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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번 님의 서재입니다.

마음을 울리는 음악

웹소설 > 작가연재 > 팬픽·패러디, 현대판타지

김현우
작품등록일 :
2015.04.16 13:27
최근연재일 :
2015.06.01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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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4.16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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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쪽

마음을 울리는 음악 10장-12장

DUMMY

제10장 정체를 들키다




놀이공원을 갔다 온 뒤 창현의 일정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뮤직비디오를 제작할 감독과 미팅도 하고, 본격적인 구체안을 접하면서 창현도 덩달아 바빠지고 있었다.

외부 활동은 안 하지만 인터넷까지 활동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기에 창현은 집에 돌아오면 곧잘 게시글을 올리곤 하였다.

그의 팬 클럽인 다크 스타에 앨범 진척 상황을 가끔 올리곤 하는데, 그 관심도가 대단하였기에 따로 광고가 필요없을 정도로 열기가 대단했다.

앨범 발매일이 약 보름 정도 남았음에도 벌써부터 선주문이 이십만 장이나 들어온 상태였다. 아직 음원 공개도 하지 않은 상황에서 오로지 가수 현이라는 네임벨류 하나만으로 이룩한 성과였다.

자신의 인기에 얼떨떨한 창현에 비해 석규의 입은 찢어지기 일보직전이었다. 현의 이름만으로 사람들이 주는 신뢰가 엄청나다는 건, 잘만 요리하면 초대박까지 터뜨려 한 번에 대한민국 전체를 휩쓸 폭풍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석규는 초대박을 일으킬 수 있는 시기라고 파악하였고, 감독에게 말하여 뮤직비디오 제작 일정을 대폭 끌어당겼다. 뮤직비디오든, 티저 영상이든 간에 빠르게 이 여세를 몰아가려는 것이다.

앨범의 대박은 곧 뮤직비디오의 대박으로도 연관될 수 있기에 감독 또한 석규의 제안을 수락하면서 창현은 6월이 채 끝나기도 전에 본격적인 뮤직비디오 제작에 나서게 된다.



-가수 현玄(AA엔터테인먼트) 1집 정규앨범 타이틀 곡 <Bad Boy> 뮤직비디오 티저 영상 공개.


선주문 20만장이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기록하며 대중을 놀라게 한 가수 현의 1집 정규앨범 타이틀 곡 <Bad Boy>의 티저 영상이 공개되었다.

가수 현(나이불명)은 작년 9월 미니앨범 <Go&Stop>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렸고, 폭발적인 가창력과 친근감 있는 멜로디로 대중을 사로잡아 국내에서 손꼽힐 만한 판매기록을 세웠다.

그 후 가수 현은 가수가 아닌 작곡가로서, 프로듀서로서 올 여름을 휘어잡으며 8주 연속 1위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운 라샤의 1집 정규앨범 전곡을 작곡 작사함으로써 세간의 관심을 모으고, M본부에서 한 차례 방송을 출현하여 시청자들의 폭발적인 관심을 받았다.

아직 공인으로서 자신이 많이 부족하다며 겸양의 말을 내세운 그를 비판하는 사람도 있지만 아직 학생의 신분이고, 학업과 작곡 활동에 충실하고 싶다는 그를 응원하는 사람이 더욱 많은 실정이다.

신비주의 컨셉을 가진 현이 뮤직비디오에 출현한다는 것 자체만으로 세간의 엄청난 관심을 모으고 있었다.

혹여 불미스러운 일로 얼굴이 노출되지 않을까 기다리던 팬들은 성공리에 뮤직비디오 촬영을 끝마쳤다는 소식에 안도의 한숨을 내면서도 한편으로는 안타까워했지만 뮤직비디오 티저 영상이 공개됨으로써 그러한 안타까움은 한방에 가시기 충분했다.

아직 전체 음원이 공개되지 않았지만 현의 타이틀 곡인 <Bad Boy>는 기존의 현이 보여주었던 폭발적인 가창력과 부드러운 가창력이란 장르를 버리고 다소 거친, 파워풀한 느낌을 주는 곡이었다. 아직 어린 나이인 현에게 그러한 것은 무리라는 우려의 목소리도 높았지만 공개된 티저 영상은 그러한 우려를 종식시키기에 충분했다.

뮤직비디오를 보면 전체적으로 어두운 조명에 가수 현 또한 얼굴이 거의 나오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다. 드문드문 드러나는 경우에는 썬글라스를 쓰고 있는데, 그것만으로도 그가 무척 잘생겼다는 걸 안목있는 사람이라면 알 수 있다.

클라이막스 부분은 현이 썬글라스를 살짝 내리면서 두 눈으로 카메라를 응시하는 장면이다.

불과 10초짜리 티저 영상이지만 이 클라이막스 장면으로 인하여 선주문이 무려 오만장이 추가 되었다고 하며, 현재 풀 버전 뮤직비디오를 공개하라고 언론사는 물론 방송사에서도 AA엔터테인먼트에 압박을 가할 정도라고 한다.

AA엔터테인먼트 사장 강석규는 “가수 현의 뮤직비디오 제작이 빨리 끝났으므로 뮤직비디오 공개는 7월 3일에, 음반은 7월 7일부터 본격적으로 발매하겠다.”고 말하였다.

<Bad Boy> 티저 영상은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보고 매료되고 있기에 음반 발매가 되기 전 선주문이 약 30만장까지 돌파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예상하는 바다.

현재 AA엔터테인먼트에서는 가수 현의 공중파 데뷔에 대해 이렇다 할 언급이 없는 상태로 보아 가수 현의 공식 데뷔는 그가 공언한대로 내년이 될 것으로 본다.


서민지 기자.



기사의 내용처럼 현의 뮤직비디오 티저 영상이 공개되자 대한민국 연예계는 물론 일본에서도 상당한 진동을 일으켰다.

일본 언론에서 이번 현의 앨범은 일본에서도 동시 발매를 한다고 하였던 것이다. 게다가 한국어와 일본어 버전이 따로 있다는 말에 현의 팬인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언어로 현의 노래를 들을 수 있다는 걸 기뻐했다. 한국만큼은 아니지만 일본에서도 무려 오만 장의 선주문이 들어와 현이 비단 한국에서만 통하는 가수가 아닌, 아시아에서도 통하는 가수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앨범 발매에 앞서 7월 3일, 마침내 수십만 네티즌의 관심을 이끌던 뮤직비디오 <Bad Boy>가 공개되었다.

어두운 분위기와 언뜻언뜻 드러나는 가수 현의 모습은 완벽 그 자체였다. 특히 클라이막스 부분에서 살짝 썬글라스를 내리는 장면은 소년 소녀들을 가릴 것없이 보는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앨범 발매에 앞서 약 30만장의 예약이 들어올거란 추측과 달리 앨범이 나오기 전까지 무려 35만장의 예약이 들어와 있었다.


형광등을 키지 않아 어두운 방안.

갓 태양이 떠오르고 있는 탓인지 어둠에 잠겨있던 방을 햇빛이 조금씩 밝혀주고 있었다.

방안에는 한 소녀가 컴퓨터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마우스와 키보드를 두드리면서 무언가를 살피고 있었는데, 뮤직비디오를 보는 중인지 헤드셋을 쓰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정수연. SM엔터테인먼트 소속의 연습생이자 근시일 내에 데뷔할 소녀시대의 멤버 중 한 사람이다.

모니터를 바라보는 수연의 표정은 자못 심각했다.

컴퓨터에는 세 개의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하나는 세 여인을 다정스럽게 바라보며 노래를 부르는 반쪽 가면, 외안경을 쓴 청년이 자리하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어두운 분위기 속에서 노래를 부르는 현의 모습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동영상에는… 자신과 한팀인 미영과 주현이 안무를 선보이며 한 소년이 등장하는 영상이었다.

수연은 이 세 개의 영상을 몇 번이나 봤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하지만 영상을 볼 때마다 그녀의 눈은 반짝거리며 빛나고 있었고, 무언가를 찾는 듯 집요하게 영상의 어떠한 것을 쫓고 있었다.

세 영상이 모두 끝났을 무렵, 그녀의 조그마한 입술이 열렸다.

“알아냈어. 드디어 모든 퍼즐을 맞췄어.”

밤새도록 영상을 보았지만 그녀의 눈에는 피로 한점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의 눈에는 피로 대신 막대한 희열과 성취감이 감돌고 있었다.

처음에 그녀는 단지 수상하다는 느낌을 받았을 뿐이다.

확인해보고 싶어 문자로도 은근슬쩍 물어보았지만 워낙 잘 둘러대는 터라 자신이 원하는 사실을 알아내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는 그때부터 방법을 바꾸었다. 바로 다크 스타 내의 ‘특별회원’이라는 위치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다크 스타에서 특별회원에 다다르려면 가히 ‘현덕’이라 불릴 정도의 경지에 올라야 가능했다.

수연은 특별회원 게시판에 글을 올려 각 회원들간의 정보를 공유하였다. 그리고 그녀가 알고 있던 기존의 것과 다른 특별회원들의 정보를 얻어 조합한 결과 결정적인 걸 알아내기에 이르렀다.

우선 수연이 주목한 것인 가수 현이 올리는 게시글이었다.

자주는 아니지만 다크 스타에 가입한 현은 이따금 게시글을 올린다. 총 다섯 개 정도인데, 수연은 게시글을 올린 시간이 모두 네시 안쪽이란 것에 주목했다.

가수 현이 정말 고등학생이라면 네 시 전에 글을 올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고등학생의 정규수업이 끝나고 아무리 집에 빨리 돌아와도 최소 네시 반이 된다는 걸 윤아를 통해 알고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그녀가 분석한 것은 바로 가수 현이 가지고 있는 습관적인 제스처였다.

솔직히 가수 현의 무대 영상은 단 하나밖에 없다. 그래서 그것이 특유의 제스처인지 안무인지 파악하기가 무척 힘들었다.

그랬기에 수연은 특별회원들과 정보를 교류하면서 현의 제스처로 의심되는 것 하나하나를 모두 메모해놓았다. 그리고 정규앨범 타이틀 곡 <Bad Boy> 뮤직비디오를 보고 비교에 나섰다.

그러자 가수 현 특유의 제스처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는 음의 강약을 조절할 때 손목을 움직이고, 박자를 맞출 때 손가락을 움직이는 버릇을 가지고 있던 것이다. 그리고 음의 파워를 조절할 때 마이크를 잡는 손가락의 범위가 달라지는데, 이것 또한 가수 현 특유의 제스처였다.

그것을 모두 캐치한 수연은 마지막 영상과 비교에 나섰다.

마지막 영상은 놀이공원에서 일반 시민이 찍은 노래자랑 <Yesterday>였다. 이건 우연찮게 다크 스타에 올라온 영상인데, 수연은 자신들이 저 대회에 출전했다고 하는 미영과 주현의 증언을 밑바탕 삼아 결정적인 증거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화질이 좋지 않기에 동영상에 찍힌 사람들의 얼굴은 알 수 없다. 그러나 당사자가 미영과 주현이었기에 현의 파트를 부른 사람이 누구인지 잘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것을 알아낼 수 있었다.

수연이 알아낸 제스처를 동영상 속 소년이 같게 재현하고 있던 것이다.

저것은 무의식적으로 하는 것이라 따라한다고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동영상을 보면서 대질하는 순간, 수연은 알아낸 것이다.

처음부터 수연은 한 존재가 가수 현이라는 전제를 깔아두고 퍼즐을 차곡차곡 맞췄다.

그녀의 눈이 빛났다. 검은색에 빛이 서려있는 그녀의 눈동자는 마치 흑요석같이 아름다웠다.

그녀의 붉은 입술이 열렸다.

“강창현. 네가 현이었어.”

퍼즐은 완성되었다.

///

앨범이 발매되는 7월 7일.

모든 가게가 열리자마자 현의 앨범이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특히 시험기간이었기에 일찍 끝난 중고등학생들도 현의 앨범을 구입하였다.

이번 앨범은 전 앨범인 <Go&Stop>과는 달리 한 장의 큰 화보를 넣었다.

바로 인터넷에서 모든 사람들을 매료시킨 장면을 화보로 넣은 것이다.

어두운 분위기 아래 검은 썬글라스를 살짝 내리며 강렬한 눈동자로 전방을 주시하는 화보는 앨범을 제하더라도 충분히 소장가치가 있었다.

무엇보다 이번엔 현이 어느 정도 선상에서 모습을 드러냈기에 석규는 더욱 폭 넓은 판매전략을 구사할 수 있었다.

앨범 안에 화보뿐만이 아니라 현의 한정 싸인 앨범 100개를 랜덤으로 섞어서 판매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앨범 포장을 뜯고 내부를 들여다봐야 했기에 구입하지 않고서는 절대 확인이 불가능했다.

세상에 알려지기로 여태껏 공식 싸인본이 단 하나뿐인 현의 싸인 앨범은 희귀본 중에 희귀본이었다.

석규의 이런 영업 전략은 대성공이었다.

몇몇 돈이 풍부한 사람과 머리가 돌아가는 사람들은 선물을 해준다는 이유 하에, 대신 사준다는 명목 하에 대량으로 구입을 하였고, 하나하나 개봉해보며 싸인을 찾기까지 하였다.

이런 전략이 제대로 먹혀든 탓에 첫날 앨범 판매량은 무려 20만장에 이른다. 초두 물량이 40만장이니 단 하루만에 반절이 판매된 것이다.

처음 예측이 10만장에서 15만장이었으니 무려 두배에 달하는 판매를 기록한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석규는 입이 귀에 걸리며 추가 물량 십만 장을 더 예약했다. 무난하게 이번 달 안으로 오십만 장을 판매할 것 같았다.

게다가 요즘 상승가도를 달리고 있는 라샤가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서 현 대신 PR을 해주고 있으니 그 파급력 또한 만만치 않을 것이다. 대세는 라샤라고 할 정도로 엄청난 인기몰이를 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 기세를 적절하게 탄다면 아마도 아니, 충분히 백만 장까지 노려봄직 하리라.

판매가 순조롭다는 소식에 창현도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자신의 이름을 믿어주고, 뮤직비디오로 반응이 폭발적이라고 하였지만 가수에게 있어 가장 인정받는 것은 앨범 판매였다.

앨범 판매가 순조롭다니 창현은 모처럼 졸이던 가슴 한구석이 뻥 뚫리는 듯했다. 근래 들어 회사에서, 팬 사이트에서 자신에게 거는 기대가 너무 큰 것 같아 내심 어깨가 무거웠는데 한시름 놓았다.

게다가 자신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던 주현도 의심을 어느 정도 푼 듯하고… 창현은 요즘 같은 생활이 지속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행이야. 순조로운 것 같아서.”

어찌 보면 오늘이 분수령일 수 있다.

1차로 구매한 사람들이 현의 노래를 듣고, 지금의 상승세를 더욱 끌어올려줄지 아니면 차갑게 외면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만약 구매자들의 호응을 얻고, 그들의 입소문까지 타게 된다면 앨범 백만 장의 판매도 꿈만은 아닐 것이다.

“아버지가 알아서 해주시겠지. 그 분야까지는 내가 신경 쓸 수 없으니까.”

자신은 노래를 부르는 가수이며, 노래를 작곡하는 작곡가이자, 노래를 프로듀싱하는 프로듀서다. 자신은 그저 최선을 다해 노래를 하면 되는 것이고, 그것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것은 석규가 할 일이다.

앨범이 발매되고 다른 가수라면 본격적인 PR로 인하여 바쁠 시기지만 창현에게는 예외였다.

뮤직비디오 촬영이 끝난 직후 창현이 하는 일이라고는 이따금 AA엔터테인먼트를 찾는 것 외에는 집에서 게임을 하거나 밀린 애니메이션을 감상하는 것. 그리고 영감을 얻을 때 곡을 쓰는 것밖에 없었다.

“오늘도 게임이나 할까.”

중간고사가 끝났다.

뮤직비디오 촬영이 바빠서 학교를 며칠 결석을 했기에 이번에는 석차가 조금 떨어질 것 같다.

시험은 변화가 없지만 수행평가 점수에 따라 석차가 달라지곤 했으니까.

석차가 떨어지더라도 전교 10등 안에는 들 것이다.

어차피 학교 성적에는 크게 신경도 쓰지 않지만.

오늘은 놀토였기에 창현은 아침 일찍 일어나 게임 몇판을 한 뒤 옷을 갈아입었다.

새벽에 석규가 흥분한 어조로 이십만 장이나 팔렸다면서 기뻐하다가 불현듯 오늘 창현이 쉬는 날인 걸 깨닫고는 축하 회식이라도 하자는 것이었다. 바쁜 라샤도 회식에 참가한다고 했으니 아무래도 친목도모 겸 현의 앨범 발매를 축하하려는 듯하다.

처음에 창현은 참가하지 않으려고 했으나 몇몇 관계자는 그가 가수 현이라는 걸 알고 있었고, 이번 회식의 주인공이 그라는 걸 알았기에 참가하길 원하는 듯했다. 물론 회식 참가 신분은 가수 현이 아닌 사장의 아들 창현으로서 참석해야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회식을 가는 것이 솔직히 창현은 불안했다.

전에도 비슷한 이유로 AA엔터테인먼트에 갔다가 다짜고짜 붙잡혀 라샤의 부탁을 들어준 적이 있다. 게다가 가장 최근에는 앨범이 나와서 받아가라고 하여 오게 한 뒤 무려 싸인 백 개를 하게 하였다.

싸인을 하면서 느꼈던 손의 저릿함이란…….

나오라는 말에 슬쩍 의심하는 기색을 내비치니 이번에는 한사코 아니라고 한다.

미심쩍지만 어쩌랴. 자신의 흥행가도를 축하해주겠다는데.

옷을 입고 준비를 마친 뒤 문단속을 할 때 창현의 핸드폰이 울렸다.

♩♪♬

“누구지, 아버진가?”

딱히 전화 올 사람이 없어서 그렇게 생각하며 핸드폰을 확인하는데, 전화 온 사람은 석규가 아니었다.

액정에는 다른 사람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얼음공주 제시카.

“수연 누나가 왜……?”

평소 자주 문자를 주고받긴 하지만 통화를 자주하는 건 아니었다.

창현은 고개를 갸웃하면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수연 누나에요?”

-창현이야……?

약간 잠긴 듯한 목소리였다.

무슨 일이 있는가 싶어 창현이 고개를 갸웃한다.

“당연히 저죠. 그런데 누나 목소리가 잠겨있는데 무슨 일 있으신 거에요?”

-응? 아니. 방금 일어나서 그래.

방금 일어났다는 말을 들으니 목소리에 잠결이 묻어있는 것 같았다.

창현은 납득하면서 물었다.

“그런데 갑자기 왜 전화를 거신 거에요? 정말 무슨 일 있는 거 아닌가요?”

-무슨 일이라고 하면… 무슨 일일 수도 있어.

“무슨 일이 있다고요? 뭔데요? 심각한 일이에요?”

수연의 말에 놀라며 창현이 물었다.

그에 수연이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후훗! 아직은 심각하지 않으니 괜찮아. 하지만 심각해질 수도 있어. 창…현이 혹시 시간 언제 나? 할 이야기가 있는데.

수연의 물음에 창현이 자신의 일정들을 생각해본다.

어차피 앨범이 나왔고, 공식 활동은 하지 않으니 시간은 많다.

다만 오늘 회식을 가면 어떻게 될지 모르기에 내일 약속을 잡으면 지킬 수 있을지 확실하지가 않다.

그래서 창현은 다음주를 염두에 두며 입을 열었다.

“이번주는 약속이 있고요. 다음주부터는 넉넉할 거 같아요. 그런데 정말 무슨 일 없는 거죠?”

창현은 수연의 말이 걸려 걱정이 담긴 목소리로 물었다.

수연은 창현의 말에 대답했다.

-아직은 별일이 아니야. 창현이 너랑 만나서 이야기를 해봐야 알 것 같아. 다음주에 시간 되면 토요일 2시 그때 내가 윤아랑 주현이가 함께 만났던 곳에서 만나는 게 어때?

어디를 지칭하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흥이 동해서 원맨쇼를 했던 곳 아닌가.

창현은 그때 일이 떠올라 다소 무안해지는 걸 느끼며 대답했다.

“네. 그럼 거기서 뵐게요. 무슨 일이 있으시면 연락주시고요. 제가 도와드릴 수 있으면 도와드릴게요.”

-응. 신경 써줘서 고마워. 그럼 다음주에 보자.

“네. 누나도 쉬세요.”

그 말과 함께 통화가 마무리 되었다.

집을 나서면서 창현은 수연의 말에서 느껴졌던 여운에 고개를 갸웃했다.

“정말 무슨 일이 없는 걸까?”

통화상에서 굳이 말하지 않으려는 것으로 보아 직접 만나봐야 알 것 같았다.

창현은 궁금증을 접어놓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오늘은 낚시가 아니었다.

AA엔터테인먼트에 도착하자 회식을 위해 업무를 마무리 짓고 있는 직원들의 모습이 보였던 것이다.

“후우!”

그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는 창현이었다. 오늘은 붙잡혀서 싸인을 하거나 그런 건 아니군.

AA엔터테인먼트에 들어선 창현은 곧장 사장실로 향했다.

노크를 한 뒤 들어가니, 얼굴에 한가득 웃음 짓고 있는 석규와 라샤가 창현을 맞이했다.

“하하! 왔느냐, 효자 아들.”

“네, 효자 아들 왔습니다. 제발 오늘은 부려먹지 말아주세요.”

능청스럽게 대꾸하는 창현의 모습에 석규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알았다, 알았어. 앞으로는 꼼수 안 부리고 당당하게 부탁하마. 네가 원한 거니 말하면 들어주겠지? 가뜩이나 언론사와 방송사의 압력을 힘들게 견디고 있는 이 아비의 부탁인데 말이다.”

석규의 말대로 AA엔터테인먼트에서는 연일 각종 언론사와 방송사에서 가수 현의 정체를 공개하라는 압력이 들어오고 있다.

그들로서는 가수 현의 정체를 반드시 알고 싶어했다.

현의 정체를 요구하는 그들의 말은 간단했다.

바로 신비주의 컨셉의 현을 좀 더 유명하게 해주겠다는 것.

인간은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에 더욱 공포를 느끼듯이 때로는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더욱 동경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그것도 적절한 강약이 조절되었을 때의 이야기다.

보이지 않는 것에 동경과 신비를 품고 있지만 그 기간이 길면 사람들은 지치고 흥미를 잃는다.

대중에게 흥미를 잃는 것은 곧 인기의 하락이었다.

과거에 이런 식으로 사라진 얼굴없는 가수들은 많았다.

언론사와 방송사들은 그러한 전례를 들며 현의 정체를 공개하라는 요구를 함과 동시에 그를 확실한 스타로 광고해주겠다는 제의를 해온 것이다.

얼핏 들으면 무척 매력적인 제의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석규는 노련한 사업가였다.

달콤한 그들의 제안에 치명적인 결함이 있음을 알아차렸다.

우선 대중의 무관심 속에 사라진 얼굴없는 가수들은 무언가를 갖추지 못한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비주얼이나 신체적인 결함, 혹은 공개할 수 없는 각자의 사정 등.

무엇보다 그들이 힘없이 사라진 이유는 옆에서 시기적절하게 조언을 해줄 존재의 부재였다.

그런 반면 현에게는 석규라는 조언자가 있다. 연예계에 오랫동안 종사해온 만큼 그의 경험은 현에게 있어 강력한 힘이 될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현 스스로가 자신의 처신을 잘했다는 것이다.

지금은 비록 이름없는 가수로 활동하고 있지만 1-2년이 흐른 뒤에 그가 모습을 공개하고 데뷔할 것이란 걸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즉, 현 스스로가 자신의 신비주의 컨셉에 제한을 둠으로써 대중들의 관심을 식게하기는커녕 도리어 더욱 애타게 기다리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건, 현 스스로가 최고의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가창력, 작곡 어느 것 하나 빠짐없이.

그랬기에 외부의 압력에도 석규는 자신의 흔들리지 않는 자신의 주장을 가지고 있었다.

아직 어린 창현은 그러한 것을 잘 모르지만 자신의 편의를 위해 석규가 여러모로 애써주고 있다는 걸 알았다.

“저야 항상 감사하죠. 그렇게 말씀하시니 어렵지 않으면 들어드릴게요.”

“하하! 잘됐구나. 그럼 온 김에 앨범 100장에 싸인 좀 하고 가거라. 추가 물량이 있는데 거기에 싸인이 없으면 섭하지 않느냐?”

그러면서 석규는 미리 준비해둔 듯, 앨범을 꺼내든다.

그 모습에 창현이 당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신음을 흘렸다.

“윽! 알았어요.”

그런 두 부자의 모습에 시린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칫! 사장님 이러시기에요? 아직 저희랑 인사도 안했는데 일부터 시키시면 어떻게 해요.”

