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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번 님의 서재입니다.

마음을 울리는 음악

웹소설 > 작가연재 > 팬픽·패러디, 현대판타지

김현우
작품등록일 :
2015.04.16 13:27
최근연재일 :
2015.06.01 17:02
연재수 :
5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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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96,4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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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4.16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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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68쪽

마음을 울리는 음악 91장-93장

DUMMY

제91장 미국행 티켓




프로젝트 앨범 4-B를 발매한 뒤 여전히 뜨거운 인기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인기에 비해 활동량은 서서히 줄어들고 있었고, AA엔터테인먼트에서는 이번 달 말, 현이 미국으로 출국할 것이라는 것을 발표하면서 다시 한 번 열광의 도가니로 접어들었다.

일 년 전, 현이 미국으로 처음 떠날 때 팬들 사이에서는 말이 많았던 것과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당시에는 아시아 지역에서 절대적인 인기를 지녔지만 미국만큼은 다를 것이라는 것이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서양인이 아닌, 동양인이 미국 시장에서 큰 성과를 보인다는 것은 사람들의 고정 관념으로 생각하기에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물론 현이라면 가능할 것이란 막연한 기대감을 가진 사람들은 있었다.

미국으로 진출한 현은 모두의 걱정을 비웃기라도 하듯, 점점 뚜렷한 성과를 보이기 시작했고, 단 세 장의 싱글 앨범을 통해 정상에 군림하는데 성공한다.

길지 않은 기간이었지만 미국 전역이 현의 신드롬에 빠져들기 시작했고, 아시아에서만 먹히던 동양인 가수는 어느덧 완벽한 월드 스타가 되어 있었다.

그런 현이 모국을 사랑한다는 말과 함께 국내로 돌아온 것이 어언 1년하고도 2개월이다.

사람들은 다시 한 번 그가 세계 정상에 우뚝 서서 대한민국의 우수함을 알려주길 바라고 있었다.

그 바람은 곧 온/오프라인을 가리지 않는 뜨거운 관심으로 이어졌다.

점점 하향곡선을 그리던 앨범이 다시 상향곡선을 그려나가기 시작했고, 인터넷에서는 현의 미국 성공 가능성 여부를 놓고 연일 토론이 오가고 있었다.


“파급력이 생각보다 크네요.”

“괜히 불화설이 나오는 것보다 낫지 않느냐?”

며칠 동안 이어지는 뜨거운 관심에 창현이 감탄 섞인 어조로 중얼거리자, 피식 미소를 지은 석규가 여유로운 태도로 대꾸한다.

그 모습을 본 창현은 앞에 놓인 생강차를 한 모금 마시며 입을 열었다.

“조만간 떠나는 건 맞지만 굳이 이렇게 먼저 털어놓을 이야기는 아니잖아요?”

“모호한 것보다는 뚜렷한 게 더 좋지. 팬들도 구체적으로 어느 시기인지 알고 싶어 했고.”

“그게 아닌 것 같은데. 혹시 저번에 제안이 왔다던 MKMF 때문에 그런 거 아닌가요?”

눈을 가늘게 뜨고 추궁하자, 멈칫한 석규가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것도 있지. 괜히 그쪽하고 어색해지는 걸 가지고 시끄러워지면 네게도 영향이 갈 테니까.”

“불발이 되면서 좋지 않게 헤어졌나 봐요?”

“네 가치를 모르고 있으니 한바탕 혼쭐을 내주었지.”

“가치라, 그런 건 둘째 치고 솔직히 회사간의 압력 같은 건 제가 조금 싫어서요.”

“그럴 수도 있겠군. 어쨌든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한테 맡겨놓아도 좋다.”

처음부터 자신이 모두 처리를 했지만 슬슬 주변 상황을 파악해나가는 창현의 변화를 나쁘지 않게 여기는 석규였다.

“원래 아버지를 믿었는 걸요.”

“그렇다면 기분이 좋지. 하하!”

“아참, 지영이는 어떻게 하시려고요? 이번에 반응이 다시 한 번 나오던데.”

“음!”

지영의 이름이 언급되자 석규는 입을 다물고 조용히 생각에 잠겨들기 시작한다.

엠넷의 최PD와 유쾌하지 않게 헤어졌지만 엠넷 측에서는 AA엔터테인먼트와 척을 지려하지 않았다. 현과 라샤라는 강력한 미끼가 걸려 있었기에 엠넷은 MKMF에 참가하지 못하더라도 친분을 유지하자 하였고, 그 제안으로 내놓은 것이 바로 현의 다큐멘터리 촬영했던 메이킹 필름으로 별도의 프로그램 한편을 만드는 것이었다.

시간에 맞추기 위해 잘라낸 부분과 기존의 다큐멘터리에서 나왔던 부분을 합쳐 새로운 편을 만들자는 엠넷의 기획안을 석규는 받아들였고, 다시 방송을 타게 되자 네티즌들 사이에서 연일 화제가 되었다.

특히 화제가 된 것은 두 부분이었는데, 그 중 하나가 스태프들을 세세하게 챙겨주는 창현의 모습이었다.

타이트하게 이뤄지는 촬영 속에서 직접 도시락을 챙겨주는 모습부터 시작하여 적절하게 휴식 시간을 갖게 해주는 것까지.

방송에서 전혀 드러나지 않았던 창현의 배려가 메이킹 필름에서 드러나게 되자, 네티즌들은 역시 현이라는 말과 함께 열광했다.

일각에서는 조작이 아니냐는 의혹이 있었지만 만들어진 이미지가 워낙 좋다 보니 그런 소수의 의견은 금세 묻히고 말았다.

두 번째로 화제가 된 것은 바로 현의 동생인 지영이었다.

AA엔터테인먼트 사장인 석규가 재혼을 하게 되면서 졸지에 현의 동생이 된 행운의 소녀.

아무도 연습생으로 받지 않고 있는 AA엔터테인먼트 유일 연습생이라는 점에서 많은 안티들이 지영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고는 하였다.

다큐멘터리에서 간략하게 실력이 공개되었지만 그것만으로 부족하다는 평가였다.

하지만 메이킹 필름에서 창현의 트레이닝을 받은 지영의 실력이 대대적으로 공개되었고, 다듬어지지 않았지만 탁월한 감정 전달력과 곡 소화 능력에 현의 팬들은 지영의 실력을 인정하는 수순에 들어갔다.

그러자 언제쯤 데뷔하냐는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흘러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동안 열심히 실력을 갈고 닦은 것이 마침내 빛을 발하는 순간이기도 하였다.

“일단은 좀 더 지켜보기로 하자. 아직 구체적인 계획을 잡은 것이 없으니.”

“네, 그럼 지영이한테 미리 이야기를 해두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괜히 잘못해서 이상한 바람이 들어가면 실망이 더 클 수도 있으니까요.”

“그것도 맞는 말이다. 확실히 그런 바람이 들어가서 실망하면 그렇겠지.”

“그러니까요.”

아직 어린 나이인 만큼 주변의 바람에 민감하게 반응할 시기다.

그로 인해 그동안 노력해온 것이 한순간 무너질 수 있는 만큼, 미리 잡아두는 것이 좋은 선택일 것이다.

누구보다 지영을 염려하였기에 석규와 창현의 생각이 통한 것이다.

“그럼 제가 가서 지영이한테 이야기를 하도록 할게요.”

어느 정도 이야기가 끝나자, 창현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래? 그렇게 하도록 해라. 아, 그러고 보니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네?”

석규의 물음에 고개를 갸웃하는 창현.

그 모습을 보며 석규가 묘한 미소를 지은 채 묻는다.

“어제 지선이 있는 곳에 가지 않았다고 해서 말이다. 세희 양에게도 아무 말도 없었던 걸 보면 어디 혼자 간 것 같은데…….”

“네? 하하!”

석규의 말에 창현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어제라면 미영과 만나서 데이트를 한 날이었던 것이다.

데이트라 생각하지 않지만 누가 보면 영락없는 데이트였다.

‘게다가 아메리카식 인사를 당하기도 했고.’

늘 누군가에게 당하는 것으로 하다 보니 이것도 참 고역이었다.

나쁘지는 않지만 계속해서 당하다 보니 이제는 자신이 주도하고 싶은 마음이 종종 들고는 했다.

단지 아쉽다면 주도하고 싶은 대상이 없지만.

“친구를 만나서 같이 밥 좀 먹었어요.”

“그래? 그렇군.”

의심이 불쑥 들었지만 석규는 더 깊게 들어가지 않았다.

자기관리가 철저한 그라면 어련히 알아서 했을 거란 생각이 들었으니까.

괜히 자리가 불편해진 창현은 고개를 꾸벅 숙인 뒤 자리를 벗어난다.

“후우!”

사장실을 나서자 안도의 한숨이 가장 먼저 흘러나오는 것은 왜인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그는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지영이 한창 연습하고 있을 연습실에 도착한 창현은 노크를 한 뒤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간다.

“어라, 쉬고 있던 거야?”

“응? 아, 오빠!”

휴식 시간이었는지 자리에 앉아있던 지영이 창현을 보고는 밝은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이내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다.

지영에게 다가가던 창현은 평소와 다른 그녀의 반응에 고개를 갸웃한다.

“왜 그래?”

“미안, 오빠. 내가 지켜주지 못했어.”

“응?”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말하는 지영의 말에 창현은 무슨 말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했지만 지영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굳이 말하려 하지 않는 지영의 모습에 창현도 더 이상 묻지 않고는 입을 연다.

“지영아, 요즘 사람들이 좀 알아보고 그러지 않아?”

“응? 으응. 좀 그래. 아무래도 오빠가 나온 다큐멘터리를 봐서 그런가 봐. 그래서 요즘 모자를 쓰고 다녀. 그러니까 알아보지 못하더라고.”

“그렇구나.”

관심을 받고 있지만 낯이 익지 않았기에 모자만 써도 어느 정도 시선을 차단하는 것이 가능했다.

게다가 다행히도 지영은 아직 다른 사람의 바람이 들어가지 않은 듯했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눈을 부릅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리가 지선에게 며느리감 후보 0순위에 올라섰으니, 지영으로서는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다.

입술을 꾹 다물고 있던 지영이 결연한 표정으로 입을 연다.

“그런데, 오빠.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뭔데?”

“유리 언니를 어떻게 생각해?”

“응?”

예상치 못한 지영의 질문에 순간 창현의 표정에 균열이 일어났다.


“…무슨 뜻으로 묻는 건지 물어봐도 될까?”

전설급 둔탱이지만 눈치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성이 보이는 관심에 대해 전혀 자각이 없을 뿐.

하지만 지영의 물음에서 묘한 뉘앙스를 느낀 창현은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무슨 의도를 가지고 물어보는 것인지.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야. 내가 유리 언니랑 친하잖아. 히힛!”

진지하게 변하는 창현의 표정에 지영은 가슴이 철렁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놀란 가슴을 안정시키며 지영은 속으로 끊임없이 스스로를 위로했다.

‘난 그냥 유리 언니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 건지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야. 절대 다른 의도는 없어.’

약속하기 전이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방해공작을 펼쳤을 테지만 한 번 약속을 하였고, 자신에게 꿈(?)과 희망(?)을 불어넣어준 유리를 방해하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한 지영이었다.

“어떻게 생각한다라. 그렇게 묻는다면 간단하잖아. 유리 누나는 좋은 누나지. 허물없이 친하게 지낼 수 있고, 믿음직하기도 하고…….”

그렇게 말하던 창현은 자연스럽게 친하게 지내는 소녀시대 멤버들을 떠올렸다.

어찌된 인연인지 데뷔하기 전부터 하나하나 알게 되어 누구보다 친하게 지내고 있는 그녀들.

유리를 언급하니 자연스럽게 그녀들을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다가 창현은 돌연 멈칫했다.

한줄기 생각이 그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 것이다.

‘정말 그렇게 생각할 뿐인가?’

잠깐의 갈등이 머릿속에 맴돌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지금은 그 고민에 집중하는 것보다 당장 지영에게 답을 내주는 것이 중요했으니까.

“그렇구나.”

단순히 친한 언니라는 이야기를 듣자 지영은 안도가 되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걷잡을 수 없는 불안함을 느껴야만 했다.

그저 순수한 호감을 가지고 있기에 여기에서 유리의 본격적인 계략이 발동되기 시작하면 창현은 속절없이 무너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믿기지 않는 모습(조신율)으로 지선에게 단단히 점수를 딴 유리의 변신은 그야 말로 놀라움 그 자체였다.

“그런 거지. 혹시 다른 의미로 물어본 거였나?”

“응? 아냐! 그럴 리가. 내가 유리 언니랑 친하게 지내다 보니 오빠랑은 어떤 사이일까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그래.”

묘한 뉘앙스가 느껴졌었지만 자신만의 착각으로 치부하는 창현이었다.

‘후우!’

날카롭게 물어보던 창현이 넘어가주는 듯하자 지영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 보니 화제가 잠깐 다른 걸로 넘어가 있었네. 지영아.”

“응, 오빠.”

잠깐 다른 곳으로 흘러갔던 화제를 바로잡는 창현.

진지한 어조로 입을 열자, 지영도 자연스럽게 긴장하며 창현을 바라본다.

“방송에 나가면서 지영이 네 인지도가 많이 높아졌잖아? 사람들의 관심이 즐겁고, 즐길 시기라는 걸 알아. 하지만 지영이 네가 처음 연습생을 하겠다고 하면서 나와 했던 약속을 기억하지?”

“응…….”

살짝 굳은 표정으로 지영이 고개를 끄덕인다.

어찌 그 순간을 잊을 수 있겠는가.

아직도 그 순간을 떠올릴 때면 지영은 입술이 찢어질 정도로 질끈 깨물고는 한다. 자신이 새로운 목표를 잡을 수 있었던 시기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창현에게 큰 폐를 끼친 시기이기도 했다.

가수를 하겠다고 목표를 잡았지만 반드시 그의 합격 기준에 들어서겠다고 굳게 다짐하던 그 순간을 지영은 결코 잊지 않았다.

“그때와 지금, 달라진 건 없어. 아니, 달라진 건 있긴 해. 지영이 네가 그동안 꾸준히 쌓아온 것들이 서서히 개화하고 있으니까. 남들보다 더 잘하는 수준에 올라섰고, 지금도 실력은 늘고 있어. 하지만 난 그 정도 수준에서 만족하지 말았으면 해.”

“…….”

“저번에도 말했지만 내 동생이라는 것만으로 수많은 비교를 당할 거야. 그런 만큼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에 올라선 뒤 비로소 데뷔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오빠는 내가 서둘러 데뷔를 하겠다고 보챌까봐 그런 거야?”

지영의 어조가 날카롭다. 살짝 돌려서 이야기를 하지만 결국 자신에게 아직 데뷔할 때가 아니라는 이야기가 아닌가?

날카롭게 변한 지영의 눈이 창현을 향하고 있었다.

누구보다 창현을 좋아했고, 그를 진심으로 따르고 있다.

그런데 이런 말을 듣게 되니 지영의 마음이 좋을 리 없었다.

“오빠가 날 그렇게 못 믿을 줄 몰랐어.”

데뷔를 시켜주지 못하겠다고 해서 섭섭한 것이 아니다.

반드시 그의 기준에 부합하겠다고 선언한 자신의 결심을 너무 얕게 본 것 같아 섭섭함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갑자기 많아진 주변의 관심에 어깨가 으쓱할 때가 있다. 하지만 MP3에 수록된 창현의 노래를 들을 때마다 올라간 어깨가 다시 축 처지고는 한다.

끊임없이 그의 노래를 들으면서 결심을 되새기고 하는 자신에게 믿음을 주지 않으니 지영으로서는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런 게 아니야.”

“날 못 믿는 게 아니야?”

“지영이 네 실력이 서서히 좋아지고 있는 건 알아. 그래서 혹시나 조급해 할까봐 그런 거였어. 지영이 널 믿지만 만약 흔들렸다면 어떻게 됐을까? 만약의 상황마저도 대비했기에 이런 말을 꺼냈다고 생각해주면 좋겠는데.”

“…그럼 오빠는 어떻게 생각하는데?”

“뭘?”

잠시 침묵하던 지영이 묻자, 창현이 고개를 갸웃하며 묻는다.

“지금 내 실력에 대해서.”

실력이 부쩍 늘었다는 것은 지영 스스로도 알고 있다.

하지만 실력이 늘어날수록 겸손해야 한다는 말을 강조하는 창현이었기에 차마 자신의 실력이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르렀는지 물어보기가 무척 어려웠다.

이 기회를 빌려 창현에게 자신의 성취도에 대해 묻는 것이다.

멈칫한 창현이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지금 네 실력이면… 내후년까지 꾸준히 할 경우 정식으로 데뷔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

“내후년이면…….”

창현이 말했던 시기보다 1년이나 빠른 것이었다.

3년 동안 노력하더라도 힘들 것이라던 처음 말과 판이하게 다른 결과물이었다.

노력은 결코 자신을 배신하지 않았다.

“그러니 영어를 열심히 배워야지? 발음이 좋아야 영어권 국가에서도 활동을 할 수 있으니까.”

약점인 영어가 언급되자, 지영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나, 난 일본어가 조금 되니까 괜찮아.”

“그럼 중국어도 익혀야지.”

“주, 중국어도 기본은 해.”

“요즘은 4개 국어가 기본이니 영어까지 갖춰놓으렴.”

“흑흑!”

자신은 다 할 줄 안다고 여동생에게까지 그 정도 스펙을 요구하는 창현의 만행(?)에 지영은 혹독한 그의 말에도 흘리지 않던 눈물을 흘려야만 했다.

영어는 너무 어려웠다.


“이야기가 잘 돼서 다행이네.”

지영과 이야기를 어렵지 않게 매듭 지은 창현의 표정은 밝았다.

제법 언쟁이 오고갈 경우까지 염두에 두었지만 지영은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생각이 확립되어 있었고, 굳건한 의지를 지니고 있었다.

예정에 없던 데뷔에 대한 이야기까지 하게 되었지만 창현은 개의치 않았다.

“영어만 좀 잘했으면 좋겠는데.”

일어와 중국어를 약간씩 하는 것도 좋았지만 가장 큰 시장이 영어이니 만큼 한국어를 구사하는 만큼 영어를 구사했으면 좋겠다 싶었다.

하지만 영어 이야기만 나오면 현기증을 일으키기에 앞으로 갈 길이 멀어보였다.

“그나저나 머리가 복잡하네.”

왜인지 모르지만 지영이 자신에게 돌발적으로 물었던 질문이 계속해서 뇌리를 감돌고 있었다.

유리를 어떻게 생각하냐는 것.

불과 얼마 전이었다면 친한 누나라고 대답하고 그 이상에 대해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왜인지 계속해서 무언가 꺼림칙한 느낌을 가져다주고 있었다.

“왜일까.”

생각은 조금씩 깊어지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던 걸 왜 지금은 심각하게 생각하는 걸까.

점점 머릿속이 복잡해져갈 무렵, 운명의 장난처럼 그 상념을 깨버리는 핸드폰 벨소리가 요란하게 창현의 귀를 자극한다.

핸드폰을 든 창현이 곧장 열어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창현아, 나 윤아야.

발랄한 윤아의 목소리가 창현의 귓가를 자극했다.


“아, 네, 윤아 누나. 갑자기 무슨 일이세요?”

창현은 갑작스러운 윤아의 연락에 다소 놀랐지만 그것을 내색하지 않은 채 물었다.

그러자 건너편에서 힘이 넘치는 목소리로 윤아가 투정을 부린다.

-잉! 뭐야. 설마 드라마가 끝났다고 해서 나에 대한 애정이 식은 거야? 창현이한테 나는 잠깐 즐기고 끝나는 그런 존재였어?

“잘 지내고 있나 보네요.”

예전이라면 당황하며 대꾸를 했을 테지만 임초딩의 힘은 창현마저도 적응하게 만드는 위력을 담고 있었다.

대수롭지 않은 듯 넘겨버리자, 윤아는 장난을 포기한다.

-칫! 이제는 통하지 않네. 예전에 당황하던 창현이는 귀여웠는데. 그때 그 창현이는 도대체 어디로 간 거니.

“세상의 풍파를 겪으면서 이렇게 변한 거죠. 그런데 갑자기 무슨 일로 전화하신 거예요?”

-응, 다른 게 아니라 삼촌이 창현이 네게 우리들에게 할 이야기가 있을 거라던데?

“네? 제게요?”

영문을 몰랐기에 창현은 윤아의 말이 갑작스럽기만 하였다.

-모르는 눈치면 AA엔터테인먼트 사장님께 물어보시면 상세하게 알려주신다고 했어.

“아버지한테요? 음! 그럼 곧장 물어보도록 할게요.”

무슨 이유 때문에 소녀시대에게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것일까.

의아한 마음이 들었지만 석규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다고 하니, 창현은 의문을 접어놓고는 말한다.

“제가 아버지에게 물어본 뒤 다시 연락을 드릴게요.”

-응, 그럼 조금 있다가 전화 줘.

“네.”

그렇게 윤아와 통화를 끝낸 창현은 곧바로 석규에게 향했다.


마침 지영에 대한 이야기 건도 있었기에 석규를 찾은 창현은 지영과 나누었던 이야기에 대해서 먼저 털어놓았다.

그 이야기를 접한 석규는 밝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영이가 네 옆에 있으면서 아주 좋은 것만 배웠구나. 솔직히 걱정이 많았는데 안심을 해도 좋겠어.”

“네, 열심히 하는 것도 있지만 조급해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지영이는 충분히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 같아요.”

“암, 누구 딸인데.”

“누구 동생이기도 하죠.”

입가에 미소를 지은 석규의 말에 창현이 받아치자, 두 부자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밝은 분위기로 변하자, 창현은 석규를 바라보며 본격적인 용건을 꺼내놓았다.

“다른 게 아니라 아버지에게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요.”

“무엇인데 그러냐?”

“그러니까…….”

방금 전 윤아에게 왔던 전화 내용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창현. 이야기를 들은 석규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아아, 그 부분에 대해서 말한 거로구나. 예전에 내가 SM엔터테인먼트에 한 번 찾아가라고 한 적이 있지 않더냐?”

“네, 그렇죠.”

프로젝트 앨범인 4-B 앨범이 나오기 직전, 창현은 SM엔터테인먼트에 들려 수만과 이야기를 나누었던 적이 있다.

눈치가 어느 정도 있다면 석규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알아차렸을 터.

눈을 빛낸 창현이 나직이 감탄사를 흘리며 말한다.

“아, 그 부분에 대한 것이었어요?”

“그래, 아무래도 칼자루는 이쪽에서 쥐고 있다 보니, SM엔터테인먼트에서는 네가 간략하게 이야기를 해주었으면 하는 입장이더구나. 구체적인 목적은 네가 SM엔터테인먼트에 자주 드나드는 것을 누군가에게 어필하려는 것이겠지만.”

입가에 묘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리는 석규였지만 아직까지 창현은 그 말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아차리지 못했기에 그저 고개를 갸웃할 따름이었다.

석규는 그것을 보았지만 굳이 설명을 하지 않았다.

아들이 세상에 대해서 알아가는 것은 좋았지만 처음부터 너무 많은 것을 알아가길 바라지는 않았다.

더러운 꼴을 보는 것은 아직까진 자신만으로 족하다 생각했으니까.

스케줄이 없었던 창현은 곧바로 윤아에게 연락을 하여 SM엔터테인먼트에 가기로 하였다.


한편, 창현의 연락을 받은 윤아는 멤버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숙소 가운데에서 큰 목소리로 외쳤다.

“언니들, 창현이랑 연락했어요.”

“뭐래?”

오후 스케줄을 위해 움직이던 소녀들은 하나같이 윤아의 행동에 이목을 집중하기 시작한다.

윤아는 입가에 미소를 짓다가 이내 살짝 찌푸리더니 말한다.

“곧 회사로 온다고 하는데요? 그런데 삼촌이 연희 언니도 함께 자리에 간다고 하는데…….”

“연희 언니가 왜?”

밝은 표정을 짓던 몇몇 소녀들이 윤아의 말에 발끈한다.

그 기세에 눌린 윤아는 움츠러들며 힐끔 눈치를 살피더니 나직한 목소리로 말한다.

“저번에 뮤직비디오 촬영 건으로 함께 인연이 될 뻔한 것이 아쉬워서 오늘 자리를 발판 삼아 친분을 쌓게 한다고 하시더라고요. 차마 제가 삼촌 말을 거스를 수도 없어서…….”

눈치를 보며 말하는 윤아의 모습은 무척 애처로웠다. 그리고 그녀의 입장을 이해했기에 소녀들은 더 이상 윤아를 타박하지 않았다.

“그럼 어떻게 해야지? 연희 언니가 함께 가면 너무 위험하잖아.”

불안한 표정을 지은 태연이 미영과 유리를 번갈아 보며 말한다. 잠시 후에 그녀는 스케줄을 위해 헤어 샵에 가야 했기에 직접 회사로 달려가 연희를 막아내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

무표정한 얼굴로 생각에 잠긴 미영과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기는 유리.

먼저 입을 연 것은 미영이었다.

“일단 윤아 혼자서는 안 돼. 그러니까 우리가 나서야 해.”

“동감이야. 윤아 혼자서는 이리저리 휘둘리다가 비참한 새드 엔딩을 맞이할 수 있어. 내 생각에는 스케줄이 없는 사람이 총동원 되어서 연희 언니를 막아야 할 것 같아. 어차피 우리도 참석하는 자리잖아? 우리가 못갈 명분은 없어.”

같은 의견을 제시하는 미영과 유리였다. 두루두루 능력을 갖춘 연희를 윤아 혼자서 막아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저번에 협약을 맺었던 것처럼 스케줄이 없는 멤버들이 서로 힘을 합쳐 연희를 견제하는 것이 가장 적합한 방법이었다.

“스케줄이 없는 사람이 누군데?”

태연의 말에 오늘 오후 스케줄이 없는 사람들이 손을 든다.

공교롭게도 스케줄이 없는 사람은 전화를 한 당사자인 윤아와 의견을 낸 미영과 유리였다.

세 사람을 보면서 태연은 재빨리 전력 분석에 들어갔다.

‘일단 윤아가 탱커 역할을 하고 미영과 유리가 두뇌 플레이로 힘을 합친다면? 연희 언니를 퇴치하는 것은 불가능해도 충분히 견제하는 것은 가능해.’

오늘의 목적은 연희를 무찌르는 것이 아닌 견제였다.

창현의 앞이니 만큼 연희도 어느 정도 기량을 감추려 들 것이고, 그렇다면 기회는 있다.

미영과 유리도 서로를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

두뇌를 쓰는 캐릭터가 없으면 어떻게 하나 싶었는데 마침 두 사람 모두 스케줄이 없었고, 맷집이 강한 멤버 또한 있다.

“이 조합이면…….”

“나쁘지 않은데? 해볼만 하겠어.”

“그럼 너희들을 믿을게. 연희 언니가 득세하게 하면 안 돼. 알겠지?”

“물론이야.”

“훗! 연희 언니를 철저하게 마크해주겠어.”

“언니, 저만 믿어주세요.”

태연의 말에 그녀들은 자신감 넘치는 어조로 대답하며 주먹을 불끈 쥐어보였다.

믿음직한 세 사람의 조합에 다른 소녀들도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적이라면 누구보다 두렵지만 아군이라면 누구보다 믿음직했으니까.

‘언니들 미안해요.’

그 속에서 윤아는 속으로 언니들에게 사과를 하고 있었다.

누구보다 사랑하는 가족이자 동료였지만 사랑 앞에서는 가끔은 그것들을 저버려야 할 때가 종종 있다.

마왕을 등에 업은 윤아의 본격적인 반란이 시작되었다.


-그래? 너랑 유리랑 미영이가 같이 온다고? 나를 막기 위해서?

연희를 막기 위한 팀이 조직된 후, 윤아는 가장 먼저 씻고 준비를 마친 뒤 조용히 자리에서 벗어나 연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기다렸다는 듯 전화를 받은 연희. 윤아는 그녀에게 숙소 내에 있었던 이야기에 대해서 상세하게 연희에게 이야기를 해주었다.

모든 것이 그녀의 예상대로 돌아가고 있었기에 연희에 대한 윤아의 믿음은 굳건하였다.

“네, 언니도 긴장하셔야 해요. 미영 언니랑 유리 언니는 정말 엄청나요.”

솔직히 윤아는 마음이 불안했다.

만약 미영과 유리가 함께 하지 않았더라면 연희의 도움을 등에 업어 자신은 창현과 단 둘만의 시간을 보낼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두 사람의 합류로 인해 달콤한 꿈이 무산되었고, 도리어 연희의 존재가 두 사람의 견제로 타격을 입을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후훗! 그러니?

“웃을 게 아니에요. 두 언니는 곁에서 봐도 정말 엄청나요. 어떤 대책을 마련해야 하지 않을까요?”

눈앞에 닥쳐왔던 단 둘만의 시간이 무산 되어서일까? 윤아의 어조는 다급했다.

-윤아야. 날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니?

“죄, 죄송해요, 언니.”

싸늘하게 가라앉는 연희의 목소리에 윤아는 순간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이것은 얼음 레이저로 한때 소녀들 사이에서 폭군으로 군림했던 수연의 카리스마와 비교해도 결코 밀리지 않는 기운이었다.

단순한 통화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윤아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언니는 무척 섭섭하네. 설마 윤아는 언니가 아무런 대책도 없이 그저 웃음만 짓는 바보로 생각한 거니?

“그, 그럴 리가 없잖아요. 전 언니를 굳게 믿고 있어요. 이렇게 말하는 것도 다 언니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정말 그런 거니?

간단한 한 마디였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속내를 훤하게 꿰뚫어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두근두근.

거세게 뛰는 윤아의 심장. 나긋나긋한 연희의 목소리였지만 등골에서 올라온 소름은 그녀의 전신을 지배하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있는 듯한 연희의 말은 지금 옆에서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대화를 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으니까.

-정말 그런 거야, 윤아야?

“죄, 죄송해요.”

나긋하지만 강렬한 재촉이 담긴 연희의 말에 윤아는 결국 항복을 선언하며 연희에게 사과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다급한 건 알고 있어. 하지만 내가 도와준다고 한 이상 마지막에 웃는 것은 윤아, 너 하나뿐이야. 그러니 날 믿어줄 수 없겠니?

“죄송해요, 언니. 제가 너무 다급했어요.”

-알아주었다니 다행이야. 하마터면 섭섭함을 느낄 번했으니까. 그리고 미영이와 유리의 존재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

자신감 넘치는 연희의 말에 윤아가 제 안색을 회복하며 눈을 빛낸다.

방금 전까지는 미영과 유리의 강렬함에 연희의 진면목을 보지 못했다면 지금은 연희가 어떻게든 두 사람을 견제해줄 수 있다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무슨 특별한 방법이라도 있는 건가요?”

-윤아는 이거 아니?

“어떤 걸요?”

-꽃이 아무리 찬란하게 개화를 해도 결국 시들고 말 거란 걸. 아무리 찬란하더라도 세상을 비추는 태양에 비할 바는 아니란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자세히 묻고 싶은 욕구가 치솟았지만 윤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자 연희가 조금 더 풀어서 이야기를 해준다.

-지금은 많이 컸다고 해도 결국 미영이와 유리는 내게 매번 당하던 아이들이야. 그러니 윤아 너는 걱정하지 말고 마음 편하게, 그리고 예쁘게 차려 입고 오렴.

“네…….”

불안했지만 윤아는 연희의 말에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미영과 유리는 그동안 발군의 성장을 이뤘고, 그것은 연희가 방심하면 큰 코 다칠 정도였다. 연희가 자신감에 부풀어서 일을 그르치는 것이 아닌지 불안했다.

그녀의 불안함을 눈치 챈 것인지 연희가 쐐기를 박는다.

-날 상대하려면 윤아 너를 제외한 소녀시대 멤버 전부를 데려오도록 해. 모두 굳게 각오를 하게 한 다음에. 그러면 조금 재미있게 될 것 같네.

마왕의 웃음기에 서린 음산한 기운이 윤아에게 스며들고 있었다.

와룡파니와 사마율을 어린 아이 취급하는 마왕 연희 양이었다.


SM엔터테인먼트에 도착한 창현은 곧장 수만이 머물고 있는 회장실로 향한 뒤, 간략하게 이야기를 나누고는 모든 전권을 자신에게 위임하겠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현재 추진하는 일 자체가 창현에게 권한이 있는 만큼 그의 의견을 존중하겠다는 이야기였다.

“창현아, 어서 와.”

연습실 안으로 들어선 창현을 반겨준 것은 미영과 유리, 윤아였다.

가장 먼저 앞으로 나선 것은 전화 통화를 했던 윤아였다. 밝은 표정을 지은 윤아는 창현을 보면서 반가움을 감추지 못했다.

“마침 할 일도 없어서 그냥 지금 오게 되었네요. 폐가 된 건 아니죠?”

“그럴 리가. 와줘서 오히려 좋은 걸. 무슨 이야기인지 궁금하기도 하고 말이야.”

‘윤아 저게 치사하게 혼자 인사하고 이야기 나누네.’

두 사람이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는 것을 질투의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미영이었다. 질투의 화신으로 변신한 그녀는 강렬한 눈웃음을 지으며 성큼 앞으로 나서며 대화를 끊었다.

“안녕, 창현아.”

아메리카식 입맞춤 사건 이후 처음 만나는 것이었다.

창현은 미영의 인사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 움찔하더니 그 인사에 답한다.

“네? 네, 안녕하세요, 미영 누나…….”

“응응! 정말 오랜만이지?”

“그, 그러네요.”

불과 며칠만에 만나는 것이었지만 마치 만나지 않았던 것처럼 이야기하는 미영의 행동에 창현은 어색하게 맞장구를 친다.

전과 달리 살짝 어색해졌지만 자신을 의식하는 듯한 그의 모습에 미영은 미소를 지었다.

‘헤헤! 그때 도장이 확실히 통하기는 했나 보네.’

헤실헤실 미소를 짓고 있는 미영과 무언가 부자연스러운 창현의 태도에 유리의 눈이 세모꼴로 변해간다.

‘뭔가 있는데.’

무언가 냄새가 솔솔 풍겼다.

전 같았더라면 곧장 파고들었겠지만 지금은 힘을 합쳐야 할 때였다. 나중에 확실하게 파헤쳐주겠다 생각한 유리도 뒤처질 수 없다는 생각에 앞으로 나서서 인사를 한다.

“안녕, 창현아.”

“네, 안녕하세요, 유리 누나.”

살갑게 대하던 윤아, 미영과 달리 상당히 예의를 갖추며 인사를 하는 창현이었다.

그것은 여태까지 유리가 창현에게 조신한 모습을 보이고자 노력했던 성과이기도 하였고, 조금 전에 지영에게 들었던 유리에 대한 질문이 머릿속에 맴돌았던 것도 있었다.

‘평소와 다른 느낌이네. 지영이가 물어봐서 그런 건가?’

예전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여겼던 것이 지금 와서는 무척 신경이 쓰이게 하였다.

고개를 갸웃하는 창현을 보면서 유리는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후훗! 이것이 나와 애들의 차이지. 너희들은 처음부터 방향을 잘못 잡았어.’

창현과 친해지면서 자연스럽게 벽을 허무는 것이 방법이라 생각했다면 그것은 큰 오산이다.

유리는 처음부터 다른 방법을 선택했고, 단기간에 가까워지는 것보다, 서서히 가까워지면서 자신의 또 다른 매력(?)인 조신한 모습을 창현에게 어필하기 시작했다.

보이지 않게 차곡차곡 쌓인 그것은 창현으로 하여금 조신율의 완성판(?)을 형성하게 하였고, 지금에 와서는 창현의 눈에 보이는 것은 완벽한 조신율의 모습이었다.

여성으로서 판타지를 갖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창현과의 벽을 서서히 무너뜨리려 하는 자신의 계획이 성과로 드러나기 시작하자, 유리는 뿌듯한 웃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분위기가 이상하게 변해가는 듯하자 윤아는 다급한 마음에 화제를 전환한다.

“창현아! 오늘 특별히 소개시켜주고 싶은 사람이 있어.”

“소개시켜주고 싶은 사람이요?”

전해 듣지 못한 사실이었기에 창현이 고개를 갸웃한다.

“응! 우리 소속사 여배우야. 창현이 뮤직비디오에 출연할 뻔 하기도 했다던데?”

“제 뮤직비디오에요? 그렇다면…….”

똑똑똑!

누구인지 알아차린 창현이 눈을 살짝 크게 뜨일 때, 마치 계획했던 것처럼 노크 소리가 울려 퍼진다.

너무나 절묘한 타이밍에 윤아가 움찔하더니 밖을 향해 말한다.

“드, 들어오세요.”

윤아의 허락이 떨어지자, 연습실 문을 열리면서 한 사람이 안으로 들어온다.

“……!”

들어온 사람의 모습을 보는 순간 모든 사람들의 눈이 크게 떠진다.

그곳에는 순백의 원피스를 차려입은 아름다운 여인이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던 것이다.

투명 메이크업은 그녀의 청순한 외모를 더욱 돋보이게 하였고, 입가에 맺힌 은은한 미소는 남자의 마음을 뒤흔들고 남았다.

창현의 앞에 선 연희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하였다.

“갑자기 찾아오게 되어 죄송해요. 이연희라고 해요.”

“현으로 활동하고 있는 강창현입니다.”

잠시 멈칫해 있던 창현이 자기소개를 하였다. 그에 연희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모를 리가 있나요. 현 씨의 광팬이어서 한 번쯤 꼭 뵙고 싶었어요. 저희 회사 프로듀서를 맡고 계신다고 했는데 만날 기회가 없어 어찌나 속상하던지. 이렇게 뵙게 되어 정말 영광이에요.”

“감사합니다.”

“…….”

창현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연희의 모습을 보는 소녀들은 가슴이 철렁한 상황이었다.

설마 저렇게 꾸미고 올 줄이야. 화려하게 꾸미고 왔다면 오히려 거부감을 샀을 수 있을 테지만 저렇게 연하게 화장을 하여 본래 미모를 한껏 뽐내게 하는 것은 부담감을 느끼게 하지 않고, 쉽게 친근감을 줄 수 있다.

