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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번 님의 서재입니다.

마음을 울리는 음악

웹소설 > 작가연재 > 팬픽·패러디, 현대판타지

김현우
작품등록일 :
2015.04.16 13:27
최근연재일 :
2015.06.01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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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4.16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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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64쪽

마음을 울리는 음악 97장-99장

DUMMY

제97장 벼락 맞은 사슴




전날, 미란, 효연과 저녁 식사 자리를 갖은 창현은 석규의 이른 호출에 쉬지도 못한 채 회사로 나가야만 했다.

보름의 휴가 중 사흘이 흘렀지만 아직 제대로 쉰 날이 없었다.

“갑자기 무슨 일이세요?”

“할 이야기가 있어서 불렀다만, 안색이 안 좋은데?”

“하하, 갑자기 인기가 폭발해서요. 약속이 자꾸 생기네요.”

“그래? 확실히 그럴지도. 하지만 푹 쉬는 게 좋을 거다. 안 그러면 미국에 가서 고생을 할 테니까.”

“그러고 싶은데 세상사 제 뜻대로 이루어지지가 않네요. 하하.”

“그 이치를 깨달았다면 값진 공부를 한 게지.”

피식 웃음을 짓자, 창현도 웃음을 짓는다.

미리 주문해놓은 생강차 두 잔이 나오자, 한 모금씩 음미하며 잠시 침묵이 내려앉는다.

자주 마시지만 아직도 독특하게 느껴지는 쓴맛에 입 꼬리를 말아 올린 석규가 말문을 열었다.

“널 부른 건 다른 게 아니라, 스케줄에 관련된 이야기다.”

“스케줄이요? 아아, 그러고 보니 스케줄 하나 있다고 하셨죠? 그런데 아무 말씀도 안 하셨잖아요.”

“원래는 SM엔터테인먼트 측의 부탁으로 널 무릎팍 도사에 출연시키려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할 이유가 없어져서 말이다.”

“무릎팍 도사요? 꽤 오래 전부터 제의가 오고 있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것 때문에 호동이 형이 자꾸 뭐라고 하시던데요.”

MC계를 양분하고 있는 강호동과 유재석의 프로그램 중 재석의 프로그램에 더 많이 출연하였기에 언제 한 소리를 들은 창현이었다.

엄살 부리는 그의 모습에 석규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하하하!”

“어쨌든 안 하게 되었다면 편히 쉴 수 있겠네요. 다행이다. 무릎팍 도사는 엄청 고되다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음, 미안하지만 그렇게는 안 될 것 같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다른 스케줄이 잡혔거든.”

약을 준 뒤, 병을 주는 석규의 행동에 표정을 일그러뜨리는 창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석규는 대수롭지 않은 듯 어깨를 으쓱해보이며 말한다.

“하지만 이번 스케줄은 네게 굉장히 도움이 될 것 같다. 그래서 무릎팍 도사 출연하던 것을 미루고 이걸 정한 것이고.”

“도대체 어떤 것인데요?”

“대학교 OT에 출연하는 거다.”

“……대학교 행사가 무릎팍 도사보다 유용하다고요?”

길게 침묵하던 창현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대학교 행사에 참가하는 것이 어딜 봐서 무릎팍 도사에 출연하는 것보다 나은 건지 생각하기 힘들었다.

무릎팍 도사는 창현이 본격적으로 데뷔했을 때부터 시작하여 긴 시간 동안 오퍼를 보내던 곳이다. 그가 얼굴을 드러내고 정식으로 데뷔하던 2007년 2월 경부터 끊임없이 러브 콜을 보내왔으니 벌써 2년이나 되었다.

미국에 진출하고, 세계적인 스타가 된 지금도 간절하게 러브 콜을 보내는 중이다.

가급적 방송 출연을 자제하는 현의 이미지는 아직까지 신비에 휩싸인 면이 많았기에 스타의 모든 것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무릎팍 도사의 출연은 엄청난 화제를 불러일으킬 것임이 분명했다.

방송국에 강력한 입김을 행사할 수 있는 기회임에도 불구하고 그것보다 대학교 행사가 더 낫다는 것에 창현은 공감하기 힘들었다.

고개를 갸웃하는 그를 보며 석규가 말한다.

“대학교 OT는 OT지만 기존의 형태와 다른 거라 할 수 있다.”

“다르다고요? 노래를 부르고 행사를 하는 게요?”

“노래를 부르는 건 맞지만 이번에는 다른 형태를 고민하고 있다 해서 말이지. 내 친구 중 교수가 있는데, 그 녀석이 찾아와 이야기를 했는데, 제법 괜찮은 형태더구나.”

회사의 이익도 중요했지만 창현의 발전보다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이번 무릎팍 도사는 AA엔터테인먼트의 주도 하에 이루어진 것이 아닌, SM엔터테인먼트의 주도로 이루어진 셈이다. 선택사항인 만큼, 상대방이 아쉬워할 수 있지만 석규는 개의치 않았다.

미국 시민권에 관련하여 창현이 말했던 것처럼 무릎팍 도사 또한 기간이 정해진 게 아니니까. 언젠가 출연은 할 테니 출연하겠다는 약속만 해놓고 기간은 무기한 연장해놓으면 아무 탈도 없다.

“도대체 어떤 형태인데요?”

석규가 이렇게 말하니 창현도 모른 척 넘길 수 없었다.

불퉁한 모습을 지운 채 이야기를 경청할 준비를 하자, 석규가 입을 연다.

“보통 대학 OT는 가수가 노래를 부르고 끝이 나지만 이번에 특별한 OT를 기획했다고 하더구나. 세계적인 스타가 된 너를 초청하여 노래를 듣는 것에서 끝나는 게 아닌, 대학교 재학생과 신입생들을 데리고 일종의 팬 미팅을 하는 거지.”

“팬 미팅이요? 잘 이해가 되지 않는데요.”

고개를 갸웃하는 창현이다. 팬 미팅은 자신의 팬을 모아놓고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가 아닌가? 자신의 팬이 많다고 하지만 모든 대학생이 자신의 팬일 리는 없다.

이해하지 못하는 그를 향해 석규가 친절하게 설명을 첨부한다.

“지금 20대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은 바로 너다. 아직 성인이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이 보기에 모든 것을 이룬 사람처럼 보이겠지. 그것은 많은 사람들의 열등감을 불러일으키지만 필연적으로 동경심을 일으키기도 한다. 네가 해야 할 일은 그 부분을 그들에게 전해주는 것이다.”

“에… 그럼 일종의 강의 형태라 할 수 있는 거네요?”

“아직 무어라 결론짓기 뭐하지만 그렇게 생각해도 좋겠지. 너의 생각을 전해주어도 좋고, 대학생들의 질문에 답해줘도 좋다. 무엇을 하던 네가 원하는 걸 하면 되는 거니까.”

“원하는 거라… 회사에 도움이 별로 안될 것 같은데. 무릎팍 도사가 더 낫지 않을까요?”

“…….”

창현의 말에 안타까운 표정을 짓는 석규였다. 작은 회사에서 나타난 최고의 스타이기에 그는 자신의 가치를 회사의 위상 높이는데 사용하려 하고 있다.

안타까운 마음이 든 석규는 잠시 말을 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자신이 실수한 건지 모르는 창현으로서는 고개를 갸웃했다.

한참 동안 입을 열지 않던 석규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이번 스케줄은 회사를 위한 게 아니다. 널 위한 거지.”

“절 위해요?”

“그래, 지금 넌 다른 사람이 보기에 완벽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아니다. 너무 어린 나이에 스타가 되었기에 평범한 생활을 제대로 겪어보지 못했지. 특히 남들이 모두 해보는 고등학교 생활마저도 못했다. 남들과 다른 특별함은 네게 필요하지만 남들과 비슷한 평범함 또한 필요하다. 이번에 가서 그걸 깨닫고 오면 좋겠다.”

석규의 말을 들은 창현은 자신이 포인트를 잘못 짚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가 무릎팍 도사보다 이 행사를 선택한 까닭은 회사를 생각하여 내린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석규의 말을 곱씹어보고 있었다.

“…평범함. 남들이 보기에는 제가 평범하지 않겠죠?”

여태까지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부분이었다.

창현의 말에 석규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쉽지만 그렇겠지.”

“아직 무엇을 말하고자 하시는 건지 확실하게 감이 오지 않아요. 하지만 절 위해서 내린 결정이 분명할 테니 아버지 말을 따를게요.”

“잘 생각했다. 네게 도움이 될 거다.”

“그랬으면 좋겠네요. 제가 갈 대학교는 어디죠?”

창현의 물음에 석규가 잠시 멈칫한다. 그러다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동국대학교다.”

“…….”

무언가 아는 사람을 만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스케줄을 전해들은 뒤, 창현은 사흘 동안 편히 쉴 수 있었다. 예정대로 무릎팍 도사 스케줄이 진행되었다면 대본 작성을 위해 인터뷰를 하느라 바빴을 테지만 OT에 참석하는 것은 사전 조사가 필요 없으니 편히 쉴 수 있었다.

그동안 그는 인터넷을 뒤적이며 나름대로 준비를 해나갔다. 석규가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스스로 감을 잡았기에 자료 조사에 박차를 가했다.

“성공한 사람들은 모두 고난을 극복했구나. 그리고 남들과 다른 참신함이 있었기에 성공할 수 있었어.”

사흘 동안 창현이 조사한 것은 성공한 사람들의 일대기였다. 옛 사람부터 시작하여 현재 존재하는 사람들까지, 그들의 공통점을 묶으며, 자신과 대입해보았다.

“나도 어찌 보면 사람들과 다른 걸 갖고 있다 할 수 있겠네. 내가 알고 있는 음악의 체계는 현대의 것도 있지만 근본적인 면은 옛날 것이니까. 그 점을 극대화 할 수 있는 음향총서가 있으니 장점을 극대화하고 단점을 없앨 수 있었어.”

스스로 갈 길이 남아 있다 생각하지만 남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이 보는 현은 이미 세계적인 스타이자, 어린 나이에 절대적인 부를 넣은 인물이다.

그랬기에 창현은 자신이 성공했다는 가정 하에, 기존에 성공한 사람들과 무엇이 다른지 고민했다.

“난 그 사람들과 달리, 쉽게 성공했어. 음향총서가 있기에 내 장점을 극대화하는 걸 어렵지 않게 알아냈고, 누구도 갖지 못하던 개성을 지니게 되었지. 그리고 고난과 역경 또한…….”

이 부분에 대해서 말을 아꼈다.

자신의 고난과 역경은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유년기와 사춘기 시절, 그로 인해 마음이 꽁꽁 얼어붙어 있었고, 어머니의 잔향을 잊지 못해 그리워했다.

자신에게는 큰 고난이었지만 남들에게는 그러지 않을 수 있다.

내가 느낀 고통을 남이 느끼지 못하는 법이니까.

그렇기에 창현은 냉정하게 생각했다.

자신은 여타 성공한 사람들과 달리, 어렵지 않게 성공했다는 것을.

그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축복 받은 환경에서 가수 생활을 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내 주제를 파악하는 것도 어렵지. 그것이야 말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니까.”

마지막으로 창현이 정리한 내용은 자신의 주제를 아는 것이다.

유감스럽지만 인간은 태어나면서 지닌 재능이 다르고, 그릇의 크기 또한 다르다. 다재다능한 사람이 있지만, 정작 최고의 수준에 오르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한 가지 밖에 못하지만 그것만으로 최고의 반열에 오르는 사람이 있다.

재능의 종류가 다르고, 그릇의 크기가 다르다. 네 자신을 알라, 라는 말을 창현은 깊게 공감했고, 다시 한 번 자신을 살피는 계기가 되었다.

“어렵긴 어렵네. 잘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고. 그래도 강의는 아니니까 편하게 하면 되겠지.”

정리한 내용을 모두 훑어본 창현은 눈이 아픈 것을 느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푹 쉬면서 준비를 했지만 막상 준비를 하다 보니 뭔가 미진한 것 같아 마음 한 켠에 아쉬움이 남았다. 시간이 좀 더 있으면 철저하게 준비하여 알찬 시간을 누릴 수 있게 해줬을 텐데 말이다.

“별 수 없지. 허락된 시간이 적으니까, 응?”

정리한 내용을 프린트 한 그는 연예 뉴스란에 익숙한 제목의 기사를 발견하고는 눈을 빛냈다.

그가 클릭한 것은 소녀시대 멤버들의 대학교 입학 관련 기사였다.

“수영 누나랑 윤아 누나가 대학교에 입학한다고? 호오.”

입가에 묘한 감탄사를 흘리며 기사 내용을 읽는다. 기사 내용은 새로운 09학번이 된 그녀들을 소개하는 내용이었다.

기사를 읽던 창현의 눈이 동그랗게 변해갔다.

“수영 누나는 중앙대구나. 그리고 윤아 누나는… 동국대학교 연극학과? 에엥?”

황당한 표정을 짓는 창현. 그도 그럴 것이 내일 자신이 OT에 참석하는 학교가 다름 아닌 동국대학교 아닌가?

그 동국대학교 신입생이 바로 윤아란다.

“이런 우연도 있네? 하지만 뭐, 윤아 누나는 한창 바쁠 테니까. OT 오지 못할 수도 있겠지.”

강제적인 것이 아닌, 자발적인 의지로 참석하는 OT이기에 스케줄이 바쁜 윤아가 참석할 것이란 생각은 버렸다.

인터넷 창을 끄며 창현은 석규에게 대학교 이름을 들을 때 느꼈던 감정을 상기했다.

“설마, 아니겠지.”

설마가 사람 잡는 법이지만.


스케줄에 나선 창현은 오랜만에 세희를 만날 수 있었다.

창현을 본 그녀는 밝은 미소를 짓고는 손을 흔들며 반가움을 드러냈다.

“창현이 오랜만.”

“오랜만이에요.”

“그동안 잘 지냈어?”

“저야 잘 지냈죠. 이곳으로 소식이 전해지지 않나요?”

“그렇더라도 직접 듣는 것보다는 못하지. 안색을 보니 잘 지낸 것 같은 걸? 미국에 가서 예쁜 금발 미녀들을 많이 봐서 그런 거 아냐?”

웃음을 지으며 농담을 건네는 세희의 눈길은 묘했다. 미국에서 창현과 함께 스캔들 난 사람들 대부분이 금발을 지니고 있어서 생긴 선입견인 듯했다.

당연히 창현은 부인했다.

“그럴 리가요. 예전에는 힘들었는데 이제는 나름대로 적응이 되더라고요. 설마 스캔들 때문에 한 번 넘겨 짚어보시는 건 아니죠?”

“그럴 리가. 그냥 한 번 물어본 거야.”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이제 슬슬 가야겠다. 응? 그런데 창현이 너 키 좀 큰 거 같다?”

눈이 동그랗게 변하는 세희의 반응에 창현은 미소 짓는다. 석규나 라샤도 눈치 채지 못한 점을 그녀가 알아차린 건 매니저로서 같이 지내는 시간이 많아서일 것이다.

어깨를 쭉 핀 창현이 의기양양한 어조로 말한다.

“훗! 미국에서 영양가 있는 육류를 많이 섭취했죠. 짧은 시간 동안 무려 1.5cm나 컸단 말씀! 이제 키가 179.1cm입니다. 180cm까지 멀지 않았죠. 하하!”

“…좋겠네, 참. 그나저나 예전에는 꼬맹이였는데 많이 컸네. 정말 더 크려나?”

“물론이죠. 아마 185cm까지 크지 않을까요?”

“꿈도 야무지다고 말하고 싶지만 지금 추세를 보면 정말 그럴 수도 있겠네.”

의기양양한 창현을 보고 있자니, 왠지 희망을 깨버리고 싶었지만 키로 민감한 반응을 보이던 그에게 태클을 걸 수 없었다.

싱글벙글 웃음을 짓던 창현이 세희에게 말한다.

“그렇게 되면 누나가 많이 힘들어지겠어요.”

“내가 왜?”

“앞으로 절 따라다니려면 고개를 높게 들어야 하잖아요. 고생 좀 하실 거예요.”

“…하아! 가자.”

“네, 가죠.”

즐거운 기분을 간직한 창현은 곧바로 동국대학교 OT가 열리고 있는 곳을 향했다.


6시가 조금 넘어서 도착한 창현은 무대 위에 서는 시간이 8시가 훌쩍 넘어서란 말에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세희에게 고개를 돌렸다.

“너무 일찍 온 거 아니에요?”

“그건 아니야. 지금 저녁 시간이고, 저녁 시간이 끝나면 한 시간 정도 휴식 시간이 주어져. 그리고 동아리 공연이 벌어지고, 그 다음 창현이 네가 무대에 서겠지. 어차피 시간도 많으면서 왜 그래.”

“…그러게요.”

고개를 저은 세희가 도리어 뻔뻔하게 나오자, 창현은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 무언가 생각이 난 듯, 고개를 번쩍 들더니, 빛나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그렇군요. 그럼 한 시간 넘게 시간이 남아 있다는 거네요?”

“그렇겠지? 왜?”

“후후, 시간이 남으면 좀 돌아다녀보고 싶어서요.”

“안 돼.”

일고의 가치도 없이 곧바로 창현의 희망사항을 짓뭉개는 세희였다.

창현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왜요. 어차피 사람 많아서 제가 들킬 확률은 거의 없어요. 좀 돌아다녀보고 싶다는데 매몰차게 바로 거절하기에요?”

“그러다가 들키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제가 들킬 거 같아요? 저도 나름대로 배테랑이라고요.”

“배테랑이던 아니던 허락할 수 없어. 들키게 되면 완전 혼란이 일어날 텐데 그걸 누구 보고 수습하라고?”

듣기에는 세희의 말이 옳았다. 그 사실은 창현 또한 알고 있었다. 하지만 대학생 OT는 어떤 분위기인지 알고 싶었던 창현은 어떻게든 돌아다니고 싶었다.

“안 들킬 테니까요. 네?”

“그래도 안 돼.”

“정말 이러기에요?”

“이러기라니? 난 매니저로서 최선을 다할 뿐이라고.”

“…….”

이쯤이면 허락해줄 법도 했지만 세희는 철벽 방어를 자랑했다. 한 번 풀어주기 시작하면 끝도 없다는 걸 알았기에 그녀는 창현을 철저하게 단속하였다.

거듭되는 세희의 퇴짜에 창현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바뀐 그의 눈빛에 세희가 움찔하며 한 걸음 물러섰지만 단호한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이제는 옳고 그름을 떠나 자존심 싸움이 되어버렸다.

“정말 안 되요?”

“정말 안 돼.”

“어쩔 수 없군. 사용하지 않으려 했는데 비장의 무기를 사용하는 수밖에.”

“비장의 무기?”

순간 세희의 얼굴에 의문이 서린다. 비장의 무기라니? 미국에서 자신이 알지 못하는 수법이라도 터득했단 말인가. 창현의 전신에 심상치 않은 기세가 감돌자, 세희의 얼굴에 긴장이 퍼져 나갔다.

그때였다. 번개처럼 빠르게 나온 창현의 손이 세희의 팔을 억세게 잡는다. 단지 팔을 잡혔을 뿐이지만 세희는 온몸을 옴짝달싹 할 수 없었다.

그녀의 눈에 두려움이 서렸다.

‘설마 새로운 수법이란 게 폭력을 사용한……?’

이 무슨 야만적인 방법이란 말인가. 자신의 팔을 묶어놓은 창현의 힘에 억눌리는 걸 느끼며 세희가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누나, 나 정말 나가보고 싶은데 어떻게 안 될까요? 응? 응? 누나아아.”

손발이 오그라드는 창현의 목소리가 세희의 귀를 강타했다.

이어질 충격(?)에 대비하던 세희는 애교가 진득하게 묻어나오는 창현의 목소리에 순간 멍한 표정을 지은 채 그를 바라보았다.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는 어린 시절 보았던 ‘짱구는 못 말려’에서 나올 법한 것이었다.

근접 거리에서 발산되는 창현의 애교 눈빛은 그대로 세희의 심장 깊숙이 박혀들었다.

“으, 으으윽!”

“누나, 정말 안 돼요?”

“…돼.”

뭐라 말을 했지만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확답을 받으려는 듯, 창현은 거듭 그녀를 밀어붙였다.

“응? 응?”

“가, 가라고. 가도 돼. 대, 대신 너무 늦으면 안 돼.”

마침내 떨어진 세희의 허락. 빙긋 미소를 지은 창현이 뒤로 물러난다. 그러자 땅이 꺼져라 흘러나오는 세희의 한숨. 안도가 섞인 한숨이었다.

“고마워, 누나. 늦지 않게 들어올게.”

“…….”

아무 말도 못하는 세희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인 창현은 행여나 그녀의 말이 바뀔까 싶어 모자를 쓴 채 눈부신 속도로 나간다.

“…당했네.”

자신의 반응을 깨달은 세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완전히 당해버렸다.


밖으로 나온 창현은 모자를 깊게 눌러 썼다. 무대 위에 서기 전, 아무것도 섭취하지 않는 그였기에 식당에 가서 가만히 있는 건 이상했다. 때문에 군것질하는 사람들을 보기 위해 매점으로 향했다.

“흐음, 이게 신입생 공기라는 건가?”

과자나 음료수, 아이스크림을 사먹는 신입생들의 표정에는 하나같이 낯선 생활에 대한 기대감과 두려움, 걱정이 뒤섞여 있었다. 막 성인이 되어서 그런지 염색한 머리가 어색하게 보였고, 파마 또한 어울리지 않았다.

풋풋함이 느껴졌으며, 한편으로는 미지의 세상에 발 디딜 때가 떠올라 가슴이 두근거렸다.

한동안 매점에서 신입생들을 구경하던 창현은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군데군데 보이는 담배 피는 모습들. 담배 향이 느껴지자 창현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음, 저건 좀.”

다양한 면을 보기 위해 왔지만 담배 피는 모습은 별로 보고 싶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온 창현은 무작정 걸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삼삼오오 뭉쳐 걸음을 옮기는 신입생들을 보면서 문득 자신은 혼자 동떨어져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저게 평범하다는 건가? 그렇다면 내가 평범하지 않은 거고?’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을 쫓으면서 평범한 것은 무엇이고, 동떨어져 있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본다. 쉽게 답은 나오지 않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저들이 있는 곳과 자신이 있는 곳의 공기는 다르다는 것.

그것이 부럽게 느껴지면서 한편으로는 자신에 대한 경각심이 들었다.

‘저 사람들이 보기에는 내가 부럽겠지. 집중 조명을 받으며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스타의 삶을 살아가고 있으니까. 내가 바라는 많은 것들 중 하나이기도 하고.’

무엇이 평범한 것이고, 무엇이 비범한 걸까.

남들의 집중 조명을 받아서? 그건 아닌 듯하다.

자기가 잘하는 분야에 충실하면 언젠가 다른 사람들의 집중 조명을 받는다.

창현은 걸음을 옮기면서 석규가 자신에게 깨닫게 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했지만 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그저 머리만 더 혼란스러워질 뿐.

“응?”

무심코 걸음을 옮기던 창현은 자신이 머물던 대기실로 들어가는 곳에 도착했다는 걸 깨닫자 고개를 들었다. 그때, 대기실 있는 곳으로 익숙한 여성이 들어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모자를 눌러쓰고, 메이크업을 하지 않은 상태였지만 창현은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봤다.

“태연 누나? 태연 누나가 왜 이곳에……?”

의아한 마음이 든 창현이 대기실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 할 때였다. 몇몇 사람이 그의 앞을 가로막더니 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곳은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예?”

태연의 뒤를 쫓던 창현의 시선이 앞을 향했다. 진행요원이라 적힌 완장을 차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오늘 OT를 빛내주실 연예인분들이 계신 곳입니다. 물러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오늘 게스트가 소녀시대인가 보죠?”

“예, 하지만 퍼뜨리지 말아주십시오.”

그것은 부탁이라기보다 명령조에 가까운 말이었다.

순간 기분이 팍 나빠졌지만 내색하지 않고 웃어 넘겼다.

“하하, 전 여기 학생이 아니라서, 안심하셔도 됩니다.”

“학생이 아닌 분이 이곳에 무슨 일이시죠? 모자를 푹 눌러쓴 것도 왠지 수상하군요.”

진행요원들의 눈이 가늘어졌다. 신입생인 줄 알았던 사람이 학생이 아니란다. 현재 이곳은 OT를 위해 학생 혹은 관계자들만 들어올 수 있는 곳이다. 당연히 의심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아하하, 이거 실수해버렸네. 그럼…….”

방법이 없다는 걸 깨닫고는 눌러쓴 모자를 들어 얼굴을 드러낸다. 의심 가득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던 진행요원들은 창현의 얼굴을 알아보고는 경악한 표정을 짓는다.

“이제 좀 들어가도 될까요?”

“혀, 현이 어떻게 여기에…….”

“저도 오늘 게스트라서요. 그나저나 저도 대기실이 이쪽이거든요. 들어가도 되죠?”

“무, 물론입니다.”

태도가 180도 바뀐 것은 현의 이름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바뀐 진행요원의 태도에 씁쓸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통쾌하기도 하였다. 그러다 무언가 생각이 난 듯 창현이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말한다.

“그리고 퍼뜨리지 말아주세요.”

“…….”

웃으며 말하자, 진행요원의 얼굴이 붉어진다.

그 말은 방금 전 자신이 창현에게 했던 말이었다.


한편, 대기실을 향하는 태연의 안색은 우울했다.

그녀의 품안에는 음료수가 한가득 실려 있었다.

“흑, 내가 왜… 아악!”

흘러내리지도 않는 눈물을 닦아내는 시늉을 하다가 하마터면 음료수를 쏟을 뻔한 태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가까스로 음료수 캔을 수습한 태연은 자신이 이런 처지에 놓이게 된 원흉들을 떠올리며 궁시렁거렸다.

“막냉이 녀석, 말도 안 되는 규칙을 내세워서 날 합법적으로 부려먹다니.”

정해진 규칙을 위반할 때마다 벌점을 가산하여, 벌점이 많을수록 일을 많이 하게 되는 시스템은 소녀시대 막내이자, 순수의 대명사로 불리는 주현이 만들어냈다. 그것은 정권 변경 이후 벌점을 부여받은 태연과 윤아에게 악재로 작용했다.

“내가 다시 권력을 쥐면……!”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어주겠다 다짐해본다.

하지만 현실로 돌아온 태연의 얼굴에 그늘이 자리했다. OT를 면목으로 사라진 윤아 덕분에 모든 잡일은 그녀가 맡게 되었다.

“현실은 시궁창이라는 말이 이렇게 공감가다니. 흑, 윤아야, 보고 싶어.”

두 명이 당하면 그래도 덜 서러웠지만, 혼자서 당하려니 너무나 억울한 태연이었다.

그때, 갑자기 그녀의 양 어깨로 올라오는 손이 있었다. 억센 힘으로 그녀의 어깨를 점거한 양손은 그녀의 발걸음을 붙들어놓았다.

동시에 귓가로 들려오는 음침한 목소리.

“입 다물고 가만히 서 있어.”

“……!”

온몸에 돋아나는 소름에 태연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이곳은 연예인 대기실로 사용되는 곳이라 보안이 철저할 텐데?

‘어떻게 들어온 거지? 그리고 날 어떻게 하려는 거지? 설마 소녀시대의 리더인 날 납치해서 우리 멤버들도 한 명씩 납치하려는 그런…….’

온갖 상상이 그녀의 머릿속을 채워나갔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서 괴한의 말을 따라야 할지, 아니면 들고 있는 음료수를 던지고 자리를 벗어나야 할지 그녀는 고민했다.

‘음료수 내동댕이치면 다시 사와야 되잖아. 아니, 지금은 그게 급한 게 아니지. 일단 도망쳐야해.’

그때, 예의 음침한 목소리가 다시 한 번 그녀의 귓가에 들려왔다.

“돌아보지 마. 내 얼굴을 보면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어주지.”

“네, 네! 알았어요.”

“그래, 좋은 모습이야. 후후후.”

낮게 들려오는 그의 웃음소리는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그때, 그녀의 양 어깨를 잡고 있던 괴한이 몸을 잡아 돌렸다. 잔뜩 긴장해있던 태연의 몸은 괴한에 의해 그대로 돌려지면서 마주하게 되었다.

‘아, 안 돼!’

얼굴을 보면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어주겠다는 말을 떠올리며 태연은 재빨리 눈을 감았다.

배신자들에게 복수하지 못하고, 창현을 조련하지 못한 지금, 아까운 삶을 마감하기 싫었다.

“…….”

긴 침묵이 흘렀다. 태연은 괴한에게서 아무런 반응도 없자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간도 크게 대기실 복도에서 자신을 납치했으면 한 건데, 그 이상의 행동을 보이지 않자 도저히 의중을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목적이 뭐야?’

눈앞에 괴한이 있는 지조차 의문이 들 정도였다.

한참이 지나도 아무런 반응이 없자, 태연은 조심스럽게 실눈을 떴다.

그러자 시야에 들어오는 괴한의 모습. 다시 눈을 감아야 했지만 한 번 고개를 든 호기심은 태연을 지배하여 그대로 괴한의 얼굴을 향했다.

조금씩 위로 올라간 그녀의 시야에 들어온 괴한의 얼굴은 무척 잘생겼다.

‘흐미, 잘 생겼네. 저런 남자가 왜 강도 짓이나 하고 있는 겨? 어떻게 하면 창현이랑 저렇게 똑같이 생…….’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태연은 더 이상 눈을 감지 않았다. 자신의 눈앞에서 웃고 있는 사람은 강도가 아니라 다름 아닌 창현이었다.

입가에 웃음을 짓고 있는 창현은 태연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안녕하세요, 누나?”

“에엑?”

온갖 감정이 범벅된 외침이 태연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태연은 지금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권력을 빼앗긴 이후, 보이지 않는 폭군 수연의 여러 압박과 규칙을 빙자한 주현의 부림은 위대한 리더에서 잡일꾼으로 변모시켰다.

그럴 때마다 태연은 현실을 외면하고는 했다. 그리고는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었다.

자신은 지금 신데렐라라고. 계모와 언니들의 핍박에서 고생을 하고 있지만 반드시 왕자님이 나타나 이 모진 역경에서 구원해줄 것이라고.

어처구니없는 생각이지만 모진 고난을 겪고 있는 그녀 입장에서는 창현이야 말로 한 줄기 광명과도 같았다.

상상으로만 여기던 순간이 현실로 이루어지자 태연은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었다.

“차, 차, 창현이 네가 어떻게?”

“음? 제가 여기 있는 게 이상하려나요?”

“응, 확실히.”

이곳은 대학교 행사인 OT가 벌어지는 곳이다. 창현이 이곳에 있는 것이 이상하게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태연이 고개를 끄덕이자, 창현도 동감이라는 듯 피식 웃었다.

“그러네요. 저도 오늘 OT 행사에 초대 받아서 오게 되었어요.”

“행사에? 너도 행사를 다녔었어?”

“아니요, 다니지 않았지만 아버지 친구분의 부탁이 있어서 오게 되었어요.”

“그래? 우움! 역시 사회는 인맥이구나.”

얼마나 친한 친구이기에 행사 전력이 없는 창현을 끌어들일 정도일까.

새삼 인맥의 위대함을 몸소 느끼며 고개를 끄덕거린다.

“누나들도 행사 오신 거예요?”

“그렇지, 뭐. 윤아가 여기 신입생이잖아. 그래서 겸사겸사 우리가 나선 거지. 윤아는 모르고 있고.”

“윤아 누나도 OT에 참가하나 봐요?”

“당연하지. 신입생인데.”

“아아, 그렇군요.”

왠지 모르게 묘한 기분이 느껴지더니, 인연의 끈이 이렇게 이어져 있었나보다.

“…….”

생각에 잠긴 창현을 태연이 물끄러미 올려다 본다. 그러다 문득, 그의 변화가 느껴졌는지, 그녀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성큼 한 걸음 앞으로 다가오는 그녀. 움찔한 창현이 뒤로 한 걸음 물러섰지만, 태연은 개의치 않은 채, 아래부터 시작하여 위까지 훑어보았다.

“…왜 그래요?”

“으음. 미미한 차이지만 나에게 느껴져. 창현이 너! 키 컸지?”

“어떻게 알았어요?”

“후후, 이 정도쯤은 위대한 리더님에게 별 거 아니지. 그나저나! 얼마나 큰 거야?”

“별로 안 컸어요. 이제 179cm니까요.”

“뭐, 뭐시라? 크윽! 나랑 키가 비슷하던 게 이렇게 크다니…….”

가슴을 움켜쥐며 괴로워하는 태연이었다. 첫 만남 때 창현은 그녀와 별 차이가 나지 않을 정도로 작은 난쟁이(?)였다. 함께 키 문제로 열등감을 폭발시키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자신과 20cm가 넘는 차이를 만들어 내다니. 부럽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흐뭇하기도 했다.

'21cm 차이면 딱 어울리잖아? 흐흐흐! 좋아, 이대로만 자라다오.‘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음침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태연을 보면서 창현이 움찔하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선다.

하지만 태연은 그런 창현의 움직임을 뛰어넘어 곧바로 나아가 그의 팔을 낚아채어 팔짱을 낀다.

“응?”

“왜?”

“아니, 팔짱을 끼면 제가 이상하게 여기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요?”

이름답게 태연한 반응에 황당한 표정을 짓는 창현이다. 다짜고짜 팔짱을 껴놓고 아무런 설명이 없는 모습이라니? 안 그래도 그녀의 일일 연인이라는 이름하에 벌어진 만행(?)들이 아직까지 창현의 뇌리에 남아 있었다.

다소 당황한 그의 모습에 태연은 속으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후후, 아직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였어. 나에게도 기회가 남은 겨.’

창현이 윤도현의 러브레터에 나와 했던 말을 듣고 얼마나 후회했던가? 옆에 멤버들이 없었다면 땅을 치고 엉엉 울었을지도 모른다.

그놈의 밀고 당기기가 뭔지, 다 된 밥을 앞에 놓고 과도하게 뜸을 들여 다른 사람이 채어갈 때까지 놔둔 자신의 행동은 어리석었다.

미국으로 간 창현을 떠올리며 태연은 두 번 다시 어리석은 실수를 범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지금의 팔짱은 모험을 건 조련의 시작이었다.

“그냥. 친밀감의 표시니까 신경 쓰지 마.”

“…그런 거예요? 후우! 일단 대기실까지 음료수 들어드릴게요.”

“그래줄래? 고마워.”

호의를 거절하지 않고 음료수를 건네준다. 그리고 팔짱을 낀 채 거의 끌고 가다시피 창현과 함께 대기실로 향했다.

‘흐흣, 이거 좋은데? 좀 더 시간을 끌까? 우움! 어떻게 시간을 끌지?’

남자도 아니었건만 팔에서 느껴지는 감촉에 태연은 속으로 음흉한 웃음을 지으며 어떻게 하면 합법적으로 대기실까지 도달하는 시간을 지연시킬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때, 대기실 문이 열리더니, 한 사람이 밖으로 나온다.

어떻게 하면 시간을 지연시킬지 고민하던 태연은 불행히도 그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고민하던 태연의 귓가에 창현의 음성이 청천벽력처럼 울려 퍼졌다.

“아, 주현 누나, 오랜만이에요.”

“응, 창현아 오랜만이야.”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상상 속에서 빠져 나온 태연은 지금 자신의 상황을 즉각 파악할 수 있었다.

순간 그녀의 눈과 주현의 눈이 마주했고, 시선이 팔짱 끼고 있는 부분에 향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자 태연의 안색이 새하얗게 탈색되었다.

아주 고약하게 걸려버린 것이다.

“주, 주, 주현아, 이, 이, 이건 그러니까…….”

“언니가 오랫동안 오지 않으셔서 걱정되어 나왔어요. 무슨 일이 있는가 싶었는데 그건 아니었네요.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계셨으니까.”

“그, 그, 그…….”

이가 딱딱딱 부딪치며 뭐라 말이 나오지 않았다. 지금 상황은 심부름꾼 노릇을 하고 있다가 엎친 데 덮친 격이 되었다. 입가에 걸린 의미심장한 미소와 살벌하게 빛나는 눈동자를 보는 순간 태연은 자신의 미래를 직감했다.

어떻게든 상황을 풀어보려 했지만 몸과 머리가 따로 놀았다.

“일단 그 팔은 푸세요. 스캔들이 날 수도 있잖아요.”

“응응, 그래야겠지? 하하! 내가 실수를 했네.”

주현의 말이 태연은 훈련 받은 군인 마냥 재빨리 팔을 빼고 어색하게 웃음을 지었다. 아무 말 없이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던 주현은 창현에게 시선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이곳에는 무슨 일이야?”

“저도 OT 행사에 참가하기로 해서요. 일단 안으로 들어가서 인사를 해도 될까요? 이거 은근히 무겁네요.”

“응, 그러자. 언니도 오세요.”

“알았어.”

창현과 주현이 어깨를 나란히 한 채 대기실 안으로 들어갔고, 그 뒤를 따라 태연이 걸음을 옮겼다.

안으로 들어서는 태연의 양 어깨가 아래로 축 처져 있었다.


창현이 대기실 안으로 들어서자, 메이크업을 끝내고 잡담을 나누던 소녀들은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그를 맞이했다.

게임에서 이겼는지 순규에게 강력한 딱밤을 선사하던 수영이 가장 먼저 발견하고는 소리친다.

“창현이 네가 여기 무슨 일로?”

“저도 오늘 초대 게스트거든요. 오랜만이에요, 누나들.”

“게스트? 창현이 넌 행사 안 하지 않았어?”

“아버지 친구 분이 이곳 교수님이라서요. 그래서 왔죠.”

“그렇구나. 그나저나 미국 생활이 좋았나 봐? 때깔이 더 좋아졌는데?”

가장 먼저 말을 건 수영이 대화를 주도하면서 팔로 창현을 툭 친다. 그녀의 칭찬에 창현은 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요? 하하하! 미국 물이 좀 좋긴 하더라고요.”