“맞아요. 저희도 엄연히 이곳 소속의 가수인데. 한창 유명세를 떨치는 가수 현과 이야기를 해야지요. 안 그래, 세룬?”

미란의 말에 세룬이 웃음을 지어보였다.

“응. 맞는 말이야. 우리도 제법 현을 홍보하고 다녔는데 너무 찬밥 대우인 것 같아.”

세 여인의 집중 포화에 석규가 혀를 내둘렀다.

“이것 참, 순식간에 나쁜 놈이 되는군. 창현아, 어여 인사하여라. 네가 인사 안해주다가는 이 아비가 천하의 나쁜 놈이 될 것 같구나.”

너스레를 떨며 말하는 석규의 모습에 싸인을 하던 창현이 힐끗 고개를 들고는 말한다.

“고용된 입장에서 보면 악덕 고용주가 맞긴 하죠. 사정없이 부려먹는…….”

“누가 보면 내가 정말 나쁜 놈인 줄 알겠다. 이것아.”

펄쩍 뛰며 반응하는 석규의 모습에 창현이 씨익 웃음을 짓더니 라샤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에요, 누나들. 요즘 다 휩쓸고 다닌다면서요. 8주 연속 1위도 축하드려요. 이번에 <Laser>를 후속곡으로 해서 다시 1위도 했다면서요.”

라샤는 타이틀 곡 <Yesterday>로 8주 연속 1위라는 기록을 세웠고, 여세를 이어 후속곡으로 <Laser>로 음악방송에 참가하고 있었다. 첫주에 <Yesterday>를 누르고 <Laser>가 1위를 함으로써 라샤의 시대를 열어나가고 있었다.

창현의 칭찬에 미란이 한껏 콧대를 세웠다.

“우리가 좀 대단하지. 에헴!”

“저 모습을 팬들이 봐야 할 텐데. 아쉽네.”

세룬은 그런 미란의 모습을 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시린은 입가에 미소를 띤 채 대답했다.

“이게 다 현이 네 덕분이지. <Laser>도 약 3-4주는 1위를 지킬 수 있을 것 같아. 우리가 이렇게 인기를 얻을 수 있었던 건 다 네 덕분이야.”

그 말에 창현이 어깨를 으쓱했다.

“제가 도움을 드렸지만 이런 결과는 누나들이 열심히 연습하셔서 가능한 거에요. 누나들이랑 같은 소속사란 게 자랑스럽고요.”

라샤의 앨범은 꾸준한 판매를 이루고 있어서 지금까지 약 40만장의 판매를 이룩한 상태였다. <Laser>로 라샤의 새로운 매력을 한 차례 더 부각 시킨다면 50만장 판매까지 가지 않을까 예상되었다.

석규가 창현을 보며 말했다.

“라샤는 7월말까지 활동을 하고 당분간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약 세 달 동안 바쁘게 활동을 했으니 한동안 쉬어주는 게 좋지. 하지만 놀 생각은 아니다. 널 이리로 부른 까닭은 싸인을 부탁하기 위함도 있지만 라샤의 2집 준비도 부탁하려고 해서다.”

“2집이요? 흐음.”

석규의 부탁에 창현은 생각에 잠겼다.

라샤가 활동을 접을 시기인 7월말은 자신에게 방학 시즌이다.

이번 방학을 통해 일본으로 어학 연수를 가려고 마음 먹었던 창현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 싶지만 시간이 워낙 촉박하네요. 앨범 준비만 해도 몇 달은 걸릴 테고… 무엇보다 이번 방학에 일본에 한 번 가보고 싶어서 아버지한테 부탁드릴 예정이었거든요.”

창현의 말에 석규가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일본을? 너야 괜찮다면 상관없다만… 흐음! 그럼 이건 어떠냐? 7월말에 라샤는 한국에서 모든 일정을 정리하도록 하고, 일본으로 진출하는 게다.”

“일본을요?”

창현은 물론이고, 라샤마저 놀란 표정이었다.

놀란 그들을 보며 석규가 자신이 구상해오던 것을 설명하였다.

“이번에 현의 앨범을 일본에 판매하면서 여러 회사에 사업적 제휴를 맺게 되었다. 그래서 라샤의 일본 진출 이야기도 있었는데 아직 구상일 뿐 본격적인 이야기는 없었지. 많은 인기를 얻었지만 라샤는 아직 신인 그룹이니까. 체력적으로 정신적으로 7월말까지 활동하면 한계에 이를 것 같아 국내 활동을 끝으로 당분간 휴식기를 취하게 하려고 한 게다.”

그렇다고 하나 일본 진출이란 미끼는 무척 달콤한 것이다.

시린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하지만 일본 진출 기회를 놓칠 수도 있지 않나요?”

“그렇긴 하지. 하지만 너희들은 이걸 알아야 한다.”

석규가 강렬한 눈빛으로 라샤 멤버 하나하나를 훑었다.

그녀들은 그런 석규의 시선이 절로 전신에 긴장감이 퍼져나가는 걸 느꼈다.

“너희들은 생각보다 더욱 유명하고 대단하다는 것을 말이다. 너희들의 뛰어난 실력을, 창현이의 뛰어난 곡을, 나의 사업 능력을 잘 조합할 수 있다면 일본은 언제든지 진출할 수 있다. 지금 너희들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무리하게 인기를 쫓는 것이 아닌 적절하게 몸을 추스르는 것이다. 난 너희들을 소모품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

석규의 말에 라샤 멤버들은 감동에 빠져들었다.

근 몇 달 동안 연예계에서 활동을 했기에 그녀들도 어느 정도 이 바닥의 현실을 자각하고 있다.

그중 가장 많이 들은 이야기는 기획사의 횡포에 의하여 쉴 사이도 없이 무리하게 많은 스케줄을 소화하다가 결국 목도 몸도 망가져 속절없이 사라지는 아이돌 그룹의 이야기였다.

몇몇 친해진 아이돌 그룹의 계약 조건을 들으면서 라샤 멤버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괜찮은 기획사를 택했고, 사장님이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눈으로 직접 목격하고, 귀로 직접 듣게 되자 그녀들은 가슴 한구석이 따뜻해지는 걸 느꼈다.

생각해보면 자신들의 스케줄은 그나마 넉넉한 편이었다.

정신없이 바쁘긴 하지만 못해도 하루 8시간 수면은 취할 수 있게 배려해주었다. 늦은 밤까지 스케줄이 있으면 오전 스케줄은 비워주면서 말이다.

정신없이 촬영을 다닐 땐 몰랐는데 이렇게 이야기를 들으니 새삼스럽게 그 사실들을 자각하게 된다.

라샤의 세 멤버가 눈빛을 교환한다.

시린이 눈빛으로 무언가 의중을 묻는 듯하자 고개를 끄덕이는 세룬과 미란.

그 모습에 석규가 의문을 느낄 무렵, 시린의 입이 열렸다.

“저희는 괜찮으니 8월달에 일본으로 진출하는 건 어떨까요?”

“일본을?”

석규가 눈을 살짝 크게 뜬다. 의외였던 탓이다.

시린이 고개를 끄덕인다.

“솔직히 일본에서 저희가 국내만큼은 아닐 거잖아요. 그렇죠?”

석규는 솔직하게 인정했다.

“실망할지 모르지만 맞는 말이다. 적은 수의 팬층은 존재하지만 아직 너희들의 존재가 많이 알려지진 않은 상태다.”

“괜찮아요. 오히려 일본에서 활동하지 않았음에도 팬층이 있다는 게 기쁜 걸요. 한국에서 활동을 마친 뒤 일본에서 활동을 하면 앞으로 더 좋지 않을까요? 게다가 아직 유명하지 않다면 스케줄도 넉넉할 테니 충분히 휴식을 취할 수 있을 테고요.”

오로지 국내에서만 활동했음에도 일본에 적은 수의 팬층이라도 있는 건 대단한 일이었다.

게다가 라샤는 대한민국을 뒤흔들고 있는 아이돌 그룹이었고, 뛰어난 노래와 뚜렷한 개성은 많은 팬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녀들의 매력이 충분히 일본에서도 먹힐 거라 생각한 일본 여러 회사에서 라샤의 일본 진출을 넌지시 제시한 상태였다.

사업자의 입장에서 놓치기 싫은 제의였지만 라샤는 AA엔터테인먼트의 근간을 이루는 가수이자 어린 시절부터 보아온 딸과 같았기에 석규는 혹사시키기 싫어 보류를 해놓은 상태였다.

그런데 본인들이 희망하니 석규의 마음이 흔들렸다.

“으음! 솔직히 회사 사장의 입장에서 너희들이 일본 진출을 해주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고민이 되는 듯 말끝을 흐리는 석규를 보며 시린이 쐐기를 박았다.

“저희는 괜찮아요. 오히려 일본 진출은 저희가 사장님에게 부탁해야 하는 걸요. 건강은 잘 챙기고 있으니 저희 의견대로 해주세요, 네?”

“맞아요. 춤으로 단련되서 몸이 얼마나 튼튼한데요.

“건강검진도 받아보니 아무 문제가 없데요. 그러니 상관없어요.”

다른 두 사람도 석규에게 부탁한다.

졸지에 입장이 역전된 셈이다.

단번에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사항이 아니었기에 석규는 심도있게 고민을 하며 창현을 바라보았다.

문득 그의 생각을 알고 싶었다.

“창현이 넌 어떻게 생각하느냐?”

석규의 물음에 싸인을 하던 창현이 씨익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본인들의 의지가 확고하고, 건강 문제도 없다면 정해진 것 아닐까요? 아버지의 걱정은 분명 소속사 가수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지만 때로는 그것이 과보호가 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해요.”

“과보호. 과보호라…….”

창현의 말에 무언가를 느낀 걸까.

석규가 굳은 표정으로 중얼거린다.

확실히 소속사 연예인을 위한답시고 과하게 보호를 하려고 했던 것은 맞다.

기존의 아이돌들을 너무 강하게 통제한다는 데서 온 반발심인 탓일까.

최대한 배려를 해준다고 하면서 그들이 너무 부담을 느낄 정도로 과하게 보호를 하려고 했나보다.

마침내 결정을 내린 듯 석규가 고개를 끄덕인다.

“좋다. 너희들이 원한다면 일본에서의 활동도 허락하마. 대신 할 테면 제대로 해야 한다. 너희 앨범도 일본어로 새로 녹음을 할 거다. 창현아, 그건 도와줄 수 있지?”

“일본어로요? 가능하죠. 다만 누나들의 일본어 실력에 따라 녹음 기간이 달라질 텐데…….”

창현이 말끝을 흐리며 시선을 주자 라샤 멤버들이 미소를 짓는다.

“훗! 우리는 이미 일본 진출을 노리고 오래 전부터 일본어를 배워왔단 말씀. 쓰는 거 빼고 회화랑 듣기는 가능해.”

“우리를 얕보면 안 되지요.”

“이럴 때 보면 창현이가 원래 나이처럼 보인다니깐?”

괜한 걱정이었나보다.

창현은 인상을 썼다.

“저도 일본어 웬만큼 하거든요? 회화가 부족한 것 빼고는 쓰기랑 듣기 다 돼요.”

“그래그래, 우리 창현이는 역시 잘났지.”

“누가 뭐라나.”

“가장 중요한 말하기가 안 되면 뭐…….”

“이익!”

본전도 못 건진 창현은 그대로 침몰하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보며 석규가 앞서 나온 말들을 정리한다.

“그럼 7월 내로 라샤의 앨범을 일본어로 녹음하도록 하고 8월초에 일본에 진출하도록 하자. 그리고 창현이는 어학연수겸 해서 라샤와 함께 일본으로 가도록 하고. 그럼 되겠지?”

시린이 대표로 대답하였다.

“네. 저희는 그렇게 하면 만족이에요.”

“그럼 후속곡은 어떻게 하지?”

석규의 물음에 창현이 대답했다.

“미니 앨범으로 하는 게 어때요? 중간 공백기만 채울겸 해서요. 그리고 천천히 2집을 준비하면 될 것 같은데.”

미니 앨범만 준비하면 시간도 적게 들고 공백 기간도 짧아질 것이다.

석규는 괜찮은 방법이라고 생각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은 방법이구나.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자. 창현이 넌 어서 싸인이나 하거라. 네가 다 해야 회식을 할 수 있으니까.”

“윽!”

“어서 싸인 하렴, 창현아.”

“맞아, 빨리 싸인 해. 나 배고프다고.”

“너무 빠르게 하면 손 아플 테니 천천히 해. 대신 우리 것도 하나씩 싸인 해주고.”

석규와 라샤에게 시달리며 창현은 열심히 싸인을 해야만 했다.

그렇게 AA엔터테인먼트의 회식은 창현이 103개의 싸인을 함으로써 차질없이 시작될 수 있었다.


가수 현의 앨범 대박 축하 회식을 한 뒤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갔다.

앨범 판매는 순조로웠고, 창현은 날마다 웃음을 터뜨리며 전화하는 석규의 통화에 미소를 지으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회식 이후 가장 먼저 창현이 한 것은 라샤의 정규앨범 곡들을 번역하는 작업이었다.

한글을 일본어로 바꾸는 것이었기에 기존의 가사 틀을 지키면서 비슷한 의미를 지니게 하는 것은 무척 까다로운 작업이었다.

모르는 건 라샤 멤버들에게 물어보면서 번역을 한 끝에 모두 번역을 할 수 있었고, 라샤의 스케줄이 비교적 적어지는 다음주에 녹음을 시작하기로 하였다.

라샤의 노래도 모두 번역한 창현은 오랜만에 게임과 애니메이션 감상을 하면서 휴식에 빠져들었다. 어디에 신경 쓸 필요없는 평온한 일상이었다.

“그러고 보니 토요일에 수연 누나랑 약속이 있었지.”

라샤 노래의 번역을 하느라, 그 다음은 휴식을 취하느라 잠시 잊었던 약속이었다.

창현은 금요일이 돼서야 수연과 약속이 있다는 걸 떠올렸고, 그녀가 왜 갑자기 자신을 만나자고 했는지 고심해보기 시작하였다.

“수연 누나도 내 정체를 의심하고 있나? 하지만 딱히 의심거리를 준 적은 없는데.”

윤아의 생일 때 전한 앨범으로 인하여 조금이나마 의심하는 기색을 보이기는 했지만 잘 무마한 것이 벌써 한 달 전이다. 이제 와서 다시 의심을 할 이유가 없다.

“고맙다고 하려고 하는 건가?”

미영과 주현을 데리고 놀이공원에 가서 노래자랑 1등을 함으로써 무료 입장권을 얻지 않았는가?

그것에 대해 감사의 인사를 하려는 건가 싶어도 그 일 또한 벌써 이주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럼 도대체 뭐지?”

그것들을 제외하면 수연이 굳이 자신을 만나자고 할 이유가 없다.

오랫동안 못 봤으니 한 번 보자? 이것도 좀 어폐가 있다.

단순히 보자는 것 가지고 통화 당시 같은 목소리를 보일 리 없으니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모르겠네.”

분명 무언가가 있는 것 같은데 떠오르지가 않자 애꿎은 머리만 헝클어뜨리는 창현이었다.

그 뒤로도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았지만 결론이 도출되지는 않았다.

“뭐 부딪쳐보면 알겠지.”

침대에 드러누운 채 창현은 눈을 감았다.


토요일이 되었다.

오전 수업을 마친 창현은 곧장 집으로 돌아가 점심을 해결한 뒤 옷을 챙겨입었다.

“두 시니까 시간이 넉넉하네. 천천히 가도 되겠어.”

지금 나가면 시간이 많이 남을 것 같았기에 창현은 가볍게 게임 한판을 하고는 집을 벗어났다.

약속장소는 저번에 만났던 분수대광장이었다.

주말인 오늘 같은 날에 이곳은 말 그대로 인간이 범람하는 곳이기에 창현은 수연에게 자신이 입고 갈 옷차림을 간략하게 적어서 문자로 보냈다.

아마 십여 분 정도 전에 도착할 테니 자신이 먼저 도착하리라.

창현이 분수대광장에 거의 다 도착했을 무렵, 문자가 왔다.

지이이잉.

[나 이미 도착했어. 분수대광장 중앙부근에 있고, 흰색 반팔티랑 청바지 입고 있으니 찾아오도록 해.] 얼음공주 제시카

문자를 받은 창현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나보다 먼저 도착할 줄은 몰랐는데.”

아직 약속 시간이 남았다고 하지만 남을 기다리게 하는 건 적성에 맞지 않았기에 창현은 걸음 속도를 높였다.

그리고 분수대광장에 도착하자 그는 수연이 말한 옷차림을 한 사람을 찾기 시작했다.

“에휴. 하필 흰색 티람. 찾기 힘든데.”

사방을 둘러보니 상당수 사람들이 흰색 반팔 티를 입고 있었다.

수연이 말한 중앙부근으로 향하면서 한 사람씩 찾던 창현은 분수대 앞에 앉아있는 수연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약간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이 차마 부르기가 뭣했다.

조용히 다가간 그는 수연의 어깨를 살짝 쳤다.

“안녕하세요, 수연 누나. 저 왔어요.”

“꺅! 으응? 아, 창현이었네.”

창현의 터치에 짧게 비명을 지르며 경계 어린 표정을 짓던 수연은 창현을 보더니 표정이 스르르 풀린다.

사람이 북적거리는 주변을 둘러본 창현이 말했다.

“누나가 제게 뭔가 할 말이 있으다고 하셨죠?”

수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응. 할 이야기가 있는데 여긴 힘들 거 같네.”

“그럼 근처 카페로 가요. 거기서 이야기 하죠.”

“그게 낫겠네.”

그리하여 두 사람은 근처에 위치한 카페로 향하게 되었다.

카페로 들어선 수연은 메뉴판을 보더니 말했다.

“난 아메리카노. 창현이 넌 저번처럼 딸기 주스?”

“네? 네. 딸기 주스요.”

수연의 물음에 창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이 마시고 싶은 것을 말하였다.

그 모습에 수연이 쿡쿡 웃음을 지었다.

“중학생이라지만 딸기 주스 먹는 건 좀 이상하다.”

그런 수연의 말에 창현은 약간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지만 인정할 수 없었다. 좋아하는 건 좋아하는 것 아닌가.

“좋아하는 걸 어떻게 해요.”

“응. 그냥 말해본 거야. 귀여워서. 자, 그럼 창현이 네가 자리를 잡아놓아.”

그러면서 계산대로 향하는 수연.

창현이 그런 수연을 붙잡았다.

“에이, 괜찮아요. 제가 살게요.”

수연이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이번엔 내가 살 거야. 저번에 신세도 졌고, 커피도 얻어 마셨잖아? 창현이 네가 계속 사주면 나한테 부담이 되니까 오늘은 내가 사도록 할게.”

그렇게 말하니 창현은 더 이상 고집부릴 수 없었다.

“알았어요. 자리 잡아놓을게요. 그런데 영광인 걸요. 수연 누나가 사준 커피를 마시게 되다니.”

“다른 멤버들에게도 산 적 없다고. 영광으로 알아.”

수연의 콧대가 한껏 높아진다.

그런 수연의 모습을 보며 창현은 웃음을 짓고는 근처에 자리를 잡는다. 그리고 커피와 딸기주스가 나오자, 창현이 다가가서 그걸 받아든다.

“옮기는 건 제가 할게요.”

“응, 고마워.”

수연은 그것까지 거절하지 않고는 창현이 잡아놓은 자리에 먼저 앉는다. 뒤이어 창현이 수연 앞에 커피를 내려놓고 자신 앞에 딸기 주스를 놓는다.

창현이 딸기 주스를 한모금 마신다. 달콤한 딸기맛이 입안에 감도는 게 오랜만에 느껴보는 맛이었다.

오랫동안 맛보지 못한 만큼 그 맛이 각별하다는 걸 느끼며 창현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일로 만나자고 하신 거에요? 전 무슨 일일까 싶어서 생각해봤는데 도통 생각이 나질 않더라고요. 무슨 일이 있던 건가요?”

창현의 물음에 수연이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살짝 한모금 빨아들이고는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라고 한다면 무슨 일이라고 할 수 있어.”

수연의 말에 창현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래요? 저랑 관련된 건가요?”

“응. 창현이 너랑 관련되어 있어. 그리고 자칫하면 제법 큰일이 될 수도 있고.”

“큰일이라고요?”

창현이 고개를 갸웃해본다. 수연이 말하는 큰일이란 게 무엇일지 생각해보는 것이다.

자신이 무언가 사고를 친 적이 있던가?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봐도 자신이 사고친 것은 대부분 수습을 한 뒤였고, 딱히 다른 사고를 친 적은 없었다.

창현은 자신을 바라보며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수연을 힐끗 보고는 생각에 잠겨들었다.

‘수연 누나가 이렇게 말할 정도면 무언가 있는 건데 왜 난 모르지? 설마 내가 술이라도 마시고 무슨 실수를 했나.’

태어나서 술 한모금도 안 마셔봤기에 그런 일이 있을 리 없다.

여러 방면으로 생각을 해보았지만 결론은 없다, 였다.

창현이 수연에게 물었다.

“솔직히 뭔지 감이 안 잡히네요. 알려주실 수 있으세요?”

수연은 흔쾌히 대답했다.

“물론이야. 그걸 말해주려고 만나자고 한 거니까.”

“그럼 알려주세요.”

“응.”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는 수연의 모습이 순간 이질적으로 변했다.

뭐랄까 방금 전까지 포커 페이스로 자신을 대했다면 지금은 표정에 감정이 묻어나온다고 할까?

그녀의 얼굴에 드러난 감정은 설렘과 확신, 그리고 상대를 꿰뚫어버릴 듯한 예리함이었다.

갑작스럽게 바뀐 그녀의 태도에 창현은 움찔했다.

수연이 창현을 보며 입을 열었다.

“우선 모든 퍼즐을 맞췄다고 할까? 누가 과연 예상했을까. 평범한 중학생 강창현이 요즘 승승장구하는 대한민국 최고의 가수 현이라는 것을? 안 그래, 현아?”

쿠궁!

확신이 깃든 수연의 말을 듣는 순간 창현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현이라니?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한 표정이지 않은가?

창현은 수연을 보면서 머리가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표정으로 티를 내면 안 된다.

이럴 땐 강하게 나가서 착각이었다는 인식을 심어줘야한다.

창현은 짐짓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제가 윤아 누나한테 앨범을 건네드린 것 때문에 그러시는 거에요? 그것 때문이라면 제가 설명을 못드렸네요.”

“뭔데?”

차갑게 묻는 수연이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현이라는 사실을 굳게 믿고 있는가보다.

창현은 침착하게 속으로 심호흡을 하며 말을 이어나갔다.

“실은 AA엔터테인먼트 회사의 사장님이 저희 아버지거든요. 그래서 제가 부탁드려서 싸인본 CD를 얻을 수 있던 거에요.”

이것이라면 앨범 문제에 대한 의구심을 충분히 해소시킬 수 있다.

제아무리 얼굴없는 가수 현이라고 하여도 소속사 사장님과 얼굴을 안 볼 리는 없었으니까.

상황에 걸맞는 최고의 변명을 해내는 창현이었다.

수연의 입이 열렸다.

“그래? 그랬구나.”

수긍을 하기는 한다.

하지만 수연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흔들리지 않는 확신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창현은 가슴에 불안감이 싹트는 걸 느꼈다.

“저… 제가 말한 건 모두 사실이에요.”

가수 현이라는 것도 사실이다. 다만 인정하지 않았을 뿐. 창현은 수연에게 거짓을 말한 것은 없다.

창현의 말에 수연의 표정이 밝아진다.

웃음을 머금은 그녀는 아름다웠으나 창현의 눈에는 몸서리 칠 정도로 무서워보였다.

입은 웃고 있는데 눈은 자신을 훑고 있던 것이다.

“이제보니 현이는 말을 참 잘하는구나. 예전에 나한테 어수룩하게 당한 것 같아서 솔직히 눈치를 못챘거든. 현이 네가 말하는 건 모두 사실이겠지. 네가 AA엔터테인먼트 사장님의 아들이란 것도. 맞지?”

“네. 맞아요. 이제 의심이 모두 풀린 거죠?”

창현의 말에 수연은 여전히 웃음을 머금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풀릴 리가 있겠어?”

“어째서죠?”

“네가 가수 현이라는 사실을 아직 인정하지 않았잖아?”

창현은 펄쩍 뛰며 입을 열었다.

“제가 가수 현이라는 건…….”

수연이 창현의 말을 끊으며 가로막았다.

“그래. 정면으로 부인하지 않았지. 다만 화제를 돌려 벗어나려고 했을 뿐. 안 그래? 부인하지 않잖아.”

“…….”

지금 수연에게는 어떠한 말도 먹히지 않는다고 생각한 창현이었다.

의자에 몸을 푹 묻으며 딸기 주스를 마신다. 달콤한 맛이 지금은 왜 이리 씁쓸하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목이 타는 듯 다시 한 번 딸기 주스를 마시고는 창현이 물었다.