딱 창현의 취향에 연희가 맞췄다는 것이다.

‘당했어. 연희 언니가 처음부터 강수를 둘 줄이야.’

‘이렇게 되었지만 뒤는 쉽지 않을 거예요.’

눈에 불을 키고 연희를 바라보는 미영과 유리였다.

그 대열에는 윤아 또한 합류해 있었다.

자신을 밀어주겠다고 하더니 정작 자신이 한껏 꾸미고 오자 윤아는 치미는 질투심과 배신감으로 인해 표독한 눈으로 연희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에 연희는 눈짓을 준 뒤 말을 이어나간다.

“오늘 윤아가 좋은 자리를 마련해주어서요. 평소 윤아가 현 씨를 어찌나 칭찬하던지, 팬이기도 했지만 꼭 한 번 만나보고 싶기도 했답니다.”

“윤아 누나가 제 칭찬을요?”

의외라는 듯 창현이 윤아를 바라보자, 갑작스러운 상황 반전에 윤아가 고개를 푹 숙였다.

“네, 겉으로는 초딩같은 모습을 보이지만 속이 따뜻한 아이거든요. 제가 괜한 말을 한 걸까요?”

슬쩍 창현의 눈치를 보며 이야기하는 연희.

창현은 아니라는 듯 고개를 좌우로 젓는다.

“아닙니다. 오히려 윤아 누나의 새로운 모습을 알게 되어서 나쁘지 않네요.”

“윤아가 친하게 지내면 무척 정이 많고 착한 아이에요. 친하게 지내면 결코 해가 될 아이가 아니니, 앞으로도 친하게 지내주셨으면 좋겠어요.”

“물론입니다.”

“…….”

이야기가 오고가는 걸 느끼면서 미영과 유리의 머릿속은 빠르게 상황을 분석하고 있었다.

지능형 캐릭터인 그녀들은 곧바로 파악할 수 있었다.

첫 만남에서 호감을 따낸 연희가 갑자기 윤아를 언급하고 나선 이유, 그것은 바로…….

‘윤아를 방패막이로 사용하려는 거구나!’

자신들이라면 호락호락하지 않을 테지만 허점이 많은 윤아라면 연희의 입장에서 이용하기 용이한 인물이었다.

지금 그 예로 자신의 칭찬이 더해지자 윤아는 제대로 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방심하다가 곧바로 침몰해버린 것이었다.

미영과 유리가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나직이 끄덕인다. 그리고는 유리가 먼저 앞으로 나서면서 대화를 끊고, 화제를 전환한다.

“창현아,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아기는 요즘 어때?”

그의 최대 관심사는 바로 아기였다.

그것은 교묘하고 정확하게 파고 들어 대화의 맥을 끊어버리는데 성공했다.

“아현이야 요즘 잘 지내죠. 어찌나 귀여운지, 깨물어주고 싶어서 매일 충동과 싸움을 할 정도라니까요. 게다가…….”

아기 이야기로 빠져든 창현은 연희와의 대화를 그만두고 그쪽에 몰두하기 시작한다.

유리가 연희를 바라보며 입 꼬리를 살짝 말아 올린다. 하지만 연희는 유리의 비웃음에도 불구하고 담담할 뿐이다.

‘아차!’

자신의 허실을 파악한 유리가 재빨리 입을 열려고 했지만 연희의 말이 더 빨랐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 늦둥이 동생을 얻으셨다면서요. 축하드려요. 현 씨의 동생이니 그 외모가 엄청 귀엽겠죠?”

“말도 못할 정도죠. 어찌나 귀여운지…….”

“저도 아기들을 무척 좋아하거든요. 특히 갓난 애기들은…….”

“…….”

아기 이야기를 소재로 치고나가는 연희를 보며 미영과 유리의 표정이 좋지 않게 변했다.

그녀만 이야기를 한다면 비집고 들어갈 방법이 있는데 연희는 아주 교묘하게 윤아를 끌어들이면서 자신은 중심에서 살짝 벗어난 듯한 모션을 취하고 있었다.

하지만 미영과 유리가 보기에는 창현과 윤아가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연희가 모든 상황을 조종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훗!

시선을 마주하게 된 연희의 입가에 미소가 맺힌다.

그것은 아직 너희들이 나보다 한 수 아래라는 생각이 담긴 말이었다.

‘이익!’

‘저 언니가!’

그 의미를 알아차린 미영과 유리는 발끈했다. 연희보다 전체적인 스탯은 낮지만 지능적인 측면에서 뒤처지지 않으리라 자신했기에 더욱 약이 올랐다.

대화의 흐름을 살피던 미영이 조심스럽게 파고든다.

“헤헤! 창현아.”

다른 사람이 끼어든다면 분위기가 싸해지지만 눈웃음으로 친화력을 대폭 상승시키는 미영은 자연스럽게 대화의 흐름을 자신에게 끌어온다.

“네, 누나.”

“오늘 여기 오게 된 게 뭘 말해주려고 한다는 거라지 않았어?”

“아아, 그러고 보니 그걸 까먹고 있었네요.”

미영의 말에 창현은 고개를 끄덕인다. 아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대화의 주제를 살짝 벗어나 있었던 것이다.

말을 하려던 창현은 순간 멈칫한다.

그러자 연희가 그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끼어든다.

“저… 제가 있어서 그런 건가요?”

“네?”

생각에 잠겨있던 창현은 연희의 목소리에 시선을 돌렸다가 움찔하고 만다. 애처로운 눈을 한 연희가 촉촉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 죄를 지은 것도 없지만 괜히 자신이 잘못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제가 들으면 안 되는 이야기라면 잠시 자리를 비켜드릴게요.”

“그런 게 아니라 이 이야기를 일부 사람들이 아닌, 전체에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잠시 망설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가 불쾌하게 했다면 죄송합니다.”

“사과하지 않으셔도 되요. 제가 혼자서 오해를 해서 그런 걸요.”

연기자가 아니랄까봐 슬픈 표정부터 시작하여 애처로운 얼굴과 살짝 미소를 짓는 얼굴 등, 비슷하면서도 미묘한 감정의 변화가 표정에서 그대로 묻어나오고 있었다.

자각하지 못한 사이 어느덧 대화는 다시 연희에게 흐름이 넘어와 있었다.

회심의 일격을 날렸던 미영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연희의 실체(?)에 대해서 다 알고 있으니, 저 표정과 저 말투에서 느껴지는 가증스러움은 상상을 초월했다.

‘이익! 저 언니가 연기를 하네.’

‘상황이 좋지가 않은데? 일단 윤아를 수습하자.’

눈빛으로 대화를 나눈 미영과 유리가 움직임을 보이자, 연희가 곧바로 선수를 친다.

“아 그러고 보니, 뮤직비디오 정말 잘 봤어요.”

“뮤직비디오요? 아아, 그렇게 또 되네요.”

“네. 솔직히 출연 욕심이 컸지만 시카가 워낙 하고 싶어 해서요. 아, 현 씨는 시카를 어떻게 부르시나요? 미국 이름으로? 아니면 한국 이름으로?”

“수연 누나라고 불러요.”

“그렇군요. 솔직히 수연이에게 양보를 했지만 배가 많이 아팠어요. 현 씨와 키스신도 있는 뮤직비디오인데 말이죠. 호호!”

“하하!”

노골적인 연희의 말에 창현은 그저 어색한 웃음만 지을 따름이었다.

“언니!”

점점 강력해지는 연희의 대시(?)에 유리가 마침내 참지 못하고 큰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응? 왜 그러니?”

“저랑 잠시 이야기 좀 해요?”

“내가 왜?”

상냥하게 눈웃음까지 치고 있지만 그 속에 담긴 경고를 유리가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그 위협에 밀릴 거라면 이곳에 오지도 않았다. 유리는 연희의 위협을 정면으로 받아내면서 꿋꿋하게 말했다.

“연기가 요즘 잘 안 돼서요. 잠시 조언 좀 해주세요.”

그러면서 연희의 팔을 잡아든 유리가 연습실 밖으로 나간다.

“나도 잠시 나갔다 올게. 연희 언니에게 물어볼 게 있어서.”

조심스럽게 눈치를 보던 미영도 그렇게 말한 뒤 걸음을 옮기다가 윤아에게 속삭인다.

“정신 차려, 윤아야.”

“네? 네에…….”

얼떨떨한 어조로 대답한 윤아를 놔두고 밖으로 나가는 미영. 윤아가 걱정되긴 했지만 마왕을 상대하는 것이 먼저였다.

“…뭔가 후다닥이네요.”

“으응.”

“그런데 미영 누나가 왜 정신 차리라고 한 거예요?”

“응? 아, 아아, 그, 그게… 요즘 스케줄이 너무 많아서 내가 피곤해가지고 멍하니 있는 경우가 많거든.”

말을 더듬던 윤아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린 끝에 그럴 듯한 변명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했다.

“그래요? 에구! 너무 몸을 축내면 안될 텐데. 몸은 좀 괜찮고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 창현을 보면서 윤아는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는데 지금 이 상황은 창현과 단 둘만 있는 것 아니던가?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더니, 기어코 이 순간이 온 것이다.

“어디 아파요? 얼굴이 붉어진 것 같은데.”

“아, 아니야.”

“아니라뇨. 얼굴이 붉은데. 잠시만요.”

손을 뻗은 창현이 윤아의 이마에 대려고 할 때, 당황한 윤아가 뒤로 물러서다가 삐끗하여 무너진다.

화들짝 놀란 창현이 황급히 윤아의 몸을 받아들며 묻는다.

“괜찮아요? 많이 아픈 것 같은데.”

“으응? 그, 그냥 머리가 좀 아파서. 누워서 쉬면 괜찮아질 거야.”

“아프면 아프다고 해야죠. 으이구.”

가볍게 윤아를 타박한 창현은 그대로 윤아를 안아든다. 소위 말하는 공주님 안기였다.

‘꺄악!’

실제로 하나도 안 아픈 윤아는 창현의 대 서비스에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자신에게 이런 축복이 내려질 줄이야.

시기적절하게 붉어진 자신의 얼굴과 애드리브에 윤아는 감사하고 또 감사할 따름이야.

“좀 쉬어요.”

그러면서 창현의 차가운 손이 윤아의 이마 위로 올라온다.

마음이 따뜻한 사람은 손이 차다고 하더니. 역시 창현이라 생각하면서 윤아는 창현이 손을 떼려하자 말한다.

“조금만 이렇게 있어줘. 기분 좋아…….”

“알았어요.”

다정하게 이마 위에 손을 올려두는 창현을 보면서 윤아는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아아, 오늘은 수확은 대만족이야…….’

자신에게 이런 행운이 온 것에 대해 신께 감사를 드리고 연희에게 고마운 감정을 느끼는 윤아였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했지만 모든 것은 연희의 뜻대로 돌아갔다.

‘언니만 믿고 따를게요.’

연희와 이야기했던 내용을 떠올리는 윤아의 입가에는 세상을 다 가진 듯한 사람의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일단 내가 현과 윤아 너와 단 둘만의 자리를 마련해줄게. 대신 그곳에서 얻은 현의 정보를 모두 제공해줘야 돼.”

“어째서요?”

불쑥 의심이 들어 경계 어린 표정을 짓자, 연희가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그래야 내가 현에게 대응할 수 있는 매뉴얼을 짤 수 있지.

“그 그러네요.”

지능 캐릭터가 아니었기에 완벽하게 공감할 수 없지만 미영과 유리를 보아왔기에 윤아는 선선히 납득했다.

“다 널 위한 거니까 괜히 이상한 의심을 하지 말고 말해줘야 돼. 그래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윤아 네가 현을 차지하기 위한 계획을 진행해 나가지. 알고 있지? 모든 건 윤아 널 위한 거야.”

“네, 언니를 믿어요.”

그때도 믿고 있었지만 지금은 완전 신앙 수준이었다.

연희를 믿는 윤아의 미래는 밝은 듯했다.


유리와 함께 연습실 밖으로 나온 연희는 연습생들이 쉴 수 있는 휴게실로 향했다.

현재 대부분의 연습생들이 레슨을 받고 있었기에 휴게실에 있는 사람들은 그녀들뿐이었다.

“난 커피 부탁해. 밀크로.”

사뿐하게 자리에 앉은 연희가 자연스러운 어조로 유리에게 주문을 한다.

자신을 커피 배달원 취급하는 듯한 연희의 말투에 유리가 발끈했지만 이내 침착하게 마음을 가다듬는다.

‘침착해야 돼. 이것도 다 저 언니의 계략이야. 여기에서 발끈해봤자 내가 얻을 것은 없어.’

‘아쉽네. 유리가 많이 크긴 컸어. 발끈하던 걸 잘 다스리네.’

유리의 예상대로 연희는 그녀를 흔들기 위한 가벼운 한 수를 전개했던 것이었다.

잠시 후, 커피를 뽑은 유리가 탁자 위에 내려놓는다.

그것을 받아든 연희가 한 모금 마시면서 느긋한 목소리로 묻는다.

“그래서, 내게 받고 싶은 연기 조언이란 게 뭐니?”

“선수끼리 이러지 마요, 우리.”

“선수라니? 난 연기자고, 너는 아이돌 가수인 걸? 선수가 들어갈 만큼 우리가 무언가를 했던가?”

“…….”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유리가 조용히 연희를 노려본다.

매서운 그녀의 시선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희의 모습은 여유로울 뿐이었다.

그때, 미영이 휴게실 안으로 들어오며 유리 옆에 앉는다. 그리고 지금 이 분위기가 유리에게 안 좋게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듯, 유리를 부른다.

“유리야.”

“응.”

“커피 좀 뽑아줘. 돈을 안 가지고 왔네. 헤헤!”

“…….”

“풉!”

할 말을 잃은 유리가 미영을 멍하니 바라보았고, 연희는 흘러나오는 실소를 감추지 못했다. 심각한 분위기를 단번에 날려버리는 미영의 모습이 여전히 바뀌지 않았다고 생각하면서.

“에휴! 다음부터는 돈 좀 갖고 다녀. 심각한 분위기에 뭐하자는 거야, 이게.”

“미안.”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는 미영의 모습에 유리는 더 이상 뭐라 하지 못한 채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는 자판기에서 밀크커피를 누르는 순간, 미영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앗! 유리야, 난 블랙커피를 좋아하는데…….”

빠직!

이마에 선명한 사거리 마크가 생겨난 유리가 미영을 향해 바락 외친다.

“그냥 아무거나 마셔!”

“아, 알았어.”

힘을 합쳐도 모자랄 판에 처음부터 상잔을 하고 있는 두 사람이었다.


“그래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뭐니?”

다시 분위기는 차분하게 변했고, 연희의 물음이 들리자, 유리는 진지한 표정으로 연희에게 말한다.

“언니가 창현이에게 관심이 있다고 들었어요.”

“윤아가 말했니? 아쉽네, 윤아가 비밀로 해주길 바랐는데.”

아쉬운 듯 말했지만 표정 자체는 여전히 싱글벙글이다. 마치 윤아가 그녀들에게 말할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유리는 내색하지 않았다. 마왕은 그녀마저도 바짝 긴장하게 만들 정도로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한순간 틈을 보인다면 자신은 처참하게 물어 뜯겨 헤어 나오지 못할 늪에 빠져버릴 것이다.

‘정신 차리자, 쐐기를 확실하게 박아둬야 해.’

“미안하지만 창현이에 대한 관심을 꺼주셨으면 해요.”

“왜 그렇게 말하는 거니?”

“이미 창현이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다른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그 부분에 대해서 구체적인 언급은 하지 않아도 언니가 잘 알 거라 생각하고요. 그런 상황에서 저희는 언니를 적으로 생각하지 않길 바라고 있어요.”

“적이라… 확실히 그건 그래. 나도 너희들과 적이 되는 건 정말 싫거든.”

“그럼……?”

유리의 얼굴에 기대감이 번져 나가기 시작한다. 지금 이 대화의 흐름이라면 걱정했던 마왕과의 일전이 허무하게 끝날 상황이다.

하지만 그것은 유리의 헛된 기대에 지나지 않았다.

“아쉽지만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네. 미안하지만 포기해줄 수는 없어. 그래도 미안한 마음은 있으니까 사과할게. 미안.”

“…….”

“언니, 정말 저희와 경쟁을 할 생각이에요?”

유리는 침묵했고, 그녀를 대신하여 나선 것은 미영이었다.

“경쟁?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될까?”

“네.”

“현에게 관심을 두고 있는 사람 중에서 현과 사귀고 있는 사람이 있어?”

“그, 그건…….”

미영의 말이 궁색해지기 시작했다. 창현을 좋아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정작 그와 마음을 터놓고, 정식으로 사귀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각자만의 방식으로 공략을 하고 있고, 소소한 성과를 거두고 있지만 큰 성과를 거둔 사람은 많지 않은 실정이었다.

훗!

말을 이어나가지 못하는 미영, 그리고 침묵하는 유리를 보면서 연희는 입 꼬리 한쪽을 말아올렸다.

그 모습을 보면서 미영과 유리는 발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더욱 긴장감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저렇게 입 꼬리를 말아 올린 채 상대방을 사정없이 짓밟아 누르는 것이 바로 마왕의 본성이다.

“제대로 된 진전도 이뤄내지 못하면서 내게 포기하라고 하다니. 너희들이 제법 많이 크긴 컸구나. 그동안 스케줄로 바빠 나와 만남이 드물어져서 그런지 말이야.”

과거에 미영과 유리는 연희의 제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쓴 과거가 그녀들에게 자양분이 되어 지금의 와룡 파니, 사마율을 낳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를 과거와 비교하지 마세요.”

“과거와 비교하지 않는다면, 동등하게 대해주길 바라는 건가?”

발끈하는 미영을 보면서 연희는 가소롭다는 식의 미소를 지었다. 그녀에게 가장 많이 장난을 당한 것은 미영이었고,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미영이 자신의 제물이라는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이익!”

평소와 달리 미영은 그 말에 발끈하는 모습을 보였다. 전에 알던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번번이 당하는 자신의 모습에 자괴감이 느껴질 지경이었다.

완벽하게 심리전에 휘말려 페이스를 잃어가는 미영을 보면서 유리가 재빨리 분위기를 깨고자 하였다.

“언니.”

“왜 그러니?”

조금만 더 낚으면 미영을 완전히 농락할 수 있었는데, 유리가 방해하자 연희는 아쉬운 표정을 짓는다.

자신조차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미영을 완벽하게 농락하는 연희를 보면서 유리는 마음속으로 긴장감을 끌어올렸다. 만약 자신도 연희와 좀 더 긴 시간을 함께 보냈더라면 지금 미영의 모습이 자신의 것이 되었을 수도 있다.

‘확실한 방법으로.’

“예전에 우리가 함께 세워두었던 룰을 기억하세요?”

“룰이라고? 무슨 룰을 말하는 거니?”

“그거 있잖아요. 언니가 소녀시대가 될 뻔하면서 우리와 함께 세웠던 룰. 앞으로 우리가 함께 지켜나가고, 서로의 팀워크를 해치지 않겠다고 하면서 지키기로 맹세했던 룰 말이에요. 똑똑한 언니가 그것을 잊어버릴 리가 없으시잖아요.”

“아아, 룰이라면 기억하고 있지.”

살살 자극하며 말하자, 연희는 기억이 난 듯 고개를 끄덕인다. 잊어버렸다면 졸지에 돌머리가 되어버리는 유리의 교묘한 화술에 휘말린 것이다.

‘걸렸어.’

입가에 진한 미소를 지은 유리가 연희를 바라보며 말한다.

“그럼 이 조항도 기억하고 계시겠네요. 3조 제1항. 우리들 중 누군가를 좋아할 때, 뒤늦게 좋아하게 된 사람은 과감하게 마음을 포기해야 한다, 이걸요.”

씨익.

펼쳐든 그물에 확실하게 걸려든 대어를 보면서 유리는 진한 미소를 지었다. 연희라면 당연히 이 조항을 알고 있을 것이고, 자신의 말에 꼼짝없이 걸려들 것이다.

이것을 적절하게 이용한다면 연희를 몰아내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고 보니 그런 조항이 있었네.”

“후후, 언니라면 기억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어요.”

맥이 빠진 듯한 연희의 목소리에 유리가 득의양양한 미소를 짓는다.

혼란 상태에 빠져있던 미영은 유리의 언변에 감탄하고는 눈빛으로 감탄 섞인 칭찬을 보낸다.

‘잘했어! 유리야.’

‘후후! 이 정도는 기본이지. 대신 좀 더 거들어줘. 연희 언니를 여기에서 확실하게 보내야 돼.’

유리의 눈빛을 읽은 미영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금 전 흥분하던 모습을 감춘 채,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연희에게 말한다.

“그러고 보니 그러한 조항이 있었네요. 언니. 후후후!”

상황이 뒤바뀌었다는 것에 만족하며 미영은 즐거운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생각에 잠긴 연희.

그것이 마지막 발악이라 여긴 미영과 유리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떤 방법으로 이 탄탄한 그물망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만약 자신들이 저 상황에 처했다면 꼼짝없이 포기선언을 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마왕은 그녀들과 궤를 달리하는 여인이었다.

입 꼬리를 말아 올린 연희가 미영과 유리의 눈을 하나하나 마주하면서 입을 열기 시작한다.

“그런데 너희 그거 알고 있니?”

“뭘요?”

“난 소녀시대가 아니야. 이게 무엇을 뜻하고 있는지 알아?”

“……!”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짓는 두 사람. 어느새 상황은 바뀌었고, 미소를 지은 건 연희, 표정이 일그러지고 있는 것은 미영과 유리였다.

“소녀시대가 될 뻔한 그룹에서 맹세했던 조항에 굳이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거지. 후후후!”

“으음!”

절로 흘러나오는 침음. 그 모습을 보면서 연희는 미소를 감추지 않았다.

조금 더 이 자리를 즐기고 싶지만 윤아를 너무 오래 놔두었다. 적절하게 시간을 끌어주었으니 이제 슬슬 상황을 마무리해야 할 때였다.

“그래도 너희들이 그렇게까지 말할 정도니 조금은 주의를 해야겠는 걸? 다짜고짜 내게 와서 이렇게 포기하라는 건 조금 이르지 않니? 내게 조금 생각할 시간을 주었으면 하는데.”

“그것도 일리가 있네요.”

“언니가 현명한 판단을 할 거라 믿어요.”

유리와 미영은 당장 연희에게 포기 선언 듣는 것을 무리라 판단하고는 한 발자국 물러선다. 조금 더 몰아쳐서 확답을 받고 싶지만 마왕은 둘이서 합공을 가해도 쓰러지지 않는 강적 중 강적이었다.

끝까지 자신의 의도대로 움직이는 두 사람을 보면서 연희는 미소를 머금은 채 은근한 어조로 두 사람을 자극한다.

“그러고 보니 현 씨와 윤아를 너무 오래 두었네. 내가 보기에는 윤아도 호감이 꽤 있던 것 같은데 단 둘이서 있으면 어떤 상황이 일어나려나…….”

“……!”

은근히 충동질하는 연희의 말에 미영과 유리의 두 눈이 부릅뜨인다.

연희를 견제하느라 미처 자각하지 못하고 있던 윤아의 존재가 떠올랐던 것이다.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지만 좋아하는 남자 앞에 서면 윤아도 한 마리의 여우로 돌변한다.

그것을 깨닫지 못한 채 연희를 견제하느라 둘이서 있게 스스로 자리를 마련해주다니. 미영과 유리 모두 이 부분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결정적으로 단 둘이서라는 말을 강조하였기에 두 사람은 걷잡을 수 없는 불안함에 휩싸였다.

“이야기가 끝났으니 먼저 가볼게요.”

“저도요. 언니도 더 이야기 할 게 있으면 천천히 와요.”

자리에서 일어선 두 사람은 쓰레기통에 종이컵을 버린 뒤 광속의 속도로 연습실을 향해 뛰어나간다.

“후후, 앞으로 지루하지 않을 것 같네.”

허겁지겁 달려가는 두 사람을 보며 미소 지은 연희가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선다.


“하아! 하아!”

“학! 학!”

빠른 속도로 연습실 앞에 도착한 미영과 유리는 잠시 멈춰 서서 거칠어진 숨결을 가다듬는다. 그리고 서로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나직이 끄덕인다.

설마 임초딩이 잠깐의 찬스를 살려 무언가를 했을라고.

그동안 보여준 윤아의 모습을 떠올리며 두 사람은 사정없이 윤아를 무시하면서 곧바로 연습실 문을 열었다.

아무 일도 없을 것이라 생각하며.

하지만 안으로 들어선 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뻣뻣하게 굳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헤헤헤!”

앙큼한 여우는 창현의 허벅지에 대고 누운 채 연신 행복한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아 오셨어요?”

“창현이 너 지금 뭐하는 거야?”

미소를 지으며 반겨주는 창현의 모습을 보면 평소였다면 얼굴을 붉혔을 두 사람이었지만 지금 창현이 윤아에게 해주는 행동을 보고는 눈이 뒤집혀 있는 상황이었다.

‘가, 감히 허벅지에 누워 있다니!’

‘나도 못해본 건데!’

미영과 유리는 당장이라도 윤아를 잡아먹을 듯, 살벌한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는 중이었다.

목숨이 위태로운 당사자인 윤아는 정작 창현의 허벅지에 머리를 대고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중이었다.

“이거요? 윤아 누나가 몸에 열이 조금 나는 것 같아서요. 배게로 사용할 마땅한 게 없어서 이렇게 하게 되었네요, 하하!”

“그, 그래?”

윤아의 몸에 열이 있다는 말에 미영과 유리는 움찔한다. 마땅한 응징을 해줘야 함이 옳지만 아프다고 하니 무어라 하기도 힘든 상황. 하지만 보면 볼수록 속이 뒤집히는 듯했기에 두 사람의 표정은 점점 좋지 않게 변해갔다.

그때, 연습실 문이 열리며 연희가 안으로 들어온다.

“…….”

안으로 들어온 연희는 윤아의 모습을 보고는 한순간 미소가 사라졌다가 다시 원래대로 미소를 짓는다.

그 모습을 보지 못한 창현은 고개를 살짝 갸웃하며 묻는다.

“이야기는 잘 되셨어요?”

“응? 으응, 연희 언니가 좋은 조언을 해줘서 이야기는 잘 끝낼 수 있었어.”

차마 마지막 상황까지 갈 뻔했다는 것을 언급할 수 없었다.

유리의 대답에 미영도 고개를 끄덕이며 곧바로 호응을 해주었다.

“맞아, 연희 언니가 좋게 이야기를 해줬거든.”

두 사람의 이야기에 창현이 감탄한 눈으로 연희를 바라본다.

“누나들에게 기댈 수 있는 분인가 봐요. 이런 이야기를 도통 하는 사람들이 아닌데.”

“아니에요. 애들이 좋게 이야기 해준 건 걸요.”

사심이 담기지 않은 채 반짝이는 눈빛을 보며 연희는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단숨에 녹아들 듯한 저 미소는 백만 불이 아닌, 억만 불이라 해도 인정할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그리고는 조용히 윤아에게 다가가더니, 그녀를 일으켜 세운다.

“윤아야, 현 씨에게 그만 폐 끼쳐야지? 언니가 부축해줄게.”

“언니…….”

한창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윤아는 조금 더 하는 마음에 그만둘 것을 미루다가 미영과 유리의 등장에 조마조마한 마음을 간신히 감추고 있었다.

그러던 중 연희가 자신을 구해주자, 고마움이 담긴 눈빛을 보낸다.

연희가 나직한 목소리로 윤아에게 조언을 해준다.

“여기서 꺾이면 방법이 없으니 둘이 추궁하면 그대로 밀고 나가. 알겠지?”

“네.”

고개를 끄덕이는 윤아. 상황이 어느 정도 일단락되자, 미영은 힐끔 윤아를 본다.

질투심이 가득 담긴 눈빛은 흡사 먹이를 노리는 맹수를 연상시키고 있었다.

‘히잉, 윤아 나빴어. 내가 먼저 도장(?)까지 찍어뒀는데. 하지만 저렇게 착한 것도 창현이의 매력이니까…….’

야속했지만 저것마저도 그의 매력 중 하나였기에 미영은 뭐라 하지도 못한 채 처음 목적으로 돌아간다.

“창현아, 그건 그렇고 우리에게 해줄 이야기가 뭔지 궁금한데…….”

“이야기요? 아아, 그거요. 음! 일단 이야기를 해줘야 하긴 하는데…….”

말끝을 흐리며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는 창현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유리가 의아한 표정으로 묻는다.

“이야기하기 난감한 거야?”

“그렇다기보다는 다른 누나들이 있는 곳에서 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음, 어떻게 해야 하나.”

“우리가 듣고 멤버들에게 이야기해주면 되지.”

“그것도 그러네요. 아무래도 제가 미국 가는 스케줄하고 누나들 스케줄을 맞추는 건 어려울 테니까요.”

미영이 명쾌하게 답을 해주자, 창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수만이 제법 민감한 사안이라고 이야기를 하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동시에 알려줘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렇지. 아쉽긴 하지만 우리들도 스케줄이 있고, 창현이 너도 스케줄이 있으니까. 무엇보다 네가 여기까지 알려주러 왔는데 아무런 성과도 없이 가고, 다시 오게 하는 건 우리가 너무 미안해서.”

독한 어조로 연희를 사정없이 밀어붙일 때와 다른 조신율의 모습에 창현은 살짝 감동한 표정을 짓는다.

조신율의 장점은 그 배역에 완벽하게 몰두하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것이 유리의 본 모습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이 비기로 유리는 창현의 어머니인 지선의 마음을 사로잡는데 성공했다.

“그러네요. 고마워요, 유리 누나.”

“뭘, 당연한 말을 한 것 가지고.”

점수를 땄다고 생각한 유리는 어깨를 으쓱하며 미소를 지었다.

명쾌한 답을 내려준 미영과 유리의 말에 창현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자신이 찾아온 목적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제가 이곳가지 찾아온 이유는요…….”

“……!”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미영과 유리, 그리고 윤아의 눈이 크게 뜨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야기를 듣고 있던 연희의 얼굴에 짙은 아쉬움이 서렸다.


“어? 어어?”

스케줄을 마치고 돌아온 효연은 지금 몹시 어리둥절한 상태였다.

모처럼 단체 스케줄이 있어서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된 효연은 숙소에 있는 것처럼 입담을 과시하지 못했지만 점점 나아지는 자신의 모습에 뿌듯함을 느끼고 숙소로 귀환한 상황이었다.

밖에서 식사를 해결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 있었지만 마왕 연희를 상대로 파견된 용사들이 어떠한 성과를 얻었는지 알기 위해 곧장 숙소로 가야 한다고 해서 아쉬움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 또한 용사들이 어떠한 성과를 얻었을지 궁금하였기에 거절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귀환한 소녀들은 용사들에게서 소기의 성과에 대해 전해들을 수 있었고, 강력한 경고를 해주었다는 말에 흡족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그 다음에 일어났다.

간단한 샤워를 마치고 저녁을 해결하기 위해 주방으로 가려 하는데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세 명이 있지 않은가?

그 세 명은 마왕 연희를 상대하기 위해 연습실로 갔던 미영과 유리, 윤아였다.

“너희들 뭐야?”

다짜고짜 앞을 가로막았기에 효연은 얼떨떨한 어조를 감추지 못했다.

자신을 가로막은 세 사람의 기세가 살벌하였기에 그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어진 그녀들의 행동은 효연으로 하여금 황당하게 만들었다.

“효연아! 피곤하지? 내가 안마해줄게!”

“오늘 식사 당번 내가 대신해줄게! 그러니까 넌 좀 쉬어!”

“언니! 그동안 제가 언니 보고 초딩이라 놀렸죠? 죄송해요. 오늘부터 제가 초딩할게요. 그동안 언니 놀려서 진심으로 미안해요!”

갑자기 자신에게 아양을 떨며 환심을 사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하는 세 사람.

그 모습을 보며 효연은 기쁘다기보다는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불쑥 치솟았다.

‘뭐, 뭐야?’

미안한 이야기지만 지금 자신에게 애교를 부리며 죽으라고 하면 죽을 시늉까지 할 기세인 멤버들은 결코 순수한 목적으로 자신에게 이럴 사람들이 아니었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 것일까.

그것 때문에 효연은 마음이 불편해서 도통 지금 이 순간을 즐길 수…… 없기는 개뿔이다.

‘으흐흐! 뭔지는 몰라도 일단 즐겨야겠지?’

입가에 진한 미소를 지은 효연은 눈을 빛내며 말한다.

“좋아! 유리 넌 식사 당번 대신해주고, 미영이 넌 나 안마 좀 해줘. 요즘 몸이 뻐근하네. 그리고 윤아 넌 그동안 나한테 초딩이라 놀렸으니 대화를 좀 할까?”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지만 기왕 즐기게 된 것 아주 열심히 즐겨주겠다는 효연이었다.

…초딩의 피는 결코 사리지지 않았다.


“뭐야, 저거.”

태연은 마음이 몹시 불편했다.

소녀시대의 위대한 리더이자, 폭군의 난폭한 정치에서 벗어나 진정한 민주주의(?)를 가져온 자신에게도 주어지지 않는 극진한 대우가 지금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그 대상이 자신이라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눈앞에 그 호사를 누리고 있는 존재는 바로 얼마 전에 자신에게 깜찍한(?) 반란을 일으킨 효연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뒤에서는 미영이 연신 헤헤거리며 어깨를 주물러주고 있었고, 유리는 그녀의 심부름을 도맡아서 하고 있었다. 그리고 옆에서는 윤아가 공손한 자세로 앉아 이야기를 나누며 가끔씩 효연의 말에 찔끔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효연이 저런 호사를 누리고 있는 것일까.

다른 멤버들도 궁금했는지 힐끔힐끔 효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 태연은 더 이상 궁금증을 참지 못한 채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너희 왜 효연이한테 친절하게 대하는 거야?”

“…무슨 말이야?”

효연의 아이스크림 심부름을 위해 움직이던 유리가 멈칫하며 묻는다.

자신의 충직한 책사 역할을 하던 유리의 뒤바뀐 모습에 태연은 이질감을 느꼈지만 자신은 현재 소녀시대의 정권을 쥐고 있는 탱통령이다. 결코 물러설 마음이 없었다.

“그렇잖아. 왜 갑자기 효연이한테 저런 친절을 베푸는 건데?”

“이유가 필요해?”

“당연하지 않겠어?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하다가 지금은 극진하잖아. 무슨 연유가 있는 게 분명해 보이는데? 효연이한테 뭐 잘못한 거라도 있어?”

날카롭게 반응했지만 태연의 대응도 만만치 않았다.

쉽지 않겠다는 느낌에 유리는 움찔했지만 대응은 술술 이어졌다.

“그냥 우리가 그동안 효연이한테 너무 막대한 것 같아서 반성을 했을 뿐이야. 다른 건 없어.”

“정말이야? 정말? 정말로?”

유리에게, 미영에게, 윤아에게 번갈아 물어보는 태연이었다.

“…….”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이것들을 그냥…….’

유리의 대답이 정답이 아니란 걸 태연은 확신하고 있었다.

리더인 자신에게 말하지 못할 앙큼한 비밀이라니. 순순히 말했더라면 별다른 일 없이 넘어갔을 텐데 지금 이들의 행동은 잠자던 태연의 성장판을 건드린 상황이었다.

‘얘들이 갑자기 왜 이럴까.’

공통분모를 찾아 빠르게 머리를 굴리는 태연. 구체적인 정황 같은 것을 알아내기에는 무리였지만 태연은 여태까지 까마득하게 잊고 있던 것을 떠올릴 수 있었다.

‘아!’

무언가 떠오른 듯 눈을 빛내는 태연. 그리고는 매서운 눈빛으로 유리를 바라보더니 입을 연다.

“그렇구만. 지금 너희가 효연이에게 이런 호의를 베푸는 이유는 창현이한테 있는 거였어!”

자신감에 넘치는 어조로 외치는 태연이었다.

그리고 그 외침에 여태껏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멤버들의 눈에 이채가 서린다. 태연의 말에 아양을 떨던 세 사람 중 한 명이 반응을 보인 것이다.

그것은 바로 윤아였다.

태연의 외침에 순간적으로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마인드 컨트롤에 능숙한 미영과 유리는 반응하지 않았지만 그녀들에게 있어 윤아는 구멍이었다.

“후훗! 그런 거였어. 너희들은 능숙해도 윤아는 그렇지 않지. 도대체 왜 효연이한테 이러는 걸까? 키워드는 창현이라는 걸 알았으니 답은 간단하게 나오지.”

처음에는 확신하지 못했지만 윤아의 반응을 본 태연은 확신할 수 있었다.

마치 명탐정 누구처럼 자세를 잡은 태연은 애니메이션 속 주인공이 된 느낌을 받으며 자신의 추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놓치고 있었어. 그것이 뭐냐! 라고 묻는다면 간단해. 모두가 연희 언니를 제지하는 것에 정신이 팔려 있지만 실제로 얘네들이 연습실에 간 이유는 연희 언니를 견제하려고 간 게 아니었어. 얘들이 연습실에 간 이유는 바로 창현이가 할 말이 있다고 했고, 그것을 듣기 위해 갔다고 한 거였지.”

“아아…….”

태연의 말을 이해한 다른 멤버들이 나직이 감탄사를 흘린다.

그러고 보니 처음 목적은 연희를 견제하는 것이 아닌, 창현이 무언가 할 말이 있다고 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 장소에 연희가 등장한다는 말에 견제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나머지, 다른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주변의 호응에 힘입어 태연이 자신만만한 어조로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창현이는 원래 목적이었던 말을 했어. 그리고 그것은 아마 효연이와 관련이 있는 것이겠지. 왜냐! 돌아온 뒤에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걸 보면 뻔하거든. 이래도 할 말이 없어?”

“…….”

유리를 추궁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 모습을 보며 태연의 이마에 혈관 마크가 도드라졌다. 그리고는 거세게 콧김을 내뿜으며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흥! 너희가 말하지 않아도 방법은 있지.”

그러면서 태연이 꺼내든 것은 휴대폰이었다. 휴대폰을 연 태연은 곧장 창현에게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당당하게 스피커 폰 모드로 해놓은 태연은 날카로운 눈으로 유리와 미영, 윤아를 훑어보며 말한다.

