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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번 님의 서재입니다.

마음을 울리는 음악

웹소설 > 작가연재 > 팬픽·패러디, 현대판타지

김현우
작품등록일 :
2015.04.16 13:27
최근연재일 :
2015.06.01 17:02
연재수 :
5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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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4.16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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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345쪽

마음을 울리는 음악 31장-33장

DUMMY

제31장 누나 컨셉 No! 연인 컨셉 Yes!




공교로운 타이밍에 전화를 한 사람은 다름 아닌 석규였다.

석규가 전한 말은 내일 할 말이 있으니 회사에 오면 사장실부터 들리라는 이야기였다.

알겠다고 한 창현은 편안하게 휴식을 취한다.

막상 숙소에 올 때는 상당히 우울한 기분이었는데 지금은 상쾌하기만 하다.

“이런 건 고마워 해야겠네.”

투닥거리기는 하지만 정말 소녀시대가 자신의 친누나처럼 느껴지는 창현이었다. 만약 혼자였다면 이런저런 고민 때문에 우울한 기분이 지속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상쾌한 기분으로 하루를 보낸 창현은 아침이 되자 준비를 마치고 AA엔터테인먼트로 향한다.

AA엔터테인먼트에 도착한 창현은 곧장 사장실로 향했다.

똑똑똑, 노크를 하자 안에서 석규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들어와라.”

석규의 수락이 떨어지자 창현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면서 인사를 하였다.

“좋은 아침이에요, 아버지. 부르셨어요?”

“그래, 앉아라.”

석규가 고개를 끄덕이며 창현에게 자리를 권한다.

창현이 자리에 앉자 석규가 자리에서 일어나 차를 타는 곳으로 향한다.

“무엇을 먹을 거냐?”

“아시잖아요. 생강차요.”

매번 와서 같이 마시다 보니 어느새 생강차에 익숙해진 창현이었다.

그런 창현의 모습을 보며 석규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참 취향도 특이하구나.”

그 말에 ‘자기도 생강차 좋아하면서.’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굳이 언급하지는 않았다.

잠시 후, 따뜻한 생강차 두 잔을 탄 석규가 하나를 창현에게 내밀며 맞은 편에 앉았다.

생강차를 한모금 마시면서 석규가 입을 열었다.

“내가 너보고 오라고 한 이유는 간단하다. 바로 숙소 문제 때문이다.”

“…….”

석규의 말에 창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또한 석규가 자신을 부른 이유가 숙소 문제 때문이란 것을 어렴풋 눈치채고 있었다.

창현이 알고 있는 듯하자 석규는 다시 생강차 한모금을 마시더니 말을 이어나갔다.

“짐작하고 있는 듯하니 이야기하기가 편하겠구나. 네 숙소는 SM엔터테인먼트가 보유하고 있던 것을 우리가 구입한 것이다. 그리고 얼마간 쓰다가 네가 미국으로 가게 되었고, 그 기간에 소녀시대가 옆에 있던 곳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지. 아무래도 밑에서 실수가 조금 있던 것 같더구나.”

“SM엔터테인먼트가 작정하지 않았다면 고의적으로 그럴 리가 없겠죠.”

창현의 말에 석규가 웃음을 지었다. 아직 어리지만 가끔 놀라울 정도로 날카로울 때가 있었다.

“그래, 내가 여러 경로로 알아보니 고의적인 것은 아니더구나. 다만 나나 너보다 조금 일찍 눈치를 챘었다.”

“그래서요? 설마…….”

말끝을 흐리며 말하자 석규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칫하면 노이즈 마케팅 거리가 될 뻔했지. 상당히 위험할 뻔했다.”

“역시 그랬군요. 이수만 회장님의 계획이던가요?”

이미 예상하고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묻는 창현이었다. 노이즈 마케팅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어렴풋 예상했으니 말이다.

그런 창현의 물음에 석규가 고개를 끄덕였다.

“계획? 그렇다고 볼 수도 있겠지. 창현이 네 이름값이 워낙 높으니 욕심이 동했었나 보더구나. 뭐 어제 만나서 이야기를 하니 사과를 하더군. 일단 노이즈 마케팅 같은 건 하지 않기로 약속을 받아냈다. SM엔터테인먼트에서도 이쪽에 원하는 것이 있으니 사이가 틀어지기를 원하지 않았겠지.”

“그래요? 그럼 다행이네요.”

석규의 말에 창현이 한결 표정을 풀며 말했다. SM엔터테인먼트에서 노이즈 마케팅을 안하겠다고 하다니. 창현으로서는 한시름 놓은 셈이다.

그런 창현의 모습에 석규도 살짝 미소를 짓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잘된 셈이지. 그 이야기가 잘 해결되었으니 숙소를 옮겨야 할 듯 싶구나. 멀리 떨어진 곳은 아니고, 같은 단지 내로 숙소를 잡으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돈이 많으면 집 같은 것은 금방 구할 수 있다. 하지만 창현은 연예인이다. 당연히 집을 고르는데 여러 가지 여건이 고려될 수밖에 없다. 특히 회사와 가까우면서 방송국과도 멀지 않은, 그러면서 주변에 마트 같은 것이 가까워야 하는 등, 고려해야 할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런 면에서 창현이 현재 머물고 있는 숙소는 거의 모든 조건을 충족시키고 있기에 그대로 이사 가는 것은 무척 아까웠다.

석규도 이 점을 알고 있었기에 먼 곳으로 이사 가는 것보다 같은 단지 내에서 새로운 집을 구하는 방향으로 생각했다.

뭐, 이러다가 같은 단지에 사는 걸 들키면 그냥 우연이라고 하면 되니 말이다. 연예인이 같은 단지 내에 사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창현이 소녀시대 멤버들과 무척 친밀한 사이인 것 같았기에 굳이 멀리 떨어뜨려놓을 필요를 못 느꼈다. 외동아들인 데다가 유년 시절에 무관심으로 일관하였기에 창현은 무척 외로움을 잘 탄다. 석규는 이 점을 배려해주고 싶었다.

석규의 말에 창현은 고민에 빠졌다. 솔직히 그가 걸려했던 점은 바로 옆집이라는 사실 때문이지 옆집이 아니라면 그리 부담을 느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저야 좋죠. 어차피 논의되던 녹음실도 그 근처로 물색하고 있었잖아요? 근처로 옮기면 굳이 녹음실도 옮길 필요가 없으니 좋을 것 같네요.”

창현의 편의를 위해 녹음실도 숙소 근처에 마련할 생각이었고, 실제로 몇 곳을 후보지로 올려놓은 상태였다.

“그래, 그럼 그 일은 내게 맡기도록 하여라.”

“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해요, 아버지.”

솔직히 창현은 조금 감동한 상태였다.

처음에 숙소를 옮긴다고 할 때 세금이니 뭐니 말도 안 되는 말을 하면서 거부할 때 실망을 했었다. 석규라면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분명히 알고 있었을 텐데 자신의 말을 매몰차게 거절하자 마음이 상했던 것이다. 그로 인해 개인적으로 숙소를 옮길 생각까지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다 자신에게 쓸데없는 염려를 끼치지 않기 위한 석규의 배려였다. SM엔터테인먼트와 확실한 이야기 마무리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창현과 먼저 이야기를 마무리 지으면 나중에 내용이 달라지고, 더 마음이 상할 수 있기에 석규가 먼저 선을 그어서 창현이 섣불리 결론을 내리지 않게 한 것이다.

뭐, 결론적으로 배제된 면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자신을 배려해준다는 마음을 알고 있었기에 딱히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이야기가 훈훈하게 마무리가 되자 석규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숙소 이야기는 여기가지 하기로 하고. 이번에 너한테 음료수 광고가 들어왔는데 어쩌겠느냐?”

“음료수 광고요? 저야 나쁘지 않죠.”

지금 석규가 말하는 것은 하나 밖에 되지 않지만 실제로 창현에게 쇄도하는 CF의 숫자는 무시무시했다. 세계적인 스타인 창현이었기에 그가 광고를 찍으면 외국에도 그 막강한 파워가 전해질 정도로 창현의 이름값은 대단했던 것이다.

그걸 노리고 각종 광고사들이 창현에게 CF제의를 해온 상태였고, 석규가 먼저 그 제의를 받아들이고, 선별하고 선별하여 몸값을 조절한 뒤 창현에게 말한 것이다. 당장 창현에게 들어온 CF는 스무 가지가 넘었지만 석규에게 걸러져 창현에게 전해진 것은 하나밖에 없다.

그리고 석규가 권하는 거라면 창현도 대부분 OK하는 편이었다. 가족이라는 점과 기획사 사장님이라는 점이 겹치는 만큼 창현은 석규를 세상에서 제일 신뢰하고 있다.

“승낙하니 잘 되었구나. 조건도 좋고 컨셉도 제법 마음에 들었는데 말이다.”

창현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석규가 가볍게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한다.

그에 창현이 조금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데 저 혼자 촬영하는 거예요?

음료수 광고는 보통 다른 사람들도 같이 촬영하지 않던가?

창현은 그것이 궁금했다.

그 물음에 석규가 아! 하더니 대답한다.

“아니, 다른 사람도 같이 촬영한다.”

“오! 누군데요?”

같이 촬영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에 창현의 눈이 빛난다.

그런 창현의 모습에 석규가 씨익 웃음을 짓더니 말한다.

“누굴 것 같으냐?”

장난기 어린 웃음. 분명 한 가지 사실은 확실했다.

창현은 이제 제법 내공이 쌓였기에 석규의 웃음을 보고 그가 왜 웃는 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일단 아버지의 그 웃음을 보니 일단 함께 촬영하는 사람이 여자인가 보네요. 맞죠?”

“…너 돗자리 펴도 될 것 같다.”

창현의 말에 석규가 흠칫하더니 대답한다. 설마 자신의 웃음을 보고 그것을 알아차리다니. 자신이 새삼 창현을 제법 많이 놀려먹었다고 생각했다.

석규의 반응에 기분이 좋아진 창현이 어깨를 으쓱한다.

“뭐 이 정도야 기본이죠. 그나저나 누군데요?”

자신과 함께 촬영하는 사람의 정체가 궁금한 듯 창현이 재촉한다.

“SM엔터테인먼트에서 눈치를 챈 듯 제법 힘을 쓴 것 같더구나. 너와 함께 찍는 사람은 소녀시대다.”

“소녀시대라고요?”

창현의 얼굴에 놀라움이 서린다. 설마 자신과 함께 CF 촬영하는 사람이 소녀시대라니.

요즘 자주 엮이는 느낌에 창현이 조금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창현이 석규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거 잘못하다가 오해 받는 거 아니에요?”

석규의 입가에 조금 씁쓸한 미소가 맺힌다.

“그 부분은 어쩔 수 없더구나. 뭐, SM엔터테인먼트에서 밀어주는 듯하니 나쁘지는 않겠지. 창현이 네가 미국에서 하던 만큼 깔끔하게 행동하면 잡음은 나지 않을 게다. 기자들도 네 기사를 작성하려면 제법 부담을 안고 가야 할 테니 말이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창현의 위치가 위치인 만큼 잘못 기사를 작성하다가는 집중 포화를 당하기 십상이다. 창현의 위치가 위치인 만큼 그를 자극하는 기사를 작성하려면 기자의 목숨을 걸고 써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런 현상 때문인지 매번 찬양에 가까운 기사가 올라와서 상당 숫자의 악플러들도 생겨났지만 그들을 신경 쓸 정도로 창현이 세심하지 않았다. 그냥 그러려니 할 뿐.

석규의 말에 창현이 알아들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의심할 만한 행동을 안하면 되겠죠. 그 부분은 제가 신경 쓰도록 할게요.”

“그래. 그렇게 하도록 하고. 조만간 미팅이 있을 게다. 오늘 라샤 녹음을 할 거지?”

“네, 그래야죠.”

“녹음은 잘 되고 있나?”

창현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이번에 난이도가 좀 높은 곡이라 그런지 라샤 누나들이 잘 소화하지를 못하네요.”

“안 그래도 그 이야기를 들었다. 어제 너한테 깨지고 많이 기가 죽은 것 같더구나. 혼내는 것도 좋지만 너무 과하면 역효과가 나니 적절하게 하도록 하여라.”

“물론이죠. 저도 프로인데요. 그럼 전 일어날게요. 일 보세요.”

