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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번 님의 서재입니다.

마음을 울리는 음악

웹소설 > 작가연재 > 팬픽·패러디, 현대판타지

김현우
작품등록일 :
2015.04.16 13:27
최근연재일 :
2015.06.01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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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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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4.16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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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쪽

마음을 울리는 음악 94장-96장

DUMMY

제94장 무혈입성




시간은 빠르게 흘러간다.

2008년 하반기 최고의 화제라 하면 역시 현과 관련된 일들이었다.

10월 초, 미국으로 건너가 활동을 시작한 현은 4집 프로젝트 앨범 <Devil Cry>로 활동의 시작을 알렸다. 그리고 한 달 후, 대한민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몰이를 했던 <악마의 유혹>을 <Temptation>으로 고친 뒤 발매, 일주일 후 빌보드 차트 1위를 차지하는 기록을 세운다.

단순히 곡이 좋은 것이 아닌, 그동안 보여주지 않았던 강렬한 퍼포먼스와 특별한 마케팅을 통해 시간이 흐를수록 인기는 더욱 가속화 되고 있었다.

특히 화제가 된 것은 퍼포먼스인 ‘계단 춤’과 여성 팝 스타들이 직접 디자인했다고 알려진 열 개의 반지였다.

모든 여성을 홀려버릴 듯 강렬한 페로몬을 풍기는 그는 단순히 실력만 뛰어난 가수가 아닌, 사람을 끌어당기는 스타로서 확실히 자리매김했다.

작년 활동 당시 너무나 깔끔한 활동으로 이렇다 할 가십거리가 없었지만 이번에는 처음부터 여성 팝 스타들과의 염문을 통해 기자들이 살맛나게 해주는 그는 현재 특종 제조기라 불리고 있었다.

그 중에서 가장 스캔들이 난 것은 세실리아였다.

대놓고 현이 좋다고 선언한 그녀는 스케줄이 빌 때마다 그와 접촉을 시도했고, 그것은 기자들에게 훌륭한 기사거리가 되어주었다.

한창 최고의 주가를 달리고 있는 그녀가 함께 하니, 미국 사람들은 현이란 이름을 모르려고 해도 모를 수가 없게 될 정도였다.

“다 좋긴 한데 이건 좀…….”

“별 수 없지. 운명이라고 생각해라.”

“그래도, 하하!”

허탈한 마음에 창현은 웃음을 흘렸다.

미국에서 하루하루를 알차게 보내고 있지만 예전처럼 한국이 그립거나 그렇지 않았다. 이것은 작년보다 내면이 더욱 단단해졌다는 것을 뜻하고 있었다.

“인기를 얻으려면 이렇게 해야 하는 걸까요?”

“꼭은 아니지만 하나의 방법이란 걸 부인할 수는 없구나.”

“그렇군요.”

씁쓸한 표정을 짓는 창현이었다.

이번 4집 앨범을 발매하면서 그가 세운 것은 대중성을 끌어들여 높은 인기를 얻는 것이었다. 그것을 위해 그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다양한 마케팅 방법을 사용하였다.

여성 팝 스타들에게 반지 디자인을 의뢰했던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다.

그로 인해 스캔들이 끊임없이 터져 나오고 있었고, 석규는 그것을 적절하게 조절하면서 현의 인기를 수그러들지 않게 하는 가교 역할을 하고 있었다.

“세상이 올바를 수 없는 법이지. 여러 가지 방법이 공존하고 있는 만큼 정공이 아닌, 변칙도 존재하는 법이다. 네가 대중적인 인기를 노린다고 했으니 그것을 위해 최선을 다할 뿐이고.”

“알고 있어요. 그리고 결과를 보니 확실히 먹히기는 하네요.”

“그렇지. 여태까지 너무 꽁꽁 싸매고 있어서 그렇다. 이미지라는 것도 결국 소진되는 법이니, 얼마 있으면 그것도 시들해지겠지.”

“후우!”

이미지 소진이고 자시고, 창현은 지금 상황에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원래 그와 소속사가 계획한 것은 두 달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의 활동이었다. 총 세 개의 앨범을 발매하는 것이 목표였는데, <Devil Cry>와 <Temptation> 싱글 앨범을 각각 발매한 뒤 4집 정규 앨범을 발매하고 미국 활동을 마무리 지은 뒤 한국으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하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마케팅이 훨씬 잘 터졌다.

초대박이라 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터지다 보니 예상보다 1위를 훨씬 빨리했고, 폭발적으로 치솟고, 지속되는 인기는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본래 계획대로라면 지금쯤 한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해야 했을 터지만 상황이 달라졌다.

계속해서 1위를 유지하고 있는 곡을 놔두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어리석은 선택을 할 리가 없는 것이다.

조용히 활동만 해도 돈이 쏟아져 들어오는 상황이 만들어졌기에 석규는 당초 계획을 수정하여 창현과 이야기를 나누고 결정을 내렸다.

예정보다 좀 더 늦게 한국으로 돌아가기로.

“그렇게 길게 가지 않을 거니 한숨 쉬지 않아도 된다.”

“힘들어서 그런 게 아니에요. 제가 이렇게 있으면 귀염둥이 아현이를 보지 못해서 그러는 거예요.”

“그런 거냐?”

힘들어서 투정부리던 것이라 생각하던 석규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거라고요. 아현이 보는 낙에 하루하루를 보냈는데! 그나저나 지영이랑 어머니도 잘 지내고 있죠?”

“물론이다. 네가 없으니 스스로 분발하려고 더욱 노력하더구나. 지선이도 몸조리를 잘해서 정상적으로 활동을 하고 있고.”

“다행이네요. 잘하고 있다니까.”

잘 지낸다는 말에 미소 짓는 창현. 자신이 이렇게 활동하는 것도 다 가족을 먹여살리기(?) 위해서 하는 것이니 만큼 주변이 안정되어야 했다.

“그나저나 다행이네요.”

“뭐가 말이냐?”

뜬금없는 창현의 말에 석규가 고개를 갸웃하자, 창현이 입 꼬리를 말아 올리더니 밖을 가리킨다.

시선을 옮긴 석규의 눈에 들어온 것은 새하얗게 흩날리는 눈이었다.

펑펑 내린 눈은 쌓이고 쌓여, 정상적인 활동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눈이 내리는 게 뭐가 그래서 말이냐?”

“오늘이 무슨 날인지 잊으신 거예요? 크리스마스잖아요.”

“크리스마스에 눈이 내리는 게 다행이라는 거냐?”

“그럴 지도요? 크리스마스에 폭설이 내려서 다행이니까요.”

“…….”

창현의 말에 황당한 표정을 짓는 석규였다.

신은 솔로들의 바람을 들어주었는지 크리스마스에 유례가 없는 폭설을 내려주었다.

플래그 마스터 현도 아직 솔로였다.


9주 연속 1위!

현의 싱글 앨범 <Temptation>이 9주 연속 1위를 달성하자 한국에서는 난리가 났다.

그를 정상에 우뚝 서게 만들어준 곡인 <Minus>도 9주의 아성을 넘지 못하고 1위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이것 또한 놀라운 성과였지만 항상 그보다 더욱 높은 성과를 바라는 사람들은 그가 대한민국에서 일으킨 여파를 미국에서도 이어나갈 수 있을지 주목하고 있었고, 범상치 않은 그의 기세는 마침내 스스로의 한계를 넘어 9주 연속 1위라는 기염을 토했다.

뿐만 아니라 아직까지 그 기세는 계속되고 있었기에 사람들은 그가 10주까지, 기세를 더욱 타면 12주까지 가능할 것이라 전망하고 있었다.

9주 연속 1위를 한 것 때문일까.

창현에게 한국에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반가운 마음에 전화를 받자, 건너편에서 또랑또랑한 여성들의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안녕하세요, 소녀시대입니다!

“그래요, 고마워요, 누나들.”

-응! 창현아, 1위 축하해. 그리고 생일도 축하하고.

태연의 목소리였다. 생일 축하 인사에 입가에 미소를 지은 창현이 말한다.

“알고 계셨어요? 날짜가 틀려서 타이밍을 놓칠 줄 알았는데.”

-우리를 뭘로 보고! 그 정도쯤은 당연히 알고 있었지. 게다가 9주 연속 1위까지 해서 여기는 아주 떠들썩하다고!

“그렇군요. 1위를 해서 저도 기분이 좋네요. 더 열심히 해야겠어요.”

-흐흐, 그랴, 열심히 해봐. 야! 너만 전화 하냐!

미소를 짓던 태연의 목소리 뒤로 다른 목소리들이 들려왔고, 곧이어 티격태격하는 목소리가 오고갔다.

-창현아! 나야, 하이!

“아, 수영 누나죠?”

-맞아. 너 완전 대단하더라. 여기에서 보면 미국을 정복했다고 하던데?

“그 정도는 아니에요. 여기가 얼마나 큰데 이곳을 지배해요. 그런데 수영 누나, 요즘은 길 안 잊어먹죠?”

-아, 안 잊어먹거든! 그건 실수였을 뿐이야!

당황하는 기색이 그대로 느껴져서 창현은 터지려는 웃음보를 간신히 참아냈다. 하지만 목소리에는 그대로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누가 샌드위치 사준다고 해도 따라가면 안되요? 하하!”

-이익!

뭐라 반박하고 싶었지만 저지른 일이 있었으니 수영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팩토리 걸> 촬영 이후 한국과 미국에서는 한차례 난리가 났다.

한창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현의 다급한 안색은 이슈거리가 되기 충분했고, 그가 길을 잃은 수영과 만나는 장면은 제대로 사진이 찍혀 커다란 스캔들 기사가 나와 버렸다.

창현과 알콩달콩 게릴라 데이트로 스캔들 기사를 유도하려던 유리의 의도는 완전히 묻혀버렸고, 덕분에 창현과 수영은 홍역을 앓아야만 했다.

나중에 직접 해명을 하여 같은 나라 출신이라는 것과, 한국에서 촬영을 왔다가 길을 잃어버려 다급한 마음에 주변 상황을 잊고 거리를 헤맸다는 이야기를 하여 스캔들을 해소할 수 있었다.

그 덕에 수영은 확실하게 미국사람들에게 얼굴도장을 찍어버렸다.

자신 때문에 창현이 귀찮은 일에 휘말린 걸 알고 있었기에 수영은 그가 놀려도 뭐라 반응할 수 없었다.

-창현아, 생일 축하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린 수영을 밀어내고 유리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상념에 벗어난 창현이 유리에게 말한다.

“고마워요. 그나저나 누나들도 앨범이 곧 발매된다고 들었어요. 이번에는 잘할 수 있는 거죠?”

-물론이지! 이번에는 우리가 야심차게 준비했다고!

-태연이는 하기 싫다고 막 울먹였지만. 헤헤!

-야! 내가 언제 울었다고 그래!

옆에서 끼어든 미영의 목소리에 태연이 버럭 소리치며 반박했지만 이미 모든 내용은 창현의 귀에 들어간 상태였다.

“어쨌거나 파이팅이에요. 이번에 아버지도 SM엔터테인먼트에서 야심차게 준비하고 있다 들었어요. 라샤 누나들이 불안하다고 하던데, 기대할게요.”

창현의 말은 새 앨범 발매를 앞두고 불안해하던 소녀들에게 용기를 복돋아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가 미국으로 떠난 뒤 기습 컴백을 한 지금 가요계는 라샤 천하가 되어 있는 상태. 정점에 선 그녀들을 위협할 상대로 자신들이 지목되었다고 하니 없던 용기도 생겨나는 기분이었다.

-열심히 할 거야. 그리고 그때 했던 말 기억하지? 차근차근 올라갈 거니까 기다리고 있으라고.

“물론이에요. 얼마든지 기다리죠.”

-헤헤! 유리 혼자만 올라가는 건 아니니까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옆에서 계속 같이 있었던 듯, 미영이 불쑥 끼어든다.

더 높은 곳으로 향하고자 하는 열망이 그대로 느껴졌기에 창현도 미소 지으며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알았어요. 진심으로 올라오길 기원할게요.”

-창현아! 그런데 한국은 언제쯤 와?

윤아의 물음에 창현은 살짝 표정이 찌푸려졌다. 이미 예정보다 훨씬 늦어지고 있었기에 요즘 부쩍 피곤함을 느끼고 있었다.

“아무래도 구정 전에 갈 것 같네요. 그때쯤이면 누나들은 한창 활동 중이겠네요.”

-으응. 오면 꼭 연락해줘! 알았지?

“알았어요, 그럼 저도 이만 준비하러 나가봐야 할 것 같네요. 누나들 앨범 잘 되길 바라고요, 지금보다 더욱 높은 곳에 서서 다시 만나길 바랄게요. 알았죠?”

-물론이지!

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그녀들에게서 강한 의지가 전해졌다.

기대감이 담긴 그녀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창현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걸렸다. 그것은 여태까지 보였던 것과 다른 씁쓸함이 담긴 미소였다.

‘잘 되어야 할 텐데.’

수만에게 소녀시대가 해체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입맛이 썼다. 만약 그 이야기가 없었더라면 좀 더 순수하게 축하를 해주었을 테지만 그 이야기를 접했기에 잘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더욱 강했다.

그래서 평소보다 더욱 강조해서 말한 것일지도.

“잘 되길. Good Luck.”

멀리 떨어져 있는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건 잘 되길 바라는 것밖에 없었기에 행운이 따르길 기원해주었다.

소녀시대 The First Mini Album <Gee>가 발매되기 하루 전 이뤄진 통화였다.


통화가 끝나자 왁자지껄하던 분위기가 착 가라앉았다.

묘하게 자리한 침묵, 그것을 깬 것은 태연이었다.

“갑자기 의욕이 불끈불끈한데?”

과장된 포즈로 주먹을 불끈 쥐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순규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우리 변탱구의 언어 구사 능력이 점점 화끈해지는데?”

“뭐? 내가 왜 변탱구야. 그런 별명 쓰지 말라고 했지? 너보고 순규라고 하면 좋냐!”

자신이 가장 싫어하던 별명 중 하나를 언급하자, 태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버럭했다.

하지만 그녀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순규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좋은 건 아니지만 나쁘지도 않은데?”

“윽! 근데 내가 왜 변태라는 거야.”

“막 멤버들 엉덩이 만지고 좋아하잖아. 윤아랑 같이 소녀시대 변태 1, 2위를 다투면서 억울하다는 표정을 짓네.”

“윤아는 원래 변태인 거고! 난 리더로서 너희들의 상태를 체크하기 위해 그런 거라고!”

스스로 말해놓고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는 태연이었다. 똑같이 엉덩이 만져놓고 누구는 변태고, 누구는 정당하다는 게 말이 된단 말인가.

“언니, 내가 왜 변태에요!”

아니나 다를까, 애꿎은 희생양이 된 윤아가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항의했다.

“넌 변태 맞아!”

“윤아가 변태면 너도 변태지! 이 변태연.”

“으으, 이 순규를 그냥…….”

윤아와 함께 변태 세트로 묶어버리는 순규의 만행에 이를 부득부득 가는 태연이었다.

소녀시대 권력의 정점에 선 자신에게 이런 반란을 꾀하다니.

‘오늘 나의 무서움을 똑똑히 각인시켜줘야겠어!’

눈에 시퍼런 광망을 쏟아내며 태연이 순규를 응징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수연아! 헬프!”

신변의 위협을 느낀 순규는 재빨리 곁에 있는 수연의 뒤로 숨는다.

순규를 응징할 생각이던 태연은 그녀를 숨겨준 수연을 보면서 말한다.

“수연아, 잠시 좀 비켜줘.”

자신보다 월등히 작은 저 단신을 토벌하지 않으면 리더의 위엄이 설 것 같지가 않았다.

“…….”

태연의 요구에 수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주변을 둘러본다. 그러자 그녀와 시선을 마주한 몇몇 소녀들이 고개를 나직이 끄덕인다.

그것은 본격적인 그녀의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과도 같은 것.

입가에 흐릿한 미소를 지은 수연이 뻣뻣한 태도로 태연에게 말한다.

“내가 왜?”

“뭐?”

순간 태연은 자신이 잘못들은 게 아닌가 싶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갸웃하며 퉁퉁 털어댔다. 하지만 귀가 막혀있는 게 아니었기에 방금 전 들은 말은 진실일 것이다.

“지금 뭐라고 했어?”

“내가 왜 비켜야 하냐고 물어본 건데? 써니가 목적이면 네가 돌아와서 데려가면 되잖아.”

“…….”

자신의 밥으로 전락했던 싴순이가 맹렬하게 반항하자, 태연은 멍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폭군을 정권에서 끌어낸 뒤 완벽한 하찮은화를 위해 지속적으로 갈궜더니 이성을 잃어버리기라도 한 거란 말인가.

갑자기 달라진 수연의 태도는 태연으로 하여금 공황 상태로 몰고 갔다.

“수연이 너 뭘 잘못 먹었어?”

한참 동안 수연을 이리저리 살피던 태연이 한 말이다.

그 말에 수연은 입 꼬리를 더욱 말아 올리더니 그녀에게 말한다.

“내가 잘못 먹은 것 같아?”

“그런 것 같지는 않아.”

여유롭게 말하는 수연의 눈 밑에는 다크 서클도 없었고, 오늘 먹었던 식단에도 특별한 문제가 없었다.

평소와는 사뭇 다른 그녀의 모습.

하지만 태연은 이런 수연의 모습이 익숙했다.

지금 보이는 수연의 모습은 한때 숙소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폭군의 모습이었으니까.

그때의 공포가 살아나면서 태연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그 당시 자신은 수연의 밥과도 같은 처지였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달라! 나한테는 든든한 우군이 있어!’

좌 미영 우 유리로 이어지는 탱구라인은 소녀시대 내 최강의 파워를 자랑한다.

여기에 무적의 힘을 자랑하는 윤아가 가세하면 다섯 명이 연합해도 자신의 정권을 깨지 못할 것이다.

뒤로 슬금 물러난 태연은 자연스럽게 미영과 유리가 서 있는 곳으로 향한다.

양옆에 두 사람이 자리하자, 마음이 놓인 듯 눈을 크게 치뜨며 말한다.

“지금 그건 나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도 되는 거야?”

“도전? 예전의 것을 되찾으려는 것뿐인데.”

“앨범 나오기 전에 확실하게 명암을 가르자는 거로군.”

꾸준히 싴순이 작업을 해왔지만 결국 고개를 들고 자신에게 도전해오자 태연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이것은 위기임과 동시에 기회라 생각했다. 여기에서 확실하게 눌러버릴 수 있으면 더 이상 수연은 자신의 아성에 도전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 했으니까.

“후후후!”

“왜 웃는 거야? 수연이 네가 천상천하 유아독존하던 시대는 끝났어. 개인은 다수를 이길 수 없는 시대야. 잘못 생각해도 한참 잘못 생각한 것이여.”

불안함을 털어버리기라도 하듯, 태연의 목소리가 높아진다.

그럴수록 수연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더욱 짙어진다.

“왜, 왜 웃는 거야?”

“태연아, 넌 내가 아직도 혼자서 이렇게 행동하는 것 같니?”

“그게 무슨…….”

의문 섞인 어조로 말하던 태연이 멈칫했다. 자신의 오른쪽에 서 있던 유리가 성큼 한 걸음 옮기더니, 그대로 수연에게 향하는 것이 아닌가?

졸지에 배신당한 태연은 눈을 부릅뜨며 유리에게 외친다.

“유, 유리 네가 어째서 날?”

“미안, 태연아. 수연이가 마음을 고쳐먹어서 이쪽이 좀 더 낫네?”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자신을 지지해주던 가장 든든한 아군 한 명이 사라지자 태연은 황당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충격은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다.

순규와 수영이 슬금슬금 걸음을 옮기더니, 그대로 수연의 뒤에 선 것이다. 그리고 효연과 주현도 어느새 수연의 뒤에 자리하고 있었다.

눈 깜빡할 사이에 다섯 명의 멤버가 수연의 편을 든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대세는 기울어진 것이리라.

너무나 큰 충격을 받은 태연은 얼빠진 표정으로 몸을 가늘게 떨었다.

“너, 너희가 어떻게…….”

“수연이는 새롭게 태어났어. 예전에 마음껏 권력을 휘두르던 얼음 마녀가 아니란 이야기지. 그에 비해 태연이 넌 권력의 맛을 알고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어. 넌 스스로 변하는 것에 대해 깨닫지 못했고, 그 결과가 바로 이것이야.”

“…….”

유리의 말에 태연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변했다고 지적하는데 여기에 더 이상 무어라 말을 한단 말인가.

절망스러운 상황이었지만 태연은 아직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두뇌 중 한 명인 유리가 떨어져 나갔지만 자신에게는 미영과 윤아가 있다. 지력과 무력이 합쳐진다면 여섯 명의 공세는 어떻게든 견뎌낼 수 있으리라. 그리고 협상을 시도해서 다시 한 번 재집권을 노릴 생각이었다.

“미영아, 윤아야.”

그녀들도 흔들리기 전에 붙잡으려는 생각을 하였고, 태연이 막 이름을 부를 때, 옆에서 미영이 태연을 불렀다.

“태연아.”

“왜, 왜 불러, 미영아?”

불안한 마음에 삐끄덕거리며 고개를 돌린 태연.

그곳에는 변함없이 생글생글 미소 짓고 있는 미영의 모습이 자리하고 있었다.

“미안.”

“미, 미안이라니! 미영이 너 설마…….”

“응, 권력을 잡은 태연이는 너무 변했어. 조금 불쌍하지만 멤버들에게 헌신적이던 태연이로 다시 돌아왔으면 좋겠어. 미안, 헤헤!”

그렇게 말을 한 미영도 걸음을 옮겨 수연의 곁으로 향했다.

6대3에서 7대2로 변한 것이다.

“어, 언니…….”

“윤아야…….”

미영마저 배신해버리자 태연은 자신 곁에 윤아 한 명만 남은 것을 보고는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부러울 것 없던 막강한 권세를 휘둘렀건만 이제는 처분만 기다리는 신세가 되어버리다니.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태연을 보며 수연은 입가에 진한 미소를 지었다.

이 날을 위해 얼마나 이를 갈았던가. 오나라 왕 부차가 원한을 갚기 위해 가시방석에 앉으며 쓸개를 씹던 것이 바로 자신의 기분이었으리라.

물고기가 그물에 들어와 퍼덕거리고 있었고, 이제 남은 것은 비늘을 벗긴 뒤 뼈와 살을 분리하는 것뿐.

입가에 맺힌 수연의 미소에 섬뜩함이 깃들기 시작한다.

“후후! 그럼 처형식을 시작하도록 할까.”

“으으……”

전신을 덮쳐오는 얼음 레이저에 태연은 몸을 부들부들 떤다.

든든한 아군이 모두 사라진 이상, 그녀는 얼음마녀 앞에 놓인 샌드백에 지나지 않았다.

성큼성큼 한 걸음씩 태연에게 다가가는 수연.

자신의 최후를 직감한 태연의 눈은 암울하게 젖어 들어가고 있었다.

이대로 모든 것이 끝난단 말인가.

희망을 끈을 놓아버리며 자신의 최후를 직감한 듯 태연이 눈을 질끈 감을 때, 낭랑한 목소리가 수연의 걸음을 붙잡아 세운다.

“언니, 잠시만요.”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는 수연의 발걸음을 붙잡아 세운다.

고개를 돌린 수연의 눈에는 입가에 묘한 미소를 지은 주현이 들어왔다.

“아직 더 정산해야 할 게 있어요.”

권력 다툼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그동안 자신을 집요하게 괴롭히던 악마를 마무리하려던 단계다.

여름 가요제에서 명수에게 디스를 당한 뒤, 유리의 주도 하에 이루어진 반란은 폭군 자리에서 마음껏 권력을 휘두르던 수연을 밑바닥으로 끌어내렸다. 그 후, 그녀는 막내 주현만도 못한 위치에서 수많은 구박과 수모를 받으며 꿋꿋이 견뎌냈다.

그 중에서도 자신을 가장 괴롭히던 것은 바로 태연.

자신과 동갑이지만 몇 년 늦게 연습생으로 들어온 그녀는 수연에게 있어 친구 같다기보다는 동생 같다는 느낌이다.

그런데 어려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속이 깊고 강한 소녀였고, 심지어 저 외모로 자신보다 생일이 빨라 소녀시대 리더로 낙점되었다.

리더에서 밀려났다는 것은 수연에게 큰 관심사가 아니었다. 자신을 제외한 여덟 명을 책임질 만큼 자신은 책임감 있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뒤에서 리더를 보조해주는 것이 자신에게 딱 맞았다.

연습생 기간이 한참 뒤처졌고, 내공 또한 부족했기에 태연은 늘 수연의 밥이었다.

가볍게 기세를 담아 바라보는 것만으로 깨갱하던 것이 소녀시대 리더 태연의 위치.

하지만 자신이 밑바닥으로 추락하면서 권력을 잡게 된 태연은 달라졌다.

그동안 당한 것을 앙갚음 하려는 것일까. 아니면 전대 권력자인 자신을 짓밟아 더욱 권력을 공고히하려는 것일까.

태연은 집요할 정도로 자신을 괴롭혔고, 심지어 싴순이라는 별명을 지어준 채 구박을 일삼았다.

그 모진 구박을 수연은 이를 갈며 견뎌냈다.

오죽하면 이 심정을 표현하기 위해 손자병법 책을 사서 와신상담이라는 사자성어를 알아내 그 심정으로 수모를 버텨냈다.

점점 강해지는 태연의 구박을 견뎌내며 하나씩 동료를 섭외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오늘 결실으르 거두는데 성공하였다.

빨갛게 익은 사과를 크게 배어 상큼한 과즙을 느끼려던 순간 주현이 제지하였다.

당연히 수연의 반응이 고울 리 없었다.

“왜 그래, 주현아?”

상큼하게 치켜 든 아미는 벌써부터 폭군의 기질을 가감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예전이라면 막냉이 주현을 간단하게 압도했을 강력한 기세.

그러나 수연이 그동안 와신상담하며 칼을 갈아온 부차왕이라면, 주현은 자신의 모든 것을 숨긴 채 오직 이 날만을 기다려온 흑화 서로로다.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그녀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수연에게 말한다.

“잠시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요?”

“이야기? 갑자기 왜?”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해야 해서요. 언니에게만 해야 하고.”

“…….”

단 둘이서 해야 할 이야기라.

수연은 주현의 말을 쉽사리 넘기지 못했다.

그러기에는 지금 이 자리까지 오는 그녀의 공이 너무나 컸다.

태연에게 응집되어 있는 세력을 분해하여 그녀를 궁지로 몰아넣게 한 것은 온전히 주현의 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좋아, 이야기 하도록 해.”

“고마워요, 언니.”

상큼하게 미소 짓는 주현의 모습에서 불안한 기운이 발산되는 걸 느낀 수연이 멈칫했다가 방안으로 들어가는 주현을 따른다. 그러다 고개를 돌리고는 하얗게 질린 태연을 향히 차가운 미소를 짓는다.

“조금만 기다려, 완전히 끝을 내줄 테니까.”

“…으으!”

폭군으로 돌아온 수연의 카리스마에 압도된 태연은 신음을 흘렸다. 그리고는 매서운 눈으로 자신을 배신한 종자들을 째려본다.

“이 배신자들!”

“너도 수연이랑 다를 바 없어! 뭘 잘났다고 그러셔.”

“내, 내가 언제!”

펄쩍 뛰며 필사적으로 부인하는 태연이다. 자신이 언제 폭군을 노릇했다고 사람을 이렇게 매도한단 말인가! 자신은 그저 폭군의 말로를 보여주기 위해 있는 힘껏 수연을 갈궜던 겄밖에 없다.

탱통령으로서 당연한 조치를 취했을 뿐인데 이런 식이라니!

유리의 말에 태연은 아니라 외쳤지만 미영이 뒤이어 말했다.

“미안하지만 유리 말이 맞거든? 태연이 너 많이 변했어.”

“…….”

“어쩔 수 없는 대세네. 태연이 넌 많이 변했어. 너도 모르게 권력 맛을 느껴버린 것일 테지. 그러니 키에 맞게 놀았어야지.”

“내, 내가 정말 변했다고?”

“그걸 알았으면 지금 같은 상황이 되지 않았겠지.”

“크흑!”

냉정한 순규와 수영의 말에 자리에 엎어진 태연은 그대로 OTL 자세를 취했다. 폭군의 난폭 정치에 평화로운 숙소 분위기를 만들고자 했지만 그 자신마저도 권력의 맛에 취해버리다니.

자괴감이 듦과 동시에 앞으로 수연에게 당할 자신의 모습이 떠오르자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 모습을 보며 유일한 태연의 편이던 윤아가 안타까운 어조로 입을 연다.

“언니…….”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자신의 앞날이 너무 생생하게 예상되어 태연의 좌절은 점점 깊어만 갔다.


주현을 따라 방안으로 들어간 수연은 곧바로 용건에 들어갔다.

“할 이야기가 뭔데?”

그녀는 바쁜 몸이다. 그동안 이를 꽉 물고 태연의 갈굼을 견뎌 내왔기에 다시 권력을 찾으면 그녀를 어떻게 괴롭힐지 수백 가지의 아이디어를 공책에 차곡차곡 정리해놓았다. 일을 끝마치면 곧바로 태연을 소녀시대 파출부로서 온갖 모진 일을 전담시킬 생각이었다.

“마음이 많이 급하신가 봐요, 언니.”

“그렇지 않겠어? 그동안 날 괴롭히던 탱구의 최후가 보이는 날인데. 후후!”

생각만으로도 웃음이 절로 흘러나온다. 예전에는 당연하게 누리던 권리가 사실은 이렇게 즐거운 것일 줄이야.

“그렇군요. 태연 언니를 괴롭힐 생각에 즐거운 거였어요.”

“당연하지, 그동안 내가 당한 게 얼만데!”

“그래도 딱하잖아요.”

“딱해도 내가 당한 건 갚아주고 싶어.”

정색하며 이야기하는 수연이었다. 근 반년 동안 당해온 것은 그만큼 컸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 주현이 네가 싫어하는 설거지를 태연이에게 전담시키고, 스케줄 이동할 때 짐을 조금 더 많이 드는 정도일 거니까. 나는 가늘고 길게 가고 싶다고? 그러니 무리는 하지 않을 거야.”

주현이 세운 공을 생각하여 절충안을 내놓는다.

함께 고생해온 멤버를 모질게 괴롭히는 것은 그녀도 원치 않았다.

단지 자신이 당한 것을 가늘고 길게 적용시켜 권력자던 탱통령을 하찮탱으로 격하시키는 것뿐.

수연의 설거지 공약이 먹혔음일까.

눈을 빛낸 주현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군요. 그 정도라면 괜찮은 것 같아요.”

“그렇지? 전에 말했던 것처럼 심하게 할 생각은 없어.”

“그러게요. 언니 많이 변하신 것 같아요.”

“많이 변했지. 후후! 앞으로 막내의 설움은 태연이가 직접 겪게 될 거야. 그러니 밖으로 나갈까?”

주현과의 대화는 유익하지 않다.

지금 수연은 태연을 권력의 밑바닥으로 끌어내린 뒤 다시 제위에 오르는 것에 관심이 쏠려 있었다.

“잠시만요, 언니, 아직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어요.”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다고? 그게 무슨 말이야?”

“제가 언니를 이곳으로 부른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잖아요.”

“응? 그랬나? 기억이 잘 안 나네.”

고개를 갸웃하던 수연은 주현이 자신에게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한 걸 떠올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렇구나. 할 이야기가 있다고 했었지. 주현이 네가 하려던 말은 태연이를 괴롭히지 말라는 거 아니었어?”

“그런 거 아니에요. 저는 언니를 믿는 걸요. 예전처럼 심하게 하지 않으려 하는 걸.”

“물론이지. 한 번 약속한 만큼 반드시 지킬 생각이야.”

“제가 하려는 이야기는 다른 거예요.”

“그래? 뭔데?”

의문을 표하는 수연을 보며 주현은 머릿속으로 할 말을 정리한다.

지금부터 하려는 것은 수연만이 알고 있는, 누구도 알지 못하는 도둑고양이와도 같은 그녀의 전과를 밝혀내는 자리였다.

“언니, 3년 전 여름에 스캔들 사건에 휘말리신 적 있으시죠?”

“으응? 응… 그랬지. 갑자기 그 이야기는 왜?”

좋지 않은 기억을 끄집어내자, 얼떨떨한 표정을 짓던 수연의 표정이 살짝 굳는다. 지금 생각하면 잊어버리고 싶은 악몽과도 같은 기억이다.

그러던 수연은 이내 입가에 살짝 미소를 짓는다. 그 스캔들 덕분에 자신은 창현과 만남을 가질 수 있었고, 그의 집에서 식사를 하고, 함께 야시장도 가면서 시간을 보내는 등 최고의 시간을 보냈다.

무엇보다 그녀에게 최고의 추억이었던 것은 기습적으로 훔친 첫 키스. 비록 아메리칸 스타일이라 말하여 연인간의 키스로 기억되지 않겠지만 그녀만이 간직하고 있는 소중한 추억이다.

“…….”

찰나에 맺힌 수연의 미소를 주현은 놓치지 않았다. 날카로운 눈으로 그녀의 표정을 읽어낸 주현은 무언가 말하려다가 멈칫했다.

