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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번 님의 서재입니다.

마음을 울리는 음악

웹소설 > 작가연재 > 팬픽·패러디, 현대판타지

김현우
작품등록일 :
2015.04.16 13:27
최근연재일 :
2015.06.01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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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4.16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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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6쪽

마음을 울리는 음악 61장-63장

DUMMY

제61장 사면초가四面楚歌 초미지급焦眉之急 여리박빙如履薄氷




드라마가 대박이 터지자, 드라마에 출연하는 주연, 조연 배우들의 본격적인 대박행진이 이어지기 시작하였다.

주연인 근영은 벌써부터 밀려들어오는 CF로 인하여 소속사가 몸살을 앓을 정도로 기쁜 비명을 토하고 있었으며, 조연인 윤아도 무난한 연기를 펼침으로 인해 연기력 논란에서 벗어나고, 그녀를 중심으로 드라마 ost를 부른 태연과 수연, 미영의 가창력을 인정받고, 그 이름을 알려나가고 있었다.

현재 가요계에서 빅뱅과 원더걸스가 각각 남자, 여자 아이돌의 최고 영역을 양분하여 군림하고 있지만 소녀시대 또한 서서히 치고 올라가며 저력을 비축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런 와중에 사람들의 궁금증을 자아내게 만드는 현상이 하나 있었다.

바로 드라마의 가장 큰 수혜자라 볼 수 있는 현에 관련된 언급은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주연 중에서도 가장 비중이 높고, 드라마 ost를 모두 제작한 그는 드라마에 있어서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인물이고, 이번 상황에서 가장 큰 이득을 봐야 할 인물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에 대해 언급을 하지 않고 있는 실정이었다. 모르는 사람들로서는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드라마 성공으로 그 가치를 높이는데 성공했기에 엄청난 CF 제의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대부분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AA엔터테인먼트에서는 당분간 CF 제의를 받지 않는다는 말과 함께 드라마를 제외한 다른 스케줄을 일절 잡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간간이 잡아놓았던 인터뷰 스케줄 같은 것도 일절 받고 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 상황이 한 달여 가깝게 이어지자 연예계 관계자들은 무언가 이상이 있다는 것을 서서히 깨닫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이상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추측성 기사가 가득 할 뿐이었다.


“윤아야, 창현이한테 무슨 문제가 있는 거야?”

일주일 동안 바쁘게 스케줄을 소화하다가 모처럼 쉬는 날, 인터넷을 뒤적거리던 미영은 기자의 추측성 기사를 보고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윤아에게 창현의 상태를 묻는다.

인터넷 기사에는 창현의 신변에 무언가 이상이 생기지 않았을까, 라고 조심스럽게 추측성 기사를 흘리고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지금 같이 활발하게 활동을 해야 할 시기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일 리가 없다는 것이 기자의 주장이었다.

그 말이 제법 일리가 있었기에 미영은 호기심을 느끼고는 윤아에게 물었다.

윤아는 그 질문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젓는다.

“절대요. 쌩쌩하던데요?”

“그래? 흐음! 그러면 왜 활동을 안 하는 거지?”

마음 같아서는 창현에게 직접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물어본다고 하여 대답해줄 문제가 아니었고, 판을 그르칠 수 있는 중대한 문제였다. 그랬기에 물어보지 않고 윤아에게 묻는 것이었다.

고개를 갸웃하던 미영이 윤아에게 시선이 머문다. 그러고 보니 오늘 다른 멤버들은 스케줄이 없는데 윤아만 스케줄이 있다.

“오늘도 스케줄 나가는 거야?”

“네. 방송 프로그램에 스케줄이 있어요.”

드라마의 가장 큰 수혜자가 윤아라는 것을 아무도 부인하지 못한다. 드라마 조연으로서 안정적인 연기를 펼치고 있는 윤아는 그 이후 방송 출연이 멤버들 중에서 가장 많아졌기에 스케줄 또한 가장 많이 소화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게다가 신인답지 않게 단독으로 CF 제의가 종종 들어오고 있기까지 하여, 지금이 가히 윤아의 전성기라 봐도 무방하였다.

전체적인 인지도가 서서히 상승하고 있지만 자신이 가장 앞으로 치고 나가는 것이 좋은 한편, 언니들에게 눈치가 보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랬기에 근래 들어 윤아의 행동이 극히 조심스러워진 것은 오랜 시간 함께 지낸 멤버들이 눈치 채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멤버들은 윤아가 부담을 느끼지 않게 은연중 배려를 해주고 있었다.

미영은 윤아에게 응원의 인사를 건넸다.

“응, 열심히 해.”

“네. 열심히 해야죠.”

주먹을 불끈 쥐며 웃는 윤아의 모습에 미영은 빙긋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렇게 윤아가 스케줄을 위해 숙소를 나섰고, 미영은 계속해서 인터넷 기사를 뒤적거린다. 인터넷 기자들뿐만 아니라, 현의 팬들까지 여러 가지 설을 내놓고 있는 실정이었다.

몇몇 사람들은 그동안 현이 너무나 열심히 활동을 한 나머지 몸이 좋지 않아 드라마 외 CF 같은 것을 거부하고 있다는 말도 있었고, CF 관계자들에게 너무 높은 금액을 제시하여 접점이 맞지 않는다는 터무니없는 추측도 있었다.

여러 가지 사실들을 보면서 미영의 근심은 점점 더 쌓여갔다. 보면 볼수록 전부 사실 같았고, 창현에게 무언가 문제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창현이가 큰 문제 있는 게 아닐까?”

걱정이 담긴 어조로 중얼거리는 미영이었다.

그런 그녀의 어조를 단호하게 끊어버리는 한 줄기 음성이 있었다.

“그건 아닐 거야.”

“으응?”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미영이 반응을 보이며 시선을 옮긴다. 그러자 그곳에는 선호도 높은 쭈쭈바 중 하나인 빠O코를 열심히 빨아먹고 있는 순규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초콜릿 맛이 무척 달콤하게 보여서 순간 먹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미영은 순규의 말을 떠올리고는 물었다.

“그건 아니라니, 그게 무슨 뜻이야, 써니야?”

이제는 제법 써니라는 호칭이 익숙해져서 순규라 그러지 않고 써니라 부르는 미영이었다. 그리고 그 호칭이 마음에 들었는지 순규의 입가에 미소가 살짝 맺힌다. 그리고는 미영에게 은혜를 베풀 듯이 말한다.

“에헴! 창현이가 딱히 몸에 이상이 있다거나 그런 게 아니란 거지. 설마 돈을 더 벌려고 CF 협상에서 그렇게 높은 금액을 제시하겠어? 나같으면 지루한 협상을 안하고 그냥 CF 한편 더 찍어서 돈을 벌겠다.”

몸값이 최고조에 이른 만큼 그것은 일도 아니었다. 창현이 CF 제의가 들어오지 않아서 골골대는 것도 아니고, 너무 많이 들어와서 피곤하게 여길 정도였으니까.

“응응. 그것도 그러네.”

일리가 있는 말이었기에 미영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다가 무언가 떠오른 듯 순간 눈이 가늘어지면서 순규에게 말한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알아낸 거야, 써니?”

“알아내다니? 그냥 말하는 거지.”

그렇게 말을 하는 순규의 음성에 미묘한 떨림이 존재했다.

미영은 그 장면을 놓치지 않았다. 평상시에는 삼약의 일원으로써 다른 멤버들에게 매번 당하는 띨파니였지만 창현에 관련된 문제에서는 암중모략가인 사마율과 쌍벽을 이룰 수 있는 와룡파니로 변모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묘한 콧소리를 흘리며 순규를 바라본다.

“흐응… 정말이지?”

“내, 내가 설마 너한테 거짓말을 하겠어? 아앙?”

자신의 속내를 꿰뚫어보는 듯한 미영의 모습에 순규가 불량스러운 표정을 띤 채 미영에게 말한다. Big 3에 비견되는 순규의 포스인 만큼 평소 미영이라면 맥없이 나가 떨어질 것이란 게 그녀의 예상이었다.

그러나 이미 와룡파니로 변모한 미영은 굳건하였다.

그녀는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순규에게 묻는다.

“거짓말 평소에 많이 하잖아.”

설마 반격을 하리라고 생각도 못했기에 순규의 몸이 격렬하게 떨리며 미영의 이름을 외친다.

“너, 너… 후우!”

이런 반응을 보일 것이라 생각지 못한 순규가 고개를 살짝 젓는다. 그리고는 미영에게 자세한 사정을 설명한다.

“내가 창현이랑 스타크래프트를 자주 하잖아? 그래서 슬쩍 운을 떼 봤어. 그런데 그런 건 별로 없다고 하더라고. 다만 특별 지시가 있어서 그렇다더라. 그건 자기도 잘 모른다고 하고.”

“스타크래프트? 창현이 자주 들어와?”

순규가 창현과의 접점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자 눈을 빛내며 묻는 미영이었다.

그 물음에 순규가 묘한 미소를 짓더니 말한다.

“자주 들어오기는 하는데 왜?”

“자주 들어오면 나도 같이 하려고 그러지!”

창현이 스타크래프트를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미영도 간간이 스타크래프트를 하고는 한다. 그래서 이제는 프로브도 알고, 질럿도 알고 있으며, 넥서스도 알고 있다. 그리고 스타리그가 벌어지는 채널에서 자주 봐서 그런지 어느 정도 정식 빌드도 익혀서 나름대로 실력을 발휘하고는 한다. 소녀시대 스타크래프트 구도인 일강 삼중 오약 중 오약의 일인인 미영의 급성장으로 조만간 삼중이 사중으로 바뀔 거라는 순규의 전망이었다.

하지만 아직도 많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순규는 비웃음을 지으며 미영에게 말했다.

“그래 봤자야. 미영이 너 정도 실력으로는 상대도 안 해줄 걸?”

비웃음이 역력한 그녀의 모습에 미영이 발끈한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뭐라고? 실력은 서로 겨뤄봐야 아는 거야.”

“겨뤄보고 자시고, 제대로 할 줄도 모르는 애랑 해서 뭐가 재미있겠어?”

“나 TV 보고 열심히 연습해서 이제 잘하거든? 제시랑 유리랑 수영이랑 효연이 내가 다 이겼어!”

그녀가 오약에서 최강으로 군림하게 된 것은 다른 오약의 멤버들을 꺾어서 그런 것이다.

하지만 순규의 비웃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비웃음이 더욱 진해지는 모습을 보였다.

“걔네들은 일꾼도 제대로 못 뽑는 애들이잖아? 그런 애들 이기고 나니 좋아?”

“…….”

대답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솔직히 이겨서 기분이 좋았기 때문이다.

지는 것보다 이기는 것이 기분 좋지 않은가? 미영은 은연중 오약으로 분류되는 것이 분해서 열심히 연습을 하였고, 그녀들을 당당하게 꺾었다. 그래서 자신의 실력을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순규는 그러한 자신의 실력을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잠시 침묵하던 미영이 순규에게 버럭 소리친다.

“너도 이길 수 있거든!”

오기로 똘똘 뭉친 미영의 눈빛은 마치 어린 아이의 것과도 같았다.

“풉! 아서라, 감히 네가 나를 이기겠다고? 내가 누구인지 잊은 거야? 소녀시대의 여제 써니님을 이겨보겠다고? 참으로 가소롭군.”

모든 멤버들에게 스타크래프트를 전파한 사람이자, 모든 멤버들의 스승이 바로 순규였다. 그랬기에 스타크래프트에 있어서 순규의 위치는 절대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삼중에 속하는 태연, 윤아, 주현도 순규와 격차는 엄청나니까. 두 명이 합공을 하여도 순규에게 번번이 패할 정도로 순규는 소녀시대 내에서 절대적인 실력을 자랑한다.

그런데 오약의 일원인 미영이 순규를 이겨 보이겠다?

시를 통일한 초등학교 일진이 고등학교 일진을 꺾겠다고 말을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익! 그럼 내기 해!”

순규의 비웃음을 이겨내지 못한 미영이 마침내 버럭 소리를 지르며 내기를 하자고 한다. 아주 간단한 도발의 수순에 걸려든 것이다.

그 목소리를 들은 순규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좋아, 그 내기 제안 받아들이도록 하지. 네가 나를 이기면 창현이와 게임을 할 수 있게 중간에서 도와주겠어. 하지만 내가 이기면?”

“…내가 일주일 동안 언니라 부르겠어.”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힐끗 미영을 보니, 그녀의 눈에는 승부욕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앞뒤 돌아볼 겨를이 없는 성난 황소와도 같은 상황이었다.

순규는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욱파니 발동이군. 이 정도쯤이야, 후후후!’

성난 소는 오로지 들이받기만 할 뿐이다. 정면으로 상대하기 까다롭지만 이런 저런 방법을 사용하면 한낱 사냥감에 지나지 않는 법. 순규의 눈에 미영은 언제라도 사로잡을 수 있는 사냥감으로 보였다.

일주일 동안 미영에게 언니라 불리는 것이라.

매력적인 조건이었다.

스케줄 장소에 나가서 만인들 앞에서 미영에게 언니라 불리는 상상을 해보라!

상상만 해도 짜릿하다.

“후후후! 좋아. 그 제안 받아들이도록 하지. 후회하지 마.”

미영의 제안을 받아들인 순규였다.

하지만 미영도 만만치 않았다.

“그건 내가 할 말이야.”

“그럼 바로 갈까?”

망설일 이유가 있는가? 교섭에 성공했으니 곧장 게임을 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미영도 바라는 바였다.

“…좋아.”

그렇게 본격적인 대결이 시작되었다.

순규는 제법 대담하여 핸디캡을 주었다. 단판승부가 아닌, 다섯 판을 할 테니 그 중에 한 번이라도 이기면 미영의 승리로 인정해주겠다는 것이었다. 다섯 판 연속으로 미영을 열심히 관광시켜서 실력 격차를 뼈저리게 느끼게 만들고, 다시는 기어오르지 못하게 하려는 순규의 생각이었다. 이렇게 보면 순규도 제법 잔혹한 구석이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4:1. 순규의 승리였지만 내기에서 승리한 것은 미영이었다.

연속 네 번 더블 넥서스를 시도하던 미영은 순규에게 처참한 패배를 당했지만 마지막 판, 본진에 게이트웨이를 하나 지어놓고 질럿을 뽑는 척하면서 센터에 게이트웨이 세 개를 지어놓고 올 질럿 러시를 감행, 방심하던 순규는 패배를 당하고야 만다.

미영은 승리를 위해 앞서 네 판을 포기했던 것이다. 그것도 모른 채 순규는 미영이 그것밖에 모른다고 비웃으며 하다가 뒤통수를 한 대 맞아버린 셈이었다.

창현과 스타크래프트로 온라인 교류를 하겠다는 와룡파니의 한판승이었다.

대결에서는 패했으나 승부에서는 승리했다.


수요일과 목요일이 다가오면서 월요일부터 본격적으로 대대적인 언론 플레이가 시작되었다. 앞으로 내용에 대한 전망이 담긴 스포일러와 배우들과의 인터뷰 내용, 그리고 추후 전개 방식에 대한 여러 의견을 내놓으면서 드라마에 관련한 흥미를 더욱 솟구치게 만들고 있었다. 이번 주만큼은 시청률 40% 대를 넘어서기 위해서인지 분주하게 준비에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시청률이 30%대와 40%대인 것은 그 위상 자체가 틀리다.

쇼핑 몰에서 가격이 4만원이 넘는 것과 39700원하는 것이 큰 차이가 나는 것처럼 느껴지는 효과였다.

30%대의 정점을 찍었지만 아직 40%를 넘지 못했다. 드라마에 있어 40%를 넘는다는 것은 상당한 의미가 있었기에 기왕 잘된 거, 이번만큼은 시청률 40%를 넘기고 싶은 것이 배우들과 드라마 팀의 소망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수요일이 되었다.

월요일과 화요일에 언론 플레이를 하였고, 반응도 기대한다는 쪽으로 기울고 있는 만큼 이번에는 40%의 고지를 넘어설 수 있을 듯하였다.

윤아도 괜히 그 기대감에 들뜬 표정을 지우지 못한다.

“이번에는 40%를 넘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하며 잔뜩 기대한 표정을 짓는 윤아.

그도 그럴 것이 드라마를 하면서 자신의 인지도는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로 고공행진을 거듭하고 있었다. 드라마 ost가 발표된 지 보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상위권에 머물고 있으며, 드라마 자체는 그보다 더 고공행진을 하여 배우들이 모두 선풍적인 인기몰이를 하고 있었다.

거기에 윤아도 당연히 덕을 보고 있다. 각종 인터뷰와 간간이 들어오는 CF가 바로 그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 수만이 말했던 것처럼 소녀시대의 인기가 올라가고, 그 중심에 자신이 서게 되었다. 그때 말한 것 그대로 이루어졌기에 윤아로서는 참으로 흡족한 면이 없지 않아 있었다.

물론 자신만 너무 잘 나가는 것 같아 종종 멤버들에게 미안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지만 언젠가 모두가 함께 비상할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윤아야.”

그렇게 생각에 잠겨있던 윤아에게 한줄기 음성이 들려온다. 다른 사람과 딱히 구분할 필요가 없는 목소리였다.

윤아는 바로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알아차리고는 슬쩍 미소를 지은 채 말한다.

“아! 수연 언니.”

그녀에게 다가온 사람의 정체는 바로 수연이었다.

수연은 방금 머리를 감고 나온 윤아를 보면서 물었다.

“스케줄 가려는 거야?”

“네! 한 시간 후에 나가야 되거든요.”

아직 시간은 넉넉하지만 원래 여자는 꾸미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은가? 게다가 창현이도 오늘 온다고 하니 잘 보이기 위해서는 잘 꾸미는 것이 관건이었다. 그랬기에 피곤한 몸을 이끌고 일찍 준비를 하고 있던 것이었다.

윤아의 말을 들은 수연이 근심 어린 표정을 짓고는 조심스레 묻는다.

“그래? 요즘 스케줄이 바빠 보이던데 괜찮은 거야?”

“네. 전 괜찮아요.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인 걸요.”

자신을 이렇게 걱정해주는 수연의 모습에 윤아가 빙긋 웃음을 지었다. 걱정해주는 수연의 관심이 마냥 고맙게 느껴졌다.

한때 무한태연교의 제일교도로서 뼈를 묻겠다고 굳게 다짐을 한 적이 있는 윤아였지만 지금 수연에게 충성을 맹세한 것이 옳은 판단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수연은 무척 세심해서 자신의 사람들을 잘 챙겨준다.

무엇보다 윤아를 좋게 만든 것은 멤버들 사이에서 서서히 상승하는 서열이었다. 폭군이라는 사람을 배경으로 삼게 되니, 감히 언니들이 자신을 부려먹지 못하게 되는 상황이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로 인해 고생이 더 심해진 것은 주현이었다. 막내가 두 명이었는데 한 명으로 줄어들게 되니 그 업무가 주현에게 몰려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상이었다.

윤아는 그런 주현의 모습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그녀 또한 자신을 따라 수연에게 왔더라면 지금 같은 고생을 하지 않았을 텐데. 괜히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주현에게 다시 권유를 해볼까 고민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세상은 선택의 연속인 것을.

주현이 자신의 길을 택한 것도 모두 자신이 자초한 것이니 뭐라 말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생각에 잠겨있던 윤아는 수연이 방금 전 씻고 나왔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오늘 그녀의 스케줄은 없는 상황인데 갑자기 씻고 나오다니? 외출을 하려는 건가 싶어서 윤아가 수연에게 물었다.

“그런데 언니는 갑자기 왜 씻으신 거예요? 외출하시려고요?”

윤아의 말에 수연이 싱긋 웃음을 짓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외출은 아니야.”

“그럼 왜……?”

“오늘 윤아 너를 따라 촬영장에 가보려고.”

“네에?”

놀란 윤아가 눈을 크게 뜨고는 수연을 바라보았다. 지금 그녀가 무슨 말을 한 것이란 말인가? 촬영장에 간다고? 모처럼 노는 날에?

어이가 없는 나머지 윤아가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자 수연이 자세하게 설명을 곁들인다.

“윤아 네가 많이 피곤해보여서 가서 이야기도 해주고 그러려고. 그리고 드라마가 어떻게 촬영하는 건지 궁금하기도 하거든. 너 주려고 피로에 좋다는 찻잎도 이렇게 샀어.”

그러면서 주방으로 걸어간 수연이 무언가를 뒤적거리더니 윤아에게 찻잎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을 본 윤아의 눈이 거세게 흔들린다.

“저, 저를 위해…….”

이렇게 감격스러운 순간이 어디 있겠는가! 자신을 위해 피로에 좋은 찻잎까지 구매를 하다니! 윤아의 눈에 진한 감동이 서리며 거센 감동의 물결이 전신을 휘감고 있었다.

다시 한 번 치솟아 오르는 충성심!

잠시 윤아가 말을 하지 않자 수연이 조심스러운 시선으로 윤아를 바라보며 묻는다.

“혹시 내가 가면 폐가 되려나……?”

“아니에요! 감독님도 스태프분들도 오시면 좋아할 거예요! 제가 언니들 홍보 많이 해놨거든요. 아마 오시면 엄청 좋아하실 걸요? 대신 조용히 해주셔야 해요.”

“그건 나도 알지! 그 부분에 대해서는 염려하지 않아도 돼.”

“그럼 얼마든지 오셔도 되요.”

흔쾌히 수락하는 윤아의 모습에 수연이 속으로 미소를 짓는다. 역시 윤아를 끌어들인 것은 그녀에게 있어 창현에게 가까워지기 위핸 비장의 수단이었다.

윤아의 환심을 산 뒤 그녀를 걱정하는 모습을 보이며 자연스럽게 촬영장으로 향한다. 그리고 그곳에 가면 창현이 나오고 몰랐던 척하며 자연스럽게 만남을 가지면 될 테지. 윤아가 근래 들어 스케줄이 많아져서 그런지 부쩍 피곤한 모습을 보여서 걱정된 것은 사실이었지만 차를 싸들고 간다는 것은 모종의 꿍꿍이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걸 모르는 윤아로서는 한차례 의심을 품다가 오히려 충성심이 더욱 깊어지는 결과가 나온 것이고.

그렇게 수연이 자신의 계획을 완벽하게 실행하고 있을 때였다.

예상하지 못했던 복병이 출연하여 수연의 계획을 흐트러뜨리기 시작했다.

“언니, 그러면 제가 가도 될까요?”

“……!”

갑자기 끼어든 목소리에 수연과 윤아가 흠칫하면서 시선을 옮긴다.

그곳에는 미소를 짓고 있는 주현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주현도 오늘 스케줄이 없어서 숙소에서 머물고 있는 상황이었다.

윤아는 주현이 갑작스레 등장할 줄 몰라서인지 당황한 표정을 지은 채 말한다.

“주, 주현이 너도?”

“네, 저도 한 번 촬영장을 구경 가고 싶었거든요.”

“그, 그래?”

그때 자신의 제안을 거절해서인가. 주현을 대하는 것이 묘하게 힘들어지는 걸 느끼는 윤아였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주현은 주방 한쪽을 가리키며 말한다.

“게다가 오늘 언니를 따라가려고 저기 과일까지 준비해놓았거든요.”

“과, 과일까지?”

윤아가 눈이 동그랗게 변한다.

그러자 주현이 살짝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요즘 많이 힘드신 것 같아서요. 피곤하고 그럴 땐 과일을 먹으면 좋아요. 영양소가 풍부하고 살도 잘 찌지 않아서 좋거든요. 아침에 먹는 사과는 보약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니까요.”

“주, 주현아…….”

요즘 연기를 너무 많이 해서 그런지 부쩍 감수성이 풍부해진 윤아였다. 그녀는 수연에 이어 자신을 걱정해주는 주현의 모습에 감격한 표정을 짓는다. 자신은 막내가 자신의 말을 따라주지 않아서 서운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는데 막내는 언니를 위해 몸소 과일을 준비하고 있었다니! 괜히 자신의 옹졸함을 엿본 것 같아 무안하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감격한 윤아의 표정에 주현이 말한다.

“이럴 때일수록 열심히 하셔야죠. 잘못해서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떻게 해요? 인기도 좋지만 확실하게 몸을 챙기면서 활동하셔야 되요.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계시죠?”

“응응. 잘 알고 있지.”

잔소리라 여겨지던 주현의 말이 이제는 감미롭게 들릴 정도였다. 자신에게 뼈와 살이 되는 그녀의 말을 여태까지 왜 귀를 닫아둔 채 듣지 않으려 했던 것일까.

한 번 좋게 생각하니 주현의 모든 면모가 좋게 보이는 윤아였다.

윤아가 웃음을 짓자 주현도 마주 웃음을 지어보인다.

“그리고 언니가 활동하는 곳인데 인사도 안한다는 게 좀 그렇잖아요? 기회를 엿보다가 오늘 스케줄이 없어서 가려고 한 건데 수연 언니도 같이 가게 되었을 줄 몰랐네요.”

묘한 말이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 듣는다면 마치 주현이 먼저 가려고 한 것을 수연이 중간에서 끼어든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하지만 주현에게 그런 의도는 전혀 실려 있지 않았기에 무어라 하기에 무척 난감한 상황이었다.

수연의 눈썹이 순간 꿈틀거렸지만 주현이 설마 악의적인 의도로 그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하면서 조용히 성격을 억누른다.

“그러게. 설마 이렇게 같이 가게 될 줄은 몰랐네. 같이 가서 인사도 하고 윤아의 말 상대도 되어주고 그러면 더 좋겠지. 안 그래?”

주현이 정말 의도적으로 그렇게 말을 했는지 슬쩍 떠보려는 수연이었다.

하지만 그 의도에 주현은 미소를 지으며 살짝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물론이죠.”

‘내 착각이었나?’

주현이 의도적으로 비꼰 게 아닐까 싶었는데 이렇게 대답을 하는 걸 보면 자신이 착각을 한 듯 싶었다.

마음속에서 치솟아 오르는 의문을 접어 넣은 수연이 속으로 한껏 아쉬움을 토로한다. 주현이 따라오게 되면 자신이 계획했던 ‘은연중 창현이와 단 둘이 되기’가 실패로 돌아가게 될 확률이 높았다. 자신의 옆에 주현이 달라붙게 되면 단 둘이 있고 싶어도 있을 수가 없어지니까.

오늘을 위해 많은 준비를 했는데 주현의 개입으로 한순간에 어그러져버린 것이다.

수연으로서는 참으로 원통하고 주현에게 경계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때, 윤아가 박수를 짝짝! 치더니 말한다.

“이제 시간이 40분도 남지 않았네요. 얼른 준비하고 같이 가도록 해요. 특히 수연 언니랑 주현이는 같이 가게 되는 입장인데 늦으면 매니저 오빠한테 혼날 수 있어요. 그러니 빨리 준비하도록 해요.”

“알았어.”

“네, 언니.”

윤아의 말이 틀린 것이 아니었기에 수연과 주현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본격적으로 준비를 하기 시작한다. 아직 씻지 않았던 주현은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 씻기 시작하였고, 수연은 방안으로 들어가 옷을 고르고 있었다.

순식간에 30분이란 시간이 흘러갔다. 그 사이 주현은 씻고 옷을 입는 것까지 완료한 상황이었고, 윤아 또한 옷을 다 갈아입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아직 수연은 나오지 않고 있었다.

나갈 시간이 5분 정도 남게 되자 윤아가 조급함이 들었는지 수연이 있는 방을 향해 말한다.

“언니, 시간이 얼마 안 남았어요. 어서 나오세요.”

“알았어, 잠시만.”

그 말과 함께 옷 갈아입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옷을 다 차려입은 수연이 나온다. 수수하게 보이지만 은근히 눈에 들어오는 옷차림을 한 그녀의 모습에 주현의 눈이 순간 가늘어진다.

수연이 윤아와 주현을 향해 물었다.

“어때, 괜찮아?”

“네, 딱히 튀지 않으면서 예쁜 것 같아요.”

“언니의 고심한 흔적이 느껴져요.”

“…….”

윤아의 말은 무난하게 받아들였지만 주현의 말은 또 묘하게 꼬여있는 것 같아 수연이 순간 움찔하면서 몸을 떨었다. 그리고 주현에게 시선을 고정하였는데, 그 시선을 주현은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그리고는 마치 자신이 무언가를 잘못했냐는 듯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는 모습까지 보여주었다.

“왜 그러세요, 언니? 제가 뭐 잘못한 거예요?”

“아, 아니. 그런 거 없어. 시간이 다 됐다고 했지? 나가자.”

“네.”

주현의 물음에 정곡을 찔린 건지 수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보이고는 같이 나가자고 한다. 방에 들어갔다가 차를 끓여놓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보온병에 차를 담아둔 상태였기에 수연은 보온병을, 주현은 과일바구니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어라, 너희들은 왜?”

수연과 주현도 함께 타자 로드 매니저가 놀란 얼굴로 묻는다.

그러자 수연이 당당하게 대답했다.

“윤아 응원하러 가는 거예요. 뭐 잘못 되었나요?”

“하핫! 아니다. 조금 의외여서 그랬던 거다. 서현이도 윤아 응원하러 가는 거니?”

“네. 윤아 언니가 고생하는 것 같고, 드라마 촬영하시느라 고생하시는 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해야 할 것 같아서요.”

말 한 번 예의 바르게 한다.

그 말을 들은 로드 매니저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 윤아를 생각하니 부럽네. 어쨌든 용건은 알겠다. 대신에 너희들이 밖으로 나온 건 회사에 보고를 할 거다? 사적으로 로드 매니저가 차를 태워주면 안 되니까.”

여자 아이돌인 만큼 제법 통제가 있는 편이었지만 불만을 표하지는 않았다.

“네.”

“…….”

수연은 방금 전부터 자신이 묘하게 못된 여자가 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주현의 말이 예의바르긴 했지만 자신이 말을 한 후에 해서 그런지 묘하게 자신이 나쁜 여자가 된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숙소 내에서 있던 일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주현의 말이 묘하게 자신의 신경을 건드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설마 주현이 자신의 계획을 알아차렸단 말인가? 절대 그럴 일은 없다. 포커페이스부터 시작하여 차근차근 한단계씩 진행해나가는 자신의 계획은 의심할 구석 없는 완벽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내 착각이겠지? 그럴 거야.’

자신의 생각을 의심으로 치부하는 수연이었다. 눈치가 빠른 순규나 수영이도 아니고, 고지식하고 답답함으로 일인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주현이 자신의 계획을 알아차리다니, 천부당만부당 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수연의 고정관념에서 오는 뼈저린 실책이었다.

깊은 생각에 잠겨있던 그녀는 번뜩이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눈길을 느끼고 있지 못했던 것이다.

그 눈빛의 주인은 다름 아닌 주현이었다.

그녀는 생각에 잠겨있는 수연을 바라보며 자신의 생각을 이어나갔다.

‘…절대로 언니 뜻대로 되게 놔두지 않을 거예요. 이 모든 건 언니가 자초한 일이니까…….’


세 소녀를 태운 벤은 무사히 촬영장에 도착했다.

윤아가 빨리 가야 한다고 은연중 압박을 주다보니 생각보다 훨씬 일찍 도착하게 되었다. 보통 촬영 시작하기 30분 전쯤에 도착하여 준비를 하고는 하는데 이번에는 거의 한 시간 가깝게 일찍 도착한 것이다.

늦었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윤아만 무안해지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수연과 주현의 시선에 윤아가 얼굴을 붉히면서 소리를 질렀다.

“뭐 어때요! 인사하고 친분을 쌓으면 되는 거지. 자, 가요!”

그렇게 외치면서 수연과 주현의 손을 붙들고 앞서나가는 윤아였다. 얼떨떨한 얼굴로 끌려가던 두 소녀도 이내 체념하고는 윤아와 함께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소녀시대 제시카입니다.”

“안녕하세요! 소녀시대 서현입니다.”

수연과 주현의 방문은 촬영장에 큰 열기를 일으켰다. 요즘 여성 아이돌 중 톱은 당연히 원더걸스지만 소녀시대도 그 뒤를 바짝 쫓는 아이돌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각각의 개성을 지니고 있는 소녀들이 아홉 명이나 존재하고, 비주얼적인 면에서 결코 원더걸스에 비해 부족하지 않았기에 남자 스태프들의 뜨거운 반응을 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스태프들의 뜨거운 반응에 윤아는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 수연과 주현을 데리고 김지환 감독에게 다가가 인사를 한다.

“안녕하세요, 감독님! 인사드려, 우리 드라마의 감독이신 김지환 감독님이셔.”

윤아의 소개에 두 소녀는 아까 전 했던 것처럼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소녀시대 제시카입니다.”

“안녕하세요, 소녀시대 서현입니다.”

두 소녀의 인사에 김지환 감독도 남자는 남자였던지 흡족한 미소를 지은 채 인사를 받았다.

“부족하지만 이 드라마를 책임지고 있는 김지환 감독이라 합니다. 소녀시대의 제시카 양과 서현 양을 만나게 되어 무척 기분이 좋군요. 하하!”

아무래도 시커먼 남자들이 주를 이루고 있는 촬영장이다 보니 젊고 예쁜 여자의 등장은 반길 만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촬영할 때 근영과 윤아는 거의 여신으로 대우를 받고 있었으니.

반겨주는 김지환 감독의 모습에 기분이 좋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염려가 되기도 하여 주현이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저희가 폐가 되지는 않을까요?”

주현의 물음에 김지환 감독이 갑자기 웃음을 지우고는 진지한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두 소녀를 힐끗 보더니 말한다.

“폐? 폐라… 확실피 폐가 될지도…….”

“네에?”

폐가 된다는 말에 수연과 주현은 화들짝 놀라며 김지환 감독을 바라본다.

그러자 무표정한 얼굴로 두 소녀를 바라보고 있던 김지환 감독이 이내 웃음을 터뜨린다.

“하하하! 농담입니다. 아니, 농담은 아니죠. 젊고 아름다운 두 분이 오셨는데 스태프들의 마음이 흔들려서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말을 한 겁니다. 하핫!”

“에… 그게…….”

“…….”

김지환 감독의 농담에 두 소녀가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자신들을 향한 칭찬이었으니 그럴 만도 하였다.

그러자 윤아가 입을 삐죽이더니 김지환 감독에게 툴툴 댄다.

“칫! 감독님, 그럼 이제 저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죠?”

“그게 무슨……?”

당황한 표정을 짓는 김지환 감독이었지만 윤아의 우울한 표정은 가시지 않았다.

“예전에는 제가 오기만 하면 촬영장에 빛이 난다고 해주셨으면서 이제는 수연 언니랑 주현이만 편애하고…….”

“허험! 그, 그건 말이다…….”

윤아의 말에 눈에 띄게 흔들리는 김지환 감독이었다. 정말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는 듯 싶었다.

김지환 감독이 뚜렷한 답변을 하지 않자 윤아가 우울한 표정을 지은 채 한숨을 길게 내쉰다.

“역시 전 금방 질리나 봐요. 후우…….”

“하하! 윤아야, 내가 언제 너보고 질린다고 했더냐? 다만 제시카 양과 서현 양은 처음 오니 더 새롭고 반가워서 그렇다는 거지.”

“전 낡고 반갑지도 않다는 거죠?”

“그, 그게 그러니까…….”

어쩔 줄 몰라 하는 김지환 감독의 모습을 수연과 주현은 흥미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말 꼬리를 잡고 우울한 표정을 짓는 윤아에게 무슨 말이 먹히겠는가? 일찌감치 사과를 하는 것이 살아남는 지름길이라.

결국 김지환 감독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항복선언을 하였다.

“후우! 그래, 미안하다. 내가 어떻게 하면 되겠냐?”

그 말을 듣고 목적을 이루었기 때문일까.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던 윤아의 표정에 순간 균열이 일어난다. 그리고 이내 박장대소를 터뜨리기 시작하였다.

“푸훕!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요. 푸하하핫!”

어찌나 웃음을 터뜨리는지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힐 정도였다. 주체할 수 없는 윤아의 장난기와 연기가 합쳐진 한편의 작품이었다.

수연과 주현은 그 모습을 보며 안절부절하지 못했다. 설마 했는데 윤아가 대담하게도 감독에게 장난을 하리라고 생각도 못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김지환 감독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당장 화를 내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녀들이 염려하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돌연 김지환 감독이 웃음을 터뜨린 것이다.

“하하하! 내가 속았다, 속았어. 설마 그 상황을 그렇게 이용할 줄이야. 나름 여자의 심리를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해서 정말 그런 것인 줄 알았는데 설마 그걸 연기로 해낼 줄 몰랐다.”

자신을 연기로 속인 것이 기분 나쁘기보다는 제법 대견하게 느껴졌나보다.

그 말에 윤아가 입술을 삐죽이며 말한다.

“연기긴 했지만 반은 진심이었다고요. 수연 언니랑 주현이만 반겨주고.”

“하하, 그래, 미안하다, 미안해.”

“그럼 됐어요, 히히! 앞으로 저도 반겨주셔야 해요?”

“그래, 그러마.”

장난을 치는 윤아와 그 장난을 너그러이 받아주는 김지환 감독의 모습은 전혀 감독과 연기자의 모습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한동안 김지환 감독과 이야기를 나누던 윤아는 본격적으로 촬영을 위해 준비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런 윤아를 향해 수연이 다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윤아야, 너희 감독님 말이야.”

“응? 감독님이 왜요?”

“정말 감독 맞아……?”

물어보는 것도 조심스럽다. 그만큼 방금 전 보인 모습이 충격적이어서 그렇다.

하지만 윤아는 다른 의미로 알아들었나보다. 그녀는 히죽 웃음을 짓고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감독님 맞아요. 드라마를 책임지고 있죠. 왜요? 나이가 너무 젊으신 것 같아서요?”

“나이가 젊다기보다는 윤아 너랑 장난치는 모습이 감독님이라기보다는…….”

차마 무어라 말을 할 수 없었기에 말끝을 흐리는 수연이었다. 그 말을 들은 윤아는 아! 하고 고개를 나직이 끄덕이다가 말한다.

“그렇구나. 그렇게 보일 수도 있네요. 하지만 촬영할 때 보시면 알겠지만 호랑이 감독님이에요. 대본대로 이행하지 않으면 정말 무섭거든요. 보면 아실 거예요.”

“그래?”

아까 전 모습을 보아서 그런 걸까? 그 모습이 전혀 예측하기가 힘들었다.

그 모습에 윤아는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보면 알아요.”

그리고 그 모습을 실제로 볼 수 있게 되었다.


“NG! 방금 대사가 부정확하게 들렸습니다. 다시 한 번 갑시다.”

촬영 전 김지환 감독은 마치 조카의 장난을 받아주는 막내 삼촌과도 같은 이미지였다. 조금 애교를 부리면 당장이라도 용돈을 주고 같이 게임도 하고 티격태격하는 그런 막내 삼촌.

하지만 촬영에 들어간 김지환 감독은 그 모습을 말끔하게 날려버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수연이나 주현의 눈에는 완벽하게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김지환 감독은 서슴없이 NG 선언을 하면서 다시 하길 종용하였다. 귀신같이 잘못된 점을 짚어내는 김지환 감독은 한편으로는 무섭기까지 하였다.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수연이 중얼거렸다.

“저 감독님… 창현이랑 비슷해.”

“창현이랑요?”

주현이 반문하자 수연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창현이랑 비슷해. 다만 창현이는 프로듀싱을 할 때 저런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이고 감독님은 촬영할 때 저런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 다르지.”

“아아…….”

수연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차렸기에 고개를 끄덕이는 주현이었다. 확실히 그녀의 말처럼 김지환 감독은 창현과 유사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평소에는 다소 느슨한 모습을 보이다가 자신의 일을 할 때는 빈틈이 없어진다고 할까? 그 이중적인 모습이 무척 멋있게 느껴졌다.

촬영에 들어간 윤아는 벌써 일곱 번이나 NG를 냈다. 촬영 전에는 곧잘 구박까지 하던 그녀는 지금 만큼은 김지환 감독의 지시에 성실히 따르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확실히 압도가 되는 것 같아. 평소에는 창현이를 동생으로 대하지만 프로듀서로 대할 때는 어김없이 따라야 하는 것처럼.’

수연의 말이 어떤 뜻을 담고 있는지 십분 이해가 가는 주현이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기분이 꿍해지는 걸 느꼈다. 수연이 깨달은 걸 자신은 왜 깨닫지 못하게 된 걸까.

이미 수연이 창현에게 부렸던 앙큼한 수작(?)의 일부를 눈치 챈 주현은 그녀에게 모종의 경쟁 심리를 느끼고 있는 실정이었다. 수연도 창현을 좋아하고 있으며, 그에 대한 물밑 작업으로 소녀시대 멤버들을 자신의 수중에 넣어 천하통일(?)을 이룬 뒤 압도적인 힘으로 창현을 공략하려는 그녀의 속셈을 말이다.

수연이 주현에게 묘한 불편함을 느꼈다면 주현이 수연에게 느낀 것은 직접적인 불편함 그 자체였다.

‘그래도 아버님에게 인정을 받았으니 내가 앞서 있어. 조급해 하지 말자.’

아버님이라는 단어에서 살짝 얼굴이 붉어질 뻔하였으나 애써 표정 관리를 한 덕에 티가 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부끄러운 것은 사실이었다. 그래도 자신이 앞서 있다는 생각이 한줄기 위안이 되었다.

객관적으로 생각해보면 자신이 창현이와 만들어놓은 추억이 훨씬 많으니까.

이것이 바로 학교 선배의 위엄(?)이었다.

‘내가 이길 거야! 내가 앞서 있으니까.’

추억거리부터 시작하여 시아버지의 지원까지.

자신이 조금만 열심히 하면 수연은 자신의 상대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주현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모르는 사실이 있다. 수연에게는 주현이 가진 수많은 추억거리들을 한 번에 뒤집어버릴 엄청난 무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녀가 창현의 첫 키스를 빼앗아간 장본인이었다. 남자는 첫 사랑을 잊지 못한다고 하지만 첫 키스를 한 여자도 못 잊는 법이다. 그런 만큼 주현의 수많은 추억들은 수연의 첫 키스 한방으로 무효화 시킬 수 있을 만큼 대단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을 모르기에 주현의 계산은 처음부터 어긋나고 있었다.

“윤아 언니가 많이 피곤해 보이네요.”

“아무래도 NG를 많이 냈으니까 심적으로 피곤하겠지. 차라도 한 잔 줘야겠다.”

TV에서 보던 촬영 장소를 직접 눈으로 보게 되자 신기한 듯 이리저리 둘러보면서 윤아가 촬영하는 모습을 구경하는 두 소녀였다.

그리고 11번 NG를 낸 끝에 간신히 OK를 받은 윤아가 힘이 담기지 않은 발걸음으로 걸어온다.

주현이 그런 윤아에게 재빨리 다가가 그녀를 부축하며 묻는다.

“괜찮아요, 언니?”

“괜찮지가 않아. 에휴! 오늘은 감정 이입이 잘 안 되네. 연기가 너무 힘들다.”

“이럴 때일수록 힘을 내야죠.”

“그게 잘 되지 않아서 그러는 거야. 우리 사랑스러운 주현아! 네가 나 대신 해주면 안 될까?”

급기야 말도 안 되는 부탁까지 하는 윤아였다.

그 말에 주현은 당연히 펄쩍 뛰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언니!”

목소리가 너무 커서 그런지 윤아가 표정을 찡그리며 말한다.