“그래.”

자리에서 일어난 창현이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사장실을 나온다. 그리고 막 녹음실로 발걸음을 옮기려고 할 때, 핸드폰이 울린다.

번호를 확인한 창현이 고개를 갸웃한다.

“어라? 이 누나는 왜 전화한 거지?”

전화를 한 사람은 선예였다.

그러고 보니 한국에 돌아와서도 간단한 연락만 했지 만나본 적은 없다.

그래도 번호까지 알고 지내는 몇 안 되는 사람인데 내심 미안한 마음이 든 창현은 전화를 열고 받았다.

“여보세요, 선예 누나?”

-안녕, 창현아. 지금 바빠?

아무래도 창현이 무리해서 전화를 받지 않았을까 싶어서 그런가 보다.

창현은 그런 배려에 피식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딱히 바쁘지 않아요. 아니, 바쁘더라도 지은 죄가 있는데 받아야죠. 하하!”

-흥! 알기는 아네? 어떻게 한국에 돌아온 다음에 한 번도 얼굴을 안 비출 수가 있어! 하마터면 우리는 네 얼굴 까먹을 뻔했단 말이야.

단단히 삐진 듯했다. 하기야 한국에 돌아온 지 열흘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화는커녕 먼저 문자도 하지 않았으니 선예 입장에서는 화가 날 만도 하였다.

창현도 그걸 알았기에 웃음을 지으며 애써 얼버무려 하였다.

“그게 그러니까… 요즘 라샤 누나들 녹음 때문에 조금 바빠서…….”

변명을 하려는 창현.

하지만 상대를 잘못 골라도 단단히 잘못 골랐다.

-흥! 소녀시대 애들이랑 자주 만난 거 다 알고 있거든? 설마! 세계정복 했다고 우리는 잊어버린 거야?

이미 전황을 모두 파악한 뒤 전화한 선예였다. 자신을 비롯한 멤버들도 아직 창현을 만나기는커녕 전화조차 못 받았는데 소녀시대 멤버들은 창현을 여러 번 만났다고 하니 심통이 날 만도 하였다.

설마 선예가 그것까지 알고 있을 줄 몰랐던 창현은 살짝 당황했다.

“에 그러니까… 소녀시대 누나들은 촬영 때문에 만났다고 할까…….”

만원의 행복 때 자주 만나기는 했으니 그걸로 얼버무리려고 했지만 선예도 만만치 않았다.

-애들이 다 말해줬거든? 거짓말 하지마!

“윽! 에휴! 실은 조만간 연락하려고 했어요. 이건 진짜에요.”

-정말이지?

전화를 받는 것임에도 건너편에서 선예가 눈을 가늘게 뜨고 거짓 유무를 판단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창현은 순간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지만 애써 당황하지 않은 척하며 대답했다.

“물론이죠.”

-흐응! 그렇단 말이지? 아이! 야! 잡지마…….

갑자기 격렬한(?) 목소리와 함께 투닥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선예의 목소리가 멀어진다.

그리고 들려온 목소리는 선미였다.

-하이 창현! 미국 물 좀 많이 먹으셨는가?

“이야, 선미지? 오랜만이네. 미국 물 많이 먹고 배불러서 한국으로 돌아왔지. 그동안 잘 지냈고?”

선미와 창현은 같은 92년생으로 동갑이었다. 상당히 독특한 정신세계로 4차원 소녀라 불리는 선미는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유쾌하고 재미가 있다.

창현이 반갑게 인사를 해주자 선미가 말한다.

-호오! 우리 창현이가 친근하게 인사하는 걸. 좋아, 창현이 네가 우리에게 싸인 앨범을 줄 영광을 주겠노라.

선미의 독특한 말에 창현은 순간 어이없는 표정을 짓더니 말한다.

“뭐야? 내가 주고 네가 영광스럽게 받아야 하는 거 아니야?

-어쨌든 주면 다 똑같잖아. 아참! 창현아, 내일 시간 있으면 S본부 방송국으로 와줘. 너 소녀시대 언니들이랑은 자주 만났는데 우리들이랑은 연락도 안 했잖아.

“윽!”

연락 문제가 나오면 한없이 작아지는 창현이었다.

아무래도 소녀시대와 더 친하다 보니 그렇게 된 건데 어쩔 수가 없는 건가보다.

나직이 신음을 흘린 창현이 내일 할 일이 뭐가 있나 생각해본다.

어차피 일요일이고, 녹음도 강행할 생각은 없으니 내일은 프리. 하루 종일 논다.

창현은 장난기가 들어 슬쩍 떡밥을 뿌린다.

“흐음! 갈까 말까…….”

상당히 애매한 창현의 말투.

그런 창현의 말에 선미가 말한다.

-창현아, 너 내일 안 오면 선예 언니가 때려주겠다던데? 큰일났다! 안 오면 인천 앞바다로 끌려갈지도 몰라.

-야! 내가 언제 그랬어!

-아이! 언니는 다 낚여 가는데 왜 소리치는 거야.

뒤에서 들리지 않는답시고 속닥거리는데, 청각이 좋은 창현은 다 들었다. 아무래도 선미가 장난을 친 듯하다.

피식 웃음을 지은 창현이 말했다.

“알았어. 그럼 내일 가도록 할게. 그냥 놀러 가면 되는 거지?”

-물론! 선예 언니! 창현이 내일 온데요.

-정말? 내일 열심히 해야겠네!

한동안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워낙 작은 소리여서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언뜻언뜻 들리는 이야기가 있어 내용 파악은 어렵지가 않았다.

-여보세요? 창현아, 그럼 내일 우리 대기실로 와줘.

통화 상대가 바뀌었다. 선예와 선미가 속닥거리는 듯 싶더니 예은이 전화를 받은 것이다.

뒤에서 ‘야 핸드폰 내놔!’, ‘언니 핸드폰 내놓으시죠!’ 라는 목소리가 들렸기에 창현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쿡쿡! 알겠어요. 그럼 내일 보도록 할게요. 요즘 ‘Tell Me'로 선풍적인 인기몰이를 하는 원더걸스가 초대해주니 너무 영광이네요.”

-알고 있다면 내일은 빠릿빠릿하게 움직여서 오라고. 그럼 우리는 방송 시간이 되었으니 이만 끊을게. 내일 봐.

“네, 내일 봐요.”

그 말과 함께 통화가 끝났다.

창현은 핸드폰을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내일은 집에서 게임이나 하려고 했는데 할 일이 생겼네.

그래도 자신을 기억해주고 부른다는 사실이 나쁘지는 않았다.

아니, 솔직히 기분이 좋다고 할까?

한결 나아진 기분으로 녹음실로 향한 창현은 열심히 연습하고 있는 라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자신을 보며 긴장한 표정을 지어보이는 라샤 누나들의 모습에 창현은 미소를 지우며 말했다.

“누나들 연습 많이 하셨어요?”

“으응. 일단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봤어.”

시린을 보며 창현이 묻자, 시린 고개를 끄덕인다. 목이 쉬지 않은 것을 보아 적절하게 관리를 했나보다.

그에 창현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한다.

“녹음 들어가면서 확인해보도록 할게요. 곧장 녹음에 들어가도록 하죠.”

창현은 자리에 앉으면서 곧장 녹음을 시작하였다.

전날 창현에게 왕창 깨진 것 때문일까?

라샤는 정말 열심히 연습을 했는지 어제보다 한결 나은 기량을 보였다.

하지만 아직 창현의 마음에 들 정도는 아니었다.

분명 잘하기는 한다. 아마 창현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오! 하는 감탄사와 함께 박수를 쳤을 것이다.

그러나 창현이 바라는 수준은 이 정도가 아니었다.

노래가 끝난 뒤 라샤는 제법 자신감이 담긴 눈으로 창현을 바라보았지만 그녀들이 본 것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창현의 모습이었다.

“후우!”

제법 잘했다고 여겼지만 아직 창현의 마음에 들 정도는 아니었나보다.

그 뒤에도 최선을 다해 몇 번을 불러보았지만 끝내 OK사인을 받지 못했다.

자신들이 고작 이 정도 밖에 되지 않았는가.

내심 자괴감을 가질 때 창현이 그녀들에게 말한다.

“점심 먹고 계속 하도록 해요.”

“응…….”

의기소침한 모습이었다.

창현은 그녀들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누나들이 못해서 그런 게 아니에요. 조금 더 하면 더 괜찮을 것 같아서 그러는 거니 실망하지 마세요. 어제보다 훨씬 나아졌어요.”

“정말?”

그제야 표정이 환해진다. 하지만 사실이었기에 창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에요. 전보다 훨씬 나아졌어요. 며칠 더 연습하면 완벽하게 소화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다행이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라샤. 어제 창현이 강하게 쏘아붙인 것 때문에 내내 가슴을 졸이고 있었나보다.

그에 창현도 미소를 지어 보인다.

“열심히 연습한 게 눈에 보여서 좋네요. 오늘 제가 지적하는 부분 몇가지를 보완하면 될 것 같아요. 내일은 녹음을 하지 않고 연습하시고요.”

“그래도 돼?”

녹음 일정은 창현이 조율한다. 창현이 쉰다고 하면 라샤도 쉬게 되는 것이다.

쉰다는 말에 미란의 눈이 반짝반짝거렸다.

그렇게 노는 게 좋을까.

“쉬는 건 맞지만 부지런히 연습해야 될 걸요? 연습한 것과 안한 것이 확실하게 티가 날 테니까요.”

“칫! 그럼 집에서 빈둥거릴 수 있는 걸 위안 삼지, 뭐.”

“어쨌든 진전이 있다는 건 반가운 소식이에요. 이 고비만 잘 넘기면 되니까 오늘은 사장님이 사주시는 밥을 먹고 힘내도록 하죠.”

“Yeah! 비싸고 맛있는 걸로 고고!”

석규를 벗겨(?) 먹자는 창현의 말에 모두가 환호성을 지르며 달려간다.

그렇게 창현은 라샤의 기를 보충해줘야 한다는 명목 하에 석규를 실컷 벗겨 먹을 수 있었다.

먹고 싶은 것은 모두 창현이 정했으니 이것이야 말로 라샤에게 신임도 사고 먹고 싶은 것도 먹는 일석이조의 효과였다.


하루가 지났다.

오늘은 녹음이 없는 날이기에 제법 늦잠을 잔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명상과 함께 가벼운 스트레칭으로 몸을 푼 창현이 본격적인 하루를 시작한다.

아침은 간단하게 시리얼로 해결한 뒤 컴퓨터에 앉아 그간 밀린 애니메이션을 찾아서 본다.

애니메이션을 감상하면서 중간에 점심도 해결하자 시간이 어느덧 나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

“시간 참 빨리 가네.”

아침부터 시작하여 한편의 26편 완결인 애니메이션을 다 본 창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나갈 준비를 한다.

어차피 방송을 하는 것이 아니기에 준비하는 것은 간단했다.

샤워를 한 뒤 옷을 갈아입은 것으로 준비를 끝마친 것이다.

로드 매니저가 도착했다는 문자를 받고 창현이 집을 나선다.

벤을 타고 S본부로 향하는 창현. 이미 출입증을 받아놓은 상태였기에 들어서는데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게다가 창현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메이크업을 안 하고, 그냥 머리를 빗어내린 창현은 간단한 안경을 쓴 상태였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빛이 났다.

방송국을 걷던 사람들은 창현이 모습을 드러내자 놀라는 한편 아무런 메이크업도 하지 않은 채 눈부신 외모를 발하는 그를 보며 감탄을 금치 못한다.

이건 뭐 그냥 걸어 다니는 조각상이 아닌가.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면서 창현이 인기가요를 녹화하는 곳으로 향했다.

창현은 원더걸스의 대기실을 찾기 시작했다.

대기실을 찾는 것은 간단했다.

요즘 <Tell Me>란 곡으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원더걸스인 만큼 제일 마지막에 편성되어 있었고, 창현 또한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걸 감안하며 찾으니 금방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대기실 앞에 도착한 창현은 새삼 신경도 쓰지 않던 머리를 정돈하고 옷을 정리정돈한 뒤 노크를 한다.

똑똑똑.

“들어오세요.”

안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예민한 창현의 청각에 의하면 선예의 목소리였다. 그게 누구 목소리인지 솔직히 그리 중요하지는 않지만 말이다.

