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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번 님의 서재입니다.

마음을 울리는 음악

웹소설 > 작가연재 > 팬픽·패러디, 현대판타지

김현우
작품등록일 :
2015.04.16 13:27
최근연재일 :
2015.06.01 17:02
연재수 :
5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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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4.16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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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332쪽

마음을 울리는 음악 88장-90장

DUMMY

제88장 프로젝트 앨범 4-B <Devil Cry>




와아아아아!

홀을 뒤덮는 거대한 함성 소리와 함께 한 남자가 무대 위로 등장했다. 그리고는 몇마디 대사를 하더니 앞쪽을 힐끗 보고는 고개를 갸웃한다.

“누구?”

“누구라뇨. 대한민국이 낳은 천재 중 천재! 월드 스타이자, 황태자라 칭해지는 현 씨가 오늘 오셨다구요.”

“…….”

흥분하여 침을 튀기면서 이야기하는 수근의 말에 왕비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는 조용히 창현과 수근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헛웃음을 짓는다.

“하! 이거 PD님이 날 죽이려고 하네. 내가 아무리 네티즌의 안티, 시청자의 안티지만 말 잘못하면 내일 묻히는 거 아니야.”

천하의 왕비호조차도 창현에게 함부로 말할 수 없었다.

현과 관련된 이야기는 무조건 전국민적인 관심을 받을 수밖에 없으니까.

재미를 위해 악담을 해도 그것이 어떻게 비틀려서 보도될지 상상도 하기 싫었다.

“시청자분들도 이해해주실 거예요. 현 씨도 이해해주실 거죠?”

수근의 물음에 앉아있던 창현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자 왕비호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그럼 또 이야기가 달라지지. 시청자 여러분 보셨죠? 이거 다 현 씨가 원해서 그런 겁니다.”

입가를 히죽이며 얄미운 미소를 지은 왕비호가 무언가를 들고 말한다.

“자! 현! 나이가 올해 열일곱! 이제 고등학생이네?”

마치 어린 아이를 대하는 것처럼 우쭈쭈쭈 말한 왕비호가 만들어 온 판을 들더니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한다.

“이번 노래! 악마의 유혹! 그야 말로 대박이었어. 솔직히 순정만화책을 찢고 나온 줄 알았다니까?”

꺄아아아아!

웬일인지 창현의 외모를 극찬하자, 여성팬들이 함성을 지르며 환호한다.

“하지만!”

입가에 비열한 미소를 지은 왕비호가 그 환호를 끊어버린다. 그리고 그가 내용물을 가리고 있던 포스티지를 떼자, 글자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그것은 대한민국을 광풍으로 몰아넣은 이번 앨범의 타이틀곡 <악마의 유혹> 가사였다.

“현의 여태까지 가사 유형을 보면 제3자, 3인칭 관점에서 보는 경우가 많았지. 그런데! 이 가사를 봐! 여성과 잘 되어서 알콩달콩 행복하게 살아가는 이야기야.”

<악마의 유혹> 가사를 차근차근 읽으면서 말하는 왕비호.

그러면서 의미심장한 눈으로 창현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제3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감이 있던 그의 노래가 1인칭이 되면서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 직접 알콩달콩 로맨스를 즐기는 류로 변한 것이다.

관객들의 반응이 심상치 않게 변하자, 왕비호가 웃으면서 말한다.

“에이! 뭐! 현도 사람이니까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 그럴 수도 있지. 누구나 선망하는 슈퍼스타지만 사람답게 사랑도 하고 잘 지내길 바라면서, 다시 한 번 현이 세계 정상으로 올라가길 바랍니다. 현 포에버!”

그 말과 함께 마무리를 짓는 왕비호였다.

하지만 그 대상이 다름 아닌 현이었기에 파장은 만만치 않을 것이다.

‘골치 아파지겠군.’

웃음을 짓고 있던 창현은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현에 관련된 이야기는 늘 연예기사 중 가장 뜨겁게 다뤄진다.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한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사소한 것 하나까지 기사로 작성되었던 것이다.

조만간 미국으로 진출할 거란 이야기가 있었기에 그 반응은 더욱 뜨거웠다. 다시 한 번 미국으로 건너가 빌보드 제패를 이룩한다면 그의 성과가 우연이 아닌, 실력으로 올라섰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과 같았으니까.

그런 와중에 개그 콘서트를 보러 갔다가 왕비호에게 당한 일격은 제법 컸다.

먹음직스러운 떡밥이 생겨나자, 기사는 우후죽순 양산되기 시작했고, 소설가의 재능을 발견한 기사들은 어느새 현의 열애설 추측까지 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하지만 석규는 그것을 보고도 태평했다.

“상관하지 마라.”

“이렇게 소란스러운데 상관하지 말라고요?”

기사란을 보고 머리가 절로 지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가장 먹음직스러운 연애라는 것이 쥐어졌으니 한동안 그것을 가지고 생산에 생산을 거듭할 것이고, 잊혀질 즈음에 재생산을 거듭할 것임이 분명했다.

“이걸 뒤덮기 위해서는 막강한 것이 필요하다는 건 알겠지?”

“물론이죠.”

하지만 추측을 가지고 소설을 써내려가는 기자들에게 제동을 거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정도 건수가 있지 않느냐?”

“있다고요? 아, 설마?”

무언가 떠오른 듯 창현이 석규를 바라보자, 입가에 미소를 지은 그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 설마가 맞다. 바로 4-B 앨범 발표 소식으로 묻어버리면 된다.”

석규가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던 이유가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아무리 물고 늘어져도 결국 근거가 없는 소설 짓기가 아니더냐? 그것을 한방에 보내버리려면 4-B 앨범으로 무대 위에 선다는 것을 알리면 되는 거지. 일정도 슬슬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으니 적절한 순간이기도 하고.”

“그렇죠. 아무래도…….”

고개를 끄덕이는 창현. 계단 춤의 호응이 워낙 좋아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활동을 길게 이어나간 점이 없지 않아 있었다.

이렇게 되면 자칫 4-B 앨범은 제대로 활동을 하지 못하고 미국으로 향할 수도 있었다.

새로운 앨범으로 컴백한다는 사실을 알리면 충분히 상황을 뒤집을 수 있을 것이다.

“기자들도 이게 더 낫다는 걸 알고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 기자들을 구워삶는 것은 내 일이니까.”

“뒤집을 수 있을까요?”

“어렵지 않으니까 걱정하지 말아라. 이번 앨범은 특별한 안무가 필요 없으니 간단한 퍼포먼스로 대체하고.”

“네.”

그 부분은 예전부터 계속해서 연습을 해왔기에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석규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완성된 4-B 앨범을 집어들고 중얼거린다.

“그럼 본격적으로 소설들을 묻어볼까.”


석규의 호언장담처럼 다음 날이 되자 거짓말처럼 열애설에 대한 기사들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힘을 발휘하여 기사들을 감춘 것이 아니다. 현의 4-B 앨범 발매 일정이 발표되자마자 더 먹음직한 미끼를 물고 기자들이 그것을 보도하기 바빴던 것이다.

여기에 쐐기를 박기 위해 인터뷰를 몇 개 진행함으로써 자연스레 근거 없는 기사들을 묻어버리기 시작하였다.

창현으로서는 절로 안도의 한숨이 나오는 순간이기도 하였다.

“후우!”

“뭘 걱정한 거야. 사장님이 괜찮다면 괜찮은 거지.”

“아버지 능력이 뛰어난 건 알았지만 당사자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어요.”

연습실에서 시린과 함께 노래를 맞춰보던 중이었기에 창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했다. 석규의 말을 믿었지만 만약 묻히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일말의 걱정이 남아 있었다.

그 말에 시린이 어깨를 으쓱했다.

“사장님의 능력이야 검증된 거지.”

“그래요?”

“잘 모르나 본데, 회사 규모가 작아보여도 알짜 중 알짜라고! 그런 사장님이 장담하신 일이라면 그렇게 진행될 거니까 그냥 믿어!”

“이럴 땐 누나가 속이 편해보여요.”

“그래? 내가 좀 그런 면이 있긴 하지. 그래도 활동할 땐 안 그렇다고.”

현재 라샤는 엠넷과 함께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컴백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상태. 작년 이후 쭉 국내 무대에 서지 않았기에 많은 팬들이 그녀들의 컴백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그 기대를 조금이나마 충족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오게 될 것이다.

이번 현의 4-B 앨범 수록곡 중에 함께 듀엣으로 노래를 부르는 곡이 있었고, 그것을 부르며 무대 위에 설 예정이었으니까.

“연습을 많이 해서 그런지 굉장히 능숙한데요? 오히려 제가 부족하게 느껴질 정돈데.”

“그렇게 말하지 마. 누구 자신감 깎아먹을 일 있나. 어쨌든 난 꾸준히 연습해왔으니까 창현이 네가 좀 맞춰줘.”

“알았어요.”

이번에 무대 위에 서는 것은 시린에게도 여러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룹으로 활동하지만 아시아 각국의 콘서트를 성공적으로 이끌었고, 개개인의 인지도도 확고부동하게 자리를 잡은 상황이다.

여기에서 각자 개인의 역량을 발휘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기에 석규는 먼저 라샤에서 가장 가창력이 뛰어난 시린을 무대 위에 세우려고 하는 것이다.

함께 무대 위에 서지만 엄연히 주가되는 것은 시린이고, 창현은 보조 역할에 지나지 않았기에.

그 이야기를 전달받은 상황이었고, 솔로로서 욕심을 갖고 있었기에 시린은 이 기회를 붙잡기 위해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

‘그나저나 이번 컨셉을 잘 소화해야 할 텐데.’

열심히 하는 시린을 보면서 창현은 살짝 걱정이 들었다.

4-A와 4-B는 컨셉이 동일하지만 그 속에 담긴 의미는 달랐다.

그 부분을 담아내는 것은 온전히 자신의 몫이었기에 창현은 시린과 연습이 끝나도 홀로 남아 연습에 매진하느라 바빴다.

‘4-A가 잘된 만큼 4-B도 성세를 이어나가려면 최대한 잘살려야 해.’

자신만의 스타일을 추구하다가 처음으로 대중적인 것에 초점을 맞춰 기획하게 된 이번 4집 앨범.

그것은 창현으로 하여금 대중들의 기대라는 큰짐을 떠안게 하였다. 그들의 기대가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그리고 얼마나 멋진 무대를 선사해야 하는지 몸소 느끼고 있었다.

자신을 위해서, 자신만의 무대를 서던 것과 천지차이였다.

기대를 양 어깨에 짊어진 창현은 오늘도 연습으로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2008년 9월 30일.

“어떻게 하지?”

정은은 너무나 초조했다.

오늘은 다름 아닌 현의 4-B 타이틀곡 <Devil Cry>의 티저 영상 공개가 있는 날이다.

8월 초중순 4-A 앨범으로 컴백한 현은 현재 7주 연속 1위라는 어마어마한 기록을 세우고 있는 중이었고, 그것은 현재진행형이었다.

그런 현의 순위를 위협할 수 있는 가수들이 전무한 가운데, 자체 기록을 갱신하는 것도 가능했지만 AA엔터테인먼트에서는 미국 일정을 위해 4-B 앨범을 발매하겠다는 이야기를 한 상태였다.

현의 골수팬인 정은으로서는 당연히 티저 영상을 보기 위해 눈이 뻘겋게 변할 수밖에 없었다.

저번에 티저 영상을 보면서 방청권을 얻었던 만큼 이번도 그에 준하는 상품이 있을 것이라 생각되었기 때문에.

다만 그녀로 하여금 망설이게 만드는 것은 예전과 비교도 할 수 없는 경쟁자들 때문이었다.

4-A 타이틀곡 티저 영상 공개는 기습적으로 이루어졌지만 이번 4-B는 대대적으로 이야기를 퍼뜨려놓은 상태였기에 경쟁자들이 장난이 아닌 상태였다.

여기에서 순위권을 기록한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나 혼자로는 안 돼.”

아무리 자신의 컴퓨터가 최신형이라 해도 순위권에 드는 것은 무리가 따랐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

잠시 고민을 하던 정은이 이내 입술을 지그시 깨물더니 결정을 내린 듯 걸음을 옮긴다.

그녀가 향하는 곳은 다름 아닌 안방이었다.


“딸, 무슨 일로 온 거니?”

정은의 어머니, 박지숙 여사는 입가에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딸의 방문을 환영했다.

그 모습을 보며 정은은 자신의 용건을 꺼내놓았다.

“엄마한테 부탁할 게 있어서요.”

“무슨 부탁?”

“오늘 현의 4-B 앨범 타이틀곡 <Devil Cry> 티저 영상이 공개돼요. 엄마도 알고 있죠?”

“물론이지. 저번에도 말했지만 엄마도 현의 팬이란다.”

“…….”

정은이 그것을 모를 리 없다.

현의 팬이자, 블랙 큐트의 특별회원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 바로 현의 컴백 때였으니까.

그리고 자신의 엄마가 대단한 능력자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말인데, 오늘 티저 영상을 볼 때 순위권에 들어가고 싶어요.”

“방청권을 줄 것 같아서 그런 거니?”

박지숙 여사와 정은은 모녀가 나란히 현의 컴백 무대를 보기 위해 K본부로 간 적이 있다. 둘 모두 방청권을 얻어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는 영광을 누렸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들이 본 현의 무대는 그야 말로 최고라 해도 부족함이 없는 것이었다.

강렬한 카리스마로 무장한 현은 가창력, 퍼포먼스 어느 것 하나 부족하지 않은 완벽한 무대를 팬에게 선사했다.

지금도 떠올리면 황홀한 것이 바로 현의 무대였다.

“맞아요. 이번 무대도 빠질 수 없어요. 왜냐면 현은 곧 미국으로 가니까요.”

한국을 워낙 사랑하는 현이었기에 미국에서 오랫동안 머물지 않을 테지만 그래도 한국에 있다는 것과 미국에 있다는 것 자체가 달랐다.

욕심이었지만 정은은 현의 무대를 다시 한 번 보고 싶었다.

“그런데 이 엄마한테 무슨 부탁을 하겠다는 거니?”

“엄마는 저번에 세 번째로 당첨되었잖아요. 그거라면 오늘도 충분히 순위권에 들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아무리 최신형 컴퓨터로 광클릭을 하더라도 한계는 존재한다. 하지만 엄마의 능력이 더해진다면 충분히 순위권에 들어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니까 지금 정은이가 엄마한테 거래를 제안하는 거네.”

“그게 거래라면 맞는 말이에요.”

“딸이 연예인에 빠져있는 것을 반대해야 하는 것이 맞다는 걸 알고 있지?”

“네.”

한창 공부해야 할 자식이 연예인에 빠져있으면 누가 좋아하겠는가.

정은이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박지숙 여사를 바라보자,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던 그녀가 정은에게 제안한다.

“하지만 이 엄마도 현을 좋아하니 딱 잘라 말하기에는 뭐하고, 이러면 어떨까?”

“어떻게요?”

“도움을 줄 테니 평균 5점을 올릴 것. 이 정도면 충분히 가능하지?”

“…….”

정은은 갈등했다. 그녀의 성적에서 5점을 올리는 것은 그야 말로 부단한 노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상위권이었지만 5점이 더해지면 최상위권이라 할 수 있기에.

현의 무대를 한 번 더 보느냐, 아니면 지금의 평온한 날들을 이어가느냐가 그녀에게 대두되기 시작했다.

잠시 갈등을 하던 정은은 결정을 내린 듯 말한다.

“올릴게요.”

“그래, 그럼 도와줄게. 대신 성적 올리지 못하면 1점당 1달씩 용돈 안 줄 거다?”

“아, 알았어요.”

막강한 패널티에 멈칫했지만 반드시 해낼거란 의지와 함께 정은은 엄마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정은이는 똑똑하니까 가능할 거야.”

딸이 성적 5점을 올리게 유도한 박지숙 여사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매우 만족스러운 거래가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와아…….”

정은은 눈이 휘둥그레 변했다.

박지숙 여사의 컴퓨터에 복잡한 프로그램이 떠오르고 있던 것이다.

역시나, 일반적으로 광클릭을 하던 자신과 수준이 다른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감탄하듯 바라보던 정은이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근데 이거 범죄 아닌가요?”

박지숙 여사가 사용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매크로였다.

설정을 해놓으면 한순간 수천 번의 클릭이 되면서 상위권을 차지할 수밖에 없는 그런 매크로였다.

“범죄라니. 이건 순위권을 차지하기 위해 이 엄마가 직접 만든 프로그램이란다. 절대 범죄가 아니란다.”

“그래요……?”

어째 썩 믿음이 가지 않았지만 좋은 게 좋은 것인지라 순순히 넘어가는 정은이었다.

티저 영상이 공개되는 00:00이 되어가고, 마침내 카운트다운을 셀 수 있을 무렵, 박지숙 여사는 본격적으로 매크로를 발동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00:00이 되는 순간! 활발하게 움직이던 컴퓨터가 멎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렉 걸린 거 아니에요?”

“잠시만 있어보렴.”

불안한 마음에 정은이 재촉했지만 박지숙 여사는 태평했다.

잠시 후, 컴퓨터가 다시 활동하기 시작하더니 창이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눈에 들어온 것은 현의 4-B TEASER <Devil Cry>라 적힌 것이었다.

무사히 상위권 대열로 들어서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와아!”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터뜨리는 정은. 하지만 박지숙 여사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괜히 어색해진 정은이 질문을 했다.

“엄마, 왜 그래요?”

“저번보다 훨씬 보강을 했거든.”

“보강이요?”

“그런데 순위가 오히려 떨어졌네?”

“…….”

박지숙 여사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컴퓨터 모니터를 가리키자 정은의 시선이 그곳을 향한다. 그리고 한순간 얼어붙고 말았다.

언론에 보도까지 된 현의 티저 영상을 본 순위는 다름 아닌 4번째였다.

그것을 보며 박지숙 여사는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이었다.

“이상하네. 내가 배운 걸 다 사용했는데…….”

컴맹인 주부들에게 구에서 인터넷을 가르쳐준다 하여 그것을 신청한 박지숙 여사.

본격적으로 컴퓨터를 배우며 그것에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고, 그곳에서 배운 것과 독학을 통해 그녀는 상당한 수준에 올라서는데 성공한다.

대한민국의 파워를 그대로 보여주는 아줌마 해커 1호가 바로 그녀였다.

이날 티저 영상을 보기 위해 십만 명이 넘는 사람이 동시 클릭한 걸 감안하면 엄청난 성과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정작 박지숙 여사는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자신이 만든 매크로 프로그램을 다시 한 번 점검해야겠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접속하게 된 현의 티저 영상.

재생된 4-B 티저 영상은 예전에 보았던 4-A와 다를 바가 없었다.

검붉은 머리를 한 악마 현과 금발 머리를 한 소녀시대 제시카가 다정한 모습을 연출한다. 부럽고 샘이 날 정도로 친근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깔리는 배경음은 무척 음울한 느낌을 주는 것이었다.

쩌적! 쩌저적!

행복했던 그 장면들에 서서히 실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이내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산산이 부서지기 시작한다.

다시 나오는 것은 악마인 현이 처음 유희 상대를 정할 때였다.

다정하게 로맨스를 즐기던 때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는 그.

<악마의 유혹>에서 처음에는 인간 여자를 농락할 의도로 접근하는 악마였지만 서서히 사랑을 알게 되면서 악마의 근간이 흔들리며 고뇌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붉은 머리를 한 시린과 금색 머리를 한 제시카 사이에서 대상을 고르는 현.

거기에서 고른 것은 4-A와 달리 시린을 선택했다. 그리고 제시카와 연출했던 다정한 장면을 시린과 함께 연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거기에서 느껴지는 것은 알콩달콩한 로맨스가 아니었다.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긴장감이었다.

두근. 두근.

달콤한 로맨스를 펼치는 장면이 흘러나오지만 배경음은 그와 어울리지 않는 거센 심장 박동 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와 함께 화면이 지지직거리며 흐릿해지더니, 한순간 스쳐지나가는 여인의 차가운 미소.

그리고…….

꺄아아아아!

터져 나오는 날카로운 고음과 함께 음울한 분위기의 장소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곳에는 무릎을 꿇고 고개를 든 현이 있었다.

그 뒤에는 뱀처럼 현을 휘어 감고 있는 시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미소를 짓는 시린의 모습은 마치 먹잇감을 거미줄로 꽁꽁 묶어놓은 거미를 연상시키고 있었다.

현의 전신을 속박한 시린이 서서히 고개를 내리기 시작하더니, 입을 벌려 현의 목을 향해…….

와장창!

그 순간 장면이 깨져나가면서 나오는 것은 [The End]였다.

정신없이 몰입하게 만드는 뮤직비디오 티저 영상이었다.

“…….”

티저 영상이 끝났지만 정은이나 박지숙 여사나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4-A와 달라도 너무 다른 분위기의 티저 영상은 그녀들에게 큰 충격을 주고 있었다.

얼마나 침묵이 흘렀을까, 박지숙 여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정은아.”

“네?”

“아무래도 안 되겠다.”

“뭐가요?”

뜬금없는 엄마의 말에 고개를 갸웃하는 정은. 그 뒤에 흘러나온 박지숙 여사의 말은 충격적인 것이었다.

“나도 현 무대를 보러가야겠어.”

“에?”

“저걸 무대로 어떻게 표현할지 너무 궁금해. 알콩달콩 다음에 배신이라니! 저걸 무대로 어떻게 표현할지 너무 궁금해. 반드시 가야겠어. 같이 가는 거다. 알겠지?”

“네? 네…….”

엄청난 박력을 보여주는 엄마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이는 정은이었다.

다시 한 번 티저 영상을 재생하는 박지숙 여사의 눈은 반짝이고 있었다.

대한민국 아줌마들이 좋아하는 막장 드라마에는 가장 큰 공통적인 요소가 있다.

불륜, 복수, 그리고 배신이다.

그 중 박지숙 여사는 배신 코드에 눈을 뜨고 말았다.


악마의 외침!

4-A 앨범이 공개되면서 4-B 앨범의 타이틀곡에 대해 공개된 적이 있다.

<Devil Cry>라 정해진 제목은 많은 사람들에게 의아함을 심어주었다. 제목 자체로 보면 기존의 악마 컨셉을 유지해나가는 것을 알 수 있지만 ‘Cry'란 단어가 주는 느낌은 4-A 앨범과 차이를 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한창 해나가던 4-A앨범 활동을 유지하면서 돌연 4-B 앨범 활동 선언을 시작하였다.

현재 현의 4-A 앨범은 신드롬이라는 단어로 표현이 부족할 정도로 대단한 상황이다.

기존의 보컬 능력에 대중성이 더해지고, 계단 춤이라는 퍼포먼스가 곁들어지면서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내는데 성공했다.

발매되는 즉시 앨범이 모두 동나는 사태가 발생하였고, 모든 음원 차트를 휩쓰는 기록을 세우게 되었다.

단기간 동안 유지할 수 있는 인터넷 음원 차트도 무려 3주 동안 1위 자리를 지켰다. 가장 많은 다운 건수를 기록했고, 여전히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발매된 4-B 앨범.

미국 활동을 위해 빠르게 발매한 이 앨범은 국내 시장을 현으로 도배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임이 분명했다.

현재 정상에 군림하고 있는 4-A 앨범의 아성에 도전하는 것은 다름 아닌 그의 앨범인 4-B 앨범이 될 테니 말이다.

10월 1일을 0시를 기점으로 현의 4-B 앨범 타이틀곡 <Devil Cry>가 공개되었다.

<악마의 유혹>과 확연하게 다른 분위기는 사람들로 하여금 몰입하게 만들었고, 긴장감을 유발하는 사운드는 사람들의 심장을 크게 요동치게 만들었다.

악마의 외침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Devil Cry>는 <악마의 유혹>과 확연히 다른 점을 보이고 있었다.

알콩달콩한 로맨스로 달달함을 최대한 보여주었다면, 지금 앨범은 한순간의 선택이 큰 과오를 범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여자 주인공 중 소녀시대 제시카를 골랐던 저번과 달리 이번에는 라샤의 시린을 고른 현은 선택의 실수로 결국 그녀에게 당하는 모습을 연출했다.

뱀파이어인 시린은 그를 배신하여 그의 모든 것을 빼앗는 것을 연출한 <Devil Cry>는 <악마의 유혹>과도 같은 분위기를 기대하던 사람에게 큰 타격을 가했다.

하지만 그것 또한 색다른 매력을 지니고 있었기에 기대감을 팽배하게 만들었다.


“생각 이상인데요?”

거듭 이어지는 인터넷 반응은 창현으로 하여금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만들었다.

워낙 <악마의 유혹> 반응이 좋아서 그 성세를 어떻게 이어나갈지 걱정이 많았다. 하지만 티저 영상 공개 이후 반응은 상당히 괜찮았고, 벌써부터 기대감이 팽배한 반응이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석규의 세상은 다른 듯했다.

“생각 이상이라고?”

“아닌가요?”

“예상했던 것보다 부족하다. 음, 전 앨범이 너무 성공해서 그런 걸지도.”

석규도 이 정도로 성공할 줄 예상했지 못했기에 4-B 앨범은 그의 예상이 못미치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이 정도면 엄청난 것 같은데.”

“본격적으로 음원이 공개되면 그때 승부가 시작되겠지. 어쨌든 나쁜 반응은 아니다. 그 성세를 이어나가는 것도 네가 어떻게 실력을 발휘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테고.”

“하하! 부담을 팍팍 주시네요.”

“부담을 주는 것도 괜찮겠지. 넌 부담을 주면 줄수록 더 잘해내고는 하니까.”

입가에 미소를 짓는 석규였다. 4-B 앨범 활동을 끝으로 미국으로 떠날 것이다. 그리고 라샤 또한 본격적인 활동에 시동을 걸 것이고.

여러모로 일이 수월하게 풀리고 있기에 석규는 만족스러웠다.

“창현아.”

“네, 아버지.”

“라샤가 미국으로 가면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으냐?”

“…….”

갑작스러운 물음에 할 말을 잃은 창현. 표정이 굳은 창현은 생각에 잠겨 있다가 말한다.

“확언하지는 못하겠어요. 실력은 만족할 만한 수준이지만 그쪽은 조금 차별이 있잖아요.”

“음, 그건 그렇지.”

고개를 끄덕이는 석규. 라샤는 국내를 기반으로 활동을 시작했지만 지금 기반은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욱 탄탄하게 다져놓았다.

특히 일본에 탄탄하게 기반을 다져놓았기에 석규는 라샤를 국내 활동에 국한시키지 않을 생각이었다.

파이가 나눠지지만 일본에서 활동하는 것이 AA엔터테인먼트에 더욱 이득이 되니까.

스케줄을 촘촘하게 하여 잠을 자게 할 시간마저 줄이고 활동하게 한다면 이익은 극대화되지만 단기적인 수익밖에 올리지 못한다.

넓게 보고 몇 년 후까지 내다보고 있었기에 석규는 좀 더 자기계발에 투자하게끔 했고, 라샤는 꾸준히 실력을 늘려나가고 있었다.

“그럼 일단 중국을 기반으로 인지도를 쌓아나가는 게 좋겠군. 차별을 극복할 정도의 실력을 쌓을 정도로 말이다.”

“그렇게 되면 무난할 것 같아요.”

“중국 시장을 놀려두는 것도 좋지 않으니 그 방법도 좋겠군.”

턱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석규. 10억을 훌쩍 넘기는 중국이라면 시장 크기도 크고, 같은 동양인이기에 인지도를 쌓는 것도 훨씬 수월하리라.

마침 중국 쪽 교두보를 마련해놓은 상황이니 그곳에서 활동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싶었다.

“그렇게 하는 게 낫겠군.”

“저한테 물어보셔서 깜짝 놀랐잖아요.”

“사업적인 측면은 몰라도 실력을 알아보는 건 네가 더 자세할 거라 생각해서 그랬다.”

웃음을 지으며 말하는 석규였다. 라샤가 중국으로 진출하게 되면 본격적으로 한국 업무가 비게 될 테니 그 틈을 타 본격적으로 연습생을 뽑고 활동을 할 예정이었다.

‘중국, 일본, 그리고 아시아 각국의 시장에 기반을 다져놓는 것이 좋겠지. 창현이를 한 번 데리고 가서 확고하게 굳혀놓고.’

국내 시장도 중요하지만 이미 엠넷이라는 거대 공룡이 잠식하기 시작한 만큼 이곳에 모든 것을 기대려는 것은 최악의 선택이다.

국내에서 활동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자립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시장 자체가 전세계를 아우를 수 있다는 것만 보일 수 있다면 선택권은 이쪽에게 올 것이다.

엠넷 측과 SM엔터테인먼트 양쪽에 줄타기를 하고 있는 아슬아슬한 형국에 석규의 고민은 깊어갔다.


“어서 와. 스타 씨.”

석규와 남은 스케줄에 대해 간략하게 이야기를 마친 창현이 녹음실로 돌아오자, 먼저 와 있는 손님이 그를 맞이해주었다.

녹음실을 차지하고 있는 여인들은 바로 라샤였다.

안으로 들어서던 창현은 한 명만 있어야 할 곳에 두 명만 있자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어라? 왜 다른 누나들도 있죠?”

“그게…….”

말끝을 흐리는 시린을 대신하여 미란이 말한다.

“숙소는 너무 심심해서 여기 왔어. TV도 크고, 시설도 숙소보다 훨씬 낫고.”

“…하아!”

백수를 떠올릴 정도로 편안한 복장에 느긋한 자세를 취한 미란은 TV에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한숨을 푹 내쉰 창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안으로 들어선다.

“미안. 따라오겠다고 워낙 떼를 써서.”

“아뇨, 그럴 수도 있죠.”

괜찮은 듯이 이야기하지만 실은 전혀 괜찮지 않았다.

녹음실에서 최종 연습을 가진 뒤 무대 위에 설 예정이었기에 그녀들의 존재는 자칫 신경을 건드릴 수도 있었다.

“꺄하하! 너무 웃겨!”

개그 프로그램을 보며 배꼽을 잡고 웃음을 터뜨리는 미란. 그 옆에 앉은 세룬도 웃음을 참지 못하고 박장대소를 터뜨리고 있었다.

“…….”

“미안.”

할 말을 잃은 창현을 보며 시린은 다시 사과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왕 올 거면 꾸미고 올 것이지, 완전 백조 차림으로 와서 민폐를 끼치는 걸 보면 머리가 지끈거렸다.

창현과 시린은 곧장 녹음실로 올라갔다.


“심정이 어때요?”

“뭐가?”

“내일 어떻게 보면 누나의 솔로 무대잖아요.”

입가에 미소를 짓는 창현. 내일 있는 무대는 4-B 앨범 타이틀곡인 <Devil Cry>도 있지만 수록곡인 <Vampire>도 부르게 된다.

이 곡은 시린의 솔로곡으로, 창현의 보조가 곁들어진 곡이다.

“솔로는 무슨. 엄밀히 말하면 창현이 네 곡이라고.”

“그렇긴 하지만 대부분을 누나가 부르잖아요. 전 코러스 좀 넣어주고 약간의 파트만 소화하고요.”

“뭐… 그냥 그래. 조금 떨리는 정도?”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떨리는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시린이었다. 라샤라는 그룹으로 무대 위에 섰지만 이 곡은 창현의 활동이 끝난 뒤 본격인 시범 케이스로 솔로 활동을 이어나가게 될 것이다.

라샤의 일원 시린이 아닌, 솔로 시린으로서.

“잘할 수 있을 거예요.”

“진심이야?”

“물론이죠. 누나들이 잘되어야 나중에 예능 프로그램 나가서 내 애제자들이 이렇게 잘됐다, 라고 자랑할 수 있을 테니까요.”

의기양양하게 말하는 창현의 모습에 시린은 웃음을 짓고 말았다.

“풋! 애제자라고? 그렇기도 하네. 나이 어린 스승님을 모시고 있는 건가? 잘 모셔야 앞으로 잘해주겠네.”

“물론이죠.”

“알았어. 앞으로 잘 모실게요, 스승님.”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스승이라는 단어도 딱히 틀린 것은 아니었다. 현의 후광으로 라샤가 폭발적인 인지도를 얻게 될 때, 자신들의 실력은 엄밀히 말하면 딱히 뛰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후 현의 보컬 트레이닝이 이어지면서 폭발적인 인지도를 실력으로 소화하고자 하였고, 각고의 노력 끝에 마침내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

창현도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시린을 비롯한 라샤 멤버들은 모두 그를 스승처럼 여기고 있었다.

‘이럴수록 더 멀게 느껴지네, 에휴.’

좀 더 높은 자리에 올라서는 것 이상으로 더 높은 자리로 올라서니 언제쯤 따라잡을 수 있을까.

그러면 좀 더 자신도 떳떳하게 마음을 고백할 수 있을 텐데.

가만히 보고 있으면 나오는 것은 한숨뿐이었다.

“그럼 연습 시작할까요?”

아등바등 노력하는 사람의 심정도 모른 채 연습을 시작하자고 한다.

저 둔한 모습이 때로는 도움이 되지만 이럴 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기에 시린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후우!”

“왜 그래요? 연습 강도 높게 안할 거예요.”

자신의 심정을 전혀 알아주지 않는 그가 괘씸해서 불끈 쥔 시린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주먹을 부르는 둔함이었다.


그동안 꾸준히 연습해왔기에 시린의 노래는 완벽했다. 첫 솔로로서 데뷔 무대를 갖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보니 만전에 만전을 기하기 위해 꾸준히 연습을 했던 것이다.

덕분에 오늘 단단히 시린을 지도해줘야겠다고 생각하던 창현은 생각을 달리할 수밖에 없었다.

“목 좀 쉬어주고, 내일 만전의 상태로 만나요.”

“알았어.”

만족하는 창현을 보며 시린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프로듀싱에 들어가면 누구보다 까다로워지는 것이 바로 창현이다.

그의 커트라인을 넘어섰다는 것은 만족할 만한 무대를 선보일 수준이 된다는 뜻일 터.

시린으로서는 자신감을 얻을 수 있는 사실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다른 누나들도 데리고 가요.”

“…설마 만족스럽다고 한 게 애들 일찍 보내려고 그런 건 아니지?”

가늘게 변한 시린의 눈이 창현을 훑자, 그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가 그럴 거 같아요?”

“하기야…….”

워낙 여유롭게 대답하니 시린은 자신이 쓸데없는 말을 했다 생각하며 피식 미소를 지었다.

“…단지 하나의 이유였을 뿐.”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그를 보며 창현이 나직하게 중얼거린다.

자신은 그저 녹음실이 초토화되는 것을 막고 싶었을 뿐이었다.


다음 날.

무대 위에 서기 위해 K본부로 향하는 창현의 안색에는 잔뜩 먹구름이 끼어 있었다.

머리가 아픈 듯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은 채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창현이 맞은편에서 미소를 지으며 재잘재잘 떠드는 여인들에게 말한다.

“…그런데 왜 누나들도 있는 거죠?”

“그야 우리의 리더가 무대에 서기 때문이지. 역사적인 날이잖아.”

창현의 말을 듣고 여유로운 모습으로 대답하는 것은 다름 아닌 세룬이었다. 그리고 옆에 앉아있던 미란이 눈을 가늘게 뜨며 창현을 바라본다.

“뭐야, 설마 우리가 온 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러는 거야?”

“글쎄요…….”

“글쎄요? 어쭈? 창현이 너 많이 컸다.”

고분고분하던 평소와 달리 까칠하게 나오는 창현을 보며 미란이 날카롭게 말하자, 창현은 어깨를 으쓱한다.

“제가 많이 큰 걸 이제 알았어요? 이제 누나보다 크다고요.”

“나, 남자랑 여자를 비교하면 안 되지! 나도 여자 중에서 큰 편이라고!”

“그렇다 치죠, 뭐. 그리고 매일 혼나는 게 누구인데 저한테 그래요.”

“윽!”

말로서 상대가 되지 않자 미란은 말문이 막힌 채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 자리를 대체한 것은 라샤의 브레인 세룬이었다.

차분하면서 논리적으로 파고드는 세룬은 상대하기 무척 까다롭다.

“창현아, 시린이랑 우리는 같은 그룹이잖아. 마침 차 공간도 넉넉하고 해서 응원차 온 건데 그렇게 야박하게 대하면 나랑 미란이는 뭐가 되겠어.”

“그, 그건…….”

외고 출신이자 석규의 맞고 멘토를 맡고 있는 세룬은 강력했다.

한순간 창현을 꿀 먹은 벙어리로 만들어버리자, 옆에 앉아있던 미란이 주먹을 불끈 쥔다.

“세룬이 나이스! 역시 우리들의 브레인이라니까.”

“이왕 이렇게 된 거 창현이 너도 즐겁게 맞이해줘. 벌써부터 우리를 지겨워하면 우리도 슬프다고.”

“알았어요, 알았어.”

거듭 이어지는 세룬의 공격에 창현은 양손을 들고 포기선언을 하였다. 애초에 세룬과 말싸움을 한 것 자체가 그의 패인이었다.

“창현아 미안.”

“아뇨, 딱히 그런 건 아니에요. 다만 누나들이 함께 있으면 팬들이 알아볼까 해서 그렇죠.”

관객석에서 보면 들킬 염려가 있고, 대기실에서 보는 것도 좋지가 않다.

그 말에 미란이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이미 작전을 세워놓았단 말씀! PD님에게 부탁해서 가장 근접한 거리에서 볼 수 있게 해놨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래요? 철저하네. 아아…….”

의외라는 기색을 띠던 창현은 입가에 미소 짓고 있는 세룬을 보고는 모든 것을 납득할 수 있었다.

라샤의 브레인인 그녀는 아이큐 150이 넘는 괴물 여인네였다. 이 정도쯤은 사전에 조치해두었을 테니 걱정하는 사람이 우스운 처지였다.

그 사이 그들을 태운 벤은 방송국에 도착하고 있었다.


오늘 K본부에서 창현은 총 세 곡을 불러야 한다.

4-A 앨범 타이틀곡인 <악마의 유혹>과 4-B 앨범 타이틀곡 <Devil Cry>, 그리고 수록곡인 <Vampire>를 부르기로 되어 있던 것이다.

재미있게도 오늘 1위 후보가 각각 <악마의 유혹>, <Devil Cry>였다. 현의 곡 두 개가 1위를 놓고 경합을 펼치게 된 것이다.

“준비는 어때요?”

“완벽해. 목 상태도 좋고. 창현이 네가 잘 보조해주기만 하면 최고일 것 같아.”

메이크업을 받은 시린이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뱀파이어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 스모키 화장을 한 시린은 날카로운 아름다움을 발산하고 있었다.

뮤직비디오를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한순간 돌변하는 시린의 연기에 섬뜩함을 느낄 정도라며 극찬할 정도였으니까.

여기에 더해져 시린의 연기 진출을 놓고 한동안 왈가왈부가 있을 정도였는데, 라샤를 아시아에서 기반을 닦은 뒤 미국 진출을 노리는 석규는 라샤에게 연기는 없을 것이라 단단히 못을 박아두었다.

발목을 붙잡는 족쇄가 될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가수로만 전념할 수 있게 만드는 강력한 한 수였다.

“진짜 뱀파이어 같은데요?”

“그래? 창현이 너도 악마 같아.”

남자이기에 조금 더 빨리 메이크업을 마친 창현도 뮤직비디오에서 나오는 악마 그 모습을 하고 있었다.

다만 뱀파이어의 계략에 의해 희생되는 비운의 악마였지만.

그 말을 듣고 끼어드는 한 줄기 목소리가 있었다.

“악마 맞지! 매일 보컬 트레이닝으로 우리를 괴롭히는 AA산 특급 악마!”

“뭐라고요?”

미란의 말에 창현이 발끈하자, 움찔한 그녀가 우는 시늉을 한다.

“악마 맞잖아! 우리가 얼마나 괴로웠는데. 그렇게 닦달하지 않아도 스스로 알아서 하는 새나라의 어린이인데. 흑흑!”

“으음! 다 누나들을 위한 거였어요.”

예전 기억을 떠올리며 창현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한다.

폭발적인 인기에 비해 실력이 부족하다 여긴 창현은 연일 그녀들을 혹독하게 단련시켰다. 당시 라샤 멤버들이 그때를 회상하면 지금도 구역질이 나올 정도로 끔찍한 기억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것은 프로듀서로서 현을 설명할 때 대표하는 것이 되었다.

호랑이 프로듀서라 불릴 정도였으니까.

창현이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듯하자 세룬이 중재한다.

“알지. 미란이가 장난하는 거야.”

“어휴! 누나야 말로 연기의 길로 가야 할 것 같아요.”

“연기보다는 노래가 더 흥미 있어. 세계 모든 사람들이 날 보고 환호하는 거지. 난 슈퍼스타가 되는 거고.”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자아도취에 빠져드는 미란. 연기의 길도 매력적이었지만 가수로서 정점을 찍지 않은 지금은 좀 더 노래에 전념하고 싶었다.

각국에서 큰 인기를 얻고 싶지만 좀 더 큰 인기를 얻고 얻어 나중에는 미국을 정복하고 세계 최정상급 헐리우드 남자 배우를 만나 알콩달콩 로맨스를…….

“아니, 난 그냥 한국 남자가 좋네.”

상상의 나래를 벗어난 미란이 단호하게 끊어낸다.

외적인 면에서는 멋있지만 그래도 한국 남자가 여러모로 더 나은 것 같았다.

‘쩝! 창현이가 지금 나이에서 열 살만 더 많아도 좋을 텐데.’

아쉬움을 느끼며 입맛을 다시는 미란이었다.

“으음!”

섬뜩한 그녀의 시선에 순간 몸을 부르르 떠는 창현. 그리고는 시린과 무대 위에 설 것에 대해 몇마디 더 나누던 도중,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

“응?”

전화 온 사람은 다름 아닌 석규였다.

격려를 하기 위해서 전화를 한 것인가? 하지만 무대 위에 서기 전 정신집중을 위해 조용한 분위기를 즐기는 걸 아는 석규는 전화를 하지 않는다. 만약 하더라도 자신이 아닌 시린에게 했을 터.

“뭐지?”

의아함을 느낀 창현이 핸드폰을 열고 전화를 받는다.

그리고 뭐라 입을 열기도 전에 핸드폰에서 다급함이 담긴 석규의 음성이 들려온다.

-창현아! 지선이가 지금 진통을 느끼고 있어서 병원에 왔다. 네 동생이 나올 것 같다.

“예? 어머니가요?”

화들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는 창현이었다.


“알았어요.”

한동안 석규와 통화를 나눈 창현이 전화를 끊었다.

다소 심각해진 그의 표정을 본 시린이 조심스러운 어조로 묻는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셋째가 나오려 한다네요.”

“셋째? 셋째라면 설마…….”

시린을 시작으로 세룬과 미란의 얼굴에 놀라움이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자신들이 생각하는 그것이 맞냐는 듯 바라보자, 창현이 고개를 끄덕인다.

“맞아요. 다음 달 초로 예정되어 있던 게 한 달 앞서서 나오려 한다네요.”

“…….”

창현의 말에 시린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새 어머니이긴 하지만 극진히 생각하고 있었고, 곧 태어날 셋째를 기다리던 만큼 무대를 앞에 둔 그에게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힐끔 그를 바라본 시린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래? 걱정되겠다.”

자칫 잘못해서 컴백 무대를 망치면 어떻게 하겠는가.

시린은 괜히 석규를 원망하는 마음이 드는 걸 느끼며 창현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돌아온 그의 대답은 그녀가 생각한 것과 전혀 다른 것이었다.

“걱정이요? 하하! 왜 걱정을 하겠어요.”

“에?”

웃음을 터뜨리는 창현을 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시린.

어안이 벙벙한 듯한 그녀의 표정을 보고는 창현이 말한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요. 설마 제가 그 정도로 흔들릴 것이라 생각했어요?”

“아니었어……?”

“그렇게 생각했다면 제가 좀 서운한데요.”

나이로 판단하기 어려운 존재가 바로 창현이었다.

어린 시절 혼란을 겪은 뒤 그의 정신은 단단해졌고, 다른 사람들과 달리 완벽하게 상황 하나에 집중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남들이 말하는 발군의 집중력을 지니게 된 셈.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정신력을 지닌 만큼 셋째의 탄생 소식은 오히려 그에게 기쁨을 줄 수 있는 것이지, 슬픔을 주는 것이 아니었다.

어리둥절한 시린을 보며 창현이 말한다.

“아버지가 오히려 기뻐하라고 전화를 주신 거예요. 셋째가 나오는 건 위험 부담이 적으니 미리 기뻐하라고요.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시겠어요?”

“아, 아니.”

“셋째를 위해 축하 무대를 해달라는 거예요. 그 바람을 들어드려야겠죠. 제가 첫째인데.”

“그렇구나…….”

다르게 생각하면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을 시린은 처음으로 알았다.

은연중 걱정하던 미란은 풀어진 표정으로 창현이의 어깨를 툭 치며 말한다.

“역시 창현이 넌 독특하단 말이야.”

“독특하다니. 긍정적인 사고관을 지닌 거죠.”

“창현이가 긍정적인 사고관을 지녔다니, 말도 안 돼.”

좀처럼 먼저 나서지 않던 세룬이 나서서 강력하게 부인하자 순간 얼떨떨한 표정을 지은 창현이 말한다.

“그렇게 말하면 제가 섭섭한데요.”

“섭섭하긴. 그게 사실인데.”

옆에 있던 시린이 말하자 창현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미소를 지었다.

혼자였다면 그녀의 말마따나 불안해 할 수 있었지만 같이 있기에 불안한 마음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편안해지는 기분이었으니까.

이래서 사람은 사회의 동물이라고 하는 듯했다.

“그럼 사전 무대 준비부터 해볼까요?”

“물론이지.”

입가에 미소를 지은 시린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녹화 무대 시작 10분 정도 남았습니다. 준비해주세요.”

한동안 시간을 보내며 긴장감을 가라앉히던 창현과 라샤 멤버들은 직접 대기실로 찾아와 남은 시간을 말해주는 FD를 보고는 미소를 지어준 뒤 본격적으로 무대 위에 설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긴장 되요?”

“긴장은 무슨. 나도 이제 베테랑이라고.”

“그래요?”

묘한 표정으로 시린을 바라보는 창현은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라샤’라는 그룹으로 무대 위에 서왔지만 ‘시린’이라는 이름을 걸고 무대 위에 서는 것은 처음이다. 지금 이 노래는 현의 앨범 수록곡이겠지만 11월 이후 라샤의 활동 재개와 함께 그녀의 솔로 활동도 시작될 것이다.

떨리냐? 라고 묻는다면 당연했다.

그룹으로 무대 위에 서는 것과 홀로 무대 위에 서는 것은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었으니까.

“걱정하지 마요. 뭐든지 처음이 중요하니까. 그 처음을 훌륭하게 장식해주기 위해 제가 있는 거고요.”

“그렇지. 후우…….”