“아야야! 농담이야, 농담. 뭘 그렇게 과민 반응을 하고 그래.”

“농담이었어요? 진심인 줄 알았잖아요.”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을 하는 주현의 모습은 너무나 귀여웠다. 누가 들어도 농담이고 투정인 걸 알 텐데 그걸 진심으로 알아듣다니. 너무 순진하고 귀여워서 윤아는 주현을 꼭 껴안는다.

“주현이 이 녀석! 너는 이 언니가 격하게 아낀다! 제발 앞으로도 이렇게 순수한 모습을 간직해다오!”

“껴안지 마요! 머리 헝클어진단 말이에요. 이잉.”

윤아의 격한(?) 포옹에 머리가 헝클어진 주현이 울상을 지었다.

그러자 윤아가 포옹을 풀고는 재빨리 주현에게 사과를 하였다.

“하하, 미안해. 하지만 이건 내 잘못이 아니라 주현이 네 잘못이야. 너무 귀여워서 그런 거야. 나는 잘못 없어.”

“저도 이제 다 컸는데 귀엽다고요? 그런 말은 실례에요.”

짐짓 화가 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팩 돌리자 윤아의 표정에 난감함이 감돈다. 딴에는 감정을 표출한 것인데 그것이 주현의 마음을 상하게 한 것이다.

고지식한 주현에게는 우회한 사과 따위는 효과를 발휘하기 힘들다. 이럴 때는 오로지 직구 승부였다.

“미안해, 주현아! 용서해줘!”

“고의가 아닌 걸 아니까 용서해드릴게요.”

“고마워! 주현아!”

쿨(?)하게 용서해주는 주현의 모습에 싱긋 미소를 짓는 윤아였다.

그러다가 주현이 궁금한 게 생긴 듯 윤아에게 묻는다.

“그런데 언니 NG를 낸 거 괜찮은 거예요?”

“NG? 괜찮기는 하지. 다만 감독님과 스태프들이 조금 고생을 하니 미안하지. 배우로서는 좀…….”

“이번에는 조금 많이 낸 거예요?”

“좀 많이 냈지. 보통 많이 내도 열 번 이내거든. 열 번이 넘어버렸으니 많이 한 것이지.”

“그렇구나.”

윤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리던 주현은 조금 더 떡밥을 풀었다.

“그럼 다른 배우분들은 얼마나 NG를 내는데요?”

“다른 분들? 자세히 살펴보지 않아서 잘 모르지만 연기에 내공이 있는 분들은 다섯 번 이내로 끝내고, 다른 조연분들은 보통 일곱여덟 번 정도를 내고는 해.”

충분히 떡밥을 풀었다고 생각한 주현이 은근슬쩍 윤아에게 물었다.

“그럼 창현이는요?”

“창현이? 창현이는 조금 특별해.”

“특별하다고요?”

주현이 잔뜩 궁금한 표정으로 윤아에게 묻는다. 그러자 윤아는 씨익 웃음을 짓더니 자신이 신난 듯 주현에게 이리저리 말하기 시작한다.

“특별하고말고. 창현이는 NG를 거의 내지 않아. 특히 본인의 실수로 NG가 나는 경우가 별로 없지. 배역에 몰입도가 너무 뛰어난 편이거든. 그래서 스태프들 사이에서 괴물로 통하기도 하고.”

“와아… 대단하네요.”

주현은 감탄사를 터뜨린다. 역시 창현이라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설마 연기 경력이 초보임에도 불구하고 괴물로 통할 정도의 몰입력이라니! 역시 대단하다는 말만 나온다.

그 호응에 윤아는 술술 정보를 누설한다.

“그렇다니까? 특히 배역에 대한 몰입도는 대단해서… 막 연기가 끝날 때 말을 걸면 까칠한 모습을 보이기도 해. 한지훈이라는 역에 너무 몰입한 거지.”

“그럼 나쁜 남자네요?”

“그렇지? 나쁜 남자라니까.”

나쁜 남자라는 말에 주현은 창현이 나쁜 남자일 경우를 떠올려본다. 확실히 그 외모에 까칠하면서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고, 내 여자에게 따뜻한 모습을 보인다면… 상상만 해도 두근거리는 치명적인 매력을 지니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창현이 나쁜 남자일 경우를 상상하자 살짝 볼이 붉어진 주현은 짐짓 덥다는 듯 손부채로 열을 식힌다. 그리고 시간을 슬쩍 확인하면서 윤아에게 말한다.

“그러고 보니 저번 화에서 언니랑 창현이가 나온 장소가 보이던데 그곳에서도 촬영을 하나요?”

“그곳에서? 아니, 아마 안할 거야. 창현이가 지금부터… 한 시간 후쯤에 올 거거든. 그리고 다른 세트장에서 나랑 촬영할 거야.”

“그렇군요.”

자연스러운 질문으로 창현의 도착 시간을 알아낸 주현이 속으로 득의의 웃음을 짓는다. 그리고 수연에게 도착하자, 그녀가 보온병을 열고 윤아에게 차를 한 잔 따라주면서 내민다.

“윤아야, 이거 마셔. 많이 피곤할 것 같은데.”

“언니, 고마워요. 잘 마실게요.”

수연의 은혜(?)에 감사를 하며 윤아가 차를 마신다. 씁쓰름하면서 머리가 확 맑아지는 게 청아한 향과 절묘하게 어우러져 피로를 단번에 날려버리는 듯하였다.

눈을 번쩍 뜬 윤아가 놀랍다는 표정을 지으며 수연에게 말한다.

“와아! 이거 정말 좋네요? 머리가 막 맑아지는 것 같아요.”

“비싼 거니까.”

“언니 정말 고마워요. 저를 위해서 이런 차도 끓여주시고…….”

다시 한 번 수연에게 감사를 표하는 윤아였다.

그 모습에 수연은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당연하지. 이게 얼마나 비싼 건데.’

그렇게 말을 하지만 실제로 이것은 수연이 산 게 아니다. 얼마 전 단독으로 스케줄을 하고 돌아오던 중 매니저가 그동안 수고했다면서 회장님이 특별히 구해서 준 차라고 하면서 수연에게 준 것인데, 수연은 그것을 본인 소유로 횡령(?)하고 근처 대형마트로 가서 가장 비싼 홍차를 사서 회장님이 줬다고 하였다. 자신으로 인해 소녀시대가 질서를 유지하니 가질 자격이 있다고 스스로 위안을 삼으며. 원래 가장 높은 자리가 좋은 게 이런 거 아닌가? 알게 모르게 들어오는 물건들 말이다. 흠흠!

그런 방식으로 횡령한 차를 윤아에게 내놓음으로써 그녀의 충성심을 한 층 더 끌어올린 것이다.

주현도 수연이 준 차를 한 모금 마셔보고 놀란 표정을 짓는다.

‘이렇게 좋은 차를 윤아 언니를 위해서 구매하다니… 수연 언니는 정말 얕볼 수가 없어.’

오히려 수연에 대한 경계심을 끌어올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게 몇마디 주고받다가 다시 촬영을 위해 윤아가 자리를 벗어났다. 수연과 주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윤아가 촬영하는 것을 바라본다. 이번에는 제법 무난하게 촬영을 풀어나가고 있어서 NG 세 번 만에 통과를 한다. 그리고 다시 장소를 옮겨서 촬영을 하고 또 촬영을 하고 그런다.

거의 한 시간 가깝게 촬영을 한 끝에 윤아가 다시 좀비가 되어 비틀비틀 수연과 주현에게 다가온다.

두 사람은 그런 윤아를 반갑게 맞이한다.

“수고했어.”

“수고했어요, 언니.”

“우우! 오늘은 평소보다 힘들어. 무언가 분위기가 묵직한 것 같고.”

우는 소리를 내면서도 입가에 미소를 짓는 윤아였다. 그러다가 문득 시간을 확인하고는 들뜬 목소리로 말한다.

“그러고 보니 잠시 후면 창현이가 도착하겠네.”

“창현이가 도착한다고?”

수연이 화들짝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에게는 뜬금없는 말이었던 것이다.

그러한 그녀의 모습에 윤아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한다.

“어라? 언니 모르셨어요? 제가 주현이한테 말했는데?”

“주현이한테 말했다고?”

황당한 표정을 지은 수연이었다. 그녀는 주현에게 들은 바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주현에게 시선을 주었다.

수연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는 것을 깨달은 주현이 살짝 고개를 돌려 외면한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단 하나였다.

고의적으로 말을 하지 않은 것이다.

주현을 바라보는 수연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막내 이것이…….’

왠지 숙소에서부터 느낌이 묘했다. 자신을 살살 긁는 말투부터 시작하여 자신을 방해하려는 듯한 움직임. 정황상 증거가 없었기에 무어라 말을 하지 못했지만 그런 주현의 행동이 곱게 보이지 않는 것이 사실이었다.

순규나 수영조차도 수연에게 반기를 들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는데 막내인 주현이 반기를 들려고 하다니.

수연은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는 주현이란 싹을 짓밟을지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폭군과 흑화 서로로가 서로의 존재를 자각하였다.

최종보스와 최종병기의 대결이었다.


수연의 머릿속이 복잡했다.

설마 하던 것이 사실로 드러나서 그렇다.

그녀는 주현이 자신에게 반기를 들 것이라고 생각도 못했다. 기껏해야 자신의 독재정권에 답답함을 느낀 순규나 수영이 반기를 들 것이라 생각했지, 막내인 주현이 반기를 들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소녀시대는 그 어느 때보다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강력한 정권 아래 호흡 곤란을 겪어야만 했다. 그 이유는 수연의 강한 통제력 때문이었다. 기존에 Big 3 체제를 유지하면서 강자가 강자들을 견제하는 체제였는데, 그 중 한 명인 효연이 무너지고 수연의 정권에 투신하게 됨으로써 힘의 균형추가 기울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연은 방심하지 않았다. 남은 인원인 수영이나 순규가 나선다면 방심한 사이 뒤집힐 일이 생길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에 그렇다. 그녀는 철저하게 계획을 세웠고, 철권통치 하에 숨통을 조여 나갔다.

그 이유는 무척 간단했다.

순규와 수영이 서로 힘을 합치지 못하게 하고 각자 개별로 나서게 함으로써 각개격파를 하려는 것이었다.

두 사람을 격파하게 되면 더 이상 절대권력에 도전할 인물이 사라지게 된다.

그야 말로 여제 부럽지 않은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이와 같이 중요한 상황에서 그녀에게 도전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막내 서현.

너무나 조용하고 바른생활 소녀인 그녀는 애초에 반항아 리스트에 들지도 못한 인물이다. 아니, 오히려 자신이 타이트하게 멤버들을 조이고 그러면 그 작용이 이롭게 되니 아군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인물로 올라 있었다.

그런 막내가 자신에게 발톱을 드러내고 있던 것이다.

무슨 이유인지 그녀도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정권을 차지한 독재자가 결코 걸어오는 시비를 마다하는 성격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걸 어떻게 처리하지?’

평상시 조용하던 사람이 한 번 화가 나면 무척 까다롭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자신에게 반기를 든 사람이다. 일벌백계로 다스려 다시 한 번 누가 가장 상위 서열에 도달해 있는가 알리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다.

‘처리할 방법은 많으니까.’

말 그대로 주현을 처리하려고 하면 방법은 많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전력을 갉아먹는 하책이다. 싸우지 않고 그녀를 제압하는 것이 진정한 상책. 일단 수연은 주현이 왜 자신을 적대하는지 알아보고자 그녀에게 물었다.

“주현아. 왜 언니한테 말하지 않은 거야?”

수연의 말에 고개를 돌리고 있던 주현이 수연에게 시선을 주면서 사과를 하였다.

“윤아 언니에게 들었는데 다른 이야기를 하는 바람에 까먹어버렸어요. 죄송해요, 언니.”

고개와 허리를 숙이며 사과를 한다. 정말 미안한 마음이 담겨 있는 사과가 아닐 수 없다.

“…….”

그러한 주현의 사과에 수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바라본다. 지금 어떻게 주현을 처리해야 할지 무척 난감했다.

여기서 더 혼내야 할지 아니면 그냥 넘어가야 할지.

생각이 길어졌음일까.

수연은 누군가가 옆에서 자신을 툭툭 치는 걸 느꼈다.

그리고 시선을 옮기니, 그곳에는 윤아가 당황한 표정을 띤 채 수연에게 속삭인다.

“언니, 뭐하시는 거예요. 어서 사과 받아주셔야죠.”

“……아!”

윤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수연이 순간 주변을 둘러본다.

주변은 온통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주현은 계속해서 고개와 허리를 숙이고 있었고, 자신은 그 사과를 받아주고 있지 않다. 제3자가 보기에는 마치 언니가 동생에게 기합을 주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가는 듯하자 윤아가 나서서 상황을 타개하고자 하였다.

“어서 허리를 펴! 뭐하는 거야, 주현아!”

그리고는 이곳을 바라보고 있는 스태프들을 향해 큰 목소리로 말한다.

“아하핫! 죄송합니다. 저희 막내가 실수한 게 있어서 사과한 거예요. 이상하지 보지 말아주세요. 촬영에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제법 익숙해지기는 했지만 아직 연기자로서 신인이었고, 스태프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어도 모자랄 상황이었기에 재빠르게 대처를 하였다.

윤아의 빠른 대처에 스태프들은 납득한 표정을 하며 시선을 거둔다.

하지만 여전히 주현의 태도에는 변함이 없다. 숙였던 허리를 폈지만 고개는 여전히 땅을 바라보고 있던 것이다.

“도대체 왜 그래, 주현아?”

그 말을 들은 주현이 잠시 멈칫하다가 수연을 힐끗 바라보고는 말한다.

“언니가 사과를 받아주지 않으셔서요…….”

“…….”

주현의 말에 수연은 표정이 굳어 있었다. 그녀의 행동 때문에 순간 머리가 복잡했던 것이다.

그녀가 의도했든 안했든 방금 전 행동으로 인해 자신은 동생에게 기합을 주는 무서운 언니가 되어버렸다. 이것이 고의적인지 아닌지 중요하지가 않다. 결과가 그러했으니까. 순간적인 자신의 실수와 주현의 고지식함이 맞물려 나온 결과물이었다.

수연이 애써 굳은 표정을 풀고는 주현의 말에 대답을 해주었다.

“나는 괜찮아. 그럴 수도 있으니까.”

“네. 사과 받아주셔서 감사해요.”

감사의 인사를 하는 주현이었지만 수연은 그 인사를 받아줄 기분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방금 전 상황으로 인해 자신의 이미지는 더없이 나빠질 대로 나빠졌으니까.

이것을 의도한 것이라면 주현은 실로 무서운 인물이라 칭할 수 있다.

두 사람 사이에 숨 막히는 침묵이 감돌자 윤아가 끼어들어 중재를 하였다.

“주현이 네 반응이 과했어. 그렇게 행동을 하면 수연 언니가 난처해지잖아.”

수연을 따르는 윤아답게 그녀의 고충을 단번에 짚어냈다.

그 말에 주현은 다시 한 번 사과를 하였다.

“죄송해요. 언니.”

“하아! 고의적인 게 아니라면 됐어. 사과하려고 그런 건데 그 사이에 멍 놓고 있던 내가 잘못한 거지. 난 괜찮으니 미안해 할 필요 없어.”

괜찮다고 말을 하지만 나오는 말과 표정은 전혀 상반되어 있었다.

수연은 눈을 번뜩이며 주현을 훑고 있었다. 만약 이것이 고의라면 주현을 강적으로 지정하여 경계를 해야 한다.

차가운 눈빛이 감도는 수연의 눈길에 주현은 부담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저것이 연기인지 진실인지 파악해내는 것이 관건이다. 조금만 더 바라보면 그 진위를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바람은 이루지 못했다.

막 수연이 주현의 벽을 깨려 할 때, 그녀의 집중을 깨버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그것도 너무나 익숙한 목소리였다.

“어라, 누나들이 이곳에 무슨 일로……?”

“……!”

주현의 진실을 꿰뚫어보려던 수연도, 차가운 눈빛을 견뎌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주현도 미처 반응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가장 먼저 반응을 한 것은 두 사람의 이상 기류를 긴장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던 윤아였다.

창현의 등장에 윤아는 반가운 표정으로 그를 맞이하였다.

“창현아!”

이상한 분위기 때문에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안절부절하던 윤아는 창현의 등장이 너무나 반가웠다. 그의 등장으로 숨 막힐 듯 무겁게 가라앉았던 분위기가 일시에 해소되었던 것이다.

윤아는 그런 창현이 너무나 반가워 성큼성큼 다가가서는 창현의 손을 덥석 잡고는 흔든다. 평소보다 대담한 행동이었다.

“잘왔어, 정말!”

“엥?”

갑작스러운 윤아의 행동에 창현이 고개를 갸웃한다. 평소보다 훨씬 반겨주는 윤아의 모습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던 것이다.

무슨 일이 있는가 싶어서 창현이 물었다.

“왜 그래요? 무슨 일 있는 거예요?”

“응? 아, 아니.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고…….”

자세한 사정을 물어오는 창현의 모습에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윤아가 대답하길 꺼려한다. 수연과 주현의 묘한 충돌을 언급하기에는 후환이 두렵고,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 이유가 없었기에 그렇다.

“누나가 갑자기 반겨줘서 그런 생각이 든 거예요. 그런데 갑자기 누나들이 무슨 일로 오신 거예요?”

윤아가 별로 대답하려고 하지 않자, 창현은 굳이 깊게 캐묻지 않고 화제를 수연과 주현으로 돌린다.

그러자 윤아가 활발한 어조로 말한다.

“아, 수연 언니랑 주현이는 날 응원하기 위해서 왔어. 오늘 스케줄이 없어서 드라마 촬영을 어떻게 하는지 구경하고 싶다 하더라고. 그래서 온 거야.”

“아아, 그렇군요. 하기야,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궁금할 수도 있겠네요. 그래서, 보니까 궁금증이 좀 풀리셨데요?”

“그거야 본인들에게 물어봐야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은 윤아가 슬쩍 빠지자, 창현이 물어보았다.

“어때요? 직접 보니까?”

먼저 수연에게 물어보자 그녀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으응, 직접 보니까 많이 다르네. 나는 한 번 촬영을 하면 드라마 한편을 촬영하는 거라고 생각했거든…….”

“비슷하긴 하지만 장소에 따라서 촬영하는 게 달라요. 부분적으로 촬영을 하니까요. 주현 누나는 어때요?”

타깃이 주현에게로 옮겨졌다.

주현도 살짝 고개를 끄덕인다.

“보던 거랑 많이 다르다는 것을 느꼈어.”

“보이는 거랑 많이 다르죠. 많이…….”

동감하는 듯 창현이 고개를 끄덕인다. 확실히 보는 거랑은 천지차이다. 연기를 하는 것도 그러했고, 대사를 외우는 것도 제법 힘이 들었다. 하나하나에 전력을 다해야 했기에, 몰입에서 벗어날 때 오는 피로감도 장난이 아니었다.

물론 집중하는 만큼 돌아오는 대가가 컸지만 그래도 피곤한 것은 피곤한 것이었다.

눈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힘들다는 것이 그대로 통용되는 셈이었다.

세상에 눈으로 보이는 것보다 힘든 일은 많지만 특히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은 단순히 보는 것만으로 느끼는 것보다 몇 배 이상 힘이 든다.

근래 들어 창현은 처음과 달리 상당히 힘겹게 촬영을 이어나가고 있는 실정이었기에 주현의 말은 큰 파문을 일으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어쨌든 잘 오셨어요. 윤아 누나가 오늘 늦게까지 촬영하죠?”

“응, 너랑 같이 끝나.”

후반부로 들어서면서 초반에 미미했던 윤아의 비중이 점점 커지게 된다. 이제 본격적으로 질투의 화신이 되어 등장을 하게 될 테니까.

그런 만큼 윤아의 비중이 늘어나고 있고, 오늘 늦게까지 촬영을 하기로 예약이 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아아, 그렇군요. 그런데 궁금한 게 있는데, 아까 들어오다가 주현 누나가 수연 누나한테 고개 숙이고 있는 걸 봤는데 무슨 문제가 있는 거예요?”

“응? 아, 그, 그게 말이지…….”

수연을 바라보며 창현이 묻자 순간 당황한 그녀는 무어라 말을 하지 못한 채 당황한 모습을 보인다.

그러자 윤아가 재빨리 나서서 수연 대신 말을 해준다.

“아, 주현이가 조금 잘못한 게 있어서 사과를 한 거였어. 수연 언니는 잠시 멍 놓고 있다가 사과를 받을 시기를 놓쳤고. 그래서 본의 아니게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받게 되었어. 수연 언니도 참, 그럴 때 멍 놓으면 어떻게 해. 사람들이 오해하게. 아하하!”

절묘하게 변호를 해주는 윤아의 말이었다.

수연은 자신을 변호해준 윤아에게 감사의 의미가 담긴 눈빛을 보냈다.

창현은 그 말을 듣고 피식 웃음을 지었다.

“하하하! 수연 누나도 참, 그런 상황에서 멍 놓고 계시면 어떻게 해요. 그것이 매력이어서 귀엽긴 하지만 말이죠.”

“우… 그, 그게 그러니까…….”

매력이라는 말에 수연은 얼굴에 열기가 치솟는 것을 느끼며 무어라 말을 하지 못했다. 자신보다 세 살이나 어린 창현에게 귀엽다는 말을 들으니 무척 부끄러운 감정이 들었던 것이다.

그 모습에 창현이 순간 멈칫하더니 조심스럽게 묻는다.

“아, 제가 실수한 건가요?”

“그건 아냐.”

“그럼 다행이고요.”

혹시 자신이 실수한 게 있지 않은가 싶었던 그는 실수가 아니라는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수연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기에 창현은 혹시 몰라 다시 한 번 사과한다.

“순간적으로 나온 말이어서 그러니 너무 마음에 두지 마세요. 다시 한 번 죄송해요.”

“아니야. 난 괜찮다니까. 괜찮다고 하는데 그렇게 나오면 내가 오히려 미안해지잖아.”

입술을 삐죽 내밀며 새침한 시선으로 창현을 바라보는 수연이었다. 그녀의 모습에서 소녀시대의 폭군이라는 것을 떠올릴 만한 여지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게 어린 아이 투정부리듯 하니 귀엽다고 하는 거예요.’

불경하게도 또 다시 귀엽다고 느끼면서 창현은 속으로 쿡쿡! 하고 웃음을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그런데 많이 피곤해 보이네, 괜찮은 거야?”

창현의 눈밑이 거뭇거뭇한 것을 보고는 걱정스러운 어조로 말한다.

그 물음에 창현은 자신의 눈가를 매만졌다. 생각해보니 노메이크업인 상태라서 얼굴에 현재 몸 상태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었나보다.

“아아, 괜찮긴 해요. 다만 잠을 많이 못 자서 피곤해서 그런가 봐요.”

“그래?”

수연이 걱정스러운 어조로 말할 무렵, 조용히 서 있던 주현이 불쑥 끼어들어 창현에게 말했다.

“창현아, 피곤할 땐 과일이 좋은데 조금 먹는 건 어때?”

그러면서 과일이 담긴 바구니를 내미는 주현이었다.

그러자 수연이 선수를 빼앗긴 느낌에 입술을 지그시 깨물더니 보온병도 내민다.

“피로에 좋은 차도 있는데 어때?”

수연과 주현의 시선이 허공에서 충돌하였다. 그녀들은 서로 물러설 수 없다는 굳은 의지를 내보이고 있었다.

창현은 그런 그녀들의 제안에 웃음을 지으며 정중하게 거절했다.

“하하, 죄송해요. 오늘 조금 늦어서 바로 준비 들어가야 할 것 같아요. 윤아 누나랑 같이 끝나니 그때까지 계실 거면 끝난 뒤에 제가 맛있는 거라도 사드릴게요. 그러니 싸우지 마세요.”

“응!”

창현의 말에 눈싸움을 하던 두 소녀가 물러선다. 창현의 앞에서까지 싸움을 하면 호감을 깎아먹는 어리석은 실수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화기애애(?)한 소녀들의 모습에 창현이 진한 웃음을 지었다. 자신의 말에 똑같은 대답을 할 정도의 싱크로율이라니. 정말 친하지 않고서는 절대 저런 모습을 보일 수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럼 조금 있다 다시 이야기해요.”

그러면서 준비를 위해 자리를 벗어나는 창현이었다.


‘후우! 오늘은 잘 해야 할 텐데.’

창현은 근래 들어 연기를 하면서 자신의 한계를 부쩍 실감하고 있었다. 딴에는 열심히 노력을 한다 하여 연기를 해나가는데 마음같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요즘 들어 드라마에서 그가 하는 연기는 갈등에 휩싸인 채 슬픔을 발산하는 역할.

하지만 감정 몰입이 쉽지가 않았다.

감정 몰입을 하는 것 자체는 어렵지가 않다. 슬픔이라는 키워드를 자신에게 주입을 하여 슬픔으로 자신을 감싸면 되니까.

문제는 그것이 아니다.

슬픈 감정 몰입은 어렵지가 않지만 문제는 그 강도가 조절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과함이 지나치면 안한 것만큼 못한 경우가 종종 있다.

감정에 깊이 취하면 취할수록 그 감정에서 헤어 나오기가 힘들다. 연기를 할 때 감정 몰입을 하는 것은 일종의 자가 최면이기에 그런 것이다.

무슨 일을 할 때 사람은 자신에게 할 수 있다. 라는 단어를 끊임없이 머릿속에서 떠올린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주문을 건다. 정말 할 수 있다는, 자신이 노력하면 해낼 수 있다는 주문을. 그러면 인간은 자신의 잠재적인 재능까지 끌어내 그 일을 해낼 수 있다. 그렇게까지 할 수 있는 인간은 소수지만 스스로 최면을 건다는 것은 잠재능력을 이끌어낼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한 부분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창현도 가능한 부분이었다.

어느 키워드를 주입하여 감정 몰입을 하고, 캐릭터를 완벽하게 구현해내는 것까지 일종의 자가 최면으로 이루어진 행위니까.

게다가 드라마가 절정으로 올라서는 과정에서 요구되는 ‘애절’, ‘갈등’, ‘후회’ 등 수많은 마이너스적인 감정은 창현을 힘들게 만들었다.

감정 몰입도 몰입이지만 창현에게 익숙하지 않은 감정들도 종종 존재하고 있던 것이다. 이럴 경우 NG가 많이 나는 것은 물론이고, 끝까지 김지환 감독이 원하는 장면을 해내지 못했다. 바로 경험 부족에서 나타나는 부족함이었다.

작곡을 할 때는 자신이 키워드를 제시하여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상상력으로 그 감정을 채워나가게 하면 된다.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면 그 키워드를 가지고 알아서 상상을 하니까.

하지만 연기는 달랐다.

눈으로 직접 보여주는 것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키워드를 제시하는 것이 아닌, 자신이 직접 키워드를 가지고 나름대로의 해석을 하여 많은 사람들이 공감해야 하는 연기를 보여줘야 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무난하게 나가다가 근래 들어서는 삐꺽거리는 모습을 많이 보이고 있었다.

창현으로서는 자신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무던히 노력을 하고 있지만 경험 부족은 노력으로도 쉽게 채울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밤잠까지 아껴가며 약점을 극복하려고 했지만… 결코 쉽지가 않았다. 절로 한숨이 흘러나오는 상황이 아닐 수 없다.

‘힘들어. 후우!’

오늘은 어떻게 촬영을 해나갈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과연 무사히 해낼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으니까.

이럴 때일수록 긍정적인 마음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만 그것도 한두 번이지, 며칠 내내 좋지 않은 상황을 겪다 보니 그것도 차츰 힘들어지고 있었다.

‘잘 해내야 할 텐데.’

메이크업을 끝내고 옷까지 갈아입은 창현이 촬영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문득 수연과 주현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윤아는 촬영을 하고 있었는지 보이지 않았고, 두 소녀만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두 소녀가 웃음을 지으며 손을 흔든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창현은 마음이 탁! 하고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누구는 저렇게 밝게 웃음을 짓고 있는데 자신은 심각하게 고민을 하고 있으니 순간 자신의 모습이 우습게 여겨졌던 것이다.

‘저 누나들이 속이 편한 건가, 내가 쓸데없이 속이 예민한 걸까?’

답은 이미 나와 있다. 요즘 들어 자신이 너무 예민해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심각한 얼굴로 이런 걸 진지하게 고민하는 자신의 모습이 우습기까지 하였다.

‘그래도…….’

뭐라고 해야 할까. 묘하게 마음이 놓이는 느낌이었다. 드라마를 촬영할 때 자신 혼자 밖에 없다는 느낌이 종종 들고는 했는데 지금은 지켜봐주는 사람이 있다는 느낌이랄까? 물론 근영이나 윤아는 물론, 다른 배우들도 응원을 해주고는 하지만 드라마에 관련된 사람이라 그런지 창현에게 있어서는 의례적인 응원으로 밖에 들리지 않았다.

‘지켜봐주는데 못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지.’

스스로에 대한 다짐.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기대를 걸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못난 모습을 보일 수 없다는 굳은 결의가 전신을 휘감는다.

자신에게 다른 사람들이 거는 기대가 대단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다만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그것이 익숙해져 자각을 하지 못하고 있을 뿐. 그러다가 문득 깨닫게 된 사실은 창현으로 하여금 굳은 다짐을 하게 만들었다.

지켜보는 사람들에게 실망을 안겨다 줄 수 없는 감정이랄까?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그럼 가볼까.’

다짐을 한 창현이 촬영장에 도착한다. 그리고 김지환 감독과 스태프들에게 살짝 고개를 숙인다.

“오늘도 잘 부탁드립니다.”

“음! 열심히 하도록 하자.”

김지환 감독은 창현의 모습에서 평소와 다른 무언가가 있다고 느끼며 살짝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는 곧장 촬영을 시작한다.

“후우!”

길게 호흡을 내쉬면서 창현은 감정 몰입을 해나간다. 더 잘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스스로에게 주면서 한지훈이라는 배역에, 그가 처한 상황에서 느낄 법한 감정을 스스로에게 불어넣는다.

그리고 완벽하게 배역에 몰입했을 때, 그의 연기는 시작된다.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김지환 감독은 나직이 고개를 끄덕인다.

“오늘은 나쁘지 않군. 안정되어 있어.”

근 며칠 동안 무척 위태위태하게 연기를 해오던 모습을 보아왔기에 그 또한 상당히 불안한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스태프들은 서슴없이 창현을 몰아치는 김지환 감독에게 은연중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이 보기에 창현의 연기는 무난하다 할 수 있는데 김지환 감독은 그것에 만족하지 않은 채 끊임없이 창현을 몰아쳤던 것이다. 그것이 다른 사람들 눈에는 김지환 감독 본인의 만족을 위해 창현을 몰아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시선에도 불구하고 김지환 감독은 끊임없이 창현을 몰아치고, 더 좋은 연기를 하라고 다그쳤다.

그가 이런 모습을 보이는 이유는 간단하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연기를 하게 될 창현에게 건성으로 하는 것을 한 명의 감독으로서 용납할 수가 없었다.

스태프들이 무난하다고, 괜찮다고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초보자’의 범주에서 보았을 때다. 연기 경력이 짧다고 연기를 못하는 것이 용납된다면 창현의 첫 연기 경험은 안 하느니만 못하게 될 것이다.

창현은 김지환 감독이 발견한 원석이었고, 존경하고 따르는 선배의 아들이기도 하였다. 그랬기에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것을 최대한 해주고 싶은 것이 그의 마음이었다.

그가 경험 부족으로 힘들어하고는 있지만 나중에 그것이 그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하며 김지환 감독은 악역을 자처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창현의 연기가 오늘은 제법 안정되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바로 OK 싸인을 내린다.

“OK! 괜찮았어.”

“감사합니다.”

“다음 장면은 삼십 분 뒤에 촬영하도록 하지.”

“예.”

잠깐의 휴식을 얻은 창현이 걸음을 옮겼다. 저쪽에서 수연과 주현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이 보였기에 그렇다.

제법 무난하게 촬영을 하였기에 창현이 어깨를 으쓱하면서 말한다.

“봤어요?”

창현의 말에 수연이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응, 봤는데 연기 잘하더라. 고뇌에 빠진 모습이…….”

평소 이래도 생글 저래도 생글거리는 창현의 모습과 달리 고민에 빠진 듯한 그의 모습은 두근거리게 만들기 부족함이 없었다.

드라마 속 모습도 충분히 매력적이랄까?

‘오히려 그게 더 나을지도…….’

창현이 드라마에서 맡은 배역은 적어도 이성 관계에 있어 둔감하지는 않으니까.

주현도 감탄사를 터뜨리며 창현에게 말했다.

“멋졌어. 정말 갈등하고 고민하는 사람 같은 느낌이 들었거든.”

자신의 감상을 솔직하게 말하는 주현이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창현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실제로도 갈등하고 고민은 하고 있는데.’

굳이 언급할 필요는 없었기에 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리고는 히죽 웃음을 지으며 그녀들에게 말했다.

“좋게 봐주셨다니 기분이 좋네요. 아무래도 누나들이 와서 그런지 더 힘을 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었기에 망설임 없이 언급할 수 있었다.

정말 그 말처럼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하니 평소보다 기합을 단단히 주고 연기에 임할 수 있던 것이니까.

창현의 말에 주현이 생긋 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네. 피곤해 보이는데 과일 먹지 않을래? 감독님이 삼십 분 동안 휴식이라고 했으니 괜찮을 것 같은데.”

“저야 좋죠.”

수연이 미처 차를 권할 틈조차 주지 않은 채 치고 나가는 주현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수연의 눈이 가늘어졌지만 보온병에 담겨 있는 차는 오래 갈 것이라는 생각에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묵묵히 있는다.

그렇게 주현이 권하는 과일을 먹고 있을 때, 저쪽에서 서운한 감정이 가득 담겨있는 윤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나만 빼놓고 먹는 거야?”

“오셨어요, 윤아 언니?”

“주현이 너 이러기야? 나만 빼놓고 과일 먹고.”

“언니도 곧 끝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거기 서 계시지 말고 여기 앉아서 드세요.”

“알았어.”

툴툴거려봤자 자신만 손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윤아가 자리를 잡고는 과일을 같이 먹기 시작한다.

과일을 먹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가 자신이 나설 차례가 되자 창현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과일 잘 먹었어요. 촬영하고 올게요.”

“응, 다녀와.”

살짝 손을 흔들며 말을 해주는 주현의 모습에 창현이 싱긋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촬영에 임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수연이 불쑥 윤아에게 묻는다.

“윤아야, 창현이 좀 이상한 거 같은데?”

“네? 갑자기 왜요?”

갑작스러운 수연의 물음에 윤아가 의아한 기색으로 묻는다. 그렇지만 그 속에 숨어 있는 미미한 떨림을 수연은 감지하고 있었다.

수연은 생긋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창현이가 필요 이상으로 파이팅하고 있는 것 같아서 물어본 거야. 우리 윤아가 나한테 숨기는 건 없을 것이라 믿어.”

자신의 속내를 정확히 꿰뚫어보는 수연의 모습에 윤아가 움찔한다. 그리고는 숨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이내 사실을 털어놓는다.

“그, 그게 그러니까… 후우! 밝혀서 좋을 건 없지만 눈치 채셨다니 어쩔 수 없네요. 요즘 창현이가 뭐라고 해야 할까? 좀 슬럼프 같은 걸 겪고 있어요.”

“슬럼프라고?”

수연은 물론이고 주현도 눈을 동그랗게 뜨며 윤아를 바라본다. 조금 피곤해서 그런 것이라 생각했는데 설마 슬럼프라는 단어가 나올 줄 몰랐던 것이다.

놀란 수연의 외침에 윤아는 순순히 수긍한다.

“네, 슬럼프요. 초반에는 정말 잘 해냈는데 요즘 들어 부쩍 힘들어해서요. NG도 곧잘 나고… 그것 때문에 창현이가 좀 힘들어하더라고요. 굳이 밖에다가 언급할 이유가 없어서 말을 안한 거지, 딱히 숨기려고 그랬던 건 아니에요.”

“그랬구나… 슬럼프.”

왠지 모르게 피곤해보이던 모습이 이해가 가는 수연이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마음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꼈다. 슬럼프임에도 불구하고 애써 밝은 모습을 보이다니.

수연의 얼굴에 안쓰러움이 떠오른 걸 확인한 윤아가 당부한다.

“제가 말했다고 내색하지 마세요. 일종의 금기 사항이니까요. 아셨죠?”

“응.”

“주현이 너도.”

“네, 알았어요.”

그 후 창현이 촬영을 마치고 돌아오자 수연이 준비한 차를 창현에게 건네준다. 그 차를 마시면서 알싸한 맛과 함께 전신에 감도는 청량함이 창현이 눈을 살짝 크게 뜨며 감탄한다.

“하하! 오늘은 무척 잘 풀리네요. 주현 누나가 준비한 과일하고 수연 누나가 주신 차 때문인 것 같네요.”

“우리가 도움이 된 거야? 그럼 다행이네.”

주현의 말에 창현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물론이죠! 예쁜 여성 두 분이 응원을 왔는데 어찌 의욕이 나지 않을까요. 앞으로도 종종 와주세요, 하하!”

웃음을 터뜨리는 창현의 모습에 살짝 볼을 붉히는 폭군과 흑화 서로로였다. 역시 창현 앞에서는 소녀시대를 아우르는 절대 권력자도, 시아버지의 지원을 받는 최종병기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사랑에 빠진 수줍은 소녀일 뿐. 그 모습에 창현은 그저 고개를 갸웃하며 평소 칭찬을 잘 받지 않아 부끄러워하는가 보다 생각할 뿐이었다.

그 리스트에 배제된 윤아는 입술이 삐죽 나왔지만 평소 촬영장에서 가장 많이 보는 것이 자신이라는 것에 애써 위로를 한다.

그날 창현은 촬영을 큰 탈 없이 무사히 끝낼 수 있었다. 무척 고생하던 것과 달리 빠르게 끝을 맺자, 기분이 좋아진 창현은 소녀들과 함께 저녁을 먹기 위해 촬영장을 벗어났다. 오늘은 무척 즐거운 날이었다.


“오늘은 무사히 해냈군.”

김지환 감독은 큰 문제없이 촬영을 끝내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창현이 삐끄덕거리는 모습을 보이자 그 또한 상당한 불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 불안함은 오늘 촬영을 무사히 해냈다고 하여 벗어날 수 있는 성질이 아니었다.

아직 그가 염려하던 부분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드라마를 촬영하면서 자신이 가장 걱정했던 그 부분이.

“그 부분만 무사히 넘길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김지환 감독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그의 얼굴에 진 그늘은 창현의 슬럼프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알려주고 있었다.


오늘 촬영을 무사히 마쳐서 기분이 좋았던 창현은 소녀들을 데리고 유명하다는 횟집에 가서 함께 회를 사주었다. 각종 회를 유감없이 맛볼 수 있던 소녀들은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숙소로 돌아올 수 있었다.

“창현이가 설마 그런 걸 좋아할 줄이야.”

“그러게. 뭔가 생긴 건 레스토랑을 다닐 것 같은 느낌인데.”

“회가 어때서요. 회가 살도 찌지 않고 얼마나 좋은 건데.”

맛있게 먹고 저런 말을 하다니! 창현에 대한 실례라 생각했기에 주현이 윤아의 말에 반박한다.

하지만 윤아는 어깨를 으쓱하며 물러서지 않는다.

“그냥 그렇다는 거야. 창현이는 왠지 토속적인 느낌보다는 서양적인 느낌이 들잖아? 안 그래?”

“그건 그러네요. 아무래도…….”

토속적인 느낌이 결코 고급스럽지는 않다. 창현 같은 경우 촌스럽다기보다는 귀티가 나는 느낌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일반 사람들의 인식은 서양적인 느낌이 귀티가 나는 느낌이었다.

윤아의 말을 인정하게 되자 주현은 살짝 분한 마음이 들었다.

시아버지(?)의 인정을 받은 만큼 창현에 대해서는 자신이 가장 잘 알아야 한다고 은연중 생각하고 있었는데 윤아가 더 잘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기분이 그리 좋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부족한 점을 깨닫는 것도 중요한 법! 모르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잘못된 것을 알고 있음에도 개선하지 않으려는 자세가 올바르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저랑 수연 언니만 놀러갔다고 뭐라 말이 나오지 않을까요?”

숙소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 탑승하고 주현이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윤아에게 묻자,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대답했다.

“뭐, 괜찮지 않겠어?”

너무 낙천적이었다.

전혀 불안함이 풀리지 않은 주현을 보면서 윤아가 피식 웃고는 팔꿈치로 주현을 툭 치고는 귓속말로 속삭인다.

“우리한테 누가 있는데 감히 불만을 제기해?”

그러면서 슬쩍 윤아가 눈동자를 굴리는데, 그곳에는 수연이 팔걸이에 기댄 채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주현은 윤아가 믿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단번에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말에 순순히 납득하는 모습을 보였다.

“아아, 그러네요.”

“그렇지? 누가 감히 수연 언니를 추궁하겠어. 안 그래?”

소녀시대의 정권을 움켜쥔 최종보스에게 누가 감히 따지겠는가!

주현은 윤아의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할 수 있었다. 이럴 때 만큼은 수연의 존재가 더없이 든든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주현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 있었다.

제대로 된 계략을 세우지 못해 번번이 당하던 윤아가 주현의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의 책략을 세우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저 수연을 믿은 나머지 단단히 배짱을 보유하게 된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눈앞에 닥친 상황 때문에 큰 것을 놓치고 있었다.

띵동.

그 사이 엘리베이터는 숙소가 위치한 층에 도착하였다.


결론적으로 윤아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숙소 안으로 들어선 수연과 윤아, 주현은 신발을 벗고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 없었다.

그녀들 앞에는 흉흉한 안색을 하고 있는 여섯 명의 소녀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들 중 보스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듯, 태연이 앞으로 나서면서 세 소녀를 반겼다.

“어서 오시게나.”

“왜 갑자기 이렇게 모여 있는 거예요?”

태연을 비롯한 다른 소녀들의 표정이 심상치가 않았다.

윤아가 앞으로 나서면서 그 연유에 대해 물었다.

“언니들, 왜 이렇게 나와 계신 거예요? 설마 우리가 그렇게 보고 싶었던 거예요? 그럼 전화라도 하지. 나 그렇게 바쁜 여자 아닌데.”

무언가 심상치 않은 기류를 느꼈음일까. 살짝 애교를 부리면서 상황을 타개하려는 윤아였다. 하지만 그것은 남자에게나 먹히는 애교였고, 지금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여인. 그것도 윤아의 애교에 엄청난 저항력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콧방귀로 윤아의 애교를 간단히 무력화 시킨 태연이 윤아를 추궁한다.

“흥! 그런 애교는 안 먹히거든? 남자들한테나 하도록 해. 그리고 윤아, 왜 이렇게 늦게 온 거지?”

자신의 필살애교가 맥없이 무력화 되자 윤아는 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침착함을 되찾았다. 자신의 뒤에는 절대자인 수연이 존재한다! 당황하더라도 수연이 뒤를 받쳐준다면 피해는 없을 것이다.

그 생각이 윤아를 당당하게 만들었다.

“저녁 먹고 왔으니까 늦었죠.”

“저녁? 그래, 저녁은 저녁이겠지.”