원리원칙을 고수하고, 동료로서, 언니로서 수연을 사랑하는 주현은 그녀에게 많은 기회를 줄 생각이다. 스스로 사실을 털어놓는 자백의 기회를.

“좋지 않은 기억의 이야기를 꺼내서 죄송해요. 제가 이 이야기를 꺼낸 건 언니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그래요.”

“뭔데? 물어 봐.”

“그때 언니가 기분이 무척 좋지 않으셨잖아요. 동방신기 오빠들이랑 슈퍼주니어 오빠들의 팬 때문에 테러까지 당하셨고요.”

“그랬지.”

“저를 비롯해서 언니들은 그때 수연 언니를 무척 걱정했어요. 친한 사이여서 찍은 사진이 그런 폭풍을 일으킬 줄 저희도 몰랐거든요. 그래서 많이 울적한 언니를 보며 언니들도 많이 우울해 했어요.”

“…응, 그건 고맙게 생각해. 나 때문에 분위기가 가라앉은 것 같아 미안하기도 했고.”

그때 기억을 떠올리며 수연은 마음이 뭉클해지는 걸 느꼈다.

지금 이 이야기가 자신의 최고의 추억이자, 치명적인 실수를 끄집어내는 것인지 자각하지 못한 채.

“그래서 저는 언니의 기분을 풀어드리기 위해 같이 영화를 보려고 했거든요. 그런데 그날, 언니가 일찍 나가셨더라고요. 그것도 아침 일찍. 평소 아침에 약한 언니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요.”

“…….”

순간 수연은 할 말을 잃었다. 주현이 말하는 시기는 자신이 창현과 약속을 잡아서 아침 일찍 일어나 그의 집을 갔던 날이다.

갑자기 왜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것일까.

수연은 가슴속에 불안함이 스멀스멀 지배해나가는 걸 느꼈다.

“기억나시죠?”

“…그랬지.”

주현의 재촉에 어렵사리 고개를 끄덕인다. 미소를 지은 주현은 수연을 살피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 날 언니는 밤 늦게 들어오셨어요. 사실 저랑 언니들은 걱정이 많았거든요. 가뜩이나 상황이 좋지 않고, 언니는 우울해하시는데 늦게 오시니 무슨 일이 있는가 싶어서요. 그때 언니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다른 언니들은 많이 화가 났었어요. 연락하지 않은 언니한테요.”

“그랬어? 미안해. 내가 주의했어야 했는데.”

“아니에요. 화가 났지만 언니들은 내색하지 않았던 이유가 울적했던 수연 언니의 기분이 풀려서였거든요. 커다란 곰 인형을 안은 채 들어온 그때 언니의 모습은 세상을 다 가진 듯했죠. 저랑 언니들은 아직도 그때를 기억하고 있어요. 한나절 사이에 확 바뀐 언니의 모습을. 마치 누군가가 마법을 부렸던 것처럼요.”

“…….”

점점 좁혀오는 포위망.

태연에게 당하면서 예리하게 갈고 닦인 수연의 위험감지 센서가 작용하고 있었다.

무언가 말려들어가는 기분이 강하게 든다.

고개를 저은 수연이 힘겹게 말문을 연다.

“가, 갑자기 과거 이야기는 왜 꺼내는 거야?”

“그때 힘들어하시던 언니 모습이 떠올라서요.”

“괜찮아. 지금은 다 극복했는 걸? 그러니 더 이상 유쾌하지 않은 과거 이야기는 꺼내지 말자. 응?”

“그러고 싶지만 제가 하려는 이야기가 아직 끝나지 않아서요.”

활짝 미소를 지으며 주현이 말하자 수연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분명 그녀는 느꼈다. 미소를 짓고 있지만 주현의 저 모습은 결코 좋은 의미에서 미소를 지은 게 아니란 것을. 여태까지 느껴왔던 것과 비교도 안 될 불안함이 그녀를 덮쳐오고 있었다.

‘막아야 해.’

어떻게든 저지해야 한다는 마음에 수연이 입을 열고자 했지만 주현이 입을 뗀 속도가 더 빨랐다.

“솔직히 그 당시에는 언니의 기분이 풀린 것이 무척 기뻤어요. 언니의 기분이 풀리시면서 자연스럽게 숙소 분위기도 화기애애하게 변했거든요. 그런데 얼마 전에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되었어요.”

잠시 입을 다문 주현은 수연을 조용히 바라본다.

한껏 부려먹던 막내였건만 수연은 감히 그녀의 눈을 마주하지 못한 채 고개를 돌린다. 빠르게 굴러가는 수연의 눈은 다가올 불안함을 예측한 듯 어떻게든 벗어나기 위해 방법을 고안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벗어날 방법은 없었다. 이미 사방에 촘촘한 그물이 그녀를 옭아맨 채 천천히 조여들어가고 있었으니까.

눈을 빛낸 주현이 마무리 작업을 하기 시작한다.

“AA엔터테인먼트 사장님이시죠, 강석규 사장님께서 제게 이런 이야기를 하셨어요. 2006년 여름에 집을 방문한 적이 있다고.”

“…….”

수연의 눈이 거세게 흔들린다. 그 당시 그녀는 창현의 집에 방문했다가 갑작스러운 석규의 방문에 몸을 감춘 적이 있다.

분명 창현은 완벽하게 속였다고 했었는데?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죠. 업무를 끝내고 집에 돌아가니 창현이가 웬 여자와 함께 집에 있다고.”

“…그, 그게 무슨 말이야? 난 금치초문인 걸?”

점점 조여 오는 그물망에 수연은 힘겹게 입을 연다. 그리고 틀린 걸 바로잡으려는 주현의 성격을 이용하여 일부러 금시초문을 틀리게 말했다.

그러나 대어를 눈앞에 둔 주현은 수연의 깨알 같은 피라미 투척에 흔들리지 않았다.

입가에 서늘한 미소를 지은 그녀가 말을 이어나갔다.

“저는 무슨 말인가 싶었어요. 여자에 대해 전혀 모르는 창현이가 집에 여자를 끌어들이다니. 하지만 강석규 사장님께서는 확신을 갖고 제게 이야기를 하셨어요. 그리고 그 대상이 저인 줄 아시더라고요. 하지만 전 아니니, 그 상황에 대해 깊게 고민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리고 깨달았죠.”

“뭐, 뭘?”

날카롭게 쏘아보는 주현의 눈빛에 수연은 싴순이 모드로 돌아가 한없이 수그러들었다.

폭군 수연을 압도하는 눈빛을 거두지 않은 채 주현이 말한다.

“비슷한 시기, 친절한 창현이의 성격과 안티로 인해 우울해하던 언니. 당시 언니는 저를 통해 창현이를 소개받고 보컬 트레이닝을 받으면서 상당한 친분을 자랑했죠. 언니가 우울한 걸 창현이가 알게 되었고, 착한 창현이는 그것을 그대로 넘어가지 못한 채 언니를 집에 초대했을 거예요. 함께 식사를 하다가 강석규 사장님이 방문한 것일 테고, 위기를 넘긴 뒤 함께 밖으로 나가 놀이동산이라도 갔을 테죠. 곰 인형은 창현이가 타준 상품일 게 분명하고요.”

“…….”

놀이동산이 아닌 야시장이었지만 거의 정확하게 상황을 꿰어 맞추는 주현이었다. 놀라운 그녀의 추리에 수연은 할 말을 잃은 채 입을 꾹 다물었다.

끝까지 진실을 말하지 않는 수연을 보며 주현이 몸을 부들부들 떤다.

“그리고… 그리고…….”

우울한 기분을 풀어준 대가로 수연은 창현에게 입맞춤을…….

차마 그 말을 자신의 입으로 꺼내지 못하는 주현이었다.

창현을 가장 먼저 알게 된 것은 자신인데! 호감을 느끼고 좋아하는 것도 분명 자신이 가장 먼저일 것이다.

그런데, 그런데 어찌하여 금 쪽과도 같은 창현이의 첫 키스를…….

화르륵.

주현의 등 뒤로 검은 불꽃이 이글거리는 것은 단순한 착각일까.

온몸을 덮쳐오는 강렬한 기세에 수연은 몸을 떨었다.

입술을 질겅질겅 씹으며 주현은 필사적으로 마음을 가라앉혔다. 치미는 감정을 어렵게 억누른 그녀는 차분한 어조로 입을 연다.

“…창현이가 당했다던 첫 키스, 그것은 언니가 했을 확률이 높죠. 맞죠? 창현이의 첫 키스를 훔쳐간 도둑고양이가.”

쿠구궁!

어마어마한 충격이 전신을 휩쓸었다.

모든 정황을 꿰뚫어 보고 있는 주현에게 어떠한 변명도 통할 것 같지 않았다.

누구도 모르는 자신만의 비밀이라 생각했는데 그걸 알아차리다니. 자신이 간직하던 소중한 비밀이 밝혀지고, 그동안 저질러온 비리(?)를 주현이 알게 되자 수연은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털썩.

정신이 혼미해지며 수연은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역시 언니였군요.”

온몸으로 대답하는 수연을 보며 주현이 차갑게 말했다.

언니의 도둑고양이 짓을 밝혀낸 그녀의 눈은 타오르고 있었다.


“아아…….”

뒤죽박죽 엉켜버린 수연의 뇌는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패닉에 빠진 그녀는 모든 정황을 파악하고 있는 주현의 말이 계속해서 머릿속에 맴돌고 있었다.

누구도 알지 못하는 자신만의 비밀.

힘든 시절, 한 줄기 힘이 되어준 그 사건은 수연과 창현만이 기억하는 추억이자, 복잡하게 엉켜가는 연애전선에서 가장 앞서 가는 요소였다. 다른 멤버들이 창현을 좋아한다 그러고, 치열한 각축전을 벌여도 수연은 언제나 미소를 지을 따름이었다.

저렇게 분주하게 움직이고 노력을 해도 가장 앞서 나간 것은 자신이었으니까.

아메리칸 스타일이라 하여도 첫 키스는 첫 키스다. 창현 본인 입으로 잊지 못하는 걸 목격하였기에 수연은 경쟁자들이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자신이 가장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양날의 검이기도 했다.

만약 이 사실이 알려지면 자신은 모든 경쟁자로부터 견제를 받게 될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 진실이 밝혀졌다.

완벽 범죄에 가까운 자신의 행동이 밝혀지자, 무어라 변명할 겨를조차 없이 무언으로 시인하고 말았다.

“…….”

주저앉은 수연을 바라보는 주현의 눈은 복잡하였다.

모든 정황을 파악했고, 사실로 판명이 났지만 속이 후련하기는커녕 더 복잡하게 변해갔다.

진실을 알게 되고 긴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수연에게 말을 꺼내지 않았던 것은 상황을 극대화하기 위한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함께 연습생 생활을 해온 언니이자, 동료인 수연에게 상처 입힐 것을 걱정해서 그렇다.

결국 괘씸한 마음이 커지고, 경쟁자의 독주를 꺾어놓아야 한다는 생각에 일을 저질렀지만 그녀의 마음속 상처를 헤집어놓은 것 같아 유쾌하지 않았다.

물밀 듯 밀려오는 미안한 마음에 주현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독해져야 해, 서주현, 아직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어. 앞서 나가기 위해서는 더 몰아붙여야 해.’

단 한 번도 독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지만 그녀는 스스로 독해지려 했다.

자신이 가장 먼저 만났고, 가장 먼저 좋아했다.

언니들과 쌓아나간 우정과 처음 찾아온 사랑 사이에서 주현은 수많은 고민을 해야만 했다.

우정과 사랑.

두 감정 사이에서 한 가지 선택을 강요하게 되는 건 주현에게 너무나 가혹한 처사였다.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고민하는 사이, 다른 언니들은 독자적인 방법으로 창현과 관계를 발전시켜나갔다.

그리고 그녀에게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은 석규의 말로 인해 수연의 집 방문 사실을 알았을 때다.

우정을 버릴 수 없고 사랑 또한 저버릴 수 없다는 강박관념은 주현을 잔인하게 만들었다.

‘눈을 질끈 감고 저지르는 거야. 이미 저질렀어. 돌이킬 수 없고.’

주저앉은 수연을 매몰차게 외면하며 입술을 강하게 깨문다.

트득.

입술이 찢어져 피가 번져 나오며 비릿한 맛이 느껴졌지만 그것을 느낄 틈도 없이 주현이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한다.

“아무 말도 안 하시는 건 제 말을 인정하신다는 거죠?”

“…….”

여전히 공황 상태에 빠져 있는 수연.

그녀를 보며 주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기다린다.

잠시 후, 힘겹게 정신을 추스른 수연은 방금 전과 확연히 다른 초췌한 모습으로 주현을 바라본다.

“설마 그걸 알게 될 줄 몰랐어.”

“알게 되면서 저도 고민을 많이 했어요, 언니.”

“그래, 주현이 네가 원하는 게 뭐니?”

수연의 목소리에는 힘이 실려 있지 않았다. 모든 진실을 알고 있는 주현은 자신의 가장 큰 약점을 틀어쥐고 있었다.

“창현이를 포기해주세요.”

“진심이니?”

“…역시 힘들겠죠?”

“당연해. 다른 애들에게 이야기를 하더라도 난 포기하지 않을 거야. 날 처음으로 이해해준 남자이자, 내가 사랑하겠다고 결심한 남자야. 난 절대 포기할 생각이 없어.”

흐릿하던 수연의 눈에 강렬한 빛이 맺히며 어느덧 제 기력을 회복하여 날카로움을 띤다.

그녀의 모습에 혹시나 싶던 주현은 더 앞서나가지 않았다.

“역시나, 저도 거기까지는 바라지 않았어요.”

“그럼?”

“다른 언니들에게 알리지 않겠어요. 제가 이 이야기를 꺼낸 건 언니에게 사실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어요.”

사실 확인과 동시에 주현의 머릿속에 수연의 등급이 대폭 향상되었다.

반드시 견제해야 할 가장 위험한 경쟁자로.

말하지 않겠다는 주현의 행동에 수연의 얼굴에 의혹이 서린다. 가장 큰 무기를 쥐고 사용하지 않으려는 그녀의 행동이 이상하게 여겨졌다.

“나한테 바라는 게 없고?”

“물론, 언니에게 부탁드릴 것도 있어요.”

“뭐, 뭔데?”

“간단한 거예요. 아주 간단한 것.”

입 꼬리를 말아 올리는 주현.

오싹!

그 모습을 본 수연은 한기가 치미는 걸 느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방안으로 들어갔던 수연과 주현은 약 한 시간이 지나서 방밖으로 나왔다.

그 시간은 태연에게 억겁같이 느껴지는 긴 시간이었다.

상황이 뒤집혀 자신의 위치는 추락하는 것밖에 남지 않았다.

여기에서 어떻게 상황의 반전을 꾀할 수 있겠는가.

유일한 자신의 편이던 윤아는 대세에 따라 등을 돌림으로써 완벽한 혼자가 되어버렸다.

한 시간 동안 태연은 자신이 하찮탱이 되는 수천 가지 상황을 떠올리며 두려움에 잠식되어갔다.

그동안 자신이 수연을 괴롭혔으니, 그 몇 배에 달하는 능욕(?)을 당하게 될 테지.

암울하게 젖어드는 태연의 눈에는 한 줄기 빛이 번뜩이고 있었다.

‘난 죽지 않아. 반드시 살아남아서 복수를 꾀할 겨.’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어떻게 잘 비벼야 최대한 능욕을 덜 당할지 생각하고 있으니, 인간은 참으로 이중적이라 할 수 있다.

태연이 이런저런 생각에 빠지며 갈팡질팡할 때, 방문이 열리며 수연과 주현이 밖으로 나왔다.

제법 긴 시간을 기다리게 만든 수연을 보며 유리가 눈썹을 찌푸렸다.

“왜 이렇게 늦게 나왔어.”

“잠시 이야기 할 게 있어서.”

“무슨 이야기인데?”

“앞으로의 정책에 관련된 이야기야. 나쁜 건 아니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방안에서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던 수연은 방밖으로 나오자 폭군의 카리스마를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었다.

“그동안 탱구가 권력 맛을 보면서 많이 변했다는 걸 느낄 거야.”

화두를 꺼내들자, 곳곳에서 성토가 이어진다.

“응, 태연이가 좀 많이 변했지. 착하다가 난폭해졌고.”

“예전에는 순수했는데, 권력을 쥐니 사탕 맛을 알아버린 어린 애가 되어버렸어.”

“나중에는 수연이가 더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

멤버들의 이야기가 이어질 때마다 태연의 고개가 점점 깊게 숙여지고 있었다. 리더로서 신망이 두터웠던 자신이 지금은 이렇게 밑바닥까지 추락하는 신세가 될 줄이야.

이야기를 듣던 수연이 손을 들어 멤버들의 험담을 제지했다.

“그만, 그렇게 이야기하면 태연이가 많이 섭섭하잖아.”

곤경에 처해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자신을 괴롭히던 사람이더라도 도움을 주면 고마운 법이다.

멤버들의 이어지는 성토에 마음이 상할 대로 상한 태연은 수연의 제지가 고맙게 느껴졌다.

왜일까.

스스로 납득이 되지 않았지만 그녀는 수연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수연은 태연에게 시선을 옮기며 말한다.

“태연이도 그럴 의도는 아니었을 거야. 내가 무감각하게 괴롭히던 게 쌓이고 쌓여서 잘못된 형태로 분출되었을 뿐이지. 게다가 너희가 말한 것처럼 권력이란 게 사람을 바꾸기도 하잖아? 난 여전히 태연이가 착하고 순수하다고 생각해. 그러니 헐뜯지 말자.”

“…….”

뭘까. 마음속에 번져가는 이 무지막지한 고마움은.

수연을 바라보는 태연의 눈에는 물기가 아른거리고 있었다.

자신을 괴롭혔다는 생각에 시도 때도 없이 불러서 굴렸건만 정작 자신을 이해해주는 것은 수연밖에 없었다.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했지? 내가 무심하게 대해서 미안해. 이해해줄 수 있지?”

“흐, 흑! 수연아…….”

자신을 이해해주는 수연이 너무 고맙고, 그동안 그녀를 괴롭힌 것이 너무 못되게 느껴져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자책감에 빠진 태연을 보면서 수연은 흐릿한 미소를 지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를 꼭 안아준다.

“…….”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멤버들은 할 말을 잃은 상태였다.

태연이 권력을 쥐고 있을 때 가장 괴롭힌 것은 수연. 그동안 이를 갈며 권력을 되찾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린 것도 그녀다.

이제 위치가 뒤바뀐 만큼 남은 건 피의 숙청뿐이라 생각했는데 전혀 다른 전개로 흘러가고 있었다.

미영과 유리는 수연의 행동을 보며 속으로 감탄했다.

‘제시, 대단해. 태연이를 저렇게 감싸주면 후환은 없을 거야.’

‘호오! 적을 감동시켜 아래로 끌어 들이겠다? 수연이 수가 상당히 늘었는데.’

두 눈에 눈물을 흘린 채 수연을 바라보는 태연의 눈은 충성심이 가득했다.

졸렬함을 스스로 깨닫게 하고 자신의 넓은 마음을 보여줘 상대방을 감동시킨다.

역사책에 나올 법한 전개를 발휘하는 수연의 실력은 보통이 아니었다.

하지만 다른 멤버들은 갑자기 뒤바뀐 훈훈한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한 표정이다.

이어질 피의 숙청을 내심 기대하고 있었던 그녀들은 맥이 빠짐과 동시에 훈훈하게 끝난 상황에 안도의 감정을 느껴야만 했다.

이 중에서 가장 불안해하는 사람은 딱 한 명뿐이다.

그녀의 이름은 바로 윤아였다.

끝까지 태연의 곁에 남아있던 무한태연교의 윤아. 그녀는 자신을 제외한 다른 멤버가 모두 수연을 지지하고, 자신과 운명을 같이할 거라 생각하던 태연이 수연의 자비에 용서를 받는 듯하자 좌불안석이 되어버렸다.

상황이 어떻게 흐르고 있는 것인가.

분위기 파악이 되지 않고, 극도의 불안함을 느낀 윤아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저기… 언니 그럼 어떻게 되는 거죠?”

“…….”

향후 자신의 운명에 대해 물어본 것이지만, 윤아의 말에 태연의 몸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아직 모든 것이 해결 된 게 아니었다.

어색하게 가라앉기 시작한 침묵. 그 침묵 사이로 멤버들은 조심스럽게 수연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모든 것은 그녀의 뜻대로 흘러갈 가능성이 농후했다.

“어떻게 되냐라, 그건 나도 잘 모르겠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권력을 움켜쥔 수연이 모른다고 이야기를 한다.

윤아를 비롯한 다른 멤버들의 얼굴에 의문부호가 떠오를 무렵, 여태껏 침묵을 지키고 있던 주현이 앞으로 나선다.

“그건 제가 말씀드릴게요.”

그녀의 입가에는 진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지금 주현의 모습은 마치, 소녀시대 숙소에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천하게 만들 운동가 같았다.


“이번 주 1위는 소녀시대의 <Gee>입니다. 축하드립니다.”

퍼벙! 펑! 펑!

요란한 폭죽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1위 소식이 알려진다.

무대 위에 서 있던 소녀들은 MC의 1위 발표에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기쁨이 서리더니 환호성을 지른다.

“꺄아! 1등이야! 1등!”

“우리가 1등 했어! 드디어 1등을!”

서로 부둥켜안고 감동에 빠진다. 몇몇 멤버들은 눈시울을 붉힌 채 필사적으로 눈물을 억누르고 있었다.

1위를 못해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번 1위는 그녀들에게 여러 가지 의미를 가져다주었다.

2008년 가요계를 호령하던 원더걸스가 미국으로 떠났다.

그 틈을 타 모든 역량을 집중하여 미니 앨범을 발매하여 빈집털이라는 말이 있었지만 SM엔터테인먼트의 힘이 집중되어 힘을 발휘하기 시작한 소녀시대의 인기는 실감이 나지 않을 정도로 비현실적이게 급상승해나갔다.

음원차트 제패는 물론, 음반 판매 또한 불티나게 이어지면서 무늬만 원더걸스의 라이벌이 아닌, 정말 원더걸스를 위협할 수 있는 걸 그룹으로 도약하게 되었다.

이번 1위는 그만큼 그녀들에게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축하해, 이길 줄 알았는데 져버렸네?”

“그러게. 이번에 1위하면 새로운 기록 갱신도 가까워지는데. 이미 져버렸으니 어쩔 수 없나. 쳇!”

“…기록에 너무 연연하면 꼴사나워. 선배로서 너그러운 모습을 보여.”

“알았다고. 그래도 아쉬워서 그래. 이번에 1위하면 사장님을 확실히 벗겨먹을 수 있었는데. 축하해.”

소녀들에게 다가와 축하 인사를 건네는 건 AA엔터테인먼트 그룹 소속의 걸 그룹 라샤였다.

현이 미국으로 진출하면서 동시에 라샤는 국내 가요계에 컴백하여 돌풍을 일으켰다.

해외 활동에 비중을 두던 라샤는 공백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강력한 파괴력을 발휘하며 상승세를 이어나갔고, 한동안 부동의 1위 자리를 차지했다.

뮤직뱅크 7주 연속 1위를 눈앞에 둔 그녀들은 소녀시대와 맞붙게 되었고, 안타깝게 패배하고 말았다.

지는 달과 떠오르는 해처럼 극명하게 대비되고 있었기에 다음 주에는 더욱 큰 격차가 벌어질 것임이 분명했다.

“고마워요, 언니들.”

눈물을 줄줄 흘리며 감사의 인사를 건네는 태연을 보며 피식 미소를 지은 미란이 품속에서 손수건을 꺼내들더니 그녀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얼마나 기쁘면 눈물을 흘리는 거야. 눈물 좀 닦아. 자, 킁!”

“네, 네. 킁!”

화장이 번지는 태연의 얼굴을 정성껏 닦아주는 미란의 모습은 친절한 언니 그 자체였다. 두 그룹의 화기애애한 모습은 TV를 통해 그대로 반영되고 있었고, 마음을 추스른 소녀시대는 수상 소감을 발표하게 되었다.

“이수만 선생님과 사장님, 그리고 실장님과 팀장님… SM식구 모두에게 감사의 인사드리고 가족들에게도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너무나도 많은 사랑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욱 열심히 하는 소녀시대가 되겠습니다.”

감정이 격해지면서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도 모르는 수상소감이 끝났고, 앵콜 무대를 펼친 소녀들은 곧바로 대기실에 돌아왔다.

아직까지 1위 여운에 빠져든 그녀들은 멍한 표정이었다.

“정말 우리가 1위를 한 거야?”

“현실 같지가 않아. 우리가 1위라니…….”

“나도 동감이야.”

현실에서 살아가고 있음에도 현실을 부인하는 그녀들의 모습에 주현이 한숨을 푹 내쉬며 말한다.

“현실이에요, 언니. 우리가 라샤 언니들을 꺾고 1위를 했어요. 그러니 현실 이야기는 그만하시고 지금을 즐기세요.”

“그렇지? 와아아아!”

“우리가 1위야!”

주현의 말에 현실로 돌아온 그녀들은 기뻐하며 날뛰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주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말 언니들은 못 말리겠어요.”

말리고 싶어도 말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무엇보다 1위를 했다는 즐거움은 그녀들만 느끼는 것이 아닌, 주현도 느끼고 있었다는 것.

입가에 미소를 지은 주현은 대기실을 엉망진창으로 만드는 소녀들의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후, 어느 정도 기분이 가라앉는 듯하자 주현이 입을 연다.

“언니들, 다음 스케줄을 해야 하니 슬슬 준비하세요.”

“그러고 보니 다음 스케줄이 있었지. 주현아, 오늘 청소 당번은 누구야?”

“오늘 청소 당번이요? 그러니까… 태연 언니랑 윤아 언니네요.”

수연의 물음에 수첩을 펼쳐든 주현은 태연과 윤아의 이름을 언급한다. 한참 기쁨에 겨워 날뛰던 두 사람은 주현의 호명에 멈칫한다.

“나, 나라고?”

“엑! 벌써?”

“네, 언니들이 게으름 피운 것들이 누적되서 순서가 빨리 돌아오게 되었어요.”

“…….”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는 주현을 보며 태연과 윤아의 얼굴에 참담함이 서렸다.

태연이 권좌에서 내려오고 수연이 다시 권력을 움켜쥐던 날.

수연은 폭군의 자리에 오르지 않은 채 주현에게 숙소에서 지내는 기본 생활 규칙을 정하게 하였다.

그녀의 호명에 앞으로 나선 주현은 수첩에 빼곡하게 적힌 규칙을 차출하여 멤버들이 지켜나가야 할 것에 대해 이야기를 하였다.

그 결과 소녀시대 숙소는 철저히 규칙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 곳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권력을 움켜쥐고 숙소의 기강을 문란(?)하게 만든 태연과 윤아에게는 벌점이 가산되어 청소와 설거지를 담당하게 되었다.

주현의 규칙은 멤버들이 어길 경우 벌점이 추가되는데, 이 벌점에 따라 청소 당번과 설거지 당번의 로테이션 순위가 올라간다.

더불어 벌점을 받을 때 벌금마저 내게 되었다.

일상생활을 즐김에 있어 규칙이 문제되지 않았기에 가장 많은 벌점을 받은 태연과 윤아가 불이익을 받는 건 당연했다.

1위를 한 기쁨도 잠시, 양 어깨를 늘어뜨린 채 어지럽힌 대기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청소하는 태연과 윤아를 보며 시간을 재던 주현이 말한다.

“언니들 시간이 많지 않아요, 좀 더 빨리 움직이세요.”

으득! 까드득!

“알았어.”

이 가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태연과 윤아가 더 빠르게 움직였다. 속으로 불만이 가득했지만 주현의 벌점 시스템은 파고들 틈이 없어 감히 불평을 할 수 없었다.

결국 주현은 수연에게 반기를 들었던 태연과 윤아를 효과적으로 부려먹고 있는 셈이다.

“…….”

태연과 윤아를 재촉하는 주현을 보며 미영과 유리의 눈이 묘해졌다.

주현의 규칙은 실로 완벽하여 빈틈을 파고들 여지가 없었다. 계책에 능한 두 사람마저도 주현의 규칙에 허점을 발견하지 못했고, 몇 차례 실수를 하여 벌점을 부여받은 상태였다. 하지만 가장 큰 불이익을 보는 것은 태연과 윤아였지, 자신들이 아니었다.

‘막내가 보통이 아니야. 앞으로는 조심해야겠어.’

운이 좋아 창현과의 데이트를 얻어내고, 입술 도장까지 찍는데 성공했지만 미영은 촘촘한 그물망을 펼치는 주현의 행동에 경계심을 끌어올렸다.

‘흐응, 막냉이가 제법인데? 저걸 잘하면 좀 더 재미있는 상황을 만들어낼 수도?’

입가에 흐릿한 미소를 걸친 채 태연과 윤아를 갈구는 주현을 지켜보는 유리였다.

잠시 후, 청소를 모두 끝낸 태연과 윤아가 이마에 땀을 닦아냈다.

“다, 다했다.”

“다했어. 히잉, 죽겠네.”

“수고하셨어요, 언니들, 이거 비타민 음료에요, 드세요.”

청소를 마친 태연과 윤아에게 음료수를 건네주는 주현이었다.

“…….”

채찍질 뒤에 당근을 내미는 주현의 노련함에 태연과 윤아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철저한 로테이션 시스템이어서 불만을 갖고 있어도 표현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고생 뒤, 이렇게 신경을 써줄 테면 마음과 달리 고마움을 느끼고는 한다.

대기실에서 나온 소녀들은 다음 스케줄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한다. 벤으로 향하던 태연은 무슨 생각이 있는 듯, 입 꼬리를 말아 올리더니 핸드폰을 만진다.

벤에 탑승하고, 움직일 무렵, 태연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한다.

♩♪♬

일부러 진동을 하지 않고 벨소리가 울리게끔 한 태연은 전화를 건 상대의 이름을 보고는 환한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 모두 들으라는 듯 큰 목소리로 말한다.

“어머! 창현이가 나한테 전화를 했네?”

“……!”

태연의 말에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짓는 소녀들.

삽시간에 시선이 집중되었지만 태연은 여유로운 태도로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핸드폰을 연 그녀는 당당한 태도로 전화를 받았다.

모두 들을 수 있게 스피커 폰으로 변환한 채.

“여보세요, 창현아?”

-네, 누나. 오랜만이에요.

틀림없는 창현의 목소리다. 모두의 눈빛이 번뜩이자, 태연은 득의양양한다. 자신이 그에게 소식을 알려 먼저 연락하게끔 했지만 이렇게 의도 된 상황에서 집중되는 질투의 기색은 그녀로 하여금 흐뭇하게 만든다.

‘이 기세로 귀국하면 확 몰아붙이는 겨.’

서열이 떨어졌지만 소녀시대 리더 태연이 어디로 가는 게 아니다. 창현이 미국에서 돈을 쓸어 담는 순간에도 태연은 꾸준히 자기계발을 하여 다양하고(?) 획기적인(?) 조련을 터득하고 있었다.

“우리 1위 했어. 축하해줘.”

-라샤 누나들이 1위를 하고 있던데, 그걸 제치다니, 대단한데요?

“그렇지? 히히!”

창현과 이야기를 하면서 태연은 자신에게 말할 기회를 달라는 듯, 눈빛을 연신 뿌리는 멤버들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절대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왜냐고? 작정하고 약 올릴 요량으로 전화를 한 것이니까.

특히 질투의 빛을 활활 태우는 주현을 보며 태연은 속으로 웃었다. 촘촘한 규칙망으로 자신을 빈틈없이 옭아맨 막냉이야 말로 최대의 적이었다.

그동안 고생한 보상 심리를 엉뚱하게 발휘하고 있었다.

‘이렇고 저런 이야기로 열심히 약 올려주지.’

그렇게 생각한 태연이 막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아참! 누나, 우결 잘 보고 있어요. 재미있던데요? 형돈 형이랑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

와장창!

한껏 기분 업 되어있던 태연은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을 받았다.

하위 서열로 밀려난 태연의 귀여운 반란은 채 1분도 되지 않아 자체 분해가 되어버렸다.

현은 반란을 꾀하던 태연이 침몰하면서 소녀들은 자연스럽게 전화를 인수인계 받을 수 있었다.

가장 먼저 전화를 받은 것은 권력을 움켜쥔 수연이 아니었다.

태연 바로 옆에 앉아 곧바로 전화를 받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수연은 핸드폰을 주현에게 양보하는 놀라운 면모를 보였다.

가장 뒤쪽에 앉아있던 주현은 놀라움이 역력한 언니들의 시선에 살짝 양해의 의미가 담긴 고개 숙임을 보인 뒤 핸드폰을 받아든다.

“여보세요, 창현아! 잘 지내고 있어?”

“응? 의외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보통 전화를 하면 누나가 가장 늦게 받았잖아요. 그런데 이번에는 가장 먼저인 것 같아서요.

“가장 먼저는 아니지. 태연 언니가 먼저 받았잖아.”

-그거야 태연 누나한테 전화를 해서 그렇죠. 아참! 태연 누나는 전화를 받다가 갑자기 왜 사라진 거예요? 무슨 일 있는 건가요?