“…….”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하는 창현이었지만 그 말을 듣고 눈에 띄게 표정이 굳어진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유리였다.

뭐 눈에 뭐 밖에 보인다랄까. 말로 지영을 현혹시켰던 유리는 창현이 말한 것 중 미국 물 = 금발 미녀로 해석되었다.

‘정말 금발 미녀에게 유혹받은 거 아냐? 그러고 보니 스캔들 난 대상들도 하나같이 금발 미녀들이었고, 걔네들은 성적으로 무척 개방적이라 들었는데.’

하나가 마음에 걸리기 시작하자, 다른 것들도 마음에 걸렸다.

특히 전과 달라진 그의 분위기는 유리를 더욱 불안감으로 몰아넣었다.

‘그러고 보니 전보다 분위기가 어른스러워졌어. 마치 어른의 세계에 입문한 것 같은… 헉!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아직 정해진 건 없어. 괜히 앞서 나가지 말자, 권유리.’

힘차게 고개를 저은 유리는 대화를 나누고 있는 창현에게 시선을 두었다.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난 소녀들에게 둘러싸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대화 주도권을 빼앗겨서 끼는 것조차 힘들었지만 유리는 다급해하지 않았다.

‘흥! 그렇게 공작을 펼쳐도 어머님이랑 친해진 내가 절대적으로 유리해.’

그렇게 생각한 유리는 대화에 주도적으로 끼지 않은 사람의 면면을 훑는다. 뒤에서 관전하고 있는 사람은 총 네 명. 태연과 수연, 미영과 주현이었다.

범죄(?)를 저지른 태연은 주현의 눈치를 살피며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고, 수연은 즐겁게 대화하는 창현을 보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있었다. 그리고 미영은 묘한 빛이 감도는 눈으로 창현을 바라보다가 유리와 허공에서 시선이 마주했다.

파직! 파지직!

스파크가 일어날 정도로 치열한 눈 싸움이 벌어졌다. 에너지를 아끼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말은 없었지만 창현이 온 이상 보이지 않는 전쟁은 시작되었다.

♩♪♬

“응?”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창현은 핸드폰이 울리자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한 사람은 다름 아닌 세희였다.

-창현아, 이제 슬슬 메이크업 하고 의상도 갈아입어야 하니 대기실로 돌아와.

“어라?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어요? 빨리 갈게요.”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는 걸 깨닫게 된 창현은 가겠다는 말과 함께 통화를 끊었다. 수영은 아쉬움이 잔뜩 담긴 표정으로 창현에게 묻는다.

“벌써 가려고?”

“저도 준비를 해야 하니까요. 누나들이 먼저 무대 위에 서겠지만 저도 미리 준비를 끝내놔야죠.”

“음, 그것도 그러네. 그럼 조금 있다가 무대 위에서 보자.”

“네, 막 왔는데 이야기 못해서 저도 아쉽네요. 아, 그리고 누나들, 인사 못해서 미안해요. 조금 있다가 봐요.”

제대로 인사를 나누지 못했던 수연과 미영, 유리에게 말하자, 그녀들은 제각각 고개를 끄덕이며 답해준다.

“으응.”

“헤헤, 역시 날 잊지 않았네.”

“조금 있다가 보자.”

손을 흔들어 보인 창현은 창현이 대기실을 나섰다.

쾅.

“…….”

문이 닫힌 대기실은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자리하였다. 한순간 어색해진 분위기는 선뜻 깨기 힘들 정도로 기이한 구도를 이루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어색하게 변해가는 분위기를 깬 것은 주현이었다.

“언니들. 할 이야기가 있어요.”

“뭔데?”

“방금 전 태연 언니가 들어올 때요…….”

주현은 대기실 밖에서 태연이 했던 만행(?)에 대해 샅샅이 고했다. 이야기가 흘러나오자, 차츰 소녀들의 표정이 변해가기 시작했고, 태연의 얼굴은 다시 한 번 창백하게 변해갔다.

결코 알려져서는 안 될 자신의 만행이 만천하에 알려지는 순간이었다.

모든 진실을 폭로한 주현은 미안한 어조로 태연에게 말한다.

“규칙 중 멤버들간에 비밀은 없어야 한다는 것 때문에요.”

말은 그랬지만 표정은 하나도 미안하지 않아 보였다. 오히려 뒤에 벌어질 일에 설레는 표정을 짓는 악동같은 표정이 자리했다.

“자, 잘못했어.”

재빨리 권력자 수연에게 고개를 돌려 용서를 구한다. 권력을 쥔 그녀가 용서해준다면 자신은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함께 고생했던 그녀라면 자신의 진심이 전해질 터!

그녀의 진심이 전해졌음인가. 태연에게 시선을 고정한 수연이 예쁘게 웃음을 지었다. 마치 그녀의 마음을 모두 이해해주겠다는 것처럼. 하지만 입에서 흘러나온 내용은 정반대의 것이다.

“잘못한 건 알고 있네. 창현이를 이곳으로 데려온 공적은 인정해주겠지만, 규칙은 규칙. 진실을 발설하지 않았으니 어쩔 수 없네. 주현아, 태연이한테 벌점 몇 점?”

“10점이요.”

쿠구궁!

주현의 말에 태연은 몸을 가누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윤아와 투톱을 달리던 태연은 벌점 10점이 가산되면서 단독 질주를 달리게 되었다.

그것은 영구 하녀 당첨과 같았다.


흥겨운 공연들이 펼쳐졌다. 새로 입학한 09학번들이 앞으로 지켜나가야 할 사항들을 알려주는 시간이 지나자, 대학교 각 동아리가 자신들의 역사(?)를 소개하며 그동안 준비한 공연들을 펼쳐보였다.

점점 동아리의 공연이 끝나가자, 신입생들의 눈에 기대감이 서리기 시작한다.

누가 뭐라 해도 OT의 백미는 바로 그 날 초대 된 연예인의 공연이었다.

동국대학교는 서울에서 일류로 평가받는 만큼 제법 인지도 있는 연예인을 초대했을 것임이 분명했다. 그런 신입생의 기대를 읽기라도 한 듯, MC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진행을 해나간다.

“자, 과연 오늘 초대 게스트는 누구일까요?”

“원더걸스! 빅뱅! 슈퍼주니어! 소녀시대!”

각자의 바람을 담은 연예인이 터져 나오며 강당 전체에 울려 퍼졌다. 남자 신입생들은 하나 같이 여성 걸 그룹 혹은 여성 가수를 외치고 있었으며, 여자 신입생들은 남자 아이돌이나 남자 가수를 외치며 누가 나왔을지 기대감을 증폭시키고 있었다.

한참 뜸을 들인 MC는 어느 정도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싶자, 곧바로 초대 게스트를 소개한다.

“오늘의 초대 손님은 바로 소녀시대입니다.”

MC의 외침과 함께 동시에 흘러나오는 <Gee> 반주, 누구의 이름이 언급될지 기다리던 신입생들은 소녀시대라는 그룹명이 언급되자, 떠나가라 함성을 질렀다.

와아아아아아아!

무대 위로 올라오는 여덟 명의 소녀들.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트레이드 마크와도 같이 되어버린 스키니 진을 입은 채 곧바로 무대에 열중하기 시작한다.

한 달여라는 시간 동안 <Gee>라는 폭풍은 그동안 쌓아놓은 반석 위에 탄력을 받아 대한민국 전역을 휩쓸고 있었다. 원더걸스에 밀려 만년 2인자, 아니, 2008년 하반기에는 카라보다도 못하게 되었지만 저번 달에 발매된 앨범은 그녀들을 단숨에 걸 그룹 정상으로 등극하게 하였다.

재학생과 신입생, 특히 남학생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으면서 소녀들은 열정적인 공연을 펼친다.

오늘 이곳 대학의 신입생인 윤아가 비록 무대 위에 올라가지 못했지만 여덟 명의 소녀가 펼치는 공연은 남학생들의 넋을 빼놓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잘하는데요?”

메이크업을 받던 창현이 나직한 소감을 말하자, 세희도 맞장구 친다.

“그렇지? 나도 깜짝 놀랐다니까. 잘 될 것 같다는 느낌을 받기는 했는데 설마 이 정도로 잘 될 줄이야.”

“그야 그동안 노력을 해온 게 있으니까요.”

“노력을 많이 하기는 했지. 정상에 대한 욕심이 유달리 강한 애들이었으니까. 그 집념이 나한테까지 전해질 정도였으니 할 말 다한 거겠지.”

“그래요? 정상에 대한 집념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는 그동안의 노력이 꽃을 피운 거라 생각했는데 말이죠.”

정상에 대한 집념이 꽃을 피웠다고 말하는 세희와 그동안의 노력이 꽃을 피웠다고 말하는 창현. 얼핏 들으면 다르게 들렸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정상에 오르기까지 피나는 노력이 있었다는 점이다.

자신보다 오래 보아왔던 창현의 말을 세희는 부인하지 못했다.

“그런가? 그럴지도. 어쨌든 네가 미국으로 간 다음에도 애들이랑 종종 만났는데 이번 앨범에 관련해서 의욕이 장난 아니더라고. 나조차 질릴 정도였다니까?”

“일 안하고 사적으로 만났다고요? 업무 태만이에요, 그거.”

“세상은 요령껏 사는 거야, 창현 군. 들키지 않았으니 된 거지.”

“…….”

농담조로 말했건만 사회에 찌든 세희의 한 마디는 창현을 침묵시키기에 충분했다. 그 사이, 소녀시대의 열정적인 무대는 어느덧 끝을 맺고 있었다.

“어, 벌써 끝나가네. 한두 곡 정도 더 하면 창현이 너 나가야 하니까 서둘러야겠다. 메이크업, 좀 더 서둘러주세요.”

“네에!”

낭랑한 메이크업 아티스트들의 외침과 함께 창현의 변신(?) 속도가 점점 빨라지기 시작한다.

자신의 얼굴에 칠해지는 화장을 보며 창현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에휴! 난 이 시간이 정말 싫더라.”

“포기해. 연예인 계속하고 싶으면.”

“끄응.”

앓는 소리를 흘리는 창현이었다.


“모두 즐거우셨죠?”

네에에에!

<Gee>에 이어 <Kissing You>와 <소녀시대>까지 부르자, 장내는 열광의 도가니에 휩싸였다. 소녀시대의 등장에 실망하던 여학생들조차 자리에서 일어나 즐겁게 자리를 즐기고 있었다.

“후후, 오늘 윤아가 신입생이어서 무척 뿌듯한데요. 앞으로 윤아가 학교에 가면 너무 괴롭히지 말아주세요. 우리 막내가 본격적인 캠퍼스 라이프를 즐길 수 있게요. 아셨죠?”

네에에에!

탱구도 동국대 와라!

와아아아아!

라디오 DJ를 해서인지 태연의 진행은 매끄러웠고, 급기야 남자 신입생들은 눈이 뒤집혀 태연을 입학시키려는 만행(?)을 저지르고 만다. 문제는 신입생들 뿐만 아니라 재학생들마저도 합세하여 그러고 있었다.

본래 소녀시대 내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축에 속하던 태연은 정형돈과 우결을 찍게 되면서 급속도로 동정표가 집중, 그 덕에 소녀시대 내에서 가장 많은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그 중 절반이 동정표라는 것이 문제였지만.

“네! 저도 마음 같아서는 캠퍼스 라이프를 즐기고 싶은데요. 해야 할 스케줄이 많아서 아쉽게도 불가능하네요. 그 기회는 다음으로 미루도록 하고요.”

입가에 싱글벙글 미소를 짓고 있는 태연의 능수능란한 진행을 옆에 있는 수영이 이어받는다.

“오늘 이렇게 공연을 하게 되고, 윤아의 빈자리를 채우느라 저희들 모두 허리가 삐끗할 지경입니다. 아무래도 OT가 끝나면 윤아한테 꽃등심을 사라 해야겠어요.”

와아아아아!

식신 수영!

소녀시대 1, 2위를 다투는 입담다운 모습을 보였지만 들려오는 단어에 수영은 눈이 뒤집히고 말았다.

“누구야! 누가 나한테 식신 수영이랬어! 열심히 행사를 했으니 에너지 보충을 하는 건 당연한 거라고! 당장 나와!”

“얘들아! 수영이 말려!”

모두가 폭주 모드에 들어간 수영을 뜯어말리는 사이, 주현이 나직이 중얼거린다.

“전 별로 안 힘든데…….”

10대의 체력은 위대하여, 아직도 체력이 방전되지 않은 주현이었다. 그 말에 안 그래도 앙금이 남아있던 태연이 이마에 사거리 마크를 새겨넣으며 말한다.

“막냉이 뭐라고? 안 힘들다고? 그래! 너 젊어서 좋겠다, 이것아.”

와하하하하!

겉모습으로는 막상막하를 다투는 태연이 폭발하자, 학생들이 즐거운 듯 웃음을 터뜨렸다. <Gee>가 발매되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게 된 소녀시대는 SM엔터테인먼트의 홍보 전략으로 인해 아이돌 특유의 신비감을 지니게 되었다.

머나 먼 뜬 구름 위에 살 듯한 그녀들이 이렇듯 인간적인 면모를 보이자, 연예인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한 듯하여 무척 즐거운 표정이었다.

“아차차, 저희가 추태를 보였네요. 이제 저희들의 시간이 모두 끝나가는 데요. 여러분 어때요? 우리 윤아가 올라와 아홉 명인 소녀시대가 마지막 무대를 꾸미는 건?”

신입생들이 운집해 있는 중앙에 서 있는 윤아를 보며 태연이 제안하자, 당연히 뜨거운 반응이 터져 나온다.

윤아! 윤아! 윤아! 윤아!

학생들의 폭발적인 지지에 윤아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며 손을 양옆으로 저었지만, 이미 무대 아래로 내려온 유리와 효연이 그녀의 양팔을 붙들고 있었다.

“어딜 빼려고. 윤율은 하나란 말씀!”

“흐흐, 초딩 양. 빠질 생각은 말게나.”

“안 돼요. 언니, 나 목도 안 풀었고 몸도 안 풀…….”

필사적으로 몸을 뒤틀었지만 그대로 끌려가는 윤아였다.

무대 위로 윤아가 올라가자,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언제 준비했는지 주현은 마이크를 윤아에게 내밀었고, 태연이 다가와 히죽 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포기해. 이미 늦었어.”

“히잉.”

앓는 소리를 내며 어쩔 수 없이 마이크를 쥐는 윤아였다. 그때, 태연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멤버들에게 눈빛을 보낸다. 권력을 잃은 그녀는 식모와 다름 없는 나날을 보냈지만 이럴 때는 완벽한 리더였다.

태연의 눈빛에 순식간에 하나로 담합하는 소녀들. 그녀들의 입가에도 태연과 비슷한 미소가 걸리더니, 하나둘씩 고개를 끄덕인다.

마이크를 넘겨받은 수연이 입가에 짓궂은 미소를 띤 채 말한다.

“아쉽지만 마지막 곡을 할게요. 마지막 곡은 저희들에게 무척 감명 깊은 곡입니다. 이 곡을 받는 순간 저희들은 환호했고, 밤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즐거워했죠. 그리고 지금의 소녀시대를 있게 해준 노래이기도 합니다.”

“…….”

수연의 말을 들은 윤아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역력한 불안감이었다.

‘설마…….’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조마조마하게 수연을 바라보는 윤아.

그때, 허공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한다. 수연의 입 꼬리가 말려 올라가더니, 마치 판사처럼 판결을 내린다.

“저희들이 부를 곡은 바로! <다시 만난 세계>입니다.”

“마, 맙소사! 안 돼!”

와아아아아!

윤아의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그것을 뒤덮는 것은 거대한 함성 소리였다.

선풍적인 인기를 누리지 못한 곡이지만 <다시 만난 세계>는 남성들에게 절대 잊을 수 없는 노래였다. 특히 군대를 다녀온 남자들의 경우 더욱 그러했다.

<다시 만난 세계>의 백미는 당연 발차기 춤이다. 치마만 둘러도 열광하는 군인들이 소녀시대의 발차기 춤에 얼마나 열광했던가!

무엇보다 남자들이 열렬하게 열광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지만.

“어, 언니!”

“그럼 시작할게요.”

윤아가 무어라 말을 하려 했지만 수연의 말을 끝으로, MR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제지하려던 윤아는 반사적으로 대형을 갖췄고, 곧바로 <다시 만난 세계> 안무를 추었다.

“안 되는데…….”

윤아의 얼굴은 울상이 되었다.


와하하하!

함성 소리와 웃음소리가 강당을 가득 뒤덮었다.

처음으로 아홉 명이 되어 펼치는 <다시 만난 세계> 무대는 우스꽝스러웠다. 신입생인 윤아는 시종일관 제대로 안무를 맞추지 못한 채 번번이 틀리기 일쑤였던 것이다.

그녀에게는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다. 워낙 갑자기라는 핑계는 시시했다. 그것을 뛰어넘을 만큼 충분한 연습이 되어 있었지만 그녀를 괴롭게 만드는 것은 짧은 미니스커트를 입고 왔다는 점이다. 날씬한 각선미가 고스란히 드러나 남자들의 목을 타게 만들었지만 그 미니스커트가 안무를 펼치는데 방해가 되고 있었다.

번번이 틀리지만 열심히 안무를 따라하던 윤아의 머릿속은 어지러워졌다.

‘어떻게 하지.’

그녀를 괴롭히는 것은 <다시 만난 세계>의 백미인 발차기 춤이었다. 다른 멤버들은 스키니진을 입었지만 신축성이 좋아 발차기를 소화할 수 있었지만 자신은 짧은 치마를 입고 있다.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제대로 안무를 못 맞추고 있는데 발차기를 할 수 있을 리 없지 않은가.

시간이 흐를수록 윤아의 얼굴이 울상으로 변해갔다.

노래는 빠르게 흘러갔고, 서서히 클라이막스를 향해 달렸다.

그때, 강당을 뒤덮는 러브 콜(?)

차라! 차라! 차라! 차라!

그 말은 다름 아닌 윤아를 향한 것. 자신에게 집중되는 관심에 윤아의 얼굴이 점점 울상으로 변한다.

‘정말 차버려?’

자포자기 심정이 들어 불쑥 그렇게 생각했지만 윤아의 머릿속에 경종이 울려 퍼졌다. 여기에서 자폭을 하게 되면 소녀시대 윤아! 속옷 드러내! 라는 식의 기사가 평생 따라다닐 것임이 분명했다.

‘안 돼! 그럴 순 없어.’

여기서 순결(?)을 잃을 수는 없었다.

마침내 발차기 안무가 펼쳐질 때, 윤아의 눈이 순간 반짝이더니, 그대로 무대에서 넘어진다.

안무를 펼치던 소녀들은 화들짝 놀라 윤아에게 달려간다.

“윤아야! 괜찮아!”

“윤아! 안 다쳤어?”

“…전 괜찮아요.”

“괜찮다니! 방금 넘어지는 거 다 봤는데! 우리가 미안해. 장난기가 도져서 그만…….”

“일단 내려가자.”

수연의 주도 하에 윤아가 급히 아래로 내려갔다.

진행요원들의 호위를 받으며 아래로 내려가는 윤아.

누구도 보지 못했을 것이다.

내려가는 윤아의 입가에 걸린 야릇한 미소를.

돌연변이가 된 사슴은 날로 진화하고 있었다.


멤버들의 부축을 받아 무대 아래로 내려간 윤아. 많은 팬들은 갑자기 주저앉은 윤아를 보며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자신들의 무리한 요구로 윤아가 부상 입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자 아찔했다.

많은 사람들이 걱정하는 눈으로 바라보자, 윤아는 양심이 찔렸다.

‘칫! 언니들을 완벽하게 속일 수 있었는데.’

연기력을 발휘하면 멤버 여덟 명을 낚을 수 있었지만 양심이 찔리자, 윤아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젓더니, 자신을 부축하고 있는 효연과 유리에게 말한다.

“언니들, 저 괜찮아요.”

“정말 괜찮은 거야?”

사물을 관찰하듯, 날카로운 눈을 하던 유리가 지금은 걱정을 가득 담아 묻는다. 마음이 뭉클했지만 윤아는 연기를 풀지 않았다.

‘여기에서 연기를 풀면 난 죽어.’

탁월한 생존 본능을 터득한 사슴은 연기를 이어나간다.

“네, 괜찮아요.”

“그래도 걱정되는데… 우리가 미안해. 장난이 너무 지나쳤지?”

효연마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자, 콕콕 찔리는 양심을 가까스로 다잡으며 윤아가 말했다.

“괜찮아요, 전 괜찮으니까 올라가세요. 아직 순서가 끝난 게 아니니까요. 언니들은 프로잖아요.”

“올라가자, 효연아.”

“…알았어.”

유리의 말에 효연은 윤아를 힐끔 보다가 무대 위로 올라간다.

두 사람이 모두 올라간 걸 확인한 윤아의 얼굴에 힘겨워하는 안색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그 자리를 대신 한 것은 장난스러운 미소였다.

오늘 밤이 두려웠지만 장난을 성공했을 때 느껴질 쾌감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언니들, 저는 괜찮으니 안심하세요.”

손을 크게 휘휘 저으며 윤아가 외친다.

“……?”

상황을 이해 못한 듯 고개를 갸웃하는 소녀들.

부상 입었다 생각한 윤아가 갑자기 활기찬 목소리를 내자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를 이해하지 못했다. 잠시 후, 폴짝폴짝 뛰는 모습을 보이자, 눈치 빠른 멤버들이 이를 갈기 시작했다.

“으으, 임윤아!”

“설마 우리를 속인 거야?”

“가녀린(?) 우리 마음에 상처를…….”

“…멤버들에게 거짓말을. 벌점 10점이에요, 언니.”

마지막에 이어진 주현의 말을 들었으면 뒷목을 잡고 쓰러졌을 윤아였다. 멤버들에게 거짓말 하는 규칙 위반을 저지른 윤아의 죄는 그만큼 컸다.

만약 주현의 반응을 예상했다면 절대 장난을 안 쳤겠지만 이미 일은 벌어졌다.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치미는 배신감을 느낀 소녀들이었지만 아쉽게도 수많은 눈이 자신들을 주시하고 있는 중이다.

본 모습을 보여주는 건 숙소에서도 충분했다.

침착하게 마음을 가다듬은 뒤, 소녀들은 아쉬운 이별을 고했다.

“아쉽지만 저희는 이제 물러나야 할 시간이에요.”

우우우우! 한 곡만 더 불러달라!

소녀들의 말에 학생들은 짙은 아쉬움을 표현하며 야유를 터뜨렸다. 하지만 정해진 시간을 모두 사용한 소녀들은 어쩔 수 없었다. 오늘 OT 스케줄 말고도 그녀들을 원하는 곳은 많았다.

“저희들도 여러분들과 더 있고 싶지만 스케줄이 있어서요. 대신 뒤의 시간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유쾌할 거란 걸 장담드리겠습니다.”

호언장담하는 태연이었지만 그 말을 믿는 학생들은 많지 않았다.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는 소녀시대의 뒤를 이어 나올 게스트가 얼마나 큰 이미지를 주겠는가. 당연히 믿을 수 없었다.

그 모습을 보며 혀를 차던 수영이 태연의 손에서 마이크를 강탈하며 말한다.

“뒤이어 나올 게스트가 하나 더 있습니다. 그걸 아시나요?”

아니요!

그냥 소녀시대가 노래 불러줘요!

열렬한 소녀시대 팬들이 노래를 불러달라고 했지만 수영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말을 잇는다.

“뒤에 나올 게스트는 저희들보다 훨씬 인지도도 있고, 인기도 많습니다!”

수영의 외침에 순간 학생들의 머릿속에 의문 부호가 떠올랐다. 정상의 인기는 아니지만, 최고의 흐름을 이어나가고 있는 소녀시대가 선뜻 말할 정도면 보통 수준의 연예인이 아니란 걸 암시했다.

도대체 누구일까?

여러 명의 후보가 머릿속에서 스쳐지나갔지만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학생들의 궁금증을 한껏 불어넣은 수영이 입가에 흐릿한 미소를 지을 무렵, 무대를 두리번거리던 효연이 무대 뒤쪽에 대기하고 있는 창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치자, 창현이 눈을 찡끗하며 한 동작을 펼쳤다. 그것을 본 효연이 입가에 묘한 미소를 짓더니 고개를 나직이 끄덕인다. 그리고는 한참 학생들에게 궁금증을 불어넣고 있는 수영에게서 마이크를 빼앗아 들며 말한다.

“여러분, 게스트가 누구인지 궁금하죠?”

네에에에!

수영의 재치 있는 입담으로 인해 소녀시대가 떠나는 것보다 다음 게스트가 누구인 것이냐에 대해 궁금증을 품게 된 학생들이다.

입 꼬리를 말아 올린 효연은 평소 멤버들을 대하는 것처럼 절정의 효능감을 발휘하며 학생들을 구워삶았다.

“수영이가 이렇게 말했으니 궁금할 거예요. 과연 뒤이어 나오는 사람은 누구일까. 혹시 소녀시대가 빠져나가기 위해 뻥치고 있는 게 아닌가, 이런 생각 등이요.”

하하하!

효능감은 학생들에게 통했다. 학생들이 웃음을 터뜨리며 서서히 효연의 말에 빠져들었고, 그녀는 더욱 능수능란하게 상황을 주도했다.

마이크의 주도권마저 장악한 그녀는 길고 길었던 게스트 정체 공개에 나선다.

“자, 지금부터 게스트 공개에 들어가겠습니다. 뒤를 이어줄 게스트는 조금 부끄러움이 많은 분이라, 모자를 쓰고 나오셨네요. 제 말이 거짓인지, 진짜인지 한 번 확인해보시길 바랍니다. 그럼 다음에 기회가 되면 또 만나요.”

이미 무대 뒤에서 대기하고 있는 창현을 한 번씩 본 소녀들이기에 효연의 말과 함께 인사를 한 뒤 무대를 벗어난다.

“…….”

소녀들이 퇴장하자, 무대를 비추던 조명이 꺼지며 한동안 침묵이 내려앉았다. 한껏 기대를 심어준 소녀들. 다음 게스트는 누구일지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누굴까? 누구지?

궁금증을 발산했지만 게스트는 나타나지 않았다.

웅성거림이 조금씩 커질 무렵, 어두워졌던 무대가 밝혀졌다.

파앗!

조명이 비춰진 무대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학생들이 고개를 갸웃거릴 때, 갑작스러운 노래가 흘러나온다. 가수가 노래를 부르기 위해 깔리는 MR이 아닌, 마이클 잭슨이 환상적인 문워크를 선보였던 <Billie Jean>이었다.

호우!

공간을 울리는 소리와 함께 무대 뒤에서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낸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문워크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모자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 누구인지 식별하기 불가능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체형으로 보아 남자라는 점뿐이었다.

누구지?

학생들의 얼굴에 떠오른 공통된 의문이었다. 의문이 들었지만 그가 펼치는 절정의 문워크는 절로 감탄을 터뜨릴 정도로 대단했다.

학생들의 의문에도 불구하고 문워크만으로 모습을 드러낸 그는 무대 중앙에 선다. 그리고 모자로 얼굴을 가린 채 조용히 서 있는다.

와이셔츠와 정장바지만 입고 있었지만 빼어난 몸매는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얼굴이 드러나지 않았지만 살짝 드러난 턱선은 여학생들을 뒤흔드는 강렬한 페로몬을 발산했다.

“…….”

고요하게 가라앉은 분위기.

시선을 사로잡는 문워크로 파격적인 모습을 드러낸 인물이었기에 모두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모자를 치우지 않았다.

치워라! 치워라!

참지 못한 몇몇 학생들이 선동하자, 강당 안에 있던 학생들이 전염되듯, 하나둘씩 얼굴을 가린 모자를 치우라 외치기 시작했다. 특히 남자의 얼굴에 기대감을 품은 여학생들이 열렬했다.

남자들이 소녀시대로 재미 좀 봤으니(?) 이젠 자신들이 재미를 볼 차례다!

이것이야 말로 남녀평등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모자는 치워지지 않았다.

그러자 참을성이 바닥난 몇몇 학생들이 소리치려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무대 위로 한 사람이 올라왔던 것이다. 그는 조금 전 학생들에게 총 학생회장이라 소개했던 인물이었다.

정장 상의를 가지고 온 그는 서 있는 인물에게 인사를 하더니, 공손하게 옷을 입혀주기 시작한다.

모자를 잡지 않은 왼손을 들어 옷을 입었고, 왼손으로 모자를 잡은 뒤 오른손마저 옷을 입는다.

옷을 모두 갖춰 입은 그는 학생회장이 건네주는 마이크를 잡는다. 그리고 얼굴을 가린 모자를 살짝 위로 들자, 여학생들의 감탄사가 터져 나온다.

꺄아아아아!

드러난 턱선에 이은 입술! 얼굴을 보지도 않았건만 클로즈업 된 것 마냥 기대감을 심어주는 얼굴이다.

비명이 잦아들자, 입가에 흐릿한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헛기침을 하기 시작한다.

“흠! 흠! 흠! 안녕하세요, 여러분.”

“……!”

헛기침이 거듭됨에 따라 시큰둥하던 학생들의 얼굴에 점점 경악스러워진다. 점점 변하는 목소리는 남자의 것이 아닌, 방금 전 무대 위에 올라왔던 윤아의 것이었다.

남자가 아니었단 말인가.

윤아 또한 자신의 목소리를 변조해내는 남자의 능력에 경악하는 표정을 지었다. 큰 특징이 있는 것도 아니건만 자신의 목소리를 완벽하게 변조해내는 능력이라니?

경악하던 윤아의 머릿속에 이 정도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해내는 괴물(?)의 이름이 떠올랐다.

‘서, 설마!’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저 능력 때문에 자신이 만원의 행복에 패하여 굴욕을 당했는데!

혼란스러워하는 학생들을 향해 그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진다.

“많은 무대 위에 섰지만 이런 자리에 서게 되니 떨리네요. 특히 소녀시대 분들이 워낙 잘해주셔서 더 긴장되네요.”

크지 않았지만 또렷한 목소리는 학생들의 귀를 사로잡았다.

남자의 체형임에도 불구하고 여자의 목소리를 내는 그의 정체는 무엇인가.

“설마, 설마…….”

몇몇 학생들은 어림짐작을 한 듯, 설마를 연발하며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어떤 가수의 광팬인 그들은 윤아의 목소리를 변조할 만큼의 실력자를 알고 있다.

날렵한 턱선과 유혹하는 듯한 입술의 소유자 또한!

학생들의 애를 닳게 하고, 윤아의 목소리지만 절대 거부할 수 없는 마력을 담고 있는 그!

점점 수군거림이 번져 나가자, 입 꼬리를 말아 올린 그가 말한다.

“장난은 이쯤이면 좋겠네요. 몇몇분들은 제 정체를 알아차리신 것 같고요. 그렇죠?”

처음에는 윤아의 목소리였지만 뒷 문장을 말하는 것은 남자의 목소리였다.

자신의 정체를 시인하자, 여학생들의 눈이 동그랗게 변하더니, 이구동성으로 외친다.

네에에에!

“입이 근질근질하시겠지만 제 정체는 스스로 말할 기회를 주시길.”

그 말과 함께 얼굴을 가리고 있던 모자를 치운다.

서서히 드러나는 그의 얼굴. 아직까지 무대 위에 선 무뢰한(?)의 정체를 알지 못하던 학생들의 얼굴에 경악이 번지고, 이미 짐작하고 있던 사람들 또한 놀란다.

꺄아아아아아아!

뒤이어 터져 나오는 함성 소리에 강당이 뒤흔들리는 듯한 충격파가 일어났다. 그 함성은 남학생보다 여학생의 것이 압도적이었다.

격렬한 반응에 미소 지은 그가 고개 숙이며 자기소개를 한다.

“안녕하세요, 현입니다. 즐거운 시간 보냈으면 좋겠네요.”

그 말과 함께 그의 데뷔곡인 <Go&Stop> MR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TV로 보던 것과 실제로 보는 것이 다르다.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오늘 확실하게 깨닫는 동국대학교 학생들이다.

매체에서 접하던 창현은 현대판 세계의 황태자와도 같은 인물이다.

잘생긴 외모는 두 번째로 친다. 관점에 따라서는 그보다 잘생겼다 평가되는 사람들은 많으니까.

그를 진실로 빛나게 만드는 것은 자체적으로 풍겨내는 아우라와 성격, 그리고 실력이다.

실력 같은 경우 세계 정상에 올라선 것으로 증명할 수 있지만 자체적으로 발산되는 아우라와 성격은 증명할 길이 없다.

그 때문에 몇몇 사람들은 현에 대해 상당 부분 의문을 품고 있었다.

실제로 보면 정말 정말 분위기가 장난 아닐까?

실제로 보면 정말 소문대로 성격이 좋을까?

한 번이라도 그를 본 사람은 헤어나오지 못한다는 말을 많은 사람들은 은연중 공감 못했으며, 정말 성격이 좋은지도 의문을 가졌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은 오만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 아닌가. 그렇기에 이상하리만치 나쁜 소문은 하나도 없는 현에 대해 많은 사람은 의문을 품었다.

그러나 오늘 이 자리에서 보는 순간, 한 가지만큼은 확실하게 의문을 풀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가 발산하는 분위기.

분위기는 사람을 더욱 멋지게 만들고, 더욱 호감형으로 만든다.

TV로 볼 때 은은하게 전해지던 그의 아우라에 직접 맞대는 순간, 학생들은 빨려 들어가는 듯한 충격을 받아야만 했다.

입가에 흐릿한 미소를 지은 창현은 여유가 넘치는 모습으로 노래를 시작했다.

첫 데뷔곡이자, 얼굴 없는 가수 현을 알린 <Go&Stop>은 무시무시한 고음으로 많은 사람들의 귀를 사로잡은 곡이다. 멋진 고음 처리로 단숨에 인지도를 얻은 현의 대표곡으로서, 아직도 열렬한 지지를 받는다.

때로는 답답하게 하여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옥죄었으며, 때로는 시원하게 내질러 막힌 가슴을 뻥 뚫어준다.

아는 것만큼 볼 수 있기에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을 자유자재로 조종하는 듯한 현의 노래에 빠져들었다.

노래를 잘 부르면 자연스럽게 조성되는 분위기는 사람을 더욱 매력적으로 보이게 만든다. 자연스럽게 빠져드는 창현의 노래에 사람들은 왜 그에게서 헤어나오지 못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강당을 뒤흔드는 어마어마한 고음이 울리며, 노래를 끝맺는다.

듣는 사람들이 질릴 정도로 큰 음역대를 자유자재로 소화해낸 창현이었지만 땀조차 흘리지 않았다.

입가에 미소를 지은 그가 멍하니 바라보는 관객들을 향해 고개를 숙인다.

“…감사합니다.”

짝짝짝짝!

꺄아아아아아!

자지러지는 듯한 함성 소리가 울려 퍼졌다. 창현은 연신 고개를 숙이며 감사하다는 인사를 했다.

어느 정도 분위기가 가라앉자, 마이크를 들고 인사를 한다.

“안녕하세요, 현입니다.”

꺄아아아악!

여학생들의 함성 소리와 함께 다시 한 번 뒤흔들리는 강당. 소녀시대가 등장하면서 큰마음 먹고 단장한 자신들이 얼마나 뒤처졌던가? 밑바닥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부글부글한 마음을 간신히 부여잡고 있었는데 창현이 나타나자, 그녀들은 마음의 상처가 거짓말처럼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더하여 안구 정화도 톡톡히 하고 있었고.

함성 소리가 가라앉자, 여전히 미소 지은 채 창현이 말한다.

“…환영 인사 감사합니다. 특히 누나들이 많이 반겨주셔서 좋네요.”

누나래. 누나! 아아 죽어도 좋아.

현 짱! 관에 들어가도 난 현의 팬이야!

누나란 호칭에 눈이 뒤집힌 누나 팬들의 격렬한 호응이 이어진다. 그럴수록 남학생들의 입지는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비교 불가능의 인물이 나타나 여학생들의 눈을 몇 단계씩 높여주고 있었으니까.

이럴 때 하는 말이 바로 미꾸라지가 물을 흐린다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오늘 초대가수로 오게 되었습니다. 아쉬우실지 모르나, 오늘 초대 가수도 제가 끝이고요.”

그 말에 전혀 아쉽지 않다는 듯 외치는 여학생들이었다.

그에 힘을 얻은 창현이 말을 이어나갔다.

“감사합니다. 그럼 용기를 갖고 해볼게요. 오늘 전 단순히 노래를 부르는 게 아니라 다른 목적을 가지고 이곳에 왔는데요. 몇몇분들은 싫으실지 모르지만 제법 긴 시간을 함께 지내야 할 것 같습니다.”

전혀 싫지 않아요!

한 목소리로 외치며 속으로 ‘아싸!’를 연발하는 여학생들. 창현의 말이 사실이라면 오늘 그녀들은 진정으로 계를 탄 것임이 분명했다.

어느새 무대 위로 올라온 진행요원들이 의자를 마련해주었고, 창현은 그 위에 앉았다. 그리고 잠시 모습을 드러냈던 학생회장이 무대 위로 올라오더니 말한다.

“안녕하십니까. 오늘 가수 현 씨를 이 자리에 모시게 되어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 동국대학교는 가수 분들이 오셔서 단순히 즐긴 뒤 끝나는 OT가 아닌, 좀 더 의미 있는 OT를 만들고자 합니다. 그래서 마련된 것이 바로 가수 현 씨를 모셔서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입니다.”

학생회장의 말에 학생들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밤이 되면 밤새도록 술로 이어지는 것이 바로 OT다. 술에 떡이 된 학생들이 다음 날 이어지는 행사에 제대로 참여할 리 없고, 그 날 또 술로 이어지며 결국 술로 시작해서 술로 끝나는 것이 바로 OT였다.