“진실을 파헤쳐주도록 하지. 각오하도록.”

♩♪♬

컬러링이 조용한 숙소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고, 잠시 후, 컬러링이 끊기면서 창현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여보세요?

“나야, 창현아. 태연이.”

“……!”

갑자기 확 바뀌는 태연의 목소리에 소녀시대 멤버들은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유리를 몰아칠 때 태연의 모습은 마치 야차와도 같았지만 지금은 마치 모든 남자를 녹여버릴 듯한 달콤한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지만 이것은 너무 심했다.

-네, 누나. 갑자기 무슨 일이세요?

“응, 다른 게 아니라 아까 전에 우리 멤버들 만났잖아. 미영이랑 유리, 윤아 말이야.”

-만났죠. 아직 숙소에 들어오지 않았나요? 헤어진 지 꽤 됐는데.

“그러게. 아직까지 들어오지 않아서 걱정이 되네.”

-이럴 때 보면 누나가 정말 리더 같아요. 멤버들을 그렇게 걱정하는 걸 보면 말이에요.

“그래? 고마워.”

멤버들을 억압하고 권력을 휘두르는 탱통령이 어느덧 멤버들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리더가 되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창현의 생각을 고쳐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지금의 태연을 건드리는 것은 그야 말로 자살 행위. 언제고 찾아올 기회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로도 하하호호 창현과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던 태연은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꺼내놓기 시작한다.

“다른 게 아니라 애들에게 해주려는 이야기가 있다고 했잖아.”

-네, 있었죠. 그리고 해줬고요.

“그런데 우리는 듣지 못해서 말이야. 기다릴까 했지만 워낙 늦어서 말이야. 그래서 궁금해가지고 전화를 하게 됐어. 직접 알려달라고 하면 실례가 될까?”

-딱히 실례는 아니에요. 제가 굳이 만나서 이야기하자고 한 건 좀 더 자세히 이야기를 해줄 수 있어서 그런 건데…….

살짝 부정적으로 말했지만 태연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면 자세한 건 애들이 오면 물어볼 테니까 간략하게만 이야기를 해주면 안 될까? 사실은 애들이 이걸 가지고 약올려서 그런 거거든.”

졸지에 장난꾸러기로 만들어버리는 태연이었다.

-그래요? 이런, 그러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했는데. 그럼 간략하게만 알려드릴게요.

“응응, 고마워.”

‘우웩!’

콧소리를 섞으며 귀엽게 애교를 부리는 태연을 보며 소녀시대 멤버들은 속이 매스꺼워짐을 느껴야만 했다.

-다른 게 아니라 제가 얼마 후면 미국으로 가잖아요.

“응응.”

-그런데 SM엔터테인먼트에서 협력 요청이 들어왔고, 저희 회사 측에서도 그것을 긍정적으로 검토한 뒤, 수락을 했어요.

“협력 요청? 뭔데?”

창현이 직접 이야기를 한다면 그와 관련된 협력 요청일 것일 터.

도대체 무엇일까.

궁금증이 점점 증폭되어 갈 때, 적절한 타이밍에 창현의 말이 작렬하였다.

-누나들이 촬영하는 프로그램에서 미국에 갈 일이 있다고 해서 며칠 미국에 머무를 동안 제가 협력하기로 했거든요. 공연에 서면 VIP로 온다거나, 이런 식으로요.

“……!”

이야기를 듣던 여섯 멤버의 눈이 부릅뜨였다. 마치 번개를 맞은 것 마냥 등골에 소름이 돋으며 전신에 퍼져나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창현이와 미국 여행이라고?

그가 말하고자 했던 대박 건수가 마침내 소녀시대 숙소 한복판에서 터지고 말았다.


“미, 미국으로 여행을? 우, 우리가?”

머릿속으로 대박이라 생각하면서 태연은 말을 더듬으며 창현에게 확인 차 묻는다.

-여행은 아니에요. 말 그대로 촬영 일정에서 제가 약간의 협조를 하겠다는 거죠. 그것만으로도 상당한 파급력이 있다나 뭐라나? 길지는 않고 약 3일 정도 함께 움직이게 될 것 같아요.

여행이 아니라는 말에 아쉬움을 느꼈지만 3일 동안 함께 움직인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이었다.

미국으로 가게 되면 보지 못하니까.

‘그래서 쟤네들이 저랬던 거네. 응? 쟤네들이 저래?’

속으로 궁시렁거리며 미영과 유리, 윤아를 한 차례씩 째려보던 태연은 무언가를 깨닫고는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창현을 향해 물어보았다.

“호, 혹시 우리들 중 일부만 가는 거야?”

-네, 총 두 명이요.

“그, 그렇구나.”

그래서 저 두 명이 간이라도 빼줄 것처럼 효연에게 아양을 부렸던 것이다.

‘그런데 효연이한테 왜?’

의문이 불쑥 든 태연은 그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창현에게 물어보았다.

“그 두 명을 선정하는 기준이 뭐야?”

자신의 불길한 예감이 들어맞지 않길 바라면서 태연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하지만 나쁜 예감은 반드시 들어맞는 법이다.

-아, 그 부분에 대해서 회장님이 제게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고 해서 독단적으로 결정을 내렸거든요. 그 뭐냐, 제가 저번에 갔을 때 효연 누나한테 생일 선물 겸해서 선택권도 줬어요. 왜 그런 거 있잖아요, 왕 게임 같은 거. 왕 한 번 되보라고 드린 거죠, 후후!

창현의 말은 소녀들의 귓속에 똑똑히 박혀들었다.

태연은 가슴이 철렁했지만 가까스로 그 감정을 참아내며 마무리한다.

“으응, 그래. 알았어. 그럼 우리가 효연이한테 이야기를 잘 해서 두 명 정하도록 할게.”

-네, 그럼 수고하세요.

그렇게 통화가 끝났다.

“…….”

그 뒤에 숙소에 들이닥친 것은 폭풍전야의 고요한 침묵.

소녀들은 각각 머릿속으로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며 앞으로의 상황에 대해 계산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그녀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한 사람에게 향하고 있었다.

순식간에 모든 전권을 쥐게 된 인물!

멤버들의 시선을 받은 효연은 입 꼬리를 말아 올리더니, 턱을 치켜들고 다리를 꼰 채 발을 까딱이며 낮은 웃음을 흘린다.

“후후, 그렇다는데?”

소녀시대 숙소에 진정한 왕이 강림하였다.


“잠깐만!”

졸지에 효연이 왕으로 군림하게 된 분위기를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선 사람이 있었다. 바로 소녀시대의 정권을 쥐고 있는 태연이었다.

“왜, 무슨 할 말이라도 있어, 탱구 양?”

입가에 진한 미소를 지은 효연이 편하게 등을 기댄 채 거만한 어조로 태연에게 말한다.

그 모습에 태연은 욱했지만 지금 전권을 쥐고 있는 것은 효연이었다. 최소한 그녀에게 밉보이는 짓을 하면 손해를 보는 것은 자신이었다.

‘하필이면 이렇게…….’

상황이 꼬여도 단단히 꼬여버린 셈이다.

얼마 전 창현이 앨범을 내면서 그것을 받은 것을 보고는 효연과 사이가 상당히 어색해졌다.

그것을 감안하면 자신이 미국에 갈 가능성은 매우 희박했다.

‘어떻게 해야 되지?’

머리를 맹렬히 굴려보지만 뚜렷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얄미운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효연에게 굽실거리는 건 죽어도 싫었다.

“효연이 넌 어떻게 할 생각인데?”

“뭘?”

“미국에 가는 거 말이야.”

“음! 글쎄? 그거야 뭐 지금부터 천천히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

싱글벙글 미소를 지은 채 한껏 여유를 부리는 효연은 급할 것 없다는 듯 말한다.

“으윽!”

신음를 흘리며 뒤로 물러선 태연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허탈함을 느꼈다.

자신의 왼팔, 오른팔 역할을 해주던 미영과 유리가 지금은 효연에게 찰싹 달라붙어 그녀의 환심을 얻기 위해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다른 멤버들 또한 힐끔힐끔 효연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고 있었다.

“…….”

그러한 멤버들의 모습에 태연은 자신이 혼자가 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멤버들의 압도적인 지지(?) 속에 정권을 장악했지만 지지를 받지 못하는 지금은 끈 떨어진 동네 샌드백 탱구에 지나지 않았다.

진한 이질감을 느끼는 태연을 두둔하고 나선 것은 주현이었다.

“효연 언니, 일단 창현이가 언니에게 선택권을 주었지만 최대한 빠르게 정해야 창현이도 난감하지 않고 준비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내,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 그거야.”

태연은 자신의 편을 들어준 주현에게 무한한 고마움을 느끼면서 그 말을 인정하고 나섰다.

“그렇기도 하네.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지 뭐. 후후!”

쿨한 성격답게 효연은 주현의 말을 흔쾌히 인정한다. 그러면서 태연을 바라보며 묘한 미소를 짓는 것을 잊지 않았다.

“…….”

효연의 행동에 태연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미국에 가는 건 포기해야 할 듯 싶었다.


“아까 전에는 왜 태연이를 두둔한 거야?”

한 차례 소란이 흘러가고, 방안에는 수연과 효연, 주현이 자리하고 있었다.

수연은 조금 전 고립되었던 태연을 두둔하고 나선 주현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표정을 살짝 찌푸린 채 주현을 추궁하였다.

한때 강력한 카리스마로 멤버들을 벌벌 떨게 만드는 수연의 말이었지만, 그녀의 만행(?)을 알아차린 주현에게 있어 수연은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다.

도리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수연의 눈과 마주한 채 또박또박 자신의 논리를 펼쳐나가기 시작했다.

“조만간 전세를 뒤집으려면 지금부터 그렇게 압박을 주어서는 안 되죠. 태연 언니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채고 대비를 하면 어쩌시려고요?”

“그건…….”

“일을 시작하셨으면 마무리 하실 때까지 방심하셔서는 안 되요. 제가 나선 건 태연 언니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지 못하게 하려고 한 거고요.”

“그, 그래.”

강력한 주현의 반격에 수연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다시 권력을 차지할 자신이 막내에게 맥없이 밀린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음일까, 수연은 효연에게 시선을 옮기며 은근한 어조로 묻는다.

“미국에 가는 티켓은 어떻게 할 예정이야?”

“글쎄? 탐나나 봐? 후후!”

“…….”

입매를 비틀며 말하는 효연의 모습에 수연은 아무 말도 못했다.

그녀의 말처럼 탐이 나는 것이 사실이었으니까.

“제 생각에는 이번 미국행 티켓이 결정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그렇게 말을 꺼낸 주현이 효연에게 말한다.

“언니, 미국행 티켓을 유리 언니와 수영 언니께 주시는 게 어떨까요?”

“유리와 수영이한테? 그건 왜?”

자신의 이름이 언급되길 은근히 기대하던 수연이 실망한 어조로 묻자, 주현은 대수롭지 않게 말한다.

“유리 언니와 수영 언니를 꼬드길 수만 있으면 전세는 완벽하게 뒤집혀요. 태연 언니가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건 양대 책사인 미영 언니와 유리 언니가 있어서 그렇잖아요.”

“그럼 파니와 유리를 보내는 게 더 좋잖아?”

의아한 듯 효연이 묻자, 주현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며 말한다.

“미영 언니는 제가 이미 설득해놓았어요.”

“어, 어떻게?”

수연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주현을 바라보았다. 미국 출신인 만큼 Give & Take 정신에 충실한 미영은 띨파니라는 별명답지 않게 설득하기 상당히 까다로운 위치에 놓여 있었다.

지금 태연에게 받는 것 이상을 주지 않으면 끌어들이는 것이 애시당초 불가능했기에 섭외 대상에서 제외를 해놓았었는데 주현이 이미 설득을 했단다.

“열심히 설득했어요. 아주 열심히…….”

속에서 치솟아 오르는 질투의 감정을 억누르며 주현이 말한다.

미영을 설득하기 위해서 자신이 야심차게 준비한 계획을 고스란히 그녀에게 헌납해야 했기에 분한 마음이 절로 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도…….”

수연은 여전히 가고 싶은 마음을 버리지 못한 듯 미련을 보였다. 미국이라면 그야 말로 자신의 홈 그라운드와 같은 곳. 그곳에서 3일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함께 하지만 홈 그라운드라는 느낌은 자신에게 새로운 전투력을 불어넣어줄 것이란 것이 수연의 생각이었다.

자신에게는 익숙한 환경. 그리고 창현에게는 덜 익숙하면서 좀 더 개방적인 곳, 그곳에서 자신은 자연스럽게 리드를 하고 새로운 역사를…….

“안 돼요.”

“왜, 왜?”

단호하게 끊어버리는 주현의 말에 수연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묻는다.

“어차피 그곳에 가더라도 촬영을 위주로 해야 하기에 언니가 꿈꾸는 그런 건 불가능해요. 3일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자유시간이 주어져도 얼마나 주어지겠어요? 게다가 창현이가 말해주길, 미국 활동은 꽉꽉 압축해놓은 형태라서 개인 시간을 거의 가질 수가 없다고 해요.”

“그, 그렇구나.”

창현에 대해 빠삭하게 꿰고 있는 주현의 말에 수연은 고개를 끄덕인다.

“차라리 이걸 미끼로 유리 언니와 수영 언니를 설득하면 언니가 정권을 장악할 수 있죠.”

“그래…….”

“잠깐, 잠깐, 이건 나에게 주어진 권한이라고.”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효연이 제지하고 나선다.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인데 누구 마음대로 누구에게 주라니 뭐라니 한단 말인가!

“언니는 누구에게 주실 생각인데요?”

“그, 글쎄? 일단 두 명이라니까…….”

“제가 살짝 들었는데, 미국 가는 건 정말 좋지가 않아요.”

“그, 그래?”

귀가 얇은 효연은 그 말을 듣고 혹한다.

“믿을 만한 곳에서 들은 정보니까 믿으셔도 좋아요.”

믿음직한 정보일 수밖에 없다. 주현의 정보는 Made in 시아버지 표 정보였으니까. 3일 동안 빡빡하게 촬영하여 얻을 것만 얻어가는 것이기에 자유시간은 거의 없을 예정이었다.

그걸 전해들은 주현은 일찌감치 포기하고 개인 계획을 수립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 정보를 얻은 건데?”

“실은 세희 언니에게 들었어요.”

“그, 그렇구나.”

날카롭게 질문을 해본 수연이었지만 주현의 자연스러운 방어에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나도 다음에는 세희 언니에게 물어봐야겠다.’

이미 주현이 확보해놓은 확실한 경로보다 훨씬 약한 경로를 개척하겠다고 야무지게 결심하는 수연이었다.

주현의 논리정연한 설득에 허점을 파악할 수 없었던 수연과 효연은 더 이상 반박할 말이 없었다.

단지 선택권을 쥔 효연은 살짝 불만을 가지고 있을 뿐.

“하지만 이렇게 일찍 정하면 재미가 없어지는데…….”

한껏 왕 노릇을 할 단꿈에 젖어있던 효연이 아쉬운 듯 중얼거리자, 주현이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그럼 왕의 기분을 느끼실 대로 느낀 뒤 마지막에 결정을 내리면 되죠.”

“…….”

아주 적절한 주현의 방법 제시에 수연과 효연은 주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순진무구한 막내는 어디로 사라지고 계략에 능한 막내가 되었을까.

잠깐이지만 동시에 소름이 돋은 수연과 효연이었다.

그렇게 미국행 티켓은 유리와 수영을 정해놓은 상태로 효연은 한껏 왕 노릇을 하게 되었다.

세상은 원래 시상자를 정해놓고 대회를 여는 법이다.




제92장 반지의 제왕




<Devil Cry> 이후 서서히 스케줄을 줄여나가던 창현은 어느 시점부터 스케줄을 완전히 정리한 채 미국 진출을 위한 준비를 해나가기 시작했다.

현지 레이블과 계약을 맺은 뒤, 본격적인 미국 스케줄을 잡아나가기 시작했고, “가능하면 짧고 굵게!” 라는 창현의 바람대로 석규는 짧고 굵은 스케줄을 잡아주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잡힌 스케줄을 보는 순간, 창현의 입에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하하.”

“하하! 그래, 아주 잘 짜여진 스케줄이지. 흡족하지?”

석규는 자신이 잡아준 스케줄을 창현이 만족하는 거라 생각하며 마주 웃음을 지어주었다.

하지만 그 순간 창현은 웃음을 뚝 그친 채 날카로운 눈으로 석규를 바아보았다.

“…아버지.”

“왜 그러냐?”

“지금 장난하세요? 이걸 정말 제가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시는 거예요?”

날카로운 어조로 석규에게 따지는 창현. 분명 짧고 굵게 잡아달라고 한 것은 그였지만 이것은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지금 석규가 잡아온 스케줄은 말 그대로 살인 스케줄이었다. 하루 3시간 이상의 수면 시간을 보장하지 못할 죽음의 살인 스케줄. 이것을 하다가는 몸이 열 개라 해도 버텨내지 못할 것임이 분명했다.

“하, 하하! 그렇지? 장난 한 번 쳐봤다. 짧고 굵은 걸 원한다고 해서 저번에 갔던 것보다 더 타이트한 걸 원하는 줄 알았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아무리 타이트하더라도 작년에 활동했던 것처럼 팍팍한 스케줄은 사양이었다.

그때와 같은 스케줄을 다시 하라고 하면 기겁할 테니까.

“일단 잡은 스케줄 표는 이거다. 대충 네가 원하는 선에서 맞춰보기는 했는데, 어떨련지는 잘 모르겠구나.”

석규가 새로 건네주는 스케줄 표를 받아든 창현은 눈으로 빠르게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만족한 듯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네요. 이 정도면 저도 어느 정도 휴식을 취하면서 할 수 있을 것 같고요. 다만 전보다 훨씬 굵직한 스케줄이 많아졌네요?”

“후후! 미국에서 그만큼 네 인기가 치솟았다는 뜻 아니겠느냐? 그동안 미국에 있는 네 팬들이 꾸준히 동향을 살폈고, 이번 4집 앨범에 지대한 관심을 드러내고 있지. 특히 계단 춤이라는 것을 한 번 보고 싶다고 난리더구나.”

“하지만 국내에서 먼저 발매해서 좀 그렇지 않을까요?”

“전혀 안 그렇다고 보면 된다. 어차피 그곳에서는 영어 버전으로 새로 출시될 것이고, 이미 한국어 버전으로 들은 만큼 구매욕을 당기고 있으니까. 미국에서는 어린 소년이 드디어 성인이 되어간다고 하면서 오히려 좋아하더구나.”

“반응이 나쁘지 않다니 다행이네요.”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될 게다.”

‘오히려 좋아서 문제지. 소년에서 성인이 되어간다. 이걸로 어필을 해놓았으니 반응도 뜨거울 테고. 성인이 되는 과정은 제법 괴로울 게다. 후후!’

입가에 묘한 미소를 띤 석규를 보았더라면 창현은 그가 다른 생각을 갖고 있음을 알았을 테지만 불행하게도 그 표정을 보지 못한 채 미국 내 반응에 만족하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미국으로 가기 전 집에 한 번 들리도록 해라.”

“집이요?”

“그래, 지선이가 너를 꼭 한 번 데려오라고 하더구나. 아들이 미국으로 가는데 제대로 된 파티 하나 열어주지 못하면 엄마 노릇을 제대로 못하는 거라나 뭐라나?”

“그, 그런가요?”

엄마 노릇이라는 말에 창현은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지선이 자신의 엄마라는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아직까지는 엄마보다는 어머니라는 단어가 더 익숙했다.

그것은 자신의 돌아가신 엄마를 좀 더 소중하게 간직하기 위함이었다.

창현이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자, 그를 조용히 바라보던 석규가 입을 연다.

“…난 네가 지선이를 받아주어서 늘 고맙다고 생각하고 있다. 불화 없이 이렇게 자연스럽게 융화될 수 있었던 것은 너와 지선이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겠지. 그 부분에 대해서 항상 고마워.”

“고맙긴요. 가족으로써 당연히 해야 할 행동인 걸요.”

“하하! 그렇게 생각해주면 더욱 좋지. 이번에 아현이를 대하는 네 모습을 보면서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 있기도 했고. 그러니 한 번 오도록 해라. 지선이가 한 번 실력을 발휘하겠다고 하니.”

“물론이죠. 언제쯤이 좋을까요?”

“언제쯤? 잠시만 기다려봐라.”

창현이 흔쾌히 허락하자, 석규가 핸드폰을 열어 지선과 연락을 시도하기 시작한다.

“그래, 그래서 창현이가 허락했어. 그래? 으음! 일단 물어보고 그렇게 하도록 할게. 바로 연락할 테니까. 알았어. 그럼 다시 전화하도록 하지.”

지선과 통화를 끝낸 석규가 창현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약간 어색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창현아.”

“네, 아버지.”

“지선이가 오늘 바로 데려오라고 하더구나. 네 음식 실력이 뛰어나니 같이 만들자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냐?”

“어머니가요? 하하, 저야 좋죠.”

약간 막무가내식이었지만 창현은 좋은 듯 웃음을 터뜨렸다.

집에서 파티를 하게 되면 음식을 만들어야 할 텐데 지선이 혼자 만들면 괜히 자신에게 부담이 된다. 오히려 오순도순 같이 만들면서 함께 하는 것도 좋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어차피 할 일도 없으니까요. 집에 음식 재료는 충분한가요? 그렇지 않으면 같이 장을 봐야 할 것 같은데…….”

“잠시만 기다려라.”

다시 핸드폰을 연 석규가 지선에게 연락을 시도했고, 이러저런 이야기를 나누더니, 통화를 끝낸 뒤 말한다.

“재료가 부족하다고 하구나. 할 수 있으면 함께 장을 보자고 하는데, 음! 네가 부담되면 하지 않아도 되고.”

“아니요, 저도 장 정도는 볼 수 있죠. 평일이고, 시간도 이른 시간이니 소란을 몰고 다닐 것 같지도 않고요. 매니저 형이랑 같이 가면 되겠네요.”

“음,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해라. 최 매니저에게 말해둘 테니까.”

“알겠어요.”

로드 매니저를 이런 식으로 이용하는 것이 조금 미안했지만 한두 명쯤 방패막이가 필요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회사를 나선 창현은 AA엔터테인먼트에서 새로 구입한 작은 벤을 타고 이동하기 시작했다. 스타크래프트 벤은 그의 상징과도 같게 된 것이라서 움직이는데 제약이 많았기에 다른 차를 선택했다.

벤은 곧장 석규의 집으로 향했고, 집밖으로 나와 아현이를 안고 있던 지선이 벤을 발견하고는 곧장 그곳으로 향했다.

안에서 문을 열어준 창현이 문을 열어주며 지선에게 인사를 한다.

“어서 오세요, 어머니.”

“직접 오라고 해서 폐가 된 건 아니지?”

살짝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창현에게 묻는 지선이었다. 자신의 아들이지만 친아들이 아니고, 슈퍼스타이다 보니 창현을 대하는 태도가 무척 조심스럽다.

“아니에요. 하나도 폐가 되지 않았으니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그래도 되겠니?”

“물론이죠. 오히려 그렇게 대하시면 제가 불편해요, 하하!”

자연스럽게 어머니와 아들로 융화되었지만 아직까지 몇 겹의 벽이 남아있는 상태였다.

이 몇 개의 벽을 창현은 오늘 깨고자 하였다.

서서히 다가가는 것도 좋았고, 단번에 깨는 것도 좋았다.

다만 오늘 깨달은 것은, 더 이상 자신의 가슴 속에 어머니에 관련된 상처는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아버지의 재혼을 찬성한 것이겠지?’

상처가 여전히 남아있었다면 자신은 석규가 어머니를 버리고 새로운 결혼을 하려고 한다 생각했을 테니까. 하지만 더 이상 마음속에 남은 것은 상처가 아닌, 소중한 추억이었다.

차에 탄 지선은 품에 안겨있는 아현이 바동거리는 것을 보고는 미소지었다.

“후훗! 아현이가 오빠를 보고 싶어서 바동거리네?”

그러면서 품에 안겨있던 아현을 창현에게 넘겨준다.

익숙한 자세로 아현을 받아드는 창현. 아현을 안아든 뒤 살살 흔들며 눈을 마주하자, 환한 웃음을 짓는다.

“귀엽네요, 역시.”

“호호! 네 동생이잖니. 당연히 귀여워야지.”

“그럼요. 아참, 아무래도 장을 보는데 제가 면허도 없고 해서 매니저 형이 도와주기로 하셨어요.”

안 그래도 왜 벤이 와 있나 고개를 갸웃하던 지선은 창현의 말에 놀란 표정을 지으며 로드 매니저를 바라보았다.

“어머나, 그러니? 정말 고마워요, 항상 창현일 보조해주느라 고생하실 텐데.”

“아닙니다, 사모님.”

“아니라니요, 고생하시는데 당연히 감사의 인사를 해야죠. 이럴 게 아니라 그이한테 이야기해서 보너스라도 조금 드리라고 해야겠네요. 호호!”

“아이고, 말뿐이라도 감사합니다, 사모님.”

그렇게 말하지만 로드 매니저의 입 꼬리가 점점 찢어지고 있었다. 석규가 상당한 공처가라는 것은 회사 사람들도 알고 있는 만큼 보너스는 정해진 수순이다.

부아앙!

로드 매니저의 기분 좋음이 반영된 벤은 신속하게 마트를 향해 가기 시작했다.


마트에 도착하자, 로드 매니저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점심식사를 해결하러 갔고, 창현과 지선은 카트를 뽑아들고 곧장 움직이기 시작했다.

“죄송해요, 어머니.”

“아니란다. 이게 뭐 어렵다고.”

“그래도…….”

“아현이가 오빠를 너무 좋아해서 그런 거잖니. 그러니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단다.”

“네…….”

원래는 카트를 밀고 다니려던 창현이었지만 아현이 자꾸만 그에게 붙어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했기에 하는 수없이 지선이 카트를 밀고 있었다.

창현은 괜찮다고 하면서 자신이 밀겠다고 했지만 지선은 거듭 괜찮다고 말하며 자신이 밀겠다고 하였다.

주차장에서 매장이 있는 아래층으로 내려가기 시작하자, 주변에서 웅성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얼굴을 가리지 않았기에 창현을 알아보는 사람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알아보는 사람이 많네? 당연한 건가? 창현이는 슈퍼스타니까. 호호!”

창현을 알아보는 사람이 많자, 지선은 괜히 자신이 뿌듯해져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하, 이 상황이 오히려 아현이한테는 안 좋을 것 같은데.”

“아현이는 오히려 즐기는 것 같은 걸?”

그 말에 슬쩍 품에 안고 있는 아현을 보니, 오히려 방긋방긋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하! 저처럼 무대 스타일인가 봐요.”

“호호! 그러게.”

마트에서 장을 보던 수많은 사람들이 창현과 지선을 둘러싸고 있었지만 가급적 신경을 쓰지 않은 채 움직이며 오늘 파티에 쓸 음식 재료를 고르고 있었다.

“창현아! 잠시 이리로 오렴.”

“네? 네.”

막 고구마를 카트 안에 넣던 창현에게 지선이 손짓하였고, 그 손짓에 창현은 재빨리 다가갔다.

식품 코너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사람은 이십대 중반의 여인이었는데, 음식을 맛보게 하기 위해 시식 코너에서 고기를 굽고 있었다.

“응? 뭐지?”

마트가 갑자기 소란스러워진 것을 느낀 그녀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하다가 그만 눈앞이 아찔해지는 것을 느꼈다.

“헉!”

여인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요즘 최고의 주가를 달리고 있던 현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아기를 안은 채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안구가 정화되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눈앞에 슈퍼스타가 모습을 드러낸 것만으로 여인의 몸은 빳빳하게 굳어버렸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창현과 지선은 식품 코너에서 음식을 살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맛있을 것 같지 않니?”

“괜찮을 것 같긴 하지만 맛을 모르는데…….”

“지영이가 이런 걸 좋아하거든. 하나쯤은 사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런가요? 그럼 사는 게 좋겠네요. 하지만 맛을 한 번 보고 사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자신은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지영이 원한다면야 하나쯤 사는 게 좋으리라.

“그럼 하나 먹어보렴.”

“그래야죠.”

그리고 고기를 먹으려던 창현이 순간 멈칫했다. 지금 양손으로 아현이를 안고 있어서 음식을 먹는 게 불가능했던 것이다.

지선도 그것을 깨닫고는 아! 하는 표정을 짓다가 저 멀리 놓여있는 카트를 보고는 여전히 굳어있는 여인에게 부탁한다.

“아! 그러고 보니 카트를 저기 놓고 왔네. 저기 아가씨?”

“네, 네?”

굳어있던 여인은 지선의 물음에 얼떨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죄송한데 이거 하나 찍어서 창현이한테 좀 먹여주실 수 있으세요?”

지선이 손으로 가리키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창현이었다.

“제, 제가요?”

“그럼 부탁 좀 드릴게요.”

그렇게 말한 지선은 카트를 가지러 가버렸고, 자리에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창현을 바라보고 있는 여인만 남게 되어버렸다.

쓴웃음을 지은 창현이 여인을 바라보며 말한다.

“한 점 먹어보고 구입 여부를 정하려고 하는데, 신세 좀 져도 될까요?”

“무, 물론이죠.”

빠르게 계산이 되지 않았지만 머릿속에서 연신 대박이라는 신호가 뜨고 있었고, 여인은 자신에게 온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재빨리 고기 한 점을 찍어준 여인은 그대로 창현의 입가에 가져간다.

살짝 고개를 옆으로 뺀 창현은 입을 벌리자, 첫 날 밤을 맞이하는 새색시마냥 얼굴을 붉힌 여인이 고기 한 점을 입에 넣어준다.

창현의 입에 고개를 넣어주는 여인의 머릿속에는 이런 메시지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띠리링! 가수 현에게 최초로 고기를 먹여준 사람 타이틀을 획득하셨습니다.]

등록금을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계를 탄 여인이었다.


마트에 출몰한 창현은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가져다 주었다.

장을 보러 왔던 사람들에 의해 촬영된 창현의 장보는 장면은 당연 화제가 되었는데, 그 중에도 우연찮게 기자가 있었는지, 오후 3시 무렵, 기사가 올라와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었다.

기사의 내용은 평범한 사람 가운데서 빛나는 현에 관련된 것이었고, 사진은 막내 동생인 아현이를 정 듬뿍 담긴 표정으로 바라보며 노래를 불러주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본 네티즌들은 현의 새로운 모습을 본 것에 환호하면서 그동안 떠돌던 현의 팔불출설이 사실로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다.

“이건 이렇게 해도 될까요?”

“응, 그렇게 해도 되겠네. 창현이가 요리를 참 잘하네?”

“그런가요? 그래봤자 어머니한테는 안 되죠.”

집으로 향한 창현은 지선과 함께 파티에 쓰일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아현이를 재운 뒤 부엌으로 향한 두 사람은 음식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재료를 가다듬기에 바빴다.

슈퍼스타인 아들이 요리에 빠삭한 모습을 보이자 지선은 제법 놀란 표정이다.

“아버지가 일에 몰두할 때 음식을 제가 도맡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아요. 돈이라도 있었으면 시켜 먹었을 텐데 그게 안 되니 해먹는 수밖에 없잖아요.”

“그러니?”

창현의 말에 지선은 자신의 마음이 싸하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

석규에게 창현의 과거에 대해 이야기를 어느 정도 들은 상황이었다. 자신이 신경을 써주지 못해서 창현의 마음속에는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심각한 공백이 존재하고 있으며, 그것을 채워줘야 하는 것이 바로 가족의 역할이라고 하였다.

아닌 척 티를 내지 않지만 지선은 창현이 무척 외로워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삭삭.

조용히 아채를 다듬는 소리만 들리는 가운데, 지선이 창현을 향해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창현아.”

“네, 어머니.”

“미국 활동 이후에 혼자 사는 걸 접고 같이 집에서 사는 게 어떠니?”

“집으로요?”

“그래, 그렇게 하면 가족들과 함께 오순도순 살 수 있잖니. 그것이 더 좋게 보일 것 같고.”

무척 조심스럽게 말을 하는 지선이었다.

“같이 사는 것도 있지만 지금은 일에 더 치중하고 싶어요. 괜히 제가 함께 살면 가족들에게 피해가 끼칠 것 같기도 하고요.”

“그러니? 창현이 넌 생각이 깊은 아이니 그게 옳을지도 모르겠네.”

“옳은 건 모르겠지만 혼자 사는 게 여러모로 편하긴 하더라고요. 사실 가족들에게 피해를 끼치는 건 그에 대한 핑계죠, 하하!”

자신을 한껏 띄워주는 지선의 말에 어색한 웃음을 짓는 창현이다.

“…….”

그 후, 주방에 자리한 것은 어색한 침묵이었다. 지선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고, 창현은 선의로 제안한 지선의 말을 거부한 것이 껄끄러웠기에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무겁게 가라앉은 침묵을 깬 것은 아현의 울음소리였다.

“으아앙!”

“아현이가 깼나 보네요. 제가 갔다올게요.”

“그, 그래.”

빠르게 주방을 벗어나는 창현을 보며 지선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방으로 향한 창현은 울고 있는 아현이를 안아들었다.

대소변을 본 것이 아니라 잠에서 깬 직후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고는 지독한 외로움을 느껴서 울음을 터뜨린 것이다.

“자장자장, 우리 귀여운 아기. 예쁘게 잠들렴, 우리 귀여운 아기.”

흥얼거리던 멜로디로 즉석 자장가를 만들어낸 창현이 포근하게 안아주며 노래를 불러준다.

울고 있던 아현이는 창현의 노래에 마음이 편안해졌는지 서서히 울음을 그치며 잠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천사처럼 귀엽게 잠든 아현이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창현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우리는 조금 닮았을지도?”


“다녀왔습니다! 어, 오빠?”

“어서 와.”

학교 수업을 마친 뒤 집으로 돌아온 지영은 자신을 반겨주는 창현을 보면서 순간 눈앞이 아찔해지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자신을 반갑게 맞이해주는 꽃미남의 앞치마 차림이라니!

순정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환상적인 전개에 지영은 가슴 속에서 무언가 꿈틀하는 것이 느껴졌지만 그것을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다.

“오빠가 갑자기 이곳에 무슨 일로……?”

“아버지에게 말을 못 들었나? 오늘 연습은 없어. 내가 미국으로 갈 예정이라서 집에서나마 작게 파티를 열기로 했거든.”

“그, 그런 거야?”

“그런 거지. 옷 갈아입고 좀 쉬고 있어. 아직 음식을 만들려면 시간이 좀 걸리거든.”

“오빠도 음식 만드는 거야?”

“물론이지. 기대해도 좋을 거야.”

미소를 지으며 창현이 말하자, 지영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응! 누구 음식인데! 당연히 기대해야지.”

“하하, 그래. 기대해주는 사람이 있으니 기분 좋네. 그럼 옷 갈아입고 와.”

“응, 오빠!”

활기찬 어조로 대답한 지영은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교복을 벗고 평상복으로 갈아입기 시작하였다.

“가만! 그러고 보니?”

옷을 갈아입은 지영은 방밖으로 나가려더가 무언가 떠오른 듯 입가에 묘한 미소를 짓는다.

핸드폰을 잡아든 그녀는 곧장 문자메시지 작성란에 들어가더니 누군가에게 문자를 작성하기 시작한다.

아주 얄미운 어조를 한껏 담아서.

[후훗! 나 지금 오빠가 직접 해주신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가요. 오빠의 정성이 듬뿍 들어간 음식! 누구는 먹어본 적 있으련지 몰라.]

고심에 고심을 한 끝에 작성한 지영이 문자 보내기를 꾸욱 누른다.

자신이 보낸 문자 내용에 만족하며 지영이 진한 미소를 지었다.

“히히! 이제 약이 올라 죽으려 하겠지?”

그녀가 문자를 보낸 대상은 다름 아닌 유리였다.

방해를 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지선을 자신의 편으로 만든 유리의 수법을 보고 지영은 경계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상황에 어울리는 완벽한 행동력과 언변은 지영으로 하여금 이성에 관심이 없는 창현이 정말 함락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심어주었으니까.

유리와의 약속으로 인해 방해를 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약올리지 않겠다고 한 것은 아니었다.

“어떤 답장이 올까나.”

입가에 미소를 지은 지영은 유리의 답변을 기다렸다.

그녀가 약올라 죽으려 하는 표정을 상상하니 입가에는 절로 미소가 맺혀 있었다.

부르르.

잠시 후, 핸드폰에 진동이 울리며 유리의 답장이 날아왔다.

“…….”

빠르게 핸드폰을 열어 유리의 답장을 확인한 지영의 표정이 형편없이 구겨지기 시작했다.

[창현이 음식? 상당한 실력이라던데 축하해! 지금 내가 맛보지 못하는 게 아쉽지만 곧 있으면 창현이가 나만을 위한 음식을 해주겠지? 정말 기대된다. 과연 창현이가 어떤 음식을 해줄까? 지영이는 어떻게 생각해? ^^?] 내숭100단 유리언니

“이익!”

유리의 답장을 본 지영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약 오르라고 문자를 보냈건만 오히려 자신을 놀리는 듯한 어조로 한껏 꿈에 부풀어 이야기를 하는 모습이라니.

당장 악담을 퍼부어주고 싶지만 정말 유리라면 이렇게 될 수도 있다는 불안한 마음이 지영의 마음을 휘감고 있었다.

“…유리 언니는 너무 강적이야.”

바짝 독이 오른 표정을 짓던 지영은 자신이 유리를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절망이 깃든 어조로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와! 맛있겠다.”

“그래? 나랑 어머니가 차린 거니까 맛있게 먹도록 해.”

“응응! 맛있겠다.”

방에서 한동안 절망하는 자세를 취하던 지영은 먹음직스럽게 차려진 저녁상을 보고는 환호성을 질렀다.

특히나 자신이 좋아하는 고기 산적이 올라와 있자, 입가에는 함박 미소가 걸려 있었다.

“호호! 저 고기 산적이 얼마나 웃겼던지. 아르바이트생이 창현이한테 먹여주면서 몸을 배배 꼬는 게… 호호호!”

“뭐, 뭐라고? 엄마! 그게 무슨 말이야!”

