현은 웃음을 짓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시니 거절할 수 없네요. 참석할게요.”

“감사합니다.”

와아아!

스태프들 사이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것만으로도 그가 미국에서 달성한 위업이 그를 한 층 빛나보이게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용건을 마친 PD와 작가들이 멀어지자 다가온 것은 카라 멤버들이었다. 나이는 창현이 어렸지만 창현은 그녀들보다 2년 먼저 데뷔한 선배였다.

“안녕하세요, 카라입니다.”

“반갑습니다, 현이에요.”

“오늘 선배님이 와주셨을 줄 몰랐어요. 오셔서 너무 기뻐요.”

양손을 포갠 승연이 눈을 반짝이며 창현을 향해 말했다. 과할 정도로 예의를 차리는 그녀의 모습에 멋쩍게 웃음을 지은 그가 말했다.

“저보다 나이가 많으시니 편하게 대하시는 건 어떨까요?”

“아, 아니에요! 제가 어찌 감히 현 선배님에게 말을 놓겠어요!”

펄쩍 뛰며 거부하니 오히려 제안한 이쪽에서 겸연쩍어졌다. 창현의 표정을 본 승연은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는 안절부절 못했다.

‘이게 아닌데, 난 좀 더 예의바른 모습을 보여서 친해지려고 한 건데…….’

창현에게 다가가기 전 나름대로 야심차게 계획을 세워놓았지만 머릿속이 텅 비어버리는 느낌과 동시에 생각과 입이 따로 놀았다.

실의에 빠진 승연이 양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안쓰러운 그 모습을 본 규리가 속으로 혀를 차면서 그녀를 변호해주었다.

“이해해주세요. 얘가 그러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라 너무 팬인 나머지 말이 잘못 나온 것 같아요.”

“네, 그런 것 같네요. 좋아해주신다니 저도 좋네요, 하하! 규리 씨도 편하게 대할 생각이 없으신가요?”

“제가 어렵게 대하는 동생이 있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사실이에요. 제가 선배님을 좀 더 편하게 대하게 되는 순간 동생으로 대하도록 할게요. 그래도 되죠?”

황당할 법도 한 그녀의 말이었지만 그 당당함이 오히려 어울리는 기도를 지니고 있었다. 입가에 미소를 지어준 창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가 언제일지 기대가 되네요.”

“얼마 걸리지 않을 거예요. 우리가 좀 더 친해질 기회가 많다면.”

“하하하.”

여러 의미로 해석되는 말에 창현은 웃음을 지었다. 그 틈으로 생겨난 공백의 틈을 발견한 하라가 잽싸게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저는 그런 거 상관없어요! 전 바로 편하게 대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상관없어요.”

“말은 천천히 놓을게요! 대신 현 씨는 절 누나라 불러줘요. 제가 91년생이거든요.”

“아 그래요? 조금 어색하지만 친해지자는 의미로 편하게 대할게요.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하라 누나.”

“네! 정말 반가워요.”

누나라는 단어에 하라는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맹렬한 속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누나라는 단어가 말하는 사람에 따라 이리도 황홀하게 들릴 수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아, 오늘 목적은 다 이뤘어. 하지만…….’

반짝이는 하라의 눈에는 짙은 욕망이 서려 있었다. 하루만에 까마득한 선후배 사이에서 누나 동생 사이가 되었으니 좀 더 발전할 수 있으리라 여긴 것이다.

졸지에 밀려난 규리는 무시무시한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언니가 이야기하고 있는데 저게 감히 초를 쳐?’

카라의 리더인 자신의 권위를 무시한 행동에 규리는 무시무시한 기세를 담아 하라를 노려보았지만 오늘 숙소에서 깨질 각오를 한 하라는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대화의 주도권을 잡은 그녀는 속사포로 말을 꺼내며 창현과 대화를 나누었다. 좀처럼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자 규리는 뒤처져 있던 지영의 손을 잡아끌며 말했다.

“너무 하라랑 이야기 하지 말고 지영이랑도 인사를 나눠주세요.”

“네? 아, 제가 실수를 했네요. 반갑습니다, 지영 씨.”

“네? 네, 네! 안녕하세요, 카라의 강지영입니다.”

잔뜩 얼어있고,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에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입가에 미소 지은 창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어요, 제 동생 이름이 최지영이라서 익숙하네요.”

“아, 그 동생분? 저도 보고 신기했어요.”

“그런가요? 그래서인지 지영 씨가 동생처럼 느껴지네요. 연예계에서 활동하면 앞으로 자주 보게 될 텐데 편하게 대해도 될까요?”

“네! 물론입니다. 영광이에요.”

나이가 자신보다 많은 다른 사람과 달리 두 살 어린 지영이 대하기 편해 창현은 빠른 속도로 친해질 수 있었다.

“다음에 같이 찻집에 가요! 제가 좋은 곳 알고 있거든요.”

“그래요? 하라 누나가 좋다고 하니 어디인지 기대가 되네요. 시간이 맞으면 같이 가도록 해요.”

“물론이죠!”

확실하지는 않지만 잠정적으로 만날 약속까지 잡게 되자 하라는 입이 찢어지려는 것을 간신히 참아냈다. 오늘 하루만에 이 정도 진전은 대단한 것이다.

“그럼…….”

목례를 살짝 하여 양해를 구한 창현은 카라 멤버들에게 벗어나 다른 곳으로 향했다. 아직 인사를 나누지 못한 미란과 효연이 있는 곳이다.

다가오는 창현을 보며 미란은 묘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인기 많네?”

“제 인기가 원래 좀 대단하잖아요?”

“으윽, 우리 창현이가 바뀌었어. 예전 같으면 온갖 겸손한 표현을 보여주었을 텐데.”

“사람이 원래 변하는 법이죠. 누나도 예전에는 저보고 어리다고 바락바락 악 쓰던 시절이 있었잖아요.”

“으윽, 과거 이야기는 하지 말자고.”

“누가 먼저 했는데요.”

“항복! 항복할 테니 봐줘.”

과거 폭로전 양상으로 흘러갈 기미가 보이자 양손을 들며 항복 의사를 표하는 미란이었다.

“어쨌든 누님들이 좋은 자리에 불러주었으니 맘껏 즐기다 가라고.”

“여기가 좋은 자리에요? 음! 속이지만 않았으면 좋은 자리가 될 수 있었긴 하네요.”

“속이다니! 약속 장소가 이곳에서 바뀐 것뿐인데.”

“음, 아까 전에 세룬 누나가 저한테 그렇게 능청을 떨다가 파트 부분이 대폭 줄어드는 참사를 겪었는데, 다음 라샤 앨범은 아무래도 시린 누나가 중심이 되겠네요.”

“아잉! 왜 그러세요!”

“…….”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터져 나온 애교에 창현과 효연은 침묵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바라보니,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눈치를 보더니 슬금슬금 걸음을 옮겼다.

“나, 난 메이크업 좀 고치러! 재미있게 이야기 나눠, 하하!”

어색하게 변한 분위기 속에서 효연과 단 둘이 남게 된 창현은 방금 전 PD가 했던 제안을 떠올리며 그녀에게 말했다.

“이따 촬영이 끝나면 같이 회식을 할까 하는데 누나는 어때요?”

“회식? 갑자기 무슨 회식?”

계획과 다르게 흘러가는 걸 느낀 효연이 표정을 묘하게 일그러뜨리며 물었다.

“PD님이 회식을 하자고 하셔서요. 누나는 시간이 안 되나요?”

“응? 아, 아니야. 나도 시간 돼.”

창현의 물음에 자신이 표정 관리를 못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은 그녀는 황급히 표정을 고치며 대답했다. 하지만 그녀의 머릿속은 방금 전 그의 말로 인해 복잡하게 뒤엉키고 있었다.

‘커플로 선정되면 데이트를 하게 되는데 회식을?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멤버들에게 들었던 것과 다르게 흘러가는 전개에 아리송함을 느꼈지만 창현과 접점을 만들고자 슬쩍 걸쳐놓는 것은 잊지 않았다.

“나도 가도 되겠지?”

“당연하죠.”

흔쾌히 수락하자 창현의 마음도 한결 놓였다. 그러다 문득 효연의 모습을 보고서는 생각에 빠져들었다.

‘좀 맞지 않는 것 같은데…….’

무대 위에서는 파워풀한 댄스로 좌중을 압도하는 그녀의 꿈이 현모양처라는 게 쉽게 매치되지 않아 이상하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요즘 여자들에게서 쉽게 가질 수 없는 꿈을 가진 그녀가 대단하게 여겨졌다.

‘정말일까, 아니면 방송용 멘트일까.’

문득 궁금증이 든 창현은 아까 전 진지하게 말하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전에 말했던 거요.”

“응? 어떤 거?”

“누나 장래희망이 현모양처라는 거요. 그거 진심이에요?”

“진심이야, 현모양처 말고도 일찍 결혼하고 싶기도 하고. 얼마나 멋져! 어린 나이에 결혼해서 귀여운 아기들을 낳아 오순도순 사는 모습이. 안 그래?”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녀의 말에 이끌려 자신을 닮은 아기들과 사랑스러운 부인이 함께 하는 장면을 떠올리며 창현의 입가에 슬쩍 미소가 걸렸다. 생각만 해도 흐뭇해졌다.

“장난도 아니고 방송용 멘트도 아니지. 난 진심으로 한 이야기야.”

“그럼 그 뒤에 했던…….”

“뒤에 했던? 아항! 그 이야기 말이구나.”

말끝을 흐린 창현이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 눈치 챈 효연의 입가에 음흉한 미소가 걸리며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왜, 거짓말인 것 같아?”

“거짓말이라뇨, 단지 사안이 사안이니 만큼…….”

“사안이 사안이니 만큼 믿을 수 있는 사람과 해본다면 나쁘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데, 안 그래?”

“그럴까요? 전 잘 모르겠어요.”

“잘 모르겠다고? 창현이 넌 그런 경험 없나 보네?”

“네? 어떤 경험이요?”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지 몰라 되물었던 창현은 입 꼬리가 말려 올라가는 효연의 표정을 보며 알 수 없는 불길함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뒤이어 흘러나오는 그녀의 말에 가슴이 철렁 주저앉는 듯한 충격을 받아야만 했다.

“누군가가 여자 친구 대역을 해주었던가 하는 경험 말이지.”

“…….”

숨길 틈도 없이 창현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가늘게 뜬 눈과 묘하게 말려 올라간 입 꼬리는 가슴을 덜컥 주저앉게 만들었다.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리며 전에 있던 일을 자기도 모르게 떠올린다.

품속에 쏙 들어오던 작은 체구와 다르게 소극적인 자신을 이끄는 리더십은 아직까지 잊혀지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 화룡점정을 찍은 것은 그녀와의 키스.

고양이처럼 할짝이던 그 경험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할 정도로 치명적이었다. 그래서 한때나마 그녀의 마음을 의심한 적도 있지만 돌아온 것은 적당한 거리감이었다. 그 이후, 창현은 그녀가 정말로 자신을 위해 한 몸 희생(?)했다고 생각했다.

태연이 알았더라면 땅을 치고 후회할 츤츤이었다.

“네, 네? 그, 그런 경험이 있을 리가 없죠, 하하하!”

철렁하는 마음을 간신히 부여잡은 창현이었다. 하지만 거세게 뛰는 심장 박동수와 창백하게 질린 안색은 그의 의지대로 조절되지 않았다. 의미심장한 효연의 한 마디가 그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설마 효연 누나가 알고 있었나?’

그는 슬럼프 타파를 위해 태연이 여자 친구 역할을 해주면서 그에게 온갖 스킨십을 해댔던 것에 대해 모를 것이라 생각했지만 효연은 태연이 교육을 빙자한 딥 키스 진도까지 나간 것을 두 눈으로 생생히 목격한 산증인이었다.

“없구나, 창현이 너라면 그렇게 해줄 사람이 있을 거라 생각했지.”

“에이, 설마요.”

제딴에는 나름대로 능청스러운 연기를 펼쳤지만 모든 상황을 알고 있는 효연의 눈에는 그의 심리 상태가 빤히 들여다보였다.

‘거짓말 정말 못하네.’

창현이 들었으면 땅을 치고 후회할 말이었지만 진실은 그러했다.

“아니라면 어쩔 수 없지.”

“그러게요, 하하! 저, 저도 메이크업 좀 고치러.”

그녀의 눈치를 보던 창현은 찔리는 것이 있었는지 양해를 구하고 슬그머니 멀어졌다.

그걸 본 효연은 결국 웃음을 짓고 말았다.

“하! 메이크업도 안 하고 왔으면서.”

그 모습이 너무 귀엽게 느껴졌다.


재개 된 촬영은 무난하게 흘러갔다. 본격적인 식사 타임에서 참가한 여성들의 관심이 창현에게 몰려드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었다.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그대로 따라하는 것도 매력의 한 요소지만 그가 밖에서 보여주었던 노래는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인들의 마음속 깊숙이 각인되어 있었다.

맛있는 식사를 마친 뒤 마음을 선택하는 자리에서 창현은 의리(?)를 선택했다. 아직 데면데면한 규리나 승연보다는 익숙한 효연을 선택하는 것이 더 나았다는 것. 현모양처라는 그녀의 꿈이 끌리기도 하였기에 양심을 속이는 행동도 아니었다.

의례적인 선택이었지만 효연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했다.

하지만 난관은 그 다음부터였다.

커플 선정에 성공하고 주어지는 포상과도 같은 데이트 시간 선정에 곤란이 생겨난 것이다.

난감한 표정을 지은 PD는 미안한 표정으로 효연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맞지 않을 것 같은데…….”

그가 이렇게 저자세를 보이는 것은 오늘 커플 선정에서 치러질 데이트 코스를 취소해야 했기 때문이다. 다른 게스트가 참가했더라면 원래대로 진행되었을 테지만 창현이 참여함으로써 갑작스럽게 잡힌 회식으로 인해 데이트 스케줄을 대대적으로 수정해야 했다.

강적을 물리치고 창현을 득템(?)한 효연의 입장에서는 쉬이 받아들일 수 없는 말이었다.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창현이 앞으로 나며 중재안을 내놓았다.

“음, 그러면 이렇게 하는 게 어떨까요?”

“어떤?”

“일단 회식에 참가하기로 한 부분은 제 책임도 일부분이나마 있으니 효연 누나와 따로 시간을 빼놓도록 할게요. 그러면 되지 않을까요?”

“으음, 그래도 되려나?”

PD는 상관없다는 듯 효연에게 바통을 넘겼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잠깐의 데이트가 하루종일 이어질 것으로 변했으니 대대적으로 환영해야 했지만 너무 노골적으로 티를 내면 속이 빤히 보일 것 같아 고심하는 척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다행이군, 그럼 그렇게 진행하도록 하지.”

“하하, 잘 해결되어서 다행이네요.”

한시름 놓게 된 창현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효연 또한 만족할 만한 성과에 자꾸만 말려 올라가려는 입 꼬리를 진정시키느라 고생했다.

“잘 됐네?”

“후후, 고마워요, 언니.”

“내가 한 게 뭐 있다고. 좋은 결과를 끌어낸 건 다 네가 잘해서 그런 건데.”

미란은 그녀답지 않게 자신의 공을 내세우지 않으며 겸손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다 한 가지 사실을 떠올리고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에효! 하지만 고생은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난 이제 죽었다.”

“왜 그래요?”

“세룬이가 창현이를 낚아서 이곳에 온 것 때문에 단단히 토라졌거든. 달래주려면 상당히 고생해야 할 것 같아. 안 그러면 내 파트가 줄어버릴 테니. 에휴휴!”

양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걸음을 옮기는 그녀들이다. 오랜만에 소화하는 스케줄이어서 숙소로 돌아가 푹 쉬려 했지만 창현의 회식 참가 선언으로 인해 그녀들도 세트처럼 딸려갈 수밖에 없었다.

“언니의 희생, 잊지 않겠어요.”

장렬히 산화(?)한 미란의 공로를 잊지 않기 위해 효연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자! 여기 고기 먹어!”

“하하, 고마워요.”

회식이 열리는 고깃집의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서른 명이 넘는 방송 구성원들과 오늘의 게스트들이 들이닥치면서 고깃집은 소란에 빠져야만 했다. 현과 라샤, 효연과 카라 멤버들의 방문은 식사를 하던 사람들이 들썩이게 만들기 충분할 정도의 파급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인기의 중심이 된 것은 당연히 창현이었다. 열렬한 팬이라며 중년 나이답지 않게 두 눈에 하트를 뿅뿅 떠올리며 싸인 요구를 하는 여사장님에게 성심성의껏 싸인을 해준 뒤 가게 벽면에 커다랗게 싸인을 해주는 서비스를 발휘하였다. 뒤이어 다른 연예인들도 싸인을 함으로써 본격적인 회시을 시작했다.

회식에서 창현은 왕이었다. 창현과 세룬, 미란, 효연으로 구성된 테이블에서 고기를 굽는 것은 가장 큰 죄를 저지른 세룬이었고 마늘을 굽고 자질구레한 일을 하는 것은 미란의 몫이었다.

단 한 번의 장난이었지만 그녀들은 까칠한 창현의 요구를 한 몸 바쳐 들어주는 성실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속에서 묵묵히 고기를 먹던 효연의 눈동자가 살벌하게 빛났다.

그녀의 시선이 고정된 곳에는 창현과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하라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애써 담담한 척 하려 해도 자꾸만 그곳으로 시선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저것이 감히…….’

모처럼 멤버들의 눈에 벗어나 단독 찬스를 맞이하게 된 걸 도둑맞는 기분에 효연은 심기가 불편했지만 자신의 마음을 드러낼 수 없어 속으로 끙끙거렸다. 오늘 하루 만났지만 하라는 벌써 창현과 말을 편히 주고받는 절정의 친화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대로 두다가는 오늘 진도가 어디까지 빠질지 몰라 효연은 제동을 걸 필요성을 느꼈지만 지략 캐릭터가 아닌 그녀로서는 뚜렷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묵묵히 고기를 집어먹던 그녀는 무심코 옆을 보다가 탄성을 터뜨렸다.

“아!”

그곳에는 존재했다.

자신과 비슷한 기파를 흘리는 동류의 존재가.