자신의 속내를 꿰뚫어 보는 듯한 창현의 말에 시린은 숨길 수 없다는 것을 느끼고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킥킥! 시린이가 저렇게 긴장하는 걸 보니 웃기네. 매일 근엄한 표정만 지으며 리더 행세는 다하더니.”

“나도 신기하네.”

긴장하는 시린을 보며 웃음을 흘리는 미란과 세룬이었다.

그녀들의 행동에 시린의 눈에 불길이 치솟았지만 창현의 눈길을 느끼고는 애써 성질을 억눌렀다.

‘숙소에서 두고보자.’

오늘 무대를 성공적으로 끝마친 뒤 숙소에서 피의 축제를 벌이겠다고 다짐하면서.

그렇게 속으로 칼날을 갈던 시린이 무언가 떠오른 듯 움찔하더니 날카로운 눈빛으로 창현을 바라본다.

자신의 속내를 꿰뚫어 보면서 여태까지 보인 행동은 뭐라 판단해야 한단 말인가.

‘설마 다 알면서 모르는 척 하는 건가? 난 어장관리용이었고?’

그렇게 생각하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는 시린이었다.

만약 자신의 가설이 사실이라면 창현은 희대의 바람둥이임이 분명할 테니까.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불쑥 치솟는 의심을 억누르기가 힘들었다.

“갑자기 왜 그래요?”

“아무것도 아냐.”

자신의 눈빛을 읽은 것인지 시린은 황급히 눈을 감아 평소 모습으로 돌아왔다.

“어쨌든 사전 녹화는 저도 함께 하니까 부담 갖지 말아요. 알겠죠?”

“알았어. 나도 프로라고. 조금 긴장했다고 해서 신인 취급하지 마.”

“하하! 알았어요.”

날카로운 시린의 반응에 자신이 너무 놀렸나 싶어 꼬리를 만 창현은 웃음을 지으며 상황을 얼버무렸다.

그리고는 핸드폰을 열어 시간을 확인하더니 시린에게 말한다.

“그럼 슬슬 가볼까요?”

“벌써?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잖아.”

의아함이 담긴 미란의 말에 창현이 말한다.

“시린 누나는 라샤의 일원으로 오래간만에 모습을 드러내는 거잖아요. 여기 온 팬들 중 상당수가 라샤 팬들인데 설마 달랑 무대 위에 서고 갈 생각이었어요? 시린 누나도 그렇고 누나들도 잠깐 무대 위에 올라서 팬 서비스 좀 해줘요.”

“그게 가능하려나?”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었기에 미란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세룬을 바라보자, 그녀도 창현의 말을 예측하지 못했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젓고 있었다.

“제가 미리 양해했어요. 어차피 사전 녹화 전인데요.”

“그래? 그럼 거리낄 것 없지. 가자.”

양해를 구해놓았다는 창현의 말에 미란이 표정을 바꾸더니 앞장 서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국내에서는 오랫동안 무대 위에 서지 못했기에 안 그래도 무대 위에 서고 싶어서 몸이 달아올라 있는 상태였다.

그것은 세룬 또한 마찬가지였는지 빠른 걸음으로 미란의 뒤를 따르기 시작한다.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지금 상황을 지켜보던 시린은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었다.

“누나는 가지 않을 거예요?”

“응? 아, 아니. 가야지.”

그렇게 말을 한 시린도 대기실 밖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은 창현이 뒤를 따랐다.


와아아아아아!

꺄아아아아아!

남성과 여성의 엄청난 함성 소리가 무대를 뒤흔들고 있었다.

그들이 환호하고 있는 중심에는 일남 삼녀가 서 있었다.

모두 국내에서 특급 인기를 얻고 있는 그들은 다름 아닌 창현과 라샤 멤버들이었다.

오늘 현의 4-B 앨범 수록곡 사전 녹화가 있다는 말에 기다리던 팬들은 예정에 없던 라샤 멤버 두 명의 등장에 목이 터져라 함성을 지르고 있었다.

콘서트장을 방불케 할 정도로 뜨거운 열기가 전해지는 함성을 접하자 라샤 멤버들은 한순간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들을 보며 창현이 마이크를 입에 뗀 채 나직한 목소리로 말한다.

“인사해야죠.”

“으응.”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 시린이 정신을 추스르고 마이크를 들어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라샤의 시린입니다.”

“라샤의 세룬입니다.”

“라샤의 분위기 메이커 미란이에요.”

와아아아아!

라샤 멤버들의 소개가 이어지자 남성 팬들의 무지막지한 함성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입가에 미소를 짓던 라샤 멤버들이 말을 하기 위해 마이크를 들자 거짓말처럼 함성이 잠잠해진다.

분위기가 사그라들자 세룬이 차분하게 입을 열기 시작했다.

“비공식적이지만 오랜만에 이렇게 뵙게 되어 정말 반갑습니다. 곧 있으면 저희들의 컴백이 이어질 테니 오늘 어쩌면 솔로로서 자립할 수도 있는 시린의 무대를 많이 지켜봐주세요.”

“물론! 솔로로서 가능성을 시험해볼 뿐, 라샤의 일원이라는 건 달라지지 않습니다! 왜냐면 우리들은 영원한 라샤니까요.”

재빨리 말의 허점을 채워 넣는 미란을 보면서 창현은 피식 미소를 지었다.

평소 순간순간 발휘되는 재치가 이럴 때 빛을 발하고 있었다.

“조만간 컴백을 준비하고 있으니 잘 부탁드리고, 오늘 현의 무대를 빛낼 수 있게 되어 개인적으로 무척 영광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부디 이 순간을 즐기시길 바라겠습니다.”

시린! 시린! 시린!

라샤! 라샤! 라샤!

오늘의 주인공이기도 한 시린의 말이 끝나자 남성 팬들의 거센 함성 소리가 다시 한 번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 함성이 잦아들 때쯤, 마이크를 든 창현이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앞으로 나섰다.

“오늘은 무척 기쁜 날이기도 합니다. 제가 오랫동안 준비해온 곡을 부를 수 있는 날이기도 하고, 제 사랑스러운 동생이 세상에 나오기 위해 힘을 내고 있는 날이기도 합니다.”

사랑스러운 동생이 나오는 날?

무슨 말인지 깨닫지 못해 순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사람들의 얼굴에 놀라움이 서리기 시작했다.

년초 현의 아버지인 AA엔터테인먼트 사장 강석규가 재혼한 사실이 그들의 머릿속에 떠올랐던 것이다.

그리고 임신을 하여 년말에 현의 동생이 태어날 거란 말도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입가에 짙은 미소를 띤 창현이 말한다.

“세상의 빛을 보기 위해 노력하는 제 동생에게 노래를 불러주고자 합니다. 시린 누나의 가능성을, 제 노래를, 그대로 팬 분들의 환호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미란과 세룬은 무대 밑으로 내려가 있었고, 창현과 시린은 뒤로 물러나 조용히 눈을 감은 채 노래를 부르기 위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무대 주변이 어두워지기 시작하며 MR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현의 프로젝트 4-B 앨범 수록곡이자 시린의 솔로곡이기도 한 <Vampire>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눈을 뜨고 입가에 미소를 짓는 시린의 모습은 섬뜩한 뱀파이어를 연상시키고 있었다.


현의 4-B 앨범의 콘셉트는 간단했다.

4-A가 선택에 의한 달콤함이었다면 4-B는 선택에 의해 올 수 있는 불행을 뜻했다.

각각의 앨범이 사랑을 담아내고 있지만 큰 줄기로 관통하는 것은 바로 선택의 순간 판이하게 달라질 수 있는 운명이었다.

수록곡인 <Vampire>는 인간 여자를 농락하기 위해 악마인 현이 제시카가 아닌, 시린을 골랐을 때 그 상대가 된 시린의 입장에서 노래한 것이다.

뮤직비디오에서 보여줬던 것처럼 인간 여자를 농락하기 위해 지상에 내려온 악마는 마지막에 와서 배신을 당하고 만다.

그에게 선택을 받았던 여인은 인간이 아닌 뱀파이어였고, 순간의 잘못된 선택이 돌이킬 수 없는 불행을 일으킨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새하얀 얼굴과 붉게 빛나는 눈동자. 그것은 붉은 머리칼과 잘 어울려 보는 관객들로 하여금 섬뜩함이 절로 들게 하였다.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그녀는 표정과 행동마저도 마치 뱀파이어를 연상시키고 있었다.

“…….”

입가에 걸린 섬뜩한 미소와 함께 흘러나오는 목소리를 들으며 창현도 마이크를 들어 시린의 노래를 보조하기 시작한다.

오늘 이 노래는 시린을 위해 맞춰진 노래였다.

본래 <Vampire>에서 배정된 창현의 파트는 없다. 사전에 녹음된 곡에서는 AR이 모두 대체해주지만 오늘 이 무대에서는 그 AR을 배제한 채 창현이 그 부분을 커버해준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무대 위에 서는 시린에게 마음의 안도감을 심어줄 사람이 필요했다.

아무리 창현이 노래를 잘하더라도 그의 노래 중 가장 잘된 것만을 추려낸 AR에 비할 바는 못된다. 하지만 그가 AR을 대체함으로써 시린은 마음의 안도를 얻을 수 있고, 좀 더 훌륭하게 감정을 몰입할 수 있게 된다.

그룹을 유지하되 솔로로서 가능성을 시험하려는 석규는 사전에 여러 가지 안배를 해두고 시린을 무대 위에 세워두었다.

그리고 그 예감은 훌륭하게 맞아떨어지고 있었다.

창현이 뒤에 서서 그녀의 노래를 보조함으로써 시린은 마음의 안정을 얻을 수 있었고, 그동안 꾸준히 연습해온 실력을 마음껏 발휘하며 그녀 스스로 노래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여인의 입장에서 재해석 된 <Vampire>는 작곡에 창현의 이름이 들어가 있지만 작사에는 창현을 비롯한 라샤 멤버들이 들어가 있었다.

처음에는 3인칭 관점에서 여성의 시점을 노래하려 했지만 시린에게 배정되면서 좀 더 세밀한 표현의 필요성을 느끼고 그녀들의 도움을 받아 작사를 하게 되었다.

때문에 <Vampire>는 여성들의 공감대를 적절하게 끌어내며 그녀들의 마음을 사로잡아나가기 시작했다.

‘상당한데?’

4-A 앨범 활동으로 시린의 실력을 자주 봐주지 못했지만 무대 위에서 발휘되는 시린의 실력은 상당했다.

며칠 동안 자신이 보아왔던 것과 비교도 안될 정도로 훌륭하게 노래를 소화하고 있었으니까.

뿐만 아니라 여자 뱀파이어의 갈등을 그려내는 그녀의 노래 실력은 창현의 입장에서 굉장히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이 정도면…….’

오늘 같은 실력을 유지해나갈 수 있다면 충분히 솔로로서도 무리 없이 자립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이 창현의 판단이었다.

그 사이 시린의 노래는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창현의 보조 하에 완벽한 감정 몰입을 한 그녀의 노래는 훌륭하게 끝났고, 노래가 끝나자 남녀 가릴 것 없이 큰 함성 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와아아아아!

꺄아아아아!

“…….”

자신에게 쏟아지는 함성 소리를 들으며 시린은 멍한 표정을 짓는다.

옆에 서 있던 창현은 피식 웃고는 시린의 어깨 위에 손을 올리며 말한다.

“왜 그런 반응이에요. 누나를 위해 이렇게 박수를 쳐주고 있는데.”

“그, 그냥… 아직도 믿기지가 않아서.”

라샤로 활동할 때 이보다 더한 함성과 박수를 받은 적은 많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 본인에게만 쏟아진 찬사가 아닌, 라샤라는 그룹 자체에 향한 것이었다.

과연 자신이 혼자 독립했을 때 그 인기를 유지할 수 있을까?

그 부분에 대해 무척 비관적이었던 시린으로서는 지금 쏟아지는 박수와 함성 소리가 감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매인 목으로 감사의 인사를 하며 고개를 꾸벅 숙인 시린이 무대에서 내려온다.

그런 그녀를 향해 미란과 세룬이 다가온다.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란이 시린을 보고는 바로 상태를 파악한 뒤 말한다.

“우쭈쭈쭈! 우리 리더 마마께서 울려고 하시네. 그렇게 감격에 겨우셨어요?”

“하지 마.”

충혈된 것인지, 렌즈 때문인지 몰라도 붉게 빛나는 시린의 눈은 섬뜩함을 주었다.

하지만 미란은 미소를 감추지 않은 채 놀리듯 말을 이어나갔다.

“히히! 뭘? 울 뻔한 걸 들켜서?”

“하지 말랬지?”

슈아앗!

그 말과 함께 섬광처럼 뻗어 나온 시린의 손이 미란의 팔을 잡아 꺾더니 왼발로 그녀의 몸을 옭아매더니 그대로 남은 손으로 미란의 옆구리를 간질이기 시작한다.

순식간에 제압된 미란은 자지러지기 시작했다.

“꺄! 꺄하하! 하, 항복! 내가 잘못했어! 내가 미안해! 흑흑! 살려주세요, 리더 마마!”

“이제 정신 좀 차렸지?”

“네, 네! 살려주세요.”

온몸을 결박한 채 간지럼을 피우는 것은 시린의 필살기 중 하나로, 기가 센 세룬과 미란을 완벽하게 제압한 기술이었다.

시린의 포박이 풀어지자 흐느적거리며 무너진 미란이 비운의 여주인공 포스를 흘린다.

“흑! 진실도 말하지 못하는 세상.”

“뭐어?”

“힉! 아니에요, 리더 마마! 제가 다 잘못했죠. 제가 죽일 년이에요!”

도끼눈을 뜬 시린을 보자 미란은 새하얗게 질려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다.

그 모습을 보며 세룬은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말한다.

“그런데 완벽한 무대였어. 설마 솔로로 뜬다고 해서 우리 버리면 안 돼?”

“얘는, 내가 그럴 것 같아?”

“농담이야, 농담.”

장난스럽게 농담을 했지만 세룬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자신도 시린의 감정 상태를 깨닫고 장난을 치려했는데 미란이 먼저 나서서 화를 피할 수 있었다.

‘저 기술에 걸리면 나라도…….’

몇 번 결러본 적이 있던 세룬으로서는 생각만으로도 끔찍한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흐느적거리는 미란을 끌고 대기실로 돌아온 시린이 창현을 바라보며 묻는다.

“무대 어땠어?”

“상당히 좋았는데요? 누나 실력이 그렇게 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니까요.”

“정말?”

창현의 말이 기분 좋은 듯 미소를 짓는 시린이었다.

수십만의 팬보다 창현의 칭찬이 더 감명 깊게 다가왔다.

팬들에게는 조금 미안한 마음이 있었지만.

“그럼요. 제가 왜 거짓말을 하겠어요. 오히려 연습할 때보다 더 멋진 무대를 보이는 걸 보니 누나도 무대 체질이긴 무대 체질인 것 같아요.”

“무대 체질이긴 하지. 콘서트장에서 시린이 얼마나… 꽥!”

그 사이 부활한 미란이 무언가 말을 하려 했지만 축지법을 사용하여 이동한 시린이 다시 한 번 그녀의 몸을 옭아맨 뒤 피의 숙청을 감행하고 있었다.

입이 틀어 막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바동거리던 미란이 이내 축 늘어지고 만다.

“고마워. 앞으로도 열심히 해야겠네.”

“그럼 반드시 성공할 거예요. 미란 누나도 열심히만 하면 되니까 좀 열심히 해봐요. 매일 뺀질거리기나 하고.”

“내가 언제 뺀질거렸다고 그래. 나도 열심히 한다고.”

퍼져 있던 미란이 억울한 듯 변명했지만 시린과 세룬의 시선을 받고는 어색하게 웃음을 흘리며 슬금슬금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하하! 너희들, 그렇게 보면 창현이가 날 어떻게 생각하겠니?”

“이미 창현이도 잘 알고 있는데 아직까지 현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걸 보면 안쓰럽기까지 해, 미란아.”

“으윽!”

세룬의 말에 치명적인 일격을 받은 미란이 비틀거렸다.

그 모습을 보며 창현은 웃음을 터뜨렸다.

사전 녹화 무대는 성공적으로 끝을 맺을 수 있었고, 그들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평소였다면 조용히 자신만의 시간을 보내며 마음을 추슬렀을 텐데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나쁘지 않게 여겨졌다.

‘친한 사람들과의 자리라서 그런 거겠지?’

왜, 술에 관련된 이야기에도 그런 것이 있지 않은가.

친한 사람들과 마시면 취해도 취한 것 같지 않다고.

그것과 비슷하게 친한 사람들과의 수다는 시간을 잊어버리게 만드는 마력을 품고 있는 듯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을 무렵, 밖에서 유쾌하지 않은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똑!

“손님이 온 거 같은데요?”

코디나 매니저였다면 그냥 들어왔을 텐데 노크를 했다는 것은 다른 손님이라는 뜻일 터.

창현의 말에 라샤 멤버들도 시선을 문 쪽으로 옮겼다. 그리고 대표로 미란이 말했다.

“들어오세요.”

허락이 떨어지자 굳게 닫혀있던 문이 스르륵 열리며 일단의 남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일렬로 선 그들은 자리에 앉아있는 창현과 라샤 멤버들에게 힘찬 목소리로 인사를 하였다.

“안녕하십니까, 2PM입니다!”


“어서 오세요.”

갑자기 방문한 손님의 존재로 어안이 벙벙하던 상태에서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연 것은 시린이었다.

그녀의 말에 중앙에 선 청년이 앞으로 나서며 인사를 하였다.

“2PM의 리더 박재범입니다.”

그 후, 멤버들이 각자 자기소개를 하기 시작했다.

조용히 소개를 듣고 있던 미란이 의아함이 담긴 목소리로 묻는다.

“2PM이라면 오후 2시를 뜻하는 거 맞나요?”

“예, 가장 활발한 시간인 오후 2시를 따서 그룹명을 2PM이라고 정했습니다.”

“진영이 형님이 그렇게 지어주셨어요.”

“진영이 형님? 그렇다면…….”

“예! JYP엔터테인먼트입니다.”

재범 옆에 서 있던 택연이 자신 있게 외치자 순간 라샤 멤버들의 눈초리가 날카롭게 변했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JYP엔터테인먼트와 그녀들 사이가 틀어질 이유는 없지만 그녀들은 작년에 있었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바로 원더걸스와 현간에 오고가던 퍼포먼스가 그것이다.

당시 뒷마무리가 그리 좋지 않았고, 성격 좋기로 유명하던 창현이 열이 받아 미국에서 직접 세실리아를 초청하지 않았던가?

팔이 안으로 굽는 이상 JYP엔터테인먼트 출신이라는 것이 곱게 보일 리 없었다.

더군다나 원더걸스와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라샤가 동남아시아 진출을 하게 된 내막도 존재했으니까.

한순간이지만 날카로운 기운을 뿌린 걸 느낀 듯하자, 시린이 먼저 나서서 그들의 기분을 해소시켜준다.

“죄송해요, 그간 저희들이 활동을 하지 않은 채 음반 작업에 몰두하다 보니.”

“아, 예. 이해합니다.”

한두 살 많은 나이였건만 한순간 발산한 라샤 멤버들의 기세는 보통이 아니었다.

국내와 일본, 동남아시아를 정복하고 조만간 중국 진출과 미국 진출을 앞에 둔 그녀들의 아우라는 톱스타들 못지않은 강렬함이었다.

편안하게 보내왔다고 하나 그것만으로 제법 긴 시간 동안 연예계에서 톱에 위치한 곳에 군림하는 것은 힘든 법이었으니까.

“데뷔하셔서 많이 힘드시겠어요.”

“아니오, 오히려 데뷔하게 돼서 기쁩니다. 이렇게 라샤분들을 만나게 되어 더욱 좋고요.”

시린과 재범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세룬과 미란은 목소리를 죽이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JYP에서 언제 아이돌을 데뷔시켰지? 웬만하면 다 들어볼 텐데?”

“그거 있잖아. 예전에 말했던 거. 십점 만점.”

“십점 만점? 아, 그게 쟤네들이었어?”

미란의 표정이 팍 일그러진다.

정확하게 가수는 몰랐지만 노래는 들어본 적이 있던 것.

대중적인 잣대로 어떻게 판단할지 모르지만 여자를 두고 점수를 매기는 것이 그리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던 것이 기억난다.

가뜩이나 창현이를 물 먹여서 기분이 왕창 나쁘던 상황이었는데 그런 만행을 저지르다니!

단단히 뿔난 표정을 짓는 미란이었다.

뿔난 미란을 보면서 세룬은 다혈질인 그녀가 사고를 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괜히 말했나? 뭐, 창현이가 수모를 당했다는 건 기분 나쁜 사실이니까. 게다가 창현이도 있으니 어떻게 잘 되겠지.’

기분 나쁜 것은 그녀 또한 마찬가지였기에 미란을 말리지 않고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는 세룬이었다.

그 사이 시린과 재범의 대화가 이어지고 있었고, 간략한 인사가 끝났기에 2PM 측에서 돌아가야 할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었다.

아무래도 뒤에 선 미란이 단단히 뿔난 표정을 짓고 있기에 행여 사고를 치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시린이 분위기를 조성한 것이다.

하지만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그녀의 배려를 저버리는 우매한 양이 있었다.

“죄송하지만 라샤 선배님들을 뵙게 되어 기분 좋은데 조금 더 이야기를 할 수 없을까요?”

앞으로 나선 인물은 야심만만한 포부를 품고 연예계에 데뷔한 택연이었다.

4개 국어를 사용할 줄 알며, 엘리트 출신인 그는 연예계에 데뷔하여 단숨에 톱 반열로 올라설 자신이 있었다.

엘리트 출신이었기에 머리 회전이 빨랐고, 진영이 어떻게 활동을 하는지 보았기에 그는 어떻게 하면 단숨에 인지도를 끌어올릴 수 있을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곳에 온 것은 순순하게 인사를 하기 위한 것도 있지만 택연에게는 다른 멤버들이 알지 못하는 계산이 밑바닥에 깔려 있었다.

‘라샤를 공략해라.’

이곳으로 오기 전 진영이 했던 말이었다.

작년 현의 일로 인해 사이가 나빠지는 것은 막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좋아지기 힘든 위치에 서게 된 것이 현실이었다.

미국 진출을 염두에 두고 있는 진영으로서는 그것이 불편할 수밖에 없었고, 상황을 뒤집기 위한 패로 2PM을 생각해냈다.

그것은 2PM에게도 도움이 되고, 나아가 JYP엔터테인먼트에도 도움이 되는 것이다.

진영과 택연이 의도한 바는 바로 고의적인 스캔들 조성이다.

걸 그룹 국내 파워는 현재 원더걸스가 가장 폭발적이지만 장기간 정상에 군림해온 라샤는 안팎으로 거대한 힘을 품고 있었다.

그녀들에게 어필할 수 있다는 것은 곧, 국내를 넘어 아시아 각국에 자신을 알릴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것을 위해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스캔들을 내는 것이다.

욕을 조금 먹겠지만 가장 싸게 먹히는 마케팅 효과이기도 했으니까.

일단 친해진 뒤 고의로 스캔들을 흘리게 되면 AA엔터테인먼트에서는 라샤가 타격 입는 것을 막기 위해 노력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수습하기 위해서는 JYP엔터테인먼트의 협력이 필요할 것이고, 결국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속적으로 스캔들을 물고 늘어지면 2PM의 이름이 알려지는 건 순식간일 테고, AA엔터테인먼트가 백기를 들면 적정 수준에서 스캔들을 무마한 뒤 미국 진출에 도움을 받으면 될 테니까.

두 마리의 토끼를 동시에 잡으려는 속셈이었다.

그 선봉에는 택연이 서 있었다. 야심이 큰 그는 욕을 먹더라도 가장 단기간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을 걷고 싶었다.

그 첫 번째 방법이 바로 라샤와 친분을 쌓는 것이었다.

그런 뒤에 같은 그룹 생활이라는 분모를 통해 작업을 해나가면 될 테니까.

“대화요?”

“예! 비록 저희가 신인이지만 같이 그룹 활동을 한다는 점에서 공통 분모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

입가에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택연이었지만 그 순간 분위기가 싸하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

그룹 활동이라는 공통 분모를 통해 살살 꼬드겨볼 생각을 했지만 그는 중대한 실수를 범했다.

바로 지금 이곳에는 그룹이 아닌 사람이 존재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바라보고 있지만 라샤의 중심에는 창현이 서 있고, 택연의 말은 아니겠지만 그를 따돌리려는 발언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미란의 눈이 뒤집혔다.

그리고 손을 뻗어 삿대질을 하며 버럭 외쳤다.

“나가!”

“예?”

갑자기 터져 나온 고함과 삿대질에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는 택연.

그 모습을 보고는 미란이 더욱 분통 터지는 표정을 지었다.

가뜩이나 여자한테 점수 매기는 듯한 행태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현을 따돌리려는 수작을 부리다니! 미란은 JYP엔터테인먼트가 2PM을 동원하여 교묘하게 창현을 디스하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음모설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미란아.”

옆에 있던 세룬이 미란의 팔을 잡아든다. 하지만 그 행동은 그리 적극적이지 않았다.

어떻게 된 상황인지 알아차리지 못하는 그들에게 시린이 차분하게 말한다.

“방금 하신 말, 의도하신 건 아니겠지요?”

“예? 저, 전 그저 그룹 생활을 하니 서로의 고충을 털어놓고 나눠보자는 취지에서…….”

엘리트 출신의 한계가 명백하게 드러나는 상황이다.

자신의 머리를 지나치게 과신하는 사람은 계획을 세울 때 예외 상황을 적용시키지 않는다.

택연은 자신의 생각을 너무 믿었고, 모든 것이 진영의 생각대로 돌아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JYP엔터테인먼트에서 그의 말은 가히 신의 계시와도 같았으니까.

그렇기에 그가 세워놓은 시나리오를 토대로 자신이 써나가는 중이었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과 직면하고 말았던 것이다.

좋은(?) 취지에서 한 말에 미란이 죽자살자 덤벼들 줄 누가 알았겠는가.

예상 외 변수가 등장한 순간 그의 머리는 새하얗게 비어버리고 말았다.

지금 이 순간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머리가 하얗게 비어 아무 말도 떠오르지가 않았다.

특히 활화산과도 같은 미란의 박력은 건장한 체구를 지닌 남자임이 무색할 정도로 뜨겁고 강렬하여 순간 다리가 후들 떨리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잠깐이었지만 무엇보다 그를 살 떨리게 만든 것은 눈앞에 있는 시린 때문이었다.

방금 전과 다른 것이 없어 보였지만 살짝 굳어있는 그녀의 전신에서 차가운 한기가 풀풀 풍기고 있었는데, 아직 서늘한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한겨울인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차가운 눈으로 택연을 바라보는 시린이 입을 열었다.

“방금 전 말은 의도한 건지 아닌지 몰라도 여기 현을 배제한 채 이야기를 하려고 한 걸로 들리거든요. 미란이가 소리 친 것도 그것과 같고요. 제 생각이 틀린 건가요?”

아차!

시린의 말을 듣는 순간 택연은 자신의 실수를 깨달을 수 있었다.

라샤와 친해져야 한다는 압박감에 그만 현을 잊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모든 중심에는 그가 있는데, 라샤를 보는 순간 현의 존재를 깜빡하고 말았다.

나무를 보고 숲을 보지 못해버린 셈이다.

……결정적으로 남자라서 관심이 덜했던 면도 있었고.

“죄송합니다,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자신의 실수를 파악한 택연이 즉각 사과를 하였다. 나빠진 이미지를 되돌리고 친해지기 위해서는 각고의 노력이 필요할 터, 속으로 똥 밟았다는 생각이 끊임없이 맴돌고 있었다.

그의 사과에도 불구하고 미란은 토라진 안색을 지우지 않더니 말한다.

“실언을 했더라도 다시는 그런 말을 마세요. 알겠어요?”

“아, 알겠습니다.”

의외로 순순히 용서해주는 미란이었다.

그 말을 들은 택연은 용서 받았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분위기가 누그러지는 듯하자 재범이 시린에게 인사를 하였다.

“죄송합니다. 저희가 휴식을 방해한 것 같으니 이만 나가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세요.”

시린의 허락이 떨어지자 2PM 멤버들은 후다닥 대기실을 나섰다.

일곱 명의 사내가 사라지자, 대기실이 휑한 느낌이 들었다.

미란은 자신의 옆에서 느껴지는 의미심장한 시선에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연다.

“왜?”

“아니, 그냥. 우리 미란이가 언제부터 그렇게 순순히 용서를 해줬나 싶어서.”

순순히 화를 풀고 용서해주는 게 미란답지 않아서 세룬은 나름대로 혼란에 빠져있었다.

자신이 알고 있던 미란이 아닌 듯 싶었으니까.

조용히 미란을 부추겨서 따끔한 맛을 보여주려 했는데 계획이 어긋나고 말았다.

입가에 호선을 그린 미란이 말한다.

“아아, 그거? 일부러 한 거야. 일부러.”

“일부러……?”

의아함이 담긴 세룬의 물음과 시린의 시선을 받자, 미란은 웃음을 참지 못한다.

“쿡쿡쿡! 이대로 확 폭발시키면 너무 허무하잖아. 앞으로 연예계 생활을 같이 오~래 할 동료인데. 적정선을 유지하면서 선배의 입장에서 후배를 조금씩 갈궈줘야지. 이 험한 연예계 생활을 얕보지 못하게 말이야.”

“…….”

섬뜩함이 담긴 미란의 말에 세룬과 시린은 물론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던 창현마저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그들의 머릿속에는 미란 앞에서 절대 언급하지 말아야 할 그녀의 별명이 떠올랐다.

‘미친개 미란…….’

한 번 물면 절대로 놓지 않아 미친개라 불리던 것이 바로 미란이다.

그런 미란이 두뇌를 사용하여 먹잇감을 농락하기 시작했다?

구경하는 입장에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해줌과 동시에 앞으로 물어뜯길 먹잇감을 향해 측은지심이 절로 들었다.

2PM은 미친개에게 찍혔다.


“그런데 창현이 넌 거기에서 왜 가만히 있던 거야?”

“네?”

대기실 안에 있던 모두가 미란의 무서움에 몸서리를 칠 때 창현은 갑자기 자신에게 돌아오는 화살을 느끼고는 몸을 움찔한다.

그 모습에 눈썹을 치켜 든 미란이 날카로운 눈으로 창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적이잖아! 적! 왜 적을 앞에 두고 싱글벙글 미소를 짓고 있는 거야!”

“적이라뇨…….”

서슴없이 적으로 규정하는 미란의 말에 창현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좋은 감정을 가질 수 없는 관계이기는 하지만 적이라 하기에는 어폐가 따른다.

“적이 아니라고? 널 물 먹였던 곳이잖아! 그리고 저쪽 때문에 우리는 그 험난한 동남아시아를! 으으…….”

동남아시아 투어 콘서트를 열었던 걸 떠올리던 미란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것은 시린과 세룬도 마찬가지였다.

최고의 대우를 받았다고 하지만 외국에서의 생활은 그리 유쾌한 경험이 되지 못했다.

“하하하! 덕분에 아시아를 아우르는 가수가 되었잖아요.”

어색하게 미소를 지은 채 창현이 해줄 수 있는 말은 그게 전부였다.

분명 앙금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어차피 이쪽이 아쉬울 것 없는 입장이니 굳이 격한 반응을 보일 이유가 없었다.

“그것도 그렇긴 하지만…….”

호응을 해주지 않는 창현의 말에 미란이 풀 죽은 표정을 짓자, 창현이 재빨리 수습한다.

“그래도 미란 누나가 소리친 건 멋졌어요.”

“그렇지?”

언제 풀 죽었냐는 듯 금세 밝은 표정을 짓는 미란이었다.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시린이 세룬에게 시선을 두며 말한다.

“그런데 아까 걔네들은 조금 조심해야 할 필요성이 있겠는 걸?”

“그렇지?”

“그러게. 신인이라 그런지 아직 미숙하던데? 의도가 훤하게 보이더라고.”

시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미란과 세룬이었다. 연예계 생활을 오래했던 만큼 그녀들은 다른 기획사나 연예인들의 움직임을 보면 단번에 파악하는 것이 가능하다.

“의도라뇨?”

“너 눈치 채지 못한 거야?”

의아한 시선을 보내는 창현을 보며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짓는 라샤 멤버들.

한눈에 봐도 훤하게 의도가 보이건만 정말 눈치를 채지 못했단 말인가?

여기 있는 사람들 중 가장 눈치가 빠른 것이 바로 창현이지 않은가.

그 모습을 본 시린은 한숨을 푹 내쉬고 말았다.

“후우! 창현이라면 그럴 수도 있지.”

다른 건 다 빠삭한데 이상하게 연애에 관련된 쪽으로는 전무후무한 눈치 꽝이었으니까.

구제불능이라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자 창현은 더욱 궁금한 듯 묻는다.

“뭔데요?”

“딱 보면 모르겠어? 아까 왔던 애들이 친해지자고 했잖아. 원래 아이돌 그룹은 자연스럽게 친해지는데 먼저 저렇게 성큼 다가오면 그 의도는 뻔한 거지. 넌 어쩜 그렇게 눈치가 없니?”

“크윽!”

다른 사람도 아니고 미란에게 눈치 없다는 말을 듣자 창현은 가슴을 움켜쥐며 뒤로 주춤 물러났다.

하필이면 미란에게 이런 말을 듣다니.

충격 받은 표정을 창현이 세룬을 바라보며 말한다.

“그러니까 불순한 목적이 있었다는 거네요?”

“그런 거겠지? 아무래도 신인이 가장 쉽고 효율적으로 인지도를 올릴 수 있는 방법이니까. 하지만 상대를 잘못 선택했지.”

입가에 싱긋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세룬의 모습에 미란은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떨어진다.

늘 방관자적인 입장에 서 있는 세룬이었지만 그녀의 실상은 철두철미함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여태까지 그녀의 철벽을 뚫고 접근한 남자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

“어쨌거나 마음에 안 들어! 분명 그 사건을 모를 리가 없는데 저렇게 미소 짓고 접근하다니.”

“신인이잖아요. 누나들을 동경하는 마음이 있던 거겠죠.”

분통을 터뜨리는 미란을 창현은 다독이려 하였다.

“넌 왜 자꾸 걔네들 편만 드는 거야!”

“그냥 불쌍해서요.”

미란에게 찍힌 이상 남은 것은 지옥길 밖에 없으니 어찌 측은지심이 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차마 그것을 말할 수 없었기에 창현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갈 뿐이었다.

그저 명복을 빌어주는 수밖에.

“으으! 아직도 분이 안 풀려! 감히 그런 얄팍한 수작으로 접근하려 들다니!”

여자의 몸을 점수로 평가하는 노래도 마음에 들지 않는데 행동까지 마음에 들지 않자, 미란은 연신 분통을 터뜨릴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창현을 비롯한 시린과 세룬은 조용히 눈을 피할 뿐이었다.

바짝 독이 오른 미친개에게 물리면 인생이 고달파진다.

그때, 시린의 시선이 한쪽으로 향하더니 반짝 빛난다.

“걔네들 무대 위에 섰는데?”

그녀가 선택한 방법은 미란의 반응을 외부의 다른 인물에게 돌리는 법!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내부의 불만을 조선 침공으로 돌리지 않았던가!

시린의 계략은 훌륭하게 먹혀들었다.

눈에 불을 킨 미란이 삿대질을 하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아악! 저 노래야! 나 저거 정말 마음에 안 들어!”

때마침 대기실에 보이는 TV에는 2PM이 <10점 만점에 10점>을 부르고 있는 장면이 방영되고 있었다.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미란의 표정은 찌푸려져 있었다.

그리고 한동안 분에 찬 목소리를 낼 때, TV가 갑자기 꺼진다.

미란이 고개를 홱 돌리니, 그곳에는 창현이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제 슬슬 무대 위에 설 준비를 해야 돼서요.”

“으응, 그렇구나.”

무대 위에 서기 위해 준비하는 창현의 아우라는 미친개 모드로 돌입한 미란조차 감당하기 버거운 것이었다.

단숨에 순한 양으로 변모한 미란에게 미소를 지어준 창현이 말한다.

“이번 무대도 잘 봐주세요. 꽤나 노력했으니까 누나들의 냉정한 평가를 들어보고 싶네요.”

“알았어.”

“그럼 수고해. 우리는 무대 앞에서 지켜볼게.”

“네.”

고개를 끄덕이는 창현을 보며 시린이 멤버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간다.

“…….”

그녀들이 밖으로 나가자 창현이 다시 TV를 킨다.

그리고 무대 위에서 노래를 부르는 2PM을 조용히 바라본다.

그들의 무대가 끝났을 때, 창현은 TV를 끄며 중얼거린다.

“왠지 미안하네.”

두고두고 씹을 거리를 제공해주는 것 같아서.

창현의 입가에 씨익 미소가 맺히고 있었다.


오늘 K본부 뮤직뱅크는 한 마디로 표현이 가능했다.

바로 현의 독무대.

1위 후보 두 곡이 모두 그의 곡인 걸 감안하면 현재 음악계를 누가 평정했는지 알 수 있었다.

약 두 달 전 발매한 앨범이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새로 발매한 앨범이 그 1위 자리를 노리고 있는 상황.

앨범을 발매하고, 1위를 노리는 가수라면 누구나 한 번쯤 꿈꾸는 그런 상황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을 어렵지 않게 해낸 것이 바로 현이다.

한국이 낳은 말도 안 되는 스타 중 스타.

2PM의 무대를 보고 정신집중에 들어간 창현은 잠시 후 무대 위에 서야 한다는 말에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선다.

<악마의 유혹>을 먼저 무대 위에서 부른 다음 사전 녹화를 한 <Vampire>가 방영된다. 그리고 노래가 끝난 뒤 4-B 앨범 타이틀곡인 <Devil Cry>를 불러야 한다.

짧은 시간 동안 의상을 갈아입어야 했기에 무척 바빠질 것이다.

하지만 그 바쁜 순간도 하나의 도전이다.

무대 위에 연속으로 설 수 있다는 것.

약간의 시간을 두고 무대 위에 선다는 것은 한차례 쭉 이어가는 미국과 체제가 다르지만 이것도 즐거웠다.

“가장 많은 교류가 되는 느낌.”

비슷한 환경에서, 비슷한 것을 보고, 비슷한 생각을 하며 살아온 사람들에게 자신의 노래를 들려준다. 다른 팬들과도 교감을 하지만 자신과 같은 환경에서 자라난 사람들과 노래로 하나가 될 때, 진정한 교감을 이룬 듯한 느낌을 받는다.

서서히 무대 위로 오를 무렵, MC의 소개가 이어진다.

“이번은 여전히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곡이죠. 악마가 강림한 듯한 섬뜩함과 여성의 마음을 사정없이 뒤흔드는 로맨스가 담긴 노래, 현이 부릅니다, <악마의 유혹>.”

와아아아아아!

이 함성 소리가 언제나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만들어준다.

무대 위에 선 창현은 입가에 미소를 짓는다.

여성 팬들이 자지러지는 마력을 품은 미소였다.

“실력 차이를 보여주지.”

누구한테 말하는 것인지 다 알 것이라 믿는다.


“이거 귀한 손님이 찾아오셨군.”

입가에 미소를 지은 수만은 오랜만에 보게 되는 반가운(?) 손님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의 앞에 앉은 인물은 그 말에 묘한 미소를 짓더니 고개를 숙인다.

“귀한 손님이라니, 영광입니다.”

“하하! 영광 정도는 아니고. 그런데 요즘 많이 바쁠 텐데 갑자기 보잘 것 없는 나를 찾은 것은 무슨 이유인가?”

“보잘 것 없다니, 어찌 그런 말씀을. 언제나 존경하고 있으니 행여나 그런 말씀 마십시오.”

손을 좌우로 흔들며 수만의 말을 강력히 부인하는 인물은 다름 아닌 JYP엔터테인먼트의 프로듀서 박진영이었다.

“하하! 존경이라니, 고맙군. 정면대결을 했다가 완전히 깨진 패자에게 그런 말도 해줄 줄 안다니 말이야.”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수만이 언급한 것은 소녀시대와 원더걸스의 한차례 정면대결을 언급하는 것이었다.

2007년 말, 야심차게 데뷔를 시켰지만 결과는 상박이라고 부르기도 어려운 중박을 치면서 SM엔터테인먼트의 계획에 큰 차질을 빚게 되었다.

의도하지 않았을 테지만 그렇게 된 원인을 제공한 것이 바로 눈앞의 진영이 프로듀서로 있는 원더걸스 덕분이었다.

<Tell Me>라는 거대한 해일이 덮쳐오는 바람에 SM엔터테인먼트에서 준비한 프로젝트를 모조리 말아먹었을 뿐만 아니라, 소녀시대의 활동 또한 잠정적으로 미뤄진 상태였으니까.

“운도 실력 아닌가? 보니까 시기적절하고 아주 멋진 마케팅이었어. 우리 사원들도 노래를 따라할 정도로 파급력이 강했으니까.”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계속해서 자신을 낮춰 말하는 수만을 보며 진영은 마음이 살짝 불안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자신이 그를 찾아온 입장이었다. 서로 이득이 될 수 있는 거래를 제안하기 위해 찾아온 것인데, 수만의 행동은 진영에게 잔뜩 부담을 안겨다주고 있었다.

묘한 불안함을 떨쳐내며 진영이 속으로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서로 손해가 아니니 괜찮을 거다.’

이렇게 말했지만 자신이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갑의 입장보다는 을의 입장에 처하게 될 확률이 높았다.

머릿속으로 할 말을 정리하는 그를 보며 수만도 두뇌 회전이 빨라지고 있었다.

‘저 녀석이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있군.’

이 바닥에 오래 굴러봐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만약 친분을 쌓기 위해 찾아왔다면 저녁을 함께 하며 가볍게 반주를 동반하면 된다.

하지만 지금은 아직 해가 쨍쨍한 낮이다.

이 시간에 굳이 약속을 잡고 찾아왔다는 것은 무언가 바라는 것이 있다는 뜻이었다.

근래 들어 SM엔터테인먼트는 다른 기획사와 달리 위험한 줄타기를 하고 있기에 처신을 잘해야 하는 입장에 처해있다.

어떤 제안을 하러 온 것일까.

짜릿하면서 스멀스멀 솟아나는 긴장감이 수만으로 하여금 미소 짓게 하였다.

아쉬울 것 없는 것이 자신의 입장이었기에 수만은 입을 다물고 조용히 진영을 바라본다.

그 뜻을 알아차린 진영이 포기한 듯 먼저 입을 연다.

“제가 회장님을 찾아온 것은 서로에게 득이 될 수 있는 제안을 하기 위함입니다.”

“서로에게 득이라? 아주 좋은 말이군. 누군가 이득을 얻기 위해 한 명이 밥그릇을 빼앗기는 것보다 훨씬 좋으니 말일세.”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 제안을 회장님께서도 긍정적으로 검토해보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말하니 궁금하군. 무슨 이야기인지 들어보도록 하지.”

“예! 제가 회장님에게 이야기 드릴 것은 소녀시대에 관련된 건입니다.”

진영은 소녀시대를 언급하는 순간 수만의 눈이 반짝이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자체적인 정보망에 의하면 현재 소녀시대는 SM엔터테인먼트의 계륵과도 같은 존재였다.

먹자니 그렇고, 버리기에는 아깝고.

묘한 균형 속에서 한쪽으로 기울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진영의 입장에서 소녀시대는 한쪽으로 기울게 만들 수 있는 훌륭한 추 역할을 할 수 있다.

‘거절할 수 없을 걸?’

속으로 미소 짓는 진영의 예상과 비슷하게 수만이 반응을 보인다.

“소녀시대라? 말해보게.”

“예! 요즘 소녀시대가 많이 힘들다고 들었습니다.”

“힘들다라… 누군가 소속사 때문에 힘들기는 하지.”

“하하하!”

수만의 말에 진영은 어색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라는 것은 결국 원더걸스 때문이었으니까.

당연한 사실이었지만 진영은 속으로 감탄을 감추지 못했다.

왜냐하면 압도적인 우세를 점하고 있음에도 원더걸스와 소녀시대는 여전히 경쟁 구도를 달리는 그룹처럼 대중에게 비춰지고 있던 것이다.

앨범 판매에서 뒤처졌지만 인지도 측면에서는 모든 것이 압도적인 원더걸스의 우위다.

분명 경쟁 구도가 성립되지 않는데 SM엔터테인먼트에서는 그것을 해낸 것이다.

이 구도를 오랫동안 지속해나갈 경우 자칫 잘못하면 덜미를 잡힐 수도 있다.

경쟁 관계는 언젠가 뒤집힐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었으니까.

“그 부분에 대해서는 죄송합니다.”

“죄송하기는. 우리쪽에서 미흡했기에 그런 결과가 나온 게지.”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제가 회장님께 제안을 드리고자 하는 것은 소녀시대에 관련된 것입니다.”

“소녀시대와? 뭔지 궁금하군.”

“예! 제가 회장님께 제안을 드릴 것은 소녀시대의 인지도를 띄우는 것입니다.”

수만으로서는 혹할 수밖에 없는 제안이었다.

현재 소녀시대의 고질적인 단점은 각각의 멤버들이 개별적인 인지도를 쌓는데 성공했지만 문제는 그 인지도를 소녀시대 자체에 녹여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멤버들 각각의 인기는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그들을 지탱해줄 소녀시대라는 이름은 빛을 제대로 발하지 못하고 있었으니 수만으로서는 이것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머리가 지끈 거릴 지경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진영의 제안이 들어온 것이다.

“소녀시대의 인지도를? 그러면 그쪽에 무슨 이득이 되는 거지?”

“얼마 전에 저희 측에서 두 그룹을 데뷔시킨 것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두 그룹? 알고 있지. 2AM과 2PM이란 그룹인 걸.”

언급하는 수만의 표정은 상당히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JYP엔터테인먼트에서 누구를 데뷔시키던 상관이 없지만 문제는 그들을 데뷔시킨 시기가 SM엔터테인먼트 새로운 5인조 남성 그룹인 SHiNee의 데뷔 시기와 상당히 비슷했던 것이다.

신인을 데뷔시킬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현 가요계 상황이었다.

원더걸스와 빅뱅 2강 라인으로 종횡무진 휩쓸고 있는 상황에서 빈틈을 노리려 했는데 JYP엔터테인먼트에서 무려 두 그룹이나 데뷔를 시킨 것이다.

수만으로서는 결코 곱게 보일 수 없는 일이었다.

“하하하! 그렇습니다. 저희 측에서 상당히 공을 들였죠.”

“그건 우리 쪽도 마찬가지지.”

“활동 시기가 겹친 것에 대해서는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희 쪽도 계획이 잡혀 있고, 한국 쪽은 제가 총괄하는 게 아니다 보니 말이죠.”