그제야 재학생들은 전날, 교수들이 눈을 부릅뜨며 술자리를 강제종료 시킨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누구도 모시지 못했던 현이 오는데, 앞에서 빈대떡이나 부치고(?) 있으면 정말 기분이 뭐 같을 것이다.

“이 일은 극비리에 진행되어 제가 MC를 맡도록 하겠습니다. 진행방식은 제가 주도하고, 중요한 질문은 학생회에서 준비된 것으로 하겠습니다. 물론! 학생 분들의 의견을 무시할 수 없는 법. 하여 과마다 각각 세 가지 질문을 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대신! 겹칠 경우 생략당할 수 있으니 참신한 질문 선별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시간은 10분 드리겠습니다.”

참으로 기발한 방법이 아닐 수 없다.

스타를 앞세워 학생들이 창의적으로 머리 굴리게 만드는 수법이라니. 학생회장의 말이 떨어지자, 학생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야! 모여!”

과 학생들을 모집한 그들은 곧바로 참신한 질문을 만들기 위해 고심했다. 어찌 보면 술로 이어지는 술자리보다 더 유익한 자리가 지금이 아닐까 싶다. 참신한 질문을 한 신입생들은 선배의 이쁨을 듬뿍 받았고, 재학생의 경우 신입생의 우러름(?)을 받을 수 있었다.

10분이라는 여유가 생기자, 창현은 잠시 무대 뒤로 향했다. 몸을 돌리던 그는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윤아와 눈이 마주쳤다.

토끼처럼 동그랗게 변한 그녀의 눈을 보며 가볍게 손을 흔들어준 뒤 안으로 들어간다.

“분위기 좋은데?”

“그래요? 행사라는 것도 나쁘지 않네요. 어떻게 보면 콘서트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고.”

“콘서트는 무슨. 네 인기가 많아서 그런 거야.”

“제 인기가 좀 대단하긴 하죠.”

“뭐 저래.”

으스대는 창현을 보며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인상을 찌푸리는 세희였다. 무대 뒤에서 시시콜콜한 이야기로 10분을 보내자, 학생회장의 호명이 있고, 다시 무대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많지 않은 나이에 세계 최고로 우뚝 선 현과 이런 자리를 갖는 건 쉽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선 저희들이 준비한 질문을 하면서 과에서 준비한 질문들을 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질문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주로 관련된 이야기는 창현이 어떻게 세계에 우뚝 설 수 있게 되었는지에 대해서였다.

동국대학교에서 나름대로 세심하게 배려를 했는지, 그가 기분 나쁠 법한 질문은 존재하지 않았고, 하는 것들 또한 어렵지 않은 것이었기에 창현도 쉽게 대답할 수 있었다.

“세계적인 인지도를 얻게 되고, 그럴수록 자국민들의 기대로 인해 부담스러우실 텐데 그런 부담감은 어떻게 이겨내시나요?”

“일단 즐기려고 노력을 합니다. 전형적인 말이 있잖습니까? 그런 만큼 저는 스스로 행복하다 생각을 해요. 내가 좋아하는 걸로 이렇게 즐길 수 있다고. 많은 팬 분들이 좋아해주는 만큼 이보다 더 행복한 일은 없다고. 그러면 부담감보다는 잘해야겠다는 의욕이 생기더라고요.”

“아아, 그렇군요.”

어떻게 보면 전형적인 말이라 생각될 수 있다. 하지만 듣기에 따라서 다르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사람이 이런 말을 한다면 ‘헛소리’가 되겠지만 성공한 사람에게서 흘러나오는 말은 ‘명언’이 된다.

그가 어떻게 세계적인 가수가 되었는지 설명하는 자리였기에 많은 사람들은 귀를 쫑긋 세워 듣기 위해 노력했다.

그 모습을 보며 창현은 새로운 감흥에 빠져들었다.

‘새로운데?’

왜 석규가 자신에게 이 자리를 나가보라 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뻔한 것이고, 한 번쯤 해보았던 생각들이지만 이렇게 질문을 받게 되면 한 번 더 생각해보게 되고, 무심코 지나쳤던 것들을 깨닫게 된다. 평소에 알던 부분도 다시 한 번 되짚어보게 되자, 창현은 석규의 뜻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게 가능했다.

또 한 가지 깨달음은 바로 뻔한 것이 주는 감흥이었다.

남들이 식상하다 여길 수 있는 대수롭지 않은 말로도 감흥을 줄 수 있다. 이것은 흥미를 자극하고, 재미 또한 줄 수 있다는 말. 새로운 것에 대한 욕구가 강하던 창현은 뻔한 것의 재미에 대해서 다시 한 번 고민할 수 있게 되었다.

분위기가 너무 시리어스하게 진행되는 것 같다 여긴 걸까.

학생회장은 입가에 미소를 짓더니, 말한다.

“그럼 이쯤에서 학과에서 선택한 질문들을 들어볼까요?”

네에에에!

질문도 좋고, 대답도 좋았지만 자신들의 질문이 나오는 시간을 기다렸던 학생들은 한 마음이 되어 외쳤다.

너그러운(?) 학생회장은 그 바람을 들어주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지요. 괜찮겠습니까?”

“아, 물론이죠. 그 전에 먼저 다른 시간을 가져도 될까요?”

“다른 시간이라면?”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은 뒤, 윤아를 바라보며 말한다.

“이번에 새로 입학했으니 당연히 퀸카라 불러야겠죠? 동국대 신입생 퀸카인 윤아 씨에게 질문을 받아보고 싶은데요.”

꺄아아아아악!

안 돼애애애애!

마치 고백하는 듯한 창현의 말에 여학생들이 거품을 물며 결사반대를 외쳤다.

“아, 질문이요, 질문. 다른 건 아니에요. 자리도 자리인 만큼 윤아 씨가 절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궁금하고요.”

아아아아악!

확인 사살을 꽂는 창현의 말에 비명 소리가 난무했다.

콘서트를 자주 하더니, 이제는 팬들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창현이다.

그 사이, 차츰 모이기 시작한 시선이 윤아에게 모여들었다.

“아…….”

졸지에 화제의 집중이 된 윤아는 입을 벌렸다.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그녀의 머릿속은 벌써부터 무슨 질문을 해야 할지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당황했지만 돌연변이 사슴은 위대했다.

평소 장난에만 사용되어 언니들에게 이용당하던 윤아의 뇌가 본인의 의지와 다르게 활성화 되며 빠른 속도로 생각에 빠져들었던 것이다.

수백 명의 학생들이 생각했던 것들이 윤아의 머릿속에 집약되어 흘러가고 있었다.

‘어떻게 하지? 이 기회를 잘 살려야 하는데. 창현이한테 날 좋아하냐고 물어볼까? 아냐! 그건 안 돼. 그럼 호감 있는 여자가 있냐고 물어볼까? 그러다가 없으면? 그럼 좋아하는 여성상을? 어떻게 하지?’

위기 상황에 대처 능력이 늘어났지만 한계는 명확한 법이다. 그녀는 와룡파니나 사마율처럼 극한의 상황을 완벽하게 자신의 것으로 소화해내지 못했다.

‘안 돼! 내 머리야! 좀 더 생각을 해봐! 굴러들어온 기회를 놓쳐버리면 안 되잖아! 조금만 더 쥐어짜! 조금 더!’

당혹스러운 그녀의 표정이 서서히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핫!”

표정을 찌푸리던 윤아는 자신에게 집중된 주변의 시선을 깨닫고 곧바로 표정을 핀다. 그리고는 자신을 바라보는 창현을 보며 입을 열려 하였다.

짧은 시간에 대책이 나온 것인가.

그것은 아니었다.

지금 그녀의 심정은 그야 말로 될대로 되어버려라, 하는 심정 그 자체였다.

혼란스러운 그녀의 심정을 눈치 챈 창현은 입가에 피식 미소 짓고는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아! 마이크가 없어서 이야기하기가 힘들겠네요. 올라와주시겠어요?”

“아? 아아. 네.”

한 방 먹은 윤아는 멍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는 무대 위로 올라선다.

와아아아아!

무대 위를 밝혀주는 미모의 여성에 함성을 터뜨리는 남학생들. 현의 등장이 불만족스러울 리 없지만 본능에 의거하여 그들은 남자보다 여자에게 더 큰 함성을 질러주었다.

살짝 당황하던 윤아는 자신에게 지지를 보내주는 남학생들을 보며 미소 지었다.

저들은 자신의 사랑을 도와주는 큐피트(?)였다.

속 마음을 알았더라면 절규를 터뜨렸겠지만 그것은 윤아가 알 바 아니었다.

“사실 공적인 자리이기에 존댓말을 하지만 저랑 윤아 누나는 제법 친합니다. 그렇지만 주변 시선 때문에 자주 만나지 못했는데요. 오늘은 친한 누나 동생도 아니고, 가요계 선후배도 아닌, 행사를 온 현과 신입생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네요.”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말로 윤아를 궁지에 몰아넣는 창현이다.

그의 말에 윤아는 움찔했지만 방금 전과 달리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자, 하고 싶으신 질문은? 아무거나 얼마든지 물어보세요.”

미소 지은 채 권유하자 윤아는 더 이상 거절하지 않았다. 속마음을 들키는 것 같아 부끄러웠지만 여기 있는 수많은 여자들이 자신과 같은 마음 아니겠는가. 윤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만약에 여, 여자 친구를 사귀게 된다면 몇 살까지 가능한가요?”

뻔하기 그지없는 질문이었지만 그것이 윤아의 한계였다. 소녀시대 미모 담당 꽃사슴은 마왕에게 물들며 돌연변이로 진화했지만 두뇌마저도 일취월장하지 못했다.

어마어마한 특혜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기회를 살리지 못한 윤아였다. 그녀에게 주어진 특혜 때문에 난리를 피우던 여학생들은 무난한 질문에 광분하던 것을 멈추고는 눈을 빛내며 창현을 바라본다.

활동에 비해 제법 많은 것이 알려진 현. 하지만 연애에 관련해서 알려진 바는 그리 많지 않았다.

간단하고, 뻔한 질문이었지만 친한 그녀의 질문이었기에 창현은 잠시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순간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여러 명의 여인들.

“음! 좋아하면 나이는 상관없다고 하겠지만… 저는 일단 위아래로 세 살 정도가 좋은 것 같아요. 하지만 제 아래로 내려가면 중학생이라서, 하하.”

아아아아악! 안 돼!

꺄아아아악! 만세!

비명과 환호성이 동시에 터져 나온다. 비명을 지른 것은 세 살 범주에 벗어난 88 이상의 노땅(?)들이었고, 환호성을 지른 것은 89 이하의 재학생과 신입생들이었다.

“하하하.”

극과 극으로 갈리는 반응에 창현은 어색하게 웃음을 지었다.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었지만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아닌 듯했다.

분위기가 술렁이자, 자리에서 일어선 창현이 말한다.

“분위기를 전환할 겸, 한 곡을 더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부를 곡은 아이러니하게도 타이틀곡보다 더 사랑받은 곡입니다. <August>."

계절별 테마를 담아냈던 창현의 정규 앨범 3집. 한 곡에 열두 달의 변화를 담아낸 변화무쌍한 곡이었지만 지금 와서는 자신의 실수였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짧게는 3분. 길게는 5분여 정도 이어지는 곡에 열두 달 동안 이어지는 변화를 모두 넣는 것은 어려웠던 것. 의도는 훌륭했지만 안타깝게도 듣는 사람의 입장을 많이 고려하지 않았기에 타이틀곡보다는 수록곡이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지금 창현이 부르는 <August>의 경우가 그러하다. 시원하게 터져 나오는 고음은 막힌 사람의 마음을 뻥 뚫어주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하여 엄청난 호응을 얻었으며, 한때 부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의 곡이었다.

그것이 결국 가창력 논란으로 이어지고, 연말 가요대전에 출연하여 직접 부름으로써 논란을 말끔히 종식시킨 적이 있다.

와아아아아아!

창현이 부르는 곡의 정체를 알아차리자, 사방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온다. 그들은 K본부에서 음향사고가 났을 때 발휘했던 창현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마이크 볼륨이 꺼졌음에도 불구하고 육성으로 모든 사람을 압도하던 그 모습을.

그 곡을 눈앞에서 접하는 감동은 뭐라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환호성이 강당을 뒤흔들자, 입가에 미소 지은 창현이 노래를 시작한다.

시원함을 극대화시키기 위해서는 뜨거움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모든 관객들이 뜨거움을 절정으로 느낄 때, 그 모든 것을 송두리째 뒤흔들어주는 시원함이 온몸을 지배해나간다.

답답하게 막힌 가슴을 뻥 뚫어주는 고음은 듣는 사람을 전율로 몰아갔다.

단순히 내지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 속 근심을 모두 털어 내버리는 듯한 고음이었다.

노래의 여운은 한동안 이어졌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학생들을 보며 창현은 가만히 서 있었다.

서서히 여운에서 헤어 나올 무렵, 입가에 미소 지은 그가 숨을 내쉬며 말문을 뗀다.

“하아, 두 곡을 전부 고음으로 했더니 목이 아프네요. 잘 들으셨나요?”

네에에에!

엄살을 피우지만 그것이 진실이라는 걸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첫 곡을 불렀을 때,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았던 것이 그였다.

두 곡을 끝낸 지금도 이마에 땀이 약간 맺혔을 정도여서, 그가 땀이 나고 있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분위기도 전환했으니 다음 순서로 넘어가도 되지 않을까요?”

“예, 그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학과별로 준비한 질문 세 개를 질문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단, 질문 내용이 겹칠 경우 그것은 가차없이 기각 되니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해해주십시오.”

학생회장의 말과 함께 학생들이 직접 창현에게 물어보는 코너가 시작되었다.

여기에서 학생들은 한 가지 우를 범했는데, 바로 너무 뻔한 질문은 겹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여 처음부터 다른 경로로 우회한 경우가 많았다.

때문에 흘러나온 질문의 양상은 예상과 많이 달랐다.

특히 몇 개의 질문은 무척 황당한 것이었다.

그 중 하나가 이것이다.

“가요계 정상으로 군림하고 있는 원더걸스와 소녀시대가 위기에 처했다면 누구를 구하실 생각입니까?”

단어만 바뀌었지, 아빠 엄마가 물에 빠지면 누구를 구할 것이냐는 거랑 다를 바가 없었다. 그 외에도 질문 중 상당수가 창현의 선택을 종용하는 것이 많았다.

그때마다 창현은 유연하게 대처를 하였다.

훗날 말이 나올 법한 질문은 두루뭉술하게 대답을 하였으며, 확실하게 대답해줄 수 있는 부분은 대답을 했기에 불만은 나오지 않았다.

여러 가지 질문 중 황당한 것들도 많았다. 아버지인 석규가 가혹하게 부려먹지 않느냐부터 시작하여, 재산은 어떻게 관리하는지, 아버지가 결혼하는 모습을 보며 어떤 마음이 들었는지까지. 각종 다양한 질문들이 창현에게 주어졌다.

질문 타임이 끝날 때까지 창현에게 연애에 관련된 질문은 나오지 않았다.

기껏해야 윤아가 물어보았던 상대방 나이 허용 범위와, 싫어하는 여자의 성향 정도뿐이었다.

가장 황당한 질문이라면 창현의 쓰리 사이즈를 묻는 것 정도? 물론 본인의 쓰리 사이즈를 몰랐기에 대답하지 못했지만.

“생각보다 질문의 강도가 그리 세지 않네요. 아무래도 이십대 형 누나들이 많은 만큼 연애에 관련된 부분이 많으리라 생각되었거든요.”

너무나 뻔했기에 나온 함정이었다.

누군가 한 사람은 하겠지 하는 심정으로 비롯된 사소한 생각은 많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끌어당길 수 있는 결정적인 부분을 놓치게 만들었다.

만들어진 기회를 놓치게 된 학생들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에 후회가 자리하지 않고 있는 까닭은 오늘 이 자리가 뜻밖이고, 그만큼 감명 깊은 자리가 되었다는 뜻이리라.

“아! 이거 동국대의 저력를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 것 같아 아쉬운데요.”

학생회장은 맥없이 무너져 내린 학과들의 질문을 보며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나름 창의적인 질문은 많았지만 가장 기본적인 질문은 주어지지 않았다.

아쉬워하는 학생회장을 보며 창현도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죠? 저도 제법 센 것들이 나올 거라 각오했지만 배려를 해주셨는지, 센 건 나오지 않았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그래서 그런데, 제가 제안을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제안이요? 무슨?”

“이대로 끝내기에는 아쉽지 않습니까. 그러니 한 번쯤 이벤트 기회를 주시지 않겠습니까?”

“무슨 이벤트인지 궁금하네요.”

창현의 얼굴에 호기심이 서리자, 학생회장은 묘한 미소를 짓더니 학생들을 둘러보며 큰 목소리로 외친다.

“제가 생각한 이벤트는 바로 OT가 끝난 뒤, 현 씨와 함께 일일데이트입니다!”

“…….”

학생들의 반응을 유도하듯 외쳤지만 아무 말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어이가 없어서? 상종할 가치가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아무 반응이 나오지 않은 것은 가치가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너무나 놀라워서 그런 것이다.

하지만 현의 생각은?

대답은 허무하리만치 간단하게 나왔다.

“어렵지 않네요. 그 정도는 저도 될 듯 싶고요.”

간단한 이벤트라 생각했기에 가능한 결정이었다.

그러나 그 결정이 가져다주는 파장은 어마어마했다.

꺄아아아아아아!

우우우우우우우!

자지러지는 여학생들의 환호성이 터져 나왔지만 그와 반대로 남학생들은 야유를 터뜨렸다. 재수 없게 자신들이 당첨되면 남자와 데이트가 아닌가. 아무리 현이 세계적인 스타라 하더라도 남자와의 데이트는 사절이다.

그들은 C.C, 캠퍼스 커플이 되길 바라는 것이지, C.H, 캠퍼스 호모가 되길 바란 게 아니다.

극명하게 갈리는 반응에 학생회장이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아아, 남학생 학우 여러분들은 분노를 가라앉히고 냉정하게 생각해보십시오. 만약 여러분들이 당첨되어서 호감이 가는 여성에게 데이트 권리를 주신다면? 이벤트는 잠깐이지만 여러분이 딴 점수는 무척 오래갈 것입니다. 만약 호감이 가는 여학우에게 권리를 양보하면, 잊지 못할 추억을 경험한 여학우가 당신을 잊을 것이라 생각합니까?”

궤변에 가까운 말이었지만 그 말이 가져다주는 효과는 대단했다.

그의 말대로 이벤트성 데이트는 하루뿐이다. 그걸 한다고 하여 서로 사귀는 것이 아닌가. 현은 너무나 높은 존재. 하지만 자신들은 언제든지 가까이 할 수 있는 존재다.

그것이야 말로 자신들이 우위를 점할 수 있는 부분이다.

야유를 터뜨리던 남학생들의 눈빛이 바뀌었다. 현과 데이트 할 수 있는 것은 어느덧 반짝반짝 빛나는 다이아몬드 반지와 비슷하게 변해갔다.

자신의 설득이 먹혀들자, 학생회장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좋습니다, 이벤트를 시작해볼까요?”

모두의 마음에 불을 지르는 한 마디였다.

여학생들에게도, 남학생들에게도.

그리고 연예인에게도.


학생회장의 즉석 제안은 상황을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하였다.

바로 현과 일일 데이트!

구름 위에 있는 존재라 생각했기에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벤트성으로 이루어진 일일 데이트는 달랐다.

잠깐이지만 성실하게 임하던 그의 모습을 보면 하루지만 최선을 다할 것인 건 분명한 사실! 그것만으로도 여학생들은 월드 황태자라는 별명이 붙은 현과의 데이트를 꿈꾸며 달콤한 상상에 젖어들었다.

상황은 다르지만 남학생들도 불타올랐다.

비록 같은 성별이지만 데이트권을 획득하여 호감 있는 여성에게 건네준다면?

잊지 못할 추억을 선사함과 동시에 된장남의 허세 같은 면모를 보여주지 않더라도 여성들에게 어마어마한 점수를 획득하는 것이 가능했다.

남녀를 가리지 않고 모두가 불타오르는 가운데, 유일한 연예인인 윤아 또한 불타오르고 있었다.

별빛처럼 반짝이던 그녀의 눈은 이글이글 불꽃이 타올랐다.

그것은 마치 마왕 연희를 제압하던 조폭 사슴과도 같았다.

‘창현과 일일 데이트라고? 누구 마음대로 감히 일일 데이트야.’

속으로 울화가 치미는 걸 느끼는 윤아였다.

안 그래도 언니들과 주현 때문에 속앓이를 하던 그녀였다. 좋아하는 사람이 다른 이성과 친하게 지내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많지가 않다. 그녀 또한 마찬가지였고, 창현이 데이트 비슷한 것을 할 때마다 끓어오르는 울화를 간신히 억누르기 일쑤였다.

그런데 이벤트성으로 데이트라니!

속이 넓지 못한 조폭 사슴은 이마저도 용납하지 못했다.

하지만 상황은 이미 그녀에게 안 좋게 흘러가고 있었다.

‘좋아! 그렇다면 내가 1등을 해주겠어. 내가 1등을 해서 당당하게 데이트를 해주지.’

의욕이 불타는 윤아였다.

“자! 그럼 이벤트를 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벤트는 빙고 이벤트로 하겠습니다. 각기 1부터 50까지 숫자를 빙고판에 입력하여 하는 걸로, 제가 10개의 숫자를 뽑을 테니 먼저 빙고가 되는 분이 1등을 하게 됩니다. 이 게임에 이의가 있으신 분 있으십니까?”

“…….”

있지 않았다. 오히려 의욕에 불타는 눈빛으로 학생회장에게 헛소리를 그만하고 어서 진행하라고 무언의 압박을 주고 있었다.

“하하! 그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진행요원들은 종이를 나눠주시고요, 5분 정도 시간을 드릴 테니 숫자를 입력하도록 하세요.”

언제 준비를 한 것인지 진행요원이 각 과마다 종이를 나눠 빙고를 할 수 있도록 세팅해주었다. 빠른 속도로 종이를 나눠 받자, 학생들은 각각 빙고판을 입력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자, 학생회장은 진행을 해나갔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번호는 현 씨가 직접 뽑도록 하겠습니다.”

“예, 시작하겠습니다.”

상자 안에 번호가 적힌 공들이 어지럽게 돌아다니고 있었고, 창현은 그 중 하나를 뽑아들며 외쳤다.

“34.”

번호가 호명되자, 사방에서 각양각색의 반응이 터져 나왔다.

“와아!”

“아싸! 있다!”

“안 돼! 없어.”

즐거워하는 사람들과 절규를 터뜨리는 사람들. 그 모습을 보며 창현은 다시 번호를 뽑았다.

“45!”

그러자 방금 전과 비슷한 반응이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번호가 하나하나 흘러나올 때마다 사람들은 기쁨에 겨운 환호성을 터뜨리거나 한숨을 내쉬었다.

“7.”

“여덟 번째 번호! 7입니다. 빙고는 아직 없습니까?”

여덟 번째 번호가 모습을 드러내자, 학생회장이 빙고 여부를 물어보았지만 아직 없었다.

결국 창현은 번호를 하나 더 뽑게 되었다.

“14.”

“빙고 없습니까?”

“…….”

없었다.

지금쯤이면 누구 한 사람은 빙고가 되리라 생각하던 학생 회장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혹시 네 개까지 맞추신 분?”

그 말에 삼십 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손을 들었다. 마지막 숫자가 나오게 되면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이 빙고를 만들어내리라.

“그럼 마지막 번호입니다. 뽑아주세요.”

상자 안에 손을 넣은 창현이 공을 잡아든다. 과연 몇 번일까?

긴장감이 극도로 고조된 가운데 창현이 번호를 뽑아든다.

“47번입니다. 47! 아무도 없습니까? 빙고를 하신 분?”

“…….”

없…었다.

아무도 손을 들지 않자 분위기는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고스톱으로 치면 나가리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설마 한 명도 빙고가 되지 않자, 학생회장도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런 상황은 그조차도 미처 예상치 못했다.

“어떻게 이런 상황이. 이거 무척 당혹스럽네요. 아무도 빙고가 탄생하지 않을 줄이야. 현 씨, 이거 어떻게 하죠?”

“아무도 탄생하지 않았으니 이벤트는 실패한 게 아닐까요?”

안 돼요!

창현의 말에 여학생들이 격렬하게 항의했다.

일생에 한 번쯤 있을까 말까한 이벤트다. 그 이벤트가 맥없이 사라지는 것을 그냥 지켜볼 여학생들이 아니었다.

번호가 발표됨에 따라 희망을 접었지만 나가리가 되어버린 지금, 그녀들은 다시 한 번 희망을 불태우며 외쳤다.

한 번 더! 한 번 더! 한 번 더!

노래를 부른 것도 아니건만 이어지는 한 번 더 콜.

그 목소리에 창현은 당황했다. 사랑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벤트성으로 만나는 것뿐인데 임하는 여학생들의 태도는 보통이 아니었다.

‘사랑이 없는 데이트인데도?’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세상 사람이 모두 자신 같지 않은 법. 별다른 말을 하지 않은 창현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알겠습니다. 그럼 한 번 더 하겠습니다.”

와아아아아!

터져 나오는 함성 소리. 왜 즐거운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즐거워하니 그것만으로 족했다.

그렇게 다시 빙고 이벤트가 시작되었다. 종이를 나눠주고, 번호를 입력한다. 이번에는 한 층 신중한 안색으로 번호를 입력하는 학생들.

시간이 빠르게 지나가고, 다시 한 번 빙고 이벤트를 시작한다.

이번에도 창현이 번호가 적힌 공을 뽑았다.

차례차례 번호가 호명되기 시작하고, 희비가 교차하는 가운데, 공은 하나씩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이번에도 여덟 번째 공이 될 때까지 빙고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48번.”

“…….”

“…마지막입니다. 37번.”

“…….”

마지막 번호가 호명되었지만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당첨된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어떻게 이런 경우가…….”

학생회장은 황당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처음 빙고 이벤트를 시작할 때, 여러 명 당첨된 사람들을 어떻게 정리할지 고민을 했다. 그런데 막상 상황은 당첨자들끼리 경합을 벌이기는커녕 아무도 당첨되지 않아 헛물을 켜야 할 처지에 이르렀다.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 건지.

황당해서 뭐라 말하기도 어려웠다.

“아무도 당첨되지 않았네요.”

“…….”

흥겨웠던 분위기는 축 가라앉았다. 두 번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첨자가 나오지 않다 모두 우울한 표정이었다.

분위기가 우울해지자, 학생회장이 다급한 어조로 창현에게 말한다.

“버, 번호를 하나 더 뽑으면 안 되겠습니까?”

“정해진 룰을 어기면 안 되겠죠. 그러면 당첨자가 나오겠지만 제가 인정을 못할 것 같은데요.”

“으음, 하지만 당첨자가 나와야 분위기가…….”

제발 어떻게 좀 해달라는 식으로 말하는 학생회장을 보며 창현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다 상황이 이렇게 된 건지. 황당함이 들 뿐이었다.

“좋습니다. 당첨자가 반드시 나와야 한다면 방식을 바꾸도록 하죠.”

“어떤……?”

“빙고 게임은 당첨자가 안 나올 수 있다는 게 증명되었으니 방법을 바꿔서 각각 번호가 적힌 공을 넣어서 제가 뽑는 걸로 하면 어떨까요? 여기 있는 사람 중 한 사람이 넣었으니 게임이 무효가 될 일도 없고요.”

타개책을 제시해주자, 학생회장의 표정이 환하게 변한다.

“좋은 방법입니다. 학우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좋아요!

한 목소리로 외치자, 창현도 납득한다. 결정이 내려지자, 곧바로 게임을 바꿔 진행하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각각 자신이 원하는 공을 잡아 통에 넣었다. 그리고 번호가 적힌 종이를 부여받았다.

공이 모두 통에 넣어지자, 진행요원들이 통을 들고 섞는다.

일련의 작업이 모두 끝나자, 창현은 공이 든 통 앞에 선다.

“딱 한 번입니다. 제가 고른 번호를 부르면 큰 소리로 대답해주세요.”

그렇게 말한 창현은 대답도 듣지 않은 채 손을 넣는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부여잡고 결과를 기다리는 학생들.

상자에 손을 넣고 한참 동안 뒤적이던 창현은 움직이던 팔을 멈추더니, 공 하나를 쥔다.

긴장되는 눈으로 창현을 바라본다.

공을 위로 든 창현은 번호를 확인하고 말한다.

“530번. 530번 공 갖고 계신 분 있습니까?”

“…….”

고요했다. 뒤적거리며 자신의 번호를 확인하던 학생들은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아래로 숙인다. 마음은 당첨번호에 가 있지만 현실은 달랐다.

“530번 없나요?”

아무도 대답하지 않자, 창현은 다시 한 번 묻는다. 하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여기 안에 들어있는 번호는 모두 이곳 학생들이 갖고 있는 공에 기반된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서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과 일일 데이트에 흥미가 없다는 걸 뜻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을지 몰라도 창현은 그랬다.

“없네요. 아무래도 저와 일일 데이트에 흥미가 없나봅니다.”

“그, 그런 말도 안 되는…….”

창현의 말에 황당한 표정이 감추지 못하는 학생회장이었다.

무려 현과의 일일 데이트다. 반드시 획득해야 하는 이유는 여학생들이라면 충분히 알고 있을 것이고, 남학생들 또한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서지 않는다는 건 명확했다.

‘안티인가?’

안티가 거의 없는 현이지만 거의 없는 것이지, 없는 건 아니었다. 공교롭게도 창현이 뽑은 번호는 그의 안티가 들고 있는 번호인 듯했다.

“이렇게 되면 어쩔 수 없죠.”

“어, 어쩔 수 없다는 건?”

“번호가 뽑혔음에도 나오시지 않으신다는 건 데이트할 의사가 없으시다는 것이니 무효로 해야겠지요.”

“아아…….”

“너무 아쉬워마세요. 그럴 수도 있는 것 아니겠어요? 사람 일이 다 그러니 어쩔 수 없죠. 삼세판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저는 충분히 기회를 주었지만 나오지 않았죠. 일일 데이트를 하지 말라는 계시인 것 같네요.”

아아아!

여학생들은 아쉬운 기색이 역력했지만 더 이상 뭐라 말하지 않았다. 창현의 말처럼 그는 충분한 기회를 주었다. 하지만 하늘이 돕지 않았고, 결국 그와 일일 데이트권은 누구도 취득하지 못했다.

어찌 보면 다행일지도?

몇몇 여학생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갖지 못할 것을 남이 갖는다면 배가 아플 것이 당연할 터. 차라리 누구도 데이트권을 획득하지 못한 것이 다행이라 여겼다.

“이렇게 되었으니 어쩔 수 없죠. 하지만 축 처진 분위기를 그대로 갖고 가기는 싫으니…….”

입가에 묘한 미소를 띠고 있는 창현. 그 모습이 마치 장난기 많은 악동을 연상케 하였다.

‘무슨?’

많은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창현의 표정 변화에 적응하지 못했다.

그때, 흘러나오는 MR.

어리둥절하던 사람들은 그 소리를 듣자, 서서히 눈이 커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엄청난 함성 소리를 터뜨리기 시작하였다.

우와아아아아아!

강당을 가득 채우는 MR의 정체는 바로 대한민국을 휩쓸었던 <악마의 유혹>이었다.

미국에서는 <Temptation>이라는 제목으로 세계를 휩쓸었다. 현재까지 빌보드 차트 12주 연속 1위를 차지하고 있는 세계 최고의 곡!

섬세하고 변화무쌍한 감정 변화가 압권이며, 누구도 흉내내지 못하는 계단 춤은 이 노래의 백미라 할 수 있었다.

학생들의 환호성을 받으며 창현은 노래를 시작한다. 학생들이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 무대 뒤에는 그가 노래를 부를 때 등장하던 계단이 자리했다.

비록 데이트는 무산되었지만 최고의 가수가 최고의 노래를 부르는 것에 학생들은 만족했다.

“…….”

모두가 흥겨운 가운데 한 사람은 무거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가장 앞에서 무대를 지켜보고 있는 윤아가 그 주인공이다.

무겁게 가라앉은 그녀의 눈은 노래에 몰입하여 안무와 하나가 된 창현을 쫓았다.

그녀는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해?’

최고의 무대마저도 즐기지 못할 정도로 그녀는 혼란스러운 상태에 빠졌다.

창현과의 일일 데이트.

누구나 탐내는 것이지만 당첨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왜 나타나지 않은 것일까.

일일 데이트권을 획득한 것이 창현의 안티라서?

전혀 그렇지 않다. 그것은 수많은 생각의 하나일 뿐, 당첨자는 안티보다 팬일 확률이 높았다.

그런데 왜 나타나지 않았을까.

나타나지 않은 것이 아니다. 바로 나타나지 못했던 것이다.

‘난 어떻게 해야 할까.’

손에 쥐고 있는 종이를 힘줘서 움켜잡는 윤아.

그녀가 잡고 있는 종이에는 선명한 530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불운을 겪던 사슴이 마침내 운을 몰아 받아 당첨이 되었다.

이제 선택의 순간이었다.




제98장 버프 받는 사슴




OT 행사는 성황리에 끝났다. 대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갖고, 본인의 히트곡을 부름으로써 잊을 수 없는 추억을 안겨주는데 성공했다.

많은 사람들을 열광하게 만들었지만 정작 본인은 아닌가 보다. 세희는 멍하니 밖을 바라보는 창현의 모습에 의아함이 담긴 목소리로 묻는다.

“왜 그렇게 뚱한 표정을 짓고 있어?”

“어라, 제가 그랬어요?”

“그랬고 말고. 지금 무척 뚱한 표정이었는데? 뭐가 마음에 안 드는 거야?”

“으음! 그냥요. 전체적으로는 만족하는데 몇몇 부분이 아쉬웠다고 해야 할까. 그래서 뭔가 찜찜하네요.”

창작을 하는 사람은 예민하다. 그렇기에 사소한 부분 하나마저도 신경 쓰게 되는데, 완벽을 지향하는 창현의 마음에 어떤 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다.

세희의 눈에는 그것이 모두 엄살로 비춰질 뿐이었다.

“훌륭하게 무대를 소화해놓고 엄살은. 학생들 반응 안 봤어? 아주 열광의 도가니였다니까. 나중에 연예부 기자들까지 와서 사진을 찍던데?”

“그래도요. 으음.”

“도대체 뭐가 마음에 안 드는 거야? 내가 보기에는 완벽했는데. 평소대로 노래를 불렀고, 무대 매너도 충분히 합격 수준이고. 아, 무대 상태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런 거야? 그런 거라면 아무래도 네가 인정해야겠지.”

“아니요, 무대 상태가 마음에 안든 건 아니에요. 제가 부른 노래는 전체적으로 만족해요. 그런데, 음, 그러니까…….”

말끝을 흐리는 창현.

“으응?”

그 모습을 본 세희는 고개를 갸웃했다. 도대체 어떤 부분이 마음에 안 들어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인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러다 어떤 것이 떠올랐는지 그녀는 감탄사를 흘리더니, 묘한 표정으로 창현을 바라본다.

“아아! 설마 너…….”

“네? 왜요?”

“후후, 그랬던 거야? 우리 창현이, 그런 거였구나.”

“뭐, 뭐가요.”

음흉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자, 창현이 표정이 기괴하게 일그러진다. 하지만 그가 불만족스러워하는 이유를 알아차린 세희는 멈추지 않았다.

“후후후, 설마 일일 데이트가 무산되서 아쉬워할 줄이야.”

“…아쉬운 게 아니라 이벤트를 했으면 완벽하게 해냈으면 싶어서 그랬던 거예요.”

“성숙한 대학생 누나와 데이트를 해보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고?”

“그럴 리가 없잖아요!”

“정말? 요만큼의 사심도 없고?”

“으음.”

집요한 세희의 물음에 창현이 침음을 흘렸다. 예전이라면 자신감 있게 그렇다 했을 테지만 어느 정도 크다 보니 저 말에 동의하게 되면 자신이 남자로서 인정받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사심이 있었구나!”

“왠지 인정하기 싫지만 나쁜 건 아니니까요. 하지만 그것보다는 기껏 이벤트가 이루어져서 많은 사람들이 즐거워하는데 괜히 물거품이 되어서요.”

“그랬던 거야? 으음! 확실히 그럴 수도 있겠지. 많은 여학생들은 간절히 원하는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당첨된 사람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니.”

“그렇죠. 그 부분에 대해서 여러 생각을 해봤는데, 제가 뭐라고 하는 것도 웃겨서요. 그래도 이미 확정된 이벤트가 이루어지지 않으니 뭔가 미안하기도 하고 찜찜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을 추첨했으면 될 일이지만 그렇게까지 하기는 싫었다.

한 번 엇나갔으면 그것은 운명. 그 이상을 붙들고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아쉬워했지만 자신의 생각을 바꿔가면서 일일 데이트를 위해 노력할 생각은 없었으니까.

“그냥 홀가분하게 털어버려. 그럴 수도 있는 거지.”

“그렇겠죠. 에휴! 괜히 걱정만 늘어서.”

“늙은이처럼 한숨을 푹푹 쉬고 있어. 좋아, 오늘 저녁은 맛있는 걸로 먹자!”

자신에게 활기를 심어주려는 듯, 쾌활하게 이야기하는 세희를 보며 창현의 입가에 짓궂은 미소가 걸렸다.

“…누나가 사는 거죠?”

“박봉 월급쟁이를 쥐어짜는구나. 흑, 그래도 누나 체면을 살리려면 어쩔 수 없지. 좋다, 내가 사겠어.”

“아싸! 비싼 걸로 먹어야지.”

“사, 살려줘. 흑!”

말 한 마디 잘못 뱉은 세희는 창현이 주문한 고급스러운 음식을 보고 졸도 지경까지 가게 되었다.