무슨 일이 있기는, 원인을 제공한 것이 당사자이면서.

우결 발언으로 인해 태연은 거품을 물고 쓰러진 상태였다.

처음에는 우결을 하게 되어 두근거리는 마음을 감추지 못하던 태연. 내색하지 않았지만 가상 결혼 체험을 통해 연애 기술을 예리하게 갈고 닦아 창현을 노릴 생각이었겠지.

하지만 그녀의 생각은 어긋나고 말았다. 창현을 노리겠다는 야무진 의도는 상대가 형돈이라는 것에 철저히 깨부서졌고, 진상 캐릭터인 그를 보면서 남자에게 일말의 불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거기에다가 창현에게 우결 잘 보고 있다는 축하 멘트를 들어버리다니.

태연으로서는 최악의 전개가 펼쳐진 셈이다.

“태연 언니는 잠시 사정이 생겨서 그래.”

-그렇군요. 어쨌든 누나가 받으니 상당히 의외에요.

“응, 나도 그렇게 생각해.”

평소에 전화가 오면 가장 나중에 전화를 받는 것이 주현이었다.

왜냐? 막내였으니까.

그러나 수연의 약점을 틀어쥐게 된 주현은 더 이상 설거지 담당을 맡던 약해빠진 막내가 아니다. 자기 것(?)을 지키기 위해 각성한 그녀는 권력자 수연을 뒤에서 조종하는 암중 배후 흑화 서로로였다.

‘이제는 내가 다가갈게.’

남녀간의 관계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인지 까맣게 모르던 주현. 멍 놓고 있으면서 언니들에게 수많은 기회를 제공했지만 가만히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녀는 예리했고, 습득력이 빨랐다.

멤버들이 창현을 어떻게 요리하는지 보면서 그녀는 하나하나 습득해나가고 있었고, 그것을 소화해나가며 자신의 역량을 착실히 기르고 있었다.

소화를 마치고 마음을 굳힌 그녀는 석규의 후원을 등에 업은 최강의 적이다.

오랜만에 나누게 된 대화는 주현에게 있어 감격이었고, 다른 멤버들에게 부러움을 사기에 충분했다.

다른 소녀들도 대화를 했지만 핸드폰을 쥔 주현이 대화를 주도해나가고 있었다.

안부 인사를 나눈 뒤, 주현은 창현에게 본격적인 용건에 들어갔다.

“창현아, 언제 귀국할 것 같아?”

“……!”

주현의 물음에 소녀들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짓는다.

그녀의 질문은 소녀들이 가장 궁금해하던 것 중 하나. 다만 누군가가 총대를 짊어져야 하는 역할이었기에 물어보지 않고 있었다.

-저요? 음! 아직은 확실하게 정해진 게 없어요. 일단 계획 대로라면 2월 중순에 복귀하게 될 것 같아요.

“확실하게 정해진 건 없고?”

-그렇겠죠? 그런 것도 있지만 잔여 스케줄이 생길 수도 있어서요.

“그렇구나…….”

-아쉬워하는 것 같은데요?

“응, 일찍 오면 초콜릿이라도 주려 했지.”

2월 중순이라면 발렌타인 데이와 겹치는 시기였다. 하지만 중순인 만큼 지나서 올 확률이 무척 농후했다.

-초콜릿이요? 하, 하하! 마음만 받을 게요.

예전 살인 초콜릿을 기억한 것인지 창현의 목소리에 긴장감이 역력하게 배어난다.

“아, 아니야! 그건 효연 언니가 장난을 쳐서 그런 거라고.”

-알긴 알지만…….

“믿어달란 말이야. 나 정말 잘 만들었는데. 이잉…….”

-쿠, 쿨럭!

조곤조곤한 논리정연의 상징과도 같던 주현의 애교 섞인 콧소리에 창현이 기침을 흘린다. 다른 소녀들 또한 애교부리는 그녀의 모습에 눈을 동그랗게 뜬다.

“어쨌든 돌아오게 되면 알려줘. 나랑 언니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알았어요. 그런데 제가 가더라도 누나들이 바빠서 시간을 낼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Gee>를 발매한 소녀시대의 인기는 고공행진을 거듭하고 있는 중이다.

서서히 타오르고 있는 그녀들의 인기는 지금 막 피어나는 중이기에 앞으로 더 바빠질 것임이 분명했다.

“아니야! 그때면 분명 시간이 날 테니까…….”

-그래요? 절 위해 시간을 내주시는 건가요?

“응.”

-네?

서슴없이 대답하는 주현의 모습에 창현이 한순간 의아함이 담긴 목소리를 낸다. 그에 순간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주현이 황급히 부인했다.

“열심히 일해야지. 하지만 그렇게 바쁜 것도 아니야.”

‘그래야 조금이라도 따라잡을 수 있잖아.’

자신과 창현의 거리.

그것은 인지도도 그러하였고, 사람 대 사람으로서도 그러하였다.

<Gee>의 대박은 그 격차를 조금이라도 좁혀줄 수 있는 회심의 한 수였다. 하지만 아직도 많이 부족해서 더욱 열심히 분발해야 했다.

-기대할게요. 그럼 파이팅입니다.

“응, 창현이 너도 열심히 해.”

그렇게 통화는 끊어졌다.

“…….”

화제 거리를 제공하는 창현과의 통화였지만 소녀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들 머릿속에는 창현과 거리를 조금이라도 좁힐 생각밖에 없었다.

음원 차트를 휩쓸고 가요 1위를 차지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국내 Top일 뿐.

그에 반해 창현은 국내가 아닌 세계의 Top이다.

조금이라도 따라잡기 위해서는 열심히 움직여야 했다.

부르릉.

침묵이 가라앉은 곳에서 엔진 소리가 간간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소녀시대가 한동안 대박을 터뜨리고 있을 때, 수만은 미국에서 방문한 손님을 맞이하는 중이었다.

“하하, 반갑습니다, 사장님.”

“오랜만입니다, 회장님.”

SM엔터테인먼트 회장인 수만이 맞이하고 있는 손님은 다름 아닌 석규였다.

창현의 매니저 역할을 하던 그가 오랜만에 한국에 복귀하자, 이를 알아차린 수만이 재빨리 약속을 잡아 자리를 만든 것이었다.

“역시 강 사장님은 대단합니다. 현을 다시 1위로 만드시다니.”

“제가 1위를 만든 게 아니죠. 다 창현이가 잘해서 그런 것입니다.”

“그게 그거 아니겠습니까? 저희 엔터테인먼트는 소속사 연예인이 하나의 결과물이니까요. 다 사장님의 역량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너무 대우를 해주시는군요.”

“불편하십니까?”

“조금 그렇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웃음을 짓는다. 부담스럽다고 했지만 석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사회에 나오고, 어느 정도 경력이 쌓이면 그때부터 나이보다 우선시 되는 것이 능력이다. 작은 중소규모의 회사였지만 현과 라샤를 거느리고 있는 AA엔터테인먼트는 무너질 리 없는 최고의 회사였고, 그 회사의 사장인 석규는 현을 다시 한 번 1위에 올려놓음으로써 돈방석에 앉았다.

총 매출액은 SM엔터테인먼트가 더 많을 테지만 남는 이익은 비교할 바도 안 된다.

미국 진출을 염두에 두고 있는 수만으로서는 미국에서도 통하는 석규의 역량이 절실하게 필요해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이번에 현이 1위 하는 것을 보며 강 사장님의 기획력이 더 향상된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다 회장님이 도와주셔서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아직 부족하니 많이 도와주십시오.”

“물론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도 도움이 되니까요. 허허!”

“그건 그렇고 이번에 소녀시대가 대박을 터뜨렸다고 들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작은 성과를 거두었을 뿐입니다.”

그렇게 말하지만 수만은 입가에 걸리는 미소를 지울 수 없었다.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임한 소녀시대는 훌륭히 성공을 거두었다. 만약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면 자신의 입지가 상당 부분 흔들렸을 것임이 분명했다. 이사 회의에서 상당한 압박도 받았었고.

“작은 성과라니요. 제가 그 특혜를 보고 있지 않습니까?”

“하하, 이럴 줄 알았으면 강 사장님의 투자를 받지 않는 건데 말입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수만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석규 또한 입가에 진한 미소를 걸어놓은 상태였다.

창현이 미국으로 떠난 뒤, 수만이 직접 진두지휘하여 소녀시대 미니 앨범 프로젝트를 기획하기 시작했다. 당시 SM엔터테인먼트는 동방신기와 슈퍼주니어의 활동 중단으로 상당한 자금 압박에 시달리고 있던 시기였다.

그러던 중 투자 제의가 들어온다. 바로 AA엔터테인먼트 석규의 투자 제안이었다.

소녀시대에게 상당히 밝은 미래를 보았다고 말한 그는 지분 10%를 대가로 50억이라는 엄청난 금액을 투자하였다.

자금 압박을 받고 있던 수만으로서는 환영할 만한 제안이었고, 동지 개념으로 이끌고 가고 싶어 하던 AA엔터테인먼트였기에 곧바로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덕분에 자금 압박을 해소하고 순조로이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었고, 소녀시대가 대박이 나게 됨에 따라 AA엔터테인먼트도 이득을 보게 되었다.

무엇보다 기쁜 것은 AA엔터테인먼트를 끌어들여 동지로 삼았다는 점이다.

이제 자신이나 SM엔터테인먼트가 직접 AA엔터테인먼트의 지분을 파고들면 뗄 수 없는 완벽한 관계가 성립된다.

“잘 되었습니다. 고된 연습생 기간을 거쳐서 그런지 곡과 컨셉을 잘 소화하더군요.”

“강 사장님이 도와주셔서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제 도움이 없어도 충분히 성공했을 것입니다.”

“하하! 이거 이야기가 제자리 걸음을 하는 것 같군요. 미국에서 갓 복귀를 하셨으니 무척 바쁠 것이라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그런데 곧바로 본론에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예, 물론입니다.”

석규의 수락이 떨어지자, 수만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면서 의자에 몸을 묻는다. 사업적 제휴를 얻어내기 위해서는 서로 이득을 얻어내야 한다.

이번 부탁은 그가 힘을 써줘야 하는 것. 머릿속에서 복잡한 수가 스치고 지나갈 수밖에 없었다.

“사실 이건 사업적 제휴라기보다는 부탁에 해당합니다.”

“일단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한 가지는 미국에 진출한 보아에 관련된 것입니다.”

SM엔터테인먼트의 간판 스타라 할 수 있는 보아는 현재 미국에 진출한 상태지만 결과가 여의치 않다.

“아아, 들었습니다. 안 그래도 그 부분에 대해서 알아봤습니다.”

“그럼……?”

“대한민국도 그렇지만 미국도 비슷합니다. 사람을 잘 만나야 하지요. 저도 처음에는 인맥이 부족했지만 창현이가 잘 되면서 각지에 인맥을 형성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우선 보아 양을 창현이의 콘서트 게스트로 참석하게 하고, 잘 나가는 프로듀서를 섭외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별 것 아닌 것처럼 말하지만 수만으로서는 너무 어렵게 생각하던 일들이었다. 그에 석규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한다.

“아니요, 제게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다만 보아 양이 잘 해내는 것이 문제겠지요. 그리고 또 다른 한국 가수의 진출은 창현이에게도 정신적으로 상당한 의지가 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도 감사한 건 감사한 것입니다.”

“회장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별 수 없군요. 하하!”

“그렇습니까? 주주가 되었다고 해도 주제가 넘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만큼 도움을 받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한 가지 부탁은 해결되었으니 다른 부탁을 들어볼 수 있습니까?”

“음! 다른 부탁은…….”

난감한 듯 말끝을 흐리는 수만. 그 모습을 보며 석규의 얼굴이 호기심으로 물들어간다. 도대체 무슨 부탁을 하려는 것일까.

고민하던 수만은 결심한 듯 입을 연다. 방금 전 부탁과 달리 상당히 무례한 부탁이었지만 그래도 해야만 했다.

석규와 전혀 관련 없는 일이 아니었으니까.

“현이 귀국하면 한 방송에 출연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허어, 이것 참.”

수만과 이야기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석규는 혀를 내둘렀다.

원하던 바를 들어주고, 자신 또한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지만 감탄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역시 실력자는 실력자로군. 설마 그런 식으로 일을 처리할 줄이야.”

부탁이었지만 자신이 들어줄 수밖에 없는 형태였다.

웬만하면 끌려가지 않는 자신을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만들어버리자, 석규는 감탄이 절로 일어났다.

경험을 쌓고, 눈치가 늘었지만 아직까지 부족한 면이 없지 않아 있나보다.

“일단 나쁘지 않으니까.”

손해가 된다면 절대 받아들이지 않았을 테지만 이익이 된다는 생각에 동의를 했다. 한 번 끌려갔으니 남은 것은 자신이 주도하며 일을 처리하는 것뿐이다.

“이제는 좀 쉬어야겠군.”

수만에게는 바쁜 척 모션을 취했지만 자신의 귀국 사실을 몇 사람에게만 알렸던 터라 별로 바쁘지 않았다.

그가 현의 활동에도 불구하고 중도에 방문한 것은 지쳐 있는 것도 있지만 다른 이유도 존재했다.

석규가 모는 차가 어느덧 주택 단지로 들어섰고, 잠시 후, 사랑하는 가족들이 살고 있는 주택이 모습을 드러냈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석규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걸린다.

“나 왔어.”

“왔어요?”

“응, 오랜만이야.”

“저도요.”

앞치마를 두르고 있는 지선은 석규를 반겨주며 사뿐사뿐 다가와 그의 뺨에 입술을 맞춘다. 부부간에 이루어지는 가벼운 스킨십이지만 그것은 지친 석규의 마음을 빠른 속도로 치유하고 있었다.

‘음!’

부드럽게 내려앉은 집안 공기는 그를 보듬어주었으며, 사람의 향기는 지친 정신을 달래주기에 충분했다.

방안으로 들어가 석규의 옷을 받아든 지선은 계속해서 두리번거리는 그를 보며 의아한 목소리로 묻는다.

“왜 그래요?”

“그냥 집에 왔다는 게 실감 되서.”

“장난도 참. 잠시 기다리고 있어요. 음식 준비하고 있으니 잠시 후면 지영이도 올 거예요.”

“그래.”

다시 주방으로 향하는 지선을 보며 석규는 조용히 거실로 옮긴다. 그리고 리모컨을 쥐고 TV를 튼다.

타닥! 타닥! 타닥!

TV에서 나오는 소리와 도마 위로 들려오는 칼질 소리가 정겹게 들려왔다.

이미 그의 두 눈은 TV 내용을 쫓고 있지 않았다. 한참 웃긴 장면이 나오고 있었지만 그의 표정은 시간이 흐를수록 굳어가고 있었다.

멍하니 TV 화면을 바라보던 석규가 입을 열었다.

“창현이한테 미안하군.”

미국에 놔두고 자신 혼자 돌아와서 그런 것이 아니다.

이 편안한 분위기를 느끼면서 석규는 오랜만에 창현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어린 시절 겪었던 분위기에 대해서였다.

부인을 잃은 석규는 기울어가는 사업을 되살리기 위해 소위 말하는 일 중독에 걸렸었다.

성실함이 돋보이던 그는 지나칠 정도로 일에 몰두했었다. 그것은 그가 행할 수 있는 유일한 자기방어이기도 하였다. 사랑하는 부인을 잃은 그는 정신적으로 지독한 괴로움을 겪어야만 했고, 그것을 잊기 위해서 자신을 학대해야 했다. 그 분출구가 바로 사업이었다.

일에 몰두하면서 부인을 잃은 슬픔에 벗어날 수 있었지만 그는 결정적인 실수를 범하게 된다.

바로 하나뿐인 아들 창현을 그대로 방치하게 된 것이다.

자신과 부인의 장점을 닮은 창현은 귀엽고 영리한 아이였다.

부인을 닮아 얼굴이 잘생기고 노래를 잘했으며, 자신을 닮아 성격이 모나지 않고, 적응력이 뛰어났다.

사랑을 받고 무럭무럭 자라던 창현은 석규에게 있어 자랑거리였다.

상념에 젖어있던 석규를 깨운 것은 지선의 목소리였다.

“갑자기 왜 그래요?”

멍하니 TV를 바라보고 있는 석규의 모습에 그녀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은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응? 아아… 그냥 생각에 빠져서.”

“그래요?”

“그런 거지.”

“감성적으로 변한 것 같은데.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고요?”

지선의 물음에 석규는 고개를 젓다가 이내 쓴웃음을 짓는다.

“그건 아니야. 음, 고생을 좀 해서 그런가? 그런 것일 수도 있겠지.”

“곧 있으면 지영이가 올 거예요. 식사 준비도 다 되었으니 오랜만에 셋이서 먹도록 해요.”

“그래.”

다시 주방으로 향하는 지선을 보며 석규가 미소를 짓는다.

예전에는 자신을 걱정해줄 사람조차 없었는데 이제는 걱정해주는 가족이 생겼다.

‘그래, 가족이 생겼다.’

창현을 보면서 석규가 느끼는 것은 ‘미안함’이었다.

자신으로 인해 제대로 된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자란 창현은 평범하지 않은 유년기를 겪었다. 사업에 난항을 겪고 있을 때 그의 노래를 듣고 얼마나 놀라고 미안했던가. 누구의 도움도 없이 실력으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했다는 것이 석규에게 대견함보다는 미안함을 느끼게 하였다.

그의 모든 것이 자신의 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훌륭한 아들이었지만 석규의 눈에는 창현이 지닌 약점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남에게 관심 받기를 원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처음 얼굴 없는 가수를 제안했던 것도 관심 받고 싶지만 동시에 관심에 대한 두려움이 있어서 그랬던 것이다. 창현은 자신에게 집중된 관심이 떨어져 나갈 것을 두려워하였다.

능력적인 면에서 뛰어났지만 정신적인 부분은 한없이 여렸다.

쉽지 않은 재혼을 강행한 것도 창현에게 가족의 존재를 다시 느끼게 하고 싶어서였다.

창현이 힘들고 괴로워 할 때도, 석규는 자신의 무능함에 몸서리를 쳤다.

‘앞으로 떨어져서도 안 된다. 찬란한 앞날만을 보이게 해줘야 한다.’

겉으로 내색할 수 없는 스스로의 속죄.

그랬기에 석규는 더러워서 담그지 않던 세계에 망설이지 않고 몸을 내던지고, 독해졌다.

현이란 이름이 최고의 반열에 오르고, 안정 되어 감에 따라 나아졌지만 아직 해야 할 것은 많았다.

‘내 경험을 전수해주면 굳이 쓴 경험을 하지 않고도 잘 나갈 테지.’

미국에 남아 있는 창현에게 대견함을 느끼면서 앞으로 해야 할 일을 머릿속으로 정리한다.

생각 정리가 끝나갈 무렵, 낭랑한 목소리가 그의 귀를 뒤흔든다.

“아빠! 오셨어요?”

“오랜만이다, 지영아. 그동안 더 예뻐졌구나.”

“시간이 얼마나 지났다고요. 그리고 전 원래 예뻐요.”

“예쁘기는 무슨! 어떻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자화자찬에 빠져드니.”

통통 튀는 지영의 말에 눈살을 찌푸린 지선이 혼낸다.

“칫! 난 엄마 딸이 아닌가 봐. 도대체 어디서 주워온 거야? 아빠도 내가 안 예뻐요?”

“음! 예쁘지.”

“그렇죠? 엄마가 잘못된 거야! 내가 얼마나 예쁘다고! 아빠랑 오빠가 인정해주는 예쁜이라니깐!”

“뭐라고 좀 해봐요. 지영이 저거 심각한 공주병이에요.”

지선의 말에 피식 미소를 지은 석규가 말한다.

“하지만 엄마를 따라갈 수는 없지.”

“에?”

“지영이가 아무리 예뻐도 지선이를 뛰어넘을 수 없지. 엄마를 뛰어넘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노력해라. 하핫!”

“…….”

석규의 닭살 멘트에 지영은 할 말을 잃어버렸고, 지선은 얼굴을 붉혔다.

화려하게 차려진 상 자리에는 무거운 침묵이 자리하였다.

“흠흠! 내가 좀 심했나?”

“아빠 진짜 닭살이다. 와! 나 정말 소름 돋았어요.”

“그래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 부러우면 지영이 너도 너만 바라봐줄 남자 친구를 구하던가.”

“저야 항상 남자들이 줄 서 있죠. 히힛! 하지만 참으려고요.”

“어째서?”

“남자 친구 잘못 사귀면 나중에 제가 가수 됐을 때 인터넷에 뜰 거 아니에요. 과거가 깨끗해야 상큼하게 가수 생활을 시작할 수 있다는 말씀! 저도 나름대로 생각하고 있다고요.”

“상당한 걸?”

어린 나이에 벌써 저런 성숙한 생각이라니.

놀란 석규의 표정에 지영이 의기양양해져 어깨를 쭉 폈다.

“제가 좀 대단하죠. 에헴!”

“하하! 벌써 이렇게 크다니. 지영이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물론이죠. 저도 다 컸어요.”

“다 크기는 무슨. 넌 아직 어린애야.”

분위기 깨는 지선의 말에 지영이 표정을 팍 찌푸렸다.

“내가 왜 어린애에요. 아빠가 말하잖아요. 다 컸다고. 저도 어린 아이가 아니라니깐요?”

“이미 다 알고 있어. 남자가 줄을 서기는 무슨. 천방지축인 널 누가 따르겠니.”

“아니라니깐요, 정말. 아악! 보여줄 수도 없고. 억울해!”

절규하는 지영을 바라보는 지선의 눈은 냉정했다. 그녀의 눈에 비친 지영은 세상물정 제대로 모른 채 자신감에 찬 어린아이였다.

지선은 한숨을 푹 내쉰다.

“후우! 지영이가 유리의 반만 닮았어도…….”

“유리는 또 왜?”

익숙한 이름이 들리자, 반응하는 석규. 지선의 말에 아차했던 지영은 석규가 유리의 이름을 언급하고 넘어지자 다급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지선의 말이 한발 빨랐다.

“유리가 참 조신하잖아요.”

소녀시대 멤버들이 들었으면 바닥을 치고 통곡할 소리였다.

하지만 불행히도 유리의 본 모습을 아는 것은 지영 뿐, 석규 또한 얼굴과 이름만 알 뿐, 자세한 성격은 잘 모르고 있었다.

“그래?”

“네, 나이 차이가 조금 있지만 그 정도는 요즘 일반적이잖아요. 조신하면서도 생각이 트인 것 같고, 창현이 부인으로는 딱이라 생각되는데.”

“…….”

유리를 적극 추천하는 지선을 보며 지영은 조마조마했다.

올바른 그녀의 모습을 알지 못하는 지선의 생각은 너무나도 위험했다.

재빨리 그녀는 석규에게 도움 요청의 눈빛을 보낸다.

그리고 석규는 그녀의 눈빛 때문인지 원하는 답을 낸다.“

“음! 그 말이 사실이라면 괜찮긴 하지만 세 살 차이는 조금 힘들다고 생각하는데.”

“그래요? 그래도 그 정도 차이라면…….”

“세 살은 좀 무리인 것 같아.”

‘아빠, 굿!’

지선의 공세를 무너뜨리는 석규를 보며 지영이 열심히 응원한다.

하지만 이어진 그의 말은 지영을 나락으로 떨어뜨리기에 충분했다.

“내가 점 찍고 있는 며느리감은 소녀시대 서현인데, 창현이보다 한 살 많고…….”

이어지는 것은 석규의 주현 찬양이었다.

“…….”

그 말을 듣고 있는 지영은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이래나 저래나 석규와 지선은 창현을 솔로부대에서 탈출시키려 하고 있었다.


식사를 마친 석규는 잠에서 깬 아현이를 들어 올리며 미소 지었다.

“아이구, 우리 아현이 잘 잤어?”

“꺄우!”

오랜만에 아버지를 본 것일까. 환하게 미소 짓는 아현을 보면서 석규는 그동안 겪은 고생이 싹 내려앉은 듯한 표정이었다.

창현에게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이루게 된 가정. 처음 목적과 달리 가족과 함께 하는 지금 이 순간이 석규에게도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시간이 되었다.

지선이 설거지를 하는 동안 석규는 아현을 돌보면서 놀아주기 바빴다.

그러던 중, 방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더니, 지영이 안으로 들어온다.

“아빠.”

“갑자기 무슨 일이냐?”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그런데요.”

“하고 싶은 말? 음! 상담은 바람직한 것이지. 말해보아라.”

나직이 고개를 끄덕인 석규는 품에 안긴 아현을 바라본다. 배고파서 깼던 아현은 목적을 달성하자 잠에 빠져 있었다.

“방으로 갈까?”

“네.”

대답한 지영은 자신의 방으로 향했고, 아현을 내려놓은 석규가 그 뒤를 따랐다.

“여기 앉으세요.”

“음, 그래.”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지영의 방을 둘러보던 석규는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한결 여유가 생긴 그는 입가에 흐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그래, 하고 싶은 말이 뭐니?”

“저, 그게…….”

밥상이 차려졌지만 막상 차려지자 지영은 망설이는 기색을 보였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것이기에 그런 걸까.

말하지 않아도 우물쭈물하는 그녀를 보며 석규는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사춘기란 다 그런 게지.’

이미 창현의 경우가 있어서 짐작이 되었다. 본격적으로 자아를 형성해나가는 사춘기 시기는 부모와의 대화가 절실한 시기다.

매일 얼굴을 마주하는 지선보다는 자신이 상담에 제격이리라.

창현이 사춘기를 겪을 때 제대로 힘이 되어주지 못했던 걸 떠올린 석규는 이번만큼은 지영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어 훌륭한 아버지 노릇을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창현 오빠에 관련된 건데요.”

석규의 예상은 처음부터 완전히 빗나갔다.

“창현이에 관련된 이야기라고?”

“네…….”

“하하, 그래.”

애써 웃음 짓지만 한참 앞서 나간 자신의 행동에 석규는 헛웃음을 지어야만 했다.

오늘 감상에 젖어 있다 보니 이런 실수를 범하게 되나보다.

헛웃음을 짓던 석규는 고개를 내저어 상념을 털어버린 뒤 지영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하고 싶은 말이 창현이에 관련된 거라면 왜 이야기를 하지 않느냐?”

“저, 그게 그러니까…….”

말을 할지 말지 우물쭈물하는 지영이었다. 그 모습에 석규는 답답함을 느끼며 그녀를 재촉하였다.

“왜 말을 못하지? 뭔가 난감한 거라도 있니?”

“음, 한 가지만 물어볼게요.”

“그래.”

“아까 아빠가 했던 말이 제일 걸려서요.”

“내가 했던 말? 무슨 말이 거슬렸니?”

그러면서 자신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지영에게 거슬렸을 법한 말을 되짚어본다. 사춘기는 무척 예민하기에 말 한 마디에도 신경을 써줘야 한다. 좋은 부모가 되고자 하는 석규로서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사이 실수를 범한 게 아닌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러나 이어진 지영의 말에 황당한 표정을 지어야만 했다.

“저, 그… 아까 했던 며느리감 이야기 때문에요.”

“며느리감? 며느리감이라면, 하하!”

또 다시 잘못된 자신의 헛다리에 헛웃음만 나오는 석규였다. 뭐가 잘못된 것인지 몰라 한참 고민하고 있었는데 전혀 상관없는 부분에서 이야기가 나오고 말았다.

“그게 궁금했던 거니?”

“네… 대답해주실 수 있죠?”

“음, 그래. 딸의 물음이라면 얼마든지 해줄 수 있지.”

“정말요?”

“물론이고 말고.”

석규의 대답에 환하게 변하는 지영의 얼굴. 그 모습을 보며 그는 속으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피가 섞인 딸이 아니라서 그럴까? 지영은 친근하게 대하려 노력하지만 그 이면에는 알지 못하는 벽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점을 내심 염두에 두고 있던 석규는 환하게 웃으며 간격을 좁혀오는 지영의 접근이 반가웠다.

허락이 떨어지자, 지영은 본격적으로 눈에 불을 키고 달려들었다.

이야기를 듣는 순간 몸이 근질근질해서 참지 못하던 걸 폭발했다.

“아빠는 왜 주현 언니를 며느리감으로 점 찍으신 거예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단다.”

“여러 가지 이유요?”

“일단 창현이랑 성격이 잘 맞는 것 같아서 그랬지. 자세히는 알지 못하지만 성격이 무척 꼼꼼하다고 들었거든. 앞으로 세계를 일주해야 하는 창현이는 그런 꼼꼼한 여자를 만나는 것이 여러모로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다.

“하, 하지만 서로 좋아하는 사이가 아닌데…….”

가뜩이나 주체할 수 없는 깝을 뿌려대는 유리가 말도 안 되는 조신함으로 무장하여 지선의 지지를 얻어냈다. 진실을 알고 있는 지영으로서는 입이 근질거려 속이 터져버릴 지경인데 거기에 소녀시대 서현마저 끼어들게 된다?

어처구니도 이런 어처구니가 또 없을 것이다.

“그 부분은 각자가 알아서 해야 할 사항이지. 그 부분에 대해서는 터치하지 않을 거고.”

“오빠가 좋아하지 않으면 밀어붙이지는 않겠다는 거죠?”

“그렇겠지? 아무래도 창현이의 의향이 가장 중요하니 말이다. 하지만 창현이가 원한다면 적극적으로 지지할 생각이다. 물론 지금까지는 염두에 두는 수준이고.”

“그렇군요.”

가슴을 쓸어내리는 지영을 보며 석규는 흐릿한 미소를 지은 채 말한다.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창현이는 아직 어리지 않느냐? 해야 할 것도 많고, 봐야 할 것도 많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본인 의사에 맡길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히히, 전 아빠를 믿으니까요.”

“하하하! 물론이다. 아빠를 믿어야지.”

지영의 애교에 그대로 녹아나는 석규였다. 아들이 있으면 집안이 든든하지만 재미가 없다. 그래서 아들 있는 집안은 딸을 하나 낳는가 보다.

으아아앙!

“어이구, 아현이가 또 쌌나 보구나.”

안방에서 들려오는 울음소리에 석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을 나서는 그를 보며 지영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헤헤헤.”

석규가 말한 것이니 확실한 것임이 분명하다. 주현을 지지하지만 지원을 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사실이다.

“다행이다. 난 또 유리 언니 같은 일이 벌어지는 줄 알았네.”

자신을 미치게 만드는 사람은 유리 하나만으로 충분했다. 방해하지 않기로 약속한 만큼 옆에서 자연스럽게 펼쳐지는 그녀의 내숭은 지영을 미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지영이 모르는 부분이 있었다.

전적으로 둘의 마음에 맡기겠다고 했지만 중간에 역할을 해주는 것은 충분했던 것.

다만 수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먼저 목적에 들어가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둘러말하는 버릇이 배어 있다보니, 그것이 지영에게도 적용되었다.

“헤헤헤, 다행이야, 다행.”

그것도 모른 채 지영은 웃음만 짓고 있었다.


“으음!”

석규가 귀국하여 알콜달콩한 집안분위기를 만끽할 무렵, 창현은 골치 아픈 상황에 직면하여 머리를 부여잡고 있었다.

그는 눈앞에서 생글생글 미소 짓고 있는 여인을 보며 속이 끓는 것을 느꼈다.

“이건 뭐하자는 거야.”

“뭐긴, 이미 완료 단계에 들어간 계약서지.”

“나조차 모르는 계약서가 있다고?”

“그 부분은 미스터 강에게 이미 이야기를 했는데?”

“난 못 들었다니까.”

고개를 저으며 부인하는 창현이었지만 이미 계약서는 작성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활동하면서 가십거리를 제공해준 그녀에게 어떠한 일 한 가지를 도와주기로 했다.

그것이 이런 깜짝 등장 형태로 나타나게 된 것이지만.

“난 상관없는 부분인 걸? 중요한 건 이미 계약서가 완료 단계에 들어갔다는 거니깐. 오늘 내가 방문한 건 어떻게 촬영할지 이야기를 하러 온 거야. 귀여운 아가야.”

“크윽!”

말 싸움에서 패배한 창현은 좌절감에 고개를 푹 숙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여인의 입가에는 진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반짝거리는 푸른색 눈동자는 마치 진귀한 장난감을 바라보는 것 마냥 황홀함과 동시에 짓궂은 장난기가 서려 있었다.

“항복이야, 항복. 원하는 게 뭐냐, 스위프트.”

“어머나, 레이디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다니. 우리 아가가 조금 무례하네.”

“무례하기는 무슨! 나 지금 미치겠으니까 어서 이야기 해.”

“그렇게 할게.”

한 발 물러섰지만 입가에 맺힌 장난스러운 미소는 걷히지 않았다.

그걸 보면서 창현은 다시 한 번 짙은 패배감을 느꼈다.

자신 앞에 미소 짓고 있는 여인의 이름은 테일러 스위프트. 미국의 팝 가수이자, 자신과 같은 싱어 송 라이터다.

처음 미국에 건너오면서 비슷한 연배로 친해지게 되었다. 하지만 한 차례 스캔들이 나면서 교류가 뜸해졌는데, 자신이 미국으로 컴백하면서 열 명의 팝 가수를 통해 가십거리를 만들면서 다시 교류를 갖게 되었다.