창현은 조심스럽게 대기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러자 무대 의상을 갖춰 입고 있는 원더걸스가 보였다.

싱긋 미소를 지으며 창현이 인사를 하였다.

“안녕하세요.”

“…….”

창현의 인사에 한동안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는 원더걸스 다섯 멤버.

설마하니 정말 창현이 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선미가 창현에게 냉큼 다가오더니 손을 턱! 붙잡고는 격하게 흔든다.

“잘 왔어! 나의 베스트 프렌드 현! 오랜만이라 그런가? 키가 큰 것 같네.”

선미의 인사에 창현이 웃음을 지었다.

“선미 넌 여전히 엉뚱하군. 나야 한창 때니까 키가 무럭무럭 클 게 분명하지. 내년에는 180cm가 넘지 않을까 생각 중이야, 후후!”

“흐음?”

창현의 말에 선미가 창현의 위아래를 훑어본다. 그리고 씨익 웃음을 짓더니 말한다.

“그건 좀 힘들 듯 싶은데.”

“너 이러기임?”

어찌 보면 아직까지 콤플렉스라 할 수 있는 부분이었기에 키에 관해서는 조금 예민한 창현이었다.

“하하! 장난이야. 어쨌거나 잘 왔어. 자자, 인사 나눠야지.”

“어째 네가 소개시켜주는 듯한 기분이냐. 어휴!”

선미의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창현이 차례대로 인사를 한다. 선예, 예은, 소희 순으로 인사를 끝낸 창현은 유빈과 마주치게 된다.

선예가 유빈을 소개하였다.

“이번에 우리 새로운 멤버로 들어온 유빈 언니야. 창현이 너보다 무려 네 살이나 많아.”

“선예야, 그런 건 좀…….”

스무 살인 것이 결코 많은 나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자리에서는 제일 많았다. 게다가 창현보다 네 살이나 많다니 꽤 차이가 나 보였다.

유빈은 창현을 보더니 쑥스러운 듯 시선을 어디에 둘지 몰라하며 인사를 하였다.

“안녕하세요, 유빈입니다.”

“네, 안녕하세요. 현으로 활동하는 강창현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네, 네…….”

유빈은 창현을 직접 본 것이 어색하고 실감이 나지 않았다.

다른 멤버들은 창현과 여러 번 마주치고 연락도 여러 번 한 까닭에 그나마 낯가림을 하지 않지만 데뷔한지 얼마 되지 않은 유빈에게 있어서 창현은 까마득한 위치에 있는 대스타였다.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 언제부터 인기가 나이를 그렇게 따졌던가?

세계를 제패하고, 한국에서는 가히 폭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창현의 위치는 다른 연예인들과 격을 달리하였다.

지금 유빈은 일반인인 자신이 톱스타 중 톱스타인 현을 만난 기분이었다.

그래서 말도 제대로 꺼낼 수 없었다.

메이크업을 하지 않아도 저렇게 빛나는 외모라니!

아직 나이가 어린 걸 감안하면 앞으로 더욱 더 잘생겨질 것이 분명했다.

격이 다르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선미가 소희의 귀에 속삭였다.

“유빈 언니가 너무 내숭을 떠는데?”

소희가 그런 선미를 타박했다.

“부끄러워서 그런 거잖아. 솔직히 창현이의 인기가 얼마나 높은데. 아마 개인적 친분이 아니었으면 우리가 감히 얼굴도 맞대기 힘들었을 걸?”

“그거야 그렇지만 지금은 친구잖아.

“유빈 언니는 그때 없었잖아.”

“아참, 그렇지.”

소희의 말에 유빈이 왜 창현을 어색해하는지 깨달은 선미였다.

그때만 해도 국내 정상의 인기를 달리고 있던 창현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무척 친해지기가 힘들었다. 창현이 편하게 대해주지 않았다면 계속해서 그러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창현의 인기가 더 이상 치솟을 수가 없을 정도로 올라가 있는 상태여서 유빈의 부담이 더욱 클 것이 분명했다.

창현이 편안하게 대해주지 않는 이상 말이다.

‘그때도 창현이가 먼저 친절하게 말을 해줬었지.’

잔뜩 얼어있는 입장에서 먼저 말을 꺼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아니나 다를까, 잔뜩 굳어있는 유빈에게 창현이 말을 건넸다.

“너무 그렇게 어려워하지 마세요. 평범한 소년인 걸요. 편하게 대해주세요.”

“네? 네… 응.”

단번에 고치기는 힘든 듯했다.

그에 창현은 차선책을 내놓았다.

“처음부터 힘들게 하실 필요 없고 조금씩 익숙해지면 될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핸드폰 번호 좀 알 수 있을까요?”

“무, 물론이지…….”

말끝이 어색하게 흐리는 유빈의 모습에 원더걸스 다른 멤버들이 미소를 지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선미가 창현을 보며 말했다.

“에, 창현이 너 지금 작업하는 거야?”

“무슨 작업?”

“유빈 언니 번호 따내려고 하잖아.”

창현의 얼굴에 황당한 표정이 떠올랐다.

“남자가 여자 번호 따내면 전부 작업이야?”

“그럼 아니야?”

고개를 갸웃하는 선미. 정말로 모르고 있는 듯했다.

그런 선미의 모습에 머리가 아픈 듯 머리를 부여잡은 창현이 말한다.

“그럼 내가 네 번호를 따낸 것도 작업이야?”

“그러고 보니 그것도 있었네. …헉! 창현이 너 나한테 작업 걸었던 거야? 난 아직 안 돼! 정상을 위해 달려야 한다고.”

양팔로 자신을 감싸며 고개를 젓는 선미의 모습을 보며 창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이고! 너 땜에 내가 미친다. 그냥 친해지자는 건데 뭐 그렇게 확대 해석을 하는 거야.”

“그런 거야? 아쉽네. 난 또 네 살 차이 커플은 궁합도 안보고 결혼하다고 하기에 그런 줄 알았지.”

“에휴!”

선미의 태도에 창현은 그저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그렇게 유빈과 번호를 교환한 창현이 무언가 떠오른 듯 대기실을 둘러본다.

그리고 없는 것이 확인 되자 선예를 보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현아가 없네요. 아픈 거예요?”

“…….”

창현의 물음에 대기실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원더걸스 다섯 명의 표정도 살짝 굳었다.

자신이 무슨 실수를 저질렀나 싶어 덩달아 표정을 굳힌 창현이 선예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선예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후! 현아는 원더걸스를 탈퇴 했어.”

“탈퇴라고요?”

놀라움을 대변하듯 창현의 목소리가 높아진다.

선예가 고개를 끄덕인다.

“응. 사정이 있어서 탈퇴할 수밖에 없었어. 그 빈자리에 유빈 언니가 들어온 거야.”

“무슨 문제 때문인데요?”

동갑인 탓에 창현은 현아와도 상당한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 종종 문자도 보낼 정도였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문자를 주고 받았다. 아무 언급도 없었기에 특별한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설마 원더걸스를 탈퇴했을 줄이야.

창현의 물음에 선예가 대답해주었다.

“잘은 모르겠고… 건강 문제 때문인 것 같다고 사장님이 말씀해주시더라고. 현아가 활동하면서 몸이 부쩍 안좋아졌거든.”

“…그렇군요. 후! 전 그것도 모르고 실수를 저질렀네요.”

창현이가 현아를 언급한 것 때문에 대기실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함께 연습생 때부터 시간을 보냈고, 데뷔한 후 얼마 전까지 쭉 같은 시간을 보내왔기에 제법 돈독한 친목이 쌓여 있는 상태였다. 애써 현아를 잊고 새로운 멤버 유빈을 맞아들여 새로 정비가 되던 차에 창현이 현아를 언급한 것이다.

분위기를 망쳐버린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머리를 긁적인 창현이 분위기를 반전시키고자 들고 온 작은 쇼핑백을 내민다.

“이거 내 앨범인데 하나씩 선물하려고 가져왔어. 확인해봐.”

“앨범이라고?”

창현의 앨범이란 말에 그녀들은 언제 침울했냐는 듯이 눈을 빛내며 쇼핑백을 낚아챈다. 그리고 안에 들어있는 앨범을 꺼내든다. 빌보드 차트 7주 1위라는 기염을 토해낸 창현의 싱글 앨범 <Minus>였다.

그녀들은 앨범을 하나씩 잡고는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우와! 내가 현에게 직접 앨범을 받는 날이 올 줄이야.”

“가문의 보물임. 아니다, 팬들한테 팔아볼까?”

“창현아, 여기 싸인 안 했지?”

“앨범 밀봉이잖아요. 당연히 안 했죠.”

포장도 뜯겨지지 않은 앨범에 싸인을 할 재주는 창현에게 없었다. 뭐 백 미터를 10초 이내로 주파하거나 그런 육체적인 능력은 제법 가능하지만 말이다.

창현의 말에 예은이 터프하게 앨범 포장을 좍좍 뜯어내더니 창현에게 내민다. 어느새 앨범 위에는 싸인펜이 첨부되어 있었다.

다소 황당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창현의 시선을 사뿐하게 무시해주며 예은이 말했다.

“싸인해주고 아래에다가 현이 인정하는 우월한 예은님께라고 해줘.”

“하아?”

어이가 없다는 듯 소리를 흘리자 약간 부끄러움을 느낀 예은이 얼굴을 붉히며 소리친다.

“해달라면 해줘. 선물해주면서 그 정도도 못해줘?”

“아니 못해줄 건 없지만… 하아!”

뭐라 따져봤자 손해를 보는 건 자신이리라.

슬쩍 보니 다른 멤버들도 뭐라 적어달라는 눈치여서 창현은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원하는대로 적어준다.

그러자 원더걸스 멤버들이 순위를 다투듯 앞 다투어 창현에게 싸인과 한마디 적어주는 것을 부탁하였다.

그렇게 하나하나 해주고 마지막 차례는 선미였다.

창현은 선미를 보며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제일 엉뚱한 존재여서 무슨 말이 튀어나올지 생각만 해도 두려웠다.

“넌 뭐라고 적어줄까?”

“으음! 잠깐만! 적고 싶은 내용이 너무 많아서 고민이 되네.”

생각이 안 나서 고민하는 게 아니라 너무 많아서 고민이란다.

창현은 마음속에 있는 불안한 마음이 사실로 드러나는 것을 느꼈다.

‘불안한데…….’

“빨리 좀 정해봐.”

창현의 재촉에 선미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입술을 삐죽 내민다.

“이씨! 좀 더 좋은 게 생각날 것 같은데. 알았어, 말할게. 나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여자 아이돌, 나의 로망, 나의 공주 선미에게라고 해줘.”

“…….”

선미의 말에 대기실은 한순간 침묵에 잠겨들었다. 너무나 어이가 없는 말이었던 것이다.

창현은 결국 마음속에 있는 말을 꺼내고야 말았다.

“…너 지금 제정신?”

“선미 너 지금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너 그러다가 스캔들에 휩쓸린다고!”

다른 멤버들도 선미를 적극 만류한다. 얼핏 들으면 선미를 걱정하여 만류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실제로는 질투심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 녀석, 제일 늦게 싸인을 받는다고 해서 이상하게 여겼는데 설마 이렇게 훌륭한(?) 멘트를 구상하고 있었을 줄이야.

창현과 멤버들의 성화에 선미는 인상을 찡그렸다.

“알았어! 그럼 나의 공주까지 빼줄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아이돌, 나의 로망 선미에게라고 해줘. 그럼 됐지? 더 이상 타협은 없음!”

“…하아! 그래 알았다.”

더 이상 타협 따위는 안하겠음이라고 강렬한 포스를 풍기는 선미의 모습에 창현은 한숨을 내쉬며 싸인과 함께 선미가 바라는 멘트를 써주기 시작한다.

나의 로망까지 적었을 무렵, 닫혀있던 대기실 문이 벌컥 열린다.

그와 함께 일단의 무리가 대기실 안으로 들어선다.

“야호! 유빈 언니, 선예야! 그리고 얘들아, 우리 놀러왔어.”

익숙한 목소리다.

멘트를 적던 창현은 귀에 익은 목소리를 듣고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창현은 볼 수 있었다.

원더걸스 대기실로 물밀 듯이 밀려오는 소녀시대를 말이다.