그녀의 옆자리에는 규리가 섬뜩한 한기를 흘리며 하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 규리와 효연의 사이가 친밀했던 것을 감안하면 여태껏 원활한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이상했다. 효연은 그것이 왜인지 단번에 알아차리고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굳이 내 손을 더럽힐 이유가 없지. 여기서 유리라면 어떻게 했을까?’

한때 자신과 함께 초딩 라인을 구축하던 유리의 행동패턴을 연구하던 그녀는 얼마 전 그녀가 획책했던 계략을 떠올리고는 은근한 어조로 규리에게 말했다.

“언니.”

“으, 으응? 불렀어?”

“네, 모처럼 만났는데 너무 조용히 고기만 먹고 있는 것 같아서요. 뭐 신경 쓰이는 거라도 있어요?”

“시, 신경? 내가 뭘 신경 쓰는 게 있다고 그래!”

툭 찌르니 튀어나오는 반응은 신선했다. 모든 게 자신의 계획대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확신에 효연이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요? 제가 잘못 알고 있었나 봐요. 그나저나 하라가 창현이를 많이 좋아하나 봐요?”

“걔 숙소 벽에 브로마이드로 온통 도배가 되어 있을 정도야. 팬 사이트인 다크 스타 특별회원이라면서 자랑하던 걸?”

“그 정도에요? 흐음, 동경의 대상을 현실에서 만났으니 욕심이 생긴다는 건가.”

“……!”

“아, 그냥 해본 말이에요. 하지만 저렇게 보니 잘 어울리는 것 같지 않아요?”

무심코 흘린 말이지만 규리의 눈이 흉흉하게 변했다. 그녀가 창현을 이성으로서 좋아하거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호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그런 자신은 안중에 두지 않은 채 창현을 차지하려고 살랑살랑 꼬리를 흔드는 하라의 모습이 아니꼽게 보였다.

“비주얼 극강 커플이 될지도.”

“구하라… 숙소로 가면 죽었어.”

효연의 이간질에 홀라당 넘어간 규리는 눈을 까뒤집으며 전투심을 불태웠다.

그 모습을 보며 효연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구하라는 오늘 밤을 성히 보내기 힘들 것이다.

소녀시대 지략 캐릭터 사마율이 쓸 법한 차도살인지계였다.

‘나만의 뚜렷한 무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세상에 나와 있는 강력한 무기를 활용하겠어. 적절히 활용할 수 있는 센스만 있다면 그 누구도 두렵지 않아.’

후발주자로서 앞서 나간 선두주자를 따라잡기 위해 선택한 그녀의 방법이었다.

사마율의 전략을 응용함으로써 그녀는 자라나는 새싹을 짓밟아 놓을 수 있었다.

그것도 자신의 손에 피 한 방을 묻히지 않고서.


회식을 마친 효연은 곧장 밴을 타고 숙소로 귀가했다. 간단하게 반주를 곁들이다 보니 알딸딸한 알콜이 온몸을 휘감는 느낌이 일품이다.

♫♪♬

“여보세요?”

-나 규리야.

핸드폰이 울리는 소리에 이름도 확인하지 않은 채 받자 건너편에서 규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언니. 잘 들어가셨어요?”

집에 들어가는 안부 인사이겠거니 싶어 그런 말을 꺼냈지만 건너편에서 공포에 질린 여자의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악! 효연 언니 살려줘요! 언니들하고 막내가 날… 아악!

“뭐, 뭐지.”

듣는 것만으로 공포심이 뭉클 피어나는 목소리에 효연은 술이 깨는 걸 느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무,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 아니에요?”

-별 거 아니야, 언니들을 무시하고 남자를 탐한 멤버에게 주어진 약하디 약한 벌칙일 뿐이지.

감정 변화 하나 없이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모골이 송연했다.

“그렇군요. 그래도 살살 대하세요.”

-스케줄을 하려면 티가 나면 안 되니까. 그리고 이 정도면 만족했니?

“네? 무슨 말이에요?”

-네가 바라는 전개가 이뤄졌으니 만족했냐고 묻는 거야.

“…….”

순간 온몸에 소름이 바짝 돋는 것을 느끼며 몸을 부르르 떤 효연이었다. 잘 속였다고 생각했지만 규리 또한 만만치 않은 눈치를 지니고 있었나 보다.

-나도 언짢은 게 사실이었으니 넘어가줬지만 다음에도 날 속이려면 좀 더 능숙하게 연기를 해봐.

“하, 하하. 그럴게요. 역시 언니를 속이는 건 힘드네요.”

-누가 감히 날 속이겠어.

도도함이 느껴지는 목소리에 효연은 맞장구를 쳐주며 상황을 타개했다. 뒤에서 계속 하라의 비명소리가 들려왔지만 모두 그녀가 저지른 업보이겠거니 하면서 애써 외면할 따름이었다.

통화를 끝낸 효연의 입에서 쓴 미소를 지었다.

“역시 쉽지는 않네.”

상대가 상대인 것도 있지만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몸소 체험한 그녀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너덜너덜하게 당했을 하라를 떠올리며 속으로 염불을 외워주었다.

‘아미타불.’

자신이 저질렀지만 뒷수습으로 그녀의 안전을 빌어주는 그녀의 장래 희망은 현모양처였다.


“잘 놀다 왔네?”

“안 자고 있었어?”

집으로 들어온 그녀를 반겨준 것은 수연이었다. 회식을 끝내고 돌아온 시간은 늦은 밤이기에 멤버들은 잘 준비를 하느라 무척 분주했다. 그 가운데 권력자의 권한으로 먼저 세팅을 마친 수연은 날카로운 눈으로 효연을 훑고 있었다.

“왜 그런 눈으로 보시나?”

“오늘 스케줄 뭐였어?”

“뭐였을 것 같아?”

“이익.”

약 올리듯 은근한 어조로 되묻자 심통 난 표정으로 효연을 바라보는 그녀였다.

“별 거 아니니 그리 신경 쓸 필요 없는데?”

“그런 판단은 일단 듣고 난 다음에 하고 싶어.”

“방송을 보면 알게 될 거야. 괜히 말했다가 곤경에 처하라고? 에이, 그건 아니지.”

능숙하게 거절 의사를 비친 그녀는 노곤해진 몸을 뒤틀며 말했다.

“아아, 피곤해라. 오늘 재미있게 스케줄을 했으니 푹 쉬어야겠다. 설마 우리 수연 양은 스케줄로 피곤한 날 세워두고 정보를 캐내려는 건 아니겠지?”

“…….”

싱글벙글 미소 짓고 있는 그녀에게 얼음 레이저를 발산해주고 싶었지만 내일 아침 있을 단체 스케줄 때문에 차마 그녀를 방해할 수 없었다.

한숨을 푹 내쉰 수연이 자리를 비켜주자 효연은 보무당당하게 지나가며 화장실로 향했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수연의 눈에 새파란 귀화가 넘실거렸다.

‘두고 봐, 무슨 꿍꿍이인지 몰라도 반드시 막아버릴 테니까.’

‘방해하려 해도 이미 쌀은 익어 밥이 되어가고 있는 중이라고.’

창현의 의중이 배제된 쟁탈전은 그렇게 두 여인의 팽팽한 대립으로 이루어지는 듯했다. 하지만 그녀들의 대립은 채 하루가 지나지 않아 허물어졌다.

다음 날 강타한 소식은 대한민국 연예계 아니, 대한민국 전체를 뒤집어놓은 것이다.

아침부터 SM엔터테인먼트와 AA엔터테인먼트의 전화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고, 연예 뉴스란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와 관련된 내용이 범람했다.

대한민국을 발칵 뒤집어놓은 사건.

그것은 바로 창현과 윤아가 촬영한 테일러 스위프트의 뮤직비디오 티저 영상의 공개였다.


딸칵딸칵.

키보드 버튼을 누를 때마다 기계식 특유의 촉감이 느껴지며 시시각각 화면이 바뀌고 있었다.

모니터에 떠 있는 것은 온통 영어로 도배된 사이트였다. 컴퓨터를 하고 있는 여인은 그것을 빠르게 읽어내리며 마우스와 키보드 버튼을 눌러댔다.

방대한 양의 영어를 모두 해석한 것일까?

사이트 화면을 한동안 바라보던 여인의 초롱초롱한 눈빛과 달리 입에서 깊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후우! 망했네.”

컴퓨터를 하고 있는 여인의 정체는 다름 아닌 윤아였다. 그녀는 막 잠들기 전, 지금으로부터 2시간 전에 받은 테일러 스위프트의 연락을 떠올리며 표정을 찌푸렸다.

“티저 영상을 공개하겠다고? 나야 상관은 없지. 계약서에 싸인을 했고, 감독인 그녀의 요구에 따랐을 뿐이니까. 하지만…….”

세상의 규칙이라는 것이 계약에 충실히 이뤄졌다면 세계는 진즉에 사회주의 사상으로 뒤덮였을 것이다. 윤아의 입장에서 그저 계약에 충실(?)했을 뿐이지만 지켜보는 사람들은 절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가출을 할까.”

막상 일어날 여파를 생각하니 덜컥 겁이 나는 그녀였다. 짧게 공개된 티저 영상에서 그녀와 창현이 펼쳤던 농염한(?) 애정신은 빠져 있었지만 사흘 후, 풀 동영상이 공개되면 대한민국이 발칵 뒤집힐 것은 분명 했다. 아니 어찌 보면 지금 공개된 티저 영상만으로도 발칵 뒤집힐 공산이 컸다.

여기에서 그녀는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 수 있을지 궁리를 해야 했다. 숙소의 독재자 수연처럼 차가운 얼음 레이저를 발산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윤아가 지닌 것은 역발산을 능가하는 강맹한 힘밖에 없다.

한동안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보던 그녀였지만 뚜렷한 타개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미간을 지그시 모으며 고민에 빠져있던 윤아는 무의식적으로 티저 영상 재생 버튼을 클릭했다.

그러자 화면에 등장하는 자신과 창현의 달콤한 로맨스.

귀국하기 전 대략적인 내용을 보았지만 가공을 거쳐 나온 내용은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설렐 정도로 멋진 내용이었다. 특히 마지막에 서로의 눈을 그윽하게 바라보며 서서히 가까워지는 고개는 당사자인 그녀마저도 콩닥콩닥거리며 바라볼 지경이었다.

짧은 티저 영상이 끝나자 윤아는 방금 전까지 하던 고민을 홀라당 잊어버린 채 침대에 벌러덩 누워버렸다.

“에잇! 뭐 어때! 어차피 난 계약에 충실했을 뿐이야! 뭐라고 하면 배 째라고 하면 되지! 내가 잘나서 한 걸 어떻게 하라고!”

결론은 더 고민하기 싫으니 정면돌파를 선택하는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소녀시대 멤버들이 본격 전쟁 체제에 빠져든 것도 그녀가 스캔들을 터뜨리면서 전쟁의 도화선을 잡아당긴 것.

그리고 짧게 30초 정도 공개된 티저 영상은 전쟁의 새로운 도화선을 예고하고 있었다.


자포자기 심정으로 잠이 든 윤아를 반긴 것은 살벌한 여덟 쌍의 눈이 아니라 눈부신 속도로 휙휙 움직이는 여인들의 모습이었다.

“일어나, 빨리빨리 준비해.”

“뭐, 뭐에요?”

“뭐냐고? 너 지금 완전 늦잠 잤거든! 왜 하필이면 막냉이까지 늦잠을 잔거야. 어쨌든 지금 빨리 준비해도 늦었으니까 어서 준비해. 시간 늦었어.”

“네? 헉! 빨리 준비해야겠네요.”

시간을 확인한 윤아가 총알처럼 튀어나가며 빠르게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공교롭게도 소녀시대 멤버들이 늦잠을 잔 덕택에 위기를 넘긴 그녀였다.

준비를 마치고 헤어샵에 간 그녀들은 행사를 위해 머리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수다를 떨며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그녀는 하나뿐인 컴퓨터를 먼저 점거함으로써 만약의 사태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다.

“너 왜 컴퓨터를 차지하고 안 비키는 건데?”

“저 좀 할 게 있어서요. 좀 기다려봐요.”

“아까부터 그 말하면서 계속 차지하고 있거든? 좀 비켜주시지!”

컴퓨터를 차지하고 있는 윤아와 차지하려는 순규 사이에 치열한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는 중이다. 딱히 할 것이 없는 그녀였지만 슬쩍 본 뉴스에서는 벌써 난리가 나기 시작했다. 연예 뉴스를 습관처럼 살펴보는 순규의 습성을 감안하면 곧바로 연예 뉴스를 보면서 악몽이 시작될 게 분명했다.

‘아직은 아냐. 조금 더 늦출 수 있어.’

그렇게 생각하며 윤아는 순규와 몸싸움에서 압도적인 면모를 보이며 헤어샵을 나갈 때까지 수성에 성공했다.

부아아앙!

엔진 소리를 자장가 삼아 소녀들은 저마다 잠에 빠져들었다. 오늘 첫 단체 스케줄은 지방 행사였다. 충청권에서 하나를 해결한 뒤 수원 부근에서 하나를 더 하고 방송국에서 마지막 스케줄을 하는 것이 오늘 그녀들의 스케줄표였다.

일찍 일어나 준비를 한 탓인지 소녀들은 곧장 잠에 빠져들었지만 윤아는 오히려 정신이 또렷하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머릿속은 뉴스란에서 얼핏 보았던 것들로 인해 복잡하게 엉켜가고 있었다.

‘어떻게 대처해야 잘했다고 할 수 있지? 잘못하면 완전 끝날 텐데.’

여러모로 머리를 굴려보지만 뚜렷한 대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저지를 때는 좋았지만 상황은 시시각각 그녀를 조여오고 있었기에 계략의 대가인 와룡파니와 사마율조차 쉽게 빠져나오기 힘들 듯했다.

‘에이! 모르겠다, 내가 계속 생각한다고 해결될 것도 아니고, 어떻게든 되겠지.’

짧은 고민 후 빠른 포기. 자신이 어떻게 하기 힘들다는 것을 새삼 느낀 그녀는 눈을 감으며 잠에 빠져들었다.




제105장 부러우니 한 대 맞아




활발한 앨범 활동이 적었던 2008년도에 이곳저곳 행사를 자주 다녀서인지 그녀들의 행사 스킬은 달인의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예전이라면 한두 시간 더 걸릴 법한 것을 능숙한 대처로 처리한 뒤 행사에 임하고 차에 탑승하자마자 다음 행사를 위해 체력을 비축하는 그녀들의 모습에서는 전문가의 향기가 느껴졌다.

충청북도에 있던 행사를 마치고 수원에 있는 행사를 할 무렵, 윤아는 자신에게 향하는 눈초리가 서서히 바뀌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었다. 아침에 그 정도였으니 지금쯤이면 연예 뉴스란 전체가 도배되었을 것임이 분명했다.

‘불안해.’

소녀시대를 외치며 열광하는 남성 팬들은 상관없었지만 무대 앞에서 묘한 눈과 더불어 질투심이 섞인 여성들의 눈빛은 가슴이 철렁일 정도로 서늘했다. 팬들인 그들조차 그러한 반응인데 다른 언니들과 막내는 어떤 반응을 보일지 생각만 해도 두려웠다.

‘견뎌내야 해, 앞날이 험난한 만큼 그만한 대가를 받아냈잖아? 더욱이 엄청난 보물을 손에 넣기도 했고, 헤헤!’

테일러 스위프트에게 건네받은 뮤직비디오 메이킹 필름을 떠올리며 윤아의 입이 쭉 찢어졌다. 자신이 삼십 번 넘게 창현의 입술을 맛본(?) 그때 그 순간을 떠올리면 아직도 황홀함에 휩싸이고는 했다.

혼자 망상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그녀에게 말을 건 것은 태연이었다.

“윤아야, 너 괜찮아?”

“네? 아, 괜찮죠. 갑자기 왜요?”

“응, 네가 야한 상상을 하는 것 같아서 구해주려고 했지.”

“뭐, 뭐라고요? 내가 왜 야한 상상을 해요! 모함하지 마세요, 언니!”

얼토당토한 말에 윤아는 펄쩍 뛰었다. 어떻게 자신과 창현의 해피 엔딩 모드가 야한 상상으로 둔갑될 수 있단 말인가.

본인 입장에서는 아니었지만 보는 입장에서는 전혀 달랐다.

“모함 아니거든? 눈이 풀린 채 입가에 음흉한 미소 짓고 있는 거 보면 뻔하더만, 새벽에 컴퓨터 했던 게 야동 본 거 아냐?”

“아니에요! 억울해요!”

“뭐 억울하다면 어쩔 수 없지만.”

끝까지 부인하는 그녀를 보며 태연은 의심을 집어넣었지만 미심쩍은 표정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답답한 마음에 윤아의 표정이 일그러졌지만 그렇다고 하여 자신의 머릿속에서 진행된 야릇한 망상을 그녀에게 내비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데 말이야, 뭔가 이상하지 않았어?”

“네?”

“아까 행사장에서 말이야. 여자들이 너를 이상하게 집중해서 바라보는 것 같았는데.”

“서, 설마요. 언니들이 민감하게 받아들인 것 아닐까요.”

이럴 때만 눈치가 빨랐다. 화들짝 놀랐지만 윤아는 필사적으로 감정을 다잡으며 애써 태연함을 가장했다.

“그런가? 근데 나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니라 다른 애들도 그렇게 느꼈던데.”

“뭔가 오해가 있었나 보죠.”

“그럴 수도 있겠지.”

다행히도 더 깊이 파고들지 않는 태연이었다. 순수한 걱정에서 비롯된 말이었기에 그녀를 속이는 입장이 되어버린 윤아는 마음이 찜찜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팀의 입장에서 더없이 소중한 언니였지만 남자 문제에 있어서는 결코 양립할 수 없는 연적이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조심해.”

조언을 남긴 뒤 멀어지는 태연이었다.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윤아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에휴! 이러다가 일찍 죽겠어.”

“일찍 죽으면 안 돼요, 언니.”

“꺄악! 주현이 너 뭐야!”

뒤에서 불쑥 들려온 목소리에 윤아가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돌렸다가 주현이 서 있는 것을 보고 한시름 놓은 표정으로 말했다. 기척 없이 접근한 그녀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벌써부터 건강이 상하면 안 되죠. 제가 웰빙 식품 몇 개 추천해드릴까요?”

