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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번 님의 서재입니다.

마음을 울리는 음악

웹소설 > 작가연재 > 팬픽·패러디, 현대판타지

김현우
작품등록일 :
2015.04.16 13:27
최근연재일 :
2015.06.01 17:02
연재수 :
5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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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96,4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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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4.16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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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29쪽

마음을 울리는 음악 100장-102장

DUMMY

제100장 헬 게이트(Hell Gate)




세 장의 사진이 첨부된 게시글은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었다.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 익명으로 올라온 게시글에는 현재 가장 뜨거운 아이콘인 소녀시대의 윤아가 찍혀 있던 것이다.

놀이공원에 남자와 단 둘이 찍혀 있는 윤아의 모습은 수많은 논란을 낳았다. 그리고 생성된 것이 바로 여성 아이돌에게 치명적인 ‘스캔들’이었다.

윤아와 함께 한 남자의 얼굴은 자세히 찍히지 않았지만, 게시글 작성자는 이 남자가 현이 아닐까 하는 의견을 조심스럽게 내놓았다. 얼굴이 자세히 나오지 않았지만 얼굴 윤곽이나, 전체적인 체형이 현과 흡사하다는 것. 네티즌들 또한 이러한 의견 제시에 혹하며 정말 윤아가 현과 데이트를 한 게 아니냐는 의혹을 제시하고 있었다.

막힘없이 고공행진을 하던 윤아의 앞날에 먹구름이 끼는 순간이다.


따르릉 따르릉.

아침부터 SM엔터테인먼트를 요란하게 울리는 전화 벨소리.

“여보세요? 아직 그 부분에 대해 확인된 건 없습니다.”

“여보세요? 그건 아직 저희도 아는 바가 없습니다.”

“사실무근입니다.”

“여보세요?”

전화를 받은 직원들은 빗발치는 문의에 땀을 뻘뻘 흘리며 해명을 해야만 했다. 새벽 무렵에 터진 스캔들은 끝없이 양산되어 아침이 되었을 때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 정도로 퍼져 있었다.

소녀시대의 윤아라는 이름의 파급력 때문에?

그것도 있지만 그 스캔들의 대상이 더욱 판을 키우는데 한 몫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스캔들에 연류된 인물은 다름 아닌 현이었고, 이 부분에 대해서 수많은 사람들은 정말 그럴 수도 있다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는 상태다.

특히나, 현의 열렬한 팬들이 모여 있는 공식 카페에서도 자신 있게 부인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다 보니 기자들은 그럴 듯한 이야기와 상상력을 더하여 소설을 지어냈고, 아침이 되었을 무렵에 연예 기사란은 모조리 현과 윤아의 스캔들로 뒤덮여야만 했다.

그들의 이야기에 가장 신빙성을 더해주고 있는 것은 얼마 전 동국대 OT에 현이 참가했다는 점이다. 당시 OT에 윤아도 함께 참석했다는 걸 감안하면, 여태까지 단 한 번도 행사에 나서지 않았던 현이 왜 나섰느냐가 설명되는 순간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소식이 스캔들로 뒤덮이고 있을 무렵, 소녀시대 숙소는 아직까지 고요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폭풍이 일기 전 고요함이라 할 수 있다.

가장 먼저 스캔들을 확인한 것은 태연이었다.

습관적으로 아침 일찍 일어난 그녀는 멤버들을 깨우려다가 스케줄이 모두 오후에 있음을 확인하고는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리고 인터넷에 들어가 연예 뉴스란을 보다가 눈을 부릅뜨고 말았다.

“이, 이게 뭐야?”

메인 타이틀에 윤아의 스캔들 사실이 대문짝만하게 실려 있었다.

뿐만이 아니라, 그 상대는 다름 아닌 창현이라는 것.

믿기지 않는 상황에 한동안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태연.

그녀의 정신을 깨운 것은 문밖에서 들려오는 요란한 초인종 소리였다.

띵동! 띵동!

“에, 오빠?”

워낙 격렬하게 울리고 있었기에 인터폰으로 상대의 정체를 확인한 태연이 눈을 동그랗게 뜬다. 그에 개의치 않은 채 안으로 들어선 매니저가 다급한 어조로 묻는다.

“일어나 있었구나. 윤아 어딨어?”

“윤아요? 아직 자고 있어요. 그런데 윤아는 왜요?”

“일단 윤아부터 깨워. 지금 한시가 급하니까.”

“인터넷 기사 때문이에요?”

“그래. 지금 회장님이 찾고 계시니까 어서 윤아 깨워라.”

“아, 알았어요.”

다급함이 가득 담긴 매니저의 말에 태연은 빠른 속도로 방에 들어간다. 그곳에는 스캔들이 터진 것도 모른 채, 어제 함께 했던 달콤한 데이트를 떠올리며 헤헤거리는 윤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에 태연이 괜히 울컥한다.

‘지금 스캔들이 터졌는데 즐겁게 자고 있어?’

당사자도 아닌 자신은 가슴을 가득 졸이고 있는데, 정작 당사자는 달콤한 잠에 빠져있다는 사실에 분노하던 태연은 침착하게 마음을 가라앉힌 뒤 윤아를 깨운다.

“윤아야, 일어나.”

“우응, 태연 언니? 왜 그래요, 저 오늘 오후 스케줄이에요. 좀 더 잘게요.”

“자겠다고? 지금 상황이 어떤데 잠을 자겠다고 그러는 거야.”

“우으음.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무것도 모르는 윤아는 만사태평한 모습으로 침대에 굴러다니며 잠결이 묻어나오는 어조로 묻는다.

그러자 속에서 욱하는 걸 참지 못한 태연이 결국 버럭 소리를 지른다.

“너 스캔들 터졌다고!”

“…에엑? 그, 그게 무슨 말이에요?”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윤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면서 경악이 가득한 어조로 외친다. 그 물음에 대답하지 않은 태연은 머리가 사방으로 삐친 윤아를 보며 한숨을 푹 내쉬더니 말한다.

“회사에서 호출이 있었으니 어서 씻어. 매니저 오빠가 기다리고 계셔.”

날카로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윤아가 움찔한다. 평소에는 만만하기 그지없는 하찮탱이었지만 이럴 때만큼은 리더의 진가를 발휘한다.

“아, 알았어요.”

“숙소에 돌아오면 우리에게도 이야기를 해야 할 거야.”

“…….”

사태의 심각함을 느낀 윤아도 표정을 굳힌다.

아침부터 날벼락을 맞은 듯했다.


“…….”

간단하게 씻고 준비를 마친 윤아의 머릿속은 복잡하였다.

갑자기 터진 스캔들. 자신이 씻고 나온 사이 방안의 컴퓨터를 킨 태연은 인터넷 연예 뉴스란을 뒤덮고 있는 스캔들 기사를 보여주었다. 회사에 가더라도 무슨 상황인지 알고 가야한다는 말과 함께.

그것을 확인한 윤아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인터넷에 올라온 사진은 놀이공원에서 자신과 창현이가 즐겁게 놀고 있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찍혀 있었다. 다행히 창현의 모습이 찍히지 않아 수많은 억측을 낳았지만, 대다수가 진실에 가까운 것이었다.

‘너무 부주의했어.’

얼굴이 드러날 정도로 편하게 다닌 것이 문제였다. 제대로 스캔들이 터진 적이 없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방심을 했나보다.

사태를 파악한 윤아의 머릿속을 채워나간 것은 현재 상황의 인지였다. 스스로 언급하기 민망하지만 소녀시대는 현재 대한민국 최고의 인기를 누리느냐 없느냐 기로에 놓여있다. 그 선봉에는 자신이 서 있다는 것을 윤아는 잘 알고 있다.

‘내가 취할 최선의 방법은 뭘까.’

회사에서 정해주는 방침이 있을 테지만 그것은 자신의 생각과 다를 가능성이 높았다. 회사는 말 그대로 회사, 자신들의 이익을 창출하기 위해 최선의 시나리오를 내놓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 뜻에 순순히 따르지만 자신의 뜻이 무시되는 건 싫었다.

‘한 번 해볼 수 있을지도?’

예전이라면 꿈도 못 꿀 일이었지만 지금은 가능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찌 보면 이 기회가 자신에게 찾아오는 절호의 찬스가 될 수 있을 것이고. 물론, 태연이 보여준 인터넷의 단편적인 면만 하여도 어마어마한 파급력을 지니고 있었기에 쉽게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한 번쯤 해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은 그녀의 머릿속에 맴돌고 있었다.

생각과 생각이 엉켜 머릿속이 점점 복잡해지자, 윤아는 고개를 흔들며 생각을 지워나갔다.

‘일단 삼촌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저지르던, 물러서던 결정해야지.’

머리가 좋은 사람은 가정을 너무 많이 하게 된다. 그것이 최악의 상황을 면하게 할 수 있을지언정 상황을 앞서 나가게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성보다 본능이 강한 사슴은 가끔씩 저돌적인 행동을 할 때가 있다.

그것이 윤아에게 화가 될지 복이 될지 지켜보아야 할 일이다.


가볍게 털어버리듯 아무 생각을 하지 않는 윤아였지만 회사 분위기는 그녀의 생각과 달리 최악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당사자인 그녀가 등장하지 않다 보니, SM엔터테인먼트 측에서는 다른 말을 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기자들은 사건을 더욱 키워나가면서 점점 골머리를 앓게 하였다.

윤아 또한 회사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사태의 심각함을 느끼고는 표정을 바꾸었다.

“분위기가…….”:

“각오 단단히 해둬. 회장님이 직접 호출할 정도면 사태가 보통 심각한 게 아니니깐.”

“저도 그건 알아요.”

“그걸 알면 왜 그렇게 부주의하게 한 거냐. 요즘 힘든 것 같아 느슨하게 풀어주었더니 스캔들이나 터뜨리고. 후우!”

“…….”

한숨을 내쉬는 매니저에게 한 마디 해주고 싶었지만 자신의 스캔들로 인해 가장 먼저 깨지는 것이 그라는 걸 알았기에 윤아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 모습을 보며 매니저도 입을 다물고 그녀를 회장실로 안내한다.

회장실이 자리한 위층으로 올라가자, 밖에 있던 비서가 말한다.

“윤아 양만 들어오라 하셨어요.”

“알겠습니다. 윤아야, 말 잘해라.”

“알았어요.”

매니저의 격려를 받으며 회장실 안으로 들어서는 윤아. 안으로 들어가자, 자리에 앉아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수만이 그녀를 맞이한다.

“어서와라.”

“…네.”

심각한 그의 표정에 잔뜩 긴장한 윤아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한다. 그리고 둘 사이에 자리한 것은 침묵이었다. 무겁게 가라앉는 분위기에 덩달아 의기소침해지는 걸 느끼며 윤아의 어깨가 점점 움츠러들었다.

한 번 지르겠느니 하던 그런 발칙한 생각은 저 멀리 사라진지 오래였다.

“뭘 마시겠느냐?”

“네? 전 그냥 물이요.”

“그래, 김 비서, 여기 물 두 잔 갖다 주게.”

비서에게 물을 주문한 수만은 그 뒤에도 아무 말을 하지 않는다. 머리가 백지가 되어버린 윤아 또한 아무 말도 못한 채 부지런히 머리를 굴려보지만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 물 두 잔이 두 사람 앞에 놓였다. 목이 탔던 윤아가 물을 한 모금 마신다. 얼음이 동동 띄워진 얼음물이 그녀의 속을 시원하게 해주며 머릿속까지 맑게해주는 기분이다. 그때까지 침묵하고 있던 수만이 천천히 입을 연다.

“꽤 큰일을 저질렀더구나.”

“…….”

“일단 너희들이 연애를 하는 점에 대해서 크게 제재를 가할 생각은 없다. 어차피 금지조항으로 넣어도 할 건 다 하는 건 알고 있기 때문이지.”

“…네.”

“하지만 말이다. 금지조항을 넣어둔 까닭은 너희들이 연애를 함에 있어 조금이라도 조심하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스캔들이 나면 회사도 회사지만 너희들 이미지에도 피해가 크다는 걸 알고 있겠지?”

“…….”

부드럽게 타이르듯 이야기하는 수만의 어조에 윤아의 고개가 점점 숙여졌다. 차라리 호통을 쳤다면 이런 기분도 들지 않았을 텐데, 마치 부모님이 훈계하는 것 같이 말하자, 죄송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상대가 현인가?”

“…네, 맞아요.”

차를 타고 올 당시만 하여도 호쾌하게 사실을 시인하고 관계를 인정해달라고 하려 했지만 상황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다.

순순히 대답하자, 수만이 입을 다문다. 윤아 또한 다음 무슨 말이 흘러나올지 몰라 조용히 침묵하며 그의 말을 기다렸다.

“한 가지만 물어보마.”

“말씀하세요.”

“현을 좋아하고 있느냐?”

“그건…….”

말끝을 흐리는 윤아.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수십 가지 생각이 스쳐지나가며 복잡하게 헝클어뜨리고 있었다. 어떤 대답을 하는 것이 지금 상황에 가장 좋을지 섣불리 감을 잡을 수 없었다. 한 번 떠보는 것일지, 아니면 확신을 갖고 묻는 것인지 모르겠다. 고개를 들어 수만의 표정을 살펴보았지만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다.

‘어떻게 하지?’

한 번 저지르는 형식이면 모든 일이 해결될 거라 생각했지만 수만은 감히 자신이 대적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란 걸 뼈저리게 느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는 윤아. 목이 타는지 컵을 들어 남은 물을 모두 마신다. 그리고 얼음마저도 와그작와그작 씹어 먹는다. 입속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얼음 맛이 뜨겁게 달아오르던 머릿속이 어느 정도 가라앉히는 듯했다.

“후우!”

숨을 길게 내쉬는 윤아. 그녀는 고개를 들어 수만을 똑바로 응시하며 자신이 내린 답을 내놓는다.


“전, 창현이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아니, 좋아해요.”

“…….”

확신 어린 윤아의 말에 수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그녀를 바라본다.

흔들리지 않는 윤아의 눈.

그 모습을 보며 수만은 그녀가 참 많이 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릴 때부터 연습생으로 들어와 커온 모습을 지켜보았다. 비주얼적인 면이 훌륭하였기에 SM엔터테인먼트의 힘만 있으면 어떻게든 성공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수만의 마음에 들었던 것은 윤아의 성격이었다.

연습생 생활을 해가며 점차 커감에 따라 그녀는 훌륭한 자기 관리를 보여주었다.

잘생긴 남녀가 있는 곳이다 보니 연습생들끼리 정분이 나는 것은 다반사. 그 중에서도 상위권에 드는 외모를 지닌 윤아는 많은 남자들의 대시를 받은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다.

하지만 SM엔터테인먼트는 그리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다. 사내에 펼쳐진 거미줄 같은 정보망은 연습생간에 이어지는 관계를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그런 면에서 단 한 번도 정보망에 걸려들지 않은 윤아는 훌륭한 자기 관리의 표본과도 같다.

그렇기에 소녀시대 멤버로 발탁되어 데뷔를 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게 너의 대답이냐?”

“네, 삼촌.”

“허어.”

흔들리지 않는 윤아의 눈에 수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고민이 깊어졌지만 막상 말하고 나자 자신의 생각이 확실하게 정해지는 기분이었다.

흔들림 없는 그녀의 눈을 응시하며 수만은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컸구나.”

“감사해요.”

“아니야, 빈말이 아니다. 설마하니 네가 내 앞에서 당당하게 남자를 좋아한다고 할 줄 몰랐으니. 그 말을 들으면 내가 무슨 반응을 보일 것이라 생각했지?”

“전 머리가 그렇게 좋지 않아요, 삼촌. 제가 이렇게 말한 건 순수한 제 감정을 말했을 뿐이에요.”

“헤어지라면 헤어질 수 있고?”

“…사귀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좋아하는 건데 헤어지고 자시고도 없죠.”

소녀시대 비주얼 담당인 윤아가 일방적으로 좋아한다?

황당함이 들어야 하지만 수만은 그녀의 말에 웃음을 지었다.

“하하! 그렇군. 상대가 현이었으니.”

“상대도 상대 나름이죠. 사실 창현이는 너무 힘들어요.”

“네게 마음은 없는 듯하고?”

“있는 듯해서 오히려 더 힘들어요. 차라리 호불호가 갈리면 좋겠는데 절 정말 좋아하거든요. 친한 누나로. 그것 때문에 더 이상 다가가지 못하는 것이기도 하고요.”

“그렇구나. 그랬던 거였어.”

자세한 정황은 몰랐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윤아가 창현을 좋아한다는 것.

지금 상황에서 그것이 어떠한 이득도, 손해도 되지 않지만 한 가지는 분명해진 것 같아 한결 마음이 놓였다. 그녀의 마음을 알고 있다면 괜히 회사와 그녀간에 관계가 틀어질 일도 없을 것이고.

“좋다, 네 마음은 알았으니 사태 진화에 대해 이야기를 하자. 사진을 보니 다행히 현의 얼굴이 나온 부분은 없더구나.”

“그 부분은 너무 경솔했어요. 죄송해요, 삼촌.”

“알면 앞으로 주의하도록 하고, 늘 그랬듯이 남자의 정체에 대해서는 네 사촌 오빠로 하자꾸나. 그렇게 할 수 있겠지?”

“…네.”

마음 같아서는 인정해버리고 싶었지만 회사 입장과, 그룹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지. 그 외에 별다른 사항은 없다.”

“정말 이게 끝인가요?”

“왜, 그럼 내가 마음을 접으라고 강요할 줄 알았더냐?”

“…….”

침묵은 곧 긍정. 윤아의 모습에 수만은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다 이내 입가에 쓴 미소가 걸렸다. 이건 윤아를 탓할 게 아니라, 자신이 뿌려놓은 것이 자연스럽게 고착화 된 것에 지나지 않았다.

“하기야 내가 여태까지 그런 이미지를 심어주기는 했지.”

“아, 아니에요!”

“아니다, 여태까지 그런 이미지를 주기는 했지. 어쨌든 세월은 흘렀고, 시대는 변했다. 1세대 아이돌이었다면 제재를 가했을 테지만 지금은 그럴 생각이 없다. 단!”

말을 끊은 수만이 조용히 윤아를 바라본다.

가라앉은 그녀의 눈은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어 윤아는 찔끔한 표정으로 몸을 움츠린다.

“다시는 다른 사람에게 들키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 그거면 되나요?”

“그래, 그거면 된다.”

“가, 감사합니다. 삼촌.”

예상치 못한 성과에 윤아는 얼떨떨한 안색을 감추지 못했다.

감격에 겨워하는 그녀의 모습에 수만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한 번 더 실수를 하면 이쪽에서도 네게 제재를 가할 수밖에 없으니 알아서 잘 하도록 하고.”

“물론이죠!”

소속사 보스(?)에게서 승인을 얻은 윤아는 활발한 어조로 대답했다.

세상을 다 가진 듯한 충족감이 그녀의 가슴을 가득 채웠다.


“……?”

매니저는 지금 의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대담하게 현과 스캔들을 터뜨린 윤아는 회사에 끌려가 회장님과 단독 면담을 하게 되었다. 스캔들을 일으킨 걸로 인해 된통 깨졌으리라 생각했기에 내심 그녀를 숙소로 바래다주면서 어떻게 위로를 해줘야 할까 머리가 복잡했다.

하지만 상황은 그의 생각과 다르게 흘러갔다.

회장님과 단독 면담을 끝내고 벤에 탑승한 윤아의 얼굴에 자리한 것은 침울함, 암담함 등의 감정이 아니라, 기쁨, 환희 등의 감정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영문을 몰랐기에 혼란을 느낀 매니저는 이따금 “히히!”거리며 실없는 웃는 윤아에게 조심스레 묻는다.

“윤아야?”

“히히! 네? 말씀하세요, 오빠.”

“다른 게 아니라… 회장님과 면담을 잘 했나봐?”

“그렇겠죠?”

“정말 그런 거야? 깨진 게 아니라? 스캔들을 일으켜서 된통 깨졌을 것 같았는데.”

“뭐야! 오빠는 내가 삼촌한테 깨져서 슬퍼하길 바랐던 거야?”

윤아가 도끼눈을 뜨자, 매니저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는 침을 꿀꺽 삼켰다. 살벌한 그녀의 기세는 당장 자신의 목숨을 위협할 듯 매서웠다.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기분 좋은 게 궁금해서 그런 거지. 내가 왜 슬퍼하길 바라겠어? 안 그래? 하하, 하하하!”

“흐음! 수상하지만 내가 기분 좋으니 참아줄게. 운 좋은 줄 알아, 오빠. 히히!”

어색하게 변명하는 그의 모습은 지극히 수상했지만 오늘의 윤아는 자애의 여신 그 자체였다. 평소였다면 돌주먹 연타를 날렸을 테지만 너그러이 인정해주는 모습을 보였다.

“…….”

무난하게 넘어가주자 당황한 것은 매니저였다. 말실수로 인해 대형 참사가 일어날 것이라 생각했건만 윤아는 너그러이 자신의 실수를 인정해주었다.

“히히!”

의심스러운 매니저의 눈초리를 느끼지 못했는지 윤아는 자리에 앉아 실없는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창현과 분홍빛 미래가 펼쳐지고 있는 상태였다. 가장 큰 난적(?)인 수만의 간접적인 허락마저 얻어낸 만큼 그녀의 앞을 가로막을 장애물은 전무한 상태였다.

이제 남은 것은 창현을 어떻게 거꾸러뜨리느냐 뿐.

장애물이 모두 사라진 이상, 그것도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되었다.

‘내가 여태까지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한 건 회사 때문이었다고. 이제 그게 해결되었으니 단번에 넘어뜨리면 돼. 그 정도쯤이야. 헤헤!’

자만하는 건 아니지만 자신이 적극적으로 나선다면 충분히 창현을 꼬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방법이 스쳐지나가고 있었고, 가장 효율적이고, 가장 가능성이 높은 방법이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꽃 꽂은 여인 마냥 실실 웃음을 짓는 사이, 그녀를 태운 벤이 숙소에 도착하였다. 차에서 내리자, 매니저 또한 차에서 내리다가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예, 실장님. 아, 이제 막 도착했습니다. 아직 옆에 있고요. 알겠습니다. 주의를 주도록 할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예, 그럼 지시대로 하겠습니다.”

통화를 끝낸 매니저는 윤아를 바라본다.

여전히 상상의 나래에 빠져있는 그녀는 헤실헤실거리고 있는 상태.

이 모습을 보며 수많은 남자들이 열광하는 것이란 말인가.

왠지 보아서는 안될 것을 보는 느낌에 한숨을 푹 내쉰 매니저가 입을 연다.

“윤아야.”

“네, 오빠.”

“방금 회사에서 전화가 왔다. 스캔들은 회사 측에서 무마할 테니 당분간 자숙하고 있으란다. 한 일주일 정도는 최소 스케줄을 소화하고 곧바로 다음 스케줄을 할 테니 그때까지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있도록 해. 알겠지?”

“네, 물론이죠.”

“그, 그래. 그럼 숙소까지 바래다주마.”

평소라면 거칠게 반응했을 그녀가 순순히 대답하자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낀 매니저였지만 깊이 파고들다가 봉변을 당할 것 같아 입을 다물고 조용히 그녀와 함께 위층으로 올라간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윤아의 머릿속이 분주히 움직였다.

‘일주일이면 국내 스케줄은 모두 취소고, 곧바로 미국으로 가는 거구나. 헤헤.’

오히려 잘 됐다. 괜히 스케줄을 나가게 되면 스캔들에 대한 질문을 피해갈 수 없어서 복잡해졌을 수 있었을 텐데. 수만이 잘 해결해준 것 같아 흡족했다.

띵!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매니저는 숙소 문앞에 선 윤아를 보며 말한다.

“그럼 한동안 자숙하고 있고. 괜히 소란피우지 말아라.”

“알았어요. 저도 어린애가 아니라니까요. 잘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후! 그래, 믿는 수밖에 없겠지. 그럼 푹 쉬어라. 너도 힘들었을 텐데.”

“네, 매니저 오빠도 안녕히 가세요.”

평소에는 하지도 않던 90도 인사까지 하며 매니저를 배웅하는 윤아. 엘리베이터가 내려가자, 그녀의 입가에 여태까지 드러내지 못했던 진한 미소가 걸린다.

“흐히히히!”

이제부터 펼쳐진 것은 자신의 세상!

남은 일주일을 앞으로 펼쳐질 분홍빛 연애 계획을 세우는데 써야겠다고 생각한 윤아는 숙소 문을 열며 힘찬 발걸음을 내딛었다.

그러나 그녀의 걸음은 채 한 걸음도 되지 않아 멈춰설 수밖에 없었다.

문을 여는 순간 전해지는 음습한 기운들. 그리고 안에 펼쳐진 광경을 보는 순간 환희에 젖어있던 윤아의 얼굴이 멍하게 변하더니, 자연스럽게 입이 벌어진다.

“아…….”

너무 기쁜 나머지 잊어버리고 있었다.

아직 모든 게 끝난 것이 아니라는 걸.

지금 그녀의 앞에 펼쳐진 것은 한편의 지옥도와 같았다.

몸을 송곳을 꿰뚫는 듯한 예리한 시선들.

윤아는… 제 스스로 지옥의 문에 들어서고 말았다.


싸한 기운이 온몸을 휘감았다.

차가운 바람이 부는 한겨울에 옷을 입지 않고 밖을 나온 듯한 한기가 덮쳐오고 있었다.

난방이 잘 되고 있는 숙소이건만 윤아가 느끼고 있는 체감 온도는 한겨울 시베리아의 것과 다르지 않았다.

꽁꽁 얼어붙은 그녀를 지켜보는 여덟 쌍의 눈길.

모두 곱지가 않다.

“안으로 데리고 와.”

겉으로 드러내지 않던 권력자 수연의 말이 떨어지자, 주현과 유리가 재빨리 다가가 윤아의 양팔을 붙든다. 그리고 그녀를 숙소 거실로 거칠게(?) 연행한다.

“앗!”

거실 바닥에 주저앉은 윤아를 중심으로 소녀들이 둘러싼다. 그리고 아무 말없이 그녀를 응시하기 시작한다.

“…….”

윤아는 자신에게 가해지는 기운에 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그녀는 자신이 단단히 착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스캔들이 터졌을 당시, 수만의 호출에 어떻게든 그를 설득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계약서에 엄연히 연애금지 조항이 달려 있었기에 만약 마음을 접으라 하면 거칠게 반항할 각오까지 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실수였다. 눈앞의 나무를 본 나머지 전체 숲을 보지 못한 것이다. 정말 자신이 경계했어야 하는 것은 수만의 허락이 아니다.

자신이 주의했어야 하는 것.

그것은 바로 멤버들의 포화였던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현과 스캔들이다. 파급력도 파급력이지만 윤아가 이러한 반응을 보이는 까닭은 다른 곳에 존재했다.

바로 멤버들이 현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자신이 호감을 갖고 있는 남자가 다른 여자와 데이트를 했다? 그리고 요란하게 스캔들이 터져 나온다?

그렇게 되면 어떤 기분이 들겠는가.

여기에서 평범한 것과 다른 전제가 있는데, 원래대로라면 화를 내야 함이 정상이지만 상대는 밀고 당기기가 전혀 먹혀들지 않는 현이었다.

그리 되면 남는 것은 일방적인 당기기 뿐.

그것을 위해 각자 암중에서 움직이고 있는 상황. 누구의 입에서도 나오지 않았지만 서로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부분이었고, 그 부분을 굳이 깨려하지 않았다.

왜냐고?

그렇게 되면 바로 지금 같은 상황이 벌어졌을 테니까.

“임윤아.”

“…네.”

차갑게 얼어붙은 수연의 음성에 윤아가 몸을 파르르 떤다. 냉기가 뚝뚝 묻어나오는 그녀의 표정은 예전 자신이 무서워하던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스캔들이 일어났다고 들었어.”

“…….”

“자세한 연유를 알고 싶은데?”

“언니도 보셨을 거 아니에요.”

온몸을 휘감는 한기에 윤아는 굴복할 뻔했지만 필사적으로 자신의 페이스를 만들고자 하였다. 여기에서 휘말리면 수만에게 허락받은 것은 물론, 자신이 만들어놓은 찬스조차 제대로 사용할 수 없게 된다. 무서운 권력자였지만 윤아는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용감하게 반응했다.

하지만 그것은 사슴의 한계

국산 마왕과 미국산 마왕을 맞서는데 성공한 돌연변이 사슴이었지만 그녀가 내성된 것은 마왕에 대한 것이었지, 숙소를 지배하는 얼음 마녀의 내성이 아니었다.

상승으로 따지면 가위와 주먹.

아무리 마왕에게 멋지게 대항해도 결국 얼음 마녀에게는 한 주먹거리도 되지 않는 풀 뜯는 사슴일 뿐이다.

용감한 윤아의 반응에 수연은 피식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보긴 봤지.”

“그럼 된 거잖아요.”

“그게 사실이 아니란 걸 네가 더 잘 알 텐데?”

“뭐, 뭐가요?”

확신 어린 수연의 어조에 윤아는 순간 흔들리고 만다. 아차 했지만 이미 모든 멤버들이 봐버렸기에 발뺌하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흔들리는 윤아의 앞으로 유리가 나선다. 평소에는 윤율 자매로 절정의 친분을 자랑했지만 지금 만큼은 같은 남자를 놓고 대립하는 연적이었다.

날카롭게 눈을 뜬 그녀가 윤아를 스윽 훑어보더니 입을 연다.

“회사에 왜 불려갔는지, 그리고 어떻게 대답했는지도 다 알아. 아마 삼촌은 자세한 연유를 물어보았겠지? 그리고 어떤 형식으로든 대답을 했겠지. 그러니 곧바로 반박 기사가 뜨더라고?”

“…전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어요.”

끝까지 발뺌하는 윤아였다. 절대 꺾일 수 없다는 생각에 그녀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호오! 그래?”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지은 유리가 미영을 슬쩍 바라본다. 그러자 그녀 또한 유리와 비슷한 미소를 짓더니 윤아에게 시선을 주며 말한다.

“아마 윤아 네 성격상 삼촌에게 정면돌파를 했을 거야. 물론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윤아 넌 어제 아침부터 시작해서 저녁 시간까지 밖에 나갔다 왔어.”

“그게 무슨 문제라도 되나요?”

평정심을 되찾은 윤아는 모른 척하며 말을 한다. 그러자, 유리가 나서며 샅샅이 분해하기 시작한다.

“스캔들이 날 수 있던 사진이 어제 찍힌 사진이란 건 알지?”

“그게 왜요?”

“그럼 어제 어딜 간 건데?”

“그야 물론 놀이공원이죠.”

“사촌 오빠랑?”

“물론이에요.”

반박 기사에 사촌 오빠와 함께 놀이공원으로 간 것이라 되었을 것이다. 윤아는 그것으로 끝까지 밀어붙이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상대는 그녀에 대해 자세히 파악하고 있는 유리였다. 윤아의 말을 듣는 순간 그녀의 눈에 기광이 번뜩이더니 날카롭게 묻는다.

“윤아 네 사촌 오빠는 지금 군대에 있는데?”

“네?”

“내가 예전에 네 사촌 오빠를 소개 받은 걸 잊었나 보네.”

“그…….”

윤아의 말이 궁색하게 변했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데뷔 전에 서울에 놀러온 사촌 오빠와 유리가 한 번 만난 것이 떠올랐다.

‘안 돼.’

실수했다는 걸 깨달은 윤아였지만 재빨리 표정을 수습하며 말한다.

“다른 사촌 오빠에요.”

“윤아 너 그때 나한테 한 말을 잊었구나?”

“뭘요?”

“너한테 사촌 오빠는 한 명밖에 없다고 했거든. 그런데 언제 또 다른 사촌 오빠가 생겼을까? 군대 간 사촌 오빠를 만난 것도 아닐 테고. 내가 기억하는 생김새랑 많이 다르거든.”

“…….”

이쯤 되면 넉다운이었다. 더 이상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지 않았기에 윤아는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처음부터 쉽지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자신을 자세히 파악하고 있는 유리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윤아의 얼굴에 자포자기의 감정이 떠오르자, 유리가 이번에는 표정을 바꾸며 살살 설득한다.

“솔직히 말해. 우리는 널 다그치려는 게 아니야.”

“그럼요?”

“그냥 진실을 알고자 하는 거야.”

“전 정말 사촌 오빠랑 간 거예요. 이종 사촌 오빠랑…….”

“…정말 끝까지 이러기야?”

유리의 표정에 짙은 아쉬움이 서렸다. 이쯤이면 진실을 실토해도 되었을 테지만 윤아는 끝까지 사실을 말하길 거부했다.

이쯤 되면 자신이 해줄 수 있는 허용 범위를 벗어난 셈이다.

한숨을 푹 내쉰 유리가 물러서자, 여태까지 상황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수연이 말한다.

“솔직히 실망이야.”

“뭐, 뭐가요?”

“여태까지 모든 것을 알면서 내색하지 않은 것은 서로의 관계를 깨기 싫어서였어. 이성에 대한 호감으로 적게는 3년, 많게는 7년 동안 연습해온 것이 허사가 되길 바라지 않았으니까. 윤아 너도 그걸 알고 있었기에 여태까지 내색하지 않았던 거잖아?”

