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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번 님의 서재입니다.

마음을 울리는 음악

웹소설 > 작가연재 > 팬픽·패러디, 현대판타지

김현우
작품등록일 :
2015.04.16 13:27
최근연재일 :
2015.06.01 17:02
연재수 :
5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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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96,4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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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4.16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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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글자
215쪽

마음을 울리는 음악 55장-57장

DUMMY

제55장 던져진 화두




결과적으로 창현의 일본 진출은 대성공이었다.

보름 동안 활동은 일본 전역에 거대한 폭풍을 일으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그가 나온 방송 프로그램은 하나같이 시청률 대박을 터뜨렸고, 팬 미팅을 비롯하여 동방신기 콘서트에 게스트로 참가할 때는 현의 콘서트인지 동방신기 콘서트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로 큰 함성을 받아야만 했다. 불과 보름이지만 그 열기는 인기 연예인이 몇 년 동안 받아야 할 크기를 넘어설 정도로 대단하다고 할 수 있었다.

15일 간의 활동을 끝으로 창현은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공항으로 향한 창현은 다시 한 번 일본 팬들의 열정에 놀라야만 했다. 공항 자체에서 수용이 불가능 할 정도로 엄청난 숫자의 팬들이 공항에 몰려와 있던 것이다. 15일이란 시간이 무척 짧았기에 많은 팬들과 소통을 할 수 없었고, 그랬기에 일본 팬들은 한국으로 떠나는 창현을 보고자 공항에 몰려든 것이다.

너무나 감격스러운 상황에 창현은 팬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고, 인터뷰를 한 뒤 무사히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석규는 아직 사업에 관련된 일이 끝나지 않았고, 라샤는 본격적으로 일본에서 활동할 예정이었기에 한국으로 돌아오는 것은 창현과 세희 뿐이었다.

한국으로 돌아오고 나서도 편안하게 온 것이 아니었다.

창현이 한국으로 돌아온다는 소식이 전해짐에 따라 기자들이 공항에 진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창현의 활약상은 한국에 실시간으로 전달되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기자들이 눈에 불을 키고 인터뷰를 하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현이라고 하면 시청률을 보장해주는 보증수표와도 같은 역할을 하니 말이다.

결국 공항을 나서다가 기자들에게 붙잡혀서 한동안 인터뷰를 해야만 했다.

인터뷰를 끝내고 팬들 사이를 헤쳐 무사히 벤에 탑승한 창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우와! 힘들다.”

“힘들 수밖에 없지. 그렇게 인터뷰를 하는데 어떻게 힘들지 않겠어.”

옆에 있던 세희가 한 마디 하였다.

그러자 창현이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그게 아니라요. 이 짐들 때문에 힘이 들다고요.”

창현은 무슨 물건이 가득 들어있는 가방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세희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게 무슨 물건을 그렇게 많이 샀어? 보는 내가 다 질릴 지경이더라.”

세희가 그렇게 말을 할 정도로 창현이 산 물건의 양은 엄청났다. 한국에 있는 지인들에게 선물을 해야겠다고 창현이 엄청나게 물건을 사댔던 것이다. 그리고 그 물건의 양은 세희가 질린 표정을 지을 정도로 엄청나게 많았다.

“뭐 그럴 수도 있죠. 어쨌든 누나는 휴가죠?”

일본에 가면서 제법 고생을 했다고 여겼기에 석규는 세희에게 휴가를 주었다. 오늘부터 2박 3일 동안 쉬어도 된다고 한 것이다.

하지만 세희는 고개를 저어보일 뿐이었다.

“휴가 반납하려고.”

“왜요? 모처럼만의 휴가인데.”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창현이 물었다. 휴가를 받았는데 왜 거절하는 걸까?

의아한 표정을 짓는 창현에게 세희가 말했다.

“내가 생각해도 일본에서 한 일이 너무 없어. 난 창현이 네가 일본어를 할 줄 몰라서 내가 통역해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거든. 그런데 스스로 알아서 잘 하고 매니저 업무도 쟈니스 직원들이 알아서 하고 말이야…….”

창현이 이미 일본어를 할 줄 안다고 해도 리스닝이 되고, 간단하게 말을 하는 것만 할 줄 알았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창현은 일본어를 거의 현지인 수준으로 구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매니저 업무 또한 자신이 한 게 아니라 쟈니스에서 파견된 세 명의 매니저들이 하였다. 자신이 한 것이라고는 세 명의 매니저들에게 주의해야 할 점 같은 것들을 말만 했을 뿐이었다.

결과적으로 보름 동안 일본에서 빈둥빈둥 놀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 휴가까지 받으니 어찌 양심에 찔리지 않겠는가.

현의 매니저를 맡았기에 그 대가로 상당한 연봉을 받고 있다. 하지만 하는 일에 비해 연봉이 너무 높다고 생각하던 세희는 이런 휴가까지 받을 만큼 몰양심적이지 않았다. 그렇기에 휴가를 반납하고 회사에 나올 생각이었다.

창현은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뭐 그거야 쟈니스의 호의죠. 모처럼 그렇게 했으면 스케줄이다 하고 즐기면 될 텐데. 아쉽네요.”

“난 그렇게 태연하지 못하단 말이야. 일본에서 한 일도 없이 놀았는데 어떻게 휴가를 해. 어쨌든 난 내일 나가서 서류처리라도 할 거니까 그렇게 알도록 해.”

“네, 그러세요. 어차피 저도 휴식이니까요.”

일본에 갔다 온 창현도 마찬가지로 2박 3일의 휴가를 받았다. 그동안 장난이 아니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촘촘한 스케줄을 이행하지 않았던가? 게다가 스케줄을 하면서 잠도 거의 자지 못했기에 2박 3일 동안 쉬면서 체력을 회복할 예정이었다.

세희는 그런 창현의 말에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넌 휴식 취해야지. 그렇게 혹사해놓고 쉬지 않으면 병이 날 테니까. 편히 쉬도록 해. 넌 몸이 재산인 거 알지?”

“걱정해주니 고맙네요. 그럼 전 쉬도록 할게요, 하하!”

휴식을 준다고 해서 거절할 창현이 아니었다.

그렇게 창현은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창현은 우선 자신의 침대에 몸을 묻었다.

“후우! 역시 집이 최고구만.”

보름 정도 집을 비웠지만 정기적으로 집을 청소해주는 아주머니를 고용하고 있었기에 집은 무척 깨끗했다. 어차피 숙소와 녹음실, 회사를 번갈아 다녔고, 창현이 집을 더럽게 사용하는 편이 아니었기에 깨끗했지만 말이다.

“일단 돌아왔다고 소식이라도 보내야겠군.”

자신이 돌아온 걸 알리지 않으면 나중에 위협을 가할 인물들이 여럿 있었기에 창현은 전체 문자로 자신의 귀환 소식을 알렸다. 그중에는 전체문자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간단하게 용무를 전달하는 것이기에 전체문자를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면서 문자를 보냈다.

문자를 보내자 잠시 후, 핸드폰이 웅웅! 진동이 울리면서 답장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창현은 문자를 보낸 사람들에게 답장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창현은 방금 도착한 문자를 보고는 흠칫했다.

예전에 왔던 문자와 똑같은 문자가 도착했던 것이다.

바로 전체문자를 싫어하는 수연이 보낸 문자였다.

[전체문자지? 죽을래?] 얼음공주 제시카

“하, 하하! 역시 싫어하네.”

전체문자를 싫어하는 수연이었지만 자신의 행동을 이해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었나보다. 조금 아쉬운 점도 있고 한편으로는 섬뜩한 면도 없지 않아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방금 전 문자를 보낸 수연이 전화를 한 것이다.

내심 창현은 흠칫하면서 수연의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한국 돌아왔다면서?

“네, 방금 돌아왔어요. 근데 전체문자 보내서 전화하신 거예요?”

먼저 언급할까 싶어서 아예 선수를 치는 창현이었다.

그 말에 수연이 피식 웃음을 짓더니 말한다.

-아니, 그거 효연이가 보낸 거야. 내 말투 따라 해서 장난을 쳤더라고.

‘그렇구나! 다행이네.’

수연이 화를 낸 것이라 생각했던 창현은 마음이 한결 놓이는 걸 느꼈다. 그러다가 문득 장난을 친 효연의 안위가 궁금해져서 물었다.

“그럼 효연 누나는……?”

-궁금해? 정말로……?

마치 절대로 물어보아서는 안될 것을 물어본 듯한 느낌에 창현은 서둘러 부인하였다.

“아, 아니오. 별로 궁금하지 않네요.”

-차, 창현아 살려… 퍽! 조용히 햇! 효연이 붙잡고 간지럽 혀. 어느 정도로? 쟤는 지금 살아있으면 도움이 안 되니까 실신할 때까지 간지럽 혀. 그래, 알았어. 가르쳐 줄 테니까.

“…….”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창현은 침묵을 해야만 했다. 수연은 들리지 않겠다고 생각하겠지만 청각이 예민한 창현의 귀에는 지금 어떠한 상황이 재연되고 있는지 생생하게 들려왔으니 말이다. 건너편에서는 효연의 비명소리와 더불어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마구 들려오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잠시 대화가 이어지지 못하다가 수연이 핸드폰을 들었는지 숨을 몰아쉬면서 말했다.

-후우! 미안. 잠시 할 일이 생겨서 말이야. 어디까지 이야기 했었지?

“네? 그, 글쎄요?”

마치 동영상을 재생하는 것처럼 효연이 어떤 최후를 맞이했는지 생생하게 느낀 창현은 바짝 얼굴을 굳히고는 대답했다.

-어디까지 이야기했더라? 기억이 잘 안 나네. 아참! 우리한테 선물 사준다고 하더니 어떻게 됐어?

일본에 가면서 창현은 아는 지인들에게 선물을 사주겠다고 한 적이 있다. 제법 기대감이 높았기에 수연은 창현이 어떤 선물을 준비했는지 궁금했나보다.

“하하! 선물 준비해놓았어요. 그러니 그 점은 염려하지 않으셔도 되요.”

너무 많이 사서 세희에게 구박을 들을 정도가 아니었던가? 게다가 하나하나가 모두 어울릴 법한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선물에 있어서는 강한 자신감을 보였다.

-선물 준비해줬으니 우리가 찾으러 갈게! 언제쯤 시간이 돼?

근래 들어 창현은 드라마 촬영으로 인해 무척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소녀시대 또한 방송 출연과 행사 스케줄이 상당하였기에 서로 시간을 맞춰야 했다.

수연의 말에 창현은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저 오늘부터 내일 모레까지는 휴식이에요. 휴가 받았거든요. 그리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녹음실에 있을 생각인데 시간 나면 녹음실로 오시면 되겠네요.”

-녹음실? 잠깐만…….

잠시 멤버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듯하던 수연이 창현에게 물었다.

-그럼 내일 오후에 찾아가도록 할게. 시간 되지?

“자세한 시간은요?”

약속을 할 때 가장 속이 타는 것이 바로 불분명한 약속이었다. 가령 내일 전화를 주겠다 했지만 정확한 시간이 없는 한 내일 하루는 온종일 전화를 기다려야 하지 않는가? 그것은 은연중 심리적 압박을 가하는 것이기에 창현은 약속을 할 때 가급적 확실하게 시간을 정하고 하는 것을 좋아하였다.

창현의 말에 수연이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지방 행사라서 아무래도 끝나고 차 막히는 걸 봐야 결정이 날 것 같아. 시간은 저녁쯤이 될 것 같아.

지방 스케줄이라면 어쩔 수 없다. 그날 차가 얼마나 막히는지 모르니 말이다.

불분명한 시간이었지만 대충 저녁 시간 때쯤이라고 못을 박아두었기에 창현은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었다.

“알았어요. 그럼 내일 저녁쯤에 녹음실로 오세요. 준비하면 되죠?”

-응! 녹음실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우리가 근처로 가서 연락을 하도록 할게. 창현이 네가 성공적인 일본 활동을 한 기념 파티니까.

자신은 선물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느새 파티로 진화를 한 상태였다.

어이가 없었지만 자신을 위한 파티라는 말에 창현은 기분 좋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어차피 자신의 녹음실이라면 아직 위치도 밝혀지지 않았고 누군가에게 들킬 염려도 없으니 말이다. 여차해서 들키면 뭐, 드라마 ost 손볼 점이 있다고 하면 될 테니 대응 준비는 완벽하다고 할 수 있었다.

“알았어요. 그럼 내일 저녁에 뵙도록 해요. 선물도 기대해주시고요.”

-응, 그러면 내일 봐.

그 말을 끝으로 창현이 막 통화를 끊으려고 할 때였다. 건너편에서 아직 통화를 끊지 않았는데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일 만나기로 했으니까 그렇게 알도록 하고. 효연이 이것을 좀 더 묵사발 내둬야겠어! 감히 내 핸드폰으로 장난질을 쳐? 이참에 완벽하게 정신을 차리게 해줘야지. 아참! 내일 창현이 만나니까 외부에 상처 나지 않게 조심 해야겠네…….

“…….”

섬뜩한 말을 들은 창현은 자신도 모르게 핸드폰 통화종료 버튼을 눌렀다. 내일 만남을 위해 보이지 않게 다져놓는 섬세함이라니.

창현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무, 무섭네, 하하…….”

조금이나마 소녀시대의 실체를 알게 된 창현이었다.


수연과 통화 이후 재석이나 효리와도 전화를 한 뒤 창현은 편안하게 휴식을 취했다. 일본에서의 스케줄이 만만치 않았기에 침대에 눕자마자 곧바로 잠에 빠져든 것이다.

잠에서 깨니 이른 새벽이었다. 평소보다 빠른 5시에 일어난 창현은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잠에 빠졌던 것을 상기하고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이러다가 하루 리듬이 완전히 어긋나겠는 걸? 잘 다독여야겠군.”

생활 리듬이 어긋나게 되면 몸이 불규칙하게 변한다. 그렇게 되면 먹는 것이 살이 되고, 스트레스도 높아지며, 결정적으로 건강이 흐트러지게 된다. 상당히 강도 높은 스트레스를 받는 창현 같은 경우 규칙적인 생활이 관건이었기에 상당히 중요한 사안이었다. 그렇기에 매일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습관을 들인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난 창현은 옷을 편안하게 갈아입었다. 4월 말인 지금은 아직 덥다고 하기에는 조금 날씨가 쌀쌀하고, 춥다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따뜻했다. 그랬기에 옷 선정에 있어 상당히 난감한 면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러다 보니 무슨 옷을 입을까 고민하던 간단한 추리닝을 입고는 몸을 풀었다. 그리고는 명상에 잠기면서 오늘 하루를 위한 준비를 해나가기 시작했다.

명상을 끝내고 가장 먼저 한 것은 아침식사였다. 어제 저녁을 거르고 잠만 잤기에 상당히 허기가 진 상황이었다. 그랬기에 무엇을 해먹어야 하는데 상당히 시간이 걸리는 것들이어서 창현은 냉장고를 뒤지다가 떡과 어묵을 발견하였다. 언제고 떡볶이를 해먹으려다가 사놓은 것 같은데 유통기한이 불과 3일 밖에 남지 않았다. 그래서 창현은 아침 메뉴를 떡볶이로 결정하였다.

먼저 물을 끓이고 고추장과 물엿, 설탕을 넣고 간을 맞추기 시작했다. 양념이 어느 정도 만들어지자 떡과 어묵을 넣는다. 원래대로라면 파도 넣고 양파도 넣고 그럴 테지만 재료가 없으니 간단하게 떡과 어묵만 넣고 볶는다.

대충 떡볶이가 만들어지자 그릇에 덜어 넣고는 컴퓨터 앞에 앉는다. 그리고는 인터넷을 살피면서 고개를 나직이 끄덕인다.

“나쁜 평가는 없군. 한국에서도 제법 크게 터진 모양이네.”

보름 동안 한국에 없다 보니 당연히 근래 일어난 일에 어두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창현은 한국에 관련된 정보를 접하면서 그동안 알지 못했던 것들을 섭렵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자신의 일본 활동이 한국에도 많이 알려진 것을 확인하고는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자신의 활약상이 이곳에까지 알려져 있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게다가 드라마 홍보를 겸하여 갔기에 자신을 무어라 말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언제나처럼 무개념 악플이 달리기는 했지만 그런 것들은 신경을 쓰지 않은 지 오래되었기에 창현은 제법 유익한 인터넷 서핑을 할 수 있었다.

떡볶이를 다 먹은 창현은 간단하게 스타크래프트를 하기 시작했다. 보름 동안 게임을 하지 않았기에 손이 굳었다는 판단에서였다.

역시나, 게임을 하니 손이 굳은 것이 확연하게 느껴졌다. 끊임없이 담금질을 해야 더욱 단단해지는 것처럼 게임 또한 끊임없이 연습에 연습을 해야 실력이 느는 법이다. 창현은 자신의 기량을 되찾기 위해 꾸준히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였다.

“후우! 어느 정도 감각은 되찾았네.”

두 시간 동안 정신없이 게임에 몰두하던 창현이 시간을 보고는 정신을 차렸다.

다섯 시였던 시간은 어느덧 아홉 시가 되어 있었다.

참으로 시간이 빠르게 흐른다고 생각하면서 창현은 간단하게 지갑과 핸드폰을 챙기고는 집을 나섰다. 녹음실을 가기 위함이다.

창현이 수연에게 녹음실로 오라고 한 것에는 이유가 있다.

2박 3일이라는 휴식 기간을 그냥 빈둥빈둥 보낼 생각이 아니라, 새로운 앨범에 대한 구상을 해볼까 싶어서 그랬던 것이다.

자신의 정규 3집 앨범이 작년 12월에 나오지 않았던가? 지금이 4월 말인 걸 감안하면 슬슬 준비를 할 시기였다.

게다가 이번에는 방송 출연을 하면서 무대 위에 설 생각이었다. 동방신기 콘서트 게스트로 나가면서 자신이 무대 위에 서는 것을 얼마나 원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기에 무대 위에 오르고자 마음을 먹었던 것이다. 물론 그것은 석규와 이야기를 해야겠지만 이번에는 잘 협상을 하면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는 게 창현의 생각이었다.

여느 때처럼 옥상으로 가서 옆 라인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온 창현은 사생팬들의 눈을 유유히 피하고는 녹음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떻게 보면 촌스럽다고 할 수 있는 추리닝 차림에 모자를 푹 눌러쓰니 그를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날이 가면 갈수록 변장술이 늘어난다고 볼 수 있었다.

무사히 녹음실에 도착한 창현은 가볍게 숨을 몰아쉬었다.

“후우!”

아직 아무도 눈치를 채지 못했지만 그래서인지 더욱 스릴이 넘쳤다. 이곳을 들키게 되고, 출입이 잦은 걸 들키게 되면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 테니 말이다. 그렇기에 위치를 들키면 안 된다는 강한 압박감이 전해지고는 하였다.

가볍게 숨을 몰아쉬던 창현은 눈앞에 보이는 풍경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나저나 이곳은 먼지가 쌓여있네. 후우!”

녹음실은 청소를 하는 사람이 없었다. 누구에게도 위치를 노출하지 않으려는 방편이었던 것이다. 그 덕에 이곳에 창현만의 아지트가 될 수 있었지만 단점도 존재하였다. 모든 청소 같은 건 창현이 책임을 져야했던 것이다.

평소에는 자주 오곤 하였기에 문제가 없었지만 지금 같이 장기간 자리를 비우게 되면 먼지가 쌓이고는 한다.

고작 보름이라지만 보름이라는 시간은 먼지가 쌓이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한숨을 내쉰 창현은 곧장 녹음실을 치우기 시작했다. 그래도 보름이라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은 만큼 쌓인 먼지의 양은 얼마 되지 않았다.

어렵지 않게 녹음실 청소를 마친 창현은 소파에 앉아 몸을 묻었다.

“이제야 좀 사람 사는 곳 같아졌네.”

이렇게 넓은 곳을 한 시간 만에 치운 것도 기록이라 생각하며 한시름 놓은 창현이었다.

잠시 지친 몸을 쉬어주던 창현은 자세를 바로하면서 생각에 잠기기 시작했다.

“다음 앨범은 어떤 컨셉으로 할까…….”

우선 고민해야 할 점이 여러 가지가 있었다.

가장 먼저 정해야 할 것이 바로 앨범의 종류였다.

싱글로 할 것인가 미니 앨범으로 할 것인가 아니면 정규 앨범으로 할 것인가.

이에 창현은 은연중 미니 앨범으로 마음을 굳히고 있었다.

정규 3집 앨범 같은 경우 자신이 미리 준비한 면이 강했기에 준비를 하는데 오래 걸리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슬럼프 파동으로 인해 제대로 된 준비를 할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슬럼프로 인해 한동안 손을 대지 않았고, 그러다 보니 제대로 된 곡을 준비하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테마조차 정하지 않은 만큼 앨범이 준비될 리가 만무하였다. 그러다가 일본에서 자신이 어느 정도 슬럼프에서 벗어났다고 판단이 되었기에 본격적으로 앨범을 준비할 마음을 굳히게 된 것이었다.

정규 앨범은 시간이 너무 걸리기에 포기를 한 상황이었고, 싱글 앨범은 성의가 없어 보인다.

그러다 보니 남은 것은 미니 앨범뿐이었다. 미니 앨범을 기획한 뒤 겨울에 다시 한 번 정규 4집 앨범을 내는 것이 창현의 계획이었다. 조금 빠른 면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요즘 트랜드가 빠르게 내는 것 아니겠는가? 게다가 테마를 잡으면 미리 준비한 곡들로 한 번에 쭉쭉 나가는 성향이 있었기에 준비를 하는 데에는 그리 큰 어려움이 없다.

내심 미니 앨범에 마음을 두고 있었는데 다시 한 번 진지하게 고민을 하게 되자 결정을 내리는데 도움이 되었다.

“그럼 미니 앨범으로 하도록 하고. 테마는 뭐로 하지?”

앨범의 테마. 이것도 무척 중요했다. 곡들이 무슨 분위기를 띠고 있느냐가 중요할 테니 말이다.

창현이 여태까지 불렀던 노래들은 대부분이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는 것, 그리고 결말은 해피한 분위기의 것이었다. 그것이 아니라면 확실한 이야기를 담아내거나 하나의 일대기를 해나가고는 하는데, 이것 자체로도 상당한 모양을 그려내고 있었다.

그렇기에 창현은 테마를 무척 중요하게 여겼다. 테마가 결정되면 앨범을 준비하는 것의 절반은 완료했다고 할 정도니 말이다.

“역시 테마가 골치로군. 뭐로 해야 하나.”

그렇게 중얼거리지만 내심 사랑에 관련된 테마를 담아내고 싶은 창현이었다.

풋풋한 사랑 이야기 이외에 다른 것들은 시도조차 해보지 않았는가? 그렇기에 창현의 팬들 대다수가 아직 현이 써낼 수 있는 곡은 무궁무진하다고 말한다. 노래에서 가장 많은 종류를 차지하는 것이 바로 사랑에 관련된 이야기였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창현 또한 사랑에 관련된 노래를 써보고 싶었다. 죽이 되건 밥이 되건 말이다.

그러다가 창현이 고개를 저었다.

“죽이 되면 안 되겠지. 그럼 회사의 손실이 크니까…….”

확실히 이런저런 시도를 해보고 싶은데 망할 수도 있다는 중압감에 작용하였다. 앨범이 망하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회사가 뒤집어 써야 할 테니 말이다.

회사의 수익이 자신과 라샤가 전부 담당하고 있으니 그 부담감은 더욱 컸다.

현실적인 문제가 합쳐지자 부지런히 진행되던 구상이 멈추게 되었다.

제법 오랜 시간 생각에 잠겨 있었기에 창현은 머리가 아파오는 걸 느꼈다.

“일단 천천히 결정하도록 하자.”

그리고 슬쩍 시간을 보니 벌써 오후 1시가 되어 있었다.

점심이라도 먹을까 싶어 자리에 일어서던 창현에게 벨소리가 들려왔다.

띵동!

“뭐지?”

택배인가? 라고 생각을 했지만 자신은 택배를 받을 것이 없었다.

누구인가 싶어 녹음실 문으로 향하는 창현. 그리고는 입구 앞에 있는 사람들을 보고는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어떻게…….”

녹음실 앞에는 지금 지방 행사를 갔어야 할 인물들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녀들은 창현이 자신들을 보았다는 걸 알아차렸는지 입을 연다.

“열어줘, 창현아!”

“…….”

창현은 어이없는 표정을 짓다가 이내 녹음실 문을 열어준다.


우르르!

창현이 녹음실 문을 열어주자 소녀들이 안으로 몰려들었다.

“…….”

그 모습을 보면서 창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바라보고만 있었다.

녹음실 안으로 들어온 소녀들은 그대로 소파에 자리하기 시작했다.

소녀들이 한숨 돌린 듯 싶자, 그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던 창현이 입을 열었다.

“갑자기 무슨 일이에요? 저녁쯤에 온다고 하지 않았어요?”

창현의 물음에 소파를 향해 성큼 발걸음을 옮기고 있던 수영이 입을 열었다.

“그랬는데 오늘 지방 행사가 취소되었다고 하더라고. 급히 다른 스케줄을 잡아보려고 했지만 불발 되어서 시간이 나게 되었어. 그래서 깜짝 놀라게 해주려고 찾아왔지. 놀랐지?”

수영의 말에 창현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놀랍긴 놀랍더라고요. 일찍 찾아왔으니까요. 그런데 어쩌죠? 이렇게 일찍 올 줄 몰라서 아무런 준비도 안 했는데요. 청소만 하고 아무것도 안했는데…….”

그러면서 창현이 주변을 가리키자, 소녀들도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그리고는 자신들이 한 가지 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창현이 오랜만에 와서 준비를 해놓았을 리가 없다는 것을 말이다. 놀라게 할 생각으로 왔었지, 여러 생각을 할 틈이 차마 없었다.

소녀들의 얼굴에 망연자실한 표정이 서렸다.

그도 그럴 것이 점심을 먹지 않은 채 창현의 녹음실로 왔던 것이다.

아침을 챙겨먹기는 했지만 점심의 만찬을 즐기기 위해 모두 끼니를 거른 상태였다.

결국 제 꾀에 제가 넘어간 셈이다.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는 소녀들을 보며 창현이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녀들의 표정만 보아도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쿡쿡! 결국 누나들 꾀에 누나들이 당해버린 셈이네요.”

“이런 실수를 할 줄이야…….”

창현의 녹음실을 오는데 집중한 그녀들의 명백한 실책이 아닐 수 없었다.

짙은 패색을 띠고 있는 소녀들을 보며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던 창현은 기분이 유쾌해진 걸 느껴야만 했다. 앨범 구상으로 인해 머리가 지끈거리는 감이 없지 않아 있었는데 이런 웃긴 행동들을 보다 보니 자연스레 골치 아픈 것이 싹 가셨던 것이다.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하면서 창현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해보이고는 입을 열었다.

“준비가 하나도 되지 않았으니 부득이하게 시켜먹거나 그래야겠네요. 누나들도 동의하죠?”

“응. 뭘 하려면 오래 걸리니까…….”

상황이 상황인 만큼 동의를 할 수밖에 없는 소녀들이었다.

그러다가 창현은 문득 소파에 푹 몸을 묻고 있는 효연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항상 에너지가 넘치던 그녀는 오늘따라 무척 힘이 없어보였다.

그녀를 보고 있자니 어제 수연과 통화를 했을 때 들렸던 소리가 떠올랐다.

수연에게 처참하게 당하던 그 소리를 말이다. 그리고 자신에게 살려달라고 하던 그 목소리가 귓가에 아른아른 맴돌고 있었다.

축 늘어져 있는 모습이 어제의 그 일 때문인 것 같았다.

그 때문일까? 창현은 효연이 무척 아련하게 보였다.

‘얼마나 당했으면…….’

조금이라도 그 실체에 접근한 창현이었기에 절로 몸이 떨려오는 걸 느꼈다.

창현은 자신도 모르게 효연에게 물었다.

“효연 누나, 몸은 괜찮아요?”

움찔!

창현의 물음에 효연은 물론이고 다른 소녀들이 몸을 떨었다. 의도했던 하지 않았던 그의 말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소녀들을 찔러왔던 것이다.

설마 창현이 어제 자신들이 했던 일을 알고 있단 말인가?

그렇지 않다면 효연의 안부를 물을 이유가 없었다.

특히 수연의 눈은 초조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자신에게 반란을 일으킨 반동분자들을 차례차례 진압하는 과정에서 자칫 잘못하다가 중도에 창현에게 들킬 과정에 놓인 것이다.

효연이 입을 잘못 놀리기라도 한다면 자신의 호감도는 끝없는 밑바닥으로 떨어질 것이다.

그리고 이 좋은 기회를 놓칠 효연이 아니었다.

자신이 어제 얼마나 혹독하게 당했던가? 문자로 장난 한 번 쳤다고 기절할 때까지 간지럼을 태우다니! 자칫 잘못하다가 정말 돌아가신 고조할아버지를 만날 뻔하였다.

이를 뿌득 갈며 효연이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게 그러니까 말이지…….”

말을 하려던 효연이 순간 몸을 움찔하였다.

돌연 싸늘한 한기가 그녀의 전신을 뒤덮고 있었던 것이다.

절대 무시할 수 없는 강렬한 기세에 효연이 힐끗 시선을 옮겼다.

그러자 그녀는 보고야 말았다.

