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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번 님의 서재입니다.

마음을 울리는 음악

웹소설 > 작가연재 > 팬픽·패러디, 현대판타지

김현우
작품등록일 :
2015.04.16 13:27
최근연재일 :
2015.06.01 17:02
연재수 :
5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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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96,4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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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4.16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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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7쪽

마음을 울리는 음악 13장-15장

DUMMY

제13장 위기 때 나타나는 정의의 기사




“빠, 빨리 대답해라. 너희 둘 지, 지금 뭐하는 것이여.”

당황한 탓일까? 상황을 묻는 태연은 억양마저 바뀌어 있었다.

지금 둘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느냐?

아주 오해받기 좋게 서로를 껴안고 있는 모습이었다.

주현의 비명소리에 달려온 태연은 그 모습을 보고 아연실색을 하였다.

태연은 재빨리 두뇌회전을 가동시켜 상황판단을 하였다.

둘은 분명 껴안고 있다. 그런데 넘어져 있다.

왜 넘어져 있을까?

분명 주현은 비명을 질렀다.

즉, 이걸 조합해보면 하나의 상황이 만들어진다.

주현의 뒤에 있던 창현이 갑자기 주현을 껴안았다.

놀란 주현은 반항을 하였고, 춤 연습으로 단련된 그녀의 힘을 이겨내지 못한 창현은 그대로 쓰러졌다. 그런데 껴안고 있던 주현마저도 같이 넘어졌다.

제법 그럴싸 한 추측이었다.

그리고 태연은 그 추측이 사실일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판단하자 그녀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감히 우리 순진한 막내를 추행하려 하다니!

우선 저 포옹부터 풀어야 한다.

태연이 소리쳤다.

“어서 포옹부터 풀엇!”

심상치않은 기세를 담은 그녀의 목소리에 창현과 주현이 화들짝 놀라며 떨어진다. 그리고 서로 고개를 돌리며 어색한 표정을 짓는다.

그 모습에 태연은 한순간 의아함을 느꼈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는 자신의 판단을 믿었다.

왜냐하면 자신은 소신 있는 여자였으니까.

지금 저 반응도 주현은 부끄러워서, 창현은 추행의 장면을 들켜서 어떻게 해야 할지 궁리를 하고 있는 것으로 여겼다.

그녀는 팔짱을 끼고 턱을 살짝 치켜들었다. 그리고 창현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자! 변명해보시지. 방금 전 우리 주현이를 껴안고 있던 것에 대해서! 거짓말 할 생각은 하지 말고!”

“태, 태연 언니!”

태연이 오해하고 있음을 느낀 주현이 그녀에게 소리쳤다. 언니가 생각하는 게 아니라고 말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태연은 지금 주현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손을 내밀어 주현을 제지했다.

“주현아! 이런 것은 강경하게 나가야 해. 네가 너무 순진하니까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거야.”

“어, 언니 그게 아니라…….”

“아! 일단 조용히 있어봐. 이건 당사자의 말을 들어봐야 해.”

그러면서 창현에게 시선을 주는 태연.

창현은 어이가 없는 표정이었다.

태연의 말을 듣는 순간 그녀가 완전히 소설을 썼다는 걸 느낀 것이다.

잠시 침묵하던 창현이 입을 열었다.

“솔직히 실망입니다. 아무리 절 안 좋게 보았어도 그렇지. 제가 추행이나 일삼을 파렴치한으로 보인 겁니까?”

“…….”

정색하며 말하는 창현의 모습에 태연은 일순간 할 말을 잃었다. 생각해보니 자신이 너무 막말을 했다는 걸 느낀 것이다.

창현이 정색하자 분위기가 삽시간에 사나워졌다.

태연은 그런 창현을 보면서 차마 입을 열 수 없었다. 창현의 태도를 보니 자신이 실수를 했다는 걸 느낀 것이다.

그런 태연의 소매를 잡는 손이 있었다. 바로 주현이었다.

주현은 태연을 보며 말했다.

“언니 잠시 할 말이 있어요.”

“어? 으, 응.”

주현이 자세한 정황을 설명해주려는 것 같았기에 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태연이 위로 올라갔고, 주현이 그 뒤를 따랐다.

주현이 창현을 보며 말했다.

“미안! 태연 언니가 오해한 것 같아. 나를 워낙 아껴주는 언니라서… 자세하게 이야기 할 테니까 화 좀 풀어줘.”

창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대신 오해 확실히 풀어주세요.”

정색하고 나서야 자신이 조금 심했다는 것을 깨달은 창현.

태연이 저렇게 반응한 것도 다 주현을 아껴서 그러한 것인데 순간 욱하는 마음이 생겨서 과민반응을 보인 듯했다.

차분하게 대화로 풀었으면 되었을 일을.

창현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나도 잘한 게 없네.”


밖으로 나온 주현은 태연을 보면서 표정을 살짝 굳히며 입을 열었다.

“이번 일은 언니가 실수 하셨어요.”

“…….”

태연은 입을 열지 못했다.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알아서이다.

그런 태연을 보면서 주현이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창현이가 절 안고 있던 건 제가 계단에 발을 헛디뎌서 넘어질 뻔해서 그런 거에요. 앞으로 쓰러지던 저를 창현이가 몸을 날려서 감싸준 거고요.”

“……!”

주현의 설명에 그제야 상황 파악이 된 태연.

그녀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린다.

그것도 모르고 지레짐작하여 감사의 인사를 표해도 모자랄 사람을 파렴치한으로 몬 것이 아닌가.

미안한 마음으로 인하여 그녀는 어쩔 줄을 몰라했다.

“어,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긴요. 솔직하게 사과를 해야지요. 창현이도 속이 좁지 않으니까 언니가 사과하시면 받아들일 거예요.”

주현이 차분하게 답을 내놓는다.

이럴 경우 면목이 없지만 솔직하게 사과를 하는 것이 제일이다. 면목이 없다고 도망치면 더욱 어색해질 뿐이었다.

“…그래. 사과를 해야겠지. 내가 실수를 했으니까.”

“제가 도와드릴게요.”

“고마워, 주현아. 그럼 사과하러 가자.”

태연이 다시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주현이 그 뒤를 따랐다.


“미안해. 내가 착각해서 너무 심한 말을 했어.”

계단에서 내려온 태연이 창현에게 고개를 숙이며 사과를 하였다.

얼마나 미안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다리가 미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창현의 입에서 절로 입가에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순간 발끈해서 정색했지만 창현은 그리 화가 나지 않았다.

적어도 남의 입장을 존중할 줄 알기에 그녀가 자신에게 했던 말이 모두 주현을 위해서 그랬다는 걸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한순간 기분이 나쁘기는 했지만 주현을 저렇게 신경 써주는 모습이 무척 부러웠다.

마치 친자매와 같았던 것이다. 그걸 자각하게 되자 창현은 조금이나마 욱하던 화가 스르륵하며 사라졌다.

문득 창현은 자신에게 사과를 하는 태연의 모습이 무척 귀엽다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손을 올려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아!”

갑작스러운 창현의 행동에 태연은 물론 창현마저도 움찔했다.

황급히 머리에 올려진 손을 치우는 창현.

그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 미안해요. 저도 모르게… 그리고 전 괜찮아요. 솔직히 욱하긴 했지만 그게 모두 주현 누나를 걱정해서 그런 것이란 걸 아니까요.”

태연이 살며시 고개를 들며 묻는다.

“…그럼 용서해주는 거야?”

창현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아, 이왕 이렇게 된 거 누나도 같이 노래방에서 놀아요. 저랑 주현 누나는 이번 수학여행에서 듀엣 곡을 하기 위해 연습차 왔거든요. 누나도 이왕 여기까지 오셨으니 별다른 일이 없으면 같이 하죠. 앙금도 털어버림 겸 해서요.”

“그래도 될까……?”

태연이 말끝을 흐리며 주현을 힐끗 바라본다.

알게 모르게 주현의 얼굴이 흐려졌지만 그걸 내색할 수는 없었다.

주현은 어색하게나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괜찮겠네요. 같이 해요, 언니.”

“으응. …미안, 주현아.”

태연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작은 소리로 주현에게 사과한다.

그에 주현이 아니라는 듯 고개를 살짝 저었다.

비록 오늘의 만남을 중요하게 여겼지만 한 멤버이고 몇 년동안 알고 지낸 태연도 소중한 언니다. 그런 언니가 창현과 어색해지는 것은 그녀가 바라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세 사람은 노래방 안으로 들어섰고, 듀엣 곡을 연습하면서 갖가지 노래를 즐겁게 부를 수 있었다.


9월 중순으로 접어들면서 현의 앨범이 80만장을 돌파하는 기염을 토한다.

판매되는 앨범 숫자가 점점 하락세를 보이고 있지만 여전히 꾸준한 구입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이 추세라면 이번 년도가 끝나기 전 꿈의 100만장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전망이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었다.

100만장 앨범 시장!

한해가 지날 때마다 눈에 띄게 축소되는 앨범 시장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주는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연일 앨범 증판 소식과 함께 가수 현의 가치는 하루가 다르게 치솟고 있었다.

본래 신비주의 컨셉을 하는 가수의 인기는 오래가지 못한다.

처음에는 베일에 가려진 신비함으로 인하여 어느 정도 인기를 유지할 수 있겠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신비함에 대중들은 지치고, 나아가 무관심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은 그러한 흐름에서 빗겨나간 존재였다.

<Go&Stop>이 발매되고 일 년이 흘렀음에도 그는 여전히 신비주의를 표방하고 있다. 그럼에도 사람들의 반응은 더욱 타오르고 있었다.

그 까닭은 라샤라는 걸출한 걸 그룹의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고, 아사미 유키라는 일본 열도를 휩쓰는 대형 신인의 존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라샤의 존재로, 아사미 유키의 존재로 인하여 현의 관심은 비단 한국을 넘어서 일본에까지 퍼져나갔으며, 몇몇 골수팬들은 전문적인 작업을 통해 가수 현의 몽타주를 작성하기까지 하였다.

게다가 현은 막연한 신비주의를 펼치는 것이 아닌, ‘놀러와’에서 시한부 신비주의 컨셉을 표방함으로써 대중들의 기대감을 끌어모았다. 현의 공식 팬 사이트인 다크 스타는 어느덧 사십만에 육박하고 있었다.

다크 스타 자유게시판에는 연일 현의 정체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는 글들이 올라오고는 하는데, 그것이 일종의 토론 문화가 되어 현의 정체에 대해 신빙성 있는 여러 증거를 통해 그의 모습을 유추해나갔다.

가장 신빙성이 있는 것은 역시, 음악에 미쳐 살아온 십대 소년이 자신의 가능성을 시험해보기 위해 중소 규모인 AA엔터테인먼트에 곡을 주었고, 그 곡이 대한민국을 휩쓸었다는, 다소 소설적인 이야기가 가미된 가설이었다.

현의 나이는 내년이면 학교 생활의 마지막인 열여덟 살로 추정되었고, 키는 약 175cm정도. 얼굴은 <Bad Boy>에서 약간 드러난 것으로 보아 웬만한 꽃미남들은 비교를 거부하는 잘생긴 외모를 가진 것임이 분명했다.

<Bad Boy>가 선풍적인 인기를 끔에 따라 다크 스타에도 소위 ‘빠순이’라 불리는 족속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그녀들은 제3자가 보기에 무서울 정도로 현을 찬양하며 그가 정식 데뷔 하길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이렇듯 현의 인기가 날로 높아짐에 따라 AA엔터테인먼트도 고민을 해야만 했다.

가수 현과 라샤의 대성공으로 인하여 기획사 규모를 본격적으로 팽창해야 할지 아니면 두 가수를 투톱으로 확실한 인기 안착에 나서야 할지 분기점에 이른 것이다.

사실 말이 엔터테인먼트지, AA엔터테인먼트에서 활동하는 연예인은 오로지 라샤뿐이다. 음반을 내는 현을 합치더라도 활동하는 연예인이 불과 둘인 기획사인 것이다.

다행이라면 라샤의 대성공으로 연일 가수를 희망하는 사람들이 찾아온다는 것? 하지만 그런 사람들 중 제대로 된 사람들은 거의 없었기에 AA엔터테인먼트에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회사가 커나가기 위해서는 라샤의 뒤를 이어줄 가수들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결단이 필요했지만 석규는 조급해하지 않았다.

가수 현이라는 한국, 일본에서 최절정의 인기를 달리는 가수가 자신의 아들인 이상 AA엔터테인먼트가 무너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미래에 대비하여 돈을 쓸데없이 안 쓰고 모아두는 것이다.

돈이란 것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이니까.


태연과 주현이 창현을 만난지 일주일이 지났다.

오늘도 주현은 창현과 약속이 있다. 매주 토요일에 만나서 연습을 하기로 했던 것이다.

그런데 주현이 간과하고 있던 것이 있었다.

바로 오늘이 그녀 집에 제사가 있는 날이었던 것이다.

주현은 아침에 온 전화를 받고는 안절부절하지 못했다.

“…아! 어떻게 하지.”

“왜 그래, 주현아.”

“아, 언니.”

주현에게 다가간 것은 태연이었다.

저번주에 창현과 만남 이후 태연은 매주 주현과 창현이 만나서 연습을 하기로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런데 주현이 안절부절하는 모습을 보고는 무슨 일이 있나 싶어 물은 것이다.

“무슨 일 있는 거야?”

주현의 모습에서 무언가 있음을 느낀 태연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에 주현이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오늘 저희 집 제사를 하거든요. 그래서 못 나갈 것 같아요.”

태연의 얼굴에 안타까운 표정이 생겼다.

“저런. 어떻게 한담.”

“창현이라면 벌써 준비 다 했을 텐데. 미안해서 어떡하죠?”

“어쩌긴. 양해를 구해야지. 말하기 힘들면 내가 대신 전해줄게.”

아무래도 직접 전하기가 힘들었나보다.

태연의 말에 주현의 안색이 밝아진다.

“정말요?”

“그래. 너 못나간다고 전해줄 테니 안심하고.”

“네. 고마워요 언니. 혹시 언니가 시간 되시면 창현이랑 만나주시던가요. 창현이 이미 준비다했을 텐데 언니라도 나가서 도와주시면 좋을 것 같은데…….”

솔직히 창현과 태연이 단둘이 만나는 것이 불안한 주현이었지만 예의상 그렇게 말했다.

그런데 태연은 그 예의상 한 말을 덥석 물었다.

“흠! 그것도 괜찮겠네?”

“에?”

무의식적으로 나온 말에 주현이 반응하자 태연이 움찔하고는 주현에게 말했다.

“아, 아니야. 집에 가야 한다니 준비하고 있어. 내가 전화해줄게.”

“네.”

씻기 위해 주현은 화장실로 들어갔고, 태연이 핸드폰을 들고 방으로 들어가 창현에게 전화를 건다.

♩♪♬

컬러링과 함께 뚝!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창현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여보세요?

창현의 목소리를 들은 태연은 순간 장난기가 발동하여 목소리를 두툼하게 낸다.

“허허! 날세! 오늘 내 그대에게 밥 한끼 살 영광을…….”

-잘못 거셨네요. 지금 거신 번호가 어떻게 되시죠?

태연의 장난을 무참하게 끊어버리는 창현.

자신의 장난이 무산되자 태연이 표정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에잇! 장난이 안 먹히는 녀석 같으니라구! 나야 나!”

-…태연 누나인가요.

애초에 번호가 등록되었으니 모를 리가 없다.

태연은 순간 자신이 당했다고 느끼면서 입을 열었다.

“그래. 나다. 오늘 주현이가 집안의 일 때문에 못나갈 것 같아서 전화했어. 혹시 지금 준비 다한 상태?”

-네. 준비 다하고 나가려던 참인데… 주현 누나가 못 나온다고요?

“그래. 그러니 네가 오늘 나에게 밥을 살 영광을 주겠노라.”

저번주에 어색해질 뻔했다가 같이 노래방을 간 이후로 상당히 개선 관계가 되었기에 태연은 스스럼없이 창현을 대했다.

창현도 그런 태연을 스스럼없게 대했다.

그는 태연의 말에 어이가 없었는지 맥빠진 목소리로 말한다.

-헐! 누나에게 밥을 사라고요? 누나 만나게 되면 또 구박만 잔뜩 받을 텐데. 그냥 오늘 집에서 놀아야겠…….

“아 맞다!”

뒤로 내빼려는 창현에게 소리치려던 태연은 무언가가 생각났는지 소리쳤다.

그 소리가 무척 컸기에 창현이 불퉁한 목소리로 말한다.

-지금 제 귀 멀어버리게 하려고 한 거죠?

태연이 당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 아냐 너, 너 그거 있잖아. 야옹이! 야옹이 데리고 나와. 생각해보니까 오랫동안 못 봤어!”

태연은 예전에 창현이 했던 말을 떠올리고는 말한다.

전에 창현이 고양이를 구입했을 때 태연에게 고양이가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말하라고 한 적이 있다. 태연은 그걸 떠올린 것이다.

창현도 그걸 기억하고 있었는지 한동안 아무 말도 못한다.

그리고 이내 한숨을 내쉬는 창현.

-후! 그걸 기억하고 계실 줄이야. 알았어요. 그럼 열한 시에 분수대광장에서 뵐게요.

“그려, 늦지 말고.”

그 말을 끝으로 통화가 끝난다.

핸드폰 폴더를 덮은 그녀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한다.

그리고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 흠칫한다.

“…헉! 이거 설마 데이트?”


데이트라니!

그걸 자각하는 순간 태연의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콩콩 뛰었다.

열여덟이나 되었지만 그녀의 인생은 지극히 평면적이었다. 언제나 학교를 다니면서 노래 연습 안무 연습이 끝이었던 것이다. 남자와 데이트라니, 그런 걸 해본 적이 없었다.

데이트 첫 상대가 바로 연하라니. 그것도 무지하게 귀여운…….

거기까지 생각한 그녀가 갑자기 고개를 휘휘 젓는다.

“귀엽긴! 얼마나 애늙은이 같은데! 그리고 이건 데이트가 아냣! 야옹이를 보러가는 것뿐이지.”

그래도 솔직히 외모는 국보급이었다. 몇 년이 지나면 어떨지 상상만 해도 즐거울 정도로 말이다.

애써 데이트가 아니라고 한 태연은 아니라고 한 것치고는 아주 정성스럽게 씻고, 옷을 차려입었다.

왠지 창현 앞에서 치마를 입는 건 어색한 것 같아서 청바지를 입고, 분홍색 후드티를 입었다. 그리고 뿔테 안경을 쓴 다. 눈이 나쁘지 않음에도 뿔테 안경을 쓴 것은 뭐랄까, 약간 자기방어적인 면 때문에 그러하다. 왠지 데이트란 생각 때문에 창현을 보면 이상하게 보일 것 같아서.

옷을 다 차려입고 5cm 위쪽 공기를 맛보게 해주는 마법의 신발을 신은 뒤 약속 장소로 향했다.

약속 장소인 분수대광장에 도착하자 그녀가 슬쩍 시간을 확인한다. 그녀에게 공기층이 다르게 해주는 마법의 신발 종류가 제법 많아 고르다 보니 시간이 상당히 지체되었다.

시간을 확인하니 열시오십 분이었다. 늦지 않은 셈이다.

“어딨지?”

창현이라면 분명 먼저 나와서 기다릴 것이기에 태연은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는 순간, 창현을 발견하였다. 창현도 그 순간 태연을 발견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발견한 순간 손가락으로 서로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엇!”

두 사람이 놀란 이유는 간단했다.

바로 창현도 분홍색 후드 티를 입고 있던 것이다. 그리고 태연도 분홍색 후드 티를 입고 있었다.

더욱 문제인 것은 두 후드 티가 같은 종류란 것이다.

마치 타인이 보면 커플 티처럼 보이리라.

태연이 창현의 후드 티를 가리키며 외쳤다.

“너, 너 왜 나를 따라하는 것이냣!”

창현은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왜 누나도 갑자기 그걸…….”

“난 그냥 있어서 입고 나온 건데…….”

“그건 저도 마찬가지라고요.”

“…….”

두 사람 사이에 한동안 침묵이 감돌았다. 절로 한숨이 나오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창현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후! 그렇다고 집에 돌아갈 수도 없잖아요. 그냥 이대로 가요.”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태연이 버럭 소리쳤다. 솔직히 옷이 같다고 집에 돌아가서 바꿔입는 건 너무 유치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창현은 입가에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도대체 누가 누나고 누가 동생인지.

이 생각을 알아차리면 태연이 창현을 죽이려 들 것이 분명했기에 창현은 품안에서 갸르릉거리는 고양이를 태연에게 건넸다.

“자요! 누나가 그토록 보고 싶어하던 야옹이랍니다.”

창현이 품안에서 고양이를 건네자 태연이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고양이를 받아들었다.

“꺄아! 야옹아 오랜만이야. 좀 많이 컸네? 네 못된 주인이 괴롭히지 않고? 응? 괴롭힌다고? 네가 이해해. 원래 그런 애야.”

혼자서 묻고 혼자서 대답하는 태연의 모습에 창현이 어이없는 표정을 짓는다. 그러다가 창현은 태연이 안경을 쓴 것을 보고는 물었다.

“근데 누나 눈 나빴어요?”

“아! 이건…….”

태연은 우물쭈물하면서 대답하지 못했다. 눈이 너무 좋아서 탈인데 단지 이걸 쓴 게 자기방어본능 때문이라고 하면 창현이 무슨 반응을 보일까?

“그냥 물어본 거에요.”

어물거리며 태연이 대답하지 않자 창현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태연을 바라본다.

그 시선을 느낀 태연이 흠칫하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왜, 왜 그러는데?”

창현의 입가에 짖궂은 미소가 걸렸다.

“호오! 갑자기 키가 좀 커졌네요?”

자존심의 전문가가 태연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작은 키에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던 창현도 나름대로 자존심을 착용한 적이 많고, 덕분에 상대방이 자존심을 착용했는가 알아내는 것도 제법 일가를 이루었다.

바로 알아보면서 묻는 창현의 말에 태연이 가슴에 손을 대며 뒤로 물러났다.

“…윽! 알아차리다니. 그래서 뭐!”

창현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

“아니에요. 뭐, 그냥 물어본 거에요. 근데 예전엔 자존심을 착용하면 저랑 비슷했는데 이젠 제가 더 크네요.”

태연이 눈을 부릅떴다.

“지금 키 컸다고 자랑하는 거야?”

“그럴 리가요. 그냥 말하는 거에요. 자랑까지야. 누구 염장 지를 일 있다고요.”

“…….”

태연은 침묵했다. 지금 창현이 작정하고 자신의 염장을 지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흥! 하며 창현을 일별한 그녀는 품속의 고양이와 논다. 창현은 안중에도 없다는 티를 팍팍 내면서.

“야옹아! 우리 저 못된 녀석 놔두고 놀러갈까? 응? 좋다고? 그럼 갈까.”

그러면서 정말 발걸음을 옮기는 그녀의 어깨에 창현의 손이 닿았다.

“어딜! 지금 누나 남의 고양이 유괴하려고 하는 겁니까.”

“아, 아니야.”

창현의 손이 자신의 어깨에 닿는 순간 흠칫하며 뒤로 물러나며 태연이 소리쳤다. 조금 과한 반응이었다.

그런 태연의 모습에 창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태연은 자신이 너무 과민반응을 한 것 같아 사과했다.

“미, 미안.”

“아니에요. 갑작스럽게 여성의 어깨를 잡은 제 잘못이죠.”

창현이 씨익 웃으며 말한다. 그 모습에 태연은 더욱 미안해지는 걸 느꼈다. 창현은 별다른 의도 없이 한 건데 자신이 너무 과하게 반응을 한 것이다.

태연이 미안해하는 모습에 창현은 고개를 난감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결심한 듯 그녀의 손을 잡는다. 남자답지 않게 섬세하고 부드러운 감촉이다.

갑작스러운 창현의 행동에 태연이 벙찐 표정을 짓는다.

“어, 어?”

“길 한복판에서 그런 표정을 짓지 말아요. 자, 그럼 놀아보도록 하죠.”

그 말과 함께 창현이 태연을 살짝 잡아 끈다.

태연은 그런 창현의 힘에 못이기는 척 뒤따르면서 말한다.

“이, 이 손 놓아!”

별로 힘이 담기지 않은 외침이었다.


창현이 태연을 데리고 온 곳은 근처 영화관이었다.

영화 매표소에 도착하자 태연이 물었다.

“영화 보려고?”

“네. 보고 싶은 영화 있어서요. 아, 누나 괴물 보셨어요?”

창현이 영화 괴물 포스터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에 태연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여기 있는 거 다 못 봤어. 연습하느라 바빠서…….”

서울에 있지만 그녀는 전주에 있는 학교에 재학 중이다.

연습생 생활을 위해 서울에 올라와서 정규 수업을 못받기에 그녀는 연습을 하면서 틈틈이 학교 공부까지 해야했다. 주말에 놀기도 하지만 진도를 쫓아가기 위해 공부를 자주 하곤 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영화 같은 건 사치라 여기게 되었고, 최신 영화 같은 건 본 적도 없게 된 것이다.

그녀의 입가에 걸린 씁쓸한 미소를 보자 창현은 자신이 질문을 잘못 했다는 걸 알았다.

“아, 미안해요.”

“아니야. 모처럼 영화 보러 오니 즐거운 걸.”

밝은 표정을 지어보이는 그녀를 보면서 창현은 미안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에휴! 굳이 밝은 표정 짓지 않아도 되요. 제가 겪어보지 않아서 잘은 모르지만 충분히 힘든 것 정도는 아니까. 사과의 의미로 제가 영화표랑 팝콘, 콜라 살게요.”

“나도 돈 있어!”

자존심을 세우려는 듯 소리치는 그녀를 보면서 창현이 피식 웃었다.

“있기야 있겠죠. 하지만 전 나름대로 수입이 있으니 이럴 땐 고마워! 라고 하시면 됩니다. 빚졌다고 생각하시면 나중에 연예인 된 뒤에 한턱 쏘시면 되고요.”

창현의 통장에 수십 억이 넘는 돈이 쌓여있는 걸 모르는 태연으로서는 그저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어떻게 하면 열다섯 살 소년이 돈을 버는 건지.

뭐, 굳이 밝히고 싶어하지 않는 눈치였기에 태연은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내 고맙게 얻어 보고 얻어 먹으마. 나중에 반드시 갚아주지.”

창현이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러시지요. 이자는 차곡차곡 쌓일 테니 나중에 원망마시길.”

“흥! 그런 것쯤은 두렵지 않아.”

태연이 당당하게 대답했다.

창현은 그런 그녀의 모습이 마치 투정부리는 여동생 같아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었지만 목숨은 하나 밖에 없기에 충동을 꾹 누르며 표를 주문했다.

역시 인기가 있는 영화라 그런지 세 시간이나 공백이 생겼다.

창현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일단 오락실 가서 시간 좀 보내다가 점심 먹고 영화 보러 가는 게 어때요?”

태연도 비슷하게 생각했기에 승낙했다.

“오케이! 오락실로 가자. 내가 순규에게 전수받은 실력으로 네 눈의 피눈물을 쏙 빼주마.”

창현이 턱을 치켜세우고 오만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저를? 이래뵈도 옛날에 게임에 있어서 신이라 불린 몸인데.”

“흥! 그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도 금방일 것이다. 가자!”

태연은 자신만만한 얼굴로 창현을 잡아끌었다.


오락실로 향한 태연이 자신만만한 얼굴로 도전한 것은 KOF97(킹오브파이터97)이었다.

설마 여자가 이것을 할 줄 몰랐던 창현은 잠시 벙찐 표정을 지었다. 이걸 여자도 했었나?

그런 창현의 모습에 태연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훗! 내가 말했지? 눈물 콧물 쏙 빼주겠다고. 설마 남자가 되어서 이걸 못하는 건 아니겠지?”

못하긴, 무슨. 이것 때문에 동네 형들하고 싸운 게 얼만데.

창현이 대답하지 않자 태연은 그가 다른 수작을 부리고 있는 것이라 판단하여 강제로 자리에 앉히고는 동전을 넣어 게임을 시작했다. 창현은 고양이가 다른데 못가도록 목걸이를 채워놓았다.

태연이 고른 게임 캐릭터는 쿄와 이오리, 베니마루였는데 조합을 보니 제법 해본 사람이 할 법한 조합이었다.

창현은 태연이 고르는 걸 보다가 유리, 마이, 아테나를 골랐다.

그걸 보면서 태연이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짓고는 물었다.

“야! 너 왜 여자 캐릭터만 고르는 거야?”

창현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예쁘잖아요.”

“그래! 어디 게임이 끝나도 웃나 보자.”

그 모습이 너무 얄미워 태연이 이를 갈며 게임에 집중했다.

잠시 후 게임이 끝났다.

결과는 태연의 참패.

접전을 벌였다면 말도 안 한다. 창현의 첫 캐릭터인 아테나에 의해 세 캐릭터가 처참하게 패배한 것이다.

태연은 자신의 머리를 움켜쥐며 절규했다.

“이럴 수가! 말도 안 돼! 순규가 청출어람 했다고 칭찬할 정도의 내가 이렇게 지다니!”

계속해서 순규, 순규거리는 걸 보니 태연의 친구 중에 게임을 자주하는 사람이 있나보다.

창현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말도 안 되긴요. 엄연한 실력 차이가지고요.”

얄미운 창현의 말에 태연의 이마에 혈관 마크가 도드라졌다.

“이익! 우연이었을 거야!”

그러면서 다시 동전을 넣고 도전하는 태연.

그러나 연이어 두 번이나 패하자 그녀는 전의를 잃고 말았다.

씩씩거리던 그녀는 오락기 전원을 꺼버렸다.

황당한 시선으로 창현이 바라보자 그녀가 창현의 손을 잡아 끌었다.

“다른 걸로 해! 아직 게임은 많아!”

그 모습에 창현은 끌려가면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태연은 의외로 승부욕이 강한 듯했다.

‘져줘야 하나.’

그러나 승부욕이라면 창현도 강했다.


뒤이어 다른 게임에 도전했지만 태연의 연전연패였다.

자신있게 고른 철권도 패배하였고, 1945도 창현은 한 번도 안죽었는데 태연은 게임 오버가 되었다. 그리고 총 게임도 창현은 체력이 풀인데 그녀는 게임 오버가 되었다.

무려 다섯 개의 게임으로 겨뤄봤지만 태연의 전패였다.

그녀는 절망에 빠졌다.

“이럴 수가. 내가 이렇게 지다니.”

“실력인 걸 어째요.”

창현은 별로 위로할 마음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게임에 진 태연은 분풀이로 온갖 짓을 다하여 창현을 방해하였기 때문이다.

휙!

창현의 말에 태연이 고개를 휙 돌린다. 그녀의 눈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마지막이다! 이것까지 진다면 깨끗하게 인정하겠어!”

그러면서 그녀가 창현을 데리고 간 곳은 펌프였다. 조이스틱으로 조종하는 게임과 달리 온몸으로 하는 게임인 것이다.

태연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마지막 보루이긴 하지만 이걸로 꺾을 수 있겠지!’

창현이 아무리 잘해도 기획사 연습생인 자신보다 잘하지 못하리라.

펌프 위로 올라선 태연이 창현에게 손을 까딱인다.

“Come on Baby.”

절망에 빠져있던 방금 전 모습과는 전혀 다른 그녀의 모습에 창현이 웃음을 지었다.

“쿡! 좋아요. 해봅시다.”

“흐흐! 그래. 보기 좋아, 그 모습.”

음흉한 웃음을 지으면서 태연이 두 명분의 돈을 넣고 펌프 곡을 고른다.

자신이 가장 있어 하면서도 가장 어려워하는 곡.

곧 있으면 창현은 쏟아져 내려오는 화살표 물결에 무참하게 침몰하리라.

곡 선정과 함께 펌프가 시작되었다.

태연의 생각처럼 시작되자마자 쏟아져내리는 화살표 물결. 웬만한 고수가 아니고서는 엄두도 내지 못하리라.

예전에 자주하던 경험을 떠올리며 서서히 태연이 화살표를 밟아나가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옆을 슬쩍 바라본다. 쏟아져 내리는 화살표에 의해 창현은 침몰하고 울상을 짓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화려한 자신의 퍼포먼스에 감탄을 금치 못하고 승복하겠지.

“엥? 마, 말도 안 돼!”

옆의 모습을 확인한 태연의 입에서 황당한 감정이 담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가 떨어질 거라고 의심치 않던 창현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려오는 화살표를 차근차근 밟아나가는 것이 아닌가?

처음에는 조금 어설펐다. 그러나 그 어설픔도 점점 사라지고, 눈에 띄게 능숙해지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믿기지 않는 모습이었다.

태연이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다.

바로 창현의 신체능력이었다.

창현이 음향총서를 얻으면서 얻은 것은 총 세 개인데, 그것은 각각 목소리를 바꿀 수 있는 천음변성록과, 음악강론, 현음심법이었다.

천음변성록은 놀이공원에서 보여주었듯이 목소리를 바꿀 수 있는 공부였으며, 음악강론은 말 그대로 마음을 울리는 음악에 대한 원론적인 학문이었다. 그리고 현음심법은 말 그대로 무협지에서 나올 법한 무공으로, 익히면 익힐수록 아름다워지고 음역이 넓어지는 공부였다.

현음심법은 내공이 느리게 쌓이지만 부작용이 없고, 사람의 기본 골격을 토대로 가장 아름다운 외모를 가질 수 있게 해준다. 마초같은 남자보단 꽃미남을 선망하던 창현은 현음심법을 당연히 익혔고, 본래 잘생긴 외모에 내공심법까지 더해져 사람들이 한 번쯤 돌아볼 법한 외모로 성장해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내공이 생기면 세맥에 내공이 퍼짐으로써 신체 능력이 비약적으로 향상된다. 아무리 근육을 길러도 내공을 이기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리고 오감이 발달되어 반응 속도가 빨라진다.

처음엔 당황했지만 창현은 신체 능력을 이용하여 화살표를 하나하나 밟아나갔다. 그리고 점차 반복되는 리듬에 능숙해져 손쉽게 화살표를 제거해나갈 수 있었다.

“이익? 다시해!”

열심히 화살표를 밟아나가던 태연은 창현이 손쉽게 클리어하자 소리치면서 더욱 어려운 곡을 선택한다. 자신조차 딱 한 번 클리어 못한 전설의 곡이었다.