고기 산적에 얽힌 비화(?)를 지선이 이야기하자, 지영은 눈에 불을 키며 버럭 외쳤다.

“뭐라니? 우리 지영이가 먹을 걸 창현이가 직접 시식해서 골랐을 뿐인데. 설마 동생을 위해 음식을 시식한 오빠의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건 아닐 테지?”

“그, 그건 아니지만…….”

“그런데 왜 소리를 지르는 거니?”

“…죄송해요.”

자신이 배 아파 낳은 딸인 만큼 지영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지선이었다.

꼬리를 만 채 의기소침한 표정을 짓는 지영을 보면서 창현은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럼 같이 먹도록 할까요?”

지영을 간단하게 제압한 지선이 본격적인 파티 시작을 제안하자, 석규가 고개를 끄덕이며 창현에게 말한다.

“음, 그러지. 창현이 네가 직접 만들어서 말하기 뭐하다만 많이 먹도록 하고.”

“예. 물론이죠. 그리고 제가 만들었다기 보다 어머니를 보조했다는 말이 옳아요. 하하!”

“보조 했다기에는 너무 많이 한 것 같은데? 호호!”

웃음이 오고가는 속에서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즐겁게 음식을 먹는 가족이었다.

간간이 이야기를 하며, 음식을 먹고, 근심 걱정 없는 분위기 속에서 서로 의지할 수 있는 이곳은 누가 뭐라 해도 행복한 한 가정의 모습이리라.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되겠니?”

“네, 뭔데요?”

지선이 궁금한 표정을 지으며 질문을 하려 하자, 창현이 고개를 끄덕인다.

“혹시 여자 친구 사귀고 있니?”

“아니요, 여자 친구는요. 그럴 틈도 없을 만큼 바쁜 걸요.”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하는 창현이었다. 그 물음에 석규는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고, 지영은 올 것이 왔다는 표정을 하며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창현이가 얼핏 보면 여자 친구를 참 잘 사귀게 생겼는데 그렇지가 않네. 혹시 여자 친구를 사귀는 게 어색해서 그런 거 아니니?”

“그럴지도요?”

슈퍼스타이고, 수많은 소녀 팬들을 거느리고 있건만 여자 친구에 대한 언급이 자연스러웠다.

소속사 사장 입장에서 제지해야 함이 옳지만 석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흥미로운 표정으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럼 이 엄마가 한 명 소개시켜줘도 될까?”

“소개요? 아직 제 나이가 이른데…….”

“결혼을 하나 게 아니라, 한 번 만나보란 거란다. 험난한 타지 생활을 하려면 이곳에서 마음 편하게 둥지를 틀어도 되고. 어떻게 생각하니? 조금 주제 넘는 참견일까?”

“아니요, 저를 생각해주시는 말씀인 걸요.”

당혹스러웠지만 순수한 선의에서 이루어지는 말이었기에 창현은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단지, 의문이 든 것은 갑자기 지선이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이상했다랄까?

고개를 갸웃한 그가 지선을 바라보며 물어보았다.

“그런데 누구를 소개시켜줄 생각이셨는데요?”

“혹시 소녀시대 유리라고 아니? 참 곱고 어른을 대우할 줄 알며 예쁜 아이던데.”

“……!”

지선의 말에 화들짝 놀란 것은 창현뿐만이 아니었다.

한창 이성에 대한 관심이 많을 때인 창현이인 만큼 소개시켜줄 수 있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구체적인 사람 이름이 언급되자 석규는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지선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생각한 며느리감 후보와 전혀 다른 이름이 언급된 것이다.

그것도 같은 그룹 내 멤버가.

창현 또한 갑작스러운 유리의 언급에 놀란 표정을 지으며 지선을 바라보다가 이내 지영에게 시선이 향했다.

생소하다기보다는 묘한 데자뷰 같은 느낌이 그를 휘감고 있었다.

“…….”

창현의 시선을 받은 지영이 고개를 푹 숙인다. 하필이면 상황이 이렇게 겹쳐서 곤란한 지경에 처하게 된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니?”

자세한 정황을 모르는 지선은 창현을 바라보며 물어볼 뿐이었다. 병실에서 보여준 조신한 모습과 참한 외모, 그리고 창현이를 너그럽게 이해해줄 수 있는 듯한 유리가 그녀의 마음에 쏙 들었다.

“하하!”

시누이의 어택에 이은 시어머니의 어택에 창현은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 기분 나쁜 거니?”

“아니요, 그럴 리가요. 다만 조금 당혹스러워서요. 지영이도 얼마 전에 유리 누나에 대한 걸 제게 물어보더라고요. 그런데 어머니까지 물어보시니 갈피가 안 잡힌다고 해야 할까.”

“지영이가? 어머나.”

놀란 표정을 지은 지선이 지영을 바라보았지만 고개를 푹 숙인 지영은 지선의 시선을 외면했다.

“음, 어머니나 지영이가 좋은 의도로 물어본 건 알고 있지만 당분간은 그것보다 미국 활동에 신경 쓰려고요. 아직 나이도 어린데 좋은 인연은 자연스럽게 생기지 않겠어요?”

“호호! 그건 그렇지. 괜히 주제 넘게 이야기한 게 아닐까 모르겠네.”

“그럴 리가요. 걱정하셔서 해주는 말인 걸 아는 걸요. 단지 제가 할 일이 있고, 당분간은 그것에 집중하고 싶다는 이야기죠.”

“그건 네 말이 옳다.”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석규가 창현을 두둔하고 나섰다.

갑작스럽게 유리를 추천하고 나선 지선의 모습에 놀랐지만 석규는 지선이 점지한 유리보다 좀 더 나은 상대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아무래도 한 살 연상이 더 낫지 않나? 게다가 똑부러진 성격에 논리정연함을 지닌 만큼 창현이를 좀 더 잘 보조해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석규가 마음에 두고 있는 대상은 다름 아닌 소녀시대 막내 서현이었다.

한 살 많지만 충분히 극복되는 범위 내였고, 성격이나, 습관 모두 석규의 마음에 들었기에 내심 그녀를 며느리감으로 점찍어두었던 그에게 있어 갑작스러운 유리의 언급은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너무 급하게 이야기를 했네.”

“아니요, 오히려 어머니가 저에 대해 이런저런 걱정을 해주신 것 같아 오히려 기분이 좋은 걸요. 그러니 그런 말씀 마세요.”

“호호, 고맙네.”

웃음을 짓는 지선. 창현이 좋게 넘겨주어서 다행이지만 속으로 실수한 것을 느끼고 있었다.

‘창현이가 기분 나빠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아직 어느 정도 선이 남아 있고, 그것을 지켜야 했는데, 오늘 창현이 워낙 살갑게 대해줘서 친해졌다고 생각한 나머지 질러버린 것이다.

괜히 창현의 머릿속을 복잡한 게 만든 게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창현은 그런 감정을 겉으로 노출하지 않았고, 오히려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자아내고자 노력하며 시간을 보냈다.


“지선이가 한 말은 너무 신경 쓰지 말아라. 다 널 걱정해서 한 말이니까.”

파티가 끝난 뒤, 석규는 몸소 차를 끌고 창현을 숙소로 바래다주기 위해 함께 이동하고 있었다.

“신경 쓰다뇨. 오히려 절 생각해주는 것 같아 기분이 좋은 걸요.”

“그렇게 생각하면 다행이고. 그런데 궁금하긴 하구나. 창현이 넌 어떤 여자를 좋아하냐?”

“저요? 으음!”

석규의 진지한 물음에 창현은 또 진지해져서 고민에 빠져든다.

이것만으로도 그간 놀라울 정도로 바뀌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전 같으면 그런 말을 하지 말라하며 자리를 모면했을 테지만 어느덧 질문을 받으면 그에 대해 고민에 잠기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으니까.

“아직은 잘 모르겠네요. 음!”

“그래도 원하는 그림이 있을 것 아니냐?”

“원하는 그림이요? 원하는 그림이라면…….”

창현은 석규의 말에 다시 한 번 생각에 잠긴다.

자신이 원하는 이상형이라? 단 한 번도 생각할 필요가 없었지만 이번 앨범이 그에 관련된 컨셉이었고, 최근 들어 자신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 이에 관련된 생각이 종종 머릿속을 맴돌고는 하였다.

과연 자신이 원하는 이상형은 무엇일까.

여태까지 말했던 것은 그저 정형화 된 것이었지만 막상 자신이 원하는 것을 떠올리자니 머리가 뒤죽박죽이 되어서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

“……아!”

생각에 잠겨있던 창현은 무언가 떠오른 듯 눈을 빛낸다. 그리고는 무언가 대단한 것을 발견한 것 마냥 석규에게 말한다.

“전 조금 순종적이었으면 좋겠어요.”

“순종적이라고?”

“제 말에 무조건 따르라는 식이 아니라, 뭐라고 해야 할까. 무엇을 하더라도 서로 상의를 할 수 있다고 해야 할까요? 그리고 너무 기가 센 것 말고 제가 좀 주도할 수 있고, 그런 거요.”

“그래? 요즘 세대에서 참 발견하기 힘든 이상형이구나. 하하!”

“그렇죠?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하하!”

말해놓고 스스로도 어처구니가 없었는지 창현은 웃음을 지었다.

마주 웃음을 지어주는 석규도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

오늘도 보람차게 하루를 끝낸 주현은 일찍 씻은 뒤 수면 시간인 12시가 되기 전까지 자기계발서적을 읽고 있는 중이었다.

언니들은 모두 거실에 나가 TV를 시청하고 있었기에 방안에 있는 것은 주현뿐이었다.

아무도 없는 방이었기에 얼마 전 유료 다운을 받은 일본어 버전 케로로 OST와 한국어 버전 케로로 OST를 CD로 구워 감상하고 있었다.

들을 때마다 그렇지만 마음을 차분하게 만드는 마력을 담은 노래였다.

부르르.

그렇게 조용히 독서에 몰두하고 있던 주현의 핸드폰이 떨리기 시작했다.

누가 문자를 한 것인가 의아해하던 주현은 문자를 보낸 사람의 이름을 확인하고는 뻣뻣하게 굳을 수밖에 없었다.

발신자는 다름 아닌 시아버님(?)이었기 때문.

재빨리 문자를 확인한 주현의 눈이 말똥말똥하게 변해가기 시작했다.

그곳에는 억만금을 줘도 구하지 못할 창현의 이상형에 대한 정보가 적혀 있었다.

그동안 누구도 밝혀내지 못했던 창현의 이상형!

너무나도 귀한 정보를 석규가 주현에게 몸소 내준 것이다.

‘감사합니다, 아버님.’

속으로 함성을 지른 주현은 문자의 내용을 뇌리에 각인시키려는 듯 뚫어지게 바라본다.

한 가지 그녀가 간과한 것은, 아직 각성이 이루어지지 않은 둔탱이 창현에게 지금의 이상형 모습을 띠면 어필을 할 수가 없다는 점이다.

너무나 앞서나갔기에 시대에 맞지 않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는 주현이었다.

시대를 초월한 천재는 언제나 쓸쓸히 죽어나갈 뿐.


와아아아아!

꺄아아아아!

수많은 사람들의 함성 소리가 공항 전체를 울리고 있었다.

그곳에서 보안 요원들의 호위 속에 움직이고 있는 한 사람이 있었다.

공항에 모인 사람들 모두가 그를 보러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 인기는 상상을 초월할 지경이었다.

“하하, 이것 참. 어떻게 알아낸 건지.”

“글쎄다. 이쪽에서도 보안을 철저하게 했는데 결국 이렇게 되었구나.”

창현의 중얼거림을 용케 들은 석규가 옆에서 대꾸한다.

지금 창현은 본격적인 미국 진출을 위해 공항에 온 상태였다.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은 채 공항으로 왔건만, 어디서 정보가 샌 건지 수많은 사람들이 함성을 지르며 창현을 따라오고 있었다.

미리 준비한 보안 요원들의 도움으로 상황이 나쁘게 치닫지는 않았지만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기에 창현과 석규가 느끼는 당혹감은 상상을 초월했다.

“SPN입니다! 한 마디만 좀…….”

“S본부에서 나왔습니다! 미국 진출 소감 좀…….”

“K본부에서 나왔습니다.”

“M본부에서…….”

창현을 보기 위해 몰려든 인파를 헤치고 앞으로 나선 리포터들이 창현에게 인터뷰를 따내기 위해 치열한 자리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처음부터 조용히 출국하려던 창현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석규에게 말했다.

“사람들이 오지 못하는 곳까지 간 다음에 간략하게 몇마디를 해야 할 것 같아요.”

“그래, 어차피 인터뷰도 전부 예정을 잡은 게 아니니 간략하게 하고 떠나는 게 좋을 것 같구나.”

석규의 허락이 떨어지자 그 다음은 일사천리였다.

사람들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까지 간 창현은 곧장 안으로 들어가지 않은 채 몸을 돌린다.

묵묵히 걸음을 옮기던 창현을 애타게 바라보던 사람들이 와! 하고 함성을 지르며 그에게 시선을 집중한다.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가운데, 창현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연다.

“절 보기 위해 여기까지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좁게 보면 타국 활동을 위해 가는 가수에게 이렇게까지 큰 환호를 보내주시니 정말 기쁘네요. 이 응원 마음속에 간직하고 미국에 가서 꼭 좋은 성적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먼 곳으로 가지만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주시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고개를 꾸벅 숙인 창현이 그대로 몸을 돌려 안으로 사라진다.

멍하니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함성을 지른다.

와아아아아!

꺄아아아아!

현! 현! 현! 현!

사람들은 함성을 지르며 저 멀리 사라지는 창현의 뒷모습을 바라고 있었다.

작게 보이는 저 인물이 미국으로 가서 얼마나 큰 돌풍을 일으킬까.

사람들의 기대를 양 어깨에 짊어진 창현은 그렇게 미국으로 떠났다.


미국에 도착한 창현은 시차 적응을 위해 며칠 동안 휴식을 취한 뒤 본격적인 스케줄을 시작하고 나섰다.

시차 적응을 한 뒤 녹음실로 향한 창현은 곧바로 음반 작업에 착수하였고, 기존에 있던 4집 앨범에서 곡을 추려내어 영문 버전으로 작사, 녹음 뒤 싱글 앨범을 발매한다.

첫 활동 개시로 알린 것은 바로 얼마 전까지 국내에서 활동하던 4-B 앨범 타이틀곡 <Devil Cry>였다.

한국에서는 강력한 임팩트를 주기 위해 <악마의 유혹>부터 발매를 했지만 미국에서는 좀 더 다른 전략으로 접근하기로 하였다.

앨범이 완성되고, 싱글 앨범 발매 하루 전, 창현은 살짝 불안함이 섞인 표정으로 석규를 바라보았다.

“이게 정말 먹힐까요?”

“먹히지 않을 것 같으냐?”

“그야 뭐… 사실 조금 불안하긴 해요.”

아니라고 말하려던 창현은 묘한 미소를 짓고 있는 석규의 모습에 순순히 속내를 털어놓는다.

“나도 네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잘 알고 있다.”

‘걱정하고 있는 분이 미소를 짓고 있나요?’

누구는 걱정이 태산과도 같은데 누구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차 한 잔 하고 있으니, 창현으로서는 불만일 수밖에 없었다.

“정말 알고 계신 거죠?”

“알고 있고 말고. 네가 불안해하는 이유가 뭔지도 잘 알고 있지. 음, 일단 그 부분에 대해서는 상황을 지켜보도록 하자.”

“그냥 지켜보자고요?”

“그래.”

무책임한 석규의 말에 창현은 맥이 탁 풀리는 느낌이었다.

무엇 때문에 불안해하는지 알고 있으면 그것을 극복할 방안을 알려주거나 해야 할 텐데 그냥 지켜보자는 무성의한 말이라니.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이쪽도 이런저런 걱정이 많아서 그렇다. 그러니 지켜보도록 하자.”

“지켜보면 결론이 나오지 않잖아요.”

“그럴지도? 하지만 이미 만들어놓은 걸 새로 만들려니 아까운 느낌이 들어서 말이다. 게다가 네 인지도가 어디까지 먹힐지 궁금하기도 하고.”

“하아.”

천하태평인 석규의 말에 창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뿐이었다.

창현이 불안함을 느끼고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바로 뮤직비디오가 그의 머리를 지끈거리게 만들고 있었다.

미국으로 왔지만 창현은 이곳에서 새로운 앨범을 발매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에서 이미 발매한 4집 앨범을 영문 버전으로 새롭게 해석을 하여 발매를 하기로 하였다.

거기까지는 이해 범주였지만 문제는 뮤직비디오를 기존의 것 그대로 가져가겠다는 것이었다.

창현이 4집 앨범 타이틀곡으로 사용했던 노래는 <악마의 유혹> 과 <Devil Cry>였다.

프로젝트 앨범이라는 이름 하에 A와 B로 나뉜 두 앨범은 각각의 테마를 담고 있지만 큰 테두리 안에 하나로 포함되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것을 설명하기라도 하듯, 뮤직비디오 또한 같은 맥락에서 촬영된 것이 두 갈래로 나뉘어져 있었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먹힐 것인가.

그 부분에 대해서는 고개를 갸웃하게 만들었다.

이미 예약이 물밀 듯이 밀려오고 있는 만큼 곡에 대해서는 자신감이 생겼지만 과연 동양인들만 나오는 뮤직비디오가 이곳 미국 사람들의 가슴을 사로잡을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솔직히 불안함이 자리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동양인이라는 인식을 타파하겠다고 다짐하던 녀석이 오히려 불안해하니, 오히려 이쪽이 더 기분 나빠지려고 하는구나.”

“그것도 그러네요. 뮤직비디오에 대해 걱정하는 제가 잘못된 걸까요?”

“딱히 잘못된 건 아니지. 네 생각처럼 아직 편견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니까. 하지만 이번 기회를 통해 좀 더 완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면 좋지 않을까?”

“완화라, 그렇게 되면 저야 좋죠.”

자신 또한 같은 나라 사람과 촬영하는 것이 더욱 편했으니까.

“그러니 그 부분에 대한 것은 일단 지켜보도록 해라. 굳이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지 않느냐. 상당한 인지도를 끌어 모으고 있으니, <Devil Cry>의 반응을 보고, 다음 차례인 <악마의 유혹>이 진짜 승부라 생각하면 돼.”

석규의 계획은 간단했다.

국내를 경악으로 빠뜨린 계단 춤이라는 엄청난 퍼포먼스가 함께 하고 있는 만큼 <Devil Cry>가 <악마의 유혹>을 뛰어넘을 확률은 적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Devil Cry>를 실험용으로 사용한 뒤, 본 승부처인 <악마의 유혹>의 성공 확률을 더욱 끌어올릴 생각이었다.

“그래도 <Devil Cry>가 잘되었으면 좋겠어요.”

잘 되고 안 되고의 여부가 갈리지만 창현의 입장에서는 모두 같은 입장에 놓인 자식과도 같은 작품들이었다.

누가 잘 되기 위해 누가 희생양이 된다는 말이 좋게 들릴 리 없다.

“그렇게 되면 좋겠는데 말이다.”

석규도 창현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1년 4개월만에 현의 새로운 싱글 앨범 <Devil Cry>가 미국에 발매되었다.


거대한 저택 내부에는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고급스러운 가구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치렁치렁 길게 금발을 기른 여인은 긴 다리를 꼬고 앉은 채 자신을 찾아온 사람을 바라보며 도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날 왜 찾아온 건가요?”

“이곳에 찾아올 때 말했던 것 그대로입니다.”

“부탁이라, 제게 부탁할 만한 사람이 아닌 걸로 알고 있는데요?”

“그 부분에 대한 부탁이 아닌 걸로 알고 있습니다. 다른 사유로 부탁한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온 이유는 그것 때문이고요, 스위프트 양.”

거대한 저택의 주인은 2006년 싱글 앨범 <Tim McGraw>로 데뷔한 테일러 스위프트였다.

싱어송라이터로 상당한 인기를 얻고 있는 그녀는 자신을 찾아온 중년인을 보면서 흥미로운 눈빛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소개를 듣지 못했는데요?”

“이런, 제 소개를 잊었군요. 제 이름은 존슨이라고 합니다.”

테일러 스위프트 앞에 선 중년인은 정중하게 인사를 하면서 자신의 명함을 그녀에게 건넨다.

명함을 받고 조용히 눈으로 그것을 읽어들이는 테일러 스위프트.

그녀는 이내 놀란 표정을 지은 뒤 존슨을 바라본다.

“상당히 유명한 분이셨네요.”

“그렇습니까? 그리 유명하지 않으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유명하지 않다니. 그래, 그렇다 치고 절 찾아온 이유에 대해서 듣고 싶은데요.”

“방금 전에도 말했지만 제가 이렇게 테일러 스위프트 양을 찾은 것은 부탁이 있어서입니다. 제 부탁이 아닌 현의 부탁입니다.”

“알고 있어요. 그가 부탁을 했다고 하여 작업을 내팽개치고 이렇게 존슨을 만난 거니까요.”

흥미로운 표정을 지은 테일러 스위프트가 고개를 끄덕인다.

곡 작업에 몰두하고 있던 그녀가 갑작스러운 손님을 맞이하게 된 것은 얼마 전 미국으로 입국한 현이 자신에게 부탁할 것이 있다고 해서였다.

같은 싱어송라이터였기에 가급적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려고 하지 않는다. 게다가 왕래 또한 잦지 않았기에 그저 인사만 하는 사이였는데 갑자기 자신에게 부탁할 것이 있다고 하니, 테일러 스위프트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흥미를 자극하는 것이었다.

한창 미국 활동을 할 때도 현은 다른 팝스타들과 친분을 쌓지 않기로 유명했으니까.

“이건 현이 스위프트 양에게 전해달라 한 것입니다.”

본격적인 용건으로 들어가자는 듯, 눈짓을 보내자, 존슨에 품안에서 무언가를 꺼내들더니 테일러 스위프트에게 건넨다.

“이게 뭐죠?”

곱게 접힌 종이를 보면서 고개를 갸웃하자, 존슨은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그곳에 현의 부탁이 적혀있을 것입니다.”

“훗! 러브레터라도 되는 건가요?”

“저야 내용은 잘 모릅니다. 대충 짐작은 가지만.”

입가에 여유로운 미소를 짓는 존슨을 보며 테일러 스위프트는 곱게 접힌 종이를 펼쳐들기 시작한다.

아무것도 부러울 것 없는 그가 무슨 목적으로 자신에게 부탁을 하는 것일까.

종이를 펼쳐들고 내용을 읽어 들이기 시작한 테일러 스위프트의 눈이 서서히 커지기 시작한다.

“호호호호!”

그리고 터져 나오는 웃음.

그것을 제지할 생각이 없는 듯 테일러 스위프트는 한동안 큰 웃음을 터뜨렸다.

존슨은 그녀가 왜 웃음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있었기에 빙그레 미소를 짓고 있을뿐이었다.

“이게 정말 현의 부탁인 건가요?”

“그래서 제가 온 것입니다.”

“그렇군요. 확실히 그런 거였어. 현이 참으로 재미있는 일을 벌이려고 하는군요.”

“그에게 필요한 것은 스위프트 양에게 부탁한 것뿐. 다른 준비는 모두 갖춰져 있는 상황입니다.”

“그것도 그러네요. 그가 모국에서 발매한 앨범은 제게 있어 새로운 충격을 줄 정도였으니까.”

입가에 미소를 지은 테일러 스위프트는 현이 한 부탁을 떠올리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철저하게 음악으로만 승부할 것 같았던 일 년 전 인물이 이렇게 바뀌어서 돌아올 줄이야.

목석과도 같았던 그 모습이 달라진 것 같아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재미있네. 과연 얼마나 쇼킹한 무대를 보여주려고 그러는 거지?’

곡 자체만으로도 쇼킹하건만 이런 멋진 퍼포먼스까지 준비하고 있을 줄이야.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테일러 스위프트는 존슨을 보며 묻는다.

“언제부터 시작하면 되죠?”

“바로 시작하셔도 됩니다.”

“좋아요. 여태까지 수많은 곡을 만들었지만 이런 것은 처음이네요. 과연 어떤 퍼포먼스를 펼칠지 기대가 되는군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입가에 미소를 지은 테일러 스위프트는 존슨이 건네주는 종이와 펜을 받아들고 곧바로 그림을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아가가 멋진 퍼포먼스를 준비한다니, 협력할 수밖에 없네.’

그녀의 눈에 자신보다 키가 작은 동양인 소년은 그저 어리디 어린 아가일 뿐이었다.


<Devil Cry>의 성적은 나쁘지 않았다.

창현이 미국에서 발매한 앨범의 숫자는 총 다섯 장이다.

그 중 싱글 앨범이 네 장이었고, 정규 앨범이 하나다. 미국 데뷔 초창기 인지도를 쌓기 전에는 정상을 차지하지 못했지만 차이와 차이에서 오는 매력을 노래한 <Shield&Spear>와 발음 차이로 인해 운명이 뒤바뀐 연인 사이를 그린 <Minus>가 빌보드 차트 1위를 기록하면서 동양 뮤지션의 정상 군림을 기록하게 되었다.

정규 앨범 또한 엄청난 판매고를 올리며 화제가 되었지만 당시 창현은 미국이 아닌, 한국에 있었기에 결국 정상의 자리를 차지하지 못했다.

그런 와중에 4집 앨범이 발표되었고, 3집과 달리 4집 앨범은 오로지 그의 모국인 대한민국에서만 발매되었다.

동양인의 편견을 깨고, 마음을 울리는 음악을 하는 현에 대한 관심은 폭발적이었다. 특히나 현에 대해 엄청난 관심을 갖고 있던 팬들은 직접 한국에서 앨범을 구매할 정도의 열의를 보였다.

당연히 화제가 되었던 것은 계단 춤이었다.

마치 허공을 밟고 올라가는 듯한 계단 춤을 보며 사람들은 감탄을 감추지 못했고, 그가 정상을 차지하기 위해 등장할 때, 꼭 한 번 그 춤을 보고 싶다 말을 할 정도였다.

마침내 미국에 도착한 그가 싱글 앨범을 발매하였다.

순간의 선택이 낳은 비극을 노래한 <Devil Cry>는 폭발적인 관심을 받으며 순조롭게 판매가 이뤄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악마의 유혹>에 대한 관심이 너무 컸기 때문일까.

<Devil Cry>가 묻히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다.

성적은 결코 초라하지 않았다.

첫 주에는 50위권 안으로 들어갔고, 두 번째 주에서는 30위권으로, 셋째 주에는 7위를 기록하였고, 넷째 주에는 4위까지 올라가는 기염을 토했다.

그러나 거기에서 한 풀 꺾이며, 더 이상 올라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삼주 째 되는 날, 석규는 창현을 보며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약간 방향을 선회해야겠다.”

“어떤 방식으로요?”

앨범이 나쁘게 된 건 아니지만 대박이 난 것도 아니었기에 창현 또한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던 중이었다.

“기존에 뮤직비디오 형태는 그대로 가지고 가도록 하고, 네 라이브 장면을 교차하면서 넣을 생각인데.”

“그러면 뮤직비디오가 조금 길어지지 않을까요?”

“길어져도 상관없다. 기존의 것으로 가면 너무 단조로울 수 있으니까 약간의 변화가 있는 게 좋겠지.”

“그건 저도 동의해요.”

“걱정할 필요는 없다. 최근 들어 관심이 다시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걸 너도 알고 있잖느냐.”

“하하! 알기야 알죠.”

<악마의 유혹>에 대한 관심이 날로 증가하고 있는 걸 알았기에 창현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씁쓸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Devil Cry>를 위해 살인적인 스케줄을 견뎌내며 움직였건만 결국 관심을 받는 것은 다른 곡이었으니 말이다.

“소문이 은근히 퍼지고 있는가 보죠?”

“그럴 수밖에 없겠지. 사람들이 몇이나 연류되었는데. 여태까지 어느 정도 비밀이 유지되고 있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다.”

“그것도 그러네요.”

자신이 계획했던 것을 떠올리며 창현은 입가에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사람과 사람이 대함에 있어 비즈니스적인 관계라면 서로가 이득을 볼 수 있는 것을 중요시한다. 그것이 아닌 친분 관계라면 상관이 없지만 지금 창현이 계획하는 것은 개개인과 특별한 친분이 없는 상태에서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부담감이 클 수밖에 없었다.

왠지 모르게 신세를 끼치는 기분이 들기도 하였고.

“그 부분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예?”

“뭘 걱정하는지 한눈에 다 보여서 말이다.”

창현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다 알고 있다는 듯 미소를 짓는 석규였다.

“알고 계신다면 오히려 다행이네요.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그렇게 한다는 것 자체가 조금 이치에 어긋나지 않나요?”

“그렇기도 하지. 하지만 난 공짜로 부탁을 한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

“그러면요?”

자신의 생각과 살짝 다르게 흘러가자 창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전략적인 제휴를 제시했다. 네가 한국에 돌아가더라도 조금 더 힘을 발휘할 수 있도록 말이야.”

“전략적 제휴라면 어떤…….”

“가령 피처링이라던가?”

“아아…….”

석규의 말이 무엇인지 알아차린 창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도움을 요청한 사람들 모두 여성 팝 가수인 만큼 피처링이라는 미끼를 걸면 충분히 Give & Take가 이루어지는 셈이다.

게다가 자신의 공백기에도 그녀들의 앨범이 꾸준히 나올 테니 피처링을 하면 간접적으로나마 계속해서 자신의 존재를 알릴 수 있을 테고.

“이게 Win-Win이라는 것 아니겠느냐?”

“그러네요. 그런데 제 도움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도 있지 않나요?”

“그렇긴 할 테지만 그런 경우가 거의 없지. 오히려 쌍수를 들고 반길 수도?”

“그래요?”

자신의 가치가 상승했다지만 모두가 반길 정도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승낙을 했다는 게 창현은 의아했다.

“왜냐면 네가 아시아 쪽 사람이니 만큼 네 피처링이 포함되면 앨범 판매가 아시아권으로 뻗어나갈 수 있거든. 아마 상대 쪽에서도 그것을 계산했을 게다. 그러니 한 사람도 거부하지 않고 모두 수락을 했지. 특별히 대가를 바라지 않고 수락한 사람도 있고. 후후!”

“아아, 그럴 수도 있겠네요.”

“개인적으로 너와 친분을 쌓고 싶기도 했겠지. 아직 넌 소수 팝스타들 외에는 친분을 나누지 않았으니까.”

“하하!”

인간관계가 좁은 걸 꼬집는 석규의 말에 창현은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어쨌거나, 그녀들에게 있어 넌 아주 유용한 비즈니스 상대란 뜻이다. 너와 친하게 지내면서 피처링을 따내거나 하면 좀 더 아시아 시장을 효과적으로 공략할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할 수 있는 걸 저도 몰랐네요.”

“그건 네가 일본을 제외하고 다른 곳에 가지 않아서 그렇지.”

“그것도 그러네요. 하하!”

어색하게 웃음을 터뜨리는 창현. 하지만 이렇게 계기가 만들어진 만큼 조만간 조금씩 다가갈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기회가 생기면 한 번씩 만나봐야겠네요. 일단 제 부탁을 들어준 거니 감사의 인사를 해야 하잖아요.”

“그것도 나쁘지 않겠지. 이참에 자세한 사업적인 이야기를 해도 좋으니 말이다.”

“그렇겠죠?”

비즈니스로 이뤄진 만남이지만 그곳에서 친분을 쌓을 수도 있을 터. 닫혀있던 친분 관계를 조금씩 열어나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여겨졌다.

“그러고 보니 깜빡한 게 있구나. 여기 주문했던 물품들이 모두 완성되었다.”

석규가 건네는 것은 작은 상자였다.

“…….”

그것을 바라보며 창현의 눈이 살짝 떨렸다.

이 상자 안에 웃기지도 않던 계획의 결과물이 있다니 생소한 느낌이 들었다.

처음 이 계획을 들었을 때 어찌나 황당했던지. 하지만 한편으로는 파격적인 임팩트를 줄 수 있다 생각했고, 동시에 재미있을 것 같다는 느낌도 받았다.

그런데 막상 완성되었다고 하니 무언가 무시무시한 일을 벌이고 있는 느낌이었다.

딸칵.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상자를 연다.

그곳에는 각양각색의 반지들이 빛을 발하며 창현을 반겨주고 있었다.

“모두 네 손에 딱 맞을 것이다.”

“하하, 이번 활동은 참 재미있을 것 같네요, 아버지.”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창현의 눈앞에 황홀하게 빛나고 있는 반지. 그것은 두 사람이 가장 인지도 높은 열 명의 여성 팝 스타가 디자인한 반지였다.

졸지에 반지의 제왕이 되어버린 창현이었다.


현의 앨범 <악마의 유혹> 공개!

미국 진출 이후 <Devil Cry>가 공개될 때부터 화제가 되었던 <악마의 유혹>이 본격적으로 발매가 되자 단숨에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기 시작했다.

여태까지 현이 보여준 노래와 사뭇 다른 달달한 느낌이 드는 노래는 많은 팬들이 어서 영문 버전으로 나오길 바라던 곡이기도 하였다.

현의 음악적 범위를 더욱 넓혔다고 칭찬받는 <악마의 유혹>은 <Temptation>이라는 제목으로 거쳐졌고, 뮤직비디오 또한 약간의 수정을 한 뒤 본격적으로 공개되었다.

그와 함께 이어진 대대적인 홍보.

가뜩이나 기대를 하던 팬들은 본격적으로 시작된 마케팅에 그만 입을 떡 벌리고 만다.

새로 공개된 뮤직비디오와 맞물린 마케팅은 이제까지 본 적도 없고, 들어본 적도 없던 엄청난 마케팅이었던 것이다.

기존의 뮤직비디오는 달달한 로맨스 장면을 연출하는 한편의 영화와도 같은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수정된 뮤직비디오는 로맨스와 더불어 현이 노래를 부르는 모습까지 곁들어져 있었다.

검붉은 머리칼 속에 빛나는 서늘한 눈동자와 중세 귀족을 연상시키는 고급스러운 복장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절로 감탄이 흘러나오게 하였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열광하게 만든 마케팅의 정체는 현의 양손 가득 자리하고 있는 열 개의 반지였다.

각각의 개성을 드러내고 있는 열 개의 반지를 아무렇지도 않게 넘길 수 있지만 본격적으로 시작된 마케팅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냥 넘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그 이유는 현이 착용하고 있는 열 개의 반지가 현재 미국 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열 명의 여성 팝 가수에게 의뢰하여 만든 것이란 게 알려진 것이다.

무려 열 명의 팝 가수!

그것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사람들은 현이 선정한 열 명의 여성 팝 가수가 누구인지 궁금해 하였고, 반지 하나하나를 살피면서 누가 디자인 한 것인지 추측하기 바빴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노코멘트를 한 채 현은 활동을 시작하였고, 사람들의 폭발적인 반응 가운데 앨범 발매 후 일주일 만에 빌보드 차트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한다.

어리게 보이던 소년이 성인의 매력을 한껏 풍기자, 사람들은 바람직한 그의 변화에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보냈다.

“일단은 성공이군.”

“성공이긴 하네요.”

일주일이라는 짧은 시간에 정상 등극을 해내자, 석규는 웃음을 터뜨렸지만 정작 당사자인 창현은 어색하게 미소를 지을뿐이었다.

분명 좋아해야 함이 옳지만 뭔가 씁쓸한 느낌이 들었다.

“좋아하지 않는 것 같구나?”

“그냥 좀 씁쓸해서요.”

“씁쓸하다라, 분명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이것들도 무시할 수 없는 요인 중 하나란 걸 알아야 한다.”

“그거야 알죠.”

창현이 쓴 웃음을 지은 이유는 간단하다.

<악마의 유혹> 또한 공을 들인 곡이지만 <Devil Cry> 또한 마찬가지로 공을 들인 작품이다. 하지만 마케팅에 따라 반응이 천지차이다 보니 심각한 괴리감이 들었고, 그 결과 나오는 것은 쓴웃음이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곡 자체의 퀄리티보다는 마케팅이 더 중요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마케팅이 아무리 잘 이뤄져도 곡 자체가 좋지 않으면 이렇게 뜨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걸 알아야 할 것이다.”

“알긴 알죠.”

알고 있기에 더욱 씁쓸했던 것이고.

창현의 기분이 쉽사리 풀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석규는 화제를 돌린다.

“반지 제작자에 대해서는 이야기해도 좋다. 토크쇼에 나가게 되면 당연히 그 질문이 있을 테니 이야기를 풀어두는 것도 좋겠지.”

“조금 이른 것 아닌가요?”

“아니, 오히려 그렇게 한 뒤 서서히 사그라 드는 반응을 다시 한 번 끌어올리는 게 좋다. 그리고 미국 전역을 돌며 콘서트를 열 계획이니까 잘 쫓아오도록 하고. 앞으로 이어지는 스케줄이 진짜 살인적인 스케줄이다.”

“알고 있어요.”

지금부터가 진짜라는 생각이 들자 창현은 바짝 정신을 차릴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의 스케줄은 자신이 미국에 온 진정한 이유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까.

“후우! 상당히 바빠지겠네요.”

“바쁜 건 좋은 일이지. 네가 1위를 기록하면서 콘서트 표 또한 모두 매진이 되었으니 앞으로 더욱 재미있어질 거다.”

“제 괴로움을 즐기시는 것 같은데요?”

“그럴 리가? 아직 정정하니 바짝 벌어두란 의미가 담긴 미소다, 미소.”

“그래요?”

날카로워진 창현의 어투에 석규는 능글맞은 미소로 대응했고, 상대가 되지 않음을 느낀 창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숨을 푹 내쉴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하나 까먹은 게 있었구나.”

“뭔데요?”

“테일러 스위프트 양을 알고 있지?”

“물론이죠.”

테일러 스위프트라는 이름이 언급되자 창현은 다시 한 번 한숨을 푹 내쉰다.

반지를 디자인 한 열 명의 팝 가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다 보니, 자연스럽게 여성 팝 가수들이 출연할 때 이에 대한 질문이 이어지고는 하였다.

그 중 테일러 스위프트는 묘한 발언을 함으로써 창현을 곤혹스럽게 하였다.

