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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번 님의 서재입니다.

마음을 울리는 음악

웹소설 > 작가연재 > 팬픽·패러디, 현대판타지

김현우
작품등록일 :
2015.04.16 13:27
최근연재일 :
2015.06.01 17:02
연재수 :
5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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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4.16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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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86쪽

마음을 울리는 음악 58장-60장

DUMMY

제58장 조짐




드라마 1화가 대박이 난 이후 인터넷상에서 또 다시 시끌시끌한 화제가 생겨났다.

창현과 지영이 부른 듀엣 곡 때문이었다.

지영과 그 친구들이 노래와 스티커 사진을 유출한 것으로 인해 한동안 큰 사건이 벌어진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 때문인지 지영은 인터넷에서 제법 유명했었다.

인터넷에서 네티즌들은 지영을 일컫길 현대판 신데렐라라 하였다. 아버지와 오빠를 잘 만나 하루아침에 인생이 달라진 경우 때문이었다. 그랬기에 비호감까지는 아니더라도 호감은 아니었다. 특히 졸지에 현의 여동생이 된 경우는 부러움을 자아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녀가 AA엔터테인먼트의 연습생이 되었다는 것도 무척 부정적으로 인식되었다. 연습생을 받지 않기로 유명한 그곳에 연습생이 된 것은 부모의 후광 혹은 오빠의 후광이 작용했다고 여겨서이다.

그러던 차에 현의 팬 사이트인 다크 스타로 현이 게시글을 올렸다. 게시글의 제목은 축하받을 일이 있어서 귀여운 여동생과 함께 듀엣 곡을 불렀다는 내용이었다.

김동률, 이소은의 <기적>을 부른 두 남매의 가창력은 훌륭했다. 지영의 실력을 누르는 것이 아닌, 조화를 이끌어내는 현의 가창력은 두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훌륭했고, 감정을 한껏 담아내는 지영의 가창력 또한 뛰어났다. 그리고 게시글 내용인 막내 동생이 올해 말에 태어날 것이란 말은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자아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게다가 두 사람의 노래 또한 호평에 호평을 얻어냈고.

다크 스타는 기본적으로 팬 사이트였고, 상당히 이성적인 팬들이 많았기에 지영을 맹목적으로 싫어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다만 벼락출세를 하듯 현의 여동생이 된 게 부럽고 질투가 날 뿐이었다. 덤으로 AA엔터테인먼트 연습생이 된 것도 비슷한 감정이었고 말이다.

그런 와중에 동생이 생겼다는 게시글과 함께 상당한 가창력이 발휘된 듀엣곡은 팬들의 의식을 전환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연습생으로 들어간 지 채 반년도 되지 않았지만 지영은 본인이 느끼는 감정을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막내 동생이 생겼다는 이야기는 인터넷 상에 널리 퍼져 나가기 시작했고, 현의 팬들은 축하 인사를 하면서 한편으로는 AA엔터테인먼트 사장인 석규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열일곱 살인 현의 아버지인 만큼 나이가 사십대 중반일 확률이 높은데 늦둥이를 낳았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능력이었던 것이다.

한 회사의 사장인데다가 뛰어난 아들까지 두었다. 거기에 아직 정정한 능력까지.

네티즌들은 석규를 폭풍능력 중년남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절대 호감의 현의 아버지였기에 그의 별명 또한 호감형일 수밖에 없었다.

드라마가 대박이 난 창현은 첫날 소녀시대와, 둘째 날은 드라마 ost에 참여한 가수들과 함께 축하 파티를 즐겼다.

하는 일마다 잘 되었기에 창현의 안색은 밝았고, 지영 또한 자신의 실력을 인정받았다는 것에 상기된 기색을 보였다. 그래서인지 보컬 트레이닝을 받을 때도 더욱 열심히 하고는 하였다.

이틀에 걸친 잔업과 축하 파티까지 모두 끝낸 창현은 지선을 찾아갔다. 종종 창현이 찾아가고는 했지만 드라마 촬영에 들어가게 되면서 일본 활동까지 하게 되자 제대로 지선과 만날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어머니, 임신 축하드려요.”

집에서 조용히 시간을 보내던 지선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창현을 맞이하였다.

“깜짝 방문인 거니? 놀랐잖니.”

“놀라게 한 거예요? 죄송해요. 이 정도는 괜찮을 줄 알았는데.”

임신 중에 격한 반응을 하면 안 되었기에 창현은 지선을 놀라게 한 것에 바로 사과를 하였다. 인터폰으로 자신의 모습을 확인했기에 그리 놀라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자신이 경솔한 모습을 보인 듯했다.

“호호! 그리 놀라지 않았으니 사과할 필요 없단다. 갑자기 찾아와서 장난을 친 거니까. 여기 앉으렴.”

지선의 권유로 거실에 자리한 소파에 앉은 창현이 말한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아니, 제가 갈게요.”

창현은 지선이 자리에 앉지 않고 주방으로 향하려 하자 자신이 하겠다고 한다.

그러자 지선이 고개를 젓는다.

“아니지. 오랜만에 창현이가 왔는데 손님이 일을 하게 만들 수는 없잖니.”

“손님이기 전에 가족이잖아요. 남 취급하는 건 저도 싫다고요. 그럼 제가 들고 오도록 할게요. 그럼 되는 거죠?”

“괜찮은데…….”

말끝을 흐리는 지선이었지만 창현의 말을 못이긴 척 따른다. 이렇게 알아서 나서주는 아들이 마냥 고맙기만 한 그녀였다.

지선과 나란히 주방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창현이 말한다.

“몇 번 와보지는 않았지만 올 때마다 좋네요.”

“가끔은 너무 부담되기도 해. 그이가 일을 하는 아주머니를 들이겠다고 할 정도니 더 부담이 되기도 하고…….”

지선 또한 아직 집이 적응이 되지 않는 듯하였다. 그래서인지 영 불편한 표정을 짓고는 한다.

석규와 결혼을 한 후 지선은 지영과 단둘이 살던 아파트를 처분하고 집을 옮겼다. 석규가 그동안 꽁꽁 싸매던 돈을 대대적으로 풀어 강남에 큰 저택을 마련한 것이다. 사람들끼리 함께 사는 것도 좋지만 지선이나 지영 모두 조용한 것을 선호하였기에 석규는 큰 회사 사장들이 살 법한 저택을 구입했다. 경비 또한 탄탄하고 담 또한 무척 높은 곳이어서 도둑이 침입할 걱정이 거의 없었고, 마당까지 있어 바비큐 파티까지 가능한 완전 호화로운 저택이었다.

좋은 집이었지만 지선은 너무 호화로운 것이 불편한 듯하였다. 그냥 세 식구가 살기 좋은 32평 아파트 정도면 만족했는데 갑자기 1,2층 합쳐서 100평이 넘는 저택을 구입하여 살게 되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검소하게 살아온 지선에게 있어 지금의 삶은 무척 편안하기는 했지만 몸에 맞지 않은 불편한 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하기도 하였다.

그 말에 창현이 석규를 옹호하는 말을 하였다.

“어쩔 수 없죠. 아버지가 어머니를 힘들게 만들지 않으려는 거니까요. 그렇다고 아버지가 쓸데없는 곳에 돈을 쓰시는 분도 아니고요. 다 어머니를 위해서 하는 것이니 좋은 의미로 받아들이면 좋겠어요. 당장 일하는 아주머니를 고용하고 있잖아요? 좋게 생각하면 아버지가 그분들의 직업을 창출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고요. 좋게좋게 생각하시면 좋을 것 같아요.”

갑자기 주변 환경이 바뀌면 부담스러운 것은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지선은 석규와 결혼을 하면서 규모는 크지 않지만 알찬 규모를 보유한 회사 사장의 부인이 되었고, 스타인 아들을 두게 되었다. 그런 만큼 이런 소비를 불편해하면 결국 가족들마저도 불편해 할 수 있다.

지선은 창현의 말에 고개를 나직이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 생각해야겠지. 그이가 나를 괴롭히려고 그러는 게 아니니까.”

“그걸 아시면 된 거죠. 정 불편하시면 어머니도 살짝 도와주시면 되고요. 불편하지 않게 친절하게 대해줘도 되고요. 그러면 되는 거예요.”

구구절절 옳은 말을 하는 창현이었다. 그래서 지선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문득 떠오른 게 있는 듯 창현에게 말한다.

“그러지 말고 이참에 창현이 너도 이쪽으로 이사 오는 게 어떠니? 여기 방비도 철저해서 괜찮을 것 같은데…….”

지선의 말에 창현이 고개를 젓는다.

“방비가 철저해도 사생팬들이 있어서 안되요. 자칫 가족들에게 폐가 될 수도 있고요.”

창현이 따로 나가서 살고 있는 이유는 자신으로 인해 가족들이 피해를 입을까 싶어서 그랬다. 괜히 자신을 보고자 모여든 팬들에게 함부로 대하기 힘든 것도 있지만 가족들이 행여나 입을 수 있는 피해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는 의미도 숨어 있었다.

또 다른 이유도 하나 있었다.

“게다가 녹음실도 거리가 멀어지고요. 제가 머무는 집 앞에 마련되어 있는데 이곳에서는 좀 멀거든요.”

여러 이유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었다.

창현의 말을 들은 지선은 아쉬운 표정을 짓는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고…….”

“하하, 아쉬워도 참으세요. 대신 자주 찾아오도록 노력할게요.”

창현의 말을 들은 지선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 내가 예쁜 아들을 괜히 피곤하게 만드는 것 같네. 억지로 찾아오지 말고 시간 날 때마다 종종 찾아오렴.”

지선의 걱정에 창현이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하하, 그건 저만 믿으세요. 이래보여도 프로라고요. 제 몸 관리는 철저하게 하니까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요.”

호언장담을 하는 창현의 모습에 지선은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쟁반 위에는 딸기와 사과가 놓였다. 그리고 쟁반을 창현이 받아들고는 거실로 발걸음을 옮기려던 차였다.

창현의 앞에서 놀란 지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어? 오빠, 오늘 온 거였어?”

고개를 돌린 창현의 눈에 지영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창현은 고개를 나직이 끄덕이고는 지영에게 말했다.

“깜짝 방문을 했지. 그런데 일찍 왔네? 방에만 있던 거야? 어머니랑 이야기도 하고 그래야지.”

그 말에 지영이 어색한 웃음을 흘리면서 말했다.

“헤헤! 그게… 친구들이 놀러 와서 같이 방에서 놀고 있었어.”

“친구? 자주 데리고 오나?”

창현의 물음이 지선이 대답하였다.

“집이 넓다 보니 자주 데리고 오라고 했단다. 지영이도 3학년으로 올라가면서 친구들을 많이 사귀었는지 곧잘 데려오고 있고.”

“그래요? 그랬구나.”

“응응! 그런 거야.”

그러면서 지영이 창현과 함께 거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다가 창현에게 찰싹 달라붙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오빠, 요즘 써니 언니랑 자주 통화해?”

“순규 누나? 문자는 종종 주고받지만 자주 연락을 하고 지내지는 않는데? 갑자기 그건 왜?”

뜬금없는 지영의 물음에 고개를 갸웃하며 묻는 창현이었다.

그러자 지영이 웃음을 짓더니 말한다.

“응? 아, 저번에 만났을 때 나한테 너무 잘 대해주더라고. 친절하기도 하고 성격도 좋고. 완전 좋아져서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지영의 작전이 발동되었다.

유리의 대항마로 순규를 내세운 만큼 그녀를 적극적으로 밀어주려는 계획을 세웠다.

어차피 순규는 창현에게 특별한 감정이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자신이 밀어주어도 상관없다고 생각을 하면서 갑자기 순규 찬양에 들어간 지영이었다.

키는 작지만 몸매가 좋다는 둥, 성격이 좋다는 둥 하나부터 열까지 순규의 칭찬밖에 없었다.

그런 지영의 말을 들으면서 창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정말 그랬었나?’

지영의 말을 들으면서 창현은 헷갈리는 걸 느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순규는 스타에서 지면 짐승같이 포효를 하면서 가까이 있으면 호시탐탐 폭력을 행사하려고 하는 난폭함의 대명사였다. 그런데 지영의 말을 들어보면 완전 날개 없는 천사가 아닌가?

거듭되는 지영의 말을 들어볼수록 헷갈리는 창현이었다.

“지영이 네 맘에 단단히 들었나 보네. 순규 누나가 그 정도였다니.”

“응응. 내가 소녀시대 내에서 가장 좋아하는 언니라니깐?”

열렬히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의 의미를 보이는 지영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알까.

그녀의 충동질로 인하여 창현을 그저 그렇게 여기던 순규가 급격히 호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녀의 선택으로 인해 순규가 창현을 좋아하고 있는 과정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것도 모른 채 열심히 순규를 밀어줘서 유리를 견제하려는 지영의 모습은 정말 안쓰럽기 그지없었다.

지금 같은 상황이 바로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과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영의 의도도, 순규의 변화도 감지하지 못한 창현이 제일 불쌍하고 말이다.

그저 지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순규의 성격에 대해 다시 한 번 재정립할 뿐. 실제로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성공적이라 할 수 있었다.

“그래? 의외네. 순규 누나한테 그런 면이 있다니.”

“응응! 그렇다니깐.”

어느덧 창현과 이야기에 완전히 몰입해 있는 지영이었다.

그러다가 창현이 힐끗 지영을 바라보면서 물었다.

“그런데 지영이 너 괜찮아? 친구 왔다면서? 간식이라도 챙겨서 가려던 거 아니었어?”

순간 지영은 들고 있던 딸기를 놓쳤다. 그리고는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는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앗! 맞다!”

그러면서 부리나케 자리에서 일어나며 주방으로 향하는 지영을 보며 창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에휴! 의외로 손이 많이 간다니까.”

“그러니 창현이 네가 잘 챙겨주렴.”

“네, 그래야죠.”

지선의 말에 창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주방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여기저기서 과자를 꺼내 그릇에 담는 지영의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창현이 쟁반을 꺼내고는 잘 정리를 해주었다.

그리고 냉장고에서 주스를 꺼내오던 지영이 놀라 외쳤다.

“앗! 오빠! 뭐하려고?”

“뭘 하긴. 혼자서 들고 가기 힘들어보여서 도와주려는 거잖아. 게다가 지영이 친구면 한 번 인사를 해야 할 것 같기도 하고.”

창현의 배려를 느낀 지영이 혀를 살짝 빼며 감사의 인사를 하였다.

“헤헤, 고마워, 오빠.”

“고맙긴. 이럴 때 오빠가 있어서 좋은 거지. 자, 가자.”

“응!”

그렇게 창현은 과자와 컵을 쟁반에 받쳐 들고, 지영은 주스 두 병을 들고 2층 방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지영의 방앞에 도착하여 노크를 하자 안쪽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최지영! 너무 늦게 오는 거 아냐?”

“미, 미안! 그리고 소리 지르지 마! 손님 왔단 말이야!”

친구의 타박에 얼굴이 붉어진 지영이 창현을 힐끔 보고는 버럭 소리를 지른다.

그에 안쪽에서 우당탕! 하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지영에게 다시 소리를 친다.

“뭐, 뭐야! 왜 손님이 온 걸 말을 안 했어?”

“몰라. 나도 갑작스럽단 말이야. 어쨌든 오빠가 너희들에게 인사하고 싶다고 하거든.”

“오, 오빠? 지영이 네 오빠라면…….”

그 말이 다 흘러나오기 전에 창현이 한손을 들어 문을 열었다.

그러자 창현과 지영의 눈에는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세 명의 소녀가 눈에 들어왔다. 모두 지영이 다니는 중학교의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었다.

창현의 모습을 확인한 소녀들의 눈이 휘둥그레 변한다.

그러한 소녀들의 모습에 창현이 낮게 웃음을 짓고는 자기소개를 한다.

“반가워요. 지영이 오빠 강창현입니다.”

“아아…….”

소녀들의 입에서는 나직이 감탄사만 흘러나올 뿐이었다.


“후우!”

집을 나선 창현의 입에서 나직이 한숨이 흘러나왔다.

오랜만에 지선을 만나보고 지영을 비롯하여 친구들도 만나게 되어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지영의 친구들은 실제로 창현을 보게 되자 딱딱하게 얼어붙고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반응을 보였다. 창현이 거듭 친절한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일상에서 스타를 만난다는 것이 쉽지 않았기에 소녀들은 헤어질 때까지 딱딱한 모습을 보였다.

창현이 한숨을 내쉬는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지선과 지영을 만난 시간은 분명 즐거운 만남이었다. 하지만 뭐라고 해야 할까. 그의 가슴에는 무언가가 막혀있는 것처럼 답답함을 호소하고 있었다.

“뭐 때문일까.”

그렇게 말을 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저 가슴이 답답할 뿐이었으니까.

그는 왜 자신이 이런 느낌을 받아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원인을 알지 못하기에 더욱 답답함을 느끼는 것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이유를 안다면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노력이라도 했을 테니까.

“집에 가서 클래식이라도 틀어놓고 마음을 안정시켜야겠군.”

조용한 집속에서 클래식을 틀어놓고 생각을 비울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 성공이라 생각하는 창현이었다.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움직여야 할 판인데 이런 심란한 마음은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으니까.

언제나 일을 위해서 스스로의 몸과 정신 상태를 만전의 상태로 만들어놓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 면에서 창현은 진정한 프로였다. 자신의 몸 상태를 냉정하게 판단하고, 그것을 완화시킬 방법을 내놓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그의 방법은 말 그대로 ‘완화’시킬 뿐이었지 ‘완치’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억누르고 억누른 것은 언젠가 터지기 마련이다.

지금 창현이 그와 비슷한 처지에 놓여있다고 할 수 있다.

당장이라도 터질 듯한 시한폭탄 같은 모습.

그것이 바로 창현의 상황이었다.


“후우! 잠이 들었네…….”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창현은 곧장 잠에 빠져들었다. 클래식을 들으며 잠시 누워 있는다는 것이 깊은 수면으로 유도한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선 창현이 가볍게 몸을 풀었다. 시간을 확인하니 새벽 5시다. 어제 오후 8시에 집에 도착하여 잠에 들은 것을 감안하면 9시간 동안 잠이 들었다는 이야기였다.

몸을 풀어보며 창현은 자신의 몸 상태를 체크하기 시작했다.

푹 잠이 들었기에 몸은 상쾌했고, 무엇보다 그를 괴롭히던 답답함이 말끔하게 가신 상태였다.

그걸 확인하게 되자 창현의 표정이 사르르 풀렸다.

“괜찮아졌네. 다행이야.”

일시적인 현상이었다는 것에 안도하면서 밝은 표정을 짓는 창현이었다. 장시간 동안 지속되면 어쩔까 싶었는데 잠을 푹 자고 나니 말끔하게 해결되어 있던 것이다.

상쾌한 마음으로 명상에 잠기며 오늘도 활기찬 하루를 위해 분주히 준비하기 시작하는 창현이었다. 오늘부터 다시 촬영에 참여해야 했다.

여태까지는 그가 나오지 않는 장면들을 위주로 촬영을 했지만 주연 중에서도 가장 비중이 높은 그가 나오지 않으면 드라마 스토리가 제대로 진행이 될 리가 없다. 그래서 4월 초까지 그가 나오는 장면들을 집중 촬영하였고, 창현이 일본 활동을 떠난 뒤 그가 나오지 않는 장면들을 촬영하며 분량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현재 완벽하게 완성이 된 것은 5화까지였고, 10화까지 어느 정도 틀을 잡아놓은 상황이었다. 몇 장면을 더 촬영하면 10화까지 무난하게 완성이 된다고 볼 수 있었다.

아침을 먹고 준비를 한 창현이 본격적으로 나갈 준비를 마쳤다. 오늘 드라마 촬영은 점심시간부터 저녁시간까지 이루어지기에 단단히 준비를 하고 가야했다.

씻고 나올 무렵 세희에게서 전화가 온다.

“여보세요? 네, 세희 누나. 준비 거의 다 했어요. 올 때쯤이면 완벽하게 준비가 될 것 같아요. 네. 지하 주차장으로 갈게요. 네, 거기서 만나요.”

그렇게 통화를 끝낸 창현이 부지런히 옷을 챙겨 입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소지품을 챙기고는 집을 나섰다.

곧장 지하주차장으로 향하자 그곳에 벤이 자리해 있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 창현이 인사를 하며 물었다.

“안녕하세요, 제가 늦은 거 아니죠?”

“우리도 막 도착했으니까 늦은 거 아니야.”

“다행이네요.”

남에게 피해를 끼치는 것을 무척 싫어하는 창현이었기에 세희의 말에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창현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세희가 입을 열었다.

“그동안 쉬었으니까 잘할 수 있지?”

창현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이 묘했다.

그 눈빛에 창현은 세희가 무언가 알고 있는가 싶었지만 그럴 리가 없을 것이라 판단하면서 대답했다.

“…물론이죠. 쉬다 보니 체력이 넘치다 못해 흘러넘칠 정도인 걸요.”

그러면서 몸을 쭉 피는 그의 모습에 세희가 살짝 미소를 짓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자기관리를 잘하는 창현이었기에 그의 말을 믿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었다.

“그래, 믿을게. 오늘도 촬영 열심히 하고 일찍 끝내자.”

“그래야죠. 드라마가 잘 되었다니 좋기는 하지만 부담이 크네요. 후우!”

“부담이 크기는 하지. 첫 작품이니까…….”

한숨을 내쉬는 창현의 모습을 보며 동의를 표하는 세희였다.

부담감에 무너질 인물은 아니었지만 첫 번째 시도에 대박이 터졌다는 것은 상당한 문제점이 있다. 바로 부담감을 너무 무겁게 지우는 것이 있고, 또 다른 것은 주변의 기대감이었다.

본인 스스로가 느끼는 부담감은 마음이 강하면 극복할 수 있지만 주변의 기대는 결코 쉽게 극복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었다.

특히 드라마 대박으로 창현에 대한 주변의 기대감은 최고조에 이르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상의 고지를 가파르게 오르면 내려오는 길도 급경사일 수밖에 없다. 스스로에 대한 부담감과 주변의 기대를 이겨내지 못하면 지금의 성공은 모래성처럼 무너질 수 있다.

세희는 창현을 잘 다독여줄 사람이 자신 밖에 없다는 것을 느끼고는 입을 열었다.

“너무 부담 가지려고 하지 마. 지금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하니까. 더 잘하려는 것보다 지금 할 수 있는 만큼 하도록 해. 너무 과해서 좋을 게 없으니까. 알겠지?”

“그러도록 할게요.”

대답을 하지만 그의 모습이 평상시와 약간 다르다는 것을 느끼는 세희였다.

창현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이 깊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뭔가가 있는 것 같은데…….’

자세한 것을 몰랐기에 언급을 하지 않지만 창현에게서 무언가 이상한 느낌을 받는 세희였다. 행여나 자신의 예감이 틀릴 수 있기에 굳이 언급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육감은 강하게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지금 창현에게서 심상치 않은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세희는 그런 자신의 감각을 상당히 신뢰하였다.

‘주의 깊게 지켜봐야겠어. 무슨 문제가 있는지.’

일단은 언급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지켜보기로 결정을 내린 세희였다.


촬영장에 늦지 않게 들어선 창현이 인사를 하기 시작한다.

“안녕하세요.”

“오오, 오랜만인데? 어서 와, 복덩이 스타.”

김지환 감독이 활짝 웃음을 지으며 창현을 맞이하였다. 드라마가 대박이 난 뒤 엄청난 관심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드라마 촬영장의 분위기는 전체적으로 고조되어 있었다.

결코 나쁘지 않은 분위기였다. 드라마가 시청률이 저조하여 분위기가 축 처져있는 것보다는 훨씬 나으니 말이다.

창현은 김지환 감독의 말에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하하, 복덩이 스타라뇨. 그런 말씀은 과분하네요.”

“아니긴. 우리 복덩이 스타가 드라마 ost에서 대박을 터뜨려주고 일본을 한바탕 휘저어서 엄청난 관심 몰이를 하지 않았나? 그게 아니면 1화에서 그 정도 시청률이 나올 수가 없어.”

이것이 바로 소위 말하는 이슈 마케팅의 효과였다.

현을 여태까지 수많은 드라마에서 캐스팅하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었다. 그의 이름을 이용한 대대적인 홍보로 드라마에 관심을 끌어 모으고 시청률을 올리려는 계획이니 말이다. 게다가 그 드라마가 평가가 좋지 않더라도 현의 골수팬들이 존재하는 이상 최소 중박은 칠 수 있을 것이다. 그 후 어떻게 되던 간에 현을 이용하여 그 정도 효과를 노리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현이 드라마에 캐스팅 되었고, 1화가 방영되기 전 일본 활동과 드라마 ost 성공으로 드라마 1화 시청률이 소위 말하는 ‘대박’의 반열에 들어서는데 성공했다. 게다가 드라마 내용 또한 호평으로 이어지는 지금, 2화에는 더욱 높은 기대감이 형성되고 있는 실정이었다.

여기서 시청자들을 만족시킬 수 있다면 꾸준히 일정 수준 이상의 시청률을 유지할 수 있으리라.

첫 작품인 드라마에서 이렇게 대박이 터지니 김지환 감독의 입에 미소가 맺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김지환 감독의 칭찬에 창현은 어색하게나마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하하, 그런가요? 더욱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네요.”

물론 최선을 다할 것이다. 자신 또한 잘 된 거 그 성세를 유지하고 싶은 것은 같은 마음이었으니 말이다.

‘일단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봐야겠지.’

창현의 말이 마음에 드는지 김지환 감독이 고개를 크게 끄덕인다.