한 마리의 야수가 흉흉한 안광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것을 말이다.

바로 소녀시대의 최종병기 수연이 효연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수연은 전매특허인 얼음 레이저를 동반하여 효연에게 시선을 주고 있었다.

그 시선이 의미하는 것은 간단했다. 바로 어제 일에 대해 함구할 것. 괜히 입을 잘못 놀리면 결말이 좋지 않을 것이라고 말이다.

오랜 시간 동안 효연과 연습생 생활을 함께 한 만큼 그녀의 속내를 정확하게 꿰뚫어보고 있는 수연이었다.

지금 효연은 이 기회를 빌려 자신에게 다시 한 번 반역을 저지르려고 했던 것이다.

차가운 눈빛 속에 숨겨져 있는 살의는 효연에게 그대로 전달되었다.

그 눈빛을 정면으로 받은 효연은 어제의 기억이 그대로 재연되기 시작했다. 그녀에게 있어 어제의 처참한 고문은 그야 말로 악몽과도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었다.

“허억! 아, 아니! 아무 일도 없었어. 나 건강해. 그러니 아무 걱정도 안 해도 돼.”

헛바람을 집어 삼킨 효연이 창백하게 질려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한때 소녀시대 내에서 수연과 최상위를 다투던 효연이었지만 어제 이후 둘 사이의 서열은 확실하게 판가름 난 상황이었다.

마치 드래곤 피어에 노출된 사람 마냥 효연은 경기를 일으키고 있었다.

“…….”

그런 효연의 반응에 창현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한눈에 보아도 효연의 반응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창현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것은 그 또한 수연의 눈빛을 슬쩍 보았기 때문이다. 상대방을 단번에 압도해버리는 듯한 그녀의 눈빛에 창현은 더 이상 파고들 수가 없었다. 그 이상 파고들면 신변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그, 그래요. 괜찮다니 다행이네요. 제가 일본에서 선물 사왔는데 받으세요.”

어제 일이 궁금하여 살짝 파고들고자 했는데 더 이상 파고들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래서 창현은 화제를 돌리고자 하였다.

그 의도는 제법 성공적이어서, 한순간 냉각되어 있던 소녀들의 분위기가 급변하기 시작하였다.

“선물? 기대해도 되는 거야?”

선물이라는 말에 화제가 전환된 것임을 알아차린 효연이 창현에게 감사의 눈빛을 보내면서 선물에 대해 묻는다.

그러자 창현이 입가에 웃음을 머금은 채 말한다.

“큰 기대는 하면 안되요. 왜냐하면 비싼 게 아니거든요. 하지만 나름 누나들을 고려해서 구입한 거니까 어느 정도 기대를 해도 좋을 것 같아요.”

그렇게 말을 한 창현은 선물들을 하나하나 꺼내들기 시작하였다. 소녀들이 좋아할 법한 옷이나 장신구 같은 것들을 건네주자 모두 감사의 인사를 하면서 선물을 받아든다. 예상치 못한 선물이라 그런지 갑작스러운 선물에 소녀들 모두 희희낙락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창현은 수연에게 작은 상자를 꺼내들었다. 그리고는 그것을 수연에게 건넸다.

“수연 누나 선물은 시계에요. 가격 차이는 그리 나지 않지만 가격에 비해 디자인도 예뻐서 구입했어요.”

“시계? 고마워.”

시계라는 말에 수연은 반색을 하며 받아든다. 손목시계 같은 경우 언제든지 들고 다닐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 면에서 창현의 선물은 센스 만점을 외칠 수 있는 선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상자를 열어보자 분홍빛이 감도는 아기자기한 손목시계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 얼핏 보면 무척 어려보이는 패션이 아닐 수 없지만 달리 보면 무척 아기자기한 맛이 나는 여성적 취향을 만족시키는 디자인이라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섬세한 면이 있는 수연은 이런 종류의 디자인을 무척 선호하는 편이었기에 그녀의 입맛에 딱 맞는 선물이 아닐 수 없었다.

“고마워, 창현아. 너무 예쁘네.”

받은 사람이 기뻐하자 선물을 주는 당사자도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받는 사람이 좋아하니 물건을 고른 보람이 있네요. 잘 사용해주세요.”

“언니 좋겠다. 시계가 너무 예뻐요.”

아직 선물을 받지 못한 주현이 수연의 시계를 빤히 바라보면서 부러움의 감정을 표명하였다.

그 말을 듣자 수연의 콧대가 더욱 높게 솟구치기 시작했다.

자신의 마음에도 쏙 들지만 부러움의 눈길을 보내고 있는 소녀들의 모습에 한층 우월감이 들었다.

내가 이 정도라고 이것들아!

속으로 그렇게 외치면서 웃음을 터뜨리고 있는 수연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선물은 주현의 것이었다.

창현은 어린 아이처럼 수연의 선물을 부러움이 담긴 눈으로 바라보는 주현에게 말했다.

“누나도 선물 제법 마음에 들 거예요. 그러니 너무 부러워하지 마세요.”

“응.”

자신이 너무 어린 모습을 보인 게 아닐까 싶어 주현은 살짝 얼굴을 붉히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창현은 다시 한 번 웃음을 짓더니 주현의 선물을 꺼내든다. 그녀의 선물은 다소 부피가 큰 편이었다. 다른 소녀들의 선물은 작은 상자에 수용이 되었지만 주현의 것은 좀 큰 상자에 담겨 있다고 해야 할까?

궁금증이 담긴 주현의 눈빛을 받으면서 창현이 상자를 개봉하였다.

그리고 그 상자 안에 담긴 내용물을 본 주현이 탄성을 질렀다.

“아!”

선물을 본 주현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창현이 꺼내든 것은 다름 아닌 거대한 크기의 케로로 인형이었던 것이다.

족히 1미터는 되어 보이는 큰 케로로 인형을 꺼내들면서 창현이 말했다.

“이 케로로 인형으로 말할 것 같으면 크기도 크기지만 10초 가량 음성녹음을 할 수 있는 기능이 탑재되어 있어요. 이걸로 누나가 원하는 소리를 녹음해서 가지고 다니면 될 거예요. 게다가 푹신푹신해서 껴안고 자기에도 좋고 베개로 삼기에도 나쁘지 않아요.”

“와아…….”

홀린 듯 케로로 인형을 바라보던 주현이 다가오더니 그대로 인형을 안아든다. 그리고는 환희에 가까운 표정을 짓는다.

그 모습을 보며 창현이 미소를 지었다.

“마음에 들죠?”

“당연히 마음에 들지! 정말 고마워, 창현아.”

“누나가 좋아하니 저도 좋네요.”

선물을 받는 사람이 기분 좋으니 창현도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는 느낌에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역시 자신은 선물을 고르는데 한 센스를 발휘하는 듯하였다.

한동안 케로로 인형을 든 채 기쁜 표정을 짓던 주현이 무언가 떠오른 듯 창현을 바라보고는 입을 열었다.

“그런데 한 가지 부탁을 해도 될까?”

갑자기 무슨 부탁?

의아한 생각이 든 창현이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부탁이요?”

“응! 어렵지 않은 부탁인데…….”

“뭔지 말씀해보세요. 어렵지 않으면 들어드릴게요.”

쿨하게 수락하는 창현의 모습에 주현은 입가에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이렇게 허락해줄 것이라고 이미 예상을 했었지만 말이다.

창현의 학교 선배인 그녀의 위엄 덕택에 창현의 심리에 대해서 가장 상세히 파악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녀였다.

아직 자신의 그러한 점들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본능적으로 행동하고 있지만 말이다. 추후 이것을 자각하게 되면 가장 무서운 루키로 떠오를 인물이 바로 그녀일 것임이 분명했다.

지금은 그것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크나 큰 패착으로 다가오고 있지만 말이다.

주현은 창현에게 케로로 인형을 내밀면서 자신의 부탁을 말하기 시작했다.

“이거 음성 녹음 창현이가 해주었으면 해서.”

별로 어려운 부탁도 아니었다. 창현은 그런 주현의 부탁을 흔쾌히 수락하였다.

“제가요? 어렵지 않죠. 어떤 식으로요?”

“음! 케로로 목소리로 ‘주현아! 너무너무 사랑해!’로 감미롭게 해줘!”

창현의 능력을 신봉하고 있는 주현이었기에 주문도 자못 화려하였다.

주현의 말을 들은 소녀들의 표정이 변하기 시작했다.

별 것 아닌 것 같은 부탁임에도 불구하고 그 내면에 숨겨진 위력은 제법 파워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내막을 모르는 창현으로서는 별로 거리낄 것 없는 내용이었다.

그만큼 케로로를 좋아하고 있구나, 라고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말이다.

‘너무 케로로에 빠져있으면 안 되는데 말이지.’

되지도 않는 걱정을 하면서 창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요. 그럼 녹음할 테니 잠시 조용히 해주세요.”

내친 김에 바로 녹음을 하려는 창현이었다. 그리고 막 녹음을 하려고 할 때, 그를 제지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잠깐만.”

“……!”

갑작스러운 제지에 모두의 시선이 목소리의 진원지로 향했다.

그곳에는 차가운 표정을 한 수연이 자리하고 있었다.

자신에게 시선이 집중되자 수연은 창현이 선물한 시계를 내려놓으면서 말한다.

“이 시계도 좋지만 난 저 케로로 인형이 갖고 싶어.”

“네?”

수연의 말을 들은 창현이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수연의 그러한 말은 다른 소녀들의 얼굴에 놀라움이 서리게 하기에도 부족함이 없었다.

음성 녹음이 되는 케로로 인형은 분명 매력적인 물건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수연이 그것을 강탈하고자 나설 줄은 몰랐다.

모여드는 멤버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수연이 말을 이어나갔다.

“주현이가 이 시계 마음에 들어 했잖아? 나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건 아니지만 저 케로로 인형이 더 마음에 들더라고. 그렇다면 교환을 함으로써 서로에게 더욱 유익한 선물 증정의 현장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야.”

말을 하는 수연의 눈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녀로서는 이런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 케로로 인형이 나왔을 때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주현이 케로로 인형을 좋아하니 창현이 잘 맞춰서 구입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내용 진행 상황을 보아하니 점점 막을 수 없는 지경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특히 수연을 나서게 만든 것은 바로 케로로 인형의 음성 녹음 기능이었다.

어떻게 음성 녹음을 하는가는 그녀의 관심 밖이다. 그런데 감히 창현에게 음성 녹음을 부탁하는가 싶더니 감미로운 목소리로 ‘주현아 너무너무 사랑해!’로 해달라는 것이었다.

감히 이런 대담한 부탁을 하다니!

더욱 황당한 건 이 둔감한 창현은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서 주현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정말 둔한 것으로는 세계 제일을 다투는 둔감왕이 아닐 수 없었다.

주현의 부탁을 받아들이고 곧장 녹음을 준비하는 창현의 모습을 보면서 수연은 많을 고민을 해야 했다. 이대로 가만히 놔둔다면 주현은 초 레어급으로 급상승한 케로로 인형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질릴 때까지 아니, 질릴 리가 없을 것이다. 그야 말로 케로로 인형이 닳아 없어질 정도로 달콤한 목소리를 들을 것임이 분명했다.

감히 자신조차 들어본 적 없는 그러한 목소리를 들으려고 한다니!

순간 이성이 이탈하는 것을 느끼면서 수연이 앞으로 나선 것이다.

빼앗고 말 것이다! 감히 누구도 들어본 적 없는 달콤한 저 목소리를 독점하려고 하다니.

지금 이 순간 만큼은 얼음공주 제시카가 아닌 질투의 화신 제시카로 변모한 수연이었다.

반드시 저 케로로 인형을 손에 넣고 말겠다는 의지가 그녀의 외부로 발산되고 있었다.

수연의 갑작스러운 난입에 창현은 당황한 표정으로 말을 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건 주현 누나 선물이고 무엇보다 수연 누나는 케로로를 좋아하지도 않…….”

그 말에 수연이 창현의 말을 끊으면서 말했다.

“나 케로로 좋아해. 케로로, 타마마, 기로로, 도로로 등등 캐릭터들도 알고 있는 걸?”

사실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다. 다만 주현이 TV로 케로로를 보던 걸 곁눈질로 보면서 캐릭터의 이름을 외운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 이렇게 유용하게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수연의 말에 창현이 놀란 표정으로 그녀에게 묻는다.

“누나도 케로로를 좋아한다고요?”

처음 안 사실이었다. 아니, 그것은 창현 뿐만 아니라 다른 멤버들도 마찬가지인 듯 놀란 표정으로 수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설마 수연조차 케로로를 좋아하고 있으리라 생각을 못한 소녀들이었다. 여태까지 왜 그것을 말하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해봤지만 그 의문은 이내 해소되었다. 케로로를 좋아하는 것으로 자신들이 주현을 놀렸던 것을 감안하면 충분히 숨길 수 있다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사실 별로 좋아하지 않기에 내색하지 않은 것이지만 지금은 그것 자체가 묘하게 설득력을 담아내고 있었다.

“…….”

케로로를 좋아한다는 수연의 말에 한동안 침묵이 감돌았다.

무어라고 말을 해야 할까. 분위기를 보아하니 수연이 케로로를 좋아하는 것은 어느 정도 사실인 듯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그녀가 케로로 등장인물에 대해 알고 있을 확률은 높지 않으니 말이다.

수연이 주현에게 시선을 주면서 입을 열었다.

“주현이 너도 이 시계 마음에 들어 했잖아? 그러니까 우리 서로 교환하자. 응? 언니가 부탁할게.”

말은 부탁이었지만 실제로는 전혀 부탁 같지 않았다. 그것은 부탁이라는 껍질을 뒤집어 쓴 강압과도 같았다.

강렬한 압박이 깃든 수연의 말에 주현은 순간 움찔하여 뒤로 물러섰다. 그러다가 이내 입술을 질끈 깨문다. 이대로 순순히 케로로 인형을 내줄 수 없다는 생각이 감돌았던 것이다. 잘 하기만 하면 창현의 음성이 깃든 멋진 녹음을 얻어낼 수 있는데 쉽게 물러선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소녀시대 먹이사슬 최정점에 위치한 수연이었다. 굳세게 마음을 다잡기는 했지만 그녀의 반항은 소심한 것에 불과하였다.

“하, 하지만 언니! 이건 제 인형이에요…….”

힘을 내서 목소리를 쥐어 짜냈지만 그 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다. 처음에는 컸지만 뒤로 갈수록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였던 것이다.

머리로는 힘껏 대항해야 한다고 외치고 있었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전신에 새겨진 수연의 무시무시함으로 인해 가슴은 그녀에게 기를 펴지 못하고 있던 것이다. 이른 바 머리와 가슴이 따로 놀고 있는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안 된다는 거야? 응?”

강하게 나왔던 수연이 이번에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주현은 대나무와도 같은 속성을 지니고 있다. 부러질망정 결코 꺾이지 않는 것이 그녀의 속성이다. 그런 그녀에게 계속 강하게 나간다면 결국 부러질 수밖에 없다. 그리 되면 둘 사이가 어색해질 수도 있고, 자칫 잘못하다가 제2차 반란을 초래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수연은 강약을 조절하여 주현을 꼬드기기 시작한 것이다.

반란으로 인해 당한 것은 한 번이면 족했다.

단 한 번의 실패가 수연을 더욱 더 강하게 만들어준 상황이었다.

“그, 그게 그러니까…….”

부드럽고 애절한 수연의 목소리에 주현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수연이 이렇게 나올 줄 몰랐고, 그녀가 이런 반응을 자신에게 보이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전형적인 외유내강인 주현의 속을 정확하게 꿰뚫어본 수연의 계책이 적절하게 먹혀들고 있다고 볼 수 있었다.

늘 강한 모습의 수연만 보다가 이렇게 여린 모습을 보게 되니 마음이 크게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어떻게 하지? 창현이의 음성이 녹음된 인형을 갖고 싶지만 수연 언니가 너무 간절하게 원하는 것 같은데… 하지만 갖고 싶고…….’

둘 사이에서 갈등하기 시작하는 주현이었다.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면 당연히 케로로 인형을 자신이 취해야 함이 옳다. 하지만 수연의 모습을 보니 마음이 크게 흔들렸다. 자신이 연습생으로 들어왔을 때부터 잘 대해준 수연이 이렇게 간절하게 원하는데 그것을 충분히 내줄 수 있음에도 자신의 욕심 때문에 내줄 수 없는 지금 자신의 모습이 속물 같이 느껴지기도 하였다.

복잡한 수만 가지 생각들이 주현의 머릿속에 교차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주현은 이내 결심을 내렸다.

입술을 꾹 깨문 주현이 말했다.

“언니에게 드릴 수 없어요.”

줄 수 없다는 말에 수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자신의 계략이 실패로 돌아갔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수연의 입가에 씁쓸함이 맴돌았다.

‘내 욕심이 과했지.’

확실히 과하기는 과했다. 주현에게 준 선물을 자신이 강탈하려 하다니. 한순간 욕심에 눈이 멀어 주현의 약점까지 공략했으니 자신은 언니로서 실격이었다.

씁쓸한 모습을 하고 있는 수연을 보며 주현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공동 소유로는 인정해드릴 수 있어요. 하루는 제가, 하루는 언니가. 어때요?”

“…정말?”

설마 주현이 이렇게까지 해줄 줄 몰랐던 수연이 깜짝 놀라 주현을 바라본다.

그러자 주현이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도 케로로를 좋아할 줄 몰랐거든요. 여태까지 언니들이 모두 케로로를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수연 언니도 케로로를 좋아한다니 기쁜 마음이 들어서요. 아깝긴 하지만 언니라면 괜찮을 것 같아요.”

수연은 마음 한구석이 찡해지는 걸 느꼈다. 설마 주현이 이런 생각을 해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마음 한편이 찔리기 시작했다. 케로로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 상황에서 거짓말을 했으니 말이다.

앞으로 케로로를 좋아하도록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수연이 감사의 마음을 담아 주현에게 말했다.

“…고마워, 주현아.”

“뭘요.”

“이거 가져. 아무래도 그래야 내 마음이 편할 것 같아.”

이대로는 찜찜함이 들 것 같아서 수연은 창현이 준 시계를 내밀었다.

주현은 그 선물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건 창현이가 언니에게 준 선물이잖아요? 저는 괜찮으니 챙겨두세요. 대신에 예쁜 옷 하나 나중에 사주세요.”

비싼 걸 사달라고 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이렇게 말을 해야 수연이 납득할 것 같았기에 말을 한 것이다. 수연이 주현을 상세히 파악하고 있는 만큼 주현도 수연에 대해 상세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한 주현의 말에 수연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으응. 알았어. 고마워.”

훈훈하게 마무리가 되자, 창현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끼어들었다.

“수연 누나도 케로로를 좋아할 줄 몰랐네요. 이럴 줄 알았으면 다른 인형도 사올 걸 그랬네. 다음에 제가 꼭 구해서 드릴게요.”

“정말? 고마워, 창현아.”

창현의 배려에 수연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감사의 인사를 표했다.

“…….”

이와 같은 모습을 지켜보면서 소녀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멍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뭔가 순식간에 파바박 이루어졌는데 그것이 워낙 찰나의 순간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인 것은 케로로 인형의 축복이 주현에게서 수연까지 늘어났다는 점이다.

부러움의 결정체라 할 수 있는 케로로 인형의 소유자가 늘어나다니!

소녀들의 뇌리에 한 가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간다.

‘나도 가지고 싶어!’

주현이 없을 때 남몰래 케로로 인형을 사용하려던 소녀들은 어려운 미션을 수행하게 되었다. 졸지에 수연과 주현, 이 둘이 없는 상황을 노려야 되게 생겼으니 말이다.

케로로 인형의 감미로움이란 은총을 받기 위해서는 수연과 주현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것을 떠올렸다.

마치, 케로로 인형을 얻는 자! 소녀시대의 정점에 서리, 라는 구절이 떠오르는 듯한 현상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선물 증정식이 모두 끝나자, 창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선물도 다 줬으니 점심을 먹어야 하지 않겠는가?

지금 선물 효과로 배고픔을 잊은 듯하지만 그 여파는 다시 몰아칠 것임이 분명했다.

창현이 자리에 일어서면서 입을 열었다.

“여기 앞에서 먹을 거 사오도록 할게요. 일단 간단하게 과자랑 음료수 사올 테니 그걸로 좀 버티다가 배달 음식이 도착하면 그걸로 배를 채우도록 하죠.”

녹음실 앞에 바로 마트가 있었기에 할 수 있는 발상이었다.

창현의 말을 들은 소녀들은 그제야 자신들이 허기가 진 상황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는 창현의 말에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부탁할게.”

“그럼 잠시만 기다리도록 해요. 얼른 나가서 사올 테니까요.”

그 말과 함께 창현이 밖으로 나가려고 할 때였다.

누군가가 창현의 뒤로 다가오더니 그의 어깨에 손을 얹는다.

그리고 창현이 고개를 돌리자 그녀가 입을 열었다.

“나도 같이 가.”

창현의 어깨에 손을 얹은 사람은 다름 아닌 수영이었다.

갑자기 자신의 뒤를 선점하였기에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짓던 창현은 수영의 말에 한시름 놓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깜짝 놀랐잖아요.”

“아, 그랬어? 미안. 바로 나가려고 해서 놀랐지, 뭐야.”

창현의 말에 수영이 미안한 표정을 지으면서 큰 눈을 깜빡였다.

좀처럼 보기 힘든 그녀의 모습에 창현은 피식 웃음을 지으며 주의를 주었다.

“다음부터 조심하세요. 제가 무척 예민한 편이어서 뒤에 누군가가 갑자기 다가오면 과하게 반응할 수도 있거든요.”

저번에 효리에게 한 번 그렇게 하지 않았던가? 그런 일이 있는 만큼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가급적이면 조언을 해주는 창현이었다.

“응, 미안. 내가 경솔했네.”

그 말을 들은 수영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사과를 한다. 몰랐던 사실이었지만 방금 전 창현의 반응을 보니 그 말이 옳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수영의 사과에 창현은 웃음을 지은 채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주의를 줄 생각이었지, 딱히 타박을 하고자 하는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같이 나가자고요?”

“…열 명이 먹을 양이면 많잖아? 그래서 짐이나 좀 들어줄까 싶어서 그랬지.”

순간 멈칫하다가 입을 여는 수영이었다.

그 말에 소녀들이 일제히 수영에게 외치기 시작했다.

“거짓말! 너 또 가서 몰래 먼저 먹으려고 하는 거 아니야?”

“자기 입맛대로 사오려는 것일 수도 있어!”

“여기 오기 전에 사온 양의 절반이 사라질 걸?”

식신 이미지로 널리 알려진 상황이었고, 실제로 소녀시대 내에서 가장 많은 양의 음식을 먹는 축에 속하였기에 그녀의 대외적인 별명은 식신이었다.

멤버들의 매도에 수영이 얼굴을 붉히면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왜 나한테 그래! 그리고 윤아 너도 많이 먹잖아! 태연이 너도 많이 먹고! 너희들 전부 많이 먹으면서 왜 나한테만 그래!”

자신은 단지 다른 멤버들보다 아주 조금, 그래, 아주 조금 더 먹을 뿐인데 마치 혼자서 다 먹는 것 마냥 모함당하는 것이 싫었다.

종종 팬 카페에서 눈팅이라는 것을 하고는 하는데, 그곳에서 유명한 팬픽 작가가 말하길, 대통령이 미국산 쇠고기를 수입하는 이유는 수영이 꽃등심을 너무 먹어서 대한민국의 한우가 멸종 직전에 놓여 있다고 한 적이 있다.

팬픽에서 늘 식신 이미지로서 항상 꽃등심을 찾다 보니 어느덧 한우가 멸종 직전에 놓였다는 소리였다.

장난처럼 한 말이었지만 수영은 그 언급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었다. 자신이 팬들에게 어떠한 이미지로 각인 되었는지 확인하는 자리였던 것이다. 살이 잘 찌지 않고 잘 먹는 편이기는 하지만 설마 그런 이미지로서 굳어질 줄이야. 대중들에게 인기를 얻는 아이돌인 만큼 근래 들어 수영의 뇌리에 비상 경종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우선 식신이라는 이미지를 탈피하기 위해 멤버들의 인식부터 전환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평소 식신이라는 말에 반응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격렬하게 반응을 한 것이다.

그녀 또한 장기간의 연습생 생활로 인하여 수연에 버금가는 강자 중 한 사람이었다. 효연이 어제 수연에게 처참한 패배를 당한 지금, 수연에게 유일하게 일대일로 대적이 가능한 인물이 바로 수영이었다. 멤버들이 수연만큼 두려워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수영의 말을 함부로 무시하지도 못했다.

“…….”

아니나 다를까, 수영의 외침에 소녀들이 입을 다문다.

수영은 큰 눈을 크게 뜬 채 부리부리하게 멤버들을 노려보고는 말한다.

“나 이제 식신 안 한다! 소녀시대 식신은 이제부터 2인자인 윤아에게 넘겨주겠어! 그리고 내가 나가려는 이유는 정말 순수하게 창현이를 도와주려고 하는 거거든? 그러니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가자, 창현아!”

“어? 알았어요.”

그렇게 말을 하며 수영이 창현의 팔을 살짝 잡아끌자, 창현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함께 녹음실을 나선다.

두 사람이 밖으로 나서자 한동안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들의 뇌리에 스친 생각은 딱 하나다.

‘우리 수영이가 달라졌어요!’

식신 이미지도 하나의 캐릭터라면서 좋아하던 수영의 모습이 달라졌다. 무슨 급격한 기분의 변화를 일으킬 만큼 일이 생겼는가 싶기도 했다.

“아…….”

그러다가 두뇌 회전이 빠른 몇몇 소녀들은 창현과 함께 나서는 것이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을 자각했다. 설마 이것을 눈치 채지 못했을 줄이야. 식신 이미지로 너무 굳어져서 함께 마트로 간다고 생각해서인지 이 점을 고려하지 못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배는 떠나가 버렸는데 말이다.

“뭐야? 그럼 이제 소녀시대의 식신은 나에요? 이럴 수가…….”

그런 와중에 졸지에 소녀시대의 식신이 되어버린 윤아는 기이한 넙치 표정만 짓고 있을 뿐이었다.


한편, 밖으로 나온 창현은 약간 염려스러운 표정을 지은 채 녹음실이 있는 곳으로 힐끗 시선을 주고는 수영에게 물었다.

“그런데 괜찮겠어요? 소리를 쳐서 놀랐을 것 같은데.”

“괜찮아, 한두 해 같이 지낸 사이도 아닌데, 뭐. 아마 내 말을 알아서 잘 알아들었을 걸?”

손사래를 치면서 괜찮다고 말을 하는 수영이었다. 얼핏 보기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하는 듯하였지만 그 이면에는 몇 년 동안 함께 했던 멤버들에 대한 믿음이 서려 있었다.

사람의 말에 실린 그 감정을 파악하는데 무척 능숙한 창현은 수영이 어떠한 의미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는 부러운 표정을 지은 채 고개를 나직이 끄덕였다.

“그렇군요. 왠지 부러운데요? 그렇게 믿을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점이 말이죠.”

친구가 없는 창현이 그 부분에 대해 부러워하게 된 것이 바로 소녀시대를 보고 나서였다. 가끔씩 보여주는 끈끈한 그녀들의 모습은 창현에게 있어 자신이 잘못된 방향으로 대인관계를 이루고 있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물론 자신이 알고 지내는 사람의 숫자가 적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하여 가깝게 지내는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그어놓은 일정한 선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만드는 묘한 기준이 있었으니 말이다.

창현의 말에 수영은 공감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친구라… 확실히 그건 힘들 것 같아. 일반인 친구라 하여도 연예인이 되면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게 되거든. 그러니 진짜 친구를 사귀기는 힘들지.”

“그렇죠.”

“그럼 연예인 친구를 사귀어보는 건 어때? 많지는 않아도 창현이 너랑 동갑인 친구들도 있잖아.”

수영의 말처럼 창현과 동갑인 친구들도 있기는 하다.

하지만 나이가 같다고 다 친한 친구가 될 수 있는 법은 아니지 않은가?

게다가 쉽게 친해지지 못하는 이유도 있고 말이다.

창현은 다소 머쓱한 표정을 지으면서 수영에게 말했다.

“그게 쉽지 않네요. 하하!”

“아아…….”

웃음을 짓는 창현의 모습에 수영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은 이렇게 편하게 대할 수 있지만 창현은 웬만한 인기로는 범접하기 힘들 정도로 성세를 누리고 있는 스타가 아니겠는가? 게다가 창현과 동갑이면서 절정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연예인은 원더걸스 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도 굳이 비교 대상을 꼽을 경우에 그렇고, 실제로는 비교하기가 힘들 정도로 그 차이가 심각하다. 그런 만큼 창현이 친구를 사귀는 것도 힘이 들 것임이 분명하였다.

수영은 자신이 실수를 했다는 걸 깨닫고는 창현에게 사과했다.

“미안. 내가 실수했네.”

그녀의 사과에 창현은 고개를 살짝 저었다.

“아니에요, 미안하기는요. 어차피 친구라는 건 인연이 닿아야 하지 않겠어요? 게다가 나이는 같지 않지만 누나들도 있고요. 그러니 외롭지는 않아요.”

“그래……?”

창현의 말에 무언가 걸리는 게 있는지 살짝 말꼬리를 흐리는 수영이었다.