태연은 무언가 추궁할 것이 있는 듯 순순히 윤아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때, 수연이 앞으로 나서면서 시니컬한 모습으로 말했다.

“뭘 그렇게 돌려 말하는 거야? 빨리 물어보고 싶은 걸 물어봐. 피곤해서 쉬고 싶으니까.”

움찔!

최종보스 수연의 등장에 태연이 순간 몸을 떨었지만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가 최종보스라면 지금 자신의 뒤에 있는 사람들은 한때 최종보스를 레이드 하는데 성공했던 최강의 파티다. 이들을 믿으면 수연과 충분히 대적하는 것이 가능하리라.

수연의 직설적인 물음에 태연이 강한 목소리로 말한다.

“너희들! 창현이랑 같이 밥 먹었다며!”

“…….”

버럭 외치는 태연의 모습에 순간 할 말을 잃은 수연이었다.

그러다가 이내 침착함을 되찾고는 태연에게 말한다.

“우리가 언제?”

“써니야.”

태연의 호명에 순규가 앞으로 나선다. 그리고는 당당하게 핸드폰을 내민다. 순규의 핸드폰 액정에는 창현이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문자가 자리하고 있었다.

문자의 내용은 같이 식사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같이 스타크래프트나 한판 하려고 했는데 이런 문자가 오더군?”

씨익 웃음을 지어보이는 순규였다.

그 모습에 수연은 무어라 할 말이 선뜻 떠오르지 않았다. 설마 저런 식으로 문자를 교환해서 자신들의 행적을 파악하리라고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당당히 한 건 해낸 순규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뒤로 물러섰고, 태연이 앞으로 나선다.

그녀는 방금 전까지 보이지 않았던 모습을 보였다. 턱을 살짝 치켜든 채 무척 오만해 보이는 눈으로 수연에게 물었다.

“자, 이제 우리가 무엇을 물어보려 하는지 알겠지?”

“…….”

수연은 저런 태연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위서열인 그녀가 뒷배를 믿고 자신에게 이런 식으로 나오다니! 이것은 가히 역모에 준할 정도로 엄청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눈을 가늘게 뜬 채 태연을 조용히 바라보자 그 눈빛에 압도된 태연이 주춤 물러서려다가 멈춰 선다.

지금 상황은 가히 기호지세라 해도 무방하다. 여기에서 물러나면 수연에게 처참하게 물어 뜯겨 최후를 맞이할 뿐, 그 이상의 전개는 존재하지 않는다.

물어 뜯겨 죽나, 땅에 떨어져서 죽나, 어차피 죽는 것은 똑같다.

‘나도 전주에서 날렸다고!’

태연의 눈에 독기가 서렸다. 그리고 이를 악 문 채 물러서려던 몸을 앞으로 내밀면서 말했다.

“자, 자세한 사정을 털어놓으시지.”

물러서지 않는 태연의 모습이 마치 백만대군을 향해 돌진하는 조자룡과도 같았다. 태연의 뒤에 서 있는 멤버들은 오오! 하고 나직이 감탄사를 터뜨리며 그녀를 바라본다. 작은 덩치를 지닌 그녀가 유난히 크게 보이는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들려온 수연의 대답은 허망하기 그지없는 내용이었다.

“그래, 같이 저녁 먹었어. 그런데 그게 뭐가 어때서?”

“…….”

너무나 쉽게 인정하는 수연의 모습. 그 말에 태연을 비롯하여 소녀들이 한순간 할 말을 잃었다.

수연의 말마따나 같이 식사를 했다. 그게 뭐가 어때서인가? 같이 식사도 할 수 있고 그런 거 아닌가? 물론 혼자서 같이 식사를 했다면 충분한 추궁 사유가 되지만 그것도 아니지 않은가?

순간 왜 자신들이 추궁했는지 명분을 잃어버린 듯하였다.

할 말을 잃은 태연을 비롯한 멤버들을 보며 수연이 훗! 하고 웃음을 짓는다. 전세가 자신에게 넘어왔다는 것을 은연중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도도하게 턱을 살짝 치켜들고는 말했다.

“너희들 말처럼 같이 저녁을 먹었어. 오늘 나랑 막내가 윤아를 응원하러 갔다가 창현이를 만났거든. 그러니까 창현이가 응원해줘서 고맙다는 말과 함께 저녁을 사줬어. 그런데 그게 뭐가 어때서? 우리가 왜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는 거지?”

그녀의 대외적인 모습은 절대적인 포스를 겸비한 폭군이다. 하지만 판타지 소설을 읽고 깨달음을 얻은 수연은 지력과 무력을 겸비한 만능의 인물이 되었다. 만약 수연이 삼국지 캐릭터로 존재했다면 무력 99 지력 99 정치 99 매력 99라는 조조를 능가하는 만능 인물이었을 것이다. Big 중 최강의 힘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무력 속에 교묘히 감춰놓은 지력, 소녀시대 멤버 구도를 교묘하게 흩어버린 정치력과 최강의 무력을 지닌 윤아와 실세 효연을 끌어들이는 매력까지. 만능 캐릭터가 아닐 수 없다.

영웅은 따로 떼어놓고 보면 개개인 중 뛰어난 인물에 불과하다. 하지만 영웅이 진정 무서운 것은 그의 주변에 호걸들이 모이고, 그를 중심으로 한 군대의 힘은 기존의 전력보다 훨씬 강하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영웅을 두려워하고 경외시 한다.

소녀시대 내에서 수연은 가히 영웅과도 같은 신위를 지니고 있었다.

윤아와 주현을 제외한 다른 여섯 소녀들은 수연에게서 감히 범접하기 힘든 아우라를 느껴야만 했다. 최장기간 연습생 생활을 하면서 자연스레 몸으로 체득한 선배 포스였다.

순규나, 효연, 유리, 수영도 만만치 않은 긴 연습생 생활을 거쳤지만 몇 개월 차이가 가져다주는 짬밥의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 거대한 차이를 이루고 있다.

게다가 효연은 원래 수연의 사람이었고.

태연을 제외한 다른 다섯 명은 수연의 포스에 뒤로 물러선다.

졸지에 다섯 명의 지원을 받고 있던 태연은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되어버리고 만다.

수연은 묘한 웃음을 지은 채 태연을 바라본다. 그녀에게 더 이상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대로 처참하게 침몰하여 울부짖으며 용서를 비는 것일 뿐. 그녀는 대大 소녀시대의 리더였지만 숙소 내에서는 하위서열에 불과하였다.

사면초가의 상황에 처하게 된 태연이 갑자기 고개를 푹 숙이더니 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한다.

최후의 발악을 준비하는 건가? 하지만 이쪽에는 명분이 존재한다.

싱긋, 악마와도 같은 웃음을 지은 수연이 태연을 침몰시키기 위해 한걸음 앞으로 나설 무렵이었다.

갑자기 태연이 고개를 들어 수연의 눈과 마주한다.

그 눈을 마주한 수연이 순간 멈칫한다. 태연의 눈에서 느껴지는 광기에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이 붙잡힌 것이다.

붉은 화염이 일렁이는 눈으로 수연에게 다가간다. 그리고 양손을 들어 그녀의 어깨에 턱하니 손을 올린다.

곧이어 터져 나오는 외침.

“왜 이런 대접이냐고? 간단해! 너희들만 몰래 빠져나가서 맛있는 저녁을 먹었잖아! 너희들이 맛있는 저녁을 먹는 동안 우리는 어땠는지 알아? 밥통에 밥이 부족해서 밥을 하려고 했더니 쌀이 부족했고, 쌀을 사오니 깜빡하고 반찬거리를 잊어버려서 반찬거리를 사러 다시 마트로 가야했어! 어디 그뿐이냐? 유리 저 녀석의 부주의함으로 정체를 들켜서 고생을 해야만 했고, 간신히 마트를 빠져나와 짐을 들기로 해서 가위 바위 보를 했는데 졌어! 가뜩이나 키가 작아 죽겠는데 무거운 짐을 낑낑대고 들고 오니 키가 안 크는 거 아냐! 좀 도와줄 법도 한데 저 녀석들은 치사하게 딸기우유에 빨대 꽂아서 쪽쪽 빨아먹으며 얄밉게 쫓아오고! 게다가 집에 돌아오니 밥을 하는 것도 내 몫, 반찬을 하는 것도 내 몫이야. 내가 소녀시대 멤버지 너희들의 식모냐! 그런 상황에서 너희들은 맛있는 저녁을 먹는다고 들었어! 너무나 부러워! 누구는 식모 노릇하고 있는데 누구는 도도한 도시여자처럼 비싼 밥을 먹다니! 부러워서 이러는 거야! 나는 부러워서 이러는 거라고! 너희는 승자야! 나는 패자고! 그래서 열폭하는 거다. 앙? 됐냐? 됐어? 속 시원해? 좋지?”

무차별적으로 퍼부으면서 오늘 있었던 서운한 감정과 부러운 감정을 아낌없이 토로하는 태연이었다.

그 모습을 본 소녀들은 뒤로 주춤주춤 물러서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최종보스인 수연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뒤로 물러서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이렇게 광기 넘치는 태연의 모습이라니.

이건 마치 판타지 소설에 나오는 버서커(Berserker)와도 같은 모습이 아니던가?

씩씩거리던 태연의 눈이 주변을 훑는다. 그러자 효연이 갑자기 배를 문지르더니 말한다.

“나, 난 갑자기 배가 아파서 화장실 좀…….”

그러면서 수연을 힐끗 본 효연이 후다닥 화장실로 향한다.

순규와 미영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하더니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순규가 말한다.

“나, 난 미영이랑 하기로 한 스타크래프트나 하러 가야겠다. 미영아 가자?”

“응. 가자.”

대답과 함께 내빼는 순규와 미영.

그 사이 유리와 수영의 시선도 허공에서 마주하더니 모종의 대화를 마치고는 중얼거리듯 말한다.

“그러고 보니 팬분들이 선물로 준 팩이 있는데 하러 가야겠다. 수영이 너도 가자.”

“그래, 가자.”

그 말과 함께 유리와 수영도 작전상 후퇴를 감행하였다.

남은 것은 버서커 모드인 태연과 수연, 윤아와 주현이었다.

버서커 모드로 돌입한 태연과 눈을 마주하고 있는 수연은 고역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평소에는 조용하고 꾹꾹 눌러놓는 성격이어서 만만하게 여겼는데 한 번 폭발하니 보통이 아니지 않은가?

정면대결을 하다가는 자신만 손해라는 것을 수연을 깨달았다.

‘얘 너무 무섭잖아.’

그러면서 재빠르게 회전하는 두뇌.

수연은 재빨리 결론을 도출하고는 태연에게 말한다.

“태, 태연아. 식사를 한 건 인정해. 하지만 더 부러운 게 있어.”

“뭔데? 거짓이면 수연이 너라 해도 용서하지 않을 거야!”

공식적으로 패배자 인증을 한 태연에게 더 이상 두려운 것은 없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뒤집어 엎어버리고 싶은 강렬한 충동만이 감돌고 있을 뿐이었다.

화제를 돌리는데 성공한 수연이 태연에게 말한다.

“주현이가 과일을 싸가서 창현이한테 아앙! 을 했어.”

그걸 보고 자신이 얼마나 부러워했던가!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이 상황을 모면하는 최고의 한 수가 될 것이라 수연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수연의 말을 들은 태연의 눈에 서린 광기가 더욱 짙어진다. 그리고는 수연의 어깨를 속박하던 손이 풀려나간다. 그러자 수연이 재빨리 옆으로 피했고, 태연이 궁신탄영弓身彈影의 묘리로 튕겨나가더니 주현의 양어깨를 점하며 광기가 번들거리는 눈으로 주현에게 묻는다.

“뭐시라? 막내 너 그거 정말이냐?”

“어, 언니! 그게 그러니까…….”

내심 수연이 당하는 모습을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짓던 주현은 화제가 자신에게 옮겨지며 태연의 광기 어린 눈이 자신에게 향하자 마치 드래곤 피어에 노출된 가련한 사냥감 마냥 몸을 파들파들 떤다.

그 사이 수연은 윤아의 팔을 끌어당기며 말한다.

“가자.”

“에? 어, 언니. 그러면 주현이는…….”

윤아는 주현이 걱정되었는지 슬쩍 그녀를 보더니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수연은 냉정하게 그 걱정을 끊어버렸다.

“누군가는 희생해야 해. 주현이는 값진 희생을 하는 거야. 망설이면 우리도 희생되고 말 거야. 들어가자.”

“네, 네…….”

수연의 말에 윤아가 미련이 남는 표정을 지어보였지만 결국 그녀의 이끌림을 이기지 못하고 방으로 들어간다.

그녀는 주현의 만행(?)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순간적인 임기응변의 능력을 발휘하여 주현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 씌우는데 성공했다.

‘잘 당해라, 막내. 이것이 나에게 대항한 대가다.’

그러면서 수연은 열폭하는 태연을 관찰할 생각이다. 의외의 변수를 지닌 것들은 제거하거나 끌어들어야 할 테니까.

결국 광폭한 버서커 앞에서 노출된 가녀린 서로로는 열폭에 의해 처참한 침몰을 겪어야만 했다.


태연의 버서커 모드 강림은 소녀시대 숙소에서 엄청난 파란을 일으켰다.

서열 1위 수연을 압도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멤버들마저도 짓누르는 엄청난 기백을 보였던 것이다.

이것은 수연도 못하는 엄청난 것이었다. 수연이 강력한 독재정권을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은 교묘한 계략이 덧붙여져 그녀를 뒷받침할 수 있는 효연과 윤아의 존재가 컸다. 하지만 태연은 홀로 모든 멤버들을 압도하는 기백을 선보였다.

싹싹하고 마치 엄마와도 같이 멤버들을 잘 챙기는 태연이었지만 연습생 기간이 짧아서 그런지 밖에서 대할 때는 리더로서의 면모를 보였지만 숙소 내에서는 소심한 면을 곧잘 보였다.

그랬기에 그녀가 소녀시대의 약체로서 분류된 것이다.

하지만 어제 그녀가 발휘한 신위는 가히 만부부당萬夫不當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폭군 수연이 제압당했고, 최종병기 주현이 처참하게 당했다.

버서커 모드가 풀린 뒤 본래 순둥이 태연으로 돌아왔지만 그녀의 숨겨진 내면을 보았기에 소녀들은 아무도 태연을 건드리지 못했다.

밖에서도 안에서도 리더로서의 권위를 찾은 태연이었다.


윤아는 지금 이 자리가 약간 불편하였다. 다름이 아니라 드라마 촬영을 가는데 태연과 함께 하였기에 그렇다.

오늘 태연의 스케줄은 오후에 있는 라디오 하나였는데, 공교롭게도 게스트로 윤아와 함께 가게 되었다. 그로 인해 오전은 완전히 스케줄이 비어버려서 태연은 숙소에서 빈둥거리기보다는 윤아의 촬영장을 구경하러 가기로 마음먹었다. 숙소 내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멤버들의 시선이 약간 불편하였기에 그렇다.

그러면서 촬영장으로 가서 창현을 볼 수도 있고, 그야 말로 일석이조가 아닌가?

수연은 값비싼 차를, 주현은 과일을 싸갔다는 말에 태연은 팬들에게 공양(?) 받은 영양갱을 다수 챙겼다. 양갱을 좋아한다는 말에 팬들이 엄청나게 많은 숫자의 양갱을 선물로 주고는 하는데, 처음에는 좋다고 먹다가 이제는 먹다 지쳐서 질려버렸다. 숙소에 썩혀두기도 그렇고, 칼로리가 높아서 멤버들에게 권유하기도 좋지 않았기에 오늘 드라마 촬영장에 가서 나눠줄 생각이었다.

제법 고급스러운 것들도 많았기에 받으면 나쁘지 않으리라.

“…….”

윤아와 태연이 탄 벤은 조용하였다. 무한태연교의 제일교도로서 태연에게 아낌없이 충성을 바쳤던 그녀였지만 지금 이 자리가 불편하였다. 어떻게 보면 자신은 배신이라는 행위를 하였기에 그렇다.

태연은 어제 있었던 일과 오늘 해야 할 일들에 대해서 점검하느라 바빴고, 윤아는 태연에 대한 미안한 마음에 이렇다 말을 걸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촬영장에 도착하였고, 두 사람이 벤에서 내렸다.

그때, 태연이 윤아를 불렀다.

“윤아야.”

“네, 언니.”

대답하는 윤아의 음성에 긴장감이 잔뜩 서려 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겁이 나면서 한편으로는 당당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감돌고 있었다. 자신은 최종적으로 수연을 선택하지 않았는가? 모든 선택에는 책임이 따르는 만큼 그 선택에서 당당해져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었다.

긴장한 윤아의 모습에 태연이 피식 웃음을 짓는다.

“우리 에이스가 왜 이렇게 긴장을 하는 거야? 이렇게 긴장하면 촬영을 할 때 제대로 집중할 수 없잖아? 자, 날 따라해 봐. 내가 긴장할 때 숨을 길게 들이쉬면서 긴장을 푸는데, 해보면 괜찮을 거야.”

그러면서 태연이 길게 호흡을 하자, 윤아도 얼떨결에 그 호흡을 따라한다. 그리고 그녀의 긴장이 어느 정도 풀린 듯하자 태연이 씨익 웃음을 지으며 윤아를 툭 쳤다.

“긴장이 어느 정도 풀렸지?”

“네? 네에.”

태연의 친절한 행동 덕분일까?

윤아는 한결 긴장감이 풀린 표정이었다.

그 모습에 태연이 싱긋 웃음을 지어보였다.

“너무 긴장하면 안 되니까 마음 풀고. 긴장이 풀렸으면 들어가자.”

“네, 언니.”

그러면서 안으로 들어서는 윤아였다. 윤아가 앞장을 서고 태연이 뒤따라오는 형식이었는데, 앞장 서서 걷는 윤아의 표정이 복잡하였다.

배신이란 행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자신을 대해주는 태연의 모습과 긴장한 자신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격려를 아끼지 않는 모습. 진정한 리더가 바로 태연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자신보다 불과 한 살 더 많을 뿐이지만 그녀를 대하면 마치 엄마를 상대하는 듯한 느낌이 들고는 하니까.

윤아가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는다. 두근거리는 자신의 심장박동이 느껴지는 듯하다. 가슴부터 시작하여 전신으로 퍼져나가는 이 느낌은 충성심이었다.

‘수연 언니 어떻게 해요. 태연 언니에 대한 충성심이 완벽하게 사라지지 않았나 봐요.’

흔들리는 윤아의 충성심.

그것은 수연의 소녀시대일통지계少女時代一統之計가 서서히 어긋나는 것을 암시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소녀시대 태연입니다.”

촬영장 안으로 들어선 태연은 윤아와 함께 인사를 하기 시작하였다.

태연의 등장은 촬영장을 후끈 달아오르게 만들기 부족함이 없었다.

소녀시대 내에서 윤아와 함께 인기 최고봉을 다투는 태연은 소녀시대를 모르더라도 태연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높은 인지도를 자랑하고 있었다.

귀여운 외모와 달리 파워풀한 가창력은 사람들에게 묘한 이중적인 매력을 가져다주니까. 게다가 외모 또한 피부가 하얗고 귀여우면서 부담이 느껴지지 않았기에 사람들은 부담을 갖지 않고 태연을 대했다.

수연과 주현에게는 애석하지만 어제보다 반응이 훨씬 좋았다.

종종 싸인을 부탁하는 스태프들의 요구에 응해주면서 태연과 윤아는 김지환 감독에게도 인사를 하였다.

태연을 본 김지환 감독은 웃음을 지었다.

“하하하! 이러다가 소녀시대 멤버들이 한 번씩 다 오겠는 걸? 스태프들이 좋아하겠어. 하하하! 반갑네, 태연 양. 김지환 감독이라고 하네.”

“네? 네. 안녕하세요. 소녀시대의 태연입니다.”

사오십대 나이가 지긋한 감독을 연상하던 태연은 예상보다 훨씬 젊은 김지환 감독의 외모에 놀란 듯하다.

그 표정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었기에 김지환 감독은 싱긋 웃음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내가 생각보다 젊기는 하지. 그러다 보니 가끔 스태프로 오해받기도 하고. 어찌 보면 우리는 동병상련일 수도 있네, 태연 양.”

“네?”

동병상련이라니? 영문을 몰라 태연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김지환 감독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한다.

“태연 양도 나이에 비해 젊은 외모를 하고 있지 않은가? 아마 소녀시대를 모른다면 태연 양이 리더인지 모르는 사람이 있을 테지. 사람이 외양이 아닌 내면으로 평가를 받아야 하는데 외양으로 모든 걸 판단하는 건 슬픈 일이야. 안 그런가?”

“그러네요. 정말…….”

김지환 감독의 말에 태연은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한다. 윤아나 주현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나이가 모두 같기에 리더라는 것을 몰라도 상관이 없다. 하지만 태연으로 하여금 정말 참기 힘들게 만드는 것은 바로 자신을 종종 막내로 보는 사람이 있다는 점이다. 다른 사람들은 젊어 보여서 좋다고 하겠지만 그것은 사람 나름이다. 어릴 때부터 어려보인다는 말을 듣는 사람에게 어려 보인다는 것은 결코 좋은 것이 아니다.

물론 사십대까지 이런 외모가 이어진다면 그때는 좋다고 느낄 테지만.

길지 않은 말이었지만 태연은 김지환 감독의 말에서 짙은 동질감을 느꼈다. 외양보다는 내면으로 평가 받고 싶은 마음, 그것이 같았다.

고개를 끄덕이는 태연의 모습에 김지환 감독이 싱긋 웃음을 지어보였다.

“이렇게 오게 되었으니 즐겁게 구경하도록 가길 바라지. 스태프들 중 태연 양의 팬이 많으니까 싸인을 부탁하더라도 거절하지 말고.”

“제 싸인이 필요하다면 당연히 해드려야죠.”

“그 자세가 보기 좋군.”

그렇게 김지환 감독과 대화가 끝났다.


“감독님이 정말 좋으신 분이네.”

태연의 말에 윤아가 살짝 놀란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더니 말한다.

“그래요? 그건 맞는데 처음 보고 그렇게 느끼는 건 언니가 처음인 것 같아요.”

“음, 그런가? 아마 걔네들은 나같이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해서 그런 것 같아. 이야기를 나눠보니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생각해주는 것이 무척 좋은 것 같았어.”

“진심으로 생각해주는 면이 정말 좋죠. 다만 때로는 너무 직설적이어서요.”

솔직한 것은 좋지만 때로는 너무 직선적인 것이 좋지 않을 때도 있다.

윤아의 말을 들은 태연이 피식 웃음을 지었다.

“오히려 감독과 배우 관계면 직설적인 게 좋을 것 같은데?”

“그것도 그렇죠. 극복해야 할 점들을 바로 짚어주거든요.”

“그러니까. 그 점이 좋은 거야.”

그렇게 두 사람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눌 때, 태연이 한쪽에 들어선 인물을 발견하고는 눈을 빛냈다.

“창현이도 왔네? 가자, 인사하러.”

윤아도 막 창현을 발견했던 참이었기에 고개를 끄덕인다.

“네!”

그리고 두 사람이 함께 창현에게 다가간다.

메이크업을 막 받고 옷까지 차려입은 창현은 윤아가 태연과 함께 있는 것을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뜬다.

“어라? 오늘은 태연 누나가 왔네요?”

“왜? 나는 오면 안 되나?”

자신이 온 것을 반갑게 맞이해주지 않자 태연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한다.

그러자 창현이 피식 웃음을 짓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요? 다만 누나가 온 게 의외여서 그렇죠. 소녀시대 중에서 가장 스케줄이 바쁜 사람이 누나잖아요?”

창현의 말은 사실이었다. 노래도 잘하고 입담도 좋아서 태연은 라디오뿐만 아니라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상당한 러브콜을 받고 있었다. 윤아가 드라마로 인지도가 상승하면서 가장 스케줄이 많아졌지만 평균적으로 따지면 태연의 스케줄이 가장 많은 축에 속한다.

태연은 창현의 말을 안 좋게 받아들였는지 눈썹을 꿈틀거리며 말한다.

“그러니까 지금 스케줄이 많아서 여기 오면 안 된다는 건가잉?”

“그럴 리가. 다만 환영할 타이밍을 놓쳐서 그런 거예요.”

“흠! 믿도록 하겠어.”

특별히 창현의 말을 믿어주기로 하면서 자비(?)를 베푸는 태연이었다. 그리고는 가방을 열고 잠시 뒤적거리더니 창현에게 작은 상자를 내민다.

“이게 뭐에요?”

“양갱이야.”

“양갱? 갑자기 양갱은 왜…….”

자신에게 양갱을 내미는 태연의 태도가 이해되지 않았는지 창현이 고개를 갸웃하며 묻는다.

그러자 태연이 창현에게 강제로 상자를 떠넘기며 말했다.

“빈손으로 오기 뭐해서 양갱을 잔뜩 챙겨왔지. 연기도 나름대로 머리를 쓰잖아? 두뇌 활동에는 단 게 좋단 말씀!”

“하하, 그것도 그러네요. 잘 먹을게요.”

“누가 주는 건데, 암! 잘 먹어야지. 잘 먹어야 하고말고.”

콧대를 높이며 대답하는 태연의 모습에 싱긋 웃음을 짓는 창현이었다.

그러다가 그의 표정이 살짝 가라앉는다. 그리고 그의 소지품이 담긴 가방에 상자를 넣으면서 태연에게 말했다.

“아, 저 지금 촬영이 있거든요. 이번 촬영을 끝내면 휴식시간이 주어지니까 그때 이야기 나누도록 해요.”

“그래? 열심히 해!”

약간 가라앉은 창현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하면서 창현을 보내는 태연이었다. 그리고 그가 촬영장을 향해 걸어가자 태연이 궁금한 듯 윤아에게 물었다.

“윤아야, 창현이 왜 저래?”

“그게…….”

“시청률 문제는 아닌 것 같은데? 시청률 좋잖아.”

어제 방영된 4화에서 마침내 40%의 벽을 허무는데 성공하였다. 40.5%로 소폭 상승했지만 마의 벽을 넘은 만큼 드라마 제작진 측에서는 고무되어 있어야 함이 옳다. 배우들도 엄청난 시청률에 당연히 기분이 고조 되어 있을 테고. 그런데 창현은 전혀 고조되어 있지 않은 듯하니 의아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 있는 거야?”

이상함을 느낀 태연이 거듭 묻자 윤아가 고개를 저으며 말한다.

“있긴 하지만 그건 언급하기가 좀 그래요. 그리고… 지금 창현이가 촬영하는 장면은 직접 눈으로 보기에는 그리 건강상 좋지 않아요.”

“건강상 좋지 않다고? 뭔데 그래?”

태연이 궁금한 듯 묻자, 윤아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대답한다.

“그러니까… 저기 근영 언니도 있잖아요?”

“응응.”

“지금 저 장면… 창현이가 근영 언니한테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씬이에요.”

“뭐라고?”

고백하는 장면이란 말에 태연의 눈에서 순간 불길이 뿜어져 나왔다. 그 모습이 어제 버서커 모드가 된 것과 비슷하게 느껴져서 윤아는 순간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하지만 다행히도 버서커 모드가 되지 않았다.

다만 눈길에 붉은 화염이 일렁이고 있을 뿐.

태연이 윤아에게 다시 한 번 물었다.

“그러니까… 창현이가 근영 언니에게 고백을 한다고?”

“드라마 상이니까요. 그러니 진정하시고…….”

“진정은 무슨! 나 하나도 안 흥분했거든?”

그렇게 말을 하는데 태연의 눈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콧김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누가 봐도 흥분했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그에 윤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쨌든 별로 건강상 좋지 않으니 보지 않는 게…….”

“왜 안 봐! 나는 꼭 보고 싶어. 보고 말겠어. 아니, 볼 거야. 그러니 윤아 너도 같이 보도록 해. 과연 어떤 식으로 고백을 하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자고!”

그렇게 말을 하며 윤아의 팔을 잡은 뒤 질질 끌고 가는 태연이었다. 윤아는 그런 태연의 속박에 벗어나보려 했지만 어제 이후 서열이 급상승한 태연은 힘도 덩달아 세졌는지 벗어나는 것이 여의치 않았다. 결국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윤아는 태연의 뒤를 조용히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촬영하는 곳에 도착하니 창현과 근영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촬영장은 회사 옥상이었는데, 바람이 강하게 부는 가운데 주인공 한지훈이 마침내 최예린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확실하게 깨닫고 그녀에게 고백을 하는 장면이었다. 서로가 결코 좁힐 수 없는 거대한 장애물들이 존재하고 있었지만 그것마저도 뛰어넘는 듯한 애절한 고백을 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얼핏 보아도 애절한 분위기가 감도는 것을 본 태연의 눈에는 불덩이가 이글이글거리고 있었다. 내 남자의 비즈니스라고 하나 고백이라니! 속에서 대단위 폭발이 연쇄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아…….”

건강을 위해 고백 씬을 애써 보지 않으려던 윤아는 태연에 의해 목격하게 되자 그녀의 눈에도 차츰 화염이 일렁이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비단 그녀들뿐만이 아니었다. 촬영을 하고 있는 여자 스태프들의 눈에서 공통적으로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로 인해 서서히 더워지고 있는 바깥 공간이 한여름 마냥 후끈 달아오르고 있었다.

다만 촬영하고 있는 장소만 인공 바람이 불고 있을 뿐.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면서 창현은 최대한 자신의 감정을 끌어올린다. 사랑하는 마음. 자신 나름대로 그 감정을 최대한 끌어올린 뒤 근영을 바라보며 고백을 한다.

“우리에게 수많은 장애물이 존재한다고 해도 나는 오직 너만 사랑할 자신이 있어. 생애 처음으로 찾아온 이 감정을 나는 소중히 하고 싶고 그 대상인 너를 영원이 아껴주고 싶어. 나의 고백을…….”

창현의 대사는 끝을 맺지 못했다.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김지환 감독이 고개를 저으면서 중단을 한 것이다.

“NG!"

NG가 떨어지자 창현이 김지환 감독을 바라본다.

김지환 감독은 창현에게 조언을 해주었다.

“아직 감정몰입이 부족해. 좀 더 감정몰입을 해서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해내겠다는, 굳은 의지와 사랑한다는 감정을 발산해 봐. 알았지?”

“노력하겠습니다.”

힘차게 대답을 한 창현은 자신이 감정을 좀 더 몰입하기로 마음먹으면서 다시 촬영에 임한다.

하지만 OK는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NG는 세 번이 되고 네 번이 되며, 끊임없이 NG가 이어지기 시작했다. NG가 거듭될수록 창현의 얼굴에는 짙은 당황이 떠올랐고, 김지환 감독의 표정은 무표정하게 변해갔다.

이렇게 많은 NG는 처음이었기에 스태프들도 당황하기 시작한다.

불길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촬영장을 바라보던 태연도 거듭되는 NG에 당황했는지 윤아에게 말한다.

“유, 윤아야. 이거 뭔가 잘못되고 있는 거 아니야?”

윤아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저, 저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에요. 창현이가 이 정도로 NG를 내는 건 본 적이 없어요.”

그 사이 촬영은 계속해서 이어졌지만 OK는 떨어지지 않고 NG는 점점 더 쌓여갔다.

“NG.”

열아홉 번째 NG가 나왔다. NG가 나자 창현의 시선이 김지환 감독에게 향한다.

잠시 침묵을 지키고 있던 김지환 감독이 무언가 결심을 한 듯 창현에게 말한다.

“전혀 사랑한다는 감정이 실려 있지 않아. 지금 네가 집중하고 있는 감정이 과연 사랑이라고 할 수 있어?”

“……!”

김지환 감독의 말을 듣는 순간 창현의 표정이 새하얗게 변했다.

그의 말은 지금 자신이 몰입하고 있는 감정의 근원을 부정하는 말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창현은 함부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의 말이 송곳처럼 자신의 마음에 틀어박힌 이유가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알리고 있는 것이기에 그렇다.

자신이 집중하고 있던 감정이 사랑이 아니다? 그럼 집중하고 있던 감정은 무엇이란 말인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본다. 하지만 결말은 나오지 않는다. 연기자의 연기와 몰입하고 있는 감정의 종류를 정확하게 꿰뚫어보는 김지환 감독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면 자신이 틀렸다는 걸 의미한다.

그런 창현에게 김지환 감독이 한마디 한다.

“지금 네게 사랑이란 감정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내 눈에는 드라마 속 한지훈이 사랑 연기를 하는 것처럼 느껴질 뿐, 그 본질 속에는 사랑이 전혀 느껴지지가 않아.”

혹평의 연속이었다.

자신이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말은 창현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이게 사랑이 아니면 도대체 어떤 감정이 사랑이라는 거지?

충분히 사랑에 대해 알고 있다고 생각하던 창현이었기에 자신의 감정이 송두리째 부정 당하자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허우적거렸다.

“묻도록 하지, 사랑이라는 감정에 몰입할 수 있겠나?”

“…….”

창현은 대답하지 못했다.

자신의 답이 틀린 것이라면 이것은 사랑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 감정에 몰입한다 한들 김지환 감독이 원하는 장면은 영원히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의 침묵은 충분한 대답이었다.

김지환 감독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스태프들에게 시선을 주면서 말한다.

“이 장면 촬영은 하지 않도록 한다. 창현이 너는 돌아가서 쉬도록 해라. 아무래도 오늘은 안될 듯하군.”

“죄송합니다.”

멍한 표정을 지은 창현이 고개를 숙인다.

하지만 김지환 감독은 고개를 저으며 말한다.

“나한테 죄송하면 안 된다. 이 장면을 위해 힘들게 준비한 스태프들과 근영이에게 죄송해 해야 한다.”

그 말을 들은 창현이 고개를 든다. 초점이 제대로 잡히지 않는 눈동자는 누가 봐도 안쓰럽게 느껴질 정도로 힘이 실려있지 않았다. 그 눈동자로 창현은 스태프들에게 사과를 하였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는 곧장 발걸음을 옮겨 촬영장을 벗어났다.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가장 자신 있던 감정 몰입에서 근원마저 부정당한 창현이 받은 충격은 상상을 초월하고 있었다.

촬영장을 벗어나던 창현은 태연과 윤아가 서 있는 곳으로 향했다.

놀란 시선으로 창현을 바라보던 태연이 창현에게 손을 뻗었다.

“창현…….”

그녀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창현은 마치 그녀를 보지 못한 것처럼 그냥 지나친 것이다.

그 모습을 보며 태연도 한동안 멍한 표정을 지었다. 옆에 서 있는 윤아도 놀란 눈으로 바라보다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충격이 여전히 남아있는 스태프들에게 김지환 감독이 외친다.

“창현이가 없는 장면부터 촬영하도록 한다.”

하지만 드라마가 점점 클라이막스로 치닫는 부분이었기에 창현이 나오지 않는 부분은 거의 없었다.

오후 7시에 끝나기로 예정되어 있던 촬영은 불과 3시에 끝이 나고 말았다.

드라마 제작진에게 창현의 심상치 않은 반응이 뇌리 깊숙한 곳에 각인된 채.

본격적인 태풍이 몰아치기 시작하였다.

그 시작은 ‘사랑’이라는 단 두 글자였다.




제62장 Golden Opportunity




촬영을 일찍 끝낸 김지환 감독은 촬영진 전체에게 함구령을 내렸다.

드라마가 폭발적인 시청률로 엄청난 관심을 얻고 있지만 현이라는 이름 자체는 드라마가 가져다주는 파급력을 뛰어넘을 정도로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런 현이 촬영장에서 이상한 모습을 보였다고 하면 괜히 일이 크게 번질 수도 있었다.

일종의 긁어 부스럼인 셈이다.

김지환 감독의 함구령에 스태프들은 물론, 연기자들도 동의를 하였다. 연기를 하다가 종종 막혀서 슬럼프를 겪을 수 있기에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여긴 것이다.

촬영이 일찍 끝나자 태연과 윤아는 숙소로 향했다. 원래는 촬영장에서 곧장 라디오 스케줄을 위해 방송국으로 움직이려 했지만 훨씬 빨리 끝난 탓에 숙소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태연이 작은 목소리로 윤아에게 말했다.

“창현이 모습 봤어?”

“네. 그런 표정은 처음이었어요. 그런 표정은…….”

새하얗게 질린 창현의 표정이라니.

늘 여유만만하고 어려움도 정면돌파로 극복하는 모습을 보아왔기에 그런 창현의 모습은 적응이 되지 않았다.

태연 또한 고개를 끄덕인다.

“나도 처음이야. 그런 모습은.”

창현이 고민을 하는 모습은 본 적이 있다. 그가 미국 진출을 할 당시 미국으로 갈 것인가 아니면 한국에서 계속해서 활동할 것인가 고민을 하고 있었고, 자신이 상담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를 떠올리면 스스로 생각해도 주제 넘는다고 생각될 정도로 참견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자신의 말은 창현에게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자신이 도움을 줄 수 없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깨달았다.

그녀가 알고 있는 창현은 감독의 꾸지람으로 풀이 죽거나 의욕이 꺾이는 인물은 아니다. 하지만 김지환 감독의 말에 그의 표정이 새하얗게 질리더니 주변을 돌아볼 여유도 없이 촬영장을 벗어났다.

기존에 있던 것들로 대입할 수 없을 만큼 큰 충격을 받았다는 걸 뜻했다.

‘사랑이라는 게 그렇게 어려운 거였어?’

촬영장에 가까이 있었기에 태연과 윤아는 창현이 무슨 이유로 충격을 받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사랑이라는 단어에 받은 큰 충격. 태연은 창현이 사랑이라는 감정을 왜 소화해내지 못할까 의문이 들었다.

주변의 말을 들어보면 창현은 정말 뛰어난 인물이다. 무슨 일이든지 척척 해내는 다재다능한 면이 존재하였고, 성격 또한 좋았다. 연기력 또한 뛰어나서, 드라마를 보면서 그의 연기력이 신인답지 않은 성숙함이 은연중 묻어나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노련한 배우들이 보여주는 경험들은 따라가지 못하지만 그에게는 진정성이라는 것이 존재하였기에 사람들의 공감을 끌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사랑이라는 감정은?

창현이 스스로 대입하지 못한 채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김지환 감독에 의해 그가 몰입하던 감정을 송두리째 부정 당하자 견뎌내지 못하고 무너진 것이다.

여태까지 겪어보지 못한 큰 시련이 그에게 닥쳤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라디오 스타에서 첫 사랑조차 해보지 않았다고 하더니 그 말이 정말이었나 보다.

태연에 상념에 빠져있는 사이, 윤아도 무언가 골몰히 생각에 잠겨 있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오늘 일은 말하지 않는 게 좋겠죠?”

필요 이상으로 파고들지 않지만 아무래도 창현에 관련된 일이니 만큼 감추기가 무척 껄끄러웠다.

그러나 김지환 감독이 오늘 일을 함구하라고 한 만큼 말을 하면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 같았다.

다른 사람의 좋지 않은 일을 알리는 것도 꺼림칙하였고,

윤아의 말에 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게 좋을 것 같아. 감독님이 직접 말씀하신 것도 있고, 창현이의 안 좋은 일을 떠들고 다닐 필요가 없으니까. 괜히 말을 했다가 걱정거리만 늘리면 안 좋잖아. 안 그래?”

“그건 그래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윤아였다. 그녀도 알리지 않는 쪽으로 무게 추가 기울고 있었나보다.

태연의 대답을 들은 그녀의 눈은 묘하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태연은 알고 있었다.

사랑이라는 단어가 주는 감정의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해서 무너져버린 창현. 아직 사랑을 모르는 만큼 그 감정의 물꼬를 틔워준다면 전화위복의 찬스를 잡을 수 있다.

인간이라면 사랑이라는 것을 아예 모르고 있을 리가 없다.

이성간의 사랑을 제외하더라도 가족간의 사랑도 존재하고, 일상생활에서도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고는 하니까.

단지 창현은 그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마음속에 댐을 세워놓고 그 감정을 억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감정이 쌓이고 쌓이다가 마침내 범람하게 되면 걷잡을 수 없을 정도의 감정적인 상태가 될 터.

윤아의 그런 생각을 태연이 알아차리지 못할 리 없다.

“이번 일은 창현이한테 중요한 일이니까 섣불리 나서면 안 돼. 큰 폐가 될 수도 있으니까. 내가 생각하기에는 스스로 일어나야 의미가 있을 거라 생각해. 알았지?”

자신의 뇌를 스캔한 듯한 태연의 말에 윤아가 움찔한다. 자신의 생각을 정확하게 알아차리고 있을 줄 생각도 못했다.

그녀의 얼굴에 아쉬움이 서리더니 이내 고개를 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았어요.”

“그래, 당분간은 입을 다물고 있자. 창현이가 스스로 극복할 수 있도록.”

태연과 윤아는 같은 배를 타게 되었다.


태연과 윤아가 모종의 계약을 맺고 있는 사이, 석규는 김지환 감독의 전화를 받아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서 전해 듣고 있었다.

“그런 일이 있었다고? 그래, 알겠어.”

띠딕.

통화가 끝나자 석규가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심란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그런 일이 없었으면 했는데 마침내 일이 터졌군.”

석규는 김지환 감독과 창현의 결정적인 약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려고 만났던 순간을 떠올렸다.

당시 이야기를 나누면서 김지환 감독은 창현이 사랑을 해본 적이 있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라디오 스타에서 언급을 한 적이 있기는 하지만 연예인의 멘트는 방송용이 엄연히 따로 존재하였기에 진실이 아니라고 판단을 하고 있는 듯하였다.

하지만 석규가 알고 있는 바로는 창현이 여태까지 누군가를 좋아하거나 사귄 적이 없었다. 어리지만 그는 치열한 삶을 살아왔고, 누구보다 음악에 몰입을 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릴 한줌의 여유조차 없다 할 수 있었다.

그 말을 들은 김지환 감독은 창현이 이성을 사귀어보지 않았다는 것 자체가 연기를 함에 있어 크나큰 결점으로 다가올 것이라 말했다. 사랑을 해보지 않은 자가 진실 된 사랑 연기를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과 함께 말이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기에 석규는 큰 불안함을 느껴야만 했다.

그러나 그는 창현을 믿었다.

여태까지 자신의 일을 스스로 헤쳐 나온 그가 아니던가? 김지환 감독의 말이 불안하기는 했지만 자신의 일이니 만큼 스스로가 충분히 헤쳐 나올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러다 마침내 일이 터져버린 것이다.

거짓된 사랑 연기는 김지환 감독의 눈에 단숨에 발각되었고,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하하, 이것 참.”

작게 웃음을 지은 석규가 자신의 양손에 시선을 두었다.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던 자신의 손이다.

하지만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자신이 나서서 창현에게 어떠한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회사가 영향력을 갖게 되고, 열심히 확장을 해나가면서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승승장구하는 기세에 휘말려 착각하게 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의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이렇게 무력함을 느낀 적은 오랜만이군. 하지만 내가 할 수 없다면 다른 사람의 힘을 빌려서라도 돕도록 하겠다. 너를 오랫동안 방치하여 지금의 사태를 초래한 나의 잘못도 존재하니까.”

굳은 다짐을 하며 입술을 지그시 깨무는 석규였다.

자신이 할 수 없다면 다른 사람을 동원해서라도 창현의 빠른 재기를 돕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니까.


“요! 오늘은 좀 일찍 왔네?”