“좋은 자세야. 지금의 성공은 아직 작은 것에 불과하지. 더욱 큰 성공을 위해서는 당장의 일들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제일이지. 다른 생각도 들지 않을 테니 말이야.”

“하하하…….”

그저 머쓱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런 창현의 모습에 김지환 감독이 살짝 고개를 저었다.

“내가 괜히 말한 건가? 어쨌든 내가 우리 복덩이 스타를 너무 오랫동안 붙잡고 있었군. 어서 준비하도록 하게.”

“네, 알겠습니다.”

고개를 꾸벅 숙이며 촬영장으로 향하는 창현이었다.

“…….”

그 뒷모습을 김지환 감독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바라본다. 그러다가 눈을 감으면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군. 부디 나의 불안한 예감이 기우로 끝나길…….”


김지환 감독과 이야기를 나눈 창현은 세트장에서 촬영을 하고 있는 윤아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인사를 건넸다.

“윤아 누나.”

“아, 창현아!

막 장면 촬영을 끝낸 윤아가 창현의 목소리를 듣고는 환한 표정을 지은 채 그를 맞이한다. 오늘부터 촬영에 참여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정말로 온 것이다.

윤아가 환영해주자 창현도 빙긋 웃음을 짓고는 말한다.

“잘 지냈어요?”

“잘… 지냈지.”

순간 몸을 움찔 떨며 대답을 하는 윤아였다.

‘잘 지내지 못했군.’

그녀의 반응을 본 창현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의 생각처럼 윤아는 그리 잘 지내지 못했다. 드라마 첫화가 방영된 이후 수연은 수시로 그녀에게 2화 내용에 대해서 말하라는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하지만 첫 방영 날 2화에서 나올 장면을 떠올리며 얼굴을 붉혔다가 폭군 수연의 지휘 하에 처참하게 당해야 했던 윤아는 뿔난 표정으로 수연의 요구를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그러한 거절에 수연은 최근에 반기를 들었다가 가장 충실한 하수인이 되어버린 효연을 앞세워 윤아를 공략했다. 연습생 내공이 만만치 않은 효연은 소녀시대 내에서도 수위를 다투는 실력자였기에 윤아는 상대하기가 벅찼다.

그럼에도 윤아가 버텨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무한태연교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자신과 주현의 막내 라인부터 시작하여 포스는 하위권이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태연을 중심으로 뭉친 무한태연교는 만만치 않은 응집력을 자랑하였다.

그래보았자 결국 태연이나 주현도 2화 내용이 궁금하였기에 윤아는 처참한 최후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1화가 방영된 저번 주 목요일부터 2화가 방영되는 오늘까지 장장 일주일 동안 윤아에게 있어 지옥과도 같은 나날이었다.

결코 괜찮아 보이지 않는 그녀의 모습에 창현이 조심스레 묻는다.

“무슨 일이 있었나 봐요?”

“후우! 사실은 괜찮지가 않았어. 언니들이 무척 괴롭혔거든.”

“왜요?”

괴롭힘을 당했다는 말에 화들짝 놀라 묻는 창현이었다.

그러자 윤아가 침울한 표정을 한 채 말했다.

“사실은 드라마 1화를 함께 시청했거든. 그런데 2화 내용이 궁금하다고 하면서 자꾸 나한테 물어보는 게 아니겠어? 그래서 궁금하면 다음 화를 보라고 하니까 괘씸하다고 하면서…….”

그녀도 제법 만만치 않은 반항을 했었지만 이야기를 하는 과정에서 살짝 각색되어 어느덧 그녀는 일방적인 피해자가 되었고, 다른 멤버들은 일방적인 가해자가 되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창현은 그 말을 들으며 웃음을 지었다.

“하하하! 누나도 많이 고생하셨네요. 그래도 재미있게 봐서 그런 거 아니겠어요? 게다가 오늘 밤에 방영을 하니 마음 넓은 모습을 보여주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마음 넓은 모습이야 뭐…….”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창현의 말에 수긍하는 윤아였다.

어차피 그녀들은 드라마 뒷내용을 모르지만 자신은 상세하게 알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 만큼 은연중 우월감을 느끼고 있으니 마음 넓은 모습을 보여주어도 나쁘지 않을 듯 싶었다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윤아를 보며 창현이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수연 누나가 좀 무섭잖아요? 괜히 척을 지면 누나도 무사하지 못할 거예요.”

“으으! 그렇지. 수연 언니가 좀 무섭긴 무서워. 잘못 보이면…….”

몸을 부르르 떠는 윤아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수연은 그저 소녀시대 내에서 장난스럽게 최종 보스로 불릴 뿐이었지만 한 차례 반란이 성공한 이후부터 차곡차곡 밑바탕을 깔아놓고 멤버들을 제압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지금에 와서는 절대적인 위치에 올라섰고, 멤버들은 은연중 수연을 폭군이라 부르며 두려워 하였다.

그렇게 두렵다면 제2차 반란을 일으키면 될 테지만 그것마저도 힘이 들었다. 수연은 교묘하게 수를 써서 반심을 품은 멤버를 고발하게 만드는 시스템을 구축해놓은 것이다. 게다가 수연의 곁에는 효연이 찰싹 달라붙어 무슨 일만 시킬 때면 ‘Yes, your majesty.'라는 이상한 대사를 내뱉으며 달려드니 방법이 없었다.

윤아의 반응을 확인한 창현이 표정을 바꾸며 말했다.

“정말 무섭긴 무섭나 보네요.”

“겪어보지 않았으면 말을 하지 말라고 할 정도야. 으으!”

“하하! 장난으로 그러는 거겠죠. 그러니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요.”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니까? 정말 수연 언니는 최종 보스가 아니라 폭군暴君이야.”

도대체 얼마나 강압적인 모습을 보였으면 폭군이라고 할 정도일까? 창현은 그때 통화에서 들었던 내용보다 더욱 심각한 내용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행여나 자신도 연류가 될까 싶어 화제를 옮겼다.

“그 이야기는 여기서 그만두도록 해요. 그러고 보니 다음 주는 순규 누나 생일이네요. 그리고 30일은 누나 생일이고…….”

“응! 내 생일이지. 뭐 선물 주려고?”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묻는 윤아의 모습에 창현이 어깨를 으쓱했다.

“기브 앤 테이크죠. 누나가 제 생일에 뭘 줬더라…….”

“창현아잉! 나도 예쁜 선물 주라!”

쉽게 선물을 주지 않을 듯하자 필사의 애교를 펼치는 윤아였다.

갑작스러운 기습 공격에 창현이 기침을 터뜨렸다.

“쿨럭! 그거 뭐죠? 서, 설마 그것이 애교?”

애교와 거리가 먼 그녀였기에 쉽게 와 닿지가 않았다.

창현의 반응이 신통치 않자 윤아가 축 늘어진 모습을 보며 말한다.

“애교 같지가 않나? 나름 회심의 한 수였는데…….”

“살기를 부르는 애교가 아닐 수 없네요. 생각해보면 일일 카페에서 했던 애교가…….”

일일 카페에서 벌어졌던 그때의 애교 대전을 떠올리며 창현이 말하자 윤아가 팔을 휘휘 저으며 소리쳤다.

“왁! 그때 이야기는 하지 마! 제발! 그것 때문에 얼마나 웃음을 당했어야 했는데! 내 인생에 있어 가장 잊고 싶은 장면 중 하나였다고!”

“그래도 재미있는데요, 뭐. 종종 말하고는 할게요. 후후!”

약점을 하나 잡은 듯하자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그 모습에 윤아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창현에게 말한다.

“말해봐, 수연 언니한테 일러버릴 테니.”

“…….”

윤아의 말에 순간 할 말을 잃어버린 창현이었다. 창현이 명명한 애교 대전은 각각 수연과 윤아가 포함되어 있던 것이다.

만약 수연에게 들키게 되면 자신 또한 전화로 들어야만 했던 효연의 처지가 될 것이리라.

“안 할 거지?”

회심의 미소를 짓는 윤아를 보며 창현이 말했다.

“수연 누나가 없을 때는 안 하고 누나가 있을 때만…….”

“그래도 이를 거야. 수연 언니도 언급을 했다고 거짓말을 하면 되겠지.”

“윽! 알았어요.”

거짓말까지 동원하겠다는 그녀의 말에 창현은 결국 먹음직스러운 놀림거리 하나를 포기해야만 했다.

그러다가 창현은 문득 시간을 확인하고는 윤아에게 말한다.

“촬영 시작하겠네요. 전 준비하고 올게요.”

창현의 말에 시간을 확인한 윤아가 고개를 끄덕인다.

“정말 시간 얼마 안 남았네. 얼마 남지 않았으니 빨리 준비하고 와.”

“네.”

대답을 한 창현이 메이크업을 받고 옷을 차려입는 등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컷! 수고했어.”

준비를 완료한 창현은 윤아와 촬영하는 장면을 완벽하게 마무리할 수 있었다.

그들이 촬영하는 장면은 5화부터 시작하여 8화까지 담겨야 할 장면들이 어우러져 있는데, 처음에 도도한 모습을 보였던 백은설이 한지훈에게 반하게 되면서 점점 순종적인 모습을 보이는 장면이었다.

역에 한껏 몰입하며 자신의 감정을 고백하는 백은설에게 동화되어 윤아가 생각에 잠겼다.

‘아, 내가 이렇게 하면 창현이가 정말 날 받아줄까?’

그럴 확률은 극히 적을 것이다. 드라마에서도 받아주지 않는데 현실에서 받아줄 확률이 얼마나 되겠는가.

지금처럼 같이 일을 하며 차근차근 거리를 좁혀나가는 것이 오히려 더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창현은 완벽하게 역할을 소화하는 윤아의 모습에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누나 잘하시는데요? 오늘 컨디션이 좋은가 봐요?”

“으응? 그, 그런가? 잘 되었다니 좋네.”

뚜렷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약간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던 윤아가 창현의 칭찬을 듣고는 활짝 웃음을 짓는다.

“점심시간이니 같이 점심 먹는 건 어때요? 그래봤자 제가 대접하는 건 아니지만 말이죠.”

드라마를 촬영하다가 식사시간이 되면 제작 측에서 도시락을 제공한다. 고생하는 배우들이나 스태프들을 위해 시중에서 파는 도시락이 아닌 고급스러운 도시락이지만 말이다.

방금 촬영한 장면을 끝으로 점심시간이 되었다. 창현은 도시락을 받아 윤아와 함께 먹자고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윤아는 창현의 식사 신청에 환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나야 좋지! 어서 먹자.”

그러면서 도시락을 받아 함께 식사를 하는 두 사람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이제 제법 친해진 스태프들이나 배우들이 두 사람이 연인이냐고 놀리기도 했지만 창현이 워낙 요지부동이어서 제풀에 지쳐 나가떨어지고는 하였다. 하지만 윤아는 그런 오해도 즐겁다는 듯 싱글벙글 웃음을 짓고 있었다.

부디 그 말처럼 연인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점심을 다 먹고 난 뒤 곧바로 다음 촬영에 들어갔다.

윤아도 아까 전 역에 몰입하던 감각을 잊지 않고 임했기에 촬영은 빠르고 성공적으로 진행이 될 수 있었다. 그래서 예정된 시간보다 다소 빠르게 정해진 장면을 완벽하게 끝낼 수 있었다.

장면을 모두 촬영하게 되자 윤아는 곧장 촬영장을 떠나게 되었다. 다음 스케줄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창현은 그런 윤아를 향해 손을 흔들며 배웅해주었다.

“잘 가요. 내일 봐요.”

“그래. 2화도 잘 되었으면 좋겠다. 창현이 너도 열심히 하고. 파이팅.”

“잘될 테니 걱정하지 말아요. 누나도 스케줄 잘 하세요.”

웃으면서 윤아를 배웅한 창현이었다.

예정된 시간보다 조금 더 빠르게 끝났기에 휴식을 취하면서 다음 장면의 대본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창현은 자신의 몸에 특별히 문제가 없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어제 느꼈던 불안한 마음이 거짓말처럼 사라져 있었으니 말이다.

“괜찮은데? 문제는 없는 것 같고.”

괜한 기우인 듯하였다. NG도 별로 내지 않았고 예정된 시간보다 빠르게 끝낼 만큼 좋은 페이스를 유지했으니 말이다.

창현은 자신이 느꼈던 감정이 착각이었다는 걸로 결정을 내렸다.

“좀 오래 쉬어서 불안한 마음에 그랬나보다. 부담감도 있었고.”

너무 부담감을 느끼면 이상 현상이 종종 일어나고는 하였기에 자신의 마음에서 비롯된 일이라 치부하였다.

대본을 읽으며 재점검을 하던 창현은 다음 장면을 같이 촬영할 근영이 도착하자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근영과 오랜만에 만났기에 몇마디 인사를 나눈 뒤 곧장 촬영에 들어갈 준비를 한다.

윤아와 성공적으로 촬영을 끝마친 상황이었기에 창현은 별다른 문제없이 무난하게 넘어갈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다.

그런데 예기치 못한 곳에서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한 번에 OK날 것이라 생각하던 부분에서 김지환 감독의 외침이 터져 나온 것이다.

“NG!"

“네? NG?"

완벽하게 소화해냈다고 생각하던 창현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김지환 감독을 바라본다.

그곳에는 냉정한 표정을 짓고 있는 김지환 감독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창현을 바라보며 다시 촬영에 들어갈 것을 권유했다.

“방금 전 장면이 다소 어색하게 느껴졌어. 그래서 다시 촬영에 들어가도록 한다.”

그러면서 다시 촬영에 들어가는 싸인을 보내는 김지환 감독이었다.

도대체 어떤 점이 어색했단 말인가?

자신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파악하지 못했기에 창현은 마음속에 불안함이 깃들었다. 여태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위기감이랄까. 그런 것이 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나 혼자의 착각이겠지.’

다시 잘하면 NG가 나오지 않고 무사히 OK 싸인이 나올 거라 생각하는 창현이었다.

묘한 불안함이 서서히 덮쳐오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다시 시작된 촬영.

창현은 대본에 있는 대로, 자신이 그동안 배운 연기를 발휘하며 연기를 하기 시작한다.

그가 연기를 해야 하는 장면은 다름 아닌 근영과 오해가 터지는 시점이었다.

드라마 내에서 한지훈과 최예린은 같은 반에 앙숙과도 같은 사이였다.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며 밴드부의 보컬을 맡고 있는 한지훈은 최예린과 함께 반에서 성적 순위권을 다투는 동시에 개학 첫날부터 악연으로 얽힌 상대였다. 그랬기에 서로를 볼 때면 으르렁거리기 일쑤였다.

그러던 중 한지훈은 한영 그룹의 차기 회장으로 낙점이 되었고,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곧장 한영 그룹으로 들어가 자신의 회장직을 잇는 걸 반대하는 이사들과 한바탕 일전을 벌인다. 그리고는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겠다고 하며 특별 부서에서 일을 하게 된다. 그리고 최예린도 한영 그룹에 입사를 하게 되어 서로 마주하게 된다. 결국 두 사람은 부서 내에서도 투닥거리는 사이로 전락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 숨어있는 사연이 있다.

바로 최예린은 한영 그룹의 공격에 의해 무너진 회사 사장의 딸이었던 것이다. 그랬기에 그녀는 한영 그룹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고, 자신의 힘으로 한영 그룹을 무너뜨려 복수를 하겠다는 야심찬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우연찮게 한지훈이 한영 그룹의 후계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지훈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던 최예린에게 있어 그것은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그리고 심각한 표정을 한 채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을 촬영하고 있는 것이다.

최예린은 한순간 치솟아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한 채 한지훈에게 버럭 소리를 지르는 장면이고, 뒤늦게 한영 그룹의 만행을 알게 된 한지훈은 그런 최예린의 말에 일언반구 변명도 못한 채 침묵을 지키는 장면이었다. 비록 대사가 없다고 하지만 복잡한 마음이 담긴 표정 연기와 등을 돌려 장소를 벗어나는 최예린의 모습을 바라보는 눈빛 연기가 제대로 조화되어야 한다.

무척 고난이도 연기였지만 여태까지 창현은 이 연기를 잘 해왔다. 그런데 오늘은 유난히 NG가 많이 나고 있는 것이다.

한 번 더 촬영을 하던 김지환 감독은 또 다시 마음에 들지 않는지 고개를 저으며 NG를 외친다.

“그게 아니야. 좀 더 애절한 느낌을 줘야 해. 한지훈은 최예린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단 말이야. 그런 최예린이 실망을 하고 좁힐 수 없는 차이가 생겼는데 너무 눈빛이 약해. 좀 더 애절한 느낌을 표현해봐. 알겠지?”

자신의 문제점을 지적해주자 창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좋아, 말하면 알아들으니 바로 가도록 하지.”

그러면서 다시 촬영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촬영은 쉽게 OK 싸인이 나오지 않았다. NG가 두 번에서 세 번, 세 번에서 네 번, 그렇게 차곡차곡 늘어나 무려 여덟 번의 NG가 나자 김지환 감독의 표정이 구겨질 대로 구겨진다.

평소대로라면 이 정도 NG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문제는 전부 같은 장면 같은 순간에서 NG가 난 것이다. 그렇다는 건 창현이 자신의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컷! 그게 아니라니까? 좀 더 애절한 느낌을 담아야 해. 좋아하던 사람이 떠날 수 있는데 그 정도 반응 밖에 보이지 않나? 좀 더 애절하게 해보라고. 응?”

“……네.”

거듭되는 자신의 실수에 창현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은 김지환 감독의 지적대로 하고 있는데 그것이 마음에 들지가 않나 보다. 이런 경우는 창현으로서도 처음이었기에 무척 마음이 복잡할 수밖에 없었다.

“…….”

근영은 그런 창현의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촬영 도중 그녀가 NG를 내고 만다.

NG를 내자 근영이 김지환 감독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한다.

“죄송합니다, 감독님. 좀 지쳐서 그런데 약간 휴식을 취할 수 있을까요? 잘 되는 날도 있고 안 되는 날도 있잖아요. 창현이도 많이 지친 것 같으니 약간 기분 전환을 해야 할 것 같은데…….”

나이는 많지 않지만 근영의 연기 경력은 결코 적은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창현의 파트너 역할을 맡고 있는 만큼 그녀가 허언을 할 이유가 없었다.

김지환 감독도 너무 몰아친 감이 없지 않아 있었기에 근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게 하도록 하지. 너무 몰아쳐서 미안하다. 좀 더 하면 더 좋은 장면이 나올 수 있을 것 같아서.”

사과 인사를 들은 창현이 쓰게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제가 실수를 해서 그런 건데요.”

“후우! 일단 근영 양의 말대로 머리 좀 식히고 와. 잘 안 풀릴 땐 기분 전환을 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니까.”

“알겠습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그렇게 말을 한 창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힘없이 발걸음을 옮긴다.

그 모습을 본 김지환 감독이 무어라 말을 하려다가 근영의 제지하는 모습을 보고는 멈춘다. 그리고는 근영이 창현의 뒤를 따라갔다.


“후우! 힘드네.”

기분 전환을 위해 창현이 나온 것은 밖에 훤하게 보이는 휴게실이었다. 창문도 있어서 바람이 솔솔 들어오는데, 봄에서 여름으로 접어드는 시기라 그런지 바람은 잘 들어오지 않는 듯하였다.

그래도 푸른 하늘을 지켜보고 있자니 울적했던 기분이 조금 해소되는 것 같기도 했다.

“잘 되지가 않네. 문제가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솔직히 창현은 자신이 잘못하고 있는지 잘 몰랐다. 애절한 느낌을 표현한다고 하긴 했는데 그것이 김지환 감독의 마음에 들지가 않았나보다.

더 애절하게 해보라 했지만 창현은 자신이 없었다.

이것이 연기를 익힌 경력이 짧아서 오는 한계란 말인가?

그렇게 밖에 생각할 수 없는 것이 현재 창현의 처지였다.

그런 창현의 뒤로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낸다. 바로 창현의 뒤를 따라온 근영이었다.

그녀는 창현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입을 열었다.

“꽤 울적한 모습이네.”

“무슨 일이에요? 위로라도 해주려고 온 거예요?”

창현은 근영이 온 게 고맙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부끄럽기도 하였다. 남녀차별 발언은 아니지만 남자가 위기에 처해 있는 모습을 여자에게 보이게 되면 상대적으로 더 부끄러운 감정을 느끼기에 그렇다.

그 말에 근영이 웃음을 지었다.

“후후! 위로라고 하면 창현이 네가 좀 무안할 테지? 그럼 위로라는 단어보다는 음, 도움을 주러 왔다고 해야 할까?”

“도움이요? 지금은 어린 아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심정이긴 해요.”

확실히 자신이 도움이 절실하기는 했다. 그래서 창현은 근영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수락의 의미가 담긴 창현의 말에 근영이 그에게 다가와 곁에 앉았다.

“읏차! 창현이 네가 지금 겪고 있는 감정은 어떤 거야?”

다짜고짜 물어보는 근영. 그에 창현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제가 겪고 있는 감정이요?”

“그래, 복잡한 계산을 하지 말고 순수하게 느끼고 있는 감정을 말해줬으면 좋겠어.”

“순수하게 느끼고 있는 감정이라… 아무래도 당혹스러움이겠죠. 여태까지 연기 초보자답지 않게 순조로이 풀어나갔으니까요.”

연기 대선배가 아닌 마치 친누나처럼 대해주는 근영의 모습에 창현은 순순히 자신의 심정을 털어놓았다.

그 말에 근영이 고개를 끄덕여 보인다.

“그거야 바로.”

“네? 뭐가요?”

“네 말에서 너의 증상 원인이 나타나는 거야. 비유로 들어줄게. 너는 지금 상태를 검으로 치면 무척 날카롭게 벼려놓은 검이야. 날카롭게 벼려놓았기에 그 예기는 상상을 초월하지. 당연히 무언가를 벨 때 절대적인 위력을 발휘하고. 하지만 그거 알아?”

근영의 눈이 창현의 눈과 마주한다.

그리고 근영이 입을 연다.

“날카롭게 벼려놓은 검은 쉽게 부러진다는 걸.”

“…….”

그 사실을 창현이 모를 리 없다. 그 방법은 자신이 늘 사용하는 방법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근영의 말이 거듭 이어진다.

“연기 초보자답지 않게 너무 수월하게 일이 풀렸어. 그래서 너는 은연중 느끼고 있는 거지. 나라면 날카롭게 벼려놓아도 결코 부러지지 않을 거라고. 그러다가 위기에 처하게 된 거야. 바로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NG가 난 거지. 절대 그 부분에서 NG가 나지 않을 거라 생각하던 너는 당황하기 시작했어. 여태까지 멋지게 들어맞았던 계산이 어긋나기 시작한 거지. 그리고 그 부분에서 날카롭게 벼려놓은 것이 내구성의 문제로 넘어가게 되면서 균열이 일어나게 된 거야.”

간단하면서 정확하게 창현의 상태를 파악해내는 근영이었다.

“그럼 지금 제가 균열이 일어난 상태라는 거군요?”

“그래.”

“그럼 그 균열을 어떻게 해야 하죠?”

창현의 물음에 근영이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너 의외로 바보구나?”

“바보라고요? 제가? 나름 수재라 불렸는데…….”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리는 창현.

그에 근영이 말한다.

“수재라 해도 머리를 활용하는데 있어 굳어 있으면 바보지 뭐. 방법은 너무나 간단해. 균열이 일어났으면 수리를 하면 되는 거야. 더욱 단단하게.”

“…너무 간단해서 짐작을 못했을 뿐인데요?”

황당한 표정을 지은 채 말하는 창현의 모습에 근영이 미소를 지었다.

“너무 깊게 생각하려고 하면 끝도 없는 법이니까. 의외로 주변에 간단하면서 해결할 방법들이 많다고?”

“그렇다면 지금의 위기를 타파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창현의 물음에 근영의 표정이 샐쭉하게 변했다.

“이거 떠먹여주는 방법을 가르쳐주니 완전히 떠먹여달라고 하네? 그 정도는 스스로도 할 수 있잖아?”

“하하! 그건 좀 과했나요? 어쨌든 고마워요. 저 때문에 일부러 NG도 내주시고.”

그 말에 근영이 흠칫하며 물었다.

“티, 티가 났나?”

“감독님은 모르셔도 전 알 수 있죠. 누나가 그 부분에서 실수할 리가 없으니까요. 뭐, 저만 알고 있을 테니 걱정은 하지 마시고요.”

“그래주면 좋고. 어쨌든 내 경험에서 우러나온 조언이니까 허투루 듣지는 말아. 나는 밖으로 나갈 테니 너는 머리 좀 식히고 생각 좀 하다가 나와.”

“알았어요.”

창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근영이 자리에서 일어나 휴게실을 벗어난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창현은 근영의 전신에서 형용할 수 없는 아우라가 뿜어져 나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동안이어서 선배란 느낌이 잘 들지 않지만 상황이 진지할 때는 정말 선배이고 연장자라는 느낌이 물씬 풍기고는 하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창현은 근영의 말을 곱씹어보기 시작했다.

“떠먹는 방법까지 가르쳐줬으니 이제 떠먹는 건 내가 알아서 해야겠지?”

그렇게 중얼거린 창현이 살짝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곰곰이 생각에 잠기기 시작한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분명한 것은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은 창현에게 있어 무척 긴 시간이었다. 수많은 생각이 복잡하게 얽히다가 풀어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후우!”