그녀가 마음에 걸려하는 것, 그것은 다름 아닌 ‘누나들’이라는 단어를 아무렇지도 않게 언급하는 점이었다. 그것은 달리 말하면 창현이 자신들을 누나들 그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 점이 마음에 걸리는 수영이었다.

‘하지만 아직 기회는 있다는 거겠지?’

늦은 시작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창현의 말은 희망이라는 단어를 심어주었다. 아직 그 선을 넘지 못했다는 것은 언제든지 상황을 역전할 수 있는 반전의 여지가 존재한다는 뜻이었으니 말이다.

힘이 나는 것을 느끼면서 수영은 창현과 함께 마트에서 과자와 음료수 등을 구입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사심을 담아 과자와 음료수를 고르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자신이 식신 이미지를 탈피하겠다고 결심한 것도 잊은 채 정신없이 이것저것 담아대는 수영의 모습에 창현은 웃음을 지으면서 수영에게 말했다.

“그런데 누나 식신 이미지를 버리겠다고 하지 않았어요?”

“…앗!”

창현의 말에 수영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는 자신이 실수를 했다는 걸 깨달았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수많은 과자들을 보고 있다 보니 무아지경에 빠져서 손이 가는대로 과자를 집어대고 있었던 것이다.

불과 십여 분 전에 식신 이미지를 버리겠다고 해놓고 이런 모습을 보이다니.

이 모습을 보고 속으로 비웃을 창현의 모습을 떠올리고는 수영이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혔다.

이런 실수를 범할 줄이야.

“그게 그러니까…….”

말끝을 흐리는 수영의 모습에 창현은 항상 당당하고 쾌활한 모습을 보이는 그녀가 이런 모습도 보인다는 것에 약간 의외의 감정을 느끼면서 말했다.

“알아요. 단번에 바꾸기는 힘들겠죠. 차근차근 바꿔나가면 되요. 너무 한 번에 바꾸려고 하면 힘들 테니까 무리는 하지 말아요. 알겠죠?”

“…알았어.”

다행히도 자신을 인정해주는 모습이었기에 수영은 본래 안색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리고는 다시 예의 활발함을 되찾고는 과자 구입에 앞장 서기 시작했다. 이제는 괜찮지 않냐는 창현의 말에 우리 멤버들은 이 정도로 간에 기별 수준이라고 말을 하면서 말이다.

산더미 같이 구입한 과자는 단지 배달 음식을 먹기 위한 위장 준비운동에 불과하였다.

그렇게 과자를 구입하니 족히 두 바구니가 가득할 정도가 되었다. 창현 혼자서 들기에는 무리일 정도로 엄청난 양의 과자였다.

계산을 하던 아주머니도 엄청난 양의 과자를 보고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었다.

그리고 계산을 한 결과, 무려 5만 원이 넘는 돈이 나왔다.

세상에나, 과자와 음료수로 5만 원이 넘게 나오다니! 정말 대단한 기록이 아닐 수 없었다.

수영은 막 계산을 하려는 창현에게 손을 내밀어 그의 행동을 제지하였다.

“괜찮아. 이건 내가 계산할게.”

당연히 자신이 계산을 할 줄 알았던 창현으로서는 다소 의외가 아닐 수 없었다.

“괜찮겠어요?”

“어차피 배달 음식은 창현이 네가 사준다고 했잖아? 그러니 이 정도는 당연히 우리가 구입해야지.”

그러면서 수영이 체크카드를 꺼내 내민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계산을 하기 시작한다.

“…….”

그 모습을 창현은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당연히 자신이 계산할 줄 알았는데 수영이 계산을 하니 뭐랄까,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계산을 마친 창현과 수영은 짐을 들기 시작했다. 과자 봉지에 질소가 워낙 빵빵하게 들어가 있는 관계로 과자와 음료수를 담는데 무려 비닐 봉지가 여섯 개나 소요되었다.

호리호리한 체구에 비해 힘이 무척 센 창현은 음료수가 든 봉지를 비롯하여 과자가 든 봉지까지 총 네 개의 봉지를 들었다. 그에 수영이 도우려고 했지만 무리 없이 들면서 괜찮다고 말을 하는 창현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창현은 수영을 보면서 입을 열었다.

“설마 누나가 계산할 줄 몰랐어요.”

“이 정도는 당연히 해야지. 솔직히 너한테 너무 많은 걸 받아서 애들이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거든. 그리고 이 카드는 우리 애들이 용돈을 약간씩 걷어서 사용하고 있는 거니까 너무 부담 갖지 않아도 돼. 겨우 이 정도로 부담을 가지면 우리가 그동안 받은 게 너무 적어보이잖아. 넘칠 만큼 받았는데.”

“하하, 그건 그러네요. 알았어요.”

자신이 부담을 갖는 것이 오히려 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창현이 웃음을 지으며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제야 수영도 미소를 되찾을 수 있었다.

짐이 무척 많고 무거웠지만 다행히도 마트와 녹음실의 거리는 걸어서 삼 분여 밖에 걸리지 않을 정도로 가까웠다.

두 봉지를 들었음에도 제법 무거워서 수영이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창현을 바라보았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걸음을 옮기는 창현의 모습에 과연 남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얼핏 보면 힘이라고는 전혀 쓰지 못할 것 같은데 거뜬하게 짐을 드는 모습을 보면 듬직한 느낌이 들었다.

“궁금한 게 하나 있어.”

녹음실에 거의 다 도착했을 무렵 수영이 창현을 향해 입을 열었다.

묵묵히 짐을 들고 가던 창현은 수영의 말에 곧장 대답했다.

“궁금한 거요? 말해보세요.”

예상했던 대답. 창현은 언제나 궁금한 점을 물어봐도 되냐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을 하고는 한다. 그 모습이 자연스럽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며 무례를 끼칠까봐 염려가 되기도 하였다. 그 선을 잘못 넘게 되면 창현에게 폐가 될 테니 말이다.

그 점을 자각한 수영이 경계심을 다지면서 창현에게 말했다.

“조금 예민할 수도 있는데 괜찮겠어?”

“…대답하기 곤란한 게 아니라면 대답을 하도록 하지요.”

어차피 상대적인 것이다. 수영의 생각으로 예민한 것일 수 있지만 창현의 입장에서는 아무것도 아닐 수 있을 테니.

그 말을 들은 수영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살짝 숨을 몰아쉬면서 창현에게 물었다.

“창현이 너 사랑해본 적 있어?”

화두는 그렇게 던져졌다.


“…….”

질문을 건넨 수영의 얼굴이 붉어졌다. 이 말은 자칫 잘못 해석하게 되면 이성에 대한 호감 표현으로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실수한 걸까?’

자신이 질문을 해놓고 실수를 한 게 아닐까 염려하는 수영이었다. 자칫 창현의 말에 사전 차단을 당하기라도 할까 싶어 그녀의 가슴이 조마조마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수영은 창현의 대답이 온 신경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과연 그가 어떠한 대답을 할까. 자신의 감정을 알아차린 것은 아닐까. 그 시간은 극히 짧았지만 수영에게 있어서는 억겁처럼 길게만 느껴졌다.

“음…….”

그러던 차에 창현의 입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수영은 더욱 더 긴장을 하며 창현의 입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창현의 입에서 나온 말은 허무하리만치 간단한 것이었다.

“글쎄요, 사랑이라… 누나가 말하는 사랑의 종류는 아무래도 이성 간의 사랑이겠죠?”

분명 그러할 것이다. 다른 사람이 사랑에 대해 물으면서 가족에 관련된 사랑을 묻지 않을 테니 말이다.

가족끼리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은 이성 간의 사랑을 묻는 것일 것이다.

창현의 물음에 수영이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으응. 맞아. 이성 간의 사랑.”

대답을 할 것이라 생각하던 수영으로서는 허탈했지만 한편으로는 쓸데없는 바람이 빠져나간 듯하여 한결 나아진 모습으로 창현의 말을 경청할 준비를 하였다.

그 말에 잠시 침묵을 지키던 창현이 입을 열었다.

“없네요. 이성 간의 사랑이라. 제가 저번에 라디오 스타에서 언급한 그대로에요.”

창현의 대답에 수영이 놀란 눈으로 창현을 바라보았다. 설마 방송에서 말한 것처럼 사랑을 해보지 않았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그녀는 그 말이 그저 방송용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정말 그럴 줄이야.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수영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창현에게 다시 한 번 물어보았다.

“정말 사랑을 해본 적이 없어?”

“유감스럽게도요.”

어깨를 으쓱하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하는 창현이었다. 그와 함께 봉지가 위로 올라왔지만 창현은 그 영향을 받지 않는 듯하였다.

“…….”

잠시 할 말을 잃은 수영이었다. 설마 하니 정말로 그런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녀는 방향을 살짝 우회하여 물었다.

“어릴 적 풋풋한 그런 감정들도? 막연한 동경이라거나 그런 것들도 있잖아.”

어릴 때 보통 이런 감정을 느끼지 않던가? 친구의 어머니가 무척 예쁘다거나 이웃집 누나, 아니면 학교 선생님 같은 사람들을 보면서 동경의 마음을 갖는 그런 현상 말이다.

창현은 웃음을 지은 채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없는 듯하네요. 제가 머리가 차가운 AB형이라서 그런가 봐요. 하하!”

자신이 생각해도 정말 황당한 순간이었다.

동경의 감정이라, 분명 느껴본 듯 싶지만 그것은 엄연히 말하면 사랑의 감정이 아니지 않은가? 자신이 느낀 사랑이라면 가족에게 느낀 것밖에 없었다.

그것도 돌아가신 어머니에게서 느꼈던 그러한 사랑 말이다.

모든 것이 행복하고 모든 것이 즐거웠던 그때.

아릿하게 기억으로만 남은 그때의 사랑은 점점 미화가 되어 창현에게 있어서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성역으로서 자리매김을 하였다.

그것이 사랑이라면 창현은 할 자신이 없었다. 자신에게 있어서 그러한 감정은 두 번 다시 느끼기 힘든 감정이었을 테니 말이다.

스스로의 마음 속에서 너무나 높은 벽을 세웠기에 창현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은 지극히 한정적이라 볼 수 있었다.

“…….”

웃음을 짓는 창현의 모습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는 수영이었다. 정말 별종은 별종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 흔하디 흔한 첫 사랑의 감정도 가져보지 못한 사람이 자신의 눈앞에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으니 말이다.

창현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수영에게 장난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그런데 그건 왜 물어보는 거예요? 설마?”

‘역시 알아차린 건가?’

무언가 알고 있는 듯한 표정을 짓는 창현의 모습에 수영이 잔뜩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의 착각에 불과하였다.

“연애에 관심이 생겨서 그런 거예요? 요즘 누가 누나한테 대시라도 하는 건가요?”

‘하아…….’

제대로 착각을 하는 창현의 모습에 수영은 속으로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설마하니 창현이 이런 식으로 착각을 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한 것이다. 하기야, 자신의 감정을 보인 적이 없으니 창현이 알아차리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신이 본 바에 의하면 창현은 지독한 둔감함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왜 그런 것인지도 대략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 천연기념물 같은 인간은 사랑이 무엇인지조차 이해를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아예 알고 있지를 못하니 그것을 알아차릴 리가 없지 않은가?

수영은 창현과 대화를 나누면서 한 가지 수확을 얻을 수 있었다.

‘창현이는 아직 사랑에 대해서 모르는 거야. 이런 경우 자각을 할 수 있게만 한다면 그 다음부터는 걷잡을 수 없게 타오를 수 있어.’

문제가 있다면 자각을 하게 만드는 계기가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 계기를 누가 만드느냐에 따라서 승패가 달라질 것임이 분명하였다.

하지만 그 계기라는 것이 문제였다. 계기라는 것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내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뒤늦게 합류를 한 만큼 저만큼 전진하고 있는 사람들을 따라잡는 것도 문제 중 하나였다.

‘뭐, 어때. 최선을 다하면 결과는 나오는 법이겠지.’

지금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달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 만큼 짧은 시간에 방법을 도출하는 것보다 시간을 가지고 차근차근 나아가는 것이 더 도움이 될 것이다.

생각을 정리한 수영이 빙긋 웃음을 짓고는 창현에게 말했다.

“그건 아니니 안심해도 돼. 후후!”

수영의 말에 창현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짓다가 이내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제가 무슨 안심을! 제가 그런 건 잘 몰라도 상담은 해드릴 수 있으니 언제든지 도움을 청해도 좋아요.”

“그래. 생기면.”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녹음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녹음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배가 고파서 흐느적거리는 좀비들을 볼 수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수영이 혀를 쯧쯧! 차더니 과자 한 봉지를 꺼내서 윤아 쪽으로 휙 던지며 말한다.

“새로운 소녀시대 식신아! 받아랏!”

“과, 과자다!”

과자에 눈이 먼 윤아는 수영이 던지는 과자를 보고는 눈을 빛내며 앞으로 달려 나와서는 긴 팔을 뻗어 그대로 과자를 낚아챘다. 그 모습이 마치 액션 배우와도 같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다만 그것이 과자로 인해 벌어진 일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과자를 성공적으로 받은 윤아는 정신을 되찾고는 자신의 실수를 깨달을 수 있었다.

“앗!”

윤아의 안색이 하얗게 변하기 시작했다.

지금 창현이 앞에 있는 자리인데 숙소에서 보일 법한 모습을 보이다니! 배가 너무 고파서 이성을 잃기 직전에 등장한 과자였기에 그녀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는 창백하게 질릴 수밖에 없었다.

그 모습을 보며 수영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큭큭큭! 푸하하하! 윤아 너무 웃긴다! 무슨 동물원에 있는 동물 같아! 먹이 주면 꼬리 살랑살랑 흔드는…….”

“수영 언니!”

결국 버럭 소리를 지르는 윤아였다.

그 모습을 보며 안에 있던 사람들이 폭소를 터뜨렸다.

“으으…….”

부끄러움에 윤아는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과자로 어느 정도 허기를 달랠 무렵, 배달한 음식이 차곡차곡 도착하기 시작했다.

음식이 도착하자 창현은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는 음식을 받기 시작하였다. 모자를 깊게 눌러쓴 탓에 배달원들은 창현의 정체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들은 빨리 음식을 건네고 돈을 받는데 정신이 팔려 있었지, 음식을 시킨 사람의 정체에 대해서 궁금해 하는 것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배달원들 대부분이 창현보다 키가 큰 사람들이었다. 그렇기에 모자를 깊게 눌러쓴 창현의 모습을 알아차리기는 힘들었다.

그렇게 음식이 도착하자 본격적으로 음식을 섭취하기 시작했다. 창현의 한국 복귀를 축하하기 위한 자리였지만 어느덧 배고픔을 달래기 위한 자리가 되어버렸다.

약간 의미가 변질된 듯 싶었지만 창현은 개의치 않았다. 자신의 복귀를 축하하고자 스케줄이 있는 나날임에도 불구하고 시간을 내어 이곳에 와준 성의만으로도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음식을 다 먹고 음료수를 먹으면서 소화를 시키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수연과 주현이 창현에게 다가왔다. 그녀들 손에는 케로로 인형이 들려 있었다.

주현이 창현에게 케로로 인형을 내밀면서 부탁했다.

“창현아! 이것 좀 녹음해 줘.”

“녹음은 어렵지 않은데 내용은 그대로 해요?”

케로로 인형에 녹음을 해달라고 하던 내용은 ‘주현아 너무너무 사랑해’였다. 그런데 아까 전에 공동 소유로 한 만큼 약간의 변화가 있을 것이 아닌가? 창현은 그 점을 묻고 있는 것이었다.

그 물음에 주현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용을 바꿔줘. 케로로 목소리로 'I Love you My Darling.' 으로 해줘.”

그렇게 말을 하는 주현의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창현에게 이러한 부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무척 부끄러웠기에 그렇다.

“…….”

주현의 부탁을 보면서 소녀들이 눈을 빛내고 있었다. 아까 전에 주현이 녹음해달라는 내용보다 한 층 강해진 내용이었기에 그렇다. 그리고 그녀들의 눈에는 강렬한 소유욕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아까 전 내용으로 녹음을 했다면 마음의 귀로 ‘주현아’ 는 자체적으로 삭제를 하면 되었지만 지금 녹음을 한다면 굳이 그럴 필요도 없이 인형의 속삭임을 듣기만 하면 되니 말이다.

창현은 부끄러워하는 주현의 부탁을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받아들였다.

“알았어요. 그렇게 해드리면 되죠? 잠시만요.”

그렇게 말을 한 창현이 케로로 인형을 받아들고는 몇차례 목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음성 녹음 기능을 실행하였다. 음성 녹음을 실행한 창현은 주현이 한 부탁대로 녹음을 하기 시작했다.

“I Love you My Darling 케로케로케로!”

완벽한 케로로의 목소리로 음성 녹음을 하는 창현이었다. 뒤에 케로로의 웃음소리까지 가미함으로써 완벽하게 목소리를 위조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창현의 완벽한 성대모사에 소녀들이 감탄에 가득 찬 목소리를 흘렸다.

“와아…….”

감탄하는 소녀들의 모습에 창현은 콧대를 높이 세웠다.

“후후! 제가 좀 우월하죠.”

“못 말려.”

역시 칭찬을 해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소녀들이었다.


“…….”

소녀들이 돌아간 뒤 창현은 홀로 녹음실에 남아 있었다.

함께 웃고 떠들 때와 달리 지금 그는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가 이렇게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유.

그것은 다름 아닌 그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드는 사실이 있어서 그러하였다.

창현이 이렇듯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은 아까 전 수영이 물어보았던 물음 때문이었다.

사랑을 해보았냐는 수영의 질문. 그리고 깊어지는 그녀의 질문은 창현의 가장 중요한 무언가를 자극하고 말았다.

그로 인해 창현은 자신이 정말 사랑을 하고 있는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을 해야만 했다.

정말 자신이 사랑에 대해 모르는 것일까? 아니면 모르는 척하고 있는 것일까?

수만 가지 생각에 머릿속에서 복잡하게 교차하고 있었고, 조용한 적막함 속에서 창현은 이리저리 생각에 잠기면서 그에 관련된 답을 도출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머리가 더 아파올 뿐이었다.

창현은 양손으로 머리를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나직이 한마디를 내뱉는다.

“제기랄.”

복합적인 의미가 담긴 창현의 목소리가 녹음실에 나직이 울려 퍼진다.




제56장 드라마 첫 방영




창현의 일본 활동은 일본에 국한된 것이 아닌, 한국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첫 일본 방문을 성공리에 끝마친 현의 물결이 일본에서부터 시작하여 한국까지 떠밀려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한국에서도 탄력을 받기 시작하였다.

현의 앨범이 일본에서 이백만 장이 넘게 나갔다는 소식이 들려오면서 한국 팬들의 자존심을 묘하게 자극을 한 것이다.

애초에 일본에 가면서 AA엔터테인먼트가 교묘하게 언론 플레이하기를, 일본에 드라마 홍보를 하기 위한 것도 있지만 일본 내에서 이백만 장이 나간 점을 부각시켜 창현의 프로모션 활동을 광고했던 것이다.

그에 반해 한국에서는 아직 이백만 장이 되지 않았다는 점을 묘하게 흘렸다.

이 점이 한국 사람들을 자극하였다.

일본 시장은 한국에 비교할 바가 되지 못한다. 인구도 두 배 이상일 뿐만 아니라, 시장 크기도 몇배에 달할 정도로 컸으니 말이다.

한국 내에서 백만 장을 넘게 판 것도 거의 기적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인구 숫자에 비하면 거의 전설에 가까울 정도로 판매고를 올렸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일본은 그 두 배인 이백만 장이 나갔다고 한다.

이것이 한국 사람들에게 묘한 경쟁심을 불어다 넣어주었다.

반일 감정을 어느 정도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한국 사람들은 일본에게 만큼은 지기 싫어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시장 크기와 인구 숫자는 언급하지 않은 채 묘한 경쟁 심리를 불어다 넣으니 사람들 사이에서 다시 한 번 앨범 구매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인터넷 BGM만 구입했던 사람들은 현의 앨범을 구매하기 시작하였고, 마냥 일본에서 지기 싫어하는 사람들도 앨범을 구입하였다.

어찌 보면 제법 뻔한 상술일 수도 있어 그것에 넘어가지 않은 사람들도 있지만 넘어간 사람의 숫자도 만만치가 않았다.

그렇게 구매에 구매가 이어지다 보니 판매율이 뒤늦게 수직 곡선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절정에 달한 석규의 상술이 아닐 수 없었다.

현의 일본 활동 여파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그 여파는 한국을 넘어서 중국으로까지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일본 기획사인 쟈니스에서 이번에 현으로 인해 어마어마한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일본 활동으로 인한 것임이 퍼져 나가자 중국 기획사 측에서 본격적으로 TTS 기획사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시장이 잘 구축된 일본보다 시장이 크다고 볼 수 없지만 인구 숫자만큼은 세계 최고인 중국이다. 그런 만큼 중국 내에서 활동할 경우 벌어들일 수 있는 돈은 어마어마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현을 끌어들일 수만 있다면 덤으로 라샤의 활동까지 끌어낼 수 있기에 중국 기획사에서는 눈에 불을 키고 현을 끌어들이려고 하던 차였다. 그리고 AA엔터테인먼트의 중국 활동 보이콧 이유인 TTS 기획사를 압박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기간이 길어짐에 따라 거의 무너지기 직전까지 온 상황이었다.

그러던 차에 현의 일본 활동은 기폭제가 되었다.

일본에서 어마어마한 돈이 된다는 것을 목격한 중국 측 기획사들이 눈에 불을 키기 시작한 것이다.

그로 인해 TTS 기획사는 거의 다 무너진 상황이었다.

비유를 들자면 벼랑 끝까지 내몰린 상황이랄까?

더 이상 버틸 여력이 남지 않은 상황이라 할 수 있었다.

일본에서 업무를 마치고 창현보다 하루 늦게 귀국한 석규는 중국에서 전달된 소식을 접하고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이제 슬슬 끝나가는 군.”

일본보다 더욱 큰 시장이 될 수 있는 중국을 이대로 보이콧 할 리가 없었다. 애초에 석규는 TTS 기획사를 무너뜨리고, 중국 쪽에 직접 손을 뻗어 활동을 할 계획이었다.

쟈니스와는 좋은 인연으로 맺어져 그쪽의 호의를 이쪽에서 답하는 방식으로 했지만 중국 쪽에서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지 않은가? 쟈니스와 똑같이 호의로 대하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악의로 대한 TTS 기획사를 제거한 뒤 헐값이 된 그곳을 인수하여 직접적으로 중국 활동을 추진하려는 석규였다.

그와 함께 본격적으로 오디션을 열어 연습생들을 대거 보충할 계획이었고,

중국 쪽까지 안전하게 진출할 수만 있다면 시장은 완성되는 것이었기에 그 후부터는 회사를 더욱 크게 키워줄 연습생들을 대거 발탁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쉽게 발탁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예전에는 연습생 선정 기준이 그리 까다롭지 않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약간 다르다. 연예인을 하려고 하는 청소년들의 숫자는 많았고, 무엇보다 AA엔터테인먼트는 청소년들에게 있어 SM엔터테인먼트, JYP엔터테인먼트, YG엔터테인먼트. DSP미디어 등 이름 난 아이돌 그룹을 보유한 기획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들어가고 싶은 기획사로 꼽히고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서 AA엔터테인먼트는 기획사들 중 가장 연습생으로 들어가기 어려운 곳이었다. 애초에 뽑지를 않으니 말이다. 그로 인해 회사가 기이한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현과 라샤만으로 유지가 되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유지가 가능한 것도 현과 라샤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언제까지 이대로 버틸 수 없는 노릇이었기에 석규는 천천히 연습생들을 확충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여러 단계에 걸쳐서 뽑아야겠군. 그 부분은 차차 방법을 강구하도록 해야지.”

어차피 연습생을 뽑는 것은 급한 일이 아니다. 현의 곡만 있으면 단번에 인기를 얻을 수 있다는 인식이 팽배한 만큼 지원자는 넘치고 넘치는 상황이었다.

슬슬 중국 쪽도 장악해야 하는 만큼 재능 있는 가수 지망생들을 뽑아야 했기에 석규는 장기적인 프로젝트를 계획하였다. 그리고는 홈 페이지에 조만간 연습생을 뽑을 계획이라고 언급을 해놓으라 하였다. 기대감이 클수록 재능 있는 사람들이 모여들 테니 말이다.

그리고 몇 년 동안 연습생 생활을 거치고 데뷔를 하게 되면, AA엔터테인먼트에서는 한국과 중국을 자체적인 역량으로 움직이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멀지 않았군. 계획이.”

무려 일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차근차근 진행해온 그의 계획.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그리 멀지 않은 듯하였다.


“후우! 여기에서 잠들어버렸군.”

소녀들이 창현의 한국 귀환을 축하하기 위해 놀러왔다가 돌아간 뒤, 창현은 계속 녹음실에서 머무르고 있었다. 복잡한 고민 때문에 고민에 잠겨 있다가 시간이 늦은 것을 보고는 집으로 돌아가기가 귀찮아 그대로 녹음실에서 잠이 든 것이다. 녹음실에서 잠을 잘 수 있도록 시설을 배치해두었지만 익숙하지 않은 잠자리였기에 약간 불편한 것은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창현이 가볍게 세수를 하고는 모자를 썼다. 유감스럽게도 녹음실에는 샴푸가 없어서 머리를 감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오랜만에 왔기에 아침을 해 먹을 반찬거리도 없었기에 간단하게 옷을 차려입고는 밖으로 나와 인근 갈비탕 집으로 향했다. 24시간 영업을 하는 곳이었기에 부담없이 먹기에는 그곳이 제일이라는 생각이었다.

젊은 소년이 갈비탕 집으로 들어오자 손님들이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보았지만 모자를 눌러쓰고, 마스크까지 쓰고 있었기에 창현의 얼굴을 알아보지는 못했다.

그렇게 아침을 무사히 해결하고는 창현은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까지 휴식이었기에 간단하게 게임이나 할까 싶어 컴퓨터를 키는 순간, 지영에게서 문자가 왔다.

오늘 시간이 되냐는 물음이었다.

“그러고 보니 지영이랑 본 지도 꽤 됐군.”

일본 활동 직후부터 보지를 못했으니 보름 이상 만나지 않게 된 것이다.

자신이 무심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시간이 된다고 말을 하면서 만나자고 하였다.

마침 지영은 오늘 중간고사가 끝나는 날이라고 하면서 녹음실 근처에 있는 커피숍에서 만나자고 하였다.

창현으로서는 집 앞에 있는 곳이었기에 망설임 없이 OK 사인을 내렸다. 그리고는 두 시간여 정도를 게임으로 보내다가 12시 30분이 되자 집 밖으로 나왔다. 지영의 시험이 11시 40분쯤이 끝나서, 종례를 하고 나면 1시쯤에 도착할 것이라 말을 하였기에 넉넉하게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는 옷을 챙겨 입고 나오자 12시 40분이었다. 커피숍까지 5분여 정도밖에 걸리지 않으니 넉넉하게 도착하리라.

딸랑.

“어서 오세요.”

맑은 소리와 함께 커피숍 문이 열리면서 창현이 들어오자 종업원의 인사소리가 들려온다.

그 목소리를 들으면서 창현은 밖이 보이는 전망 좋은 곳에 앉는다. 그리고는 시간을 확인하고는 의자에 몸을 묻었다.

“십 분 정도 기다리면 되겠지.”

대충 십 분 후면 1시가 되니까 그때까지 기다리기로 결정을 한 것이다.

그리고 약 십여 분 정도를 기다리자, 커피숍 문이 열리면서 교복을 입은 지영이 안으로 들어온다.

커피숍 안으로 들어온 그녀는 주변을 둘러본다. 그러다가 모자를 푹 눌러쓴 창현을 발견하고는 성큼성큼 다가온다.

창현은 지영이 온 것을 확인하고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반겼다.

“어서 와라, 지영아. 오랜만이지?”

“오랜만이야, 오빠.”

그렇게 말을 하면서 지영은 옆 의자에 가방을 내려놓고 교복 마이를 벗어놓았다. 그리고는 창현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와 달리 창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영이 왔으니 주문을 해야 했던 것이다.

“기다려, 주문을 해야지 뭐 먹을래?”

“잠깐만, 물어볼게 있어, 오빠.”

“뭔데?”

지영의 표정이 심각하였기에 창현은 경시하지 못하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지영의 눈을 바라보자,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결심을 굳힌 듯 창현에게 물었다.

“오빠, 드라마 촬영하는 거 키스신 있어?”

지영의 눈이 질투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

갑작스러운 지영의 말에 창현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그녀가 안으로 들어오면서 다짜고짜 그 사실에 대해 물어보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창현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지영이 살짝 눈을 찌푸리면서 그를 재촉하였다.

“오빠! 대답 좀 해보라니깐? 정말 내가 알고 있는 것 그대로야?”

사실 이 점은 지영 또한 일말의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요즘 드라마에서 키스신 없는 드라마를 찾아볼 수 있는가? 키스신이 없는 드라마를 찾아보는 것이 오히려 쉬울 만큼 드라마 대다수가 키스신을 보이고 있다.