“…….”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는데도 끝까지 말을 하지 않는다는 건 결국 서로를 배려하던 마음을 저버리려는 거라 생각해. 윤아 넌 우리를 버리고 네 사랑을 찾아가겠다는 거지?”

“아, 아니에요!”

실망감이 역력 수연의 말에 윤아는 자신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마음속으로 그녀의 말을 진심으로 거부할 수 없었다.

그녀의 말마따나 어렴풋 모든 것을 눈치 채고 있음에도 내색하지 않았던 것은 자신의 사랑도 소중했지만 멤버들간의 관계를 깨는 것도 원하지 않는 것도 있었다.

그래서 필사적으로 만났다는 것을 부인한 것이다. 만약 모든 진실이 밝혀지면 유혈사태가 발생할 것 같았기에.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생각이 짧았던 것이란 걸 깨닫고 말았다.

“하아!”

한숨을 푹 내쉬는 수연. 짙은 수심이 서린 그녀의 표정은 다른 멤버들의 얼굴에도 떠올라 있었다. 그것은 그녀들이 그토록 경계하던 벽이 허물어지는 순간이기도 하였다.

“윤아야.”

“네, 언니.”

“다시 한 번 물어볼게. 정말 창현이를 만난 게 아니야?”

“…….”

“진실을 말해줬으면 좋겠어.”

“전… 정말로 사촌 오빠를 만난 거예요.”

윤아 입장에서는 이제 와서 말을 바꾸기도 어려웠다. 긴 침묵 끝에 그녀는 처음 입장을 끝까지 고수하는 것이 최선이라 여겼다.

하지만 그것은 팽팽하게 당겨진 긴장의 끈을 완전히 놓아버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정말 사촌 오빠란 말이지?”

“…네.”

수연은 물론이고, 다른 멤버들의 표정도 바뀌었다. 그것은 짙은 아쉬움과 동시에 후련함, 분노 등 여러 감정이 뒤범벅되었다.

최악을 면하기 위해 윤아는 자신의 거짓말을 끝까지 밀고 나갔지만 그녀의 판단은 틀렸다.

그녀의 행동은 여태까지 물이 쌓이고 쌓인 제방을 허물어뜨리는 결과를 낳았다.

복잡한 표정을 띤 수연이 눈을 감으며 윤아에게 말한다.

“윤아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어쩔 수 없지.”

“믿어주시는 거예요?”

윤아의 얼굴에 서린 것은 기쁨의 표정. 하지만 그 표정은 채 3초도 되지 않아 사라져야만 했다.

“아니.”

“그, 그럼?”

“태연아.”

“왜?”

가만히 있던 태연이 수연의 대답에 반응한다. 그녀의 표정 또한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아무리 연기를 잘해도 상황이 명명백백했기에 진실을 거짓으로 뒤덮는 건 불가능했다.

“창현이한테 전화해봐.”

“에?”

“스캔들 상대가 창현이니까 한 번 해보라고. 만약 창현이가 놀이공원을 가지 않았다면 윤아의 말이 진실이겠지.”

“……!”

윤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회사와 이야기가 잘 끝났기에 굳이 창현에게 전화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말을 맞추지 못했다면 그의 성격상 분명 진실만을 말할 것임이 분명했다.

그 순간 윤아는 자신이 화를 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자신을 믿지 못하고, 창현에게 전화를 하려는 건 여태까지 한 모든 말을 불신하는 것이다.

그러나 수연이 한 발 더 빨랐다.

“상황을 확실히 하기 위함이야. 윤아 네 말이 진실이라면 창현이가 알아서 이야기를 해주겠지. 그렇지, 윤아야?”

“…네.”

“그럼 전화해봐.”

“…….”

창현에게 전화를 거는 태연을 보는 윤아의 안색이 초조하게 변해갔다.


“스피커 모드로 할 거야.”

수연의 부탁으로 전화를 하게 된 태연은 모두에게 통보하듯 말한 뒤, 스피커 모드로 전환하여 창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

소녀시대의 히트곡인 <Gee>가 울려 퍼진다. 자신들의 곡을 컬러링으로 삼은 창현의 곡 선정에 몇몇 소녀들의 표정이 풀어졌다가 다시 빠른 속도로 굳어갔다. 지금 이 자리는 잠시라도 방심할 수 없는 복마전과 같은 곳이었다.

“…….”

컬러링이 울려 퍼짐에 따라 윤아의 표정은 초조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창현이 전화를 받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제발 스케줄이나 다른 볼 일이 있기를!’

만약 창현이 전화를 받게 되어 모든 진실을 말한다면 자신의 앞날은 불투명함 그 자체가 되어버린다.

자신을 위해, 그리고 창현을 위해서도 윤아는 그가 전화를 못 받길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신은 누군가의 바람을 장난감처럼 부숴버리는 걸 좋아한다.

거실을 울리던 컬러링 소리가 끊기더니, 창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아…….”

순간 윤아의 얼굴이 짙은 절망이 드리웠다. 뒤바뀐 그녀의 표정을 본 태연이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은 채 곧바로 통화를 한다.

“여보세요? 창현아, 나 태연이야.”

-네, 누나. 당연히 알고 있죠. 그런데 무슨 일로…? 아, 오늘 있었던 일 때문인가요?

“응, 알고 있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창현은 벌써 인터넷 상에서 난리 난 상황을 모두 간파하고 있었다. 걱정이 되어 전화를 해볼까 싶었지만 그녀들 나름대로 바쁠 것 같아서 사태가 어느 정도 완화된 뒤에 전화를 걸어볼까 했는데 태연에게서 먼저 전화가 온 것이다.

-음, 스캔들이 터진 것에 대해서는 유감이에요. 누나들한테 미안해요. 괜히 피해를 끼친 것 같아서.

“아니야, 상황을 보니까 우리 소속사에서 잘 해결하고 있는 것 같던 걸. AA엔터테인먼트 쪽은 어때?”

-저희 쪽이 뭐 별 게 있나요. 일단 스캔들은 우리나라에서는 남자보다 여자 쪽이 더 타격이 가잖아요. 그러다 보니 아버지는 윤아 누나한테 피해가 가지 않는 방향으로 조치하고자 해요. 정정 기사가 떴으니 이쪽에서도 움직이고 있을 테죠.

“그렇구나. 배려해줘서 고마워.”

-아니에요, 부주의해서 스캔들이 난 건데 그럴 수도 있죠.

“…….”

듣는 사람에게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드는 말이었다.

무엇이 부주의했을까?

만약 그가 윤아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굳이 부주의했다는 말을 할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그가 개입되지 않은 이번 사건은 윤아의 부주의로 일어난 것일 테니까. 바짝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소녀들은 창현의 말에서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윤아의 안색이 창백해졌고, 몇몇 소녀들의 얼굴은 심각해졌다.

태연 또한 안색을 굳혔지만 목소리는 변하지 않고 묻는다.

“아니야, 그 부분에 대해서는 윤아도 실수를 좀 했지. 좀 주의하지 그랬어.”

-하하, 미안해요.

“그래도 어제 재미있게 놀았지?”

자연스럽게 물음을 던지는 태연이었다. 그것은 창현이 윤아와 놀았을 거란 전제조건을 깔아둔 뒤 하는 질문이라 볼 수 있었다.

아예 작정을 하고 묻자, 윤아의 표정이 다시 한 번 변했다. 설마하니 태연이 이렇듯 노골적으로 물어볼 줄은 그녀도 몰랐던 것이다.

상황을 모르는 창현으로서는 걸려들기 딱 좋았다.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그는 태연의 미끼를 덥썩 물었다.

-하하! 윤아 누나가 좀 까다로워서 고생 좀 했어요. 물론 재미있기는 했지만요.

진실은 밝혀졌다.

창현의 말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소녀들의 시선이 일제히 윤아에게 향했다. 자신의 거짓말이 만천하에 공개된 윤아의 안색은 하얗게 탈색된 걸 넘어서 푸르죽죽하게 변해버렸다.

태연 또한 표정이 날카롭게 변했지만 통화가 이어지고 있다는 걸 감안하고 평정을 유지한다.

“재미있었겠다. 나도 놀이공원 가고 싶은데.”

-마음 같아서는 같이 가고 싶지만 스캔들이 터졌으니 어려울 것 같네요. 게다가 시간도 없고요. 조만간 미국으로 가서 남은 스케줄을 해야 되거든요.

“칫! 그럼 다음에는 같이 가기야.”

-그러고 싶지만 누나들이 워낙 잘 나가서 모르겠네요. 이거 잘못하다가 다음에 또 걸리면 제가 죽어날 것 같은데요?

예전이라면 스캔들이 난 윤아가 일방적인 포화를 받았을 테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Gee>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며 남자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게 된 소녀시대의 팬 층 또한 두터워지고 있었다. 그랬기에 대부분의 남성 팬들은 창현보다 윤아의 손을 들어주었다. 악플이라고는 담을 쌓았던 창현이 이번만큼은 제법 많은 욕을 먹을 정도였으니까.

다음에 또 소녀시대 멤버와 스캔들이 나면 더 큰 몸살을 앓을 것 같았다.

특히 그룹 내 다른 멤버와 스캔들이 나면 바람둥이로 찍혀 순식간에 비호감으로 전락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이렇게 깊게까지 생각 못한 태연은 창현의 말에 버럭했다.

“뭐야! 윤아는 되고 나는 안 된다는 거야?”

-하하, 그게 아니라 누나의 팬들한테 맞아죽을 것 같아서 그렇다는 거죠. 사정이 되면 당연히 같이 가고 싶죠.

“그렇지? 마음은 그렇지만 현실이 그렇지 않다는 말을 수용해주겠어. 어쨌든 걱정해줘서 고마워. 창현이 넌 어떻게 하고 있는지 궁금했거든. 우리 쪽은 잘 해결될 것 같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응, 그러니 걱정 말고 쉬어.”

-네, 누나도 쉬세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통화가 끝난다. 스피커 모드로 통화를 했기에 소녀들은 모든 내용을 들은 상태였다. 그녀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윤아에게 몰려들었다.

침묵하고 있던 수연이 날카로운 어조로 쏘아붙인다.

“사촌이랑 갔다던 놀이공원을 창현이는 같이 갔다는데?”

“…….”

“자세한 해명을 해보시지, 임윤아?”

“저… 그게…….”

무어라 말을 하려 했지만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자신이 명백히 거짓말을 했고, 멤버들을 속이려 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인 셈이다.

“말해봐.”

어물거리는 윤아에게 수연은 모든 이야기를 다 들어줄 포즈를 취한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에 대한 추궁으로 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입을 꾹 다문 윤아는 주변을 둘러본다. 평소에 윤율 자매라 불릴 정도로 친하게 지낸 유리에게 도움의 눈길을 보냈지만 매정하게 외면한다. 거짓말도 거짓말이거니와 연적인 그녀에게 지금 도와줄 틈 따위는 없었다.

“마, 막내야.”

매몰찬 유리의 거절에 윤아는 지푸라기라도 잡은 심정으로 주현을 불러보았다. 하지만 그녀를 보는 순간 윤아는 숨이 멎어버리는 것 같았다.

표독하게 치뜬 그녀의 눈빛은 심장을 꿰뚫어 버릴 것처럼 예리했다.

“…….”

충격을 받은 윤아는 눈을 질끈 감은 채 입을 꾹 다물었다. 수연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그녀를 몰아붙였다.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고, 진실로 밝혀진 지금 시점에서 다른 것을 다 제쳐두더라도 멤버들을 속이려는 그녀의 의도가 괘씸하게 느껴졌다.

“무슨 말이라도 해봐. 윤아야.”

“미안해요.”

“왜 거짓말을 한 건데?”

“전 이게 최선이라 생각했어요.”

“무슨 최선? 멤버들에게 감추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한 거야?”

“네, 전 그게 저를 위해서도, 언니를 위해서도, 그리고 창현이를 위해서도 좋다고 생각했어요.”

한 번 트인 말문은 계속해서 말이 흘러나오게 하였다.

거짓말을 해놓고 당당하게 이야기하는 모습에 수연은 물론 다른 소녀들도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윤아의 모습은 그녀들이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모습이다.

“그게 왜 최선이라 생각했는데?”

“때로는 거짓이 진실보다 좋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너와 창현이가 알콩달콩하게 데이트를 한 걸 들켜서 응징당하는 게 두려워서 그런 게 아니라?”

“…….”

자신의 속마음을 정확하게 짚어내자, 윤아가 입을 꾹 다문다.

수연은 그 모습을 보며 한숨을 길게 내쉰다. 그러자 여태까지 침묵하고 있던 태연이 앞으로 나서며 윤아에게 말을 한다.

“윤아 네 생각처럼 응징하려는 생각도 있었어. 하지만 지금 내가 널 이렇게 몰아붙이는 건 거짓말을 해서 그런 거야. 두 눈을 가리면 세상이 사라지는 줄 알았어? 네가 거짓말을 하면 우리가 정말 속을 거라 생각했어? 우리가 바보인 줄 알고?”

“전 단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요.”

수연이 말했던 대로였다. 창현과 데이트를 했다고 하면 무슨 응징이 날아올지 생각만 해도 두려웠다. 그랬기에 차마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때, 윤아의 머리에 스치고 지나가는 한 가지 생각이 있었다.

‘잠깐! 거짓말을 한 건 미안하다고 해. 하지만 지금은 뭔가 아니잖아?’

평소 거짓말을 하면 가벼운 훈계로 끝나는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 분위기는 그야 말로 법정을 방불케 하였다.

그렇다는 것은 즉, 사적인 감정이 개입되어 평정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말과 같았다.

치명적인 진실을 알아차린 윤아의 눈빛이 예리하게 변했다.

“거짓말을 한 건 제가 정말 잘못했어요. 다시는 언니들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을게요. 하지만 언니들이 절 혼내는 건 그것 때문이 아니잖아요?”

“뭐, 뭐라고?”

갑자기 당돌해진 윤아의 모습에 태연이 당황한다. 다른 소녀들도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이건 방귀 뀐 놈이 되려 성내는 격 아닌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윤아는 날카롭게 쏘아붙인다.

“언니들이랑 막내가 화내는 건 제가 창현이를 만나서 데이트를 한 것 때문이잖아요. 생각해보니 제가 왜 이렇게 혼나야 되죠? 스캔들을 낸 건 미안하지만, 몇 차례 있었던 일이에요. 충분히 미안해하고 있어요. 하지만 언니들이 창현이의 여자 친구가 아니잖아요. 그런데 제가 왜 그 부분에 대해서 추궁 당해야 하는 거죠?”

“……!”

당돌하면서 정곡을 찌르는 말에 소녀들은 패닉 상태에 빠져든다. 그럴수록 윤아의 눈이 점점 날카롭게 변하고 있었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무는 법이다.

사슴은 멤버들을 향해 정면으로 선전포고를 하였다.

진정한 헬 게이트는 지금부터 시작이다.


소녀들은 패닉 상태다.

설마하니 윤아가 이렇듯 당돌하게 나올 줄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결정적으로 그녀의 말은 틀린 곳이 없었다.

진정 그녀들이 화가 난 까닭은 윤아의 거짓말 때문이 아니라 창현과 데이트를 해서였다.

냉정하게 판단하면 윤아의 말이 옳다.

하지만 진실을 알고 있음에도 그녀들은 승복하기 싫었다.

만약 인정하게 되면 윤아의 말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고, 그리 되면 아무 상관도 없는 자신들은 일정한 범위를 벗어난 난동에 지나지 않는 셈이다.

억지였지만 모두들 스스로를 납득시키려 하였다.

자신은 틀린 것이 아니다. 그러니 윤아의 말을 인정할 필요가 없다.

왜냐고? 자신은 창현을 좋아하니까.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지만 그 감정만큼은 진심이었다. 짝사랑이지만 사랑은 이기적이다. 억지를 부려서라도 지금 윤아의 선언을 무마하고, 단순한 폭동으로 치부하고 싶은 것이 그녀들의 솔직한 마음이었다.

“…….”

물론 모든 소녀가 그런 것이 아니다.

몇몇 소녀의 표정은 결연하게 변했고, 몇몇 소녀는 충격 받은 표정이다.

윤아의 말에 적잖이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자각하지 못한 진실을 절절하게 느끼고 자신들이 놓치고 있는 점을 깨달을 수 있었다.

권력의 정점이자, 얼음 마녀인 수연조차도 큰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윤아 네가 어떻게 그런 말을…….”

“제 말이 틀린 건 아니잖아요.”

평소라면 얼음 포스에 쪼그라들었을 윤아였지만 지금은 달랐다. 마음을 굳게 먹은 그녀의 눈앞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상대가 얼음 마녀이던, 사마율이던 거칠 것이 없었다.

“네가 어떻게…….”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이제부터 적이에요. 더 이상 거칠 게 없다고요.”

“윤아 너 변했구나.”

“창현이는 처음 봤을 때부터 좋아했어요. 그러니 언니들은 포기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설마 규칙을 잊으신 건 아니겠죠? 멤버들 중 좋아하는 남자가 있으면 포기해주기로. 여기서 밝히겠어요. 전 창현이를 좋아해요. 그러니 언니들이 포기해주셨으면 좋겠어요.”

가장 먼저 자신이 좋아했음을 알리는 윤아였다.

“…….”

당당한 윤아의 선언에 무거운 침묵이 가라앉았다. 모두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당혹감이었다.

설마하니 그녀가 이렇게 당당히 선언을 할 줄 예상치 못했다.

윤아의 말처럼 소녀시대 내에는 한 가지 룰이 있다.

아니, 어찌 보면 소녀시대라는 이름이 지어지기 전, 여단팀 내에 있던 규칙이었는데, 훗날 남자 문제로 팀워크가 깨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세워둔 규칙이었다.

규칙대로라면 가장 먼저 선언을 한 것은 다름 아닌 대역죄인(?) 윤아였다.

어렴풋 서로의 마음을 눈치 채고 있었다고 하나, 공식적으로 자신이 창현을 좋아한다 밝힌 사람은 없었다. 말 그대로 규칙대로라면 모두가 윤아를 위해 창현에 대한 마음을 포기해야 함이 옳았다.

하지만 이대로 쉽게 물러날 소녀들이 아니었다.

특히, 가장 먼저 좋아했다는 말에 발끈한 주현이 입을 연다.

“잠시만요, 언니. 가장 먼저 좋아했다는 점에서 동의할 수 없어요.”

“무슨 뜻이야?”

“가장 먼저 조, 조, 좋아한 건 언니가 아니라, 바로 저니까요.”

윤아의 물음에 주현이 멈칫거렸지만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는다. 소극적인 그녀가 이런 말을 하는 데에는 엄청난 노력을 필요로 하였다. 하지만 자신의 권리(?)를 침범 당하는 것을 눈 뜨고 당할 수 없었다.

여태까지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지만 창현을 가장 먼저 좋아한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이다.

‘언니라고 해서 양보할 수 없어요.’

입술을 질끈 깨문 주현이 눈에 새파란 빛을 뿜어내며 자신의 의지를 확고히 다진다.

“어째서 네가 가장 먼저 좋아했는데?”

“언니들에게 창현이를 소개시켜준 게 누구인지 잊으셨어요?”

“그, 그건…….”

기세등등하게 나아가던 윤아가 멈칫한다. 주현의 말처럼 가장 먼저 창현과 인연을 맺은 것은 다름 아닌 그녀다. 보컬 트레이닝을 빌미로 인연을 맺었고, 그 후부터 친분 관계를 유지해올 수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부분에 있어서는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절대의 영역이다.

당당히 자신의 권리를 내세우자, 다른 소녀들의 눈도 흔들린다.

여기에 주현은 다시 한 번 확고히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다.

“전 언니들을 소개시켜주기 전부터 창현이를 조, 좋아했어요. 그럼 제가 가장 먼저 좋아한 거죠? 그러니 우선권은 제게 있어요. 맞죠?”

“…….”

논리적으로 조목조목 짚어내는 주현의 말엔 큰 폭풍을 동반하고 있음과 동시에 함부로 반박할 수 없게 만드는 힘이 있다.

여기에 무어라 반박할 수 있을까.

그러나 윤아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이익! 그래도 막내 넌 좋아한다 말하지 않았잖아! 가장 먼저 좋아한다고 말한 건 다름 아닌 나야! 그러니까 나에게 우선권이 있어!”

“전 창현이를 가장 먼저 알았고, 가장 먼저 좋아했어요. 언니들도 제게 창현이를 좋아하냐고 놀리셨잖아요. 그때 이미 제 마음을 알고 있으셨던 것 아닌가요?”

“몰랐어! 몰랐으니까 나야!”

“전 인정할 수 없어요.”

두 막내 라인이 투톱으로 나선 가운데 팽팽한 신경전이 벌어졌다.

다른 소녀들이 파고들 틈이 전혀 보이지 않는 듯했다.

하지만 투톱 라인으로 나선 두 소녀에게도 보이지 않는 틈이 존재했다.

점점 흥분하여 말이 앞뒤가 맞지 않는 윤아와, 조목조목 짚어내면서 점점 열이 오르는 주현의 모습에 수연이 차가운 목소리로 흐름을 끊는다.

“거기까지.”

“……!”

“너희들의 말은 잘 알겠어. 요컨대 윤아 넌 우리 멤버들 중에서 가장 먼저 선언을 했으니 네게 우선권이 있다는 것이고, 주현이 넌 창현이를 가장 먼저 알고, 내심 가장 먼저 좋아했으니 네게 우선권이 있다는 이야기겠지?”

“네.”

윤아와 주현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다. 그러다 허공에서 시선이 마주쳤지만 냉정하게 고개를 외면한다. 언니들의 등쌀에 모진 고생을 겪던 막내 라인의 우정이 무너지려는 순간이었다.

그 모습이 보기 좋지 않아 태연이 한숨을 길게 내쉰다.

“후우! 여태까지 우리가 내색하지 않았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거야. 창현이를 좋아하지만 서로간에 팀워크는 깨지 말아야지. 지금 이게 무슨 모습이야? 결국 걱정하던 상황이 벌어지고 있잖아.”

“미안해요, 언니.”

“죄송해요.”

태연의 말에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두 사람은 고개 숙여 사과한다. 여태껏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지금 같은 상황을 염려해서였다.

사랑을 하게 되면 점점 여유가 사라지며 매사에 초조함을 느끼고 걱정하게 된다. 더군다나 창현은 그녀들이 차지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경쟁자를 두고 있다. 여타 다른 사람들보다 그 초조함이 배에 달할 수밖에 없다.

윤아의 폭탄선언은 여태까지 졸이고 있던 마음의 한계를 깨버리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두 사람이 그나마 팀워크에 대한 부분을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는 듯하자 태연이 확실하게 정리를 해둔다.

“한 가지는 확실히 하도록 하자. 지금 말하는 건 좋지만 흥분을 하지 말고, 서로에게 상처주는 말은 하지 말도록 해. 어차피 한 번은 겪어야 했을 일이야. 알겠지?”

“알았어요.”

“네, 언니.”

태연의 중재로 인해 윤아와 주현이 흥분을 가라앉혔다. 그렇다고 하여 상황이 종료된 것이 아니다. 여전히 상황은 해결된 것이 하나도 없었다. 태연의 말에 납득을 했지만 윤아나 주현이나 둘 모두 한 치도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참고 참았던 둑이 마침내 넘치는 순간이다. 여기에서 물러나면 두 번 다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수 없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다.

“일단 정리가 됐네. 그럼 내가 한 마디 해도 되지?”

분위기가 안정되자, 잠자코 지켜보던 수연이 입을 연다. 상황을 안정시키려던 것은 그녀였지만 태연이 나서자 잠자코 지켜보고만 있었다. 아무래도 자신보다 태연이 상황을 안정시키는데 더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

자신은 그 부분이 모자라 리더직을 태연에게 양보해야만 했으니까.

열기가 가득하던 분위기를 차분하게 가라앉혀놓자, 수연은 찰나에 생긴 빈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뭔데? 해봐.”

태연의 허락이 떨어지자, 수연의 입가에 싱긋 미소가 걸린다.

지금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환한 미소였다.

저 미소를 언제 보았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수연은 드물게 환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 상황에 왜 미소를 지을까? 불안한 느낌이 번져 나갔다.

“너희들은 한 가지 모르는 것이 있어.”

“…….”

환한 미소에 당당함이 서려있는 음성.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이기에 저런 태도를 유지하는 것일까.

소녀들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꼬여갔다.

그것을 즐기는지 수연은 말을 끝낸 뒤 잠시 시간을 끌더니 천천히 입을 연다.

“지금 윤아랑 주현이가 싸우는 이유는 결국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어. 출발점이 어떻든 지금 상황은 모두가 좋아하는 거니까. 안 그래?”

“마, 맞아.”

“와, 대단해, 제시.”

미영이 감탄할 정도로 고급단어를 구사하는 수연이다.

더욱 의기양양해진 수연은 고개를 들어 도도하게 턱을 추켜세운 뒤 말한다.

“창현이는 아직 연애경험이 없다고 했었지? 그런데 키스는 해보았다고 했어.”

키스라는 단어에 몇몇 소녀들의 눈동자가 번뜩인다.

교육(?)이라는 단어로 창현과 어른의 키스 진도까지 나가본 태연과 아메리칸 스타일이란 명목 하에 입맞춤을 성사시킨 미영이 바로 장본인이다. 그리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입 꼬리를 말아 올린 윤아도 있었다.

단어에 반응하는 것도 잠시. 묘한 불안함을 야기하는 수연의 태도에 태연은 미간을 지그시 모으며 묻는다.

“갑자기 그 이야기는 왜 하는 거야?”

“생각이 났다고 해야 할까? 지금 막내들이 싸우는 이유는 결국 자신이 먼저 창현이를 좋아했다는 것. 하지만 말이야, 연애 경험이 없는 창현이는 키스 경험이 있다고 했지. 그것도 팬 미팅에서 말이야.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 창현이와 첫 키스를 한 것은 누구일까요~?”

“…….”

무거운 침묵이 숙소에 내려앉았다.

간단한 퀴즈 형식으로 이야기했지만 그녀의 말에서 풍겨 나오는 뉘앙스를 모를 소녀들이 아니었다.

눈치가 빠른 유리와 수영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갔고, 그것을 시작으로 다른 소녀들의 안색 또한 굳어갔다.

그녀들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공통된 단어였다.

‘이 도둑고양이!’

창현의 첫 키스를 훔쳐간 발칙한 암고양이는 다름 아닌 수연이었던 것이다.

소녀들의 눈에 하나둘씩 귀화가 번뜩이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연의 태도는 태연자약했다.

“창현이랑 키스를 한 건 나라고. 그러니 게임이 될 필요는 없겠지? 좋아하는 건 결국 별개의 문제. 진도도 빼지 못한 막내들이랑 나랑은 애초에 평가가 안 되지. 안 그래?”

“으윽.”

“…….”

침음을 흘리는 윤아부터 시작하여 고개를 숙인 채 주먹을 굳게 움켜쥐는 주현까지 무어라 할 말이 없었다.

결국 그녀들의 감정은 일방통행인 셈. 상대방이 모르는 마음보다는 키스로서 연인으로 한 걸음 앞서간 수연의 행동은 결정타라 할 수 있다.

침묵하는 막내라인을 보며 수연은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마치 더 할 말이 있으면 해보라는 듯, 그녀는 여유가 넘쳤다.

“Game Over?"

아무 말도 없는 두 사람을 보며 수연이 고개를 까딱인다.

그럼에도 반응이 없는 둘. 아무리 머리를 굴려봤자, 이미 연인으로서 상당한 진도를 뺀(?) 수연을 말로서 이겨낼 방도가 없었다.

이 세상은 뭐든지 말보다 행동으로 옮기는 자를 우위로 쳐 주기에.

“잠깐!”

수연에게 기울어가는 분위기 속에 한 사람이 단호하게 분위기를 깼다.

그 분위기를 깬 것은 지략 캐릭터 와룡파니도, 사마율도 아니었다.

타도 수연 독재정권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상대는 다름 아닌 태연이었다.

평소 새하얀 얼굴이 붉게 달아오를 정도로 흥분한 그녀.

창현의 첫 키스를 빼앗아간 암 고양이를 보며 태연은 활화산 같이 터져 나오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수연의 독주를 순순히 인정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다급한 마음은 태연에게 여유를 없앴고, 결국 숨겨야 할 진실마저 폭로하게 만들었다.

수연의 눈을 똑바로 응시한 태연은 멤버들을 스윽 둘러본다.

여러 생각에 잠긴 멤버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다 효연과 시선이 마주친 태연은 입 꼬리를 비열하게 말아 올린다. 그리고는 수연에게 고개를 고정한 뒤 비웃음이 역력한 어조로 말한다.

“흥! 겨우 애들이 하는 베이비 키스 정도로 우선권을 독점하려고? 아직 멀었네, 정수연.”

“뭐?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수연의 눈썹이 상큼하게 치켜 올라갔다. 평소였다면 하찮탱이 벌벌 떨 포스가 줄기줄기 뿜어졌지만 그녀는 물러서지 않았다. 눈이 뒤집힌 태연은 지금 뵈는 것이 없는 절대무적의 상태다.

“훗! 겨우 베이비 키스로 의기양양하냐고 했다.”

“그러는 넌 더한 거라도 해본 듯이 말한다?”

“있어.”

“뭐어?”

너무나 당당한 태연의 대답에 수연의 표정이 순간 벙찐다. 다른 소녀들 또한 키스보다 더한 진도를 뺐다는 이야기에 놀람이 가득한 표정을 한다.

여전히 입 꼬리를 비열하게 말아 올린 태연은 멤버들을 스윽 훑어본다. 마치 윗사람이 아랫사람들을 바라보는 것 같은 교만한 눈동자였다.

그리고 말하고 싶은 충동을 참고 참았던 걸 터뜨리며 자신의 감정까지 실어 외친다.

“난 창현이랑 딥 키스까지 가본 사이다아아아! 이 루저들아아아아!”

“…….”

욱탱구의 선언에 숙소는 또 한 번 초토화 되었다.


욱탱구의 선언은 숙소를 초토화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소녀들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경악 그 자체. 방송에서는 아줌마 이미지로 자리 잡은 것과 달리, 평소 성격은 소극적인 태연이 이 중에서 가장 많은 진도를 나아갔을 줄은 효연을 빼고 꿈도 꾸지 못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적팀의 수비수에게 결승골을 먹힌 느낌이 이것과 비슷하다 할 수 있다.

모두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경악 뒤 짙은 배신감.

하지만 지금은 그러한 감정마저도 우월감을 젖어들게 만들었다.

“후후, 진도를 뺀 것으로는 내가 가장 앞서는데 어떻게 할래? 여기에 무슨 말이 더 필요해? 얼마든지 반박해봐. 맞서줄 테니.”

눈이 뒤집힌 욱탱구는 장판파에서 백만대군과 맞서던 장비 마냥 만부부당의 신위를 발휘하며 소녀들을 압도해나갔다.

가장 앞선 진도를 빼놓은 자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모태 우월이었다.

“…….”

한편, 졸지에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어버린 수연은 입술을 질겅질겅 깨물었다. 한순간 가장 낮은 곳으로 추락한 그녀의 마음은 복잡하게 헝클어졌다.

진도를 빼놓은 것으로 다른 멤버들이 움직이지 못하게 하려 했는데 이 무슨 실수란 말인가.

저 교만한 태연에게 무어라 한 마디 해주고 싶지만 감히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패배감에 젖어있는 수연에게 고개를 돌린 태연이 밉살 맞게 웃는다.

“후후.”

‘이익!’

이가 부득부득 갈렸지만 할 말이 없다.

“뭐라 말을 해보라구.”

“…….”

일동 침묵하는 멤버들을 보며 태연은 승리를 직감했다. 비록 창현의 의지에 의해 벌어진 일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행동은 옳았다. 개인적인 성취감과 동시에 결정적인 순간에 유용한 무기가 되지 않는가.

탁월한 두뇌회전으로 자신을 농락하던 와룡파니와 사마율마저 침묵하자, 태연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더욱 짙어져서, 입 꼬리가 귀 끝까지 닿을 듯했다.

‘나의 승리야.’

아무리 발버둥 쳐도 자신 이상의 성과를 이룩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할 말이 없으면 나의 승리인 거지? 앞으로 창현이한테 접근하지 말아줘.”

적군을 몰아낸 뒤, 남은 것은 깃발을 꼽아 이곳은 나의 성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복병은 어디에서나 있었다.

“잠깐.”

“왜, 미영아? 한 가지 말하면 난 양보할 생각이 없다는 걸 알아둬.”

“일단 침착해야 한다고 생각해. 태연이 지금 네 말은 결국 처음 말했던 팀워크를 해치는 말이야. 그렇지 않아?”

“응? 그게 무슨 말이야.”

“지금 우리를 비웃으면서 말하고 있잖아. 분명 가장 많은 진도를 나간 것은 사실이지만 공개적으로 선언한 적도 없고, 가장 먼저 좋아한 것은 주현이잖아. 그리고 선언한 것은 윤아고…….”

“그, 그래도 진도를 가장 많이 나간 건 나야!”