설마 지금 이 타이밍에 올 줄이야. 원더걸스와 소녀시대가 친하다는 것을 간과한 창현의 실수였다.

대기실 안으로 들어선 소녀시대도 당연히 창현을 발견했다.

가장 선두에 서 있던 미영은 창현을 보더니 퍼뜩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어? 창현이? 창현아, 지금 뭐하는 거야? 그건 앨범이고 펜을 쥐고 있네. 설마 싸인 해주고 있는 거야?”

“…….”

미영의 말에 다른 소녀들의 시선이 모두 창현에게 집중되었고, 특히 앨범과 펜에 모여들었다.

서서히 접근하는 소녀들. 창현은 속으로 식은땀을 연신 흘린다.

그냥 싸인이라면 문제가 없을 텐데…….

이 멘트를 어떻게 한단 말인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여자 아이돌과 나의 로망이라니.

제3자가 보면 오해하기 딱 좋은 문구가 아닌가?

“엇, 누나들도 있네요. 그러고 보니 겹치는구나.”

창현은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펜을 내려놓으면서 미영을 바라보며 인사를 하였다.

이런 상황일수록 침착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좋다. 당황한 모습을 보이면 이상하지 않은 것도 이상하게 보일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네가 여긴 웬일이야?”

순규가 찌릿하며 창현을 노려본 채 묻는다. 창현의 퉁 치자 사건으로 인해 아직도 삐져있는 듯했다.

그런 순규의 모습에 창현은 피식 웃음을 짓더니 대답했다.

“제가 여기에 있으면 안 되나요?”

창현이 왜 원더걸스의 대기실에 있는 걸까?

설마 원더걸스를 축하하기 위해서?

대기실에 들어서면서 상황 파악에 힘쓰던 윤아가 창현의 말에 울컥하여 대답한다.

“여긴 원더걸스 대기실이잖아!”

“그, 그렇긴 하죠. 그게 왜요.”

갑작스러운 윤아의 외침에 움찔한 창현이 윤아를 보며 물었다.

왜 소리를 지르는 것일까.

뭐라 말하려던 창현은 자신을 바라보는 윤아의 눈빛에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분위기가 이상하게 가라앉자 선예가 끼어들어 중재하였다.

“우리가 초대했어. 그러니 뭐라고 하지마, 윤아야.”

“그래요?”

고개는 끄덕였지만 완전히 납득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창현이 그런 윤아에게 말했다.

“선예 누나 말이 사실이에요. 저 한국으로 돌아온 다음에 만난 사람들이 누나들 밖에 없거든요. 여태까지 인사도 못해서 시간이 남는 오늘 인사차 들린 거예요.”

창현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인다. 소녀시대 멤버들은 자신들을 먼저 만났다는 창현의 말에 흡족한 기색이었고, 원더걸스 멤버들 또한 사실을 말했기에 기분 나쁠 이유가 없었다.

“근데 저건 뭐야, 창현아?”

주현이 창현을 보며 묻는다.

그녀가 가리키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CD였다.

들어올 때 창현이 무언가에 싸인을 하고 있었기에 물어본 것이다.

그 물음에 창현이 웃음을 지었다.

“하하! 실은 사과의 의미로 CD를 한 장씩 선물하고 있는 중이었어요.”

“선물이라고?”

창현의 말에 몇몇 소녀들이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다. 자신들은 창현에게 CD를 받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원더걸스 전원이 CD를 받았다고 하니 웬지 모를 패배감이 들었다.

‘윽!’

시무룩한 소녀들의 모습에 창현은 왜 그런 모습을 보이는지 깨닫고는 속으로 신음을 흘리며 한발자국 뒤로 물러선다.

그때, 선미가 창현이 가지고 있던 CD를 낚아채더니 자랑한다.

“그뿐만이 아니라고. 이것 봐, 언니들! 창현이가 우리에 대해 써달라고 했더니 이렇게 써줬어.”

창현이 싸인해 준 부분을 내밀며 자랑하는 선미였다.

CD를 빼앗긴 창현은 아차하는 기색이었고, 소녀시대 멤버들은 선미가 내민 그녀에 대한 창현의 소감(?)을 읽을 수 있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아이돌, 나의 로망이라고……?”

태연이 비명에 가까운 침음을 흘리며 말한다.

그러자 창현은 정신이 번쩍 드는 걸 느꼈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선미에게 소리쳤다.

“야, 선미 너 왜 거짓말 해! 누나들, 그건 선미가 써달라고 했던 내용이에요. 오해하지 마세요.”

“그래?”

“하기야… 창현이가 낯간지럽게 저런 걸 쓸 성격은 아니지.”

“괜히 속을 뻔했네.”

창현의 말에 급격히 안정된 모습을 보여주는 소녀시대였다.

그 모습을 본 선미는 뭐가 아쉬운 지 ‘칫’ 하고 혀를 찬다.

‘저것이 진짜…….’

아쉬워하는 선미의 모습에 창현은 속으로 이를 갈며 선미를 째려보았다.

그에 선미가 살짝 혀를 내밀어 메롱을 하더니 고개를 돌린다.

그 모습에 심통이 난 창현.

시키는대로 다 해줬(?)더니 이런 배신이라니.

자칫 잘못했으면 큰 곤욕을 치를 뻔했다.

창현은 소녀시대를 보더니 갑자기 생긋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이거 방송 끝나면 저 밥 사주면 안 되요?”

여태까지 사주기만 했던 창현.

반드시 사줄 거라는 자신감이 가득하였다.

그리고 그 예상은 절반만 맞아떨어졌다.

소녀들은 원더걸스를 힐끗 바라 보면서 승리감에 찬 눈을 하더니 자신들끼리 시선을 교환하였다.

태연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밥이야 당연히 사줄 수 있지! 하지만 맨입으로 안 돼.”

‘누나들은 매번 나한테 공짜로 얻어먹었잖아요.’

조건 없이 베풀던 자신에게 감히 조건을 걸 줄이야.

창현의 눈이 꿈틀거리자 그의 기분이 그리 좋지 않다는 걸 깨달은 태연이 황급히 말한다.

“어, 어려운 건 아니야! 그냥 우리들도 싸인 CD를 하나씩 달라는 거야. 우리는 못 받았거든.”

“맞아 맞아! 우리 회사 프로듀서라면 우리도 신경 좀 써달라! 우우!”

“창현이는 우리에게 앨범을 달라!”

“앨범을 달라!”

마치 시위를 나가는 사람들의 모양새를 보이는 소녀들의 모습에 창현은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알았어요. 그 정도야 어렵지 않죠.”

“우리도 원하는 멘트 적어주기다?”

요구사항도 참 많았다. 하지만 원더걸스에게도 이미 해주었기에 안 해주겠다고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상한 거 적어달라고 하면 안 해줄 거예요.”

“물론이지, 후훗!”

그렇게 협상이 이루어지려던 찰나였다.

갑자기 방해꾼이 끼어들었다.

“잠깐만! 창현아, 우리가 밥 사줄 테니 우리랑 같이 저녁 먹자!”

이야기 진행상황을 지켜보던 선예가 끼어들었다.

그녀의 말에 소녀시대 멤버들이 놀란 시선으로 선예를 바라보았고, 원더걸스 멤버들도 선예를 바라보았다.

자신에게 시선이 집중되자 선예가 얼굴을 붉혔지만 창현에게 말했다.

“우리는 조건 같은 거 안 걸게. 오늘 찾아와서 정말 고마움의 인사를 하고 싶어서 그래. 어때?”

“조건 없이요?”

조건 없다는 말에 창현이 눈을 반짝인다.

그런 창현의 반응에 소녀시대 멤버들은 바짝 긴장한 표정을 짓고 선예의 표정은 밝아져간다.

“응. 조건 같은 거 없어. 맛있는 거 사줄게.”

“호오! 상당히 구미가 당기는데요?”

선예의 첨언에 창현이 턱을 쓰다듬으며 눈을 빛낸다.

그러자 더욱 불안해져가는 소녀시대 멤버들.

곁눈질로 그녀들을 본 창현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선예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쉽지만 오늘은 안될 것 같네요.”

“왜……?”

창현의 대답에 선예가 풀죽은 얼굴로 묻는다.

그에 창현이 소녀시대를 가리키며 말한다.

“먼저 선약을 했잖아요. 게다가… 개인적으로 할 이야기도 있고요. 나중에 만나서 이야기 해볼까 싶었는데 마침 오늘 기회가 닿게 되었네요.”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선예는 아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지만 창현에게 볼일이 있다는 말을 듣고 깨끗이 포기하였다.

그에 반해 창현이 자신들을 선택하자 소녀들은 희희낙락한 모습이었다.

그러던 중 자신들에게 할 말이 있다는 것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그런 기색은 사라졌다.

지금 당장 선택 받았다는 것이 중요했으니까.

그때, 여태껏 조용히 생각에 잠겨있던 미영이 입을 열었다.

“잠깐, 그러고 보니 나는 창현이 앨범 받았잖아!”

“…….”

미영의 외침에 소녀들의 얼굴에 ‘아!’ 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녀들이 데뷔하기 하루 전날에 창현이 선물로 앨범을 보내준 적이 있다. 그것도 한정판으로.

덕분에 그걸 들고 한동안 소란이 일어나지 않았던가.

창현도 미영에게 앨범을 선물로 보내준 것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요. 그럼 어떻게 하죠?”

다른 소녀들은 모두 주는데 혼자 안준다고 하면 조금 불공평하다.

창현의 말에 미영은 손바닥을 짝! 치더니 말한다.

“그럼 나는 나중에 부탁 하나 들어줘, 응?”

“부탁이요? 음! 어렵지 않은 거라면요.”

“OK! 그럼 부탁 하나 킵 해둘게.”

창현의 승낙에 미영이 환하게 웃는다.

그런 미영을 보며 소녀들은 당했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한다.

평소에는 빈틈투성이의 모습을 보이다가 이럴 때 빠르게 치고 들어올 줄이야.

불의의 일격을 치고 들어오니 정말 무서운 존재였다.

시간이 흘러 리허설 무대를 할 시간이 되었고, 창현도 원더걸스의 대기실에서 나와 가수들이 하는 리허설 무대를 감상하였다. 그리고 방송 관계자와 인사를 나누며 리허설 무대를 끝낸 가수들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방송 관계자들은 창현의 인사에 화들짝 놀라면서 반갑게 그와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스리슬쩍 언제 앨범을 들고 나오는지 묻는게, 흡사 먹이를 노리는 맹수의 눈빛과도 같았다.

아직 확실한 일정이 없다는 말로 잘 넘어간 창현은 가수들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창현이 갓 데뷔할 때 인사를 나눴던 가수들은 거의 없었고, 새로 인사를 하는 가수들이 대부분이었데, 그들도 창현의 등장에 놀라면서 간단하게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그때는 보지 못했던 가수들을 보면서 창현은 신인 가수들이 얼마나 많이 등장하고 사라지는가를 알 수 있었다.

연예계란 곳이 치열한 각축장이란 것을 느끼자 창현은 자신도 그런 이곳에 서 있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도태되지 않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창현은 시들해지던 의욕이 다시 타오르는 걸 느꼈다.

무대 위에 서서, 자신의 노래를 들려주고 싶다.

“오길 잘한 것 같아.”

무엇이든 꾸준히 오래간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창현이 아무리 음악을 좋아하고 즐긴다고 하여도 쉬고 싶을 때가 있고, 싫어질 때가 있는 법이다.

근래 들어 창현은 의욕을 상실한 상태였다.

뭐라고 해야 될까, 정상을 차지하고 딜레마에 빠졌다고 할까.

전과 다름없이 활동하고는 있었지만 그런 마음이 없지 않아 있었다.

실제로 자신의 음반 작업은 하고 있지 않았으니까.

새로운 것을 보고, 새로운 것을 깨닫게 되면서 수많은 콘티들을 만들어둔 상태였다.

마음이 준비가 되지 않았던 것이지, 그 외의 것들은 모두 준비된 상태였다.

그리고 오늘 보면서 다시 무대에 대한 열망을 키울 수 있게 된 것이다.

자신의 노래를 들려주고 관중들의 환호성을 듣고 싶다.

“한 번 해보자.”

그렇게 다짐을 하며 창현은 소녀시대가 있는 곳으로 향한다.