“후! 왜 저를 현이라 생각하시는 거죠?”

반쯤은 인정한 셈이다.

수연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들으면 인정할 수밖에 없을 텐데?”

“그래도 듣고 싶네요.”

몇가지 실수를 했지만 자신이 현이라고 단정 지을 만한 결정적인 실수를 한 적은 없다.

창현은 왜 수연이 자신을 가수 현이라고 단정 짓는지 궁금했다.

수연은 창현을 힐끗 보더니 커피를 한모금 마시고는 의자에 편하게 몸을 묻는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내가 너를 현이라고 확신할 수 있게 된 이유는 총 세 가지야. 첫 번째, 가수 현이 게시글을 올린 시간이야. 난 현의 팬 사이트인 다크 스타의 회원이거든. 그래서 현이 올린 게시글을 보곤 해. 게시글이 전부 네 시 안쪽에 올라와 있더라고. 즉, 가수 현이 아직 십대란 사실 하에 네 시 안에 게시글을 올리려면 중학생이어야 한다는 말이 돼. 고등학생은 네 시가 조금 넘어서 정규수업이 끝나거든.”

그동안 앨범 제작이 바빴기에 학교에 돌아온 뒤 곧장 게시글을 작성하곤 하였다. 그리고 곧장 준비한 뒤 AA엔터테인먼트로 가곤 하였는데 수연이 그것을 정확하게 짚어낸 것이다.

창현이 힘겹게 말해본다.

“가수 현이 의도적으로 그랬을 수도 있잖아요?”

수연은 그저 미소를 지을 뿐 대답하지 않고는 두 번째 이유를 말한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윤아에게 앨범을 선물한 거야. 가수 현의 싸인은 무척 귀하지. 여태껏 받은 사람이 누구인지 모를 정도로. 그런데 다크 스타 팬 사이트의 주인장이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윤아에게 현의 싸인이 들어간 앨범이 선물로 왔어. 둘이 연관성은 없어 보이지만 창현이 네가 현이라는 가정 하에 둔다면 비슷한 시기에 앨범을 준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연관이 가능해.”

“하지만 그건 억지에 가까운데…….”

“설명해줄 테니 기다려.”

길게 말하여 목이 타는지 수연은 식어버린 아메리카노를 쭈욱 들이켰다.

갈증이 가시는지 그녀는 창현의 의문에 대답해주었다.

“억지에 가까운 건 알아. 하지만 세 번째 이유가 결정적이야. 창현이 너 미영이랑 주현이 데리고 놀이공원에 가서 노래 부른 적 있지?”

“…….”

창현은 대답하지 못했다. 직감적으로 놀이공원에서 노래를 부른 것이 결정적 이유란 것을 느낀 것이다.

수연은 그런 창현의 반응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설명을 하였다.

“난 한 사람의 팬으로서 가수 현이 누구일지 궁금했어. 그래서 그의 제스처를 연구했지. 넌 몰랐겠지만 가수 현은 노래를 부를 때 박자와 음의 높낮이를 조절하면서 손목과 손가락을 흔들어. 그리고 마이크를 쥔 손가락의 넓이로 음의 강약을 조절해. 난 이걸 M본부 라샤의 데뷔 무대와 <Bad Boy>에서 확인했어. 내가 예상했던 것들 중 몇가지는 현의 습관적 제스처란 게 확인된 셈이지.”

“…….”

설마 그렇게까지 할 줄이야.

창현은 수연이 무슨 말을 할지 짐작이 갔다.

“근데 창현이는 알아? 놀이공원에서 부른 그 공연이 다크 스타에 올라왔다는 것을. 난 가수 현의 습관적 제스처를 모두 알고 있기에 바로 비교해봤지. 그리고… 놀이공원에서 노래를 부르던 소년이 가수 현과 같은 제스처를 하고 있더라고. 본인도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에. 이게 가능할까?”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설마 자신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그렇게까지 비교 분석에 나설 줄이야.

다른 사람이었다면 결코 창현의 정체를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자신을 알고 있는 수연이었기에 가능했던 일들이다.

수연은 아메리카노를 끝까지 들이킨 뒤 창현을 보며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난 윤아가 받은 앨범을 보고 처음부터 창현이 네가 가수 현이라는 가정 하에 모든 퍼즐을 맞춘 것뿐이야. 그리고 나의 퍼즐은 정확하게 맞춰진 것뿐이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수연은 이미 확신하고 있었고, 자신에게 빠져나갈 길은 보이지 않았다.

이것이 현실이다.

더 이상 아니라고 부인해봤자 추해지는 건 자신이다.

창현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마침내 인정하고야 말았다.

“하아! 제가 현이 맞아요. 설마 이렇게 들킬 줄은 몰랐네요.”

마침내 들키고야 말았다.

창현은 머릿속이 아득해지는 걸 느꼈다.

수연은 창현의 인정에 미소를 지었다. 승리자의 미소였다.

“이제야 인정해주네.”

“후! 제 정체를 알아낸 수연 누나에게 경의를 표해요. 정말 대단하세요.”

“고마워. 나도 창현이가 끝까지 부인하지 않아줘서 기뻐.”

창현이 인정하기 전까지 수연은 약 99%의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나머지 1%는 본인이 인정하지 않으면 채울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하고 있었다.

내심 그녀는 창현이 끝까지 인정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럼에도 창현을 만난 건 가수 현의 팬으로서 반드시 확인하고픈 욕망이 있어서이다.

모든 걸 들키게 되자 잔뜩 긴장한 창현의 몸에 힘이 쭉 빠졌다.

힘없이 의자에 몸을 묻으며 창현이 물었다.

“제 정체를 알아내셨으니 무언가 원하는 게 있을 거라 생각해요. 원하는 걸 말해보세요.”//

힘이 실리지 않은 그의 목소리는 모든 걸 감수하겠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창현은 수연의 입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직 가수 현의 정체가 드러나서는 안 됐다.

평온은 자신의 일상 생활도 그러하지만 아직 스스로 마음의 준비가 덜 되었다.

수연이 무얼 원하는지 모르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거라면 어느 정도 감내할 생각이었다.

창현의 말에 수연이 반색하며 물었다.

“정말 뭐든지 말해도 되는 거야?”

입술을 지그시 깨문 창현이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요.”

“좋아! 그럼…….”

고개를 끄덕이며 말끝을 흐리는 수연.

그 모습을 창현이 물끄러미 바라본다.

얼굴에 서린 긴장감이 보인다.

수연은 그 모습을 보고는 절로 웃음을 흘린다.

“후후! 내가 원하는 건 없어.”

자신의 예상과 전혀 다른 수연의 말에 창현이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지었다.

“하아? 누나 지금…….”

“원하는 게 없다고. 설마 넌 내가 네 비밀을 빌미로 무언가 이익을 취득하려고 생각한 거야?”

눈을 부릅 뜨고 자신을 바라보니 할 말이 궁색해진 창현이었다. 수연의 말마따나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 그게…….”

당황하는 창현을 보며 수연은 그런 그의 모습이 무척 귀엽다고 여겼다.

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황해서 제대로 인지하기가 힘들었겠지. 난 창현이가 날 그렇게 안 봤을 거라 믿어. 믿어도 되지?”

“무, 물론이죠.”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는 창현. 정체가 밝혀지면서 주도권은 완전히 수연에게 넘어가 민첩하기 회전하던 두뇌도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알아주었으면 됐어. 내가 오늘 이렇게 확인한 건 한 사람의 팬으로서 현의 정체를 알고 싶었거든. 다른 욕심은 없어.”

“누나가 설마 제 팬일 줄은 몰랐어요.”

이미 모든 사실을 알고 있기에 편하게 말하는 창현.

수연은 그런 창현의 말에 검지 손가락을 흔들어 보였다.

“쯧쯧! 자신의 인기를 이렇게 몰라서야. 우리 멤버들 중에서 네 팬 아닌 사람 없을 걸? 특히 주현이가 얼마나 네 팬인데.”

“그래요? 절 좋아해주신다니 기쁘네요.”

자신을 좋아해준다는 말에 싫어할 사람이 있을 리 없다.

창현의 입가에 미소가 절로 걸렸다.

“다크 스타만 해도 삼십만 명이 넘는 회원이 있는 걸? 아무래도 알아보는 사람이 없어서 인기를 실감하지 못하나봐?”

작게 한숨을 내쉬며 창현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 편이에요. 솔직히 앨범이 나오지 않으면 체감도 못하죠.”

“그래도 대단한 거야. 세상에 얼굴없는 가수를 하는 사람은 많아도 창현이처럼 인기를 끄는 가수는 없잖아.”

“그거야 당연히 감사하죠. 그래서 더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꽤 커요, 하하!”

“그래? 그래도 창현이는 뛰어난 작곡 실력이 있으니 앞으로도 잘 될 거야.”

수연은 창현의 이야기를 들어주면서 그와 친분을 쌓아나갔다.

비밀을 서로 공유하게 된 시점에서 서로를 가로막던 벽 하나가 부서진 상태였다.

수연은 창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때로는 감탄을, 때로는 조언을 하면서 창현과 친분을 쌓아나갔다.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시간이 어느덧 네 시가 훌쩍 넘었다.

창현은 시계로 시간을 확인하곤 수연에게 말했다.

“시간이 꽤 흘렀네요. 저녁 같이 드실래요, 누나? 제가 살게요.”

수연이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 싶은데 다섯 시까지 들어가봐야 해. 연습실에 볼일이 있거든. 오늘 만나자고 한 것도 이야기하고 싶어서 그런 거고.”

“아, 그렇군요.”

창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수연이 미소를 짓는다.

“비밀이라면 걱정 마. 아는 사람은 나밖에 없으니까. 누구한테도 말하지 않을게.”

“…네. 고마워요 누나.”

어쩌면 저 말을 제일 듣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렇게 카페를 나선 창현과 수연은 인사를 한 뒤 헤어졌다.

집으로 돌아가며 창현은 자신의 비밀을 지켜주겠다던 수연의 말을 떠올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다행이다. 정체를 들켜서 많이 걱정했는데 수연 누나가 정말 좋은 사람이라 다행이었어. 다음에 만나게 되면 내 싸인 앨범이라도 선물해야겠다.”

비밀을 들켰지만 창현의 표정은 어둡지 않았다.


창현과 헤어져 숙소로 돌아오는 수연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성공한 거겠지?”

그녀가 창현의 정체를 알고 있음에도 아무런 요구를 하지 않은 것은 정말 순수한 팬으로서 현의 정체를 지켜주고 싶은 것도 있지만 다른 노림수 또한 존재하였다.

바로 창현과 둘만의 비밀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녀는 창현의 정체를 알아내고, 일주일 전에 그와 약속을 잡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였다.

처음에는 무엇을 요구할까 생각을 해보았다. 솔직히 앨범이나 부탁 같은 걸 해도 창현은 충분히 들어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녀는 생각을 달리할 수 있었다.

다른 물질적인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닌 창현 그 자체와 친해지는 계기를 만들고자 마음 먹은 것이다.

아직 세간에는 창현의 정체가 밝혀지지 않았다.

즉, 관계자를 제외하면 창현이 가수 현이라는 걸 아는 유일한 사람이 바로 자신이란 이야기다.

그걸 깨닫게 되자 그녀는 창현에게 무언가를 제시하지 않기로 마음 먹었다. 그 편이 훨씬 창현의 호감을 사기 좋았다.

예상대로 자신이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는 말에 창현은 반색하였고,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한결 달라졌다.

근 두 달이란 기간 동안 문자를 하면서 친해진 것을 월등히 뛰어넘는 친분 상승이 아닐 수 없다.

“창현이는 나에게 특별한 감정을 가질 수밖에 없을 거야. 둘만의 비밀을 간직하게 된 셈이니까.”

수연의 눈은 반짝이고 있었다.

솔직히 창현이 저녁을 먹자고 했을 때 얼마나 갈등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녀가 결국 택한 것은 같이 저녁을 하는 것이 아닌 헤어지는 것이었다.

이럴 경우 창현은 자신에게 무언가 마음의 빚을 진 느낌을 받으리라.

둘만의 비밀과 자신에게 고마움을 가지고 있는 창현.

그리고 무언가 빚진 기분까지.

처음 만남 때부터 마음에 들었던 창현이었기에 수연은 앞으로의 일을 떠올리며 한껏 기대감을 가졌다.

남녀간에 비밀이란 것이 존재하는 한 서로를 의식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 기회를 어떻게 살리느냐에 따라 무궁무진한 가능성의 여부가 결정될 것이다.

숙소로 돌아가는 수연은 양주먹을 불끈 쥐었다.

“제대로 해보는 거야. 파이팅.”

수연의 책상 위에 있는 책들 중 유난히 닳아있는 책 하나가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 팔랑거렸다.

그 책의 이름은 ‘남녀 간에 밀고 당기기 100가지 비법’ 이었다.




제11장 돌풍, 일본 진출




가수 현의 정규 1집 앨범의 발매는 대한민국 음반 시장의 거대한 폭풍을 일으켰다.

2006년 들어서면서 대한민국 음반 시장은 극도로 위축되며 그 규모가 축소되기 시작하였다.

나날이 성행하는 불법 음악 파일 공유로 인하여 음반 판매가 극도로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음반 시장에 활력을 불어넣어준 존재가 있었다.

국내 영세 기획사인 AA엔터테인먼트가 키워낸 걸 그룹 ‘라샤’ 였다.

뛰어난 가창력과 춤 실력, 각자의 컨셉에 맞는 비주얼로 데뷔 초부터 세간의 관심을 모은 걸 그룹이었다.

AA엔터테인먼트 사장 강석규는 비록 영세 규모의 기획사를 운영하고 있지만 이 바닥에서 오래 종사한 사람이라면 한 번씩 이름을 들어봤을 정도로 오랫동안 연예계에서 일해온 사람이다.

그는 탁월한 수완 능력으로 라샤의 관심을 끌어올리면서 AA엔터테인먼트를 자금난에서 구해낸 구세주이자 전년도 음반 판매 차트 상위에 이름 올린 가수 현이 작곡가로서, 프로듀서로서 라샤의 앨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고 하였다.

비록 가수 현이 싱글 앨범 하나밖에 내지 않은 신인 가수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관심은 대단하였다.

정보가 범람하고 대중의 선택권이 넓어지면서 대중들은 이른바 ‘보는 눈’이란 것이 생기고 조금 더 좋은 것을 선택할 권리를 가지게 되었다.

그들은 가수 현이란 존재가 국내 굴지의 실력을 지니고 있는 가수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곡을 직접 작곡하였으니 기존에 현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라샤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가수 현의 이름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모은 석규는 그들의 관심을 더욱 끌어올리고 열광하게 할 필요를 느꼈다.

그리고 그 발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공개된 것이 <Laser>의 뮤직비디오 티저영상이다.

라샤 멤버들의 매력을 절정으로 끌어올려주는 <Laser>는 당연히 대박이 터졌다. 중독성이 강한 멜로디와 라샤 멤버 하나하나가 보여주는 각자 특유의 매력에 수많은 남성들을 매료시켰고, 여성들 또한 어디 하나 흠잡을 데 없는 라샤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가히 폭발적인 세간의 관심.

하지만 석규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언론사를 이용하여 짧은 기사를 낸다.

바로 라샤의 <Laser>가 타이틀 곡이 아니란 사실을 말이다.

그 기사를 본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가졌다.

왜 <Laser>가 라샤의 타이틀 곡이 아닐까?

그들이 보기에 <Laser>는 충분히 중독성도 있고 시장성도 존재하였다. 게다가 각 멤버간의 개성도 잘 살려주어 라샤에게 적합한 노래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뒤이어 발표된 라샤의 타이틀 곡에 그들은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Yesterday>란 곡의 티저 영상이 발표되면서 라샤의 타이틀 곡이 본격적으로 공개되는 형국에 이른 것이다.

<Laser>가 중독성 있는 멜로디로 젊은 층을 공략했다면 타이틀 곡 <Yesterday>는 감미롭고 달콤한 멜로디로 전 연령층을 아우르는 곡이었다.

수줍은 소녀들의 목소리는 30-40대 남성들의 첫사랑 시절 풋풋함을 떠올리게 해주었고, 달콤한 현의 목소리는 30-40대 여성들의 수줍었던 첫사랑을 떠올리게 하였다.

그 결과 라샤의 앨범은 대박을 터뜨렸다.

10-20대들을 사로잡아도 30-40대가 보여주는 구매력과는 비교할 수가 없다. 10-20대가 사회를 이룰 싹이라면 30-40대는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뿌리였기 때문이다.

일명 아저씨 부대의 열렬한 환호 속에 라샤는 고공행진을 거듭하게 되었고, 결국 8주 연속 1위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우게 된다.

물론 단지 그것만으로 앨범이 대박날 수 있던 것이 아니다.

라샤의 앨범이 대박이 날 수 있었던 것은 AA엔터테인먼트의 적극적인 자세가 있어서이다.

앨범 판매가 시작되고 인터넷에는 당연히 라샤의 음악 파일들이 불법 공유가 되었다.

AA엔터테인먼트는 이에 대해서 강경한 조치를 취하였다.

아직 영세 규모인 그들은 다른 데 신경 쓸 연예인이 없다. 오로지 라샤에 전력을 다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AA엔터테인먼트는 불법 음원 파일이 올라온 업로더를 집요하게 추적하였고, 업로더들을 감싸주는 P2P사이트를 상대로 고소를 하였다.

P2P사이트 운영자들은 AA엔터테인먼트를 상대로 타협을 해보려 하였지만 AA엔터테인먼트의 자세는 강경하였다. 제3자의 입장에서 보기에 마치 회사의 사활을 걸고 임하는 듯하였다.

그에 반하여 P2P사이트는 어떻게든 이 사태를 유야무야 넘어가려고 하였다.

처음부터 임하는 자세가 틀렸다.

결국 지루한 공방전 끝에 법정은 AA엔터테인먼트의 손을 들어주었고, AA엔터테인먼트는 라샤의 불법 음원 파일이 올라온 모든 P2P사이트에 업로더의 신상명세와 다운로더의 명단을 원하였다.

당시에 불법 음원 파일을 공유한 업로더는 처벌받는 경우가 있어도 다운로더들이 처벌받는 경우는 없었다.

하지만 AA엔터테인먼트는 업로더, 다운로더 가릴 것없이 모조리 고발을 하였고, 물경 수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법정에 끌려가게 되었다.

이런 심각한 사태가 벌어지자 언론에서는 AA엔터테인먼트가 돈에 미쳤다는 등 대한민국을 범죄자 국가로 만들려는 의도냐는 등 안 좋은 말이 쏟아졌지만 AA엔터테인먼트는 이에 굴하지 않고 업로더와 다운로더들을 모조리 적발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끝까지 업로더들과 재판 공방을 벌인 끝에 승리하게 된다.

판사는 업로더들에게 배상금을 지급하라고 말하였지만 이에 대해 AA엔터테인먼트는 다른 방안을 꺼내놓았다.

바로 업로더들이 불법 음원을 유포함으로써 그들에게서 받아간 다운로드 숫자만큼 앨범을 구입하게 하는 것이었다.

어찌 보면 이것이 더 무서운 형벌이었다. 적게는 수백 번의 다운로드가 있지만 많게는 수만 건의 다운로드가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업로더들은 배상금을 지급하는 것으로 끝을 맺었고, 다운로더들에게는 AA엔터테인먼트에서 관용을 보였다.

다시는 다운을 받지 않겠다는 반성문 한 장과 함께 앨범 한 장씩 구매하는 것으로 끝을 맺겠다고 한 것이다.

이로 인하여 세간에는 AA엔터테인먼트가 오로지 돈을 위해 이런 일을 벌인 것이 아니라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었고, 음반 시장에 이토록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는 AA엔터테인먼트의 존재가 훗날 다른 기획사들의 좋은 귀감이 될 수 있을 거란 기사가 터져 나왔다.

압도적인 인기를 구가하며 방송 3사의 예능 프로그램을 점령하다시피 한 라샤는 물경 40만장이 넘는 앨범을 판매하는 기염을 토해냈다.

뒤이어 현이 앨범을 낸다고 하고, 라샤의 일본진출이 유력해진 지금, 연예계의 집중 조명을 받고 있는 것은 바로 라샤와 현이었다.//


7월 7일, 가수 현, 정규 1집 앨범 전격 발매. 20만장 판매.

7월 8일, 가수 현, 정규 1집 앨범 총 판매 25만장 돌파.

7월 11일, 가수 현, 정규 1집 앨범 총 판매 30만장 돌파.

7월 19일, 가수 현, 정규 1집 앨범 총 판매 40만장 돌파.

.

.

.

7월 30일, 가수 현, 정규 1집 앨범 총 판매 50만장 돌파.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한 달 사이 앨범 50만장 판매 돌파!

각종 음원 차트에서 가수 현의 앨범 수록곡이 Best 10에 총 8개가 차지하고 있는 것은 놀라움이 아니었다.

가수 현玄이란 이름은 어느덧 대중들의 아이콘으로 자리한 상태였다.

‘현’이라는 단어 하나만으로 열광할 수 있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그들은 현의 앨범에 수록된 음악의 대중성을, 작품성을, 예술성을 인정하였다.

솔직히 처음에 난관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라샤의 데뷔 무대에서 현이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많은 것을 얻었지만 그만큼 잃은 것도 존재하였던 것이다.

현이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사람들은 현이 이십대, 혹은 삼십대 초반의 가수가 아닐까 조심스럽게 예상하였다. 그 정도 되는 가창력과 작곡실력을 겸비하기 위해서는 세월이 힘이 어느 정도 필요하다고 여긴 탓이다.

간혹 십대에 미소년일 것이다, 라는 추측도 있었지만 그것은 너무나 개연성이 부족한 설명이 아닐 수 없다.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목소리와 쉽게 빠져들 수 있는 멜로디는 십대 소년이 하기엔 경험치의 차이가 컸다.

그런데 모두의 예상을 깨는 일이 나타났다.

바로 가수 현이 십대 후반의 소년인 것이 밝혀진 것이다.

밝혀지지 않던 신비가 일부 드러나자 사람들은 열광했지만 그만큼 부작용도 있었다.

소위 말하는 어른들의 ‘선입견’이 자리하기 시작한 것이다.

능력위주의 자본주의 사회지만 대한민국은 유난히 그런 면에서 퇴보된 면을 보인다. 능력이 있는 사람보다는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 좀 더 대우를 해주는 면이 많은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선입견도 압도적인 실력에 부서졌다.

가수 ‘현’은 일반 범주에 속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적어도 음악에 있어서는 천재의 범주에 도달한 인물이었다.

‘놀러와’에서 했던 나이답지 않은 성숙한 발언은 사람들의 선입견을 어느 정도 해소시켜주었고, 라샤의 열풍이 전국적으로 퍼져나감에 따라 사람들의 인식에 가수 현은 어린 나이의 가수가 아닌 뛰어난 작곡가이며 프로듀서이자, 대한민국을 강타한 가수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그러한 인식의 변화는 현에게 날개를 달아주었다.

음반 발매가 채 한달도 되지 않았음에도 50만장 판매를 돌파하자 언론사와 방송사에서 주목하였다. 지금 이 추세라면 능히 100만장 판매까지 넘볼 수 있을 거란 추측이 나올 정도였다.

앨범 100만장!

그게 어디 입에 올리기 쉬운 말이던가?

음반 시장이 불황으로 접어들면서 100만장은커녕 50만장만 팔아도 초대박이라며 손가락을 치켜 세워준다. 그만큼 옛날과 지금의 음반 시장이 달라져 판매가 더욱 어려워진 실정인 탓이다.

몇 년 동안 100만장 이상 돌파한 앨범은 없었다.

그래서인지 언론사에서는 이 사실을 중요하게 다루었다.

최고의 주가를 달리고 있는 현의 앨범이 어느 정도 판매되느냐에 따라 음반 시장이 활기를 띠느냐 아니면 이대로 침체기에 접어드냐를 판가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언론사의 보도 때문일까?

아니면 한 번 타오르면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르는 국민성 때문일까?

현의 앨범 100만장 판매를 놓고 국민들의 열기에 불을 살랐다. 어디서부터 시작된 지 모르는 이 흐름은 음반을 구입하여 듣는 도시인이라면 누구든 현의 앨범을 최소 한 장은 구입해야 한다는 인식이 박혀든 것이다.

공교롭게도 언론사의 보도가 현의 앨범을 홍보한 효과가 된 셈이다.

그로 인하여 현의 앨범 판매는 한 층 탄력이 붙었고, 시시각각 발표되는 기사를 통해 사람들은 ‘설마’ 하는 기대감을 가졌다.

음반 시장이 살아났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문화 시장이 활력을 띠었다는 것이고, 그것은 경제가 어느 정도 나아졌다는 걸 암시하는 것이었으니까.