그런 만큼 창현이 출연하는 드라마에도 키스신이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드라마의 주된 내용이 회사 내에서 이루어지는 이야기였지만 젊은 층의 사랑 이야기도 비중 있게 다루어지니 말이다. 달콤한 로맨스가 담긴 만큼 키스신이 있을 확률이 높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지영의 물음에도 불구하고 창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자 지영은 반드시 이야기를 듣겠다는 듯, 창현을 바라보면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둘 사이에 한동안 숨 막히는 침묵이 흘렀다.

그러다가 이내 창현이 한숨을 푹 내쉬면서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맞아, 있을 거야. 아니, 있겠지.”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창현도 확신을 못하고 있는 부분이었다. 아직 그에 관련된 대본을 받지 못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드라마의 흐름을 감안하면 충분히 있을 확률이 높았다. 아니, 없으면 오히려 이상한 흐름이었다.

“으으으…….”

진실을 시인하는 창현의 모습에 지영이 신음을 흘리고야 말았다.

설마설마 했는데 정말로 키스신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제3자에게 정보를 접해서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지만 실제로 정보를 접하게 되니 그 충격은 더욱 컸다.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내겠다고 다짐했건만, 그런 오빠에게 키스신이 있다니!

‘반드시 막아야 돼!’

다행인 점은 아직 키스신이 담긴 촬영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창현의 말을 들어보면 아직 하지 않았다는 것을 눈치로 간단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아직 막아낼 수 있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었다.

너그러운 팬들은 ‘내 남자의 비즈니스’라고 하면서 참을지도 모르지만 지영은 그럴 수 없었다. 창현은 지영에게 있어 자신의 오빠에 앞서 팬이었다. 게다가 가족 관계로 묶인 이상 자신은 다른 여자들의 마수에서 그를 구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주먹을 불끈 쥐는 지영을 보면서 창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은 거야?”

그녀는 속으로 굳은 결심을 하고 있었지만 제3자가 보기에는 정상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창현은 그녀가 염려스러워서 물은 것이었지만 지영은 괜찮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응? 으응! 괜찮아. 그럼 키스신 촬영은 언제 있는 거야?”

자꾸 키스신에 관심을 갖는 지영의 모습에 창현은 불편함을 느꼈지만 뭐라 말을 할 수 없었다. 평소 같았으면 그만하라고 강하게 나올 수도 있었을 테지만 뭐랄까, 키스신이라는 것이 묘하게 죄를 지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함부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지영의 기세가 평소보다 훨씬 강하기도 한 면이 있었고 말이다.

‘응? 그런데 키스신이 있는 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그러고 보니 한 가지 의아한 점이 있었다.

지영은 도대체 어디에서 키스신에 관련된 정보를 얻은 것일까?

자신에게 말하는 것으로 보면 어디에선가 정보를 듣고 온 것임이 분명했다. 지금 지영의 반응으로 보면 결코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그 사실을 묻어둘 인물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도리어 일본에 있음에도 연락을 할 인물이 바로 지영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정보를 얻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달리 생각하면.

‘갑자기 생각이 났을 수도 있겠지. 드라마에 키스신은 거의 있는 편이니까.’

이것도 제법 타당하다고 생각하는 창현이었다. 창현은 주연을 맡았고, 로맨스가 있는 만큼 키스신은 반드시 있는 것이라 볼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외부에서 정보를 얻지 않아도 충분히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이 미치자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걸 느낀 창현은 살짝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는 지영의 물음에 대답해주었다.

“아직 몰라. 대본이 나오지 않았거든. 게다가 키스신이 있는 것도 확실하지는 않아. 아직 대본이 나오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흐름을 보면 있을 것 같아.”

“…그렇다는 건 조금 뒤에 있다는 이야기지?”

있을 것 같다는 이야기에 지영은 이를 뿌득 갈면서 말한다.

그 모습에 창현이 어색한 웃음을 짓고 고개를 끄덕이며 자세히 말해주었다.

“10화까지 사전 촬영을 했다고 하지만 10화까지 완성된 게 아니거든. 내가 나오지 않는 장면은 꾸준히 촬영하고 있을 테고, 나도 며칠 쉬다가 본격적으로 촬영에 들어가서 확실하게 10화까지 촬영을 할 테지. 그리고 시청률을 보면서 연장을 할지, 조기종영을 할지 결정할 테고.”

그렇다는 건 제법 시간이 남아 있다는 뜻이었다.

그에 지영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알았어. 소리 질러서 미안해, 오빠. 조금 흥분해 버렸네.”

순순히 사과하는 지영의 모습에 창현은 웃음을 지으며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하하! 지영이가 질투해주니 기분이 좋은 걸? 당황하기는 했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응, 이해해주니 고마워. 그런데… 헛! 그러고 보니 드라마 촬영에서 키스신을 촬영하면 오빠 첫 키스를 하게 되는 거 아니야?”

팬 미팅에서 당한 적이 있다고 언급을 해서 한동안 화제가 된 적이 있는데 지영은 그 사실을 접하지 못했나보다.

창현이 대답을 하지 않자 지영의 눈에서 다시 한 번 불길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감히 오빠의 첫 키스를 가져가게 되다니!

완전호감이었던 문근영이 지영의 적으로 돌변하는 순간이었다.

지영이 오해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창현은 무어라 말을 할지 몰라 하다가 이내 머쓱한 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그게 그러니까 말이야…….”

“응, 왜?”

멀뚱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지영의 모습에 창현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유감스럽게도… 처음은 아니다. 하, 하!”

“…….”

창현의 말에 지영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순간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그녀는 이해를 하지 못했다.

그게 그러니까 무슨 말이라는 건가? 유감스럽게도 처음은 아니라니? 그렇다면? 처음은 아니라는 것, 그것은 곧 해봤다는…….

번쩍!

지영의 눈에서 강렬한 안광이 폭사되었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려던 충동을 필사적으로 억누르고는 창현에게 물었다.

“그, 그, 그, 그러니까! 키, 키스를 해봤다고? 정말?”

이럴 수가! 여태까지 여자를 사귀지 않아보았다는 오빠가 키스 경험자라니! 설마 자신에게 한 말이 모두 거짓이었단 말인가? 아니다, 그것은 아닐 것이다. 창현은 거짓말을 잘 하지 않는 편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설마 여자를 사귀지 않은 채 자유롭게 엔조이를 하는 것이란 말인가? 저 사람 좋은 얼굴 뒤편에 숨겨진 여성 편력이 존재했단 말인가?

창현의 숨겨진 실체를 알게 된 듯하자 지영의 빠심은 급격히 하향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런 지영의 표정을 보고는 창현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무언가 실례되는 생각을 하는 것 같은데.”

“설마 이성을 사귀지 않고 엔조이하는 거였어? 정말 그런 거야, 오빠?”

자기 멋대로 상상을 전개하던 지영이 두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만들어내며 말했다.

“뭐? 엔조이?”

그 말에 창현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얘가 뭐라고 하는 건가? 뭐, 엔조이라고?

창현은 그녀가 심각한 오해를 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리고는 한숨을 푹 내쉬며 해명하기 시작했다.

“그런 게 아니라… 예전에 팬 미팅에서 밝힌 적이 있어. 당한 적이 있다고. 그것 때문에 해봤다고 말을 한 거야.”

“아아… 그렇구나. 뭐? 당했다고?”

지영은 창현이 여자를 엔조이하다가 차버리는 악질 바람둥이가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하다가 두 눈을 부릅떴다. 지금 들어서는 안될 말을 들은 것 같았던 것이다.

당했다니! 누가 감히 창현의 첫 키스를 뺏어간단 말인가!

“오빠, 그 년이 누구야! 알려줘! 내가 당장 요절을 내주겠어!”

오해가 풀리면서 빠심 급상승이 이루어진 지영은 세상에 그 누구도 두려워할 것이 없을 정도로 용기백배하게 변한 상황이었다.

누구라고 말을 하면 당장 박살을 내버릴 기세였다.

하지만 창현은 명쾌한 답변을 해줄 수 없었다.

그저 어색한 미소를 짓고는 지영을 말리는 수밖에 없었다.

“괜찮아. 이미 지난 일이니까. 그러니 너무 흥분하지 말아.”

“내가 흥분하지 않게 됐어! 오빠가 당했다는 것은 성희롱을 당한 거라고! 말해봐! 내가 애들 풀어서(?) 박살 내줄게!”

소리를 지르는 지영의 모습에 한숨만이 나왔다.

‘그러다가 네가 박살이 날 것 같아서 그러는 거란다, 지영아. 후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소녀시대 최종보스 제시카가 그 범인이 아닌가? 멤버 8명의 레이드에도 불구하고 리젠이 되어서 역으로 하나하나 사냥하고 있는 그녀는 이 시대 최종보스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만큼 창현은 입을 잘못 놀려 괜히 애꿎은 지영을 희생시킬 수 없었다.

“그러지 말고 일단 뭐 시켜먹자. 아까부터 눈치가 장난이 아니라고.”

시간을 보니 벌써 1시 20분이었다. 창현이 12시 50분에 왔으니 30분 동안 주문을 하지 않은 채 이야기를 한 셈이었다. 덕분에 종업원의 눈치가 장난이 아니었다.

창현은 자리에서 일어나고는 지영에게 물었다.

“뭐 마실래?”

“난 카라멜 마끼야또!”

고등학생임에도 불구하고 카라멜 마끼야또의 달콤한 맛을 알아버린 지영이었다.

그에 창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카운터에 가서 주문을 한다. 창현은 여전히 변함없이 딸기 주스를 주문하였다. 그리고 치즈 케이크 두 조각도 주문을 하였다.

주문을 하고 오자, 지영이 다시 창현의 첫 키스를 빼앗은 망할 년(?)에 대해 묻는다. 반드시 캐고 말겠다는 의지가 굳건하였다. 하지만 창현은 끝까지 대답하지 않았고, 주문한 게 완성되었다는 말에 지영이 나가서 들고 온다.

그리고는 각자 주문한 카라멜 마끼야또와 딸기 주스를 마시면서 치즈 케이크를 먹는다.

아직 점심 전이었기에 지영은 부지런히 포크를 놀려 치즈 케이크를 열심히 먹었다.

마치 폭격을 당한 것처럼 이곳저곳 구멍이 숭숭 뚫리던 치즈 케이크는 이내 자취를 감추고야 만다. 지영의 빠른 폭격에 견뎌 내지를 못한 것이다.

어느 정도 허기가 가신 듯 싶자 그녀는 다시 창현에게 묻는다.

“오빠, 정말 대답해주지 않을 거야?”

“알아봤자 이미 지난 일이야. 일 년도 훨씬 넘은 일을 문제 삼아서 어쩌자고? 잊는 게 속이 편할 거야.”

“하지만…….”

지영이 계속 물고 늘어지자, 창현은 단호하게 끊어버렸다.

“그만. 거기까지 하는 게 좋아.”

“으응.”

창현이 엄하게 나오면 지영도 꼼짝을 못한다.

그렇게 지영을 제압한 창현은 딸기 주스를 한 모금 마신다. 딸기맛과 시원한 느낌이 조화 되서 잠시나마 행복한 느낌을 선사해준다.

그 맛을 음미하던 창현은 무언가 떠오른 듯 지영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지영아.”

“궁금한 거? 뭔데?”

창현이 화가 난 게 아닐까 싶어 조심스러운 태도로 대답을 하는 지영이었다.

그 모습에 창현은 피식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화가 나지 않았으니 그런 모습 보이지 않아도 돼. 내가 묻고 싶은 게 있어서 그런데, 그 키스신에 관련된 거 말이야.”

“키스신이 왜?”

지영이 의아한 듯 묻자 창현이 거침없이 물었다.

“내가 처음 드라마 촬영을 할 때 아무 말도 안했었잖아. 그렇다고 내가 일본에 갔을 때 안 것도 아닐 테고. 분명히 조금 전에 알았을 것 같은데 그거 누가 가르쳐준 거 아니야?”

창현의 의문은 그것이었다. 갑자기 지영이 키스신에 언급한 것을 보아 그녀가 생각했다기보다는 누군가 언급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지영에게 질문을 던진 것이다.

그 질문에 지영은 순간 머뭇거렸다.

“어? 응, 그게 그러니까…….”

우물쭈물하는 지영. 그 모습에 무엇이 있다고 창현은 확신할 수 있었다. 스스로 생각해낸 것이라면 저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누가 말해주었다는 건데 누가 말했을까? 석규가? 아니면 드라마 촬영하는 배우 중 한 사람인 윤아가? 쉽게 짐작이 가질 않았다.

지영이 대답하기를 기다리던 차에 창현의 뒤에서 돌연 한줄기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건 내가 가르쳐줬어.”

“응?”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창현이 움찔하며 반응을 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매우 익숙한 목소리가 그의 귀에 천둥처럼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는 볼 수 있었다.

완전무장을 한 채 자신을 향해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유리의 모습을 말이다.


“후후훗!”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창현의 모습에 유리가 웃음을 흘렸다.

그녀는 지금 상황이 매우 흡족하였다. 딱 자신이 원하던 상황을 정확하게 만들어내는데 성공을 한 것이다.

오늘 이 자리는 유리, 그녀가 만들어낸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제 숙소에 돌아온 뒤 내일 스케줄이 저녁 라디오 밖에 없다는 것을 확인한 유리는 한 가지 계획을 세웠다. 바로 창현을 만날 계획이었다.

하지만 혼자서 그를 만난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혼자서 만날 명분도 부족했고, 무엇보다 암중에서 차근차근 접근해나가는 자신의 계획을 저버리는 결과를 낳을 수 있었기에 그렇다.

그러나 유리가 누군가? 소녀시대 내에서 암중에서 거대한 대계를 세워놓고 차근차근 하나씩 이룩해나가는 숨은 모사가 아닌가? 그녀는 짧은 시간 동안 고민을 한 끝에 절묘한 계획을 세운다.

바로 지영에게 연락을 하여 창현과 만날 자리를 갖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 자리에 자연스럽게 끼어드는 것이고 말이다.

물론 끼어드는 것 자체가 명분이 부족하였기에 지영에게 밑밥을 깔아놓았다. 드라마 키스신에 대해 지영에게 언급을 한 것이었다.

한방을 쓰는 윤아에게 그에 관련하여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드라마에서 창현이 키스신 촬영을 할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들은 유리는 소위 말하는 열폭을 하고야 말았다. 윤아가 있기에 겉으로 드러내지 못했지만 그녀의 속에서는 원자폭탄 몇 개가 폭발했을 정도로 엄청난 충격파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녀 또한 ‘내 남자의 비즈니스’를 용납하지 못했다. 비즈니스라고 해도 키스는 키스였다! 감히 자신도 못한 것을 남이 하게 할 만큼 그녀는 너그러운 성격이 아니었다.

그래서 지영에게 스리슬쩍 언급을 한 것이다. 창현을 상당히 아끼는 그녀라면 분명 반응을 보일 것이라며 말이다. 그래서 전화로 살살 구슬려서 자리를 만들어줄 테니 자신도 참가하게 해주면 정보를 주겠다고 했다. 유리의 이러한 내공에 지영은 꼼짝없이 넘어갔고, 이렇게 당당히 시누이(?)의 허락을 얻어 자리에 참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한 내막을 모르는 창현으로서는 갑작스러운 유리의 등장에 당혹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여기에…….”

“여기 나도 자주 오거든. 그런데 설마 여기에 있을 줄 몰랐네? 우연도 이런 우연이 없나봐. 우연이 겹치면 인연이라던데. 나도 앉아도 되지?”

뻔뻔하게도 지영에게 정보를 얻어 와놓고 거짓말을 하는 유리였다.

전말을 알고 있는 지영이었지만 유리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그녀에게 창현과의 관계를 방해하지 않겠다고 말을 했던 것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리고 유리는 그것을 제대로 활용하고 있었다.

“네, 물론이죠.”

창현은 대수로울 것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럼…….”

수락이 떨어지자 유리가 곧장 움직였다. 그리고는 짐짓 지영의 옆에 앉으려고 하다가 멈칫하며 아쉬운 표정을 만들어내고는 입을 열었다.

“아쉬워라! 지영이 옆에 자리가 없네? 창현아, 여기 앉아도 되지?”

“네? 네. 그러세요.”

지영 옆에는 아까 내려놓은 가방과 교복 마이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에 반해 창현의 옆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기에 유리는 자연스럽게 창현의 옆자리에 앉아도 되냐고 물은 것이다. 그리고 창현은 그 제안을 고민도 하지 않고는 가볍게 수락하였다.

“아…….”

유리의 말을 듣고는 치워주겠다고 말을 하려던 지영은 섬광을 방불케 하는 유리의 대처에 말을 잇지 못했다. 설마 자신이 말을 하기도 전에 창현의 옆에 앉아버리는 것을 확정지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한 것이다. 정말 대단하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 대단한 대처가 아닐 수 없었다.

싱긋.

창현의 옆에 앉은 유리는 지영에게 웃음을 지어 보인다. 그리고는 지영만 볼 수 있게 입모양을 그려냈다. ‘고마워.’ 라고 말이다.

그러한 유리의 행동에 지영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마치 한편의 추리 드라마처럼 완벽하게 딱딱 맞아떨어지는 유리의 행동에 절로 소름이 돋았다.

‘으으! 이 언니 정말 무서운 사람이야.’

자신에게 단도직입적으로 창현을 좋아한다고 했을 때 그녀는 솔직히 유리가 바보 같다고 여겼다. 자신이 방해를 하지 않는다고 하여도 유리 혼자서 창현을 어쩔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게다가 이렇게 직선적으로 나오는 모습을 창현에게 그대로 한다면 결국 차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랬기에 약간 얼떨떨한 가운데 수락을 한 것이고 말이다.

하지만 그 직선적인 모습에는 수많은 계산이 자리하고 있었다.

애초에 유리는 자신에게 수많은 계산을 한 뒤에 그렇게 말을 한 것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과 같이 놀라운 모습으로 창현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자신이 본 책사 같은 모습이 아닌, 언제나 쾌활하면서 창현 앞에서는 조신하고 착한 모습을 보여주는 그녀는 두 얼굴의 사람이 어떠한 것인지 전형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좋게 말하면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최대한 얌전한 모습을 보이며 차근차근 작업을 하는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가식을 전체로 둘러 자신의 오빠를 공략하는 나쁜 여자였다.

‘어쩌면 내가 인생에 있어 최대 실수가 유리 언니의 말을 수락한 것일지도 몰라.’

모든 일이 끝나면 전말을 돌아볼 여유가 생기지 않은가?

지영은 자신이 유리에게 이용당했다는 것을 은연중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가방을 옆자리에 놓아둘 것을 계산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소름이 오싹 돋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 되면…….’

지영은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자신이 방해를 하지 않기로 했으니 유리를 견제할 수 없었다. 하지만 유도는 할 수 있지 않은가? 이대로 가다가는 창현이 유리에게 넘어갈 가능성이 99.9%라고 보는 지영이었기에 유리의 마수에서 창현을 어떻게 구해낼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였다.

그러다가 지영이 무언가 떠오른 듯 눈을 빛냈다.

‘오빠를 좋아하는 언니가 두 명만 더 있다면…….’

소녀시대 내에서 창현을 좋아하는 사람이 두 명 정도 더 있다면 그녀들을 끌어들일 계획을 세우는 지영이었다. 지금은 유리 혼자서 독주를 하고 있지만 두 명을 더 끌어들이면 서로 알아서 견제를 할 것이라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었다.

그 옛날 신라가 당나라의 힘을 빌려 고구려와 백제를 무너뜨린 것처럼 말이다. 게다가 세 명이면 묘한 힘의 균형을 이루게 되어서 쉽게 무너지지 않은 채 서로 심력만 소모하게 될 것임이 분명했다.

그 틈을 타 자신은 창현의 방어를 더욱 견고하게 다지면 되고 말이다.

아직 어리지만 결코 우둔한 것이 아니었기에 지영은 순식간에 계획을 수립할 수 있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기발한 계획에 주먹을 불끈 쥐자, 창현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지영에게 물었다.

“왜 그래, 지영아.”

“응? 아, 아하하! 아무것도 아니야, 오빠.”

그제야 자신의 행동을 알아차린 지영이 주먹을 피면서 어색하게 웃음을 지었다.

“그래? 그럼 말고. 고민 있으면 나한테 털어놓도록 하고.”

“응, 알았어!”

그러면서 유리에게 시선을 옮긴 창현이 말했다.

“누나도 고르세요. 제가 살게요.”

“정말? 고마워. 그럼 난…….”

메뉴가 있는 곳으로 시선을 옮긴 유리가 눈을 움직이면서 메뉴를 둘러본다. 하지만 머릿속에서는 다른 생각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지영이 요것이 다른 생각을 품고 있는 것 같은데? 다시 한 번 잘 단속해야겠어.’

뛰는 사람 위에 나는 사람이 있는 법이었다. 지영이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단번에 알아차린 유리였다.

두 사람의 대결이 어떻게 될지는 두고 봐야 할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유리는 메뉴를 정했다는 듯 창현에게 말한다.

“나는 아메리카노!”

얼핏 보면 아무렇지도 않게 고른 듯하지만 그 속에는 여러 계산이 숨어 있었다. 우선 아메리카노가 커피 계열 중에서 가장 저렴했고, 달달하기보다는 커피의 씁쓸한 맛이 난다. 그러니 남자의 눈에서는 경제적인 면에서 저렴한 걸 고르니 좋게 보일 수밖에 없고, 달달한 것보다 씁쓸한 맛도 즐길 줄 아는 성숙한 여자로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이런 계산을 이공계에 접목시켰다면 그녀는 미래에 스트라이크 프리덤 건담을 제작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유리의 주문 선정에 창현은 살짝 놀란 표정을 짓는다.

“아메리카노요? 누나는 달달한 걸 안 좋아하나 봐요?”

“그렇다기보다는 약간 씁쓸한 맛을 즐기거든.”

“왠지 성숙한 느낌이 드는데요?”

“그래? 후후!”

예상대로 이루어지는 창현의 행동에 입가에 미소를 짓는 유리였다. 그리고 아메리카노를 주문한 창현이 자리로 돌아오고, 잠시 후 아메키라노가 나오자 유리가 직접 가서 받아온다.

유리의 합류로 이야기가 다시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창현이 키스신 이야기에 대해 묻자, 유리는 흥분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침착하게 숨을 고르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짓고는 말했다.

“키스신 이야기는 윤아에게 살짝 들었거든. 그리고 평소 지영이랑 문자를 주고받고는 하는데 우연찮게 언급하게 되었어. 폐가 되었다면 미안해.”

사과하는 유리의 모습에 창현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것 가지고 미안해 할 이유는 없어요.”

“그런데 정말 키스신이 있는 거야?”

유리가 궁금한 듯 물었다. 그러자 창현이 망설임 없이 대답한다.

“잘은 모르겠지만 흐름상 있을 것 같아요.”

“그, 그래?”

설마 했지만 창현의 입에서 듣게 되자 유리는 제법 충격이 큰 듯 목소리가 떨려나왔다. 하지만 그 변화를 창현은 눈치 채지 못했다. 지영만이 그녀의 변화를 알아차렸을 뿐이었다.

창현이 알아차리기 전 유리는 침착하게 평정을 되찾으며 말했다.

키스신 부분이야 서서히 조치를 취하면 된다.

“이왕 한 거 잘 되었으면 좋겠다. 드라마 도전 때문에 말이 많았잖아?”

“그랬죠.”

제법 민감한 이야기였기에 창현의 표정이 살짝 굳는다.

그에 유리는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그거 말나오는 것들 확 눌러줬으면 좋겠어. 창현이 너 연기 잘한다면서?”

“딱히 잘하는 건 아니에요. 간신히 NG 면하는 수준이죠, 뭐.”

자신을 살짝 띄워주는 말에 창현은 살짝 미소를 짓다가 고개를 저으면서 대답한다.

그러자 유리가 눈을 가늘게 뜨고는 툭 치면서 말했다.

“에이, 거짓말. 윤아가 잘한다고 얼마나 말하는데? 자기도 질 수 없다면서 매일 연기연습에 매진하던데. 도대체 얼마나 잘하기에 그러는 거야?”

“딱히 잘하는 게 아닌데…….”

그렇게 말을 해도 칭찬을 해주는데 기분이 나쁠 리 없다.

“잘한다면 잘하는 거지, 뭐 그래. 노래도 잘하고 얼굴도 잘생기고 후! 드라마까지 대박 나면 완전 끝장 아니겠어?”

“그런가요?”

지금도 완전 끝장이었지만 드라마가 잘 되면 주가는 더욱 올라갈 것임이 분명했다.

유리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창현에게 말한다.

“그렇고 말고! 연기자로서도 가능성을 보이면 완전 탄탄대로지! 이럴 때 확 잡아놓아야 하는데. 창현아, 누나한테 장가올 생각 없니? 내가 잘 대해줄게.”

농담처럼 언급을 하는 유리였다.

그것이 농담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창현은 미소를 짓고는 슬쩍 뒤로 빠진다.

“생각은 해보겠지만 긍정적인 답변은 기대하지 마세요.”

“으으, 차였군. 언제든지 생각이 나면 말하라고.”

“그럴게요, 하하!”

그렇게 장난스러운 어조로 말을 주고받는 창현과 유리였다.

하지만 그것도 유리의 계산 중 하나였다. 은연중 언급을 하면서 창현이 살짝 자각할 수 있게 미끼를 흘리는 것이었다. 농담조로 말을 하였기에 창현이 심각하게 받아들일 리가 없을 것이고, 이런 농담을 자주 하게 되면 차근차근 쌓여서 나중에 큰 효과를 발휘할 것이다. 너무 자주하게 되면 역효과가 생기니 가끔 해주는 것이 제대로 된 사용법이었다.

“…….”

지영은 그 모습을 못마땅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하나가 눈에 걸리니 계속해서 유리의 행동이 모두 눈에 걸렸다. 저 행동 하나하나가 계산적이고 가식적으로 보였던 것이다.

그런 지영을 향해 유리는 훗! 하고 웃음을 날려준다. 그것은 마치 ‘네가 그렇게 봐도 이미 대세는 기울었어!’ 라고 비웃음을 날리는 것과 비슷했다.

가뜩이나 창현과 하하 호호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보기 싫어 죽겠는데 그러한 모습이 그녀의 눈에 곱게 들어올 리 없었다.

눈을 가늘게 뜬 지영이 유리가 아메리카노를 다 마시길 기다리다가 그녀가 다 마시기 무섭게 입을 연다.

“언니, 그러고 보니 스케줄 있지 않으세요? 이만 가봐야 하지 않아요?”

그렇다. 유리는 다름 아닌 연예인이지 않은가! 게다가 어느 정도 잘 나가는 연예인이니 만큼 스케줄이 있을 확률이 무척 높았다.

요컨대 지영의 말은 스케줄이 있을 테니 어서 가보라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유리는 쉽사리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입가에 미소를 지은 유리가 빈 컵을 쟁반 위에 올려놓으며 말한다.

“오늘 마침 공교롭게도 저녁에 스케줄 하나뿐이더라고. 창현아, 아직 점심 먹지 않았지?”

‘아, 안돼!’

지영은 유리의 의도가 무엇인지 파악하고는 창현을 제지하려 하였다.

그러나 창현의 대답이 한 박자 더 빨랐다.

“점심이요? 먹지 않았는데요?”

“그래? 그럼 나 점심 사주면 안 돼? 이대로 들어가기는 좀 그래서…….”

“그래요? 전 상관없어요. 어차피 지영이랑 먹으려고 했거든요. 한 명분 더 늘어나는 건데요, 뭐.”

“정말? 고마워!”

창현이 거절할 리 없다고 생각한 유리였기에 그 수락을 무척 반갑게 받아들였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빈 컵이 담긴 쟁반을 들었다.

“이건 내가 치울게. 나가자.”

“네, 그러죠.”

그러면서 창현도 자리에서 일어났고, 지영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영은 교복 마이를 벗고 가방을 내려놓은 상황이었기에 나가는데 약간 시간이 걸렸다.

교복 마이를 챙겨 입고 가방을 멘 지영이 막 커피숍을 나서려고 할 때였다. 공교롭게 유리도 쟁반과 빈 컵을 모두 처리하고 나가려던 차였다.

그러다 보니 두 사람이 자연히 마주하게 되었다.

유리는 입 꼬리를 살며시 말아 올리며 지영에게 말했다.

“훗! 지영아, 넌 아직 나한테 안 된단다. 그러니 순순히 포기하렴.”

그러면서 지영을 지나치며 밖으로 나가는 유리였다.

홀로 남겨진 지영은 도도하게 걷고 있는 유리의 뒷모습을 보며 이를 갈았다.

“이익!”

지영의 오빠 사수는 앞으로 더욱 험난할 듯 싶었다.


창현과 유리, 지영이 향한 곳은 근처에 위치한 고급 숯불갈비이었다. 아직 밤도 아니었고, 그렇게 거창하게 먹을 것도 아니었기에 괜히 한우 전문점이나 레스토랑 같은 곳이 아닌, 이곳을 택한 것이다. 게다가 사방이 트여 있지 않고 테이블마다 이야기를 나누며 먹을 수 있게 배려한 곳이었기에 정체를 들키지 않고 마음껏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곳이었다.

가격이 제법 비쌌지만 말이다.

“언니 여기 앉으세요!”

재빠르게 창현의 옆에 앉은 지영이 얄미운 미소를 지으면서 텅 비어있는 반대편 자리를 가리킨다.

“그, 그래? 고마워, 지영아.”