“음식 문제는 아니야. 그러니 괜찮아.”

“그래요? 으음! 그래도 혹시나 생각 있으시면 말씀하세요.”

“알았어.”

총총 멀어지는 주현을 보는 윤아의 마음은 복잡했다. 살아남기 위해 정보를 차단했지만 자신을 걱정해주는 마음에 마음이 찡했다.

“차라리 모든 걸 말할까.”

모든 것을 털어놓고 편안해지는 게 어떨까 생각했다. 하지만 윤아는 어느 정도 깨닫고 있었다. 자신이 모든 걸 털어놓으면 마음이 편안해질 수 있지만 더하여 몸 또한 편안해질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것도 영원히.

“…그냥 숨겨야지.”

창창한 나이에 죽고 싶은 마음은 눈꼽만큼도 존재하지 않았다.


수원에 잡힌 행사도 성공적으로 끝마친 소녀시대는 방송 스케줄을 위해 방송국으로 향했다. 피곤한 몸을 차에 묻어놓고 편히 휴식을 취하는 소녀들의 머릿속에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특히 민감한 몇몇 멤버들은 기이한 기류를 감지하고 있었다.

‘뭔가 있는 것 같은데.’

행사를 하게 되면 그냥 무대 위에 서서 노래만 부르고 끝나는 줄 아는 경우가 많은데 그렇지 않다. 방송 무대보다 훨씬 가까운 곳에서 많은 수의 관객을 마주하고 하다 보니 그들이 어떤 느낌을 받고 있는지, 어떤 생각을 갖고 행사를 지켜보는지 파악하는 것이 중요했다. 적절한 타이밍을 잡아 호응을 끌어내는 것도 하나의 실력이며 앙코르를 이끌어내는 것은 능력이다.

그 부분에 있어서 달인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일가견이 있게 된 그녀들은 이상 기류를 눈치 챘다.

그리고 그 중심지에는 다름 아닌 윤아가 있었다.

“…….”

언니들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지만 윤아는 애써 외면하며 모른 척했다. 여기까지 어렵게 숨겼는데 막판에 와서 들킬 수는 없었다.

“윤아야 정말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아니에요. 오늘 정말 왜 그러세요.”

“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전 모른다니까요.”

한사코 잡아떼니 다른 소녀들도 뭐라 따질 수 없었다. 물러선 소녀들의 눈빛이 허공에서 뒤엉켰다.

‘숙소에서 물어보자.’

‘그게 좋겠어.’

방송국 안에서 숙소 내 모습을 연출할 수 없기에 순순히 후퇴하는 소녀들이다.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안도했지만 점점 뒷일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면 무사히 넘길 수 있지?’

배 째라는 식으로 넘겨왔지만 슬슬 숙소로 돌아갈 시간이 다가오자 뒷일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자신은 순수한 노력(?)으로 쟁취한 결과이지만 세상에는 그 결과물을 시기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내일 스케줄은 단독 스케줄! 그럼 이따 돌아갈 때 집으로 피신하면?’

모레 다시 단체 스케줄이지만 폭풍을 직접 맞이하는 것과 여파를 맞는 것은 하늘과 땅만큼 커다란 차이가 존재했다. 우선 몸을 피하기로 마음을 먹은 윤아는 방송이 끝나는 순간을 노리기로 하였다.

방송국 안으로 들어간 소녀들은 애써 눌러놓았던 의문이 증폭되는 것을 느꼈다. 쭈뼛거리며 다가오지 않은 채 뒤에서 수군거리는 스태프들의 행동이 무척 수상하게 여겨졌던 것이다.

자신들이 모르는 사이에 무슨 커다란 일이 일어나기라도 했단 말인가.

진실에 근접한 의문이었지만 그것을 해소시켜주는 사람이 없으니 답답할 노릇이었다.

“무슨 일 있는 건가?”

“다들 우리를 보면서 수군거리잖아. 뭔가 있는 것 같은데.”

“물어볼까? 뭔지 궁금한데.”

“그럼 내가 물어보고 올게.”

씩씩하게 앞으로 나서는 수영이었지만 앞을 가로막은 윤아 때문에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 없었다. 눈살을 찌푸린 그녀가 물었다.

“뭐야, 왜 가로막아?”

“언니! 잘못해서 이야기를 듣고 방송에 차질을 빚으면 어떻게 하려고요?”

“뭐?”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것이 나쁜 이야기 때문이라고요. 그걸 들으면 방송에 지장이 있을 게 분명해요.”

“너 뭔가 알고 있는 거지?”

이대로 가다가는 들킬 판이었기에 윤아는 과감하게 일부분을 드러내는 도박을 감행하였다. 어차피 알게 될 일이었고, 그리 되면 여파를 맞이하게 되는 것은 자신이었다. 더군다나 지금 알게 되면 숙소로 끌려가 쥐도 새도 모르게 견제 당할 수 있기에 윤아는 필사적이었다.

대답을 요구하는 다른 멤버들의 눈빛에 윤아가 말을 지어냈다.

“말씀드리고 싶지만 좋지 않은 소식이라서요. 스케줄을 다 끝내면 말할게요.”

“그 정도로 안 좋은 소식이야?”

“네, 정말 안 좋은 소식이에요.”

태연의 물음에 윤아가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마따나 다른 소녀들에게 있어서는 재앙과도 같은 소식이 분명했다.

“좋아, 궁금하지만 참도록 하지. 대신 스케줄이 끝나면 말해줘야 돼. 상세히, 알겠지?”

“네, 물론이에요.”

물론 말할 생각이었다. 다만 직접 말하지 않고 집으로 도망친 뒤 전화를 걸어 스피커폰으로 전환 시켜달라고 한 뒤 말할 생각이다.

그렇게 윤아는 코앞까지 들이닥친 위험을 비켜갈 수 있었다.

메이크업을 고치고 의상을 갈아입은 소녀시대는 곧바로 방송에 임했다. 주변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호기심을 자극했지만 좋지 않은 소식이라는 말에 호기심을 꾹 억누르며 어서 방송이 끝나기 바랐다. 마음이 싱숭생숭해진 탓에 몇몇 멤버들이 실수를 저질렀지만 사태가 발생할 때보다는 양호한 수준이다.

그렇게 방송 스케줄이 끝나자 의상을 갈아입기 위해 대기실로 온 소녀들은 윤아를 추궁했다. 방송 중간 쉬는 시간에도 그렇고 방송 녹화 중에도 스태프들이 힐끔거리며 자기들끼리 소곤거렸기에 호기심이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윤아야! 녹화 끝났으니 어서 말해봐.”

“그래! 어서 말해.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야.”

“자, 잠시만요, 저 옷 좀 갈아입고요. 반쯤 탈의한 상태에서 다짜고짜 물어보면 누가 대답하겠냐고요.”

“칫! 알았어.”

이리저리 핑계를 댄 윤아는 옷을 갈아입은 뒤 눈치를 보다가 화장실을 가겠다는 핑계를 대고 대기실 밖으로 빠져나오려 했다. 하지만 그녀가 나가기 전 일단의 무리가 대기실 안으로 들어왔다.

“정말 있었네?”

“어? 언니! 스케줄 있어요?”

“우리 다음 녹화가 있어서 왔지. 그런데 너희들이 여기 있다는 말에 찾아왔어.”

“이렇게 만나니 굉장히 반가운데요?”

대기실을 찾아온 것은 바로 카라였다. 앞장서서 안으로 들어온 규리는 태연과 인사를 나누었고, 다른 멤버들에게도 인사를 했다. 그런데 분위기가 기이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하라가 힐끔힐끔 윤아를 쳐다보았던 것이다. 평소 무척 친한 사이인 걸 감안하면 이상한 반응이었다. 더군다나 그녀의 시선에는 일말의 적의마저 서려 있었다.

“하라야, 왜 그래?”

“…….”

조용히 침묵하는 그녀는 고개를 들어 윤아를 빤히 바라보았다. 평소 열렬한 현의 팬을 자처하는 그녀였기에 단숨에 의미를 알아차린 윤아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뭐야,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언니, 하라가 왜 저러는 거예요?”

분위기가 심각하게 변하는 걸 느낀 태연은 대답을 바라는 눈으로 규리를 바라보았다. 그 물음에 그녀는 입 꼬리를 말아 올린 채 윤아를 바라보았다.

‘도, 도망쳐야 돼.’

본능적인 위협을 느낀 윤아는 슬금슬금 대기실 문을 향했다. 모두의 시선이 규리에게 집중되었기에 움직이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윤아가 막 문에 도달했을 무렵 규리가 말했다.

“너희들 모르나 보네? 오늘 현하고 윤아가 아주 진하게 스캔들 터졌거든.”

“……!”

대기실을 뒤덮는 경악.

소녀들의 시선이 대기실 문 앞에 서 있는 윤아에게 집중되었다. 입가에 진한 미소를 지은 규리는 축하의 의미를 담아 말했다.

그것은 다시 한 번 지옥의 문을 여는 주문이 되었다.

“축하해, 두 번이나 스캔들이 난 걸. 기자들이 아주 좋아서 기사를 양산하던데? 미국에서 아주 붙어 다녔나 봐? 미국에서 따로 살림 차렸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소문이 퍼지고 있는 걸 보면.”

이쯤 되면 윤아도 이판사판 가릴 것 없었다. 목숨의 위협을 느낀 그녀는 대기실 문을 열며 소리쳤다.

“해명은 내일 모레 해줄… 히익?”

막 대기실을 박차고 나가려던 그녀는 양팔을 붙드는 감촉에 기겁했다. 삐끄덕거리며 고개를 돌리니 그곳에는 환한 미소를 지은 채 살기를 감추지 않는 태연과 순규가 서 있었다.

“우리는 할 이야기가 많은데 어딜 가.”

“맞아맞아, 밤은 길고 대화를 나눌 시간도 많다고.”

“마, 말도 안 돼. 기척도 느끼지 못했는데. 흐윽! 작아서 못 본 건가.”

이 순간 존재감이 없고 키가 작아 신경 쓰지 못했던 자신의 어리석은 판단이 원망스러운 윤아였다.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팔을 붙든 그녀들의 악력은 상상을 초월하고 있었다.

“규리 언니! 살려주세요! 저 이대로 가면 죽어요! 언니! 언니이이이!”

“언니! 이야기는 나중에 나누도록 해요. 저희는 먼저 가볼게요.”

“그래요, 나중에 재미있는 이야기 많이 들려드릴게요.”

“그, 그래. 다음에 보자.”

윤아의 애처로운 외침이 대기실을 쩌렁쩌렁 울렸지만 살기가 풀풀 풍기는 단신듀오의 기세에 규리가 얼떨떨한 표정을 지은 채 윤아를 끄덕였다. 모든 것을 다 잃을 듯한 표정으로 축 늘어진 그녀는 단신 듀오에게 이끌려 연행되었다. 그 뒤를 따라 소녀들이 하나둘씩 대기실을 벗어났다.

“다음에 봬요.”

“유, 윤아는 어떻게 되는 거니?”

살기에 가득 찬 소녀들을 보며 기가 질려 있던 승연이 마지막으로 남은 주현을 보며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그러자 무표정하던 그녀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걸리며 말했다.

“지금 상상하고 계신 것 그 이상이 될 것 같아요. 그럼 저도 이만…….”

고개를 꾸벅 숙인 주현이 밖으로 나갔다.

한참 동안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던 분위기는 니콜의 한 마디로 깨졌다.

“어, 언니 윤아 언니는 어떻게 되는 걸까요?”

“글쎄, 아무래도 다시 보기 힘들지 않을까?”

“…….”

카라 멤버들은 진심으로 윤아의 명복을 빌어주었다.


살벌한 분위기가 숙소 전체에 퍼져 나갔다.

살이 에일 듯한 살벌한 분위기는 윤아에게 집중되고 있었다. 매서운 눈으로 바라보는 멤버들을 보면서 그녀는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그 속에서 소녀들은 경악에 빠져 수군거리고 있었다.

“이럴 수가…….”

“임윤아, 이것이 이런 걸로 수작을 부릴 줄은.”

소녀들의 얼굴에 서려 있는 것은 경악이었다. 숙소로 돌아온 그녀들은 사람들이 왜 윤아를 보면서 수군거리는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바쁘게 스케줄을 하고 있는 사이 대한민국은 그야 말로 발칵 뒤집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중심에는 이번에 새로 앨범을 출시하는 테일러 스위프트의 메인 타이틀곡 뮤직비디오 티저 영상이 있었다.

특이하게도 그녀의 뮤직비디오는 시나리오에 의해 만들어진 이야기였다. 그곳에 주인공으로 나오는 것은 바로 창현과 윤아였다. 짧은 30초 분량의 뮤직비디오였지만 그 속에서 두 사람은 알콩달콩한 모습을 보이며 연인의 모습을 연출하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눈이 뒤집히는 부러운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설마 이럴 줄은.”

“여태까지 모두를 속이고 있었던 거야?”

부럽기도 하고 배가 아프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분노가 솟구쳤다.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이렇게 부러운 짓을 합법적으로 하고 있을 줄 몰랐던 것.

순차적으로 모여드는 눈빛에는 살기가 느껴질 정도로 강렬했지만 윤아는 내색하지 않은 채 태연한 표정을 가장했다.

“속이지는 않았어요. 그때 게임을 하면서 말을 하지 않았으니까요?”

“으, 으음.”

대범하게 받아치는 윤아의 모습이 얄미웠다. 그녀들의 입장에서 대역죄를 저지른 입장이었지만 막상 상황이 닥치자 그녀는 날 선 반응을 보이며 도리어 역공을 가하는 상황이다.

‘이렇게 된 이상 강하게 나가서 언니들이 더 이상의 소리를 못하게 만들어야 돼.’

티저 영상에는 연인의 콘셉트로 다정한 모습을 연출하는 것만 담겨 있다. 마지막에 서로를 그윽한 눈으로 바라보며 점점 얼굴이 가까워지는 모습이 존재하기는 했지만 입맞춤을 했는지 안 했는지는 풀 버전의 동영상이 공개되어야 알 수 있다.

만약 그것부터 공개되었다면 지금처럼 큰소리를 치는 것이 가능 할 리 없었을 테지만 아직까지 긴가민가 하고 있는 소녀들이 상당수였기에 윤아는 승부수를 띄우기로 마음먹었다.

“말 그대로 저는 뮤직비디오 촬영을 위해 간 거예요. 창현이와 함께 테일러 스위프트의 뮤직비디오를 촬영하면 드라마를 하는 것보다 인지도가 높아지고 해외쪽에도 얼굴을 알릴 기회라 생각했어요.”

입에 꿀을 바른 것 마냥 술술 흘러나오는 설명이었다. 이 부분은 이미 몇 달 전부터 생각해온 변명거리였다.

멈칫하는 소녀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윤아는 한 마디 덧붙였다.

“창현이에 대한 사심이 있었지만 제가 냉정히 따져보고 결정을 내린 것이기도 해요.”

물론 거기에 섞인 사심이 약 99.9%의 절대 함유량이라는 걸 그녀는 밝히지 않았다.

도리어 배 째라는 식으로 나가자 소녀들은 주춤했다. 잠시 숨겼을지라도 모든 걸 떳떳하게 밝히는 윤아에게 무어라 쏘아붙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납득하고 넘어간 것은 아니었다. 속이 부글부글 끓으면서 당장이라도 폭발시키고 싶었지만 뚜렷한 명분이 존재하지 않았다.

보는 입장에서는 미칠 것 같은 답답함을 느껴야만 했다.

분위기를 읽은 윤아의 입가에 여유로움이 번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니 제가 이렇게 취조를 당할 이유는 없는 셈이지요.”

짝짝짝.

“멋진 달변이야, 윤아 너 많이 성장했네?”

“그, 그렇죠, 유리 언니?”

박수를 치는 것은 다름 아닌 유리였다. 한 걸음 앞으로 나선 그녀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칭찬해주었지만 윤아는 딱딱한 미소를 지우지 못했다. 웃고 있는 그녀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아 있는 걸 본 것이다.

자기도 모르게 몸을 움츠리는 윤아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다 이내 자신이 무슨 행동을 보이고 있는지 깨닫고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안 돼, 여기서 내가 물러서면 앞으로 언니들하고 막내의 견제에 나가떨어질 거야. 강하게 나가서 기선을 제압해야 해.’

굳은 다짐과 함께 고개를 든 그녀의 눈은 반짝이고 있었다.

“오히려 전 제가 잘못하지 않았다고 해요. 비즈니스적인 일을 기회로 승화시킨 제가 대단한 것 아닌가요?”

“대단하지, 난 개인적으로 그 성과가 정말 대단하다는 걸 인정하고 있어. 우리들 중 누가 그런 방식으로 창현이랑 함께 시간을 보내겠어.”

“알아주시니 기뻐요.”

“하지만.”

짧게 말을 끊은 유리의 눈이 스산하게 빛났다. 무슨 일이라도 저지를 것 같은 섬뜩한 기운이 온몸을 휘감자 자기도 모르게 몸을 파르르 떨며 움츠렸다.

“넌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어.”

“내가 실수를요? 난 실수한 적 없어요.”

“넌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다른 사람의 생각은 다르겠지?”

“어디 말해 봐요! 부러워서 다른 이유를 댈 생각은 말아요. 그렇게 해서라도 핑계를 잡을 거면 나도 참지 않을 테니까.”

없는 용기를 모두 쥐어짠 윤아가 당당히 외쳤다.

그에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유리가 입 꼬리를 말아 올리며 말했다.

“잘 알고 있네.”

“에……?”

“네 말 그대로야. 우리는 네가 부러워서 화를 내고 있는 거 맞아.”

“……!”

유리의 선언에 모두 얼떨떨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설마하니 그녀가 자신들의 열폭을 당당하게 밝혀버릴 줄은 몰랐다.

치부를 드러냈음에도 유리는 개의치 않는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너무 부러워서 화가 나. 스케줄이라는 대의명분을 획득해서 몰래 데이트를 할 정도라니. 대단하고 멋있잖아? 네 반응을 보건대 뮤직비디오 안에는 티저 영상 그 이상의 것이 있을 확률이 높았고.”