현실은 그러하지 않지만 이렇게나마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은 사람들의 마음이었다.

앨범 판매가 순조롭게 이루어지면서 창현은 그동안 주어졌던 일들을 서서히 마무리 짓고 있는 단계였다.

“라샤 누나들도 활동을 슬슬 마무리 하고 있는 단계고, 녹음도 마무리를 했으니 이제 내 할 일만 끝내면 되겠군.”

어제 학교에서 여름방학식을 하였다.

수연에게 정체를 들킨 이후 창현은 주현을 볼 때마다 마음을 졸이고는 했는데, 다행히 수연이 약속을 지켰는지 주현이 눈치 챈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미리 말해두었으니 의심을 사지 않겠지.”

창현은 주현에게 더 이상 의심을 사기 싫었기에 방학식 때 일본으로 어학연수를 간다고 하였다.

그런 창현의 말에 주현이 아쉬워하는 기색을 보였지만 방학이 되면 연습 또한 한층 강도가 높아지기에 웃음을 지으며 문자라도 자주 교환하자고 하였다.

그렇게 주현을 성공적으로 클리어한 창현은 태연, 미영, 유리, 윤아에게도 문자를 보냈고, 안부 인사와 함께 강제로 일본에서 선물을 사오라고 협박을 받게 되었다.

남은 것은 수연 뿐.

이 최종보스를 잘 클리어 해야 마음놓고 일본에 다녀올 수 있을 것이다.

며칠 후면 라샤와 함께 일본으로 갈 것이기에 창현은 그전에 수연과 만나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전화를 걸었다.

♩♪♬

대놓고 흘러나오는 <Bad Boy>. 전엔 분명 이게 아니었는데 자신의 정체를 알고 난 뒤 바꾼 듯했다.

약 십여 초 정도가 흐른 뒤 수연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창현이?

“네, 수연 누나. 저에요.”

-응. 그런데 갑자기 웬일이야?

정말 모르는 걸까? 다른 누나들에게 이미 말했는데?

창현은 순간 고개를 갸웃하다가 이내 생각을 접어두고 말했다.

“제가 이번 방학에 일본을 가게 되었거든요. 그전에 누나 한 번 만나고 가려고요.”

만나는 김에 싸인 CD를 주려는 의도도 포함되어 있지만 왠지 자신의 싸인이 담긴 CD를 준다는 게 아직도 어색했기에 창현은 말하지 않았다.

-신경 써주는 거야? 고마워. 그럼 언제 보려고?

“저 다음주 월요일에 가게 되거든요. 그러니 토요일날 만났으면 싶은데 괜찮으시겠어요?”

오늘이 금요일이니 토요일은 바로 내일이다. 라샤의 녹음을 하고 정신없이 하루하루를 보내다보니 시간이 촉박하게 잡혔다.

창현의 말에 수연은 잠시 침묵하더니 대답했다.

-…알았어. 그럼 내일 보자. 장소는?

“저번에 만났던 곳으로요. 혹시 내일 연습 있으세요?”

-응. 아침엔 없고 점심시간 끝난 후부터 쭉 연습 있어.

그 말에 창현은 부지런히 생각을 정리하고는 말했다.

“그럼 아침에 만날까요? 그리고 점심 같이 먹고요.”

-난 상관없어.

“네. 그럼 아침 10시에 분수대광장에서 뵈요.

-그때보자. 그럼…….

그렇게 통화는 끝났고 창현은 몇가지 생각을 하다가 이내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아직 많이 만나보지도 않았는데 내가 어찌 수연 누나의 속을 알리.”

비밀을 공유(?)하는 사이이긴 하지만 아직 수연의 속내를 쉽사리 짐작하기 힘든 창현이었다.


고된 연습이 끝나고 밤이 되어서야 숙소로 돌아오는 소녀들에게 있어 드라마 시청은 큰 낙이었다.

숙소로 돌아온 뒤 삼삼오오 모여 TV앞에 옹기종기 앉았다.

아무래도 인원이 아홉 명이다 보니 선호하는 드라마가 각각 갈리는 경우가 있다.

이럴 경우 가장 많은 인원은 거실에서, 그 다음으로 많은 인원은 큰방으로 가서 TV를 시청하곤 한다.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 거실에는 다섯 명의 소녀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드라마가 막 시작되려고 할 무렵, 태연은 한 사람이 안 보이는 걸 보고는 입을 열었다.

“수연이 어디갔어? 오늘 드라마 기대 된다고 막 난리법석 피우더니?”

태연의 물음에 과자를 먹던 윤아가 말했다.

“수연 언니 방에 있던데요? 지금 드라마 하는 거 모를지도…….”

“그럴 리가… 유리야! 네가 수연이 좀 불러와.”

유리는 자신에게 말하는 태연을 보고 발끈했다.

“야! 왜 나야!”

“네가 제일 가까운 곳에 있잖아. 게다가 아직 앉지도 않았고. 항명은 허용하지 않으니 어서 가도록.”

“쳇!”

따져봤자 자신의 손해란 걸 깨달은 유리가 혀를 차며 수연이 있는 방으로 향했다.

그리곤 문을 활짝 열면서 소리쳤다.

“정수연! 드라마 시작한다고!”

갑작스러운 유리의 난입 탓일까.

수연은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응? 어, 응.”

“왜 그렇게 놀라? 뭔가 수상한데?”

그녀의 과한 반응에 유리의 눈이 가늘어진다.

평소에는 별로 눈치가 없는 편인데 이럴 때만 눈치가 9단으로 변하는 유리였다.

수연은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드라마 시작한다며? 가자.”

하지만 유리는 수 년간 수연과 연습을 하였기에 그녀의 미묘한 태도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동시에 그녀의 입에 걸리는 음흉한 웃음.

“흐흐! 우리 수연 양이 뭣 때문에 화제를 전환하며 살며시 덮을까? 우선 뒤로 살며시 숨기는 그것부터 확인해볼까?”

명탐정을 능가하는 유리의 관찰력에 수연이 눈에 띄게 당황했다.

“내, 내가 뭘…….”

“일단!”

섬전을 방불케 하는 빠른 속도로 수연에게 다가가 그녀가 은밀하게 숨기려던 책자를 낚아채는 유리.

미처 수연이 반응하기도 전에 책을 뺏어든 유리는 달려들 때보다 더욱 빠르게 방을 벗어나며 소리쳤다.

“얘들아! 수연이가 무슨 비밀을 가지고 있어! 우리 몰래… ‘남녀 간에 밀고 당기기 100가지 비법?’ 헐!”

큰 소리로 책의 제목을 읽어 내리던 유리의 입에서 허탈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유리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집안을 울렸기 때문일까.

몇몇 소녀들이 눈을 빛내며 유리를 바라본다.

태연이 유리에게 묻는다.

“그게 무슨 말이야? 지금 수연이가 연애 책을 읽고 있다고? 그런 걸 갑자기 왜 읽는 거야?”

유리의 입가에 장난기 가득한 미소가 맺힌다.

“그건 나도 모르지. 혹시 아나? 수연이가 밀고 당기기를 해야 할 님이 생겼을지.”

오랜만에 놀려봄직한 대상이 생긴 탓일까. 유리의 얼굴에 생긴 장난기는 지워질 줄 몰랐다.

유리의 뒤를 이어 방으로 나온 수연은 유리를 보며 눈을 부라렸다.

“너……!”

자신을 향해 손을 뻗는 수연을 보며 유리가 한걸음 뒤로 물러나며 엄살을 핀다.

“어허! 이거 왜 이러시나, 무섭게. 그리고 찔리는 게 없다면 굳이 반응을 보이지 않을 텐데?”

“으으…….”

“뭐야, 수연이 너 남자 만나?”

직접적으로 물어오는 태연의 물음. 그녀의 표정이 자뭇 심상치 않다.

아이돌 그룹으로서 데뷔가 얼마 남지 않은 그녀들은 이성 관계에 있어 철저해야 한다.

단 한 사람의 행실이 그룹 전체에 해악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자를 만나는 건 멤버의 개인 문제가 아닌 그룹 전체의 문제였다.

의심의 시선이 하나둘씩 모여들자 수연이 황급히 손을 저어보인다.

“아, 아니야! 남자는 무슨. 책 내용이 재미있어서 본 것뿐이야.”

“야, 너 드라마 그렇게 기대한다더니 몇 번이나 읽은 책을 다시 보냐? 이것 봐. 하도 봐서 책이 다 닳았어.”

책을 팔랑팔랑 흔들어 보이며 말하는 유리. 그녀의 말대로 책이 아주 너덜너덜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은 갑작스러워서 당황했지만 두 번은 안 당한다.

수연은 책을 확 낚아채면서 성큼성큼 걸어가 소파에 앉았다.

그 모습을 보며 유리는 쳇! 하면서 흥미를 잃은 듯 TV로 시선을 옮겼고, 태연은 수연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나보다 오랫동안 연습생으로 있었으니 알아서 잘 하겠지.”

그러면서 다시 TV로 시선을 옮기는 태연이었고, 수연은 그런 태연의 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소녀시대 멤버들 중에서 가장 까다로운 사람이 자신이라고 하지만 내부에는 결코 만만치 않은 멤버들이 즐비하고 있었다.

수연은 위험할 뻔한 상황을 유야무야 넘긴 것에 대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내가 너무 방심했나봐. 다음부터 조심해야지. 들키면 위험하니까. 특히 주현이가 위험하고… 유리랑 미영이, 그리고 태연이도 위험해. 윤아도 주의해야 하고…….’

주현은 창현과 같은 학교이고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건 옆에 있는 사람이 조금만 신경 쓰면 단번에 알아낼 수 있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창현에게 호감을 가진 것은 주현뿐만이 아니었다.

함께 놀이공원을 갔다온 미영은 자신이 한 음식의 참맛을 알아주는 남자가 나타났다면서 노골적인 호감을 드러냈고, 유리도 창현이 마음에 들었는지 언제 한 번 만나고 싶어하였다.

그리고 태연. 창현을 오만불손한 녀석이라 하면서 벼르고 있지만 제3자의 시선에서는 재회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 어린시절 남자 아이들이 호감을 가진 여자 아이들을 괴롭히는 것과 비슷한 경우로 보였다.

마지막으로 윤아다. 짧은 만남 밖에 가지지 못했지만 앨범 선물로 묘하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이 불순한 싹들을 모두 제거해야만 승자로 거듭날 수 있다. 만만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수연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시작부터 힘드네. 이것도 능력인가.’

그때, 막 다 씻고 나온 미영이 뽀송한 얼굴로 나온다.

“후우! 시원해. 앗! 드라마 시작했네.”

그런 그녀를 순간 힐끗 본 소녀들.

유리가 갑자기 자리에 일어나면서 미영에게 손가락질을 한다.

“아앗! 그거 내 수건이잖아.”

“어어? 어라. 그러네. 미안!”

자신의 수건을 분간하지 못하는 어벙함을 보이는 미영.

수연은 그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평가를 살짝 수정하였다.

‘그래도 미영이가 제일 만만할지도.’


창현과 수연의 만남은 별다를 것 없는 평범한 만남이었다.

아침에 만나서 자신이 일본에 간다는 내용의 대화와 싸인이 담긴 CD를 전달하는 것, 그리고 안부를 묻는 것과 간단한 점심식사였다.

주말이 끝나고 월요일이 되자 창현을 비롯한 라샤는 일본으로 떠나게 되었다.

일행에는 석규도 함께하고 있었는데, 영세 규모를 벗어났다고 하나 아직 외부로 뻗어나기에는 AA엔터테인먼트의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그래서 석규가 직접 나서서 영업망을 확장하려는 속셈이었다. 어차피 라샤가 국내 활동을 접은 이상 AA엔터테인먼트가 할 일이라고는 현의 앨범 판매뿐이었다.

현재 일본에서도 현의 앨범 판매는 순풍 타는 배처럼 꾸준한 판매고를 이루고 있었다. 국내에서 50만장 돌파하는 기염을 토했다면 일본에서는 20만장 돌파라는 기염을 토해낸 것이다. 한국 가수로서 놀라운 성과였고, 하위권이긴 하지만 오리곤 차트에 이름을 올리는 영광 또한 얻었다. 이 추세라면 무난하게 중위권에서 상위권까지 넘볼 수 있을 거란 전망이었다.

하지만 일본의 앨범 시장은 그 시작이라 불릴 정도로 방대한 규모의 시장을 가지고 있다.

캐릭터를 이용한 각종 부가 산업이 일찍이 발달한 일본은 한 번 인기를 얻으면 그야 말로 노다지라도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시장이 잘 발달되어 있다.

가수 현이 신비주의 컨셉으로 인하여 그러한 인기몰이를 하지 못하지만 라샤는 다르다.

올해 중반기를 제패했다고 과언이 아닌 라샤의 멤버는 한국을 넘어 일본, 중국을 비롯한 동남아시아에 뻗쳐 있을 정도였으며, 알게 모르게 해외에서도 수많은 팬층을 형성하고 있었다.

라샤의 일본 진출 선언에 언론에서 많은 관심을 가졌다.

한국을 제패한 라샤의 일본 진출!

하지만 일본 시장은 한국보다 더욱 넓고 방대하였다.

한국에서의 인기가 일본에서도 통한다는 보장이 없을뿐더러, 이웃나라지만 국민성이나 선호하는 것들이 달랐기에 실력도 실력이지만 운도 상당히 필요하다.

언론에서는 라샤의 일본 진출 성공여부를 놓고 여러 추측성 기사를 내놓았다. 현재 한국의 많은 가수들이 일본 진출을 시도하고 있는 지금, 라샤의 성공여부는 또 하나의 분수령이 될 수 있다는 걸 짐작하고 있던 것이다.

그저 뭉텅그리며 적어놓은 기사도 있지만 제법 분석적으로 내놓은 기사도 있었다.

그들이 내놓은 분석 중 하나가 바로 라샤의 성공적인 일본 진출이다.

라샤는 데뷔 전부터 비주얼과 가창력, 춤 실력을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면서 네티즌들의 눈길을 끌었다.

그러나 이것은 연습생들도 상당히 갖추고 있는 것으로, 이것만으로 인기를 얻으며 연예계에 진입하는 건 힘들다.

여기서부터 회사의 역량이 중요하다.

어떻게 마게팅을 하느냐에 따라 성공적인 진입을 하느냐, 아니면 언더 그라운드를 밟고 올라가느냐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AA엔터테인먼트는 비록 영세 규모의 기획사였지만 사장 강석규는 유능했다. 그는 라샤의 성공적인 진입을 위하여 회사에서 동원할 수 있는 것들을 모두 동원하였다.

하나는 현의 작곡 능력이다.

베일에 가려져 있는 현은 신인이지만 대중을 사로잡는 작곡 능력을 가지고 있다. 현이 의도한 것인지 석규가 의도한 것인지는 몰라도 현의 정체는 알려지지 않았고, 석규는 그것을 이용하여 현의 작곡 능력을 AA엔터테인먼트의 독점으로 만들었다. 일각에서는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 작곡가를 등쳐먹는 게 아닌가 하고 비난이 있었지만 AA엔터테인먼트에서 계약서를 공개함으로써 그러한 말들을 단번에 억눌렀다.

현의 첫 앨범 <Go&Stop>은 이미 많은 사람들의 팬층을 두고 있었기에 그가 라샤의 곡에 참여한다는 소문은 팬들의 관심을 사기에 충분하였다. 현의 곡을 라샤가 어떻게 소화할지 기대되는 부분이었던 것이다.

두 번째는 현의 피처링이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라샤의 타이틀 곡인 <Yesterday>는 현이 피처링을 하게 되었다. 그것을 석규는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방송사와 타협을 이끌어내고, 라샤의 데뷔 무대를 폭발적인 관심 속에서 성공적으로 치러낸다. 현의 존재감으로 라샤가 묻혔느니 뭐니 하는 말이 있지만 현으로 인하여 모인 관심을 그대로 라샤가 소화시켰으니 이는 결코 묻힌 게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언론에서 AA엔터테인먼트가 라샤의 일본 진출을 자신있게 선언했다고 여기는 것이 바로 이 두 가지 패를 일본에서도 그대로 적용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아직 라샤는 적은 수의 팬층을 가지고 있지만 일본에서 가수 현의 관심은 상당하다. 그의 데뷔 곡은 번역이 되지 않았음에도 일본에서 매니아 층을 형성할 정도였으며, 한국에서 현의 노래를 직접 구입할 정도로 열의를 보이는 팬들도 있었다.

그러던 차에 현의 정규 1집 앨범이 발매되었다.

AA엔터테인먼트에서는 본 궤도에 오른 한국보다는 일본 시장의 영업망을 확충하는데 신경을 썼다.

그러던 차에 사업적 동맹을 맺게 된 것이 일본의 거대 음반사 쟈니스였다.

아무래도 라샤가 여성 그룹이다 보니 석규는 일본 톱 여가수들이 소속되어 있는 AVEX를 염두에 두었으나 그곳은 이미 SM과 사업적 제휴를 맺고 있었다.

그 규모 면에서는 비교가 안 되었지만 훗날 기획사가 성장하게 되면 SM과 경쟁을 벌여야 한다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쟈니스는 일본 거대 기획사로서 AVEX가 일본 톱 여가수들이 소속된 곳이라면 쟈니스는 일본 톱 남자 아이돌이 소속된 곳이라 할 수 있다.

정상급 남자 아이돌들이 소속된 탓에 이제는 분위기의 변화를 꾀하고자 여성 아이돌 육성에 눈을 돌렸지만 한 번 박힌 이미지는 쇄신하기가 힘들었다. 여성 아이돌은 모두 AVEX로 향하고 있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쟈니스의 눈에 들어온 것이 대한민국을 초토화시킨 걸 그룹 라샤였고, 현이라는 불세출 작곡가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그곳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AA엔터테인먼트와 사업적 제휴를 맺게된 것이다.

석규가 일본으로 향하는 것도 그동안 라샤와 현의 앨범 발매로 바빴기에 제대로 된 사업적 이야기를 나누지 못하였기에 이번 기회를 빌어 일본으로 간 것이다.

쟈니스는 라샤뿐만 아니라 현의 존재에 대해서도 관심을 표하였다.

이미 기라성 같은 남자 가수들을 보유한 쟈니스지만 회사 규모가 방대하고 인재들이 많은 만큼 좋은 곡에 대한 욕심이 많다. 쟈니스가 판단하기에 현의 멜로디는 일본에서도 충분히 먹힐 만한 시장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 대해 석규는 내년까지 기다려달라는 말을 하였고, 현에 대한 계약 건은 아직 보류된 상태였다. AA엔터테인먼트에서는 하나의 패를 움켜쥔 셈이다.

일본에 도착하고, 창현과 라샤는 쟈니스에서 잡아준 호텔에서 편히 쉴 수 있었다.

석규는 여독을 풀 겨를도 없이 곧장 차를 타고 약속장소로 향해야 했다. 저녁식사 약속이 있었다.

택시를 타고 도착한 곳은 고급 일식집이었다.

예약을 확인하고 예약실로 들어선 석규는 약 십 분여를 기다린 후, 육십대 후반의 노인을 맞이하게 되었다.

석규는 능숙하지 않지만 어색하지 않은 일본어로 노인을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회장님.”

공손하게 인사를 하는 석규의 모습에 노인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받았다.

“허, 한국에서 폭풍같이 들고 일어난 기획사 사장답지 않군. 앉게나.”

“예.”

석규와 노인이 자리에 앉았다.

노인은 종업원을 불러 몇 가지를 주문한 뒤 석규를 보며 입을 열었다.

“이곳의 음식은 제법 담백해서 다른 나라 사람들의 입맛에 거부감이 없지. 아, 초면인데 내가 말을 놓아서 실례가 되나?”

석규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한국에서는 연배가 높으신 분이 곧잘 말을 놓으십니다. 물론 사람에 따라 기분 나빠하는 사람이 있지만 전 아니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노인의 얼굴에 미소가 맺혔다.

“세세한 걸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 그것은 좋군. 일단 자기소개를 하게나. 난 쟈니 키타카와라고 하네. 쟈니스를 맡고 있는 늙은이지.”

자기소개를 하는 노인. 하지만 그 정체는 범상치 않은 것이었다. 바로 일본의 기둥이 되는 거대 기획사 쟈니스의 회장인 쟈니 키타카와였던 것이다.

석규도 침착하게 자기소개를 하였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AA엔터테인먼트의 사장 강석규입니다.”

“요즘 익히 들었다네. AA엔터테인먼트… 라샤를 키워냈다면서? 한국을 초토화시켰다는 이야기는 종종 전해지곤 한다네.”

“과분하지만 뛰어난 아이들입니다. 그리고 이번 기회를 통하여 더욱 넓은 시장을 경험하게 해주고 싶어서 이렇게 쟈니 회장님을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우리로서는 사양할 일이 없다네. 내가 보기에 라샤는 이미 완성된 그룹이거든. 아마 일본에서도 충분히 성공할 게야.”

빈 말이 아니었다. 허허롭게 웃고 있지만 쟈니는 누구보다 냉철한 사업가였다. 그가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은 라샤가 충분히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자신이 키운 아이돌이 인정받는다는 건 좋은 일이다.

석규가 미소를 띤 얼굴로 답했다.

“감사합니다.”

“라샤가 성공한다면 우리도 충분히 발판을 마련할 수 있을 테니 마냥 고마워 할 것은 없네. 이것은 어디까지나 사업이니까. 우리에게도 도움이 되고, 상대방에게도 도움이 되면 다음에는 더욱 좋은 얼굴로 사업적 제휴를 맺을 수 있지 않은가?”

수십 년 동안 쌓아온 사업의 연륜이 이러한 것일까.

쟈니는 단기적인 시야로 사람을 보지 않았다. 마치 대국에서 몇 수를 내다보는 국수처럼 확실하게 앞날을 내다보고 사람을 대할 줄 알았다.

석규는 그러한 쟈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저 또한 부족하지만 양측이 만족하는 계약을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쟈니 회장님을 택한 게 틀린 선택이 아니란 걸 알게 되었습니다. 같은 사업가로서 존경스럽습니다.”

입에 발린 말이 아닌 진심이 담긴 말이었다.

수십 년 동안 쌓아온 자신의 세월이 인정받는 느낌이었다.

쟈니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맺혔다.

“허허, 고맙네. 내 여러 사업가를 대했지만 자네같이 마음에 드는 사람은 드물군. 라샤는 이미 한국에서 대형 스타가 되었으니 그에 준하는 조건으로 계약을 하겠네.”

“예?”

쟈니의 말에 석규가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짓는다. 그의 말대로 라샤가 한국에서 대형 스타로 올라설 초석을 닦긴 했지만 일본과는 비교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보다 월등히 시장이 발달한 일본의 대형 스타는 한국에 비하여 몇 배에서 많게는 수십 배에 달하는 금액의 차이를 보인다.

라샤가 한국에서 성공적인 인기 몰이를 했다고 하나 일본에서는 신인보다 조금 더 나은 정도에 불과한데 그 정도 대우를 해준다니…….

석규의 놀라움을 읽었는지 쟈니가 설명해준다.

“라샤는 좋든 아니든 우리 회사를 대표하는 여성 아이돌로 매김할 것이네. 그렇게 되면 훗날 그녀들의 계약조건에 대해서도 말이 오가겠지. 우리 쟈니스는 일본에서도 손꼽히는 기획사인 만큼 돈 문제가지고 구설수에 휘말리는 것은 싫네. 게다가 내 눈에 라샤는 일본에서도 성공할 재목이야. 그저 조금 과한 투자로 알면 될 걸세.”

라샤를 첫 여성 아이돌 그룹으로서 좋게 선례를 남겨 회사의 이미지 상승을 꾀하겠다는 이야기였다. 이것은 쟈니스에게도 라샤에게도 손해될 것 없는 이야기였다.

석규로서는 거절할 리 없었다.

“좋군요. 솔직히 제가 생각한 것보다 좋아서 놀랐습니다.”

“대신 유명해지기 위해서는 음악도 중요하지만 여러 활동도 부지런히 시킬 것이라네. 물론 AA엔터테인먼트 계약처럼 수면시간은 보장하고 지속적인 건강검진은 할 것이네. 그녀들에게 한국과 비슷한 스케줄을 소화해달라고 하면 될 거네.”

그것은 도리어 라샤가 바라는 것이었다. 칭찬보다 악플이 무섭지만 악플보다 무서운 것은 무관심이었으니까. 인기몰이를 못하여 빈둥빈둥 노는 것보다 꾸준한 활동을 하는 것이 그녀들에게 있어 더욱 나을 것이다.

석규는 좋아할 라샤의 모습을 떠올리며 미소지었다.

“도리어 좋아할 것 같습니다. 쟈니 회장님의 호의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쟈니는 그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자, 이것으로 라샤에 대한 사업적 이야기는 끝이 났군. 이제 가수 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봄세.”