숙소로 돌아오자 오늘 스케줄이 없는 순규가 손을 흔들며 반겨주었다.

그러자 태연과 윤아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면서 안으로 들어온다.

순규는 두 소녀를 반겨주다가 오늘 라디오 스케줄이 있다는 것을 떠올리며 물었다.

“뭐야, 촬영 일찍 끝난 거야?”

“촬영이 일찍 끝나서 일찍 오게 되었어. 잠시 숙소에서 쉬었다가 가려고.”

“그렇군. 바로 갈 예정이었다면 빨라도 7시쯤에 끝났을 텐데 일찍 끝났네.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툭 던지는 말이었지만 때로는 그것이 무척 날카로울 때가 있었다.

하지만 상대는 다름 아닌 태연과 윤아.

버서커 모드로 서열이 급상승하며 배짱이 두둑해진 태연과 윤아는 속으로 뜨끔했지만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태연이 자연스러운 어조로 대답해주었다.

“뭐, 윤아가 연기를 잘해서 일찍 끝나게 되었지.”

“오오! 연기가 많이 늘었나 봐? 좋았어! 다음에 나도 구경을 가야겠어!”

“그, 그러세요.”

“웬일이야? 허락을 다해주고? 간다면 나야 좋지.”

얼떨떨한 상태의 윤아가 수락을 하자, 순규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순수하게 촬영장을 하고 싶다 말을 하며 창현에게 관심이 없다는 것을 표방하는 순규였지만 그녀의 속내는 촬영장에 올 창현을 보러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표면적으로는 앙숙관계이고, 자신은 괘씸한 놈이라고 입에 달고 있었기에 갑자기 풀어지는 모습을 보일 수 없었다. 그러면 의심을 살 수밖에 없으니까.

그렇게 순규와 이야기를 나누고, 시간이 되자 태연과 윤아가 라디오 스케줄을 가게 되었다. 드라마로 한창 인지도가 상승하고 있는 윤아였기에 라디오에 출연하자 상당한 환영을 받으며 라디오 방송에 임했다.

낮에 보았던 일 때문에 머릿속이 뒤죽박죽 복잡했지만 프로정신으로 무장하고 있었기에 무사히 라디오 방송을 끝내고 곧장 숙소로 향했다. 드라마 본방사수를 위해 바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라디오 방송이 10시에 끝나고, 숙소까지 빨리 도착해도 10시 30분이었기에 DMB 핸드폰으로 방송을 보며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서둘러 숙소로 향했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서자 10시 30분. 이미 드라마가 절반이나 흘러가고 있던 것이다.

“어서 와, 탱구, 아가씨.”

숙소 안으로 들어서자 멤버들이 태연과 윤아를 반겨준다. 탱구는 태연의 별명이었고, 아가씨는 드라마에서 재벌가 영양의 역할을 하고 있는 윤아의 새로운 별명이었다.

“드라마 보고 계셨네요.”

TV 앞에 옹기종기 모여서 드라마를 시청하고 있는 멤버들의 모습에 윤아가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나온다고 하여 손수 모니터링을 자청해주는 멤버들이 고마웠던 것이다.

“점점 재미있어지는데? 저거 삼각관계잖아. 윤아가 중간에 진다는 게 아쉽지만.”

“그래도 보면 묘하게 흥미진진한데? 상식적으로 보면 윤아랑 이어져야 하니까.”

드라마 뒷내용을 전혀 모르기에 화두가 나오면 그것을 가지고 열띤 토론을 벌이는 소녀들이었다. 윤아에게 뒷내용을 말하라고 무언의 압박을 가해도 절대 입을 열지 않았던 것이다.

드라마를 조용히 시청하고 있던 주현이 입을 열었다.

“저렇게 나오면 윤아 언니가 어떤 행동을 보일 것 같은데.”

“맞아. 저기서 움직임을 보이지. 사랑이 집착으로 변해가는 과정이거든.”

“……!”

무심코 중얼거리던 주현은 옆에서 들려오는 윤아의 목소리에 놀란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다른 멤버들도 놀란 눈으로 윤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태까지 내용을 발설하지 않았던 윤아가 뒷내용을 발설한 것이다.

멤버들의 시선이 집중되자 윤아가 헉! 하더니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는 자리에서 일어선다.

“저, 저는 피곤해서 미안 잘게요. 재미있게 보세요!”

그렇게 말하며 재빨리 물러서는 윤아였다.

멤버들은 자리를 비운 윤아의 모습에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좀 더 유도를 하면 내용을 발설할 것이라 생각이 되었는데 윤아가 자리를 피해버린 것이다.

좀 더 캐내면 궁금증을 해소할 수도 있었을 텐데. 무척 아쉬운 순간이었다.

주현은 윤아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

유독 윤아와 친한 그녀가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것이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묘한 느낌이 주현의 감각을 자극하고 있었다.

작은 변화였지만 그것은 주현의 실행력을 비약적으로 상승시켜주고 있었다.

주변을 잠시 둘러보던 주현은 다른 언니들이 모두 드라마에 집중하고 있는 모습을 확인하고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른 멤버들은 주현이 화장실에 가는 줄 알았기에 아무도 그녀를 제지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사이 주현은 조용히 윤아의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방으로 들어서자 주현의 눈에 들어온 것은 옷도 벗지 않은 채 침대에 몸을 파묻고 있는 윤아의 모습이었다.

열려있는 문으로 조심스럽게 들어온 것이기에 윤아는 주현이 안으로 들어온 것을 눈치 채지 못한 듯하다.

주현이 막 방안으로 들어설 무렵, 침대에 몸을 묻고 있던 윤아의 입에서 한숨이 길게 흘러나온다.

“후우! 어떻게 하지?”

의미 모를 한숨.

하지만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주현이 눈을 빛냈다. 윤아의 기색이 이상하다 싶어서 막연하게 의심을 했는데 그녀의 말을 듣게 되자 무언가 일이 있다는 것을 알아낸 것이다.

‘역시.’

속으로 고개를 끄덕인 주현은 더 이상 윤아가 반응을 하지 않자 조용히 윤아를 부른다.

“언니.”

흠칫!

주현의 목소리에 윤아의 몸이 한차례 격렬하게 떨리더니, 고개를 든다. 그리고 주현을 발견하자 잔뜩 경계하는 표정을 짓더니 입을 열었다.

“드라마 더 보지 않고 왜 들어온 거야?”

경계의 마음이 잔뜩 녹아있는 음성이었다.

그 음성에 주현은 각별히 조심해야겠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는 입가에 미소를 지어보이고는 윤아에게 말했다.

“윤아 언니가 무언가 걱정을 하고 있는 것 같아서요.”

“내가?”

“네, 평소와 태도도 약간 다른 걸 보면 무슨 걱정이 있는 것 같은데요? 혹시 오늘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거예요?”

데뷔한지 일 년도 되지 않았지만 같이 함께 한 시간은 인생의 절반을 향하고 있을 정도로 길다. 숨기려고 하지만 몇 년 동안 함께 한 동료들의 눈을 속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특히 윤아에게 있어 주현은 속내를 숨기기 무척 어려운 상대임이 틀림없었다.

윤아는 주현의 통찰력에 혀를 내두르면서 고개를 저었다. 오늘 일은 겉으로 드러내서는 안되는 일이다. 그렇기에 주현이라 해도 내색할 수 없는 노릇이다.

“아냐, 아무것도 없어. 주현이 네가 착각한 걸 거야.”

“정말이에요? 언니, 제 눈을 봐요.”

그러면서 주현이 윤아와 시선을 마주하는 걸 시도한다. 수연이 윤아의 눈을 살핌으로써 진실을 파악한 이후로 윤아가 무언가를 숨기려고 하면 눈과 눈을 마주하는 심문방식을 즐겨 사용하고는 하였다.

그러한 멤버들의 속내를 윤아가 모를 리 없었다.

그녀는 굳이 주현과 시선을 마주하여 부스럼 만들 필요가 없었기에 단호하게 거부한다.

“주현아, 내가 오늘 좀 피곤하거든? 쉴 수 있게 좀 도와주지 않을래?”

가장 확실하게 피곤함을 핑계로 대는 윤아였다. 평소였다면 기꺼이 응했을 테지만 숨기고 있는 것이 있는 만큼 시선을 마주할 생각이 없어보였다.

“…….”

그녀의 거부에 주현은 잠시 침묵하며 침대에 얼굴을 푹 묻고 있는 윤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무거운 침묵이 자리하였는데, 주현이 이내 고개를 젓더니 윤아에게 말했다.

“언니가 말씀해주시기 싫으시면 어쩔 수 없죠. 하지만 피를 나눈 친 자매만큼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제게 숨기는 것이 있다니, 슬프네요.”

윤아가 숨기고 있는 것을 확실시 하는 주현이었다.

그 말을 들은 윤아의 몸이 움찔했지만 더 이상의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최후의 수단이라 생각하던 것이 먹혀들지 않자 주현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리고 한 가지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

자신에게 숨길 정도로 제법 큰 사안이라는 것을 말이다.

‘언니가 내게 밝히지 못할 정도라면 큰 일일 거야.’

천천히 윤아를 떠보며 조사를 하기로 하며 주현은 더 이상 윤아를 몰아치지 않기로 결정을 내렸다. 필요 이상으로 몰아치면 부작용이 일어난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수연의 만행(?)을 목격하면서 내면의 사악함을 불러낸 주현은 더 이상 순진하다고 할 수 없었다.

흑화 서로로는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정도로 악랄해졌다.

다만 겉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뿐.

외부로 드러내지 않은 채 속으로 숨기고 있는 것이 더 무섭다는 것을 주현은 잘 알고 있었다.

‘서서히 밝혀내면 돼. 윤아 언니는 모든 사실을 털어놓을 수밖에 없어.’

훗날을 기약하며 주현이 윤아에게 말했다.

“말하기 힘든 문제라면 더 이상 언니를 괴롭히지 않을게요. 아니, 제 착각일 수도 있으니까… 푹 쉬세요.”

그 말과 함께 자리를 벗어나는 주현이었다.

스륵.

주현이 방에서 나가자, 이불에 몸을 묻고 있던 윤아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주현이 나간 것을 확인하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들키지 않았구나. 다행이야.”

평소에는 순진하지만 가끔 보여주는 날카로운 눈치에 가슴이 철렁하지 않았던가. 윤아는 주현을 무사히 속인 것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한편, 주현에게 무언가를 숨겼다는 생각에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하지만 오늘 일을 발설하지 않기로 약속했기에 주현이라 하여도 말을 할 수 없었다.

약속이라는 것은 무척 중요한 것이니까.

“다음에 꼭 말해줄게.”

다음이 언제가 될지는 윤아도 모르고 있었다.

그렇게 윤아는 주현을 완벽하게 속여 넘겼다고 생각했지만, 그 실상은 전혀 달랐다.

방을 나선 주현이 귀를 방문에 가져다 댄 채 청력을 방 안쪽에 집중시키고 있던 것이다.

그리고 주현은 윤아가 한숨을 내쉬는 것과 무언가 일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듯한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이것만으로도 결정적인 증거를 얻어낸 셈이다.

혹시나 하는 한줄기 의심을 가지고 있던 주현은 귀를 떼고 입가에 싱긋 미소를 지어보였다.

“고마워요 언니.”

주현의 예리한 촉이 반응을 하기 시작하였다.


드라마 5화에서 다시 한 번 성공을 거두며 시청률이 소폭 상승하는 효과를 일으켰다. 4화가 40.5%의 시청률을 기록했지만 5화 시청률은 42.2%로 1.7%가 상승했던 것이다. 본격적인 삼각 멜로라인이 그려지면서 예린과 은설의 다른 행보는 사람들의 궁금증을 일으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게다가 주인공인 지훈이 회사에 입사하여 한건을 크게 터뜨리며 자신들만의 아집에 빠져있던 상사들을 물 먹임으로써 직장인들의 커다란 대리만족을 이끌어 내는데 성공하였다.

이렇게 시청률이 높게 치솟으면 잘 하면 꿈의 50% 시청률을 달성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그리고 이 날 순규의 생일이기도 하여 멤버들이 축하 파티를 열어주었으며, 태연과 윤아는 낮의 일로 제법 마음이 심란했지만 순규의 생일이었기에 진심으로 축하해주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순규는 그리 밝은 표정을 짓지 않았다.

그녀는 핸드폰을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하였다. 그렇게 해도 오지 않은 문자가 왔을 리 만무하였다.

순규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킁! 내가 부탁만 했다고 해서 정말 부탁만 들어주네. 선물은 주지 않더라도 문자 정도는 기대했는데.”

그녀는 창현의 축하 인사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자신의 생일을 알고 있는 창현이었기에 순규는 선물을 주지 않더라도 전화나 문자로 축하 인사를 보내줄 줄 알았다. 하지만 창현에게서 생일을 축하한다는 식의 문자나 전화는 전혀 오지 않았다.

차근차근 접근하여 제법 친밀감을 키웠다고 생각하던 순규의 생각이 어긋나는 순간이었다.

그 불만은 생일이 지난 다음 날인 5월 16일까지 이어졌다.

태연과 윤아는 그런 순규의 행동에 마음이 무척 불편하였다. 창현이 왜 순규에게 문자를 보내지 않았는지 알아차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순규에게 문자를 보내지 않을 정도라면 제법 심각한 지경에 처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건 말건 순규는 씩씩거리며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는 태연과 윤아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주현이었다.

그녀는 어제부터 윤아의 행동에 의구심을 느끼고 있었기에 윤아를 주도면밀하게 관찰하고 있었다.

윤아의 표정을 관찰하는 것이지만 주현은 그것만으로도 많은 것을 알아낼 수 있었다.

우선 태연도 비슷하게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으로 보아 윤아가 말하지 않는 사실은 태연도 알고 있는 듯하였다. 그리고 태연과 윤아가 함께 했던 것은 촬영장과 라디오 스케줄이다.

그 중에서 촬영장에서 무언가 일어났을 확률이 컸다.

왜냐하면 창현의 축하 인사를 받지 못해 흥분한 순규를 바라보는 그녀들의 시선이 심상치가 않았던 것이다.

애초에 강렬한 느낌이 왔던 것은 창현과 관련이 있어서 그런 것이었다.

‘역시, 창현이와 연관이 있는 일이야.’

주현은 창현에게 무언가 일이 발생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언니들의 눈을 피해 조심스레 방으로 향했다. 순규는 창현이 먼저 연락을 할 때까지 하지 않겠다고 하며 자존심을 세우고 있었기에 연락을 취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

익숙한 컬러링과 함께 통화연결음이 들려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이어 핸드폰이 꺼져있다는 말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 언급에 주현의 표정이 굳었다. 여태까지 핸드폰을 꺼놓은 경우가 없었는데 처음으로 그의 핸드폰이 꺼져있던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발생했기에 이런단 말인가?

‘무슨 일이 일어난 게 틀림이 없어.’

당장 윤아에게 달려가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어제 모습을 떠올려보면 윤아가 말을 할 확률은 극히 희박하였다.

억지로 알아내려 하면 결국 싸움만 일어날 뿐이었다.

‘어떻게 하지?’

주현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면서 고민을 하였다. 짐작이었지만 창현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다면 꼭 그 연유에 대해 알고 싶었다.

태연과 윤아에게서 알아내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정보를 얻는단 말인가?

그냥 이대로 손을 놓고 있어야 하나?

절망스러운 생각이 머릿속에 감돌 무렵, 주현의 눈이 순간 번뜩인다. 자신에게는 최강의 아군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뒤늦게 떠올랐던 것이다. 의지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이럴 때만큼은 의지할 수 있는 든든한 아군이 아니던가.

‘나에게는 최고의 정보통이 있어.’

그녀가 생각한 최강의 아군은 다름 아닌 석규였다.

사석에서는 아버님과 새아가의 관계를 맺은 만큼 주현에게 있어 최고의 아군이 되어줄 수 있는 인물이 바로 석규였다.

막상 전화를 하려고 하니 그것도 쉽지가 않았다.

자그마치 시아버지(?)에게 먼저 거는 전화인 것이다. 게다가 자신이 먼저 설레발치는 것이라면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다면?

예비 며느리로써 창현의 문제를 당연히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주현은 각오를 다지면서 석규의 번호를 찾아 통화 버튼을 꾸욱 누르기 시작했다.


“…….”

석규의 표정은 석고상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어제 김지환 감독의 연락을 받은 직후부터 창현과 연락을 시도하고 있지만 연락이 닿지 않고 있던 것이다.

핸드폰은 물론이고 숙소와 녹음실에 있는 전화도 연결되지 않고 있었다.

어제 촬영장을 벗어날 때도 혼자서 벗어났다고 한다. 사라지면서 모습을 들키지 않은 듯했지만 그로 인해 창현의 자세한 행방을 알아내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그러다가 방금 전 아침이 되어서야 창현이 남긴 문자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일주일 동안 머리를 식히기 위해 여행을 가겠다는 말이었다.

드라마 스케줄 이외에 다른 스케줄은 전무한 상황이었고, 김지환 감독이 단호하게 일을 처리한 까닭에 이 기회를 빌려 사라졌던 것이다.

석규는 전신에서 느껴지는 무력감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미치겠군. 후우!”

회사가 제법 커지고 힘이 생겼다고 하지만 위기에 처한 자식을 도와줄 수 없다니.

도와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자괴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자신의 능력이 부족한 것처럼 느껴지고 있었으니까.

드라마 시청률이 상승하여 고공행진을 하고 있었지만 석규의 표정은 밝지 않은 이유가 바로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업무를 보는 둥 마는 둥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점심시간이 될 무렵, 석규의 핸드폰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

전화한 사람의 이름을 확인하니 주현이었다.

창현의 선배이자 그 행동거지가 마음에 들어 예비 며느리 감으로 점찍어놓은 아이.

무척 수줍음과 부끄러움을 타는 듯하였기에 번호를 알려주어도 연락이 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오늘 연락이 온 것이다.

시기가 공교롭다 보니 석규로서는 자연스레 창현의 일과 연관이 지어졌다.

“…이상을 알아차린 건가?”

그럴 확률이 높다고 생각한 석규가 핸드폰을 열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저기 저… 주현이에요.

낮게 가라앉은 석규의 목소리 때문인지 주현의 목소리도 한껏 위축되어 있었다.

석규 딴에는 신경을 쓴다고 했지만 지금 기분 상태가 워낙 좋지 않아서인지 감정을 다스리는데 상당한 고역을 겪어야만 했다.

“흠! 미안하다. 기분이 좋지 않은 일이 있어서. 그래, 무슨 일로 전화를 했느냐?”

아직 주현이 알고 있을지 확실하지 않았기에 전화한 연유에 대해 묻는 석규였다.

그 물음에 주현이 잠시 멈칫거리는가 싶더니 이내 결심을 굳힌 듯 어렵게 말을 꺼낸다.

-그러니까… 창현이한테 무슨 일이 있는 게 아닐까 싶어서요…….

“…….”

그녀의 말을 들은 석규의 눈이 순간 빛났다. 예상을 하고는 있었지만 그녀가 정말 이번 일을 짐작하고 말을 걸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아직 확실하지 않은 듯했지만 무언가 이상 기류를 느낀 것은 분명했다.

‘그러고 보니 촬영장에 윤아가 있었을 테지.’

촬영장에 윤아가 있었다면 충분히 소녀시대 멤버인 주현이 알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다만 윤아가 말을 했느냐가 중요한데, 김지환 감독은 함구령을 내렸다고 했다.

주현이 확신하지 못하는 어조로 묻는 걸 보아하니 윤아가 말을 한 건 아닌 듯하고 짐작만 하고 있는 듯한 단계였다.

석규는 고민에 빠졌다.

‘어떻게 한다?’

그의 고민은 주현에게 말을 할 것인가 말을 하지 않을 것인가였다.

이번 사안은 제법 심각하다. 김지환 감독이 식사 당시 말하길, 이것은 앞으로 창현의 연기 인생을 좌우할 뿐만 아니라, 여파가 심하면 가수로서의 인생도 크게 좌우할 것이라 하였다.

결점이 연기에서 드러나게 되었지만 그 주체가 창현인 만큼 그와 관련된 모든 것이 줄줄이 영향을 받는다는 뜻이었다.

그 말을 듣고도 석규는 긴가민가하였다.

과연 그것이 창현에게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을까?부터 시작하여 심각하다면 대책을 세워야겠다는 생각도 하고 있었다.

대책의 일환이 바로 주현이었다.

창현이 집으로 초대를 할 정도라면 그 사이가 범상치 않을 확률이 높다.

사랑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호감을 가지고 있을 터였고, 그 호감이 쌓이면 추후 사랑이라는 열매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계획은 이제 시작단계다.

깊이 들어가지 못한 만큼 주현에게 알려주어야 할지 고민이 되는 것은 당연한 현상.

잠시 고민을 하던 석규는 어차피 윤아가 알고 있다면 언제고 알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알게 될 것 조금 더 빠르게 안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지는 않으리라.

우선 이야기를 하기 전에 확답을 받아야 할 것이 있었다.

“창현이한테 무슨 일이 있는 건 맞다.”

건너편에서 전화를 받고 있던 주현은 그 말을 듣고 심장이 쿵쾅쿵쾅 뛰고 있었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진실이라는 것과, 석규에게 직접 듣는다는 것은 그 무게가 다르다는 것을 은연중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어, 어떤 일인지 알 수 있을까요?

상당히 주제 넘어 보일 수 있지만 너무나 궁금하였기에 참을 수가 없었다.

이미 대답을 해주기로 한 상황이었기에 석규는 낮게 목소리를 깔며 입을 열었다.

“우선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까… 음, 주현이 넌 창현이가 나온 라디오 스타를 본 적이 있나?”

-네, 전부 본방으로 봤어요.

“스케줄에 맞추기 힘들었을 텐데 용케도 봤구나.”

-좋아하는 남자가 나오는 방송이니까요. 열심히 해야죠.

말을 하는 주현의 음성은 기어들어가고 있었다. 하기야, 직접 그 말을 입에 담으려니 무척 부끄러웠을 것이라.

주현의 성격이 어떤지 알고 있었기에 이렇게 하는 것 자체가 상당한 용기를 냈다는 걸 알았다.

“알고 있다면 말하기 편하지. 거기에서 창현이가 첫 사랑도 해보지 못했다는 걸 알고 있을 게다.”

-네에…….

그 대목을 가장 집중해서 들었기에 모를 리가 없다.

알고 있다는 듯 대답을 하자 석규가 설명을 이어나갔다.

“실제로 창현이는 거기에서 방송용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 진실을 말한 것이다. 그리고…….”

이어진 석규의 설명은 장황하지 않고 무척 간단했다.

주현에게 이야기를 하기로 마음을 먹었지만 모든 사실을 털어놓을 생각은 없었다. 그리 되면 무척 복잡하게 파고들어야 한다는 점이 있을 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기에 그렇다.

-…….

묵묵히 석규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주현은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 교차하였다.

약 오 분 동안 이야기를 하자 주현은 창현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있었다.

석규가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그리고… 창현이는 지금 서울에 없을 거다.”

-네?

“이번 일로 인해 충격이 컸다는 이야기지. 핸드폰도 꺼놓고 여행을 가겠다는 말과 함께 사라졌으니까.”

그로 인해 놀라서 김지환 감독에게 곧장 연락을 했더니, 머리를 식힐 테니 일주일 동안 나가지 못하겠다고 미리 말을 했단다.

그때를 떠올리면 석규는 골머리가 절로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창현이 서울에 없다는 이야기를 듣자 주현이 힘 없는 음성으로 말한다.

-그, 그럼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네요…….

역시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나보다.

제법 갸륵한 정성이었지만 과한 것은 역효과로 나타날 수 있는 법이었기에 석규가 주현을 만류하였다.

“당장 무엇을 하려고 하면 역효과가 날 확률이 높다. 천천히 다가가야지.”

-네…….

“일단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을 하면 안 된다. 알고 있는 사람이 전무하니까. 창현이는 강한 녀석이니까 일주일 후면 웃는 얼굴로 돌아올 거다. 이럴 때는 믿는 것이 좋다. 알겠지?”

-네. 알겠습니다.

주현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석규 자신도 한결 마음이 가라앉은 것 같았다. 괜히 조급하고 그러했는데 주현에게 조언을 해주면서 스스로도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그렇게 알고 있도록 해라. 창현이 소식이 전해지면 연락을 하도록 할 테니. 알겠지?”

-네. 갑자기 전화 드려서 죄송합니다.

끝까지 예의를 지키는 모습에 석규는 미소를 지으며 전화를 끝맺을 수 있었다.

그리고 통화가 끝나자 석규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후우! 내가 할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다니. 기분이 그리 좋지 않군.”

기껏 한다는 말이 기다려달라는 말밖에 없다니.

자신의 무능력을 인정한 것 같아 찜찜한 석규였다.


자신에 대한 무력감을 느낀 것은 주현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석규와의 통화에서 창현이 그런 큰 문제에 직면하고 있었다는 것을 몰랐다.

한편으로는 그런 고민을 안고 있으면서 자신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대해주었다는 것이 고맙고 미안했다. 여러 고민을 안고 있는 상황에서 자신의 행동은 철부지 어린 아이처럼 여겨졌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여행을 떠나버린 창현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고, 당장 그를 만난다고 하여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도 않았다.

결국 자신이란 존재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 점이 주현으로 하여금 무력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아버님에게 인정을 받았어도 난…….’

선택하는 주체가 창현인 만큼 석규의 지원을 받는다 하여 안심할 수 있지 않았다. 방금 전 전화를 하면서 그녀는 깨달은 점이 있었다. 아직 자신이 모든 상황을 자세하게 전해들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다는 것을 말이다.

이것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잘해야 한다. 석규와 거리를 좁히고, 선배였다는 점을 적극 활용하여 창현에 대해 자세히 알아두어야 하는 것이다.

그가 어려울 때 고민을 자신에게 털어놓을 정도로.

석규가 말한 것처럼 창현은 아직 사랑을 모른다고 하였다. 하지만 그는 결코 사랑을 모르는 것이 아닐 것이다. 아직 자각하지 못했을 확률이 더 크다. 그런 만큼 조급하게 다가가는 것이 아닌, 차근차근 다가가려는 마음이 중요하였다.

‘내가 노력을 해야 해.’

그러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주현이 눈을 빛내면서 깊은 생각에 잠겨들었다. 남들과의 경쟁에서 자신이 앞서 나가기 위한 방법은? 자신의 장점을 극대화 하고 단점을 최소한 숨기는 것이다. 그리고 숨은 비장의 한 수를 만드는 것이 제일 중요했다.

우선은 자신의 장점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단점은 막내이기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 없다는 점. 하지만 소극적이기에 다른 언니들의 눈에 띄지 않을 수 있다는 장점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것은 결정적인 장점이 아닌 만큼, 자신만의 장점을 발견해야 한다.

그리고 그 해답은 가까운 곳에 있었다.

무심코 시선을 두고 있던 핸드폰에서 정답을 얻은 것이다.

‘나의 장점은… 아버님이 날 지원해준다는 것.’

석규가 지원해준다는 것은 그가 자신에게 창현에 관련된 정보를 준다는 점이다. 그리고 방금 전 통화에서 창현이 어떤 상황에 처하게 되었는지 알 수 있었고,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내용들도 알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어제 촬영장에 갔던 태연이나 윤아도 알지 못하는 고급 정보다.

여기에서 가장 활용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창현이 일주일 동안 여행을 떠났다는 것이다.

일주일 동안 여행을 떠났다는 이야기는 일주일 후에 돌아온다는 뜻과 상통한다.

그렇다는 건 일주일 후에 창현을 만날 기회가 생겼다는 것.

마음이 복잡한 그를 만나서 이야기를 잘 나눌 수만 있다면 백 번의 노력으로도 힘든 어필을 한 번의 기회로 해낼 수 있다.

그 점을 파악한 주현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일주일 후. 그때가 기회야.’

어떻게 만날지, 무슨 이야기를 할지 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일주일 동안 생각할 과제였다.

더 높은 곳으로 도약을 하기 위해 주현이 성큼 한 발을 내딛기 시작하였다.


드라마 시청률이 안정적으로 40%대에 안착되자 끊임없는 고공행진을 하는 듯 싶었다.

하지만 세상사는 그리 만만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어디에서 소문이 시작된 것인지 모르지만 며칠 전부터 현이 촬영장에 나오지 않는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더니, 그 소문이 크게 번지면서 마침내 스태프의 입에서 익명을 요구한 채 현이 촬영장에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밝혔던 것이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수많은 사실을 내포하고 있었다.

현이 촬영장에 나오지 않는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연예부 기자들은 현과 드라마 제작사 측의 불화설부터 시작하여 부상을 입었다는 말과 배우들끼리 싸웠다는 등, 수많은 의혹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사기에 부족함이 없었고, 이것이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들자 기자들은 드라마 제작진 측에 달라붙어 끊임없는 회유를 하기 시작한다.

김지환 감독의 신신당부가 있었지만 그것이 지켜지는 것은 불과 며칠에 지나지 않았고, 결국 제법 세부적인 이야기가 밖으로 흘러가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익명을 요구한 제작진이 밝힌 바에 의하면 현과 드라마를 제작하는 김지환 감독간에 고성이 오고갔다는 이야기였다. 여기에서 현이 김지환 감독에게 혼나다 견디지 못하여 나갔다는 이야기가 첨부되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제법 세부적인 그 사실은 진실이건 거짓이건 간에 사람들이 믿을 만한 사실을 담아내고 있어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기류가 휘몰아치고 있는 것을 느끼고 있던 사람들은 기사를 접하고 드라마를 촬영하다가 무언가 일이 발생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김지환 감독을 성토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드라마를 보면서 시청자들은 현의 연기력이 수준급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연기력에 관련된 것으로 고성이 오고갔다면 김지환 감독의 과도한 요구 때문에 상황이 틀어졌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여기에는 절대적이라 할 수 있는 현의 인지도가 한몫을 한 것도 있었다.

그 정보는 2차, 3차 가공이 되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였고, 처음에 김지환 감독이 현에게 목소리를 높여 연기를 지적했다는 이야기는 와전되어 두 사람이 목소리를 높여 싸웠다는 이야기로 바뀌었고, 급기야 출연료 인상을 놓고 싸웠다는 말조차 나오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소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날조였지만 자극적인 기사를 원하는 네티즌들은 그 기사를 보면서 현이 실제로는 성격이 좋지 않느니라는 말과 함께 열심히 악플을 달아대기 시작하였다.

현은 한국이라는 나라를 세계적으로 알린 영웅이었지만 삐뚤어진 사람들의 심정은 그 영웅을 추락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기도 한다.

사태가 좋지 않게 흘러가자 석규가 직접 사태 진화에 나섰다.

가공되지 않는 1차 기사를 좀 더 순화시켜서, 현이 근래 연기 슬럼프를 겪는 것 같아 김지환 감독이 현을 혼내고 머리를 식힐 겸 시간을 주었다고 발표한 것이다.

소속 연예인이 적은 탓에 무슨 안 좋은 여론이 형성되면 곧장 나서서 사태를 완화시키는 AA엔터테인먼트였다. 안 그래도 머리 아파죽겠는데 기자들이 달려들어서 창현의 이미지를 나쁘게 만드는데 일조를 하고 있으니 순간 열 받아서 난리를 칠 뻔하였다.

하지만 소속사와 기자들은 관계를 잘 형성해놓아야 하기에 간신히 참았을 뿐이었다.


그렇게 난리가 나고 있을 무렵, 창현은 저 멀리 떨어진 경주까지 내려와 있었다.

“후우!”

머리가 너무 복잡하여 김지환 감독에게 일주일 동안 나가지 못하겠다는 말과 함께 석규에게 짤막한 말을 남기고 곧장 집을 나섰다. 혹여 석규가 자신을 찾을까 싶어 핸드폰은 아예 집에 놓고 왔고, 돈을 인출한 것으로 위치를 찾아낼까 싶어 은행에서 이백만 원을 찾아 가방에 챙겨 넣고 왔다.

서서히 여름으로 접어들고 있는 날씨였지만 창현은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평소 잘 착용하지 않던 안경까지 씀으로써 분장을 마쳤다. 설마 자신이 이렇게 돌아다닐 것이라고 사람들이 예상할 리가 없었기에 빠져나오는 것은 너무나 쉬웠다.

나오고 무작정 터미널로 가다가 문득 오징어 회가 먹고 싶어서 창현은 곧바로 버스를 탄 채 속초로 향했다. 오징어는 속초가 유명하다는 말을 얼핏 들었던 것이다.

그렇게 속초로 향한 뒤 바닷가를 구경하면서 유명하다는 오징어 회를 실컷 먹었다. 아직 미성년자인 그가 혼자 다니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의아한 표정을 짓고는 했지만 그것은 알 바가 아니었기에 그저 오징어 회를 먹으면서 조용히 바닷가를 돌아다니며 복잡한 상념을 정리하고자 하였다.

바닷가를 거닐며 창현은 많은 생각을 하였다.

그리고 지금 그가 하고 있는 생각은 딱 하나였다.

‘내가 지금 잘하고 있는 걸까?’

모든 것을 내팽겨 치고 바닷가를 돌아보니 복잡하던 머리가 한결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지만 그렇다고 하여 자신의 고민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김지환 감독에게 들었던 지적. 그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그것이 정답에 가깝다고 할 수 있었다.

창현은 그의 말을 듣는 순간 자신이 몰입하던 감정이 거짓된 것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온몸으로 부정하고 싶을 정도로 거북한 느낌이 들었으니까.

그리고 그 말이 거북하게 들렸던 이유는 김지환 감독의 말이 진실이기 때문이었다.

“정말 내 내면에는 사랑이란 감정이 존재하지 않는 건가?”

창현으로 하여금 수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화두였다.

자신의 내면에는 정말 사랑이란 감정이 존재하지 않을까?

바닷가를 걸으면서 짭짜름한 바람의 향을 느낀다. 그리고 푸른색 바닷물을 보면서 자신의 감정이 진실된 건지 거짓된 것인지 생각을 해본다.

연기를 할 때 자신이 가장 어렵고도 쉽게 느낀 것이 감정 몰입이다.

어떤 대사를 할 때 목소리에 감정이 실려야 보는 사람이 진정성을 느낀다. 행동으로, 말로써 진정성을 발현할 수 있다면 다른 사람은 그 사람을 신뢰한다.

창현도 이와 같은 진정성으로 정상의 자리에 올랐다.

음향총서를 배울 때 음악강론에서 가장 중요하게 언급한 것은 바로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것.

그 사람의 마음을 울린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자신의 진실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라는 점이었다.

감정을 전달하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으니 다른 노래들과 큰 차별성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멜로디를 작곡하더라도 다른 작곡가들보다 훨씬 우위를 점하는 건 어려웠지만 작사를 하고 그 노래를 부를 때는 다른 곡들과 비교도 할 수 없는 차별성을 두게 된다.

노래를 만드는 것은 작곡이 전부가 아닌, 작사와 함께 부르는 가수가 그 노래에 담긴 의미를 얼마나 정확하게 전달하느냐게 중요했다.

그런 점에서 음향총서를 습득한 창현은 이 세 박자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면서 정상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고민에 고민을 하다가 창현은 불현 듯 깨달은 것이 있었다.

자신이 사랑에 관련된 곡을 제대로 써본 적이 없다는 것을 말이다.

여태까지 자신의 곡 특징을 살펴보면 직접적인 경험을 담아낸 것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거의 대다수가 제3자의 관점에서 마치 소설을 보듯이 한 것들이 많았고, 그것을 읽고 자신이 느낀 점을 발표하는 것처럼 사람들에게 의미를 전달하였다.

예전에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생각했다. 자신이 의미한 바를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자신은 약점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은연중 피하고 있던 것이다.

사랑이라는 키워드를.

연기를 하면서 사랑이라는 것을 피할 수 없게 되었고, 결국 정면으로 부딪치면서 자신의 약점이 여과없이 드러난 것이다.

“결국 난 도망자였다는 이야기군. 내가 이런 행동을 할 줄이야. 후우!”

스스로 약점을 깨닫는 것은 장점과 단점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장점은 다른 사람이 말해준 것보다 훨씬 절실하게 깨닫게 되어 극복을 위해 노력을 하게 된다는 점이다. 단점은 스스로 깨닫기가 무척 힘들다는 점이다. 이미 익숙해진 모든 것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살핀다고 해도 어느덧 그 시선은 느슨해지기 마련이고, 약점도 자신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여 자연스럽게 고착화 되는 셈이다.

김지환 감독으로 인해 자신의 약점을 깨닫게 되었고, 여러 고민을 하다가 스스로 그 의미가 무엇인지 깊게 깨닫게 되었다.

창현은 자신의 약점을 깨닫게 되자 웃음을 지었다.

“절망스러운데……? 하하!”

진짜 웃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약점을 깨달았지만 그 해결방안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이 아니었기에 그렇다.

약점을 알게 되면 뭐하나? 약점을 자각했다고 지금 당장 느끼지 못하는 사랑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하여 억지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사랑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억지로 한다고 하여 그것이 사랑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절망을 언급한 것이다. 약점을 자각했지만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약점을 깨달았는데 극복할 방법이 없다니. 이것이 진정한 절망이 아니면 무엇일까.

“미치겠군. 내가 이런 지경에 처하게 되다니.”

창현은 자신이 막힌 부분을 떠올려보았다.

드라마 상에서 자신이 막힌 부분은 애절하게 자신의 심정을 고백하는 부분이다. 마치 가문간에 철저한 원수지간을 맺고 있어 그 사랑을 이루지 못한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가해자와 피해자의 후손이 모든 사실을 알면서도 맺어지는 그 상황은 사랑과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는 감정이 함께 공존해야 한다.

자신이 그것을 연기한다? 나름대로 노력을 했지만 돌아온 말은 너의 감정은 거짓된 것이라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치를 깨닫게 되었다.

“나 혼자서 모든 역경을 극복할 수 있다는 건 거짓이었어.”

사랑은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다. 짝사랑도 사랑이긴 하지만 엄연히 반쪽짜리 사랑이기에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두 사람이 함께 하기에 사랑이지 않은가?

구체적으로 무엇이 사랑인지 아직 감을 잡지 못했지만 그것만은 확실했다.

이번 문제는 자신 혼자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결국 문제 해결을 위해 혼자 여행을 온 창현의 행동이 헛수고가 된 셈이다.

게다가 사랑이 무엇인지도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러다가 설마 자신이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인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터넷 어딘가에서 본 기억이 나는데, AB형 인간은 가슴이 뜨겁기보다는 머리가 차가운 사람이기에 사랑을 함에 있어서도 무척 계산적이라는 말을 보았던 것이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기는 해야 할 텐데. 누군가의 말을 듣고 내가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잖아? 나도 사람인데 설마 사랑이란 감정이 없겠어? 자각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지.”

그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위로였다.

자신 또한 한 사람의 인간인데 사랑이란 감정을 정말 느끼지 못하겠는가? 다만 자신이 자각하지 못하고 있을 뿐일 것이다.

“돌아갈까?”

자신의 문제를 깨달은 이상 해결을 하러 가기 위해 곧장 서울로 돌아갈까 생각을 하였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지금 간다고 해서 당장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 그동안 너무 여유 없이 달려왔어. 이번 기회에 내 마음 속에 사라진 여유를 되찾고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면서 마음을 다스리자.”

그렇게 생각하니 다른 곳으로 가보고 싶었다.

오징어 회로 미각을 만족시켰으니 이제 눈을 만족시켜야 할 차례.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적지가 많은 곳으로 향할 생각이었다.

“천년고도 경주로 가볼까…….”


경주에 가는 이유는 유적지를 보고 싶은 마음이 문득 들어서 그렇다.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초등학생 때, 혹은 중학생, 고등학생 때 경주로 수학여행을 한 번씩은 가본다.

운이 없다면 대부분의 수학여행을 강원도에 마련된 곳으로 가는 경우가 생기지만 그만큼 경주는 대한민국 학생들이라면 한 번씩 가보는 곳이라 할 수 있다.

경주 자체가 문화유적지로 가치가 높기에 무척 많은 관광객들이 늘 득실거리기도 한다.

창현이 경주로 가는 이유는 간단했다.

초등학생 때 수학여행을 가본 적이 없고, 중학생 때도 수학여행을 가본 것은 2학년 때가 처음이다. 하지만 그곳도 경주가 아니었고. 그래서 또래 학생들은 모두 경주에 한 번씩 가보았다고 하는데 정작 자신은 그런 경험이 없으니 기분이 좀 묘했다.

남들 다하는 걸 자신은 못한 기분이랄까?

“그래서 오긴 왔는데…….”

경주에 온 창현은 낭패감이 가득 찬 표정을 지었다.

오고 싶은 마음에 오기는 왔는데 사전에 전혀 조사를 하지 않은 탓에 어떻게 움직일지 막막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터미널 앞에 늘어선 안내표를 보고 택시에 탑승한다.

“결국에는 택시행이군.”

안내판으로 볼 때 거리가 감이 잡히지 않아 택시를 타고 가장 가까운 천마총으로 향하는 창현이었다.

금세 천마총에 도착한 그는 주변을 둘러보며 생각에 잠겼다.

중간고사가 끝난 시기여서 그런지 학생들이 무척 많았다.

얼핏 보면 자신도 비슷한 나이 대였기에 착각을 한 선생님들이 엮으려 들지 않게 멀찍이 떨어져서 곳곳을 구경하였다.

그러다가 창현의 눈에 들어온 것은 수학여행을 온 학생 커플들이었다.

자신과 비교해도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 나이들.

그런데 저렇게 다정한 표정을 한 채 어깨를 나란히 하고 주변의 시선에 아랑곳 하지 않은 채 애정행각을 벌인다.

이제 십대 후반으로 접어드는 시기.

과연 저들은 정말 ‘사랑’이라는 걸 하기에 저렇게 서로를 좋아하는 걸까?

“모르겠네.”

물끄러미 자신들의 애정행각을 바라보니 학생 커플의 시선도 창현에게 향한다. 그러자 자연히 시선이 마주하게 되었다.

보통 이런 경우가 되면 시선을 거둘 법도 한데 창현은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담담히 시선을 마주한다. 자신이 부끄러울 것도 없고, 솔로로서 열등감을 느끼거나 그런 것이 아니었기에 굳이 피할 이유를 느끼지 못했다.

창현이 담담하게 시선을 마주하자 오히려 학생 커플이 당황한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자기들끼리 쑥덕거리더니 자리를 벗어난다.

그 모습에 창현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내가 괜히 실례한 것 같네.”

그렇게 중얼거렸지만 실제 마음은 다가가서 물어보고 싶었다.

서로 정말 사랑하느냐고. 사랑이 무엇이냐고 묻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들었다.

하지만 그것이 실례라는 것을 알았기에 접근을 하지 못했다.

“응?”

문득 상념에서 벗어난 창현은 자신에게 제법 많은 시선이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학생 커플을 살펴보느라 느끼지 못했지만 모자와 안경을 착용했음에도 불구하고 꾸미지 않은 멋이 있는 그에게 사람들의 시선이 조금씩 집중되고 있던 것이다.

게다가 무언가 고독함과 쓸쓸함이 살며시 감도는 그의 아우라에 여학생들은 묘한 매력을 느끼며 힐끔힐끔 창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 되지 않지만 내공이라는 것이 감정에 영향을 끼치며 분위기를 자아내기에 그런 듯했다. 음향총서는 궁극적으로 마음을 울리게 만들어 다른 사람의 감정을 울리게 만드는 것이었으니 창현도 자각하지 못한 사이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들이고 있던 셈이다.