생각에 잠겨있던 창현이 작게 한숨을 내쉰다. 그리고는 눈을 뜬다. 그의 눈에는 사그라지려 하던 자신감이 다시 일렁이고 있었다. 무언가 방법을 생각해낸 것이 분명했다.

창현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입을 열었다.

“일단 부딪쳐 볼까.”

결과는 어떨지 모르나 한 번 부딪쳐볼 생각이었다.


“좀 괜찮아졌나?”

창현이 모습을 드러내자 김지환 감독이 걱정 담긴 어조로 묻는다. 자신이 심각하고 몰아쳤다고 생각하여 얼굴에는 미안함이 감돌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다른 배우들도 충분히 이런 실수를 범하는데 자신이 너무 까다롭게 대했다고 자책하고 있었다.

그에 창현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의 인사를 표했다.

“네. 정리할 시간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흠! 나도 심했던 것 같으니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사과하지.”

“아니에요. 지적을 해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부분에서 계속 틀렸다는 건 제 실력 미숙이죠. 그 점에 대해서는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죄송하다는 말밖에.”

거듭 죄송하다고 말을 하는 창현의 모습에 김지환 감독이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흠흠! 그렇게 말하니 내가 악질 감독이 된 것 같군. 너무 잘하다가 막혀서 잠시 열이 올라온 거니 그에 대한 언급은 그만 하도록 하지. 나도 잘하고 창현이 너도 잘하면 되니까.”

“알겠습니다.”

지적받은 내용을 제대로 개선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창현의 잘못이다. 그랬기에 창현은 방금 전 제대로 해내지 못하던 자신의 모습을 자책하고 있었다.

“그럼 다시 촬영에 들어가도록 하지. 잘 하라고.”

“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믿겠어.”

고개를 숙이는 창현의 모습에 김지환 감독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촬영에 들어간다.

촬영에 들어가기 전 창현이 근영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고마워요, 누나. 많이 도움이 되었어요.”

그 말에 근영이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도움이 되었다면 NG 좀 그만 내라고.”

“하하!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죠. 그런데 정말 특이한 거 있죠? 나이보다 훨씬 어려보이는 사람들이 의외로 성숙한가 봐요.”

근영도 그렇지만 태연 또한 그러하였다. 나이보다 어려보이는 사람들이 내면은 성숙한 것처럼 느껴졌다.

자신이 나이에 비해 어려 보인다는 것을 의외로 콤플렉스로 여기고 있던 근영이었기에 성숙해 보인다는 창현의 말을 듣고는 어깨를 당당하게 핀다.

“내가 좀 성숙하지.”

“그러게요. 겉모습과 달리요.”

“뭐라고?”

도끼눈을 부릅뜨는 근영이었지만 행동은 거기에서 멈춰야만 했다. 어느덧 촬영 준비를 마치고 본격적으로 촬영에 들어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자신이 기껏 도움을 줬는데 이런 식의 보답이라니!

눈을 가늘게 뜬 근영이 창현에게 경고했다.

“두고 봐. 가만두지 않겠어.”

“하, 하, 좀 봐주세요.”

어색하게 웃음을 흘린 창현이 양손을 모아 잘못을 비는 모습을 보였지만 근영은 흥! 하고 고개를 돌려 외면할 뿐이었다.

그 사이 촬영은 다시 시작되었다.

창현은 마음을 다잡고 연기에 임하기 시작했다.

근영의 말처럼 복잡하게 생각한다고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일상생활에서도 얼마든지 그 해결책을 찾아볼 수 있지 않은가? 그런 만큼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려는 자세를 갖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리고 창현은 자신의 문제점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을 하였다.

김지환 감독은 자신이 복잡하고 슬픔이 담긴 눈빛처리가 어색하다고 하였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간단하다. 정말 그 상황에 처하게 되면 되는 것이다.

감정을 몰입할 수는 있지만 너무 의욕이 과했기에 부자연스럽고 어색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이 해결책으로는 약간 힘을 빼고 감정의 흐름에 자연스레 몸을 맡기면 된다.

그것이 정답이라고 믿으면서 창현은 연기에 임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김지환 감독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음!”

확실히 전보다 나아진 연기였다. 하지만 약간 미진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물로 이건 내 기준에서겠지만.’

유난히 깐깐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기에 미진한 감이 느껴지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무난하면서 감정이 잘 느껴지는 연기일 것임이 분명했다.

여기서 NG를 내면 창현이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였다.

결국 김지환 감독은 이쯤에서 타협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나직이 고개를 끄덕인 그가 외친다.

“OK! 수고했어요. 다음 장면으로 넘어갑시다.”

김지환 감독의 통과 싸인이 떨어지자 창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후우!”

참으로 위험한 순간이었다. 자신은 몰입한다고 한 것 같은데 다행히 그것이 김지환 감독의 마음에 들었나보다.

그렇게 창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그를 향해 다가오는 검은 그림자가 있었다.

흠칫한 창현이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웃음을 짓고 있는 근영의 모습에 눈에 들어왔다. 다른 사람들이 보면 선한 웃음이겠지만 창현이 보기에는 뒤에 악마 현상이 일어날 정도로 사악한 느낌이 물씬 풍기는 웃음이었다.

창현이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하하, 누나? 다음 촬영이 있는데 어서 준비하셔야죠.”

“그래? 그렇구나.”

그녀는 성큼성큼 창현에게 다가오면서 말했다. 전혀 창현의 말을 알아들은 눈치가 아니었다.

마치 순간 이동을 한 듯한 그녀의 발걸음에 창현이 놀라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이미 어깨를 부여잡고 있는 그녀의 손 때문에 움직일 수가 없었다.

“네가 한 말에는 책임을 져야겠지?”

“크윽…….”

뒤끝이 제법 있는 근영이었다.

섬뜩한 기운이 몰아치는 그녀의 눈을 본 창현이 나직이 신음을 흘렸다.

그날 창현은 근영에게 처참하게 당해야 했지만 촬영 자체는 무리 없이 끝을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창현을 바라보는 김지환 감독의 눈빛은 심상치 않았다.

‘형님에게 말씀을 드려야겠군. 사안이 심각해.’

긴가민가했지만 오늘 창현의 모습을 보고는 자신의 생각을 굳힐 수 있던 김지환 감독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그를 행동으로 옮기게끔 만들었다.


지선이 임신을 하고, 창현의 드라마가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라샤 또한 일본에서 상당한 활약을 하고 있었기에 석규는 무척 즐거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중국 쪽도 조만간 결판이 날 듯 싶어서 업무량이 늘었지만 이것을 성공적으로 끝내면 더욱 폭 넓은 시장을 둘 수 있었기에 바쁘지만 즐거웠다.

그런 석규에게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

요란하게 울려 퍼지는 벨소리에 업무를 보던 석규가 움찔하더니 핸드폰을 바라본다. 그리고 전화를 한 상대의 이름을 보더니 고개를 갸웃한다.

“갑자기 웬 전화지?”

무슨 일로 전화를 하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지만 전화를 받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을 하였기에 석규가 전화를 받아들었다.

“여보세요?”

-접니다, 형님. 바쁘신데 제가 방해한 것이 아닌지요?

방해를 했다면 했다고 할 수 있다. 업무를 보던 와중에 전화가 걸려와 리듬이 깨졌으니 말이다. 하지만 업무를 거의 다 끝낸 상황이었기에 석규는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 않았다.

“아니다. 일이 다 끝났으니 괜찮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할 이야기가 있어서 전화를 드리게 되었거든요.

“할 이야기? 나한테 전화를 걸 정도면 중요한 이야기인가 보군. 아, 우선 드라마 성공 축하한다. 아주 대박이 터졌던데? 이로써 단번에 인기 감독의 반열에 올라서겠어.”

첫 작품이 시청률 30%를 돌파하여 40%를 넘보는 것은 이례적이라 할 수 있었다. 화려한 캐스팅도 한 몫을 하였지만 감독도 수혜자 중 한 사람인 것은 부인할 수 없었다.

김지환 감독이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하하하! 감사합니다. 형님이 뒤에서 물심양면 도와주신 덕분 아니겠습니까?

“돕긴. 난 그저 밑바탕만 깔아주었는데. 그걸 가지고 성공을 하는 것은 본인 몫이지. 그런 점에서 너는 실력으로 올라선 셈이야. 그러니 그런 말은 하지 마라.”

-알겠습니다. 그래도 감사한 건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형님이 도와주신 점이 명백하게 있으니 말입니다.

“그거야 나중에 밥 한 끼 사면 되는 일이고.”

어차피 세상은 지연 학벌 출신이 아니겠는가? 석규는 자신의 후배가 드라마 감독을 한다고 하고, 그가 인간성이 괜찮은 인물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도와줬을 뿐이었다. 될 듯 싶은 나무는 떡잎부터 다르다는 말처럼 그의 실력이라면 충분히 성공을 할 수 있을 것이란 확신이 있어서 밑바탕을 깔아준 것뿐이었다. 그리 큰 도움이 아니었기에 그것 가지고 고맙다는 인사를 연신 받을 생각은 없었다.

-하하, 형님은 여전하시군요. 알겠습니다. 제가 나중에 근사한 걸로 대접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그러면 나도 마음이 편해지고 좋지.

김지환 감독의 말에 석규도 웃음을 지으며 납득할 수 있었다.

그렇게 공치사를 하고, 겉치레 말들을 한 뒤 석규가 본론을 꺼내들었다.

“나한테 전화를 했다는 건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한데. 맞나?”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형님에게 드릴 말씀이 있어서 전화를 한 거니까요.

“나한테 할 말이라… 무슨 말인지 궁금한데?”

-여기서 말씀드리기는 좀 그래서…….

말끝을 흐리는 김지환 감독. 그 말을 들으면서 석규는 사안이 제법 심각하고 이야기가 길어질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무슨 이야기인데 그런 거냐?”

석규의 목소리가 심각하게 변하자 김지환 감독도 덩달아 무거운 목소리로 말한다.

-창현이에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창현이? 그 녀석이 왜? 무슨 문제라도 일으켰나?”

난데없는 창현의 이름이 나오자 석규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자기관리를 잘하는 창현이었지만 아직 나이가 어리고, 주변에 의해 휩쓸리면 무슨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걸 느끼고 있어서 은연중 무슨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말에 김지환 감독이 부인했다.

-그건 아닙니다. 문제를 일으킬 리가 있겠습니까? 배우들과 스태프들 모두가 좋아하는데 말이죠. 다만 창현이에 관련된 문제점이 있어서 형님하고 이야기를 나누려고 하는 것입니다.

“문제점? 문제점이라…….”

심각한 목소리로 말을 하는 김지환 감독의 목소리에 석규는 중얼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전화로 이야기를 하기 힘들다고 할 정도면 사안이 심각하다는 뜻. 창현은 회사의 가장 큰 이익을 안겨다주는 존재이자 자신의 아들이었다. 문제가 있다면 당연히 들어보는 것이 좋았다.

“좋아, 바로 만나도록 하지. 언제쯤 시간이 되지?”

-내일모레까지는 시간이 안 됩니다. 하지만 그 이후는 언제든지 상관없습니다.

“삼 일 뒤. 삼 일 뒤라…….”

석규가 곧장 자신의 스케줄 표를 확인한다. 요즘 벌여놓은 일들이 많아서 업무 처리를 해야 할 것들도 많지만 사업적인 제휴나 CF에 관련된 건으로 움직여야 할 날이 많았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삼 일 뒤에 시간이 딱 비어 있었다. 다른 날들은 시간이 없는데 딱 그 날만 운이 좋게 비어 있던 것이다.

자신에게 운이 따른다고 생각하면서 석규가 말했다.

“그럼 삼 일 뒤에 만나기로 하지. 이야기가 길어질 듯 싶으니 저녁을 같이 먹으면서 이야기하기로 하고. 장소는 내가 잡도록 할 테니 시간만 비워두도록 해.”

-알겠습니다. 그럼 삼 일 뒤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지.”

그 말과 함께 통화가 끝났다.

통화가 끝나자 석규가 무거운 표정으로 생각에 잠긴다.

“문제점이라… 아직 슬럼프가 완벽하게 끝나지 않았단 말인가?”

창현의 슬럼프 문제. 본인은 완벽하게 극복했다고 했지만 그 사안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던 석규는 어쩌면 완벽하게 슬럼프가 끝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생각하고 있었다.

슬럼프를 극복하는 것과 억누르는 것은 다른 것이다.

극복하는 것은 그 한계를 뛰어넘었다는 이야기지만 억눌렀다는 이야기는 당장의 증상을 감추기 위한 임시방편이라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직감적으로 석규는 김지환 감독이 하려는 말이 그에 관련된 것이라는 것을 느꼈다.

“슬럼프라… 후우! 이름값에 어울리는 거창한 일들이군. 힘들겠어.”

무거운 음성이 사장실에 조용히 울려 퍼졌다.




제59장 다가오는 위기




창현이 등장한 드라마는 수요일과 목요일 방영에서도 고공행전을 보여주었다.

1화가 이슈 마케팅으로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무색하게 2화에서는 39.5%를, 3화에서는 39.9%의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였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시청률 40%의 벽을 넘지 못했다는 점이다.

1화 시청률이 39.2%였으니, 2화에서 0.3%, 3화에서 0.4% 소폭 상승했었다. 40%를 넘지 못해 아쉬웠지만 이 정도 시청률만으로도 정말 대단한 성과였다.

거기에 드라마 ost도 온라인 음원 차트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었으니 정말 대단한 성과였다.

3화까지 방영된 지금, 더 이상 창현의 연기력을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사람은 없었다.

까칠하면서 정이 많은 한지훈의 역을 완벽하게 소화해내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시청자들은 실제 현의 성격이 저러지 않을까 생각할 정도로 완벽하게 동화된 모습을 보여주었으니 말이다.

2화와 3화가 방영되면서 가장 큰 수혜자는 바로 윤아였다. 그녀는 2화에서 한영 그룹과 같은 십대 그룹 중 하나인 은영 그룹 총수의 무남독녀로 등장하면서 까칠한 남자인 한지훈에게 빠져드는 백은설의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해냈다.

재벌가 영양답게 처음에는 도도한 모습을 보이던 그녀는 미워할 수 없는 매력을 지닌 한지훈에게 서서히 빠져드는 모습을 보였고, 3화에서 본격적으로 그와의 만남을 결심하게 하는 장면은 드라마 내 본격 삼각관계를 형성하면서 흥미를 유발하였다.

특히 2화에서 시청자들에게 가장 많은 환호를 받은 것은 바로 1화 마지막에 윤아가 모습을 드러내며 창현과 마주하던 장면이었다.

두 사람이 이야기를 하던 도중 현이 윤아에게 다가가 살짝 턱을 치켜 올리며 말하는 장면은 까칠한 그의 매력을 제대로 어필했을 뿐만 아니라 눈빛으로 여성의 마음을 단번에 휘어잡았다고 평가가 나올 정도였다. 그 장면을 보던 여성들이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며 좋아했을 정도였으니 그 파급력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대단하였다.

그것은 다정다감한 이미지로 부각되던 현에게 새로운 매력 요소 중 하나인 ‘나쁜 남자’라는 타이틀을 성공적으로 확보하게 하는데 이르렀고, 그것은 현의 인지도 상승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인기를 실감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인터넷을 확인하면 쉽게 알 수 있다.

소녀시대 멤버들은 인터넷으로 드라마에 관련된 기사를 보면서 부러움이 가득 담긴 감탄사를 흘렸다.

“윤아 좋겠다!”

“부러워.”

“인지도가 팍팍 올라가고 있네. 좋겠다.”

드라마가 동시간대 시청률 1위의 자리를 압도적으로 유지하면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이미 드라마에서 모습을 드러냈던 윤아의 성공적인 변화를 기자들이 다루게 되면서 연기력 논란에 말끔하게 벗어난 윤아는 호평을 받고 있었다.

수연도 노트북을 붙잡고 드라마에 관련된 기사를 보다가 윤아에게 힐끔 시선을 주며 말했다.

“그래서 2화 내용을 말하지 않은 거였구나?”

“언니 그건…….”

“잘하면 윤아 너랑 키스신도 할 기세던데? 흐음…….”

키스신이라.

한순간 불편한 상상에 수연이 표정을 찡그렸다. 내 남자의 비즈니스라고 하여도 불쾌한 것은 불쾌한 것이다.

수연은 2화 내용을 가르쳐달라 할 때 윤아가 왜 얼굴을 붉혔는지, 그리고 왜 끝까지 입을 다물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녀 또한 드라마에서 봤던 것이다.

까칠한 표정을 지은 채 살짝 턱을 치켜들고는 말하는 창현의 모습을.

그 모습이 무엇보다 잘 어울렸고, 자신이었어도 심장이 두근거리는 경험이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입술과 입술이 맞닿을 듯한 근접한 거리는 윤아에게 있어 설레는 마음을 심어주기에 부족함이 없었을 것이다. 워낙 가까운 거리여서 숨결이 느껴지는 거리였을 테니.

“키, 키스신이요? 있으면 좋긴 하지만…….”

키스신이라는 말에 화색을 띠다가 이내 침울한 안색을 하는 윤아였다. 있을 리가 없다는 것을 그녀 또한 느끼고 있던 것이다. 게다가 키스신을 하다가 어떻게 될지 감히 상상도 하기 싫었다.

“뭐 말만 그렇다는 거니까. 그럼 4화 내용 가르쳐주지 않을래?”

처음에는 윤아가 나오는 드라마여서 시청을 했지만 지금은 드라마에 푹 빠져들게 된 수연이었다. 그래서인지 부쩍 윤아와 함께 하는 시간이 늘었고, 그녀에게 곧잘 대해주기도 하였다.

수연이 윤아에게 잘 대해주기 때문일까?

근래 들어 소녀시대 내 윤아의 서열이 급격히 치솟기 시작하였다. 폭군 수연의 후광을 등에 업은 윤아를 건드릴 만한 내부 인물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윤아는 수연의 물음에 꺼릴 것도 없었기에 잠시 생각을 하는 듯하더니 간략하게 말을 해주기 시작한다. 약간의 내용 누설은 오히려 드라마를 시청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4화 내용이요? 4화라면…….”

자신 옆에서 드라마 내용을 알려주는 윤아의 모습을 보며 수연이 입가에 미소를 살포시 짓는다.

‘좋아. 천천히 진행되고 있어.’

멤버들은 모두 수연이 윤아를 잘 대해주는 이유가 드라마 내용이 궁금해서 그렇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수연은 애초에 목적을 가지고 윤아에게 접근한 것이었다.

윤아는 드라마 촬영을 하게 됨으로써 창현과 많은 접점을 두게 되었다. 여기에서 자칫 윤아가 앞으로 치고 나가 독주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조성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수연은 그 상황을 막기 위해 윤아와 가까이 지내면서 은연중 압박을 가하고 있었다. 자신의 눈 밖에 나면 상상도 못할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물론 그것을 티 나게 하면 안 된다. 티가 나지 않게, 아주 은밀하게 윤아의 무의식 속에 자신의 생각을 주입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윤아는 무의식적으로 창현과 일정한 선을 넘어서 안 된다는 강력한 강박관념을 갖게 된다. 그렇게 되면 독주할 수 있는 상황은 조성되고 싶어도 조성되지 않을 것이다.

언뜻 보면 수연이 윤아에게 당근만 주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렇게 보이지 않는 채찍질을 하고 있던 것이다.

‘후후후!’

천천히 세뇌(?) 되어가는 윤아의 모습에 그저 흐뭇한 수연이었다.

그녀는 소녀시대 내에서 폭군으로 자리하게 되었지만 그녀는 결코 난폭한 군주가 아니었다.

예로부터 난폭한 군주는 그 최후가 비참하였다.

은나라의 주왕이 그러하였고, 한국의 역사로 보면 연산군이 그러하였다. 난폭한 군주는 결국 밑 사람의 원망을 사며 처참한 침몰을 맛보아야만 했다.

그러나 수연은 폭군이 되기 전 그 침몰부터 맛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방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마냥 찍어 누르는 것이 잘못된 방법이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여전히 겉모습은 폭군 같은 모습을 유지하되 은연중 멤버들을 당근과 채찍을 섞어서 대하고 있었다. 그렇게 하자 멤버들은 감히 반기를 들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수연의 강력한 독재 통치 하에 신음을 흘리면서도 그에 순응하는 수밖에 없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그야 말로 철혈통치! 하지만 그 내면에는 수많은 계산들이 복잡하게 숨겨져 있었다.

‘나에게 도움이 되었어.’

수연이 이와 같은 방법을 구사하게 된 것은 한권의 책이었다.

평소 잡지를 많이 읽던 그녀는 무심코 책을 고르다가 한권의 판타지 소설을 보게 되었다. 피 튀기는 전쟁의 연속인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무척 재미가 있어서 그녀는 계속해서 보게 되었고, 그 소설 속에서 그녀는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해준 구절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전쟁에서 전략은 약자가 강자를 상대하기 위한 꾀에 불과하다!>

이것은 수연에게 하나의 깨달음을 안겨다 주었다.

안 그래도 자신이 한풀 꺾여서 서열이 흔들리는 조짐을 보이고 있었는데 이 구절을 보게 되니 자신이 너무 서열을 앞세운 강압 통치를 했다는 걸 깨닫게 된 것이다.

분명 전략은 약자가 강자를 위해서 생각해낸 것이다. 강자는 굳이 전략을 사용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압도적인 힘으로 그 전략을 뭉개버릴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약자들이 힘을 모아 전략을 사용하게 되면 강자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수연은 자신도 전략을 사용하기로 마음먹었다. 강자가 전략을 사용하게 되면 그 효과는 무궁무진하지 않겠는가! 그때부터 수연은 멤버들의 성향을 철저하게 연구하였고, 윤아에 이어 효연을 제압함으로써 다시 한 번 자신의 천하를 이루는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효연에게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를 약속함으로써 충성을 받아내는데 성공하게 된 것이다.

‘이제 진흙탕 싸움이 벌어질 거야. 거기에서 승자는 내가 될 거고.’

윤아의 이야기를 듣는 사이 한동안 노트북을 두드리던 멤버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스케줄을 준비해야 했기에 나오는 것이다.

그러다가 수연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런데 순규가 없네?”

“그러게? 순규야! 뭐하니!”

단신듀오라는 명칭과 함께 떼려야 뗄 수 없게 된 태연이 순규의 이름을 크게 외친다.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방안에서 순규의 버럭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죽을래, 김태연! 나 지금 게임 중이니까 너희들이 먼저 씻어! 아악! 또 졌어!”

비명을 지르는 순규의 모습으로 보아 게임에서 또 처참하게 패한 듯 싶었다.

그 소리를 들으며 소녀들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에잉 쯧쯧, 저런 게임 폐인 같으니.”

“그러게요. 걱정될 정도에요.”

“자기가 알아서 하겠지, 뭐.”

그렇게 순규를 걱정해주는(?) 멤버들이었다.


하지만 순규 혼자 있는 방안에는 전혀 다른 풍경이 연출되고 있었다.

그녀는 모니터를 들여다 보며 연신 웃음을 짓고 있었다.

“후후! 이 방법은 몰랐겠지?”

순규가 지금 게임을 하고 있는 상대는 바로 창현이었다. 시간이 빈다는 그의 말을 듣고는 곧장 게임 대전을 신청한 그녀는 한창 창현과 게임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당연히 게임에서 패배를 했지만 그녀는 분한 감정이 들지 않았다.

지영의 부탁으로 불현 듯 화장실에서 깨달음을 얻게 된 그녀는 그날부터 창현을 보는 시선을 달리하게 되었다. 남자로서 매력이 넘치는 창현을 그동안 자신은 왜 그렇게 아니꼽게 봤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는 생각에 그녀는 차곡차곡 작전을 펼치고 있는 상황이었다. 자신이 변했다는 기색을 숨긴 채, 그녀는 자신과 창현의 접점인 스타크래프트를 이용하여 그의 정보를 캐내고 있었다.

그녀가 다른 사람들보다 우위에 있는 점은 평소 게임에서 하도 패하다 보니 창현에게 버럭버럭하며 좀 더 막대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그 말투를 적절하게 섞으면 창현의 정보를 얻어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순규는 창현과 채팅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그의 취향을 알아낸다.

SNSD)SunNy:나는 스타크래프트 할 때 노래 틀어놓는데 너는 어때?

DarkSword:저도 배경음악은 꺼놓고 노래를 들으면서 써요.

SNSD)SunNy:그래? 무슨 음악 들으면서 게임 하는데?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놓고 자연스럽게 창현이 듣는 음악의 종류를 물어본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전혀 눈치 채지 못할 고단수의 질문이 아닐 수 없다.

창현은 아무 의심없이 순규의 질문에 답한다.

DarkSword:음! 아무래도 집중을 해야 하다 보니 잔잔한 발라드 곡들을 들으면서 해요.

SNSD)SunNy:잔잔한 곡? 그럼 평소에는 다른 곡들을 듣나 보네?

DarkSword:네, 아무래도 항상 기분을 좋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신나는 락 종류를 많이 듣죠.

“호오, 락이라… 창현이가 락을 좋아하는군.”

정보를 취득하게 된 순규가 눈을 빛낸다.

탁월한 대화 유도 능력과 정보 취합 능력.

그것이 어우러진 순규는 차곡차곡 창현에 대한 정보를 쌓아나간다.

그리고 그것은 순규를 숨겨진 다크호스로 급격하게 성장시켜주고 있었다.


수요일과 목요일 드라마가 성공적으로 방영된 이후, 김지환 감독은 석규와의 약속을 위해 용산에 위치한 유명한 일식집으로 향했다. 석규가 그 근처에 볼일이 있다 하여 용산에 위치한 일식집을 잡아놓은 것인데, 마침 용산이 집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기에 김지환 감독은 흔쾌히 수락을 하고는 약속장소를 그곳으로 정하였다.