창현이 소녀시대에게 볼일이 있다고 한 것은 광고 이야기 때문이었다.

그것에 먼저 운을 떼자 자신들은 전혀 몰랐다는 듯 반응을 보이는 소녀들. 아무래도 창현의 캐스팅이 확실시 안된 상황인지라 그녀들에게 소식이 가질 않았나보다.

창현도 그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에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고, 근래 들어 광고 제의가 들어온 것이 있냐고 살짝 운만 띄운 상태였다. 소녀들이 회사 입장을 생각해서 말을 하지 않았는지 모르지만 말이다.

함께 한 식사 메뉴는 닭갈비였다.

맛은 무척 훌륭했지만 식사를 하면서 창현은 속으로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내가 살 땐 매일 꽃등심 기본 옵션으로 딸린 소고기고, 왜 누나들은 돈 없다는 핑계로 닭갈비를… 흑흑!’

만약 닭갈비가 맛이 없었더라면 제대로 반란을 일으켰으리라.

식사가 끝나고, 창현은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회사로 향했다.

그 이유는 바로 옆집인 만큼 집으로 돌아가면 행선지가 겹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무대를 보면서 사그라들었던 의욕이 되살아났기에 회사에 들려 그 느낌을 되살려보고 싶었다. 아직 개인 녹음실이 없었기에 회사의 것을 써야만 했다. 그리고 그날, 창현은 즉석에서 다섯 곡이나 만드는 놀라운 속도를 보인다.

월요일이 되고 다시 라샤의 녹음도 순조롭게 재개되었다.

창현의 지적을 겸허히 받아들인 라샤의 가창력은 나날이 나아지는 면모를 보였고, 처음에는 무척이나 버거워하던 노래들도 점차 무난하게 소화해나가는 모습을 보였다.

그런 라샤의 모습에 창현도 만족을 표하며 녹음의 막바지를 향해 달리기 시작한다.

평온한 나날.

학교를 나가는 날이면 어김없이 소란이 일어나고는 했지만 이젠 어느 정도 대처능력을 습득한 창현은 최소한의 자기방어로 학교에서의 생활도 무난하게 해나간다.

중간고사에서 총 틀린 개수가 세 개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퍼지면서 기사화되기도 하였지만 원래 창현의 성적이 그러했기에 창현이 공부를 못한다고 생각하던 팬들만 놀랄 뿐이었다.

오늘도 학교 수업을 다 듣고 집으로 돌아오는 중이었다.

지이이잉

갑자기 창현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하였다.

학교에서 방금 전에 나온 터라 매너 모드 상태였다.

“으응?”

창현이 번호를 확인하니 전화한 사람은 태연이었다.

고개를 갸웃한 창현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주변에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태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창현아! 우리 1위했어!

“네, 1위요? 누나들이?”

창현은 놀라움이 담긴 목소리로 묻는다. 그러고 보니 전날 자신들이 내일 1위를 할지도 모른다고 들뜬 마음이 담긴 문자를 보내고는 하였다.

그에 창현은 힘내라고 문자를 보내줬는데… 정말 1위를 했나보다.

아직도 감동이 가시지 않았던 탓인지 막 소녀들의 들뜬 목소리가 들려오곤 하였다.

창현은 데뷔한지 두 달 밖에 되지 않은 그녀들이 1위를 차지했다고 하자 놀라는 한편 축하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정말 축하드려요. 정말 1위를 할 줄이야. 누나들의 노력이 드디어 결실을 맺었네요.”

그러고 보니 창현이 주현을 시작으로 소녀시대 멤버들과 차례차례 인연을 맺어온 것이 벌써 햇수로 2년이 다 되어간다. 그 시간 동안 그녀들의 모든 노력을 알고 있다고 말하기 어려웠지만 누구보다 열정을 가지고 노력해왔다는 것은 안다.

창현은 이제 데뷔 두 달 밖에 되지 않은 그녀들이 1위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간에 노력해온 것에 대한 보상이라 생각했다.

-고마워! 정말 고마워.

“네네.”

창현의 축하 인사에 태연의 물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온다.

평소 자신을 골탕 먹이던 그녀와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그런 태연의 목소리에 창현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러자 태연이 창현에게 말한다.

-창현아! 우리 지금 스케줄 끝내면 아무것도 없거든. 애들끼리 숙소에 모여서 파티를 하려고 하는데 너도 오지 않을래? 옆집에 살잖아.

숙소에 남자를 부르는 것은 금지사항이지만 창현은 옆집에 살고 있지 않은가? 멤버들의 동의만 얻어내면 쥐도새도 모르게 들일 수 있다.

그 말에 창현은 고마운 한편 걱정이 되기도 하였다.

“초대는 고맙지만… 제 생각에는 누나들 숙소 분명 어질러져 있을 것 같은데.”

안 봐도 비디오였다. 다른 사람이 온다고 하면 치우고 평소에는 인간이 살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만 확보해놓을 테지.

창현의 예상이 빗나가지 않았는지 건너편에서 더듬거리는 태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 숙소 깨끗하다고!

“그래요? 그럼 누나들이 올 때 바로 가도 되요?

입가에 사악한 미소가 절로 걸린다.

과연 자신의 말에 승낙을 할까?

승낙은 개뿔! 분명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댈 것임이 분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한결 나아졌지만 여전히 어색한 태연의 말이 들려온다.

-아, 안 돼! 우리 돌아오고 옷 갈아입고 그럴 시간이 필요하단 말이야.

“그렇게 준비하는데 얼마나 걸리는데요? 옷만 갈아입을 거면 한 삼십 분이면 되겠네요?

삼십 분도 많이 준 것이다. 그냥 옷만 갈아입으면 십 분도 안 걸린다.

창현 나름대로 제법 많은 시간을 준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모자랐나보다.

태연이 마치 협상을 하는 것처럼 창현에게 말한다.

-한 시간은 필요해.

옷 갈아입는데 십 분, 치우는데 오십 분이겠지.

모든 정황이 그려졌기에 창현은 느긋하게 태연을 압박해나간다.

“무슨 옷을 갈아입는데 한 시간이에요?”

-여, 여자는 원래 오래 걸려!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기는.

창현은 피식 웃음을 짓고는 말했다.

“알았어요, 누나들 숙소 깨끗하다고 쳐드릴게요. 아, 그러지 말고 스케줄이 다 끝나면 저희 집으로 오는 건 어때요? 저희 집은 누나들 숙소와 달리 깨끗하거든요.”

-야! 우리 숙소 깨끗하다니까! 그런데… 가도 돼? 애들한테 말하지 말라며.

끝까지 숙소가 깨끗하다고 말하다가 창현의 말에 조심스러워지는 태연의 말투였다. 하기야, 창현이 진지하게 말하지 말라고 했었으니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지.

그에 창현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그 부분에 대해서 다 해결해놓았거든요. 그러니 안심하시고 스케줄 다 끝나면 놀러오세요. 제가 간단하게 준비해놓을 테니까요.”

-응. 그럼 애들한테 말하고 가도록 할게. 고마워.

“뭘요. 일찍 올 생각이나 하세요. 그럼 이만 끊어요.”

-응!

그렇게 창현과 태연의 통화가 끊겼다. 그러면서 집에 무엇이 있나 생각해보던 창현이 로드 매니저에게 말한다.

“형! 잠시 마트 좀 들려야 할 것 같아요. 그곳으로 부탁할게요.”

그 말과 함께 창현이 의자에 몸을 묻는다. 괜찮다고 했지만 자신의 결정에 대해서 혼란을 느끼고 있었다.

“얼마 후, 얼마 후면 옮길 테니까 괜찮겠지…….”

이내 마음을 가라앉힌 창현이 눈을 감았다.


창현과 통화를 끝낸 태연은 곧장 순규에게 자세한 사정을 털어놓았다.

현재 창현의 숙소를 알고 있는 것이 자신과 순규뿐이었으니 사정을 설명하고 의견을 듣고 싶었던 것이다.

자신의 설명을 듣자 순규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짧게 말한다.

“그냥 창현이가 말한대로 말하자.”

“…….”

“창현이가 알아서 처리했다며? 우리보다 어리지만 일처리 같은 건 따라갈 수 없어. 그냥 믿는 게 속 편할 걸?”

딴에는 순규의 말이 옳다. 회사가 정해준 틀에서 옴짝달싹 못하는 자신들과 달리 창현은 그 틀이 무한대에 가까울 정도로 자유로웠으니 말이다. 순규의 말대로 그냥 믿고 따르는 것이 속이 편할 것이다.

“그럼 창현이 집을 밝히는 건 어떻게 하지?”

“그냥 밝혀. 뭐 설마 사실을 숨겼다고 죽기야 하겠어?”

둘이서 알고 사실을 숨겼다고 하면 필시 엄청난 추궁이 들어올 것임이 분명했다.

그 점을 걱정하고 물었지만 순규의 대답은 간단하였다. 마치 남의 일을 보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으휴! 내가 미쳐. 알았다, 알았어.”

괜히 순규에게 의견을 구했다는 생각을 하며 태연은 멤버들이 모여 있는 대기실로 향했다.

아직도 1위를 했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는 듯, 붉게 상기된 얼굴로 서로에게 축하를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태연이 짝짝! 하고 박수를 쳤다.

그러자 집중되는 시선.

태연이 멤버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오늘 정말 수고했어! 1위를 했다고 하니까 오늘만큼은 편히 쉬라고 하시더라고. 그래서 파티를 하기로 했잖아? 그런데 약간 변경이 되었어.”

“어떻게 변경이 되었는데?”

스케줄이 끝나면 숙소로 돌아가 파티를 할 생각만 가득 차 있던 수영이 물었다.

그러자 태연이 씨익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특별 게스트를 섭외했지!”

태연의 말에 소녀들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대부분의 표정은 ‘게스트는 필요 없다.’ 였다.

“게스트? 그런 거 필요 없어. 그냥 우리끼리 놀자.”

“게스트가 창현인데도?”

“정말?”

“창현이라면 좋지!”

태연의 대답에 삽시간에 태도가 바뀌는 소녀들. 요즘 녹음 때문에 무척 바쁘다고 했는데 축하해주기 위해 와준다고 하니 고마울 따름이었다.

그 모습을 보던 태연은 한 가지 사실을 더 밝혀야 했다.

“그리고 중대한 발표가 있어. 나랑 순규가 숨겼던 사실인데…….”

숨겼다는 말에 멤버들의 눈이 반짝인다. 숨겼다는 건 비밀이 아닌가? 비밀을 밝히겠다는 태연의 말에 궁금증이 유발되는 건 당연한 일이다.

호기심 가득한 멤버들을 보면서 태연은 눈을 질끈 감고는 말했다.

“실은 창현이… 우리 옆집에 살아.”

“…….”

태연의 말에 순규를 제외한 다른 소녀들은 침묵하였다.

그녀들은 지금 태연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말이 되는가? 창현이 자신들 숙소 옆집에 살고 있다니.

3류 로맨스 소설 작가라도 이런 어이없는 소재는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말도 안 된다는 뜻이었다.

소녀들은 모두 태연이 장난을 치고 있다고 생각했다.

침묵 끝에 입을 연 것은 수연이었다.

“…태연아, 너 약 먹었어?”

“내가 왜 약을 먹어!”

수연의 말에 태연이 발끈하며 말했다.

아무리 믿기 힘들다고 해도 자신을 약 먹은 사람으로 취급을 하다니!

태연이 수연을 째려보자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지은 수연이 마주 째려보며 말했다.

“그럼 방금 전 말은 뭔데? 창현이가 우리 옆집에 살고 있는데 여태까지 숨겼다는 거야?”

애초에 태연이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알고 있던 사실을 숨기는 밝히는 자리였으니 애초에 한 수 접고 들어가는 것이었다.

수연의 기세에 밀린 태연이 급격하게 위축되기 시작한다.

승패는 기울었다. 더 이상의 발악은 매를 부를 뿐이었다.

태연은 수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으, 으응.”

“왜 숨겼는데?”

날카로운 말의 연속이었다.

수연의 말에 다른 소녀들도 모두 태연을 바라본다. 왜 숨겼을까 궁금해 하는 표정이었다.

‘어쩌지.’

갑작스런 시선 포화에 태연이 순규를 보며 눈빛으로 도움을 청한다.

그러자 수연이 그것을 사전에 차단한다.