상념에서 벗어난 창현은 자신의 내공이 움직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곧장 제자리로 옮겨놓으며 쓰게 웃었다.

“주목받지 않아야 할 자리에서 주목을 받아버렸네.”

수군거리고 있는 것이 느껴졌기에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었다고 생각하며 창현은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다. 한차례 주변을 둘러보았기에 자리를 벗어나는데 망설임이 없었다.

그가 발걸음을 옮긴 것은 천마총 정문 방향이었다. 그곳으로 향하면 근처에 첨성대가 있기에 그곳을 보고 석빙고와 안압지, 박물관을 한차례 둘러볼 계획이었다.

호로로로로롱!

천마총에서 구입한 새소리가 나는 피리를 장난스럽게 불면서 발걸음을 옮기는 창현이었다.

물을 넣어 불면 마치 새가 지저귀는 듯한 소리가 나서 신기한 마음에 구입을 하였다.

그러면서 쉴 틈 없이 주변을 휘휘 둘러본다.

어느덧 발걸음은 첨성대에 이르렀는데, 아무래도 천마총보다 더 유명하다 보니 관광객들도 더 많은 느낌이었다.

첨성대는 별을 관측하는 거였다는 말도 있고, 제사를 지내던 곳이라는 말도 있었지만 아직 명확하게 해명된 것이 없다. 하지만 신라시대를 대표하는 유물 중 하나였기에 사람들이 무척 많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많아서 멀찍이서 구경을 하던 창현은 고개를 나직이 끄덕인다.

“첨성대도 괜찮은데?

그러면서 주변을 분주하게 돌아다녔는데, 안압지에서 잉어에게 뻥튀기를 주는 맛도 제법 일품이었다.

뻥튀기 하나를 물에 던지면 물을 먹은 뻥튀기가 점점 크기를 줄여나가는데, 그 상태가 되면 잉어가 슬그머니 다가와 뻥튀기를 한입에 쏙 빨아들인다.

팔뚝만한 잉어가 뻥튀기를 한입에 먹는 광경이 무척 신기했기에 창현은 뻥튀기 한 봉지를 사서 전부 던져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것도 나름대로 재미가 있네.”

그러면서 인도로 올라오던 창현에게 한 사람이 다가왔다.

“응?”

반사 신경이 좋은 창현이 몸을 돌리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창현의 반응에 다가오던 사람은 움찔했지만 이내 본래 기색을 되찾는다.

갑자기 자신에게 다가올 이유가 없었기에 창현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갑자기 무슨 일이시죠?”

창현 앞에 다가오던 청년은 그 말을 듣고 정신을 되찾으며 사과하고는 자신의 용건을 꺼내놓는다.

“아, 죄송합니다. 실은 사진을 찍으려고 하는데 부탁을 좀 드리고 싶어서요.”

슬쩍 뒤를 보니 비슷한 나이 대 여인이 서 있었다. 함께 사진을 찍으려고 하는데 그 사람이 자신으로 낙점되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창현은 자신이 오해했다는 걸 깨닫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예. 물론이죠. 카메라 조작법 좀 가르쳐주시겠어요?”

“감사합니다. 여기 버튼을 누르시고 이렇게 누르면 됩니다.”

선뜻 응해주는 창현의 모습에 청년이 감사의 인사를 표하면서 디지털 카메라 조작법을 가르쳐준다.

별로 어려울 것 없는 조작법이었기에 창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바로 카메라를 받아든다.

“예, 그럼 찍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서 청년과 여인이 나란히 서는 모습을 카메라로 비춰보고는 마치 전문 사진사처럼 각도를 맞추고 그대로 찍는다. 혹시 눈을 깜빡일지 몰라 연달아 세 번 정도를 찍은 뒤에 카메라를 내민다.

“여기 있습니다.”

창현이 디지털 카메라를 내밀자 여인이 찍은 것을 확인하고는 미소를 지으며 감사의 인사를 하였다.

“와, 잘 찍으셨네요. 감사합니다.”

“뭘요. 별로 수고한 것도 아닌데요.”

“아니에요. 이 정도면 충분히 잘하셨는 걸요. 어라?”

“네? 왜 그러세요?”

감사의 인사를 표하던 여인이 순간 멈칫하자 창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자 여인이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에요. 저기 잉어가 튀어 올라서 놀랐거든요.”

“그래요? 제가 뻥튀기 줄 때는 그런 장면을 보지 못했는데.”

잉어가 튀어 올라오다니. 진귀한 구경거리인데 보지 못하자 무척 아쉬운 기색을 보이는 창현이었다.

그러자 여인이 무언가 생각에 잠겨있다가 창현에게 말한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사진을 찍어주셨는데 음료수라도 하나 뽑아드릴게요.”

“굳이 그러실 필요 없는데…….”

그렇게 말을 하며 창현이 손을 뻗었지만 무의미한 행동이었다.

어느덧 청년에게 다가간 그녀가 귀에다가 무언가를 속닥거리기 시작한다. 그러자 청년의 눈이 크게 뜨이더니 살짝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여인은 자판기가 있는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여인은 음료수를 사러 가고, 청년은 창현에게 다가오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현, 맞나요?”

그 말을 들은 창현은 여인이 갑자기 왜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 알 수 있었다.

‘아, 날 알아본 거였나?’

그러면서 이미 확신단계라는 것을 알았기에 창현은 쓰게 웃음을 짓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알아보셨네요.”

“…….”

순순히 수긍하는 창현의 모습에 청년은 경악하여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만남이었고, 상대가 너무나 큰 거물이었던 것이다.

그 모습에 창현은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애인분이 알아보신 거죠?”

“예, 맞습니다. 혹시 현 씨가 아닐까 하더군요. 설마 현 씨일 줄이야. 노래 정말 잘 듣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지닌 소년이라는 것을 느꼈지만 그것이 다였다. 학교를 가야 할 이 시간에 이곳에 있다는 것은 무언가 하자가 있는 학생일 거란 생각이 들었으니까. 하지만 상대가 현이라는 사실에 청년은 경악을 감출 수 없었다. 연예인 중에서 가장 보기가 힘든 인물인 현을 경주에서 보게 되리라고 누가 감히 상상이나 했을까.

자신보다 훨씬 어렸지만 그를 대하는 것이 무척 어렵다고 느끼는 청년이었다. 창현에게서 은연중 뿜어지는 아우라가 그를 어렵게 만들고 있던 것이다.

어떻게 대할지 몰라 어색한 모습으로 서 있는데, 음료수를 사러 갔던 여인이 달려온다. 그리고는 창현에게 음료수를 내밀면서 말한다.

“무엇을 좋아할지 몰라서 복숭아 티로 사왔어요.”

그러면서 작은 페트병에 담긴 음료수를 내미는데, 자신이 탄산음료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언급한 적이 있다는 걸 떠올리고는 미소를 지으며 받아들었다.

“감사합니다. 설마 제 얼굴을 단번에 알아보리라고 생각 못했네요.”

“정말… 현 씨에요?”

여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창현의 정체를 물었다.

그러자 창현이 눈을 가리고 있던 안경을 살짝 벗고는 여인과 시선을 마주하며 인사한다.

“가짜는 아니니 의심하지 말아주세요.”

“꺄아! 정말 현 씨네. 저 정말 팬이에요. 이렇게 만나게 되어 영광이에요.”

“하하, 감사합니다.”

자신을 열성적으로 맞아주는 여인의 모습에 창현은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데 이곳은 어쩐 일로……?”

제법 예민할 수 있는 질문이었기에 목소리가 조심스럽다.

창현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아아, 휴가를 받아서요. 괜히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칠 수 있을 것 같아서 혼자 왔어요. 나름대로 준비를 했는데 절 알아보실 줄 몰랐네요.”

“딱 보는 순간 외모가 똑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리고 현 씨가 공개한 키랑 비슷한 것도 있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꺼내본 건데 정말이네요. 정말 영광이에요.”

말로 반가움을 표시하고 있지만 그보다 몸에 일어난 반응이 더욱 컸다. 창현을 만난게 어찌나 반가운지 몸을 베베 꼬고 있던 것이다.

자신을 너무 좋아해주는 여성의 모습에 창현이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너무 띄워주시면 좀 그런데.”

“그, 그런가요? 설마 이렇게 만나게 될 줄 몰라서요. 게다가 워낙 팬이기도 하고… 저 다크 스타 회원이거든요!”

“그래요? 다크 스타는 저도 자주 들어가고는 하는데… 여기서 만나게 되니 정말 반갑네요.”

그러면서 즐거운 이야기가 여러 차례 오고갔다. 청년도 창현의 팬이었기에 그런 여인을 말리지 않고 이야기에 동참하면서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가 지금 시간이 점심시간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여인이 창현에게 제의한다.

“혹시 점심 드셨어요?”

“아뇨, 먹지 않았는데…….”

“그럼 저희가 사드릴게요. 여기 근처에 맛있는 음식점이 있거든요.”

그 말에 창현이 손을 들며 말했다.

“아닙니다. 수익은 제가 더 많잖아요? 맛있는 음식점을 소개시켜드리면 제가 사드리도록 할게요.”

“정말요?”

“물론이죠.”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근처 음식점으로 향했다. 아무래도 혼자서 식사를 하게 되면 대충 때우는 경향이 생기는데 여러 명이서 먹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기에 같이 먹는 것이다.

게다가 자신을 알아보는 것이 기분 좋기도 했고.

여인은 창현에 대해 궁금한 것이 많았는지 이런저런 물음을 던진다. 그리고 여인의 부탁으로 가볍게 사진을 한 장 찍어주었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들 커플은 경주에서 살고 있는 이들로, 포항에 직장을 다니고 있는데, 주말에는 이렇게 첨성대나 안압지, 천마총 같은 곳으로 데이트를 온다고 한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창현 또한 여러 가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얻은 정보는 바로 경주빵에 관련된 것이다.

경주빵을 만드는 곳은 무척 많지만 그 원조는 황남빵이라는 것.

위치까지 친절하게 알려주자 창현은 유쾌했던 만남을 끝으로 황남빵으로 가서 황남빵과 찰보리빵을 한가득 샀다. 황남빵은 적당하게 단맛을 내고 있는데, 쉽게 질리지 않고 계속해서 먹게 만드는 매력을 지니고 있었고, 찰보리빵은 담백한 맛으로 어린 층보다는 어른들이 좋아할 법한 맛을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랑 어머니한테도 선물로 줘야겠군.’

선물로도 적합한 형태를 갖추고 있었기에 창현은 집으로 배달을 시켰다. 돈을 너무 많이 뽑아서 남아도는 돈을 꺼내들어 즉석으로 결제하는 돈 버는 남자의 위엄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먹을 황남빵과 찰보리빵을 한가득 들고 움직인다. 터미널 근처에 모텔이 많던데 그곳 중 방을 잡고 하루 머물 생각이었다.

‘내일은 전주로 가볼까.’

경주에 와서 황남빵을 먹었으니 이번에는 전주비빔밥이 땡기는 창현이었다.

머리를 식히기 위해 한 여행은 어느덧 전국 맛집 투어가 되어가고 있었다.


전주로 가서 전주비빔밥을 먹은 창현은 더 머물지 않고 곧장 서울로 올라왔다. 4일에 걸친 움직임은 창현에게 있어 그동안 꽉 조여 있던 마음을 풀어놓을 수 있게 만들었지만 여전히 사랑이라는 화두는 해결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가 느낀 것은 한 가지다.

‘사랑은 나 혼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더욱 근본적으로 파고들면 사랑이란 감정이 무엇인지 아예 자각조차 못하고 있었다.

속초, 경주, 전주를 돌아다니면서 창현은 커플로 보이는 사람들을 유심히 관찰하였다.

그들은 서로에게 모든 것을 다 줄 듯이, 이 세상에 자신 둘밖에 없는 것처럼 서로를 아끼고 좋아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것을 보고 창현이 느낀 것은 부럽다라는 감정보다는 왜 저런 모습을 할까? 였다.

어떻게 보면 서로가 서로를 전혀 모르던 사이 아닌가? 물론 친분이 생기고 친하게 지낼 수 있지만 저렇게 모르는 사람끼리 서로의 모든 것을 주려는 자세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얼핏 물음을 던져보기도 하였다. 왜 그렇게 서로를 아껴주냐고.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창현을 더욱 알쏭달쏭하게 만들었다.

그냥 좋아서 그렇단다. 사람을 좋아하는데 무슨 이유가 필요하냐는 말에 오히려 창현이 말을 잃어야만 했다.

사흘 동안 돌아다니면서 몸과 마음은 여유를 되찾았지만 머리는 더욱 복잡해져서 돌아왔다. 그리고 결론을 내린 것이 자신 혼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서울로 올라가기 위해 터미널에서 표를 끊고 시간을 보내며 동전 컴퓨터를 하고 있던 차였다.

창현은 거기에서 인터넷을 뒤져볼 수 있었는데, 연예 기사란을 보는 순간 헛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허허.”

연예 기사란은 온통 자신의 이야기로 도배가 되어 있던 것이다. 그뿐인가? 온갖 추측이란 추측은 다 되어 있었다. 김지환 감독과의 불화설부터 시작하여 드라마 제작진과 충돌 등 하나하나 세부적으로 나누면 수십 가지가 될 만큼 다양한 이유가 늘어서 있었다.

‘하기야, 그때는 좀 그랬지.’

창현은 김지환 감독이 자신을 혼내던 순간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이 몰입을 제대로 하지 못할 때 김지환 감독은 거침없이 자신을 혼냈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을 상대하는 방법 중 하책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의 인지도나 자존심을 고려했더라면 사람들이 많은 자리에서 혼을 낸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단 둘이 조용히 이야기를 나눈다면 모를까, 많은 사람들이 있는 자리에서 그렇게 행동하면 자신을 무시하는 행위였다.

물론 그것이 마냥 나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를 했기에 자신이 더욱 충격을 받았고, 결과적으로 잘못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제3자를 대할 때는 좀 올바르지 못하다는 것이 창현의 생각이었다.

“몰라서 그런 것일 수도 있으니 내가 직접 말을 하는 게 나을 테지.”

창현이 겪어본 김지환 감독은 정말 사귀어 볼 만한 인물이었다. 감독과 배우의 관계를 떠나 사람됨도 사람됨이지만 성격도 무척 좋았기에 그렇다. 아직 경험이 적어서 그런 듯하지만 창현이 말을 하면 충분히 수용을 해줄 수 있을 것이란 게 그의 생각이었다.

슬쩍 보니 석규가 본격적인 대응에 나서서 쓸데없는 추측성 기사는 빠르게 정리가 될 듯 싶었다.

“하기야, 아버지라면 믿을 만하지.”

일처리가 확실한 걸 믿고 있었기에 창현은 나직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버스 시간이 다 되었다.


“오랜만이구나.”

“오랜만이네요……?”

석규의 말에 창현이 쓰게 웃음을 지으며 그 말을 받았다.

서울로 올라온 창현은 곧장 석규가 있는 AA엔터테인먼트로 향했다. 쪽지 하나 달랑 남기고 지방으로 떠난 만큼 자신이 잘못한 걸 알고 있었기에 서울로 올라오자마자 석규에게 온 것이다.

뭐라 불호령을 떨어뜨릴 거란 생각을 했지만 석규는 그러기보다는 담담하지만 걱정이 담긴 어조로 창현을 맞이하였다.

그의 눈에 들어온 창현의 모습은 크게 문제가 없어 보였다. 김지환 감독의 말을 듣지 않았다면 평상시 모습과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그것은 달리 말하면 그만큼 자신의 감정을 감추는 것이 능하다는 이야기였다.

결국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이야기니 그것이 속으로 곪아 터지는 것일 테지.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으라고 말을 하고 싶지만 그 말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그것이 자신과 창현의 암묵적인 선이었던 것이다. 이 선을 넘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

“꽤 여기저기 돌아다닌 것 같던데?”

“하하! 그렇죠?”

창현이 경주에 왔었다는 소문은 이미 인터넷 상에 널리 퍼져 있었다. 경주에서 만났던 커플이 창현과 함께 찍은 사진을 인터넷에 올렸던 것이다. 감독님에게 휴가를 받아 내려왔다는 말이 첨부되었기에 석규의 대응에 도움을 주기도 했고.

“여기저기 돌아다녔어요. 속초도 가고, 경주도 가고. 전주를 갔다가 서울로 올라왔죠.”

“어떻게 보면 남한을 한바퀴 돌아서 왔구나.”

“그러네요, 하하!”

“그래서, 가서 좀 얻은 게 있더냐?”

문제점을 극복했냐고 묻는 석규였다.

그 말에 창현은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 혼자서 해결하기 쉽지 않은 문제더라고요. 해결방안조차 감을 잡지 못하겠고요.”

“흐음.”

창현의 말을 들으니 생각보다 더 심각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감조차 잡지 못했다는 것은 극복하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사랑이라는 것이 갑자기 찾아올 리가 없을 테니 부단한 노력을 동반하더라도 앞으로 몇 년 이상의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드라마는?

상황이 제법 심각하다.

“드라마는 어떻게 할 생각이더냐?”

“드라마는… 일단 3일이라는 시간이 남았으니까요. 그 기간 동안 노력을 해보고 되지 않으면 김지환 감독님에게 말씀드려야죠. 저의 거짓된 연기와 타협을 한다거나 아니면 시간을 더 준다거나. 하지만 시간을 더 준다 하더라도 쉽지 않을 것 같아요.”

“음! 사랑이라는 게 쉽지 않지.”

창현의 말에 동의를 표하는 석규였다.

그러자 창현이 슬쩍 석규를 바라보면서 물었다.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뭐냐.”

“사랑이 뭐죠?”

무척 간단하면서 어려운 질문이었다. 무슨 대답을 원하는 것일까?

석규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창현을 바라보자 그가 자신이 알고 있는 바에 대해서 말한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사랑이란 것은 이성에게 이끌려 열렬히 좋아하는 마음이라고 하더군요.”

“그 말 그대로다. 이성을 열렬히 좋아하는 마음이 바로 사랑이지.”

“하지만 저는 이성이 좋지만 열렬히 좋아한 적은 없어요.”

“그래서 네가 아직 사랑을 모른다는 것이다. 사랑에 대한 것은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가 존재한다. 그것은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하는 것이지. 지금의 너는 머리로 모든 것을 판단하려 하고 있어. 그러니 사랑이 무엇인지 감을 잡지 못하는 것이다.”

그 말을 들은 창현이 눈을 살짝 크게 뜨더니 석규에게 다가가면서 물었다.

“좀 더 자세하게 들을 수 있을까요?”

하지만 석규가 해줄 수 있는 말은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그는 고개를 저으면서 창현이 원하는 대답을 해주지 못했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여기까지다. 사랑이라는 것은 말로 표현함에 있어 무척 난해하다고 할 수 있지. 말로 표현해줄 수 있다면 내가 진즉에 너에게 말을 해줬을 것이다.”

“…결국 제 스스로 답을 찾아야 한다는 거군요?”

“도움이 되지 못해서 미안하다.”

창현의 말에 석규는 한숨을 푹 내쉬면서 사과를 하였다. 말로는 무엇을 말하지 못하겠느냐만은, 여기서 섣불리 말하다가 창현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 수 있기에 그가 해줄 수 있는 말은 많지 않았다.

자칫 잘못된 생각을 갖게 되어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걷잡을 수가 없어질 테니까.

지금 창현의 상태는 사랑에 있어 백지와도 같다. 그런 그가 잘못된 방향으로 사랑을 깨닫게 되면 날개가 꺽여버린 새가 될 수도 있다.

“아니에요. 그 정도만으로도 충분해요. 아버지는 제 스스로 답을 찾길 바라시는 거죠?”

“그래, 사랑이라는 것은 단순히 말로 정리가 되어 있는 듯하지만 사람마다 느끼는 것은 제각각 다른 법이지. 그런 만큼 네 스스로 사랑을 깨닫고 너만의 사랑이 무엇인지 정립하는 게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알겠어요.”

이렇게까지 말을 하는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창현이 아니었다. 그는 석규의 말을 충분히 이해했고, 다른 사람에게 기대는 것이 아닌, 자신 스스로 해답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말로는 쉽지만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그것을 알기에 석규는 창현에게 사과를 했던 것이다.

“나는 네가 해답을 찾을 것이라 믿는다.”

지금 상황에서 석규가 보여줄 수 있는 최선은 창현을 굳게 믿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뿐이다. 그리고 그는 창현이 이 위기를 잘 해낼 것이라 믿고 있었다.

자신을 믿어주는 석규의 모습에 창현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제부터 어떻게 하지?”

AA엔터테인먼트를 나서 집으로 돌아온 창현은 침대에 앉아 한숨을 푹 내쉬며 자신의 행보에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자신 스스로 답을 찾아야 한다고 했지만 솔직히 그 말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제대로 감을 잡지도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사랑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그것도 단 3일 사이에?

불가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오기가 생겼다.

도대체 사랑이라는 것이 무엇이기에 자신을 이렇게 괴롭힌단 말인가? 단순히 서로를 좋아하는 것에 무엇이 그렇게 복잡하기에 자신을 이렇게 괴롭게 만드는 것일까?

“날 이렇게 괴롭힌 이상 대가는 반드시 치러야지. 어떤 건지 반드시 깨닫고 부려 먹어주겠어.”

이렇게라도 말을 해야 한줄기 위안이 된다.

남은 시간은 3일. 그 시간 동안 창현은 자신에게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다. 그리고 촬영장에 나타나 자신이 문제점을 완벽하게 극복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자신이 문제점을 해결한 모습을 보고 경악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일 뿐, 실제로는 아직 감도 못 잡고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충분히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에 대해 물어보았다. 하지만 자신은 그에 대해 공감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무엇이 문제일까? 자신이 정말 사랑이라는 감정을 몰라서? 아니면 자신이 질문을 한 상대가 대부분 자신보다 나이가 훨씬 많아서?

“잠깐.”

나이가 많다는 대목에서 창현은 멈칫했다. 그리고 자신의 실수가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이 여태까지 사랑에 대해 물어본 사람들은 나이가 적어도 이십대 중반에서 많게는 사십대 중반이었던 것이다.

오 년만 지나도 세대 차이를 느낄 만큼 빠르게 변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그런데 자신은 최소 열 살 이상 나이 차이가 나는 사람들에게 사랑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았던 것이다.

세대 차이가 나는 만큼 자신은 그 말에 공감하지 못했던 것이고.

“그렇군. 내가 실수를 했던 거였어.”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깨달은 창현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리고 자신과 나이 대가 비슷한 사람에게 조언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였다.

누구에게 조언을 구하는 것이 좋을까?

창현의 핸드폰에는 제법 많은 사람들의 핸드폰 번호가 저장되어 있다. 그리고 연락을 하면 자신과 만나기 위해 대부분이 시간을 내줄 것이다. 대인관계를 그리 나쁘게 하지 않았기에 낼 수 있는 자신감이었다.

하지만 정작 누구에게 해야 할지 망설여졌다.

자신을 위해 시간을 내줄 사람은 많지만 진실 된 조언을 해줄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

거기에서 멈칫거림이 생겨났다.

그리고 이어지는 고민.

진심으로 조언을 해주더라도 자신의 말을 잘 들어주고 합리적인 결론을 내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했다.

누구에게 연락을 해야 할까.

고민에 고민을 하던 창현은 순간 멈칫했다. 그리고 이내 눈을 빛냈다.

연락을 할 상대를 정한 것이다. 시간이 될지 안 될지는 모르지만 자신이 연락을 한다면 시간을 내줄 것이라 생각했다.

창현이 정한 상대는 예전에도 자신이 미국 진출을 놓고 상담을 해주었던 인물이다.

그 인물은 바로 소녀시대 리더이자, 창현에게 있어 든든한 조언자로 남은 인물.

바로 탱구였다.


창현에 대한 좋지 않은 기사가 연속적으로 올라오기 시작하면서 소녀들의 분위기도 착 가라앉았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았는데 그것이 현실로 드러났던 것이다.

특히 순규가 받았던 충격은 매우 컸다. 자신의 생일 축하 문자 메시지 하나 보내지 않아서 괘씸하다고 방방 날뛰었는데, 창현은 심각한 문제에 휩싸여 있던 것이다.

“내가 바보야, 내가 바보…….”

창현의 입장은 고려하지 않은 채 자신만 생각한 것에 자괴감이 생겨난다. 자신이 너무 이기적이었다는 생각이 뒤늦게 전신에 감돌고 있었다.

다른 소녀들은 순규보다 덜했지만 걱정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수습에 나선 AA엔터테인먼트에서 언급한 내용도 심상치 않게 들렸던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이번 일이 범상치 않다는 것을 다른 소녀들도 눈치 채게 되었다.

그리고 곧바로 청문회가 열리게 되었다.

그 대상은 태연과 윤아였다.

창현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그 자리에 태연과 윤아가 있었기에 두 사람을 중심으로 청문회가 열렸던 것이다.

태연과 윤아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기에 잔뜩 얼어있는 표정을 하고 있다. 그런 그녀들 앞에 수연을 중심으로 좌우에 미영과 유리가 포진 되어 있었다. 이번 청문회를 위해 전대미문의 와룡파니와 사마율이 협력 체제를 구축한 것이다.

수연이 매서운 눈으로 두 사람을 훑어보더니 묻는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봐.”

“…….”

태연과 윤아는 마치 사전에 협의를 한 것처럼 서로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그러자 수연이 눈살을 살짝 찌푸려졌지만 호통을 치지는 않았다. 오히려 낮게 가라앉았지만 부드러운 목소리로 두 사람에게 말했다.

“이번 일은 어차피 외부에 알려졌잖아? 그런 만큼 함구령이 내려졌다고 해도 말을 해도 괜찮다고 생각해. 창현이는 너희 둘뿐만 아니라 우리들에게도 큰 은혜를 입혔고. 그런 만큼 우리들도 사정을 알아서 도와주고 싶어.”

그것이 순수한 수연의 마음이었다.

자신이 어려울 때는 창현이 큰 도움을 주지 않았던가? 그런데 정작 창현이 어려울 때는 영문도 모른 채 자신이 아무것도 도와줄 수 없다는 사실이 무척 무력감을 들게 만들었다.

소녀시대 내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구축하면 뭐하는가. 제대로 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인데 말이다.

그녀는 이미 전전날 촬영장에 간 적이 있기에 창현이 근래 들어 연기를 할 때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상태다. 이번 일도 그와 연관이 있다고 생각했기에 추궁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수연은 태연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윤아에게 시선을 옮기며 묻는다.

“윤아야, 이래도 말하기 어려워?”

“그게…….”

윤아가 태연을 힐끗 보면서 말문을 열 듯 말 듯한다.

그러한 윤아의 행동에 태연은 모든 걸 포기한 듯 고개를 끄덕인다. 어차피 외부에 알려졌기에 김지환 감독의 함구령도 유명무실한 상태, 여기에서 더 비밀을 지키고 있다가는 감정만 상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말을 해도 좋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다만 태연은 드라마 관계자가 아니었기에 윤아가 말을 하는 것이 더 합당하다고 생각했다.

태연의 허락이 떨어지자 윤아가 입을 열기 시작했다.

“사실은요…….”

어렵사리 열린 윤아가 그 당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소녀들은 윤아의 이야기를 눈을 반짝이며 듣고 있었다. 수많은 기사들이 범람하고 있었지만 제대로 진실 되게 접근한 것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게다가 이야기가 와전되어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경우가 많았기에 윤아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야기가 진실에 가장 가까운 것이었다.

멤버들의 시선을 받으며 윤아는 촬영장에서 있던 일들을 이야기 한다. 창현이 근래 들어 연기를 함에 있어 고생을 하고 있다가 태연과 함께 촬영장을 찾은 날 사건이 터졌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창현에게 심각한 슬럼프가 되어 바로 촬영장에서 모습을 감추었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윤아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서 소녀들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안타까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창현이 그런 고역을 겪고 있을 줄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이야기가 모두 끝나자 각자 생각에 잠긴다.

이번 청문회를 주도했던 인물 중 한 사람인 미영은 창현이 처한 상황에 마음이 짠해지는 걸 느껴야만 했다.

‘창현이가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니.’

너무나 안타깝고 눈치 채지 못한 자신이 미안했다. 주변에 적(?)들이 너무 많다 보니 그들을 견제하느라 창현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던 것이다.

자신은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며 미영은 자책하였다.

하지만 이번 상황이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걸, 와룡이라는 칭호를 획득한 그녀는 놓치지 않았다.

눈 딱 감고 비리 한 번만 저지르면 일확천금(?)이 흘러들어오는 기회다. 이 기회를 살려 나서야 할지 아니면 뒤로 물러서야 할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미영의 마음이 왔다갔다 하였다.

그것은 사마율, 유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건 하나의 기회가 될 수 있는데…….’

혼란에 빠진 창현인 만큼 그를 구해준다면 이번 기회는 둘도 없을 값진 기회가 될 것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유리는 한 가지가 걸렸다.

창현의 혼란 상태를 이용하여 자신의 호감도를 끌어올리려는 것이 뭐랄까, 무척 비겁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승리를 위해서는 모든 요소를 활용한다. 그것이 유리의 생각이고, 여태까지 그래왔다. 냉철한 분석으로 지영의 성격을 파악하고 정면돌파를 함으로써 그녀의 허락을 얻어내지 않았던가?

숨길 수 없는 깝의 본능으로 인해 일이 틀어져버린 상황이지만 어쨌든 계책을 사용함에 있어 유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하지만 상황도 상황 나름. 창현의 혼란스러운 상태를 이용하여 호감을 획득하면 자신의 마음이 편하지 않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결정적인 것은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자신이 있었다.

‘내가 굳이 그걸 이용할 필요는 없어.’

정말 좋아한다면 이것은 잘못된 방법이다.

잘못된 방법을 사용할 만큼 자신은 궁하지도 않았다. 그것이 유리의 생각이었다.

허나…….

‘내가 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도 하면 안 되겠지?’

내가 못 먹을 떡 남이 먹으면 배가 아프지 않은가? 지금 유리의 심리 상태가 딱 그러하였다. 자신의 마음 상태가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기에 하지 않을 것이라 했지만 지금 자신의 옆에서 빠른 계산을 하고 있는 미영이나 최종보스 수연이라면 그것을 이용하기 위해 나설 수도 있다.

그것을 미연에 차단하는 것이 자신의 역할.

그래야 공정한 경쟁이 될 것이니 유리는 앞으로 나서면서 침착하게 입을 연다.

“확실히 창현이의 문제는 안타까워. 그러니 이번 일은 우리가 힘을 합쳐서 도와주는 게 어때?”

“그게 무슨 말이야?”

윤아의 말을 듣고 각자 치열한 연산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것은 다른 소녀들도 마찬가지였고, 그 계산 과정에서 완전히 어긋나버리는 말을 꺼낸 유리를 보며 수영이 물었다.

그러자 유리는 수영의 속내를 알고 있다는 듯, 싱긋 웃음을 지어보이며 말한다.

“간단해. 이번 일은 그 사안이 중대하잖아? 아마 창현이한테 있어서도 무척 중요한 일일 거야. 창현이는 개인적으로 우리에게 많은 기회를 주었다고 생각해. 데뷔를 하기 전에 보컬 트레이닝을 도와주기도 했고, 데뷔 후에 여러 도움도 받기도 했고. 그러니 이번만큼은 우리가 도와주자는 이야기지. 물론 혼자 나서는 앙큼한 행동을 금지하고.”

그러면서 날카롭게 빛나는 눈으로 소녀들을 훑는 유리였다.

속내를 정확하게 꿰뚫어보는 그녀의 눈동자에 소녀들이 가늘게 몸을 떨었다. 자신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유리가 귀신같이 알아차린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하자는 거지?”

수연이 유리에게 물었다.

그녀는 먼저 선수를 친 유리가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독주를 방지하고자 하는 의미가 담겨있기에 불쾌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모두가 출발점이 같다면 최종 승자는 자신일 것이라 굳게 믿고 있었으니까.

수연의 말에 유리가 싱긋 웃음을 지었다.

“간단해. 휴가를 받았으니까 창현이는 조만간 돌아올 거라는 게 내 생각이야. 그렇게 되면 혼자서 이야기를 나누지 말고, 다 같이 함께 도와주자는 이야기지. 너희들도 창현이한테 신세 진 게 많잖아? 그런 만큼 이번 일은 다 같이 나서서 도와주는 게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 어때?”

다 같이는 개뿔, 혼자서 나서는 것은 비겁다고 생각하니 다른 사람이 나서지 못하게 하는 예방차원에 불과하였다.

“…….”

하지만 그 말은 제법 많은 소녀들의 공감을 사고 있었다.

자신이 기회를 움켜쥐면 좋다. 하지만 그 기회를 놓치게 되면 어떻게 될까?

기회를 놓친 채 다른 사람이 더 앞서 나가는 모습을 이를 부득 갈며 지켜보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가 가질 수 없다면 다른 사람도 가지면 안 된다.

이것이 바로 사람의 이기적인 심보였다.

유리의 제안에 가장 먼저 동의하고 나선 것은 같은 책사 캐릭터인 미영이었다.

그녀 또한 이번 기회를 놓치는 것이 아쉬웠지만 다른 여덟 명을 견제하고 독주할 자신이 없었다. 그런 만큼 다 같이 기회를 박탈해버리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했다.

‘유리가 좋은 생각을 했어.’

숙명의 맞수(?)인 만큼 유리가 어째서 이 제안을 했는지 꿰뚫어보는 미영이다.

“좋아, 난 유리의 말에 찬성이야. 우리 모두 창현이한테 신세를 졌으니 다 함께 창현이를 도와야 한다고 생각해. 그것이 공평하다고 생각하고. 제시는 어떻게 생각해?”

미영은 소녀시대 최종보스인 수연의 동의를 끌어내고자 하였다.

그녀의 동의를 이끌어내면 상황은 종료인 것이나 다름이 없다.

“나는… 좋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말끝을 흐리던 수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같은 출발선이라면 자신이 압도적으로 유리하기에 그녀로서는 손해 볼 것이 없었다.

“나도 찬성.”

“저도요…….”

수연의 찬성을 시작으로 그녀를 따르는 효연과 윤아가 찬성을 하면서 순식간에 과반수를 넘기게 되었다.

대세가 그렇게 흘러가는 듯하자, 따로 사과를 하며 호감도를 상승시키려던 순규는 계획이 어긋나는 느낌에 인상을 살짝 찡그렸지만 결국 찬성을 표했다.

남은 것은 태연과 주현 뿐.

태연은 무언가 생각에 잠겨있는 듯하다가 순규가 찬성하는 모습을 보이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나도 좋아.”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주현이었다.

그녀는 쉽사리 동의를 할 수 없었다. 유리의 말은 단독 찬스를 가지려던 자신의 속내를 정확하게 꿰뚫어보고 있는 말이었기에 그렇다. 이번 기회를 잘 살리면 창현에게 호감을 사내는 것은 물론 시아버지의 후원으로 압도적인 독주를 할 수 있는 기회다. 이 기회를 놓치기에는 너무나 안타까웠다.

무엇보다 그녀는 여행을 떠난 창현이 언제 도착할지 대략적으로 알고 있었다.

“…….”

“주현이 넌 반대야?”

대답을 하지 않은 채 생각에 잠긴 주현의 상념을 단호하게 끊어버리는 수연이었다. 그녀는 주현의 숨겨진 면-흑화 서로로-를 보았기에 무언가 계책을 수립하고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경계해야 할 인물로 그녀를 꼽고 있는 실정이었다.

‘아…….’

수연의 말에 주현은 반대하기 힘든 상황이 되어버렸다. 다른 언니들 모두가 동의를 했는데 자신이 반대를 해버리면 여덟 명 모두를 적으로 만드는 우를 범할 수 있던 것이다.

그렇다고 이 좋은 기회를 날리려니 너무나 아까웠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는 주현.

그러다가 다른 언니들의 눈초리가 점점 변하는 것을 느끼고는 결국 대답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저도 찬성이에요.”

소녀시대 아홉 명의 지장이 찍힌 ‘창현 공동 헬프 조약’이 채결되는 순간이었다.


‘아까운데…….’

방으로 들어선 태연은 스케줄 준비를 하면서 안타까움을 감출 수 없었다.

윤아와 자신만 알고 있기에 이것을 잘만 하면 기회로 삼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윤아도 알고 있는 사실이고, 자신만 행동하면 비겁한 것 같아서 조용히 묻어두려고 했다.

하지만 계산이 빠른 유리가 다 같이 하자는 걸 듣고 자신이 지닌 정보의 가치가 생각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자각할 수 있었다.

창현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자연스럽게 전달하면서 호감도를 상승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던 것이다.

그런 가치를 지닌 것이란 걸 눈치 채고는 유리가 재빨리 차단을 한 것이다. 그리고 평소와 달리 날카로운 눈매를 보이는 미영이 그에 동조하고 나선 것이고.

큰 기회를 놓쳤기에 태연은 진한 아쉬움을 느껴야만 했다.

‘그래도… 이 기회를 이용하려는 것은 나쁘니까.’

다른 사람의 위기를 자신의 기회로 이용하려는 것은 좋지 않은 행동이다. 그걸 위안 삼아 자신을 위로하는 태연이었다. 만약 홀로 나서려 했다면 그건 무척 좋지 않은 행동이라고 말이다.

♩♪♬

스케줄이 없는 멤버들은 숙소에서 시간을 보내고, 자신은 단독 스케줄이 있기에 숙소를 나섰다. 그리고 막 엘리베이터에 탑승할 무렵, 핸드폰에서 벨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이 시간에 누구……?”

혹시 숙소에 다 쓴 물건이 있어서 자신에게 사오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 핸드폰을 꺼내든 태연의 눈에 순간 광망이 번뜩였다.

연락이 온 상대는 다름 아닌 창현이었던 것이다.

태연이 서둘러 목을 가다듬고 전화를 받기 시작했다.


“여보세요?”

-태연 누나, 저예요, 창현이.

자신이 본 것이 착각이 아니라는 듯 창현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태연은 감격의 도가니로 빠져들었다. 다른 멤버들이 창현의 전화를 받은 것을 본 적이 없으니 그가 돌아오고 자신에게 가장 먼저 연락했을 확률이 높았던 것이다.

자신에게 가장 먼저 연락이라니! 이것은 자신을 가장 각별하게 생각한다는 것이 아닌가?

가까스로 두근거리는 마음을 다잡으며 태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갑자기 무슨 일이야? 여행 갔다면서? 나한테 먼저 연락한 거야?”

창현을 걱정하는 말을 하면서 은근슬쩍 자신에게 가장 먼저 연락을 했는가 묻는 태연이었다.

-네, 먼저 아버지에게 연락을 하기는 했지만 그 다음이 누나네요. 여행은 다 끝났고요, 지금은 숙소에요.

“그래? 갑자기 여행을 갔다고 해서 많이 놀랐거든.”

침착하게 말을 하지만 태연은 속으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창현이 가장 먼저 연락을 한 것이 자신이란다. 이것은 자신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을 뜻하지 않은가?

사소한 거지만 그것만으로도 태연의 기분은 무척 좋아졌다.

-좀 좋지 않은 일이 있어서요. 걱정을 끼쳐드렸다면 죄송해요.

“아니야, 기분이 좋지 않을 수도 있지. 사람인 이상 언제나 행복할 수는 없잖아? 기분이 좋지 않은 날도 있기에 기분 좋은 날이 더욱 각별하게 느껴지는 것일 수도 있고.”

-하하, 그건 그러네요. 모든 것은 상대적이니까요.

“그런데 무슨 일로 연락한 거야? 여행을 갔다왔으면 다른 애들한테도 연락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렇게 말을 했지만 태연의 가슴은 두근두근거리고 있었다. 만약 다른 멤버들에게도 연락을 한다면 협정을 맺은 대로 행동을 해야 했던 것이다. 별 것 아닌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녀들이 맺은 협정은 무척 강력한 효력을 발휘하여 자칫 잘못하다가는 멤버들에게 집단 다구리를 당할 수도 있다.

-아, 그건 그런데 아직은 알리고 싶지가 않아요. 앞으로 삼 일 동안 편안하게 있고 싶거든요. 누나한테 연락을 한 것도 따로 목적이 있고요.

“목적? 뭔데……?”

목적이라는 말에 태연이 다소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순수한 의미로 자신을 찾은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한 태연의 기색을 느끼지 못했는지 창현은 자신의 목적을 털어놓는다.

-다름이 아니라 오늘이나 내일 잠깐 시간이 되는가 싶어서요.

“시간……? 그건 갑자기 왜?”

자신에게 시간을 내달라니?

의아한 목소리로 태연이 묻자 창현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한다.

-할 말이 있어서요. 스케줄이 바쁘다면 어쩔 수 없고요.

“잠깐만.”

창현이 직접 만나자고 하는데 거절하면 이것은 도리가 아니다. 태연은 재빨리 자신의 스케줄에 대해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과는 제법 실망스러웠다.

소녀시대 중에서 윤아와 더불어 가장 많은 스케줄을 소화하는 그녀는 넉넉하게 시간을 낼 수 없던 것이다. 특히 낮 시간에는 스케줄로 꽉꽉 채워져 있어서 시간을 내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웠다.

최소 일주일 동안 스케줄이 꽉 차 있는 실정이었으니까.

태연이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낮에는 힘든데…….”

모사재인 성사재천이라더니, 기회가 왔는데 하늘이 그 뜻을 이루어주지 않는 것 같아 무척 섭섭한 태연이었다.

되지 않는다는 그녀의 말에 창현도 실망한 목소리로 말한다.

-그래요? 아쉽네요. 잠깐, 방금 낮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밤에는 시간이 된다는 이야기죠?

밤이라는 말에 순간 태연이 눈을 번뜩였다. 창현의 말을 떠올려보니 딱히 낮에 시간을 내달라는 말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그는 현재 휴가 상태이기에 스케줄이 없다. 그것은 자신의 사정에 따라 맞춰줄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게다가 생각해보면 낮에 자신이 나가려고 할 때 과연 멤버들이 순순히 보내줄까? 협정을 맺는 순간부터 멤버들은 서로가 서로를 견제해야 할 의무를 지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기에 자신이 낮에 나가려고 하면 추적자가 따라 붙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스케줄이 끝나고 어둠에 몸을 숨긴 채 만나는 것이 좋다.

태연은 서둘러 동의를 표하며 말한다.

“응, 낮에는 안 되지만 밤이라면 가능해. 밤이 된다면 밤에 만날까?”

-네, 언제쯤이요?

창현이 수락하자 태연은 속으로 웃음을 지으며 창현에게 말했다.

“라디오 스케줄이 10시에 끝나거든. 그리고 10시 30분쯤에 숙소에 도착하는데 뭐 사갈 게 있다고 말을 하면 상가에서 내릴 수 있거든. 상가에 위치한 커피숍이 자정까지 한다던데 거기서 만날까?”

그렇게 말을 하는 태연의 가슴은 두근거리고 있었다. 이것이 성공하면 창현과 만남이 성사되는 것이고 실패하면 만남은 이루어지지 못할 것이다.

창현이 어떤 대답을 할지 기다리는 그녀의 얼굴에 초조함이 감돌고 있었다.

그러길 잠시, 창현은 무언가 계산을 하는가 싶더니 이내 대답을 한다.