“어서 오세요. 예약하셨나요?”

먼저 방을 잡아놓거나 방문을 하게 되면 뒤에 올 손님을 위해 먼저 온 사람이 이름을 남긴다. 석규가 예약을 했기에 이름을 대야 했다.

“강석규 씨의 이름으로 예약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김지환 감독의 말에 종업원이 예약 명단을 둘러보다가 석규의 이름을 발견하고는 방을 가르쳐주었다.

“7호실로 가시면 됩니다. 저쪽으로 가시면 바로 나옵니다.”

“수고하십시오.”

그렇게 말을 한 김지환 감독이 7호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신발을 벗고 방안으로 들어서니 석규의 모습에 눈에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형님.”

“그래, 어서 와라.”

김지환 감독의 인사에 석규가 반갑게 맞이하였다.

석규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맞이하려 하자, 김지환 감독이 그를 제지한다.

“일어서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앉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을 들은 석규가 멈칫하더니 김지환 감독에게 자리를 권유한다.

“이리 앉지.”

“네.”

대답을 한 김지환 감독이 석규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러자, 곧장 문을 열고 종업원이 안으로 들어오더니, 기본 밑반찬을 차리기 시작하였다.

반찬이 차려지는 것을 본 석규가 김지환 감독을 힐끗 보더니 말한다.

“간단하게 반주를 하도록 하지. 복분자 한 병 주시오.”

“알겠습니다.”

대답을 한 종업원이 방을 벗어나더니 금방 복분자 한 병과 잔을 들고 왔다.

“한 잔 받지.”

“예, 형님.”

석규가 복분자를 따라주자 김지환 감독이 공손히 잔을 받았다. 그리고 석규가 한 잔 따라주자, 김지환 감독이 복분자 병을 들며 말한다.

“저도 한 잔 따라드리겠습니다.”

“아아.”

고개를 끄덕인 석규가 잔을 내밀자 김지환 감독이 복분자를 따른다.

석규는 그 잔을 상 위에 내려놓지 않고 그대로 내밀며 말한다.

“우선 한 잔 마시지.”

“예.”

대답과 함께 김지환 감독이 잔을 들어 석규의 잔과 마주한다.

짜안!

두 잔이 경쾌한 소리를 울렸다. 그리고 두 사람이 한 잔씩 마시고 잔을 내려놓는다. 그러자 김지환 감독이 다시 잔을 따르고, 석규도 잔을 따라준다.

묵묵히 한 잔을 주고받은 두 사람이 잠시 침묵을 한다.

그러다가 김지환 감독이 먼저 만나자고 한 것이 자신이라는 것을 떠올리며 입을 열기 시작하였다.

“제가 왜 형님을 부르셨는지 어느 정도 짐작을 하시리라 생각합니다.”

“대충 짐작은 하고 있지. 안 그래도 2월에 슬럼프로 고생을 한 적이 있거든. 그로 인해 드라마를 하게 되면서 잠잠해진 모습을 보였는데 그게 아니더군. 아마 그거와도 연관이 있을 것 같고.”

“그럴 거라 생각합니다. 우선 그 점에 대해서는 제가 사과드립니다. 드라마 시청률도 잘 나오고 있는 상황에서 한창 기뻐해야 할 텐데 제 말로 인해 여러모로 마음고생을 하셨을 테니 말입니다.”

언젠가 한 번쯤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었지만 김지환 감독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기에 석규에게 사과를 하였다.

현재 드라마 시청률이 높게 나오면서 벌써부터 드라마 출연진들의 거센 인기몰이가 한창이었다.

그 중에서 주연을 맡은 창현이 가장 큰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소속사 입장에서는 소속 연예인의 가치가 더욱 커졌다는 것을 의미하였기에 지금이야 말로 돈을 한 번에 쓸어 담을 수 있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김지환 감독이 거기에 브레이크를 걸어버린 셈이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사과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음, 언젠가 한 번쯤 넘고 가야 할 일이니 어쩔 수 없겠지. 손해가 제법 크기는 하지만.”

이 시기를 놓치는 것은 바보나 하는 짓이었다.

석규 또한 더욱 높아지는 창현의 가치를 활용하여 여러 가지 계획을 구상하고 있는 중이었다.

드라마에서 폭발적인 인기몰이를 하고, 드라마가 끝날 때쯤 하여 정규 앨범이나 미니 앨범 형식으로 컴백하는 것도 좋았고, 드라마로 인해 한 층 선택의 폭이 넓어진 CF를 노려도 괜찮다. 그리고 드라마가 끝난 뒤 일본에서 방영될 것을 노려 다시 한 번 일본으로 진출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택할 방법이 없어 곤란을 겪는 게 아니라 택할 수 있는 방법이 너무나 많아서 곤란을 겪고 있는 실정이었던 것이다.

그 부분에 대해서 논의를 하던 도중 갑작스러운 김지환 감독의 말은 발목을 잡기에 부족함이 없는 말이었다.

그 말에 김지환 감독은 사과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어쩔 수가 없었거든요. 봐주십시오. 하하!”

“흠! 일단 이야기를 들어보고 그 여부에 대해 정하도록 하지. 무슨 이유에서 만나자고 한 건가?”

석규는 기획사의 사장일 뿐, 가수나 연기자가 아니었다.

소속사 사장으로써 전체적인 흐름을 내다볼 수 있지만 그쪽에서 전문 분야로 진출한 적이 없었기에 창현에게 문제가 생겨도 마땅히 해줄 수 있는 조언이 적었다. 형식적인 조언이 먹힐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난 상황이었기에 김지환 감독의 말은 창현에게 있어 무척 중요한 작용을 할 수 있었다.

“일단 전화로 말씀드렸다시피 창현이한테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라… 무슨 문제지?”

문제가 있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그 문제가 있다는 걸 다른 사람에게 듣는다는 건 그 무게가 다르다.

자신만의 생각이 아닌, 다른 사람도 그렇게 생각한다는 건 정말 문제가 있다는 뜻이었으니.

표정을 굳힌 석규가 묻자, 김지환 감독이 잠시 말을 멈추더니, 복분자를 한 잔 홀짝이며 말한다.

“일단 여러 갈래로 나뉠 수 있지만 하나로 묶어서 말하자면… 경험의 부재입니다.”

“경험의 부재? 경험이 부족하다는 이야기로군.”

석규는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바로 알아차렸다.

확실히 창현은 나이가 어린 만큼 경험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그 점을 모를 석규가 아니었다.

김지환 감독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예. 그것도 심각합니다. 제법.”

“구체적으로 어떻다는 거지?”

석규가 알고 싶은 것은 창현에게 문제가 있다는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그 또한 언제나 창현의 경험 부족을 염려하고 있었으니까. 다만 그가 듣고 싶은 것은 경험의 유무가 아닌 근본적인 해결책이었다.

하지만 김지환 감독은 그것부터 말하려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는 심각한 표정을 한 채 석규에게 묻는다.

“한 가지 묻겠습니다. 창현이는 이별 이후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이별이라면……?”

“…돌아가신 형수님에 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죄송합니다. 이런 걸 물어보게 되어서.”

석규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가는 모습을 본 김지환 감독은 정중하게 사과를 했다.

“꼭 말해야 하나?”

“창현이의 연기를 본 저로서는 그걸 알아야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습니다.”

“…….”

침묵하는 석규.

그 모습에 김지환 감독도 아무 말도 안한다.

석규로서는 복잡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가슴 속에 영원히 묻어두고 싶은 그 순간을 떠올리게 만드는 말이었으니. 하지만 그 부분을 알아야 자세한 판단을 내릴 수 있었기에 반드시 알아야 했다.

그래야 자신의 말이 창현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테니까.

“지금 창현이는 밝지?”

“예, 주변 사람들과 관계도 원만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전에는 누구와도 말을 섞지 않았지. 그건 나와도 마찬가지였고. 엄마를 잃었던 충격이 너무 컸던 거지. 그녀가 그렇게 죽은 이후 2년 동안 내가 창현이와 이야기를 나눈 말이 채 열마디도 되지 않을 테니.”

“…….”

거의 대화가 단절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묵묵히 듣고 있자, 석규의 말이 이어진다.

“그리고 호칭이 바뀌었지. 그전까지만 해도 나를 아빠라 불렀거든. 하지만 그 이후부터는 아버지로 부르기 시작했지. 그러다가 그 아이가 열네 살이 되던 해부터 바뀌기 시작했어. 알지? 그 아이가 열네 살이 첫 미니 앨범을 낸 걸.”

“알고 있습니다. 그때가 열네 살 때라는 걸 생각하면 소름이 돋지요.”

현의 첫 미니 앨범이 나왔을 때 일어나던 여파를 떠올린 김지환 감독이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짓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만큼 현의 재능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알 수 있었지. 그 녀석은 어미를 잃고 방황하던 마음을 수차례 다잡으려고 했어. 하지만 내가 말한 것처럼 2년 동안 다잡지 못했지.”

“왜 그렇습니까?”

그 물음에 석규가 쓴웃음을 짓는다.

“나 때문이지.”

“예?”

“그 녀석은 어미를 잃은 슬픔으로 음악을 하기 시작했어. 그리고 나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했지. 나에게 인정을 받아서 예전의 화목한 가정을 되찾고 싶었던 게지. 하지만 나는 그럴 겨를이 없었어. 당시 나 또한 느꼈던 슬픔이 대단했거든. 그에 대한 방편으로 나는 회사 일에 모든 신경을 집중했지. 그래서 창현이에게 신경을 돌릴 틈이 없었던 거야. 그것도 모른 채 창현이는 내가 자신에게 신경 쓰지 않는 것을 실력이 부족한 탓이라 여긴 것이고.”

“…….”

조금은 충격적인 말이었다. 그리고 왜 현이라는 가수가 나타나게 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한창 기량이 발전할 나이에 실력을 인정받고자 하는 마음.

그리고 실력을 인정해주지 않는 듯한 아버지의 모습에 창현은 오로지 인정받기 위해 자신의 실력에 한계선을 그어두지 않았을 것이다. 오로지 실력을 늘리고 늘리는데 집중을 한 나머지 나이 대에 비해 터무니없을 정도로 대단한 실력을 갖게 된 것이라.

“대인 관계도 꽝이었지. 누구도 자신의 틀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으니까. 그런 면에서 나는 꽝이었어. 그런 아이의 마음을 2년 넘게 알아차리지 못했으니. 어쨌든 이것이 창현이 겪었던 일들이지. 어린 나이에 너무나 큰 충격이었을 것이고 아직도 상처로 남았을 거야.”

“…그래서 그랬던 거로군요.”

석규의 말을 들은 김지환 감독은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왜 창현이 애절한 눈빛을 하며 연인을 떠나보내는 연기를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는지 알 수 있었다.

창현의 뇌리 깊숙한 곳에 각인이 되어 있던 것이다.

떠나보내면 두 번 다시 볼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그 감정에 완전히 몰입하게 되면 자신이 그때로 돌아갈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무의식적으로 느끼고 있었을 거다.

중간이 아닌, 너무나 극단적인 이별을 했기에 집중을 하려 해도 무의식이 그것을 거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 내 이야기를 했으니 이제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하지. 창현이는 어떤 문제가 있는 건가?”

“이별에 관해서 전혀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형님의 말을 들어보니 그 이유가 짐작이 가는군요. 그때에 비하면 훨씬 나아졌지만 창현은 두터운 방어막에 자신을 가두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대인관계가 원만할 테지만 실제로 그가 그어놓은 선 안으로 들어선 인물들은 거의 없을 테지요.”

“음, 그렇다고 볼 수 있지.”

“이 부분에 대해서는 쉽게 해결을 하려고 해도 사실상 어렵습니다. 아무리 주변에서 조언을 해줘도 본인이 깨닫고 타파해야 하는 문제니까요.”

이야기를 들어보니 제법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감정 몰입에 능하다고만 생각했는데 그것은 능한 것이 아니라 지나칠 정도로 몰입을 한 나머지 누구보다 뛰어나게 보였던 것이다. 그런 탁월한 감정 몰입이 플러스적인 요소를 일으키면 좋지만 마이너스적인 요소로 변환되면 상당한 골치를 썩게 될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생각하는 거지?”

“일단 그 부분은 정신과 치료를 받아도 효과가 없을 듯 싶군요. 본인 스스로가 깨닫고 치료하는 수밖에요.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창현이에게 필요한 건 정이라는 점입니다. 형님은 너무 사무적으로 대하지 마시고, 가족들과도 자주 만나서 따뜻하게 대해주는 게 좋을 듯 싶군요.”

“정이라… 그렇게 하도록 하지. 지선이나 지영이도 창현이를 좋아하니까.”

자신이 창현을 사무적으로 대할 때가 종종 있다는 걸 깨달은 석규가 흠칫하면서 고개를 살짝 끄덕인다.

“대본을 수정해야 할 듯 싶군요. 저는 창현이의 역량을 평가하면서 그에게 굴곡이 없을 것이라 판단했던 것이 실수를 불러일으켰네요. 따지고 보면 제 실수인데 창현이가 NG 내는 걸 보고 뭐라 했으니. 후우!”

자신의 한심한 실수에 절로 한숨이 나오는 김지환 감독이었다. 그래도 문제점 하나를 파악했으니 추후 촬영에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걸로 창현이가 완벽하게 단점들을 극복할 수 있다는 건가?”

석규의 물음에 김지환 감독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당연히 아닙니다. 제가 물어본 것은 중요한 질문 중 하나에 불과했던 걸요.”

결정적인 것은 경험 부족.

하지만 그 외에도 자잘한 것들이 존재했다.

우선 처음으로 NG를 다량으로 냈던 문제점을 간파하는데 성공했으니 이제부터는 그가 파악한 것들을 질문해야 할 시점이었다.

“중요한 질문들이 더 남아있단 이야기로군. 으음!”

또 무슨 질문을 할지 석규가 다소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창현의 허락없이 그의 과거를 말한 것이 다소 불편한 상황이었다.

그 말에 김지환 감독이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하하! 죄송합니다.”

“이미 말했으니 사과를 들어도 별로 내키지 않는군. 다른 중요한 질문은 뭐지?”

“예, 그건 말입니다…….”

물을 마셔 살짝 목을 축인 김지환 감독이 석규를 바라본다. 앞서 한 질문은 자신의 궁금증, 그리고 앞으로 전개될 것에 대한 염려라고 한다면 이번 질문은 자신이 창현에게 느꼈던 가장 근본적인 문제점이라 생각되는 문제였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현에 대해 조사를 하게 되면 숱하게 나오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엄연히 ‘방송용’으로 볼 수 있는 내용이었기에 김지환 감독은 자세한 답을 알고 있었다.

그는 다시 진지한 표정을 찾으며 석규에게 넌지시 묻는다.

“창현이가 사랑을 해본 적이 있습니까?”


“후우! 힘들다.”

“오늘 라이브가 있어서 그런지 피곤하네.”

“겨우 한 곡 부른 것 가지고 힘들다 그러냐.”

라디오 스케줄이 끝난 뒤, 소녀들은 온몸을 덮쳐오는 피로를 간신히 견뎌내며 차에 몸을 실었다.

오늘 라디오 스케줄을 했던 소녀들은 수연과 순규, 수영이었다.

앓는 소리를 냈던 순규가 수영의 타박에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겨우? 나는 노래를 부를 때 혼신의 힘을 다한다고! 그걸 가지고 겨우라니. 오늘 송장 하나 치워볼까?”

“아, 알았어. 너 고생했으니까 그만 달려들어. 나도 피곤하다고.”

수영은 순규가 죽일 듯한 기세로 달려들려 하자 고개를 좌우로 저으면서 항복을 선언한다. 평소대로라면 가볍게 한판을 떴을 테지만 지금은 라디오 스케줄로 인해 그녀도 피곤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힘을 더 빼는 건 사양이었다.

순순히 패배를 선언하는 수영의 모습에 순규가 살며시 미소를 짓는다.

“훗! 순순히 꼬리를 마는군. 내가 특별히 용서해주도록 하지.”

“이게 그냥… 으그그그! 내가 상대를 말아야지.”

발끈한 표정을 짓던 수영이 이내 고개를 젓고는 그녀와 맞상대 할 의지를 접는다. 만만치 않은 순규를 상대로 대결을 벌이다가는 자신만 손해였다.

“에구! 나도 상대하기 싫다. 피곤하고 배고파…….”

순순히 물러서는 수영을 보며 좀 더 곯려줄까 싶다가 자신도 피곤한 상태라는 것을 깨닫고는 축 늘어지는 순규였다. 이야기를 하면서 노래를 부르는 라디오 스케줄이 싫은 것은 아니지만 말을 너무 많이 하고 여러모로 신경 쓸 것이 많다 보니 무척 피곤한 직업이었다.

그렇게 축 늘어져 있던 순규가 배고픔을 호소하였다.

“배고프다.”

“나도…….”

옆에서 같이 늘어져 있던 수영도 배고픔을 호소한다. 식신을 탈퇴했다고 하나 그녀는 여전히 ‘전직’ 식신이었다.

“……."

동시에 배고픔을 호소한 두 사람은 순간 서로를 마주보다가 고개를 나직이 끄덕이며 모종의 합의를 본다. 그것은 바로 숙소로 들어가기 전 야식을 먹자는 것! 오늘 밤에 먹고 내일 하얗게 불태우면 충분히 칼로리 소모가 되리라.

의견을 그렇게 모은 두 사람의 시선이 수연에게 향한다.

“수연아 너는…….”

말을 하던 수영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수연에게 시선을 둔 순규가 짧게 말한다.

“…자네.”

왠지 조용하다 싶더니만 차에 타자마자 수연은 실신하듯 잠에 빠져든 것이다. 하기야 자신들은 피로하면 입에 달고 있지만 수연은 쓸데없는 힘을 소모하지 않은 채 그대로 비축하는 축에 속했다.

수연도 끌어들여서 함께 야식을 먹으려던 그녀들의 계획은 처음부터 불발이 날 지경이었다.

“수연이가 자면 우리는 어떻게 하지?”

“깨우는 건 좀 그렇고… 그냥 우리 둘이?”

“하지만 둘이 먹는 건 분위기가 안 살잖아. 세 명은 되야 먹을 맛도 나고 그러는데.”

두 명과 세 명은 상당한 차이가 있다. 분위기에서나 먹는 것에서나. 그랬기에 그녀들은 수연이 잠에 빠져든 모습을 보고는 맥이 풀려버렸다.

서로 마주보던 그녀들의 입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에휴! 포기해야 하나?”

“그래야겠네.”

애석하지만 둘이서 먹는 건 좀 그랬기에 그녀들은 야식에 대한 꿈을 단념하려 하였다.

그 순간 그녀들의 귓가에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야식을 먹으려고?”

잠이 들었다고 생각하던 수연이 눈을 뜬 채 그녀들을 바라보고 있던 것이다.

순규와 수영은 얼굴에 화색이 돌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 깼어?”

“잘 됐다. 우리 배고픈데 야식 먹자! 어때?”

두 사람의 달콤한 제안에 수연이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도 배고픈 것은 마찬가지였다.

“으음! 야식이라… 난 좋아.”

“좋았으! 그럼 뭐 먹을까?”

주먹을 불끈 쥐며 묻는 수영의 모습에 실소를 짓던 수연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말한다.

“…족발?”

“족발 좋지! 좋고 말고.”

“그럼 족발 콜?”

“콜!”

그렇게 메뉴가 선정되고 있을 때, 아직 잠이 덜 깨 비몽사몽이던 수연의 머리가 차츰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내 무언가 생각이 난 듯 눈을 번쩍 뜨더니 말한다.

“잠깐만.”

“왜? 족발 싫어?”

갑작스레 외치는 그녀의 모습에 순규가 고개를 갸웃하며 묻자, 수연이 고개를 젓고는 말한다.

“그게 아니라… 지금 윤아도 드라마 촬영하고 있지? 아마 지금쯤 끝나갈 걸?”

“어어? 그러고 보니 그러네. 오늘 드라마 밤늦게까지 한다고 했으니까.”

수연의 말에 허를 찔렸다고 생각하던 수영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짓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고 보니 오늘 윤아도 드라마 촬영을 밤늦게까지 한다고 투덜거린 적이 있다.

“그럼 윤아도?”

순규가 무언가 깨달은 표정을 지으며 수연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수연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게 하자. 윤아도 같이. 어차피 끝나면 두 개로 나눠서 탈 필요 없이 같이 타도 되니까.”

그리고…….

운이 좋으면 창현이랑 함께 할 수도 있었으니까.

그 말을 누구도 하지 않았지만 세 사람의 뇌리에서 공통적으로 떠오른 것이었다.

수영과 순규가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찬성하였다.

“좋아. 윤아도 합류 시키자.”

“의리를 지켜야지. 난 찬성.”

“그래. 매니저 오빠! 윤아 스케줄 지금 어떻게 되어가요? 끝났으면 우리랑 함께 가도록 해요.”

수연의 말에 로드 매니저가 윤아의 매니저에게 연락을 하더니 빠르게 합의를 본다. 곧 있으면 드라마 촬영이 끝나니 그쪽으로 가겠다는 이야기였다. 좀 돌아가는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그녀들은 그 정도에 신경 쓰지 않는 쿨한 도시여자였다.

창현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그녀들은 미소를 지었다.


한창 그녀들이 탄 벤이 촬영장을 향하던 차, 밤늦게까지 진행된 드라마 촬영이 마침내 끝이 났다.

전날 여러 번 NG를 낸 것은 마치 장난인 것처럼 창현은 촬영을 수월하게 끝낼 수 있었다. 그랬기에 창현은 그날은 자신이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고 생각을 하면서 무사히 오늘도 촬영을 끝마칠 수 있었다.

“이런, 벌써 11시네. 지금 가서 자면… 에휴! 좀 늦겠군.”

수면 시간에 예민한 모습을 보이던 창현은 오늘 제 시각에 자는 건 무리라는 걸 깨닫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그런 창현에게 윤아가 슬그머니 다가오더니 묻는다.

“창현아, 오늘 촬영 힘들었지?”

그 말에 창현이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했다.

“아,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어요. 단지 좀 늦게 자는 것 때문에 걸리네요. 아무래도 오늘은 제 시각에 자는 걸 포기해야겠어요.”

제 시각에 자는 걸 포기한다는 창현의 말에 윤아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창현에게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이다가 입을 열었다.

“그렇구나. 그럼 말이지… 같이 야식 먹으러 가면 안 될까?”

“야식이요?”

“응. 촬영을 늦게까지 해서 그런지 배가 고파서… 혼자서 먹으려니 그렇고, 창현이 너도 배가 고프면 같이 먹는 게 어떨까 싶어서.”

촬영장에서 지급한 도시락은 6시에 해치워버린 상태였다. 그랬기에 지금 시간 때쯤이면 배가 출출해질 시간이었다.

그것은 창현 또한 다르지 않았다.

몇 시간 동안 촬영에 임했기에 저녁으로 먹은 것들은 모두 소화가 된 상태. 허기를 느끼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야식이 언급되니 군침이 동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누나 괜찮겠어요? 야식 먹으면 살 찌잖아요.”

자신은 괜찮지만 문제는 윤아였다. 걸 그룹으로써 몸매가 강조되는 옷들을 입고 노래를 부르다 보니 살이 찌면 상당한 곤란에 처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 말에 윤아가 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괜찮아! 난 먹어도 살이 잘 찌지 않는 체질이거든.”

당당하게 말하는 윤아의 모습에 창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어! 다른 여자들이 무척 부러워할 만한 체질이군요.”

“후후후! 그래서 이 체질을 가지고 언니들을 많이 놀려먹고는 하지.”

살이 찔까봐 야식을 먹지 못하는 사람 앞에서 야식을 먹는 그 쾌감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것이다.

“그런 장난 잘못 하면 큰일 날 수 있어요. 자제하는 게 좋을 걸요?”

“별로 자주는 안 쳐.”

“그럼 뭐 먹을까요? 저도 배가 고프던 차였는데 잘 됐네요.”

창현의 수락이 떨어지자 윤아가 주먹을 불끈 움켜쥔다. 혹시나 싶어서 찔러본 건데 성공하자 그녀는 큰 환희에 휩싸였다.

‘아싸!’

촬영장에 같이 있는 시간도 많은데 여기에서 차근차근 시간을 늘려나가면 자신에 대한 호감도가 쌓일 것이라 생각하는 윤아였다. 비록 수연이 알아차릴까 두려웠지만 이미 라디오 스케줄을 끝내고 숙소로 돌아갔을 터. 자신은 야식을 먹은 뒤 조용히 숙소로 돌아가 언급을 하지 않으면 이 일은 영원히 수면 아래로 묻히게 될 것이다.

수연이 두려웠지만 그 두려움을 뛰어넘을 용기는 윤아에게 있었다.

‘비록 매니저들이 같이 하지만 서서히 접근하면 인식이 달라질 거야.’

그것이 윤아의 생각이었다.

그러면서 윤아는 자신이 먹고 싶은 걸 늘어놓았다.

“먹고 싶은게 많네. 고기도 먹고 싶고 닭갈비도 먹고 싶고 한식에 일식에 양식에…….”

끊임없이 음식의 종류를 늘어놓는 윤아였다.

그리고 그것이 그녀의 패착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불행하게도 창현의 생각은 윤아의 것과 전혀 다른 생각이 맴돌고 있었다.