“그건 알고 있다네. 그래서, 구체적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뭔가?”

“예! 제가 회장님께 드릴 제안은 바로 2PM에 관련된 것입니다.”

“2PM? 방금 전에는 소녀시대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지 않았었나?”

의아한 표정을 짓는 수만을 보면서 진영은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말한다.

“참고로 2PM은 일곱 명으로 이루어진 남성 그룹입니다. 소녀시대와 인원이 상당히 비슷하지 않습니까?”

“인원이 비슷하다라, 그래서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건가?”

“…….”

끝까지 모른 척하는 수만을 보며 진영은 헷갈리는 것을 느꼈다.

‘이 양반이 정말 몰라서 묻는 건가? 아니면 알고도?’

상대가 알아차리는 것과 자신이 직접 말하는 것은 상당한 차이를 동반한다. 만약 이 상황에서 수만이 알아차리고 먼저 언급하면 자연스럽게 자신이 주도권을 끌어올 수 있지만 자신의 입으로 이야기하게 되면 수만은 여전히 모름쇠로 일관하며 대화를 서서히 자신의 페이스로 끌어당길 수 있다.

한 방 먹었다는 생각에 진영은 표정 관리를 하며 말한다.

“2PM은 일곱 명, 소녀시대는 아홉 명, 숫자가 상당히 비슷한 만큼 얽힐 거리도 다양하지 않겠습니까?”

“흐음! 그러니까 남녀 그룹을 얽히게 하자, 이거로군.”

“그렇습니다.”

“얽히게 해서 노이즈 마케팅을 하자는 건가?”

진영의 생각을 꿰뚫어 보지 못할 리 없다.

2PM은 갓 데뷔를 했지만 케이블 TV를 통해 상당한 인지도를 확보한 상태다. 그리고 소녀시대 또한 데뷔 1년이 넘어가면서 자체적인 인기는 상당한 상태.

두 그룹이 얽히게 되면 연예계 기자 입장에서는 상당한 기삿거리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맞습니다.”

“노이즈 마케팅이라, 상당히 골치 아픈 걸 제안하는구만.”

그렇게 말을 하지만 수만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리고 있었다.

그것을 본 진영은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저런 모습을 보인다면 거래는 성사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군.’

아마 오늘 현의 새로운 무대가 있는 곳으로 2PM이 갔으니 그곳에서 라샤와 친해지기 위해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AA엔터테인먼트의 라샤와 스캔들을 터뜨리고, SM엔터테인먼트의 소녀시대와 얽히게 한다.

JYP엔터테인먼트를 제외한 다른 걸그룹과 얽히게 하여 스캔들을 터뜨리면 2PM의 인지도는 별다른 노력 없이 치솟을 것임이 분명했다.

‘미국 진출로도 따내고.’

내년부터 원더걸스의 미국 진출을 염두에 두고 있는 진영으로서는 큰 밑그림을 그리고 있는 상황이었고, 지금 이 계획을 차곡차곡 진행하여 더욱 큰 성과를 쥐기 위해 움직일 생각이었다.

그 중 하나가 소녀시대와 2PM이 얽히는 것이다.

단기간에 폭발적인 인지도 상승을 꾀하여 남자 원더걸스라는 칭호를 획득하고, 원더걸스가 미국으로 간 틈을 2PM이 고스란히 차지하게 하려는 것이 진영의 속내였다.

이미 시나리오는 짜여 있고, 계획도 빈틈없이 잡혀 있다.

그리고 원더걸스가 자리를 비우게 되면 소녀시대 또한 일각에서 작게나마 자리를 공고히 할 수 있을 테니

‘넘어 온다, 넘어 와.’

고민에 빠져있는 듯한 표정이지만 저것이 자신의 애를 더욱 닳게 만들게 하려는 속셈이라는 것을 진영은 잘 알고 있다.

처음 초년생일 때 저것에 얼마나 낭패를 보았던가. 하지만 이제는 저 표정 자체가 상대방의 마음을 옥죄게 하려는 하나의 퍼포먼스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다.

‘아닌 척하면서 승낙하겠지? 일단 앓는 소리를 할 테고. 살살 비위를 맞춰줘야겠군.’

이미 수만의 반응까지 모두 꿰뚫고 있는 진영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이 계획을 애초에 실행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생각에 잠겨있던 수만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미안하지만 불가능할 듯하군.”

“예?”

예상을 빗나가는 수만의 말에 진영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수만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번져나가고 있었다.


‘제법 머리를 굴렸지만 한 가지 놓치는 것이 있군.’

얼이 나가버린 진영의 표정을 보면서 수만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소녀시대가 원더걸스에게 밀리면서 늘 인상을 쓰는 것은 자신이었는데 지금 만큼은 자신이 우위에 섰다는 것이 그렇게 유쾌할 수 없다.

수만의 생각처럼 진영이 간과하고 있는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자신이 AA엔터테인먼트와 생각 이상으로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AA엔터테인먼트의 사장인 강석규와 자신은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사업적인 측면에서 여러 가지 이야기가 오고 갈 정도로 끈끈한 사이를 유지하고 있다.

최근 들어 엠넷에 관련된 문제로 인해 다소 지지부진한 모습을 보였지만 그것을 제외하면 여러 가지 사업적인 측면에서 공동 제휴를 맺고 활동을 하고 있다.

SM엔터테인먼트에서는 엔터테인먼트 사업에 전반적인 노하우를 조금씩 알려주고 있었고, AA엔터테인먼트는 미국에 관련된 사업 노선을 개척해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석규가 말하길, 현은 소녀시대와 긴밀한 사이로 엮여있는 만큼 현과 소녀시대의 관계가 지속되는 것만큼 두 회사도 친해지자고 하였다.

그때는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지만 진영의 말을 듣는 순간 석규는 깨달을 수 있었다.

현이 자체적으로 소녀시대를 끌어주는 역할을 할 수 있으니 괜히 허튼 짓을 하지 말라는 것.

그것을 제외하더라도 진영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은 이유가 또 있었다.

‘JYP엔터테인먼트랑 AA엔터테인먼트랑 사이가 좋지 않지.’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수만은 작년에 있었던 MKMF일을 잘 알고 있다.

석규가 말해주지 않았지만 현과 원더걸스 사이에 이야기가 오고간 적이 있었고, 그것이 틀어져서 미국의 스타 세실리아를 데리고 와 퍼포먼스를 펼친 적이 있다는 것을.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AA엔터테인먼트와 JYP엔터테인먼트의 사이가 그리 좋지 않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한다면 수만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AA엔터테인먼트를 선택할 것이다.

서로가 서로의 이득을 취할 수 있고, 공생하면서 이득을 낼 수 있는 사업적인 동료였기에.

잡음을 일으키며 인기를 얻어봤자 결국 단기적인 시각에 지나지 않기에 그것은 수만이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수만은 화들짝 놀란 채 표정을 수습하지 못하는 진영을 보며 의자에 몸을 묻었다.

저렇게 놀라는 표정을 보니 그동안 묵은 체증이 싹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불가능하다는 말이 의외로 들렸나 보군?”

“솔직히… 그렇습니다.”

경악에 빠져있던 진영이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자신의 제안은 어디 하나 빈틈이 없을 정도로 완벽했다.

비단 자신만의 이득을 챙기는 것이 아닌, 자신과 SM엔터테인먼트 모두 도움이 되는 제안이기도 했다.

그런데 어찌하여?

그 생각을 꿰뚫어보기라도 하듯 수만이 말한다.

“내가 왜 제안을 거부했는지 궁금하겠지.”

“…….”

무언은 곧 긍정.

괜한 말로 상황을 더 어지럽히지 않으려는 의도가 엿보였지만 이미 주도권은 수만에게 넘어왔다.

“간단하네. 소녀시대를 굳이 노이즈 마케팅에 사용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지.”

“가장 확실하고 효율적인 방법입니다.”

“그럴 수 있을지도? 하지만 우리 쪽은 이미 그렇게 해서 한 번 크게 데인 적이 있어서 말일세.”

방대한 팬덤을 보유한 SM엔터테인먼트는 소녀시대를 여자 슈퍼주니어라는 이름 하에 그쪽 팬들을 흡수하려는 움직임을 보인 적이 있다.

하지만 오히려 그것을 실패하자, 안티만 잔뜩 늘어났기에 수만의 말은 얼핏 들으면 그럴 듯해보였다.

진영은 무엇을 말하는지 깨닫고는 황급히 말한다.

“그때와 상황이 다르다는 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다른 건 알아도 굳이 그럴 이유가 없다는 거일세. 소녀시대는 데뷔 1년이 넘어가는 그룹이고, 2PM은 이제 갓 데뷔한 그룹이 아닌가? 인원은 비슷해도 급수가 맞지가 않아.”

“큭!”

급이 다르다는 말에 진영은 이를 꽉 깨물었다.

‘그럼 소녀시대는 원더걸스와 급이 같습니까?’

그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차마 밖으로 내뱉을 수 없었다. 만약 이 말을 하게 되면 더 이상 수만과 협상은 없다는 뜻이었으니까.

“소녀시대 이름 자체의 브랜드는 약하지만 개개인 멤버들의 인지도는 상당하지. 무엇보다 이쪽은 굳이 노이즈 마케팅을 하지 않아도 확실하게 할 방법들이 많지.”

“…….”

직설적인 거절이었다. 그 속에 서린 말은 아직 2PM이 소녀시대에 비할 바가 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였다.

입술을 질겅질겅 씹던 진영이 수만을 바라보며 말한다.

“그래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결코 서로에게 손해가 아닐 것입니다.”

“손해가 아닌 건 알지만 노이즈 마케팅으로 인해 우리 아이들이 힘들어 질 것은 사양이라서.”

‘언제부터 그렇게 그들을 생각했다고 그러시는 것입니까!’

얼핏 보면 소속사 연예인을 걱정하는 따뜻한 사장님의 모습이었지만 그 본질을 알고 있는 진영으로서는 속이 터질 것 같았다.

저렇게 의례적이고, 보여주기 위한 말을 듣기 위해 이곳까지 온 것이 아니기에.

“그래도 한 번쯤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생각이 나면 그렇게 해보도록 하지. 조심히 돌아가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끝까지 고려하지 않는 수만의 모습에 진영은 고개를 숙인 뒤 밖으로 나간다.

SM엔터테인먼트 건물 밖으로 나온 그는 차를 몰고 오다가 잠시 정차한 뒤 주먹으로 핸들을 내리친다.

쾅!

“제길! 하필이면…….”

첫 단추가 잘 꿰어져야 나머지 계획들도 순조롭게 진행된다.

그런데 첫 단추가 완전히 어긋나버렸으니 진영으로서는 불쾌한 감정이 들 수밖에 없었다.

“괜찮아, 아직 사용할 수 있는 패는 있으니까. 소녀시대를 사용할 수 없다면 다른 패를 사용하면 되겠지.”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생각에 잠겨있던 진영은 그대로 핸드폰을 열어 통화를 시도한다.

“여보세요? 택연이냐? 그래, 네게 할 말이 있는데…….”

2PM의 야심가 택연에게 지령을 내리는 진영.

하지만 그는 알았을까.

그의 말을 듣고 충실하게 움직인 택연은 미친개 미란에게 단단히 찍혀버린 것을 말이다.

첫 단추에 이어 두 번째 단추도 완전히 어긋나버리게 되었다.


노래를 부르며 안무를 펼치는 창현의 무대 장악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MR이 흘러나오고, 노래를 부르며 안무를 소화하는 그를 보며 관객들은 자신도 모르게 노래에 빠져들고는 한다.

현의 노래 중 가장 큰 장점은 어느 사람들이나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대중적인 가사와 음률이다.

세상에 살아가는 사람의 숫자는 많다.

많은 사람들은 각자 다양한 생각을 품고 있으며, 그들의 의견은 통일되지 않아 하루하루 크고 작은 다툼을 불러일으키고는 한다.

하지만 그들은 한 사람의 사람이었고, 각자의 근원은 동일했다.

창현의 가사는 시적인 함축적 의미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었고, 작가의 수려한 문장을 품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기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동질감을 주었고, 쉽게 이해가 되었으며, 나아가 굵은 줄기를 관통하며 사람들에게 자신이 의도한 바를 직설적으로 전달하고는 한다.

여기서부터는 각각의 개성이 빛을 발하는 때다.

화두를 던져준 창현의 노래에 듣는 사람들은 각각 자신이 살을 덧붙이기 시작하고, 그것은 곧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든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하나의 판타지(Fantasy).

장르의 경계를 그어놓지 않은 채 무한의 상상 속으로 빠뜨리는 창현의 노래는 그 자체만으로 판타지라 할 수 있었다.

달콤한 로맨스를 부르는 그의 노래는 듣는 사람에게 알콩달콩한 로맨스를 꿈꾸게 하고, 백마 탄 왕자님, 잠자는 숲속의 공주님을 만나는 듯한 환상을 심어준다.

달디 단 이 분위기에 휩쓸려 종래에는 사람들이 지금 이곳이 현실인지 꿈인지 분간을 하지 못할 정도가 되고는 한다.

그 중심에는 노래 하나로 환상을 심어주는 현이 존재한다.

아아아아!

환상에 빠져들었던 사람들은 허공을 밟으며 승천하고자 하는 창현의 모습을 보며 안타까워한다.

한 여자를 사랑했기에 존재조차 포기하려는 악마의 안타까운 손짓.

그가 악마라서 사악한 느낌이 드는 것보다, 자신의 존재에 갈등을 겪고,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려는 듯한 모습에 관객들은 아쉬운 탄식을 흘린다.

반드시 그것을 이루었으면 좋겠다 생각하지만 이것은 이미 결론이 난 악마의 일대기.

아쉬움과 깊은 감동을 남긴 현의 무대는 그렇게 끝을 맺는다.

“…….”

방금 전 귀를 어지럽힌 채 볼거리만 제공하던 누군가의 무대와 엄청난 비교를 하게 만들면서.


“후우. 어땠어요?”

무대 위에서 내려온 창현이 뒤에서 기다리던 라샤 멤버들을 향해 묻자, 그녀들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어떻긴, 완전 최고였지.”

“와! 창현이 정말 장난 아니다. 어떻게 그런 안무를 할 생각을 한 거야? 계단 춤? 나도 좀 가르쳐주라!”

“현 오빠! 너무 멋져요!”

“…….”

“자, 장난이야.”

창현을 보고 극성 여성 팬의 모습을 따라하던 세룬은 분위기가 급 냉각되자 황급히 손을 좌우로 흔들며 자신의 무고함을 알린다.

그래도 같은 그룹원이었기에 시린은 한심했지만 무안해하는 세룬을 구해주고자 화제를 돌린다.

“그런데 평소보다 더 퀄리티가 높은데?”

“그래요? 전 항상 최선을 다하는데.”

“그래?”

고개를 갸웃하는 시린. 평소에 그가 무대 위에서 최선을 다한다는 건 알고 있지만 방금 전 무대는 평소보다 더욱 강렬한 마력을 담아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평소에는 적절히 우려낸 사골 같다면 지금은 아주 진하게 우려낸 사골 같다랄까.

이렇게 되면 그 다음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암울해진다.

진한 사골 뒤에 아무리 맛있는 사골을 만들어내도 그 진함을 이겨낼 수 없으니까.

그리고 그 전에 했던 사람들 또한 진한 사골의 맛을 본 관객들 때문에 평가는 더욱 떨어질 것이다.

‘전에 했던 사람?’

“창현이 설마 너…….”

무언가를 눈치 챈 듯 눈을 크게 뜬 시린이 창현을 바라보자, 그는 어깨를 으쓱할 따름이었다.

“왜요?”

“왜라니? 네가 한 건 방금…….”

“어허! 시린 양! 왜 그러시나. 방금 무대를 마치고 돌아온 우리 창현 군에게.”

미란이 창현을 감싸돌며 시린을 튕겨낸다. 하지만 그녀의 놀라움은 여전히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누나, 들어가서 쉬세요. 메이크업도 최종 검사를 해봐야죠. 다음 무대가 우리라니까요?”

“으응? 아, 그렇지.”

무어라 말을 하려던 시린은 창현의 말에 의문을 접어두고 대기실 안으로 들어서는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생각이 맞았는지 헷갈려 고개를 갸웃거린 채.

시린이 안으로 들어가자, 미란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창현의 어깨에 손을 올린다.

“후후, 우리 창현 군도 이제 다 컸구만.”

“크긴요. 누나에게 약간의 협조를 해준 거죠. 게다가 전 잘못한 게 없어요. 평소보다 힘이 남아돌아서 최선을 다한 것뿐이거든요.”

“정말 다 컸어. 이거 최종 보스는 따로 있었구만, 그래.”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부인하는 창현을 보며 미란은 세룬을 바라보며 말하자, 그녀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내막을 알아차리자, 속으로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만약 자신의 생각이 맞다면 미란과 창현은 합동 공격을 펼친 것과 마찬가지였기에.

‘불쌍하네, 앞으로 어떻게 하려고.’

갑자기 2PM이 급 불쌍하게 여겨지는 세룬이었다.

필사적인 부정으로 미란을 떼어놓은 창현은 화장실을 가며 조용히 핸드폰을 열어본다.

그리고 무대 위에 서기 전 왔던 문자를 다시 한 번 확인한다.

[이잉, 매일 나 귀찮게 구는 오빠들이란 말이야. 그나마 같이 무대 위에 서지 않게 돼서 다행이지. 창현이가 언니들에게 충고 좀 잘해줘. 믿을껭♡] 순진한 티파니

[파, 파니 말대로 몇 번 만났지만 그것 뿐이야. 작업하려는 것 같아서 두 번 다시 만나지 않았어. 정말이야? 정말이니까! 응? 히잉, 믿어줄 거지? ㅠ.ㅠ] 얼음공주 제시카

“난 그저 무대에 최선을 다했을 뿐.”

딸칵.

핸드폰을 덮은 창현은 거울을 잠시 바라보다가 무대 위에 서기 위해 복장을 고치기 시작했다.


빠른 속도로 복장을 갈아입은 창현이 무대 위에 서기 위해 걸음을 옮긴다. 이미 무대가 끝나가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스태프들은 창현의 행방을 찾느라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어서 여기로!”

“알겠습니다.”

다급한 스태프들과 달리 창현은 여유로웠다.

무대 위에 서기 위해 준비를 끝마친 창현은 시린을 보며 말한다.

“잘 부탁해요. 첫 무대니까요.”

“물론이야. 네가 잘되어야 우리도 잘 될 수 있으니까.”

“와! 그건 좀 속물적인 말인데요?”

“그래?”

황당한 창현의 말에 시린은 낮게 웃음을 흘렸다.

이것은 긴장감을 없애기 위한 그녀의 간단한 농담이었다.

그녀의 마음을 알아차린 창현도 작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가볼까요.”

“응.”

창현의 <악마의 유혹>이 끝난 뒤 다른 가수 한 명이 노래를 부르고, 이번 앨범의 수록곡인 <Vampire>를 부르는 시린의 모습이 방영되었다.

그리고 이번 차례는 바로 창현과 시린의 것이었다.

<Devil Cry>는 창현 혼자서 부를 수 있는 노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린이 함께 하는 것은 그녀가 있음으로 인하여 노래의 완성도가 더욱 높아질 수 있어서 그렇다.

꺄아아아아아!

무대 위로 올라서자, 자지러지는 여성 관객들의 함성 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 사이, MC가 노래를 소개하기 시작한다.

“달콤한 로맨스에서 강렬한 배신을 당한 남성을 표현합니다. 현의 <Devil Cry>.”

두둥! 둥! 둥!

무겁게 느껴지는 MR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듣는 사람들이 한순간 가슴이 철렁하게 만들 법한 사운드는 몇 번을 들어도 적응하기 힘든 섬뜩함을 담고 있었다.

창현의 뒤에 선 시린이 조용히 손을 뻗는다.

그와 함께 창현의 얼굴을 살며시 매만지는 시린의 손.

그것을 보며 여성 관객들 몇몇이 함성을 질렀지만 그들을 압도하는 MR 때문인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두근! 두근! 두근!

거세게 요동치는 심장 박동 소리. 그와 함께 클로즈업된 시린의 입가에 잔혹한 미소가 걸리기 시작하더니, 유리가 깨지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

와장창!

나긋나긋한 손길로 창현의 얼굴을 매만지던 시린의 손 동작이 커지자, 몸을 비틀거린 창현이 앞으로 몇 걸음 나선다.

차가운 미소를 지은 시린이 그대로 몸을 돌려 무대 뒤로 모습을 감춘다.

쿠웅!

거센 소리와 함께 격렬하게 떨린 창현의 몸이 고정되며 노래를 시작한다.

<Devil Cry>는 한순간 선택의 실수로 판이하게 달라지는 운명을 노래한 노래였다. 선택의 실수로 비롯될 수 있는 미래의 변화와 사랑하던 이에게 배신당하는 노래는 달달한 로맨스를 노래하던 <악마의 유혹>과 판이하게 다른 분위기였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창현의 노래에 더욱 열광했다.

언제나 모순된 것에 끌리는 그들은 달달함이 묻어나오는 노래에서 음울할 정도로 어두운 창현의 노래에 이질감을 느낌과 동시에 걷잡을 수 없이 빨려드는 듯한 착각을 느꼈으니까.

마이크를 잡은 창현의 노래가 본격적으로 이어지기 시작한다.

처음 시린과 함께 보인 퍼포먼스는 선택을 잘못한 악마의 최후를 나타낸 것.

초반부는 오만한 악마가 인간 여자를 농락하기 위한 것이어서, 그것은 마치 <악마의 유혹>을 연상시키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하지만 완벽하게 비슷한 것이 아니었다. <악마의 유혹>에서는 비열한 이미지보다는 좀 더 시크하고 날카로움을 강조했지만 <Devil Cry>에서는 좀 더 비열함이 돋보이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꺄아아아아!

그 모습에 더욱 열광하는 여성 관객들. 흔히 말하는 썩소를 지은 채 모든 것을 굽어보는 듯한 창현의 모습은 전 무대에서 보여주던 로맨틱한 악마가 아닌, 사람이 죽어나가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듯한 냉철함이 느껴지고 있었다.

평소에 볼 수 없었던 그의 모습에 여성 팬들은 더욱 자지러졌고, 열광했다.

여성들의 판타지를 자극하는 창현의 모습은 그것만으로도 열광하게 만드는 그 자체였다.

이번 노래는 전 앨범과 달리 안무가 별로 없었다.

평소 그의 노래보다 조금 더 퍼포먼스가 곁들어지기는 했지만 그것 뿐, 표정과 손짓, 몸동작에서 간간히 노래를 표현할 뿐, 그 이상의 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관객들은 노래에 더욱 몰입할 수 있었다. 요즘 같은 시대에서 노래는 눈으로 함께 보는 것이 되었지만 아직까지 귀로 듣는 면이 더욱 크다.

쿠웅! 쿵!

악마의 선택을 받은 여인, 시린이 무대 뒤에서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모습을 드러낸다.

그녀에게 다가간 창현이 이번에는 반대로 얼굴을 매만진다.

우오오오오!

꺄아아아아!

남자 팬들과 여자 팬들이 그 모습을 보며 열광하기 시작했고, 입가에 미소를 지은 시린 또한 창현을 올려다보며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매만지며 그윽한 눈빛을 보낸다.

아찔한 팬 서비스에 열광하는 팬들.

그 모습을 보며 입가에 미소를 지은 창현의 노래가 이어진다.

악마로서 인간 여자를 농락하기 위해 대상을 정했지만 정작 악마가 모르는 것이 있었다.

자신의 오만함에 먹혀버린 그의 시야는 좁았고, 악마에게 선택 받은 여인은 차츰 그의 존재를 좀 먹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오만한 악마는 점점 초췌하게 변해갔고, 생기를 잃어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모두 여자의 계획.

자신도 모르는 사이 서서히 존재를 잃어가는 악마가 마지막에 여인의 정체를 눈치 챘을 때, 그녀의 붉은 입술은 악마에게 말하고 있었다.

‘Good Bye.'

악마가 농락하기 위해 선택했던 여인은 뱀파이어로, 그녀의 존재를 눈치 채지 못한 악마는 결국 자신의 오만함에 존재를 잃고 사라지게 된다.

뒷모습을 보인 채 시린을 바라보는 창현.

그 모습에 미소를 지은 그녀가 손을 뻗어 목에 두르자, 그의 몸이 그대로 무너져 내린다.

와장창!

아아아아!

뮤직비디오에서 이 장면이 나올 때, 붉게 빛나는 시린의 눈과 새하얗게 질린 창현의 모습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노래가 끝나자, 무대가 어두워지기 시작했고, 창현은 중심을 잡고 일어나 시린에게 작게 속삭인다.

“고마워요. 정말 잘해줬어요.”

“나 없으면 앞으로 이 무대는 서기 힘들 걸?”

“설마요.”

입가에 미소를 짓자, 시린도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은 함께 무대 뒤로 향한다.

여전히 무대에 몰입되어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하는 관객들을 뒤로한 채.


“선배님.”

무대 뒤로 향한 창현과 시린이 본 것은 자리에서 대기하고 있던 2PM이었다.

그들은 믿기지 않는 눈으로 창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격렬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자체적인 퍼포먼스를 펼친 창현은 그들의 퍼포먼스 못지않은 격렬함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떨어지지 않는 가창력은 그들로 하여금 아득한 절망을 느끼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차원이 다른 실력.

그래봤자 그저 잘하는 범주로 판단했지만 눈앞에서 직접 보고, 겪어본 현은 자신들이 감히 뒤쫓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그들은 절실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하지만 개 중에는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 법.

2PM의 야심가 택연은 날카로운 눈으로 창현을 노려보고 있었다.

두 눈으로 직접 보았지만 믿기가 힘들었다.

‘우연일 거야. 저런 퍼포먼스를 펼치고도 저런 가창력이라니, 말도 안 돼. 분명 AR이라거나 다른 속임수를 썼을 거야.’

그렇게 하지 않으면 가슴속에서 치미는 열등감을 지울 수 없었다.

무엇보다 그를 힘들게 한 것은 시린과 함께 보인 다정한 퍼포먼스였다.

여성 그룹 중 탑에 드는 라샤였고, 그 중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것이 시린이었다. 내심 그녀를 노리고, 스캔들까지 가려했던 택연으로서는 연인의 모습을 보이며 퍼포먼스를 펼친 창현이 마음에 들 리 없었다.

애써 억누르고 있지만 날카로운 눈빛은 그대로 창현을 향하고 있었다.

정작 창현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지만.

“무언가 하실 말씀이 있나요?”

“아까 전에 저희가 무례를 저지른 것 같아 사과를 하기 위해 왔습니다.”

자신이 저지른 일이 아니었지만 재범은 고개를 숙이며 시린에게 사과를 했다. 그룹원인 택연이 잘못을 저질렀지만 미리 제지하지 못한 리더인 자신의 잘못도 있었다.

지독한 열등감을 느끼고 있던 택연 또한 재범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는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선배님. 제가 경솔했습니다.”

“반성하고 있다면 그걸로 되었어요. 변변찮은 저희가 선배 노릇을 한다는 것도 웃기고요.”

“죄송합니다.”

진영의 명령을 떠올린 택연은 거듭 고개를 숙이며 시린에게 사과를 하였다.

어떻게든 라샤와 얽혀서 단번에 인지도를 얻어야 했다. 첫 단추를 잘못 꿰어서 이런 상황에 닥쳤지만 최소한 출발점으로 돌아가야 다음 기회를 노릴 수 있었다.

“에휴!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나쁜 사람이 되겠네요. 반성하시는 듯했으니 그걸로 되었어요.”

어차피 화가 난 것은 자신이 아니라, 미란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상당히 암울한 미래를 가지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감사합니다.”

“뭘요.”

‘어차피 미란이한테는 찍혀있는데.’

사과를 받아준 것에 대해 감사의 인사를 표하는 재범에게 괜히 미안함을 느낀 시린이 간단하게 고개를 저으며 걸음을 옮긴다.

뒤에 서 있던 창현은 살짝 고개를 숙이더니, 그대로 지나친다.

“…….”

창현이 지나치는 것을 본 택연은 순간 뚜껑이 열리는 줄 알았다. 지나치는 그의 입가에 비웃음 비슷한 것이 걸려있는 걸 본 것이다.

‘언젠간 반드시…….’

이를 부득 간 택연이 창현을 노려보고 있었다.

미친개에게 찍힌 자신의 안위부터 걱정해야 하는 것을 모른 채.

자고로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는 말이 있다.

아무래도 지금 상황이 그 말과 딱 부합하는 게 아닐까 싶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택연의 미래는 먹구름이 끼고 있었다.

2PM 팬에게는 그저 죄송할 뿐이다.




제89장 Countdown




셋째가 태어나고, 창현은 한동안 번뜩이는 영감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지내야만 했다. 새로운 신곡을 준비하느라 그나마 있던 시간들도 모조리 날려버리게 되면서 곧장 Digital Single <아름다운 탄생>의 발매에 몰두해야 했던 것이다.

“…….”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라샤 멤버들로서는 혀를 내두를 따름이었다.

작곡가들이 순식간에 곡을 만들어서 만드는데 5분이 걸렸느니, 10분이 걸렸느니 하는 말을 들은 적은 있어도 이렇게 순식간에 만든 것을 본 것은 그녀들도 처음이었던 것이다.

뭐든지 사전에 철저한 준비를 바탕으로 만들어나가야 하는데, 창현은 그것도 필요 없다는 듯 그냥 후다닥하더니, 완성해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전혀 날림도 아니었고,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고, 한없이 신비로운 감정을 들게 만들며, 가사가 새로운 탄생에 대한 축복을 담고 있어서 너무나 좋게 들렸다.

‘괴물 같은.’

셋째가 나와서 기뻐해야 할 석규도 어느덧 정신을 차리고 후다닥 디지털 싱글 앨범 발매를 준비 완료한 것을 본 라샤 멤버들은 괴물 부자지간이라 생각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기습 발표된 <아름다운 탄생>.

사전에 별다른 홍보를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창현의 노래는 폭발적인 반응을 샀다.

그도 그럴 것이 음악 프로그램에서 1위 소감을 말했던 것이 화제가 되고 있던 것.

거기에서 창현은 굳이 숨길 것도 없이 막내 동생의 탄생을 암시하는 소감을 언급했다. 예리한 네티즌들은 이것이 무엇인지 단번에 알아차렸고, 조만간 현의 동생이 태어날 것이란 추측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것은 창현과 시린이 함께 섰던 <Vampire>에서도 증명이 되자, 더욱 힘을 얻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몇몇 기자들이 기사를 작성하고, 현이 막내 동생의 탄생 축하를 위해 새로운 곡을 썼다고 하니 관심이 몰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서서히 일어난 바람은 단숨에 온라인을 뒤엎기 시작했고, 굳건하게 지키고 있던 <Deveil Cry>를 하루 동안 제치는 기염을 토하기도 하였다.

4집 앨범에 오면서 약간 스타일이 변했던 현의 노래가 <아름다운 탄생>을 통해 기존의 스타일 유지와 동시에 그가 말하고자 하는 색다른 심경이 담긴 독특함이 동시에 전해지면서 두 마리의 토끼를 잡는데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렇게 음반 차트에서 고공행진을 달리고 있는 창현이었지만 정작 그의 표정은 밝지 못했다.

“하아! 기분이 영 좋지 않아요.”

-모든 게 잘 되고 있던데, 왜 좋지 않다는 거야?

“잘 되는 게 좋긴 한데, 정작 하고 싶은 걸 하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뭔데 그래?

한숨을 푹푹 내쉬는 것이 걱정되었는지 상대방은 들뜬 감정을 애써 억누른 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묻는다.

하지만 그 속에는 흔들리는 그 틈을 파고들겠다는 굳건한 의지가 묻어나오고 있었다.

그 말에 창현이 말한다.

“가, 간호사님들이 제 동생을 못 보게 해요.”

-꺄아! 이번에 새로 탄생한 동생 말이지? 엄청 귀엽겠다. 그런데 왜 못 보게 하는 건데?

“사실은…….”

현의 새로운 동생에 관련된 소식은 인터넷을 달구는 뜨거운 정보 중 하나였다.

오죽하면 새로운 신조어 중 ‘태어나 보니 현의 여동생? 헐, 결혼하긴 글렀군.’ 이란 말이 나올 정도겠는가.

창현의 여동생으로 태어난 것 자체가 사람들에게는 축복이었다.

-뭔데, 말해 봐.

나긋나긋한 어조로 자신에게 말하자, 창현은 머뭇거리다가 이내 포기한 듯 축 늘어진 목소리로 말한다.

“너무 자주 보여 달라 한다고 쫓겨났어요.”

-…그게 끝?

“네, 귀여워서 계속 보고 있었는데, 그게 너무 길어지니까 본업에 충실 하라면서 쫓겨났어요.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충격을 받은 창현의 말투.

여태까지 여성 그 누구에게도 이런 홀대(?)를 받아본 적이 없는 만큼 이번 일은 충격적이었다.

자신은 그저 할 일이 없어서 아침 내내, 그리고 점심을 먹은 뒤 오후 내내 예쁘디 예쁜 여동생을 먼 발치에서 지켜보고자 했을 뿐인데!

그것이 너무 과하다면서 첫날 자신의 열렬한 팬을 자처하던 간호사님에게 결국 쫓겨나기에 이르렀다.

단 한 번도 여성에게 이런 격렬한(?) 튕김을 당해본 적이 없었기에 창현의 충격은 상당했다.

-하아! 뭐야, 난 또 걱정했잖아.

“걱정해주셔야죠! 여동생을 못 보게 되었는데. 후우! 내일부터는 다시 스케줄을 해야 하는데 심란하네요.”

-그런다고 해서 여동생이 어디 가는 게 아니거든요? 그러니 마음 차분하게 먹으시고 하던 일이나 성실하게 해나가세요.

“네, 알았어요. 통화해줘서 고마워요, 유리 누나.”

창현과 통화를 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조신 모드로 들어간 유리였던 것.

전체 문자로 여동생의 탄생에 대해 소식을 뿌린 창현은 많은 사람들과 전화를 나눠야 했고, 그러던 중 타이밍이 맞게 떨어진 것이 바로 유리였다.

다른 멤버들이 모두 시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리만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누구도 모르는 흑막이 있다.

‘후후, 내 옆에는 한 명의 간첩(?)이 있다고.’

창현과 알콩달콩 통화를 하면서 유리는 속으로 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다른 멤버들은 지금도 불통인 창현의 핸드폰에 계속해서 전화를 걸며 애가 탈 뿐이지.

그에 반해 자신은 먼저 정보를 선점하여 그의 심리 상태와 주변 상황을 단숨에 파악할 수 있었다.

현대전은 곧 정보전과도 같은 법. 정보의 질과 양에서 월등히 앞서는 자신이 다른 조무래기들에게 패할 리가 만무하였다.

‘일단은 조신한 모습을 한껏 보여주었으니 무리하지 말자. 여기에서 더 하면 역효과일 수도 있으니까.’

적절하게 치고 빠지는 타이밍을 아는 자만이 무슨 일이든 성공할 수 있는 법.

마음 같아서는 몇 시간 동안 핸드폰을 붙잡고 있지만 유리는 적절한 신비감 조성을 위해 빠지기로 하였다.

이렇게 하면 창현은 자신을 보면서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조신한(?) 누나로 생각할 터. 이제 차츰 고민을 털어놓게 유도만 하면 알아서 끌려 들어올 것이다.

‘지영아! 네가 없어도 난 가능하다고.’

이 사실을 알면 열을 낼 지영이 그저 가소로울 따름이었다.


창현이 <아름다운 탄생>이라는 곡을 기습 발표하면서 덩달아 석규는 엄청나게 바빠지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현의 4집 앨범 4-B를 발매하여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상황에서 새로운 디지털 싱글 앨범을 발매하게 되었으니 잠도 부족할 정도로 일에 매달려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석규는 무박 3일 알콜 레이스를 달릴 수 있을 정도로 거뜬하게 일을 해치우고 있었다. 지선의 나이가 상당히 많아 내내 골머리를 앓게 하던 문제가 해결되었을 뿐만 아니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예쁜 딸을 얻었으니 그것만으로 보약이었다.

밤새도록 서류 처리를 한 석규는 아침이 되고, 낮이 되자, 약속 장소로 움직이기 위해 옷을 챙겨 입기 시작했다.

“역시 딸이 보약이로구만.”

밤새도록 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펄펄한 자신의 모습을 보고는 석규가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혹시 몰라 로드 매니저가 운전하는 차에 탑승한 뒤 유명한 한식집으로 향하는 석규.

목적지에 도달하자, 곧장 자리로 향하자, 한 남자가 석규를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인사를 한다.

“안녕하십니까, 강 사장님.”

“예, 반갑습니다, 최 PD님.”

석규가 인사를 하는 상대는 다름 아닌 엠넷의 최재철 PD였다.

4-A 앨범 발매 이후 한창 상승가도를 달리던 때 다큐멘터리를 촬영하여 엄청난 시청률을 기록하는데 일조한 최 PD가 석규를 만나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석규가 SM엔터테인먼트와 엠넷 사이에 기묘한 줄타기를 하는데 사용되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였다.

최 PD가 자리를 권하자, 맞은편에 앉는 석규.

뒤이어 앉은 그가 석규를 바라보며 입가에 미소를 짓는다.

“소식을 접했습니다. 귀여운 딸이 태어났다면서요?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현 녀석이 갑자기 영감이 떠올랐다고 하면서 곡을 쓰지 뭡니까. 그래서 일이 늘어나서 쉬지도 못하고 처리하던 참입니다. 하하!”

“그렇습니까? 여전히 대단하군요. 현 씨가 우리나라 사람이라는 것은 정말 축복입니다. 제 생각에는 국보로 지정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으니까요.”

“하하하! 국보라, 말씀만으로도 기분이 좋습니다.”

“말뿐인 것이 아닙니다. 진심으로 하는 말입니다. 아직 준비가 되지 않은 곳에서 그렇게 뛰어난 인물이 나왔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국내에 기반을 깔아둔 연예인이라면 최 PD가 이렇게까지 안 했을 것이다. 하지만 현은 국내에 기반을 두었지만 이미 그 기반이 세계로 뻗어나간 인물이다.

한국에 대한 그리움이 없었다면 이렇게 접점을 갖는 것조차 어려울 정도로 큰 스케일의 인물이었던 만큼, 평소 다른 연예인들을 강압적으로 대하던 것과 태도를 다르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생각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아닙니다. 이번에 사장님이 도와주신 덕분에 저희 방송사에서 시청률을 상당히 올릴 수 있었습니다.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한동안 소원하게 보이던 사이를 다시 한 번 공고하게 다졌을 뿐입니다.”

“하하하! 그렇게 생각해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연신 서로를 칭찬하고, 띄워주고 있지만 그 속에는 치밀한 계산이 숨어 있었다.

서로가 서로의 의도를 꿰뚫어 보려는 날카로운 눈빛이 웃음 속에 숨겨져 있었고, 석규는 최 PD의 속내를 비교적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

‘먼저 아쉬운 사람이 입을 열겠지.’

“이번에 다큐멘터리 메이킹 필름을 내주셔서 현의 이미지를 좋게 만드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설마 그걸 공개할 줄 몰랐는데 대단하다는 말이 절로 나오더군요.”

“하하! 이쪽에서는 시청률을 끌어당기기 위해 방법을 썼을 뿐입니다. 사실 현 씨가 좀 더 많이 출연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만…….”

“…….”

은근한 어조로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는 최 PD.

하지만 석규는 그 말에 걸려들지 않은 채 그저 살짝 미소를 머금고 있을 뿐이었다.

‘후우! 역시 너구리로구만. 이런 사람은 상대하기 껄끄러운데.’

완전한 너구리던가, 아니면 완전한 강경 타입이면 요리하기 쉬울 텐데 그때그때 대처가 달라지며 S라인을 그리는 뱀처럼 요리조리 빠져나가니 상대하는 입장에서는 괴로울 수밖에 없었다.

밑반찬이 나오고, 음식이 차례차례 나오자 두 사람의 대화는 잠시 끊길 수밖에 없었다.

“한 잔 하십시오.”

“예. 감사합니다.”

복분자를 권하자, 석규가 잔을 들었고, 진한 보랏빛 복분자가 잔을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꼴꼴꼴.

석규의 잔이 꽉 차자, 이번에는 최 PD에게 복분자를 권한다.

잔이 모두 채워지자, 아무 말도 없이 잔을 부딪친 뒤 깔끔하게 한 잔을 넘긴다.

소주보다 독하지도 않건만 빈속에 들어가다 보니 목구멍이 쌉싸름한 걸 느끼며 최 PD가 표정을 살짝 찌푸리며 잔을 내려놓는다.

“크으! 제가 이렇게 강 사장님을 청하게 된 것은 한 가지 부탁드릴 것이 있어서입니다.”

“말씀 하십시오.”

“이번 2008 MKMF에 현과 라샤를 내보내주시길 바랍니다.”

솔직하게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는 최 PD였다.

그 말을 들은 석규의 눈이 반짝이더니 입 꼬리가 말려올라간다.


최 PD가 이렇게 석규에게 부탁을 하는 것은 당연했다.

작년 2007 MKMF는 그야 말로 성공 그 자체였다.

수상에 관련된 부분에 대해서는 여전히 말이 많았지만 2007 MKMF가 성공이라 평가받을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현의 출연 덕분이었다.

당시 미국을 제패하고 화려하게 국내로 귀환한 그는 온갖 화제를 끌어 모으고 다니는 중이었고, 그러던 중 미국 스타와 함께 펼치는 퍼포먼스는 국내 팬들의 시선을 하나로 끌어 모으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가장 폭발적인 인기를 지니던 때 자리를 빛내주었으니 그로 인해 시청률을 얼마나 재미 보았던가.

2008년에는 그 정도의 폭발력을 잃었지만 드라마와 앨범 활동을 통해 더욱 장기적인 안목으로 바라볼 수 있게 성장하였다.

거기에 컴백 준비를 하고 있는 라샤까지 끌어들인다면 두 말할 필요도 없이 대박이 터질 것이다.

가뜩이나 SM엔터테인먼트와 사이가 틀어지고 있는 상황이었고, 자칫 잘못하면 2008 MKMF에서는 SM엔터테인먼트 소속 가수들이 불참할 수 있는 상황이 초래될 수도 있었다.

만약 그 상황이 되면 엠넷에서는 상당히 곤란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동방신기와 슈퍼주니어로 아시아에 막강한 파워를 자랑하는 SM엔터테인먼트의 불참은 가뜩이나 말이 많은 MKMF의 정통성을 완전히 부인하게 될 확률이 높았다.

그래서 AA엔터테인먼트 소속 가수들을 잡으려고 하는 것이다.

현과 라샤의 네임 파워라면 그것을 충분히 지워낼 수 있을 것이기에.

“소속 가수들이라…….”

“예! 이번 MKMF는 작년도보다 더욱 화려하게 꾸밀 예정입니다. 이 자리를 현과 라샤가 빛내준다면 저희 측과 AA엔터테인먼트 측 모두에게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하하! 그렇습니까?”

“…….”

웃음을 짓고 있지만 최 PD는 석규의 미소가 반갑지가 않았다.

닳고 닳은 만큼 저 웃음이 자신에게 유쾌하게 다가올 것이 아니란 것을 느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조용히 물 한 컵을 마신 석규가 말한다.

“일단 그 부분에 대해서는 당장 답을 드리기가 힘들 듯하군요.”

“가능하시다는 이야기입니까?”

답을 내리기 힘들다는 것은 이 자리를 피하기 위한 성격이 강한 말이었기에 최 PD는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기 시작했다.

반드시 붙잡겠다는 의지가 전달되고 있었다.

아무 말도 없이 석규가 다시 물 한 모금을 마시자, 최 PD가 말한다.

“현과 라샤의 참석은 MKMF의 정통성을 더욱 살려주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양측에 이득이 되었으면 되었지, 손해는 아닐 것입니다.”

‘손해라…….’

순간 석규는 비웃음이 흘러나올 뻔한 것을 참을 수 있었다.

분명 최 PD의 말대로 손해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익의 분배 방식이 틀렸다. 이쪽은 이득을 거의 얻지 못하는데 반해 저쪽이 얻는 이익은 상상을 초월할 지경이었으니까.

얄팍한 술수를 부리려는 것이 그대로 눈에 보였기에 석규도 순순히 나오지 않았다.

“그러고 싶지만, 현재 라샤는 컴백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중이고, MKMF가 열리게 되면 현은 아마 국내에 없을 듯 싶군요.”

“어떻게 조절이 안 되겠습니까?”

이미 그 정도 정보쯤은 접하고 있었고, 그때쯤이면 미국에서 활동하는 현의 기량이 최절정으로 달릴 것이기에 화제를 만들기에도 좋았다.

운이 좋으면 이번에도 미국 여배우를 캐스팅 할 수 있다는 계산도 깔려있고.

그 의도가 고스란히 보였기에 석규는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너무 착하게 살았군.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사람이 한 번 호의를 베풀면 그것에 차츰 익숙해져서 그 호의가 마치 자신의 권리인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석규는 엔터테인먼트 사업을 하면서 가급적이면 서로가 윈윈 할 수 있는 방법을 도출하고자 하였고, 그것은 사업을 하는 상대방에게 좋은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중에는 석규가 베푼 호의가 자신의 권리, 혹은 그를 얕보는 것이 되면서 도리어 칼을 겨누는 사태가 발생하고는 하였다.

지금 상황도 바로 그것과 일맥상통하였다.

엠넷과도 같은 거대 기업이 자신만의 이익을 바라보고 상대방의 이익을 전혀 고려하지 않다니.

이것이 바로 대기업의 자신감이라는 것인가.

‘너무 신사적이긴 했지. 그래도 어처구니가 없군.’

월드 스타인 현과 아시아 스타 라샤를 붙잡기 위해 파격적인 카드를 내밀어도 모자랄 판에 자원 봉사 한 번 나와달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다니.

기분이 팍 가라앉은 석규가 조용히 최 PD를 바라보며 말한다.

“음, 최 PD님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미국에서 현이 공연을 하기 위해 움직이면 최소 몇 명의 관객들이 오는지 알고 계십니까?”

“…….”

“빌보드 차트 1위를 하게 되면서 현의 공연에 5만에서 10만 사이의 관객이 모입니다. 그리고 동양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곳은 10만 명이 넘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얼마의 수익이 나올 것이라 생각합니까?”

“그, 그건…….”

5만, 10만이라니.

아득한 숫자에 최 PD는 말이 나오지 않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그 사이 석규의 일침은 계속해서 가해지고 있었다.

“현이 미국에서 2~3일 내에 그런 공연을 한 번씩 합니다. 그런데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면? 당연히 스케줄을 바꾼 것에 대한 손해배상을 해야 하고, 적어도 일주일 정도의 스케줄 조정이 필요합니다. 여기에서 현이 벌어들이는 금액이 어느 정도나 될 거라 보십니까?”

