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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번 님의 서재입니다.

마음을 울리는 음악

웹소설 > 작가연재 > 팬픽·패러디, 현대판타지

김현우
작품등록일 :
2015.04.16 13:27
최근연재일 :
2015.06.01 17:02
연재수 :
5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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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96,4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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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4.16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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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98쪽

마음을 울리는 음악 43장-45장

DUMMY

제43장 드라마 제의




졸업식은 많은 이슈를 만들어내며 끝을 맺었다.

특히 이슈가 된 것은 다름 아닌 다크 스타에 올라온 ‘현의 마이 획득!’ 이라는 게시글이었다.

창현과 같은 반이었던 3학년 2반의 반장 홍지경이 창현에게서 얻어낸 마이를 사진으로 찍어 올렸던 것이다.

당연히 게시글이 올라오자 다크 스타는 난리가 났다.

단추가 모조리 떨어진 채 푸른색 명찰로 강창현이라 되어 있는 마이 귀퉁이에는 현의 싸인이 되어 있었기에 진품이라는 것을 인증했기에 그렇다.

창현이 다니던 중학교 교복인 데다가 3학년을 상징하는 명찰, 그리고 귀퉁이에 새겨져 있는 싸인까지. 가짜라고 생각할 수 없는 진품이었다.

그것을 본 팬들은 3년 동안 현의 체향(?)이 배어 있는 마이를 획득한 사람에게 부러움을 감추지 않았다. 저 정도 되면 일전의 일일 카페에서 경매로 판매한 목도리보다 더욱 유니크한 물품이었기에 그런지도 모른다.

어떤 회원은 무려 500만원을 제시하며 그것을 자신에게 판매하라고 할 정도였다.

하지만 단호히 거절을 하였고, 한동안 현이 입던 교복은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며 화제가 되고 있었다.

현의 인기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는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외에도 현의 조끼와 와이셔츠 등을 입수한 동급생들의 자랑으로 인해 현의 애장품은 그 값이 대단하다고 평가받게 되었다.

무엇보다 가장 화제가 되었던 것은 졸업식에서 현이 불렀던 <February>였다. 졸업이라는 배경에 절묘하게 어울리는 멜로디가 추운 날 따뜻한 희망의 씨앗이 되어 사람들의 감수성을 자극한 것이다.

현의 팬 중 한 사람이 촬영을 하여 동영상으로 올린 상태고, 동영상이 널리 퍼지게 되고 급기야 기사화가 되면서 단숨에 디지털 음원 차트 상위권으로 치고 올라간 케이스였다.

무대를 갖는다는 것 자체가 PR이 되는 셈이었다.

“졸업을 하니 뭔가 허전하네…….”

졸업 이후 느껴지는 심경에 창현은 2층 녹음실에서 밖을 내다보면서 중얼거렸다.

학교에서 얽매이던 것이 해방되면 뭐든지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동안 자신을 옭아매던 고리를 제거한 셈이니 말이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달랐다.

졸업을 함으로써 더 이상 자신을 구속하는 것이 없어졌으면 무언가 상쾌한 기분이 들어야 하지만 그런 느낌보다는 공허한 느낌이 강했다.

당장이라도 무슨 일이든 의욕적으로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것보다는 무기력하게 축 늘어진 기분이랄까, 그런 느낌이 더 강했다.

“하아! 세상 일이 쉽지는 않구나.”

결코 창현의 입에서 나올 법한 말이 아니었지만 지금 창현의 심정이 그러했다.

졸업하면 뭐든지 다 될 것 같았는데 그렇지 않으니 세상사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느꼈다랄까.

이대로 가다가는 슬럼프를 겪을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났다.

“후우! 고민이구만, 고민.”

슬럼프라는 것은 무서운 것이다.

무슨 일에 손을 대려고 해도 흥미가 생기지 않으니 말이다.

억지로라도 임해서 슬럼프를 타파하는 방법이 있지만 이것은 궁극적으로 악수였다.

무슨 일을 하던 간에 즐기는 마음을 중요시 여기는 입장이니 만큼 갑작스러운 허탈함의 습격은 창현으로 하여금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뭘 어떻게 해야 한담.”

여태까지 창현에게 슬럼프가 찾아온 적은 없었다.

음향총서를 얻고, 자신의 실력에 자신감을 얻게 된 창현은 그 후부터 그야 말로 탄탄대로를 걸어왔다.

곡을 작곡하는 것에서 자신의 느낌을 담는 것 자체에 즐거움을 느꼈고, 가사를 짓기 위해 각종 서적을 읽으면서 공부를 하는 것조차 즐거웠다. 그리고 자신의 느낌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노래를 하는 것도 즐거웠다.

모든 것 하나하나 즐거웠던 것이다.

그런 만큼 갑작스러운 슬럼프는 창현을 혼란스럽게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었고, 결과적으로 악영향을 초래하고 있었다.

의욕적인 모습은 사라진 채 축 늘어진 모습이랄까.

이런 모습은 하루 동안 그러는 것이 아니라, 2월 7일인 오늘까지 내내 이어지고 있었다.

“회사에 가봐야겠네. 지영이 트레이닝을 봐줘야 할 시간이니까.”

시계를 본 창현은 지영의 보컬 트레이닝을 봐줘야 할 시간이 되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리고는 자신을 데려가기 위해 온 벤에 탑승하여 회사로 향한다.


“수고했어, 지영아.”

회사에 도착한 창현은 먼저 도착해 있는 지영을 데리고 회사 내 녹음실로 가서 보컬 트레이닝을 봐주었다.

결혼식에서 노래를 한 번 불러보았음일까.

그 후로 지영은 놀라울 정도의 열정을 보여주고 있었다.

결혼식장에 있던 사람들의 숫자는 많지 않았지만 하나같이 기획사에 관련된 실무진이었다는 점과, 현재 가요계를 주름 잡는 아이돌 가수들 앞에서 노래를 불렀다는 것이 큰 경험이 되었는지 지영은 부쩍 의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의욕적인 만큼 실력도 부쩍 느는 모습이었다.

차근차근 기초를 다져나가는 상황이었기에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천천히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네, 감사합니다.”

자신의 실력이 서서히 늘고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일까?

예전에는 수동적으로 임하던 지영도 무척 적극적으로 보컬 트레이닝에 임하고 있었다.

“그래, 잘하고 있어. 꾸준히 트레이닝을 받으면 더 잘할 수 있을 거야. 그러니 연습 게을리 하지 말고, 쉴 때는 반드시 쉬어야 돼. 알겠지?”

규칙적으로 트레이닝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중간에 휴식을 취하는 것도 트레이닝 못지않게 중요하였다. 휴식을 제대로 취하지 않은 채 트레이닝만 하면 실력이 늘어나기는커녕 도리어 목만 상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기에 그렇다.

조급한 마음을 갖지 않고 차근차근 계단을 하나씩 밟고 올라가는 것처럼 차분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중요했다.

“알겠어요. 그런데 오빠, 무슨 일 있으세요?”

고개를 끄덕이던 지영이 창현을 보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트레이닝을 할 때는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트레이닝이 끝난 지금, 창현의 모습이 마음에 걸렸던 탓인지 물은 것이다.

지영의 말에 창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일? 있어 보이나? 흐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듯한 모습을 보였지만 속으로는 뜨끔한 창현이었다. 설마 지영이 예리하게 자신의 상태를 알아차릴 줄은 몰랐던 것이다.

‘내가 그렇게 티를 내고 있었나? 조심해야겠네.’

자신이 제대로 컨트롤 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며 창현은 슬쩍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아무 일도 없으니까 그런 걱정은 할 필요 없어. 지영이 네가 조금 예민해서 그렇게 느낀 걸 수도 있지.”

“그런가? 그럴 수도 있겠네. 요즘은 집에 혼자 있으니까.”

신혼여행 중이었기에 지영은 요즘 혼자서 집에 머물고 있었다. 창현과 함께 있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창현의 집 앞에 늘 머물고 있는 팬들로 인하여 통학이 자유로울 수 없다는 판단 하에 혼자 살게 된 것이다.

지선은 물론 석규와 창현도 걱정했지만 혼자서도 잘할 수 있다는 지영의 말에 결국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그럼 트레이닝이 끝났으니 어떻게 할래? 집에 갈 거야?”

창현의 말에 지영이 생각에 잠겨 있다가 말한다.

“음! 조금 기다렸다가 오빠랑 같이 저녁 먹으면 안 돼? 집에 아무것도 없어서…….”

현재 시간은 다섯 시. 저녁을 먹기에는 애매한 시간이었다. 게다가 트레이닝이 끝난 뒤 창현은 세희와 스케줄 논의를 해야 한다.

“그것도 나쁘지 않겠네. 그럼 조금만 기다려. 금방 이야기를 하고 올 테니까.”

“응!”

그렇게 지영의 대답을 들은 창현이 회의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다섯 시에 세희와 스케줄 논의를 위해 회의실에서 만나기로 했기에 그렇다.

회의실 안으로 들어선 창현은 자신이 조금 늦은 것을 깨닫고는 사과를 하였다.

“제가 좀 늦었네요, 미안해요, 누나.”

서류를 검토하고 있던 세희는 창현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시계를 확인하고는 고개를 젓는다.

“응? 아냐. 트레이닝이 다섯 시에 끝나는 걸 아니까 어느 정도 늦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해. 그보다 앉아, 스케줄에 대해 이야기 나눌 게 있어서.”

보통 커다란 스케줄을 제외하고는 자잘한 스케줄은 일주일 단위로 한 번씩 이야기를 나눈다.

자잘한 스케줄 이야기가 나오고, 세희가 스케줄의 장점과 단점에 대해 설명을 해주면, 창현이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생긴 의문에 대해 질문을 하고, 세희가 답을 해주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그 답을 들은 창현이 최종 결정을 내리는 것이고 말이다.

스케줄에 대한 이야기가 모두 끝났을 무렵, 세희가 창현을 보면서 조용히 물었다.

“창현이 너 무슨 걱정이라도 있는 거야?”

그 말에 창현은 겉으로 아무런 티도 내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다소 놀란다. 지영이도 그렇고 세희도 자신의 심정을 알아차린 것이다.

‘내가 허술한 건가?’

순간 자신이 허술한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고개를 갸웃하면서 창현이 세희에게 되물었다.

“걱정이라뇨? 그게 무슨 말이죠?”

“티를 내지 않으려고 해도 다 알아내는 수가 있어. 졸업식 이후로 뭐라고 해야 될까. 좀 늘어진 느낌이랄까? 그런 느낌이 나는데?”

정확하게 창현의 상태를 꿰뚫어보는 세희였다. 아무래도 창현의 매니저이다 보니 세세한 것들까지 살필 수밖에 없었고, 그가 졸업식이 끝난 3일 전부터 묘하게 늘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묻는 것이었다.

아직 어설픈 면이 남아 있지만 그래도 톱스타 현의 매니저였기에.

그가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알아야 합당한 결론을 내려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에 묻는 것이다.

창현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한 세희의 모습에 피식 웃음을 지으면서 입을 열었다.

“들켰네요. 요즘 기분이 좀 그래서요.”

그러면서 자신의 상태에 대해 설명을 하는 창현이었다.

“…….”

그 이야기를 듣고 있는 세희의 표정은 점점 굳기 시작했다.

심각하게 굳어가는 세희의 표정을 보면서 창현은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이야기를 끝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세희에게 말했다.

“저는 지영이랑 저녁 먹기로 했거든요. 누나도 같이 드실래요?”

창현의 물음에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던 세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난 업무가 남아 있어서. 난 괜찮으니 맛있는 거 사먹어.”

“그럼…….”

그 말과 함께 살짝 고개를 숙인 창현이 회의실을 벗어났다.

회의실에 혼자 남게 된 세희의 표정은 심각해져 있었다.

“이거 큰일인데…….”

창현은 별 거 아닌 것처럼 이야기를 했지만 세희는 창현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단순한 슬럼프라고 이야기를 했지만 세희는 언젠가 창현이 이런 상황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인간이란 동물은 목적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경쟁을 해야만 능력 이상의 것을 발휘하고, 의욕을 갖게 된다.

그런 면에서 입각하면 창현은 진즉에 목표를 상실한 가수였다. 정확하게 창현의 목표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세계 최고의 자리를 경험해보았고, 아낌없는 사랑도 받아보았다.

즉, 가수로서 모든 영광을 다 누려보았다는 뜻이 된다.

이런 상황에서 찾아온 슬럼프란 것은 결코 가벼이 넘길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늘어질대로 늘어지고는 그대로 주저앉는 수도 있으니 말이다.

물론 이것은 심한 비약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다. 항상 창현을 최상의 상태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 그녀의 임무인 걸 감안하면 최악의 상황은 언제든지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일이 제법 심각한데. 나 혼자서 해결책을 제시할 수도 없고. 그럼…….”

세희가 고민에 잠겼지만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자 떠오른 방법은 결국 하나 뿐.

핸드폰을 연 세희는 전화번호를 검색해보았다.

그러자 등장하는 저장된 이름은 다름 아닌 AA엔터테인먼트 사장님 강석규였다.

신혼여행을 가면서 석규는 세희에게 가급적 전화를 하지 않되 급한 일이 있으면 전화를 하려고 하였다.

큰일들을 처리해놓았다고 하지만 사장인 자신의 의견이 필요한 순간이 있을 것이라 판단했기에 그렇다.

달콤한 신혼여행을 만끽하고 있을 것이기에 가급적 전화를 하지 않았지만 지금 일 같은 경우는 도저히 자신의 선에서 끝낼 자신이 없었다.

‘보통 같아 보여도 상황이 제법 심각하니까.’

그렇게 판단을 하고 있었기에 전화를 거는 세희의 표정은 무척 심각하였다.

이번 일이 잘못되면 창현의 가수 인생에 있어 큰 악영향을 끼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기에 그렇다.

♩♪♬

컬러링 소리가 들려오면서 신호가 가기 시작한다.

초조한 마음으로 얼마나 기다렸을까.

건너편에서 딸칵! 하는 소리와 함께 석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세희는 재빨리 입을 열어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사장님! 저 윤세희입니다.”

-아… 윤 매니저인가? 무슨 일로 전화를 한 건가?

의아한 목소리를 한 석규가 세희에게 용건을 물었다. 가급적 급한 일이 아니면 전화를 하지 말라고 한 만큼 세희가 무슨 용건으로 전화를 했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그에 세희는 재빨리 생각을 정리하더니 입을 열기 시작한다.

“심각한 사안이 있어서 전화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신혼여행 중이시지만 워낙 급한 일이어서요.”

세희의 급박한 목소리에서 사태의 심각함을 느낀 것일까.

건너편 석규의 목소리도 평소보다 낮게 가라 앉았다.

-그런가? 말해보게.

“네, 실은…….”

세희는 창현이 겪고 있는 증상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하였다.

그가 슬럼프에 걸린 것과 현재 상황에서 슬럼프가 어떻게 악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 그리고 자신이 생각하는 것들까지 곁들이면서 석규에게 설명을 하였다.

“…이렇게 되었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장님.”

말을 모두 끝낸 세희가 석규의 의견을 구했다.

-…으음! 심각한 상황이군. 윤 매니저의 말처럼 그렇게 될 확률도 높고 말이야.

잠시 침묵하던 석규가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 내용은 세희의 말에 전반적으로 동의하는 내용이었다. 그녀의 생각은 일리가 있었고, 충분히 그렇게까지 번질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런 만큼 석규도 속 시원한 답을 내려줄 수가 없었다.

한동안 석규와 세희 사이에 긴 침묵이 감돌고 있었다. 세희는 석규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고, 석규는 무언가 방법을 떠올리고 있었다.

약 3분여의 시간이 흘렀을까.

국제 전화이기에 상당한 통화료가 부과될 것임이 분명했지만 둘 모두 그것에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잠시 후, 석규가 입을 열기 시작했다.

-심각한 만큼 확실한 방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지.

석규의 말에 세희가 깜짝 놀랐다. 방법이 있다니? 역시 사장님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기대감이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확실한 방법이 있는 건가요?”

-확실할지 안할지는 모르지만 가장 나은 처방법이겠지. 어차피 슬럼프인 이상 억지로 임하려고 해도 제대로 하지 못할 터. 오히려 안하느니만 못한 결과가 나올 수도 있지. 이럴 때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리는 것도 좋은 방법이야. 그리 되면 어느 순간 음악에 대한 굶주림을 느낄 테지. 그 정도로 음악을 사랑하는 녀석이니까. 여태까지 마음껏 음악을 했기에 늘어지고 그러는 것일 터. 적당한 완급을 줘야 할 때지.

그 말을 들으면서 세희의 뇌리에 무언가가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세희가 놀란 목소리라 석규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설마?”

-후후! 창현이에게 그 제안을 보여주도록 하고, 가급적 하는 방향으로 설득하도록 하게나. 그것이 처방전이니. 그럼 이만 통화를 끊도록 하지. 나머지는 윤 매니저가 알아서 하도록 하고.

그 말과 함께 석규는 전화를 끊었다.

“…….”

석규가 전화를 끊었음에도 불구하고 세희는 전화를 받는 자세 그대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얼마나 생각에 잠겨 있었을까.

돌연 움찔하고 몸을 떤 세희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핸드폰을 챙겨 넣는다.

“사장님의 말씀도 맞아. 그렇다면 한 번 해보는 것도 좋겠지.”

결심을 굳힌 세희의 눈에는 더 이상 망설임이란 감정이 존재하지 않고 있었다.


같은 시각, 윤아는 회사에서 보낸 벤을 타고 따로 움직이고 있는 상황이었다.

음악 방송을 끝낸 소녀시대 멤버들은 숙소로 돌아오려던 중, 돌연 회사에서 윤아는 남아 있으라고 하더니, 그녀를 데려오기 위한 벤을 한 대 보낸 것이다.

그에 여덟 멤버들은 벤을 타고 숙소로 돌아간 상태였고, 윤아는 혼자 벤에 탑승하여 SM엔터테인먼트로 향하고 있었다.

“…….”

혼자 SM엔터테인먼트로 향하는 윤아의 머릿속은 복잡하였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자신을 부르는 것인지 짐작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드라마? 예능? CF?'

아니, 짐작은 하고 있었다. 무언가 개인 스케줄을 할 것이 있기에 부르는 것이겠지.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쉽게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왜냐하면 단독 스케줄이 정해지더라도 보통 실장님이나 총 매니저가 와서 알려줄 뿐, 이렇게 직접 회사로 오라고 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기에 그렇다.

자신을 개별적으로 부를 정도라면 제법 큰일이라는 것인데… 그 상황만으로 윤아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 거야.’

의문을 참지 못한 윤아가 자신을 데리러 온 로드 매니저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무슨 일로 제가 가는 건지 알 수 있을까요.”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윤아의 기대를 저버리는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저는 윤아 양을 태워오라는 말밖에 듣지 못한 상태입니다.”

“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로드 매니저가 그런 것을 알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한편으로는 기대를 하고 있었기에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의자에 몸을 묻는 윤아였다.

잠시 후, 벤은 SM엔터테인먼트에 도착하였고, 회사 건물 안으로 들어선 윤아는 곧장 회장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걸음씩 걸음을 옮기는 윤아는 잔뜩 긴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선생님이 찾으시는 거지?’

그녀가 선생님이라 부르는 사람은 한 사람 밖에 없었다.

국내 최대 기획사인 SM엔터테인먼트 명예회장인 이수만이 바로 선생님이었다.

데뷔하고 몇 번 만나기는 하였지만 단독으로 만난 것은 라샤의 뮤직비디오 촬영 이외에는 한 번도 없었다.

그랬기에 더욱 긴장을 하는 것이었다. 제법 인지도를 쌓고 있다고 하지만 아직 소녀시대는 데뷔 한 지 반 년밖에 되지 않는 새내기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아니, 데뷔한 지 2년이 훌쩍 넘은 슈퍼주니어 멤버들도 개별적으로 만나기 힘든 것이 바로 이수만 명예회장이었다.

회장실 앞에 도착한 윤아는 잠시 후, 들어오라는 소리와 함께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안에 들어섰다. 그리고는 수만의 모습이 보이자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를 하였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윤아의 인사에 수만이 살짝 미소를 짓더니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한다.

“그래, 어서 오너라, 윤아야. 이리 앉아라.”

수만의 말을 들은 윤아가 조심스럽게 맞은 편 소파로 향하더니 조심스럽게 앉았다.

그러자 수만이 윤아를 보더니 말했다.

“음, 윤아가 뭘 좋아하더라. 녹차로 하려는데 괜찮겠지?”

“네? 네. 아무거나 상관없어요.”

“그럼, 미스 최, 여기 녹차 둘로 준비해줘.”

녹차 둘을 주문한 수만은 차가 나오기를 기다리면서 윤아에게 소소한 질문을 하였다.

“그래, 요즘 스케줄은 어떠냐?”

수만의 물음에 윤아는 솔직하게 대답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힘들지는 않아요. 서서히 인지도가 쌓이는 것 같고요. 언니들하고 주현이도 모두 열심히 하려고 하고 있어요.”

“음! 그렇게 생각하니 다행이구나. 그래, 이왕 시작을 했으면 정상의 자리를 노려야겠지. 숙소는 불편함이 없고?”

“네, 별로 불편한 점은 없는 것 같아요.”

처음에는 아홉 명이나 되는 멤버들이 함께 살았기에 불편한 점도 존재했지만 지금에 이르러서는 그것이 익숙해진 상황이었다. 약간씩 양보를 하고 살다 보니 오히려 서로를 배려해주는 점이 생기게 되어 좋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숙소에 한 명만 없어도 무척 허전한 느낌이 들고는 하였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녹차 두 잔이 나왔고, 수만과 윤아는 이야기를 멈추고는 녹차를 들기 시작하였다.

조용히 한 모금을 든 뒤, 다시 한 번 녹차를 마신다.

윤아는 여전히 긴장을 풀지 않은 채 조용히 녹차를 마시고 있었다.

한동안 조용한 감돌던 침묵은 수만이 입을 열음으로써 끝을 맺었다.

“내가 왜 불렀는지 의아할 것이다.”

“…네.”

솔직한 심정이었기에 윤아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에 수만은 살짝 웃음을 짓더니 윤아에게 말했다.

“내가 너를 부른 이유는 간단하다. 소녀시대의 인지도를 비약적으로 치솟게 만들 기회가 왔기에 너를 부른 것이다. 소녀시대 내에서 너밖에 할 수 없는 것이기에.”

“인지도를 높일 수 있는 기회라고요? 그게 정말인가요?”

수만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는 윤아였다. 수만이 저렇게 말을 할 정도면 범상치 않은 기회임이 분명했다.

놀란 그녀의 모습에 수만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분명 큰 기회가 될 것이다. 어쩌겠느냐, 해보겠느냐?”

“물론이에요! 해보겠어요. 시켜만 주세요.”

힘차게 대답하는 윤아였다. 지속적인 활동으로 차근차근 인지도를 쌓아나가고 있지만 그것만으로 갈증이 해소되지 않았다.

그녀의 대답에 수만은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좋다. 네 의욕이 대단한 듯하니 이쪽에서도 힘을 써보도록 하마. 네가 할 것은 다름 아닌 드라마 출연이다.”

“드라마 출연이요?”

윤아는 자신의 예상이 맞았다는 것을 느꼈다.

개인적으로 부른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개인 활동을 뜻하는 것. 그리고 개인 활동의 대표적인 것이 드라마와 예능, CF였다.

그중에서 하나일 것이라 생각했으니 자신의 예상은 들어맞은 셈이다.

다만 그녀가 의문을 느끼고 있는 것은 왜 수만이 자신을 불러서 이것을 직접 말하느냐였다.

‘도대체 왜?’

이미 드라마에 출연한 적이 있는 윤아로서는 그런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당시 자신이 드라마에 출연할 때도 수만이 아닌, 실장님에게 이야기를 전해 듣고 오디션에 응시하여 배역을 따냈던 것이다.

이번에도 그런 케이스가 될 수 있지 않은가?

이해가 되지 않는 윤아에게 수만이 입을 열었다.

“이번 드라마는 아주 중요하다. 잘만 하면 소녀시대의 인기를 비약적으로 끌어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윤아 너를 중점으로 하여 말이다.”

순간 윤아의 눈이 흔들린다. 수만의 말에 혹한 모습이었던 것이다.

믿기지 않는 듯 윤아가 자신을 가리키며 말한다.

“저를 중점으로요……?”

“그래, 너를 중심으로.”

확신에 가득 찬 수만의 모습에 윤아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물론 그 말을 하지 않더라도 지금 소녀시대의 인기는 자신을 중심으로 분포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노래를 부를 때 센터를 자주 차지하는 것이 바로 그 증거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자신이 가장 인기가 많은 것은 아니었다. 태연과 미영이 언제라도 뒤집을 수 있을 정도로 막강한 인기를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었고, 다른 멤버들도 점차 인지도를 쌓아나가고 있는 실정이었던 것이다.

결정적인 건 아직 소녀시대가 데뷔 초반이라는 점이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인기 구도가 어떻게 변할지 누구도 모른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나와 소녀시대 멤버로 합류하지 않았는가? 그 때문에 윤아는 멤버들이 얼마나 다양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서로 인기를 얻으면 축복을 해주고는 하지만 그 속에는 묘한 경쟁심이 존재하고 있었다.

윤아 또한 신경 쓰지 않는 척하지만 인기 구도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랬기에 자신을 중심으로 소녀시대의 인지도를 끌어올릴 수 있다는 말에 혹할 수밖에 없었다.

구미가 당기는 모습을 하자 수만은 갑자기 표정을 굳히면서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 가수로서 인지도를 쌓아나가게 하고 싶지만 그것이 어렵지 않더냐. 계속해서 꾸준히 인지도를 쌓아나가는 것도 방법이지만 원더걸스가 컴백을 준비하고 있는 실정이고.”

“…….”

원더걸스가 언급되자 윤아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 이름이 소녀시대에게 주는 압박감은 상상을 초월하고 있던 것이다.

2007년 8월 싱글 앨범 <다시 만난 세계>로 데뷔한 이래 정규 1집 <소녀시대>에 이어 <Kissing You>로 활동하고 있는 소녀시대는 서서히 자리를 굳혀나가고 있는 실정이었다. 아홉 명의 각양각색 매력을 발산함으로써 팬 층을 형성하고 있었고, 처음 계획하던 프로젝트로서의 움직임도 서서히 탄력을 받고 있는 실정이었다.

하지만 소녀시대에게 가장 괴로움을 안겨다주는 것은 다름 아닌 원더걸스의 존재였다.

<Tell Me>라는 곡으로 단번에 원더걸스를 대세로 만들어버린 그 저력은 무시무시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것이다.

게다가 원더걸스가 컴백할 것이란 이야기는 소녀시대에게 큰 영향을 끼칠 것임이 분명했다.

<소녀시대>와 <Kissing You>도 어찌 보면 원더걸스와 겹치지 않게 활동을 하고 있는 실정이었으니 말이다.

윤아의 표정이 살짝 굳자, 그것을 확인한 수만이 입을 열었다.