미영의 페이스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태연은 발버둥 쳤다. 여기에서 확실하게 뿌리를 박아놓으면 여덟 명의 훼방꾼을 동시에 소탕할 수 있다! 하지만 그녀의 바람과 달리, 지략 캐릭터는 말하는 것마저 그녀보다 능했다.

“하지만 창현이를 좋아한다고 멤버들에게 밝힌 건 아니잖아.”

“윽.”

“그리고 가장 많이 진도를 나간 건 인정해도 우리를 비웃는다는 건 처음 이야기했던 팀워크를 깨버리는 것이기도 해.”

“그, 그건 미안해.”

말과 다르게 행동한 자신의 모습에 부끄러움을 느낀 태연이다. 그 모습에 가볍게 미소를 지어보인 미영은 고개를 저으며 말한다.

“일단은 머리를 식혀야 한다고 생각해. 태연이 넌 필요 이상으로 흥분했고, 다른 애들도 아직 할 말이 있다고 봐. 그러니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차분하게 생각을 해보자. 응?”

“…알았어. 난 팀워크를 깨려 한 적은 없어. 그래도 창현이를 포기할 생각도 없고. 그러니 그 부분에 대해서는 오해하지 말아줘.”

꼬투리를 잡힌 태연은 결국 미영의 말을 들어주고 말았다. 욱탱구로 변신했던 그녀는 자신이 팀워크를 깨고 창현을 독차지하려 했다는 행동이 믿기지 않았다.

팀을 생각하는 그녀였기에 그 충격은 더욱 컸다.

“물론이지. 우리는 오해하지 않아. 잠시 흥분했을 뿐이니까. 그렇지?”

“응…….”

“당연하지.”

미영의 말에 멤버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한다. 그러자 어둡게 변했던 태연의 표정이 다소 밝아지며 고개를 숙인다.

“고마워, 얘들아. 그리고 미안해.”

“아니야, 일단은 좀 쉬고 다시 이야기하자. 애들도 할 이야기가 있을 거야.”

“알았어.”

태연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상황은 잠시 소강상태를 맞이하였다. 충격 받은 수연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고, 윤아와 주현은 자리에 일어나 각각 방으로 향했다.

“잘했어.”

짝.

흩어지는 네 명을 보며 유리가 미영의 손바닥에 하이파이브를 한다.

모든 것은 와룡파니의 계략대로였다.

태연의 독주는 미영으로 인해 제동이 걸리게 되었다.


촤악! 촤악!

화장실 안에 들어간 수연은 찬물로 연신 얼굴을 씻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얼굴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열기가 가라앉지 않을 것 같았다.

“후욱! 후우!”

얼굴에 느껴지는 차가움이 치솟은 열기를 어느 정도 식혀주는 듯했다.

간신히 마음을 추스른 수연은 수건으로 얼굴을 닦는다. 그리고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가 손으로 뺨을 세게 친다.

짝짝!

“아직 끝난 게 아니야. 태연이가 강하게 공격을 했지만 역전의 여지는 있어. 기 죽지마, 정수연! 창현이의 첫 키스를 빼앗아간 건 너야. 그러니 위축되지 마.”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며 수연은 자신의 원래 모습을 되찾고자 했다. 맑아지는 정신은 다시 그녀를 얼음 공주로 되돌려놓게 만들기 충분했다.

화장실을 나선 수연은 떠들썩하던 거실을 힐끗 바라 보다가 방으로 들어선다. 그리고 창현이가 녹음해준 케로로 인형을 안고 있는 주현에게 시선을 주다가 입을 열었다.

“막내 너 보통이 아니야.”

“…수연 언니도요. 설마 첫 키스 이야기를 털어놓을 줄은 몰랐어요.”

“…….”

둘 사이에 묘한 침묵이 자리 잡는다. 첫 키스 이야기는 주현이 소녀시대의 암중 배후로 매김 할 수 있게 해준 약점 중 하나였다. 그녀에게 치명적인 약점이었던 것이 결정적인 순간에 예리한 무기가 되었지만 날카롭게 벼려진 만큼 부러지는 것도 한순간이었다.

‘윽!’

맑게 빛나는 주현의 눈동자를 마주하면서 수연은 자신이 압도되는 것 같아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확실하게 밝혀둔다.

“난 절대 물러날 생각이 없어. 그것만은 알아둬.”

“저도에요, 언니.”

“많이 바뀌었네.”

“막내라서 양보할 게 많았지만 사랑만큼은 그럴 수 없잖아요.”

“…그래. 그렇지.”

단호한 수연과 배수진을 친 주현.

두 사람의 마음은 확고하였다.


이러한 두 사람의 대립과 비교될 정도로 다른 방에서는 태연과 윤아의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방안에 들어서는 태연의 모습은 마치 전쟁에서 승리한 개선장군과도 같은 모습을 연상시켰다.

처음 그 광경을 효연에게 들켰을 때는 자신에게 치명적인 약점이 될 줄 알았지만 모든 것을 폭로하는 지금 이 자리에서는 더할 나위 없는 최강의 무기가 되었다.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던 윤아는 태연을 보며 말했다.

“설마 언니가 그러실 줄 몰랐어요.”

“윤아 네게 고맙다고 생각해. 오늘 일이 터지지 않았더라면 난 그 문제를 갖고 여전히 고민했을 테니까.”

권력의 정점에 섰던 태연과 그녀에게 달라붙었던 윤아는 동시에 추락을 겪으며 동지애가 강했다. 그러나 사랑 앞에서는 두 사람도 라이벌일 뿐이었다.

날카로운 윤아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태연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수연의 선언으로 인해 태연은 기회를 움켜잡을 수 있었고, 자신이 투하한 폭탄은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초강력 핵폭탄이다.

“언니가 비록 창현이와 깊은 관계까지 갔다고 해도 아직 사귀고 있는 게 아니라 믿어요.”

“사귀지 않으면 그런 단계까지 갈 거라 생각해?”

“혹시 모르죠. 창현이가 예상치 못한 사이에 기습적으로 했을지?”

“…그럴 리가? 후후!”

속으로 뜨끔한 태연은 잠깐의 침묵 후, 미소를 지었다. 목격하지 않았음에도 윤아의 말은 정황과 거의 일치된 모습을 보였다.

태연이 의연하게 대처하든 말든 윤아는 이미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렸다.

“내 매력에 넘어가지 않은 창현이가 태연 언니에게 넘어갔을 리 없어.”

“뭐? 이 초딩융이…….”

“어쨌든 전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가장 먼저 선언한 건 나니까!”

“그래! 열심히 덤벼봐, 창현이랑 키스도 못해본 루저야!”

“이익.”

평소와 판이하게 바뀐 위너와 루저 관계였다.


첨예한 대립각이 세워지고 있는 두 방과 달리 한 방은 진중한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바로 각각 톱으로 나섰던 네 사람과 달리, 이번 대화에서 두각을 드러내지 못한 다섯 사람이었다.

미영의 언변으로 시간을 벌어두는데 성공한 다섯 소녀는 황급히 방으로 이동하여 비상 대책 회의를 열었다.

“일단 시간을 버는 건 정말 잘했어, 미영아.”

“응, 하지만 이 정도 밖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어.”

태연의 기세가 워낙 강렬하여 순식간에 멤버들을 뒤덮을 뻔하였다.

그녀의 약점인 팀에 대한 책임감을 건드려 간신히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지만, 이후에 대책이 시급했다. 이 소중한 시간을 유용하게 활용하지 못한다면 주도권은 태연에게 넘어갈 것임이 분명했다.

거기까지는 해냈지만 미영에게 남은 계략은 없었다.

“방법이 없을까?”

“고민을 해봐야겠지.”

유리 또한 근심이 깊어졌다. 지략 캐릭터였지만 그녀의 머리도 복잡하게 엉킨 실타래와 같았다. 주변 인물을 공략하여 어머니를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데 성공했고, 이제 남은 것은 창현을 천천히 공략하는 것뿐이라 생각했는데 설마하니 직접 공략하고 있는 멤버가 있을 줄이야.

그 중에서 태연과 수연은 상당한 성과를 올렸기에 유리로서는 이가 갈렸다.

여태까지 자신이 쌓아올린 모든 성과가 수포로 돌아간 느낌이다.

‘아니야, 지금은 비록 뒤처져 있지만 난 그릇을 먼저 만드느라 그런 거야. 대기만성이란 말이 있는 것처럼 큰 그릇을 만들었으니 내용물을 채워나가면 내가 이길 게 분명해.’

큰 그릇을 가득 채우기 위해서는 당장의 위기를 이겨내는 게 중요했다.

“방법이 없을까? 의견을 좀 얘기해봐.”

답답한 마음이 든 미영은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는 순규와 효연, 수영을 재촉했다.

그러자 수영이 답답한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뭘 그리 복잡하게 생각해. 어차피 띨파니 말대로 태연이가 가장 먼저 진도를 나갔다고 해도 정식으로 사귀는 게 아니잖아? 아직까지는 임자가 없다 이거야. 그러니까 평준화 상태로 만들어버려.”

“그건 나도 알고 있다고. 하지만 핑계거리가 없잖아.”

“어차피 수연이도 키스를 했다잖아? 진도 한 발자국 차이니까 피장파장이야. 그걸로 우기면 돼.”

“그래도…….”

수영의 기에 억눌린 미영이 무어라 말을 하려 했지만 눈을 부라리는 그녀의 모습에 풀이 죽은 듯 말을 잇지 못한다.

평소였더라면 그 말이 통했을 테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유리가 나서서 미영이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해주었다.

“지금은 그렇게 해서는 안 돼.”

“왜 안 되는데?”

“우기는 걸로 밀고 나가려면 충분히 태연이를 꺾을 수 있겠지. 하지만 그렇게 되면 우리가 끼어들 여지가 사라지게 돼. 수영이 넌 수연이 좋은 일만 시켜주고 싶어? 넌 끼어들기 싫고?”

“그건 아니지.”

“그러기 위해서는 합리적으로 태연이를 굴복시켜야 한다는 거야. 그래야 우리가 끼어들 틈이 생길 테니까. 어정쩡하게 하다가는 수연이랑 막내들한테 먹힐 수밖에 없어. 아까 안 봤어? 걔네들 지금 장난하는 거 아니야.”

“하지만 방법이 없잖아. 가장 많이 진도를 뺐다고 하는데 여기에서 뭘 어쩔 건데?”

“뭘 어쩌든 간에 일단 방도를 마련해야겠지. 우리가 해야 할 일이 그거고. 고민하기 싫으면 수영이 넌 빠져도 돼. 대신 창현이에 대한 마음도 포기하고.”

“…….”

독한 유리의 말에 입을 다무는 수영이었다.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으니 반박의 여지가 없었다. 그녀의 말마따나 여기에서 대안이 나오지 않으면 속시원하게 빠지는 것이 옳았다.

하지만 그러기 싫었다.

단 한 차례 계기였지만 이미 마음이 단단히 빼앗긴 그녀는 다른 멤버들에게 창현을 내주기 싫었다.

‘나도 한 매력 할 수 있다고. 절대 물러설 수 없어.’

좋아하는 마음에 더하여 동료이자, 오랫동안 경쟁자였던 멤버들에게 지고 싶지 않았다.

수영이 침묵하자, 순규가 답답한 듯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

“아! 탱구 고것이 설마 그렇게 단계를 나갈 줄이야. 우월한(?) 나도 진도를 못나갔는데 어떻게 고것이! 아유 분해!”

“분한 건 동감이야.”

유리도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효연과 수영의 표정도 다를 바 없었다.

다만 미영의 표정은 몽롱하게 변했다.

눈이 풀린 그녀는 허공을 바라보더니 헤실헤실 웃음을 지었다.

“헤헤! 얼마나 좋았을까. 헤헤헤.”

“…….”

넋을 놓은 미영의 모습에 멤버들은 행여나 자신이 저런 표정일까 싶어 재빨리 관리에 들어갔다.

엄숙한 표정을 지은 유리가 상상에 젖어든 미영을 툭툭 치며 말했다.

“서둘러 방도를 마련해야 돼. 지금 당장 태연이가 소집하면 대책 없이 당한다고?”

“응? 아, 그렇지. 그래도 아쉽다. 나도 하기 직전이었는데… 헤헤!”

한숨을 푹 내쉬며 안타까움을 호소하는 미영을 보며 소녀들이 눈을 번뜩였다. 상상은 자유지만 지금은 그것마저도 불쾌할 정도로 예민해졌다.

그 뒤로도 이야기는 이어졌다. 유리가 대화를 주도하고, 순규와 수영이 의견을 내는 방향이었다. 미영은 시도 때도 없이 상상으로 만족하려다가 유리에게 제지당하는 쪽이었고, 효연은 주로 듣는 포지션이었다.

한참동안 대화를 나누었음에도 뚜렷한 대책이 떠오르지 않자, 유리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후우! 정말 방법이 없을까?”

“…그러고 보니 한 가지 소스가 있는데.”

여태까지 침묵하고 있던 효연이 손을 들며 말문을 뗀다.

“소스?”

“그래.”

“뭔데?”

“난 태연이가 창현이랑 그것을 하는 장면을 목격했거든.”

“그래서? 자세히 말해봐.”

눈을 반짝인 소녀들이 효연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그리고 효연의 입에서 당시 정황에 대해 자세한 서술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소녀들의 눈에 빛이 반짝였다. 특히 입가에 미소를 지은 미영과 유리는 서로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나직이 끄덕인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었다.


“자, 어디 할 말이 있으면 해봐.”

다시 거실에 모인 소녀들을 보며 태연은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말한다.

미영의 페이스에 휘말려 시간을 내줬지만 태연은 그녀가 어찌하여 시간을 벌고자 했는지 이미 눈치 챈 상황이었다.

‘아마 궁리할 시간이 필요했겠지?’

자신이 창현과 딥 키스를 했다는 건 꽤나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단순한 키스만으로 경악에 빠질 정도인데 혀와 혀가 설왕설래하는 특급 진도는 그녀들로서 엄두를 낼 수준이 아니었다.

물론 태연의 경우 누님 포스를 풍기며 창현 본인의 의사는 반영되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돌격하여 설왕설래를 하는데 실패했지만 어찌 되었든 딥 키스는 딥 키스였다.

쌍방통행이 아니라 일방통행이라는 결정적인 단점이 있지만 이미 멤버들에게 산전수전 공중전을 겪은 태연이 자신의 약점을 노출할 리 없다.

어디 해볼 테면 해보라는 듯 자신감이 넘치는 그녀의 태도.

그것이 마치 승자의 여유인 것 같아서 수연과 막내 라인 두 명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아무리 좋아한다 선언을 해도, 키스를 했다 해도, 도저히 태연을 뛰어넘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모의를 마친 방에서 유리가 대표로 나서며 태연의 성과에 찬사(?)를 보낸다. 한 사람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을 펼치는 사이였지만 태연이 이룩한 성과는 놀라운 것이었다.

“태연이 네가 거기까지 진도를 나간 것은 대단하게 생각해.”

“대단한 정도가 아닐 텐데? 난 너희들이 이쯤에서 포기해줬으면 좋겠어.”

“왜?”

“난 이미 창현이랑 거기까지 간 관계야. 한순간의 흔들림으로 수연이랑 키스를 했지만 더 깊은 관계로 간 건 나라고. 더 감정이 깊어지기 전에 너희들이 포기해줬으면 해.”

“…….”

“더 이상 진행되면 우리 사이만 나빠질 뿐이야. 난 그렇게 되길 원하지 않아. 우리 모두 청소년기를 바쳐 연습생 생활을 거쳐 왔고, 큰 위기 없이 힘을 합쳐 여기까지 왔어. 이제 막 인기를 얻어 모두가 잘 되려고 하는 때에 이런 일이 일어나면 좋지 않다고 생각해.”

사랑도 중요했지만 소녀시대도 중요했다.

태연 같은 경우 연습생으로 늦게 들어온 축에 속했기에, 데뷔 직후 자신에게 몰려드는 인기가 다른 멤버들에 대한 미안함으로 승화되었다. 그러다 <Gee>가 잘되면서 모든 멤버들이 잘될 기회가 왔는데, 사랑 문제로 멤버들이 감정적으로 쪼개지길 바라지 않았다.

이기적이지만 그것이 태연의 솔직한 마음이었다.

얼핏 듣기에는 옳은 말 같지만 유리는 그녀의 속내를 정확하게 꿰뚫어 보았다.

“네 말은 이기적이야.”

“이기적인 건 알아. 하지만 이건 너희들을 위해 하는 말이야. 난 너희들이 상처받지 않길 바라.”

“흐응, 그래?”

“……”

이번에는 태연이 입을 다물었다. 콧소리와 함께 묘한 표정을 짓는 유리를 보며 불안한 느낌이 물씬 들었다.

왜 저런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일까.

자신의 속내를 꿰뚫어 보는 것 같은 유리가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태연을 스윽 훑어보더니 말한다.

“그러니까, 태연이 네 말은 지금 너와 창현이가 깊은 관계까지 갔으니 우리가 모두 포기해줬으면 좋겠다는 거네?”

“맞아.”

“우리 태연이가 참 못됐구나.”

“…뭐라고?”

태연의 표정이 급변한다. 그럼에도 유리는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는다.

“못됐다고.”

“내가 왜 못됐다는 거야? 이유를 설명하지 않으면 나 화낼 거야.”

표정을 굳힌 태연이 으름장을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유리는 오히려 입가에 미소를 짓는다.

뭔가 저 여유로움은.

마음에 들지 않은 태연이 미간을 모으자, 유리가 천천히 입을 연다.

“네가 창현이랑 딥 키스를 했다고 쳐. 정말 깊은 관계에서 우러나오는 관계였다면 나는 순순히 손을 털고 포기를 했을 거야. 하지만 태연아. 그 딥 키스가 정말 깊은 관계에서 우러나오는 거였을까?”

“…무슨 말이야?”

속에서 쿵! 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태연은 애써 표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그러나 유리의 공격은 연이어 펼쳐졌다.

“모른 척 시미치 떼도 소용없다고. 우리 중에는 이미 태연이 네가 창현이와 애정행각을 펼친 장면을 본 사람이 있으니까. 전주 갔다 왔다고 거짓말을 한 채 밤늦게 들어온 그 날 말이지.”

콰과과광!

태연의 머릿속에서 천둥이 울려 퍼졌다.

빠른 속도로 표정이 변한 그녀의 고개가 효연에게 향한다. 시선을 받은 효연은 어깨를 으쓱하며 입가에 미소를 지어 보인다.

다시 유리에게 시선을 옮기자, 주도권을 잡은 그녀는 한껏 고압적인 자세가 되어 입가에 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참 대단하지? 슬럼프에 빠진 창현이에게 사랑을 깨닫게 해주겠다는 명목으로 하루 여자 친구를 해주면서 이것저것 다 해보다니. 머리를 쓰는 캐릭터 역할은 나랑 미영이가 아니라 태연이가 해야 할 것 같아.”

아무렇지 않은 척 이야기를 하지만 그녀의 눈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어찌 열받지 않을까.

창현이가 힘든 시절을 절묘하게 간파하여 하루 동안 여자 친구 역할을 하며 꿈에도 그리던 이런 짓(?) 저런 짓(?)을 합법적으로 마음껏 해보았을 텐데.

내 남자(?)가 다른 여자에게 이리 주물럭, 저리 주물럭 당했을 것을 생각하니 냉정함을 유지하는 것이 힘든 유리였다.

“후읍! 후!”

분기가 치밀어 오르는지 호흡을 고른다. 그녀가 핀치 상태에 이른 것을 파악한 미영이 대신하여 앞으로 나선다.

“너무했어. 설마 그 좋은 기회를 살려서 그럴 줄은. 나도 하고 싶었는데.”

“…….”

모든 진실을 간파한 태연은 입을 다물었다. 독재자 수연을 물리친 뒤 자만에 빠진 것이 결정적인 실수였다. 하나하나가 가진 것은 자신에게 비할 바가 되지 않았지만, 멤버들이 갖고 있는 정보를 합치다 보니 퍼즐처럼 하나의 그림이 완성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사실이 밝혀지자, 정황을 알지 못하는 세 소녀 또한 경악한 표정으로 태연을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희망이 생겨났다. 그녀가 선언한 것 때문에 이미 창현과 상당히 깊은 관계까지 갔으리라 생각하며 절망했지만 하늘은 아직 자신들을 버리지 않았다.

차분히 호흡을 고른 유리가 태연에게 말한다.

“정식으로 교제하지 않은 상황에서 창현이와 딥 키스를 했다고 하여 우리가 인정할 거라 생각한 건 아니겠지, 탱구 씨?”

“윽.”

“수연이가 키스를 했다고 선언했는데 그 가운데 딥 키스를 했다면 그건 연인의 상징이 아니라, 불륜의 상징이 되어버린다고.”

“부, 불륜.”

충격을 받은 태연의 몸이 거세게 흔들린다.

자신이 갖고 있는 추억이자, 자랑이던 딥 키스는 한순간에 불륜의 상징으로 전락해버렸다.

절망에 빠져버린 태연을 보며 유리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럼 이제 천천히 그림을 다시 그려볼까?”

흐름이 바뀌었다.


남은 멤버들의 협동으로 위기를 이겨내는데 성공했지만 아직 상황이 모두 끝난 것은 아니다.

자신의 절대적인 우위를 저버릴 수 없었던 태연은 쉽게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

불륜이라는 단어에 강렬한 충격을 받았지만 딥 키스를 해보지 않은 루저(?)들보다는 아직 자신이 우위에 있음이 틀림 없다.

“다시 그림을 그려보자는 건 무슨 뜻이야?”

“네가 생각하는 것과 같지 않을까?”

“…난 인정할 수 없어. 내가 불륜이라고 내가 어째서 불륜인 건데?”

“분명 키스는 수연이가 먼저 했잖아. 통상적으로 보면 먼저 찜을 한 건 수연인데 태연이 네가 중간에서 가로챈 거지. 이 정도면 불륜이라 할 수 있지 않겠어?”

“하지만 수연이는 창현이랑 사귀는 사이가 아니잖아!”

악을 지르며 발악하는 태연이었지만 이미 상황은 끝난 상태였다. 그녀를 제외한 대다수 멤버들은 함께 공동전선을 펼치기로 합의한 상황이었고, 여러 명이서 한 명을 바보로 만드는 것은 무척 간단한 일이다.

“그럼 너랑 사귀는 사이고?”

“윽!”

“수연이도, 너도 강제로 했다는 건 변함이 없잖아. 그럼 그림을 새로 그리는 것이 옳지 않겠어? 안 그래?”

“끙!”

반박할 여지가 없었기에 앓는 소리만 내는 태연이었다. 진도를 나간 부분에 있어서 자신이 가장 앞선 것은 사실이었지만 강제로 했다는 점에 있어 수연과 함께 다를 바 없는 원점 상황으로 되돌려놓았다.

다 된 밥에 코 빠뜨린 격이기에 태연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후후, 너무 방심했다고, 탱구.”

“이익!”

버럭 소리치고 싶지만 분한 마음을 가까스로 삭인다.

그 모습을 여유로이 지켜보며 유리가 주변을 둘러본다.

“그럼 다시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잠깐만요.”

“왜?”

원래대로 돌아가려는 흐름을 끊은 것은 윤아였다. 태연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던 상황을 유리가 끊어준 것은 다행이지만, 자신의 권리를 포기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나에게 기회야.’

혼란 속에 기회는 오는 법. 영악한 사슴은 본능적으로 자신에게 기회가 되돌아 왔음을 깨닫고 치고 나갔다.

“결국에는 태연 언니가 창현이한테 무엇을 했건 무효라는 거잖라요.”

차마 딥 키스라는 단어를 언급할 수 없었다. 그것만 생각하면 속이 부글부글 끓어 질투심이 폭발할 것 같았으니까. 깊디 깊은 무한태연교의 신앙심도 결국 사랑 앞에서는 부질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수연 언니도, 태연 언니도 무효라면 제가 가장 유리한 거죠? 언니들에게 가장 먼저 창현이를 좋아한다고 밝힌 것은 저니까요.”

“그렇게 따지면 가장 먼저 좋아한 것은 주현이잖아.”

“그래도 제가 제일 먼저 밝혔잖아요.”

“후후, 그렇긴 하다만 이미 복잡하게 얽힌 상황이야. 윤아 네 주장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이곳에 있을 거라 생각해?”

“…….”

낮게 웃으며 말하는 유리의 모습에 윤아는 입을 닫고 주변을 둘러본다. 그리고 자신이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글거리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멤버들은 절대 물러설 수 없는 배수의 진을 치고 있다.

어떤 말로도 설득은 불가능해보였다.

“하아.”

“봤지? 윤아 네 말은 옳지만 상황은 이미 최악을 향해 달려가고 있어. 최악의 상황을 피하는 것은 모든 것을 재정립하는 수밖에 없지.”

“어떻게 재정립한다는 거야?”

첫 키스로 모든 멤버들을 올킬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던 수연이 톡 쏘아붙이듯 묻자, 유리 옆에 앉아있던 미영이 눈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간단해. 모든 걸 백지 상태로 돌려놓는 거지.”

그녀의 눈웃음은 아직 폭풍이 끝나지 않았음을 알리고 있었다.


살살 눈웃음을 치며 보이는 모습은 그녀의 평소 별명이던 띨파니를 연상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지만 실제 그 내용은 쉽게 넘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백지 상태로 되돌리다니?

특히 키스니 딥 키스로 인해 자신이 절대적 우위를 점했다고 생각하던 태연과 수연으로서는 납득하기 힘든 말이 아닐 수 없다.

“무슨 뜻이야?”

표정을 굳힌 수연이 냉랭한 어조로 한기를 풀풀 풍겼다.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것인지 미영은 여전히 생글생글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간단해. 여태까지 해왔던 걸 모두 백지 상태로 돌리자는 거야, 제시.”

“내가 왜 그래야지?”

“이미 우리들의 룰은 깨졌거든.”

“……?”

수연과 태연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던 윤아와 주현도 무슨 말인지 알지 못하겠다는 듯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는데.”

“우리가 팀을 결성하고, 영원히 함께 가자고 대화를 할 때 이랬었어. 우정 사이에 사랑이 끼어들면 힘없이 깨질 수 있다고. 그래서 누군가 한 명이 말하면 끼어들지 않기로 규칙을 세워둔 것이고.”

“음.”

“사실 규칙만으로 따지면 우선권은 윤아에게 있다고 봐.”

“……!”

“맞아요! 역시 미영 언니가 정확해요!”

자신의 편을 들어주는 미영의 말에 윤아가 환호하며 동조했다.

하지만 연적인 미영이 순순히 윤아의 편을 들 리 없다.

의도는 다음에 바로 드러났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

“에?”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뱅뱅 돌려 말하는 미영의 말에 윤아는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고, 수연은 싸늘한 어조로 그녀의 대답을 독촉하였다.

차가운 냉기가 자신을 휘감자, 미영은 혀를 내밀며 귀여운 표정을 지었다.

“헤헤! 그때 우리가 세운 규칙은 좋아하는 사람을 서로 좋아하지 말자는 취지였잖아.”

“그랬지. 그런데 귀여운 척은 하지 마. 나한테는 통하지 않으니까. 용건만 말해.”

“응, 내 말은 지금 상황이 이미 규칙을 벗어난 상황이란 거지.”

“무슨 말이에요, 언니.”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걸 느낀 윤아마저 재촉하자, 미영은 입 꼬리를 말아 올린다.

여태까지 보여주었던 귀엽고 띨띨한 모습과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자세한 정황을 모르는 소녀들은 미영의 모습을 보고 모두 똑같은 생각을 하였다.

‘소리장도!’

웃음 속에 칼을 감추고 있다는 뜻의 말로, 지금 미영의 모습은 이 단어로 표현이 될 듯 싶었다. 평소와 다를 바 없지만 저 미소 속에는 방금 전과 차별화 되는 폭풍을 숨기고 있었다.

“간단해. 규칙을 세울 때는 멤버가 같은 사람을 좋아할까 염려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 이미 선언하기도 전에 다른 사람들도 모두 같은 마음이잖아? 여기에 룰이 효과가 있을까? 안 그래, 윤아야?”

“…….”

윤아의 눈썹이 파르르 떨린다. 두뇌 회전이 빠르지 않아도 풀어서 말한 미영이 전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빠르게 회전한 그녀의 머릿속에 마침내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하자, 안색이 창백하게 변한다.

“그, 그렇다는 건 제가 선언한 건…….”

“응! 아무 효과도 없는 메아리였단 거지.”

“말도 안 돼요!”

“말이 안 되다니?”

“부, 분명 규칙에는 가장 먼저 좋아한다고 말한 사람에게 우선권이 있다고요. 그러니 저를 위해서 언니들이 마음을 포기해줘야죠…….”

말을 더듬던 윤아의 목소리가 점점 힘을 잃어갔다.

그에 반해 맞은편에 있는 미영은 태평했다. 평소 윤아의 장난에 번번이 당하던 것을 감안하면 먹이사슬이 완전히 뒤바뀌어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하지만 상황이 다른 걸.”

“그, 그래도 규칙이잖아요.”

“상황이 다르니 어쩔 수 없지.”

“이익! 그래도 제게 우선권이 있어요!”

“그건 윤아 네 생각일 뿐이야. 다른 멤버들도 그렇게 생각할 거라 생각해?”

“…….”

입을 꾹 다문 윤아가 주변을 둘러보다가 이내 허탈한 표정이 되었다.

다른 소녀들은 모두 미영의 말에 공감하는 눈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자신의 우선권은?

졸지에 1vs8이 되어버린 것 같아 윤아는 끝까지 한 가닥 희망을 걸고 끝까지 미영을 추궁하던 수연에게 고개를 돌렸다.

“어, 언니.”

“나도 파니의 생각이 옳은 것 같아. 확실히 규칙을 만들 때 다른 사람들이 좋아할까 싶어서 만든 건데 이미 모두가 좋아해버렸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그럼 규칙은 왜 세운 건데요!”

“이런 일이 있을 줄 몰랐던 거지. 설마 아홉 명이 모두 한 사람을 좋아할 줄 누가 알았겠어. 윤아 넌 지금 이 상황이 믿겨?”

“그, 그건…….”

차마 반박할 수 없었다. 지금 그녀도 눈앞의 상황이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지경이었다. <Gee>로 일약 국민 걸 그룹에 올라선 소녀시대 멤버 전원이 한 사람을 좋아하다니. 밖에 나가면 자신을 좋아하는 남자들이 수두룩했고, 남자 아이돌도 종종 대시가 들어올 정도로 인기가 상승한 상황이다. 그런데 아홉 명 모두가 한 사람을 좋아하다니. 직접 겪어보고 있지만 실감이 나지 않았다.

“하, 하, 하…….”

허탈한 마음에 나오는 건 웃음뿐이었다.

넋을 놓은 윤아의 모습을 보던 수연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녀 또한 졸지에 여덟 명의 경쟁자가 생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 이렇게 되었다면 남은 것은 정정당당하게 경쟁을 하여 승리자가 되는 것뿐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어.’

이 모든 상황이 저 생글거리는 미영과 음흉함으르 숨기고 있는 유리에게서 나왔다는 게 느껴졌다. 앞으로 두 사람을 가장 경계해야겠다고 마음먹으며 수연이 입을 열었다.

“그렇게 허탈해 할 필요 없어. 모든 것을 초기화 하겠다는 건 다시 시작하겠다는 거니까. 자신이 있다면 당당히 임할 테고 자신이 없으면 포기하겠지. 윤아 넌 자신감이 없나 봐.”

“제가 왜 자신감이 없어요! 제가 마음만 먹으면 창현이는 금방 넘어온다고요!”

자신의 매력을 깎아내리는 수연의 말에 정신을 차린 윤아가 버럭 소리를 지른다.

“가장 먼저 좋아했다고 주장하더니 창현이를 꼬시지도 못했잖아.”

“그, 그건…….”

양주처럼 독한 수연의 말에 윤아는 침묵했다. 하지만 소득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녀의 말로 인해 윤아는 지금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정신을 차린 윤아를 외면한 수연은 미영을 날카롭게 쏘아보며 말했다.

“어쨌거나 이런 계획을 짜다니 얕볼 수 없어. 처음 볼 때는 그저 맹한 앤 줄 알았는데.”

“헤헤, 사랑이 날 그렇게 만들었어.”

“흥! 그렇게 귀여운 척 웃음을 지어도 난 믿지 않아.”

“이잉, 왜 그래. 지금은 연적이지만 우리는 친한 친구잖아.”

그러면서 양팔을 뻗은 미영이 수연의 몸을 끌어안는다.

“이거 놔! 엉겨 붙지 마!”

“칫! 분위기 좀 풀어보려 했더니 너무 거칠어.”

입을 불퉁하게 내민 채 투정부리는 모습은 영락없는 어린 아이다. 그러나 지금 상황을 이렇게 이끈 주역 중 하나가 그녀였기에 수연은 방심을 풀지 않고 말한다.

“방금 그 이야기를 한 건 그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이 있어서 꺼낸 거겠지?”

“역시 제시야. 후후!”

“아까 방에 모여서 이런 계획을 짜고 있었군? 그럼 생각해둔 바를 풀어봐.”