“…….”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는 최 PD였다.

머리가 나쁜 인물이 아니었기에 그는 석규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자신들이 거저 끌어들이려던 현의 레벨이 이러하다, 하고 어필하려는 것이다.

5만에서 10만에 달하는 관객들이 모여들면 수익은 어느 정도일까?

대충 계산을 때려보아도 감히 자신이 언급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야 말로 상대도 안 된다는 뜻이었다.

“작년 MKMF를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말 그대로 스케줄이 맞았던 것. 그리고 엠넷의 간절한 오퍼 요청이 있었기에 자국의 시상식을 빛내주기 위해 참석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작년의 호의를 기억하고 올해에도 그러길 바란다면 상당히 난감하군요.”

“…죄송합니다.”

조용하지만 석규의 말 하나하나에는 날카로운 가시가 돋아나 있었다.

결국 최 PD가 할 수 있는 것은 석규에게 사과를 하는 것뿐이었다.

“나쁜 사이가 될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저희 측이 그쪽에 출연한다는 것은 기존의 스케줄을 비워둔 채 움직여야 한다는 뜻. 사업하는 입장에서 그 손해를 보장받을 메리트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라샤 또한 중국 프로모션 무대가 있고요. 그곳도 최소 2만 명에서 3만 명 정도가 모일 예정입니다.”

“…….”

완전히 할 말을 잃어버린 최 PD였다.

다큐멘터리로 이야기를 나눌 때 AA엔터테인먼트 사장이 약간 무른 면이 있는 것 같아서 자신이 주도권을 쥐고 휘두른 다음 당근을 주어 꼬드기려고 했는데 자신이 단단히 착각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단순한 능구렁이가 아닌, 주변 상황을 자유자재로 조율할 수 있는 용이었다.

주변의 장애물들을 눈치 볼 것 없이 종횡무진 적들을 상대할 수 있는 용.

“만약 현과 라샤를 MKMF로 청하고 싶다면 좀 더 좋은 자리를 마련하도록 하겠습니다. 충분히 이야기를 나눠본 뒤 연락을 주시기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석규에게 완전히 휘말린 최 PD는 그저 그가 말하는 대로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창현아, 이번에 열리는 MKMF에 참가할 생각이 있느냐?”

“2008 MKMF요? 스케줄이 되지 않을 텐데요? 그때면 미국에서 활동할 때잖아요.”

“그렇긴 하지. 그런데 네 생각은 어떤지 궁금해서 말이다. 작년에는 MKMF에서 재미 좀 보지 않았더냐?”

“재, 재미라뇨.”

게슴츠레하게 변하는 석규의 눈에 창현이 당황한다. 작년 MKMF에서 세실리아와 함께 키스 퍼포먼스를 언급하고 있는 걸 알았기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남들은 안했다는 걸 알지만 직접 한 것도 있었기에.

괜히 말려들면 자신만 손해였기에 창현은 내색하지 않은 채 자기 페이스를 유지한다.

“스케줄이 맞지 않으면 갈 수 없죠. 가고 싶어도요.”

“그렇겠지? 네 말이 맞다.”

굳이 가지 않아도 될 자리.

창현이 딱 적절하게 정리를 해준 셈이다.

웃음을 지은 석규가 고개를 끄덕끄덕 한다.

“그런데 미국에 가면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움직일 텐데, 마음의 준비는 어떠냐?”

“굳이 마음의 준비를 언급할 이유까지야 없죠. 한 번 해봤던 거고. 다시 하는 건데 굳이 그걸 준비할 이유는 없으니까요. 그저 최선을 다할 뿐이지요.”

“그래? 맞는 말이다. 어쨌든 네 바람대로 국내에 머무르면서 미국에 활동하는 형태로 굳혀나가는 상황이니 만큼 잘 해낼 거라 믿는다. 미국 스케줄을 염두에 두고 충분히 쉬어두도록 해.”

“충분히 쉬고야 있죠. 막내 보러 가는데 간호사분들이 잘 보여주질 않네요.”

“네가 하루 종일 보고 있으려 하니 당연하지. 그런 거 말고 스케줄이 끝나면 여자 친구나 좀 만나고 그러도록 해라."

황당한 표정을 지은 창현이 석규를 바라본다.

“여자 친구요? 제가 여자 친구 없는 거 알면서 그러시네.”

“그래? 근데 만들고자 하면 얼마든지 만들 수 있지 않나?”

“글쎄요…….”

만들어보지 않아서 그것을 장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왠지 아니라고 하면 자신이 패배자가 된 것 같아서 쉽게 말할 수가 없는 창현이었다.

“어쨌든 각 방송국에 하나씩 해주었군. 마지막이니 그것도 잘 하도록 하고.”

“알겠어요.”


-내일 스케줄을 하나 하게 되면 당분간 할 것은 음악 프로그램과 인터뷰 촬영 등 밖에 남지가 않는단다.

“그런가요?”

반짝이는 여인의 눈. 방금 전까지 흐릿하던 것과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그래, 이건 하나의 기회이기도 하지. 미국으로 떠나기 며칠 전 새로운 추억을 만들게 되면 어떨까? 아마 외로운 미국 생활에서 더욱 기억에 남겠지. 이것만으로도 상당한 효과를 발휘하게 될 게다.

“정말… 그러네요. 감사드려요.”

엄청나게 유익한 정보였다. 여기에 최신 업데이트 되는 것처럼 동선까지 제공 받으니, 정보전에 가장 앞설 수 있었다.

-하하! 이 정도 가지고 뭘 그러느냐, 오히려 내가 미안할 따름이지. 훌륭한 조건들을 모두 갖춰놓고 그것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맹탕 아들을 두어서 속을 썩이고 있으니까.

“그래도, 그것 덕분에 제가 이렇게 기회를 얻은 거잖아요? 그 부분이 답답할 때도 있지만 오히려 감사할 때도 있어요.”

자각하지 못한 채 페로몬을 뿌리고 다니지만 한 명의 승자가 모든 것을 독식할 수 있는 상황이다. 이보다 더 매력적인 조건은 없다.

-하기야, 만약 그 녀석이 그런 분야로 눈을 떴다면 못 말릴 정도가 되었을 수도 있겠지. 남자라면 열 여자 마다하지 않는 면을 가지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것도 초반에 잘 휘어잡으면 된다. 그 부분은 네가 잘 알아서 할 거라 믿는다.

“네, 믿어주세요.”

-그래, 그럼 건투를 빌도록 하마, 새아가.

딸칵.

그 말을 끝으로 통화를 끝낸 여인은 잠시 핸드폰을 바라보다가 입 꼬리를 말아 올린다.

그녀는 소녀시대의 막내 서주현 양이었다.


요즘 들어 스케줄이 상당히 느슨해졌다.

앨범에 대한 최종 결과가 나오지 않고 있는 상황이어서 연습 시간 또한 전보다 상당 부분 줄어든 상황이었고, 새로 촬영하고 있는 프로그램을 제외하면 다른 스케줄은 거의 전무한 상황이었다.

‘일단…….’

든든한 지원군이 준 정보에 주현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비록 오해로 인해 비롯된 신임이었지만 석규의 이러한 행동은 자신에게 절대적 우위를 심어줄 것임이 분명했다.

‘수연 언니.’

원래 창현이 집으로 데려온 상대는 자신이 아닌 수연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주현의 눈이 한순간 날카롭게 변했다.

생각할 때마다 그것은 그녀의 머리를 지끈거리게 만들었다.

도대체 집으로 데려와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것을 생각할 때마다 주현은 마음 속을 가득 채워나가는 질투심을 다스리느라 진땀을 흘려야만 했다.

당장 수연에게 달려가서 어떻게 된 영문이냐 따지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그것을 참고 있는 것은, 이 오해가 장기화 될수록 자신에게 유리하게 작용한다는 것을 알기에 침묵하고 있는 것이다.

“두고 봐. 승자는 내가 될 테니까.”

날카롭게 치뜬 눈을 하던 주현이 핸드폰을 열고는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전화를 걸고 있는 대상은 다름 아닌 창현이었다.

♩♪♬

벨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건너편에서 창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주현 누나?

“응, 창현아. 지금 잠깐 통화해도 돼?”

-네, 바쁘지 않으니까 가능해요.

당연히 바쁘지 않을 것이다.

방금 전 석규와 통화를 하면서 창현의 스케줄에 대해 확인을 해놓은 상황이었다.

신뢰할 수 있는 정보란 생각이 들자, 미소를 지은 주현이 활기찬 목소리로 말한다.

“응, 내가 전화한 건 다른 게 아니라, 이번에 동생이 태어났잖아.”

-동생이요? 그럼요. 태어난 지 며칠 되지 않았는데 어찌나 예쁘던지, 확 깨물어주고 싶을 정도라니까요.

“그래? 정말 귀엽겠네.”

입가에 더욱 짙어지는 미소.

석규가 해준 말이 모두 사실로 확인되고 있는 순간이었다.

셋째가 태어나고, 가장 예뻐하는 것은 아빠인 석규도, 엄마인 지선도 아닌, 오빠인 창현이었다.

스케줄이 없을 때면 병원으로 달려와 아기를 감상한다고 하여, 간호사들이 그를 쫓아내는 해프닝까지 발생할 정도라 한다.

-정말 귀여워요. 보면 아주 깜빡 죽을 걸요?

주현이 의도한 것이 곧바로 나왔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주현의 눈에 빛이 번뜩이더니 바로 낚아챈다.

“으응, 그래서 그런데, 나도 창현이 동생 한 번 보러 가면 안 될까?”

-아기를요?

“응, 너무 귀엽다고 하니 어느 정도일지 궁금해서. 한 번 보고 싶은데, 정말 귀여운지 눈으로 확인하고 싶기도 하고…….”

은근한 어조로 부탁하는 주현이었다. 이것은 그녀가 짧은 시간에 나름대로 머리를 굴려 짜낸 계획이었다. 번뜩이는 계획 같은 것을 세우지는 못하지만 창현에 대해 잘 파악하고 있었기에 그에 맞는 계획을 세우는 게 가능했다.

-괜찮겠어요? 스케줄이 있잖아요.

‘좋았어!’

이쯤 되면 반쯤 승낙이었기에 주현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스케줄이라면 괜찮아. 드문드문 있거든. 그래서 한 번 보러 가고 싶은 건데, 안 될까?”

-그러면 안 될 거 없죠. 시간이 언제쯤 되는데요?

“응, 스케줄이…….”

재빨리 파악해놓은 스케줄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주현. 그리고 빠른 속도로 창현과 만날 시간을 잡아나가기 시작했다.

현재 출연하고 있는 프로그램은 하나 밖에 없었기에 시간이 넉넉한 상황이었다.

창현 또한 굵직한 촬영 하나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자잘한 것이어서 시간에 크게 구애를 받고 있지 않은 상황.

며칠 뒤가 아닌, 바로 내일 약속을 잡을 수 있었다.

약속 시간까지 정하자, 주현은 입가에 진한 미소를 지으며 좋아한다.

“내일, 좋아, 내일이야.”


“어서 와요. 오느라 고생 좀 했죠?”

“응? 아니야, 오히려 네가 나 때문에 고생한 거 같은 걸.”

“하하! 아니에요. 우리 귀염둥이를 보러 온다는데 이 정도쯤은 기본이죠.”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젓는 창현. 그 모습을 보면서 주현도 입가에 미소를 짓는다.

마스크를 하고, 모자까지 쓰고 있어서 불편했지만 이렇게 둘이서 만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녀에게 있어 감지덕지였다.

“그런데 여기 괜찮은 걸까?”

“괜찮아요. 다니는 사람이 별로 없거든요. 게다가 아는 누나라고 하면 되니까 조심하기만 하면 될 거예요.”

“으응.”

아기를 보러온다는 핑계로 만남을 가졌지만 자칫 잘못해서 스캔들이 날 수도 있는 노릇이었기에 주현은 불안함을 감추지 못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위층으로 올라가는 두 사람.

둘이 향한 곳은 지선의 병실이었다.

개인실에 머물고 있는 지선은 품에 아기를 안고 있다가 안으로 들어서는 창현을 보면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렇게 답답한 복장을 하고 있니?”

“아! 오늘 막내 보고 싶다고 하신 분이 온다고 했잖아요. 그 분을 데리러 오려고 이렇게 한 거예요. 누나, 인사하세요.”

“으, 으응! 아, 안녕하세요, 소녀시대의 막내 서주현이라고 합니다.”

아기만 보는 것이라 생각하던 주현은 갑작스러운 시어머니(?)와의 만남에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모자와 마스크를 벗고는 인사를 하였다.

그 인사에 놀란 표정을 짓던 지선이 창현을 바라보자, 그가 말한다.

“주현 누나는 제 학교 선배거든요.”

“어머, 그러니? 어서 와요. 창현이 엄마에요.”

“네,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시어머니(?) 앞이었기에 주현은 잔뜩 긴장했다. 시아버지(?)를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데 성공했지만 시어머니는 아직 미지수였다. 팍팍 밀어준다는 석규의 말이 있었지만 시어머니의 반대에 부딪치게 되면 자신의 앞날에 먹구름이 낄 것이 분명할 터.

긴장이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기회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여기에서 점수를 팍팍 따놓은 자신의 앞길은 그야 말로 탄탄대로 그 자체가 될 것이다.

“아기가 보고 싶다고 그랬죠?”

“네! 창현이가 너무 귀엽다고 해서 한 번 꼭 보고 싶어서 이렇게 실례를 무릅 쓰고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평소 아기 보는 걸 좋아했고요.”

“너무 긴장하지 않으셔도 되요. 괜히 그렇게 하시니 제가 불편할 정도에요.”

“네? 아, 죄, 죄송합니다.”

군기가 잡힌 군인처럼 힘이 실리고, 절도 있는 동작을 보이던 주현은 지선의 말에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는 얼굴을 붉힌다.

그 모습을 보며 지선은 입가에 미소를 짓더니, 품안에 안고 있던 아기를 잘 볼 수 있게 내민다.

그대로 아기를 받아든 창현이 주현을 향해 몸을 돌린 뒤 보여준다.

“자, 보세요.”

“와… 귀엽다.”

아기를 보는 순간 주현은 절로 나오는 감탄을 참을 수 없었다.

동글동글한 얼굴에 꼭 감은 눈을 보면서 흘러나오는 감탄사를 흘러나올 수 없었다.

창현이 말했던 것처럼 깨물어주고 싶은 귀여움이랄까.

유전자는 어디로 가지 않았는지 창현이 아기라면 저런 느낌이 나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니 더욱 귀엽게 느껴졌다.

“그렇죠? 저만 그런 게 아니라니까요.”

동생이 칭찬을 받자, 창현의 입가에 의기양양한 미소가 걸린다.

고개를 끄덕이며 아기를 바라보는데 여념이 없던 주현이 지선에게 묻는다.

“아기 이름이 뭔지 알 수 있을까요?”

“강아현, 아현이라고 한단다.”

“아현… 예쁜 이름이네요.”

“제 이름이 끝이 현이라서 아예 현으로 맞춘다고 하더라고요. 그것 때문에 지영이가 이름을 지현으로 바꾸겠다고 얼마나 보채던지, 하하!”

창현이 부연 설명을 덧붙여주자, 주현이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창현을 바라보자, 입가에 미소를 지은 그가 아기를 주현에게 건네준다.

“조심하셔야 해요.”

“응.”

아기를 안아든 주현은 넋을 잃은 듯 바라보기 시작했다.

귀여워도 너무 귀여워서 당장 깨물어주고 싶은 이 나쁜 마음을 억누르느라 애를 써야만 했다.

만약 자신과 창현이 나중에 애를 낳으면 이렇게 귀엽겠지?

‘난 몰라!’

퐁!

망상이 폭발한 주현의 얼굴은 홍당무처럼 새빨갛게 변해버렸다.

상상만 해도 즐겁고, 신이 나는 망상이 아닐 수 없다.

그 모습을 보며 걱정된 창현이 그녀에게 다가가며 묻는다.

“누나, 더워요?”

“아, 아냐!”

으에에엥!

당황한 나머지 목소리가 높아지자, 그 소리에 깨버린 아기가 울음을 터뜨렸다.

“어떡해!”

아기를 깨우게 된 주현은 울상을 지으며 지선을 힐끗 바라보았다.

괜찮다는 듯 미소를 짓고 있지만, 아무래도 점수를 깎인 것 같았다.

하필이면 그때 망상이 폭발해버리다니.

‘망했어.’

첫 인상을 최악으로 심어버렸다는 생각이 주현은 울고 싶었다.


부아아앙!

지선에게 좋은 이미지를 심어주는데 실패했지만 주현의 기분은 그럭저럭 풀렸다.

그도 그럴 것이 돌아갈 시간이 되자, 창현이 그녀를 태워주겠다고 했기 때문. 아직 미성년자인 만큼 차가 있을 리도 없는데, 어떻게 태워주나 싶던 주현은 분홍색 스쿠터가 모습을 드러내자 자신도 모르게 할 말을 잃고 그것을 바라보고 있어야만 했다.

그러다가 이내 창현의 뒤에 탑승하여 합법(?)적으로 그의 허리에 양손을 두르고 바짝 밀착한 채 숙소로 향하기 시작했다.

‘손해는 아니었어.’

아기를 보면서 단 둘이 알콩달콩한 분위기를 연출하는데 실패했지만 이렇게 단 둘이서 돌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여겼다.

눈에 띄는 스쿠터라서 걱정했지만 헬멧을 쓰고, 마스크까지 쓰니, 사람들은 그저 사이좋은 커플이 나란히 스쿠터를 타고 가는 것 정도로 생각하고 지나쳤다.

주현으로서는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오는 순간이었다.

“누나가 사는 동에 내려주는 건 좀 그렇죠?”

“응, 옆 동에 내려줘.”

그럼 옥상으로 올라가 옆 동으로 옮기고, 무사히 숙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가능했다.

“알았어요.”

아기가 있는 병원이 멀지 않은 곳에 떨어져 있기에, 주현으로서는 금방 끝나지 않았으면 하는 시간이 순식간에 끝나버렸고,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서 옆 동에 주현을 내려주었다.

스쿠터에서 내린 주현이 창현을 바라보며 말한다.

“고마워. 보답으로 다음에 내가 한 번 식사 대접할게.”

“그 정도까지 안 해도 되는데.”

“안 그러면 내가 불편해서 그래. 조만간 연락할게.”

“네? 누나가 어떻게 알고…….”

창현이 뭐라 말하려 했지만 주현은 손을 흔들어보이고는 그대로 안에 들어갔다. 그의 스케줄에 대해서는 이미 석규를 통해 파악하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자신의 스케줄이었다. 그리고 이미 자신의 스케줄이 맞춰 데이트 날짜까지 설정해놓은 상태.

자연스럽게 밑밥을 뿌려놓았으니 이제 회수하는 일만 남은 셈이다.

“흐흐흥.”

콧노래가 절로 흘러나오며 걸음을 옮긴 주현은 옥상으로 향한 뒤, 옆 동으로 이동하고는 곧장 엘리베이터에 탑승하여 숙소가 위치한 층으로 내려온다.

“다녀왔습니다.”

숙소 문을 연 주현은 현 심리를 반영해주듯 밝은 어조로 인사를 하며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안으로 들어선 주현은 순간 멈칫했다.

거실로 향한 그녀를 반긴 것은 날카로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태연이었다.

“어서 와, 우리 막내. 아주 즐거웠지?”

“네, 네?”

날카로운 기세를 풀풀 풍기는 태연의 모습에 주현이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다음에 이어진 말은 그녀의 가슴을 쿵! 떨어지게 만들었다.

“왜 즐겁지 않겠어, 창현이랑 만나고 왔는데.”

“…….”

하얗게 질려버리는 주현의 안색이었다.


“즐거웠어? 왜 말이 없어, 막내야.”

하얗게 질려버린 주현을 향해 미소 지으며 묻는 태연. 하지만 그녀의 눈썹은 꿈틀거리고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어본 것이다. 그런데 주현의 반응이 심상치 않자, 태연은 아무 말도 없이 조용히 핸드폰을 들어 보인다.

그러자 주현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문자 내용.

[주현이가 창현이랑 만남을 가지고 있음] 158

보낸 자의 번호를 바꾼 듯했지만 그 내용은 창현과 주현의 만남 소식을 알리고 있었다.

부르르.

자신과 창현의 만남을 들킨 것 때문인지 가볍게 몸을 떠는 주현.

“…….”

“사실이로군.”

침묵하는 주현을 보며 태연은 방금 전 도착한 문자 내용이 사실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콧김을 내뿜었다.

주현의 전매특허였던 콧김이지만 지금만큼은 완벽한 태연의 것.

날카롭게 치뜬 눈과 격렬하게 뿜어지는 콧김은 주현을 더욱 의기소침하게 만들었다.

“스캔들이 날 수 있었던 거 알지?”

“…죄송해요.”

빈틈을 노리는 태연의 말에 주현은 그저 고개를 숙이며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연은 날카로운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스캔들을 언급하며 주현을 혼냈지만 실상은 속으로 부러움의 감정을 간신히 억누르고 있는 중이었던 것이다.

자신 또한 먼저 달려가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누르고 있는 중인데 먼저 선수를 치려고 하다니!

한 대 콱 쥐어박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누르고 있는 태연이었다.

하지만 아침에 밖으로 나간 주현이 낮에 들어온 만큼 별다른 일이 없었다는 것을 뜻하고 있기에 여기서 더 추궁하기가 어려웠다.

인상을 찌푸린 채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태연이 주현에게 말한다.

“다음에 조심하도록 하고. 한 번 더 그러면 용서하지 않을 거니까 주의하도록 해. 알겠어?”

“네, 고마워요, 언니.”

이 정도로 넘어가게 된 것을 천만다행이라 생각하며 주현은 고개를 깊게 숙인 뒤 서둘러 방으로 향한다.

주현이 사라진 방향을 쫓던 태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한숨을 푹 내쉰다.

“후! 주현이까지 적으로 돌리면 안 되지.”

근래 들어 기묘한 권력의 움직임을 느꼈기에 태연은 조금이나마 몸을 사리기로 하였다.


한편, 태연과 주현이 이야기하던 것을 은밀히 지켜보는 두 쌍의 시선이 있었다.

“생각보다 일이 크게 벌어지지 않았는데?”

“그러게…….”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자, 상황을 주시하던 여인 중 한 사람인 효연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는다.

“그럼 어쩌려고?”

“그래도 지금 일로 인해 주현이가 흔들렸을 거야. 잘 자극하면 넘어올 것 같아.”

짧은 시간 생각을 한 끝에 결론을 도출한 여인은 수연이었다.

태연에게 창현과 주현이 만남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린 존재는 다름 아닌 효연이었다.

베란다에서 조용히 밖을 바라보던 효연은 덜덜거리며 다가오는 스쿠터를 발견할 수 있었는데, 그것을 보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눈에 확 들어오는 분홍색 스쿠터는 예전에 자신이 한 번 얻어 탄 적이 있던 창현의 스쿠터였던 것이다.

화들짝 놀란 효연은 서둘러 망원경을 동원하여 분홍색 스쿠터에 탄 사람을 살펴보기 시작했고, 그것은 아침 일찍 나간 주현이라는 것을 알아낼 수 있었다.

옆에서 멍하니 서 있던 수연은 효연의 말에 정신이 확 깼고, 곧이어 분노에 타오르다가 머리를 강타하는 계획이 떠오르자 효연에게 합작해줄 것을 제안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태연을 이용하여 주현을 공략하자는 것.

그 제안을 수락한 효연은 번호를 바꿔 태연에게 정보를 누설한 것이다.

그리고 그 정보를 문 태연은 주현을 추궁한 것이고.

비록 생각한 것보다 강도가 약했지만 이 정도로도 충분히 원하는 것을 얻어낼 수 있을 것이라.

“설득할 수 있겠어?”

“물론이야. 주현이는 창현이를 만난 것이 그저 순수한 의도에서잖아? 으득! 순수한 의도로 만난 걸 가지고 혼났으니 기분이 좋지 않을 거야. 그 부분을 공략하자는 거지. 으드득!”

순수한 의도라는 단어를 강조하지만 수연의 입에서는 이가 부서지는 섬뜩한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효연은 그저 어색한 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어쨌든! 지금이 기회야.”

“알았어. 나도 탱구를 타도하는데 도움이 되고 싶으니까.”

“그 마음이면 충분해. 그럼 가자.”

효연의 말에 미소를 지은 수연이 고갯짓을 하자,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이 주현의 방으로 향하기 시작한다.

그냥 가기 심심했는지, 효연은 거실에서 멍하니 앉아있는 태연을 보고는 말을 건다.

“거기서 왜 멍 때리고 있냐, 멍탱아?”

“내가 왜 멍탱이냐! 어라? 효연이 너 왜 싴순이랑 같이 있는 거야?”

“…….”

가만히 걸음을 옮기던 수연은 이젠 숙소에서도 당당하게 자신을 싴순이라 칭하는 태연의 말에 잠시 걸음을 멈춘 뒤 날카로운 눈으로 태연을 바라본다.

하지만 그 눈빛에 오히려 흐릿하던 태연의 눈이 강렬하게 변하더니, 말한다.

“그 눈빛은 뭐야, 한 판 해보자는 건가?”

“…됐어. 말을 말아야지.”

상대하면 지금 상황에서 자신만 털릴 뿐이란 걸 알았기에 수연은 훗날 이 모든 수모를 갚아주겠다 다짐하며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태연이 너도 작작해. 싴순이가 뭐냐.”

“알았어. 지금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아서 그런 거야. 미안.”

효연의 말에 태연은 곧바로 사과를 하였다. 수연이 고개를 끄덕여 받아주는 듯하자, 태연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자신의 방으로 돌아간다.

똑똑똑.

“들어오세요.”

주현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수연과 효연이 안으로 들어간다.

책상에 앉아서 컴퓨터를 하던 주현은 수연과 효연의 등장에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묻는다.

“무슨 일이세요, 언니들?”

“응? 주현이 너한테 할 이야기가 있어서.”

“제게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영문을 몰라 하는 주현의 모습에 수연은 입가를 말아 올리며 말한다.

“응, 주현이 네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말씀하세요.”

의자에서 내려와 똑바로 자세를 잡고 이야기를 들을 자세를 취하자, 수연도 맞은편에 앉으며 입을 연다.

“방금 전에 태연이가 목소리를 높이던데 무슨 일이 있었어?”

“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부인하는 주현의 모습은 궁금증을 더욱 증폭시킨다는 걸 스스로 알고 있을까? 아마 모르기에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이겠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수연으로서는 주현의 반응에 날카로운 눈빛을 뿌릴 뻔했지만 지금 자신은 그녀를 낚기 위해 움직였다는 것을 떠올리고는 애써 표정을 수습한 채 말한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소녀시대는 아홉 명이잖아? 힘든 일이 있어도 서로를 감싸주거나 위로를 해줘야지, 목소리를 높이고 혼내는 일은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 내 말이 틀리다고 생각하니?”

“아뇨, 언니 말씀이 맞아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주현을 보면서 수연의 입가에 맺힌 미소는 짙어진다.

아무래도 자신에게는 숨겨진 낚시꾼의 재능이 있는 듯했다. 순규부터 시작하여 효연을 낚고, 이번에는 주현까지 낚을 상황이었으니까. 게다가 지략 캐릭터인 지략 캐릭터인 미영과 유리와도 한 번 자웅을 겨루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근래 들어 자신감이 팽배하고 있었다.

“내 말이 맞지? 무슨 일이던 간에 태연이가 좀 심했다고 생각해.”

차근차근 물밑작업을 하는 수연.

그 말에 순진무구(?)한 주현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입질에 서서히 딸려올 뿐이었다.

어느 정도 뜸을 들였다고 생각한 수연은 본격적으로 주현을 낚아올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말인데, 요즘 태연이가 너무 횡포를 부리고 있는 것 같아.”

“네…….”

“그래서 판도를 바꿀까 해. 태연이가 강압적이어서 불만을 품은 멤버들이 있거든. 그래서 힘을 합치려고 하는데, 주현이 넌 어떠니?”

“하지만…….”

수연의 제안에 쉽사리 응하지 않는 주현.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정권을 잡고 있는 태연이 강압적이지만 전대 권력자인 수연은 이보다 심했으면 심했지, 덜하지 않았다.

주현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알아차린 수연이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물론 내가 전에 한 행동들이 신뢰할 수 없는 것들이란 걸 인정해. 하지만 정말 반성을 많이 했고, 이제 정권을 장악하더라도 나 혼자만이 아닌, 나와 함께 하는 멤버들과 나누고 싶어. 오랫동안 날 봐온 만큼 이번 한 번만 믿어줄 수 없을까?”

“…….”

보아온 시간에 호소하자, 주현의 눈이 거세게 흔들린다.

그녀를 바라보는 수연의 눈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조용히 자리에 앉아있던 주현은 고민에 잠겨들다가 이내, 어렵게 고개를 끄덕인다.

“알겠어요. 그게 언니들에게 좋은 선택이라면… 대신 태연 언니는 어떻게 되는 거죠?”

순진무구(?)한 막내는 마음껏 횡포를 일삼는 독재자 탱구까지 걱정해주는 세심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살며시 미소를 지은 수연이 주현의 걱정을 덜어준다.

“태연이? 걱정하지 마. 여태까지 해온 것들에 대한 대가만 치르면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어.”

‘다만 날 싴순이로 만든 만큼 하찮탱구로서 행복을 찾아야겠지만.’

차마 속내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정말요?”

“물론이지.”

그 말에 설득이 된 주현은 밝은 표정을 지었고, 수연도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수연의 손을 주현이 맞잡았다는 것은, 주현이 완벽하게 그녀의 편으로 돌아섰다는 것을 뜻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밖으로 나가 창현과 이야기를 나누게 된 주현.

예상치 못한 시어머니(?)의 등장으로 인해 훨씬 빨리 귀가했어야 했지만 결코 나쁜 시간이 아니었다.

다만 태연의 반응이 생각보다 미지근하여 계획에 살짝 차질이 생길 뻔했다.

“잘 부탁해, 주현아.”

“네, 언니.”

흐뭇한 미소를 짓는 수연을 향해 주현도 마주 미소를 지어준다.

하지만 그 미소는 한 쪽 입 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간, 언니들이 생각하던 순진무구한 막내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모략가의 미소였다.


“이제 됐어.”

“잘된 거 맞지?”

주현을 설득하는데 성공한 수연과 효연은 다른 방으로 옮겨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상당히 난항을 겪을 것이라 판단되던 주현을 손쉽게 설득하자 수연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다.

그에 비해 효연은 무언가 불안한 표정을 지은 채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그럼 이게 잘된 거지. 여기에서 더 이상 잘될 수 없잖아?”

“그렇긴 한데…….”

말끝을 흐리는 효연은 뭔가 말을 하려다가 멈칫하였다.

그 모습을 보지 못한 채 수연은 지금의 상황을 자축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써니랑 효연이, 막내까지 끌어들였으니까 이제 수영이만 설득하면 돼. 그럼 전체 전력에서도 뒤처지지 않으니까, 날을 잡아서 뒤집으면 돼. 파니랑 유리가 아무리 머리를 써도 상황은 뒤집을 수 없어.’

혼자 끈 떨어진 신세로 싴순이 취급을 받던 것이 어제 같은데 어느덧 태연과 한 번 일전을 불사해볼 만큼 성장하게 되었다.

흡족함을 느끼면서 한편으로는 더욱 경계심을 다진다.

완벽하게 자신의 우위를 점할 때까지 경계심을 끌어 올려야 한다.

“막내를 설득한 건 정말 큰 성과야.”

“그래.”

“혼자서 외출한 것이 괘씸하기는 하지만.”

순간 수연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지만 거기까지였다.

효연의 제보를 받는 순간 수연은 창현에게 문자를 보냈고, 그에게 온 답장에 의하면 다행히도 특별한 일은 없었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것은 주현이 창현의 어머니와 만남을 가졌다는 것이다. 우연찮은 만남이었지만 그 만남으로 인해 자칫 시어머니(?)에게 점수를 따내는 불상사가 발생하면 이것은 엄청난 사태로 번질 수 있었다.

‘아니겠지, 첫 만남으로 그렇게 될 리가 없어.’

스스로를 위로하며 수연은 상황을 합리화시키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자신이 정권을 잡게 되면 찬스는 얼마든지 늘어난다.

그때까지는 이를 꽉 물고 이 좁은 속을 넓은 것처럼 속여야 했다.

“…….”

속으로 칼을 갈고 있는 수연을 바라보며 효연 또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녀 또한 속이 복잡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베란다에서 분홍색 스쿠터를 보고, 그 뒤에 여자가 타고 있는 것을 보는 순간 먹은 것도 없는데 체한 것 마냥 속이 좋지 않았다.

이 감정을 뭐라고 말해야 할까, 창현이 자신에게 태워주었던 분홍색 스쿠터를 다른 사람에게 태워주는 걸 보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속이 부글부글 끓는 걸 느꼈다.

‘질투심이라고?’

막내가 창현을 좋아한다는 것은 예전부터 방관자 입장에서 보아왔으니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뿐만 아니라 다른 멤버들도 그러했으니까. 다만 자신은 그럴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고, 계속해서 그럴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인가 저 모습을 보고 질투심을 불태우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때문에 효연은 이미 맞춰놓은 계획 대로 움직이면서 혼란을 느껴야만 했다.

자꾸만 한 줄기 감정이 그녀를 괴롭게 만들고 있었기에.

“어쨌든 멀지 않았어. 그때까지 최선을 다하자.”

생각에 잠겨있던 효연에게 수연이 말한다.

“알았어. 나도 탱구가 계속해서 정권을 잡고 있는 건 싫으니까.”


“후우!”

한편, 수연과 이야기를 나눈 주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걱정이 앞섰지만 자신의 예상대로 일이 진행되었고, 앞으로의 전망도 나쁘지 않았다.

“일단 일은 해결이 되었으니까…….”

한시름 놓은 주현은 핸드폰을 들고는 조용히 문자를 보내기 시작했다.

물론 그녀가 보내는 사람은 다름 아닌 창현이었다.

[오늘 고마웠어. 아현이 정말 예쁘더라. 병원 잘 도착했어?]

문자 전송 뒤, 잠시 후, 창현의 문자가 도착하였다.

[고마워요. 아현이 정말 귀엽죠? 제가 봐도 그런 거 같아요. 병원 무사히 도착했고, 아현이 돌봐주고 있어요. 누나도 쉬세요. 아침 일찍부터 준비하시느라 고생 많이 한 것 같은데.] 창현이

마음 같아서는 하트를 도배해주고, 다른 이름으로 저장하고 싶지만 언니들이 워낙 무서운 사람들이어서 주현은 가장 무난하게 창현의 이름을 그대로 적어놓고 저장한 상황이었다.

[고생하긴. 오히려 내가 찾아가서 폐만 끼쳤는데.]

[절대 아니에요. 동생 보러 와준다니 오히려 좋았죠.] 창현이

상대방의 부담을 덜어주는 말에 주현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몇 번 문자를 주고받은 뒤, 주현이 슬슬 본심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잠시 통화해도 돼?]

[잠시만요. 지금 아현이 잠들어서 밖으로 나온 뒤에 제가 전화할게요.] 창현이

그 문자를 본 주현은 핸드폰을 꾹 눌러 진동으로 바꿔놓았다.

행여나 벨소리를 듣고 꼬여들 사람들이 있을 수 있기에.

잠시 후, 핸드폰이 부르르 떨리더니 창현의 전화가 온다.

핸드폰을 연 주현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네, 누나. 갑자기 무슨 일로 통화하자는 거예요?

“응, 오늘 내가 너무 폐를 끼친 것 같아서. 그래서 말인데 내가 밥 한 번 사겠다고 한 거 기억해?

-물론이죠.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기회를 잊어버리면 안 되죠.

주현을 바래다 줄 때, 한 번 식사를 대접하겠다고 했기에 창현은 그것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 말에 미소를 지은 주현이 본격적인 작업을 발동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런데, 일주일 후에 시간 돼?”

-일주일 후요? 시간 되죠.

잠시 멈칫한 창현이 대답하자, 주현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이미 시아버지라는 든든한 후견인을 두었기에 주현은 창현의 스케줄을 모조리 꿰고 있었다.

일주일 후는 자신 또한 스케줄이 없는 상황이었다.

이 날이라면 두 사람 모두 아침 일찍 만나서 밤 늦게까지 놀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럼 그때 식사를 한 번 대접하고 싶은데, 내가 맛있는 한식 집을 알고 있거든.”

-그래요? 사실 그 날 아현이 보러 병원에 갈까 했는데…….

“…….”

창현의 말에 급속도로 긴장했다.

조마조마한 속내를 힘겹게 숨기며 주현은 창현의 대답을 기다렸다.

‘설마 매일 보는 아기한테 지지 않겠지? 지지 않을 거야.’

-어머니랑 지영이가 있으니 그 날 하루는 괜찮겠죠? 그 날 만나는 걸로 할게요.

승낙이 떨어지자 주현은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그의 승낙이 떨어진 이상 일은 절반 이상 성사된 것이나 다름없다.

이제 남은 것은 그날 완벽한 계획으로 주워먹기만 하면 된다.

“알았어. 그럼 내가 계획 세운 다음에 문자할게.”

꼬리가 길면 밟힐 수 있기에 주현은 통화를 길게하지 않으려 했다.

-네, 그럼 쉬세요.

“응, 너도.”

그 말과 함께 통화가 끝났고, 주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이제 계획만 세우면 돼.’

하늘이 자신을 돕는다는 생각에 주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로 향했다. 말을 너무 많이 해서 그런지 갑자기 목이 말라왔다.

“……!”

거실로 나온 주현은 순간 몸을 움찔 떨었다.

방문에서 멀지 않은 곳에 두 명의 멤버가 포착된 것이다.

“유리 언니, 지금 뭐하세요?”

방문 바로 앞 현관에 유리가 표정을 찌푸린 채 서 있는 것이 주현의 눈에 들어온 것이다.

도둑이 제 발 저리는 것처럼 주현은 자신도 모르게 뾰족한 목소리로 묻는다.

“뭐라니? 가위 바위 보 져서 군것질거리 사러 가는데?”

“네? 아, 죄송해요.”

“에휴! 가위 바위 보 실력이 왜 이렇게 안 느는 건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유리는 그대로 밖에 나갔다.

그러자 주현의 시선이 이번에는 부엌 쪽에 있는 미영에게 향했다.

유리와 이야기 나누는 것을 본 미영은 주현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언니, 왜 그러세요?”

“응? 아니, 신경이 날카로워 보여서…….”

“아니에요. 깜짝 놀라서 그런 거예요. 그래 보였으면 죄송해요, 언니.”

“아니야. 잘못한 것도 없는데.”

눈웃음을 지으며 말하는 미영을 보며 주현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아무래도 미영과 유리 모두 자신이 한 통화 내용을 모르고 있는 듯했다.

‘들켰으면…….’

두 지략 캐릭터에게 어떤 꼴을 당했을지 상상만 해도 두려웠다.

하지만 주현이 잘 모르고 있는 것이 있었다.

그녀가 가장 염려하던 최악의 시나리오가 두 사람 중 한 사람의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다는 것을.

‘일주일 후? 일주일 후면 미리 애들을 구워삶아 스케줄을 비워놓아야겠네. 막내가 혼자 독주하는 것을 볼 수 없지.’

용의주도하게 일을 치른 주현의 가장 결정적인 실수는 방문을 잠그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날씨가 추워지고 있습니다. 환절기 감기 조심하시고, 옷을 두툼하게 입으셔야 합니다.”

수많은 관객들이 앉아 있고, 중앙에 마련된 무대 위에는 윤도현이 자리에 서서 본격적인 오프닝 멘트를 하고 있었다.

적절하게 관객들의 호응을 끌어내며 그는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사실 공연을 보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흥이 돋아서 곧잘 더워지고는 하는데요. 이번에 모실 분은 굳이 공연을 하지 않더라도 온 국민을 흥겹게 만들어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

도현의 말에 관객들의 얼굴에 순간 의문이 떠올랐다.

공연을 하지 않더라도 자신들을 흥겹게 만들어줄 수 있는 존재라니? 그럼 다른 방법으로 흥겹게 만들어준다는 것인가?

무슨 뜻인지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기에 대다수의 관객들은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그 중 눈치 빠른 몇 명은 눈을 빛내며 혹시나 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눈치 채지 못하는 관객들을 보며 입가에 미소를 지은 도현이 말한다.

“이런, 제가 너무 어렵게 말했나요? 그럼 좀 더 풀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오늘 모신 분은 여러분들이 보는 것만으로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을 수 있는 분입니다. 좀 더 힌트를 드리자면 한국인 최초로 세계 정상에 우뚝 선…….”

꺄아아아!

도현의 말에 여성 관객들이 자지러지게 함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아무리 둔해도 저 정도 이야기가 나오면 오늘 나오는 손님이 누구인지 알아차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열렬한 함성이 장내를 지배해나가자 더 이상 뜸을 들이지 못한 채 도현이 말한다.

“더 이상 시간을 끌기 어렵겠군요. 소개하겠습니다, 오늘 나오게 되는 분은 월드 스타! 현입니다.”

도현의 소개와 함께 무대를 밝히던 조명이 모두 꺼졌다.

그와 함께 숨 막히는 긴장감이 좌중을 지배해나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갑자기 한 줄기 조명이 켜지면서 한쪽을 비춘다.

꺄아아아아아!

와아아아아아!

관객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곳으로 향하기 시작했고, 그곳에 모습을 드러낸 사람들을 보며 함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관객들의 함성이 터져 나오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들이 기다리던 현이 모습을 드러낸 곳이 무대 위가 아니라, 바로 관객석이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곳에 현이 모습을 드러내자, 주변에 있던 여성 관객들은 자지러지며 창현에게 손을 뻗기 시작했다.

입가에 미소를 지은 창현은 자신에게 손을 뻗는 사람들의 손을 맞춰주며 앞으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성큼성큼 앞으로 걸음을 옮기며 관객들과 손을 맞춰주던 창현이 순간 멈칫한다.

일부 관객들이 그의 옷을 잡고 늘어졌던 것이다.

걸음을 멈춘 창현이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한 여성 관객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그의 옷을 잡고 있었다.

그 모습에 미소를 지은 그가 손을 뻗어 머리를 살짝 쓰다듬어주며 말한다.

“움직일 수 있게 좀 놓아주시겠어요?”

“…….”

신기한 현상이었다. 사방이 시끄러운데 부드러우면서 나직한 창현의 목소리가 귓가에 스며드는 듯한 느낌이었다.

옷을 잡고 있던 여성 관객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손에 힘을 풀었다.

감사의 의미로 고개를 살짝 숙인 창현이 그대로 앞으로 향한다.

두둥! 둥!

무대 위에 오르자마자 둔중하게 울려 퍼지는 사운드. 그와 함께 YB가 본격적으로 연주를 하기 시작한다.

그들이 연주하고 있는 창현의 곡은 다름 아닌 현재 폭풍가도를 달리고 있는 <Devil Cry>였다.

묵직한 사운드로 울려 퍼지고 있으니, 이 곡을 자주 듣던 사람들은 익숙하면서 한편으로는 전혀 색다른 기분을 받아야만 했다.

마이크를 든 창현은 곧바로 노래를 열창하기 시작했다.

본래 선택과 배신을 노래하지만 밴드가 곁들어진 그의 노래는 원곡과 달리 강렬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가사도 살짝 바꿔, 암울한 분위기보다는 좀 더 강렬한 의지가 깃든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밴드 노래로 듣자, 그의 무대를 종종 보아왔던 관객들은 자신도 모르게 그의 강렬함에 압도되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처음이었다.

소름 끼치도록 높은 고음을 내지르는 것도 아니고, 강렬한 퍼포먼스를 곁들인 것도 아니다. 그의 전신에서 퍼져 나가는 강렬한 존재감이 장내 전체를 뒤덮는 듯한 느낌. 새로운 그의 모습은 관객들을 매료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쿠웅!

큰 발 구름과 함께 노래가 끝을 맺는다.

손을 들어 밴드 연주를 멈추게 한 창현이 입가에 미소를 짓더니,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며 인사한다.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현입니다.”

짝짝짝!

꺄아아아아!

강렬한 무대에 매료되어 있던 사람들은 박수를 치기 시작했고, 여성들은 새로운 현의 모습에 자지러지는 환호성으로 보답했다.

멀찍이서 무대를 지켜보던 도현은 무대 중앙으로 나오면서 감탄 섞인 어조로 입을 연다.

“새로운 모습의 현 씨를 본 것 같아 감탄이 저절로 나오네요. 여기에 기타까지 치면 완전히 밴드 보컬일 것 같은데요.”

“감사합니다.”

“혹시! 기타 연주하실 줄 아시는지? 예전에 들어보니 기타를 칠 수 있다고 들었던 거 같은데? 왜, 드라마 출연하실 때 실제로 기타를 연주했다고 해서 화제가 되지 않았습니까?”

창현이 드라마에 출연할 때 밴드 보컬 겸 기타리스트로 나왔던 것을 떠올린 도현이 묻자, 창현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기타요? 조금은 칠 줄 알지만…….”

“그럼 여기서 조금 연주를 보여주실 수 있겠습니까? 관객 분들도 한 번 현 씨의 연주를 보고 싶어 하실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도현의 물음에 대답은 없었다.

꺄아아아아! 보여줘!

그저 함성을 지를 뿐.

“하하.”

졸지에 기타를 연주해야 할 입장에 처하게 되자 창현은 어색하게 웃음을 지으면서 도현을 바라본다.

당황 섞인 그의 눈빛에 도현은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자, 보여주시죠.”

꼼짝 없이 당하게 된 창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곧바로 가져오는 기타. 마치 준비했다는 듯 기타를 건네받게 되자, 창현은 황당한 시선으로 도현을 바라보았다.

도현은 싱글벙글 웃으면서 쐐기를 박았다.

“자, 모두 박수 부탁드립니다.”

짝짝짝짝!

빼도 박도 못하게 만드는 도현의 실력에 창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곧장 기타를 튜닝하기 시작했다. 이미 사용하던 거라 그런지 튜닝이 잘 되어 있었고, 마이크 앞으로 다가간 창현은 순간 무언가 생각이 났는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조잡한 실력을 보이게 되어 부끄럽지만 한 번 열심히 쳐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하려는 곡은, 바로 불후의 명곡이죠? <오 필승 코리아>입니다.”

“……!”

창현의 말에 YB 전체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창현은 곧장 연주를 하기 시작했다.

2002년 월드컵 때 온 국민을 하나로 만들었던 노래.

사람의 마음을 절로 들뜨게 만드는 노래가 무대에서 즉흥적으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당황하던 YB 또한 그에 맞춰 연주를 하기 시작했다.