당시 MC가 그녀에게 “현에게 반지 디자인 의뢰를 받았나요?” 라고 묻자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그건 아가에게 허락을 받아야 대답할 수 있네요.” 라고 대답해서 엄청난 화제를 일으켰다.

애매모호한 말이었지만 사람들에게 자신이 했다고 시인하는 듯한 모습이었으니까.

그것이 사실이었기에 그냥 넘길 수 있었지만 문제는 그녀가 친근하게 아가라는 호칭을 사용하여 쓸데없는 가십거리 기사가 넘쳐났다는 점이다.

몇 번 만나보았지만 그 정도로 친한 사이가 아니었기에 창현은 더욱 머리가 아파왔다.

“어떻게 해결 해야 되죠?”

“여긴 원래 그런 동네니까 그건 굳이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아아, 그걸 신경 쓰는 게 아니라 다른 걸 신경 쓰고 있던 건가?”

무언가를 깨달은 듯 묘한 미소를 지은 석규가 창현을 바라보았다.

“그, 그럴 리가요.”

“그럴 리가요가 사람을 잡는 법이지. 안 그래도 항의 전화가 왔었거든. 뭐라고 했더라, 순순히 전화를 받지 않으면 익사이팅한 일을 일으키겠다나?”

“…….”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린 창현은 멍한 얼굴로 석규를 바라보았다.

석규가 언급한 항의 전화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세실리아였다.

가수가 아닌 연기자였기에 창현은 그녀에게 반지 디자인 의뢰를 맡기지 않았고, 뮤직비디오 또한 기존의 것을 사용하였기에 여주인공 역할을 할 생각을 품던 그녀의 기대감을 짓밟고 말았다.

그러자 창현에게 돌아온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할 금발 푸른 눈 미녀의 어택이었다.

자진출두하지 않으면 짜릿한 일을 벌여주겠다는 그녀의 협박에 창현은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걸 느꼈다.

“후우, 어떻게 하자고.”

“그래서 그녀가 제안을 하긴 하더구나.”

“제안이라고요?”

“그래.”

제안이라는 단어를 듣고도 고개를 젓는 창현. 세실리아가 싫은 건 아니지만 가십거리 기사들이 판을 치는 이곳에서 그녀의 존재는 너무 부담되었다.

하지만 그냥 무시하고 넘기기에는 그녀의 직선적인 성격이 두려웠다.

직접 익사이팅이라 언급할 정도면 과연 어느 정도일지 상상도 가지 않았기에 창현은 부디 그 제안이 소프트한 것이길 바라며 물어보았다.

“어떤 건데요?”

“별 거 아니다. 네가 콘서트 하는 것 중에서 몇 번은 자기도 게스트로 참가하고 싶다는 것?”

“세실이 게스트로요? 가수도 아니잖아요.”

“가수가 아니라고 하기에는 글쎄……?”

묘한 표정을 지은 석규가 등을 돌려 무언가를 뒤적거리더니 창현에게 음반 한 장을 내민다.

“이게 뭐…….”

그것을 받아든 창현은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 정도면 가수라고 할 수 있으려나? 참 애매하긴 하군.”

“하아! 세실이 그동안 치밀하게 준비했네요, 아주 치밀하게.”

석규가 내민 것은 세실리아의 모습이 담긴 앨범이었다.

도대체 언제 앨범을 발매했단 말인가.

가수가 아니니 콘서트에 오지 말라고 하려던 창현은 자신 머리 꼭대기 위해 세실리아가 서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아야만 했다.

“빠져나갈 구멍은 없죠?”

“알아서 잘 하라는 말만 하던데?”

“후우!”

금발 미녀의 적극적인 어택은 싫지 않았지만 그 여파는 생각하면 결코 좋아할 수 없었다.

막 데뷔하던 신인 여배우가 이제는 상당한 인지도를 쌓은 여배우가 되어 나타났으니까.

나쁘지는 않지만 호감을 대놓고 드러내며 저돌적으로 달려드는 것은 상당히 부담스러운 현상이었다.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요?”

창현은 마지막 방법으로 석규에게 기대는 것을 선택했다.

연예계에서 닳고 닳은 석규라면 무언가 방법을 제시해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음! 유감이지만 워낙 철저하게 준비를 해놔서 빠져나갈 방법이 없구나. 익사이팅한 것을 겪을 각오가 되어 있다면 거절해도 좋을 거다.”

“크윽!”

완벽한 세실리아의 그물망에 걸려든 창현은 눈을 질끈 감으며 신음을 흘렸다.

금발 미녀가 펼친 거미줄에 걸려든 창현은 옴짝달싹하지 못한 채 바동거리는 가녀린 먹잇감 신세가 되고 말았다.




제93장 팩토리 걸(Factory Girl)




2008년 9월 중순.

오랜만에 소집된 SM엔터테인먼트 주주 회의에서는 한창 열띤 토론이 벌어지고 있었다.

순조롭게 이어지던 회의는 한 부분에 멈춰 서서 치열한 공방이 오고가고 있었다.

“…….”

그 속에서 수만은 심각한 표정을 지은 채 침묵하고 있었고, 자리에서 일어난 서 이사는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훑으며 자신의 의견을 강력하게 피력하고 있었다.

“더 이상 소녀시대는 가망이 없습니다. 쓸데없는 투자를 그만두고, 지금이라도 해체한 뒤 각자 개인 활동을 해야 합니다.”

부드럽게 흘러가던 회의가 갑자기 심각하게 변한 것은 앞으로 이어질 소녀시대의 행보에 관련된 대목에서였다.

고공행진을 거듭하고 있는 동방신기와 슈퍼주니어에 대해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지만, 소녀시대에 관련된 문제에 도달하게 되자 분위기는 심각하게 경직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몇몇 이사들은 강력하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기 시작했다.

소녀시대가 해체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그룹 자체의 브랜드를 원더걸스와 비등하게 맞췄지만 인지도에서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개개인의 인지도는 오히려 원더걸스보다 낫다고 볼 수 있죠. 이것만 보아도 소녀시대란 그룹 자체보다 개별 인원이 활동하는 게 더 낫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으음.”

단단히 준비한 듯, 막힘없이 말을 이어나가는 서 이사의 말에 다른 이사들은 미미하게나마 고개를 끄덕인다.

그들 모두 서 이사의 의견에 동감하는 눈치였다.

동방신기, 슈퍼주니어 모두 만족할 만한 성과를 냈지만 소녀시대는 투자대비 본전이 나오지 않아 골머리를 앓고 있는 중이었다.

이대로 손해를 감수하고 대박을 위해 투자를 계속하느냐, 아니면 지금 이 시점에 해체를 하느냐 하는 것이 현재 이사들의 고민거리였다.

“하지만 소녀시대에 투자한 비용이 만만치 않습니다. 게다가 효과가 아주 없는 것도 아니고요. 해체를 언급하기에는 아직 이른 것 아닙니까?”

소녀시대와 직접 관련된 프로젝트를 맡았던 남 이사가 서 이사의 의견에 반박한다.

“이르다니, 오히려 늦었다고 말하는 것이 옳지 않소? 현재 소녀시대를 원더걸스와 경쟁 구도로 만드는데 까먹은 돈만 얼마냐 말이오. 그것도 본전을 찾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고. 이대로 가다가는 회사가 성장하지 못하고 제자리 걸음만 할 텐데 남 이사가 책임질 생각이요?”

모든 것을 책임질 거냐는 식으로 말하자 남 이사의 인상이 찌푸려진다.

물고 늘어지는 것이 기분 나빴지만 큰소리치기에는 서 이사가 내세운 말이 너무나 타당한 것이었다.

이대로 물러설 수 없었는지 한마디 덧붙인다.

“그렇게 말씀하셔도 제 생각은 아직 이르다입니다. 제대로 해보지도 않고 물러서는 것은 우리 회사 방침과 맞지 않습니다.”

“잘못된 점을 깨닫고 물러설 줄 아는 것도 하나의 용기일세.”

“크흠!”

불편한 헛기침을 흘린 남 이사가 자리에 앉는다.

소녀시대를 감싸고 도는 남 이사를 격퇴한 서 이사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의견을 묻는다.

“다른 이사분들의 의견은 어떠신지요?”

“…….”

무언은 곧 자신의 의견을 지지한다는 뜻이라.

자신만만해진 서 이사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쐐기를 박기 위해 입을 연다.

“저도 소녀시대 해체를 주장하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현재 국내 시장에서 걸 그룹이 성공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아! 물론 원더걸스는 예외입니다. 운인지 실력인지 몰라도 JYP의 박 사장이 아주 잘 성공시켰으니까요. 하지만 비슷한 시기에 데뷔시킨 소녀시대는 참패입니다. 들인 돈에 비해 얻은 이익이 너무 미미해요. 차라리 슈퍼주니어의 뒤를 잇는 남성 그룹을 좀 더 빨리 데뷔시켰더라면 이익도 극대화하고, 남성 아이돌을 전문적으로 육성하는 이미지를 더욱 확고히 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쉬운 마음만 듭니다.”

음반은 남자보다 여자가 더 많이 산다.

상술에 특화된 SM엔터테인먼트는 그것을 잘 알고 있고, 각종 이미지 마케팅을 통해 동방신기와 슈퍼주니어의 음반 판매를 비약적으로 끌어올리는데 성공했다.

소녀시대 앨범 또한 그런 SM엔터테인먼트의 상술이 적용되었지만 두 그룹에 비교하면 초라한 수준이었다.

차라리 그것을 남성 그룹에 투자했다면 더욱 큰 돈을 벌어들였을 것이란 것이 서 이사의 생각이었다.

다른 이사들도 모두 동의하는 듯하자, 그는 더욱 용기백배하여 끝판왕인 수만에게 시선을 옮겼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침묵을 지키고 있는 수만.

그가 가장 많은 양의 주식을 보유하고 있지만 이사들의 의견을 하나로 규합한 지금, 자신의 의견을 쉽게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묘한 미소를 띤 서 이사가 수만에게 말한다.

“회장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참 일찍 물어보는군, 서 이사.”

“하하! 회장님이시니 가장 늦게 의견을 물어보게 되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처음부터 수만의 의견을 물어보면 그의 의도대로 흘러갈 확률이 높았다. 그랬기에 서 이사는 처음부터 회의를 주도하며 수만을 제외한 채 다른 이사들의 의견을 모으기 시작한 것이다.

수만이 서 이사의 속을 모를 리 없다.

“죄송할 것까지야. 오히려 서 이사와 다른 이사들의 생각을 듣게 되어서 기분이 좋군.”

“과찬이십니다.”

“그럼 이제 내 의견을 말해야 할 차례로군. 내 생각은 간단해. 소녀시대 해체는 있을 수 없네.”

“……!”

전혀 다른 수만의 말에 모두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서 이사 또한 놀란 표정을 짓다가 빠르게 표정을 수습하며 수만에게 묻는다.

“어째서입니까? 설마 써니 양 때문입니까?”

“자네는 내가 조카 때문에 회사의 큰 일을 그르칠 거라 생각한 건가?”

“그건 아닙니다만…….”

“서 이사가 말했던 것처럼 현재 소녀시대는 적자를 내고 있지. 애초에 계획했던 것에 비해서 말이야. 원더걸스라는 생각지도 못한 복병이 존재했었고, 마케팅의 실패로 몇 단계 퇴보를 하기도 했고 말이야.”

“그렇습니다. 그렇기에 해체를 시켜야 합니다. 더 이상 손해를 볼 수 없습니다.”

자신이 해주고 싶은 말을 하자 서 이사는 의아함을 느끼면서도 재빨리 호응했다.

“하지만 말일세. 요즘 내 눈에 보인단 말이지.”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갑자기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수만의 모습에 서 이사는 이해하지 못한 표정을 지으며 묻는다.

“퍼즐을 하나하나 맞추는 기분이랄까. 그동안 기획했던 계획이 전부 어그러지는 기분이었지. 처음 그룹을 기획할 때 가장 먼저 하는 것이 무언가? 그룹 이름을 알리는 것 아닌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승철의 노래는 <소녀시대>를 리메이크 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그룹 이름을 알리기 위해 노력을 했단 말이지. 왜냐하면 그룹 이름을 알리면 그 후에 멤버들을 알게 되고, 그 그룹 특유의 색채에 빠져들기 때문이지. 그런데 말이야. 소녀시대는 그것과 전혀 반대로 가고 있단 말이네.”

“반대라면……?”

“드라마로 윤아의 이름이 알려졌고, 노래로 태연, 눈웃음과 MC로 티파니, 라디오 진행과 곧 벌어질 이벤트에서 알려질 써니, 광고에서는 효연. 입담의 수영과 데뷔 전 CF를 촬영한 유리, 그리고 뮤직비디오에서 제시카가 알려졌지. 아직 폭발적인 수준은 아니지만 몇몇 멤버들은 벌써 그룹 자체보다 개인의 이름을 알리는데 성공했어. 이게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나, 서 이사?”

“…회장님이 무엇을 말씀하고자 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잠시 침묵하던 서 이사는 솔직하게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는다.

그러자 수만은 입가에 진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개인의 이름이라는 건 아주 좋은 거야. 특히 그룹에 속해 있으면 개인의 이름이 알려질 경우 그룹 또한 같이 딸려오기 마련이지. 축구선수 박지성만 해도 대한민국을 알리지 않았나? 그리고 처음 몇몇 멤버들을 밀어주는 것도 결국 그룹 이름을 알리기 위함이지.”

“그게 무슨 상관이 있는 건지?”

“지금 소녀시대는 그룹 자체보다 개개인 멤버들의 이름이 더 알려진 기형적인 상태를 유지하고 있지. 그것도 상당수 멤버들아 각각 다른 분야에서 말이야. 개개인의 이름을 알리는 것은 결국 그룹을 알리기 위함이야. 개인 인지도보다 현저하게 뒤처진 그룹 인지도. 과연 어떻게 될지 그림을 그려본 적 있나?”

“……!”

수만의 말을 들은 이사들은 그제야 그가 무엇을 말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리고는 경악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본다.

서 이사 또한 경악 어린 표정으로 수만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빠르게 표정이 가라앉더니, 수만에게 말한다.

“하지만 잘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 유감이게도 말이야. 하지만 내 감은 말하고 있어. 곧 한 방이 크게 터질 거라고. 그래서 그대들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도록 하지. 딱 하나일세.”

“무슨 말씀이십니까?”

“소녀시대 앨범을 한 장 더 발매하도록 하지. 그리고 그 결과에 따라 해체 여부를 결정하겠네. 내가 원하는 것은 대박. 중박… 아니, 상박이더라도 깔끔하게 접도록 하지. 그리고 내가 시대에 뒤처졌음을 인정하고 뒤로 물러나도록 하겠네. 큰 도박을 걸기 위해서는 대가를 감수해야 하는 건 당연한 일. 난 이런 조건을 걸 예정인데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나?”

“…….”

당당하게 조건을 내거는 수만의 말에 이사들은 할 말을 잃고 침묵하였다.

커도 너무 큰 것을 배팅하였기에 머릿속이 멍해지는 기분이었다.

“진심이십니까?”

“그럼 내가 거짓을 말하는 줄 알았나?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좋겠네.”

“알겠습니다. 회장님의 생각이 그러하시다면 받아들이도록 하겠습니다.”

나쁠 것 없는 제안이었다. 서 이사가 소녀시대 해체를 주장한 것은 말 그대로 돈이 되지 않아서였다. 그런데 한 장의 앨범 뒤에 모든 것을 판가름하겠다고 하니, 그를 비롯한 다른 이사들에게 손해가 되는 일이 아니었다.

대박이 터지면 자신들에게 돈 다발을 안겨다줄 것이고, 실패하게 되면 수만이 물러나니 자신들의 입김이 더욱 세질 것이다.

어느 것 하나 자신들에게 손해될 것 없는 일이었다.

“그럼 회의는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방금 전 격했던 언행에 대해서 사과드립니다.”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러나. 그럴 수도 있지. 다 회사를 위한 것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네.”

“예, 감사합니다.”

고개를 숙인 서 이사도 회의실을 벗어나자, 남은 것은 수만뿐이었다.

턱을 괸 채 조용히 생각에 잠겨있는 수만.

자신이 말했던 것은 모두 사실이었다. 그룹의 인지도보다 개인의 인지도가 훨씬 높은 만큼, 그것을 잘 엮어서 한 방에 터뜨리면 분명 자신이 생각하는 만큼의 대박은 터질 것이다.

만약 실패하면 자신의 눈은 잘못되었다는 뜻, 더 이상 연예계에 종사할 자격이 없다는 것과도 같았다.

“기폭제가 중요하겠지. 얼마나 강력한 기폭제이냐에 따라 그 파괴력은 달라질 테니까.”

그리고 공교롭게도 자신은 지상 최강의 위력을 지닌 기폭제를 알고 있었다.

소녀시대의 대박을 견인해줄 초특급 기폭제를.

“흔히 이걸 주워 담는다고 하면 되는 건가? 앨범 나올 때가 기대되는군. 후후!”

낮은 수만의 웃음이 회의실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시간은 흘러 11월이 된다.

소녀시대는 지난 9월부터 <팩토리 걸> 촬영에 몰두하고 있었다. 여태까지 해보았던 여타 프로그램과 다른 방식이었기에 고생이 많았지만 적응을 하게 되자 오히려 더 재미있고 편안하게 임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든지 처음이 힘들지만 익숙해지면 재미있는 법, 촬영에 익숙해져가자 오히려 즐기면서 하루하루 임할 수 있었다.

원래 촬영에 열심히 참여했지만 최근 들어 그녀들이 촬영에 임하는 자세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10월 말부터 주변 사람들이 봐도 이상할 정도로 열심히 촬영에 임하기 시작하더니, 주변 사람들이 예상치 못한 성과를 내기도 하여 놀라게 만들기도 하였다.

“그래봤자 달라지는 건 없어. 후후!”

“그러게 말이야. 의미 없는 일을 하네?”

오늘도 파이팅하며 열심히 촬영에 임하는 소녀들을 보며 의기양양하게 웃음을 흘리고 있는 두 사람이 있었다.

웃음의 주인공은 유리와 수영이었다.

두 사람은 멤버들이 촬영에 왜 이렇게 열심히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자신들이 촬영하고 있는 <팩토리 걸>에서 조만간 미국으로 갈 일이 있다. 그리고 그곳에 낙점된 것이 바로 유리와 수영이었고.

그녀들의 말에 몇몇 소녀들이 발끈하며 앙칼지게 외친다.

“캬악! 네가 지금 죽고 싶은 것이더냐!”

“효연이는 어째서 저 녀석들을 선택한 거야!”

“나도 가고 싶어요, 언니 히잉…….”

칭얼거리는 그녀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유리와 수영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더욱 짙어진다.

그러다 둘은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는 시선을 느끼고는 그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살짝 눈짓을 하자, 알겠다는 듯 유리와 수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눈짓을 보낸 사람은 다름 아닌 수연이었다.

두 사람이 미국으로 갈 수 있게 된 이유 중 하나가 수연의 편을 들어주겠다고 맹세해서였다.

효연에게 주어진 권한으로 두 사람을 포섭, 미국에 가는 대가로 태연이 아닌 자신을 지지해달라는 수연의 매력적인 제안을 두 사람은 감히 거부할 수 없었다.

‘효연이가 왜 수연이한테 순순히 협력할까? 뭔가 냄새가 나는데.’

어깨를 쭉 피며 웃음을 짓고 있지만 유리의 눈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자신과 수영이 협력하면 태연을 누르는 것은 어렵지 않다는 수연의 말에 얼마나 놀랐던가.

잠시 작업을 위해 정신을 쏟는 사이, 수연이 절반에 가까운 멤버들을 포섭하는 수완을 발휘하다니.

새로운 수연의 모습에 유리는 자신이 그녀를 너무 얕봤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찮아져도 여전히 건재하단 거로군.’

잠시 잊고 있었지만 폭군 제시카는 혼자의 몸으로 소녀시대 전체를 휘어잡던 희대의 효웅이었다.

자신이 그 자리에서 끌어내렸지만 재기한 뒤 어떻게 변할지 몰랐으니까.

생각에 잠겨있던 유리는 옆을 힐끗 바라 본다.

아무 생각 없이 진심으로 좋아하며 히히덕거리는 수영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무턱대고 좋아하기나 하고.’

수영의 입장에서야 누가 정권을 휘어잡든 상관없을 테지.

그래도 고민하는 자신과 달리 싱글벙글인 그녀를 보고 있자니 괜히 부아가 치밀었다.

팔꿈치를 든 유리가 수영의 옆구리를 쿡쿡 찌른다.

방심하고 있다가 불의의 일격을 당한 수영이 표정을 찌푸리며 말한다.

“아야! 왜 그래?”

“다른 애들은 못 가는데 계속 그렇게 약 올리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고?”

가해자인 녀석이 오히려 당당하게 나오자 버럭하려던 수영은 그 말을 듣고 멈칫하더니 조용히 주변을 훑어본다.

부러움이 뒤범벅되어 있던 멤버들의 눈에는 스멀스멀 살기가 발산되고 있었다.

자칫 잘못하면 밟힐 수도 있다는 생각에 수영은 고개를 돌리며 웃음을 터뜨린다.

“하핫! 날씨가 좋네.”

쏴아아아아!

밖에서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후우!”

방으로 들어온 수연의 표정은 우울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아닌 척 내색하지 않았지만 유리와 수영이 부러운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짧지만 미국으로 가서 창현과 만남을 갖는다는 것!

그것 하나만으로도 수연에게는 엄청난 메리트가 되었다.

어디 그뿐인가? 이곳에 있으면 자신을 방해하는 훼방꾼이 여덟 명에 플러스 무한대 알파가 되지만 미국으로 가면 그곳에 간 인원으로 대폭 축소가 된다.

여러 가지 제약이 있지만 그것쯤은 얼마든지 이겨낼 자신이 있었다.

“게다가 미국은 내 홈그라운드인데.”

개도 자기 집에서는 먹고 들어간다고 하지 않은가?

드넓은 미국이지만 미국이라는 것 자체로 그녀에게 주는 이점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을 것이다.

한국어처럼 영어도 능숙하게 사용하는 만큼 폭풍 영어 대화가 이뤄지고, 자연스럽게 개방적인 분위기를 유도한다.

“분위기도 한국보다 더 개방적이니까…….”

여러 가지 요소들을 잘 조합하기만 한다면 충분히 진전을 이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모든 것이 정해진 상황이다.

미국으로 가는 인원에 대해서 효연이 선택권을 갖게 되었고, 자신의 정권 재탈환을 위해 대범한 척, 기회를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속은 부글부글 끓고 있는 중이었다.

“방법이 없을까, 방법이…….”

홈그라운드에서 더욱 먹고 들어간다는 이점이 수연으로 하여금 포기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자신을 탄압하는 태연만 없다면 미국을 종횡무진 누비며 창현을 찜쪄먹는(?) 건 손쉽다.

철저히 무장된 이론과 홈그라운드의 이점은 자신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준다.

문제는 미국으로 갈 수가 없다는 것이지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수연은 무언가 떠오른 듯 눈을 빛내다가 멈칫한다.

자신의 행동은 자칫 악마에게 손을 내미는 것과 같은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었다.

“방법을 알고 있을 거야. 하지만 자칫 잘못되면…….”

죽 쒀서 개 주는 격이 될 수도 있었다.

떠오른 방법으로 인해 다시 한 번 고민에 빠져든 수연.

잘못 삐끗하면 자신이 모든 것을 잃고 남 좋은 일을 해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그녀는 섣불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길고 긴 고민 끝에 그녀는 마침내 결정을 내린다.

“좋아, 한 번 부딪쳐보는 거야. 일단 공통의 목표를 갖고 힘을 합치는 거니까. 그 후에 진검승부를 벌이면 돼. 일을 벌여놓지도 않고 두려워할 수는 없지.”

결심을 내린 수연은 입술을 꼭 깨물더니 다부진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리고 책상 위에 놓인 핸드폰을 잡고 문자를 찍기 시작한다.

[할 말이 있으니 신속히 내 방으로 올 것.]

“한 번 해보자고.”

미련을 버리지 못한 수연은 일을 벌이기로 결정을 내렸다.


문자의 효력이 발휘된 것은 불과 5분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밖에서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자, 수연은 올 사람이 왔다는 생각에 눈을 빛내며 대답해주었다.

“들어와.”

“헤헤! 무슨 일로 부른 거야, 제시?”

방안으로 들어오노 여인의 정체는 다름 아닌 미영이었다.

얼핏 보면 만만하기 그지없는 그녀의 모습에 수연은 절로 나오려는 한숨을 가까스로 참아내고는 가슴이 철렁이는 충격을 맛본다.

와룡 파니의 신위에 대해서 몇 번이나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그녀의 눈에 보이는 미영의 모습은 자신이 챙겨줘야 하는 어리바리함 그 자체였다.

그토록 무서운 모습을 보여 놓고도 상대방에게 방심을 자아내게 만들다니.

가슴이 싸늘하게 식어가는 것을 느끼며 수연은 미영에게 입을 열었다.

“할 이야기가 있어서.”

“뭔데? 뭔가 중요한 이야기인 것 같은데?”

“맞아, 이건 나에게도, 그리고 파니 네게도 이득이 될 이야기야.”

“어떤 건데?”

서로에게 이득이 된다고 하니, 미영은 호기심이 동한 얼굴로 다가와 조용히 맞은편에 앉는다.

“미국에 가는 거에 대해서야.”

“미국? 미국이라면… 팩토리 걸?”

“맞아. 조금 수를 쓰면 우리가 갈 수 있을 것 같아서. 하지만 세부적인 계획을 세울 수가 없어서 널 불렀어. 너라면 가능할 거라 생각해서!”

“…….”

미영의 표정에 변화가 일어난다.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그녀도 미국에 가고 싶었다. 생각하고 있는 바는 수연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홈그라운드인 미국에서 좀 더 개방적인 분위기로 단숨에 승부를 보고 싶었으니까.

게다가 얼마 전에 도장(?)까지 찍어놓은 만큼 창현은 자신을 의식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조금만 수를 쓰면 자신에게 넘어오게 만드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미영의 눈이 순간 가늘게 변한다.

‘제시가 앙큼하네. 역시 그때 범인이 제시였구나.’

아닌 척하면서 하나하나 실속을 챙긴다. 이 앙큼한 고양이의 행동에 미영은 은밀하게 한 수를 준비했고, 역시나, 앙큼한 고양이는 자신의 레이더망에 걸려들었다.

이제 이 앙큼한 고양이가 내미는 미끼를 받아서 날름 집어삼키면 된다.

‘전에 알던 나로 생각하면 안 된다고 제시. 후후!’

어리바리한 모습으로 수연의 보살핌을 받던 미영은 이제 그녀의 머리 꼭대기 위에서 놀고 있었다.

수연의 계획에 대해서 듣는 미영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번져 나갔다.

폭군도 와룡 파니 손안에 놓여 있었다.


수만은 지금 갑자기 찾아온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간단한 오전 업무를 처리한 뒤, 점심 약속 시간 동안 빈 시간에 새로운 약속이 들어섰다.

자신을 찾아온 손님을 반겨주며 수만이 입을 열었다.

“그래, 갑자기 날 찾아온 이유가 무엇이냐?”

“삼촌께 부탁드릴 게 있어서요, 헤헤!”

“너도 마찬가지고?”

“네.”

친근하게 눈웃음을 짓는 사람은 다름 아닌 미영이었고, 옆에 앉아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것은 수연이었다.

“그래, 무슨 일로 찾아온 건지 궁금하구나.”

소녀시대 멤버가 자신을 찾는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닐 터. 평소라면 만나주지 않았을 테지만 이사 회의에서 선언한 것과 더불어 <팩토리 걸>에서 미국으로 향하는 일정이 멀지 않았기에 수만은 기꺼이 두 사람의 만남 요청을 들어주었다.

아직 사회 경험이 두텁지 않은 두 사람은 여러 요인이 우연찮게 겹쳐 수만을 만나게 되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으리라.

“삼촌께 부탁을 하나 드리고 싶어서요.”

“두 번이나 언급하는 것을 보니 조금 어려운 부탁이겠군?”

“헤헤! 듣기에 따라서는 쉬운 것일 수도 있어요.”

“그래? 그럼 일단 들어보도록 하자.”

‘뭔가 이상하군.’

이야기를 주도적으로 이끄는 미영을 보면서 수만은 의문이 들었다.

콘셉트인 것도 있지만 실제 성격도 비슷하여 그렇게 콘셉트를 잡았다. 미국에서 데려온 미영은 실제로도 성격이 어라비라하였기에 수만은 야무진 수연이 아니라 어리바리한 미영이 대화를 주도하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번에 <팩토리 걸>에서 미국을 가잖아요.”

“그래, 저번에 이야기를 한 적이 있지.”

“네, 그것 때문에 삼촌께 부탁을 드리고 싶어서요.”

“어떤 부탁이지?”

무엇인지 감이 왔지만 수만은 짐짓 모른 척 대답한다.

“다른 게 아니라 이번 <팩토리 걸>에서 미국을 갈 때, 저희도 함께 갔으면 해서요.”

부탁을 하는 입장이라는 걸 자각하고 있는지 미영은 수만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러운 어조로 입을 연다.

두 사람의 목적을 알아차리자, 수만의 입가에 여유로운 미소가 번져나가더니 모른 척 묻는다.

“미국이라, 내가 알기로는 너희들이 아니라 유리와 수영이가 가기로 결정된 걸로 아는데?”

“네. 둘이 가기로 결정되었어요.”

“그런데 너희들이 왜 가겠다는 거지? 그때 동안 일종의 휴식기일 텐데 말이다.”

본격적으로 앨범 계획에 들어가고 있었기에 연습을 제외하고 별도의 스케줄이 없는 상황이었다.

굳이 휴식을 마다하고 촬영에 합류하겠다는 것을 짐짓 모르겠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수만이었다.

그것이 상대방으로 하여금 더욱 다급하게 만든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 그게 그러니까…….”

아니나 다를까, 수만의 말에 미영이 당황하기 시작한다.

아직 어린 나이인 그녀가 수만을 감당하기에는 무리였을까.

감정이 그대로 얼굴에 드러나는 그녀를 보면서 수만은 한 차례 더 재촉한다.

“이유를 말해줘야 결정을 내릴 수 있지 않겠나?”

“네. 사실은 저희가 미국에서 살다 보니 미국에 한 번 가보고 싶어서요. 유리랑 수영이가 아무리 영어를 해도 저희보다 못하니까… 그리고…….”

말이 드문드문 끊긴다.

말주변이 부족하지만 어떻게든 이어나가려는 미영의 모습이 수만은 장하게 느껴졌다.

“한마디로 미국파인 너희들이 함께 가서 멤버들을 도와주겠다는 거로구나?”

“네! 맞아요! 그거에요.”

정답을 찾은 어린 아이처럼 미영이 밝은 표정으로 대답한다.

“흐음, 인원 추가라, 촬영비가 추가로 들어서 과연 엠넷 측에서 수락을 할지 모르겠구나.”

왜일까.

수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사업가 모드로 발동하여 상대방의 애를 닳게 만들고 있었다.

될 듯한 희망을 주면서도 쉽게 원하는 답을 주지 않는 수만의 능수능란한 사람 다루기에 수연과 미영의 표정이 일희일비한다.

“어떻게 안 될까요?”

간절하게 변한 두 소녀의 표정은 감정을 자극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하지만 사업은 어디까지나 손에 쥐어지는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법. 여인의 간절한 표정에도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이며 수만이 말한다.

“글쎄다. 이미 두 명으로 통보를 해놓아서 과연 그쪽에서 수락할지 모르겠군.”

“현을 만나니까 그쪽에서도 조금 더 투자를 많이 하지 않을까요?”

침묵하고 있던 수연이 조심스럽게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는다.

정답에 가까운 질문에 수만은 뜨끔했지만 생각이 절대 얼굴에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표정을 굳힌 뒤 고개를 젓고 겁을 주듯 말한다.

“먼저 준비를 마치고 있을 수도 있어서 끼어들 여지가 없을 확률이 더 높다. 만약 그렇게 되면 회사적인 측면에서 양보가 이루어져야 할 텐데…….”

“부탁드릴게요, 삼촌. 더 열심히 할 테니까…….”

“그 말은 그동안 열심히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인 것이냐?”

“아, 아뇨! 절대 그렇지 않아요. 정말 열심히 했어요. 믿어주세요.”

고개를 힘차게 저으며 변명하는 미영의 모습이 애처롭다. 약간 어눌한 발음과 어느새 눈물까지 글썽거리는 모습은 수만으로 하여금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만들기 부족함이 없었다.

“그런 반응을 보이니 내가 나쁜 사람이 된 기분이구나. 좀 더 이야기를 자세히 나눠봐야 하니 흥분을 가라앉히도록 하고.”

“죄송합니다.”

품에서 분홍색 손수건을 꺼낸 미영이 눈을 콕콕 찍었다.

“일단 그 부분에 대해서는 상의가 이뤄져야 한다. 왜냐하면 두 명으로 정한 것에는 이유가 있거든.”

특별히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굳이 두 명을 콕 집은 것도 서로 경쟁을 하게 함으로써 재미를 유도하려던 것이었다. 네 명이 가게 되면 엘리트로 뽑힌 사람이 너무 많아져서 프로그램 개연성에 상당한 차질을 빚게 된다.

아홉 명 중 네 명이 엘리트는 조금 이상했다.

하지만 원활한 언어 소통을 위해 두 명을 함께 하게 하는 것은 상당히 귀가 솔깃했다.

현이 도와주기로 한 만큼 많이 참여시킬수록 SM엔터테인먼트에서는 높은 홍보 효과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결정적으로 현에게 통보한 것이 두 명이어서 그렇다. 이번 미국행의 메인은 현이 될 확률이 높으니까 그의 허락이 중요하지. 두 명과 네 명의 차이는 생각보다 클 수 있다. 그것은 한창 절정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그에게 있어 민감하게 작용할 수 있기에 충분한 협의가 이뤄져야 하지.”

“그럼… 현이 허락만 하면 저희도 함께 할 수 있나요?”

“허락을 받는다면 엠넷 측에는 내가 이야기를 하도록 하마.”

“정말이죠, 삼촌?”

눈을 반짝이며 묻는 미영의 모습에 수만이 미소지었다.

“그래. 현의 허락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그럼 저희가 연락을 시도해볼게요. 만약 되지 않으면 포기하고요.”

“그렇게 하도록 하여라.”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해요.”

“더욱 열심히 하겠습니다.”

수연과 미영이 자리에서 일어선 뒤 예의 바르게 인사를 하였다.

밖으로 나서는 그녀들의 모습을 보면서 수만은 입가에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후후, 열심히 해줘야겠지.”

자신에게 더욱 이득이 되는 일임에도 생색을 내어 상대방이 고마운 마음을 느끼게 하고 더욱 분발하게 만든다.

SM엔터테인먼트라는 거대 기획사를 세운 수만의 화술은 절정에 다다라 있었다.

하지만 반전은 있었다.


“거 봐, 모두 내 말대로지?”

“으응, 정말이네.”

연습실로 내려온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의기양양한 미영과 달리 수연은 얼떨떨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상황이 그저 신기하게만 느껴졌다.

어깨를 쭉 핀 미영이 말을 이어나갔다.

“아무리 말을 잘해도 삼촌에게는 먹히지가 않아. 삼촌이 산전수전 공중전을 다 겪으신 분인데 내가 화술로 설득할 수 있을 리 없잖아? 차라리 우리가 불쌍한 모습을 보이고, 찰나의 틈을 만드는 게 더 좋아. 그리고 성공했잖아.”

“파니 네 말이 맞아. 나도 신기하니까.”

“헤헷! 내가 좀 대단하지.”

콧대를 높이 세우는 미영. 처음부터 수만에게 이리저리 휘둘리는 모습을 보였던 것은 하나의 계획에 지나지 않았다.

아직 어린 소녀들이라는 점은 수만으로 하여금 방심하게 만들었고, 결국 모든 것을 자신의 통제 하에 두고 선심을 쓴 것처럼 생각했지만 사실 그것은 모두 미영의 계산 범주 안에 들어가 있었다.

SM엔터테인먼트 회장인 수만마저 자신의 뜻대로 다루는 미영을 보면서 수연은 소름이 오싹 돋는 기분이었다.

“헤헷! 미국에 갈 수 있다. 미국! 헤헤.”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지 못했는지 미영은 싱글벙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삼국지에 제갈공명이 그녀 같은 딸만 낳았다면 촉나라는 50년을 더 연명했으리라.


승리를 자축하며 커피숍에서 커피 한 잔의 여유를 만끽하던 수연은 무언가 떠오른 듯 멈칫하며 미영에게 시선을 옮긴다.

“파니야,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응? 뭔데, 제시?”

달달한 커피 맛에 빠져 연신 미소를 방긋방긋 짓고 있던 미영이 심각하게 변하는 수연의 표정에 의아한 표정을 한다.

“일단 미국에 가는 건 좋아. 삼촌도 허락을 해주셨으니까.”

“당연하지. 미국에 가는 게 좋지. 좋고말고, 헤헤!”

무엇을 상상하며 웃음을 짓는 것일까.

헤헤거리는 미영의 표정이 거슬렸지만 수연은 내색하지 않고 속으로 꾹 참았다.

‘지금 저렇게 좋아해도 결국 승자는 나니까.’

그렇게 마음속으로 다짐하자, 헛된 희망을 품고 있는 미영이 불쌍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미국으로 가서 저 희망을 깔끔하게 끊어주겠다고 생각하며 수연은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는다.

“좋은 분위기를 망치는 건 미안하지만 한 가지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어.”

“뭔데?”

“애들에게 어떻게 말할 거야?”

“애들? 그게 문제가 돼? 그냥 말하면 되잖아.”

“그러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면서 그래? 특히 태연이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생각해봤어?”

다른 멤버들은 상관없지만 현재 소녀시대에서 권력을 쥐고 있는 태연은 달랐다. 가뜩이나 자신이 가지 못한다는 것에 독이 바짝 오른 상태인데 그 부분을 자극한다면 분명 폭발할 것이다.

“그걸 걱정한 거야, 제시?”

“당연하잖아.”

“헤에, 몰랐는데 제시는 태연이를 무서워하는구나?”

“그, 그게 무슨!”