“글쎄요.”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지만 윤아의 심장이 쿵쾅쿵쾅 뛰고 있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 모습은 곧 휘몰아칠 폭풍을 예고하고 있는 것 같았다.

“대답은 상관없어, 나중에 직접 두 눈으로 보면 되니까. 지금 중요한 건…….”

유리가 기이한 빛이 담긴 눈으로 윤아의 눈을 응시했다. 그리고 슬며시 입 꼬리를 말아 올리며 그녀에게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을 했다.

“우리가 너무 부러워한 나머지 너에게 응징할 거란 말이지.”

“그게 무슨 말이에요? 지금 언니는…….”

“너무너무 부럽고 화가 나서! 난 윤아 널 응징할 거야.”

“논리에 맞지 않아요! 화가 난다고 날 응징하다니! 냉정하고 계략에 밝은 언니가 아니잖아요!”

그녀의 말에 윤아는 깨닫고 말았다. 기이하게 일렁이는 빛은 숨길 수 없는 질투심이었고 그녀는 처음부터 이번 일을 그냥 넘어갈 생각이 어림 반푼어치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윤아는 거세게 반발해보았지만 유리는 미리 답을 준비한 듯 물 흐르는 것 마냥 자연스럽게 말을 이어나갔다.

“사랑 앞에서 이성이고 나발이고 어디 있어. 본능적으로란 노래 몰라? 그런 거야.”

“안 돼! 난 인정할 수 없어!”

“인정하지 않아도 돼. 우리가 인정하면 되니까.”

“내가 납득할 만한 이유가 없으면 난 최선을 다해 방어할 거예요! 다가오지 마요!”

주먹을 든 윤아는 눈을 부라리며 매섭게 경고했다. 한 걸음 다가온 유리는 그녀의 말을 듣고 고개를 갸웃하다가 입 꼬리를 말아 올렸다.

“납득할 이유가 필요해? 음! 그럼 이렇게 할게. 소녀시대 윤아는 월드스타 현과 올해 들어서만 벌써 두 번의 스캔들을 일으켜 소녀시대의 활동 폭을 제한시키게 되었습니다. 이에 우리 소녀시대 일동은 윤아가 앞으로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게 바른 몸가짐을 시키려 합니다! 이 정도면 됐지?”

“…….”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린 윤아였다.

저런 식으로 가져다 붙여 자신을 응징할 대의명분을 만들어내는 유리의 지략에 기가 질릴 정도였다.

말로써 윤아를 함락시킨 유리는 입가에 미소 지은 채 흉흉하게 변해 있는 소녀들을 향해 말한다.

“자, 내가 판을 만들어줬으니 곱게 다뤄줘야 해? 그래도 같은 멤버니.”

“흐흐, 좋아. 곱게 다뤄주겠어. 앞으로 함께 할 날은 많으니.”

“그러게, 혼자 독식하면 체한다는 걸 모르는 것 같으니 이참에 세상의 이치를 알려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음산한 목소리가 윤아의 몸을 꽁꽁 옭아맸다.

점점 다가오는 다수의 그림자를 보며 그녀는 두 눈을 질끈 감으며 말했다.

“저, 절 어떻게 할 거죠?”

“간단해, 말 그대로 정신과 몸가짐이 새로 무장되는 것뿐이지. 아 물론 이건 표면적인 이유일 뿐, 느닷없이 등장하는 변수의 제거라고 해야겠지.”

“…두고 봐요, 언니. 전 이걸로 무너지지 않을 거예요.”

“기대하겠어. 끌고 가.”

뒤이어 벌어진 일은 무엇을 상상하던 그 이상의 일이 벌어졌다는 것만 알아두자.

사슴이 돌연변이로 진화를 해봤자 결국 사마율의 손바닥 안이었다.

그녀의 연애전선 앞날에 장마전선이 드리웠다.


“에구, 결국 터졌네.”

윤아가 여덟 명의 멤버를 상대로 외로운 전투를 벌이고 있을 무렵 창현은 인터넷 뉴스를 뒤덮고 있는 것을 보고는 입가에 쓴 미소를 지었다.

예상은 했지만 상상 이상이었다.

“터질 게 터진 게지. 여파는 만만치 않을 거다.”

“그걸 아시면서도 허락을 하신 거예요?”

“언젠가 한 번쯤 겪어야 할 일이었으니 이번이 기회라 여겼다. 언제까지 널 어린 아이 취급하며 이리저리 제한을 가할 수는 없지 않느냐.”

“그건 그렇죠.”

태연한 석규의 대답에 오히려 창현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그의 입 꼬리가 말려 올라가며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그리고 윤아와 이미 호흡을 맞춰본 적도 있고.”

“네?”

“라샤 뮤직비디오 말이다. 드라마도 그렇고.”

“아! 그렇죠. 그래서 익숙한 느낌이었나.”

라샤의 타이틀곡 뮤직비디오에서 연인으로 호흡을 맞추며 열연을 펼친 적이 있는 창현이었다. 거기에 드라마에서 같이 연기를 선보이다 보니 짧은 뮤직비디오 티저 영상을 보면 그야 말로 연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결정적으로 네가 윤아를 좋아하잖아.”

“제, 제가요?”

“그럼 싫어하는 걸로 할까?”

“그건 아니죠. 으음! 굳이 따지면 좋아하는 축에 속하네요.”

“그럼 키스신 촬영도 아주 좋아서 했겠구나.”

“그, 그럴 리가요.”

“아니라고? 아니면 네 취향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할 듯 싶은데…….”

가늘게 뜬 석규의 눈빛을 받으니 마치 온몸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듯한 징그러운 느낌이 온몸을 휘감았다.

자칫 잘못하면 아버지에게서 동성애자로 오해받을 것 같았기에 창현은 백기를 들고 투항하는 마음으로 모든 사실을 인정했다.

“하아, 맞아요, 나쁘지 않았어요. 그게 뭐 잘못된 거예요?”

“잘못되긴, 오히려 정상적인 반응이라 마음이 놓이는데.”

“이해해주시면 좋고요.”

“어쨌든 간에 언제고 한 번 벌어질 일이었다. 앞으로 네가 더 넓은 영역에서 활동하려면 한 번쯤 겪어야 할 성장통이니 받아드리도록 해.”

“괜히 서먹해지지는 않겠죠?”

“그건 네가 알아서 해야 할 일이고.”

“에휴! 쉬운 일이 하나 없네요.”

결국 모든 책임이 자신에게 돌아오는 듯하자 창현은 자포자기 심정이었다.

입가에 미소를 지은 석규는 옆에 놓여있던 A4용지를 그에게 내밀었다.

“한 번 보도록 해라.”

“이게 뭐죠?”

“앨범 활동은 접었어도 종종 방송 활동은 하겠다고 하지 않았더냐? 그래서 재미있는 이벤트 형식으로 기획된 프로젝트하고 간단한 인터뷰 스케줄이다.”

“정말 간단하네요.”

“하고 싶다면 예능 프로그램 섭외건도 있는데?”

“일단 주세요. 한 번 다 훑어보고 결정내리면 되죠?”

“그래, 그러면 된다.”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남는 시간에는 가급적이면 앨범 구상에 투자하고 싶거든요. 아! 이건 가져가도 되죠?”

이야기가 마무리되자 자리에서 일어선 창현은 섭외 건이 담긴 A4용지를 들며 물었다.

“사본을 떠서 가지고 가라. 그런데 쉬지도 않고 바로 앨범을 제작하겠다고?”

“쉬면서 하겠다는 거예요. 여유를 갖고 하면 더 좋은 게 떠오르거든요.”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멋진 곡 기대하마.”

“기대에 어긋나지 않을 거예요.”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은 창현이 고개를 꾸벅 숙인 뒤 사무실을 막 나서려 할 때 석규가 말했다.

“아참! 잠깐만.”

“네?”

“지영이가 너한테 전화 달라고 하더구나.”

“왜, 왜 그러죠?”

“그거야 해보면 알지 않겠느냐?”

“그렇겠죠, 후우!”

자신의 운명을 직감했음일까. 곧 있을 여동생의 구박에 시달릴 것을 생각하며 눈앞에 아찔해지는 기분을 맛본 그는 당당하던 방금 전과 달리 양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밖으로 나갔다.

“자신감이 넘친다고? 기대되게 만드는군.”

주변 사람에게 저절로 기대하게 만드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그 기대를 뛰어넘는 사람을 흔히 천재라고 한다.

창현은 석규에게 있어 그런 존재였다.

어떤 성과물로 자신을 놀라게 해주루지 기대하던 그는 문득 아까 전 창현이 보였던 반응을 떠올리고는 낮게 웃음을 지었다.

“나쁘지 않았다고? 후후후.”

소년은 커서 어느덧 늑대가 되어가고 있었다.

다만 본인만 모르고 있을 뿐이다.


“하아.”

지친 표정으로 집에 돌아온 창현은 입가를 비집고 흘러나오는 한숨을 참지 못한 채 길게 내뱉었다.

그 속에는 일말의 안도감이 짙게 배어 있었다.

“살았다.”

소속사를 나서던 그에게 떨어진 절대지령. 그것은 절대 거부해서는 안 되고 절대 피할 수 없는 악몽과도 같은 것이었다.

동생 지영의 호출은 심장을 덜컹 내려앉게 만들기 충분했다. 하지만 막상 만나게 된 그녀는 의외로 호의적이었다.

“평소랑 많이 다르던데 괜찮은 건가.”

평소와 다른 반응에 오히려 지영에게 별다른 문제가 없는지 걱정이 앞서는 그였다. 창현은 좀 전에 만났던 지영과의 만남을 떠올려보았다.


지영을 만나기 위해 집에 들른 창현의 모습은 흡사 형을 집행하기 위해 끌려가는 죄수와도 같았다. 하지만 지영은 의외로 차분한 기색을 유지하고 있었다.

“왜 그렇게 서 있어? 여기 좀 앉아 봐, 오빠.”

“으응, 그래.”

“귀국했다는 말도 안 해주고 섭섭하잖아. 오빠가 연락하길 기다렸는데, 힝.”

“미안, 조용히 귀국한다는 게 그만 너한테도 비밀로 해버렸네.”

“칫! 오빠가 사과하니 어쩔 수 없지. 하지만 그렇게 무심하게 대하면 정말 섭섭하단 말야.”

“하하, 미안해. 앞으로는 꼬박꼬박 연락 할게.”

“그렇게 말하니 용서해줄게. 솔직히 많이 섭섭했었는데.”

“미안미안.”

의외로 조용조용하고 순순히 말하는 지영의 모습에 안도하는 창현이었다. 하지만 뒤이어 흘러나온 말이 그로하여금 긴장하게 만들었다.

“미국 갔던 게 윤아 언니랑 뮤직비디오 촬영 때문이었어?”

“그것도 있고 여러 스케줄을 마무리하려는 것도 있었어.”

“그랬구나. 뮤직비디오 촬영은 재미있었고?”

“뭐… 나쁘지는 않았어.”

예상과는 다른 전개였다. 예전 같으면 앙칼진 지영의 반응에 이래저래 물어 뜯겼을 텐데 지금은 평화주의적인 그녀의 모습에 창현도 순순히 정보를 털어놓았다.

하지만 그가 마음놓기 무섭게 지영의 카운터가 들어왔다.

“설마 깊은 관계까지 간 건 아니겠지?”

“그게… 무슨 말이야?”

“왜 그런 거 있잖아. 미국은 우리나라보다 개방적이어서 스킨십도 우리나라보다 좀 더 농도 짙게 한다던가?”

“하하! 그럴 리가.”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느낌이었지만 창현은 내색하지 않았다. 변화무쌍한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건대 자신이 진실을 털어놓으면 어떻게 변할지 쉬이 짐작할 수 없었다. 긁어 부스럼이 생기느니 차라리 진실을 밝히는 걸 좀 더 뒤로 미루자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렇구나. 히히, 다행이다.”

“다행?”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런데 왜 연락 안했던 거야? 엄마도 많이 섭섭해 하셨다고!”

“그랬어? 에구 내가 너무 무심했나 보네.”

“무심하고 말고. 엄마도 얼마나 섭섭해 하셨는데. 그러니 어서 인사 나누라고.”

“알았어, 걱정해줘서 고맙다.”

“이 정도쯤은 기본이지! 히히.”

창현의 말에 안도해서일까.

예상했던 앙칼진 모습은 사라진 지영의 표정은 무척 밝았다. 그 모습에 창현은 나중에 풀 버전 뮤직비디오가 공개되었을 때가 정말 걱정되었다.


“뒷일은 알아서 해결되길 빌어야겠지?”

위기를 모면하는데 성공했지만 뒷일이 두려운 것이 사실이었다.

지영이 워낙 유별나게 자신을 챙겨주지 않았던가.

하지만 때때로 그것이 위험 수위를 드나들기에 창현은 골치가 아파오는 걸 느꼈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타개할 방법을 생각하고 있자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오지 않는 방법은 나중에 궁리하기로 생각한 창현은 침대에 누웠다.

이래저래 머리가 아파 생각할 것이 많았다.


-그래서 그랬다고 하더라고요.

“흐음, 그게 정말이야?”

-네, 다른 건 없었고요. 설마 오빠가 저한테까지 거짓말을 했겠어요?

“그건 그렇지. 창현이가 지영이 너한테만큼은 숨기지 않고 모든 것을 털어놓고는 하니깐. 어떨 때 보면 우리 남매랑은 사이가 정반대인 것 같아서 엄청 부럽더라니깐?”

-히히! 오빠가 저한테 좀 솔직하긴 하죠. 어쨌든 별 게 없었다니 다행이에요. 언니 말대로 페이스 유지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요. 앙큼한 고양이 같은 윤아 언니! 다음에 내 눈에 보이면 각오해야 할 거예요.

앙큼한 지영의 위협에 통화하고 있는 상대인 유리는 미소를 지었다.

“그럴 필요 없어. 윤아는 이미 우리들한테 잔인하게 응징당했거든. 지금 유폐되어서 죄인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지.”

-그래요? 그렇게 말하니 마음이 약해지네.

“풀 버전이 공개되고 모든 걸 결정해도 지나지 않아. 어쨌든 정보 고마워.”

-네, 언니도 그렇게 알고 있어요. 오빠가 저한테까지 거짓말을 했을 리 없으니까요.

“응, 그렇게 알고 있을게. 그럼…….”

지영과 통화를 끝낸 유리는 빈 액정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여동생인 지영에게 정보를 얻어냈지만 마음이 쉬이 진정되지 않았다.

“동생한테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뒷일을 염려해서 말을 하지 않았을 확률도 있지. 아니, 그럴 확률이 더 높아.”

풍기문란(?) 죄로 소녀들에게 입건된 윤아는 모진 고문을 당하며 진실을 토해내길 강요받았다. 하지만 강도 높은 고문에도 꿋꿋이 견뎌내며 그녀는 그 이상의 씬은 없었다고 주장했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모진 고문을 견뎌내는 독립투사 마냥 결연하기까지 한 윤아의 모습에 마음이 약한 몇몇 소녀들은 그녀의 말에 인정하는 추세였지만 유리는 달랐다.

그녀는 오히려 역발상을 하고 있었다.

“필사적으로 아니라고 했다는 건 숨길 게 더 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 윤아의 특성상 모든 걸 말했을 확률이 높지만 그 말이 뚜렷하지 않다는데 주안점을 두어야 해.”

여러 추측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지만 그녀가 진실을 말하지 않는 이상 자세한 정황은 파악되지 않을 터였다.

한숨을 푹 내쉰 그녀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본능적인 그녀의 육감에는 뮤직비디오의 수위가 티저 영상처럼 끝나지 않을 거라 외치고 있었다.

개방의 나라 미국이 아니던가.

자신이 지영을 꼬드길 때 말했던 것처럼 개방적인 미국의 풍토상 그 정도에 끝나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예상이 맞아도 싫고 틀려도 내 생각이 틀렸다는 거니 어느 거 하나 마음에 들지 않아.”

한숨을 푹 내쉰 유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록 윤아에게 선수를 빼앗겼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내 남자의 비즈니스는 충분히 용납할 만큼 대단한 남자였고 이미 수연과 태연 등이 강제적인(?) 수단을 이용해 깽판을 벌인 적이 있으니.

“이참에 완전히 망가뜨려서 포기하게 만들어주겠어.”

그녀의 눈에 사악한 빛이 일렁였다.


“아아.”

절망이 담긴 윤아의 깊은 한숨이 복도에 울려 퍼졌다. 그럼에도 그녀의 곁에 있는 소녀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을 지은 채 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윤아의 표정은 수심으로 물들었다.

‘단단히 마음먹었나 봐.’

테일러 스위프트의 뮤직비디오 티저 영상이 공개되고 이틀이 흘렀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시간 동안 윤아는 자신이 얼마나 절망스러운 상황에 처했는지 절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설마 정공법으로 나올 줄은…….’

수세에 처한 윤아가 행할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멤버들의 자존심을 적당하게 긁어 물러서게 만들려는 방법을 구사하려 했지만 결과는 대실패, 오히려 그 자존심의 발로가 자신을 더욱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윤아는 자신이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자신이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뭐해, 어서 움직이지 않고.”

“알았어요. 에휴.”

옆에 서 있는 태연의 재촉에 한숨을 푹 내쉬며 걸음을 옮겼다. 이틀 전부터 자신은 이런 상황에 처해 있었다.

2009년도에 접어들어 창현과 두 번의 스캔들을 일으키며 물의(?)-라고 쓰고 질투심 폭발이라 읽는다.-를 일으킨 윤아는 멤버들의 절대적인 찬성 하에 동반자 동행 시스템의 수혜자가 되었다.

동반자 시스템이란 윤아가 어딜 갈 때 멤버 중 한 사람이 따라나서며 사후 보고의 원칙을 띠는 불평등 보호 조약이었다.

당사자인 윤아는 격렬하게 거부 반응을 보였지만 이미 약체로 전락한 그녀의 선택권은 존재하지 않았다. 다른 여덟 강대국에 의해 보호국이 되어버린 그녀는 심지어 슈퍼마켓에 갈 때조차 감시자가 달라붙었다.