웅성웅성.

오락실에 때 아닌 사람들로 인해 북적거렸다.

원래 영화관에 있는 오락실은 사람이 붐비는 곳이다. 영화 시간을 기다리기 위해서 이곳만큼 시간 죽이기 좋은 곳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모인 것은 그것 때문만이 아니다.

오랜만에 아주 볼 만한 것이 나타나서 하나둘씩 모이다보니 설 자리가 없을 정도로 붐비게 된 것이다.

그들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두 사람이 빠르게 발을 놀리고 있었다.

마치 커플처럼 분홍색 후드 티를 입은 그들은 펌프 위를 격렬하게 뛰며 천둥이 내리치듯 빠르게 쏟아지는 화살표를 없애나가고 있었다.

구경하던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감탄사를 터뜨렸다.

“정말 대단해! 아직 어려보이는데 펌프를 저렇게 잘하다니.”

“전문 댄서인가? 엄청 잘하네.”

커플이라는 걸 과시라도 하듯 같은 티를 맞추고 와서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존재는 바로 창현과 태연이었다.

펌프를 하면서 태연은 점점 창현에게 질리고 있었다.

맙소사! 연습으로 다져진 자신조차 점점 숨이 차오르고 있는데 창현은 숨이 가쁘기는커녕 움직임이 점점 좋아지고 있었다.

‘익!’

약한 모습을 보여줄 수 없기에 태연은 이를 악물고 펌프를 밟았다. 그리고 마침내 클리어를 할 수 있었다.

워낙 격렬한 운동을 했기에 태연은 다리가 후들거리는 걸 느꼈다.

그만하고 싶어서 창현을 보는 순간, 창현이 말했다.

“더 안해요?”

“윽!”

순간 욱해서 더 할거야! 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너무 지쳤다. 태연이 고개를 저었다.

“난 지쳐서 못하겠다. 너나 해.”

창현은 자신과 달리 태연은 내공의 도움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알았어요. 이거 꽤 재밌네요. 전 한판만 더할게요.”

“그려.”

그 말과 함께 태연은 내려갔고, 창현은 마지막 판이니 가장 높은 난이도를 설정했다. 가장 어려운 나이트매어급 난이도였다.

“헐! 저걸 한다고?”

“저거 인간이 할 게 못 되는데. 할 줄이나 아는 거야?”

“그냥 해보는 거 같은데.”

창현의 선택을 본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그에 창현이 고개를 갸웃하면서 그대로 시작하였다.

시작과 동시에 창현은 사람들이 왜 저런 반응을 보였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헉!’

도저히 인간이 할 만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내 호흡을 가다듬고는 빠르게 밟아나가기 시작했다. 이미 일반인의 범주에서 벗어난 창현의 반사신경은 악몽이라는 나이트매어급도 소화가 가능했다.

파바바바바박!

발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펌프를 밟아나갔고, 그걸 지켜보는 사람들의 눈과 입은 점점 크게 찢어져가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 눈에서 벌어지는 것이다.

창현은 정말 격렬하게 움직였다. 뭣도 모르고 선택을 했다가 제대로 풀가동해서 몸을 움직이는 것이다. 이마에 땀이 맺혀 머리카락이 푹 젖어갔고, 땀에 젖은 머리가 거치적거려 손으로 거칠게 머리를 쓸어올렸다.

꺄아악!

그 모습을 보던 여자들이 소리를 지른다. 땀을 거칠게 훔쳐내는 창현의 모습이 외모와 절묘하게 어우러져 마치 한편의 영화와도 같은 장면이 연출된 것이다.

팍!

마지막 화살표를 제거함으로써 펌프가 끝났다.

숨을 차분하게 고르며 펌프 위에 서 있는 창현의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자신도 모르게 나오는 박수였다.

짝짝짝!

“아, 감사합니다.”

박수소리를 듣고 게임의 여운에서 빠져나온 창현이 어색하게 감사의 인사를 하면서 펌프에서 내려온다.

그러자 태연이 창현에게 음료수를 건네면서 징그럽다는 표정을 짓는다.

“너 정말 사람 맞아? 어떻게 그걸 하는 거야.”

마지막 보루인 펌프에서도 패했음을 느낀 탓인지 태연의 음성은 불퉁했다.

그 말에 창현이 피식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전 엄친아니까요.”

“…….”

순간 어이가 없어서 할 말을 잃은 태연.

그런 태연의 반응에 창현은 머쓱해져서 젖은 머리를 긁적인다.

그 모습을 보면서 태연이 얼굴을 살짝 붉힌다. 그러자 분위기가 더욱 어색해진다.

그때, 창현과 태연에게 말을 거는 사람이 있었다.

“여보게, 학생들.”

“네? 저희들이요?”

사십대 중년 사내가 자신들을 부르자 창현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묻는다.

창현의 대답에 사내가 밝은 표정을 지으며 창현에게 말한다.

“펌프하는 모습 인상 깊게 봤네. 커플이 정말 나란히 펌프를 잘하더군.”

커플이란 말에 태연이 깜짝 놀라 반박하려 하였다.

“에? 저희는…….”

“아,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게 아니고. 한 시간 뒤에 커플들을 상대로 하는 이벤트가 있는데 참가자가 부족해서 말일세. 자네들 보아하니 커플인 것 같은데 참석해볼 생각이 없나?”

“그러니까 저희는 커플이…….”

“잠시만요. 상품이 뭔가요?”

창현은 부인하려는 태연의 말을 끊고 중년 사내에게 묻는다.

사내는 씨익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문화상품권 십만 원과 커플 영화 관람권일세. 내년까지 총 48번 영화를 볼 수 있는 관람권이지. 어떤가?”

“호오! 제법 좋은데요?”

상품에 눈을 빛내는 창현. 태연도 상품에 혹했는지 눈을 빛낸다.

창현이 물었다.

“이벤트 어디서 하죠? 참석할게요.”

“참가해준다니 다행이군. 이벤트는 여기 아래 오층 메인 홀에서 한 시간 후에 시작된다네.”

“한 시간이라.”

창현이 슬쩍 시간을 들여다본다. 오락실에서 한 시간 정도 시간을 보냈으니 두 시간은 죽여야 한다. 한 시간 뒤라면 가볍게 점심을 먹고 참석하면 넉넉할 듯 싶었다.

“저희 두 시간 뒤에 영화가 있어서요. 한 시간 안에 이벤트 끝나겠죠?”

“물론이네. 삼십 분 정도면 끝날 게야.”

“그럼 참석할게요. 어때요?”

창현이 태연을 바라보며 묻자 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지! 기왕하는 거 일등을 목표로 하자.”

참가 의지를 보이자 사내가 웃음을 지었다.

“다행이군. 그럼 이따가 메인 홀로 오게나. 나는 다른 커플들을 섭외해야 되기에 이만 가보겠네.”

그 말과 함게 사내가 사라진다. 아무래도 이벤트를 위해 커플들을 섭외하러 다니나보다.

창현은 태연을 보며 말했다.

“그럼 이벤트 참석하기로 하고 저희는 밥먹으러 가요. 햄버거 먹을까요?”

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햄버거 좋지. 가자!”

게임에서 진 것은 모두 잊어버린 듯 활기차게 걷는 태연이었다.


햄버거로 점심을 먹고 커피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어느덧 이벤트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창현과 태연은 이벤트가 시작하기 오 분전에 도착했다.

두 사람이 나타나자 그들을 초빙했던 사내가 반색하며 다가왔다.

“오! 정말 와주었군.”

창현이 웃음을 지으며 밉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상품이 탐나서 왔습니다.”

“후후! 이 정도 상품가지고 뭘 그러나. 자, 곧 이벤트가 시작하니 대기실로 가게나.”

대기실로 가니 창현과 태연을 제외한 네 쌍의 커플이 있었다. 하나같이 훤칠하고 예쁘장한 것이 사내가 선남선녀 커플들만 섭외해온 듯했다.

그 속에 자신도 있다니 왠지 기분이 좋았다.

‘나도 선남이란 말이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안내요원이 와서 번호표를 나누어주었다. 창현과 태연은 5번이었다.

그 사이 이벤트를 시작한 듯, 요란한 소리와 함께 진행 MC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 오늘도 황금 주말을 맞이하여 저희 CGV에서 이벤트를 마련하였습니다. 오늘은 커플 이벤트인데요! 하나같이 선남선녀 커플이랍니다. 자, 1번 커플부터 나와주세요.”

MC의 말과 함께 차례차례 커플들이 무대 위로 나왔다.

매주 이벤트를 해서 그런지 사람들이 제법 많이 모였다.

4번 커플까지 소개한 MC는 마지막으로 창현 커플을 소개했다.

“자! 이번 커플은 최연소 커플이 아닐까 싶습니다. 극강의 귀여움과 깜찍함을 겸비한 커플입니다. 나와주세요.”

창현은 MC의 소개 멘트가 부담스러웠지만 이미 엎지른 물이었다.

슬쩍 옆을 보니 태연도 부담되는 표정이었다.

창현이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장난이잖아요. 장난. 지금은 그런 거 신경쓰지 마시고 상품타는 것에 신경 쓰자고요.”

“그, 그래.”

아무래도 커플로 나선다는 것이 큰 부담으로 작용하는 듯했다.

안내요원에게 고양이를 맡긴 창현과 태연이 무대 위로 등장하였다.

오오오!

꺄아아!

창현과 태연의 모습에 사람들이 감탄사를 터뜨린다. 남자들은 태연을 보고, 여자들은 창현의 모습을 보고 소리를 지른다. 괜시리 창현과 태연의 얼굴이 화끈해진다.

모든 커플이 무대 위로 올라오자 MC가 게임을 진행하였다.

“자! 오늘은 선남선녀 커플분들을 데리고 간단한 커플 게임을 해보고자 합니다. 1등에게는 문화상품권 10만원어치와 언제든지 영화를 관람할 수 있는 커플 관람권을 드립니다! 2등은 5만원의 상품권과 이번 년도에만 사용할 수 있는 커플 관람권을 드리겠습니다. 3등부터는 참가상입니다. 매주 이벤트 하다보니 상품이 좀 부족합니다. 하하하!”

MC의 너스레에 사람들도 웃음을 지었다.

반응이 좋아지자 MC가 웃음을 지으며 게임을 진행하였다.

“게임은 총 세 가지를 하겠습니다. 다 알려드리면 재미가 없으니 우선 첫 번째 게임부터 시작하면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자, 우선 남성분들은 여성분을 일명 공주님 안기를 해주십시오.”

“엑?”

사회자의 말에 창현과 태연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커플 게임이라고 해서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참가했는데 처음부터 안으라고 하다니.

다른 커플들은 벌써 공주님 안기를 하고 있었다.

창현은 안절부절 못하다가 태연에게 말했다. 이 정도쯤이야!

“누, 누나 실례할게요.”

“어? 어, 응. 응?”

태연도 정신이 없었는지 대답을 이상하게 한다.

창현은 그런 태연을 가뿐하게 공주님 안기로 안아든다.

갑작스러운 창현의 행동에 화들짝 놀라는 태연이었지만 자리가 자리인지라 아무 말도 못했다.

다섯 커플이 모두 공주님 안기를 하자 MC가 미소를 지으며 외친다.

“자! 이제부터 남성분들의 체력 테스트를 하겠습니다. 남자라면 역시 체력이 좋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하나를 하면 앉아주시고, 둘 하면 일어서주시는 겁니다. 여러분들도 따라해주세요. 자, 하나!”

하나!

MC의 외침과 함께 사람들도 동시에 외친다.

그러자 다섯 커플들이 일제히 자리에 앉는다.

창현도 태연을 안아든 채 앉았다. 태연은 고개를 푹 숙이면서 말했다.

“차, 창현아 무거우면 그냥 내려놔… 뭐라고 안 할 테니.”

창현은 아까 전만 해도 펌프를 하지 않았던가? 엄청 뛰었으니 체력이 부족할 것이다.

물론 태연이 염려하는 부분은 그것이 아니었다.

‘무겁다고 생각할 텐데. 후!’

걱정하는 부분은 바로 이거였다.

창현은 그런 태연의 물음에 빙긋 웃으면서 말했다.

“아니에요. 누나 생각보다 안 무거운 걸요. 밥좀 많이 먹어야겠어요. 그래야 키도 크고 살도 붙죠.”

“뭐얏!”

키 이야기가 나오자 바로 표독스럽게 변한다.

창현이 피식 웃는다. 그때, 둘! 하는 외침이 들렸고 창현이 번쩍 자리에서 일어난다.

대부분 열 번까지는 무난하게 했다. 하지만 열 번이 넘어가자 탈락자들이 속출하였고, 서른 번이 넘어가자 남은 것은 창현, 태연과 1번 커플이었다.

1번 커플 남자는 운동을 했는지 옷을 입었음에도 근육이 울퉁불퉁 할 정도로 대단했다. 그에 반해 안겨있는 여자는 체구가 무척 작아, 마치 고목나무에 매미가 달라붙어있는 듯했다.

MC는 창현, 태연이 아직도 있다는 것에 놀라면서 장난스럽게 말한다.

“이야! 가장 먼저 떨어질 거라 생각했던 5번 커플! 최후까지 살아남았군요. 5번 커플 남성분 같은 사람이 실은 알짜배기란 거죠! 저 체구에 저런 힘이 숨어있다니! 자, 이제부터 빠르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나!”

사람들이 MC의 말에 웃으면서 하나란 말에 동시에 반응한다.

그렇게 사십 번이 넘고, 오십 번에 다다랐다.

그러자 태연은 안절부절하지 못했다.

창현은 조용한 목소리로 태연을 안심시켜주었다.

“힘들면 포기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아직은 괜찮아요.”

힘든 건 창현이니 태연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으응.”

처음 창현은 적당히 하다가 포기할 생각이었다. 태연이 부담스러워 할 뿐만 아니라 자신도 상당히 지친 상태여서이다.

그런데 창현은 우연찮게 보고 말았다. 1번 커플 남자놈이 자신을 비웃는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을 말이다.

그러자 창현은 쓸데없는 자존심을 발동하고 말았다. 지쳤음에도 그가 이렇게 버티고 있는 것은 세맥에 스며든 내공 말고도 단전에 축적된 내공을 사용하고 있어서다.

태연의 몸무게가 얼마 나가는 것도 아니었고, 이 정도면 하루종일 안고 서 있을 수 있다. 이제 남은 것은 저 1번 남자놈이 나가 떨어지고, 그 모습을 비웃어주는 일만 남았다.

MC는 끈질기게 버티는 창현의 모습에 놀랐는지 점점 페이스를 빠르게 하다가 느리게까지 하였다. 육십 번이 넘고 칠십 번이 넘어가자 사람들의 눈에 놀라움이 서리기 시작했고, 1번 남자는 눈에 띄게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1번 커플이 무너지고 말았다.

창현은 태연을 살짝 내려놓으면서 거만한 눈으로 1번 커플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창현의 눈을 감히 마주하지 못하고 외면하고 말았다.

MC는 1번 커플이 무너지자 호들갑을 떨었다.

“대 이변! 우승후보였던 1번 커플이 탈락하면서 첫게임은 5번 커플이 승리하였습니다. 이거 이벤트의 다크호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군요.”

MC가 진행을 하건 말건 태연은 창현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창현아 괜찮아?”

걱정스러운 그녀의 얼굴을 본 창현이 웃음을 지었다.

“아, 조금 힘들긴 하네요. 아까 한 말 취소에요. 누나 다이어트 좀 하셔야 할 듯하네요. 하하!”

창현의 말에 태연의 눈이 날카롭게 변했다.

“뭐어!”

그러나 그녀는 더 따지지 못했다. MC가 바로 두 번째 게임을 진행한 것이다.

“자! 이번엔 두 연인의 화음을 알아보는 게임입니다. 이른바 커플 듀엣 가요제입니다. 1번 커플부터 차례대로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심사위원은 관객분들이 함성으로 해주실 겁니다. 그럼 시작하도록 하죠.”

그러면서 참가 곡을 받기 시작하였다.

창현과 태연이 상의를 나눈다.

“누나 뭐 생각하고 계신 거 있으세요?”

“글쎄. 듀엣 곡이야 제법 알지만 음!”

고민에 빠진 태연. 창현이 제안한다.

“누나 혹시 팝송인데 아세요? Endless Love라고…….”

창현의 말에 태연의 눈이 광채를 뿜어낸다.

“그거 알지! 나 완전 팬인 걸.”

“가사 알죠?”

“물론이지! 너도 알아?”

“전 걱정마세요.”

“그럼 그걸로 하자.”

창현과 태연이 서로를 보며 미소를 짓는다.


1번 커플부터 듀엣 곡을 시작하였다.

김동률, 이소은의 기적부터 시작하여 소중한 너, 사랑보다 깊은 상처, 대화가 필요해 등 듀엣 곡들을 불렀다.

선남선녀들은 노래들도 잘하는지 관객들의 반응이 무척 뜨거웠다.

마침내 네 커플이 모두 다하고, 창현과 태연의 차례가 왔다.

MC가 다가와 물었다.

“자! 이번 이벤트의 다크호스 5번 커플의 차례입니다. 첫 대결을 승리해서 무척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있는 지금 두 번째 대결도 승리하면 상품에 한발자국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무슨 곡을 하시겠습니까?”

창현이 대답했다.

“Endless Love란 곡을 하고 싶습니다.”

영어가 나오자 흠칫하는 MC. 설마하니 팝송이 나올 줄 몰랐나보다.

이내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연다.

“하하! 죄송합니다. 제가 사실 영어기피증 환자라 영어만 나오면 순간 굳어버립니다. 자, Endless Love 준비 되나요?”

MC가 음악을 틀어주는 사람에게 물었고, 워낙 유명한 곡이어서 그런지 OK사인이 왔다.

“자! 마지막을 장식할 5번 커플의 노래입니다 이름부터 무서운 곡! Endless Love!"

외침과 함께 MC가 슬쩍 물러서고 창현과 태연이 무대의 중심에 선다.

창현은 천음변성록을 시전 하였다. 기존의 목소리와 태연의 목소리가 화음이 안어울리고, 가수 현의 목소리를 그대로 낼 수 없었기에 목소리를 약간 묵직하게 바꾸었다. 그리고 노래가 시작된다.

태연은 노래를 상당히 잘한다. 창현이 본 소녀시대 멤버들 중에서 제일 잘하는 듯했다. 그녀의 노래에는 힘이 있고, 감정이 담겨 있으며, 보는 사람에게 활력을 불어다 넣어준다.

실력과 실력이 조화가 되면 그것은 상승효과를 일으킨다. 창현은 태연과 화음을 맞추면서 그녀와 자신의 실력을 조화시키며 최고의 무대를 만들어낸다.

보는 사람들의 입이 떡 벌어진다.

이거 차이가 심해도 너무 심한 것 아닌가.

마치 가수가 콘서트에 나와 듀엣곡을 부르는 듯하다.

창현의 목소리에, 태연의 목소리에 압도된 관객들은 노래가 끝나도 그 여운에 취해 헤어나오질 못한다.

정신을 놓고 있던 MC가 간신히 정신을 수습하면서 입을 연다.

“아, 아… 저, 정말 최고의 무대였습니다.”

MC의 말에 퍼뜩 정신이 깬 관객들이 함성을 지른다.

와아아아아아!

여태까지 들려온 것들과는 비교도 안되는 호응이다.

창현과 태연은 관객들의 반응에 빙긋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하였다. 최선을 다한 무대였고, 호응도 좋으니 기분은 최고였다.

태연은 창현의 옆구리를 살짝 찌르며 말했다.

“너 노래 엄청 잘한다? 설마 가수?”

창현이 피식 웃는다.

“그럴 리가요.”

“그래? 음! 예전 윤아 생일 때 난 널 장난스럽게 현이라고 했었는데. 이거 왠지 갑자기 의심되네.”

“…….”

태연의 말에 뜨끔한 창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창현이 아무런 리액션이 없자 태연은 입술을 삐쭉인다.

그때, MC가 진행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자! 이미 승패는 결정된 듯하지만 마지막 게임은 뒤집기가 가능합니다! 마지막 게임은 바로 연인들의 진정한 사이를 알아볼 수 있는 빼빼로 게임입니다!”

“……!”

MC의 말에 창현과 태연이 서로를 바라본다. 그리고 어이가 없는 목소리로 입을 연다.

“헐!”//

빼빼로 게임이라면 설마 실수를 할 경우 입술과 입술이 맞부딪치는 그 게임을 말하는 거란 말인가?

당황한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본다.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그 사이 MC가 두 사람을 아예 빠져나가지 못하게 말해버린다.

“관객 여러분들도 기대하시는군요! 저는 특히 5번 커플이 기대됩니다. 환상의 화음을 보여준 5번 커플! 과연 빼빼로 게임에서 어떠한 애정을 보여줄지 기대되네요. 여러분들도 기대되시죠?”

네에!

정말 MC 말대로인 듯 관객들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이렇게 되면 그만두지도 못하지 않는가?

창현과 태연의 얼굴이 푸르죽죽하게 변했다.

그 사이 빼빼로 게임은 시작되고 있었다. 역시 진짜 커플이라 그런지 다른 커플들은 거침없이 빼빼로를 먹었다.

그러다가 입술과 입술이 맞대지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관객들은 자지러질 듯 소리를 지르며 좋아했다.

창현과 태연에게 있어 지금 1초가 마치 바람처럼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어느덧 4번 커플이 빼빼로 게임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입술이 맞닿자 관객들은 다시 한 번 함성을 지르며 좋아한다.

4번 커플이 끝나자 MC가 기다렸다는 듯 외친다.

“드디어 기다리던 순간이 왔습니다. 자, 5번 커플! 앞으로 나와주세요.”

드디어 창현과 태연의 차례가 온 것이다.

둘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왜 하필 입술이 그렇게 도드라져보이는 걸까.

꿀꺽.

두 사람 모두 침을 삼켰다.

“일단 가요, 누나.”

창현이 조심스럽게 태연을 이끈다.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내자 관객석에서 함성이 터져나온다.

오오오오!

키스해라! 키스!

빼빼로는 필요없다! 키스해!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외침에 창현과 태연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한다. 아주 대놓고 말하고 있질 않은가.

관객들의 눈이 묘한 광기로 일렁이는 것을 본 것은 창현과 태연만의 착각일까.

노골적으로 요구하는 관객들을 진정시킨 것은 MC였다.

“자자, 진정하십시오, 여러분! 저도 키스를 보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지만 이렇게 강요를 하면 마치 저희가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지 않습니까? 빼빼로 게임으로도 얼마든지 합법적으로 가능합니다. 우리 모두 두 사람을 믿어봅시다!”

진정 시키기는 개뿔. 아예 노골적으로 빼빼로 게임을 하면서 입술 박치기를 하라고 종용하는 MC였다.

창현과 태연이 눈을 가늘게 뜨고 MC를 노려보았지만 눈치 빠른 그는 빼빼로를 놓고는 후다닥 무대 아래로 내려간다.

“…….”

빨리해라!

빨리빨리 키스해라!

관객들은 창현과 태연이 멍하니 있자 재촉을 한다.

그에 창현과 태연은 어쩔 수 없이 빼빼로가 있는 곳으로 간다. 그리고 빼빼로를 입에 문 채 태연에게 내미는 창현. 그 모습을 보며 여자들이 꺅꺅거린다.

태연이 조심스럽게 빼빼로를 입에 물자 창현이 약간 새는 발음으로 말한다.

“안할 테니까 누나는 걱정하지 마시고 가만히 계세요. 제가 적당하게 하고 끝낼 테니까요.”

“응.”

그 대답과 함께 태연이 눈을 감는다. 이거 왠지 하라는 표시 같잖아.

피식 웃은 창현이 서서히 빼빼로를 먹어간다.

오독오독.

야금야금 조심스럽게 빼빼로를 먹어가는 창현.

점점 다가오면서 창현의 체취가, 그의 숨결이 느껴지자 태연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다.

조금씩 다가오는 게 느껴진다.

이대로 입술이 닿아버리면 어떻게 하지?

아직 첫 키스도 못해봤는데.

그러면서 한편으로 묘하게 기대되는 건 뭘까. 지금 이 상황이 낭만적이라서? 그건 아니다. 그런데 왜 기대가 되는 걸까.

태연의 머리가 복잡하게 엉켜갔다. 왜 이대로 닿아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걸까.

살며시 감았던 눈을 떠본다.

“……!”

그러자 바로 코앞에 창현의 얼굴이 보였다.

눈과 눈이 마주친다.

입으로 흘러나오는 숨결이 교환된다. 뭐랄까, 남자인데도 숨결이 굉장히 달콤하게 느껴진다.

그러한 생각은 찰나에 이어진 것이다.

빼빼로가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이제 조금 더 전진하면 입술과 입술이 맞닿는다.

관객들은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았고, 그들의 눈에는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기대는 충족되지 못했다.

태연이 눈을 뜬 순간 창현은 놀랐고, 태연도 반사적으로 힘을 줘서 빼빼로가 그만 부러지고 만다.

와삭.

“…….”

아아아!

빼빼로가 아주 조금 남은 채 부러지자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는 관객들.

MC도 안타까움을 금치 못한다.

“아! 정말 아쉽네요. 조금만 더 했으면 되었을 텐데. 어찌되었건 간에 상당히 조금 남았는데요. 이거 보나마나 5번 커플이 1위네요.”

첫 게임과 두 번째 게임, 그리고 빼빼로 게임까지 일등을 했으니 당연히 창현과 태연의 우승이었다.

창현은 웃으면서 상품권과 관람권을 받았다. 태연의 얼굴은 여전히 붉어져 있었다.

그런 태연에게 다가간 창현은 태연에게 관람권과 상품권을 건넨다.

“상품권은 반으로 나눴고 영화관람권은 누나가 가지도록 하세요.”

“응. 고마워…….”

그녀답지 않게 수줍게 대답한다.

태연은 지금 민망하기 그지없었다. 창현과 빼빼로 게임을 하면서 자신이 왜 그런 감정을 느낀 것일까. 그녀는 갑작스러운 자신의 감정이 당혹스러웠다.

‘내가 왜…….’

처음에 만났을 땐 그저 오만불손한 녀석에 지나지 않았고, 두 번 세 번 만났을 땐 그저 좋은 녀석이라는 생각이 전부였다.

그런데 왜 이러한 기분을 느끼는 걸까.

창현은 흐릿한 그녀의 표정을 보고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핸드폰이나 그런 것에 찍혔을 거라고 생각된다면 안심하세요. 아까 노래를 부를 때 찍은 사람은 없었고, 빼빼로 게임할 때는 제가 손으로 누나 얼굴 가려줬으니까요.”

“…아!”

창현의 말에 그녀는 절로 탄성을 흘렸다. 잠시 자신이 연습생이란 신분을 간과한 것이다.

연예인으로 데뷔할 그녀는 이런 사진을 한 장 찍히면 후일 어떠한 영향으로 되돌아올지 모른다. 그런데 그걸 새까맣게 까먹고 있던 것이다. 그런데 눈앞의 창현은 그러한 그녀의 사정을 알고 보호해준 것이다.

이렇게 세심한 배려까지 해주다니. 정말 미워할 수 없는 녀석이었다.

“…고마워.”

“하하! 뭘요. 자, 그럼 가볼까요.”

시간을 보니 어느덧 영화 시작 이십 분 전이었다.

창현과 태연은 팝콘과 콜라를 샀다. 창현이 시간을 확인하면서 태연에게 물었다.

“그런데 영화가 끝나면 저녁 먹을 시간이 되겠네요. 저녁도 드실래요? 제가 고집 부려서 이벤트 참가하게 되었으니 저녁 살게요.”

전이라면 뭐라 말했을 테지만 뭐랄까, 이벤트 이후 태연은 조금 조신해졌다. 그녀는 순순히 승낙했다.

“저녁? 나야 좋지. 아, 저녁 먹고 들어가는 거 이야기해야겠네.”

그러면서 핸드폰을 열고 전화를 하는 그녀. 하지만 전화가 연결되지 않는다.

잠시 고개를 갸우뚱 하던 그녀가 손바닥을 짝! 친다.

“아, 맞다. 나 알 다 썼지. 충전일이 내일이네. 창현아, 미안한데 핸드폰 전화 한통 좀 쓸 수 없을까?”

창현은 대수롭지 않게 핸드폰을 건넸다.

“그러세요. 전 자리 잡아놓을 테니 통화하고 오세요.”

“응.”

그리고 통화를 하는 태연.

“여보세요. 어, 수영아. 아, 나 밥 먹고 들어간다고. 응. 늦지 않을 거야. 응, 너희들끼리 잘 챙겨먹고. 알았어, 끊어.”

통화를 끊은 태연은 자연스럽게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은 채 영화관으로 들어간다.


영화를 본 창현과 태연은 근처 부대찌개 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창현은 아까 전과 무언가 달라진 태연의 모습이 어색했지만 지금 모습이 훨씬 여자답고 대하기 편했기에 이내 자연스럽게 대했다.

시계를 보니 어느덧 일곱 시가 되어 있었다.

창현은 태연을 보며 말했다.

“조금 늦었으니 근처까지 제가 바래다 드릴게요.”

태연이 손을 내저었다.

“아니야. 괜찮아.”

창현이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밤길에 여자가 혼자 돌아다니는 건 위험하다.

“요즘 밤이 빨리 찾아와서 여자 혼자 돌아다니면 위험해요. 어차피 요 근방이잖아요. 저희집도 그곳에서 멀지 않으니 부담갖지 않으셔도 되요.”

그렇게까지 말하니 거절할 수 없었다. 창현은 순수한 호의로 말해주는 것이니 말이다.

“으응. 알았어. 고마워.”

‘자세히 보니 매너도 있네.’

이벤트 이후 창현을 보는 시선이 약간 달라졌기에 태연은 창현의 행동 하나하나가 좋게만 보였다. 실제로도 창현은 무척 예의바르고 상대를 배려할 줄 알았다. 태연은 왜 여태껏 자신이 그렇게 심술궂게 대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창현과 태연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걸었다. 이렇게 이야기 할 거리가 없었기에 두 사람 사이에는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태연은 새삼 아까 전처럼 거침없이 창현을 대하던 자신의 모습이 부러웠다. 지금은 왠지 모르게 창현을 대하는 게 어려웠다.

그렇게 침묵하는 사이 태연이 사는 아파트 단지에 도착했다.

창현이 태연을 바래다주는 건 여기까지였다.

“전 이만 가볼게요. 아파트 앞까지 가면 괜히 오해를 살 수 있으니까요. 하하!”

“응. 오늘 즐거웠어.”

“즐거웠다니 다행이네요. 그럼 들어가서 쉬세요.”

“응 너도.”

그렇게 창현과 헤어진 태연은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막 아파트로 들어서려고 할 때,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봐봐. 역시 내 정보가 확실하지? 아직 연습생이라서 보안이 약하다니깐.”

“호오! 윤철이 너 제법인데? 설마 진짜 정보를 물어올 줄이야.”

“그러게 말이야.”

익숙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두 번 다시 듣고 싶은 목소리는 아니었다.

태연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간다. 그리고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시선이 향한다. 그러자 그녀의 눈에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던 인물이 서 있었다.

그녀의 입이 힘겹게 떨어진다.

“…박윤철.”

“오랜만이군, 김태연.”

박윤철이라 불린 청년은 씨익 웃음을 짓는다.

그 웃음을 보며 태연은 뻣뻣하게 굳었다.


한편,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던 창현은 오늘 석규가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온다는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오늘 아버지가 집으로 오신다고 했던가? 몇 시에 들어오는지 물어봐야겠네.”

그러면서 주머니를 뒤져보는 창현. 그런데 핸드폰이 없었다.

“어라 핸드폰이 어디갔지? 아…….”

창현은 영화 관람 전 태연에게 핸드폰을 건네주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 건네주고 미처 받질 않은 것이다.

그때 이후로 단 한 번도 핸드폰이 수중에 없다는 것을 못 알아차리다니.

창현은 자신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자책했다.

“나도 참 건망증이 심하네. 얼른 가서 받아와야겠다.”

헤어진지 얼마 안되었으니 빠르게 쫓아가면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다.

판단이 서자 창현은 빠르게 태연과 헤어졌던 곳으로 향했다. 어차피 저번에 한 번 만난 적이 있기에 집주소는 몰라도 몇동 몇라인에 사는지는 알 수 있다.

다행이 늦지 않았는지 아파트 입구로 들어가는 태연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늦지 않았…….”

태연에게 다가가려던 창현은 발걸음을 멈추었다.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세 청년이 태연을 감싸는 것이 보인 것이다.

창현의 표정이 굳었다. 극도로 발달한 그의 청각은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저들의 대화를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다. 분명 좋지 못한 의도임이 분명했다.

잠시 후, 태연과 세 청년이 이동하였다. 근처 놀이터로 가는 듯했다.

표정을 굳힌 창현이 그 뒤를 따랐다. 무언가 위험한 냄새가 났다.


태연의 표정은 심각하게 굳어 있었다.

박윤철. 두 번 다시 듣기 싫고 두 번 다시 보기 싫은 얼굴이었다.

서울에 올라와 두 번 다시 볼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 자리에서 보게 될 줄이야.

“네가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거야?”

태연은 몸을 가늘게 떨며 입을 열었다.

그런 태연의 말에 박윤철이라 불린 청년이 섭섭한 표정을 지었다.

“이거 너무 박대하는 거 아니야? 이래 보여도 우린 동창이라고. 중학교 동창. 그리고 한때 고등학교 동창. 우린 꽤 자주 봤었잖아? 안그래?”

“…….”

윤철의 말에 태연은 대답하지 못하고 몸을 가늘게 떨 뿐이었다.

박윤철. 그로 말할 것 같으면 태연에게 있어 악몽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는 중학교 때부터 학교에서 소위 말하는 짱이었다. 권투로 단련된 그의 주먹을 막아낼 자는 학교에 없었고, 학교를 평정한 그는 전주에서 손꼽히는 주먹으로 성장하면서 전주의 일진들을 이끌었다.

당시 태연은 그와 전혀 접점이 될 만한 것이 없었다. 그녀는 노래를 좋아하는 소녀에 불과했고, 학교에서는 사교성 좋고 공부도 어느 정도 중상위권에 속한 평범한 소녀였다.

그런데 그녀가 연습생이 되면서부터 사정이 뒤바뀌었다.