펄쩍 뛰며 부인하려던 수연은 자신의 행동을 되짚으며 멈칫했다. 예전이라면 신경도 쓰지 않았을 태연에게 필요 이상으로 신경을 쏟는 자신의 모습이 의아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내가 언제부터 태연이를 신경 쓴 거지?’

아마 자신을 싴순이로 만들겠다고 달려들면서 그렇게 된 것 같았다.

연습생 때는 자신의 밥(?)에 불과했던 태연이었는데 어느새 상황이 역전되다니.

입술을 꼭 깨문 수연은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미영의 시선을 외면하며 앙칼지게 말한다.

“아니니까 방법을 좀 연구해봐.”

“물론 연구해뒀지. 들어 봐.”

마치 모든 것을 계산했다는 듯 술술 이야기를 이어가는 미영.

그 이야기를 듣는 수연의 눈이 매섭게 빛나고 있었다.


“그, 그게 무슨 말이여!”

머리 위로 천둥이 내리치는 듯한 충격을 느끼며 태연의 몸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당장 무너져 내려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그녀는 큰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흔들리는 두 눈은 자신 앞에서 의기양양하게 미소 짓고 있는 소녀에게 향하고 있었다.

“못 들었어? 그럼 다시 말해줘야겠네?”

태연 앞에서 한쪽 입 꼬리를 말아 올리고 있는 사람은 수연이었다.

그녀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태연을 보면서 그동안 묵은 감정이 날아가는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미국 간다고. 후후!”

“어, 어떻게?”

정신을 차린 태연은 당장이라도 수연의 멱살을 틀어쥘 듯한 사나운 어조로 묻는다.

얼마 전이었다면 사나운 태연의 기세에 압도되어 깨갱했을 테지만 지금 그녀는 암암리에 멤버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놓은 상태다. 더 이상 태연을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그녀에게는 없었다.

“영어가 되잖아. 애석하게도 유리랑 수영이는 영어 회화가 제대로 안 되니 말이야. 후훗!”

“나, 나도 영어 할 수 있어!”

“헤, 태연이 거짓말 한다.”

흥미로운 표정으로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미영이 태연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다.

두개골이 흔들리는 듯한 거센 충격에 태연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태연이 너 영어 못하잖아. 헤헤!”

해맑은 미소로 사정없이 비수를 꽂고 비틀어버리는 미영.

“나 영어 잘해! 이 띨파니!”

자신을 도와 수연을 발라버려야(?) 할 미영이 자신을 옹호하기는커녕 오히려 수연을 옹호하여 자신에게 폭격을 가하다니!

가슴 속에 치밀어 오르는 배신감에 태연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포효했다.

“그래도 거짓말은 할 수 없잖아.”

“나 영어 잘한다니깐! 나도 삼촌한테 얘기 할 거야! 그럼 나도 갈 수 있겠지?”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기는 것도 아니고.

음흉한 유리를 혼자 보내는 것이 불안했지만 만만치 않은 수영이 함께 한다기에 어느 정도 마음을 놓고 있던 중이었다.

하지만 수연과 미영은 달랐다.

미국에서 살았기에 그녀들은 움직이는데 더욱 원활할 것이고, 더욱 개방적인 분위기는 그녀들의 행동력을 더욱 높여줄 확률이 높았다.

익숙하지 못한 환경에서 무언가를 하려는 것과 익숙한 환경에서 무언가를 하려는 건 엄청난 차이였으니까.

‘특히 수연이! 쟤가 제일 불안하단 말이야.’

최근 들어 태연은 극도로 불안함을 느끼고 있는 상황이다.

보지 않았으면 좋았을 테지만 그녀는 불행하게도 K본부에서 방영된 <윤도현의 러브레터>라는 프로그램을 보고 말았다.

창현이 출연한 것을 사수하기 위해 스케줄을 일찍 마치고 돌아와 TV를 보는 순간, 태연은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을 느껴야만 했다.

자신의 어설픈 밀고 당기기로 인해 다잡은 물고기를 바다에 풀어주는 무시무시한 실수를 범했던 것이다.

메인 요리가 완성되었으니 이제 떠 먹기만 하면 되었던 것인데!

도로아미타불이 된 상황에 태연은 얼마나 아쉬워했는지 모른다.

그런 상황에서 창현에게 노골적인 관심을 드러내는 수연이 간다는 것은 무척 위험했다.

가끔씩 똑똑해지는 미영은 괜찮았지만 수연은 위험했다.

“나도 갈 거야!”

수연을 마음껏 미국에서 활보하게 놔둘 수 없었기에 태연의 입장은 단호했다. 그리고 눈짓으로 미영에게 도움을 재촉했다.

그녀의 눈빛을 받은 미영은 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헤헤! 태연아, 영어 잘한다고?”

“물론이지! 나랑 <Because of you> 불러봤잖아. 나 발음 끝내줘!”

예전에 함께 부른 팝송을 언급하면서 자신의 도움을 유도하는 태연의 계략은 뛰어났지만 그녀는 결정적인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나 사실 태연이 예전 성적표가 있거든?”

“예, 예전 성적표? 그, 그걸 왜 네가 가지고 있어?”

눈에 띄게 흔들리는 태연. 1년 전, 완벽하게 처리했다고 생각했던 것이 여기에서 언급이 될 줄이야.

미영은 입 꼬리를 더욱 말아 올리며 확인 사살을 한다.

“쓰레기통에 버려져 있어서 주워놓았지. 누가 장난을 쳤을 수도 있잖아. 영어 실력이 뛰어난 태연이가 성적표를 버릴 리 없고. 안 그래? 헤헤!”

“그, 그렇지.”

불안함이 스멀스멀 치솟으며 태연은 급속도로 위축되기 시작한다.

그 모습에 수연도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번져나간다.

“파니야, 그럼 성적표에 적혀 있던 태연이 영어 성적도 기억 나?”

“영어 성적? 우움…….”

수연의 말에 미영이 잘 기억나지 않던지 인상을 찌푸리며 손가락으로 자신의 볼을 쿡쿡 찌르며 생각에 잠기기 시작한다.

그 모습을 보며 태연의 얼굴에 하얗게 질리기 시작한다.

‘제, 제발 기억나면 안 돼.’

그렇게 되면 자신은 눈앞의 싴순이에게 성적 공개 굴욕과 함께 더 이상 고집 부릴 여지마저도 사라지게 되어버린다.

하지만 이럴 때만 두뇌가 활성화 되는지 미영은 눈을 크게 뜨더니 손가락을 튕긴다.

“아! 기억 났다.”

“몇 점이었어?”

“그러니까… 웁! 우웁!”

“하하! 미영아? 우리 방에 들어가서 이야기 좀 할까?”

어디서 생겨난 것인지 미영의 입을 틀어막은 채 자리에서 일어난 태연이 그녀를 질질 끌고 가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녀의 입만 막으면 모든 것이 묻힐 거라 생각한 것은 명백한 오산이었다.

“5등급.”

“그, 그게 무슨!”

뜨끔했지만 태연은 필사적으로 부인하려 했다.

“설마 성적표가 하나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태연아? 후훗! 참 멋진 성적이더라고.”

“난 기억나지 않아.”

성적표에 관련된 내용! 그것은 오래 전부터 태연의 머릿속에 말끔히 삭제된 지 오래된 것이었다.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도 않고, 기억에 남겨두고 싶지도 않았다.

“기억나지 않는다고 해도 사실이 변할 수는 없잖아?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 내가 보았던 것을 이야기 해줄 수 있는데. 후후!”

“크, 크윽!”

여태까지 싴순이로 취급받던 수연의 대반격에 태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신음만 흘리며 뒤로 물러섰다.

가장 들키지 말아야 할 상대에게 들키자, 그녀의 머릿속에는 낭패라는 글자만 가득했다.

“다른 멤버들은 우리가 가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동의했어. 하지만 태연이 너는 영어를 잘해서 같이 간다고 하니 멤버들을 모아서 이야기를 해야겠네.”

“아, 안 돼!”

만약 멤버들이 자신의 성적에 대해 이야기를 듣는다면 그때부터 자신은 하찮탱이 되고 말 것이다.

그리되면 숙소 내 기강이 흐트러질 것은 당연한 일.

소녀시대를 위해서(?)라도 그런 불상사가 일어나면 안 된다.

“왜 안 되는데? 자신 있으면 공개하는 게 좋을 텐데. 후훗!”

신이 난 수연은 맹렬한 기세로 태연을 몰아붙였다.

“…….”

그녀의 맹공에 태연은 입술을 꽉 깨물며 분을 삭일 뿐이다.

와룡 파니의 가호를 받고 있는 수연을 꺾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공개할까?”

“내, 내가 졌어. 미국으로 가버려! 흑!”

능욕(?) 당한 태연은 수연에게 핍박 받던 시절로 돌아간 느낌을 받으며 패배를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방으로 후다닥 달려가는 태연을 보면서 미영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 심한 거 아냐, 제시?”

“심하긴, 앞으로 매일 저럴 텐데.”

‘앞으로 하찮탱이 될 거니까 각오해두라고.’

승리의 쾌감을 느끼며 수연은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조금만 더 버티면 자신이 매일 같이 이런 형태로 태연을 핍박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폭군 싴의 재림이 다가오기 시작하였다.


수연과 미영의 합류에 별다른 반응은 없었다. 유리와 수영은 경계하는 기색을 보였지만 그 이상 반응하지 않았고, 이미 수연에게 포섭된 순규와 효연, 주현 또한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태연과 윤아는 격렬한 반응을 보였지만 영어 성적 언급으로 인해 태연은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고, 윤아 또한 미영의 말에 그대로 침몰하고 말았다.

덕분에 수연과 미영은 싱글벙글 짐을 챙길 수 있었다.

“후후! 일찍 일어났네, 파니야?”

“제시도.”

아침에 약한 해외파 2인방은 일찍 일어나서 깔끔하게 준비를 마치고 여유롭게 유리와 수영을 기다리는 모습을 보였다.

뒤이어 준비를 마친 유리와 수영이 합류하고 네 사람이 숙소를 나선다.

고개를 힐끗 돌린 수연은 이를 부득부득 갈고 있는 태연을 보면서 상큼하게 한 마디 건넨다.

“다녀올게, 태연아. 후훗!”

그 말과 함께 몸을 홱 돌려 밖으로 나가는 수연.

그녀의 일격에 당한 태연의 눈은 불이 뿜어져 나올 정도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이이…….”

학교에서도 당해보지 않은 설움을 여기에서 당하는 태연이었다.

‘내가 반드시 영어 배우고 만다!’

한 사람에게 당한 수모는 한 사람을 영어 마스터로 변모시켜주었다.


미국으로 가는 길은 고되었지만 누구에게는 익숙하고, 누구에게는 낯설다는 설레임으로 인해 고생을 잊을 정도로 편안한 마음을 가진 채 갈 수 있었다.

긴 시간 비행기를 탄 끝에 미국에 도착할 수 있었고, 수연과 미영은 오랜만에 맡아보는 미국 공기에 미소를 지었다.

“정말 오랜만이네.”

“나도! 정말 익숙해.”

홈그라운드 입성에 두 사람은 작은 감동을 느끼고 있었지만 유리와 수영은 그게 아닌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사람들을 구경하기에 바빴다.

“외국인들 진짜 많다.”

“저 여자 봐봐! 배우인가? 몸매 너무 예쁘다!”

공항 이리저리 사람을 둘러보며 컬처 쇼크에 빠져든 듯 멍한 얼굴로 이 사람 저 사람 훑어보기 바빴다.

“자, 그럼 이동할게요.”

입국 수속을 마친 뒤 소녀들은 차를 타고 이동하기 시작했다.

“미영아!”

“응, 왜?”

싱글벙글한 얼굴로 바깥 풍경을 감상하는 미영에게 수영이 슬그머니 다가온다.

“오늘 자유 시간 주잖아. 그럼 같이 움직이자. 너 영어 잘하잖아.”

평소 자신에게 한국어를 가지고 장난을 치던 수영이 미국에 오자 고분고분하게 변했다. 한국에서는 한국어로 인해 고역을 겪어야 했지만 이곳은 자신의 홈그라운드, 영어가 아니면 제대로 된 쇼핑조차 불가능한 곳이니 만큼 주도권은 자신에게 있었다.

입 꼬리를 말아 올린 미영이 의자에 몸을 묻더니 다리를 꼬고 도도하게 변한다.

“으음? 글쎄? 좀 피곤해서 쉴까 생각했는데, 헤헤!”

“…어버버?”

충격적인 미영의 변화에 수영은 입을 떡 벌린 채 그녀를 바라본다.

자신이 알던 띨파니 황미영이 맞단 말인가?

“조, 좋아! 그렇게 나오면 난 수연이랑 다닐 거야!”

조금 비겁하지만 죽어도 굽히기 싫었던 수영은 미영의 약점을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혼자 있는 것을 싫어하는 미영은 다른 사람과 함께 있어야 마음을 놓는 편이다. 이 부분을 공략하면 배짱을 부리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수영은 착각을 해도 단단히 착각을 하고 있었다.

오히려 입 꼬리를 더욱 말아 올리더니, 미영이 말한다.

“흐응, 그래? 제시가 과연 너희들과 함께 할까? 아까 이야기를 들어보니 제시는 시차 적응 때문에 많이 힘들어하는 것 같았는데. 열심히 해봐.”

“…….”

할 말을 잃은 수영을 보며 미영은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안 그래도 잠에 빠져든 수연을 보면서 미영을 선택하고 접근했던 그녀였다.

이쯤에서 굽히고 들어올 줄 알았던 미영이 배째라는 식으로 나오자, 수영의 머리는 분주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때, 미영의 말이 쐐기를 박는다.

“그리고 제시는 나랑 같이 움직이기로 했어.”

“…윽!”

“어떻게 할래? 헤헤!”

상대방을 궁지로 몰아넣은 채 귀여운 미소를 짓는 미영의 모습은 진정으로 공포스러웠다.

수영은 자신이 알고 있던 띨파니와 지금 눈앞에 있는 와룡 파니의 모습에 극심한 괴리감을 느꼈고,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지금 자신의 상황이 최악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고개를 푹 떨궜다.

“가, 같이 가줘.”

“응, 뭐라고?”

“같이 가달라고! 나 영어 못한단 말이야!”

길 잃은 강아지처럼 축 처져 있는 수영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평소에는 당당한 모습이 인상적이었지만 미국에 온 그녀는 영어 회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가녀린 이방인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너무 심했네.’

그동안 당한 것에 앙심을 품고 장난이 과했다는 것을 깨달은 그녀가 손을 뻗어 수영의 머리를 자신의 품안에 안고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한다.

“헤헷! 미안해, 수영아. 장난 조금 쳤어. 촬영 마치고 자유시간 생기면 같이 다니자.”

“응, 고마워, 미영아.”

평소 소녀시대 엄마로 통하던 수영은 미국에 와서 미영에게 의존하는 어린이가 되고 말았다.

태연과 찰떡처럼 붙어 다니던 미영은 어느덧 자신도 모르는 사이 조련 스킬을 사용하고 있었다.


“일단 휴식을 먼저 취한 뒤 촬영을 하도록 하겠어요.”

<팩토리 걸>은 시차 적응을 위해 하루 휴식을 취한 뒤 본격적인 촬영을 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본래 <팩토리 걸> 자체가 많은 예산 지원이 이루어지지 않는 프로그램이었지만 얼마 전, 미국행에서 현이 출연을 하겠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자 대대적인 지원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3일로 예정되었던 스케줄이 일주일로 늘어날 수 있었고, 본래는 시차적응 없이 곧바로 촬영에 들어갈 예정이었지만 지금은 시차적응을 위해 하루 휴식을 취할 수 있게 되었다.

“난 시차적응 하지 않아도 멀쩡해. 오랜만에 구경이나 할래. 헤헤!”

4인실을 배정받은 소녀들 중, 미국에 와서 가장 기력이 넘치는 미영이 웃음을 지으면서 짐을 풀어놓은 뒤 곧장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나도 갈래! 미국에 왔는데 이대로 퍼져 있을 수 없지!”

시차적응 따위는 없는지, 간단하게 샤워를 마친 유리가 활기찬 어조로 외친다.

그러자 시체처럼 침대에 누워있던 수영이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말한다.

“으으, 나도 빠질 수 없지. 오늘이 아니면 휴식 시간도 별로 없을 텐데 이 찬스를 놓칠 수 없어.”

“제시는 어떻게 할 거야?”

“난 좀 쉬고 싶은데… 혼자 있는 건 싫으니까.”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서는 수연은 수영을 따라 화장실로 들어간다.

“미영아! 오늘 잘 부탁해!”

누군가에게 믿을 수 있는 대상이 된다는 것은 뿌듯함을 동반한다. 늘 멤버들에게 짐이 되는 게 아닐까 싶어 근심하던 미영은 자신을 믿는다는 유리의 말에 어깨를 쭉 피며 의기양양하게 말한다.

“영어는 나한테 맡기란 말씀!”

“오오! 든든하다!”

유리의 찬양과 함께 미영의 어깨는 더욱 으쓱거린다.

그렇게 밖으로 나온 소녀들은 주변 지리를 익히며 숙소를 중심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연과 미영에게 있어서는 곧잘 보던 풍경이었지만 유리와 수영에게는 자주 볼 수 있던 풍경이 아니었던지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며 구경하기 바빴다.

“우와! 예쁘다!”

“그런데 비싸!”

주변을 둘러보며 물건을 이리저리 둘러보던 유리와 수영은 한국과 차이 나는 물가에 혀를 내둘렀다. 처음 미국에 올 때는 예쁜 옷 같은 것들을 잔뜩 구입하려고 했지만 이곳과 한국의 물가를 감안하니 도저히 지갑이 열리지 않았다.

결국 아이 쇼핑을 하면서 간단한 먹을거리를 산 채 주변을 구경할 뿐이었다.

마트로 들어간 소녀들. 유리와 수영이 음료수를 고르고 있었고, 미영은 오랜만에 들어오는 미국 마트에 미소를 지은 채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심각한 표정을 지은 채 신문을 보고 있는 수연을 발견하며 접근한다.

“제시, 왜 그래?”

수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신문을 가리킨다. 그에 미영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신문으로 향했고, 이내 표정이 딱딱하게 굳기 시작했다.

“스캔들…….”

두 소녀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일면을 차지하고 있는 스캔들 소식이 실려 있었다.

그리고 스캔들의 주인공은 바로 그들이 찾던 창현이었다.


“방금 뭐라고 했어?”

“스캔들? 누구 스캔들인데?”

두 사람의 중얼거림을 놓치지 않은 유리와 수영이 성큼 다가와 묻는다.

“…….”

둘의 물음에도 불구하고 수연과 미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는 의미심장한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나직이 끄덕인다.

“도대체 뭔데 그래?”

답답한 듯 가슴을 탕탕 두드리며 유리가 묻는다. 그리고 슬쩍 수연이 들고 있는 신문을 보다가 그녀의 표정이 굳어버리고 만다.

유창한 영어 회화는 불가능하지만 영어를 읽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신문에는 대문짝만하게 창현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한국에서 활동하던 것과 비슷한 느낌이 드는 귀족 예복 같은 그의 복장은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멀어버릴 듯 멋졌다.

하지만 신문 옆에 늘어져 있는 사진들을 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하나같이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여인들의 모습이 유리의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제시카! 티파니! 뭔데 그러는 거야. 답답해서 죽겠다!”

수영도 이상 기류를 감지했지만 자신의 생각이 틀리길 바라면서 두 사람에게 묻는다.

“스캔들이야.”

“스캔들이라고? 설마 창현이의?”

미영의 말에 수영의 표정이 급격한 변화를 일으킨다. 스캔들이라니? 한국에 있을 때는 전혀 접하지 못했는데 이곳에서 스캔들이 난단 말인가?

“맞아. 그것도 아주 크게 났어. 이 정도면 미국 전역에 퍼져 있을 걸?”

“미국 저, 전역? 스캔들이 사실이야?”

“그건 몰라. 하지만…….”

말끝을 흐린 미영이 신문을 바라본다. 그곳에는 창현과 함께 여러 명의 여성들의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다. 전부 개성이 넘치고,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여인들이었다.

‘하필이면…….’

스캔들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수연은 표정을 찌푸린다.

가십거리가 많은 미국의 특성상 톱 반열에 서 있는 창현이라면 충분히 스캔들이 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하는 것과 직접 눈으로 목격하는 것은 상당한 차이를 동반한다.

수연은 창현의 스캔들 소식을 접하게 되자 속에서 무언가 부글부글 끓는 것이 느껴졌다.

다른 사람과 충분히 스캔들이 날 수 있지만 이렇게 많은 숫자의 여자들과 스캔들이 나다니. 눈으로 빠르게 세어보니 무려 열 명에 달하는 여성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하나같이 미국에서 어마어마한 인지도를 지니고 있는 팝 스타였다.

‘미국에 와서 여자만 꼬신 거 아냐?’

미국으로 간 것이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부터 이렇게 많은 여성 팝 스타들과 스캔들이 난 건지, 속이 뒤집어지는 것 같았다.

‘후우! 참자, 참아야 해. 창현이를 믿고 있잖아? 충분히 그럴 수 있어. 며칠 후에 만날 수 있으니까 그때 물어보자. 창현이는 그런 남자가 아니니까.’

속이 쓰린 것을 애써 참아내며 수연은 자신을 다스렸다.

그것이 가장 현명하다고 생각했으니까.

제대로 뒷 내용을 읽지 않았기에 오는 그녀의 착각이었다.


“헤에? 헤헤! 창현이가 스캔들이 났구나.”

수연의 옆에 선 미영은 신문을 빠르게 읽으면서 입가에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녀의 눈에 드러난 것은 이글이글 타오르는 짙은 질투심이었다.

자신이 도장을 찍어놓았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팝 스타들에게 페로몬을 뿌리고 다니다니.

‘내 도장이 약했나? 그러면 안 되는데.’

미국으로 떠나기 전 자신의 도장으로 다른 곳에 눈을 돌리지 못하게 막아놓았다 생각하던 미영은 자신의 생각이 단단히 어긋났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다음에 만나면 더 콱 찍어놔야지. 창현이는 순진하니 아메리칸 스타일이라고 하면 이해해줄 거야.’

자신의 사리사욕과 창현을 위해(?) 더욱 더 강력한 수위의 것을 실행에 옮기겠다고 굳게 다짐하는 미영이었다. 그러면서 표정이 심각하게 굳은 유리를 힐끗 살핀다.

유리 또한 흐름을 읽고 심각하게 표정을 굳히고 있는 상황이다. 영어를 제대로 읽지 못해서 구체적인 내용 파악은 힘들었지만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도 상황 짐작이 가능했다.

‘내가 언급했던 금발 미녀들이 저기 저렇게 많을 줄이야.’

자신이 지영의 협력을 끌어내기 위해 언급했던 금발 미녀들. 그녀들이 지금 창현과 함께 연류 되어 마음껏 스캔들을 뿌리고 있었다.

설마 했던 일이 실제로 일어날 기미를 보일 줄이야.

시어머니(?)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내고 시누이(?)의 방해도 없으니, 이제 당당히 무혈입성을 하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하던 유리로서는 금발 미녀들과의 스캔들은 다급함을 심어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다급해지는 자신의 마음을 느끼며 유리는 숨을 길게 들이쉬었다.

‘후우! 침착하자, 권유리. 미국은 가십성 기사가 많다고 했어. 창현이가 희대의 바람둥이도 아니고, 저렇게 많은 여자들과 사귈 리가 없잖아? 그동안 수집해온 정보를 믿고 움직이자. 창현이는 호락호락하지 않으니 며칠 뒤에 만나서 차분하게 행동하면 될 거야. 그러면 돼.’

스스로 마인드 컨트롤을 해나가는 유리는 눈에 띄게 안정을 찾아나가기 시작했다.

창현은 쉬운 남자가 아니니, 좀 더 참고 기다리겠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었다.

시기를 기다리다가 놓쳐버리는 불상사가 발생할 수 있지만 괜히 사마율이라 불리는 자신이 아니다.

‘게다가 수연이도 있고, 미영이도 있으니까. 둘의 도움을 받으면 미국 내에서 안전하게 관리를 할 수 있을 거야.’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이용한다!

적이지만 공통된 목적을 위해서는 기꺼이 동료로 받아들일 생각이 있었다.

눈을 빛내며 생각에 잠긴 유리는 그렇게 생각을 정리해나갔다.

창현이 한국으로 돌아오면 그때부터는 본격적인 행동으로 옮기겠다고 다짐하면서.


“…….”

수영의 기분은 유쾌하지 않았다.

빠른 속도로 움직인 그녀의 눈은 창현의 스캔들에 관련된 기사를 읽고 있었고, 완벽하지 않지만 상당 부분의 내용을 읽으면서 가슴 속이 타들어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애써 내색하지 않으려던 자신의 마음. 작은 불씨였기에 한 때의 장난으로 끝나버릴 것이라 생각하던 이 불씨는 작지만 쉽게 사라지지 않는 끈질김을 갖고 있었다.

이제는 괜찮을 것이라 스스로 위안 삼았건만 막상 창현의 스캔들 기사를 접하게 되자 그녀의 기분은 착 가라앉기 시작하였다.

쭉쭉빵빵한 금발 미녀들의 마수에 걸려 헤롱헤롱거릴 창현의 모습을 생각하자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내가 잘못된 건가?’

잠깐의 착각이라 생각했건만 그것이 아닌 듯했다.

보면 볼수록 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치밀어 오르고 있었고, 주변 분위기에 자신도 모르게 동화되어 당장이라도 창현에게 이 스캔들이 사실이냐고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다.

‘하아! 진흙탕 싸움에 참가하기 싫었는데.’

숙소 내 멤버들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치열한 눈치 싸움.

눈치 하면 빠질 수 없는 수영이 그것을 모를 리가 없다.

그렇기에 애써 자신의 마음을 억누르며 자신은 창현을 좋아하는 것이 아닌, 친한 동생으로 생각하고 있다 스스로 위안 삼았다.

그러나 막상 눈으로 보게 되자, 그것은 자신의 착각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억눌릴대로 억눌린 자신의 마음이 스캔들 소식을 보는 순간 봇물 터지듯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진흙탕 싸움에 참전하기 싫어 침묵하고 있었지만 더 이상 그러기 싫었다.

자신의 마음을 속이는 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었으니까.

수영의 시선이 멤버들에게 향했다. 그녀들은 각자 생각에 잠겨 있으면서 은밀하게 서로가 서로를 경계하고 있었다.

제3자의 입장에서 보고 있으니, 그것이 생생하게 들어왔다.

‘좋아, 지금은 조용히 침묵하고 있겠어. 아직 내 마음을 잘 모르겠으니까. 하지만 날 무시하다가는 큰 코 다치게 될 거야.’

자신을 무시하는 대가는 반드시 치르게 될 것이다.

수영을 안중에도 두지 않던 세 소녀는 원치 않게 한 명의 강적이 각성하게 만들었다.


“일단 숙소로 갈까?”

무거운 침묵이 자리한 가운데, 유리가 신문에 눈을 떼며 말한다.

“응, 그러자. 구경할 마음이 나질 않네.”

“응응!”

수연과 미영이 동의하자, 유리의 시선이 수영에게 향한다.

자신에 대한 방심을 유도하기 위해 등을 돌린 수영은 군것질거리를 고르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수영이 넌?”

“들어가자고? 음! 군것질거리도 샀으니까 괜찮겠네. 가자.”

“하아! 그래.”

누구는 심란해죽겠는데 누구는 군것질거리를 사면서 미국 온 순간을 즐기고 있다니.

한마디 말해주고 싶었지만 괜히 적을 만드는 게 아닐까 싶어 유리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이미 자신을 비롯한 다른 멤버들의 행동이 한 사람의 강적을 각성하게 만들었다는 걸 깨닫지 못한 채.

“가자!”

“그래.”

물건을 구입한 수영의 말과 함께 소녀들은 축 처진 채 숙소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각자 생각에 잠겨있는 소녀들을 보면서 수영은 머리에 걸치고 있던 썬글라스를 쓰며 날카로운 눈으로 멤버들을 훑으며 다짐한다.

‘두고 봐. 날 무시한 대가를 치르게 만들 테니까.’

때로는 경쟁심이 플래그를 더욱 공고하게 만들 때가 있는 법이다.


“앞으로 일정에 대해 알려주도록 하겠습니다.”

시차적응을 위해 하루 휴식을 취한 뒤, 담당 PD는 스태프들과 출연자인 소녀들을 불러 간략한 브리핑을 하기 시작하였다.

일정에 대해 대략 들었지만 현지에 도착한 뒤에는 현의 스케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하였기에 모두들 주의를 기울여 PD의 말을 듣기 시작한다.

“우선 3일 동안 촬영에 임하도록 하겠습니다. 소녀시대 분들은 먼저 우리가 왜 미국에 오게 되었는지를 떠올리며 그 부분에 대해 촬영을 할 것이고, 마지막 3일은 현 씨에게 찾아가 패션에 대해 취재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에서 현 씨는 특별 게스트로 초청된다는 설정이며, 소녀시대 분들이 각자 현 씨의 패션에 대한 보고서를 써서 발표를 하는 걸로 할 예정입니다.”

“오오.”

현이 게스트로 참석한다는 이야기만 들었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지 모르던 스태프들은 PD의 말에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미국에서 빌보드 차트 1위를 차지한 현의 관심은 그야 말로 최고조에 이른 상황! 국내 인지도는 그가 처음 정상에 설 때보다 더욱 치솟은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현이 특별 게스트로 참여하게 된다면 시청률은 그야말로 기하급수적으로 치솟게 될 것임이 분명했다.

전에는 막연히 대단하다는 걸 알았지만 현지에 와서 직접 체감한 그의 인기는 그야 말로 상상초월 그 자체.

인식이 바뀐 상황에서 그를 만난다는 건 새롭게 느껴지게 만들었다.

“현을 만나는 건 사흘 뒤니, 본격적인 촬영에 집중해주시길 바랍니다. 촬영이 빨리 끝나면 현 씨를 찾아가 간략한 미팅을 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렇게 되면 휴식시간도 늘어날 테니 모두 힘을 냅시다.”

“알겠습니다.”

휴식시간이 늘어난다는 말에 모두 이구동성이 되어 외쳤다.

소녀들도 기쁨이 담긴 목소리로 합창하며 앞으로의 스케줄에 대해 의논하기 시작했다.

“창현이가 정말 미국 내에서 인기가 대단하구나.”

“대단하지. 오죽하면 일거수일투족이 기사로 쓰일 예정이겠어?”

“특히 계단 춤에 관련된 건 장난이 아닌데? 우리나라에서도 그랬지만 여기에서 인기를 얻으니 스케일이 다른 것 같아.”

“당연하지! 미국과 우리나라의 시장 규모가 틀린데. 어쨌거나 여기에 오니까 창현이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을 것 같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녀들은 창현에 대해 감탄을 감추지 못했다.

국내에서 그와 만날 때는 인기가 있지만 친근한 동생 같은 느낌을 받았다면 이곳에서 느끼는 것은 넘을 수 없는 높은 산을 앞에 둔 기분이었다.

밖으로 나가면 곳곳에 볼 수 있는 것이 그의 흔적이었고, 영어로 번역된 그의 노래가 거리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화보집이나 광고에도 출연하고 있으니, 그 인기가 얼마나 대단한지 감히 상상도 하기 힘들 지경이었다.

“하아! 괜히 멀어진 기분이야.”

안타까움이 담긴 수영의 한숨에 다른 소녀들은 무어라 말할 수 없었다. 그녀들 또한 수영과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는 중이었으니까.

“그래도 창현이는 창현이야. 인기에 의해 우리를 멀리했을 거면 처음 우리랑 만났을 때부터 그랬을 걸? 괜히 그런 걱정할 필요가 없어.”

“그렇겠지?”

유리의 따끔한 말에 수영은 하하! 하고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너희들은 어때?”

“우리가 뭘?”

유리가 수연과 미영을 바라보며 묻자, 미영이 고개를 갸웃하며 묻는다.

“창현이에 대한 생각 말이야.”

“생각? 난 그냥인데? 헤헤! 창현이는 창현이일 뿐, 달라질 게 뭐가 있겠어. 다만 인기가 이렇게 많으면 만날 때 좀 불편하기도 하겠네.”

“파파라치가 따라 붙으면 소녀시대 이름이 미국에 알려질 수도 있어.”

“오오! 그것도 나름대로 괜찮은 듯?”

수연의 말에 수영이 눈을 빛내며 말하자 유리는 피식 미소를 지었다.

“괜찮긴 해도 미국에서 활동할 인프라가 안 갖춰져 있잖아. 게다가 영어 회화가 되는 멤버도 몇 명 없고. 지금 우리 입장에서는 그림의 떡이지.”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 마치 전문가 같은데? 그냥 이사 하는 게 어때? 권유리 이사님! 멋지다, 멋져.”

“후훗! 내가 원래 좀 오피스 레이디 필이 나긴 하지.”

수영의 칭찬에 유리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오피스 레이디 포즈를 취한다.

조신한 이 복장의 힘은 시어머니의 마음을 훔칠 정도로 대단한 위력을 지니고 있다.

“칭찬을 못해주겠네, 칭찬을 못해주겠어, 깝율 같으니라고.”

“뭐어?”

칭찬에 이은 수영의 비아냥에 유리의 눈 꼬리가 한껏 치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수연이 단호한 어조로 말한다.

“어쨌거나! 더 인기가 많아지던 뭐던 창현이는 창현이야. 괜히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자. 그리고! 앞으로 이어질 촬영에 대해 서로 최선을 다하기야. 괜히 딴생각하다가 늦어지면 알지?”

“…….”

날카로운 수연의 말에 유리와 수영은 압도되어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태연의 말에 낑낑대며 하찮음을 바닥에 뿌리고 다니던 수연이었는데 어느덧 예전의 폭군 모습을 되찾아나가고 있었다.

얼어붙은 유리와 수영을 보며 미영이 살짝 옆구리를 찌르자, 자신의 실수를 알아차린 수연이 미소를 지으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한다.

“열심히 하자, 응? 난 휴식 좀 취하고 싶단 말이야.”

“아, 알았어.”

“협력할게.”

극과 극을 오고가는 수연의 모습에 유리와 수영은 얼떨떨함을 감추지 못했다.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촬영에 최선을 다하자는 것!

좋은 취지의 이야기인 만큼 유리와 수영은 전폭적인 협력을 약속하였다.


<팩토리 걸> 촬영은 어렵지 않았다.

뉴욕 길거리로 나아가 자신만의 패션을 갖춘 사람들에게 인터뷰를 하고, 전문가가 가져야 할 시각에 대해 이야기를 들으며 스케줄을 진행해 나갔다.

바쁘게 이어지는 촬영 덕분에 소녀들은 미국을 구경할 틈도 없이 스케줄로 하루하루를 보내야만 했고, 멤버들의 열성에 힘입어 촬영은 순조롭게 이어져 끝을 맺을 수 있었다.

“촬영이 모두 끝났으니 내일 현 씨가 있는 곳으로 이동하도록 하겠습니다.”

3일 동안 정신없이 이어진 촬영 때문에 휴식시간이 주어졌다. 각자 주어진 시간 동안 부족한 수면 시간을 보충하고, 간단하게 거리를 둘러보며 충전의 시간을 갖는 소녀들. 그 과정에서 자신들이 보았던 스캔들이 진짜 스캔들이 아니라 일종의 마케팅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자 허탈함을 감추지 못했다.

자극적인 사진과 눈에 들어오는 커다란 제목 때문에 완전히 낚여버렸던 것이다.

‘창현이가 그럴 리 없지.’

‘헤헤, 역시. 하지만 더 찐한 도장을 남겨둬야 해.’

해외파 두 명의 소녀는 신문을 읽으면서 고개를 끄덕였고, 유리와 수영은 간단한 해석을 통해 오해였다는 걸 알아차리자, 어느 정도 안도하는 모습을 보였다.

상쾌한 기분으로 하루를 보낸 뒤,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현을 찾아 촬영팀은 이동하기 시작했다.

한국에 있을 때와 달리 미국에서 활동하는 현은 콘서트를 자주하였기에 지금 촬영팀이 향하는 곳은 콘서트 장이었다.

“와! 이렇게 큰 곳에서 콘서트를 하는 거야?”

“창현이가 메인이고, 몇몇 가수들이 게스트로 와준다고 하던데? 그런데 그 게스트들도 장난이 아니야.”

“정말 스케일 크다.”

콘서트 장에 도착한 소녀들은 국내에서 볼 수 없는 방대한 스케일에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감탄하는 멤버들을 보며 유리가 입을 열었다.

“자자, 여기서 감탄을 할 때가 아니라고. 우리가 가야 할 곳이 있다는 걸 잊은 건 아니겠지?”

“어서 창현이한테 가자. 오늘 특별 게스트인데 후배로서 인사를 해야지.”

말을 덧붙이는 미영이었다. 그녀를 보며 유리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게, 후후! 미영이 네가 뭔가 좀 알고 있네.”

“유리 너도, 헤헤!”

수연과 수영을 연행하다시피 끌고 간 두 사람은 곧장 현의 대기실로 향한다.

노크를 하고 안으로 들어서려던 순간, 그녀들의 귓가에 들려오는 끈적한 여인의 목소리.

“현, 그렇게 거부하지 말라니까.”

“이건 좀 아닌 것 같은데.”

“후후! 아니라니. 거부하지 않아도 돼. 그냥 받아들이라니까.”

“하지만…….”

난감함이 잔뜩 실려 있는 창현의 목소리에 당장 붙어버릴 듯한 여인의 끈적한 목소리. 영어로 이뤄진 대화라서 유리와 수영은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지만 목소리에서 실려 나오는 느낌만으로 무슨 상황인지 눈치 채는 것이 가능했다.

긴급 상황이다!

창현이 궁지(?)에 몰려 금발 미녀에게 잡혀 먹힐 수 있다는 생각을 한 소녀들은 쾅쾅! 하는 점잖은 노크 소리와 함께 우렁찬 목소리로 훼방을 놓았다.

“들어가겠습니다!”

그리고 문을 열고 들어간 그녀들의 눈에 들어온 안의 광경은 충격 그 자체였다.