실컷 곯려준 뒤 정작 계산은 창현이 했지만.


저녁 식사를 마친 창현은 숙소가 아닌, AA엔터테인먼트로 향했다. 늦은 시간이었기에 대부분의 직원이 퇴근했지만 석규는 여전히 일을 보고 있었다.

서류 검토를 마친 그는 창현을 보며 입가에 미소를 짓더니 묻는다.

“그래, 괜찮았냐?”

“네, 괜찮았어요. 뭐라고 해야 하지? 새로운 걸 알게 된 건 아닌데 기존에 제가 알고 있던 걸 다시 한 번 되짚어보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겠네요. 나쁘지 않았어요.”

“그렇다면 다행이군. 네가 알아서 하겠지만, 지금의 넌 나이에 비해 풍부한 경험과 다양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무조건 새로운 걸 배우는 게 능사가 아니다. 네가 가진 걸 완벽하게 발휘하는 것만으로도 네가 정상에 군림하는 게 가능할 테니.”

“그렇겠죠? 그런데 제가 욕심이 많아서요, 하하하!”

“알아서 잘 하겠지. 어쨌거나 네 덕에 친구한테 자존심 좀 부릴 수 있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고맙게 생각하고.”

실제로 지금 인터넷에서는 OT에 등장한 현 덕분에 지금 인터넷은 난리가 아니었다. 공식적인 활동은 일체 삼가던 그가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 곳이 대학교 OT 현장이었으니 오죽하겠는가.

특히 난리가 난 것은 대학생들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OT를 참여했던 그들로서는 동국대학교 학생들에게 무한한 부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다름 아닌 현이 OT에 참가하다니.

덕분에 창현을 초대하는데 지대한 공을 세운 안종욱 교수는 대학교 내에서 거의 영웅 대접을 받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걸 잘 알고 있기에 석규 또한 적절하게 이용(?)하면서 그에게 자존심을 세우고 있었고.

“자존심을 세웠다기에는 제가 얻은 게 있어서 괜찮아요.”

“그렇다면 다행이지. 어쨌든 내 욕심이 들어간 일인데 해줘서 고맙구나.”

“아버지가 부탁하시는데 이 정도는 어렵지 않죠. 비록 악덕 사장님이지만 근본적으로 제가 잘못되길 바라지는 않으시니까요.”

“당연한 말을! 누가 들으면 내가 널 혹독하게 부려먹는 줄 알겠구나.”

“아니었어요?”

“허어!”

창현의 날카로운 반격에 할 말을 잃은 채 입을 뻐끔거리는 석규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창현의 입가에는 작은 미소가 그려졌다.

“대학교 행사 스케줄은 무사히 해냈으니 괜찮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 다음이라뇨? 편히 쉬는 게 아니었던가요?”

“일단 우리가 표방하고 있는 건 그건데 말이다. OT에 참가하니까 스케줄 제안이 순식간에 몰려드는구나. 안 그러면 내가 이 밤까지 서류를 처리할 리 없지 않느냐?”

석규가 가리킨 서류를 본 창현은 순간 할 말을 잃어버렸다. OT가 끝내고 저녁 식사를 하고 온 사이 수십 개의 스케줄 제안이 들어온 것이다.

“아, 그 짧은 시간에…….”

“너의 위력이기도 하지. 일단 자잘한 행사 스케줄들은 모두 제외했다. 페이도 맞지 않고, 네게 도움도 되지 않는 거지. 그런데 문제는 방송국들이다.”

“방송국이요?”

“그래, 널 출연시키고 싶다면서 만만치 않은 압력을 행사하더구나. 하하.”

“압력이라…….”

표정을 찡그리는 창현. 그는 유난히 압력이라는 단어를 좋아하지 않았다. 자신이 처음으로 데뷔하고 큰 성과를 거두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얼굴을 보길 바랐다. 하지만 끝까지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고, 시간이 지나 라샤가 데뷔하게 되었다. 얼굴 없는 가수 현이 직접 만든 곡으로 프로듀싱까지 맡은 걸 광고하면서 말이다.

그때, 난관에 봉착하게 되는데, 바로 방송국에서 라샤의 데뷔 무대를 걸고 AA엔터테인먼트에 강한 압박을 가한 것이다. 당시 석규는 자신에게 라샤 데뷔 무대에 모습을 드러내면 방송국이 많은 걸 양보해주기로 했다 했지만 그것이 아니란 걸 근래 되어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SM엔터테인먼트 같은 대형 기획사가 아니라면 방송국과 맞서기 힘들었으니까.

그때는 그렇게 당할 수밖에 없지만 지금은 달랐다.

방금 전과 확연히 다른 매서운 눈으로 창현이 말했다.

“방송국에는 출연하고 싶지 않네요. 압력을 행사하라면 해보세요. 그 방송국 프로그램은 일절 출연하지 않을 테니.”

“그렇게 강하게 나가겠다고?”

“이상하게 압력 받는 건 싫네요.”

“하하, 그럴 수 있을지도. 확실히 세계적인 인지도를 얻은 널 출연시키기 위해 압력을 가하는 건 어리석지. 어리석고 말고.”

창현의 말을 인정했지만 석규는 아직 그가 어리다는 걸 느꼈다. 수많은 이해관계가 얽힌 사회에서는 대나무 같이 나가면 부러지기 마련이다. 지금은 자신이 방파제 역할을 하고 있지만 때로는 부드럽게 휘어지는 모습을 보여야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아직 시간은 많으니.’

이제 열여덟 밖에 되지 않은 그가 벌써부터 이와 같은 것을 체득하길 바라는 건 무리였다. 그러나 자신이 옆에 있는 만큼 그러한 면모를 체득하여 하여, 자신이 없더라도 홀로 설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주고 싶었다.

“우리의 기본 방침은 현의 휴식이다. 대학 OT는 나의 친구가 부탁하여 허락한 걸로 하지. 다른 스케줄은 없을 테니 그 부분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네, 부탁드릴게요.”

“그럼 그 안건은 그렇게 넘어가도록 하지.”

방송국의 압력이 있어도 석규는 개의치 않았다.

힘이 없을 때는 이유를 만들어서라도 창현을 설득해야 했지만 지금은 세계적인 인지도를 지닌 그에게 선택 범위는 넓었다.

“아, 그거 알고 있나?”

“네? 뭘요?”

“이런, 아무래도 널 놀리기 위해 비밀로 했나 보구나.”

“네? 뭘 비밀로 해요?”

석규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창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전혀 알지 못하는 그의 모습에 석규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불길한 느낌이 물씬 풍기고 있었다.

“왜 그런 표정을 지으세요?”

“정말 모르는 게냐?”

“정말 몰라서 그러는 건데요?”

“후후, 그럼 어쩔 수 없지. 내 특별히 이야기를 해주마.”

“……?”

궁금한 표정을 짓자, 석규가 천천히 입을 뗀다.

“테일러 스위프트가 오늘 내한방문을 한다더구나.”

“…네에?”

창현의 얼굴에 경악이 번져나갔다.

미국산 마왕이 국내에 강림하는 순간이었다.


인천 국제공항에 수십 명이 넘는 기자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그들이 기다리고 있는 손님은 딱 한 명이었다.

잠시 후,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십여 명의 경호원에게 호위를 받으며 나타나는 금발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기자들은 그녀의 모습을 놓칠세랴, 빠른 속도로 셔터를 누르기 시작했다.

찰칵찰칵.

눈부신 플래시가 연달아 터져 나왔지만 선글라스를 쓴 금발 여인은 여유가 넘쳤다.

차분하게 주변을 둘러보던 그녀가 입 꼬리를 말아 올리더니 중얼거린다.

“이곳이 현의 나라? 괜찮네.”

“테일러, 한 마디 해주시죠.”

“음! 그래야 하나? 성가신데.”

어차피 한국어를 잘 모르기에 인터뷰를 피하고 싶은 그녀였지만 자신을 위해 모인 수십 명의 기자들을 보니 그냥 지나치기 힘들었다.

짝짝!

“간단한 인터뷰만 하겠어요. 혼란스러운 모습은 싫으니 정리를 해주시겠어요?”

“알겠습니다.”

고개 숙인 경호원이 달려가 기자들을 정리해나갔다. 그녀와 인터뷰를 하고 싶어 하던 기자들은 순순히 경호원의 지시를 따랐고, 빠른 속도로 인터뷰 할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졌다.

시끌벅적하던 공간이 조용해지자, 테일러 스위프트가 미소를 짓는다.

“이제야 좀 마음에 드네. 인터뷰를 시작하도록 하죠.”

그녀의 허락이 떨어지자, 권한을 얻은 기자가 먼저 질문을 한다.

“대한민국에 무슨 일로 오신 것입니까? 혹시 현과 관련이 있는 일입니까?”

갑작스러운 그녀의 방문. 공연이 잡혀있는 것도 아니고, 화보 촬영도 있는 게 아니었다. 앨범 발매를 위해 휴식기를 취하고 있는 그녀의 방문은 많은 사람을 의아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통역이 옆에서 말을 전달하자, 테일러 스위프트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있어요.”

그 대답에 기자들이 오오! 하며 감탄사를 터뜨린다. 두 사람은 미국에서 한 차례 스캔들을 일으킨 사이였다. 목적을 알 수 없는 내한방문이 현과 관련이 있다고 하니 눈이 반짝이는 건 당연했다.

“현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다른 기자가 손을 들고 묻는다. 지금 주어진 먹잇감만으로 충분히 추측성 기사를 쓸 수 있지만 자칫 잘못하면 고소당하기 십상이다. 옆에서 이야기를 전해들은 그녀가 미소 짓는다.

“현은 뮤직비디오 주인공으로 나오게 될 거예요. 내가 나온 이유는 그와 관련이 있고요.”

새로 컴백을 위해 준비하는 그녀의 뮤직비디오 주인공이 현이라는 사실은 처음 접하는 것이었다. 기자들의 손이 더욱 빠르게 움직였다.

그러나 몇몇 기자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은 채 테일러 스위프트를 바라보았다.

짧은 휴식을 취하고 있는 창현은 며칠 후면 미국으로 돌아갈 예정이다. 굳이 찾아와서 이야기를 나눈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기자가 영어로 다른 질문을 한다.

“그럼 대한민국에 찾아오신 이유는 현 때문입니까?”

“제가 찾아온 이유는 다른 것입니다.”

“어떤 것입니까?”

기자의 질문에 입 꼬리를 말아 올리며 웃음을 짓는 테일러 스위프트. 손에 걸린 시계를 보더니 말한다.

“아쉽지만 시간이 되었군요. 인터뷰 시간을 끝내도록 하겠어요.”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 가만히 서 있던 경호원들이 기자들의 길을 가로막는다. 조금이라도 정보를 더 얻기 위해 경호원들과 치열한 몸싸움을 벌였지만 상대가 될 리 없었다.

경호원에게 떠밀리면서 기자가 외쳤다.

“한국에 방문한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 물음에 걸음을 옮기던 테일러 스위프트가 우뚝 멈춰 선다. 그리고 기자를 향해 고개를 돌리더니,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나직이 말한다.

“목적은 히로인을 찾기 위해서.”

그녀를 태운 자동차가 빠르게 공항을 벗어났다.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한숨을 길게 내쉬는 창현이었다.

“하아! 그게 목적이라고요?”

“너한테는 이야기를 안 했나 보군. 나한테 그리 이야기를 했다.”

두 사람의 대화 화제는 다름 아닌 테일러 스위프트에 관련된 것이었다. 미국에서 방문한 그녀는 언론의 관심사가 되어 집중 조명을 받고 있었다. 한 차례 창현과 스캔들을 일으켰던 그녀는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싱어송라이터로 많은 팬들을 보유한 여인이다.

“다음 주에 미국으로 돌아가면 뮤직비디오를 찍어야 하지 않느냐? 그와 관련해서 찾아온다고 했었다.”

“그 부분이면 제가 미국으로 돌아가니 상관 없잖아요.”

“그게 아니라, 으음! 그녀가 찾아온 이유는 너 때문이 아니다.”

“저 때문이 아니라고요?”

“그래, 그녀가 찾아온 이유는 곧 촬영할 뮤직비디오의 여자 주인공을 찾기 위해 직접 이곳으로 온 거다.”

“이곳이라면…….”

그럴 듯한 말이었기에 고개를 끄덕이는 창현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녀의 뮤직비디오 주인공을 맡게 되었을 때, 여자 주인공에 대해 다른 설명이 없었다.

단순히 자신을 어린 아이 취급하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것이 아니었나 보다.

“여자 주인공도 한국 사람이라는 거죠?”

“그런 듯 싶다. 구체적인 내용은 나도 모르지만.”

“그렇군요. 저는 그렇다 쳐도 여자 주인공도 한국 사람일 줄이야. 세계적으로 노는 아티스트의 뮤직비디오에 한국 사람이 주인공으로 나온다는 게 신선한데요?”

창현의 말에 석규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 경계를 허문 게 누구인데 신기하게 여기냐.”

“당사자더라도 신기한 건 신기한 거죠.”

“그래? 그럴지도.”

♩♪♬

고개를 끄덕이며 창현의 말에 동의를 표하던 석규는 전화가 걸려오자, 창현에게 눈빛으로 양해를 구한 뒤 전화를 받아든다.

“여보세요?”

-미스터 강. 저예요. 테일러. 그때 이야기 한 것 때문에 연락을 드렸어요.

“음? 아아! 그렇군요.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영어로 대답한 석규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사장실을 나선다. 전화 통화를 위해 움직이는 것이기에 창현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끓여온 생강차를 마신다.

한 잔 다 마시고, 새로 생강차 한 잔을 끓일 무렵, 전화 통화를 끝냈는지 석규가 사장실 안으로 들어온다.

“무슨 전화에요? 미국에서 온 거죠?”

“그래. 미국에서 왔다고 할 수 있지. 그나저나…….”

입가에 묘한 미소를 지은 채 창현을 바라보는 석규.

그 모습에 묘하게 기분 나쁨을 느낀 창현이 고개를 갸웃한다.

“왜 그러세요?”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다. 후후!”

아니라고 말을 하지만 입가에는 진한 미소가 걸려있는 석규였다.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는 부분이었지만 여태까지 했던 행동들이 떠오른 창현은 쉽게 여길 수 없었다.

‘뭔가 불안한데…….’

방금 전 통화와 관련된 것인 듯한데 물어봐도 대답해줄 것 같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 창현이 할 수 있는 것은 한 가지.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석규의 짓궂은 장난에 걸려들지 않는 것뿐이다.

눈에 힘을 준 채 결의를 다진다.

‘이제는 쉽지 않을 거라고요.’

‘재미있겠어. 이럴 생각이던가. 후후!’

창현의 생각처럼 석규의 머릿속에는 재미있는 상황이 그려지고 있었다.

다른 점이라면 그것을 주도한 것은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라는 점이지만.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할까.’

윤아의 고민은 깊어만 갔다. OT에 다녀온 뒤 그녀는 자신의 손에 쥐어진 종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선명하게 적혀 있는 530의 숫자는 아직도 자신을 그날 그 현장에 놓아두는 것 같았다.

창현과 일일 데이트를 획득했지만 주변의 시선이 두려워 감히 앞으로 나가지 못했지만 속마음은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끝내 주변 시선을 두려워하여 나서지 못했다.

‘바보! 용기를 낼 걸!’

고민이 어찌나 깊었던지, 숙소로 돌아와 꾀병 부린 것에 대한 멤버들의 처벌이 있었음에도 윤아는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을 정도였다. 평소였다면 방방 날뛰었을 그녀가 반응을 보이지 않자, 소녀들은 윤아가 무언가를 잘못 먹었다는 의혹을 제기하며 그녀를 방치하였다.

초딩에게 드디어 사춘기가 왔다면서,

그녀의 고민은 스케줄을 끝내고, 안무 연습을 위해 연습실에 갈 때까지 계속 되었다.

안무 연습이 끝나고, 땀에 절은 윤아는 바닥에 축 퍼져 있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떠나가지 않는 일일 데이트가 괴롭게 만들었다.

휴식시간이 거의 끝나갈 무렵, 밖에 나가 있던 순규가 연습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더니, 윤아를 호명한다.

“윤아야, 삼촌이 너 부르셔.”

“에? 나를요?”

“응, 급한 문제라던데? 뭐 사고 친 거야?”

“아니요, 제가 사고 칠 리 없잖아요.”

강하게 고개를 저어 부인하는 윤아였다. 그러면서 마음 한쪽으로 자신이 무언가 실수를 했는지 진지하게 고민을 해보았지만 걸리는 건 없었다.

“그렇지? 그럼 다른 볼 일인가? 어쨌든 우리가 아니라 너만 올라오래.”

“언제요?”

“가급적 빨리.”

“그럼… 아! 일단 좀 씻어야겠네요.”

자리에서 일어나던 윤아는 축 젖은 트레이닝복을 보고는 당장 달려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 곧바로 샤워실에 들어간 그녀는 땀을 닦아내고 옷을 갈아입은 뒤 곧장 회장실로 향했다.

“상당히 늦었는데 괜찮으려나.”

최대한 빨리 준비한다고 했지만 순규가 말한 거로부터 무려 20분이 넘게 시간이 흘러 있었다. 걱정스러운 표정을 한 윤아가 회장실 앞에 도착하자. 비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녀를 반긴다.

“어서 와요. 회장님이 바로 들어가도 좋으시다 했어요.”

“저… 삼촌이 화나신 건 아니죠?”

조심스러운 어조로 안의 상황을 묻자, 어리둥절하던 비서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호출하고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에 나타나서 그런 듯하다. 그녀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한다.

“연습 중인 거 다 알고 계세요. 늦어도 되니 씻고 오라고 하셨는데 전해듣지 못했나 봐요?”

“네…….”

고개를 끄덕이는 윤아의 머릿속에 순규의 모습이 스쳐지나갔다. 분명 전해 들었을 그녀가 말을 하지 않으니 자신으로서는 모를 수밖에 없다.

‘이런 순규 언니 같으니!’

돌아가면 복수 하겠다 마음먹은 윤아는 고맙다는 인사를 한 뒤 노크를 한 뒤 조심스럽게 회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실례합니다.”

“어서 와라.”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 윤아는 자신을 반겨주는 수만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다가 순간 깜짝 놀란 표정을 짓고 말았다.

“하이~!”

그녀 앞에는 생글생글 미소 짓고 있는 테일러 스위프트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한국산 마왕을 물리치니 미국산 마왕이 눈앞에 나타났다.


갑작스러운 금발 미녀의 인사에 당황한 윤아는 손을 들어 어색하게 인사했다.

“하, 하이?”

“…….”

한 차례 무거운 적막이 흘렀다. 황당한 표정을 지은 수만이 헛웃음을 지으며 윤아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이분이 누구신지 알고 있나?”

“네? 그러고 보니… 아! 테일러 스위프트!”

고개를 갸웃하던 윤아는 자신의 머릿속에 자리하던 블랙리스트 한 명과 닮았다는 걸 깨닫고는 소리친다.

“이번에 내한방문을 했지.”

“아… 그런데 저는 왜……?”

“그 이야기는 차차하기로 하지. 일단 자리에 앉아라.”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윤아는 테일러 스위프트 옆에 다른 사람이 앉아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의 정체를 확인한 그녀는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인사했다.

“아, 안녕하세요?”

“하하! 오랜만입니다. 윤아 양.”

테일러 스위프트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석규였다. 자신의 예상을 초월하는 조합에 윤아는 머릿속이 어지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 거지?’

일일 데이트로 인해 머리가 복잡하게 헝클어진 윤아는 테일러 스위프트가 내한방문 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그녀를 알고 있는 것은 창현과 미국에서 스캔들 난 사실을 알고 있어서이다. 스캔들 상대 이외에 알고 있는 것은 미국의 가수이며, 싱어송라이터 정도라는 것뿐이다.

열심히 분석 중인 윤아의 생각은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귀여운 그녀의 표정에 테일러 스위프트가 피식 웃으며 말한다.

“생각보다 괜찮은 것 같네요.”

“그런가? 그걸 떠나 이미 마음을 정한 듯 싶은데?”

“그럴 리가! 아무리 염두에 두고 있어도 확인은 할 생각이었죠. 실제로 보니 실물이 더 나은 것 같군요. 이 정도면 충분히 합격선이에요.”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군.”

석규가 고개를 끄덕였고, 테일러 스위프트의 얼굴에는 묘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두 사람의 영어 대화에 수만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지만 정작 당사자인 윤아는 자신의 생각에 몰두해 있느라 무슨 말이 오고가는 것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일단 한 가지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요. 미스터 강.”

“뭐지?”

“내가 임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서 아직 모르고 계시죠?”

“음! 그 부분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 그러고 보니 무슨 이유로 윤아 양을 선택했는지 모르겠군.”

“내가 미스 임을 선택하게 된 것은 당신 회사의 소속 그룹인 라샤의 앨범 <가면의 기사> 뮤직비디오를 봤기 때문이에요.”

“아아! <가면의 기사>로군. 확실히.”

테일러 스위프트가 왜 윤아를 히로인으로 염두에 두고 있는지 알 것 같은 석규였다. 라샤의 타이틀곡인 <가면의 기사>는 뮤직비디오 여자 주인공으로 윤아가 출연한 적 있다. 그리고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가면의 기사> 남자 주인공으로 열연을 펼친 사람은 다름 아닌 창현이었다.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었지만 당시 윤아는 데뷔 전에 라샤의 뮤직비디오에 출연함으로써 큰 인기를 얻을 수 있었다.

뮤직비디오 촬영을 계기로 윤아가 창현에게 홀딱 넘어간 것은 누구도 모르는 전개였지만.

고개를 끄덕이는 석규를 보며 테일러 스위프트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걸린다.

“현과 상당히 멋진 열연을 펼친 걸로 기억해요.”

“으음! 알고 있었나?”

“보다 보면 알게 되더군요. 굳이 얼굴을 확인하지 않아도 월드 스타의 아우라는 아무나 지닌 게 아니니까요. 당시 나이를 조합해보면 누구인지 뻔하게 나오죠.”

“하하하! 그런 식으로 구분이 가능하기도 하군. 상당히 신선해.”

“저만 사용하는 방법이니 염려하지 않아도 돼요. 어쨌든 그 뮤직비디오에서 제가 눈여겨 본 것은 여기 미스 임이니까요.”

“그렇지.”

“…….”

빠르게 오고가는 대화 속에 윤아의 표정이 점점 불퉁하게 변해갔다. 대화를 나누면서 간간이 자신에게 시선을 두는 것으로 보아, 대화 속 미스 임의 존재는 자신이라는 걸 눈치 챈 윤아였다. 영어를 배우기는 했지만 두 사람의 폭풍 영어 회화를 따라가기에는 아직 많이 부족했다.

“그럼 어떻게 하겠나? 결정을 내리겠나?”

“그건 아직 확정 짓지 못하겠네요. 제가 결정을 내린다고 해도 이곳의 사정이 있지 않을까요?”

“그것도 그렇지. 아마 이 회장님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걸세.”

“일개 뮤직비디오를 촬영하기 위해 미국으로 나가는 건 어렵지 않나요?”

“가능합니다, 충분히.”

조용히 경청하던 수만이 말문을 떼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의 얼굴은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테일러 스위프트는 제대로 중요성을 모르고 있는 듯하지만 미국은 이곳과 크기를 달리하는 어마어마한 규모를 지닌 시장이다. 그곳에 얼굴 도장을 찍는 것이 얼마나 어렵던가. 그것을 테일러 스위프트의 뮤직비디오로 찍게 되면 앞으로 큰 장점이 되어 나타날 것임이 분명했다.

‘소녀시대의 미국 진출도 염두에 둘 만하다!’

동방신기와 슈퍼주니어 모두 아시아의 스타로 발돋움 시킨 SM엔터테인먼트였기에 소녀시대의 아시아 스타 프로젝트도 이미 확립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거기에 미국이라는 시장까지 끼어든다면 프로젝트의 규모는 몇 배 아니, 몇십 배로 커질 것임이 분명했다.

현의 뮤직비디오 주인공으로 출연한 세실리아가 지금 확고하게 자리 잡은 것을 감안하면 이는 놓칠 수 없는 절호의 기회였다.

“가능하다는 건가요? 현재 미스 임은 이곳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 들었어요. 미국으로 오게 되면 잠시나마 그 기반을 포기해야 한다는 건데 그게 가능한가요?”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만큼 미국은 큰 시장이니까요.”

“흐응, 하지만 그것은 미스 임의 의견이 아닌 당신의 생각인 듯 싶군요.”

“…….”

날카로운 테일러 스위프트의 말에 수만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그녀의 말마따나 아직 대화의 흐름에 끼어들지 못하고 있는 윤아는 무슨 내용이 오고가는 것인지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상태였다.

“일단 긍정적으로 생각해주신다는 것에 만족해요. 제가 간 뒤에 한 번 이야기를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억지가 아닌 본인의 의지를 확인하고요. 그 정도는 가능하겠죠?”

“물론입니다.”

반짝이는 푸른색 눈동자를 보는 순간 수만은 자신의 뜻대로 그녀를 다루는 건 쉽지 않으리란 걸 눈치 챘다.

“그럼 제 용건은 마무리가 되었네요. 이렇게 자리를 마련해주어서 정말 고마워요, 미스터 강.”

“하하! 이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하지. 전혀 부담을 갖지 말고 삼촌처럼 편안하게 대하라니까.”

“흐응, 그렇게 하면 미스터 강이 많이 피곤할 텐데요?”

입 꼬리를 말아 올린 그녀의 모습은 매력적이었지만 사람을 휘두르는 마왕의 기질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그걸 눈치 챈 석규는 곧바로 한 발 물러섰다.

“피곤쯤이야, 하지만 귀찮게 구는 건 나보다 현에게 해주었으면 싶은데?”

“아버지가 그런 말을 할 수 있나요?”

“귀찮게 해야 그 녀석이 아등바등 몸부림쳐서 더 성장할 테니까.”

“호호! 그것도 그렇군요. 그 제안은 한 번 고려해보도록 하겠어요.”

웃음을 터뜨린 테일러 스위프트가 윤아를 바라본다.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상황을 지켜보던 그녀는 자신을 바라보는 눈길에 고개를 돌렸다가 움찔한다. 검고 푸른 것의 차이가 있었지만 자신을 응시하는 눈길은 마치 연희의 것과 흡사해보였다.

전신에 소름이 바짝 돋는 것을 느낀 윤아가 눈에 힘을 팍 주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그녀의 눈빛에 휘말렸을 테지만 소녀시대의 꽃사슴은 마왕에게 이골이 난 돌연변이 사슴이다.

‘전에 알던 내가 아니라고!’

빠직! 빠지직!

스파크가 일어날 정도로 강렬한 눈빛을 교환하는 두 사람.

“훗!”

만만치 않은 기백이 느껴지자 테일러 스위프트는 입 꼬리를 말아 올리고는 자리에서 일어선다. 석규가 뒤따라 일어나고, 수만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엉겁결에 윤아도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그녀는 윤아에게 손을 내밀며 말한다.

“제안을 수락하면 같이 활동하게 될 테니 잘 부탁해요.”

“에? 아, 음! 오, 오케이! 땡큐! 시유 넥스트 타임.”

빠르게 나오는 영어에 고개를 갸웃하던 윤아는 잘 부탁한다는 한 마디를 알아듣고는 나쁘지 않겠거니 생각하며 아는 단어를 총동원했다.

주입식 교육의 폐해인지 머리에 쌓인 영어 지식이 이럴 때는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인사를 마치고 회장실을 나선 테일러 스위프트가 석규에게 말한다.

“저녁 식사나 같이 할까요, 미스터 강?”

“숙녀의 초대라면 얼마든지 응하지. 현도 부를까?”

“미국에 오면 많이 괴롭힐 텐데 굳이 한국에서 괴롭힐 필요는 없겠죠. 이곳에서 괴롭혀도 각별한 맛이 있을 테지만. 호호!”

생각만으로도 즐거운 듯 미소 짓는 그녀였다. 정서의 차이인지 모르겠지만 키 이야기에 유난히 민감한 창현은 괴롭힐 맛이 나는 사람이다.

같이 식사 자리를 가져 괴롭힐까 생각이 들었지만 그녀는 나중의 재미를 위해 과감히 시일을 미루었다. 맛있는 음식도 아껴서 먹어야 더욱 각별한 맛이 느껴지는 법이다.

“짓궂군.”

“스페셜리스트라 해주세요.”

“그러지. 그럼 내가 에스코트하겠네.”

피식 웃음을 지은 석규가 테일러 스위프트와 함께 자리를 옮긴다.


한편, 두 사람이 밖으로 나갔음에도 윤아는 여전히 멍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영어가 꽝인 그녀는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감을 잡지 못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생각에 잠겨있는 수만을 보면서 윤아는 입을 열 수 없었다.

그녀의 생각처럼 수만은 지금 머릿속에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하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테일러 스위프트의 제안. 그녀의 제안은 지금 고공행진을 거듭하고 있는 소녀시대의 인기를 다시 한 번 비상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잡음이 끊이질 않겠지만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을 테지.’

당사자의 허락이라는 조항이 붙어 있었지만 수만은 개의치 않았다. 분명 그녀라면 이 제안을 허락할 테니까. 그녀에게도, 소녀시대에게도 도움이 되는 것을 놓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마음을 굳힌 수만이 고개를 한 번 끄덕이자, 조심스럽게 그를 살피던 윤아가 입을 연다.

“저기, 삼촌.”

“음? 왜 그러냐?”

“방금 전 테일러 스위프트가 왔던 거 맞죠?”

“그래, 용무가 있어서 우리 회사에 들른 거다. AA엔터테인먼트의 강 사장님이 소개를 시켜주었지.”

“아아, 그렇구나. 그런데 미국의 스타가 무슨 일로 회사에 온 건가요?”

“일 때문이지.”

“그럼 저는 왜……?”

윤아가 알고 싶은 것이 바로 이것이다. 용무가 있다면 높으신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면 되는데 굳이 자신을 부른 이유가 도통 생각나지 않았다.

“그야 일 때문이지.”

“일이라면 어떤 거죠?”

“지금부터 내가 하는 이야기를 잘 들어라.”

진지한 수만의 표정에 윤아도 덩달아 긴장하기 시작한다.


“일단 테일러 스위프트가 누구인지 알고 있지?”

“네, 미국의 유명한 가수라는 건 알고 있어요.”

“그래, 그녀는 미국의 유명한 가수다. 천재 싱어송라이터로 이름이 높지. 실력도 실력이거니와 대중적인 인기도 높다. 얼마 전 현과 스캔들이 나서 더욱 뜨거운 인기를 얻고 있지.”

“…네.”

스캔들이라는 말에 불길이 치밀었지만 겉으로 티내지 않았다. 수만은 그녀의 반응을 깨닫지 못한 채 말을 이어나갔다.

“그녀가 이곳을 찾아온 까닭은 다름 아닌 네게 있다.”

“네? 저한테 있다고요?”

“그래 너. 다른 사람이 아니라.”

어리둥절하는 윤아의 반응에 수만이 손을 들어 가리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반응은 황당함이었다.

“절 왜요?”

미국에서 활동하는 사람이 왜 자신을 찾아왔을까?

부지런히 머리를 굴렸지만 윤아는 해답을 찾을 수 없었다.

‘쯧!’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윤아의 모습에 수만이 혀를 찼다. 방금 전 테일러 스위프트와 석규가 영어로 그녀 앞에서 버젓이 대화를 나누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모르는 눈치였던 것이다. 앞으로 미국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영어가 필수인 만큼 윤아의 반응은 그의 마음을 굳히게 만들었다.

‘당장 내일부터라도 영어 교육을 강행해야겠군.’

소녀시대에게는 지극히 불행한 이링 아닐 수 없다.

생각을 정리한 수만은 자세한 설명을 곁들여 이야기를 시작했다.

“간단하다. 그녀의 뮤직비디오 주인공으로 널 선택하였기 때문이지.”

“에엑? 저를요? 그녀가 언제 절 봤다고 뮤직비디오 주인공으로 선택을 해요?”

황당함에 가득 찬 소리를 질렀지만 수만은 개의치 않고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녀가 널 눈 여겨 보게 된 것은 다름 아닌 라샤의 뮤직비디오 <가면의 기사>다.”

“그거라면…….”

반짝이는 윤아의 눈. 창현과 함께 촬영했던 그 기분이 다시 떠오르자, 몸이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비록 입맞춤을 하지 않았지만 숨결을 바로 앞에까지 느낄 수 있었던 그 시간은 아직도 잊을 수 없는 달콤한 순간이었다.

“그곳에서 그녀가 구상하는 뮤직비디오 주인공의 모습을 엿본 것이겠지. 어쨌든 그녀는 네가 마음에 든다 하였고, 직접 보면서 만족의 표시를 하더구나.”

“마음에 든다는 건?”

“주인공을 맡아주었으면 싶다는 게지. 하지만 그녀는 조건을 붙이더구나. 바로 당사자의 결정에 따라서 물려줄 수도 있다는 것. 네가 내키지 않으면 하지 않아도 된다는 조건이다.”

“내 선택…….”

“현재 소녀시대는 국내 활동에 박차를 가하고 있지. 그런 와중에 뮤직비디오 촬영을 하기 위해 미국으로 가는 건 자칫 잘못하면 국내 인지도를 저버리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물론 이건 너에 한정해서지만.”

“그렇군요.”

고민에 빠져드는 윤아였다. 미국에서 알아주는 테일러 스위프트의 뮤직비디오 출연 기회. 그것은 자신에게 엄청난 호재로 작용할 것임이 분명했다. 만약 소녀시대가 이대로 인기를 얻어나갈 경우에는 몇 년 후라면 미국 진출도 노려봄직하다.

하지만 국내 인지도를 저버린다는 말에 윤아는 고민해야만 했다.

“그리고 한 가지 더할 게 있다. 뮤직비디오 촬영 스케줄과 겹치는 다른 제안이 들어온 상태인데.”

“다른 제안이라면?”

“드라마 주연으로 출연해주었으면 한다 싶더구나.”

“드라마 주연이요? 어떤 드라마인데요?”

“이거다. 제목은 <신데렐라 맨>이로군.”

수만이 내미는 서류는 드라마 시나리오와 대본이 적혀있는 것이었다. 윤아는 서류를 받아들며 떨리는 눈으로 제목을 읽어나갔다. 연기도 병행하는 그녀의 최종 목표는 드라마 주연을 맡는 것이다. 그 꿈이 이뤄지기 직전이었으니 떨릴 수밖에 없다.

“드라마 제안도 나쁘지 않지. 주조연 역할을 훌륭하게 해냈으니 주연으로 한 번 도전해보는 것도 네게 괜찮을 테고.”

“…하지만 삼촌은 그리 추천하시는 것 같지 않아요. 제가 뮤직비디오에 출연하길 원하시는 건가요?”

윤아는 솔직하게 수만의 속내를 물었다. 드라마 주연이라는 자리도 훌륭하게 여겨졌지만 뮤직비디오 이야기를 하던 때와는 톤이 상당히 다르게 느껴졌다.

“일단 내 생각을 묻는다면 뮤직비디오에 출연하는 것이 훨씬 좋다고 느껴진다.”

“어째서요? 드라마에 출연하는 게 국내 인지도를 다져놓는데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고개를 저은 수만이 딱 잘라 말한다.

“드라마가 모두 잘 되는 게 아니지. 만약 실패하게 되면? 오히려 네게 마이너스가 될 확률이 농후하다.”

“하지만 그것은 뮤직비디오도 비슷할 텐데…….”

“그래도 미국이다. 시장의 크기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지. 그리고 테일러 스위프트와 친분을 다져놓게 되면 몇 년 후 소녀시대가 미국에 진출하여 큰 도움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미국이 그 정도로 큰 곳인가요?”

“그래서 원더걸스가 미국으로 떠난 거 아니겠느냐?”

“아…….”

국내 지지기반을 놓아둔 채 미국으로 떠난 원더걸스를 예로 들자, 윤아는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미국으로 간다는 건 좀 어려운 건 같아요. 가본 적도 없고, 낯선 시스템에 제대로 적응할 자신도 없고…….”

조심스럽게 자신의 생각을 밝히는 윤아. 더 넓은 미국도 좋지만 국내 지지기반을 버리고 떠난다는 건 내키지 않았다. 차라리 가수 활동을 하면서 드라마를 병행하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는 형태가 더 노려봄직했다.

자신의 뜻을 따라주지 않는 윤아의 말에 수만은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네 결정이냐?”

“네, 아무래도 뮤직비디오가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어서요. 흥행할지 여부에 대해서도 미지수고요.”

“그건 네가 뭘 잘못 알고 있는 듯하구나. 테일러 스위프트 앨범의 뮤직비디오는 엄청난 흥행이 보장되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지.”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흥행이 보장되었다는 말에 윤아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황당한 표정을 지은 수만이 말한다.

“그것도 모르나? 이번 테일러 스위프트의 뮤직비디오에 현이 출연하다고 하지 않느냐? 그렇다면 흥행은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지.”

“……!”

가뜩이나 커다란 윤아의 눈은 수만의 이야기에 찢어질 듯 커졌다. 지금 잘못 들은 것이 아니라면 테일러 스위프트의 뮤직비디오에 창현이 출연한다는 이야기였다. 자신이 여자 주인공이라면 분명 남자 주인공은 그일 터.

“차, 창현이가 출연하나요?”

“그걸 모르고 있었나? 허! 그래서 드라마를 하겠다고 했던 거로군.”

“그, 그랬군요.”

확답을 받은 윤아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일일 데이트권 획득으로 인해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있던 그녀는 테일러 스위프트가 공항에서 이야기했던 내용을 접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다 제대로 된 내용을 접하게 되자 패닉 상태로 빠져들었다.

‘창현이와 뮤직비디오라면 고민할 가치가 없잖아!’

더군다나 국내가 아닌 미국에서 단 둘이 촬영!