당시 반지 퍼포먼스를 갖던 창현은 열 명의 팝 가수 중 한 명인 테일러 스위프트에게 반지 디자인을 부탁하면서 그녀의 부탁 한 가지를 들어주기로 구두상 약속하였다.

그것이 지금 발목을 잡히게 된 것이다.

“일단 해줘야 할 건 피처링하고 뮤직비디오 출연 정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하는 테일러 스위프트였지만 창현은 격렬히 저항했다.

“두 개잖아. 난 하나만 부탁했는데 왜 두 개야.”

“훗! 정말 모르는 거야?”

“뭐, 뭐가?”

입가에 짙은 조소가 걸리자, 창현이 움찔한다. 비슷한 연배이며, 잦은 교류를 가졌지만 뜸해지게 된 것은 그녀의 성격이 한 몫을 하였다.

그 이유는 두 가지. 그 중 하나가 바로 그녀의 성격이었다.

“우리 아가가 그것도 모를 줄 몰랐어. 이 누나는 매우 슬퍼.”

“슬프기는. 어서 말이나 해!”

“전에는 그러지 않던 고함까지 지르고. 사내다워졌는 걸?”

“…하아!”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해도 먹혀들지 않은 채 흥밋거리만 제공하자, 깊게 한숨을 내쉰 창현은 소파에 몸을 축 늘어뜨렸다.

말 싸움에서는 자신이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았다.

“왜 두 가지인지나 말해줘.”

“간단한 세상의 논리야. 돈을 빌리면 이자를 내잖아? 그 원리라 생각하면 돼.”

“이자라고? 말도 안 되는 말을!”

타당했지만 둘 중 하나로 딜 치기로 마음먹은 창현은 화 난 표정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하지만 당황할 거라 예상했던 테일러 스위프트는 오히려 피식 미소를 짓더니,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선다.

머리 하나 더 큰 그녀의 키에 창현은 자연스럽게 올려다보는 형태를 이루게 되었다.

“욱!”

창현이 그녀를 기피하는 두 가지 이유 중 하나, 그것은 바로 무지막지한 그녀의 키 때문이다.

자신과 비슷한 키를 지녔지만 배려심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존재하지 않는 테일러 스위프트 양은 만날 때마다 하이힐을 신고는 한다.

키에 민감한 창현으로서는 이런 쥐약이 또 없었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테일러 스위프트의 모습에 그는 짙은 박탈감을 느끼고 말았다.

“이미 계약은 끝났어. 장난은 그만치고 이야기를 하도록 해.”

“아, 알았어.”

마주한 형태가 부담스러웠단 창현은 결국 백기를 들고 투항한다. 여자에게 내려다보이는 것은 그에게 짙은 굴욕감을 선사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패잔병의 우울한 아우라를 풍겨대는 창현을 보며 테일러 스위프트의 몸이 부르르 떨리더니 기어코 참지 못한 채 손을 뻗어 그의 볼을 잡는다.

“너무 귀여워, 현! 정말 내 아가하지 않을래?”

“놔! 이 악마야.”

“정말 귀여워.”

세계를 호령하고 무대를 지배하는 가수였지만 그녀 앞에서는 속수무책으로 당해버린다.

…테일러 스위프트에게서 마왕의 향기가 났다.




제95장 달콤한 제안, 귀국




이 여자를 상대하는 것은 피곤하다.

테일러 스위프트의 실체를 여러 차례 겪어본 창현이 내린 결론이었다.

전형적인 마이 페이스인 그녀는 남의 말이 휘둘리지 않는 강한 뚝심을 지니고 있으며, 한 번 꽂히면 절대 물러서지 않는 불굴의 정신 또한 지니고 있다.

싱어 송 라이터에게 반드시 필요한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그것이 창현을 더없이 피곤하게 만들었다.

그녀가 지닌 장점들이 자신에게 피곤한 형태로 다가오고 있었으니까.

“그럼 피처링하고 뮤직비디오에 출연하면 되는 거지?”

“그 이상은 나도 바라지 않는다고. 그 정도면 나도 만족이야.”

“후우! 코가 꿰어도 단단히 꿰었네.”

“꿰이긴, 내 뮤직비디오에 출연하게 된 걸 영광으로 알아야지.”

생글생글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를 보면 속에서 열불이 확 치민다. 성격은 둘째 치고 자신보다 키만 작았어도 콱 눌러줄 텐데.

괜히 일어나봤자 키에 민감한 자신의 성격을 꿰뚫고 장난스럽게 대응할 것임이 분명했다.

결국 창현에게 남은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상큼하게 포기를 하는 것.

“이미 엎질러졌으니 어쩔 수 없지.”

“포기가 빠르니 좋네. 앞으로 그래줘.”

“후우! 차라리 스위프트를 빼고 다른 팝 가수에게 보낼 걸.”

“그건 실례라고? 나같이 뛰어난 여자 팝 가수를 빼놓으려고 하다니.”

“쳇! 내 판단은 잘못된 거였어.”

살살 반응이 오자,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은 창현이 그녀를 긁어놓으려 한다. 하지만 그 속내를 읽기라도 한 듯, 입가에 미소 지은 스위프트가 어깨를 으쓱한다.

“이미 저지른 일을 돌릴 수 없으니 상관 안 해. 후훗!”

“큭…….”

“날 도발하려면 좀 더 센 수를 준비하도록 해.”

“그래, 내가 졌다.”

항복선언에 흡족한 미소를 지은 그녀가 간략한 이야기를 한다.

“우선 피처링 분량은 많지 않아.”

“그건 참 좋네.”

“화음을 넣어주고, 단독 파트는 1분 정도밖에 안 될 예정이거든.”

“…….”

말과는 전혀 다른 내용물에 할 말을 잃어버린다. 그 정도면 아예 듀엣 곡이라 해야 함이 옳으리라.

결국 참지 못한 창현이 그녀에게 묻는다.

“이거 듀엣 곡 아니야?”

“듀엣 곡 아닌데?”

“하지만 내 분량을 보면 듀엣 곡 같은데…….”

“피처링이야.”

생글생글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그녀를 보면서 창현은 포기했다. 피처링이든 듀엣이든 고집불통인 그녀를 꺾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뮤직비디오는 남자 주인공으로 출연해주면 돼.”

“내용은 어떻게 되는데?”

“여기 간략한 시놉시스를 가지고 왔어.”

그녀가 내미는 서류를 받아든 창현이 빠른 속도로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뮤직비디오 시나리오는 전형적인 사랑 이야기였다. 사랑하는 여자에게 죄를 지은 남자 주인공은 그녀의 그림자가 되기로 맹세하며 묵묵히 그녀를 위해 일을 한다. 그러던 중 그녀가 자신의 존재를 알아차리자, 남몰래 떠나기로 결심을 굳히고, 그의 앞에 나타난 여자 주인공은 그에게 모든 죄를 용서해주며 행복하게 살았다는 내용이었다.

“스토리는 평범하네.”

“그렇지? 요즘은 그렇게 튀지 않는 게 좋더라고.”

“그래서, 이대로 가려고?”

“다른 일이 없는 한은?”

“이 정도면 무난하네.”

톡톡 튀는 그녀의 행동을 염두에 두고 있어서 얼마나 이상한 이야기가 펼쳐질지 내심 고민하던 창현이다. 하지만 평범한 스토리가 눈에 들어오자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이 정도면 하루만에 끝낼 수 있겠어.’

눈을 빛낸 창현은 테일러 스위프트를 바라보며 말한다.

“좋아, 연기 경험이 있으니 잘 이끌어주도록 하지. 잘 부탁한다고.”

“잘 부탁한다니? 그건 내가 해야 할 말인데?”

“응, 그게 무슨?”

뮤직비디오의 남자 주인공은 자신이니 당연히 여자 주인공은 그녀가 아닌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그녀는 가소로운 듯 미소지으며 말한다.

“유감이지만 내가 여자 주인공이 아니야.”

“왜……?”

“나랑 현은 키 차이 때문에 그림이 안 맞거든.”

“쿨럭!”

그녀의 농담에 내상을 입은 창현은 기침을 했다. 간단한 행동으로만 보이던 공격에서 변화된 강력한 말 공격이었다.

“크으으!”

절규하는 그를 보며 즐거운 듯 생글생글 미소 지은 그녀가 말한다.

“농담이고, 내가 구상한 거랑 이야기가 맞지 않아서.”

“…넌 S가 틀림없어.”

“고마워, M보다는 S가 내 취향이지.”

“말로는 못 당하겠네, 정말.”

“후훗! 그러니 잘 보이라고. 뮤직비디오 촬영 때 직접 가서 지적을 해줄 거니까.”

“아주 단단히 부려먹으려고 작심을 했네.”

포기한 듯한 그의 음성에 테일러 스위프트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랬어? 난 그럴 의도가 아닌데 그렇게 느껴졌나 보네.”

상대할수록 느는 것은 한숨뿐이었다.

“후우! 그럼 여자 주인공은 누구로 하려고? 난 몸값보다 상대와 호흡을 중시 여기는 걸 알지?”

“당연히 그 점도 염려했지. 걱정하지 않아도 돼.”

“자신감이 넘치는 걸?”

“물론, 현하고 환상의 호흡을 보이는 사람을 섭외 중이니까.”

“호오…….”

자신감 넘치는 그녀의 모습에 창현이 묘한 감탄사를 흘린다.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자신감일까.

‘하기야, 자신감 뺀 모습은 상상도 할 수 없지.’

“좋아, 기대하겠어. 만약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면 각오해야 할 거야.”

“기대해도 좋아.”

입 꼬리를 말아 올린 그녀는 자신감이 넘쳤다.


미국에 진출하여 <Temptation>이라는 곡으로 대성공을 거둔 현의 행보는 거침이 없었다.

곳곳에서 그의 노래가 흘러나왔으며, 음반 또한 불티나게 팔려 전 세계를 통틀어 1000만 장이 넘는 판매고를 올리는데 성공한다.

이는 중간 고지점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앨범은 계속해서 팔려나가고 있었으며, 전문가들은 1500만 장에 도달할 수 있을 거란 추측을 내놓고 있었다.

그만큼 현의 인기는 미국을 넘어 세계로 뻗어나간 상태였다.

거액의 광고 계약을 채결하고, 다른 팝 가수 앨범 제작에 참여하기도 하면서 현은 전보다 미국에 뿌리를 깊게 박아놓았다.

예전에는 South Korea라는 나라에서 온 이변을 일으킨 가수였지만 지금은 당당히 한 일각을 차지하는 가수가 되어 있었다.

국내에서 실감하는 것 그 이상의 파급력을 발휘하는 존재였다.

그런 그의 존재는 거대한 단체를 비밀리에 움직이게 만들었다.


테일러 스위프트와의 뮤직비디오 촬영을 계약한 창현은 짜여 있는 스케줄을 이행하는 나날을 보내다가 미국으로 온 석규를 맞이하였다.

“오셨어요.”

“그래. 그동안 잘 지냈고?”

“저야 뭐 잘 지냈죠. 스케줄도 그렇게 촘촘하지 않았고. 어머니랑 지영이는 잘 지내고요?”

“당연히 잘 지내지. 그런데 아현이에 대해서는 안 묻는다?”

“그야 문제가 있으면 제일 먼저 이야기 하셨을 거 아니에요. 무소식이 희소식일 테니 굳이 물어볼 이유가 없죠.”

“그런가? 하하!”

자신이 창현에게 팔불출 면모를 보였단 걸 깨닫자 어색하게 웃음을 짓는 석규였다.

“그런데 테일러 스위프트와 언제 계약을 하셨던 거예요?”

“음! 찾아왔었나 보구나. 저번에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지. 반지 디자인을 부탁할 때 그쪽에서 제시한 조건이었다.”

“제가 손해 보는 거 아니에요?”

“그건 아니다. 너나 스위프트나 둘 모두 어린 나이에 정상의 자리를 넘보고 있는 가수이기에 가십성 기사에 더욱 불을 지를 수 있었던 거지. 당사자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하지만 말이다. 하하하!”

“썩 마음에 드는 말은 아니에요.”

단호한 창현의 말에 석규는 웃음기 어린 얼굴로 묻는다.

“허허! 아주 이를 가는데?”

“날 아주 아이 취급한다고요!”

“그 이야기는 들었지.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만 들더군.”

“그게 다에요? 그것 때문에 만나기 얼마나 껄끄러운데요.”

표정을 구기는 창현을 보면서 석규는 미소를 지을뿐이었다.

어찌 보면 손해라고 할 수 있지만 가십성 기사에서 충분한 이익을 보았다. 그리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녀와의 교류는 창현을 더욱 폭 넓은 세계로 이끌어줄 것이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네가 알아서 하도록 해라. 계약은 되었지만 다른 부분은 힘을 쓸 수 있겠지.”

“내키지 않아도 그렇게 해야겠죠.”

“그래,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난 약속이 있어서 나가봐야 하는데. 너도 같이 가겠느냐?”

“…….”

창현은 조용히 석규를 바라본다. 같이 가겠냐고 물어보지만 그의 얼굴에는 굳이 올 필요 없다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었다.

그런데 왜 자신에게 권유하는 것일까? 의문이 들었지만 창현은 석규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보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피곤해서 좀 쉬고 싶어요.”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 쉬고 있어라. 난 약속 장소에 다녀올 테니.”

“네, 늦지 말고 일찍 들어오세요.”

“알았다.”

자리에서 일어선 석규가 방을 나선다.

그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던 창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일이지?”

무언가 알지 못하는 내막이 있는 듯했다.


집을 나선 석규는 차를 몰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 그가 향한 곳은 고급 레스토랑이다. 칸막이가 쳐져 있어 이야기가 새어나가지 않는 레스토랑은 은밀한 만남을 갖기에 제격이었다.

“후!”

차에서 내린 석규는 가볍게 숨을 몰아쉰다. 여태까지 많은 거물들을 만났지만 만나기 전 이렇게 긴장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처음이다.

주체 없이 떨리는 마음을 다잡으며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예약자의 이름을 조회한 뒤 곧바로 자리를 이동한다.

약속 장소에 도착한 석규의 눈에는 금발 사이로 드문드문 흰 머리가 자리하고 있는 중년 신사를 볼 수 있었다.

석규의 등장에 미소 지은 채 자리에서 일어선 그가 손을 내민다.

“반갑습니다.”

“저도 반갑습니다.”

“영어를 상당히 잘하시는군요?”

유창한 석규의 영어에 감탄사를 흘린다.

“로마에 왔으면 로마 법을 따라야 하지 않습니까? 불이익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언어까지 확실하게 익혀둬야지요.”

“그렇군요. 역시 철저한 준비를 하셨던 거로군요. 앉으시지요.”

“예.”

중년 신사의 권유에 석규가 자리에 앉는다. 그의 등장과 함께 음식이 테이블 위에 올라오기 시작한다.

중년 신사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단 둘이서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아 코스 요리를 배제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군요.”

고개를 끄덕이는 석규. 그의 얼굴에는 보이지 않는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아참, 제 소개를 하지 않았군요. 제 이름은 존 스미스라고 합니다.”

“강석규입니다. 어디에서 오셨는지……?”

“허허, 그건 아직 말할 때가 아닌 듯합니다.”

“…알겠습니다.”

석규가 긴장하는 이유, 그것은 중년인의 존재 때문이 아니었다.

미국에서 창현의 매니저 일을 하던 석규는 아는 사람에게서 이야기를 전해 듣는다. 바로 높은 곳에 있는 사람이 자신을 만나고자 하는 것. 이름조차 모르고 단체조차 모르지만 눈앞의 존 스미스라는 신사는 자신을 만나고자 했던 높은 곳에서 나온 사람이었다.

반드시 만나야 한다고 하던 지인의 말과 달리 존 스미스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는 신사의 표본과도 같았다.

음식을 먹으면서 존 스미스가 이야기를 주도해나갔다.

“현은 참 대단한 가수인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동양에서 온 그저 그런 가수라 생각했지만 지금은 이곳의 대중 아이콘이 될 정도니.”

“운이 좋았습니다.”

“운이 좋다는 말은 옳지 않은 듯하더군요. 저는 현의 콘서트에 직접 간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노래를 들으면서 화들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지배하는 그의 노래는 여태까지 들어본 적 없는 새로운 형태였기 때문이죠.”

“…….”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침묵한다. 지금 상황을 파악하고 분석하느라 모든 역량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존 스미스는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처음 1위를 했을 때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이제는 정상에 군림하여 내려올 줄 모르는 최고의 가수가 되었더군요. 이는 저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흥미를 갖게 하였습니다.”

여기서 많은 사람은 지인이 말했던 높은 곳에 있는 사람일 확률이 높았다.

그런 석규의 속내를 모르는지 존 스미스는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아니, 모르는 것이 아니다. 빛나는 그의 푸른 눈은 석규의 속내를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 이는 모르는 것이 아닌, 안중에도 없다는 걸 뜻했다.

“현은 사람의 마음을 지배하는 창법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저를 비롯한 많은 분들을 매료시키는데 성공하였고요. 만약 현이 2년 전 정상에 군림하고 향수병에 걸리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요.”

창현이 미국에서 정상의 자리를 차지하고 다시 돌아갈 때 팬들에게 댄 이유는 향수병 때문이었다.

일부 팬들에게만 말했던 이유인데 그것을 알고 있다면 존 스미스는 창현에 대해 상당 부분 조사했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제안을 하려고 합니다.”

“어떤 제안을……?”

아무런 목적도 읽을 수 없는 남자가 제안을 언급하자 석규가 긴장한다.

그 모습을 보며 피식 한 존 스미스가 말한다.

“South Korea는 남자가 성인이 되면 병역의 의무가 주어지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맞습니까?”

“맞습니다.”

“그럼 우리는 서로 주고받을 수 있는 게 있군요.”

“설마…….”

경악이 번져나가는 석규의 얼굴.

“현에게 미국 시민권을 주겠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 정부는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을 약속드립니다.”

“……!”

놀란 석규를 보며 존 스미스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군요.”

한참 동안 침묵하던 석규가 꺼낸 말이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존 스미스의 입가에는 여전히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이러한 반응 정도는 충분히 예상하고 이 자리에 나왔다.

“이런 실례. 제가 너무 갑자기 말을 꺼낸 듯하군요.”

“괜찮습니다.”

정중하게 사과하는 그를 보며 석규가 고개를 내젓는다. 갑작스러운 말에 놀랐지만 빠른 속도로 평정을 찾아갔다. 지금 그의 머릿속에는 존 스미스가 했던 말을 분석하기 바빴다.

‘왜 이런 제안을 꺼내놓는 거지?’

그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존 스미스가 입을 연다.

“아마 의아하게 여기실 겁니다.”

“잘 모르겠군요.”

“짧은 시간 동안 신뢰감을 심어주는 건 어렵죠. 하지만 우리 측에서는 제법 진지합니다. 현이 미국 시민이 되는 것, 그 부분에 대해서 머리를 맞대고 많은 고민을 했으니까요.”

“왜 현을 미국 시민으로 받아들이려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머릿속에서 정밀한 분석이 이루어지며 왜 미국 시민으로 만들려는 건지 짐작이 갔지만 석규는 모른 척한다. 그 말에 존 스미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허!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이십니까? 만약 진심이라면 실망입니다.”

“…….”

“이런, 끝까지 도발에 걸려들지 않으시는군요. 현의 매니저이자 아버지인 미스터 강은 상대하기 까다로운 인물이라 하더니 그것이 정말인가 봅니다.”

“자세한 이유를 설명해주시길.”

석규의 말에 존 스미스의 표정도 진지하게 변해간다. 처음 그가 임무를 부여받을 때 느낀 감정은 황당함이었다. 동양에서 온 가수를 미국 시민으로 만들라니? 뛰어난 성과를 보이고 있지만 가수 하나를 시민으로 만들기 위해 펼쳐진 계획을 보고 입이 저절로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의아함이 앞섰고, 어이가 없었지만 자료를 검토하고, 직접 현의 무대를 보면서 그의 의문은 차츰 사라져갔다.

현은 충분히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

단순한 상징성에서 그치는 것이 아닌, 그의 영입은 앞으로 세계의 문화 트렌드를 이끌어나가는 국가의 입장에서도 큰 이익이 될 것임이 분명했다.

현의 자료를 검토한 결과, 존 스미스는 계산적인 자신을 왜 책임자로 삼았는지 알 수 있었다.

“간단합니다. 문화의 아이콘이 된 현은 우리 미합중국에 필요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나라에서 필요한 존재란 말입니까?”

“현, 그의 무대는 다른 가수들에게 느낄 수 없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그것은 아주 작으면서도 아주 큰 것이기도 하지요. 사람을 홀려버리는 듯한 그의 노래는 나라와 인종을 가리지 않으니 말입니다.”

“…….”

“뛰어난 보물을 보면 욕심이 나는 건 당연합니다. 단지 현이라는 존재는 개인이 소유하기에는 너무나 큰 존재, 그렇기에 본국이 직접 나선 것입니다. 현이 더욱 크고 밝게 빛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주기 위해.”

그럴 듯한 말로 포장을 한다.

한참 동안 침묵하던 석규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어렵군요.”

“어려울 것 없습니다. 미스터 강이 결정을 내리고, 현을 설득해주시면 모든 게 끝날 것입니다.”

“설마 현이 그 제안을 받아들일 것이라 생각합니까?”

“애국심이 강한 현이라면 받아들이지 않겠지요. 하지만 미스터 강은 현의 아버지. 그의 미래가 더욱 밝게 빛나기 위해서는 우리들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 이득이지 않겠습니까?”

다시 미소를 지은 존 스미스의 말에서 강한 자신감이 풍겨 나왔다.

그 자신감 밑바탕에는 국가적인 차원의 지원이 이루어질 것이 암시되어 있었다.

“…….”

석규는 침묵하며 생각에 잠겨들었다. 존 스미스가 언급한 내용은 엄청난 것이어서 그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세계 최강의 국가인 미국의 국가적인 지원이 이루어진다면 창현이 앞으로 얼마나 더 높게 날아오를지 짐작하기 힘들었다.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의 늪에 빠져있던 석규는 순간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는 헛웃음을 흘렸다.

‘나도 많이 타락했군.’

언제부터 나라를 버리고 이익만을 쫓았단 말인가?

이득에 따라 움직였지만 자신의 뿌리에 대한 애국심은 깊었다. 미국에서 국가적인 차원의 지원이 이루어진다고 하나, 지금 상황만으로도 아쉬울 것은 없었다.

고개를 가로 저은 석규가 답을 내놓는다.

“조국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미스터 강이라면 현명한 판단을 내릴 거라 생각했습니다만.”

“우리 대한민국은 한민족이라는 자긍심으로 똘똘 뭉친 곳입니다. 조국을 버리고 타국의 국적을 선택하게 되면 많은 사람이 실망할 것입니다.”

“왜 실망을 합니까?”

“방금 언급하셨던 것처럼 우리 조국의 남자는 병역의 의무가 있지요. 그것은 생각보다 민감한 사안입니다. 의무를 수행하지 않고 국적을 바꾼다면 많은 비난을 받게 될 것이고, 그것은 현에게 큰 상처가 될 것입니다.”

“병역, 말입니까.”

존 스미스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걸린다.

그 모습을 본 석규는 뜨끔했다. 그가 이런 말을 한 것은 그의 제안을 우회적으로 거부한 것이었다. 병역이라는 의무가 창현을 2년 동안 묶어놓겠지만 대한민국 남자라면 절대 피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였다. 언젠가 창현도 병역 의무에 대해서 의연한 모습을 보였다. 굳이 피할 생각이 없었고, 가수 현이 아닌, 대한민국 남자의 한 사람인 강창현으로서 의무를 이행할 생각이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게 무슨…….”

“우리들은 바보가 아닙니다. South Korea가 가진 한민족이라는 민족의 자긍심,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다르지만 비슷한 형태의 일도 알고 있지요.”

“…….”

입가에 미소 짓는 존 스미스를 보며 석규는 예전에 있던 일이 떠올랐다. 그가 언급하는 일은 그때와 달랐지만 형태는 비슷했다.

“우리들은 그 부분에 대해서 가상의 시나리오를 세워놓았습니다.”

“가상의 시나리오라면……?”

“현은 원래 미국인이라는 설정이라면 어떻습니까?”

순간 머리가 텅 비는 듯한 충격이 든 석규는 강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말도 안 되는 말입니다.”

“말이 안 되면 말이 되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현을 골수 미국인으로 만들 시나리오를 세워놓았습니다. 그리고 미스터 강 또한 미국 시민으로 만들 계획을 세워놓고 있지요.”

“말이 된다고 생각합니까?”

“한 말을 다시 하게 하는군요. 우리가 그 정도도 불가능할 거라 생각합니까?”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조국을 버릴 생각은 없습니다.”

“멋진 말씀이군요. 하지만 제안을 받아들일 경우 얻는 것이 클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최소한의 반발이 일어나는 범위 내에서 현을 미국 시민으로 만들 계획을 세워놓은 상태입니다.”

“…일단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쉽게 넘어오지 않는 석규였다. 내내 미소가 걸려있던 존 스미스는 자신의 말에 쉽게 넘어오지 않자, 표정이 빠르게 사라져갔다.

‘복잡하게 하는군.’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는 속내를 감추고 말을 이어나간다.

“간단합니다. 미스터 강은 처음부터 미국 국적을 지닌 미국 시민이었다. 그리고 한민족의 피를 이어 받았지만 현은 미국 시민인 미스터 강의 아들이고, 미국에서 태어났다. 다만 그것을 다른 사람들은 모르고 있었기에 여태까지 South Korea 사람인 줄 알았다. 이러면 어떻겠습니까? South Korea 사람들이 납득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사람들이…….”

“중간에 바꾼다면 탈이 많겠지만 처음부터 미국인이었다는 설정은 무리가 없지요. 현은 미국 시민이 되어 권리를 누리면 되는 것이고, 한민족의 피를 이어받은 것으로 의무를 실행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게 가능합니까.”

“미스터 강과 현의 동의만 있으면 가능합니다. 승낙할 경우, 정부 차원에서 지원이 들어갈 것입니다. South Korea 정부 또한 협력하게 만들 자신이 있고요.”

“…….”

모든 준비를 끝낸 채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하자, 석규는 깊은 고민에 빠져들었다. 빠져나갈 구멍이 마땅치 않을 정도로 존 스미스가 들고 온 계획은 완벽에 가까웠다.

창현이 미국으로 국적을 바꾸게 되면 가장 큰 문제점이 자국민들의 실망이다.

그런데 처음부터 그가 미국인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면 잡음이 일어날지언정 중도에 국적을 바꾼 것과는 현저히 다르게 흘러갈 것이다.

여기에 언론 플레이로 잘 포장만 한다면 인기가 조금 떨어지더라도 국내 활동에 무리가 없을 것임이 분명했고.

석규가 고민하고 있다 생각한 것인지 존 스미스는 달콤한 제안을 이어나갔다.

“병역 의무를 벗어나게 되면 현은 더욱 높이 날아오르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미국 시민이 된 미스터 강에게 사업적인 면에서 여러 편의를 봐드릴 수 있을 것 같군요. 독자적인 레이블을 세울 수도 있고 말입니다.”

‘무섭군.’

창현에 이어 자신까지 옭아매려 한다.

아직 어린 그는 자신에게 의지하는 면이 많다. 존 스미스는 그것까지 꿰뚫고 자신에게 편의를 봐준다는 말로 완벽하게 속박하려 들었다.

빈틈없이 준비한 미국 정부에게 두려움을 느끼는 석규였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말씀하시지요, 미스터 강.”

“도대체 미국 정부에서 현을 원하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정부가 현을 원하는 이유라…….”

말을 멈춘 존 스미스는 와인잔을 든다. 향을 맡은 그는 와인 향을 음미하면서 눈을 감았다.

잠시 끊어졌던 대화의 흐름은 존 스미스가 눈을 뜨면서 이어졌다.

“현이라는 존재는 세계에 큰 충격을 안겨다주었습니다. 실력도 실력이거니와 부족하지 않은 퍼포먼스, 카리스마는 작은 무대에서 활동하던 가수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지요. 그리고 은연중 그어져있던 동양인에 대한 한계를 깨버리기도 했습니다. 맞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세계는 날이 갈수록 다양해지고 있습니다. 그 속에서 미합중국은 모든 것을 주도하려고 합니다. 세계의 군사력도, 세계의 경제력도, 그리고 세계의 문화까지.”

“…….”

그들이 창현을 미국 시민으로 만들려는 이유가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세계 최강 대국이라는 타이틀은 동양의 소년에게 내준 문화 아이콘이 탐날 수밖에 없다. 아직 스물도 되지 않은 그는 최소 이십 년 이상 세계의 문화를 주도해나갈 역량을 지니고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 발전할 것이고, 그가 제시하는 트렌드는 막대한 돈이 되어 세계의 문화를 이끌어나갈 것이다.

“그런 이유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그렇군요. 무슨 말인지 잘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결정을 내리셨겠군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현과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바로 답을 내리기에는 중대한 사안인지라.”

바로 결정 내릴 줄 알았던 석규가 답을 회피하자 존 스미스의 눈가가 파르르 떨리다가 되돌아왔다. 전례가 없을 정도로 파격적인 제안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이지 않은 것에 살짝 자존심이 상했다.

“…뭐, 좋습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요. 아까도 말했지만 정부는 모든 것을 지원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부디 현명한 결정 내리시길 기원합니다.”

“예. 고민해보겠습니다.”

“받아들이지 않으셔도 다른 위해는 없을 테니 안심하시길.”

사람 좋은 미소를 짓는 존 스미스다. 하지만 그 말은 듣는 사람에 따라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드는 말이었다.

석규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존 스미스가 입을 연다.

“아! 현에게 돌아가면 한 마디만 전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무슨 말을 전하면 됩니까?”

“계단 춤, 인간의 능력으로 펼치기 힘든 퍼포먼스를 아주 인상 깊게 봤다고 말입니다.”

“…그대로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께름칙한 느낌을 받은 석규는 고개를 숙인 뒤 방을 나섰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존 스미스는 아직 끝나지 않은 식사를 이어나간다.

와인으로 목을 축인 그는 레스토랑을 벗어나는 석규의 차를 보며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현명한 판단하길.”

불길한 느낌을 풍기는 말이었다.


“…….”

창현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저녁 약속을 위해 밖으로 나갔던 석규가 집으로 돌아오면서 그를 붙잡고 존 스미스와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민감한 부분을 사정없이 찌르고 있는 그의 제안은 창현으로 하여금 고민에 빠져들게 하였다.

“…이거 심각한 거 맞죠?”

“당연히.”

“그럼 전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네게 스스로 판단하도록 해라.”

“제 판단대로 따라주실 거고요?”

“네 생각이 무엇인지 들어보고.”

자신의 선택권을 보장해주는 듯했지만 어떻게 보면 가혹한 말이었다. 스스로 결정은 필연적으로 책임을 동반한다. 사회 경험을 일찍 했지만 아직 미성년자인 창현에게 있어 인생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사안에 대해서 독단적으로 결정내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

수십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서 실타래처럼 엉키고 풀어지기를 반복했다.

한참 고민하던 창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입을 연다.

“모르겠어요. 뭐가 옳은지. 아버지의 조언을 듣고 싶어요.”

“네가 고민하게 만드는 부분이 무엇이냐?”

“군대 부분이요. 대한민국에 태어난 이상, 언젠가 가야 한다는 걸 알고 있어요. 굳이 수를 써서 비겁하게 빠질 생각도 없었고요. 하지만… 2년이라는 시간이 안 아깝냐고 물어보면 그건 또 아니겠죠. 저만 그런 걸지도 모르고요. 그 부분을 해결해준다고 하니 솔직히 많이 갈등이 되요.”

“군대라, 2년이라는 시간은 짧은 게 아니지. 특히 자기 계발이 절정에 달하는 시기다. 너라면 2년이라는 시간은 남들과 차원을 달리 할 정도로 각별하게 사용할 수 있을 테지.”

“그 부분은 둘째치더라도…….”

“음?”

말끝을 흐리는 그를 바라본다. 그러자 멋쩍은 미소를 지은 창현이 말한다.

“2년 동안 활동하면 벌어들이는 돈이 크잖아요? 하하하.”

“돈이라, 확실히 그것도 그렇지.”

귀화 제안의 이유 중 하나가 돈에 관련된 것이다. 미국으로 귀화할 경우 미국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이 이루어지면서 월드 스타 현을 지금의 급과 다른 전설의 영역으로 끌어 올리려 할 것이다.

그 부분은 모두 돈에 관련되어 있다.

“일단 군대 부분이 민감하잖아요. 하지만 제가 미국으로 귀화하게 되면 한국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걸요? 잘 몰라도 남자들은 그 부분에 대해서 굉장히 민감하다고 들었어요.”

“민감하지, 아주 민감하다.”

“그래요?”

“금 같은 2년이란 시간을 나라에 바치고 왔으니 그럴 수밖에.”

“전 조국을 저버리면서까지 활동을 할 생각이 없어요. 군대, 솔직히 가는 것이 좋은 건 아니지만 피할 수 없다면 정면으로 부딪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죠.”