그녀들의 눈에 비친 것은 다름 아닌…….

금발미녀와 얽혀 있는 창현의 모습이었다.

어디서 감히!

불륜(?)을 목격한 소녀들의 눈에 불꽃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갑자기 문이 열리자 대기실 안에 있던 사람들은 도둑질을 하다 들킨 것처럼 깜짝 놀랐다.

“…….”

분노로 이글거리는 소녀들의 눈에 대기실 안 광경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곳에는 십여 명의 사람들과 함께 밖에서 소리를 내던 주인공인 창현과 금발 미녀가 자리하고 있었다.

너무나 익숙한 금발 미녀의 모습에 소녀들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감히!’

창현의 몸에 팔을 두르고 착 달라붙어 있는 금발 미녀는 작년 MKMF 때 키스 퍼포먼스와 폭탄선언으로 단번에 유명해진 세실리아였다.

나긋나긋하게 양팔을 창현의 목에 두르고 몸을 기대며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이는 듯한 모습은 한 편의 화보와도 같은 느낌을 주고 있었다.

초롱초롱 빛나는 푸른 눈이 곱게 반달을 그리며 웃음을 그린다.

그 속에 서린 감정을 읽은 소녀들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저것은 자신이 우위에 서 있다는 것을 뜻하는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어 있는 것도 배 아파 죽겠는데 비웃음까지 날리다니.

당장 달려들 듯 날 선 기세를 발산하는 소녀들이었지만 창현의 목소리에 우뚝 멈출 수밖에 없었다.

“누나들 왔어요?”

“응, 창현아, 안녕?”

질투심으로 인해 판단이 흐려진 미영의 빈틈을 비집고 유리가 미소를 지으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선다.

찰나의 순간 어느 것이 더 이득인지 판단한 것이다.

“그러게요.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는데 먼 곳에서 만나다 보니 무척 반갑네요. 음, 세실 손 좀 놔줘.”

반갑게 인사하며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창현은 자신의 목을 휘감고 있는 세실리아의 손을 떼어놓으며 말한다.

“칫! 나 같은 미인이 해주면 고마워 할 것이지. 현은 너무 둔해.”

아쉬움을 드러내며 팔을 푸는 세실리아. 그녀의 말을 알아들은 수연과 미영의 눈에 다시 한 번 불똥이 튀었지만 유리는 알아듣지 못한 상황이다.

다만 눈치껏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할 뿐.

‘하지만 넌 안 돼!’

금발 미녀에 대한 불안함을 짧게 끊어 말하는 유리.

아무리 열심히 움직여도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다.

아쉬워하는 세실리아와 눈이 마주친 유리는 입 꼬리 한 쪽을 말아 올리며 손가락을 흔든다.

세계 모든 사람들과 소통이 가능한 바디 랭귀지!

유리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차린 세실리아의 표정이 사납게 변한다.

“창현아, 1위라면서? 축하해.”

“운이 좋았죠. 하하.”

“운이 좋긴, 우리 나라에서도 그 정도 인기였으면 미국에서도 당연히 그 정도는 해줘야지. 이참에 아예 전설을 세워버리는 건 어때?”

“전설이라고 하면 정말 판타지 같은 기록을 내야 하는데요? 제가 죽을 때까지 미국에 있어도 그 기록을 넘기는 힘들 것 같네요.”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창현과 유리의 대화.

그것을 본 소녀들은 세실리아의 도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우르르 달려와 창현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소녀시대입니다.”

수많은 눈을 의식한 세 소녀는 입을 맞춰 인사를 했다.

갑자기 등장한 동양인 소녀들의 모습에 스태프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곳은 오늘 콘서트 장에서 가장 보안이 철저한 곳인데 어떻게 들어온 것인가?

그들의 얼굴에 서린 의문을 읽은 창현이 유창한 영어로 궁금증을 풀어준다.

“그녀들은 제 모국인 대한민국에서 가수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제 친누나들 같은 분이니 친절하게 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친한 사람을 강조하자, 스태프들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한다.

“흐응, 현, 그때 보았던 걔네들인 거야?”

뒤로 찰싹 달라붙는 세실라아가 귀에다가 입김을 불어넣는다.

예민한 곳을 공략 당한 창현은 움찔 몸을 떨다가 인상을 찌푸린 뒤 세실리아를 떼어놓고 말한다.

“세실, 난 이런 거 좋아하지 않는다니까?”

“그래? 몰랐어, 미안해.”

하나도 이해하지 않은 얼굴로 뻔뻔하게 미안하다 말하는 세실리아였다.

전혀 신뢰가 가지 않는 그녀의 말에 창현의 표정이 찌푸려진다.

그의 변화에 세실리아는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는 곧장 팔에 달라붙어 애교 어린 목소리로 부탁한다.

“미안하다니까, 응?”

“알았어. 그런데 방금 내 말을 듣지 않은 거야?”

“그, 그럴 리가. 그런 거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

자신도 모르게 창현에게 스킨십을 시도했던 세실리아는 서서히 변하는 그의 표정을 보고는 화들짝 놀라 손을 저으며 부인한다.

몇 번 보면서 느꼈지만 현은 자신이 싫어하는 행동을 여러 번 반복하면 단호하게 인연을 끊어버린다.

성숙한 누님의 매력으로 현에게 여성의 매력을 눈 뜨게 만들려던 세실리아의 계획은 완전히 어긋나버리고 말았다.

세실리아가 고분고분해지자 창현은 고개를 저으며 짧게 한숨을 푹 내쉬다가 시선을 옮겨 엠넷 촬영팀을 향해 입을 연다.

“다, 당장이라도 했으면 좋겠습니다만…….”

주변을 감싼 분위기에 PD가 몸을 떨며 말한다. 주변에 가라앉은 묵직한 공기가 시시각각 그를 압박해오고 있었다.

그저 겸사겸사 시청률을 올려줄 구원투수라 생각했는데, 직접 보게 되자 상상 이상이었다.

‘왜 깍듯하게 대하라 했는지 이해가 되는군.’

상상을 초월하는 미국 내 현의 인기. 그것만 보아도 그의 스케일이 감히 국내에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는 것을 뜻했다.

부서는 다르지만 다른 부 PD가 억지로 현을 MKMF에 참가시키려다가 호되게 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AA엔터테인먼트 측에서 간이 부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보니 이야기는 다르다.

막말로 자신들이 훼방을 놓아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국내일 뿐, 외국에는 영향력을 행사하기 힘들 테니까. 이곳에서 활동하는 것이 더욱 큰 수입을 가져다 줄 것임이 분명했다.

“당장이라, 뭐 나쁘지 않겠죠. 하지만 주변의 허락을 구해야 할 듯 싶으니 잠시만 기다려주시죠.”

그 말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선 창현은 스태프들에게 사전 양해를 구한다. 모국에서 자신과 친한 연예인들이 미국으로 촬영을 왔는데 협력하게 되었다는 것과 간략한 인터뷰에 응해주길 부탁한다.

“현이 원한다면 물론!”

흔쾌히 수락하는 세실리아다.

“고마워, 세실.”

“고맙긴. 이 정도는 현을 위해서 얼마든지 해줄 수 있는 걸. 호호!”

전략을 바꾼 듯 조신한 모습으로 웃음 짓는 세실리아.

그녀의 머릿속에는 예전 한국에 있던 일들에 대해 떠올리고 있었다.

‘이대로 촬영을 하면 현의 모국에도 나간다는 거겠지? 그럼 지지 여론을 더욱 확대할 수 있겠어.’

현을 좋아한 뒤로 한국어 열공에 빠져든 세실리아.

미국에 돌아간 뒤 그녀는 우수한 인터넷을 이용하여 대한민국 내 반응을 살피고, 자신에게 상당히 호의적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여론에 힘 입어 세실리아는 대한민국 내 자신의 인식을 더욱 좋게 만들고자 하였다.

그것이 곧 현과의 관계에 진전으로 이어질 것이라 생각하며.

“스태프들 모두 협력하겠다고 하네요. 간단한 인터뷰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현의 무대에 관련된 여러 가지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창구가 마련된 것이기에 PD의 표정이 밝아진다. 그러다 슬쩍 세실리아를 보고는 은근한 어조로 창현에게 묻는다.

“혹시 세실리아 양은……?”

현의 미국 내 대표곡이라 할 수 있는 <Minus>에서 여자 주인공으로 출연하여 일약 스타덤에 오른 세실리아는 영화와 드라마 출연으로 인지도가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치솟은 상황이었다.

작년 MKMF에서 나왔을 때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값어치가 상승하였기에 PD는 세실리아와 꼭 인터뷰를 하고 싶었다.

그 물음에 창현이 세실리아를 힐끗 살폈고,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피식 웃음을 지은 창현이 PD에게 말한다.

“적극적으로 협력하겠다고 하더군요.”

“정말입니까?”

“세실리아는 우리나라를 무척 좋아하거든요.”

“정말 잘 되었군요.”

세실리아까지 합류하겠다고 하자, PD의 얼굴은 싱글벙글이었다.

현도 대박이지만 미국 내는 물론 국내에서도 심상치 않은 인기를 지닌 세실리아도 함께 촬영한다면 시청률은 더욱 뛰어오를 것이다.

“저기 창현아, 궁금한 게 있는데…….”

“네, 아… 뭐, 뭔데요?”

한 걸음 성큼 나선 미영이 말을 걸자 창현이 순간 움찔했다가 원래 안색을 찾으며 묻는다.

그 반응에 눈치가 빠른 유리의 눈이 순간 가늘어졌다.

‘뭐지? 왜 창현이가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거야?’

의심이 들었지만 무슨 상황인지 몰랐기에 조용히 상황을 주시한다.

“아까 전에 세실리아 씨랑 뭘 한 거야? 영어로 뭔가 심각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는데…….”

“네? 아, 아아! 그거요.”

고개를 갸웃하던 창현은 아까 전 소녀들이 들어올 때 상황을 떠올리고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실은 콘서트에서 부를 노래를 가지고 이야기를 했거든요. 듀엣곡을 부르자고 해서 제가 거부를 하니 좀 옥신각신 했어요.”

“헤헤! 그렇구나.”

걱정하던 것이 아니자, 미영의 표정이 밝아졌다. 뒤에 있던 수연과 유리, 수영의 표정도 덩달아 한결 나아졌다.

“창현이 너 정말 대단하더라. 완전 미국에서 슈퍼스타야.”

수영이 미소 지으며 장난스럽게 말하자 창현은 어깨를 으쓱할 따름이었다.

“슈퍼스타는 모르겠고 한 인기 좀 하죠?”

“헉! 겸손하던 창현이가 변했어.”

“변했다기보다는, 여긴 마냥 겸손 떨면 손해 보는 곳이더라고요. 그래서 조금 난 척 좀 하고 있어요. 이른 바 아메리칸 스타일이랄까?”

그러면서 그의 시선이 수연과 미영을 훑었다.

괜히 뜨끔한 두 소녀는 고개를 돌려 창현의 시선을 외면했다.

“어쨌든 출연해줘서 고마워.”

“이 정도쯤은 어렵지 않죠. 게다가 타지에 와서 저도 좀 외로웠거든요. 누나들이 오니까 저도 나쁘지 않네요.”

내심 창현에게 부담감을 주는 게 아닐까 걱정하던 소녀들은 그 말을 듣고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고맙긴, 오히려 우리가 고마워해야지. 창현이가 함께 한다고 하니까 바로 대우가 달라지던데? 식사부터 시작해서 숙소까지 말이야.”

“하하! 그래요? 그럼 오늘 누나들한테 저녁 좀 얻어먹어도 되려나?”

“헉! 그것만은…….”

“히잉! 용돈이 얼마 없는데…….”

자신들의 지갑 사정을 떠올린 소녀들은 새파랗게 질려서 뒤로 물러서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하! 뭘 그렇게 무서워해요, 농담 가지고. 오히려 저 때문에 여기까지 왔으니 저녁은 제가 사드릴게요. 평소라면 바빠서 힘들었을 테지만 콘서트 뒤에는 휴식시간이 있어서 시간이 되네요.”

“사준다면 또 거부하지는 않겠어!”

안 그래도 먹고 싶은 것이 산더미 같았는데, 용돈 부족으로 인해 그림의 떡 취급을 하던 상황이 절망스러웠던 수영이다. 그런데 창현이 사주겠다고 하자,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사양하지 않았다.

다른 소녀들도 비슷한 모습이어서 창현은 웃음을 지었다.

“현, 뭐해?”

조용히 지켜보던 세실리아는 즐겁게 이야기 나누는 그들에게 접근했다.

그녀의 말에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창현이 세실리라에게 소녀들을 소개시켜준다.

“아! 그러고 보니 아직 소개를 안 했네. 세실, 인사해. 여긴 내 모국에서 가수 활동을 하는 소녀시대 그룹의 멤버 제시카, 티파니, 유리, 수영 누나야.”

“안녕하세요, 세실리아입니다.”

“소녀시대입니다.”

서로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그녀들이었지만 중간에 창현이란 존재가 있자, 어느 순간부터인가 휴전을 선언하고 드러내던 발톱을 감췄다.

‘점수를 따야겠어!’

세실리아는 자신이 그동안 열심히 연마한 자신의 한국어 실력을 창현에게 보여주기로 하였다.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세실리아가 소녀들에게 반가움이 잔뜩 실린 목소리로 말한다.

“앞으로 잘 부탁해요.”

“네, 저희들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유창한 세실리아의 한국어에 깜짝 놀란 소녀들이었다. 그러다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세실리아에게 마주 미소 지어주었다.

세실리아가 손을 내밀자 그 손을 잡는 수연.

맞잡은 손을 흔들며 세실리아가 그녀들에게 덕담(?)을 해주었다.

“너희들 같은 허접은 나한테 듣보잡이야.”

“…….”

인터넷 속성으로 한국어를 배운 세실리아의 언어 구사에 입을 떡 벌린 채 할 말을 잃은 소녀들.

한국말을 인터넷 용어부터 배운 세실리아였다.

외국어는 욕부터 배운다는 선입견을 과감하게 깨버린 그녀는 진정한 선구자였다.


“…….”

세실리아의 화려한 언어구사로 인해 한동안 벙쪄 있던 사람들.

그 침묵을 깬 것은 창현이었다. 웃음을 참지 못한 그는 세실리아의 이상한 언어구사에 폭소를 터뜨리고 말았던 것.

자신의 덕담(?) 구사에 스스로 만족하던 세실리아는 창현이 웃음을 터뜨리자 당황하고 말았고, 웃음을 터뜨리던 창현은 간신히 웃음을 그친 뒤 그녀가 했던 말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었다.

자신이 말했던 내용이 무엇인지 알아차리자 세실리아는 얼굴에 붉어져서 무안해했다.

아름답고(?) 고귀한(?) 자신이 그런 저급한 언어를 구사하다니.

특히나 상대방에게 대놓고 실례가 된 말을 했기에 세실리아는 벙쪄 있는 소녀들에게 황급히 사과했다.

“미, 미안합니다.”

어눌하지만 또박또박 한국어로 이야기하는 세실리아의 모습은 귀여웠고, 창현의 설명으로 오해를 풀게 되자, 화해할 수 있었다.

해와파인 수연과 미영은 그러한 세실리아의 태도에 호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봤자 자신의 것(?)을 노리는 도둑 고양이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아, 덕분에 기분이 좀 좋아졌네요.”

“기분이 안 좋았던 거야?”

“우리 때문에 그런 거야?”

조심스럽게 창현을 바라보며 묻는 수연과 유리. 미영은 특유의 친화력으로 세실리아의 영어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같은 해외파인 수연은 자신의 주적(?)과 웃으면서 이야기 나눌 자신이 없어서 슬그머니 자리에서 빠진 상황이다.

수영도 창현의 말을 듣고는 한결 조심스러워진 모습으로 묻는다.

“설마 내가 밥을 사달라고 한 것 때문에 그런 거야? 미안, 많이 안 먹을게.”

끝까지 안 사줘도 된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그 말에 다시 웃음이 터진 창현은 미소 지은 채 고개를 저었다.

“아아,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럼 왜…….”

창현에 대해서라면 눈에 불을 키는 수연이 자세한 연유에 대해 물으려 할 때, 뒤에서 세실리아가 주변을 둘러보다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창현에게 묻는다.

“응? 시간이 됐네? 현, 시간 맞지?”

“지금쯤이면 되겠네. 그럼 부탁을 좀 할까?”

“물론이지. 후후!”

입가에 미소를 짓는 세실리아. 그리고는 소녀들을 둘러보며 말한다.

“자, 소녀분들 지금은 우리가 밖으로 나가줘야 할 시간이랍니다.”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건…….”

“주변을 한 번 둘러봐.”

어느새 친분을 쌓은 미영이 친근하게 물어오자, 세실리아가 주변을 가리키며 말한다. 그 말에 주변을 둘러본 미영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제법 많은 사람이 바글바글하던 대기실에는 자신들을 비롯한 촬영팀 밖에 없던 것이다.

“사람들이 왜…….”

“자자, 아가씨들? 그 이야기는 잠시 후에 해주지 않겠어?”

연유를 물어보려던 미영의 말을 끊고 한 줄기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 목소리에 일제히 고개를 돌렸던 소녀들의 눈이 휘둥그레 변한다.

“세희 언니!”

그녀들에게 말을 건 사람은 다름 아닌 세희였던 것.

입가에 미소를 지은 세희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소녀들에게 말한다.

“일단 밖으로 나갈까. 창현아, 밖으로 나가면 되지?”

“네, 부탁드릴게요.”

“그럼 시작 전에 오도록 할게.”

“네.”

창현의 대답을 끝으로 세희는 소녀들을 데리고 대기실 밖으로 나간다.

그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밖으로 나오게 되자, 미영이 눈을 빛내더니 세희를 바라보며 입을 연다.

“언니, 설마…….”

“맞아. 으이구,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운 건 이해를 하지만 창현이도 좀 도와줘야지. 창현이는 무대 위에 서기 전에 집중력을 벼려놓잖아. 그래서 혼자 있을 시간이 조금 필요하다고.”

“아…….”

세희의 말에 소녀들은 자신의 실수가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그녀들도 익히 알고 있던 사실이었건만 반가운 마음이 앞서다 보니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게다가 대기실에 사람이 많았던 것도 한몫을 하였고.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하는 소녀들.

그 가운데 미영은 무언가 궁금한 게 있는지 고개를 갸웃하며 수연에게 묻는다.

“제시, 벼려놓다가 무슨 뜻이야?”

세희가 말한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아서 가장 친한 수연에게 묻는다.

그러나 불행히도 수연은 벼려놓다라는 뜻을 모른다.

그렇다고 곧 제위(?)에 오를 자신이 일개 단어 뜻을 모른다고 하면 이 띨파니에게 어떤 트집을 잡힐지 모른다.

이럴 땐 그저 톡 쏘아붙이는 게 최고다.

“그것도 몰라? 한국어 공부를 하는 거야, 뭐야.”

“히잉, 그냥 알려주면 되잖아.”

“스스로 공부해. 그렇지 않으면 금방 까먹을 걸?”

“제시 나빴어.”

알려주지 않는 수연을 보며 입술을 삐죽 내민 미영은 눈에 들어오는 사람을 보고는 멈칫한다.

유리에게 물어볼 계획이었는데 그녀는 세희와 수다를 떨고 있던 것.

결국 남은 사람은 수영밖에 없었다.

‘수영이는 장난 칠 것 같은데…….’

한국어에 약한 자신을 가장 많이 놀린 것이 바로 수영. 때문에 그녀에게 한국어 뜻을 물어보기가 상당히 망설여졌다.

‘괜찮을 거야. 설마 장난을 치겠어?’

설마 그녀가 이 분위기에 자신에게 장난을 칠까.

근거 없는 자신감을 바탕으로 미영은 수영을 바라보며 묻는다.

“수영아. 벼려놓다가 무슨 뜻이야?”

“벼려놓다? 아아, 그거 몰라서 수연이한테 물어봤던 거였어?”

“으응. 뭔지 모르겠어서.”

“그러니까 벼려놓다는 뜻은 그거 있잖아? 벼. 쌀이 되기 전 벼를 잘라서 이걸 쌀로 만들어서 맛있게 먹는다는 뜻이야. 우리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농부들에게 감사한다는 뜻을 갖는다는 거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 태연한 모습으로 미영을 속이려는 수영.

하지만 당하는데 도가 튼 미영은 만만치 않았다. 눈을 가늘게 뜬 뒤 수영을 바라보면서 날카롭게 물어본다.

“그런데 창현이가 왜 정신을 벼려놓는 거야? 말이 안 되잖아.”

“음, 그건 나도 잘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생각에 잠기면서 자신에게 밥을 먹게 해주는 농부에게 감사한 마음을 갖는다는 거 아닐까? 왜 그런 사람 있잖아. 오늘 하루 식사를 하면서 농부에게 감사한 마음을 갖는 사람. 창현이도 무대 위에 서면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낀다니까 그럴 수도 있지.”

소설가를 해도 부족하지 않을 듯한 수영의 그럴 듯한 논리는 미영을 납득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이상함을 느끼던 미영도 수영의 말에 절로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렇구나. 농부분들에게도 감사함을 느끼다니. 역시 창현이는 착하네. 헤헤!”

“그렇지. 나도 창현이한테 감탄했다니까?”

고요히 흐르는 강물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말을 해내는 수영. 한 점 흐트러짐 없는 수영의 태도는 미영을 완벽하게 속여 내는데 성공했다.

속는 미영의 눈치도 점점 빨라지지만 속이는 수영의 실력 또한 미영의 실력에 비례하여 늘어나고 있었다.

“…….”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수영의 탁월한 거짓말 실력에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표정 변화 하나 없이 완벽하게 거짓말을 해내다니.

사람들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하나였다.

‘구라쟁이!’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는 가운데 미영을 완벽하게 속인 수영은 구라쟁이라는 별명을 갖고 말았다.

그리고…….

그 속에서 열공 모드에 빠져든 한 사람이 있었다.

부드럽게 흘러내린 금발과 장난기가 감도는 미소. 보석을 박아 넣은 듯한 푸른 눈 속에는 열의가 맺혀 있었다.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수영의 말을 알아든 세실리아.

그녀는 수영이 말한 것을 머릿속으로 새겨 넣고 있었다.

‘벼려놓다, 벼를 베어서 쌀로 만들어 농부에게 감사한 마음을 갖고 먹는다는 뜻이구나. 현에게 말해서 멋진 모습을 보여줘야지.’

글로벌 구라쟁이가 되어가는 수영이었다.


고요하게 가라앉은 공연장.

그렇다고 해서 지금 이 곳이 텅 비어있느냐? 그것은 아니었다.

공연장에는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수많은 사람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들이 보러 온 사람은 오직 한 사람.

온 몸 가득 신비로움으로 무장하여 머나먼 타국인 이곳 정상에 우뚝 선 그를 보기 위해 먼 길을 찾아왔다.

과연 어떤 무대를 자신에게 보여줄 것인가.

곧 자신에게 덮쳐올 감동의 크기를 상상하며 관객들은 조용히 침묵하였다.

이제 오랜 기다림을 깨고 즐기는 순간만 남아 있었다.

뚜벅 뚜벅 뚜벅.

선명한 발자국 소리가 그들의 가슴을 거세게 두드린다.

도대체 어떤 효과음이기에 걸음 소리만으로 자신들의 마음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것일까.

어둠 속에 휩싸이니 무대이기에 그들의 눈에는 흐릿한 검은 그림자만 보일 뿐이었다. 무대 위에 서는 그가 어떤 의상을 입고 있는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느낄 수 있었다.

선명한 발자국 소리가 들릴 때마다 거대한 존재감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그 발자국 소리가 더욱 커지며 자신 앞에 도달한 듯한 느낌이 들었을 때, 걸음이 멈췄다.

무대 위에 서서 마이크를 만지는 그. 아직까지 어둠에 휩싸여 아무도 그의 자세한 모습을 볼 수 없었다.

10만 명에 가까운 관객들이 만들어내는 침묵은 거대한 크기의 기대감을 만들어나갔고, 그것은 서서히 형태를 갖추며 무대 위에 선 그에게 전달되기 시작했다.

어둠에 익숙해진 탓일까.

흐릿하게만 보이던 그의 모습이 서서히 형상을 이루기 시작했고,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그가 무슨 행동을 하는지 분간할 정도가 되었다.

마이크를 든 뒤 조용히 전방을 향해 겨누고 왼쪽 끝을 겨눈다.

그 순간, 그가 가리킨 마이크 방향에서 불꽃이 터져 나오기 시작한다.

퍼벙! 펑! 펑펑!

마이크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움직이고 있었고, 그때마다 불꽃이 터져 나오며 화려한 모습을 자아내고 있었다.

요란하게 터지는 폭죽 소리와 함께 미소를 지은 그가 마이크를 입가로 가져가며 한마디 한다.

“이제부터 파티를 시작하겠습니다. 즐겁게 즐겨주시길.”

와아아아아아!

거대한 함성 소리와 함께 환하게 밝혀진 조명이 그의 모습을 비춘다.

무대 위에 선 그, 창현은 폭발적인 관객의 반응에 미소를 짓는다.

이 시간은 나의 것이다.


와아아아아!

가벼운 손짓 하나에 거대한 함성이 일어난다.

이 맛이다. 세상 위에 오로지 나 홀로 서 있는 듯한 느낌.

잠깐의 망상이고, 터무니없는 상상이지만 지금 이 순간, 이 무대 위에 서 있는 만큼은 관객들을 내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마에스트로(Maestro)다.

10만에 가까운 관객들이 자신의 노래에 함성을 터뜨리는 모습을 보면서 창현은 미소를 지었다.

이 열기를 잊지 못하기에 자신이 무대를 비울 수 없었다.

앞으로 더욱 많은 무대 위에 서고 싶고, 더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그것이 그가 가진 욕심이었다.


“와아…….”

창현의 무대를 본 소녀들은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그녀들이 자리하고 있는 곳은 몇 되지 않는 VIP석이었다.

미국까지 온 그녀들에게 창현이 해줄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는 자신의 무대를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게 하는 것. 좌석을 몇 개 미리 빼두었기에 PD를 비롯한 몇몇 스태프들도 VIP석에서 창현의 무대를 볼 수 있는 영광을 누렸다.

본격적인 콘서트를 시작하면서 그가 정상에 군림하고 있는 ‘현’인지를 확실히 깨닫게 해주었다.

그의 무대는 사람의 영혼을 압도하는 듯한 압도적인 파워를 지니고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 자신이 무대에 동화가 된 듯한 느낌.

어느 순간부터인가 노래 가사에 몰입되어 흥얼거리며, 어깨를 들썩이는 자신의 모습을 자각하는 순간 그들은 화들짝 놀라고 만들었다.

자신의 의지를 배반하고 움직이는 몸의 움직임은 가히 공포스러울 지경이었다.

“너무 멋져…….”

“무대를 압도하는 힘이…….”

무대 위에 선 창현을 바라보는 소녀들의 눈은 하트를 그리고 있었다. 특히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은 채 창현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미영의 눈에는 분홍색 하트가 뚝뚝 떨어질 것 같은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진짜 어떻게 저런 무대를 펼칠 수 있는 걸까?”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가 않아.”

“정말 평소 우리랑 이야기하는 창현이가 맞아?”

눈으로 직접 보고 있지만 믿기가 힘든 광경이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들과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던 소년이 지금은 십만에 가까운 관객들을 압도하는 엄청난 무대를 선보이고 있었다.

말이 십만이지, 그들이 한데 모여 있는 광경은 그야 말로 설명이 불가능 할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다.

수백 명만 있어도 많은 느낌이 물씬 풍기는데 그보다 수백 배 더 큰 규모의 사람들이 모여 있다고 생각해보아라.

그들이 발산하는 존재감에 곧바로 짓눌리고 말 것이다.

“정말 멋지다.”

무대에 집중하며 조용히 지켜보던 유리도 그렇게 감탄사를 흘렸다.

그러면서 흐뭇함을 감추지 못했다.

저렇게 멋진 남자가 곧 자신의 남자 친구가 될 예정(?)이라니.

누구도 예상치 못할 테지만 시어머니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둔 이상 기회는 자신에게 올 것임이 분명했다.

‘그때가 되면 반드시…….’

사람에게 한 번쯤 기회가 찾아오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기회를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은 철저한 준비를 해놓은 사람뿐이다.

그런 점에서 유리는 이미 준비가 되어 있었다.

좋아하고 있었지만 지금 보고 있으니 그 감정은 더욱 강해지는 느낌이다.

두 눈 가득 열기를 담아 창현을 바라본다.

격렬한 무대를 선보인 창현은 호흡을 가다듬더니, 마이크를 들고 말한다.

“하아! 다음 무대는 오늘 콘서트를 빚내주기 위해 온 게스트분과 함께 듀엣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어렵게 시간을 내어 와주신 분입니다. 모두 함성으로 맞이해주시기 바랍니다. 세실리아.”

와아아아아!

창현의 호명에 관객들이 함성을 지르며 세실리아의 등장을 반긴다.

어느덧 미국 사람들에게는 세기의 카사노바가 되어 있는 창현. 미국에 오자마자 작업(?)에 착수하여 열 명의 팝 스타에게 다리를 걸치는 것으로 모자라 예전에 작업을 했던 여배우를 어장 관리하는 철두철미함까지 보인다.

장난으로 말하지만 미국 사람들에게 현은 희대의 바람둥이였다.

“반가워요, 우리 현 많이 사랑해주시고요.”

여유 있는 모습으로 등장한 세실리아는 확실한 팬 서비스와 함께 긴장하지 않은 듯 입가에 미소마저 짓는다.

“여기까지 와준 세실리아와 함께 듀엣 곡을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기 시작했고, 흘러나오는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아무리 음반을 내도 세실리아의 실력이 창현에 견줄 정도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맑은 음성과 창현의 음성이 조화롭게 섞여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어주었다.

“…….”

너무나도 다정한 모습을 연출하는 두 사람.

잘 어울리는 그들을 보며 진심으로 즐거워하던 소녀들의 안색이 굳는다.

내 남자(?)가 다른 여자와 다정하게 노래를 부르고 있는데 즐거울 리가 없다.

당장 뛰쳐나가 훼방을 놓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했고, 지금 자신의 위치에 저기 서 있는 창현의 위치가 너무나도 멀게 느껴졌다.

‘언젠가는 반드시…….’

그녀들의 머릿속에 떠오른 공통된 생각. 언젠가 반드시 저 옆에 서는 것은 자신이 될 것이라는 굳은 다짐이었다.

반드시 그 위치까지 올라가겠다고 다짐하면서.


현의 콘서트는 성황리에 끝을 맺었다.

기존의 히트곡이었던 <Shield&Spear>와 <Minus>, 그리고 이번에 새로 발매한 <Devil Cry>와 <Temptation>을 부르며 관객들의 폭발적인 반응을 끌어내는데 성공했다.

뿐만 아니라 국내에서 발매했던 <Go&Stop>과 <My Princess> 영어 버전도 엄청난 호응을 얻었는데, 앞으로 여러 번의 콘서트를 통해 반응을 본 뒤 지금 추세를 이어나간다면 새롭게 앨범으로 발매할 예정이었다.

그가 부른 곡 중에서 가장 화제가 되었던 것은 당연히 <Temptation>이었다.

계단 춤이라고 하면 이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 계단 위를 걷다가 마치 허공을 걷는 듯한 그의 춤을 보고 사람들은 판타지(Fantasy)라 칭하며 극찬을 하고는 하였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칭송을 듣고 있건만 정작 창현은 요 며칠 동안 함께 하기로 한 <팩토리 걸> 촬영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건물 내부에서 촬영을 하자는 말에 창현은 오랜만에 거리를 활보하고 싶은 마음에 다른 제안을 내놓는다.

“밖에서 해도 된다고?”

“딱히 상관은 없거든요. 파파라치에게 사진이야 찍히겠지만 여러 명이서 함께 가면 괜찮고요. 미국은 연예인이 등장해도 딱히 달려들지 않거든요.”

“그래?”

창현의 말에 표정이 밝아지는 소녀들.

모처럼 미국까지 왔는데 호텔 안에서만 시간을 보내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던 차였다. 창현 또한 그것을 눈치 채고 있었고, 자신 또한 밖으로 나가고 싶었기에 한 제안이었다.

“모두 찬성이죠? 싫으면 안 나가도 되고요.”

안 봐도 뻔했지만 창현은 그것을 또 물어본다.

서로의 얼굴을 바라본 소녀들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동시에 외친다.

“콜!”

대답 하나는 빨랐다.


촬영진의 협조를 구한 그들은 밖으로 나왔다.

현재 미국에서 가장 뜨거운 감자는 다름 아닌 현이었기에 그의 등장은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중심으로 널찍한 원을 그렸지만 다가오는 사람은 없었다.

한국과 비슷하면서 무언가 묘하게 다른 감이 있었다.

파파라치라도 있는지 곳곳에서 플래시가 터지자, 수영이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창현에게 말한다.

“슈퍼스타랑 가는 느낌은 색다르네. 시선이 팍팍 집중되고 있어.”

“그런가요? 한국에 가면 누나들도 같을 텐데요, 뭐.”

“그러려나? 잘 모르겠어.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으니까.”

“하하!”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유지한다. 어디까지나 인터뷰를 위해 나온 것이기에 몇몇 의례적인 질문을 하고, 창현은 그에 대한 대답을 하면서 걸음을 옮기다.

그러던 중 수영이 무언가 떠오른 듯 손바닥을 탁! 치며 말한다.

“이렇게 하는 건 어때?”

“뭘?”

“이대로 하는 건 너무 식상하니까 조금 방식을 바꾸는 거야.”

“어떻게?”

호기심을 드러내는 유리의 반응에 수영이 탄력을 받아 빠르게 말을 이어나갔다.

“그거 있잖아. 게릴라 데이트! 한 명을 제외하고 다른 세 명은 반대편으로 가서 즉석 인터뷰를 하는 거지. 그리고 한 사람은 창현이와 함께 게릴라 데이트를 하며 인터뷰를 하는 거야. 어때?”

“끌리는데……?”

“나도나도!”

수영의 제안에 수연과 미영이 동의한다. 합법적으로 세 명의 적을 떨어뜨려놓을 절호의 기회를 그녀들이 놓칠 리 없다.

“그럼 합의가 된 거네? 창현이 넌 어때?”

“저도 나쁘진 않네요.”

창현의 허락이 떨어졌으니 거칠 것이 없었다.

“좋아! 그럼 갈라볼까.”

“어떻게 하려고?”

“가위 바위 보로 해야지. 화끈하게 단판승부. 어때?”

“나쁘지 않군. 그렇게 하도록 해.”

수영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소녀들. 그러자 순식간에 전투모드가 되어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며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 중 가장 먼저 행동에 나선 것은 수영이었다. 그녀는 바로 옆에 있는 미영을 툭 치더니 손가락 두 개를 피고 미영을 쿡 찌른다.

그것은 가위를 내자는 수영의 싸인. 쿡 찔린 미영 또한 손가락 두 개로 수영을 찌른다.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는 미영의 대답이었다.

‘수영이랑 편을 먹으면 일단 살아남을 수 있을 거야.’

하지만 미영은 미처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의 허벅지를 손가락 두 개로 쿡 찌르는 순간, 수영은 맞은편에 위치한 유리와 눈빛으로 대화를 나누며 살짝 주먹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는 것을.

매주 일요일 1박 2일을 열혈 시청하더니 싸인 주고받는 것에 도가 튼 유리와 수영이었다.

‘후후! 띨파니, 넌 내 밥이야.’

첫 희생양을 미영으로 삼은 수영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걸렸다.

그러나 그녀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지금 이 장면이 낱낱이 카메라에 촬영이 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미영에게 싸인을 주는 것부터 시작하여 유리와 이중싸인을 주고받는 것까지 모두 카메라에 담겨 있었다.

대기실에서도 절정에 달한 화술로 미영을 속였던 수영. 이번에는 절정에 달한 싸인으로 미영을 완벽하게 속이고 그녀를 희생양으로 삼으려 하고 있었다.

아마 이것이 방영되면 수영에게 별명이 지어질 것이다.

구라쟁이라고.


수영의 제안은 소녀들로 하여금 치열한 심리전을 벌이게 하였다.

빠르게 오고가는 눈치. 하지만 그 속에는 두 사람이 알지 못하는 은밀한 거래가 존재하고 있었다.

‘훗! 일단 약한 것들부터 떨어뜨리는 거야. 그 후에 진검승부다.’

스스로 생각해도 만족스러운 화술로 미영을 낚는데 성공한 수영은 속으로 키득키득 웃음을 지었다.

‘띨파니, 넌 내 밥이라고. 널 딛고 데이트권을 내가 확보해주겠어!’

엄밀히 말하면 카메라가 함께 하는 것이지만 여러 명이 함께 하는 것과 혼자서 단독으로 인터뷰를 한다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존재한다.

더불어 경쟁자들을 모두 물리쳤다는 쾌감을 느낄 수 있지 않은가!

여러모로 자신에게 충족감을 채워줄 계획이었다.

‘승부다, 유리 너도 협력자지만 경쟁자에 불과해.’

이곳에 오기 전 이미 유리와 협의를 마쳐놓은 수영이었다. 그 내용은 게릴라 데이트를 제안하여 단 한 명의 승자를 가리자는 것.

미영에게 제안한 것은 그녀를 낚기 위한 하나의 계책에 지나지 않았다.

‘승자는 나야!’

게릴라 데이트를 획득하기 위해 글로벌 구라쟁이가 되어버린 수영의 눈이 파랗게 빛났다.


‘흐응, 수영이가 말을 잘하긴 하네.’

수영과 함께 협력 체계를 유지한 유리는 미영을 낚는 것을 보면서 눈을 빛냈다.

나름 한 지략하는 자신도 미영을 낚는 것은 어려운데 수영은 이상할 정도로 손쉽게 미영을 낚고는 한다. 그 비결이 무엇인지 분석하려 해도 자신이 알 수 없는 미묘한 것이 존재했다.

만약 그것을 터득한다면 자신도 미영을 뜻대로 이용할 수 있다는 생각에 부풀었지만 잘못된 생각이란 걸 알아차린 후, 유리는 수영으로 하여금 미영을 낚게 하였다.