가수 지망생이 자신의 학교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윤철이 노골적으로 태연에게 관심을 보낸 것이다.

하지만 태연이 제일 싫어하는 게 윤철과 같은 양아치 부류였다. 제 주먹을 믿고 남을 짓밟으며 으스대는 그런 것을 제일 싫어했다.

당연히 윤철이 사귀자는 제의를 거절했고, 그때부터 윤철의 일방적인 스토킹이 시작되었다.

매일 등교 길에서부터 슬금슬금 따라오기가 일쑤였고, 그녀가 이동수업을 할 때면 자기 수업도 빼먹은 채 태연을 따라다녔다. 그렇다고 순수한 애정으로 그런 것도 아니고 주변에 온갖 위협을 일삼으면서 자신의 힘을 자랑이라도 하듯 으스대며 그녀의 주변을 맴돌았던 것이다.

그럴수록 그녀는 더욱 윤철을 멀리했고, 그럴수록 더욱 스토킹은 심해졌다.

결국 참다못한 그녀는 경찰에 신고하기에 이른다. 윤철은 체포되었지만 다음날 바로 석방되었다. 증거불충분이란 말 때문이다. 윤철은 교활하고 영악하여 증거가 될 만한 것을 남기지 않았다.

그렇게 악몽과도 같은 중학교 생활이 끝나고 그녀는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된다. 그런데 윤철은 집요하게도 고등학교까지 그녀를 쫓아왔다. 그리고 중학교에서도 그러했듯이 주먹으로 1학년들을 평정하고 왕처럼 군림하였다. 태연에게 있어 하루하루가 악몽과도 같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그녀는 본격적인 연습생 생활로 인하여 서울로 상경하게 되었다. 시험 때만 전주에 내려가면 되었기에 그녀는 부모님과 떨어져지내는 것을 잊을 정도로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그리고 중간고사 때 학교에 오니 윤철이 전학을 갔다고 한다. 그대 그 기쁨이란…….

그런데 오늘 절대 만나지 않았으면 하던 윤철을 만나게 되었다.

태연은 윤철의 양옆에 있는 청년들의 이름도 알았다. 신정후와 김해진. 윤철의 왼팔 오른팔 노릇을 하던 애들이었다.

“그리고 더 예뻐진 것 같단 말이야. 연예인 한다고 하면서 아까 어떤 놈팽이랑 만나던데. 남자 친구? 연습생은 남자 친구 만나도 되는 건가?”

태연이 정색하며 대답했다.

“남자 친구 아니야.”

“알고 있어. 가수가 꿈인 네가 벌써 남자 친구를 사귈 리 없지.”

키득키득 웃으면서 윤철이 말한다. 뭐가 웃긴 건지 모르겠다.

“그런데 무슨 일이지? 특별한 용무가 없으면 돌아가줬으면 좋겠는데.”

“아아, 용무가 있어서 온 거야. 그나저나 보는 사람이 많군. 어디 조용한데 가서 이야기 좀 할까?”

태연이 슬쩍 주변을 둘러보니 주변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 멀찍이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러한 시선 집중은 좋지 않았지만 태연에게 있어서는 빠져나갈 구실이 된다. 저들이 이렇게 사람이 모인 곳에서 무슨 짓을 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난 싫은데? 너희들을 어떻게 믿고.”

강하게 나오는 태연의 모습에 윤철이 눈을 부릅 뜨고 인상을 구긴다.

“김태연. 네가 그렇게 뻣뻣하게 나온다고 내가 순순히 물러설 것 같아? 네가 오늘 여기서 무사히 빠져나간다고 내가 여기서 영원히 물러날 것 같아? 이미 네 멤버들이 누군지 다 파악했어. 내 말에 순순히 따르지 않으면 어떻게 될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겠어.”

윤철의 눈은 광기로 번들거렸다.

그 눈을 본 태연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려왔다. 저 눈이다. 그녀가 그토록 보기 싫어하고 두려워했던 눈.

태연은 두려움으로 떨리는 자신의 몸을 필사적으로 진정시키며 말했다.

“겨, 경찰에 신고하겠어.”

윤철이 피식 웃었다.

“경찰? 네가 아직 잘 모르나본데 난 아무 짓도 안했다고? 경찰이 오면 난 그냥 이 근처에 놀러왔다고 하면 돼.”

정말 아무 짓도 안했으니 그들이 경찰에 잡혀갈 가능성은 없었다. 이미 과거에 선례가 있었으니 분명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될 것이다.

“…….”

태연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자신에게 선택지가 없었다. 이대로 가버리면 멤버들에게 위해를 가하겠다고 대놓고 위협을 하는 녀석이었다.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한동안 고민하던 태연은 결정을 내렸다.

“좋아. 조용한 곳으로 가자.”

“그래야지.”

근처 놀이터로 향하는 태연. 나름대로 머리를 쓴 것이다. 여차하면 도망치면서 소리쳐서 사람들에게 도움을 구할 수 있으리라.

놀이터에 도착하자 태연이 말했다.

“용건을 말해. 난 빨리 들어가봐야 하니까.”

“그래. 용건을 말하지. 나랑 사귀자, 김태연.”

진지하게 말하는 윤철. 하지만 그녀의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싫어. 자기 관리 그런 걸 둘째 치더라도 난 너 그 자체가 싫어.”

태연의 말에 윤철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하! 도대체 왜 내가 싫다는 거지? 싸움으로 전주를 통일했고, 서울로 올라와서 나름대로 자리를 잡은 실력이 있다. 강남 노른자 위를 차지하고 있는 사해파의 행동대원이기도 하고. 그리고 내 외모면 떨어지지 않고 공부도 잘했고. 그런데 뭐가 부족하지? 다른 버러지들하고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데.”

갑자기 학교에서 사라졌다더니 조폭이 된 모양이었다. 그리고 어디까지나 윤철의 말은 사실이었다. 중학교 재학 당시 그의 성적은 전교권이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얼굴도 잘생겨서 그를 좋아하는 여자가 많았다. 무엇보다 현재 사해파에서 그는 유망주로 취급받고 있었다. 열심히 활동만 한다면 출세가도를 달리리라.

태연은 인상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난 너의 그 점이 싫어. 사람을 깔보고 뭉개려는 너의 그 태도 자체가. 네가 그걸 고친다고 해도 난 널 싫어해. 이미 너란 사람은 나에게 최악의 인간으로 낙인 되었으니까. 그리고 내가 남의 것을 공갈하는 조폭 따위랑 사귈 것 같아?”

윤철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그냥 싫은 거였군. 그럼 억지로 날 좋아하게 하는 수밖에. 네가 나랑 사귀지 않겠다고 하면 내 친구들을 시켜서 네 친구들 하나하나를 납치하겠다. 경찰? 걱정하지마. 쥐도 새도 모르게 납치해줄 테니까. 한 명씩 납치하면서 난 네게 말하겠어. 나랑 사귀겠냐고. 그때도 싫다고 하면 대충 납치된 네 친구가 어떻게 될지 상상이 되겠지? 상상만으로도 즐겁군. 하하하!”

미쳐도 보통으로 미친 게 아니었다. 그랬기에 태연은 더욱 그 말이 사실감 있게 들렸다. 이렇게 눈이 회까닥 가버린 녀석은 정말 자신의 말대로 실행할 확률이 높았으니까.

그렇다고 굴할 그녀가 아니였다.

태연이 입술을 질끈 깨물며 윤철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어디 해볼 테면 해봐!”

그 말과 함께 그녀가 아파트 쪽으로 달려가려고 하였다. 더 이상 윤철과 말을 섞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달려가려던 그녀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아파트로 향하는 방향을 정후와 해진이 가로막고 있던 것이다. 태연이 흠칫하며 뒤로 물러선다.

윤철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거 위협이 안 먹힐 줄이야. 그 정도로 했으면 지레 겁먹고 넘어올 줄 알았는데 말이지. 네 속셈이야 처음부터 뻔하지. 그러나 애석하게도 나도 그리 녹록치 않아서 말이야.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지. 강제로라도 하는 수밖에.”

그와 함께 정후와 해진이 서서히 태연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태연은 그들을 보면서 흠칫하며 한걸음씩 물러선다.

윤철의 입에 짙은 음소가 맺힐 때,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그만 여기까지.”

“……!”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네 쌍의 시선이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향한다.

그곳에는 한 소년이 서 있었다.

태연이 그 소년을 알아보고는 소리쳤다.

“창현아!”

윤철은 태연이 애타게 부르는 모습을 보고는 인상을 구기며 외쳤다.

“넌 뭐야?”

위협적인 윤철의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창현은 태연했다.

오히려 살짝 웃음을 짓고는 말했다.

“나? 레이디를 구하는 정의의 기사라고 할까.”

윤철의 입가에 비웃음이 맺혔다.

“기사? 웃기고 있군. 어디서 본 건 있어서 정의의 기사를 흉내내나 보는데 세상의 이치는 다른 법이다. 꼬마야.”

“그건 네 생각이고. 세상은 제법 소설처럼 돌아갈 때가 있거든.”

“말로 해서는 안될 놈이군.”

윤철의 말이 기폭제였는지 정후와 해진이 사나운 시선으로 창현을 노려보았다.

그때, 기회를 보고 있던 태연이 창현에게 달려갔다.

다다닥.

“…익!”

잠깐 한눈을 판 사이에 태연은 창현의 옆에 도착했다.

태연은 창현에게 말했다.

“도망치자. 너무 위험해.”

창현이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 얘네들은 너무 위험해요. 반드시 감옥에 넣어야 해요. 아까 얘네들이 한 말 못 들었어요?”

“그건…….”

태연이 말끝을 흐렸다. 창현의 말을 듣는 순간 윤철이 했던 말이 떠오른 것이다.

그런 태연의 모습을 보면서 윤철이 말했다.

“네가 간다고 하면 난 정말 내가 했던 말대로 이행할 것이다. 경찰? 불러봐. 증거불충분으로 나올 수 있으니까. 하지만 명심해라, 김태연. 난 내가 말한 것은 반드시 이행한다.”

위협적인 윤철의 말에 태연이 부들부들 떨었다. 정말 억울하고 분했다. 저런 녀석을 감옥으로 보내지 못하다니.

창현이 떨고 있는 태연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눈물이 맺힌 그녀의 얼굴이 보인다. 창현은 침착하게 호흡하면서 말한다.

“안심해요, 누나. 증거불충분 따위 없애드릴 수 있어요.”

그러면서 창현이 MP3를 꺼내든다. 그리고 전원을 누르자 외장 스피커에서 소리가 흘러나온다.

-그래. 용건을 말하지. 나랑 사귀자, 김태연.

-싫어. 자기 관리 그런 걸 둘째 치더라도 난 너 그 자체가 싫어.-

-하하! 그냥 싫은 거였군. 그럼 억지로 날 좋아하게 하는 수밖에. 네가 나랑 사귀지 않겠다고 하면 내 친구들을 시켜서 네 친구들 하나하나를 납치하겠다. 경찰? 걱정하지마. 쥐도 새도 모르게 납치해줄 테니까. 한 명씩 납치하면서 난 네게 말하겠어. 나랑 사귀겠냐고. 그때도 싫다고 하면 대충 납치된 네 친구가 어떻게 될지 상상이 되겠지? 상상만으로도 즐겁군. 하하하!

뒤이어 계속해서 태연과 윤철의 대화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태연의 뒤를 쫓은 창현이 그들의 대화를 녹음한 것이다.

창현은 MP3전원을 끄면서 히죽 웃는다.

“이 정도면 충분히 증거가 될 것 같은데?”

하지만 윤철의 얼굴에는 당황의 감정은 없었다. 오히려 그는 웃었다.

“하! 멍청한 녀석이군. 그걸 지금 보여주다니. 어쩔 수 없지. 병신으로 만들어주고 그걸 뺏는 수밖에. 정후, 해진 저새끼 죽여버려.”

윤철의 명령에 정후와 해진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창현에게 접근한다.

창현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둘을 보며 고양이를 태연에게 건네고는 말한다.

“누나 뒤로 물러서세요.”

사색이 된 태연이 말했다.

“도, 도망치자, 창현아. 너 혼자서 무리야.”

“그건 지켜보면 알아요. 어서 뒤로 물러나요.”

“으응.”

강하게 말하는 창현의 말에 태연이 뒤로 주춤 물러섰다.

창현은 목과 손을 풀며 다가오는 정후와 해진에게 말했다.

“얼마나 강하기에 조폭을 하는지 볼까.”

실전 경험은 적지만 창현은 여유가 있었다.

먼저 달려든 건 정후였다.

꽤 먼 거리에 떨어져 있던 그는 돌연 보폭을 늘리며 순식간에 창현과의 거리를 좁히며 주먹을 휘둘렀다. 놀라울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쉬익!

순식간에 안면에 꽂혀오는 주먹을 보면서 창현은 고개를 살짝 틀었다. 싸움 경험이 별로 없지만 무공을 익히고 내공을 갖게 된 창현의 신체 능력은 일반인보다 훨씬 뛰어나다. 평범한 사람이 보기에 그들의 주먹과 움직임은 무척 빨라 보이겠지만 창현에게는 별로 빨라보이지 않았다.

가볍게 고개를 틀어 주먹을 피한 창현이 정후의 복부로 주먹을 휘두른다.

퍼억!

창현의 공격은 실패로 끝났다. 복부에 꽂히려는 순간 정후의 왼손이 그의 주먹을 막아낸 것이다.

하지만 왼손으로 창현의 주먹을 완벽하게 막아내기는 불가능했다.

쩌적! 하는 소리와 함께 정후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얼마 되지 않아도 내공이 담긴 주먹을 정면으로 받았으니 뼈에 금이 간 것이다.

창현은 자신의 공격이 막힌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한 번 복부로 주먹을 꽂아 넣는다. 왼손이 망가졌으니 막을 수가 없다.

뻐어억!

“끄헉!”

복부를 강타하는 소리와 함께 주먹에서 내장이 진탕된 촉감이 전해진다. 이 정도면 전투 불능이라. 하지만 완벽한 마무리를 위해 창현은 정후의 양 어깨를 잡은 뒤 무릎으로 다시 한 번 복부를 찍었다. 옆에서 해진이 공격해오건 말건 확실하게 한 명을 무력화 시킬 생각이었다.

퍽!

창현의 무릎이 정후의 복부에 꽂히면서 정후의 눈이 뒤집혔고, 그걸 확인한 순간 창현은 옆에서 주먹을 휘두르는 해진을 힐끗 보고는 살짝 몸을 기울이고 정후를 내민다. 기절한 정후를 방패로 쓴 것이다.

그러자 해진의 주먹이 정후의 어깨를 강타했다. 해진의 주먹이 정후의 어깨에 박히자 창현은 기절한 정후를 내동댕이 치며 주먹을 휘두른다. 그걸 본 해진이 발차기를 하며 창현의 주먹을 차온다. 발차기와 주먹의 싸움. 발차기가 주먹보다 세 배는 세다고 할 정도로 발차기의 파괴력이 압도적이다. 해진은 발차기로 창현의 주먹을 부숴버리려는 속셈인 듯하다.

하지만 창현의 주먹은 보통 주먹이 아니었다. 내공을 머금은 그의 주먹은 바위에 박아버릴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파괴력을 내포하고 있다. 게다가 오감이 발달한 창현은 주먹의 궤도를 살짝 틀어 자신의 주먹이 발이 아닌 정강이로 향하게 만들었다.

빠악! 쩌저적!

창현의 주먹과 해진의 정강이가 충돌하는 소리와 함께 정강이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주먹에서 느낌이 온 순간 창현은 왼발로 해진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컥!”

숨이 막히는지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해진.

창현은 그대로 그의 명치에 주먹을 꽂아넣는다. 잘못하면 죽을 수 있으니 적당하게 파워를 조절하면서.

명치에 주먹이 박히자 해진이 그대로 눈을 까뒤집으며 기절한다.

순식간에 두 명을 제압한 창현은 윤철을 바라본다.

윤철의 얼굴에는 더 이상 비웃음이 자리하고 있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는 놀라움과 분노가 뒤범벅 되어 있었다.

“어떻게 네녀석이 둘을… 상관없다. 네 녀석을 죽여버리면 되니까.”

그러면서 품에서 칼을 뽑아드는 윤철. 아끼던 두 부하가 쓰러지자 가뜩이나 돌아버린 정신이 더 돌아버린 듯했다.

창현이 두 명을 멋지게 제압하자 얼굴 가득 희망이 채워지고 있던 태연은 윤철이 칼을 뽑아들자 사색이 되며 창현을 불렀다.

“차, 창현아.”

윤철이 칼을 뽑아들자 창현은 내심 긴장되었지만 내색하지 않은 채 침착하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누나도 휘말릴 수 있으니 조금 더 뒤로 가세요. 제 걱정은 마시고요.”

그러면서 창현은 눈앞의 윤철에게 집중했다. 칼을 쥔 자세를 보니 제법 능숙하게 다루는 것 같았다. 죽여본 적은 없어 보이지만 칼로 사람을 꽤 상하게 해본 듯했다.

‘침착하자. 침착해.’

조용히, 상대가 느끼지 못하게 호흡을 조절하면서 창현은 머리를 차갑게 식혔다.

눈앞의 상대가 칼을 뽑아든 이상 그것을 휘두르며 자신에게 위해를 가하려고 할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대가 칼을 뽑아들면 당연히 긴장하고 움츠러들 것이다. 그게 사람의 일반 심리니까.’

차갑게 머리를 식힌 창현은 냉정한 눈으로 윤철을 살폈다.

광기 어린 표정이지만 그의 행동 하나하나는 정후와 해진과는 비교를 달리했다. 실전 경험이 풍부한 듯했다.

주먹 다짐이었다면 내공을 쓰는 창현이 단번에 제압할 수 있겠지만 칼을 들었으면 자칫 부상을 입을 수도 있다.

서서히 다가오는 윤철을 보면서 창현이 돌연 소리를 냈다.

“아!”

그리 큰 소리가 아니었다. 그 소리를 낸 창현은 동시에 윤철에게 접근해나갔다.

“회를 떠주겠다.”

접근하는 창현을 보며 윤철이 살기 등등한 표정으로 외칠 때였다.

갑자기 그의 뇌리를 뒤흔드는 소리가 있었다.

[아………………!]

“……!”

그것은 방금 전 창현이 낸 소리였다. 창현은 주먹질이 미숙한 자신이 칼을 든 윤철을 쉽게 제압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고, 고민하던 중 음악강론에 있던 음공을 응용하여 윤철을 공격한 것이다.

음공은 좋은 일에 사용하면 사람에게 활력을 불어다 넣어주고 희망을 갖게해주지만 나쁘게 사용하면 사람의 인성을 해치고 심성을 사악하게 만든다.

내공이라고는 한줌밖에 없는 창현이 그런 경지에 도달할 수 없지만 일반인에게 어느 정도 충격을 주는 것은 가능했다. 그리고 그것은 성공이었다.

한순간 멍하니 서 있는 윤철에게 창현이 발차기로 손목을 찼고, 손목을 움켜쥐고 물러나는 그의 복부에 주먹을 꽂아넣었다.

“커억!”

비명과 함께 쓰러지는 윤철. 그가 맞은 일격은 정후와 해진이 공격 당한 것과 비교도 되지 않는, 창현의 모든 힘이 담긴 주먹이었다. 아마 속이 빌빌 꼬였을 것이라.

세 사람을 모두 제압한 창현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그런 창현을 보며 태연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창현아! 괜찮아!”

“네 전 괜찮아요. 누나도 괜찮으세요?”

창현의 물음에 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야 괜찮지.”

“다행이네요. 제가 안 왔으면 큰일 날 뻔했어요. 누나한테 제 핸드폰이 있다는 걸 알고는 왔거든요.”

창현의 말에 그녀는 자신이 창현의 핸드폰을 가지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아! 핸드폰.”

그러면서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창현에게 건넨다.

창현은 그 핸드폰을 받아들고는 곧장 112에 전화를 한다.

“여보세요? 여기 조폭들이 공갈협박하고 납치까지 하려고 했거든요. 장난 전화 아니고요. 제 핸드폰 번호 나오잖습니까? 여기요?”

창현이 자세한 위치를 모르는 듯하자 태연애 말해준다.

“삼호아파트 101동 5-6라인 놀이터.

“삼호아파트 101동 5-6라인에 있는 놀이터입니다. 네, 빨리 와주세요.”

통화를 마치고 핸드폰을 덮은 창현은 태연을 보며 말했다.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정말 고약한 녀석들이네요.”

창현의 말에 태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응.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았는데…….”

“이대로 들어가기에는 좀 그렇겠죠. 잠시만요.”

핸드폰을 연 창현이 연락을 한다. 주현에게 연락할까 싶었지만 그녀는 이번 일에 조금 부적합했다.

“여보세요? 수연 누나? 네, 저에요. 아 다름아 아니라 지금 101동 5-6라인쪽 놀이터에 있거든요. 태연 누나가 안 좋은 일에 좀 휘말려서요. 네. 일단 비밀로 해주시고 나와주세요.”

창현이가 통화를 끝내자 태연이 물었다.

“수연이는 왜?”

“누나가 많이 놀라셨잖아요. 위로해줄 사람이 필요할 것 같아서요. 제가 누나 멤버들 중에서 가장 친한 건 주현 누나지만 오늘 제사 갔다는 말도 있고 해서 수연 누나를 부른 거예요.”

하나같이 자신을 배려하는 행동이었다. 태연은 그런 창현이 너무나 고마웠다.

“응, 고마워. 이 말밖에 할 말이 없네.”

“하하! 경찰이 오면 귀찮게 굴 것 같으니 그때 가서 절 원망하지 마세요.”

오 분 정도가 지나자 수연이 놀이터에 모습을 드러냈다.

수연은 창현 옆에 있는 태연의 모습과 쓰러져 있는 세 사람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짓는다.

“태연아!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 말에 창현이 나서서 간략하게 설명해줬다.

“태연 누나를 스토킹 하던 녀석들이에요. 협박에 모자라 심지어 납치까지 하려고 해서 제압했어요.”

“이 녀석들이 감히 태연이를 협박하고 납치하려 들어?”

창현의 설명에 수연은 눈에 불을 키며 쓰러진 녀석들에게 다가가 발길질을 하였다.

그 기세가 워낙 흉험하여 순식간에 녀석들을 제압하던 신위를 보인 창현조차 움찔하였다.

그러다 보니 음성이 절로 떨려나왔다.

“수, 수연 누나가 무섭네요.”

자신의 정체를 알아낸 것도 그렇고, 저렇게 화난 모습을 보니 새삼 수연이 무섭다는 걸 느끼는 창현이었다.

그런 창현의 모습을 보며 태연이 말했다.

“무섭긴. 수연이가 평소에 얼마나 사근사근한데. 내가 안 좋은 일을 당할 뻔했다고 하니까 저렇게 화내는 거야.”

“그래요? 그럼 다행이고요.”

한동안 발길질을 하던 수연이 화가 어느 정도 풀렸는지 태연에게 다가와서 묻는다.

“괜찮은 거지 태연아?”

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여기 창현이가 구해줬어.”

“그래? 다행이다.”

고개를 끄덕이면서 슬쩍 창현을 보는 수연의 눈.

눈을 마주한 순간 창현은 무언가 뜨끔하여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잠시 후면 경찰이 올 거예요. 제가 수연 누나만 부른 건 태연 누나가 많이 놀라서 위로 좀 해달라고요. 이 녀석들 확실하게 감옥에 넣을 증거가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요.”

수연은 창현이 왜 자신을 부른지 깨닫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 네 말대로 할게. 그리고 태연이 구해줘서 고마워.”

“뭘요. 함께 도와야죠.”

잠시 후, 경찰이 도착하였고, 일단 그들은 쓰러진 세 명을 제압한 뒤 경찰서로 향했다. 창현과 태연, 수연도 함께였다.

창현은 경찰에게 녹음 내용을 들려주면서 그들의 죄목을 설명하였고, 워낙 확실한 증거 덕택에 그들은 꼼짝없이 감옥에 갇혀야만 했다. 이번 사태에 대해서 SM엔터테인먼트도 적극적으로 나섰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자칫하면 후환을 가져올 수 있는 일이었기에 SM엔터테인먼트에서는 아주 철저하게 물고 늘어져 다시는 사회에 나와서 제 구실을 못하게 만들어버렸다고 한다.




제14장 수학여행, 주현과 듀엣




라샤의 일본 활동이 점점 끝나감에 따라 창현도 점점 바빠지고 있었다. 라샤의 타이틀 곡을 완성했지만 작사 문제와 더불어 미니 앨범에 넣을 다른 곡들도 작곡을 해야 되기 때문이다.

창현은 곡 하나를 작곡할 때 정해진 테마에 맞추어 자신의 모든 역량을 동원한다. 그는 작곡을 할 때 음향총서 중 음악강론의 이론을 적용시키면서 곡을 만드는데, 음악강론의 이해도가 높아 어느덧 자신만의 경지를 개척하고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라샤의 첫 정규 1집 앨범이 강렬한 임팩트를 주는 노래였다면 이번 미니 앨범은 여성스러운 이미지를 더욱 확고하게 다져주는 굳히기 개념의 곡들로 준비하였다. 과도한 섹시 컨셉을 탈피하여 실력파 가수로 자리매김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정신없이 시간은 흘러 9월이 지나가고 10월이 찾아왔다.

그동안 창현은 주말마다 주현과 만나서 듀엣 곡을 연습하였다.

두 사람이 준비하는 곡은 Endless Love였는데, 태연과 함께 영화를 보러갔을 때 창현은 이 노래가 무척 마음에 들어서 주현에게 강력하게 추천을 하였다.

주현도 무척 좋아하던 노래였기에 창현의 결정을 반겼다. 그 모습을 보면서 창현은 왠지 모르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태연과 이미 함께 불러보아서 그런 것일까? 창현도 자신이 왜 이런 마음이 드는지 잘 몰랐다.

두 사람은 Endless Love를 연습하는 한편 다른 듀엣 곡들도 맞춰보았다. 알게 모르게 창현이 주현의 목소리에 잘 맞춰주었기에 괜찮은 노래가 몇 개 나왔다.

그렇게 창현이 작곡과 듀엣 연습을 하는 사이 라샤가 일본 활동을 접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그녀들은 더 이상 무서운 신예가 아니었다.

한국을 제패하고 일본마저 점령한, 중국과 동남아에서도 열광하는 한류 스타가 되어 돌아왔다.

그녀들의 귀국하는 날, 공항에는 백여 명이 넘는 기자와 천 명이 훌쩍 넘어가는 팬들이 모여들었다. 엄청난 환영 인사가 아닐 수 없었다.

설마 이렇게까지 환영해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그녀들은 이내 환한 미소와 함께 피로도 잊은 채 즉석 팬 사인회와 더불어 인터뷰를 하였다.

여기서 기자들은 라샤의 향후 행방에 대해 무척 궁금해하였다. 이미 아시아를 대표할 정도로 성장한 그녀들의 행방은 연예계의 관심을 모으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일본을 평정하였으니 중국으로 진출할 것이라고 하였고, 어떤 사람들은 동남아시아를 차례차례 순회할 거라고도 하였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미국으로 진출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여러 추측성 질문이 들려왔지만 라샤는 그에 대해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회사의 방침이었고, 이미 그녀들과 어느 정도 이야기가 된 상태였기에 아직까지는 기밀에 속하는 것이었다.

기자들의 질문이 그쪽으로 기울자, 라샤의 매니저는 석규에게 전화를 하였고, 석규의 승낙이 떨어지자 라샤의 리더, 시린이 대답한다.

“저희는 한 달 가량 휴식을 취하면서 미니 앨범을 준비할 예정입니다. 저희들의 곡을 만들어주시고, 프로듀싱을 해주실 가수 현씨가 곡을 완성했다고 하네요. 녹음을 끝마치고 뮤직비디오를 제작한 뒤 한국에서 컴백 무대를 가질 생각입니다. 저희를 한류 스타라고 말해주시지만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확실하게 실력을 쌓고, 한국과 일본에서 활동할 예정입니다.”

시린의 말에서 현이 언급되자 기자들이 오오! 하는 소리와 함께 눈을 빛낸다. 최고의 작곡가, 최고의 프로듀서란 별명과 함께 히트 곡 제조기란 별명이 있는 현이 라샤의 미니 앨범 제작을 마쳤다고 하니 기대가 되는 것이다.

다른 기자가 용기내어 묻는다. 가수 현에 대한 힌트를 조금만 달라고 말이다.

그 질문에 세룬이 살짝 웃음을 지었다.

“여섯 글자로 힌트를 드릴게요. 음… 초절정 꽃미남?”

세룬의 말에 기자들의 감탄사가 흘러나온다. 잘생겼다는 말이 있긴 하지만 그것은 추측에 불과하였기에 이런 정보 하나하나는 특종이 된다.

여러 질문이 나왔고, 라샤의 활동 계획과 관심사가 되고 있는 중국, 동남아시아 진출 등이었다. 마침내 마지막 질문이 나왔다.

기자 한 명이 물었다. 가수 현이 언제 데뷔할지.

그에 잠자코 있던 미란이 재빨리 마이크를 잡아서 대답했다. 그녀의 입가에는 회심의 미소가 서렸다.

‘고생 좀 해보렴, 창현아. 호호!’

“가수 현은 빠르면? 내년 초에 데뷔할 예정이랍니다.”

‘늦으면 내년 말이겠지만.’

그 말은 하지 않았다. 기자들은 특종을 좋아하기에. 미란도 그저 창현을 골려주기 위해 한 말이다.

그렇게 라샤의 인터뷰는 마무리되었고, 연달이 보도되는 인터넷 기사에 의하여 한동안 가수 현의 데뷔, 현의 얼굴, 라샤의 신곡, 라샤의 미니 앨범 등 여러 가지 연관 검색어가 상위에 등록되었다.

그러나 이때는 누구도 몰랐을 것이다.

창현이 정말 내년 초에 데뷔하게 되리라고 말이다.


라샤가 귀국하자 창현은 AA엔터테인먼트에 들려 거의 두 달만에 라샤를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만나자마자 창현은 그녀들에게 단단히 따져물었다.

“누나들 그게 뭐에요! 왜 제 데뷔 시기를 마음대로 정한 거에요?”

유명 곡들을 작곡한다고 해서 창현이 컴퓨터를 안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컴퓨터로 자기 미니 홈피도 관리하고 게임도 하며 애니메이션도 보고 뉴스도 본다. 할 건 다 한다는 이야기다.

그러니 그가 라샤의 현 데뷔 발언을 못 봤을 리가 없다.

창현이 따져묻자 시린이 고개를 저었다.

“내가 안 했어.”

세룬이 미란을 가리켰다.

“나도 아니야. 미란이가 그랬어.”

창현이 미란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미란 누나!”

“으윽! 목소리가 너무 커! 난 그냥 장난으로 한 말이라고. 그리고 빠르면이라고 했으니 어느 정도 늦어도 이해는 해줄 거야.”

“하아!”

무책임한 그녀의 말에 창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창현의 모습에 시린이 물었다.

“그럼 창현이 넌 언제 데뷔할 생각인데?”

창현이 생각에 잠기다가 말했다.

“글쎄요. 내년이라고 했으니 겨울방학? 그때로 생각하고 있었는데요.”

그의 대답에 시린이 생각에 잠겨있다가 창현을 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창현아, 내 말이 곱게 들리지 않더라도 들어줘. 솔직히 창현이 네 노래 실력이 굉장하고 작곡 실력이나 프로듀싱 실력도 대단해. 그건 우리도 알고 한국, 일본 사람들도 알지. 하지만 방송은 우리가 먼저 겪어봤어. 그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네가 너무 늦게 데뷔하는 건 안 좋다고 봐.”

시린이 진지하게 말하니 창현으로서도 자세를 바로하고 진지하게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은 창현이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시린은 이미 창현의 데뷔를 놓고 여러 가지 생각을 한 듯했다. 창현의 물음에 그녀는 머뭇거리지 않고 대답했다.

“그건 바로 한국 사람의 특성 때문이야. 한국 사람들은 한 번 타오르면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르지만 그만큼 빠르게 식기도 해. 창현이 네가 노래나 그런 것도 분명 잘하지만 그 인기가 지속되는 것은 어느 정도 한계가 있다고 봐. 이왕 데뷔할 거면 최고의 인기를 그대로 유지하는 게 좋잖아?”

창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야 그렇죠.”

어떤 가수가 자신의 인기가 적은 걸 싫어하겠는가. 창현도 마찬가지다. 비록 제대로 실감하고 있지 못하지만 다크 스타에서 간접적으로 느끼는 것만으로도 대단했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인기가 있기를 바랄 수밖에 없고, 그것이 지금보다 적어진다면 생각만해도 싫었다. 그러다 보니 창현은 시린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보는 수밖에 없었다.

세룬이 옆에서 시린을 거들었다.

“그건 나나 미란이도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어. 사장님은 창현이 네가 좋을대로 하라고 하셨지만 연예인의 시선으로 입각해서 보면 올해 말이나 내년 초에 데뷔를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해. 그럼 선풍적인 인기몰이를 할 수 있을 걸? 지금 우리가 이렇게 왕성하게 활동하는데도 네 인기를 못 따라잡는데 만약 제대로 인기를 끌어안고 가게 되면…….”

상상만 해도 흥분이 되는 듯 세룬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만큼 가수 현의 인기는 독보적이었다.

“…….”

시린과 세룬의 말에 창현은 진지하게 생각해보았다.

확실히 방송을 해보고 연예계를 겪어본 경험을 토대로 해주는 그녀들의 조언은 무시할 것이 못 되었다.

창현이 고민에 빠져있을 때 미란이 말했다.

“뭘 그렇게 고민해. 어차피 1학년하고 2학년 때 열심히 다녔잖아? 그냥 데뷔하고 3학년은 대충 다녀. 그래도 졸업은 될 거야.”

순수한 중학생을 타락의 길로 인도하는 미란이었다.

그 말에 시린과 세룬에 미란을 째려보았고, 미란은 움찔하며 깨갱한다.

창현은 그런 그녀들의 모습에 웃음을 짓는다. 이렇든 저렇든 다 자신을 생각해줘서 하는 말이다. 그리고 이 일은 고민해볼 만한 가치가 있었다.

“일단 고민해볼게요. 아직 시간은 있으니 천천히 고민해봐야겠네요. 아참, 제가 드린 MR 자주 들으시고요. 일단 임의로 제가 녹음을 했으니 들어보시고 귀에 익혀놓으세요. 전 내일부터 수련회라서 삼 일 뒤에 오니까요.”