-으음! 10시면 보통 수면을 취하지만 이번 일은 제법 중요한 거니까… 알겠어요. 10시 30분에 누나가 커피숍으로 오세요. 전 커피숍 안에 있을 테니까요.

“정말?”

수락이 떨어지자 태연의 표정이 태양처럼 환하게 밝아졌다. 희망이 별로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창현은 자신의 요구조건을 들어주었던 것이다.

그녀의 기쁜 목소리에 창현이 어색하게 대답했다.

-너무 좋아하시는데요? 음! 누나가 좋다면 저도 나쁘지 않죠. 그럼 오늘인가요, 내일인가요?

“오늘이 좋을 것 같아.”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오늘 바로 즉석 만남을 추진하는 태연이었다.

-그렇게 하도록 하죠. 그럼 조금 있다가 만나요.

“응응.”

창현의 대답을 들은 태연이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는 입가에 진한 미소를 지었다.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지만 이건 기회인 게 분명해.”

방금 전 멤버들과 맺은 협정 따위는 태연의 안중에 사라진지 오래였다. 거기에 명시된 것은 스스로 능동적으로 창현을 만나려 하는 것은 금지된 것이 아닌가? 하지만 지금 상황은 자신이 능동적으로 나선 것이 아닌, 창현이 능동적으로 나선 것이 자신은 수동적으로 나섰다.

결코 협정을 위반한 것이 아니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라는 것과 다를 바가 없지만 그러한 자기합리화는 태연으로 하여금 굳은 마음을 지니게 만들었다.

“난 협정을 위반하지 않았어. 창현이가 먼저 연락을 해왔으니까. 그러니 나는 켕길 이유가 없지.”

그렇게 자기합리화를 하며 자신을 데리러 온 차에 탑승하는 태연이었다.

오늘은 일진이 무척 좋은 날 같았다.

그리고 불과 한 시간 전에 맺은 협정이 본격적으로 효력을 잃는 순간이기도 하였다.


스케줄을 하는 태연은 무척 적극적이었다. 빨리 밤이 찾아오길 바랐기에 그녀는 멍한 표정을 지은 채 죽치고 있는 것보다 열심히 나서서 하는 것을 택했다. 열심히 움직이고 또 움직이다 보면 시간은 금방 지나간다는 걸 그녀는 알고 있기에 그렇다.

매사에 의욕이 넘치고 열심히 하려고 하는 그녀의 행동에 PD가 많은 칭찬을 해주었고, 그 칭찬에 힘입어 태연은 스케줄을 성공리에 끝마칠 수 있었다.

“오늘은 무척 운이 좋은 것 같아.”

칭찬도 받고 약속도 생기고.

태연은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라디오 스케줄을 위해 움직였다. 요즘 스케줄도 많고 앞에서 혼나는 창현의 모습을 보았기에 무척 머리가 복잡했는데 창현이 자신에게 가장 먼저 연락을 해주니 그것 하나만으로도 기분이 무척 좋았다.

도대체 오늘 만나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것일까.

아니, 그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우울한 창현을 위로해줄 역할로 자신이 낙점되었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으니까. 창현이 위급한 상황에서 자신을 찾았다는 것은 그만큼 의지가 되고 믿을 수 있다는 뜻일 것이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할수록 기분은 더 좋아져갔고, 라디오 스케줄도 의욕적으로 해내는 그녀를 보며 청취자들도 무척 좋은 반응을 보내주었다.

“헤헤.”

“의욕적으로 하는 건 좋은데, 왜 저래?”

열심히 하는 건 좋은데 잠시 쉬는 시간마다 멍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생각하며 웃음을 짓는 태연의 모습에 주변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해야만 했다.

하필 그 날은 보이는 라디오였기에 청취자들은 그런 태연의 모습을 보고 멍탱구 혹은 백지 탱구라 부르며 귀엽다고 해주었다.

과도한 의욕이 새로운 별명을 탄생시킨 어이없는 하루가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라디오 스케줄을 끝내고 태연은 숙소로 복귀하고 있었다. 숙소로 거의 다 와가는 시점에 시간은 10:25분. 평소 30분 전후로 도착하는 걸 감안하면 제법 빠르게 도착하고 있었다.

막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태연이 로드 매니저에게 말한다.

“잠시만요, 오빠. 숙소에 사갈 게 있어서 그런데 오늘은 여기에 내려주시겠어요?”

“그래? 물건만 사갈 거지?”

“네, 애들이 물건을 사오라고 해서 한 번 쭉 둘러봐야 할 것 같아요.”

“쭉 둘러보면… 11시 30분 안에 들어가야 해. 확인할 거니까, 알겠지?”

제법 믿음을 쌓았기에 수락을 받긴 했지만 관리가 필요한 여성 아이돌이었기에 통금 시간을 말하는 로드 매니저였다. 사실, 이 정도면 30분 정도 줄 테지만 오늘 태연이 무척 열심히 했고, 너무 팍팍하게 굴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에 매니저의 재량으로 30분을 더 준 것이다.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태연은 로드 매니저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였다.

“네, 감사합니다. 그렇게 하도록 할게요.”

“그래, 수영이랑 윤아 살찔 수도 있으니까 야식은 너무 많이 사지 말고.”

“네, 그럴게요.”

살이 잘 찌지 않는 체질이라고 해도 방심하면 살찌는 것은 금방이었기에 언제나 주의를 주고는 한다.

상가단지에 차를 세우자, 태연이 조심스럽게 내린다. 정체를 감추기 위해 모자를 푹 눌러쓰고 큰 뿔테 안경으로 얼굴을 가린 상태였다.

그렇게 로드 매니저와 일별한 태연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둘러본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곧장 움직이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상가에 위치한 커피숍이었다.

2층에 위치해 있기에 커피숍으로 올라가는 계단 쪽으로 향할 때였다.

갑자기 태연의 어깨에 턱하니 올려지는 손이 있었다.

워낙 갑작스러운 행동이었기에 화들짝 놀란 태연이 비명을 지르려 하였다.

“꺄아…….”

그녀의 비명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뒤에 있는 납치범(?)은 비명을 지르는 그녀의 입을 능숙하게 손을 틀어막은 것이다.

순식간에 차단당했지만 아직 태연에게는 숨겨진 수가 있었다.

스토커나 납치범을 만나면 사용하라고 배운 호신술이 바로 그것이었다. 아무리 강한 남자라 하여도 한방에 무력화 시킬 수 있는 비기가 존재했던 것이다.

‘이, 이럴 땐 호신술을.’

그리고는 수백 번 넘게 연습한 호신술을 사용하였다.

발을 들고는 그대로 뒤를 향해 킥을 날린 것이다. 이 일격이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순간의 틈을 만들 수 있으리라.

그러나 납치범의 실력은 생각보다 더 대단하여 태연의 입을 가로막고 있는 손을 놓으면서 살짝 몸을 틀었다. 그러자 태연의 킥은 허무하게 허공을 가르고 말았다.

“누구…….”

입이 자유로워졌기에 고개를 돌리며 납치범의 얼굴을 바라보려던 태연은 순가 멈칫했다.

납치범의 얼굴이 너무나 익숙했던 것이다.

“하하, 태연 누나 반응이 장난 아니네요? 장난 한 번 쳤다가 죽을 뻔했어요.”

태연의 뒤에 있던 납치범의 정체는 다름 아닌 창현이었던 것이다.

삼십대나 사십대에 이른 중년인 납치범을 연상하던 태연의 예상이 완벽하게 어긋나는 순간이었다.

화들짝 놀란 태연은 창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 어떻게…….”

“안에 기다리기 뭐해서요. 날씨도 춥지 않아서 바깥에서 좀 기다리고 있는데 누나가 오더라고요. 그래서 깜짝 놀라게 만들려고 다가갔는데 이런 반응을 보인 거죠. 깜짝 놀랐어요.”

사건의 전말에 대해 설명하는 창현이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태연은 부끄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자신 멋대로 상상하면서 창현을 납치범으로 만들고 불능으로 만들어버릴 뻔하였던 것이다. 물론 불능이 되면 책임질 의향은 있지만 이런 새드 스토리는 그녀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태연은 침착함을 되찾으면서 창현에게 말했다.

“갑자기 어깨를 짚어서 납치범인 줄 알았어. 미안해. 하지만 갑자기 나타나서 그런 행동을 하면 위험해.”

“미안해요. 살짝 놀라게 해줄 마음이었는데 이렇게 되어버렸네요, 하하.”

사과를 하는 창현의 모습에 태연이 더 이상 무어라 하기 힘들었다.

그런 태연의 모습에 창현은 2층에 위치한 커피숍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서 이러지 말고 일단 안으로 들어가요.”

“앗! 그래. 안으로 들어가야지.”

지금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고개를 끄덕인 태연이 창현과 함께 커피숍 안으로 들어갔다.


창현은 모자를 깊게 눌러 쓴 것이 태연과 같았지만 안경을 쓰지 않고 목에 헤드셋을 두르고 있었다. 제법 큰 헤드셋이었기에 얼굴이 작은 창현의 얼굴 상당 부분이 가려지는 효과를 발휘했다. 그렇다고 그리 수상하지도 않은 차림새였기에 사람들은 의심을 하지 않았다.

커피숍 안으로 들어선 두 사람은 창가로 자리를 잡았다. 어둠이 내려앉아 빛이 나는 간판들만 보였지만 그것만으로도 밤의 정취를 어느 정도 느낄 수 있었다.

밤늦게 커피숍을 찾아와 딸기 주스 두 잔을 시키는 어이없는 행동을 한 두 사람은 딸기 주스가 나오자 한동안 아무 말도 없이 조용히 딸기 주스를 마신다.

한 모금 마시고, 두 모금 마시고.

딸기 주스를 약 삼분의 일가량 마셨을 무렵, 창현이 입을 열기 시작한다.

“제가 누나를 보고 만나고 하잔 이유가 궁금할 것이라 생각해요.”

“응…….”

창현의 표정이 심각했기에 태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자 창현은 다시 딸기 주스를 한 모금 마시더니 말했다.

“누나도 아실지 모르지만 제가 드라마 촬영장에서 좋지 않은 모습을 보인 뒤 일주일 동안 휴가를 얻게 되었어요. 그리고 4일 동안 여러 곳을 둘러보고 다시 서울로 왔죠.”

“…….”

태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창현의 말을 듣고 있었다.

“여기저기를 둘러보면서 전에 없던 여유를 되찾고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었어요. 무척 이로운 현상이지만 저에게 당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죠.”

창현이 말하는 문제점이 무엇인지 촬영장에서 들었기에 태연은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였다. 김지환 감독은 그 약점을 극복하지 못하면 제대로 된 장면을 촬영하지 못할 것이라 했다.

목이 타는지 창현이 거듭 딸기 주스를 마시며 말했다.

“많은 사람에게 물어봤어요. 하지만 그들의 말은 저를 이해시키기는커녕 오히려 혼란으로 몰아넣었어요. 제가 다른 사람들과 다른 삶을 살아서 그런 걸까요? 전혀 이해가 되지 않더라고요. 몸과 마음은 안정을 되찾았지만 머리는 더욱 복잡해져서 서울로 돌아오게 되었죠.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야 했어요.”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그가 얼마나 고민을 했고, 해답을 찾기 위해 노력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태연은 그런 창현을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래서 답은 찾았어?”

“…….”

창현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답을 찾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혼자 답을 찾을 수 있었으면 진즉에 해결할 문제였죠. 고민을 하다가 문득 누나가 떠올랐어요. 작년 3월쯤이었죠? 고민하던 제가 누나에게 조언을 들었던 것이. 그때 전 결심을 굳히고 미국으로 갈 수 있었어요. 남자인 제가 여자인 누나에게 답을 구하는 것이 이상할 수 있어요. 남자와 여자는 다르니까요. 하지만 누나라면 제게 답을 줄 수 있을 것 같아요.”

뜨거운 빛이 일렁이는 창현의 눈빛이 태연을 향했다. 빙산이라도 녹여버릴 듯한 그의 눈동자는 태연에게 절대적인 믿음을 가진 듯하였다. 마치 자신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던 윤아의 눈이 연상될 정도였으니까. 그것이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을 인정해주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고민을 하는 그에게 도움이 되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 뿌듯했다.

“명쾌한 답이 될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내가 도와줄 수 있다면 도와줄게.”

망설임 없는 허락.

그 모습에 창현이 빙긋 미소를 지으면서 태연에게 말을 꺼내기 시작한다.

“고마워요. 그렇다면 물어볼게요. 누나, 사랑이라는 것이 뭘까요?”

김지환 감독에게 결정적인 감정이 결여되어 있다고 지적을 받았던 사랑. 창현은 그것이 무엇인지 태연에게 물었다.

사랑이 무엇이냐 묻는 창현의 모습에 태연이 눈을 빛냈다.

자신에게 절호의 기회가 왔다는 것을 그녀는 느끼고 있었다.


기회라는 것은 모름지기 자신에게 찾아왔을 때 잡아주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멤버들과 공동으로 서약한 조약을 위반했지만 태연은 떳떳했다.

만약 다른 멤버들에게 들킨다면 그녀는 당당하게 외칠 말이 있던 것이다.

‘내가 먼저 찾지 않고 창현이가 먼저 나한테 연락을 했다!’

솔직히 그 말을 해도 멤버들이 믿어줄지에 대해서는 미지수였다. 그래도 태연은 눈 딱 감고 강행을 하였다. 찾아온 기회를 차버리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이나 하는 짓이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던 것이다.

기회라는 것은 스스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제 발로 굴러들어오는 기회는 천에 하나둘이다. 그런 만큼 태연은 모처럼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을 기세였다.

그리고 그 기회를 잡기 위해 태연이 나서기 시작하였다.

“사랑이라, 사랑. 무척 어려운 단어야. 한편으로는 무척 쉬운 단어이기도 하고.”

말하는 게 제법 철학적이다. 무언가 한 수 있어 보이는 듯한 말에 창현이 눈을 살짝 크게 뜨고는 태연에게 묻는다.

“누나는 사랑에 대해서 알고 있어요?”

참으로 애매한 말이다. 창현의 말을 들어보면 자신이 사랑에 대해 알고 있는가 고민이 들기도 한다.

왜냐고?

다른 사람들은 전부 쉽게 느끼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창현은 너무나 어렵게 생각하고 있는 듯하니까.

지금 이렇게 두근거리고 있는 자신의 심장이 바로 사랑의 증거라고 말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창현에게는 그것마저도 어렵게 느껴질 것이다. 좀 더 쉽게 풀어서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사랑은 알고 있다고 할 수 없어. 하지만 느끼고 있지.”

“느낀다고요?”

이해가 되지 않는지 창현이 고개를 갸웃한다.

그러자 태연이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나갔다.

“사랑은 흔히 머리로 하는 게 아닌 가슴으로 한다는 말이 있어. 그러니 알고 있는 게 아니라 느끼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지. 굳이 사랑에 대해 알고 있나? 이렇게 묻는다면 이렇게 생각해보면 돼. 이성을 향해 내 마음이 단 한 번이라도 움직인 적이 있는가.”

“아아, 서로에게 끌리는 그런 종류의 감정이죠?”

“글쎄? 그걸 사랑이라 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 창현이 네가 물은 것은 사랑을 느껴보았냐니까. 이성을 보면서 내 모든 것을 주어도 아깝지 않은 상태, 그것이 흔히 사랑을 느끼고 있는 단계라 생각해.”

“오오.”

태연이 말을 한 것은 창현이 의문을 느끼던 부분이었다.

서로 남남임에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아낌없이 주려고 하는 것일까? 수많은 커플들을 보면서 창현이 의아하게 느꼈던 부분이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한 상태였다.

그런데 태연이 그 부분에 대해 언급을 한 것이다.

창현은 태연의 말에 믿음이 마구 생기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공감대를 끌어내는데 성공한 태연은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미영만큼 다채로운 별명을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태연이었다. 그 중에서도 그녀의 별명 중 하나가 바로 조련사라는 별명이었는데, 팬들이 원하는 것들을 소위 말하는 눈팅함으로써 그것을 착실하게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자 팬들은 그녀에게 조련사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 팬들을 잘 조련한다는 것 때문에 주어진 별명이다. 이와 같은 실력으로 태연은 소녀시대 내에서 탑을 다투는 인기를 얻게 되었다. 폭발력에 있어서는 당연히 윤아가 1등이었지만 지속성과 충성도를 따지면 자신이 최고라고 자부하는 태연이었다.

그리고 그 조련 스킬은 창현에게 적용되기 시작하였다.

청산유수와도 같은 태연의 말에 창현이 눈을 빛내며 바라보고 있던 것이다.

그 반응에 탄력을 받은 태연이 말을 이어나간다.

“물론 이건 쉽지가 않아. 사랑은 쉽게 느껴지는 사람한테는 쉬운 거지만 어려운 사람한테는 무척 어렵거든. 창현이 너는 아무래도 사랑이라는 것을 어렵게 깨닫는 스타일인 것 같아.”

“그럼 어떻게 해야 되죠?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타개책이 떠오르지가 않더라고요.”

침울한 표정을 짓는 창현이 너무나 귀엽다. 그리고 자신의 말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모습을 보니 밑에서 살금살금 욕망이라는 것이 치솟아 오른다.

‘안 돼. 이건 비겁해.’

이번 기회를 발판 삼아 도약하자는 악마의 속삭임에 태연이 속으로 고개를 젓는다.

하지만 그 유혹을 이겨내기가 쉽지 않다.

괜히 악마의 유혹이라 불리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태연의 생각은 점점 한곳으로 기울고 있었다.

‘다 창현이를 위해서잖아? 사랑을 모른다면 드라마 촬영에 위험할 수도 있고. 거기에 내가 희생(?)을 함으로써 도움을 줄 수 있다면 나도 좋고 창현이한테도 좋은 게 아닐까? 내가 왜 물러서야 하지? 내가 왜?’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왜 물러서야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기에.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던 생각이 한쪽으로 기울기 시작한다.

일단 그걸 내색하지 않은 채 태연이 창현을 바라보면서 말한다.

“어떤 타개책을 실행해봤는지 알 수 있을까?”

어떤 방법을 선택했는지 들어봐야 더 자세한 조언을 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단 돌아다니면서 여러 모로 생각을 해봤어요. 그 다음에는 커플들을 유심히 살펴보았고, 나중에는 직접 물어보기까지 했죠. 하지만 그 말이 좀처럼 공감이 가지 않았어요. 뭐라고 해야 할까, 뜬구름 잡는 소리처럼 들렸다랄까요? 그 사람들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제가 이해를 하지 못한 거니까요. 제가 틀린 걸까요?”

“틀린 방법은 아니라고 생각해. 사랑을 모르니까 사랑하는 사람들을 살펴본다, 이것도 정답 중 하나라고 생각하니까.”

“하지만 저는 그들을 보면서 깨닫기는커녕 오히려 혼란스럽더라고요. 아예 사랑을 모르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요.”

처음 말을 할 때는 꺼려지는 감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말을 하고 나니 이제는 술술 나온다.

창현이 한결 쉽게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태연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의 머릿속은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연산을 마친 그녀가 웃음을 지으면서 창현에게 말한다.

“우선 사랑의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해. 설마 가족들에게도 그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건 아니겠지?”

“가족에게야 뭐…….”

말을 듣고 나니 자신이 놓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세상에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없나보다. 적어도 가족에게는 사랑을 느끼고 있으니까.

“하지만 형태가 다르지 않나요?”

창현이 말하는 것은 가족이 아닌 이성에게 말하는 사랑이었다.

“다르긴 하지. 하지만 형태가 다르더라도 사랑은 사랑이잖아? 그것만으로 창현이 네가 사랑을 느끼고 있다는 걸 알기에는 충분하지.”

“…그러네요.”

형태는 다르지만 사랑은 사랑이다.

그걸 창현은 이해했다.

“이해를 해주니 다행이네. 그것 하나만으로도 많은 걸 깨달은 거야.”

형태는 다르더라도 본질은 같다는 것. 그것을 이해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성과였다.

“하지만 이성에 관한 사랑은 잘 모르겠는데요.”

“이제 그 이야기를 해주려고 했어.”

그렇게 말을 한 태연이 싱긋 웃음을 짓더니 창현에게 말하기 시작한다.

사랑이라는 것에는 뚜렷한 정답이 없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느끼는 가장 순수한 느낌, 그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하니까. 만 명의 사람들이 만 개의 개성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사랑의 형태도 각양각색이다. 태연은 그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창현은 아직 그 사랑이라는 개념조차 제대로 잡아놓지 못한 상태였다.

태연은 그런 창현의 개념을 자신의 방식으로 잡아놓기 시작했다.

“내가 생각하는 사랑은 이래. 사랑을 하게 되면 사람은 애틋하게 변한다고 생각해.”

“애틋하다고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창현의 말이었다. 거창하게 여러 단어를 늘어놓는 것이 아닌, 딱 하나의 말로 정의를 하는 것이 아닌가?

의아한 표정을 짓는 창현에게 태연이 설명을 덧붙인다.

“내가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은 간단해. 사랑이라는 것을 하게 되면 사람은 애틋하게 변하거든. 창현이 너는 아직 사랑을 해본 적이 없다고 했지?”

“네.”

“그렇다면 이성 친구를 사귀어 본 적은 있어?”

사랑을 해보지 못했지만 이성 친구를 사귀는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하지만 창현은 그런 경우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젓는다.

“사랑을 해보지 못했는데 어떻게 이성 친구를 사귀겠어요? 당연히 사귀어 본 적이 없죠.”

“그건 그렇지. 내가 질문을 잘못했네.”

자연스러운 물음으로 창현의 연애 경험을 파악하는 태연이었다. 그리고는 그가 이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순수한 소년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미소를 짓는다. 떼 묻지 않은 백지 같은 소년에게 자신이 밑바탕을 그리는 것이니 어찌 기분이 좋지 않겠는가.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아내며 창현에게 말한다.

“음, 사랑을 해보지 않았으니 이해가 안될지 모르지만 들어봐.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사람은 침착하지를 못해. 오히려 안절부절 산만해지지. 왜냐하면 그 사람이 보고 싶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고 그렇게 되거든. 그래서 사랑을 하게 되면 애틋하게 된다는 이야기야. 평소 여유가 넘치는 사람에게 여유가 사라지거든.”

“왜 여유가 사라지는 거죠?”

“그 사람을 시도때도 없이 보고 싶으니까 여유가 사라지는 거지. 그래서 사랑을 하게 되는 사람은 병을 앓는 것과 같아. 괜히 사랑하는 사람을 잃으면 반쪽을 잃는다고 하는 게 아니고.”

“음, 이해가 될 듯하면서도 잘 이해가 안 되네요.”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게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태연도 그것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럴 수밖에. 아직 사랑을 하지 못해서 그런 가잖아?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사랑에 대한 개념은 이렇다는 거야.”

“사랑을 하면 애틋하게 변한다는 거, 이거 말이죠?”

“그래, 그것은 가족에게도 적용이 된다고 생각해. 가령 부모님을 일주일 동안 보지 못한다고 생각해봐. 그렇게 되면 갑자기 부모님이 무척 보고 싶어지거든. 창현이 넌 그런 경험이 없어?”

이성에게 적용시켜도 창현이 이해를 하지 못하니 그 대상을 가족으로 옮기는 태연이었다.

그 말에 창현은 순간 뇌리에 벼락이 내리친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녀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단숨에 깨달을 수 있던 것이다.

어릴 적 어머니를 잃었다. 그리고 영원히 어머니를 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미친 듯이 어머니를 보고 싶어하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것이 바로 사랑이었던 것이다. 평소에는 자각하지 못했던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어머니를 보지 못하는 시점에서 폭발하여 마음속에 가득 채워나갔던 것이다.

그제야 태연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아…….”

멍한 표정을 지은 채 나직이 감탄사를 터뜨리는 창현을 보면서 태연은 그가 사랑에 대해 어렴풋 감을 잡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개념을 전혀 잡지 못하던 것과 감을 잡은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존재한다. 꽉 틀어 막힌 댐에 살짝 바늘구멍이 뚫린 격이랄까? 하지만 그 구멍이 점점 크기를 넓혀나가 종래에는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거대한 구멍을 형성하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중요하다. 여기서 개념을 어떻게 잡아나가느냐에 따라 조련(?)의 성공 여부가 결정되니까.

나직한 감탄사를 흘린 후 창현은 약 5분여 동안 멍한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이내 눈동자에 초점이 맺히더니 제정신을 되찾는다.

그리고 태연에게 감사의 의미가 담긴 인사를 한다.

“고마워요, 태연 누나.”

“조금 깨달은 게 있어?”

“완전히는 아니지만 어렴풋 사랑이 어떤 건지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이게 다 태연 누나 덕분이에요.”

감사의 인사를 하는 창현의 눈에는 방금 전까지 볼 수 없던 한줄기 빛이 흐르고 있었다.

태연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젓는다.

“나는 단지 단초만 제공한 건데? 게다가 어렴풋 깨달았다고 해서 끝이 아니야.”

“그럼……?”

이미 태연의 쥐고 흔드는 스킬에 완전히 말려들은 창현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명령을 기다리는 강아지마냥 태연을 바라본다.

그러자 태연이 속으로 흐뭇해하면서 말을 이어나간다.

“어렴풋 깨달은 깨달음 자체를 완전히 너의 것으로 만들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힘들게 깨달은 지금 그 감정을 다시 잃어버릴 수 있어.”

“잃어 버린다라…….”

창현은 자신도 모르게 오른손으로 심장이 위치한 곳에 손을 올렸다. 어렴풋 깨닫게 된 이 감정, 어머니를 잃고 느꼈던 감정을 기반으로 떠올린 것이기에 그리 유쾌한 감정은 아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설레고 알 수 없는 두근거림이 동반되고 있었다. 이 느낌을 잊어버린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

입술을 지그시 깨문 창현이 태연을 바라보며 말한다.

“이 감정을 잃어버리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죠?”

태연이 생긋 웃는다.

“간단해.”

어떤 방법이기에 간단하다는 것일까.

이미 태연을 굳게 믿고 있는 창현이었기에 그의 시선이 태연에게 향한다.

그러자 태연은 창현의 손위에 자신의 손을 살짝 올려놓으며 말했다.

“나와 데이트를 하는 거야. 그래서 내가 그 사랑이라는 감정을 하나하나 성심성의껏 가르쳐줄게.”

연상 누님의 포스를 흘리는 태연의 강렬한 유혹이었다.




제63장 생각대로~ 탱?!




태연과의 대화는 무척 유익하였다.

통금 시간이 다 되었다고 하여 헤어지게 되었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창현의 발걸음은 무척 가벼웠다. 태연의 도움으로 사랑이 무엇인지 어렴풋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이다.

창현은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태연 누나에게 도움을 청했던 것은 틀리지 않은 선택이었어.”

조언을 얻고 꽉 틀어박힌 것 마냥 절대 뚫어내지 못할 것처럼 답답하게 만들었던 사랑에 대해서도 어렴풋 깨닫게 되었다.

창현으로서는 큰 수확을 거둔 셈이었다.

그러다 보니 입가에 미소가 절로 걸렸다.

“그런데 왜 만난 걸 이야기 하지 말라고 한 거지?”

태연은 창현에게 자신과 오늘 만남을 가진 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지 말아 달라 하였다.

의문이 들어서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소녀시대 멤버들이 자신을 걱정하고 있어서 다 같이 도움을 주기로 했는데 자신이 선수를 쳐버린 셈이 되어서 그렇단다. 그 부분에 대해서 창현은 고마운 마음을 느꼈다. 자신이 어려울 때 도움을 주려고 하다니, 기분이 나쁠 수가 없었다.

“사람 하나는 잘 사귄 거지.”

기분이 무척 좋았다.

예전의 기억 때문일까?

어려움에 처하게 되면 자신 혼자서 처리하려는 버릇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다.

주변을 둘러보면 도움을 줄 사람들이 이렇게 생겼는데

괜히 자신이 오기를 부린 듯하여 무언가 씁쓸하면서 한편으로는 기분이 좋았다.

세상은 더 이상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기에.

“그나저나 내일모레라…….”

자신의 감정을 확실하게 깨닫게 해준다고 하면서 태연은 내일모레 낮에 시간이 된다는 말과 함께 만남을 갖기로 하였다. 어떤 방식으로 가르쳐줄지 궁금했지만 그것은 아무래도 좋다. 이미 태연에게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기에.

다만 자신이 너무 신세를 지는 것 같아 미안할 따름이었다.

“괜히 나 때문에 바쁜 시간을 억지로 쪼개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말을 하고 있지만 창현의 얼굴에는 웃음이 맺혀 있었다.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는다는 것이 이렇게 기분 좋은 것일 줄 몰랐다.

여태까지 너무 기브 앤 테이크에 익숙해져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대가없이 서로 주고받을 수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세상은 아직 살 만한 듯하였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태연에게 조련 당한 것을 모르는 가련한 창현이었다.


“흐흐흥!”

창현과 헤어진 태연은 절로 콧노래가 흘러나오는 것을 막지 않았다.

지금 그녀의 기분은 당장 날아오를 듯 최고조에 이른 상태였다. 자신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었기에 기분이 너무나 좋았던 것이다. 처음 만날 때는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막상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훨씬 크고 유리하게 일을 진행할 수 있었다.

태연으로서는 미소가 절로 나올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어찌 보면 자신은 단순하게 화두만 던져준 상태였다. 그런데 창현은 그것을 알게 모르게 따라오면서 스스로 깨달음을 얻어낸 것이다. 태연이 한 것이라고는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고, 창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시기적절하게 조언을 해준 것뿐이다.

물론 이것 또한 대단한 것이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시기적절하게 조언을 해준다는 것은 얼핏 들으면 쉽게 들리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무척 어려우면서 고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다만 태연이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자신의 예상보다 훨씬 일이 무난하게 진행되었고, 큰 수확을 거두었기에 그러는 것이다.

들인 노력에 비해 큰 수확을 얻었으니 어찌 기분이 좋지 않은가.

“흐흐, 이미 게임은 다 끝나가고 있단 거지.”

음흉한 웃음이 절로 흘러나왔지만 참을 수 없었다.

창현에게 조언을 해줌으로써 그에게 무한한 신뢰를 얻음과 동시에 자연스럽게 그의 과거를 알게 되었고, 데이트 약속도 잡을 수 있었다. 태연으로서는 일석삼조의 효과를 거둔 것이다.

당연히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으리라.

“너희들은 뒷북을 치고 있어야 해. 후후후!”

한참 앞서 나가게 된 우월한 감정과 뒤처진 멤버들을 보며 비웃음을 흘리는 태연이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협정을 어긴 것에 대한 생각은 말끔하게 사라져 있었다.

세상은 선택의 연속이다. 그런 만큼 자신은 선택을 하였고, 그 선택이 주효하였다. 자신은 완벽하게 알리바이를 만들었고, 창현의 입단속까지 한 이상 이 일은 완벽하게 수면 아래로 묻히게 될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이틀 후 창현과 오붓한 데이트를 즐기면 되는 것일 뿐.

“일단 내일 어떻게 빠져나올지가 관건이군.”

낮에 시간이 비어서 약속을 잡았지만 멤버들을 효과적으로 따돌리는 것이 관건이다. 그리고 자신의 정체를 들키지 않도록 무장을 하는 것도 중요했다. 멤버들을 따돌리더라도 제3자에게 들켜서 스캔들이 나면 아미타불이 되어버릴 확률이 높으니까.

여러 가지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많았지만 태연은 개의치 않았다.

이번 기회를 확실하게 붙잡을 수만 있다면 자신은 승자로서 모든 것을 누리고 확실한 상품을 얻어낼 수 있을 테니까.

그 상품은 바로 창현이라는 모든 여자들이 원하는 최고의 선물이리라.

“내가 인심 팍팍 베푸마.”

기분이 좋아져서일까? 태연의 씀씀이도 자연히 커졌다.

마트에서 주스도 사고 우유도 듬뿍 산 태연은 베이컨이 들어간 토스트가 먹고 싶다던 미영의 말을 떠올리고는 비싼 베이컨도 구입을 하였다.

모처럼 씀씀이가 커진 태연이었다.

그러다가 시간을 확인한 태연은 자신이 시간을 많이 보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간은 어느덧 11시 2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크, 시간 아슬아슬하네.”

계산을 마치고 서둘러 숙소로 향한 그녀가 숙소 안에 들어왔을 때 시간은 11시 30분이었다.

당당하게 문을 열고 들어간 태연이 힘차게 외쳤다.

“얘들아, 내가 왔다!”

숙소 안으로 들어선 태연을 맞이한 것은 미영과 주현이었다.

“태연이 왔어? 왜 이렇게 늦었어.”

“언니, 좀 늦으셨네요.”

“차가 좀 막혀서. 그리고 이것들 좀 사느라 시간이 걸렸어.”

그러면서 자신이 사온 것을 들어 보이는 태연이었다. 그러자 미영과 주현이 눈을 빛내면서 쪼르르 태연에게 다가온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사이 태연에게 다가온 한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 사람은 바로 윤아였다.

윤아는 태연이 비닐봉지를 보고 탄성을 흘렸다.

“와아! 언니, 엄청 많이 사오셨네요. 용돈은 무사해요?”

비닐봉지를 확인한 주현도 놀란 표정을 지으며 태연에게 말한다.

“언니, 이거 돈 많이 들었을 텐데…….”

“베이컨까지 사고… 너무 많이 산 거 아니야? 용돈 다 썼을 것 같은데…….”

자신이 베이컨을 먹고 싶다 했던 것을 떠올린 미영이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태연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태연은 입가에 미소를 짓더니 가슴을 탕탕 두드리며 호기롭게 소리친다.

“이 정도 가지고 뭘 그래! 나 이래보여도 라디오 DJ 고정이라고? 수입이 있으니까 겨우 이 정도 가지고 감동하지 마. 오늘 기분이 좋아서 사온 거니까.”

“고마워요, 언니!”

윤아와 주현이 태연에게 감사를 표했다. 고마운 것은 고마운 것이다.

그것은 다른 멤버들에게도 전파되었다. 태연이 사온 것을 본 멤버들이 모두 놀라면서 태연을 바라본다.

그리고 이유를 묻는 멤버들에게 태연은 방금 전에 말했던 것처럼 오늘 기분이 좋아서 모처럼 구입을 했다고 한다.

그 말에 몇몇 소녀들이 눈을 가늘게 뜨고 태연을 바라본다.

‘태연이가 기분이 좋다고 해도 이 정도면 제법 출혈이 있었을 텐데… 그래도 웃고 있어? 이번 달 용돈에 타격이 있었는데도?’

‘뭔가 이상해…….’

의아함을 느낀 인물들은 바로 유리와 미영이었다.

책사 캐릭터인 두 소녀는 머리를 쓰다 보니 행동 하나하나를 분석하고 해부하는 버릇이 은연중 생겨났다. 일단 가슴이 아닌 머리로 이해를 하려는 고약한 버릇이 생겼던 것이다.

그렇기에 두 소녀의 눈에 태연의 갑작스러운 행동이 의아하면서 한편으로는 무언가 의심이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증거는 없었고, 태연이 순수한 호의로서 사온 것일 수도 있었기에 이내 표정을 풀고는 즐거운 표정을 지으며 사온 것을 풀어놓고 냉장고로 운반한다.

좋아하는 멤버들을 보면서 태연은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후후! 고마워하지 않아도 돼, 얘들아. 이건 나의 작은 성의니까.’

협정을 어겼기에 자기합리화를 위해 물건을 구입한 것에 불과하다. 결코 감사의 인사를 받기 위해 산 것이 아니었다.

미소를 짓고 있었기에 얼핏 보면 그녀가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는 것으로 보였지만 태연의 모습에 은연중 의심을 하고 있던 미영과 유리의 눈에는 그런 태연의 미소가 심상치 않은 것으로 보였다.

흐뭇한 미소로 보기에는 지나치게 음흉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그것이 결정적이었다.

가뜩이나 의심이 생기고 있었는데, 태연이 저런 표정을 짓고 있었으니 사그라 들던 의심이 다시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불현 듯 두 소녀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한다. 그리고 서로 같은 생각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되자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미영이 눈으로 유리에게 물었다.

‘너도?’

‘설마 너도?’

유리도 놀라며 묻자 미영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두 사람이 눈빛을 여러 차례 교환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인다. 두 사람 사이에 협정이 채결 된 것이다.

아무 일도 아닐 수 있지만 태연의 행동은 무언가 냄새가 풍겼다. 이대로 넘겨서는 안될 아주 불길한 듯한 느낌이 솔솔.

소녀시대 내에서 엄마로 통하는 태연은 짠순이었으면 짠순이었지, 결코 이렇게 돈을 쓰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방송이 잘되었다고 해도 단순히 자축하고 마는 그녀가 이렇게 호의를 베풀 정도라면 무언가 내막이 있다는 뜻이다.

태연의 지나친 호의는 지력 100을 향해 달리고 있는 와룡파니와 사마율의 눈을 뜨게 만들었다.

최강의 두뇌 캐릭터 율팊 동맹이 성사되는 순간이었다.


다음 날, 창현은 주변 지인들에게 일제히 문자를 날렸다.

며칠 간 여행을 갔다 왔다고, 걱정을 끼쳐서 죄송하다는 내용이 동반하고 있었다.

당연히 전체 문자 대상에는 소녀시대도 속해 있었다.

오전 스케줄을 위해 준비하던 그녀들은 창현의 문자를 받아들고는 밝은 표정을 지었다.

“창현이 문자다! 너도 왔어?”

“나도 왔어! 전체 문자 같은데?”

전체 문자인 것이 흠이지만 창현에게서 문자가 왔다는 것 자체만으로 소녀들은 만족하는 눈치였다.

아무래도 이번 일에 대해서 알리는 건 누구에게 먼저 알리고 누구에게는 늦게 알리면 책잡힐 수도 있으니까.

문자에다가 기분이 상할 수도 있으니 전체문자로 알린다고 친절하게 말까지 적어놓았으니 무어라 불만을 표할 수도 없었다.

태연은 그 전체 문자를 받고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만난 것을 비밀로 해달라고 했는데 알아서 잘 해주고 있던 것이다.

‘창현이가 알아서 잘해주네. 후후후!’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멤버들을 힐끗 바라 본다.

문자를 받고 흐뭇해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멤버들이 보인다.

저들은 모를 것이다. 자신은 어제 창현을 만났고 이미 1차 조련(?)이 끝났다는 것을.

가장 어려운 1차 조련이 끝났으니 이제 2차, 3차에 걸친 조련으로 완벽하게 끌어들이면 된다.

이미 늪에 한 발자국 발을 뻗었으니 서서히 헤어나오지 못하게 끌어들이면 된다.

‘게임은 끝난 거라고.’

하지만 방심은 금물이다. 멤버들 중 창현과 관련된 문제라면 눈을 번뜩이며 판단력이 급속도로 향상되는 사람이 여럿 있기에 한 치도 방심을 할 수 없다.

다만 포커페이스로 우월감을 느끼며 바라볼 뿐.

“창현이가 문제점을 극복했을까?”

수영의 물음에 순규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한다.

“아직 극복 못하지 않았을까? 그게 어디 하루아침에 해결될 문제도 아니고.”

“그것도 그렇지? 그럼 휴가가 끝나면 다시 촬영장으로 복귀할 거 아냐? 문제 있는 거 아냐?”

“그래봤자 어쩔 수 없잖아. 우리가 단체로 도와줄 수 있는 사항도 아니고. 그렇다고 몇 명만 도와준다고 하면 분명히 불만 터뜨릴 걸?”

순규의 말은 애석하게도 사실이었다. 소녀시대는 개별 스케줄로 바쁘게 스케줄을 소화해야 하는 처지다. 오늘만 해도 오후에 남는 멤버들은 몇 되지 않았고, 내일도 오후에 모처럼 시간이 남는 멤버는 몇 되지 않는다.

창현과 만나서 도움을 주려고 해도 그녀들이 단체로 맺은 협정에 어긋나게 되는 셈이다. 한 명이라도 빠지게 되면 그 멤버는 차별을 당하게 되는 셈이었으니까.

“그럼 세 명씩 나눠서 해보는 건 어때? 각자가 감시자가 되면 되잖아.”

효연이 제법 합리적인 방법을 제시한다.

“오, 괜찮은데?”

“그러게. 괜찮은데?”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는지 순규와 수영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스케줄 표를 보면서 계산을 해보기 시작하는데,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창현의 휴가는 이틀 밖에 남지 않았는데 세 조로 나누면 3일 동안 만나야 하는 셈이었다. 게다가 세 명씩 나누는 것이 스케줄이 여의치 않았다.

‘후우!’

순간 가슴이 철렁했던 태연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저 계획이 성사되었으면 자신의 계획이 어긋날 뻔했다.

‘역시 효연이, 방심할 수 없어.’

가슴이 서늘해지는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럴 듯한 제안이었지만 빛 좋은 개살구였기에 결국 무산될 수밖에 없었다.

“칫! 모처럼 좋은 생각을 해냈는데.”

효연은 자신의 기발한 생각이 어긋나자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수연이 나서서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누구는 만나고 누구는 만나지 못하는 경우라면 어쩔 수 없잖아? 그럼 차라리 창현이가 촬영장에 나올 때 스케줄이 비는 멤버들 몇 명이 번갈아 가면서 가는 건 어때?”

그 중심에는 윤아가 서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드라마 촬영으로 접점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 그녀밖에 없었으니까.

“전 찬성이에요!”

언니들이 어떤 방식으로 훼방을 놓을지 걱정이 되던 윤아는 자신을 중심으로 끌어올려주는 수연의 언급에 행여 반대 될까 싶어 얼른 찬성을 표했다.

윤아가 좋다고 하자, 다른 소녀들도 하나둘씩 동의를 표하기 시작한다.

“그게 좋으려나?”

“그 수밖에 없잖아.”

“좋아, 수연이 말대로 하자. 그게 나을 것 같아.”

그렇게 협정에 유연성을 두어 소녀들이 협력을 하였다.

“응?”

그것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던 태연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인영을 발견하였다. 그리고는 그 사람이 미영이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의아한 표정을 지은 채 물었다.

“갑자기 왜 그래, 미영아?”

“으응? 아니, 어제 태연이가 사준 베이컨 잘 먹었다고. 맛있어서.”

“그래? 맛있게 먹었다니 다행이네.”

자신보다 약간 키가 큰 미영이었지만 태연은 초롱초롱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가 귀여워 머리에 손을 얹고는 흐뭇하게 미소를 짓는다.

미영이 들으면 미안하겠지만 이럴 때마다 마치 귀여운 애완동물을 기르는 것 같았다. 미영 또한 태연의 손길을 그리 싫어하지 않고.

하지만 그것은 태연의 착각이었다. 저 초롱초롱한 눈동자 너머에 감히 그녀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수십 수백 가지의 계산이 치밀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손길이 오히려 기분 좋은 듯 미소를 짓고 있던 미영이 태연에게 살며시 묻는다.

“그런데 그 베이컨 비싼 거 아냐? 태연이 네가 너무 손을 크게 쓴 것 같은데…….”

태연이 구입한 베이컨의 가격은 제법 높은 것이었다. 저렴한 것도 아닌, 비싼 것을 구입하자 걱정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걱정스러운 미영의 음성에 태연이 싱긋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뭐 그거 가지고 그래? 누가 보면 엄청 비싼 걸 가지고 그러는 줄 알겠다.”

“그래도… 태연이 네가 무리한 것 같아서 그렇지.”