“그 이야기는 내가 하도록 할게.”

상황을 지켜보던 유리가 앞으로 나선다. 계획한 대로 상황이 흘러가자 그녀의 입가에 만족의 미소가 걸린 상태였다. 이제 남은 것은 새로운 규칙을 정하여 쟁탈전을 벌이기만 하면 된다.

앞으로 나서는 유리의 모습은 마치 전쟁에 승리하여 전리품을 분배하는 것과 흡사했다.

진정한 전쟁은 지금부터 시작이었지만.

치열한 접전이 예상되었지만 이런 난세야 말로 새로운 기회를 낳는 법이다. 그 속에서 승리할 자신이 있었고, 구체적인 방안 또한 존재했다.

머릿속으로 계산을 마친 유리는 자신의 구상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고개를 돌린 유리가 윤아에게 시선을 옮긴다. 잔뜩 불퉁한 표정을 지은 그녀의 얼굴이 유리의 시야에 잡혔다. 가장 먼저 선언을 했음에도 권리를 인정받지 못하자, 윤아의 불만은 극에 다다라 있었다.

“윤아 넌 승복하지 못하겠어?”

“솔직히 이건 아니잖아요.”

띨파니라는 별명답지 않게 미영이 잘 풀어서 이야기했지만 윤아는 납득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러자 유리도 입가에 짓고 있던 미소를 지우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한다.

“미영이가 말했던 대로 규칙은 이미 유명무실해졌어. 그걸 아무리 주장해봤자 다른 사람들이 마음을 되돌릴 리도 없고. 윤아 너라면 순순히 양보할 수 있을 것 같아?”

“…아니요.”

“그렇지? 그런데 우리라고 순순히 양보할 것 같니?”

“하지만 그럴 때를 대비하여 만든 규칙이잖아요. 이건 너무 불공평해요.”

절대 쉽게 물러서지 않는 윤아였다. 지금에 와서는 억지에 가깝지만 그녀는 끝까지 물고 늘어졌다.

“불공평한 게 아니라 이런 경우가 없어서 그런 거야. 지금 억지 부리는 거 하나도 좋을 거 없다? 괜히 그렇게 되면 다들 너만 견제할 뿐이야.”

“…….”

그제야 자신에게 곱지 않은 시선이 집중되고 있음을 깨달은 윤아는 입을 다물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계속해서 고집을 부리다가는 정말 빼도 박도 못하게 될 것 같았다.

“상황은 변했으니 새로운 규칙을 마련해야 된다고 생각해.”

“어떻게?”

잠자코 지켜보던 태연이 불퉁한 눈으로 유리를 바라보지만 그녀는 표정 변화없이 대답했다.

“그건 지금부터 천천히 논의를 해야지.”

“유리 널 믿어야 한다고?”

“아, 물론 규칙을 정하는데 참가하고 싶지 않다면 참가하지 않아도 돼. 물론 그렇게 되면 마음을 접거나 도태되거나 둘 중 하나겠지.”

“…결국에는 참가해야 한다는 거네.”

“포기하고 싶으면 참가하지 않아도 되고.”

생글생글 웃는 유리의 모습이 마치 수연에게 권력을 빼앗기며 배신당하던 때 같아 태연은 톡 쏘아붙였다.

“참가할 거야!”

“그럴 거라 생각했어. 그럼 규칙을 다시 정해볼까? 우리 막내도 그 부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공정한 경쟁이라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렇지? 막내라면 대화가 통할 거라 생각했어.”

그러면서 빠른 속도로 두 사람을 훑고 지나간다.

“……!”

졸지에 대화가 통하지 않은 사람이 된 태연과 윤아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하지만 지금의 흐름은 새로운 규칙을 정하는 것으로 흐르고 있는 상황이다. 괜히 끼어들어봤자 본전도 찾지 못할 거란 생각이 들었기에 입을 꾹 다물었다.

아니, 윤아는 다물고 있었지만 태연은 참지 못하고 질문을 던졌다.

“규칙은 어떻게 할 건데?”

“지금부터 정할 거라니까?”

“아까 너희들이 방안에서 쑥덕거린 걸 모른다고 생각해?”

“아, 그 부분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 우리끼리 먼저 정하려고 했는데 의견이 도저히 합쳐지지 않더라고.”

태연의 고개가 순규에게 향하며 묻는다.

“정말이야?”

“정말이야. 다들 자기들한테 어찌나 유리하게 하려고 하던지.”

“아, 완전 대박이었어. 특히 저 띨파니가 가장 여우야. 조심해라, 탱구. 저거 웃으면서 등에 칼 꽂을 것이야.”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하는 순규와, 이를 부득 갈더니 미영을 가리키며 경고를 던져주는 친절한 수영이었다.

불신감이 담긴 태연의 시선이 미영이 우는 표정을 지었다.

“힝, 내가 언제 그랬다고.”

“그러셔? 띨파니 네 검은 속내는 내가 잘 알고 있으니 딴청 부리지 말라고.”

“…….”

미영이 고개를 돌리자, 숙소는 침묵에 빠져들었다.

경쟁자 하나가 다굴(?) 당할 조짐을 보이자 손을 놓고 있던 유리는 미영의 무사 생존에 아쉬움을 금치 못하며 회의를 이어나간다.

“…이야기가 잠시 다른 곳으로 빠졌는데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고.”

“네가 사회를 맡았잖아. 그러니 회의를 주재하도록 해.”

“내가 어쩌다가… 에휴! 어쩔 수 없지. 어쨌든 내가 생각한 거랑 애들의 생각은…….”

그렇게 시작된 회의는 길게 이어지기 시작하였다.

사회자 역할을 맡게 된 유리는 은근슬쩍 자신에게 유리한 조항을 집어넣으려 하였고, 같은 두뇌 캐릭터인 미영이 그것을 저지하면서 번번이 회의는 제자리걸음을 하였다. 다른 소녀들도 의견을 제시하였지만 모두 같은 마음, 유유상종이라는 단어가 딱 어울릴 정도로 개인주의적인 생각이었기에 통상적인 것만 빼고 진척이 되질 않았다.

무려 두 시간 동안 진행된 회의의 진도는 결국 처음이었다.

날이 어둑어둑해지며, 저녁시간이 다가오자 진이 빠진 유리가 허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뭐야, 그럼 결국 어쩌자는 건데?”

“…….”

모두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들의 눈은 밤하늘에 뜬 별처럼 반짝였다. 체력은 고갈되고 있지만 한순간 정신을 놓을 수 없는 상황의 연속이다. 여기에서 방심하면 자신에게 치명적인 조항이 들어가서 을사늑약에 버금가는 불평등 조약이 성립될 수도 있는 노릇이다.

그때 나선 것은 여태까지 묵묵히 이야기만 듣고 있던 주현이었다.

“제가 의견을 제시해도 될까요?”

“내봐. 여태까지 한 마디도 안하더니.”

“제 생각은 간단해요. 어차피 언니들은 창현이를 포기할 생각이 없으시잖아요.”

“물론이지.”

유리가 대표로 대답을 하고, 다른 소녀들도 모두 양보할 의사가 없음을 고개 끄덕여 표시한다. 지친 기색이 역력함에도 포기할 기색은 보이지 않자 늘어나는 것은 한숨뿐이었다.

하지만 이미 피할 수 없는 지경에 처한 만큼 정면돌파뿐이다.

“그럼 규칙은 무의미하다고 봐요. 세세하게 짜봤자 결국 이번처럼 파괴될 것 같은데, 그럴 거면 차라리 딱 하나의 규칙만 세우는 게 어때요?”

“딱 하나?”

“네.”

“그게 뭔데?”

“바로 창현이의 마음을 얻는 사람이 곧 승자. 어때요?”

“…….”

숙소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서서히 해가 지며 붉은 노을빛이 숙소에 스며들었지만 누구도 입을 열 생각이 없었다.

주현의 말은 그녀들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여태까지 복잡하게 규칙을 짰던 것은 자신에게 유리하기 위함도 있지만 다른 멤버를 견제하기 위한 것도 있다.

그러나 바보가 아닌 이상 그러한 의도에 말려들 리 만무했다.

그렇다면 차라리 규칙이 아예 없는 것은 어떨까?

고민하는 소녀들에게 주현이 쐐기를 박는다.

“저희들이 이렇게 떠들어봤자 어차피 창현이의 마음을 얻는 사람이 승자에요. 게다가 규칙이 있어봤자 그걸 지키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요. 창현의 의사랑 상관없이 진도를 나간 분도 계시는데요.”

순간 날카롭게 변한 주현의 시선이 태연과 수연을 훑는다. 두 사람은 차마 그녀의 눈빛을 받아내지 못한 채 고개를 돌려 헛기침을 한다.

“험험.”

“음!”

주현의 제안에 긍정적인 분위기가 만들어지는 가운데, 가장 먼저 찬성 의견을 내비친 것은 이번 일을 일으킨 사태의 주범 윤아였다.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어차피 진흙탕 싸움이 된 만큼 제대로 싸워보죠. 전 절대로 질 생각이 없어요. 물론! 언니들은 생각이 다를 수도 있지만요.”

꽤 도전적인 눈으로 소녀들을 바라본다. 내리까는 눈이 마치 자신을 비웃는 것 같아 욱하는 마음이 밑에서부터 치밀어 오른다.

“윤아 제법인데? 도발도 할 줄 알고.”

“흥! 원래대로라면 창현이를 독점해야 하는 건 저였다고요.”

“뭐 그랬을 수도 있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잖아? 어쨌든 난 막내의 의견이 좋은 것 같아. 세세한 조항 따위 있어봤자 지킬 것 같지 않고, 윤아의 말처럼 진흙탕 싸움을 펼쳐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규칙이 없다는 건 방해를 해도 된다는 건가?”

“물론이야! 그럴 능력만 있다면.”

“흐흥! 재미있는데?”

윤아가 기폭제가 되어 다른 소녀들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특히 한 명이 잘나갈 경우 방해를 해도 된다는 점이 무척 좋게 느껴졌다.

그러자 태연이 나서면서 서서히 달아오르는 분위기를 식힌다.

“방해를 하더라도 정도껏 해야 된다고 생각해. 우리가 이렇게 규칙을 정했던 것도 결국 팀워크를 깨지 않기 위해서잖아?”

“그건 맞아.”

“그러니까 정도껏 하라는 거지. 난 창현이를 좋아하지만 우리 팀이 깨지는 것도 원하지 않아. 내 사랑도 소중하지만 내 꿈도 소중하니까. 그리고 꿈을 같이하는 너희들도 소중하게 생각해. 그러니 경쟁을 하더라도 도를 넘지는 말도록 하자.”

“…….”

분위기를 잡고 말하자, 멈칫한 다른 소녀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태연의 말처럼 여태까지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성립되었던 것은 각자가 팀을 망치는 행동을 하기 싫어서였다. 그 근원은 서로를 생각하는 배려가 있었고, 꿈을 같이하는 동료의식이 존재했다.

“하더라도 페어 플레이. 난 그걸 원해.”

“물론이야. 그렇게 되면 창현이는 나한테 넘어올 수밖에 없으니까.”

“어쭈? 최수영 너 많이 컸다.”

“난 원래 많이 컸어, 이 단신 순규야. 난쟁이 똥자루 만한 너랑 창현이가 그림이 된다고 생각하냐.”

“뭐? 이게 그냥…….”

순규와 수영이 투닥거리자, 분위기는 삽시간에 활발하게 변해갔다.

방금 전까지 남자 문제로 심각한 분위기를 야기한 것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로.

그것이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한 그녀들의 의도적인 행동임을 알고는 다른 소녀들은 미소를 지었다.


소녀시대 숙소에서 대격변이 일어나고 있는 순간, 창현 또한 나름대로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어쨌거나 무난하게 하루가 지나가긴 했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몸을 묻는다. 윤아와 스캔들이 터지고 주변이 불같이 일어나 한바탕 몸살을 앓아야만 했다.

인터넷은 물론이고, 아는 지인들 또한 은근한 어조로 물어보는 등, 한바탕 홍역을 앓다가 나은 기분이랄까? 그나마 AA엔터테인먼트와 SM엔터테인먼트가 빠르게 연계하여 해결하지 않았으면 더 귀찮아질 뻔했다.

“그나저나 사촌 오빠라니, 참 수단도 잘 만들어낸단 말이야.”

아침에 터진 일을 한두 시간만에 정정 기사를 내고, 수습 단계에 들어간 걸 보면서 새삼 언론 플레이가 얼마나 대단한지 깨달을 수 있었다.

“이젠 좀 쉬어야지.”

정신적으로 여러 모로 피곤했기에 한숨 돌릴 겸 침대에 눕는다. 그리고 눈을 감고 조용히 시간 흐르는 걸 즐기고 있을 때, 핸드폰이 울린다.

♩♪♬

전화 건 상대를 본 창현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곧바로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창현아, 나야.

“아, 네. 누나.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잘 지냈지. 그런데 국내로 왔으면 좀 연락해주지 내가 꼭 연락을 해야겠어? 저번에도 대기실에서 잠깐 스치듯이 보기만 하고…….

서운함이 잔뜩 담긴 목소리에 창현은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모두 친한 누나들이었지만 그녀만큼은 자신에게 특별함이 있는 누나 아니였던가.

“하하! 미안해요. 정신이 없다보니 미처 신경 쓸 겨를이 없었어요.”

-그러니 이해해야지. 에휴!

“미안해요. 다음에는 신경 쓸게요.”

-그래줘. 많이 서운했단 말이야. 명색이 네 선배인데…….

“네, 알아서 모시겠습니다, 주현 선배님.”

창현에게 전화를 한 사람은 다름 아닌 주현이었다. 평소와 달리 그녀가 칭얼거리는 것 같은 느낌에 왠지 모를 이질감을 느끼며 궁금했던 점을 묻는다.

“그런데 그쪽 분위기는 어때요? 잘 해결되었나요?”

-응, 회사 쪽에서 잘 수습을 해줘서 문제없어. 스케줄도 지장 없이 진행될 것 같아. 윤아 언니는 모처럼 쉴 수 있겠다고 즐거워하다가 갑자기 슬퍼하고 있어.

“그래요? 하하! 그 모습이 연상되어서 웃기네요.”

-옆에서 보면 더 재미있어.

“보고 싶은데 아쉽네요.”

소소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창현의 입가에 미소가 걸린다. 이리저리 시달리며 머리가 복잡했는데 조금은 나아진 기분이다.

그렇게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낼 때, 통화를 마무리하면서 주현이 한 마디 한다.

-창현아.

“네?”

-앞으로 조금 괴로울 거야.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니야. 그냥 혼잣말이야. 오늘 고생했을 텐데 푹 쉬어. 알았지?

“네, 알았어요. 누나도 푹 쉬세요.”

-응, 그리고…… 아니야, 잘 자.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리던 주현은 할 말을 포기하고는 잘 자라는 말과 함께 그대로 전화를 끊는다.

전화를 받는 포즈를 취한 채 창현은 방금 전 들려온 작은 목소리에 고개를 갸웃한다.

“…포기하지 않고 물러서지도 않을 거라고? 무슨 뜻이지?”

무슨 뜻인지는 조만간 몸으로 직접 겪게 될 듯하다.

진정한 헬 게이트가 누구에게 열렸는지는 두고보아야 할 일이다.




제101장 이제부터 시작이다




현과 윤아의 스캔들로 인해 대한민국이 한차례 떠들썩했지만 그 소동은 만 하루가 지나지 않아 가라앉았다. 연예계 언론의 큰 손인 SM엔터테인먼트와 AA엔터테인먼트의 절묘한 호흡이 존재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새벽부터 터져 나오기 시작한 스캔들은 아침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범람하기 시작하였다. 각종 추측성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고, 네티즌 또한 그에 편승하여 본격적으로 불이 붙어 어느 것이 진실이고, 어느 것이 소설인지 분간을 하지 못할 무렵, 정정 기사가 나오면서 분위기를 반전시키는데 성공했다.

결국 수많은 스캔들 기사 중 하나로 치부되면서 가라앉게 되었고, 각종 스캔들에 면역력이 존재하던 네티즌 또한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으며 그러려니 하는 기색이었다.

그러니 이번 스캔들은 그들이 보지 못하는 점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바로 스캔들 당사자의 마음을 숨김없게 만들어 놓은 것.

본격적으로 불이 붙게 만들어놓음으로써 저돌적으로 달려들게 만들었다.

당장의 정정 기사에 사귀지 않는다는 것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지만 이번 일은 오히려 본격적인 폭풍 전 고요함에 불과했다.

지금부터는 소리 없는 치열한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예정이었다.


다음 날, 연예 뉴스란을 뒤덮듯이 하던 스캔들 기사가 어느 정도 안정된 기미를 보이자 창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가라앉았네요.”

“힘을 좀 쓴 탓이지. 감사하게 여겨라.”

“그야 물론이죠.”

핀잔하듯 말하는 석규의 행동에 불퉁한 마음이 들었지만 순순히 대답했다.

“그런데 이렇게 걸릴 줄은 몰랐는데.”

“이상한 느낌을 받긴 했었어요. 그래서 얼굴을 감추는데 신경을 썼는데 윤아 누나는 미처 그러지 못한 거죠.”

“거 참, 네 녀석이 눈치 챈 건 그렇다 치고, 왜 윤아 양한테는 이야기를 하지 않은 게냐? 설마 물 먹이려고 그런 건 아니겠지?”

“제가 그럴 리 없잖아요.”

윤아가 들으면 펄쩍 뛸 소리를 하자, 먼저 펄쩍 뛰는 창현이었다. 자신과 스캔들이 나면서 상당히 고생했을 텐데,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고 하면 무슨 반응을 보일지 몰랐다.

“저도 이상한 느낌만 받아서 조언을 해줄 수 없었어요.”

“음, 그건 그래 보인다. 저렇게 해맑게 웃고 있는 얼굴에 뭐라 하기 힘들겠지.”

스캔들이 난 사진은 환하게 웃음을 짓고 있는 윤아였다. 사진이었지만 그 속에 느껴지는 감정은 보는 사람도 느껴질 만큼 진실된 것이었다.

“그런데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닌 거냐?”

“…물론이죠, 하하!”

눈을 가늘게 뜨고 묻자, 창현이 웃음을 지었다.

여느 때와 같은 모습이건만 석규는 창현의 행동에 바뀐 점을 눈치 챌 수 있었다.

‘달라졌군.’

예전이라면 단칼에 아무 사이도 아니라 부인하면서 그저 친한 누나라는 사실을 덧붙였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에 대한 사실을 덧붙이지도 않고, 확연하게 부인하지도 않았다.

이것은 어느 정도 이성에 대해 눈을 뜨고 있다는 뜻. 나쁘지 않은 변화였다.

“아쉬운데? 윤아라면 너랑 뮤직비디오를 촬영한 경험도 있고, 나쁘지 않으리라 여겼건만.”

“아버지는 왜 매번 그런 쪽으로 몰아가시는 건지. 호동이 형도 아니고.”

중매(?) 전문가 호동과 석규를 비교하며 한숨을 푹 내쉬는 창현이다. 전혀 다른 사람이지만 두 사람 모두 사람을 곤혹스럽게 만들 정도로 탁월한 커플 엮어주기 능력을 보이고는 한다.

“그게 뭐 어때서? 나야 네가 연애를 한다면 찬성이다. 물론 평범한 소속사 사장이라면 반대했을 테지만 난 착한 사장님이니까. 하하!”

“착한 사장님은 무슨. 저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럼 뭔데?”

“악덕이죠. 소속 가수를 착취하지는 않지만 정신적으로 괴롭히길 즐기는.”

“뭐? 이 녀석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소리치지만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딱딱했던 창현의 모습이 어느 정도 부드럽게 풀려있는 것 같아 마음에 들었다.

“어쨌든 인연은 인연이구나. 윤아랑 그렇게 접점이 닿다니.”

“저도 신기했어요. 당시 제 안티가 당첨된 줄 알고 포기했는데 그렇게 연결될 줄은.”

“인연이라는 거겠지. 따지고 보면 네가 데뷔하기 전부터 알고 지낸 이들이 상당수 아니더냐? 그것만 봐도 보통 인연이 아니지.”

그 인연이 깊어져서 헤어나올 수 없는 늪으로 끌고 갔다는 점이 충분히 문제라면 문제였다.

사실을 잘 모르지만 어느 정도 눈치 채고 있는 석규로서는 이런 석고상 같은 녀석을 좋아하는 여인들에게 애도의 감정이 들었다.

“그야 그렇죠.”

“인연인 걸 알면 사귀어보라니까?”

“계속 몰아가지 좀 마세요. 뭘 사귀어요, 또.”

“거참, 넌 너무 진지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너무 머리로만 계산하려들면 죽을 때까지 연애는 꿈도 못꿀 거다.”

“…….”

정곡을 찌르는 석규의 말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린다.

그의 말마따나 요즘 자신이 너무 계산적인 것 같은 느낌을 종종 받고는 하였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네가 스스로 극복해야 할 문제겠지.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옆에서 일깨워주는 것 정도? 난 네가 모든 걸 잘 해내길 원한다. 연애를 하고, 사랑을 한다면 지금보다 훨씬 좋은 곡을 쓸 수 있을 것 같고.”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전 제가 좋은 곡을 쓰는 것도 실감이 나지 않아서요.”

“자신감을 갖는 게 좋다. 며칠 후면 출국을 해야 하는데 그런 마음은 좋지가 않아.”

스타는 항상 자신감이 넘쳐야 하고, 당당해야 한다. 처음에는 겸손한 이미지로 많은 사람에게 어필했지만 세계적인 스타가 된 현은 실력에 어울리는 당당한 이미지를 대중에게 선보여야 한다.

성격상 그 부분과 맞지 않는 창현은 부담스럽고 힘들어 하였다. 그가 미국에서 활동하는 기간이 길지 않은 까닭도 이러한 부분을 연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기간이 짧을 테니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만 확실히 마음은 정해두도록 해.”

“물론이에요.”

“나머지 부분은 걱정하지 말고. 네가 나갔다가 들어올 때면 스캔들도 진정될 테니… 아!”

따뜻한 아빠 미소로 창현을 안정시켜주던 석규가 짧은 감탄사를 흘리더니 그를 바라본다.

음흉함이 깃든 미소에 왠지 모를 불안함을 느낀 창현이 인상을 찌푸린다.

“왜 그러세요?”

“아무래도 스캔들이 진정될 것 같지는 않구나. 그러고 보니 너 윤아랑 같이 테일러의 뮤직비디오에 출연하지 않느냐?”

“아, 그러고 보니……”

깜빡 잊고 있던 사실이 떠오르자, 표정이 찡그려지는 창현이다. 스캔들이 터졌는데, 뮤직비디오에 함께 출연하면 국내에서 무슨 소식이 보도될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테일러 스위프트의 성향상 절대 무난한 스타일이 아닐 테니 그러한 논란은 더욱 가중될 가능성이 높았다.

“별 수 없지 않느냐, 모든 게 운명인 게지.”

위로를 해줘도 모자랄 망정 운명 타령만 하다니.

“에휴!”

전혀 위안이 되지 않는 석규의 말에 창현이 느는 건 한숨뿐이었다.


석규와 이야기를 마친 창현은 내심 머리가 복잡했다.

그는 아직 눈치 채지 못했다 생각하지만 창현 또한 어느 정도 자신의 변화를 눈치 챈 상태였다.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그냥 아는 누나라 칭했을 자신이 그렇게 말하지 못했다. 이러한 부분만 보아도 자신의 속에서 그녀를 생각하는 부분이 바뀌었다는 걸 뜻했다.

“게다가 주현 누나가 했던 말도 걸려.”

어제 밤 주현이 했던 이야기가 창현의 머릿속에 맴돌았다. 물러서지 않고, 포기하지도 않겠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인 걸까.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았기에 창현은 그 말을 쉬이 생각하지 않았다.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를 가지고 끙끙대던 창현은 이내 고개를 저어 고민을 털어버린다.

“괜히 머리만 복잡해지네.”

애초에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였다. 괜히 머리만 붙잡고 끙끙 앓는 것은 싫었기에 창현은 깊게 고민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주현의 굳은 의지가 담긴 목소리가 자꾸만 떠올랐다.

그에게 있어 주현은 상당히 특별한 존재였다. 음향총서를 얻고 과거의 음영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창현이 가장 먼저 마음을 열고 친해진 것도 그녀였으며, 학교 선후배 관계가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 또한 특별한 점이었다.

다른 소녀들도 친한 누나 동생 관계로 엮여 있지만 선후배 관계로 얽혀있는 주현은 관계 선에서 그보다 더욱 돈독했다.

“좀 걸을까.”

쉬이 고민을 털어버릴 수 없자, 창현은 기분 전환을 위해 가벼운 산책을 계획했다. 간편한 트레이닝복에 모자를 푹 눌러쓰자 나이 또래에 어울리는 모습이 되었다. 스캔들이 터진 다음 날인 만큼, 사람들은 의심을 하더라도 자신일 거라 예상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이 많은 곳에 나간 창현은 사람의 향기를 한껏 느끼며 걸음을 옮겼다.

정처 없이 걸음을 옮기던 그는 자신이 도착한 곳을 보고는 피식 미소를 지었다.

“내가 이곳에 올 줄이야.”

창현이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그가 다니던 중학교였다.

졸업을 한 뒤 올 일이 없으리라 생각했던 곳인데 이곳에 올 줄이야. 무의식이 자신을 이곳으로 이끌었다는 생각에 헛웃음을 지으며 학교 안으로 들어갔다.

한창 방학 시즌 중이었기에 눈에 들어오는 것은 간간이 축구나 농구를 하는 학생들뿐이었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자신이 학교 다닐 때 항상 휴식을 취하던 정자로 향했다.

“여전히 변함이 없네.”

일 년이란 시간이 흘렀지만 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변함이 없다.

자신에게 있어 지난 일 년이란 시간은 수많은 변화를 주었는데. 주변은 경관은 변함이 없자 팽팽하게 당겨져 있는 신경이 누그러지는 기분이었다.

늘 앉던 곳에 엉덩이를 붙인 창현은 천천히 몸을 눕혔다. 정자 지붕 사이로 살짝 드러난 푸른 하늘을 보니 쌀쌀한 바람마저 가시는 기분이었다.

“이대로 쭉 걱정 없이 쉬고 싶다.”

어찌 보면 이제부터 편치 않게 될 그의 운명을 암시하는 말일지도 몰랐다.


“하아.”

텅 빈 숙소를 보며 주현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소녀시대 대전쟁의 서막을 고한 다음 날, 숙소 분위기는 여느 때와 다름이 없었다.

평소대로 태연과 주현이 가장 먼저 일어나 멤버들을 깨우고, 소녀들은 오늘 스케줄을 확인한 뒤 곧바로 밖을 나선다.

서로를 챙겨주는 모습은 전과 다를 바 없었으나 그 속에 내재 된 신경전은 예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

창현은 이미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세계적인 스타였고, 자신들 또한 인기를 얻으면서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있는 중이다.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만큼 짧고 굵게 해내야 하는 것이 그녀들의 임무였다.

각자 머릿속에 생각을 품은 채 스케줄을 나서자, 숙소에 남은 것은 주현뿐이었다.

공교롭게도 숙소에 혼자 남게 된 주현은 혼란스러운 마음을 독서로 달래려 하였지만 도저히 책의 내용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왜 이리 걱정될까.”

그녀는 자신의 반응을 이해하지 못했다. 전날 엄청난 폭풍이 휘몰아쳤지만 자신만큼은 여느 때와 다를 것이 없다 생각했다. 자신만의 방법이 있었고, 언니들에게 밀리지도 않을 자신감도 존재했다.

하지만 한순간 여덟 명의 적이 등장했다는 점이 그녀로 하여금 쉽게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함께 가야 할 언니들이 적인 상황이라니.

“이대로는 안 되겠어.”

숙소에 있어봤자 시간 낭비만 할 뿐이란 걸 알아차린 주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혼란스러운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외출을 택했다.

씻고, 옷을 챙겨 입은 그녀는 모자를 푹 눌러써 정체를 감춘 뒤, 곧장 밖으로 외출을 하였다. 정처 없이 걸음을 옮기던 그녀는 문득 머리에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있어 발걸음을 돌렸다.

그녀가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자신이 졸업한 학교였다.

“…….”

물끄러미 학교를 바라보며 주현은 과거를 회상한다.

“이곳에서 모든 게 시작되었지.”

창현과의 만남, 그리고 그에게 보컬 트레이닝에 대한 조언을 듣고, 언니들에게 그를 소개시켜주었다.

만약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주현은 절대로 창현을 언니들에게 소개시켜주지 않았을 것이다.

“하아! 이미 돌이킬 수 없잖아.”

만약이라는 상황을 가정하던 주현은 자꾸만 삐뚤어진 생각을 하는 자신을 스스로 꾸짖은 뒤 학교 안으로 들어간다.

선후배 관계로 정립하게 해준 학교였고, 추억 또한 많았지만 그와 각별한 추억을 간직한 곳이 존재한다.

운동장을 지나친 주현은 학교 뒤로 걸음을 옮긴다. 이 년만에 보는 익숙한 풍경이 그녀의 시야에 들어온다.

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변함없는 모습을 과시하는 정자와 풍경, 그리고 자신에게 각별한 추억을 선물해준 창현의 모습까지.

“…에?”

가만히 생각에 잠겨있던 주현의 입에서 당혹감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그녀의 눈에는 정자에 누워 눈을 감은 채 미소 짓고 있는 창현의 모습에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본의 아니게 밑밥을 뿌린 주현은 창현이라는 월척을 낚아 단독 찬스를 갖게 되었다.


“…….”

찬바람이 온몸을 간질였지만 창현은 눈을 감은 채 조용히 지금의 순간을 즐겼다.

살짝 눈을 뜨니 푸른 하늘과 새하얀 구름이 두둥실 떠다닌다.

평화롭다.

창현이 느낀 감상이다.

“이대로 영원히 시간이 흘렀으면 좋겠다.”

마음속에서 바라고 있는 간절한 바람이 흘러나온다.

그가 원하는 것은 다른 사람과 다르지 않다. 많은 돈을 벌고,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그도 다른 사람과 다를 바 없이 작은 행복을 바라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내 하루가 이렇게 평온하길 바란다면 배부른 소리겠지.”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스타의 자리에 올랐지만 그는 늘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다. 높은 위치에 섰기에 언젠가 떨어질 수도 있다는 것. 사람들은 처음부터 왕좌에 올라선 그가 아래를 내려다보지 않는다 이야기하지만 당사자의 입장은 다르다.

오히려 남들보다 처절한 밑바닥 생활을 경험하였고, 창현은 그 쓴 경험을 철저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심할 정도로 과장하여 스스로를 몰아세웠다. 절대 자만이라는 함정에 빠져들지 않도록.

그것은 창현으로 하여금 정상의 자리에 군림하게 만들어주었다면 반대로 어느 때나 날카로운 감각을 세우게 만들었다.

긍정적인 면도 있지만 반대로 부정적인 면도 존재했다.

바로 언제나 감각을 곤두세웠기에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매사에 여유가 사라진다.

그러다 보니 오랜만에 느껴지는 이러한 편안함은 창현으로 하여금 자리에 일어서지 못하게 만들었다.

눈을 감고 지금의 기분을 만끽하며, 때때로 눈을 떠 푸른 하늘을 구경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시간이 점차 흐르고, 한기가 몸에 스며들기 시작하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몸을 뒤척인다.

“더 이상 못 있겠네.”

봄이나 가을이었다면 이 기분을 즐기며 낮잠을 늘어지게 잘 수 있었을 텐데. 상황과 계절이 맞아떨어지지 않는 것에 창현은 짙은 아쉬움을 느꼈다.

팔개를 푼 창현은 자리에서 막 일어서려 했지만 그 자리 그대로 멈출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주변이 확 어두워지더니 자신의 머리 위로 고개 하나가 불쑥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갑작스러운 방해꾼의 등장에 인상을 찌푸리려던 창현은 낯선 침입자(?)의 얼굴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뜬다.

“어?”

“안녕, 창현아?”

정자에 침입한 존재는 다름 아닌 주현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창현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것은 이곳에서 뜻하지 않은 만남을 이룬 주현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곳엔 어쩐 일이야?”

“저요? 그냥 발걸음을 옮기다 보니… 그러는 누나는요?”

“나? 나, 나도 그냥.”

“그냥이라고요? 누나 요즘 엄청 바쁘시잖아요.”

의아함을 표하는 창현의 모습에 주현은 왠지 그에게 실망감을 준 것 같아 풀 죽은 어조로 말했다.

“난 예능감이 떨어져서 스케줄이 그리 많지 않아.”

“그, 그래요? 죄송해요.”

“아니야.”

“…….”

졸지에 실례를 저지른 창현은 입을 꾹 다물었다. 어색한 건 주현도 마찬가지여서 둘 사이에는 어색한 침묵이 자리했다.

그것이 주현은 싫었다. 얼마나 많은 우연이 겹쳐 창현을 만나게 되었던가.

신이 내려주신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됐다.

‘어차피 언니들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거야. 그렇다면 이건 내게 기회야.’