창현의 말에 라샤 멤버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응. 그렇게 할게.”

“우리도 이젠 프로라고.”

창현이 피식 웃음을 지었다.

“아직 데뷔한지 일 년도 안 되었는데 너무 자만하면 안 되죠. 전 그럼 가볼게요. 녹음 스케줄은 바쁘게 하지 않을 테니 천천히 쉬시고요.”

그 말과 함께 창현이 자리를 떠난다.

사라지는 창현의 모습을 보면서 시린과 세룬이 서로를 보고는 동시에 한숨을 내쉰다.

“하아!”

미란은 시작될 녹음을 생각하며 표정을 찌푸린다.

“또 지옥의 녹음이 시작 되네.”

“그러게. 이번엔 또 얼마나 기를 죽일지.”

자신들의 실력에 제법 자신이 있는 그녀들이었지만 녹음을 할 때 있어서 창현의 노래를 들으면 언제나 한숨만 나오는 그녀들이었다. 언제가면 이 실력 차이를 따라잡을 수 있을는지.

창현의 노래 실력은 그녀들이 뒤처질 수 없다는 감정을 만들어냈고, 따라잡기 위해, 뒤질 수 없다는 마음 하에 그녀들은 더욱 노력하였다.

그러한 그녀들의 노력은 하루하루 차곡차곡 쌓여 어느덧 싹이 피고 열매를 맺어가고 있었다.


수련회를 가는 당일이 되었다.

창현은 갈아입을 옷 몇벌과 세면도구, 듀엣 곡으로 부를 MR이 저장된 CD 등을 챙기고 집을 나섰다.

학교에 도착하니 여러 대의 관광 버스가 대기해 있는 모습과 운동장에 바글바글하게 모여 있는 학생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수련회는 놀러가는 개념이 강했기에 아이들 대부분 한껏 멋을 내고 온 상태였다. 남학생들은 머리에 왁스를 바르고 어제 쇼핑이라도 했는지 빳빳한 옷들을 입고 왔고, 여학생들도 어제 옷 좀 샀는지 새것으로 보이는 옷들과 짧은 치마, 구두를 신고 있었다.

2학년과 3학년 합동 수련회란 말에 2학년 학생들은 처음에 많은 반항을 하였다.

한 학년 높은 선배들이 같이 가게 되면 모처럼만의 수련회를 만끽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이미 학교 교장은 결정을 내린 상태였고, 2학년과 3학년의 친목 도모 수련회란 이름 하에 같이 가게 되었다. 중학생들이 반항을 해봤자 이미 결정된 사항을 뒤집을 수 있을 리 없다.

그런데 막상 수련회 당일이 되자 언제 그런 말이 있냐는 듯 하나 같이 멋을 내고 온 것이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3학년의 눈치를 보는 2학년들이 조금 불쌍하긴 했다.

창현은 애초에 멋을 낼 이유를 못 느꼈기에 간단한 옷차림을 하고 왔다. 그래도 워낙 패션 스타일이 좋으니 여학생들이 창현을 보면서 표정을 환하게 하곤 수군거리곤 했다.

비니를 쓰고 이어폰을 귀에 꼽고 있는 창현이 운동장에 우두커니 서 있었을 때였다.

누군가가 갑자기 그의 귀에 꽂힌 이어폰을 빼더니, 손으로 눈을 가린다.

“누굴까요. 맞추지 못하면 천벌 받습니다.”

나름 열심히 목소리를 바꾼답시고 바꿨나보지만 창현의 눈을 속일 수 없었다. 창현이 피식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목소리라도 바꾸지 그랬어요, 주현 누나.”

“에이 열심히 바꿨는데 알아차리네.”

창현이 너무 쉽게 알아맞히자 주현이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눈을 가렸던 손을 뗀다. 그러자 창현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게 아니라 학교에서 저한테 이런 장난을 할 사람은 누나밖에 없어요.”

“그거 좋은 의미… 가 아니잖아.”

창현이 피식 웃음을 지었다.

“뭘요. 조용하고 좋은데요.”

“아니야. 학교를 다니면 당연히 친구들이랑 노는 게 제일이지. 뭐… 그렇게 말하는 나도 딱히 친한 친구가 없지만.”

주현이 가볍게 한숨을 내쉰다. 창현은 그런 주현을 위로했다.

“친구가 꼭 같은 나이일 필요가 있나요. 따지고 보면 저랑 누나도 친한 친구잖아요. 그러니 너무 낙심하지 말아요.”

창현의 말에 주현이 살짝 인상을 찡그리며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그만 둔다. 그리고 입술을 삐죽이며 말한다.

“창현이 넌 둔감하다는 말 듣지 않아?”

“글쎄요, 그런 말 들어본 적은 없는데…….”

고개를 갸웃하면서 생각해보지만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은 없었다.

그런 창현의 말에 주현은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헷갈렸다.

들어본 적이 없다면 주변에 여자가 없었단 이야기인데…….

그때, 소집 시간이 되었는지 각 반별로 모이라는 소리가 있었고, 주현은 창현을 보며 말했다.

“일단 가야겠네. 콘도 가고 자유 시간에 봐.”

창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주현은 3학년 1반이다.

그녀가 다니는 학교는 전교생이 칠백 명이 조금 안 된다. 학년마다 7반씩 존재하였고, 학급의 인원은 적게는 32명에서 많게는 38명까지 있다.

주현의 담임선생은 3학년 1반 아이들에게 말했다.

“버스 인원에 맞춰야 하기에 부득이 하게 우리는 2학년 7반과 같이 탑승하게 된다.”

담임선생의 말에 곳곳에서 야유가 터져 나온다.

“에엑! 2학년하고 같이 탄다고요?”

“아오! 중국 수학여행 취소될 때부터 마음에 안들더라니!”

“왜 2학년이랑 같이 타는 거야? 이럴 땐 1반인 게 싫다.”

담임선생은 그런 반 아이들을 진정시키면서 말했다.

“전부 다 타는 게 아니다. 열세 명만 타고, 나머지는 2반하고 같이 타면 된다.”

그러면서 담임선생은 2학년 7반과 함께 버스에 탈 인원을 걸러낸다. 아무래도 3학년보다는 2학년이 편하다고 생각하는 아이들이 있었기에 몇몇 지원자가 나온다.

2학년 7반과 함께 차를 탈 인원을 선발하던 담임선생이 말했다.

“이거 말을 안했구나. 한 명은 부득이하게 2학년 7반 애랑 앉아야 하는데. 혹시 2학년 7반에 동생 있는 사람 없나?”

“……!”

담임선생의 말에 주현은 무언가가 자신의 머리를 강타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녀는 떠올릴 수 있었다.

강창현! 창현이가 바로 2학년 7반이었던 것이다.

생각이 떠오름과 동시에 주현의 손이 섬광처럼 뿜어졌다. 담임선생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자 주현이 행여 누가 말할세랴 빠르게 말한다.

“2학년 7반에 아는 사람 있어요. 제가 걔랑 앉을게요.”

주현이 자청하자 담임선생의 표정도 밝아진다. 지원자가 없어서 누굴 뽑으려고 했는데 적임자가 나타난 것이다. 만약 지원자가 없어서 자신이 한 명을 지목했다면 그 학생은 두고두고 자신을 원망했을 것이라. 그러니 주현의 지원이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주현이 네가? 잘 되었구나.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자.”

잠시 후, 학년 대표 선생들이 나와 간략한 주의점 등을 말한 뒤 학생들이 차에 탑승하기 시작했다.

2학년 6반과 2학년 7반 학생들 일부가 버스에 타고, 2학년 7번 담임선생과 3학년 1반 담임선생이 나란히 선다. 참고로 두 선생은 교사 부부였다.

2학년 7반 담임선생이 말했다.

“아까 말한 것처럼 3학년 1반 학생들이랑 같이 타게 되었단다.”

“네에.”

2학년 7반 학생들은 내심 불만이 태산과도 같았다.

가뜩이나 3학년하고 같이 수련회를 가는 게 못마땅해 죽겠는데 버스까지 같이 타게 되다니.

불만이 산더미와 같았지만 내색할 수는 없었다. 옆에 3학년이 보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2학년 7반 담임은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버스에 앉게 되면 부득이하게 한 명이 3학년하고 앉아야 하는데…….”

“…….”

담임의 말에 순간 꿀먹은 벙어리처럼 조용해지는 2학년 7반 학생들. 가뜩이나 3학년하고 같이 가는 것도 서러운데 생판 얼굴도 모르는 3학년하고 세 시간 넘게 버스에서 같이 앉게 되면 1분이 마치 1시간처럼 느껴지리라.

그런 학생들의 심정을 알아차렸는지 3학년 1반 담임이 말한다.

“아, 그건 우리 반에서 해결이 되었습니다. 마침 저희 반 학생 중에 2학년 7반 학생을 아는 사람이 있다고 하질 않습니까?”

3학년 1반 담임선생의 말에 2학년 7반 학생들의 얼굴색이 밝아지다가 고민에 빠져든다. 자신이 아는 선배가 3학년 1반에 속해있는지 생각해보는 것이다.

그때, 3학년 1반 담임선생이 주현을 보며 말했다.

“주현아 아무도 나서질 않는데?”

그 말에 주현이 웃음을 지었다.

“아마 혼자서 딴 짓하고 있을 거예요. 사교성이 별로 없는 애라서요.”

“그래? 그럼 차에 타야 하니 네가 데리고 오너라.”

“네, 선생님.”

대답과 함께 그녀가 앞으로 나선다.

그러자 고민에 빠져있던 2학년 7반 학생들의 시선이 주현에게 집중되었고, 그들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한다.

주현이 앞으로 나서자 그녀가 2학년 7반 학생 중 아는 사람이 있다고 했던 3학년 학생임을 알아차린 것이다.

방금 전 2학년 6반과 함께 탄 7반 학생들은 여학생들이었기에 남은 7반 학생들은 대부분 남학생들이었다.

남자인 그들이 어찌 학교에서 유명한 주현을 모르겠는가.

SM엔터테인먼트 소속 연습생이자 데뷔가 멀지 않은 예비 연예인!

얼굴? 당연히 귀엽다. 지금은 귀엽지만 몇 년이 지나면 그 귀여움이 아름다움으로 승화될 것이란 걸 눈을 감고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가수 지망생답게 노래를 잘하고 피아노를 전문가 수준으로 치며, 수줍으면서 사근사근한 그녀는 학교 남학생들의 선망의 대상과도 같았다.

방금 전까지만 하여도 인상을 쓰고 있던 2학년 7반 남자들은 언제 그런 표정을 지었냐는 듯 눈을 반짝이며 주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주현은 자신에게 시선이 집중되건 말건 그건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우연이지만 콘도로 가는 동안 창현과 함께 앉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콘도까지 그냥 가느냐? 그것도 아니다. 가는 동안 휴게소에도 들릴 것이고, 첫날이니 숙소에 도착한 뒤 버스를 타고 낙산 해수욕장이나 이런 곳도 들릴 것이다. 그러려면 당연히 버스를 타야할 것이고, 지금 이 구도 그대로 이어질 것임이 분명했다.

즉, 오늘 하루 수련회 스케줄이 끝날 때까지 붙어있을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니 어찌 안 좋을 수 있겠는가.

슬쩍 시선을 옮기니 2학년 7반 줄 끝에 있는 창현을 볼 수 있었다. 이어폰을 귀에 꼽은 채 마치 세상과 단절된 듯한 분위기를 풍기는 창현.

창현을 발견한 주현은 냉큼 그의 팔을 잡아 끈다. 그러자 남학생들의 눈에 짙은 아쉬움이 서린다.

멍하니 있던 창현은 누군가가 갑자기 자신의 팔을 잡아 끌자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는다.

“어, 어?”

자신의 팔을 잡은 사람을 보니 주현이었다.

창현의 표정이 기괴하게 변했다.

왜…….

그에 대한 답을 하려는 듯, 주현이 창현의 귀에 꼽힌 이어폰을 뽑아내며 말했다.

“다른 반이랑 버스 같이 타는데 창현이 네가 2학년 마지막 반이잖아.”

그건 창현도 아는 사실이다. 자신은 2학년 7반이고 주현은 3학년 1반이니까. 그런데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주현이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버스 좌석 때문에 숫자에 맞춰서 타거든. 창현이 네가 탈 버스에 자리가 남아서 우리가 타기로 한 거야.”

“아! 대충 알겠네요.”

주현의 설명에 대충 감을 잡은 창현. 그러고 보니 담임선생이 뭐라 말하던 게 어렴풋 기억났다.

그에 주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알았으면 다행이네. 그럼 가자.”

어느새 선생들의 통솔에 버스에 탑승하는 학생들을 보며 주현이 창현을 잡아끌었다. 2학년 7반 남학생들은 버스에 탑승하지 않은 채 창현을 노려보고 있다. 선망하던 선배와 나란히 서 있으니 부러울 테지.

창현은 MP3 전원을 끄면서 그런 주현의 힘에 저항하지 않고 버스로 탑승 한다. 그리고 적당한 곳에 앉자 학생들을 인원을 체크한 뒤 버스가 출발했다.


버스에 탑승하자 학생들은 각자 떠들면서 가방에서 과자를 꺼내든다. 목적지인 설악산 인근 콘도까지 못해도 네 시간 이상 걸릴 터. 중간중간 휴게소와 다른 곳들을 들릴 테니 더 걸릴지도 모른다.

그런 긴 시간을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지루하지 않겠는가.

게다가 수련회의 특성상 학생들 모두 들뜬 기분이었기에 서로 과자를 나눠먹으며 각자 떠들고 있었다.

창현은 주현을 보면서 물었다.

“누나는 과자 같은 거 안 싸오셨어요?”

주현이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난 과자 같은 거 별로 안 좋아해서… 그냥 과일만 싸왔어.”

건강식을 좋아하는 주현은 칼로리가 높고 몸에 안 좋은 과자를 그리 즐기는 편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아무런 간식거리 없이 수련회에 오는 건 가혹한 것이었기에 그녀는 과일 간식을 준비해왔다.

그런 주현의 말에 창현이 웃음을 지었다.

“저랑 같네요? 저도 과자는 그렇게 안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심심풀이 콩만 싸왔는데.”

“그래? 나랑 비슷하네.”

주현이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창현도 과자를 별로 안 좋아한다니 왠지 공통점을 발견한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창현은 가방을 뒤적이더니 콩이 담긴 통과 PMP를 꺼내든다.

의아한 시선을 한 주현의 모습에 창현이 PMP를 살짝 들어보이며 말했다.

“실은 누나랑 같이 가게 될 줄 몰라서 가는 동안 애니메이션이나 보려고 했거든요.”

“애니메이션?”

창현의 말에 주현의 눈이 빛난다.

애니메이션이라면 그녀와 떼어놓을 수 없는 한몸과도 같은 존재가 아니던가.

주현이 호기심으로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무슨 애니메이션인데?”

“아, 그게. 누나는 봤을 수도 있는데…….”

창현이 머쓱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끝을 흐렸다. 그래도 주현이 재촉하자 대답했다.

“개구리 중사 케로로 극장판이요.”

“뭐 케로로? 그것도 극장판?”

주현이 놀라며 말한다. 개구리 중사 케로로 극장판은 그녀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애니메이션을 좋아한다고 하나 매일 연습으로 보내는 그녀는 TV로 보는 것이 다였다. 주말에는 학교 진도를 따라가기 위해 공부를 하였고, 컴퓨터를 할 틈이 별로 없었다. 즉, TV에서 방영되는 애니메이션만 본다는 것이다. 때문에 그녀는 개구리 중사 케로로를 좋아했지만 극장판을 본 적은 없다.

주현이 얼굴에 화색을 띠며 말한다.

“나 극장판 본 적 없어. 꼭 보고 싶었는데! 재미있겠다. 보여줘.”

주현이 재촉하자 창현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본 적 없다고요? 좀 의외네요. 알았어요. 그럼 같이 보도록 하죠.”

본래 창현은 일본에서 명작이라고 말하는 애니메이션을 좋아했다. 감동이 있고, 슬픔이 있는 애니메이션을 좋아했고, 건담 시리즈물도 좋아했다. 그렇게 애니메이션을 하나둘씩 섭렵해나가다 보니 더 이상 볼 애니메이션이 없어졌다.

그러다가 눈을 돌리게 된 것이 개구리 중사 케로로다.

그림체는 초등학생들이 즐겨볼 법한 것이었지만 케로로의 흡인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초등학생용 애니메이션이라고 생각하던 케로로는 창현이 놀랄 정도로 흡인력 있게 그를 매료시켰고, 한편한편 보는 사이 어느덧 방영된 모든 것을 봐버린 것이다. 과연 명불허전이었다. 이 케로로가 가져다주는 매력은.

창현은 입이 심심하지 않도록 콩을 자신과 주현 사이에 놓고 MP3에 장착되어 있던 이어폰을 뽑아 PMP에 연결하였다. 그리고 한쪽을 자신의 귀에 꼽고 다른 한 쪽을 주현에게 내밀었다.

하나의 이어폰을 공유해서 그런 걸까.

주현이 살짝 머뭇거리다가 이어폰을 받아들고는 귀에 꼽는다.

창현은 웃음을 짓고는 볼륨을 조절하며 케로로 극장판을 재생한다.

곧이어 대두 개구리라 불리는 케로로의 등장과 함께 오프닝 곡이 흘러나오며 애니메이션이 시작된다.

창현과 주현은 주변의 떠드는 소리를 무시한 채 애니메이션에 몰입해나간다.


거의 한 시간 가깝게 애니메이션을 본 것 같다.

애니메이션이 끝나자 주현이 미소를 지었다.

“역시 케로로! 정말 재밌네.”

“그러게요. 처음에는 그림체 때문에 거들떠보지도 않았는데 보면 볼수록 재미있더라고요.”

“그게 바로 케로로의 매력이지! 빠져들 수밖에 없는 매력!”

매일 대두 개구리를 좋아한다고 놀림 받던 주현은 케로로의 진정한 가치를 알아주는 창현의 말에 적극적으로 호응한다.

콩을 먹으려던 창현은 어느새 콩을 다 먹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혼자 먹을 줄 알고 많이 안 싸온 것도 있지만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오독오독 씹으며 고소한 맛을 음미하느라 쉴새없이 먹어서 그렇다.

“응? 콩 다 먹었네. 과일 먹을래?”

주현은 콩 껍질만 남은 것을 확인하고는 창현에게 말한다.

창현이 고개를 끄덕이려고 할 때, 중간 휴식을 취할겸 휴게소에 멈추겠다고 한다.

그 말에 창현은 주현을 보며 말했다.

“휴게소에 간다네요. 간단한 거 사먹을까요? 다른 애니메이션도 넣어왔거든요.”

최소 세 시간 이상 걸리기에 애니메이션을 통째로 넣어온 창현.

창현의 말을 들은 주현이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러자.”

버스가 멈추자 창현과 주현이 버스에서 내렸다. 같은 휴게소에서 내린 탓인지 학생들이 우르르 몰려나오는 게 마치 개미 떼 같았다.

창현이 주현과 걸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매일 한국말로 더빙된 걸 듣다가 일본어로 들으니까 무언가 어색하면서도 더 자연스러운 것 같아.”

“그럴 수밖에 없죠. 아무래도 일본에서 제작되었으니까요. 일본 애니메이션 기술이 정말 대단해요. 어떤 애니메이션은 캐릭터가 노래를 부르는데 입모양이 가사랑 똑같아요.”

캐릭터가 노래를 모습. 입모양과 가사가 일치한다는 건 대단한 일이다.

주현이 감탄했다.

“와! 일본 애니메이션은 대단하구나.”

창현은 웃으면서 말했다.

“우리나라도 그에 못지않다고 하는데 돈이 있어야죠. 그리고…….”

애니메이션에 대해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 주로 듣는 것은 주현이었고, 창현은 자신이 일본에서 보았던 것과 기존의 알고 있는 것들을 이야기하며 대화를 이끌어나갔다.

휴게소에 오백 명이 넘는 학생들이 습격하니 여기저기 초토화 되었고, 창현은 호두과자와 생과일 딸기주스를, 주현은 맥반석 오징어와 생과일 파인애플주스를 사서 버스로 돌아갔다.

주현은 창현이 자신의 특기라면서 케로로 성대모사를 보여주자 놀라워하면서 계속 보여달라고 하고 있었다.

“완전 똑같아! 또 보여주라.”

“하하! 제 성대모사는 비싼 거예요.”

“닳지도 않는 거 가지고 뭐 그래. 응? 더 보여줘.”

“알았어요.”

주현의 요구에 이기지 못한 창현은 케로로 성대모사를 보여줘야만 했고, 즐겁게 애니메이션을 관람하면서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일성 콘도라 불리는 곳에 도착한 창현은 방 배정을 받고 다시 버스를 타고 돌아다녀야만 했다. 그러면서 창현은 따가운 눈총을 받아야만 했다. 버스 편성이 그대로였기에 이동하는 내내 창현은 주현과 함께 했었기 때문이다.

곧 연예인이 될 거란 소문이 파다했기에 사귀는 사이라고 의심은 하지 않았지만 부러움, 질시의 눈을 보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것은 남자의 시선이었고, 여자들의 시선은 또 달랐다. 모두 주현을 부러워하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던 것이다.

학교 남학생들에게 있어 주현이 선망의 대상이라면 여학생들에게 있어 창현은 동경의 대상이었다.

남학생들 중에서 중간 아니, 그보다 작은 축에 속하는 체구지만 길게 뻗은 다리와 호리호리한 체구, 그리고 여성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뒤돌아보게 하는 잘생긴 외모는 여성들에게 있어 축복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뿐만 아니라 무관심하고 특유의 차가움은 그를 더욱 신비롭게 하였고, 그 분위기는 여학생들을 매료시키기에 부족하지 않았다. 마치 창현이 주스를 마시면, 급식을 먹으면 그 장면 하나하나가 영화처럼 보이곤 하였다.

호리호리하여 힘이 하나도 없을 것 같지만 창현이 연약한 것도 아니었다. 2학년에 올라온지 얼마되지 않아 창현이 2학년 짱이라 불리는 녀석과 시비가 붙었다. 요는 학교 체육 시간이라 옷을 빌려달라고 했는데 창현이 거부하자 자존심이 상했다고 시비를 걸은 것이다.

당시 2학년 짱을 제외하고 노는 애들 세 명이 탈의실로 들어간 창현을 둘러쌌는데, 창현을 걱정한 반학생들이 탈의실로 들어서자 그들은 놀라운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바로 2학년 짱이라고 으스대던 녀석은 입에 게거품을 문 채 쓰러져 있었고, 그와 함께 하던 세 양아치 녀석들도 창현에게 얻어 터지고 있었던 것이다.

자칫 린치로 이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고, 다수가 한 명을 핍박하던 상황이었기에 학교에서는 이 일을 크게 벌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창현의 성적은 전교에서 톱을 달렸다. 학교를 빛내줄 인물을 잘못도 없는데 처벌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하여 창현은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학교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달라졌다. 여학생들은 순정만화 남주인공 같은 창현을 보면서 더욱 열광했고, 남학생들은 짱이라 불리는 일진마저 때려눕히는 창현의 싸움 실력을 은연중 두려워하며 그와 가까이하려 하지 않았다.

어쨌던 간에 창현이 주현과 함께 하는 건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화제를 낳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어떻게 보면 학교의 킹카 퀸카들이 함께 다니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하루 일정이 끝나고 저녁이 되었다.

저녁식사를 하고 각방에서는 카드로 포커, 훌라, 원카드 등을 하였고, 동양화로 고스톱과 섯다 등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일찍 씻은 창현은 같은 방에 배정된 친구들이 노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방마다 아홉 명씩 배정되었는데, 창현을 제외한 여덟 명이 웃고 떠들며 게임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보니 왜 불현 듯 자신이 외롭다는 것을 느끼는 걸까.

‘수련회라 그런가?’

수련회에서 추억을 만든다는 것. 친구들과 함께 만드는 것이겠지.

문득 자신에게 친구가 없다는 생각이 들자 창현의 입가에 쓴 미소가 걸린다. 생각해보니 주현과 추억을 만들어도 반쪽짜리 추억인데.

이런저런 생각이 창현의 머릿속에 감돌 때,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야, 강창현.”

“……?”

창현이 시선을 힐끗 돌리니 신나게 고스톱을 치던 녀석 하나가 창현을 불렀다.

그에 창현이 그를 바라보자 다른 녀석들도 창현에게 시선을 준다.

창현을 부른 녀석은 자신의 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네가 주현 선배와 신나게 노는 것을 다 보았다. 감히 학교의 퀸카를 하루 동안 독차지하다니. 여기 앉아라. 나의 용맹한 부하들이 너의 지갑을 털어줄 것이다.”

그러면서 자리에서 일어나자 사방에서 비난이 쇄도한다.

“야 이 자식아! 왜 우리가 네 녀석의 부하냐!”

“하지만 창현이의 지갑을 터는 건 찬성이다! 앉아라! 싸움에서는 못 이기지만 도박의 세계에서는 우리가 한 수 위임을 가르쳐주겠다.”

호기롭게 창현에게 고스톱 파이트를 요청하는 반 친구녀석들.

창현의 입가에 피식 미소가 걸린다. 악의로 하는 말이 아님을 안 것이다.

“나도 한때 도박 신으로 불렸는데.”

창현의 말에 그 녀석들이 발끈한다.

“웃기고 있네! 네가 도박 신이면 난 창조신이다!”

“아놔! 그거 내가 하려고 했는데. 그럼 난 주신이다! 어쨌든 앉아라! 네 지갑을 털어버림으로써 오늘의 분노를 달래겠다!”

녀석들의 성화로 창현은 웃음을 짓고는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오고가는 화투 패.

승패가 엇갈림에 따라 희비가 교차하였고, 창현은 서서히 친구들 속에 녹아가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결코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돈도 따고.’

약 두 시간 동안 이어진 도박판은 참가자 전원의 올인으로 끝났다. 각각 오천원씩 잃은 그들은 피눈물과 함께 파산을 신청하였고, 고스톱으로 딴 돈으로 창현은 과자와 음료수를 쏨으로써 그들의 신망을 얻을 수 있었다.

수련회란 것은 어색하던 사이도 단숨에 친근하게 만들어주는 마력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그렇게 창현의 수학여행 하루는 끝이 났다.


이틀째 되는 날.

창현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음료수 페트병에 소주와 맥주를 절묘하게 위장시켜서 가지고 온 친구들은 취침시간에 조용히 일어났고, 그 뒤에 벌어진 건 술 파티였다.

창현은 고스톱으로 싹쓸이한 돈을 모두 내놓아 과자와 음료수를 샀고, 옆방 같은 반 녀석들과 뒤섞여 맥주와 소주를 마시며 광란의 밤을 보냈다.

그중에 선천적으로 술이 센 녀석도 있지만 제 주량도 모르고 먹다가 죽은 녀석도 있었다.

아침 일찍 일어난 창현은 그런 친구들의 모습을 보면서 피식 웃고는 조용히 편의점으로 갔다. 그리고 편의점에서 숙취 해소용 인스턴트 북어국을 몇 개 산 창현은 콘도에 비치된 냄비에 북어국을 끓이며 곯아떨어진 녀석들을 깨웠다. 곧 있으면 기상 시간이고 그렇게 되면 미처 몸을 추스를 시간이 없었다.

“으으으!”

창현이 깨우자 그들은 앓는 소리와 함께 부스스 일어났고, 숙취 해소용으로 내민 창현의 북어국을 마신 뒤 화장실로 들어가 씻었다. 창현은 널브러진 이불들을 치우면서 왠지 자신이 가정부가 된 느낌을 받으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광란의 밤을 보낸 여파가 모조리 자신에게 돌아온 느낌이었다.

친구들이 모두 씻고 옷을 갈아입었을 무렵, 조교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기상이다! 엇?”

으레 그러하듯 죽은 듯이 널브러져 있을 거라 생각하고 들어서던 조교는 말끔한 몰골을 하고 있는 녀석들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이내 자신의 표정이 어떠한지 깨달은 듯, 험험! 헛기침을 함과 동시에 말을 하였다.

“삼십 분 후에 아침 식사를 하러 갈 것이다. 이미 준비를 다한 듯하니 기다리고 있어라.”

그러면서 옆방으로 가는 조교는 처참하게 널브러진 녀석들을 보며 소리친다. 같은 광란의 밤을 보냈지만 한 사람의 존재가 그들의 처지를 판이하게 만들었다.

같은 방 친구들은 창현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고맙다! 네 덕에 조교 일그러진 표정을 다 보네.”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더니 그 무안한 표정은… 크크!”

고마움을 표하는 친구들을 보며 창현을 피식 웃으면서 농담을 하였다.

그들이 보기에 창현은 정말 유쾌한 녀석이었다. 워낙 여자들이 좋아하고, 성적도 좋으면서 싸움도 잘한다. 그리고 홀로 고독을 씹기에 성격이 안 좋을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정말 괜찮은 녀석이었다. 사람들끼리 어울릴 줄 알고 성격도 무난했다. 말없이 타인을 배려해주는 모습이 나이답지 않으면서 무척 멋졌다.

특히 술이 들어가면 사람이 친분을 쌓는 것이 한결 용이해진다. 같은 반 남자들이지만 모두 다 친한 것은 아니었는데, 술이 들어가고 어울리다 보니 어느덧 스스럼없이 말을 하는 사이가 되었다.

조교가 사라지자 그들은 창현을 톡톡치며 묻는다.

“야, 근데 너 주현 누나랑 어떻게 아는 거야? 우리가 알기론 그 누나 연예인이 될 거라 남자들이랑은 말도 안 한다고 하던데.”

“웃으면서 정중하게 거절하는데 그 모습이 완전 무섭다고 하더라고.”

그러면서 그들은 창현을 바라본다. 대답을 종용하는 것이다.

난데없이 진실게임 분위기가 되어버리자 창현은 어색한 웃음을 짓다가 그럴싸한 변명을 했다.

“내가 노래를 좋아해서 작곡하는 게 취미인데 우연찮게 알게 되었어. 그리고 부족하지만 내가 여러 가지 조언을 해줬고, 자연스럽게 알게 된 거야. 사귀는 사이는 아니고.”

창현의 말에 그들이 눈에 불을 키며 말한다.

“크으! 사귀는 게 아니긴 개뿔! 내가 보기엔 이미 초기단계인데! 으으! 우리 학교의 퀸카 중 하나가!”

“알고 지내던 사이가 점점 무르익어서 어느새 사귀는 사이가 되는 거지! 부럽다! 잘생기고 공부 잘하고 싸움도 잘하고 도박도 잘하는데 예쁜 여자친구까지!”

도박을 잘하는 건 딱히 부러울 것이 아니지만 녀석들은 창현을 보며 절규에 가까운 외침을 토해냈다.

그 모습에 창현은 진지하게 생각을 해야했다.

‘제3자의 눈에 사귀는 것처럼 보이는 건가?’

과연 자신의 마음은 어떨까 생각을 해본다.

자신은 주현을 좋아하는 걸까?

Yes와 No로 나누면 당연히 Yes다.

그런데 연인으로서의 감정이라면?

말 그대로 ‘글쎄’였다.

확실히 주현에게 호감은 있지만 연인으로서의 감정은 모르겠다.

아직 그런 것을 생각해본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자신은 남녀간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모른다.

너무 좋아서 죽겠다는 감정?

모르겠다. 하지만 어디서 들은 것은 있다.

사랑은 할수록 여유가 없어진다고 한다. 자꾸만 보고 싶어 하며, 자신만의 것으로 구속하고 싶어 하고, 곁에 두고 싶어 한다고 한다. 이것을 사랑이라고 하지만 집착이란 것과 종이 한 장 차이와도 같아 사랑과 집착 사이에서 헷갈려하는 사람이 많다.

그렇게 복잡한 것이 사랑이란 것이다. 그런 사랑인 것을 하기에는 창현 본인 스스로가 아직 어리다고 생각했다.

사랑을 알기엔 자신이 아직 이르다.

결론을 내린 창현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여자 친구 아니야. 그리고 난 남자랑 여자가 사귀는 게 무엇인지 잘 모르겠어.”

그냥 좋아하면 사귀는 평범한 중학생 녀석들에게는 이해가 안되는 말이었나보다. 창현의 말에 그들은 궁시렁거리면서 창현을 타박했다. 잘생긴 녀석은 여자들이 꼬이니 역시 무감각하다는 둥 여러 가지 악담을 하면서 말이다.

거기에 진짜 악의는 들어가지 않았기에 창현은 피식 웃으면서 넘길 수 있었다.

아침 식사를 한 뒤 설악산으로 가서 등산을 하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반별로 줄을 섰다가 결국 뒤죽박죽 섞이게 되었다. 그러다가 창현이 주현과 함께 가게 되었는데, 친구 녀석들이 부럽다느니 뭐니 하면서 타박을 한다.

창현은 웃으면서 그들의 타박을 흘려냈고, 옆에 있던 주현이 놀란 눈으로 창현을 보며 말한다.

“창현아! 언제부터 친구들 사귀게 된 거야?”

그 물음에 창현이 피식 웃으면서 대답했다.

“어제 같이 이야기 하면서 친해지게 되었어요. 녀석들이 술도 가져와서 마시더라고요. 같이 마시다 보니 어느새 친해졌고요.”

“그래? 잘 됐네.”

주현은 창현에게 미소를 지어주었다. 친구가 없다고 말하던 창현이 친구를 사귄 모습을 보니 조금은 나이답게 보였다.

‘솔직히 너무 애늙은이 같았어.’

처음에 자신을 만나면서 당황하던 모습을 빼고 창현의 모습은 마치 자신보다 어린 동생이 아닌 한두 살 많은 오빠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런데 창현이 이렇게 친구를 사귀고 농담을 주고받는 걸 보니 나이답고 그의 새로운 면을 보게 된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창현은 주현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친구를 사귄 것을 축하해주니 왠지 기분이 좋았다. 그러면서 염려가 담긴 목소리로 물었다.

“고마워요. 그런데 안 힘드세요?”

“응, 등산? 그리 힘들지 않아. 이래 보여도 초등학생 때부터 연습으로 다져져서 체력은 좋아.”