“괜찮아. 어제 방송이 잘 풀려서 그런 거니까.”

순진한 얼굴로 물어보는 미영의 말이 계속해서 정곡을 비집고 들어왔기에 태연은 정신을 다잡고는 생각해두었던 이유를 가져다 붙인다.

그러면서 미영에 대한 경계심을 한층 끌어올린다.

‘방심해서는 안 되겠어. 잘못하다가 말이 헛 나올 수도 있으니까.’

미영은 태연의 눈에 경계심이 서리는 것을 보고는 속으로 혀를 찼다.

‘칫! 눈치 챘네. 방심하고 사실을 말할 거라 생각했는데.’

충분히 진실을 끌어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태연은 제법 만만치가 않았다.

그녀의 말을 순순히 믿을 미영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평소 소녀시대 내에서 살림을 맡으며 짠돌이 근성이 몸에 배어버린 그녀가 어느 날 갑자기 돈을 물 쓰듯이 쓰는 모습을 보고 그러려니 할 수 없지 않은가? 방송에 잘 되었다 하더라도 혼자서 자축을 하지, 무리해서 돈을 쓸 그녀가 아니었다.

무언가 숨은 내막이 있다고 생각하는 미영이었다.

슬쩍 고개를 돌린 미영이 유리에게 고개를 나직이 저어보이자 유리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앞으로 나섰다.

“태연아, 어제 사온 것들 잘 먹었어.”

이미 경계심을 끌어올리고 있던 태연은 유리의 그런 접근을 필요 이상으로 경계하는 모습을 보였다.

“갑자기 왜 그래? 유리 네가 그러니까 뭔가 이상한데.”

“에잇! 뭐가 이상해? 우리 소녀시대의 짠돌이 엄마 태연 씨가 모처럼 통을 크게 써서 고마워서 그런 건데. 설마 순수한 인사마저도 받아주지 않을 만큼 내가 싫어진 거야? 그런 거야?”

그러면서 섭섭한 표정을 짓는 유리의 모습에 태연은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깨닫고는 황급히 사과했다.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에잇! 미안하다고!”

“칫! 요즘 미영이랑 같이 놀더니 나에 대한 애정이 식었나봐. 예전처럼 귀여워해줘야 나에 대한 애정이 다시 살아나려나?”

“헉!”

유리의 살벌한 모습에 태연이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그녀가 말하는 귀여워해준다는 것은 인간으로 대하는 것이 아닌, 마치 곰 인형을 대하는 것처럼 절제 되지 않은 무지막지한 애정을 퍼붓는 걸 뜻했다.

그 애정을 받다가는 몸이 남아나지 않는 걸 알았기에 태연은 얼굴에 사색이 되어 뒤로 물러났다. 다른 애정들은 환영이지만 그런 육탄 애정 공세는 사양이었다.

필요 이상으로 과잉 반응을 보이는 태연의 모습에 유리가 피식 웃음을 지으면서 말한다.

“농담이야, 농담. 하지만 그런 태도는 섭섭하다고.”

“뭐야, 날 놀린 거야?”

짐짓 화난 표정을 지으며 버럭 소리를 치는 태연의 모습에 유리가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며 말한다.

“놀리기는. 태연이 네가 무슨 기쁜 일이 있는 것 같은데 우리한테 말을 해주지 않으니까 그러는 거지.”

대놓고 말을 하는 유리였다.

“뭐어?”

그 말을 들은 태연이 순간 멈칫하였다. 그리고 유리를 바라보자, 그녀는 정면돌파를 감행하였다.

“뭔가 좋은 일이 있으면 같이 기뻐해야지? 우리도 좀 알려주라.”

“내가 무슨 좋은 일이 있다고 그러는데?”

“평소 하지 않던 행동을 하니까 그러지.”

“난 이러면 안 되는 거야?”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하지만 속으로 땀이 흐르고 있었다. 이런 눈치가 귀신같은 것들이 냄새를 맡고 자신에게 있던 일을 털어내려는 것이었다.

이럴 때는 짐짓 화난 척하는 것이 즉효약이다.

“후우! 나한테 이런 모습을 보일 거라고 생각도 못했는데. 나는 갑자기 변하면 안 되는구나. 좀 실망이야.”

그러면서 방안으로 들어서는 태연이었다.

갑자기 화를 내는 태연의 모습에 유리가 당황하며 그녀를 불렀다.

“태, 태연아.”

태연은 그 말을 듣지 않은 채 방문을 닫았다.

쾅!

아무래도 의심하는 듯 말을 한 것이 단단히 화가 난 것임이 분명했다.

잠시 태연이 들어간 방을 바라보던 유리가 미영에게 시선을 옮기더니 묻는다.

“어때?”

“…내 분석에 의하면 지금 태연이는 무언가 숨기기 위해 평소보다 과잉반응을 하고 있어. 실제로 화가 난 게 아니라 당황한 감정을 숨기기 위해 화난 척을 한 게 분명해.”

데뷔 초부터 커플이라 오인 받을 만큼 태연 옆에 붙어 다녔던 미영의 냉철한 판단이었다.

그리고 미영과 동맹을 맺은 유리는 그런 그녀의 판단을 신뢰했다.

적일 때는 최악이지만 아군일 땐 최상이었으니까.

“그럼 오늘 행동으로 옮기도록 하자. 알겠지?”

“좋아.”

“이걸로 끝났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야, 탱구야, 후후!”

유리의 눈이 번뜩이고 있었다.


오늘도 라디오 스케줄을 끝내고 온 태연은 숙소로 들어서자 곧장 씻기 위해 화장실로 들어갔다.

화장실 안으로 들어서기 전에 소지품을 방에 놓아두었는데, 그 틈을 타고 방안으로 들어서는 두 명의 소녀가 있었다.

바로 미영과 유리였다.

태연에게 무언가 있다고 확신하는 바, 그녀가 소지품을 잠시 놓아두는 틈을 타 방안으로 진입한 것이다.

그리고 두 사람의 발걸음은 태연의 핸드폰이 놓인 침대로 향하기 시작했다.


미영과 유리는 태연을 의심하기 시작한 시점에서 그녀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분명 태연의 행동은 얼핏 보면 나무랄 곳 없이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그녀들의 자세히 살펴보면 태연의 행동에는 무언가 부자연스러움이 존재하고 있었다.

우선 그녀들이 가장 의혹이 들었던 것이 바로 태연의 과도한 소비였다.

누군가가 쓸데없이 돈을 많이 쓰는 걸 방지하기 위해 소녀시대 멤버들은 매달 각각 일정량의 돈을 걷어 숙소 생활에 필요한 것을 공동으로 구입하고는 한다.

그런데 태연은 혼자서 막대한 양의 돈을 썼다.

평소 짠순이라 불리던 그녀의 행적을 보면 이것은 말도 안 되는 것이다.

거기에서 의심이 시작 되었고, 그 의심은 점점 몸집을 불려나갔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것이 바로 물건들을 산 이유가 방송이 잘 풀려서란다.

태연의 말에 일말의 의구심을 품던 미영과 유리는 그 말을 듣고 본격적으로 의심이 증폭되었다. 그리고 천천히 태연을 염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태연도 결코 만만하지 않았다. 미영의 유도 심문에 쉽사리 걸려들지 않았고, 유리의 직공에도 걸려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하여 완벽하게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미영이 태연의 부자연스러운 행동을 간파한 것이다.

‘태연이가 무언가 숨기고 있는 것이 분명해.’

필요 이상으로 화를 내는 그녀의 모습은 다른 사람들의 눈에 지극히 자연스러운 행동으로 보일지 모르나 미영의 눈에는 그렇지 않았다.

평소 태연이라면 그냥 무시로 일관하거나 가볍게 코웃음 쳤을 것을 가지고 버럭 화를 내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던 것이다.

소녀시대 내에서 태연을 가장 잘 알고 있는 멤버라 해도 과언이 아닌 미영의 확신이었기에 유리는 그런 미영의 말에 동의를 표했다.

그녀들은 태연을 본격적으로 조사하기로 했다.

유리가 열기 담긴 눈으로 태연의 핸드폰을 향해 손을 뻗었다.

‘태연이한테는 미안하지만…….’

그녀들이 선택한 방법은 다름 아닌 태연의 핸드폰을 조사하는 것이다.

예상으로는 창현과 만났거나 연락을 취했을 것이라 생각되었다. 그것을 알아내어 진상 규명을 하고자 하였다. 책사는 치밀한 계산을 바탕으로 하지만 그녀들은 육감까지 겸비하여 만사형통의 경지에 도달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핸드폰을 잡은 유리가 곧장 통화목록을 확인하려 하였다.

그러자 무섭게 떠오르는 비밀번호 창.

미영이 손을 뻗어 핸드폰을 잡아채며 말한다.

“비밀번호는 나한테 맡겨.”

그렇게 말을 한 미영이 전문가 뺨치는 수준으로 태연의 핸드폰에 걸린 비밀번호를 풀어내기 시작한다. 태연이 즐겨 사용하는 번호를 알고 있었기에 서너 번의 실패 끝에 락을 풀어내는데 성공한다.

“풀렸어.”

옆에 있던 유리가 눈을 빛내며 핸드폰 액정을 향해 시선을 고정한다.

미영은 버튼을 눌러 태연의 통화목록을 확인하기 시작한다.

오늘부터 시작하여 차례차례 연락되었던 목록이 보였다.

그 목록에는 가족들부터 시작하여 회사 실장님의 번호와 멤버들의 전화가 보였다. 하지만 그녀들이 원하는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두 소녀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어어?”

“이럴 리가 없는데?”

분명 창현과 연락을 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보이지가 않다니? 자신들이 착각을 했단 말인가?

믿을 수가 없었기에 몇 번이고 통화목록을 바라본다.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면서 태연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너희들 뭐하는 거야?”

핸드폰 액정에 시정이 고정되어 있던 미영과 유리는 화들짝 놀랐다. 태연이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씻었던 것이다. 핸드폰을 들고 있던 미영은 황급히 핸드폰을 뒤로 감췄고, 유리가 앞으로 나서 그런 미영을 가리키며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어응? 아, 아니야. 아무것도.”

“뭐야? 무슨 반응이 그렇게 싱거워?”

“방에 뭐 가지러 온 거거든. 그런데 없네. 그치? 가자, 미영아.”

“응응.”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침대 위에 핸드폰을 내려놓은 미영이 유리의 말에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리고 빠른 동작으로 방을 벗어난다.

자신들의 방으로 도착하자, 유리는 미영에게 물었다.

“뭐야, 설마 우리들의 예상이 틀렸던 거야?”

“그럴 리가 없는데… 분명 느낌이 들었는데…….”

미영도 어이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정말 석연찮은 느낌이 들었는데 실제로 조사해보니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유리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미영에게 말한다.

“아, 머리 아파. 괜히 우리가 과민반응 했던 거 아냐?”

“그런가?”

털어보아도 증거가 나오지 않으니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유리의 말에 미영도 그렇게 납득을 하기 시작했다. 데뷔 초부터 단짝처럼 지내서 태연의 반응을 보면 무언가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자신의 예상이 아무래도 틀린 듯했다.

“괜히 우리가 의심했나봐. 하기야, 창현이가 문자를 보낸 날이 태연이가 이상한 짓을 한 다음 날이잖아. 연관 가능성이 없을 수도 있어.”

“그럴 수도 있겠네. 괜히 태연이가 하지 않던 행동을 해서 우리가 의심한 것일지도…….”

자신들의 착각으로 의견이 기울기 시작했다.

유리는 곰곰이 생각에 잠겨있다가 말한다.

“좀 찜찜하기는 하지만… 태연이가 다른 짓은 안 했을 것 같아. 설마 우리 두 사람의 추측을 완벽하게 벗어날 리가 없잖아, 안 그래?”

“그건 그래.”

미영과 유리는 태연이 자신들의 예측 범위를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들은 소녀시대 내에서 가장 뛰어난 지력을 자랑하는 책사 캐릭터였으니까.

그런 자신감이 스스로 빗겨 나가버리게 만든 것이란 걸 모르는 채 말이다.


한편, 방안으로 들어온 태연은 미영과 유리가 황급히 방을 벗어나자 아직 물기가 덜 마른 손으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입가에 진한 미소가 걸렸다.

“이것들이 설마 이런 짓까지 할 줄이야. 하지만 이건 몰랐을 걸?”

자신이 통화목록에 걸어놓지 않던 락을 일부러 걸어놓고 비밀번호 또한 미영이 알고 있는 것들 중 하나로 바꿔놓은 것을.

이것은 전부 계획이었다. 미영과 유리가 자신을 의심하고 있었기에 그 싹을 중간에 끊어버리기 위한 그녀의 계획.

그래서 태연은 일부러 핸드폰을 보란 듯이 놔두고 씻으러 갔던 것이다. 창현과 통화 했던 내역을 모두 지워버린 채.

그 결과 미영과 유리는 태연이 쳐놓은 함정에 걸려들었고, 자신이 등장하자 이런저런 생각할 여유도 없이 돌아갔다.

이제 더 이상 자신을 의심하지 못하리라.

모든 것은 계획대로였다.

“훗, 바보들. 너희들이 아무리 날뛰어봤자 내 손바닥 안이야.”

이것이 리더의 위엄이었다.


미영과 유리를 여유 있게 따돌린 태연은 피부 세포 재생 시간 법칙을 착실하게 지켜 씻은 뒤 곧장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는 아침 일찍 일어나 분주하게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오늘은 창현에게 사랑에 대한 교육을 위해 데이트를 하기로 한 날이었다. 연상의 누나로서 상당한 위엄을 보였기에 확실하게 데이트를 주도하고 조련 2단계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철저한 준비를 필요로 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멤버들의 의심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예전에 수연이 수상하다고 하여 미행조를 기획하여 그녀를 미행을 주도한 것이 자신 아니던가? 그 외에도 상당한 미행 경력이 있었기에 태연은 자신이 그와 같은 처지에도 처할 수 있다는 것을 은연중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철저하게 준비를 하고 있었다.

복장은 어차피 얼굴을 최대한 가릴 것이기에 튀지 않으면서 한편으로는 계속해서 시선이 갈 수밖에 없는 복장을 하였다.

분홍색 미니스커트에 티를 입고 청색 재킷을 걸친 태연이 방을 나선다.

그러자 이제야 막 일어난 멤버들이 놀란 얼굴로 태연을 바라보며 묻는다.

“태연아, 너 왜 그렇게 차려입은 거야? 오늘 스케줄도 없잖아?”

이제부터 중요했다. 여기에서 변명거리를 잘못 늘어놓으면 멤버들의 의혹을 사서 미행을 당할 수도 있다.

데이트를 계획하면서 이 부분에 대해서 가장 신경을 기울였기에 태연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멤버들에게 말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태연은 확실한 돌파구를 만들어놓은 상태였다.

“오늘 아침부터 스케줄 없잖아? 게다가 밤에 라디오도 녹방 하기로 해서 당일치기로 집에 다녀오려고.”

이미 부모님에게도 말해놓은 상태였다. 오늘 친구들과 놀고 싶은데 회사에서 핑계거리를 대기가 힘들어서 집에 내려간다고 말을 했다고. 그랬기에 멤버들이 부모님에게 전화를 하더라도 자신은 전주로 갔다는 알리바이가 성립된다.

실로 용의주도하고 완벽한 계획이 아닐 수 없다.

아니나 다를까, 멤버들이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 한편으로는 의구심을 보이지 않는다.

“전주로? 힘들지 않겠어?”

“힘들긴 하겠지만, 늦지 않게 돌아올 거야. 그래서 아침 일찍 가는 거니깐. 아, 기차 시간이 다 되어 가거든. 난 빨리 가보도록 할게. 밤늦게 들어올 거니까 그렇게 알도록 하고.”

더 캐물을 시간도 주지 않는 행동까지. 오늘의 태연은 만통자 탱구였다.

신발을 신고 빠르게 숙소를 나선다. 기차 시간을 핑계로 댔기에 멤버들은 자신을 붙잡지 못할 것이다.

“후후후!”

성공적으로 숙소를 나선 태연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맺혔다. 그리고 시간을 슬쩍 확인하니 약속시간보다 한 시간 전인 9시였다.

한 시간이나 여유가 남아 있지만 이 여유를 남긴 것은 멤버들에게 자신이 그만큼 일찍 나간다는 것을 어필하기 위한 것도 있고, 무엇보다 화장을 할 시간을 벌기 위한 것도 있었다.

사생팬들의 눈을 피해 상가로 향한 태연은 사람들이 잘 이용하지 않는 4층 화장실로 향했다. 그리고 화장실 거울을 보면서 화장을 하기 시작한다.

화장 기술이 날로 늘어 예전에는 한 시간 걸렸던 것이 이제는 채 삼십 분도 걸리지 않는다. 숙련도가 높아질수록 화장은 곱게, 속도는 빨라지고 있었다.

그렇게 화장을 끝낸 태연이 모자를 쓰고 검은 뿔테 안경을 쓴다. 요즘 시력이 부쩍 나빠져서 렌즈를 사용하지 않으면 안경을 쓰고는 한다.

“OK."

자신의 상태를 확인한 태연의 입에서 만족의 미소가 그려진다.

그리고 빠른 발걸음으로 약속 장소로 향한다.

자, 조련을 할 시간이다.


약속 장소에 도착하니 시간은 9시 55분이 되어 있었다.

10시까지 만나기로 한 만큼 늦지 않은 셈이다.

일찍 도착했지만 창현이는 아마 도착했을 확률이 높았기에 태연은 고개를 움직이며 창현을 찾았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얼굴을 드러낼 수 없을 테니 모자를 썼을 확률이 높았다.

아침이었지만 무척 사람들이 많이 오고갔기에 한동안 주변을 둘러보던 태연은 창현을 찾을 수 있었다.

모자를 쓴 사람들을 중점적으로 찾으니 찾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역시! 오늘도 멋져!’

태연은 창현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데이트를 하기 위해 나올 때 잘 차려입어야 한다는 말을 했는데 얼핏 봐도 창현의 모습은 흐뭇한 미소를 머금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키가 큰 사람들이 워낙 많은 탓에 도드라지지 않지만 자세히 보면 쭉 뻗은 하체 비율이 그야 말로 예술이었다.

감탄사를 터뜨리던 태연이 문득 눈을 빛내며 창현을 바라보았다.

‘저것이 언제 저렇게 컸지?’

재작년 첫 만남 때는 자신과 별로 차이가 나지 않았다.

기껏해야 160cm 초반대로 기억하고 있는데 지금은 얼핏 봐도 거의 180cm에 근접한 키가 아닌가.

참으로 시간이 빠르게 흘러간다고 생각하면서 한편으로는 저렇게 훈훈하게 컸다니 흐뭇한 마음이 든다.

저 정도는 되어야 조련탱의 실력을 적극적으로 발휘할 수 있지 않은가?

태연은 속으로 음흉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재빨리 감정을 컨트롤 하고는 창현에게 다가가서 자연스럽게 말을 걸었다.

“일찍 나왔네?”

“어, 누나 왔네요. 늦지 않은 것 같고.”

창현이 슬쩍 시계를 보며 말을 하자 태연이 인상을 살짝 찡그리면서 그의 등을 팡! 하고 친다.

“원래 여자는 약속이 잘 늦는 법이거든? 늦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돼. 그러지 않으면 마이너스야. 알겠어?”

“그래요?”

몰랐던 걸 알았다는 듯 창현이 살짝 고개를 끄덕인다. 예전 같으면 그렇게 말을 할 경우 무어라 꿍얼거리면서 티격태격했을 텐데 지금은 말을 잘 듣는 강아지와도 같은 모습이다.

역시 자신이 해주었던 조언이 제대로 먹혀들었다는 생각에 태연은 속으로 흐뭇한 미소를 지으면서 창현에게 말한다.

“자, 그럼 가볼까?”

“그러죠.”

건물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몸을 돌리려던 순간 창현이 몸을 움찔 떨었다. 태연이 갑자기 창현의 오른팔을 낚아채더니 그대로 팔짱을 낀 것이다.

놀란 시선으로 창현이 바라보자 태연이 빙긋 미소를 지으면서 말한다.

“오늘 요점은 노는 게 아니라 사랑이란 감정을 깨닫는 거라고? 나의 행동에 착실히 따르도록 해. 알겠지? 널 위해 일부러 노력하고 있는 거니까.”

“네, 네. 알았어요.”

창현은 잠시나마 가슴이 두근거렸던 것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이성과 팔짱을 낀 적이 없기에 무척 어색하게 느껴졌지만 한편으로는 묘하게 흥분이 되었다. 신체 접촉을 했기 때문일까?

그렇게 창현의 팔을 합법적으로 점거한 태연은 자연스럽게 창현과 나란히 걷는다. 그리고는 건물 안으로 들어선 뒤 엘리베이터에 탑승하여 곧장 위층으로 올라간다.

사랑 교습이라는 태연의 계획 하에 오늘은 하루 동안 촘촘하게 같이 보낼 스케줄이 짜여있는 실정이었다.

가장 먼저 보기로 한 것은 영화였다.

CGV 영화관으로 올라온 태연은 주변을 둘러보며 창현에게 말한다.

“여기도 제법 오랜만이네. 그렇지?”

“그러네요… 재작년에 같이 왔었으니까.”

창현은 예전 기억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태연의 말마따나 재작년에 태연과 함께 이곳에 왔던 기억이 떠오른다. 주현과 함께 수학여행에서 노래를 부르기 위해 만남을 갖다가 갑자기 사정이 생겨서 나오지 못하고 태연이 나왔었지.

그리고 그녀와 함께 오락실에서 놀기도 하고 이벤트에 참가하기도 하고 여러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럼 영화표 끊으러 가자.”

“네.”

여전히 팔짱을 낀 채로 영화표를 구매한다. 슬슬 더워지는 계절이라 그런지 공포영화가 개봉하고 있었는데, 태연은 과감하게 공포영화를 보자고 하여 표 두 장을 예매하였다.

영화 시작 시간은 열한 시. 약 한 시간 정도의 여유가 남은 셈이었다.

어떻게 시간을 보낼까 하다가 태연은 한곳에 시선을 고정하더니 눈을 빛내면서 창현에게 말한다.

“시간 남았는데 오락이나 하러 갈까?”

“그럴까요?”

“그래, 오늘이야 말로 그때의 치욕을 복수해주겠어. 리벤지 매치라고.”

“과연 가능할까요? 뭐 해보죠.”

대담하게 복수전을 외치는 태연을 보며 가소롭다는 듯 웃음을 지어보인 창현이 함께 태연과 함께 오락실 안으로 들어선다. 아침 시간이라 그런지 아직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

곧장 돈을 바꾼 창현과 태연은 킹오브파이터97에 나란히 앉아 게임을 하기 시작한다.

창현은 여전히 아테나, 마이, 유리로 이어지는 미소녀 트라이앵글 포지션이었고, 태연은 외모와 어울리지 않게 치트키를 사용하여 초 레오나, 초 이오리, 초 크리스를 골랐다.

이윽고 벌어지는 두 사람의 치열한 대전.

대결의 결과는 놀랍게도 태연의 승리였다.

그것도 초 이오리 한 캐릭터에게 올킬을 당하는 대 이변이 일어났던 것이다.

믿기지 않는 상황에 창현의 얼굴에 황당함이 서렸다.

“이럴 수가.”

“후후후! 내가 뭐라고 했어? 나는 재작년의 내가 아니라고.”

태연은 흰 이를 드러내며 진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녀가 이렇게 자신 있는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간단했다. 창현에게 처참한 패배를 당한 이후 끊임없이 게임에 게임을 거듭하면서 캐릭터의 스킬을 습득했던 것이다.

더군다나 그녀가 고르는 캐릭터들은 전체적인 밸런스에서 모두 상위권에 속한 캐릭터다. 그런 만큼 스킬이 받쳐주면 기본기로 상대를 농락하는 창현을 꺾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그리고 결과가 이것이었다.

창현의 처참한 패배.

태연은 자신의 승리가 당연하다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보기 싫었는지 창현은 다시 동전을 넣고 도전을 한다.

하지만 이미 달인의 경지에 올라있는 태연을 꺾는 것은 요원하였다. 흔히 고수들의 대결은 종이 한 장 차이라 말을 하는데, 태연이 고수의 반열에 들어선 이상 연습에 연습을 해온 그녀가 창현보다 우위에 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결과는 연전연패!

무려 연속 세 판을 패배하고 나서야 창현은 태연의 실력이 운으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큭! 누나 열심히 연습했네요.”

“뭐 이 정도야 기본이지. 흠흠!”

자꾸 웃음이 나와서 그런지 태연은 표정 관리에 여념이 없다.

그러면서 총 게임도 하고 오토바이 게임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영화가 시작할 시간이 거의 다 되자 창현이 태연에게 묻는다.

“그런데 이것도 오늘 하려던 것과 관련이 있는 건가요?”

“아니? 오늘 모처럼 나왔는데 수업만 할 수 없잖아. 즐기는 시간도 있어야지.”

“그래요……?”

여태까지 같이 한 게 사랑을 느끼는 수업의 일환으로 생각했는데 아니라고 하자 조금 허탈해진다.

그런 창현의 표정을 읽었는지 태연은 피식 웃음을 지으며 그의 팔에 팔짱을 끼며 말한다.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너무 서두르지 말라고.”

“서, 서두른 건 아닌데.”

역시 이성에 접촉을 해오면 얼떨떨해진다.

창현의 서툰 반응에 태연의 입가에 맺힌 미소는 더욱 짙어진다.

이렇게 숙맥이라면 자신이 리드를 하는데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

팝콘과 콜라를 파는 곳으로 가서 당당하게 커플 세트를 구입한 그들은 팝콘과 콜라를 듣고 상영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무서운 거 잘 봐?”

자리에 앉으면서 태연이 창현에게 묻는다. 자리 또한 잡는다는 것이 커플석으로 잡아서 함께 앉으니 묘한 느낌이 든다. 창현은 애써 그 감정을 억누르며 고개를 가볍게 끄덕여보였다.

“못 보는 편은 아니에요.”

“그래? 다행이네.”

그렇게 말을 하며 웃는 태연의 모습에 묘한 불안함을 느낀다.

그런 창현의 기색을 눈치 챈 것일까?

태연이 창현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을 한다.

“공포 영화를 보는 것도 수업의 일환이니까 잘 보도록 해. 알겠지?”

뭔지는 모르지만 창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한 것인지 잠시 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영화가 시작되고 본격적으로 무서운 장면이 나오기 시작하자 태연의 몸이 흠칫 떨리기 시작하더니 창현의 팔을 잡은 것이다.

갑자기 자신의 팔을 잡는 태연의 행동에 창현이 깜짝 놀랐지만 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리고는 아무 반응을 하지 않았다. 영화가 시작하기 직전 수업의 일환이라 했던 말을 떠올렸던 것이다.

그렇게 태연이 창현의 손을 붙잡은 채 시간이 흘러갔다.

잠시 후, 귀신이 섬뜩한 분장을 한 채 모습을 드러내는 장면이 나타났다.

“꺄아!”

영화관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고, 태연 또한 비명을 터뜨리며 창현의 품에 푹 안긴다. 얼마나 무서웠는지 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창현이 그런 태연을 진정시키듯 등을 토닥거려주면서 걱정스러운 어조로 말한다.

“괜찮아요?”

“응, 응. 괜찮아. 영화가 좀 무섭네.”

어두워서 자세히 보이지 않았지만 태연의 얼굴에 약간 홍조가 돌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정작 본인도 얼굴이 태연이 안겨옴으로써 상기되어 있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한 채 말이다.

창현의 품에서 벗어난 태연은 여전히 상기되었지만 입가에 살짝 미소가 서려 있었다. 무서운 영화를 곧잘 보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같이 본 이유가 존재하고 있던 것이다.

사전에 수업의 일환이라 말을 했으니 과감한 스킨십에도 섣불리 반응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것이야 말로 합법(?)적인 스킨쉽이 아닌가.

문득 태연은 멤버들이 이런 행동을 하고 있다는 걸 알면 어떨지 상상하며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흐흐흐! 너희들은 절대 해보지 못할 것들을 오늘 이렇게 저렇게 해볼 거다!’

야심차게 준비한 계획들을 하나하나 이행하면서 태연은 진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지만 영화가 제법 무서웠기에 여전히 창백한 안색을 하고 있었다.

태연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무려 다섯 번이나 창현의 품에 합법적으로 안기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영화 무서웠어.”

“그래요.”

태연은 영화가 무섭다고 말을 하며 호들갑스럽게 말했지만 창현은 그에 대해 대답을 잘 해줄 수가 없었다.

시시각각 스킨십을 해오는 태연 때문에 영화에 집중할 틈이 없었던 것이다.

예전 같으면 여자들이 이렇게 접근해올 때 단호하게 거절을 했을 텐데,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는 명분하에 안겨오는 태연을 매정하게 뿌리칠 수 없었다.

무엇보다 결정적인 것은 태연이 안겨올 때 그 감촉이 나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히려 안겨올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렸고, 더 안겨오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계획대로 창현의 품에 실컷 안겨본 태연은 그 감정을 절대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녀는 창현에게 말한다.

“영화가 무서운 탓에 좀 오버했지? 미안해.”

“아, 아니에요.”

“좀 심하긴 했지. 그런데 내가 안길 때 기분이 어땠어?”

“…나쁘지는 않았어요.”

솔직하게 대답하는 창현이었다. 행여 그가 좋지 않게 생각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나쁘지 않았다고 말을 하자 태연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은 채 창현에게 말한다.

“나쁘지 않았다면 희망은 있는 거라 생각해. 이성이 안길 때 좋다는 것은 그에 대한 자각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니까. 창현이 너라서 그럴 수 있던 거야. 내가 창현이 너를 위해 많이 노력하고 있는 거 알고 있지?”

일말의 걱정이 있다면 자신을 조금 해프가 볼 수 있다는 염려였다. 그렇기에 창현이 특별하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그 말의 의미를 파악한 창현이 웃음을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알고 있어요. 태연 누나가 저를 위해 많이 노력해주고 계시다는 거.”

“알아주니 다행이야. 고마워.”

“고맙긴요. 절위해서 이렇게 해주시니 제가 오히려 너무 고마운 걸요.”

아홉 명을 이끄는 리더의 진가가 여기에서 드러난다. 태연은 자신이 실컷 즐겼(?)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자신이 손해 보는 식이라는 이야기를 은연중 풍김으로써 창현의 고마운 마음을 이끌어낸 것이다.

실로 놀라운 운영력이 아닐 수 없었다.

“고마운 걸 알면 보답도 해야 하는 거 알지?”

“그럼요.”

이로써 창현은 자신에게 은연중 고마운 감정을 갖게 될 것이고, 그로 인해 자신을 대하는 것을 한층 각별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게다가 결정적인 것이 또 있다.

바로 스킨십을 하는데 자연스러워진다는 것.

영화를 보면서 커트라인을 그어놓았으니 자신이 팔짱을 끼거나 안겨도 창현은 이렇다 할 제지를 하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자신을 위해 더욱 분발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으리라.

‘모든 건 계획대로.’

속으로 미소를 지어보인 태연이 창현을 보면서 말을 꺼낸다.

“그럼 점심 먹고 다음 코스인 놀이공원에 가자.”

주도권은 태연에게 넘어온 상태. 창현은 순순히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죠.”

창현이 깨닫지 못하는 사이 그는 점점 태연의 2차 조련에 빠져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

점심을 해결한 창현과 태연은 곧장 놀이공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것이 염려가 되었는지 창현이 태연을 보며 걱정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사람들이 많지 않을까요?”

사람이 많으면 운신이 불편하고 자칫 잘못하면 정체를 들킬 수도 있다. 갈 장소가 넘치는 마당에 굳이 놀이공원에 갈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창현이었다.

그 말에 태연이 창현을 바라보더니 입가에 싱긋 미소를 짓다가 혀를 차 보인다.

“쯧쯧! 그것은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

“……?”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창현.

태연은 친절하게 설명을 해준다.

“놀이공원은 남녀가 함께 놀이기구를 탐으로써 감정이 싹트기에 무척 좋다고. 게다가 사람이 많은 것? 오히려 사람이 많아서 우리를 알아보기 힘들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어?”

“아아, 그건 그러네요.”

놀이공원에서 남녀의 감정이 싹튼다는 것은 잘 모르겠지만 사람들이 많음으로써 오히려 알아보기 힘들 수도 있다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자신의 말에 순순히 응하기 때문일까?

태연은 빙긋 미소를 지어보이더니 그대로 손을 뻗어 창현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아유, 착하다.”

머리카락이 스치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지만 모자 위로 쓰다듬는 것도 묘한 매력이 있었다.

“제가 어린 아이도 아니고.”

“오늘만큼은 어린 아이라고. 나는 가르치는 선생님이고 너는 제자니까.”

미소를 지으며 말을 하는 태연의 모습에서 전혀 선생님과 매치가 되지 않았다.

그 모습에 창현이 저절로 중얼거렸다.

“쳇! 제자보다 키 작은 선생님이라니…….”

“뭐시라? 방금 들어서 안될 말을 들은 것 같다만?”

“잘못 들은 셈 치세요. 하하! 그럼 갈까요?”

대범하게 보였던 태연이 눈을 부릅뜨며 창현을 바라보자, 어색하게 웃음을 지으면서 얼버무린다.

“흠! 한 번 봐주겠어. 그런 태도는 이롭지 못하다고. 알지?”

“예예.”

태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따라가는 창현이었다.

놀이공원에 가기 위해서 두 사람은 지하철에 탑승하였다. 제법 오랜만에 지하철에 탑승하는 것이기에 태연은 신기한 눈으로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둘러본다.

두리번거리는 그녀에게 창현이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사람이 많아서 들킬 수도 있다고요.”

“괜찮아.”

고집을 부리는 태연이었지만 사람이 점점 몰려들자 작은 체구로 버티는 것이 상당히 벅차졌다.

“으윽!”

구석으로 몰린 태연이 신음을 흘리자 창현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그녀의 손을 잡아끌며 그대로 구석에 몰아넣는다. 그리고 양손으로 벽을 짚은 뒤 사람들의 여파를 몸으로 버텨낸다.

“괜찮아요?”

“으응.”

얼굴이 무척 지척에 자리하고 있었기에 태연이 얼굴을 살짝 붉힌 채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 태연의 모습을 눈치 채지 못했는지 창현이 연신 그녀를 타박하였다.

“그러니까 왜 그렇게 둘러봐요. 신기한 건 이해하지만 자칫 잘못하면 다칠 수도 있다고요. 가뜩이나 체구가 작아서 사람들에게 휩쓸리기도 쉬우면서.”

“으윽!”

무어라 말을 하려 했지만 고개를 푹 숙이는 태연이었다. 그의 말을 듣지 않아서 하마터면 이산가족이 되어버릴 뻔했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고분고분해지니까 좀 귀엽네요.”

“여, 여자에게 귀엽다는 말은 실례라고!”

누구에게 듣는 말인데 싫겠는가. 하지만 여자는 귀엽다는 말보다 예쁘다는 말을 더 좋아하는 족속. 그것을 냉정하게 지적하는 태연이었다.

그러나 창현은 그런 태연의 말을 전혀 듣지 않은 채 미소를 짓고는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알았어요. 하지만 거짓말을 할 수는 없잖아요. 누나는 예쁘다기보다는 귀여우니 그러려니 하세요.”

“알았어.”

더 몰아치고 싶었지만 창현이 자신을 위해 버티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태연은 더 말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이고 만다. 그리고는 고개를 푹 떨구더니 창현의 가슴에 머리를 가져다 댄다.

“조금만 이러고 있을게…….”

“그러세요.”

졸린 건가? 라고 중얼거리던 창현은 딱히 무게가 느껴지지도 않았기에 태연의 행동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보이고는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창현의 가슴에 머리를 댄 채 숙이고 있는 태연의 얼굴은 잔뜩 붉어져 있었다.

‘으으, 부끄러워서 어떻게 해…….’

그녀가 고개를 숙인 것에는 상기 된 자신의 얼굴을 보여주기가 싫어서 그런 것이다.

오늘은 자신이 리드를 하는 날인데 이런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이 무척이나 부끄러웠기에.

놀이공원에 도착할 때까지 태연은 그렇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와… 사람 진짜 많네.”

놀이공원에 도착한 창현은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숫자가 엄청나게 많았던 것이다. 대부분 교복을 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학교에서 단체로 온 듯하였다.

“이거 타려면 한 시간 넘게 기다려야 할 것 같은데요?”

“별 수 있겠어? 게다가 많이 타려면 밤늦게 타는 게 좋아. 낮에는 기다리면서 연인들끼리 시간을 보내고 함께 타는 맛이거든. 밤에 많이 타기로 하고 기다리면서 이 분위기 자체를 즐기자.”

마치 이런 상황을 예상한 듯 말을 하는 태연의 모습에 창현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네, 네.”

“자, 가자.”

자유이용권 두 개를 끊은 태연은 창현의 팔을 잡아끌며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가장 먼저 구입한 것은 토끼 모양의 귀.

창현은 그걸 구입하는 태연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태연 누나가 하면 귀여울지도.’

귀여운 외모에 귀여운 모양의 토끼 귀라. 상당히 멋진 조합이 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창현의 생각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토끼 귀를 구입한 태연은 자신이 착용한 것이 아닌 그것을 창현에게 가지고 오더니 그대로 그것을 그에게 내밀었던 것이다.

“어? 이걸 왜 저한테…….”

“창현이 너 하라고 산 건데?”

“에?”

창현의 입에서 어이가 없다는 식의 소리가 흘러나왔다. 자신이 왜 이런 걸 한단 말인가?

“이걸 하면 귀여울 것 같거든. 고개 숙여봐, 내가 직접 해줄 테니까.”

“후! 알았어요.”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테지만 오늘은 놀러온 게 아닌 수업(?)을 하러 온 것이기에 태연의 말에 순순히 납득하며 허리를 살짝 굽히는 창현이었다.

태연은 그런 창현의 머리 위에 토끼 귀를 얹어주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음음! 잘 어울린다. 귀여워.”

“남자가 귀엽다는 소리를 들으면 별로라고요.”

“지하철에서 한 말 그대로 돌려주겠어. 창현이 너도 귀여우니까 별로라고 해도 어쩔 수 없는 거야.”

“에휴!”

그 말을 잊지 않은 채 자신에게 해버리는 태연의 모습에 한숨을 내쉬는 창현이었다.

어쨌든 준비를 마쳤기에 두 사람은 안으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어느덧 창현과 팔짱을 낀 채 커플 분위기를 내며 걷고 있었다.

놀이공원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은 창현과 태연을 보면서 힐끗힐끗 시선을 주고 있었다. 모자와 안경을 썼지만 창현과 태연은 사람들이 한 번씩 돌아볼 만큼 뛰어난 외모를 자랑하고 있었기에 그렇다.

“처음부터 바이킹?”

“놀이공원의 꽃은 바이킹이잖아? 자, 가자.”

“예예.”

긴 줄을 보자마자 사람을 질리게 만들었지만 태연은 그것마저도 즐기는 듯 창현을 이끌고 그곳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창현을 줄 서게 만들고는 자신은 사라진다.

잠시 후, 등장한 태연의 양손에는 삼단 아이스크림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삼단 아이스크림이 하나만 있는 들고 있던 것이다.

“에? 왜 아이스크림이 하나에요?”

창현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은 채 묻자, 태연은 태연한 얼굴로 말한다.

“나눠 먹어야지.”

“네?”

얼굴에 곧바로 황당함이 번져나간다. 아이스크림을 나눠 먹다니! 이것은 어디에서 나오는 행동이란 말인가?

하지만 태연의 안색에는 변함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뚱한 표정을 지은 채 창현을 타박한다.

“창현이 너 너무 보수적인 거 아냐? 요즘 커플들은 아이스크림 하나로 나눠 먹는다고. 그러니까 그런 표정 짓지 말도록 해. 자, 너도 한입 먹어봐.”

태연은 먼저 한입을 베어문 뒤 그것을 그대로 창현에게 내민다.

“…….”

그녀가 내민 아이스크림을 보며 창현은 생각에 잠겼다. 이것은 소위 말하는 간접키스라는 것이다. 자각을 하지 않을 때는 아무렇지도 않게 했을 테지만 태연이 누누이 강조를 하면서 내미니까 묘하게 긴장의 마음이 들었다.

“안 먹을 거야?”

창현이 선뜻 나서지 않자 태연은 실망한 표정을 짓는다.

그 표정은 마치 장화 신은 고양이처럼 사람의 마음을 자극하는 표정이어서, 망설이던 창현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움직여 아이스크림을 한입 베어 물고 있었다.

그러자 태연은 언제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냐는 듯, 환한 표정을 지어보이면서 창현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말 잘 듣는다. 후후! 그래, 그렇게 하는 거야.”

그러면서 창현이 베어 문 곳을 향해 아이스크림을 크게 한입 베어 문다. 완벽한 간접키스였다.

“흠흠!”

그 모습에 부끄러워 창현은 고개를 돌려 태연의 시선을 피한다. 왠지 남자와 여자의 입장이 뒤바뀐 듯하여 느낌이 묘했다.

그런 창현의 모습에 태연은 진한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아이스크림을 같이 먹고 함께 사진도 찍으면서 1시간 20분을 기다린 끝에 바이킹을 탑승하는데 성공한다.

두 사람이 탑승한 곳은 가장 무섭다고 하는 끝 부분이었다.

원래 소극적인 주인공이라면 놀이기구를 무서워하는 것이 인지상정!

하지만 창현은 공포영화도 무서워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바이킹을 무서워 할 리가 없다.

다만 흔들거리며 높이 치솟아 오를 때 묘한 쾌감이 느껴져 돌고래 초음파에 버금가는 소리를 지를 뿐.

태연도 바이킹이 즐거운 듯 양손을 번쩍 들며 기쁨이 담긴 소리를 지른다.

그렇게 몇 번 흔들어주던 바이킹이 마침내 멈춰 선다.

1시간 20분 동안의 기다림에 비하면 너무나 짧은 즐거움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웠다.

“아, 좋다. 또 타고 싶네.”

“그러게요, 재미있네요.”

“그렇지? 야간개장 할 때 사람이 많이 없으니까 그때 또 타자.”

신이 난 태연은 이제 자신이 전세를 낸 것 마냥 자연스럽게 창현의 팔을 낚아채고는 그를 이끌며 놀이기구를 타기 시작했다.

외부로 나와서 범퍼카와 고공파도타기를 차례대로 탄 두 사람은 아틀란티스를 타기 위해 줄을 섰다.

시간을 확인하니 2시 30분쯤에 도착했던 것이 어느덧 6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저녁은 언제쯤 먹을까요?”

“저녁? 이거 타고 먹자.”

“그러죠.”

학교에서 해산이 되었기 때문일까. 학생들 상당수가 보이지 않았고, 그로 인해 줄이 한결 줄어들어서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은 채 아틀란티스에 탑승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밥을 먹고 나오니, 시간은 어느덧 7시였다.

“으, 놀이공원은 하나하나가 전부 비싼 것 같아.”

그렇게 말을 하지만 계산을 한 건 태연이 아닌 창현이었다.

자신이 말해놓고 무안했는지 태연은 얼굴을 살짝 붉히더니 그대로 창현을 잡아끌며 말한다.

“자! 식후에는 자이로 드롭이 제 맛(?)이야. 위아래로 흔들어주면 소화가 쑥쑥 될 거야. 아마도.”