만약 다른 언니가 이곳에서 창현이를 만났으면 어떻게 되었을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그야 말로 순하디 순한 양과 음흉한 늑대가 절묘하게 포지션 교환이 되어 아비규환의 참상(?)이 벌어졌겠지. 뇌리에 야릇한 상상이 전개되자 주현은 이를 꽉 물었다.

‘그래도 선배인 내가 나서야 돼.’

스스로 합리화를 하며 주현이 견고히 자리한 침묵을 깬다.

“그런데 여기 무슨 일로 온 거야?”

“누나는요?”

“내가 먼저 물어봤잖아. 설마 선배인 내가 먼저 질문했는데 내가 대답해야 하는 거야?”

논리적인(?) 주현의 일격에 창현은 한 방 먹은 표정을 지었다.

“윽, 그냥 밖에 나와 걷다 보니 여기로 오게 되었어요. 제법 많은 추억이 있는 곳이기도 했고.”

“그랬지. 참 좋은 추억이 많았어.”

“그랬죠. 재미있었고요.”

“응.”

“…….”

중학생 시절 있던 일을 떠올리며 두 사람은 추억에 잠긴다. 당시 창현은 얼굴 없는 가수로 활동하였고, 주현은 연예인을 준비하는 연습생이었다. 그러던 두 사람이 이제는 누구나 알아볼 법한 위치에 서게 되었다.

“그런데 누나가 이곳에 온 이유는 못 들었네요. 누나는 무슨 일로 온 거예요?”

“응? 나도 그냥 걷다 보니 이곳에 왔어.”

“누나도 저랑 같은 이유네요.”

“그게 뭐 잘못 됐어?”

“그럴 리가요. 그냥 신기하다는 거죠.”

“칫! 아닌 거 같은데.”

불퉁한 표정을 지으며 의심스러운 눈을 하는 주현이었다. 평소 숙소에서는 의젓한 막내 역할이자, 언니들의 벌점을 책임지는 악역을 맡고 있지만 창현 앞에 서면 자신도 모르게 성격이 발랄해지는 기분이다.

“진짜라니까요.”

“알았어, 믿을게.”

“…왠지 제가 손해 보는 기분이에요.”

“그럴 리가. 난 정말 믿어서 대답하는 건데? 날 못 믿는 거야?”

“끄응.”

당한 것 같은 느낌에 앓는 소리가 입에서 흘러나왔다.

변치 않는 그의 모습에 괜히 기분 좋아진 주현이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연다.

“그나저나 아직 추운데 정자에 누워있으면 못 써. 한기가 스며들어서 감기 걸리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곧 있으면 미국으로 출국한다던데 몸 관리는 잘해야지.”

“하, 하하! 잘하긴 잘해야죠.”

“대답만 하지 말고 앞으로 잘하란 말이야. 옷도 왜 이렇게 얇아? 아직 날씨가 따뜻하지 않다니까? 좀 더 신경 쓰고 기왕이면 장갑이랑 귀마개도…….”

이어지는 잔소리에 창현의 표정이 음울하게 젖어 들어갔다. 헤어 나오고 싶지만 네버 엔딩으로 이어지는 주현의 잔소리는 빠져나올 수 없는 늪과도 같았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귀가한 남편이 부인에게 바가지 긁히는 게 이러한 걸까.

주현의 잔소리로 예상치 못한 간접 경험을 하게 된 창현은 기회를 엿보다가 그녀의 말을 끊는다.

“그나저나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요?”

“아직 할 이야기가 남았는데… 묻고 싶은 게 뭔데?”

“음, 어제 통화에서 누나가 했던 말이요.”

“으, 응?”

통화 이야기가 거론되자 주현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당혹감이 떠올랐다.

어제의 일은 그야 말로 대혼돈. 종잡을 수 없는 가운데, 다급해진 그녀는 창현과 통화에서 말하지 말아야 할 것들도 말하고 말았다.

그 중에서 가장 큰 실수는 앞으로 자신이 본격적으로 나설 것임을 그에게 직접 이야기했던 것이다. 작게 웅얼거리는 수준이었지만 창현의 청각이 남들에 비해 월등히 좋은 걸 감안하면 그것일 확률이 높았다.

“누나가 제게 말하셨잖아요. 포기하지도 않고 물러서지도 않겠다는 말. 그게 무슨 뜻인지 궁금해서요.”

“…….”

역시 들어버렸다.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린 주현은 빠른 속도로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이내 어색한 미소를 짓더니 그에 대한 답변을 내놓는다.

“아하하! 사실 그건… 널 뒤쫓겠다는 이야기였어.”

“뒤쫓아가요?”

“가수 입장에서 창현이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존재잖아. 우리는 이제 막 관심을 받기 시작한 단계고, 그래서 뒤쫓겠다는 의미로 한 말이야.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다진 것이기도 하고.”

스스로 생각해도 그럴 듯한 변명이었다. 창현도 주현의 말에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런 뜻이었구나.”

“응, 그런 거야.”

“그런데 왜 숨기려 하셨던 거예요? 그냥 말해도 괜찮을 텐데?”

무난하게 넘어가는 듯했지만 창현은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대위기였지만 한 번 터져 나오기 시작한 주현의 거짓말 포텐(?)은 봇물 터지듯 범람하고 있었다.

“쑥스러워서…….”

“응? 하하하! 그러네요. 그럴 수도 있겠어요.”

부끄러워하는 주현의 모습이 무척 귀여워 절로 웃음이 나왔다.

“이익, 창현이 너…….”

짓궂은 그의 모습에 볼을 부풀린 주현이 매섭게 노려본다. 하지만 이미 귀여운 이미지가 각인된 그녀가 노려본다한들, 창현에게 위협이 될 수 없었다.

“아아, 미안해요, 미안해. 그런데 흐읍! 후, 후후후!”

“왜 웃는 거야!”

단순히 웃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부끄러움이 물밀듯이 밀려온다. 자신을 능수능란하게 놀리는 창현을 본 주현은 평정심을 잃고 빽 소리쳤다.

그리고서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허둥지둥 사과한다.

“하앗! 미, 미안. 화내려고 한 건 아닌데.”

“아니에요, 제가 심하기는 했네요. 미안해요.”

“으응, 나도 미안.”

창현의 사과에 주현도 사과한다. 그러다 그녀는 문득 지금과 비슷한 상황이 머릿속에 스쳐지나가는 걸 느꼈다.

‘그러고 보니 창현이랑 처음 만났을 때…….’

2년 전 그 날이 떠오른다. 보컬 트레이닝을 받으며 도통 실력이 늘어나지 않을 때, 그녀는 쉬는 시간마다 이곳에 와서 노래를 부르며 마음을 추스르고는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의 노래를 들었던 사람이 나타났고, 그것이 바로 창현이었다.

그는 자신의 노래를 듣고 박수를 치며 칭찬해주었고, 부끄러움에 허둥지둥거렸던 적이 있었지.

그때와 지금이 너무 비슷하게 여겨져 주현은 자신도 모르게 과거를 회상한다.

만약 자신이 창현을 다른 언니들에게 소개시키지 않았더라면…….

‘이런 전쟁도 없었을 텐데… 후우!’

성인이 되어갈수록 늘어나는 건 한숨뿐이라는 걸 근래 들어 절실히 느끼는 주현이었다.

이미 흘러간 과거를 탓해봤자 자기 계발에 독이 될 뿐이었다. 상념에 벗어나 현실로 돌아온 주현은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창현의 시선에 움찔 몸을 떤다.

“왜, 왜 그래?”

“그냥 재미있어서요.”

“뭐가?”

“누나 표정이요. 갑자기 과거를 회상하는 표정을 짓다가 부끄러운 표정으로 변하고, 짙은 아쉬움이 서리다가 한숨을 푹 내쉬잖아요. 누나가 그렇게 표정이 다채로운 사람인 줄 몰랐네요.”

“나도 표정 많거든?”

발끈하려던 걸 가까스로 참고 말한다. 평소에는 이러지 않는데 이상하게 오늘따라 감정적으로 자주 변하는 것 같았다.

“그런 것 같아요. 제가 아는 누나는 하늘이 무너져도 침착하게 타개책을 찾아낼 사람 같았거든요.”

“그 정도는 아니야.”

“하하! 그 정도로 누나가 침착하단 거죠.”

“하아! 칭찬인지 욕인지 이젠 모르겠어.”

“칭찬으로 생각하세요.”

“그게 편한 것 같아.”

논리적인 걸 좋아하는 주현조차도 두 손 두 발을 들고 항복을 표했다. 미소 짓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창현은 푸른 하늘을 바라보다 시간을 확인하더니 주현에게 말한다.

“그럼 슬슬 가보도록 할게요?”

“응? 가다니?”

“시간이 많이 지났잖아요. 이제 슬슬 들어가야죠.”

“…….”

맞는 말임에도 불구하고 주현은 다급함이 들었다. 오늘 헤어지면 이렇게 단 둘이서 언제 만날지 짐작이 되지 않았다. 평소라면 그의 뜻에 순순히 따랐을 테지만 이미 전쟁은 시작되었다. 주어진 기회조차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하면 그것은 못난이, 게으름뱅이다.

‘서주현! 넌 해낼 수 있어!’

창현을 잡아먹으려는 언니(?)들의 모습을 떠올린 주현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더니 그의 앞을 가로막는다.

“왜 그래요?”

의아한 표정을 짓는 창현을 보며 주현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른 말을 참지 않고 방출한다.

“차, 창현아! 나랑 고구마 라떼 한 잔 안 할래?”

본격 창현 쟁탈전 발발 이틀째.

막내가 먼저 선빵을 날렸다.


용기를 내어 일을 저질렀지만 주현은 내심 가능성이 적다 여겼다.

하지만 이곳에서 창현을 만난 만큼 그녀에게 천운이 따르고 있었다.

“그러죠.”

“응?”

“왜 그래요?”

놀란 주현을 보며 창현이 피식 웃음을 짓자, 주현이 대답한다.

“의외여서…….”

“의외라뇨?”

“윤아 언니랑 스캔들 났잖아. 그러니 거절할 거라 생각했거든.”

“아아, 그럴 수도 있네요. 하지만 전 그런 거 별로 신경 쓰지 않아요. 실제로 사귀는 사이가 아니니 스캔들이 나봤자 무슨 소용이겠어요? 물론 악플을 좀 받기는 했지만, 하하.”

정면으로 윤아와 관계를 재정립해주는 창현의 반응에 주현은 미소를 지었다가 딱딱하게 굳어갔다.

“그렇지…….”

“음? 표정이 안 좋은데요?”

“아무것도 아니야.”

그렇게 대답했지만 표정은 좋지 않았다. 그의 말은 윤아와 관계를 확실히해두는 것이었지만 다른 맹점 또한 존재하고 있었다.

자신과 함께 한다는 것도 결국 윤아와 같다는 이야기였으니까.

즉석 데이트를 하는데 성공했지만 즐거울 수 없었다.

“그럼 가죠. 어디로 갈까요?”

“응? 그, 글쎄?”

“글쎄라뇨, 누나가 제안을 하셨으면 누나가 안내를 해주셔야죠.”

“그건 그렇지. 에, 그런데 여기 주변에는 카페가 없는 걸로 아는데…….”

“다른 곳은 알고 있단 이야기?”

“응, 좀 거리가 있는데 그곳으로 가도 될까?”

효율적인 것을 좋아하는 주현이라면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곳을 선호할 터. 창현은 그녀가 먼 곳을 가려는 이유가 궁금했다.

“다른 카페 말고 굳이 그곳으로 가는 이유가 있나요?”

“응, 그곳은 고구마 라떼를 정말 잘하거든.”

“…그럼 가죠.”

카페에 가면 딸기 주스를 주문하려던 창현은 반드시 고구마 라떼를 먹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부지런히 걸음을 옮겨, 고구마 라떼를 잘하는 카페에 도착하자 창현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여기에요?”

“응, 무슨 문제라도 있어?”

“아니요, 하하.”

“그럼 들어가자.”

“네.”

앞장 서는 주현의 뒤를 따르며 어색한 웃음을 흘리는 창현이었다. 그녀가 안내하여 도착한 곳은 바로 자신의 집이 있는 아파트 단지 내 카페였다.

혹시 사람 많은 곳에 가지 않을까 싶어 어떻게 할지 고민하던 창현으로서는 마음이 놓이는 순간이었다.

“여기 앉아. 내가 사올게.”

“네? 그래도…….”

“내가 먹자고 했잖아. 당연히 내가 사야지. 그러니 가만히 앉아서 고구마 라떼나 음미하세요.”

“그러죠, 하하! 맛있게 잘 먹을게요.”

마음 써주는 주현의 행동이 예뻐서 창현은 미소를 짓는다.

예상치 못한 기습 공격(?)에 주현은 얼굴을 푹 숙이더니 그대로 몸을 돌린다. 그리고는 곧바로 주문하는 곳으로 향한다.

졸지에 데이트 신청을 하게 된 그녀가 창현을 이곳으로 데려온 이유는 간단했다. 여기 카페 주인과 제법 돈독한 친분을 나누고 있어서이다.

콧수염을 길게 기른 중년인은 주현을 보자 입가에 미소를 짓는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잘 왔다. 오늘도 고구마 라떼냐? 고구마 라떼 하나랑 다른 건 뭐로 줄까?”

“고구마 라떼 두 개요.”

“고구마 라떼 두 개? 같이 온 일행도 고구마 라떼냐?”

“네. 제가 이곳 고구마 라떼 맛이 좋다고 했거든요.”

“음, 그렇지. 누구한테 구박을 받으며 맛을 개선했는데 맛이 없을까.”

“아저씨!”

얼굴이 붉어져서 소리치는 주현이었지만 주인은 입가에 미소만 짓고 있을 뿐이었다.

“하하, 그래, 어쨌든 고구마 라떼 두 개, 주문 접수 완료. 그런데 같이 온 일행은 누구냐, 설마 남자 친구?”

주현이 아이돌이란 걸 알고 있음에도 스스럼없이 농담을 건넨다.

“아, 아니에요.”

“그래? 허, 하기야, 네가 남자 친구가 생기는 것도 이상하겠군.”

“그건 또 무슨 말이에요.”

“워낙 고지식해서 남자 친구를 안 사귈 것 같았거든.”

“그…….”

말끝을 흐리는 주현이었다. 자신은 올바른 가치관을 갖고 있다 생각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 책에 나온 바에 의하면 자신이 옳은 것이지만 세상이 그렇지 않다는 것은 그녀 또한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남자 친구를 안 사귈 것 같다니. 그것만큼은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듯했다.

“저도 마음만 먹으면 남자 친구 사귈 수 있다고요.”

“그럴 수야 있겠지. 소녀시대 막내 서현인데 하하.”

“그런 걸로 남자 친구를 사귀는 건 싫어요.”

“그러냐? 음! 네게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인생의 선배로서 한 마디 해주마. 남자는 그리 어렵지 않아. 본능에 충실한 만큼 강하게 한 방 확! 해주면 홀라당 넘어오기 마련이지.”

“정말이요?”

초롱초롱하게 변하는 주현의 눈동자. 그녀의 리액션에 의기양양해져서 존재하지 않았던 허구의 과거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그렇고 말고. 내가 소싯적이 얼마나 많은 여자들을 사귀었냐면…….”

줄줄이 늘어놓는 무용담.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주현은 열심히 경청하다 고개를 갸웃한다.

놓치고 있던 중요한 사실이 그녀의 머릿속을 스쳤다.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피던 주현이 입을 연다.

“그런데 아저씨 아직 결혼 안 하셨잖아요.”

“…고구마 라떼 두 개? 바로 갖다드리겠습니다.”

“…….”

잽싸게 도망치는 주인을 보며 주현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머릿속에 맴돌고 있었다.

‘강하게? 강하게…….’


바로 창현에게 가는 것이 부끄러웠던 주현은 카운터에 서 있다가 고구마 라떼가 완성되자, 곧바로 쟁반을 들고 자리로 향했다. 이곳의 장점은 칸막이가 쳐져 있어 독립된 공간 같은 느낌을 준다는 점이다.

주현이 쟁반을 들고 오자, 창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곧바로 그것을 받아들며 말한다.

“절 부르지 그랬어요.”

“응? 아니야, 별로 무거운 것도 아니고.”

“그래도요. 누나가 샀으니 가지고 오는 것 정도는 제가 해야죠.”

“그런가? 여기 주인아저씨랑 이야기 나누다 보니 완성 되서 그냥 내가 들고 왔어.”

“여기 주인이랑 친한가 봐요?”

“응, 아주 재미있는 아저씨야.”

카페 주인에 대한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대화를 주도해나가는 주현. 평소에 이렇게 대화를 끌어나간 적이 없던 그녀는 창현과 있는 상황에서 자신이 주도한다는 것에 희열을 느꼈다.

마음이 편해지고, 뭔가 하고 싶다는 의욕이 불끈 생겨났다.

고구마 라떼를 한 모금 홀짝인 주현이 자연스럽게 창현에게 묻는다.

“그러고 보니 미국에는 언제 가는 거야?”

“며칠 남지 않았어요. 며칠 후에 출국할 예정이에요.”

“가면 언제 올 예정인데?”

아무렇지 않은 듯 질문하지만 이것은 무척 중요한 내용이다. 그가 언제 귀국하는지 알아야 구체적으로 공략할 방법을 계획할 수 있으니까.

“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예요. 대충 한 달여 정도? 그 정도 있다가 올 것 같네요.”

“그렇게 오래 있지는 않네. 그런데 그곳에 가서 뭐하는 거야?”

“뮤직비디오 촬영이요.”

“뮤직비디오? 음반 내는 거야?”

한 달 정도로 미국 활동이 끝날 리 없을 터. 기간과 맞지 않자, 계산이 오류나면서 주현의 고개가 갸우뚱한다.

“아니요, 뮤직비디오 주인공으로 채택이 되어서요. 약속한 것도 있고 해서 거절할 수도 없고, 어쩔 수 없이 수락하게 되었죠.”

“누구 뮤직비디오에 나오는 건데?”

“테일러 스위프트요.”

“테일러 스위프트라면…….”

“미국 팝 가수요.”

“아… 설마 그…….”

창현의 말에 누구인지 알아차린 주현이 눈을 동그랗게 뜬다. 테일러 스위프트라면 창현과 함께 스캔들이 난 적 있는 금발 미녀였다.

“제가 미국에서 컴백할 때 도움을 받은 적이 있거든요. 그래서 뮤직비디오 주인공으로 출연해달라는 제안을 거절할 수 없더라고요. 뭐, 그래서 미국 활동을 정리할 겸해서 참가하게 되었죠. 하하! 연기는 아직 미숙한데.”

“대단하네. 다른 가수 뮤직비디오에도 출연하고. 이제 연기자를 해도 될 것 같아.”

속에서는 테일러 스위프트와 무슨 관계인지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초인적인 인내를 발휘하여 억눌렀다.

하지만 그 다음 이어진 창현의 말은 주현의 인내심을 가볍게 무너뜨렸다.

“그렇죠. 사실 미국 사람들하고 하면 좀 낯선데 이번에는 윤아 누나도 같이 하니 어느 정도 편하게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뭐, 뭐? 윤아 언니?”

“어라, 몰랐어요? 이번에 한국에 왔었잖아요. 그게 SM엔터테인먼트에 가서 윤아 누나를 섭외하기 위함이었어요. 물론 주목적은 내한공연을 위한 것도 있지만요.”

“그, 그래? 윤아 언니가 테일러 스위프트 뮤직비디오에 출연하다니…….”

놀란 가슴을 가까스로 다스린다. 심호흡으로 안정을 되찾은 주현은 창현에게 묻는다.

“그럼 혹시…….”

“네?”

“혹시…….”

“혹시 뭐요?”

“…아무것도 아니야. 생각해보니 별 거 아닌 것 같아서.”

주현이 물어보고 싶은 것은 윤아와 함께 촬영하면서 있을 애정신에 관련된 것이었다. 그가 4집 프로젝트 앨범을 발매하면서 수연과 함께 뮤직비디오를 촬영하지 않았던가! 거기에서 있었던 키스신은 주현의 속을 발칵 뒤집어놓기 부족하지 않았다.

실제로 닿지 않고 연출만 했음에도 이 정도인데 한국보다 더 개방적인 미국에서는 어떤 장면을 촬영할지 상상만 해도 두려웠다.

‘부러우면 지는 거야. 견뎌내야 해. 내 남자의 비즈니스니까. 내 남자의 비즈니스. 내 남자의 비즈니스…….’

눈을 꼭 감고 생각에 잠겨드는 주현이었다.

그 모습이 살벌하기 짝이 없어 지켜보고 있는 창현은 온몸에 오한이 생겨나는 듯했다.

“으음.”

자신도 모르게 고구마 라떼를 집어든 창현이 조심스럽게 맛본다. 대화를 나누느라 마시지 못했지만 막상 먹어보니 맛이 나쁘지 않았다.

‘그래도 난 그냥 고구마가 더 낫네.’

고구마와 달달한 맛이 제법 괜찮았지만 자신의 취향은 이런 것보다 새콤달콤한 딸기 주스가 더 입맛에 맞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 조심스럽게 주현의 안색을 살피기에 여념이 없다.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눈을 감은 주현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어떻게든 추스르려 했지만 생각할수록 질투심이 봇물처럼 터져 나오고 있었다.

“저기 누나?”

파앗!

조심스럽게 주현을 부르던 창현은 번쩍 뜨인 그녀의 눈동자를 보고 멈칫한다. 마치 무협 고수 마냥 그녀의 눈에서 새파란 안광이 창현을 집어삼킬 듯 덮쳐왔던 것이다.

“창현아!”

“네, 네?”

“아직 밥 안 먹었지?”

“그, 그렇죠?”

“그러니 밥 사줘! 내가 차를 사줬으니 밥은 사줄 수 있지?”

질투심에 사로잡힌 주현의 눈은 초롱초롱함 뒤에 활화산처럼 타오르는 열기를 간직하고 있었다.

그 기세에 압도당한 창현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 물론이죠.”

선빵에 이어 추가타까지 먹이는데 성공한 주현이었다.


두 사람은 카페를 벗어났다.

갑작스러운 기습 공격을 감행한 주현이나, 기습 공격을 당한 창현이나 어떻게 할지 난감한 건 똑같았다.

“어디로 가죠?”

“응? 그, 글쎄?”

갑자기 질러버렸으니 주현으로서도 뚜렷한 타개책이 존재하지 않았다.

어색한 표정을 짓는 그녀를 보며 창현은 시간을 확인하고는 말한다.

“점심을 먹기에는 늦었고, 저녁을 먹기에는 이르네요.”

“그러게…….”

한순간 질투심에 질러버린 탓에 주현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다 방금 전 카페 주인이 했던 말이 머릿속에서 스치고 지나갔다.

‘일단 질러!’

필터링 되어 간소화 되었지만 그 뜻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 사실을 깨달은 주현이 고개를 들더니 창현을 바라본다.

그녀의 뜨거운 시선(?)에 창현은 몸을 움찔 떨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난다.

“왜, 왜 그래요?”

“시간이 남잖아. 그러니 같이 시내 구경 좀 하자!”

“네?”

“시간이 남으니까 쇼핑이라도 하자고. 안 돼?”

“아니요, 안 될 건 없죠.”

“그럼 가자.”

당당하게 걸음을 내딛는 주현을 보며 멍한 표정을 짓던 창현은 그녀의 뒤를 따르고 만다.

‘아저씨 말이 맞을지도?’

앞장 선 주현은 창현이 뒤따라오는 것을 느끼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일단 지르고 보는 것이 상당히 괜찮은 효과를 낳는 듯했다.


두 사람이 향한 곳은 멀지 않은 압구정 거리였다.

이제 곧 다가올 봄을 위해 옷 몇 벌을 구입해야겠다고 결정 내린 주현은 자신이 뱉은 말을 책임지고자 창현과 함께 압구정 거리를 활보했다.

하지만 예기치 못한 난관이 두 사람에게 닥쳐왔다.

바로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창현과 주현에게 집중되었던 것이다.

설마 사람들이 두 사람의 정체를 알아보아서?

그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두 사람이 워낙 선남선녀라서?

그것도 아니었다. 두 사람이 아무리 선남선녀라 하더라도 빼어나게 차려입은 것도 아니고, 얼굴이 훤히 드러난 것도 아니었다. 이곳 압구정 거리에는 두 사람만큼 몸매가 좋은 사람도 많고, 스타일이 좋은 사람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선집중을 받는 까닭은 간단했다.

두 사람의 포지션이 워낙 애매했기 때문이다.

키도 훤칠하고, 몸매도 좋은 창현과 주현은 각각 모자로 얼굴을 가린 상태다. 하지만 워낙 어색하게 떨어져 있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시선을 머물게 하였다.

연인 사이도 아니고, 친구 사이도 아닌 애매한 관계로 보인달까?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이대로 가면 영락없이 정체를 들킬 판이었다.


사람들의 시선 집중을 모를 두 사람이 아니었다.

어제 윤아와 스캔들을 일으켰던 창현은 또 다시 스캔들이 일어날까 싶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주현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죠?”

“나도 모르겠어.”

당혹스럽기는 주현 또한 마찬가지였다. 창현과 함께 데이트를 하는 것은 좋은데, 문제는 사람들의 시선을 한눈에 받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왜 시선 집중을 받는지 이유 또한 알고 있었다.

‘너무 어색해보이잖아.’

마치 자신과 창현의 거리감을 나타낸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았다.

입술을 꼭 깨문 주현의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지금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한 가지는 이곳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다른 한 가지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기는 부분을 해소하는 것이다.

전자는 주현이 원하지 않았다. 이곳을 벗어나게 되면 마치 자신이 패배를 시인하는 것 같았다.

어차피 내 남자가 될 사람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러나는 것은 겁쟁이나 하는 짓이다.

예전이라면 훗날을 도모했을 것이나, 지금은 여덟 명이나 되는 적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이다. 취할 수 있는 건 취해야 최후의 승자로 등극할 수 있다.

주현은 자신에게 온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일단 질러!’

카페 주인의 목소리가 주현의 머릿속에 천둥처럼 울렸다. 그러자, 그녀의 눈빛도 변하더니, 자연스럽게 창현의 곁에 다가간다.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모자를 깊게 눌러쓰던 창현은 자신의 팔에 감겨오는 감촉에 화들짝 놀라 옆을 바라본다.

“억, 누나?”

“이렇게 하고 가. 사람들이 의심하잖아. 자연스럽게.”

“아, 알았어요.”

당황했지만 몸동작은 평상시와 다를 바 없이하며, 자연스럽게 행한다.

어색해 보이는 두 남녀를 바라보던 사람들은 몇 마디 나눈 뒤 팔짱을 끼고 걸어 다니자, 사이가 좋지 않아 싸운 것이려니 생각하며 제 갈 길을 갔다.

“뭐가 어떻게 된 거죠?”

“어색해보여서 의심했던 거야. 친구도, 연인도 아닌 것 같으니 이상하게 보일 수밖에 없지.”

“아, 그렇군요. 그래서 사람들이 바라봤던 거였구나. 누나 대단한대요?”

“대단하긴.”

별 거 아닌 듯 대수롭지 않게 반응했지만 자신을 한껏 추켜 세워주는 창현의 모습에 미소가 지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것이 바로 꿩 먹고 알 먹고 아니겠는가. 사람들의 관심을 쫓아내고, 합법적으로 창현과 자연스럽게 팔짱을 낄 수도 있고.

세 번 연속 성공하게 되자, 주현의 머릿속에 ‘일단 질러!’는 가히 진리처럼 새겨지고 있었다.

‘아, 얼굴 붉어질 것 같아. 안 돼. 진정해, 주현아. 앞으로 더한 것(?)들도 할 텐데 이 정도로 두근거리면 안 돼. 침착해야 돼.’

속은 당장 터질 듯 요동쳤지만 겉으로는 절대 내색하지 않았다. 앞으로 넘을 고비가 많은데 이 정도로 만족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는 곧바로 표정 연기에 돌입하여 아무렇지 않은 듯 창현에게 말한다.

“팔짱 풀면 사람들이 의심 사니까 이러고 다니자. 알았지?”

“네…….”

뭔가에 홀린 것 마냥 고개를 끄덕이는 창현이었다. 쿨한 모습을 보여주자, 그의 머리가 복잡하게 헝클어졌다.

‘내가 아는 주현 누나가 맞나?’

자신이 아는 사람이라면 이런 행동을 함에 있어 부끄러워하고 적극적이지도 않을 텐데.

평소에는 수줍음이 많고, 이성적이라면 오늘의 주현은 왠지 모르게 성숙함이 풍겨나오는 본능적인 캐릭터였다.

‘이것도 싫진 않네.’

색다른 주현의 모습이 나쁘지 않다 생각하며 창현은 그녀와 팔짱을 낀 채 압구정 거리를 활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창현은 자신의 느낌이 틀렸다는 걸 곧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저 옷 예쁘네. 가격은… 음! 좀 비싸네. 효율적인 면에 비해 비싸. 하지만 예쁜데, 이런 매장은 깎아줄 확률이 적고, 도매상을 알아보기도 힘든데…….”

“…….”

꼼꼼히 가격을 따져가며 효율성과 자신에게 어울리는지 따져보는 주현의 모습에 창현은 할 말을 잃고 혀를 내둘렀다.

평범한 수준이라면 어느 정도 납득을 하겠지만 문제는 옷을 사지 않은 채 분석만 하다가 끝난다는 점이다.

세 번째 옷집을 나섰을 때, 참지 못한 창현이 주현에게 말을 건다.

“누나, 안사요?”

“아! 지루했어? 미안.”

방금 전 들른 옷집과 전에 들른 옷집의 가격과 효율을 비교하던 주현은 창현의 말에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실수를 자책했다.

‘이러면 안 되는데…….’

남자들이 가장 고역으로 여기는 것이 여자의 쇼핑을 따라가는 것이었다.

“아니요, 그 정도는 아닌데…….”

“그래? 지루하지는 않았고?”

“저도 옷을 좋아하다 보니 여러 옷을 구경했죠. 그런데 누나가 너무 심각해보여서요.”

“아, 그걸 말하는 거였구나.”

“사지 않는 이유라도 있는 거예요? 마음에 드는 게 많은 듯했는데. 그냥 다 사면 되잖아요.”

“…….”

그 말에 주현의 표정이 굳었다. 자신이 무언가 실수했나 싶어 창현이 찔끔한 표정을 지었지만 마음을 굳힌 주현이 창현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연다.

“그야 지금 옷을 사면 정체를 들킬 수도 있잖아? 잘못하면 스캔들이 날 수 있고. 게다가 마음에 든다고 바로 사면 안 돼.”

“왜요?”

“그야 돈을 함부로 쓰면 안 되잖아. 앞으로 부유하게 사려면 돈을 효율적으로 써야 돼.”

“그, 그렇군요.”

“창현이 너도 새겨듣는 게 좋아. 돈이란 건 많을수록 좋지만 씀씀이가 커지면 패가망신할 수 있어. 그러니까…….”

졸지에 주현의 잔소리에 시달리게 된 창현이었다.

뼈가 되고 살이 되는 말이었지만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거리에서 일장연설을 듣는 건 고역 중 고역이었다. 특히 주변에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주현의 말을 듣고 피식 웃을 때마다 창현은 부끄러움이 물밀듯이 밀려오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누나, 알았으니까 이제 그만해주면 안 될까요? 거리 한복판에서 그런 소리를 들으니 좀…….”

“응? 아…….”

창현의 말에 정신을 차린 주현은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방금 전에는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던 그녀가 부끄러운 표정을 짓자, 귀엽다고 느낀 창현이 팔을 슥 내밀었다.

“갈까요?”

“으응.”

낼름 팔짱을 끼는 주현이었다.

부끄러운 와중에도 챙길 건 확실히 챙기는 모습이다.


“와, 저것도 예쁘다.”

“그래요?”

“응, 그런데 비싸네. 사고 싶은데… 용돈을 모아야 하나.”

옷의 가격을 본 주현은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꼭 갖고 싶었지만 가격이 너무 비싸 살 엄두가 좀처럼 나지 않았다.

그것도 잠시, 자신의 얼굴을 창현이 쳐다보고 있는 걸 깨닫고는 표정을 고친다.

“창현아, 이제 저녁 먹자.”

“음, 5시 30분인데…….”

“저녁은 일찍 먹을수록 좋아. 밤에 배고프면 물 마시면 되고.”

“알았어요. 누나가 맛있는 곳으로 안내해주세요.”

“응, 내가 맛있는 곳 알아.”

주현이 창현을 데리고 간 곳은 멀지 않은 삼계탕 전문점이었다. 토속적인 음식을 좋아한다는 걸 알았지만 삼계탕 전문점을 올 줄 몰랐기에 창현은 신기한 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런 곳도 있네요.”

“곧 미국 가면 또 바빠질 거 아냐, 그러니 원기 보충하라고.”

“그런 깊은 뜻이. 영광입니다.”

“그러니 다 먹어야 해. 여기 맛있는 곳이야.”

도도한 듯 콧대를 높이는 주현을 보며 창현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주문을 하고, 약 이십 분 정도를 기다려야 한다고 하자, 살며시 자리에서 일어난 창현이 주현에게 말한다.

“잠시…….”

“응.”