이번에도 멋지게 창현의 옆에 앉으려던 유리는 지영의 매콤한 반격에 미간을 꿈틀거리다가 이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뭘요, 호호!”

유리의 일그러진 얼굴을 확인한 지영이 웃음을 지어보인다. 하지만 그 웃음은 결코 승자로서 보일 수 있는 웃음이 아니었다. 유리의 모습을 보면서 잠자던 사자의 코털을 뽑은 게 아닐까 염려가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미 기호지세였기에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어를 해주겠다고 결심하는 지영이었다.

그렇게 자리에 앉게 되자, 창현이 입을 열었다.

“점심부터 갈비라니 조금 뜬금없지만 맛이 있으니까 괜찮을 거예요.”

“아니야! 창현이 네가 사준다고 하니 감지덕지인데 뭐. 게다가 상당히 맛있어 보이는 곳이기도 하고 말이야. 안 그래? 창현이 너 제법 입맛이 까다롭잖아.”

아무거나 잘 먹는 편이었지만 음식 맛을 평가하는데 있어서는 제법 까다로운 창현이었다.

커피 전문점이야 어차피 딸기 주스만 마셔댔기에 그리 장소를 따지지는 않았지만 음식점의 경우는 약간 달랐다.

하지만 그것을 여태까지 누구에게도 언급을 한 적이 없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다른 음식들도 곧잘 먹는 모습을 보였기에 창현의 입맛이 까다롭다는 걸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던 것이다.

창현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유리에게 말했다.

“누나가 그걸 알고 있었어요? 제가 입맛이 좀 까다로운 편인 건 잘 모르는데…….”

“정말이야, 오빠?”

창현의 입맛이 까다로울 것이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지영이 경악한 표정으로 묻는다.

뭐든지 잘 먹는다고 알려진 창현에게 갑자기 입맛이 까다롭다니? 아직도 오빠를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속으로 웃음을 짓던 지영이었다.

그런데 이게 무엇이란 말인가! 유리의 말이 사실이라니! 정말 경악스러운 사실이 아닐 수 없었다.

자신의 추측이 맞자 유리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내 생각대로였네. 예상이 맞아서 다행이다.”

그러면서 지영에게 슬쩍 시선을 옮긴 유리가 한쪽 입 꼬리를 말아 올린다. 이른 바 비웃음이었다.

‘훗!’

감출 수 없는 깝의 본능이 발현되고 있는 실정이었다.

불행하게도 지영은 그 비웃음을 정면으로 목격하고 말아, 이를 부득부득 갈기 시작했다.

“이, 이익!”

창현은 갑자기 지영이 이를 갈자 화들짝 놀라며 지영에게 물었다.

“왜 그래, 지영아?”

“응? 아, 아니야. 아무것도.”

이것은 유리와 자신, 둘만의 전쟁이라고 생각하는 지영이었기에 창현에게 언급하지 않았다. 자신의 생각처럼 이것은 둘만의 전쟁이었다. 우선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런 지영의 생각을 알고 있는 듯, 여유가 담긴 눈으로 지영을 바라보던 유리가 창현의 물음이 대답해주었다.

“음, 창현이 네가 음식을 먹을 때 묘하게 판단을 내리려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거든. 그래서 음식을 제법 까다롭게 판단하는 것 같아서 물어본 거야. 내 예상이 맞았다니 기분이 좋네.”

“솔직히 놀랐거든요. 맛을 가리는 건 아니지만 어느 정도 맛있느냐는 따지는 편이니까요. 그 부분을 알아차린 사람은 없었는데 누나가 알아차리다니 놀랍네요. 그리고 관심을 가져주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기도 하고요.”

“기분이 좋다니 나도 좋은 걸?”

기분이 좋다는 말에 유리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자신의 계산이 다시 한 번 맞아떨어진 것이다.

사실 창현의 입맛이 까다롭다는 것은 넘겨짚은 것에 불과하였다. 위에 말을 한 것처럼 창현이 음식을 먹는 모습에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어본 것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자신의 예상은 훌륭하게 맞아떨어졌고, 이것이 좋은 점수로 이어지게 되었다.

창현을 아주 유의 깊게 관찰한 유리의 공적이 아닐 수 없었다.

그녀가 본 창현은 자신에게 깊은 관심을 가져줄수록 호감을 느낀다. 듣기로는 어렸을 때 어머니를 잃었다고 하던데, 그 부분 때문에 은연중 다른 사람과 만나는 것을 꺼려하는 면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처음 관계를 갖는 것은 힘들지만 그 반경 안으로 들어서면 모든 것을 내어줄 듯이 잘 대해준다. 그리고 상대방이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면 지켜볼수록 친근함을 느낀다.

그것이 바로 창현이었다.

마치 정보부에서 집중적으로 연구를 한 듯한 세세한 내용까지 담겨 있었지만 날카로운 매의 눈으로 그동안 조용히 정보를 수집한 유리의 정보의 양은 만만치가 않았다.

보이지 않게 차근차근 쌓아놓은 정보는 지금에 와서 유리의 절대적인 지원군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것을 모르는 지영이 애초에 유리를 상대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소리였다.

지영이 매섭게 유리를 노려보는 가운데 창현이 주문을 하였다. 숯불갈비를 시키고, 된장찌개보다는 김치찌개가 좋다는 창현의 의견 하에 김치찌개를 주문하였다.

주문을 모두 하자 유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창현아, 나는 잠시…….”

“네? 네. 다녀오세요.”

언급하지 않았지만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는 뜻으로 알아차렸기에 창현이 고개를 끄덕인다.

“나도 화장실 좀 다녀올게, 오빠.”

창현의 옆에 앉아있던 지영도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래, 빨리 오도록 하고.”

“응!”

그렇게 자리에 일어선 지영이 화장실로 향한다.

화장실에 도착하자 유리가 거울을 보며 화장을 고치고 있었다. 화장을 한 게 아닌 것처럼 느껴졌는데 유리는 요즘의 대세인 안한 듯하면서 한 화장을 구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 화장이 짙은 것을 좋아하지 않는 창현의 취향에 맞춰서 한 것이리라.

‘이 언니 너무 위험해.’

다시 한 번 유리의 숨은 계략에 치를 떠는 지영이었다.

그 사이 화장을 모두 고친 유리가 지영에게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는 차분한 어조로 입을 열기 시작하였다.

“지영아, 도대체 언니에게 왜 그러는 거야?”

“그건 언니가 더 잘 알겠죠.”

이미 유리의 무서움을 파악한 지영은 더 이상 속내를 숨기지 않은 채 유리에게 그대로 말하고 있었다.

그러자 유리가 의문 부호를 그리면서 물었다.

“뭘? 내가 뭘 어쨌다고? 설마 내가 장난 친 것 때문에 그러는 거야? 그렇다면 미안해. 내가 좀 장난기가 넘쳐서 그러는 거니깐.”

정말 모르는 듯한 유리의 말에 지영은 속이 부글부글 끓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는 세차게 고개를 젓더니 말한다.

“내가 말하는 건 그게 아니에요. 내가 말하는 건 바로 유리 언니 자신이에요!”

코난이 범인을 가리키는 것처럼 손가락을 척 들어서 유리에게 가리키며 소리치는 지영이었다.

졸지에 범인으로 지목된 유리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 지영에게 말한다.

“내가 왜?”

“언니는 너무 위험한 사람이에요. 내가 언니를 방해하지 않겠다고 생각한 것은 애초에 언니가 오빠를 함락시킬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오늘의 언니는 너무나 무서운 모습을 보이고 있어요. 애초에 제정신이 아닌 상태였고, 문서로 남기지도 않은 이상 우리 둘 사이의 계약은 파기에요.”

긴 지영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유리의 눈이 이채가 스쳐간다. 그리고는 묘한 표정을 짓더니 콧소리를 흘리면서 지영에게 말했다.

“아항! 그러니까… 내가 창현이를 함락시킬 것 같으니까 불안했다, 이거네?”

움찔!

자신의 마음을 정확하게 꿰뚫어 본 유리의 말에 지영의 몸이 격렬하게 떨렸다.

하지만 유리의 공격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녀의 말은 더 이어졌다.

“게다가 애초에 내가 창현이를 함락시킬 것이라고 생각도 안 했었고, 넘겨줄 생각도 없었다는 거네. 안 그래?”

“그, 그래요! 그러니 언니와 맺은 협정은 오늘 부로 파기에요!”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면서 소리를 치는 지영이었다.

그러자 돌연 유리가 진지한 표정을 짓더니 지영에게 다가온다. 그리고는 양손을 뻗어 지영의 어깨에 손을 얹어 놓는다.

“정말 파기하겠다는 거야?”

“진심이에요!”

눈을 마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영은 흔들리지 않았다. 자신만의 판타지를 지키기 위해 암중모사인 유리와 홀로 맞서는 지영이었다.

굳은 결의가 담긴 지영의 목소리에 유리가 강한 기세를 실어 지영에게 말한다.

“지영아!”

“말하세요.”

“너와 창현이는 남매야! 그리고 남매 사이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어!”

지영이 창현에게 어떠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차린 유리였다. 팬으로써 자신의 스타를 빼앗기기 싫었겠지. 게다가 그 스타가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오빠가 되었다면 더욱 그러한 감정이 강해졌을 것임이 분명했다.

유리는 그 부분을 자극하지 않고 잘 파고들었다고 생각을 했는데 그것은 자신의 실수인 듯하였다.

그녀의 말에 지영이 고개를 저으면서 외쳤다.

“난 오빠를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아요.”

자신의 마음은 정말 순수한 것이었다.

슈퍼 스타인 오빠를 좀 더 우상화 시킨 것이다! 생각해보라! 여태까지 초절정의 인기를 얻은 톱스타 중에서 결혼한 사람이 있는가 말이다! 그것은 바로 그 톱스타가 자신을 좋아해주는 팬들을 위해서 결혼을 한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뭔가 이야기가 이상하게 흘러갔지만 지영의 생각은 그러했다. 그랬기에 자신이 직접 나섰던 것이다.

“난 이해해, 지영아.”

그런 지영의 마음을 유리는 이해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창현이를 평생 총각으로 놔두겠다고?”

“평생은 아니에요.”

그 정도로 지영은 이기적이 아니었다. 다만… 서른 살 정도까지는 창현이 솔로이길 바랄 뿐이었다.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 뒷내용이 어떠한 것인지 알고 있는 유리였다.

그녀는 다시 지영에게 날카로운 말을 쏟아냈다.

“그래서 창현이를 솔로로 놔두겠다고? 넌 그걸 생각해봤니? 너는 창현이를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창현이에게 있어 그것이 불행이 될지도 모른다는 걸?”

콰과광!

유리의 말에 지영의 몸이 세차게 흔들렸다. 그녀의 말처럼 자신의 판단이 정말 불행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아버린 것이다.

얼굴이 사색이 된 지영이 말을 더듬었다.

“그, 그건…….”

대답을 할 수 있을 리 없다. 자신 또한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할 말을 잃은 지영의 모습에 유리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그녀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어주며 이야기를 한다.

“나도 네 마음을 이해해. 하지만 창현이의 행복이 최우선 아니겠어?”

“…그건 맞는 말이에요.”

지영도 창현이 행복하길 원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흘러간다고 생각하며 유리가 말한다.

“이렇게 하자. 창현이한테 네가 물어보는 거야. 그리고 내가 말한 대로 창현이가 대답하면 지영이 너는 방해를 하지 않는 거야. 애초에 나는 너의 마음을 모두 이해하고 있어서 너도 만족할 만한 결과를 낳을 수 있어. 어때?”

“…….”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침묵하는 지영이었다.

그 모습에 유리가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지영아! 네가 수락하지 않으면 나도 어쩔 수 없어. 내가 여태까지 너에게 거스르지 않으려고 좋은 방법들을 얼마나 많이 포기했는데! 계속 날 싫어한다면 나도 전쟁을 치루는 수밖에 없어.”

“그, 그건…….”

유리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드는 지영이었다.

조용히 하는 것이 이 정도인데 제대로 한다면 도대체 얼마나 강할 것이란 말인가?

아마 상상도 하기 힘든 엄청난 위력을 발휘할 것임이 분명했다.

지영은 결국 유리의 말에 다급함을 느낀 채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아, 알겠어요! 언니 말대로 할게요! 대신 오빠가 그걸 바라지 않는다면 저는 최선을 다해서 언니를 몰아낼 거예요.”

“좋아, 내 판단이 틀리다면 인정하도록 할게.”

유리가 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자 지영이 곧장 화장실을 나섰다.

“가요! 가서 바로 물어보겠어요.”

“바라던 바야.”

그러면서 유리도 지영의 뒤를 따랐다.

지영의 뒤통수를 바라보는 유리의 입가에는 진한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좀 늦었네.”

지영이 앞에서 오고, 유리가 뒤에서 오는 걸 본 창현이 입을 열었다.

이미 상 위에는 세팅이 다 끝나 있었고, 창현은 불판 위에 고기를 올려놓고 굽는 중이었다.

겉옷을 한쪽에 걸어놓은 상황이었기에 고기 냄새가 심하게 배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창현은 안심하고 고기를 굽고 있었다.

“어서 앉아요. 조금 있으면 고기 다 익으니까요.”

“응.”

유리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창현의 말에 대답하면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창현은 아직도 앉지 않은 지영에게 시선을 주면서 말했다.

“지영이도 앉아.”

“알았어.”

대답과 함께 지영도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구워지는 갈비를 바라보고 있다.

그러한 지영의 모습에 창현은 그녀가 배고파서 그러는 것이라고 판단하고는 갈비가 다 구워지자마자 지영에게 건네주기 시작한다. 지영은 그런 창현의 호의를 마다하지 않은 채 갈비를 받아먹으면서 본격적으로 식사가 이루어졌다.

아무래도 먹는 와중에 이야기를 하는 것은 좀 그런 것 같았기에 지영은 식사가 다 끝나갈 무렵에 이야기를 하기로 하였다. 유리 또한 그런 지영의 기색을 눈치 채고는 티를 내지 않은 채 창현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서 갈비를 먹기 시작했다.

그렇게 세 명이서 갈비 5인분을 먹은 뒤 김치찌개에 밥 한 공기까지 먹은 세 사람은 배가 든든해지는 걸 느꼈다.

식사가 모두 끝났다고 생각한 지영은 주문한 콜라를 한 잔 마시면서 창현에게 입을 열기 시작했다.

“오빠한테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뭔데? 말해봐.”

심각한 지영에 비해 창현은 별달리 심각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긴장감이 풀어질 법도 하였지만 지영은 여전히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는 유리의 시선을 느끼면서 창현에게 시선을 고정하고는 물었다.

“오빠는 이성 친구를 사귀는 것에 어떻게 생각해?”

갑작스러운 지영의 질문에 창현이 고개를 갸웃하면서 그녀에게 물었다.

“이성 친구? 뭐, 그냥 알고 지내는 여자 친구가 아니라 애인 같은 의미로서의 이성 친구를 말하는 거야?”

창현이 자신의 질문을 제대로 알아들은 듯 싶자 지영이 고개를 끄덕인다.

“응. 연애 상대로 생각하는 이성 친구 말이야.”

“흐음! 이성 친구라… 아직 특별히 생각해본 적은 없는데 말이지.”

“정말? 그거 정말이지, 오빠?”

자신이 원하던 답을 들었기에 지영이 환한 표정을 지으며 창현을 재촉하기 시작한다.

영문을 모르는 창현으로서는 그러한 지영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사실은 사실이었기에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별로 생각해본 적은 없어.”

“그래? 흐응…….”

환희에 가까운 표정을 지은 지영이 유리를 바라본다. 자신의 승리라는 의미를 한껏 담아내면서 말이다.

유리는 설마 창현이 이러한 답을 하리라고 생각도 못했기에 다소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설마 그가 이런 말을 할 줄이야.

‘내 계산이 어긋난 건가?’

자신이 판단을 잘못한 게 아닌가 싶어 자책하는 유리였다.

하지만 거기에는 한 가지 반전이 숨어 있었다. 끝났다고 생각하던 창현의 말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지영이 환호하고 유리가 심각한 표정을 지을 때, 창현의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뭐… 사귀면 좋은 거겠지? 좋은 인연이 나타난다면야 뭐, 한 번 교제해보는 것도 좋겠지.”

“…뭐, 뭐라고? 오빠! 지금 그 말 진심이야?”

승리의 웃음을 짓고 있던 지영이 화들짝 놀라며 창현에게 다시 묻는다. 그녀의 얼굴에는 믿기 힘들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게 무슨 말이란 말인가! 다 이겼다고 생각하던 차에 이런 반전이라니? 전혀 예상하지 못하던 창현의 반응이었기에 지영은 자신의 패배를 믿을 수 없었다.

그에 비해 당혹한 표정을 짓고 있던 유리는 자신의 페이스를 되찾은 상황이었다. 그녀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지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황하던 지영은 유리의 입가에 맺힌 미소를 볼 수 있었다.

그러자 그녀의 입에서 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크윽…….”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물어보는 거야, 지영아? 왜, 아는 예쁜 언니라도 있는 거야?”

“응? 아, 아니.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힘차게 부정하는 지영이었다.

그 모습에 창현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궁금하면 궁금한 거지, 무슨 반응을 그렇게 격하게 하는 거야. 나한테 죄 지은 거라도 있어? 남매지간에 그런 것도 물어볼 수 있는 거지. 하지만 나는 눈이 좀 높은 편이니까 소개를 시켜주려면 잘 해줘야 해. 알겠지?”

“으응.”

창현의 수습으로 인해 지영은 더 추궁당하지 않고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그녀의 기분이 나아질 리가 없었다. 그랬기에 그녀는 우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이성 친구에 관련된 질문 이후 더 이상의 질문이 없었기에 창현은 시간을 보다가 유리에게 말했다.

“이제 슬슬 일어나도록 할까요?”

“응. 이대로 돌아갈 셈이야?”

지영이와의 승부에서도 이겼겠다, 이제 거칠 것이 없어진 유리였다. 그래서 망설임 없이 창현의 의도를 물어볼 수 있었다.

유리의 말에 창현은 힐끗 지영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지영이 보컬 트레이닝을 시켜줘야 할 것 같아서요. 녹음실로 돌아가야죠.”

보컬 트레이닝이라는 말에 유리는 따라가도 되냐고 물어보려다가 그만두었다. 너무 따라붙으려고 하면 자칫 쌓아놓은 이미지가 한순간 허물어질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함께 가지 못한다는 것이 아쉽기는 했지만 물러날 때는 확실하게 물러나는 것이 좋았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네. 나는 그럼 숙소로 돌아가도록 할게.”

“네, 알겠어요. 그럼 일어나도록 하죠.”

유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창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이어 유리가 자리에서 일어났고, 지영도 자리에서 일어난 뒤 가방을 챙겼다.

이곳에서 창현의 녹음실이나 소녀시대 숙소나 얼마 걸리지 않는 위치였다. 게다가 밝은 대낮이었기에 창현은 유리를 먼저 보내주었다.

“그럼 들어가세요.”

“응, 난 가볼게. 점심 고마웠어.”

“뭘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는 창현이었지만 고마움을 표하는 유리의 모습이 보기 좋았기에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그렇게 창현에게 말을 한 유리가 이번에는 지영에게 시선을 주더니 말했다.

“지영아, 그러면 이제 방해하면 안 되는 거다?”

그러면서 유리가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지영의 귓가에 아주 낮은 목소리로 작게 속삭였다.

“잘 부탁해, 지영 시누.”

귀가 무척 좋은 걸 알고 있었기에 지영도 간신히 들릴 만큼 작은 목소리로 말을 하는 유리였다.

‘시누’ 라는 단어에 지영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남편의 누나나 여동생을 일컫는 시누이의 준말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지영에게서 떨어진 유리는 상큼한 미소를 지어보이더니 손을 흔들더니 그대로 숙소로 향한다.

그 모습을 보며 웃음을 짓고 있던 창현은 지영에게 시선을 주며 물었다.

“지영아, 그런데 유리 누나가 방해하면 안 된다는 게 무슨…….”

지영에게 말을 하던 창현이 순간 멈칫하였다. 지영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던 것이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그리고 지영은 무어라 중얼중얼거리고 있었다.

놀란 창현이 다가가자 그 내용이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 혼자서는 안 돼… 그렇다면 다른 사람을 끌어들여서 견제를 하게 해야 돼. 나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어…….”

“무슨 말이야?”

지영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창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다가 이내 유리에게 무슨 장난을 당했거니 판단을 내리면서 지영을 데리고 녹음실로 향했다.

자신을 중심으로 어떠한 공방이 이루어지고, 어떠한 조약이 맺어졌는지 모르는 채 말이다.

오늘 지영은 유리를 견제하기 위해 외부 인물을 영입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것이 어떠한 국면을 만들어낼지는 지켜볼 일이었다.


드라마가 방영되기 전인 이틀 전인 4월 29일에 현이 처음으로 국내 가수들에게 작곡 작사, 녹음을 맡은 드라마 ost 모음집이 공개 되었다.

이미 일본에서 엄청난 활약을 보이면서 한껏 이름을 더 끌어올린 현이 내는 앨범이었기에 그 관심도는 대단했다. 연예부 기자들이 이미 수시로 광고를 했을 뿐만 아니라, 이번 드라마 ost에서 두 곡이나 참가를 하게 된 SM엔터테인먼트도 언론 플레이에 적극적인 힘을 보탰기에 나타난 현상이었다.

총 여섯 개의 곡으로 이루어진 드라마 ost는 발매 되자마자 온라인 음원차트 올킬을 이룩하는데 성공한다. 현이 직접 부른 노래는 당연히 1위로 등극하였고, 그 뒤를 이어 다른 수록곡들도 차곡차곡 랭킹을 차지하였다. 여기에서 소녀시대 멤버 중 드라마 ost에 참여한 제시카 (Feat. 태연) 곡은 3위를 차지하였고, 제시카 (Feat. 티파니) 곡은 5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리고 드라마 ost 간에 치열한 경쟁을 보이면서 순위권 다툼을 하기 시작한다.

이미 음악으로 수많은 매니아들은 물론, 대중들에게도 절대적인 인지도를 얻고 있는 현이었기에 각각의 수록곡들도 후한 평가가 주를 잇고 있었다. 특히 SM엔터테인먼트와 협력 관계라 하여 무려 두 곡이나 얻어냈다면서 상당한 비판을 받았던 두 곡은 다른 곡들보다 한 층 냉정한 평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호평을 얻으면서 가창력에 관련해서 대중들의 인정을 받는 계기가 된다. 어느 정도 인정을 받고 있었지만 이번 노래를 통해 완벽한 굳히기를 달성했던 것이다.

드라마 ost 선공개로 인해 사람들의 관심은 더욱 더 뜨거워지기 시작하였고, 삼 일째 되는 날, 두 곡이 각각 3위와 4위 자리를 굳힘으로써 그 이름을 더욱 널리 알려나간다.

창현은 드라마 ost가 상위권에 랭크된 것을 보고는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잘 돼서 좋은데?”

자신이 드라마를 한다고 하여 팬들이 상당한 동요를 보인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드라마 ost에까지 전염되지 않은 듯하여 상당히 흐뭇한 창현이었다. 드라마 ost로 인해 오히려 드라마에 대한 관심도를 끌어올리는데 성공한 셈이니 말이다.

석규에게서도 이 정도면 대 성공이라는 이야기를 들었고, 앞으로 드라마가 방영되면 더욱 더 탄력을 받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애초에 창현은 성공 여부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최소한 실패 소리는 듣지 않길 원했다. 이번 시도는 자신 또한 처음 하는 것이었기에 일말의 불안감이 존재했던 차였다. 그런데 실패를 하지 않고 성공을 거두자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슬럼프를 극복했다고 판단하고 처음으로 한 작업이었는데 이 정도 성과라니, 자신의 슬럼프가 완전히 걷힌 것으로 판단되었다.

“이제 드라마만 어느 정도로 성공했으면 좋겠는데.”

드라마 ost로는 소기의 성과를 이루었으니 이제 남은 것은 드라마뿐이었다.

우선 드라마에 대한 기대감 고조를 이루는데 성공하였으니 1화의 시청률은 보장된 셈이었다. 현의 드라마 진출에 대해서 불안함을 표현한 팬들도 일단 현의 연기력이 어떤지 확인하고자 1화는 시청할 것임이 분명했으니 말이다. 게다가 언론 플레이도 상당하게 해놓았으니 1화의 시청률은 보장 받은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다만 그 이후, 다음주에 방영될 2화부터가 본격적인 시청률이라 볼 수 있었다.

그랬기에 1화가 중요하였다. 드라마 1화에서 호평을 얻는다면 1화의 시청률을 그대로 2화로 끌고 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성공할 수 있을까?”

창현은 오늘 밤, 처음으로 방영될 드라마를 떠올리면서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두근두근 가슴이 떨리는 느낌. 여태까지 이런 느낌을 받지 않은 적은 없었지만 그것들은 모두 기분 좋은 두근거림이었다. 어느 정도의 성공을 보장 받았기에 기분 좋은 두근거림이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지금의 느낌은 마치, 자신이 첫 앨범을 발매할 때, 그리고 미국 진출을 하여 첫 싱글 앨범을 발매할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전혀 성공이 보장되지 않은 채 미지의 길에 발을 내놓는 기분이랄까.

그랬기에 창현의 가슴은 거세게 요동치고 있었다.

“시간을 보내는 것도 고역이군. 잘 되어야 할 텐데.”

두근거리는 가슴을 애써 억누르며 창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는 시간을 보내기 위해 컴퓨터 앞에 앉았다. 오늘 창현의 마음이 싱숭생숭할 것이란 걸 알아차린 석규는 모든 일정을 빼두었기에 창현은 집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상황이었다.

컴퓨터 앞에 앉은 창현은 곧장 게임을 한다. 시간을 보내려면 게임이 최고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게임으로 시간을 보내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렇게 컴퓨터에 앉아 게임도 하고 드라마도 보면서 시간을 보낸 창현은 일곱 시가 되자, 저녁을 해결하고는 소파에 앉아 TV를 틀었다. 저녁까지 먹었지만 시간은 7시 30분이었다.

무심코 시계를 확인하던 창현은 무언가 깨달은 듯 입을 열었다.

“아, 그러고 보니 드라마가 10시쯤에 하니까 잠을 11시쯤에 자야겠네?”

평소 수면을 10시쯤에 취하는 창현으로서는 앞으로 계획을 변경해야 함을 깨달았다. 그래보았자 드라마가 방영하는 수요일과 목요일만 변경해야 하는 것이지만 말이다. 그래도 제법 중요한 일이었기에 창현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8시부터 하는 뉴스부터 시작하여 9시도 뉴스를 보면서 시간을 보낸 창현은 9시 30분쯤이 되자 양치를 하기 시작한다. 드라마가 끝나면 곧장 수면에 들기 위함이었다.

양치를 하고 가볍게 씻고 나오니 시간은 10시가 다 되어 있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다잡고 TV 앞에 앉으니 어느덧 광고가 나오고 있었다.

몇 차례 광고가 더 나온 후, 화면이 뒤바뀌면서 마침내 드라마 1화가 방영되기 시작한다.


드라마의 시작은 순조로웠다.

한영 그룹의 회장이 돌연 은퇴를 선언하고, 손자에게 회장의 자리를 물려주는 것. 그리고 임원들이 웅성거리는 것과, 몇몇 욕심이 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앞으로 큰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시청자들에게 은연중 알려주고 있었다.

프롤로그 격인 회의 장면이 끝을 나자 밴드부 기타와 보컬을 맡고 있는 창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일렉트로닉 기타를 현란하게 연주를 하면서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을 보면서 창현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으, 왠지 오글오글한데?”

자신이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자신이 보니 뭐랄까, 손발이 오글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래도 정식 무대 위에서 부르는 것이 아닌 드라마에서 부르는 것이어서 그런가 보다.

그러나 제3자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늘 무대 위에서 얌전히 노래를 부르는 창현의 모습이 아닌, 기타를 연주하면서 파워풀한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게 부르던 노래는 밴드부에 들어선 불청객으로 인해 끝이 났고, 본격적으로 연기에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누군가가 자신을 찾는다는 말에 밖으로 나가는 모습. 그리고 교문에서 한영 그룹의 비서실장 역할을 맡은 승우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을 보면서 창현은 자신의 연기에 대해 평가를 하기 시작했다.

“좀 부족한 면이 많네.”

촬영을 한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창현은 자신의 연기에서 발생하는 약점 같은 것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비록 길지는 않지만 촬영장에서 직접 연기를 함으로써 그의 실력은 처음에 비해 무척 많이 는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첫 화에서 보여주는 연기에 아쉬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묘하게 발음이나 행동 같은 것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이때는 자신에게 맞는 것이 어떤 건지 잘 몰라서 구체적으로 형식을 갖춰놓은 것이 아니었기에 일정한 틀이 없었던 것이다.

“그것들이야 차근차근 고치면 되는 거니까.”

자신의 연기를 냉철하게 확인하며 고쳐야 할 점들을 보는 창현이었다.

뒤이어 학교에서 근영과 충돌하는 장면이 나왔고, 소소하게 부딪치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한영 그룹 내 이사진들의 모습과 음모를 꾸미는 모습들이 눈에 들어왔고, 마지막으로 극중에서 창현의 약혼녀 역할을 맡은 윤아가 등장하면서 1화가 끝났다.