“지금 상황에서 원더걸스와 정면 대결을 하는 것은 무모하다. 하지만 시간은 너희들이 편이다. 너희들의 노력은 결코 원더걸스보다 부족하지 않다. 차근차근 인지도를 쌓아나가면 원더걸스를 뛰어넘을 수 있을 터. 그리고 그 기회로 삼는 것이 바로 지금의 드라마다. 이것을 반드시 잡아야 소녀시대가 더 높은 고지로 올라서기 위한 발판을 마련할 수 있다.”

수만이 이렇게 말할 정도라니.

윤아는 수만의 말을 들으면서 원더걸스를 뛰어넘을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듬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무슨 드라마이기에 이렇게까지 확신을 하는지 궁금하였다.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한 윤아가 수만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도대체 드라마가 어떤 것이기에 그러시는 거죠?”

“그러고 보니 드라마를 말하지 않았구나. 이걸 보아라.”

그렇게 말을 한 수만이 윤아에게 A4용지 뭉치를 건넸다.

딱 보니 드라마의 시나리오인 듯하다.

그것을 받아든 채 윤아가 어중간한 포즈를 취하자, 수만이 손짓을 하였다.

“괜찮으니 읽어보아라.”

“네…….”

수만의 허락이 떨어지자 윤아는 A4용지를 펼쳐 드라마 시나리오를 읽기 시작했다.

시나리오를 읽는 윤아의 눈이 크게 뜨였다가 본래대로 돌아오기를 반복하였다.

마침내 시나리오를 다 읽은 윤아가 A4용지를 내려놓으면서 가볍게 한숨을 내쉰다.

“후…….”

“어떠냐?”

윤아에게 슬쩍 드라마 시나리오의 느낌을 묻는 수만이었다.

그에 윤아는 움찔 몸을 떨더니 이내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말했다.

“정말 재미있어요. 시나리오만 읽었는데 몰입도가 대단하던 걸요? 이야기도 이야기지만 다양한 연령층을 사로잡을 수 있는 드라마 같아요.”

아직 보는 눈은 부족하지만 사람들이 공통으로 느끼는 것이 있지 않은가?

바로 대박작품에 대한 느낌은 누구 가릴 것 없이 같다는 것.

윤아 또한 나름 연기를 배우고, 드라마에 출연한 적이 있기에 지금 이 시나리오를 읽는 것만으로도 드라마가 어떻게 전개될지 상상할 수 있었고, 중간에 삐끗하지만 않으면 상당한 성과를 이룰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왜 수만이 인지도를 높일 수 있는 기회라 했는지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이런 드라마에 출연하여 이름을 알릴 수 있다면 자신의 인지도는 물론이고, 소녀시대의 인지도도 덩달아 끌어올릴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여러 가지 고려해야 할 점이 있다.

첫째는 바로 배역이었다.

드라마는 배역에 따라 인기를 얻느냐 얻지 못하느냐가 확연하게 갈린다. 그렇기에 무슨 배역을 받느냐가 무척 중요했다.

둘째는 바로 연기력이었다.

좋은 배역을 따놓는다고 하여 모두가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배역을 충분히 소화할 수 있는 연기력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유감이지만 윤아는 아직 연기력이 부족한 실정이었다. 자신이 소화하지 못할 배역은 결국 드라마를 망치는 요소로 전락하게 될 것임이 분명했다.

제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너무 많이 먹게 되면 체하듯이 말이다.

그걸 생각한 윤아는 수만을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기서 제가 무슨 배역을 얻어내야 하는 거죠?”

“그걸 말하지 않았군. 윤아 네가 얻어내야 할 배역은 주조연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윤아의 얼굴에 살짝 놀라움이 서린다.

“주조연이라고요?”

주조연이면 조연이되 그 비중이 무척 큰 비중이 아닌가?

무척 부담이 되면서 한편으로는 두근거렸다.

잘 소화해내기만 하면 주연보다 더 많은 인기를 얻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주조연이었다.

놀란 표정을 짓는 윤아의 모습에 수만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주조연이다. 시나리오를 보면 주인공을 좋아하는 재벌가의 영양이 있지 않느냐? 그 배역을 얻어내야 한다.”

“확실히 그 배역은…….”

나직이 중얼거리는 윤아는 큰 기회가 왔다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방금 시나리오를 읽어본 바에 의하면 자신에게 배정된 주조연 자리는 지고지순한 사랑을 하지만 주인공에게 외면을 당하는 비운의 여인이다. 그리고 주인공이 가진 것 없는 히로인을 좋아하게 되자 복수의 화신이 되어 주인공과 히로인의 사랑을 방해하는 역할을 한다.

지고지순한 사랑과 버림받는 역이라는 점에서 사람들의 동정을 끌어내고 지지를 얻을 수 있는 역할이었다.

다만 걸리는 점이 있다면 복수의 화신이 된다는 점인데.

이것을 잘못하면 오히려 안티만 늘리고 배역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다 하여 연기력 논란에 휩싸일 소지가 다분했다.

“하지만 배역이 조금 어려울 것 같은데…….”

복수의 화신이라니.

엄청난 분노를 내뿜으며 표정 연기를 해야 하는 것이었기에 윤아는 자신 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윤아의 모습에 수만은 눈썹을 찡그리더니 윤아에게 묻는다.

“자신이 없는 게냐?”

“하고는 싶지만 만약에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회사와 멤버들에게 누가 될 것 같아서요.”

잘할 경우 대박이지만 제대로 못할 경우도 염두에 두어야 했다. 드라마는 잘 흘러가는데 자신이 누가 되어 욕을 먹는다면? 그것도 무척 힘든 일임이 분명했다.

“정말 힘들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하고는 싶지만요…….”

이렇게 의견을 말하지만 어차피 자신의 의견보다는 회사의 의견이 더 중요하다.

자신 없다는 식으로 말을 했지만 윤아는 많이 갈등하고 있었다.

자신이 열심히 하기만 한다면 기회는 오는 셈이었다.

하지만 못할 경우는?

잘해낼 경우와 못할 경우를 생각하면서 치열하게 계산에 계산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렇게 그녀가 고민에 잠겼을 무렵, 수만의 아쉬움이 담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쉽군, 캐스팅 멤버들이 무척 호화스럽고 시나리오도 좋아서 대박 조짐이 보이는데.”

아무래도 포기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이대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머리에 감돌 때, 윤아의 뇌리에 호화 캐스팅 멤버라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그에 윤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호화 캐스팅 멤버가 누구인지 알 수 있을까요?”

고민이 되는 상황에서 캐스팅 멤버를 듣고 마음이 바뀔 수도 있지 않을까?

윤아의 질문에 수만은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입을 열기 시작한다.

“음, 아직 확정되지는 않았지만 상관없겠지. 대신 다른 사람들에게는 말하지 말아야 한다. 남자 주인공 역으로는 현이 후보에 오른 상태고…….”

그 말과 함께 줄줄이 캐스팅 멤버를 거론하는 수만.

그러나 윤아의 사고는 멈춰 있었다. 수만의 입에서 남자 주인공 역으로 창현이 후보에 오른 상태란 말에 일순간 사고가 마비된 것이다.

수만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윤아의 입이 열린다.

“저도 드라마 배역을 따도록 할게요. 그렇게 호화 멤버들이 뭉치는데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죠.”

“그, 그러도록 하여라.”

갑자기 의욕이 충전된 윤아의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짓는 수만이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허락한다.

어쨌든 목표는 윤아의 드라마 참여였으니 말이다.

그렇게 윤아의 드라마 참여가 결정되었다.

SM엔터테인먼트가 물심양면으로 힘을 쓰고, 오디션에 합격해야 한다는 전제가 붙겠지만.


다음 날, 창현은 갑작스러운 세희의 호출에 의아한 표정을 한 채 회사로 찾아왔다.

“갑자기 무슨 일이에요?”

창현으로서는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어제 스케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던가?

이야기가 끝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자신을 찾다니, 의아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창현을 보면서 세희가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할 말이 있어서 불렀지 뭐 때문에 불렀겠어.”

“그렇죠?”

오늘은 지영의 보컬 트레이닝도 없는 날이었기에 창현은 편한 자세를 취하며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는 공 들여 끓인 생강차를 마시면서 눈을 감았다.

아주 포근한 느낌이 드는 게, 기분이 무척 좋았다.

세희는 창현을 보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슬럼프는 어때? 아직도 좀 그래?”

“슬럼프요? 흐음! 조금 그렇긴 해요. 뭐랄까, 꽉 막힌 느낌이랄까.”

슬럼프란 말에 생각에 잠겨있다가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는 창현이었다.

어제 세희에게 슬럼프 여부에 대해서 말을 하기는 했지만 속이 시원하다기보다는 여전히 답답한 마음이었다.

세희 이전에 지영도 자신의 이상 기류를 눈치 채지 않았던가. 그 뒤를 이어 세희에게도 들키자 창현은 자신이 그렇게 노골적으로 티를 내지 않았나 생각을 해야만 했고, 슬럼프가 무엇인지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간단하였다. 그동안 억눌러왔던 감정이 폭발했다는 것이 바로 결론이었다.

세희가 짐작했던 것처럼 창현은 이룰 수 있는 모든 목표를 이룬 상태였다. 음반 판매도, 절정의 인기도, 차트 1위를 차지하는 것도 모두 잃은 창현은 목적을 잃은 채 공황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탁월한 마인드 컨트롤이 있었기에 그것이 표면화 되지 않고 있던 것이다.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는데 익숙했던 창현은 자신의 이상 기류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저 기분이 조금 나쁜 것이라 단정 짓고 있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다니던 학교를 졸업하게 되었다.

평범한 학생이라면 중학교 이후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것은 당연한 일. 하지만 창현은 고등학교 진학을 선택하지 않았고, 음악에 모든 것을 쏟아 붓기로 결심을 하였다.

그것이 여태까지 조여오던 긴장감을 해방시키는 촉매제였다.

중학교를 졸업하게 되면서 그와 동시에 그동안 목표로 삼아오던 것을 잃게 되었던 것이다. 그로 인해 자신의 목표가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되었고, 뜻대로 되지 않는 자신의 모습으로 인해 실망이 겹치게 되면서 지금의 슬럼프에 빠지게 된 것이다.

냉정하게 자신을 돌아볼 시간이었기에 창현은 자신의 상태가 어떠한 것인지 은연중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럴 경우 치료법은 간단하다.

목표를 잃었기에 실의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목표를 재조정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디 쉬운 일이던가.

자신의 상태를 알아차리는 데는 성공했지만 자신의 상태를 해결하는 것은 실패한 것이다.

목표를 설정하면 된다.

말은 쉽다. 하지만 그 목표를 무엇으로 한단 말인가? 이것을 쉽게 해결할 수 있었다면 진즉에 다른 사람들도 일찍 재기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에서 막혀버리자 창현은 갑자기 깜깜해지는 것을 느꼈다. 지금 상황이라면 음악이고 뭐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느꼈기에 그렇다.

사람들은 결코 어리석지 않았기에 이대로 무대에 선다면 자신의 상태를 단번에 알아챌 확률이 높다. 무엇보다 자신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언제나 더 좋은 노래를 부르기 위해 최고의 상태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만큼 말이다.

결국 창현은 자신의 상태를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후! 솔직히 많이 힘드네요. 목표를 잃은 것 같고요.”

“그런 것 같았어. 음, 목표라면 구체적으로 무슨 목표를 잃은 건데?”

세희는 자신의 예상이 들어맞자 고개를 끄덕이며 창현에게 물었다.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는 말이 있다. 창현의 고민은 곧 세희의 고민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녀는 창현의 매니저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충분히 그가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도움의 손길을 내밀 수 있는 자격이 있다.

그 물음에 창현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입을 연다.

“모든 목표를 잃은 것 같아요. 제 목표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음악을 만드는 것이고,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는 노래를 하는 것이에요. 그리고 가수 데뷔 후 1위를 차지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왔고, 그 목표도 이루었고요. 그것 때문인 것 같아요.”

모든 것을 이루었기에 목표가 사라졌다는 이야기였다.

그 말에 세희가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옳은 말이야.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아니,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

세희의 말에 창현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자신의 상태를 짐작하고 있었다니? 그게 무슨 말이란 말인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고요?”

“그래. 창현이 네 행보를 봐봐. 언제나 찬란했다고 볼 수 있지. 그런 만큼 언젠가 벽에 부딪칠 것이라 생각했어. 너무 잘 나가도 그에 따른 허탈함은 밀려오거든. 여태까지는 긴장감을 가지고 잘 해내왔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고 말이야. 설마 졸업식이 그 계기가 되었을 줄은 몰랐지만 말이야.”

모든 것을 짐작했다는 말에 창현은 고개를 나직이 끄덕였다.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는 느낌이 든 것이다.

“하아! 그렇군요.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럼 저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신의 고민을 세희에게 털어놓으며 조언을 구하는 창현이었다.

이것은 무척 이례적인 일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자신의 고민은 뭐든지 스스로 해결하려는 모습을 보여 왔던 창현이다.

하지만 지금은 세희에게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고, 조언을 구하고 있었다.

심지어 석규에게도 곧잘 조언을 구하지 않던 창현인 만큼 지금 상황은 무척 놀라운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창현이 세희에게 친누나와 같은 느낌을 받고 있기에 그렇다.

뭐랄까, 자신을 감싸 줄 수 있는 느낌이랄까.

어렸을 적 어머니에게 받지 못했던 느낌을 세희에게 받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세희에게 의존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고 말이다.

창현의 물음에 세희는 웃음을 지으면서 말한다.

“창현이 네 상태를 해결하는 방법은 무척 간단해. 목표를 잃었으면 새로운 목표를 설정하면 되는 거지.”

“…그건 저도 알고 있는데요.”

뭔가 기발한 해답을 바란 창현으로서는 허탈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었다.

그에 세희가 고개를 저으면서 말한다.

“말을 끊지 말고 들어봐. 새로운 목표를 설정한다는 것 자체는 무척 쉬워. 하지만 창현이 너 같은 경우에는 새로운 목표를 찾는다는 것이 무척 힘들지. 그건 알고 있지?”

“네, 무언가 목표를 찾고 싶어도 그게 쉽지가 않네요.”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 창현이었다.

처음에는 자선 사업 같은 것을 위해 순회 콘서트를 계획해보면 어떨까 싶었다. 좋은 일에 목표를 둠으로써 조금이나마 목표를 세울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곧이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좋은 일을 하는 것은 분명 좋지만 자신의 목표를 재조정하는 것과는 방향이 달랐기에 그렇다.

자신의 상황은 그보다 좀 더 심화된 상태였다. 근본이 다르다고 해야 할까? 그런 느낌이 들었다.

“쉽지가 않겠지. 그럴 수밖에 없어.”

세희도 창현의 말에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이미 부족함이 없는 상황에서 무슨 목표를 찾을 수 있겠는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창현의 상황이 생각보다 조금 더 심각하다는 것을 느낀 세희였다.

그렇다고 하여 해답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어제 밤 창현의 상태를 파악한 세희는 밤새도록 고민을 하였고, 석규에게 자문을 구한 뒤 어느 정도 그의 목표 설정에 대해 생각을 해놓은 상황이었다.

세희가 창현을 보면서 말했다.

“하지만 방법은 있어.”

“방법이요? 그걸 생각해내신 건가요?”

방법이 있다는 말에 창현의 시선이 세희에게 향했다.

그에 세희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나는 톱스타 현의 매니저잖아? 밤새도록 생각해봤지. 그리고 사장님에게도 조언을 구했고.”

“아버지에게요? 으음! 그리고…….”

자세히 보니 세희의 눈 아래 희미하지만 다크 서클이 자리한 것을 볼 수 있는 창현이었다. 아무래도 고민을 하느라 밤을 샌 듯하다. 화장으로 가린다고 했지만 자세히 보면 다크 서클이 자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자신을 위해 밤까지 샐 정도라니.

새삼 가슴이 찡해지는 것을 느끼면서 창현이 세희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방법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세희가 거침없이 말문을 열기 시작한다.

“물론이야. 창현이 네 상태를 해결하는 것은 간단해. 종목을 바꾸면 되는 거야.”

“종목이라뇨? 무슨 운동을 하라는 건가요?”

뜬금없는 세희의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짓는 창현이었다.

그에 세희가 고개를 젓는다.

“그 말이 아니야. 창현이 네 상태는 모든 것을 이룬 것에서 오는 허탈함에 의욕이 저하된 상황이거든. 이럴 경우 억지로 다른 것에 집중하는 것도 좋지가 않아. 그렇다면 아예 그것을 잊고 한동안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지. 그래서 다른 종목에 집중해보라고 한 거야.”

“아…….”

그제야 세희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한 창현이었다. 억지로 붙잡고 있어봤자 이도저도 안 되니 다른 것에 도전해보라는 뜻이다.

“다른 거라면 뭔데요? 생각한 게 있는 것 아닌가요?”

창현의 말에 세희가 A4용지 뭉치를 창현에게 건넸다.

얼떨결에 창현이 그것을 받아들자, 세희가 말한다.

“드라마 대본이야. 이제 뮤지션 현이 아니라 연기자 현이 되는 거지.”

“드라마라고요?”

황당한 표정을 짓는 창현이었다.

다른 종목을 도전해야 한다는 세희의 말에는 동의하는 바였다. 하지만 왜 하필 드라마란 말인가?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던 창현이 세희를 바라보며 물었다.

“왜 드라마인지 물어도 될까요?”

도전을 할 것이라면 많은 선택지가 존재한다.

당장 방송인이 아니어도 된다. 말 그대로 운동에 집중을 해도 되고, 평소 좋아하던 게임에 집중을 해봐도 된다.

그런데 하필이면 왜 드라마일까.

창현의 물음에 세희는 그의 손에 쥐어져 있는 A4용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간단해. 창현이 네게 드라마 제의가 왔기 때문이야.”

세희의 말에 창현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무언가 거창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을 했는데 그것이 아니었나보다.

단순히 드라마 제의가 와서 해보라는 게 이유라니.

어이없는 표정을 한 창현이 세희에게 물었다.

“그것뿐인가요? 드라마를 하라는 이유가?”

창현의 말에 세희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야. 때마침 드라마 제의가 온 것도 있지만 단순히 그렇다고 드라마를 하라고 한 거겠어? 기왕이면 새로운 도전을 하되 앞으로 창현이 너의 장래에 관련된 것에 가능성을 점쳐보고 싶은 거겠지. 요즘은 한 분야만 하는 것보다는 만능 엔터테인먼트가 대세니까.”

“만능 엔터테인먼트라… 대세를 따르라는 건가요?”

대세를 따르라는 식의 말이 창현의 심기를 건드린 듯하다.

눈썹을 꿈틀거리며 창현이 묻자 세희는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시류에 편승하라는 식의 말은 창현이 무척 싫어하는 말 중 하나였다. 언제나 자신의 독창적인 것을 추구하려는 경향이 많은 만큼 남들을 따라하라는 말은 창현이 제일 싫어하는 말이었던 것이다.

지금 연기를 하라는 것도 그렇다.

세희의 말은 언젠가 연기를 하거나 다른 분야에 도전할 일이 있는 만큼 미리 간을 보자는 뜻과 다를 바가 없었다.

창현이 불편한 기색을 비추자 세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말한다.

“그런 게 아니야. 대세에 따르란 이야기는 내 실수고, 창현이 너의 슬럼프를 타파할 다른 종목을 고를 때 기왕이면 연예계에 관련된 일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어. 어찌 보면 완전히 밑바닥 아니, 그보다 더 열악한 상황에서 도전을 해야 될 테니까.”

그 말을 듣고 있던 창현이 한결 누그러진 표정으로 세희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건 무슨 말이죠?”

열악한 상황이란 말이 창현의 호기심을 끈 상태였다.

‘후우!’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리는데 성공한 세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창현에게 설명을 하였다.

“간단한 말이야. 창현이 네가 의욕을 잃은 것은 가수로서 정점을 찍은 것에 오는 허탈함일 확률이 높아. 그런 상황에서 네가 연기에 도전한다고 하면 당연히 수많은 시선들이 집중될 것이 분명해. 그리고 그 시선은 좋든 싫든 간에 창현이 너의 연기력을 낱낱이 분해할 테지. 가수가 연기에 도전한다고 하면 색안경을 끼고 보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으니까. 그런 만큼 웬만한 연기자들이 하는 것보다 더 뛰어난 연기를 보여주어야 해. 이도저도 아닌 모습을 보이면 사람들은 더욱 날뛰면서 창현이 너를 물어뜯으려 할 테니까. 어찌 보면 이번에 실패를 할 경우 영원히 연기를 못할 정도로 큰 비난을 받을 수 있어.”

세희의 말은 사실이었고, 냉혹한 현실을 그대로 설명하고 있었다.

창현의 인기가 절정을 달리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가수로서 국한된 것이었다. CF에 출연하여 연기력을 보여주었다고 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반복된 촬영에서 누구나 해낼 수 있는 어렵지 않은 것들뿐이었다.

그런 만큼 그가 연기에 도전한다는 말은 사람들에게 있어 큰 파장을 줄 수 있지만 그것이 창현에게 좋게 작용할지에 대해서는 미지수였다.

우선 창현을 캐스팅 했다는 것 자체가 큰 이슈가 될 것은 분명했다.

이른바 이슈 마케팅인 것이다.

가수로서 정점을 찍은 현의 연기 도전.

그것 하나만으로도 큰 보도 거리가 될 것이 분명했고, 사람들은 현의 행보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될 터였다.

그뿐이겠는가.

창현의 연기를 세세하게 해부할 것이 분명했고, 잘해야 본전, 못하면 지금까지 쌓아온 이미지를 깎아먹을 우려가 있다.

연예계에 나름대로 몸을 담았던 창현이 이 정도를 예상하지 못할 리 없다.

그는 황당한 표정으로 세희를 바라보면서 말한다.

“설마 그런 마이너스 요소들을 감안해서라도 드라마를 하라는 건가요? 그건 조금 어폐가 있는 것 같은데요.”

“그건…….”

날카로운 창현의 말에 일순간 말이 턱하니 막힌 세희였다.

사실 창현의 말이 틀린 게 어디 있는가?

그런 모험을 하지 않더라도 창현은 정상의 자리에서 군림하고 있다.

굳이 모험을 하여 이미지에 손상을 입힐 짓을 할 이유가 없다는 이야기다.

말문이 막힌 세희를 보면서 창현이 말했다.

“누나가 대답을 못하는 걸 보면 답은 뻔한 거 아니겠어요? 저는 드라마를 하지 않겠어요.”

“자, 잠깐만.”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창현을 멈칫하게 만드는 세희의 목소리였다.

그에 창현이 의아한 표정을 지은 채 세희를 바라본다.

아직까지 할 말이 남은 것인가?

창현의 시선에 세희는 호흡을 고르면서 말한다.

“창현이 네가 드라마를 해야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어.”

“이유라고요?”

다른 종목에 도전해야 한다는 거창한 목표 말고 또 다른 이유가 있단 말인가?

도대체 무슨 이유인지 들어보기라도 하기 위해 창현이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세희를 바라보며 대답을 재촉하자, 다시 한 번 심호흡을 한 세희가 설명을 하기 시작한다.

“연기라는 것은 노래만큼 심오한 분야야. 그건 알고 있지?”

창현이 말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걸 알기에 하지 않으려는 겁니다. 지금 같이 어정쩡한 마음으로 연기에 임한다면 그것은 저를 캐스팅 한 감독님에게 폐를 끼치는 것이고, 아울러 드라마 전체에 피해를 끼치는 것이니까요.”

무슨 분야든 간에 창현은 가벼이 보지 않는다.

쉽게 보면 쉽고, 어렵게 보면 어렵게 보이는 법이다.

하지만 처음 단계는 쉽게 들어가다가 점점 어렵게 보일 수밖에 없다.

지금 창현에게 있어 연기란 분야는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이 말은 좋게 보면 발전의 가능성이 높지만, 나쁘게 보면 연기를 쉽게 보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연기에 임하게 되면 반드시 한계를 보이게 될 것이 분명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치느니 애초에 하지 않는 것이 낫다는 게 창현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연기는 창현이 너에게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분야이기도 해.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

“무슨 뜻이죠?”

자신에게 필요하다는 분야라는 말에 멈칫하고는 진지하게 묻는 창현이었다.

그에 세희는 차분한 안색으로 말한다.

“내가 대학교를 다닐 때 교수님이 그러셨어. 연기자는 단순히 배역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닌, 그 배역으로 또 다른 하나의 삶을 사는 것이라고. 연기를 하고 그 배역에 빠져들게 되는 순간 너는 여태까지 겪어볼 수 없었던 새로운 인생 하나를 겪게 되는 것이라고 말이야. 이것은 창현이 너에게 반드시 필요한 요소이기도 해. 지금 너에게 부족한 것은 경험이니까. 맞지?”

“…….”

세희의 말에 일순간 창현은 할 말을 잃었다.

어이가 없어서가 아니다.

그녀의 말이 옳았기에 반박할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정상의 자리에 섰다지만 창현 본인이 느끼기에 스스로는 결점투성이다.

그의 노래 중 진정한 사랑을 그린 것이 없다는 것도 그 이유 중 하나다.

창현이 작곡 작사를 한 곡 중에서 사랑에 관련된 곡은 라샤의 타이틀곡이던 <Yesterday>와 미국에서 발매했던 싱글 앨범 <Minus>뿐이다.

하지만 두 곡에는 공통분모가 존재한다.

다름 아닌 진정한 사랑을 그린 것이 아닌 어린 아이의 풋사랑을 그려냈다는 점이 그것이다.

사람들은 진정한 사랑을 그려낸 곡에 감동을 받기 마련이다.

그런 면에서 <Yesterday>와 <Minus>는 특유의 동심을 자극하는 잔잔한 느낌의 멜로디와 수줍으면서 순수한 느낌을 살려주는 가사가 있었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왜 진정한 사랑을 표현한 곡을 그려내지 못했느냐.

그것은 다름 아닌 창현이 아직 진정한 사랑을 해보지 못했기에 그렇다.

어찌 보면 이 부분은 상관이 없는 것일 수도 있다.

세상에 노래로 표현할 소재는 무궁무진하였으니 말이다.

남들이 보기에 식상하다고 할 만한 소재도 창현의 손을 거치면 세련되고 사람의 마음에 깊숙이 각인되는 노래로 탄생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단기적인 시각으로 볼 때의 이야기다.

노래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소재는 다름 아닌 사랑 이야기다.

언제까지 어린 아이의 풋풋한 사랑만을 그려낼 수는 없는 이야기다.

부딪치고 맞서야 할 것이라면 겪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물론 이것을 해결하는 하나의 방편은 연애를 해보는 것이다.

하지만 세희가 보기에 창현이 여자 친구를 사귈 가능성은 극히 낮아보였다.

당장 음악에 미쳐서 주변에 있는 예쁜 여자 가수들에게도 시선을 돌리지 않는다. 본인 스스로가 아예 자각 자체를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임시방편으로나마 취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드라마다.

분명 창현이라면 연기의 재미를 깨닫게 될 것이고, 배역에 몰입하다 보면 자신의 단점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세희가 노리는 바였다.