다른 여자들은 땀을 흘리면서 점점 뒤로 처지는데 반해 주현은 잘 쫓아오고 있었다. 게다가 숨도 거칠지 않은 게 여유가 있어 보였다.

그 모습에 창현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주현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산을 탔다.

정상에 당도한 뒤 배급하는 도시락을 받아 점심을 해결하고는 콘도로 돌아가 자유시간을 받는다. 저녁시간까지 자유였기에 친구 녀석들은 매점에 들락날락거리더니 갑자기 판을 벌이면서 창현을 끌어들인다. 어제의 리벤지라면서 고스톱 리매치를 신청하는 것이다.

창현은 웃으면서 그 도전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친구들의 지갑을 털어버린 창현은 그 돈으로 아이스크림을 쏘면서 신망을 얻는다. 누구 돈으로 누가 생색내는 꼴이었다.

그렇게 친구들과 오고가는 돈 속에 친분을 쌓아나가며 저녁을 먹고 창현은 방을 살짝 빠져나온다. 저녁 식사를 하고 한 시간 자유시간을 보낸 뒤 장기자랑을 하기 때문이다.

창현이 밖으로 나오니 주현이 다소 긴장한 얼굴로 노래를 흥얼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다가 창현이 나온 모습을 보고는 노래를 중단한다.

그 모습에 창현이 조용히 물었다.

“긴장되요?”

주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무래도 무대 위에 서본 경험은 별로 없으니까…….”

“그래요? 연습생이고, 데뷔를 하려고 하면 무대 위에 자주 설 줄 알았는데.”

“몇 번 있지만 떨리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아. 창현이는 안 떨려?”

주현의 물음에 창현은 생각해본다. 자신도 무대 위에 오르기 전 떨리는 걸까? 답은 금방 나왔다.

“물론 떨리죠. 하지만 떨리는 감정보다는 설렌다고 할까요? 내가 잘하는 만큼 상대방이 보여줄 반응은 더욱 좋을 테니까요. 마치 악기를 연주하는 것 같아요. 내가 연주를 잘하면 더욱 좋은 소리가 나오는 것처럼요.”

주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창현의 말을 음미해본다.

“비유가 좋네. 좋은 악기라… 같은 피아노라도 연주 실력이 다르면 엄청난 차이가 나니까… 창현이 넌 가끔 나이에 맞지 않게 성숙한 면을 보일 때가 있어.”

창현이 살짝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갸웃한다.

“제가요?”

“응. 나보다 한 살 어리지만 가끔 말하는 거나 행동하는 게 오빠처럼 느껴져.”

“성숙하다는 말은 들어봤지만… 누나도 그렇게 느끼실 줄은 몰랐어요.”

주현이 웃으면서 말했다.

“칭찬하는 거야. 어려운 일이 있으면 기댈 수 있을 것 같고. 좋은 의미로 하는 말이야.”

“하하! 그건 저도 알아요. 일단 노래 맞춰볼까요?”

“응.”

창현과 주현은 자유시간을 이용해 장기자랑에 참여할 듀엣 곡을 연습했다. 이미 몇차례 맞춰보았기에 창현과 주현의 목소리가 잘 어우러지며 듣기 좋은 화음을 만들어낸다.

한 시간 동안 이리저리 노래를 맞춰보며 만족한 둘은 장기자랑 시간이 시작할 시간이 되자 방으로 돌아가서 조교의 안내에 따라 콘도 내에 마련된 강당으로 향했다.


전문 사회자의 능숙한 진행 아래 장기자랑이 시작되었다.

확실히 요즘 아이들은 끼가 많았다. 오랫동안 준비한 듯 능숙하게 모 아이돌 그룹의 춤을 그대로 재현하는 여자들이 있는가 하면, 나이에 맞지 않게 뛰어난 노래를 보여주는 남자들도 있었다.

제법 수준 높은 무대가 나오자 질서 정연하게 앉아있던 2학년과 3학년은 점점 대열을 헝클어뜨리며 환호했고, 장기자랑은 점점 마지막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사회자가 마지막 참가자를 남겨두고 말한다.

“아! 마지막 참가자는 학교의 킹카와 퀸카라네요? 어디… 이야! 선남선녀군요. 남학생은 영화배우 해도 손색이 없겠어요. 게다가 공부도 잘한다니! 완전 엄친아군요. 그리고 여학생. 완전 제 스타일이네요. 하하! 농담이에요, 농담. 오! 가수 연습생이었군요. 학교의 킹카와 퀸카가 보여줄 무대 기대하겠습니다. 자! 나와주세요.”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는 사회자의 진행 아래 창현과 주현이 모습을 드러낸다. 과연 킹카와 퀸카라고 불릴 만한지 함성이 터져나온다.

사회자가 대본을 보면서 말했다.

“장기자랑 마지막 참가자! 학교의 킹카와 퀸카가 부릅니다. Endless Love!”

사회자의 외침이 끝남과 동시에 MR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창현과 주현은 서로 마주보더니 마이크를 움켜쥐고 서서히 노래를 시작한다.//

Endless Love는 미국에서도 손꼽히는 실력파 가수 루터 밴드로스(Luther Vandross)와 머라이어 캐리(Mariah Carey)가 부른 노래로서 감미로운 멜로디와 달콤한 목소리가 인상적이다.

둘 모두 둘째가라 하면 서러울 정도로 뛰어난 노래 실력을 지닌 가수들이었기에 자칫 어설프게 따라하려 들면 가창력의 비교로 처참하게 무너질 수도 있다.

주현은 그것을 알았기에 처음에 많이 걱정하였다.

이 노래가 그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것은 파워풀한 고음이 있는 것도, 남들이 어려워 할 법한 구간이 있어서도 아니다. 이 노래가 사랑받는 이유는 쉽게 따라할 수 있고, 귀에 저항없이 스며들며 사람의 마음에 파동을 일으켜서이다.

즉, 가창력에 따라 최고의 명곡도, 최고의 저질 곡도 가능하단 이야기다.

그걸 깨달은 주현은 연습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투자하여 Endless Love에 매진하였다.

이미 중학생 수준을 벗어났지만 그녀가 이토록 필사적으로 연습한 이유는 간단하다.

바로 창현의 수준 때문이다.

웬만한 가수 수준의 가창력을 보이는 창현과 아직 데뷔를 위해 연습을 하고 있는 주현의 가창력은 수준 차이가 있다.

주현은 그 간극을 채워 넣기 위해 애썼고, 한 달이 넘는 연습 끝에 창현과 좋은 화음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주현의 그러한 노력을 창현이 알아차렸기에 그가 어느 정도 도움을 준 것도 있다.

창현이 노래를 시작하자 주현이 그 뒤를 따른다.

사랑이 주제지만 굳이 사랑이란 감정을 전하지 않아도 된다. 상대를 좋아한다는 그 마음 하나만으로 충분하니까.

달콤하게, 부드럽게 흘러나오는 창현과 주현의 노래가 강당을 장악해나간다.

폭발력 넘치는 고음도 없고, 누구를 압도할 랩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들의 손짓 하나가, 그들의 음절 하나하나가 강당에 거미줄같이 퍼져가며 보는 사람의 몸을, 마음을 장악해나간다.

그리고 노래가 끝났을 때, 강당은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퍼져나간다.

짝짝짝짝짝!

우와아아아!

앵콜! 앵콜!

누가 외친 것일까.

어느 한 사람이 앵콜을 외치자 그 물결은 전체로 퍼져나가며 2학년과 3학년 전체가 앵콜을 외친다.

오백 명이 넘는 학생이 앵콜을 외쳐대는 장면은 창현과 주현이 겪어보지 못한 일이었다.

그런 앵콜 선언을 잠재운 것은 사회자였다.

창현과 주현의 노래에 흠뻑 취해있던 그는 학생들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는 사람들을 진정시켰다.

“자! 조용히! 학생 여러분의 바람 잘 알겠습니다. 본래 같으면 시간 관계상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가야 하나 이거 너무 잘해서 저도 앵콜을 듣고 싶습니다. 뭐, 오분 정도야 늦어도 상관없겠죠. 밤은 기니까요. 안 그렇습니까, 학생 여러분?”

기다렸다는 듯 학생들의 대답이 터져나온다.

네에에에에!

“좋아요. 그럼 앵콜을 부탁해보겠습니다. 혹시 다른 곡 준비한 게 있나요, 주현양?”

역시 남자보다 여자가 좋은 것일까.

사회자는 가까이 있는 창현보다 멀리 있는 주현에게 물었다.

주현은 움찔하다가 마이크를 잡고는 말했다.

“네. 김동률, 이소은의 기적도 연습했습니다.”

“좋습니다. 기적, 유명한 곡이죠. 그럼 앵콜 들어갑니다.”

잠시 후 멜로디가 흘러나온다.

창현과 주현은 서로를 힐끗 바라보고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처음과 달리 폭발적인 반응을 얻으며 그들은 성공적으로 무대를 끝마칠 수 있었다.

자리로 돌아가자 창현은 자신에게 폭주하는 관심에 어리둥절해야 했다.

반 친구들은 창현을 보면서 막 달려들었다.

“야! 도대체 언제 그렇게 노래를 부른 거야? 무슨 가수가 콘 서트 하는 거 같았어.”

“완전 잘한다! 노래 킹왕짱! 역시 넌 엄친아! 아놔, 부럽네.”

“하하!”

웃음을 지으면서 멋쩍은 표정을 짓는 창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사회자가 마이크를 잡은 채 다음 행사를 이어나간다.

“최고의 장기자랑을 보여주었으니 최고의 즉석 버라이어티를 해보겠습니다. 자! 각반 반장은 자리에서 일어나주세요.”

사회자의 외침에 가장 앞에 앉아있던 반장들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반장이 모두 일어서자 사회자가 말한다.

“자, 이제부터 선남선녀 커플 게임을 해보겠습니다. 3학년 반장들은 각반에서 제일 예쁜 반의 퀸카들을! 2학년 반장들은 각반에서 제일 멋진 반의 킹카들을 데리고 오세요.”

사회자의 말에 삽시간에 강당이 소란스러워졌다.

각반 반장들은 자기 반 아이들을 보면서 사회자의 말에 적합한 사람을 물색하고 있었고, 어디에서는 자기가 더 예쁘다는 둥 더 잘생겼다는 둥 다툼까지 하고 있었다.

창현은 멍했다. 무대도 끝났고, 제법 큰 호응도 받았으니 그 나름대로 만족하고 언제 끝나나 멍하니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사회자가 뭐라고 말하는지, 왜 소란스러워졌는지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때, 창현을 톡톡 치는 사람이 있었다.

창현이 시선을 옮기니, 그곳에는 같은 반 여학생이 창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멍놓던 걸 멈춘 창현이 물었다.

“무슨 일이야, 반장?”

창현의 물음에 반장이라 불린 여학생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창현이 너 앞으로 나오라고 해서…….”

그런 반장의 말에 같은 반 남학생들이 야유를 터뜨렸다. 창현이 있긴 하지만 내심 혹시나 하는 기대가 있었던 것이다.

“으아! 왜 또 저녀석이야! 이 부러운 자식!”

“끄아악! 주, 주화입마에 걸릴 것 같다.”

“빌어먹을 엄친아! 오늘 밤은 베개 싸움이다! 광란의 다구리를 보여주자!”

‘뭐지?’

절규하는 남학생들을 보면서 창현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반장의 손에 이끌려 앞으로 나갔다. 거의 제일 늦게 나가서 그런지 이미 무대 위에는 일곱 명의 여자와 여섯 명의 남자가 자리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창현이 올라오자 사회자가 창현을 보면서 말했다.

“이거 파란의 듀엣 곡 주인공들이 또 나오셨군요! 역시 킹카와 퀸카 이건가요! 엇? 그러고 보니 연상연하 커플이었군요.”

“응?”

사회자의 말에 두리번거리던 창현은 올라온 여자들 중 주현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주현은 창현을 발견하고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뭐지?’

멍하니 있다가 갑자기 올라오게 된 창현은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사회자는 친절하게도 그런 창현을 위해서인지 설명을 해준다.

“자! 제가 이렇게 각반의 선남선녀들을 불러오게 한 이유는 간단합니다. 바로 남자와 여자가 한팀이 되어 커플 게임을 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왜 3학년은 여자고 2학년은 남자냐고요? 그건 내가 연상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하하하! 자, 그럼 게임 룰을 설명하겠습니다.”

사회자는 너스레를 떨면서 게임 룰을 설명하였다.

게임 룰은 말 그대로 간단했다. 무대 위에 올라온 일곱남녀가 각각 한쌍씩 팀을 이뤄 총 세 게임을 한다는 것이다.

상품을 이야기하는 순간 창현은 하마터면 기침을 할 뻔했다.

“상품은 바로… 맥주 한 박스입니다! 그리고 밤새도록 놀 수 있도록 해주겠습니다.”

와아아아아아!

술! 술! 술!

알콜! 깁 미어 소주!

사회자의 외침에 별별 말이 다 나왔다. 하지만 열광하는 것은 다 똑같다.

이렇게 친절한 조교들이 다 있다니!

선생님 몇몇이 나서서 뭐라뭐라하는 것 같지만 사회자는 강력한 카리스마로 무마했다.

“어차피 요즘 중학생들도 알 거 다 알고 다 마십니다. 그걸 가지고 뭘 새삼스럽게 그럽니까. 아마 여기서 어제 몇몇 반은 술판을 벌였을 겁니다. 어차피 수련회 온 거! 먹고 한 번 죽어봐야지요. 자, 학생 여러분. 어떻습니까. 제가 내건 상품이 마음에 드나요? 특별히 우승한 각 두 반은 오전 스케줄을 빼드리겠습니다.”

그러자 다시 한 번 함성이 터져 나온다.

그 반응에 만족한 사회자가 씨익 웃으면서 말한다.

“자, 그럼 커플 선정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커플 선정은 각각의 의사가 맞아야겠지요? 이른 바 넌 내꺼! 라고 표시를 하겠습니다. 제가 하나둘셋을 외치면 각각 파트너를 하고 싶은 이성을 가리키십시오. 그리고 서로의 마음이 일치하면 팀을 이룬 것으로 해드리겠습니다. 자, 눈빛 교환하시고요. 하나, 둘, 셋!”

사회자가 셋을 외치는 순간 각각 손이 뻗어나와 마음에 드는 이성을 가리켰다.

일곱 여자 중 다섯 명이 창현을 가리켰고, 일곱 남자 중 여섯이 주현을 가리켰다. 압도적인 인기였다.

그리고 창현과 주현은 서로를 가리키고 있었다.

사회자가 그걸 보고는 외친다.

“역시 엄청난 인기! 첫 커플은 3학년 1반 퀸카와 2학년 7반 킹카가 한 커플이 되었습니다. 첫 커플이므로 두 반에게는 음료수 한캔씩 드리겠습니다. 아, 그리고 팀이 되면 팀 이름도 정해주세요.”

와아아아!

분위기가 싸늘했지만 음료수를 받은 두 반만은 열광했다.

창현과 주현은 한팀이 되어서 나란히 섰다.

아직도 멀뚱한 표정을 지은 채 창현이 말했다.

“이거 참가 조건이 뭐에요? 전 아무것도 모르고 끌려와서…….”

그 물음에 주현이 멈칫하다가 대답했다.

“그게… 각반 킹카, 퀸카를 데리고 나오는 거래.”

“헐, 그럼 제가 킹카?”

조금 어이없는 표정을 짓는 창현. 그 표정이 웃겨서 주현이 쿡쿡 웃는다.

그 사이 팀이 다 짜였고, 사회자는 그들을 나란히 세우고는 진행한다.

“자, 이 게임은 오로지 학생 여러분들의 함성으로만 평가될 것입니다. 먼저 팀 이름부터 들어보겠습니다. 자, 첫 번째 팀! 팀 이름이 뭡니까?”

창현과 주현에게 마이크를 들이대는 사회자. 미처 팀 이름을 생각하지 않은 주현이 당혹했지만 창현이 당황하지 않은 채 침착하게 대답한다.

“우주최강 케로로요.”

“…….”

창현의 말에 강당은 침묵에 빠져들었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사회자였다. 그는 당황한 감정을 웃음으로 감추려 하였다.

“하! 하! 하! 상당히 센스가 있는 이름이네요. 다음 팀은…….”

사회자는 다른 팀 이름을 묻기 시작하였고, 다른 팀들도 이름을 말하자 사회자가 진행을 하였다.

“자! 첫 번째는 여학생들의 끼를 보는 시간입니다. 바로 춤! 첫 번째 팀 퀸카부터 나와주세요! 음악 큐!”

갑작스러운 말에 주현은 당황한 표정을 짓다가 음악이 나오자 춤을 추기 시작한다. 노래와 춤은 그녀의 전문 분야였다. 몇 년 동안 연습생으로서 연습한 것은 오로지 춤이었다. 아무리 끼가 있고 재능이 있어도 몇 년간 쌓아온 노력을 단번에 추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주현은 놀이공원에서 보여주었던 라샤의 <Yesterday> 안무를 추기 시작했고, 특유의 귀여움으로 눈웃음과 새침한 표정을 보여줌으로써 남학생들을 졸도 지경으로 몰아갔다.

무인지경으로 학생들을 파헤친 주현의 귀에 사회자의 외침이 들려왔다.

“다음은 2팀!”

자연스럽게 주현이 뒤로 빠졌고, 두 번째 여학생이 나와서 열심히 춤을 춘다. 하지만 주현의 반응에 비하면 불쌍할 정도였다.

그렇게 7팀까지 모두 춤을 추었다. 온몸을 이용하여 춤을 추는 그녀들의 눈에는 반드시 승리하겠다는 결의가 보였다.

그러자 사회자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자, 이것은 연습 게임입니다. 하하하하!”

열심히 춤을 췄던 여학생들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고, 학생들도 야유를 보냈다.

우우우우!

“하하! 너무 그러시지 마시고! 자, 이번부터 본 게임입니다. 4팀이 올라갈 예정이고, 남학생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겁니다. 남자라면 역시 힘 아니겠습니까? 남자의 힘을 증명하라! 팔씨름!”

사회자의 외침과 함께 조교 두 명이 팔씨름을 할 탁자를 들고 나왔다. 그리고 여자 조교가 조그마한 통을 가지고 왔다. 사회자는 그걸 가리켰다.

“7팀인 만큼 한 팀은 부전승으로 올라갈 수 있는 영광을 드리겠습니다. 자, 1팀부터 뽑아보세요.”

창현은 주현에게 통을 가리키며 말했다.

“주현 누나가 뽑아주세요.”

“응? 어, 응.”

주현이 앞으로 나가서 번호표를 뽑았다. 그녀는 1번을 뽑았다. 부전승은 7번이므로 팔씨름을 해야 한다.

그녀의 어깨가 축 처진다.

“미안.”

“뭘요. 괜찮아요.”

그리고 차례차례 추첨을 하는데 마지막 두 팀이 남을 때까지 부전승이 나오지 않았다. 2번과 부전승만 남은 것이다.

그러나 남은 두 팀은 부전승에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창현의 겉모습만 보면 힘이 하나도 없게 생겨서이다. 싸움하고 팔씨름은 별개이니 저런 가느다란 팔뚝을 가진 창현에게 질 리가 없으리라.

마침내 창현의 상대와 부전승 당첨자가 결정되었고, 창현은 1번을 뽑았으므로 처음으로 팔씨름을 하게 되었다.

주현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창현아 너무 무리하지 않아도 돼.”

염려가 섞인 그녀의 말에 창현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내가 너무 연약하게 보이나?’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요.”

그 말과 함께 창현은 탁자를 마주하고 상대방과 마주하였다. 그리고 사회자의 말에 따라 손을 잡았다. 제법 악력에 억센 걸로 보아 운동을 좀 한 듯했다.

하지만 창현이 질 리가 없다.

‘난 내공이 있거든.’

시작! 하는 외침과 함께 상대측 남학생이 인상을 찡그리며 창현을 단번에 넘겨버리려고 한다. 자신의 힘을 어필하려는 속셈인가보다.

그러나 창현의 팔은 요지부동이었다.

피식! 하면서 웃음을 흘려주는 창현. 그와 함께 그의 팔에 힘이 들어간다.

그러자 마치 고수가 하수를 상대하는 것처럼 상대방의 팔이 서서히 넘어간다.

오오! 하는 학생들의 외침과 함께 창현이 가볍게 승리를 해준다.

그에 사회자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외친다.

“우, 우주 최강 케로로팀 승리!”

와아아아아!

소리를 한껏 지르는 3학년 1반과 2학년 7반을 향해 손을 들어 호응해준 창현이 자리로 돌아간다.

주현이 놀란 듯 두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창현을 바라보고 있다.

“창현이 힘세네?”

창현이 어깨를 으쓱한다.

“남자 구실은 할 수 있죠.”

그 모습에 주현이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러게.”

소소한 잡담을 나누는 사이 팔씨름이 진행되어 승자팀과 패자팀으로 나뉘었고, 패자팀은 쓸쓸히 자신의 반으로 귀환해야 했다.

네 팀이 남게 되자 사회자는 입가에 씨익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자! 승자 팀의 남성분들에게 합법적인 스킨쉽을 도와드리겠습니다. 이른 바 공주님 안기입니다. 남학생들은 여학생분을 공주님 안기 해주십시오. 그리고 제가 하나를 하면 앉고 둘을 하면 일어서는 것입니다.”

오오오오오!

사회자의 말에 학생들이 함성을 질렀다. 비록 안는 거지만 중학생인 그들에게 있어 그 정도만 해도 제법 농도 짙은 스킨쉽이다.

남학생 여학생 가릴 것 없이 부끄러워하는 기색이었다. 그것은 주현도 마찬가지였는데, 창현은 피식 웃음을 지으면서 주현을 안아들었다.

제일 먼저 그러자 학생들은 다시 한번 오오! 하며 함성을 터뜨렸고, 다른 남학생들도 용기를 내어 여학생들은 안는다.

‘왜 요즘 이런 게임만 하게 되는 거지.’

창현은 태연과 한 번 했던 이 게임을 떠올리면서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그 모습에 주현이 불안한 눈을 한다.

‘설마 무겁다고 생각하는 걸까?’

직접 물어보기 민망했다.

사회자의 외침에 따라 일어서고 앉기를 한다.

역시 중학생이라 그런지 힘이 약한가보다.

열 번을 채 넘기지 못한 채 두 팀이 탈락했고, 창현과 한 팀만 남았다.

사회자는 일어서고 앉기를 멈추며 다가가 인터뷰를 한다.

“자, 파트너의 몸무게를 비유해주자면?”

당장이라도 무너질 듯한 남학생에게 묻는다.

남학생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허세를 부린다.

“으으! 솜털?”

“강철로 만들어진 솜털인가 봅니다. 이렇게 힘들어하시니.”

하하하하!

학생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사회자는 이번에 여학생에게 질문한다.

“자, 힘들어하시는 남학생에게 응원 한마디 해주세요.”

“히, 힘내. 나중에 밥 사줄게.”

그 말을 들은 사회자의 눈이 번뜩인다.

“오오! 이거 데이트 신청 아닙니까? 역시 연상! 적극적이군요. 이러다가 영화보고 그러다가 결혼하는 거지요. 하하! 오늘 이 게임으로 커플 하나가 추가 되었습니다.”

혼자서 진행시켜버린 사회자는 창현과 주현에게 간다.

그는 창현에게 같은 질문을 한다.

“파트너의 몸무게를 비유하자면?”

창현은 여유가 있었다.

“가벼운 솜 인형?”

장난질을 사전에 차단해버리자 사회자가 입맛을 다시며 주현에게 말한다.

“힘들어하는 남학생에게 응원 한마디 한다면?”

주현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그녀는 창현에게 안긴 이후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창현이 여유로운지 힘들어하는지 파악도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사회자의 물음에 그녀는 어벙벙한 정신에서 저도 모르게 말해버린다.

“이, 이기면 뽀뽀해줄게.”

“…….”

와아아아아!

우우우우우!

안돼애애애!

주현의 말에 엄청난 함성과 함께 야유가 터져 나왔다.

창현도 황당한 표정이었다. 설마 얌전한 주현이 이런 말을 할 줄이야.

그때, 한쪽에서 버티고 있던 남학생이 기어코 무너지고 만다.

사회자가 입꼬리를 한쪽만 말아올린 채 썩소를 지으며 학생들에게 말한다.

“이런 남학생분들 어찌합니까. 꿈은 현실이 되어버렸군요. 큭큭큭! 승리는 2학년 7반과 3학년 1반이 되었습니다. 약속대로 맥주 한박스와 오늘 밤새도록 놀아도 눈감아드리겠습니다.”

와아아아아!

승리한 2학년 7반과 3학년 1반에서 함성이 터져나온다.

승부가 나자 창현은 주현을 살그머니 내려놓는다. 주현은 뒤늦게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닫고는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갛게 변해 있었다.

사회자는 여전히 모 만화의 캐릭터를 연상시키는 썩소를 지은 채 말했다.

“자! 이제 아까 말했던 것을 이행할 때가 왔군요. 여학생분이 뭐라고 했더라? 음, 아! 입술에 뽀뽀를 해주기로 했던가?”

그러자 바로 야유가 터져 나온다.

우우우! 입술 아니다! 우우!

악덕 진행 사회자 물러가라!

강력한 남학생들의 반발에 사회자가 움찔하며 뒤로 물러선다.

“아, 알겠습니다. 그럼 볼 정도로 타협을 하죠. 어떤가요?”

그 정도야 뭐… 마음이 쓰리지만 납득하는 남학생들이었다.

자기들 멋대로 정하는 모습에 창현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주현도 안절부절 못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이 망할 놈의 사회자는 학생들을 선동하기에 바빴다.

“자, 이왕 이렇게 된 거 후다닥 해치워버립시다. 자 모두 저를 따라해주세요. 뽀뽀해!”

뽀뽀해!

“뽀뽀해!”

뽀뽀해!

사태를 막장의 끝으로 몰아가는 사회자.

그 선동에 주현의 얼굴이 터질 것 같은 토마토처럼 붉어지더니 이내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는 창현의 볼에 살짝 뽀뽀를 한다.

그 광경에 남학생은 물론 여학생들도 열광한다.

우와아아악!

꺄아아아아!

“…….”

창현은 주현이 뽀뽀한 볼을 살짝 매만진다. 촉촉하면서 부드러운 느낌. 결코 나쁘지가 않다.

“자, 이게 끝이 아닙니다. 우승 팀은 정해졌지만 우승 기념 팬 서비스 정도는 해주어야겠지요? 자, 가지고 오세요.”

사회자의 말에 조교들이 무슨 돌림판을 가지고 온다. 그리고 탁자를 치워내고 돌림판을 가져다놓는다.

“우승팀이 보여주는 서비스 게임입니다. 총 네 가지며, 각각 말하자면 빼빼로 게임과, 커플 댄스, 사랑의 세레나데, 그냥 키스입니다. 여학생분이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그 말과 함께 사회자가 주현에게 다트를 건넸다.

그걸 받아든 주현의 눈이 거세게 흔들렸다.

그녀의 시선은 한곳을 향하고 있었다. 큼지막하게 적혀있는 ‘키스’ 란 단어를.

주현은 자신이 그걸 보고 있다는 생각에 고개를 젓는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지금.’

제일 무난한 게 커플 댄스와 사랑의 세레나데다. 사회자가 다트 판을 돌리자 어느 정도 거리를 벌린 그녀가 다트를 꾹 쥔다. 그리고 힘차게 다트를 던진다.

팍!

경쾌한 소리와 함께 다트가 박혀들었고 서서히 회전이 멈추면서 학생들의 시선이 집중된다.

그리고 터져 나오는 탄성.

다트는 커플 댄스에 박혀 있었다.

묘한 기대감이 있었던 탓일까.

학생들은 잘 됐다고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쉬워하였다.

사회자도 아쉬워하는 기색이었다.

“아쉽군요. 여기서 키스가 나왔다면 완전 대박이었을 텐데. 자 그럼 마지막 커플 댄스로 끝을 맺겠습니다. 원하시는 곡 있나요?”

그 물음에 창현이 주현에게 슬쩍 묻는다.

“누나 <Laser> 안무 알아요?”

“응, 알지.”

“그래요? 그럼… 라샤의 <Laser> 해주세요.”

“역시 범상치 않은 우승팀! 우주최강 케로로팀의 커플 댄스로 장기자랑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창현이 주현을 보면서 말했다.

“제가 시린, 세룬 파트 맡을게요.”

“응.”

그렇게 협의를 보자 음악이 흘러나온다. 그리고 창현과 주현이 능숙하게 안무를 추기 시작한다.

창현이 <Laser>의 안무를 아는 것은 간단하다. 예전 라샤의 데뷔 무대를 갖기 전 라샤가 창현에게 안무를 익혀야 한답시고 엄한 안무를 가르친 것이다. 그것이 바로 <Laser>의 안무였다. 당시에는 인상을 팍팍 썼는데 이런식으로 응용이 가능했다.

능숙한 창현과 주현의 안무에 학생들이 열광한다.

이거 점점 무대 위에서 떨리기는커녕 중독이 되는 게 아닐까 싶다.

창현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고, 주현의 입가에도 즐거운 미소가 맺혔다.

그렇게 장기자랑이 끝났다.


장기자랑이 끝나고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창현은 방으로 돌아가자 친구들에게 지독하게 시달려야했다. 이유는 주현에게 뽀뽀를 받아서란다. 그러면서 베개를 무자비하게 던져대는데, 하마터면 창현은 방에서 베개에 묻혀 죽을 뻔하였다.

이리저리 잡담을 나누면서 친구들과 농담을 하던 창현은 갑자기 조교가 자신을 찾자 의아한 얼굴로 방을 나선다.

창현을 찾은 조교는 아까 장기자랑에서 막장 진행을 하던 사회자였다.

그는 사회를 볼 때와 전혀 다른 얼굴로 창현을 맞이했다.

“어서와라.”

창현은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하고는 물었다.

“무슨 일로 부르셨죠?”

지금은 엄연히 자유시간이다. 창현은 조교가 자신을 찾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조교가 살짝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부탁할 게 있어서 불렀다.”

“부탁이요?”

조교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눈을 빛냈다.

“그래. 일단 네가 부른 노래를 잘 들었다. 사람들은 그저 환호했을 뿐이지만 여기서 일하면서 제법 보는 눈을 길렀거든. 나는 네가 모든 실력을 발휘하지 않고 그 너와 함께 한 여자 아이에게 맞춰주는 걸 알 수 있었다. 맞지?”

“…….”

창현은 침묵했다. 설마 그걸 알아차릴 줄이야. 그는 마냥 가볍게 보였던 이 조교가 보통 눈썰미를 가지고 있는 게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한순간 창현과 조교의 눈이 마주쳤다. 그는 의문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닌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모든 걸 알고 있으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후우! 맞아요. 저 혼자 이탈하는 것보다 조화를 이루는 게 중요하니까요. 그런데 그걸 확인하려고 절 부른 건가요?”

조교가 고개를 젓는다.

“아니, 말하지 않았나? 부탁을 하려고 불렀다고.”

“무슨 부탁인데요?”

상식적으로 조교가 자신에게 할 부탁은 없다. 이미 장기자랑이 끝났고 더 이상 노래를 부를 이유도 없지 않은가?

그런 창현의 의문을 풀어주듯 조교가 입을 열었다.

“조금 있으면 캠프 파이어를 하는데 거기서 촛불을 들고 부모님에게 감사의 마음을 떠올리는 것이 있다. 알고 있지?”

솔직히 창현은 모른다. 여태까지 수련회에 참석해본 적이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친구들이 말한 것은 들었다. 수련회에 가면 맨날 캠프 파이어를 하고 촛불 들게 한 뒤 억지 눈물을 쏟아내게 한다는 것을 말이다.

이야기로나마 들었기에 창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일단 알고는 있습니다.”

창현이 안다고 하자 조교는 편하게 말했다.

“내 부탁은 거기서 네가 노래를 불러줬으면 한다는 거다.”

“제가요?”

창현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왜 자신에게 노래를 부탁하는 걸까?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조교가 이유를 설명했다.

“솔직하게 말하면 요즘 캠프 파이어에서 부모님에게 감사를 하는 마음을 가지는 학생들은 거의 없다. 몇몇 감수성이 풍부한 학생들만 진정으로 그러할 뿐이지. 비록 돈을 받고 학생들을 받아주지만 우리는 그 아이들에게 정말 부모님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해주고 싶다. 보통 때라면 그냥 지나쳤을 테지만 네 노래 실력이라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아서 부탁하는 거다.”

아직 어린 창현을 조교는 무척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나이가 어리다고 무시하는 경향을 갖는 사람들과는 틀린 듯했다.

그 모습이 창현의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좋은 취지에서 부탁을 하는 것이 아니던가.

다른 일이었다면 충분히 고심을 했을 테지만 창현은 수련회라는 곳에 와서, 추억을 만들 수 있는 이곳에서 자신이 무언가를 하고 싶었다.

잠시 고민하던 창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할게요. 절 믿어주시니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겠네요.”

조교의 입가에 웃음이 떠올랐다.

“수락해줘서 고맙다. 마법의 성이란 노래 알지? 그걸로 할 거야.”

“유명한 노래인데 모를 리가 없죠. 알겠습니다. 그럼 캠프 파이어 할 때 하도록 할게요.”

“그래.”

어떻게 보면 이것은 엄청난 모험이었다. 고작 중학교 2학년생에게 수련회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부분을 맡겨버린 셈이니 말이다.

하지만 조교의 눈은 흔들림이 없었다. 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매일같이 학생들을 봐온 그는 자신의 안목을 믿었다.

“어쩌면 내 조교 인생에서 최고의 무대가 나올지도.”

그는 무척 기대가 되는 듯했다.


자유시간이 끝나고 학생들은 조교의 통솔 아래 콘도 뒤편에 마련된 운동장에 모였다.

이미 초등학교 때부터 몇 번씩이나 수련회에 참석했던 학생들은 무엇을 할지 알았기에 심드렁한 반응이었다. 그러나 밤이라는 사실과, 수련회의 마지막 밤이라는 점, 그리고 캠프 파이어라는 거대한 불장난은 언제나 즐거웠기에 설레는 눈은 감출 수 없었다.

수련회에 처음 참석해보는 창현은 그러한 것들 하나하나가 신기했다.

나무를 쌓아 그것을 불태우는데 별로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친구들과 함께라서 그런지 유쾌하고 즐거웠다. 그리고 가볍게 반끼리 팀을 하여 게임을 하는데 그것도 재미있었다.