2002년 월드컵의 감동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가 되어 창현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에 화답하듯 창현이 본격적으로 노래를 해나갔다.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그의 노래는 관객들을 하나로 만들어나가기 시작했고, 현란하지 않지만 부드럽게 이어지는 그의 연주는 사람들로 하여금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게 하였다.

<오 필승 코리아> 노래가 끝나자, 창현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감사합니다.”

와아아아아아!

엄청난 함성 소리가 울려 퍼졌고, 창현은 여전히 멍한 표정을 짓는 도현을 향해 악동 같은 미소를 지어주었다.

“하하! 이거 제가 한 방 먹었네요. 이거 내일 기사로 윤도현 가창력 논란 기사가 올라오는 게 아닐까 싶은데요.”

와하하!

재치 있는 도현의 말에 관객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밝은 분위기를 유지시키는데 성공한 도현이 창현에게 시선을 옮기며 말한다.

“어째서 그 곡을 하신 건지?”

“음, 일단 <오 필승 코리아>는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 들은 노래거든요. 이 노래는 당시 월드컵 때 온 국민을 하나로 만들어준 노래잖아요? 그래서 무엇을 할까 하다가 즉흥적으로 떠올라서 하게 되었어요. 게다가 갑자기 기타 연주를 시키셔서 살짝 놀라게 할 의도로 하게 되었습니다.”

“하하! 완전히 당해버렸네요. 설마 현 씨가 그렇게 할 줄이야. 원곡을 부른 입장에서 굉장히 난감해지는 실력을 지니셨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오리지널을 뛰어넘을 수는 없죠.”

한동안 서로가 서로에게 더 잘하느니 하며 옥신각신하는 두 사람.

결국 항복 선언을 한 것은 도현이었다.

“이러다가는 끝이 없을 듯하니 서로가 잘한 것으로 하죠.”

“예. 알겠습니다.”

서로 웃음을 지으며 간단하게 일단락 시킨 뒤, 본격적인 도현의 인터뷰가 시작된다.

“정말 노래를 잘하세요. 올해 나이가 어떻게 되시죠?”

“올해 열일곱 살입니다. 만으로는 열여섯 살이고요.”

“말도 안 되는 나이죠. 이렇게 어린 나이에 세계를 제패한 싱어송라이터로 성장하다니요. 혹시 판타지 소설에서 나오는 것처럼 미래에서 회귀하거나 아카식 레코드 같은 것에 접속하실 수 있는 건 아니죠?”

“하하! 그럴 리가요.”

판타지가 언급되자 순간 뜨끔한 창현이었지만 순식간에 제 안색을 회복한다.

도현이 말한 것처럼 판타지는 아니었지만 무공은 엄연히 판타지 장르에서 무협에 속한 것이었으니까.

“농담입니다. 그만큼 사기적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정말 대단하고요. 열일곱 살이면 한창 공부를 하면서 장래에 대한 꿈을 키워나갈 시기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벌써 현 씨는 장래에 대한 꿈을 이뤄나가고 있네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저도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른 나이에 꿈을 찾게 되었고, 그 꿈을 이뤘으니까요. 아침에 일어나면 제 소원을 들어주신 하느님께 늘 감사를 드립니다.”

“하느님이라면, 종교를 믿으시는 건가요?”

“아뇨, 그런 건 아니고,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그 분께 감사를 드린다는 것이죠.”

“그렇군요.”

여태까지 예능 프로그램 같은 곳에서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았던 이야기였기에 관객들의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도현 또한 흥미로운 눈을 한 채 창현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이렇게 꿈을 이뤄나가고 있는 현 씨도 미래에 대한 계획이 있겠죠? 먼 미래에는 무엇을 하고 싶은지 궁금한데요.”

“일단 먼 미래까지 염두에 둔 적은 없습니다. 왜냐면 제 좌우명이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자는 것이어서요. 한 걸음씩 다가간다면 언젠가 제가 원하는 곳에 도착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제가 바라는 건 먼 미래에도 지금처럼 음악을 하고, 많은 분들께 사랑을 받는 것이겠죠.”

“나이답지 않게 너무 겸손하신데요. 아까 무대 위에 서실 때는 정말 악마다운 모습을 보이셨는데 말이죠.”

“하하하!”

무대 위에 섰을 때 달라지는 모습을 언급하자 창현으로서는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실제 모습과는 전혀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무대 위의 모습이었다. 무대 위에 오르기 전 끊임없이 자신에게 그 모습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최면을 걸고는 했으니까.

창현의 어색한 웃음을 본 도현은 곧바로 화제를 옮겼다.

“그런데 이번 4집 앨범은 A와 B로 나뉘어 있지 않습니까? 이건 왜 나눴는지 솔직히 많이 궁금한데요.”

“4집 앨범에 대해서는 많은 에피소드가 있어요. 일단 4집 앨범에서 그동안 제가 추구하던 스타일에서 조금 벗어난, 좀 더 많은 분들이 좋아할 수 있는 대중적인 스타일을 추구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던 중 두 가지 코드를 잡아낼 수 있었고, 이것을 하나로 조합하는데 실패해서 결국 A와 B로 나누어 하게 되었습니다. 정규 앨범이면 하나로 내야 하는데 두 개로 낸 것은 테마가 각각 달라서 그렇게 되었죠.”

“아, 그렇군요. 제가 듣기로는 A는 사랑에 관련된 것이고, B는 배신에 관련된 것 같은데.”

“네, 맞아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테마가 나뉘더라고요.”

“그 뮤직비디오에서 소녀시대 제시카 씨가 나오지 않았습니까? 당시 뮤직비디오에서 충격적인 금발은 물론, 현 씨와 달달한 로맨스 씬이 있었던 걸로 아는데.”

우우우우!

로맨스라는 말에 여성 관객들이 야유를 터뜨렸다.

갑작스러운 반응에 도현은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하하! 그건 어디까지나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하지만 뮤직비디오에서는 키스신도 있었고…….”

우우우우우!

더욱 거세지는 야유.

당장 잡아먹을 듯한 여성 관객들의 기세에 도현이 땀을 흘리며 한 발자국 물러선다.

“어쨌든, 4-A 앨범은 그야 말로 대박이 터졌던데요. 노래도 노래지만 계단 춤! 그건 아무리 봐도 정말 신기하던 춤이더라고요. 따라하는 사람들도 서서히 나타나고 있지만 3단계까지 구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던데…….”

“사실 좀 어렵긴 하죠. 그 부분에 심혈을 기울였거든요. 많은 분들에게 어필할 수 있으면서 저만의 춤을 갖기 위해 노력을 했으니까요.”

“그렇군요. 그럼 혹시 곡에 관련된 에피소드는 없습니까? 가령 4-A 앨범은 여태까지 방관자적인 입장을 취하던 현 씨의 곡이 본인에 대입된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건 직접 겪어본 것 같은데…….”

직접 곡을 만드는 입장이라 그런지 창현의 변화를 예리하게 알아차리고 있었다.

창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에는 괴로웠지만 이제는 담담하게 말할 수 있는 경험담이었다.

“4집 앨범을 만들 당시 제가 슬럼프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도움을 받게 되었죠.”

“여자입니까?”

“그…….”

기습적인 질문에 순간 말문이 막혀버린 창현.

그 모습을 보며 도현은 물론 관객들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반응을 보니 맞군요?”

대어를 건졌다는 듯 눈을 빛내며 창현에게 묻는 도현.

관객들도 흥미가 가득한 눈으로 창현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4집 앨범은 국내에서만 발매되었지만 여태껏 발매된 앨범들과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엄청난 인기를 얻고 있다.

그 이유는 제3자의 입장에서 노래하던 입장에서 이제는 당사자가 되어 사랑을 노래하니, 정말 자신이 달달한 로맨스를 즐기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된 것이다.

이러한 현의 변화에 많은 팬들이 4집 제작과정에 대해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다. 갑작스레 대중성에 중점을 두고, 사랑을 노래하는 창현에게 어떠한 변화가 있을 것이라 믿으면서.

매섭게 파고드는 도현의 눈빛에 창현은 어색하게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별 수 없네요. 맞습니다.”

“맞답니다. 이거 흥미로운데요?”

우우우우!

흥미가 가득한 도현의 말과 달리 여성 관객들은 야유를 터뜨렸다.

그녀들의 왕자님인 창현이 다른 여성과 얽히는 것 자체가 그녀들 입장에서는 썩 유쾌하지 않았다.

“하하하.”

여성 관객들의 야유에 창현은 그저 웃음을 지을뿐이었다.

이러한 반응이 예상되었기에 언급 자체를 하지 않았던 것인데 어떻게 걸려버리고 말았다.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을까요?”

“음, 별다른 건 없어요. 제가 4집 앨범 제작을 앞두고 흔히 말하는 슬럼프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앨범 제작도 그렇고, 연기에서도 슬럼프를 겪게 되면서 한동안 굉장히 힘이 들었거든요.”

“현 씨도 슬럼프를 겪는군요? 평소 모습을 보면 절대 슬럼프를 겪을 것 같지 않은데 말입니다.”

“많은 분들이 그렇게 말씀해주시지만 사실 굉장히 예민한 타입이라서요. 드라마를 촬영할 때도 슬럼프를 맞이하게 되어 감독님이 휴가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기분 전환 겸 경주에 놀러갔다가 언론에 알려지게 되었죠.”

“아아, 그게 그거로군요.”

드라마가 한창 인기몰이를 할 당시 현이 경주에 모습을 드러냈다고 하면서 감독과의 불화에 대해서 한동안 언급이 있던 적이 있었다.

40%가 넘는 엄청난 시청률을 기록하였기에 많은 사람들은 그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요? 여성분을 경주에서 만난 것입니까?”

도현의 초점은 어디까지나 창현에게 도움을 주었던 여성에게 맞춰져 있었다.

“아뇨, 그런 건 아니고, 제게 인생의 선배로서 조언을 해주셨어요. 그 이야기를 듣고 저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고, 제 발목을 붙잡던 슬럼프에서 벗어날 수 있었죠. 그것뿐이에요. 더 이상 특별한 것도 없고요.”

어깨를 으쓱하며 다른 것이 없다고 쐐기를 박자, 도현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신다.

무릎팍 도사 같이 좀 더 추궁하면서 파고들면 나올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창현이 그 이상은 허용하지 않는다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었다.

“아쉽지만 그렇다니 어쩔 수 없죠. 그럼 한 가지만 더 물어보겠습니다. 현 씨의 이번 4집 앨범에서 사랑을 노래한 것은 본인 경험입니까?”

“…….”

예리한 도현의 질문에 창현은 침묵한다.

관객들도 흥미로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태까지 수많은 인터뷰에서 말했듯이, 그는 단 한 번도 이성과 교제를 한 적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사랑을 해보지 않았다고 확신하기에는 이르다.

모든 여성들의 로망이라 칭해지는 현도 사랑을 할 수 있으니까.

“음, 뭐라고 말을 해야 할까요. 아직 제 감정에 대해서 확실하게 모르겠네요. 사랑을 노래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제가 사랑하는 코드를 노래했을 뿐, 그것이 다른 분들이 말하는 사랑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조금 우스울지 모르지만 아직 전 가족들과 하는 사랑과 이성과 하는 사랑이 무엇인지 분간을 제대로 못하고 있거든요.”

“그럼 <악마의 유혹>은……?”

“제가 생각하는 사랑이 이런 게 아닐까 생각하며 쓰게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꿈꾸는 달콤한 로맨스죠. 제 상상력도 들어가 있고요.”

연애를 해보지 않은 사람이 오히려 아름다운 연애 이야기를 쓸 수 있는 것처럼, 아직까지 사랑을 해보지 않은 창현이었기에 많은 사람들에게 꿈을 꾸게 만드는 사랑 이야기를 쓸 수 있었던 것이다.

무슨 말인지 알아차린 듯 도현이 고개를 끄덕인다.

“환상이 들어간 사랑 이야기는 아름다운 법이죠. 개인적으로 현 씨가 사랑을 해보고 썼던 이야기면 좋았으리라 생각했는데.”

“하하! 그러고 싶어도 아직 사랑이 무엇인지 몰라서요. 제 나이가 어려서 그런 걸까요?”

창현을 괴롭히는 고민 중 하나가 이것이다.

자신이 나이가 어려서 사랑을 깨닫지 못하는 것일까?

그렇게 생각했지만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사람들도 사랑을 하고, 이성교제를 하지 않던가. 결국 이것은 나이 탓이라기보다는 자신의 문제라는 이야기가 된다.

그 고민이 무엇인지 간파한 도현이 조언을 해준다.

“어리다고 하기에는 어린 나이부터 사회생활을 했으니 그건 아닐 것 같네요. 제가 보기에 현 씨는 직접 사랑을 느끼는 것보다는 다른 사람의 사랑을 받으면서 사랑이 무엇인지 깨닫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조언 감사드립니다. 오늘 정말 좋은 말을 듣고 가게 되네요.”

사랑을 직접 느끼지 못하면 받아야 한다는 것.

어려울지 몰라도 하나의 해답으로 제시 받는 만큼 방안을 마련한 듯한 기분이었다.

“그럼 미국 활동 후 한 번 더 출연해주시면 됩니다. 하하!”

“하하하! 알겠습니다.”

몇 마디 충고로 창현의 출연권을 따낸 도현이었다.

애석한 점이 있다면 창현이 미국 활동을 끝내고 돌아왔을 땐 윤도현의 러브레터가 종방한다는 사실이었지만.

“오늘 이렇게 현 씨를 초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나눠볼 수 있었습니다. 현 씨가 관객 여러분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노래가 있다면서요?”

“예, 오늘 이렇게 좋은 자리를 갖게 된 만큼 그동안 제가 많이 들려드리지 못했던 노래를 부르고 싶네요. 제가 가수가 되기 전 가장 많은 고민을 담고, 제 판타지를 담았던 노래, <Go&Stop>을 부르고자 합니다.”

“섬뜩할 정도로 높은 고음으로 대한민국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던 곡이죠. 기대하도록 하겠습니다.”

와아아아아!

도현이 물러나고, 창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노래를 부를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방금 전 말했던 것처럼 창현의 <Go&Stop>은 그의 고민이 녹아든 곡이었다.

당시 곡이 발매될 때, 소름이 끼칠 정도로 높은 고음이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뒤흔들었지만, 가사 자체도 상당히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곡이었다.

사춘기 청소년의 고민을 담아내고 있으며, 진로에 대한 걱정, 학교에서, 집에서 불안해하는 청소년들의 스트레스를 날려 버려주는 <Go&Stop>은 누적 판매 100만 장을 넘어선 앨범이었다.

그리고 현의 팬들이 가장 좋아하는 곡이기도 하였다.

지금 이곳에서 이 곡을 부르는 것은 그때 그 시절 느꼈던 감정을 잊지 말고 초심을 유지하고자 하는 창현의 바람이 담겨 있었다.

높게 올라가는 매끄러운 고음은 여전히 사람들의 가슴을 뒤흔드는 마력을 담고 있었다.

“…….”

가슴을 시원하게 만들어주는 창현의 목소리에 관객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여전히 시원함을 지닌 그의 목소리는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맑게 만들어주고 있었고, 마치 곡이 처음으로 인기를 얻던 2005년 후반대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얼굴 없는 가수로 수많은 억측을 낳던 그 가수는, 어느덧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 세계적인 스타로서 입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와아아아아!

노래가 끝나고 터져 나오는 함성 소리에 창현은 미소를 지었다.

함께 호흡하고 함께 즐기는 듯한 이 기분.

이것 때문에 자신이 무대 위에 서는 게 아닐까 한다.

이 순간만큼은 고민을 잊을 수 있으니까.

“감사합니다.”

환호성으로 답해주는 관객들을 향해 창현은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멋진 무대였어.”

“땡큐.”

촬영을 끝낸 창현은 세희의 짧은 감상평에 인사를 한 뒤 곧장 대기실로 향했다.

그리고 옷을 갈아입다가 순간 시선을 고정하고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거, 옷이 뜯어졌네.”

모습을 드러내면서 사람들이 의상을 잡아끄는 듯한 느낌이 들었는데 기어코 옷이 뜯겨 나간 듯 싶었다.

제법 비싼 의상이었기에 난감한 표정을 지은 창현이 옷을 갈아입고는 세희에게 말한다.

“의상이 뜯어졌는데 괜찮아요?”

“의상이? 뭐 괜찮지 않을까? 어차피 국내 활동을 조만간 접을 예정이니까. 미국 가면 미국에서 새로운 의상을 맞추고 활동해야지.”

“이거 엄청 비싼 옷인데 누나가 말하니 왠지 싸구려 옷을 뜯긴 것 같네.”

“싸구려는 무슨! 그게 얼마나 비싼 건데! 아깝지만 여태까지 잘 입었으니까 잘 보관해둬. 나중에 경매로 판매한 다음에 불우이웃을 도울 예정이거든.”

“예이.”

그렇게 활용할 수도 있겠구나 싶어서 창현은 곱게 의상을 접어둔다.

얼마를 받을지 모르지만 상태가 좋을수록 경매 가격은 오를 테니까.

옷을 모두 갈아입은 창현이 밖으로 나갈 준비를 마치자, 세희와 함께 주차장으로 향하기 시작한다.

“어디로 갈 예정이야? 집? 녹음실?”

세희의 말에 우뚝 멈춰 선 창현이 무슨 말을 하냐는 듯 세희를 바라본다.

“무슨 말이에요. 당연히 병원이죠.”

“병원? 너 또…….”

“아현이 보러 가야죠! 어서 가요.”

그러면서 빠르게 걸음을 옮기는 창현이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세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기어코 한마디 한다.

“에휴! 저 팔불출.”

창현의 극진한 여동생 사랑에 두 손 두 발 다 들어버린 세희였다.




제90장 撥長食之 爾馬奚馳




소녀시대의 아침은 활기찼다.

가장 먼저 일어난 주현이 오늘도 멤버들을 깨우기 위해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 주현에게 있어 요즘 가장 호감의 대상인 존재가 있었으니, 바로 태연이었다.

“막내, 일어났어?”

“오늘도 일찍 일어나셨네요.”

“물론이지. 이 즐거움을 남에게 줄 수 없잖니. 후후!”

원래 일찍 일어나는 편이었지만 주현의 손길이 없으면 쉽게 눈을 뜨지 못하던 태연이었다. 하지만 근래 들어 그녀는 주현보다 일찍 일어날 정도로 부지런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다른 멤버들을 깨우기 위해 움직이려던 주현이 멈칫하더니 태연에게 묻는다.

“오늘도 하시게요?”

“물론이지, 내 하루의 즐거움인 걸. 후흐흐흐!”

음흉한 웃음을 지은 태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리고 뚜둑! 뚜둑! 하며 본격적으로 몸을 풀기 시작하는 태연. 몸을 다 푼 뒤 입가에 함박 미소를 지은 채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그녀가 걸음을 옮긴 곳은 다름 아닌 수연이 잠들어 있는 방이었다.

한때 폭군으로 소녀시대를 아우르던 수연의 방은 절대 금지 중 한 곳이었지만 정권이 태연에게 넘어온 뒤 그녀는 철저하게 싴순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잠자는 숲속의 공주처럼 잠에 푹 빠져든 수연을 보면서 태연의 입 꼬리가 더욱 말려 올라간다.

“오늘도 나의 러브러브 어택을 받아보랑께.”

그 말과 함께 허공 위로 붕 뜬 태연의 몸이 그대로 수연을 덮쳐나가기 시작한다.

꿈속에서 창현을 만나 데이트를 즐기고 있던 수연은 둔중한 느낌과 함께 엄청난 충격이 전신에 퍼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0.1톤에 달하는 엄청난 충격에 숨이 절로 막혀왔다.

“헉!”

“흐흐, 우리 수연이 일어나랑께. 안 일어나면 더 판타스틱한 일이 일어날 거여.”

음흉한 어조로 속삭이는 태연의 목소리.

며칠 동안 이런 태연의 공격에 당한 수연은 잠이 확 깨는 것을 느꼈다.

처음에는 과감하게 무시하고 수면 시도를 했지만 뒤이어 덮쳐오는 것은 간지럼 폭풍이었다. 이미 몇 번 당했기에 수연은 더 이상 당하지 않고자 일어났다 말하려 하였다.

“나 이… 웁!”

일어나려던 수연의 입에는 공교롭게도 태연의 팔뚝이 올라왔다.

그 덕분에 수연의 목소리는 옆으로 새고 있었고, 그것을 못들었다는 듯, 태연은 한 쪽 입 꼬리만 말아올리며 말한다.

“일어나지 못하네. 괜찮아, 나의 사랑이 담긴 손길이면 잠이 확 일어날 거야.”

“웁웁웁!”

이미 일어났다고 거세게 항의하는 수연이었지만 입이 틀어 막힌 뒤라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크흐흐!”

음흉한 웃음과 함께 꼬물거리는 태연의 손이 수연의 몸을 누비기 시작했다.

싴순이의 하루 시작은 태연의 스트레스 해소로 열리고는 한다.


“오늘도 즐거운 하루 시작이네! 오늘도 잘해보자고!”

하루의 스트레스를 말끔히 털어버린 태연은 밝은 표정으로 멤버들을 독려하였다.

그에 반해 태연의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전락하게 된 수연의 표정은 처참했다.

사지를 포박당한 채 간지럼에 당하다 보니 잠을 자도 잔 것 같지 않은 모습이 나타나고 있었다.

“언니, 괜찮아요?”

“내가 저 탱구를 언젠가는…….”

걱정스러운 어조로 주현이 묻자, 수연은 한이 묻어나오는 싸늘한 목소리로 태연을 노려보았다.

“응? 무슨 할 말이라도 있어?”

예민한 태연은 수연의 눈길을 느끼고는 미소를 지은 채 묻는다.

그 모습에 기겁한 수연이 고개를 젓는다.

타도 태연을 외치고 있지만 싴순이 만들기 프로젝트가 어느 정도 진전을 보이고 있는 듯했다.

‘너무 유치해요, 언니들.’

한두 살 먹은 어린 애들도 아니고 주도권을 갖기 위해 옥신각신 다투는 모습이라니. 주현의 입장에서는 어린 애들이 옥신각신 다투는 것 같았다.

‘난 상관 없지.’

누가 주도권을 쥐든 간에 상관하지 않는다. 어차피 자신은 며칠 후면 창현과 알콩달콩한 데이트를 할 예정이니까.

이렇게 다투는 동안 자신은 실리를 챙기면 되니 오히려 이 다툼이 길어지길 바라고 있었다.

강력한 경쟁자의 등장은 주현으로서도 바라지 않았기에 빠른 속도로 진도를 밟고 결판을 내고 싶었다.

‘그리고 승부를 보는 거야. 헤…….’

핑크빛 미래를 상상하니 자연스럽게 미소가 얼굴에 번져 나갔다.

“막내, 무슨 생각을 그렇게 깊게 해?”

“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화들짝 놀란 주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을 건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니 미영이었다.

그녀의 얼굴을 보는 순간 주현은 가슴이 쿵! 떨어지는 듯한 충격을 느껴야만 했다.

사람들에게는 띨파니라고 놀림을 받는 그녀였지만 주현은 미영이 얼마나 무서운 두뇌의 소유자인지 잘 알고 있다. 평소 어리버리한 모습이 모두 연기라 느껴질 정도로 철두철미한 미영의 모습은 지금 주현의 입장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대상 1호였다.

“그래? 재미있는 상상을 하는 것 같아서.”

무서운 두뇌를 지닌 그녀는 예리한 눈썰미까지 지니고 있었다.

주현은 침착하게 마음을 가라앉히며 대응한다.

“며칠 뒤에 휴식을 취하니까요. 편하게 쉴 걸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나 봐요.”

“흐응, 그래?”

“네!”

묘한 미소를 짓는 미영의 모습에 뜨끔한 주현이었지만 애써 표정을 수습한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저 표정으로 인해 자신이 실수를 하였고, 그로 인해 미영은 모든 것을 알아차리고는 하였다.

‘침착하자, 주현아.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없잖아.’

주현의 의도가 먹혔음일까? 묘한 미소를 짓던 미영은 더 이상 주현이 뜨끔할 법한 말을 하지 않았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가, 미영은 스케줄 표를 확인하더니 말한다.

“그러고 보니 나도 며칠 뒤에 휴식이네? 주현아, 우리 오랜만에 쇼핑이나 갈까?”

“언제요?”

“사흘 뒤에 시간이 완전 텅텅 비더라고. 어때?”

‘사흘 뒤라면… 창현이랑 만나기로 한 날이잖아.’

하필이면 그 날도 미영이 쉬게 되다니. 재앙도 이런 재앙이 없었다.

이 위기를 슬기롭게 넘겨야 한다는 생각에 주현은 재빨리 두뇌를 회전시키며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한다.

“아, 그 날 제가 친구들이랑 만나기로 해서요. 먼저 선약이 잡혀있는 터라…….”

“그래? 아쉽네. 오랜만에 막내랑 데이트 하나 싶었는데.”

“죄송해요. 다음에 같이 쇼핑해요.”

“알았어.”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순순히 포기하는 미영을 보면서 주현은 눈을 빛내고는 쐐기를 박았다. 웬일인지 미영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서 주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렇게 스케줄 장소에 도착하자 주현은 간신히 미영의 사정거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행사 무대를 뛴 뒤 다음 장소로 이동하기 위해 차를 탔다.

‘미영 언니 옆은 안 돼!’

괜히 옆에 타고 있다가 자신도 모르게 정보를 흘릴 수 있다고 판단했기에 주현은 미영을 피해서 가장 늦게 탔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유리 옆에 앉게 되었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노래를 흥얼거리던 유리는 주현을 보고는 눈을 빛내며 반겨준다.

“우리 막내! 왜 이렇게 늦은 거야?”

“네? 아, 잠시 화장실 좀 다녀왔어요.”

차마 미영을 피하기 위해 늦게 들어왔다 할 수 없었기에 주현은 미리 준비해놓은 변명을 한다.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 유리가 무언가 생각이 난 듯한 표정으로 말한다.

“막내야, 사흘 뒤에 뭐해?”

“네? 사, 사흘 뒤요?”

순간 가슴이 철렁하는 주현. 사흘 뒤 일을 묻는 것만으로도 묘한 불안함이 엄습하고 있었다.

“응! 사흘 뒤에 쉬잖아. 같이 쇼핑이나 하러 가는 게 어때?”

아까 전에 미영이 했던 말과 똑같은 내용이었다.

설마 미영과 짜고 자신을 떠보기라도 하는 건가?

순간 그런 의심이 불쑥 들었지만 주현은 애써 담담한 척하며 말한다.

“죄송해요, 그 날 미리 선약이 잡혀 있어서요.”

“선약이라고? 그 날 막내가 좋아할 만한 곳으로 가려고 했는데.”

“죄송해요.”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주현의 거절에 유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보며 주현은 속으로 식은땀을 흘리며 사과를 할 뿐이었다.

그렇게 행사 스케줄을 무사히 마치고, 어둑해질 무렵, 소녀들을 태운 벤은 숙소로 돌아가고 있었다.

‘후! 조금만 더 버티면 돼.’

미영과 유리의 공세를 간신히 버텨냈기에 주현은 앞으로 사흘만 버티면 된다고 생각하며 의지를 다진다. 여기서 조금만 더 정신을 바짝 차리고 버티면 이상향이 펼쳐질 것이다.

숙소에 도착하고 소녀들이 하나둘씩 차에 내릴 무렵, 매니저가 주현을 불렀다.

“아참, 서현아, 너한테 말하지 않은 게 있는데.”

“네? 저요?”

주현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매니저가 입을 연다.

“서현이 너 사흘 뒤에 스케줄이 없지?”

“네, 없어요.”

오늘따라 왜 이렇게 사흘 뒤 스케줄을 묻는 사람이 많을까.

그 날부터 며칠 동안 스케줄이 없었기에 주현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하지만 이어진 매니저의 말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것이었다.

“미안한데 사흘 뒤에 긴급 스케줄이 잡혔거든. 스케줄이 하나도 없는 날이니 할 수 있겠지?”

“…….”

와장창!

주현은 순간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충격을 받아야만 했다.


“어, 어째서요?”

충격으로 인해 비틀거릴 뻔한 몸을 간신히 지탱하며 묻는다.

“하하! 사실은 일주일 전에 이야기가 왔는데 전달하는 것을 깜빡했거든. 게다가 연휴로 쉬니까 하루 정도 비울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미루다가 오늘에서야 이야기 하게 되었네.”

“…….”

멋쩍게 웃음을 짓는 매니저를 보면서 주현은 속으로 치미는 분노를 간신히 억눌러야만 했다.

지금 웃으면서 이야기를 할 상황이 아니지 않은가!

밖으로 분출 되려는 분노를 힘겹게 억누르며 주현이 말한다.

“언제 하는 건데요?”

“음, 아마 저녁 전에는 끝날 거다. 점심쯤에 시작해서 다섯 시간 정도?”

“그럼 저녁 전에 끝나겠네요.”

“그래.”

시간도 중간에 떡하니 걸쳐져 있었다. 만약 이 스케줄을 하게 되면 이날 있을 창현과의 데이트를 취소해야 할 것임이 분명했다.

‘미룰까? 그것도 힘들어.’

사흘 후 창현과 만나기로 한 날은 그가 미국에 가기 전 자신과 유일하게 쉬는 시간이 겹치는 순간이었다. 다른 날로 미루게 되면 제대로 된 데이트를 할 수 없다.

그렇다고 그 날 스케줄을 무시하기도 힘들었다.

“저 그 날 약속이 있는데…….”

“약속? 미안한데 그 약속을 미루면 안 될까?”

“하지만 중요한 약속이에요.”

자신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약속이었다.

강경한 주현의 모습에 매니저는 골치 아프다는 듯 머리를 긁적인다.

“이거 정말 빼놓을 수 없는 건데, 어떻게 안 되겠니?”

“다른 언니들이 대신 해줄 수 없을까요?”

누군가 스케줄에 펑크가 나면 다른 멤버가 대신하고는 한다.

주현이 노린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사흘 후 있을 약속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림으로써, 다른 멤버가 대신 스케줄을 하게끔 하는 것. 물론 공짜로 해달라는 것이 아닌, 아주 큰 대가를 지불할 용의가 있었다.

그만큼 자신이 얻는 것이 큰 날이었으니까.

“언니들 중 한 사람이 대신하면 되지 않을까요?”

“다른 애들이? 미안하지만 그것도 안될 것 같다.”

“어째서요?”

멤버들이 스케줄에 나가지 못할 때 종종 있던 일이지 않은가.

자신 또한 아픈 태연을 대신하여 스케줄에 나간 적이 있었고, 언니들간에는 부득이한 사정이 있을 때 서로 스케줄을 대신하여 해주고는 하였다.

그런데 왜?

불신 섞인 주현의 시선이 매니저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주현에게 말한다.

“그게… 네가 가야 할 스케줄이 걸 그룹 막내들이 모여서 촬영하는 거거든.”

“막내라면…….”

“미안하다, 서현아.”

“…….”

창백하게 변해가는 주현의 얼굴. 걸 그룹 중 막내라면 자신 밖에 없었다. 소녀시대 내에서는 윤아도 막내 취급을 받지만 시청자들이 생각하는 막내는 다름 아닌 자신이었으니까.

이건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자리이기도 하였다.

와장창!

다시 한 번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받은 주현이었다.

신은 그녀를 버렸다.


스케줄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에 주현은 완전히 풀이 죽어버렸다.

축 처진 그녀를 보며 소녀들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함께 그룹 활동을 하는 막내가 세상 다 살은 듯한 모습으로 축 처져 있으니, 그녀들로서는 걱정이 앞설 수밖에 없었다.

“막내! 괜찮아?”

“태연 언니…….”

“무슨 일 있어? 언니한테 말해봐. 다 들어줄 테니까.”

멤버들 내에서 제대로 된 리더 취급을 받지 못하지만 소녀들 사이에서 고민 상담을 도맡아 하는 태연이었기에 멤버들이 그녀를 적잖게 의지하고는 한다.

자신에게 모든 고민을 털어놓으라 말하는 태연을 보며 주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괜찮긴! 지금 얼굴이 반쪽이 되어 있는데! 무슨 고민이야. 언니가 능력은 없지만 이야기를 듣고 답을 주도록 할게.”

“말만으로도 고마워요, 언니.”

차마 태연에게 말을 할 수 없는 주현이었다.

창현과 데이트를 가야 하는데 스케줄이 생겨서 못가게 되었다고 어찌 말할 수 있겠는가?

아마 말하면 즉시 대신 가겠다고 말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게다가 이런 앙큼한 계획을 세운 대가로 참혹한 간지럼 세례를 받을 수도 있었고.

“말하기 힘든 고민인가 봐?”

태연은 끙끙거리면서 말을 하지 못하는 주현의 모습에 피치 못할 사정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네…….”

‘말했다가는 죽을 수도 있어요.’

“그럼 어쩔 수 없지. 막내가 힘들어하니까 언니들 마음이 편치 않아. 고민을 털어놓을 생각이 들면 언제든지 찾도록 하고. 좋으나 싫으나 우린 팀이잖아. 알겠지?”

“네, 고마워요.”

독재자의 모습을 보이던 태연이 모처럼 멤버들을 걱정하는 따뜻한 리더로 돌아오자 주현은 감격한 얼굴로 감사의 인사를 건넨다.

그 인사에 태연은 빙그레 미소를 지은 뒤 손을 올려 주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한다.

“우쭈쭈쭈! 우리 막내가 아직 고민이 많구나. 사춘기가 이제 찾아온 건가?”

“사춘기라뇨… 그리고 이렇게 머리 만지면 헝클어져요.”

“어허! 언니가 모처럼 머리를 쓰다듬어주는데 그렇게 말하기야?”

안 그래도 요즘 폭풍성장을 하고 있어서 점점 키 차이가 나고 있었기에 태연은 이 기회를 틈타 주현의 머리를 무차별적으로 쓰다듬고 있었다.

결코 키 차이가 나는 것에 대한 시샘의 표출이 아니었다.

“머리 헝클어지는데… 히잉.”

울상을 짓는 주현이었지만 머리를 쓰다듬는 태연의 손을 치우지 않았다.

자신을 걱정해주는 언니들의 모습에 마음이 따스해지는 것을 느꼈으니까.

요즘 들어 자신이 너무 날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래도 언니들에게 말할 수는 없어.’

공은 공이고, 사는 사였다.

언니들에게 고마웠지만 창현과 있을 데이트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오는 미안함과 고민으로 인해 주현은 계속해서 끙끙 앓아야만 했다.


‘어떻게 해야 하지?’

방으로 들어온 주현의 고민은 깊어만 가고 있었다.

아무리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도 뚜렷한 답은 나오지 않고 있었다.

사흘 후 있는 스케줄은 도저히 뺄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걸 그룹 막내들만 출연한다고 이미 못이 박혀 있는 만큼 다른 멤버로 교체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반드시 스케줄을 해야 한다면 창현과의 데이트를 포기해야 한다.

하지만 데이트를 포기하게 되면 자신의 이미지가 뭐가 되겠는가? 모처럼 힘들게 약속을 잡아놓았는데 자신의 스케줄 때문에 만나지 못한다? 이것은 창현에게 이미지를 망가뜨리기로 작정한 것과 마찬가지의 행동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히잉…….”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를 만난 것 마냥 주현은 끙끙 앓아야만 했다.

이럴 때 미영이나 유리에게 조언을 구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융통성이 부족한 자신과 달리 자유자재로 계략을 세우는 그녀들이라면 분명 빠져나갈 구멍을 마련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은 그런 융통성이 없으니 그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채 끙끙 앓는 것이고.

똑똑똑.

“막내, 안에 있어?”

“네? 누구세요?”

“나야, 파니. 들어가도 될까?”

생각하기 무섭게 노크를 하는 미영의 모습에 주현은 불안한 마음이 불쑥 들었지만 그 속내를 숨긴 채 수락한다.

“미영 언니? 네, 들어오세요.”

주현의 허락이 떨어지자 방문을 연 미영이 안으로 들어온다. 숙소로 돌아온 뒤 가장 먼저 화장실로 들어가 씻은 미영은 뽀송뽀송한 얼굴을 한 채 분홍색 파자마를 입고 있었다.

“갑자기 무슨 일이세요, 언니?”

켕기는 것이 있는 주현으로서는 미영의 방문이 불편했다. 띨파니라 불리며 사람의 경계심을 풀어놓는 친화력을 지닌 그녀와의 대화는 단서를 흘리게끔 유도하는 듯했다.

입가에 미소를 지은 미영이 주현에게 말한다.

“태연이가 말하더라고, 고민이 있는 것 같다고.”

“고민이요? 아…….”

태연에게 이야기를 전해들은 것이라 생각한 주현이 고개를 끄덕인다.

“무슨 고민인지 말해줄 수 있어?”

“별 거 아닌데…….”

“말하기 힘든 건가 봐?”

“네, 아무래도.”

말하기 힘들다기보다는 말을 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당장 이걸 말하면 숙소에 피바람이 볼 수도 있으니까.

그런 주현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미영이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고민을 하면 우리들에게 좀 나눠줬으면 좋겠어. 왜 한국 속담에 그런 거 있잖아?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을 나누면 반이 된다고. 태연이가 막내의 고민이 깊은 것 같다고 많이 걱정하더라고.”

“아…….”

진지하게 말하는 미영의 모습이 주현은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의 말처럼 소녀들은 힘든 연습생 생활을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서로의 고민을 들어주고,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고는 하였다.

그 이유는 미영이 말했던 것과 같았다.

너무나 힘든 시절을 함께 이겨냈기에 자연스레 고민을 털어놓는 풍습이 생겨났던 것이다.

말은 안했지만 태연은 자신이 끝까지 말하지 않자, 많이 섭섭했을 것이다.

“태연 언니한테 폐를 끼쳤네요.”

“그건 아니고. 우리는 섭섭한 것보다 막내가 무엇으로 인해 고민하는지 걱정이 될 뿐이니까.”

그러면서 순하게 웃음을 짓는 미영을 보면서 주현은 양심에 콕콕 찔리는 것을 느꼈다.

분위기는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아야 하는 것으로 조성되고 있는데, 문제는 지금 말하게 되면 이 화기애애함은 사라지고 한차례 피바람이 휘몰아칠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죄송해요.”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해칠 걸 알았지만 주현은 끝까지 비밀을 고수했다.

미안한 마음이 한가득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에이, 끝까지 말해주지 않네.”

“죄송해요, 언니.”

아쉬움이 담긴 미영의 말에 사과하는 주현. 그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미영이었다.

“사정이 있는 것 같으니 어쩔 수 없지.”

“말할 수 있는 상황이 되면 반드시 말할게요.”

그것이 주현이 해줄 수 있는 유일한 말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말하는 순간은 더 이상 다른 훼방꾼이 참가할 수 없을 정도로 확실하게 마무리를 지은 후였다.

“괜찮아. 나도 지금 상황이었다면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을 테니까.”

“예?”

갑자기 미영의 기질이 변했다.

방금 전까지 친근한 언니였다면… 지금 이 기질은 멤버들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농락하는 와룡파니의 기운이었다.

“단 둘이서 창현이를 만나려고 하는 건데 어찌 쉽게 말할 수 있겠어. 안 그러니?”

“……!”

날카롭게 빛나는 미영의 눈빛과 흘러나온 말로 인해 주현의 입이 저도 모르게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 반응을 본 미영의 입 꼬리가 말려 올라가기 시작했다.

미영의 미소에 주현은 아차했지만 이미 들켜버렸다.

완전히 걸려들었다.


일렁이는 눈동자와 파르르 떨리는 입술은 지금 주현의 상태가 어떠한지 잘 알려주고 있었다.

그런 주현을 보며 미영은 입가에 여유로운 미소를 짓는다.

“훗!”

아주 간단하게 낚이는 막내를 보면서 미영은 아직도 그녀가 순진하다는 생각을 한다.

스리슬쩍 밑밥을 던졌을 뿐인데 그대로 덥썩 물다니.

낚시꾼에게 있어 쉬워도 이렇게 쉬운 낚시는 없을 것이다.

“어, 어떻게 아셨어요?”

“방금 전에. 막내 네가 반응으로 다 알려줘 놓고 왜 그래?”

“…….”

입을 꾹 다문 주현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미영을 바라본다.

진지한 그녀의 모습에 미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알았어, 말할게. 주현이 너 저번에 창현이랑 통화한 적 있지?”

“…어, 언니가 그걸 어떻게?”

소스라치게 놀란 주현은 경악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미영을 바라보았다.

그 말에 미영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무리 지략가를 흉내내려고 해도 막내는 막내였다. 융통성이 부족하고, 누군가를 속인 뒤 목적을 이뤄내지 못한 채 손해만 보는 그런 막냉이.

“후! 비밀 이야기를 하려면 문을 잠그고 이야기를 나눴어야지. 아무리 조곤조곤 이야기를 하더라도 문이 살짝 열려있으면 이야기가 들릴 수밖에 없어. 거실에 물을 마시려고 나왔다가 이야기를 들었어. 자세한 내용은 듣지 못했고, 창현이란 이름만 들었지.”

“언니만 알고 계신 건가요?”

만약 다른 멤버들도 알고 있다면 어떻게 될지 상상만 해도 끔찍했기에 주현의 안색이 좋지 않게 변했다.

“걱정 마, 나만 알고 있으니까.”

“다행이다.”

“그러니까 이야기를 나누려면 조심스럽게 해야지. 문을 열어놓으면 어떻게 해.”

“죄송해요.”

“마침 내가 있어서 다행이지, 거기 내가 없었으면 유리가 들었을 수도 있다? 그럼 일이 더 커졌을 수도 있어.”

“…….”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주현이었다. 미영과 마찬가지로 지략 캐릭터였지만 유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약점을 잡혔다면 길게 괴롭힘을 당했을 수도 있으리라.

“그런데 어떻게 아신 거예요?”

주현은 아직도 그것이 신기했다.

자신은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는데 미영은 자신의 속내를 훤하게 꿰뚫어 보는 듯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가.

순진한 막내의 반응이 미영이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반응을 보이는데 어찌 모르겠니. 아까 태연이랑 이야기를 나눌 때부터 계속 지켜봤지. 평소 막내라면 고민이 있을 때 멤버들에게 이야기를 털어놓잖아? 그런데 이야기를 하지 않은 채 끙끙 앓고 있으니 알아차리기 쉬웠지. 내가 계속해서 반응을 살핀 것도 있고.”

“그럼 전 언니에게 농락당한 거네요?”

“농락이라니! 나도 확신하지는 못했어. 다만 끝까지 말을 하지 않으려는 모습과 창현이와의 통화, 그리고 나의 상상을 약간 더해서 물어보았던 것뿐이야.”

“…….”

신기해도 너무나 신기했다.

미영의 말은 결국 자신의 예감대로 대충 때려넣은 것인데 맞았다고 하는 격이 아닌가?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말이 정확하게 들어맞았던 것이다.

감탄이 일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실패했을 경우가 궁금하기도 했다.

“만약 아니었으면요?”

“아니었으면 그냥 아닌 거지, 뭐.”

“헐…….”

말 그대로 헐이었다. 때려 맞춰보고 맞지 않으면 그냥 아닌 거라니. 황당하면서도 미영이 대단하다는 것을 절로 느끼고 있었다.

어느 정도 분위기가 풀어지자, 미영은 친근한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이렇게 알게 된 거, 자세히 이야기해줄래? 혼자서 고민하는 것보다 둘이서 머리를 맞대는 게 낮잖아.”

“…….”

“말하기 싫으면 말하지 않아도 돼. 하지만 난 막내를 위해서 하는 말이야.”

“사실은요…….”

자신을 위한다는 말에 주현은 입을 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시작되는 그녀의 이야기. 창현과 만나기로 약속을 잡아놓았는데, 갑자기 생긴 스케줄로 인해 빼도박도 못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난감하겠네.”

“어떻게 하죠, 언니?”

“스케줄을 뺄 수 없다면 결국 약속을 파기해야 한다는 거잖아. 내 말 맞지?”

“네…….”

혼자서 생각할 땐 몰랐지만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이야기를 듣자 주현은 울상이 되었다.

그 표정을 살핀 미영이 말을 덧붙인다.

“창현이는 약속 어기는 걸 싫어하니까 파기 하려고 하면 이미지가 나빠질 수도 있고…….”

“…….”

더욱 어두워지는 주현의 얼굴.

그 모습을 보며 미영은 살짝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지금 그녀의 입장에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지극히 한정되어 있었다.

“방법은 두 가지야. 하나는 창현이에게 양해를 구하고 약속을 파기하는 것. 만약 이렇게 하면 창현이한테 감점을 받을 수도 있지.”

“감점… 다른 방법은 없나요?”

그것을 염려하였기에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주현의 대답을 예상하기라도 한 듯 미영이 곧바로 다음 방법을 말한다.

“다른 방법도 그리 내키지 않을 것 같은데. 다른 방법은 스케줄이 비는 멤버들 중 한 사람에게 대신 나가달라고 하는 거야.”

“언니들한테요?”

“감점을 당하느냐, 다른 애들에게 기회를 주느냐가 되겠네?”

“…….”

두 가지 모두 주현에게 있어서 최악의 방법이었다.

기회랍시고 잡아놓았다가 감점 당할 위기에 처했으니까. 그렇다고 하여 다른 언니들에게 기회를 주는 것 또한 싫었다.

정확히 누구누구가 창현이를 좋아하는지 몰랐지만 자칫 잘못해서 좋아하게 되면 경쟁자를 한 명 늘리는 상황이 되어버린다.

모든 것이 주현에게 있어서 최악의 상황이었다.

‘어떻게 하지?’

고민을 거듭하던 주현의 시선이 미영에게 향한다.

그러자 미영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자신의 얼굴을 매만지며 입을 연다.

“응? 왜 그래, 얼굴에 뭐라도 묻었어?”

“아, 아뇨. 으음, 언니.”

“응, 말해.”

무언가를 말할 듯하면서 말을 하지 않는 주현을 재촉한다.

그 모습을 보면서 주현은 머릿속으로 치밀한 계산에 계산을 거듭하고 있었다.

‘제약을 걸어두면 돼. 하지만 미영 언니가 그걸 지키느냐 없느냐가 문제인데…….’

고민하던 주현은 미영을 바라보며 말한다.

“전 창현이와 잡은 약속을 취소하기가 싫어요. 만약 취소하게 되면 창현이는 너그러이 인정해주겠지만 제게 실망을 할 테니까요. 그 실망은 제가 수십 번 잘하더라도 쉽게 채울 수 없는 거라 생각해요.”

“그럴 수도 있지.”

“그래서 말인데… 언니가 저 대신 약속 장소에 나가주실 수 있으세요?”

“내가?”

의외라는 표정을 짓는 미영. 하지만 주현이 눈치 채지 못한 사이 미영의 눈에는 한 줄기 빛이 스쳐지나고 있었다.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주현은 맹수의 소굴로 들어서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한 채 말을 이어나간다.

“네, 대신 언니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뭔데?”