자신의 단점을 알아차린다면 창현은 반드시 그것을 극복하려고 할 것이다.

그리 되면 최대 약점 부분도 극복이 될 가능성이 높겠지.

당장 눈앞의 것을 보면 잘해야 본전치기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이것도 하나의 귀한 경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세희의 말에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창현이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누나는 이게 저에게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하는 건가요?”

마음이 살짝 기운 듯한 모습이었다.

다소 긍정적으로 변한 창현의 모습에 세희는 살짝 안도하면서 말한다.

“물론이야. 이건 창현이 너의 매니저로서 이야기할 뿐만 아니라, 친한 누나로서도 조언을 하는 거야. 분명히 언젠가는 한계가 올 수 있어. 이건 그에 대한 준비 차원이야.”

자신의 의견을 강력하게 밀어붙이는 세희였다.

그에 창현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대답한다.

“…좋아요.”

“하겠다는 거야?”

확 밝아지는 세희의 얼굴과 목소리.

하지만 창현의 대답은 달랐다. 세희의 말은 옳긴 하지만 그걸 가지고 곧장 수용할 생각은 없었다.

“아니오. 생각은 해보도록 할게요. 이야기는 이게 끝이죠?”

“응? 으응…….”

당연히 승낙할 것이라 예상했던 차였기에 세희는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에 창현이 자리를 일어서고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한다.

“집에 가서 생각을 하고 대답을 드릴게요. 그럼…….”

“…….”

회의실을 나서는 창현을 보며 멍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세희였다.


수만에게 강력하게 주장을 하여 드라마 배역을 따겠다고 한 윤아는 SM엔터테인먼트에서도 물심양면 지원해주겠다는 약속을 받고서야 숙소로 돌아올 수 있었다.

“얘들아! 윤아 왔어.”

늦은 시간에 윤아가 숙소로 돌아오자 문을 열어주었던 유리가 소리를 쳤다.

그러자 우르르 몰려나오는 소녀들.

팩을 하던 태연도, 피부 재생을 위해 일찍 잠에 들 준비를 하고 있던 주현도, 게임을 하고 있었는지 무선 마우스를 든 채 온 순규도… 모두 제각각 하던 일을 뒤로 제쳐놓은 채 온 것이다.

“언니들… 주현아…….”

윤아는 멤버들이 자신을 걱정해주었다는 것에 감격 어린 표정을 지으며 숙소 안으로 들어섰을 무렵이었다.

막 신발을 벗고 거실에 발을 들여놓을 무렵, 수연이 날카로운 어조로 외친다.

“효연이하고 수영아, 포박해. 진실을 밝힐 때가 왔어.”

“오케이!”

“윤아 너 꼼짝 말아.”

갑자기 윤아의 양옆으로 다가오더니 그녀의 양팔을 붙잡는 효연과 수영이었다.

자신을 걱정한 줄 알고 있었던 윤아는 감격스럽던 기분이 말끔히 걷히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지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에?”

멍한 시선으로 효연을 바라보자, 그녀가 웃음을 지으면서 상황을 알려준다.

“흐흐! 순진한 척 해도 소용없다고, 윤아 씨. 우리는 이미 네가 무엇 때문에 회사에 갔는지 다 알고 있단 말씀!”

그 말을 듣는 순간 윤아는 소름이 바짝 돋는 것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잊은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일거리가 하나 생길 때마다 그 멤버를 습격하여 모든 사실을 낱낱이 캐내는 것을 말이다.

자신 혼자 회사로 간만큼 멤버들이 자신에게 무언가 일거리가 생겼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확률이 높았다.

그러자 두려움이 불쑥 들었다.

자신이 드라마 배역을 따내려고 한다는 걸 알게 되면… 분명 무슨 수를 써서라도 벗겨먹으려 들 것임이 분명했다.

윤아는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보였다.

“그, 그게 무슨 말이에요, 언니. 저는 몰라요.”

필사적인 윤아의 행동에 수영이 음침한 웃음을 지었다.

“후후후! 그렇게 말을 해도 늦었단 말이지. 늦은 시간에 회사로 향했다는 것 자체만으로 우리의 후각을 자극하기에 부족함이 없어. 그것도 맛있는 꽃등심 냄새가 솔솔 풍기는데! 쓰읍!”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도는 지 입가를 훔치며 입맛을 다시는 수영이었다.

꽃등심이라는 말에 윤아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해간다.

설마 이 언니들이 꽃등심을 노리고 있을 줄이야.

창현에게 몇 번 얻어먹은 적이 있기에 아홉 명이 함께 먹게 되면 어느 정도 가격이 나올지 견적이 뽑혔다.

평소 소식을 하는 멤버들이지만 꽃등심 앞에서 만큼은 판타지 소설에 곧잘 등장하는 아공간 확장 마법을 주머니에 걸어놓지 않는가?

드라마 배역도 따지 않은 시점에서 꽃등심을 사게 되면 자신은 파산이었다.

‘꽃등심이라니. 아홉 명이 먹으면 최소한 백만 원이 넘을 텐데.’

백만 원은 그야 말로 최소 단위.

마음만 먹는다면 그 두 배가 훌쩍 넘게 나오는 건 일도 아니다.

윤아는 멤버들을 결코 과소평가 하지 않는다. 한다면 하는 만큼, 충분히 자신을 빚쟁이로 만들어놓을 수 있는 것이 바로 멤버들이다.

그리고 이것이 소녀시대의 진정한 저력이다.

우선 이 자리를 벗어나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윤아는 필사적으로 발버둥을 치며 외친다.

“언니의 착각이에요. 아무것도 아니라니까요.”

소녀시대 내에서 분명 힘이 세다 하여 힘윤아라 불리지 않던가!

그런데 효연과 수영의 포박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이런 힘이라니. 밥을 먹지 못해서 그런 것인가.

발버둥을 치지만 두 사람의 포박에 벗어날 수가 없는 그녀는 덫에 걸린 애처로운 초식 동물에 불과하였다.

윤아 앞에서 팔짱을 낀 채 TV에 나올 법한 불량소녀 포즈를 취한 수연이 말한다.

“거짓말 하지마. 설마 선생님께서 아무런 용건도 없이 너를 회사로 부르셨겠어? 순순히 진실을 실토하시지?”

“아니에요. 믿어주세요, 언니.”

백날 효연과 수영을 설득해봤자 소용없다. 눈앞의 수연을 설득하면 최소한 80%는 풀어낼 수 있을 것이라 믿은 윤아는 애처로운 눈을 한 채 수연의 동정심 유발 작전을 실행한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애처롭게 바라보는 윤아의 연기는 상당한 수준급에 이르러 있었다.

실제로 윤아의 모습을 본 태연이나 주현은 웃! 하는 소리와 함께 뒤로 한걸음 물러난 상태였다. 애처로운 윤아의 모습에 모질게 대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작 먹혀야 할 상대는 요지부동.

윤아의 열연에도 불구하고 냉정한 표정을 지은 수연이 한 것은 한마디였다.

“좋아. 그렇다고 쳐줄게. 그럼 한 가지 설명해봐. 회사에서 윤아 널 부른 이유가 뭐야?”

“…….”

할 말을 잃은 윤아였다.

거기까지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저 자신의 연기를 보면 알아서 풀어질 것이라 생각했는데 설마 설명을 하라고 할 줄이야.

그에 대한 변명을 생각해 놨어야 뭐라 말을 하지 않겠는가.

무어라 말을 하지 못하는 윤아의 모습에 수연은 피식 시니컬한 웃음을 짓더니 말한다.

“윤아 너의 연기는 이럴 때 빛을 발한다는 걸 이미 알고 있다는 말씀. 얘들아, 윤아가 거짓말을 하려고 했는데 어떻게 하지?”

“처벌해야지! 아주 혹독하게!”

윤아의 연기에 1차 피해자인 태연이 표독한 표정을 지으며 외친다.

리더의 위엄으로서 지금의 사태를 진압해줄 것이라 믿었던 윤아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느끼면서 한순간 만큼은 언니들을 압도하는 파워를 지닌 주현에게 마지막 희망을 걸고 그녀에게 시선을 주며 도움을 요청했다.

“주, 주현아! 도와줘.”

하지만 이번에도 윤아의 기대는 처참하게 어긋났다.

윤아의 연기에 2차 피해자였던 주현은 매정하게 그녀의 시선을 외면하며 말했던 것이다.

“사람을 속이는 건 나쁜 일이에요. 미안해요, 언니.”

“주현아!”

그녀의 절규를 뒤로한 채 수연이 명령을 내린다.

“처벌하자! 감히 거짓을 고하려 하다니. 무슨 일을 받았는지 낱낱이 캐내는 거야.”

“오케이!”

그 뒤로 펼쳐진 것은 차마 말로 뭐라 할 수 없는 참혹한 처벌의 세계.

가차 없이 가해지는 멤버들의 간지럼 세례에 윤아는 두 손 두 발을 다 든 채 항복을 외쳐야만 했다.

“언니들! 항복! 항복!”

윤아의 항복 선언에 간지럼을 태우던 멤버들이 무언가 후련한 표정을 지은 채 뒤로 주춤 물러난다.

“후우! 스트레스가 확 풀리네.”

“윤아가 별로 못 버티네. 섭섭한데?”

자신을 무슨 오락실 펀칭 머신 취급하는 소리에 윤아의 표정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으으! 이 언니들이 날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거잖아?’

마음 같아서는 반란을 일으키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적의 숫자들이 너무 많았다.

결국 순순히 현실에 수긍한 채 회사에서 들었던 것을 그대로 고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멤버들이 모두 밝은 표정을 짓는다.

태연이 들뜬 안색을 하며 말한다.

“그러니까 드라마에 출연한다는 거네? 그것도 대박이 터질 확률이 높은 드라마에?”

“아직 확정된 건 아니에요. 오디션을 봐야 하니까요.”

윤아가 고개를 저으며 말하지만 이미 듣고 있질 않았다.

효연이 윤아를 보면서 말한다.

“출연하면 출연료 많이 받겠다. 그러면 우리한테 정말 꽃등심을 사는 거야?”

그 말에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수영이 진지한 표정으로 고민에 잠긴다.

“꽃등심을 사면 윤아의 이름을 꽃등심 셔틀로 바꿔야 하나? 흐음! 사실 창현이 이름을 아직도 꽃등심 셔틀로 하고 있는데 말이지.”

“아니 그러니까 아직 확정된 게…….”

무어라 말을 하려던 윤아는 말을 끝맺지 못한 채 누군가에게 손을 붙잡히고 말았다.

시선을 옮기니 그곳에는 초롱초롱 눈을 빛내고 있는 주현의 모습이 보였다.

“언니, 대단해요. 드라마에 출연을 하다니. 소녀시대를 알리기 위해 이렇게 노력을 하고 계신데 저는 언니를 괴롭히는데 동참이나 하고… 미안해요, 언니. 앞으로는 더욱 잘할게요.”

방금 전까지만 해도 팬들에게 가장 인정받던 윤현 라인을 무참하게 저버렸던 주현이 아니던가?

그 때문에 주현에게 실망한 안색을 보이던 윤아였는데 이렇게 사과를 하고 나오면 뭐라 말을 할 수 없지 않은가.

웃는 얼굴에 침 못뱉는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윤아는 차마 주현에게 뭐라 쏘아붙일 수 없었다.

결국 웃음을 지으며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그래? 하하! 열심히 해야겠네. 소녀시대를 널리 알리기 위해서 말이야.”

“그렇죠? 저도 힘낼게요. 언니도 힘내세요. 파이팅!”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파이팅 포즈를 취하는 주현이다.

“언니는 방으로 들어가 볼게. 조금 피곤해서…….”

계속 있다가는 무슨 꼴을 당할지 모르기에 눈치를 보며 자리를 피하려는 윤아였다. 그리고 주현은 그런 윤아의 기색을 알아차리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배려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세요. 언니들이 못 되게 굴었으니 편하게 쉬세요.”

“으응. 고마워.”

그렇게 주현의 배려 하에 윤아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제대로 씻지도 못했지만 워낙 심적으로 생각에 많았던 순간이었기에 윤아는 그대로 침대에 몸을 묻었다.

그리고는 방금 전 상황을 떠올리면서 중얼거렸다.

“이렇게 되면 반드시 합격할 수밖에 없잖아.”

자신이 확정된 줄 아는 이상 반드시 오디션에 합격을 해야만 한다.

만약 자신이 오디션에 떨어져서 드라마에 합류하지 못한다고 하면 멤버들이 얼마나 실망을 하겠는가.

소녀시대를 널리 알리기로 마음을 먹은 이상 멤버들에게 실망을 주는 행위를 하고 싶지 않았다.

“잠이 안오네.”

피곤해서 당장이라도 잠이 들 듯 싶었는데 막상 눕고 보니 잠이 오질 않았다. 오히려 정신이 또렷해지는 느낌이었다. 밖에서 멤버들이 왁자지껄 소란스럽게 떠드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곳에 합류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침대에 몸을 묻은 채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하던 윤아가 돌연 웃음을 지었다.

“히히! 그러고 보니 비밀을 지켜냈네.”

생각해보니 드라마 오디션을 본다는 이야기는 했지만 중요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급하게 이야기를 하느라 생각할 겨를이 없어서 언급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바로 창현이 드라마 주연으로 캐스팅 받았다는 것을 말이다.

나중에 멤버들이 황당해 할 표정을 떠올리며 윤아는 웃음을 흘렸다.

“나는 몰랐던 거지. 나중에 뭐라 해도 몰랐다고 하면 되는 거고.”

내심 후환이 두려웠지만 뭐 별 수 있겠는가.

자신이 몰랐다고 잡아 떼면 되는 것이고, 그때는 이미 게임 오버일 텐데.

그래도 멤버들을 속였다는 생각에 윤아는 당했다는 느낌보다 통쾌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은 윤아는 그대로 잠이 들었다.

자신이 먼저 한 걸음 다가갈 수 있다는 생각에 모처럼 편안한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지금 몇시지?”

아침이 되자, 윤아는 거짓말처럼 일찍 일어날 수 있었다.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난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핸드폰을 집어 들고는 시간을 확인하였다.

“6시 밖에 안 됐어? 하아! 그러고 보니 오늘 10시에 스케줄이 있으니까 곧 있으면 태연 언니랑 주현이가 일어나겠네.”

평소 곧잘 늦잠을 자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윤아는 자신이 일찍 일어난 것에 대해서 무척 의아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만의 비밀을 간직한 것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자리에서 일어난다.

“후후! 오랜만에 언니들을 내가 직접 깨워주는 위업을 달성해 볼까나.”

그렇게 중얼거린 윤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태연과 주현이 자고 있는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는 곧장 두 소녀를 깨우기 시작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자신이 깨우는 모습에 태연과 주현은 놀란 표정을 지은 채 자리에서 일어난다.

“윤아 네가 웬일로 일찍 일어난 거야?”

“저도 나름대로 부지런한데 왜 그래요.”

평소에 태연이 깨워줘서 일어나고는 하였지만 이런 소리를 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라고 생각하는 윤아였기에 의외라는 태연의 말에 콧잔등을 찡그렸다.

그에 주현이 윤아를 슬쩍 보더니 말한다.

“무언가 좋은 일이 있나보죠. 좋은 일이 있으면 일찍 일어나곤 하잖아요?”

예리한 주현의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윤아는 자신이 그런 티를 너무 냈다 싶기도 하고, 들킨 것인지, 추측뿐인지 몰라서 뜨끔한 표정을 지은 채 대답한다.

“그, 그런가? 아무래도 어제 일찍 자서 그런 것 같은데.”

“그래요? 그럼 그런가 보네요. 일단 언니들 깨워야죠. 미용실에 가서 준비하고 그러러면 시간이 부족해요.”

“그렇지. 그럼 태연 언니, 수연 언니와 미영 언니를 부탁할게요.”

곧장 태연에게 할 일을 떠넘겨버리는 윤아였다.

그에 태연이 표정을 찡그리며 말한다.

“…왜 하필 제일 어려운 임무를 내게 넘기는 거야?”

“위대한 리더시잖아요. 저는 유리 언니 깨우러 갈게요.”

그렇게 말을 한 윤아는 후다닥 방을 벗어났다. 이미 주현은 사라진 상황이었기에 홀로 남은 태연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하아! 매일 어려운 일은 내가 전담한다니까.”

생일이 빠르다 하여 리더 자리를 맡게 된 것이 서글프다면 서글픈 일이었다.


윤아가 의외로 일찍 일어난 탓에 소녀시대 멤버들은 늦지 않게 준비를 하고 스케줄 준비를 위해 미용실로 향할 수 있었다.

벤에 탑승하여 이동하는 소녀들의 모습은 각양각색이었다.

원활한 스케줄을 위해 일찌감치 수면을 보충하는 멤버가 있는가 하면, 삼삼오오 뭉쳐서 이야기를 나누는 멤버들도 있었다.

그리고 홀로 MP3를 들으면서 사색에 잠겨 있는 사람도 있었다.

윤아는 바로 혼자 생각에 잠겨 있는 부류에 속해 있었다.

MP3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들으면서 윤아는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어떻게 하지.’

연신 MP3를 만지작거리면서 그녀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녀가 고민하는 것은 다름 아닌 현의 드라마 출연 여부였다.

캐스팅을 받았다고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1순위일 뿐, 반드시 드라마에 참여한다는 것이 아니었다.

수만의 이야기를 듣고는 눈이 뒤집혀 곧장 하겠다고 했지만 자세히 생각해보니 창현이 드라마를 할 가능성이 희박했다.

제대로 된 정보통은 아니지만 어찌어찌 곁가지로 들어오는 정보가 상당하였다.

특히 그녀에게 들려오는 창현의 정보 출처는 라샤일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그녀들이 언급한 바에 의하면 창현이 드라마 제의를 받는 것은 한두 번이 아니라고 한다. 정식 데뷔 이후 드라마 출연 제의만 다섯 번 이상을 받았다고 하니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이번 드라마에 창현이 캐스팅 될 확률이 무척 적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윤아는 깊은 생각에 잠기면서 창현의 드라마 참여 여부에 대해 계산하고 있었다. 창현이 드라마에 참여할 확률이 적다고 하나 그 여부를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만약 창현이 드라마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할 경우… 어떤 형태로든 마음의 준비를 해야 했으니 말이다.

‘전화를 해봐야 하나?’

창현에게 직접 전화를 해볼까 싶었지만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직접 묻기에는 뭐랄까, 쑥스러운 느낌이랄까. 게다가 괜히 자신이 참여한다고 광고를 하는 것 같아서 별로였다.

‘세희 언니에게 물어볼까?’

창현의 매니저인 세희와 소녀시대와의 관계는 무척 친밀하였다.

1월 2일 창현의 생일 때 세희에게 부탁을 하여 녹음실의 열쇠를 빌릴 정도였으니 말이다. 물론 그 허락을 얻어내기까지의 과정은 험난했지만 그 일을 계기로 전화번호를 주고받을 정도로 친해진 상황이었다.

‘세희 언니에게 물어보는 게 좋겠네. 물어보면 대답해줄 테고…….’

좋은 인상이었기에 세희를 굳게 믿고 있는 윤아였다.

그렇게 결심을 굳힌 그녀는 세희와의 통화를 위해 멤버들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조금 있으면 미용실에 도착한다. 그리 되면 분명 기회가 생길 터.

‘미용실에서 몰래 빠져 나와 전화를 해야겠다.’

잠시 후, 미용실에 도착하였고, 일제히 벤에서 내린 뒤 미용실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일찍 머리를 하면 그만큼 쉬는 시간도 많아지기에 소녀들간의 순서 다툼은 무척 치열하였다.

윤아는 그 경쟁 대열에서 살짝 뒤쳐져 조용히 화장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는 뒤따라오는 멤버들이 없음을 확인한 뒤 조심스럽게 통화를 시도하였다.

♩♪♬

컬러링과 함께 잠시 후, 세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언니, 저 윤아에요. 기억하시죠?”

자신의 번호가 액정에 떴을 테지만 먼저 정체를 밝히는 윤아였다.

그에 세희가 당연하다는 듯 대답한다.

-물론이지. 기억 못할 리가 없지. 그런데 갑자기 무슨 일로 전화한 거야?

“아, 실은요…….”

막 말을 꺼내려던 윤아는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머뭇거렸다.

어찌 보면 드라마에 참여하는 여부 자체가 무척 큰 정보에 속하는 것이기에 순간 세희가 순순히 말해줄지 회의감 비슷한 것이 들었던 것이다.

‘눈 딱 감고 물어보자. 안 되면 어쩔 수 없는 거지.’

그렇게 마음을 굳힌 윤아는 망설임 없이 세희에게 물어보았다.

“실은 창현이가 드라마에 캐스팅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어서요…….”

아니나 다를까.

건너편에서 깜짝 놀란 듯한 세희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어라? 그걸 어떻게 알았어? 아무도 모를 텐데…….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정보를 윤아가 알고 있다 보니 적잖게 놀란 세희였다.

그에 윤아가 자세한 사정을 털어놓는다.

“실은 저도 드라마에 캐스팅이 되었는데, 남자 주인공으로 창현이가 1순위 캐스팅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어서요.”

그러면서 수만이 자신에게 해주었던 이야기를 간략하게 세희에게 이야기하였다.

그 이야기를 들은 세희가 납득한 듯 말한다.

-그렇구나. 그 배역이면 주조연이네? 그러고 보면 이미지가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아참, 이게 아니지. 창현이 캐스팅 건에 대해서 물어봤지?

“네? 네.”

긴장한 안색으로 전화기에 귀를 기울이는 윤아였다.

과연 창현이가 드라마 캐스팅을 승낙했을까. 아니면 다른 때처럼 거절했을까.

기대감에 가득 찬 윤아에게 세희의 선고가 떨어졌다.

-아쉽게도 캐스팅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 같아.

“그, 그래요?”

실망하지 않겠다고 굳게 마음을 먹었지만 몸과 마음이 따로 놀고 있었다.

그러한 감정이 그대로 세희에게 전달 되었음일까.

세희가 윤아의 상황을 바로 알아차리고는 묻는다.

-창현이가 드라마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해서 실망한 거야?

“그, 그게 그러니까… 조, 조금은요.”

자신의 상태를 바로 알아차린 세희의 말에 당황한 표정을 짓던 윤아는 숨길 수 없다는 걸 알고는 그대로 인정을 한다.

그러자 건너편에서 잠시 세희의 웃음소리가 들려오더니, 세희가 말한다.

-으이구! 귀여워라. 음, 창현이가 현재 드라마 캐스팅에 대해 부정적이거든. 물론 여태까지 온 드라마 제안도 있지만 그건 모두 사장님의 선에서 거절 했거든.

“그 말은……?”

세희의 말에서 묘한 여운을 느낀 윤아였다.

여태까지 사장님의 선에서 거절 당했지만 이번에는 약간 다르다는 것이 아닌가? 창현에게 이야기가 갈 정도라면 말이다.

윤아가 단번에 알아차린 듯하자 세희가 설명을 해준다.

-잘 설득만 하면 할 확률도 있다는 거지. 하지만 아직 확률은 낮아. 윤아도 창현이가 드라마에 나와주었으면 좋겠지?

“저야 좋죠…….”

본심을 털어놓는 윤아였다.

그에 세희는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알겠어. 그럼 내가 힘내서 창현이를 설득해보도록 할게. 윤아와 함께 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할 수 없지.

“어, 언니! 잠시만요! 제가 드라마에 나온다는 건 비밀로 해주실 수 없을까요?”

자신이 드라마에 참여하려 한다는 것을 알리는 것은 상관이 없지만 그래도 뭐랄까, 자신이 참여하는데도 창현이 거절하면 그에 딸려 오는 실망감을 견딜 수 없을 것 같아 마지막 마지노선을 그어놓는 윤아였다.

그에 세희는 의아한 기색이었지만 이해하는 모양이었다.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일단 창현이를 최대한 설득해볼 테니 그렇게 알아둬. 최종 결정이 되면 전화해줄 테니까.

“네, 언니, 고마워요.

자신을 배려해주는 세희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며 통화를 끝내는 윤아였다. 그리고 막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으려 할 때, 갑자기 화장실 앞에 툭!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작은 소리였지만 화장실이 워낙 조용했기에 윤아는 그 소리를 듣고 반응을 하였다.

“응?”

의아한 기색을 띤 그녀가 문을 열어 밖을 확인했지만 아무도 없었다.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자신이 예민했던 것이라 판단하며 손을 씻은 뒤 아무렇지 않은 기색으로 화장실을 나서는 윤아였다.




제44장 수영의 생일




“드라마라, 드라마…….”

집으로 돌아온 창현은 방금 전 세희와 나눴던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드라마 제안에 대해 곰곰이 생각을 해보기 시작했다.

세희의 말을 들으면서 드라마 제안이 끌렸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자신은 무언가를 쉽게 결정을 내리는 그런 스타일이 아니다.

일단 사회적 위치가 있지 않은가.

나이는 어리지만 자신이 사회에 미치는 파장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창현이었다.

인기 실감은 아직 잘 못하고 있었지만 자신이 무언가 결정을 내림에 있어 번지게 될 파장이 제법 크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는 창현이 인기에 비해 스케줄을 바쁘게 소화하지 않기에 인터넷으로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있어서 그렇다.

그런 만큼 자신에게 결정권을 주어진다는 것은 자신의 행보를 자유로이 결정할 수 있다는 뜻이지만 한편으로는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무언가 앞을 볼 시야는 있었지만 두 수, 세 수까지 내다볼 수 있는 눈은 없기에 그렇다.

이럴 때 석규가 있었더라면 나았을 텐데, 라고 생각하던 창현은 순간 멈칫한다.

자신이 석규에게 많은 것을 의존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기획사 사장님이기도 하지만 아버지이기도 한 석규는 창현에게 있어서 최고의 조언자였다.

그가 있었기에 지금의 자신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으니 말이다.

세상이란 것이 호락호락하지 않았기에 만약 창현이 석규와 계약을 하지 않은 채 다른 기획사와 계약을 하였다면 지금의 위치에 서지 못했을 확률이 무척 크다.

그랬기에 창현이 석규에게 느끼는 감사의 마음은 컸다.

물론 석규의 입장에서도 창현에게 고마울 테지만 말이다.

어찌 되었든 창현에게 있어서 석규의 부재는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아버지가 승낙을 했다는 건 해봐도 괜찮다는 뜻인가.”

불현 듯 석규가 허락했다는 사실이 떠오르는 창현이었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석규가 허락했다고 하여 하겠다고 하는 것은 결국 자신의 의견은 배제된 채 석규의 의견에 따르는 것에 불과하다.

사춘기의 어줍잖은 반항심이 아니었다.

드라마가 자신에게 가져다주는 이점이 무엇인지 냉정하게 생각을 해보고, 정말 드라마가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세희의 말은 창현의 정곡을 찌르고도 남음이었다.

그 말들은 창현이 고민하던 점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었던 것이다.

세희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창현이 중얼거렸다.

“인생 경험이라. 정말 연기로 부족한 인생 경험을 채울 수 있을까.”