점점 분위기가 클라이막스로 향하자 창현은 조교의 은밀한 손짓에 즐겁게 하던 게임을 중단하고 조교의 안내에 따랐다.

창현이 도착한 곳은 공터에 마련된 무대 뒤쪽이었다.

사회자를 맡았던 조교는 창현을 반겼다.

“잘 왔다. 조금 있다가 시작할까 싶은데 어때, 괜찮겠어?”

창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야 상관없어요.”

“그래. 그럼 시작하도록 하지.”

“아참. 제가 마법의 성 부를 때요 전 뒤에서 조용히 부르려고요.”

창현의 말에 조교의 눈에 왜? 라는 의문이 생겼다.

그에 창현이 피식 웃으면서 설명했다.

“이건 콘서트가 아니잖아요. 어차피 주 목적은 애들의 감수성을 자극하는 거고요. 괜히 제가 앞으로 나서면 안 좋은 인식을 심어줄 수 있을 것 같아서요. 뭣하면 초대 가수라고 해주던가요.”

놀라울 정도로 세심하였다.

조교의 눈에 놀라움이 번져나갔다.

중학교 2학년생이 이런 생각을 할까?

그가 십여 년 동안 조교 생활을 해오면서 느낀 것은 점점 변해가는 학생들이었다.

십여 년 전만 하여도 학생들은 제법 순수했다. 함께 웃고 서로를 돕고 배려할 줄 알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눈에 띄게 이기적으로 변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단체 행동에서부터 심하게 삐끄덕거리기 시작했고, 다른 사람들이 피해를 입음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심지어 조교들에게까지 들이대는 모습을 보면 월급만 받지 않으면 한 대 쥐어박고 싶은 심정마저 들 정도였다.

물론 아직까지 착한 학생들은 많지만 이렇듯 여러 사항을 세심하게 배려하는 학생은 없었다.

조교는 놀라움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너 정말 대단한 녀석이구나. 그렇게 세심하게 생각을 해줄 줄이야. 알겠다, 네 말대로 하지.”

“뭘요. 그저 여러 가지 생각해보고 말씀드린 것뿐인데요. 버릇없다고 안 해주셔서 감사해요.”

창현은 살짝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 모습에 조교는 미소를 지었다. 정말 보통 녀석이 아니었다.

“버릇없긴. 적어도 옳은 말과 버릇없는 말은 구분할 줄 안다. 자, 그럼 시작한다. 잘해라.”

무대 위로 올라서는 조교. 그리고 진중하던 방금 전과 달리 아까 전 막장 진행 모드로 변환하여 능숙하게 분위기를 이끈다.

옆에서 보니 정말 놀라운 변신이 아닐 수 없다. 심지어 이중인격자인지 의심이 될 정도였다. 사회자가 진행하는 사이 창현은 마이크를 받고 노래를 준비하였다.

능숙하게 분위기를 조성하여 서서히 분위기를 낮게, 어둡게 가라앉힌다.

그리고 조용하게 흘러나오는 멜로디. 마법의 성이었다.

그 멜로디를 음미하며 창현은 마이크에 음을 입혀나간다.

천천히 흘러나오는 마법의 성.

창현에게 있어 마법의 성은 많은 사연을 간직한 곡이다.

음향총서를 얻기 전 작곡가를 꿈꾸던 창현은 마법의 성을 들으며 자신이 작곡가가 되면 반드시 그러한 곡을 만들겠다고 다짐하곤 하였다. 그때는 잘 몰랐지만 음향총서를 얻고, 이해도가 넓어지면서 그때 왜 그러했는지 알 수 있었다.

마법의 성이란 곡은 창현의 이상향이었다.

마음을 울린다. 그 사람의 감수성을 자극한다.

부드러운 멜로디. 감미로운 목소리.

노래를 부르면서 창현은 그 노래에 취해간다.

창현이 노래를 부르는 것인가? 아니면 노래가 창현을 부르는 것인가?

적어도 지금 그에게 있어 그러한 경계는 무의미했다.

목소리에 감정이 묻어나오고, 가사에 창현의 목소리가 덧대어지며 가사 하나하나에 감정이 실려온다.

처음에는 뻔한 레파토리인지라 심드렁한 반응을 보이던 학생은 갑자기 흘러나오는 마법의 성이 라이브 곡이라는 것에 놀라고, 흘러나오는 가사에 놀란다. 그리고 그 놀라움은 잠시, 점점 그들은 그 노래에 취해간다.

배경음처럼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창현의 노래에 사회자의 목소리가 더해진다. 예민해진 그들의 감수성에 조금씩 접근해나가는 한마디의 말들.

자신을 위해 힘들게 살아가시는 부모님의 모습.

한 번쯤 감사의 인사를 표하고 싶은 그 마음.

쑥스럽지만 힘든 부모님에게 안마를 해주고 싶었던 마음과 힘들고 지친 얼굴에 한줄기 웃음을 만들어주고 싶은 마음.

말 하나하나가 이어지고, 노래가 그 감수성을 더욱 예민하게 만들어줌으로써 학생들의 눈이 붉어진다. 감수성이 풍부한 학생들은 눈물을 보인다.

분위기가 조성되자 사회자는 말을 멈춘다. 학생들은 각각의 생각에 잠겨 이어지는 마법의 성에 취해간다. 오백 명이 넘는 학생들이 노래에 빠져드는 모습은 장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마침내 노래가 끝났다. 그럼에도 운동장은 조용했다. 창현이 부른 노래의 여운에 취해 있었다.

조용히 무대 아래로 내려온 사회자는 창현에게 엄지손가락을 내민다.

“넌 정말 대단한 녀석이야.”

그에 창현이 미소를 짓는다. 그에게도 만족할 만한 무대였다.


“분명 창현이야…….”

두 눈가가 여전히 붉은 주현이 중얼거린다.

2학년 끝반인 7반과 3학년 첫반인 1반은 공터에 나오면 항상 붙어있다.

게임을 하면서 주현은 간간이 창현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창현이 조교의 이끌림에 사라지더니 곧이어 마법의 성이 흘러나오는 것이 아닌가?

주현과 같은 방에 속한 친구들은 모두 울었다. 그만큼 감수성을 자극하는 최고의 노래였다.

방으로 돌아온 여학생들은 아직도 그 노래의 여운에 헤어 나오지 못한 채 약간 붉어진 눈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야기의 화제는 당연히 마법의 성을 부른 창현이었다.

“도대체 누가 부른 걸까? 유리상자는 아닌 거 같은데.”

“그래도 완전 잘 부르는 것 같아. 정말…….”

“노래를 들으면서 그렇게 감정이 격하게 움직인 건 처음 같아.”

“누굴까? 보고 싶다.”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면서 주현은 생각에 잠겨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친구 한 명이 주현을 툭 쳤다.

“주현아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 거야?”

수학여행의 마력 때문인지 주현도 같은 방 친구들과 서먹함 없이 친해질 수 있었다.

“응? 아, 그냥…….”

“그냥은 무슨. 그나저나 주현이 넌 누굴 거 같아? 그 마법의 성 부른 사람 말이야.”

“아, 그거? 아무래도…….”

“아무래도?”

갑자기 친구들의 눈이 가늘어진다. 주현이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것을 간파한 것이다.

친구들이 자신을 가늘게 치뜨고 바라보자 주현이 당황한다.

“왜, 왜 그래?”

“주현이 너 아는 거지? 그 마법의 성 부른 사람.”

무시무시한 얼굴로 추궁해오는데 절대 거짓말을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세상에나, 방금 전만 해도 그렇게 착했던 애들이 이렇게 변하다니.

주현은 이실직고 할 수밖에 없었다.

“응. 마법의 성 부른 사람 창현이 같은데…….”

“뭐? 창현이? 설마 강창현? 와!”

주현의 말에 방안에 있던 친구들이 난리를 쳤다.

“꺄아! 마법의 성 부른 사람 창현이래!”

“역시 완전 엄친아! 잘생기고, 노래 잘하고, 공부 잘하고, 싸움도 잘하고 완전 짱이야!”

“응. 평소에는 잘 몰랐는데 노래 부르는 모습 보니까 완전 멋있더라.”

“응응! 완전 멋있어. 있잖아, 주현아. 혹시 창현이 여기로 불러줄 수 있어?”

“……!”

한 친구의 말에 주현은 물론 방안에 있던 여자들도 깜짝 놀란 표정을 짓는다.

“야! 그게 무슨 말이야. 왜 여기로 창현이를 불러.”

“그럼 싫어? 난 솔직히 와줬으면 좋겠는데.”

“그건 나도 찬성! 남자 녀석들 와봤자 추파나 보낼 텐데 창현이는 어차피 한 명이잖아. 설마 우리가 한 명에게 이상한 짓 당할까.”

“그러게. 어차피 수학여행 마지막 날인데 여자들끼리 보내는 건 조금 그렇고…….”

“하지만 남자들이 발들인 적 없는 금남 구역인데…….”

반대 의견도 있었지만 찬성이 압도적이었다. 반대 의견을 보이는 애들도 그리 싫은 기색이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시선은 삽시간에 주현에게 집중되었고, 시선 집중 포화에 주현은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응. 알았어. 하지만 말해봤자 안올 확률이 높은데…….”

그에 친구가 해결책을 제시해주었다.

“당연히 꾀를 써야지. 솔직히 창현이 걔 여자 안 좋아하잖아? 하지만 친한 누나의 부탁을 어찌 거절하겠어? 잠깐 오라고 한 뒤에 들여보내면 돼.”

“그거 속이는 거잖아.”

“속이긴 무슨! 일단 들여보낸 뒤에 선택을 종용하면 되는 거야. 안 그래?”

순간 빠르게 시선을 교환한다. 그리고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친구들. 눈빛으로 무언가를 주고받은 듯했다.

그리고 주현에게 창현을 부르라고 압박한다.

일 대 다수의 대결이다. 주현은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미안해, 창현아. 내가 애들 보고 살살 다루라고 해볼게.’

결국 창현에게 통화를 거는 주현.

컬러링과 함께 창현이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창현아, 나야.”

-네, 당연히 알죠, 주현 누나. 그런데 이런 밤에 갑자기 왜요?

그러자 옆에 있던 친구가 주현에게 소곤소곤 말한다.

“마법의 성 불렀냐고 물어봐줘.”

“있잖아, 그 캠프 파이어에서 마법의 성 부른 거 창현이 너야?”

주현의 물음에 창현이 잠시 침묵하다가 대답한다.

-…어떻게 아셨어요?

창현이가 불렀다는 말.

방안에 있던 이들은 눈빛을 교환하며 환희에 가까운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주현을 다시 한 번 압박한다.

어느새 한통속이 된 주현은 잠시의 머뭇거림도 없이 말한다.

“왠지 들어본 목소리인 거 같아서. 그런데 잠깐 전해줄 게 있는데 와줄 수 있어? 내가 가고 싶지만 좀 그래서…….”

콘도 안이라지만 여자 혼자서 돌아다니는 건 아무래도 모양새가 좋지 않았다.

창현도 수긍했다. 어차피 밤은 길고 시간은 많으니까.

-알았어요. 지금 갈게요. 그런데 누나 몇호에 있는데요?

“606호에 있어. 오면 전화줘.”

-네. 이크! 친구 녀석들이 오네요. 그럼 조금 있다 뵐게요.

“응.”

주현이 통화를 끊자 방안에 있던 친구들의 입가에 미소가 맺힌다.

미션 첫 단계 클리어였다.


주현과 통화를 끝낸 창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뭘 전해준다는 거지?”

뭔지 짐작이 가지는 않았지만 일단 전해줄 게 있다니 창현은 지갑과 핸드폰을 챙긴 채 방을 벗어났다.

아까 커플 게임에서 창현과 주현이 속한 우주최강 케로로팀이 승리함으로써 2학년 7반과 3학년 1반은 각 방마다 맥주 한박스에 있는 1/4에 해당하는 양을 지급 받은 상태고, 내일 오전 스케줄을 비워둔 상태였기에 벌써부터 광란의 술 파티를 벌이고 있었다.

조용히 방에서 빠져나온 걸음을 옮겨 주현이 머물고 있는 606호로 향했다. 창현이 속한 방이 506였기에 바로 위층이었다.

‘방 앞에 도착하면 전화하라고 했지?’

방 앞에 도착한 창현은 주현이 했던 말을 떠올리고는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전화를 걸자 갑자기 닫혀있던 문이 열리더니 창현의 팔을 잡아끌어 방안으로 들이더니 다시 문이 닫힌다.

“……?!”

갑작스러운 사태에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는 창현.

그런 창현을 보며 주현이 어색한 미소를 지은 채 맞이했다.

“미안 창현아. Welcome to Hell…….”

“응? 주현 누나, 그게 무슨…….”

아직까지 정신없던 창현이 무슨 사태인지 파악을 못할 때였다.

갑자기 여자 선배들이 우르르 나오더니 창현을 맞이하는 것이 아닌가?

“꺄! 정말 왔어. 창현아 환영해!”

“화닝화닝! 어서 와!”

“주현아, 잘했어! 자! 일단 안으로 들어와.”

“어? 아, 네.”

그러면서 여자 선배들이 창현을 안으로 이끈다. 창현은 아직도 얼떨떨한 얼굴로 그녀들이 잡아끌자 순순히 방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앉게 되자 창현이 주현을 보면서 물었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에요, 누나?”

창현의 물음에 주현은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하지 못한 채 대답한다.

“으응, 그게… 마법의 성을 네가 불렀다고 하니까 애들이 보고 싶다고 해서…….”

“아, 마법의 성…….”

주현과 통화 내용을 떠올린 창현이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인다.

그때, 여자 선배가 끼어들며 말했다.

“응! 마법의 성 완전 감명 깊게 들었어. 완전 짱이더라.”

그러자 다른 여자 선배가 타박하며 말한다.

“얘는! 짱이 뭐니. 완전 잘 들었어요, 창현군.”

“어머어머! 이 기집애가 창현이 왔다고 조신하게 구네. 너 이러는 거 아니다.”

“내가 뭘!”

순식간에 시끄러워지는 방. 남자 방과는 비교도 안되는 하이톤의 목소리가 숨 가쁘게 공방전을 벌인다.

그런 창현을 보며 주현이 말한다.

“미안. 애들이 널 너무 보고 싶다고 해서 속였어.”

“하하, 아니에요. 뭐 그럴 수도 있죠. 그런데 괜찮아요? 여자들이 머무는 방에 남자를 들여도…….”

“둘이 뭘 그리 속닥거리는 거야!”

창현과 주현이 소곤거리며 이야기를 나누는 게 마음이 들지 않는지 끼어들며 묻는 여자 선배.

아직 어색함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창현이 말한다.

“아, 여기 선배님들 방이잖아요. 여자 방인데 제가 들어오는 게 좀 폐가 되는 것 같아서…….”

“뭘 그거 가지고 그래. 우린 창현이를 믿어. 그러니 괜찮아.”

하지만 요즘 여자 선배들은 쿨했다.

단 한 방에 창현을 유치해버린 여자 선배는 아직도 티격태격하는 친구들을 보며 말했다.

“야! 싸우지 말고 우리 창현이 왔으니 진실게임 하자!”

“진실게임? 완전 좋지!”

“오케이! 진실게임 콜!”

엄청난 호응 속에 순식간에 둥근 원을 그리며 앉는다.

그리고 삽시간에 진실게임을 시작하게 되었다.

빗 하나를 꺼내든 여자 선배가 중앙에 놓으면서 말한다.

“룰은 간단해. 이 빗을 돌려서 요 끝부분이 가리키는 상대가 맞은 편 사람에게 질문을 할 수 있어. 물론 곤란한 것도 있기에 노 코멘트도 가능하지. 하지만 노 코멘트는 이걸 마셔야 해.”

갑자기 냉장고에서 맥주와 콜라, 사이다, 출처 불능의 소주를 꺼내어 대접에 콸콸콸 부어 배합 엉망의 폭탄주를 만드는 그녀.

“으으! 보기만 해도 속 쓰려!”

그걸 보면서 여자 선배들은 인상을 쓰며 외면했다. 보기만 해도 취기가 물씬 풍겼다.

“대답 안 하면 마시는 거야. 자! 그럼 나부터 돌린다.”

그러면서 빗을 돌리는데 모두가 침을 꿀꺽 삼키고 그것을 바라본다.

빠르게 회전하던 빗은 이내 천천히 멈추기 시작하고, 끝은 주현을 가리킨다.

“와아! 주현아! 질문 잘해!”

긴장하던 여자 선배들은 환호성을 터뜨린다. 빗의 끝이 주현을 향하고 있던 것이다. 그리고 주현의 맞은 편에는 창현이 있었다. 즉, 주현의 질문에 창현은 진실 되게 대답해야 하는 것이다.

친구들의 환호에 주현은 어색하게 웃었고, 창현은 복잡한 표정이었다.

주현은 친구들의 질문 쇄도에 잠시 생각하다가 묻는다.

“음, 처음이니까 센 질문은 안 할게. 창현이 넌 노래를 매우 잘하던데 어떻게 그런 걸 잘하게 되는 거야? 분명 독학은 아닌 것 같은데…….”

이것은 그녀가 그동안 가지고 있던 큰 의문 중 하나였다. 열다섯 살 소년인 창현은 그녀가 봐도 너무나 뛰어난 노래 실력과 보컬 트레이닝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언젠가 한 번 반드시 물어보고 싶은 내용이기도 하였다.

주현의 질문은 제법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이었다.

방금 전 캠프 파이어에서 마법의 성을 듣지 않았던가. 웬만한 전문 가수는 저리가라 할 정도의 가창력이었다.

창현은 어색한 표정을 짓다가 대답을 하였다.

“이거 저한텐 좀 센 질문인데… 알았어요. AA엔터테인먼트라고 아세요?”

다른 여자 선배들은 창현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지만 주현은 잘 알고 있었다.

“응. 알지. AA엔터테인먼트면 가수 현하고 라샤가 소속되어 있는 곳이잖아.”

주현의 입에서 현과 라샤가 언급되자 순간 눈에 불똥이 튕기는 여자 선배들. 창현을 바라보며 대답을 종용한다.

그 기세에 창현은 움찔하면서 대답한다.

“에, 그곳 사장님이 저희 아버지시거든요.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체계적인 보컬 트레이닝하고 작곡하는 법 같은 걸 배웠어요. 그래서 어느 정도 노래를 부르는 게 된 거에요.”

창현의 말은 주현에게 있어 놀라움을 주기에 충분했다.

분명 무언가 연예계에 연관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설마 창현이 AA엔터테인먼트 사장의 아들이었다니.

그제야 창현이 어떻게 윤아에게 라샤와 현의 싸인이 담긴 CD를 선물해줬는지 납득할 수 있었다.

다른 여자 선배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물었다.

“그럼 가수 현하고 라샤는 만나봤어? 특히 현은 어떻게 생겼어? 가르쳐주라.”

하지만 창현은 게임의 룰에 입각하여 거절했다.

“그건 다른 질문이네요. 빗을 돌려주세요.”

“칫! 안 넘어오네. 주현아, 네가 빗 돌려.”

주현이 빗을 돌리자 다른 여학생이 걸렸고, 처음부터 누가 좋냐는 둥 강력한 질문으로 분위기는 점점 흥미있게 진행되어갔다.

마침내 빗 끝이 창현을 가리켰는데, 창현은 입가에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주현은 움찔했고, 다른 여자 선배들은 흥미로운 눈길로 바라본다.

하지만 회심의 미소와 달리 창현은 간단하게 질문했다.

“음! 주현 누나는 저를 남자로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창현의 물음에 여자 선배들이 난리가 났다.

꺄아! 완전 대담해!

저거 고백 아니야? 장난 아니다!

그에 주현의 얼굴이 붉어졌고, 창현은 약간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하하! 너무 장난치지 마세요. 주현 누나 얼굴 터질 것 같잖아요.”

창현의 말에 여자 선배들이 일제히 주현을 바라본다.

주현은 여전히 붉은 얼굴로 조그마하게 대답한다.

“그냥 괜찮은 것 같아. 얼굴도 성격도…….”

너무 무난한 대답에 야유가 터져 나왔지만 그렇게 대답하는 것만으로도 주현은 충분히 부끄러웠다.

빗은 다시 돌아갔고, 이번에는 주현을 가리켰다.

주현은 기다렸다는 듯 창현에게 질문했다.

“창현이 넌 좋아하는 여자 있어?”

그 질문에 여자 선배들이 일제히 드디어 올게 왔다는 표정으로 창현을 주목한다.

창현은 피식 웃으면서 혀로 입술을 축인다. 매혹적인 그 모습에 여자 선배들이 살짝 얼굴을 붉히며 창현을 주시한다.

도대체 창현이 좋아하는 여자는 누굴까? 중학교 2학년인 만큼 누구 하나쯤은 있겠지?

묘한 기대감이 방안에 감돈다.

그러나 입에서 흘러나온 창현의 말은 황당 그 자체였다.

“노 코멘트! 술 마실게요.”

그러면서 여태껏 누구도 도전하지 않던 폭탄주를 들이킨다.

알싸한 폭탄주를 단번에 들이키며 창현은 멍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여자 선배들에게 웃음을 짓는다. 소주가 많이 섞여 있어 창현의 얼굴은 상당히 붉어져 있었다.

맥빠진 여자 선배들 중 하나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소리친다.

“에이! 창현이가 그걸 노 코멘트 하니 재미가 없어진다. 게임 종목 바꾸자. 왕게임이다. 왕이 되어서 창현이나 실컷 부려먹자.”

“좋아! 가는 거야!”

결정적인 질문을 빠져나간 창현에게 엄청난 분노를 느끼며 대동단결 하는 여자 선배들.

그날 창현은 여성의 무서움을 제대로 각인 시키고야 말았다.

그렇게 창현에게 있어 생애 첫 수련회는 여러 추억거리를 만듬으로써 끝을 맺었다.




제15장 뮤직비디오 제작




수학여행은 창현에게 많은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돌아올 때도 주현과 함께 앉아 재미있게 애니메이션을 관람하며 돌아온 창현은 하루 푹 쉰 뒤 곧장 라샤의 싱글 앨범 녹음에 나섰다.

창현이 이번 라샤의 타이틀 곡으로 내세운 곡은 신나는 음악들 위주로 구성되어 있던 1집과는 달랐다.

<가면의 기사>라 이름 붙인 이 곡은 라샤의 여성적 이미지를 극대화 시켜줌과 동시에 그녀들이 진정한 실력파 가수로 인정받을 수 있게 만들 일종의 분수령에 속하는 곡이었다.

<가면의 기사>의 곡 내용은 간단하다.

한 소녀가 있었다. 잘나가던 기업의 영양이던 그녀는 어느 날 가업이 몰락하면서 모든 재산을 잃게 되었고,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간다.

그런 소녀에게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 사람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힘이었다.

자신의 힘을 숨긴 소녀는 평범하게 살아가려 하지만 세상은 그녀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고, 정부 기관에서 그녀를 납치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그럴 때 그녀의 앞에 한 소년이 나타난다.

반쪽 가면을 쓰고 있는 가면의 기사.

그는 소녀가 힘들 때 홀연히 모습을 드러내어 그녀를 위험으로부터 구해준다.

소년은 자신의 모든 것을 버렸다. 그리고 소녀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고자 한다. 자신으로 인하여 몰락한 소녀의 집안과 고통 받는 소녀의 모든 어려움이 자신의 탓이라 여기며 그녀를 위해 살아갈 것을 맹세한다.

소녀는 소년의 마음을 읽었고, 그때부터 소녀와 소년의 묘한 관계는 시작된다.

그리고 소녀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가면을 쓴 소년이 나타나고 자신을 위기에서 구해주는 소년에게 소녀는 호감을 느낀다.

하지만 마지막에 와서 소년은 그런 소녀를 지켜내지 못하게 된다. 소녀는 죽어가면서 자신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하며 소년을 용서하고 감싸주며 목숨을 잃는다.

마치 소설과도 같은 노래는 애틋한 사랑과 이별,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두근거리는 설렘이 깃든 노래였다.

라샤는 창현에게 받아든 이 노래를 들으면서 전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창현에게 간략한 노래의 개요를 듣고, 가사를 음미하면서 듣는 그녀들은 가사 하나하나에 스며든 창현의 감정을 느끼면서 두려움에 가까운 설레는 감정을 가져야만 했다.

과연 자신들이 이 노래를 부를 수 있을까. 그런 한편 이 노래를 완벽하게 소화할 수 있게 되면 자신들은 어떠한 수준에 다다를 수 있게 될까.

노래가 완성되고 그녀들이 귀국함에 따라 석규가 일정을 알차게 구성해놓은 것을 그녀들은 잘 알고 있다. 결코 그녀들에게 무리가 가지 않는 일정이었다.

하지만 노래를 듣는 순간 그녀들은 자신들의 컴백이 늦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였다. <가면의 기사>란 노래가 그녀들에게 엄청나게 높은 벽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특히 창현의 가창력에 있어서는 그녀들이 한국과 일본에서 성공하여 나름 자신있던 부분을 완전히 뭉개버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우리가 너무 오만했었던 거야. 노력하자, 창현이는 우리의 가능성을 알고 노래를 만들어줬을 거야.”

노래를 들은 당일, 시린은 그렇게 말하며 창현이 돌아오기까지 맹연습을 하였다. 목에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그녀들은 삼 일 동안 피가 터져 나올 정도로 열심히 연습에 연습을 하였다.

수련회에서 돌아와 AA엔터테인먼트 녹음실에 도착한 창현은 삼 일 사이 놀라울 정도로 노래에 능숙해진 라샤의 모습에 두 눈이 휘둥그레진다.

“누나들 왜 이렇게 잘해요? 완전 상상을 뛰어넘는 정도인데요?”

그런 창현의 반응에 라샤 멤버들은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그간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음을 깨달은 것이다.

창현은 자세히는 모르지만 지난 삼 일 동안 라샤 누나들이 엄청난 연습을 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곧장 녹음에 착수했고, 부족한 부분을 지적해주면서 빠르게 노래를 개선해나갔다.

많은 양을 녹음하지 못했지만 전체적인 모습은 창현이 만족할 만했다.

녹음실에서 나오는 라샤 멤버들을 보며 창현이 엄지 손가락을 치켜 세웠다.

“누나들 정말 잘했어요. 전 녹음하는데 한 달 정도를 각오했거든요. 그런데 이 추세면 보름 안에 끝낼 수 있을 것 같아요. 연습도 좋지만 너무 목에 무리 가지 않게 하세요. 아셨죠?”

시린이 피식 웃으면서 말한다.

“우리도 프로라서 그런 건 잘 알거든요? 그나저나 사장님이 아까 너 찾으셨어.”

“아, 그래요?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누나들도 숙소 가서 쉬세요.”

인사를 건넨 창현은 곧바로 사장실로 향했다.

사장실에 들어선 창현은 쌓여있는 서류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후! 아버지, 직원들 좀 뽑으세요. 라샤 누나들로 인해서 돈 많이 벌 텐데 왜 그렇게 혼자 고생하시는 거예요.”

창현의 타박에 석규가 웃음을 지으면서 창현을 바라본다.

“우리 회사에 가수라고는 너랑 라샤밖에 없지 않느냐? 두 명 정도 업무는 내가 충분히 감당이 가능해. 자, 앉아라. 할 말이 있어서 불렀다.”

그러면서 창현에게 녹차를 타주는데, 그걸 받아들며 창현은 표정을 찡그렸다.

“으이구. 제발 예쁜 비서 좀 두세요. 남들은 사업 다 잘되면 예쁜 비서 두고 그러는데 아버지는 이게 뭐에요. 차도 인스턴트고.”

기지개를 킨 석규가 맞은 편에 앉으면서 대답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느냐? 커피 한잔 타려고 비서를 뭐하러 뽑아. 그나저나 이것 좀 보아라.”

석규가 내민 것은 무언가 글자가 빼곡하게 적힌 A4종이 세 장이었다.

창현이 받아들자 석규가 말했다.

“네가 작곡한 라샤의 미니 앨범 타이틀 곡 <가면의 기사> 뮤직비디오 스토리다. 내가 의뢰를 했더니 노래에 맞게 잘 했더구나.”

“그래요?”

창현은 눈으로 빠르게 시나리오를 읽어나갔다.

딱히 시나리오라고 할 것도 없었다. 내용을 보니 창현이 작사한 내용과 거의 흡사했던 것이다.

석규가 그런 창현의 모습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정말 웃긴 것이, 그쪽에서는 우리 회사에 아주 대단한 시나리오 라이터가 있는 줄 알더구나. 하기야 그동안 모든 뮤직비디오를 대박 냈으니 그럴 수도 있겠더구나. 조심스럽게 말하던 그 모습이 어찌나 웃기던지.”

큭큭거리며 웃음을 짓는 석규. 그는 정말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대단한 시나리오 라이터라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창현이었기 때문이다.

라샤의 <Laser>, <Yesterday>와 현의 <Bad Boy>는 모두 기존의 시나리오가 있었지만 AA엔터테인먼트로 오면서 미묘하게 수정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미묘하게 수정을 한 것은 창현이었고, 이 세 개의 뮤직비디오가 모두 대박이 터짐으로써 세간에는 AA엔터테인먼트에 뛰어난 시나리오 라이터가 있는 것처럼 되어버렸다.

“전체적으로 괜찮은 거 같네요. 여기요.”

시나리오를 검토하던 창현은 몇 가지 부분을 체크한 뒤 석규에게 돌려주었다.

그걸 받아든 석규가 물었다.

“그런데 저쪽에서 우리 보더러 뮤직비디오 여자 배우를 지명해달라고 하더구나.”

창현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지명하시면 되잖아요.”

“그게… 네 곡에 나오는 소녀라고 하면 십대인데 곡에 걸맞는 인물을 찾기가 힘들어서 말이다. 혹시 네가 생각해둔 인물이 있느냐?”

“제가요? 음…….”

석규의 말에 생각에 잠기는 창현. 자신이 곡을 쓰면서 생각해둔 이미지를 떠올려본다.

곡에서 나오는 소녀는 청순한 이미지와 함께 매사에 활기차다. 한편으론 남이 모르는 슬픔을 간직한 듯하며,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보호 본능이 일어나게 하는 그런 이미지다.

“…아! 있다.”

생각에 잠겨있던 창현은 누군가가 떠오르자 눈을 빛낸다.

석규가 창현에게 시선을 주자 그가 미소를 짓는다.

“생각해보니 이미지에 적합한 사람이 있네요. 그런데 아직 신인인데 괜찮을까요?”

석규가 대수롭지 않은 듯 말한다.

“언제부터 그런 것에 신경 썼느냐? 이제 뮤직비디오보다 라샤의 이름이 더 높아. 연기만 잘하면 신인이건 뭐건 아무 런 문제가 안될 게다.”

“그럼요…….”

창현은 자신이 생각해둔 사람을 말하였다. 그러자 석규가 눈을 빛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창현이 추천한 인물은 석규 또한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호! 그래. 내일 한 번 말해보마. 그럼 이만 가서 쉬어라.”

“네. 아버지도 일 적당히 하시고 쉬세요. 오랜만에 집에 오시던가요.”

“하하! 알았다. 일이 밀려서 집에는 못갈 것 같고 푹 쉬도록 하마.”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자리에 일어선 창현은 인사를 하고는 사장실을 벗어난다.

사장실에 홀로 남은 석규는 웃음을 지었다.

“설마 그렇게 찾아낼 줄이야. 정말 대단하구나. 그럼…….”

석규는 창현이 고쳐놓은 시나리오를 훑어보았다. 한 장씩 차근차근 보던 그는 마지막 부분에서 눈을 빛내더니 볼펜으로 쓱쓱 그어놓고는 수정을 한다. 그의 입가에는 야릇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소녀들은 오늘도 구슬땀을 흘리며 안무 연습에 빠져있다.

언제 데뷔할지 모르는 미래의 불투명 때문에 불안했지만 그녀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언제라도 데뷔할 수 있도록 최상의 상태로 만들어놓는 것이었다.

오늘도 격렬한 연습이 이어졌고, 잠시 휴식 시간이 되자 소녀들은 벽에 등을 기대며 휴식을 취한다.

격렬한 운동 후 바닥에 주저앉으면 엉덩이가 처진다는 주현의 유언비어(?)가 퍼진 탓이다.

그렇게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연습실에 다른 데뷔조 그룹의 연습생이 들어온다.

그리고 쉬고 있는 소녀들을 둘러보더니 누군가를 발견한 듯 이름을 부른다.

“윤아야!”

“응, 왜?”

수건으로 땀을 닦아내며 쉬고 있던 윤아가 시선을 들며 대답한다.

그러자 그녀를 부른 연습생은 손으로 뒤를 가리키며 말했다.

“대표님이 찾으셔. 연습 쉬어도 되니까 어서 오래.”

“응, 알았어.”

고개를 끄덕이며 슬쩍 소녀들을 바라보는 윤아. 아무래도 자기 혼자 연습을 쉬고 가는 것이 마음에 걸리는 것이리라.

그런 윤아의 모습에 쉬고 있던 소녀들이 피식 미소를 짓는다. 윤아가 무슨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있어서 그러는 것이라.

태연이 대표로 나서서 윤아에게 손을 까닥이며 말했다.

“훠이! 우리는 걱정하지 말고 가시게. 괜히 그러면 우리가 나쁜 사람들이 된 것 같지 않은가.”

“네, 미안해요. 그럼…….”

태연의 너스레에 미소를 지으며 연습실을 나서는 윤아.

연습실에 남게 된 소녀들은 윤아의 뒷모습을 쫓고 있었다.

태연이 분위기 전환을 위해 제안을 한다.

“자! 우리 내기 할까? 윤아가 왜 삼촌에게 불려갔는지. 어때? 맞추면 저녁식사 당번 면제해주기!”

“좋아! 난 CF섭외에 한표!”

“난 뮤직비디오!”

“의외성에 걸겠어. 드라마!”

무엇이든 간에 윤아가 잘 되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것이 부러웠지만 친동생, 친언니 같은 그녀가 잘 되는 것이기에 소녀들의 얼굴은 밝기만 하였다.


집무실에 도착한 윤아는 조심스럽게 노크를 한 뒤 들어오란 말에 조용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다.

“어서와라, 윤아야.”

윤아가 안으로 들어서자 안경을 쓴 중년 사내가 입가에 미소를 띤 채 윤아를 맞이한다.