‘아마 먹은 게 그대로 역류할 것 같은데…….’

그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실내에서 실외로 나오는 동안 제법 걸었기에 소화가 된 상태였다.

놀이공원의 백미답게 자이로 드롭에는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어림잡아 한 시간 정도는 기다려야 할 정도로 긴 줄이었다.

“역시 인기가 많은 놀이기구답네요.”

“그건 그래. 그런데… 어! 저건?”

생각보다 줄이 길자 인상을 살짝 찌푸리던 태연은 한쪽에서 무언가 준비하는 것을 보고는 눈을 빛내며 창현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창현 또한 시선을 그곳으로 옮기니 무언가 이벤트를 준비하는 듯 분주하게 사람들이 움직이는 게 보였다.

“저거 구경하자.”

“그러죠.”

고개를 끄덕인 창현이 태연과 함께 이벤트를 준비하는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벤트의 제목은 ‘남자들이여! 힘을 보여라!’ 라고 되어 있었다. 준비된 해머로 내리쳐서 나오는 점수에 따라 상품이 지급되는 이벤트인데, 낮은 점수가 나올 경우 공개적으로 힘없음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였기에 상당한 리스크가 존재하는 이벤트였다.

그 이벤트를 지켜보던 태연은 창현에게 고개를 가까이 하며 속삭였다.

“창현아, 나 저거 갖고 싶어.”

태연이 가리킨 것은 몸에 걸칠 수 있는 인형이었다. 상당히 귀엽게 생겨서 사람들이 좋아 할 법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창현의 얼굴에 난감한 기색이 서렸다.

“인형이요? 하지만 정체를 들킬 수도 있는데…….”

“저것 봐. 그냥 이름만 밝히고 해머 두드리면 되는데?”

“으음.”

아무것도 문제가 될 것 없다는 말에 창현이 침음을 흘리며 지켜보다가 몇몇 사람들이 더 신청하는 것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나선다.

“알았어요. 저 인형 획득하고 올게요.”

“파이팅!”

자신을 위해 나서준다는 창현의 말에 태연이 파이팅 포즈를 취해주었다.

그 모습에 피식 웃음을 흘리던 창현이 몸을 이리저리 풀면서 앞으로 나선다. 그리고 참가 신청을 하자 사회를 보고 있는 사람이 눈을 빛내며 묻는다.

“새로운 참가자가 나오셨군요. 이야, 몸이 무척 잘 빠져서 키가 무척 커 보이네요. 하지만 힘은 그렇게 세 보이지 않는데… 무슨 이유로 참가 신청을 하신 건가요?”

“여자 친구가 저 2등 상품 인형을 갖고 싶다고 해서요.”

“2등이라 해도 아직 한 개도 타지 못한 상품입니다. 참가하기 전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사회자의 말에 창현은 잠시 멈칫했다가 볼을 긁적이며 말한다.

“힘 조절이 실패해서 1등이 되더라도 2등 상품을 달라고 할 테니 염려하지 말길.”

창현의 말에 사람들이 피식 실소를 지었다.

힘이 좋은 남자들조차 2등 상품을 타내지 못했는데 1등이 되더라도 2등 상품을 달라고 하더니. 허세 하나 만큼은 무척 대단하다고 생각하였다.

사회자도 잠시 벙쪄있다가 어색한 웃음을 짓는다.

“하하, 좋은 자신감입니다. 부디 1등이 되길 기원하면서 준비해주시기 바랍니다.”

살짝 고개를 끄덕인 창현이 기계가 있는 곳을 향해 움직이며 양손으로 해머를 움켜쥔다.


사람들의 비웃음은 어느 정도 예견하였다.

자신의 체격이 호리호리한 만큼 힘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별로 들지 않았겠지. 그래도 어느 정도 기본적인 운동을 하기에 체력이나 힘 같은 건 상당히 받쳐주고 있다. 굳이 내공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세맥 같은 곳에 스며들어 체력 자체가 무척 대단했고. 외부로 단련을 한 것이 아니라 내부로 단련을 했기에 보이는 것과 달리 상당히 튼튼한 몸을 지니고 있었다.

다만 사람들이 모를 뿐.

‘어디 보자…….’

주변을 슬쩍 둘러보니 하나같이 자신을 비웃고 있는 모습들이었다.

하기야, 호리호리 하니까 힘을 쓰는 것처럼 보이지 않겠지.

해머로 힘껏 내리치면 된다고 생각하겠지만 제법 만만치가 않다.

이미 여러 남자들이 해머를 내리쳤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높은 점수를 취득한 사람이 789점이었다.

800점이 넘어가면 2등 상품을 얻을 수 있고, 900점이 넘으면 1등 상품을 얻을 수 있다. 여태까지 십여 명의 남자들이 했음에도 불구하고 789점이 최고 점수라면 그 난이도가 얼마나 높은지 알 수 있다.

‘설마 날 알아보거나 그러지는 않겠지.’

창현은 자신을 알아볼 리 없을 것이라 생각하며 양손에 쥐어진 해머에 힘을 준다. 그러자 손에 착 감기는 촉감. 제법 나쁘지 않은 느낌이었다.

확실하게 보여주겠다고 다짐을 한 창현은 양손에 굳게 힘을 주었고, 내공을 서서히 끌어올리자 상상도 할 수 없는 거력이 내부에 휘돌기 시작한다.

그리고 서서히 치켜드는 해머.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해머에 집중되는 순간, 창현이 몸을 튕기며 모든 체중과 내공을 폭발시키며 내리 친다.

쿠콰ㅡ아아앙!

벼락이 지면에 내리 꽂히는 듯한 어마어마한 충격음이 주변에 울려퍼졌다.

그 소리가 어찌나 컸는지 주변에 둘러보는 사람들은 움찔 떨며 뒤로 물러날 정도였고, 놀이기구에 탑승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던 사람들조차 시선을 돌릴 정도로 어마어마한 소리였다.

띠리리리리.

창현이 내리친 힘이 그대로 점수로 환산되기 시작했다.

일자리 숫자부터 시작하여 십의 자리까지 19점이 나온다. 그리고 뱅글뱅글 돌더니 백의 자리에 9라는 숫자가 선명하게 나온다.

919점이 나온 것이다.

와아아아아!

창현이 만들어낸 점수를 목격한 사람들이 화들짝 놀란 얼굴로 그와 점수판을 번갈아 바라본다.

저 체구에서 도대체 어떻게 이런 점수가 나올 수 있단 말인가.

경악과 놀라움이 뒤범벅된 그들의 시선이 창현에게 향하고 있었다.

그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 듯 창현은 빙긋 미소를 지어보이더니 사회자에게 다가가며 말한다.

“2등 인형 받고 싶은데요.”

“네, 네! 알겠습니다. 받아가십시오.”

무지막지한 힘을 본 사회자의 태도는 판이하게 뒤바뀌어 있었다. 저 체구에서 믿기지 않을 정도로 대단한 힘을 발휘하자 경직된 얼굴로 창현이 처음 가리켰던 인형을 건네준다.

그 인형을 받아든 창현이 흐뭇한 미소를 지어보이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형을 안아들고 태연에게 향한다.

“누나, 여기요.”

“고, 고마워. 정말 탈 줄 몰랐어.”

태연은 엄청난 힘을 발휘하는 창현의 모습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고 보니 묻어두었던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자신이 깡패들에게 습격당했을 때 그가 직접 나서서 깡패들을 물리쳤었지. 확실히 그때를 떠올려보면 창현의 힘이 보이는 것과 달리 대단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뭘요. 오늘을 기념하면서 선물하는 건데요.”

“그, 그래? 그렇다고 보답하는 건 잊으면 안 돼.”

자신이 실컷 즐겼음에도 불구하고 창현에게 도리어 보상을 요구하는 태연. 하지만 그 모습이 너무나 당당하고 자연스러워서 창현은 절로 자신이 보답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하, 물론이에요. 오늘 누나 덕분에 상당한 도움이 되었으니까요.”

“그럼 다행이고. 자, 이건 이렇게 할게.”

인형의 팔을 움직여서 자신의 목에 거는 태연이었다. 복장과 잘 매치되지는 않았지만 무척 귀여운 느낌이 들었다.

“귀엽네요.”

“내가? 인형이?”

새치름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태연의 모습에 창현은 피식 웃음을 짓고는 말했다.

“둘다요.”

“어휴! 내가 말을 말아야지. 말해봤자 나만 손해네.”

그러면서도 입가에 진한 미소를 짓고 있는 태연이었다.

두 사람은 자이로 드롭에 탑승하기 위해 줄을 서기 시작하였다.

그 뒤에 이어진 데이트는 나름대로 즐거웠다.

자이로 드롭을 탐승한 뒤 자이로 스윙, 혜성특급 등 두 개를 더 타자 야간 개장이 되었고, 사람들이 눈에 띄게 빠져나가면서 마음껏 놀이기구에 탑승할 수 있었다.

“우리 이거 타죠!”

실내로 들어온 창현은 하나를 가리키며 말하자 태연이 그곳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사색이 된다.

“저, 저걸 타자고?”

“왜요, 다른 것들은 잘 타놓고.”

창현이 가리킨 놀이기구는 내부에 위치한 놀이기구 중 가장 격한(?) 기구인 롤러코스터였다. 이곳에서는 프렌치 레볼루션이라고 하지만 롤러코스터라는 어감이 더 입에 익었다.

“하지만 저거 무서운데…….”

“별로 안 무서워요. 오히려 자이로 드롭보다 덜 무섭다고 느낄 걸요? 자자, 가요.”

“아, 알았어.”

창현이 거듭 재촉하자 거부하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이는 태연이었다.

안으로 들어서기 전 창현이 살짝 미소를 짓더니 물건을 파는 곳에 들어가더니 가면 두 개를 구입한다.

그것은 영화 스크림에서 나오는 호러 가면이었다.

“자, 이거 써요.”

“이걸 왜?”

태연이 의아한 얼굴로 창현을 바라보며 묻자, 그가 롤러코스터가 자리한 곳을 가리키며 말한다.

“저기 탑승하면 사진 찍히잖아요. 잘못하다가 얼굴 드러날 수도 있으니까 미리 철저하게 하도록 하자고요.”

“아, 그렇구나. 알았어.”

창현의 말에 깨달음을 얻은 듯 고개를 끄덕인 태연이 모자와 안경을 재빨리 벗어버리고는 가면을 쓴다. 창현 또한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가면을 썼다.

호러 가면을 쓰고 나란히 걷는 두 사람을 사람은 괴상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두 사람은 롤러코스터에 탑승한다. 그리고 한편의 장편 드라마처럼 이어지는 태연의 비명소리를 BGM 삼아 롤러코스터 탑승을 마칠 수 있었다.

“무, 무서웠어.”

몸을 바르르 떠는 태연의 모습이 재미있었는지 창현은 짓궂은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무섭긴요. 재미있어서 한 번 더 타고 싶은데. 한 번 더 탈까요?”

“아, 아니! 절대 반대.”

다른 놀이기구는 다 타면서 롤러코스터만 제대로 타지 못하는 태연의 모습이 이상했지만 그러려니 하면서 고개를 끄덕이고는 사진을 찍힌 모습을 가리킨다.

“하하하! 누나, 이거 봐요. 우리 찍힌 거.”

“응, 뭔데.?”

그때까지만 해도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던 태연이었다.

그러다가 창현이 가리키고 있는 사진을 보게 되었고, 그녀의 웃음이 터져 나왔다.

“엉? 이거 뭐야? 푸하하하하! 이거 너무 웃긴다.”

창현과 태연이 나란히 탑승하고 있던 사진은 장관이었다. 창현은 사진 찍히는 순간을 포착했는데 카메라를 향해 위협적인 손짓을 하고 있었고, 그 옆에서 태연은 무서운 듯 양팔을 휘저으며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자신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웃음을 터뜨리는 태연이었다.

그러다가 불현 듯 창현이 옆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입을 닫는다.

그리고는 자신의 방금 전 행동을 떠올리고는 무안한 표정을 지었다.

‘아, 내 이미지.’

기껏 구축해놓은 이미지가 이런 식으로 무너지다니.

창현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건만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는 태연이었다.

가면을 벗고 모자와 안경을 다시 쓴 두 사람은 지하철이 끊기기 전에 움직이기 시작한다.

자신의 이미지가 완전히 망가졌다고 생각했는지 태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고, 창현은 그런 태연을 보면서 고개를 갸웃하다가 말을 걸지 않은 채 조용히 침묵한다.

그리고 11시 30분이 되어서야 지하철역에 도착할 수 있었고, 나란히 발걸음을 옮긴다.

아파트 단지가 보이고, 소녀시대 숙소와 창현의 집이 갈라지는 갈림길에 도착하게 되었다.

“오늘 너무 즐거웠어요.”

“…….”

태연이 고개를 올려 창현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희미한 가로등만이 비춰지고 있었지만 웃음을 짓고 있는 창현의 미소는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마음고생이 제법 심했거든요. 어떻게 해야 할까 싶기도 했고, 이대로 모든 것을 잃는가 싶기도 했고요. 누나가 사랑에 대해 조언을 해주실 때 한 가닥 실마리를 잡을 수 있었고, 오늘 친근하게 대해주셔서 너무 좋았어요. 고민을 완전히 잊고 즐겁게 즐길 수 있었거든요.”

“정말 즐거웠어……?”

태연의 물음.

그에 창현은 고민할 필요도 없다는 듯 고개를 크게 끄덕인다.

“네, 무척 즐거웠어요. 누나가 말해주었던 사랑에 관한 것도 어떤 것인지 대략적으로 알게 된 것 같고요.”

그 말은 오늘 태연이 느끼고 있는 피로를 완전히 가시게 만드는 한마디였다.

환한 미소를 지어보인 태연은 순간 무언가 떠오른 듯 창현에게 말한다.

“즐거웠다니 다행이야. 창현이 네가 즐거웠다면 나 또한 만족하고 있고. 하지만 아직 한 가지 가르쳐주지 않은 게 있어.”

“가르치지 않은 거요? 뭔데요?”

고개를 갸웃하며 묻는 창현.

그에 태연은 살며시 창현에게 다가온다. 평소였더라면 그녀의 접근에 뒤로 한걸음 물러났을 테지만 하루 동안 공들여서 스킨십을 한 탓에 뒤로 물러서지 않는다.

지척 거리.

태연은 고개를 들어 창현을 올려다보면서 나직한 목소리로 말한다.

“마지막으로 가르쳐주기 위해서는 한 가지를 해줘야만 해.”

작은 속삭임.

예민한 창현의 귀에도 들리지 않을 정도의 소리였다.

그녀의 중얼거림을 듣기 위해 창현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진다.

“뭐라고요?”

“한 가지를 해줘야 한다고.”

“네?”

창현의 고개가 다시 한 번 더 기울어진다.

그 순간 번개같이 창현의 목을 휘감는 태연. 목을 감은 손에 힘을 주자 창현이 순간 엇! 하면서 몸이 기울어진다.

그리고 만나는 입술과 입술의 만남.

“……!”

갑작스러운 태연의 입맞춤에 창현은 눈을 부릅뜬 채 아무 대응도 못한 채 손을 놓고 있는다.

태연은 그런 창현을 입술을 음미하며 어른의 테크닉(?)으로 본격적으로 농락하기 시작한다.


어른의 테크닉이라고 해서 어려울 것이 없다.

자신이 하면 바로 그것이 어른의 테크닉 아니겠는가.

오늘 하루 동안 한 데이트의 정수는 바로 이곳에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창현에게 사랑을 가르치면서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어차피 화두는 던져줬다. 남은 것은 창현이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 아니겠는가.

‘나는 수고를 했으니 대가를 받을 자격이 있어!’

그것이 태연의 생각이었다.

자신은 창현을 위해 한 몸 열심히 희생을 하였다. 순결한 여인의 청백지신에 흠집(팔짱, 포옹)을 냈으면 책임을 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지극히 이기적인 발상이었지만.

태연은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 굉장히 망설임을 가지고 있었다.

오늘 데이트는 그녀 스스로가 놀랄 정도로 흡족하고 만족스러운 만남이었다.

지난 2년 동안 만나면서 진도를 뺀 것보다 오늘 하루 동안 뺀 진도가 더 많다고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얼마나 대단한 만남인가.

이대로 헤어져도 그녀는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다가 그녀는 멈칫하였다. 오늘 만남은 분명 만족스러웠지만 오늘 같은 기회는 생애 있어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다른 여덟 명의 견제와 창현의 상황이 맞아떨어지는 경우는 앞으로 몇 년 동안 좀처럼 나기가 힘들 것이다.

그렇다면?

인생은 한 방이다. 화끈하게 저지르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단점이 존재한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오늘 하루 내내 힘겹게 쌓아온 것들을 단숨에 잃어버릴 수 있던 것이다.

‘하지만 인생은 한 방이야.’

그렇게 결심을 한 태연은 어제 남몰래 컴퓨터로 열심히 모니터링 하던 것을 떠올리고는 창현과 입맞춤을 주도해 나갔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녀는 이미 프로 중 프로였다.

꾸욱.

창현의 목을 안고 있는 태연의 손은 절대 풀어질 줄 몰랐다. 그리고 자꾸만 혀를 날름거리며 우유를 핥아먹는 듯한 고양이의 혀 놀림에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지어야만 했다.

결국 두 사람 모두 초보라는 것이 들통 나는 순간이었다.

진정한 프로라면 초보를 리드하여 상황을 주도할 텐데 태연은 어떻게 주도할지 몰라 스스로 붕 떠버린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녀가 창현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기로 했다면 그것은 충분히 성공한 것이다.

입맞춤이라면 이미 두 번이나 경험을 해보았다. 그런데 혀로 날름거리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것이 바로 그 이름으로만 듣던 딥 키스(Deep Kiss)가 아닌가? 실제로 제대로 맞춰주질 못해 성사되지는 않았지만 창현은 자신이 그것을 했다고 생각했다.

“…….”

그렇기에 눈을 크게 뜨고 경악 어린 눈으로 태연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긴장을 했는지 입술과 입술이 떨어질 때까지 숨조차 쉬지 못한 채 긴장하고 있었다.

타액과 타액이 연결되어 가로등 불빛에 반사되어 야릇한 브릿지를 형성하고 있었다.

“후아! 후우!”

가로등에 비친 태연의 얼굴은 홍당무처럼 붉어져 있었고, 창현 또한 얼굴이 붉어진 것은 마찬가지였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행동에 창현은 어쩔 줄 몰라 하면서 태연에게 말했다.

“누, 누나 이건…….”

태연이 왜 이런 행동을 한 것인지 창현은 이해할 수 없었다. 잘 만남을 가졌고 이제 웃으면서 헤어지면 오늘의 일과는 마무리가 되는 것 아닌가. 그런데 헤어지기 전 키스라니.

오늘 느꼈던 것과 비교도 안 되게 열이 치밀어 오르고 한편으로는 자신의 내면에서 무언가가 강렬하게 솟아나는 걸 느꼈다.

본능적으로 창현은 이걸 위험한 것이라 여겼다. 그랬기에 그 기운을 필사적으로 억누르면서 태연을 바라본다.

모자를 쓰고 안경을 썼기에 얼굴이 드러나지 않았지만 하얀 피부를 자랑하던 그녀는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숨을 몰아쉬다가 길게 심호흡을 하더니 창현에게 말한다.

“처음이지?”

“네? 네?”

당황한 창현은 태연의 말에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다가 그녀가 무슨 뜻으로 말을 하는 것인지 이해한다.

엄밀히 말하면 처음은 아니다. 이미 2년 전에 첫 키스를 빼앗기고 작년에도 세컨드 키스를 빼앗겼으니까. 이번 키스는 정확하게 말하면 세 번째라고 할 수 있었다.

자신이 첫 키스를 다른 사람에게 빼앗겼다는 것은 거의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바였다. 그걸 태연도 모르지 않을 텐데 왜 묻는단 말인가.

창현이 입을 열려 할 때 태연이 말한다.

“커플로써! 아직 하루가 지나지 않았잖아. 그럼 우리는 커플인 거야. 커플로써 키스를 해본 건 처음이지?”

“그, 그러네요…….”

커플이라는 타이틀을 붙이면 처음이라고 말을 할 수 있다.

그 말을 들은 태연이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럼 창현이 네 마음이 담긴 첫 키스는 내가 가져간 거네? 그렇지?”

“에…….”

어째서 그렇게 되는 전개인지 몰랐지만 무어라 대답을 하기가 난감했다. 가뜩이나 머리가 복잡해서 뭐가 뭔지 사리판단이 제대로 서지 않고 있는데 첫 키스니 뭐니 하는 것에 제대로 된 답을 해줄 수 있을 리 없었다.

창현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태연에게 물었다.

“그런데 누나. 왜 저한테 키스를…….”

물어보기도 무척 난감했다. 자신에게 왜 키스를 했는지 몰랐고, 어른의 세계(?)에 발을 한 발자국 담갔다가 뺐기에 무척 당혹스러웠으니까.

만약 창현의 물음이 곧장 이어졌다면 태연은 무척이나 당황했을 것이다.

하지만 서로 입맞춤을 하고 어느 정도 시간이 생긴 바, 태연은 재빠른 두뇌 활동으로 그럴 듯한 변명거리를 만들어낸 상황이었다.

그녀는 싱긋 미소를 지으며 창현에게 물어보았다.

“수업의 일환이야. 어때, 오늘 있던 순간들 중 가장 두근거리지?”

“…….”

태연의 말에 창현은 무심코 자신의 가슴 부근에 손을 올려 심장박동을 느껴본다. 굳이 그런 행동을 할 필요도 없이 지금 자신의 가슴은 최고조로 두근거리고 있었다.

“일종의 되새김질이야. 이렇게 하면 오늘 그 감각을 절대 잊을 수 없을 거니까. 난 오늘 창현이 너와 일일 커플로써 임무를 완수한 것이고. 어때, 두근거렸어?”

“……네.”

거듭 말하지만 이 느낌은 위험하다.

입가에 미소를 짓고 고개를 살짝 들어 묻는 태연의 모습에 창현은 그렇게 느껴야만 했다. 그녀를 향해 그런 느낌을 받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내부에서 대대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것인지 몰랐고, 워낙 갑작스러운 변화에서 스스로가 혼란스러움을 느껴야만 했다.

그런 창현의 모습에 태연은 속으로 진한 미소를 지었다.

확실하게 도장을 찍어두었으니 창현은 자신이 펼쳐놓은 늪에서 당분간 헤어 나오지 못할 것임이 분명했다.

일종의 충격요법이라 할 수 있는데, 사랑에 대해 어렴풋 감을 잡아가는 창현에게 강렬한 충격을 선사하여 그 외 다른 자극에 반응을 하지 못하게 만든 것이다.

자신이 가한 자극보다 더 큰 것이 아니면 벗어나기 힘들 테니까.

이틀 동안 끓인 진한 사골 국물을 먹다가 시중에서 파는 사골 국물을 먹으면 제대로 된 맛을 느낄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자신을 뛰어 넘으려면 상당한 시간을 흘려보내거나 그보다 더욱 진한 사골 국물을 먹어야 할 테니까.

그 시간을 자신이 유야무야 보낼 리가 없을 테니 게임은 이미 끝난 터.

서서히 굳히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필요 이상으로 진도를 나가버렸지만 태연은 후회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이 테크닉 면으로 부족해서 어제 본 야동의 프롤로그격인 16분 37초의 테크닉을 제대로 펼치지 못해서 아쉬웠다. 그것만 하면 이성이 완전히 뿅 가버리던데 자신이 경험 부족으로 확실한 결정타를 날리지 못한 것이다.

아쉽기는 했지만 그것 뿐.

자신이 가장 선두로 나섰다는 것은 분명하고 이대로 1년 동안 잘 공들이면 창현은 자신 없이 못 사는 몸(?)이 될 것이다.

“두근거렸다면 나는 만족해. 전에도 말했지만 창현이 너를 위해 오늘 많은 것을 희생한 거니까. 이런 나의 노력을 잊으면 안 돼. 알겠지?”

이 착한 아이는 불행하게도 자신이 받은 것만 생각하고 남에게 해준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을 살짝 이용하는 것 같아 말할 때마다 살짝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는 했지만 이미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이용해야 하는 상황. 창현은 자신이 준 것을 반드시 잊지 않고 보답을 할 것이다.

“네. 알죠. 오늘 너무 많은 것을 받은 것 같네요. 여러 가지 의미로.”

“후후, 그래. 그런데 나도 좋긴 하네.”

“뭐가요?”

“수업을 한다는 명목 하에 창현이의 입술을 훔칠 수 있었으니까. 이런 행운은 좀처럼 찾아오는 게 아니잖아? 오늘은 무척 운이 좋은 것 같아.”

살짝 드러내는 사심은 그 사람의 진정성을 더욱 부각시킨다.

태연의 말을 들은 창현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좋을 게 따로 있네요. 후우! 어쨌든 오늘 너무 고마웠어요. 아마 평생 잊지 못할 날이 아닐까 싶네요.”

“평생 잊지 못한다면 나야 영광이지. 좋은 날이 되어서 다행이야. 그럼 나는 이만 들어가도록 할게. 창현이 너도 들어가 봐.”

“네, 그럴게요. 누나 먼저 가세요. 보다가 저도 돌아갈게요.”

매너도 좋은 창현이었다.

자신이 가지 않으면 창현도 가지 않을 기세였기에 태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발걸음을 옮긴다. 그리고 그녀가 막 시야에서 사라질 무렵, 창현 또한 몸을 돌리고는 발걸음을 옮긴다.


두근두근.

숙소가 위치한 아파트 단지로 들어서는 태연의 가슴은 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누나로써 당황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지만 실제 그녀의 심장은 당장 터질 듯이 심하게 두근거리고 있었다.

자신으로써는 모험을 하고 용기를 낸 것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그 계획들이 연달아 성공하자 그녀는 긴장감이 풀려버려서 바닥에 주저앉을 뻔한 몸을 간신히 지탱할 수 있었다.

비틀비틀 발걸음을 옮기면서 살며시 자신의 볼을 꼬집어본다.

따끔한 느낌.

결코 꿈이 아니었다. 꿈이 아니라는 건 자신이 오늘 한 행동들 모두가 꿈이 아닌 현실이라는 것이었다.

입가에 절로 미소가 감돈다.

“후후! 하하하! 오, 오늘 일이 정말 꿈이 아니란 거지? 정말 현실인 거지?”

너무나 기분이 좋고 보람찬 하루였다.

다른 쟁쟁한 멤버들의 견제 속에서 자신이 저만치 앞으로 나가고 있다니.

모르긴 몰라도 가장 앞서 나가는 것이 자신인 것은 분명할 것이다.

멤버들 중 창현과 키스를 해본 적이 있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그렇다면 결국 진한 스킨십에 어른의 진도까지 나갈 뻔하였으니 자신이 단독 질주를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너희들은 내 상대가 아니었으. 이미 게임은 끝난 거여. 하하하!”

기쁘다 보니 웃음소리가 정돈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렴 어떤가. 창현도 이 웃음소리에 딱히 제지도 하지 않았고, 자신 또한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웃음인데.

16분 37초의 테크닉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확실하게 창현에게 펼쳤더라면 게임은 완벽하게 끝났을 텐데 그것이 일말의 아쉬움으로 남았다.

그것만 성공했으면 2차 조련에서 단숨에 3차 조련으로 넘어가 궁극의 테이밍 경지에 도달할 수 있었을 텐데.

급하게 먹은 음식은 탈이 나는 것처럼 굳이 조급할 이유는 없지만 아쉬움이 남는 건 어쩔 수 없는 일.

그래도 오늘 진도에 대해서 굉장히 만족하고 있었기에 태연은 싱글벙글 미소를 지으며 엘리베이터에 탑승하여 숙소로 올라갔다.

슬그머니 시간을 확인하니 자정이 넘은 시간이다.

아직 멤버들 중 잠을 자지 않은 사람이 있을 테니 좀 일찍 왔다고 둘러대면 무어라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아침 9시에 나가 자정에 들어왔다면 15시간 동안 바깥에 있었다는 이야기니까.

멤버들에게 말리지 않기 위해 핑계거리도 완벽하게 준비해놓은 태연이었다.

그리고 막 숙소가 위치한 층에 도착하여 엘리베이터에서 내릴 때, 태연은 흠칫하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두웠던 복도의 불이 켜지면서 계단에 앉아있는 한 소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평범한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는 소녀. 모르려고 해도 모를 수 없다. 그녀는 같은 소녀시대의 멤버였으니까.

복도에 앉아있는 소녀는 다름 아닌 효연이었다.

태연이 그녀를 보며 흠칫하자 효연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태연아, 좀 늦었네?”

“으응? 느, 늦기는 뭘. 좀 일찍 온 건데.”

설마 효연이 있을 줄 몰랐기에 태연이 다소 부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말한다.

그러자 효연이 묘한 눈으로 태연을 바라보다가 물었다.

“전주 갔다 온다면서? 난 내일 올 줄 알았지.”

“조금 일찍 오게 되었어.”

제 페이스를 찾은 태연은 표정을 수습하면서 변화없는 표정으로 대꾸한다.

“그래?”

효연은 태연의 말을 듣고 의심하지 않고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숙소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다가 무언가 떠오른 듯 말한다.

“그런데 태연아.”

“응, 왜?”

“그 키스는… 좋았어?”

“……!”

그 말에 태연의 표정이 급변했다.

그녀는 황급히 숙소 문을 열려고 하는 효연의 어깨를 낚아챘다. 갑자기 어깨를 낚아채는 태연의 행동에 효연이 살짝 인상을 찡그리며 그녀를 바라본다.

태연은 효연의 눈을 보며 강하게 말한다.

“잠시 이야기 좀 하자, 효연아.”


태연과 헤어진 창현은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피곤한 몸을 침대에 푹 묻었는데, 아직까지 그 열기가 빠져나가지 않은 것 같았다.

두근두근.

심장이 요동치는 것이 귀에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거센 심장 박동은 자신이 그만큼 흥분한 상태라는 것을 뜻하고 있었다.

자신이 봉인하고 있던 감정이 터져 나온 것인지 아니면 태연에게 느끼고 있는 감정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태연이 말을 해주었던 사랑이라는 감정이 어느 것인지 짐작이 되었다.

“이 감정이라면…….”

자신이 미니 앨범을 계획하면서 했던 것들을 다시 재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지 못했기에 완성하지 못했던 콘티.

급하게 악상이 떠오르고 코드를 잡아내며 자신의 느낌을 한 곳에 쏟아붓는다.

30분… 1시간… 2시간.

무아지경의 경지에 빠져들어 정신없이 하던 작업은 새벽 3시가 되어서야 끝을 맺을 수 있었다.

자신이 완성한 것을 보고 뿌듯한 미소를 짓던 창현은 시간을 확인하고는 나직이 혀를 찼다.

“오늘은 일찍 자는 게 글렀군.”

그러면서 아직까지 두근거리며 요동치는 자신의 몸을 식히고자 곧장 샤워실로 들어간다.

쏴아아아.

따뜻한 온수로는 자신의 열기가 식지 않았다. 온도를 점점 낮추면서 냉수에 가까울 정도로 차가운 물을 맞아가며 뜨거워진 몸을 식히고 있었다.

“…….”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을 맞으면서 창현은 자신의 입술을 살짝 쓰다듬는다.

태연이 해준 어른의 키스.

부드럽고 형용할 수 없는 야릇한 기분이 다시 전신을 휘감는 듯했다.

다시 열기가 치밀어 오르는 듯하자 창현이 고개를 저어 그 기분을 털어버린다.

“태연 누나는 사심을 갖지 않고 그랬는데 오해하면 안 되지. 누나의 의도처럼 내가 사랑이라는 감정을 깨닫는데 주력을 하도록 하자.”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이 감정은 누군가를 향한 것이 아닌 그동안 자신이 억눌러온 감정이었다.

그 감정을 잘 다스림에 따라 자신의 약점을 극복하는 것은 물론, 한단계 도약을 위한 발판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태연이 효연을 데리고 간 곳은 아파트 옥상이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긴장감이 떠올라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 시간쯤이 되면 간혹 멤버들이 야식을 사기 위해 그쪽 길 방면으로 출몰한다는 것을 잠시 잊고 있었다.

이런 실수를 하다니.

자신의 어설픈 마무리에 한숨이 푹푹 나왔다.

창현을 조련하는데 성공했는데 마지막에 삐끗하다니.

게다가 상대는 다름 아닌 효연, 상대하기에 따라 최악일 수도, 최선일 수도 있었다.

다만 자신에게 최악이라는 것이 아쉬웠지만.

“본 거야?”

효연이 말을 하면서 확신에 찬 얼굴로 하는 걸 봤기에 태연은 다른 변명을 하지 않은 채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흥미로운 눈으로 태연을 바라보고 있던 효연은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봤어. 편의점을 가다가 웬 연인이 애정행각을 하고 있어서 방해하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가려고 했는데 둘 모두 익숙한 모습을 하고 있더라고? 변장을 하더라도 몇 년 동안 동고동락한 멤버의 모습을 놓치지 않지.”

“후우!”

확실히 효연의 말대로다. 자신 또한 밖에 나가더라도 같은 멤버들이 변장을 해도 알아볼 수 있으니까. 거기에서 효연이 자신을 봤다는 것은 하늘이 자신을 돕지 않는다는 뜻과 같았다.

모사재인 성사재천이라는 말이 간절하게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자신이 아무리 치밀한 계획을 세워도 뭐하나. 하늘이 자신을 도와주지 않는데.

길게 한숨을 내쉰 태연이 효연을 바라보면서 말한다.

“원하는 게 뭐야?”

“원하는 거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태연의 말에 효연이 고개를 갸웃하며 묻는다.

그러자 태연은 황당한 표정을 지은 채 효연에게 말했다.

“무언가 원하는 게 있는 거 아니었어?”

“내가 언제 뭘 원한다고 말했었나?”

“하지만 효연이 넌 알고 있잖아. 지금 애들 대다수가 창현이를 좋아하고 있다는 걸.”

그 말을 들은 효연의 눈이 빛났다. 지금 태연이 언급한 내용은 멤버들이 가장 언급하기 꺼려하는 것을 말한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금기와도 같아서 여태까지 누구도 언급하지 못한 말이기도 하였다.

그녀는 살짝 고개를 끄덕임으로써 자신 또한 알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그거야 척이면 척이지.”

“그런데 이 기회를 살리지 않겠다고? 내가 알고 있는 효연이라면 이 기회를 노려서 상당한 이권을 얻어내려 할 텐데.”

솔직하게 터놓고 말을 하는 태연이었다.

소녀시대 내 Big 3 중 한 사람이자 긴 연습생 생활을 거친 인물 중 하나가 바로 효연이었으니까. 그녀의 성격이라면 이번 일을 빌미로 자신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는 것이 당연하다 생각하고 있었다.

효연은 직설적인 태연의 말에 피식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날 나쁜 사람으로 만드네. 난 특별히 너한테 무언가 요구할 게 없어.”

“…그 말, 사실이야?”

태연이 눈을 빛내며 효연에게 묻는다.

그러자 효연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멤버들 대다수가 창현이를 좋아한다고 해도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야. 비록 계약서에 연애 금지 조항이 자리하고 있지만 그것은 우리 스스로가 조심하면 아무 문제될 것이 없으니까. 다만 내가 걱정하는 것은 서로의 경쟁이 너무 과열된 나머지 소녀시대란 그룹이 위기에 처할까 걱정이 되는 거야.”

대다수 남성 팬들의 선호로 먹고 사는 여성 아이돌이라 해도 그녀들 또한 사람이다. 한창 피가 끓어오를 나이에 연애도 하고 싶고 사랑도 하고 싶은 것은 당연한 심리다. 하지만 그 사실 자체가 그녀들에게 큰 흠집이 될 수 있어서 하더라도 누군가에게 들키지 않아야 한다는 절대적인 기준이 존재한다.

그리고 효연이 걱정하는 것은 멤버들이 너무 경쟁에 몰두한 나머지 소녀시대란 팀이 분열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태연은 그 말에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

“그거라면 다른 멤버들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어. 그러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걔들도 바보가 아니잖아? 어린 시절부터 연습해 와서 간신히 데뷔한 시점에 그동안 노력해온 모든 것들을 놓칠 리 없으니까.”

모두 가수의 꿈을 위해 몇 년 동안 노력해왔다. 그런 만큼 소녀시대라는 이름에 갖는 애착은 대단하였다. 그렇기에 다른 멤버들이 창현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은연중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언급을 하지 않은 것이다.

그것이 공식적으로 언급된 순간 자신들의 관계가 불편해질 것을 염려하고 있었으니까.

태연의 말을 들은 효연이 고개를 끄덕인다.

“팀에 문제만 생기지 않는다면 나는 상관하지 않아. 연습생 생활 때부터 보아왔잖아. 오히려 좋은 사람을 만나서 예쁜 사랑을 했으면 좋겠다고? 단지 한 남자를 가지고 싸우다가 서로 감정이 상할까 봐 두려워서 그렇지. 그렇게 되면 태연이 네가 반드시 촛불 토크를 열어줘야 해. 앙금이 남지 않게 그때그때 해소시켜줘야 하니까. 알겠지?”

“그래.”

평소 윤아와 더불어 김초딩과 임초딩 역을 맡고 있던 김초딩 효연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진지하게 팀을 걱정하는 그녀의 모습에 태연은 새로운 효연의 모습을 느끼면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긴 연습생 생활을 하면서 여러 가지 형태의 모습들을 보아왔을 테니 그만큼 정신적인 면에서 성숙되었을 것이다.

순순히 납득하는 태연의 모습에 효연은 싱긋 미소를 짓는다.

“그런데 오늘 전주를 간 게 아니라 창현이랑 시간을 보낸 거야?”

“맞아.”

이미 들킨 마당에 효연에게 숨길 것은 없었다.

순순히 수긍하는 태연의 모습에 효연이 감탄을 터뜨린다.

“너 정말 대단한데? 설마 그렇게 속일 거라고 생각도 못했어. 넌 철저하니까 아마 부모님에게도 조치를 취했을 거고 시간 또한 면밀하게 계산했을 테지. 아마 내가 눈으로 목격하지 않았으면 절대로 알아채지 못했을 정도로 말이야.”

“칭찬이지?”

“칭찬이고말고. 근래 들어 애들의 계략 중에서 가장 대단한데? 후후! 수연이에게 강적이 생겼어.”

“리더라서 여태까지 팀의 분란을 막기 위해 많은 것을 양보했지만 창현이 만큼은 양보할 수 없어. 그러니 나에게 리더로서 양보하라는 말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막상 털어놓으니 이야기가 술술 나왔다. 효연이 자신의 비밀을 지켜준다고 했으나 그녀는 엄밀하게 말하면 수연의 편에 속해 있는 인물. 자신의 입장을 확실히 해야 편할 것이라는 생각에 물러설 수 없다는 의지를 표명하였다.

“그렇겠지. 나야 인정하는 바니까. 어쨌든 키스라니, 아마 태연이 네가 진도는 제일 앞서 나간 거 같다.”

“그래?”

자신이 선두에 섰다는 이야기에 태연이 슬쩍 미소를 짓는다.

하기야, 창현의 성격상 강제로 하지 않으면 누가 입맞춤을 하겠는가. 자신 또한 거의 강제적으로 하지 않았던가. 그런 만큼 가장 앞서 나간 것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 가지 유의해야 할 것은 막내를 조심해야 돼.”

“막내… 그렇지.”

효연의 충고에 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 조용한 주현은 한 번 폭발하면 누구도 막을 수 없을 정도로 무서우니까. 물론 조용히 폭발하는 성격이기에 폭발력과 은밀함이 더해져 누구보다 무섭다.

오죽하면 최종병기라 불리겠는가.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하던 태연이 순간 흠칫하면서 효연에게 물었다.

“이걸 나한테 알려주는 의도가 뭐야?”

“의도라… 난 암투를 바라보는 재미가 쏠쏠하니 좀 더 과열되기를 바라는 거랄까?”

출혈을 줄이기 위해서는 누군가 하나가 확 낚아채는 것이 편할 텐데 좀 더 경쟁이 과열되기를 바라다니.

가장 선두에 서게 된 태연으로써는 달갑지 않은 말이었다.

“후우! 넌 여전히 짓궂어. 그것만 고치면 네 꿈인 현모양처는 따놓은 당상일 텐데.”

“아직 시간은 많으니 천천히 고치도록 하지 뭐. 아, 그리고…….”

슬슬 이야기를 마무리 지으려던 효연이 무언가 생각이 난 듯 태연을 보며 말한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할까 싶어 의아한 표정을 지은 채 그녀를 바라보자, 효연이 웃음을 지은 채 말한다.

“아무래도 맨입으로 입을 다물어주기에는 좀 그렇겠지?”

“원하는 게 뭔데?”

잠시 경계가 풀렸던 시점을 정확하게 치고 들어왔다.

태연이 경계 어린 표정으로 말하자 효연은 미소를 유지하며 말한다.

“그냥 나중에 내 부탁 하나만 들어줘.”

“…그게 끝?”

협상을 함에 있어 자신은 무척 불리한 위치에 서 있다. 지금 당장 효연이 무슨 요구를 하더라도 무리가 가지 않으면 자신이 들어줄 수밖에 없으니까.

김 빠진 표정을 짓는 태연을 보며 효연이 말한다.

“너무 적은가? 한 다섯 개로 늘려줘?”

“아, 아니야! 아주 적합해.”

짓궂은 미소를 짓는 효연을 보며 태연의 머릿속에 적색 경보가 울려 퍼졌다. 지금 상태의 효연을 건드리게 되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골치 아파진다.

질색을 하는 태연의 모습에 효연은 픽! 하고 웃음을 지으며 몸을 돌렸다.

“아무 대가 없이 입을 다물어주겠다고 하면 태연이 네가 믿지 않을 것 같아서 말이야. 방금 내가 했던 말들은 진실이라고. 믿어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조건을 건 거야. 오늘 일은 함구할 테니 알아서 잘 해보라고.”

“효연아…….”

감동한 표정으로 효연을 바라보는 태연이었다. 지금 세상에 천사가 있다면 바로 효연을 가리키는 것이라 생각할 정도로.

하지만 태연이 한 가지 잊고 있는 것이 있었다.

효연이 말을 한 내용 중 그녀가 독주하길 바라는 내용은 없다는 것을 말이다.

더욱 경쟁이 치열해져서 재미있는 상황이 만들어지길 그녀는 바라고 있었다.

‘그 사실은 알리지 않겠지만 좀 더 불을 지피는 것은 상관없겠지.’

이래서 한국말은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것이었다.

탱구의 3차 조련에 먹구름이 끼고 있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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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시즌2 시작!▲▲▲▲▲ +5 15.04.17 5,421 65 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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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마음을 울리는 음악 19장-21장 +4 15.04.16 11,485 270 216쪽
6 마음을 울리는 음악 16장-18장 +5 15.04.16 11,536 242 163쪽
5 마음을 울리는 음악 13장-15장 +5 15.04.16 14,527 297 237쪽
4 마음을 울리는 음악 10장-12장 +8 15.04.16 13,728 352 171쪽
3 마음을 울리는 음악 7장-9장 +10 15.04.16 14,540 362 142쪽
2 마음을 울리는 음악 4장-6장 +11 15.04.16 16,820 421 120쪽
1 마음을 울리는 음악 프롤로그-3장 +47 15.04.16 29,872 545 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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