연기에 대해 깊게 생각해본 적은 없다.

실제로 자신의 연기 경험은 그리 많은 것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기껏해야 뮤직비디오에 출연을 하여 주어진 역할에 충실했을 뿐, 정작 연기에 대해 깊게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천생 가수란 직업만 하게 될 것이라 생각했기에 그렇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된 이상 연기에 대해 깊게 생각해볼 필요성이 있었다.

“자신과 전혀 다른 배역을 맡게 됨으로써 또 다른 삶을 살게 된다라…….”

세희의 말이 계속해서 귀에 감돌게 된다.

또 다른 삶. 그 말이 창현에게 가져다주는 마력은 강렬하였다.

결정적인 약점인 경험 부족을 극복할 수 있는 방편이었으니.

연극영화과를 나온 세희의 말이었기에 결코 쉽게 넘길 수 없었다.

문제는 연기의 기본이 없는 자신이 잘 해낼 수 있느냐는 점이다.

연기를 하게 되면 무조건 기대 이상으로 잘해내야 한다.

그야 말로 잘하면 본전이고, 못하면 여태껏 겪어보지 못했던 심한 난도질을 당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다. 어차피 연예인이 되는 시점에서 다른 사람에게 욕을 먹는 것은 어느 정도 각오한 일이니까. 다만 자신이 걱정하는 점은 자신으로 인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끼치는 것 때문이었다.

“몰두를 할 수만 있으면 나쁘지 않겠지. 하지만 잘 하지 못할 것이라면 애초에 하지 않는 것이 나아. 아쉽지만…….”

내심 도전하고픈 마음이 들었지만 이내 포기하는 창현이었다.

거기에서 자신의 인기로 인해 포기해야 하는 점이 존재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연기를 해보고 싶기는 하였지만 어중간한 실력으로 임하는 것 자체가 통용되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렇게 창현이 자신의 마음을 굳힐 때였다.

♩♪♬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막 자신의 생각을 굳히려는 순간이 방해 당하자 창현은 다소 짜증 섞인 얼굴로 핸드폰을 집어 든다.

“뭐야?”

그리고 전화한 사람의 이름을 확인하니 의외의 인물에게서 전화가 온 상황이었다.

바로 슈퍼주니어의 리더 이특에게서 전화가 온 것이다.

평소에 안부를 묻는 문자를 보내고는 하지만 전화를 한 적은 그리 많지 않다.

“이 형이 갑자기 왜……?”

의아한 표정을 지은 창현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현이 맞나?

“네, 형 저예요. 갑자기 무슨 일로 전화 하신 거예요?”

갑작스러운 이특의 전화.

창현으로서는 의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가 맞다는 것이 확인이 되자, 건너편에서 살짝 한숨을 내쉬면서 말한다.

-후! 전화하는 건 오랜만이어서. 설마 했잖냐. 현이 너 맞지?

“저 맞다니까요. 그런데 갑자기 무슨 일로 전화하신 거예요? 평소에는 전화 안하시잖아요.”

-그렇게 말하니까 무슨 내가 무슨 연락 안하고 산 사람 같잖냐. 실은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어서 전화를 했어.

“물어보고 싶은 거요? 어떤 건데요?”

무엇을 물어보기 위해 전화를 한 것일까.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창현이 물었다.

그러자 이특이 음음! 하고 목을 가다듬더니 창현에게 말한다.

-2월 10일에 혹시 스케줄이 있나 궁금해서.

“2월 10일요?”

순간 움찔하는 창현이었다. 2월 10일이라면 수영의 생일이 아닌가? 생일 선물을 해주기로 했는데 시간이 있냐고 묻다니.

‘라디오 게스트로 초대하려는 건가?’

연말에 라디오에 한 번 간 적이 있지 않던가?

자세히 검색은 해보지 않았지만 그 라디오 방송이 대박 났다는 것을 알고 있는 창현이었다.

그랬기에 순간 떠오른 것은 게스트로 섭외 건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정식으로 소속사에 말하면 될 일이 아닌가?

허락을 받지 못한다고 미리 생각하고 자신에게 말한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이 미치자 창현은 아쉬운 어조로 말한다.

“아쉽지만 스케줄이 있어요. 아니 스케줄이라기보다는 개인적인 약속이 있어서요.”

-그래? 후! 아쉽지만 어쩔 수 없네. 오후에 잠깐이라도 시간이 안 될까?

뭔가 급한 듯한 이특의 말에 창현이 미간을 지그시 모았다.

정말 급한 일이라면 잠깐의 시간을 못 내주겠는가.

우선 연유라도 알아야 했기에 창현이 이특에게 물었다.

“무슨 일 때문인데요? 그거라도 알아야 제가 시간을 내거나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게 말이다. 실은 2월 10일이 수영이의 생일이잖냐? 그 날을 기념해서 소녀시대 팬 미팅을 개최하기로 했거든. 현이 네가 깜짝 게스트로 출연을 해주었으면 해서 연락을 한 거야.

“수영 누나의 생일이요?”

창현이 깜짝 놀란 목소리로 말한다.

그날 시간을 내려는 이유가 수영에게 선물을 주기 위함이 아니던가.

그런데 그때에 맞춰 팬 미팅을 열다니.

그제야 이특이 왜 자신에게 전화를 했는지 이해가 되는 창현이었다.

처음부터 자세히 말해주었더라면 진즉에 대답했을 것을.

“잘됐네요. 수영 누나의 생일은 저도 알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선물 사려고 했죠. 그것 때문에 그날 안 된다고 했던 거고요.”

정말 공교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니, 공교로운 일이 아닌가?

슈퍼주니어는 소녀시대와 같은 소속사인 만큼 각별하게 챙겨주었을 테니 공교로운 일이 아니었다.

주변을 둘러볼 경황이 없었던 창현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던 것이었으니 말이다.

창현의 말을 들은 이특이 잘됐다는 듯 말한다.

-그래? 그럼 잘 됐네. 창현이 널 깜짝 게스트로 초대할까 생각 중이었거든. 인원이야 이미 모였지만 기왕이면 자리를 빛내줬으면 하는 마음에서 전화를 한 거야. 어찌 보면 그것이 최고의 선물일 것 같기도 하고.

“그렇게 할게요. 좋은 자리인데 제가 빠질 수 없죠. 아, 아니다. 소속사에 가서 이야기를 해봐야 하거든요. 매니저 누나랑 이야기를 해봐야 하니. 제가 내일까지 이야기를 해보고 연락을 드릴게요.”

참으로 훈훈한 후배 사랑이 아닐 수 없었다.

설마 후배를 생각하는 마음에 자신을 초대할 생각을 하다니.

그러나 이어진 말은 창현의 그런 생각을 산산이 부숴버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래, 고맙다. 선생님이 너를 데려오면 괜찮을 것 같다는 이야기에 반신반의하면서 전화를 했는데 이야기가 잘 돼서 다행이네.

“헐! 형이 생각해낸 것이 아니라요?”

이특의 생각이라 믿고 있던 창현으로서는 황당한 순간이었다.

그에 이특이 변명하듯 말한다.

-아니… 나도 물론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지. 다만 현이 네 스케줄 때문에 못 나올 것 같아서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있었을 뿐이야.

그렇게 말을 하지만 이특 본인의 생각이 아닌, 수만의 생각이었다는 것을 이미 알아차린 후였다.

정식으로 자신을 초대하게 되면 당연히 돈을 주어야 할 테니 말이다.

하지만 친분을 자극하여 자진 참여하게 되면 회사에서는 생색만 내면 된다.

창현은 실망한 기색을 애써 감추며 말했다.

“네에, 그렇군요. 그래요. 하하! 알겠어요. 내일까지 답을 드릴게요.”

-으응. 그래. 좋은 답 기다릴게.

그렇게 통화는 끊어졌고, 창현은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면서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세상은 역시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구나.”

한순간이지만 어떤 전개인지 머릿속에서 파바박 이루어졌기에 창현의 입가에 씁쓸한 웃음이 걸렸다.

어찌 보면 자신을 이용하려는 것일 수도 있었다.

“형의 잘못이 아니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실망스러운 것은 어쩔 수 없나보다.

애써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고 있을 때, 창현의 핸드폰이 다시 한 번 울리기 시작하였다.

♩♪♬

“…….”

기분이 그리 좋지 않을 때 오는 전화는 결코 반갑지 않았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두 번이라니.

방금 전보다 기분이 더 가라앉은 상황이었기에 창현은 짜증을 감추지 않으며 확 낚아채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그 음성에는 짜증이 섞일 대로 섞여 있는 상황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스케줄을 끝내고 상쾌한 마음으로 숙소로 향할 때였다.

태연과 순규, 수영은 라디오 스케줄이 있는 상황이었고, 윤아는 개인 스케줄이, 미영과 유리는 예능 프로그램 촬영을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숙소로 향하는 것은 수연과 효연, 주현뿐이었다.

수연은 세 명 밖에 탑승하고 있지 않은 벤 의자에 몸을 푹 묻으며 생각에 잠겼다.

‘숙소에서 잠이나 잘까.’

아침 일찍 일어난 탓에 졸려오는 눈을 억지로 뜨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렇게 졸릴 때 침대에 누우면 그야 말로 꿀맛 같은 단잠을 잘 수 있다.

잠을 잘 때만큼은 모든 고민을 잊을 수 있기에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숙소로 돌아가 수면을 취하고자 마음을 먹던 수연은 무언가가 자신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오늘 날짜는 2월 8일. 다름 아닌 수영의 생일이 불과 이틀 남은 날이었다.

수연의 머릿속에 얼마 전 만났던 창현의 말이 스치고 지나갔다.

졸업식에 참여하겠다는 명목 하에 감히 독립 작전을 수행하던 미영과 주현을 잡으러 출동했을 때 창현이 말하지 않았던가. 수영을 축하해주겠다고.

하지만 2월 10일 오후에 수영의 생일을 축하할 겸 소녀시대 첫 팬 미팅을 연다.

팬 미팅의 게스트로 참가할 엄두를 내지 않고 있었다. 이미 소녀시대와 남매 그룹이라 할 수 있는 슈퍼주니어의 참여가 결정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상당한 인기를 얻고 있는 슈퍼주니어가 참석해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인 상황이었다.

만약 거기에 창현이 참석을 한다면?

소녀시대로서는 감격할 것임이 분명했고, 생일인 수영 또한 감동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절대적인 명제가 존재한다.

바로 창현의 스케줄이 2월 10일에 없어야 한다는 점이다.

‘창현이가 시간이 되려나?’

불길한 상상이 머릿속에 맴돌았지만 희망을 갖기로 하였다.

수영의 생일 선물을 언급했다면 분명 시간을 비워놓았으리라 상상하면서 말이다.

희망을 갖자 수연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분명 창현이가 날 좋게 볼 것이 분명해.’

절대 창현이에게 전화를 걸기 위함이 아니었다. 오로지 수영이를 위해! 멤버인 수영이를 위해! 아니, 가족인 수영이를 위해! 창현이에게 전화를 거는 것이다. 절대 자신이 보고 싶어서가 아닌, 수영이를 기쁘게 하기 위한 것이고 말이다.

물론 수영이가 기뻐하는 것이 주이고, 자신이 창현이를 보는 것은 덤이고 말이다.

자신의 계획이 마음에 든 듯 입가에 미소를 지은 수연이 어서 숙소에 도착하기를 기다린다. 효연이와 주현이가 눈을 번뜩이는 지금 전화를 시도할 수 없는 노릇이다.

두 사람을 숙소 내에서 따돌리고, 전화를 거는 것이 최선이었다.

숙소까지 도착하는 시간을 허무하게 허비할 수 없는 노릇이었기에 수연은 숙소에 도착할 때까지 창현에게 어떤 말을 할지 계산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숙소에 도착하자 후다닥 올라가서는 방으로 들어가며 효연과 주현에게 말한다.

“나 잘 거니까 방해하지마. 알았지?”

수연의 이런 행동 패턴을 이미 한두 번 겪어본 바가 아니었기에 두 사람은 순순히 납득하는 모습을 보인다.

“알았어. 푹 자.”

“언니, 주무세요.”

두 사람의 의심을 따돌리는데 성공한 수연은 곧장 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문을 잠근 뒤 옷을 갈아입고는 이불을 몸에 둘렀다.

조금이라도 소리가 흘러나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모든 준비를 갖춘 수연은 곧장 창현에게 전화를 걸기 시작한다.

♩♪♬

컬러링으로 흘러나오는 <One Year>가 익숙하게 귀에 감겨온다.

얼마나 흘렀을까, 잠시 후, 통화가 연결되는 소리와 함께 창현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여보세요?

하지만 그것은 수연이 원하던 창현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짜증에 가득 차 있는 목소리.

그것은 틀림없는 창현의 목소리였다.

‘왜…….’

이런 창현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기에 수연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리기 시작한다.


짜증 어린 목소리로 전화를 받은 창현은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순간 느낀 이중성으로 인해 짜증을 느끼기는 했지만 지금 전화를 건 상대가 잘못한 것이 아니지 않은가?

핸드폰을 귀에 뗀 창현이 심호흡을 하면서 전화를 건 상대를 살펴본다.

전화를 건 상대는 다름 아닌 수연이었다.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기 위해 심호흡을 하던 창현의 안색이 순간 찌푸려졌다.

설마 수연 누나도 자신을 팬 미팅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그런 것인가.

아직 속단하기에는 이르다.

다른 사람을 의심하고 싶지 않은 것이 창현의 심정이었기에 차분하게 심호흡을 하면서 전화를 받는다.

“수연 누나에요? 미안해요. 방금 전에 좋지 않은 일이 있어서요.”

-으응… 그랬구나. 순간 놀랐어.

아직까지 놀라움이 가라앉지 않은 목소리였다.

그에 창현은 다시 한 번 사과를 한다.

“미안해요, 누나. 그런데 무슨 일로 전화하신 거예요?”

궁금한 점이 있었기에 곧장 용건으로 들어가는 창현이었다.

그에 수연도 창현이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눈치 채고는 곧장 자신의 용건을 털어놓았다.

-응, 알았어. 2월 10일이 수영이 생일이잖아. 이번에 수영이 생일을 맞아서 생일 축하 겸 팬 미팅을 하기로 했거든. 그 자리에 창현이 네가 와주었으면 해서 전화를 한 거야.

“…제가요?”

역시나 예상대로였다.

설마 수연도 사주를 받은 것인가.

복잡한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아직 단언하기에는 이르다. 정말 순수한 의도에서 말을 하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은가.

어정쩡한 창현의 반응에 수연이 조심스럽게 묻는다.

-으응. 그때 창현이 네가 했던 말이 떠올라서 그러는 건데… 혹시 시간이 안 돼?

‘정말 아무에게도 지시를 받은 것이 아닌가요?’

직접적으로 묻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참아내는 창현이었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순화하여 수연에게 물었다.

“혹시 그거 누나 혼자 생각해낸 건가요?”

그 말을 들은 수연이 놀랐다는 듯 말한다.

-어라? 그걸 어떻게 알았어. 맞아! 다른 애들은 생각도 안 했는데 나만 이렇게 생각한 거거든. 어때? 대단하지 않아?

뭐라고 해야 될까.

일일 카페 이후 묘하게 애교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수연이었다. 지금 모습도 마치 자신을 칭찬해달라는 어린 아이 같은 모습이랄까.

거기에 그녀의 진심이 느껴졌다. 이특이 다른 사람의 지시를 받아 자신에게 부탁을 했다면, 수연은 정말 수영을 배려하는 마음에서 자신에게 연락을 한 것이다.

적어도 그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창현이었다.

그러자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을 계산적으로 대하지 않는 수연의 모습에서 한줄기 안도를 느낄 수 있던 것이다.

‘다행이군, 다행이야.’

그렇게 안도하면서 창현은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말한다.

“대단하네요. 다른 누나들이 생각하기도 전에 수영 누나를 배려하는 모습이 보기 좋네요. 2월 10일에 시간 되요. 그날이 수영 누나 생일이라서 선물이나 사러 갈까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정식으로 제가 낄 자리가 없겠지만 몇 분의 시간만 할당해주시면 생일 축하 노래랑 깜짝 선물이라도 주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창현이 올 수 있다는 말에 수연의 목소리가 확 밝아진다.

-당연히 괜찮지! 그럼 올 수 있는 거지?

“네, 가도록 할게요. 다른 누나들한테는 말하지 마세요. 깜짝 놀라게 해주고 싶거든요.”

-그럼 둘만의 비밀인 셈이네?

어떻게 이야기가 그렇게 되는지 모르지만 뭐 틀린 말도 아니었기에 창현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대답한다.

“그러네요. 둘만의 비밀. 어쨌든 그렇게 알고 계세요. 슈퍼주니어 형들한테는 제가 연락을 해놓을 테니까요.”

-알았어. 그리고 부탁 들어줘서 고마워.

고맙다는 그 한마디만으로 훈훈해지는 마음이었다.

처음에는 짜증이 서려 있던 창현은 어느덧 미소를 짓고 있었다.

훈훈하게 전화를 끝마친 창현은 핸드폰을 바라보고 있었다.

묘하게 이용당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기에 그렇다.

수영의 생일을 순수하게 축하해주는 것으로 찾아가려는 것이지만 이특과의 통화 때문일까.

머리 한구석에서 이용당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 이내 결심을 굳힌 듯 창현이 중얼거렸다.

“그래, 수영 누나를 축하하기 위한 거니까. 이용당한다는 생각을 하지 말자.”

그렇게 결정을 내린 창현이 이특에게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창현이 세희에게 드라마 제안을 받은 지 며칠이 흘렀다.

그동안 창현은 세희에게 딱히 답을 해주지 못했다.

드라마 제안도 드라마 제안이었지만 갑작스럽게 결정된 소녀시대 팬 미팅에도 참여하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 말을 세희에게도 전해놓은 상황이었기에 세희도 알고 있는 상황이었다.

팬 미팅에 참여한다는 말에 난색을 표했지만 이미 가기로 했다는 것을 어쩌겠는가.

그러던 중 석규에게 전화가 와서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신혼여행을 떠난 석규가 귀국하는 날짜는 2월 10일이었기에 내일이면 귀국을 하는 것이었다.

그가 세희에게 전화를 한 이유는 정확히 중간보고를 듣기 위함이었다.

드라마 제의를 받은 만큼 어떤 형식으로든 이야기가 끝났을 것이란 것이 그의 생각이었던 것이다.

세희에게 이야기를 들으면서 석규가 말했다.

-그래서 창현이가 아직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는 이야기인가?

“네, 사장님. 창현이가 고민을 하고는 있지만 섣불리 결론은 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고민이 되긴 하겠지. 자신의 행동이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테니까.

담담하게 대답하는 석규의 태도에서 세희는 흘러나오는 한숨을 간신히 참아냈다.

‘후우! 사장님이 안 계시니 창현이를 다루는 게 너무나 힘이 든다고요. 사장님의 도움이 필요한데…….’

석규가 있고 없고의 차이를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직접적으로 석규에게 도움을 받은 것은 없지만 그가 있음으로 인하여 세희는 한줄기 마음의 안도를 얻고 있었다.

어려울 때는 석규에게 도움을 청하면 되기에 그렇다.

그러나 지금 상황은 석규에게 도움을 받기가 쉽지 않았다.

누가 알콩달콩한 신혼여행을 방해받고 싶겠는가.

무척 힘들었기에 석규에게 도움 요청을 한 세희였다.

이래저래 고민이 많은 세희였다.

-일단 내일이면 귀국을 하니 모레부터 회사에 나가기로 하지. 창현이가 드라마에 고민을 하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하는 바니까. 우선 연기 지도도 받아야 할 테고 말이지. 다른 일은 없었나?

“있다면 있습니다만…….”

세희는 그간에 일어난 소소한 일들을 보고하기 시작하였다.

그 속에는 창현이 소녀시대 팬 미팅에 참석하기로 한 것이 함께하고 있었다.

이야기를 들은 석규가 혀를 쯧쯧 찼다.

-실수했군. 설마 그 사이에 소녀시대 팬 미팅이 있을 줄이야. 창현이 녀석이 직접 승낙했다고?

“네, 가기로 승낙을 해놓은 상황이라서 물릴 수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번 건은 생각이 짧았어. 회사 측에서 들어온 제안이 아니겠지?

상황을 정확하게 꿰뚫어보는 석규의 통찰력에 세희는 감탄을 하면서 대답한다.

“네, 창현이한테 개인적으로 들어왔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승낙이 되었을 리 없지. 이번 결정은 창현이가 실수를 한 거야. 설마 그런 식으로 초대를 할 줄 몰랐고. 윤 매니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가?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장님. 솔직히 이번 일은 창현이가 실수를 조금 한 것 같아서요.”

석규의 생각과 정확히 일치하는 세희였다.

그녀 또한 창현이 소녀시대 팬 미팅에 참석하기로 한 것은 실수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소녀시대 팬 층은 남자 위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들은 현과 소녀시대가 친하다는 것을 그리 달갑게 여기는 인물들이 아니었다.

물론 이것은 어느 정도 넘어갈 수 있다고 치자.

하지만 결정적인 것은 소녀시대 팬 미팅에 슈퍼주니어라는 든든한 선배 가수들이 참석을 한다.

그런 만큼 굳이 창현이 팬 미팅에 참석하여 자리를 빛내줄 이유가 없는 것이다.

득보다는 실이 많은, 이슈 마케팅용으로 사용될 확률이 극히 높았다.

-지금이라도 말리고 싶지만 이미 정해진 만큼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어쨌든 그 건은 윤 매니저가 잘해주길 바라네. 그때까지는 회사에 없을 테니. 윤 매니저만 믿기로 하겠어.

석규의 말에 세희는 책임감이 막중하다는 것을 느꼈다.

“네, 알겠습니다, 사장님. 최선을 다하도록 하겠습니다.”

-말실수 같은 건 걱정하지 않지만 그 녀석이 의외로 무른 구석이 있는 건 알지? 그 부분만 신경 쓰면 될 걸세.

창현의 단점을 정확하게 지적하는 석규였다.

아무래도 나이가 어리고, 사람들과의 인연이 고픈 창현인 만큼 친한 사람의 부탁을 거절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이것은 결코 나쁜 점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을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이다.

석규는 세희가 중간에 서서 그것을 이용하려는 사람들을 차단해주길 원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 말의 의미를 파악한 세희가 대답한다.

“네, 알겠습니다, 사장님. 그 점은 맡겨주세요.”

-그래, 윤 매니저만 믿기로 하지.

신뢰를 보여주는 말과 함께 통화가 끝났다.

전화기를 내려놓으면서 세희는 나직이 한숨을 내쉰다.

“후우! 믿음을 보여주시는 건 좋지만 이런 것들은 복잡하네.”

창현의 매니저를 하기가 벅차다고 느끼는 세희였다.


석규와 세희가 통화를 끝낼 무렵, 창현은 집에서 부지런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내일 팬 미팅에 깜짝 등장을 하기로 한 만큼 준비가 필요했던 것이다.

축하의 의미를 담은 노래를 연습하면서 오늘 세희에게 부탁을 하여 선물을 사러 가기로 한 상태였다.

아무래도 여자의 선물을 구매한 적이 없다 보니 세희에게 도움을 요청하였고, 참으로 가지가지 부려먹는다는 소리를 들으면서 세희의 도움을 얻어낼 수 있었다.

“카드도 챙겼고. 준비 완료군.”

겨울은 정체를 들키지 않기에 무척 좋은 나날이다.

모자를 쓰고 목도리만 둘러도 얼굴의 대부분이 가려지니 큰 고민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복장을 갖춰 입은 창현은 기본적인 것들을 챙기고는 이어폰을 귀에 꼽은 뒤 외출을 하였다.

세희에게 부탁을 하였지만 로드 매니저까지 부르는 것은 조금 아니었기에 버스를 타고 이동할 생각이었다.

괜히 큰 벤을 타고 다니면 여기 연예인이 다니고 있소, 라고 광고를 하는 꼴이었으니 말이다.

그저 조용히 선물을 구매하려는 것이 창현의 마음이니 만큼 요란하게 하고 나갈 이유가 없었다.

“역시 이 방법은 최고라니까.”

옥상을 통해 옆 동으로 이동하여 유유히 벗어나는 이 수법!

자신이 생각해도 참으로 기발한 방법이 아닐 수 없었다.

추운데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팬들을 보면 미안하지만 정체를 들키는 것보다는 나았기에 바삐 발걸음을 옮긴다.

“이렇게 다니는 것도 오랜만이네. 하아!”

주변을 둘러보면서 평범하게 길가를 걷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에 창현은 묘한 감회에 빠져든다.

불과 일 년 전만 해도 자신은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앨범을 발매하여 유명세를 얻고 있기는 했지만 얼굴 없는 가수로서 일상생활에 제약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 만큼 오늘 같은 이런 평범한 행보가 새롭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후회하는 건 아닌데 말이지.”

공인이 되었다고 해도 창현은 후회하지 않는다.

일상생활에 제약이 생겼다고 하나 그걸 포기한 대신 남들과 비교하지 못할 인기와 재물을 얻게 되었다. 한 가지를 얻으면 한 가지를 포기하는 만큼 자신은 과분할 정도로 많은 것을 얻은 것이다. 그런 만큼 지금의 생활을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어찌 보면 슬럼프를 겪는 것도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하면서 겪게 된 것이었으니 말이다.

자신은 누구보다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을 근래 들어 느끼는 창현이었다.

“늦으면 안 되는데.”

버스 정류장에서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며 중얼거리는 창현이었다.

가만히 서 있으니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힐끗힐끗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모자를 쓰고, 목도리를 두른 채, 안경으로 얼굴을 가린다고 했지만 특유의 아우라가 형성되어 있다 보니 사람들의 시선을 절로 끄는 무언가가 있는 것이었다.

그런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지 못할 창현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걸 의식하게 되면 정체를 들킬 확률이 높았기에 애써 무시하면서 담담히 음악을 듣고 있는다.

듣는 노래는 당연히 자신의 노래.

죽어라 자신의 노래를 들으면서 녹음된 곡과 한 치도 다를 바가 없는 라이브를 하고자 노력하는 편이었기에 노래를 들으면서 스스로 끊임없이 채찍질을 하고 있었다.

잠시 후, 버스가 도착하였고, 창현은 버스에 탑승하면서 버스기사에게 정류장을 묻고는 이십여 분가량 버스에 타 있다가 내린다.

그리고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기니 다행히 약속시간에 늦지 않았다.

약속시간 5분 전에 도착한 것이다.

창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 늦지 않았군. 다행이야, 다행.”

“뭐가 다행인데?”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창현은 순간 움찔하면서 뒤를 돌아본다.

“헙! 누나 오셨어요?”

그곳에는 예쁜 도시 여자 차림(?)의 세희가 서 있었다.

원래 미모가 받쳐주기에 평소와는 전혀 다른 예쁜 모습이었다.

세희는 피식 웃음을 짓고는 창현에게 말한다.

“그래, 어떤 나쁜 연예인 씨께서 매니저를 하도 호출하기에 오게 되었습니다.”