‘이게 진짜 목적이었나?’

석규는 본능적으로 쟈니가 이걸 원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나쁠 것 없다는 생각을 하였다.

어차피 현도 내년이면 모습을 드러낼 것이고 공식적으로 활동할 것이고, 국내에서만이 아닌 일본에서의 활동도 하게 될 것임이 분명했다. 이 기회에 확실하게 이야기를 해놓으면 이익이 되었으면 되었지 결코 손해는 보지 않을 것이다.

짧은 시간에 여러 계산을 마친 석규가 말했다.

“말씀하십시오.”

“가수 현이 아마 십대라고 했지? 한국은 지금 방학 시즌이니… 가능하겠군. 한 아이의 작곡과 프로듀싱을 맡아주었으면 하네.”

석규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작곡과 프로듀싱을요? 하지만 쟈니스에도 유능한 작곡가와 프로듀서가 존재하지 않습니까?”

쟈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대 기획사인 만큼 초일류 작곡가와 초일류 프로듀서가 존재하였다.

하지만 이 경우는 조금 다르다.

“그거야 그렇지. 하지만 이 아이의 경우는 조금 특이하다네. 여러 작곡가들과 프로듀서들이 힘써봤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지. 그러던 차에 현이라는 가수가 작곡과 프로듀싱에 능하다는 걸 알았고, 작은 희망을 걸어보는 검세.”

석규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창현은 일본에 와 있으니 적어도 물어보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다. 게다가 쟈니의 부탁을 들어주면 더욱 긴밀한 사업적 파트너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확신은 못하겠지만 일단 무슨 사연인지 전달은 해보겠습니다.”

쟈니도 그럴 줄 알았는지 흐릿한 미소를 지으며 CD한장을 꺼내들며 석규에게 건넸다.

석규가 CD를 받아들자 쟈니가 말했다.

“그걸 현에게 전해주고 제안을 해보게. 내 예상대로… 아니, 현이 정말 소문대로의 실력자라면 그 CD를 듣고 분명 반응이 있을 걸세. 대답은 그 후에 들으면 되겠군. 만약 CD를 듣고 난 후에 못하겠다고 하면 더 이상 뭐라고 하지 않겠네.”

CD를 갈무리 하며 석규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근시일 내에 전달한 뒤 답을 하겠습니다.”

쟈니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맺힌다.

“허허, 고맙네. 자, 그럼 사업적 이야기도 일단락이 되었으니 저녁을 들도록 하지. 술을 할 줄 아는가?”

“주량이 많지는 않지만 분위기를 즐기는 편입니다.”

석규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쟈니의 입가에 만족의 미소가 맺힌다.

“많이 마시는 사람은 많아도 분위기를 즐기는 사람은 드물지. 오늘 즐겨봄세.”

“감사합니다.”

쟈니가 따라주는 술을 받으며 석규는 천천히 술을 마시기 시작하였고, 적당히 취기가 올라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석규는 성공적인 일본 진입 사업을 마칠 수 있었다.


쟈니와 흡족한 만남을 가진 석규는 늦은 새벽에 돌아와 푹 쉰 뒤 다음날 창현을 찾았다.

석규와 창현은 같은 방이었지만 호텔이 투 룸 형식이었기에 각방에 화장실이 있고 TV가 있었다.

그래서 석규가 온 줄 모르고 이른 아침에 일어나 명상을 한 뒤 씻고 TV를 보던 창현은 석규가 자신을 찾자 놀란 표정을 짓는다.

“어라? 오셨어요? 전 밤새 나가계실 줄 알았는데.”

석규는 창현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정말 효자 아들이었다. 창현이 없었다면 지금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을지…….

아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흐뭇한 석규였다.

“이야기가 잘 돼서 그럴 필요가 없더구나.”

“그래요? 잘됐네요. 쟈니스 회장의 성격이 독특하다고 해서 걱정했는데 말이죠.”

“만나보니 괜찮더구나. 사업을 할 줄 아는 분이기도 했고.”

석규의 칭찬에 창현의 눈에 이채가 감돈다.

“아버지가 그렇게 칭찬할 정도라면 대단한 사람인가 보네요.”

“그래. 라샤가 충분히 일본에서 성공할 재목이라고 하더구나.”

창현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대한민국을 제패한 라샤가 아니던가! 비록 일본 시장이 한국보다 더 방대하다지만 바로 옆 국가인 한국을 제패한 라샤의 인기는 충분히 일본에서도 먹힐 수 있다.

“아버지가 수 년간 노력한 결실이잖아요. 라샤 누나들이라면 충분히 일본에서도 먹힐 테고요.”

“그래. 그 아이들이라면 잘 해내겠지.”

고개를 끄덕인 석규가 창현을 바라보았다. 어제 쟈니와 이야기 나누었던 부분을 처리해야 한다.

“그러고 보니 너에게 전해줄 물건이 있다. 쟈니 회장님의 부탁이기도 하고.”

창현의 표정이 조금 심각해진다. 쟈니스 같은 거대 기획사를 이끄는 회장의 부탁이라니. 부담감이 전해져온다.

“그래요? 중요한 건가요?”

“음! 중요하다고 할 수 있지. 사업적 제휴니까.”

그에 창현이 시계를 보고는 어색하게 말한다.

“5분 후에 라샤 누나들하고 아침 먹기로 했거든요. 아버지가 아침에 오실 줄 알고 미리 약속을 잡아놨는데…….”

쟈니 회장이 무슨 부탁을 했는지 궁금했지만 지금 당장 중요한 건 라샤와의 약속이었다.

석규는 창현의 말에 놀란 표정을 짓는다.

“이런! 빨리 준비할 테니 나갈 준비 해놓거라. 어차피 이야기는 라샤 애들이 들어도 상관없으니.”

“알겠어요. 전 준비 다 했으니 아버지만 하시면 되요.”

“그래.”

그 말과 함께 화장실로 들어가는 석규.

창현이 그 모습을 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아무래도 늦겠군.


결국 5분 정도 늦고야 말았다.

별로 기다리지도 않았건만 마치 몇 시간 기다린 것마냥 창현을 구박하는 라샤.

아버지 때문이라고 궁시렁거려봤지만 그녀들에게 있어 석규는 하늘같은 사장님이었기에 결국 만만한 창현만 라샤에게 된통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대로 아침을 먹으러 가려고 했지만 뜻하지 않은 일로 브레이크가 걸렸다.

바로 호텔에서 라샤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던 것이다.

상당수가 한국에서 온 사람들이고, 일본 사람들도 상당수 라샤를 알아보고 있었다.

한국에서도 몇 번 해보지 않은 싸인회를 졸지에 하게 된 라샤는 근 한 시간 동안 붙잡혀서 시달린 뒤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일본에서 전혀 체감하지 못했는데 팬들이 알아봐주자 그제야 자신들의 인기를 실감한 라샤는 다시 방으로 돌아가 간단한 모자로 얼굴을 가리고 호텔을 나섰다.

일본에 왔으니 초밥을 먹어줘야 한다면서 제법 큰 초밥집으로 들어선 라샤와 창현, 석규.

초밥을 먹으면서 석규가 라샤에게 쟈니와 이야기했던 부분을 들려준다.

대형 스타에 준하는 계약조건이란 말에 환호하는 라샤 멤버들. 보는 창현도 절로 기분이 흡족해졌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식사가 다 끝나갈 무렵, 석규가 창현에게 말을 꺼냈다.

“창현아, 아까 했던 말 말이다.”

창현은 성게 초밥을 먹고 있다. 비싼 곳이라 그런지 입안에 넣으면 살살 녹는다.

우물우물 초밥을 삼킨 창현이 되묻는다.

“아까 했던 말이요? 어떤……?”

“쟈니 회장님의 부탁 말이다.”

“아, 그…….”

쟈니 회장의 부탁이란 말에 창현은 물론 라샤 멤버들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석규를 바라본다.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석규는 쟈니가 했던 부탁을 창현에게 말한다.

“어제 쟈니 회장님이 말하시더구나. 작곡가이자 프로듀서인 현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한 가수에게 곡을 달라고 하더구나.”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쟈니 회장이 자신에게 할 부탁이라면 이것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직접 들으니 기분이 조금 상할 수밖에 없다.

창현의 눈썹이 꿈틀했다.

“저의 도움을요? 하지만 전 이곳에 일본어 회화가 능숙해지기 위해 온 건데요?”

“나도 자세한 것은 모르다. 그 말을 들으면서 이걸 건네받았을 뿐이지.”

그러면서 석규가 쟈니에게 받은 CD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창현에게 건넸다.

“쟈니 회장이 말하길 이 CD를 들어보고 답을 달라고 하더구나. 듣고 난 뒤에 거절하면 상관하지 않겠다고 하더군.”

“그래요?”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한 것일까.

창현은 관심이 동하는 표정으로 CD를 받아든다. 거절해도 상관없다는 말을 들었으니 우선 이 CD가 무엇인지 확인해보고 답을 해도 늦지 않으리라.

그렇게 식사가 끝나고 호텔로 향한 창현은 호텔 내에 있는 컴퓨터를 켰다.

쟈니 회장이 무엇을 건넸는지 궁금했던 라샤 멤버들도 창현을 따라왔고, 석규 또한 무엇 때문에 쟈니 회장이 부탁했는지 궁금하여 모니터에 시선을 주었다.

CD를 넣고 실행을 시키자 나온 것은 하나의 동영상이었다.

그것은 한 소녀가 노래를 부르는 동영상이었다.

갓 고등학생일 법한 나이랄까? 창현보다 두세 살 정도 더 많아 보이는 소녀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소녀는 청순가련한 외모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보호 본능을 일으키는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녀의 음성은 맑고 아름다웠다.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노래의 멜로디를 스며들게 하는 강렬한 마력을 담은 목소리였다.

석규와 라샤는 절로 소녀의 노래에 빠져든다. 그리고 노래를 들으면 들을수록 창현의 표정이 굳어간다.

4분여간 이어진 노래는 끝을 맺었고, 동영상 또한 끝났다.

굳은 표정을 유지하며 창현이 석규에게 물었다.

“아버지가 듣기에는 어땠어요, 이 노래?”

석규가 노래의 여운이 묻어나오는 얼굴로 평가했다.

“음! 어린 나이인데 정말 대단하구나. 이 정도면 일본에서도 능히 탑 클래스에 들어갈 만한 노래 실력이야. 하지만…….”

“하지만?”

“뭐랄까, 더없이 완벽하긴 한데 약간 위화감이 느껴지는구나.”

그 말에 라샤도 노래의 여운이 젖어있다가 답한다.

“저도 그렇게 느꼈어요.”

“저도 묘하게 그런 느낌이 들더라고요.”

“표현할 수 없는 위화감이랄까?”

“역시.”

각자의 평가를 들어본 창현이 고개를 끄덕인다.

왜 쟈니 회장이 자신에게 부탁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창현의 굳은 표정이 풀리며 입가에 미소가 맺힌다.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날 청했지만 십대에 불과한 나에게 부탁할 정도라니. 과연 보통은 아니군.’

쟈니 회장은 자신에게 얼마의 기대를 걸지 않았을 것이다. 못 먹는 감 한 번 찔러보자는 식으로 떠봤을 테지.

하지만 창현은 쟈니 회장의 생각보다 훨씬 유능했다. 그는 쟈니 회장이 무엇을 염두에 두고 창현에게 부탁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의도했건 안했건 쟈니 회장은 인물을 제대로 고른 것이다.

창현이 석규를 보며 말했다.

“아버지! 쟈니 회장에게 말해주세요. 그 제안 수락하겠다고.”

창현의 입가에 점차 짙은 미소가 자리하고 있었다.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 창현은 쟈니의 제의를 수락하고 점심시간이 되기 전 라샤와 함께 쟈니스로 향했다. 계약 조건을 어제 합의 봤지만 아직 정식 계약을 한 것이 아니었기에 정식으로 계약을 맺기 위해 쟈니스로 향하는 것이다.

라샤는 쟈니스로 향하면서 일본 연예인들을 볼 수 있다는 것에 한껏 들뜬 듯 했고, 석규는 창현이 계약을 수락함으로써 어떠한 것을 얻어낼 수 있을지 고심하는 듯했다.

그에 반해 창현은 시종일관 담담한 표정이었다.

처음 CD속 소녀의 노래를 듣고 희열에 가까운 표정을 보였지만 지금은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없었다.

석규는 그러한 창현의 모습이 듬직했다. 아직 어린 아들이지만 그가 보고 판단하는 것이 일반인의 범주와 다르다는 걸 알고 있다. 그리고 그가 CD속 소녀에게서 무엇을 보았건 간에 무언가 획기적인 것임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쟈니 회장이 직접 신경 쓸 정도고, 창현이 그것을 파악해냈다면 필시 엄청난 것이 숨어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 궁금하여 석규가 물었지만 창현은 담담한 얼굴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확실하지 않아요. 다만 제가 본 게 쟈니 회장님하고 같을 것 같네요. 그리고 그걸 위해 저에게 제의를 한 것 같고요. 쟈니스에 가서 확인하면 알게 될 거에요.”

무언가 말하기 힘든 비밀인 것 같았기에 석규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어느덧 일행은 쟈니스에 도착하게 되었고, 석규는 전날 쟈니 회장이 발급해준 통행증을 내밀며 어눌하지 않은 일본어로 경비원에게 설명하여 약속이 있음을 알렸다. 그리고 약속이 확인되자 석규를 비롯한 창현과 라샤는 쟈니스로 들어설 수 있었다.

쟈니스는 일본 제일을 다투는 기획사답게 여태까지 보아온 국내 기획사와 비교를 거부하는 엄청난 크기를 자랑하고 있었다.

국내 여러 기획사를 다녀본 석규는 쟈니스의 규모에 혀를 내둘렀다.

‘과연 일본 거대 기획사. 한국과는 비교를 거부하는군.’

건물 크기가 그 기획사의 힘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심리적인 요소에 영향을 끼치는 건 사실이었다. 당장 쟈니스의 규모만 하여도 국내 대형 기획사 두세 곳은 합친 규모였으니 새삼 자신이 얼마나 큰 곳과 사업적 제휴를 맺고, 라샤에게 얼마나 좋은 기회가 찾아왔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회장과 약속이 있다는 말에 안내를 자처한 직원에 의해 미팅 룸으로 들어선 일행은 두 중년인을 만날 수 있었다.

미팅 룸에서 기다리고 있던 두 중년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석규에게 인사를 건넨다.

“기획부장 나카무라 준입니다.”

“영업부장 사나다 료이치입니다.”

두 중년인은 쟈니스의 실세라 할 수 있는 인물들이었다. 그들이 석규를 맞이하는 것으로 보아 쟈니스에서 라샤의 영입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석규는 입가에 미소를 띠우며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AA엔터테인먼트 사장 강석규입니다. 두분의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나카무라 준이라 밝힌 중년인은 머리가 살짝 벗겨진 인물이었는데 눈매가 날카로워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움찔하게 만드는 카리스마가 있었다.

그가 라샤 멤버들과 창현을 힐끗 하더니 입을 연다.

“이분들은……?”

그 물음에 석규가 재빨리 소개를 하였다.

“여기 세 여인이 이번에 계약할 라샤입니다. 그리고 이 아이는 제 아들로서, 오늘 회장님과 직접 약속한 것 때문에 데리고 오게 되었습니다.”

쟈니를 언급하는 석규의 말에 두 사람이 흠칫하고 반응한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여보인다.

사나다 료이치라 밝힌 중년인은 영업을 하는 사람답게 인상이 서글서글하고 항상 웃는 듯한 입매가 호감이 가는 중년인이었다.

그는 라샤 멤버를 하나씩 보면서 칭찬을 하였다.

“그렇군요. 라샤, 한국 중반기를 제패했다고 하여 궁금했는데 하나하나 예쁜 처자들이군요.”

쟈니스의 영업부장이라면 수십 년 동안 전문적인 영업을 해온 사람이다. 그의 말이 빈말일지 아닐지 몰라도 그의 입에서 나온 칭찬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라샤의 세 멤버가 그런 료이치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그에 놀란 표정을 짓는 료이치.

“호! 일본어를 아는가 보군요? 제 말에 답을 할 정도라면.”

그 말에 석규가 웃으면서 말했다.

“여기 있는 사람 전부 일본어가 가능합니다. 다만 제 아들이 약간 회화가 부족하지요. 나머지 아이들은 데뷔 전부터 일본어를 공부해왔기에 제법 능숙하게 구사할 줄 압니다.”

데뷔 전부터 일본 진출을 염두에 두었다는 말이었지만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자칫 오만하게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료이치는 그런 라샤를 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준비하는 자세부터 마음에 드는군요. 일본에 왔으면 일본어를 쓰고 활동하는 게 여러모로 편하니 말입니다.”

그는 라샤가 일본어를 구사할 줄 아는 것이 무척 마음에 들었나보다.

“일단 기본은 되어있군요. 비주얼도 뛰어나고, 가창력도 괜찮은 걸 확인했으니 우리 쟈니스와 함께 한다면 충분히 일본에 성공적인 진출을 할 수 있을 겁니다.”

준도 일본어를 구사하는 라샤가 마음에 들었는지 한마디 거든다.

라샤는 감사의 인사를 건넸고,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여러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주로 사업적인 이야기였는데, 라샤의 일본 진출에 대한 성공여부를 놓고 하는 대화였다.

당사자들이 있음에도 준과 료이치는 때로는 냉정한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그때마다 라샤는 가슴이 철렁한 표정을 지었지만 두 사람은 능숙한 언변으로 라샤를 쥐었다 풀었다 하며 전반적인 사항을 이야기 하였다.

하지만 계약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오늘 계약건은 그들의 선에서 해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미팅 룸에 들어서는 한 사람이 있었다.

석규와 준, 료이치는 미팅 룸에 들어서는 사람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창현과 라샤도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팅 룸에 들어선 것은 다름 아닌 쟈니였던 것이다.

석규가 쟈니를 보며 인사를 건넸다.

“오셨습니까, 회장님. 간밤엔 편안하셨는지요.”

쟈니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허허,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났으니 어찌 안 편안하겠는가. 그래, 어제 잘 들어갔는가?”

“예, 염려해주신 덕택에 무사히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내가 들어서니 분위기가 경직되었군. 우선 앉게나. 그리고… 이 처자들이 자네가 발굴한 보물 라샤겠지?”

“예. 얘들아 각자 자기소개를 하여라. 이분이 쟈니스의 쟈니 키타카와 회장님이시다.

석규의 소개에 라샤는 다소 경직된 얼굴로 자기소개를 하였다.

“안녕하세요, 라샤의 리더 시린입니다.”

“라샤의 세룬입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라샤의 미란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어여쁜 세 여인의 인사에 쟈니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예쁜 처자들의 인사를 받으니 좋구만. 비주얼도 뛰어나서 일본 연예계에서 무너질 일도 없겠어. 자네들이 보기에는 어떠한가?”

쟈니가 준과 료이치를 보며 묻자 두 사람의 입에서도 긍정적인 말이 흘러나왔다.

그에 쟈니가 고개를 끄덕이며 석규에게 말했다.

“어차피 라샤의 계약에 대해서는 어제 이야기를 끝마치지 않았던가? 바로 계약을 함세.”

쟈니가 눈짓을 하자 준이 석규에게 계약서를 건넨다. 일본어로 된 계약서였다.

석규는 그 계약서를 받고는 꼼꼼하게 읽어들였다.

총 다섯 장에 달하는 계약서를 세세하게 읽어본 석규가 미소를 지었다.

“만족스럽군요. 너희들도 한 번 읽어보아라.”

석규가 시린에게 계약서를 건네려하자, 준이 그걸 말리며 사본 계약서를 나누어준다.

계약서를 꼼꼼하게 읽어본 라샤는 생각보다 후한 조건에 놀란 표정을 짓는다.

그 모습에 석규가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모두 마음에 드나봅니다. 전 바로 계약을 하고 싶군요. 너희는 어떠냐?”

시린이 대표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보다 좋은 조건은 없을 것이다.

“저희도 대만족이에요.”

“바로 계약을 하도록 하지요.”

그 말과 함께 바로 계약서에 싸인을 하였다. 라샤가 정식으로 일본 거대기획사 쟈니스와 계약을 맺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파격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좋은 조건에 계약하게 되자 석규를 비롯한 라샤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쟈니도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쟈니스도 일보를 내딛을 수 있는 계약을 성사했으니 좋군. 마침 점심시간이니 같이 점심식사라도 하지 않겠나?”

그 말에 석규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 아직입니다.”

“응? 뭐가 아직인가?”

쟈니의 물음에 석규가 입가에 띠고 있던 미소를 한층 짙게 그리며 입을 열었다.

“어제 마지막에 하셨던 것에 대해 제가 답을 안하지 않았습니까?”

어제 마지막에 했던 일이라면 CD를 건네주고 현에게 답을 구해달라던 이야기였다.

쟈니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설마 바로 답을 가져왔단 말인가?”

“쟈니 회장님의 부탁이 아닙니까? 바로 보여주고 답을 가지고 왔습니다.”

쟈니의 눈에 기대감이 서린다.

“궁금하군. 어떤 답을 가져왔을지.”

본의 아니게 한껏 궁금증을 끌어올리게 만든 석규가 웃음을 지었다.

“하하! 죄송합니다. 본의 아니게 그렇게 되었군요. 한 가지 묻겠습니다, 회장님. 나카무라 기획부장님과 사나다 영업부장님은 믿을 수 있는 분이지요?”

석규의 물음에 쟈니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 회사에서 가장 중요한 부서를 맡고 있는 만큼 제일 믿음직한 사람들이지.”

그 말에 석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우선 그 답을 들려드리기 전에 한 사람을 소개해야겠군요. 창현아.”

석규가 창현을 부르자 창현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모두의 시선이 창현에게 향한다.

창현은 그 시선을 받으며 자기소개를 한다.

“안녕하십니까? AA엔터테인먼트 강석규 사장님의 아들인 강창현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말끝을 살짝 흐리는 창현.

그의 입가에 미소가 맺힌다.

“한국에서 가수 현이란 예명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만나뵙게되어 반갑습니다.”

“……!”

창현의 소개에 쟈니 회장은 물론 두 부장 또한 놀라움으로 두 눈이 부릅 뜨였다.


창현의 소개가 가져다주는 파급력은 컸다.

가수 현玄

단지 그 이름만으로 현재 일본에서 20만장이 넘는 판매고를 기록한 가수.

한국에서 앨범 출하 한 달만에 50만장을 넘게 판매하였고, 제2의 서태지라 불리며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는 실력파 가수.

그가 십대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얼마나 놀랐던가.

모두가 십대 후반이라 추측하였고, 심지어 쟈니 회장도 그렇게 생각하였다. 솔직히 십대 후반이란 사실도 믿기가 힘들었다. 그 또한 기획사의 회장이고, 한국에서 거대한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는 가수 현의 노래를 직접 들어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십대 후반이란 사실도 믿기가 힘들었는데 지금 모습을 보라. 기껏해야 중학생으로 밖에 보이질 않았다.

산전수전 다 겪은 쟈니도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물었다.

“저, 정말 가수 현이란 말인가? 십대 후반도 아닌 십대 중반에 불과한 자네가?”

믿기지 않는다는 불신감이 가득한 시선.

그 모습에 창현이 웃음을 짓는다. 아무래도 자신의 나이가 어리다보니 이런 반응을 보일 거라고 대충 예상을 하였다.

한차례 목을 가다듬은 창현은 노래를 부른다. 그의 데뷔곡인 <Go&Stop>이다.

대중들에게 강렬한 이미지를 박히게 해준 창현의 폭발적인 가창력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것이었다.

갑자기 창현이 노래를 시작하자 눈을 빛내며 노래를 듣는 쟈니와 두 부장. 석규와 라샤도 흥미로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제부터 고음이다.

현인지 판가름 할 수 있는 파트.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창현이 서서히 음을 올리기 시작한다.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고음.

반주가 없지만 듣는 사람의 막힌 가슴을 뻥 뚫어내는 힘을 가지고 있다.

듣는 사람들의 눈이 모두 휘둥그레진다.

끝없이 올라가는 창현의 고음은 듣는 사람에게 경외감을 심어주기에 부족하지 않았다.

도대체 어디까지 올라가는 걸까.

사람들의 반응을 힐끗 본 창현이 음을 중도에 끊는다.

그리고 싱긋 미소를 지으며 어눌한 일본어로 입을 연다.

“이 정도로… 부족한가요?”

“…….”

창현의 말에 쟈니는 놀라움이 담긴 시선으로 한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눈앞의 소년은 원석이다. 아니, 이미 최고로 가공된 보석 중의 보석이었다.

저 작은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폭발력.

저 실력 저 자질이면 능히 세계에서 놀 수 있을 것이다.

쟈니의 뇌리에 스친 생각이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한가지 생각만 자리하고 있었다.