그녀는 중년 사내에게 조심스럽게 인사를 하였다.

“네, 안녕하세요, 삼촌. 부르셨어요?”

중년 사내, 국내 대형 기획사 중 하나인 SM엔터테인먼트 대표이사이자 회장인 이수만은 윤아를 보며 말했다.

“그래. 일단 저기 앉아 있거라. 할 말이 있어서 불렀다.”

수만은 무언가 좋은 일이 있는 듯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윤아에게 말했다.

자세한 영문을 모르는 윤아는 조심스럽게 소파에 앉았다. 그러자 비서가 조용히 녹차를 내민다. 윤아는 그것을 받아들고 조심스럽게 녹차를 마신다.

수만은 업무처리를 하는지 정신없이 서류를 결제하고 있었고, 약 5분여간의 씨름 끝에 모든 서류를 처리할 수 있었다.

그는 어느새 녹차를 다 마시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윤아를 보면서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미안하구나. 원래 오면 처리하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찜찜해서 처리하다 보니 기다리게 했구나. 김비서, 여기 녹차 두 잔 부탁해.”

잠시 후, 녹차가 나오고, 수만은 녹차를 한모금 마시면서 윤아에게 입을 열었다.

“윤아야, 내 말을 곡해 듣지 말고 솔직히 대답해주려무나. 너 AA엔터테인먼트에 아는 사람이 있느냐?”

갑작스러운 질문에 윤아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고개를 젓는다.

“AA엔터테인먼트면 현하고 라샤가 있는 곳 아닌가요? 저는 아는 사람 없는데요.”

“그래? 흐흠! 이거 너무 떡밥이 커서 말이다.”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기는 수만의 모습에 윤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무슨 일이신데 갑자기 그러시는 거예요?”

윤아의 질문에 수만은 입가에 미소를 띤 채 말했다.

“혹시 라샤가 일본 활동을 마치고 돌아온 것을 아느냐?”

“물론이죠. 라샤가 현의 데뷔 발언까지 해서 상당히 화제가 되었잖아요.”

두 말 할 것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는 윤아. 당시 라샤의 귀국과 함께 열린 인터뷰에서 미란이 현의 데뷔 발언을 함으로써 상당한 파장을 일으켰다. 연예계 뉴스를 즐겨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윤아가 그 사실을 알고 있자 수만은 빙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흐음! 그럼 라샤가 국내에서 활동을 재개한다는 것도 알고 있겠구나.”

“네, 뉴스에서 봤어요. 이번에 미니 앨범을 준비한다고 본 것 같아요.”

기본적인 사항을 알고 있자 수만이 말했다.

“알고 있다니 말하기가 쉽겠구나. 라샤가 미니 앨범 제작에 착수했다고 하는구나. 그리고 뮤직비디오 제작을 한다고 하는데 AA엔터테인먼트에서 제의가 왔다. 그것이 뭔지 아느냐?”

그걸 윤아가 알 리가 없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저는 잘…….”

“하핫! 내가 너무 이야기를 끌었구나. AA엔터테인먼트에서 이번 라샤 타이틀 곡 뮤직비디오 여주인공을 너로 지정했다. 그래서 너를 부른 것이다.”

“네에? 제, 제가요?”

수만의 말에 윤아의 눈이 크게 뜨인다. 큼지막한 눈망울이 크게 뜨이니 그녀가 느끼는 놀라움이 정말 커보인다.

그 모습에 수만은 웃음을 지었다. 아까부터 정말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그래. 너도 알다시피 AA엔터테인먼트가 비록 규모는 작지만 알짜배기 가수 둘을 보유하고 있지 않느냐? 게다가 연이은 히트 속에 현재 한국 연예계의 중심이 되어가고 있지. 너도 알겠지만 이번 라샤의 앨범 또한 현이 작곡을 했다고 한다. 즉, 아무리 못해도 준대박은 친다는 것이지. 그것은 그만큼 라샤에 대한 관심도가 높다는 이야기다. 당연히 라샤의 뮤직비디오에 출연하게 되면 단번에 유명해질 수 있다는 이야기지.”

“저, 저를 캐스팅하다니 믿어지지가 않아요.”

윤아는 아직도 얼떨떨한 기색이었다. 수만이 앞에 없었다면 지금 볼이라도 꼬집어봤을 것이다.

AA엔터테인먼트에서 자신을 여주인공으로 지목하다니?

화제의 중심이며 한국과 일본을 휩쓴 라샤의 뮤직비디오라면 참여하고 싶어하는 연예인이 줄을 설 것이다. 그런데 자신을 콕 집어 지명하자 그녀는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되질 않았다.

그런 윤아의 마음을 이해하는 듯 수만이 말했다.

“솔직히 나도 아직 믿기지가 않는다. 이건 너무 좋은 기회거든. 게다가 AA엔터테인먼트에서 해온 계약조건도 절대 나쁘지가 않다. 오히려 너무 좋아서 무슨 의도가 있는 게 아닐까 고민을 할 정도야.”

AA엔터테인먼트의 대우가 좋은 것은 연예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일이다.

한때 AA엔터테인먼트에서는 가수 현을 노예계약으로 인한 곡을 착취한다는 평가를 들은 적이 있다.

그런 의견이 불거지고 여론이 조성되려 하자 AA엔터테인먼트는 발 빠르게 조치를 취하였다. 그리고 그 조치는 바로 AA엔터테인먼트와 가수 현간의 계약서를 공개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계약서 공개로 인해 AA엔터테인먼트는 일약 연예인을 잘 대우해주기로 유명한 곳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심지어 연예인이 가장 가고 싶어 하는 계약조건 1위 기획사로 꼽히기도 하였다.

수만이 윤아에게 말했다.

“솔직히 이건 엄청난 기회라고 할 수 있다. 네가 이 일을 맡게 되고, 내 예상대로 라샤가 대박을 터뜨린다면 윤아 너는 대중들의 관심을 한 몸에 사게 될 것이다. 가수에게 있어 대중들의 관심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 너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면 당연히 소녀시대에 관심을 갖게 될 것이고 너뿐만 아니라 아이들 전체가 관심의 대상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내년 말쯤으로 생각하던 데뷔가 한층 당겨질 수 있을 것이다.”

“…….”

윤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속으로 엄청나게 흥분하고 있었다. 데뷔. 이 얼마나 기다려오던 이야기란 말인가.

그녀는 자신에게 절호의 기회가 왔음을 느꼈다. 기약없는 연습생 생활로 인하여 다른 멤버들이 모두 지쳐가고 있다. 그런 와중에 데뷔 시기가 당겨지고, 구체적인 계획이 나온다면 모두가 기뻐할 것이다. 무엇보다 자신의 인지도를 넓혀갈 수 있는 기회가 아닌가? 연예계에서 그것은 곧 힘이 된다.

수만이 윤아를 보며 물었다.

“절호의 기회인 만큼 난 네가 이 기회를 잡았으면 한다. 어쩌겠느냐, 해보겠느냐?”

거절 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었다. 자신의 이름을 대중에게 알릴 수 있고, 멤버들을 위한 길이었다. 게다가 계약 조건도 좋다고 하니 그녀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해볼게요. 아니, 꼭 할게요.”

“잘 생각했다. 이건 뮤직비디오 시나리오다. 며칠 후 AA엔터테인먼트에서 뮤직비디오 제작을 놓고 미팅이 열릴 테니 한 번 가보려무나.”

수만이 미소를 지었다. 윤아가 승낙하자 한건 했다는 기분이 든 것이다.

SM엔터테인먼트가 아시아 각국으로 영향력을 넓혀가면서 크게 성장했지만 아직 여러 방면으로 부족한 점이 많았다. 특히 소속 가수들의 일본 진출에 간혹 에러 사항이 발생하고는 하였는데, 이 기회에 AA엔터테인먼트와 관계를 맺고 사업적 제휴를 노려볼 생각이었다. 그들이 제휴를 맺고 있는 쟈니스는 일본의 무궁무진한 부가산업을 꿰고 있는 곳이니 말이다.

윤아에게 있어 이번 일은 자신과, 멤버들을 위한 일이었지만 수만에게 있어서는 SM엔터테인먼트의 한 발 도약을 준비할 수 있는 기회였다.

둘 모두에게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이다.

두 사람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맺혔다.


AA엔터테인먼트 사장실.

창현과 석규는 아침부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라샤의 녹음을 위해 일찍 기획사를 방문하였다가 석규와 이야기를 나눌 게 있어서 사장실을 찾은 것이다.

석규는 창현에게 차를 내밀고는 입을 열었다.

“SM엔터테인먼트에서 제안을 받아들였더구나. 네가 말했던 임윤아 양이 이번 뮤직비디오 제작에 참가하게 되었어.”

창현은 차를 마셨다.

아놔, 이런 배려없는 아버지 같으니라고 창현이 마신 건 생강차였다.

힘겹게 꿀꺽 삼키며 창현이 물었다.

“근데 혹시 아버지 마음에는 안 드신 거 아니죠? 괜히 저 때문에…….”

창현의 물음에 석규는 빙긋 웃더니 생강차를 한모금 마시며 말했다. 저걸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마시는지 대단했다.

“마음에 안 들다니? 아주 며느리감으로… 아니, 여주인공감으로 딱이더구나.”

잠시 실언을 한 석규는 재빨리 말을 바꾸었다. 창현은 석규가 생강차를 너무 여유롭게 마시기에 자신도 도전하던 중이었기에 그런 석규의 실언은 듣지 못했다.

생강차의 맛을 음미하려고 해도 되지 않자 창현은 그냥 삼켜버리며 살짝 인상을 찡그린 채 말했다.

“다행이네요. 행여 제 고집 때문에 한 줄 알았거든요.”

창현의 말에 석규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아무리 내가 너를 아끼고 귀여워해도 한 회사의 사장 아니더냐? 당연히 회사의 이익을 위해서 어느 정도 선에서 냉정해질 필요가 있지. 다만 네가 너무 잘하는 턱에 내가 너무 오냐오냐해주는 것처럼 보였나보구나.”

칭찬인지 타박인지 모를 말이었다. 하지만 창현은 칭찬으로 들었다.

“네,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제가 이렇게 온 것은 아버지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혹시 라샤 누나들한테 뭐 들은 거 없으신가요?”

석규가 고개를 갸웃하며 되묻는다.

“뭘 말이냐?”

반응을 보니 라샤 누나들이 말을 하지 않은 듯했다. 아무래도 창현이 스스로 판단해보고 석규에게 말하길 원한 듯했다. 새삼 느끼지만 참 라샤 누나들이 속이 깊다고 느끼는 창현이었다.

창현이 입을 열었다.

“그, 미란 누나가 제 데뷔 발언을 해서 한동안 이슈가 되었잖아요.”

석규가 표정을 살짝 굳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지. 그것 때문에 내가 미란이를 꽤 혼냈다. 그러니 꽤 토라져 있더구나.”

이 말은 처음 듣는 것이었다. 하지만 창현이 말하고 싶은 것은 그게 아니었다. 그래도 미란이 혼났다니 왠지 기분은 좋았다.

“아,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그때 미란 누나의 발언을 들으면서 제가 라샤 누나들과 이야기를 나눠봤거든요. 제 데뷔에 관해서요. 그러니 몇 가지 조언을 해주면서 아버지에게도 조언을 구해보라고 하더라고요. 아무래도 이쪽 종사자시고, 연륜이 있으시니까요.”

“말해보려무나.”

이야기가 조금은 심각한 주제로 넘어갔다. 창현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지만 가수 ‘현’의 데뷔 문제라면 그 무게가 달라진다. 이미 한국과 일본을 넘어서 중국, 동남아시아, 미국 일부까지 그 명성이 퍼져나가고 있었기에 가수 현은 이미 아시아 스타를 넘어서 월드 스타로 도약할 가능성까지 내포하고 있었다.

창현은 생강차를 한모금 마신다. 이거 몇 번 마시다 보니 묘한 중독성이 있다.

“라샤 누나들이 말씀해주시더라고요. 미란 누나가 장난처럼 말했지만 제 데뷔가 올해 말, 내년 초에 하면 좋을 거라고요.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는데 솔직히 전 그 이야기에 공감을 했어요. 아버지도 아시죠? 제가 처음에 왜 얼굴 없는 가수를 하고 싶어 했는지.”

석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아직도 창현이 자신의 재능을 처음 드러내던 그 순간을 잊을 수 없었다.

“알고 있지. 평범한 일상생활을 즐기기 위함이 아니더냐?”

“그렇죠. 그런데 전 수련회를 가면서 불현듯 깨달았어요. 제 일상이 이미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요. 아버지는 아실지 모르지만 전 학교에서 혼자 있는 걸 좋아하거든요. 수업도 잘 안 듣고 공책을 펼쳐놓고 곡의 콘티를 짜고… 아마 이번 수련회에서 친구를 사귀지 않았다면 계속 혼자였을 거예요. 그걸 보면서 전 깨달았어요. 제가 이미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요.”

창현의 말에 석규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이것은 한 회사의 사장과 소속사 가수로서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아버지와 아들간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제법 긴 시간 동안 생각에 잠겨있던 그가 입을 열었다.

“내 생각을 말해줘도 되겠느냐?”

“네.”

“그럼 말하마. 내가 보기에 창현이 넌 실패를 두려워하고 있다.”

창현의 얼굴에 황당함이 서렸다. 갑자기 이게 무슨 말인가?

“그게 무슨…….”

“듣고 있어라. 내가 보기에 창현이 넌 실패를 두려워하고 있어. 남들보다 더욱. 그것은 나의 탓이겠지. 내가 회사의 기반을 잡는다고 바깥 일에 신경 쓰는 사이 엄마를 잃은 너는 혼자서 묵묵히 학교를 다니고 있었으니까.”

어머니의 이야기가 나오자 창현은 표정을 굳혔다. 초등학생 때 어머니를 잃은 창현은 아버지 석규가 정신없이 회사 일에 바쁠 때 자신 혼자 홀로 서고자 노력을 하였다. 하지만 어린 그가 성공을 할 리가 없었고,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게 되었다. 창현은 의식하지 않기 위해 그러한 기억들을 깊은 곳에 묻어두었지만 석규는 알고 있었다. 창현은 그의 아들이고 세상에 하나 뿐인 피붙이여서이다.

석규가 말을 이어나갔다.

“난 네가 어떤 어려움을 겪었는지 솔직히 모른다. 하지만 어느 정도나마 그것을 알 수는 있다. 내가 너에게 실패를 두려워한다고 했지? 그것은 너의 태도에서 드러난다. 창현이 넌 이미 한국은 물론 각국에서도 팬층을 형성하고 있는 가수다. 가히 아시아 스타 아니, 월드 스타에 버금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하지만 넌 그것을 무의식 중에 아니라고 외면을 하고 있어. 왜인지 아느냐?”

“…….”

창현은 대답하지 못했다. 석규의 말을 곱씹기에 바빴던 것이다. 그는 석규의 말처럼 자신이 정말 인기를 의식하지 않으려 했는지 고민해보았다. 그리고 고민하면 할수록 석규의 말이 사실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석규가 잠시 고민할 시간을 준 뒤 말했다.

“바로 사람들에게 기대를 받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이런 말이 있다.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크다고. 넌 스스로의 실패가 사람들의 거대한 실망을 사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무의식적으로 피하기 위해 자신의 인기를 절감하지 못하려 하는 것이지. 얼굴없는 가수도 같은 맥락이다. 넌 스스로의 얼굴을 알리지 않음으로써 자신에게 쏟아질 기대를 사전에 차단했다. 모든 것이 사람들이 자신에게 기대하는 것이 부담스럽고 그들의 실망이 두려웠던 것이지. 넌 궁극적으로 일상적인 생활을 영위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실패를 두려워하여 다른 사람들 앞에 스스로 나서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석규는 창현을 미안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창현이 실패를 두려워하게 만든 것은 바로 자신이었다. 자신이 조금만 더 창현에게 신경을 쓰고 관심을 주었더라면 그가 이렇게 실패를 두려워 할 리가 없다. 그래서 더욱 자신의 아들이 자랑스러웠다. 이렇듯 훌륭하게 자라나 뭇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가수가 되었으니 말이다.

창현은 머리가 복잡했다. 그는 석규의 말이 사실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은 실패를 두려워한다. 사실이다. 세상에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없으니까. 하지만 석규의 말을 들으니 자신이 왜 그동안 이런 행동을 보여 왔는지 알 수 있었다.

‘내가 실패를 두려워하고 있었다니…….’

음향총서를 얻고 자신감을 얻었다. 그래서 모든 것을 극복했다고 여겼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남아 있었던 듯했다.

창현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석규가 말했다.

“회사 사장의 입장에서 말하면 창현 너는 최고의 가수가 될 수 있는 재능을 가지고 있고, 지금 그 실력도 충분하다. 1집이 끝나는 올해 말까지 얼굴없는 가수로서 활동을 하고 2집을 준비하면서 데뷔를 한다면 너의 인기는 절정으로 달릴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회사 사장인 나의 생각이다.”

“…….”

석규의 말에 창현은 눈을 감았다.

당장 선택해야 할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지금이 아니고서는 결정을 내리기 힘들 것 같다.

데뷔, 데뷔라…….

창현은 라샤와 함께 처음 섰던 그 무대를 잊지 못했다.

자신에게 보내는 수천 쌍의 시선, 수천 개의 함성.

자신의 노래를 들어주는 그들은 환호했고, 무대 위에서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꼈다.

놀이공원에서도, 수련회에서도. 자신의 노래를 듣고 열광하며, 웃어주고, 함성을 지르며, 눈물을 흘리던 그 모습을 하나하나 잊을 수 없었다.

실패를 두려워한다고 하여 그것을 포기하기에는 너무나 이르지 않은가?

수많은 생각들이 감돌았지만 그것들이 이윽고 하나로 합쳐졌다.

그래, 더 이상 두려워 할 필요는 없는 거야.

눈을 뜨며 창현이 말했다.

“좋아요. 그 데뷔라는 거 내년에 하도록 할게요.”

“…잘 생각했다. 넌 최고의 가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환영한다.”

석규는 담담하게, 창현의 결정을 알고 있었다는 듯 미소를 지어보인다. 창현도 그런 석규를 보며 마주 웃음을 지었다.

그러다가 문득 창현이 어색한 표정을 짓는다. 간과하고 있던 문제가 떠오른 것이다.

“아… 그럼 학교는 어떻게 하죠?”

정식 데뷔를 하게 되면 학교에 제대로 나갈 수 있을 리가 없다.

“아, 그거 말이더냐?”

창현의 말에 석규가 바로 반응을 보인다. 무언가 대책이 있는 듯했다.

하지만 뒤이어 나온 말은 처참했다.

“네가 알아서 해야지, 내가 해주어야겠느냐?”

“에?”

창현은 맥 빠진 표정을 짓는다.

무언가 해결책을 제시해줄 줄 알았더니 이런 무책임한 발언이라니?

그런 창현의 반응이 재미있었는지 석규가 말한다.

“네가 교장한테 잘 말해보아라. 그럼 될 게다.”

“하아! 알았어요. 그 문제는 제가 알아서 할게요.”

자신의 수완 능력을 믿어야 하는 처지에 이르렀다.

가장 큰 문제가 해결되자 석규는 이제 거리낄 게 없다는 듯, 창현에게 말했다.

“마침 잘 되었구나. 안 그래도 너에게 말하려고 했는데. 이번 뮤직비디오에서 나오는 남주인공 있지 않느냐? 그걸 너로 했다.”

석규의 말에 창현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무슨 말이긴. 네가 남자 주인공이라고. 어차피 가면의 기사니 가면 쓰고 등장하지 않느냐? 상관없을 게야.”

“하지만 들킬 수도 있어요.”

“어째서?”

심드렁하게 반응하는 석규. 그러자 창현은 당황하며 말했다.

“제가 라샤 누나들 데뷔 무대에서 가면 썼잖아요. 대질하면 들킬지도 몰라요.”

당황하며 말하는 창현의 모습에 석규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하지마라. 네가 라샤의 데뷔 무대에서 몇장을 깔고 나갔는지 아느냐? 이미 키 차이가 상당해. 게다가 머리 스타일도 다르다. 네 체구는 아무리 봐도 중학생이야. 소년과 소녀의 이야기인 만큼 이미 열여덟 살로 굳어진 현의 정석을 깨지 못해. 혹시 모르지, 누가 의혹을 제기할지. 하지만 그것도 재미있지 않겠느냐? 솔직히 널 어떻게 설득하느냐 고심했는데 마침 네가 데뷔 문제를 해결해주니 마음이 편하구나. 하하하!”

“크윽!”

웃음을 터뜨리는 석규를 보며 당했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창현이었다. 설마 이런식으로 자신의 베일을 하나씩 벗겨나갈 생각을 하다니.

은연중에 배려를 해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당했다는 생각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때, 석규의 핸드폰이 울렸다.

여전히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석규가 핸드폰을 열고는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강석규입니다. 아! 예. 지금 오고 계신다고요? 알겠습니다. 밑에 오시면 마중할 사람을 보내드리겠습니다.”

석규가 통화를 끝내자 창현이 물었다.

“누군데요?”

“윤아 양이다. 오늘 뮤직비디오 미팅이 있다고 해서 오라고 했다. 곧 도착한다고 하니 네가 마중 나가거라.”

“제가요?”

“그럼 네가 가지 누가 가겠느냐? 내가 너를 위해 얼마나 배려를 아끼지 않았는데…….”

배려? 무슨 배려를 했단 말인가?

창현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배려요? 무슨 배려요?”

“조금 있으면 알게 될 거다. 가서 윤아 양부터 데리고 오너라.”

석규는 무언가 또 일을 꾸미는 듯 입가에 짙은 미소를 지은 채 창현에게 말했다.

그걸 보면서 창현은 불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뭔지 알 수 없었기에 자리에서 일어나 윤아를 마중하러 갈 수밖에 없었다.

사장실을 벗어나는 창현을 보면서 석규가 웃음을 터뜨렸다.

“창현아 넌 분명 나한테 고마워 할 게다. 큭큭큭!”

무엇을 꾸미는지 너무나 즐거워하는 석규였다.


석규의 말대로 윤아를 마중하러 나간 창현이 막 건물을 나왔을 무렵, 택시에서 내리는 윤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뮤직비디오 미팅 문제 때문인지 옷차림에 많이 신경을 쓴 듯하다. 보는 창현의 눈이 화사해질 정도였으니 말이다.

창현은 두리번거리는 윤아에게 손을 들며 그녀를 불렀다.

“여기에요.”

그의 목소리에 윤아의 시선이 창현에게 향한다. 그리고 그녀의 눈이 크게 뜨인다. 갑자기 창현이 자신을 불러서 놀란 것이다.

창현은 웃음을 지은 채 그녀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에요, 누나.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안녕, 창현아. 오랜만이야. 난 늘 잘 지내지. 그런데 네가 여기 웬일이야?”

여전히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채 의문을 던지는 윤아.

창현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통화 내용에 있었잖아요. 마중 나갈 사람 보낸다고.”

“그게 너였어?”

“네. 일단 안으로 들어가요.”

창현이 윤아를 이끌고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윤아에게 말을 건넸다.

“SM엔터테인먼트에 비해 많이 누추하죠?”

SM엔터테인먼트에 비하면 솔직히 아니 아주 많이 누추했다. 하지만 윤아는 그렇게까지 티는 안 내고 고개를 끄덕이며 적당히 대꾸했다.

“응. SM엔터테인먼트보다는 좀 협소하네.”

“이런 면에 있어서는 짠돌이거든요. 사장님이.”

당한 것이 있어서일까. 창현은 악의가 담기지 않은 말투로 뒷담화를 하였다.

서슴없이 AA엔터테인먼트 사장을 욕하는 창현의 모습에 윤아가 물었다.

“그런데 창현이 네가 왜 마중 나온 거야?”

그것이 궁금했나보다. 아까부터 의문 섞인 시선으로 바라보니 말이다.

창현은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AA엔터테인먼트 사장님의 이름이 강석규. 제 이름은 강창현이에요. 무언가 공통점이 안 느껴지세요?”

“공통점? 아, 설마…….”

그제야 어떻게 된 일인지 눈치 챈 윤아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뜬다. 눈이 정말 맑고 순수해서 창현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 설마에요. AA엔터테인먼트 사장님이 저희 아버지죠.”

“그렇구나. 정말 의외네.”

그러면서 한편으로 윤아는 왜 창현이 그렇게 뛰어난 보컬 트레이닝 실력을 가지고 있는지 수긍이 갔다. 어렸을 때부터 이쪽에 관련된 일을 해왔으니 잘할 수도 있던 것이었다.

창현의 얼굴을 보자 윤아는 무언가가 생각난 듯 창현에게 말을 건넸다.

“아, 맞다. 그때 인사를 못했네. 내 생일 때 싸인 CD 고마워.”

창현은 별것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뭘요. 누나랑 문자를 하면서 많이 친해졌지만 솔직히 만난 건 한 번뿐이어서, 옷이나 그런 걸 선물할까 하다가 사이즈를 모르고 해서 라샤 누나들에게 부탁한 거예요.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이네요.”

윤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빛내며 말을 늘어놓았다.

“완전 마음에 들었지. 언니들이랑 주현이가 얼마나 부러워 했는데. 특히 현의 싸인! 이거 완전 국보급이잖아. 그거 받고 얼마나 기뻤는데! 그런데 창현이 넌 가수 현 실제 얼굴 봤어? 싸인 받은 걸 보면 직접 보고 받은 걸 텐데…….”

윤아의 질문에 창현이 등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신비주의 컨셉을 그만두겠다고 결심은 했지만 아직 마음은 준비가 안 되었나보다.

창현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물음에 답했다.

“아니오, 그건 제가 한 게 아니라 라샤 누나들이 받아준 거예요. 가수 현은 이곳에 잘 안 오거든요. 그래서 제가 부탁해서 받은 거예요.”

“그래? 아쉽네.”

창현의 말에 윤아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쉽게 납득하였다.

그 모습을 보면서 창현은 가수 현이 정말 열여덟 살로 이미지가 굳어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다행이긴 한데 왠지 너무 쉽게 납득하자 묘하게 가슴이 쓰렸다.

하지만 그것을 내색할 수 없는 바, 창현은 웃음을 머금은 채 말했다.

“사장님을 만나고, 미팅을 한 뒤에 라샤 누나들 만나볼래요? 요즘 녹음 중이라 기획사에서 머물거든요.”

“정말?”

윤아의 눈이 반짝반짝 빛난다.

그 모습을 보니 왜 그녀를 꽃사슴이라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정말 귀여웠다.

“물론이죠. 저도 라샤 누나들하고 제법 친분이 있거든요. 녹음도 타이트하게 하지 않으니 이야기 나눌 시간은 충분할 거예요. 어때요?”

윤아가 맹렬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나야 완전 환영이지. 내가 그 언니들을 얼마나 좋아하는데! 친해져서 숙소 돌아가면 자랑해야지, 히힛!”

어린 아이처럼 좋아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니 창현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맺혔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어느덧 사장실에 도착하였다. 노크와 함께 사장실에 들어서니, 창현과 이야기를 나눌 때 보여주었던 사악한 면을 말끔하게 지워낸 채 인상좋은 미소를 지은 석규가 창현은 나몰라라 한 채 자리에서 일어나 윤아를 맞이했다.

“이거 반갑습니다, 윤아 양. 제가 부족하지만 AA엔터테인먼트의 사장을 맡고 있는 강석규입니다.”

지나치게 신사적인 모습이었다. 창현은 그것이 가식이라는 걸 알았지만 윤아는 아니었다.

그녀는 당황한 표정을 지은 채 정중한 석규의 인사에 화답했다.

“SM엔터테인먼트의 가수 지망생 임윤아라고 해요, 사장님.”

“하핫! 잘 알고 있습니다. SM엔터테인먼트에서 야심차게 준비하는 소녀시대란 그룹이지요? 아무래도 우리 기획사도 가수들이 주축이다 보니 많은 관심을 갖게 되더군요. 각각 멤버들도 개성이 있고 재능도 있는 게 마음 같아서는 저희 기획사로 초빙하고 싶을 정도입니다. 하하핫!”

그것은 어느 정도 진심인 듯했다. 대형 기획사인 SM엔터테인먼트에서도 상당한 투자를 하고 있는 그룹이었으니 말이다.

윤아는 그런 석규의 말이 싫지 않은 듯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 모습에 석규는 윤아가 아직도 서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말했다.

“손님을 아직까지 세워두었군요. 여기 앉으시지요, 윤아 양.”

자리를 권하면서 자신도 자리에 앉는 석규.

윤아가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자 창현도 자리에 앉으려 하였다.

그러나 석규의 제지에 창현은 자리에 앉지 못했다.

석규가 창현에게 말했다.

“너는 저기 손님용 차를 내오너라. 그리고 난 생강차로 한잔 타오고. 손님용 녹차인데 녹차 마시는지요, 윤아 양?”

“네? 네. 저는 상관없어요.”

“그럼 다행이군요. 창현아, 차 내오너라.”

윤아의 등장으로 완전히 찬밥 신세가 되어버린 창현.

차마 겉으로 드러낼 수 없어 속으로 궁시렁거리면서 차를 타온다. 장난질이라도 치고 싶건만 이럴 때만큼은 자신의 명품 차타기 실력이 싫었다.

창현이 차를 내오자 석규가 생강차를 들며 윤아에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시나리오를 읽어보셨습니까, 윤아 양?”

“네. 읽어봤어요. 정말 좋은 내용이더라고요. 슬프면서 로맨틱하고, 한편으로는 수줍으면서 달콤한 느낌이 들더라고요. 이 곡도 가수 현씨가 작곡한 건가요?”

윤아의 말에 힐끗 창현을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 석규.

창현은 뜨끔하여 고개를 돌린 뒤 생강차를 마신다.

그 모습에 석규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맞습니다, 윤아 양. 뮤직비디오 스토리도 노래 가사를 시나리오화 시킨 겁니다.”

“와! 정말 대단하네요. 아, 저기…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말을 놓아주시면 안 될까요?”

“불편하신가요?”

“네, 아무래도 사장님이시고, 저보다 연배가 높으신데 존댓말을 들으니 좀…….”

실례가 되는 거라 생각했는지 석규를 힐끗 보며 어렵게 말을 하는 윤아.

그 모습에 석규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알겠네, 윤아 양. 이제부터 편하게 대하도록 하겠네.”

“네, 감사합니다. 주제 넘는 말이 아닌지 모르겠어요.”

“하하! 주제 넘는 말은 아니고, 단지 예우 차원에서 존댓말을 한 것뿐이라네, 윤아 양. 그런데 윤아 양 그거 아나? 뮤직비디오를 찍는 남자 배우 말일세.”

윤아가 고개를 젓는다. SM엔터테인먼트에서도 아직 미정이라 하여 누군지 모르고 있다.

“아니오, 누군지 모르겠어요. 제가 삼촌… 아니, 회장님에게 물어봤지만 미정이라고 하시더라고요.”

그 말에 석규는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깨닫고는 혀를 찬다.

“아차, 그걸 말을 안했구나. 솔직히 이번 뮤직비디오 배우를 정하는데 무척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 아무래도 시나리오 내용이 십대 소년 소녀들의 이야기다 보니 그에 걸맞는 배우를 찾기가 힘들었거든. 그래서 고민하던 차에 창현이가 이야기를 해주더군. 자신이 적합한 사람을 안다고. 그게 바로 윤아 양이었다네.”

“창현이가요?”

윤아의 눈에 놀라움이 서린다. 설마하니 자신이 캐스팅 된 것에 그러한 내막이 숨어 있을 줄 몰랐다.

하지만 석규도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의문을 표했다.

“어라, 둘이 아는 사이였나?”

창현이 윤아를 추천할 때 뭔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설마 아는 사이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석규의 의문에 윤아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저희 그룹에서 주현이라는 애가 있는데, 걔가 창현이 학교 선배거든요. 그래서 저도 우연찮게 만나게 되어서 도움도 받고 그랬어요.”

“허, 그랬군. 그렇게도 인연이 이어지는군. 아참, 내가 왜 창현이의 추천 이야기를 했느냐면 윤아 양이 왜 자신이 캐스팅 되었을지 궁금해서 그런 것이라네. 물론 창현이의 의견이 있었지만 나 또한 윤아 양이 적합하다고 생각되어 캐스팅을 한 것이고. 그러니 혹여 그에 대한 의문이 있었다면 이걸로 해소 되었으면 하네.”

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석규의 설명으로 자신이 왜 캐스팅 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석규가 적합하다는 말을 해주자 막연히 인맥으로 발탁된 게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던 그녀는 문득 생각이 나 물었다.

“그런데 아까 전에 남자 배우에 대해 말씀하시다 그만 두셨는데 남자 배우는 누구인가요?”

석규가 남자배우에 대해 언급할 듯하다가 언급하지 않자 궁금해진 윤아가 물었다.

그러자 석규가 씨익 웃음을 지으며 창현을 힐끗 보더니 말했다.

“하하! 남자배우라면 아까부터 윤아 양 옆에 있지 않은가?”

석규의 말에 윤아가 적지 않게 놀란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옆에 앉은 창현이를 보며 말한다.

“에? 설마 창현이가 남자 배우?”

“그렇다네. 내 아들이지만 제법 잘 생기지 않았는가? 게다가 마침 남자 배역과 나이 대도 비슷하고. 무엇보다 창현이는 연기를 제법 하거든.”

1집 앨범 타이틀 곡 <Bad Boy>를 찍을 때 NG를 거의 내지 않고 찍은 사실은 무척 유명했다. 비록 뮤직비디오고, 얼굴이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NG가 거의 나지 않았다는 것은 기본 연기력이 된다는 이야기다.

‘창현이가 남자 배역이라니. 부끄러운데…….’

윤아는 창현이 남자 배역을 맡는다는 사실에 가슴이 두근거리면서 한편으로는 부끄러워하였다. 시나리오를 읽어본 바로는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기에 사랑하는 연기를 해야 한다는 것인데 그 대상이 창현이란 것이 무척 부끄러웠다.

창현도 윤아가 부끄러워하니 조금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석규가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허어, 두 사람 다 왜 그렇게 부끄러워하는 건가? 이거 뮤직비디오에서 사랑하는 연기를 해야 할 텐데 벌써부터 부끄러워하면 어떻게 할 건가?”