밖으로 나간 창현은 십여 분이 흘렀을 무렵 가게로 돌아왔다. 무언가 들고 있었지만 주현은 개의치 않고 창현을 맞이하였다.

맛있게 삼계탕을 먹은 두 사람은 소화 시킬 겸하여 숙소까지 걸어갔다. 소녀시대 숙소 앞에 도착한 창현이 주현에게 말한다.

“오늘 재밌었어요.”

“응, 내 무리한 요구 들어줘서 고마워.”

“무리하다뇨. 선배님이 말씀하시는데 후배가 당연히 따라야죠.”

“그렇지? 그럼 앞으로도 잘 따라줘야 해.”

예전이라면 이런 말도 안했을 테지만 전쟁에 임하는 주현은 그 호의마저도 덥석 받아들였다.

“하하, 그러죠. 이건 선물이에요.”

“선물? 무슨 선물?”

“오늘 놀아준 선물이요. 자, 받아요.”

“어어, 으응.”

떠넘기다시피 하자, 주현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다. 그리고 무슨 말을 하려 했지만 손을 흔든 창현이 멀어진다.

“그럼 나중에 봐요. 바이바이.”

“아…….”

무슨 말을 하려 했지만 창현은 저만치 멀어진 상황이었다.

하는 수없이 쇼핑백을 든 주현은 숙소로 돌아왔다. 그것을 본 다른 멤버들은 그녀가 쇼핑을 다녀왔겠거니 생각하며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다.

방안에 들어온 주현은 창현이 준 선물을 펼쳐보였다.

그러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아까 보았던 옷이었다. 너무 비싸서 용돈을 모아 사야겠다고 마음먹었던 옷. 그것을 창현이 선물했던 것이다.

우웅!

요란한 소리와 함께 핸드폰 진동음이 울린다. 문자를 확인하니 창현의 문자였다.

[오늘 즐거웠고, 그건 제가 주는 선물이에요. 과소비는 아니에요. 바다에서 한 바가지 퍼 쓴다고 바닥나지 않잖아요? 그 정도 능력은 됩니다. 그럼 굿 바이~!] ♡

“…….”

할 말이 없었다.

자신을 신경 써주고 사소한 배려마저 아끼지 않는다.

이 남자를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둔하지만 않더라면 모든 게 완벽했을 텐데.

“절대 포기할 수 없어.”

확고한 쐐기를 박아준 창현의 행동에 주현은 각오를 다졌다. 자신이 가장 먼저 알았고, 가장 먼저 좋아했다. 설사 꿈을 같이 한 언니들이더라도 절대 포기할 수 없었다.

기쁜 마음으로 창현이 선물해준 옷을 입어본다. 마치 자신을 위해 맞춤 제작을 한 것 마냥 딱 맞는다.

거울 앞에 선 주현은 몸을 빙글 돌며 살펴본다.

“……!”

싱글벙글 웃음을 짓던 주현의 표정이 한순간 딱딱하게 굳었다.

지금 그녀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것은 결코 쉽게 지나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차, 창현이가 내 사이즈는 어떻게 알았지?”

어떻게 알았을까? 도대체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머릿속이 백지로 변해갔다. 어떻게 알았는지 도저히 짐작이 가질 않았다.

“…….”

주현의 얼굴이 홍당무로 변했다.

어떻게 알았을까?

미스테리한 일이었다.


주현과 헤어진 창현은 한결 홀가분한 표정을 지을 수 있었다.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그 또한 윤아와 스캔들로 인해 마음이 복잡했던 것이 사실. 다만 대한민국의 특성상, 스캔들은 남자보다 여자가 손해를 보는 면이 더 많았기에 겉으로 내색하지 않으려 하였다.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그 또한 사람인 이상 신경이 쓰이는 것이 사실. 특히나 그의 머릿속을 괴롭히고 있던 사실은 오전까지만 하여도 터질 지경으로 부풀었었다.

“이제는 괜찮으니 참 웃기네.”

스스로 진단해본 창현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학교로 향한 것은 그의 무의식이 이끈 점이지만 그것이 왜인지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연예인이 되고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지만 자신은 평범하게 살아가던 중학생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다. 지금도 행복하지만 그때 그 시절 또한 행복했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 복잡하게 헝클어진 일상에서 잠시나마 피하고 싶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이렇게 보면 나도 환자인 것 같은데, 후우!”

쏴아아아!

집으로 돌아온 창현은 샤워기 물을 맞으며 눈을 감았다.

그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던 문제는 하나였다.

바로 윤아와 스캔들.

그것이 어째서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었냐고?

그 부분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면 간단하다.

세계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그는 겉으로 내색하지 않지만 자신의 실력이 지금보다 더 발전하길 바라고, 인기 또한 유지되길 바란다. 그러다 보니 자기비판적인 면이 많고, 다른 사람들보다 스스로에 대한 평가가 박한 편이다.

그러다 보니 창현은 늘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고는 한다.

윤아와 스캔들 또한 그 범주에 속한다.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그냥 친한 누나와 놀이공원에 간 거였는데 ‘재수’없게 걸린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은?

냉정하게 질문을 던져본다.

과연 사심이 하나도 없었는가.

다른 사람이 스캔들 사실 여부를 물어볼 때 나는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가.

그 부분에 대해서 창현은 선뜻 답을 내놓지 못했다.

그것은 그에게 있어 하나의 충격과도 같은 사실이었다. 언제나 친한 누나일 거란 인식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순간이었고, 자신이 이성 문제로 두 번이나 커다란 혼란을 겪는 일을 초래하였다.

처음은 일일 여자 친구 역할을 자처한 태연의 농밀한 스킨십 때문이었고, 두 번째는 윤아와 자신의 관계를 명확하게 하지 못하는 자신의 태도 때문이었다.

아직 그 답은 찾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주현과 함께 다니면서 혼란스러운 머리가 진정된 건 사실이었다.

“일단 지금 그대로 지내자. 지금 그대로.”

주현과 함께 다니면서 창현은 자신의 여태까지 행동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

늘 다른 사람에게 친절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일이고, 나아가 자신이 세워놓은 가치관을 실천할 수 있는 만족이었다.

허나, 그 부분이 다른 사람의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일이라면?

상황은 복잡하게 꼬일 수 있는 노릇이었다.

여태까지 자신의 행동에 대해 일절 의심이 없던 창현이었지만 처음으로 그 부분에 대해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확실히 선후배 관계가 편하긴 편하구나.”

그래도 다른 누나들보다 좀 더 편하게 대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한결 마음이 놓이는 걸 느낀 창현은 일찍 잠이 들었다.

고민이 많아 잠이 오지 않았지만 그에게는 반드시 일찍 자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

아직 성장기가 다 끝나지 않았던 것이다.


하루를 푹 쉰 창현은 본격적으로 미국에 건너갈 준비를 하기 시작하였다. 짧은 기간 동안 휴식을 취하는 것이었지만 많은 일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주변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어서 집에 쥐 죽은 듯이 박혀 있어야만 했다.

대외적인 활동할 생각을 접은 창현은 짧은 기간이지만 아예 집으로 들어가 생활하였다.

덕분에 입 꼬리가 귀에 걸린 건 지영이었다.

“…그 덕에 내가 혜택을 보네, 헤헤!”

“오빠랑 노는 게 혜택이야?”

“그만큼 오빠 보기 힘들다는 이야기지, 뭐.”

“그건 미안하다.”

“미안하긴! 난 그냥 한 말이다? 오빠가 내 오빠라서 얼마나 자랑스러운데.”

“그래? 그건 참 고맙네.”

도란도란 지영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창현은 내심 안도하고 있었다.

윤아와 스캔들이 나면서 창현은 지영이 잔소리 할 것을 생각하니 아득한 절망을 느꼈었다. 시어머니보다 더 잔소리가 심한 그녀는 때때로 자신의 부인이 아닐까 할 정도로 과도하게 바가지를 긁는 면이 없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집으로 들어갈 때 상당 부분 각오를 하고 있었는데, 예상과 달리 지영은 창현을 너그러이 인정해주는 대인배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어차피 그 윤아 언니와 스캔들이 사실도 아닌데. 오빠가 워낙 유명하니 그런 스캔들도 일어날 수 있는 거지.’

창현과 윤아의 스캔들이었지만 그녀의 사촌 오빠를 창현으로 착각하여 났다는 것에 지영은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다. 다만 윤아가 창현을 노리는 것 같아 좀 더 순규에게 경각심을 심어줄 생각이었다.

‘역시 순규 언니가 오빠를 좋아하지 않아서 그런가? 적극적이지가 않아. 이렇게 되면 유리 언니가 독주할 게 뻔한데.’

초절정 마왕에서 현모양처로 탈태환골하여 지선의 환심을 사낸 유리는 지영에게 있어 경계 1순위에 속한 인물이었다. 이대로라면 그녀가 독주하여 창현의 마음을 훔칠 수도 있기에 지영은 순규를 닦달할 생각이었다.

고양이에게 생선을 떠맡기는 것 정도로 위험한 발상이었지만 유리의 이중적인 모습을 눈앞에서 지켜보았기에 어쩔 수 없었다.

솔직히… 윤아는 안중에도 없었다.

유리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라 생각되었으니까.

“그럼 올라갈 때까지 이렇게 지내려고?”

“그래야겠지? 조용히 지내는 게 좋을 것 같아.”

“사고를 쳤으니 그럴 수밖에. 그래도 오빠가 낸 건 아니니깐. 왠지 오빠가 손해보는 기분이겠는데? 그치?”

“하하, 별 수 없잖아.”

직접 범행(?)을 저질렀지만 자신이 저질렀다 말할 수 없기에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그걸 모르는 지영은 간특한(?) 윤아 때문에 창현의 자유가 속박되었다면서 툴툴거렸다.

잃는 게 있다면 얻는 것이 있다고, 그로 인해 창현이 이렇게 집에서 머무는 것이겠지만.

“연습은 잘 하고 있지?”

“물론이지! 아빠가 매일 칭찬할 정도라니깐!”

“그래? 기대되네.”

“응, 얼마 후면 연습생을 뽑는다고 하던데 아버지가 거기에서 실력을 보여주는 게 어떨까 하고 나한테 이야기를 하더라고. 오빠 생각은 어때?”

“음, 나쁘지는 않은데 솔직히 아버지의 기획사에 있는 이상 지영이 네게 득이 될 건 거의 없어. 자칫 실수라도 하면 입는 손해는 막대할 테고.”

“…그렇겠지?”

자신만만했지만 냉정한 창현의 분석에 금세 풀이 죽어버리는 지영이었다.

피식 미소를 지은 창현이 그녀에게 당근을 던져준다.

“하지만 자신 있으면 해봐도 괜찮겠지. 아버지가 칭찬할 정도라면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다는 것일 테니.”

“그렇지?”

“잘 생각해봐. 결정은 네가 하는 거야. 물론 실력이 있을 경우에나 선택권이 생겨나는 것이지만. 일단 쉽게 결정내릴 사안은 아니야.”

“좀 생각을 해봐야겠네.”

“그게 현명해.”

늘 여자 문제로 잔소리하는 게 아니라, 장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지영의 모습을 보자 한결 마음이 편해지는 창현이었다. 그녀 또한 또래 아이들처럼 고민하고 있고, 더 잘하기 위해 차곡차곡 준비를 하는 것 같아 오빠 입장에서 흐뭇했다.

띠링!

훈훈한 분위기가 이어질 무렵, 창현의 핸드폰에 소리가 울려 퍼지며 문자 메시지가 도착한다.

확인할 필요도 없이 곧바로 액정에 문자가 뜬다.

[창현아! 며칠 뒤에 미국가지? 나도 준비 중이얌! 우리 가서 멋지게 촬영하자. 뮤직비디오에서는 연인이니깐 연인분위기로! >_<!] 윤아 누나

“…….”

잘나가는 분위기를 산산조각 내버리는 결정타였다.

열폭 기미가 보이는 지영의 표정에 창현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에휴!”


한편, 한통의 문자로 창현을 멋지게 위기 상황으로 몰아넣는데 성공한 윤아는 분위기 파악을 못한 채 헤픈 웃음을 지었다.

“헤헤, 헤헤헤!”

이런 웃음을 지으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멈추지가 않았다.

이제 며칠 남지 않았다.

조금만 더 참으면 미국으로 가서 창현과 연인이 될 수 있다.

비록 뮤직비디오 상에서였지만 윤아는 그것만으로도 대만족이었다.

“미국에 가면 언니들이랑 막냉이가 방해할 일도 없고, 나는 완벽한 자유! 게다가 테일러 스위프트가 날 도와준다고 했으니까…….”

테일러 스위프트와 대화를 나누던 그 순간을 떠올린다.

그녀의 본 모습을 보는 순간 윤아는 익숙한 향기를 맡아야만 했다. 그것은 마왕에게서만 풍기는 특유의 향기였다.

사람을 농락하고, 자기 뜻대로 다루는 오만한 마왕. 테일러 스위프트는 연희와 마찬가지로 마왕의 기질을 가진 여인이었다.

그러나 상대는 마왕조차 휘어잡은 마왕 슬레이어 돌연변이 사슴이었다. 테일러 스위프트의 약점을 쥐고 있지는 않지만 윤아는 그녀의 호기심을 충족시켜줌으로써 자신의 이익을 얻어내는 방법을 만들어냈다.

흥미로운 얼굴로 수락한 만큼 미국으로 향하는 순간, 자신만의 낙원이 펼쳐지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헤헤헤! 미국은 개방적이니까 많은 걸 할 수 있을 거야.”

기대감에 한껏 부푼 윤아는 어서 하루하루가 흘러가길 바랐다.

조금만 더 참으면 흉흉한 전장을 벗어나 마음껏 독주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으리라.

“즐거워 보이네?”

“핫! 어, 언니! 언제 오셨어요?”

홀로 즐거워하던 윤아는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몸을 떨며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그녀가 가장 만만하게 여기는 미영이 눈웃음을 짓고 있었다.

“미국에 간다더니 표정이 많이 좋아 보이네, 윤아야?”

“뭐 그렇죠? 좋은 건 싫다고 할 수 없으니까요.”

변했다. 예전이라면 좋아하는 기색을 내비치지 않으려 애썼을 테지만 지금은 달랐다. 본격적인 전쟁이 선포되면서 윤아는 더 이상 자신의 감정을 감추지 않았다. 자신이 잘못한 것은 없다. 미국으로 가서 창현과 촬영을 하는 것도 모두 자신의 복이고, 성과다. 모든 게 밝혀진 이상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이용할 생각이었다.

“흐응…….”

“왜, 왜 그래요?”

불안한 콧소리에 윤아가 몸을 떤다. 마왕에게 이용당하고, 멤버들에게 휘둘려서일까. 본능이 발달한 사슴은 육식 동물의 살기를 감지하는데 능숙했다.

입가를 비틀며 이질적인 웃음을 짓는 미영.

이어 흘러나온 말은 윤아의 머릿속을 천둥처럼 강타했다.

“나도 미국 가려고.”

“……!”

“그,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언니!”

쩌렁쩌렁한 윤아의 목소리가 커다랗게 울려 퍼졌다.

이 무슨 다 된 죽에 코 빠뜨리는 격이란 말인가!


큰 충격을 받은 윤아의 몸이 거세게 떨렸다. 진정하지 못하는 그녀의 눈이 격렬하게 깜빡이며 경악을 감추지 못한 어조로 미영에게 묻는다.

“어, 언니가 왜 미국으로 가는데요?”

“왜? 이상해?”

“이, 이상하고말고요! 지금 한창 인기가 절정가도를 달리고 있는데 언니가 왜 미국으로 가요! 전 이해할 수 없어요.”

질문이라기보다 악을 쓰는 것과 같았다.

파리하게 질린 윤아는 현실을 부정하기 위해 어떻게든 미영이 미국으로 가는 사실을 부정하려 애썼다.

하지만 그럴수록 미영의 말은 공고하게 굳어질 뿐이었다.

“아쉽네. 내가 미국으로 가게 되어서.”

“…….”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멍한 표정을 짓는 윤아였다.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이 그녀를 덮쳐오고 있었다.

어찌하여 이런 일이 벌어진단 말인가.

착하고(?) 순수하고(?) 여리디 여린 자신이 모진 고난을 겪으며 마왕을 넘고, 미국산 마왕과 지루한 대치 끝에 얻어낸 쾌거가 바로 미국에서의 뮤직비디오 촬영이 아닌가! 그러한 대찬스가 단 한 명의 훼방꾼으로 무산될 지경에 처하자 윤아는 제 정신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헤헤! 많이 실망했어?”

“어, 언니라면 이 상황에 어떤 기분을 느끼겠어요?”

“에, 나라면? 으음! 나라면 어떻게단 방해꾼을 떨어뜨려놓았겠지? 그게 옳지 못한 방법이라도.”

순간 윤아는 미영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살벌하게 느껴졌다.

전신에 치미는 한기에 부들부들 떤 그녀가 눈을 치뜨며 미영에게 말한다.

“그, 그걸 알면서 오겠다는 거예요?”

“이렇게 하지 않으면 윤아 네가 앞서가잖아.”

“그래도…….”

“그때 이야기를 잊은 거야? 방해를 해도 상관이 없는.”

“으윽!”

방해 허용 조항을 떠올린 윤아는 아무 말도 못한 채 입을 꾹 다물 뿐이었다. 설마하니 미국까지 쫓아와서 방해할 생각일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절호의 기회가 무산될 위기에 처하자, 윤아는 독기 어린 눈으로 미영을 바라보며 묻는다.

“미국에 가면 어떻게 방해할 건데요?”

“음! 글쎄? 아무래도 힘들 것 같기도 하고? 시기가 겹치는 것도 아니니깐 내가 어떻게 하지 못할 것 같네.”

의아함을 느낀 윤아가 고개를 갸웃한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저랑 같이 미국에 가는 거 아니었나요?”

“글쎄?”

모호한 말을 할 뿐이니, 윤아는 더욱 헷갈릴 뿐이었다.

결국 도끼눈을 뜬 윤아가 단단히 미영에게 따지고 들어갔다.

“확실하게 말해줘요!”

“에, 알았어. 이번에 <Gee> 앨범이 끝나면 휴가가 주어지잖아. 그때 미국에 가보려고.”

“…그때가 언제인데요?”

“4월쯤이 되지 않을까?”

“…….”

입가에 피식 미소를 지은 미영을 보면서 윤아는 자신이 당했다는 걸 깨달았다. 4월이 오기까지 한 달하고도 며칠이 더 남았다. 그런데 며칠 후면 미국에 갈 자신을 방해하겠다고?

어림도 없는 소리에 자신은 당해버리고 만 것이다.

“속았지?”

“언니!”

“윤아 너도 매번 날 놀리잖아. 그러니 한 번 당해보라고 한 거야. 장난을 당하는 입장이 얼마나 괴로운지 너도 잘 알겠지?”

“윽!”

또박또박 말하자, 할 말을 잃어버리는 윤아였다. 미영의 말마따나 자신이 가장 장난을 많이 친 대상이 바로 그녀였다. 그런데 반대 입장이 되어보자 자신이 얼마나 짓궂게 놀렸는지 알 수 있었다.

윤아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있을 때, 미영은 아쉬움이 담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쉽네. 시간적 여유만 되었으면 미국에 갔을 텐데.”

“흐, 흥!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내 바람을 이야기 했을 뿐이야. 안도했어, 윤아야?”

“안도하긴요!”

“안도한 것 같은 걸. 그래도 끝까지 마음을 놓지 마. 혹시 다른 애들이 정말 미국까지 쫓아갈지 어떻게 알아? 그렇게 애들이 쉽게 물러설 거라 생각하지 마.”

“…….”

어렵지만 달리 굉장히 설득력 있는 말이어서 윤아는 진지하게 고민을 해야만 했다.

눈이 뒤집힌 그녀들이라면 정말 쫓아올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였다.

오싹한 한기가 한동안 윤아를 지배하고 있었다.


“하아.”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조용히 떠나려고 했건만 그의 주변에는 백여 명에 가까운 기자들이 카메라 셔터를 누르며 창현의 모습을 담기 바빴다.

찰칵찰칵.

눈부신 플래시 세례에 창현은 언제 한숨을 내쉬었냐는 듯 입가에 미소를 띤 채 기자들에게 손을 흔들어준다.

조용한 출국.

당초 예정된 것보다 하루 전에 출발함으로써 언론의 노출을 피하고자 했지만 어디에서 정보가 샌 것인지 기자들이 벌 떼처럼 모여 있었다.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그것을 겉으로 내색할 수도 없는 노릇. 창현은 표정 관리를 하며 미국으로 출국하기 전 짧은 기자회견을 갖는다.

역시나 가장 화제가 되는 것은 윤아와 스캔들이었다.

“소녀시대 윤아와 사귀는 게 사실입니까?”

“SM엔터테인먼트 측에서 해명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짐을 은근슬쩍 SM엔터테인먼트 쪽으로 밀어둔다. 아니라고 대답하면 거짓말을 하게 되고, 거짓말을 하지 않자니 다시 한 번 시끌벅적할 것 같다.

어른들의 문제는 어른들이 해결하도록 은근슬쩍 밀어두는 센스를 발휘하는 창현이다.

“미국에 가시면 언제 돌아오실 예정이십니까?”

“자세히는 말씀드리기 힘들지만 확실한 건 오래 있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새로운 음반을 낼 생각이신가요?”

“아니요, 미국에 가는 것은 남은 스케줄을 하려는 것입니다.”

“어떤 것인지 말씀해주실 수 있습니까?”

현의 미국 스케줄은 한국 사람들에게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한국처럼 예측이 가능한 거리에 있지 않고, 시장이 워낙 크고 광범위하다 보니 무엇을 하는 것인지 짐작하기가 쉽지 않았다.

듣기만 해도 입이 떡 벌어질 법한 스타들과 함께 움직이니, 그의 스케줄 행보 하나하나가 초미의 관심사가 되는 것은 당연했다.

그것을 창현이 모를 리 없다.

입가에 미소를 지은 창현이 주변을 슥 둘러본다. 기자들의 기대감 어린 눈동자가 그의 시야에 그대로 잡혔다.

조용히 출국하려던 자신의 계획이 기자들로 인해 산산조각났기에 창현은 청개구리 마음이 들어 대답해주지 않은 채 미끼만 던져놓았다.

“자세히는 말씀드리기 힘듭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기자님들이 생각하시는 것 이상의 쇼킹한 일이 벌어질 거란 것이죠.”

“……!”

“그, 그게 무엇입니까?”

무려 현의 입에서 나온 대박 특종이었기에 기자들은 몸이 달아올라 질문을 퍼부었다.

하지만 거기까지가 창현이 의도한 바였다. 이렇게 말했으니 다급해져서 어떻게든 알아내려고 안간힘을 쓰겠지.

기대감이 잔뜩 서린 눈빛이 창현을 뒤덮었지만 창현은 그 기대를 매정하게 끊었다.

“아쉽지만 이번 스케줄은 제가 주관하는 것이 아니라서요.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네요. 기자님들이 좋아하는 화제성은 당연히 최고이고, 아마 많은 말이 있을 거예요. 그렇게만 알아두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럼 시간이 되어서 저는 이만…….”

기대감만 잔뜩 부풀게 만들어놓고 기자회견을 종료하는 창현이었다. 그 후에 기자들은 어떻게든 그에게 정보를 얻어내려 했지만 경호원들의 제지로 인해 어찌 할 수 없었다.

저 멀리 사라지는 창현을 황망한 눈으로 바라보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허어! 도대체 뭐기에 저런 말을 하는 거지?”

그렇게 중얼거려도 대답해줄 사람이 없었다.


한편, 백여 명의 기자들을 궁금증 속에 몰아넣은 창현은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행동을 자화자찬하고 있었다.

“재미있게 되었는데?”

미끼를 뿌려놓았으니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까.

생각만 하여도 기대가 되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창현이 뿌려놓은 떡밥의 정체는 바로 테일러 스위프트의 뮤직비디오 출연이다. 허나, 그 자체만으로 그가 이렇게 말할 수 없는 노릇. 큰 센세이션을 일으킬 수 있는 스케줄임에는 틀림없으나 그가 이러한 언급을 했다는 것은 좀 더 큰 노림수가 있다는 걸 뜻했다.

그 노림수는 바로 뮤직비디오에서 윤아의 출연이었다.

아직 그녀가 출연할 거란 게 알려지지 않은 상황이다. 그렇기에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대한민국 언론은 한 차례 큰 충격에 빠질 것임이 분명했다.

“일은 벌여놓았으니 나머지는 아버지가 알아서 되겠지.”

분명 뒤집힐 일이지만 그때 자신은 바다 너머에 있을 테니 아무런 피해도 없을 것이다.

다만 석규가 사건을 수습하느라 제법 고생을 할 테지.

일그러진 석규의 얼굴을 떠올리며 낮게 웃음을 짓는 창현이었다.

“후후후!”

생각만 해도 즐거운지 입 꼬리가 귀에 걸린 채 비행기 탑승 준비를 한다. 한숨 푹 자며 앞으로 있을 일에 대해 설계할 생각에 빠져있던 창현의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온다.

“창현아!”

“응?”

고개를 갸웃한 창현이 고개를 돌려 소리의 진원지로 향한다. 하지만 그곳에는 그가 생각한 사람은 없고, 비행기에 탑승하려는 승객들 뿐이었다.

“잘못 들은 거겠지.”

그렇게 결론을 내린 창현은 자신이 환청을 들었겠거니 했다. 정신을 다른 곳에 팔고 있다 보니 다른 소리를 착각한 듯 싶었다.

하지만 그 생각도 자신의 어깨에 손이 올라간 느낌과 함께 산산조각났다.

“창현아!”

익숙한 목소리. 그렇다면 방금 전 자신이 들은 것이 환청이 아니란 걸 뜻했다. 흠칫한 창현이 고개를 돌리고,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한 순간 얼굴에 경악이 번져나간다.

“어, 어어? 누나가 여길 어떻게……?”

그곳에는 스캔들의 주범(?) 윤아가 환한 미소를 지은 채 서 있었다.




제102장 맹수는 풀을 뜯지 않는다




“누나!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그게 그러니깐… 하하.”

낮게 웃음을 지은 세희는 창현의 외침에 고개를 돌려 외면하였다.

그 모습을 본 창현은 어처구니가 없어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넋을 잃은 그가 딱해보였음일까?

머뭇거리던 세희가 입을 연다.

“윤아가 온 건 다른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니야.”

“다른 이유가 없다니요?”

“말 그대로야. 촬영을 위해 온 거지.”

변명에 지나지 않는 설명에 맥이 풀린 창현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하? 촬영을 위해? 촬영 날짜까지 상당 기간 남은 걸로 아는데 그 말을 제가 믿을 거라 생각한 거예요?”

“믿지 않아도 어쩔 수 없어. 난 진실만 말하고 있는 거니깐.”

“진실이라니…….”

“단지 조금 일찍 왔을 뿐이지. 미국을 구경하고 싶다나?”

“…….”

앓느니 죽는 게 낫다는 말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윤아가 미국에 온 것에 대해 딱히 큰 의미를 두지 않으려 해도 그럴 수 없는 까닭은 그녀가 자신과 스캔들 상대란 점도 있고, 테일러 스위프트와 묘한 공감대를 지니고 있는 것 같아서이기도 했다.

남을 농락하는 게 취미인 테일러 스위프트와 함께 하면 자신에게 무슨 일이 닥칠지 모르는 일. 예정보다 이른 윤아의 방문은 창현으로 하여금 찜찜함을 남겨주었다.

펴지지 않는 창현의 표정을 살피며 세희가 조심스레 말한다.

“어차피 다른 곳에 머물고 있으니까 괜찮잖아.”

“그건 그렇죠. 그래도 있는 것과 없는 건 상당한 차이잖아요.”

“그건 그렇지. 하지만 굳이 과민 반응할 필요는 없잖아?”

“과민반응이라고요?”

정말 자신의 생각을 몰라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이란 말인가?

발끈한 창현이 날카로운 눈을 했지만 세희도 물러서지 않은 채 말을 받아쳤다.

“과민반응이 아니면? 윤아도 한국에서는 엄청난 인기를 얻고 있어. 오랜 스케줄로 지쳐서 겸사겸사 미국에 올 수 있는 거잖아.”

“음, 그래도……."

“그래도는 무슨 그래도. 기왕 쉴 거면 자기를 알아보는 곳보다는 몰라보는 곳이 낫겠지. 어차피 미국에서 촬영이 들어갈 거면 미국에서 보내는 게 낫겠고.”

“그런 걸까요?”

세희의 말을 들어보니 자신이 과격하게 반응했다는 걸 깨달았다. 많은 사람들이 알아보는 만큼 장점도 있지만 단점도 있다. 자신도 때때로 사람들이 몰라보는 곳으로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드는 만큼 윤아 또한 그런 기분을 느꼈을 때가 있을 것이다.

창현이 넘어오는 기색을 보이자 세희도 표정을 풀고 사근사근한 어조로 말한다.

“그런 거야. 그러니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려 하지 마. 괜히 너만 피곤해져. 남은 스케줄을 해결하려면 만전의 상태로 임해도 부족하다고. 알겠지?”

“네, 제가 과민반응을 했나 보네요, 미안해요.”

“미안하긴, 피곤한 상태이기도 하고 스캔들도 났으니 당연히 날카로울 수밖에 없어. 난 다 이해하니까 어서 제 컨디션 찾도록 해. 내일부터 다시 부지런히 움직여야 하니깐. 알겠지?”

“네.”

세희의 말에 자신이 과민 반응 했다는 걸 인정한 창현은 컨디션을 끌어올리기 위해 마음을 편히 먹고자 하였다.

‘윤아 누나가 와서 그런 게 아니라 내가 피곤해서 그런 거지.’

여유가 생기니, 근본적인 원인도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있게 되었고.

하지만 모든 마수가 그를 벗어난 것이 아니었다.


“우와아아!”

미국에 도착한 윤아는 정해진 목적지로 향했다. 이미 사전에 협의가 되어 있었기에 창현과 헤어져 걸음을 옮긴 그녀는 목적지에 도달하자 터져 나오는 탄성을 참지 못했다.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거대한 저택이었다. 영화에서 볼 법한 웅장한 저택의 자태는 윤아로 하여금 넙치 표정에서 돌아오지 못하도록 가로막았다.

그그그긍.

굳건한 철문이 열리며, 윤아를 태운 차가 안으로 진입한다. 좌우로 보이는 꽃밭과 분수, 저 멀리 위치한 수영장은 윤아로 하여금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하였다.

“진짜 멋있다. 이렇게 넓은 저택에서 한가롭게 가지치기도 하고, 수영도 하면서 살면… 완전 대박!”

“그러려면 젊어서 부지런히 일을 많이 해야겠지.”

창현과 함께 커다란 저택에서 알콩달콩 살아가는 상상을 펼치려 하는데 옆에서 매니저가 초를 쳐버린다.

인상을 구긴 윤아가 미국까지 따라온 여자 매니저에게 톡 쏘아붙인다.

“그래봤자 이런 저택 구입하기 힘든 거 다 알고 있거든요!”

“힘들다니. 너희들이 지금 인기가 얼마나 좋은데. 열심히 일하면 이런 저택을 구입하는 것도 먼 훗날이 아닐 거다.”

“흥! 날 세 살 꼬맹이로 아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불신하지 않아도 되잖니.”

미국에 오기 전, 마음이 들떠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던 윤아였기에 매니저는 이 기회를 틈타 윤아에게 일에 성실히 임하는 자세를 알려주고자 하였다.

“일을 열심히 하면 정말 가능해요?”

“물론이지.”

“정말로요.”

“그렇다니까.”

자꾸 되묻는 윤아의 태도에 매니저가 인상을 찡그리려 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입 꼬리를 말아 올린 윤아가 노골적인 비웃음을 지었던 것이다.

“우리나라 땅값이 얼마나 비싼지 잘 알고 있는데, 절 설득하려면 좀 더 내공을 쌓으셔야 해요, 언니.”

“…….”

대한민국의 비싼 땅 값을 들먹이는 윤아의 모습에 매니저는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창현과 알콩달콩한 미래를 설계하는 윤아는 재테크에도 빠삭한 면모(?)를 보였다.


차를 타고 저택 안 깊숙이 향한 윤아는 마침내 집주인과 대면할 수 있었다. 커다란 저택이라 하면 나이 지긋한 신사를 떠올리기 십상이었으나 실상 이 저택의 주인은 이제 갓 이십대 초반의 여인이었다.

“어서 와.”

“반가워요.”

영어로 한 인사에 한글로 화답하는 윤아. 그래도 초등 영어 정도는 완벽히 떼었기에 반겨주는 영어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초대해줘서 고마워요, 테일러.”

집주인의 정체는 바로 테일러 스위프트였다. 한 차례 방한했던 그녀는 휴가를 얻은 윤아로 하여금 미국에 올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던 것. 때문에 미국에 온 그녀는 숙박의 걱정 없이 곧바로 미국에 오는 것이 가능했다.

피식 미소를 지은 테일러 스위프트가 어깨를 으쓱한다.

“뭘, 이 정도는 나한테 어렵지 않은 걸.”