“창현이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좋게 생각하고 있어. 기회가 생긴다면 내 보이 프렌드로 삼고 싶을 만큼!”

자신의 속내를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말하는 미영이었다.

그 말을 들은 주현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이미 알고 있음에도 그 이야기를 직접 면전에서 듣는 것은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특히나 자신이 잡은 기회를 경쟁자에게 넘겨줘야 하는 상황이었으니.

“제가 창현이와 해놓은 약속을 언니에게 양도할게요.”

“정말? 나한테?”

눈을 빛낸 미영이 주현을 바라보았지만, 주현은 그 시선을 외면하며 말한다.

“대신! 저와 약속을 해주셔야 해요.”

“약속? 어떤 걸? 말만 해.”

활발한 미영의 말에 주현은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지만 애써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이번뿐이야. 다음에는 반드시 확답을 받아놓고 진행할 거야. 아직은 내가 유리해. 아버님이 있는 이상 조만간 기회는 다시 찾아올 거야. 아버님이 있으니 가장 유리한 건 나야.’

입술을 꼭 깨물며 쓰라린 마음을 다잡은 주현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책상 위에서 A4용지와 볼펜을 들고 온다. 그리고 미영 앞에 앉더니, 무언가를 적어나가기 시작한다.

그것은 미영이 창현과 만남을 가질 때 지켜야 할 사항이었다.

주현이 A4용지에 적은 내용은 이러하였다.


소녀시대 서현(이하 갑)은 소녀시대 티파니(이하 을)에게 사흘 후 있을 데이트 권한을 양도한다. 갑은 을에게 데이트 권한을 양도하는 대신, 을은 갑이 요구하는 이하 항목들을 충실히 이행해야 한다.


1. 과도한 스킨십 금지(손을 잡고 팔짱을 끼는 것까지 허용하지만 그 이상의 것은 금지. 지키지 않을 경우 협약은 자동으로 파기된다.).

2. 저녁 8시 이전 귀가(멤버들이 의심할 여지를 지우기 위해 일찍 귀가를 해야 한다.).

3. 수수한 옷차림(너무 꾸밀 경우 멤버들의 의심을 살 수 있으므로 가급적 튀지 않는 복장을 해야 하며, 스캔들을 염두에 두고 최대한 얼굴을 가릴 것).


이 모든 항목을 충실히 이행해야 하며, 이것을 지키지 않을 경우 을은 갑의 설거지 당번을 3년간 도맡아야 한다.

갑 서주현 (인)

을 황미영 (인)


“하시겠어요?”

나름대로 머리를 굴린 주현은 A4용지에 그럴싸한 계약서를 만든 뒤 미영에게 내밀었다.

이것은 그녀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것을 발휘한 것으로, 창현과 데이트를 즐길 수 있지만 그 이상의 선을 넘지 않기 위해 계약서롤 통해 다짐을 받으려는 것이었다.

“나쁘지 않네. 오히려 이걸로 부족한 걸? 어찌 보면 내가 대신 자리를 차지하게 된 거니까 설거지 당번 한 달 동안 대신 해줄게.”

“…괜찮겠어요?”

설거지는 주현이 가장 괴로워하는 항목 중 하나였다.

그것을 대신하게 해주겠다고 하니 그녀의 얼굴에 화색이 도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이지. 남의 것을 날름 먹으면 체하기 마련이야. 나도 멤버들에게 들키지 않길 바라니 충실히 지키도록 할게. 그리고 보답이라기에는 뭐하지만 설거지 당번 한 달 대신해주고.”

“좋아요.”

반발하지 않을까 싶던 미영이 순순히 받아들이자 주현도 한시름 놓는다. 과도한 스킨십 금지 조항이 있는 만큼 어느 정도 안심할 수 있을 것이다.

주현은 미영이 계약서에 동의하자, 컴퓨터로 계약서를 두 매 작성하여 각각 싸인을 한 뒤 한 장씩 소장을 하였다.

자칫 호감을 깎일 수 있던 위기를 넘기게 되자, 주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한 고비 넘긴 주현은 미영을 바라보며 마지막 제안을 한다.

“그리고 한 가지 부탁을 들어주셨으면 해요?”

“부탁?”

“네. 제 부탁은…….”

미리 생각해놓은 부탁을 미영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흥미로운 표정으로 이야기를 듣던 그녀는 흠칫한 표정으로 주현을 바라본다. 그리고 생각에 잠겨있다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수락한다.


“막내는 너무 순진해.”

방으로 돌아온 미영은 계약서를 보고는 피식 미소를 지었다.

마음만 먹으면 이러한 계약서 따위는 무시하고 얼마든지 자신의 계획을 펼치는 것이 가능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정말 막내의 얼굴에 눈물을 흐르게 만들 수 있으니 패스, 창현과 데이트를 하는 것만으로 만족하기로 하였다.

“소녀시대 팀원으로 오래 가고 싶어. 하지만 사랑을 차지하는 것만큼은 수단과 방법을 가려서는 안 돼.”

그러기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가 너무나 대단했다.

자신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으면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굳건하게 버틸 정도로. 원하는 사람들이 많은 만큼 이 요새를 함락시키기 위해서는 적극적인 공세가 필요하다.

주현이 무엇을 고민하는지 알아차린 미영은 그녀의 고민을 집중적으로 후벼 팠고, 마침내 대신 데이트를 나가는데 성공했다.

자신이 다른 수작을 부려 막내에게 스케줄을 부여한 것도 아니고, 순수한 설득을 통해 정당한 거래를 한 뒤 얻어낸 데이트였다.

누구도 뭐라 할 수 없는 완벽한 기회를 부여잡았지만 미안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계약서에 있는 걸 어기지 않더라도, 확실하게 끝을 볼 수 있어.”

계약서에 적힌 내용에 최대한 따르면서 승부를 볼 생각이었다.

불가능하다고?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여인, 그것이 바로 와룡 파니였다.

“무슨 옷을 입을까나.”

튀지 않으면서 창현에게 최대한 매력 어필을 할 수 있는 옷들을 고르며 미영의 밤은 깊어만 가고 있었다.


撥長食之 爾馬奚馳

발장식지 이마해치


먹기는 발장이 먹고 뛰기는 말더러 뛰란다.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호인이 받는다. 먹기는 파발이 먹고 뛰기는 역마가 뛴다.)


“창현아!”

-아, 미영 누나. 갑자기 무슨 일이세요?

거사(?)가 이루어지기 하루 전, 미영은 창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창현이 전화를 받자, 미영은 입가에 절로 미소 꽃이 피어나는 것을 느끼며 기분 또한 상쾌하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

“응, 다른 게 아니라 내일 막내랑 만나기로 했잖아.”

-네, 저번에 신세 진 게 있다면서 식사를 대접하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그건 왜요? 누나도 같이 나오시게요? 그럼 같이 나오세요.

이런 눈치 없는 남자 같으니라고.

‘그럴 때는 혼자 나오라고 해야 한다고!’

속으로 버럭 했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는다.

익숙해져서 그런 거냐고? 절대 그런 것이 아니다.

미영의 머릿속에는 다른 생각이 떠오르고 있었다.

‘모른다면 내가 가르쳐줄게. 아메리카식으로, 헤헤!’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미영은 곧바로 말을 이어나간다.

“그런 게 아니라, 내일 막내가 나가기 힘들다고 하더라고. 갑자기 스케줄이 잡혀서.”

-그래요? 이런, 아쉬운데.

“막내가 너무 미안해해서 내가 내일 대신 나가기로 했어. 일방적으로 약속 파기하면 너무 미안하다고 해서 말이야. 괜찮지?”

-괜찮죠. 그 부분까지 신경 써주다니, 역시 주현 누나답네요.

약속 취소인 줄 알았는데 그 부분까지 배려해주다니, 역시 주현이라는 말이 나왔다. 사정이 있다면 기꺼이 약속을 취소해주었을 텐데.

“응, 그렇지. 그냥 취소해버리면 너무 미안하다고 해서 내가 대신 나가기로 했어. 괜찮지?”

-네, 저야 괜찮죠. 그런데 누나는 괜찮아요?

“나도 내일 스케줄 없어. 그럼 내일 막내랑 약속한 장소로 나가면 되는 거야?”

-네, 그곳으로 오시면 되요.

“그럼 내일 봐.”

뚝.

통화가 끝나자, 미영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내일 데이트 약속이라, 이런 단독 찬스는 처음이었기에 자꾸만 흘러나오려는 웃음을 갈무리하는 것도 벅찼다.

“내일 확실하게 도장을 찍어놔야겠네. 확실하게.”

예리하게 빛나는 미영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주현이 창현과 만나려던 시간은 이른 아침인 오전 9시다.

그 시간이 왜 만나려고 했냐면 이유는 간단했다.

식사를 대접한다는 핑계 하에 먼저 만나서 함께 영화를 보려고 했던 것이다.

창현과의 데이트를 꿈꾸며 야심차게 스케줄을 준비한 주현이었지만 지금 그 스케줄은 몽땅 미영에게 양도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아침에 약한 그녀였지만 창현과 데이트 한다는 사실에 엄청난 속도로 일어나더니, 멤버들이 깨기 전에 후다닥 씻고 준비하기 시작했다.

“룰루루.”

절로 흘러나오는 콧노래와 함께 매끈한 피부는 순식간에 변모하기 시작했고, 발랄한 이십대 초반의 소녀에서 소녀시대 눈웃음 전담 티파니로 완벽 변신을 하였다.

“후흐흥!”

콧소리를 흘리며 준비를 마친 미영이 방문을 열었을 때, 그녀는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방문 앞에는 눈을 부릅 뜬 주현이 자리에 우뚝 서 있던 것이다.

“까, 깜짝이야. 내장 떨어질 뻔했잖아, 막내야.”

“내장이 아니라 간이에요. 그리고 언니.”

“으응?”

강렬한 아우라를 풍기는 주현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든 미영. 자신의 술수를 주현이 알아차린 게 아닐까 걱정이 절로 되었다.

그녀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주현은 조용히 미영의 모습을 훑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계약서에 적었던 것처럼 미영의 옷차림은 화려하지 않았고,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었기에 잘만 가리면 알아보는 것이 불가능했다.

이 정도면 미영도 최대한 선을 지켜준 셈이라.

“언니.”

“응.”

“오늘 잘 부탁드려요.”

“물론이야. 계약서에 적은 말을 지킬 테니까 걱정하지 마. 나 약속 잘 지켜. 알지?”

“네, 믿을게요.”

“…….”

자신을 믿는다는 주현의 말에 미영은 양심의 가책이 느껴졌지만 세상은 물고 물리는 관계였다. 스스로 거짓말 한 것이 없다 자위하면서 미영은 미소를 지어주었다.

“걱정 마. 그럼 나 다녀올게.”

“다녀오세요.”

믿음이 담긴 시선으로 바라보는 게 불편한 미영은 서둘러 자리를 피하고자 하였고, 이제부터 스케줄 준비를 해야 하는 주현도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

숙소 밖으로 나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미영은 핑크빛으로 변한 입술을 깨물며 의지를 다졌다.

“여기서 포기하면 안 돼. 마음 독하게 먹자.”

주먹을 불끈 쥔 미영은 다시 한 번 마음을 굳게 먹었다.

이제부터 자신은 주현의 대역이 아니다.

창현의 마음을 훔치려하는 하트 헌터(Heart Hunter) 티파니다.

의지를 다지는 미영의 눈이 별빛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너무 일찍 나왔나?”

오랜만에 중앙 분수대로 나온 창현은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며 중얼거렸다.

10월 하순으로 접어들고 있었기에 여름 날씨의 무더위는 사라지고, 가을의 쌀쌀함이 찾아오고 있었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헤드셋과 안경, 그리고 마스크까지 착용하고 나온 창현의 모습은 대한민국을 쩌렁쩌렁 울리는 가수 현이라 보기 힘들었다.

“못 알아보니 다행이군.”

나름대로 철저하게 얼굴을 가렸지만 알아볼 수도 있다는 불안한 마음이 들었는데, 마스크 덕분인지 알아보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날씨가 갑자기 추워지면서 마스크를 하는 사람이 많아진 탓에 이목을 사지도 않았고.

약속 시간 20분 전부터 기다리고 있던 창현은 8시 50분이 될 무렵, 저 앞에서 팔을 흔드는 여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날씬한 다리를 감싼 커피색 스타킹과 무릎까지 오는 치마, 그리고 하얀색 가을 점퍼를 입은 미영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모자를 눌러쓰고 안경을 하고 있었지만 친근한 느낌은 단번에 그녀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저러면 들킬 수 있는데.”

미영이 반가운 표정으로 손을 흔들자, 피식 웃음을 창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마주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러자 입가에 함박 미소를 지은 미영이 쪼르르 달려오기 시작한다.

그 모습을 보면서 창현은 반가움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넘어질 것 같은데.”

다른 사람이라면 그런 느낌이 들지 않을 테지만 미영이라면 왠지 넘어질 수도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

아니나 다를까.

창현과 가까운 곳까지 도착한 미영이 발을 헛디디더니, 그대로 비틀거리며 무너지기 시작했다.

화들짝 놀란 창현이 앞으로 나가 쓰러지는 미영을 받아들었다.

넘어질 뻔한 미영은 가까스로 창현의 가슴에 안착하여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괜찮아요?”

“으응, 괜찮아. 다칠 줄 알았는데 도와줘서 간신히 살아났어.”

간신히 살아났다는 말에 피식 웃음을 지은 창현이 가슴에 안긴 채 고개를 든 미영의 눈을 마주하며 말한다.

“그러니까 조심해야죠. 앞으로 뛰지 마세요. 누나가 뛰는 거 보면 굉장히 불안하더라고요.”

“응, 고마워.”

“그럼 가요. 오늘 제가 알고 있는 스케줄은 영화 보는 것밖에 모르는데, 주현 누나에게 들은 거 있나요?”

“걱정 마. 내가 주현이한테 다 듣고 왔거든. 이 누나만 믿고 따라오면 돼!”

가슴을 탕! 두드리며 당당하게 말하는 미영의 모습을 보면서 창현은 연상의 누나가 이렇게 믿음이 안 갈 수도 있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 표정을 읽은 것인지 표정을 찌푸린 미영이 말한다.

“뭐야? 설마 날 못 믿는다는 거야?”

“하하! 그럴 리가요. 믿죠. 믿고 말고요. 그럼 가도록 할까요?”

“응!”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창현의 팔짱을 끼는 미영.

멈칫하며 자신을 바라보자, 그녀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은 채 자연스레 말한다.

“추우니까 이렇게 가는 게 좋아. 게다가 어색하게 떨어져서 걸어가면 오히려 의심을 살 수도 있어. 그러니까 오늘은 친근한 연인처럼. OK?”

“그것도 그러네요.”

논리정연한 미영의 말에 창현은 설득 당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직까지 미영이 조금 어리버리한 사람이라 생각하고 있으니, 이것은 미영에게 가장 큰 장점이 될 것이다.

‘미안해, 막내야. 하지만 난 계약서에 적힌 내용을 어기지 않았어.’

자신은 창현의 가슴에 안기게 된 것은 어디까지나 길을 걷다가 넘.어.져.서. 그렇게 된 것이다. 우연찮은 요소가 조합되어 나타난 결과이니 만큼 주현이 작성한 계약서에 어긋날 짓을 한 적이 없다.

과연 그 진실을 누가 알 것인가.

하늘도 모르고 땅도 모르고, 주현도 모른다.

창현의 가슴에 안긴 것에 대한 진실을 아는 사람은 오로지 당사자인 미영뿐일 것이다.

당당하게 창현의 팔을 꿰차고 영화관으로 들어서는 미영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걸렸다.

이제껏 어리버리했던 티파니의 모습은 모두 잊어라!

오늘 그녀는 진정한 와룡 파니의 진가를 보여주고 있었다.


영화관 안으로 들어온 미영은 눈을 반짝이며 주변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와! 오랜만이다.”

“저도 오랜만이네요.”

오랜만에 영화관에 온 탓인지 두 사람은 기분 좋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 보지? 창현이 너 보고 싶은 거 있어?”

“누나가 고르세요. 조조할인 대라서 선택권이 자유롭거든요.”

“그래? 그럼 난…….”

눈을 반짝인 미영은 영화를 골랐고, 창현이 계산을 하였다.

‘어디서 본 거 같은데?’

표를 예매할 때 창현과 미영을 본 직원이 고개를 갸웃한다. 두 사람을 보면서 무언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수수하게 차려 입었지만 여자는 한 눈에 보아도 글래머러스한 몸매를 지니고 있었고, 모자를 쓰고 있었지만 외모도 상당히 예쁜 것 같았다. 그리고 표를 예매하는 남자 또한 비율이 상당히 좋았고, 왠지 일반인과 다른 아우라를 지니고 있는 듯했다.

‘내 착각이겠지.’

일반인과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예상일 뿐, 괜히 의심을 품었다가 손님의 기분을 상하게 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의심을 접어두고 표를 끊어준다.

표를 끊은 창현은 시간을 확인하고는 미영에게 말한다.

“30분 정도 남았는데 좀 앉았다 갈까요?”

“응!”

두 사람이 향한 곳은 영화관 내에 있는 커피숍이었다.

이른 시간이었지만 벌써 오픈한 상태였기에 두 사람은 안으로 들어간다.

“누나는 뭘로?”

“난 카페라떼.”

“네, 그럼 주문하고 올게요.”

미영의 주문을 받은 창현은 계산대로 가서 카페라떼와 딸기주스를 주문하였고, 잠시 후, 벨이 울리자 자리에 일어서려는 창현을 미영이 제지한다.

“내가 가지고 올게.”

“네?”

“창현이가 사줬으니까 가지고 오는 것 정도는 내가 해줘야지. 이게 요즘 매너래. 헤헤!”

친근하게 미소를 짓는 미영을 보면서 창현은 피식 웃은 채 벨을 건넨다.

“하하! 그럼 부탁할게요.”

“나만 믿으라고!”

그렇게 말한 미영이 딸기주스와 카페라떼를 가지고 왔고, 그것을 마시면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럼 10월말에 미국으로 가는 거야?”

“네, 아무래도 그곳에서 힘들게 인기를 얻어놓았는데 이대로 버려둘 수가 없어서요. 저도 국내에서만 활동하고 싶지만 시장 크기도 있고, 여러 가지 복합적인 사업 문제도 얽혀 있더라고요.”

“그렇구나.”

창현은 미국에서도 알아주는 스타였고, 그곳에서 벌어들이는 돈이 국내와 비교도 안 된다는 것을 미영 또한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미국에 활동하러 가는 것이 당연했지만 아쉬운 것은 어쩔 수 없다.

국내에 있을 때 자주 보지 못하더라도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생각을 하면 위안이 되었지만 저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면 체감이 달라지니까.

“뭘 그리 침울해해요. 두 달 있다가 바로 돌아올 건데.”

“두 달도 제법 길다고. 게다가 우리는 요즘 일정도 제대로 잡히지가 않아서…….”

개개인의 인지도는 상당했지만 정작 그룹이 인기를 얻지 못하고 있는 이상한 현상에 회사 직원들도 당황하고 있었다.

게다가 창현과 인지도 차이를 실감할 때만 자신도 모르게 풀이 죽고는 했으니, 미영의 반응은 당연한 것이었다.

“잘 될 거예요. 비상을 위한 준비라 생각하면 되죠.”

“비상? 비상이 뭔데? 위험하다는 뜻? Dangerous?”

“아뇨, 날아오르기 위한 준비죠. 더 잘되기 위한 준비 단계.”

“아아, 그렇구나. 잘 되면 좋지. 요즘 애들이 그것 때문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거든.”

“그렇군요.”

졸지에 고민 상담이 되어버렸지만 창현은 진지하게 이야기를 들어주었고, 미영도 답이 나오는 게 아니란 걸 알았지만 창현과 고민을 공유한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생각한 것인지 이야기를 털어놓기만 할 뿐이었다.

순식간에 시간이 지나가고, 영화 시작 시간이 되어가자 창현이 묻는다.

“누나, 뭐 드실래요?”

“난 콜라! 영화관에서는 역시 콜라지. 헤헤!”

“그래요? 음, 그럼 저도 콜라 마실게요. 몇 년만에 마셔보는 건지.”

“그럼 우리 저 세트로 하자. 저게 맛있어 보여!”

미영이 가리킨 것은 스페셜 커플 세트로, 콜라 두 개와 팝콘, 그리고 버터 오징어와 나초가 포함된 것이었다.

“저걸요?”

“응, 실은 아침을 못 먹었거든.”

“음, 그래도 저걸 먹으면 점심을 제대로 먹지 못할 텐데.”

“날 무시하지 마! 저거 먹어도 점심 잘 먹을 수 있거든?”

“그, 그래요?”

발끈하는 미영을 보면서 황당한 표정을 짓는 창현.

“그러니까 저거 사주랑! 응?”

“알았어요. 누나를 한 번 믿어보죠.”

“응, 오랜만에 먹어보네, 헤헤!”

항복선언을 하는 창현을 보며 행복한 미소를 짓는 미영이었다.

그 모습을 보는 창현도 피식 미소를 지었다.

별 거 아닌 거 같은데 이걸로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 왠지 모르게 절로 웃음이 나오곤 하였다.


영화관 안으로 들어선 두 사람은 곧장 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조조할인 시간 대였기에 보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좌석은 영화가 가장 잘 보이는 뒤쪽 중앙이었고, 창현과 미영은 자리를 잡고는 모자를 푹 눌러쓰기 시작했다.

주변이 제법 밝았기에 자칫 잘못하면 얼굴이 노출될 수도 있었다.

고개를 숙인 미영은 팝콘을 깨작깨작 먹기 시작했다.

잠시 후, 조명이 어두워지기 시작했고, 주변에 사람들이 없는 걸 확인하자, 한시름 놓으며 영화 관람을 준비했다.

바스락 바스락거리며 팝콘을 먹던 소리가 뜸해지자 의아하게 여긴 창현이 고개를 돌리니, 수북하게 쌓여있던 팝콘은 어느새 자취를 감춘 상태였다.

“빠, 빨리 먹네요.”

“응? 헤헤! 빠, 빨리 먹기는. 그냥 먹은 건데.”

“그래요? 하하.”

무안해진 미영은 얼굴을 빨갛게 물들였다. 다행이라면 지금이 무척 어두워서 그 표정을 들키지 않았다는 점이다.

“잘 먹으니까 좋네요. 이것도 드세요.”

“고마워.”

창현이 나초를 건네주자, 감사의 인사를 한 미영이 나초도 치즈에 찍어서 먹기 시작했다.

영화가 본격적으로 시작했고, 창현은 간간히 콜라를 마시면서, 미영은 나초와 버터 오징어를 먹으면서 보기 시작했다.

제법 볼 만한 영화였기에 창현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영화에 몰입하기 시작했고, 미영 또한 영화에 몰입하고 있는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응?’

영화를 보고 있던 창현은 갑자기 자신의 팔에 묵직한 느낌이 드는 것을 느꼈다.

의아함이 든 그가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니, 그곳에는 미영의 고개가 자신의 팔에 기대고 있었다.

“누나 자요?”

“…….”

목소리를 죽인 창현이 물어보았지만 미영은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모자를 눌러쓰고, 머리로 가려져 있었기에 그녀의 얼굴을 확인하는 것도 불가능한 상황, 창현은 미영이 잠들어있다고 판단하고는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그러자 미영의 고개가 점점 창현의 품속을 파고들기 시작했고, 둘 사이를 가로막는 팔걸이는 처음부터 치워놓았기에 미영은 창현의 무릎에 머리를 대고 누운 형태가 되었다.

“하하, 이것 참.”

자신에게 완전히 기댄 미영을 보면서 창현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난감해서 깨우기는 깨워야 할 텐데 잠이 들어있는 사람을 깨우자니, 미영이 무척 무안해 할 것 같았다.

“머릿결은 참 곱네.”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는다. 그리고 다시금 영화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졸지에 창현의 무릎 위에 눕게 된 미영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그 자세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미, 미안해.”

“아녜요, 그럴 수도 있죠.”

영화가 끝난 뒤, 미영은 창현에게 거듭 사과하고 있었다.

밤잠을 설치며 데이트를 기다렸는데 영화를 보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수마를 이겨내지 못한 채 그대로 잠이 들어버린 것이다.

그러면서 내내 창현에게 폐를 끼쳤기에 미영은 거듭 사과했다.

“피곤해서 그럴 수도 있죠.”

“미안.”

“그렇게 미안할 건 아니에요. 정 미안하면 점심 먹을 곳으로 맛있는 곳 추천해주시면 되고요.”

“응, 그런데 정말 괜찮은 거지?”

“그렇다니까요. 계속 그렇게 미안해하면 오히려 제가 무안해지잖아요.”

“미안. 헤헤! 안 그럴게.”

더 이상 사과하면 역효과가 날 수 있다는 걸 파악한 미영이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친근한 그 웃음에 창현도 피식 웃으며 말한다.

“어제 잠을 못 잤나 봐요?”

“으응, 좀 잠을 설쳐서…….”

“잠 설치는 건 안 좋은데. 괜찮은 거죠?”

“물론이지! 요즘 바빠서 그랬던 것뿐이야. 오히려 잠깐 자니까 개운한 걸. 그러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나 멀쩡하다고.”

팔뚝을 들어 보이며 근육을 과시(?)하는 미영의 모습에 창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알았어.”

“헤헤, 그럼 점심 먹으러 갈까? 점심은 내가 사도록 할게. 그러니 이 누나만 믿고 쫓아 와.”

“네, 그럴게요.”

썩 믿음이 가는 건 아니었지만 순순히 미영의 뒤를 따르는 창현이었다.

앞장 서는 미영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걸리고 있었다.


‘난 분명히 의도한 게 아니야. 잠깐 의식을 잃었다가 깨었는데 그곳이 천국이었을 뿐이었어. 이건 정당방위야. 그러니 이해해줘, 막내야.’

깜빡 졸았다가 깨었을 때는 이미 창현의 품속이었다.

미영은 주현과의 약속을 상기하고 필사적으로(???) 그곳을 벗어나려 했지만 몸이 그녀의 통제에 따르지 않았다. 너무나 피곤하여 자신의 몸 통제권을 찾았을 때는 이미 영화가 끝난 뒤였다.

이것은 계약위반이 아닌, 정당방위였다. 자신은 주현과의 약속을 기억하고 일어나려 했지만 몸의 통제권이 돌아오지 않아 영화가 끝나기 전까지 창현의 품안에 안겨 있어야 했으니 말이다.

의지는 굳건했으나 육체의 갈망이 더욱 강력했다.

양심에 콕콕 찔렸지만 미영은 그렇게 합리화시켰다.

‘그나저나 창현이 품은 참 따뜻했지. 생각보다 훨씬 넓었고.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면 저 품에 자주 안길 수 있겠지? 헤…….’

핑크빛 미래를 상상하며 미영은 피식피식 미소를 지었다.

모사재인 성사재천이라.

와룡 파니에게 하늘의 도움이 함께하고 있었다.


창현과 미영의 데이트는 순조롭게 이어지기 시작했다.

영화가 끝난 뒤 두 사람이 향한 곳은 본래 주현이 계획했던 곳이었다.

그곳을 정당한(?) 방법으로 양도 받은 미영은 신난 얼굴로 창현을 끌고 가기 시작했다.

“빨리 와! 너무 느려.”

“하하, 알았어요.”

“걸으면서 딴 생각하면 어떡해. 그렇게 멍하게 있다가 잡혀 간다?”

“…….”

누가 누구에게 잡혀간단 말인가.

그것도 소녀시대 No.1 어리바리 티파니에게 그런 말을 들으니 창현은 황당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가자!”

그 표정을 본 건지 보지 못한 것인지 미영은 창현의 팔을 낚아챈 뒤 그대로 끌고 간다.

‘이거 참 묘하네.’

끌려가면서 창현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소녀시대에서 가장 맹하다고 평가받는 티파니에게 리드를 당하는 입장에 처한다면 누구나 그러하리라.

그렇게 미영의 주도로 도착한 곳을 본 창현은 다시 한 번 황당한 표정을 지어야만 했다.

“여긴?”

“막내가 스케줄로 잡은 곳이 여기래. 분위기 괜찮지?”

“분위기는 괜찮은데 왜 이런 곳으로…….”

말끝을 흐리며 창현은 다시 한 번 가게 간판을 힐끗 본다.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영양죽을 파는 곳이다. 보아하니 자리마다 칸막이가 쳐져 있어서 정체를 감추고 이야기를 나누기 용이한 곳으로 보였다.

“막내가 말하길, <악마의 유혹> 활동 하면서 힘 많이 쓴 것 같다고 영양 보충을 해줘야 한다던데? 게다가 여기는 정체를 감추기도 좋잖아.”

“그러네요. 건강까지 생각한 걸 보면 역시 주현 누나답네요. 하하!”

“막내가 그렇지. 나도 여기 한 번도 안 와봐서 잘 몰라. 하지만 막내가 이야기를 해줬으니까 나만 믿으면 돼. 알겠지.”

“……네.”

언제나 그러했지만 미영이 자신만 믿으라고 하면 왠지 모르게 선뜻 믿음이 가지 않는 창현이었다.

두 사람은 가게 안으로 들어갔고, 전통차를 주문한 뒤 메뉴판을 보면서 잠시 고민하다가 가장 비싼 게 가장 좋을 것이라는 미영의 지론 하에 가장 비싼 영양죽을 주문하게 되었다.

“으, 써.”

전통차를 마신 미영은 쓴 맛에 표정을 찌푸렸다. 여러 가지 한약을 넣고 끓인 차라고 해서 마셨는데, 입맛에 썩 맞는 것 같지 않았다.

창현도 차를 마시더니,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미영이 왜 쓰다고 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쓴 게 몸이 좋다고 하잖아요.”

“그런가? 헤헤, 그래도 난 쓴 게 싫은데. 설탕이 없나?”

두리번거리며 설탕을 찾자, 창현이 쓴 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그러지 말고 마신 다음에 좀 음미하면서 마셔 봐요. 처음에는 좀 쓰다가 점점 차 특유의 맛이 느껴지거든요.”

“그래? 그럼…….”

창현의 말을 믿고 다시 한 번 차 마시기에 도전하는 미영이었다.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그의 말처럼 조용히 그 맛을 음미하기 시작한다. 쓴 맛이 입안에 퍼져 나가면서 한약 특유의 냄새가 입안에 맴돌기 시작한다.

그리고…….

“우엑! 그래도 써.”

“그래요? 특유의 맛이 나서 전 좋던데. 생강차를 즐겨 마셔서 그런가.”

그러면서 창현은 전통차를 여유로이 마시기 시작한다. 그 모습을 본 미영이 다시 한 번 마시는 것에 도전했지만 우는 표정을 지으며 칭얼거릴 뿐이었다.

“힝, 난 맛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나 봐.”

“각각 느끼는 맛의 포인트가 다른 법이니까요. 그럴 수도 있죠.”

“그런가?”

그러면서도 미영은 홀짝홀짝 곧잘 마시고 있었다. 쓰다고 징징거리면서 결국 창현보다 먼저 다 마셨는데, 그것을 본 창현은 순간 머릿속에 ‘내가 낚인 건가?’ 이런 생각을 할 정도였다.

잠시 후, 영양죽이 나왔고, 죽을 먹으면서 두 사람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주된 이야기는 창현의 미국 활동에 관련된 것이었다.

“이번에도 진출하면 1위 할 수 있는 거지?”

“그건 잘 모르겠어요. 이미 노래가 국내에서 나온 터라 미국에서 어떻게 반응할지 확신할 수 없거든요.”

“그래도 그거 있잖아! 계단 춤! 그거면 미국 사람들도 완전히 반할 거야!”

“그럼 좋죠. 그러길 바라고 있고요.”

“근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뭔데요?”

말끝을 흐리며 묘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미영의 모습에 창현이 고개를 갸웃하며 묻는다.

그러자, 핑크빛 입술을 꼬옥 깨물던 미영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악마의 유혹> 활동을 재개하면 혹시 뮤직비디오도 그대로 할 예정이야?”

“뮤직비디오요? 별다른 말이 없으니까 아무래도 그렇겠죠?”

창현도 고민해본 적 없었고, 석규도 말한 적이 없던 내용이다. 언급이 없었다는 것은 국내에서 활용했던 것을 그대로 가지고 갈 확률이 높다는 걸 뜻했다.

“그럼 제시는 세계적으로 인지도를 쌓겠네? 부럽다, 히잉.”

“그래요? 하하!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런데 왜 제시인 거야? 나도 잘할 자신 있는데!”

부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미영이 묻자, 창현은 그 부분에 대해서 간단하게 이야기를 해주기 시작했다.

원래 후보로 거론된 것은 연희와 수연, 윤아였던 것. 그리고 최종 후보로 연희와 수연이 남게 되고, SM엔터테인먼트에 이야기를 전하니, 수연이 최종 후보가 되어 뮤직비디오에서 함께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미영은 후보 중 연희가 있었다는 이야기에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

“연희 언니? 다, 다행이다.”

“예? 다행이라뇨?”

“아, 아무것도 아냐!”

의아한 듯 바라보는 창현에게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미영. 하지만 속으로는 안도의 한숨을 거듭 내쉬고 있었다.

연습생 시절 연희는 여자 연습생들에게 마왕이라 불리던 인물이었다.

사기적으로 예쁜 외모도 외모지만 항상 웃음을 짓고 있는 얼굴에 숨겨진 일면은 그야 말로 마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간단하게 설명하면 연희는 수연의 카리스마와 윤아의 힘, 유리의 심계와 주현의 꼼꼼함을 겸비하고 있었다.

만약 연희가 창현을 만나고 마음에 들어 했다면?

소녀시대 멤버 전체가 연합해도 상대하기 버거운 마왕이 적으로 나타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 상당히 괜찮네요. 딱히 느끼하지도 않고.”

“응. 근데 별로 배가 부른 것 같지 않아. 한 그릇 더 먹을까?”

이야기하는 사이 어느새 죽을 다 먹었고, 미영이 아쉬운 듯 말하자, 창현은 그녀의 식탐에 혀를 내두르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래도 상관없지만 자제하는 게 좋을 걸요?”

“왜?”

“칼로리가 상당히 높거든요. 두 그릇 먹으면 누나 배가 볼록 튀어나올지도 몰라요.”

“그, 그래? 그럼 당장 그만 먹어야지!”

창현의 말에 기겁하며 수저를 내려놓는 미영이었다. 가뜩이나 음식과 전쟁을 선포한 그녀에게 있어 칼로리는 불구대천 원수와도 같았다.

“슬슬 일어날까요. 배도 꺼뜨릴 겸 커피숍에 가요.”

“응, 그러자.”

주현이 짜놓은 스케줄은 점심 식사와 저녁 식사를 할 곳뿐이었다. 나머지는 창현이 적절하게 리드를 하게 함으로써 그에게 어느 정도 주도권을 쥐어주게 하려는 계략이었다.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미영은 눈을 빛내며 중얼거렸다.

‘막내가 많이 약았어.’

리드를 하면서 적절하게 리드 당해주는 것까지 계산에 넣다니. 이것은 계략에 능한 자신도 예상하지 못했던 방법 중 하나였다.

막내에 대한 경계심을 끌어올린 미영은 길을 걸으면서도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눴고, 정말 연인 관계가 되어 데이트를 하는 것 같아 행복한 기분을 한껏 만끽할 수 있었다.

커피숍에 도착하여 테이크 아웃을 한 뒤 밖으로 나온다.

“어디로 갈까요?”

“음! 난 점심하고 저녁 먹을 곳밖에 모르겠거든. 창현이가 다른 곳으로 안내해줬으면 하는데.”

“제가요? 음! 그럼 오락실 가는 건 어때요? 사람이 많아서 시선을 잡아 끌 일이 별로 없고, 재미도 있으니까요.”

“응! 그러자.”

자연스럽게 창현의 팔을 차지한 미영은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영화관에 위치한 오락실에 도착한 두 사람은 간단하게 오락을 즐기기 시작했다.

“나 저거 해보고 싶어!”

“저거요? 음! 같이 하는 거네요. 한 번 해봐요.”

“응!”

미영이 가리킨 것은 좀비들이 “끄워워워워!” 하면서 인간에게 달려드는 총 게임이었다. 500원씩 넣은 두 사람은 총을 들고 본격적으로 게임을 하기 시작했다.

두두두두!

“와우! 재미있다!”

총으로 좀비를 쏴 죽이는 미영은 연신 총을 흔들며 즐거워했다.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은 창현도 열심히 총을 쏘기 시작했다. 미영의 실력은 초보자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창현은 발군의 반사신경을 활용하여 자신의 것을 커버함과 동시에 미영을 도와주면서 버텨나가기 시작했다.

즐겁게 총 게임을 하던 두 사람은 보스를 죽이는데 성공했지만, 2탄으로 접어들자, 그대로 Game Over 되고 말았다.

“윽! 아까워라.”

안타까운 표정을 지은 미영이었다. 옆에 있는 창현은 잘해주었는데 자신을 끝까지 보호해주려다가 죽어버리고 만 것이다.

“한 번 혼자 해 봐.”

“제가요?”

“응, 두 개 들고 하면 멋있을 것 같아.”

발군의 실력을 보여준 창현이 만약 총을 두 개 들고 하면 어떤 실력을 보여줄까? 분명 멋진 모습이 나올 것이라 생각했기에 미영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그를 바라보았다.

선망이 담긴 그 시선이 창현은 고개를 저으며 항복을 선언하였다.

“알았어요.”

차마 못하겠다고 할 수 없어서 순순히 수락한 창현은 양쪽에 돈을 넣고 두 손에 총을 쥐기 시작했다.

두 총을 양손에 쥔 창현의 눈이 진지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예리한 시선과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하는 그의 손.

화면을 뒤덮고 있는 좀비들은 그의 총에 난타당하기 시작했다.

두두두두두두!

좀비들은 창현에게 다가오지도 못했다.

다가오는 즉시 총에서 뿜어지는 총알 세례에 나가 떨어지고 있었고, 모든 방위를 커버하는 그의 반사 신경이 빛을 발하면서 두 사람이 간신히 클리어 했던 보스도 어렵지 않게 격파했다.

웅성웅성.

창현의 놀라운 실력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혼자서 양손에 총을 쥐고 멋들어진 폼으로 좀비들을 학살하는 창현의 모습은 시선을 사로잡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1탄은 물론, 2탄 보스까지 무리 없이 클리어하자 사람들이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저거 뭐야. 벌써 3탄이잖아.”

“목숨도 두 개나 남았어. 말도 안 돼.”

“여러 번 이은 거 아냐?”

“멋있어…….”

남성들은 혼자서 폼을 잡은 채 총질을 하고 있는 창현을 경계 어린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고, 여성들은 시선을 끄는 멋진 청년이 게임에 진지하게 몰두하는 모습을 보자, 눈이 하트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시선이 서서히 몰리자, 불안해하던 미영은 여성들의 시선을 느끼고는 콧김을 거칠게 뿜어냈다.

“흥!”

‘너희들이 그렇게 보아봤자 저 남자는 오늘만큼은 내 것이라고!’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던 미영은 꺄아! 하는 소리가 들려오자 고개를 홱하니 게임 화면으로 돌린다. 그곳에는 3탄 보스와 치열하게 겨루는 창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쩌면 게임 하는 모습도 저렇게 멋있을까.

주변 시선이 몰려드는 것도 잊은 채 미영의 눈이 하트로 변하기 시작했다.

‘멋있어!’


“후우!”

3탄 보스와 치열하게 겨뤘지만 결국 패한 창현은 아쉬운 표정으로 총을 내려놓았다. 그러다 주변 시선이 온통 자신에게 몰려있는 것을 보고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모자를 쓰고 안경을 쓴 뒤, 마스크와 헤드셋으로 얼굴을 감췄기에 정체를 들킬 염려는 없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었다.

미영도 주변 분위기를 알아차렸는지 하트로 변한 눈이 원래대로 돌아오더니 창현의 팔을 잡아끌었다.

“가자!”

“네.”

행여나 정체를 들킬세랴, 두 사람은 빠른 걸음으로 오락실을 벗어났다.

“후아! 무슨 게임을 그렇게 잘해.”

“제가 그런 쪽으로는 재능이 좀 있어요. 가수 안했으면 게이머 했을 정도로요. 하하!”

“그래도 가수가 아닌 창현은 생각되지 않는 걸.”

호탕하게 웃음을 짓는 창현을 보며 미영이 피식 미소를 짓는다.

“그럼 다른 곳으로 가자.”

“생각하신 곳 있어요?”

“타로 카드!”

활기찬 어조로 대답한 미영은 그대로 창현의 팔을 잡아끌고 간다.

그리고 이어진 두 사람의 데이트. 타로 카드를 보기도 하고, 칸막이로 분리된 보드 게임방에서 젠가를 하기도 하면서 즐겁게 시간을 보냈다.

마침내 저녁 시간이 되자, 미영은 주현이 준비한 곳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저녁 식사를 할 곳으로 데려가자, 창현은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하하, 여긴……?”

“응? 한글 못 읽어? 장어 전문점이잖아. 민물 장어 전문점.”

“그러네요. 하하!”

순진한 얼굴로 한글을 못 읽냐고 묻는 미영의 모습에 창현은 괜히 자신이 발랑 까진 사람이 된 것 같아 무안한 표정을 지었다.

‘헤헤! 내 남자라면 힘이 있어야지.’

속으로 미소를 짓는 미영이었다.

띨파니라 불리지만 그녀의 나이가 올해 스물, 미국식으로 하면 열아홉.

알 것 다 아는 그런 나이인 것이다.


“오늘 고마웠어.”

힘이 불끈(?) 솟아오르는 식사가 끝난 뒤, 미영은 주현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숙소로 돌아가야 된다 하였다. 아쉬웠지만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주현과 틀어질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계속해서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면 이런 좋은 기회가 종종 자신의 것으로 될 수 있는 일이었다.

소녀시대 숙소가 있는 라인으로 가면 들킬 수도 있다는 미영의 말에 창현은 가장 끝에 있는 라인 앞으로 미영을 바래다주었다. 이곳에서 옥상을 통해 라인을 넘어가겠다는 미영의 말이었다.

라인 앞에 도착한 창현이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미영에게 말한다.

“오늘 재미있었어요. 괜히 누나가 대신 나와서 고생이 많네요.”

“고생이라니! 오히려 너무 즐거웠는 걸. 놀아줘서 고마워.”

“좋았다니 다행이에요. 저도 즐거웠으니까 서로에게 좋은 거네요.”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를 짓는 두 사람.

그러더니 미영이 갑자기 창현에게 안겼다.

“……?”

갑작스러운 미영의 행동에 창현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을 읽기라도 한 듯 품아 안긴 미영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아메리카식 인사야. 아메리카식.”

“아아, 그렇군요.”

“그리고 아메리카식 인사는 또 있거든.”

“또라고요? 그게 뭔…….”

창현의 말은 끝을 맺지 못했다. 품에 안겨있던 미영이 절정에 달한 그의 반사 신경을 벗어난 속도로 떨어지더니, 그대로 까치발을 들며 목적지를 향해 눈부신 속도로 쇄도한 것이다.

어색하게 미영을 안고 있던 창현은 반사 신경마저 초월한 미영의 움직임에 한순간 허를 찔리고 말았다.

그리고…….

“……!”

입술에서 느껴지는 감촉에 그의 눈이 커지기 시작했다.

제기랄, 네 번째 키스마저 당해버리는 창현이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놀란 창현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던 미영은 떼기 싫은 충동을 힘겹게 이겨내며 뒤로 물러선 뒤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는 혀를 내밀어 핑크빛 입술을 살짝 핥는다.

아찔한 그 모습에 창현은 가슴이 두근거렸고, 미영은 매혹적인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연다.

“헤헤, 많이 놀랐지?”

“마, 많이 놀랐죠.”

“아메리카식 인사야. 미국에 가봤다면서 모르나 봐?”

“미국에 갔지만 겪어본 적은 없네요, 하하!”

당한 것은 창현이었지만 오히려 당황하는 것은 그였다.

가해자임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당당하게 나오는 미영의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말려버린 것이다.

어색하게 미소를 짓는 그를 향해 미영은 속으로 키득거렸다.

‘당연하지. 미국에서도 이렇게 안하거든. 헤헤!’

미국에서 살아본 적이 없는 창현이었으니 아메리카식으로 밀어붙이면 그로서도 어쩔 수 없다.

마음 같아서는 오늘 승부를 보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자신에게 허락된 선은 여기까지. 사실 이것도 주현과 협의한 것을 넘어선 것이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오늘 너무 재미있게 놀아줘서 보답한 거야. 미국에서도 이렇게 하는 건 쉽지 않아. 그러니 영광으로 알아둬.”

“그, 그래요? 그것 참 고맙네요.”

이걸 화내야 할지 고마워해야 할지.

머릿속이 온통 뒤죽박죽이 되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 창현이었다.

그러면서 자신도 모르게 손을 들어 입술을 매만진다.

그러니 방금 전 느껴졌던 촉감이 생생하게 재연되기 시작했다.

말랑말랑하면서도 당장이라도 터질 듯한 탱탱함. 그리고 화악 풍겨오는 복숭아 향은 취하게 만들 듯 매혹적이었다.

한편으로는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여자와의 입맞춤은 이번이 총 네 번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단 한 번도 주도적으로 한 적이 없다.

나쁘지 않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남성이 리드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복잡하게 얽히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고개를 저으며 제정신을 차리는 창현이었지만 그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미영은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 그런 모습 보이면 내가 너무 미안해지잖아.”

“그런 거 아니에요. 오히려 좋았… 아니, 어쨌든 나쁘거나 그러지 않았으니까 그런 시무룩한 표정 짓지 마세요. 괜히 제가 나쁜 놈이 된 것 같잖아요.”

‘좋았다고? 헤헤!’

귀가 쫑긋하며 창현의 말을 캐치한 미영의 입가에 함박 미소가 걸린다.

“아무에게도 해주지 않는 거라고! 그러니 영광으로 알도록 해.”

“예, 감사합니다.”

의기양양하게 말하는 미영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이는 창현.

어느 정도 분위기가 풀어지자 미영은 만족의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서 입가에 짓궂은 표정을 짓더니 대담한 질문을 한다.

“그런데 어땠어, 기분?”

“네? 저, 저야 뭐… 나쁘지 않았어요.”

“그래? 그럼 다음에도 나랑 놀아주면 해줄게. 아메리카식으로 헤헤! 어때?”

“예? 아메리카식은 조금 부담이 되는데요. 하하!”

적극적으로(?) 나오는 미영의 모습에 당황한 창현이었다. 그러면서 자신도 모르게 옆쪽을 바라보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그러고 보니 첫 키스 때도 여기서 했네. 그때도 아메리카식이더니, 이번에도…….”