이것은 막강한 여덟 명의 경쟁자를 합법적으로 따돌리고 단독 포지션을 취할 수 있는 최상의 조건이었다.

“현이 출연한다는 이야기에 눈빛이 바뀐 듯한데, 어떻게 할 생각이냐?”

“창현이가 있다면 적응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을 것 같아요. 그리고 국내는 언니들과 막내가 알아서 잘 할 테니 아무래도…….”

횡성수설하며 자신이 미국으로 가야하는 이유에 대해 설명하는 윤아. 어리숙하게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수만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럼 뮤직비디오 촬영을 하는 걸로 가닥을 잡아도 되겠군.”

“네, 그렇게 해주세요. 미국이라니, 큰 시장을 경험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

단순히 창현이 출연한다는 사실만 첨가되었을 뿐인데, 윤아의 태도는 판이하게 뒤바뀌었다. 미영이나 유리처럼 뛰어난 지략이 있는 것도 아니고, 수연처럼 카리스마가 있는 것도 아니다. 주현처럼 선후배 관계도 아니었기에 윤아는 창현과 단 둘이라는 포지션을 취하는 것이 너무나 어렵게 느껴졌다.

“그래, 결정을 내렸군. 그럼 뮤직비디오 촬영을 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겠다.”

“네, 그렇게 해주세요.”

“좋다, 그렇게 하도록 하마.”

윤아의 진출은 미국에 있는 보아에게도 큰 도움이 될 것이고, 동방신기나 슈퍼주니어의 미국 진출도 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것이다.

‘일이 술술 풀리는군.’

모든 일이 뜻대로 풀리고 있었다.


“…….”

수만과 대화를 마친 윤아는 연습실로 돌아가 연습을 재개했지만 제대로 집중하지 못한 채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계속해서 단 둘이 뮤직비디오를 촬영하는 장면이 연상되고 있었다.

‘미국은 수위가 상당히 강하겠지? 그렇다면 키스신도 있을 거야. 그럼 난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합법적으로… 에헤헤!’

노을이 지고 끝없이 펼쳐진 광활한 평야에서 단 둘이 선 채 설렘을 담은 입맞춤을 한다. 생각만 해도 머리가 뻥! 하고 터져버릴 듯한 야릇한 상상의 향연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이어졌다.

‘꺄아! 난 몰라. 그래도 이해할 수 있어. 미국이니까! 개방된 국가니까 난 해야만 해!’

이상한 곳에서 결의를 다지는 윤아. 일일 데이트권으로 고민하느라 썩은 동태눈을 하고 있던 그녀의 눈은 별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그 모습을 놓칠 소녀들이 아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축 쳐져 있던 그녀가 활기에 가득 찬 모습을 보이자, 윤율의 일원인 유리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어본다.

“윤아야,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나 봐?”

“네? 아, 아니요, 그냥 내일 음악 프로그램에 출연한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서요.”

“그것뿐이야?”

“왜요? 1위 후보니까 기분이 좋아서 그런 거죠.”

“그래? 흐응.”

콧소리를 흘리며 유리의 눈이 가늘어지자, 윤아는 뜨끔했지만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다. 자신보다 훨씬 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마율이었지만 윤아는 속으로 주문을 외웠다.

‘난 연희 언니마저도 굴복시켰어. 유리 언니랑 미영 언니한테 밀릴 수 없어.’

윤아가 즐거운 이유를 캐내는데 실패하자, 미영이 나서며 그녀의 팔을 잡은 채 애교를 부린다.

“헤헤! 그것 말고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은데. 말해줄 수 없어? 우리는 같은 멤버잖아. 비밀 같은 거 만들지 말고 같이 공유하자. 기쁨도 나누면 곱빼기가 된다고 하잖아.”

“웃…….”

동성에게도 통하는 강력한 눈웃음에 윤아가 순간 멈칫했지만 넘어가지 않았다. 여기에서 발설하면 온갖 견제가 들어올 것은 초딩 융이라 해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가까스로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킨 그녀가 말한다.

“별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니라니까요. 그냥 요즘 하루하루가 즐거워서 그래요.”

“즐겁다고 스케줄 때문에 힘든 게 아니라?”

“그래도 작년처럼 숙소에 있는 날이 많았던 것보다 낫잖아요. 언니는 안 그래요?”

“아, 아니 낫긴 하지.”

암울했던 한때를 언급하자 미영이 움찔하며 물러난다.

반응이 나오자, 용기를 얻은 윤아가 말한다.

“그래서 스케줄이 힘든 요즘 우울하게 지내다가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든 거예요. 이렇게 피곤한 게 오히려 아무것도 안하는 것보다 즐겁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기분이 좋아지더라고요. 그리고 내일 음악 프로그램 1위 후보이기도 하고요. 생각해보세요. 여태까지 우리가 이 정도로 상승세를 탄 적이 있는지.”

“…….”

윤아의 말에 그녀를 주시하던 소녀들이 할 말을 잃었다. 그녀의 말은 요즘 스케줄로 지쳐있던 자신들을 일깨워주는 말이었다.

멍하니 서 있던 미영은 감동받은 표정으로 말한다.

“와! 윤아 말 잘한다. 나 방금 엄청 감동 받았어.”

“그래요? 히히! 저도 할 땐 한다고요.”

“윤아 대단해!”

미영의 칭찬에 이어 다른 소녀들의 칭찬이 이어진다.

‘위기는 넘긴 거지? 다행이다. 후우!’

고비를 넘겼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는 윤아였다.

하지만 그녀를 지켜보는 두 쌍의 눈이 있었다.

윤아를 주시하는 눈동자의 주인공은 바로 효연과 유리였다.

멤버들에게 둘러싸여 미소 짓는 윤아의 모습을 보며 효연은 이질감을 느꼈다.

‘흐음, 내 직감에 의하면 방금 말한 게 전부는 아니야. 제법이군 초딩. 어설픈 말로 멤버들을 속여 넘길 줄이야. 하지만 난 아니라고.’

끝판왕 포스를 팍팍 풍기는 효연과 달리 유리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은밀히 미소 지었다.

‘그렇게 나오겠다는 거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미영이를 속여 넘겼다고 해서 나까지 속았다고 생각하지 마. 괜히 윤율이라는 말이 나온 게 아니라고. 반드시 밝혀내겠어.’

소녀시대 내에서 가장 장난기 많은 삼인방으로 통하는 효연과 유리, 윤아.

그녀들은 달리 초딩 삼인방이라 불리기도 한다.

초딩은 초딩을 알아보는 법이다.


창현은 지금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미국에서만 볼 수 있는 눈앞의 여인은 그에게 있어 그리 달가운 상대가 아니었다.

반가워하지 않는 창현과 달리 여인은 달랐다.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지은 그녀는 손을 들어 인사했다.

“하이, 현.”

“어떻게 여기에…….”

“미스터 강을 따라왔지. 맛있는 식사도 대접해주고.”

“…….”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테일러 스위프트였지만 창현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이글거리는 눈으로 석규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고개를 돌린 채 딴청을 피우고 있을 뿐이었다.

입가에 맺힌 장난스러운 미소에 창현은 울컥했지만 간신히 억누르며 테일러 스위프트에게 말한다.

“큭! 피곤할 텐데 뭐하러 여기에 왔어? 좀 쉬지.”

“현이 보고 싶어서 왔지.”

“미국에서도 볼 수 있잖아.”

“뭐야, 힘겹게 여기까지 찾아왔는데 지금 쫓아내려는 거야?”

“그, 그럴 리 없잖아.”

고개를 저으며 부인하는 창현이었지만 그런 기색이 많이 티가 났나 보다. 테일러 스위프트는 풀 죽은 표정으로 말한다.

“하아! 내가 이곳에 온 이유 중 하나가 현 때문이기도 하고, 직접 오게 된 것에는 현의 국가라는 점이 많이 작용한 것인데. 정작 현은 날 반가워하지 않나 보네.”

“아, 아니야! 그런 게 아니라니까.”

부인하는 창현이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실의에 빠진 표정이다.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에 어쩔 줄 몰라하며 석규에게 도움을 청하는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그는 매몰차게 고개를 저어 외면했다.

‘쓴 경험도 해보는 게 좋지.’

고개 숙인 테일러 스위프트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여지없이 휘둘리는 창현이었기에 석규는 좋은 경험(?)을 하라는 의미에서 방관자로 남았다.

그녀가 어깨까지 들썩이기 시작하자, 기겁한 창현은 무조건 항복을 외치며 달래기 바빴다.

“그럼 내일 시간 내줄 수 있지?”

“으응?”

“한국에 처음 오잖아. 아는 사람이 안내를 해주었으면 좋겠어서.”

“일 때문에 온 거 아니야? 테일러는 바쁘잖아.”

어떻게든 떼어놓으려 애쓰는 창현이었지만 이미 그의 머리 위에 놀고 있는 테일러 스위프트는 어느새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일은 이미 마무리 단계야. 상대방 측에서 대답만 내놓으면 되거든. 그렇죠, 미스터 강?”

“물론이네. 빠른 시일 내에 결정이 나겠지.”

“잠깐, 아버지가 도와주셨어요?”

“응, 미스터 강이 도와줘서 일찍 끝낼 수 있었어.”

“…….”

도의상 도와줄 수 있었지만 지금만큼은 석규가 원망스러운 창현이다.

“그래서 내일은 휴식의 의미에서 현이 이곳 서울을 안내해줬으면 하는데 어때?”

“하지만 난…….”

자신을 장난감처럼 농락하는 테일러 스위프트와 오랫동안 있고 싶은 마음이 없는 창현이다.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빠져가려 했지만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있는 그녀는 사전에 그의 말을 차단했다.

“다 들었어. 현이 이곳에 있는 동안 휴식기라며? 특별한 약속이 없다면 같이 놀아줘. 응?”

“…누구한테 들었어?”

“미스터 강에게.”

그 말에 창현이 석규를 날카롭게 쏘아봤지만 그는 어느새 사장실 앞에 도달하여 세 사람에게 말한다.

“험! 그러고 보니 대화를 나누는데 차가 없군. 차를 내오도록 하지.”

직원을 시키면 되건만, 직접 차를 타오겠다는 말로 자리를 피하는 석규였다.

“크윽.”

강하게 한 방 먹은 창현의 입에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석규가 차를 내오고, 사적인 이야기에서 일 이야기로 넘어갔다.

“뮤직비디오 히로인을 정했다고?”

“맞아, 이번에 내가 구상하고 있는 뮤직비디오 주인공은 현이 적합하거든. 그리고 여자 주인공 또한 현과 같은 나라의 인물이 적합한 것 같아서.”

“그래서 히로인을 정하러 왔다고 한 거구나.”

“이미 히로인 후보를 만나고 왔어. 내가 보기에는 합격이야.”

까다로운 그녀의 마음에 들었다는 것에 창현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과연 그녀의 마음에 들었을까.

“히로인 후보가 누군데?”

“미스 임. 아주 예쁘게 생겼던데?”

“미스 임? 미스 임이 누구에요?”

성만 듣고 누구인지 알아차리지 못한 창현이 석규에게 묻자, 그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걸린다.

“소녀시대 윤아라고 하면 알아들으려나?”

“엑? 정말이야? 윤아 누나를 히로인으로 하겠다고?”

“물론이야.”

“어째서? 난 지금 테일러의 생각을 모르겠어.”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짓는 창현이다. 국내에서 윤아의 인지도는 높지만 미국에서는 무명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테일러가 뮤직비디오 히로인으로 내세우겠다는 의도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매우 계산적인 그녀가 자신의 직감만으로 일을 추진할 리도 없다.

비교적 자신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는 창현의 물음에 그녀는 친절하게 대답한다.

“간단해. 이곳 소속의 라샤 뮤직비디오 <가면의 기사>를 봤기 때문이지.”

“<가면의 기사>를? 그런데 그게 왜……?”

묘한 불안함이 들었다. 자신이 <가면의 기사>에 출연했다는 것은 라샤 멤버들과 뮤직비디오 제작진, 그리고 석규와 윤아뿐이다.

“감추려고 애쓰지만 나한테는 감출 수 없지. 내 날카로운 눈매는 <가면의 기사> 주인공이 현이란 걸 눈치 챈 상태라고.”

“큭!”

확실히 다른 사람이라면 이해할 수 없지만 자신이 대마왕 취급하는 그녀라면 충분히 알아차리는 것도 가능할 것 같았다.

“이미 성공한 조합이라는 것에 마음이 끌린 거로군.”

“그것도 있지. 도전을 좋아하지만 실패 가능성이 높은 도전은 싫어하니까. 내 구상과 비슷하다는 점도 한 몫을 했어.”

즐거운 듯 미소 짓는 그녀를 보며 창현은 한숨만 푹 내쉴 뿐이다.

“후우! 괜히 윤아 누나만 불쌍하게 되었네. 테일러의 히스테리에 희생되는 건 나면 족한데…….”

“뭐어?”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머릿속의 생각을 아무 생각 없이 중얼거린 창현이지만 이미 그의 말은 테일러 스위프트의 귀에 스며든 상태였다.

그녀의 입 꼬리가 불길하게 말려 올라간다. 자신의 말실수에 아차한 창현이었지만 이미 그녀의 귀에 말이 흘러들어갔기에 여기서 더 자극했다가는 역효과만 나기 십상이다.

“흐응, 현이 날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구나.”

“아, 아니야! 오해야. 난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히스테리라…….”

“크윽!”

정확하게 듣고, 언급하자, 창현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이 절망스러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야 할지 캄캄하게 변하는 기분이다.

“현이 날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니 보답을 해야겠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 내 뮤직비디오에 과감한 마조 연기를 넣을까?”

“…….”

“아니면 아주 진한 베드신을 넣을까? 아! 그건 히로인에게 실례가 될 수 있으니 키스신 스무 번 정도를? 그것도 좋아할 수 있으니 동성과의 진한 접촉을 넣어볼까. 파격적일 텐데.”

“…….”

갈수록 강해지는 수위에 창현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려갔다. 말 한 마디 잘못한 대가로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생겼다.

썩은 감자처럼 변해버린 창현의 얼굴을 보며 테일러 스위프트는 속으로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한 마디에 일희일비하는 그의 모습이 너무나 재미있었다.

‘이러면 더 괴롭히고 싶잖아?’

마음 같아서는 더 괴롭히고 싶은 욕구가 들었지만 애써 충동을 억눌렀다. 매일 황금알을 낳는다고 하여 거위의 배를 째는 우를 범할 정도로 그녀는 어리석지 않았다.

창현의 반응을 한껏 즐기던 그녀가 조금 풀어준다.

“마음 같아서는 방금 말한 것처럼 해주고 싶지만…….”

“으음.”

한 번 시선을 주자, 창현의 뺨을 타고 땀 한 방울이 흘러내린다.

최고조로 긴장감을 조성한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소파에 몸을 묻는다.

“너무 심한 것 같으니 넘어가줄게. 대신 내일 성실하게 안내해주기야?”

“…알았어. 너그러이 이해해줘서 정말 고마워, 테일러.”

“뭘, 내가 착하고 상냥한 걸 이제 알면 조금 섭섭하네.”

“크, 크윽.”

스스럼없이 자신이 착하다 일컫는 테일러 스위프트의 태도에 창현은 목구멍까지 치민 말을 간신히 억누를 수 있었다. 여기서 한 마디 더하면 위에 늘어놓은 것들을 모두 넣고도 남을 사람이 그녀였다.

‘이걸 고마워하다니. 정말…….’

내일 서울을 안내해주는 것도 좋지 않게 여겼는데 그것으로 만족하다니 이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여기는 자신의 간사한 마음에 한숨만 저절로 나왔다.


숙소로 돌아온 윤아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전날 테일러 스위프트가 내려준 은총(?)이 그녀의 머릿속에 맴돌았기에 창현과 달달한 로맨스 향연을 펼치는 것을 맛보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헤, 헤헤! 그러면 안 된다니깐.”

한껏 즐거워하는 윤아. 그런 그녀의 귀로 달콤한 순간을 방해하는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윤아야, 윤아야.”

“음? 아, 안 돼. 난 지금 행복한데. 안 돼… 으음? 언니에요?”

서서히 깨져가는 꿈에 필사적으로 발버둥치는 윤아였지만 잠에 깨면서 달달했던 로맨스는 저 멀리 날아가고 말았다. 눈을 뜨니 그녀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천장과 자신을 깨우는 효연의 얼굴뿐이었다.

자리에서 부스스 일어선 윤아가 비몽사몽한 표정으로 효연에게 묻는다.

“효연 언니, 왜요? 오늘 모처럼 스케줄 없는 날이어서 푹 자려 했는데…….”

원망 섞인 윤아의 목소리가 귀를 울렸지만 효연은 개의치 않고 컵을 내민다.

“음? 하하! 미안해. 하지만 그냥 잠자기에는 날씨가 너무 좋아서. 자, 여기 차가운 얼음물이야.”

“고마워요.”

작정한 듯 물을 내미는 효연을 보며 윤아는 차가운 얼음물을 들이켰다. 전신에 번져가는 차가움에 졸음의 여파가 가시는 걸 느꼈다.

“하아! 시원하네요. 그런데 절 왜 깨우신 거예요?”

“응? 방금 말했잖아. 날씨가 너무 좋아서 숙소에만 있기 그렇다고. 그러니 같이 나가는 게 어때?”

“아직 아침이잖아요.”

“이런 날은 아침 일찍 일어나서 밤늦게까지 놀아줘야 예의라고! 오늘 융이 널 선택했으니 감사하며 따라오도록! 알겠나?”

잘 자고 있는 자신을 깨워놓고 오히려 감사하라는 효연의 적반하장 행동에 윤아는 입술을 삐죽였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나이가 깡패인데. 더욱이 자신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조용히 있어야 할 때였다.

“칫! 피곤해서 오늘은 푹 자려 했는데. 이미 깨버렸으니 어쩔 수 없네요.”

“하하! 미안해. 유리도 준비하고 있으니까 어서 일어나. 오늘 재미있게 놀아보자.”

“하아. 알았어요.”

한숨을 푹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윤아. 입가에 미소를 지은 효연이 그녀를 부축하여 일으켜주는 친절함을 발휘하였다. 윤아를 데리고 방밖으로 나가자, 드라이로 머리를 말리고 있는 유리가 둘을 맞이하였다.

“일어났어? 못 일어날 것 같더니 일어났네.”

“효연 언니가 얼음물까지 준비해서 안 일어날 수가 없었어요.”

“효딩이 준비성 하나는 철저하지. 이미 일어났으니 어쩔 수 없잖아? 씻고 와. 기왕 일어난 거 재미있게 놀아야지.”

“알았어요. 아우, 졸린데.”

투덜거리며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는 윤아였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효연과 유리는 아무 말 없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둘 사이에 무슨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이른 아침, 창현의 집은 고요한 적막에 휩싸여 있었다.

평소라면 잠에서 깨어 간단한 세면 뒤 명상에 잡길 시간이지만 오늘은 명상에 잠기지 않은 채 분주히 움직이는 중이었다.

“쳇! 유쾌하지는 않아.”

옷을 차려입는 창현의 입은 삐죽 튀어나온 상태였다.

오늘은 테일러 스위프트와 만나기로 약속한 날이다. 단 한 번의 말실수로 인해 약점을 잡혀버린 창현은 그녀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는 위치에 서 있었다.

“게다가 차려입으라니. 들키면 무슨 사태를 초래하려고.”

가뜩이나 눈에 띄는 외모를 지녔으면서 자신에게 한껏 차려입으라는 주문을 하자, 창현의 입에서는 거듭 한숨만 흘러나왔다.

모자나 선글라스로 외모를 가린다 하더라도 뛰어난 미모를 지닌 그녀를 사람들이 그냥 스쳐지나갈 리 없다. 거기에 세계적인 인지도를 지닌 그녀의 아우라를 사람들이 느끼지 못할 리도 없고.

“대한민국 출신인 나랑은 다르니까 더 골치 아프겠네.”

겸양이 미덕인 대한민국과 달리 미국은 겸손함보다는 자신감에 박수를 쳐주는 곳이다. 지닌 아우라를 숨기는데 능한 자신과 달리 테일러 스위프트는 그 부분에 있어서 생초보였다.

자칫 잘못하다가 사람들에게 들켰을 경우를 생각하니 아찔해지는 걸 느꼈다.

“걱정이군, 걱정이야. 잘못해서 들키면 왕창 깨지는데. 후우!”

주변에 포진한 여러 사람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잔소리를 늘어놓을 걸 생각하니 나오는 건 한숨뿐이다.

거울을 보며 옷을 차려입던 창현은 멈칫하며 고민에 잠기길 반복하다가 결정을 내린 듯 옷을 차려입기 시작한다. 무난하면서 자신의 장점을 부각시키는 간단한 패션이다.

“이 정도면 뭐라고 안 하겠지.”

뭐라 하더라도 들을 생각은 없다. 이것만으로도 자신은 충분한 성의를 보였다 생각하기에.

준비를 마친 창현은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자 대기하고 있는 차를 보고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탑승한다. 스캔들을 염려하여 반대해도 모자를 소속사 사장님은 특별히 차를 이용할 수 있게 도와주니 가끔은 아군인지 적군인지 헷갈려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벤을 타고 향한 곳은 압구정이었다. 젊은 사람들이 많은 거리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젊은 열기가 넘치는 곳 중 하나였다.

창현을 내려준 차는 조용히 떠났고, 거리로 나온 그는 주변을 둘러보며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서 그냥 기다리라고? 하아!”

톱스타 반열에 오르면서 이렇게 멍하니 거리에 서 있던 적은 거의 없었다. 간간이 사람들을 만나거나, 길을 걸었을 때는 있지만 그때와 지금은 기분이 사뭇 달랐다. 그때는 자신의 의지로 나온 것이지만 지금은 타인의 의지로 인해 반강제적으로 끌려온 것과 다를 바가 없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옷을 차려입은 채 멍하니 서 있는 창현에게 시선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주로 쳐다보는 사람들은 여성이었는데, 확 튀지는 않지만 자신의 장점을 살려주는 패션과 드러난 몸매는 한 번쯤 뒤돌아보게 만드는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혼자 나온 걸까?”

“일행을 기다리는 거 아닐까?”

“한 번 말 걸어봐.”

이른 시간이었지만 일찍 일어난 새가 먹이를 구한다는 불변의 명언을 실천하듯, 아침 일찍부터 거리를 배회하는 사람이 제법 많았다.

몇몇 여자들이 즉석 헌팅(?)을 위해 모의하며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다.

그때, 저 멀리서 찰랑찰랑 금발을 흔들며 다가오는 한 여인이 있었다. 모자와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린 그녀는, 같은 패션으로 얼굴을 가린 창현을 보고는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손을 들었다.

“하이.”

“하아! 왜 늦었어?”

“늦기는, 레이디는 약간의 준비 시간이 필요한 법이야.”

“10분이나 늦어놓고 그렇게 변명하면 안 되지.”

날카롭게 쏘아붙이는 창현이었지만 그녀는 대수롭지 않은 듯 손을 들며 말했다.

“그래? 그럼 미안해. 됐지? 이제 갈까.”

“크윽.”

성의가 전혀 담기지 않은 그녀의 사과에 신음을 흘린 창현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이내 한숨을 푹 내쉬고는 그녀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간다.

“에이, 역시 일행이 있었네.”

“게다가 상대는 금발 미녀야. 승리하기 힘들겠어.”

“칫! 괜찮다 싶으면 다 임자가 있네.”

호시탐탐 창현을 노리던 여자들은 아쉬움이 잔뜩 담긴 한숨을 내쉬고는 갈 길을 간다.

그렇다고 하여 그들에게 집중된 시선이 거두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남자들은 늘씬한 금발 미녀 테일러 스위프트에게 시선이 집중되었고, 여성들은 금발 미녀에게 전혀 처지지 않는 창현에게 시선을 두었다.

집중되는 시선에 부담감을 느낀 창현이 그녀 옆에 서며 묻는다.

“테일러, 이거 위험한 거 아니야?”

“뭐가 위험한데? 누가 총이라도 들고 있어?”

“그런 의미가 아니잖아. 우리가 들키면 어떻게 하냐고.”

“뭘 그 정도로 불안해하는데? 그냥 사진 찍히고 말면 되는 거지.”

“하아! 태평해서 좋겠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평온할 수 있지?”

만약 정체가 들켜 스캔들이 나게 되면 어떤 여파가 일어날지 상상도 하기 힘든 창현이었지만 테일러 스위프트는 나던 말던 방관하는 입장인 듯했다.

비꼬는 듯한 그의 말에 잠시 멈칫한 그녀가 선글라스를 살짝내리며 창현을 훑어보더니, 입가에 미소를 띤 채 말한다.

“편하게 살면 돼. 그나저나 현, 키가 상당히 커졌네?”

“웃!”

키 이야기가 나오자 창현은 침음을 흘렸다. 비슷한 키를 지니고 있기에 오늘 그는 자존심 다수를 착용하고 나왔던 것. 하지만 그녀는 전혀 굽이 없는 신발을 신고 나왔기에 창현의 키가 더 커보였다.

“후후후!”

“기, 길이나 갈까. 대한민국에 왔으니 한식을 먹어봐야지.”

“얼마든지. 기왕이면 맛있는 게 좋을 것 같아.”

황급히 화제를 전환하려는 창현과 달리 테일러 스위프트는 여유가 넘쳤다.

거리를 걷고 있는 두 사람에게 시선은 점점 집중되었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각선미가 드러나는 치마를 입고 왔기에 그녀의 긴 다리를 보고 남자들이 시선을 빼앗겨 멍한 표정을 짓기 일쑤였다.

“상당히 관심 받아서 좋은 걸?”

“관심 받아서 좋겠습니다, 그려. 난 불안해 죽겠는데.”

“불안하면 좀 더 빨리 움직여. 아쉬운 건 내가 아니란 걸 알 텐데?”

“크윽! 일단 전통찻집을 알아봤거든? 그곳으로 가자. 한식집은 점심으로 예약해뒀으니까.”

그렇게 말을 한 창현은 테일러 스위프트의 손을 잡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갑자기 적극적으로 변한 그의 행동에 그녀는 당황하기는커녕 오히려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머! 적극적이네? 하지만 난 아가에게 관심이 없어요. 좀 더 큰 다음에 대시한다면 진지하게 고려해볼게.”

“고려는 무슨! 너 때문에 내가 죽을 것 같다고.”

사람들의 시선이 점점 더 커지는 걸 두려워한 창현은 그녀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며 빠른 속도로 걸음을 옮겼다.

오늘 하루는 아침부터 험난했다.


“여기는 갑자기 웬일이에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은 윤아가 주변을 둘러본다.

고풍스러운 디자인이 되어있는 이곳은 전국의 다양한 차를 마실 수 있는 전통 찻집이다. 형돈과 우결 촬영으로 태연이 전통 찻집을 가봤고, 고전적인 것을 좋아하는 주현도 전통 찻집을 가보기는 했지만 소녀시대 초딩 라인인 효연과 유리가 자신을 이곳으로 데려온 것은 의외였다.

“우리도 가끔 괜찮아? 전통차도 한 잔 마셔보고.”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는데 좋지.”

“그래요?”

효연과 유리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윤아. 곤히 잠자고 있는 자신을 끌고 와서 전통 찻집이란 곳에 데려오자 무언가 이상한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괜히 언니들이 초딩이라 불리는 게 아니니깐. 조심해야 해.’

믿었던 연희가 자신을 한낱 유희의 도구로 사용했다는 충격은 사람 잘 믿던 윤아를 의심 많은 사슴으로 변화시켰다.

경계심을 끌어올린 그녀는 아무 행동을 보이지 않은 채 조용히 상황을 주시한다.

효연은 메뉴판을 들고 윤아에게 보여주며 말한다.

“자! 여기서 골라봐. 맛은 대체적으로 쓴데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어.”

“음! 어떤 걸 골라야 할지 잘 모르겠는데, 언니가 추천 좀 해주시겠어요?”

“내가?”

“네!”

“내가 보기에는 이게 괜찮은 것 같은데. 대체적으로 네 입맛에 맞을 것 같고. 또…….”

“또 뭐요?”

“요즘 많이 피곤한 것 같아서. 이 차는 피곤한 걸 풀어주는 효능도 가지고 있거든.”

“그래요? 그럼 전 이걸로 할게요.”

효연의 추천대로 주문한 윤아. 주문은 효연이 하였고, 값은 유리가 지불하였다. 잠시 후, 차가 나오자 자리에서 일어난 윤아가 말한다.

“제가 갖고 올게요.”

“그래.”

카운터로 향한 사이, 효연과 유리가 눈빛을 교환하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뭔가 있는 것 같지?”

“응, 분명히 있어. 뭔가를 숨기는 것 같아.”

다른 멤버들은 속였을지 모르나 초딩의 피를 지닌 두 명의 눈을 피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것이 비밀을 요하는 것이라면 둘이 캐내려 하지 않았을 테지만 순간 보여준 윤아의 눈빛은 분명 밝힐 수 있는 것임에도 밝히지 않는 종류의 것이었다.

두 사람이 수군거리며 상의를 끝낼 무렵, 쟁반을 든 윤아가 테이블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러다 갑자기 자리에서 멈춰 서자, 효연이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왜 그래?”

“…….”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윤아. 그 모습에 유리가 불길한 느낌을 받고는 황급히 묻는다.

“왜 그래, 윤아야. 무슨 일 있어?”

그때, 윤아가 양손으로 받치고 있던 쟁반이 땅으로 떨어진다.

와장창!

찻잔이 산산조각 나는 소리가 찻집에 울려 퍼졌다. 손님들의 시선이 윤아에게 집중되었지만 그녀는 찻잔이 깨진 것에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지금 윤아의 눈에 들어오고 있는 것은 오직 한 가지 장면이다.

바로 방금 전 다정하게 들어온 한 쌍의 커플이 그것이다.

눈에 확 띄는 금발 미녀와 패션과 몸매가 돋보이는 남자의 모습.

모자와 선글라스로 얼굴을 감추고 있지만 그것을 놓칠 그녀가 아니었다.

“왜 그래, 윤아야 괜찮아?”

“괜찮은 거야?”

효연과 유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윤아의 안위를 물었지만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활활 타오르고 있는 그녀의 눈빛은 정확히 금발 미녀에게 향해 있었다.

“주, 죽었어…….”

윤아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창현과 테일러 스위프트가 다정하게 마주 앉아있는 곳이었다.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윤아는 카페 안 손님들의 시선을 한눈에 받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효연과 유리는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자칫 잘못하여 손님들에게 들켰다가는 좋지 않은 소문이 돌 가능성이 높아서 그렇다.

두 사람은 재빨리 눈빛을 교환하며 대화를 나누었다.

‘어떻게 해?’

‘말려야지. 어서 말려.’

‘윤아 상태가 이상한데?’

‘그것보다 우리 정체가 들키는 게 더 급해.’

나온 찻잔을 깨버려서 보상까지 해줘야 했기에 골머리가 아픈 두 사람이었다. 윤아가 갑작스레 발작(?)을 일으킨 게 이상했지만 그보다 더 급한 사정이 있는 만큼 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효연은 윤아에게 향했고, 유리는 깨진 찻잔을 치우러 온 종업원에게 말했다.

“미안해요, 일행이 손이 미끄러져서 실수를 저질렀네요. 깨잔 찻잔은 보상할게요. 다른 분들에게도 죄송합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유리의 사과에 손님들은 분분이 시선을 거두었다. 하지만 윤아의 발작을 진정시키는 효연은 처음부터 차질을 빚고 있었다.

“윤아야, 왜 그래? 갑자기 이상한 반응을 보이고.”

“…….”

“윤아야?”

“언니, 저 지금 매우 심각해요.”

“도대체 왜 그러는데?”

답답함을 느낀 효연이 물어보았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그에 질문하길 멈춘 그녀가 고개를 돌려 윤아가 바라보고 있는 곳에 시선을 고정했다. 풍성한 금발을 늘어뜨린 여인이 모자와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린 채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것만 눈에 들어왔다.

“저게 왜?”

“…….”

“일단 앉아. 이러다가 다른 사람들에게 정체가 들킬 수 있어. 그렇게 되면 외출이 더 힘들어지는 거 알고 있지?”

“…알았어요.”

고개를 끄덕인 윤아가 자리에 앉는다. 종업원과 대화를 마친 유리도 자리에 돌아와 그녀의 맞은편에 앉고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묻는다.

“후! 윤아야, 갑자기 왜 그런 거야? 깜짝 놀랐잖아.”

“미안해요, 언니. 갑자기 놀랄 일이 있어서.”

“도대체 뭐 때문에 그런 건데?”

“언니, 테일러 스위프트라고 알죠?”

“테일러 스위프트? 모를 리가 없지. 미국의 유명한 가수잖아. 이번에 내한방문을 하기도 했고. 게다가 창현이랑 스캔들도 났었지.”

말을 하는 유리의 눈이 순간 번뜩였지만 눈치 챈 사람은 없었다.

유리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윤아가 말을 이어나간다.

“테일러 스위프트는 풍성한 금발을 지니고 있어요. 삼촌의 호출로 제가 개인적으로 한 번 볼 기회가 있었거든요. 웬만한 눈썰미를 지녔다면 그녀를 알아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겠지요?”

“그렇겠지? 무엇보다 예쁘게 생겼잖아.”

“그럼 저기를 보시겠어요?”

윤아가 한쪽을 향해 손을 가리키자, 효연과 유리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곳을 향한다. 그곳에는 모자와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린 금발미녀가 웃음을 지으며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것인지 바로 알아차린 유리가 묻는다.

“설마 저 여자가 테일러 스위프트라고?”

“맞아요. 저 여자가 바로 테일러 스위프트에요.”

“그래? 흐음!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매력적이네. 그게 뭐가 어째서? 저 여자가 윤아 네게 무슨 잘못이라도 저질렀어?”

그녀가 이곳에 왔다는 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게 어째서 윤아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인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잘못은 아니죠. 하지만 뭐라고 해야 할까, 가슴이 부글부글 끓게 만드네요.”

“뭐 때문에 그러는데?”

“지금 테일러 스위프트 맞은편에 있는 사람이 우리랑 잘 알고 있는 사람이거든요.”

“잘 아는 사람?”

“네! 국내에서는 현이라는 예명으로 활동하고 있는 사람인데, 언니들도 잘 알고 있죠?”

“……!”

윤아의 말에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던 두 사람이 이내 표정을 확 뒤바꾸더니 자리에서 일어난다.

“어떻게 하시게요?”

“네 말이 맞는지 확인하러. 가자, 효연아.”

“OK.”

고개를 끄덕인 효연이 유리의 뒤를 따랐다.

“후우!”

한숨을 내쉰 윤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자리를 옮겼다.


한편, 테일러 스위프트를 간신히 찻집으로 데려오는데 성공한 창현은 얼굴에 흐른 땀을 닦아내고 있었다. 어딜 가나 시선 집중을 받는 그녀 때문에 벌써 몇 차례나 정체를 들킬 뻔했는지 모른다.

‘고생이야, 고생.’

말 한 마디 실수한 것 때문에 천하의 자신이 이리도 휘둘리다니.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들에게도 쉽게 말리지 않는다 자부했는데 아직 수련이 부족한 듯했다.

‘일단 여기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지 않으니까 괜찮겠지.’

이곳의 장점은 칸막이가 펼쳐져 있어 주변 시선에 신경 쓰지 않고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점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자신들을 볼 수 있지만 그 정도로 열의를 보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한숨을 돌린 창현은 차를 주문하였다. 중간에 찻잔이 깨지는 소란이 벌어지는 듯했지만 개의치 않은 채 테일러 스위프트의 안색을 살피기 바빴다.

“응? 뭔가 즐거워 보이는데?”

“그래 보여?”

이곳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기분이 안 좋던 그녀였다. 주변의 시선을 한껏 즐기는 것이 그녀의 스타일인데 창현은 부담스러워한 나머지 자리를 옮겨버린 것. 그 때문에 표정이 안 좋던 그녀가 무언가를 보더니 입가에 미소를 매달고 있다.

“그렇게 보이니까 묻는 거잖아.”

“그냥 재미있는 일이 일어날 것 같네.”

“흐음.”

뭔가 불안한 느낌이 물씬 들었지만 아무래도 좋을 것 같았다. 마왕의 자질을 지닌 그녀가 한 번 삐치면 풀어주는데 큰 노력을 필요로 했기에 자연스레 풀어진다면 자신에게 더 좋다.

차가 나오기 전, 이야기를 주고받던 차에 그녀의 입가에 돌연 야릇한 미소가 맺히더니 창현을 부른다.

“현.”

“왜 그래?”

“재미있는 이벤트가 발생할 것 같아.”

“이벤트라고? 헉!”

의아한 표정을 짓던 창현은 갑자기 바람처럼 테이블 앞에 나타난 두 명의 여인을 보고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발달된 감각마저 속이고 나타난 두 여인은 모자와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렸지만 누구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정말 창현이었어.”

“창현아, 안녕?”

놀란 표정을 짓는 유리와, 미소 지은 채 인사를 건네는 효연. 두 사람의 공통점은 표정과 달리 두 눈은 활화산처럼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그걸 모른 채 창현은 갑자기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생각에 미소 지으며 인사를 하였다.

“하하! 안녕하세요?”

“안녕 창현아.”

“네, 안녕하… 헉!”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대답하던 창현은 고개를 돌리다가 기겁을 하였다. 그곳에는 악귀처럼 일그러진 윤아가 눈에서 얼음 레이저를 발사하며 테일러 스위프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시무시한 기세가 덮쳐오고 있건만 그녀는 여유를 간직한 채 손을 들어 인사를 받아주었다.

“하이, 미스 임."

강렬한 기세가 덮쳐 오고 있지만 아메리카 마왕은 여유로웠다.


자리는 자연스럽게 합석으로 이어졌다.

폭풍전야와도 같은 분위기를 기대했던가?