초등 영어를 마스터 했지만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말을 완벽하게 캐치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마에 사거리 마크를 생성한 윤아가 사납게 으르렁거린다.

“자꾸 영어로 말할래요? 어차피 한국말 잘하면서…….”

“쳇! 알았어.”

혀를 찬 그녀가 순순히 말을 한다. 정상적인 루트가 아니라 꽤나 하드한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 한국말을 익혔기에 그녀의 어투는 와일드했다.

외계어에서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바뀌자 윤아의 표정이 한결 편해진다.

“역시 한국말이 편하다니깐.”

“미국에 왔으면 영어를 해야하는 거 아니야?”

“그래봤자 난 영어가 아직 미숙하다고요. 어차피 테일러가 한국말 잘하니까 의사소통은 문제가 없잖아요? 그러니 좀 양보해달라고요.”

“까다롭기는. 따라와.”

딱히 꽁해서 한 말이 아니었기에 더 따지지 않고 넘어간다. 윤아와 매니저를 데리고 간 곳은 그녀들이 머물 수 있는 방이었다. 한국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크고 화려한 크기에 입이 벌어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방에서 짐을 풀 수 있게 시간을 준 뒤, 윤아를 데리고 온 테일러 스위프트는 그녀와 마주앉은 채 향후 일정에 대해 대화한다.

“미국은 어때?”

“놀라워요. 뭐라고 해야 할까, 와보지 못한 새로운 세계에 온 느낌?”

“그렇겠지. 어찌 보면 미국이 세계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곳이니깐.”

시골에서 갓 서울로 상경한 시골 처녀의 모습이 윤아와 비슷하였다. 어딘가 어색하면서 기대감을 품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무척 귀여워 저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예정이에요?”

“예정이라니?”

“내가 일찍 온 이유가 테일러의 권유 때문이었잖아요. 그러니 당연히 무슨 말이라도 해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음? 그래야 하나?”

“뭐라고요? 그럼 지금껏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날 한나절 동안 비행기 타고 오게 한 거예요?”

열폭한 윤아가 사나운 기세를 흘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지만 테일러 스위프트는 전혀 위축되지 않은 채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이 마치 자신을 자유자재로 가지고 놀던 연희와 오버랩 되어 윤아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그렇게 흥분하지 마.”

“내가 지금 흥분하지 않겠어요?”

“내가 비록 계획을 세우지 않았지만 지금부터 세우면 되잖아?”

“이미 신뢰가 팍 떨어졌는데, 무슨. 이제부터 계획을 세운들 뭐가 달라지는데요?”

“달라질 수 있는데? 내가 누구라 생각하는 거야. 이래 보여도 인기가 제법 많은 팝 가수라고.”

한국에서 이런 말을 하면 욕을 먹었겠지만 이곳은 미국이다. 그녀의 태도는 오히려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으로 비춰져 좋아보였다.

그에 압도된 윤아가 한결 누그러진 어조로 말한다.

“으음, 그럼 뭘 해줄 수 있는데요?”

“네가 바라는 게 뭔데?”

“바라는 게 뭐냐고요? 저번에 이야기했었잖아요! 테일러가 나와 현이 연결되는 걸 적.극.적.으.로. 도와주겠다고! 설마 기억 못하는 건 아니겠죠?”

“기억하지 물론. 대신 나에 대한 기대감도 충족시켜줘야 한다고?”

그녀의 기대감은 창현을 놀라게 만드는 것. 다른 사람을 놀라게 만들거나, 자기 뜻대로 다루는 것은 그녀의 취미 중 하나였다.

그것이 무척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던 윤아는 모든 것을 수용하기로 한 채 테일러 스위프트의 도움을 받기로 구두 합의가 된 상태다.

“그건 충분히 가능하니 도와주기나 해요.”

“후후, 좋아. 그럼…….”

낮은 웃음소리와 함께 탁자 위에 놓인 종이를 둘러보던 그녀. 잠시 뒤적거리던 그녀는 원하던 것을 찾은 듯, 야릇한 미소를 짓더니 윤아에게 말한다.

“찾았다.”

“뭘요?”

“내일 오전에 나갈 수 있도록 준비해.”

“어딜 갈 예정인데요?”

“뮤직비디오 촬영을 하려면 대략적인 시스템을 파악해두는 게 좋잖아. 그러니 내 말을 따르도록 해. 손해가 되는 건 없을 거야.”

무엇을 계획하는 걸까.

불안함이 스멀스멀 생겨났지만 지금 상황에서 믿을 수 있는 건 그녀밖에 없었다.

“아, 알았어요.”

“기대해도 좋을 거야.”

내일 벌어질 일을 생각하며 싱글벙글 미소 짓는 그녀였다.


시차적응을 위해 하루 동안 휴식을 취한 창현은 스케줄을 소화하기 위해 세희와 이동 중이다.

“잘 쉬었어?”

“괜찮은 것 같아요.”

“그것 봐. 다 마음 문제라니깐?”

“당시에는 아닌 것 같았는데 막상 상황이 닥치니까 누나 말이 맞는 것 같아요.”

“그렇지. 내가 틀린 말을 해줄 리 없잖아.”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는 그녀를 보며 창현은 피식 웃음을 짓고 말았다. 석규 대신 와서 미국에서까지 자신의 매니저 노릇을 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고마운 마음이 가득했다.

분위기가 한결 가벼워지고, 세희는 오늘 있을 스케줄에 대해 말했다.

“오늘은 화보 촬영만 있어.”

“금방 끝나겠네요.”

“시차적응을 끝낸 지 얼마 안 되는 시점이니깐. 원래는 며칠 전에 와서 충분히 적응을 했으면 좋겠지만 한국에 좀 오래 있었잖아.”

“그도 그렇죠. 하하.”

아무래도 익숙한 곳이 더 좋다 보니 예정된 날보다 며칠 더 있었기에 빠듯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집에서 지내는 나날이 좋았기에 뭐라 불평불만을 늘어놓을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어쨌거나 화보 촬영만 하면 돼. 저번에 호흡을 맞춰본 적이 있는 곳이니까 그 부분에 대해서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빨리 끝내고 오늘도 휴식을 취하자고.”

“알았어요.”

쿵짝이 맞은 두 사람은 곧장 화보 촬영 장소로 향했다.

가벼워진 마음으로 스태프들과 인사를 나눈 창현은 오늘 있을 컨셉에 대해 설명을 듣다가 함께 하는 파트너 이야기를 듣고 멈칫한다.

“으음.”

그러한 변화를 세희는 놓치지 않았다.

“갑자기 표정이 안 좋은데?”

“아무래도 파트너가 좀…….”

“파트너가 왜? 저번에 방한도 했으니 친한 거 아니야?”

“친한 건 별개로 성격이… 음…….”

뭐라 말하고 싶은데 후환이 두렵기도 하고.

떨떠름한 마음을 해소시키지 못한 채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기분이었다.

“왜 그러는 건데?”

그의 반응을 이해하지 못한 세희는 연신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그때, 한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린 세희가 눈을 빛내더니, 여전히 생각에 잠겨있는 창현의 팔을 툭 친다.

“에?”

“고민하는 사이 와버렸네, 너의 파트너가.”

“그 무슨…….”

세희의 손짓에 따라 고개를 돌렸던 창현이 그대로 딱딱히 굳어버렸다.

어째서냐고?

“하이, 현.”

입가에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짓고 있는 미국산 마왕 테일러 스위프트 때문에?

절대 그런 건 아니었다. 오늘 화보 촬영 파트너가 그녀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를 놀라게 만든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다.

그 이유는 바로 그녀 옆에 있는 존재 때문.

입가에 환한 미소를 지은 존재는 손을 세차게 흔들며 창현에게 인사를 하였다.

“안녕! 창현아! 여기서 또 만나네?”

환한 미소를 지은 채 손을 흔들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소녀시대 센터 윤아였다.


“누나가 여길 어떻게……?”

얼떨떨한 마음을 가까스로 수습한 창현이 윤아에게 자세한 연유를 물어보았다.

함박 미소를 짓고 있던 그녀는 옆에 서 있는 테일러 스위프트를 슬쩍 바라보더니 여유 있게 대답했다.

“응, 저번에 테일러가 방한했을 때 친해졌거든. 그래서 휴가차 미국에 올 때 테일러 집에 머물게 되었어. 오늘 촬영이 있어서 같이 가자고 하기에 온 건데 창현이랑 함께 하는 거였구나.”

“…….”

준비된 대사를 차분히 말하니, 창현으로서는 그것이 연기인지, 진심인지 분간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왜 그래?”

“아, 아니에요, 아무것도.”

“응, 오늘 테일러 촬영을 따라왔는데 창현이도 보고, 참 운이 좋네.”

입가에 싱글벙글 미소를 짓고 있는 윤아를 보고 있자니 뭐라 지적하기도 어려웠다. 본래 웃는 사람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하지 않는가.

복잡해지는 창현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윤아가 절묘하게 틈을 찌르고 들어온다.

“그런데 미국 화보 촬영은 뭔가 다른 게 있어?”

“아니요, 별로 다른 건 없어요. 다른 게 있다면 영어 정도?”

“그래? 그래도 왠지 기대된다. 미국에서 화보 촬영이라니. 히히! 완전 기대하고 있으니 멋진 모습 보여줘. 알았지?”

“네, 그렇게 할게요.”

뭐에 홀린 것 마냥 고개를 끄덕이는 창현이었다.

그리고 궁금한 표정으로 다가온 세희에게 간략한 이야기를 해주자, 고개를 끄덕이고 순순히 수긍하는 표정을 짓는다.

잠시 후, 메이크업을 마친 테일러 스위프트가 다가오며 반갑게 인사한다.

“오랜만이야.”

“오랜만은 무슨, 너무 자주 보는 것 같은데?”

“현은 날 자주 보는 게 싫은가 봐? 난 좋은데…….”

짐짓 아쉬운 표정을 짓지만 창현으로서는 가소로울 뿐이다. 그녀가 어디 그런 것에 영향을 받을 사람이었던가.

“연기 하지 마. 어색해.”

“그래? 역시 난 연기 체질은 아닌가 봐.”

창현의 말에 바로 반응하며 컨셉을 바꿔버린다.

천의 얼굴을 지닌 그녀의 모습에 나오는 것은 한숨뿐이다.

“후우! 어쨌거나 오늘 촬영 잘해보자. 웬만하면 조용히 끝났으면 좋겠는데…….”

“좋게? 후후, 물론 좋게 끝나야지. 아주 재미있게…….”

“재미있게?”

“응, 후후.”

“…….”

자신과 윤아를 번갈아 보며 키득거리는 테일러 스위프트의 모습에 불안함을 느끼는 창현이었다.


“좀 더 가까이!”

“표정 처리가 어색해, 현!”

“농밀한! 남성적인 느낌으로!”

본격적인 화보 촬영이 들어가면서 분위기는 어수선하게 변했다. 평소 완벽한 집중력으로 칭찬이 자자했던 창현이 제대로 집중하는 모습을 보이지 못하며 거듭 지적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연달아 지적을 받은 창현은 머리를 긁적이더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오늘 컨디션이 안 좋아?”

“그런 건 아닙니다만…….”

상태를 물어오는 사진작가의 질문에 고개를 저은 창현이 힐끔 한쪽을 바라본다.

그곳에는 인상을 살짝 찌푸렸지만 눈만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 윤아가 서 있었다.

전에는 안 그랬는데 지금은 왜 그런 것일까.

그녀가 지켜보고 있다는 걸 자각하니 컨셉에 몰입하는데 상당한 걸림돌이 되었다.

창현이 오늘 몰입해야 할 컨셉은 테일러 스위프트와 연인 역할이다.

어리지만 남성다운 모습을 보여야 하는데, 윤아에게 신경을 쓰다 보니 제대로 집중이 되지 않고 있었다.

“힘든가봐?”

“힘든 건 아닌데…….”

“그래? 그렇다면 뭔가 신경 쓰이는 것이 있다던지?”

“뭐야, 마치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한 그 표정은?”

묘한 미소를 지은 채 말하는 테일러 스위프트의 태도가 걸렸는지 창현의 눈썹이 꿈틀한다.

그럼에도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미소를 풀지 않았다.

“그냥. 무슨 걱정이라도 있는가 싶어서 물어봤지.”

“내가 아는 테일러는 절대 그런 걱정을 할 사람이 아니지.”

“어머, 심해라. 나 방금 상처 받았어.”

“그리고 상처 받을 사람도 아니지.”

“…칫!”

강한 창현의 말에 혀를 찬 테일러 스위프트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러다 표정을 바꿔, 예의 묘한 미소를 지은 채 창현에게 말한다.

“어떤 걱정이 있던 프로의 모습을 보여 달라고. 간단하게 끝날 수 있지만 한 번 수렁에 빠지면 끝도 없이 길어지니까. 오늘은 연인 컨셉이니 충실해줬으면 좋겠어, 달링.”

“크윽.”

꿀처럼 달콤한 목소리에 창현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모습을 본 그녀는 꺄르르 웃음을 지은 뒤 멀어졌다.

혼자 남게 된 창현은 자신의 손으로 팔을 강하게 비볐다. 한 번 돋은 소름은 쉽게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소름 돋았어.”

달콤한 테일러 스위프트의 목소리에 현혹 되서?

절대 그런 게 아니다.

그가 소름 돋은 것은 성격과 매치되지 않는 그녀의 목소리 때문이다.

사람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노는 걸 좋아하는 그녀가 이런 목소리를 내다니.

제대로 하지 못하면 저 목소리로 놀림 받을 걸 생각하니 소름이 돋을 지경이다.

“내가 그런 목소리를 듣기 싫어서라도 열심히 한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의욕을 제대로 심어주었다는 점이다.


테일러 스위프트의 충격 요법 때문인지 창현은 한결 집중된 자세로 촬영에 임할 수 있었다.

뒤바뀐 그의 모습에 사진작가도 만족을 표했고, 빠른 속도로 촬영이 전개되었다.

연인 컨셉이기에 진한 스킨십도 나오고는 하였는데, 스스로 최면을 걸어 아무것도 아니라 생각하며 임하니, 망설임이 없어지고, 마인드 컨트롤로 우러나오는 감정은 사진에 담겨 퀄리티 향상으로 이어졌다.

창현을 놀리는데 맛 들였던 그녀는 뒤바뀐 그의 모습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라움을 표했다.

“갑자기 달라졌네?”

“걱정을 끼칠 수 없는 노릇이니까.”

“걱정이라니, 내가 왜 현을 걱정해.”

“걱정이 아니었어?”

“누나가 아가를 보듬어주는 건 당연한 일이잖아. 그걸 가지고 걱정이라 해주면 내가 너무 쑥스럽지.”

“…….”

자신을 아기 취급하는 그녀의 말에 창현은 발끈했다.

키가 그리 크지 않았었기에 자신을 작게 취급하는 것을 무척 싫어한다. 그런데 눈앞의 여자는 종종 자신을 아기 취급하며 민감한 부분을 툭툭 건드리고는 한다.

당연히 발끈할 수밖에 없다.

“…이 키만 큰 멀대같은 여자가…….”

여태까지 영어로 말하던 창현의 입에서 처음으로 한국어가 흘러나왔다.

당연히 그녀가 못 알아들을 것이라 생각하고서.

하지만 그것은 그의 결정적인 실수.

이미 한국어 마스터 영역에 들어선 그녀는 비속어부터 익히기 시작했기에 창현의 말을 정확하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작게 중얼거렸지만 정확하게 들은 그녀의 눈이 새파랗게 빛났다.

그러다 이내 입가에 미소를 짓는다.

‘후후, 아무래도 더 재미있게 해줘야겠네.’

제 무덤을 파버린 창현이었다.


집중력을 되찾고 촬영에 임하자 진도가 빠르게 나가기 시작했다. 사진작가의 호응 아래, 다정한 연인을 어렵지 않게 연출하게 되면서 화보 촬영은 예상보다 일찍 끝을 맺게 되었다.

“같이 식사할래?”

“아니, 괜찮은데…….”

“흐응, 그래? 아쉽네.”

“…….”

묘한 콧소리를 흘리니, 창현은 자기도 모르게 등골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뭐,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오늘 데려온 것도 있고, 자칫 요란하게 스캔들이 날 수 있으니까.”

“…무슨 의도냐.”

“뭘?”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의아한 표정을 짓자, 반대로 눈을 가늘게 뜬 창현이 날카롭게 그녀의 미묘한 변화를 지적한다.

“내가 아는 테일러 스위프트는 날 이렇게 순순히 놓아줄 사람이 아니야.”

“무슨 뜻?”

“내 약점을 잡았으면 집요하게 이용하는 게 바로 너의 성격! 무슨 일을 꾸미는 거야?”

몇 번 당했으면 충분히 학습이 되었다.

순순히 넘어가지 않겠다는 표정으로 테일러 스위프트를 압박하는 창현.

그 표정마저도 귀엽게 느껴져서 입가에 웃음을 지었다.

“웃어?”

“아니, 눈치 챘나 싶어서. 이제야 알아차린 거야?”

“당연하지. 설마 내가 그렇게 학습 능력이 부족한 줄 알았어?”

“순순히 당해주니 부족한 줄 알았지.”

“크윽.”

할 말이 없었다. 그녀의 말마따나 미국에 있는 동안 몇 번이나 당했는지 생각하는 것조차 두려웠다.

창현의 반응에 테일러 스위프트는 그녀답지 않게 양 어깨를 늘어뜨리고 의욕을 잃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알아차렸으니 더 놀려먹기도 힘들겠네. 같이 식사하면 재미있는 소재거리를 마음껏 던져주려고 했는데.”

“누구한테?”

“기자들한테. 대한민국에서 스캔들 나고 미국에서도 스캔들! 짜잔하면 아주 들썩일 것 같아서 잔뜩 기대했었는데…….”

“…….”

등골이 서늘했다. 만약 그랬다면 미국은 그렇다 쳐도 국내가 뒤집힐 것임이 분명했다. 이미 한 차례 스캔들이 일어났는데, 미국에서도 같이 있는 모습을 보이면 분명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이 벌어질 것은 확률적으로 100%다.

“무슨 생각이야?”

“생각 없어. 이미 현이 눈치 채버렸잖아.”

“그럼 이상한 짓 안할 거지? 정말로?”

“들켰으니 걸려들 리도 없잖아? 물론 흥미진진한 소재거리는 던져줄 생각이지만 후후.”

“뭐?”

“아무것도 아니야.”

뒷말은 혼자 중얼거리듯 작게 말했기에 창현은 듣지 못했다. 기이한 기분이 들어 되물었지만 테일러 스위프트는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말을 얼버무렸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미칠 것 같은 불안함이 창현을 휘감았다. 예측할 수 없는 성격을 지닌 여인이었기에 윤아를 상대로 무슨 사고를 칠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어쨌든 아쉽지만 물러가도록 할게. 미스 임이랑 친해지는 시간을 가져야 하기도 하고.”

“친한가 봐?”

“집에 재울 정도면 충분하지 않겠어? 후후, 물론 내가 밤새도록 재우지 않았지만.”

“밤새도록 재우지 않았다고? 그게 무슨…….”

묘한 뉘앙스와 색기가 감도는 표정이 자꾸 무언가를 상상하게 만든다. 하지 않으려도 해도 자연스럽게 남자의 상상력이 발동된 창현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오른다.

“무슨 상상이라도 했어?”

“으응? 뭐, 뭘?”

“후후, 귀엽기는. 그래서 내가 아기라고 부르는 거야. 후후.”

낮게 웃음을 짓는 그녀를 보며 더 이상 상대를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냉정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그것마저도 어린 아이의 칭얼거림 그 이상 그 이하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어쨌든 가보도록 할게. 뮤직비디오 촬영할 때 봐.”

“알았어.”

“후후, 굿 바이.”

나직한 웃음소리를 남기며 멀어지는 테일러 스위프트를 보고 있자니 남는 것은 찜찜함 뿐이었다.

인상을 찌푸린 창현에게 다가오며 세희가 묻는다.

“촬영 잘 했어. 그런데 표정이 왜 그래?”

“그냥 좀 기분이 그래서요.”

“그래? 그럼 곧바로 돌아갈까?”

“네, 가서 맛있는 식사하고 푹 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평소보다 테일러 스위프트에게 더 휘둘린 감이 있었기에 컨디션 조절이 필요했다. 아직 시차적응을 완벽하게 한 것도 아니기에 스스로 다스리는데 미숙했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은 휴식이었다.

세희도 아무 말 않고 묵묵히 창현을 보조했다.


“왜 이렇게 일찍 온 거예요?”

“일찍이라니?”

“그냥 우리끼리 돌아가는 거예요? 창현이는 어떻게 하고?”

“하아? 이런.”

한숨을 내쉬며 황당한 표정을 지은 테일러 스위프트는 손을 들어 윤아의 이마에 튕겼다.

“아얏! 왜 그래…요.”

따끔한 고통에 이마를 부여잡은 윤아가 인상을 찡그리며 외쳤지만 엄마 포스를 물씬 풍기는 그녀를 보며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잘 들어. 대한민국에서는 모르지만 미국 내에서 현의 위치는 대단해. 나름대로 인기 있다 자부하는 나조차도 현과 스캔들을 일으켜 노이즈 마케팅을 일으킬 만큼.”

“…….”

“단지 길을 걷기만 해도 파파라치가 수십 명이 달라붙어. 그나마 행실이 바르고 깨끗하다 소문이 나서 생활에 지장이 없을 정도지, 만약 스캔들 거리를 주면 어떻게 될 거라 생각해?”

“…좀 더 많이 달라붙겠죠?”

“맞아, 현과 만나려면 이렇게 건물 안에 있는 스튜디오 안이면 힘들어. 그 외 공간에는 모두 파파라치가 붙는다고 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현과 만나겠다고? 대한민국에서 스캔들을 일으킨 네가?”

“그…건…….”

뭐라 할 말이 없는 윤아였다. 속으로는 어떻게든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파파라치가 그렇게 달라붙는다는 말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욕심으로 창현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고 싶은 건 당연한 마음이었으니까.

한국에서처럼 어떻게든 만나는 형태는 미국에서 불가능한가 보다.

“히잉.”

아쉬움에 양 어깨를 축 늘어뜨린다.

어린 아이가 칭얼거리는 것 같아 테일러 스위프트가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대신 좋은 기회를 만들어줄 테니까.”

“좋은 기회라면……?”

금세 회복하여 초롱초롱한 눈을 한다. 마치 밥을 주면 눈을 빛내며 달려오는 강아지 같았다. 한국에서 앞세우는 사슴을 조금 더 닮은 듯하지만, 테일러 스위프트는 강아지 쪽을 강력 추천하고 싶다.

‘왜냐면 강아지는 충성을 다하잖아.’

그녀의 눈에는 윤아가 그렇게 보였다.

원하는 바를 이루어주면 충성을 다할 것 같은 존재.

상대를 농락하는 게 취미인 마왕의 필수 스킬은 바로 상대방의 성격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는 것이다.

“뮤직비디오 촬영 있지?”

“네. 있죠. 그것 때문에 제가 미국에 왔고요.”

“그래, 그 미국 촬영에서 좋은 게 떠올랐어.”

테일러 스위프트가 입 꼬리를 말아 올리자 윤아의 입가에 비슷한 미소가 걸렸다.

그리고 이어진 그녀의 이야기에 윤아의 눈동자가 점점 커져갔다.

그날, 윤아는 테일러 스위프트에게 영원한 충성을 맹세했다.


“하아아.”

저녁을 먹은 뒤, 휴식을 취하던 창현은 길게 숨을 내쉬며 눈을 떴다.

세희를 돌려보낸 창현은 모처럼 남는 시간을 명상으로 보내고 있었다. 긴 시간 동안 집중하면서 그동안 쌓여있던 피로를 말끔히 날려버리며 현재 자신에 대해서 좀 더 깊이 파고든다.

“내 마음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 걸까.”

자신에게 찾아온 변화를 그는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다만 현실적인 이유로 가로막혀 있고, 본인이 그어놓은 선 때문에 애써 내색하지 않을 뿐.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한계를 넘게 됨으로써 더 큰 감정의 변동을 일으키려 하고 있었다.

인상을 찡그린 창현이 고개를 저었다.

“힘드네.”

한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면 충분히 현실을 인정하고, 한계를 뛰어넘어 방향을 정할 수 있다.

문제는 자신의 마음이 한 방향으로 향하는 게 아니라는 것.

그러다 보니 제대로 된 거취를 정하지 못하고 혼란에 빠져들기 일쑤였다. 그러느니 차라리 봉인해두는 쪽으로 가닥을 잡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그 봉인도 언제까지 이어질지 장담하기 힘들었다.

“여기까지 찾아온 윤아 누나도 그렇고.”

테일러 스위프트의 제안을 거절한 것은 자신을 위한 것도 있고, 윤아를 위한 것도 있다. 아마 자신이 수락을 했어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그 정도로 경우가 없는 사람이라면 창현과 친해지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을 테니 말이다.

자유로운 미국이라 하더라도 스캔들이 터지면 대한민국까지 큰 영향을 끼치게 될 것임이 분명했다.

“나도 피곤하고, 윤아 누나도 피곤해지니까 나머지는 테일러한테 맡기는 게 낫겠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속 편했다. 아마 테일러 스위프트 또한 그것을 눈치 챘기에 더 채근하지 않고 순순히 말에 따라줬을 테지.

자리에서 일어선 창현은 창문을 통해 드러난 바깥 풍경을 감상했다.

세련된 현대의 거대한 빌딩들이 눈에 들어왔다.

대한민국보다 훨씬 세련되면서 광활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넓은 세계, 그곳의 중심이 이곳이었다. 가장 큰 시장이라 할 수 있고, 가장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이지만 그곳에 자신이 마음 놓고 돌아다닐 수 없다는 사실이 울적해졌다.

문득 밖에 나가 마음껏 돌아다니고 싶다 생각하던 창현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이런 감정도 사치지, 사치야.”

명상으로 기분 전환을 했다 생각했건만 그것이 아니었나 보다.

시시각각 좁혀오는 복잡한 관계와 자신의 처지가 울적했다.

“집에 가고 싶다.”

자신을 따뜻하게 맞이해주는 가족들과 편안히 몸을 눕힐 수 있는 집의 존재가 미치도록 그리웠다. 미국에 온지 불과 이틀 밖에 되지 않았지만 벌써부터 향수병이라니. 미국 생활 막판에 이르러 이런 감정에 휩싸이는 것은 자신의 의지가 나약하다는 뜻이리라.

“열심히 해야지.”

자리에서 일어나 각오를 다진다.

남들보다 화려한 삶을 살고 있음에도 이렇게 약해지는 건 사치였다. 더 열심히 하고, 잘해내는 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슬기롭게 소화하는 방법일 것이다.

의욕을 다지고자 스케줄 표를 챙겨보던 창현이 순간 멈칫했다.

자신의 미국 마지막 스케줄이 무엇인지 봐버린 것이다.

그것은 바로 테일러 스위프트가 총 책임지는 그녀의 뮤직비디오 촬영.

주인공은 바로 자신, 여자 주인공은 그녀의 변덕으로 윤아가 낙점된 상태다.

“…뮤직비디오 촬영도 열심히 해야 하나?”

다시 울적해졌다.


마음을 굳게 먹은 창현은 다음 날부터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스케줄을 소화했고, 세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창현을 보조하는데 힘을 쏟았다.

완벽한 프로의 모습을 보이는 그를 향해 관계자들은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하지만 곁에서 자주 봐온 세희는 창현이 많이 지쳐있는 상태란 걸 알아차렸다. 여태까지 활동은 의지가 받쳐주었지만 마지막은 흔히 말하는 근성과 악이 필요하다.

“괜찮아?”

“할 만해요. 어차피 체력적인 문제도 아니고.”

“정신이 피로하면 몸도 피로한 법이야. 스케줄 끝나면 다른 건 다 필요 없으니까 휴식에 힘을 써. 난 몸에 좋은 음식 좀 구해볼게.”

“괜찮은데…….”

“담당 연예인의 건강을 챙기는 것도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그러니 푹 쉬기나 하세요.”

그를 지치게 만드는 것은 바뀐 주변 환경 중 음식이 가장 컸다. 그랬기에 세희는 몇 없는 한인 식당을 둘러볼 생각이었다.

당찬 걸음으로 나서는 세희를 보며 창현은 침대에 몸을 묻었다.

“그럴 필요 없대도… 그래도 고맙네.”

솔직히 한국 음식이 땡기는 건 사실이었다.


마침내 그 날이 왔다.

촬영 날이 되자 창현은 기대감과 동시에 긴장감이 드는 걸 느꼈다. 오늘 촬영을 성공리에 끝마치면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러다 보니 몸이 달아오르는 것이 당연했다.

“마지막이니까 방심하지 마.”

“물론이죠. 절 뭐로 보시는 거예요.”

“마지막이라서 하는 말이야.”

그렇게 말했지만 의욕적인 창현을 보니 자신의 걱정이 쓸데없는 기우인 것 같았다.

하지만 이어진 말에 세희는 황당한 표정을 지어야 했다.

“저만 믿으시라니까요. 성공리에 끝마치고 당당히 돌아가서 푹 쉬면서 맛있는 음식을 왕창 먹을 테니까요.”

“뭐야, 머릿속에 있는 건 음식 먹을 생각이었어?”

“그런 목표라도 있어야 원동력이 되죠.”

“하아! 내가 졌다, 졌어. 그래도 그런 목표가 있으면 열심히 할 것 같긴 하네.”

어이가 없었지만 확실히 저런 목표를 세워두면 성공리에 끝마치고 싶은 욕심이 생길 듯 싶었다. 뭔가 아닌 듯 싶으면서 설득력 있는 창현의 목표에 세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렇죠? 저도 이상하지만 뭔가 의욕이 생기더라고요.”

“그러네. 가면 맛있는 거 먹자. 내가 사줄게.”

선심 쓰듯 말하니, 창현은 어이가 없어 웃음을 지었다.

“박봉인 매니저를 뜯어먹으라니, 제가 누구인지 잊은 거예요?”

“박봉이라니! 이 정도면 남들 대기업에서 받는 것도 안 부럽거든?”

펄쩍 뛰는 세희였다. 그녀의 말마따나 집에서 그녀가 벌어다주는 돈으로 인해 매번 돈 문제로 싸우던 부부싸움이 종결된 지 오래였다. 모든 걸 가져다주지는 않지만 풍족한 돈은 가정의 평화를 가져다준다.

그러나 돈 자랑을 하기에는 상대가 나빴다.

“그래도 제 앞에서 그러면 안 되죠.”

“그래 너 잘났다! 으이구!”

“어, 그렇게 말하려던 게 아닌데? 제가 더 잘 버니 제가 사겠다는 거였어요.”

“그런 거야? 그래도 가끔은 누나가 동생에게 사주고 싶을 때도 있어.”

“그래요? 음! 왠지 동감이 되네요. 그럼 저도 최고급 프랑스 레스토랑에서…….”

한 건 잡은 듯 눈을 반짝인다. 그렇지만 만만치 않은 고단수 세희는 곧바로 그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사전에 차단한다.

“…10만원 이상 나오면 죽일 거야.”

“칫! 아쉽지만 그 정도로 타협 보죠.”

잔뜩 아쉬운 표정을 짓는 창현을 보며 세희는 지갑이 심각한 위기에 처할 뻔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후! 큰일 날 뻔했다.”

“아참! 누나, 부가세는 별도인 거 아시죠?”

“있는 사람이 더한다더니. 그래 다 빼먹어라!”

결국 자포자기 모드로 빠져버린다.

그렇게 두 사람이 유쾌한 시간을 보낼 때, 테일러 스위프트와 윤아가 촬영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현, 하이.”

“어서 와. 그동안 잘 지냈어? 윤아 누나도 잘 지냈어요?”

“나야 잘 지냈지. 테일러가 구경 제대로 시켜주던 걸.”

활기찬 어조로 말하니, 주변 분위기도 살아나는 것 같았다.

테일러 스위프트에게 지독히 시달릴 거라 생각하던 윤아가 의외로 즐겁게 관광을 했다고 하자, 창현은 의외의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깨를 으쓱한 그녀가 대답한다.

“나도 재미있게 보냈다고.”

“정말 의외인데… 무슨 다른 의도가 있는 건 아니고?”

“날 뭐로 보는 거야. 나랑 미스 임은 무척 친하다고. 한 배를 탄 사이. 그렇지?”

영어로 이야기하지만 의미는 고스란히 전달된다. 장난기가 듬뿍 담긴 그녀의 눈빛에 윤아도 고개를 큼지막하게 끄덕인다.

“물론이야! 나랑 테일러는 이미 뗄레야 뗄 수 없는 사이라고!”

그러면서 허리에 매달리는데, 그 모습이 마치 나무에 매달린 매미 꼴이라 창현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러다 무언가 생각난 듯 윤아에게 말했다.

“어? 누나 영어가 많이 늘었네요?”

“그런가? 아무래도 이곳저곳 다니다 보니 영어가 늘었나봐. 이제 나도 미국 물 먹었으니 소녀시대에서 해외파인 셈인가? 에헴!”

미국에서 며칠 머물렀다고 해외파를 하려고 하니, 나오는 건 웃음뿐이다.