악플로 인해 실의에 빠졌던 수연과 함께 하루를 보내고 바래다줄 때 이곳에서 첫 키스를 하지 않았던가? 그때도 수연은 아메리카식이라고 이야기를 했고, 이곳에서 미영에게 다시 한 번 아메리카식 키스를 당했다.

같은 장소에서 똑같이 아메리카식으로 당하니, 창현으로서는 묘한 기분이 들 수밖에 없었다.

“응? 뭐라고 했어?”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자신의 중얼거림이 들린 듯하자 창현은 재빨리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바래다줘서 고맙고, 조심히 들어가. 미국 가더라도 나 잊으면 안 돼?”

“두 달밖에 안 있을 건데요, 뭐.”

“그래도.”

입술을 삐죽이며 투정을 부리는 미영의 모습에 창현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하하, 알았어요.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누나도 들어가서 푹 쉬세요.”

“응.”

미영이 안으로 들어가고, 엘리베이터에 탑승하자, 창현도 몸을 돌려 숙소로 향한다.

“…….”

엘리베이터로 꼭대기 층을 누른 미영은 조용히 거울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울 너머로 창현이 몸을 돌려 돌아가는 것을 본 미영의 목소리가 싸늘하게 가라앉기 시작한다.

“첫 키스. 여기서. 그리고 아메리카식?”

듣지 못한 척했지만 미영은 창현의 중얼거림을 들었다.

아주 작았지만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신경을 기울이고 있었으니까.

워낙 작은 목소리여서 완벽하게 듣지 못했지만 주요 단어는 완벽하게 캐치해냈다.

첫 키스라는 단어와 여기서라는 단어, 그리고 아메리카식이라는 말까지.

간단한 단어들이지만 이것을 조합하면 한 문장이 나온다.

“첫 키스를 여기서 아메리카식으로 했다?”

날카로워진 미영의 눈. 그것은 창현과 함께 다니는 내내 반달을 그리며 사람 좋아 보이는 미영의 모습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사건의 진실에 근접하는 와룡 파니만 있을 뿐.

“첫 키스를 여기서 했다는 것은 이 아파트에 창현이 올 일이 있었다는 뜻이야. 그리고 아메리카식으로 했다는 것은 누군가가 나와 같이 아메리카식으로 했다는 것이고.”

미영은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다.

창현의 팬 미팅에서 첫 키스에 대한 질문이 나왔을 때 당황하면서도 그는 자신의 첫 키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었다.

연인 사이에서 한 것은 아니지만 이성과의 입맞춤이라면 당했다고 말이다.

그것을 아메리카식이라 핑계를 대고 시도했다면 모든 의혹은 풀어진다.

누군가 자신보다 한 발 앞서 창현에게 아메리카식이라는 핑계로 이곳에서 그의 첫 키스를 빼앗아간 것이다.

누굴까.

추리는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아메리카식이라는 것 자체에서 이미 답은 나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여기까지 온다면 우리 멤버들 중 하나고, 아메리카식이라면 우리 멤버 중 나를 제외하고 한 명밖에 없어.”

답은 나왔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문이 열리자, 미영이 몸을 돌려 걸음을 옮긴다.

또각또각.

선명한 발걸음 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섬뜩하게 변한 미영의 표정이 어둠에 묻히기 시작한다.

“제시, 이런 식으로 선수를 친 거야?”

스산한 기운이 미영의 주변을 감싸기 시작했다.

창현의 작은 중얼거림은 잔잔한 호수 위에 작은 파장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나비효과처럼 언제 거대한 태풍이 될지 모르는 작은 파장을.


찬바람을 쐬면서 미영은 곰곰이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였다.

그리고 미영이 낸 결과는 당분간 보류라는 점이었다.

단지 자신의 추측과 창현의 몇 단어만으로 조합해낸 추리다. 상당히 신빙성이 있지만 그것으로 섣불리 결과를 확신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다.

“다녀왔어.”

“언니, 오셨어요?”

미영이 들어오자 방안에 있던 주현이 쪼르르 달려오며 그녀를 반겨준다.

“응, 우리 막내, 언니 기다려준 거야?”

“걱정이 되어서요.”

“걱정하지 마. 우리 막내가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니까, 헤헤!”

그러면서 주현에게 안기는 미영이었다. 처음 연습생으로 들어올 때는 자신보다 작았지만 이제는 자신보다 더욱 커져서 자신이 안기는 꼴이 되어버렸지만.

주현은 색다른 미영의 반응에 고개를 갸웃했다.

“언니, 술 마시셨어요?”

“응? 아니, 안 먹었어. 왜? 취한 것 같아?”

“네, 술 마신 줄 알았어요.”

‘헤헤! 창현이랑 키스를 해서 취해버린 걸지도?’

그렇게 생각하니 똘망똘망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주현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미영은 떳떳했다.

‘난 절대 주현이와 맺은 계약을 어긴 게 아니야. 거기에는 스킨십을 금지했지만 인사(키스)를 하지 말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으니까.’

자기 좋을 대로 키스를 인사로 분류하는 미영. 그런 자기 합리화가 있었기에 미영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었다.

다만 자신을 믿고 있는 막내에게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을 뿐.

“술 안 마셨어. 일찍 들어와야 하는데 그런 실수를 할 리 없잖아.”

그러면서 시계를 향해 힐끗 시선을 옮기니, 시간은 정확히 8시였다.

“그렇긴 하죠. 저도 언니를 믿고 있었어요.”

그렇게 말하는 주현이었지만 표정에는 불안함이 묻어나오는 것으로 보아 꽤나 불안했나보다. 하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하는 미영의 행동에 홀라당 넘어가버리고 말았다.

연기 수업도 받지 않은 미영의 대반란이었다.

“그런데 제시는?”

“수연 언니는 방안에서 쉬고 계신데요? 오늘 하루 종일 집에 계셨어요.”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이던 미영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분명 감은 수연이 창현의 첫 키스를 도둑질했다고 알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알 방법이 없는 것이 문제였다.

생각에 잠겨있던 미영은 슬쩍 주현을 바라보며 입을 연다.

“혹시 제시가 늦게 들어온 적이 있던가?”

“늦게요? 잘 모르겠는데요? 데뷔 전에 스캔들 사건이 일어나서 한 번 늦게 들어오신 적은 있는데…….”

그렇게 말한 주현의 눈이 순간 날카로워진다. 수연이 그 날 늦게 들어온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창현의 집으로 가서 함께 식사를 했기 때문 아닌가. 그로 인해 자신이 어부지리를 얻게 되었지만 수연의 행동은 주현으로 하여금 경계심을 바짝 끌어올리게 하였다.

“늦게? 그렇구나.”

미영의 눈빛도 순간 예리하게 변했다가 원래대로 돌아온다. 늦게 들어온 적이 있다면 상당히 의심이 갔다.

‘아직은 확신할 수 없으니까.’

그렇지만 그녀의 감은 계속해서 외치고 있었다.

창현의 첫 키스를 훔쳐간 도둑고양이는 바로 수연이라고.

“그럼 난 좀 씻고 쉴게.”

“네, 언니 쉬세요.”

방으로 들어가는 미영을 바라보던 주현은 자꾸만 혀로 입술을 할짝이는 것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한다.

‘언니가 왜 저러지? 새로운 습관이면 고치라고 해야겠네. 그리고 일찍 들어왔으니까 별일 없었겠지? 계약서도 썼으니까…….’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것을 아직 모르는 주현이었다.


방안으로 들어간 미영을 맞이한 것은 룸메이트 유리였다.

숙소에서 입는 평상복이 아닌, 상당히 차려입은 유리가 안으로 들어오는 미영을 맞이하였다.

“이제 왔어?”

“응, 유리 너도 밖에 나갔었던 거야?”

“응? 아아, 나도 볼 일이 좀 있어서.”

자신의 복장을 보고 미소를 지은 유리가 고개를 끄덕인다.

마치 자신이 우위에 있다고 말하는 듯한 유리의 모습에 미영은 고개를 갸웃한다.

‘유리가 왜 저러지?’

무언가 불안한 마음에 들었지만 미영은 개의치 않고 차곡차곡 옷을 벗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자신도 모르게 혀로 입술을 할짝이고는 손으로 촉촉한 입술을 매만진다.

‘참 부드러웠지. 남자가 그렇게 부드러울 줄 몰랐는데. 헤헤!’

창현과 입맞춤을 했다는 생각에 미영의 표정은 싱글벙글이었다.

그의 첫 키스가 아니라고 하지만 개의치 않았다. 이제부터 그 입술을 자신이 독점할 테니까. 그렇게 되면 상상으로만 해왔던 여러 가지를…….

‘헤헤!’

미영의 얼빠진 표정을 본 유리가 흠칫하면서 자신에게 멀어지고 있었다. 허나 당사자인 미영은 개의치 않은 채 자신의 망상에 빠져 허우적거릴 뿐이었다.

‘다음에 만나면 아메리카식이라고 하고 좀 더 진하게 할까? 애들이 말하는 설왕설래로… 그러면 창현이가 이상하게 생각하려나? 어쨌든 다음에도 만나면 아메리카식이란 이름 하에 여러 가지를…….’

이럴 때 미국에서 살았던 것이 그렇게 다행일 수 없는 미영이었다.

만약 자신이 미국에서 살지 않았더라면 무슨 핑계로 했을까.

궁하면 다른 방법이 나올 테지만 이보다 더 속편한 방법은 없었다.

‘오늘은 안 씻고 자야지.’

피부가 나빠지든, 머릿결이 나빠지든간에 오늘은 즐겨야 하는 날이다.

핑크핑크 티파니가 한 건 해낸 날이다.


제90.33장. 틈새시장


“언니가 약속을 지켜줄까?”

미영과 계약을 맺은 주현은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창현과 데이트를 하기로 한 날 스케줄이 생기다니.

그것만 아니었다면 다른 언니들이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로 진도를 나갈 계획이던 주현은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게 틀어졌다는 걸 느꼈다.

신뢰를 잃을 수 있다는 걱정 때문에 미영에게 데이트 약속을 양도하고, 계약서까지 작성하여 단단히 약속을 받은 상태였지만 주현은 불안했다.

평소에는 만만하게 느껴지는 미영이 어느 순간에는 무시무시한 모습을 보인다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으니까.

다른 언니들이 모르는 미영의 모습을 주현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방법이 없어.”

불안했지만 주현에게 주어진 선택의 범위는 무척 좁았다.

그랬기에 그녀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미영을 굳게 믿는 것, 그것뿐이었다.

12시가 되기 전까지 조용히 책을 읽을 요량이었지만 책에 집중이 도통 되지 않는 주현이었다.

평소라면 한 권을 다 읽었을 시간이었지만 지금은 채 반도 읽지 못한 상태였다.

“…….”

계속해서 불안한 상상이 주현의 머릿속에 맴돌고 있었다.

평소 자주 넘어지는 속성을 이용하여 고의로 넘어지는 척하며 창현에게 안긴다던지, 정체를 들키지 않기 위해 연인 행세를 해야 한다며 팔짱을 끼고 걷는다던지.

그리고 과감하게 계약을 위반하며 오늘 데이트가 고마웠다고 말하며 창현에게 땡큐 키스를…….

“안 돼!”

“와악!”

불길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주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치자, 옆에서 여인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들리지 말아야 할 비명 소리가 들리자, 주현은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곳에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유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에? 언니?”

“뭐, 뭐야. 깜짝 놀랐잖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깜빡 졸다가 악몽을 꿔서… 그런데 언니는 왜 그렇게 조용히 들어오신 거예요?”

“응? 아하하! 깜짝 놀라게 해주려다가 역으로 당했네.”

어색하게 웃음을 짓는 유리였다. 주현에게서 심상치 않은 기류를 느끼고는 조심스럽게 접근을 한 것인데 갑자기 소리를 지른 탓에 하마터면 간이 떨어질 뻔했다.

“네?”

“아냐. 그냥 방에 들어왔는데 막내 상태가 이상해보여서.”

“그런데 갑자기 여기에는 무슨 일로?”

“응? 아아, 할 말이 있어서. 주현이 너 며칠 전에 창현이 동생 태어난 병원에 갔다면서?”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저 일로 인해 한바탕 태연에게 꾸지람을 듣지 않았던가.

그것 때문에 수연의 편에 서기로 마음을 굳히게 되었지만.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주현의 눈길에 유리가 말한다.

“태연이한테 들었지. 조만간 다 같이 한 번 방문하자고 하더라고. 무슨 병원이었지?”

“삼성역에 있는 병원인데…….”

“그래? 한 번 갔다 와봤으니 우리가 갈 때 길 안내 부탁하면 되겠네?”

“네, 무척 유명한 곳이라서 제가 안내할 수 있어요.”

“그럼 다행이네. 독서 열심히 해.”

고개를 끄덕인 유리가 입가에 미소를 짓더니 그대로 방 밖으로 나간다.

의아한 시선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주현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다시 독서에 집중하려 한다.

하지만 불길한 상상은 여전히 그녀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미영 언니, 제발 약속을 지켜주세요.”


“그렇단 말이지.”

정보를 얻은 유리는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방으로 돌아와 컴퓨터를 킨다. 그리고 주현이 말해주었던 정보를 바탕으로 인터넷 검색을 한다.

정보가 주어졌기에 병원을 찾는 것은 간단한 일이었다.

“여기구나.”

입가에 호선을 그린 유리가 병원의 이름과 전화번호까지 알아둔다. 만사 불여튼튼이라고, 만약의 상황에 대비하여 병원을 혼자서 찾아갈 수 있도록 대비를 해놓는 것이다.

전화번호까지 저장을 한 유리가 핸드폰을 열어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

핸드폰 건너편에서 울려 퍼지고 있는 창현의 노래 <악마의 유혹>. 그 노래를 듣는 유리의 입가에 미소가 번져 나간다.

“후후! 너도 그러니? 나도 이 노래가 더 좋더라고. 역시 우리는 한 식구가 될 사이!”

노래가 유리의 귓가를 자극하고, 잠시 후, 반대편에서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오랜만이야.”

-네, 언니…….

전화를 하는 유리는 미소를 지었지만 건너편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급속도로 경직되어 가고 있었다.

그 변화가 고스란히 느껴졌지만 유리는 개의치 않고, 오히려 미소를 짙게 띠며 말한다.

“오랜만이지, 지영아?”

유리가 전화를 건 상대는 다름 아닌 지영이었다.

2008년 초 유리는 지영에게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자신은 창현이를 좋아하고 있으며, 적극적으로 협력을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지영은 유리에게 협력할 의사가 없음을 보여주었다. 그 날 이후 곧잘 오고가던 연락이 뜸해지기 시작했고, 대면하게 되면 반가운 기색보다는 경계 어린 모습을 보여주고는 했으니 말이다.

-네, 오랜만이에요.

“연락이 오고간 지 너무 오래된 것 같아서 연락했어. 그동안 잘 지냈지?”

-저야 항상 잘 지내죠.

짧게 대답을 하는 지영. 그것은 그녀의 경계심에서 발동된 행동으로, 길게 말하면 자신도 모르게 유리의 페이스에 휘말릴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짧게 대답함으로써 중심을 지키려는 행동이었다.

유리 같은 구미호(?)에게 오빠를 빼앗길 수 없다는 여동생의 철벽 방어가 발동된 순간이었다.

하지만 유리의 눈에는 그러한 지영의 의도가 빤히 들여다 보였다.

‘귀엽네.’

입 꼬리를 말아 올리며 미소를 지은 유리는 계속해서 지영이 경계하는 점을 살살 긁어주기 시작한다. 그러자 지영은 더욱 경계심을 끌어 올리며 대답했고, 그러는 사이 서서히 유리의 페이스로 넘어오고 있었다.

“이번에 여동생이 태어났다면서?”

-네.

“그래서 내일 한 번 보러 갈까 하는데.”

-네? 내, 내일이요?

“응, 내일. 혹시 알겠어? 운이 좋으면 창현이가 그곳에 있을지.”

-…….

전화를 받는 지영의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게 유리에게까지 느껴졌다.

그 속내가 그대로 전해졌기에 유리는 속으로 미소를 킥킥 지었다.

‘넘어온다, 넘어 와.’

내일 창현이가 병원에 있을 확률이 희박하다는 것을 그녀도 잘 알고 있다. 한창 스케줄도 바쁘다는 걸 모를 리 없으니까. 하지만 이런 말을 뿌린 것은 그녀 스스로 아기를 보러가기 위한 명분을 만든 것이도, 나아가 지영을 끌어내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다.

-내일은 오빠가 없을 거예요…….

“그래? 그럼 아쉽지만 아가만 보러 가야겠네.”

소녀시대 내에서 두뇌를 맡고 있는 유리는 알고 있다.

병원에 가면 창현은 없을지라도 아기를 돌보는 그의 어머니가 있을 것이라는 걸.

자신들을 좋아하는 팬 분들 중 아주머니들이 상당수인 만큼, 창현의 어머니에게 적극적인 매력 어필을 할 계획이었다.

지영이 그걸 모를 리 없으니 결국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었다.

‘지영아, 어서 나와 언니를 마중하렴.’

아니나 다를까, 지영의 다급한 목소리가 유리의 귀에 스며든다.

-자, 잠깐만요! 언니! 내일 언제 가실 생각이죠?

“응? 아직 확실하게 시간을 정하지는 않았는데?”

-…시간을 정하시면 제가 언니와 함께 가도록 할게요. 몇시에 만날까요?

“나야 아무 때나 다 좋지만 배려를 하는 게 좋겠지? 점심시간이 끝날 때쯤인 2시가 좋겠다. 삼성역으로, 어때?”

지영도 모르는 사이 주도권은 자연스럽게 유리에게 넘어왔다. 을의 입장이 되어야 할 유리가 시간과 장소를 정하고 있었으니까.

갑이 되어야 할 지영은 어느덧 을이 되어 충실한 유리의 말이 되어 움직이고 있었다.

-알았어요. 그럼 그때 삼성역으로 오세요.

“응, 그럼 내일 보자, 지영아.”

입가에 함박 미소를 지은 유리는 만족스럽게 통화를 끝낼 수 있었다.

방금 전 했던 대화 내용을 떠올리며 유리의 머릿속이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한다.

“내일인가?”

굳이 지영을 부르지 않아도 되지만 유리가 그녀를 부른 이유는 간단했다. 자신의 든든한 우군이 되어 줄 거라 생각했던 지영이 적으로 돌변한 것에 대해 새롭게 구도를 개편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내일 보자, 지영아.”

누구도 노리지 않는 틈새시장을 노리는 유리였다.


다음 날, 스케줄이 있는 멤버들을 제외하고, 오늘 휴식을 갖는 멤버들의 숫자는 총 네 명이었다. 그 중 미영은 아침 일찍 친구와 약속이 있다면서 나갔고, 윤아는 만날 사람이 있다면서 SM엔터테인먼트로, 잠자는 숙소의 공주님인 수연은 푹 퍼져서 일어날 줄 몰랐다.

아침 일찍 일어난 유리는 오늘을 위해 특제 마즙을 갈아 마신 뒤 미리 골라놓은 옷을 입기 시작한다. 평소 선호하던 스키니 계열의 복장이 아닌, 어디 결혼식에 가는 것을 방불케 할 정도로 정숙한 차림새였다.

여기에 얼굴을 가리기 위해 모자를 쓰고, 썬글라스까지 쓴 뒤 숙소 밖으로 나간다.

“이 정도면 완벽해.”

밖으로 나간 유리는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무심한 모습을 연출함으로써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고 움직일 수 있었고, 택시를 잡아 곧장 삼성역으로 향했다.

“수고하세요.”

삼성역에 도착한 유리는 대금을 치른 뒤 밖으로 나온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는 것을 보면서 인적이 뜸한 곳으로 향한 유리는 시간을 확인한 뒤 문자를 보낸다.

[나 도착했어.]

잠시 후, 핸드폰이 부르르 떨리더니 답장이 도착한다.

[삼성역 2번 출구로 오세요.] 귀염둥이 시누이

“2번 출구? OK!”

입가에 미소를 지은 유리가 곧장 2번 출구 쪽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불안한 표정을 지은 채 서성이는 지영을 발견할 수 있었다.

또각또각 굽 소리가 나면서 걸음을 옮기자, 지영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유리에게 향한다.

“……!”

유리를 보고 놀란 표정으로 변하기 시작하는 지영. 모자를 벗고, 긴 생머리에 썬글라스를 쓴 유리는 사람들의 시선을 한눈에 사로잡는 늘씬한 몸매를 자랑하고 있었다.

오피스 레이디와 같은 검은색 투피스 정장 차림이라니.

오늘 단단히 준비하고 왔다는 생각이 들자 지영은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안녕, 오랜만이지?”

“네… 오랜만이에요.”

입가에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며 여성의 매력을 물씬 풍기는 유리를 보며 지영은 굳게 전의를 다진다.

‘내 앞에 선 여자는 오빠를 빼앗아가려는 여자야. 지영아, 정신을 바짝 차리자.’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그냥 평소 같았어요. 오빠한테 보컬 트레이닝을 받고, 기타 여러 가지 연습을 병행하고요.”

“창현이랑은 잘 지내고?”

“그럼요. 남들이 시샘할 정도로 아주 잘 지내는 걸요.”

톡 쏘아 붙이듯이 말하는 지영의 모습에 유리의 미소가 더욱 짙어진다.

오빠라는 단어를 강조하고, 시샘할 정도로 친하게 지낸다고 해봤자 어차피 남매였다. 그 정도로 질투심을 불사를 만큼 유리의 심계는 얕지 않았다.

‘제법 성장했네? 날 도발하려 하기도 하고?’

하지만 자신은 정치권을 방불케 하는 소녀시대 내에서 심계로 1,2위를 다투는 인물이었다. 지영의 이러한 심리전은 그녀에게 우스울 따름이었다.

“그럼 가도록 할까?”

자신의 도발에 걸려들지 않은 유리를 보며 지영은 마음이 다급해졌다.

“잠깐! 전 언니에게 할 이야기가 좀 있어서요. 잠깐 이야기를 좀 해도 될까요?”

“응, 물론이야. 그럼 커피숍으로 갈까?”

“그렇게 해요.”

유리의 발걸음을 잠깐 잡아두는데 성공한 지영. 어떻게든 창현을 포기하게 만들기 위해 평소 쓰지도 않던 부분까지 풀가동하여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기 시작한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면 이 언니가 오빠를 포기하게 만들지?’

‘후후, 미안해, 지영아. 머리 돌아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다 들리네?’

오빠를 지키고자 하는 여동생의 헛된 반항을 지켜보며 유리는 진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병원 근처에 위치한 커피숍에 들어선 두 사람은 주문을 한 뒤 자리에 앉는다. 잠시 후, 커피가 나오자, 각자 주문한 음료를 한 모금씩 마신다.

입가에 번지는 달콤한 맛에 유리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갑자기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은 거야?”

지영의 속내를 훤하게 꿰뚫어 보고 있지만 유리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척, 묻는다.

그 물음에 지영은 짐짓 표정을 굳히더니 유리를 향해 입을 연다.

“언니가 저번에 제게 그랬었죠? 오빠를 좋아한다고.”

“응, 그랬어. 그리고 그 마음은 지금까지 변함이 없고.”

“오빠를 포기해주실 수 없어요?”

“왜?”

지영의 말에 유리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정말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그 대답에 지영은 입술을 꼭 깨물더니 나름대로 논리를 펴 나가기 시작한다.

“오빠는 연예인이에요. 비록 그 부분에 대해 신경 쓰지 않는 팬 분들이 많다고 해도 오빠가 연애를 하다가 들키면 큰 타격을 입지 않겠어요? 게다가 언니는 아이돌이고요. 연애를 하면 오빠도 오빠지만 큰 타격을 입는 건 언니에요. 그래서 저는 언니를 생각해서…….”

“잠깐만. 말 끊어서 미안한데 내 말을 들어줄래?”

“네…….”

지영의 이야기를 끊은 유리는 조용히 그녀를 바라본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자신을 바라보니, 지영은 속이 불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지영이가 그런 걱정을 하는 건 창현이를 걱정하고, 날 걱정해주는 것이란 걸 알아. 하지만 내 생각을 이야기하자면 지영이 네 이야기는 맞지가 않아.”

“어째서요?”

“창현이가 아직 나이가 어리지만 그 인지도는 세계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야. 얼마 후면 창현이는 미국으로 떠날 테고. 그곳에서도 창현이의 인기는 폭발적일 거야. 맞지?”

“물론이에요.”

직접 미국으로 가서 그 열기를 체험해보지 못했지만 창현의 인기는 상상을 초월한다.

그것은 미국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 부분에 대한 지영의 믿음은 굳건했다.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유리는 말을 이어나간다.

“그런 창현이를 미국 여자들이 싫어할까?”

“그건…….”

지영의 할 말이 궁색해졌다. 미국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면 국내와 비교도 안될 정도로 여인들의 유혹이 뻗힐 것임을 잘 알고 있던 것이다.

그 예로 미국 스타 중 한 사람인 세실리아가 있지 않은가? 그녀는 직접 당당하게 자신은 현을 좋아한다고 선언하기까지 하였다.

대한민국보다 훨씬 개방적인 미국에 간 창현은 그야 말로 늑대 소굴에 풀린 가녀린 양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지?”

“네.”

“지금 아마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할 테지만, 지영아, 남자들은 생각보다 이성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고는 해.”

“…….”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침묵하는 지영. 그녀는 깨닫지 못하고 있지만 이미 유리의 말에 어느 정도 설득이 되어가고 있었다.

“대한민국이라면 몰라. 하지만 미국은 이곳보다 훨씬 개방적인 곳이야. 금발에 늘씬한 몸매를 지닌 여자들이 창현이한테 육탄 공격을 감행한다고 생각해 봐. 어떻게 될 거 같니?”

지영의 표정이 참혹하게 변해가기 시작했다.

동양인과 비교도 안될 정도로 쭉쭉빵빵한 몸매에 남성의 판타지를 자극하는 금발의 미녀가 창현에게 대놓고 유혹한다면?

“아, 아니야! 오빠가 넘어갈 리 없어!”

고개를 힘차게 저으며 부인하는 지영이었다. 창현이라면 절대 넘어가지 않을 것이라 부인하는 그녀였지만 막상 그 상황이 닥치면 어떻게 될지 상상하기 힘들었다.

그만큼 금발의 여인은 대한민국 남자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정말 아니라고 생각해?”

“아, 아니에요. 오빠가 그런 유혹에 넘어갈 리가 없어.”

힘차게 고개를 젓는 지영의 모습은 애처로웠다. 아니라고 강하게 말하지만 이미 속마음에서는 넘어갈 수도 있다 생각하고 있었기에 더욱 참혹했다.

“그래, 창현이라면 넘어가지 않을 수도 있어. 하지만 그것도 오래 가지 않을 거야. 앞으로 창현이의 인기는 더욱 높아질 거고, 그럴수록 유혹의 강도는 더욱 강해질 거야. 그렇게 되면? 과연 피가 한창 끓을 나이인 창현이가 버틸 수 있을까?”

“…….”

이번에는 아니라고 말을 못하는 지영이었다.

모든 부와 명예를 쥔 남자가 여자를 거부하는 전개 따위는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아무리 자기관리가 철저하더라도 결국 틈이 생길 것이고,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은 끝장이다.

‘이, 이게 아니잖아?’

오빠가 타락하는 장면을 생각하던 지영은 정신이 확 깨는 것을 느끼고는 날카로운 눈으로 유리를 바라보더니 말한다.

“그, 그거랑 오빠가 언니랑 사귀는 건 관계가 없잖아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 하지만 연결고리는 있어.”

“무슨 말이죠?”

천천히 자신의 페이스로 휘말리는 지영을 보며 유리는 미소를 지었다. 이쯤이면 이미 2/3는 넘어온 상태였고, 사태를 파악했어도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여자 친구가 있고 없고의 차이야. 만약 창현이가 여자 친구가 있는데 바람을 필 거라 생각해?”

“오빠는 그런 사람 아니에요!”

“나도 아니라고 생각해. 그럼 만약 창현이가 여자 친구를 사귀면 금발 여자들의 유혹에 넘어갈까?”

“그럴 리 없겠죠…….”

유리의 말에 연결점을 발견한 지영의 목소리가 기어들어가기 시작한다. 완벽하게 유리의 말에 넘어갔다는 것을 그녀도 깨달았다.

호선을 그리며 미소를 지은 유리는 쐐기를 박기 시작한다.

“아까 전에 날 걱정해주는 말을 했지? 난 모든 것을 각오하고 있어. 창현이를 내 것으로 만들 수만 있다면! 그리고 지영이가 생각하는 것처럼 창현이도, 나도 호락호락하지 않아. 만약 잘 되면 들키지 않고 오랫동안 갈 수 있어.”

“…….”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녀의 마음속에서 갈등하고 있다는 뜻. 방금 전 유리의 금발 미녀 공격이 제대로 먹혀들어가 지영은 속으로 고민하고 있었다.

만약 창현이 여자 친구를 만들지 않으면 미국에 가서 금발 미녀에게 먹혀(?)버릴 수도 있다고.

채찍을 한껏 휘둘렀으니 이제는 당근을 주어야 할 때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난 기다릴 거야.”

“뭘요?”

“창현이와 사귀는 게 목표지만 당장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아. 지영이 네가 그동안 날 경계했던 건 내가 창현이를 빼앗아 갈 것 같아서 그랬던 거지?”

“그, 그렇지 않아요.”

부인하지만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자신의 속내를 훤하게 꿰뚫어보고 있는 유리의 모습에 지영은 두려움마저 느껴야만 했다.

“다 이해해. 모든 남매 사이에는 그런 박탈감이라는 게 있거든. 나도 위에 오빠가 있어서 그 심정을 잘 알아. 그런 만큼 지영이 널 가장 많이 이해해줄 수 있는 건 나라고 생각하고.”

“절 이해한다고요?”

“지영이 입장에서 난 오빠를 빼앗아가려는 적이잖아? 그러니 저번에 했던 말을 바꾸도록 할게. 창현이와 사귀도록 도움을 달라고 말하지 않을게. 대신 나에게도 기회를 줄 수 없겠니?”

“…….”

유리의 말에 갈등하는 지영이었다.

어제만 해도 아니, 30분 전만 해도 이 말을 들었다면 그녀는 매몰차게 유리의 말을 거부했을 것이다.

왜냐고? 유리가 말한 것처럼 그녀는 지영에게 있어 오빠를 빼앗아가려는 악적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금발 미녀들의 유혹…….’

그 말이 자꾸만 지영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안 그래도 국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어 매일매일이 불안한 지영이었다. 그런데 이곳보다 더욱 개방적이고, 쭉쭉빵빵 금발 미녀들이 많은 곳에서 과연 창현이 지금처럼 잘 활동할 수 있을까?

석규에게 몇 차례 창현의 인기에 대해서 들었던 지영은 불안감이 증폭되는 것을 느꼈다.

안 그래도 인기 폭발인데 미국에서 가면 정말로 유리가 말했던 것과 같은 사태가 발생할 것 같았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유리가 말했던 것처럼 국내에서 여자 친구를 사귀게 하면 어떨까?

국내에서 여자 친구를 사귄다면 자신이 충분히 둘 사이의 진도를 조절할 수 있는 범위 내에 있다. 게다가 눈으로 직접 지켜볼 수도 있고, 때에 따라서는 여자의 입장에서 창현에게 조언을 해줄 수도 있으리라.

점점 기울기 시작하는 지영의 마음.

그녀가 고민하는 모습을 유리는 미소 지은 채 바라보고 있었다.

입가에 맺힌 그녀의 미소는 점점 진해지고 있었다.

지영의 고민 상황이 한눈에 훤히 들여다 보이고 있었기에.

‘넘어 오려나?’

“결정했니?”

“…정말 오빠가 좋으신 거예요?”

“물론이야. 설마 내가 그걸로 네게 거짓말을 칠 거 같니?”

“그렇지 않아요. 하지만 확답이 필요했어요.”

“그럼…….”

유리의 표정이 밝아지자, 지영이 고개를 저으며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제가 도와드릴 거란 생각은 하지 마세요. 전 그저 옆에서 지켜보기만 할 거예요. 대신 저번에 했던 것처럼 언니를 노골적으로 피하거나 적대하지 않을게요. 오빠의 마음을 훔치는 것은 어디까지나 언니가 해야 할 일이고요.”

“아쉽네.”

지영이 직접 도와줄 확률이 적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아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만약 지영의 도움을 얻을 수 있다면 창현에게 다가가는 것이 더욱 쉬웠을 텐데.

“미안해요. 하지만 제가 직접 나서서 오빠랑 잘 되게 해주는 건 죽어도 못하겠어요.”

“괜찮아. 나도 그렇게 잘난 오빠가 있다면 그렇게 했을 테니까. 지영이 네 입장을 잘 알고 있으니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대신 방금 말했던 것처럼 방해는 하면 안 된다?”

“네.”

“그것만으로도 충분해.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하고.”

자리에서 일어선 유리가 미소를 지은 채 손을 내밀자, 지영은 그 손을 마주잡는다.

모든 것은 유리의 통제 하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때까지도 지영은 자신이 가련한 마리오네트가 되었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고.

“그럼 갈까?”

“돌아가시게요?”

눈에 띄게 밝아지며 은근한 어조로 유리에게 돌아갈 것을 묻는 지영.

여전히 속내가 훤하게 들여다 보였기에 유리는 피식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돌아가다니? 어딜?”

“숙소로 돌아가시는 거 아니었어요?”

“그럴 리가. 아직 아기를 보지 못했는데 내가 왜 돌아가?”

“…….”

“아기를 보려고 병원 근처인 이곳까지 왔는데 돌아갈 수 없지. 어제 말했던 것처럼 안내해줄 수 있지?”

입은 웃고 있었지만 날카롭게 빛나고 있는 유리의 눈은 지영으로 하여금 커다란 중압감을 느끼게 하였다.

그러다 이내, 눈까지 반달을 그리며, 웃음을 짓는다.

“창현이랑 지영이 동생이니까 분명 귀엽겠지?”

“물론이죠.”

“그럼 부탁할게.”

“……네.”

시누이를 완벽하게 휘어잡는데 성공한 유리는 입 꼬리 한쪽이 말려 올라갔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병원 안으로 들어선 유리와 지영은 많은 시선을 받아야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정장 투피스 차림을 한 유리는 오피스 레이디 복장이었고, 늘씬한 몸매와 긴 생머리가 어우러져 보는 사람의 시선을 절로 사로잡게 하였다.

대부분 유리에게 시선을 빼앗긴 것은 남자들인 것은 당연했다.

지영은 유리에게 집중되는 시선이 불편했는지 표정을 살짝 찡그리며 입을 연다.

“괜찮아요?”

“뭐가?”

“이렇게 되면 언니가 이곳에 온 게 노출되잖아요.”

당사자가 아닌 지영이 정작 걱정하는 이상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유리는 대수롭지 않은 듯 대답한다.

“괜찮아. 슬픈 사실이지만 아직 소녀시대 내에서 뚜렷한 이미지가 없어서 알아보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거든. 게다가 이게 있잖아.”

“그, 그런 거예요?”

“슬프지만 그렇지. 대신 앞으로 열심히 하면 되지 않겠어?”

“그러네요.”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유리의 언변에 지영은 그저 고개를 끄덕거릴 수밖에 없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병실이 있는 층에 도착한 두 사람.

병실 앞에 도착하자 유리가 나직하지만 힘이 실린 목소리로 지영을 제지한다.

“잠시만.”

“네, 왜요?”

의아한 표정을 하던 지영은 이내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병실 앞에 선 유리가 재빨리 품속에서 손거울을 꺼내들더니 빠른 속도로 화장을 체크했고, 복장 또한 점검하기 시작한 것이다.

철두철미한 그녀의 모습에 지영은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그냥 문을 확 열어버릴까?’

그러고 싶은 충동이 불쑥 들었지만 그러다가다는 자신의 목숨을 장담할 수 없었기에 충동을 꾹 누르며 유리가 준비를 마치길 기다린다.

“다 됐어. 여기지?”

얼굴을 가리던 썬글라스까지 안에 넣어두었다. 자칫 잘못하면 스타 흉내를 낸다고 밉보일 수 있기에. 작은 가능성마저도 철저하게 따지는 유리였다.

“네. 그럼 들어갈 게요?”

“응.”

유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지영이 문을 두드린다.

똑똑똑.

“누구니?”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자상한 여인의 목소리.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듯한 목소리였다.

‘역시, 창현이 어머니는 목소리도 일품이야.’

단단히 콩깍지가 씐 유리는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감탄했다.

아닌 척했지만 천하의 사마율도 시어머니(?)를 대면하려 하니 가슴이 걷잡을 수 없이 쿵쾅쿵쾅 뛰고 있었다.

“엄마 나에요.”

“지영이니? 들어오지 않고 뭐하니?”

“손님이 같이 왔거든요.”

“모시고 들어오렴.”

순순히 손님의 입실을 허락하자, 지영은 유리를 힐끔 보며 말한다.

“안으로 들어가요.”

“응. 난 준비됐어.”

그녀의 대답에 지영이 병실 문을 열었고,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 유리는 그 뒤를 따라 조심스럽게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유리의 눈에 들어오는 지선의 모습.

지선은 입가에 자상한 미소를 지은 채 유리를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어서 오세요, 어머, TV에서 자주 나오시던 분이네.”

‘이제 시작이야.’

쿵쿵 뛰는 심장 박동을 느끼며 앞으로 나선 유리가 병원에 들어오기 전 구입한 과일을 조심스럽게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조신하게 고개를 숙인다.

미남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모름지기 직구 승부다!

“안녕하세요, 어머님?”

“……!”

병실에 조신율이 강림했다.


‘어, 어머님이라고?’

떡 벌어진 지영의 입은 닫힐 줄 모른 채 크게 벌어져 있었다.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귀를 후벼보았지만 방금 전 말이 잘못들은 것일 리가 없다. 어머니라니, 처음부터 초강수를 두는 유리가 아닐 수 없다.

“어머님?”

지선도 그 말에 고개를 갸웃하며 반응을 보이자 유리는 조신한 태도로 수줍게 웃음을 지으면서 말한다.

“제가 지영이랑 많이 친해서요. 아주머니보다는 친근한 어머님이라는 단어가 더 입에 붙는 것 같아서 그렇게 칭했는데 혹시 불편하신가요?”

다른 목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즉석에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유리였다.

가증스러운 그녀의 두 모습에 지영은 떡 벌어진 입을 다물 줄 모른 채 그저 어버버! 할 따름이었다.

“불편하지는 않지만…….”

“편하게 대해주세요.”

“그래도 될까?”

“물론이죠. 저도 어머님이라 불러도 될까요?”

“그게 편하다면 그렇게 해도 괜찮단다.”

조심스럽게 묻는 유리의 모습에 홀딱 넘어간 지선은 순순히 어머님이라는 호칭을 허락하고 말았다. 그것이 단순히 지영의 친한 언니라서 하는 것이 아닌, 창현을 향한 사심이 담긴 호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도란도란 유리와 이야기를 나누던 지선은 어느덧 그녀가 편해졌는지 어느새 편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무슨 일로 온 거니?”

“아기가 너무 귀엽다고 지영이가 자랑을 해서 한 번 찾아오게 되었어요.”

“아기가? 호호! 우리 지영이가 아닌 척 해도 그렇게 자랑을 했구나. 너무 귀엽단다.”

‘난 그런 말 한 적 없다고, 엄마!’

진실이 목구멍 끝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화기애애한 지선과 유리의 분위기를 타파할 수 없어서 꾹 억누르며 분한 마음을 삭힐 뿐이었다.

“아기를 한 번 볼 수 있을까요?”

품안에 있는 아기를 보며 유리가 묻자, 지선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럽게 아기를 유리에게 건넨다.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아기를 넘겨받은 유리가 살살 흔들어주면서 아기를 돌보기 시작한다.

그 모습을 본 지선의 눈이 동그랗게 변한다.

“어머나, 아기를 보는데 상당히 능숙하네?”

“네? 아, 제가 아기를 좋아하는 편이라서요. 아기 보는 것도 좋아하다 보니 그 진심이 전해지나 봐요.”

“어쩜, 지영이는 언니임에도 불구하고 아현이가 안기면 막 울던데.”

“그건 내가 아기 돌보는 게 서툴러서 그런 거야!”

갑자기 표적이 되어버린 지영이 바락바락 외쳤지만 그것은 오히려 지선으로 하여금 혀를 차게 만들었다.

“열다섯이나 되었으면서 아직도 조신하지 못하니. 여기, 그러니까…….”

유리의 이름을 몰랐기에 지선이 살짝 난감한 표정을 짓자, 그 의도를 알아차린 듯 유리가 빠르게 자기소개를 한다.

“유리! 권유리입니다.”

“그래, 유리 양처럼 조신하질 못하니. 이렇게 아기도 잘 돌보고, 살림도 싹싹하게 잘할 것 같은데.”

“씨잉, 엄마는 나한테만 그러고…….”

“엄마가 말을 하면 좀 들을 줄 알아야지 매일 칭얼거리기만 해. 여기 유리같이 조신한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서? 좀 본받도록 해. 친하다면서 어떻게 이런 모습은 본받지 못하니.”

‘유, 유리 언니가 조신하다고?’

말도 안 되는 말을 연발하는 지선의 말에 지영이 얼빠진 표정으로 유리를 바라본다.

자신을 농락하며 창현을 차지할 음모를 꾸미는 유리가 도대체 어딜 봐서 조신하단 말인가!

시선을 마주한 유리는 눈웃음을 치면서 지영에게 말하고 있었다. 이것이 세상의 이치라고. 너도 어서 세상을 살아가는 법을 깨달으라고 말이다.

지영은 속이 터져버릴 것 같았지만 차마 유리의 진실을 폭로할 수 없었다. 여기에서 말해봤자 바보가 되는 것은 자신이라는 걸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알았어요. 본 받을게요.”

“그걸 알았다니 참 다행이다. 여기 유리를 보렴. 복장부터 시작하여 얼마나 조신하니. 이런 며느리가 있으면 소원이 또 없겠네.”

‘헉!’

흘러나온 지선의 말에 지영은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유리는 아무런 말도 안했음에도 불구하고 지선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며느리라는 단어가 나왔던 것이다.

설마 이것도 모두 유리가 주도한 것인가?

그렇다면 자신은 정말 위험한 존재를 무방비로 풀어주겠다는 선언을 한 것과 다름없었다.

속이 타들어가는 지영과 달리 유리의 입가에는 함박 미소가 맺히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지선의 입에서 며느리라는 단어를 흘러나오게 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속으로 방방 날뛰고 있지만 오늘 그녀의 컨셉은 ‘조신율’이다. 너무 좋아하지 않되, 싫어하지 않는 듯, 아니, 상당히 좋아하는 모습을 연출하며 말한다.

“호호호! 어머님, 며느리라뇨. 그런 과분한 말씀을.”

과분하기는커녕 당장 허락만 떨어지면 혼인신고서부터 쓰고 싶었지만 조신율의 컨셉에 맞게 꾹꾹 눌러 담는 유리였다.

지선은 유리의 대답에 단호히 고개를 저으며 말한다.

“아니, 난 창현이가 스타라는 걸 떠나서 유리 같이 조신한 여자가 며느리로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단다. TV에서 자주 본 것 같은데, 유리도 연예인이니?”

“네, SM엔터테인먼트에서 소녀시대라는 그룹의 일원으로 있습니다.”

잔뜩 점수를 딴 것 같아 기분이 좋아진 유리는 한순간 힘이 실린 목소리로 말했다가 아차! 하고 말았다.

하지만 지선은 그 말에 개의치 않는 듯 유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SM엔터테인먼트라면 그 이가 친하게 지낸다고 말하던 곳이구나. 어떻게 또 인연이 되어 이렇게 찾아오기도 하고. 혹시 창현이랑도 아는 사이니?”

“네, 알고 지내지만 서로 바쁘다 보니 제대로 연락을 하지 못하고는 해요.”

사실은 연락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걸 알고 있기에 최대한 자제하고 있지만.

“그러니? 유리는 올해 나이가 어떻게 되니?”

“올해 스무 살입니다.”

“스물? 이거 미안하네. 생각했던 것보다 많이 어린 것 같아.”

지선의 말에 유리는 속으로 뜨끔했다. 자신이 성숙한 외모를 지니고 있어서 그 부분이 가장 마음 속에 걸리고 있었다.

가뜩이나 세 살 연상이라는 단점이 존재하고 있는데, 성숙한 외모로 인해 더 나이 차이가 나 보이면 끔찍했으니까.

다행히도 창현 또한 나이에 비해 제법 성숙해보인다는 점이었다.

뜨끔했지만 유리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말한다.

“호호! 많은 분들이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해요. 하지만 이것도 제 하나의 매력이라 생각하니 기분이 나쁘지는 않아요.”

“그렇게 생각하니 다행이네. 스무 살이면 창현이랑 세 살 차이고, 아주 적당한데…….”

“호호! 그렇게 말씀해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빈말이 아니란다. 창현이는 오히려 나이가 좀 더 많은 연상이 어울리는 스타일이란다. 제 아버지를 닮아서 여자관계는 좀 더 주도적으로 이끌어주는 스타일이 좋거든. 그런 의미에서 유리랑 잘 어울릴 것 같고.”

“과찬이세요. 창현이 같은 슈퍼스타가 저와 어울리는 것 자체가 영광이죠.”

‘거짓말!’

아닌 척 발뺌하는 유리를 보면서 지영은 속이 터지는 것 같았다.

어떻게 하면 저렇게 얼굴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내숭을 떨 수 있단 말인가!

당장 지선을 병실 밖으로 끌고 가서 유리의 진실 된 모습을 미주알 고주알 다 밝혀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힐끔힐끔 자신을 바라보며 방해하면 용서하지 않겠다는 식으로 경고하는 유리의 눈빛에 지영은 그저 속이 타들어갈 뿐이었다.

“슈퍼스타를 떠나서 창현이도 한 사람의 남자 아니겠니? 사실 연예인이면 대부분 좋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유리를 보니까 그것도 아닌 것 같네. 혹시 창현이랑 잘 해볼 생각이 없니?”

“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게 이야기를 꺼내는 지선의 말에 유리는 속으로 놀라고 말았다.

오늘 이 자리에서 지선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점수를 얻고, 천천히 이미지를 쌓아나가 자연스럽게 예비 며느리의 자리를 굳히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처음부터 예상보다 빠르다는 느낌이 들기는 했는데, 오늘 이 자리에서 즉석으로 며느리 자리를 권유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왜? 혹시 창현이가 싫은 거니?”

“그, 그럴 리가요. 다만 너무 갑작스러워서…….”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른 게, 창현이가 많은 인기를 얻고 있는 만큼 빨리 자리를 잡아 정착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거든. 가정이 있고, 가족이 있으면 창현이가 외국에서 활동하는 것도 조금 더 안정감이 있지 않겠니? 한국에 있는 것으로도 불안한데 미국에 가면 어찌 될까 싶기도 하고…….”