그 때문에 윤아는 미칠 맛이라는 걸 몸소 체험 중이었다. 스스로 질투심 폭발 중이라는 걸 선언한 뒤 다른 멤버들은 거의 노골적으로 윤아를 갈구는 형식을 띠었기 때문이다.

오늘 스케줄도 마찬가지였다. 태연은 스케줄이 없었지만 감시자의 명목하에 그녀를 따라와 물 샐 틈 없는 철통 감시망을 펼치고 있었다.

“언니, 오늘 쉬는 날이잖아요.”

“그렇지.”

“그럼 푹 쉬셔야죠. 고된 스케줄 때문에 많이 힘들어하셨잖아요.”

“그렇긴 한데 질투심 폭발하지 않으려면 다른 방법이 없어서.”

태연의 어조는 무미건조했다.

그 어떠한 설득도 타협도 존재하지 않는 그녀의 맹목적인 태도에 윤아는 좌절에 빠져야만 했다.

생각해보라, 잘 때를 제외하고 온종일 자신에게 감시의 눈동자가 적용되는 순간을.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으로 돌변한 것도 모자라 내내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니 미칠 노릇이었다.

“언니 저 말라죽을 것 같아요.”

“그 정도로 죽지 않아.”

“편히 쉬고 싶어요.”

“그럼 편히 쉬어.”

“그렇게 감시하는데 어떻게 편히 쉬겠어요. 저 좀 살려줘요.”

“살려줄 테니 편히 쉬어. 아니면 어디까지 갔는지 말하던가.”

이런 식이었다. 감시에 지쳐 칭얼거리면 어김없이 빈틈을 비집고 회유가 들어온다. 이틀 후면 어차피 풀 버전 뮤직비디오가 공개될 터였다. 그때면 모든 것이 밝혀질 테지만 자신의 정신이 허약해진 틈을 타 행해지는 달콤한 유혹은 윤아로 하여금 이를 꽉 물게 만들었다.

‘절대 말하지 않을 거야.’

이 모든 게 와룡파니 사마율의 전략이라는 걸 깨닫게 되면서 치가 떨렸다.

사람의 빈틈을 파고들어 귀중한 정보를 날로 먹으려니 어찌 치가 안 떨리겠는가.

때때로 유혹 앞에 흔들리는 자신의 모습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스케줄을 마치고 돌아온 윤아에게 달라붙은 감시자는 미영이었다. 그녀는 지략가답지 않은 푼수끼 넘치는 웃음을 지으며 친근하게 접근했다.

“윤아야, 몸이 안 좋아 보여.”

“감시가 딸려 있으니 그럴 수밖에요.”

이번에 냉랭한 것은 윤아였다.

저 미소와 띨띨하게 보이는 행동이 모두 위장이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그녀는 세상에 믿을 것이 하나 없다는 진리를 몸소 체득할 수 있었다.

저렇게 보여도 미영은 자신에 대한 모든 정보를 취하고 있었다.

‘흥! 절대 안 넘어가.’

콧방귀를 뀌며 각오를 다지는 윤아였다.

냉랭한 그녀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미영은 연신 친근한 태도를 유지하였다. 그렇게 되자 윤아는 정말 미영이 자신에게 감시의 목적 없이 접근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흥! 이번에는 안속을 거야.’

그러면서 옷을 차려입자 슬그머니 다가온 미영이 은근한 어조로 묻는다.

“어디 가려고?”

“네! 편의점 가려고요! 언니도 따라오시게요?”

“응! 나도 마침 물건 살 게 있었거든, 헤헤.”

‘흥! 그럴 줄 알았어.’

대놓고 톡 쏘아붙여서 심기가 불편한 것을 알렸지만 기어코 이유를 대고 따라붙었다. 결국 그녀도 자신을 감시하기 위해 접근하는 것이었다.

찬바람이 쌩쌩 부는 태도로 밖을 나선 윤아는 뒤따라오는 미영을 모른 척했다. 그럼에도 미영은 웃음을 지으면서 따라붙었다.

“그거 사려고 절 따라온 거예요.”

“왜, 이상해?”

560원짜리 맛소금을 든 채 고개를 갸웃하는 미영을 보면서 머릿속으로 열이 뻗치는 걸 가까스로 억누르는 윤아였다.

‘이유를 댈 거면 제대로 된 걸로 대던가.’

기껏 살 게 있다고 하면서 따라와 놓고 사는 게 맛소금이라니. 그녀가 산 물건 마냥 입맛이 쓴 윤아였다.

“이씨.”

“왜 화났어?”

“화가 안 나겠어요? 절 잡아먹지 못해 안달 난 멤버들이랑 같이 살고 있는데 말이죠.”

“그래? 흐응, 그러면 그 중에 네 힘이 되어주는 사람이 없다는 거네?”

“힘이 되어주기는요! 아주 제 옆에 달라붙어서 힘만 쪽쪽 빨아먹고 있잖아요.”

분한 마음을 참지 못한 윤아는 기어코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지만 그녀는 이미 될대로 되라는 식이었다.

“그럼 내가 힘이 되어줄까?”

“…무슨 의도에요. 유리 언니 사주 받았죠?”

집중 포화를 받다보니 느는 건 의심뿐이었다.

가자미눈을 뜬 채 노려보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은 미영이 말했다.

“사주는 무슨, 내가 유리의 사주를 받고 움직일 것 같아.”

“혹시 모르죠. 제게 정보를 캐내려고 먼저 움직일 수도 있으니.”

“헤헤, 그런 안심은 접어둬. 유리랑 합작하면 결국 사냥 당하는 건 난데 내가 왜 협력하겠어.”

“그걸 어떻게 믿어요.”

“그래서 나는 지금 네게 협력을 제안하려고 하는데?”

“…정말이에요? 쉽게 넘어갈 거라 생각했다면 오산이에요.”

“물론이야. 내가 어떻게 널 쉽게 생각하겠어.”

“예전 같으면 바로 동맹을 맺었겠지만 이제는 쉽게 맺지 않아요. 언니가 먼저 패를 내놓으면 생각을 해보도록 하겠어요.”

윤아의 의심은 이미 극에 달한 상황이었다. 쉽게 설득할 수 없을 것이란 기세를 팍팍 풍기면서 미영으로 하여금 먼저 숨겨둔 패를 내놓으라고 압박했다.

그녀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동안 스케줄이 많지 않아. 그렇게 되면 내가 널 감시하는 상황이 많겠지?”

“그래서요?”

“내가 맡을 때 널 자유롭게 풀어주도록 할게.”

“그럼 언니가 얻는 게 뭔데요?”

“대신 너의 정보를 내게 조금만 나눠줘.”

“언니가 무엇을 원하는 건지 잘 모르겠네요.”

솔직하게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는 윤아였다. 미영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안심시켜주었다.

“간단해. 윤아 네가 창현이와 두 번이나 스캔들을 일으켰다는 것은 그만큼 행동력과 정보가 있다는 것 아니겠어? 그것을 내게 조금이라도 공유해줬으면 하는 마음이 있어.”

“그에 비해 내가 얻는 게 너무 적은데요?”

단지 자신을 자유롭게 해주는데 반해 미영이 얻으려고 하는 건 너무 많았다.

마음에 들지 않는 기색을 풍기며 미간을 찌푸리자 미영은 웃음을 지우며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직 네 처지를 잘 모르고 있나 보네.”

“무슨 뜻이에요?”

“스캔들을 두 번이나 일으키면서 질투심이 폭발한 이야기는 거짓말이 아니야. 우리가 돌아가면서 널 감시하는 건 그리 큰 일도 아니고. 우리에게 있어 조금 귀찮은 일이지만 당사자인 넌 어떨까? 여덟 명이 돌아가면서 감시하는데 다른 틈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아?”

“…….”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리는 건 한순간이었다. 그녀의 말마따나 여덟 명이 협력하여 조금만 귀찮으면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인 자신을 물 먹이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난 널 구제하기 위해 제안을 하는 거야.”

“언니는 무슨 이득이 있는데요?”

“창현이와 함께 할 수 있는 비법! 네가 어떻게 창현이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지 알 수 있지.”

“으음.”

윤아는 고민에 빠져들었다. 별 거 아니겠거니 싶었던 유리의 계획은 무서운 것이었다. 여덟 명의 작은 힘을 한데 모아 가장 앞서 있는(?) 자신을 격침시키려 하다니.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다가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내게 손해될 건 없어. 미영 언니가 날 이용하려고 하면 나도 이용하면 돼!’

전에 알던 자신이 아니란 걸 보여주겠다고 생각하며 결심을 굳힌 윤아가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잘 부탁드려요.”

“나도 잘 부탁해.”

외통수밖에 존재하지 않던 윤아가 동맹 제안을 받아들이자 미영이 환하게 웃음을 지었다.

‘유리와 이야기 했던 대로인 걸? 이 추세로 밀고 나가면 되겠어.’

음모가 느껴지는 음흉한 미소였다.


두 지략가의 회동은 모두가 잠든 야심한 시간에 이루어졌다. 룸메이트 순규가 잠든 것을 확인한 유리는 기척을 지우며 방으로 들어가 뽀송뽀송한 얼굴의 미영에게 물었다.

“어떻게 됐어?”

“이미 예상하고 있잖아.”

“…….”

담담한 미영의 대답에 유리는 미소를 지었다. 창현과 관련된 문제에 있어 그 지략이 천인지통(하늘과 통하는 수준)의 수준에 도달한 책사 캐릭터가 아니던가. 서로의 반응을 보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척이면 척이었다.

“나도 그냥 물어본 거야. 너라면 확실하게 처리할 거라 믿었으니까. 하지만 방심하면 안 되는 거 알지?”

“방심하면 안 될 것 같았어. 당한 게 있다 보니 독이 바짝 올라 있던 걸? 특히 유리 너에 대한 불신감이 극에 달해 있는 중이야.”

“그래? 그건 좀 안 좋은데.”

“괜찮아. 내가 중간에서 윤아의 의심을 싹 풀어놓고 접근하면 되니깐. 대신 네가 수고 좀 해줘.”

“그건 나만 악역을 맡으라는 거잖아.”

“헤헤.”

미간을 찌푸리는 유리를 보며 미영은 웃음을 지었다.

대역죄를 범한 윤아를 완전히 탈락시키기 위한 계획을 세운 것은 유리가 아니라 미영이었다. 두 번의 스캔들로 그 죄가 하늘에 닿은 윤아는 유리의 계략을 들은 미영은 한 가지 번뜩이는 계책을 마련하였다. 그로 인해 새로 파생된 것이 바로 고육지책이었다.

유리에게 번번이 이용당하여 이리저리 쓴맛을 본 윤아는 이번 이리로 인해 불신감이 하늘을 찌르는 중이었다. 멤버들의 거듭되는 감시로 인해 불만이 극에 달한 윤아의 상태는 궁지에 몰려 독이 바짝 오른 생쥐였다.

갈 곳이 사라진 생쥐는 될대로 되라는 식의 마음을 갖고 고양이를 무는 법이다. 미영은 그러한 사태가 발생하지 않게 하기 위해 유리를 악역으로 내세운 채 접근했다. 바로 윤아에게 한 줄기 숨통을 틔워주는 구원자 같은 존재였다.

“생각해보면 너도 참 잔인해.”

“잔인하다니. 이 일로 우리가 감정이 상하는 일은 없어! 사랑과 우정은 별개니깐.”

“네가 윤아 입장이면 그 말을 당당히 할 수 있어?”

“아니, 헤헤. 그렇진 않네.”

“불쌍한 윤아, 어떻게 하다가 얘한테 걸려서는.”

사도에 능통한 유리가 혀를 찰 정도로 미영의 계략은 잔인했다.

“어쩔 수 없어. 이대로 가면 연기 경력을 쌓은 윤아가 제일 앞서 나갈 수 있으니.”

“그렇게 따지면 노래 분야인 태연이도 있잖아.”

“노래를 잘해서 만나도 기껏해야 듀엣, 피처링이지만 연기로 만나면 더한 것도 하잖아.”

“…설마 거기까지 계산하고 윤아를 제거하려고 한 거야?”

“그럴 리가 없잖아.”

‘거기까지 계산한 게 분명해.’

고개를 저어 부인하는 미영이었지만 가늘게 뜬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유리는 내심 확신하고 있었다.

사랑에 있어서는 강력한 경쟁자를 합공할 수 있는 든든한 동료였지만 적으로 삼기에는 성가신 인물임이 분명했다.

‘윤아 다음에는 얘를 떨어뜨리는 게 가장 좋겠는데.’

자신과 비슷한 타입의 캐릭터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더군다나 미영은 자신과 달리 귀여운 외모를 갖고 있지 않은가.

‘창현이가 두세 살만 더 많았어도 녹여버렸을 텐데.’

그 점이 너무나 아쉬운 유리였다. 성인층에게 어필되는 자신의 매력 상 창현이 성인이었으면 더욱 유리한 고지를 점령할 수 있었을 터인데 아직 법적으로 미성년자였다. 시부모님들에게 허락을 받고 도장(?)을 찍어놓더라도 이게 도장이 아니라 법정으로 향하는 지름길만 될 뿐이었다.

유리가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할 때 미영 또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윤아 때문에 힘을 합쳤지만 유리가 더 위험해.’

잠재적인 위험도는 그녀가 더 컸다.

미영의 머릿속이 빠르게 회전하면서 어떻게 유리한 고지를 점령할지 계산했다.

‘일단 윤아랑 접점을 갖는 건 나니깐 그 방법을 나 혼자서 꿀꺽하면?’

유리에게는 그럴 듯한 방법을 알려줘서 속이면 그만이다. 그러다 그녀가 실수를 해서 점수가 깎이면 더 좋고.

‘좋아! 그렇게 해야지. 헤헤.’

머릿속으로는 수십 가지 계획이 스쳐지나가고 있지만 두 소녀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빈틈없이 잘 처리해. 내가 악역 맡은 만큼 어설프게 처리하면 용서하지 않을 거야.”

“응, 최선을 다할게.”

위태롭지만 최강의 동맹이었다.


빈틈없는 로테이션 감시로 윤아를 제거하려 했지만 쉽지 않은 순간도 존재했다. 바로 다른 멤버들이 스케줄을 이행할 때 윤아 혼자 떨어지는 경우였다.

숙소의 권력자 수연은 눈살을 찌푸리며 윤아에게 물었다.

“회사에 가야 된다고?”

“네, 뮤직비디오 공개 건 때문에 이야기 할 게 있다는데요?”

“언제까지 있을 것 같은데?”

“저도 잘 몰라요. 왜요, 스케줄 가장 먼저 끝나는 사람이 감시하러 오려고요?”

“그야 뭐…….”

눈을 똑바로 뜨고 물어오는 윤아의 모습에 순간 당황한 수연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분위기가 어색하게 변하려 하자 미영이 손을 들어 말했다.

“내가 오늘 스케줄 가장 먼저 끝나니 윤아랑 함께 올게.”

“네가? 띨파니는 썩 믿음이 가지 않는데.”

“뭐? 힝, 나 띨파니 아니거든?”

‘그래, 너 띨파니 아니야. 속에 능구렁이 백 마리 정도 숨겨두고 있는 두 얼굴의 여자지.’

간사한(?) 미영의 모습을 보며 진저리를 쳤지만 협력관계이기에 유리는 도움을 주었다.

“그럼 따로 회사에 갈 사람 있어? 없잖아. 그럼 미영이가 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

유리의 말에 침묵이 감돌았다. 그녀의 말마따나 스케줄이 끝나고 굳이 회사에 가서 윤아를 감시하고 싶은 사람은 없었다.

“그럼 파니가 가는 게 좋겠네.”

“그치? 내가 갈게.”

“윤아 잘 보살펴. 알았지?”

“응! 물론이야. 내가 언니니까 잘 보살필 게.”

대화 내용만 들으면 동생을 극진히 아끼는 언니의 모습이었지만 그 속에 내재된 의미를 알아차린 윤아는 이를 갈았다.

‘회사에 간 나까지 감시한다고? 미영 언니 말이 정말이었어!’

우월한(?) 자신을 나락으로 떨어뜨리려는 악마들의 계략에 치를 떨며 힐끔 미영을 바라보았다.

찡긋 하는 그녀를 보니 마음이 놓였다. 모두가 적일 때 단 한 사람이지만 자신의 편이 있다는 사실은 안도를 하게 하였다.


회사로 향한 윤아는 기획 실장을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향후 진행 상황에 대해 들었다. 현재 SM엔터테인먼트는 AA엔터테인먼트와 거의 운명을 같이하는 수준으로 협력 관계를 끌어 올렸기에 대외적으로 은밀히 소문을 흘려 그 관계를 공고히 하겠다는 방책이었다.

회사 차원에서 협력을 아끼지 않겠다는 말을 듣자 윤아는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자신을 적대하는 멤버들을 어떻게 물리치느냐였다.

모든 이야기를 끝마치고 연기 레슨까지 받으니 시간은 어느덧 저녁이 되어 있었다. 식사를 마친 뒤 연습실로 향하자 미영이 손을 흔들며 윤아를 반갑게 맞이하며 그녀에게 성큼 다가왔다.

“이야기는 잘했어?”

“네. 언니도 스케줄 잘 하셨고요?”

“나야 잘했지. 회사에서는 뭐라고 말해?”

“어떤 걸요?”

아닌 척하려 했지만 순순히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입 꼬리를 말아 올린 미영은 구체적인 사실을 언급했다.

“오늘 그 뮤직비디오 때문에 이야기 했던 거 아냐?”

“에휴! 맞아요. 회사에서 최대한 지원을 해주겠데요. 어차피 우리 회사랑 창현이가 있는 회사랑 긴밀한 관계를 맺어서 비즈니스적인 관계라 강조해도 괜찮으니까요.”

“정말 괜찮은 거야?”

“언니라면 안 괜찮을 것 같아요?”

“아니, 괜찮을 것 같아.”

일을 핑계로 창현과 연인 관계를 연출하며 함께 촬영하는 것. 이 얼마나 부러운 상황이란 말인가. 연습생 시절 가수 준비를 하면서 연기자 준비까지 하는 윤아가 안쓰러웠는데 지금은 부러워서 속이 쓰릴 지경이었다.