군대를 다녀오지 않았기에 얼마나 힘든 곳인지 몸으로 실감하지 못한다. 단지 이야기로만 접했기에 상상 이상으로 힘들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 피할 수 있다면 피하는 게 옳지만 굳이 조국을 버려가며 영광을 누리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말이다.”

“네?”

“미국 정부에서는 그 부분도 해결을 해줄 수 있다고 하더구나.”

“어, 어떤 부분을요?”

“네가 원망을 많이 사지 않고 미국으로 귀화하는 부분을.”

“…….”

할 말을 잃은 창현이었다.

“꽤나 철저하게 준비했더군. 그들은 네가 미국 시민이 되어 세계의 대중문화를 자신들이 이끌길 바라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 막대한 지원을 약속하고 나섰지.”

“만약 제안에 응하지 않으면요? 불이익이 있는 것 아닌가요?”

“불이익이라, 있을 수 있지. 하지만 그러한 불이익이라면 처음 이곳에 왔을 때부터 겪었던 것이지 않느냐? 굳이 그 부분에 대해서 무서워 할 이유는 없겠지.”

“그런가요.”

대수롭지 않은 듯 말하는 석규의 모습에 창현은 안도했다. 쉼 없이 미국에서 활동을 하였고, 이제 끝나갔지만 이곳에도 자신을 좋아해주는 팬이 존재한다. 자신에게 함성을 질러주고, 노래를 따라 부르며, 앨범을 사주는 팬들을 외면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 너의 결정은?”

“굳이… 미국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아요.”

“후회할 수도 있다.”

그것은 석규의 진심이었다. 그의 입장은 창현이 미국 시민이 되지 않길 바랐지만 당사자가 되지 않고서는 모른다.

찬란한 미래가 눈앞에 펼쳐져 있고, 2년이라는 시간 동안 일을 하면 얼마를 벌어들일지 감히 상상도 하기 힘들다. 거기에 복불복 시스템이 강한 군대는 악질 상사를 만나게 되면 죽는 것만도 못한 처지가 되어버릴 수 있다.

그 부분이 걱정되는 석규였다. 그랬기에 만약 창현이 귀화할 의향이 있다면 눈 감고 모르는 척 넘어가줄 생각이었다.

결국에는 그렇게 되지 않았지만.

“후회라, 후회하기에는 아직 제가 어리잖아요. 후회는 좀 더 나이를 먹고 하도록 할게요.”

“후우! 그래, 아직 어리니 그런 오기를 부릴 수도 있는 거지. 그 사람들도 불쌍하지. 네가 스무 살이 넘어갔을 때 제안을 했으면 확률이 더 높아졌을 텐데.”

“절 뭐로 보시고요. 지조 있는 남자라고요.”

“그만큼 군대는 남자에게 있어 무덤과도 같은 곳이지. 한 번쯤 가볼 만하다고 하는 것도 피할 수 없으니 즐기라는 의미에서 하는 말들이고.”

“모르겠어요. 일단 생각해보겠다고 하니 좀 더 생각해보죠.”

“응?”

그의 말에 의아함을 느낀 석규가 고개를 갸웃하자, 씩 미소를 지은 창현이 말한다.

“생각해보겠다면서요? 기간은 말하지 않았으니 좀 오래 생각해보죠.”

“…하하하!”

빈틈을 비집고 들어간 창현의 틈새 공격에 웃음을 터뜨리는 석규였다.


라샤를 제치고 1위를 차지한 소녀시대는 점점 거세지는 인기를 앞세워 가요 차트를 독점하며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었다.

간간이 개인 스케줄만 있던 2008년 때와 달리, <Gee>로 폭발적인 인기 성장을 누린 소녀시대는 잠 잘 시간까지 아껴가며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 사이, 정권이 뒤바뀐 소녀시대 숙소는 7명이 행복하고, 2명이 불만을 갖는 기이한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뽀드득. 뽀드득.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는 인물은 근래 들어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소녀시대의 멤버이자, 인기 순위 1,2위를 다투는 꽃사슴 윤아였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침울하게 어두워져 있었다.

“히잉, 팔 아파…….”

아홉 명이 먹은 그릇의 양은 엄청났다. 식단 조절을 하면서 그릇의 숫자가 줄어들었지만, 아침에 급히 먹고 설거지 통에 놔둔 그릇은 말라붙어 거센 수세미질을 동반하게 하였다.

뽀득. 뽀득.

“지금쯤 언니들이랑 주현이는 편하게 촬영하고 있겠지? 좋겠다.”

예전에는 권력자 태연의 옆에 붙어 편하게 설거지도 안하고 만족의 나날을 보냈는데.

수연이 권력을 쥐고, 주현이 내정을 담당하게 되면서 벌점이 가산된 태연과 윤아는 암울한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오늘은 태연의 우결 촬영에 다른 소녀시대 멤버들이 참가한다.

중도에 합류하기로 한 윤아는 남은 짬을 내어 설거지를 해야만 했다. 만약 하지 않으면 저녁을 먹은 설거지까지 자신이 몰아서 해야 했으니까.

계모에게 구박 당하는 신데렐라의 심정을 몸소 느끼며 윤아는 눈물을 훔쳤다.

“흑, 창현이 보고 싶다.”


“…….”

태연의 속은 지금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그녀가 지금 이런 표정을 짓는 이유는 여러 가지였는데, 그 중 하나가 우결 촬영으로 인해 형돈과 함께 웨딩 사진을 찍고 있어서 그렇다.

꿈에 나올 정도로 창현이와 웨딩 화보를 찍었지만, 정작 눈앞의 상대는 진상 지존 정형돈이었다.

상상 속에서 멋지게 턱시도를 차려입은 창현의 모습을 떠올리다가 옆을 바라본 태연은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꿈은 꿈일 뿐이었어…….’

방송이고, 비즈니스였기에 다 넘길 수 있다. 하지만 태연의 속을 앓게 만드는 것은 눈앞의 여인 때문이었다.

“좀 더 다정하게 포즈를 취해 봐요.”

카메라를 든 채 시크하게 말하는 사람은 소녀시대 얼음공주 수연이었다. 그녀의 말을 들은 형돈이 어색하게 포즈를 취해야만 했고, 태연 또한 마지못해 포즈를 취했다.

포즈를 취하자, 플래스가 터져 나왔다.

찰칵 찰칵.

“좀 더 찐하게 해요. 부부 같은 느낌이 들지 않네.”

“아유! 어떡해. 오늘 시카가 작정했네.”

농밀한 스킨십을 요구하자, 소녀들은 꺄르르 웃으면서 즐거워한다. 그러면서 정작 구원의 눈길을 보내는 태연을 단호하게 외면한다. 그녀가 안타까웠지만 제3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건 분명 재미있다.

‘으으, 이것들이.’

욱하는 기질이 튀어나올 뻔했지만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간신히 견뎌내고 말에 따른다. 다정한 포즈로 사진을 찍자, 수연은 입가에 흐릿한 미소를 짓더니 더 요구한다.

“좋아요, 좀 더 진하게.”

“시, 싫어.”

“응?”

“싫다고. 선생님이 계시는데 왜 자꾸 수연이 네가 포즈를 요구하는 거야.”

순순히 따르다가는 자신을 매장시킬 듯한 수연의 요구에 태연은 소심한 반항을 개시하였다. 권력을 쥐었지만 예전 같은 폭군의 기질을 보이지 않았기에 할 수 있는 작은 반항이었다.

“……”

태연의 반항에 눈썹을 꿈틀하는 수연. 순간 태연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하지만 그녀의 걱정이 기우였던 것일까? 수연은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은 채 진두지휘하던 것을 넘기고는 핸드폰을 조작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태연을 보더니 씨익 미소를 짓고 다시 핸드폰을 조작한다.

“수, 수연아.”

“왜 그래?”

무심하게 대답하는 그녀의 태도에 가슴이 콩알만해졌지만 참아내고 묻는다.

“핸드폰으로 뭐 한 거야?”

“갑자기 그건 왜?”

“날 보면서 웃은 것 같아서……”

“아아, 그거?”

태연이 다 볼 수 있게 핸드폰을 만져놓고 모른 척하는 수연이다. 그녀의 그러한 모습은 태연의 불안감을 더욱 증폭시켰다.

“뭐야? 알려줘.”

“별 거 아니야. 우리 꼬꼬마 리더님과 형부가 다정하게 찍은 웨딩 사진을 창현이한테 보내준 것뿐인데.”

“…….”

하나, 둘, 셋.

카운트다운과 함께 태연의 입에서 괴성이 터져 나온다.

“안 돼애애애애애!”

양손으로 머리를 움켜쥔 태연이 그대로 바닥에 쓰러진다. 안 그래도 형돈과 우결 촬영하는 게 알려져서 절망하던 차였다. 그런데 다른 것도 아닌 웨딩 촬영하는 모습을 보여 버리다니!

순간 자살 충동을 느낄 만큼 태연이 받은 충격은 컸다.

“어머, 이렇게 싫어할 줄 몰랐는데. 미안해.”

전혀 미안함이 담기지 않은 사과였다.

절규하는 태연을 보며 수연은 입 꼬리를 말아 올렸다.

다른 방식이지만 태연을 갈구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어디 소설의 형돈이처럼 되지 않는 한 태연의 절규는 계속해서 이어질 듯했다.


현의 귀국!

이 소식은 대한민국을 거세게 흔들었다.

이미 대한민국에서 한차례 발표한 적이 있던 그의 정규 앨범이자, 프로젝트 앨범.

4-A와 4-B로 나눠 발매된 현의 앨범은 여태껏 그가 보여주었던 감성 멜로디가 아닌, 보는 것과 듣는 것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새로운 시도를 담아내고 있었다.

강렬한 아름다움으로 여성을 유혹하는 악마가 된 그는 성공적인 변신으로 언제나 그러했듯 대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4-A 앨범 타이틀곡인 <악마의 유혹>은 인간 여성을 농락하던 악마가 여자를 사랑하게 되면서 느끼는 갈등과 애틋함, 그리고 달달한 로맨스가 포함된 곡이다.

단순한 곡의 분위기로 끝나는 것이 아닌, 호소력 깊은 퍼포먼스는 노래를 듣는 사람들의 이해를 더욱 도왔으며, 그동안 사용하지 않던 현의 비주얼 무기를 본격적으로 발휘하는 시점이기도 했다.

그 중 백미는 당연코 계단 춤이었다.

인간의 몸짓으로 불가능하게 보이는 계단 춤은 등장한지 상당한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완벽하게 구사하는 사람이 없는 불가해 영역의 춤이었다.

누구도 완벽하게 해내지 못했기에 몇몇 사람들은 우스개 소리로 현이 외계인이 아닐까 하는 의혹을 내놓기도 하였다.

대한민국에서 대성공을 거두고 미국으로 진출한 현.

많은 사람들은 그가 다시 전설을 재현할 수 있을지 주목하고 있었다.

이미 성공을 거두었음에도 또 다시 의혹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사람이란 참으로 어리석은 존재다.

동양의 소년이 처음 빌보드 차트를 제패했을 때, 놀라고, 경악했지만 그와 비슷하게 터져 나온 것이 바로 우연의 치부였다.

나이 어린 동양의 소년이 빌보드 차트를 제패한 것이 불가능한 것이라 생각했으며, 우연이지만 기뻐해야 한다고 강조하던 사람들이 상당수였다.

하지만 현은 그들의 추측을 비웃기라도 하듯, 연속으로 몇 주간 1위를 지켜냈으며, 그 다음 곡은 10주가 넘는 1위 방어를 성공해낸다.

대한민국 출신으로 이와 같은 위업을 누가 달성할 수 있단 말인가.

이미 세계적인 인지도를 얻은 현은 미국을 떠나 고국에 복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고, 행동 하나하나가 거대한 파장이 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국 사람들은 오히려 그를 과소평가하면서 의혹을 제기했다.

눈앞의 보물을 알아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행동이 아닐 수 없다.

그런 현이 <Devil Cry>로 1위를 차지하지 못했을 때 한때나마 현의 운이 끝났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악마의 유혹의 제목을 바꾼 <Temptation>이 발매되고 엄청난 기세를 휘몰아치며 1위를 차지하지 평가는 상반되기 시작했다.

연일 현을 찬양하는 기사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고, 그가 방문한 장소들이, 그가 먹은 음식들과 패션, 일과마저도 세세하게 팬들에게 전해졌다.

이러한 기사가 몇 달간 이어지자 현을 뿌리 깊게 부정하는 사람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뇌 아닌 세뇌를 당하게 되었다.

그들의 머릿속에 생각은 하나뿐이었다.

‘현은 나라의 위명을 빛낸 천재!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대한민국의 보물!’

농담처럼 몇몇 사람들은 현을 국보로 삼아야 한다는 말을 할 정도였다.

그런 현이 대한민국으로 귀국한다.

그것은 거대한 태풍을 일으키고 있었다.


스케줄이 모두 끝난 소녀시대 숙소,

웨딩 촬영을 마치고 돌아온 태연의 안색은 초주검이 된 상태다. 오늘 낮에 있었던 우결 웨딩 촬영에서 수연에게 큰 한 방을 먹은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그녀를 괴롭게 한 것은 돌아온 뒤,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집안일 때문이었다.

윤아가 설거지를 끝냈지만 빨래 당번으로 낙점된 태연은 촬영으로 지친 몸을 이끌고 집안일을 해야만 했다. 세탁기에 넣고 간단하게 끝낼 수 있는 것들이 있지만, 몇몇 멤버들의 까다로운 기호에 의해 쭈그려 앉아 손빨래를 해야 했다.

가뜩이나 정신적으로 피폐해져 있던 그녀는 육체적으로 피곤이 겹치자, 당장 쓰러지기 일보직전이었다.

모든 일을 끝내고 드디어 쉬는가 했더니만, 주현의 소집이 있던 것이다.

당연히 태연의 안색이 고울 리 없었다.

“별 거 아니면 각오해, 서주현.”

이보다 더 안 위협적인 위협이 있을까?

마치 아기 고양이가 갸르릉거리는 듯한 태연의 앙칼진 반응에 주현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미소를 짓고 말았다.

당사자인 태연의 눈에는 주현이 가소로워 미소 짓는 것처럼 보였다.

죽어가던 태연의 눈에서 지옥의 겁화가 피어났다.

“너…….”

“제가 언니들을 부른 이유는 간단해요.”

“…….”

상큼하게 무시당한 태연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자신은 시기와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소녀시대의 위대한 리더였다. 지금은 빨래와 사투를 벌이는 한심한 처지가 되었지만 언제고 다시 한 번 자신에게 기회가 올 것이라 믿었다.

‘그때가 되면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막냉이.’

태연이 속으로 이를 갈고 있을 때, 주현은 자신이 방금 전 극비리에 입수한 정보를 털어놓고 있었다.

“창현이가 돌아온데요.”

“…….”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그것도 잠시, 시선을 교환하던 소녀들은 자신이 들은 게 착각이 아니란 걸 깨닫게 되자, 일제히 경악성을 내질렀다.

“에엑?”

“사실이야?”

“거짓말 아니지?”

화산이 폭발하는 것 마냥 터져 나오는 소녀들의 반응. 주현은 표정 변화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제가 그런 걸로 거짓말을 할 리 없잖아요.”

“그렇지? 그렇구나.”

“와! 드디어 창현이가 돌아오는구나.”

“난 인기가 너무 많아서 영영 안 돌아올 줄 알았어.”

한 마디씩 더하는 소녀들. 그만큼 그녀들이 느낀 놀라움은 컸다. 그리고 어둡게 가라앉았던 대화 분위기는 순식간에 상승하여 창현이에 대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현에게 분노를 불태우던 태연조차 대화 분위기에 끼어들어 열심히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

그 분위기 속에서 유일하게 끼지 못하는 것이 수연이었다.

그녀의 얼굴은 착잡했다. 모두 창현이란 주제로 대화를 나누기 바빴지만 이러한 고급 정보를 주현이 어떻게 가지고 왔는지 의문을 품지 않았다.

수연은 주현이 어디에서 정보를 가지고 온 것인지 알 수 있었다.

AA엔터테인먼트 사장이자, 창현의 아버지인 강석규와 친해졌다고 이야기하던 주현이다. 그런 만큼 그녀가 정보를 얻은 곳은 그일 확률이 높았다.

미래의 시아버지와 친분을 트고 정보를 교류하고 있다니.

‘안 좋아.’

이는 결코 좋은 징조가 아니었기에 수연의 안색은 더욱 굳어가고 있었다.

그때, 주현의 시선이 수연에게 향했다. 흐릿하게 미소 짓고 있는 그녀의 표정은 평소와 다를 바 없었지만 마치 자신을 비웃고 있는 것 같았다.

‘이대로라면…….’

속으로 퍼져 나가는 불안한 마음.

첫 키스를 취한 뒤, 창현에게 잊을 수 없는 장면을 각인시켰다는 것이 너무 방심한 듯했다. 아무리 열심히 움직여도 자신만큼 각인을 시키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고, 그 자신감은 얼마 전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자신이 방심하는 사이 다른 멤버들은 조용히, 그리고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 결과가 서서히 나타나고 있는 중이다.

‘대책을 세워야 해.’

심각한 위기감을 느낀 수연의 결심이었다.

“…….”

그리고 즐겁게 이어지는 대화 분위기 속에서 한 사람이 조용히 눈을 빛내고 있었다.


“현이 돌아온다고?”

“네, 언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 충실한 하수인이 된 윤아는 창현의 귀국 사실을 알게 되자, 쉬는 시간 사이, 연희에게 찾아가 자세한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었다.

그녀가 하는 이야기는 창현이 귀국한다는 사실과 소녀시대 멤버들 사이에 있던 논의였다. 연희의 달콤한 유혹에 여지없이 넘어간 윤아는 그때부터 유능한 스파이가 되어 소녀들 사이에 있던 내용에 대해 상세하게 전달했다.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연희가 손가락으로 머리를 꾹 누르며 중얼거린다.

“귀국하면 좀 더 힘들어지겠네.”

“에, 왜요?”

“정말 모르는 거야?”

“이해가 잘 안 되는데요? 창현이가 귀국하면 오히려 기회가 많아지잖아요. 물론 언니들과 주현이의 눈을 피해서 움직여야겠지만…….”

말을 하는 윤아의 얼굴이 침울하게 변해간다.

오랜만에 창현을 보게 되는 만큼 같이 있고 싶은 마음이 절실한 것은 당연했다. 몇 달 동안 그를 못 본 것도 있거니와, 무엇보다 소녀시대의 <Gee>가 대박을 터뜨리면서 데뷔 이래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타이트한 스케줄을 이행해야만 했다.

그러다 보니 몸도 마음도 지친 상태.

피폐해진 자신을 회복시켜주기 위한 포션은 오로지 창현뿐이었다.

하지만 현실의 벽에 가로 막혀 좌절하고 있을 뿐.

만약 자신이 바쁜 사이 다른 언니들이나 주현이가 빈틈을 공략한다면?

‘안 돼! 난 이 불륜에 반대야!’

자신이 한다면 로맨스지만 남이 하면 불륜이었다.

풀 죽은 윤아를 보며 연희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지었다.

지금 염려할 것은 그게 아닌데 사소한(?)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는 윤아를 보니 웃음이 저절로 나왔다.

“그건 오히려 문제가 안 돼.”

“문제가 안 된다고요?”

“그렇겠지? 사실 그 부분은 전과 다를 바가 없을 거야. 윤아 네가 바쁜 만큼 다른 애들도 바쁠 테니까.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오오……!”

자신의 생각을 정확하게 꿰뚫어보는 연희의 모습이 감탄을 터뜨리는 윤아였다.

이래서 자신이 사부로 모시는 것이었다. 직접 말하지 않아도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그녀의 통찰력! 적일 때는 두렵지만 아군이라면 모든 것을 걸고 믿어봄직했다.

물론 순수한 선의로 자신을 도울 때 이야기였지만.

“후훗!”

자신의 생각이 얼굴에 전부 드러나는지도 모른 채 무작정 신봉하는 윤아를 보며 연희는 낮게 미소를 지었다.

‘이게 장점이기도 하고, 단점이기도 하지.’

적절한 당근을 제시하여 윤아를 꼬드긴 뒤 이익을 챙긴다.

상대를 농락하는 재미에 희열을 느끼며 연희가 입을 열었다.

“윤아 네가 행동을 하기 위해서는 현이 언제 귀국하는지 알아내는 게 중요해. 내가 이렇게 말했지만 타이밍이 맞지 않아서 너는 스케줄이 있는데 다른 애들은 스케줄이 없을 수도 있잖아?”

“그, 그렇죠.”

“그렇게 되면 죽 쒀서 다른 사람 주는 격이 되어버려.”

“저, 정말 그러네요.”

당근 뒤 제시 된 채찍에 윤아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한다.

자신은 소녀시대 내에서 가장 바쁜 축에 속하는 멤버. 자신은 나가서 충실히 외조(?)를 하고 있는데 그 사이 한가한 멤버가 어부지리의 이익을 취한다면 이보다 더 극악한 전개는 있을 수 없다.

방금 전만 해도 미소 짓고 있던 윤아는 무언가에 쫓기는 것 마냥 다급해졌다.

“어떻게 해야 하죠, 언니? 제발 방법을 알려주세요.”

자신의 머리로는 도저히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지만 연희라면 가능할 듯했다.

그녀라면 자신에게 한 줄기 광명을……!

하지만 이번 문제도 연희에게 어려웠나 보다. 윤아의 기대감을 깨버리듯 난감한 표정을 지은 그녀가 중얼거린다.

“음, 제법 어려운 문제네. 어떻게 해야 할까나.”

“어, 언니!”

“이건 쉽지가 않아. 계획을 세우더라도 윤아 네 스케줄이 있으면 상당 부분 꼬일 수가 있거든.”

“방법이 없을까요?”

“일단 너희들 스케줄을 알아야 해. 그리고 현의 귀국에 대해서 좀 더 자세한 정보가 필요한데…….”

현의 자세한 귀국 정보는 상당한 기밀에 속하는 것이다. 누구도 모르는 주현의 독자적 루트로 한 발 앞서 입수할 수 있는 S급 정보였지만, 몸이 달은 윤아는 앞뒤를 가리지 않았다.

“제공할게요! 뭐든 걸 제공할 테니까, 제발…….”

“그래? 그럼 윤아를 위해 모든 머리를 쥐어짜볼게. 나만 믿어.”

“고마워요, 정말 언니 밖에 없어요!”

환희에 가까운 표정을 지으며 연희에게 안기는 윤아.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며 달콤한 목소리로 그녀를 유혹한다.

“지금처럼 나만 믿어, 윤아야.”

“네, 전 언니만을 믿어요.”

“그래야지.”

문득 적성검사를 했을 때가 떠오른다.

그때 자신에게 어울리는 직업 중 하나가… 교주였던 건가?

‘그게 사실일지도?’

당시 연기자를 꿈으로 일로정진했지만 이러한 윤아의 반응을 보면 적성검사가 꼭 틀린 것만은 아닌 듯했다.

연희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마왕의 미소였다.


돌아가기로 결정을 내렸지만 창현이 해야 할 일은 산적해 있었다.

최대한 촘촘하게 스케줄을 짜서 활동했지만 쌓여있는 스케줄을 모두 끝내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모든 일을 끝낸 뒤 돌아가려던 창현은 해결되지 않은 몇몇 스케줄을 생각하며 인상을 찡그렸다.

“아무리 해도 안 되네요.”

“아무래도 다시 한 번 미국에 와야겠는데?”

“그러게요. 후우! 빨리 끝내고 싶었는데…….”

일정을 맞추기 위해 노력을 해보았지만 쉬운 것이 아니었다. 몇몇 굵직한 스케줄은 조정하는데 실패했고, 테일러 스위프트와 약속했던 뮤직비디오 약속 또한 일정이 지금보다 훨씬 뒤로 가 있었기에 다시 한 번 미국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시간이 상당히 애매하기는 하지.”

“약 보름 정도인가요?”

“음! 시간을 조정해도 그 부분만큼은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니까.”

“그러네요.”

창현이 대한민국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날은 약 보름 정도였다. 오랜 타지 생활로 당장 돌아가고 싶어 하는 그에게 있어 보름이란 기간은 썩 긴 휴식시간이 아니었다.

“최대한 조정을 해봤지만 되지 않으니 별 수 없지. 일단 보름 정도라도 돌아가는 걸로 하지.”

“네, 그럴게요.”

“일단 돌아가면 활동은 최대한 자제하는 걸로 하겠다. 음, 안 그래도 스케줄 몇 개 제안이 들어와 있는데 어떻게 할까?”

“가급적 쉬고 싶어요.”

“그럼 최대한 줄여놓도록 하마.”

이미 돌아가기로 발표를 한 이상, 비공식적으로 비밀리에 돌아가는 건 힘든 일이다. 사람들은 세계적인 스타가 화려하게 귀국하길 바랄 것이고, 일거수일투족이 관심의 대상이 될 것이다.

소파에 앉은 창현은 나른한 어조로 말했다.

“돌아간다고 하니까 확 풀어지는 느낌이네요.”

“그러냐? 하기야, 그동안 열심히 움직였으니 그렇겠지.”

“그렇죠? 그동안 열심히 움직였어요.”

“벌어들인 돈이 그걸 증명하고 있지.”

“그걸 또 돈으로 환산해요?”

“회사 사장에게 뭘 바라는 거냐? 바빴다는 증거는 당연히 벌어들인 금액이 되는 것인데.”

능글능글하게 미소 짓는 석규를 보며 고개를 젓는 창현이었다. 아직 어려서 그런지 금전에 관련된 부분을 노골적으로 언급하는 것은 익숙하지 않았다.

가만히 창현을 바라보던 석규는 존 스미스가 했던 말 중 하나가 떠올랐다.

미국 시민권에 관련된 이야기에 집중되어 있다가 미처 창현에게 하지 못했던 이야기.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겨나자, 석규가 입을 열었다.

“음, 한 가지 물어봐도 되나?”

“예, 뭘요?”

“존 스미스를 만났을 때 들었던 이야기인데.”

“존 스미스요? 갑자기 그 이름은 왜……?”

“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질 때 의미심장한 한 마디를 해서 말이다.”

“어떤 말을요?”

높은 곳과 연관된 사람이라는 말이 창현으로 하여금 불안하게 만들었다. 미국 시민권에 관련된 말 말고도 다른 말을 했다는 것이 창현의 호기심을 자극하기도 하였고,

“네 안무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제 안무요?”

갑자기 불안함이 전신을 지배해나간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석규를 바라본다.

“네 계단 춤 말이다. 그걸 가지고 존 스미스가 의미심장하게 이야기하더군. 이게 무슨 뜻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만 말이다.”

“…….”

딱딱하게 굳어가는 창현의 얼굴이다.

그 모습을 보며 석규가 의아한 듯 묻는다.

“왜 그러냐.”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존 스미스란 사람도 계단 춤이 어렵다는 걸 알고 있나 보네요. 하하”

“그렇겠지? 그 사람도 네 콘서트에 다녀왔다고 하니 계단 춤에 대해 경외심을 가졌겠지. 하하!”

“그러네요.”

어색하게 웃음을 지었지만 창현의 머리는 어지러웠다. 존 스미스란 사람이 굳이 석규에게 계단 춤에 대해 언급한 까닭이 무엇일까. 귀국할 생각에 온통 즐거운 생각으로 가득하던 창현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알면서 물어본 걸까.’

내공이라는 힘을 지니고 있으며, 음공을 공부한 자신의 공부는 모든 비밀을 털어놓는 석규에게마저도 이야기하지 않은 부분이다.

그 부분에 대해 약하지만 꼬집는 말이 나왔다.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복잡하게 헝클어진 창현의 눈이 깊어져갔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창현의 귀국 날짜가 다가왔다.

그 시간은 창현으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 시간이었다.

존 스미스가 전해달라던 말을 들은 뒤, 창현은 한동안 극도의 불안함에 휩싸여야만 했다. 마치 자신의 비밀을 알고 있는 듯한 그의 말은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하던 부분을 알아차릴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게 하였다.

‘계단 춤은 내 과욕으로 빚은 것일 수도.’

인간이 할 수 있는 범주의 경계를 오가는 춤이었다. 그래서 누구도 눈치 채지 못했고,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하던 부분이었다.

그 부분이 들킬 위기에 처하자, 창현은 무대 위에서 자신이 즐거운 나머지 필요 이상으로 힘을 펼친 게 화근이었다.

스스로 실수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기 어려웠다.

조금씩 자신이 만들어놓은 경계를 넘던 창현은 존 스미스의 말을 듣고 다시 한 번 다잡을 수 있었다.

“그럼 슬슬 갈까?”

“네.”

잘못된 부분을 다잡는 것은 나쁘지 않았다.

잠시나마 극도의 불안함을 느꼈지만 그 부분 또한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처음부터 고민할 부분이 아니었다.

‘음향총서에 대한 것은 나밖에 모르는 비밀. 그들이 나의 비밀을 알 리 없어. 아마 나의 반응을 보기 위해 한 번 찔러본 것일 수도 있고.’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지는 기분이었다. 어차피 다른 사람은 모르는 비밀이니, 자신이 떠들지 않으면 아무도 모를 것임이 분명했다.

“가면 각오해야 하는 건 알지?”

“무슨 각오요?”

“공항에 가면 널 보려는 팬들이 넘쳐날 테니 말이다.”

“솔직히 공항에 와봤자 뭐하겠냐 싶지만, 오면 저야 좋죠. 근데 그 부분이 왜 각오를 해야 하는 거죠?”

“그야 여태껏 네가 겪었던 것과 차원을 달리할 정도의 환호성이 널 반겨줄 테니까. 이제 완전한 월드 스타 반열에 올라섰으니 팬들에게 그 부분을 보여줘야 하기도 하고.”

“곧 죽어도 멋진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거네요.”

한숨을 푹 내쉬는 창현. 좋은 자리에 앉는다 해도 장시간 비행은 힘든 법이다. 온몸이 피곤에 찌들어 있는 상황에서도 멋진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압박은 상상 이상으로 셌다.

“그래, 그러니 비행기에서 잘 때도 조심해라. 눌린 자국이나, 침 자국이 남아 있으면 평생 꼬리표가 되어 따라붙을 테니.”

“그건 좀 끔찍한데요.”

“알면 주의하도록 하고.”

“이럴 땐 아버지가 부럽네요.”

“부러우면 너도 나이 먹고 기획사 사장을 하면 되지.”

“하하! 그건 좀 생각해볼게요.”

웃음을 지은 창현은 정중하게 거부했다. 석규를 따라다니면서 몇 번 사람을 만나봤지만 상상 이상으로 힘들었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게 사람 상대하는 거란 걸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차라리 콘서트를 하는 게 낫지.’

그것이 솔직한 창현의 생각이었다.

그의 속내를 읽은 석규는 피식 미소를 짓는다.

세상 살아가는 법을 깨달아가는 아들의 모습이 보기 좋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너무 일찍 깨닫는 게 아닌가 싶어 안쓰러운 마음도 들었다.

‘좋은 게 좋은 거겠지.’

편하게 마음을 먹는다. 세상을 빠르게 알아간다는 건 나쁘지 않다. 다만 너무 빠르게 알 경우 남들이 보기에 감정이 메말라 보일 수 있다.

그 부분을 조정해주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 생각했다.

‘최선을 다하마.’

자리에 앉아 눈을 감고 있는 창현을 보면서 석규도 의자에 몸을 묻었다.

하지만 석규의 이러한 생각과 달리, 창현의 머릿속에는 귀국 후, 만날 사람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라샤 누나들을 만날 수 있으려나? 음! 그러고 보니 소녀시대 누나들도 인기가 굉장하다고 하던데. 형돈 형이랑 우결 촬영을 하고 있는 태연 누나 모습이 궁금하기도 하고…….’

고민을 잊어버린 채 창현은 입가에 흐릿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한편, 창현의 귀국 소식을 전해들은 소녀들이었지만 유감스럽게도 곧바로 그를 만날 꿈에 젖어들지 못했다.

그 까닭은 해외 공연으로 인해 외국으로 나가게 된 것. 바쁜 국내 스케줄과 함께 해외 스케줄까지 겹치게 되자, 그야 말로 죽기 일보 직전인 소녀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고통스러운 한 소녀가 있었으니, 바로 소녀시대 리더 태연이었다.

그녀가 괴로운 이유는 소녀시대의 리더여서? 그런 것은 아니다. 무늬만 리더인 그녀는 때때로 리더십을 발휘하지만 평소에는 평범한 일원에 불과하다.

정말 태연이 괴로워하는 것은 바쁜 스케줄 때문이 아닌, 외국으로 나가게 되면서 병행하게 된 촬영 때문이었다.

“오빠! 그렇게 하면 안 된다니까요.”

“악! 그러시면 안 돼요.”

“제발 그만 좀 해요. 그러면 뭐가 되요.”

콘서트 준비에 바쁜 다른 소녀들과 달리 형돈과 우결 촬영을 병행하는 태연은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가상 결혼을 통해 부족한 연애 경험을 쌓고, 이것을 자신의 조련에 접목시켜 단숨에 창현을 휘어잡으려던 태연의 웅대한 포부는 서서히 희석되고 있었다.

정말 결혼이 이런 걸까? 라고 생각하면 결혼이란 걸 하지 않는 게 좋다 생각할 정도였으니까.