‘수영 누나가 2대 식신 자리를 맡긴 이유가 있구나. 먹는 것에 거리낌이 없네. 그러고도 마른 체형을 유지하다니. 대단하네?’

윤아가 알았으면 조금 애석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냉정하게도 이것이 현실이었다.

창현이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하하! 좀 많은데요?”

“그럼 고기 먹자! 한우 어때!”

비싼 한우를 언급하자 창현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한다.

“누나가 사는 거죠?”

그 말에 윤아가 헛바람을 집어삼키고는 이내 그의 팔을 부여잡으며 코맹맹이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헉! 아잉! 요즘 돈 많이 버는 창현 씨! 저 야식 좀 사주세용!”

살기를 부르는 애교가 작렬하는 순간이었다.

절대 적응이 되지 않는 그녀의 애교에 창현이 실소를 흘리더니 대답한다.

“알았어요, 알았어. 그러니 그런 애교는 그만해요.”

“아싸! 창현아 땡큐!”

자신의 목적을 이루게 되자 주먹을 불끈 쥐며 기뻐하는 윤아였다. 그 모습에 창현은 웃음을 짓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윤아는 알지 못했다.

그녀가 창현의 팔을 부여잡으며 애교를 부리는 모습을 세 여인이 봤다는 것을 말이다.

창현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힘찬 발걸음으로 촬영장에 들어서던 그녀들의 얼굴은 서서히 굳어갔다.

그리고 그곳에는 아리따운 소녀들은 사라지고 세 명의 마왕이 지상에 강림하는 의식이 거행되기 시작하였다.


“응?”

윤아와 이야기를 나누던 창현은 무언가 이상한 기류를 느끼고는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 기류가 느껴지는 곳으로 시선을 옮겼는데, 그곳을 본 순간 그는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왜 그래, 창현아?”

함께 야밤의 데이트(?)를 하게 된 윤아는 희희낙락한 모습을 보이다가 창현이 갑자기 이상한 반응을 보이자 고개를 갸웃하며 그의 시선이 고정된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생글생글 웃고 있던 얼굴이 그대로 경직되기 시작했다.

지금 이 자리에 절대! 절대 없어야 할 존재들이 자리하고 있던 것이다.

“수, 수연 언니랑 순규 언니, 수영 언니…….”

어떻게 이곳에 저 언니들이 있단 말인가.

아니, 있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그녀들이 자신의 행동을 목격했느냐였다. 자신이 창현에게 함께 야식을 먹자고 한 것을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

그러면 충분히 지금의 위기를 모면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윤아의 희망은 처참하게 부서져 나갔다.

두 눈에 용암이 들끓고 있는 그녀들의 시선과 정면으로 마주했던 것이다.

윤아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봤네.”

저 기세와 저 눈빛. 보지 않았으면 결코 저런 반응을 보일 리가 없다.

설마 이런 식으로 들키게 될 줄이야. 숙소로 돌아가면 어떻게 될지 눈앞이 아득하게 변하는 기분이었다.

‘살아야 해.’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변명거리를 만들어야 한다.

윤아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는 사이, 저 멀리 서 있던 소녀들이 다가오기 시작한다.

창현은 그녀들을 발견하자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그녀들에게 다가가 인사를 하였다.

“누나들 어서 와요. 윤아 누나 데리러 온 건가요?”

가장 앞에 서 있던 수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다.

“응. 아무래도 두 대의 차를 동원하는 것보다 한 대로 가는 게 편하잖아? 때마침 우리도 라디오 스케줄 하고 있어서 윤아 데리러 왔지.”

“그래요? 흐음! 그렇군요.”

수영의 말을 들은 창현이 고개를 끄덕인다. 윤아 혼자 데리러 왔다면 자신이 말을 하여 함께 야식을 먹으려고 할 텐데 다른 멤버들도 같이 왔으니 아무래도 힘들 듯 싶었다.

그런 창현의 얼굴을 본 것일까? 순규가 그에게 묻는다.

“왜 그렇게 고민하는 표정을 짓는 건데? 무슨 약속이라도 한 거야?”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듯한 질문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질문에 창현이 윤아와 있었던 이야기를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아, 실은요…….”

“창현아!”

입을 열려던 창현은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윤아의 제지로 인해 말을 이어나갈 수 없었다. 창현은 윤아가 옆으로 다가오자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윤아를 바라보았는데, 고개를 살짝 젓는 그녀의 행동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뛰는 자 위에 나는 자 있는 것처럼 윤아의 행동을 단번에 간파한 사람이 있었다.

수연은 눈을 차갑게 빛내며 창현에게 말한다.

“윤아는 그만. 무슨 눈빛을 그렇게 보내는 거지?”

“응? 아, 네? 제, 제가 언제요!”

정곡을 찔리자 윤아의 몸이 움찔하면서 수연에게 소리를 친다. 하지만 수연의 차가운 눈빛을 마주한 순간 자신의 거짓말을 완벽하게 꿰뚫어보는 듯하여 몸을 가늘게 떨었다.

그리고 그것이 거짓을 말했다는 걸 시인하는 것이었다.

“…창현아, 무슨 이야기 했었던 거야?”

차가운 눈빛으로 윤아를 단번에 제압한 수연이 창현에게 묻는다.

그 말을 들은 윤아가 다시 한 번 창현에게 구원 요청을 하려고 했지만 그 의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어느새 그녀의 의도를 간파한 순규와 수영이 적절하게 차단을 한 것이다.

이럴 때만큼은 절정에 다다른 팀워크를 보여주는 그녀들이었다.

창현은 윤아가 말하는 것이 어떤 의도였는지 알았지만 그렇다고 하여 거짓을 말할 수 없었다. 이미 그녀들의 눈에는 다 알고 있다는 기색이 역력했던 것이다.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 이유가 없다.

그래도 윤아를 보호하고자 어느 정도 각색을 하여 말해주었다.

“아무래도 저녁을 일찍 먹다 보니 배가 고파서요. 윤아 누나한테 같이 야식을 먹자고 했거든요.”

“야식? 단 둘이서?”

“그건 아니죠. 매니저분들도 함께니까요.”

“…….”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을 하는 창현의 모습에 수연도 더 이상 무어라 하지 못했다. 그리고는 윤아에게 슬쩍 시선을 옮긴다. 창현에게 감사의 의미를 담은 눈빛을 보내던 윤아가 수연의 눈빛을 받고는 움찔하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그 모습을 본 창현이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하하! 너무 그렇게 보지 마세요. 제가 잘못한 거니까요. 게다가 누나들도 함께 올 줄 몰랐거든요. 이렇게 되면 야식은 같이 먹지 못하겠…….”

“아니!”

창현의 말은 끝을 맺지 못한 채 중간에서 끊어졌다.

갑자기 말이 끊기자 창현이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니, 그곳에는 단호한 표정을 짓고 있는 수연의 모습에 눈에 들어왔다.

수연은 강하게 고개를 저으면서 말한다.

“왜 같이 못 먹어? 먹으면 되지!”

“그게 누나들의 의견을 묻지 않은 거니까요.”

얼떨떨한 표정을 지은 채 창현이 말했다. 평소에 그러한 모습을 볼 수 없어서 수연을 비롯한 순규와 수영도 그 모습이 무척 귀엽다고 느껴졌다. 마왕들에게 포획 당한 윤아 또한 그 모습을 보며 한순간 헤! 하고 바라볼 정도였으니 말이다.

“괜찮아. 우리도 라디오에서 말도 많이 하고 라이브도 해서 그런지 배가 고프던 참이었거든. 그래서 야식을 먹을까 고민하다가 온 거야. 그치?”

수연이 순규를 바라보며 묻자, 그녀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배가 고파서 참을 수가 있어야지. 이것도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배고프면 어쩌자는 건지. 당장 몸매관리보다 중요한 건 배고픔을 달래는 일이지!”

“하하…….”

적나라한 순규의 말에 창현이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너무 솔직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직설적인 대답이었다.

하지만 아직 의견을 말하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 바로 전직 식신 수영이었다. 창현은 그녀가 식신의 자리를 탈퇴한다는 것이 앞으로 먹는 양을 줄이는 것이라고 판단을 하였기에 수영의 의견을 중요하게 여겼다.

“수영 누나는 어때요?”

“다들 의견이 모였는지 나만 빠질 수 없는 노릇이지.”

“정해졌네요, 하하!”

의견이 모이자 창현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이렇게 되면 윤아와 함께 가는 것이 다 함께 가게 되는 것이다.

“그럼 곧장 가도록 하죠. 준비는 거의 다 끝났으니까요.”

그 말에 수연이 고개를 끄덕인다.

“응, 우리는 여기서 기다릴게. 준비 다 하고 나와.”

순규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만들지 마!”

“알았어요. 윤아 누나, 가죠.”

“응? 알았어!”

자칫하면 저 마왕들의 마수에 빠질 수 있었던 차에 창현이 구명줄을 내려주자 윤아가 감사의 의미를 담은 눈빛을 보내고는 후다닥 자리를 옮긴다. 어쩌면 살아남을 수도 있다는 몹쓸 희망이 그녀의 가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수영이 말한다.

“윤아 저것을 어떻게 처리하지?”

“지금은 즐기도록 놔두자. 숙소에서 얼마든지 응징이 가능하니까.”

평소 티격태격하지만 지금 만큼은 한 마음인 순규였다.

수연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걸렸다.

“최후의 만찬일 테니까.”

여자들은 결코 사소한 일들을 잊지 않는 법이다.


그렇게 준비를 마친 뒤 그들은 함께 인근 고기집으로 향했다. 고급 한우점이 아니라, 24시간 영업을 하는 곳인데, 제법 밤이 늦었음에도 손님들이 많은 것으로 보아 맛이 괜찮은 듯 싶었다.

방을 하나 잡아 안으로 들어가고, 자리를 잡게 되었다.

아무래도 연예인들은 연예인들끼리, 매니저들은 매니저들끼리 앉기로 했는지 테이블을 따로따로 나누어 앉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창현의 옆자리 쟁탈전이 벌어졌는데, 싱거울 정도로 허무하게 윤아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상관없지 않은가? 오늘 그 최후를 맞이할 텐데 이승에서 즐거운 추억이라도 가지고 가야지.

상이 차려지고, 물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본격적으로 고기 먹을 준비를 하였다.

창현을 조용히 바라보던 수영이 물었다.

“드라마 촬영은 어때? 힘들지 않고?”

“처음이니 당연히 힘들죠. 하면 할수록 더 잘해야 한다는 압박도 느끼고요. 그래도 제가 또 다른 사람의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 매력적이라 할 만해요.”

“그래? 난 연기가 힘들던데. 드라마 보니까 정말 연기 잘하더라.”

수영의 칭찬에 창현이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웃음을 지었다.

“하하! 그래요? 전 아직 많이 부족한 거 같던데. 요즘 촬영하면서 워낙 지적도 많이 받고 그래서요. 아직 멀었죠.”

“원래 잘하다 보면 기대치가 높아지는 거야. 감독님도 시청률이 좋게 나오니 좀 더 잘하길 원하는 걸 테고.”

“그것도 그렇죠. 아무래도 이래저래 하려고는 하는데 힘들더라고요”

그렇게 말을 하는 창현의 모습에 윤아가 맞장구친다.

“그래, 창현이 너 요즘 많이 피곤해 보이던데? 평소 잘 내지 않던 NG들도 내고. 스케줄이 많아져서 피곤한 거야?”

평소에는 곧잘 해내던 그가 갑자기 이래저래 빈틈을 보이는 것 같아 건강에 이상이 있는지 염려가 되는 윤아였다.

그 말에 창현이 미소를 짓더니 고개를 젓는다.

“그건 아니에요. 스케줄은 무난한 편이거든요. 피곤할 것도 없죠.”

“어라? 드라마가 잘 돼서 CF나 그런 거 요청 많이 들어오지 않아?”

근영은 벌써부터 들어오는 CF들로 인해 눈이 돌아갈 지경이라 그러던데 창현은 그렇지 않다? 정말 의아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의아함을 표현해도 창현으로서는 해줄 말이 없었다.

없는 걸 있다고 할 수는 없으니까.

그저 고개를 저어보일 뿐이었다.

“이상하네…….”

윤아는 의아함을 느낄 뿐이었다.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가는 것을 판단한 창현이 웃음을 지으면서 말한다.

“하하! CF야 들어올 수도 있고 안 들어올 수도 있는 거죠. 자자, 일단 먹도록 해요. 배가 고프다고 하셨잖아요?”

“그래야지.”

고개를 끄덕였지만 이미 몇 년 동안 창현을 보아왔기에 그녀들은 지금 저 모습이 억지로 활발하게 보이려 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정말 뭔가가 있어도 있는 것 같았다.

“힘 내. 너무 실망하지 말고.”

다만 옆에 앉아있는 윤아가 제일 나서면서 분위기도 파악하지 못한 채 창현을 위로할 따름이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다른 소녀들은 점점 분노 게이지가 치솟고 있었다.


야식을 먹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

윤아는 아까 전부터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탄 벤의 분위기가 살벌했던 것이다.

쿡 찌르기만 하면 곧장 피가 흘러나올 듯한 예리한 분위기랄까? 살벌한 기파를 흘려대는 언니들의 모습으로 윤아는 눈을 좌우로 굴리며 이 상황이 빠르게 타개되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수연과 눈이 마주쳤다. 살벌한 기세가 담긴 그녀의 눈빛에 윤아가 움찔하며 몸을 움츠렸다.

수연은 그런 윤아에게 싱긋 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최후의 만찬은 즐겁게 즐겼지?”

“최, 최후의 만찬? 그게 무슨 뜻이죠?”

그녀의 말 속에 담긴 살벌함에 윤아가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수영이 친절하게 설명을 한다.

“뭐긴 뭐겠어. 함부로 역모를 획책한 우리들의 에이스 윤아 양의 마지막 식사가 즐거웠냐는 이야기지. 뭐,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충분히 즐거워보였지만.”

“그, 그게 무슨…….”

야식으로 돈독한 우정을 다져왔던 수영이 내뱉는 냉혹한 말에 윤아는 배신감과 더불어 그 속에 내재된 칼날을 느끼고는 가늘게 몸을 떤다.

그러자 윤아의 옆에 앉아있던 순규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는다. 자연스레 윤아의 시선이 순규에게 향했고, 살벌한 빛이 감도는 두 사람과 달리 평온한 기색을 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윤아는 한 줄기 빛을 발견하고는 그녀에게 매달린다.

“어, 언니!”

순규가 합세하면 2대 2가 되기에 희망을 거는 윤아.

하지만 이어진 순규의 말에 윤아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한 절망을 맛보아야만 했다.

“포기 해. 그럼 편안할 거야.”

“뭘 포기하라는……?”

설마설마하는 마음으로 묻는 말. 하지만 그것은 냉혹한 현실을 인지시키는 확인사살에 불과하겠다.

“뭐겠니. 너의 처형식이지.”

그곳에는 마왕이 존재하고 있었다.

순규와 수영에게 각각 팔을 붙잡힌 채 숙소로 끌려들어간 윤아는 창현과 ‘단 둘이서’ 야식을 먹기 위해 얄팍한 계책을 도모했다는 순규와 수영의 증언에 의해 처참한 최후를 맞이해야만 했다.


너덜너덜해진 윤아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고, 그녀에게 다가오는 한 사람이 있었다.

그녀의 정체는 바로 수연이었다.

가장 살벌한 기세를 풍기고 있었지만 그녀는 윤아의 처벌에 전혀 가담하지 않았다.

수연은 윤아에게 따뜻한 미소와 함께 주스가 담긴 컵을 내밀었다.

“힘들었지? 이거 마셔.”

“어, 언니!”

세상의 모두가 나의 적일 때 단 한 사람이라도 나의 편을 들어준다면 그 존재는 더없이 든든하고 친밀하게 느껴지는 법이었다. 평소에는 무서운 수연이었지만 이렇듯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어주는 모습에 윤아는 무한한 충성심이 생겨나는 걸 느껴야만 했다.

감동에 젖어드는 윤아의 모습에 수연은 여전히 웃음을 지은 채 말한다.

“앞으로 너무 무리수를 두지 말고. 우리 서로 힘내자.”

그 말을 들은 윤아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리고는 한쪽 무릎을 꿇으며 마치 기사가 예를 취하듯이 수연에게 예를 취한다.

“Yes, your majesty.”

윤아는 자신의 힘이 되어주지 못하는 무한태연교를 버린 채 자신을 알아주는 수연에게 충성을 바치기로 마음 먹었다.

그 모습을 보며 수연은 속으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갑자기 무슨 일이지?”

창현은 의아한 기색을 띤 채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가 향하고 있는 것은 현재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이 아니었다. 그가 가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석규와 지선, 지영이 살고 있는 집이었다.

어제 드라마 촬영을 무사히 끝마치고 집으로 향한 창현은 한 가지 의아한 소식을 전달받게 된다.

바로 내일 자신의 집에 오라는 석규의 말을 들었던 것이다.

업무에 관련된 이야기라면 회사로 오라고 할 텐데 갑자기 집으로 오라니? 의아한 표정을 띠었지만 어차피 내일은 특별한 스케줄 없이 하루 종일 집에서 빈둥거릴 계획이었기에 석규의 말에 수락을 하였다. 앨범 컨셉은 정해놓았지만 도통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아 답답하던 차였는데 한바탕 바람을 쐴 요량이었다.

5월 중순으로 접어들고 있었기에 슬슬 날씨가 더워지는 시기였다.

더위를 유독 타는 사람들은 성급하게도 반팔과 반바지를 입고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고, 더위를 타지 않는 사람들은 아직까지 긴 팔과 긴 바지를 입고 다니고 있었다.

창현은 더위도 추위도 그리 타지 않는 체질이었다.

내공 때문인가? 라고 생각을 해보기도 했지만 내공을 익히기 전에도 딱히 더위나 추위를 타는 체질이 아니었나보다. 참으로 요상한 체질이 아닐 수 없었다.

어쨌든 이도 저도 아니었기에 창현이 택한 것은 변장에 다소 용이한 긴 옷들이었다.

너무 두텁게 입으면 또 그것 나름대로 주목을 받을 수 있었기에 창현은 청바지를 입고, 간단하게 반팔 셔츠를 입은 채 모자와 헤드셋을 썼다. 모자를 푹 눌러썼기에 자세히 들여다 보지 않으면 얼굴을 알아볼 수가 없다.

“이 정도면 되겠지.”

모자를 눌러쓴 채 헤드셋을 쓰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니 쉽게 알아볼 수가 없었다. 이런 차림은 거리를 걸으면 곧잘 볼 수 있는 차림새였던 것이다.

자신이 눈에 띄는 행동만 하지 않으면 튀는 일은 없으리라.

“오랜만에 사람들이랑 섞여서 구경이나 해볼까.”

그렇게 생각하며 집을 나서는 창현이었다.

석규가 자신 보고 찾아오라고 했던 시간은 저녁 시간이 되어가는 5시였다. 그에 반해 자신이 나서는 시간은 1시. 자신이 이 시간에 나서는 이유는 간단했다. 요즘 마음이 답답하고 하는 일이 잘 풀리지 않아서 여기저기 걸어다니며 바람을 쐴 요량이었던 것이다.

발걸음을 옮기며 창현은 자신이 다녔던 학교부터 시작하여 자신이 살았던 아파트도 한 번씩 걸어본다. 그리고 배가 고파지자 인근 패스트 푸드점으로 가서 햄버거를 사먹었다. 계산을 할 때, 아르바이트생이 얼굴을 알아보는 게 아닐까 싶어 마음이 철렁했지만 이내 고개를 젓는 것을 보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구석에 앉아서 간단하게 배를 채웠다.

거리를 걸으면서 창현은 많은 것을 느꼈다.

가장 절실하게 느낀 것은 자신이 거리를 마음껏 걷는 사람들과 같은 모습을 연출하지 못하는 것이다.

“난 여기에도 저기에도 속하지 못하는구나.”

절로 한숨이 나오는 순간이었다.

평소에는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졌는데 지금은 이런 사소한 자유마저도 부럽게 느껴질 줄이야.

당연하게 누리던 것을 잃고 나서야 그것이 비로소 소중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되다니.

그걸 잃는 대신 인기와 돈을 얻었지만 그래도 인간은 욕심이 많은 동물 아닌가? 갖고 싶은 것을 다 갖고 싶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한숨을 푹 내쉰 창현이 거리를 하염없이 걷다가 이내 발걸음을 옮긴다. 괜히 바람을 쐬러 왔다가 마음이 더 심란해지는 것 같았다.

이럴 때는 그냥 집으로 가는 것이 최고였다.

“어서 와. 요즘 자주 들려서 좋네?”

창현이 방문하자 지선이 반가운 얼굴로 맞이해준다.

그 모습에 창현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렇게 좋아하시니 자주 와야겠네요.”

“자주 와도 돼. 지영이도 좋아할 걸?”

“하지만 너무 자주 오게 되면 희소가치가 떨어진다니까요? 그렇게 되면 어머니가 이렇게 반갑게 맞이하지 않으실 거예요.”

“그러려나?”

창현의 말에 그럴지도 모른다고 하면서 웃음을 짓는 지선이었다.

그렇게 안으로 들어선 창현이 무심코 시간을 확인하니 4시였다. 약속시간보다 이르기는 했지만 어차피 자신의 집이기도 하지 않은가? 대수롭지 않게 여긴 채 안으로 들어섰다.

“어?”

안으로 들어선 창현은 다소 놀란 표정을 지었다. 거실에는 석규가 신문을 보고 있던 것이다.

창현의 목소리를 들은 석규가 신문 보던 것을 멈춘 채 그를 발견하고는 다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일찍 왔군.”

“회사 가신 거 아니었어요?”

“오늘 쉬기로 했다. 어차피 내가 회사 사장인데 그 정도야 어렵지 않은 일이지.”

“아니, 업무가 많잖아요. 그런데 괜찮은 거예요?”

직원들이 많아 졌다고 해도 사장의 결재를 필요로 하는 일이 요즘 무척 많아졌기에 묻는 말이었다.

그 물음에 석규가 피식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거야 그렇지만…….”

분명 맞는 말이긴 하지만 석규가 워낙 업무에서 철저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일까?

지금 모습이 다소 어색한 느낌이 드는 창현이었다.

석규가 신문을 완전히 접어두며 창현에게 말했다.

“오랜만에 가족들끼리 외식이라도 하기 위해 불렀다. 왜, 내가 불렀다니 좀 더 거창한 걸 생각한 게냐?”

“음, 집으로 부르셔서 의아하긴 했는데 외식이었군요. 저야 좋죠. 혼자서 먹는 것보다는 가족들끼리 먹는 게 좋으니까요.”

“그래, 가족과 같이 먹는 게 좋은 법이지.”

그렇게 말을 하는 석규는 그리 밝은 표정이 아니었다. 며칠 전 김지환 감독과 이야기를 나누었던 내용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가 언급한 창현의 결정적인 약점. 그것은 창현의 발목을 붙잡을 수 있는 큰 요소들이었다.

당장에 극복하기 힘들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극복하기 힘든 일일 것임이 분명했다. 그랬기에 석규는 차근차근 창현의 약점들을 극복해나가기로 마음 먹었다. 그리고 자신이 너무 그를 무심하게 대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지금부터라도 가족과 함께 지내는 시간을 늘려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석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던 창현이 무언가 떠오른 듯 말한다.

“그런데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뭐냐?”

“드라마가 대박이 나면 CF 같은 것이 많이 들어온다고 하던데 아닌가요?”

“그건…….”

석규가 순간 대답을 망설였다. 무어라고 말을 해야 할지 망설여졌던 것이다. 그의 말은 맞는 말이었다. 드라마가 잘 되면서 CF 제의가 물밀 듯이 밀려오고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현재 제의가 들어온 것만 이십여 가지가 넘었고, 그 중에서 드라마로 이미지 변신을 한 창현이 소화해낼 수 있는 것들이 다섯 종류가 넘었다. 모두가 하나같이 최상의 조건이었기에 돈을 끌어 모으려고 한다면 싹싹 끌어 모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석규는 그 제안에 응할 수가 없었다. 김지환 감독의 말을 들어보니 창현은 언제고 한 번 폭발하게 될 시한폭탄을 지니고 있었다. 만약 그것이 잘못 터지게 되면 회사는 물론 창현마저도 심각한 이미지 타격을 입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과도하게 먹기보다는 차분하게 하나씩 소화를 해내며 창현이 지닌 약점들을 극복하게 만들 생각이었다.

근데 이걸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순간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여태까지는 그냥 있는 사실을 그대로 말하면 되었는데 지금은 상황이 약간 달랐으니 말이다.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석규가 고민하던 차에, 지선에게서 창현의 방문 소식을 들은 지영이 2층에서 내려오며 창현을 반겼다.

“오빠 왔어?”

반가운 표정을 지은 채 달려오는 지영을 보면서 창현이 말했다.

“그래, 너무 자주 와서 질릴 지경에 처하게 된 오빠가 왔다.”

“뭐시라? 누가 감히 오빠한테 질린다고 그래! 나한테 걸리면 다 죽었어! 오빠! 난 절대 질리지 않으니 자주 오도록 해.”

친구들에게 능력 있는 오빠를 선보임으로써 자신이 얼마나 콧대를 높일 수 있던가! 자신이 잘난 게 아니라 오빠가 잘난 것임에도 불구하고 콧대를 높일 수 있다는 것은 여동생으로서 특권 중 특권이었다.

특별히 친구들에게 자랑하기 위함이 아니다. 자신에게 이런 오빠가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좋았고, 한 사람의 팬으로서도 광팬이었으니 말이다.