반드시 붙잡아야 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다른 곳에 가기 전에 저 소년을 붙잡아놓아야 한다.

누구보다 인재에 대한 욕심이 많은 쟈니였기에 짧은 시간이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창현에 대해 욕심이 생겨나는 걸 느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좋은 이미지를 심어줘야 한다.

쟈니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훌륭한 노래였네. 자네가 가수 현이라는 걸 인정한다네. 아, 혹시 내가 말을 놓는 걸 기분 나쁘게 생각하진 않겠지?”

자신을 인정해준다는 말에 창현이 빙긋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기본적으로 연장자께서 말을 놓는 경우가 있기에 상관없습니다. 말을 놓는 것을 기분 나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지만 전 그러하지 않으니 편안하게 말씀해주세요.”

“허허! 아버지랑 같은 말을 하는군. 알았네. 내 그럼 편안하게 말하지. 우선 자네의 가창력에 경의를 표하는 바일세. 어린 나이에 세계적인 가창력을 보유하고 있구만.”

단순히 창현의 폭발적인 가창력을 듣고서 판단한 것이 아니다. 창현의 음에서 실려나오는 기운이 듣는 이의 마음과 높은 동조율을 보이면서 그의 마음을 뒤흔든 것을 쟈니는 보았던 것이다.

쟈니의 말에 모두의 얼굴에 놀라움이 서린다.

“빈말이라도 감사합니다.”

창현도 예상하지 못한 쟈니의 후한 평가에 놀란 표정을 짓다가 감사의 인사를 표하였다.

“빈 말이 아닐세. 정말 진심으로 하는 말이지. 창현이라고 했나? 일본에서 음반을 내게 되면 반드시 우리 쟈니스와 해주게.”

쟈니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는 지금만큼 AA엔터테인먼트와 제휴를 맺은 게 최고의 선택이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눈앞의 현이라면 훗날 오리곤 차트의 제패를 넘어서 새로운 신화를 쓸 거라 믿어 의심치 않을 정도였으니까.

우선 가수 현이 내년이나 내후년부터 공식 데뷔를 할 거라고 들었기에 쟈니는 당장 계약을 맺고 싶은 욕구를 참아내며 먼저 당면한 일에 대해 물었다.

“그래, 내가 강석규 사장에게 했던 제안을 들었는가? CD도 보았겠지?”

창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CD를 보고 노래를 들어보았습니다. 회장님께서 다이아몬드 원석을 발굴하셨더군요. 하지만 그녀의 노래와 녹음 방식이 조금 아쉬웠습니다.”

창현의 말이 의외였을까?

쟈니의 눈가가 파르르 떨리며 놀라움이 담긴 목소리가 절로 흘러나온다.

“호오…….”

그 반응에 창현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회장님도 그걸 아셨기에 저에게 한 번 제의를 해본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제안을 전 승낙했습니다. 회장님이 발굴하신 원석을 세공하는 일을 제가 맡도록 하겠습니다.”

쟈니의 입장에서 바라는 바였다.

그가 CD로 건넨 동영상 속 소녀의 이름은 아사미 유키라고, 쟈니스가 여가수의 첫 스타트를 끊고자 키워낸 대형 신인이었다.

아사미 유키는 쟈니가 직접 발굴한 인재로서, 그가 그동안 키워낸 가수들과는 비교를 달리할 정도로 뛰어난 음색을 지닌 소녀였다. 잘 세공하면 최고의 보석으로 그 가치를 드높일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재료가 너무 좋으면 그 재료를 다루는 사람의 부족함이 드러나기 마련인가.

소위 초일류 작곡가, 초일류 프로듀서라 불리는 인물들은 아사미 유키의 장점을 끌어내지 못했다. 단지 일부분을 끌어내는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놀라웠지만 처음부터 그녀의 재능을 꿰뚫어보고 있던 쟈니의 입장에서 무척 불만족스러웠다.

그래서 이름 난 작곡가와 프로듀서를 찾았지만 모두 그의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못했다.

그러던 차에 등장한 가수 현.

가수는 물론 작곡가와 프로듀서까지 소화하는 천재적인 그에게 한가닥 기대를 걸었다.

지금, 그 기대가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쟈니는 깨달을 수 있었다.

쟈니는 망설이지 않았다.

“최고의 조건으로 대우해주겠네. 그 아이에게 최고의 곡과 최고의 실력을 이끌어내주게.”

창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제가 원하는 바입니다.”

그리하여 계약을 하게 된 쟈니와 창현.

석규는 쟈니가 제시한 금액을 보고 두 눈을 부릅 뜰 정도였다.

하지만 쟈니는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내 눈에 의하면 아사미는 이것의 수십 배 몫을 할 아이라네. 그걸 위한 투자라고 보면 되겠지.”

창현과 계약을 한 쟈니는 그것만으로 성에 차지 않는지 또 다른 제의를 해왔다.

“라샤와 같이 계약을 하지 않겠는가? 이 역시 최고의 대우로 해줌세.”

그러나 창현은 급할 것이 없는 몸이다. 지금 팔리고 있는 앨범의 판매숫자가 높아질수록 창현의 몸값은 수직상승을 이룰 터.

무엇보다 일본 활동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기에 창현은 정중히 거절하였다.

쟈니는 무척 아쉬워했지만 창현에게 더 권하지 못했다. 그의 의지가 확고함을 알아차린 것이다.

성공리에 계약을 끝마친 라샤는 곧장 일본 활동을 위한 준비 기간에 접어들었고, 창현은 곧장 아사미 유키와 만남을 가질 수 있었다.

최고의 원석과 최고의 세공사와의 만남.

쟈니는 이 둘의 만남이 어떠한 여파를 일으킬지 궁금하여 밤잠이 달아날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예상답게 아사미 유키란 이름은 일본의 거대한 폭풍이 되어 휩쓸 준비를 하기 시작한다.




제12장 방학이 끝나고




라샤의 일본 진출 대성공.

방학이 거의 끝날 무렵 한국으로 돌아온 창현이 본 연예계 뉴스였다.

언론사에서는 라샤의 일본 진출 성공을 두고 한국 출신 스타들이 일본 시장에 좀 더 폭넓게 진출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다루고 있었다.

언론사에서는 하나같이 라샤가 일본 거대 기획사 쟈니스와 사업적 제휴를 맺은 것에 대해 놀라움을 표하고 있다.

일본 진출로가 한국에서 알아주는 거대 기획사 SM에 비하여 부족하지 않게 된 셈이다.

특히 쟈니스가 지원하는 라샤는 왜 거대기획사를 등에 업은 가수가 대단한지 알려주고 있다.

소속사 가수들을 동원한 적극적인 홍보와 기획사의 적극적인 마게팅. 그리고 혹독한 연습으로 인한 한단계 실력 업그레이드가 된 라샤는 일본 데뷔 무대에서부터 거대한 폭풍을 일으켰다.

한국에서 단지 현의 이름을 등에 업었다면 라샤는 일본 최고의 기획사 쟈니스의 기라성 같은 최고의 남성 아이돌의 이름을 등에 업은 것이다. 그리고 뛰어난 비주얼과 실력, 좋은 곡으로 무장한 라샤는 일본에서 큰 호응을 얻으며 정상을 향해 치고 올라갔다.

라샤의 앨범이 첫 출하량이 30만장인 걸 감안하면 쟈니스에서 얼마나 그녀들을 밀어주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8월초에 발매된 그녀들의 앨범은 벌써 15만장 이상이 판매되었다고 한다. 그 기세에 힘입어 덩달아 현의 이름 또한 유명해져, 일본에서 30만장이 넘는 앨범 판매를 이룩하게 된다. 고공행진의 연속이었다.

일본에서 직접 라샤의 상승세를 보고 온 창현은 연예계에서 보도하는 뉴스를 보면서 웃음을 지었다.

“한국보다 일본에서 더 클 것 같은데. 내가 보기엔.”

이제 중간 규모로 올라선 AA엔터테인먼트와 아무래도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으니 쟈니스가 적극적으로 밀어주는 이상 라샤가 일본에서 자리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렇게 되면 라샤의 이름은 한국보다 일본에서 더욱 강세를 보이게 될 것이다.

어찌 보면 소중히 키워온 아이돌 그룹을 넘기는 것처럼 보이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AA엔터테인먼트와 쟈니스의 계약서에 반드시 명시되길, 라샤는 최소 반년동안은 국내에서 활동을, 3개월은 일본에서 활동한다는 약속이 있었다. 즉, 일본에서 활동하고 한국에 와서 휴식기를 가진다 하여도 한국에서도 최소 활동은 보장받는 셈이었다.

라샤의 이름이 높아질수록 가수 현의 이름도 높아진다. 이미 대중에게 인정받은 가수 현이 라샤의 모든 곡을 작곡했다는 건 알만한 사람이면 다 아는 사실이다.

한국에 돌아오고 곧장 AA엔터테인먼트로 간 창현은 자신의 앨범이 무려 70만장을 돌파했다는 말에 혀를 내둘렀다.

“정말 100만장이 가능할지도.”

석규는 창현이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이 사실을 알려주었는데, 방송사에서 어찌나 현을 출연 시켜달라는지, 평소에 잘 하지도 않는 우는 소리를 계속 할 지경이었다.

그래도 70만장을 돌파했다는 소식은 창현의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 자신이 그만큼 인정받는다는 건 기분 나쁜 소식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한결 어깨가 무거워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많은 사람에게 기대받는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이지만 그만큼 부담감을 가중시키기도 한다. 이 부담감을 이겨내지 못하면 양 어깨가 주저앉고 끝없는 추락만 남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다 보니 창현은 자꾸만 자신의 마음이 흔들리는 걸 느꼈다.

“정말 내 정체를 공개해도 괜찮을 걸까?”

많은 사람이 자신의 정체를 궁금해하며 연일 알아내기 위해 애를 쓰곤 한다.

창현은 그런 대중의 관심을 자신이 만족시키지 못할 것을 염려하였다. 그럴 때 대중들이 느낄 실망은 곧 분노로 변하여 자신에게 향할 것이다.

인기를 먹고 자라는 연예인은 올라서기는 어렵지만 추락은 쉽다. 창현은 자신이 대중의 기대에 부흥하지 못할 것을 걱정하는 한편 그들의 기대를 자신이 양어깨에 짊어지고 갈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

이 점이 걱정된 나머지 창현은 석규에게 조언을 구했다. 자신의 아버지이자 기획사의 사장인 석규라면 자신의 고민을 해소시켜줄 것이라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이 점만큼은 석규도 명확하게 대안을 내놓지 못했다. 그러기에는 현이란 이름이 너무 높아진 것이다. 이런 경우는 앞에도 없고 후에도 없을 것이 확실했기에 석규 또한 창현의 물음에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그가 내놓은 대안은 있었는데, 우선 다른 방면으로 진출하여 먼저 인기를 얻어나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건 창현이 거절했다. 모습을 드러내는 건 자신의 취지와 맞지 않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Bad Boy>에서 얼굴을 제외한 다른 곳은 공개를 했기에 자칫 연관관계가 드러날 수도 있다.

창현이 첫 번째 방법을 거절하자 석규는 다른 방안을 내놓았다.

바로 첫 등장 때 강렬한 임팩트로 인기를 단번에 소화시켜버리는 것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창현의 머리에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하나 있었다. 어느 정도 방법을 찾은 것 같았기에 석규에게 감사의 인사를 표하고 집으로 돌아온 창현의 발걸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오랜만에 게임이나 할까.”

집으로 돌아온 창현은 오랜만에 게임을 할까 싶어 컴퓨터를 키고 스타크래프트를 실행시켰다.

초등학생 때부터 스타크래프트를 즐긴 창현은 한때 프로게이머를 진로에 두고 진지하게 고민할 정도로 몰두한 적이 있는데, 웬만한 준프로 게이머와도 자웅을 겨룰 만한 실력을 지니고 있어 배틀넷의 많은 길드가 그를 초빙하려고 하였다.

한때 DarkSword라고 하면 배틀넷에서 최고수 중 한 사람으로 꼽아줬으니 창현의 실력을 알만했다. 아직도 그 실력이 녹슨 게 아니어서 종종 프로게이머와도 게임을 하곤 한다.

오랜만에 게임에 접속하자 그와 등록된 유저들이 반겨준다.

게임에서 만난 인연은 대부분 가볍지만 그중에서도 거르고 거르다보면 알짜배기 인연은 남게된다. 지금 창현의 아이디에 등록된 친구들이 그러했다.

자신을 반겨주는 형들과 누나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한 창현.

그러던 중 아는 형이 창현에게 말을 걸었다. 배틀넷에서 유명한 길드에 소속된 형이었다.

<From:TTa)SpiriT> : 소드야 지금 게임할 수 있냐?

게임 하려고 들어왔으니 당연히 게임이라면 환영이다.

창현은 곧장 대답했다.

<To:DarkSword> : 네. 지금 게임하려고 들어온 거에요.

그 말에 잘됐다는 듯 바로 답이 날아온다.

<From:TTa)SpiriT> : 그럼 같이 한겜 할래? 우리 길드 내에서 3:3 팀배틀 하려고 하는데 한 명이 부족하거든. 오랜만에 게임하려면 같이 하자고. 너 선봉 세워줄 테니까.

선봉이라면 대환영이었다. 종종 하곤 하는 팀배틀에서 창현은 늘 꼴지인 대장 자리를 맡곤 했으니 말이다.

창현은 반색하며 대답했다.

<To:DarkSword> : 그래주면 좋죠.

<From:TTa)SpiriT> : 그래, 어여 와라. 우리 길드에서 너 실력 보고 싶다는 사람도 있다. 선봉대 선봉으로 붙을 것 같으니 함 해보라고, 흐흐!

<To:DarkSword> : 알았어요. 채널로 가요?

<From:TTa)SpiriT> : 지금 방 파놓은 상태다. 그러니 방으로 들어와. 우리 길드 전용 방제 알지?

종종 게임을 하곤 했기에 그걸 떠올린 창현이 대답했다.

<To:DarkSword> : 알았어요. 들어갑니다.

그렇게 대답한 창현은 곧장 방으로 접속하였고, 접속한 방에는 다섯 명의 유저가 자리하고 있었다.

간단한 인사와 함께 창현은 게임을 하는 제일 윗자리로 갔다. 그리고 주종족인 Protoss를 선택하고 자신의 상대에 대해 물었다.

그랬더니 여자인데 길드 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실력자란다.

이 정도면 충분하고도 넘칠 만큼 재밌게 게임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창현은 오랜만에 전신이 찌릿찌릿해지는 느낌을 받으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상대의 전적을 알아볼겸 /stats 아이디를 쳐보았다.


TTa)SunNy's record :

Normal games: 4276-584-32

Ladder games: 0-0-0


여자인데 전적이 상당했다.

하기야 이 정도니 유명 길드 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거겠지.

여자들도 상당수가 스타를 하곤 하지만 그 중에서 실력자는 드물었다.

창현은 이 써니란 아이디를 가진 유저를 주목했다.

전적이 무려 5천전에 육박한다.

이 정도면 하루에 5게임씩 꾸준히 삼 년 정도를 해줘야 쌓을 수 있는 전적이다.

삼 년 동안 꾸준히 게임을 해왔다면 그 실력은 이미 아마추어 중에서 상위를 달릴 터.

프로게이머도 프로게이머지만 수많은 게임으로 자신만의 플레이 스타일을 창조한 아마추어 고수들의 실력도 결코 만만치 않다.

써니란 유저는 Zerg를 택했다. 아마추어 고수라고 불릴 수준의 저그는 무척 까다롭다. 기본 물량이 받쳐준다는 전제가 깔려있기에 자칫 방심하면 게임이 뒤집히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하수들은 상관없지만 저그는 고수 층에게 있어서는 상당히 까다로운 종족이다.

슬쩍 맵을 보니 맵은 파이썬이다. 그럼 중앙 힘겨루기 양상으로 흘러갈 듯싶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게임이 시작되었다.

창현은 2시 붉은색 프로토스가 걸렸고, 써니란 유저는 8시 노랑색 저그였다.

오랜만에 하여 감을 되찾기 위한 게임이었다.

창현은 처음부터 무리가 가는 전략을 택하기보다는 무난한 정석 테크를 밟아나갔다.

원 게이트를 올린 뒤 꾸준하게 질럿을 뽑으면서 테크트리를 올린다.

그동안 써니의 위치를 파악해낸 창현은 곧장 질럿으로 푸쉬를 보낸다.

2시와 8시라는 지역은 특성상 무척 먼 거리에 속해있기에 원 게이트 빌드로 푸쉬를 오지 않을 거란 생각을 많이 한다. 창현은 그 점을 비집은 것이다.

질럿 한 마리로 드론 두 마리를 잡은 창현은 그 질럿을 컨트롤 하여 끝까지 살려낸다. 초반 드론 두 마리면 타격이 제법 클 뿐만 아니라 질럿을 살려냈다는 점에 있어서 심리적인 우위를 점한 것도 있다.

올 저글링이 올 위험도 있기에 질럿을 배치하고 그 뒤에 프로브를 배치한 뒤 뽑아놓은 드라군으로 오버로드를 처치한다. 그리고 완성된 스타게이트에서 커세어를 뽑으면서 템플러 테크를 완성한다. 주변에 깔린 오버로드를 처리한 뒤 다크 템플러를 뽑아 땡 히드라 혹은 올 저글링 러쉬를 대비하면서 그대로 멀티를 가져간다.

본진 근처에 있는 오버로드를 처리한 커세어는 그대로 써니의 본진을 정찰한다. 보아하니 땡 히드라가 아닌 럴커 체제였다.

이런 경우 본진 근처로 오버로드를 몰래 끌고 와서 럴커 드랍을 시도하는 경우가 있기에 철저하게 순찰을 돌면서 늘어난 게이트 웨이에서 하이템플러와 질럿을 뽑고, 로버틱스를 올려 옵저버 체제를 갖춘다. 그 전에 다크 두 마리를 뽑아 12시와 6시 부근에 패트롤을 시켜놓고 11시와 5시는 커세어로 정찰을 겸한다.

빠른 테크 위주 최소 방어 테크였기에 물량이 터져나오는 시기는 지금부터이다.

어느덧 완성된 럴커는 본진 앞에 박혀들며 조이기를 시작하였고, 창현은 그런 럴커를 침착하게 사이오닉 스톰으로 공격한 뒤 드라군이 마무리를 짓는 형식으로 한다. 옵저버 테크가 빠르게 완성되었기에 조금씩 밀고 나가며 앞으로 전진할 수 있었다.

조금 더 뚫어내면 한 방의 대전투를 벌이기 좋은 진형이 완성된다.

럴커 두 마리를 걷어내려고 막 사이오닉 스톰을 날리려 할 때, 옵저버에 달려드는 스컬지. 빠르게 반응을 했지만 스컬지 속도가 옵저버를 훨씬 상회한 탓에 피하지도 못한다.

결국 다시 지루한 대치를 하기 시작했고, 12시에 도착한 드론을 죽인 창현은 의아함을 느낀다. 분명 제2의 멀티를 가져갈 때가 되었는데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슬쩍 커세어를 움직여서 정찰해보니 미네랄 멀티를 이미 가져갔고, 7시 섬 멀티를 확장 중이었다. 다른 곳 방비가 제법 확실하니 외곽 지형 가스 멀티를 확보하려는 속셈인가보다. 오버로드 속업과 드랍업이 되었으니 대규모 드랍도 방심할 수 없다.

셔틀을 뽑아 1시 섬 멀티를 먹으면서 다시 진출을 시도한다.

드라군과 하이템플러를 앞장 세우고 그 뒤를 질럿이 받치게 한다. 그리고 연이어 사이오닉 스톰을 뿌리며 드라군으로 럴커를 최대한 걸러낸다.

그걸 막기 위해 달려오는 히드라. 창현은 그걸 본 순간 질럿을 앞장 세우며 에너지가 남아도는 하이템플러로 히드라 뒷 부근에 사이오닉 스톰을 날렸다. 이 써니란 유저의 컨트롤이 제법 뛰어나기에 그 반응 속도를 예측하고 시전 한 것이다.

예상대로 하이템플러가 앞으로 나서자 히드라가 산개하는 모습이 보인다. 하지만 아래쪽으로 빠진 질럿이 히드라의 진로를 가로막고 있었고, 사이오닉 스톰이 피하는 부근에 작렬하고 있었다. 위쪽 히드라는 대부분 무사했지만 아래쪽 히드라는 질럿에 의해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어 사이오닉 스톰의 밥이 되었다.

정면으로 싸우면 필패가 되는 상황이었기에 써니는 후퇴를 거듭한다.

중앙을 장악하게 된 창현.

섬멀티가 돌아가고 자원 수급에 한결 숨통이 트이게 되자 미네랄 멀티와 12시 앞마당을 동시에 가져가면서 포지를 3개로 늘려 업그레이드에 박차를 가한다. 그리고 써니의 대병력과 대치를 하면서 속업 된 셔틀로 써니의 멀티를 괴롭혀준다. 정신을 다른데 놓아두게 하고 괴롭히는 이러한 작전은 저그가 무척 싫어한다.

그에 반하여 창현은 멀티마다 게이트 웨이를 지어 하이템플러를 최소 세 마리씩 배치해두었고, 포톤 또한 다섯 개 이상씩 만들어놓았다. 엄청난 병력을 쏟아부어야 함락이 가능하였기에 써니는 감히 창현의 멀티를 공략할 엄두를 내지 못하였고, 창현은 3-2-2업된 강력한 병력으로 써니의 미네랄 멀티를 휩쓴다.

자원이 고갈되어 가는 앞마당과 섬 멀티밖에 남지 않은 써니에 비해 창현은 앞마당과 섬 멀티, 그리고 미네랄 멀티와 12시 앞마당이 활발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열 개까지 늘어난 게이트 웨이는 어느덧 생산을 중지하고 있었다. 대신 스타 게이트가 네 개까지 늘어나고, 플립 비콘을 건설하여 캐리어를 뽑고 있었다.

차마 캐리어가 나오는 꼴을 보기 싫어서일까.

써니는 마지막 일전을 택한 듯했다. 그녀 또한 업그레이드에 충실한 듯 저글링과 히드라가 모두 2-2업이 되어있는 것이 보였다. 병력 규모도 장난이 아니어서 컨트롤에 이상이 발생하면 패배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창현은 정면대결을 택하지 않았다. 보아하니 이 써니란 유저는 정면대결로 인한 힘 싸움이 특기인 듯한데 창현의 전문분야는 이러한 힘 싸움 유저의 병력을 야금야금 갉아먹어 확실한 우위를 점한 뒤 질 수 없는 상황을 만드는 게 특기였다. 일종의 천적이라 할 수 있다.

슬쩍 나타나며 사이오닉 스톰을 날리고 사라지는 창현의 하이템플러는 써니에게 있어 지옥과도 같았다. 특히 병력 보급선을 차단한 뒤 야금야금 병력을 갉아먹자 써니의 병력은 눈에 띄게 줄어갔다.

마침내 소위 어택 땅을 하여도 이길 수 있다는 느낌이 들자, 창현의 병력이 달려들었다.

푸른색 사이오닉 스톰이 허공을 수놓고 질럿과 아콘이 거대한 해일처럼 써니의 병력을 덮쳐간다. 절대 질 수 없는 싸움. 완벽한 승리였다.

그때, 본진에서 빨간 불이 들어오는 게 보였다.

써니가 정면대결을 틈타 저글링을 본진에 드랍한 것이다.

창현은 그걸 보며 피식 웃고는 생산된 질럿과 하이템플러 두 기로 손쉽게 막아낸다. 그리고 남은 병력으로 본진에 총 돌격을 하자, 써니는 GG와 함께 게임을 포기한다.

창현의 승리였다.

오랜만에 느껴지는 짜릿한 손맛에 창현은 축축해진 이마의 땀을 훔쳐냈다.

“만만치가 않네. 길드 내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더니 정말 잘하네. 여성 유저 중에서 그런 물량을 뽑는 사람은 거의 못봤는데… 후우!”

감탄을 하는 창현의 입가에는 미소가 맺혀있었다.

강자와의 게임에서 승리한 이 기분.

결코 나쁘지 않았다.

그 후 창현은 이어진 두 게임을 모두 승리로 장식하였고, 데뷔 문제로 인하여 울적하던 마음을 조금이나마 풀어낼 수 있었다.

역시 게임은 이겨야 제 맛이었다.


“아아아아악!”

숙소를 뒤흔드는 찢어질 듯한 목소리.

저녁 당번이라 밥을 하고 찌개를 끓이던 태연이 놀라서 방으로 들어온다.

“순규야! 왜 그래?”

방안에 들어선 태연은 울상을 짓고 있는 소녀의 모습을 보며 걱정이 담긴 어조로 묻는다.

소녀의 이름은 이순규. 곧 데뷔할 소녀시대의 멤버이자 써니란 예명으로 활동할 예정이다.