모든 상황을 치밀하게 계산하고 만약의 변수까지 생각하여 행동으로 옮기는 자신이 그저 밥(?)에 지나지 않은 윤아에게 밀릴 수 있단 말인가. 헤실헤실 웃고 있지만 미영은 그 부분이 분하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비법이 무엇인지 궁금하기도 하였다.

“후후,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니깐요.”

“칫! 그래 잘났어. 그런데 어떻게 하면 그렇게 창현이랑 자주 접점을 갖게 된 거야?”

“에? 그건 왜요.”

“어제 말했잖아. 내가 도와주는 대신 윤아 너도 날 도와주기로.”

“겨우 하루만에 비법을 뽑아먹으려 하는 게 말이 되요?”

보따리를 지켜줄 테니 안에 든 걸 다 내놓으라는 말이랑 다를 바가 없었다. 황당한 표정을 짓는 윤아였지만 미영은 특유의 친화력 넘치는 미소로 말했다.

“궁금하단 말이야.”

“흥! 가르쳐주기 싫어요. 언니는 속이 까매서 내 비법만 쏙 빼먹을 것 같아.”

“절대 안 그럴 게.”

“싫거든요.”

“이렇게 나오면 나도 협력 안할 거야.”

입술을 삐죽 내민 채 으름장을 놓자 윤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민에 잠기다가 한숨을 푹 내쉬고는 말했다.

“언니 나빴어. 알았어요, 말할 게요. 대신 자세한 건 말 안 해줄 거예요.”

“그런 게 어디 있어.”

“언니가 내 편이라는 걸 확실하게 알게 되면 나도 협력할게요. 하지만 지금은 아니잖아요.”

미영과 유리 두 지략 캐릭터에게 집요하게 당한 전력이 있는 윤아는 불행하게도 다른 사람을 쉽게 믿지 못하게 되었다.

스스로 능력을 갖추지 못한 자는 철저하게 이용당하고 버려질뿐이다.

용담호혈이 되어버린 소녀시대 숙소에서 몇 번의 쓰디 쓴 경험을 하게 된 센터 융의 뼈가 되고 살이 되는 학습이었다.

“알았어. 내가 한 발 물러설게. 뭔지 말해줘.”

너무 머리를 써요.”

“……?”

“제가 할 말은 그것뿐이에요. 나머지는 언니가 알아서 해석해요.”

고개를 외면한 채 나몰라라하는 그녀를 보며 미영이 인상을 찡그렸다.

“뭐야, 약속했던 거랑 이야기가 다르잖아. 머리를 쓴다는 게 무슨 말이야. 머리를 쓰는 건 당연히 좋은 건데.”

“말 그대로에요.”

“하지만 계산하지 않을 경우 윤아 너처럼 이용당할 수 있잖아…….”

말을 하던 미영은 윤아의 눈 째림에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어갔다. 아차한 그녀는 은근슬쩍 다가가 팔을 붙잡고 늘어지기 시작했다.

“그러지 말고 알려주라.”

“언니가 생각할 문제라니깐요? 전 이만 일어날게요.”

“같이 가.”

걸음을 빨리하는 윤아의 뒤를 따르면서 미영은 그것이 무엇을 뜻하고 있는지 끊임없이 곱씹어보았다. 숙소로 돌아오는 순간에도 윤아와 이야기를 하지 않은 채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방에 틀어박혀 이리저리 생각에 잠겨있던 미영은 윤아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차리고는 두 손으로 무릎을 탁 쳤다.

“그렇구나! 그 말이었어.”

윤아의 말에 내포된 뜻은 아주 간단한 것이었다. 다만 자신이 너무 복잡하게 생각한 나머지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미영은 자신의 어리석음에 스스로 꿀밤을 놓았다.

“에이 바보, 그걸 이제야 깨닫다니.”

머리를 너무 쓴다는 것은 말 그대로 간단하게 풀어나갈 수 있는 상황을 복잡하게 생각한다는 뜻이었다. 마치 지금처럼 바로 해답을 낼 수 있는 이야기를 돌려 생각함으로써 눈앞의 답을 찾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때로는 머리를 쓸 필요가 없다는 뜻이지. 헤헤.”

과감한 행동을 함으로써 선택할 수 있는 무기 숫자가 늘어난다. 합리적인 생각이야 말로 최고라 생각하던 미영의 상식을 뒤집는 엄청난 것이었다.

미영이 이러한 깨달음을 얻은 걸 알면 윤아는 땅을 치고 후회하리라.

“그렇단 말이지. 헤헤.”

사용할 수 있는 무기가 늘어난 미영의 머릿속에는 창현과 달콤한 로맨스가 펼쳐지고 있었다.


새벽이 되자 유리는 은밀히 미영을 찾았다. 그녀는 오늘 있었던 이야기에 대해 물었다.

“오늘 수확이 좀 있었어?”

“응, 있었어.”

“정말?”

별로 기대하지 않았던 유리는 수확이 있었다는 이야기에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하루만에 윤아에게서 무언가 얻어내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거듭되는 시련으로 인해 독이 바짝 오른 윤아는 그녀조차 장담하기 힘들 정도로 철벽을 두르고 있었다.

“응, 윤아가 의심을 많이 했지만 계속 조르니까 간략하게 이야기를 해주더라고. 그 결과 윤아가 어떤 방법으로 창현이랑 접점을 늘렸는지 알 수 있게 되었어.”

“어떤 건데?”

유리의 얼굴에 기대감이 가득했다. 시어머니의 버프를 받고 있는 그녀는 윤아의 비법만 획득한다면 게임은 끝난 것이라 생각했다. 모든 배경을 만들어놓은 그녀에게 딱 하나 부족한 것이 바로 창현과의 접점이었다.

“응, 바로 치밀한 계획이래.”

“…뭐?”

“치밀한 계획이라고.”

“거짓말 하지 마, 황미영. 다른 사람도 아니고 윤아가 계획을 통해 창현이랑 접점을 늘렸다고? 내가 그걸 믿을 것 같아?”

싸늘한 표정으로 밀어붙이는 유리였지만 미영의 표정에는 한 점 변화가 없었다. 그녀는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두 눈을 직시하며 말했다.

“그래서 나도 처음에는 믿지 않았어. 그런데 윤아가 뭐라고 하는지 알아?”

“뭐라는데?”

“계획 하나를 세우는데 삼 일이 걸렸데.”

“뭐? 삼 일?”

냉담한 표정을 하던 유리의 얼굴에 놀라움이 서렸다. 서서히 넘어오기 시작하자 미영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나도 처음에는 놀랐어. 그런데 윤아는 창현이랑 접점을 늘리기 위해 삼 일 동안 시간을 투자하면서 대화 패턴 같은 것을 연구했다고 하더라고. 그러면서 대화를 이어나가고 자연스럽게 다음에 만날 기회를 만들어나갔다고 했어.”

“하지만 윤아가 함께 한 건 일적인 거잖아.”

“그러니까 놀라운 거지. 윤아는 그 속에서 일에 관련된 복선이라는 걸 넣어놓았대. 그래서 창현이가 먼저 말을 꺼내게끔 해서 자연스럽게 일을 만들었다는데? 이번 테일러 스위프트의 뮤직비디오도 그렇고.”

“…….”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언제든지 이용할 수 있는 봉이었던 윤아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게 되자 충격을 받은 유리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윤아에게 그런 면이 있었다니.”

“놀라는 그 마음 이해해.”

“삼 일이라는 시간 동안 쏟아 부을 정도라면 보통이 아니네. 그 정도 열정이면 그럴 수도 있겠어.”

“그렇지. 후우, 그렇게 하라고 해도 솔직히 자신이 없어.”

두 소녀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곰곰이 생각에 잠겨있던 유리는 무언가 결정을 내린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말도 확실히 일리가 있어. 화술은 우리도 배우고 있는 거니깐. 그걸 토대로 치밀하게 계획을 세운다면 가능성이 있는 것 같아.”

“설마 해보려고?”

“당연한 거 아냐? 상대방의 좋은 점을 흡수해야 앞서나갈 발판을 마련할 수 있는 법이야. 그러는 넌 못하겠다는 이야기야?”

“해보려고 하는데 솔직히 자신이 없어, 힝.”

“받아들이고 어떻게 소화시키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 좋은 이야기 잘 들었어.”

유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망설임 없이 몸을 돌리려는 그녀를 보며 미영이 다급한 어조로 붙잡아 세웠다.

“자, 잠깐! 가려고?”

“다 들었으니 가야겠지? 계획을 세우려면 시간이 빠듯하다고.”

“정말 그 방법을 할 거야?”

“당연하지. 이 지긋지긋한 대치 상황을 종결시킬 수 있는 방법인데. 아주 치밀하게 계획을 짜고 신중하게 임해야겠어. 기회를 잡게 되면 창현이는 나에게 넘어오겠지? 후후후.”

만족감에 찬 미소를 짓던 유리는 불안한 표정을 짓는 미영을 보더니 느긋함이 깃든 어조로 말했다.

“뒤처지기 싫으면 너도 하는 게 좋을 거야. 못하면 뭐 나야 좋고. 알아서 잘해봐.”

못할 게 확실하다는 식의 확신이 담긴 어조로 말한 유리는 손을 흔들어 보이며 방을 나갔다.

쾅.

방문이 닫히자 미영의 표정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좌불안석 불안함을 감추지 못하더니 어느새 그녀의 입가에는 진한 미소가 맺혀 있었다.

“속였어.”

모사재인 성사재천(謀事在人 成事在天)이라. 일을 꾸미는 것은 사람이지만 그 일이 이루어지는 것은 하늘에 달려있는 법이다. 미영의 고심 끝에 나온 그럴 듯한 말은 시어머니를 배경으로 두어 자신만만한 유리를 속이는데 성공했다.

새로운 판도를 만들어낼 수 있는 신의 한 수가 작렬했다.


“헤헤.”

미영은 기분이 무척 좋아 입가에서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전날 눈부신 계략을 발휘하여 가장 든든한 동료이자 난적이기도 한 유리를 낚는데 성공했고 윤아에게서 자신에게 부족했던 점을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만으로 그녀가 기뻐하는 것은 아니었다. 정말 기뻐하는 이유는 우연찮게 얻어걸린 지금 상황 때문이었다.

“언니가 없었으면 나 혼자 만날 수 있었을 텐데.”

“어쩔 수 없잖아. 네가 너무 앞서 나가려 하니 우리가 감시하는 수밖에. 그래도 내가 되어서 다행이다.”

“나한테는 전혀 다행 아니거든요?”

“알아, 나한테 다행이라는 거지. 헤헤.”

“씨잉.”

미간을 찌푸리며 작금의 상황에 한탄하는 윤아였다. 두 사람은 현재 회사 내에 마련되어 있는 회의실에 있었다. 이곳에 온 이유는 잠시 시간을 보내기 위한 것이었는데 잠시 후 호출이 떨어지자 자리에서 일어난 두 사람은 곧바로 목적지인 회장실로 향했다.

그곳에서 두 사람의 표정이 상반되었던 원흉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랜만이에요, 누나들.”

자리에서 일어난 창현이 인사를 건네자 미영이 먼저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하였다.

“응, 창현아 안녕. 언제 귀국 했어?”

“얼마 안 됐어요. 하하.”

“그렇구나. 나는 무척 오랜만이지만 윤아는 별로 오랜만이 아닌 것 같은데?”

“흥! 충분히 오랜만이거든요.”

은연중 자신을 몰아내려는 미영의 움직임을 눈치 챈 윤아가 톡 쏘아붙였다. 은근한 어조로 말하던 미영은 그 반응에 그만 숨이 턱 막히고 말았다.

‘윤아의 눈치가 상당히 빨라졌어.’

예전 같으면 자신이 한 말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당황하며 지리멸렬 했을 텐데 지금 보이는 그녀의 반응은 사뭇 달랐다.

“창현아 오랜만이야.”

“그러네요, 하하.”

묘한 뉘앙스가 담긴 윤아의 말에 창현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담담하려고 했지만 아무래도 두 차례 스캔들이 나다 보니 쉽게 대하기가 힘들었다.

분위기가 기이하게 흘러가는 양상을 보이자 상황을 중재한 것은 지켜보고 있던 수만이었다.

“모일 사람이 다 모였군. 근데 파니는 무슨 일로?”

“헤헤, 구경 왔어요. 저는 빠져야 하나요?”

“음, 굳이 그럴 필요는 없겠지. 괜찮겠지?”

“예, 괜찮습니다.”

별 거 없다는 듯 허락하자 윤아는 괜히 기분이 나빠 미간에 골이 파였다. 그러면서 옆을 바라보자 미영은 예의 ‘헤헤’ 하는 웃음을 지으며 만만해보이는 인상을 하고 있었다.

‘저 모습에 속으면 안 된다고!’

세상 사람들은 미영의 모습에 속고 있었다. 겉보기에는 얼빵했지만 그녀의 속에는 사특한 능구렁이가 몇 마리나 숨어있는지 감히 상상하기 힘들 지경이었다. 진실을 폭로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꾹 억눌렀다. 보기 싫어도 지금 그녀에게 있어서는 단 하나 남은 구명줄이었다.

“일단 AA엔터테인먼트의 입장에 대해서 들었네. 우리 측에서 먼저 수습해주길 원한다고?”

“예, 아무래도 남자 측인 제 쪽에서 먼저 기사를 내면 상황이 악화될 것 같다고 하셔서요.”

“음, 일단 표면적으로 아니라는 식의 뉘앙스를 풍겨놓은 상황이지. 그쪽의 생각이 그렇다면 보조를 맞출 수 있지만 좀 미진한 감이 없지 않아 있는데.”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주제는 며칠 전 일어난 스캔들 때문이었다. 올해 들어서만 두 번이나 일어난 것이기에 SM엔터테인먼트나 AA엔터테인먼트나 모두 신중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흐지부지 끝내는 게 좋다는 거죠. 곧 있으면 더 큰 게 터질 테니까요.”

“더 큰 거라. 그렇군.”

수긍한 수만이 묘한 눈으로 윤아를 바라보자,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차린 그녀는 얼굴을 붉혔다. 더 큰 것이라면 테일러 스위프트의 뮤직비디오 풀 버전 공개를 의미했고, 그곳에서 벌어진 자신의 사적인 욕망(?)이 가득한 동영상이 세상에 뿌려진다는 뜻이었다.

“그 부분에 대해서 저희 쪽에서 대응하면 더 나빠질 것 같다는 게 최종 결정입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았네. 그렇다면 우리가 힘을 쓰는 수밖에 없군.”

“예, 큰 힘이 되어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죄송하기는. 어찌 보면 우리 쪽에서 큰 신세를 진 건데. 괜히 곤혹스러웠다면 이쪽에서 먼저 사과를 하고 싶은데.”

“사과라뇨, 제 입장에서는 크게 손해보는 게 없었는데요.”

“큰 손해가 없었다라, 하기야 오히려 더 좋았을 수도 있겠군.”

“하하하.”

농이 섞인 말에 창현은 어색하게 웃음을 흘렸다. 윤아 또한 그의 웃음에 자기도 모르게 그때 그 장면을 떠올리며 입가에 히죽 미소를 지었다.

상황을 모르는 미영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그녀의 머릿속은 빠르게 회전하고 있었다.

‘뭔지 모르지만 일단 큰 건수 하나를 건질 수 있을 것 같아.’

하지만 이곳에서 자신의 입장은 어디까지나 끼어든 것이기에 조용히 이야기만 들으며 하나씩 퍼즐을 맞춰나가는 그녀였다. 그 사이 수만과 창현의 이야기는 다른 주제로 넘어가 있었다.

“그 부분은 그렇게 해결하기로 하고 그 다음은 피처링 때문인데.”

“예, 안 그래도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왔습니다. 뭐니뭐니해도 일단 도움을 받은 게 있으니 그 부분에 대해서 확실하는 게 좋으니까요.”

“내 입장에서는 이야기하기가 쉽지 않았거든. 이래나 저래나 도움을 받을 수 있고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낸 거지만 관행이라는 게 있으니.”

“무슨 말씀인지 이해해요. 그래서 그 부분에 대해서 서류를 만들어 왔습니다.”

올해 중순, 혹은 중하순에 발매될 창현의 5집 앨범 수록곡 중 유리의 내레이션이 담긴 곡에 관련된 계약이었다. 그녀에게 큰 도움을 받아 곡을 완성했지만 사업적인 면에서는 아직 손을 보아야 할 점이 있었다.

서류를 받아들고 빠른 속도로 읽어 내린 수만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도면 차고도 넘치는군. 정말 이렇게 할 생각인가?”

“전문적인 도움은 아니지만 그것도 곡의 완성에 일부분 도움을 받은 거니까요. 공동 작업이라기에는 뭐하지만 일부 참여 정도는 맞는 말이죠.”

“음, 그렇게 해주면 좋지. 마음에 드네. 유리도 마음에 들어할 게야.”

“그렇다면 저도 다행이고요.”

서류에 적혀 있는 내용은 현의 5집 앨범 수록 예정인 <괴리>라는 곡 작업에 유리가 참여했다는 이름의 개재였다. 창현의 말마따나 전문적인 도움이 더해진 것은 아니지만 그녀의 조언으로 더 좋은 곡을 완성할 수 있었기에 페이 부분보다는 이름을 올려놓는 부분으로 합의를 보고자 하였다.

이것은 이후 유리의 경력 사항에 큰 도움이 될 것임이 분명했기에 수만은 흔쾌히 수락했다. 한 분야보다 다양한 분야에 종사해야 하는 연예인의 특성상 현의 앨범에 일부 참여했다는 유리의 경력은 향후 엄청난 무기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윤아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유리 언니가 무슨 일을 한 건가요?”

“아, 말을 안 했었나? 이번에 유리가 창현이의 곡에 일부 도움을 주었다.”

그, 그게 정말이에요?”

“그래, 덕분에 아주 괴물같은 곡이 탄생했지. 잘 몰랐는데 유리가 다른 분야에 재능을 갖고 있는 듯 하더구나.”

“…….”

소속 연예인의 또 다른 발전 가능성을 발견한 수만은 기분 좋게 말했지만 듣는 윤아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언제 창현을 만나서 곡에 도움을 줬는지 그녀로서는 감히 짐작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건 무척 위험했다. 자신이 모르는 음지에서 이러한 접점이 횡행한다면 향후 자신의 연애전선에 큰 먹구름이 낄 것임이 분명했다.