배려심이라고는 일체 존재하지 않는 상대와의 결혼 생활은 태연을 점점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형돈과 우결 촬영을 이어나갈수록 태연의 환상은 점점 깨져갔다.

‘여, 연애는 좋지만 결혼은 신중해야겠어.’

참혹하지만 뼈가 되고 살이 되는 교훈이었다.


비행기가 착륙했다.

다른 물질이 첨가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의 공기는 미국의 것과 다르게 느껴졌다.

좋게 스며드는 공기는 아니지만 자신이 태어나고, 자라오면서 느낀 자연스러움.

단지 도착했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인데,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긴장이 한결 풀리는 걸 느꼈다.

창현의 그 상태를 놓치지 않은 석규가 곧바로 느슨해진 그의 페이스를 당겨놓는다.

“준비는 됐나?”

“이게 별다른 준비가 필요한 일이었나요?”

“더 잘 아는 녀석이 그런 말을 하는군.”

“하하, 그러네요.”

게으름을 피운 게 제대로 걸리자, 뜨끔한 창현은 웃음으로 무마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고리 눈을 뜬 석규의 눈이 자신을 향하자, 결국 항복 선언을 했다.

“알았어요, 준비할게요.”

월드 스타라 할지라도 팬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다. 그들이 알고 있는 월드 스타는 어느 순간에도 멋지며, 여유가 넘치는 그런 인물이다.

완전한 항복 선언을 받아내자, 흡족한 미소를 지은 석규가 말한다.

“그럴 줄 알고 미리 준비를 해뒀지. 최 코디.”

“네, 사장님.”

“성심성의껏 세팅해줘.”

“물론이에요!”

짠! 하고 메이크업 가방을 들어보이자, 창현이 기겁한다. 내공을 지니고 있는 자신의 감각마저 속이는 움직임이라니!

“어, 가, 갑자기 어디에서…….”

“그건 아실 필요 없고, 사장님이 명령하셨으니 저는 그대로 따르는 거예요.”

“윽…….”

“자자, 도망치지 마시고요.”

슬그머니 뒤로 도망가려 하는 창현 앞으로 최 코디의 양손이 덮쳐오고 있었다.

곧 있을 인형 놀이의 향연(?)을 생각하며 두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와아아아아!

모르는 사람이 보면 축제 현장인 줄 알 정도로 환호성은 대단했다.

삼천 명에 육박하는 사람들이 이례적으로 공항에 모인 이유는 간단했다.

바로 대한민국의 이름을 찬란하게 빛내준 그들의 스타, 현을 보기 위한 것!

오늘 하루, 지금 이 순간만큼은 공항 전체를 대여한 것 마냥 모인 사람 모두가 현의 이름을 외치며 조금이라도 그의 모습을 자세히 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현! 현! 현!

자신의 예명을 목이 떠나가라 외치는 사람들을 보며 창현은 손을 흔들어주었다.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성의 표시는 이 정도뿐이었다.

겉으로 웃고 있지만 창현은 속으로 궁시렁거리는 중이었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환호성을 보내는 팬들 때문에?

아니, 절대 그런 이유는 아니다. 비행기에서 막 내렸기에 몸이 피곤하고, 정신도 피곤했지만 그 정도로 궁시렁거릴 정도로 창현은 약하지 않았다. 힘든 시절 남들의 관심이 얼마나 소중한가 몸소 체험했기에 세계적인 자리에 올라선 지금, 그는 여전히 신인과도 같은 겸허함을 가지려 노력했다.

단지 그가 불만을 갖고 있는 것은 지극히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이런 패션은 좀.’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공항 패션 때문이다.

원래 공항을 지나 곧장 집으로 돌아갈 예정이던 창현은 자신의 옷을 입으려 하였다.

하지만 여기에 어른의 사정이 끼어들게 되었다.

협찬이란 이름하에 주어지는 큰 이권이 끼어들자, 석규는 그 달콤한 제안을 거절하지 못했다.

기껏해야 옷 한 번 입어주는 것 정도였으니까.

적어도 석규는 그렇게 생각했다. 창현이 그것을 모르고 있어 궁시렁거릴 뿐이지만.

가끔씩 옷을 만지며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는 그를 보며 석규가 피식 웃었다.

‘참나, 자기 가치를 너무 다운 시키는 것도 재능이라니까.’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했지만 이 협찬이 이루어지기까지 과정은 대단했다.

무려 수십여 군데 회사에서 현의 공항 패션에 경쟁이 붙었던 것.

치열한 접전 끝에 석규의 구미에 맞는 회사가 선택되었다.

모르긴 몰라도, 오늘 연예 기사란은 온통 현의 이야기로 뒤덮일 것이 분명했고, 협찬한 회사는 현의 효과를 보고 어마어마한 대박을 터뜨릴 것이다.

‘그럼 나중에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겠지.’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자체적으로 마련된 포토 존에 들어선 창현은 사진을 찍은 뒤, 간단한 인터뷰를 하기 시작했다.

이 인터뷰 또한 치열한 경쟁을 거친 자에게 주어지는 영광이었다.

인터뷰를 끝낸 창현은 경호원들의 보호 아래 가까스로 차에 탑승할 수 있었고, 그를 태운 차는 빠른 속도로 공항을 떠났다.

멀어지는 공항을 보며 창현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후우! 죽을 뻔했어요.”

“그래서, 싫었냐?”

“그럴 리가요.”

“왜, 속으로 궁시렁거리는 게 내 귀에 들릴 정도였는데.”

속으로 뜨끔하던 창현은 입가에 미소가 걸려 있는 석규의 표정을 보고는 인상을 썼다.

“…왜 그런지 아시면서 그러는 거 아니에요?”

“알고 있었나?”

“표정에서 다 나오잖아요.”

“음? 아, 아들 앞이라 너무 방심을 했군. 다음에는 좀 더 표정 관리에 철저해야겠어.”

“아들 앞에서 그러고 싶어요? 에휴!”

한숨을 길게 내쉬는 그를 본 석규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간단하게 사진을 찍고 인터뷰를 하여 간단하게 보이지만, 수많은 사람들의 환호 속에 서 있는 것 자체만으로 상당한 심력을 소모한다.

“당분간 일정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 푹 쉬도록 해라.”

“…정말이죠?”

“뭐냐, 날 믿지 못하겠다는 그 눈빛은?”

“아버지가 은근히 거짓말을 잘하시더라고요.”

“내가? 나 같이 거짓 없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떳떳하다는 듯 가슴을 쭉 펴는 석규. 그 모습에 창현은 실소가 흘러나왔다. 이건 마치 고양이가 생선을 앞에 두고 맛 없어 보인다고 하는 거랑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정말이에요?”

“정말이고 말고.”

“제가 어머니한테 이야기를 해도 되요?”

“뭐, 뭘 말이냐?”

여유롭던 석규는 지선이 언급되자 땀을 뻘뻘 흘리기 시작했다.

상황이 뒤바뀌었다.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는 창현에게서 여유가 넘쳐나기 시작했고, 반대로 석규는 불안한 듯 눈이 흔들렸다.

“제가 입을 열면 상당한 타격을 입을 걸요?”

“으음.”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기에 석규의 입에서 침음이 흘러나왔다.

주도권이 넘어가게 되면서 석규는 창현이 자신에게 무언가 원하는 게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동안 그를 따라다닌 것이 장난이 아니었다는 듯, 창현은 먼저 입을 열지 않고 석규의 입에서 말을 끌어내려 하였다.

‘호랑이 새끼를 키웠군.’

세상 경험을 시켜준 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 셈이다.

“원하는 게 뭐냐?”

“별로 없어요. 제가 해야 할 스케줄에 관련된 것뿐?”

“음! 일단 방송 프로그램 하나 출연할 예정이다. 일단 그것밖에 없다.”

“방금 전에는 푹 쉬어도 된다면서요?”

“…….”

거짓말을 했다가 본전도 찾지 못하는 석규였다. 스케줄로 아들을 농락하는 재미에 빠져들었다가 오히려 덜미를 잡히는 신세가 되었으니, 그의 심정은 참담했다.

“으흠, 일단 스케줄 하나라. 이 정도면 양호하네요. 다른 날은 푹 쉬도록 할게요.”

“한 가지 착각하나 본데, 내가 입을 놀리면 너도 무사하지 못할 거다.”

휴식은 줄 수 있으나, 주도권을 빼앗길 수 없다는 생각에 석규가 날카롭게 말했지만 도리어 창현의 비웃음만 샀다.

“말하시지 못할 걸요? 그렇게 되면 제 이미지에 타격이 가고, 결국에는 회사 사정도 안 좋아질 거잖아요? 지켜줘야 할 부분인데 아버지가 깨버릴 리 없죠.”

“크윽! 내가 호랑이 새끼를 키웠어.”

“다 아버지의 도움 덕분이에요.”

매번 톡톡히 당하다가 복수를 하게 되자, 묵은 스트레스가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입가에 미소 지은 채 몸을 묻고 눈을 감자, 석규는 피식 웃음을 짓고는 로드 매니저에게 손짓을 하여 속도를 줄이게 하였다.

오랜만에 돌아온 만큼 확실히 쉬게 해줄 생각이었다.


“현 씨가 돌아왔구나.”

-보신 거예요?

“응.”

-아악! 나도 있고 싶었는데, 왜 하필 이때 스케줄이 있는 건지. 흑, 마음은 서울에 있지만 몸은… 흑흑!

비운의 여주인공 마냥 우는 시늉을 하는 건 윤아였다. 콘서트를 위해 소녀시대 전원이 외국으로 나가 있는 상황이다. 때문에 창현이 입국했다는 소식을 들었음에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사람은 전무한 상태였다.

“너무 슬퍼하지 마. 그래도 처음부터 머리를 복잡하게 굴리지 않아도 되잖아.”

-하지만…….

“네가 기회를 노리고 있는 만큼 다른 애들도 기회를 노릴 수 있어. 당연한 것이기도 하고. 지금은 참고 견뎌야 할 때야.”

-일단 돌아오게 되면 난전이 되지 않을까요?

윤아의 걱정은 당연했다. 현재 소녀시대 아홉 명 전원이 외국으로 나가 있는 상태였다. 여기에서 국내로 돌아가게 되면 다방면으로 움직여 창현과 만남을 가지려 할 것이다. 그 중, 스케줄이 가장 많은 축에 속하는 윤아는 더 어려운 처지에 놓일 것임이 분명했고.

하지만 연희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렇게 되면 우리가 전적으로 유리해.”

-유리하다고요?

“물론이지.”

-어, 어째서요? 전 스케줄이 많은 편이라서 창현이를 만나기가 힘든데…….

일반적인 생각이라면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두뇌로도 미영과 유리를 상회하는 모습을 보여준 연희였기에 그 정도 방법쯤은 이미 돌파구가 있었다.

“일단 애들은 혼자서 활동을 하잖아. 경쟁자들끼리 손을 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해? 혼자서 활동하면 한계가 드러나기 마련이지. 그에 비해 윤아 넌 내가 도와주잖아. 한 명보다 두 명이 더 낫다는 걸 알지? 이래도 네가 불리해?”

-아, 아뇨.

“나만 믿으면 돼. 설마 날 못 믿어서 그런 이야기를 한 건 아니지?”

-그, 그럴 리가요! 저한테는 언니 밖에 없다고요. 언니만 믿으니까 제발 그런 말 말아줘요. 전 언니만 믿어요.

“어머, 그래? 내가 너무 심한 것 같네. 미안해.”

-아니에요. 언니를 의심한 제가 잘못이죠.

어느새 상황이 바뀌어 윤아가 일방적으로 사과하는 형태가 되었다.

왜 이렇게 된 걸까.

그것은 오로지 연희만 알고 있을 것이다.

“일단 윤아 네가 돌아온 뒤 승부야. 그때부터 내가 조언을 해줄 테니까 이번 기회를 통해 단번에 휘어잡아버려. 알겠지?”

-가능할까요?

“음, 반반? 아직 내가 현 씨에 대해 정확하게 아는 게 없으니까.”

-그, 그럼 정보를 좀 더 드릴게요. 그럼 정확하게 판단하실 수 있지 않을까요?

반반이라지만 휘어잡을 가능성이 있다는 말에 윤아는 몸이 달았다. 정말 이번 기회를 통해 창현을 자신의 남자 친구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종류의 희망이 전화기 너머에서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그러려나. 그건 좀 두고 봐야겠지.”

-언니! 제가 돌아가면 알고 있는 거 다 말할게요. 그러니 그때 꼭 말씀해주셔야 해요!

“알았어.”

-약속한 거예요!

결국 윤아가 애원하는 형태가 되어 통화가 끊어졌다.

묘한 미소를 띤 연희가 핸드폰을 바라보다가 어깨를 으쓱한다.

“난 먼저 제공해달라고 한 적 없어. 다 윤아가 원한 거지.”

노련한 사냥꾼인 그녀는 사냥감을 쫓아다니지 않는다.

달콤한 미끼로 사냥감이 접근하게 만들 뿐.

가련한 사냥감 윤아는 연희의 미끼에 여지없이 흔들렸고,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놓을 위기에 처했다.

“어디 보자, 소녀시대 애들이 내일 모레 귀국하지? 그럼 내일쯤해서 현 씨와 한 번 만나볼까.”

윤아가 제공한 정보를 떠올리던 연희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녀가 없는 자리에서 왜 현을 만나냐고?

혹 사심이 있는 게 아니냐고 물어볼 수 있다.

거기에 대해 연희가 해줄 대답은 간단했다.

“윤아를 위해서 현 씨에 대해 좀 더 알아야 하니까.”

그녀의 존재는 연희에게 훌륭한 방파제가 되어주었다.


스타의 삶은 편치가 않다.

움직임 하나하나에 관심을 받는 직업이다 보니, 자의식이 과해져 즐기게 되지만, 반대로 행동 모두가 이슈가 되어, 사생활이 사라지고는 한다.

모든 게 다 좋다고 여기지만 창현은 이 부분이 가장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다고는 하지만.”

자신의 사소한 행동마저 기사가 나면 그것도 골치가 아프다.

어제 라샤 멤버들과 함께 식사한 것마저 기사화 되어 있는 것을 보며 창현은 손가락으로 머리를 꾹 누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랜만에 만나 반갑게 해후를 나눈 것까지는 좋았다.

문제는 반가움이 과한 나머지 그 감정을 적나라하게 분출했던 것.

덕분에 창현은 원치 않게 술 몇 모금을 마셨다.

술을 좋아하지 않는 그에게 있어 씻지 못할 원한을 심어준 셈이다.

으드득!

자신에게 술을 권유하던 악마 한 명이 떠오르자, 창현은 격렬하게 감정을 분출했다.

“미란 누나, 다 기억해두고 있어.”

자신에게 술을 권하던 미란의 모습을 잊을 수 없었다.

한사코 거부하자 게임을 통해 합법(?)적인 출구를 마련하여 기어코 자신에게 술을 먹이던 그녀의 모습.

즐거워하던 표정을 떠올리니 다시 한 번 분한 마음이 들었다.

물론 당하고 있었던 건 아니다.

거듭 술을 권하다 게임으로 먹이려하자, 실력을 발휘하여 미란을 보내버리는데 성공했으니까.

그녀의 굴욕(?)은 창현의 핸드폰에 고스란히 저장되어 있다.

오늘 일어나게 되면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해 전해듣고 사색이 되어 자신에게 애원하리라.

간단하게 아침을 해결한 창현이 소파에 앉아 TV를 시청하려 할 때, 핸드폰이 울렸다.

[아직 자고 있을 것 같아 문자로 보낸다. 잠시 할 이야기가 있으니 회사로 와라. 한 시간 정도 지나면 도착할 거다. 자고 있으면 직접 들어가서 깨울 예정이고.] 악덕사장님

도착한 문자를 보던 창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음! 푹 쉬라고 하더니만 또 불러내네.”

그렇게 말하지만 표정은 어둡지 않았다.

어차피 자신은 푹 쉬는 게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잠시라도 가만히 있으면 불안함이 드는 것은 자신의 입지에 불안함을 가진 전형적인 한국 사람인 듯했다.

특별한 예정이 없으면 작업실을 돌아다니면서 작곡을 하거나 작사를 할 생각이었다.

차가 도착하길 기다리며 창현은 씻고 준비를 하였다.

집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온 로드 매니저는 멀끔한 그의 모습을 보고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자고 있을 거라 하셨는데 일어나 있었네?”

“아버지가 그랬어요?”

“응, 어제 미란이가 술 먹였다고 하던데.”

“저보다 그 누나가 더 마셨죠. 전 별로 안 마셨어요. 일단 가요.”

“그래.”

밖으로 나온 창현은 곧바로 AA엔터테인먼트에 도착한다.

사장실에 도착한 창현은 몇 개월 전과 확연히 달라진 비서들의 반응에 어깨를 으쓱하고는 안으로 들어선다.

“어서 와라.”

“푹 쉬라면서 곧바로 부르는 건 어느 나라 법이에요.”

“하하! 미안하다. 하지만 일을 빨리 끝내놓고 쉬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서 말이다.”

“그거야 그렇죠.”

“아버지의 배려를 알아주니 좋군.”

“배려…라고 해드릴게요. 그런데 제가 해야 할 일이 뭔데요?”

비아냥거리는 식이었지만 석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한다. 때때로 어떠한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 저 모습은 본받을 만했다.

“음! 별 건 아니고 간단하게 인사를 하고 왔으면 싶어서 말이다.”

“인사를요?”

“그래, 저번에 SM엔터테인먼트와 협약 관계에 있다고 했지?”

“그랬었죠.”

“이번에 제법 크게 도움을 받기로 해서 말이다.”

“큰 도움이요?”

전해들은 바가 없었기에 창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자 석규는 창현이 아는 바가 없다는 것에 의아한 표정을 짓다가 미국 활동에 영향을 끼치지 않기 위해 언급을 안했단 걸 깨닫고는 피식 웃었다.

“이야기를 안했었구나. 저번에 내가 연습생을 뽑겠다고 했었지?”

“그랬었죠. 그러고 보니 아직 연습생을 안 뽑으셨네요?”

“그래, 여러 가지 문제가 있어서 말이다. 그러다가 기획적인 요소를 가미하여 새로운 방식으로 오디션을 해보면 어떨까 싶어서 말이다.”

“새로운 방식이요?”

“그래, 새로운 방식.”

“어떤 방식을 염두에 두고 계신데요?”

“이번에 돈을 들여서 방송국 하나를 인수했다. 그걸 토대로 우리 AA엔터테인먼트가 주최하는 오디션을 개최하려고 한다.”

낯설었지만 몇 번 본 형태이기도 했다. 조용히 연습생을 선발하리라 생각하던 창현의 얼굴에 놀라움이 서렸다.

“TV 방영 프로그램으로요?”

“그래, 거창하게 한판 벌이는 거지.”

“…의외인데요. 그건 아버지 스타일이랑 잘 안 맞는 것 같은데.”

지금 인기를 누리고 있는 라샤의 멤버들은 석규가 조용히 발굴한 인재들이다. 요란하게 만들어 주변의 이목을 주목시키는 것보다 조용히 실리를 챙기는 것이 그의 스타일, 그런데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일을 하려고 한다.

“그때와 지금은 많이 다르지. 탄탄한 기획사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너와 라샤를 제외하더라도 몇 명의 가수가 더 나와 줘야 한다. 기초를 지나칠 정도로 다져놨으니 이제 건물을 쌓아나가야 할 테지. 여기에 너의 도움이 필요하다.”

“제 도움이라면?”

“오디션으로 능력 있는 연습생을 선발한다, 그 중 상위 두 명에게는 세 달 안에 데뷔시키는 조건을 달려고 한다. 최고의 가창력을 지닌 사람과 최고의 스타성을 지닌 사람을 뽑는 거지. 그리고 그 두 사람에게 상을 주려고 한다.”

“그 상이 저와 관련된 것이군요?”

“그래, 각각 노래왕과 스타왕이 된 사람에게는 네가 만든 곡을 주고, 직접 프로듀싱을 해주는 조건을 내세우려고 한다.”

“…상당히 센 상금인데요?”

전보다 더욱 이름값이 상승한 상태다.

현이 직접 만든 곡을 주고, 프로듀싱까지 해준다면 그 자체가 프리미엄이 되어 언론의 스포라이트를 받게 될 것임이 분명했다.

“거기에 더불어 심사위원까지 해주면 좋겠지.”

“심사위원을요? 전 남을 평가하는 게 미숙한데.”

“예선전부터 해달라는 게 아니다. 추려내고, 추려낸 다음, 스타왕과 노래왕을 선발하는 중요 오디션에서 모습을 드러내면 된다. 그리고 네가 본 관점에서 장점과 단점을 짚어주면 되겠지.”

“어렵네요.”

“어렵지. 하지만 그래서 네게 부탁하는 거다.”

“으음!”

고민하는 창현이었다. 그리고 그를 보며 석규는 입을 닫고 조용히 그의 다음 이야기를 기다렸다.

아들이지만 소속 가수이기도 하고, 그가 작곡한 곡들은 엄연히 그의 소유로서, 소속사 사장인 자신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렇기에 전반적인 구상에 대해서 그에게 이야기를 한 것이고. 아무리 획기적이고,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는 계획을 내놓아도 그가 찬성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허사가 되어버린다.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뭔데 그러냐?”

“SM엔터테인먼트는 거기에서 뭘 도와주기로 한 건데요?”

“도와주기로 한 부분이라! 일단 전반적인 부분이라 해야겠지? 괜히 대형 기획사가 아니니 말이다. 지금 내가 이야기하는 것 대부분이 SM엔터테인먼트와 이야기를 한 뒤에 나온 것이다. 그리고 우리 측에서 해결할 수 없는 자잘한 부분을 맡아주기로 했지.”

“역할이 큰가요?”

“크지, 힘든 일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석규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는 창현이었다. 별다른 용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SM엔터테인먼트에 왜 찾아가라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었는데, 석규가 이야기 한 것이 나 홀로 해낸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음! 그래서 한 번 찾아가보라고 한 거로군요.”

“그렇지. 그리고 그쪽에서도 널 한 번 보고 싶어 하기도 했고.”

“절요?”

“그래.”

“이거 위험한데요?”

“어째서?”

“이수만 회장님은 보통 능구렁이가 아니잖아요. 그런 마귀 소굴에 절 보내면서 안심이 되시는 거예요? 제가 갔다가 무슨 짓을 당할지 모르는 일인데.”

엄살을 부리며 몸을 부들부들 떠는 창현이었다. 그의 말을 들은 석규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짓다가 참지 못하고 폭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왜 웃어요? 걱정을 해야지.”

“그걸 알 정도면 호락호락 하지 않다는 걸 증명하는 거라서 그렇다. 너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수가 뛰어나. 단지 그게 다른 사람의 의중을 꿰뚫어 보는 것과 다른 사람을 조종하는 것이 일치하지 않을 뿐이지.”

“일치라고 하니 조금 섬뜩한데요. 어쨌든 제가 쉽게 당하지 않을 거란 이야기죠?”

“그런 셈이지.”

중이 제 머리를 깎지 못한다는 말은, 자신의 상태를 냉정하게 진단하기 힘들다는 뜻이다. 석규를 따라다니면서 제법 많은 상황을 겪었다고 생각하던 창현은 그가 진지하게 인정해주자 기분이 좋았다.

칭찬은 작가를 연참하게 만드는 법이다.

“좋아요. 일단 아버지가 제안한 걸 모두 수락할게요. 제가 저장해두고 있는 곡의 숫자도 제법 많으니까요. 하지만 그에 대한 권리는 제가 많이 챙겨놓을 거예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동의하시죠?”

“물론이다.”

“그럼 그 부분에 대해서 일단락 짓도록 하죠. 그리고 SM엔터테인먼트도 곧바로 가도록 할게요. 일은 빨리 처리할수록 좋겠죠.”

“음! 곧바로 연락을 넣도록 하마.”

“부탁드릴게요.”

분명 이야기를 주도한 건 자신이었지만 묘하게 주도 당하는 느낌은 무엇일까.

미소 짓고 있는 창현을 보면서 석규도 미소를 지었다.

‘성장했군.’

제발 연애 쪽도 성장했으면 좋으련만.


석규와 이야기를 끝맺은 창현은 곧바로 벤을 타고 SM엔터테인먼트로 향했다.

사내 주차장에 내려선 창현은 석규가 했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코웃음을 쳤다.

“흠! 가볍게 인사만 하고 오면 된다고?”

이수만 회장을 능구렁이라 칭했지만 자신의 아버지인 석규 또한 그에 못지않은 능구렁이였다. 다만 아버지를 능구렁이라 표현하기 미안하니, 악동이라 하면 괜찮겠지.

“일단 방심하지 말자. 무슨 이야기가 오고갔는지 몰라도 말리면 안 될 테니까.”

굳게 마음을 먹는다.

아무리 석규가 칭찬을 해줬어도 자신은 가수이지, 사업가가 아니다. 이쪽 세계에서 몇십 년을 뒹군 사람과 맞서려고 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주차장을 벗어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을 누른다.

1층에 도착하자, 깜짝 놀라며 자신을 보는 비서에게 약속 사실을 알리자, 확인을 하고, 곧바로 올라가도 된다고 말해준다.

인사하며 자리를 벗어나려던 창현은 비서가 수줍게 싸인 요청을 하자, 피식 웃으며 제안을 승낙했다. 자신보다 나이가 한참 많은 여성이건만 무척 귀엽게 느껴졌다.

싸인을 해준 창현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리고 기다릴 무렵이다.

“어머!”

뒤에서 들려오는 여성의 목소리에 창현이 고개를 돌린다. 그곳에는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서 있는 여성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연희 씨?”

한 차례 소개 받았기에 얼굴과 이름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어떻게 여길? 아니 그것보다 인사를 깜빡했네요. 안녕하세요, 현 씨?”

조신하게 고개 숙여 인사를 하는 연희. 숙여져 보이지 않는 사각에 자리한 그녀의 얼굴에는 진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마왕의 등장이다.




제96장 인생에 한 번쯤 찾아오는 기회




머릿속에서 수십 가지 생각을 하면서 연희는 자신의 매력을 한껏 살려주는 미소를 머금은 채 입을 연다.

“여긴 어떤 일로 오셨어요?”

“회장님을 뵈러 왔습니다.”

“삼촌이요? 아! 그래서 오셨군요. 곧바로 올라가셔야 하나요?”

“네, 약속을 잡아놓았으니 곧바로 올라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고개를 끄덕인 연희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거 타이밍이 좋은 걸?’

안 그래도 현을 한 번 만나보려고 생각하던 연희였다.

어떤 형태로 만날지 고민하던 차에 이렇게 기회가 만들어졌다.

힐끗 창현을 살피며 연희는 자신의 우월성에 흐뭇함을 느꼈다.

‘역시 될 사람은 된다니까?’

하지만 아직 기회는 완전히 만들어지지 않은 상태. 여러 가지 계획을 계산한 연희는 아무렇지 않은 척 창현에게 말한다.

“저도 연습실에 올라가야 돼서요.”

“아, 그렇군요. 그럼 같이 타요.”

“네.”

그 뒤로는 대화의 단절. 창현은 아직 연희를 대하는 것이 어색했고, 어떻게 하면 만남을 이어갈지 고민하던 연희 또한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띠잉!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문이 열리자, 두 사람이 안으로 탑승한다. 문이 닫히고, 다시 무거운 침묵에 휩싸일 때, 연희가 입을 연다.

“저기…….”

“네?”

“혹시 삼촌 만나고 스케줄이 있으신가요?”

기회는 찾아왔지만 결정적인 약점은 자신과 창현의 연결고리가 미약하다는 점이다. 개인적인 친분도 부족했거니와 서로 연락할 방법조차 마련되지 않은 상태다. 이런 상황에서 관계를 돈독히 만들기 위해서는 대화를 나누고, 상대의 특성을 파악해야 한다.

‘제발 없어야 해!’

그래야 자신의 윤아 도와주기(?) 계획이 성공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리고 하늘은 연희를 도왔다.

“없습니다. 그런데 그건 왜……?”

‘좋았어!’

보이지 않게 주먹을 불끈 쥔 연희는 입가에 상냥한 미소를 짓고 말했다.

“그렇다면 미팅이 끝나시고 잠시 연습실로 내려와 주실 수 있겠어요?”

“연습실이요? 형들이나 누나들은 해외 콘서트를 간 걸로 아는데…….”

“그게 아니라 제가 상담 받고 싶은 게 있어서요.”

“연희 씨가요?”

“네.”

고개를 갸웃하는 창현. 자신과 연희는 아직 대화를 나누기에는 어색한 상태였다.

결정적으로 본능이 불안함을 호소하고 있었다. 같이 가면 마치 잡아먹힐 듯한 초식동물의 감각이 창현을 붙잡았다.

“지금 여기서 말하기는 곤란하고요?”

“조금 부끄러운 이야기라서…….”

몸을 꼬며 부끄러운 표정을 짓는 연희의 모습은 보는 남자의 욕망을 자극하는 무언가가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자신에게 대화를 요청하는 그녀의 모습에 창현은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었다.

“잠깐이라면…….”

“정말요? 감사합니다.”

“네, 그럼 미팅이 끝나고 연습실로 내려가겠습니다.”

“그것보다는… 저, 핸드폰 번호 좀 주시겠어요?”

용기 있게 핸드폰을 내미는 연희. 적절한 타이밍이 파고들어 상대방이 거절하기 곤란하게 만드는 수법을 구사하고 있었다.

창현은 차마 그걸 거절하지 못한 채 핸드폰을 받아들었다.

“아, 예.”

핸드폰 번호를 입력하자, 엘리베이터가 도착한다.

띠잉.

“연락 기다릴게요. 미팅 잘 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순식간에 연락처를 따였건만 창현은 그것을 자각하지 못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사랑에 빠진 소녀 마냥 수줍은 모습을 보이던 연희의 얼굴은 빠르게 변해갔다.

“윤아야, 조금만 기다리렴. 언니가 도와줄게. 후후, 후흐흐.”

입 꼬리를 말아 올린 채 창현의 번호를 보는 그녀의 눈은 빛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회장님.”

“어서오게. 이렇게 청하게 돼서 미안하게 생각하네.”

“아니요, 그럴 수도 있지요.”

자신에게 사과하는 수만을 보며 창현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만 수만의 생각은 다른 듯했다.

“이제 막 귀국한 세계적인 스타를 오라가라 했는데 이 정도는 당연한 게지. 강 사장님에게 부탁을 했지만 오기 힘들 수 있다 생각도 했고.”

“그런가요? 피곤하기는 하지만 그 정도는 아니에요. 게다가 회장님은 아버지를 많이 도와주시는 분이잖아요? 이 정도 번거로움은 어려운 게 아니죠.”

“도움이라, 하하! 좋게 보면 도움이긴 하지. 하지만 그렇게 생각은 하지 말게나. 나와 강 사장님의 사이가 좋아 보이지만 사실은 서로의 이익을 위해 주고받는 것이니 말이네. 사업이란 냉정하기에 어느 순간이 되면 단호해지는 때가 올 수 있지.”

“그런가요? 하지만 사업적 관계가 오랫동안 무탈하게 이어지면 훌륭한 파트너가 되지 않겠어요? 아직 어려서 잘 모르지만 미국에서는 그런 경우도 종종 있더군요.”

“파트너라, 나는 그렇게 되길 바라지만 강 사장님은 어떨지 모르겠군.”

“그건 회장님이 하기 나름 아닐까요? 한 가지 팁을 드리자면 아버지는 생각보다 많이 단순하세요.”

“단순하다라? 이거 굉장한 정보로군. 하핫!”

즐거운 듯 웃음을 터뜨리는 수만이었다.

“이곳으로 청한 이유는 감사함을 표하기 위함이네.”

“감사함이라뇨?”

“이번에 소녀시대가 제법 큰 성공을 거두었지. 여태까지 투자한 게 아깝지 않을 정도로 말이야.”

“네, 저도 들었어요. 좋은 소식이죠. 그리고 인기가 더 치솟고 있다는 것도 들었고요.”

“음! 이런 기회가 찾아오기 힘드니 기획부에서도 인기를 끌어 들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지.”

“소녀시대가 성공한 건 SM엔터테인먼트의 힘이 컸죠. 그런데 제게 고마운 게 뭐죠?”

아직까지 자신에게 고마워하는 이유를 알아차리지 못한 창현이다.

그 반응에 수만은 입가에 미소를 띤 채 말한다.

“다른 게 아니라 그동안 여러 편의를 봐준 것에 대해 감사의 인사를 표하고 싶어서 말이네. 알지 못하게 여러 방면으로 많이 신경 써준 걸 알고 있으니까.”

“그 정도야 친한 사이면 얼마든지 해줄 수 있죠.”

“아직 때 묻지 않아서 그런 이야기를 해줄 수 있겠지. 앞으로도 많은 도움을 주면 하네. 우리도 AA엔터테인먼트와 시너지 효과를 일으킬 수 있는 도움을 주고받으면 되니까.”

“아버지가 들으면 좋아하시겠네요.”

“이야기를 전해주면 좋고, 하하!”

아무렇지 않은 듯 웃음을 짓지만 의도 되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순간 창현의 눈이 가늘어졌지만 작은 변화였기에 수만은 눈치 채지 못했다.