집에 온다는 것은 유리의 마수에 빠져들지 않은 채 행동한다는 것이니 마음을 놓을 수도 있었다.

지영의 말에 기분이 좋아진 창현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 시간이 나면 자주 오도록 하마.”

“응! 그런데 오늘은 무슨 일로 오게 된 거야?”

“아버지가 외식하자고 부르셔서 온 거야. 집에 찾아오기는 했지만 같이 외식은 안했잖아? 이 기회에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

“외식이라면 완전 좋지! 이탈리아 요리 같은 거 맛있더라, 헤헤!”

무척 부유한 집안이었지만 집에서 할 수 있는 음식의 종류는 정해졌기에 외식을 한다는 말을 들은 지영의 눈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먹고 싶으면 말하지. 자주 사줄 텐데.”

“정말?”

반색을 하며 눈을 빛내는 지영의 모습에 창현이 고개를 끄덕이려던 찰나, 지선의 제지가 들어왔다.

“창현아, 그러면 안 돼. 지영이 버릇 나빠져.”

“엄마! 내가 버릇이 나쁘긴 뭐가 나빠!”

“자주 사주게 되면 그걸 당연하게 여기는 경향이 생기게 된단다. 그러니 지영이 너도 버릇없게 굴면 안 돼. 지금 창현이가 해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여겨.”

“쳇! 난 항상 감사하게 여긴다고.”

투덜투덜대면서도 지선에게는 기를 펴지 못하는 지영이었다.

그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창현이 나서면서 지영을 옹호해줬다.

“너무 그러지 마세요. 지영이는 착해서 그러지 않을 거예요.”

“맞아! 난 착해서 고마움을 잊어버리는 배은망덕한 모습을 보이지 않을 거라니까?”

그러면서 자신의 편을 들어주는 창현에게 찰싹 달라붙는 지영이었다.

그 모습에 지선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 말괄량이 때문에… 후우!”

“우씨! 내가 왜 말괄량이인데? 난 학교에서 조신한 여자로 통한단 말이야!”

그렇게 말을 하지만 그 말은 그리 신빙성이 가지 않았다. 석규와 지선은 물론 창현도 그 말은 믿지 못하는 기색을 보였으니 말이다.

그러한 시선을 가족들에게 느꼈는지 지영의 입이 삐죽하게 내밀어진다.

“칫! 나만 미워해.”

“미워하는 게 아니라 거짓말을 타박하는 거야.”

“나 정말 조신한데…….”

그렇게 말을 하기는 하지만 목소리에 힘이 실리지 않는다. 창현은 그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이런 분위기라면…….’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석규는 창현이 서서히 동화되어 가는 모습을 느낄 수 있었다.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일정한 선을 그어놓는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지금은 완벽하게 섞여들어간 듯한 모습이었다.

‘차근차근 해내는 게 좋겠지. 아직 창현이는 어리고 급할 것이 없으니까.’

한 가지 과제를 차곡차곡 해나가는 기분이었다.

이대로라면…….

‘하지만 저 녀석이 사랑이라니…….’

그의 앞에 가장 큰 과제로 떠오른 것은 다름 아닌 사랑.

석규는 창현이 방송에서 거짓말을 하지 않기에 사랑을 해보지 않았다는 말을 믿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저렇게 머리가 차가운 녀석이 사랑이라는 것을 해봤을 리가 없다.

머리가 차가운 사람은 뜨거운 가슴을 억누르는 성향이 강하니까.

가장 큰 과제를 해나가야 하는데 그것에서 콱 막혀버렸으니 한숨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잠깐.’

그러다가 순간 석규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생각.

순간 석규의 눈이 강하게 빛난다. 생각해보니 그가 데뷔하기 전 있던 일이 떠올랐던 것이다.

‘내가 집에 갔을 때 누군가를 데리고 집에 왔었지? 그렇다면…….’

석규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제60장 잠룡승천潛龍昇天




거센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소녀시대의 숙소에는 다시 한 번 강렬한 폭풍이 일어나려 하고 있었다.

주현은 소녀시대 내에서 막내다. 무려 아홉 명에 달하는 그룹의 막내라는 신세는 무척 고달픔을 동반한다. 시도 때도 없는 언니들의 심부름은 물론이고, 각종 당번에서도 알게 모르게 불이익을 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현은 꿋꿋하게 해냈다. 언니들이 양보를 해주는 것도 있지만 그녀가 무척 곧은 성격을 가지고 있어 언니들이 은연중 부려먹어야 할 막내가 아닌, 옳은 소리를 하는 막내로서 자리매김을 했던 것이다.

그런 주현에게 있어 가장 친한 멤버를 꼽으라고 한다면 당연히 윤아다.

주현 다음으로 막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윤아는 비슷한 시기에 연습생 생활을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무척 어린 나이에 입사하였기에 서로 돈독한 친분을 나누고 있었다.

그렇기에 윤아도, 주현도 서로를 알게 모르게 의지하고는 하였다.

그래서 드라마 ost 피처링 문제로 서로 패가 갈렸을 때, 윤아의 설득에 의해 주현이 태연의 편에 섰던 것이다.

그 정도로 돈독한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 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 주현은 무척 혼란함을 느껴야만 했다.

윤아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그녀에게 있어 충격적인 말이었던 것이다.

전날 밤 순규와 수영에 의해 마치 범죄자가 연행되듯이 끌려온 윤아는 드라마 촬영장에서 창현과 함께 ‘단 둘이서’ 야식을 먹으려고 했다는 죄로 처참한 응징을 받아야만 했다.

그 응징하는 자리에서 주현은 직접적으로 참가하지 않았지만 원망하는 마음을 가졌던 것은 사실이었다.

일종의 배신감이랄까?

그런데 그 배신감을 윤아도 느꼈나보다.

주현은 윤아의 말을 듣고 황당한 표정을 지은 채 반문하였다.

“어, 언니! 지금 그 말이 사실이에요?”

지금 주현은 윤아의 말을 듣고 이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혼란을 느껴야만 했다.

당황한 주현의 표정에 윤아의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윤아는 그 표정에도 흔들리지 않은 채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다.

“사실이야, 주현아.”

“이럴 수가.”

주현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녀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방금 전 윤아가 한 말, 그것은 바로 더 이상 무한태연교에 들지 않은 채 수연에게 충성을 바치겠다는 말이었다.

윤아가 태연의 공적을 언급하면서 그녀에게 큰 충성심을 불살랐는가? 스스로를 제일교도라고 하지만 하는 활동량으로 보면 대장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왕성한 충성심을 보이던 그녀였다.

하지만 그 충성심은 마지막 불꽃을 태우는 것 마냥 순식간에 타오르던 것이었나 보다. 지금 그녀가 충성을 바치는 존재가 태연에게서 수연으로 바뀌는 모습을 보였으니 말이다.

주현은 살짝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러자 그녀의 안색이 다시 차분하게 변했다. 우선은 이유를 알아야 했기에 이유를 물었다.

“어째서죠?”

“뭐가?”

“언니는 한평생 태연 언니를 찬양하겠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갑자기 마음이 변한 이유가 뭐에요?”

주현으로서는 당연히 그 내막이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윤아의 태도가 변한 이유. 도대체 무슨 내막이 숨어 있기에 수연에게 충성의 방향을 돌렸단 말인가?

그 물음에 윤아가 진지한 표정을 짓더니 말한다.

“나는 아직까지 개인적으로 태연 언니를 존경해. 그 작은 키와 동안의 외모로 우리들을 훌륭히 이끌고 있으니까.”

태연이 들으면 난리 칠 단어를 서슴없이 언급하는 윤아. 하지만 슬픈 것은 그것이 사실이라는 점이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그 점을 배제하고 윤아는 여전히 태연을 존경하고 있다는 것이다.

존경하고 있는데 충성심은 변한다? 설득력이 없는 말이었다.

“그럼 왜……?”

“존경이랑 충성은 다르니까. 태연 언니를 존경하지만 언니는 리더로서 나를 구해주지 못했어.”

자신이 맞을 짓을 했더라도! 무한태연교의 제일교도라면 보호해주어야 하지 않는가?

그 말을 들은 주현의 얼굴에 황당함이 서렸다.

‘그 상황에서 도와주었다면 태연 언니도 무사하지 못했을 걸요?’

위대한 리더였지만 그 권위는 스케줄이 있을 때, 분위기가 진지할 때나 먹힌다. 평소 태연의 서열은 소녀시대 내에서도 하위권에 머무는 가련한 처지에 놓여 있다.

그랬기에 윤아의 말이 조금 과하다고 느껴졌다.

어찌 되었든 윤아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내가 힘들고 고통을 겪을 때 나에게 손을 내밀어준 것이 바로 수연 언니야. 나를 이끌어준 것은 태연 언니지만 나를 인정해준 것은 바로 수연 언니라는 점이지. 나는 그것을 깨닫고 수연 언니가 나를 얼마나 생각해주는 지 알 수 있었고, 내가 충성을 바쳐야 할 것은 태연 언니가 아닌 수연 언니라는 점을 깨닫게 되었어. 무엇보다…….”

“무엇보다……?”

말끝을 흐리자 주현이 궁금한 표정을 지으며 따라 말한다.

그러자 윤아가 씨익 웃음을 지으며 대답한다.

“수연 언니는 나를 보호해줄 수 있거든.”

하위권에 속한 태연과 달리 수연은 소녀시대 내에서 가장 높은 서열에 위치해 있다. 본래 소녀시대는 삼강 삼중 삼약으로 분류되는데, 삼강은 수연, 효연, 수영이었고, 삼중은 순규, 미영, 유리, 삼약은 태연, 윤아, 주현으로 분류된다.

달리 분류하면 사강 오약으로 나뉘고는 하는데, 여기에서 삼중이던 순규가 사강으로 올라가고, 나머지 두 명이 오약으로 나뉘기도 한다.

변함없이 강자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세 명을 통틀어 Big 3이라 칭할 정도였으니 이 서열만큼은 확고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Big 3 중에서 일인자는 수연이었고, 그런 수연에게 효연이 충성을 맹세함으로써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소녀시대 내 권력구도는 단번에 기울게 되었다.

언제나 피지배층이던 윤아는 수연에게 총애를 받음으로 인하여 권력의 맛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을 걱정해주는 자상함까지.

그것들은 윤아의 마음을 기울게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태연에게서 수연으로 갈아탄 윤아의 결정적 요인은 바로 권력의 달콤함을 조금이나마 맛보았기에 그럴 것이다.

권력은 사람을 변하게 만드는 마약과도 같은 존재였으니까.

“그건 결국 태연 언니를 배신한다는 이야기잖아요…….”

아무리 이야기를 가져다 붙인다 하여도 결국 태연을 배신한다는 이야기였다.

정확하게 핵심을 찔러버린 주현의 말에 윤아의 얼굴이 빨갛게 변한다. 이렇게 설명을 곁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정확하게 논점을 파악해버리는 주현의 행동에 부끄럽고 화가 났던 것이다.

논리가 결여된 윤아는 결국 막무가내 식으로 주현에게 묻는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 너는?”

여태까지 윤아의 말에 곧잘 따라왔던 주현이었다. 하지만 지금 만큼은 쉽지가 않았다. 윤아에게 명분은 없었고, 오로지 자신의 영달(?)을 위해 소속을 옮기겠다 말하고 있으니 주현이 순순히 넘어갈 리가 없다.

그랬기에 주현은 윤아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그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저는 태연 언니를 배신할 수 없어요. 제가 떠나게 되면 태연 언니가 너무 외로워질 테니까요.”

태연이 리더로서 갖은 고생을 한다는 걸 깨닫게 되었을 때 주현은 감출 수 없을 정도로 큰 부끄러움을 느껴야 했다. 자신이 막내로서 멤버들 중 가장 고생을 하고 있다고 생각 했는데 태연은 자신과 비교도 안될 거대한 짐을 양 어깨에 짊어진 채 묵묵히 멤버들을 이끌고 있던 것이다.

그러면서 겉으로 드러내지 않은 채 스케줄을 해내는 그녀의 모습에 주현은 결심할 수 있었다.

앞으로 태연에게 잘 대해주고 절대로 그녀를 배신하지 않겠다고 말이다.

절대 흔들리지 않는 주현의 모습에 윤아가 재차 권유한다.

“주현아, 후회할 거야. 내 말에 따르도록 해.”

“미안해요, 언니.”

“…….”

흔들리는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더 이상 권유해봤자 의미 없는 행동이라 생각되었다.

한숨을 푹 내쉰 윤아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주현을 바라보며 말한다.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지 날 찾아. 수연 언니는 평소 모습과 달리 무척 너그러우니까. 분명이 주현이 네가 와도 받아줄 거야.”

그 말과 함께 윤아가 방을 나갔다.

쿵!

방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주현이 멍한 시선으로 닫힌 문을 바라본다. 그리고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후우! 윤아 언니까지 저렇게…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걸까.”

수연에게 가버린 윤아의 마음을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주현이었다. 긴 연습생 기간부터 시작하여 약 8개월간의 하위 서열 생활은 그녀로 하여금 상위 서열에 목을 매달게 만들게끔 만들었다.

그리고 수연은 그 점을 정확하게 꿰뚫어보고 윤아를 낚았고.

Big 3 중 수연과 효연, 그리고 윤아까지.

나머지 여섯 명이 전부 연합해야 호각 혹은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정예부대였다.

그녀들이 창현과의 만남을 본격적으로 통제하게 되면?

상상만 해도 끔찍한 결과가 나올 것임이 분명했다.

지금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배경이 나타나거나 여섯 명이 연합을 하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개성이 강한 나머지 멤버들이 하나로 뭉칠 리가 만무하였다.

주현의 얼굴에 암울함이 서렸다.

“이대로는…….”

수연의 강력한 장악력이 서서히 소녀시대를 뒤덮고 있었다.

강력한 폭군의 정권이 서서히 자리를 잡아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주현은 모르고 있다.

소녀시대 내에 강력한 폭군의 정권이 자리하고 있지만 수면 아래로 그에 못지않은 치열한 두뇌 다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그것이 어떤 변수를 일으킬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후후후!”

달력을 본 순규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흘렸다.

오늘 날짜는 5월 10일.

그리고 앞으로 5일이 지난 5월 15일은 다름 아닌 자신의 생일이다.

여자의 생일은 활용하기에 따라서 그 위력이 무궁무진하게 바뀌는 엄청난 특권의 날이라 할 수 있다. 깨달음을 얻어 각성하게 된 순규는 자신의 생일이 엄청난 무기로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을 충분히 자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무기를 잘 활용할 경우에 핵폭탄급 위력을 발휘하지만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면 핵폭탄은커녕 새총만도 못한 위력을 발휘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순규는 그동안 창현에게 있어 소위 말하는 ‘관광버스’ 이용객으로써 매번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는 역할을 해왔다. 즉, 갑작스레 창현에게 사근사근 친한 척 하기에 상당한 무리가 따른다는 이야기였다.

제 위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것은 제법 애석한 일이다.

그래도 순규는 쉽사리 물러나지 않는다. 이따금 뛰어난 지략을 선보이는 똑파니나 숨은 지략가 유리만큼의 기량을 보이지 못하더라도 그녀도 한가락 발휘할 수 있는 기량을 지니고 있다.

자신이 버럭 소리를 지르는 캐릭터라면 그것을 잘 활용하면 되는 것이다.

후발주자로 나선 만큼 자신에게 있는 것들을 모두 활용해야 승리를 쟁취할 수 있다.

“내가 가진 캐릭터가 마음에 들지 않지만 어쩔 수 없지. 뚝심으로 밀어붙이면서 서서히 마음을 돌이키게 만드는 수밖에.”

자업자득이지만 때에 따라서는 전화위복이 될 수 있으리라.

순규는 앞으로 세 달 안에 상황을 뒤집어버리거나 공동 선두 주자로 떠오르겠다고 야심차게 계획을 세우면서 곧장 실행으로 옮겼다.

그녀는 백년대계처럼 멀리 내다보지는 못하지만 그에 못지않은 단번에 밀어붙이는 굳건한 뚝심을 지니고 있다. 순규는 며칠간의 고찰 끝에 자신의 장점을 정확하게 분류하고, 단점들을 자각하였다. 그리고 단점들을 최소화 하고 장점들을 최대화함으로써 창현에게 어필하기로 마음먹었다.

나쁜 인식은 사라지게. 서서히 나에게 빠져들게.

그것이 바로 순규의 계획 모토였다.

작게 미소를 지은 순규가 곧장 핸드폰을 펼치고는 창현에게 연락을 하기 시작한다.

♩♪♬

기특하게도 창현의 컬러링은 <Kissing You>였다.

그것도 자신의 파트가 나오는. 순규는 기분이 한 층 더 업 되는 걸 느꼈다. 얼마나 컬러링이 흘렀을까. 통화가 연결되는 소리와 함께 창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순규의 본격적인 계획이 발동하기 시작했다.


오늘은 오후부터 드라마 촬영이 있기에 창현은 깊은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어제 길거리를 분주하게 돌아다녔던 탓인지 무려 열 시간 동안 잠이 들었던 창현이 오전 8시에 일어나고는 물을 마시다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나쁘지는 않았어.”

어제 가족들과 한 외식은 창현에게 있어 나쁘지 않은 느낌을 가져다주었다. 오순도순한 느낌이 무척 좋았다랄까? 자식 앞에서 근엄한 모습을 유지하려는 석규와 다정다감하면서 알게 모르게 챙겨주는 지선의 모습, 그리고 활발하게 재잘거리던 지영의 모습은 생각만 해도 웃음이 흘러나왔다.

뭐랄까, 가족의 진짜 모습이 이런 느낌이랄까?

그 속에 자신이 함께 해서 어색하지 않다는 것이 창현에게 있어 무척 의미 있게 느껴졌다.

어제 길거리를 걸을 때 생각했지만 불현 듯 자신은 외톨이가 아닐까 진지하게 생각한 적이 있으니까.

앞으로도 종종 이런 자리를 갖자고 하는 석규의 말에 눈에 띄는 반응을 하지 않았지만 제법 기분이 좋았었다.

앞으로도 자주 불러주길 바라는 느낌이랄가.

“좋았지. 나쁘지 않았어.”

자리에서 일어난 창현은 본격적으로 씻기 시작한다.

오늘은 석규가 창현과 할 이야기가 있다면서 열두 시까지 회사로 오라고 해놓은 상황이었다. 점심을 같이 먹고 준비를 한 뒤 촬영장으로 가야 했기에 시간이 그리 촉박한 것은 아니었다.

아침을 먹고 씻고 다 하니 어느덧 10시가 넘어서고 있었다.

아직까지 시간이 넉넉했기에 TV나 보자고 하면서 창현이 막 소파에 앉을 무렵이었다.

요란한 벨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

“누구지?”

석규일까 싶어 핸드폰을 들여다보니 전혀 의외의 인물이 전화를 한 상태였다.

[관광순규]

매번 자신에게 몸을 사리지 않고 즐거움을 안겨다 주는 유익한 존재가 전화를 건 것이다. 평소 게임에서 곧잘 만나고, 스케줄 시간을 맞춰 게임을 하기 위해 문자를 주고 받기는 하지만 자주 통화를 하지는 않았다.

자연히 창현의 고개가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이 누나가 왜 전화를 한 거지?”

그러면서 곧장 핸드폰을 펼쳐든 창현이 전화를 받아든다.

“여보세요?”

-험! 거기 창현이 핸드폰이 맞는감?

다 알고 있으면서 살짝 장난을 치는 순규였다. 그녀도 종종 자신에게 장난을 치고는 하였는데, 갑자기 전화를 건 것으로 보아 장난을 치려고 그랬나보다.

창현이 악동 같은 미소를 지으면서 그 장난을 받아친다.

“맞는데요? 그러는 당신은 매번 제게 관광시켜주는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순한 규처자가 맞는지요?”

아니나 다를까, 창현의 도발에 넘어간 순규가 버럭 소리를 지른다.

-뭐시라? 이 녀석이… 끄응!

화를 내려던 순규는 자신의 계획을 상기하고는 곧장 분노를 가라앉힌다. 그리고는 침착하게 호흡을 고르고는 창현에게 말한다.

-다름이 아니라 할 말이 있어서 전화를 했어.

“무슨 할 말인데요?”

-며칠 후면 내 생일이야. 5월 15일이 내 생일.

무슨 말을 하려고 전화를 했는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생각해보니 며칠 후면 순규의 생일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설마 그것을 직접 전화해서 말을 할 줄이야. 창현의 얼굴에는 황당함이 깃들었다가 이내 장난기가 서린다. 그리고는 태연한 어조로 순규에게 말한다.

“아하! 그렇군요.”

-네게 특별히 선물을 바칠 기회를 주겠노라.

“누나 생일이 저랑 무슨 상관?”

-…….

강렬한 일격에 바로 입을 다무는 순규. 그의 말마따나 무슨 상관이냐는 말에 무어라 할 말이 선뜻 떠오르지 않았다.

이 정도면 충분히 놀렸다고 생각되자 창현이 말한다.

“하하하! 농담이에요. 누나 생일은 당연히 기억하고 있죠.”

-그렇다면 다행이고. 그런 장난은 치지 마. 나 순간 눈물 날 뻔했단 말이야.

너무 장난이 과했단 말인가? 순규의 음성에 물기가 서린 걸 느끼게 되자 창현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곧장 그녀에게 사과의 인사를 건넸다.

“미, 미안해요. 설마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일 줄 몰랐어요.”

-내 실수도 있는데 뭐. 내가 아무리 뻔뻔해도 당당히 선물을 요구할 처지도 아니고…….

“그게 무슨 말이에요. 얼굴을 대면하지 않았더라도 첫 게임을 같이하고 하면서 만난 게 벌써 햇수로 삼 년인데요. 누나도 제 생일 챙겨줬으니 저도 챙겨주는 게 도리고요.”

-그렇게 생각해주면 고맙고.

“하하, 정말이라니까요. 장난 아니에요.

순규의 음성이 한결 풀린 듯하자 창현도 제 페이스를 되찾고는 말한다.

그러자 순규가 어느새 본래 목소리로 돌아와 창현에게 말한다.

-나도 선물 같은 건 바라지 않아. 대신 한 가지 부탁을 하고 싶거든.

“부탁이요, 뭔데요? 어려운 부탁은 곤란해요. 요즘 제가 시간이 많이 나질 않아서…….”

드라마 촬영이 끝나더라도 6월 말에서 7월쯤에 끝날 듯 싶었으니 그 기간 동안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 촬영 자체는 시간이 그리 많이 들지 않지만 그것을 위해 준비하는 시간이 무척 많이 드니까.

-시간은 많이 안 들어. 다만 짬짬이 시간을 내야 하기는 하는데…….

“뭔데요? 말해 봐요.”

우선 무엇인지 들어보고 결정을 내려야 할 듯 싶었다.

창현의 재촉이 순규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자신의 부탁을 털어놓기 시작한다.

그 이야기를 들은 창현이 놀란 표정을 짓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의 부탁이 무엇인지 알아들은 것이다.

그리고 한동안 이야기가 더 이어졌고, 통화는 약 십여 분 동안 이어지다가 이내 끝을 맺었다.


“허, 설마 순규 누나가 그런 생각을 할 줄이야.”

순규의 부탁을 들은 창현은 깜짝 놀라야만 했다.

그녀가 한 부탁은 창현이 전혀 예측하지 못한 종류의 부탁이었던 것이다. 워낙 갑작스럽고 놀라운 부탁이었기에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던 창현은 이내 그녀의 부탁을 수락하였다. 제법 까다로운 부탁이긴 했지만 자신에게도 도움이 될 것 같았기에 순순히 허락을 한 것이다.

창현이 의외로 쉽게 허락하자 순규가 무척 기뻐하며 감사의 인사를 표하였다. 그러자 창현은 제법 흐뭇한 미소를 지어보일 수 있었다.

“후후! 재미있는 경험이 되겠지.”

그렇게 생각을 하며 창현은 외출 복장을 차려입었다. 조금 있으면 자신을 데리러 벤이 올 테니 그 전까지 준비를 마쳐야 했다.

준비를 마친 창현이 곧장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갔다. 그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벤이 안으로 들어왔고, 곧장 차에 탑승하여 회사로 향했다.

‘그런데 왜 날 부른 거지?’

회사로 향하면서 생각에 잠긴 창현이었다.

석규가 자신에게 할 말이 있다면 어제 만났을 때도 충분히 할 기회가 있었다. 아니, 넘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굳이 오늘 이야기를 할 이유가 있단 말인가?

공적인 이야기와 사적인 이야기를 나누려는 것인가 생각이 들기도 하였기에 무척 머리가 복잡했다.

그렇게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 벤은 회사에 도착하였고, 창현은 차에서 내려 곧장 사장실이 있는 곳으로 올라갔다.


“슬슬 도착하겠군.”

로드 매니저에게서 창현의 도착을 전달 받은 석규가 비서에게 창현이 올라오면 곧장 들여보내라는 말과 함께 생강차 두 잔을 주문하였다. 창현의 성격이라면 자신이 부른 이유가 궁금하여 곧장 올라올 테니 시기상 딱 맞아떨어지리라.

“흐음, 누구려나.”

석규가 창현을 부른 이유는 간단했다.

바로 예전에 창현이 집에 데려왔던 여자의 정체를 묻기 위함이었다.

본인은 첫 사랑을 해본 적이 없다고 하고, 여자에게 관심이 없다고 했지만 그것은 창현만의 철저한 착각일 확률도 존재했다.