기대했다면 틀렸다고 말할 수 있다.

합석한 분위기는 처음과 달리 화기애애하였다. 쓸데없는 오해를 사기 싫었던 창현은 악귀 같이 변한 윤아의 표정을 발견하고는 재빨리 상황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그녀들에게 정중하게 도움을 청했다.

그녀들을 발견한 창현이 생각해낸 것은 바로 함께 다니는 것.

테일러 스위프트와 함께 다니면 좋든 싫든 들킬 수밖에 없다 생각하는 창현이다. 가뜩이나 내한방문으로 큰 화제를 끌어 모으고 있는 그녀였고, 자신과 친하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진 상황이었다. 꽁꽁 가리지도 않은 채 모두 드러내고 움직이는 그녀의 모습은 자신을 알아봐달라 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다 보면 자신이 함께 움직이는 것도 들키게 될 것이고, 상황은 최악으로 전개될 것임이 분명했다.

그러느니 차라리 그녀들을 끌어들여 함께 움직이는 것이 좋다 판단했다. 여자들이 많으면 구설수가 생길 수 있으나, 골치 아픈 스캔들이 일어날 염려는 없을 테니까.

설명이 이어지자 그녀들의 표정은 풀어졌고, 분위기 또한 화기애애하게 변해갔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의 생각일 뿐, 테일러 스위프트의 입가에 걸렸던 야릇한 미소를 발견한 윤아는 경계심 가득한 표정으로 그녀를 대하고 있었다.

윤아는 자신의 본능을 믿었다.

‘이 여자, 연희 언니랑 비슷한 종족이야.’

산전수전을 넘어서 마왕과 전투를 벌였던 용사 윤아다. 자신이 놀라 찻잔을 떨어뜨릴 때, 그녀는 한순간 테일러 스위프트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때, 윤아는 느낄 수 있었다. 야릇하게 변한 그녀의 눈빛에 서린 기운을. 그것은 그녀의 머릿속에 경종을 울리게끔 하였다.

마왕을 물리치니, 뒤이어 나타난 새로운 끝판왕에 윤아는 이를 꽉 물었다.

‘쉽지 않을 거야. 난 연희 언니마저 극복했어. 듣도 보도 못한(?) 금발 마녀에게 창현이를 빼앗길 수는 없어.’

“오늘 어떻게 할 예정이었는데?”

“일단 테일러한테 서울을 구경시켜주려고요. 마침 저 혼자서 어려움이 많았는데 누나들이 있으면 좋을 것 같아요.”

“우리야 좋지. 어차피 놀려고 나왔는데. 효연이 넌 어때?”

“나도 좋아. 놀 땐 사람 많은 게 좋은 법이지. 게다가 미국 스타와 친해지는 것도 좋고. 우리랑 동갑이라며?”

흔쾌히 수락하는 유리와 효연. 창현의 합류 요청은 합법적으로 따라다닐 수 있는 권리를 주는 것이기에 두 사람의 마음이 맞았다.

“윤아 누나는요?”

“나도 따라갈게. 반드시 그렇게 하게 해줘.”

“그, 그럴게요. 하하.”

여전히 두 눈에 얼음 레이저를 발사하는 윤아를 보며 살짝 가슴을 졸인 창현이 어색하게 웃는다.

그 모습을 보고 입 꼬리를 말아 올린 테일러 스위프트가 팔을 뻗어 창현의 목에 두른 채 입을 귀에 바짝 가져다 대고 속삭인다.

“현, 나 심심한데 이제 나가자. 차도 잘 마셨잖아.”

갑작스러운 그녀의 행동에 화들짝 놀란 창현은 그녀를 떼어놓으며 말한다.

“그, 그럴까? 그런데 갑자기 이런 행동은 하지 마. 오해하잖아.”

“OK. 그렇게 할게. 그럼 나가자.”

입가에 미소를 지은 테일러 스위프트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러더니 윤아를 보고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밖으로 나간다.

“…….”

싸늘하게 식어가는 윤아의 눈빛. 보란 듯이 도발하는 그녀의 눈빛에 점점 한계치까지 분노가 치솟고 있었다.

‘내가 있는 한 쉽게 안될 거야.’

사슴의 철벽 방어가 예고되는 순간이다.


거리로 나온 일행은 오늘 스케줄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다. 중도에 합류했기에 효연은 자신들이 이쪽 스케줄에 따르는 게 옳다 생각하여 창현에게 의견을 물었다.

“어디로 갈 예정이야?”

“별다른 건 없어요. 이동하면 좋겠지만 테일러가 그런 걸 원하는 게 아니라서요. 오늘은 젊음의 거리라는 압구정을 구경시켜주려 했죠.”

“그래? 그렇다면 우리가 도와줄 수 있겠네? 안 그런가, 율 군?”

“누가 율 군이야! 하지만 그 말에는 동감하는데.”

고개를 끄덕인 유리가 입가에 묘한 미소를 짓는다. 자주 나올 수 없지만 자유시간이 생길 때마다 가장 자주 가는 곳이 바로 압구정이다. 숙소와 가장 가깝고, 사람이 많은 곳이어서 그렇다.

“그래요? 그럼 누나들이 도움을 주세요.”

“그 정도는 어렵지 않지. 오늘은 이 누나들만 믿어.”

“그럴게요, 하하. 테일러, 오늘 여기 누나들하고 같이 움직이려는데 괜찮겠지?”

“상관없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내심 다행이라 생각한 창현은 합류하게 된 세 사람을 소개시키려 하였다.

“그럼 다행이네. 여기 이분들은…….”

“Girls' Generation 유리, 효연. 그리고 윤아.”

“어?”

“미스 임을 캐스팅하려 했는데 같은 그룹의 멤버도 모를 것 같아? 반가워요, 두 사람.”

빠른 속도로 흘러나오는 영어에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는 효연과 유리였지만 마지막에 나온 말을 알아듣고는 고개를 끄덕인 뒤 그녀가 내민 손을 잡는다.

“반가워요.”

“반갑습니다.”

한국어로 이야기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 어깨를 으쓱한 테일러 스위프트가 창현에게 말한다.

“미스 임과도 인사를 시켜줘. 공적인 자리에서는 만났지만 사적인 자리는 처음이거든.”

“그냥 인사하면 되잖아?”

“저렇게 무서운 눈빛으로 날 바라보는데 인사하라고?”

“그게 무슨? 응? 아, 그러네.”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리던 창현은 테일러 스위프트를 바라보는 윤아의 사나운 눈빛에 움찔하다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다가가 입을 연다.

“저기 윤아 누나?”

“응.”

“무슨 일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기분이 많이 안 좋아 보이는데, 저랑 관련된 일인가요?”

“아니야…….”

“그럼 오늘 재미있게 놀아요. 누나가 기분 안 좋으면 모두가 우울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도 기분 나쁘면 제가 풀어드릴게요.”

걱정이 담긴 그의 말에 윤아는 기분 나쁜 것이 사르르 녹아버리는 것 같았다. 괜히 꽁해 있는 건 자신에게 손해였다.

“알았어. 별 거 아니야. 갑자기 기분 나빠서 그런 것뿐이야. 걱정해주지 않아도 돼.”

“그렇다면 다행이에요.”

입가에 미소를 짓자, 고개를 끄덕여 보인 윤아가 테일러 스위프트에게 다가가 인사를 한다.

“반가워요, 테일러.”

“나도.”

짧은 영어 회화에 미소 짓는 테일러 스위프트. 그 웃음이 윤아의 심기를 건드렸지만 창현의 앞이란 걸 상기하며 내색하지 않았다.

“그럼 움직이도록 하죠. 테일러, 이곳이 대한민국 젊은 사람들이 가장 많은 거리 중 하나야. 아직 이르기는 하지만 재미있게 즐겨.”

“OK.”

그녀의 대답과 함께 본격적인 거리 활보가 시작되었다.


압구정 거리는 일대 소란에 휩싸였다. 갑자기 나타난 다섯 명의 사람들은 그들을 웅성거리게 만들기 부족함이 없었다.

일남사녀로 이루어진 그들은 하나하나가 가장 핫 아이콘이 되는 인물들이었다.

<Gee>로 큰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소녀시대 멤버 중 세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느 프로그램에서나 집중 조명되는 그녀들이었지만 사람들의 관심은 다른 이들에게 더 집중되어 있었다.

풍성한 금발을 드러낸 채 떡볶이를 맛있게 먹고 있는 여인은 미국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는 천재 싱어송라이터 테일러 스위프트다. 내한방문을 했다 알려진 그녀가 압구정 거리에 모습을 드러내자, 사람들은 환호하며 사진을 찍기 바빴다.

매콤한 떡볶이와 사투를 벌이고 있던 그녀는 연신 터지는 플래스에 눈살을 살짝 찌푸리더니 창현에게 말한다.

“현, 이곳은 원래 사람들이 이래?”

“이해해. 미국이라면 안 그랬겠지만 이곳에서 테일러를 본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잖아.”

“그런 거겠지? 후우!”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푹 내쉰 그녀는 다시 떡볶이와 사투를 벌인다.

현재 그들이 온 곳은 압구정 거리에서 유명한 분식집이었다. 남들이 화려하게 여기는 레스토랑보다, 한국에서 유행하는 음식을 먹고 싶다는 말에 분식집으로 온 그들이다. 매콤한 떡볶이와 어묵 맛에 반한 그녀는 주변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정도로 맛있게 먹고 있는 중이다.

“하아! 맛있어. 하지만 매워.”

“그래? 하하! 원래 떡볶이가 좀 매워. 그래도 잘 먹네.”

“매운맛이 몸으로 퍼지면서 감각을 날카롭게 만들어주는 것 같아.”

“그래? 좀 독특한 표현이긴 한데 제법 괜찮네.”

“그나저나 우리 밖으로 나갈 수나 있으려나?”

“글쎄? 제법 복잡할 것 같은 걸.”

테일러 스위프트의 물음에 밖으로 시선을 옮긴 창현은 어색하게 볼을 긁적인다. 들어올 틈조차 없을 정도로 몰려든 사람 때문에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막막했다.

‘다행이네. 만약 누나들이 없었으면. 후우!’

찻집에서 그녀들을 만나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하니 한숨이 절로나왔다.

그렇지 않았으면 스캔들이라는 것이 내일 기사에 대문짝만하게 나왔을 테니까.

그 고마움은 곧바로 표정으로 흘러나왔다.

“누나들, 언제 제가 맛있는 거 사드릴게요.”

“갑자기 닭살 돋게 왜 그래?”

“그냥 고마워서요. 오늘 테일러랑 단 둘이 다녔으면 어떻게 되었을지… 후우!”

“…….”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창현을 보며 세 사람은 저마다 눈을 빛냈다. 스캔들 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그의 표정을 보자 안도감을 느꼈다. 적어도 그녀에게 마음이 없다는 걸 확인한 것이니까.

그때, 떡볶이와 어묵에 이어 김밥을 먹던 테일러 스위프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작스런 그녀의 행동에 창현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왜 그래?”

“잠시 다녀올게.”

명칭을 언급하지 않고 손으로 가리키자, 어딘지 알아차린 창현이 아! 하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나도 잠시…….”

조용히 김밥을 먹던 윤아도 자리에서 일어나 뒤를 따른다.

무언가 불길한 느낌을 풍겼다.


“후우!”

음식을 먹느라 번진 화장을 고친 테일러 스위프트는 자신 옆에 서서 날카로운 눈빛을 보내고 있는 윤아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눈빛을 이해하지 못한 듯, 어깨를 으쓱해보이자, 윤아가 입을 연다.

“도대체 목적이 뭐죠?”

“…….”

난데없이 튀어나온 한국말에 그녀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윤아가 말을 이어나갔다.

“아닌 척 하지 말아요. 난 이미 모든 걸 알고 있으니까. 아닌 척하면서 모든 상황을 조종하며 즐거워하는 당신의 성격은 이미 꿰뚫어 봤어요. 도대체 목적이 뭐죠?”

“…….”

모르겠다는 듯 다시 한 번 어깨를 으쓱하는 테일러 스위프트였다. 그러나 윤아는 그녀의 앞길을 가로막고 비킬 생각이 없는 듯했다.

“목적을 말해줘요. 이대로 있으면 난 또 다시 이용만 당한다는 걸 잘 알고 있으니까. 말해주기 전까지 절대 비키지 않을 테야.”

“…….”

“우리말을 못하는 척 하지 말아요. 당신의 눈빛을 보면 말하는 건 모르더라도, 듣는 것은 가능하단 걸 알고 있으니까. 더 이상 날 속일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말아요.”

그렇게 말하는 윤아의 눈빛이 더욱 예리하게 변한다. 그녀는 테일러 스위프트가 한국어를 알아들을 수 있다는 걸 확신하고 있었다.

“…하아!”

한숨을 푹 내쉬는 테일러 스위프트.

비키지 않는 윤아의 행동에 한숨을 내쉬는 걸까, 아니면 한국어를 할 줄 안다는 것을 시인하는 행동일까.

답은 그녀의 다음 말에 나왔다.

“좀 더 완벽해지기 전까지 숨겨둘 예정이었는데.”

“……!”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한국어에 윤아의 눈이 커졌다가 원래대로 돌아온다. 놀라웠지만 충분히 그녀의 예상범주에 있던 내용이다.

억양이 다소 부자연스러웠지만 훌륭한 한국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어?”

“당신의 눈빛! 우리가 한국어로 이야기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눈빛은 모든 것을 이해하는 것이었어요. 난 처음부터 당신에게 의심을 갖고 있었고, 자세히 관찰하면서 그 부분을 깨달을 수 있었죠.”

“내가 실수를 했네.”

완벽하게 감췄다 생각했건만 그 부분에 소홀했을 줄이야. 자신의 허술함에 반성의 시간을 갖는 테일러 스위프트였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뭔데.”

뭔가 한국어를 잘못 배운 듯했다. 기분이 묘하게 나쁜 윤아였지만 한국어 초보이려니 생각하며 애써 내색하지 않았다.

“왜 그런 행동을 보이는 거죠? 설마 당신도 창현이를 좋아하는 건가요?”

“그런 것 같아?”

묘한 미소를 짓자, 윤아는 고개를 젓더니, 확신 어린 어조로 말한다.

“지금은 아니지만 시간이 흐르면 그럴 갓 같아요. 그만큼 창현이는 매력적이니까!”

“현은 매력적인 남자가 맞아. 하지만 내 이상형은 아니야.”

“그럼 당신이 원하는 게 뭐죠? 창현이를 바라보는 당신의 눈빛은 무언가 의미가 담겨있는 눈빛이었어. 내 앞에서 거짓말을 하지 마요.”

강하게 나가는 윤아. 이미 연희에게 휘둘릴 대로 휘둘렸던 그녀는 새로이 출연한 아메리카 마왕의 뜻대로 움직일 생각이 없었다.

“호오! 그 부분까지 눈치 챘어? 바보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네.”

빠직!

한 마디 하려던 윤아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괴성을 간신히 억눌렀다.

“당신과 비슷한 사람에게 당한 이후로 예전의 내가 아니게 되었어요.”

“그렇구나. 나와 비슷한 사람이 있어서 그랬었어. 아쉽네, 재미있는 장난감을 발견했는데. 그래도 이것도 재미있겠지. 내가 원하는 건 간단해. 아주 사소하면서 재미있는 것이지.”

“창현이와 관련이 있는 거고요?”

“물론 현과 관련이 있어.”

“나쁜 내용이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겠어요.”

결의에 찬 윤아의 표정에 테일러 스위프트는 입 꼬리를 말아 올리더니 어깨를 으쓱한다. 그리고 어눌하지만 또박또박 말을 꺼내기 시작한다.

“내가 계획하고 있는 건…….”

천천히 이어지는 그녀의 이야기.

말을 듣는 윤아의 눈이 점점 커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얼굴에 환한 미소가 서리기 시작한다. 그 모습을 보며 테일러 스위프트도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의 미소는 묘하게 닮아 있었다.




제99장 폭풍전야




그날 기사란에 도배되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압구정 거리 한복판에 모습을 드러낸 창현과 테일러 스위프트, 소녀시대 멤버 세 명은 수많은 사람들의 눈에 들어왔고, 발 빠른 연예부 기자들은 그것을 곧바로 기사화하기 시작했다.

다행인 것은 남자 한 명에 여자 여러 명이기에 큰 스캔들로 번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소설 짓기 좋아하는 기자들은 창현과 테일러 스위프트, 소녀시대의 관계를 놓고 여러 가지 상황을 만들기 바빴으며, 온라인상에서 이를 놓고 여러 이야기가 흘러나와 갑론을박을 펼쳤다.

염려했던 부분을 파고들지 않은 채 겉돌고 있는 온라인 분위기에 창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네.”

미국에서 한차례 스캔들이 요란하게 났기에 그 다음 또 일어나면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내심 염려가 많던 창현은 압구정 거리에서 우연찮게 소녀들을 만난 게 천만 다행처럼 여겨졌다.

♩♪♬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을 무렵, 핸드폰 소리가 귀를 울렸다.

의아한 표정을 지은 그가 발신인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갑자기 무슨 일이지? 여보세요?”

-그동안 잘 지냈어?

“저야 잘 지냈죠. 누나는 어때요?”

-나야 항상 잘 지내지. 한국으로 돌아왔다며? 그런데 보기가 참 힘드네.

“그러게 말이죠. 어떻게 시간이 되는가 싶으면 약속이 생기고 그래서요. 미안해요, 수연 누나.”

전화를 한 사람은 다름 아닌 수연이었다. 오랜만에 듣는 그녀의 목소리에 창현은 기분이 좋아지는 걸 느끼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정말 시간이 안 돼서 못 만난 거야?

“그…런데요?”

진지해지는 그녀의 목소리에 창현은 가슴이 뜨끔하는 걸 느끼며 대답한다. 그러면서 머릿속으로 자신이 정말 시간이 없어 그녀를 만나지 못했나 생각해본다.

‘그건 아닐지도?’

자각하지 못했지만 자신이 한 말이 핑계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한 창현이다.

-…창현아?

“네, 누나. 무슨 말씀 하셨어요? 잠깐 다른 생각을 하느라.”

-전화 중에 다른 생각하면 못 써. 이것도 힘들게 전화한 건데…….

“네? 아하하하! 미안해요. 요즘 종종 다른 생각에 빠지고는 하네요.”

자신의 실수에 어색하게 웃음을 지으며 넘어가려는 창현이다.

-그럼 지금은 뭐해?

“그냥 있어요. 아무래도 한국에 돌아온 목적이 쉬는 것이다 보니 별다른 스케줄도 없고요.”

-별다른 스케줄이 없다는 거지?

“아무래도요?”

잘 됐다는 듯 나직이 중얼거리자, 고개를 갸웃한 창현이 대답한다. 그러자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수연이 조심스럽게 말문을 뗀다.

-그럼 지금 만날 수 있을까?

“예? 지금이요?”

-응, 오늘 하루 휴가거든. 혼자 기분 전환하려고 나왔는데 갑자기 슬픈 기분이 들어서… 부담되면 거절해도 돼.

누가 그런 말을 듣고 선뜻 거절할 수 있겠는가.

황당한 기분이 된 창현은 자신의 선택지를 좁혀버리는 수연의 말에 한 마디 하고 싶었지만 슬픈 기분이란 말을 듣자, 모질지 못했다.

도리어 가슴이 뜨끔할 뿐이다.

“지금 녹음실에 있거든요. 그곳 위치 아시죠?”

-응.

“그곳으로 오시면 되요.”

-알았어, 바로 갈게. 갑자기 전화해서 불쑥 만나자고 말해서 미안해.

“아니에요. 그럼 도착하시면 초인종 눌러주세요.”

-도착하면 누를게. 조금 있다 봐.

“네, 그럼…….”

그 말과 함께 통화가 끝났다. 전화를 끝낸 창현은 컴퓨터 모니터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왠지 모르게 그 날이 떠오르고 있었다.

태어나 첫 입맞춤을 하던 그 순간을 떠올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욕구불만인가.”

야릇한 상상이 떠오르자 자괴감을 느꼈다.


딩동.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초인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자리에 앉아서 TV를 보던 창현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차림을 바로한 뒤 밖에 도착한 사람을 확인한다.

삐익!

“들어오세요.”

수연이 도착한 것을 확인한 창현은 잠긴 문을 열어주며 인터폰으로 의사를 전달했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면서, 잠시 후, 안쪽에서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낸다.

아직 추운 겨울임이 무색하게 느껴질 정도로 화사한 옷을 차려입은 수연의 등장이었다.

그녀의 옷차림새를 본 창현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짓다가 황당한 표정으로 변하며 그녀에게 말한다.

“어, 그러니까…….”

“오랜만이지?”

“그러네요. 그런데 누나…….”

“왜?”

말 한 마디가 차갑게 들리는 건 여전했지만 팩토리 걸 이후 오랜만에 그녀를 본 창현은 내심 많이 변했다는 것을 느꼈다.

“살 많이 빠졌네요.”

“그렇게 보여? 하지만 더 빼야 돼.”

“거기에서 더 뺀다고요?”

앙상하게 마른 그녀의 모습이 안쓰러울 지경인데 더 다이어트를 하겠다는 말에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는 창현이다. 입가에 살짝 미소를 지어보인 수연이 말한다.

“난 TV에서 살이 쪄 보이는 체질이라 많이 빼야 돼.”

“안 힘들어요?”

“힘들지. 하지만 보이는 부분이 있으니 신경을 안 쓸 수 없더라고.”

“하아!”

한숨을 푹 내쉬는 창현. 활동을 위해 살을 빼는 건 이해하지만 뼈만 남아 앙상한 그녀의 모습은 가슴을 아프게 만들었다.

“무슨 결식아동도 아니고.”

활동을 위해 다이어트를 한다는 그녀의 말이 와 닿지 않아 안쓰러운 감정이 가슴을 지배했다.

잠시 침묵하던 창현은 고개를 나직이 끄덕이며 겉옷을 챙겨든다. 그리고 수연에게 다가가 다짜고짜 그녀의 손을 움켜쥔다.

“왜, 왜 그래?”

갑작스러운 행동에 깜짝 놀라는 수연.

그녀의 놀라움에 아랑곳 하지 않은 채 창현이 강한 어조로 말한다.

“오늘은 절 따라와요. 이게 뭐에요, 앙상하게 뼈만 남아서. 누나 팬들도 이런 모습은 원하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난 다이어트를…….”

“오늘 하루만요. 그동안 제대로 먹지 못한 게 그대로 티가 나는데, 하루 정도는 즐겨야죠. 절 위해서 그 정도도 못해줘요?”

“널 위해서? 널 위해서…….”

넋이 나간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수연이다. 창현의 말이 계속해서 그녀의 뇌리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좋아하는 남자의 뜻을 따르냐, 아니면 그동안 공들여온 다이어트 결과물을 지키느냐, 난감한 처지에 놓인 수연이었다.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모습을 보며 창현은 이해했다. 그동안 공들여온 다이어트 결과물을 저버리는 것은 힘든 일. 괜히 그녀에게 고민을 가져다주는 기분에 창현은 한 번 더 결심을 한다.

“어휴! 좋아요, 그럼 오늘 대출혈 서비스. 마음껏 먹은 뒤에 제가 마사지를 해드릴게요. 이 마사지로 말할 것 같으면 절대 살이 찌지 않는 비전 중의 비전 마사지에요. 어때요, 이러면 제 말을 따를 생각이 들어요?”

“…풋! 그런 것도 있어?”

“있죠. 누나는 먹을 것 다 먹고 다니는 제가 왜 살 안 찌는지 궁금하지 않아요?”

“넌 많이 먹질 않잖아. 게다가 우리처럼 치마를 입는 것도 아니고.”

“…윽!”

남자의 여자의 다른 점에 대해 언급하자, 설명하기 위해 말을 이어 붙이던 창현이 신음을 흘리며 말문이 막혀버리고 말았다.

땀을 뻘뻘 흘리는 창현의 모습을 본 수연은 흘러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자신을 걱정하여 어떻게든 설득하려는 그의 정성에 고마움과 동시에 그동안 그를 보지 못한 아쉬움이 씻겨나가는 듯했다.

“알았어. 그렇게 신경 써주니 내가 거절할 수가 없네. 가도록 하자.”

“누나를 위해서라니까요.”

선심 쓰는 듯한 수연의 말에 창현이 발끈한다.

“날 위한 거라지만 다른 의도가 있을지도?”

“자꾸 그렇게 말하면 안 갈 거예요?”

“그럼 나야 좋지. 다이어트를 지속할 수 있으니깐.”

“…딱 지금이 보기 좋다니깐.”

“…….”

아주 무난한 말이었지만 그 말만으로도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는 수연이었다.

그녀도 오랫동안 굶주린(?) 상태였다.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은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해 무작정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다 주변에 집중되는 시선을 느낀 창현이 수연에게 시선을 고정하며 말한다.

“누나의 그런 변장에 대해 저는 개선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고 싶은데요.”

“왜?”

“변장을 하는데 치마를 입으면 어떻게 해요?”

“그게 무슨 잘못인데. 오늘 큰마음 먹고 입은 건데…….”

“다른 여자들보다 훨씬 날씬하니까 남자들이 바라보잖아요. 시선이 집중되면 자칫 정체를 들킬 수도 있고요.”

“그…래? 흐응, 그렇구나.”

묘한 콧소리를 흘리며 흥얼거리는 수연. 그녀의 눈이 반달을 그리며 웃음을 그려내고 있었다. 의미심장한 그녀의 웃음에 움찔한 창현이 묻는다.

“왜, 왜 그래요?”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니라니 더 궁금하잖아요. 도대체 그 눈빛은 뭔데요?”

“그냥, 창현이 말에 내 정체 들킬 걸 염려하는 것과 다른 것이 섞여있는 듯해서.”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뉘앙스를 풍긴다. 차가운 외모 안에 내재된 따뜻함이 부각되는 그녀는 어른의 여유마저 느껴졌다.

그 모습 앞에서 창현은 차마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그냥 남자들이 누나를 음흉한 시선으로 보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을 뿐이에요, 다른 의미는 없어요.”

“걱정해줘서 고마워. 예전에는 그냥 넘어가던 부분까지 챙겨주고, 많이 컸네?”

“됐어요, 그냥 가요.”

괜히 얼굴이 붉어지는 느낌에 매정하게 저버린 채 성큼성큼 앞으로 걸음을 옮기는 창현이다.

“후후!”

그 모습을 보며 수연은 입가에 작게 미소를 지었다.


거리로 나온 두 사람은 인파에 묻혀 먹을 것이 많은 거리로 향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곳이라면 정체를 숨기기 한층 용이할 것이라는 창현의 판단 때문이다.

앞서 가는 창현을 바라보던 수연은 점점 사람이 많아지자, 그의 곁에 바짝 붙는다. 하지만 사람들이 스치고 지나가자, 그녀의 눈살이 살짝 찌푸려진다.

“아!”

“조심해요.”

“흐읍!”

인파에 휘말려 멀어지려던 수연의 몸을 부드럽게 감싸 안으며 곁으로 바짝 붙인다. 대담한 그의 스킨십에 그녀는 헛바람을 크게 삼키고는 순순히 그의 안내에 따른다.

사람들이 오고가는 길을 빠져나온 창현이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며 수연을 놓아준다.

“후우! 갑자기 사람이 그렇게 몰려들 줄 몰랐네. 괜찮아요?”

“응, 난 괜찮아.”

“사람들이 많으면 정체를 숨기는데 도움이 될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이거 많아도 너무 많아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볼을 긁적이자, 수연이 대안을 꺼내놓는다.

“사람이 많으니까 적당히 피해서 다니자. 우리를 유심히 볼 리 없잖아.”

“그것도 그러네요.”

“그런데 우리 뭐 먹으러 가는 거야?”

수연의 물음에 창현이 고개를 갸웃한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음식 먹으러 가는 거잖아. 아는 곳 찾아가는 거 아니었어?”

“…아닌데요. 오늘은 누나가 주인공이니 누나가 음식을 고를 줄 알았죠.”

“그럼 앞서 나간 건 뭔데?”

“그건 그냥…….”

“…….”

무거운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맴돌았다. 서로 오해를 하고 있어서 여태까지 헛걸음을 한 셈이었다.

“누나는 뭐 드시고 싶은데요?”

“나? 난 일단 패스트푸드를 먹고 싶은데 모처럼 나왔으니까 그건 좀 그렇고, 패밀리 레스토랑도 괜찮지만 고급 중식을 먹어보고 싶기도 하네. 스파게티도 먹고 싶고 갈비찜 같은 것도 괜찮을지도? 아! 하지만 살이 너무 찌겠구나.”

“…….”

수많은 음식 종류를 늘어놓으며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는 수연. 그동안 다이어트를 한 여파로 인해 먹고 싶은 음식 목록이 무제한으로 쌓여있는 상태였다.

“요즘 피잣집도 괜찮던데 너무 확 트여 있어서 위험하려나? 그러고 보니 주현이가 소개시켜준 한정식 집도 있었고…….”

끝없이 나오고 또 나온다.

두 사람이 먹을 음식을 정한 것은 그로부터 한참이 흐른 후였다.


온갖 음식 이름을 늘어놓던 수연은 힘겹게 음식을 고르는데 성공했고, 마침내 음식집으로 가서 저녁을 먹는데 성공한다.

수연은 오랜만에 느끼는 포만감에 미소 지었다.

“잘 먹었어.”

“그래요? 더 먹지 그래요.”

“아니야, 이 정도면 충분해. 그동안 다이어트를 했더니 위장이 많이 줄어들었나 봐. 더 못 먹겠네.”

“그럼 누나는 위 좀 늘려야 되겠어요. 너무 적게 먹네요.”

“창현이 너도 많이 안 먹었잖아.”

“전 그래도 일상생활이 가능할 정도로 먹는다고요.”

수연이 먹는 양을 보고 깜짝 놀란 창현이었다. 시킨 음식 양의 반 조금 더 먹고서 배부르다 할 정도였다. 그것도 중간에 그만 먹으려다가 억지로 더 먹은 것이었다.

1인분도 소화하지 못하는 그녀의 작은 위장에 창현은 고개를 저어야만 했다.

“어쩔 수 없지. 다이어트 중이니까.”

“그놈의 다이어트가 뭔지. 에휴!”

대중에게 몸매를 노출할 수밖에 없는 슬픔을 느끼는 창현이었다. 직접 다이어트를 해본 적이 없으나, 주변에서 이야기를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야 말로 살인적이다.

사람의 기본 욕구 중 하나가 바로 식욕 아니겠는가?

맛있는 음식을 보면 먹고 싶어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다이어트를 하게 되면 그 충동을 억지로 억누른 채 자신을 자제해야 한다.

목적을 위해 이를 악 물고 노력할 수 있지만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를 억누른 채 목표를 달성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얼마나 힘든 것인지 짐작 가지 않아 감히 뭐라 표현을 못하는 창현이었다.

배부르다면서 그만 먹었지만 창현은 다르게 해석했다.

‘조금씩 여러 번 섭취하면 되겠지.’

옆에서 지켜보는 것도 안타까운데 본인은 어떠할까.

그랬기에 오늘 만큼은 배부르게 먹을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 다짐하는 창현이었다.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인근 커피숍으로 향했다. 칸막이가 쳐져 있어 독립된 공간이 마련된 곳에 도착하자, 각자 기호에 맞는 아메리카노와 딸기 생과일주스를 주문한 뒤 이야기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한 가지 물어봐도 되요?”

“응?”

“오늘 누나가 전화했을 때요. 목소리가 상당히 우울하게 느껴졌거든요.”

“아…….”

커피를 마시던 수연이 멈칫한다. 그와 함께 분위기는 싸늘하게 식어갔다. 그녀의 변화에 창현은 자신이 잘못 말을 꺼낸 게 아닐까 싶었지만 이내 마음을 굳게 먹었다.

“무슨 일 있는 거예요?”

“그런 건 아니야. 그냥 요즘 우울해서.”

수연의 얼굴이 우중충하게 변해간다. 기분 전환을 위해 외출했다가 창현을 찾게 된 그녀에게도 나름대로 사정이 있었다.

“한 가지 물어봐도 돼?”

“얼마든지요.”

“경쟁자에게 결정적인 약점을 잡히게 되었어. 그것 때문에 경쟁자가 무슨 부탁을 하게 되면 도저히 거절할 수 없거든. 이럴 경우 어떻게 해야 할까?”

짙은 고민이 담긴 수연의 말에 창현도 덩달아 심각해진다.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지만 경쟁자가 본인의 치명적인 약점을 쥐고 있다면 까마득할 것 같았다.

“경쟁자가 결정적인 약점을 잡는다라, 만약 그 이야기를 꺼내면 그 사람이 파멸할 정도로요?”

“응, 어떤 의미로는.”

“그럼 심각하네요.”

“심각하지, 아주.”

말을 하는 수연의 얼굴이 심각하게 변해갔다. 아닌 척 이야기 했지만 그 이야기는 결국 본인의 이야기였다.

“경쟁자가 약점을 이용해서 부탁하는 건 아니고요?”

“그건 아니야. 그저 약점을 알고 있다는 것만 말했을 뿐이야.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아. 그걸로 협박하지도 않고. 하지만…….”

“부탁을 하면 들어줄 수밖에 없다?”

“…응.”

“아주 고단수네요. 아니, 악질이라고 해야 하나?”

“그렇지?”

“상대방의 약점을 쥐고 뒤흔드는 건 잘못된 행동이잖아요. 게다가 아무 언급을 하지 않는 건 더 큰 부담을 얹어주는 것일 테고. 주변에 그런 사람이 있다면 조심해야 해요.”

조심하고 싶어도 이미 약점이 잡힌 상태였다. 어떻게 벗어날 방도는 없었고, 표면에 내세워진 채 실권은 모두 챙겨간 상태였다.

그래도 창현이 악질이라고 표현해주자 수연의 표정이 밝아진다. 은연중 약점을 쥐고 흔드는 주현에게 꼭 해주고 싶던 표현이 바로 그것이었다.

“지금 말한 게 누나의 고민하고 관련된 것이에요?”

“관련이 없다고는 할 수 없어.”

“그렇군요. 그럼 조심하세요. 잘못하면 간 쓸개 다 내주고 버려지는 수도 있으니까요. 차라리 죽자 살자 맞불 작전을 펼쳐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고.”

“맞불 작전…….”

한순간 수연의 눈이 빛났다가 원래대로 돌아온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이라면 용기를 갖고 목숨을 건 채 달려드는 것도 방법 중 하나다.

착 가라앉은 분위기는 밝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이야기를 들은 뒤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수연을 보며 창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괜히 분위기만 우울해졌네요. 특별히 할 것도 없으면 녹음실로 돌아갈까요?”

“녹음실은 왜……?”

“제가 마법을 보여드릴게요.”

미소 지으며 기대감을 심어주는 창현이다.


“그러고 보니 이곳도 오랜만이다.”

녹음실로 들어온 수연은 주변을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제법 시간이 지났지만 그의 녹음실은 여전히 친숙한 느낌을 유지하고 있었다.

“자, 그럼 이제부터 마법의 시간입니다.”

“무슨 마법의 시간인데?”

“그 전에 여기에 올라가보시길.”

“응? 아…….”

창현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긴 수연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한다. 그곳에는 몸무게를 세세하게 알려주는 전자 체중계가 위풍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오늘 먹었던 음식을 떠올리자, 표정이 좋지 않게 변하는 수연이다.

지금 그녀가 느끼는 심정은 공든 탑이 와르르 무너지는 느낌이랄까?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창현은 옆에서 그녀의 결정을 종용한다.

“우선 몸무게를 측정해보세요. 얼마나 늘어났나.”

“안 돼. 분명 엄청 늘어나 있을 거야.”

“괜찮아요. 일단 얼마나 늘었는지 확인해 봐요.”

“알았어……. 대신! 보면 안 돼.”

“물론입니다. 비밀보장! 안심하셔도 좋아요.”

믿으라는 듯 미소 지은 창현이 몸을 돌리자, 체중계를 힐끔 보던 수연이 겉옷을 옷걸이에 걸어두고, 간편한 차림으로 올라선다. 눈을 질끈 감은 채 위로 올라간 그녀는 체중계에 표시된 수치를 보고 절망으로 물들어간다.

“아악!”

터져 나오는 비명 소리는 그녀가 무슨 상태인지 알려주었다.

“어때요?”

“내 2주일 다이어트가 한 방에 날아 갔어…….”

허망함이 잔뜩 담긴 수연의 목소리. 그 모습에 창현은 묘한 미소를 짓더니 옆에 있는 의자를 가리킨다.

“자, 그럼 이곳에 앉으세요.”

“…….”

깊은 절망을 느낀 수연이 공허한 눈으로 걸음을 옮겨 의자에 앉는다. 자리에서 일어선 창현은 그녀의 뒤로 다가가더니, 양 어깨에 손을 얹는다.

“히익?”

“너무 놀라지 마세요. 아까 이야기 했잖아요. 마사지를 해드린다고. 지금부터 놀라운 일이 벌어질 겁니다.”

부드러운 손놀림은 마치 피아노를 치는 듯 잔잔했다. 거부감 없이 은은하게 덮쳐오는 창현의 안마에 수연은 몸이 나른하게 퍼져가는 걸 느꼈다.

“아, 편해…….”

“후후, 아무나 해드리는 마사지가 아니라고요.”

미소 지은 채 안마를 계속하는 창현. 어깨에서 시작된 나른한 느낌은 전신으로 퍼져나가더니, 수연의 눈이 이내 사르르 감긴다.

“흐음.”

수연이 잠든 것을 확인하지 못한 채 창현은 안마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지금 그가 하고 있는 것은 내공을 이용한 안마로, 몸의 신진대사를 활발하게 촉진시켜주는 효과를 지니고 있다.