“아하하! 미안해요. 대신에 점심 산다니까요? 비싼 걸로 사드릴 테니까 오늘 좀 도와주세요.”

부려 먹는다는 단어 때문일까.

움찔한 창현이 웃음을 지으면서 세희의 말을 무마시키려고 한다.

그러자 창현을 지그시 바라보던 세희가 말한다.

“그래, 그렇다면 응해주는 수밖에! 자, 그럼 가볼까.”

“네, 오늘 좀 부탁드릴게요.”

아무래도 연예인과 매니저의 관계가 아닌, 동생과 누나의 만남인 만큼 한결 부담감에서 해방된 세희의 모습을 보니 창현도 밝은 표정을 지으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세희가 창현을 데리고 간 곳은 메이커 의류 전문점이었다.

창현은 의류 전문점을 보더니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어라? 여기서 사자고요?”

“그럼? 여기서 사는 게 좋잖아. 어차피 네가 광고한 것이기도 하고.”

그렇다. 세희가 창현을 데리고 간 곳은 다름 아닌 창현이 미국에서 광고를 했던 메이커였던 것이다.

그 말을 들은 창현은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인다.

“그것도 그러네요. 물건을 살 거면 제가 광고한 걸 사는 게 낫겠죠. 하하하! 그럼 안으로 들어가죠.”

왜 그걸 생각하지 못했을까, 라고 생각하면서 창현이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그 뒤를 따라 세희가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종업원의 인사를 들으면서 안으로 들어선 창현과 세희가 가게 구경을 하기 시작한다. 가게 안에 손님은 몇 명 없었다. 창현과 세희를 포함하여 다섯 명 정도? 아무래도 메이커다 보니 가격이 제법 셀 테고, 그러다 보니 손님이 많지 않은가보다.

옷을 구경하던 세희는 창현에게 손짓을 하더니 자신이 고른 걸 가리킨다.

“이런 건 어때?”

세희가 골라준 걸 보는 창현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한다.

“트레이닝복이요? 음, 생일 선물로 좀 그렇지 않을까요.”

기왕 옷을 사줄 거면 예쁜 옷을 사줄 생각이었던 창현으로서는 조금 시큰둥한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세희가 창현에게 살짝 알밤을 튕기더니 말한다.

“으이구! 그러다가 다른 사람이 선물을 보게 되면 어쩌려고? 예쁜 옷을 선물하다가 잘못하면 스캔들 난다? 그리고 안무 연습할 때 트레이닝복을 입고 하니까 예쁜 트레이닝복을 골라주면 어떨까 싶어서 골라준 거야. 어때, 이 훈훈한 마음속에 숨겨진 배려가?”

“그, 그러네요. 훈훈한데요? 그럼 트레이닝복으로 할까요?”

세희의 설득에 바로 넘어가는 창현의 모습은 평소와 달리 약간 우유부단해보였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이 부분으로는 전혀 내공이 없는데.

그저 세희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충실하게 따를뿐이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일 뿐이고. 결정은 창현이 네가 해야지. 선물 사는 건 어디까지나 너니까.”

“아니에요. 누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 솔직히 예쁜 옷을 선물하는 것은 주변 사람들이 그렇게 볼 소지가 있네요. 누나 의견을 따를게요.”

“그래, 그럼 트레이닝복 골라보자. 어차피 트레이닝복은 사이즈 조절이 가능하고, 수영이 사이즈는 대충 내가 알고 있으니까.”

그렇게 두 사람은 트레이닝복을 고르기 시작했다.

요즘 트레이닝복은 무척 예쁘게 나오기에 색깔도 다양했다.

무슨 색을 고를지 고민하던 창현이 고른 것은 회색 계열의 트레이닝복이었다. 아무래도 화려한 원색보다는 수수하면서 때가 덜 타는 색을 택한 것이었다. 외양보다는 실용적인 면을 고려한 것이다.

가격이 제법 비쌌지만 뭐 어쩌랴. 이 정도 금액은 딱히 부담이 안 된다.

옷을 고른 창현과 세희가 카운터에 옷을 내민다.

종업원은 옷을 계산하다가 고개를 연신 갸웃거리더니 창현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현 씨 아닌가요?”

갑자기 자신의 정체를 묻는 종업원의 물음에 창현이 당혹한 목소리를 흘렸다.

“네?”

옷을 제법 중무장하여 알아보기가 힘들 텐데? 도대체 어떻게 알아본 것이란 말인가.

당혹한 목소리를 흘리는 창현의 모습에 종업원이 한쪽 포스터를 가리킨다.

“저 모습하고 많이 닮으셔서요…….”

“아…….”

종업원이 가리킨 것을 본 창현의 입에서 허탈한 소리가 흘러 나왔다.

포스터에는 옷을 입은 창현의 모습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지금 입고 나온 옷하고 거의 흡사했던 것이다. 바지는 약간 달랐지만 모자와 잠바를 입은 스타일은 거의 똑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물론 그때와는 키도 달랐다. 저것은 위대한 포샵의 힘이 약간(?) 아주 약간(?) 들어간 것이고 말이다.

자신을 바라보는 종업원의 눈에는 확신이 서려 있었다.

이건 뭐 부인한다고 해도 벗어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결국 창현은 자신의 정체를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하아! 맞습니다. 현이에요. 설마 알아보실 줄 몰랐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목도리를 풀고, 안경을 벗자, 종업원이 감탄사를 터뜨렸다. 가게 안에 있던 사람들도 경악한 눈을 하였다.

“와아! 설마 진짜 현 씨일 줄이야. 꼭 한 번 뵙고 싶었습니다.”

“아, 네. 감사합니다.”

겸손하게 인사를 받는 창현이었다.

“실례가 아니라면 가게에 싸인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현 씨가 와주신 것만으로도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수 있을 것 같아서요.”

별로 어려운 부탁도 아니었다. 그저 싸인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닌데 자신의 싸인이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해줄 수 있다.

“네, 알겠습니다. 어려운 일도 아닌 걸요. 펜 좀 주시겠어요?”

“여기…….”

종업원이 내미는 펜을 받은 창현이 싸인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잘 다녀왔다는 말을 남기고 다시 계산을 하려 했다.

그때, 가게 안에 있던 사람들이 창현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현 씨, 꼭 한 번 만나고 싶었습니다. 이거 살 테니 싸인을 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이것도요.”

비싼 메이커 옷이었지만 옷 가장자리에 싸인을 원하는 사람들이었다. 기념인 만큼 옷에 싸인을 받고자 하는 것이었다.

옷에 싸인을 원하는 모습을 보고는 창현이 당혹한 표정을 지었다.

“옷에 싸인을요? 그냥 종이에다가 하는 게…….”

그렇게 합의(?)를 본 창현은 싸인을 해주기 시작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일이 발생했다. 가게 밖이 안쪽이 그대로 들여다보이는 구조여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안에 있는 사람이 정말 현이자 환호성을 지르기 시작한다.

“꺄아! 현이다!”

졸지에 즉석 사인회를 열게 된 창현이었다.

그래도 몇몇 사람들은 매너가 있는지, 물건들을 구입하고 싸인을 받아갔다.

순식간에 십여 명의 사람들이 몰려들고, 더 들어오려고 하자, 그 모습을 바라보던 세희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또 일이 벌어졌네.”

어찌 보면 자신의 불찰이었다. 설마 창현이 포스터와 비슷한 복장을 하고 올 줄 예상하지 못했기에 그렇다.

핸드폰을 연 세희는 곧장 로드 매니저를 부르기 시작했다. 상황이 이쯤 되면 대중교통으로 빠져나간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벤을 이용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리곤 싸인을 해주고, 악수를 해주며, 같이 사진도 찍어주는 창현을 방치하기 시작했다. 뭐, 벤이 올 때까지 팬 서비스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었다.

창현은 세희에게 도움의 눈빛을 보냈지만 벤이 오기 전까지 세희는 모른 쇠로 일관하였다.

그런 팬 서비스는 벤이 도착하는 삼십 분 후까지 이어져야만 했다.

밖에 벤이 도착한 것을 본 세희는 팬들을 냉정하게 자르며 말한다.

“현의 매니저인 윤세희입니다. 이제 갈 시간이 되었으니 아쉽지만 놓아주시길 바랍니다. 더 오시는 분들은 안타깝지만 안 되고요. 나머지 분들까지 싸인을 받으세요.”

간단하게 상황을 정리한 세희는 창현을 데리고 벤으로 향했다.

벤에 탑승한 창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휴! 갑자기 웬 봉변이래요.”

“누가 비슷하게 옷을 입고 오래?”

“설마 저렇게 걸려 있을 줄은 몰랐죠. 어쨌거나 힘드네요. 난데없는 팬 서비스가 되어버렸으니까요.”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지친 표정을 짓는 창현이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세희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또 인터넷 기사에 뜨게 생겼네. 후우! 창현이 넌 어떻게 보면 이슈 메이커야.”

“이슈 메이커? 나쁘지 않은 별명이네요. 제법 세련된 느낌?”

풀 좀 죽으라고 한 말인데 오히려 괜찮다고 하는 창현의 모습에 세희가 머리를 부여잡았다.

“어이구! 그거 칭찬 아니거든?”

“하하하! 알았어요. 앞으로는 자숙 좀 할게요. 어차피 이슈거리를 제공한 적은 없는데요 뭐.”

‘소탈한 네 모습이 이슈 거리를 제공한단 말이다. 으이구!’

타박의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고개를 저으면서 억누르는 세희였다.

그런 세희의 생각을 알 리가 없는 창현이었기에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무언가 떠오른 듯 세희에게 말한다.

“그러고 보니 누나한테 밥 사기로 한 거 나중으로 미뤄지게 되었네요. 나중에 사드릴게요. 그래도 되죠?”

“…뭐, 상관없겠지. 나중으로 갈수록 이자가 붙어서 더 비싼 거 사야 되는 건 알지?”

피식 웃으면서 말하는 세희의 말에 창현이 표정을 굳히며 말한다.

“…그냥 기억에 잊혀지길 바라야겠군요.”

그렇게 창현은 선물 구매를 완료하였다.


2월 10일은 소녀시대의 팬 미팅이 있는 날이다.

이 날은 자신들이 주인공인 만큼 소녀들은 떨리는 마음을 부여잡고 팬 미팅에 참석할 준비를 하기 시작하였다.

데뷔 이후 사인회 같은 자리는 자주 가졌지만 팬 미팅은 처음이었기에 그렇다.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오는 걸까.

두근거리는 마음을 부여잡은 채 팬 미팅을 위해 열심히 준비를 하는 소녀들이었다.

데뷔곡인 <다시 만난 세계>부터 시작하여 정규 1집 앨범 활동곡인 <소녀시대>와 <Kissing You>까지 안무를 다시 맞춰보면서 팬 미팅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거기에 같은 SM라인인 슈퍼주니어가 지원 사격을 해주는 만큼 든든한 마음을 가지고 연습을 할 수 있었다.

연습 도중 수연이 뭔가 흐흐흐! 하고 기괴한 웃음을 짓기에 멤버들의 눈총을 샀지만, 그럴 때마다 조신한 모습으로 돌아오는 탓에 뭐라 물어볼 수도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팬 미팅 당일이 되자 멤버들은 수영의 생일을 축하해주기 시작하였다.

오후에는 팬 미팅이 있기에, 아침 일찍 일어난 소녀들은 미리 준비한 케이크를 수영에게 내밀면서 생일을 축하해준다.

대략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멤버들의 축하는 감동을 주기에 부족함이 없어서 수영은 평소 드센 모습과 달리 눈물을 글썽이며 여성의 섬세한 감수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준비를 한 뒤 미용실로 가서 머리를 하고는 팬 미팅 장소로 이동을 하였다. 일찍 도착하여 무대를 미리 맞춰볼 생각이었던 것이다.

코디와 스타일리스트, 매니저들까지 함께 하니 총 세 대의 벤에 나눠서 대이동을 해야만 했다.

팬 미팅 장소에 도착하자, 차에서 우르르 내리기 시작했다.

“수영아, 일어나. 도착했어.”

평소 벤에 타기 무섭게 잠들던 수연은 오늘 만큼은 묘하게 들뜬 안색을 한 채 장소에 도착하자 수영을 건드리며 깨웠다.

몇 차례 건드리자 감겨 있던 수영의 눈이 서서히 뜨인다.

“으음! 벌써 도착이야?”

잠시 눈을 붙이고 있던 수영은 자신을 깨운 사람의 정체를 확인하고는 놀란 표정을 짓는다.

“헉! 뭐야? 수연이 네가 날 깨운 거야?”

“난 뭐 깨우면 안 되나? 나가자. 오늘 제법 기대해도 괜찮을 거야. 후훗!”

“뭘 기대해?”

무엇을 기대해야 하는지 묻는 수영이었지만 수연은 그 물음에 대답하지 않은 채 벤에서 내린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에 수영은 인상을 살짝 찡그린 채 벤에서 내렸다.


팬 미팅 장소에 도착한 뒤 몇 번의 연습을 하고는 본격적인 팬 미팅이 시작되었다.

선배 가수인 슈퍼주니어의 능숙한 도움 하에 소녀들은 준비한 무대를 선보일 수 있었고, 각각의 매력이 담긴 모습을 팬들에게 보여줄 수 있었다. 그리고 질문 타임을 가짐으로써 그동안 팬들이 가지고 있던 궁금함을 풀어줄 수 있는 시간도 함께 했다.

약 두 시간 동안 진행된 팬 미팅은 서서히 종반으로 치닫고 있었다.

팬 미팅의 마지막 순서는 다름 아닌 수영의 생일 축하였다.

오늘 팬 미팅의 게스트이자 MC를 겸하여 맡은 이특은 수영의 생일 축하 파트로 넘어가기 전 특별 게스트를 언급한다.

“오늘 생일인 수영 양의 축하를 하기 전에 특별 게스트를 모시기로 하겠습니다. 제가 정말 삼고초려를 하여 모신 분입니다. 모두 큰 박수를 침으로써 맞이해주시기 바랍니다.”

이특의 말에 소녀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자신들이 듣기에 이런 것은 없었던 것이다.

“특별 게스트라니? 누구야? 아는 사람 있어?”

“난 들어보지도 못했는데. 도대체 누구야?”

“나도 몰라.”

웅성거리는 소녀들 사이에서 오로지 수연만이 눈을 빛내고 있었다.

특별 게스트가 창현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렇다.

그 사이 이특의 진행에 사람들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그럼 특별 게스트를 모시기로 하겠습니다. 나와 주세요!”

그 말과 함께 하얀색 장막 뒤로 마이크를 든 한 사람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동시에 MR이 울려 퍼지면서 미팅 장소를 뒤덮기 시작하였다.


갑작스러운 인영의 등장에 사람들은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짓는다.

그것은 소녀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미 사실을 알고 있는 슈퍼주니어는 그리 놀란 표정을 짓지 않았지만 아무 사실도 모르고 있었던 소녀들은 달랐다.

뜬금없는 특별 게스트의 등장에 놀란 표정을 수습하지 못하고 있던 것이다.

특별 게스트라니?

전혀 듣지 못한 터였기에 더욱 놀라는 것일지도 모른다.

“도대체 누구야? 아는 사람 있어?”

“있을 리가 있어? 이특 오빠가 초대했다고 하잖아.”

웅성거리는 소녀들이었다.

물론 창현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는 수연만을 제외하고 말이다.

MR이 흘러나오고, 장막 뒤 그림자가 마이크를 입가에 가져다 대자, 수연이 웅성거리는 멤버들에게 말한다.

“쉿! 노래 시작한다. 조용히 듣자.”

“…….”

수연의 말에는 거부할 수 없는 절대적인 위압감이 서려 있었다.

그에 소녀들은 웅성거리던 것을 멈춘 채 조용히 노래를 경청하기 시작했다.

흘러나오는 MR은 한국 사람들에게 너무나 유명한 생일 축하곡, Cliff Richard의 <Congratulations>였다.

익숙한 MR과 함께 유창한 영어 발음이 바탕 된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한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축복하는 노래인 만큼 노래 속에는 즐거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

“와…….”

노래를 듣던 소녀들의 입에서 감탄사가 절로 흘러 나왔다.

부르는 사람에게서 축하의 느낌이 물씬 풍기고 있던 것이다.

특히나 창현이 노래를 부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수연은 역시! 하는 감탄사와 함께 고개를 절로 끄덕였다. 노래에 높은 고음이나 기교가 담겨있지 않았지만 노래를 부르는 센스 하나만으로도 잘 부른다! 라는 느낌이 철철 흐르고 있었다.

듣는 귀가 트인 사람들은 그것을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소녀들은 수영을 바라보면서 부러움을 드러냈다.

“수영이 부럽다…….”

이런 축하 노래라니. 자신들도 생일에 꼭 듣고 싶은 노래가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꿈과도 같은 노래가 마침내 끝이 났다.

짝짝짝짝짝!

노래를 듣고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박수를 치기 시작하였다.

소녀시대의 팬 미팅인 만큼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대부분 남자였다. 그들은 특별 게스트가 남자란 사실에 실망하였지만 노래를 듣는 순간 더 이상 실망의 표정은 남아있지 않았다.

지금 노래를 부르고 있는 이가 진심으로 수영의 생일을 축하해주고 있다는 사실이 그들에게도 느껴지고 있던 것이다.

이토록 생생하게 감정이 전달되는 노래는 오랜만이었기에 한동안 여운에 잠겨 있어야만 했다.

노래가 끝나자 MC 꿈나무 이특이 마이크를 들고 감탄사를 터뜨린다.

“자, 노래가 끝났군요. 정말 대단한 노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의 감성을 자극하는 노래라고 해야 할까요? 자, 그럼 이쯤에서 축하 노래를 받은 수영 양의 소감을 안 들어볼 수 없겠지요?”

그 말과 함께 이특이 마이크를 든 채 수영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축하 노래를 들었는데 어떻습니까? 수영 양?”

“네? 네, 아… 정말 대단한 노래네요. 정말 대단해요. 와…….”

노래가 주는 여운에 헤어 나오지 못한 채 감탄사만 연발하는 수영이었다.

그 모습에 이특이 웃음을 지으면서 말한다.

“그렇죠? 정말 힘들게 섭외한 특별 게스트입니다. 자, 그럼 여기서 슬슬 특별 게스트의 정체를 알아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특별 게스트 분과 인터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이특이 장막 뒤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자 장막 뒤로 이특의 모습이 드러났고, 마이크를 입에 댄 이특이 창현에게 물었다.

“네, 정말 대단한 노래였습니다. 소녀시대 분들도 그렇고 관객 분들도 모두 감탄을 하고 있는데요. 본인의 노래에 스스로 만족하시는지요?”

이특의 질문에 창현은 씨익 웃음을 짓더니 입을 열기 시작한다.

“만족은 하고 있어요. 수영 양도 물론이고 관객 분들도 마음에 들어 하셨다니 다행이네요.”

푸하하하하!

창현의 목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그들의 귀로 들린 목소리는 다름 아닌 음성변조 목소리였던 것이다.

그것도 마치 여자가 음성변조를 한 듯한 가는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에 이특마저도 당황한 표정을 지은 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내 웃음을 짓더니 창현에게 묻는다.

“어떤 연유로 수영 양의 생일을 축하하러 온 것입니까?”

그 물음에 창현이 황당한 표정을 지은 채 이특에게 말한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이특 씨가 절 초대하셨다고 했잖아요. 설마 까먹으신 거예요?”

“아! 맞다! 그렇죠. 죄송합니다, 하하!”

자신이 삼고초려 해놨다고 해놓고 어떤 연유로 왔냐는 질문을 하자 모두 피식 웃음을 지어야만 했다.

무안한 표정을 짓고 있던 이특이 창현에게 질문을 하였다.

“그럼 질문을 바꾸도록 하겠습니다. 특별 게스트로 오신 만큼 수영 양과 평소 알고 지내는 사이가 맞을 텐데요. 맞습니까?”

“네, 종종 만나고는 했죠. 아, 여기서 알아두셔야 할 것은 주로 업무적인 일로 만난 거예요. 오해는 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행여 사람들이 오해할까 싶어 공적인 자리에서 몇 번 만났다는 이야기를 하는 창현이었다.

그에 이특이 잘했다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묻는다.

“몇 번 본 만큼 수영 양의 장점과 단점을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는데요. 장점과 단점에 대해서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음! 우선 수영 양은 성격이 시원하면서 쿨한 면이 장점이죠.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에요. 그 속에 내재된 여성다운 모습이 숨겨져 있어요. 아마 이것은 남자친구분이 이끌어 내줘야 할 부분 같고요. 단점은 별명처럼 식신이라는 것? 수영 양을 데려가려면 식비로 한 달에 최소 몇백만 원은 깨질 테니까요. 데려가실 때 단단히 각오하셔야 할 거예요.”

창현의 농에 다시 한 번 팬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수영이 살이 찌지 않는 체질이라 하여 많이 먹는 것은 많이 알려진 사실이었기에 사람들의 공감을 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다만 창현의 폭탄발언에 수영이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누구인지 확인하고, 자신의 폭력이 허용되는 상대라면 당장 달려가서 쥐어박아 줄 텐데 누구인지 몰라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 수영의 모습을 보면서 멤버들은 깔깔깔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설마 이런 공개적인 팬 미팅에서 수영의 실체(?)를 낱낱이 터뜨릴 줄 몰랐던 것이다.

수영의 정체에 대한 폭로가 있은 뒤, 이특은 입가에 묘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한다.

“자, 그럼 이제 슬슬 특별 게스트분의 정체를 밝히도록 해볼까요? 그냥 모습을 드러내는 건 조금 시시하니 퀴즈를 내서 맞추는 건 어떨까요?”

이특이 관객들을 향해 묻자, 모두 좋다고 대답을 하였다.

소녀시대 멤버들에게도 동의를 얻은 이특이 수영을 슬쩍 바라보다가 말한다.

“그럼 퀴즈를 내도록 하겠습니다. 참고로 특별 게스트분이 힌트 하나를 주면 수영 양이 누구인지 유추를 하여 맞추시는 겁니다. 만약 맞추지 못할 경우 특별 게스트분의 폭로가 하나씩 이루어지는 겁니다. 어때요, 좋죠?”

네에!

수영만 속으로 아니오!를 외쳤지만 관객들은 강하게 네!를 외치고 있었다.

같은 멤버들마저 그러고 있었기에 수영은 멤버들을 째려봄으로써 진압을 하였다.

그렇게 상황을 조성하자, 이특이 창현에게 말한다.

“자, 여기서 힌트를 잘 주셔야 합니다. 수영 양이 맞추지 못해야 그동안 숨겨져 있던 수영 양의 면면들을 들을 수 있을 테니까요.”

그에 창현은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인다.

“그거 좋네요. 저도 개인적으로 한 가지 상품을 걸도록 하겠습니다. 만약 첫 번째 힌트로 맞추면 제가 소녀시대 전원에게 꽃등심을 사도록 하겠습니다.”

꽃등심이란 말에 소녀시대 멤버 전원이 움찔하였다.

하지만 수영이 움찔한 것과 다른 소녀들이 움찔한 것은 달랐다.

수영을 제외한 소녀들이 움찔한 이유는 오늘 끝나고 멤버들간에 조촐한 삼겹살 파티를 하는 것에서 꽃등심 파티로 상향조정 될 수 있다는 것에 움찔한 것이고, 수영은 순간 번개처럼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 때문에 움찔 몸을 떨었던 것이다.

‘꽃등심? 설마?’

그러고 보니 노래 실력이 보통이 아니었다. 마치 수연이나 미영이가 구사하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영어 발음과 사기적인 가창력.

수영은 처음에 동방신기의 멤버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하였다.

그런데 꽃등심을 듣는 순간 생각이 바뀌었다.

그것은 직감이었다.

자신과 꽃등심으로 아주 진하게 얽혀있는 한 사람!

그리고 사기적인 가창력을 지닌 것까지 모두 설명이 되었다.

수영이 장막을 향해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창현이? 아니, 현이? 현 씨? 설마 현은 아니겠지?”

창현과 SM라인 아이돌이 모두 친하게 지낸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반말을 쓴다고 해서 뭐라 말할 사람은 없다.

어쨌든 단번에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창현은 물론이고 이특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 힌트도 내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아차린 것이란 말인가.

당황한 이특의 표정을 확인한 수영은 자신의 추측이 확실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다시 한 번 말한다.

“뒤에 있는 거 현이 너지? 맞으면 맞다고, 틀리면 틀리다고 말해봐!”

“아, 설마 한 번에 들킬 줄은 몰랐는데. 이러면 재미가 없잖아요.”

결국 창현은 순순히 정체를 밝히고는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는 슬쩍 소녀들에게 시선을 준다.

소녀들은 수연을 제외한 모든 멤버들이 놀란 얼굴로 창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설마 하고 있었지만 정말 창현일 줄은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수영의 생일을 축하한다고 해줄 줄 알았지 설마 팬 미팅 특별 게스트로 참여할 줄이야.

무대 중앙에 선 창현이 관객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현입니다.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오오오오!

창현의 인사에 그를 반겨주는 관객들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이 남자라서 그런 걸까? 다른 무대에 설 때 듣던 함성과는 차원이 다른 저조한 함성이었다.

창현은 그런 반응에 별로 개의치 않는 듯했다. 어찌 보면 제법 자주 얽히는 모습을 보였으니 자신은 눈에 가시처럼 여겨질 것이 분명했던 것이다.

간단하게 인사를 나눈 창현은 팬 미팅을 축하한다는 등의 말을 남기고는 조용히 무대 뒤로 물러났다. 자신의 시간은 끝이 났기에 그렇다.

그 후로도 팬 미팅은 계속해서 지속되었고, 팬 미팅이 거의 끝자락으로 흘러갈 무렵, 스케줄을 위해 슈퍼주니어는 자리에서 빠져주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약 한 시간여를 기다린 끝에 창현은 팬 미팅을 끝내고 나오는 소녀들을 볼 수 있었다.

MP3를 들으면서 조용히 자리하고 있던 창현이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입가에 미소를 지어보인다.

“자, 그럼 누나들 꽃등심이나 먹으러 가볼까요.”

약속은 약속.

창현은 약속을 지킬 줄 아는 도시남자였다.


즐거운 꽃등심 파티가 기다리고 있자, 소녀들의 안색은 희희낙락이었다.

하지만 그 중에서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한 사람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수영이었다.

창현은 전용 벤이 있기에 이동할 때 함께 하지 못했지만 한우 전문점에 도착하여 내리게 되자, 벤 안에서 잔뜩 전투력을 상승시킨 수영이 곧장 창현에게 달려든다.

“네 녀석! 감히 나에게 이런 말도 안 되는 별명을 부르다니!”

수영이 빠른 속도로 창현을 덮쳐갔지만 그보다 더 빠른 몸놀림으로 수영의 어택을 효과적으로 피해낸 창현이 능글맞은 표정을 지으며 묻는다.

“그게 무슨 말이죠? 전 그런 별명으로 부른 적 없는데요.”

차라리 사과를 하면 넓은 아량으로 용서해줄 수 있다.