이성과의 사랑 자체를 모른다면 자신이 느끼고 있는 감정의 정체조차도 모를 수 있는 노릇 아닌가?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가설이었고, 석규는 창현에게 있어 가장 근접했던 여인이 바로 집으로 데려왔던 사람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물론 아직 확실한 일이 아니었기에 어떠한 결정도 내리지 않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의 발목을 붙잡는 결정적인 약점인 만큼 반드시 넘어서야 할 과제였기에 석규로서는 지난 일을 들춰내서라도 알아내고 싶었다.

이것이 앞으로 창현이 무난하게 일을 하기 위해서, 그리고 본인을 위해서였다.

앞으로 그도 이성을 만나고 사랑도 해보고 그래야 할 텐데 사랑 자체가 무엇인지도 모른다는 건 슬픈 현실이 아닌가?

“불행한 일이지. 재물이 풍족한 이상 좋은 인연을 만나야 진정한 행복을 이룰 수 있지.”

언젠가 한 번 겪어야 할 일이지만 일과 맞물리게 된 이상 정면으로 부딪칠 생각이었다.

창현의 입장에서 그것이 무척 쑥스러울 테지만 자신이 나서지 않으면 영원히 혼자서 음악이나 하다가 독거노인으로 살아갈 것 같았다.

절대 그런 일이 발생해서는 안 된다.

“폭풍능력 중년남의 아들이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지.”

제법 인터넷 웹서핑을 하기 때문일까.

네티즌이 자신에게 지어준 별명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석규였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아들인 창현도 폭풍능력 청년까지는 아니더라도 폭풍능력 완전간지 카사노바 소년쯤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능력 있는 자에게 그 정도는 당연한 거니까.

하지만 당사자가 너무 바보였기에 그 가능성을 썩혀두고 있었다. 결국 석규가 직접 나서게 만드는 불상사를 그가 자초한 셈이었다.

똑똑똑.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노크 소리가 들여왔고, 석규는 창현이 도착했다는 것을 깨닫고는 말했다.

“들어 와라.”

“부르셨어요?”

안으로 들어온 것은 창현이었다.

석규는 눈앞의 의자에 눈짓을 하자, 창현이 그곳에 앉았다. 그리고 딱 그 시기를 맞춰 생강차 두 잔이 완성되어 탁자에 놓여졌다. 나이스 타이밍이 아닐 수 없었다.

자신의 예상이 정확하게 맞아떨어지자 석규가 살짝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는 생강차를 한 모금 마시며 입을 열었다.

“내가 이곳에 널 왜 불렀는지 궁금할 게다.”

창현이 맞다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인다. 그러자 석규가 생강차를 한 모금 더 마시며 말한다.

“거두절미하고 말하마. 너 예전에 집안에 여자 들인 적 있지?”

“……! 그, 그건…….”

아주 대놓고 말을 하는 석규의 말에 창현이 당황한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그것은 석규가 알 바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다음 질문이었으니까.

창현의 반응에 신경 쓰지 않은 채 석규가 다음 질문을 하였다.

“인정하고 안하고는 중요하지 않아. 들여놓았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으니까. 다만… 그 여자의 정체가 누구냐?”

“…….”

대답하지 않은 채 입을 꾹 다무는 창현이었다. 절대 대답하지 않겠다는 굳센 기운이 그의 전신에 감돌고 있었다.

그 모습에 피식 웃음을 짓는 석규였다.

대답을 하지 않으려고 해도 이미 그의 머릿속에서는 몇가지 후보가 감돌고 있었다. 그는 가장 유력한 후보를 떠올리며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그 여자가 혹시 소녀시대에 소속된 아이가 아니더냐?”

폭풍능력 중년남의 위력은 단순히 늦둥이를 생산한 것으로 붙여지는 것이 아니었다.

석규의 통찰력은 매의 눈처럼 날카롭고 매서웠다.

그리고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통찰력은 창현을 부처님 손바닥 손오공처럼 가지고 노는 내공을 지니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숨겨진 폭풍능력 중년남의 힘이었다.

창현의 안색이 급변하기 시작하였다.

설마 2년 전의 일을 다시 언급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석규의 언급에 창현은 생각에 잠겼다. 그때가 라샤의 앨범인 <가면의 기사> 뮤직비디오 촬영을 끝냈을 당시였으니 시기상 벌써 일 년하고도 반이 지났다.

악성 댓글로 인해 괴로워하던 수연을 집으로 불러 식사를 대접했었지. 그리고 기분을 풀어주고자 야시장에 가면서 함께 놀았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그리고…….

‘첫 키스를 당했지.’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속으로 쓴웃음을 짓는 창현이었다. 수연은 그것을 아메리칸 식 감사 표시라고 했지만 자신에게 있어서는 잊을 수 없는 첫 키스였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 억울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미국에서 살다 온 수연이라 아무렇지도 않게 했지만 자신은 제법 소중한 첫 키스였는데 말이다. 여자의 순결도 중요하게 여기지만 남자의 순결도 소중한 법! 여자는 중요하고 남자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엄연한 남녀차별이었다.

‘기왕이면 수연 누나도 첫 키스였으면 좋았을 텐데.’

그럼 퉁치고 말 텐데. 괜히 손해 본 기분이라서 묘하게 꿍한 느낌이 다시 들었다. 당시 수연이 갑작스러운 자신의 행동에 당황하여 아메리카 식이라고 말을 한 것을 제법 마음에 두고 있었나 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피장파장인데.

어쩌겠는가. 창현은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인 것을.

괜히 속이 좁아진 사람이 된 것 같아 살짝 고개를 저어 생각을 털어낸 창현이 석규에게 시선을 옮긴다.

그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으니 어서 말하라는 식의 눈을 한 채 창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괜히 자신을 탐색하려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분명 가족이긴 하지만 자신도 개인의 사생활이 있고, 그것은 엄연히 존중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물론 개인적인 프라이버시보다는 부끄러운 마음이 더 커서 그런 것이지만 그렇다고 부끄러움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굳이 지난 일을 들춰서 피곤해질 이유가 없으니까.

창현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글쎄요…….”

“흐음.”

묘한 반응을 보이는 창현의 모습에 석규가 눈을 가늘게 뜨고 창현을 바라본다.

그 눈빛이 자신의 속을 꿰뚫어보고 있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굳이 그것을 내색하지 않았다. 괜한 반응은 석규에게 빈틈을 노출할 뿐이니까.

얼마나 시선 교환이 이루어졌을까.

창현을 바라보던 석규가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그 속에는 여러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후우! 정말 말을 안할 셈이냐?”

“이미 1년하고도 반이 지난 이야기입니다. 굳이 언급해야 할 이유를 모르겠는데요. 이유를 말씀해주실 수 있습니까?”

“이유라… 이유를 말하면 알려줄 것이더냐?”

석규의 말에 창현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한다.

“이유가 타당하다면요.”

“크흠!”

가능성을 열어두기는 했지만 말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을 받은 석규였다.

그리고 이유를 창현에게 말을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고.

창현에게 자칫 언급을 했다가 더욱 심각한 상황이 처하게 될 수 있다는 걸 모를 석규 아니었다. 그렇다고 단기속성으로 어떻게 해볼 문제도 아니어서 참으로 답답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대충 짐작은 가는데 창현이 말을 해주지 않는다.

석규로서는 참으로 난감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러한 자신의 감정을 노출한다는 것은 바보나 하는 짓.

자신의 감정을 숨긴 채 석규는 여전히 여유를 가지고 창현에게 말한다.

“그렇게 말을 한다 하더라도… 대충 짐작을 하고 있어서 말이다.”

여유로운 모습을 하고 있는 석규의 표정은 정말 알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창현은 그러한 석규의 말에 그가 정말 알고 있으면서 물어보는 것이라 느꼈다.

자신에게 묻는 것은 확신을 얻으려는 속셈이겠지.

괜히 자신이 휘둘리는 것 같아 기분이 나빠지려 했지만 애써 감정을 억누른 채 슬그머니 말을 돌리기 위한 포석을 깐다.

우선은 한 가지 사실을 각인시켜야겠지.

“그때 데려온 사람은 저랑 특별한 관계가 아니에요. 다만 알고 지내던 사이인데 힘든 일이 있다고 해서 초대를 한 거지만요.”

그렇게 아무 사이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살짝 화제의 중심에서 벗어날 생각이었다.

그러나 석규는 여유로운 표정을 한 채 창현에게 말한다.

“넌 아무 사이도 아닌데 집으로 데려오고 그러나? 그것도 아무도 없는 집에 말이야.”

“…끄응.”

허점을 정확하게 짚어내는 석규의 말에 창현이 절로 앓는 소리를 낸다. 정말 제대로 대화를 나누게 되면 피곤한 인물이 바로 석규였다. 무엇 하나 놓치지 않고 정확하게 논점을 파고드니 화제를 돌리려고 해도 돌릴 수가 없었다.

창현이 나이 대에 비해 말을 잘한다고 하나 결국 석규에게 있어서 어린아이의 장난일 뿐이었다.

제법 만만치 않은 어린아이였지만.

석규는 창현에게 짓궂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한다.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으니까 그냥 말하는 게 좋을 게야.”

스스로 생각해도 조금 얄미운 모습일 테지만 어쩔 수 있는가. 진실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조금 얄미운 모습을 보일 수밖에.

아니나 다를까, 그런 석규의 행동에 창현이 눈썹을 꿈틀한다. 그러다가 이내 표정을 찡그리더니 입을 굳게 다문다. 절대 대답하지 않겠다는 기세가 실려 있었다.

‘장난이 과했군.’

그 모습에 석규는 자신이 조금 놀려먹는 재미에 취해버려서 과했다고 생각했다. 이 정도 되면 자세히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처음부터 자세한 것을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는데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 셈이었다.

결국에는 자업자득인 셈이었다.

살짝 후회를 하면서 석규는 마지막 숨겨놓은 패를 꺼내놓는다. 짐작은 하고 있지만 확신은 없는 상황. 그렇다면 자신이 생각한 사람이 맞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헛기침을 한 석규가 창현에게 말한다.

그가 한 것은 일명 넘겨짚기였다.

“험험! 아무래도 그 아이가 아이돌이니 프라이버시는 지켜주어야겠지. 네 마음 이해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니까. 네가 원하지 않으면 더 이상 묻지 않으마.”

여기에 살짝 확신 어린 어조를 실어주는 것은 옵션이었다.

부전자전 아니랄까봐 석규도 연기에 상당한 재능을 보이고 있었다.

“…….”

그리고 석규의 의도는 정확하게 먹혀들었다.

확신 어린 그의 어조는 한순간 창현의 마음을 철렁이게 만들기 부족함이 없었던 것이다.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듯한 석규의 어조에서 순간 창현은 모든 걸 다 알고 묻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한 불안한 마음은 곧장 눈에 나타났다.

짧지만 한순간 눈이 흔들렸던 것이다.

그 모습은 창현의 눈을 예의주시하고 있던 석규의 눈에 정확하게 들어왔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 불리는 곳인 만큼 감정의 변화가 가장 먼저 일어나는 곳이었다.

확신 어린 어조로 연기를 한 끝에 창현에게서 블특정 다수였던 것을 아홉 명으로 축소하는데 성공했다.

석규가 속으로 소리를 질렀다.

‘맞았군.’

짧지만 창현의 반응을 확실하게 체크하는데 성공한 석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부터 아홉 명 중 누군가를 짐작에 두고 있던 만큼 창현의 반응을 알아낸 이상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창현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파악한 석규가 서둘러 말을 돌렸다.

“알았다. 네 기분이 좋지 않은 듯하니 더 이상 파고들지 않으마.”

이미 충분히 파고들었거든요? 라고 말을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괜히 말을 했다가 석규가 더욱 격하게 반응할 것 같아 창현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반응을 보였다.

그렇게 화제를 돌린 석규는 창현에게 의문이 가질 법한 행보에 대해 언급을 했다.

“아마 의문을 가질 것이라 생각한다. 요즘 스케줄이 늘어나지 않은 것에 대해서 말이다.”

드라마가 대박이 났다.

그리고 그중에서 가장 큰 인기를 얻게 된 것은 바로 창현이었다.

그렇다면 각종 CF 제의부터 여러 드라마 캐스팅까지 물밀 듯이 몰려올 것은 당연한 일.

창현은 그 부분에 대해 의문을 느끼고 있었기에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모습을 보인다.

“솔직히 의문을 느끼고 있어요.”

“음! 그 부분에 대해서는 말이다. 약간의 보정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게 무슨 말씀이죠?”

“내가 보기에는 네가 드라마에 전력을 쏟아 부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너는 아직 연기에 있어 경험이 풍부하지 않고, 지금 모든 전력을 드라마에 쏟아 부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 물론 다른 것들도 할 수 있지만 하나를 받아들이면 다른 것들도 계속해서 받아들여야 했기에 자연히 네가 연기에 집중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춰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네게 언급을 하지 않았던 거고.”

연예 기획사 관련자가 들었다면 말도 안되는 말이라고 외칠 억지가 아닐 수 없다.

연기자나 가수에게 있어 CF는 많은 돈을 벌어들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특히 드라마가 잘 돼서 CF 제의가 많이 들어오게 되면 말 그대로 한방 터뜨려 돈을 끌어 모을 수 있는 기회이기에 이미지 훼손이 되지 않는 것이라면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하는 것이 맞다. 그런데 석규는 연기에 집중해야 한다고 CF 제의를 거절했단다. 연예 기획사 관련자가 들으면 궤변도 이런 궤변이 다시없을 것이다.

하지만 석규가 이렇게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이미 현이라는 하나의 브랜드가 절대적인 가치를 형성한 상태였고, 드라마가 끝나더라도 그 가치는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무사히 드라마를 끝냈을 때의 이야기였다.

창현은 석규의 말에 납득이 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자신이 연기에 집중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준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그렇군요.”

“그러니 일단 연기에 전력을 다하도록 하여라. 아직 네 앞날은 창창하니까. 당장 CF 같은 것들을 많이 찍어서 돈을 버는 것도 좋지만 그걸 함으로써 연기력에 문제가 생긴다면 결과적으로 네게 손해가 될 것이다. 처음 연기를 하는 거지만 결과가 좋으니 앞으로도 유지를 하려면 더욱 노력을 해야 할 테고. 이번 연기는 네가 또 다른 분야로 진출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였고, 그쪽 분야에 대한 이미지를 굳히고 있는 과정이니까 연기에 전력을 다하도록 하여라. 너는 단기간을 보고 달리는 것이 아닌, 앞으로 10년이고 20년이고 내다보며 천천히 달려야 하니까.”

인기는 ‘한때’ 라는 속성으로 모든 것을 단기간에 뽑아먹는 것이 아닌, 천천히, 흠집 나지 않은 완벽한 이미지로 롱런을 하자는 이야기였다. 여기에서 그 방법은 방송 출연을 자제함으로써 신비주의를 형성하는 것도 있지만 창현은 그런 것보다 각 방면에 가능성을 보임으로써 깨끗하고 완벽한 이미지를 만들어나가자는 형식인 듯하였다.

괜히 비싼 척하다가 나중에 한 번 미끄러지기 시작하면 누구도 그 손을 잡아주지 않을 테니까.

자신을 낮추는 것이 아닌, 가치를 형성해나가기 위해 열심히 한다는 점에 있어서 창현의 마음에 쏙 드는 부분이 아닐 수 없었다.

창현이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었기에 석규의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알았어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최선을 다하도록 할게요.”

“그래, 필요한 부분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말을 하도록 하여라.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에서는 최선을 다하도록 할 테니.”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웃음을 짓는 석규였다. 창현이 먼저 언급을 하기 전에 선수를 친 것인데 말이 잘 먹힌 듯하여 석규의 마음이 한결 놓였다.

하지만 완벽하게 알아들은 것은 아닌 듯, 창현이 아직까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아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 모습에 석규는 살짝 긴장한 안색을 보였지만, 설마 자신에게 나쁜 쪽으로 이야기 했을까 싶어 창현은 굳이 자신의 의문을 털어놓지 않았다. 석규도 분명 자신이 느낄 여러 의문점에 대해 알고 있었을 텐데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은 자신이 알지 않는 것이 더 이롭다고 생각하는 것이었을 테니까.

이럴 때는 제법 눈치가 있는 창현이었다.

그렇게 판단을 내린 창현이 석규를 바라보며 물었다.

“하실 말씀 다 끝난 거죠, 그럼?”

“그래, 다 끝났다. 잠깐 나가서 기다리고 있어라. 그러면 준비를 마치고 나갈 테니.”

창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았어요.”

그러고는 고개를 살짝 숙인 뒤 사장실을 벗어났다.

혼자 남게 된 석규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서류를 처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무언가 생각이 난 듯 미소를 지었다.

“후후, 설마 이대로 끝났다고 생각하면 안 될게다, 창현아. 네가 아는 것보다 내가 좀 집요하니 말이다.”

집에 왔던 여성의 정체를 알아내는데 실패했지만 최종후보는 누구인지 올라와 있는 상태.

그냥 넘어가는 듯 싶었지만 결코 쉽게 넘어갈 석규가 아니었다.

“일단은 지켜봐야겠지. 그 아이가 창현이에게 도움이 될 만한 아이인지 알아내는 것이 중요할 테니까.”

창현의 결정적인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할 여자였다. 그랬기에 함부로 덜컥 선택하는 것이 아닌, 자신이 철저하게 조사를 하고 지켜본 뒤에 결정을 내릴 생각이었다.

서로 좋아하는 사이라면 뒤에서 지원해줄 생각이고.


소녀시대 내 권력 구도가 급속도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Big 3 중 가장 긴 연습생 기간을 한 수연이 멤버들의 쿠데타로 인해 무너지는가 싶더니 어느 날 갑자기 수면 위로 부상하며 소녀시대의 절대 권력을 움켜쥐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녀는 같은 Big 3 중 하나인 효연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내면서 철혈의 권력을 움켜쥐기 시작하였고, 얼마 전에 윤아에게 충성 서약을 받아내면서 바야흐로 소녀시대 내 절대권력의 기반을 다지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같은 Big 3 중 한 사람인 수영은 수연과 효연에 비해 한 수 처지는 실력이었고, Big 3에 비견되는 순규는 그런 권력 구도에 신경 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남은 것은 태연과 미영, 유리, 주현뿐이었는데, 그녀들은 삼중 삼약의 주축을 차지하고 있는 멤버들로써, 수연에게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 인물들이었다.

윤아가 무한태연교에서 수연에게 전향을 하게 되자 주현은 곧장 이 사실을 태연에게 알렸다. 고자질이라기보다는 태연이 상황을 냉정하게 깨닫고 무언가 리더로서 조치를 취하길 바랐던 것이다.

하지만 태연의 반응은 주현의 것과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녀는 주현의 말을 듣고는 조용히 고개를 저어보였다.

“아무리 그래도 그럴 수는 없어.”

“어째서요……?”

태연의 거절에 주현이 안색을 달리하며 물었다.

어찌하여 그럴 수 없단 말인가? 이대로 가다가는 수연의 독재정권에 모두가 강력한 통제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 닥치게 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은연중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짐작하고 있는 주현으로서는 태연이 무언가 움직임을 보이길 간절히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주현의 반문에 태연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답한다.

“수연이는 원래 우리들 중에서 발언권이 가장 강한 편이었잖아? 주현이 너의 염려가 무엇인지 알겠는데 그렇다고 해서 바뀌는 건 없다고 생각해. 어차피 우리들 중에서 수연이가 가장 강하다는 것은 변함이 없는 사실이니까.”

“그래도…….”

“그리고 나는 수연이가 그렇게 해서 우리를 이끌어줬으면 하는 마음이 있으니까.”

그렇게 말을 하며 쓴웃음을 짓는 태연이었다.

“…….”

그런 태연의 모습에 주현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웃음을 짓는 태연의 모습에서 알 수 없는 안쓰러움이 느껴졌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태연이 언젠가 스치듯이 했던 말이 있었다.

소녀시대 리더의 자리가 자신이 아닌 수연이 했으면 좋겠다는 말.

멤버들 중 가장 생일이 빠르고, 다른 멤버들을 으쌰으쌰하는 면이 있어서 리더로 선출되었지만 태연의 부담은 엄청난 것이었다.

차라리 자신이 한 살이라도 더 많았으면 모를까, 빠른 90년생인 수영까지 하면 동갑이 무려 일곱 명이다. 그런 동갑들을 이끈다는 것 자체가 무척 고역이었다. 리더로서 역할을 보일 때는 다소 고압적인 면이 있어야 할 테니까. 그렇지만 평소에는 같은 멤버이자 친구로 해야 할 텐데, 이 두 가지 역할을 해낸다는 것이 여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게다가 태연을 결정적으로 힘들게 만드는 것은 바로 연습생 기간이었다.

소녀시대 내에서 SM엔터테인먼트에 입사한 것이 뒤에서 세 번째인 태연이다. 연습생 서열이 단순히 나이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닌, 회사에 입사한 순으로 결정되니 소녀시대 내에서 태연은 아무리 서열이 높아도 뒤에서 세 번째라는 이야기였다.

그런 그녀가 연습생 생활 7년이 넘어가는 수연을 대할 때는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동갑이라 말을 놓을 수 있지만 뭐랄까, 연습생 기간이 상당히 차이가 나는데 이래라 저래라 하기가 무척 까다롭다랄까? 그런 상황에서 리더로서 부득이하게 명령조로 이야기 할 상황이 닥치고는 하는데 그것이 여간 거북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차라리 수연이 리더였으면 좋겠다고 말을 했던 적이 있다.

불현 듯 그때 기억이 떠오른 주현이 태연을 바라본다.

여러모로 복잡함이 담긴 눈이었다.

“언니…….”

주현의 시선을 느낀 태연이 입가에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리고 손을 뻗어 자신보다 10cm가 큰 주현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는다. 무척 부드러운 손길이라 생각하는 주현이었다.

“그렇게 걱정하는 눈빛 보내지 않아도 돼. 애들도 은연중 이해해주고 말없이 따라주는 눈빛이니까. 다만 내가 리더로서 행동할 때는 말 그대로 우리가 소녀시대로서 공식적인 스케줄을 할 때고, 평소까지 리더일 필요는 없잖아. 안 그래?”

“네에…….”

리더로서 무언가 강력한 일침을 가해주길 원하던 주현은 자신이 너무 과한 욕심을 부렸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무척 힘들어 보이는데 자신이 부탁을 한다는 건 이기적이었다.

결국 자신의 개인적인 욕심에 지나지 않는 셈이었다.

주현의 모습에서 힘이 느껴지지 않았는지 태연이 살짝 묻는다.

“그런데 그렇게 심각한 수준이야?”

“네. 아무래도 심각한 편이에요. 수연 언니에게 효연 언니랑 윤아 언니가 함께 하고 있으니까요.”

“확실히… 수연이 혼자일 때 레이드 하는 것도 만만치가 않았는데 두 사람까지 있다면… 게다가 윤아는 나이 때문에 약체로 분류된 거지, 수연이가 배경이 된다면 능히 강자반열에 들어갈 텐데…….”

“그렇죠.”

태연도 제법 그 부분이 걱정되었나보다. 주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직이 대답한다.

그때, 방문이 덜컹! 하고 열린다. 태연과 주현이 놀라 시선을 돌리는데, 그곳에는 순규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방안에 들어온 상태였다. 그리고는 컴퓨터 앞에 앉아 자연스럽게 전원을 킨다.

그러다가 태연과 주현의 시선을 느꼈는지 의아한 표정을 한 채 묻는다.

“갑자기 왜 그런 시선으로 바라보는 거야? 기분 묘하게끔.”

“이, 이상했나? 하핫!”

태연은 머쓱하다는 듯 웃음을 흘렸고, 주현은 살짝 고개를 갸웃하면서 순규에게 물었다.

“언니 무언가 좋은 일이 있으셨나 봐요. 콧노래를 부를 정도라면.”

“콧노래 내가 그랬었나?”

“네.”

“그랬군. 후훗! 뭐 좋은 일이라면 좋은 일이겠지. 하지만 딱히 좋은 일이라고 하기도 뭐해. 그냥 일상적인 일이니까.”

창현에게 했던 부탁을 떠올리며 묘한 미소를 짓는 순규였다.

그녀가 창현과 통화를 하면서 거둔 성과는 딱 네 글자로 정리가 된다.

일타이피, 일거양득.

자신의 부탁을 창현이 흔쾌히 들어줬을 뿐만 아니라, 생일에 선물까지 준단다. 순규로서는 정말 고마우면서 한편으로는 눈부신 성과여서 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걸 모르는 태연과 주현으로서는 의아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다가 태연이 무언가 떠오른 듯 주현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그러고 보니 며칠 후면 순규 생일이잖아. 생일이 다가오니 기분이 좋은 거 같네.”

“순규 언니는 생일이 되어도 담담할 것 같은데 역시 생일이 되면 기분이 좋아지는 건 다 같나 봐요.”

두 사람이 그렇게 순규에 대해 쑥덕거렸다.

조용히 컴퓨터를 하던 순규가 시선을 옮기며 두 소녀에게 말했다.

“너희들.”

“……?”

“순규라고 하는 거 다 들리거든? 써니라고 해.”

정말 끈질기게도 써니라고 부르라 하는 순규였다.

이쯤에서 그녀도 느낄 법하지 않은가?

순규라는 구수한 이름을 놔두고 써니라 하는 것은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과 같다고.

슬슬 포기할 시기가 다가오고 있는 듯하였다.

순규의 생일이 다가오는 어느 평범한 날이었다.


소녀는 지금과 같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혼란함을 감출 수가 없는지 당황이 역력한 얼굴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기에 바빴다.

그녀는 지금 상황이 적응이 되지 않고 있었다.