그 뒤에 나온 이야기는 사소한 이야기뿐이었다. 창현이 SM엔터테인먼트 프로듀서로 계약을 한 것은 연결 고리를 만들기 위한 것. 그것도 석규가 SM엔터테인먼트의 지분을 확보하게 되면서 유명무실하게 변했다.

그래서 창현을 부른 것이다.

AA엔터테인먼트의 80~90%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바로 현이다.

회사끼리 친분이 돈독해졌지만 개인간에 친분을 터둬야 앞으로 하는 일이 더 수월해진다.

이야기를 들으며 맞장구치는 창현은 머릿속으로 수만이 자신에게 원하는 바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럼 일어나 보겠습니다.”

“그러게.”

엘리베이터까지 마중해주는 호의를 보이는 수만이다. 엘리베이터에 탑승한 창현은 연습실이 있는 층에 도착한 뒤, 연희에게 연락을 한다. 불안한 느낌이 물씬 풍겼지만 약속은 약속이었다.

“3 연습실이라…….”

연희가 알려준 연습실로 걸음을 옮기는 창현. 복도 끝에 위치한 연습실을 발견하고는 노크를 한 뒤 안으로 들어선다.

의자에 앉아있던 연희가 눈을 빛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서 오세요.”

“많이 기다리셨어요?”

“아니요, 그럴 리가요. 연기 레슨을 받고 있었거든요.”

“아, 그렇군요. 그런데 절 왜 만나고 싶다 하신 거죠?”

곧바로 용건에 들어가는 창현이었다. 단도직입적인 그 말에 연희는 아쉬움을 느꼈다. 좀 더 친분을 나눈 뒤 자연스러운 형태로 관계를 발전시켜나갈 계획이었는데 그는 생각보다 까다로운 인물이었다.

‘칫! 어쩔 수 없네.’

진한 아쉬움을 느끼며 머릿속으로 계획을 수정한 연희가 입을 열었다.

“제가 청한 것은 현 씨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하고 싶어서요.”

“부탁이요?”

“네, 부탁. 사실 고민이 많았지만 현 씨가 괜찮다 하시면 한 번쯤 부탁하려 생각했거든요.”

“부탁이라… 뭔지 일단 들어볼게요.”

예전의 창현이라면 별다른 말없이 들어주었을 테지만 지금은 달랐다. 사회 경험을 하면서 남의 부탁을 들어주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어느 정도 깨닫게 되었다. 자신의 위치와 파급력을 자각하는 순간, 작은 부탁 하나도 파장을 크게 일으킬 수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이 정도로 충분해.’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창현을 바라본다.

부담감을 주는 눈빛에 창현은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선다.

“제가 부탁드리고 싶은 건… 연기에 대한 조언을 듣고 싶어서요.”

“연기요?”

“네, 연기.”

“…….”

예상과 전혀 다른 연희의 부탁에 창현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드라마에 출연한 적이 있지만 자신은 연기자가 아니라 가수다. 그리고 눈앞의 연희의 본업은 다름 아닌 연기자다.

연기자가 가수에게 조언을 구한다?

황당함에 창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보며 연희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걸렸다.


“당혹스럽네요.”

“저도 고민을 많이 했어요. 이 부분에 대해서 말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그렇게 말을 하는 연희의 얼굴에는 여유가 가득했다.

순간 창현은 그녀의 모습을 보고 헷갈리는 것을 느꼈지만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것보다 그녀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었다.

“연기자로 데뷔를 했지만 연기 지적이 많이 들어오고는 해요. 제 연기가 아직 많은 사람들에게 몰입하게 만드는 매력이 부족한가 봐요.”

“…….”

“연기력을 증진시키려고 부단한 노력을 했지만 쉽지가 않았어요. 선생님에게 조언을 구해보기도 했고, 사내 다른 연기자들에게도 조언을 들어봤거든요.”

“그런데 늘지가 않았다?”

“아니요, 분명 늘기는 늘었어요. 하지만 제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뭐라고 해야 할까, 다른 부분이 개선되는 것 같지만 제가 지적 받은 부분은 명쾌하게 해결되지 않는 것 같았거든요.”

“그런데 왜 제게 부탁을 하는 건지?”

이제부터가 진짜다.

지금 하고 있는 이야기는 진실임과 동시에 현과 더 친해지기 위한 계획. 두 마리의 토끼를 잡기 위해 과감하게 미끼를 투척했으니, 이번에도 대담하게 일을 처리해야 할 때다.

“윤아에게 들었어요.”

“윤아 누나한테 뭘……?”

“사실 윤아 연기력은 연기자로서 뛰어난 편이 아니었거든요. 많은 사람들에게 지적을 받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런데 어느 날, 윤아가 주조연급으로 캐스팅이 되었고, 전보다 훨씬 뛰어난 연기력을 보이더라고요.”

“…….”

“저는 윤아한테 물어봤죠. 갑자기 연기력이 늘어난 이유가 뭐냐고. 윤아는 말을 하지 않으려 하다가 나중에 현 씨 덕분이라고 이야기해주시더라고요.”

연희의 말은 절반의 진실만 담고 있었다.

그녀는 윤아의 연기력 증진 이유에 대해서 물어본 것이 아니라, 미끼 투척에 걸려든 윤아가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사실을 털어놓은 것에 불과했다.

그 점을 자신의 연기력 부족과 접목시킨 것이다.

“전 별로 한 게 없는 것 같은데.”

“저도 그 부분에 대해서 고민을 해봤어요. 그런데 윤아가 그러더군요. 현 씨는 소녀시대 애들이 데뷔하기 전에 사적으로 보컬 트레이닝을 시켜준 적이 있다고요. 그리고 프로듀서로서 활동도 하고 계신 만큼 다른 사람의 단점을 발견하는데 능하고, 도움이 되는 적재적소에 조언을 해주신다고 윤아가 말하더군요.”

“너무 과분한 칭찬인데요.”

윤아가 그런 극찬을 했다 생각하자 괜히 쑥스러워지는 창현이었다.

다소 풀어진 그의 기세에 미소 지은 연희가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서 무례하지만 현 씨에게 부탁을 드리는 거랍니다.”

“다른 연기자분들에게 조언을 구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방금 이유를 말씀드렸잖아요.”

“…하핫!”

자신의 능력을 인정해주는 건 고맙지만 연기 부분에 있어서는 아직도 부담감을 느끼는 창현이었다. 더군다나 드라마가 끝난 뒤 반년이 넘는 시간 동안 연기에 손을 놓았기에 감각도 녹슬었다.

자신과 절친한 소녀시대나 라샤가 부탁을 했으면 모르겠지만 연희는 그 정도로 친하지 않다.

거절하기 위해 창현이 막 입을 떼려고 할 때였다.

그의 기색을 읽은 연희가 처량한 표정으로 말한다.

“부탁드릴게요. 대신 원하는 걸 들어드릴게요.”

“원하는 걸요?”

멈칫하는 창현을 보며 연희가 센 거 한 방 날린다.

“네, 뭐든지요.”

“…….”

여러 가지 상상을 하게 만드는 말이었다.

하지만 창현이 멈칫한 것은 망상이 머릿속에서 폭주하는 것 때문이 아닌, 간절한 그녀의 모습을 매정하게 뿌리칠 수 없어서 그랬다.

안 해주기로 마음을 먹었으면서 간절한 저 모습을 매정하게 뿌리치지 못하는 걸 보면 아직 사회 경험이 부족한 듯했다.

“하아! 좋습니다.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봐드릴게요.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말아주세요. 알겠죠?”

“감사합니다.”

“그리고 제가 한가하지 않아서 많이 봐드리지 못해요. 딱 하루를 더 시간 내서 제대로 봐드리고 끝을 내도록 해요. 알겠죠?”

하루의 투자. 원래 목표보다 작았지만 이 정도도 충분히 만족이었다. 입가에 함박 미소를 지은 연희가 고개를 크게 끄덕인다.

“네, 그것만으로도 충분해요.”

“그럼 제가 해야 할 건 뭐죠?”

“제 상대역을 해주시면 되요. 상대로서 제가 무엇이 부족한지 지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좋습니다. 그렇게 할게요.”

처량한 연희의 모습을 지나치지 못했던 것도 있지만 수락한데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바로 미국으로 돌아간 뒤 테일러 스위프트의 뮤직비디오에 참여해야 하는 걸 떠올린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녹슨 연기 감각을 다시 되살리는 작업이 필요했고, 연희의 제안은 창현의 생황과 맞아 떨어졌다.

‘어찌어찌 연결이 되긴 하네.’

한국판 마왕과 미국판 마왕에게 낚인 것도 모른 채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에 잠긴 사이, 한쪽에 마련된 책상 위에서 종이뭉치를 가지고 온 연희가 한 꾸러미를 창현에게 넘기며 말한다.

“그럼, 부탁드릴게요.”

“무슨 부탁을? 으응?”

연희가 건네준 걸 본 창현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손에 들려있는 것은 다름 아닌 드라마 대본이었다.

“오늘 약속이 없다 하셨으니까요. 잠깐이지만 봐주세요.”

“…….”

싱긋 웃으며 이야기하는 연희의 모습에 창현은 실수했다는 걸 깨달았다.

‘당했군.’

쓴웃음을 지은 창현은 순순히 요구에 응해주었다.

뭐든지 해주겠다던 그녀의 말을 되짚어 보면서.


“아아, 드디어 돌아왔어.”

감격에 겨운 표정을 지으며 소녀들은 자신의 침대로 달려가 그대로 몸을 묻었다.

해외 콘서트를 위해 출국한 그녀들은 몸도 괴로웠지만 그보다 더 괴로운 것은 정신이었다.

그녀들이 해외로 나가는 순간 신의 장난 마냥 창현이 국내로 돌아왔다.

그러니 콘서트에 제대로 집중을 할 수 없었다.

머릿속에는 선수를 차지해야 한다는 생각이 맴돌고 있었는데 현실은 전혀 그러하지 못했으니까.

무대에 집중하지 못하니 혼이 날 수밖에 없었고, 며칠만 참자는 식의 의지 발현으로 무사히 콘서트를 끝내고 국내로 귀환했다.

몸도 정신도 피곤했지만 하나같이 머릿속으로 플랜을 짜느라 바빴다.

그 중에서도 가장 도드라지는 것은 윤아였다.

탁월한 두뇌 활동을 보이지 못하지만 그녀는 자신만만했다.

‘후훗! 나한테는 연희 언니가 있다고.’

미영과 유리를 너끈히 감당할 수 있는 괴물 중 괴물!

그런 연희가 자신의 편이라는 것에 윤아는 몸도 마음도 피곤했지만 천군만마를 얻은 것 마냥 의기양양했다.

‘내가 아는 정보를 다 전해줬으니 연희 언니가 완벽한 계획을 만들었겠지?’

자신은 그 계획에 편승하여 움직이면 된다.

제대로 된 정보가 없을 때도 승산은 반반이라 했다.

모든 정보를 전달한 지금은?

백전백승일 것임이 분명했다.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지은 윤아는 자신에게 펼쳐질 분홍빛 미래를 상상했다. 온 세상 여자들이 자신을 부러워하는 눈으로 바라보는 모습을.

“으흐흐흐!”

생각만 해도 전신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방안으로 들어오던 태연은 입 꼬리를 말아 올린 채 히죽이죽 미소 짓는 윤아를 보더니 몸을 부르르 떨었다.

“뭐, 뭐야, 쟤 무서워…….”


“언니, 안녕하세요!”

“응, 윤아야, 안녕. 외국은 잘 갔다 왔고?”

“물론이죠, 언니 드릴 선물도 사왔어요. 여기요.”

“와! 고마워.”

SM엔터테인먼트 회사로 나간 윤아는 프런트에서 일하는 직원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신이 연습생 생활을 시작할 때 입사했던 직원은 이제 프런트를 책임질 정도로 높은 자리에 올라 있었다.

해외 콘서트에서 있던 일을 이야기하던 윤아는 문득 생각난 듯 입을 연다.

“아참! 그러고 보니 연희 언니 있나요? 핸드폰 연락이 안 돼서요.”

“연희? 오늘은 안 왔는데. 아참! 윤아 너 그거 아니?”

“네? 뭘요?”

“연희, 저번에 현이랑 같이 나가더라?”

순간 윤아는 자신이 말을 잘못 들은 건 줄 알았다.

“네에? 그,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아, 어제 현이 회장님 뵈러 여기로 왔거든. 그런데 나올 때는 연희랑 같이 나오더라고요. 그러니까, 연희랑 현이 다섯 살 차이인데. 연희 고것이 연하 취향이었던가? 현은 만인의 연인으로 남아주길 바랐는데…….”

아쉬운 듯 한숨을 푹 내쉬는 그녀의 말에 윤아는 멈칫했다.

무언가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과 달랐다.

“연희 언니는 분명 날 도와준다고 했는데…….”

그런데 어찌하여 창현과 같이 만난단 말인가?

“잘 어울리긴 하더라. 칫! 왜 그렇게 예쁜 거야. 질투도 못하게.”

“…….”

그 말 한 마디에 윤아는 머릿속에 무언가가 뚝! 끊어지는 걸 느꼈다.


이성을 잃은 윤아의 표정은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졌다. 예쁜 얼굴을 찡그려봤자 귀여운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문제는 그녀의 전신에 발산되는 험악한 아우라는 앞에 서 있는 여인으로 하여금 경기를 일으키게 하였다.

‘히, 히익!’

한창 창현과 연희의 관계에 대해서 떠들기 바쁘던 그녀는 온몸에 한기가 엄습하는 걸 깨닫고는 무심코 윤아를 바라보다가 비명을 지를 뻔하였다.

꽃사슴이 조폭 사슴이 되어 그녀를 압박하고 있었다.

너무나 무서웠지만 그녀는 애써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유, 윤아야?”

“네, 네?”

이성을 잃고 있던 그녀가 대답을 하자, 험악한 아우라가 순식간에 사그라 들었다. 그녀는 안도하며 윤아에게 말한다.

“너 지금 얼굴 엄청 무서웠어.”

“앗! 그랬어요?”

“응. 갑자기 왜 그런 거야? 진짜 무서워서 소리 지를 뻔했어.”

“아, 피곤해서 순간 짜증이 났나 봐요. 갑자기 짜증나던 일이 떠올라서. 미안해요, 언니, 헤헤헤!”

“그런 거였어? 후! 다행이다. 난 또 나한테 화가 난 줄 알았거든.”

“그럴 리가 없잖아요.”

윤아의 표정이 풀어지면서 분위기 또한 한결 나아졌다. 그러면서 화제를 바꿔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지만 좀처럼 연희와 창현이 같이 움직였다는 사실이 윤아의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언니, 그런데 아까 연희 언니랑 창현이가 같이 움직였다는 게 사실이에요?”

“응, 그랬지? 좀 어색해보이기는 해도 제3자가 보기에는 그림이 참 좋아보였… 히익!”

윤아가 조폭 사슴 모드로 변하자, 그녀는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험악하게 일그러져도 귀엽던 그녀의 외모는 보는 사람의 심장을 오그라들게 만드는 위압감을 풍겨내고 있었다.

“언니!”

“네, 넵! 아, 아니, 으응? 뭐, 뭔데? 말만 해.”

자신도 모르게 존댓말을 하던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는 대답한다.

“한 가지 부탁 좀 해도 될까요?”

“부탁?”

“네, 제 부탁은요…….”

윤아의 입이 열리며, 자신의 용무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다음 날.

회사 프런트를 지키고 있던 그녀는 안으로 들어오는 창현을 발견하고는 표정이 모호해졌다가 인사를 한다.

“안녕하세요, 또 오셨네요?”

“아, 볼일이 있어서요. 하하.”

“오늘도 회장님을 뵈러 오신 건가요?”

“아니요, 회장님에 대한 볼일은 어제 끝났고, 오늘은 다른 볼일이 있어서요.”

다른 볼일이란 말을 들은 그녀의 눈이 빛난다. 어제 윤아가 했던 부탁이 머릿속에 스쳐지나간다.

“다른 볼일이요?”

“네, 이연희 씨에게 볼일이 있어서요. 올라가도 될까요?”

“이 출입증을 갖고 가시면 되요.”

“아, 감사합니다.”

출입증을 받아든 창현이 인사를 한 뒤 곧바로 엘리베이터에 탑승한다.

그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던 그녀는 품속에서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건다.

“여보세요? 윤아야, 난데…….”

사슴도 마냥 샌드백은 아니었다.


“어때?”

“흐음. 괜찮은데요?”

“정말?”

창현의 대답에 기쁜 표정을 짓는 연희였다.

현재 두 사람은 연기 연습에 매진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연희의 부탁으로 시작된 연기 연습이었지만 창현은 이번 선택이 잘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기초는 튼튼한 걸?’

연기력은 논외로 치더라도 연희가 지닌 기본기는 탄탄했다. 단지 그녀가 좀 더 다양한 상황을 겪어보지 못했기에 감정 표현이 풍부하게 우러나오지 않는 단점 때문에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있던 것이다.

어린 나이임에도 다양한 상황을 겪어본 창현과는 정반대 케이스라 할 수 있었다.

“많은 도움이 됐어. 이제 자신감이 생길 것 같아.”

“습득력이 빠른데요? 굳이 제가 돕지 않았어도 잘했을 것 같은데.”

“그럴 리가? 창현이 네가 도와줘서 이렇게 잘 된 거야.”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연희의 태도는 한결 친숙해진 상태다.

같이 연기 연습을 하면서 두 사람은 놀라울 정도로 친해졌다. 깍쟁이 같은 이미지와 달리 연희의 성격은 털털했고, 다른 사람의 신경을 덜 소모하게 만드는 좋은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녀의 성격은 창현에게 부담감을 주지 않은 채 다가왔고, 나이가 많은 점을 앞세워 무리 없이 친해지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좋고요.”

“창현이 넌 어때?”

“저요? 뭐가요?”

“흐응, 아무 말도 안 하네?”

“뭐, 뭐가 말인데요.”

묘한 미소를 짓는 연희를 보며 창현은 가슴이 뜨끔했다. 그녀의 연기 연습을 도와주면서 창현 또한 적잖은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자신이 배우던 것과 다른 형태를 보게 됨으로써 보는 시야가 더 넓어진 것이다.

연희를 돕는 명목으로 나왔지만 그가 배운 것도 만만치 않았다.

문제는 연희가 이 점을 눈치 챘다는 것.

알면서 모른 척 은근히 압박하는 점은 보통이 아니란 걸 깨닫게 한다.

‘뭐 동네가 이래.’

어째 수만을 상대하는 것보다 눈앞의 연희가 상대하기 더 까다롭게 느껴질까.

괜한 생각이라 치부하며 고개를 저어본다. 그리고는 연희를 향해 화제를 전환한다.

“어쨌거나 연기하는데 도와줬으니 부탁 하나 들어줘야 하는 건 잊지 말아요.”

“…윽!”

“설마 안 들어줄 생각이었어요?”

“창현이 너한테도 도움이 됐으니까… 밥 한 끼 사는 걸로 퉁치면 안 될까?”

건수를 만들기 위한 강력한 배팅이었지만, 막상 생각하니 너무 다급하게 나선 듯했다.

어떻게든 무마시키려는 연희의 모습에 창현은 피식 웃고는 어깨를 으쓱한다.

“나갔다가는 스캔들 난다고요? 그러니 사양하겠어요.”

“그냥 여기로 피자나 치킨을 주문해서 먹을 수도 있으니까…….”

“제가 그 제안을 받아들일 거라 생각하신 건 아닐 테죠?”

“그럼……?”

살짝 떨리는 연희의 눈을 보니 장난기가 밑에서부터 스멀스멀 올라온다. 입 꼬리를 말아 올린 창현이 장난스럽게 말한다.

“뭐든지라는 말이 붙었으니 좀 더 생각을 해보려고요.”

“여, 역시…….”

“응?”

“무, 물론 남들이 그렇게 하기는 하지만. 창현이 넌 아닐 줄 알았는데…….”

“자, 잠시만요! 지금 무슨 상상을 하고 계신 거예요!”

양손으로 어깨를 감싼 채 몸을 움츠리는 연희의 행동은 무언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걸 느끼게끔 하였다.

여유로이 미소 짓던 창현이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의 행동을 막으려 들었지만 이미 연희는 상상의 세계에 빠져들어 소설을 쓰고 있었다.

“참고 있는 걸 이런 형태로 분출하려고 한 거야? 난 그것도 모르고 현에게 연기 지도를 받고 싶어서…….”

“…지금 그거 진심?”

“그런 거 아니었어?”

“아직 가련한 여주인공 역할은 맡으면 안 되겠어요. 바로 들통났거든요.”

“그래? 칫! 제법 리얼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쉬운 표정이 역력한 연희였다. 좀 더 리얼한 연기를 펼쳤더라면 그대로 창현을 낚아서 좀 더 곤경에 빠뜨릴 수 있었을 텐데.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던 창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휴! 그런 말도 말아요. 정말 깜짝 놀랐네.”

“놀라기는. 별로 놀란 것 같지도 않던데.”

“많이 놀랐어요.”

“그래? 그런데 무슨 부탁을 할 생각인데? 소년의 삐뚤어진 요구를 받아줄 의향도 있는데 말이야. 그 소년이 현이라면 말이지.”

자리에서 일어나 빙글 돌며 포즈를 취하는 연희였다.

여자의 자신감이 부족했지만 그 외 부분에 있어서는 절대적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하하, 사양할게요. 전 그렇게 삐뚤어지지 않아서.”

“그래? 칫!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아쉬워해야 할 포지션이 바뀐 듯했지만 연희는 즐거운 듯 미소지었다.

이런 장난도 스스럼없이 주고받을 정도로 친해졌다는 것에 만족했다.

‘좀 더 친해지면 애들만큼 친분을 쌓는 건 금방 따라잡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정말 가능할지도?

생각 외로 창현과 쉽게 친해진 연희는 자신감이 넘쳤다.

“그럼 연기 연습은 여기까지 하기로 할까요?”

“응, 벌써?”

“누나가 어려워하던 부분도 잘 극복했잖아요. 여기에서 제가 드릴 도움은 더 이상 없는 듯한데, 또 필요한 부분이 있나요?”

“아, 아니. 그건 없지만…….”

회심의 미소를 짓던 것도 잠시, 아무런 요구 없이 떠나겠다는 창현의 말에 당황하는 연희였다.

한창 욕구가 넘치는 소년이라면 뭐든지 들어주겠다는 말은 엄청난 힘을 발휘할 텐데?

예정과 달랐지만 연희는 창현을 붙잡아두기 위해 질렀다.

“그, 그럼 부탁은 어떻게 하고?”

“사실 누나 말처럼 연기 지도는 저에게도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서로 이익이 되었으니 그 부탁은 없던 걸로 할게요. 하지만 뭐든지 들어주겠다니. 다른 사람한테는 조심하라고요. 저 말고 욕구 넘치는 다른 남자라면 무슨 부탁을 할지 모르니까요.”

“으, 으응.”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주며 진지하게 충고해주는 모습에 차마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얼굴을 붉힌다.

‘칫! 이러면 계획대로 진행하지 못하는데.’

속으로 투덜거렸지만 더 이상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왠지 모르게 저 미소를 본 것만으로도 다른 걸 보상받은 기분이었으니까.

“다음에 돌아오면 한 번 연락할게요.”

“응. 잘 가.”

손을 흔들어 보인 창현은 곧바로 연습실을 나섰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연희는 한숨을 푹 내쉬면서 자리에 주저앉았다.

“하아! 왠지 모르게 의욕이 안 나네.”

친분을 튼 시점부터 자신이 실력을 발휘하여 창현과 더 친해질 생각이었는데 실패했다. 이렇게 되면 윤아가 실망할 것은 분명할 터.

“어차피 기대에 부응할 생각도 없었지만 좀 늘어지네. 후우!”

연희의 목표는 윤아를 이용하여 창현에 관련된 정보를 알아내고, 그와 친분을 쌓은 뒤, 연인처럼 보일 정도로 친해지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소녀시대 멤버들이 발악하며 달려들 테고, 자신은 그녀들을 골탕 먹일 건수가 더 늘어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 생각도 말끔히 사라졌다.

“왜 애들이 좋아하는지 알 것 같네. 좀 더 깊어지면 반해버릴지도?”

제3자의 입장에서 냉정하게 상황을 지켜볼 수 있기에 더 이상 접근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 되면 정말 전쟁을 벌여야 하니까.

연애 이외에도 아직 즐길 게 많은 만큼 연애로 심력을 소모하고 싶지는 않았다.

한동안 멍하니 서 있던 연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간단하게 씻은 뒤 옷을 갈아입고 회사 밖으로 나왔다.

띵!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주차장에 도착한 연희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내렸다가 멈칫한다.

그녀의 눈앞에 흉흉한 기색을 풍기는 조폭 사슴 한 마리가 서 있었다.

“윤아 네가 갑자기 여길 무슨 일로?”

“언니, 잠시 이야기 좀 해요.”

“으응? 그, 그래.”

살벌한 그녀의 기세에 말을 더듬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두 사람은 1층으로 올라와 회사 건너편에 위치한 커피숍으로 걸음을 옮겼다.


커피숍 안으로 들어온 두 사람은 곧바로 주문을 하였다. 연기 연습 뒤, 식사를 할 거라 예상했던 연희는 빈속으로 와서 무척 배가 고팠기에 케이크 한 조각과 카페라떼를 주문하였다.

자신이 살 것을 고른 연희가 윤아를 바라보며 묻는다.

“내가 살게. 윤아 넌?”

“전 에스프레소요.”

“응? 에스프레소? 윤아 단 걸 좋아했잖아.”

그래서 평소에 카라멜 마끼야또나 카페 모카 같은 종류를 주문하고는 했다. 에스프레소는 그것과 전혀 상극에 위치한 커피였다.

“그냥요. 지금은 무척 쓴 걸 먹고 싶어서요.”

“그, 그래. 그럼 에스프레소로…….”

흉흉한 윤아의 기세에 연희는 말을 더듬으며 그녀의 주문을 바꿨다.

잠시 후, 메뉴가 나오자, 평소와 달리 연희가 직접 일어나 커피를 가지고 왔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신 연희가 윤아를 힐끔 살피더니 머릿속으로 생각한다.

‘왜 저러는 거지? 뭔가 불안한데.’

불안했지만 표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것이 그녀의 장점이다.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그녀는 케이크 한 조각을 먹으며 입을 열었다.

“콘서트는 잘 다녀왔어?”

“네, 잘 다녀왔어요. 아주 잘.”

그러면서 부담스럽게 연희를 바라보는 윤아. 제아무리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고 하나 그 시선이 부담스러웠던 연희는 살짝 고개를 돌리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윤아 넌 안 마시니?”

“마셔야죠. 아주 맛있게.”

그러면서 작은 잔 안에 든 에스프레소 잔을 조용히 드는 윤아. 그리고는 그것을 곧바로 들이키기 시작했다.

케이크를 한 조각 먹던 연희가 화들짝 놀라며 소리쳤다.

“지, 지금 뭐하는 거야.”

쓰디 쓴 에스프레소를 단숨에 들이키다니!

경악한 그녀와 달리 에스프레소를 들이키는 윤아의 표정은 살짝 찡그려졌지만 입을 떼지 않고 곧바로 원샷하고 있었다.

“크…….”

“에스프레소를 왜 그렇게 먹어!”

“난 괜찮아요. 지금 이 쓴 맛이 누구와 동감하는 바니까.”

“누구와 동감한다고?”

방금 전부터 윤아의 반응이 이해가지 않았던 연희가 고개를 갸웃한다. 자신에게 맹목적인 믿음을 보여주던 그녀의 갑작스러운 변화는 적응하기 힘든 것이었다.

“부차왕이라고 아세요?”

“부차왕?”

“네, 오나라의 부차왕이요. 예전 중국의 춘추전국 중 춘추 시대에 춘추오패라고 있어요. 제나라의 환공, 진나라의 문공, 초나라의 장왕, 진나라의 목공과 송나라의 양공을 춘추오패라고 해요. 달리 오나라의 합려왕과 월나라의 구차왕을 꼽기도 해요.”

“갑자기 그 이야기는 왜 나오는 거야?”

춘추오패라는 것은 역사에 관심 있는 사람이 아니면 잘 모르는 이야기다. 그것을 꺼내드는 윤아를 보며 연희는 고개를 갸웃거려야만 했다.

하지만 윤아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춘추오패 중 오나라의 합려왕 아들이 바로 부차왕이거든요. 이 부차왕과 관련된 고사성어가 있거든요. 이게 무엇인지 아세요?”

“뭔데?”

“바로 와신상담이란 거예요.”

“와신상담이라면…….”

“섶에 몸을 눕히고 쓸개를 맛본다는 뜻이죠. 원수를 갚기 위해 오나라 부차왕이 했던 일이기도 하고요.”

“뜻은 나도 대충 알아. 그 이야기는 왜 꺼내는 거야?”

연희의 물음에 윤아가 입 꼬리를 말아 올린다. 착각일지 모르지만 그녀가 마셨던 에스프레소의 쓴 향이 올라와 후각을 어지럽히는 듯했다.

“춘추오패 중 하나였던 합려왕은 패자의 위치에 섰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에서 죽었어요. 누구한테 죽었는지 아세요?”

“몰라.”

“바로 속국을 자처하던 월나라에게 죽었어요. 왜 월나라에게 죽은 줄 아세요?”

“…아니.”

“뒤통수를 맞아 죽었어요. 월나라는 철저히 속국을 자처했지만 칼날을 갈고 닦아 기회를 엿보던 거죠. 그리고 힘을 기르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뒤통수를 친 거고요.”

“…….”

연희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지금 윤아가 하는 이야기는 마치 자신의 상황과 부합되는 듯하지 않은가. 그녀가 쓴 에스프레소를 마신 것은 와신상담의 쓸개 맛을 본 것과 비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전과를 인정할 수 없는 노릇. 연희는 오리발을 내밀었다.

“…그 이야기를 왜 지금 하는 건지 난 잘 모르겠는 걸?”

“정말 모르셔서 하는 말이에요?”

“응, 난 잘 모르겠…….”

“모르겠다면 제가 알려드리죠. 언니, 창현이랑 만났더라고요?”

“…응, 만났는데?”

윤아의 말에 연희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여기에서 자신이 당황하면 더욱 그녀의 기를 살려주는 셈이다. 차라리 진실을 인정하고, 너를 위해서였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는 게 백 번 옳았다.

“인정하는군요.”

“그게 뭐가 잘못되었다고? 난 윤아 널 위해서 만났던 거야. 현 씨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 너에게 도움이 될 테니까.”

“…정말 그런 거예요?”

살벌하던 윤아의 기세가 한결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기회라 생각한 연희가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인다.

“물론이지, 내가 윤아 널 배신할 리가 없잖아. 설마 널 배신했다 생각한 거야?”

“그럼 창현이가 왜 언니를 만나러 올라간 거죠?”

“그건 내가 현 씨를 파악하기 위해서 약속을 잡은 거지.”

“그런데 왜 연기지도를 해달라 했을까요?”

“그건…….”

“그리고 왜 연인처럼 다정한 장면을 연출한 걸까요?”

“…….”

대답할 틈도 없이 질문이 쏟아지고, 점점 강도가 강렬해진다.

그 질문에 연희는 할 말을 잃은 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렸다. 얼렁뚱땅 얼버무리려 했지만 윤아는 모든 진실을 파악한 채 자신을 찾았던 것이다.

“사실을 말해줘요, 언니. 더 이상 거짓말은 저를 더욱 실망시킬 뿐이에요.”

“…하아! 어쩔 수 없네. 맞아, 사실 윤아 넌 이용당한 거야.”

“정말이었군요. 제가 이용당했다는 게…….”

“응, 사실 윤아 널 밀어주려고 했던 건 사실이야. 하지만 나의 궁극적인 목표는 윤아 네가 현 씨와 이어지는 게 아닌, 다른 애들을 좀 더 분발하게 만드는 게 목표였어.”

배신감에 몸을 부들부들 떠는 윤아. 자신을 도와줄 듯하던 연희는 결국 아군을 가장한 적군이었다.

“어째서요? 다른 멤버를 도우려 한 건가요?”

“그건 아니고, 애들이 분발하면 그걸 지켜보는 재미가 있을 것 같아서.”

“…그게 전부인가요?”

“응, 그게 전부야. 하지만 이제 관두기로 했어.”

“당연히 관둬야죠. 제가 진실을 알아차렸는데.”

연희는 고개를 젓는다. 윤아가 진실을 알아차렸다는 것은 뜻밖이었지만 이번 일을 포기하는데는 다른 이유가 존재했다.

“내가 포기하는 이유는 그게 아니야.”

“그럼 뭔데요?”

“내가 현 씨랑… 음, 아니지. 창현이랑 지내면서 알게 되더라고.”

친근하게 이름을 부르는 연희의 모습에 윤아의 표정이 험악해진다. 그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연희는 자신의 말을 이어나갔다.

“뭐라고 해야 할까, 자상한 남자의 표본이라고 해야 할까? 너무 자상해. 내 남자친구도 아닌데 마치 내 남자친구인 착각이 들 정도로.”