그런데 전혀 인정하지 않은 채 뻔뻔한 표정을 짓다니.

몸을 부들부들 떠는 수영은 금방이라도 초사이언으로 변할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이것이 그래도…….”

분노 게이지가 상승하는 것이 피부로 느껴질 만큼 수영의 기세는 살벌했다.

그제야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깨닫고는 창현이 황급히 양손을 저으며 말한다.

“왜 그러세요. 누나를 위해 꽃등심을 사준다고 했단 말이에요. 그러니 진정하세요. 꽃등심 원하는 대로 드시게 해드릴게요.”

“……이도.”

“네?”

순간 흘러나온 수영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창현이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물었다.

그러자 수영이 창현에게 큰 소리로 말한다.

“차돌박이도! 차돌박이도 먹고 싶단 말이야!”

“…….”

수영의 외침에 창현은 물론이고 지금 상황을 흥미롭게 바라보던 소녀들도 맥 빠진 표정을 지었다.

“네, 마음껏 드세요. 하아!”

“아싸! 얘들아 들었지? 마음껏 먹으래. 오늘 정말 내 생일이긴 생일인가 보구나! 가자, 윤아야! 오늘 고기집 습격하는 거다!”

“네? 네…….”

준 식신의 반열에 든 윤아에게 손을 뻗은 수영은 그녀를 이끌고 곧장 고기집 안으로 들어선다.

그와 함께 본격적인 고기 파티가 시작되었다.


치이익!

불판 위에 고기가 올라와 익어가는 소리는 그 어떤 감미로운 멜로디보다도 착착 감기고 있었다.

무려 여섯 개의 테이블에 둘러앉은 사람들이 꽃등심과 차돌박이를 구워먹고 있었다. 오늘은 소녀시대 뿐만 아니라 함께 따라온 코디와 스타일리스트, 매니저도 함께 하고 있었다.

매니저들은 그렇다 쳐도 코디나 스타일리스트들은 창현을 보는 것이 처음이었기에 싸인을 부탁하기도 하고, 함께 사진을 찍기도 하였다.

그런 후 벌어진 것은 본격적인 고기 파티였다.

소녀시대 멤버들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값비싼 꽃등심을 얻어먹는다는 것이 무척 부담스러운 듯했지만 너무 부담을 가지면 오히려 자신이 힘들다는 창현의 말에 조심스럽게 고기를 먹더니, 이내 한결 나아진 모습으로 고기를 구워먹고 있었다.

“그러니까 왜! 거기서 식신 발언을 하느냔 말이야. 솔직히 먹는 양으로 치면 애들이 다 비슷비슷한 거라니까? 다만 내가 좀 자주 먹을 뿐이지. 솔직히 먹는 양은 윤아가 더 많아. 안 그래?”

팬 미팅에서 창현이 한 발언 때문일까.

수영은 자신의 식신 이미지를 탈피하고자 창현에게 일장 연설을 늘어놓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술에 취한 사람이 자신은 이런 사람이다! 라고 설득하는 모습과 비슷하였다. 단지 다른 점이 있다면 수영은 술을 마시지 않았을 뿐. 어지간히 식신 이미지가 억울했나 보다.

“언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언니가 저보다 많이 먹거든요?”

졸지에 동급 식신이 된 윤아가 수영의 말에 격렬하게 반응하였다.

하지만 수영은 윤아 너도 식신이라는 말을 하면서 물귀신 작전을 썼고, 평소 윤아가 먹을 것을 먹으면서 자신들을 약올리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소녀들도 윤아가 식신이라는 것을 공개적으로 인증한다.

결국 윤아는 식신 2호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얻게 되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창현은 웃음을 지은 채 함께 할 수 있었다.

즐기고 노는 자리인 만큼 지금 이 순간은 여러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있었다.

태연에게 마늘 폭탄 쌈을 선사해준 창현은 요리조리 자리를 옮기면서 공세를 피해내고 있었고, 서로가 서로에게 폭탄 쌈을 싸줌으로 인하여 누구도 믿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결국 소녀들과 휴전 협정을 맺음으로써 다시 화기애애한 고기 파티를 벌일 수 있게 되었다.

왁자지껄 이야기를 나누며 고개를 먹고 있을 때, 윤아가 창현의 곁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가면서 입을 열었다.

“저기… 창현아.”

“응? 윤아 누나, 왜요?”

수영의 고기 스틸을 막기 위해 실드를 펼치고 있던 창현은 윤아가 자신을 부르자 의아한 표정을 지은 채 말한다.

“그게 그러니까…….”

그 물음에 윤아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고개를 살짝 젓고는 창현에게 말한다.

“내가 쌈 하나 싸줄까?”

그 말을 들은 창현이 눈을 가늘게 뜨더니 말한다.

“누나 지금 연기하면서 저 폭탄 쌈 먹이려고 하는 거죠? 안 통하거든요?”

창현의 말을 들은 윤아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입가에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 그래? 아직 연기가 미숙한가 보네.”

“아직 절 속이기에는 부족하다니까요.”

당당하게 웃음을 짓는 창현을 보면서 윤아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드라마에 관한 것을 물어보려고 했지만 뭐라고 해야 될까, 용기가 받쳐주지 않는다고 할까.

그로 인해 윤아의 마음이 무척 심란했다.

‘내일 오디션이 있는데. 창현이가 드라마를 꼭 해줬으면 싶은데…….’

주조연이라는 자리가 상당히 중요했기에 윤아는 오디션을 눈앞에 두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랬기에 창현에게 드라마 운을 살짝 떼볼까 싶었는데 말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세희에게 물어볼까 싶었지만 창현 본인에게 직접 물어보는 것이 나을 것 같아 물어보려고 했던 것이다.

‘후! 일단 조연 자리를 획득하고 물어보도록 하자. 지금은 상황이 안 좋으니까.’

멤버들이 모두 모인 곳에서 창현이 드라마에 참여한다는 소식을 흘린다는 건 그리 좋지 못했기에 윤아는 드라마에 관한 것을 묻는 걸 접어 넣었다. 그리고 그 생각을 잊으려는 듯 고기 쟁탈전에 참전하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수영이 역시 식신 2호! 라고 외치면서 윤아를 도발했지만 진정한 식신은 그런 말에 반응하지 않고 먹을 것에만 집중하는 면모를 보였다.

한쪽에서는 태연이 매니저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들도 성인이라고요. 조금만요!”

“안 돼! 무슨 아이돌이 술이야. 음주 아이돌 되고 싶어?”

“우리도 이제 스무 살인데…….”

매니저의 단단한 가드를 어떻게든 뚫어보려는 태연이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매니저의 가드를 뚫지 못한 태연이 전쟁에서 패배한 패장처럼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자리에 복귀하였다.

그리고는 갑자기 호출 버튼을 누르더니 콜라를 시키기 시작한다.

“에잇! 음주를 즐기지 못하니 콜라에 취해보자! 모두 마셔!”

매니저를 함락 시키지 못한 것을 풀어내며 콜라를 본격적으로 마시기 시작하는 소녀들이었다.

탄산음료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 창현은 슬쩍 자리를 피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 잠시…….”

“어딜!”

자리를 피하려던 창현은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태연의 재빠른 가드로 인해 피하지 못한 채 붙잡힌 신세가 된 것이다.

태연은 컵에 콜라를 한가득 따라주며 창현에게 내밀었다.

“가려면 쭉 들이키고 가!”

“누나, 저 탄산음료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콜라를 마시지 않기 위해 창현이 뭐라 말을 하려 했지만 태연이 버럭 외치며 창현의 말을 끊는다.

“이것은 탄산음료가 아니야! 우리의 정신적 스트레스를 해소시켜줄 마법의 약이야! 자! 한잔 쭉 원샷하고 스트레스를 풀어버려! 마시기 전까지 안 놔줄 거야.”

“에구!”

변질(?)된 탄산음료 사랑에 창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콜라를 쭉 들이키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화장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너무 고기 굽는 연기에 그을린 것 같아 가볍게 세수를 한 창현은 물기를 말린 뒤 화장실에서 나왔다.

그리고 막 발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창현의 귓가에 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창현이 너 드라마 한다며?”

“……!”

목소리를 들은 창현은 화들짝 놀라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한 소녀가 팔짱을 낀 채 창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대체 자신이 드라마 제안을 받은 걸 어떻게 알고 있단 말인가.

창현의 시선을 받은 소녀가 입가에 진한 미소를 만들기 시작했다.




제45장 해야만 하는 이유




수영의 생일 파티가 끝나고, 다음 날, 창현은 아침 일찍 일어나 나갈 준비를 하였다.

오늘은 기나긴 신혼여행을 떠났던 석규가 회사에 출근하는 날이었다.

어제 귀국한 석규는 쉴 틈도 없이 처갓집을 오가며 인사를 나눈 뒤 돌아왔다. 그리고 간밤에 휴식을 취한 뒤에 회사에 나오게 되는 것이다.

오늘도 업무를 보기 위해 오는 것이 아니라, 간단하게 인사를 하기 위해 오는 것이었다.

창현은 그런 석규의 얼굴을 보려고 회사에 나가는 것이고 말이다.

“결혼한 새신랑이 바쁘긴 바쁘네.”

툴툴 대듯 말하는 창현이지만 속으로는 무척 기분이 좋았다.

늘 업무에만 신경을 기울여 염려하였는데, 좋은 분을 만나 다시 가정을 꾸리게 되었으니 창현으로서는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힘들게 노력한 끝에 지금의 위치에 올라올 수 있게 되었으니 앞으로 즐겁게 하루하루를 보내면 되리라.

아침 일찍 일어나 준비를 마친 창현은 곧장 회사로 향했다. 이른 시간에 외출하는 것이기에 로드 매니저를 불러 벤을 타고 가는 것이 아니라, 택시를 타고 향해야 했다.

회사에 도착한 창현은 곧장 회사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는 마주치는 직원들과 인사를 나누면서 곧장 사장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는 어엿하게 사장실 앞에 비서까지 두고 있었기에 창현은 사장실을 직접 노크하는 것이 아닌, 비서에게 말한다.

“사장님에게 제가 왔다고 이야기해주세요.”

창현의 말에 비서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석규에게 창현의 방문을 알린다.

몇마디 이야기를 나누던 비서는 인터폰을 내려놓고는 창현에게 말한다.

“안으로 들어오시라고 하네요.”

“네, 그럼…….”

허락이 떨어지자 창현이 곧장 사장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오래간만에 보는 석규에게 반가운 듯 인사를 하였다.

“아버지 저왔…….”

반가운 얼굴로 입을 열던 창현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어, 왔냐. 잠시만 기다려라.”

석규는 안으로 들어간 창현을 맞아주기는커녕 모니터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건성으로 대답했던 것이다.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기에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이란 말인가.

호기심이 든 창현은 석규의 모니터를 들여다 보았다.

그리고는 황당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건 또 뭐야. 아버지 맞고 하세요?”

컴퓨터 화면으로 보이는 것은 다름 아닌 맞고 판이었던 것이다.

석규는 모니터에 집중하면서 열심히 상대의 수를 읽어 들이며 맞고에 임하고 있었다.

그걸 보면서 창현은 황당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아침 일찍 회사에 와서 하고 있는 것이 맞고라니?

어이가 없었지만 창현의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모니터로 보이는 바에 의하면 석규가 상대방에게 지고 있던 것이다.

우선 이야기를 하더라도 기분이 좋아야 하지 않겠는가.

창현은 석규의 뒤에 서면서 그에게 조언을 해주기 시작했다.

“그것보다는 이걸 내시는 게 좋아요. 저걸 먹으면 청단을 노릴 수 있거든요. 그리고 이걸 먹어서 고도리를 차단하고…….”

갑자기 조언을 해주는 창현의 말에 놀란 표정을 지은 석규지만 이내 그의 조언이 타당하다고 여겼는지 그의 말대로 따르기 시작했다.

그 결과 패색이 짙던 석규가 승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치열한 접전 끝에 승리를 거두게 된 석규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대기실로 나가면서 창현에게 입을 열었다.

“어쨌든 이겼구나. 그나저나 창현이 너도 맞고를 잘하는데?”

그에 창현이 싱긋 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한다.

“당연하죠. 이래 보여도 제가 여기 계급이 신이라고요.”

그러면서 랭킹표를 보여주는 창현이었다.

랭킹을 확인한 석규는 놀랍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허, 이거 무슨 신이 이렇게 흔한 거지? 듣다 보니 세룬이도 신이라고 하던 거 같던데.”

“세룬 누나가요? 그건 몰랐는데 의외네요.”

그 사실은 창현도 몰랐기에 놀란 표정을 지으며 대답한다.

설마 세룬이 신일 줄이야. 게다가 랭킹도 자신과 거의 비슷했다. 이 정도면 보통 실력자가 아니었다.

그때, 석규가 의아한 시선으로 창현을 바라보더니 묻는다.

“그러고 보니 이거 미성년자는 못하지 않나? 어떻게 한 거냐?”

“…잠시 될 때가 있더라고요. 그때부터 시작한 거고요. 그나저나 오랜만에 보네요, 아버지.”

잠시 할 말을 잃었다가 얼버무리듯 말하면서 슬쩍 화제를 전환한다.

딱히 따질 마음이 없던 차였기에 석규는 그런 창현의 모습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거의 이십일 만이지. 제법 오래 되었구나.”

“그러게 말이에요. 유럽 여행은 잘 하셨고요?”

신혼여행으로 유럽 여행을 간 석규였다.

당연히 볼 것도 많고, 즐길 것도 많았으리라.

창현의 물음에 석규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좋은 곳이더구나. 가이드가 한 몫을 하기도 했지만 네가 말해준 것 때문에 더 유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지금은 한국에 칩거하다시피 하고 있는 창현이지만 작년에 유럽 투어 콘서트를 한 적이 있지 않은가?

그 경험을 살려 석규에게 유럽 여행의 노하우에 대해서 전수를 해준 상태였다.

석규는 경험자(?)인 창현의 조언을 진지하게 받아들였고, 그가 말한 것을 유심히 살피면서 유럽 여행을 한 것이다.

그 결과 제법 만족스러운 유럽 여행을 즐길 수 있었다.

“재밌는 시간 보내셨다니 다행이네요.”

“그래, 유익한 시간이었지. 후후!”

입가에 묘한 미소를 짓는 석규였다.

그에 창현이 묘한 표정을 짓더니 석규에게 넌지시 물었다.

“그럼 아버지, 늦둥이 동생을 기대해도 되는 거겠죠?”

갑작스러운 창현의 기습 공격이었다.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던 석규는 갑작스러운 창현의 말에 사래가 들렸는지 격렬하게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으음? 쿨럭! 느, 늦둥이라고?”

“아버지의 표정이 그런 것 같아서요. 왜요, 기대하면 안 되나요?”

그러면서 석규를 바라보는 창현의 눈빛은 마치 석규의 능력을 의심하는 듯한 것이었다.

그 눈빛은 남자의 자존심을 짓밟는 것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무려 17박 18일 여행을 떠났다가 온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동안 제대로 된 거사(?)를 치르지 못했다면 당연히 남자의 능력을 의심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석규가 발끈한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기대해도 좋다! 완전 분위기 좋았으니까. 조만간 이 아버지의 위대한 능력을 알게 될 것이다.”

“네, 믿어드릴게요. 그리고 동생도 기대하고요.”

발끈한 석규의 모습이 재미 있었는지 쿡쿡! 하고 웃음을 흘리는 창현이었다.

그 모습에 석규는 자신이 말려들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헛기침을 하며 분위기 전환을 시도했다.

“험험! 그 문제는 나중에 결과가 나올 테니 지켜보도록 하고. 그나저나 너 어제 소녀시대 팬 미팅에 참여했다고 하더구나?”

세희에게 소식을 접했기에 알고 있는 석규였다.

설마 그걸 언급할 줄 몰랐기에 창현은 순간 고개를 갸웃했지만 사실이었기에 이내 수긍하는 모습을 보인다.

“네, 수영 누나의 생일을 겸해서 하는 것이기에 겸사겸사 축하하기 위해서 참석을 했어요. 뭔가 잘못되었나요?”

창현의 물음에 석규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못되고말고. 그건 저쪽의 잘못도 있고 너의 잘못도 있다.”

“네?”

설마 잘못되었다고 할 줄 몰랐기에 창현이 황당한 표정을 짓는다.

그런 그에게 석규가 잘못된 점을 지적해주기 시작했다.

“우선 잘못된 것은 SM엔터테인먼트 측의 태도다. 팬 미팅에 참여한다는 것은 엄연히 회사 간의 교류라 볼 수 있다. 당연히 이쪽의 의견을 묻고, 네 의견을 묻는 식으로 했어야지. 너에게 연락오길, 회사에서 원하는 식이 아닌 개인적 친분으로 와달라고 하지 않았더냐?”

마치 통화 내용을 그대로 본 듯이 말하는 석규였다.

그에 창현은 놀라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네, 그랬는데요…….”

그와 함께 SM엔터테인먼트 측에서 의도적으로 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씁쓸한 미소를 지어야 했지만 말이다.

창현이 수긍하자 석규는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말한다.

“걱정을 하긴 했는데 기어코 그런 일이 일어날 줄은 몰랐다. 솔직히 팬 미팅을 참여하는 것은 네게 이득이 될 것이 아무것도 없다. 부득이하게 엮는 것도 그러하고. 그건 알고 있지?”

“네, 알고 있어요.”

인터넷을 자주하는 편이기에 그 부분에 대해서는 창현도 공감하는 바였다.

SM엔터테인먼트와 프로듀서로서 계약을 했다고 하지만 젊은 남녀가 엮인다는 것 자체가 사람들의 마음에 들 확률은 많지 않다.

나이가 많은 삼촌팬들은 넓은 마음으로 이해하는 식의 아량을 보이지만 소위 말하는 열성팬들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소녀시대와 슈퍼주니어가 친하게 지내는 것은 이해가 된다. 어찌 되었든 같은 소속사니까.

하지만 그 사이에 창현이 끼는 것은 여러모로 불편함을 줄 수 있다.

그걸 창현도 알고 있었고, 사적으로는 만나되 공적인 자리에서 만나는 것은 가급적 자제하고 있었다. 괜히 팬들을 자극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랬기에 창현은 자신의 실수가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제가 실수를 했네요. 죄송해요.”

축하를 해주고 싶은 마음이 앞섰던 것과 드라마 제안으로 찜찜했던 차였기에 폭넓은 시야를 갖지 못하던 차였다.

결국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밖에 없었던 것이다.

순순히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자 석규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한다.

“인정하니 그래도 다행이구나. 솔직히 나는 네가 이성을 사귀건 말건 상관하지 않는다. 그것은 너의 마음일 테고, 네가 자기 관리를 잘하는 것은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것이 외부로 드러나지 않게 하도록 하여라. 외부로 드러나게 되면 수많은 사람들이 달려들게 될 것은 분명한 사실. 그 점만큼은 고려하면 좋겠다.”

솔직히 상품 가치가 높은 만큼 창현이 이성을 사귀지 않는 방향이 가장 바람직하다.

하지만 그 점까지는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창현에게도 자신의 인생이 있지 않은가.

다만 바라는 점이 있다면 외부에 알려지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외부에 알려지게 되면 가장 많은 손해를 보는 것은 바로 창현이었으니 말이다.

석규의 말이 자신을 위하는 것이라는 걸 알았기에 창현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다.

“네, 제가 경솔했어요. 반성할게요.”

창현이 인정하는 모습을 보이자 석규는 입가에 미소를 띤 채 말한다.

“그래, 알면 됐다. 너에게도 듣기 좋은 소리가 아닐 테니 더 말은 하지 않으마. 그리고 이거 받아라.”

석규가 무언가 주섬주섬 꺼내들기 시작했다.

창현이 그것들을 확인하니 유럽에서 사온 기념품들이었다.

면면을 들여다보던 창현이 놀란 얼굴로 말한다.

“뭘 이렇게 많이 구입하신 거예요.”

“사다 보니 이렇게 되었다. 관세가 엄청나게 나왔지. 하하!”

“잘 받을게요.”

그러면서 물건을 받아챙기는 창현이었다.

선물 때문일까. 분위기는 다시 화기애애하게 변했다.

다소 가라앉은 분위기를 걷어내는데 성공한 석규는 오늘 창현이 오면 집고 넘어가려던 일을 떠올렸다.

그리고는 창현을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창현아.”

“네, 말씀하세요.”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한 석규의 모습에 창현이 물건들을 한쪽에 내려놓으며 대답한다.

그러자 석규가 창현에게 말했다.

“드라마 제안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

세희가 나서서 도저히 풀 수 없던 드라마 제안을 직접 풀려는 생각이었다.

드라마 이야기가 나오자 창현의 표정이 급속도로 굳어가기 시작했다.

설마 석규의 입에서 그 이야기가 흘러 나올 줄 몰랐던 것이다.

창현은 석규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버지는 그 제안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데요?”

솔직히 석규의 생각이 궁금했다.

지금 드라마 제안이 석규의 승낙을 얻고 나서야 온 것이 아니던가.

그런 만큼 석규가 어떤 생각에서 드라마 제안을 수락한 것인지 궁금했다.

지금 전에도 여러 번 드라마 제안이 들어왔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을 모르고 있던 것은 석규가 중간에서 차단을 했기에 그렇다.

창현의 물음에 석규는 흠! 하고 팔짱을 끼더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기 시작한다.

“난 솔직히 좋다고 생각한다.”

“어떤 면에서요?”

창현이 알고 싶은 것은 어떤 면에서 드라마 제안이 좋다고 생각하는 지였다.

아무리 곰곰이 생각을 해봐도 드라마 제안은 자신에게 있어 득이 될 것이 없었다.

아니, 득이 되는 것은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얻는 것에 비해 잃는 것이 너무나 많이 존재한다.

세희가 말하길 드라마 제안은 창현에게 새로운 인생의 경험을 불어다 넣어줄 것이라 하였다.

그것에 대해서는 창현도 동감하는 바였다. 드라마를 함으로써 그 배역에 몰두할 수 있다면 새로운 인생의 경험을 할 수 있다는 말은 거짓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그에 비해 잃을 수 있는 것이 너무나 많다.

우선 가수가 연기자를 한다는 것이 그 이유다.

가수는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지, 연기를 하는 연기자가 아니다. 그런 만큼 창현은 스스로도 연기에 대해 부족하다고 여기고 있다.

뮤직비디오에서 배역에 몰두 할 수 있었던 것은 대사가 없는, 분위기와 표정 연기만 하였기에 가능한 것이지, 직접 육성으로 연기를 하는 것은 차원을 달리하는 일일 것임이 분명했다.

이런 상황에서 연기를 하게 되면 다른 연기자들과 달리 세세한 점들까지 지적 받을 것임이 분명했다.

못하는 것이 있으면 크게 부각될 것이고, 잘하는 것은 묻히기 십상일 것이다.

이러다 보니 어찌 연기에 임할 마음이 나겠는가.

자칫 잘못하다가 그동안 쌓아온 이미지를 모두 버릴 뿐만 아니라 가수 활동에도 지장을 끼칠 수 있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기에 창현이 망설이는 것이다.

그런 창현을 보면서 석규는 간단하게 말해주었다.

“너에게 있어 가장 부족한 점이 무엇인지 아느냐?”

“…….”

석규의 말에 순간 창현은 침묵하였다.

자신의 약점이라? 무엇인지 생각이 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약점이 없어서 그렇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창현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자신의 약점은 무척이나 많다.

하지만 석규가 이렇게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무언가 대표적인 약점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자신의 대표적인 약점이 무엇인지 떠올리지 못했기에 순간 말문이 막힌 것이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창현을 보며 석규가 말했다.

“너에게는 치열함이 결여되어 있다. 이게 무슨 뜻인지 알고 있느냐?”

“치열함이라고요? 제가?”

치열함이 언급되자 창현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석규가 언급한 것은 단점이 아니라 장점이라 생각하고 있는 부분이었던 것이다.

창현은 자신 스스로 가장 자부하는 것이 바로 치열함이었다.

정상에 우뚝 서는데 성공했지만 창현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채찍질하는데 게을리 하지 않는다. 인기라는 것은 계절과도 같아서 어느 한순간 훅하고 스쳐지나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렇다. 아니, 인기는 어찌 보면 2순위에 불과하다. 자신이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이 엄연히 존재하는 이상 스스로 치열하다고 자부하고 있기에 그렇다.

그런데 자신에게 치열함이 부족하다니.

이는 자신의 가장 큰 장점을 정면으로 부인당하는 것과 같았다.

어이없는 표정을 짓는 창현에게 석규가 말한다.

“너는 스스로 치열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아니, 그것은 어찌 보면 맞겠지. 스스로에게 엄격하고 언제나 치열하게 준비를 해오고는 하니까. 하지만 내가 말하는 그 치열함은 그것이 아니다.”

그 치열함이 아니라니. 치열함에도 종류가 있단 말인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창현의 반응에 석규가 말했다.

“스스로에게 치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람들과 함께 뒤섞이며 치열함을 겪는 것도 중요하다. 창현이 너는 다른 사람들과 경쟁을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이는 스스로에게 치열하다 하여도 반쪽짜리 치열함에 불과하다. 모름지기 치열함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 부딪치며 겪어봐야 하는 것이다. 너는 그런 적이 있느냐?”

“…….”

석규의 날카로운 말에 창현은 순간 할 말을 잃어야만 했다.

그의 말마따나 자신에게는 그 점들이 결여되어 있었던 것이다.

어찌 보면 창현은 다른 사람들과 경쟁하는 것을 싫어한다고 볼 수 있다. 다른 사람들과 경쟁을 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들을 의식하게 될 것이고, 결국 자신만의 길을 모색하지 않은 채 다른 사람들이 함께 하는 길을 걷게 될 것이란 두려움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번 정규 3집 앨범을 발매할 때도 가요 프로그램에 나가지 않게 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어 내심 안도를 하였다.

다른 사람들과 경쟁을 하지 않았다는 안도감일 수 있는 것이다.

창현의 표정을 살피며 석규가 말을 이었다.

“너는 그것을 겪어야 한다. 그 점을 극복하지 못하는 이상 너는 영원히 슬럼프를 극복할 수 없다. 드라마는 그런 점에서 너에게 아주 시기적절한 기회라 할 수 있다. 왠지 아느냐?”

그것을 창현이 알 리가 없다.

석규 또한 대답을 바라고 물은 것이 아닌 듯 창현에게 말한다.

“드라마를 하게 되면 너는 최악의 조건에서 하게 될 것이다. 창현이 너는 위기가 닥칠수록 실력을 발휘하는 타입. 그런 만큼 드라마를 하게 되면서 너 스스로가 성장할 발판을 마련하게 될 것이다. 물론 이것은 나의 생각일 수도 있지. 하지만 너를 믿기에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최악의 조건을 자처함으로써 너의 잠재적인 능력을 끌어내고, 치열한 현장에서 너 스스로가 그 분위기를 접하게 되면 더욱 잘하기 위해 노력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바라고 있는 것이다. 내 생각은 여기까지. 나머지는 네가 결정할 일이다.”

그의 설명은 여기까지였다.