그 딸에 그 엄마라는 단어가 떠오르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지영도 미국 금발 미녀의 유혹에 넘어가더니, 지선도 미국의 개방적인 분위기를 걱정하고 있던 것이다.

“그래서 창현이가 일찍 결혼했으면 하는데, 유리의 생각은 어떠니?”

“너무 갑작스럽지만 싫지는 않아요…….”

천하의 사마율이라 해도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예기지 못한 지선의 급진전된 이야기에 본심을 드러내고 말았다.

“호호! 그럴 것 같았단다. 아니, 창현이 정도면 당연히 그렇다고 생각해. 내 아들이지만 정말 매력이 넘쳐나는 아이거든.”

“그건 맞는 말씀이에요. 사실 주변에서 느껴지는 인기만으로도 엄청난데, 막상 그 열기를 느끼게 되면 상상을 초월하거든요.”

“그러니? 어느 정도로?”

전혀 몰랐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는 지선.

그 모습에 유리가 오히려 의아한 시선을 하며 지선에게 묻는다.

“지영이도 알고 있을 텐데 말을 해주지 않았나요?”

“저건 내가 자기 오빠 이야기를 입에 담는 것도 싫어한단다.”

“내, 내가 언제요!”

혼자서 멀뚱히 서 있던 지영은 버럭했지만 지선의 기세에 그대로 깨갱하고 말았다.

유리와 지선을 바라보는 그녀의 속은 복잡했다.

‘이게 뭐야. 엄마라면 오히려 오빠에게 접근하는 것을 차단해줄 줄 알았는데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도움을 주고 있잖아.’

명백한 자신의 생각 오류가 아닐 수 없다.

혼란에 빠진 지영을 놔둔 채 유리와 지선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유리는 창현의 인기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세세하게 풀어서 이야기를 해주기 시작했고, 지선은 처음 듣는 아들의 대단함에 호기심이 도는지 눈을 반짝이며 그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이야기가 길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리의 자세는 한 점 흐트러짐이 없었다.

오늘의 조신율은 싱크로율 100%의 완벽함을 자랑한다.

“호호! 창현이가 그렇게 대단할 줄 몰랐네.”

“사실 창현이가 많이 겸손해서 그렇지, 거만하게 굴어도 아무도 그걸 지적하지 못할 거예요. 그 정도로 대단하거든요.”

“그래도 창현이가 거만한 건 싫네. 그런 부분이 보이면 언제든지 말해주렴.”

“네.”

지선과 연결고리를 만드는데 성공한 유리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품안에 안겨있는 아기를 보면서 감탄 섞인 어조로 묻는다.

“그런데 아기가 정말 귀여워요. 어머님을 쏙 빼닮은 게 크면 남자들을 우르르 몰고 다닐 것 같은데요?”

“그러니? 제 아빠와 날 닮아서 못난 외모는 아니란다. 호호! 빈말이라도 고맙네.”

딸의 외모에 대해서 칭찬을 받자, 흡족한 듯 지선이 미소를 짓는다.

“빈말이라니요. 제가 굳이 빈말을 할 이유가 없잖아요. 정말이에요, 어머님.”

“그렇다면 다행이네. 혹시 아기가 지영이처럼 못된 아이로 자라날지 몰라 걱정했거든.”

“모, 못된 아이라뇨!”

졸지에 화살이 자신에게 날아오자 발끈하는 지영.

하지만 지선의 태도는 싸늘했다.

“엄마한테 숨기는 것 많은 아이는 착한 아이가 아니란다.”

도대체 누가 딸이고, 누가 남인지. 유리보다 자신이 더 냉대를 받자 지영은 서러움이 복받치는 것을 느꼈다.

“그러지 마세요, 어머님. 지영이도 속이 참 따뜻한 아이에요. 다만 아직 그걸 표현하는 게 서투를 뿐이죠. 따뜻한 태도로 대해주시면 지영이도 다시 예전 모습으로 돌아올 거예요.”

“언니…….”

감동한 듯 유리를 바라보는 지영. 자신이 철저하게 외톨이가 되어줄 때 옆에서 힘을 준 것은 바로 유리였다. 감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가? 안 그럴 것 같은데.”

“사춘기라는 게 있잖아요? 자기 마음을 표현하기 쑥스러워서 그런 거예요. 좀 더 따뜻하게 대해주시면 지영이도 괜찮아질 거예요.”

“정말 마음 씀씀이도 착하네. 유리 말고 새아가라 불러도 되겠니?”

“네, 어머님.”

바뀐 지선의 심정은 곧 호칭의 변화를 가져왔다.

수줍은 듯 조신하게 고개를 숙이며 얼굴을 붉히는 유리를 보며 지선은 미소를 지었다.

어머님(?)의 신뢰를 얻은 유리는 누구도 모르는 사이 며느리 후보 0순위에 등극하는데 성공하였다.

더불어 지영의 신뢰 또한 얻어 걸렸다.

이것이 유리의 위엄이다.


제90.66장. 마왕강림.


“룰루루.”

윤아는 오랜만의 외출에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드라마 촬영을 하고, 갑작스러운 인지도 상승으로 인해서 좀처럼 휴식 시간을 갖지 못하던 그녀였다. 소녀시대의 윤아가 아닌, 연기자 윤아로서 부지런히 움직여야만 했으니까.

안 그래도 초창기부터 자신이 먼저 인지도를 얻게 되면서 멤버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졌던 윤아는 회사에 간곡히 부탁하여 아홉 명이 함께 하는 행사 스케줄 만큼은 같이 하게 해달라고 하였다.

그 덕분에 촘촘한 스케줄은 살인적으로 변해가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윤아는 하루하루가 스케줄이 살아가는 것인지, 자신이 살아가는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지경이 되어버렸다.

“그래도 오늘은 쉴 수 있다는 말씀!”

하루도 아닌 무려 3일 동안 쉴 수 있다는 사실이 윤아로 하여금 즐겁게 하였다.

듣기로는 조만간 앨범 준비에 착수하게 되면서 주어지는 휴식이라고 하는데, 앨범을 준비하게 되어서 기쁘기도 하였고, 휴식을 즐길 수 있게 되어서 기쁘기도 하였다.

그리고 오늘, 휴일이 되자마자 약속이 잡혔지만 내일도, 내일 모레도 쉴 수 있다는 충만함이 윤아로 하여금 즐겁게 만들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숙소에서 아침 식사를 해결한 뒤 윤아는 외출을 위해 준비에 착수했다.

스케줄이 없는 만큼 간단한 복장을 차려입은 윤아는 거울을 보며 최종 체크를 한 뒤 입가에 미소를 짓는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그런데 오늘 같은 날은 창현이와 데이트를 해줘야 하는데…….”

화창한 가을 날씨가 한껏 느껴지는 오늘, 창현이와 데이트를 할 수 있다면 소원이 없다고 생각하는 윤아였다. 정작 창현은 다른 여자(미영)와 놀아나고 있는 것을 모른 채.

수연은 여전히 꿈나라에 빠져 있었고, 미영은 아침 일찍, 유리도 한껏 차려입은 채 외출을 하였다.

숙소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주현의 방에 들어간 윤아가 말한다.

“주현아, 난 잠시 나갔다올게.”

“어디 가시게요?”

“회사에 볼 일이 있어서 좀 가보려고. 정확히 말해서 회사 앞 커피숍이지만.”

“네, 다녀오세요. 대신 늦게 들어오시면 안 돼요.”

“응, 물론이지.”

정형화 된 주현의 질문에 여유롭게 대답한 윤아가 숙소를 나섰다.


숙소를 나선 윤아가 향한 곳은 SM엔터테인먼트 본사가 있는 곳이다.

택시를 타고 회사 근처에서 내린 윤아는 눌러쓴 모자와 안경을 점검하고는 조심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SM엔터테인먼트에는 늘 팬들이 대기하고 있었기에 자칫 잘못해서 정체를 들키기라도 하면 곤경에 처할 수도 있다.

꼼짝없이 한두 시간은 싸인을 해주고, 사진도 찍어줘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싫은 것은 아니지만 모처럼 휴일이니 만큼 골치 아픈 일들을 사양하고 싶었다.

핸드폰을 연 윤아는 약속 시간이 10여 분 남은 것을 보고는 빠른 속도로 문자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언니, 어디에요?]

그러자 곧바로 날아오는 답장.

[커피숍에서 기다리고 있어.] 싸부님

[곧바로 갈게요.]

생각보다 일찍 왔다고 생각한 윤아는 답장을 보내고는 빠르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윤아를 보고는 혹시나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지만 워낙 다급하게 움직이는 그녀를 보고서는 그냥 지나치고 말았다.


‘커피숍도 오랜만이네.’

고급 커피 전문점 안으로 들어선 윤아는 달콤한 케이크와 커피를 마실 걸 생각하니 입에 절로 침이 고이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 뒤 느낄 행복. 지금은 약속 상대를 만나는 것이 먼저였다.

1층을 둘러본 윤아는 상대가 없음을 확인하고는 2층으로 올라간다. 그리고 저 멀리서 아름다운 외모로 자체발광하고 있는 여인을 발견하고는 빠르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언니, 오랜만이에요.”

윤아가 오늘 만나기로 한 상대는 다름 아닌 연희였다.

그녀를 본 연희는 입가에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그러게, 보기 힘드네?”

“헤헤! 제가 좀 바빴어요, 요즘.”

입가에 미소를 지은 윤아가 맞은편에 앉으며 입을 열려고 하자, 연희는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말한다.

“주문은 미리 해뒀어. 치즈 케이크 두 조각하고, 에스프레소하고 모카 라떼. 아직도 모카 라떼 마시는 거 맞지?”

“네, 맞아요. 잊지 않으셨네요.”

“훗! 내가 잊을 리 있니. 몇 번을 네게 사줬는데.”

“그러네요. 싸부!”

사부라는 호칭에 연희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짓는다.

강력한 주먹을 지녔다고 하여, 철권 윤아, 혹은 돌주먹 윤아라는 별명을 가진 그녀의 주먹 기술은 연희에게 전수받은 것이었다.

그 파괴력은 남성 못지않았기에 장난으로 한 번 맞아본 남자 연습생들은 지금도 뼈와 살이 분리되는 듯한 그 고통을 잊지 못하고 몸서리를 칠 정도라고 한다.

“그 말도 오랜만에 들어보네.”

“저도 오랜만에 해보네요. 헤헤!”

입가에 미소를 지은 윤아가 어린 아이처럼 엉겨붙으려 하자, 연희의 입가에 포근한 미소가 걸린다.

잠시 후, 벨이 울리자, 윤아가 냉큼 그것을 들고는 자리에서 일어선다.

“언니가 계산하셨을 텐데 제가 갔다올게요.”

“어?”

“금방 가지고 올게요!”

벨을 들고 후다닥 사라지는 윤아였다.

그녀를 붙잡기 위해 손을 뻗던 연희는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중얼거린다.

“계산 아직 안 했는데.”

……졸지에 독박을 쓰게 된 윤아였다.


잠시 후, 커피와 치즈 케이크를 들고 올라온 윤아는 울상이 되어 나타났다.

“이잉, 언니, 뭐에요.”

“내가 뭘?”

“계산 안하셨잖아요!”

“난 했다고 한 적 없어. 그리고 내가 들고 가려 했는데 윤아 네가 먼저 가버렸잖니. 난 잘못 없어.”

양손을 들고 어깨를 으쓱하는 모습에 윤아의 입이 튀어나온다.

“언니는 내 성격을 훤하게 파악하고 있잖아요. 분명 의도한 거죠?”

“글쎄?”

“나빴어.”

더 따져봤자 손해를 보는 건 자신이었기에 윤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항복을 선언한다. 그 모습에 연희는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얄미운 표정으로 말했다.

“자, 그러면 인기 연예인 윤아 양이 사준 커피를 마셔볼까?”

“언니 미워.”

“풉! 장난이야, 장난. 대신 저녁은 내가 살게. 맛있는 걸로.”

“알았어요.”

항복 선언을 하는 연희의 모습에 윤아가 어느 정도 풀어진 모습을 보인다.

화를 푼 듯하자, 연희가 에스프레소를 한 모금 마신다.

무척 쓴 맛이 입속에 퍼져 나갔지만 그녀의 입가에 맺힌 미소는 더욱 짙어지고 있었다.

“내가 갑자기 부른 게 조금 이상하지?”

“음? 오랜만에 한 번 보자고 한 게 전부 아니었어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대답하는 윤아를 보면서 연희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맹한 모습을 보이면 분명 소녀시대 멤버들에게 여기저기 치이고 이용당할 텐데.

‘그러다 보면 성장하겠지.’

매정하게 외면하는 연희였다.

자신이 오늘 윤아를 부른 것은 오랜만에 본 것도 있지만 다른 이유도 존재했다.

그것은 윤아의 도움이 필요하기도 하였고.

“그런 이유도 있고, 윤아 네게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것도 있어서 불렀어.”

“저한테요?”

“응. 혹시 얼마 전에 뮤직비디오 촬영 건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은 적 있어?”

“뮤직비디오요? 언제요?”

고개를 갸웃하는 윤아. 자신이 뮤직비디오 촬영을 한 것은 소녀시대 앨범인 <Kissing You> 참여할 때가 전부였다. 그 이후에 뮤직비디오 촬영한 것은 없다.

“대충 7월쯤?”

“없었는데…….”

“그래?”

묘한 미소를 짓는 연희를 보면서 윤아는 궁금증이 치솟는 것을 느꼈다. 도대체 무엇이기에 뮤직비디오 이야기를 꺼내는 것일까? 분명 연희가 자신의 호기심을 자극해서 묻게끔 하려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궁금한 것을 그냥 넘길 수 없는 노릇이었다.

연희는 윤아가 알고 있는 그 어떠한 사람보다도 계략에 능한 인물이었다.

그 무서운 미영과 유리마저도 연희 앞에서는 한 수 접어줘야 한다고 생각할 정도였으니까.

“언니도 짓궂기는. 어서 알려줘요.”

“내가 좀 짓궂었나? 다른 게 아니라 윤아 네게도 뮤직비디오 제의가 왔었어. 그것은 나한테도 왔었고.”

“언니에게도요? 도대체 뭐길래?”

“그리고 또 한 명의 후보가 있었지. 그리고 그 후보가 뮤직비디오에 출연했고.”

“누군데요? 우리 소속사에요?”

자신도 제의를 받았고, 연희 또한 제의를 받았다. 그런데 두 사람 모두 출연하지 않았다면 도대체 누가 대신 출연했단 말인가?

“응, 너도 잘 아는 사람이야. 너희 그룹의 정수연, 제시카가 바로 그 뮤직비디오에 출연했으니까.”

“수, 수연 언니요? 그럼 설마…….”

놀라움이 번져 나가는 윤아의 얼굴.

최근에 수연이 출연한 뮤직비디오는 딱 하나뿐이다.

연희도 고개를 끄덕이며 확실하게 쐐기를 박는다.

“바로 현의 뮤직비디오야. 나에게도 제안이 왔었고, 윤아 네게도 왔었지.”

“…….”

할 말을 잃은 윤아는 입을 다물었다. 자신에게도 뮤직비디오 제안이 왔었다는 말에 그녀는 속으로 열이 스멀스멀 치밀어 오르고 있는 중이었다.

잘만 했으면 그 뮤직비디오에서 창현과 로맨스 연기를 하는 것은 자신이 되었을 텐데!

…그리고 마지막에 키스신도!

실수인 척 하면서 확 입맞춤을 해버리는 행복한 상상을 했지만 이미 지나가버린 일이었다.

“너한테는 제안이 오지 않았을 거야.”

“어째서요?”

“삼촌에게 듣기로는 드라마에서 같이 나왔기 때문에 뮤직비디오에서 같이 나오게 되면 스캔들이 생길 수 있다고 하던데? 사실 노이즈 마케팅으로 쓰면 좋지만 이상하게도 삼촌이 조금 몸을 사리시더라고.”

“그러네요.”

모든 정황이 이해가 가자 윤아는 납득할 수 있었다. 당시 자신은 창현과 함께 드라마를 막 끝낸 직후였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감정을 감출 수 없었다.

‘실수인 척하고 입맞춤 여러 번 할 수 있었을 텐데.’

이미 그렇게 수연이 한 걸 모른 채 아쉬워하는 윤아였다.

그러다가 무언가 떠오른 듯 의아한 표정으로 연희를 바라보며 묻는다.

“그런데 갑자기 그 이야기는 왜 꺼내시는 거예요?”

“응? 아, 삼촌이 네게 비밀로 하라 했지만 이렇게 숨기다가 나중에 밝혀지게 되면 좋지 않은 감정으로 번질 수 있잖아? 그래서 모든 일이 끝나고, 네가 쉬는 날에 맞춘 오늘 이야기를 하는 거지. 어때? 섭섭해?”

“솔직히 섭섭하죠. 하지만 이유가 있으니까 이해할 수 있어요.”

이미 열차는 떠났고, 종착역에 도착했으니 더 이상 무어라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얼굴에 서린 짙은 아쉬움은 어쩔 수 없었다.

연희는 그 모습을 보며 입가에 진한 미소를 지었다.

“쿡쿡! 많이 섭섭했나 보네.”

“우씨! 그런 좋은 기회를 접하지도 못하게 되었으니 당연히 그렇죠.”

만약 알았더라면 당장 찾아가서 하겠다고 난리법석을 피웠을 텐데!

스캔들 기사가 나면? 얼씨구나 하고 살며시 인정해서 그대로 공식 커플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것이 윤아의 생각이었다.

현실로 이어질 수 없기에 망상으로 끝나는 것이었지만.

행복한 상상에 젖어있던 윤아는 이내 현실을 깨닫고는 한숨을 푹 내쉰다.

“에휴! 이미 끝난 일이니 뭐라고 하기에도 그러네요. 어쨌든 말해줘서 고마워요, 언니. 만약 나중에 내가 스스로 알았더라면 크게 실망할 뻔 했네요.”

“그래서 지금 말해준 거야. 솔직히 나도 수연이한테 양보하면서 많이 배가 아팠거든.”

“배가 아프다니… 왜요?”

“왜라니? 현의 뮤직비디오잖아. 나오는 것만으로도 인지도가 CF 몇 개 찍는 것과 맞먹을 정도로 상승할 기회인데 당연히 배가 아프지.”

“아아, 그러네요.”

당연한 이유에 윤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녀가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연희에게 물어보았던 것은 전신을 뒤덮는 기묘한 기분 때문이었다.

뭔가 콕콕하고 예리한 바늘이 전신을 찌르는 기분이랄까.

결코 유쾌하지 않은 기분이었다.

윤아의 그 느낌은 정확했다.

“그리고… 또 하나 이유가 있긴 해.”

묘하게 말끝을 늘어뜨리면서 연희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번져 나간다.

그 미소를 보는 순간 윤아는 전신에 소름이 바짝 돋는 것을 느꼈다.

눈앞의 여인은 수연 언니의 카리스마와 유리 언니의 심계, 그리고 주현의 꼼꼼함과 자신보다 강력한 무력(?)을 겸비하고 있었다.

잔뜩 긴장한 윤아가 불안한 표정을 띤 채 연희의 말을 따라한다.

“또 하나의 이유라면……?”

“바로 현에게 호기심이 생겼다랄까? 이성적인 호기심.”

쿠르릉! 콰과광!

윤아의 뇌리에 강렬한 번개가 연이어 내려치기 시작했다.

소녀시대 멤버들에게 마왕이라 불리는 이연희가 창현에게 관심을 드러낸 것이다.

제발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던 일이 마침내 터지고 말았다.

새하얗게 질린 윤아를 보며 연희는 흥미가 감도는 미소를 지었다.


윤아는 지금 자신이 들은 말을 믿을 수 없었다.

마왕! 괴팍한 성격과 말도 안 되는 엄청남으로 인하여 연습생들에게 마왕 소리를 듣던 연희가 지금 창현에게 이성적인 호기심이 생겼다고 한다.

이 말을 믿을 수 있을까?

절대 아니었다.

왜냐하면 연습생 생활을 할 때 연희는 단 한 번도 남성에게 관심을 보인 적이 없다.

때문에 남성에 대한 관심이 아예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오늘 말도 안 되는 말을 한 것이다.

만약 연희가 창현을 좋아하게 되면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혼란에 빠져들 것이다.

‘내가 잘못들은 걸 거야.’

요즘 몸이 허해져서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라 중얼거린 윤아가 연희를 바라보며 말한다.

“언니, 방금 전에 뭐라고 했어? 내가 잘못 들은 것 같은데.”

“잘못 들었다고? 그럼 다시 말해줘야겠네. 가수 현에게 관심이 생겼어. 흔히 말하는 이성에 대한 관심이랄까?”

“어, 언니가 왜?”

잘못 들은 것이 아니란 게 판명되자 윤아의 표정이 보기 좋게 찌푸려졌다. 끝까지 아니라 믿고 싶었지만 연희는 결국 확인 사살까지 하였다.

“왜라고 물으면 설명해주기가 좀 그러네. 간단하게 말하면 여태까지 한 번도 두근거리지 않던 내 심장이 뛰었다는 것? 그리고 자꾸만 눈길이 그쪽으로 가려 하네.”

“…….”

입을 꾹 다문 윤아가 머리를 맹렬하게 회전하고 있었다.

지략 캐릭터가 아니었기에 그녀가 머리를 굴리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떻게 해서라도 연희가 창현을 포기하게 만들어야 한다.

“언니는 지금 착각하고 있는 거예요.”

“착각? 왜?”

“창현이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잖아요. 그런데 이성적인 호기심이라니. 말도 안 되잖아요.”

제발 착각으로 생각하길 바라는 윤아의 말이었다.

허나, 연희는 그 말에 피식 웃음을 지으면서 말한다.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더욱 보고 싶네. 영상으로 내 마음을 잡아끌 정도라면 실제 외모는 어떻다는 거겠어? 정말 기대가 되네?”

“어떻게 한 번도 보지 않고 그래요.”

“보지 않아서 더욱 궁금한 거야. 소문처럼 예의가 바른지 궁금하기도 하고, 어쨌든 한 번 만나보고 싶네. 혹시 CF 같은 거 촬영할 때 동반으로 할 수 없으려나…….”

‘안 돼!’

당장 수만에게 달려가 자리를 만들어달라 할 기세인 연희를 보면서 윤아는 입술을 깨물면서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이성적인 호기심을 가진 그녀가 창현을 보게 되면 어떻게 될지 생각하기도 싫었다.

상대를 철저하게 분석하고, 조금이라도 틈을 노출하지 않으며,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는 강렬한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는 것이 연희다.

그녀가 마음만 먹으면 창현은 그녀의 거미줄에 칭칭 휘감겨 언제든지 사라질 수 있는 가녀린 먹이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어떻게든 연희의 관심에서 멀어지게 만들기 위해 고심하던 윤아가 눈을 질끈 감았다.

‘미안! 다 창현이 널 위해서야.’

그렇게 중얼거린 윤아는 연희를 바라보며 결연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언니한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요?”

“나한테? 무슨 말인데?”

뭐든지 말해보라는 듯, 여유로움을 지닌 연희를 보면서 윤아는 갈등이 되는지 입술을 꼭 깨물고 있다가 결심을 내린 듯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사, 사실 말하지 않으려 했는데… 창현이는 성격이 좋지 않아요.”

“응?”

윤아의 말에 반응을 보이는 연희였다. 동그랗게 뜨인 눈과 살짝 벌어진 입은 그녀가 무척 놀랐다는 것을 뜻하고 있었다.

‘좋았어.’

만족스러운 연희의 반응에 속으로 만세를 부른 윤아가 재빨리 지금의 여세를 몰아 말을 이어나갔다.

“뿐만 아니라 방에 박혀서 뒹굴뒹굴 하는 걸 좋아하고요. 스케줄이 없으면 동네 아저씨처럼 후줄근한 츄리닝을 입고 다녀요. 게다가요…….”

이것저것 말하는 내용은 그야 말로 가관이었다.

항상 깔끔하게 다니던 창현은 어느덧 잘 씻지 않는 사람이 되었고, 녹음실에서 곡 구상을 하는 것이 방에만 박혀서 백수 생활하는 걸로 둔갑되었다. 뿐만 아니라 가정식을 잘 차리던 그의 요리 실력은 음식 파괴자라 불리는 티파니보다 못해졌으며, 상냥한 성격은 어느덧 팬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바뀌었다.

줄줄이 거짓말을 하다 보니 윤아는 양심이 콕콕 찔리는 것을 느꼈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지만 윤아는 속으로 끝없이 자신을 다잡아나갔다.

‘창현이를 위해서야.’

연희의 마수에 걸려들지 않게 하기 위해서!

절대 연희가 경쟁자로 등극하게 되면 자신이 패할 것 같아서 그런 것이 아니다. 창현이를 위해서 윤아는 누나의 입장으로 순수하게 말하는 것이다.

“그래?”

“네, 그게 끝이 아니라 창현이는 여자를 무척 좋아하고요…….”

이어지는 윤아의 말을 들으면 창현은 그야 발로 세상에 둘도 없는 바람둥이가 되어 있었다.

윤아의 거짓말로 인해 창현은 졸지에 나쁜놈이 되었지만 그 이야기를 듣고 있는 연희의 표정은 평온할 뿐이었다.

그저 가끔 “그래?”, “그렇구나.” 라는 무성의한 대답만 흘러나올 뿐.

상대의 반응이 미지근하니 자연스레 윤아의 거짓말은 길어지고 있었다.

“이거 안 되겠네.”

“그렇죠? 안 되겠죠?”

윤아의 말을 듣고 연희가 표정을 살짝 찌푸리며 중얼거리자, 그녀가 포기했다는 식으로 해석한 듯 윤아의 표정이 급속도로 밝아진다.

하지만 이어진 연희의 말은 윤아로 하여금 절망하게 만들었다.

“응? 아니. 오히려 더욱 전의에 불타오르는 걸? 그렇게 나쁜 남자인데 세상을 완벽하게 속이고 있다니. 오히려 더 정복해보고 싶어졌어.”

“…….”

“왜 그러니?”

황당함에 할 말을 잃은 윤아가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자, 연희가 입가에 미소를 띠며 묻는다.

“그, 그렇게 나쁜 남자는 언니에게 어울리지 않아요!”

한 줄기 희망을 건 윤아가 외친다.

이 모든 것은 연희를 위해서라고 스스로 위로하면서.

“요즘은 나쁜 남자에게 끌리는 법이잖니. 게다가 능력도 되고, 외모도 되고. 뭐 하나 떨어지는 것도 없는 걸.”

“하, 하지만 잘못하면 언니가…….”

어떻게든 창현에 대한 관심을 거두게 하려는 윤아의 노력은 눈물겨웠다.

문제는 그 눈물겨운 노력이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는 점이지만.

“미안, 윤아야. 그럴수록 더욱 불타오르네? 후훗!”

“언니…….”

“잘 할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마렴. 정 어려우면 나중에 포기해도 되니까.”

“…….”

연희의 말에 완전히 풀 죽은 표정을 짓는 윤아였다.

어떻게든 창현을 포기하게 만들려고 했는데 자신의 노력은 헛된 것이었다.

그것도 최강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는 연희가 연적으로 등장하게 될 판이었으니 윤아의 절망은 더욱 큰 것이었다.

‘후훗!’

풀 죽은 윤아를 보면서 연희는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애초부터 윤아가 하는 창현의 험담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아의 말에 맞장구 쳐준 것은, 그녀가 하는 거짓말을 토대로 창현의 정보에 대해서 차근차근 습득하고 있었던 것이다.

‘적어도 윤아가 말한 거짓말은 모두 반대라는 건데, 설마 톱스타 중에서 그런 사람이 있을 줄이야.’

왜 애들이 뿅 갔는지 알 수 있었다.

엄청난 인기를 얻고 있음에도 한결 같은 모습을 보이며, 초심을 잃지 않은 그 모습은 누가 봐도 반해버릴 것 같은 모습이었으니까.

더욱 호기심이 치솟는 것을 느끼는 연희였다.

“왜 그러니?”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모른 척, 윤아를 향해 말을 걸자, 깜짝 놀라며 고개를 젓는다.

참 놀려주는 맛이 있다.

“그럼 부탁을 해도 될까? 현과 개인적으로 만나보고 싶은데…….”

“그, 그건…….”

지금 자신도 다른 멤버들을 견제하느라 맥이 빠질 지경인데 적에게 헌납하는 행동을 하라고 하다니!

“어렵다면 어쩔 수 없고. 많이 친하다고 했는데 생각보다 아닌가 보구나.”

“그럴 리가 없잖아요! 나랑 창현이랑 얼마나 친한데!”

“그럼 소개시켜줄 수 있어?”

이미 윤아의 속내를 꿰뚫어 보고 있는 연희였기에 곯려주기 위해 소개를 시켜달라 하고 있었다.

‘어떻게 반응할까?’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를 다른 여자에게 소개시켜줄까?

현에게 관심이 있는 것은 진심이었기에 연희는 윤아가 어떻게 대답할지 기대가 되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생각에 잠겨있던 윤아는 결심을 굳힌 듯, 연희를 바라보며 말한다.

“……미안해요, 언니.”

“호오!”

이글이글 타오르는 윤아의 눈빛을 보며 연희가 나직한 감탄사를 흘린다.

입술을 꼭 깨물고, 양손에 주먹을 꽉 쥔 채 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는 윤아의 모습은 위태로워보였지만 연희에게는 그것을 초월한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이런 모습은 처음 보네.’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윤아의 모습을 보게 되자, 연희는 흥미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뗀다.

“한 가지 이야기를 해줄까?”

“…….”

이야기를 듣는 윤아의 얼굴에는 놀라움과 떨림, 그리고 결연함이 서리고 있었다.


그 날, 소녀시대 멤버가 숙소에 모두 모이게 된 시간은 자정이 되기 전인 11시 30분 경이었다.

멤버들이 모두 씻고, 잘 준비를 할 무렵, 윤아가 각 방을 돌아다니며 멤버들을 거실로 불러 모으기 시작했다.

“언니들, 주현아, 할 이야기가 있는데 잠깐만 거실로 나와 줘.”

“뭔데 그래?”

“오늘 피곤한데… 별 거 아니면 각오해야 할 줄 알아!”

씻은 뒤 게임을 하려던 순규는 표정을 찌푸린 채 거실로 나왔고, 피곤해서 당장 잠자리에 들어가려던 수영은 짜증 섞인 어조로 말하며 거실로 나왔다.

오늘 하루종일 동면을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몽롱한 표정을 지은 수연이 거실로 나왔고,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는 유리도 거실로 나왔다.

그리고…….

“헤헤헤!”

길에서 뭘 잘못 주워 먹었는지 시도 때도 없이 헤픈 웃음을 흘리고 있는 미영도 거실에 나와 앉았다.

“피부 세포 재생 시간인데…….”

아쉬움이 담긴 어조로 중얼거리는 주현.

“미안, 주현아. 그런데 꽤 심각한 이야기라서. 촛불 대화를 해도 될까요?”

주현에게 고개를 살짝 숙인 윤아가 멤버들을 둘러보며 말한다.

조용히 윤아의 말에 집중하던 멤버들은 촛불 대화라는 말에 깜짝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뭐야, 촛불 대화인가?”

“사안이 심각한가 보네.”

흥미로운 표정을 지은 효연과 심각한 표정을 짓는 태연.

도대체 무엇이기에 윤아가 저렇게 표정을 굳히고 촛불 대화를 하자고 하는 걸까.

하나씩 촛불을 들고, 숙소 거실은 어둠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 속에 한 줄기 불로 약간의 시야를 확보한 채, 소녀들은 윤아에게 시선을 집중하기 시작한다.

시선 집중을 받은 윤아가 차분하게 심호흡을 한 뒤 입을 열기 시작한다.

“오늘 연희 언니를 만났어요.”

“연희 언니를? 재미있게 놀았겠네?”

수영이 아쉽다는 듯, 묻자, 윤아가 고개를 끄덕인다.

“네. 재미있게 놀았어요. 연희 언니가 제게 뮤직비디오에 대해서 말씀해주시더라고요. 수연 언니가 출연한 뮤직비디오에 저하고 자기도 후보로 올랐었다고요.”

“…….”

윤아의 말에 날카로운 시선이 수연에게 빗발친다.

뮤직비디오에 출연하여 창현과 알콩달콩한 로맨스 씬과 키스 씬을 연출한 그녀는 여전히 대역 죄인 취급을 당하고 있었다.

“이, 이미 지난 일 가지고 왜 그래.”

가장 표독하게 노려보는 태연을 보며 움츠러드는 수연이었다. 당장 반란을 일으키고 싶지만 아직은 시기상조였다.

그 사이 윤아의 말이 이어졌다.

“연희 언니가 오늘 제게 충격적인 말을 했어요.”

“그 내용이 촛불 대화를 소집한 이유야?”

“네.”

태연의 물음에 윤아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자 궁금증이 담긴 시선으로 윤아를 바라보는 소녀들. 그 대표로 태연이 윤아에게 묻는다.

“뭔데?”

“연희 언니가 창현이한테 관심이 있데요. 이성적인 대상으로.”

“……!”

윤아의 말에 소녀들은 한 방 얻어맞은 표정을 지었다.


윤아의 말은 소녀들에게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이연희가 소녀시대에게 어떤 존재인가.

소녀시대 멤버가 될 뻔 했다느니, 뭐니 말이 많지만 딱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연희가 소녀들에게 있어 두려움을 심어주는 존재라는 것이다.

오죽하면 여자 연습생들에게 연희의 별명이 마왕이었겠는가.

“다시 한 번 말해볼래, 윤아야?”

“네, 오늘 연희 언니와 약속이 있었어요.”

“요점만, 빠르게. 우리가 원하는 말이 그게 아니란 걸 알잖아?”

“네…….”

착 가라앉은 태연의 표정에 기가 죽어버린 윤아였다.

평소에 온화한 모습만 보여주기에 탱보살이라 불리던 태연이었는데, 지금 착 가라앉은 표정은 윤아로 하여금 소름이 돋게 할 정도로 무서워보였다.

수연을 싴순이라 부르며 갈굴 때도 이러지 않았는데.

침을 꿀꺽 삼킨 윤아가 말을 이어나간다.

“연희 언니는 제게 창현이한테 호기심이 생겼다 말했어요. 이성적인 호기심이요.”

“…….”

윤아의 말에 다시 한 번 침묵이 찾아왔다.

연희의 참전 희망 소식에 소녀들은 머릿속이 뒤죽박죽 되었다.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것은 미영과 유리였다.

오늘 창현과의 데이트로 아메리칸식 인사를 빙자한 입맞춤을 성공한 미영은 연희의 참전 소식에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여, 연희 언니가 참전하면 어떻게 해야 하지?’

스스로를 와룡 파니라 자칭할 정도로 두뇌에 자신 있는 미영. 하지만 연희가 상대라면 제아무리 와룡이어도 벅찰 수밖에 없다.

지금 그녀가 있기 전까지 항상 그 위에 군림하던 것은 다름 아닌 연희였기에.

구렁이가 이무기로 진화했다 해도 용에게는 견줄 수 없는 법이었다.

창현의 입맞춤을 훔쳤다는 즐거움은 싹 사라진 채, 미영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변해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시어머니를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데 성공한 유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연희 언니는 벅찬데.’

같은 두뇌 캐릭터지만 유리가 미영을 어렵지 않게 생각하는 까닭이 바로 정석을 고집하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연희는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타입이다.

상대하기 벅찰 수밖에 없고, 자신이 갖추지 못한 과감함과 행동력, 그리고 싴병장을 능가하는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다.

연적이 되면 가장 골치 아플 거라 생각하던 존재가 적으로 불쑥 나타나게 된 것이다.

앞으로의 시나리오를 짜던 유리로서는 갑자기 등장한 큰 변수가 편하게 느껴질 리 없었다.

‘계획을 바꿔야 하는데 어떻게 하지?’

유리의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가운데, 소녀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침묵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 침묵을 깬 것은 태연이었다.

“연희 언니가 창현이한테 관심이 있다는 거야?”

“네… 그래서 저한테 이것저것 물어보더라고요.”

“그래서?”

“전 가급적 대답을 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렇게 하려고 하니 언니가 창현이와 통화를 하고 싶다고 해서…….”

말끝을 흐리는 윤아를 보며 태연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기대를 하기는 했지만 역시 윤아가 연희를 감당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헛된 것이었다.

“결국 알려줬다는 이야기네.”

“네.”

“에휴!”

윤아의 말에 여기저기서 흘러나오는 한숨 소리.

괜히 죄를 지은 것 같은 기분에 윤아가 움츠러들며 힐끔 눈치를 본다.

그 모습에 태연이 박수를 짝짝! 치며 멤버들의 시선을 집중시킨 뒤 말한다.

“어쨌든 이미 일어난 일이야. 그걸 가지고 우리가 윤아에게 뭐라고 타박할 수는 없어.”

“…….”

태연의 말에 소녀들은 고개를 나직이 끄덕인다. 그녀의 말처럼 이미 일어난 일이었다. 윤아가 연희에게 정보를 누설한 걸 탓할 게 아니라,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서 대비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서로 힘을 합쳐야 하는 거야. 여기서 혼자 연희 언니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 있어?”

도리도리.

누구도 연희를 감당할 수 있다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들에게 있어 연희는 가장 사기급 캐릭터였기에.

“그러니까 힘을 합쳐야 한다는 거야. 윤아야, 연희 언니에게 구체적으로 뭐뭐 이야기를 했어?”

리더답게 멤버들의 시선을 하나로 묶은 태연은 본격적으로 윤아를 취조하기 시작했다.

저지른 일이 있다 보니 윤아는 태연의 물음에 찔끔하여 순순히 털어놓기 시작한다.

“우선… 창현이가 평소에 뭘 하고 지내는지, 그리고 간단한 취미에 대한 것만 이야기 해줬어요.”

“정말 그것뿐이야?”

날카로운 태연의 물음에 윤아가 고개를 크게 끄덕거렸다.

“네! 정말 그것뿐이에요. 연희 언니가 좀 더 캐내려 했지만 저도 필사적으로 저항했어요. 계속해서 모른다고 하니까 결국 포기하셨고요.”

“그 후에 같이 뭘 했는데?”

“그냥 같이 놀러 다녔어요. 서점도 가고, 아이스크림 가게도 가고, 평소 놀던 것처럼요.”

“연희 언니가 그럴 리 없는데?”

“아직 간단한 호기심 수준이어서 그런 거 아닐까요? 곧 사그라들 그런 의심이요.”

의문을 제기하는 수영의 말에 주현은 자신의 바람을 담아 이야기 한다. 이성적인 호기심이 있다고 했지만 그것뿐이라면 금방 사그라들 수 있는 성질의 것이기도 하다.

“막내! 넌 연희 언니를 그렇게 보고도 아직도 잘 모르나 보네.”

“네? 연희 언니가 그냥 호기심 수준으로 끝날 수도…….”

“그게 잘못 되었다는 거야. 연희 언니가 괜히 연기자인 줄 알아? 시치미 떼는 걸 얼마나 잘하는데! 그걸 미영이가 얼마나 당했는데!”

연습생 생활을 하면서 연희에게 당했던 기억이 떠올랐는지 수영의 눈살이 찌푸려져 있었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미영도 나직이 고개를 끄덕인다.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나올 것 같아.”

“여기서 가장 중요한 건 연희 언니가 창현이에게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느냐야. 그것을 중점적으로 파악해야만 해.”

침묵하고 있던 수연이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평소라면 싴순이 취급을 당하기에 무시당했을 테지만 지금 같은 심각한 분위기에서는 아무도 수연의 말을 무시하지 않았다.

“윤아야, 연희 언니가 창현이한테 얼마나 관심이 있는 것 같았어?”

간단한 호기심 정도로 그치길 바라며 유리가 물어보았지만 흘러나온 대답은 절망할 수준이었다.

“…아주 많이 있는 것 같았어요.”

“…….”

아주 많이라는 말에 침묵하는 소녀들이었다. 그녀들은 지금 어떻게 하면 마왕 이연희를 몰아낼 수 있을지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홀로 감당할 수 없는 존재인 만큼, 그녀를 제지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연희 언니를 막는 건 불가능해.”

“맞는 말이지만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 해.”

수연의 중얼거림에 유리가 대답한다.

그녀들이 왜 창현에게 접근하려는 연희를 제지하려는 것일까.

그 이유는 그녀들도 다 알고 있지만 그것을 입에 담지 않았다.

각자의 이유를 입에 담는 순간, 지금까지 이어져온 아슬아슬한 균형이 단숨에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그녀들은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이 균형이 무너진 뒤 어떤 세상이 펼쳐질지 몰랐기에 그녀들은 서로 견제를 하면서도 일정한 선을 넘지 않고 있었다.

“방법은 하나뿐이야. 우리가 힘을 합치는 거지.”

“…….”

태연의 말에 멤버들이 조용히 그녀를 바라본다.

“연희 언니를 감당하기 힘든 건 각자 개별로 활동하기 때문이야. 하지만 힘을 합친다면 연희 언니를 막아내는 것도 어렵지 않지. 아니, 굳이 우리가 막지 않아도 돼. 연희 언니 혼자서 움직이더라도 창현이가 쉽게 넘어갈 리 없으니까. 하지만 우리가 섣부르게 나서다가 일을 그르칠 수도 있어.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서로 협력을 해야 돼.”

“나도 태연이 말에 동의 해.”

탱통령 정권에 가장 큰 힘을 실어주고 있는 유리가 가장 먼저 찬성을 표했다.

유리가 미영을 바라보자, 생각에 잠겨있던 그녀도 고개를 끄덕인다.

“지금은 그래야 할 것 같아.”

“너희들은 어때?”

유리가 멤버들을 둘러보며 묻자, 하나둘씩 찬성을 표하기 시작했다. 연희를 견제하자는 것이 아닌, 창현에 대한 정보를 유출하지 않고, 가급적 거리를 두겠다는 내용의 협력이었다.

만약 함께 하게 되면 창현에 대한 내용을 일절 언급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고.

주현까지 협력하겠다는 의사를 밝히자, 태연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좋아, 그러면 그 부분에 대해서는 협력을 하기로 약속한 거다? 연희 언니가 움직이면 문자로 상황을 알리도록 하고. 그러면 유리나 미영이가 대응 방법을 알려줄 거야.”

태연의 주도 하에 대 이연희 상대 방법에 대해서 토론이 벌어졌다.

미영과 유리가 다른 멤버들의 발언에 살을 보태주며 하나하나 대응 매뉴얼을 만들어나가기 시작했고, 자잘한 단점을 고치니,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이연희 대응 매뉴얼이 만들어졌다.

이연희라는 강력한 적 앞에 하나가 되는 모습을 보이는 소녀들이었다.

“…….”

그 이야기를 듣고 있는 윤아의 표정은 묘했다.

대화에 참여는 하고 있지만 다른 멤버들과 달리 약간 거리를 두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연희에게 정보를 누출하여 의기소침한 것일까?

평소 윤아의 성격을 감안하면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모호한 표정을 짓고 있는 윤아의 머릿속에는 아까 전 연희와 나누었던 대화 내용이 떠오르고 있었다.


“한 가지 이야기를 해줄까?”

“뭔데요?”

결연한 눈으로 연희를 바라보며 말하자, 그녀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그렇게 힘 주지 않아도 돼. 네 의지는 잘 알았으니까. 현에 대한 호기심이 있지만 방금 전에 더 흥미가 가는 것을 찾았거든.”

“뭔데요?”

“너, 현 좋아하지?”

“……”

연희의 말에 윤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윤아의 속내를 꿰뚫어 보고 있는 연희는 여유로운 모습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대답하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어. 이야기를 하는 내내 훤히 보이더라고. 한 번 더 물어볼게. 현 좋아하지? 아니라면 내가 다시 노리고.”

“…맞아요.”

연희를 참전 시키면 어떤 재앙이 닥칠지 두려웠기에 윤아는 결국 자신의 본심을 드러내고 말았다.

윤아의 항복 선언에 연희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럴 것 같았어. 그럼 이제 한 가지 선물을 주도록 할까. 윤아야, 현이랑 잘 되고 싶지 않아?”

“무, 물론이죠.”

고개를 크게 끄덕이는 윤아. 하지만 많은 스케줄과 멤버들의 보이지 않는 견제가 그녀로 하여금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내가 도와줄게.”

“네?”

“귀여운 동생이 사랑 문제로 머리 아파하는데 가만히 있을 수 없잖아? 내가 도와줄게.”

“고, 고마워요, 언니.”

천군만마를 얻은 듯한 느낌에 윤아의 표정이 밝아졌다.

고개를 끄덕인 연희가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채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일단 너희 멤버들에게는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를 하도록 해.”

“네? 왜요?”

“그렇게 하면 아마 그 아이들은 나를 상대하기 위해 하나로 뭉치려 할 거야.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소극적이게 될 것이고, 시선을 내가 잡아둔 사이, 윤아 네게 기회가 많아질 거야.”

“그, 그러네요.”

기상천외한 연희의 계획에 윤아는 점점 빠져들고 있었다.

“게다가 윤아 네가 있으니 그 아이들의 계획에 대해서 내가 알고 있겠지? 그럼 내가 그에 맞춰서 윤아 널 밀어주도록 할게. 내가 마음먹은 이상 윤아 네게 남은 건 행복한 미래뿐이야.”

자신감 넘치는 연희의 말에 윤아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한다.

“정말 고마워요, 언니.”

“뭘 그거 가지고. 간단한 이야기는 했으니 이제 즐겁게 놀도록 할까?”

“네! 제가 내도록 할게요. 재미있게 놀아요, 우리!”

“그래, 대신 연기를 잘 해야 한다는 거 잊지 마?”

“물론이죠!”

힘차게 대답하며 자청하여 남은 쓰레기를 버리러 가는 윤아였다.

“후후훗!”

활기찬 윤아의 모습을 보며 연희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야릇한 미소를 흘렸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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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마음을 울리는 음악 34장-36장 +8 15.04.16 9,524 189 3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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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마음을 울리는 음악 28장-30장 +5 15.04.16 10,660 260 277쪽
9 마음을 울리는 음악 25장-27장 +7 15.04.16 11,041 267 233쪽
8 마음을 울리는 음악 22장-24장 +4 15.04.16 10,924 261 198쪽
7 마음을 울리는 음악 19장-21장 +4 15.04.16 11,492 270 216쪽
6 마음을 울리는 음악 16장-18장 +5 15.04.16 11,544 242 163쪽
5 마음을 울리는 음악 13장-15장 +5 15.04.16 14,536 297 237쪽
4 마음을 울리는 음악 10장-12장 +8 15.04.16 13,738 352 171쪽
3 마음을 울리는 음악 7장-9장 +10 15.04.16 14,556 362 142쪽
2 마음을 울리는 음악 4장-6장 +11 15.04.16 16,843 421 120쪽
1 마음을 울리는 음악 프롤로그-3장 +47 15.04.16 29,906 545 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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