태연의 등장에 순규가 울상인 얼굴로 말한다.

“나 게임에서 졌어, 태연아.”

그 말에 태연의 얼굴에 김이 샜다는 표정이 떠오른다.

“하아? 게임이니 당연히 이기고 지고 할 수 있는 거지. 네 팀운이 나빴나 보지.”

같은 방을 쓰고, 순규가 무슨 게임을 하고 있는지 잘 아는 태연은 그녀를 위로해주었다.

태연이 아는 순규는 게임광이지만 그 이름에 걸맞는 실력도 지니고 있다. 그녀가 주로 하는 게임은 한때 국민게임이라 불렸던 스타크래프트다. 태연 또한 어느 정도 스타크래프트에 대한 제반 지식이 있었기에 순규가 얼마나 잘하는지 알고 있다. 그래서 순규가 패한 게 팀플레이에서 팀을 잘못 만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태연의 위로에도 불구하고 순규의 안색은 침울하기 그지없었다.

그녀가 힘없이 고개를 젓는다.

“그게 아니야. 완벽하게 실력으로 졌어. 그것도 완벽하게.”

그 말에 태연이 놀란다.

“허어? 네가 실력에서 완벽하게? 너 무슨 프로게이머랑 게임했어?”

“아니야. 상대는 그냥 유저인데, 프로게이머에 준할 정도로 잘하길래 내가 같은 동맹원한테 한 번 하게 해달라고 했거든. 열다섯 살인데 엄청 잘한다고 해서… 그래서 했는데 아무것도 해보지도 못하고 져버렸어.”

그녀는 자신의 패배에 자존심이 상한 듯 고개를 푹 숙인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태연이 동정의 시선을 보낸다.

게임을 그렇게 많이 하는 것은 아니지만 누구보다 게임을 즐기는 그녀였다. 즐기면서 게임을 해서 그런지 그녀의 실력은 또래에서도 최상위에 속했고, 그녀가 속한 길드에서 그녀보다 잘하는 사람은 모두 그녀보다 나이가 많다.

내심 또래에서, 동갑 대에서 거의 제일 잘한다고 자부를 했는데 의심의 여지가 없이 압도적인 실력 차이로 패배한 것이다.

만약 접전을 벌인 뒤 패배했다면 이런 기분이 들지 않았을 것이다.

제3자의 눈에는 제법 접전을 벌이다가 써니가 패한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조금 보는 눈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당사자라면 그것이 압도적인 실력 차이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순규가 중얼거렸다.

“압도적이었어. 내 타이밍을 빼앗기고, 견제 당하고. 무엇보다 상대는 나의 장점을 모조리 앗아가면서 절대로 질 수 없는 상황을 만들었어. 난 그 장단에 맞춰 춤을 춘 거고. 마치 꼭두각시가 된 느낌이었어.”

다시 그 상황을 떠올려보니 자괴감이 생겨난다.

잘한다 잘한다라고 말은 들었지만 솔직히 그녀는 자신이 질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게임 맵이 자신이 가장 자신 있는 힘겨루기 양상으로 흘러갈 파이썬이었기 때문이다. 종족 상성상 프로토스는 끝없이 흘러나오는 저그에게 약세이기에 물량전을 벌일 수 있는 파이썬은 그녀에게 최고의 맵이나 마찬가지였다.

게임 실력과 파이썬에서의 대 프로토스 전 하나만큼은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을 산산이 부숴버리다니.

태연은 몸을 부들부들 떨다가 진정된 순규를 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괜찮아졌나 보네.”

어느 정도 순규가 안정이 된 듯하자 태연은 다시 식사를 만들기 위해 주방으로 향했다.

방안에 홀로 남은 순규가 두 주먹을 불끈 쥔다.

이런 무력감은 오랜만이다.

해보는 거다. 실력이 안 되면 죽도록 연습을 해서라도 반드시 꺾어주겠다.

“다크 소드! 각오해. 오늘 이 굴욕 반드시 되갚아주겠어.”

즐기기 위해 했던 게임이 어느덧 한 사람을 꺾기 위한 수단이 되어버린 순간이었다.

자리에 앉은 그녀는 다크 소드가 자기 팀을 어떻게 요리하는지 살피기 시작했다. 낱낱이 해부해서 곡소리를 흘리게 해주리라.

그리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창현은 또 하나의 적을 만들고 말았다.


한국으로 돌아온 지 삼 일 후, 개학을 했다.

방학으로 인해 늦게 기상하는 것이 버릇되다보니 등교 시간에 맞추어 일어나는 것은 꽤나 고된 작업이다.

그것은 창현 또한 마찬가지여서, 본래 같으면 일찍 일어난 뒤 머리를 맑게 하기 위해 명상을 해야 하는데 등교 시간 때문에 명상을 거르고 등교를 해야 했다.

“에휴! 갈수록 학교 나오기가 싫네.”

학교에 온 창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여름방학 동안 내내 학교를 나가지 않다가 다시 나가게 되니 무언가 손해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나름 사회 물을 먹어서일까? 솔직히 이제 학교 나오는 시간도 아깝게 느껴졌다.

“그냥 확 지금 데뷔해버려? 그럼 학교에 양해를 구하고 할 수 있을 텐데.”

홧김에 말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생각해봐도 솔직히 이건 아니었다.

다만 내년에 데뷔를 한다는 마음은 상당히 짙어지고 있었다. 쟈니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일본 시장에 상당한 매력을 느꼈고, 무엇보다 낯설게 여겨지던 일본에 있으면서 스스로가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보는 시야가 한결 넓어진 느낌을 받은 탓이다.

생경하지만 무언가 자신의 한계라 불리는 틀을 넓힌 것 같은 느낌.

더 많은 것을 보고 더 많은 것을 깨닫고 싶었기에 창현이 느끼는 충동은 예전과 사뭇 달랐다.

하지만 모든 일을 충동적으로 할 수 없고 가수 현의 이름이 대중의 아이콘이 된 지금 작은 선택 하나도 신중해야 할 필요가 있다.

마음이 갈대 같이 변하는 지금, 내년도에 데뷔하겠다는 말은 일종의 족쇄였다.

그러나 그것도 생각하기 나름. 창현은 순식간에 마음이 변하는 자신의 모습이 웃음을 지었다.

“나도 사춘긴가 뭔가인가 보네. 변덕이 심해지는 걸 보니.”

주변에서 하도 애늙은이 취급을 하는지라 본래 나이를 자각하지 못할 때가 많아서 자각하지 못한 듯하다.

어차피 자신의 데뷔는 이제 자신만의 판단이 필요한 게 아니다. 회사 사장인 석규의 의견도 필요하고, 회사 자체에서의 결정도 필요하다.

자신의 주장을 박탈당한 것처럼 보이겠지만 이런 경우 타인에게 책임감을 떠넘길 수 있기에 무척 편하다.

수업시간이 다가오자 아이들이 하나둘씩 등교하는 모습이 보였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모습을 보니 문득 학급에 자신은 친구가 하나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조금은 서글픈 상황이다.

‘어차피 친구 사귀어봤자 나중에 보증서나 갖고 오겠지. 내 능력만 있으면 사람은 모여들 거야.’

굳이 노력할 필요가 없다. 자세히 생각해보니 친구라면 충분히 있다.

남자가 아닌 여자였지만.

어차피 교실마다 비치된 TV로 교장선생님이 훈화나 할 테니 일교시는 늦게 시작할 게 분명하다.

그럼 시간이 많이 남으니 모처럼 수면이나 보충하려던 창현은 핸드폰이 울리는 걸 느꼈다.

액정을 확인하니 문자가 왔다는 표시였다.

핸드폰을 열어 확인하니 주현의 문자였다.

[창현아, 할 말 있는데 점심시간에 정자로 와줄 수 있어?]

학교에 나오면 매일 점심시간마다 창현은 정자로 향한다. 안오는 건 주현이었지만 못 오는 날은 확인이 불가능하니 이런 문자를 보낸 것이겠지.

‘오랜만에 주현 누나 보겠네.’

방학 이후 본 적 없는 주현의 얼굴을 본다고 생각하니 창현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맺혔다. 그리고 답장을 작성했다.

[네. 저야 상관없죠. 정자에서 만나요.]

급식을 먹고 바로 갈 것이기에 굳이 시간은 정하지 않았다.

답장을 보낸 창현은 그대로 책상에 엎어졌다.


점심시간이 되고 정자로 나간 창현은 주현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도시락을 싸온다고 했었지.

정자로 다가간 창현은 주현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주현 누나. 방학 잘 보냈어요?”

주현은 창현의 인사에 빙긋 미소를 지었다.

“잘 지냈다고 할 수 있겠지? 매일 연습하고 그랬으니까… 일본은 잘 다녀온 거야?”

“그럼요. 일본 가니 좋더라고요. 한국에서 보던 것들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으니… 아참! 저 누나 선물도 사왔어요.”

선물이란 말에 주현의 눈이 빛난다. 창현이 일본에 갈 당시 선물을 사오겠다고 했지만 솔직히 별로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사왔다고 하니 무엇일지 궁금했다.

“선물? 뭔데?”

씨익.

입가에 미소가 맺히는 창현. 그것은 주현의 궁금증을 더욱 부채질하였다.

창현은 주현이 반드시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케로로 스페셜 한정판 피규어에요. 그리고 사은품으로 케로로 캐릭터가 그려진 다섯 종류의 핸드폰 고리도 주더라고요.”

“케로로 한정판……?”

주현의 눈이 묘하게 풀려나간다. 하기야 케로로 광팬에게 그것은 엄청난 가치를 지니고 있지. 창현도 막상 한정판 피규어를 구매하면서 매니아들의 엄청난 욕구를 보고 기가 질릴 정도였다.

그러니 어느 정도 광팬인 주현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창현의 입에 걸린 회심의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

“사느라 고생 많이 했습니다.”

창현의 말에 주현이 갑자기 창현에게 다가오더니 그의 팔을 덥썩 잡는다. 그리고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창현의 손을 맹렬하게 흔든다.

“와! 나 그거 정말 갖고 싶었어. 정말 고마워!”

매니아의 세계는 매니아밖에 이해하지 못한다.

그동안 케로로를 좋아한다는 것을 구실로 언니들에게 얼마나 많은 구박을 받았던가.

심지어 서주현이란 이름을 놔두고 개구리 혹은 케로로란 이름으로 대신 불리기까지 하였다.

그런데 오늘에 와서야 자신의 취향을 이해해주는 사람을 만났으니 주현이 가지는 반가운 마음은 한결 더했다.

창현은 주현의 갑작스러운 기습(?)에 당황하며 입을 열었다.

“하하! 서, 선배? 이 손좀…….”

당황하다 보니 누나의 호칭에서 선배로 바뀌어버렸다.

그러한 것을 알아차릴 사이도 없이 주현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창현의 손을 잡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화들짝 놀라며 손을 놓는다.

“아, 아! 어맛! 미, 미안!”

“하하, 아니에요. 선물은 내일 드릴게요. 아직 집에 있거든요. 아참! 그런데 무슨 일로 절 찾으신 거에요?”

어색해져가는 분위기를 전환하고자 주현에게 용건을 묻는 창현.

그에 주현이 부끄러운 마음에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며 말했다.

“아, 아! 맞다. 할 말이 있었지. 실은…….”

무언가 말을 하려다가 부끄러운 듯 말끝을 흐리는 주현.

그에 창현이 고개를 갸웃하며 묻는다.

“실은?”

창현의 되물음에 주현이 고개를 푹 숙이며 말한다.

“이, 이번 수련회에서 하는 장기자랑에 같이 나가자고. 듀엣 곡으로…….”/

창현은 주현의 말에 놀란 표정을 짓는다.

“엑? 듀엣 곡이요? 저랑요?”

“으응. 저번에 <Yesterday>했을 때 호흡이 잘 맞는 것 같아서…….”

무엇이 그렇게 부끄러운 걸까?

주현은 얼굴을 비롯하여 목덜미까지 붉어져 있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창현이 물었다.

“어떻게 같이 해요? 제가 알기로는 2학년하고 3학년은 가는 곳이 다르다고 들었는데…….”

창현이 알기로는 2학년은 수련회란 이름으로 강원도 설악산 인근으로 가고 3학년은 수학여행이란 이름으로 중국에 가는 걸로 알고 있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듀엣이라는 건지…….

이해하지 못한다는 창현의 얼굴에 주현이 설명해주었다.

“아! 2학년은 모르나? 이번에 중국 사스 문제 때문에 수학여행이 취소됐거든. 그래서 2학년하고 같이 강원도 설악산으로 간다고 하더라고.”

“허어!”

어이가 없음일까. 창현의 입에서 절로 소리가 흘러 나왔다.

참으로 어이가 없다. 수학여행이 불가피하게 취소가 되면 다른 곳을 알아보기 위해 노력을 할 것이지 엄한 2학년들하고 같이 묶어서 보내버리려 하다니.

아마 상당수의 2학년들이 이 소식을 들으면 한숨을 내쉴 것이다. 이름은 수련회지만 사실상 수학여행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3학년이 함께 한다면 당연히 행동 반경이 줄어들 것이고, 결국 자신들 마음대로 활개치지 못하게 될 것이니 꽤나 울상을 지을 것이다.

어차피 그것들은 상관없다.

창현이 특별히 활개치거나 그러한 것도 없을뿐더러 자기 잘났다고 나서는 부류도 아니었기에 굳이 선배들과 충돌할 이유가 없는 탓이다. 뭐, 3학년이 같이 간다면 제법 불편할 법도 하지만 창현은 남의 시선을 딱히 신경 쓰는 타입이 아니다.

창현이 신경 쓰이는 것은 바로 수련회 존재였다.

그가 알기로 수련회는 중간고사가 끝나고 10월 중순에 가는 것으로 안다.

시험이야 원래 신경 쓰지 않지만 그 시기가 되면 일본에서 활동하던 라샤가 귀국하여 본격적인 싱글 앨범을 준비할 때다.

이미 라샤의 전속 작곡가, 프로듀서로서 계약을 한 창현이기에 그 시기가 되면 말 그대로 눈코뜰새 없이 바빠진다. 수련회에 신경 쓸 틈이 없어진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수련회를 굳이 갈 마음을 못 느꼈는데 이런 제의를 받게 되다니.

창현은 문득 궁금한게 떠올라 주현에게 물었다.

“그런데 누나는 왜 수학여행에 가시려는 거에요? 솔직히 전 안 가려고 했거든요. 별로 내키지도 않고 친구도 별로 없고.”

“아, 안간다고?”

그 말에 주현의 얼굴에 눈에 띄게 어두워진다. 창현이 안가려고 했다는 말에 실망을 하는 듯했다.

입술을 지그시 깨문 그녀가 입을 연다.

“내년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면 본격적인 연예인이 되거든. 그렇게 되면 남들이 평범하게 즐길 수 있는 많은 것을 포기하게 돼. 특히 학창시절에 만들 수 있는 수학여행의 추억 같은 건 누구나 갖고 있잖아? 난 그걸 만들고 싶어.”

“추억. 추억이라…….”

주현의 말에서 무언가가 느껴졌기 때문일까.

창현은 주현의 말을 곱씹으며 생각에 잠겨들었다.

그녀의 말대로 연예인이 되면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한다.

소위 아이돌이라 불리는 연예인은 언제나 몸가짐에 신경을 써야 하고 다른 사람들의 우상으로 존재해야만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늘 신비감이 존재하여야 하고 일반인이 누리던 많은 것을 포기해야만 한다. 무엇을 얻으면 무언가 잃게 되는 건 세상의 당연한 이치였다.

주현의 말에 창현은 깨닫는 것이 있었다.

문득 자신은 너무 홀로 활동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창현은 주현의 말처럼 소위 수학여행의 추억이라던가 그런 것이 없다. 음향총서를 얻기 전 방황하고 절망하면서 교우 관계를 싹 틀 수 없었을뿐더러 놀러가는 개념이 강한 수련회에 참석할 메리트를 느끼지 못한 까닭이다.

그런데 주현의 말을 들어보니 문득 생각해보게 된다.

나에게 수련회라는 것에서 얻은 추억이 있던가.

있을 리가 없다. 수련회를 하는 족족 모두 빠져나갔으니까.

‘그럼 난 반쪽자리 학창생활을 보낸 건가?’

굳이 자신이 일 년이란 기간을 잡아두고 평범하게 생활을 하는 것은 평범한 학생으로서의 생활을 보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평범한 학생이라면 마땅히 즐겨야 할 수학여행을 정작 건너 뛰려 하다니. 처음 했던 결심과능 모순되는 행동이 아닐 수 없다.

창현의 머리에 복잡한 상념이 얽혀들어갔다. 어떻게 할지 고민이 되는 탓이다.

그런 창현의 모습을 주현은 조마조마한 시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느끼고 있었다. 지금 창현이 수련회에 참석하느냐 안하느냐를 놓고 고민하고 있는 것을 말이다.

저 생각이 끝나는 순간, 창현은 결정을 내릴 것이다.

주현은 창현이 반드시 수련회에 참석해주었으면 했다.

‘함께 추억을 만들고 싶으니까.’

이것이 주현의 마음이었다.

창현의 교우관계가 원만하지 않은 것처럼 주현도 교우 관계가 그렇게 원만한 게 아니다. 그녀가 SM의 연습생이란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고, 그걸 아는 반 친구들이 알게 모르게 주현에게 벽을 쳐놓고 대하고 있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교에서 주현이 허물없이 지낼 수 있는 것은 창현이 유일했다. 그녀가 수학여행에 참석하는 이유도 마지막이 될 학창시절의 추억을 만들기 위함이지만 2,3학년 합동이란 것을 듣고 창현과 함께 추억을 만들고 싶은 이유가 컸다.

그런 주현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창현은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들어 고민하고 있었다.

얼마나 고민했을까.

결정을 내린 듯 창현이 주현을 바라본다.

주현은 잔뜩 긴장하며 창현과 시선을 마주한다.

창현이 피식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동시에 주현의 표정이 환해진다.

“생각해보니 저도 학창 시절의 추억이란 게 없네요. 누나 말 믿고 참석하겠습니다.”

“잘 생각했어. 나랑 듀엣도 같이 할 거지?”

창현이 고개를 끄덕인다.

“누구 부탁인데요. 당연히 해야죠. 그런데 듀엣 곡을 하려면 연습을 해야 하는데 이건 어떻게 해결하죠?”

주현은 그걸 미처 생각 못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것도 그러네…….”

그러나 그녀의 눈은 빛나고 있었다.

창현이 그녀를 자세히 살폈다면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 이것이 그녀가 유도했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주현은 앙큼하게도 그러한 기색을 숨기고 있었다.

그녀는 짐짓 생각에 잠기는 척하더니 입을 연다.

“이건 어때? 일주일에 한 번 정도씩 만나서 같이 연습하는 거야…….”

아무렇지도 않게, 얼굴색도 변하지 않게 하면서 말했지만 그녀의 가슴은 쿵쿵 뛰고 있었다. 지금 이 말을 위해 창현의 승낙을 구하고 그를 설득한 것이다.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서 연습을 하자는 말이지만 까놓고 보면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서 데이트 하자는 이야기다. 남녀가 만나고, 호감을 가지고 있으니 그게 데이트지 뭐겠는가. 만나다 보면 연습하고, 밥을 먹을 수도 있고. 운 좋으면 같이 영화도 볼 수 있을 테고. 그리고…….

차츰 상상이 진화되자 주현은 재빨리 상상을 멈추고는 창현을 응시한다.

창현은 생각에 잠겨있다.

확실히 주현의 말대로 연습은 필요하다. 아무 연습없이 무대 위에 설 수 없는 노릇 아닌가? 프로로서 그럴 수는 없다. 그렇다고 수련회 가기 직전에 연습하자니 그때는 바빠질 것이라 시간이 빠듯할 것이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창현이 입을 열었다.

“좋은 생각이네요. 그럼 그렇게 하죠. 그런데 누나 시간은 괜찮겠어요?”

창현의 승낙에 주현은 환해지려는 표정을 필사적으로 수습한 채 생각에 잠긴 척하다가 고개를 끄덕인다.

“응. 주말이면 될듯해. 그럼 같이 연습하는 거다?”

“네, 누나 시간이 되면 그렇게 해요.”

“그럼 그렇게 하자.”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는 주현.

그러나 그녀의 속에서는 세상을 다 가진 듯한 환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매주 토요일마다 만나서 연습을 하기로 약속한 창현은 교실로 돌아가는 내내 고개를 갸웃거렸다. 눈치채지는 못했지만 예민한 그의 감각에 걸린 것이 있어서 의아함을 자아냈다.

“왜 그런 거지. 자꾸 뭔가 속은 느낌이 드는데.”

연습이란 말에서부터 모두 주현이 의도한대로 했다는 걸 모르는 걸까.

창현은 뭔가 뒷마무리가 엉성하여 찜찜한 기분을 애써 털어내며 교실로 향했다.


라샤는 순조롭게 일본 연예계에 녹아들었다.

오리콘 차트 위클리 3위에 등록되면서 쟈니스의 파워를 알림과 동시에 한국을 초토화 시킨 신인 걸 그룹 라샤의 존재를 확실하게 일본에 각인시키는데 성공한다. 그에 따라 한국 가수 현의 존재도 한층 부각된다.

가수 현과 라샤의 존재는 이제 서로를 뗄 수 없는 관계와도 같았다. 특히 라샤의 모든 곡이 가수 현이 작곡 작사를 했다는 소문에 그의 앨범도 한층 판매에 박차를 가하게 되어 오리콘 차트 중위권에 입성하게 된다.

일본에 아무 활동 없이 오로지 순수한 음반 판매로 오리콘 차트에 오른 것은 대단한 일이다.

타국에서 발매된 음반이 각양각색의 개성으로 넘쳐나는 일본 시장에서 이만큼 버텨냈다는 것은 그만큼 현의 음악이 뛰어나다는 걸 의미했다.

사람들은 가수 현의 존재를 알기 시작했고, 그의 실력을 인정했다. 음반도 꾸준한 판매를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오리콘 차트 중위권에 입성한 현의 앨범 판매는 순풍을 넘어선 강대한 폭풍을 등에 업게 된다.

바로 쟈니스에서 배출한 여성 가수 아사미 유키의 등장이었다.

아사미 유키는 신인임에도 전 일본 사람들의 집중을 받는 특별한 가수였다. 왜냐하면 일 년 전, 그녀가 부른 노래는 가히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키며 전 일본 열도에서 ‘천상의 목소리’라 칭해지며 엄청난 관심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슨 사정인지 쟈니스에서는 아사미 유키를 곧장 데뷔시키지 않았고, 사람들의 관심이 서서히 옅어지고 잊혀지려 할 때, 라샤의 등장과 함께 강력한 2연타로 등장한 것이다.

일 년이 지났음에도 아사미 유키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았다.

그들은 기대하였다. 지난 일 년 동안 아사미 유키가 얼마나 변했을지. 그리고 기대하였다. 그녀의 노래를. 천상의 목소리라 불리던 그녀의 노래를 말이다.

지난 일년의 공백기답지 않게 그녀는 단 싱글앨범을 들고 데뷔를 하였다. 그에 사람들은 그녀가 일년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가에 대해 궁금하고 걱정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아사미 유키는 지난 일 년 동안 어떠한 일이 있던 것이 아닌, 더 높은 도약을 위해 몸을 웅크리고 있던 것이다.

그녀의 노래 제목은 <のぞみ>(노조미)란 곡으로서 한국어로 희망이란 뜻이다.

맑고 깨끗한 그녀의 목소리와 감미로운 멜로디가 절묘하게 조화되어 듣는 사람의 심금을 울렸다. 그녀의 노래를 들은 사람들은 마음을 치유하는 목소리를 지닌 최고의 여가수라고 치켜 세우면서 앨범 발매 일주일 만에 오리콘 차트 데일리 5연속 1위, 위클리 1위의 기록을 세우고 만다.

상상도 할 수 없는 고공행진을 거듭한 아사미 유키는 한 방송에서 “가수 현은 나에게 희망을 주었고, 새로운 빛을 볼 수 있게 해주었다.” 란 말을 하였고, 일본 사람들은 아사미 유키란 최고의 원석과 현이란 최고의 세공사가 만나 최고의 노래가 탄생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것은 곧 현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고, 뒤늦은 현 열풍이 불면서 엄청난 음반 판매를 이루게 된다. 무명으로서 일본에 아무런 기반도 없이 오리콘 차트 3위까지 차지하는 기염을 토한 것이다. 1위가 아사미 유키, 2위가 라샤, 3위가 현인 걸 감안하면 현과 관련된 가수 둘과 본인이 최상위를 모두 휩쓴 격이 된다.

뒤늦은 현의 관심 상승에 일본 연예 언론에서는 가수 현에 대한 정보에 관심울 기울이기 시작하였고, 그의 뮤직비디오 영상과 한국에서 데뷔 무대를 가졌던 것이 공개되면서 그 열기가 한층 가열되었다.