“눈빛으로 대화하려고 하지 말고 자세하게 이야기 해봐. 왜 숨긴 건데?”

날카로운 수연의 말에 태연은 결국 사실을 밝힐 수밖에 없었다.

“창현이가 비밀로 해달라고 해서 그랬어. 그땐 정말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거든.”

“그게 정말이야?”

수연이 순규에게 시선을 주며 묻는다.

그에 감짝 놀란 순규가 이내 고개를 끄덕인다.

“마, 맞아! 창현이가 그때 엄청 심각한 표정을 지었어.”

“그래? 흐음!”

태연과 순규는 수연의 표정을 살피며 다른 멤버들의 표정을 살피기에 바빴다.

다행이랄까, 멤버들의 표정이 별로 심각하지 않았다.

창현이를 팔아먹은(?) 게 주효한 듯하다.

뭐, 솔직히 창현이가 알리지 말라고 했으니 사실을 말한 것이지만 말이다.

잠시 이어지는 침묵.

수연이 태연을 보며 말한다.

“추궁하지는 않을게. 창현이가 비밀로 하라고 했으니까 말이야. 무슨 생각이 있었겠지.”

“그, 그렇지?”

수연의 말에 태연의 표정이 환해진다. 유야무야 넘어갈 수 있는 구실이 생긴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행복하지만은 않다.

갑자기 수연의 입가에 불길한 미소가 걸린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입에서 음산한 어조가 흘러나온다.

“하지만!”

“하지만……?”

불안한 얼굴로 태연이 중얼거린다.

“이렇게 좋은 분위기를 한순간 망쳐놓은 벌은 받아야겠지? 얘들아, 처벌하자!”

“얘, 얘들… 꺄! 꺄하! 꺄하하하!”

수연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달려든 소녀들이 태연을 간지럼 피우기 시작한다.

그 틈을 타 순규는 필사의 도주를 시도해보지만 수영의 긴 팔에 뒷덜미가 잡혀 태연과 함께 간지럼 풀코스를 맛보고야 만다.

그렇게 한차례 소란 이후, 소녀들은 SM엔터테인먼트로 향했다. 처음 1위 한 것을 축하할 겸 그녀들에게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한 것이다.

SM엔터테인먼트 안으로 들어서자 연습생들의 축하 인사를 받으면서 간단한 인사를 나눈 후 소녀들은 회장실로 향했다. SM엔터테인먼트 이수만 회장이 그녀들에게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하여서 그렇다.

“어서 오너라. 여기 앉아라.”

소녀들이 안에 들어서자 널찍한 회장실이 가득 찬 느낌이 들었다.

수만이 자리를 권하자 소녀들이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비서가 주스를 든 쟁반을 들고 와서 소녀들에게 하나씩 건넨다.

소녀들이 자리에 모두 앉자 수만은 미소를 지으며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오늘 1위를 했더구나. 비록 케이블 방송이지만 지금부터가 시작이지. 다음에는 공중파에서 1위를 할 수 있도록 노력하자꾸나.”

“네! 삼촌 덕분이에요. 감사해요.”

수만의 축하 인사에 소녀들이 저마다 감사하다는 인사를 한다.

간단한 인사를 주고받은 뒤, 수만은 운을 떼기 시작한다.

“음, 내가 오늘 너희들을 부른 건 1위를 한 것도 있지만 할 이야기가 있어서 그렇다.”

“…….”

수만의 말에 소녀들은 침묵을 지킨 채 집중을 한다.

그러자 수만이 소녀들을 둘러보더니 말했다.

“너희들에게 광고 제의가 들어왔다.”

“……!”

“저, 정말이요?”

태연이 믿기지 않는 듯 묻는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들은 아직 신인이다. 비록 1위를 했다고 하지만 반쪽짜리 1위였고 말이다. 아직은 소녀시대란 이름보다는 여자 슈퍼주니어라 할 만큼 확실하게 자신들의 입지를 굳히지 못한 상황이다.

그런 와중에 광고 제의라니.

믿기 힘든 일이었다.

그 반응에 수만이 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럴 수밖에. 광고 제의라기보다는 우리 쪽에서 힘을 썼다고 할 수 있다. 인지도를 높이기 위한 한 방편으로 활용할 생각이어서.”

“그럼 저희 전원이 광고를 촬영하는 건가요?”

수만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다. 광고 촬영하는 사람은 한 명뿐이다.”

“한 명이요?”

“그것도 우리가 정하는 것이 아니다. 같이 촬영할 인물이 정할 것이다.”

소녀들의 얼굴에 황당함이 퍼져 나갔다.

이게 무슨 말이란 말인가?

광고 촬영하는 측에서 뽑는 것도 아니고 같이 촬영할 인물이 정할 거라니?

이런 방식은 들어본 적도 없고 본 적도 없다.

태연은 리더답게 황당한 표정을 지우며 수만에게 물었다.

“그럼 같이 촬영하는 인물은 누군데요?”

그 질문에 모두의 얼굴에 궁금증이 번져 나갔다.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인물이기에 상대 인물을 뽑는단 말인가?

졸지에 모두의 관심사가 되었다.

태연의 물음에 수만은 피식 웃음을 짓더니 대답했다.

“같이 촬영할 인물은 현이다.”

“…….”

수만의 말에 소녀들이 침묵하였다.

자신들 중 한 사람을 지목한다기에 누구일지 궁금했는데 설마 창현일 줄이야.

자주 얽힌다는 느낌도 있었지만 먼저 떠오른 것은 창현이라면 그럴 수도 있지. 라는 것이었다. 그 정도 레벨이 된다면 선택권이 폭 넓을 테니 말이다.

아니, 혹시 동명이인은 아닐까?

태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현이 AA엔터테인먼트의 현이죠?”

“우리와 계약되기도 한 프로듀서이기도 하지.”

태연의 질문이 우스웠는지 수만이 웃으면서 대답한다. 그러면서 소녀들을 보며 말한다.

“현에게 선택권이 주어졌다고 하지만 광고주의 의견도 당연히 들어간 상태다. 현재 광고주가 지명한 사람은 태연이랑 티파니랑 윤아다. 아마 이 세 사람 중 한 명이 될 것 같구나.”

수만은 차마 뒷말을 더 하지 못했다.

세 사람이 현재 소녀시대 내에서 가장 인지도가 있다는 것을 말이다.

물론 인지도 하면 윤아지만 태연과 미영도 상당한 인기를 얻어서 그 뒤를 바짝 추격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수만의 말에 세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들은 느낄 수 있었다.

서로 절대 물러설 수 없다는 의지를 말이다.

‘나도 CF 하나쯤은 찍고 싶었단 말이지.’

태연과 윤아의 물러설 수 없다는 눈빛과는 다른 의미로 미영은 불타오르고 있었다.

할 이야기를 모두 끝낸 수만은 소녀들을 보며 말했다.

“그래, 그럼 오늘 푹 쉬도록 하고. 태연이랑 티파니, 윤아는 혹시 현군을 볼 일이 있으면 미안하다는 말을 전해주어라.”

“미안하다는 말이요?”

태연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묻자 수만은 약간 난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그렇게 말하면 알아들을 게다.”

“네, 알겠어요.”

그 말과 함께 태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만의 눈짓을 받은 것이다.

태연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모두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고개를 꾸벅 숙인다.

“그럼 일 보세요.”

“그래, 잘하도록 하고.”

수만의 말과 함께 소녀들이 회장실에서 벗어난다. 그리고 서로를 힐끗 보더니 그대로 함께 지하로 향한다. 다른 멤버들은 상관없지만 태연, 미영, 윤아 세 사람 사이에 치열한 눈싸움이 전개되고 있었다.

그러한 신경전은 숙소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되고 있었다.


후다닥.

숙소로 돌아온 소녀들은 마치 빛살과도 같은 속도로 자신의 방으로 들어선다.

그리고 가장 먼저 옷을 갈아입고 나온 것은 윤아였다.

그녀는 현관문을 나서면서 승리자의 미소를 지었다.

“후훗! 세상은 나같이 머리를 쓰는 사람에게 미소를 지어준다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오면서 윤아는 은밀하게 입고 있던 옷의 단추를 풀어놓았다. 순식간에 갈아입기 위한 사전 준비였다.

그 노력이 빛을 발하여 다른 멤버들보다 훨씬 빠르게 옷을 갈아입을 수 있었다.

하지만 세상에 머리 좋은 사람은 그녀만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막 현관문을 나서려던 윤아의 어깨에 손을 턱하니 올리는 사람이 있었다.

흠칫한 윤아가 서서히 고개를 돌리니 그곳에는 어느새 옷을 갈아입은 주현이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윤아는 주현을 보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하! 하! 하! 주현이 옷 빨리 갈아입었네.”

“언니를 계속 지켜보고 있었거든요.”

주현이 선한 미소를 짓는다. 아저씨들을 미치게 만드는 바로 그 미소였다. 하지만 그걸 알까. 저 미소는 주현이 케로로를 연구하다가 발견해낸 산물이라는 것을.

어쨌거나 주현에게 한방을 먹은 윤아는 표정을 살짝 일그러뜨리다가 이내 활짝 웃음을 짓는다.

“좋아! 다른 언니들 나올 수 있으니까 어서 가자.”

“네, 언니.”

“야! 임윤아! 서주현! 먼저 가는 거냐아아아!”

먼저 선수 친 두 사람과 같은 방을 쓰는 룸메이트 순규의 괴성이 들려왔지만 두 소녀는 깔끔하게 무시해주며 옆집으로 향했다.

정말 이곳이 창현이의 집일까?

의문이 들었지만 태연과 순규가 확언하지 않았던가?

먼저 나온 이점을 살리기 위해서는 먼저 들이대는 것이 최선이었다.

만약 아니라면 사과를 하면 되니까.

윤아가 초인종을 힘껏 눌렀다.

띵동♪

초인종 소리와 함께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이내, 발자국 소리가 들려오더니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린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앞치마를 하고 있는 창현의 모습이었다.

윤아와 주현의 눈이 왕방울만하게 커졌다.

창현은 그런 윤아와 주현을 보더니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누나들 일찍 왔네요. 우선 들어와요. 집은 다 치워둔 상태니까요.”

“으응.”

얼떨떨한 기색으로 그녀들이 집안으로 들어선다.

그리고 집안으로 들어선 그녀들이 느낀 점은 태연과 순규가 느꼈던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집이 무척 넓게 느껴지는 것과 깨끗하다는 것.

급하게 부랴부랴 치웠다면 티가 나기 마련인데 창현의 집은 전체적으로 산뜻한 분위기가 들었다. 이것은 평소 깨끗하게 하고 다닌다는 걸 뜻했다. 항상 난장판인 숙소와는 딴판이었다.

“와아!”

거실로 들어선 윤아와 주현은 감탄사를 터뜨린다. 거실에는 거대한 상이 펼쳐져 있었고, 그곳에는 수저와 젓가락, 각종 반찬들이 올라와 있던 것이다.

놀라는 그녀들을 보며 창현이 말한다.

“파티도 좋지만 과자나 치킨, 피자 같은 건 몸에 안 좋잖아요. 마침 저녁 시간이기도 해서 밥을 준비했어요.”

창현은 상 중앙에 버너를 올려놓더니 그 위에 큰 냄비를 가지고 오면서 올려놓았다. 그리고 막 완성한 반찬들을 올려놓기 시작했다.

“창현아, 이거 뭐야?”

윤아는 큰 냄비 안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한 듯 물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소녀시대 내에서 그녀는 수영과 막상막하 난형난제 용호쟁투라 불릴 정도로 식탐이 대단했다.

“이거 부대찌개에요.”

“부대찌개!”

창현의 말에 윤아의 눈이 반짝인다.

그 모습을 보며 창현은 피식 웃음을 짓더니 부엌으로 가서 프라이팬을 뒤집는다. 프라이팬 위에는 해물파전이 있었다. 옆에는 김치전이 올라와 있었다.

“창현아 이거…….”

도울 게 어디 없을까 부엌으로 따라온 주현이 김치전과 해물파전을 보더니 놀란 표정을 짓는다.

그런 주현의 모습에 창현이 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피자 같은 건 몸에 안 좋잖아요. 그래서 전을 부쳐봤어요. 해본 지 오래 되서 이상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괜찮네요.”