드라마가 모두 끝나자 제법 숨 가쁘게 흘러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처음부터 느린 템포로 시청자들이 질리지 않게끔 하면서 빠르게 넘어가고,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시켜주는 듯하였기에 창현은 어느 정도 만족할 수 있었다.

“약간 오글거리는 점이 있지만 그때는 내가 부족했으니까. 모든 것은 평가에 따라 달라지겠지.”

자신이 보기에는 합격선이었지만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잘 모르겠다. 사람의 시각은 제각각이며 평가가 무척 혹독한 사람들도 있을 테니까. 자신이 재미있다고 하여 다른 사람에게까지 재미있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그래도 자신이 만족하였기에 결과가 좋을 것이라 믿는 창현이었다.

그렇게 드라마를 시청한 창현은 드라마가 끝나고, 2화에 대한 간략한 예고편이 나오는 것을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비틀비틀 걸음을 옮기면서 쏟아지는 수면 욕구를 이겨내지 못하고 침대에 쓰러져 잠이 든다.

내일 좋은 결과가 나올 것이라는 한 줄기 기대감을 품은 채 말이다.


한편, 드라마가 방영될 무렵, 소녀시대 또한 숙소에 있는 TV 앞에 옹기종기 모여서 드라마를 시청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윤아가 출연한 드라마를 자신들이 어찌 보지 않을 수 있겠냐는 거창한 대의명분 하에 그녀들은 드라마가 시작하기 전 TV 앞에 모이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들이 이렇게 TV 앞에 모일 수 있었던 것은 로드 매니저의 분발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지방 행사에 다녀오게 되면서 본래 도착 예정 시간은 10시 30분이었는데 윤아의 드라마를 DMB가 아닌, TV로 보고 싶다는 소녀들의 강력한 주장 하에 로드 매니저는 시속 150km를 밟아가면서 고속도로를 맹렬히 달려야 했던 것이다. 그 결과 10시 30분 도착 예정이던 것을 9시 50분으로 당기는데 성공하였다.

옷을 갈아입고 드라마를 시청할 법도 하지만 소녀들은 한 치도 놓칠 세랴 소파에 앉아 드라마가 시작되길 기다리고 있었다.

소파는 소녀시대 내 Big 3인 수연과 효연, 수영이 차지하고 있었고, 그 아래에는 다른 멤버들이 오밀조밀 자리하여 좁은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그 사이 드라마가 시작되려 하자, 눈을 빛내며 주시하기 시작한다.

“시작한다!”

들뜬 수영의 외침과 함께 드라마가 시작되었다.

첫 장면은 창현이 보았던 것처럼 회의를 하는 모습이었다. 처음부터 창현이 나올 것이라 기대하던 소녀들이 다소 실망한 표정을 지으려고 할 때, 화면이 전환되었고, 그곳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일렉트로닉 기타를 현란하게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는 창현의 모습이었다.

“와아!”

기타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는 창현의 모습에 절로 탄성을 흘리는 소녀들이었다.

감탄을 하던 주현이 옆에 앉아있는 윤아를 보며 물었다.

“언니! 창현이가 저거 정말로 연주하는 거예요?”

“나는 그때 그 자리에 없었지만 물어보니까 정말로 연주를 했다고 하더라고. 그것 때문에 내가 늦게 도착하게 된 걸 얼마나 억울해 했는데! 으으! 그래서 매니저 오빠를 열심히 괴롭혔지.”

윤아의 말에 소녀들은 첫 촬영 이후 윤아가 왜 매니저를 괴롭혔는지 알아차리고는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주현도 윤아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아차리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윤아에게 사과를 하였다.

“아, 그래서 그때 그랬던 거구나. 그때 제가 언니한테 뭐라 그랬는데 그런 사정이 있는지도 모르고… 미안해요, 언니.”

“뭘! 그때 많이 괴롭힘 당했으니 다시는 그러지 않겠지. 후후!”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쿨하게 사과를 받아주는 윤아였다.

그 사이 드라마는 계속 되었다.

연주가 도중에 끊어지며 교문에서 비서실장과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창현의 모습에 소녀들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웬만한 연기자와 비교해도 전혀 부족하지 않은 창현의 연기력이 그녀들의 감탄을 절로 자아내게 한 것이다.

“와… 저 정도면 연기를 해도 손색이 없겠는데? 연기 정말 잘한다.”

“그러게요. 윤아 언니가 연기를 잘한다고 할 때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잘 가질 않았는데. 저 정도면 정말 괜찮네요. 와아…….”

창현의 연기력에 연신 감탄을 표현하는 소녀들이었다.

그러면서 드라마에 빠져드는 모습을 보이는 그녀들이었다.

아무래도 윤아도 출연하는 드라마였기에 드라마가 전체적으로 재미있는지도 개인적인 판단을 내려야 했기에 그렇다. 드라마가 잘될수록 소녀시대의 인지도가 높아질 확률은 높을 것이고, 드라마 ost에도 연관이 된 만큼 드라마가 정말 재미있는지 재미가 없는지 냉정하게 판단할 필요성이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드라마 내용보다는 창현의 활약이 담긴 장면을 보는 것이 더 중요했지만 말이다. 연기력도 받쳐주고, 평소 사근사근한 모습과 달리 까칠한 그의 모습은 또 다른 매력으로 다가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렇게 드라마 내용이 순식간이 지나가기 시작하고, 마지막에 윤아가 차에서 내리며 학교를 바라보는 장면에서 1화가 끝난다.

드라마가 그렇게 끝나자 정신없이 몰입해서 보던 소녀들이 길게 한숨을 내쉰다.

“후우우!”

“숨도 안 쉬고 봤네.”

몰입해서 드라마에 열중하던 소녀들은 숨을 길게 내쉬고는 예고편을 보기 시작한다. 윤아가 등장하여 어떤 식으로 창현과 이야기를 나눌지 궁금해서 보는데, 이 나쁜 연출진들이 그 장면을 보여주지 않고 다른 장면들만 보여준다.

그렇게 예고편마저도 끝이 나자, 윤아가 소녀들을 둘러보면서 묻는다.

“드라마 어땠어요, 언니들? 주현아?”

“음, 1화 밖에 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우선 1화 자체는 재미있었어. 2화가 어떻게 될지 궁금하기도 하고.”

“맞아, 특히 창현이가 처음에 기타를 연주하면서 노래를 부를 줄 몰랐다. 저거 완전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는 거던데? 게다가 밴드부 내용도 언급되는 걸 보면 라이브 장면이 더 나올 것 같고 말이야. 안 그래, 윤아야?”

날카로운 질문에 윤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한다.

“마, 맞아요. 라이브 하는 장면이 몇 개 더 있어요.”

“저게 바로 노림수라는 거야. 저 장면을 보기 위해서라도 창현이 팬들은 드라마를 볼 수밖에 없을 걸? 게다가 드라마 자체도 재미있고 말이야.”

“정말 재미있었어요, 언니. 오늘이 왜 목요일인지 원망스러울 지경인 걸요?”

소녀들의 평가는 대부분이 호평이었다. 아직 1화밖에 되지 않아서 모르지만 모든 소녀들이 1화를 재미있게 보았던 것이다.

윤아도 드라마가 재미있을 것이란 생각은 했지만 자신의 예상을 뛰어넘는 재미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것이 자신만 느낀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멤버들의 평가를 보아하니 자신만 재미있게 본 게 아닌 듯하였다.

전체적으로 합격점인 듯하였기에 윤아는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잘하면 연장할 수도 있겠다!’

드라마를 연장하게 되면 촬영장에서 창현과 함께 하는 시간이 늘어날 수 있기에 기분이 절로 좋아지는 윤아였다. 보통 같으면 드라마로 인해 치솟게 될 자신의 인지도에 대해 생각할 텐데 말이다.

“그런데 2화는 어떻게 진행 되는 거야? 궁금해서 못 참겠다! 좀 가르쳐줘, 윤아야!”

1화가 제법 절묘하게 끝나서 그런 걸까? 다음 내용이 궁금했는지 윤아에게 다가가 살짝 애교 섞인 목소리로 묻는 수연이었다.

좀처럼 보기 힘든 수연의 모습에 윤아는 순간 대답을 해주려다가 멈칫했다. 그리고는 장난기 넘치는 표정을 지으면서 대답했다.

“아쉽지만 대답해드릴 수 없어요! 그러면 다음 주에 하는 걸 보지 않을 수도 있잖아요? 그러니 다음 주에 하는 걸 봐주세요.”

“궁금해서 그러는데 말해주면 안 돼?”

“안 돼요! 그 장면을 찍기 위해 제가 얼마나…….”

거부하던 윤아는 순간 그때 그 순간이 떠올라서 멈칫하였다.

그때 그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 얼마나 부끄러움을 무릅썼던가. 대본에는 살짝 훑어보면서 말을 하는 것이었는데 창현은 즉석 애드리브로 자신의 턱을 치켜들었다. 그로 인해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깝게 지냈었는데, 윤아로서는 너무나 부끄러우면서 한편으로는 황홀한 순간이었다.

수연의 물음으로 그때의 그 기억이 떠올라 약간 홍조 어린 얼굴로 변하는 윤아였다.

그러나 그것이 윤아의 실책이었다.

다음 내용을 물어보던 수연은 윤아가 갑자기 멍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야릇하면서 황홀한 표정을 짓자 무언가 있다고 느낀 것이다.

수연은 그런 윤아에게 넘겨짚듯 물었다.

“다음 장면이 무척 기분 좋았던 장면인가 봐? 그런 표정을 짓는 걸 보면.”

“네? 제가 그, 그랬나요?”

수연의 물음에 현실로 돌아온 윤아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자신을 바라보는 수연의 모습에 움찔하면서 뒤로 한 걸음 물러선다.

그러한 윤아의 모습에 수연은 무언가 있다는 것을 판단하였다. 그리고는 윤아에게 기회를 주면서 물었다.

“순순히 말하는 게 좋을 텐데?”

“어, 없어요. 그냥 드라마 촬영하던 순간을 떠올려서 그런 거예요.”

말하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그녀의 뇌리에 스치고 있었다. 그랬기에 그녀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발뺌뿐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그녀의 실수였다. 이미 소녀시대는 한 번 레이드 당한 뒤 리젠 되어서 완벽하게 장악한 수연이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웬만한 건수로 타협이 되지 않는 폭군 중 폭군이었다.

윤아가 대답하려는 기색을 보이지 않자 수연이 입을 열었다.

“효연아, 가서 윤아를 제압하고 무슨 이야기인지 알아내.”

“Yes, your majesty.”

어디 애니메이션에서 나오던 대사를 읊은 효연이 번개같이 자리에 일어나고는 윤아에게 달려든다.

자신을 향해 쇄도하는 효연의 모습에 윤아가 격렬하게 반항하기 시작한다.

“어, 언니!”

방으로 도주하기 위해 효연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벗어나려 하는 윤아의 모습에 수연이 눈짓한다.

“주현아, 너도 궁금하지? 가서 효연이를 도와주렴.”

“네, 언니.”

주현 또한 궁금하긴 마찬가지였기에 수연의 말에 자리에서 일어서고는 윤아를 제압하는데 일조한다.

한 명을 상대로 우위를 점할 수 있었지만 두 명을 상대로 하는 것은 윤아로서도 벅찼다.

결국 효연과 주현에 의해 양쪽 팔을 결박당한 채 윤아가 자리에 주저앉는다.

그 모습을 보면서 수연이 입가에 미소를 짓고는 말한다.

“말하지 않아도 돼. 지금은 버텨봐. 하지만 결국 말하게 될 거야.”

섬뜩하게 느껴지는 수연의 모습에 윤아가 겁에 질려 바동거리며 소리를 낸다.

“히익!”

폭군 수연 앞에 윤아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제57장 겹경사, 미션, 대항마를 찾아라!




폭풍!

드라마가 첫 방영 된 뒤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일어난 거대한 바람이었다.

[소년왕]이라는, 유치한 제목의 드라마는 거대한 바람을 일으키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다 어제 방영된 1화 때문이었다.

첫 방영은 그야 말로 성공이라는 말로 부족하였다. 대박, 대박이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드라마는 엄청난 호응을 얻어내는데 성공하였다.

확고한 자신만의 스타일을 구축하면서 여러 장르를 가리지 않고 두각을 보이며 음반 시장을 제패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현은 미국과 유럽, 일본에서 활동을 하며 일약 대한민국의 이슈 아이콘으로 떠오른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가 드라마에 출연한다는 것은 팬들의 입장에서 참으로 뜻밖의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앞으로 일본 진출을 하고, 중국과 동남아시아 투어를 하면서 확고하게 가수로서 입지를 다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이 드라마에 출연한다는 사실은 많은 사람들의 우려를 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사람들은 그가 왜 드라마에 출연하는지 그 내막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미 음반 시장에서 절대적인 판매량을 자랑하는 그가 금전적으로 부족할 리가 없으며, CF 또한 각 광고사들이 촬영하지 못해 안달이 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러한 사정을 알고 있었기에 사람들은 그가 새로운 분야에 도전한다는 것으로 판단하였다. 그리고 그 전망은 반반이었다. 어디서나 특출 난 재능을 보이는 현이었기에 드라마에서도 성공할 것이라는 전망과, 드라마로 인해 높아진 기대감이 자칫 실망으로 이어져 실패를 할지도 모른다는 의견이 팽팽하게 대립되고 있던 상황이었던 것이다.

너무 큰 기대감이 자칫 현을 무너뜨리는 현상을 자초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기대감을 더욱 더 키워나가는 일이 발생하였다.

바로 성공적인 일본 활동을 비롯하여 드라마 ost가 연이어 대박을 터뜨리면서 사람들의 기대심리를 한껏 키워놓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다가 한 번 미끄러지면 걷잡을 수 없는 추락을 겪을 수도 있었다. 기대감을 키워놓은 것이 마냥 좋은 것이 아닌, 일종의 양날의 검이었던 셈이다.

그런 기대감 속에서 드라마 1화가 방영되었다. 그리고 드라마 1화가 끝난 시점에, 사람들은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이 어느덧 시간을 확인하는 것조차 잊은 채 드라마에 빠져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어느덧 2화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드라마가 실패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깨끗이 사라진 상황이었다. 그들의 머릿속에서는 드라마가 대박이라는 생각만 감돌고 있었다.

처음 회사 임원들의 회의는 자칫 사람들에게 지루함을 심어줄 수 있는 부분이었다. 드라마에 몰입해서 본다면 흥미로운 시작이 아닐 수 없지만 겉핥기로 보는 사람으로서는 지루할 수밖에 없는 전개였던 것이다. 하지만 김지환 감독은 거기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였다. 지루할 수 있는 회의 내용을 짧고 굵게 압축한 뒤 곧장 현이 나오는 부분으로 장면 전환을 한 것이다.

그리고 현란하게 일렉트로닉 기타를 연주하면서 라이브를 하는 현의 모습에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빠져들고야 말았다. 현이 기타를 연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너무나 현란하고 능숙한 연주에 사람들은 그가 핸드 싱크를 한 게 아닐까 의심을 하였지만 현란하게 움직이는 손을 보면서 핸드 싱크 의혹을 제기하기에 뭐했다.

그 후에 펼쳐지는 연기.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한지훈이라는 캐릭터를 표현하는 현의 모습에 사람들은 연기력 논란에 관련해서는 언급할 여지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까칠하고 나쁜 남자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연기가 그야 말로 완벽했던 것이다.

드라마 1화가 끝날 때까지 창현이 펼친 연기는 완벽하였다.

첫 화가 끝난 다음 날, 석규는 이른 아침에 창현을 불러냈다.

다소 늦게 잔 탓에 피로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난 창현은 아침도 먹을 겨를도 없이 곧장 AA엔터테인먼트로 향해야 했다.

그리고 비서의 제지도 없이 곧장 사장실 안으로 들어선 창현이 석규에게 인사를 하였다.

“부르셨어요, 아버지?”

“어서 와라. 이 복덩이야. 으하하!”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창현을 반기는 석규였다.

지나칠 정도로 자신을 반기는 석규의 모습에 창현이 멈칫하더니 물었다.

“복덩이? 아버지가 그렇게 말씀하실 정도면 드라마 반응이 좋았나보네요?”

미지근한 창현의 반응에 석규는 멈칫하더니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뭐냐, 그 싱거운 반응은? 설마 인터넷에서 아무것도 확인 하지 않은 거냐?”

누구 때문에 아무것도 확인을 하지 못했는데,

창현은 표정을 찡그리면서 석규에게 투정을 부렸다.

“아버지가 아침 일찍 부르셨잖아요. 급한 일인 줄 알고 아침도 못 먹고 인터넷도 확인하지 않고 왔는데 잘 됐는지 어떻게 알겠어요. 하지만 아버지 반응을 보니 나쁘지는 않은가 보네요. 후후후!”

보통 성공이 아니고서는 석규가 이런 반응을 보일 리 없지 않은가?

이 정도로 반응할 정도면 큰 성공이라는 뜻이리라.

웃음을 짓는 창현의 모습에 석규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주 대박이다. 동시간대 드라마 중에서 시청률 1위를 했을 뿐만 아니라 시청률이 얼마나 나온 지 아느냐?”

“얼마나요?”

솔직히 다른 건 다 그렇다 쳐도 시청률이 얼마나 나온 지 궁금한 창현이었다. 드라마 1화가 호평을 얻었다는 것은 2화에서 그보다 더 높게 나올 수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걸 뜻했기에 그렇다.

창현의 물음에 미소를 짓던 석규가 말했다.

“무려 39.2%나 나왔다. 39.2% 그뿐이냐? 제휴 콘텐츠 부분에서도 그야 말로 폭주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대박을 터뜨렸어. 드라마 때문에 이미 온라인은 발칵 뒤집힌 상황이다.”

석규의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드라마를 뒤늦게 시청한 사람들은 생각보다 훨씬 재미있는 것을 파악하고는 곧장 제휴 콘텐츠를 다운 받아 드라마를 시청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게다가 인터넷에서는 초대박이 터져서 초창기 제기 되었던 연기력 논란에 관해서는 말끔히 해소된 상황이었다. 오히려 웬만한 연기자가 보일 법한 내공에 감탄을 금치 못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였다.

“다행이네요. 그 정도면 충분히 더 시청률을 높일 수도 있을 것 같고요.”

불안요소 중 하나로 꼽혔던 드라마의 성공이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벅차오르는 기쁨에 창현의 입 꼬리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 정도로 기뻤던 것이다.

“그렇고말고. 이 추세라면 더욱 높은 시청률도 노릴 수 있을 게다. 안 그래도 많이 들어오던 CF 제의가 이제는 폭주하는 수준으로 늘어난 것만 보아도 대단해 보이지 않느냐? 게다가 그 기타를 연주하는 부분이 특히 대박이 났다.”

석규의 말에 창현이 고개를 갸웃하면서 말했다.

“기타를 연주하는 부분에서요? 흐음! 전 거기서 대박이 나리라고 생각도 못했는데.”

“네가 피아노를 연주하는 장면은 보였지만 기타를 연주하는 장면은 처음으로 보인 게 아니더냐? 그런 만큼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지. 너무 현란하게 연주를 하다 보니 핸드 싱크가 아닐까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고 말이다.”

석규의 말처럼 창현의 기타 연주 장면에 대해서 핸드 싱크 의혹이 들어왔다. 전문가 못지않게 현란하게 연주를 하는 창현의 모습은 사람들에게 큰 믿음을 심어주지 못했던 것이다. 기타를 전문적으로 배운 사람들은 기타를 연주하는 그의 손놀림을 보고 진짜로 연주를 하는 것이라 알고 있었지만 일반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이 의혹에 드라마 제작 측은 발 빠르게 대응을 하여 기타 연주를 하는 장면을 동영상으로 제작하여 올렸다. 일체 가공을 거치지 않은 말 그대로 기타 연주 장면을 그대로 담아낸 것이었다. 그리고 그 동영상의 조회수가 십만을 넘기면서 사람들의 뜨거운 관심이 더욱 증폭되는 계기가 되었다.

피아노에 이어 기타까지 완벽하게 연주하는 창현의 모습은 사람들에게 감탄을 자아내기에 부족함이 없었던 것이다.

“좋게 해결 되었다니 다행이네요.”

“좋은 정도가 아니지. 연주를 하는 장면은 순간 시청률이 50%가 넘게 나올 정도였으니까. 기타 연주가 드라마 대박에 톡톡히 기여를 했을 게다. 정말 큰 대박을 터뜨렸어.”

드라마 대박이 터졌으니 그 대박을 앞으로 유지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이미 드라마를 사전 촬영을 한 상황이었고, 뒤로 갈수록 내용이 더욱 흥미로워질 테니 시청률이 급속도로 떨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실패를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창현은 안도를 하며 석규에게 조언을 구했다.

“드라마가 잘 되면 저야 좋은 거죠.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원래 드라마가 잘 되면 배우에게 상당한 거품이 생기기 마련이다. 너에게 그런 거품은 많이 생기지 않을 테지만 연기자로서 성공한 면모를 보였으니 그 거품도 충분히 네 것으로 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바탕으로 CF도 더 촬영하고 음반을 발매하여 인기로 전환 시킬 수 있다면 국내에서는 부동의 절대적 지지를 얻게 될 것이다. 마음껏 해외 활동을 할 수 있게 되는 거지.”

사실 이것은 드라마 촬영을 하지 않았어도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드라마를 하게 됨으로써 불안요소가 생겨나게 되었고, 그것이 좋은 방향으로 해결 되자, 더욱 단단한 지지기반을 다질 수 있게 된 것이다.

“다행이네요. 후우!”

“다행 정도가 아니지. 이로 인해 너는 완벽하게 전국민에게 너의 이미지를 각인시킬 수 있을 것이다.”

드라마를 시청하는 시청자 층은 무척 넓다.

게다가 [소년왕]은 남녀 전 연령층을 겨냥하고 촬영한 드라마다. 창현을 앞세워 알콩달콩한 로맨스는 남녀 젊은 층을 겨냥하였으며, 기업 내에서 벌어지는 암투와 속 시원한 전개는 직장인 층을 겨냥하였다. 그리고 종종 나오는 라이브 장면은 현의 팬들을 겨냥하였으니, 거의 모든 사람들이 드라마를 볼 수 있게 다양한 취향을 포함시킨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이미지를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석규가 창현에게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려 할 때였다.

♩♪♬

갑자기 벨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하였다. 창현의 핸드폰이 아닌 석규의 핸드폰에서 울려 퍼지는 벨소리였던 것이다.

“잠깐.”

말을 하던 석규가 잠시 멈칫한다. 그리고는 핸드폰을 꺼내들어 전화를 한 사람의 이름을 확인한다.

전화를 한 사람은 다름 아닌 지선이었다.

“이렇게 이른 아침에 왜?”

아침 10시가 되어가는 시간이니 이른 시간이 아니겠는가?

평소 지선이 이런 시간에 전화를 하는 경우가 별로 없었기에 석규가 전화를 받아든다.

“여보세요? 갑자기 무슨 일이야? 지금 업무에 관련된 이야기 중인데.”

창현과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어서 일단 빠르게 끊고 나서 다시 이야기를 진행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끊을 요량으로 업무 중이라 말을 하였다.

하지만 지선이 전화를 한 내용은 심상치 않은 내용인 듯하였다.

조용히 지선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석규가 경악한 표정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그래? 갑자기 거긴 왜? 뭐, 뭐라고? 그게 사실이야? 어, 그래. 알았어. 그래.”

연신 고개를 끄덕이던 석규가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멍한 표정을 짓는다.

그 모습을 보며 창현이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석규에게 묻는다.

“저기? 아버지, 괜찮으세요?”

“응? 으응. 괜찮다. 으흐! 으하하! 으하하하!”

창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석규의 입이 씰룩이는가 싶더니 이내 커다란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한다.

“왜 그러시는 거예요?”

도대체 석규가 왜 웃음을 터뜨리는 것이란 말인가?

의아함을 느낀 창현이 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석규는 웃음을 그치지 않았다. 눈물이 날 정도로 웃고 또 웃을 뿐이었다.

얼마나 웃음을 터뜨렸을까.

“쿨럭쿨럭!”

웃다가 지쳤는지 석규가 기침을 한다. 그럼에도 입가에 맺힌 미소를 지우지 않는다. 그리고는 그의 시선이 창현에게 향한다.

석규는 한껏 들뜬 목소리로 창현에게 입을 열었다.

“창현아.”

“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던 창현이 석규의 부름에 대답했다.

그러자 석규가 소리쳤다.

“기뻐해라! 네 동생이 생겼다고 한다. 임신 14주란다!”

“…….”

석규의 말에 창현은 한동안 침묵을 해야만 했다. 지금 석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섣불리 파악을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내 그 말이 무슨 뜻인지 파악한 창현이 경악한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는 놀란 목소리로 석규에게 물었다.

“그, 그게 정말이에요? 그, 그러니까… 어머니가 임신을 하셨다는 말이죠?”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었다. 지선이 임신을 했다니? 게다가 14주라면 임신을 한지 세 달이 넘었다는 이야기였다.

어떻게 그 기간 동안 알아차리지 못할 수가 있단 말인가?

창현은 놀란 표정을 지우지 못하면서 석규에게 물었다.

“그런데 너무 늦게 알아차린 것 아닌가요? 14주라니. 이렇게 늦게 알아차리는 경우도 드물 텐데…….”

“별다른 이상이 없다고 하더구나. 최근 들어 몸이 좀 무겁다는 생각을 하긴 했었는데 근래 들어 식욕도 없게 되자 병원을 찾게 되었다고 했는데, 글쎄 임신이라지 뭐냐? 하하하!”

웃음이 절로 나오는 석규였다. 지선이 임신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으면서 한편으로는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두 사람의 사랑의 결실이라 볼 수 있으니 말이다.

창현은 웃음을 지으며 석규에게 말했다.

“정말 축하드려요. 오늘은 제가 축하를 받기보다 아버지가 축하를 받아야 하는 입장이네요.”

“후후후! 고맙다. 설마 이렇게 될 줄이야. 너무 기뻐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고민이 될 정도구나. 흐흐흐!”

너무 기쁜 나머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 하는 석규였다.

“뭐 반응이랄 게 있나요. 기쁘면 되는 거죠. 잘 돼서 다행이에요.”

창현은 자신의 동생이 생긴다는 사실이 너무나 신기하고 기뻤다. 자신과 무려 열일곱 살이나 차이 나는 늦둥이 동생을 얻게 된 것이다.

그러다 보니 한줄기 걱정이 생겨나는 것도 어쩔 수가 없었다.

석규나 지선이나 모두 사십이 넘은 나이가 아니던가? 그런 만큼 지선의 늦은 출산은 자칫 건강에 심각한 영향을 끼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기쁜 마음에 그 점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있다가 뒤늦게 눈치를 챈 창현이었다.

창현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석규에게 말했다.

“하지만 너무 늦은 출산이 아닌가요? 어머니가 건강이 자칫 잘못하면 상할 수도 있을 텐데…….”

“음! 그것도 그렇구나. 지선이 나이가 적지 않으니까…….”

뒤늦게 알아차린 석규도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나이 사십을 훌쩍 넘긴 만큼 늦은 출산은 자칫 건강에 치명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던 석규가 무언가 결심한 듯 주먹을 불끈 쥐면서 말한다.

“상관없다. 얼마가 들던 간에 지선의 건강을 위해 투자하도록 하겠다. 이럴 때 돈을 써야지 언제 쓰겠느냐?”

하기야 요즘 의학이 엄청나게 발전을 했으니 늦은 출산을 하더라도 철저하게 준비를 하면 괜찮을 것이다.

창현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우고는 석규에게 말했다.

“그것도 괜찮네요. 그럼 동생 기대해도 되는 거죠?”

“기대해도 좋고말고.”

자신있게 고개를 끄덕이는 석규였다.

그 모습에 창현은 감탄사를 흘리며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아버지 정말 능력 있으시네요. 계산을 해보면 허니문 베이비에요. 와우…….”

창현의 감탄에 석규가 다소 무안한 표정을 짓더니 어깨를 쭉 핀다.

“험험! 내가 원래 좀 한 힘쓴다.”

힘을 쓸 줄 아는 남자는 당당한 법이었다.


동생이 생겼다는 소식은 곧장 지영에게도 전달되었다.

정규수업을 받고 AA엔터테인먼트로 온 지영은 창현의 말을 듣고는 밝은 표정을 지으며 재차 물었다.

“그게 정말이야, 오빠? 엄마가 임신했다고?”

“그래, 오늘 확인 되었다고 하더라.”

“대단하다! 설마 생길까 싶었는데 정말 동생이 생기다니! 너무 좋아.”

동생이 생긴다는 사실이 무척 기분 좋은 지영이었다. 늦은 나이에 동생이 생긴다니! 자신이 정성껏 돌봐주겠다고 굳게 다짐을 한다.

그러한 지영의 모습에 창현이 웃음을 흘렸다.

“좋아한다니 다행이다. 괜히 동생이 부모님 이쁨 받는다고 심통 부리지 말고 잘 대해줘. 알겠지?”

보통 첫째가 부모님의 정을 독차지하는 둘째를 질투하지 않던가?

그런 염려가 담긴 창현의 말에 지영은 어이없는 표정을 짓더니 말한다.

“오빠는 정말 내가 그런 유치한 반응을 보일 거라 생각한 거야? 내 나이가 몇인데 그런 반응을 보이겠어. 괜한 걱정을 하고 있어, 오빠도 참.”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거야. 지영이 너 질투심이 좀 많잖아.”