가는 실처럼 정제한 내공을 손에 실어 타인의 몸에 부드럽게 흘려보낸다. 내공이 흐르는 혈도가 개척되지 않은 일반인은 창현의 마사지에 잠시나마 길이 개척되어 범인을 월등히 능가하는 운동 신경을 보유하게 된다. 내공의 양이 미약하여 그 상태는 금방 끝나버리지만 피로를 풀어주는 등 여러 효과를 지닌다.

계단 춤을 펼치면서 내공의 섬세한 사용법을 연구하던 창현은 이 방법으로 내공의 세기를 조절하는데 성공했다.

“힘들긴 하네.”

가늘게 뽑아낸 내공으로 일명 ‘짝퉁 소주천’을 시킨 창현은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내며 미소 짓는다. 짝퉁이지만 피로 회복과 더불어 신진대사의 활발함으로 오늘 먹은 음식 정도는 깔끔하게 소화시켰을 것이다.

작업(?)을 마친 창현은 그제야 잠들어있는 수연을 발견하고는 그녀를 깨운다.

“누나, 일어나세요. 마사지 다 끝났어요.”

“으응? 으으응. 알았어.”

잠들어 있던 수연은 옆에서 들려오는 창현의 목소리에 투정을 부리다 살며시 눈을 뜬다. 그러다 옆에 서 있는 그를 발견하고는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짓는다.

“아, 내가 잠들었었어?”

“네. 많이 피곤하셨나 봐요.”

“스케줄이 많아서 좀 피곤했나 봐. 그런데 지금은 이상하게 활력이 넘치네?”

“누나가 잠든 줄 모르고 마사지를 계속했으니까요. 이게 마사지 효과입니다.”

“정말이야? 정말 대단한데?”

묵직하게 자리하던 피로를 말끔히 털어버린 창현의 마사지에 찬사를 보내는 수연이다.

“숙소에 돌아가시면 몸무게도 한 번 확인해보세요.”

“그, 그건 내가 알아서 할 거야.”

얼굴을 붉힌 수연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톡 쏘아붙인 그녀의 행동이 미소 지은 창현이 겉옷을 챙겨든다.

“바래다 드릴게요.”

“으응.”

그래도 호의를 거절하지는 않는다.


“다녀왔어.”

동 앞에서 헤어지고, 숙소로 돌아온 수연의 목소리에 활력이 넘쳤다.

“언니 오셨어요? 어디 가셨던 거예요?”

트레이닝 복 차림으로 숙소를 활보하던 주현이 수연을 반갑게 맞이해준다.

자신의 약점을 쥔 채 뒤흔드는 암중 배후의 존재에 순간 날카롭게 변한 수연의 눈동자였지만 빠른 속도로 돌아와 인사를 받는다.

“응, 답답해서 여기저기 좀 다녔어.”

“그래요? 많이 움직이셨을 텐데 좀 쉬세요.”

“알았어.”

거실을 지나 방안으로 들어간 수연이다. 그녀의 눈에 컴퓨터를 하고 있는 윤아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녀의 등장에 윤아가 반갑게 맞이한다.

“오셨어요, 언니.”

“응, 돌아다녔더니 좀 힘드네.”

그러면서 겉옷을 벗어둔 수연은 눈앞에 체중계를 보고 멈칫한다. 그러다 창현의 말을 떠올리며 눈을 빛내더니 체중계 위에 올라선다.

“……!”

체중계에 드러난 수치에 눈이 동그랗게 뜨이는 수연. 아까 전과 판이하게 다른 수치가 자신의 눈에 들어왔다.

‘분명 아까 전에는…….’

의구심을 가진 채 다시 한 번 체중계 위로 올라갔지만 몸무게는 똑같았다. 놀랍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의구심이 그녀를 지배해나갔다.

‘설마 녹음실 체중계가 잘못되었다거나?’

그렇게 생각도 해봤지만 그럴 것 같지는 않다. 전자 쳬중계가 더 정확했으면 더 정확했지, 틀릴 리는 없다.

믿기지 않는 사실에 몇 번이고 몸무게를 재보는 수연이었지만 수치는 그대로였다.

‘창현이 말이 사실이었나?’

정말 놀라운 사실이었다. 마사지로 몸무게를 감량시켜주는 마법을 부리다니. 다시 한 번 경외감을 느낌과 동시에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수연이 환희에 젖어있을 때, 그녀를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윤아가 있었다.

“언니, 왜 그렇게 체중계 위로 올라갔다 내려갔다 그래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가던 윤아가 순간 멈칫하며 표정이 굳는다.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그래? 그럼 난 씻으러 갔다 올게.”

몸무게를 줄였다는 것에 만족한 수연은 씻기 위해 화장실로 향한다.

방에 홀로 남은 윤아의 안색은 딱딱하게 굳은 상태다.

“방금 전 수연에게 느껴졌던 향은…….”

그녀가 며칠 전 맡았던 것과 동일했다.

윤아의 후각에 스며든 향기는 수연이 쓰는 향수가 아니라, 남자가 쓰는 향수와 누군가의 체향이 섞여 있었다.

그리고 그 체향의 정체는…….

“창현이를 만나고 왔어, 이 언니.”

예리하게 빛나는 윤아의 눈이었다. 단순한 향기일 뿐이지만 그녀는 모든 점을 꿰뚫어 보고 수연의 행보를 예측하고 있는 상태였다.

미영이나 유리처럼 정보를 토대로 유추하는 게 아니다.

순전히 본능적인 감각으로 짚어내는 것이다.

수연이 창현을 만나고 왔다는 확신을 얻자, 한 가지 고민으로 갈팡질팡하던 윤아는 마침내 마음을 굳히고 말았다.

“언니가 그렇게 나온다면, 나도 숨겨둔 비장의 수를 쓰는 수밖에 없지.”

핸드폰을 꺼내든 윤아는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기 시작한다. 컬러링 소리를 듣는 그녀의 눈빛은 멤버들을 농락하던 연희의 것과 흡사했다.

사슴은 후각마저도 뛰어났다.


“피곤하네.”

어찌하여 휴일을 수연과 보내게 된 창현은 피곤한 표정으로 침대에 몸을 눕혔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같이 시간을 보내게 되었고, 그것이 딱히 기분 나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너무 오버를 했었나.”

앙상하게 마른 모습이 안타까워 음식을 먹이기 위해 자신도 모르게 오버를 했나 보다. 평소보다 많은 음식 섭취로 인해 속이 더부룩한 것을 느끼며 창현은 자세를 바로 고치고 눈을 감는다. 명상을 통해 체내의 신진대사를 활발히 함으로써 소화를 촉진하려는 생각이었다.

평소보다 과식하여 많은 시간 명상으로 할애한 그는 일찍 잠든 뒤 아침에 회사로 향했다. 모처럼만의 휴식을 즐기려 했지만 석규의 호출이 있었다.

연이어 이어지는 부름에 창현의 안색이 곱게 펴지지 않았다.

“왜 부르셨어요?”

“상당히 내키지 않는 기색인데?”

“그렇게 보여요?”

“그렇게 보여서 하는 이야기다.”

“그럼 정답이겠죠. 황금 같은 휴가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게 되니 기분이 영 안 좋더라고요.”

인상을 찡그리며 말하자, 잠시 멈칫한 석규가 의미심장한 눈으로 그를 바라본다.

“연휴를 즐기지 못해? 어제는 누구와 만났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는데?”

“…학교 친구를 만났어요.”

수연과 만났다는 사실을 털어놓자, 뜨끔한 창현은 고개를 돌리며 말을 돌렸다. 그런 그를 보며 석규는 의문이 섞인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창현은 끝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뭔가를 털어낼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저기압인 그를 자극하지 않고자 석규는 너그러이(?) 넘어가주었다.

“흐음! 어쨌거나 휴식을 취하지 못한 건 유감이다. 하지만 아직 일주일 정도 휴식기간이 남지 않았느냐? 그걸 즐기면 되겠지. 설마 다른 일이 생기려고?”

“제발 그랬으면 좋겠지만 제 머릿속에서는 다른 이벤트가 발생할 수 있다 경고를 하네요.”

“그건 네가 알아서 할 문제겠지. 어쨌거나 널 부른 이유는 간단하다.”

“…….”

석규의 표정이 진지하게 변하자, 창현도 표정을 바꾸고 조용히 그를 바라본다.

“이번에 미국으로 출국하고 남은 스케줄을 이행해야 하는 건 알고 있겠지? 미국에서 남은 스케줄을 마치고 돌아오면 대략 3월 말쯤이 될 거다.”

“네.”

“미국에서 성대하게 활동을 벌였지만 국내는 문제가 다르지. 미국에서 활동하는 동안 생겨난 공백을 채워야 한다.”

“그럼 국내에서 앨범을 내야 한다는 이야기인가요?”

“빠르게 변하는 국내 트렌드에 적응하려면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지. 이건 네게 강제하는 사항이 아니다. 하지만 미국에서 정상을 차지한 네가 앨범을 발매하면 그 파장은 상당하겠지.”

“파장이라, 괜찮네요.”

날카롭게 변한 창현의 시선이 석규에게 향한다. 앨범에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면 누구보다 진지한 면모를 보이고는 한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창현이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는다.

“작은 국내 시장의 여세 몰이를 할 이유가 있을까요?”

“작은 시장이라 하더라도 네가 어디서 인기를 얻기 시작했는지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으음.”

“국내 시장이 작다 하지만 네 존재만으로 많은 세계인의 집중을 받고 있다. 현이라는 하나의 네임벨류가 만들어내는 문화적 흐름은 만만치가 않지. 이것은 현재 탄력을 받고 있는 한류를 더더욱 부추기는 효과를 낳게 될 것이다.”

앞을 이끄는 자의 역할은 중요하다.

누구도 총알받이가 되려 하지 않고, 개척되지 않은 길에 위험을 무릅쓰려 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이미 미국이라는 거대한 시장을 개척한 창현은 국내 시장의 작은 것을 연연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큰 존재가 되었다.

외국에 진출하였다 하여 국내 팬들을 매몰차게 저버리는 면모를 보이지 않는다는 걸 보이기 위해서라도 앨범 하나 발매하는 것은 필수적 요소였다.

석규의 말에 담긴 뜻을 이해한 창현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염려 섞인 목소리로 말한다.

“앨범을 발매하는 건 어렵지 않아요. 어렵진 않지만 4집 앨범을 뛰어넘을 자신은 없는데…….”

파격적인 퍼포먼스를 곁들인 정규 4집 앨범은 팬들 사이에서도 파격이라 불린다. 댄스라는 요소가 제외되었던 현이 모든 장르를 소화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한 곡이기도 하며, 계단 춤이라는 기상천외한 춤으로 세계에 거대한 센세이션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 점은 석규도 인정하는 바였다.

“음! 아무래도 그렇겠지. 하지만 네게 주어진 과제는 그것이 아니다.”

“그것이 아니라니, 4집 앨범보다 뛰어나지 않아도 된다는 건가요?”

“전보다 더 나은 모습을 보이는 것도 좋지.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힘든지 모두가 알고 있다. 이번 4집 앨범도 네 노력의 산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고. 그 4집 앨범을 뛰어넘으려면 네가 자체적으로 준비를 갖춰야 한다.”

“…….”

묵묵히 석규의 말을 경청한다. 무리해서 전보다 더 나아지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다소 충격적이었다.

“앞만 바라보지 마라!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앞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주변을 둘러보는 폭 넓은 시야다. 그동안 앞만 보고 달려왔으니 지금은 주변을 둘러볼 때다.”

“그럼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이번 앨범은 팬들에게 선물한다는 개념으로 해라. 텀이 길지는 않으니 정규 앨범보다는 미니 앨범이 좋겠군. 다소 퍼포먼스에 치우쳐 있던 것을 버리고, 다양한 장르를 소화하는 네 모습을 보여줘라. 그럼 팬들도 만족할 것이다.”

“팬들에게 보답을 함과 동시에 다시 한 번 절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겠네요.”

“그렇게 되면 더 좋겠지.”

두 사람의 시선에 허공에 마주친다. 고개를 한 차례 끄덕인 석규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고, 언제나 자신을 든든하게 지지해주는 아버지의 존재에 창현 또한 마음 편히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현의 새로운 행보가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오빠! 나 서운해.”

“갑자기 왜 그래.”

석규와 이야기를 마친 창현은 휴일임에도 연습을 나온 지영에게 한 소리를 듣고 말았다.

“오랜만에 귀국 했는데 나랑 놀아주지도 않고. 오빠가 없는 동안 얼마나 쓸쓸했는데.”

“그 점은 미안하게 생각해. 하지만 나도 바빠서 시간이 없었어. 이해해줘.”

“시간이 왜 없어?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거야?”

“응? 아, 아니.”

창현은 놓치지 않았다. 순간 날카롭게 변하는 지영의 눈을. 진실을 발설했다가 그녀가 옆에서 어떻게 긁어댈지 생각만 해도 두려웠다.

“아닌데 왜 바빠. 아빠가 오빠 휴식 취한다고 다 말해줬다고. 그러니 나랑 좀 놀아줘. 요즘 오빠들은 동생하고 잘 놀아준다던데.”

“어떻게 놀아주는데?”

“그야 오붓하게 영화도 보고, 같이 밥도 먹고 쇼핑도 하고…….”

“…그거 연인이 하는 거 아니야?”

“아, 아니야! 요즘 오빠 여동생은 이렇게 한다고 했어.”

이번에는 지영이 당황한다. 오빠와 여동생이 노는 것에서 약간 자신의 사심을 넣다 보니 연인간의 데이트 형식이 되어버렸다.

창현의 눈이 가늘어지자, 지영은 몸을 움츠리며 말한다.

“어쨌든 오빠가 가니 쓸쓸했어. 트레이닝을 받아도 실력이 느는 것 같지도 않고, 의욕도 별로 없고.”

“그건 미안해. 평소에 많이 있어주지도 못하는데 멀리 가버려서.”

가족과 함께 살지 못하는 것이 늘 미안하게 여기는 부분이었다. 어린 시절 정에 굶주렸던 그는 가족이 함께 산다는 것에 환상을 느끼고 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것은 사생팬이라 불리는 자신의 팬들이 상당수 존재했기에 그들에게 피해를 입지 않길 바랐다.

창현의 표정이 좋지 않게 변하자, 지영은 자신이 잘못 건드렸다는 걸 깨닫고는 당황했다.

“아, 아니! 난 그런 마음으로 이야기 한 게 아니라…….”

“그래도 얼마 지나지 않으면 완전히 돌아오니까 조금만 참아줘. 지영이 입학식 정도는 보고 떠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응?”

빠른년생인 지영은 올해 고등학생이 된다.

그 말에 지영이 기대감 섞인 눈으로 창현을 바라본다.

“그럼 내 입학식에 와주는 거야?”

“음! 가능하다면?”

“와! 그것만으로도 대만족! 오빠 정말 최고야.”

환호성을 터뜨리며 자신에게 안기는 지영을 부드럽게 안아주며 창현도 미소를 지었다. 새로 생긴 동생의 존재는 여러모로 자신에게 큰 힘이 되어주고 있었다.

입학식에 오겠다는 창현의 이야기에 지영은 완전히 풀어져 입가에 싱글벙글 미소를 지으며 재잘재잘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그 이야기를 즐겁게 듣던 창현은 무언가 생각이 난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지영을 바라본다.

“그러고 보니 한 가지 깜빡한 게 있는데.”

“응, 뭔데?”

“저번에 이야기 했던 거 있지? 지영이 네가 데뷔를 하고 싶으면 실력을 늘려 통과해야 한다는 거.”

“…응, 알지.”

밝았던 분위기가 한순간 가라앉았다. 분위기 변화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자신이 떠난 이후, 의욕적으로 임할 수 있도록 계기를 심어주고자 창현은 악역을 자처했다.

“아무리 소중하고 귀여운 동생이지만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데뷔를 하는데 반대할 거야. 내가 저번에 말했지? 정해진 기간 동안 내가 만족할 만한 실력을 쌓으라고.”

“오빠는 그렇게 말했어.”

“올해 겨울에 시험을 볼 거야. 데뷔를 하고 싶다면 그 시험에서 합격할 것. 만약 합격하지 못하면 가수의 길은 포기하는 거야. 알겠지?”

“…잔인하지만 약속했잖아. 난 오빠의 결정을 순순히 따를 거야. 하지만 오빠가 납득할 만한 실력을 쌓을 수 있게 최선을 다하겠어.”

주먹을 불끈 쥐며 전의를 다지는 지영의 모습에 창현은 미소를 지었다. 의욕에 찬 그녀의 모습은 그가 바라던 바였다.

“보기 좋네, 열심히 해서 후회가 남지 않도록 해.”

“그럴 거야. 나중에 내 실력을 보고 깜짝 놀라지나 말라고.”

“제발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네.”

“흥! 오빠는 날 너무 어린애 취급 한다니까.”

창현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인상을 찡그리는 지영. 그 모습이 마냥 귀엽게 보일 따름이다.

쾌활하던 분위기가 어느 정도 진정이 되자, 창현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모두 끝났다는 걸 깨달았다. 지영과 더 놀아주고 싶지만 피곤해서 오늘은 쉴 예정이다.

♩♪♬

그때,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지영을 힐끗 본 창현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야호! 창현아, 나 윤아야. 저번에 보고 제대로 전화도 못한 것 같아서. 잘 지냈어?

밝은 윤아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그러자 창현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힘겹게 고개를 돌리니, 그곳에는 뾰족하게 변한 지영의 시선이 그에게 향하고 있었다.

“설마 여자들이랑 노느라 휴식을 취하지 못한 거야? 그런 거야?”

지영의 음성이 무섭게 들렸다.


적절한(?) 타이밍에 걸려온 윤아의 전화에 창현은 전화를 끊은 뒤, 진땀을 흘려 해명을 해야만 했다. 이번이 처음이라고, 절대 여자와 노느라 그런 것이 아니라 말했지만 여태까지 전적을 알고 있는 지영은 쉽게 믿으려 하지 않았다.

매력이 철철 넘치는 오빠를 바람둥이로 만들지 않으려는 지영의 필사적인 의도가 섞여 있었지만 무심하게도 창현은 그것을 알아주지 못한 채 지영의 맹추격을 피하는데 급급했다.

“후우!”

하루 놀아주겠다는 말로 간신히 그녀를 달랜 뒤 자리를 벗어난 창현은 길게 한숨을 내쉰 뒤, 핸드폰을 들어 전화를 걸었다.

덕분에 바람둥이라는 생소한 단어를 듣게 되었지만 윤아가 전화한 이유라도 알고 싶었다.

♩♪♬

컬러링이 울려 퍼지기 시작하더니, 잠시 후, 윤아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창현아! 왜 이렇게 늦게 연락했어?

‘다 누나 때문이잖아!’

하필이면 지영의 앞에서 전화를 할 줄이야! 크게 소리치고 싶은 창현이었지만 간신히 억눌렀다. 그러나 발랄한 윤아의 목소리에 속이 부글부글 끓는 건 어쩔 수 없는 현상이었다.

“일이 좀 있어서요. 지금 일이 다 끝났고요.”

-아! 그렇구나. 내가 타이밍을 잘못 잡았던 거네? 미안. 방해가 된 건 아니지?

“그렇진 않아요.”

방해가 됐다 말하고 싶지만 머리 따로 입 따로 노는 창현이다.

-다행이네. 내 전화 때문에 잘못된 게 아닐지 걱정이 많았거든.

“하하하.”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었다.

억지웃음에 분위기가 가라앉고, 잠시 후, 정신을 차린 창현이 본격적으로 용건을 물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전화하신 거예요?”

-응? 내가 전화한 이유? 그, 그게 그러니까…….

발랄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하다가 급속도로 목소리가 줄어드는 윤아. 점점 말끝을 흐리던 그녀가 조심스럽게 창현에게 말했다.

-혹시 우리 대학 OT 때 기억해?

“OT 때요? 무슨 일을 말하는 건지 모르지만 그때 일어났던 일은 웬만한 거라면 다 이해해요. 누나가 꾀병 부려서 무대 아래로 내려간 것까지도요.”

-아악! 그건 제발 잊어줘!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을 떠오르게 만들자 괴로운 표정을 짓는 윤아였다. 그때 꾀병을 부린 이후, 숙소로 돌아가 열렬한 환영과 동시에 지옥을 맛보고 말았다.

특히 윤아는 아직까지 이해를 못하고 있었는데, 자신과 함께 고통을 나누며 서로를 위로하던 태연이 왜 자신을 가장 괴롭히는데 앞장 섰는지 모르고 있었다.

“잊어주고 싶지만 제가 기억력은 은근히 좋은 편이라서요. 잊을 수 있으면 잊어버릴게요.”

-짓궂어! 안 그래도 다른 언니들이 날 괴롭혀서 괴로운데, 힝.

울상을 짓는 표정이 연상되는 윤아의 말투였다. 장난을 치려고 했던 것이 괜히 심한 일로 번진 것 같아 미안함을 느낀 창현이 사과했다.

“울릴 의도는 아니었는데. 기분 나빴으면 미안해요.”

-아니야, 내가 꾀병 부린 대가인 걸.

“사실 다른 누나들이 좀 짓궂었죠. 그런데 누나가 전화하신 이유를 아직 말씀하지 않으셨는데요? OT에서 일어났던 일 웬만한 건 다 기억하고 있어요.”

-아! 그, 그게 그러니깐 말이지…….

본격적인 용건으로 들어가자, 다시 말을 더듬는 윤아였다.

그럴수록 창현의 의문은 쌓여만 나갔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그녀의 다음 말에 귀를 기울일 뿐.

그것을 눈치 챈 윤아는 더더욱 난감한 기색을 보였다.

수연의 외도(?)로 인해 기분이 확 나빠져서 일을 저질렀지만 막상 실행을 하려니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하였다.

입술을 질겅질겅 씹던 그녀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혹시 OT 때 했던 이벤트 기억해?

“이벤트라면 빙고요?”

-응, 빙고도 있고, 마지막에 했던 추첨 있잖아.

“추첨이라면 당연히 기억하고 있죠. 무려! 저와의 일일 데이트권이 걸려 있었는데 나타나지 않았었잖아요. 말을 하지 않았지만 사실 그때 얼마나 무안했다고요.”

-…많이 무안했어?

“당연하죠. 학생들이 엄청 열광했고, 저도 있는 힘껏 있는 척 했는데 아무도 안 나타났잖아요.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엄청 무안했다고요. 진짜 창피해서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을 정도였으니까요.”

-그, 그랬구나.

무안을 준 대상이 자신이라는 걸 알았기에 윤아는 심하게 말을 더듬었다. 어떻게 말을 해야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을지 짐작이 가지 않아 앞이 깜깜할 정도였다.

“…….”

윤아가 말을 하지 않자 창현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색하게 가라앉은 분위기.

전화를 걸었던 사람이 아무런 언급도 없자, 창현이 입을 연다.

“누나, 왜 아무 말도 없으세요?”

-음, 그게 그러니까… 창현아, 혹시 그때 뽑았던 번호를 기억해?

“번호요? 기억하죠. 530번인데 제가 그걸 잊을 리 없죠. 무려 제게 굴욕을 주었던 번호인데.”

굴욕을 주었다는 부분에서 다시 한 번 움찔하는 윤아였지만 여기에서 물러날 수 없었다. 아무런 기회가 없던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낸 유일한 찬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는 그녀는 두 눈을 딱 감고 일을 저질렀다.

-…사실 그 530번이 나야.

“네?”

-창현이 네게 굴욕을 선사한 사람이 바로 나라고!

“…에엑? 그게 정말인가요?”

묘한 침묵 뒤 경악을 터뜨리는 창현이었다. 우연이 이런 우연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어떻게 거기에서 윤아가 당첨될 수 있단 말인가.

황당한 표정을 지은 창현이 다시 한 번 물었다.

“그러니까, 번호를 뽑은 게 누나라고요?”

-응, 맞아. 사실 굴욕을 줄 생각은 없었어. 내가 당첨된 걸 알았을 때 많이 당혹스러웠거든. 나가고 싶었지만 만약 거기에서 나간다면…….

“제대로 스캔들이었겠죠. 미리 짠 거라 이야기 했을 수도 있고.”

-응응! 그런 거야. 난 절대 무안을 주려고 그런 게 아니야.

알아서 해명이 되자, 열렬히 그의 말을 지지하는 윤아였다. 어색했던 분위기가 해소되는 듯하자, 그 기쁨이 창현에게 전해질 정도였다.

“그래서 그랬던 거구나. 누나가 말해주지 않았으면 전 여전히 굴욕을 당한 거라 생각했을 거예요.”

-절대 그런 의도는 없었어. 믿어줄 수 있지?

“그럼요. 마음 한구석이 찜찜했었는데 잘 됐네요.”

오해를 풀고, 일이 일단락되자, 윤아는 안도하며 다음 단계로 착수했다. 오늘 그녀가 전화를 건 것은 단순히 오해를 풀기 위함이 아니었다. 좀 더 큰 대어를 낚아 목적을 성취하려 하였다.

-그래서 말인데…….

“네?”

-추첨 당첨, 아직도 유효할까?

“유효하다고요? 갑자기 그건 왜?”

-왜라니, 그때 이야기할 때 당첨자에 대해서 얼마까지 이야기해야 한다 언급이 없었잖아. 그러니 많은 사람들의 시야에서 벗어난 지금 그 당첨권을 쓸 수 없는지 궁금해서…….

황당한 논리였지만 틀린 논리도 아니었다. 그럴 듯한 말을 만들어내기 위해 윤아는 무려 하루 동안 시간을 허비해야만 했다. 진화에 진화를 거듭하고 있는 사슴이었지만 본능이 발달할 뿐, 지능이 발달하지는 않았다.

“…생각해보니 그것도 그러네요.”

-그래서 말인데 같이 만날 수 없을까?

“으음!”

고민에 빠진 창현. 어제만 하여도 수연과 만나서 제대로 된 휴식을 누리지 못했던 그는 윤아가 만나자고하자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피곤하긴 하지만…….’

윤아와 만나는 것이 싫은 건 아니었다. 단지, 만나게 되면 주변의 시선에 신경을 써야했고, 스스로 몸가짐을 조심해야 했기에 빼앗기는 에너지가 은근히 많았다. 그로 인해 휴식을 취해야 할 자신이 오히려 에너지를 소비하게 되니, 여러모로 피곤한 면이 많았다.

하지만…….

‘오히려 내 목적을 이룰 수 있을지도.’

2주의 휴식 기간 중 절반이 지난 지금 나머지 날은 쉬고 싶은 게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하루를 소모하더라도 확실하게 자신의 의사를 전달한 뒤, 남은 날을 쉬는 것이 옳은 결정일 것이다.

무엇보다 데이트권을 획득한 윤아의 말을 거절하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알았어요. 그럼 만나도록 해요. 대신 다른 날들은 제가 스케줄이 있어서요. 그러니 누나 스케줄을 말해주시면 시간을 비워보도록 할게요.”

-그래? 응! 알았어. 이틀 뒤에 오전부터 낮까지 스케줄이 비거든. 밤 10시에 라디오 스케줄이 있으니 8시까지 숙소로 들어가면 되는데, 그럼 모레에 보도록 할까?

“모레라면 저도 괜찮네요. 다른 날들은 바빠서 어떻게 할까 싶었는데.”

-괜찮아! 내가 귀찮게하지 못하도록 언니들이랑 주현이에게 확실히 이야기하도록 할게.

자신을 열렬하게 괴롭히던 악마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윤아가 힘찬 어조로 말한다. 창현이 바쁜 소식을 알리면 경쟁자인 멤버들이 알아서 포기할 것일 터. 윤아에게는 무척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정작 그녀를 통해 휴식을 취하려는 창현의 의도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자신의 의도가 정확하게 먹혀들자, 창현은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윤아가 자신의 뜻대로 움직여 주었다. 서로 모르는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것일 뿐이지만.

“좋아요, 그럼 만나는 시간은 언제로 정할까요?”

-나 영화 보고 싶어! 요즘 바빠서 영화를 볼 시간이 없었거든. 그러니 우리 조조할인으로 영화보자!

“나쁘지 않네요. 영화는 저도 좋아하니까요.

-응응! 그리고 내가 여러 가지를 생각했는데…….

창현이 수락할 것을 염두에 두고 여러 가지를 생각해온 윤아였다. 경쟁자들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는 생각에 그녀는 신나게 이야기를 하였고,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창현이 첨삭을 함으로써 데이트 플랜이 완성 되어갔다.

사슴의 역습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석규와 이야기를 나누며 앨범에 관련된 구상을 하고, 집으로 찾아가 오순도순 이야기를 하며 가족과 오붓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편하게 시간을 보냈을 법도 하지만 정작 창현의 안색은 피곤함 그 자체였다.

“그래도 썩 나쁘지는 않네.”

마음이 편안하지 않아서 피곤한 기색이 존재했지만 창현의 안색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기분은 괜찮은 축에 속했다.

“작은 차이가 이런 인식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건가?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기분이 좌지우지되는 걸 보면 나도 참 간사한가 보네.”

내일은 윤아와 약속을 잡은 날이다. 저녁 라디오 스케줄을 제외하고 아침부터 저녁식사 시간까지 시간이 비게 된 윤아는 며칠 전 대학 OT에 참가했다가 얻게 된 일일 데이트권을 창현에게 사용하였다. 당시 얼버무리며 무마된 일이었지만 철두철미하게 준비한 윤아의 언변에 허점을 찾아내지 못한 채 결국 그녀의 제안을 수락하고 말았다.

어찌 보면 반강제적인 수락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동안 만남과 달리 데이트라는 뚜렷한 성격이 존재했고, 대충 짜던 스케줄도 적극적으로 참가하여 계획했기에 그렇다.

“데이트라, 데이트.”

고개를 돌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살핀다.

묘한 기대감이 서린 표정. 이런 기분을 느낀 건 자신의 슬럼프 타파를 위해 일일 여자 친구 역할을 자청한 태연과의 데이트뿐이다.

그때와 다른 점이라면 전에는 몰랐지만 지금은 알고 있다는 것 정도.

이성과 데이트가 주는 묘한 설렘과 즐거움을 알아버렸기에 내색하지 않으려 해도 두근거리는 마음을 어쩔 수는 없었다.

“확실히 바뀌긴 바뀌었어.”

스스로에 대해 평가를 해본다.

정상의 자리에 서고, 관객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에 대한 냉정한 판단이 필요하다.

과대평가를 해서도 안 되고, 과소평가를 해서도 안 된다.

예전이라면 무감각하게 임했을 이성과의 만남에 대해서 이제는 제법 설렘을 갖고,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짧지 않은 시간이지만 창현은 그 기간 동안 자신이 많이 변했다는 것을 인정했다.

자신의 변화에 대해 생각에 잠겨 있던 창현은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옷장 문을 연다.

기왕 데이트를 나갈 거라면 제대로 차려 입는 것이 좋지 않은가?

“음, 괜찮은데?”


약속 날이 되었다.

전날 창현이 의상 문제로 여러 고민을 하고 있던 것처럼 윤아 또한 숙소에서 옷을 고르며 고민에 잠겨 있었다.

데이트의 필수요건은 바로 옷차림이다.

옷차림이야 말로 사람을 처음 만날 때 느껴지는 첫 인상처럼 중요하단 걸 알고 있었기에 윤아는 옷 선정에 있어 신중을 기했다.

데이트를 신청했던 날부터 시작하여 데이트 당일까지 윤아의 고민은 깊어만 갔다.

그녀에게 옷이 없어서 고민하는 것이냐? 라고 물어본다면 아니다. 윤아한테 예쁘고 귀여운 옷은 많았다.

하지만 문제는 그 옷들이 그녀에게 있어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어떻게 하지? 튀지 않으면서 예쁘고, 눈을 사로잡으면서 시선을 사로잡지 않는 옷을 어떻게 고르지?”

모순을 늘어놓으며 옷 선정 고민에 빠져버린 윤아였다.

데이트 날짜가 정해졌지만 옷 선정에 난항을 겪었다. 이성으로서 어필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지만 불운하게도 연예인이란 신분은 그녀로 하여금 선택의 폭을 대폭 축소해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머리를 부여잡으며 고민에 빠진 윤아였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멤버들에게 들켜도 안 되잖아. 아악! 어떻게 해야 해?”

진화에 진화를 거듭했지만 본능이 발달한 사슴은 이성적 판단에 약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는 태연이나 주현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다 직감한 윤아는 미리 멤버들에게 친구들과 놀고 오겠다고 이야기를 해놓은 상태였다.

덕분에 윤아는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었다.

멤버들에게 의심을 사지 않으면서 창현에게 어필할 수 있는 옷을 입어야 하는 것.

동성의 친구들과 노는 자리에서 이성에게 어필하는 옷을 입고 가면 의심을 사는 건 당연했다. 거기에 숙소에는 잔머리의 대가 와룡파니와 사마율이 존재했기에 윤아는 극도로 몸을 사렸다.

“막내도 조심해야 하고.”

권력의 권좌에 군림하던 태연을 어떻게 끌어내렸는지 똑똑히 목격하였기에 윤아는 막내 주현에게도 경계심을 가졌다.

신경 쓸 것이 너무 많다 보니 옷 선정은 당일이 되기 전까지 택하지 못하는 불상사를 낳았다.

머리를 움켜쥔 채 고뇌하던 윤아는 새벽 늦게 잠이 들었고, 눈을 번쩍 뜨자, 시간을 확인하고 기겁했다.

“꺄악! 어떡해! 늦었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윤아는 광속으로 준비하기 시작했다. 빠른 속도로 머리를 감고, 세수를 한 뒤 양치를 했으며, 머리를 말리면서 동시에 갈아입을 옷을 추려냈다.

계산 따위를 할 시간이 없었다. 손이 가는대로, 마음이 가는대로 옷을 고른 윤아는 추려낼 여유조차 없이 곧바로 옷을 입었다. 무난하게 가느냐, 예쁘게 가느냐 고민을 하다 결국 택한 것은 예쁘게 가는 것이었다.

준비를 마친 그녀는 후다닥 방을 나섰다. 아니나 다를까, 일찍 일어난 태연과 주현이 그제야 윤아에게 인사를 건넸다.

“좀 늦은 것 같은데, 준비 다 했어?”

“네, 다했어요.”

“언니, 빠뜨린 건 없죠?”

“응? 응! 걱정해줘서 고마워. 난 늦어서 가볼게. 꺄악! 어떡해!”

비명을 지르며 밖으로 나가는 윤아. 그 모습을 지켜보던 태연과 주현이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저렇게 허겁지겁 나가는 걸 보니 친구랑 만나는 거 맞지?”

“네, 언니라면 남자를 만나는데 저렇게 가겠어요?”

“그야 그렇지. 괜히 의심했네. 미안하게.”

“저도요. 많이 걱정했는데 아닌 것 같아 다행이에요. 윤아 언니가 너무 예쁘니까요.”

그렇게 자체적으로 의심을 접어버리는 두 사람이었다. 워낙 다급한 기색을 보이는 윤아였기에 그녀들은 예쁘게 차려입은 옷차림도 의심하지 않았다.

남자랑 만나면 아침 일찍 일어나 예쁘게 꽃단장을 하지, 머리조차 제대로 말리지 못한 채 후다닥 나갈 리는 없지 않은가.

사슴에게 운이 따르고 있었다.


“하아! 하아!”

윤아는 뛰고 또 뛰었다. 하이힐을 신은 채 뛰어가는 그녀의 모습에 주변 시선이 모여드는 것은 당연했다. 패션 모자치고 깊게 눌러 쓰고 목도리를 하여 얼굴을 알아볼 수 없지만 일반인보다 훨씬 작은 얼굴에 언뜻 드러나는 초롱초롱한 큰 눈은 그녀의 미모를 숨기지 못하게 하였다.

어디 그뿐인가. 치마 아래로 드러난 그녀의 각선미에 주변 남자들은 자기도 모르게 한 번씩 그녀를 쳐다보고는 하였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자신도 모르게 남자들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윤아였다.

택시 승강장에 도착한 윤아는 목도리를 풀고 거칠어진 숨결을 가다듬었다. 여기서 버스를 타고 가는 것이 좋았지만 언제 도착할지 모르는 버스보다 당장 빠르게 갈 수 있는 택시가 그녀의 선택에 딱 맞았다.

“일단 숨 좀 고르고.”

심호흡을 하며 품에서 거울을 꺼낸 윤아는 화장이 번졌는지 면밀히 검사를 한다. 땀이 흐르지 않을 정도를 조절하며 뛰었기에 다행히 땀이 나지 않았다.

“후우우!”

평상시 호흡으로 돌아온 윤아는 길게 숨을 내뱉은 뒤, 대기하고 있는 택시에 탑승한다.

백미러로 윤아를 보던 택시기사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반갑게 맞이한다.

“어서 오십쇼! 오늘 운이 좋네.”

“네?”

“새벽이 아녀? 요즘은 그 뭐다냐, 소녀시댄가 그걸로 활동 중이고.”

“에? 어떻게 아셨어요?”

눈을 동그랗게 뜬 윤아가 경악한 표정으로 묻자, 택시기사는 도리어 고개를 갸웃하며 말한다.

“얼굴을 다 드러내고 다니는데 모를 리가 있나.”

“아…….”

택시기사의 말에 윤아는 자신의 손에 들려있는 목도리를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숨이 가빠지면서 호흡을 고를 때 목도리를 풀러버린 것이다. 워낙 자연스럽게 목도리를 풀어버렸지만 오늘 데이트에서 이러면 곤란했다.

‘주의해야겠어.’

멤버들의 눈을 피해 무사히 숙소 탈출한 것에 너무 마음이 풀어진 듯했다. 윤아는 느슨해진 마음을 단단히 조이며 각오를 다졌다.

“그래, 새벽이 어디로 갈 예정인가?”

“죄송하지만 요 근처인데…….”

“하하! 그게 뭐 미안하다고. 정 미안하면 내릴 때 싸인이나 한 장 해줘. 우리 아들이 새벽이 광팬이거든. 가능하지?”