“뭐야! 지금 무시하는 거야?”

“무시는요. 다만 해외파를 하려면 그만큼 폭풍 영어 대화가 가능한지 문득 궁금해져서요.”

“우, 우씨!”

반박하고 싶지만 는 건 듣는 귀뿐이니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럼 슬슬 준비해야지?”

분위기가 어느 정도 풀어지자, 테일러 스위프트는 창현과 윤아를 바라보며 말한다.

오늘 뮤직비디오 촬영의 총괄은 그녀가 맡게 되었다. 두 사람은 각각 주인공 역할을 맡은 만큼 열연을 하여 완성도 높은 뮤직비디오를 만들 의무가 있었다.

“대본은 미리 줬으니 잘 숙지했지?”

테일러 스위프트가 건네준 뮤직비디오 컨셉은 간단하다. 한 남자를 받는 것 없이 사랑한 한 여인이 있고, 그녀가 기다리는 남자는 하루에도 몇 번씩 파트너를 바꿀 정도로 여성 편력이 심한 바람둥이다. 그러던 중 여자 파트너에게 지독한 배신을 당한 그는 결국 자신을 기다리던 여성에게 찾아가 용서를 구하고, 진실한 사랑을 맹세하며 해피엔딩으로 끝을 맞이한다.

예전에 대본을 숙지했지만 창현은 껄끄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숙지는 했는데… 이거 좀 무리수 아닐까?”

“무리수라니? 스캔들의 제왕 현이? 후훗!”

“왠지 기분 나쁜데.”

“난 사실을 말했을 뿐이야.”

인상을 구겼지만 전적이 있으니 할 말이 있을 턱이 없다. 실제로 반지 컨셉을 하면서 요란하게 스캔들을 일으킨 적이 엊그제다.

“그래도 이건 좀…….”

“다 경험이야, 경험.”

“경험이라기에는 너무 농밀하잖아.”

한숨을 푹 내쉬며 윤아의 눈치를 보는 창현. 그러나 의외로 그녀에게서 별다른 반응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뭐가 어떠냐는 듯 말한다.

“그 정도쯤이야… 연기인데 그럴 수도 있지.”

“그렇겠죠? 하하!”

어색하게 웃음을 짓는 창현. 그가 자기도 모르게 윤아의 눈치를 본 것은 바람둥이 역할을 하면서 여러 명의 여자들과 짙은 스킨십을 하기 때문이다. 한국이라면 선정성 논란이 일겠지만 이 동네에서는 별로 진한 편도 아니다.

한편, 쿨한 모습으로 받아넘기는 누님의 모습을 연출했지만 윤아의 속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참아야 해. 여기서 폭발하면 이도 저도 아니게 돼.’

어찌 내 남자가 금발 여인들과 부비부비하는 게 기쁘겠는가. 하지만 뒷일을 위해 참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그녀가 그냥 참는 것도 아니다. 모든 게 주고 받는 것이 있으니 참는 것. 이미 테일러 스위프트와 며칠 동안 함께 지내면서 충분한 논의가 오고간 상태였다.

“그러니 잘해. 연기는 연기일 뿐이니까.”

“그럴게요.”

윤아가 쿨하게 넘겨주니 창현도 한결 마음이 놓였다. 단지 한 마디가 더해졌을 뿐인데 마음 놓고 촬영에 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도 남자인데 설마 싫어서 그랬겠는가.

다만 주변에 눈치가 보였을 뿐이고, 갑작스러웠을 뿐이다.

‘경험이라니까…….’

앞으로 다양한 연기를 하려면 이런저런 연기도 반드시 필요한 법이다.

“자! 그럼 슬슬 메이크업하고 촬영을 시작할까?”

처음 총괄을 맡은 거라 그런지 의욕적으로 임한다. 보통 상황이라면 그 모습에 안도하고 열심히 임해야겠다고 생각할 테지만 창현은 오히려 의욕적으로 임하는 그녀의 태도가 불안했다.

“괜찮겠지.”

마왕을 상태로 모든 걸 경계하지 않고 순순히 넘어가는 것.

그것만으로도 창현의 미래는 결정된 것이다.

미리 준비된 메이크업을 받고 오니, 윤아도 막 나오고 있었다.

본래 그녀의 이미지였던 청순미를 더욱 살리고 의상 또한 그러하니, 가히 청순의 극치였다.

“오, 누나 예뻐요.”

“그래? 확실히 아메리카 메이크업은 틀리네. 히히!”

장난스럽게 웃음을 짓는 것조차 청순해보일 정도니 아메리카 메이크업이 위대하긴 위대한가 보다.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윤아의 미소가 더욱 짙어진다.

“촬영 열심히 해요, 우리.”

“응, 물론이지. 창현아.”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돌연 진지한 표정으로 그를 부른다.

평소 분위기와 달라 의아한 표정을 짓는 창현.

진지한 표정을 지은 윤아가 큰 눈동자로 창현의 눈을 마주하며 말한다.

“난 말이야, 오늘 연기에 충실할 거야. 그것도 아주.”

“그래요?”

“그러니 창현이 너도 연기에 충실해야 해. 알았지?”

“물론이죠. 우리 같이 연기에 충실해요.”

“응, 연기에 충실하자.”

진지한 표정을 지우고 활짝 미소를 짓는 윤아.

그것이 함정인 줄 창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아!”

정신이 몽롱해질 것 같은 부드러운 느낌이 온몸에 느껴진다. 몰입을 위해 집중했지만 처음 겪어보는 농밀한 감촉은 창현의 집중을 깨버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NG!"

촬영 중단이 선언되며, 찰떡처럼 붙어있던 여배우와 창현이 떨어진다. 안색이 흐려진 창현이 촬영팀을 향해 고개를 숙인다. 자신의 실수다.

“미안해요.”

무엇을 실수했는지 정확하게 알고 파악한다. 그리고 단기간에 그것을 극복한다. 누구나 다 아는 것이지만 창현은 이러한 것들을 완벽하게 해낼 수 있는 재능을 지녔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그것이 무척 힘들었다.

“괜찮아?”

팔에 감겨있던 부드러운 느낌이 사라지더니 그의 앞에 풍만한 육체가 떡하니 자리한다.

집중력이 깨져있다 보니 그걸 마주보는 것조차 부담스러워서 헛웃음을 지은 창현이 고개를 끄덕인다.

“응, 미안.”

“미안하긴, 잘되는 날도 있고 잘 안 되는 날도 있는 걸.”

남자를 현혹시키는 나이스 바디를 지닌 금발 미녀가 창현을 향해 섹시한 미소를 짓는다. 문제는 그녀 한 명이 끝이 아니라는 점. 옷을 갈아입고, 메이크업을 끝마친 여러 명의 여인들이 그를 향해 추파를 던지고 있다.

이러한 역할이 무척 어렵게 느껴졌다.

‘이거 참.’

좋다고 해야 할지, 싫다고 해야 할지.

남자로서 한 번쯤 꿈꿔오던 세상이 눈앞에 펼쳐져 있지만 마냥 웃으면서 임할 수 없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

생전 처음 겪어보는 스킨십은 그로 하여금 제대로 적응을 못하게 만들 정도였다.

그만큼 서양 여인들의 유혹은 치명적이고 강렬했다.

한국에서 볼 수 없는 나이스 바디(?)로 치고 들어오니, 시선 처리부터 시작하여 완벽한 감정 컨트롤이 되어야만 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느껴버리는(?) 표정이 카메라에 그대로 담겨버리니,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문제는 테일러 스위프트가 섭외한 여인들이 뭔가 진심으로 달려드는 중이다.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현역 모델들이다 보니, 어디 눈 둘 곳이 없는 그다.

“쿡쿡!”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창현을 보며 테일러 스위프트가 웃음을 흘렸다.

평소에는 어른스러운 모습으로 무장하여 많은 사람들을 홀리는 슈퍼 스타였지만 그 본질은 아직 껍데기도 벗어나지 못한 어린 아이에 불과하다. 그것을 일찍이 꿰뚫어 본 그녀는 현에게 아가란 별명을 붙여주었다.

그 별명처럼 자신이 예상한 그대로의 반응을 훌륭히 보여주고 있었다.

“예상 이상이잖아?”

NG가 나는 건 개의치 않았다. 이미 뮤직비디오 촬영을 염두에 두면서 이러한 상황을 모두 예측했기 때문이다. 모든 상황을 의연하게 넘길 수 있을 것 같은 현이었지만 실제로는 여자도 제대로 사귀어보지 못한 쑥맥이다.

그러한 그에게 세계 최고의 몸매를 지닌 여인들이 육탄공세를 퍼부으니,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으리라.

“귀여워.”

당황한 표정을 애써 감추며 태연한 척하려는 창현의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

마치 사자 사이에 놓인 사슴이 호랑이인 척하려는 느낌이랄까. 맹수인 척 해봤자 맹수들 눈에는 가련한 초식 동물에 지나지 않았다.

그동안의 기다림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창현의 리액션은 훌륭했다.

물론 그것을 마냥 즐겁게만 지켜볼 수 없는 한 사람이 있었다.

“이건 좀 아니잖아요.”

옆에 서 있는 윤아의 표정은 불만이 가득했다.

산통 깨는 그녀의 말에 테일러 스위프트가 웃음기 역력한 표정으로 묻는다.

“왜, 재밌잖아?”

“저게 재미있다고요?”

아미를 찌푸린 채 상황을 지켜보는 윤아는 가슴이 부글부글 끓어서 미칠 지경이다.

그녀는 당최 테일러 스위프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뮤직비디오 컨셉이라고 하나, 예쁜 모델들을 잔뜩 써서 창현에게 육탄공세를 퍼붓는 꼴이라니!

여덟 명의 경쟁자를 두고 경쟁하다 보니 눈썰미가 신의 경지에 다다른 그녀는 창현에게 달려드는 서양 모델들의 속내를 단숨에 꿰뚫어 보았다.

저건 단순한 연기에 의한 것이 아니라 진심이 내포된 육탄 공세다.

예리하게 갈고 닦인 사슴의 감각은 이미 비상경종을 울리고있다.

“재미있잖아. 당황하는 모습! 재미 없어?”

“재미있을 리가 없죠!”

“그래? 난 충분히 재미있는데. 세계적인 슈퍼스타가 여성의 육탄 공세에 흔들리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없다고?”

알면서 모르는 척 하는 건가, 아니면 몰라서 이러는 걸까.

분기를 참지 못한 윤아가 빽하니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이익, 날 도와준다면서요!”

“물론 도와줄 거야.”

“그런데 저게 뭐에요!”

“그야 뮤직비디오 촬영의 일종이지. 성공적인 컴백을 위한 뮤직비디오 촬영.”

생글생글 미소를 지으며 한 마디도 지지 않는 그녀의 태도를 보며 윤아는 당장이라도 포기 선언을 하고 물러서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자신이 물러서게 되면 창현은 저 육식 동물 사이에 놓인 가련한 초식 동물 그 이상 그 이하에 지나지 않는다.

흉흉한 표정이 자리 잡기 시작하자, 장난을 감춘 테일러 스위프트가 말한다.

“현이랑 사귀게 되면 상대 배우가 이 정도 스킨십은 할 텐데 이것도 참지 못하는 거야?”

“그건…….”

“지금 이렇게 하는 것도 모두 미스 임을 위한 거야.”

도대체 어디가 자신을 위하는 것이란 말인가.

당장 따져 묻고 싶었지만 대답하지 않은 채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니 날 믿어.”

“…….”

침묵하는 그녀를 보며 미소를 지은 테일러 스위프트는 여전히 모델들에게 시달리고 있는 창현을 보더니 박수를 친다.

짝짝!

“그럼 다시 시작하도록 할게. 장난은 그만하고 진지하게 해.”

“네!”

대답을 하는 모델들의 눈이 기이하게 반짝였다.

희대의 바람둥이 역할을 맡게 된 창현이지만 그의 앞날은 그리 평온하지 않을 듯 싶었다.


여인들 속에 파묻혀 있는다는 건 남자로서 본능에 충실할 때 그리 나쁜 감각이 아니다. 하지만 그 본능이 연기에 방해가 된다는 걸 알아차렸을 때, 창현은 자신이 시험대 위에 올랐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분명 남자로서 지금 이 순간을 즐길 수 있지만 자신은 즐기기 위한 게 아니라, 촬영을 위해 온 것이다. 욕망에 충실한 한 남자가 아니라, 여자들을 데리고 놀기 좋아하는 바람둥이가 자신이 맡은 역할이다. 비슷하지만 자신이 주체가 되는 것과, 배역에 몰두하여 그것이 주체가 된 것은 엄연히 달랐다.

‘당황하지 말고 중심을 잡자.’

여태까지 나온 NG는 모두 자기 스스로 부끄러움을 참지 못했기에 나온 것이다. 그것을 참아내고 바람둥이 껍질을 쓸 수 있다면 여인들의 육탄공세에도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노래가 흘러나오며 연기를 시작하게 되자, 금발의 여인이 매혹적인 미소를 짓는다. 그러나 여기서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서는 것은 그녀가 아닌 바로 자신. 여자를 농락하고, 자신을 사랑하는 여인을 버리는 나쁜 남자가 바로 자신이다.

입 꼬리를 말아 올린 창현은 위 아래로 여인의 몸매를 스윽 훑어보더니, 팔을 뻗어 자연스럽게 허리를 감는다. 전과 다른 그의 행동에 여인이 놀란 기색을 보였지만 다행히 카메라가 비치지 않는 구역. 그의 연기에 호응하며 자연스럽게 품에 안겨든다.

한손은 허리를 단단히 감은 채, 다른 손으로 부드럽게 머리를 쓸어내리다가 시선이 마주친다. 입가에 진한 미소를 지은 창현은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맞춤을 하자, 놀란 여인이 뒤로 물러선다.

“NG!"

“아…….”

방금 전과 같은 NG 선언이었지만 많은 것이 달라졌다. 여태까지 달려드는 여인에게 부담을 느낀 창현이 자리를 피했지만 지금은 달랐다. 사람 자체가 변했다고 할 만큼 뒤바뀐 창현의 행동에 그녀들이 놀라 미처 적응을 못한 것이다.

“와우! 멋있어, 현. 정말 바람둥이 같았어.”

감탄사를 터뜨리며 칭찬을 하지만 왠지 칭찬이 칭찬 같지가 않아 겸연쩍은 미소를 짓고는 말한다.

“계속 가자, 집중이 깨지면 안 될 것 같아.”

“OK.”

그 뒤로도 농밀한 스킨십이 이어지는 장면이 촬영되었고, 바람둥이 역할에 완전히 몰입한 창현은 스스로 NG를 내지 않은 채 성공리에 촬영을 끝마칠 수 있었다.


“으으으.”

모두가 뒤바뀐 그의 모습에 놀라워하면서 열광했지만 단 한 사람만큼은 예외다.

그 사람은 바로 오늘 뮤직비디오의 히로인을 맡은 윤아 양.

자신의 남자가 다른 여자와 농밀한 스킨십을 한 채 느끼는(?) 모습은 그녀로 하여금 열폭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하아! 참아야 해, 임윤아. 조금만 더 참아. 원래 컨셉이 이랬잖아? 생각했던 것보다 더 진하지만 참아야 해. 이것만 참으면 내 시간이야.”

뒤에 있을 분홍빛 미래를 상상하며 열기를 억누르는 윤아. 대한민국에서 이 정도면 심의에 걸리지만 개방적인 미국은 다르다. 문화가 다르기에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하며 마인드 컨트롤에 빠진다.

억겁과도 같은 시간은 매우 천천히 흘러갔다. 눈을 감고 상황을 지켜보지 않으려 했지만 그녀의 눈에 지옥과도 같은 광경은 차곡차곡 담기고 있었다.

“익… 저 년이 감히 창현이의 볼에 키스를…….”

“아악! 저년은 어딜 만지는 거야!”

“아, 안 돼!”

한 조각 남은 아이스크림을 빼앗긴 어린 아이 마냥 초조한 안색을 감추지 못한 채 여자 친구 역할에 한껏 몰입된 그녀. 지옥과도 같은 시간이 끝났을 때, 촬영도 하지 않았건만 그녀는 이미 녹초가 되어 있었다.

OK 싸인이 나자, 수건과 물을 들고 쪼르르 달려간 윤아가 여인들 사이에 파묻힌 창현을 빼내는데 성공한다. 힘융의 힘은 서양 여인들 사이에서도 빛을 발했다.

“괜찮아?”

“네? 뭐… 하하! 힘들긴 하네요. 고마워요.”

“이 정도쯤이야.”

방금 전까지만 해도 치미는 질투심에 미쳐버릴 것 같았는데 이렇게 마주하고 이야기를 하니 그것이 희미해지는 것 같았다.

그래 뭐, 이미 있었던 과거는 어쩌겠는가. 아무리 농밀한 스킨십이 있어봤자 저들과 자신은 비중 자체가 틀리고, 스킨십의 단계조차 틀렸다.

‘흥! 너희들은 어차피 루저야!’

아무리 예쁘고 훌륭한 몸매를 지녀봤자 인맥(?)을 따고 들어간 자신을 이길 수 없는 일이다.

괜히 적의를 불태우며 여인들을 향해 눈을 부라린 윤아는 앞으로 있을 촬영에 대해 상상하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힘들지?”

“아직 참을 만해요. 갈 길이 먼데 벌써 지치면 안 되죠.”

“응, 그래도 힘들면 말해. 촬영도 중요하지만 몸도 생각해야지.”

“네, 고마워요.”

의지할 사람이 없는 타지에서 아는 사람의 걱정은 큰 힘이 되며 동시에 호감을 살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방법이다.

어디선가 들은 말인데 직접 실행해보니 효과가 나쁘지 않은 듯했다.

“응, 그럼 힘내고 촬영 열심히 하자. 그, 그리고 키스신 촬영할 때 양치하고 가글할 테니까… 그건 걱정하지 말고.”

그렇게 말을 한 윤아가 부끄러움을 참지 못한 채 저 멀리 사라졌다. 남아있던 창현은 그녀가 남긴 말을 곱씹다가 황당한 표정이 되었다.

“네? 지금 그게 무슨 말이에요?”

방금 자신이 들은 게 잘못된 게 아닌가 생각하던 창현은 테일러 스위프트에게 달려가 자초지종을 물었지만 그녀는 태연함 그 자체다.

“아, 그거? 원래 있었는데?”

“내 대본에는 없었다고!”

그러면서 대본을 내민다. 그것을 받아든 그녀는 대본을 훑어보다가 피식 미소를 지었다.

“아, 이거 초기본이네. 개정본 안 줬어? 거기에 키스신이 추가되었거든.”

“그게 무슨…….”

“개정본에서는 뒷부분이 많이 바뀌었거든. 그러니 보고 숙지하도록 해. 머리 좋은 현이라면 점심시간 동안 충분히 가능하겠지? 그럼…….”

말을 끝마친 그녀는 창현이 말할 틈도 주지 않은 채 몸을 돌려 사라졌다.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창현은 황급히 대본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뒤바뀐 내용에 황당한 표정을 지어야만 했다.

“이게 뭐야.”

초기본과 개정본의 차이는 간단했다.

바로 사랑하는 여인과 재회한 이후, 펼쳐지는 스킨십은 더욱 진해졌고, 존재하지 않던 키스신이 삽입되었다.

눈 뜨고 당해버린 창현이다.


흔히 울다가 웃으면 엉덩이에 털 난다는 말이 있다. 대한민국 사람 중 이 말을 모르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 말을 모를 리 없건만 윤아는 아까 전부터 계속해서 입가에 웃음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었다.

“히히히!”

“웃지 좀 마.”

“알았어요, 그런데 계속 웃음이 나오네, 히히히!”

창현이 여자 모델과 스킨십을 할 때는 눈에서 레이저를 뿜어내더니, 자신의 차례가 되자 푼수처럼 연신 헤픈 웃음을 흘린다.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법칙을 철저히 적용시키고 있다.

“근데 정말 괜찮겠어?”

“뭐가요?”

매니저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윤아가 아무것도 모르는 척 묻자, 아미를 찌푸린 그녀가 말한다.

“넌 아이돌이야. 게다가 상대는 현이고. 분명 파장이 클 거야.”

한국에서 드라마 촬영을 할 때 키스신 촬영으로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지 않았던가. 그것을 떠올리자니, 키스신 파트너가 되는 윤아에게 미칠 파장이 걱정되었고, 그녀의 이미지가 손상될 것도 염려되었다.

“괜찮아요. 드라마 여자 주인공과 뮤직비디오 사이에서 내린 결정이에요. 어차피 드라마를 촬영하더라도 키스신은 있었을 걸요? 그렇다면 차라리 더 이슈가 되는 게 좋겠죠.”

“그럴까?”

“그럴 거예요. 삼촌이 허락하셨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요.”

“하긴…….”

쉽게 납득하지 못하자, 수만을 팔아 설득한다. 긴가민가하던 매니저도 그 말을 듣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메이크업을 마친 윤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허둥지둥 서둘렀다.

“준비가 늦은 것 같아요, 어서 가요. 언니, 빨리요!”

“자기가 웃느라 늦었으면서…….”


바람둥이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그 앞에 나타난 것은 변함없는 모습으로 자신을 기다려준 여인이다. 오로지 욕망에서 시작하여 욕망으로 끝나던 사랑이 믿음이라는 요소로 채워지게 되자, 지난날 자신의 과오를 반성하게 되고 진실 된 사랑을 깨닫는다.

감동스러운 로맨틱한 장면 촬영은 어렵지 않게 이어졌다. 두 사람 모두 같은 드라마에서 호흡을 맞춰보았기에 어렵지 않았다.

다음 이어질 촬영을 위해 잠시 휴식시간이 주어지자, 창현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윤아에게 묻는다.

“누나 괜찮겠어요?”

“뭐가?”

“그러니까… 스킨십하는 장면이요.”

미국 모델들과 할 때는 이곳이 그런 곳이라 생각하며 임하니 어렵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과 같은 곳에서 자라 비슷한 환경에서 문화를 접했다. 선정성으로 심의에 걸릴 수 있는 진한 스킨십이 망설여질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윤아는 최고의 주가를 달리고 있는 여성 아이돌이다.

윤아가 고개를 들어 창현과 눈을 마주하며 입을 연다.

“창현아, 한 가지만 말할게.”

“네. 말씀하세요.”

“제대로 안 하면 죽일 거야?”

“…….”

웃으면서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일순간 얼음이 되어버렸다. 그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지그시 창현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2차 위협을 가한다.

“알았어, 몰랐어?”

“아, 알았어요. 제대로 할게요.”

“옳지, 착하다.”

윤아는 환한 미소를 지었고, 창현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본격적으로 시작된 스킨십 장면은 순조로이 흘러갔다. 사랑하는 여인과 산책을 하고, 밭을 가꾸며, 같이 청소를 하기도 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아침을 만들며, 뒷정리를 하고, 부스스한 모습마저도 향긋한 커피 향으로 시작한다.

연인으로써 연출할 수 있는 다양한 상황 연출은 윤아로 하여금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을 만끽하게 하였다.

‘아,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산책을 할 땐 서로 깍지 손을 하여 잡고, 팔짱을 끼기도 한다. 대본에 여러 애드리브를 요구하였기에 각자 애교를 부리기도 하고, 매달리기도 하면서 윤아로 하여금 최고의 행복을 누리게 한다.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다. 같이 밭을 가꿀 때는 일에 익숙하지 못한 창현의 자세를 교정해주는 장면을 연출하며 합법적으로 몸을 감싸는 스킨십을 하게 하였으며, 청소를 하면서 시선 교환을 통해 알콩달콩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잠든 여인을 위해 아침을 만드는 매력적인 남자의 모습도 보여준다. 특히 침대에 잠들어 있는 연기를 할 때, 커피 향과 함께 자신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깨워주는 장면이 압권이다.

이 모든 장면은 윤아가 창현과 해보고 싶은 망상이 집합된 것. 테일러 스위프트는 그녀의 의견이 단지 재미있을 것만으로 모조리 추가시켰다.

여기서 끝이란 걸 알면서도 괜히 가슴이 두근두근거린다.

‘행복해.’

정말 이랬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지만 오늘따라 미친 역량을 보이는 윤아와 창현은 NG를 거의내지 않은 채 순조로이 촬영에 임하고 있다.

조금이라도 더 즐겼으면 좋겠건만.

그것이 윤아의 유일한 아쉬움이다.


연인으로 행복한 나날을 보내는 장면 촬영도 모두 끝이 났다. 남은 것은 바람둥이 생활을 반성하며 한 여인을 사랑하게 된 남자가 자신을 기다려준 여인에게 프러포즈를 하는 장면이다.

수백 개의 촛불이 어둠을 밝히며 아름다운 하트 문양을 만들어냈고, 그 가운데 서 있는 창현의 모습은 신비로운 밤의 귀족 같다.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은 채 손에 든 꽃을 내미니, 몽롱하게 풀린 윤아가 꽃다발을 받아들며 입가에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이게 연기인가, 실제인가. 구분이 가지 않을 지경이었지만 중요하지 않았다. 한껏 연기에 몰입된 그녀는 지금 이 순간이 너무나 행복하여 깨어나지 않고 싶을 따름이었다.

자연스럽게 마주친 두 사람의 시선은 일렁이는 불꽃처럼 잘게 떨렸고, 서서히 눈이 감기기 시작한다.

차츰 가까워지는 얼굴. 서로의 숨결이 피부를 간질일 때, 입술과 입술이 포개지며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낸다.

앞에서 여인들과 방탕한 모습을 보이며 즐겼던 모습과는 정반대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끼리 확인할 수 있는 순수한 키스. 짙은 어둠 속에서 은은히 어둠을 밝히는 촛불 아래 행해지는 프러포즈와 입맞춤은 풋풋하지만 이 세상 그 어느 것보다 진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NG!”

모든 게 완벽하건만 무엇이 문제였을까.

테일러 스위프트의 외침이 울려 퍼지면서 마지막 화룡정점만 남겨둔 촬영이 중단되었다. 입술이 떼어지자, 부끄러움을 참지 못한 윤아는 두 손으로 붉어진 얼굴을 가렸고, 창현도 부끄러움을 해소하고자 헛기침을 하였다. 그리고는 의아한 시선으로 고개를 돌려 물었다.

“왜 NG?"

“너무 순수해. 여자들을 농락하던 바람둥이가 하는 키스치고 너무 순수하잖아.”

말도 안 되는 트집이다. 처음부터 대본에서 요구하던 것은 진실한 사랑을 하게 된 바람둥이가 순수함 가득한 입맞춤을 하는 것이다. 모든 요구 조건을 충족시켰건만 NG가 나니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다.

“바람둥이는 여자에게 죄책감을 가지고 있어. 그래서 함부로 키스를 하지 못해. 그 속을 알아차린 여자가 미소 지으면서 입맞춤을 해줘야 해. 아가는 놀란 표정을 지어줘야하고. 알겠지?”

“…OK."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잘 몰랐지만 대충 의미는 알아차린 창현이다. 그리고 바뀐 대본을 보며 달아오른 얼굴을 식힐 겸 짧은 휴식 시간을 가졌다.

대본에 몰두하느라 창현은 보지 못했다. 한순간 테일러 스위프트와 윤아가 의미심장한 시선을 서로 교환한 것을.

윤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테일러 스위프트가 손을 들어 목을 긋는 시늉을 한다. 그걸 본 윤아의 미소가 더욱 짙어진다.

다시 재개된 촬영.

창현의 주도가 아닌, 윤아의 주도로 이루어지게 된 키스신 촬영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만족스러울 법도 하였건만 마지막 장면만큼은 가장 중요하다는 말 아래 계속해서 NG를 선언하며 재촬영을 감행하는 테일러 스위프트다.

한 번, 두 번, 세 번… 열 번, 스무 번.

이유도 각양각색.

그것을 듣는 창현은 납득하지 못하는 표정이었지만 감독이 그렇다고 하니 뭐라 반론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윤아에게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괜찮냐고 물어보자, 수줍게 괜찮다고 한다. 그 모습이 영락없이 힘들어보여서, 창현은 테일러 스위프트를 보며 궁시렁거린다.

그렇게 이어진 키스신 촬영은 무려 서른세 번.

그야 말로 원 없이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은 키스신 촬영을 하게 되었다. 여기서 테일러 스위프트가 OK 싸인을 내린 이유가 순전히 졸려서 그랬다는 건 영원한 비밀이다.

미국산 마왕과 사슴의 합작.

그렇게 육식사슴으로 변한 윤아는 창현이랑 초식동물을 먹어치웠다.

그것도 서른세 번이나.

원 없이 키스신 촬영을 한 윤아는 만족의 미소를 지으며 테일러 스위프트가 한국에 왔을 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슈퍼스타이면서 순수함을 간직한 현이 너무 귀여워. 그래서 더 괴롭혀주고 싶어. 미스 임이 그를 좋아한다면 적극적으로 도와주도록 할게. 어디 한 번 질릴 때까지 즐겨봐.”

그 결과 질릴 정도는 아니지만 만족할 정도로 즐기게 되었다.

‘역시 세상은 인맥이야…….’

미국에 와서 삶에 아주 귀중한 교훈을 깨달은 윤아였다.

그렇게 비리(?)와 인맥(?)으로 점철된 뮤직비디오 촬영이 끝나게 되었다.

아주 거대한 후폭풍을 안고서.


If……

나쁜남자 ver.


“NG!”

대본에서 요구한 대로 순수함이 가득 담긴 입맞춤을 했건만 테일러 스위프트는 NG를 외친다.

그리고 그 사이 대본이 바뀌었다는 말과 함께 다시 키스신을 하라고 한다.

요망한 것. 설마 그 검은 속내를 모를 줄 알고?

‘어차피 나한테 손해가 될 건 없지.’

눈앞에서 얼굴을 붉힌 채 손부채를 하는 윤아는 무척 귀여웠다.

그래서인지 NG 외침에 반발하지 않았다.

예쁜 여자와 키스신을 거부할 바보 같은 남자가 어디 있는가? 그 또한 즐길 때는 즐길 줄 아는 건전한 사상을 가진 남자였다.

‘후후.’

못 이기는 척 속아주면서 키스신을 한다. 서툴게나마 리드하려는 윤아의 입술 박치기를 느끼며 창현의 입 꼬리가 말려 올라간다.

‘키스 경험은 내가 위라고.’

연이은 NG 선언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차린 창현은 좋은 기색을 애써 숨기는 윤아의 모습에 피식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누나, 아무래도 우리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요.”

“뭐, 뭘?”

“여기는 미국이잖아요. 그런데 하는 건 어린 아이 동화책에 나올 법한 행동이라고요.”

“그, 그런 거야?”

설득 당해버린다. 당황해서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른 채 창현의 궤변에 고개를 끄덕인다.

“로마에 오면 로마의 법을 따라야 하는 법! 순수하지만 아메리칸식으로 해야되요.”

“아메리칸식이라면…….”

“딥 키스(Deep Kiss)죠.”

“…….”

퐁! 하고 폭발하는 윤아. 하지만 싫은 기색은 없다. 속으로 나이스를 외친 창현은 말을 더해나간다.

“연기니까요. 누나도 힘을 내주셔야죠?”

“아, 알았어, 해볼게.”

“테일러가 그렇게 말했지만 전세가 바뀌어야 해요. 누나가 입맞춤을 하면 그 다음에는 제가 리드 할게요. 알았죠?”

“으응.”

그렇게 다시 시작된 연기. 죄책감에 시달리는 바람둥이에게 여인이 다가와 풋풋하면서 달콤한 입맞춤을 한다. 창현이 놀란 척 눈을 크게 뜨다가 이내 진정을 되찾더니, 더욱 농밀한 키스신으로 리드를 해나간다. 한쪽 팔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허리를 감고, 다른 팔로 그녀의 볼을 받치며 본격적인 작업을 착수한다.

서서히 벌어지는 입.

그 사이로 들어가는 혀.

짜릿한 쾌감이 온몸에 번지는 걸 느끼며 윤아가 몸을 떨었다.

“히익!”


나쁜 남자ver 完.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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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마음을 울리는 음악 시즌2 제1화 +10 15.04.17 7,375 95 10쪽
37 ▲▲▲▲▲시즌2 시작!▲▲▲▲▲ +5 15.04.17 5,425 65 1쪽
36 마음을 울리는 음악 106장-108장 +8 15.04.16 6,414 106 230쪽
35 마음을 울리는 음악 103장-105장 +1 15.04.16 4,243 82 314쪽
» 마음을 울리는 음악 100장-102장 +2 15.04.16 4,412 68 2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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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마음을 울리는 음악 19장-21장 +4 15.04.16 11,490 270 216쪽
6 마음을 울리는 음악 16장-18장 +5 15.04.16 11,541 242 163쪽
5 마음을 울리는 음악 13장-15장 +5 15.04.16 14,534 297 237쪽
4 마음을 울리는 음악 10장-12장 +8 15.04.16 13,736 352 171쪽
3 마음을 울리는 음악 7장-9장 +10 15.04.16 14,551 362 142쪽
2 마음을 울리는 음악 4장-6장 +11 15.04.16 16,834 421 120쪽
1 마음을 울리는 음악 프롤로그-3장 +47 15.04.16 29,895 545 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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