정말 그것이 끝이라는 듯 입을 다무는 석규를 보며 창현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드라마를 해야 할지 안 해야 할지 고민하는 창현의 생각은 길어졌다.

석규는 그런 창현의 모습을 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이렇듯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지만 어디까지나 창현에게 결정권이 있다.

드라마를 하지 않는다고 하여도 슬럼프를 극복할 다른 방법들은 충분히 있을 것이다.

다만 드라마를 추천한 것은 가장 적합한 방법이라 생각하여 말을 한 것뿐이고 말이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창현은 결정을 내린 듯 석규를 바라본다.

석규도 들을 준비가 되었다는 듯 창현에게 시선을 주었다.

이윽고 창현의 입이 열렸다.

“결정을 내리지 못하겠어요. 조금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요.”

“허어…….”

결정을 내린 것이라 생각하던 석규로서는 허탈한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무언가 결정을 내린 것처럼 행동하더니 결국에는 결정을 내리지 못하겠단다.

허탈한 마음이 가슴을 가득 채웠지만 석규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일이 아닌 이상 누구도 그 심정을 제대로 헤아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번 슬럼프는 어찌 보면 창현에게 있어 첫 슬럼프와도 마찬가지다. 당연히 본인이 슬럼프 대상자인 만큼 한결 신중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여러 가지 걸리는 것과 고려해야 할 점들이 많을 것이다.

“좋다. 그렇게 하도록 하여라. 하지만 너무 길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드라마를 제작하는 측에서도 기다려줄 수 있는 시간이 있는 법이니까.”

“네, 알겠어요. 충분히 고민해보고 연락을 드릴게요. 걱정 끼쳐드려서 죄송해요, 아버지.”

감사의 인사를 건네는 창현의 모습에 석규가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말한다.

“아니다. 소속사 사장으로서 이런 일은 당연히 해줘야 할 일이지.”

“소속사 사장님이 아니셨으면 안해주셨을 분위기인데요?”

농담을 건네는 창현의 말에 석규는 어깨를 으쓱한다.

“글쎄 그것은 잘 모르겠지. 어쨌든 충분히 고민을 해보아라.”

“네, 그렇게 할게요.”

그렇게 창현의 드라마 제안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2008년 2월 11일은 석규가 회사에 출근하는 날이기도 했지만 윤아에게는 오디션이 있는 날이기도 하였다.

새로운 드라마 배역을 따내기 위해 윤아는 오디션을 보기로 결정을 하였다.

윤아가 현재 도전하려는 배역은 다름 아닌 드라마의 주조연에 해당하는 배역이었다.

주연 만큼은 아니지만 주조연은 주연이 비견될 만큼 출연빈도가 높은 배역이다. 당연히 드라마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고, 주연들이 드라마의 스토리를 풀어나간다면 주조연은 그 스토리 흐름에 영향을 주거나 감초 같은 역할을 한다.

그런 만큼 얼굴을 알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배역이 바로 주조연이었다.

어느 정도 인지도를 쌓아나가고 있지만 여전히 원더걸스의 그림자에 가려져 있는 만큼 드라마 활동으로 자신이 얼굴을 알리고 소녀시대의 존재를 알릴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다는 것이 윤아의 생각이었다.

주조연은 비중도 비중이지만 역할을 잘 소화해내면 오히려 주연을 맡은 배우보다 더 많은 인기를 얻을 수 있다는 장점이 존재한다.

“반드시 역할을 얻어내야 해. 그래야 소녀시대를 알릴 수 있어.”

윤아의 각오는 대단하였다. 소녀시대를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는 만큼 그녀를 불타오르게 하기 부족함이 없었던 것이다.

거기에 인기를 얻으면 자신을 중심으로 소녀시대가 알려진다는 사심이 한몫하는 것은 당연했다.

SM엔터테인먼트에서 대형 기획사의 힘을 바탕으로 주조연 후보에 넣어준 만큼 그에 부끄럽지 않은 연기를 펼쳐야 하는 것이 윤아의 입장이었다.

기획사의 힘으로 우선 후보에 들어가긴 했지만 부끄러운 연기를 펼치면 기획사에도 누가 되지 않는가?

그런 만큼 오디션에 임하는 윤아의 각오는 대단하였다.

자신이 노력을 하여 소녀시대란 이름을 알린다! 그리고 자신의 개인 인기를 더욱 높인다!

그리고……!

‘운이 좋으면 창현이랑 같이 드라마를 찍을 수도 있고.’

사실 이것이 가장 컸지만 자신의 마음을 슬쩍 속이는 윤아였다. 자신은 결코 창현의 이야기를 듣고 오디션을 볼 마음을 굳혔다는 게 아니라면서 말이다.

그녀가 맡으려고 하는 배역은 재벌집 영양이면서 주인공을 사랑하는 역할이다. 처음에는 무척 다소곳하고 착한 성품을 보이다가, 주인공이 히로인에게 마음을 주기 시작하면서 그 착한 성품이 복수의 화신으로 변모하는 모습을 그려내야 한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눈이 내리는 그런 모습을 보여야하는 것이다.

고난이도의 연기를 요구하는 만큼 윤아는 마음을 굳게 먹으면서 오디션 장에 발걸음을 들여놓고 있었다.


윤아가 맡으려는 역할은 재벌가의 딸로서, 드라마 내에서의 이름은 ‘백은설’이었다.

이름만큼 청순하면서 고귀한 기품을 풍기는 백은설의 역할은 아무나 해낼 수 없을 만큼 고난이도의 연기를 요구한다.

처음 백은설 역할을 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가 않다. 청초한 재벌가 영양의 모습만 흉내내면 되는 것이다. 대사도 그리 많지 않은 편이고, 소위 말하는 분위기를 자아낼 수만 있으면 어렵지 않게 소화가 가능하다.

그러나 드라마의 중후반으로 넘어가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본격적인 사랑 구도가 잡히게 되면 상냥하던 백은설은 질투의 화신이 되어 주인공의 사랑을 방해하게 된다. 그리고 주인공에게 집착에 가까운 광기를 보여야 하는 탑 클래스의 연기를 펼쳐내야 하는 것이다.

드라마 내에서 백은설의 나이는 고등학생인 만큼 그 나이 대에서 그 정도 연기력을 보유한 배우들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현재 백은설 배역을 얻어내기 위해 오디션을 보는 사람은 다섯 명. 모두 드라마 제작팀에서 캐스팅한 배우들이었다.

대기실에서 자신의 차례가 오기를 기다리면서 윤아는 어떤 방식으로 오디션이 치러질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배역을 따내기 위해서는 오디션 심사위원들의 마음에 드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런 만큼 예의 바른 모습을 보여야 하고, 주어진 과제를 완벽하게 소화해내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에서 사람들이 예의를 차리는 것은 당연한 일. 그렇다면 오디션의 승패는 과제를 어떻게 잘 소화를 하느냐가 중요했다.

그렇다면 어떤 과제가 나올지 생각을 해둬야 한다.

예상치 못한 과제에 직면했을 경우 자칫 당황을 하다가 자신의 실력을 제대로 끌어내지 못한 채 무너지는 경우가 존재했기에 그렇다.

오디션을 보는 다섯 명의 사람 중에서 윤아의 차례는 네 번째다. 앞서 들어간 사람들이 제법 긴 시간 동안 오디션을 보고 있는 만큼 연기 과제를 받고 있는 것임이 분명했다.

연기 과제를 줄 경우 감정 몰입을 할 시간이 필요했으니 말이다.

‘이날을 위해 열심히 준비했어. 그러니 최선을 다하면 좋은 결과가 나올 것이야.’

어느새 자신의 차례가 되자 윤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면서 스스로에게 최면을 건다. 그리고는 망설임 없는 발걸음으로 오디션 장 안으로 들어섰다.

오디션 장 안에는 기다한 탁자가 놓여 있었고, 그 앞에는 세 명의 심사위원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안으로 들어간 윤아는 먼저 허리를 90도로 굽히면서 인사를 하였다.

“안녕하세요, 소녀시대의 윤아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윤아의 인사에 세 사람의 고개가 나직이 끄덕여진다. 그리고 그중에서 눈 꼬리가 살짝 처져 인상이 무척 선해보이는 이십대 중반의 청년이 윤아의 인사를 받았다.

“그래요, 반갑습니다, 윤아 양. 저는 이번 드라마의 감독을 맡게 된 김지환이라고 합니다. 좋은 연기 부탁드릴게요.”

“감독님이시라고요? 앗!”

눈앞의 청년이 감독이라는 말에 윤아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묻다가 실수를 자각한 듯 손으로 입을 막는다.

그 모습에 김지환 감독은 입가에 웃음을 지은 채 고개를 끄덕인다.

“하하! 감독 같아 보이지 않아도 제가 감독이 맞습니다. 여기 옆에 계신 분은 드라마의 시나리오를 맡으셨고, 이분은 이번 드라마의 스폰서를 맡아주신…….”

옆에 있는 사람들까지 친절하게 소개시켜주는 김지환 감독이었다.

그 설명을 들으면서 살짝 고개를 끄덕인 윤아는 자신의 각오를 밝혔다.

“네, 뵙게 되어 영광이고, 열심히 하도록 하겠습니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네요. 윤아 양은 도대체 왜 드라마에 지원하게 된 겁니까?”

의욕을 보이는 윤아의 모습에 모두가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일 무렵, 김지환 감독이 윤아에게 오디션에 지원한 이유를 물었다.

그에 윤아는 사심을 살짝 밀어둔 채 자신이 느꼈던 바를 말했다.

“우선 시나리오를 접했을 때 이 드라마가 너무나 좋다는 것을 느꼈고요. 백은설의 역할을 보는 순간 이 역할은 제가 잘 해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제가 드라마에 도전하고 있는 만큼 백은설이란 역할을 소화하고 싶은 욕심에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잘 해낼 수 있단 말인가요? 백은설이란 역할이 무척 힘든 역할인데도 말이죠?”

김지환 감독의 물음은 당연했다.

상당한 연기력을 요구하는 것이 바로 백은설의 역할인데 잘 해낼 수 있다는 윤아의 말은 자칫 오만하게 보일 수 있는 말이었던 것이다.

그에 윤아는 빙긋 웃음을 지으며 대답한다. 오디션을 볼 때 위축된 모습보다는 언제나 자신만만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좋다.

물론 준비되지 않은 채 보이는 자신감은 허세에 불과하지만 만반의 준비를 갖춘 채 보이는 자신감은 준비된 자의 여유라 할 수 있다.

“열심히 준비해온 만큼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좋습니다. 그 열정이 보기 좋군요. 그럼 곧장 오디션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디션의 분위기를 이끌고 있는 것은 나이가 지긋한 작가나 스폰서 인물이 아닌, 젊은 김지환 감독이었다.

그렇기에 윤아는 그가 생각보다 훨씬 대단한 인물이라는 것을 느끼고는 긴장한 표정을 지은 채 그의 입을 주시하였다.

김지환 감독은 긴장한 표정을 짓는 윤아를 보며 과제를 내주었다.

“백은설은 재벌가의 영양이지만 이 드라마에서 재벌가의 위치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백은설의 본격적인 역할은 주인공과 히로인의 사랑을 방해하면서 삐뚤어진 사랑의 결정판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제가 내드릴 과제는 백은설이 주인공과 히로인을 보면서 질투하고,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감정 몰입할 시간을 정확하게 3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준비가 되면 바로 연기를 시작해주세요.”

그 말과 함께 김지환 감독이 입을 다문 채 윤아를 주시하기 시작한다.

과제가 주어지자 윤아는 곧장 감정몰입을 하기 시작한다.

감정몰입이라는 것은 사실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다. 요령만 알고 있다면 감정몰입이라는 것 자체는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다만 자신의 경험 밖에 존재하는 것들은 감정을 잡기 무척 힘들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백은설의 역할이 어렵다고 하는 것이다. 집착에 가까운 과도한 사랑의 모습과 질투심을 보여야 하는 만큼 여성들이 이 감정을 리얼하게 표현해내는 것을 어려워하는 것이다.

그런 만큼 이 과제를 어떻게 해내느냐에 따라 백은설 역할의 캐릭터가 살아나느냐 살아나지 못하느냐가 결정된다.

주조연의 역할인 만큼 확실하게 표현할 수 있는 배우를 뽑으려는 것이 드라마 제작팀 측의 입장이었다.

‘역시.’

과제가 주어지자 윤아는 눈을 빛냈다.

자신의 예상이 그대로 들어맞은 것이다.

윤아는 오디션 과제로 주어질 것들 중에서 가장 확률이 높은 것이 바로 질투에 사로잡힌 백은설의 모습이라는 것을 눈치 채고 있었다. 아니, 이것은 오디션을 보는 사람들 대부분이 눈치 채고 있을 확률이 높을 것이다.

다만 그것을 표현하는 것이 어려울 뿐이지.

어쨌든 자신의 예상이 들어맞자, 감정몰입 하는 것도 빨랐다.

김지환 감독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곧장 감정몰입에 빠져들기 시작한 것이다.

윤아가 감정몰입으로 택한 것은 다름 아닌 창현과 세실리아의 모습이었다.

2007년 MKMF에서 파격적인 퍼포먼스를 펼친 두 사람의 모습을 떠올리기 시작한 것이다.

너무나도 멋진 창현과, 같은 여자가 봐도 아름답고 섹시한 세실리아의 모습. 기다란 금발과 매혹적인 입술을 지닌 그녀가 창현과 함께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상상한다.

그러자 가슴 한구석에서 질투심이란 감정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자신이 만들어낸 구도지만 그것에 몰입함으로써 마치 현실처럼 느껴지기가 시작한 것이다.

질투심이 가슴에 가득 차자 똘망똘망하게 빛나던 윤아의 눈이 질투로 활활 타오르기 시작한다. 그 눈을 본 심사위원 세 사람이 흠칫할 정도로 선명한 질투심을 표현하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는 아직 부족하다.

그래서 그녀의 상상은 다음 단계로 진행되고 있었다.

2007 MKMF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진 키스 퍼포먼스.

하지만 그녀의 상상 속에서는 그 퍼포먼스가 리얼리티를 살리기 위해 실제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급격히 수정되기 시작했다.

입술과 입술이 맞닿는 것이 뇌리에 그려지는 순간, 윤아의 질투심이 마침내 폭발한다.

두 눈에 활활 타오르는 질투심을 간직한 채 김지환 감독을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상황을 주었을 뿐, 대사는 모두 애드리브로 대처해야 한다.

윤아는 김지환 감독을 창현이라 생각하면서 질투심을 폭발시키기 시작한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내 모든 것을 다 줬는데. 내가 그 년보다 부족한 게 도대체 뭔데?”

솔직히 상상 속에서 등장한 세실리아는 완벽한 몸매를 가진 여인이다. 하지만 드라마 내에서 백은설은 예쁜 외모와 든든한 집안까지 지닌 인물이었기에 살짝 상황이 수정된다. 그러면서 당시 세실리아에게 하고 싶었던 말들을 그대로 내뱉기 시작한다.

“날 버리고 그년을 택하겠다고? 난 절대 용납하지 못해. 너를 포기할 수 없으니까. 네가 날 포기하더라도 나는 너를 나만 바라보게 만들 거야. 나를 포기한 것을 죽도록 후회하도록 만들어주겠어.”

활활 타오르는 질투심에 언뜻 드러나는 집착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소름을 오싹 돋게 만들었다.

심사위원들 셋은 윤아의 연기에 저도 모르게 소름이 돋는 걸 느껴야 했다.

그만큼 윤아의 연기는 싱크로율이 높았다.

“……아!”

대사를 끝낸 윤아가 마침내 자신이 만들어놓은 감정에서 빠져나온다. 정말 그런 일이 있었던 것마냥 마음 한구석이 뻐근해져오는 것을 느꼈지만 그것을 내색하지 않은 채 윤아는 심사위원들에게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한다.

“제 연기는 여기까지에요. 예쁘게 봐주셨으면 합니다.”

짝짝짝!

윤아가 고개를 숙이자 심사위원들이 박수를 친다. 특히 김지환 감독은 무척 큰 소리로 박수를 치며 말한다.

“훌륭한 연기였습니다. 어떻게 연기를 보여줄까 싶었는데 정말 대단한 연기로군요. 잘 봤습니다. 오디션 결과는 추후 SM엔터테인먼트로 통보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수고하셨습니다.”

“네, 수고하셨습니다.”

축객령에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인 윤아가 오디션 장을 벗어났다.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심사위원들은 저마다 윤아의 연기에 점수를 매기기 시작했다.

성공적인 오디션이었다.


“모두 훌륭하군. 예상 이상의 연기를 보여줬어.”

오디션이 모두 끝나고, 휴게실에 나와 홀로 담배를 피던 김지환 감독은 오늘 백은설 역할을 맡기 위해 오디션에 임했던 배우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고개를 나직이 끄덕였다.

상당한 연기력이 요구되는 역할에 지원한 배우들답게 상당 수준의 연기를 보여주고 있었다.

모두 시험으로 치면 합격점 수준이었다.

그리고 그중에서 김지환 감독의 마음을 강하게 울린 연기가 있었다.

“소녀시대의 윤아라고? 가수라고 해서 연기가 부족할 줄 알았는데 그런 면을 보일 줄이야. 무척 의외였단 말이지.”

놀라울 정도의 싱크로율에 김지환 감독은 전신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그것은 도저히 겪어보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연기였던 것이다.

탁월한 감정몰입과 함께 보는 사람들도 빨려들어갈 수밖에 없는 질투심에 가득 찬 연기라니.

나이는 많지 않지만 김지환 감독은 윤아가 어떤 상황인지 단번에 파악할 수 있었다.

오디션에 지원한 만큼 지원자들의 연기 수준은 어느 정도 꿰고 있었기에 오늘 윤아의 연기는 무척 의외라 할 수 있었다.

김지환 감독은 그것이 윤아의 갑작스러운 연기력 향상이 아닌, 상황에 들어맞는 윤아의 감정몰입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라 판단하였다.

“다른 연기들은 어설퍼. 하지만 질투심에 가득 찬 연기만큼은 가장 느낌 있게 표현해냈지. 누굴까. 소녀시대의 얼굴 마담인 윤아에게 그런 질투심을 심어줄 사람이. 그리고 좋아하는 사람이. 궁금하군.”

연기라는 것은 잘 표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느낌이라는 것도 중요했다.

그가 가수 출신인 현을 주인공으로 캐스팅한 것도 그 느낌을 받았기에 그런 것이다.

주변 사람들은 단순히 이슈 마케팅을 위해 캐스팅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말이다.

“이제 주인공만 남았군. 주인공만 성공적으로 캐스팅이 된다면 모든 것이 금상첨화일 텐데.”

어느새 다 타버린 담배 불을 끈 뒤 쓰레기통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차였다.

갑자기 그의 핸드폰이 진동으로 울리기 시작했다. 오디션 심사위원으로 참석하느라 핸드폰을 매너모드로 맞춰놓았기에 그렇다.

“음? 결정이 난 건가.”

핸드폰 번호를 확인한 김지환 감독이 반색하며 전화를 받는다.

그리고 통화가 이어짐에 따라 그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가기 시작한다.


“음! 이대로 가면 안 될 텐데.”

대화를 끝내고, 창현이 사장실을 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석규는 상황이 제법 심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실 석규는 이번에야 말로 창현이 드라마를 하겠다고 할 줄 알았다.

자신의 설득에 창현이 넘어가는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드라마에 출연시켜야 한다는 것은 사실 석규도 별로 고려하지 않았다.

적어도 세희의 전화를 받기까지 말이다.

신혼여행 당시 세희의 전화를 받은 석규는 큰 충격을 받아야만 했다.

설마 창현에게 슬럼프라는 것이 닥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조금 생각을 깊게 해보니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창현이 데뷔한 지 햇수로 벌써 4년이다.

가수로 치면 이제 신인 티는 벗고, 중견으로 접어드는 시기라 볼 수 있다.

아니, 창현의 인기를 본다면 중견이 아닌 훨씬 뛰어넘는 존재감이지만 말이다.

그래서 창현의 슬럼프 소식을 듣는 순간 석규는 가슴이 철렁하는 걸 느껴야만 했다.

그리고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창현도 인간이고, 그에게 있어서 슬럼프라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로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예리하게 날을 벼려놓은 명검은 쉽게 부러질 수 있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그 이유는 날카로움에 집착한 나머지 검의 강도에 대해 신경을 기울이지 못해서 그렇다.

창현이가 그것과 같다.

탁월한 가창력과 뛰어난 작곡, 작사 실력. 그리고 선풍적인 인기몰이까지.

무엇하나 부족함이 없다.

하지만 단점이 존재하지 않는 그런 점이 창현에게 딜레마로 적용된 것이다.

너무 완벽하기에 오히려 극복하기 힘든 슬럼프가 닥쳐온 것일 확률이 높았다.

그걸 깨닫게 되자, 창현의 슬럼프는 쉽게 극복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때 떠오른 것이 바로 드라마 캐스팅 제의였다.

새로운 드라마로 데뷔를 하게 되는 김지환 감독은 다름 아닌 석규의 대학교 후배.

창현의 이미지가 주인공 역에 딱 들어맞는다 하여 캐스팅 제안을 한 것이다.

당시 석규는 미련 없이 드라마 제안을 거절하려다가 기간을 넉넉하게 줄 테니 한 번쯤 고려해달라는 후배의 간곡한 부탁에 기간을 다 채우고 거절하려고 하였다. 너무 칼같이 저버리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에 그렇다.

그런데 지금 이것이 새로운 슬럼프 타파의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여긴 것이다.

“다른 방법도 있지만 지금 상황에서 가장 적절한 방법이다.”

석규가 드라마가 적합하다고 여긴 것에는 이유가 존재한다.

첫째는 바로 타이트한 일정이었다.

슬럼프라는 것은 길면 길수록 늘어지게 되면서 점차 덩치를 키워나간다.

자신이 슬럼프라고 자각하는 순간 모든 것이 잘 풀리지 않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이다.

특히 날카로운 검과도 같은 창현에게 있어서 장기간의 슬럼프는 독이다.

그렇기에 타이트한 일정으로 정신없이 휘몰아치다 보면 슬럼프를 자각할 생각이 없어지게 된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슬럼프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둘째는 바로 의도적인 음악의 봉인이다.

만능 엔터테이너니 뭐니 하지만 창현은 가수다. 그렇기에 음악과는 뗄 수 없는 관계라 할 수 있다.

너무 자주 접하게 되니 오히려 질리는 상황.

그렇기에 의도적으로 음악을 멀리하게 됨으로써 음악에 대한 갈증을 키우는 것이다. 창현이 음악을 너무나 좋아하는 것을 알기에 음악의 의도적인 봉인은 그에게 있어 음악에 대한 갈증을 키워줄 것이다.

이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부여해줌과 동시에 음악을 하고 싶다는 욕구를 증가시켜 줌으로써 결여 되어 있던 음악에 대한 갈증을 해결시켜주는 해결책이 될 것이다.

시기와 상황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졌기에 석규는 창현에게 드라마를 추천했던 것이다.

만약 이 요소들이 갖춰지지 않았더라면 제안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리스크가 크기는 하지만 말이지.”

슬럼프 타파 묘책으로 언급하긴 했지만 자칫하면 잃을 수 있는 것도 너무 컸다.

그 점이 걸렸지만 근본적으로 창현을 믿기에 제안을 한 것이다.

이제 창현의 결정만이 남은 셈이었다.

“직접 이야기를 나누게 해야겠군. 이야기를 들으면 마음이 확실하게 막을 수 테니.”

창현이 가장 염려하는 부분은 다름 아닌 드라마로 인해 끼칠 악영향이었다.

리스크가 너무 큰 만큼 섣부른 결정을 못하는 것이다.

그랬기에 석규는 김지환 감독을 직접 연결시켜 창현과 이야기를 나누게 할 생각이었다.

어떤 형태로든 결론이 나길 원했으니 말이다.

마음을 굳힌 석규는 곧장 핸드폰을 펼쳤다. 그리고는 김지환 감독의 핸드폰으로 연락을 취했다.

♩♪♬

컬러링을 들으니 창현의 노래인 <Go&Stop>이었다.

그걸 듣는 순간 석규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저번에는 이 컬러링이 아니었기에 그렇다.

“벌써 사전 작업을 해놓은 건가?”

제법 투철한 작업 정신이라 생각하면서 석규는 핸드폰에 귀를 기울였다.

잠시 후, 핸드폰이 연결 되면서 김지환 감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나다, 지환아.”

직속 후배였기에 편하게 말을 놓는 석규였다.

번호를 등록해놓은 상황이기에 지환은 석규의 전화에 반기는 목소리를 하였다.

-예, 형님. 신혼여행은 잘 갔다 오셨습니까?

석규가 신혼여행을 간 것으로 알고 있었기에 김지환 감독은 석규가 얼마 전에 돌아온 것이라 생각했다. 실제로 그 생각이 맞기도 했고 말이다.

“그래, 잘 갔다 왔지. 덕분에 좋았고, 후후후!”

-크! 좋겠습니다. 저도 어서 가야 하는데 말입니다.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오랜만의 회포를 푸는 두 사람이었다.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석규는 김지환 감독의 표정이 밝다는 걸 느끼고는 물었다.

“그런데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는 게냐? 목소리가 밝은데?”

-아, 그거 말입니까. 후후후! 실은 좋은 일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김지환 감독은 아까 전에 있던 일들을 간략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드라마 주조연 역할을 맡을 사람을 뽑는데 무척 마음에 들더군요. 아주 딱 들어맞는 역할의 배우를 찾아낸 것 같아 기분이 무척 좋습니다.

“그래? 잘됐다니 다행이군. 그렇게 만족할 정도였으면 찾기가 힘들었을 텐데 말이지.”

-그러게 말입니다. 가수인데 연기도 제법 만족스러운 수준이어서 기분이 아주 좋습니다.

가수란 말에 석규는 움찔한다. 어찌 보면 창현과 같은 상황이 아닌가?

호기심이 든 석규가 물었다.

“가수라고? 누군데 그러지? 궁금한데?”

-소녀시대의 윤아라고 하는데, 알고 있습니까?

이름을 들은 석규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설마 소녀시대의 윤아가 언급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드라마에 출연을 하면서 배역을 맡던 것이 떠올랐다.

놀라움이 담긴 석규의 목소리가 그대로 전해졌다.

“소녀시대의 윤아? 그게 정말이냐?”

-어라, 알고 계십니까?

알지 못하고 있었는 줄 알았나 보다.

그 말에 석규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어찌 모를까. 직접 회사에 오기도 했었는데.

“알다마다. 라샤의 뮤직비디오에서도 출연을 했는데.”

-그렇군요. 어쨌든 배역을 잘 소화해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나저나 무슨 일로 전화하신 겁니까? 혹시?

혹시? 하면서 묘하게 말끝을 흐리는 김지환 감독. 석규가 무엇 때문에 전화를 한 것인지 어렴풋 짐작하는 듯하다.

그에 석규가 냉담하게 그의 기대감을 잘라버린다.