마지막 해물파전을 완성한 창현이 주현에게 그릇을 내밀었다.

“누나, 저기 상 위에 좀 놓아주지 않겠어요?”

“응, 물론이지.”

전을 다 올려놓은 뒤 밥을 적당하게 퍼서 그릇에 담아 상위에 올려놓았다.

준비가 막 끝날 무렵, 나머지 소녀들도 우르르 들어오기 시작했다.

“우와아!”

집안으로 들어선 소녀들은 창현의 집을 보고 감탄하고, 창현이 차려놓은 상을 보고 탄성을 터뜨린다.

그 모습에 피식 웃음을 지은 창현이 소녀들에게 말한다.

“자, 1위 축하하는 마음에 제가 드리는 상입니다. 맛은 먹은 뒤 판단하시길!”

“응! 맛있어 보인다. 먹자!”

소녀들은 창현의 음식 실력이 어떨지 기대하는 표정으로 상에 둘러앉았다. 오직 창현의 음식을 먹어본 적 있는 수연만이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앉을 뿐이었다.

가장 먼저 공략당한 것은 김치전과 해물파전이었다.

부대찌개를 끓이면서 먼저 전을 먹은 소녀들은 감탄사를 터뜨렸다.

“오! 맛있다!”

“완전 짱짱!”

호평을 시작으로 다른 것들도 호평을 들었다. 그리고 마지막 부대찌개에서도 ‘워어어어!’라는 최상의 찬사(?)를 들은 창현은 무사히 식사를 마칠 수 있었다.

반찬통 정리와 그릇 정리를 도와준 소녀들은 넓게 둘러앉았다.

배가 부르자 창현의 집을 둘러볼 수 있게 된 소녀들.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말이 있는 것처럼 배가 부르니 그제야 창현의 숙소를 둘러볼 여유가 생긴 듯하였다.

평소에 혼자 있을 땐 무척 넓게 느껴지는 집이었는데 소녀들이 오자 꽉 찬 느낌이 들었다.

창현은 사두었던 음료수들을 꺼내들며 말했다.

“누나들 1위 축하드려요. 이제 본격적인 시작이네요.”

“응! 고마워.”

저녁을 든든하게 먹어서 그런지 과자를 많이 먹지 않고 음료수를 주로 마시며 이야기를 하는 소녀들이었다.

연습을 하면서 힘들었던 점이나 1위를 했을 때 느꼈던 점들을 이야기하며 휴식을 취한다.

창현은 유리와 며칠 전 엘리베이터에서 만났던 것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때 들켰었잖아.”

“아, 그때요? 솔직히 들키고 싶지 않았거든요.”

유리의 말에 창현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솔직히 그때를 생각하면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냥 엘리베이터를 포기했으면 편할 텐데 괜히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엘리베이터가 도착해서 결국 탑승했다가 잡히지 않았던가? 지금 생각하면 웃음만 나온다.

“왜? 옆집에 살면 좋잖아.”

얼마나 좋은가! 서로 도움이 필요할 때 도움을 주고받을 수도 있고 말이다.

그것은 다른 소녀들도 비슷한 생각이었나보다. 순식간에 대화를 중단하고 창현을 바라보니 말이다. 그녀들은 왜 창현이 집을 말하지 말라고 했는지 궁금했나보다.

유리의 말에 창현이 쓰게 웃었다. 이 누나들은 자신을 남자로 전혀 안 보는 건지 옆집에 살고 있음으로 인해서 일어날 파장을 생각하지 않는가보다.

“구설수가 생길 수 있잖아요. 기사가 나면 저보다는 누나들이 피해를 입을 거예요.”

“…….”

창현의 말에 소녀들은 아무 말도 못했다. 그것은 사실이었으니까. 창현의 인지도가 압도적인 만큼 피해는 고스란히 그녀들이 입을 것이다.

그렇다는 건 언젠가 들킬 수 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소녀들의 얼굴에 불안한 표정이 떠올랐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흐르고, 창현은 그 분위기를 타파하고자 입을 열었다.

“축하해야 할 자리인데 너무 표정이 어둡네요. 오늘은 즐거운 날이잖아요? 그런 표정 짓지 마세요.”

“으응.”

창현의 말에 애써 밝은 표정을 짓는 소녀들이었다.

그때, 미영이 창현을 보면서 물었다.

“맞다, 창현아, 너 광고 찍는다면서. 그것도 우리랑.”

“아, 들으셨어요? 그렇다고 하더라고요. 아직 확실하게 결정이 난 것 같지 않아서 말하지 않았는데.”

미영이 광고를 언급하자 태연과 윤아의 눈이 빛나며 창현을 바라본다.

태연과 윤아가 자신을 노려(?)보자 창현이 움찔하며 묻는다.

“왜 그런 시선으로 절 바라보는 거예요.”

“으응?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태연과 윤아가 창현의 말에 흠칫하며 시선을 거둔다.

그런 둘의 모습에 미영이 웃으면서 끼어든다.

“실은 너랑 광고를 찍는 건 한 명이라고 했거든.”

“한 명이요? 그랬구나. 누군데요?”

“누구냐면 말이지…….”

미영이 손을 들어 태연을 척 가리킨다. 창현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한다. 그러더니 윤아에게 향하고, 마지막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이게 뭐에요?”

이해가 되지 않는 듯 고개를 갸웃하는 창현.

그에 미영이 친절하게 설명을 해준다.

“태연이랑 윤아랑 나 중에서 한 사람이라던데? 그리고 뽑는 사람은 창현이 너고.”

“제가 고르라고요?”

창현의 얼굴에 놀라움이 서렸다.

이건 무슨 어이없는 상황이란 말인가?

게다가 하필이면 세 명 중 한명이라니.

이건 마치 어떤 게임에서 선택지가 세 개 나왔는데 이건 마치, 1번 죽는다. 2번 조금 있다 죽는다. 3번 어차피 죽는다. 결국 다 죽는다랑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창현의 말문이 막히자 세 사람이 뜨거운 시선으로 창현을 바라본다.

나머지 소녀들은 그 장면을 흥미진진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말 그대로 강 건너 불구경이었다.

고민하던 창현이 시선을 든다. 그리고 시선을 마주하며 물었다.

“우선 하고 싶은 사람 있어요?”

안하겠다 싶은 사람이 있을까 싶어서 물은 것이다.

그에 서로를 바라보며 신경전을 벌인다. 누구도 포기하겠다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하지.’

이도저도 선택하지 못한 창현의 표정이 점점 굳어갈 때 미영이 갑자기 손을 번쩍 들었다.

“미영 누나, 왜요?”

“광고 내가 하도록 할게.”

웃음을 지으며 미영이 말하자 태연과 윤아가 기다렸다는 듯 끼어든다.

“무슨 소리! 나도 하고 싶거든?”

“저도 포기할 수 없거든요?”

강렬한 반박에 직면했지만 미영은 여유롭기만 하였다.

오히려 입가에 짙은 미소를 지은 그녀는 두 사람을 보며 말한다.

“하지만 내가 이길 수밖에 없을 걸? 창현아, 혹시 기억하고 있어?”

“네, 뭘요?”

창현은 미영이 무슨 말을 할까 싶어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묻는다.

그러자 입가에 지은 미소를 한층 더 짙게 하며 말했다.

“원더걸스 대기실에서 킵 해두었던 내 부탁 말이야.”

“아! 그거! 그걸 쓰겠다고요?”

창현이 어찌 잊겠는가. 불과 며칠 전에 있던 일이었는데 말이다.

설마 그 부탁을 쓰겠다는 건가?

“응. 이 일에도 부탁이 적용되는 거지? 나도 CF 찍고 싶단 말이야.”

미영은 정말 CF를 찍고 싶은 듯 창현에게 눈을 빛내며 말했다.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했으니 창현은 미영의 그러한 말을 거부할 수 없었다.

창현은 태연과 윤아를 보며 말했다.

“미영 누나가 부탁을 사용했으니 전 가급적 들어주고 싶네요. 괜찮겠죠?”

“…끄응!”

태연은 창현의 말에 앓는 소리를 냈다.

평소에 빈틈투성이인 그녀가 이렇게 영약하게 행동할 줄이야.

분한 마음에 미영을 노려보자 혀를 날름거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것이!’

태연의 눈에 불똥이 튀었지만 행동을 보일 수 없었다.

지금 화를 내봤자 패자의 발악이다. 릴렉스. 상황을 냉정하게 판단하는 것이 중요했다.

미영이 내놓은 강력한 패를 뒤집기 위해서는 그보다 더 강한 패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태연에게 그런 패는 없었다.

패배가 확실했다.

“칫!”

혀를 차며 아쉬움을 표현한다. 아쉬웠지만 자신에게는 방법이 없었다.

‘훗!’

태연이 포기하자 미영은 미소를 짓는다. 강력한 경쟁자 하나를 떨어뜨린 것이다.

남은 경쟁자는 하나다. 바로 윤아 뿐.

“…….”

윤아는 생각에 잠겼다.

미영이 부탁을 썼지만 그녀 또한 창현에게 부탁 하나를 할 수 있다.

만원의 행복을 하면서 창현에게 부탁 하나를 받지 않았던가.

그것을 쓰면 상황은 원점이 되지만 윤아는 자신의 부탁을 이렇게 쓰고 싶지 않았다.

말 그대로 원점이 될 뿐이고 자신에게 확실한 이득이 주어지지 않으니 말이다.

차라리 지금은 물러서고 나중에 좀 더 요긴하게 사용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가득했다.

윤아는 미영을 슬쩍 바라보았다.

여자의 감으로서 생각하건데 미영은 아직 창현을 이성으로서 좋아하지 않는다. 그저 편한 동생 정도로 생각한다랄까? 둘이 같이 있게 해도 위험하지 않다. 노래를 부르고 싶어 미국에서 한국에 온 만큼 그녀도 만만치 않게 벽을 쌓아놓고 있으니까.

하지만 상대는 다름 아닌 창현이었다.

자신 또한 높은 벽을 쌓아놓았다고 생각했는데 그 벽이 순식간에 무너지지 않았던가?

미영을 견제하려면 소원을 써야한다. 하지만 미영은 아직 창현에게 특별한 마음이 없다. 오히려 자신들이 이런 모습을 보여서 더욱 창현과 CF를 찍으려 하는 것일 수도 있다.

CF에 참여하는 걸 포기하자니 미영이 창현에게 특별한 마음을 가질까 불안했고, 참여하자니 부탁이 너무나 아까웠다. 잘 저장해두면 더욱 용이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다.

고민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되자 윤아는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이번에는 자신이 한 발자국 물러서기로!

미영이 설마… 설마 창현에게 호감을 품는다고 해도 매력으로 승부하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호감을 갖는다는 확신도 없으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되리라.

그렇게 결정을 굳힌 윤아는 미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는 포기할게요. 언니가 부탁을 사용하신다고 하니 어쩔 수 없죠.”

“…윤아가 포기한다니 나도 포기할게.”

윤아가 순순히 물러서자 태연도 포기하였다. 물고 늘어져봤자 승산이 없다는 걸 알아차린 것이다.

두 사람의 결정에 미영이 예쁜 눈웃음을 지으며 감사의 인사를 하였다.

“잘 생각했어, 얘들아.”

하지만 그 눈웃음은 남자에게나 통한다. 여자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특히 같은 멤버인 태연이나 윤아는 질리도록 보아온 것이기에 이미 면역이 되어 있었다.

그녀들에게 있어 미영의 웃음은 감사의 인사가 아닌, 자신의 승리라고 말하며 조소를 짓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하지만 자리가 자리였기에 함부로 행동하지 못한다.

그 모습에 미영은 입가에 서린 미소를 더욱 짙게 만들더니 창현에게 말한다.

“그럼 나로 결정되었으니 잘 부탁드려요.”

세 소녀의 대립을 흥미롭게 지켜보던 창현은 미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아, 저도요. 그런데 이런식으로 정해도 괜찮을지 모르겠네요.”

“삼촌이 그렇게 하라고 하셨으니 괜찮을 거야.”

“그럼 어쩔 수 없지만요.”

미영이 괜찮다고 하니 별 수 있겠는가. 창현으로서는 받아들일 수밖에.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태연은 미영의 말에 무언가 떠오른 표정을 짓더니 아! 하는 소리와 함께 창현을 부른다.