‘역시 유리 언니는…….’

진하게 빛나는 윤아의 눈.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미영의 눈에도 한순간 비슷한 빛이 감돌았다가 사라졌다.

“이 정도면 충분히 만족스럽군. 일은 다 해결된 듯하니 같이 밥이나 먹으러 가지 않겠나?”

“밥이요? 저야 좋지요.”

“하하, 그럼 준비하도록 하지. 너희들도 같이 먹도록 하자꾸나.”

“네!”

자리를 만들어주는 수만의 바람직한 행동에 미영과 윤아가 입을 맞춰 합창했다.


네 사람이 향한 곳은 한정식 집이었다. 자연스럽게 방안으로 들어가던 윤아는 미영이 자신의 옆이 아닌 창현의 옆에 앉자 눈을 크게 떴다.

“어, 언니 지금 그게 무슨…….”

“왜? 내가 옆에 앉으면 창현이가 삼촌이랑 이야기하기 힘들 것 같아서 여기 앉은 건데, 뭐가 이상해?”

“이익!”

천연덕스러운 그녀의 모습은 창현의 눈에 극히 자연스럽게 보였지만 윤아의 눈에는 양의 탈을 쓴 늑대가 군침 흘리며 입맛을 다시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때로는 대범한 게 좋은 걸?’

윤아가 말했던 것을 실행으로 옮긴 미영은 톡톡히 드러나는 효과에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어제 같으면 신중히 생각에 옮기느라 지금 같은 상황을 만들어내지 못했지만 계산보다 행동으로 먼저 옮기니 수만의 등장에도 떡하니 창현의 옆을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녀로서는 제법 만족스러운 성과였다.

‘아무래 노려봐도 내 상대가 안 돼.’

표독한 윤아의 눈빛을 대수롭지 않게 흘려 넘기며 미영은 득의만만한 웃음만 흘릴 뿐이었다. 그 사이 수만과 창현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현이 소녀시대랑 친하게 된 건 정말 다행이야.”

“오히려 제가 영광이죠.”

“그렇게 생각해주면 더할 나위 없이 영광이고.”

“서로의 존재가 영광이게 하면 되죠. 저희가 더 노력하면 되고요! 그렇지?”

활기찬 윤아의 말에 창현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더 좋죠. 유리 누나의 도움 같은 경우도 예상치 못하다가 받은 거라서, 덕분에 아주 큰 도움이 되었어요, 하하!”

“…….”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아니건만 유리의 도움이 언급되자 윤아의 눈이 매서워졌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리고 은근한 목소리로 자세한 연유를 물었다.

“유리 언니한테는 언제 도움을 받은 거야?”

“귀국한 날에요. 제가 녹음실에 와서 잠시 커피숍에 갔는데 거기서 마주쳤거든요. 마침 영감이 떠올라서 곡을 만들었는데 만나게 되어서 한 곡 들어달라고 했다가 의외의 조언을 듣게 되었죠.”

“그렇구나.”

“네, 운이 좋았어요. 만들어놓고 2% 부족한 느낌에 이래저래 고민하고 있었는데 도움을 받게 되었으니까요.”

“유리가 대단하네! 창현이한테 도움을 줄 정도면.”

열폭 기미를 보이는 윤아를 진정시키며 미영이 말했다. 그러자 창현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 감성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조언을 해준 느낌이었어요. 대단했죠.”

“와아, 대단하네.”

“대단한 거죠. 순간 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낱낱이 읽힌 느낌이었으니까요.”

감탄 섞인 말이었지만 미영과 윤아에게는 결코 좋지 못한 말이었다. 암중으로 물밑작업을 하던 유리의 작업이 점점 가속도를 붙이고 있다는 뜻이었으니.

‘역시 유리 언니가 문제야.’

윤아의 머릿속에서 갈등이 생겨날 때, 미영은 정성스럽게 쌈밥을 만들더니 창현에게 내민다.

“에?”

“앨범 성공하길 바라는 의미에서 주는 선물!”

“아, 감사해요.”

인사를 하며 쌈을 받아들려던 창현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미영이 내밀었던 손을 다시 회수했던 것이다. 무슨 의미인지 몰라 바라보니 그녀는 싱글벙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 내가 먹여줄게, 아! 해봐.”

“에?”

“언니!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뭐하냐긴. 앨범 성공을 위한 기념 쌈밥인 걸. 어제 누가 그랬잖아. 너무 생각이 많다고. 안 그래?”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자신이 말했던 것을 곧바로 활용하는 미영의 응용력에 윤아는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후회했다.

“으윽.”

“자, 아! 창현이가 성공해야 우리도 덕을 보지 않겠어?”

“하하, 네. 그럼 쑥스럽지만.”

어색한 미소를 지은 창현이 입을 벌리자 미영이 그 틈으로 쌈을 쏘옥 넣어준다. 그리고 반짝이는 눈으로 창현을 바라본다.

“어때?”

“음, 장난쳤을 줄 알고 긴장했는데 맛있네요. 쌈 잘 싸시네요?”

“응! 애들이 워낙 장난을 많이 쳐서 나 혼자 해먹을 수밖에 없었거든. 특히 윤아가 줬던 고추 마늘 가득 쌈은 최악이었어…….”

“이런.”

축 늘어진 미영을 보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은 창현이 윤아를 향해 책망의 눈빛을 보내자 졸지에 대역죄인이 되어버린 윤아는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피해자의 탈을 쓴 가해자 미영의 간악함에 치가 떨렸다.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것도 있는 법. 이번에는 창현이 보답이라면서 쌈을 싸서 미영에게 먹여주었다. 그 모습이 다정한 오누이 같아 지켜보던 수만은 즐거운 미소를 지으며 윤아를 힐끗 보았다.

‘질투하는 것 같은데 미영이가 꽤나 걱정하겠군.’

그는 아직 소녀시대 멤버들이 모두 창현을 좋아하는 걸 모르고 있다. 다만 윤아는 좋아하고 있는 걸 알고 있었기에 다정하고 주거니 받거니 하는 미영의 모습을 보면서 윤아에게 된통 당할 것 같아 걱정하는 마음이 살짝 들었다.

수년간 그녀를 보아온 그조차도 미영의 실체를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윤아가 활활 타오르는 눈으로 미영을 바라보며 속으로 이를 갈고 있다는 점이었다.

‘유리 언니랑 미영 언니. 내 앞길을 가로막는 가장 큰 암초들. 어떻게든 방법을 찾지 않으면…….’

그녀의 눈에는 여전히 오순도순 이야기를 주고 받는 두 사람이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히힛, 이거 제법 괜찮은 걸?”

윤아에게 알려준 수법을 적용하여 창현과 오순도순 시간을 보낸 미영은 대단히 만족한 표정이다. 그동안 자신에게 무엇이 부족했는가를 적나라하게 알려주는 것 같아 그녀는 무척 뿌듯했다.

“흥!”

옆에 앉은 윤아에게서는 찬바람이 쌩쌩 불고 있었다.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 상황에서 창현을 완전히 빼앗겼으니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질투심을 풀풀 풍기는 윤아를 보면서 미영은 슬쩍 입 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 모습에 윤아의 눈빛이 더욱 흉흉하게 바뀌는 건 당연한 현상이었다.

“무섭네.”

“이대로 있지 않을 거예요, 언니.”

“흐흥, 그런다고 내가 겁낼 것 같아? 널 도와주는 유일한 아군은 나라고?”

“이익! 지금 언니가 아군이라고 했어요? 지금 이게 아군이 할 생각이라 생각해요?”

“내가 아군으로서 협력하는 건 어디까지나 다른 애들의 견제에서 그런 거지 사랑 문제까지 아군이 되어주겠다고 한 적은 없잖아. 내가 뭘 잘못 알고 있는 거야?”

“으윽.”

생글생글 웃음을 지은 채로 비수를 꽂아대는 그녀의 모습은 진정 무서웠다. 신음을 흘리며 주춤한 윤아는 입술을 질겅질겅 씹다가 더 할 말을 찾지 못한 듯 고개를 푹 떨어뜨렸다.

그 모습에 승리감을 느낀 미영은 희희낙락이었다. 개선장군 마냥 당당하게 숙소에 들어오던 그녀는 자신을 맞이하는 유리를 보며 눈이 날카로워졌다.

윤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방안으로 들어왔던 유리로서는 어리둥절할 따름이었다.

“갑자기 왜 그래?”

“행동력 좋던데.”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왜 모른 척이야. 창현이가 귀국한 건 또 어떻게 알고 찾아가서 도움을 줬대?”

“으응?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았어.”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두 눈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 모습이 마치 “넌 나한테 안 돼.”라고 하는 것 같아 심기가 불편해진 미영이었지만 굳이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오늘 윤아 따라갔다가 알게 됐어. 창현이가 직접 와서 계약하던 걸?”

“창현이가 직접? 음, 아쉽네. 나도 같이 갈 걸.”

“스케줄도 있으면 뭘 같이 가. 그나저나 언제 만난 거야?”

“내가 말해줄 의무는 없잖아. 안 그래?”

“흥! 내가 윤아에게서 정보를 전달해줬는데 그렇게 나오기야?”

거짓된 정보를 흘렸음에도 미영의 태도는 당당했다. 그 모습에 멈칫한 유리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좋겠다, 칫. 나도 그 자리에 있었으면 도움을 줄 수도 있었을 텐데.”

“후후,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만 오는 법. 띨파니에게 올 기회 따위는 없지.”

“다음에 기회를 잡는 건 나거든? 쉽지 않을 거야!”

“얼마든지! 윤아의 신무기까지 장착된 나를 막을 자가 누가 있을까.”

당당한 그녀의 태도에 미영은 멈칫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럴수록 유리는 더욱 의기양양하게 변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입매를 비튼 미영이었지만 유리의 기고만장한 모습을 보면서 계산을 거듭하고 있었다.

‘빈틈이 없는 것 같지만 내부의 방심이야 말로 최고의 적. 유리 너는 너 스스로의 자만심으로 무너지게 될 거야.’

그녀의 눈에는 서서히 침몰하고 있는 유리가 보였다. 그녀가 신중하고 또 신중하는 사이 자신은 행동으로 옮겨 단숨에 고지를 점령할 것이다.

“며칠 후에 회사에서 연락이 올 거야.”

“계약 관련 문제 때문에?”

“응, 오늘 회사간에 계약이 마무리 되었으니 회사랑 너랑 계약을 할 것 같더라고.”

“흐응, 이제 나도 당당한 제작자 반열에 들어가는 건가. 미영이 너도 잘 보여. 그러면 내가 나중에 네 솔로곡 정도는 만들어줄 수 있으니까.”

“흥! 작곡도 못하면서 무슨.”

“칫! 여기에서 그냥 인정하고 띄워주면 덧나냐?”

티격태격하며 말을 주고받는 두 사람이었다. 창현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것과 자신의 경력이 새로 추가된다는 사실에 유리는 들뜬 미소를 지었고 미영은 그녀를 침몰 시킬 계획을 생각하며 미소 지었다.

같은 미소 속 서로 다른 생각을 품고 있는 두 여인이었다.


“이대로는 안 돼!”

윤아는 짙은 위기감을 느꼈다.

오늘 창현을 보면서 그녀는 가장 앞서 있던 자신의 위치가 망망대해 속 조각배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한 치의 실수가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농후했던 것이다.

월등히 앞서 있다고 생각하던 상황은 유리의 은밀한 움직임으로 인해 산산이 깨져버렸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녀와 비슷하게 은밀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소녀들이 몇일지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이쯤에서 승부를 걸어야 돼. 특히 미영 언니랑 유리 언니. 가만히 놔두면 나한테 있어서 두고두고 골칫거리가 될 거야.”

지략을 앞세워 능수능란하게 상대를 휘두르는 두 사람은 윤아에게 있어 쥐약과도 같은 존재였다. 두 여인을 제거(?)하기 위해 그녀는 끙끙거리며 고심을 거듭했지만 상극인 캐릭터를 제거할 방법은 요원하기만 하였다.

다른 멤버(외세)의 도움을 빌린다면 충분한 가능성이 있지만 현재 자신은 여덟 명의 동맹군에 의해 고립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칫! 잘난 게 죄야.”

혀를 차며 안타까움을 표한 윤아는 자신이 발휘할 수 있는 패를 떠올려보았지만 두 사람을 곤경에 몰아넣을 한 방이 부족하다는 걸 느꼈다.

곧 있으면 테일러 스위프트의 뮤직비디오 풀 버전이 공개된다. 그 순간이 다가오게 되면 더 큰 충격이 숙소를 휘감을 것은 물론이고 자신은 그 속에서 여덟 명의 악마에게 집중 포화를 맞을 것이다.

은밀히 동맹을 맺은 미영조차도 비즈니스적인 관계일 뿐 완전히 믿을 수 없는 존재였다.

“생각해봐, 임윤아. 방법을 찾지 못하면 넌 이대로 무너질 수밖에 없어.”

머리를 부여잡으며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는 그녀.

생각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지만 미영과 유리는 그녀가 터치할 수 없는 영역에 도달한 모사꾼들이었다.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진땀이 흘러내릴 정도로 강적 중 강적.

하지만 현실을 인정하고 이대로 물러서는 것이 전부일까.

그것은 아니었다. 여태껏 수없이 맞부딪치고 깨져온 그녀는 그 이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혼자 죽을 수는 없어. 뮤직비디오가 공개되면 어차피 지금보다 더 강하게 제재가 들어올 거야. 그렇다면…….”

윤아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아이 참, 왜 따라오는 거야.”

유리의 얼굴에는 짜증스러운 기색이 서려 있었다. 자신의 일에 방해꾼 두 사람이 들러붙어 함께 오고 있었던 것이다.

미영의 말처럼 다음 날, 유리에게 회사에 들르라는 연락이 왔다. 창현의 5집 앨범 수록 예정인 <괴리>라는 곡의 계약이 들어왔으니 읽어보고 결정을 내리라는 것이었다.

예상했던 바이기에 유리는 흔쾌히 수락하고 회사로 향했지만 미영과 윤아가 잽싸게 달라붙어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창현이 오면 단 둘이 어떻게 할까 생각하던 그녀의 상상에 재를 뿌리는 행동이었다.

“우리가 같이 가니깐 든든하고 좋잖아.”

“맞아요, 언니! 윤율은 언제나 하나라고요.”

“내가 너희들의 검은 속내를 모를 줄 알고? 그리고 띨파니가 언제부터 든든했다고 그래? 너 하나도 안 든든하거든.”

“나 든든해!”

“전혀 아니야.”

“언니! 저는요?”

“너도 그닥.”

티격태격 말을 주고받으며 회사 안으로 들어선 그녀들은 곧바로 기획실장실로 향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지만 기대했던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칫! 아쉽네.”

어제 찾아와 계약건을 마무리 지은 창현이 오늘 또 왔을 리 없었다. 하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것이 한 가닥 기대를 품기 마련이기에 혹시나 하는 마음을 가졌건만 무참히도 짓밟히고 말았다.

“그러게, 아쉽네. 헤헤.”

“맞아요, 언니.”


안타까움을 표현하고 있지만 그와 별개로 두 여인의 표정은 무척 밝았다. 유리의 얼굴에 분노가 서리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이 가증스러운 것들을 확 그냥…….”

“조용히 하고, 일단 요점만 이야기를 해줄 테니 들어라.”

“네.”

기획 실장의 제지에 분노를 접어둔 유리는 AA엔터테인먼트 측의 제안을 들어보았다. 그리고 다 듣고 난 뒤 고민할 것 없이 결정했다.

“저한테 너무 좋은 조건인데요? 바로 계약할게요.”

금전적인 부분에서 그녀가 큰 이득을 얻을 수 없지만 현의 앨범에 일부 참여했다는 타이틀만으로도 향후 엄청난 경력이 될 것임이 분명했다.

“잘 생각했다. 여기 계약서를 한 번 읽어보고 결정을 내려. 읽어보는 것과 읽어보지 않은 것은 아무래도 큰 차이가 존재하니까.”

“네!”

힘차게 대답한 유리는 꼼꼼하게 계약서를 읽어보았다. 결정은 방금 전과 다르지 않았다. 싸인을 한 뒤 계약서를 나눠갖은 유리는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창현의 5집 앨범이 공개되면 언론에 엄청난 기사를 양산할 것임이 분명하고 그 중에는 자신의 일부 참여가 화제가 될 것임이 분명했다. AA엔터테인먼트에서 말하지 않더라도 SM엔터테인먼트 내에서 자체적으로 소식을 흘릴 테니 화제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다가 운이 좋으면 나도 스캔들이 날 수 있겠지? 그리 되면 접점은 더 가까워져.’

스캔들이 일어나면 더 멀어질 수도 있다 생각하지만 예외의 상황은 어디에나 존재하는 법이다. 스캔들로 인해 자신이 욕을 먹으면 가련한 여인을 연기할 것이고 창현의 성격상 위로를 해줄 것임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승부를 걸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

모든 것은 철저하게 그녀의 통제 하에 벌어지는 것이다. 미영에게 들었던 방법을 통해 빈틈없이 세워지는 계획을 바탕으로 접근하면 지지부진하게 이어지는 애정전선을 단숨에 정리하는 것이 가능하다.

“좋았어.”

“무슨 생각을 그렇게 오래 해?”

“응? 그게 그러니까… 아! 아무것도 아냐.”

자기도 모르게 머릿속에 들어있던 생각을 털어놓을 뻔하자 유리는 황급히 말을 아꼈다. 자신의 사각을 교묘하게 비집고 들어온 미영에게 눈째림을 잊지 않았다.

“칫! 아깝다.”

“그 정도에 당할 내가 아니거든? 날 속이려면 좀 더 수련을 쌓고 와.”

“두고 봐, 언젠가는 꼭 당하게 하고 말 테니.”

“흥! 절대 안 당해.”

결심을 굳히며 자신의 생각을 닫는 그녀를 보면서 미영은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 것을 진즉에 눈치 채고 있었지만 건드리지 않은 것은 충분한 시간을 주기 위함이고 적당한 선에서 건드린 것은 그녀 스스로 생각해내고 있는 방법에 대해 확고한 생각을 심어주기 위함이었다.

‘이제 유리는 더 신중하게 생각하고 치밀한 계획을 짜려고 하겠지? 모든 건 계획대로야.’