‘문제는 수영이가 미영이를 너무 얕보고 있다는 건데.’

미영을 낚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는 수영. 그녀를 찰떡처럼 믿고 있는 듯했지만 사정은 달랐다.

수영과 합의를 본 미영의 표정이 미묘하게 달라진 것을 본 것. 그리고 그녀의 시선은 정확히 수연에게 향하고 있었고, 눈빛으로 모종의 싸인을 보내고 있었다.

‘역시나.’

와룡 파니는 녹슬지 않았다. 예전의 띨파니가 아니었던 셈.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것을 느꼈는지 미영은 유리에게 눈짓을 한다. 함께 수영을 떨어뜨리자는 신호였던 것이다.

“…….”

유리는 고민했다. 이대로 미영과 함께 협력하는 건가, 아니면 수영과의 의리를 지켜 함께 폭사할 것인가.

‘결정했어.’

눈을 빛낸 유리는 미영과 눈빛을 교환하며 나직이 고개를 끄덕인다.

동업자인 수영을 배반하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예전이라면 수영과의 의리를 따졌을 테지만 지금은 걸린 상품(?)이 너무나 컸다. 그것을 저버리기에는 자신이 잃는 것이 너무나 많았다.

창현 앞에 서면 순한 양이 되어 한껏 여성의 매력을 드러내는 수연이나, 띨해 보이지만 음흉한 속내를 간직한 미영을 단독으로 보내기에는 무리가 따랐다.

차라리 자신이 가면 더욱 안전할 테지.

‘음! 그렇고 말고.’

수연이나 미영보다는 자신이 훨씬 낫고 말고.

이미 떨어질 수영에 대해서는 안중 외가 되어버렸다.

“자, 그럼 할까?”

자신의 운명을 모르는지 수영은 활기찬 어조로 말한다.

승부가 나면 어떤 표정을 지을 건지.

둥글게 선 소녀들은 날카롭게 눈을 치뜨며 각각 손을 든 뒤 준비 자세를 취한다.

“가위 바위 보!”

파바밧!

허공에서 변화를 일으키는 소녀들의 손은 정확한 타이밍으로 변화를 일으키며 최종 단계에 이른다.

드러난 것은 세 개의 보자기와 한 개의 주먹이었다.

주먹을 낸 주인공은 다름 아닌 수영이었다.

“뭐, 뭐야!”

드러난 결과가 믿기지 않는 듯 새파랗게 질려버린 수영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 모습을 보며 미영은 싱글벙글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뭐긴 뭐겠어, 결과가 나온 거지, 수영아. 헤헤!”

“너, 너…….”

배신감에 몸을 부들부들 떠는 수영.

자신의 밥이던 띨파니가 감히 자신을 속이다니!

영원한 자신의 봉이라 생각하던 미영에게 속은 수영의 충격은 엄청난 것이었다.

몸을 떠는 수영을 보면서 미영은 먼저 선수를 친다.

“같이 가위를 내자고 하고 왜 주먹을 낸 건지 이야기해줄 수 있어, 수영아?”

“이익…….”

할 이야기가 있을 리 없었다. 먼저 배신을 꾀했던 것은 다름 아닌 그녀였으니까.

지독한 배신감과 함께 눈앞에서 웃고 있는 미영의 모습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에게 톡톡히 당하던 띨파니 같지 않게 느껴졌다.

왜 갑자기 이렇게 변한 걸까.

전신을 휘감는 이질감을 느끼면서 수영은 시선을 유리에게 옮긴다.

자신과 협력하기로 해놓고 보자기를 내서 자신을 제거한 유리.

매서운 빛을 발하는 수영의 눈빛을 유리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인다.

“어쩔 수 없었어. 이대로 나까지 희생될 판이었으니까.”

“으으.”

함께 끝까지 하자던 진한 우정은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먼저 배신한 입장이건만 수영은 자신이 당한 게 믿기지가 않는 듯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자, 그럼 세 명이서 결판을 낼까? 헤헤!”

탈락자인 수영을 미뤄둔 채 대결 진행을 시도하는 미영. MC를 좀 보더니 이제는 상황 진행하는 것이 상당히 능숙해졌다.

“시간 없으니까 빨리하자.”

수연 또한 대결을 재촉한다. 자신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한정적인 만큼 창현과의 데이트를 길게 즐기기 위해서는 빠르게 두 명의 탈락자를 만들어낼 필요성이 있었다.

“좋아, 나도 바라는 바야.”

유리도 두 사람의 생각과 일치했다.

그리고 곧장 가위 바위 보 준비 자세를 취하는 세 소녀들. 수영은 여전히 자신이 미영에게 당한 게 이해가 되지 않는지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흐응?’

무엇을 낼지 고민하던 유리는 볼 수 있었다.

수연과 미영이 서로 모종의 싸인을 보내고 있는 것을.

세 명이 남은 만큼 한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난 호락호락하지 않아.’

위기가 닥쳤건만 오히려 미소를 짓는 유리. 자신을 탈락시킬 생각이겠지만 절대 쉽게 당해줄 생각은 없었다.

“창현아.”

“네.”

유리가 창현을 부르자 수연과 미영이 몸을 움찔 떤다. 입가에 여유로운 미소를 지은 유리는 두 사람을 훑어보다가 말한다.

“가위 바위 보 이긴 사람이 너랑 같이 가는 거 맞지?”

“한 명을 가리겠다면 그렇겠죠?”

“그렇다네, 수연아, 미영아?”

“……”

불의의 일격을 당한 두 사람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유리가 자신들의 노림수를 정확하게 파고 들어간 것이다.

두 사람의 계획은 서로 같은 것을 낸 뒤 유리를 이기면 서로 승부를 보는 것이었고, 만약 지면 다른 것을 냈다고 우기면서 어버버하는 유리를 단숨에 밀어낼 작정이었다.

하지만 발군의 눈치를 지닌 유리는 어렵지 않게 두 사람의 계략을 타파했다.

‘이렇게 된 이상 이겨서 탈락시키는 수밖에 없어!’

계획이 들통 난 이상 자신의 머리와 손을 믿는 수밖에 없다.

굳게 다짐을 한 세 소녀의 대결은 운에 달리게 된다.

“가위 바위 보……!”

세 손이 허공을 가르며 변화를 일으킨다.

그리고 이 대결에서 한 사람은 웃고, 두 사람은 울상을 짓게 되었다.


“뭔가 굉장히 잔혹한 거 같아요.”

“그래? 하지만 어쩔 수 없어. 승부의 세계는 냉혹하잖아.”

“그 논리가 사소한 일에도 적용되니 뭔가 삭막한데요?”

“그러게. 나도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수영이가 워낙 그런 걸 좋아해서.”

지금 싱글벙글인 표정으로 창현 옆에 붙어있는 여인은 다름 아닌 유리였다.

결국 신은 수연과 미영을 외면하고 말았다. 대결에서 승리를 거머쥔 유리는 주먹을 불끈 쥐며 자신의 승리를 자축했고, 세 소녀는 쓸쓸히 반대편으로 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승자와 패자의 명함이 극명하게 대비되는 순간이었다.

“수영 누나가 내기를 좋아하나 봐요.”

뉴욕 타임스퀘어에 위치한 핫도그 전문점에 가고 싶다 말하던 수영을 떠올리며 창현은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기보다는 확실한 걸 좋아하는 편이야.”

자신도 협력을 했건만 수영에게 모든 것을 뒤집어씌우는 유리였다.

촉이 발달한 유리는 지금 이 순간이 자신에게 무척 중요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이미 주변 공략을 마친 상황이었기에 남은 것은 창현에게 점수를 따는 것이다. 기초가 탄탄하니 이제 건물을 쌓아올리면 으리으리하고 멋진 건물이 완성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며 걸음을 옮겼다. 편하게 인터뷰를 하기도 하고, 사소한 이야기도 주고받으며 그의 근황을 궁금해 하는 팬들의 궁금증을 풀어주기도 한다.

얼핏 보면 두 사람의 모습은 무척 잘 어울렸다. 유리의 키는 167cm였고, 창현의 키는 179cm, 게다가 유리는 키에 민감한 그를 감안하여 굽이 낮은 구두를 신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랬기에 키를 비롯한 여러 면에서 무척 잘 어울리는 모습을 보였다.

연신 찰칵거리는 카메라 소리를 들으며 유리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가십성 기사 작성을 좋아하는 파파라치 특성상 자신이 창현과 스캔들 기사가 하나쯤 분명히 날 것이다.

‘곧 현실로 될 거기도 하지. 후후!’

아직은 아니지만 스캔들이 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흡족한 유리였다.

한동안 인터뷰가 이어지고, 두 사람은 잠깐 휴식을 위해 인근 커피숍으로 온 상태다.

촬영팀도 커피 한 잔 즐기며 휴식을 취하고, 창현과 유리도 같은 탁자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미국까지 와서 고생이 많네요.”

“고생이라니, 너에 비하면 아무렇지도 않은 걸. 게다가 인기를 얻기 위해서 열심히 해야 하잖아? 당연한 걸 가지고 그렇게 말해주면 조금 무안한데?”

“그래도 고생하는 건 맞잖아요, 하하!”

“그건 창현이 너도 마찬가지니까 뭐라고 할 건 안 되는 것 같네. 같이 고생하는 거잖아.”

빙긋 미소를 지으며 커피 한 모금 마시는 유리를 조용히 바라보는 창현이었다.

지영과 지선의 질문 때문일까?

같이 있는 것이 묘하게 쑥스러웠고, 자신도 모르게 유리의 장점과 단점을 분류하고 있었다.

유리는 또래보다 성숙한 외모와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면 자신을 배려해주는 느낌이 들어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였다.

단점은… 솔직히 아직 잘 모르겠다.

가족들의 질문 때문인지 이상하게 유리가 의식되고 묘하게 긴장감이 들었다.

마치 태연이 일일 데이트를 해준 이후 자신이 반응했던 것처럼.

“누나는 들리는 소문하고 상당히 다른 것 같아요.”

“들리는 소문? 들리는 것에는 내가 어떤데?”

주변의 평가가 궁금했던지 커피를 마시던 유리가 의아한 표정을 묻는다.

“하하! 누나 별명이 깝율이잖아요. 평소에 장난꾸러기 같다고 해서 저도 그럴 거라 생각했는데 제 생각하고 전혀 달라서요.”

깝율이라는 말에 유리가 순간 멈칫했지만 그것은 찰나의 순간이었다. 빙그레 미소를 지은 유리는 어른의 분위기를 풍기며 고개를 가볍게 젓는다.

“깝율이라니, 그건 방송 이미지 중 하나야. 원래 성격은 굉장히 조신하거든. 그런데 그렇게 하면 어필할 수가 없으니 좀 활발한 이미지로 하나 만들었거든.”

“아, 그래요? 역시나, 저도 유리 누나 모습을 보고 굉장히 의아했거든요. 평소에 그렇게 조신한데 어떻게 그런 별명이 나왔는가 싶어서요.”

“어떻게든 살아남고 싶어서 그런 거니 이해를 좀 해줘. 호호!”

조신한 모습을 강조하려는 듯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다.

현실과 방송 이미지를 당당하게 뒤바꿔버리는 유리였다.

여자의 내숭에 창현은 완전히 낚여버리고 말았다.


번뜩이는 반사신경으로 창현을 납득시키는데 성공했지만 유리는 궁금했다.

누가 자신을 보고 깝율이라고 한 것일까?

원인을 알아야 나중에 흘러나올 말도 사전에 차단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유리는 은근한 어조로 창현에게 질문을 하였다.

“창현아, 그런데 깝율이라는 단어는 어디에서 들은 거야?”

“깝율이요? 방송에서 말하는 걸 보고 물어본 거예요.”

“방송? 우리 멤버가 말했었나?”

뚜렷하게 기억이 나지 않아 고개를 갸웃하는 유리.

그 모습에 창현은 잠시 멈칫했다가 어차피 방영된 것이란 생각에 입을 열었다.

“저번에 태연 누나가 방송에 나와서 에피소드 이야기를 하면서 그걸 이야기 하던데…….”

“태연이가? 그렇구나.”

안도하는 유리의 모습에 창현은 의아함을 느끼고 묻는다.

“다른 사람이 이야기한 줄 아신 거예요?”

“응? 아니, 난 다른 사람이 내 험담한 줄 알았거든.”

“그래요? 하하! 그런 건 아니라서 다행이네요.”

“그러게 내가 너무 과민반응을 했나 봐.”

살포시 미소를 짓는 유리였지만 그녀의 속은 그렇지 못했다.

그녀의 속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탱구! 네가 감히 나를 깝율로 만들려고 해?’

하마터면 공든 탑이 와르르 무너질 수도 있던 아찔한 순간이 연출된 셈이었다.

자신은 아무런 훼방도 놓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리더란 녀석은 자신에게 깝율이라는 말도 안 되는 별명을 정착시키려 하다니.

수연을 몰아내고 태연에게 권력을 쥐어주는데 일등공신 역할을 했던 유리의 눈이 매섭게 빛났다.

태연에게 떠난 유리의 마음, 그것은 과연 수연에게 유리하게 작용할지 미지수였다.

“그럼 인터뷰를 계속 할까?”

“그러세요.”


뉴욕 거리를 오가면서 즐겁게 인터뷰를 하는 창현, 유리와 달리 탈락한 패배자들에게서는 암울한 오오라가 풍겨 나오고 있었다.

“이익, 같이 하고 싶었는데 띨파니가 배신을 해서…….”

“흥! 수영이 너도 날 속였잖아. 서로 속인 걸 가지고 뭐라 할 수 있어?”

“크윽! 띨파니 너도 날 배신할 생각이었잖아.”

“수영이 너도 날 배신하려 했잖아!”

서로 배신하였기에 피장파장이건만 미영과 수영은 서로를 속인 것에 대해서 분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수영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봉이던 미영에게 속은 것이 분했고, 미영은 자신을 속이려던 수영이 자꾸만 걸고 넘어지자 폭발한 듯했다.

안 그래도 그녀도 데이트 기회를 놓쳐서 뿔난 상황이었다.

“그렇게 말해봤자 달라질 건 없거든? 서로 상처만 입는 이야기는 그만하고 우리 스케줄부터 해결하도록 하자.”

“하, 하지만!”

“히잉, 제시…….”

미영에게 확실한 우위가 무엇인지 가르쳐주려던 수영과, 자신의 편을 들어줄 것이라 생각하던 미영, 두 사람 모두 냉정하게 잘라 말하는 수연을 보면서 섭섭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수연은 냉정하게 상황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렇게 시간 보내는 동안 누구는 알콩달콩 인터뷰를 즐길 것 같은데.”

그 말은 결정타였다.

수연의 이야기를 들은 두 사람의 표정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자신들이 소모적인 논쟁을 하는 동안 따로 이득을 취하는 사람이 있다!

미영의 눈이 가늘게 변했고, 수영의 눈 꼬리가 치솟았다.

“그렇게 해줄 수는 없지. 열심히 하겠어!”

“나도 협력하도록 하지, 띨파니.”

“이젠 띨파니 아니거든요?”

띨파니라는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표정을 찌푸리며 강하게 부인하는 미영이었다.


유창하게 영어를 구사하는 수연과 미영을 앞세우고, 뒤를 수영이 보조하면서 곳곳의 미국인들과 인터뷰를 해나갔다.

나라가 다르고, 인종이 달라서인지 미국 사람들의 패션은 다양했고,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양의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힘들어.”

“나도나도.”

개인주의가 팽배한 곳이어서 그런 걸까. 몇몇 사람들과 인터뷰를 하는데 성공했지만 상당수 사람들에게는 인터뷰를 거절당하고 퇴짜를 맞아야만 했다.

그래서 더욱 힘이 들었다.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원하는 양의 인터뷰를 채우지 못하니, 다급한 마음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배고프다. 뭐 좀 먹고 하면 안 될까?”

“지금 그 말이 나와?”

수영의 말에 발끈한 수연이 날카롭게 눈을 치뜨며 말한다.

안 그래도 원하는 분량이 채워지지 않아 다급해하고 있는데 그 순간에도 먹을 것을 원하다니. 눈에 불이 켜질 수만 있으면 수연의 눈에 불똥이 튀었을 것이다.

“하지만 배가 고픈 걸. 배 좀 채우고 나면 능률이 올라갈 것 같은데.”

“배는 인터뷰를 먼저 끝내고 해도 늦지 않아. 좀 쉬었으니 부지런히 움직여서 빨리 끝내자.”

수영의 의견을 깔끔하게 제외시킨 수연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미영 또한 동감이라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며 인터뷰 대상자를 물색한다.

“쳇!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하는데.”

자신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게 마음에 들지 않는 수영이었다.

하지만 대세를 거스를 수 없었기에 순순히 두 사람의 뒤를 따른다.


마냥 빨리 끝내야겠다는 의욕에서 벗어나, 좀 더 효율적으로 인터뷰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소녀들은 빠른 속도로 인터뷰를 해나갈 수 있었다.

“쟤네들은 배고프지도 않나.”

유창하게 영어로 대화를 해나가는 수연과 미영을 보면서 수영은 투덜거렸다.

간단하게 간식이라도 먹으면 조금 나아질 것 같은데 한 번 공복감을 느끼자 그것은 거머리처럼 떨어지지 않고 수영을 괴롭혔다.

입술을 삐죽이며 걸음을 옮기던 수영의 눈에 샌드위치 가게가 보인다. 즉석에서 만드는 것이어서 무척 맛있게 보여 수영의 눈을 사로잡았다.

‘먹고 싶은데…….’

그냥 이대로 지나갈 판이었기에 수영의 마음이 다급해진다.

그러다 수연과 미영이 외국인을 붙잡고 인터뷰를 하는 걸 보자 수영의 눈이 빛난다. 지금 인터뷰 하는 장소가 샌드위치 가게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았다.

슬금슬금 뒤로 물러난 수영이 카메라 감독에게 빠르게 말한다.

“저 잠시 샌드위치 좀 사가지고 올게요. 뒤따라 갈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요!”

그러고 후다닥 물러나는 수영을 보면서 카메라 감독이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무거운 카메라 때문에 움직이지 못하고 수영을 놓칠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 수연과 미영은 느릿하게 움직이면서 인터뷰를 해나갔다.

운이 좋게도 이번 인터뷰 대상자는 자신의 패션에 대해 상세한 이야기를 해주었고, 수연과 미영은 모처럼 급하지 않게 차분히 질문을 하면서 상당량의 분량을 뽑아낼 수 있었다.

즐겁게 이야기를 끝마친 수연은 주변을 둘러볼 여유를 갖게 되자 멈칫하며 촬영팀에게 물어본다.

“수영이가 없는데요?”

“어? 그러고 보니 수영이가 안 보여요.”

“어떻게 된 거야?”

수영이 보이지 않자 그녀들은 당황한 표정을 짓는다.

그것은 촬영팀 또한 마찬가지였다. 잘 따라오던 수영이 사라지자, 그들도 허둥지둥대기 시작했다.

“아까 전에 샌드위치를 사먹겠다고 갔습니다만…….”

“왜 그걸 그냥 보낸 거야!”

카메라 감독의 말에 PD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복잡한 이곳에서 한 번 놓치게 되면 다시 만나는 것이 무척 난감해진다.

PD는 재빨리 촬영팀을 추슬러 샌드위치 가게가 있는 곳으로 향하기 시작한다.


창현과 유리가 허겁지겁 달려오는 촬영팀을 만난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샌드위치 가게에 갔지만 수영은 보이지 않았다.

당황한 그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긴급 대책 회의에 들어갔다. 간단하게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올 것이라 생각한 수영은 핸드폰마저도 갖고 오지 않아서 완전히 동떨어진 상황이었던 셈이다.

어떻게 해야할 지 몰라 허둥대던 그들은 먼저 떨어져 있던 촬영팀과 합류하는 걸 선택했다.

“하아하아! 차, 창현아…….”

“갑자기 왜 그래요? 수영 누나는 어디로 가고요?”

허겁지겁 달려온 촬영팀을 보면서 창현은 있어야 할 사람이 한 명 없는 걸 보고 표정이 변하기 시작했다. 묘한 불안함이 자신을 덮쳐오고 있었다.

“수영이가 길을 잃어버렸어!”

숨을 고르는 수연을 대신하여 미영이 말한다.

그 말에 자신의 불안한 예감이 맞았다는 걸 깨달은 창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어디서 잊어버렸는데요?”

“샌드위치 가게에서 잃어버렸어. 우리가 인터뷰를 하고 있어서 잠깐 빠져서 샌드위치를 사러 갔나 봐. 수영이가 없는 걸 보고 황급히 되돌아갔지만 수영이가 보이지 않아. 어떻게 하지?”

미영의 목소리에 물기가 어리고 있었다. 큰 도시지만 인적이 드문 골목으로 들어가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불안한 예감이 온몸을 지배하고 있었기에 미영의 목소리는 격렬하게 떨리고 있었다.

“어, 어떡해!”

자세한 상황을 알게 된 유리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발을 동동 굴렀다. 수연이나 미영이라면 영어가 되기에 그나마 걱정을 덜 수 있겠지만 수영의 영어 실력은 믿음직하지 못했다. 게다가 미국에 자주 온 것도 아닌 만큼 낯선 타지에서 혼자 떨어져 있다는 충격이 만만치 않을 게 분명했다.

“…….”

혼란에 빠져있는 촬영팀 가운데 창현은 조용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먼 타지에서 홀로 떨어지게 된 수영에 대한 걱정이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그녀가 갔던 샌드위치 가게로 가는 것이다. 하지만 이곳의 길은 복잡하게 얽히고 얽혀 있는 만큼 길을 찾는 것도 쉽지 않다. 게다가 호텔로 돌아가자니, 먼 거리인 만큼 수영의 수중의 돈도 충분히 않을 것이다.

‘생각해라.’

그녀가 갈 만한 곳을.

부지런히 머리를 굴리던 창현의 눈이 순간 반짝였다.

길을 잃었다면 이곳에서 가장 유명한 곳에 가 있을 확률이 높다.

수영이 가고 싶어 했던 곳. 그곳은 바로…….

‘뉴욕 타임스퀘어에 위치한 핫도그 전문점을 가고 싶다고 했었어.’

그것은 그녀가 알고 있는 뉴욕의 유명한 곳이다.

확률은 높지 않지만 적은 것도 아니었다. 길을 잃고 허둥대고 있는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간다면 이곳에서 가장 유명한 곳일 것이다. 아니면 샌드위치 가게에 다시 갈 것이고.

적은 가능성마저도 간과할 수 있지 않았기에 창현은 결심을 내렸다.

그곳에 가보기로.

생각에서 빠져나온 창현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말한다.

“일단 갈라져서 찾아보도록 해요. 샌드위치 가게에 가서 주변을 둘러보시고, 다른 분들은 이 근처에서 찾아보세요. 절대 혼자서 찾으면 안 되고요.”

그러면서 걸음을 성큼성큼 옮기는 창현. 나이는 어렸지만 촬영팀 스태프들은 감히 그의 말을 어길 엄두를 내지 못했다.

“차, 창현아, 어디 가는 거야.”

그의 기백에 압도되었던 수연이 힘겹게 묻는다.

그 물음에 창현이 짧게 대답한다.

“수영 누나가 있을 만한 곳이요.”

그러면서 그가 빠른 속도로 걸음을 옮긴다.

멀어지는 그를 보며 소녀들이 정신을 차리고는 뛰다시피 그의 뒤를 따른다.

“같이 가!”


샌드위치 가게에서 가장 맛있어 보이는 베이컨 샌드위치를 구매한 수영은 곧바로 한 입 크게 베어 먹고는 행복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나라가 커서 그런 건지 샌드위치의 크기 또한 보는 것만으로도 흡족할 지경이었다.

맛 또한 흡족하였기에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우물거리던 수영은 음료수를 크게 한 모금 빨아들이고 삼킨 뒤 걸음을 옮기다가 멈칫했다.

바글바글하던 거리에 자신의 눈에 익숙한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다.

“어디로 간 거지? 좀 멀리 갔나.”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수영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조금 멀리 갔기에 보이지 않는 것이라 생각한 것.

샌드위치를 먹고 걸음을 옮기면서 수영은 촬영팀을 찾으려 하였다.

이미 촬영팀이 지나간 우측 길을 지나쳤건만 그것을 모르는 수영은 꿋꿋하게 직진을 할 따름이었다.

“어? 보이지가 않네.”

꽤 빠른 걸음으로 따라갔음에도 불구하고 촬영팀의 모습이 코빼기도 보이지 않자, 수영의 마음속에 슬슬 불안함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정말 자신을 버리고 갔나? 이런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이것들이… 샌드위치 사러 갔다고 날 버려?”

씩씩거리는 수영.

배가 좀 고파서 샌드위치를 사러갔다고 하여 자신을 버리다니?

바짝 약이 오른 그녀는 멤버들이 자신을 버리고 간 것이라 단정 지으며 더욱 빠르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찾아내면 한 소리 확 쏘아주기로 하면서.

빠른 속도로 걸음을 옮긴 수영은 자연스럽게 꺾이는 길로 움직였고, 인파가 많은 곳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카메라가 있으니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이라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그것은 그녀의 오산이었다.

거리 곳곳에 공연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인파가 몰려있던 것은 그들을 보기 위해 있던 것.

“뭐야, 어디 있는 거야.”

이리저리 정신없이 헤매던 수영은 촬영팀을 찾을 수 없게 되자 독이 오른 것은 사라지고, 슬슬 마음속에 불안함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이기에 자신이 찾지 못하는 걸까.

황급히 주머니를 더듬어 핸드폰을 찾는다. 그러나 핸드폰을 가지고 나오지 않은 것도 그녀가 알고 있는 상황, 간단하게 길거리를 활보한다고 생각했기에 배터리가 다한 핸드폰을 충전기에 꽂아 넣어둔 상태였다.

“아…….”

하필이면 그때 핸드폰 배터리가 다 되다니.

암담한 표정으로 변한 수영이 주변을 훑는다.

낯선 거리, 낯선 사람들.

제대로 된 영어 회화가 불가능하였기에 더욱 무섭게 느껴졌다.

“샌드위치 가게로 가야 해…….”

자신이 일행과 헤어진 곳이 그곳인 만큼 그곳에서 기다리면 사람들이 자신을 데려올 것이라 생각했다.

길을 부지런히 걷던 수영은 걸으면 걸을수록 새로운 길만 나왔고, 낯선 곳에 도착하자, 표정은 더욱 우울하게 젖어갔다.

인파가 많은 곳에 정신없이 움직이다 보니 방향을 잃고, 제대로 된 길을 잃어버린 것이다.

“어떡해, 나 미아가 되어버린 거 아니야?”

당장 눈물을 흘려도 부족하지 않을 수영의 표정.

겉으로 당찬 모습을 보였지만 속은 무척 여렸다. 다소 중성적인 매력을 지녔기에 보이시한 모습을 보이고자 강한 성향을 보이려 했지만 낯선 타지에서 아는 사람들을 잃어버린 수영은 속안에 숨겨진 본 모습을 드러내고 말았다.

머물고 있는 호텔로 간다?

수중에 가지고 있는 돈이 턱없이 부족해서 호텔로 가는 것도 불가능했다.

“얘들아…….”

이대로 자신은 어떻게 되는 걸까. 미국은 치안이 무척 험한 곳이라고 하는데, 수중에 돈도 많이 지니지 않은 자신은 제대로 된 것도 할 수 없을 테고 그렇게 되면…….

“아냐! 아직은 아니야! 불안한 생각을 해서는 안 돼!”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낀 수영은 손으로 눈가를 훔치며 고개를 크게 저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 두 번 볼 사람들은 아니지만 이곳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고, 주저앉고 싶지 않았다.

이를 꽉 물고 일어선 수영은 강하게 결의를 다졌다.

울지 않고 반드시 일행을 찾을 것이라 다짐하면서.

그렇게 마음을 먹자 흘러나오던 눈물도 멎었다.

다부진 표정으로 지나가던 외국인을 붙잡고 말을 건다.

“Excuse me, where is? are? Time Square?”

평소라면 틀리지 않을 문장도 공황 상태에 빠져 있다 보니 버벅거리고, 더듬게 되었다.

그래도 듣기 불편할 뿐, 의미 전달을 함에 있어 문제는 없었기에 외국인은 수영의 물음에 답해주었고, 평소 영어 듣기 문제에 전혀 집중하지 않던 그녀는 발군의 집중력을 발휘하여 외국인의 말을 빠짐없이 듣고 걸음을 옮긴다.

그러다 찾지 못하면 다시 외국인에게 묻고, 또 다시 묻고 하여 수영은 어렵게 타임스퀘어에 도착할 수 있었다.

멀지 않은 거리였지만 워낙 복잡했기에 찾는데 엄청 힘이 들었다.

“하아! 이곳이 타임스퀘어구나…….”

힘 빠진 어조로 중얼거린 수영이 멍하니 고개를 들고 하늘을 바라본다.

찌를 듯한 높이의 빌딩들이 자리한 곳에 서 있으니, 자신이 너무 작고 볼품없는 것 같아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찾을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아니야, 뉴욕하면 타임스퀘어잖아. 반드시 이곳으로도 올 거야.”

애써 희망을 갖고 서 있는다. 이곳이 샌드위치 가게와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모르지만 반드시 누구 중 한 사람은 이곳에 올 것이라 믿었다.

“창현이가 와주면 좋겠다.”

자신을 찾으러 올 거란 생각에 한결 마음이 풀린 수영이 나직하게 중얼거린다.

여기에 약간 사치를 부려서 자신을 찾으러 올 사람이 창현이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의 바람은 곧 이루어질 것이다.


“후욱! 훅!”

창현은 숨을 몰아쉬면서 빠른 속도로 걸음을 옮겼다.

자신이 있던 곳에서 타임스퀘어는 상당히 거리가 떨어진 곳이다. 멀다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복잡하게 얽혀있는 거리 구조상, 결코 가까운 거리는 아니다.

사람들을 지나치며 곧바로 타임스퀘어로 향하는 그.

지나가던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거칠 것없이 걸음을 옮기는 그에게 시선을 옮긴다.

그리 큰 키는 아니지만 쭉 뻗은 몸매는 동양보다 서양의 것을 닮았고, 붉게 물들인 머리와 여성의 혼을 빼놓는 외모는 어딜 가나 관심의 대상이었다.

악마로 변신하여 여성의 마음을 거세게 뒤흔들어놓은 그를 팬들이 몰라볼 리 없다.

“현! 현이야.”

“현이 왜 이곳에?”

“무언가 다급해보이는데?”

그가 왜 이렇게 다급한 모습으로 움직이는지 영문을 몰랐지만 사람들은 쉽게 움직일 수 있도록 길을 비켜주는 매너를 발휘하였다.

그들의 양보에 살짝 고개를 숙여 감사함을 표한 창현은 저 멀리 타임스퀘어가 보이자 눈을 빛내더니, 빠르게 주변을 훑기 시작한다.

“골치 썩이는 누나가 어디 있으려나.”

확률적으로 높지 않았지만 직감적으로 수영이 이곳에 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거칠어진 숨결을 차분하게 가다듬으며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한 사람의 모습을 보고는 창현이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찾았다.”

짧은 순간이지만 속을 새까맣게 타들어가도록 만든 범인을 발견한 순간이었다.


“아무도 안 오네…….”

도착한지 제법 시간이 되었는데 아무도 오지 않자, 수영의 얼굴에 짙은 불안함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인근에서 가장 유명한 곳인 만큼 누구 한 명쯤은 자신을 찾으러 올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것은 자신의 착각이었나 보다.

“서, 설마 아무도 안 오는 건 아니겠지?”

이곳으로 올 것이란 확신이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과연 사람들이 자신을 찾으러 올까?

마음 속에서 피어난 작은 불안함은 걷잡을 수 없이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이대로 버려지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부터 시작하여 자신이 머물고 있는 호텔에 어떤 방법으로 갈 것인지 수영의 머릿속에 온갖 그림이 그려지고 있었다.

‘미국은 험난하다고 하는데 과연 순수한 호의로 날 도와줄 사람이 있을까?’

만약 사람을 잘못 만나면?

상상도 하기 힘든 전개가 마구자비로 전개된다.

전신으로 퍼져 나간 불안함은 늘 당당하던 수영을 위축되게 만들었다.

‘제발 누가 좀 와줘.’

창현이 찾아와줬으면 하는 그런 사치스러운 감정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지금은 그저, 누군가가 자신을 찾으러 와줬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 뿐.

그렇게 사치스러운 감정을 접어두려 할 때, 수영의 바람은 이루어졌다.

갑작스레 바뀌는 주변 분위기.

눈으로 들어오는 주변 변화는 없었지만 수영은 무언가 분위기가 바뀌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와 함께 분주하게 움직이던 인파가 서서히 양쪽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현대판 모세의 기적이 이러할까?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는 거리에서 거대한 공간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 중심에 서 있는 것은 한 사람.

늘 변치 않는 부드러운 미소와 여유가 넘치는 모습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안도하게 만드는 강렬한 매력을 갖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것이 전부냐고 묻는다면 그것도 아니다.

연약하게 보이는 겉모습 안으로 누구도 거역하지 못할 강렬한 카리스마를 품고 있었다.

지금 사람들이 알아서 길을 비켜주는 것도 은연중 발산되고 있는 그의 기세를 느끼고 알아서 움직인 것이다.

“차, 창현아…….”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 다가오는 창현을 보며 수영은 잔뜩 서려 있던 긴장이 풀려 몸을 가누기조차 힘들어지는 걸 느꼈다.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온 창현은 수영 앞에 선다. 그리고는 손을 들더니, 가볍게 그녀의 머리에 꿀밤을 먹인다.

“아얏!”

예상치 못한 일격에 수영이 머리를 부여잡고 어리둥절한 눈으로 그를 바라본다.

살짝 올려다 본 창현은 눈부신 미소를 지은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모두를 놀라게 한 벌이에요. 가서 열심히 사과해야 할 거예요. 알았죠?”

자신을 꾸짖는 말이었지만 수영은 하나도 기분 나쁘게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을 걱정해주는 것 같아 기쁜 마음이 들 정도였으니까.

‘설마 내가 마조히스트였던 거야?’

엉뚱한 생각과 함께 실실 미소를 짓는 수영.

그 모습에 창현이 황당한 표정을 짓는다.

“지금 웃는 거예요?”

“응… 날 열심히 찾은 것 같아서 너무 기뻐서…….”

그렇게 말하니 화를 낼 수도 없는 창현이었다.

아니, 전과 달라져서 어린 아이처럼 느껴지는 수영을 보며 피식 미소 지으며 말한다.

“하하 그러네요. 어쨌든 가도록 해요. 다들 걱정하고 있으니까요.”

“응응.”

안도하는 마음과 함께 창현에게 응석을 부리는 수영이었다.

영화와도 같은 그의 등장은 자라나는 새싹에게 무럭무럭 자라라고 최상급 비료를 뿌려준 것과 같았다.

아아, 어찌하오리까, 이 플래그들을.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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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마음을 울리는 음악 시즌2 제1화 +10 15.04.17 7,376 95 10쪽
37 ▲▲▲▲▲시즌2 시작!▲▲▲▲▲ +5 15.04.17 5,425 65 1쪽
36 마음을 울리는 음악 106장-108장 +8 15.04.16 6,414 106 230쪽
35 마음을 울리는 음악 103장-105장 +1 15.04.16 4,244 82 314쪽
34 마음을 울리는 음악 100장-102장 +2 15.04.16 4,413 68 229쪽
33 마음을 울리는 음악 97장-99장 +1 15.04.16 4,390 63 264쪽
32 마음을 울리는 음악 94장-96장 +1 15.04.16 4,379 80 230쪽
» 마음을 울리는 음악 91장-93장 +1 15.04.16 5,125 76 2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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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마음을 울리는 음악 85장-87장 +1 15.04.16 4,712 83 270쪽
28 마음을 울리는 음악 82장-84장 +2 15.04.16 4,914 85 261쪽
27 마음을 울리는 음악 79장-81장 +1 15.04.16 4,580 87 241쪽
26 마음을 울리는 음악 76장-78장 +1 15.04.16 4,753 74 244쪽
25 마음을 울리는 음악 73장-75장 +1 15.04.16 4,939 111 327쪽
24 마음을 울리는 음악 70장-72장 +1 15.04.16 4,755 82 200쪽
23 마음을 울리는 음악 67장-69장 +1 15.04.16 4,742 80 2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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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마음을 울리는 음악 61장-63장 +2 15.04.16 5,259 79 316쪽
20 마음을 울리는 음악 58장-60장 +1 15.04.16 5,251 74 186쪽
19 마음을 울리는 음악 55장-57장 +2 15.04.16 5,596 95 2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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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마음을 울리는 음악 49장-51장 +2 15.04.16 6,422 119 283쪽
16 마음을 울리는 음악 46장-48장 +3 15.04.16 7,158 149 347쪽
15 마음을 울리는 음악 43장-45장 +1 15.04.16 7,122 129 198쪽
14 마음을 울리는 음악 40장-42장 +3 15.04.16 8,909 183 320쪽
13 마음을 울리는 음악 37장-39장 +2 15.04.16 9,615 224 397쪽
12 마음을 울리는 음악 34장-36장 +8 15.04.16 9,524 189 322쪽
11 마음을 울리는 음악 31장-33장 +8 15.04.16 10,355 261 345쪽
10 마음을 울리는 음악 28장-30장 +5 15.04.16 10,659 260 277쪽
9 마음을 울리는 음악 25장-27장 +7 15.04.16 11,040 267 233쪽
8 마음을 울리는 음악 22장-24장 +4 15.04.16 10,924 261 198쪽
7 마음을 울리는 음악 19장-21장 +4 15.04.16 11,492 270 216쪽
6 마음을 울리는 음악 16장-18장 +5 15.04.16 11,544 242 163쪽
5 마음을 울리는 음악 13장-15장 +5 15.04.16 14,536 297 237쪽
4 마음을 울리는 음악 10장-12장 +8 15.04.16 13,737 352 171쪽
3 마음을 울리는 음악 7장-9장 +10 15.04.16 14,553 362 142쪽
2 마음을 울리는 음악 4장-6장 +11 15.04.16 16,841 421 120쪽
1 마음을 울리는 음악 프롤로그-3장 +47 15.04.16 29,904 545 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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