그날도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행사 스케줄을 끝내고 더 이상 스케줄이 없었고, 다음 날 오전에도 스케줄이 없었기에 편안하게 휴식을 취하며 유익하게 시간을 보낼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의 달콤함에 불과하였다.

회사에서 갑작스러운 스케줄이 잡혔다고 하면서 적어도 오전에 준비를 끝마쳐야 한다는 말을 했던 것이다.

워낙 갑작스러운 스케줄이었기에 소녀는 당황의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별 수 있겠는가? 회사에서 스케줄을 잡았다니 스케줄을 하는 수밖에 말이다.

그렇게 아침에 일어나 갑자기 잡힌 스케줄에 반항이라도 하듯 살짝 늑장을 부렸지만 스케줄이 본격적으로 잡혀있는 것은 오후였기에 그것은 반항 축에도 들지 못하는 것이었다.

일어나서 꾸물꾸물 준비를 마치고 회사에서 데리러 온 차를 타고 곧장 스케줄 장소로 이동을 하였다.

무슨 스케줄인가 싶어 물어보니 대답은 황당함 그 자체였다.

누군가를 만나는 미팅이란다. 그 말에 화들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제대로 된 언급도 없고 다짜고짜 미팅이라 하니 예전에 사라졌다던 ‘접대’ 라던 것이 불현 듯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던 것이다. 국내 최대 기획사인 SM엔터테인먼트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란 말인가? 그것도 해가 창창한 낮에? 절대로 할 수 없다고 그녀답지 않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자, 매니저가 애원하듯 말리면서 자세한 스케줄을 보여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는 설득에 간신히 진정할 수 있었다.

스케줄 장소에 도착한 소녀는 황당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자신이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AA엔터테인먼트였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이곳의 사장인 강석규와 미팅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사장실로 올라가니, 기다렸다는 말과 함께 자리로 안내해준다. 때마침 사장님이 잠시 자리를 비웠다는 말에 유자차 한 잔을 받고는 조심스럽게 차를 마시며 사장님을 기다린다.

도대체 자신을 무슨 이유로 부른 것일까.

특별히 자신을 부를 이유가 없었기에 소녀는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걸 느껴야 했다.

그 생각도 잠시. 사장실 안으로 들어서는 석규를 보고는 더 이상 고민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석규에게 인사를 하였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하하! 이거 갑자기 불러서 미안하네. 일단 앉도록 하게.”

“네.”

대답을 한 소녀가 자리에 앉자, 석규도 자리에 앉는다. 그리고 갑자기 이 자리에 부르게 된 것에 대해 정중히 사과를 하였다.

“허허, 갑자기 부르게 되어서 미안하네, 주현 양.”

석규의 언급에 맞은편에 앉아있는 소녀의 정체가 밝혀졌다.

바로 소녀시대의 막내인 주현이었다.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주현을 보면서 석규가 넌지시 물었다.

“많이 놀랐나?”

“네? 그게… 좀 갑작스러워서…….”

“그럴 수도 있지. 음! 그 점에 대해서는 미안하게 생각하네. 할 말이 있어서 SM엔터테인먼트에 특별히 부탁을 했거든.”

그가 주현에게 할 말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석규가 이틀 전 창현과 이야기 했던 것의 연장선상이라 보면 무방하다.

석규는 창현이 집으로 데려온 여자가 바로 소녀시대의 멤버이자, 그의 학교 선배인 주현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소녀시대의 멤버이자 학교 선배이고, 그 당시 가장 창현과 교류가 많은 사람 중 한 사람이었다. 처음부터 주현일 것이라 석규는 확신을 하고 있었다.

그는 주현을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 이제부터 서서히 이야기를 해보면 알겠지만 자신의 판단은 정확할 것이라 생각했다.

‘내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과신은 아니지만 자신의 판단력에 있어서는 자신감이 있는 석규였다. 모든 정황을 살피고, 가장 높은 확률의 수를 구해내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많은 경험과 실전에서 자연스레 터득되는 통찰력이라 할 수 있는데, 석규는 오랜 기간 동안 연예계에 몸을 담은 채 수많은 사람을 상대하였기에 사람을 살피는 통찰력이 무척 뛰어나다.

석규는 창현의 집에 방문한 여성을 떠올렸을 때, 누가 방문을 했을까 수많은 생각을 해야만 했다. 창현과 직간접적으로 친한 여자들을 떠올려 보았지만, 그는 여자들과 그리 교분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후보를 좁히는 것이 더욱 쉬웠다.

데뷔 전에 창현과 친하게 지낸 여자들은 거의 없으니까.

그 중에서 후보들로 꼽힌 것이 바로 소녀시대 멤버들이었고, 1순위가 창현의 학교 선배였던 주현이었다.

그리고 2순위가 바로 윤아였다. 라샤의 뮤직비디오에서 창현이 윤아를 추천했었으니, 무언가 연결 고리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키스신으로 묘한 분위기를 연출하기도 했었으니까.

창현에게는 확신 어린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실은 절반의 가능성이었다. 1순위 주현, 2순위 윤아로 해서 둘 중 한 사람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으니까.

1순위 주현이 아니라면 2순위인 윤아를 불러서 이야기를 해볼 생각이었다.

창현의 반응을 떠본 결과 소녀시대 멤버 중 한 사람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으니.

주현을 부른 내막에 대해 간략하게 떠올렸던 석규는 생각을 정리하고는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우선 내가 주현 양을 왜 불렀는지 궁금할 거라 생각하는데 맞나?”

“네, 갑자기 저를 부르셔서 솔직히 많이 당혹스러워요.”

자신의 의견을 망설임 없이 말하는 주현이었다. 그 속에 떨림은 존재했지만 분명한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고 있었다.

“하하, 충분히 그럴 수 있지. 그 점에 대해서는 미안하게 생각하네. 갑작스럽게 만날 일이 생겼고, SM엔터테인먼트에 부탁을 하니 마침 오늘 시간이 된다고 했거든. 충분한 사실을 알리지 않은 것에는 정중한 사과를 하는 바네.”

그러면서 살짝 고개를 숙이는 석규.

회사의 사장인 그가 고개를 숙였다는 것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대단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게다가 석규는 현의 아버지가 아닌가! 미래의 시아버지(?)가 자신에게 고개를 숙인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상황이다.

그 모습을 본 주현이 잔뜩 당황하여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아, 아니에요. 당황하기는 했지만 딱히 잘못된 일은 없고…….”

무어라 더 말을 하고 싶었지만 말재주가 부족한 편이어서 그런지 상황을 부드럽게 타파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의도는 전해졌음인가.

석규는 안절부절 못하는 주현의 모습에 웃음을 짓는다.

“하하하! 용서해준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는 건가?”

“네. 물론이에요.”

깔끔하게 정리를 해주는 말에 주현이 진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안도하는 그녀의 모습에 미소를 머금은 석규는 그녀 앞에 빈 잔이 놓인 것을 보고는 말한다.

“음, 이야기를 나누는데 차가 없으면 안 되지.”

그러면서 생강차와 유자차 한 잔을 주문하는 석규였다. 주현은 석규를 기다리는 동안 유자차 한 잔을 다 마셨는데, 왠지 그것이 먹성 좋은 것을 인정해버린 것 같아 얼굴이 화끈해지는 것을 느꼈다.

잠시 후, 생강차와 유자차가 놓였고, 석규가 생강차 한 모금을 마시면서 본격적인 이야기를 꺼내려고 한다.

“이제 이야기를 시작하도록 하지. 내가 주현 양을 이곳으로 부른 이유는 주현 양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어서 그렇다네.”

“제게요?”

자신에게 무엇을 묻고 싶은 게 있을까?

양손으로 찻잔을 쥐고 유자차를 한 모금 마시던 주현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는다.

무척 귀여운 그 모습에 석규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묻고 싶은 게 있어서 불렀지.”

“제게 무엇을…….”

도저히 무엇을 물을지 짐작이 가지 않아 고개를 갸웃하는 주현이다.

그 모습을 보며 석규는 본론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살짝 밑바탕을 깔아놓는 것이 더 좋다고 판단하면서 주현에게 말했다.

“음, 일단 주현 양이 중학교를 다니고 있을 때 창현이와 같은 학교를 다녔었지. 선배이기도 했고, 내 말 맞나?”

“네, 맞아요. 같은 학교에 다녔습니다.”

살짝 고개를 끄덕이면서 창현이와 함께 했던 중학교 생활이 떠오르던 주현이었다.

노래가 잘 풀리지 않아 점심시간에 정자에서 홀로 연습을 하다가 처음 만나게 되었지. 중학교 2학년생답지 않은 정중하고 애늙은이 같은 말투 때문에 동급생이라고 착각을 하다가 자신이 더 어리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당황하던 그 표정은 아직도 잊을 수 없는 명장면 중 하나였다.

그리고 함께 수학여행을 갔던 것이 떠오르기도 하고, 장기자랑에서 듀엣 곡과, 팀을 이루어 지금도 전설로 회자 되고 있는 ‘우주 최강 케로로’ 팀 결성은 아직도 그녀의 뇌리 깊은 곳에 동영상처럼 생생하게 저장되어 있었다.

특히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창현의 라이브였다.

더 클래식의 <마법의 성>을 멋지게 불렀던 그 음율은 아직도 생생하게 들려오는 것처럼 감미로웠다.

중학교 생활을 떠올리던 주현의 입가에는 살짝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 모습에 석규도 마주 웃음을 지어보이면서 말을 해나간다.

“그렇게 보여도 그 녀석이 제법 천방지축이었지. 주현 양이 그 녀석을 잘 이끌어주어서 무사히 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고 말이야.”

석규의 말에 주현이 가당치도 않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한다.

“그런 말씀은… 솔직히 창현이한테 제가 도움을 받은 게 훨씬 많은 걸요.”

“허허, 그런가? 내가 보기에는 창현이 녀석이 도움을 받은 게 더 많은 것처럼 느껴져서 말이야. 사교성이라고는 제로인 녀석이 어느 날 갑자기 예쁘고 똑똑한 선배를 얻게 되지 않았나? 알게 모르게 외로움을 타는 녀석인데 주현 양이 많은 힘이 되어줬어.”

그 말을 들은 주현의 얼굴이 홍조로 살짝 붉어졌다. 시아버지(?)에게 예쁘고 똑똑하다는 칭찬을 들은 것이다. 창현에게 들었더라면 더 기뻤을 테지만 그에게서 이런 말이 나올 확률은 제로. 즉, 창현에게 가장 가까운 석규에게 이 말을 들었다는 것은 자신에게 있어서 큰 쾌거를 이룩했다 볼 수 있다.

“치, 칭찬 감사합니다. 제가 도움이 되었다니 기쁘네요.”

“빈 말이 아니지. 내 말은 정말 사실이니까. 음! 어쨌든 내가 물어보고 싶은 건.”

잠시 말을 끊고 조용히 주현을 바라보는 석규였다.

그 눈길에 주현은 석규가 자신에게 할 말의 본론이 나오려는 것을 느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그것을 자각하니 몸이 절로 긴장하면서 빳빳하게 굳으며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창현이가 학교를 다닐 때 주현 양과 사적인 만남을 종종 가졌는지 궁금해서 말이네.”

“…….”

전혀 예측하지 못한 아니, 무엇을 물어볼지 예상 자체를 못했지만 예상을 뛰어넘는 질문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물음에 주현의 얼굴이 딱딱하게 경직되기 시작했다.

지금 석규의 물음은 여러 방면으로 해석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소위 말하는 과거 정리라는 것이 있다.

높은 곳으로 비상을 하는 연예인이 불미스러운 일이 될 수 있는 과거를 소속사에서 정리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주현은 지금 석규의 물음이 그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창현이 사적으로 여자를 만났다는 사실 자체가 그의 인기에 누가 될 수 있다는 것은 누구나 쉽게 예측할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 첫 번째 표적이 창현의 학교 선배이자, 가장 많은 접점을 가지고 있던 자신인 것임이 분명했다.

자신이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는 걸까.

석규는 그러지 않을 것이라는 묘한 믿음이 무너지면서 마음속에 묘한 배신감이 감돌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석규는 주현이 무언가 오해를 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는 서둘러 말했다.

“내가 이 사실을 물어보는 건 나쁜 의도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니란 점을 밝히도록 하지. 내가 이것을 묻는 이유는 창현이에게 있어 무척 중요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어서 그런 거니까. 그리고 그 방법을 찾기 위해 주현 양에게 자세한 것을 물어보려는 것이라네.”

말이 가져다 붙이면 그렇게도 해석이 된다. 참으로 묘한 방향으로 우회하는 말이었다.

석규의 말을 들은 주현의 표정이 한결 풀렸다. 적어도 자신이 생각하던 나쁜 의미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창현에게 무언가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 무척 걱정스러웠다. 자신이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나서야 한다고 생각하며 주현이 말했다.

“창현이에게 문제가 생긴다는 것은 어떤 일이죠?”

“아직 조짐만 있을 뿐이라 자세히 말하기는 어렵군. 하지만 지금 주현 양에게 묻는 것은 창현이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되었지, 결코 손해가 되는 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말해두지.”

그렇게 말을 하면 주현이 더 이상 숨길 수가 없었다.

창현을 위한 일이라지 않은가?

잠시 고민에 빠져있던 그녀가 이윽고 입을 열기 시작한다.

“많이는 아니지만… 만난 적은 있어요.”

보컬 트레이닝을 받았던 것과 멤버들과 함께 만났던 것, 그리고 수학여행에서 듀엣을 하기 위해 연습했던 것까지.

그 외에도 여러모로 많이 만남을 가졌다.

주현의 말을 들은 석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음, 역시 그렇군.”

‘여, 역시?’

자신의 대답을 예상이라도 한 듯한 석규의 모습에 주현의 표정이 묘해진다.

그 표정을 발견한 석규가 웃음을 지으며 주현에게 말한다.

“허허, 내가 어찌 아들의 일에 관심이 소홀할 수 있을까? 따로 조사를 한 건 아니지만 주현 양이 창현이랑 몇 번 만남을 가졌다는 것을 알고 있지.”

“네에…….”

석규가 조사를 하지 않았다고 말을 했지만 묘하게 확신 어린 어조로 말을 하는 그의 모습은 주현에게 섬뜩한 느낌을 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마치 자신의 모든 생각을 꿰뚫어보고 지난날의 행적들을 모두 다 알려지고 있는 느낌이랄까.

“과연 그랬어, 흐음. 한 가지만 더 물어봐도 되나, 주현 양?”

“네. 물어보세요.”

이미 이 자리가 질문을 하기 위한 자리가 아니라, 이미 짐작하고 있던 사실을 확인하는 자리라는 것이라 느끼고 있는 주현이었다. 어차피 거짓말을 싫어하기는 했지만 이런 경우에는 가급적이면 사실을 말하는 것이 그나마 좋은 느낌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으음… 흠흠! 이 질문이 무척 낯부끄러운 질문이라.”

도대체 어느 정도이기에 헛기침을 할 정도란 말인가.

석규의 모습에 주현은 묘한 불안함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낯부끄럽다라? 자신은 특별히 그런 행위를 없는데?

무슨 질문인지 궁금하였기에 괜찮다는 듯 말한다.

“낯부끄러워도 궁금하신 거라면 최대한 대답해드릴게요.”

“그렇다면 물어보도록 하지. 주현 양.”

“네.”

“창현이와 집에 단 둘이 있던 적이 있나?”

“……!”

석규의 말을 들은 주현의 마음이 순간 철렁거리며 그대로 내려앉았다.

지금 석규가 한 말이 무엇인가? 단 둘이서 집에 있었다고?

맹세코 자신은 그런 일을 한 적이 없다. 창현의 집에 가본 적은 있다. 멤버들과 함께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전부 다 갔을 때고, 그녀는 결코 단 둘이서 가본 적이 없다.

그 사이 석규의 말이 이어지고 있었다.

“2년 전 이야기지. 정확한 시기로 말하자면 1년 반 정도? 내가 원래 집에 잘 가지 않고 회사에서 머물던 시기였는데 옷이 더 없어서 가지러 집에 간 적이 있지. 그런데 집에 가니 창현이 녀석이 여성을 데려왔더군. 참으로 놀랐어. 그 녀석이 집에 여자를 데리고 올 줄이야.”

“…….”

자세하게 설명을 해주는 석규의 말에 주현은 그 일을 직접 겪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눈으로 보는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졌다.

말을 하지 않는 그녀의 눈은 흔들리지 않았지만 속에서는 격렬한 폭풍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설마 창현이 집에 단 둘이 여자와 있었다는 것은 상상도 못한 것이다.

특히 단 둘이서라는 단어가 마음에 걸렸다. 도대체 단 둘이서 집에서 무엇을 했단 말인가.

너무나 가슴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불쾌함이 가득한 두근거림이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야기를 끝마친 석규는 주현을 조용히 바라본다.

그는 주현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이유가 그 당사자여서 그렇다고 착각을 하고 있었다. 겉으로 티 나게 반응을 하지도 않고, 묵묵히 자신의 말을 듣고 있는 것이 무언의 긍정이라 생각하고 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석규가 주현을 몰라서 그렇게 판단하고 있는 것이었다.

주현은 다른 사람의 말을 끊지 않고 끝까지 경청한 뒤 자신의 의견을 내놓는 스타일이다. 특히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 중간에 끊지 않고 주의 깊게 듣는다. 그런 습관과 워낙 충격적인 내용이어서 한동안 굳어 있었던 것이 석규에게 있어서는 무언의 긍정처럼 보였던 것이다.

절묘한 지점에서 핀트가 어긋난 두 사람이었다.

석규가 쐐기를 박 듯 말했다.

“창현이 녀석에게 물어보았지만 대답을 하지 않아서 말이지. 하지만 내가 떠본 결과 소녀시대 중 한 사람이라는 걸 알아내는데 성공했지. 그리고 그 녀석과 자주 접점을 가진 주현 양이라는 것을 알아냈고. 불쾌했다면 사과를 함세.”

소녀시대 중 한 사람이라는 말에 주현의 눈에 귀화가 번뜩였다. 그러나 그 기운은 이내 갈무리 되었고, 살짝 고개를 젓는다.

“아니에요…….”

“허허, 마음까지 넓군. 좋아좋아. 한 가지 묻도록 하지. 주현 양, 창현이에게 마음이 있나?”

“……!”

석규의 물음이 주현이 흠칫한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그의 눈과 마주한다. 이미 자신의 마음에 대해 눈치를 채고 있는 듯한 석규를 속인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처럼 느껴졌다.

여기서 자신이 긍정하는 모습을 보이면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 억지로 갈라놓고 두 번 다시 못 보게 만들려는 것일까?

아니다. 아직 사회 경험이 많지 않은 주현도 알고 있다.

영원히 갈라놓을 것이라면 이렇게 직접 불러서 하는 것 말고 더욱 유용하고 다양한 방법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렇게 자신을 불러서 할 정도라면 일말의 희망을 걸어볼 가치가 있다는 이야기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주현은 마음을 굳히고는 살짝 고개를 끄덕인다.

그 모습에 석규가 웃음을 터뜨린다.

“하하! 좋아,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으니 좋군. 사실 창현이 녀석이 워낙 여자에게 관심이 없어서 고민을 하고 있었거든. 그런데 이렇게 멋진 주현 양에게 호감을 사고 있다니 좋군. 주현 양, 우리 아들을 잘 부탁함세.”

승낙의 의미가 담긴 석규의 말에 주현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 그 말씀은…….”

“하하하! 수락인 셈이지. 내가 열심히 밀어주도록 하겠네. 대신 서로 연애를 하게 되더라도 가급적 들키지 않고 해야 하네. 이게 나의 조건이고. 어떤가?”

“저, 저는 어떤 거라도 감수할 수 있어요.”

주먹을 불끈 쥐며 자신의 의지를 보이는 주현이었다. 여리게 보이는 주먹이지만 자신의 사랑을 위해 의욕을 불사르는 그녀의 모습은 굳세게 보였다.

“보기 좋군. 내가 도와줄 수는 있지만 나머지는 주현 양의 노력에 달렸어. 내 아들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창현이는 도전해봄 직한 녀석인 게 분명하니까.”

그 말에 주현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의 말처럼 창현은 도전을 해도 전혀 아깝지 않은 인물이었다.

“네, 물론이에요, 사장님.”

그녀의 말이 신경을 건드린 걸까.

갑자기 석규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한다.

“허어, 지금 뭐하자는 거지? 갑자기 밀어주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지는군.”

“네?”

급변하는 석규의 말에 당황한 표정을 짓는다. 도대체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단 말인가?

그러다가 그녀의 뇌리에 문득 스쳐가는 것이 있었다. 그리고는 이판사판이라는 기세로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 채 말한다.

“죄, 죄송해요. 아, 아, 아버님…….”

그 말을 들은 석규가 다시 웃음을 지었다.

“후후, 좋아. 앞으로 잘 부탁한다. 새 아가.”

창현을 차지함에 있어 세계 최강의 아군을 얻어낸 주현이었다.


그 후에 이어진 이야기는 그야 말로 화기애애함 그 자체였다.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는 말을 하면서 석규는 창현에 대한 유니크(Unique)한 정보를 주현에게 전달하였고, 그녀는 그 정보를 마른 솜이 물을 빨아들이는 것 마냥 정보를 쏙쏙 빨아들였다.

그렇게 한 시간가량 이어진 이야기가 이어졌고, 주현은 이야기를 끝마친 채 AA엔터테인먼트를 나섰다.

“…….”

뜻하지 않게 최강의 아군을 얻었으니 기뻐해야 함이 옳지만 사장실을 벗어난 주현의 얼굴은 기뻐하기는커녕 딱딱하게 굳어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녀는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고 있었다.

석규의 도움을 얻게 되었지만 그녀의 마음을 철렁이게 만들었던 것의 정체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었다.

얻어낸 정보에 의하면 석규는 아침에 집으로 갔고, 그곳에는 창현과 여자가 있었다고 한다.

시기는 약 1년 반 전. 그렇다는 건 9월 이후라는 이야기였다.

그때라면? 한창 연습생으로서 열심히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고 있었을 때다. 그때 있었던 큰일이라면 윤아가 라샤 뮤직비디오에 참여했던 것이 있고, 수연이 악성댓글로 인해 우울해 했던 적이 있었다.

그 순간 주현의 눈이 매섭게 빛났다.

‘가만? 수연 언니가 악성댓글에 우울해 했어?’

더 깊게,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기억을 떠올린다.

그러자 서서히 떠오르는 기억. 그때 우울한 기색을 띠고 있던 수연이 아침 일찍 숙소를 나가 밤늦게 돌아온 적이 있었다. 숙소로 돌아왔던 그녀는 전날 우울했던 모습을 말끔히 털어버린 채 엄청나게 커다란 곰 인형을 껴안고 있었지. 그리고 그 곰 인형을 얼마나 아끼는지 같은 멤버들조차도 만지지 못하게 하고, 철저한 관리를 하고 있었다. 수연의 보물 1호라는 영예로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바로 곰 인형이다.

그때 멤버들은 수연이 풀어진 기색을 보이자 무척 좋아했던 기억이 났다.

하지만 사실을 알게 된 주현에게 그 사실은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하고 있었다.

아침 일찍 나갔다는 점과 풀어진 기색을 보인다는 것. 그리고 누군가에게 받은 듯한 곰 인형.

모든 정황이 맞아떨어진다.

순간 주현에게서 소름 끼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까드득.

소리의 정체는 바로 주현의 입에서 난 것이다. 섬뜩하게 느껴지는 이 가는 소리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오한을 일으키게 만들 정도였다. 그리고 그녀의 눈에는 검은 불꽃이 심연의 어둠을 간직한 것처럼 거세게 일렁이고 있었다.

“수연 언니… 이러면 곤란해요.”

매우 곤란했다.

이런 짓을 저지르다니.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성질의 짓이었다.

깊은 생각 끝에 모든 사실을 알아낸 주현.

앞서 가던 수연의 행동은 숨은 잠룡을 각성하게 만들었다.

석규의 전폭적인 지원은 수연으로 인해 얻어내게 되었지만 주현은 전혀 고마운 감정이 들지 않았다. 지금 그녀의 뇌리에 감돌고 있는 것은 최강자이자 폭군인 수연을 쓰러뜨릴 방법을 모색하고 있으니까.

시아버지의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받은 주현에게 있어 두려운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것이 설마 수연이라 하여도 두렵지 않다.

이제 두려움의 대상이 아닌, 반드시 쓰러뜨려야 할 대상이 되었으니.

소녀시대 막내 서로로 주현은 흑화 서로로가 되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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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마음을 울리는 음악 시즌2 제3화 +6 15.04.22 4,425 82 10쪽
39 마음을 울리는 음악 시즌2 제2화 +9 15.04.20 4,515 91 11쪽
38 마음을 울리는 음악 시즌2 제1화 +10 15.04.17 7,375 95 10쪽
37 ▲▲▲▲▲시즌2 시작!▲▲▲▲▲ +5 15.04.17 5,425 65 1쪽
36 마음을 울리는 음악 106장-108장 +8 15.04.16 6,414 106 2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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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마음을 울리는 음악 13장-15장 +5 15.04.16 14,535 297 237쪽
4 마음을 울리는 음악 10장-12장 +8 15.04.16 13,737 352 171쪽
3 마음을 울리는 음악 7장-9장 +10 15.04.16 14,552 362 142쪽
2 마음을 울리는 음악 4장-6장 +11 15.04.16 16,835 421 120쪽
1 마음을 울리는 음악 프롤로그-3장 +47 15.04.16 29,898 545 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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