학기가 시작되고 벌써부터 라샤의 싱글 앨범에 착수한 창현은 일본에서 자신의 위상이 상승하건 말건 그에 상관없이 라샤의 곡에 대해 골몰하고 있었다.

인기가 많은 것은 좋지만 라샤는 데뷔 초부터 너무나 많은 인기를 얻어버렸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이 인기지만 그에 따른 부담감도 만만치않게 적용된다. 바로 전 곡에 눌리지 않는 강력한 임팩트와 향상된 실력을 대중은 요구하기 때문이다.

솔직히 라샤의 정규 1집이 잘된 것은 곡도 곡이지만 현의 이름에 편승한 적절한 석규의 영업과 라샤의 뛰어난 비쥬얼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데뷔 무대에서도 뛰어난 비주얼을 바탕으로 한 강력한 임팩트를 주어서 대중의 관심을 사로잡는데 성공한 것이지, 마냥 곡이 좋아서 성공한 것이 아니었다.

어리지만 음악을 많이 듣고 현재 음악의 흐름을 캐치하는데 뛰어난 창현은 이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고민을 해야만 했다. 어찌 하면 라샤를 성공으로 이끌지, 그리고 대중이 원하는 취향을 만족시킬지 말이다.

라샤의 컨셉은 기본적으로 섹시함이라는 것을 바탕으로 간다.

그러나 여성 아이돌에게 있어 섹시한 컨셉은 가장 마지막애 내세우는 무기였다. 귀엽고 깜찍한 이미지에서 차츰 섹시한 이미지로 바꿔가는 것이 대세라 불리는데 라샤는 처음부터 섹시함이란 컨셉을 내세웠다. 이것까지 고려해야 했기에 창현은 한층 머리가 아파왔다.

“내가 언제부터 이런 고민까지 하게 된 거지? 으으!”

단순한 푸념이다. 입에서는 푸념이 흘러나오고 있지만 창현의 눈은 빛나고 있었다.

어찌보면 라샤는 순수한 창현의 작품과도 같았다. 그녀가 성공하는 것은 곧 자신의 성공이라고 생각 될 만큼 이제 라샤의 행보는 창현과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그래서 창현은 라샤가 잘되길 바랐다.

“섹시함이라. 지금 와서 귀여운 이미지로 돌릴 수는 없고. 어차피 섹시함이라지만 도발적인 분위기는 하지 않았으니까 조금 더 여성스러움을 강조해볼까?”

그 생각까지 미치자 창현의 뇌리에 번뜩이는 것이 있었다.

일종의 깨달음이었다.

그걸 자각한 순간 창현은 수업 중이라는 것도 잊은 채 황급히 사물함으로 달려가 자신의 곡들이 수록된 공책을 꺼내든다. 콘티를 짜려고 공책을 펼쳐놓았는데 순식간에 기발한 소재가 떠오른 것이다.

자신에게 시선이 집중되건 말건 빠르게 무언가를 적는 창현.

그의 입가에는 짙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SM엔터테인먼트 연습실.

연습생의 연습은 무척 고되다.

그러나 데뷔를 앞에 둔 연습생과 평범한 연습생의 연습량은 비교가 되질 않는다.

곧 대중 앞에 선 연예인이 된다는 것 하나만으로 기존의 것과 차원이 다른 압박이 가해진다. 그리고 그것은 연습량의 상승으로 직접 몸으로 체감하게 된다.

오늘도 힘든 연습이 끝났다. 입에서 단내가 나올 정도로 힘든 연습이었다.

연습실 안에는 아홉 소녀가 온몸에 땀을 흘린 채로 바닥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힘든 연습 탓인지 모두가 지친 표정을 짓고 있다.

그 안에서 유독 밝은 표정을 짓고 있는 한 소녀가 있었다. 바로 주현이었다.

오늘은 금요일. 내일이랑 일요일은 그녀들에게 휴식시간이다.

토요일에 창현과 만나기로 한 주현은 비록 몸은 힘들었지만 마음은 즐거웠다.

그런 주현에게 다가서는 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태연이었다.

그녀는 수건으로 식은땀을 훔쳐내며 주현의 앞에 털썩 주저 앉는다.

“뭘 그리 웃고 있어. 뭐 즐거운 일이라도 있는 거야?”

가끔 덜렁대기도 하지만 아홉 소녀의 리더로서 그녀의 관찰력은 무척 뛰어나다.

주현은 뜨끔했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응수한다. 창현을 완벽하게 속여버린 그녀의 연기력은 예전 수연에게 추궁당할 때와는 비교를 거부할 정도로 성장했다.

“네? 아, 아니에요. 그냥요. 연습을 마치면 개운해서 기분이 좋거든요. 그런데 언니, 그렇게 바로 앉으면 엉덩이 커진데요.”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격렬한 운동 이후 바로 앉으면 엉덩이가 커진다는 말이 떠올라 태연에게 충고한다.

그러자 태연은 후다닥 자리에 일어서면서 벽에 몸을 기댄다.

“으, 키도 요즘 안 크는데 그럴 순 없지.”

주현과 태연이 나란히 서니 마치 언니와 여동생 같은 이미지가 풍겼다. 웃긴 건 언니가 바로 주현 같다는 점이다.

묘한 시선으로 자신을 보는 게 느껴졌는지 태연의 고개가 확 돌아간다. 주현이 그 시선을 피하자 태연의 눈이 가늘어졌다.

“너 지금 내가 동생 같다고 생각했지?”

“아, 아니에요. 전 그런 생각 안했어요. 그냥 내일… 아! 그냥 언니가 귀엽다고 생각했어요.”

제법 연기가 늘었지만 그것은 철저한 준비와 여유가 갖추어졌을 때였다. 주현의 연기는 금방 파탄을 드러냈고 하마터면 내일 창현과의 만남을 발설할 뻔했다.

주현은 태연의 표정이 변하는 걸 보고는 벽에서 몸을 떼며 말한다.

“전 그럼 샤워하러 갈게요. 언니도 가요.”

“흠? 아, 그래.”

더 이상 빌미를 잡힐 수 없었기에 주현은 황급히 샤워실로 향한다.

그런 주현의 뒷모습을 태연이 의미심장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뭔가 수상해.”


토요일이 되었다.

고된 연습이 끝난 다음 날이기에 멤버들 중 일찍 일어나는 사람은 거의없다. 모처럼만의 휴식이니 다들 늘어지게 자는 것이다.

주현은 이른 아침에 일어났다.

평소 같으면 부지런한 그녀도 제법 늦잠을 자고 있어 아직 수면에 빠져있을 시간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잠에 빠져있을 시간이 없다. 무엇보다 어제 연습의 피곤이 남아있지 않은 것처럼 그녀의 눈은 빛나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8시를 가리키고 있다.

다른 언니들이 깨지 않도록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난 주현은 그대로 화장실로 간다.

막 화장실 문을 열려고 할 때, 갑자기 문이 확 열린다.

“……!”

화들짝 놀란 주현의 상체가 뒤로 제껴졌다.

그녀는 놀란 눈으로 화장실에서 나오는 소녀에게 말했다.

“노, 놀랐잖아요, 언니.”

“응? 너 보통 같으면 자고 있을 시간 아니야?”

화장실에서 나온 것은 태연이었다.

그녀는 보통 지금 이 시간에 자고 있을 주현이 깨어 있자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세수하고 머리를 감은 듯 촉촉한 피부와 물기를 머금은 머리에서 향긋한 향기가 난다.

그에 주현이 살짝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다가 침착하게 대답했다.

“오늘 약속이 있어서요.”

“흐응, 그래?”

묘한 콧소리를 내며 주현을 힐끔 바라보는 태연.

마치 자신의 속내를 꿰뚫어보는 듯한 그녀의 눈치에 주현이 황급히 말을 돌렸다.

“그런데 언니도 평소 지금 이 시간이면 자고 있잖아요? 일찍 일어나셨네요?”

갑작스러운 질문이었지만 태연의 내공은 주현과 비교를 거부했다.

태연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대답했다.

“오늘 이상하게 일찍 일어나졌어. 잠도 더 안와서 씻은 거야. 화장실 쓴다며? 아참! 주현이 너 수건 잘 분간해라. 유리 수건도 초록색이니까. 괜히 아침부터 시끄럽게 만들지 말고.”

세세하게 챙겨주는 모습을 보면 이럴 때 리더다웠다.

주현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신경 써주셔서 고마워요, 언니.”

자칫 언짢게 들릴 수도 있는 말을 좋게 들어주는 주현의 모습에 태연의 입가에도 미소가 걸린다.

“뭘. 이 정도는 챙겨줘야지. 훗훗!”

그 모습에 주현이 미소를 짓고는 화장실로 들어선다.

화장실 문이 닫히고, 웃고 있던 태연의 표정이 이내 날카롭게 변한다.

이내 그녀의 입가에 다시 미소가 맺힌다.

“서주현. 넌 아직 연기가 어설프다고. 으흐흐!”

이미 그녀는 준비 완료 상태였다.


평소보다 정성껏 씻은 주현은 꼼꼼하게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긴 생머리를 꼼꼼하게 말리고 과하지 않게 살짝 화장을 했다. 그리고 어제 내내 생각해둔 옷을 챙겨 입고는 시간을 확인한다.

열시였다. 약속시간이 열한시니까 지금 출발하면 여유가 있으리라.

그녀가 나갈 준비를 마치고 거실로 나서자 잠에서 깬 몇몇 소녀가 TV 앞에 앉아 있는 게 보인다.

소녀들은 만반의 준비를 마친 주현을 발견했다.

유리가 외출복 차림을 한 주현을 보며 물었다.

“주현아, 어디 가는 거야?”

예상 범위 안에 있는 질문이다. 주현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오늘 친구랑 만나서 놀기로 했거든요.”

“친구? 어떤 친구?”

“학교 친구요. 가서 점심 먹고 조금 놀다가 오려고요.”

“그래. 늦지 않도록 하고.”

“네. 그럼 다녀올게요.”

그 말과 함께 주현이 숙소를 벗어났다.

주현이 나가자 그때까지 쿠션을 끌어안고 TV를 시청하던 태연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다. 그리고는 방으로 향한 뒤 1분만에 옷을 갈아입고는 방을 나온다. 그리고 여전히 TV 삼매경에 빠진 멤버들에게 말한다.

“나 잠시 밖에 사올 것 있어서 나갔다 온다.”

그 말과 함께 숙소를 나서는 태연의 귓가에 여러 목소리가 들려온다.

“난 과자!”

“난 음료수!”

“돈 없어! 그리고 주문 안 받아!”

뒤이어 들려오는 괴성과 협박을 모조리 흘려버린 그녀가 엘리베이터를 잡고는 빠르게 걸음을 옮긴다.


전날부터 그녀는 주현의 어색한 언행에 이상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게 확실한 것이 아니기에 멤버들을 불러서 간단한 취조를 해볼까 싶었지만 그만두었다. 만약 자신의 예상이 틀리다면 주현에게 몹쓸 짓을 하는 것이기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태연은 자신이 먼저 확인을 해본 뒤 결정을 내리기로 마음 먹었다.

솔직히 이건 범죄에 가까운 미행이었지만 그녀는 자기 자신을 합리화 시켰다.

“이건 막내를 위한 것이야. 난 결코 개인적인 궁금함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니야.”

실제로 어떨지는 오로지 그녀만 아는 일이다.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야구 모자와 검은색 뿔테 안경, 그리고 검은색 티와 청바지를 입은 그녀는 이럴 때 유용한 자신의 작은 키를 이용하여 인파에 묻힌 채 조용히 주현의 뒤를 따라갔다.

아무래도 주현이 향하는 곳은 분수대광장인 듯했다. 그동안 이곳에 살아오면서 느낀 바로는 그곳보다 약속 장소에 더 적합한 곳은 없는 탓이다.

아니나 다를까. 분수대광장에 도착한 주현은 누군가를 찾는 듯 고개를 이리저리 둘러보는 모습이 보였다.

태연이 슬쩍 시계를 확인해보니 시간은 열시사십분이었다.

‘약속시간이 열한시였구나!’

그걸 본 순간 그녀는 직감적으로 약속시간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약속이 있으면 먼저 와서 기다릴지언정 늦지 않는 그녀의 습성을 잘 알고 있었기에 가능한 예상이었다.

태연은 너무 성실한 주현의 모습에 혀를 찼다.

‘이그! 사람이 너무 성실해도 만만하게 보인다고!’

그런 면에서는 주현이 아직 융통성이 부족했다. 솔직히 그 점이 좋긴 하지만 언니로서 다른 사람에게 그 점이 약점으로 작용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는 게 사실이었다.

잠시 주변을 둘러보던 주현의 얼굴이 이내 환해지는 게 보였다. 약속 장소에서 만나기로 한 사람을 확인한 듯했다.

그에 태연의 시선도 자연히 주현이 향한 곳으로 향한다.

동시에 커지는 그녀의 눈.

마치 배율을 늘린 현미경처럼 그녀의 눈에 들어온 사람의 모습이 크게 보인다.

동시에 그녀의 입에서 사자후가 터져 나왔다.

“역시 저 녀석이었어!”//

그렇다.

태연의 눈에 들어온 것은 언젠가 한 번 반드시 손봐줘야 할(?) 그 녀석이었다.

감히 자신의 키를 가지고 놀린 녀석!

그리고 다 잡힌 상황에서 감히 맞불 작전을 놓아 교묘하게 빠져나간 녀석!

어느덧 그녀의 머릿속에서 온갖 사악한 모습을 다 그려내고 있는 그 녀석은 바로 창현이었다.

창현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저 녀석이 막내를 타락시켰어.”

한없이 순수하고 언니들을 챙기는 아름다운 동생이었건만.

이따금 이해할 수 없는 특이한 개구리 취향으로 엉뚱한 모습을 보이지만 누구보다 소중한 동생이란 사실은 변함이 없다.

그런데 저 녀석이! 감히 소중한 막내를 타락시킨 것이다.

태연은 주현이 친구들을 만나러 간다고 말한 것도 모두 저 녀석이 시켜서 그런 것이라 생각했다.

설마! 설마 순수한 막내가 그럴 리가 없지 않겠는가?

그녀는 모든 것을 창현의 탓이라 생각했다.

아마 빠져나올 방법부터 시작해서 모든 것을 사주했겠지?

‘막내에게 이상한 짓만 해봐라! 요절을 내주겠어!’

속으로 칼날을 벼려놓으며 그녀가 조금씩 창현과 주현에게 접근해나갔다.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엿듣기 위함이다.

야구 모자를 푹 눌러 쓰고 뿔테 안경을 썼기에 주현과 정면으로 시선만 마주치지 않는다면 들키지 않으리라.

조금씩 접근해내가던 그녀는 창현을 보고는 순간 멈칫한다. 그리고 위아래로 창현의 모습을 훑어본다.

그녀의 고운 얼굴이 다시 찌푸려진다.

그 이유는 하나다.

‘저 녀석 키 컸어!’

이미 자존심을 상당 기간 착용해본 경험이 있는 그녀는 신발을 슬쩍 봐도 자존심의 착용 유무를 알아낼 수 있는 경지에 올랐다.

슬쩍 아래를 쳐다보니 창현은 자존심을 착용하지 않은 듯했다. 그런데 키가 주현과 거의 비슷했다. 거의 165cm에 달한 것이다.

그녀가 처음 창현을 보았을 때 5cm 자존심으로 막상막하를 겨루었으니 몇 달 사이에 키가 큰 것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 차이를 알아내기 힘들지만 그 방면으로 전문가 저리가라 할 정도의 눈썰미를 지닌 그녀는 창현이 키가 컸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알 수 없는 패배감이 전신을 휩쓴다.

‘나는 하나도 안 컸는데!’

가슴에서부터 치고 올라오는 패배감을 억누르며 조금 더 접근한다. 그러자 대화 내용이 들린다.

먼저 주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척 반가움이 담긴 목소리였다.

“창현아, 많이 기다렸어?”

“아니에요. 방금 전에 나왔는 걸요. 누나도 일찍 나오셨네요?”

“응. 약속시간 늦는 걸 싫어해서…….”

“저도 그런 편이에요. 그런데 아침이라 조금 이른데… 열었을까요?”

무언가 의미심장한 말을 하는 창현.

그 말에 주현이 대답한다.

“열었을 거야. 내가 알기로 아침 열시부터 오픈하는 걸로 알거든. 시간 넉넉하게 주시니까 점심식사 전까지 하면 돼.”

“음, 그래요. 어차피 알고 있는 곡들이니까 몇 번 맞춰보면 금방 될 거에요. 무엇보다 화음 부분은 잘 맞춰야지, 잘못 맞추면 혼자 부르는 것보다 못해질 수 있으니까요.”

“그 점은 걱정하지 않아. 창현이 전문 분야잖아?”

“하하! 전문 분야는 아니에요.”

오고가는 화기애애한 대화를 들으면서 태연은 생각에 잠겼다.

‘뭐가 넉넉하다는 거지? 노래방을 말하는 건가? 그런데 전문 분야라는 건 뭐야. 설마 저 외모로 여자를 꼬시는 걸 말하는 건가? 아니야. 주현이는 저 녀석이 바람둥이라면 만나지 않을 텐데.’

주현이 말한 창현의 전문분야는 보컬 트레이닝 부분인데 그걸 알지 못하는 태연으로서는 자꾸 상상이 산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몇마디 대화를 더 나눈 두 사람이 곧이어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주현이 말한 노래방을 가는 듯했다.

태연은 조심스럽게 뒤따르며 여전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주현이가 가는 곳은 아마 우리가 자주 가던 그곳이겠지. 그런데 사귀는 사이도 아니면서 왜 저렇게 가까이 붙어다니느 거야?’

내내 마음에 걸렸던 것이 바로 창현과 주현의 거리였다.

마치 사귀는 사이처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는 게 아닌가?

그걸 지켜보는 태연은 왜 그런지도 모른 채 속이 부글부글 끓는 걸 느꼈다.

잠시 후, 노래방에 도착한 둘은 곧장 입구 안으로 들어서기 시작한다.

‘이대로 돌아가야 하나?’

태연은 노래방에 들어서는 둘을 보며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주현이 누구를 만나는지 보았으니 당초 목적은 달성한 셈이다. 하지만 두 사람이 만난다는 것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그것이 정녕 막내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창현을 훼방놓고 싶어하는 것인지 자신의 마음이 헷갈렸다.

‘어쩌지. 어쩐담?’

찰나의 순간에 꼬리에 꼬리를 물고 그녀의 고민이 이어졌다.

그리고 막 결정을 내리려는 순간, 그녀의 귀에 들어오는 비명소리가 있었다.

“꺄악!”

분명 주현의 목소리였다.

태연은 퍼뜩 정신을 차리며 비명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달렸다.

“주현아!”


노래방은 지하 1층에 위치해 있었다.

좁은 통로에 계단이 길게 뻗어 있었는데, 자칫 발을 잘못 딛다가는 다치기 쉬울 것 같았다.

‘조심해야겠네.’

창현은 조심스럽게 한걸음씩 걸으며 앞장 서는 주현을 주시하고 있었다. 자칫하다가 미끄러지기라도 하면 크게 다칠 수 있기에 신경을 기울이는 것이다.

“계단이 조금 험하네요.”

몇 번 와봤다기에 창현이 자연스럽게 말을 건넨다.

주현은 힐끗 뒤를 돌아보며 대답한다.

“응. 좀 험하긴 하지. 그래도 조심하면 괜찮아. 조금만 신경 쓰면 되니까… 어?”

말을 하던 그녀의 주의가 분산되었기 때문일까.

무언가 턱! 걸리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몸이 기울어진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계단에 발이 걸린 것이다.

“꺄악!”

넘어지는 주현을 보며 창현의 머릿속에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쳐지나간다.

이대로 가다가는 주현이 다칠 것은 분명했다. 계단이 열 개 정도 남은 상태였기에 이대로 넘어지다가는 잘못하면 어디 한군데 부러질 수도 있다.

그냥 보고 있어야 하나? 구해줘야 하나?

찰나의 순간 창현의 머릿속에 여러 생각이 떠오르며 뒤죽박죽 섞여갔다.

그러나 그 생각들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주현의 몸이 기울어지는 순간, 창현이 몸을 날린 것이다.

양팔을 벌린 그가 주현의 몸을 감싼다. 그리고 최대한 몸을 비튼다.

쿠당탕!

주현의 몸을 껴안은 채 둔탁한 소리와 함께 창현의 몸이 바닥에 떨어진다.

계단에 몸이 굴러 떨어진다고 생각한 순간, 눈을 질끈 감았던 주현은 무언가가 자신을 감싸는 느낌과 함께 예상했던 충격이 느껴지지 않자 살며시 눈을 뜬다. 그러자 그녀의 눈에는 자신을 감싼 채 쓰러져 있는 창현의 모습이 보였다.

주현은 죽은 듯이 쓰러져 있는 창현의 몸을 흔들었다.

“차, 창현아 괜찮아?”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자신이 부주의한 탓에 창현이 다쳤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창현은 주현의 구슬픈 목소리에 반응했다.

“으!”

짧은 신음과 함께 눈을 뜬 창현은 주현을 보며 묻는다.

“어깨가 조금 아픈 것 빼고는 괜찮네요. 누나는 괜찮아요?”

자신을 감싸느라 창현이 모든 충격을 받지 않았던가?

주현은 그만 소리를 빽 지르고 만다.

“나보다 네 몸을 생각해야지!”

“하하! 괜찮아요. 별로 다친 것 같지도 않고요.”

“그, 그래? 다행이다. 후우!”

웃음을 지으며 대답하는 창현의 모습에 주현이 살짝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창현이 다쳤을까 조마조마했다.

그런 주현의 모습이 귀여워 창현은 자기도 모르게 훗! 하고 웃음을 지었다.

그때, 두 사람의 귀에 한 소녀의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주현아! 무슨 일… 너, 너희 둘 지금 뭐, 뭐하는 거냐!”

모습을 드러낸 것은 태연이었다. 그녀는 이대로 떠날지 말지 고민을 하다가 주현의 비명소리를 듣고 냅다 달려온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두 눈에 들어오는 장면을 보고 그만 굳어버리고 말았다.

두 사람은 여전히 껴안고 있는 자세였기 때문이다.

그 모습은 사람들이 오해하기 딱 좋은 모습이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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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마음을 울리는 음악 시즌2 제3화 +6 15.04.22 4,424 82 10쪽
39 마음을 울리는 음악 시즌2 제2화 +9 15.04.20 4,514 91 11쪽
38 마음을 울리는 음악 시즌2 제1화 +10 15.04.17 7,373 95 10쪽
37 ▲▲▲▲▲시즌2 시작!▲▲▲▲▲ +5 15.04.17 5,421 65 1쪽
36 마음을 울리는 음악 106장-108장 +8 15.04.16 6,409 106 230쪽
35 마음을 울리는 음악 103장-105장 +1 15.04.16 4,242 82 3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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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마음을 울리는 음악 85장-87장 +1 15.04.16 4,708 83 270쪽
28 마음을 울리는 음악 82장-84장 +2 15.04.16 4,911 85 261쪽
27 마음을 울리는 음악 79장-81장 +1 15.04.16 4,579 87 241쪽
26 마음을 울리는 음악 76장-78장 +1 15.04.16 4,752 74 244쪽
25 마음을 울리는 음악 73장-75장 +1 15.04.16 4,938 111 327쪽
24 마음을 울리는 음악 70장-72장 +1 15.04.16 4,754 82 2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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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마음을 울리는 음악 40장-42장 +3 15.04.16 8,905 183 320쪽
13 마음을 울리는 음악 37장-39장 +2 15.04.16 9,610 224 397쪽
12 마음을 울리는 음악 34장-36장 +8 15.04.16 9,520 189 322쪽
11 마음을 울리는 음악 31장-33장 +8 15.04.16 10,351 261 345쪽
10 마음을 울리는 음악 28장-30장 +5 15.04.16 10,654 260 277쪽
9 마음을 울리는 음악 25장-27장 +7 15.04.16 11,032 267 233쪽
8 마음을 울리는 음악 22장-24장 +4 15.04.16 10,917 261 198쪽
7 마음을 울리는 음악 19장-21장 +4 15.04.16 11,485 270 216쪽
6 마음을 울리는 음악 16장-18장 +5 15.04.16 11,536 242 163쪽
5 마음을 울리는 음악 13장-15장 +5 15.04.16 14,527 297 237쪽
» 마음을 울리는 음악 10장-12장 +8 15.04.16 13,727 352 171쪽
3 마음을 울리는 음악 7장-9장 +10 15.04.16 14,540 362 142쪽
2 마음을 울리는 음악 4장-6장 +11 15.04.16 16,820 421 120쪽
1 마음을 울리는 음악 프롤로그-3장 +47 15.04.16 29,872 545 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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