창현이 짓궂은 미소를 짓고 있는 석규를 노려보며 말했다.

“막상 연기하면 잘할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저도 잘할 수 있어요.”

윤아도 대답했다.

그 말에도 불구하고 석규의 입에 맺힌 미소는 더욱 짙어지고 있었다.

그는 두 사람을 번갈아가 보며 말했다.

“호오! 그럼 뮤직비디오 마지막에 있는 키스신도 잘하겠구나. 무척 기대가 되는군.”

“……!”

창현과 윤아가 순간 얼빠진 표정으로 석규를 바라보았다./

윤아가 당혹한 표정을 지은 채 말했다.

“키, 키스신이라니요. 전 그런 거…….”

창현도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며 말한다. 분명 그는 시나리오를 확인했었고, 키스신 같은 것은 없었다.

“그게 무슨 말이죠? 시나리오를 확인할 때 아무것도 없었는데요.”

“없었다니? 여기 있지 않느냐?”

그 말에 석규가 무슨 말이라는 듯, A4용지를 윤아와 창현에게 내민다.

황급히 A4용지를 받아드는 창현과 조심스럽게 받아드는 윤아. 두 사람은 글자 하나라도 놓칠세랴 부지런히 시나리오를 읽어간다.

그리고 그들은 확인할 수 있었다. 기존의 시나리오에서 발견할 수 없었던 키스신이 마지막 순간에 나오는 것을.

본래 시나리오 마지막은 소녀가 가면의 기사에게 당신을 용서한다고,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끝이 난다.

그런데 수정된 내용은 약간 달랐다. 소녀가 최후를 맞이하는 것은 맞다. 헌데 그녀는 마지막 힘을 내어 가면의 기사의 가면을 벗긴다. 가면의 기사는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것을 묵인한다.

가면을 벗기고 소년의 얼굴을 확인한 소녀는 환한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 용서한다는 말과 사랑한다는 말을 한 뒤 목숨을 잃는다. 가면의 기사는 차갑게 식어가는 그녀의 입에 키스를 한다.

처음 시나리오보다 훨씬 애절하면서 마지막 소녀의 웃음이 그것을 극대화 시킨다. 그리고 마지막 키스신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기대감을 심어주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이 들었다.

창현은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뮤직비디오 완결부분이 약간 달라졌을 뿐인데 뮤직비디오의 여운이 훨씬 길고 오래 남을 거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감탄도 잠시, 창현은 석규를 보며 말했다.

“이거 키스는 안 해도 되잖아요.”

그에 석규가 생강차를 한모금 마시며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누가 뭐라더냐? 키스신이 있다고 했지 키스를 해야 된다고 했더냐? 아, 설마 내심 있길 바란 게 아니더냐?”

짓궂은 웃음이 다시 맺히며 창현에게 말하는 석규.

“윽!”

그에 창현이 당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을 못한다. 옆에 있던 윤아는 살짝 수정된 시나리오를 보고 감탄을 금치 못하다가 석규의 말을 듣고는 얼굴이 붉어진다.

석규의 짓궂은 말에, 윤아의 붉어진 표정에 창현도 당황하며 말했다.

“그, 그게 아니라 아버지가 사람을 헷갈리게 말하셔서 그런 건데…….”

아들의 당황한 모습에 석규는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늘 애늙은이 같던 아들이 자기 나이 대에 맞는 모습을 보이자 즐거웠다.

“하하! 알고 있다. 장난 좀 친 거니 너무 그러지 마려무나. 윤아 양도 너무 부끄러워하지 말고. 창현이가 말했듯이 마지막에 키스신이 있지만 실제로 하는 것은 아니니까. 뮤직비디오 마지막은 가면의 기사 뒷모습을 찍으면서 끝이 나거든. 두 사람의 얼굴이 겹쳐지면서 끝나니 안심하게. 아직 데뷔도 하지 않은 아이돌의 앞길을 막을 수는 없는 것 아닌가? 하하!”

“아, 전 그게 아니라…….”

자신이 부끄러워했다는 사실이 들키자 당황하며 입을 여는 윤아. 하지만 석규의 짓궂은 말은 그런 실수를 놓치지 않았다.

“그게 아니라? 허, 설마 키스신이 진짜가 아니라는 게 아쉬운 겐가? 하하! 그럼 진짜로 해도 상관없고. 대신 창현이가 윤아 양 팬에게 밟혀죽을 수도 있지만.”

윤아가 펄쩍 뛰며 양팔을 저었다.

“저, 전 그게 아니에요. 그저 당황해서…….”

안절부절하지 못하는 그녀의 모습은 무척 귀여웠다. 석규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 알고 있으니 너무 당황하지 말게. 이거 살짝 놀렸는데 반응이 너무 좋구만. 계속 놀리고 싶을 정도야, 하하하!”

“장난 그만치세요, 아버지.”

옆에 있던 창현이 보다 못해 석규에게 한마디하였다.

창현의 타박에 석규가 양손을 들며 으쓱한다.

“알았다, 알았어. 안 그래도 윤아 양의 반응에 내가 너무 심했던 게 아닐까 싶었던 참이다. 장난이 너무 심했지요? 미안합니다, 윤아 양.”

어느새 침착함을 회복한 윤아가 살짝 웃음을 지어보였다.

“아니에요.”

“하하, 다행이네. 난 또 장난이 짓궂어서 기분이 안 좋을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거든.”

그렇게 소소하게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시간을 보내니 어느덧 미팅 시간이 다가왔다.

석규가 주도 하에 창현과 윤아는 뮤직비디오 주인공으로서 성공적인 미팅을 치를 수 있었다.


미팅은 간단하게 끝났다. 시나리오를 보여주었던대로 뮤직비디오의 컨셉이나 연기의 방향 등을 이야기 하였고, 일정을 조율하면서 구체적인 촬영 날짜를 잡아놓았다.

창현과 윤아가 아직 학생인 만큼 촬영 시간을 방과 후로 잡았다.

미팅이 생각보다 일찍 끝나자 창현이 윤아에게 제의했다.

“누나, 라샤 누나들하고 만난 뒤에 같이 저녁 먹는 건 어때요?”

“저녁? 나야 좋은데 폐가 되지 않을까?”

라샤를 만나는 것과 저녁을 먹는 것이 싫지는 않은지 윤아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녀는 아직 규모가 작은 AA엔터테인먼트인 만큼 그곳의 사장이 무시무시한 얼굴로 소속사 연예인의 등골을 빨아먹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을 줄 알았는데 농담도 잘하고 사람도 좋은 석규의 이미지가 상당히 좋게 각인되었나보다.

하지만 타 기획사였기에 조심스러운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창현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폐가 되긴요. 누나가 보아서 알겠지만 AA엔터테인먼트는 상당히 사람이 적어요. 그래서 누군가 인원 한 명이 늘어나면 매우 환영해줄 거예요. 지금 라샤 누나들은 연습실에 있으니 그쪽으로 가봐요.”

“응.”

창현을 따라가는 윤아. AA엔터테인먼트는 워낙 규모가 작아서 라샤의 연습실로 가는 것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연습실에 도착한 창현은 문을 열었다. 하지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창현은 자신이 실수했음을 알았다.

“어라? 아차!”

그러면서 어색한 표정으로 윤아를 보며 말했다.

“생각해보니 이번 라샤 누나들의 곡이 발라드라서 안무가 필요없네요. 아마 녹음실에 있을 거예요. 그리로 가요.”

“응. 알았어.”

아무것도 모르는 윤아는 그저 창현의 안내에 따를 뿐이었다.

녹음실에 도착하자 아니나 다를까 노래 연습에 몰두해 있는 라샤 멤버들을 볼 수 있었다. 타이틀 곡인 <가면의 기사>를 연습하고 있는 것이다.

창현은 잠시 멈칫했다. 아직 발표되지 않은 앨범 곡을 들려줘도 되나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고민도 잠시, 어차피 뮤직비디오를 찍게 되면 노래는 듣게 될 것이었기에 별로 개의치 않으며 녹음실 안으로 들어섰다.

노래를 부르던 라샤 멤버들은 안으로 들어선 창현과 윤아를 발견했지만 노래를 멈추지 않았다.

“와! 정말 라샤네. 와!”

윤아는 라샤가 노래를 부르는 장면을 보면서 눈을 반짝였다. 그 눈빛은 영락없는 동경의 눈빛이었다.

창현은 그 모습에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무슨 연예인 처음 보는 사람 같이 그래요. 누나도 연습생활 하면서 연예인 많이 봤을 거 아니에요?”

윤아가 창현에게 눈을 흘기며 말했다.

“하지만 같은 소속사 연예인 말고 다른 연예인은 거의 못본단 말이야. 우와! 노래 정말 잘한다.”

그때, 노래가 끝나면서 라샤 멤버들이 밖으로 나왔다.

창현은 그녀들이 다른 말하지 못하게 재빨리 윤아를 소개하였다.

“누나들 여기 이분은 이번 뮤직비디오 여주인공 역할을 맡게 된 윤아 누나에요. 그 아시죠? 저번에 싸인 CD요.”

그러면서 빠르게 눈짓하는 창현. 행여나 자신의 정체가 될 법한 말을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런 창현의 눈짓에 라샤 멤버들은 웃음을 짓더니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시린이 앞으로 나서면서 말한다.

“반가워요, 윤아 양. 저는 라샤의 리더 시린이에요. 그리고 이 얘가 세룬, 얘가 미란이에요.”

“세룬이에요. 만나서 반가워요.”

“미란이에요. 우리보다 어린데 말 놓아도 될까요?”

창현의 물밑 공작을 모르는 윤아는 라샤의 자기소개에 자신도 인사를 하며 소개를 하였다.

“안녕하세요? SM엔터테인먼트 연습생 임윤아에요. 잘부탁드려요. 그리고 제가 어리니 말 놓아주세요. 저도 언니라 불러도 될까요?”

시린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야 상관없지. 예쁜 동생 생겨서 좋은 걸.”

“와! 고마워요. 앞으로 친하게 지내요, 시린 언니.”

활짝 웃으며 어마어마한 친분을 과시하는 윤아.

삽시간에 네 여인은 수다를 떨며 광속이라 할 만큼 친해져갔다.

친해지는 건 좋은데 순식간에 외톨이가 된 창현은 내심 혀를 차며 헤드셋을 쓰고 방금 전 그녀들이 부른 노래를 들어본다. 하루가 지났지만 상당한 진전이었다.

‘조금만 손보면 녹음도 당초 예상보다 더 빨리 끝날 것 같네.’

그렇게 생각하며 조용히 생각에 잠겨있을 때였다.

갑자기 그의 어깨를 짚는 손이 있었다.

창현이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시린이 그의 어깨를 잡고 있었다.

시린은 창현의 반응이 재미있는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뭐해?”

그녀의 물음에 창현은 헤드셋을 벗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누나들 노래 불렀던 거 듣고 있었어요.”

“오늘은 쉬라고 사장님이 그러셨잖아.”

“하하! 그랬나요. 이거 완전 직업병이 된 거 같네요.”

“대화에 껴줄 테니 같이 가자고.”

피식 웃은 시린은 창현을 이끈다.

창현도 그런 시린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대화 대열에 합류한다.

미란은 창현이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싶어한다는 것을 간파하고는 아주 교묘한 질문으로 창현을 괴롭혔다. 저녁 식사를 하러 가기 전까지 창현은 그녀의 질문에 식은땀을 흘릴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고, 어찌어찌 언변을 발휘하여 가까스로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두고 봅시다, 미란 누나. 다음부터 노래 파트 적게 줘버릴 테다.’

창현은 의외로 뒤끝이 있었다.

윤아도 저녁식사를 같이 먹어도 되냐는 말에 석규는 대환영의 의지를 표했고, 적지만 친분으로 뭉친 그들은 즐겁고 알찬 저녁식사를 할 수 있었다.


윤아는 그날 밤 숙소에 늦게 도착하였다.

하지만 멤버들 누구도 그런 윤아를 타박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윤아가 어떤 것에 캐스팅되었는지 궁금했던 탓이다.

분명 무언가에 캐스팅이 되었는데 수만이나 윤아나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아직 계약이 완벽하게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계약 전부터 이야기가 나돌게 되면 손가락질을 받을 수 있던 일이었다.

그런 것은 잘 모르지만 계약이 완벽하게 진행되지 않았다는 말에 소녀들은 더 물어볼 수 없었고, 오늘 윤아가 미팅을 한 뒤 계약이 확실해진다는 말을 들었기에 그녀가 돌아오자마자 물어보는 것이었다.

소녀들에게 있어 윤아의 대답은 무척 중요했다. 왜냐하면 그녀가 무엇에 캐스팅 되었느냐에 따라 제일 귀찮은 저녁식사 당번과 설거지 당번에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윤아야! 도대체 네가 제의 받은 게 뭐야! 어서 말햇!”

“빨리 말하지 않으면 밤늦게 돌아다닌 죄로 처벌하겠다!”

“어서 말해봐! 도대체 뭐야!”

파바박 하고 연속으로 치고 들어오는 질문에 윤아가 당황한 표정을 짓는다.

그녀는 소녀들이 무슨 내기를 한지도 모른 채 대답한다.

“뮤, 뮤직비디오인데요?”

“뭐엇! 뮤직비디오?!”

“아싸! 이겼다!”

“오예! 설거지 당번 면제!”

윤아의 대답에 희비가 엇갈리는 소녀들. 태연과 유리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환호한다. 하지만 나머지 여섯 소녀들의 얼굴에는 절망이 드리운다.

“이럴 수가! CF일 줄 알았는데.”

“의외성은 무슨! 괜히 드라마 했다가… 에휴!”

어깨를 축 늘어뜨리는 소녀들. 그에 반해 승리에 도취 되어 있던 유리가 윤아에게 물었다.

“야, 윤아야! 그런데 무슨 뮤직비디오야?”

같이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던 태연도 궁금해하였다.

“그러게. 왠지 궁금하네. 누구의 뮤직비디오인가, 윤아 양.”

절망하던 다른 소녀들도 궁금한 듯했다.

윤아는 살짝 미소를 지은 채 대답한다.

“제가 찍게 된 뮤직비디오는 라샤의 새 미니 앨범 타이틀 곡 뮤직비디오에요.”

“……!”

윤아의 대답에 입을 쩍 벌리며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소녀들.

그녀들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다.

라샤의 뮤직비디오!

듣기만 해도 이 얼마나 대단한 단어란 말인가.

고공행진을 거듭하여 한국은 물론 일본까지 엄청난 인기를 얻은 라샤의 인기는 웬만한 한류 스타와 비슷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니, 그 기세만 본다면 그들을 뛰어넘고도 남았다.

그런 그녀들이 미니 앨범 제작을 선언한 지금 엄청난 관심이 모여들고 있는 것은 당연했다.

못해도 상박, 준대박은 따놓은 뮤직비디오에 출연하게 되다니. 당사자가 아닌 소녀들조차도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었다.

놀란 소녀들을 보며 윤아가 말했다.

“이번 뮤직비디오로 제가 관심을 받게 되면 언니들에게도 관심이 집중 될 거라고 삼촌이 그러셨어요. 그렇게 되면 데뷔도 앞당겨질 거라고 하셨고요.”

“그게 정말이야?”

그녀의 말은 좀 전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이었다. 윤아의 말에 눈을 번뜩이는 소녀들. 데뷔, 그 얼마나 기다리고 기다리던 단어란 말인가.

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삼촌은 내년 말로 생각하고 계시다던데 아마 이번에 관심이 모여들면 좀 더 당겨서 데뷔를 시켜줄 거라고 하시더라고요.”

윤아의 말을 들은 소녀들은 그녀를 끌어안는다. 그리고 외쳤다.

“이리와! 우리 복덩이.”

“파티다! 우리 복덩이가 잘 되었으니 파티를 해야 해!”

“그래! 늦었지만 파티를 하자! 오늘 삐뚤어지게 콜라 마셔보자.”

데뷔 이야기가 나오자 기뻐하는 소녀들. 동생 윤아가 잘되었다는 기쁨과 데뷔가 차츰 다가온다는 기쁨에 그녀들은 죽도록 콜라를 마시며 축하를 해주었다.



뮤직비디오 제작에 착수하면서 창현은 본격적으로 바빠지기 시작하였다.

학교 생활과 더불어 라샤의 앨범 녹음과 뮤직비디오 촬영을 겸해야 해서이다. 다행이라면 창현의 등장신은 많지 않았기에 어느 정도 조절이 가능했다.

처음에 감독은 창현을 보면서 매우 걱정했다. 뮤직비디오에서 창현이 가면을 쓰는 만큼 얼굴이 드러날 일은 없다. 그런 반면 뮤직비디오에서 가면의 기사가 등장하여 보여주는 장면은 액션신이 대부분이다.

창현이 그 액션신을 잘 소화할 수 있을까 걱정하는 기색을 보였는데 그의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창현은 여느 액션 배우와 비견될 정도로 액션신에 능했던 것이다. 엑스트라가 NG를 내었으면 내었지 창현이 NG를 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가면을 쓴 창현의 모습은 정말 책에서나 나올 법한 가면의 기사를 연출하고 있었다.

눈과 코 부분을 가린 채 가느다란 턱선과 붉은 입술을 드러내고, 부드러운 머릿결이 바람이 흩날리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창현의 신이 끝나자 윤아가 다가오며 말한다.

“와! 창현이 너 연기 진짜 잘한다. 이참에 배우 할 생각 없어?”

호들갑스러운 윤아의 말에 창현이 웃음을 지은 채 말했다.

“절 원한다면 얼마든지 출연하죠, 뭐.”

“그 말 무척 오만하게 들리는 거 알아?”

“그런가요? 하하!”

요 며칠 동안 마주하면서 창현과 윤아의 관계는 자연히 한층 친밀해질 수 있었다. 윤아는 밝고 활달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웃는 모습이 예쁜 소녀였다. 게다가 연기 실력도 제법 괜찮아서 뮤직비디오 촬영은 무난하게 이뤄질 수 있었다.

뮤직비디오의 내용은 시나리오에서 봤던 것과 같았다.

부유한 집안의 영양이던 그녀는 어느 날 갑자기 가업이 몰락하면서 부모님을 부양하는 처지에 내몰리게 된다.

힘든 상황이었지만 그녀는 웃음을 잃지 않은 채 열심히 살아갔다.

그런 그녀에게는 한 가지 비밀이 숨어 있었는데, 바로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었다.

그리고 그 능력을 우연찮게 알아차린 타국의 정보 기관에서 그녀를 납치하려고 한다.

그때 홀연하게 등장한 것이 가면의 기사였다.

어리지만 그는 탁월한 무술 실력과 총기술로 그녀를 위험에서 구해낸다. 그리고 그녀를 위험에서 구해내면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진다.

그녀에게 씻지 못할 죄를 지은 그는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고자 마음 먹었고, 그런 소년의 마음을 알아차린 그녀는 소년과 묘한 관계를 맺게 된다.

가면의 기사는 그녀가 위기에 처하면 어김없이 나타나 그녀를 구해주었고, 처음에는 원망 비슷한 감정이 서려있던 그녀는 차츰 가면의 기사에게 호감을 갖게 된다.

그리고 어느 날, 마침내 그녀는 총을 맞게 된다.

뒤늦게 가면의 기사가 나타났지만 그녀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태였다. 너무 많은 피를 흘린 탓에 회생이 불가능하였다.

그녀는 자신이 언젠가 이렇게 될 것이란 것을 알고 있는 상태였다.

뮤직비디오에서 그녀가 쓰러지고 가면의 기사가 나타나면서 노래는 끝이 난다. 그리고 이 장면이 뮤직비디오 내용의 하이라이트에 속한다.

큐 싸인이 떨어지고, 가면을 쓴 창현이 쓰러져 있는 그녀의 앞에 나타난다.

쏴아아아아.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쓰러져 있는 그녀를 중심으로 붉은 피가 번져나간다. 얼핏 봐도 회생이 불가능한 모습이었다.

우두커니 서서 비를 맞으며 가면의 기사가 서서히 그녀에게 다가간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아든다.

그러자 죽은 듯이 눈을 감고 있던 그녀의 눈썹이 파르르 떨린다. 빗물을 머금은 그녀의 눈썹은 길고 아름다웠다.

눈을 뜬 그녀는 자신을 안아든 가면의 기사를 보며 미소를 머금는다.

“당신이군요. 위기에 처하면 언제나 나타나주는 나만의 기사님.”

“…….”

가면의 기사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러자 그녀는 처연한 표정으로 말한다. 모든 것을 포기한 얼굴이다.

“저를 내려서 받쳐 주시겠어요?”

그녀의 말에 가면의 기사는 그녀를 내려놓고 양팔로 그녀의 등을 받쳐준다.

힘겹게 숨을 몰아쉰 그녀가 말한다.

“전 모든 것을 알고 있어요. 당신이 저희 가문을 몰락 시켰다는 것도… 그리고 당신이 제게 얼마나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모두 말이에요.”

“…….”

가면의 기사의 눈이 거세게 흔들린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그녀가 계속 말을 한다.

“당신은 나의 원수인데… 당신은 내 모든 것을 빼앗아간 사람인데… 난 당신을 원망할 수 없어요. 왜 그런지 아시나요?”

가면의 기사가 고개를 젓는다.

그에 그녀가 미소를 짓는다. 맑디 맑았던 그녀의 눈은 급속도로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하아!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난 당신을 사랑하게 되었으니까요. 기사님, 나만의 기사님. 마지막 부탁이 있어요. 당신의 얼굴을… 볼 수 있을까요?”

가면의 기사가 살짝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자 그녀가 힘겹게 손을 뻗으며 가면을 벗겨낸다. 긴 머리가 그의 얼굴을 가린다. 그녀는 손으로 앞머리를 옆으로 쓸어올리며 얼굴을 본다. 얼굴을 확인한 그녀가 천천히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 천천히 그녀의 몸에서 생기가 빠져나간다.

철그렁.

그녀의 손에 쥐어져 있던 가면이 바닥에 떨어진다.

“…….”

가면을 잃은 기사는 그런 그녀를 한동안 바라본다. 빗물과 뒤섞인 그의 눈물이 그녀의 얼굴에 한방울 떨어진다.

여태껏 침묵을 지키고 있던 그는 영원히 떠나버린 그녀를 위해 마지막 한마디를 한다.

“Good Bye, My Princess.”

그와 함께 그의 고개가 서서히 식어가는 그녀의 얼굴을 향한다. 두 사람의 입술과 입술이 서서히 가까워지면서, 카메라가 차츰 멀어지며 뮤직비디오의 끝을 알려간다.

그것이 뮤직비디오의 끝이었다.


‘정말 최고의 연기가 나왔어.’

몸을 축 늘어뜨리며 비극의 여주인공 연기를 하는 윤아는 스스로가 놀랄 정도로 자신의 연기에 감탄을 하였다.

그녀는 자신 스스로도 알고 있다. 자신의 연기 실력이 웬만한 배우에 비하면 많이 떨어진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런 말이 쏙 들어갈 정도로 최고의 연기가 나왔다. 왜 그런 것인지 명확하게 알지는 못했지만 그녀는 어렴풋하게나마 자신의 연기가 잘 나온 이유는 알 수 있었다.

바로 눈앞의 창현 때문이었다.

대사가 없고 그저 묵묵히 자신을 바라볼 뿐이지만 그의 눈빛은 윤아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의 눈빛에 이끌려 대사가 흘러나오고 자신 스스로 분위기를 조성하며 지금 자신의 배역에 저절로 몰입하게 되었다.

이것은 놀라운 경험이었다. 그녀는 여태까지 몇 번이고 연기를 해보았지만 이런 경험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창현이 자신을 이렇게 이끈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한 채, 그의 눈빛이 오늘따라 자신의 연기를 좋게 만든다고 생각하면서 연기에 몰입하였다.

그리고 대사를 하면서 가면을 벗긴다. 비에 젖은 그의 앞머리가 얼굴을 가린다.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그의 머리를 쓸어올리며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녀의 가슴이 콩닥콩닥 뛴다.

‘너, 너무 섹시하잖아.’

수많은 연습생들을 보고 수많은 미남들을 보아왔지만 이렇게 분위기에 맞추어 여성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얼굴은 본 적이 없다.

윤아는 자신의 마음을 사정없이 두방망이질 치게 만드는 창현의 얼굴을 바라보며 대사를 읊는다. 단순히 대사만을 하는 것인데 왜 이렇게 부끄럽고, 왜 이렇게 두근거리며, 왜 이렇게 기쁜 것일까.

마침내 눈을 감고 몸에 힘을 뺀다. 축 늘어지는 몸, 그것을 지탱하는 것은 창현의 힘이다.

그러자 살짝 걱정이 된다. 나중에 무겁다고 생각하면 어떻게 되는 걸까.

그 걱정은 나중으로 미뤄졌다.

Good Bye My Princess란 말이 창현에게서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낮은 저음이 음울하게 울려퍼지면서 그 슬픔이 확 전해져온다. 지금 분위기와 놀라울 정도로 완벽한 싱크로율을 보이고 있었다.

그와 함께 서서히 자신에게 다가오는 창현의 얼굴.

눈을 감고 있었지만 그것이 느껴졌다.

다가오는 얼굴과 함께 그의 숨결이 느껴진다. 인공 비가 내린 탓일까. 촉촉하고 습하면서 달콤한 내음이 그녀에게 전해져온다.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진 게 아닐까 걱정되는 순간이었다.

정말 그의 고개가 가까이 다가왔다. 이대로 입술과 입술이 닿아버리는 게 아닐까 상상하는 순간, 컷! 하는 소리가 들린다.

동시에 닿을 듯 말듯하던 창현의 고개가 확 멀어진다.

눈을 살며시 뜨니 창현이 미소를 지은 채 손을 내밀고 있었다.

자신의 마음도 모른 채 웃고 있는 창현이 야속했다.

창현은 자신의 손을 잡지 않자 고개를 갸웃한다.

“왜 그러세요?”

“응? 아, 아니야.”

윤아는 창현의 손이 무안하게 여태껏 방치해뒀다는 것을 깨닫고는 그의 손을 잡고 일어선다.

창현은 윤아를 보며 말했다.

“누나 연기 잘하시네요. 가수하면서 나중에 연기도 하는 거 아니에요?”

“그러면 좋지. 하지만 지금은 가수가 하고 싶어. 무대 위에 서서 내 노래를 들려주고 싶거든.”

“그렇군요.”

두 사람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눌 때, 스텝 한 명이 다가와서 묻는다.

“창현 군! 윤아 양! 촬영도 끝났으니 회식을 할까 하는데 어때요?”

윤아가 창현을 보면서 묻는다.

“창현아 어쩔 거야? 회식 참가할 거야?”

“네? 아, 전 일이 있어서… 아, 아니에요. 참석할게요.”

AA엔터테인먼트로 돌아가 라샤의 녹음을 진행하려던 창현은 갑자기 윤아의 안색이 급속도로 침울해지자 황급히 말을 바꾸었다. 그러자 윤아의 표정이 밝아진다.

그 모습을 보면서 창현이 어색한 표정을 짓는다.

반면 윤아는 여전히 그 표정이 밝다.


“하아!”

회식은 일찍 끝났다.

창현과 윤아는 아직 미성년자였기에 저녁식사만 함께 한 뒤 자리를 벗어났다.

할 일이 있다면서 창현은 AA엔터테인먼트로 향했고, 윤아는 곧장 숙소로 향했다. 뮤직비디오 촬영 기간 동안은 연습을 하지 않아도 되기에 그녀는 조금 일찍 숙소에 도착했다.

주말이라 멤버들은 밤까지 연습을 하기에 숙소에는 윤아 혼자였다.

그녀는 쓰러지듯 소파에 몸을 묻으며 중얼거렸다.

“내가 왜 이러는 거지?”

윤아는 자신이 왜 이러는지 몰랐다.

자꾸만 가슴이 답답하고 무언가가 막혀있는 듯했다.

특히 창현을 볼 때 더욱 그랬다.

왜 그런 걸까?

하다못해 오늘 뮤직비디오 촬영까지만 하여도 그녀는 이런 증상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담담했고, 마주할 때면 기분이 좋아질 뿐이었다.

그런데 마지막 장면을 찍으면서부터 그녀는 자신이 이상해졌다고 생각했다.

창현을 볼 때마다 가슴이 쿵쿵 뛰었고 그와 좀 더 같이 있고 싶었다.

이런 증상이 나타나는데 그녀가 자신의 상태가 어떤지 모를 리가 없다.

“내가 창현이를……?”

중얼거리던 그녀는 고개를 살짝 젓는다.

사랑에는 어떠한 계기가 필요한 법이다. 첫눈에 반하는 그런 사랑을 믿지 않는다.

물론 그녀가 창현과 처음 만나는 것은 아니었다. 자신에게 도움을 준다는 말에 의하여 만나게 되었고, 도움을 받았기에 당연히 호감의 감정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이성으로써 좋아하는 감정이 아니었다.

그런데…….

“어쩌다가 내가…….”

그녀는 자기 관리가 무척 엄격한 편이다.

멤버들은 주현이 보더러 자기 관리가 철저하다고 하지만 실제로 멤버들 중에서 가장 자기 관리가 철저한 것은 바로 윤아였다.

아직 데뷔를 앞에 두고 이렇다 할 활동이 없는 멤버들이었지만 자신은 운이 좋아서인지 몇몇 활동을 하면서 어느 정도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알게 모르게 접근하는 이성들이 있었고, 그녀는 그들의 접근을 미소로써 차단하며 스스로의 마음을 차갑게 만들었다.

가수로서 데뷔를 앞에 두고 누군가를 사귀는 것은 아니, 하다못해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 자체가 독이 될 수 있다. 그랬기에 그녀는 언제나 밝고 활기차게 행동하면서 한편으로는 마음을 차갑게 식혔다. 누구도 녹일 수 없게. 누구도 침범할 수 없게.

잘생긴 연습생 오빠들이나 동갑내기, 동생들을 보면서 이성으로써 보이지 않게 되자 그녀는 자신의 마음이 완벽하게 벽을 이루었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의 착각이었다.

갑자기 찾아온 그의 존재는 그녀의 마음을 삽시간에 무너뜨리고 중심 영역까지 침범해왔다.

언제였을까.

스스로 의문을 던져보지만 그녀는 알고 있다. 바로 뮤직비디오 마지막 촬영 장면에서였다.

가면을 벗기고 머리를 쓸어 올리는 순간 그녀는 느끼고 말았다.

진정한 연기가 무엇인지 말이다.

가면이 벗겨진 뒤 창현의 얼굴은 카메라에 잡히지 않는다. 가면의 기사 특성상 신비감을 조성해야 되기 때문이다.

카메라에 잡히지 않음에도 창현은 몸 하나하나 표정 하나하나에 연기를 부여하고 있었다. 그는 정말 가면의 기사가 되었고, 마음에 두던 여인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하고 있었다.

슬픔, 안타까움, 미안함이 담긴 눈빛과 표정. 그리고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그런 애틋한 감정이 윤아의 가슴 속 깊이 침범해 들어와 차갑고 단단하게 뭉쳐있는 그녀의 얼음벽을 부숴버렸다.

그것은 그녀도 자각하지 못하던 찰나의 순간이었다.

갑작스러운 감정 변화에 그녀는 당황해야만 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다짐한다.

“나 마음의 벽이 부서졌다면 다시 그걸 쌓아나가자. 한 번 해왔으니까 난 다시 할 수 있을 거야.”

꿈을 이루기 위해 달려온 시간들이 있다.

그것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을 위해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다시 잠그기로 결심하였다.

굳게 결심을 하는 그녀.

하지만 생각과 다르게 그녀의 눈은 잘게 떨리고 있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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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마음을 울리는 음악 시즌2 제1화 +10 15.04.17 7,376 95 10쪽
37 ▲▲▲▲▲시즌2 시작!▲▲▲▲▲ +5 15.04.17 5,425 65 1쪽
36 마음을 울리는 음악 106장-108장 +8 15.04.16 6,414 106 230쪽
35 마음을 울리는 음악 103장-105장 +1 15.04.16 4,244 82 314쪽
34 마음을 울리는 음악 100장-102장 +2 15.04.16 4,413 68 229쪽
33 마음을 울리는 음악 97장-99장 +1 15.04.16 4,389 63 264쪽
32 마음을 울리는 음악 94장-96장 +1 15.04.16 4,379 80 230쪽
31 마음을 울리는 음악 91장-93장 +1 15.04.16 5,125 76 268쪽
30 마음을 울리는 음악 88장-90장 +1 15.04.16 4,929 98 332쪽
29 마음을 울리는 음악 85장-87장 +1 15.04.16 4,711 83 270쪽
28 마음을 울리는 음악 82장-84장 +2 15.04.16 4,913 85 261쪽
27 마음을 울리는 음악 79장-81장 +1 15.04.16 4,580 87 241쪽
26 마음을 울리는 음악 76장-78장 +1 15.04.16 4,752 74 244쪽
25 마음을 울리는 음악 73장-75장 +1 15.04.16 4,939 111 327쪽
24 마음을 울리는 음악 70장-72장 +1 15.04.16 4,755 82 200쪽
23 마음을 울리는 음악 67장-69장 +1 15.04.16 4,742 80 2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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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마음을 울리는 음악 61장-63장 +2 15.04.16 5,259 79 316쪽
20 마음을 울리는 음악 58장-60장 +1 15.04.16 5,251 74 186쪽
19 마음을 울리는 음악 55장-57장 +2 15.04.16 5,595 95 2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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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마음을 울리는 음악 34장-36장 +8 15.04.16 9,524 189 322쪽
11 마음을 울리는 음악 31장-33장 +8 15.04.16 10,355 261 3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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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마음을 울리는 음악 22장-24장 +4 15.04.16 10,924 261 198쪽
7 마음을 울리는 음악 19장-21장 +4 15.04.16 11,492 270 216쪽
6 마음을 울리는 음악 16장-18장 +5 15.04.16 11,543 242 163쪽
» 마음을 울리는 음악 13장-15장 +5 15.04.16 14,535 297 237쪽
4 마음을 울리는 음악 10장-12장 +8 15.04.16 13,737 352 171쪽
3 마음을 울리는 음악 7장-9장 +10 15.04.16 14,552 362 142쪽
2 마음을 울리는 음악 4장-6장 +11 15.04.16 16,837 421 120쪽
1 마음을 울리는 음악 프롤로그-3장 +47 15.04.16 29,899 545 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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