확신이 담긴 창현의 말에 지영이 움찔한다. 그리고는 창현을 바라보며 말을 더듬는다.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

“내, 내가 언제?”

“유리 누나랑 같이 있을 때 필요 이상으로 견제하는 느낌이 들던데. 내 착각이던가?”

“……!”

창현의 말을 들은 지영의 표정이 급변했다.

설마 그것을 창현이 눈치 챌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창현을 무시한 처사였다. 비록 이성 관계에 있어서 둔감하지만 지영이 필요 이상으로 반응을 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아차리고 있었다. 그리고 창현은 그것이 여성들이 가장 많이 하는 것들 중 하나인 질투라 생각하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언급을 한 것인데 지영의 반응을 보아하니 사실인 듯 싶었다.

입가에 미소를 지은 창현이 지영에게 말했다.

“정말 그런 건 줄은 몰랐는 걸? 지영이가 질투를 할 줄이야. 하하!”

“내가 질투하는 게 안 좋게 보이는 거야, 오빠?”

지영의 시선에 창현은 빙긋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어보였다.

“그럴 리가. 오히려 지영이가 질투를 해주니 기분이 좋은데? 질투를 한다는 것은 그만큼 지영이가 날 생각해준다는 이야기 아니겠어? 당연히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지.”

창현이 나쁘지 않게 생각한다는 말에 지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후우! 다행이다. 설마 오빠가 안 좋게 생각하면 어떻게 하나 싶었어.”

“그런데 왜 질투를 하는 거야? 유리 누나도 나쁘지 않은 사람이잖아. 서로 친하게 지내면 될 텐데.”

“…….”

창현의 말에 순간 할 말을 잃은 지영이었다. 이 둔감한 오빠는 자신이 질투를 하는 것은 알아차렸으면서 정작 왜 질투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처구니가 없는 창현의 말에 한동안 넋 나간 표정을 짓던 지영이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말한다. 여기에서 유리가 창현을 좋아해서 한다고 말을 하면 그것은 유리가 원하는 바일 확률이 높았다. 자신이 말을 함으로써 자칫 창현이 유리를 의식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으응. 유리 언니가 너무 예뻐서 나도 모르게 질투를 한 것 같아…….”

“그래? 으음! 하기야, 유리 누나가 좀 예쁜 편이긴 하지. 하지만 너무 질투하는 것도 좋지 않아. 지영이 너도 예쁘니까. 알지?”

지영에게 위로를 해주는 창현이었다.

그 모습에 지영은 활짝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고마워, 오빠.”

“고맙긴. 오늘 기쁜 소식이 있으니까 보컬 트레이닝 말고 같이 듀엣 곡이나 하나 부를까? 다크 스타에 노래도 올리고 기쁜 소식을 축하해달라는 게시글도 작성하자.”

“듀엣 곡이라니… 그럼 잘해야겠네. 사람들 엄청 많이 들을 테니.”

살짝 긴장하는 지영의 모습에 창현이 피식 웃음을 지었다.

“평소 하던 만큼 하면 될 거야. 긴장하지 말고. 알았지?”

“응!”

“그럼 가자, 녹음하러.”

창현과 지영이 녹음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는 김동률, 이소은의 듀엣 곡인 <기적>을 불렀다. 약간 하이톤인 창현의 목소리는 색다른 느낌을 주었고, 지영은 그동안 단련한 보컬 트레이닝의 실력을 한껏 발휘하며 노래를 열창하였다.

노래가 끝나자 창현은 살짝 놀란 눈으로 지영을 바라보면서 칭찬을 하였다.

“괜찮은데? 많이 늘었어.”

“정말? 다행이다.”

창현의 칭찬에 지영은 큰 기쁨을 느꼈다. 보컬 트레이닝을 본격적으로 받은 지 많은 시간이 흐르지 않았기에 아직 자신의 실력이 늘지 않았을 것 같아 염려를 많이 했는데 그러한 염려를 창현이 종식시켜준 것이다. 여간해서는 칭찬을 하지 않는 창현이었기에 지영은 창현의 말이 빈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랬기에 기뻐할 수 있었다.

지영이 너무 들뜨는 것 같아 창현이 제지를 하였다.

“아직 갈 길이 머니까 너무 기뻐하지 말라고.”

“에이, 이럴 땐 좀 더 칭찬해줄 수 있잖아? 너무 매정하다.”

입술을 삐죽 내미는 지영의 모습에 창현은 피식 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그러자 지영의 표정이 금세 풀어지면서 이내 헤헤! 하고 웃음을 짓는다.

게시글을 작성한 창현이 노래까지 올리는데 성공한다.

“자! 게시글도 올렸고… 슬슬 시간이 되어가네.”

“시간이라니? 무슨 말이야?”

의아한 표정을 지은 채 자세한 연유를 묻는 지영.

그 물음에 창현이 웃음을 지은 채 대답해준다.

“아아, 오늘 드라마 ost 대성공 축하를 위해서 아버지가 소녀시대를 초청했거든. 다른 가수들도 초청했지만 시간 대가 맞지 않아서 다른 날 시간을 조율할 것 같아.”

소녀시대가 온다는 이야기에 지영이 눈을 번쩍 빛내면서 묻는다.

“소녀시대가 온다고? 그 말 정말이야?”

“그런데 왜?”

“아, 아니야. 아무것도.”

무척 수상한 모습을 보였지만 고개를 저은 지영은 더 이상 창현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그녀의 머리가 분주하게 돌아가기 시작한다.

유리의 독주 체제가 오래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좋지 않다. 그랬기에 지영은 오늘 자신에게 기회가 찾아온 것이라 판단했다. 유리를 막아낼 수 있는 인물을 포섭할 수만 있다면 유리의 독주를 막아낼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해보는 거야. 유리 언니의 독주를 막아설 대항마를 찾아서.’

뜻하지 않은 기회.

지영의 입가에 서서히 미소가 자리하기 시작하였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유리를 방해하지 않겠다는 약속은 저 멀리 사라진 지 오래였다.

과연 그것이 어떠한 국면을 가지고 올지는 지켜볼 일이었다.


드라마 대박도 대박이지만 먼저 선공개한 드라마 ost가 대박이 터졌다.

처음부터 드라마 ost에 대한 판권을 모두 가지고 있던 AA엔터테인먼트는 그로 인해 대박이 터졌다. 현과 라샤의 개인 앨범이 아닌 것임에도 불구하고 막대한 이익을 창출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받은 것이 있다면 주는 것도 있어야 하는 법.

인센티브가 아닌, 곡에 참여하여 수고비를 주는 형식으로 지급을 마쳤지만 그것만으로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석규는 드라마 ost에 참여한 사람들을 초대하여 축하 파티를 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스케줄을 다 맞출 수 있었지만 소녀시대만 스케줄을 맞추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미 정해진 스케줄이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석규는 소녀시대만 불러 파티를 하고, 다른 가수들이 모여서 한 번 더 파티를 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이에 대해 SM엔터테인먼트에 요청하니, 흔쾌히 수락을 하였다.

그들로서는 소녀시대가 이번 드라마 ost로 인하여 상당한 인지도 상승을 꾀할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같은 메인보컬이지만 가창력에서 태연에게 한 수 아래 취급을 받던 수연은 자신의 실력을 인정받는데 성공하였다.

피처링에 참여한 태연은 원래 가창력을 인정받았던 차였고, 미영 또한 상당한 인지도 상승을 꾀할 수 있었다. 가장 이득을 본 것은 다름 아닌 수연이었지만 말이다.

드라마 주조연으로 윤아가 출연하고, 드라마 ost에서는 수연의 솔로 가능성을 엿볼 수 있게 되었다.

야심차게 지원하고 있지만 라이벌 여그룹인 원더걸스에게 상당히 밀리는 면이 있던 SM엔터테인먼트에서는 희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랬기에 오늘은 스케줄을 몽땅 비운 채 드라마 ost에 참여한 인물들만 참여하는 것이 아닌, 소녀시대 전원이 참석하게 된 것이다.

이미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차였기에 AA엔터테인먼트 직원치고 소녀시대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팬들인 경우가 대다수였던 것이다. 그랬기에 회식 분위기가 상당히 들뜰 수밖에 없었다.

석규와 AA엔터테인먼트 직원들, 그리고 창현과 지영은 회식이 벌어질 인근 고기집으로 향했다. 한우 전문점이었는데, 오늘 지선이 임신을 하고, 드라마 ost 대박에 드라마 대박까지 겸하고 있었으니, 그동안 봉인해두었던 지갑을 풀어버릴 기세였다.

일찍 퇴근한 직원들까지 자리에 앉고, 창현과 지영이 세 테이블 붙어있는 곳에 앉았다. 남은 빈자리에는 소녀시대 소녀들이 앉으리라.

사람들이 다 모이자, 잠시 후, 소녀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안으로 들어와서는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을 발견하고는 일렬로 서서 인사를 하였다.

“안녕하세요, 소녀시대입니다!”

“오오! 소녀시대다!”

“소녀시대!”

연예 기획사 직원으로 종사하고 있지만 연예인들을 자주 볼 기회가 없는 그들로서는 반길 수밖에 없었다. 대다수가 남자들이었는데, 그들로서는 파릇파릇한 소녀들의 매력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삼촌 팬들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며 안으로 들어서는 소녀들을 향해 창현이 손짓을 하였다.

“어서 와요. 여기 앉아요. 여기가 누나들 자리에요.”

“……!”

창현의 말에 소녀들이 눈을 번뜩이며 자리에 앉아있는 창현을 바라보았다.

그의 옆자리는 이미 지영이 당당하게 차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창현은 끝 테이블 끝 부분에 앉아 있었기에 지영이 차지하고 있는 자리 외에는 옆자리를 노릴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옆자리를 차지할 수 없다면 맞은편에 앉는 것이 관건이었다.

순간적인 판단은 그들 사이에 큰 차이를 불러일으켰다.

생각을 마친 사이, 벌써 생각을 실행으로 옮기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녀들은 놀라운 스피드로 몸을 움직였고, 창현이 앉아있는 테이블 자리를 차지하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파밧! 팟!

창현의 맞은편 테이블 자리를 차지한 인물은 다름 아닌 미영과 유리였다.

미영은 간발의 차이로 옆자리를 먼저 선점한 유리를 노려보았다.

“……윽!”

“훗!”

가소롭다는 눈으로 미영의 시선을 깔아뭉개는 유리였다.

그녀가 창현의 맞은편에 앉는데 성공하였고, 미영은 그 옆자리를 차지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두 사람의 판단은 거의 비슷한 시간에 이루어졌지만 그녀들의 차이를 불러일으킨 것은 유리가 몇 발자국 더 가까운 거리에 위치했다는 것과 좀 더 우월한 키를 지녔다는 점이었다.

사마율과 와룡파니의 1차전 대결은 사마율에게 돌아간 상황이었다.

“으으…….”

“유리랑 파니, 저것들이…….”

재빠르게 행동으로 옮긴 두 사람을 보면서 소녀들은 이를 갈며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이미 앉은 것 가지고 일어서라고 윽박지를 만큼 그녀들의 간은 크지 않았다.

더군다나 석규가 지켜보고 있는 상황이 아니던가.

그런 만큼 그녀들로서는 최대한 조신한 모습을 연기해야만 했다.

속으로 칼날을 갈면서 서 있는 그녀들을 향해 유리와 미영이 협공을 가했다.

“너희들 뭐해? 어서 자리에 앉아야지.”

“헤헤, 어서 앉아. 계속 서 있으면 실례가 되잖아.”

일명 명당을 차지하는데 성공한 승자들의 여유였다.

솔직히 창현의 맞은편 자리를 차지 못한 것이 애석했지만 미영은 같은 테이블에 앉은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저 여우들…….”

두 사람의 합공에 소녀들은 터져 나오는 신음을 간신히 참아내면서 차곡차곡 자리에 앉기 시작하였다.

그 모습을 확인한 유리가 싱긋 웃음을 지으면서 지영에게 인사를 하였다.

“안녕, 지영아? 오랜만이네.”

일주일 만에 다시 만났으니 제법 오랜만에 만난 셈이었다.

지영은 자신의 오빠를 낚아채려는 눈앞의 유리가 무척 얄밉게 느껴졌지만 애써 표정 관리를 하며 그 인사를 받아주었다.

“안녕하세요, 유리 언니.”

“헤에! 네가 창현이 동생이야? 귀여워! 나는 티파니라고 해. 친하게 지내자!”

지영을 처음 보는 미영이었기에 친근감이 드는 눈웃음을 지으면서 인사를 하였다. 소녀시대 내에서 그녀의 친화력은 거의 최상급에 다다라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녀의 인사에 지영은 마주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녀의 친숙한 눈웃음 때문인지 거부감도 느껴지지 않았고, 오히려 친근함이 들었다.

“네, 저도 반가워요, 파니 언니. 눈웃음이 정말 예쁘네요. 저도 그런 눈웃음 갖고 싶어요.”

“그래? 익숙해져서 그런지 난 잘 모르겠어. 그래도 좋게 봐주니 기분이 좋네. 헤헤!”

뭐라고 해야 할까. 무척 순수해보이면서 한편으로는 너무 착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창현에게서 소녀시대가 파티에 참석한다는 말을 들었던 지영은 눈앞의 미영에 대해서 빠르게 판단하고 있었다.

‘이 언니는 착해서 배신은 하지 않을 것 같아. 하지만…….’

걸리는 점이 제법 있었다.

착해 보여서 좋긴 하지만 그것이 단점으로도 작용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너무 착해서 유리 언니와 대적을 하기 힘들 것 같아. 어떻게 한다?’

창현에게 호감을 가진 것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았다. 여자라면 누구나 창현의 매력에 빠져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지영이었기에. 다만 그녀가 염려하는 것은 다른 것이었다.

바로 유리에게 어느 정도 대적이 가능하냐는 점이었다.

‘이런 성격을 지닌 언니는 약간 어벙한 면이 있어서 유리 언니와 대적을 할 수 없을 거야.’

방송으로 본 것도 있지만 실제로도 그런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지영은 깨달을 수 있었다.

이런 성격은 오히려 유리에게 도움이 될 뿐이었다. 그랬기에 도움이 되기 힘들 것임이 분명했다.

아직 지영이 진정한 와룡파니의 모습을 보지 못했기에 이런 판단을 하고 있는 것이지만 말이다.

물론 이것은 첫 인상에 대한 판단일 뿐이었다. 아직 겪어보지 않았으니 천천히 지켜보면서 결정을 내리면 된다.

‘일단 지켜봐야겠어. 이렇게 평소 웃음을 짓고 있는 사람이 의외로 무서운 한 수를 지니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

자신을 완전히 농락한 유리와 대적할 인물을 발굴하는 자리였다.

적어도 그녀에게는.

그랬기에 섣불리 판단을 내리는 우를 범할 수는 없었다.

지영이 그렇게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누군가 그녀의 옆에 앉는 것이 느껴졌다.

그에 지영이 시선을 돌리자, 그곳에는 주현이 앉아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낀 주현이 시선을 옮겼다가 지영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고는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하였다.

“안녕하세요, 소녀시대의 막내 서현입니다.”

“네? 네. 안녕하세요, 창현 오빠의 동생 최지영입니다.”

정중하게 인사를 하는 주현의 모습에 당황한 표정을 짓다가 인사를 하는 지영이었다. 그리고는 주현의 말투를 깨닫고는 정정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말 놓으세요. 제가 빠른 94년생이어도 언니보다 나이가 어리거든요. 그러니 편하게 대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저도 언니라고 부르도록 할게요.”

“아직 익숙하지가 않아서요. 창현이 동생이라고 해도 초면인데 실례가 될 수 있잖아요. 천천히 편하게 대하도록 할게요. 대신 많이 이야기를 나눠요, 우리.”

자신의 의견을 밝히면서 정중하게 거절을 하고, 그에 대한 타협안까지 내놓는 주현이었다.

보통 이렇게 말을 하면 수락을 하면서 편하게 대할 법도 한데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는 주현의 모습에 지영이 눈을 빛냈다.

‘이 언니는 자기 고집이 있어. 이게 좋게 작용할지도…….’

이런 성격의 소유자라면 자신의 소신껏 의견을 밀어붙일 확률이 높다.

막내라는 점이 마음에 걸렸지만 창현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면 훌륭한 대항마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지영이었다.

‘아직 확신을 내릴 수 없지만.’

꼼꼼하게 살피고 결정을 내리는 것이 관건이었다.

애초에 그녀의 목표는 유리를 떼어놓는 것도 있지만 더 큰 목표는 창현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서로 상잔 시킨 뒤 자신이 혼자서 창현을 독차지하는데 있었으니 말이다.

이이제이라는 전략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적에 대해 자세히 알아놓을 필요성이 있었다.

지영이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석규가 자리에서 일어서서 입을 열기 시작했다.

“오늘 이렇게 여러분들이 모인 이유는 드라마가 대박이 났고, 드라마 ost가 대박이 나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기 대박을 터뜨린 주인공들에게 박수를 쳐주시기 바랍니다.”

짝짝짝짝!

석규의 말에 직원들이 일제히 박수를 치기 시작한다.

그러자 창현을 비롯하여 소녀들은 감사의 의미를 담아 고개를 숙여보였다.

그렇게 박수 소리가 잦아들자, 석규가 말한다.

“라샤도 일본에서 활동을 잘 하고 있고, 현이도 일본에서 대박이 났으며, 드라마와 드라마 ost까지 잘 되어서 기쁩니다. 그리고 앞으로 회사의 대형 프로젝트도 차질 없이 시행될 예정이니 이 모두가 사원들이 열심히 해서 아니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모두 건배를 하도록 합시다.”

건배를 하자면서 소주가 담긴 잔을 번쩍 드는 석규였다. 그리고 직원들도 소주가 담긴 잔을 들었다. 다만 창현을 비롯하여 지영과 소녀들은 술을 할 수 없었기에 음료수가 담긴 잔을 들어보였다.

그걸 확인한 석규가 외쳤다.

“모두가 대박나기를 바라며, 위하여!”

“위하여!”

잔을 번쩍 든 사람들이 술을 마시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쪽 테이블은 술이 아니었기에 간단하게 음료수를 한 모금 마시고 컵을 내려놓을 뿐이었다.

그렇게 축하 멘트를 마쳤지만 석규는 자리에 앉지 않았다. 오히려 목을 가다듬는 것이 아직 할 말이 있는 듯하였다.

무슨 일인가 싶어 바라보자, 석규가 입을 열기 시작한다.

“흠흠! 오늘 이것 말고도 또 좋은 일이 있습니다. 이건 제 개인적으로 기쁜 일이지만 사원 여러분들에게 축하를 받고 싶군요.”

묘하게 운을 떼는 석규.

그 모습을 보면서 창현과 지영은 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것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런 창현과 지영의 눈을 본 석규가 씨익 웃음을 짓더니 말한다.

“오늘 저는 셋째 아이를 갖게 되었습니다.”

“…….”

석규의 말에 사람들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차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이란 말인가? 셋째 아이라니? 석규의 나이가 사십대 중반이고, 이번에 재혼을 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첫째는 창현이고 둘째는 지영이니 셋째라면…….

‘셋째!’

그제야 그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차린 사람들의 눈이 번뜩였다.

사원들이 놀란 눈으로 석규를 바라보기 시작한다.

“사, 사장님! 그 말씀이 사실입니까?”

노총각 윤진호 실장이 놀라서 큰 목소리로 묻는다.

그 물음에 석규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며 사실을 수긍한다.

“그렇소이다. 윤실장. 오늘 연락을 받았지. 14주라고 하더군.”

14주라는 단어를 유독 강조하는 석규였다.

그 말에 사원들은 잠시 고개를 갸웃하다가 이내 경악한 표정을 짓는다. 14주라면 석규가 결혼을 한 뒤 신혼여행을 갔을 때가 아닌가? 그렇다면 신혼여행에서 허니문 베이비를 성공했다는 이야기란 말인가!

능력자다!

그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는 사원들이었다. 그리고는 이내 축하의 인사를 건네기 시작하였다.

“오오! 축하드립니다. 사장님!”

“축하드립니다! 아직 사장님은 건재하시군요!”

부러움이 한껏 담긴 남자 사원들과 대단하다는 눈으로 바라보는 여자 사원들의 말에 석규의 어깨가 쭉 펴진다.

“후후후! 고맙네. 운이 좋았을 뿐이지.”

그렇게 말을 했지만 석규의 기세는 당당함 그 자체였다.

석규의 이러한 말들은 소녀들에게도 놀라움의 대상이었다.

그녀들은 한껏 놀란 눈으로 창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대표 격으로 미영이 창현에게 물었다.

“창현아! 그럼 너 동생이 생긴 거야?”

“네. 제가 예전에 아버지에게 결혼하면 힘 좀 쓰셔서 동생 좀 만들어달라고 했는데 정말로 동생이 생길 줄 몰랐어요. 늦둥이긴 하지만 기분이 좋네요. 가끔 제가 돌봐줄까 생각 중이에요.”

“…….”

창현의 말을 들은 소녀들이 순간 아기를 안아든 채 자장가를 불러주는 모습을 떠올려본다. 그 모습은 그야 말로… 최고였다. 그리고 그가 불러주는 자장가는 세계 최고의 자장가이리라.

한순간 나에게도 자장가를 불러줘! 라고 말하고 싶은 충동이 들 정도였으니 말이다.

“대단하다. 사장님도 그렇고 어머니도 그렇고…….”

경악이 담긴 태연의 목소리에 창현은 그저 웃음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지영이 손을 들었다.

“저기요… 제안하고 싶은 게 있는데…….”

자신은 TV를 보면서 얼굴을 다 익혀놓은 상황이지만 아직 소녀들 중에서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유리 밖에 없었다. 윤아도 함께 식사를 하여 안면을 익히긴 했지만 어색했고, 미영과 주현은 오늘 만난 사이였다. 그랬기에 말을 함에 있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 지영이 자칫 어색함을 느낄 수 있다고 판단했음일까?

미영이 그런 지영의 말에 적극적으로 호응해준다.

“제안? 뭔데? 재미있는 거야?”

‘고마워요.’

가문의 단비와도 같은 미영의 호응에 지영은 호감도가 상승하는 것을 느끼면서 입을 열었다.

“재미가 있다기보다는요… 오늘 언니들을 처음 만났잖아요. 그래서 언니들하고 친해지려고 하는데… 고기를 먹으면서 수시로 자리를 바꾸면 어떨까요?”

“……!”

지영의 제안에 소녀들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안 그래도 창현의 옆자리에 앉아서 애석함을 표하던 차가 아니던가? 그런 와중에 시누이(?)가 이런 바람직한 제안을 하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창현을 노리기 위해서는 이 어린 시누이를 차근차근 꼬드기는 것도 제법 괜찮은 방법일 테고 말이다.

물론 그것은 몇몇 극단적인 소녀들의 생각일 뿐이었다.

소녀들이 아무 반응을 하지 않자 지영은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드는 모습을 보이며 말했다.

“저기… 안 될까요?”

악독한(!!) 유리를 대적하기 위해 다른 언니들과도 대화를 나눠볼 요량으로 기껏 차지했던 창현의 옆자리를 양보할 생각까지 하면서 이야기를 했는데 반응이 어째 좋지 않았다.

‘무리인가.’

지영은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포기하려던 찰나 소녀들의 입에서 한 글자가 튀어 나왔다.

“콜!”


지글지글.

불판 위에서 고기가 익어가기 시작한다.

석규가 오늘 단단히 각오를 했는지 시키는 고기들이 전부 비싼 부위들이었다. 꽃등심부터 시작하여 살치살, 갈비살 등 고급스러운 부위만 시키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지영의 제안은 받아들여져서 주기적으로 움직이면서 고기를 먹고 있었다.

어차피 대부분의 소녀들 목적이 창현의 옆자리였기에 창현은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소녀들이 주로 움직이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지영은 자리를 옮기면서 소녀들과 인사를 나누고, 친분을 쌓아나가고 있었다.

아직 인사를 하지 않았던 태연, 수연, 순규, 효연, 수영과 인사를 나누면서 지영은 냉철하게 분석에 분석을 거듭하고 있었다.

처음에 태연과 인사를 나눴던 지영은 이 사람이 적임자가 아닐까 싶었다.

아홉 명 중 리더직을 맡아 꼼꼼한 면이 있었지만 그 속에 내재된 허술함을 발견했던 것이다. 미영과 커플로 오해를 받을 만큼 친하다고 하더니 그 어벙함마저도 전염이 된 듯 싶었다.

그랬기에 지영은 태연을 1순위 후보로 올려놓았다.

‘이 언니라면 어느 정도 통제를 할 수 있을 것 같아.’

지영에게조차 얕보이는 태연이었다. 그녀가 알았더라면 땅을 치고 통곡하면서 눈이 뒤집히며 방방 뛰었을 만한 건수였다.

그렇게 태연을 탐색한 지영이 두 번째로 탐색한 것은 바로 수연이었다.

하지만 수연과 인사를 나누는 순간 지영은 후보로 올리겠다는 생각을 말끔히 지워버려야만 했다.

몇마디 인사를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짓눌리는 듯한 무형의 압박을 느껴야만 했던 것이다. 게다가 자세히 살펴보니 대다수의 멤버들이 은연중 수연의 눈치를 보고 있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그것은 즉, 수연이 소녀시대 내에서 수위를 다투는 실력자라는 이야기였다.

유리도 슬금슬금 수연의 눈치를 보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가.

자신이 감당하기 벅찬 유리를 눈치 보게 만들 정도라면 대단한 실력의 소유자라는 이야기가 되었다. 그 분야가 뭐가 되었든 말이다.

‘이 언니는 안 돼. 했다가 오히려 내가 손을 댈 수 없을 정도가 되어버릴 수 있어.’

감당할 수 없는 인물들을 끌어들이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수연에 대한 탐색을 포기한 지영은 이번에는 순규를 탐색하였다. 그리고 순규도 어느 정도 합격선이었다. 털털하면서 모나지 않은 면이 무척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렇게 계략에 능한 것도 아니면서 제법 밀어붙이는 면이 있어보여서 유리와 대적한다면 박빙의 승부를 벌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써니 언니도 괜찮을 것 같아. OK.'

태연과 마찬가지로 합격점에 들어온 순규였다.

그리고 효연과 이야기를 나눈 지영은 일찌감치 후보에서 제외 시켜야만 했다. 장난기가 다분한 면모가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변덕이 심하다는 말을 들었던 것이다.

유리 같은 계략가에게는 변덕이 심한 사람이 즉효약이지만 결과적으로는 자신도 종잡을 수가 없게 된다. 그리 되면 상황이 더욱 안 좋은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는 노릇이었다. 그랬기에 효연도 후보에서 제외되었다.

마지막 수영도 합격점이었다. 제법 성격이 센 면이 있어서 유리를 억누를 수 있을 것 같았던 것이다. 게다가 장난처럼 이야기하길, 연습생 시절에 유리가 자신을 어려워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유리를 제압하는 카드로 수영을 내세울 수 있다는 계산이 설 수 있었다.

‘태연 언니랑 써니 언니랑 수영 언니, 서현 언니들 중에서 고르는 게 나을 것 같아. 이제 중요한 건 오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인데…….’

유리를 견제하는 후보를 선발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창현에게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였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순규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말했다.

“난 잠시 화장실 좀…….”

여자들끼리만 있는 자리였기에 말하는데 거침이 없었다.

그런 순규를 보면서 수영이 시비를 걸었다.

“써니야, 너는 왜 일어섰는데 앉은 거랑 차이가 없냐.”

“죽을래! 이 전직 식신아!”

식신의 명예로운(?) 자리가 윤아에게 양도되었기에 전직 식신이라 부르는 순규였다.

“너랑 나랑 비슷하게 먹었거든! 별다른 별명을 찾지 못하니 아직까지 식신이라 그러냐! 이 식신 2호야!”

“이익! 몰라! 난 화장실 갈 거야.”

으르렁거리던 순규는 고개를 홱 돌리더니 화장실로 발걸음을 옮긴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지영이 눈을 빛냈다. 순규에게 물어볼 기회가 생겼던 것이다.

‘기회야, 이건!’

단독으로 물어볼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면서 자리에 일어서는 지영이었다.

“언니들, 저도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그렇게 말을 한 지영이 순규의 뒤를 따라 화장실로 발걸음을 옮긴다.

화장실 안으로 들어서자 세면대 앞에 서 있는 순규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화장을 고치던 순규는 지영이 안으로 들어온 것을 반겼다.

“어서 와, 지영아. 그…런데 키가 크네? 몇이야?”

앉아있을 땐 몰랐는데 서 있는 모습을 보니 지영의 키가 크다는 걸 깨달은 순규였다. 그리고는 마치 습관처럼 지영의 키를 물었다.

그 물음에 지영은 잠시 고개를 갸웃하더니 대답했다.

“키요? 163cm인데요?”

“크다…, 부럽다…….”

“네?”

갑작스러운 순규의 말에 의아한 목소리를 내는 지영이었다.

그에 순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보였다.

“아니야, 아무것도.”

“네에… 그런데 언니,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자신에게 묻고 싶은 게 있다고 하자 순규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말했다.

“물어보고 싶은 것? 뭔데? 물어봐.”

“네. 그럼… 언니, 저희 오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직구 승부. 순규가 창현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면 유리와 대립 구도를 만들 생각이었기에 직접적으로 묻는 지영이었다.