“된다는 이야기가 아니니까 그런 얼토당토하지 않은 기대는 하지 말고.”

-쳇! 캐스팅 성공인 줄 알았는데. 그럼 무슨 일로 전화하신 겁니까?

캐스팅 이야기가 아닌 걸 알자 무척 아쉬워하는 안색을 보이는 김지환 감독이었다.

그에 석규는 그의 성급한 성격을 떠올리고는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한다.

“안 그래도 캐스팅 건에 대해서 이야기 할 게 있어서 전화한 것이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캐스팅 건이 무언가 잘못되기라도 했습니까? 되면 된다. 안 되면 안 된다. 결정이 내려지면 연락을 주겠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의아한 김지환 감독의 목소리는 당연했다.

그에 석규는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입을 열었다.

“사실은 드라마를 해야 하는 이유가 생겼다.”

창현의 슬럼프에 대해 굳이 언급을 할 필요는 없었다.

그의 슬럼프는 어찌 보면 큰 여파를 끼칠 수 있는 사항이었기에 그렇다.

물론 김지환 감독은 믿을 만한 사람이지만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지 않은가. 아는 사람은 적을수록 좋다는 말이 맞다. 그렇기에 굳이 언급하지 않은 채 드라마를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만 언급한 것이다.

석규의 말을 들은 김지환 감독의 목소리가 대번에 밝아진다.

-정말이십니까? 현 군을 드라마로 넣고 싶은 것이?

그로서는 믿기 힘든 사실이 아닐 수 없었다.

주인공 배역으로서 현이 마음에 든 것은 사실이지만 사실 희망을 그리 많이 걸지 않고 있었다.

여태까지 현을 드라마 배역으로 탐내던 감독들은 많았다.

그러나 누구도 뜻을 이루지 못했다. 중간에 석규에게 가로 막혀 진전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김지환 감독은 창현이 배역에 잘 어울린다 생각하여 캐스팅을 한 것이지만 다른 감독들은 다르다. 창현을 캐스팅 함으로써 이슈 마케팅을 하려고 한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김지환 감독이 캐스팅 한 것이 제3자가 보기에는 다를 바가 없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그렇기에 내심 포기하고 있었는데 석규가 전혀 의외의 말을 꺼낸 것이다.

설마 현을 드라마에 출연 시킬 생각을 하다니.

김지환 감독으로서는 가뭄에 단비가 내린 것처럼 반가운 사실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 사실이다. 하지만 문제가 있어. 무언가는 해봐야 될 것 같아서 말이지. 내가 분위기는 다 만들어뒀는데 창현이가 도통 하려고 하질 않거든. 그래도 일단 해보는 게 좋지 않겠나? 너는 내 후배니까 같이 연결되면 좋은 거고.”

그렇게 말을 해서 밑밥을 깔아놓는 석규였다.

자신의 고생을 타인에게 알림으로써 빚을 진 듯한 기분을 들게 만드는 것이다.

이래저래 인연을 만들어놓으면 나중에 나쁠 것은 없으니.

-그래요, 감사합니다, 형님. 그럼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창현을 캐스팅할 수 있다는 사실에 몸이 달아오른 김지환 감독.

자신이 해야 할 역할에 대해 묻는다.

그에 석규는 걸렸다는 듯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회사로 와라. 와서 이야기를 해라. 그럼 결정을 내릴 거다.”

본격적으로 판을 만드는 석규였다.


“언니들 저 왔어요!”

오디션을 본 윤아는 곧장 숙소로 귀가하였다. 오디션이 어디까지 길어질 줄 몰랐기에 추가 스케줄을 잡아 놓지 않은 것이다.

더군다나 이번 드라마 배역을 따내는 것은 SM엔터테인먼트에서도 제법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부분이 아니던가? 그랬기에 다른 스케줄을 더 넣어서 윤아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오늘 하루 만큼은 자유였다.

소녀시대 내에서 스케줄이 많은 걸로 둘째 가라하면 서러운 윤아였기에 그만큼 오늘은 즐거운 날이었다.

더군다나 오디션도 제법 만족스럽게 하지 않았던가?

오늘 숙소에는 수연과 유리 두 사람만 남아 있었다.

두 사람은 윤아가 돌아오자 반겨주었다.

“윤아 왔어? 오디션은 어때?”

소파에 앉아서 TV를 보고 있던 수연이 윤아에게 시선을 주면서 묻는다.

그에 윤아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말한다.

“아직은 잘 모르죠. 하지만 느낌이 좋아요. 오디션에 붙을 것 같은 예감이 들거든요.”

그만큼 윤아는 자신의 연기에 만족감을 느끼고 있었다. 방금 전 연기는 스스로가 생각해도 소름이 돋을 정도로 잘해냈다고 생각되던 것이다.

주먹을 불끈 쥐는 윤아의 모습에 수연이 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끝을 흐렸다.

“그래? 다행이다. 잘 됐으면 좋겠다.”

그때, 화장실에서 유리가 막 머리를 감은 듯 촉촉해진 머리를 수건으로 비비듯 물기를 털어내며 나왔다. 그리고 숙소로 돌아온 윤아를 보며 반색했다.

“우리 초딩 왔어?”

유리의 말에 윤아가 뚱한 표정을 짓더니 말한다.

“초딩이라뇨! 이제 그런 별명은 취급 안 하거든요.”

“그래, 알았어. 근데 일찍 왔네. 오디션이 일찍 끝난 건가?”

멤버들 모두가 윤아의 오디션 사실을 알고 있는 만큼 오디션 결과를 궁금해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성공할 가능성이 무척 높은 드라마라는 사실을 들었기 때문이다. 드라마가 성공하게 되면 소녀시대라는 이름을 널리 알릴 수 있다는 말을 듣던 차였기에 드라마 오디션 성사 여부는 무척 중요했다.

유리의 물음에 윤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오늘 일찍 끝나더라고요. 회사에서 늦게 끝날 줄 알고 스케줄 잡지 않았는데 오늘 완전 노는 날인 거죠.”

어린 아이처럼 좋아하는 윤아의 모습에 유리가 마주 웃음을 지어주고는 물었다.

“잘 됐다. 근데 생각보다 오디션 보는 사람이 적었나보네?”

“별로 많지 않더라고요. 다섯 명 정도? 연기하는 걸 보지 못했는데 신인 연기자인 것 같더라고요. 심사위원들 표정을 살펴보니 연기도 잘하는 것 같고요.”

윤아의 말에 유리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더니 의자에 앉아 머리를 말리면서 윤아에게 물었다.

“그래? 어떤 연기 했어? 궁금하네.”

“음! 제가 맡을 역할의 느낌이랄까? 그런 걸 표현했어요. 제 역할 아시잖아요.”

저번에 취조를 빙자한 고문을 하면서 다 알아내지 않았던가!

그랬기에 유리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윤아에게 말한다.

“재벌가 영양? 우와! 그거 너랑 거리가 먼 걸로 아는데?”

확실히 장난을 좋아하고 고고한 것보다는 익살스러운 면이 많기에 어울리지 않았다.

물론 그것은 유리의 생각일 뿐이었다.

윤아가 뿔난 표정으로 유리를 바라보며 말한다.

“아니거든요! 저도 기품 있는 연기 잘할 수 있거든요! 그리고 제가 오디션을 본 건 그 연기가 아니었어요.”

“재벌가 영양이 아니었다고? 그 특징 밖에 없지 않았어?”

멤버들에게 언급한 것은 재벌가 영양이라는 것밖에 없었다.

그에 윤아는 순간 아차했지만 굳이 숨기는 모습을 보일 필요가 없었기에 쿨하게 대답한다.

“사실 재벌가 영양이지만 나중에 질투에 가득 찬 여인으로 변하게 되거든요. 그래서 질투에 가득 찬 모습을 보였어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괜찮게 한 것 같아요.”

괜찮기는, 완전 대박이었다. 스스로도 그런 감정몰입이 될 줄 몰랐기에 그런 느낌은 더욱 컸다.

그 말을 들은 유리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질투에 찬 연기? 와! 그건 완전히 미영이를 위한 거잖아?”

멤버들 중 질투가 많은 편인 미영을 꼬집는 말이었다.

그 말에 윤아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연다.

“그래서 말이죠. 연기를 하는데…….”

유리에게 오디션 봤던 내용을 이야기하는 윤아.

TV를 보는 수연은 그 이야기를 조용히 귀 기울이고 있었다.


전날 창현을 만나고 김지환 감독과 통화를 끝낸 석규는 일찍 퇴근을 하였고, 다음 날, 일찍 출근을 하였다. 어제까지는 공식적으로 휴식이었고, 오늘부터 본격적으로 업무를 보아야 한다.

아침 일찍 출근한 석규는 창현을 불러들였다. 어제 이야기 했던 것을 끝맺어야 했던 것이다.

사장실 안에 들어선 창현을 본 석규는 생강차 두 잔을 주문하고는 차가 나오자 먼저 한 모금 마시면서 입을 열었다.

“내가 널 부른 이유는 알고 있겠지?”

창현이 모를 리 없다. 어제 이야기 나눈 것에 대한 답을 들으려는 것이리라.

“네.”

그가 대답을 하자 석규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창현에게 물었다.

“그래, 그럼 결정은 내렸느냐.”

드라마를 할 것이냐, 말 것이냐.

여기서라도 확실하게 결정을 내려도 상관없다. 김지환 감독을 부르기는 했지만 캐스팅 거절을 제외하고 자신의 후배로서 소개를 시켜주면 되니까. 어차피 연예계가 인맥인 만큼 창현이 어떻게 나오든 상관이 없었다.

석규의 물음에 창현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 결정을 못 내렸어요. 죄송해요.”

그답지 않은 우유부단한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창현으로서도 답답한 순간의 연속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수천수만 명의 관객들이 있는 무대라면 자신의 모든 실력을 발휘하여 그들을 만족 시켜주면 된다. 하지만 지금의 슬럼프는 태어나 처음 겪어보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고, 무엇보다 자신의 행보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 강하게 압박해왔다.

본 실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던 때에는 자신감이 그를 지탱하고 있었지만 슬럼프가 들이 닥치면서 소위 말하는 ‘나는 안 될지도 몰라.’ 라는 식의 생각이 창현을 잠식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자신감을 잃는 순간 나름 칼 같던 판단력도 흐려졌다.

예전 같으면 석규의 말을 믿고 선뜻 결정을 내렸을 테지만 자신감이 빠른 속도로 사라지고 있는 지금, 연기 실패가 자신에게 닥쳐올 리스크를 감안하면 쉽사리 결론을 내리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답지 않은 모습의 연속이 아닐 수 없었다.

석규는 그런 창현의 상태를 한눈 꿰뚫어보았다.

예상보다 심각한 상태에 석규도 가슴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한숨을 푹 내쉰 석규가 창현을 보면서 말한다.

“슬럼프는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것이다. 그런 만큼 나는 네가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면 한다.”

맞는 말이다. 슬럼프라는 것은 누구나 찾아온다. 다만 그 슬럼프를 극복하는 방법이 각각 다를 뿐이다.

말은 쉽지만 그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석규도 느끼고 있었다.

말 한 마디에 슬럼프를 극복할 수 있었다면 악순환의 반복으로 이어지는 사람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으리라.

창현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한다.

“그게 쉽지가 않네요.”

차라리 석규가 신혼여행을 갔을 때가 더 나았다. 그때는 자신이 슬럼프라는 것을 제대로 자각을 못하고 있었을 때였지만 완전히 자각하게 된 지금은 무엇 하나 하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게다가 말은 안 했지만 창현의 어깨를 더욱 무겁게 만드는 것이 있었다.

바로 석규의 드라마 제안이었다.

원래는 하지 않으려던 것이 석규는 하라는 방향으로 말을 하게 되자 의도 하지 않게 창현에게 부담감을 한층 가중시키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사람은 원래 극한의 상황까지 몰리지 않으면 도박을 선택하기가 힘들다.

그에게 있어서 드라마는 도박과도 같은 선택.

석규가 무슨 의도로 드라마를 하려고 하는 지는 알겠지만 실패할 경우 잃는 것이 너무 많기에 창현을 머뭇거리게 만들고 있었다.

“후우!”

그런 창현의 모습에 석규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때, 그의 핸드폰에 연락이 왔다. 석규는 번호를 보고는 눈을 빛내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그래, 근처에? 알았다. 말해놓을 테니 올라오도록 해. 그래.”

통화를 끝낸 석규는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창현도 입을 열지 않으니 자연히 분위기는 침묵에 빠져들었다.

잠시 후, 인터폰으로 손님이 왔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듣자 석규가 창현에게 말한다.

“신중한 것은 좋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면 네 고민이 더욱 깊어질 것 같아서 사람을 불렀다.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들어보고, 네가 결정하도록 하여라. 나는 네 결정을 존중하도록 할 테니. 안으로 들여보내도록.”

허락이 떨어지자 사장실 문이 열리면서 이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청년이 안으로 들어왔다. 바로 김지환 감독이었던 것이다.

그는 한눈에 창현을 알아보고는 그에게 다가왔다.

창현도 손님이 들어오자 놀란 얼굴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김지환 감독이 먼저 창현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이번에 현 씨를 캐스팅한 드라마의 감독 김지환이라고 합니다.”

손을 내미는 김지환 감독의 행동에 창현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은 채 손을 잡는다.

“예, 반갑습니다. 현으로 활동하고 있는 강창현입니다.”

“석규 형님의 이야기를 듣고 오게 되었습니다. 고민이 많으시다고요? 이참에 이야기를 해서 현 씨의 고민을 풀어드리고자 왔습니다.”

“일단 앉고 나서 이야기 하지. 너를 드라마에 캐스팅한 김지환 감독은 내 학교 후배다. 그러니 편한 삼촌으로 생각하고 이야기를 해보도록 해. 너도 그게 편하겠지?”

석규의 말에 김지환 감독이 고개를 끄덕인다.

“저도 당연히 그게 편합니다.”

“그럼 앉아. 서 있지 말고.”

그의 권유에 김지환 감독이 석규의 옆에 앉았다. 그러자 석규가 물었다.

“차는 뭘로? 커피? 녹차?”

“녹차가 좋습니다.”

“그럼 녹차 한 잔 부탁하도록 하지.”

비서에게 부탁을 하자, 잠시 후, 녹차가 나왔고, 잔을 받아든 김지환 감독이 당장 먹기에 뜨거워 탁자 위에 내려놓으면서 창현에게 말했다.

“묻고 싶은 말이나 하고 싶은 말을 허심탄회하게 해보십시오. 오늘 그러기 위해서 온 거니까요.”

사람을 무척 편안하게 해주는 목소리였다. 게다가 첫 인상도 나쁘지 않았고, 석규가 무척 믿고 있는 듯했다.

그에 창현은 긴장감을 풀고는 서서히 자신의 생각을 정리한 뒤 입을 열기 시작하였다.

“드라마에 대해서는 아버지… 아니, 사장님에게 간략하게 들었습니다. 제가 주인공으로 나오길 원하신다고요.”

창현의 말에 김지환 감독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맞습니다. 현 씨가 주인공으로 출연해주시면 원했기에 캐스팅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게 무엇 때문인지 궁금합니다. 솔직히 전 연기에 대해서 아무런 경력이 없습니다. 그런데 굳이 왜 제가 주연으로 출연해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창현은 이 점이 충족되질 않았다.

석규는 김지환 감독이 다른 감독들과 다른 이유에서 캐스팅을 했다고 했지만 창현은 그 이유를 짐작하기가 힘들었다.

무엇 때문에 자신을 캐스팅을 한단 말인가?

여태까지 자신을 캐스팅 하려는 감독은 모든 것을 배제한 채 자신의 이름값을 노리고 제의를 해왔었다.

이슈 마케팅으로 이름을 널리 알리는 홍보 효과를 누리려는 속셈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김지환 감독은 다르다는 말에 창현은 줄곧 의아함을 느껴야만 했다.

도대체 무슨 이유 때문에 자신을 캐스팅 했단 말인가?

이 이유를 창현은 알고 싶었다. 이유를 알지 못하면 결국 이슈 마케팅으로 이용하려고 하는 것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음! 그 점 말입니까. 하기야…….”

창현의 물음에 김지환 감독은 고개를 나직이 끄덕인다. 창현이 무엇을 염두에 두고 자신에게 질문을 한 것인지 짐작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창현이 평범한 나이의 소년들과 달리 생각이 상당히 깊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창현이 드라마를 거절하는 이유가 당장의 실패를 염두에 두고 그러는 것이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닌, 여러 가지를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다면 이야기의 진행이 더 어려워질 수도 있고 쉬워질 수도 있다.

생각이 깊다는 것은 그만큼 말이 통한다는 이야기가 될 수 있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아울러야 할 것들이 많다는 이야기였다.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하고. 일단 이야기가 통한다는 이야기니 희망을 가져도 되겠군.’

그렇다는 건 이제부터 자신의 손에 달렸다는 것이다.

김지환 감독은 혀로 입을 축이면서 입을 열기 시작하였다.

“제가 현 씨를 캐스팅한 이유는 간단합니다. 혹시 라샤의 노래 중 하나인 <가면의 기사>를 기억하고 계십니까.”

그 물음에 창현은 망설일 것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물론입니다. 기억하고 있어요.”

라샤의 노래가 아닌가? 그리고 그 뮤직비디오에서 자신이 남자 주인공으로 출연을 하였다. 여자 주인공은 윤아로 정해졌었고, 진짜 하지는 않았지만 키스신이 들어간 촬영이 있지 않았던가.

잊으려고 해도 잊기 힘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왜 그것을 언급한단 말인가.

의아한 표정을 짓는 창현을 보며 김지환 감독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일단 미안하게 생각하는 점이 있습니다. 저는 <가면의 기사>에 출연한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

김지환 감독의 말에 창현이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 석규를 바라본다.

자신이 그곳에 출연했다는 사실은 촬영팀을 제외하면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그런데 어떻게 김지환 감독이 그 사실을 알고 있단 말인가.

놀란 표정을 짓는 창현에게 김지환 감독이 살짝 고개를 숙인다.

“사실 처음에는 현 씨를 캐스팅하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드라마 주인공을 놓고 고민하던 차에 우연히 라샤의 뮤직비디오를 보게 되었습니다. 바로 <가면의 기사> 뮤직비디오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는 순간 깨닫게 되었죠. 가면을 쓴 채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가면의 기사의 모습을. 대사? 그것은 마지막 대사 한 마디로도 충분했습니다. 그 한마디에 실려 나오는 진심이 저의 가슴을 뒤흔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가면의 기사>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을 주인공으로 캐스팅하려고 한 것입니다.”

다소 놀라운 사실이었다. 그리고 창현의 의문을 풀어주는 말이 아닐 수 없었다.

그의 말대로라면 김지환 감독은 처음부터 창현을 캐스팅하려는 것이 아니라 <가면의 기사>에 나온 남자 주인공을 캐스팅하려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랬군. 그랬어.’

궁금했던 사실이 풀리게 되자, 속으로 수긍을 하는 창현이었다. 김지환 감독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는 자신의 위치를 마케팅으로 사용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걸 깨닫게 되자 안도의 감정이 든다. 사람에게 실망을 한다는 것만큼 감정에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은 드문 일이었으니 말이다.

워낙 말을 길게 한 탓에 김지환 감독은 혀로 입을 축이며 말한다.

“마침 운이 좋게도 <가면의 기사> 뮤직비디오를 촬영한 감독님이 제가 아는 분입니다. 그래서 저는 곧장 감독님에게 찾아가 남자 주인공의 정체에 대해 물었습니다. 하지만 감독님은 가르쳐줄 수 없다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저는 의아함을 느꼈습니다. 왜 가르쳐 줄 수 없는 걸까? 신인배우라면 분명 요란한 광고를 했을 텐데? 의아함을 느낀 저는 비밀 내용이라면 허락을 맡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감독님이 AA엔터테인먼트 사장이신 석규 형님에게 허락을 맡아야 한다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저는 석규 형님을 찾아가게 되었고, 석규 형님에게서 현 씨의 이름을 듣게 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제가 현 씨를 초대하게 된 연유입니다.”

“…그렇군요.”

긴 이야기였다. 하지만 자세히 설명한 만큼 확실하게 이해가 되었다.

창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김지환 감독은 입가에 미소를 짓는다.

“처음부터 현 씨라는 것을 모르는 상황에서 캐스팅을 한 것이기에 조건이 파격적이거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지만 현 씨가 완벽하게 해낼 수 있다면 가수로서도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는 것이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석규가 갑자기 창현에게 연기를 시키려는 구체적인 이유를 모르지만 김지환 감독이 눈치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창현에게 무언가 문제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것이 음악에 관련된 분야일 확률이 높다고 판단을 내렸을 뿐이다.

그래서 슬쩍 언급을 한 것이다.

창현은 김지환 감독이 그 사실을 알고 있는지 모르고 있는지 몰랐지만 어찌 되었든 중요한 것은 그가 자신에게 연기를 권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창현이 김지환 감독에게 말한다.

“하지만 저는 연기를 전공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폐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되는데요.”

그 말에 김지환 감독은 창현이 어느 정도 인식을 달리했다는 것을 깨닫고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뮤직비디오에서 보여준 것만 하셔도 충분합니다. 그리고 시나리오를 읽어보셨습니까?”

“네.”

석규가 읽어보면서 정하라고 하기에 읽어본 적이 있다. 무언가 깊은 교훈은 없지만 많은 사람들이 즐기면서 볼 수 있는 드라마라는 것이 창현의 생각이었다.

“어떻습니까?”

“나쁘지 않더라고요. 충분히 성공할 수 있을 것 같고요. 그래서 연기를 전공하지 않은 제기 끼면 어찌 될까 싶기도 하고요.”

김지환 감독이 고개를 강하게 저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제가 현 씨를 캐스팅한 까닭은 현 씨의 인지도 때문이 아닌, 뮤직비디오에서 보여준 연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연기가 다라고 할 수 없지만 드라마 내에서의 캐릭터가 그런 능력을 발휘하면 시청자들에게 깊은 각인을 줄 수 있습니다. 나머지는 현 씨의 노력에 달린 것입니다. 그렇기에 제안을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능력을 믿으십시오.”

“저를 믿으라고요?”

자신을 믿으라는 김지환 감독의 말에 창현이 순간 멈칫한다.

무언가 가슴 속에서 퍼뜩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던 것이다.

석규가 언급을 했을 때는 느낄 수 없던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은 아들이고, 자랑스러워했으니까. 칭찬을 계속 들으면 칭찬에 무감각해지는 것처럼 늘 석규에게 칭찬에 가까운 말만 들어왔기에 그의 말이 창현에게 무언가를 느끼게 하기에는 부족함이 있었다.

하지만 제3자인 김지환 감독의 말을 듣자 창현은 깨닫는 것이 있었다.

언제부터 자신이 이렇게 스스로를 믿지 못했단 말인가.

늘 겸손한 모습을 보이고는 했지만 속으로는 스스로를 믿는 마음이 대단했다.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어떤 일이든 도전을 하고 노력을 하게 되면 그 빛을 발할 수 있다고 말이다.

그런데 언제부터 자신이 이걸 하면 못할까, 라고 생각하게 된 것일까?

순간 물꼬가 트인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리고 창현은 자신의 근간이 될 수 있었던 ‘자신감’ 이라는 것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음향총서를 얻고 다시 얻게 된 자신의 자신감은 사실 깊은 바탕을 이루고 있지 못했던 것이다.

언제든지 자신은 사람들에게 외면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창현에게 오만하지 않게 만드는 겸손함을 가져다주었지만 자신을 믿게 만드는 자신감을 진하게 이루지 못하게 하였다.

양날의 검과도 같았던 두 가지를 동시에 얻지 못했던 창현의 패착이다.

그제야 자신이 왜 슬럼프가 심화되고 있었는지 창현은 깨달을 수 있었다.

그걸 깨닫게 되자 창현이 고개를 나직이 끄덕인다.

“좋아요. 드라마 제안을 받아들이도록 하겠어요. 도전이라는 것은 실패의 두려움을 극복했을 때 할 수 있는 것이겠지요. 감독님의 말씀을 듣고 저는 그 도전이라는 것을 해보기로 마음을 굳혔어요. 잘 부탁드릴게요.”

창현이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하자 석규과 김지환 감독은 화들짝 놀란다.

두 사람 모두 창현이 이렇게 일찍 결론을 내릴 줄은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특히 석규의 놀라움이 무척 컸다.

결정을 내릴 법하다고 생각할 때쯤에 계속해서 결단을 미루던 창현이 순식간에 결정을 내리자 기쁜 마음이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허탈한 마음도 들었다.

무슨 사람을 차별하는 것도 아니고…….

그런 마음이 들었지만 어찌 되었든 지금 중요한 것은 창현이 드라마를 하기로 했다고 한 것이다.

김지환 감독은 얼굴에 활짝 웃음을 지으면서 말한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현 씨가 함께 한다면 반드시 성공할 것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연기에 있어서 입문자와도 같기에 감독님이 많은 지도 편달을 부탁드릴게요.”

김지환 감독의 설득에 넘어간 만큼 확실하게 책임을 지라는 식으로 말을 하는 창현이었다.

그의 모습에 김지환 감독은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입가에 웃음을 지은 뒤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저만 믿으십시오. 제 눈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현 씨도 조만간 알게 될 것입니다.”

창현의 수락을 얻자 김지환 감독은 마치 천군만마를 얻은 것 마냥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 자신이 원하던 인물을 얻은 것도 얻은 것이지만 무엇보다 현을 얻은 만큼 드라마가 방영 시작 전부터 엄청난 이슈를 일으킬 것이란 것을 느낀 것이다.

그것을 의도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부가적으로 얻는 것이니 만큼 기뻐할 수밖에 없었다.

상황이 잘 해결되자 이를 지켜보고 있던 석규가 입을 열었다.

“이야기가 잘 해결되었다니 다행이군. 그럼 친목을 다질 겸 점심식사나 함께 하지. 원래는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서 점심식사 자리를 잡아놓았는데 다 해결 되었으니 축하하는 자리로 해야겠군.”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형님.”

“고마워요, 아버지.”

석규의 말에 고마움을 표한 두 사람과 함께 사장실을 벗어나 인근 식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계속해서 드라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친분을 틔울 수 있었다.

그렇게 창현의 드라마 합류가 본격적으로 정해졌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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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마음을 울리는 음악 시즌2 제1화 +10 15.04.17 7,373 95 10쪽
37 ▲▲▲▲▲시즌2 시작!▲▲▲▲▲ +5 15.04.17 5,421 65 1쪽
36 마음을 울리는 음악 106장-108장 +8 15.04.16 6,409 106 2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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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마음을 울리는 음악 16장-18장 +5 15.04.16 11,536 242 163쪽
5 마음을 울리는 음악 13장-15장 +5 15.04.16 14,527 297 237쪽
4 마음을 울리는 음악 10장-12장 +8 15.04.16 13,727 352 171쪽
3 마음을 울리는 음악 7장-9장 +10 15.04.16 14,540 362 142쪽
2 마음을 울리는 음악 4장-6장 +11 15.04.16 16,820 421 1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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