자식 생각하는 마음은 직업의 귀천을 떠나 모두 같았다.

“물론이죠. 대신 빠르게 가주세요. 약속이 있는데 늦었거든요.”

“약속? 남자 친구랑 약속인가?”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런가? 하하! 그럴지도. 그럼 빠르게 신속하게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손님.”

평소보다 쾌속 드라이브하는 택시기사의 솜씨로 윤아는 무사히 약속시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과욕을 부렸네, 과욕을 부렸어.”

자신의 차림새와 주변의 시선집중을 느끼며 창현은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옷차림을 두고 고민하던 그는 주변의 시선을 염두에 두고 무난한 옷을 골랐다. 하지만 패션에 대한 욕구를 참지 못하고 안에 입은 티셔츠를 튀는 걸 고르는 만행을 저지르고 말았다.

그것도 자기를 알아달라는 듯 현란한 분홍색으로.

덕분에 주변의 시선을 한껏 받다가 지퍼로 옷을 채워놓은 상태였다.

그러자 주변의 시선이 거두어졌지만 발랄한 분홍색 티셔츠로 인해 집중되는 시선은 여전했다.

“후우!”

자신이 저지른 실수에 한숨만 내쉬는 창현이었지만 이미 저지른 실수를 되돌릴 수 없는 법이다.

“조금 지나면 잊혀지겠지.”

집중되었던 시선이 이제는 조금이나마 약해져 있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완전히 거둬질 것이다.

하지만 상황은 쉽게 반전되지 않았다.

“창현아!”

한쪽에서 들려오는 윤아의 목소리. 그리 크지 않았지만 사람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고개를 돌린 창현의 안색이 어둡게 물들었다.

“하아!”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한숨.

그가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다가오는 윤아 때문이다. 예쁘게 차려입은 채 손을 흔들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주변의 시선을 한눈에 사로잡고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거두어지는가 싶었더니만 윤아로 인해 다시 시선이 집중되어버렸다.

“뭔가 불안한데 이거.”

처음부터 꼬이는 느낌이 단단히 들었다.


쪼르르 다가온 윤아는 모자와 목도리로 완전 무장을 한 상태였다. 그 사이로 드러난 그녀의 눈은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안녕, 창현아.”

“…안녕하세요, 누나.”

큰 목소리로 주위의 이목을 집중시킨 그녀의 행동에 한 마디 하려던 창현은 발랄한 그녀의 모습에 차마 뭐라 말할 수 없었다.

그저 한숨만 푹 내쉬는 수밖에.

그 모습에 윤아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왜 그래?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거야?”

“아니요, 문제는 없어요. 그런데 누나 예쁘게 차려입었네요?”

“그래? 아… 그랬구나.”

그제야 자신의 옷차림을 살펴볼 여유가 생긴 윤아는 나올 때 가장 눈여겨보던 옷을 입고 나왔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워낙 급하게 나온 탓에 미처 자신이 무슨 옷을 입었는지도 모른 상태였다. 주변 사람에게 튈 것을 염려하여 배제한 옷이지만 사슴의 본능은 예쁜 것을 추구했나보다.

지금 윤아의 머릿속에 감돌고 있는 생각은 창현의 칭찬뿐이다.

‘예뻐? 예쁘다고? 헤헤!’

입고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에 헤실헤실 웃음을 짓는 윤아.

“그럼 어디로 갈까요?”

“데이트는 당연히 영화지! 영화보자.”

“그래요? 그런데 너무 일찍 만난 것 같은데.”

“아니야! 조금 있으면 조조할인으로 영화가 시작하거든. 그거 보면 되니까 가자.”

“누나, 목소리 좀 조용히.”

창현의 속삭임에 움찔한 윤아가 주변을 둘러보니 지나다니던 사람들이 모두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이른 시간이었기에 대부분 출근을 하는 직장인이었다. 그에 반해 두 사람은 딱 봐도 데이트를 하고 있는 연인 사이였으니 시선이 가는 건 당연했다.

새빨갛게 변한 윤아가 창현의 팔을 잡고 끌고 간다.

“가, 가자.”

“어? 어어, 알았어요.”

윤아에게 질질 끌려가는 창현의 모습은 무척 새로웠다.



조조할인으로 영화를 보는 건 새로웠다. 방학중이었지만 아침이라는 특성 탓인지 영화를 보는 사람이 평상시보다 적었고, 넓은 영화관에서 이성과 단 둘이 영화를 보니 자꾸만 묘한 감흥이 일었다.

“영화도 봤으니 점심 먹으러 갈까요?”

“응, 그러자.”

동의를 표하자, 두 사람은 처음 합의한 대로 근처 스파게티 전문점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점심을 먹은 뒤, 디저트로 커피 한 잔까지 마시는 여유를 부리며 밖으로 나온다.

“좋네요, 가끔 이렇게 휴식을 취하는 것도.”

“나랑 데이트하는 게 휴식이란 거야?”

“예? 음, 기분 나빠요?”

“흥!”

목소리가 뾰족하게 변하자, 창현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윤아는 토라진 듯 고개를 홱 돌리며 기분 나쁘다는 뉘앙스를 팍팍 풍겼다.

어디에서 기분이 나쁜 것인지 모르던 창현이 물었다.

“에이, 왜 그래요. 뭐가 화난 거예요?”

“난 큰 마음 먹고 나온 건데 창현이 넌 휴식을 취하는 마음이라니. 처음부터 제대로 할 마음이 없었던 거지?”

“음.”

해괴한 해석이었지만 그럴 듯한 말이었다. 침음을 흘린 창현은 잠시 침묵하면서 조심스럽게 윤아의 눈치를 살핀다. 서운한 표정을 지은 그녀는 입술을 삐죽인 채 아무 말도 안했다.

“미안해요, 제 말이 기분 나빴으면 용서해줘요.”

“정말 미안한 거지?”

“물론이죠.”

“…좋아! 그럼 다음 목적지는 내가 정하도록 하겠어.”

“…….”

고개를 들며 활발한 표정을 짓고 있는 윤아의 모습에 창현은 어이없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윤아는 낮은 웃음소리를 흘리며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후후! 왜 그러셔? 난 정말 상심했었다고. 하지만 사과하는 창현이 모습이 화가 풀렸어! 그리고 내 뜻대로 해주면 화가 아주 말끔하게 풀릴 것 같은데.”

창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에휴! 처음부터 정하고 싶으면 말하면 되는 거였잖아요. 정말 기분 나쁜 줄 알고 깜짝 놀랐네.”

“기분 나빴던 건 사실이라니까?”

“알았어요, 그렇다고 치면 되죠. 그럼 다음 목적지는 어디죠?”

“다음 목적지는 바로… 놀이공원이야!”

“…….”

처음은 어이없음에, 두 번은 황당함에 침묵하였다.

“히히!”

그 표정을 보며 윤아는 악동 같은 미소를 지을 뿐이다.


놀이공원에 도착한 두 사람은 자유이용권을 끊고 안으로 들어갔다. 점심시간이 지났기에 몇 개 타지 못할 거라 생각한 창현은 입장만 하자고 했지만 윤아는 한사코 자유이용권을 주장했다.

“갑자기 놀이공원은 왜요?”

“연인들이 가장 알콩달콩한 데이트를 하는 곳이 놀이공원이잖아. 어떻게 얻어낸 데이트인데,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지?”

“지금 절 실험용으로 사용하시는 거예요? 이런.”

섭섭함이 가득한 창현의 목소리에 윤아가 펄쩍 뛴다.

“실험용이라니! 모처럼 기회가 생겨서 그런 것뿐이야.”

‘그리고 난 너랑 오고 싶었다고! 오직 너만!’

그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차마 밖으로 내뱉지 못하는 윤아였다.

“왜 그렇게 당황해요. 설마 진심이었던 것? 난 농담이었는데.”

당황하는 그녀를 보며 창현이 피식 웃음을 짓다가 이내 뻣뻣하게 굳고 말았다. 살벌하게 빛나고 있는 윤아의 눈빛은 금방이라도 주먹을 내지를 듯하였다.

“읏, 그러니까 누나…….”

“못됐어, 씨잉.”

“……?”

주먹을 내지를 듯하던 그녀의 예상 외 반응에 창현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눈물이 그렁하던 윤아의 표정을 떠올리고는 그녀의 뒤를 쫓았다.

“잠시만요, 누나!”


윤아의 화를 풀어주는데 상당히 고생을 해야만 했다. 놀이기구 두 개를 사면서 창현은 해본 적 없는 갖은 아부를 해야만 했다. 그뿐만 아니라 기념사진 몇 방을 찍고, 윤아를 위해 이벤트에 참석하여 토끼 인형을 획득하고 나서야 간신히 화를 풀어주는데 성공했다.

“아, 재밌다.”

벤치에 앉아 기지개를 키는 윤아를 보며 창현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고 보니 꽤 오랜만에 오는 거네요.”

드라마 촬영이 끝난 직후, 놀이공원에 왔으니 반년 정도 놀이공원에 오지 못한 셈이다. 그때 수연이 싸온 도시락을 먹다가 하마터면 생을 마감할 뻔한 기억이 떠오르자 창현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휴식이 끝나고, 어깨를 나란히 한 채 걸음을 옮기는 두 사람. 윤아가 무언가를 발견하더니 눈을 빛낸 채 그곳으로 달려간다.

“아! 솜사탕이다.”

계산을 마치고 연분홍색 거대한 솜사탕을 갖고 오는 윤아. 방실방실 미소 짓고 있는 모습이 마치 어린 아이를 연상시켜 창현도 자연스레 미소 짓게 하였다.

창현에게 다가온 그녀는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솜사탕과 그를 번갈아본다. 그러다 입가에 미소를 짓더니, 솜사탕을 떼어내어 내민다.

“자, 아, 해봐.”

“네? 하지만 누나, 이건…….”

“왜? 연인들은 다 이렇게 한단 말이야. 설마 내가 준 솜사탕을 먹기 싫은 건 아니지?”

“아니요, 그럴 리가요.”

“그럼 먹어. 자!”

“아…….”

윤아의 강요(?)에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벌리는 창현. 입가에 미소를 지은 그녀는 손에 쥔 솜사탕을 창현의 입에 넣어주는 척하다가 자신의 입에 쏙 넣는다.

“……?”

“히히! 속았지?”

“이, 이익!”

“악! 창현이가 괴물이 되어간다. 도망가야 해!”

“거기서요!”

초딩 융의 장난에 당한 창현의 분노가 폭발하면서 도망치는 윤아를 추격한다. 우사인 볼트를 방불케하는 창현의 스피드에 결국 붙잡힌 윤아. 살벌한 창현의 기세에 사시나무 떨 듯 몸을 떤다.

“자, 이제 대가를 치러야 할 순간입니다.”

대수롭지 않은 듯 말하지만 주변에 넘실거리는 기세는 금방이라도 자신을 잡아먹을 듯했다. 마치 주현이 화가 난 것을 떠올리게 만드는 창현의 모습에 윤아는 두 눈을 딱 감고 솜사탕을 떼어 창현의 입에 넣는다.

“에잇!”

“…….”

“어때, 맛있지?”

“맛이 있긴 하네요. 하지만…….”

장난을 친 것에 따지려 했지만 윤아의 반격이 한결 빨랐다.

“맛있으면 된 거잖아. 설마 여자인 날 때리기라도 하려고?”

“윽!”

애처로운 눈망울을 하며 여자임을 내세우자 말문이 막힌 창현이 멈칫한다. 오늘 따라 이상하게 윤아를 상대하는 것이 까다로웠다.

‘평소랑 다른 것 같아.’

상대하기 까다로운 것이 마치 꼼꼼한 주현을 대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철저한 이성을 바탕으로 하는 그녀와는 정반대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성적인 주현과 본능적인 윤아의 차이였다.

결국 응징하지 못한 채 뒤로 물러나는 창현을 보며 눈을 빛낸다.

‘그렇게 보이지 않아도 난 지금 죽기 살기로 움직이고 있다고.’

숨을 고르며 자리에서 일어서는 윤아.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솜사탕 조각을 떼어 창현에게 내민다.

“자, 아 하세요.”

“아…….”

그녀의 손이 무안하게 만들 수 없어 입을 벌린다. 그의 입에 솜사탕 한 조각을 넣어준 윤아가 싱글벙글 미소를 지으며 팔짱을 낀다.

“히히! 이제 화가 좀 풀리셨나요?”

“…풀리긴 풀렸는데 갑자기 팔짱은 왜?”

“오늘 우리 둘이 데이트하는 거잖아. 데이트 하는 사이에 이 정도도 못해줘? 우리는 솜사탕도 먹여주는 사이잖아.”

“…….”

해괴한 논리의 연속이었지만 창현은 대응할 수 없었다. 한숨을 푹 내쉰 그가 고개를 젓고 있었지만 윤아는 개의치 않은 채 그를 잡아끌며 활기차게 외쳤다.

“자! 아직 즐길 시간은 한참 남았다고! 열심히 놀아보자. 아자 아자! 앞으로 열 개는 더 타야지.”

활발한 모습은 그녀의 매력 중 하나.

그녀를 바라보며 창현도 미소를 지었다.

‘그래, 오늘은 즐겁게 놀자.’

옆에 있다 보니 초딩이 되어가는 창현이다.


점심을 먹은 뒤 놀이공원에 왔기에 제대로 즐기지 못할 거라 생각하던 창현의 생각은 빗나갔다. 놀이공원에 사람이 많은 것에 변함이 없지만 놀이기구를 타는 것 이외에도 즐길 것은 많았다.

저녁으로 햄버거 세트를 먹은 뒤, 놀이기구 두 개 정도 더 탑승한 두 사람은 벤치에 앉아 슬러시를 먹으며 휴식을 취했다.

“아아, 좋다.”

“재밌게 놀았네요.”

“그러게. 그동안 스트레스가 많이 쌓여 있었는데 싹 풀리는 느낌이야. 좋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저는 또 누나가 스트레스를 쌓아서 가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많았거든요.”

“무슨 말씀을! 창현이가 와줘서 이렇게 재밌게 논 거야.”

약간의 진심을 담아 은근슬쩍 이야기를 하는 윤아. 하지만 둔감한 남자에게 이러한 어필은 제대로 먹혀들지 않았다.

“그래요?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에휴!”

둔감한 남자를 좋아하여 늘어난 것은 한숨뿐이었다.

그녀의 행동에 창현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왜 그러세요?”

“왜 그러냐고? 왜 그러냐라… 에잇!”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하는 무심한 남자에게 어떻게 복수해줄까 고민하던 윤아는 빨대로 슬러시를 퍼담아 분노의 일격을 가했다.

빨대의 목적지는 바로 창현의 입!

딸기맛 슬러시를 맛있게 먹던 창현은 갑작스레 입에서 느껴지는 다른 맛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읍? 왜 그래요?”

“왜 그러긴. 한 가지 맛만 먹으면 심심하잖아. 포도맛은 어때?”

“포도맛… 음! 포도맛도 나름대로 괜찮네요.”

“그렇지? 창현이 너도 다른 맛도 좀 먹어보고 그래. 왜 매일 딸기만 좋아하는 거야. 생과일 주스도 매번 딸기맛만 먹더니.”

“그러게요. 과일을 가리지는 않는데 딸기를 유독 딸기만 찾게 되네요.”

윤아의 말에 긍정을 표하는 창현이다. 포도맛도 괜찮다 느끼며 자신의 슬러시를 퍼서 윤아에게 내민다.

“에?”

“누나가 주셨잖아요. 저도 드려야죠.”

“으응, 그렇겠지? 헤헤! 그렇고 말고. 창현이 너 알긴 아는구나.”

당황한 표정을 짓던 그녀는 이내 눈을 빛내며 창현이 내미는 슬러시를 받아먹는다.

그러면서 속으로 열광한다.

‘꺄아! 이건 연인들만 한다는 서로 먹여주기 이벤트? 게, 게다가 서로 번갈아 가며 먹여줬으니 간접 키스도 했어!’

너무 즐거워서 당장이라도 승천할 듯한 윤아였다.

“딸기맛은 어때요?”

“음! 맛있네. 계속 딸기만 고집하는 이유를 알겠는 걸?”

속으로 기뻐 죽지만 겉으로는 태연한 윤아였다. 연기를 폼으로 배운 것이 아니다.

“그렇죠? 딸기맛도 좋더라고요. 남자가 딸기를 좋아한다고 하니 가끔 이상한 눈초리도 받지만요.”

“개인의 취향가지고 뭐라 하는 건 못 써. 난 창현이 네가 딸기맛을 좋아한다고 해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잖아.”

“그건 또 그러네요. 하하!”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며 가끔씩 서로 먹여주기도 했다.

슬러시를 다 먹자, 시간을 확인한 창현이 윤아에게 말한다.

“이제 슬슬 가야할 시간이네요.”

“벌써? 조금 이르지 않아?”

“음! 그래도 일찍 가는 게 안전하지 않을까요? 여기에서 움직이는 시간도 제법 걸릴 텐데.”

“난 괜찮아! 그러니 딱 하나만 더 타고 가자. 응? 제발 하나만 더 타자. 나 아껴두느라 바이킹도 못탔단 말이야.”

창현의 팔에 매달려 열렬히 애교를 부리는 윤아.

그녀의 행동에 멈칫한 창현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 주변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빠른 속도로 고개를 돌렸다.

“…….”

시선이 머문 곳에 아무것도 없었다. 자신이 과민반응 한 것이려니 생각하며 매달린 윤아에게 말한다.

“알았어요. 딱 하나만이에요. 그 이상 하면 누나도 지각하는 거 아시죠?”

“응응, 물론이지!”

“하아! 그럼 타러 가요.”

윤아의 고집에 굴복한 창현은 길게 한숨을 내뱉으며 앞장 선다. 그 모습을 미소 지은 채 바라보던 윤아가 조용히 뒤따랐다.

인기 놀이기구인 바이킹의 줄은 제법 길었지만 오래 기다릴 정도는 아니었다. 놀이기구에 탑승할 순서가 된 두 사람은 바이킹 자리를 고를 권한이 주어졌다.

“누나.”

“응? 왜?”

“제일 끝이 좋겠죠? 가장 짜릿할 테니.”

“그, 그렇겠지?”

바이킹을 타고 싶다 조르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채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만 보이는 윤아였다. 여태껏 보이지 않은 그녀의 모습에 창현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다.

“누나 왜 그래요?”

“그, 그러니까… 우리 중간에 앉으면 안 될까?”

“예? 왜요? 제일 끝이 가장 재미있게 탈 수 있는 곳인데.”

“하지만, 그러니까…….”

우물쭈물거리며 말을 잇지 못하는 윤아. 그 모습을 보던 창현은 지난번 윤아와 함께 놀이공원 왔을 때를 떠올릴 수 있었다. 그때도 바이킹을 탔었는데, 윤아는 끝이 아닌 중간 부분에 탑승했었다.

‘그리고 고개를 푹 숙이고 소리조차 지르지 않았지.’

나름대로 즐기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었나보다.

진실을 파악한 창현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 표정을 본 윤아가 발끈한다.

“왜 그래! 난 절대 무서워서 그런 게 아니라, 중간에 타도 충분히 바이킹을 재미있게 탈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래요? 아아, 그럼 그렇다고 해드릴게요. 전 또 누나가 무서워서 그런 줄 알았잖아요.”

“내가 그럴 리 없잖아.”

“그러게 말이에요. 제가 착각을 했네요.”

“…흥!”

전혀 믿어주지 않는 듯한 그의 표정에 결국 뿔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 앉는 윤아였다.

그 모습을 본 창현은 피식 웃으며 윤아의 뒤를 따랐다.

결국 두 사람이 앉은 곳은 중앙이었다.


놀이공원에서 즐겁게 시간을 보낸 두 사람은 바이킹을 끝으로 밖으로 나왔다. 마음 같아서는 밤 시간까지 즐겁게 놀이기구를 타고 싶지만 저녁 스케줄은 윤아로 하여금 더 버티고 있을 수 없게 만들었다.

택시를 탄 두 사람은 어느덧 아파트 단지에 들어설 수 있었다.

“힝, 더 놀고 싶은데 아쉽다.”

“어쩔 수 없죠. 시간은 한정되어 있으니.”

“이익! 내가 바란 건 그런 말이 아니란 말이야!”

“그럼 무슨 말을 바랐는데요?”

“…….”

단도직입적인 창현의 말에 윤아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자세히 말하려고 해도 그녀는 뒷말을 잇기가 힘들었다.

평소였다면 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놀이공원에서 즐겁게 시간을 보낸 이후, 경계심이 풀어졌기에 윤아는 창현에게 빽 소리를 질렀다.

“그럴 때는 나도 아쉽다고 해줘야 한다고!”

“그래요?”

“당연하지! 너무 무미건조하잖아. 별로 즐거운 기색을 내비치지도 않는데 어떤 여자가 즐겁게 그 말에 대답을 해주겠냐고.”

“…그러네요. 제가 실수를 했어요. 오늘 누나랑 데이트 한 건 나쁘지 않았어요. 아니, 오히려 저도 무척 즐거웠어요. 그러니 화내지 말아요. 아직 감정 표현하는 게 서툴러서 그래요.”

“…….”

얼굴이 붉어진 채 창현을 바라보는 윤아. 방금 전까지 화가 나서 붉어진 거라면 지금은 그의 말 때문에 붉어진 것이었다.

‘창현이가 나랑 있는 시간이 즐거워? 헤헤! 역시나.’

왠지 모를 우월감에 젖어든다. 하지만 방금 전까지 화를 내나다가 기분 좋은 것을 내색하면 창현이 이상하게 볼 수 있기에 윤아는 자신의 감정을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다.

그녀의 표정 연기가 먹혀들었는지 창현이 조심스럽게 묻는다.

“화 안 풀렸어요?”

“아니, 풀렸어.”

음성은 여전히 쌀쌀하다. 그 모습을 보면 불과 일 년 전만 해도 연기 실력 의혹을 받던 윤아의 모습을 상상하기 힘들었다.

“에휴! 미안해요. 전 즐거웠는데 괜히 누나가 기분 나쁘니 저도 침울해지네요.”

“…잠시만.”

풀 죽은 창현의 말에 윤아는 상황이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자신 딴에는 우위를 점한 지금 상황에서 적절하게 밀어냄으로써 밀고 당기기를 시전하려 한 것인데 창현이 예상 외의 반응을 보여 버렸다. 냉정한 계산이 필요한 밀고 당기기를 본능에 의지하는 사슴이 시전하려 했으니 실패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창현아, 나 기분 안 나빠. 그러니까 그런 표정 짓지 마. 내가 미안하니깐. 응?”

“정말이죠?”

“정말이라니깐 오늘 얼마나 즐거웠는데. 그러니깐 그러지 마.”

숙소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여기에서 화를 풀어주지 못하면 오늘 즐겁게 놀았던 것이 모두 허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윤아는 심각한 위기감을 느꼈다.

짧은 시간 안에 어떻게는 창현의 화를 풀어야 한다!

밀고 당기기를 잊어버린 채 윤아의 머리를 꽉 채우고 있는 생각이다.

“방금 전까지 기분 나빠하셨잖아요.”

“아니야! 사실 기분 나쁘지 않았어. 아니, 나빴었어. 하지만 네 말을 듣고 풀렸어. 그런데 너무 빨리 풀리면 이상하게 보일까봐 화난 척하고 있던 거야. 지금은 다 풀렸어. 그러니 그러지 마.”

진실을 모두 밝혀야 했지만 윤아는 후회하지 않았다.

지능이 뛰어나지 않은 그녀가 할 수 있는 행동은 그것이 전부였다.

“…그랬던 거구나.”

“응응, 그랬던 거였어.”

“그래서 그랬던 거였군요.”

“응?”

갑자기 밝아진 창현의 목소리에 고개를 갸웃하는 윤아.

상황파악을 하지 못하는 그녀를 보며 창현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왠지 그럴 것 같았어요. 속았죠?”

“에, 에엑?”

“누나가 연기를 잘해도 절 속이는 건 불가능하다고요. 제 눈이 얼마나 예리한데. 잠시 속았지만 이미 눈치 채고 있었단 말씀! 속았죠?”

“…….”

멍한 표정을 지은 채 창현을 바라보는 윤아였다. 잠시 후, 지금 상황이 서서히 이해되자, 그녀의 얼굴이 붉게 물들기 시작한다.

“창현이 너어…….”

“읏차! 누나 스케줄 갈 시간이 되었네요. 전 이만 가볼게요. 오늘 즐거웠어요. 그럼 이만…….”

말을 남긴 창현은 저만치 멀어져갔다.

씩씩거리며 분을 삭이는 윤아. 시간이 지나면서 차분한 표정으로 변해갔지만 속은 곧 터질 화산처럼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렇게 나오겠다는 거지? 강창현, 네가 날카로운 눈으로 날 속였다면 나도 내 전문 분야로 상대해주겠어.”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잘하는 것으로 덤볐다면 자신 또한 잘하는 것으로 덤벼주겠어.

사슴은 감춰둔 철권을 연마하기로 하였다.

좋아하는 창현에게 자신의 사랑이 듬뿍 담긴 주먹을 내질러주겠다 다짐하며.

그녀가 잘하는 것은 뼈와 살을 분리시키는 철권이다.

어쨌거나 데이트는 즐겁게 끝이 났다.


창현이 윤아와 데이트를 끝마쳤을 무렵, 한쪽에서는 분주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서울에 살고 있는 박병근은 대한민국의 전형적인 실업자로서, 일할 능력이 있음에도 취직에 연연하지 않는 백수 중 한 사람이다.

온라인 게임이나, 인터넷 가십거리 등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는 그는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아버지의 뒤를 이을 생각이었다.

집에서는 매일 취직을 하고 경험을 쌓으라고 아우성이지만 박병근에게는 먼 나라 이야기다.

“귀찮게 구네.”

오늘도 온라인 게임이나 하며 시간을 보내려던 그는 생각지도 못한 장애물과 마주하게 되었다. 바로 사촌형 부부가 오랜만에 집으로 찾아온 것. 부부로 출장을 가게 된 사촌 내외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박병근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한다.

바로 일곱 살 된 딸을 하루만 봐달라고 한 것이다.

처음에는 거절하려 했지만 사촌 내외가 내미는 용돈에 그는 수락하고 말았다.

사촌 내외가 그에게 제시한 것은 십만 원. 술 한 번 마시면 끝나버릴 돈이지만 취직 압박과 함께 용돈을 끊어버린 부모님으로 인해 용돈이 궁하던 차였다.

돌보기로 한 아이를 집에 방치하려던 박병근의 예상과 다르게 사촌 내외는 그에게 놀이공원 자유이용권 티켓 두 장을 제시하였다.

“모처럼 바람 쐰다고 생각해야겠군.”

뭐가 그리 궁금한 게 많은지 자신을 붙잡고 질문을 날리는 아이 때문에 짜증이 났지만 천진난만한 모습에 화를 낼 기력조차 잃고는 하였다.

“아저씨! 나 솜사탕, 솜사탕.”

“그래 오늘 먹고 이빨 다 썩어봐라.”

당숙이라는 호칭이 어려워 편하게 부르라 했더니 아저씨란다. 한 마디 쏘아붙이고 싶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에게 모질게 대할 만큼 양심 없지는 않았다.

볼록하게 튀어나온 배만 해도 넉넉한 중년의 인심(?)을 상징했으니까.

아이에게 붙잡혀 이리저리 끌려 다니던 박병근은 질려버리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처음에는 바람을 쐬러 다니면 되겠거니 생각했지만 저 작은 체구에서 무슨 에너지가 뿜어지는지 계속 끌려다니다가 질려버릴 지경이었다.

“무슨 어린애가 이리도 체력이 강해.”

아침부터 질질 끌려 다니던 박병근은 두 손 두 발 들고 항복했다. 체력적으로 부담이 되었기에 돌아가자는 제안을 꺼내자, 울어버리는 모습에 결국 밤까지 실컷 놀기로 약속하고 말았다.

어린 아이에게 굴복해버렸다는 생각에 불퉁한 기색을 보이던 그. 혼이 사라진 인형마냥 아이의 요구에 맞춰주던 그는 서서히 지쳐 보이는 모습에 같이 저녁을 먹고 놀이기구를 타기 위해 움직였다.

그러던 중 그의 시선에 잡히는 한 쌍의 커플이 있었다.

“응?”

우연히 지나치듯 보았지만 박병근은 묘하게 익숙하다는 걸 느꼈다. 평범한 키를 지닌 남자는 전체적으로 평범했지만 왠지 모를 기이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으며,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모자와 목도리로 얼굴을 가린 여인은 치마 아래로 드러난 늘씬한 각선미가 정신을 혼미하게 했다.

“마치 연예인 커플 한 쌍이라 해도 믿겠잖아?”

의아한 표정을 지은 그는 그 커플을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오촌 아이와 앉아 슬러시를 먹으면서 곁눈질로 상황을 살폈다.

그러던 중 결정적인 장면을 포착했다. 커플이 서로의 입에 슬러시를 먹여주는 과정에서 여인의 얼굴 절반 이상을 가리던 목도리가 풀어진 것이다.

목도리가 사라지고 온전히 드러난 그녀의 얼굴을 보고 박병근의 얼굴에 경악이 서렸다.

“유, 윤아.”

여인의 얼굴은 현재 인기 절정가도를 달리고 있는 소녀시대의 멤버 윤아였다. 한창 바쁜 윤아가 이곳 놀이공원에서 남자와 함께 있다? 의구심에 남자를 자세히 살피던 그는 마침내 남자의 정체마저 알아냈다.

“세상에나, 현이라니.”

놀라운 특종에 머리가 텅 비어버리는 것 같았다. 세계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현은 여태껏 수많은 스캔들 기사가 터져나왔지만 단 한 번도 진실인 적 없는 청정구역 중 하나였다. 현의 팬은 아니지만 TV와 인터넷에 워낙 자주 나와 얼굴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런 그가 소녀시대의 윤아와 사귀고 있는 사이라니.

본인들은 아니라 하겠지만 제3자가 보기에는 틀림 없었다.

행여나 그들이 사라질까 싶어 박병근이 슬러시를 먹고 있는 아이에게 말한다.

“아리야, 일어나, 아저씨가 사진 찍어줄게.”

“응? 예쁘게 찍어줘, 아저씨.”

“그래, 저기가 예쁘니까 저쪽을 배경 삼아야 돼. 그러니 옆으로 움직여라.”

사진을 찍어주는 명목 하에 카메라를 든 박병근은 아이가 아닌, 창현과 윤아를 찍었다. 목도리가 풀어진 윤아의 얼굴이 정확히 드러났다. 아쉽지만 창현의 얼굴은 완벽하게 드러나지 않았지만 자세히 살피면 그라는 것을 알 정도는 되었다.

증거를 확보한 박병근은 자연스럽게 카메라를 내려놓으며 아이를 안아들었다.

“됐다, 가자.”

“응, 아저씨.”

그보다 조금 늦게 고개를 돌린 창현의 시선이 그를 향했지만 아이를 안고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박병근의 모습에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는 듯했다.

‘대박이다.’

놀이공원에서 노는 내내 박병근의 머리를 가득 채운 생각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박병근은 곧바로 컴퓨터를 켰다. 현실은 잉여 자원인 백수에 지나지 않지만 인터넷이 취미인 그인 만큼 머릿속으로 앞으로 일에 대한 전개가 그려지고 있었다.

‘현의 소속사에 먼저 질러볼까? 아니야, 얼굴이 확실하지 않아서 단순히 닮은 사람이라고 우길 수 있어. 그렇게 하면 사전에 준비를 할 테니 나한테 안 좋아.’

윤아와 데이트를 하는 현의 모습을 선명하게 촬영하지 못한 것이 통한의 한이었다. 만약 얼굴이 확실하게 찍혔다면 게임 오버였을 텐데.

‘그럼 SM에다가 해봐? 상당한 가능성이 있는데.’

SM엔터테인먼트 쪽이라면 가능성이 있었다. 윤아의 얼굴이 선명하게 나온 만큼 그들이 부인하더라도 사진을 본 당사자는 감히 부인하지 못할 테니까. 국내 1위에 해당하는 거대 기획사인 만큼 돈을 두둑하게 챙길 수 있을 것 같았다.

한창 상한가를 자랑하는 소녀시대의 이름에 흠집을 내고 싶지 않을 것이다.

‘괜찮은 방법이군. 후후.’

디지털 카메라를 컴퓨터에 연결한 박병근은 자신이 찍은 사진을 옮기기 시작했다. 혹시나 실수할까 싶어 외장하드에 완벽하게 백업해놓은 그는 작업 준비를 마친 뒤, 인터넷을 둘러보며 구상에 잠겼다.

‘금액을 어느 정도 부를까? 너무 많이 부르면 강경 대응을 할 수 있지. 이건 좋지가 않아. 그렇다고 적은 액수를 부르기에는 잡은 기회가 너무 크고…….’

나름대로 머리를 굴리며 어떤 방식으로 돈을 긁어낼지 고민해본다. 이러한 일들이 예시로 잡을 수 있는 것도 없어서 박병근은 한동안 금액 문제를 가지고 골머리를 앓아야만 했다.

“젠장, 금액 정하는 것 가지고 고생을 할 줄은 생각도 못했군.”

눈살을 찌푸린 그는 다른 생각을 하지 않은 채 인터넷 서핑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우연히 현에 관련된 기사를 접하게 되었다.

자신이 찍은 사진과 관련 있는 일이기에 박병근은 곧바로 기사를 클릭하여 내용을 읽어나갔다.

기사 내용은 아주 사소한 것에 불과했다. 예전 현이 촬영 장소로 한 번 모습을 드러낸 적 있는 음식점이 소개된 것 정도일 뿐, 정작 현에 관련된 내용은 전무했다.

스크롤을 내려 리플을 확인한 그는 헛웃음을 지었다.

“악플이 없어? 웃기는군.”

이런 내용의 글은 무더기로 욕을 먹는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지금 눈에 보이는 사실은 호의 그 자체였다.

막연하게 대단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였던가.

그의 머릿속에 창현에 대한 생각이 재정립되기 시작하였다.

“이 정도라고?”

막연하게 알고 있는 사실은 현이 대한민국 사람 최초로 미국에 진출하여 빌보드 차트 정상에 올랐다는 것 정도다.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소화하지 못하는 장르가 없는 음악의 천재이며, 자신만의 음악 스타일과 대중성, 상품성을 모두 갖춘 슈퍼스타라는 내용이었다.

좀 더 현에 대해 알고 싶어진 박병근은 인터넷을 돌아다니며 현에 관련된 정보를 수집해나갔다.

찾으면 찾을수록 놀라운 것의 연속이었다.

현이 직접 무대 위에 선 동영상까지 본 박병근은 나직이 감탄사를 흘렸다.

“이런 녀석이 이제 열여덟이라고? 천재로군.”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대학교를 물색하며 한창 공부를 하고 스트레스를 받을 시기다. 그 시기에 현은 벌써 세계 정상에 우뚝 서 수많은 사람들의 찬사를 받고 있다.

좀 더 조사해보니 그는 슈퍼스타답지 않게 사생활의 깨끗함을 자랑했다.

만약 다른 자리에서 그에게 관심을 가졌다면 그의 팬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꼬이는데.”

속이 꼬였다. 그가 현이라는 인물을 제대로 처음 접한 것이 음악이 아니라, 소녀시대 윤아와 데이트를 하고 있는 점에서 그는 객관적으로 현을 바라볼 수 없었다.

어린 나이에 세계 정상에 우뚝 섰다는 것이 대단했지만 그에게는 부러움을 넘어서 질투의 대상이 되었고, 대다수 사람들에게 찬사 받는 모습을 보며 경외하기보다 그 이미지에 흠집을 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 속고 있는 거지. 한창 혈기 넘치는 녀석이 이렇게 착할 리가 없잖아? 모두 다 가식이지. 어리석은 사람들은 속고 있을 뿐, 그 가면을 내가 벗겨주도록 하겠다.”

모든 것을 가진 소년이 남자들의 이상형 중 한 사람인 윤아와 데이트를 즐긴다는 건 박병근으로 하여금 모든 면을 부정적으로 보게 만들었다.

윤아와 데이트를 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대중들에게 가식 떠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진으로 한 몫 잡아보겠다는 생각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지금 그의 목적은 오로지 한 가지뿐이다.

바로 완전무결한 현의 이름에 흠집을 내는 것이다.

하늘을 자유로이 나는 잠자리도 날개가 꺾이면 날지 못하듯, 그 또한 날개가 꺾이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한 번 보고 싶었다.

박병근이 보고 싶은 건 딱 하나다.

그것은 바로…….

영웅의 추락이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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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시즌2 시작!▲▲▲▲▲ +5 15.04.17 5,425 65 1쪽
36 마음을 울리는 음악 106장-108장 +8 15.04.16 6,414 106 230쪽
35 마음을 울리는 음악 103장-105장 +1 15.04.16 4,244 82 314쪽
34 마음을 울리는 음악 100장-102장 +2 15.04.16 4,413 68 229쪽
» 마음을 울리는 음악 97장-99장 +1 15.04.16 4,389 63 2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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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마음을 울리는 음악 85장-87장 +1 15.04.16 4,711 83 2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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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마음을 울리는 음악 73장-75장 +1 15.04.16 4,939 111 3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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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마음을 울리는 음악 19장-21장 +4 15.04.16 11,492 270 216쪽
6 마음을 울리는 음악 16장-18장 +5 15.04.16 11,544 242 163쪽
5 마음을 울리는 음악 13장-15장 +5 15.04.16 14,536 297 237쪽
4 마음을 울리는 음악 10장-12장 +8 15.04.16 13,737 352 171쪽
3 마음을 울리는 음악 7장-9장 +10 15.04.16 14,552 362 142쪽
2 마음을 울리는 음악 4장-6장 +11 15.04.16 16,838 421 120쪽
1 마음을 울리는 음악 프롤로그-3장 +47 15.04.16 29,901 545 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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