“너희 오빠? 창현이에 대해서 말이야?”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는지 순규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자 지영이 고개를 끄덕인다.

“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알고 싶어서요.”

“창현이에 대해서라… 흐음! 그렇군.”

묘한 미소를 짓는 순규. 그러더니 지영에게 시선을 옮기면서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하면 호감은 있어. 하지만 사랑하느냐? 라고 묻는다면 대답은 No.”

“그런가요?”

호감이야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성질. 그것은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창현을 이성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았기에 지영의 음성에 맥이 빠졌다.

그런 지영의 모습에 순규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어보았다.

“무슨 일인데? 갑자기 그건 왜 물어보는 거야?”

“…언니는 유리 언니의 성격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세요?”

잠시 침묵하던 지영이 유리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순규를 대항마로 선택할 수 없다면 그녀에게서 유리에 관련된 정보를 얻기 위함이었다.

“잘 알고 있지. 연습생 때부터 알고 지냈으니까.”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순규였다. 멤버들에 관련된 것이라면 잘 알고 있었다.

그러자 지영이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유리 언니의 양면성에 대해서도요?”

“…어떤 걸 물어보려는 거야?”

양면성이라는 말에 흠칫한다. 무언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그럼에도 순규가 멈추지 않고 이야기를 진행하려는 것은 지영의 심각함에서 ‘흥미로움’과 ‘재미’를 발견하였기에 그렇다. 잘하면 재미있는 일이 발생할 것 같은 느낌이랄까?

“…….”

순규의 물음에도 불구하고 지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도와 줄 수 없다면 굳이 유리의 정보에 관련하여 언급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지영이 침묵을 지키자 순규가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고민하다가 말한다.

“유리의 양면성에 대해서는 간단하게 언급할 수 있어. 멤버들은 유리의 별명을 이렇게 말하거든. 깝율과 조신율이라고.”

“그게 뭐죠?”

지영이 눈을 빛내면서 물어보았다.

그에 순규는 지영이 유리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판단하면서 간단한 정보를 언급해주었다.

“간단해. 유리는 평소에 까불까불하는 성격이거든. 물론 밉지 않을 정도로 까불까불해서 싫어하지는 않지만 말이야. 그런 까불거리는 성격 때문에 우리는 유리를 깝율이라고 부르곤 하지. 그리고 유리가 남자 앞에서는 까불거리는 성격을 싹 지워버리고 조신한 모습을 보이고는 하지. 그래서 우리는 조신율이라 부르고. 약간 장난이 섞여있는 별명이랄까.”

“그거에요. 맞아요.”

순규의 말에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하는 지영이었다. 왜 소녀시대 멤버들이 유리를 깝율, 조신율이라 부르는지 알 것 같았다. 자신에게도 약간 그런 면모를 보이다가도 창현 앞에 있을 때면 내숭 떠는 모습을 보이고는 했으니 말이다.

역시 창현에게 보인 모습만 설정된 것이 아닌 듯하였다. 평소 행동에서 우러나온 것을 더욱 강화시켜서 창현에게 실행한 듯 싶었으니 말이다.

“자, 나는 말해줬어. 이제 지영이 네가 말해줄 차례야.”

“…뭘요?”

순규의 말에 순간 움찔하면서 묻는 지영이었다.

그러자 순규가 짙은 미소를 띠면서 지영에게 말한다.

“뭔가 말하고 싶은 게 있지 않아? 그래서 창현이에 대한 마음을 물어본 것일 테고 말이야.”

“…….”

순규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린 지영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왠지 쉽게 정보를 말해준다 싶었는데 이러한 의도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

“정말 말하지 않을 거야?”

“…미안해요.”

“흐음!”

대답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숙이는 지영을 보면서 순규가 불편한 숨소리를 흘렸다. 그럼에도 굳게 입술을 다물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 쉽게 대답을 들을 수 없을 거란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순규의 호기심을 더욱 자극하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이기에 지영이 저렇게 감추는 것일까? 유리를 언급하는 걸 보면 유리와 연관이 있는 것 같기도 한데.

유리의 언급과 지영의 행동은 순규의 호기심이라는 심지에 불을 붙이는 결과를 낳았다.

잠시 침묵하고 있던 순규가 지영에게 말했다.

“만약… 내가 창현이를 좋아한다고 이야기 했으면 자세한 이야기를 해줬겠지?”

“…네. 아마 이야기하면서 도움을 청했을 거예요.”

“흐음! 좋아! 결정했어.”

순규는 결정을 내렸다. 지금부터 창현이를 좋아하겠다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었다. 다만 자신의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지영을 도와주기로 결정을 내린 것이다.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결정을 내린 모습을 보인 그녀가 지영에게 말했다.

“나한테 말해주면 내가 도움을 주도록 할게. 어때?”

“언니가요?”

지영이 놀란 눈으로 말을 한다. 그러자 순규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한다.

“그래. 내가 도움을 줄게.”

“…잘 몰랐는데 언니는 호기심이 왕성한가 봐요.”

오늘 처음 봤지만 방금 전 행동만으로도 순규의 성격을 어느 정도 간파할 수 있었다.

자신의 호기심을 간파한 지영의 모습에 순규가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내가 너무 티를 냈나?”

“언니가 도움을 준다고 하셨으니 믿고 말씀드릴게요. 대신 비밀을 지켜주셔야 해요. 약속해줄 수 있죠?”

“알았어. 약속은 지킬게. 여자들의 약속이야, 이건!”

굳은 목소리로 대답하는 순규의 모습에 지영은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이렇게까지 말을 하면 믿을 수 있으리라.

순규에게서 믿음을 확인한 지영이 호흡을 가다듬고는 입을 열었다.

“유리 언니는 창현 오빠를 좋아해요.”

지영의 말은 큰 파장을 일으켰다.

짧은 말이었지만 지영의 말에 순규가 눈을 부릅 뜬 것이다. 그리고는 지영에게 확인하듯 물어보았다.

“…저, 정말이야?”

“네, 사실이에요.”

“이럴 수가… 전혀 눈치 채지 못했는데.”

설마설마하던 사실이었다. 지영이 창현을 좋아하느냐고 언급을 할 때 예상을 했지만 정말 그럴 것이라고 판단하지 못했다. 그렇게 판단을 내리기에는 유리의 반응이 너무나 미지근했던 것이다.

그런데 유리가 창현을 좋아한다니!

순규는 둔기로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아야만 했다.

벽에 등을 댄 그녀가 허탈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대단해. 내가 눈치 채지 못할 정도였다니. 도대체 얼마나 신중을 기했으면…….”

눈치가 제법 빠른 그녀였기에 다른 소녀들 몇 명도 창현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녀였다. 그런데 유리 만큼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었으니 경악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지영이 왜 저렇게 불안한 기색을 보이는 것인지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된 건데?”

사실을 알게 되자 순규는 다급한 어조로 지영을 재촉하였다. 지금 이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충격적이기는 하지만 더 충격적인 이야기가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순규의 재촉에 지영은 연이어 말을 꺼내기 시작한다.

“그래서…….”

이어진 지영의 말은 놀라운 것들 투성이였다.

유리가 어떤 식으로 창현을 대하고 있는지, 어떤 식으로 창현을 공략하고 있는지 지영의 입에서 상세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순규는 입을 떡 벌려야만 했다. 유리는 단순히 조신한 모습으로 공략하는 것이 아니라, 제갈공명 저리가라 할 정도의 책략을 동원하여 창현을 공략하고 있었던 것이다.

유리라는 기본 병력이 뒷받침 되는 이상 신출귀몰한 전략이 더해지면 창현이라는 난공불락의 성도 무너지기 마련이다.

‘유리의 내숭이 극에 다다랐구나. 이 정도일 줄이야. 이렇게 되면 정말 창현이가 무너지는 모습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 걸?’

창현이 넘어가는 모습을 보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마음속에서 다른 감정도 생겨나고 있었다. 바로 이대로 간과할 수 없다는 앙큼한 마음 말이다. 분명 창현에게는 호감의 마음만 가지고 있지만 이대로 넘겨주기에는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은가? 비록 자신을 스타로 처참하게 발라버려서 그렇지 다른 것은 나무랄 데 없다는 것을 그녀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순규의 머릿속에는 여러 생각이 교차하고 있었다. 이대로 지켜볼 것인가 아니면 지영의 바람을 들어줄 것이냐.

한참을 고민하고 있자, 지영의 안색이 점점 초조해진다.

선뜻 도와주겠다고 하던 순규가 생각을 길게 하자 안 좋은 쪽으로 기울고 있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순규가 돕지 않는 것은 상관이 없지만 그녀의 말에 넘어가 유리에 대한 정보를 넘긴 것이 문제였다.

‘최악의 상황이 되면 수연 언니에게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어.’

여차하면 그녀에게는 이판사판의 수인 수연이 존재하였기에 살짝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그 다음은 어떻게 할지 까마득했지만 당장 상황을 타파하는 데에는 수연이 최고의 수였다. 그 다음에는 여러 명을 끌어들여서 견제를 하면 되겠지.

무슨 신용카드 돌려막는 것 마냥 점점 과격하게 변해가는 지영의 생각이었다.

그렇게 지영이 극단적인 생각까지 하고 있을 무렵, 고민을 하던 순규가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좋아, 내가 도와주도록 할게. 어쨌든 유리만 견제하면 되는 거 아니야?”

“정말 도와주시는 거예요? 정말요?”

점점 포기의 마음을 갖고 있던 지영은 도와주겠다는 순규의 말에 환한 표정을 지으면서 묻는다.

그러자 순규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지영의 말처럼 상황이 안 좋다면 유리를 견제해야 함이 옳았다. 그래야 상황이 더욱 재미있어 질 테고 배도 아프지 않을 테니까.

‘내가 못 먹는 떡 남이 먹으면 안 되지.’

뻔뻔하기 그지없는 놀부 심보였지만 순규의 심리가 그러하였다. 유리가 창현과 잘 되어서 매일 같이 자신을 약 올릴 것을 생각하니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사귈 때도 같이 사귀고 솔로일 때도 같이 솔로인 것이다. 그래서 솔로천국 커플지옥이라는 말이 있는 게 아닌가. 게다가 자신은 소녀시대의 일원으로서, SM엔터테인먼트 명예회장인 삼촌의 조카로서 멤버들의 스캔들에 관여할 권리(?)가 있었다. 그랬기에 순규는 지영을 도와주겠다고 말을 한 것이다.

그런 복잡한 수가 있건 말건 지영으로서는 순규의 도움이 고마울 따름이었다. 그야 말로 가뭄의 단비가 따로 없었다.

“그래서 내가 어떻게 도와주면 되는 거야? 생각한 건 있겠지?”

“물론이죠. 어떻게 도울 거냐면…….”

지영이 자신의 계획을 차근차근 순규에게 말하기 시작하였다.

거창하게 계획이라 했지만 실제로는 별 것 없었다. 유리가 아직은 확정적인 단계가 아니어서 자신을 통해서 창현과 만나려 하니, 자신이 그때가 되면 말을 흘려주겠다는 식의 방식이었다. 그리고 그 정보를 입수한 순규는 유리를 방해하면 되는 것이고 말이다.

지저분한 방법이었지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기도 하였다.

유리의 마수에서 창현을 구해내기(?) 위해서라면 이전투구도 불사할 지영이었다.

“좋아. 그 정도는 어려운 정도가 아니니 내가 도와주도록 할게.”

“고마워요, 언니! 왠지 언니가 소녀시대에서 제일 예뻐보여요!”

부탁을 들어줘서일까?

갑자기 순규가 소녀시대에서 제일 예쁘게 보이는 지영이었다.

“그래? 빈말이라도 고맙네. 후후!”

침 발린 말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순규는 그 말을 기분 좋게 받아들였다.

“아니에요. 정말이에요. 에효! 믿지를 않으시네. 어쨌든 전 나가볼게요. 언니도 나오세요.”

“응? 나 아직 화장 다 안 고쳤으니까 고친 다음에 나갈게. 너부터 나가 있어.”

“네에!”

그렇게 대답한 지영이 밖으로 나간다. 그리고 순규는 다시 거울을 바라보며 화장을 고친다. 그러면서 곰곰이 생각에 잠기기 시작한다.

“따지고 보면 창현이도 참 대단한 인물이잖아? 무척 잘생겼고 노래도 잘하고…….”

그러면서 순규는 자신의 이상형에 대해 생각해본다.

우선 얼굴이 잘생겼으면 좋겠다는 건 모든 여자들의 공통된 마음이다. 평범해도 상관없지만 잘생기면 좋은 건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키는 너무 작아서는 안 된다. 자신보다 최소 20cm 정도는 컸으면 좋겠다.

그러다가 순간 순규는 흠칫한다.

“그러고 보니 내 키는 156cm잖아? 창현이는 키가 177cm라고 하던데…….”

자세히 생각해보니 20cm가 넘게 차이난다. 어느덧 무럭무럭 커서 그 정도로 차이가 나게 된 것이다.

순규의 생각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노래를 잘했으면 좋겠고…….”

이것도 부합한다.

“나랑 같은 취미를 지녔으면 좋겠고…….”

취미 또한 부합한다. 똑같이 스타크래프트를 즐기니 말이다.

“그, 그리고 나만 바라봐줬으면 좋겠고…….”

이건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창현 같은 성격이라면 충분히 해바라기처럼 바라봐 줄 확률이 높았다.

“…….”

하나하나 다 따져본 순규가 할 말을 잃었다. 생각해보니 창현은 자신의 이상형 조건에 완벽하게 부합되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성격도 모나지 않았고, 예의를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이 등잔 밑이 어두웠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럴 수가! 여태까지 이걸 모르고 있었다니…….”

완벽한 이상형을 앞에 두고 도대체 자신을 무슨 짓을 한 것이란 말인가?

순규는 잠시 혼란함을 느껴야만 했다. 창현을 노리는 수많은 여인들과 지영의 부탁. 자신은 분명이 창현에게 호감만 있다고 했다. 하지만… 하지만 그 호감이 좋아하는 감정으로 발전할 수 있지 않은가? 사람의 마음이 종잡을 수 없는 것이니 자신이 좋아하더라도 딱히 잘못은 없는 것 아니겠는가?

“그럴 거야. 다른 사람 같아도 나 같았을 거야.”

자기 좋을 대로 판단을 내리는 순규였다. 그리고는 이내 고개를 끄덕인다. 언덕에 질럿 있다고 돌파하지 못할 것 없지 않은가? 언덕에 질럿이 있으면 저글링으로 돌파를 하면 된다.

어차피 지영은 유리를 막아달라고 했지 자신에게 좋아하지 말라고 한 적은 없지 않은가? 순규는 그렇게 위로했다.

“암, 내가 유리보다 낫지. 낫고 말고.”

그렇게 말을 하는 그녀의 눈에 서서히 열망이 서리기 시작한다.

그것은 강렬한 욕망이었다.

“내가 창현이를 낚아채면 애들이 모두 순순히 포기하겠지? 그렇게 되면 스캔들 염려는 사라질 테고. 후후후! 좋아! 결정했어!”

주먹을 불끈 쥐며 결정을 내리는 순규였다. 이 진흙탕 싸움에 참전하기로 말이다.

지영의 대항마 작전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으려던 강력한 인물을 건져준 꼴이 되었다.


지영의 부탁을 들어주되 자신의 마음을 확인하고 굳은 결심을 한 순규가 화장실에서 나와 테이블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에는 자신이 오건 말건 열심히 고기를 먹고 있는 멤버들이 눈에 들어왔다.

순규는 자기 자리에 앉으면서 말했다.

“나 왔어.”

“왜 이렇게 늦었어? 뭐 나야 식신 2호가 빠져서 좋긴 했지만.”

전직 식신 수영이 어느새 갈았는지 새 불판에 고기를 올려놓으며 말했다.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고기가 익어가는 모습이 마냥 정겹다.

지영의 이야기를 들어주느라, 또 자신 혼자서 고민을 하느라, 그리고 화장까지 고치느라 상당한 시간을 화장실에서 보냈기에 고기를 먹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랬기에 회색으로 익어가는 고기를 보면서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수영이 히죽 웃음을 짓고는 시비를 건다.

“왜 그렇게 고기를 쳐다보는 건데? 아항! 화장실에서 힘을 너무 써서 배가 고픈 거구나? 그렇다면 내가 이해해줘야지. 많이 드세요, 화장실에서 너무 힘을 써서 배고프신 써니 양.”

순규가 화장실에서 오래 있었던 것 가지고 장난치는 수영이었다.

그 힘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순규가 아니었기에 수영에게 버럭 소리를 친다.

“야! 내가 무슨 화장실에서 힘을 써! 그런 거 아니거든?”

“아이구? 그럼 뭐하다가 이제야 나온 건데?”

수영의 말에 순규는 망설이지 않은 채 바로 대답한다.

“화장 좀 고치러 갔거든!”

“화장? 써니야, 아니 순규야. 너는 화장품을 가지러 아예 숙소를 갔다 왔냐? 네가 화장실에 있던 시간을 계산해봐! 단순히 화장을 고칠 시간인가. 화장 지우고 다시 해도 충분히 남겠다.”

“…….”

자신의 말을 전혀 믿지 않는 수영의 모습에 이를 부드득 가는 순규였다. 그렇지만 수영은 꿀릴 것 없다는 듯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괜히 이렇게 시간을 소비하게 만들어 불필요한 오해를 사게 만든 지영만이 안절부절 못할 뿐이었다.

결국 순규도 해명을 포기하고는 고개를 저었다.

“후! 내가 말을 말아야지.”

“누구에게나 말하기 힘든 순간이 있는 법이지. 난 이해한단다, 순규야.”

“이 식신이 정말…….”

순규의 눈에서 불똥이 튀려하자 수영은 황급히 물러서면서 방어 자세를 취한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한 치의 물러섬 없이 서로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지영은 둘 사이가 어느 정도 잠잠해지자 순규의 옆에 바싹 붙어서는 사과를 한다.

“언니, 미안해요. 저 때문에…….”

“…아니야. 난 괜찮으니까…….”

지영의 사과에 순규가 순간 움찔했다. 처음에는 관망한 채 유리를 방해하기로 했던 자신이 본격적으로 창현을 손에 넣기로(?) 마음먹은 것이 찔렸던 것이다. 그래서 제법 화가 난 상태였지만 지영에게 모진 말을 할 수 없었다.

순규의 변심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지영은 그저 대인배적 마인드를 지닌 순규의 모습에 감탄사를 터뜨릴 뿐이었다.

“써니 언니는 정말 마음이 넓은 것 같아요.”

“내가? 하, 하하! 좀 넓긴 하지. 하하…….”

뭐라 말을 할 수 없는 이 묘한 상황. 어색한 웃음으로 밖에 대처할 수 없었다.

그 모습을 수영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심각한 표정을 짓고는 지영을 불렀다.

“흐음! 지영아.”

“네?”

지영이 대답하자 수영이 진지한 얼굴로 말한다.

“너 설마 약 먹었냐? 아니면 순규에게 매수를 당한 거야?”

“네? 약? 매수요?”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짓는 지영. 지금 수영이 하는 말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영문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지영을 보면서 수영이 말한다.

“순규가 마음이 넓을 리가 없잖아? 얼마나 속이 좁고 못됐는데? 이럴 경우 두 가지야. 지영이 너의 판단력이 흐려졌거나 순규에게 무언가 매수를 당했다는 것! 어떤 것이냐. 이 정의로운 수영 언니가 너를 순규의 마수로부터 구해줄게.”

매수라면 매수라고 할 수도 있다. 순규가 유리의 마수로부터 도와주겠다고 말을 했으니 말이다. 그것을 말할 정도로 지영은 어리석지 않았다.

그저 어색한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아니에요. 전 그런 거 아닌데.”

“괜찮아. 내가 도와줄 테니 사실대로…….”

“최수영! 정말 이럴래?”

급기야 버럭 소리를 치는 순규였다.

불꽃이 번쩍거리는 그녀의 눈빛에 수영은 더 이상 장난을 치지 못하고 후퇴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알았어. 내가 뭘. 쳇! 뭔가 있는 것 같은데.”

무슨 내막이 있는 느낌이 강렬하게 풍겼지만 더 이상 언급하지 못하는 수영이었다. 좀만 더 파고들면 알아낼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는데 순규의 방해로 인해 불발된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티격태격하면서 고기를 먹는다.

그 사이 자리가 여러 번 바뀌기 시작했고, 지영은 본래 자신의 자리인 창현의 옆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지영이 살가운 어조로 창현에게 물었다.

“오빠, 많이 먹었어?”

“많이 먹었어. 아주 오랜만에 과식을 한 것 같아.”

창현이 배를 살짝 두드리는 시늉을 하면서 말한다. 그러자 지영이 웃음을 지었다. 배를 두드리는 창현의 배는 전혀 튀어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오빠는 좀 많이 먹어야 해.”

평소 창현이 소식을 한다는 걸 알고 있는 지영은 창현이 많이 먹기를 바랐다. 한창 때인데 많이 먹지 않는 그의 모습이 다소 안타까웠던 것이다.

“많이 먹으면 많이 먹을 수 있지. 하지만 적게 먹는 게 좋아. 너무 많이 먹으면 둔해져서 제대로 할 수 있는 게 없거든. 걱정해줘서 고마워.”

그러면서 창현이 지영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지영은 그런 창현의 손길을 느끼면서 빙긋 웃음을 지었다.

“간지러워, 오빠.”

“그래서 싫은 거야?”

창현의 손이 멈칫한다. 그러자 지영이 얼른 말을 이었다.

“그건 아닌데…….”

“갑자기 해서 그럴 수도 있겠네. 미안미안.”

그러면서 빙긋 웃음을 짓는 창현의 모습에 지영은 멍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힐끗 시선을 유리에게 옮기니 집중해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모습을 보며 지영이 유리에게 싱긋 웃음을 지어보였다. 순규라는 강력한 대항마로 찾았겠다, 더 이상 거칠 것이 없었다.

지영의 웃음에 유리의 표정이 팍 일그러졌다. 그 모습은 오히려 지영에게 승리의 기분을 복 돋아 줄 뿐이었다. 그러면서 창현의 품안으로 파고들려는 지영이었다.

그걸 받아주려던 창현이 지영을 제지하고는 말했다.

“보는 시선이 많아서 이 이상은 안 되겠네. 고기 먹자, 지영아.”

“응.”

아쉽지만 보는 사람이 많은 자리에서 과하게 할 필요가 없다. 다만 유리가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에 조금 열이 올라서 그랬나보다.

소녀들의 시선이 집중되는 것을 느꼈지만 지영은 애써 무시한 채 고기를 먹어나간다. 오빠를 사수하기 위해서는 이제 이 정도 시선 집중쯤은 가뿐하게 이겨내야 할 철판을 지녀야 한다.

지영이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자 소녀들도 다시 고기를 구워먹기 시작한다. 천천히 구워먹고 있었기에 고기는 끝도 없이 구워지고 사라지길 반복하고 있었다.

‘아하!’

그러다가 지영은 무엇이 생각났는지 상추 위에 깻잎을 올려놓고 그 위에 고기를 올려놓으며 쌈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고기를 굽고있는 창현에게 쌈을 내밀었다.

“자, 오빠! 아! 해봐.”

지영의 말에 고기를 굽고있던 창현의 손이 멈칫했다. 그리고는 지영이 만든 쌈을 보더니 슬쩍 묻는다.

“지영아, 여기에 장난하지는 않았지?”

“내가 왜 장난을 하겠어, 오빠. 나 못 믿는 거야?”

자신을 믿어주지 않는 창현의 모습에 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창현이 어색하게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그게 아니라 방금 전까지만 해도 폭탄 쌈을 많이 먹었거든.”

“폭탄 쌈? 왜? 누가?”

누가 감히 창현에게 폭탄 쌈을 먹인단 말인가!

지영이 부리부리한 눈으로 바라보자 창현이 어색한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주변을 향해 시선을 옮기자 지영을 바라보던 소녀들이 슬쩍 그녀의 시선을 피한다.

범인이 누구인지 바로 알아차릴 수 있는 순간이었다.

그 모습에 지영이 허탈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언니들이 이럴 수가…….”

“장난이었어. 장난. 미안해, 지영아.”

화가 난 듯한 지영의 모습에 시선을 외면하고 있던 태연이 재빨리 양손을 모아 잘못을 빌었다.

태연의 사과를 시작으로 다른 소녀들도 사과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정성이 듬뿍 들어간 쌈을 지영에게 건네주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거부하던 지영이 쌈을 받아먹다가 어느새 화가 사르르 풀려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자신의 기분 변화를 알아차린 지영이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정말 미워할 수 없는 언니들이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지영이었다. 그러면서 조용히 침묵한 채 소녀들이 고기를 먹는 장면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화기애애한 모습이 더없이 보기가 좋다.

그런 지영의 눈에 한 장면이 눈에 들어온다. 바로 주현이 유리에게 쌈을 권유하는 모습이었다.

주현은 고기만 날름 집어먹는 유리를 보더니 말한다.

“언니! 고기만 먹으면 살 쪄요. 파절임이랑 같이 드세요. 여기 야채도 많잖아요.”

“알았어. 그렇게 할게.”

말은 그런다고 해놓고 고기만 소금에 찍어서 먹는 유리였다.

그러한 유리의 모습에 주현이 콧김을 강하게 뿜어내더니 상추와 깻잎을 겹쳐놓고 그 위에 고기와 파절임, 마늘을 올리고 쌈장을 살짝 올린 뒤 싼다. 그리고는 유리에게 내민다.

“자, 언니. 고기를 먹을 땐 이렇게 먹는 거예요. 아, 하세요.”

어린 아이 주먹 정도로 보이는 거대한 크기의 쌈을 본 유리가 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젓는다.

“자, 잠깐만. 주현아, 나는 그냥 고기가 더 좋…….”

“어서 드세요! 자, 제가 먹여드릴 테니 아, 하세요.”

주현이 강하게 말하자 유리의 몸이 부르르 떨린다. 그리고는 이내 고개를 푹 숙이더니 이내 주현을 향해 입을 벌린다.

말 잘 듣는 어린 아이 같은 유리의 모습에 주현이 싱긋 미소를 지어보이더니 쌈을 유리의 입에 넣어주기 시작한다. 너무 커서 그런지 유리가 컥컥! 거리며 기침을 했지만 주현의 눈치를 보더니 이내 오물오물 씹고는 꿀꺽 삼킨다.

“그렇게 드셔야 되요. 아셨죠? 고기만 먹으면 살이 찌고 영양 불균형이니까요. 힘드시면 제가 쌈을 만들어드릴게요.”

“아, 아니야! 내가 쌈 싸서 먹도록 할게. 그러니 제발 진정해줘, 주현아!”

그러면서 황급히 쌈을 싸서 먹는 유리였다.

그 모습을 보며 주현은 싱긋 웃음을 짓는다.

“하아! 너는 못 당하겠어, 정말. 어디서 너 같은 애가 나왔는지 몰라.”

“그런 말은 본인 앞에서 하면 실례라고요.”

정확한 지적까지. 유리의 입에서 다시 한숨이 흘러나온다.

“난 몰라. 에휴!”

‘이거다.’

유리를 완벽하게 제압하는 주현의 모습을 보면서 지영이 눈을 빛냈다. 또 다른 적합한 대항마를 찾은 듯하였다. 물론 순규를 먼저 포섭한 상황이었기에 당장 주현을 포섭할 수 없을 테지만 유리를 제압하는 모습을 본 것은 상당한 성과였다.

사람이 많아질수록 다각 구도가 되어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느라 힘을 다 소모할 테니까.

우선은 지켜보면서 차근차근 결정을 내려도 될 일이었다.

지영이 계획한 본격 다각구도는 좀 더 복잡해질 예정이었다.

순규를 포섭한 가운데 주현을 포섭할지는 지켜볼 일이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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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마음을 울리는 음악 시즌2 제1화 +10 15.04.17 7,376 95 10쪽
37 ▲▲▲▲▲시즌2 시작!▲▲▲▲▲ +5 15.04.17 5,425 65 1쪽
36 마음을 울리는 음악 106장-108장 +8 15.04.16 6,414 106 230쪽
35 마음을 울리는 음악 103장-105장 +1 15.04.16 4,244 82 3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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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마음을 울리는 음악 34장-36장 +8 15.04.16 9,524 189 322쪽
11 마음을 울리는 음악 31장-33장 +8 15.04.16 10,355 261 345쪽
10 마음을 울리는 음악 28장-30장 +5 15.04.16 10,659 260 277쪽
9 마음을 울리는 음악 25장-27장 +7 15.04.16 11,040 267 233쪽
8 마음을 울리는 음악 22장-24장 +4 15.04.16 10,924 261 198쪽
7 마음을 울리는 음악 19장-21장 +4 15.04.16 11,492 270 216쪽
6 마음을 울리는 음악 16장-18장 +5 15.04.16 11,543 242 163쪽
5 마음을 울리는 음악 13장-15장 +5 15.04.16 14,536 297 237쪽
4 마음을 울리는 음악 10장-12장 +8 15.04.16 13,737 352 171쪽
3 마음을 울리는 음악 7장-9장 +10 15.04.16 14,552 362 142쪽
2 마음을 울리는 음악 4장-6장 +11 15.04.16 16,837 421 120쪽
1 마음을 울리는 음악 프롤로그-3장 +47 15.04.16 29,899 545 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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