평상시와 다름없지만 그 이면에는 치밀한 계산이 오고가는 두 소녀였다. 그 사이에 끼여 있는 가련한 사슴 윤아는 영문 모를 표정을 지었지만 두 눈은 반짝이고 있었다.

“언니들, 계약도 끝났으니 점심 먹어요.”

“어라?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네.”

“네! 점심 먹고 나면 시간도 좀 남으니까 뒹굴뒹굴하다가 연습에 합류해요.”

오후에 있는 안무 연습을 떠올리며 제안하자 미영과 유리는 흔쾌히 수락했다. 어깨를 나란히 한 그녀들은 점심을 해결하고 휴게실로 향했다. 미영과 유리가 음료수를 뽑으러 나가자 윤아는 핸드폰을 꺼내들고 눈치를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동영상을 재생했다. 아직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테일러 스위프트의 뮤직비디오였다.

“히히히.”

자신과 창현이 벌이는 로맨틱한 장면에 윤아는 연신 웃음을 흘렸다. 자신이 조금만 더 노력하면 현실에서도 저렇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자 미소는 지워질 생각을 안 했다.

뮤직비디오는 점점 클라이막스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고, 마침내 절정에 달했을 때 자신과 창현의 키스신이 나온다.

자기도 모르게 그때 그 순간을 떠올리며 눈을 지그시 감은 윤아가 입술을 쭉 내밀었다. 그러자 손에 쥐어져 있던 핸드폰이 그녀의 손을 빠져나왔다.

“……!”

“윤아야, 이게 뭐야?”

그녀의 앞에는 생글생글 미소를 짓고 있는 미영이 눈에 들어왔다. 그 속에 살벌한 살기가 깃든 걸 눈치 챈 윤아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 어떻게? 들어오는 기척도 못 느꼈는데…….”

“네가 너무 몰입하느라 느끼지 못한 것뿐이야. 그리고 이건 뭐야?”

“그, 그건! 안 돼!”

당황한 그녀는 황급히 미영의 손에 들린 핸드폰을 빼앗으려 했지만 옆에 있는 유리에게 건네지며 그녀의 접근은 사전에 차단됐다. 핸드폰 동영상 파일을 본 유리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

“이거 미공개 뮤직비디오 같은데?”

“미공개라면?”

“쟤가 창현이랑 같이 뮤직비디오 촬영했잖아. 아직 공개되지 않은 풀 버전을 먼저 갖고 있다는 거지.”

“아항! 그렇구나.”

“궁금한데? 저 태도를 보니까 뭔가 있는 게 분명해. 한 번 봐야겠어.”

윤아의 태도에서 짙은 호기심을 느낀 두 소녀는 곧바로 동영상을 재생했다. 그리고 4분여에 해당하는 내용을 모두 보는 순간 두 소녀의 표정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히익.”

북풍한설보다 차가운 냉기가 전신에 스며들자 기겁한 윤아는 진저리를 치며 아등바등 애를 썼지만 어느새 좌우를 점령한 미영과 유리는 싸늘한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는 중이었다.

“이게 뭐야?”

낮게 깔린 유리의 목소리에 몸을 움찔 떨었지만 애써 태연을 가장했다.

“뮤직비디오에요.”

“무슨 뮤직비디오에 이렇게 사심이 가득해?”

“아, 안 가득하거든요! 어디까지나 테일러 스위프트의 기획일 뿐이라고요.”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애를 쓰는 그녀였지만 참혹한 현장(?)을 똑똑히 목격한 만큼 쉽게 넘어갈 생각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시시각각 싸늘한 눈빛이 조여오자 윤아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자 조용히 침묵하고 있던 미영이 말했다.

“내가 보기에는 사심이 들어간 게 확실해.”

“그렇다면 어쩔 건데요?”

“뭐어?”

“찾아온 기회고 사심을 채울 수 있었어요. 그게 뭐 어때서요? 저는 잘못된 게 아니에요. 어차피 뮤직비디오 티저 영상을 보면서 지금 같은 상황을 예상한거 아니었어요?”

그 말은 사실이었지만 생각하는 것과 눈으로 보는 것은 엄연히 다른 법이었다. 바락바락 소리치는 그녀의 행동은 가뜩이나 기분이 상해있는 두 소녀에게 기름을 들이붓는 것과 같았다.

“예상은 했지만 기분은 안 좋네.”

“응, 아무래도 소생하게 놔두면 이런 일이 계속 벌어질 것 같아.”

모종의 합의. 미영과 유리는 짧은 순간 여러 차례 눈빛을 주고받았고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완벽하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동맹은 파기야.”

“에?”

“파기라고. 윤아 네가 가장 위험해. 회생할 기회를 주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아.”

“뭐예요! 서로 주고받는 것이 있는 동맹이었잖아요. 지금 절 배신하겠다는 거예요?”

“대의를 위해서는 배신도 필요한 법이야. 날 잔인하다고 욕해도 괜찮아.”

“이익! 이 언니가 정말…….”

이를 부득부득 갈았지만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담담한 미영의 눈빛에 몸을 가늘게 떨던 윤아는 이내 고개를 푹 떨구었다. 그리고 처량한 목소리로 말했다.

“알았어요, 포기하면 될 거 아니에요.”

“그게 무슨 말이야?”

“포기한다고요! 창현이.”

“……!”

폭탄선언이었다. 여태껏 이보다 더 암울한 상황에서도 꿋꿋이 살아남아 바퀴벌레 같은 생명력으로 엄청난 신위를 발휘하던 그녀였다. 한데 지금 포기하겠다고 선언하니 머리가 잘 돌아가는 그녀들도 한순간 상황파악이 되지 않을 지경이었다.

“더 이상 언니들이랑 신경전하는 것도 질렸어요. 애초에 상대가 되질 않는데 이제 무슨 수로 버텨요. 여기서 제가 포기하지 않겠다고 하면 절 더 압박하겠죠?”

“…그건 사실이야.”

“봐요, 여덟 명이 전부 절 압박하면 제가 어떻게 하라고요. 보니까 유리 언니는 미영 언니가 절 도와주고 있는 걸 알고 있었나 보네요.”

“맞아, 애들이 주도 했지만 그대로 흘러가면 우리 뜻 하에 놓을 수 없으니 변수가 필요했어.”

“잔인한 언니 같으니. 어쨌든 전 더 이상 지쳤고 기력도 잃었어요. 언니들을 위해서 제 사랑을 포기하도록 할게요.”

“흐음.”

너무나 뜻밖의 상황에 유리는 눈을 가늘게 뜨고 윤아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미영 또한 마찬가지여서 자세한 사실을 캐내려는 듯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침울한 기색을 띤 윤아의 모습은 처량하기 그지없어 거짓이라 보기가 힘들었다.

‘히잉, 이거 너무 못된 것 같은데.’

윤아를 무너뜨릴 절호의 기회였지만 미영은 마음이 약해졌다. 그동안 그녀를 무너뜨리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힘썼지만 막상 결과가 모습을 드러내려고 하자 선뜻 내키지 않았다.

‘마음이 약해졌나 보네. 나도 가슴이 아프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야.’

유리는 그렇게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시키며 윤아에게 말했다.

“지금이라도 포기하는 건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고 생각해.”

“유리야, 그래도…….”

“아니, 할 말은 해야지. 포기하지 않는 이상 전쟁은 계속될 것이고 누군가 승자가 가려지기 전까지 모두 만신창이가 될 거야. 이럴 때는 둔감한 창현이를 한 대 콱 쥐어박고 싶을 정도라니깐.”

“힝, 나도 그건 동감이야.”

“그렇지? 나만 그런 게 아닐 거야. 어쨌든 아쉬운 건 우리니까 당분간 참아야겠지. 어쨌든 난 윤아 네 선택을 존중할 거야. 물론 포기하지 않는다고 번복해도 존중할 거고. 대신 치열한 전쟁만이 남을 뿐이지.”

미영의 호응에 유리는 미소를 지으면서 윤아에게 선택권을 주었다. 서로가 서로를 잘 알기에 은연중 배려를 하면서 한편으로는 누군가 포기하지 않으면 전쟁은 계속해서 이어질 거라는 식의 엄포였다.

“하아.”

양 어깨를 축 늘어뜨린 윤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휴게실을 벗어났다. 느릿하게 걸음을 옮기는 그녀를 보면서 미영이 타박하듯 말했다.

“말이 좀 심한 거 아니야?”

“심하기는. 여태까지 너와 내가 애들에게 했던 걸 생각하면 이 정도가 심하다고 생각해?”

“그건… 힝.”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었어. 윤아가 지금쯤 포기해준다니 강력한 적이 사라지는 셈이니 나쁠 것 같지.”

“…….”

그건 사실이기에 미영은 유리의 말을 부인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침울한 윤아의 모습이 걱정되었기에 두 소녀는 빠른 걸음으로 그녀의 뒤를 쫓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윤아의 모습이 보였고 연습실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문 앞에 멈춰선 두 소녀는 서로 마주보며 말을 나눴다.

“들어가는 게 나을까?”

“위로를 하고 싶은 거 아니었어?”

“하지만 지금 우리 위로가 먹힐 리 없잖아. 너무 심하게 말한 것 같아. 이잉.”

“먹히지 않더라도 일단 시도는 해봐야지.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알았어.”

유리의 말에 납득한 미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연습실 문을 열었다. 그러자 안에는 양 무릎을 세우고 팔로 감싸 몸을 웅크리고 있는 윤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피도 눈물도 없는 전쟁을 벌여온 두 소녀였지만 그 모습을 보고 마음이 짠하게 변하는 걸 느꼈다.

“윤아야, 괜찮아?”

“위로가 좀 필요한 것 같은데?”

미영과 유리의 얼굴에 걱정스러운 표정이 생겨나며 윤아에게 다가갔다. 어떤 말이든 그녀에게 곱지 않게 들릴 것임이 분명했지만 조금이라도 회복할 수 있도록 위로의 몇마디를 건네주고 싶었다.

그때였다.

덜컹! 하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연습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방금 전 두 소녀가 문을 활짝 열어놓았기에 결코 자연스럽게 닫힐 수 없는 상황이었다.

왠지 모를 한기가 온몸을 휘감는 걸 느끼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녀들의 눈에 들어왔다.

문을 닫은 채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는 연희의 모습을.

싱글벙글 웃고 있는 그녀는 나직이 감탄사를 흘렸다.

“대단하네, 설마 둘을 모두 데리고 올 줄은 몰랐어.”

“그게 무슨…….”

상황이 기이하게 흘러가고 있음을 눈치 챈 유리가 고개를 돌렸다가 표정이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암울한 아우라를 풍기던 윤아가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 입 꼬리를 말아 올린 채 웃고 있었던 것이다.

“너, 너…….”

“매일 속이다가 속아본 느낌이 어때요?”

“그, 그렇다면 방금 전 모든 게 연기?”

“웬만한 떡밥이 아니면 걸릴 언니들이 아니니 이런 방법을 사용할 수밖에요. 덕분에 모든 것이 저와 연희 언니의 계획대로 이루어졌어요. 이런 전개, 나쁘지 않은 걸요? 언니들이 왜 사람들을 농락하는지 알 것 같아.”

순간 불안한 상상이 머릿속에 스쳐지나가는 것을 느낀 유리가 소리쳤다.

“그, 그렇다면 핸드폰을 보여준 것도 계획의 일환이었던 거야?”

“뭐, 뭐? 정말 그게 계획적이었다고?”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언니들은 걸려들지 않았을 테니까요.”

살을 주고 뼈를 취하는 전형적인 방법이었다. 하지만 누구라도 살을 내어주는 건 쉽지 않은 결정이기에 쉽게 사용할 수 없는 방법이기도 하였다. 철저하게 당했다는 걸 깨달은 유리의 미영은 맥이 풀린 표정이었다.

“언니들도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었네요.”

온몸을 휘감는 야릇한 쾌감에 윤아가 미소를 지었다. 평소 미영과 유리가 마음껏 농락하던 어벙한 사슴의 모습이 아니었다. 거듭 당하며 부딪치고 깨지며 칠전팔기를 거듭하던 사슴이 살아남고자 돌연변이로 진화하여 마침내 견고한 먹이사슬을 부숴버렸다.

“절 이렇게 만든 것은 언니들이에요. 조금이라도 아량을 베풀었으면 이런 참사는 벌어지지 않았을 텐데…….”

안타까운 듯 말했지만 두 소녀가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윤아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순순히 당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자신이 살기 위해서는 가족과도 같은 두 소녀의 기를 바짝 꺾어놓을 필요가 있었다.

“연희 언니 부탁드려요.”

그녀의 부름에 성큼 한 걸음 나서는 연희였다. 윤아의 부하 마냥 이리저리 휘둘리는 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미영과 유리를 요리해야 하는 상황은 무척 마음에 들었다.

“자, 그럼 피날레를 장식해볼까.”

퇴로를 차단한 채 서서히 다가오는 연희를 보며 미영과 유리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리기 시작했다.


(다음 화에서 계속)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1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마음을 울리는 음악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마음을 울리는 음악 시즌2 연재가 시작됩니다. +17 15.04.16 8,659 0 -
52 마음을 울리는 음악 시즌2 제15화 +50 15.06.01 7,723 123 11쪽
51 마음을 울리는 음악 시즌2 제14화 +10 15.05.20 3,771 95 8쪽
50 마음을 울리는 음악 시즌2 제13화 +18 15.05.13 3,574 71 10쪽
49 마음을 울리는 음악 시즌2 제12화 +8 15.05.11 3,677 90 10쪽
48 마음을 울리는 음악 시즌2 제11화 +9 15.05.08 3,780 86 10쪽
47 마음을 울리는 음악 시즌2 제10화 +21 15.05.06 3,749 86 10쪽
46 마음을 울리는 음악 시즌2 제9화 +10 15.05.04 3,692 94 10쪽
45 마음을 울리는 음악 시즌2 제8화 +17 15.05.02 4,031 92 10쪽
44 마음을 울리는 음악 시즌2 제7화 +10 15.05.01 4,129 92 10쪽
43 마음을 울리는 음악 시즌2 제6화 +7 15.04.29 3,697 89 10쪽
42 마음을 울리는 음악 시즌2 제5화 +15 15.04.27 3,713 97 9쪽
41 마음을 울리는 음악 시즌2 제4화 +7 15.04.24 3,979 89 10쪽
40 마음을 울리는 음악 시즌2 제3화 +6 15.04.22 4,427 82 10쪽
39 마음을 울리는 음악 시즌2 제2화 +9 15.04.20 4,517 91 11쪽
38 마음을 울리는 음악 시즌2 제1화 +10 15.04.17 7,376 95 10쪽
37 ▲▲▲▲▲시즌2 시작!▲▲▲▲▲ +5 15.04.17 5,425 65 1쪽
36 마음을 울리는 음악 106장-108장 +8 15.04.16 6,414 106 230쪽
» 마음을 울리는 음악 103장-105장 +1 15.04.16 4,244 82 314쪽
34 마음을 울리는 음악 100장-102장 +2 15.04.16 4,413 68 229쪽
33 마음을 울리는 음악 97장-99장 +1 15.04.16 4,390 63 264쪽
32 마음을 울리는 음악 94장-96장 +1 15.04.16 4,379 80 230쪽
31 마음을 울리는 음악 91장-93장 +1 15.04.16 5,126 76 268쪽
30 마음을 울리는 음악 88장-90장 +1 15.04.16 4,929 98 332쪽
29 마음을 울리는 음악 85장-87장 +1 15.04.16 4,712 83 270쪽
28 마음을 울리는 음악 82장-84장 +2 15.04.16 4,914 85 261쪽
27 마음을 울리는 음악 79장-81장 +1 15.04.16 4,580 87 241쪽
26 마음을 울리는 음악 76장-78장 +1 15.04.16 4,753 74 244쪽
25 마음을 울리는 음악 73장-75장 +1 15.04.16 4,939 111 327쪽
24 마음을 울리는 음악 70장-72장 +1 15.04.16 4,755 82 200쪽
23 마음을 울리는 음악 67장-69장 +1 15.04.16 4,742 80 210쪽
22 마음을 울리는 음악 64장-66장 +1 15.04.16 4,956 75 282쪽
21 마음을 울리는 음악 61장-63장 +2 15.04.16 5,259 79 316쪽
20 마음을 울리는 음악 58장-60장 +1 15.04.16 5,251 74 186쪽
19 마음을 울리는 음악 55장-57장 +2 15.04.16 5,596 95 215쪽
18 마음을 울리는 음악 52장-54장 +1 15.04.16 6,511 110 349쪽
17 마음을 울리는 음악 49장-51장 +2 15.04.16 6,422 119 283쪽
16 마음을 울리는 음악 46장-48장 +3 15.04.16 7,158 149 347쪽
15 마음을 울리는 음악 43장-45장 +1 15.04.16 7,122 129 198쪽
14 마음을 울리는 음악 40장-42장 +3 15.04.16 8,909 183 320쪽
13 마음을 울리는 음악 37장-39장 +2 15.04.16 9,615 224 397쪽
12 마음을 울리는 음악 34장-36장 +8 15.04.16 9,524 189 322쪽
11 마음을 울리는 음악 31장-33장 +8 15.04.16 10,355 261 345쪽
10 마음을 울리는 음악 28장-30장 +5 15.04.16 10,659 260 277쪽
9 마음을 울리는 음악 25장-27장 +7 15.04.16 11,040 267 233쪽
8 마음을 울리는 음악 22장-24장 +4 15.04.16 10,924 261 198쪽
7 마음을 울리는 음악 19장-21장 +4 15.04.16 11,492 270 216쪽
6 마음을 울리는 음악 16장-18장 +5 15.04.16 11,544 242 163쪽
5 마음을 울리는 음악 13장-15장 +5 15.04.16 14,536 297 237쪽
4 마음을 울리는 음악 10장-12장 +8 15.04.16 13,738 352 171쪽
3 마음을 울리는 음악 7장-9장 +10 15.04.16 14,554 362 142쪽
2 마음을 울리는 음악 4장-6장 +11 15.04.16 16,842 421 120쪽
1 마음을 울리는 음악 프롤로그-3장 +47 15.04.16 29,905 545 83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