“…….”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이야기를 듣는다. 연희의 감상은 사실이었고, 윤아 또한 그 점에 철저하게 둘러놓은 장벽이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다.

윤아가 침묵하자, 연희도 탄력을 받아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서 위험함을 느꼈어. 내 목적은 네게도 말했다시피 애들을 분발하게 만드는 건데 이대로 가다가는 내가 빠져버릴 것 같았거든. 위험을 느꼈기에 빠질 결심을 하게 된 거야. 사실 네가 직접 찾아오지 않았으면 내가 찾아가려 했어.”

“그럼 더 이상 장난을 치지 않겠다는 거네요?”

“그런 셈이지? 윤아 네게 미안하지만.”

“그렇군요.”

윤아의 표정은 복잡 미묘했다. 천군만마와도 같던 연희의 배신이 충격이었지만, 솔직하게 자신의 목적을 털어놓고, 포기를 선언하는 그녀의 말을 듣고 있으니 속이 편해지는 기분이었다.

복잡 미묘 그 자체였다.

“창현이를 좋아하지도 않고요?”

“음, 그건 내 마음의 문제지만 아무래도 그래야겠지? 아무리 멋진 남자여도 바람둥이는 싫으니까.”

“창현이는 바람둥이가 아니에요!”

발끈한 윤아가 소리쳤다. 그러자 순식간에 집중되는 시선. 다행히 주변과 차단되어 있었기에 연희와 윤아의 빠른 대처로 얼굴을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그래, 바람둥이는 아니지. 하지만 바람둥이보다 질이 더 나쁠지도?”

“무슨 말이에요, 그게.”

“자신도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 여자를 유혹하는 남자가 얼마나 질이 나쁜데. 나중에 몇십 명은 가슴앓이 하게 만들 텐데.”

“…….”

“윤아 너도 그 중 한 명이고.”

“윽!”

할 말이 없는 윤아였다. 그리고 그녀의 반응은 살벌했던 조폭 사슴이 아닌, 본래 꽃사슴으로 돌아오는 순간이기도 했다.

연희 또한 한결 마음이 나아지는 걸 느끼며 입을 열었다.

“저번에 통화로 말했었지? 모두 해외로 떠나있었기에 공평했지만 지금부터는 아니라고.”

“그랬죠.”

“그럼 이제부터야.”

“뭐가요?”

“사랑을 쟁취해야지. 이제부터 널 힘껏 도와주도록 할게.”

“언니의 뭘 믿고요.”

“그렇게 말하면 좀 찔리지만 굳이 말하자면 사과의 의미랄까? 속는 셈 치고 한 번 믿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텐데.”

“…….”

마왕의 제안. 하지만 전과 다른 형태라는 것에 윤아는 고민에 잠겼다. 전에도 그러했지만 연희의 도움은 자신에게 큰 도움이 될 것임이 분명했다.

아무 말도 안하던 윤아가 고개를 들어 연희의 눈을 응시한다. 거짓이 섞이지 않은 그녀의 눈에 확신을 얻은 윤아가 고개를 끄덕인다.

“한 가지 물어볼게요.”

“뭐든지.”

“저번에 제게 말했던 거요.”

“어떤 걸?”

워낙 거짓말을 많이 해서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조차 못하는 연희였다. 그 모습에 윤아는 부아가 치미는 걸 느꼈지만 그녀가 아군이라는 것에 화를 꾹 누른 채 말한다.

“제가 창현이의 여자 친구가 될 확률이요. 그때 언니는 분명 반반이라 그랬어요.”

“음, 그랬지. 하지만 그건 거짓말이야. 실제로 보니 아닌 것 같더라고.”

“언니가 보기에는 어땠는데요?”

“반반은커녕 한 10~20%정도?”

“…그렇군요.”

실망한 표정으로 나직이 중얼거리는 윤아였다. 확률은 있었지만 50%라는 높은 수치에 비해서 너무나 형편없었다.

“하지만 10~20%도 낮은 건 아니야. 이제부터 그걸 끌어올려야지.”

“방법이 있어요?”

“방법을 만들어나가면 되지. 그리고 직접 창현이를 만나보니 방법을 알 것 같아.”

“…정말이죠?”

연희의 말에 윤아는 희망이 생겨났다.

50%가 아니란 것에 실망했지만 10~20%도 결코 낮지 않다. 그 가능성을 차근차근 확장할 수 있다면 승리는 자신의 것이 될 것이다.

“물론이지. 이제 거짓말은 안 한다고? 대신 전과 달리 보답을 해줬으면 좋겠는데.”

“어떤 보답이요?”

“음, 임윤아 평생 부려먹기 어때?”

“언니!”

“대신 확실하게 도와줄 테니까.”

“…생각해볼게요.”

연희의 말에 깊은 고민에 빠져든다.

“후후.”

그 모습을 바라보며 연희는 미소를 지었다. 여태까지 장난으로 임했지만 창현을 직접 대하는 순간 욕심이 생겨났다.

저 남자가 사랑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 대상이 내가 되지 않는 건 아쉽지만.’

자신이 직접 사랑에 빠지게 되면 냉정하게 상황을 바라볼 수 없다. 그래서 자신이 이용하던 윤아에게 사죄 겸하여 그녀를 돕기로 마음을 먹었다.

‘덕분에 쓸 만한 하녀를 얻게 될 테고.’

일석이조였다.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던 연희.

생각에 잠겨있던 그녀는 자신을 날카롭게 살피는 윤아의 눈빛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한편, SM엔터테인먼트를 나선 창현은 숙소가 아닌 집으로 향했다.

2주라는 시간 동안 스케줄도 별로 없는 만큼 창현이 가장 치중한 것은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다. 햇볕이 쨍쨍한 낮이었지만 일을 나간 석규와 연습 나간 지영이 없었다. 하지만 집안에는 지선과 귀여운 동생 아현이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지선이 따뜻한 미소를 지어주며 창현을 반긴다.

“어서 오렴. 점심은 먹었고?”

“아니요, 아직 먹지 않았어요.”

“그래? 안 그래도 혼자 먹기 그래서 아현이랑 같이 나가려고 했는데, 괜찮으면 창현이 너도 같이 나갈까?”

“음? 그럴까요?”

시켜 먹는 것도 어려웠고, 지금부터 요리를 하는 것도 번거로웠다.

의견이 합쳐지자, 창현은 곧바로 로드 매니저에게 전화를 하려 했다. 사람 많은 곳으로 나가려면 차는 반드시 필요했기에 사적인 일이지만 로드 매니저의 힘이 필요했다.

그의 의도를 알아차린 지선이 창현을 만류했다.

“안 해도 괜찮지 않을까? 운전은 내가 할 수 있고.”

“하지만 아버지가 뭐라 하실 텐데요?”

“그래도…….”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 이유는 없죠. 일단 아버지한테 말하고 정하는 게 좋겠네요.”

“그러렴.”

지선의 허락이 떨어지자, 창현이 곧바로 석규에게 연락을 한다.

“여보세요? 아버지 전데요. 네, 지금 어머니랑 같이 점심 먹으려고요. 괜찮은 곳 추천해주시겠어요? 어머니, 프랑스 레스토랑 괜찮으세요?”

“괜찮단다.”

“그럼 그곳으로 할게요. 어머니도 괜찮다고 하시는데요. 네, 아뇨, 어머니가 운전하실 수 있으니 조용히 갔다 올게요. 예의를 지켜주겠죠. 네, 그럼 그리로 갈게요.”

통화를 끝낸 창현을 보며 지선이 물었다.

“그이가 뭐라고 하니?”

“프랑스 레스토랑에 예약을 해주신데요. 그곳으로 가서 아버지 이름을 대고 먹으면 될 것 같아요.”

“어쩐지 거창하게 되었네.”

“거창하긴요, 오랜만에 가족끼리 하는 만찬인데. 어머니는 준비하세요, 아현이는 제가 챙길게요.”

“그러렴.”

지선은 마저 준비를 하고 있었고, 창현은 아현이 잠들어 있는 방에 들어갔다. 새근새근 잠들어있는 아기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자신도 모르게 볼을 잡으려던 손을 가까스로 제지한다.

고개를 살짝 저은 창현은 조심스럽게 잠들어 있는 아현을 안아들었다.

“으잇차! 오빠가 바빠서 그러니 2주 동안 꽉꽉 압축해서 애정을 전해줄게.”

팔불출 + 여동생 바보의 모습을 그대로 노출하고 있는 창현이었다. 잠에서 깨지 않게끔 살살 흔들어주면서 잠든 얼굴을 바라본다. 깨물고 싶은 충동이 모락모락 피어날 정도로 극강의 귀여움을 자랑했다.

“준비 다 했니?”

“네, 다 했어요.”

“그럼 가자.”

필요한 물품을 챙긴 뒤, 차고로 향했다.

지선이 운전하려던 차를 보고는 창현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어머니, 이 차 타셨어요?”

“응? 뭐가 이상하니?”

“아니요, 안 이상해요.”

고개를 저으며 차에 탑승하는 창현이었다. 지선이 운전하려는 차량은 경차 중 하나인 모닝이었다. 제법 큰 차를 운전할 줄 알았던 창현으로서는 의외일 수밖에 없었다. 더하여 지선의 운전 실력에 불쑥 의문이 생겨났다.

“어머니, 운전면허 언제 따셨어요?”

“면허? 음! 이십 년은 넘은 것 같아.”

“그럼 자기 차를 갖은 건 언제고요?”

“이제 반 년 됐지?”

“…….”

순간 창현은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다는 걸 느꼈다.

그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선은 운전대를 잡고, 본격적으로 운전을 하기 시작했다. 석규가 알려준 주소를 따라 무난하게 나아갈 수 있었고, 창현의 염려와 달리, 무사히 도착했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부터 발생했다.

“아, 음. 그러니까…….”

난감한 표정을 짓는 지선. 그녀가 바라보고 있는 거울 뒤로 자리한 공간은 상당히 협소한 것이었다.

대부분의 여성 운전자들이 안고 있는 문제점. 그것은 바로 주차하기였다. 지선 또한 주차에 자신이 없는 운전자 중 한 사람이었다.

공간이 넓으면 무난하게 주차할 수 있지만 너무 좁게 느껴졌다.

실제로는 중형차가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이었지만 지선에게는 그것마저도 어려웠나 보다.

“휴우! 잠시만 기다리세요.”

결국 머릿속에 맴돌던 “현! 주차 사고 연류!”라는 타이틀을 이겨내지 못한 창현은 차에서 내려, 식당 종업원의 도움을 받고 나서야 무사히 주차를 할 수 있었다.

주차를 무사히 마친 두 사람은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섰다. 미리 석규가 예약을 해둬서인지 어렵지 않게 들어섰다. 중간에 창현을 발견한 종업원들이 평정심을 찾지 못한 채 소란을 일으켰지만, 싸인을 해주자, 극 친절 모드가 되어 두 사람을 안내했다.

칸막이가 쳐져 있는 공간에 도착하자, 창현은 지선에게서 아현을 받아들며 입을 열었다.

“조용한데요?”

“밖에서 먹게 되면 시끄러울 줄 알았는데.”

“아버지는 그 부분도 다 생각을 해두고 계시니까요. 워낙 철저한 분이라서.”

“철저하다고? 내가 보기에는 무척 엉성하던데.”

“가족에게는 그렇죠. 사업을 하실 때는 무척 철저해요. 오늘 이 자리도 비슷한 맥락이죠.”

잠시 후, 메뉴판이 나오고, 능숙하게 주문을 하기 시작했다. 중간에 온 여성 종업원 또한 창현을 보고 깜짝 놀라는 모습을 보였으나, 싸인으로 손쉽게 입막음을 할 수 있었다.

주문을 하고, 차례차례 음식이 나오면서 본격적인 식사가 되었다. 이미 집을 떠나기 전 식사를 마친 아현은 창현의 앞에서 새근새근 잠들어 천사 같은 모습을 연출했다.

“미국 생활은 힘들지 않니?”

“처음에는 많이 힘들었지만 적응이 되니 그리 힘든 것 같지 않더라고요.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 하잖아요.”

“그래도, 집이 가장 좋을 텐데.”

“집이 가장 좋은 건 맞죠.”

“그럼 한국에서 활동할 때라도 집에서 지내는 게 어떠니?”

혼자 숙소 생활을 하는 게 걱정인 지선이었다. 밥을 제대로 챙겨먹는지 걱정되는 건 물론이고, 청소도 제대로 하는지, 영양 상태는 어떤지 늘 걱정이 되었다.

창현은 걱정하지 말라 하지만 부모 마음은 다 같은 법이다.

“괜찮아요. 하하.”

“정말 괜찮은 거니?”

“제가 밖에 나와서 사는 게 가장 좋은 것 같아요. 안 그러면 가족들에게 폐가 될 것 같아서요.”

사생팬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그들은 집요함을 자랑하기에 자칫 가족들에게 폐가 될 수 있다 생각했다. 자신이 가수 생활을 하면서 여러 부분을 포기한다 생각하는데, 이 부분이 그 중 하나였다.

욕심을 부리면 무언가 하나는 잃을 수밖에 없으니까.

“그렇게 말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

“섭섭하지만 이해해주세요.”

“그렇게 말하니 그럴 수밖에 없네. 그래도…….”

“으아아앙!”

아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던 지선이 입을 열려던 찰나, 잠들어 있던 아현이 울음을 터뜨렸다.

깜짝 놀란 창현이 재빨리 그녀를 안아들고 젖병을 물려주었다.

울던 아현은 젖병을 입에 물자, 울음을 그치고 분유를 마시는데 집중했다.

그 모습을 지선이 흥미로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실력이 대단한데?”

“그래요?”

“창현이 보모를 해도 되겠어?”

“제가 보모를요? 하하! 제 몸값이 제법 비싼데요.”

“그러니? 하기야, 창현이가 보모를 하면 다른 사람이 다 시키려 들겠지? 너무 잘생겨서.”

“하하, 그것보다는 비싸서 안 쓰려고 할 거예요.”

어깨를 으쓱하며 부인하는 창현이었지만 지선은 그 말을 듣지 않고 있는 듯했다.

“왜, 예전에 그 프로그램 있잖니. 육아일인가? 그 프로그램.”

“아, 그 프로그램 알죠.”

“창현이 너도 그런 프로그램 하나 해보면 어떻겠니? 아기 키우는 실력이 뛰어나서 잘할 것 같은데.”

“주인공은 아현이로 하고요?”

피식 미소 지은 창현이 말하자, 지선의 눈이 동그랗게 변한다.

“그럼 아현이는 태어나자마자 스타가 되는 거네?”

“그런 거네요. 하하!”

“재미있겠다. 그이한테 한 번 말해봐야겠네.”

“…어머니.”

“응? 왜 그러니?”

“설마 제게 육아를 떠넘기기 위해 그 말을 하시는 건 아니죠?”

“…….”

갑자기 침묵하는 지선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창현은 농담처럼 건넨 자신의 말이 사실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후, 이어진 두 사람의 식사는 무척 어색했다고 한다.


“…….”

지금 연희는 할 말을 잃은 상태다.

지독한 배신감이 전신에 퍼져나가는 걸 느끼며 연희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 앞에는 윤아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은 채 짝다리를 짚고 서 있었다.

“유, 윤아 네가 어떻게……”

“언니, 저는요, 절대 이러고 싶지 않았어요. 하지만요, 절 이렇게 만든 건 제가 아니라 언니에요. 언니가 절 이렇게 변할 수밖에 없게 만드셨잖아요.”

“크윽.”

확연하게 변한 윤아의 말에 연희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충격적이었다. 언제나 자신의 봉으로서 역할을 충실하던 윤아가 이런 짓을 벌이다니. 의표를 찔린 연희는 자신의 22년 인생 중 가장 큰 위기를 맞이했다는 걸 깨달았다.

“내게 원하는 게 뭐야?”

“전 언니에게 많은 걸 바라지 않아요.”

“말해 봐.”

“제가 원하는 건 그저 어제 이야기 했던 걸 충실히 이행해주시면 되요. 제가 원하는 것은 그것 뿐, 언니에게 많은 걸 바라지 않아요.”

자신의 한 마디에 휘둘리던 윤아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순진한 사슴은 사라지고, 어느새 사회생활에 찌든 사슴 탈을 쓴 여우 한 마리가 그녀 앞에 서서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고 있었다.

침묵하던 연희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정말 충실히 돕기만 해주면 되는 거야?”

“물론이죠. 전 누구처럼 배신은 안 해요.”

“좋아, 따르겠어. 네 목적을 이룰 수 있게 최선을 다하지.”

“잘 생각하셨어요, 언니.”

함박 미소를 지은 윤아가 연희에게 다가와 포옹을 해준다. 극도의 친밀감 표시였지만 이미 한 차례 허를 찔린 연희는 그녀의 포옹에 흥을 더해줄 수 없었다.

“그럼 부탁드릴게요, 언니.”

“그래. 약속은 지켜줘.”

“물론이죠. 언니가 충실히 도와주시면 전 절대 배신하지 않아요. 이건 거짓말이 아니니 믿어주셔도 좋아요. 그럼 전 스케줄이 있어서 그만 가볼게요. 이건 선물이에요.”

들고 있던 물건을 건네준 뒤, 손을 흔들며 몸을 돌린 윤아가 문을 향해 걸어간다. 그러다 무언가 생각이 난 게 있는지 고개를 돌린다.

“아! 언니가 물건을 없애시더라도 이미 제가 5중으로 백업을 해놨거든요. 디카랑, USB, 외장하드와 핸드폰, 컴퓨터에 저장되어 있으니 다른 생각은 품지 마세요. 그럼 전 가볼게요.”

“…….”

친절하게 경고한 윤아는 밖으로 나갔다. 혼자 남은 연희는 주먹을 움켜쥔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윤아가 그녀에게 건넨 것은 서른 장의 사진. 하나하나가 모두 굴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엽기적인 사진들이었다.

문제는 엽기적인 사진의 주인공이 바로 연희였다. 예쁜 얼굴을 어떻게 하면 엽기적으로 망가뜨릴 수 있을지 고심하던 자료는 소각되지 않은 채 윤아에게 넘어가 있었다.

자신의 과거 중 유일한 실수라 할 수 있는 것.

디지털 카메라가 없어서 윤아가 가지고 온 것으로 엽기 사진을 찍었던 것이 부메랑이 되어 오늘 날 자신의 발목을 잡게 되었다.

“임윤아! 크윽…….”

봉에게 당했다는 치욕에 연희는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평생 하녀로 부려먹을 윤아가 자신에게 한 방 먹였다는 사실은 무척이나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혹독한 생태계에서 살아남은 사슴은 돌연변이로 진화하여 마왕을 부하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지선과 식사를 마치고 집에 도착한 창현은 양해를 구하고 밖으로 나왔다. 오늘 저녁 식사 약속이 잡혀 있었고, 낮에 만나기로 하였기에 일찍 나가야했다.

“결국 여기로 다시 오는구만. 제멋대로야, 참.”

툴툴거리는 창현의 눈앞에는 익숙한 커피숍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곳은 창현이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이자, 녹음실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얼굴을 들키지 않게 모자를 꾹 눌러쓴 창현이 커피숍 안으로 들어가고, 주변을 휘휘 둘러본다. 그러자, 자신과 비슷한 차림을 한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는 곧바로 걸음을 옮긴다.

“누나.”

“엉, 창현이 왔어? 여기 앉아.”

창현을 보며 미소 짓는 사람은 다름 아닌 미란이었다.

그의 등장에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맞은편에 앉았다.

자리에 앉은 창현은 고개를 갸웃하며 처음부터 앉아있던 사람을 바라본다.

“다른 한 분은 누구… 응? 효연 누나에요?”

“으응, 안녕, 창현아.”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던 여인의 정체는 다름 아닌 효연이었다.

입가에 어색한 미소를 지은 채 손을 드는 그녀를 보며 창현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미란은 그것을 보고는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효연이도 시간이 빈다고 해서 불렀어. 나랑 단 둘이서 먹으면 스캔들 난다고?”

“스캔들은 무슨. 누나랑 나이 차이가 몇인데. 남들이 보면 원조교제라 해요.”

“뭣이라? 너 지금 말 다했어?”

“아니요, 아직 30분 정도 할 분량이 남아 있는데… 잘못했어요.”

마귀할멈으로 변해가는 미란을 보며 재빨리 투항하는 창현이었다.

그는 자신의 목숨을 소중히 여기는 남자였다.

“쳇! 한 마디만 더 했으면 이곳을 피바다로 만들어주려 했는데.”

“어째 하는 말마다 고운 게 하나도 없어. 누가 들으면 진짜인 줄 알아요.”

“상황에 따라서 진짜가 될 수도 있지. 후훗! 어쨌든 사람은 많을수록 좋잖아. 그것도 어색한 사이도 아니고. 설마 창현이 너 효연이랑 어색한 건 아니겠지?”

“언니, 아니에요.”

“그럴 리가요!”

동시에 외치는 두 사람이었다. 그 대답에 미란은 흐흥! 콧소리를 내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두 사람이 동시에 말하니 신빙성이 있긴 하네. 뭐, 믿어주도록 하겠어. 창현이 너 뭐 마실래?”

“전 딸기 스무디요.”

“아직도 그거냐. 말투랑 행동은 완전 늙은이인데 입맛은 완전 아기야.”

“…개인의 취향은 존중해줄 수 있지 않나요?”

“말만 곱게 하면 지켜줬어요.”

“누나, 계속 그러면 회식 때 부렸던 추태를… 읍!”

“어쨌든! 내가 초대했으니 주문하고 올게.”

창현 귀국 첫날, 술을 과도하게 마셔 꽐라(?)가 되었던 모습을 그대로 노출한 전과가 있어서 그런지 미란은 창현의 입을 봉인하고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멀어지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피식 웃은 창현이 효연에게 고개를 돌리며 인사했다.

“그동안 잘 지냈어요.”

“잘 지냈지. 창현이 넌?”

“저도 잘 지냈죠. 그러고 보니 직접 인사는 한 번도 못했네요. 앨범 대박 났잖아요. 축하드려요.”

“응? 아직 애들 만난 적 없어?”

창현의 축하 인사에 이질적인 말이 섞여 있음을 느낀 효연이 고개를 갸웃하며 묻는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그렇구나. 고마워. 이번에 앨범이 괜찮게 되어서 다들 한시름 놓고 있어.”

말을 하는 효연의 가슴은 뛰고 있었다.

이 감정을 뭐라고 해야 할까. 아직 다른 멤버들이 누구도 듣지 못한 첫 축하 인사를 자신이 들어서 뛰는 이 감정을. 함부로 정의내리기 힘든 마음이었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무척 좋다는 거다.

“그동안 노력한 걸 보상받는 건데요. 전 진즉에 잘 될 줄 알았다니까요?”

“그랬어? 그런데 왜 우리는 몰랐지.”

“그거야 누나들이 전부 농담으로 치부했으니 그렇죠.”

“그렇구나. 어쨌거나 지금 잘 됐으니 된 거지, 뭐. 마음에 담아두지 마.”

“…참 쿨하네요.”

자신과 관련된 일을 대수롭지 않게 치부하자, 한동안 할 말을 잃은 창현이었다. 그러다 무언가 생각이 난 듯, 효연에게 말한다.

“아, 그러고 보니 저번에요.”

“응? 저번에 뭐?”

“기억 못하시는 거예요? 이거 살짝 섭섭한데.”

“으응? 내, 내가 무슨 실수를 했나?”

창현의 섭섭한 표정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은 듯한 충격을 받은 효연이었다. 도대체 그가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것인지 그녀는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뭘 잘못한 걸까?’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잘못한 건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일부러 그럴 사람도 아닌 만큼 무언가 잘못이 있는 것임이 분명했다.

“실수는 아니에요.”

“그래? 후우!”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는 효연. 그녀를 보며 창현이 자신의 물음을 건넨다.

“다른 게 아니라, 저번에 팩토리 걸 촬영이요.”

“팩토리 걸? 으응, 그건 왜?”

“제가 그때 누나를 미국 올 수 있게 했는데 왜 안 오셨던 거예요?”

“그, 그건…….”

말끝을 흐리는 효연. 그녀의 표정에 짙은 아쉬움이 묻어나왔다. 미국에 갈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음에도 자신의 혼란스러운 마음과 주현의 권유에 결국 미국행을 포기하고 말았다. 지금 생각하면 후회가 앞서는 결정이었다.

“그 부분을 언급한 이유가…….”

“모처럼 초대했는데 안 와서 섭섭해서 그렇죠.”

“아아…….”

묘한 감탄사를 터뜨리는 효연. 자신을 그토록 위해주는 창현의 말에 감동을 받고 말았다. 별 거 아닌 단순히 섭섭해서 그렇다는 건데 이런 감동을 받게 될 줄이야.

‘내가 이렇게 변하다니.’

극과 극을 오가는 자신의 마음에 황당함을 느낀다.

“왜 안왔던 거예요?”

“그… 건…….”

뭐라고 변명해야 할까.

자칫 잘못하면 창현에게 실망감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은 효연으로 하여금 말이 어지러워지게 만들었다.

그때 거짓말처럼 구원군이 나타났다.

“자, 여기 주문하신 딸기 스무디가 도착했습니다.”

“아, 왔어요?”

“뭐야? 갑자기 사람을 공기 취급하는 건.”

“아니에요. 그럼 잘 마실게요.”

입가에 미소를 지은 창현이 빨대를 꼽고 행복한 표정으로 딸기 스무디를 흡입하기 시작했다.

‘후우!’

안도의 한숨을 내쉰 효연은 자신에게 시간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눈앞의 딸기 스무디는 빛의 속도로 사라져가고 있었다.

‘생각해라! 이 머리야!’

미영과 유리처럼 굴러가지 않는 자신의 머리에 한탄을 터뜨리며 효연은 변명거리를 궁리했다.

머리를 쥐어짜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창현이 물어볼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는 걸 잊어버린 채.


효연이 맹렬하게 변명거리를 궁리하고 있을 때, 석규는 오랜만에 찾은 친구를 맞이하고 있었다.

입가에 미소 지은 그는 자신을 찾은 손님을 맞이하였다.

“무슨 염치로 찾아오셨는가?”

“부탁할 게 있어서 찾아왔지.”

“그래? 여기 앉지. 여기 생강차 두 잔 부탁하지.”

자리에 앉은 그는 석규의 주문에 고개를 저었다.

“여전한 생강차 사랑이군. 설마 창현 군도 너처럼 생강차 사랑은 아니겠지?”

“이거 어쩌나, 나보다 더한 생강차 매니아인데.”

“하하, 안 좋은 걸 닮아버렸군.”

“안 좋긴. 건강에도 좋고, 맛도 좋으니 마시는 거지. 그나저나 무슨 일로 찾아온 건가? 내가 어려울 땐 코빼기도 보이지 않아놓고서는.”

농담처럼 건넨 말에 뜨끔한 표정을 지은 그가 어색한 표정으로 말한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미안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그때 나도 힘이 들었다고.”

“알지, 이것저것 바쁠 때란 걸 알고 있으니까. 아마 해외 연수 가 있었지?”

“잘 알면서도 그런 말을 하다니. 여전히 짓궂어.”

“그래, 대학 교수님께서 찾아주셨으니 경청하도록 하지. 무슨 일 때문에 온 거냐?”

석규를 찾아온 사람은 그의 중학교, 고등학교 때부터 친하게 지낸 친구 안종욱 교수였다. 석규와 비슷한 성격을 지닌 그는 그보다 더욱 능글맞은 성격을 지닌 인물이었다.

“네 말대로다. 부탁을 할 게 있어서 왔다.”

“무슨 부탁?”

“제법 어려운 부탁이어서… 다른 사람이라면 돌려서 말했을 테지만 석규 너한테는 직설적인 이야기가 좋겠지. 이번에 우리 대학교에서 OT를 한다. 거기에 현이 와주었으면 싶은데…….”

“현을?”

“그래, 이번에 우리 대학교에서 좀 특별한 형식의 OT를 마련해보려고 하는데 그 계획의 시발점이 현이다. 마침 너와 내가 친구 사이기도 하니 부탁을 하려 온 거고.”

뜻밖의 부탁이 아닐 수 없다. 그의 말을 들어본 석규는 지금 시즌이 한창 OT 시즌이란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흐음, 창현이가 OT에 간다라, 여태까지 현이 콘서트를 해본 적은 있어도 행사에 관련된 건 한 번도 안 해본 거 알고 있나?”

“해보지 않은 것 같긴 했다.”

“게다가 월드 스타인데. 몸값을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

“몸값이라면 치를 준비가 되었으니 한 번쯤 생각해봤으면 싶은데?”

“흐음.”

고민에 빠지는 석규. 다른 사람의 제안이라면 일고의 가치도 없이 거절을 했을 테지만 친구의 제안이고, 다른 형식으로 도모해보겠다는 것이 고민을 하게 만들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석규가 입을 연다.

“어떤 형식으로 해보려는 거지?”

“현이 확고하게 월드 스타의 자리를 다지면서 대학생들에게 절대적인 인지도를 얻게 되었지. 하여, 노래만 부르고 끝나는 자리가 아닌, 현과 이야기 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듦으로써 무언가를 얻어갈 수 있는 OT를 만들려고 한다.”

“무언가 얻을 수 있는 OT라.”

“월드 스타와 함께 대화했다는 것도 추억일 테고, 현의 성공담과 어려운 시절 등을 들으면 좀 더 분발할 수 있을 테지.”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었다. 분명 말만 들으면 좋은 취지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석규는 종욱이 자신을 찾아온 이유가 궁금했다.

“재미있군, 근데 왜 하필 현이지?”

“너야 말로 황당한데? 요즘 가장 큰 인기를 누리고 있는 게 누구냐? 다름 아닌 현이지. 마침 내가 너와 친분이 있잖냐? 그래서 찾아온 거고.”

“호오, 인맥을 이용하시겠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사회생활이 어차피 인맥 아니냐. 섭섭하지 않게 지불할 테니 친구를 위해서 힘 좀 써줘라.”

“일단 긍정적으로 고려해보지. 여태까지 했던 것과 색다른 경험이 될 것 같으니까.”

석규의 말에 종욱의 표정이 밝아졌다. 큰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이 정도 대답만으로도 대성공이었다.

“그 정도만으로도 고맙다고. 만약 참가하면 현을 우리 대학으로 데려가주지.”

“가라 해도 안 갈 테니 걱정하지 말고. 지금 미국에서 오라는 대학이 몇인데.”

“그런가? 그럼 그냥 보험 들어둔 셈 치라고. 하하!”

웃음을 터뜨리는 종욱이었다. 석규 또한 그의 제안을 곱씹으며 고개를 나직이 끄덕였다.

‘해봐도 괜찮겠어.’

흥청망청 놀고 끝나는 OT가 아닌, 무언가를 얻기 위한 OT라는 점이 석규의 마음을 기울게 하였다.

그리고 긍정적인 그의 마음은 한 사람으로 하여금 엄청난 특혜를 입게 하였다.


소녀시대 숙소는 아침부터 분주하였다.

일찍 일어난 윤아는 짐을 챙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언니, 간단하게 이거 드시면서 가세요.”

“고마워, 주현아!”

주현이 내민 두유를 챙겨든 윤아가 준비물을 꼼꼼히 살피고는 가방을 맨다.

잠에서 막 깬 유리가 부스스한 모습으로 방밖을 나오다 윤아를 보고는 묻는다.

“윤아 너 가려고?”

“네, 저도 신입생인데 참가는 해야죠.”

“그랬지. 그래도 중간에 스케줄 있으니 너무 빠지지 말고. 낮술은 안 돼.”

“언닌 절 뭐로 보고 그러는 거예요. 그럼 저 다녀올게요.”

“다녀와.”

“다녀오세요, 언니.”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문을 여는 윤아.

그녀는 동국대 신입생이었다.

무언가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은 예감이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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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마음을 울리는 음악 시즌2 제1화 +10 15.04.17 7,375 95 10쪽
37 ▲▲▲▲▲시즌2 시작!▲▲▲▲▲ +5 15.04.17 5,423 65 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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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마음을 울리는 음악 37장-39장 +2 15.04.16 9,613 224 397쪽
12 마음을 울리는 음악 34장-36장 +8 15.04.16 9,522 189 322쪽
11 마음을 울리는 음악 31장-33장 +8 15.04.16 10,354 261 345쪽
10 마음을 울리는 음악 28장-30장 +5 15.04.16 10,658 260 277쪽
9 마음을 울리는 음악 25장-27장 +7 15.04.16 11,038 267 233쪽
8 마음을 울리는 음악 22장-24장 +4 15.04.16 10,922 261 198쪽
7 마음을 울리는 음악 19장-21장 +4 15.04.16 11,490 270 216쪽
6 마음을 울리는 음악 16장-18장 +5 15.04.16 11,541 242 163쪽
5 마음을 울리는 음악 13장-15장 +5 15.04.16 14,534 297 237쪽
4 마음을 울리는 음악 10장-12장 +8 15.04.16 13,736 352 171쪽
3 마음을 울리는 음악 7장-9장 +10 15.04.16 14,550 362 142쪽
2 마음을 울리는 음악 4장-6장 +11 15.04.16 16,834 421 120쪽
1 마음을 울리는 음악 프롤로그-3장 +47 15.04.16 29,895 545 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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