“아! 맞다. 창현아. 삼촌이 전해달라는 말이 있었어.”

창현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회장님이 제게요? 뭔데요?”

“음, 전후사정은 잘 모르겠고 창현이 너한테 미안하다고 전해달라던데?”

“제게요?”

“응.”

태연의 말에 창현은 왜 자신에게 미안하다고 전했는지 생각에 잠겼다.

생각은 그리 오래할 필요도 없었다. 이수만 회장이 자신에게 미안해할 이유는 딱 한 가지 밖에 없었던 것이다.

바로 숙소 문제 때문이겠지.

이번 일로 인하여 창현이 SM엔터테인먼트에 악감정을 가질까 염려한 듯하였다.

사람 간에 사이 틀어지는 것은 사소한 배려가 배제 되었을 때 가장 많이 일어나니 말이다. 사소한 것으로 점수를 깎아먹으면 나중에는 정말 돌이킬 수가 없을 정도로 틀어진다.

물론 숙소 문제는 사소한 일이라기에는 조금 큰일이지만 말이다.

창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태연을 보며 말했다.

“음, 혹시 회장님을 보시게 되면 전해주세요. 저는 괜찮다고요. 하지만 다음에는 조심할 것을 부탁드린다고요.”

“그렇게 전하기는 할게. 그런데 심각한 일이야……?”

태연이 창현을 보며 조심스럽게 묻는다. 무슨 일이 오고갔는지 궁금한 모양이었다.

그에 창현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가급적 말씀드리고 싶지만 제법 민감한 사항이어서요. 이런 건 이해해주세요. 괜찮죠?”

“으응.”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거절을 하는데 뭐라고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창현이 이렇게 말할 정도라면 제법 심각한 일인 것일 테고 말이다.

“자, 그럼 공적인 일은 모두 끝난 거죠? 그럼 놀도록 해요.”

CF이야기와 창현의 말로 가라앉았던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창현이 활발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자 소녀들도 무거운 분위기가 싫었던 듯, 이내 밝은 표정을 지으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다.

내일 오전 스케줄이 없다는 소녀들의 말을 들은 창현은 밤늦게까지 소녀들과 함께 하얗게 밤을 불태워야만 했다.


그렇게 소녀들을 축하하는 파티가 끝나고, 다음날 창현은 AA엔터테인먼트로 찾아가 석규에게 수만이 전했던 말을 그대로 들려주었다.

그러자 석규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회장님이 그러셨다고?”

“아무래도 사이가 소홀해지는 걸 원하지 않으셨나보죠.”

“그럴 게다. 지금 SM엔터테인먼트에서는 어떻게든 미국으로 진출을 모색하려고 하는데 그걸 원활하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은 나와 너뿐이니 말이다.”

JYP엔터테인먼트의 박진영 사장도 있지만 미국에서 직접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인맥을 구축한 석규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수만은 그런 석규의 인맥을 원했고, AA엔터테인먼트와 긴밀한 협력 관계를 맺고자 하는 것이었다. 거기에 창현이 한국에 미치는 영향력이 만만치 않았기에 기분이 상하기 전에 달래놓으려는 의도도 함께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버지, 결혼식은 언제 하실 거예요?”

간단한 이야기를 주고받던 창현이 석규를 보며 물었다. 공식적인 인사를 나누기는 했지만 석규와 지선의 결혼식 날짜가 정확하게 잡히지가 않았다.

그런 창현의 말에 석규가 식은땀을 흘리더니 웃음을 지었다.

“하하! 실은 식장을 잡아놓았다. 아마 1월 중순쯤에 하지 않을까 싶구나.”

“벌써 날짜를 잡으신 거예요? 딱 세 달 남았네요. 정말 잘됐네요.”

창현이 웃음을 지으며 말하자 석규가 조금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잡았다는 걸 말해야 하긴 하는데 조금 어색하더구나. 게다가 연말에 일이 많아서 도저히 올해에는 못할 것 같아 내년으로 미루었다.”

“저는 조금 서둘러서라도 일찍 했으면 좋을 것 같았는데 말이죠. 아버지가 일을 마치고 돌아가면 어머니가 해주시는 밥을 먹고 지영이 애교도 보면서 지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석규가 창현을 걱정해주는 것만큼 창현도 석규를 걱정해주고 있다.

창현의 말에 석규가 웃음을 지었다.

“하하! 그것도 제법 재미있겠구나. 어차피 올해까지 바쁠 것 같고 내년부터는 넉넉해질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라.”

“저도 같이 살고 싶은데 조금 아쉽네요.”

가족끼리 오순도순 살지 못하는 것이 조금 아쉬운 창현이었다. 자신이 함께 살 수도 있지만 그렇게 되면 불편함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그건 창현이 원하지 않는 일이었다.

“어쩔 수 없지 않느냐. 대신 자주 놀러 오너라.”

“물론이죠. 말 안하셔도 자주 놀러갈 겁니다. 후후!”

웃음을 짓는 창현을 보며 석규도 웃음을 짓는다. 그러더니 창현을 보며 말한다.

“그러고 보니 창현이 너에게 말을 하지 않은 것이 있구나.”

“뭔데요?”

“네 팬 미팅 날짜가 정해졌다.”

“팬미팅이요?”

창현이 놀란 표정을 짓는다. 팬 미팅이라니, 석규에게 몇 번씩 들어보기는 했지만 구체적으로 날짜가 잡혔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놀란 창현을 보며 석규가 핀잔을 주었다.

“네 녀석이 계속해서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는 바람에 팬 미팅이 한 번도 못 이루어지지 않았더냐?”

“하하하!”

석규의 말에 창현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고 보니 석규가 매번 팬 미팅을 하자고는 했는데 창현이 그런 것은 조금 어색하다면서 요리조리 피해나가는 바람에 팬 미팅이 이루어진 적이 없다.

창현은 석규를 보며 물었다.

“그런데 팬 미팅에 설마 돈을 받고 하는 건 아니겠죠?”

“그럴 리가 있겠느냐? 돈은 다 창현이 네 돈으로 할 거다.”

“제, 제 돈으로요?”

창현의 안색이 변했다. 팬 미팅이라면 분명 많은 돈이 들 텐데 전부 자신의 돈이라니! 물론 많이 벌기는 하지만 자신의 의견도 구하지 않고 그랬다고 하자 조금 그랬다.

그에 석규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네 돈으로 그럴 리가 있겠느냐? 전부 회사 돈으로 했으니 걱정하지마라. 인원은 많게 할 생각은 없고, 오백 명 정도만 초대할 생각이다. 이게 많은 건가?”

“많은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적당한 것 같긴 하네요.”

“그래. 그 정도가 적당하다고 하면 그 정도만 부르도록 하자. 참가자격은 다크 스타에서 활동을 열심히 한 인물들로 한정 지었으니 인원은 조만간 정해질 게다.”

창현은 모르고 있지만 팬 미팅 사실이 다크 스타 내에 은밀하게 퍼져 나가면서 한바탕 소란이 일어난 적이 있었다. 현재 다크 스타 회원은 80만에 육박해가고 있는데, 팬 미팅 숫자가 고작 오백 명 밖에 안 된다고 하니 일부 회원들은 불만을 터뜨렸던 것이다.

그로 인해 석규가 직접 대처하여 창현의 첫 팬 미팅이고, 아직 미숙한 점이 많아서 인원을 적게 하지만 점차 인원을 늘리고 팬들과 만날 기회를 늘리도록 하겠다고 하자 소란이 간신히 가라앉았다.

“네, 그럼 그건 그렇게 알고 있을게요.”

“라샤의 앨범도 다 녹음되어 가니 슬슬 너도 준비해야지. 어떠냐?”

석규의 물음에 창현이 웃음을 지었다. 이미 준비는 완료된 상태였다.

“저도 준비 완료에요. 움직이는 일만 남았습니다.”

“그래, 그럼 이번 달 말부터 시작해서 본격적으로 활동하자꾸나.”

“네, 알겠습니다.”

석규의 말에 창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 쉰 것은 아니지만 노래를 하지 못하니 근질근질하던 차였다.

가수라면 모름지기 노래를 해야 하지 않는가?

창현이 최근에 음반을 낸 것이 9월 중순이었으니 약 한 달 정도가 지났다. 하지만 마음껏 노래를 해본 지는 제법 되었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창현은 마이크를 볼 때마다, 노래를 들을 때마다 입이 근질거렸다.

10월말에 음반을 내는 가수들은 조심해야 할 것이다.

잘못하다가는 현이란 이름 앞에 모래성처럼 모조리 무너지는 수가 있을 테니 말이다.

그렇게 두 사람의 대화는 대한민국의 음반계를 뒤흔들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끝맺었다.

창현과 윤아가 겨룬 만원의 행복이 본격적으로 방영되기 시작하였다.

현이 한국으로 귀국한 뒤 처음으로 출연하는 방송이었기에 현의 이름을 조금이라도 안 인물들은 만원의 행복을 시청하고자 하였다. 세계 톱 아티스트인 창현이 만원으로 어떻게 일주일을 버틸지 궁금했던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창현의 놀라운 저력을 보고 말았다.

정말 짠돌이가 어떤 사람인가를 창현이 몸소 보여주면서 돈을 아끼는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상대방을 정탐하는 모습과 가볍게 일격을 맞는 모습, 그리고 라샤에게 빌붙어서 하루하루를 보내는 모습까지.

뜻하지 않게 라샤까지 방송에 자주 나오게 되자 남성 팬들까지 시청하게 되었고, 만원의 행복은 어중간한 시간대임에도 불구하고 시청률 30%를 돌파하는 엄청난 기록을 세우게 된다.

그러던 차에 사람들은 창현과 겨루는 ‘소녀시대’ 란 그룹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창현과 겨루는 윤아가 과거 라샤의 뮤직비디오에 출연한 적이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다시 한 번 뜨거운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시청자들은 창현이 천원의 만찬을 위해 창현이 직접 시장으로 가서 아르바이트를 하여 재료를 값싸게 구입, 정성스럽게 만든 낙지볶음밥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만원의 행복에서 창현이 직접 요리하는 장면을 보여주었는데, 창현의 요리 실력이 요리사 못지않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게다가 방송 도중 창현이 스스로 집안일 경력 5년차란 이야기를 함으로써 집에서 일하는 주부들이 현에게 열광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예리한 주부들의 눈에 창현의 숙련된 몸놀림에서 타고난 주부의 혼(?)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가뜩이나 팬 층이 다양하던 창현에게 최강이라 불리는 아줌마 팬 층이 두터워지는 순간이었다.

만원의 행복에서 가장 하이라이트라 불릴 수 있는 장면이 두 개가 존재했는데, 첫 번째는 바로 잔액 교환의 순간이었다.

그토록 열심히 돈을 아껴서 우위를 점하였는데 시청자들을 조금 더 재미있게 만들어줄 생각이었는지 라샤가 불성실하게(?) 게임에 임하는 바람에 창현이 패하고 말았던 것이다.

시청자들은 창현의 위기를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예고편에서 반전이 있음을 슬쩍 흘렸는데, 그 반응이 뜨거울 정도로 대단하였다.

2주에 걸쳐서 한 만원의 행복 창현-윤아 편은 첫 주 시청률 31.3%가 나왔고, 두 번째 방송은 37.8%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우게 된다.

두 번째 주에서 최고의 하이라이트 장면은 당연히 창현의 목소리 변조였다.

정말 놀라울 정도로 완벽한 목소리의 재현.

방송에서 창현이 태연의 목소리를 흉내내어 윤아에게 콜렉트 콜로 돈을 소모하게 한 장면을 보는 순간 시청자들은 저도 모르게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만큼 창현의 목소리 위조는 완벽했던 것이다. 태연이 말하는 장면을 보여주며 목소리 대조를 해주는데, 그 장면을 보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자칫하면 문제가 될 수 있는 소지였지만 만원의 행복에서는 그것을 염려한 탓인지 자막으로 절대 따라 해서는 안 된다고, 장난은 장난일 뿐이라고 자막을 넣어주었기에 크게 문제 삼는 사람은 없었다.

솔직히, 목소리가 저렇게 완벽하게 위조가 되는 사람은 없으니 말이다.

그렇게 콜렉트 콜로 돈을 소모 시킨 창현은 마침내 승리를 거머쥐게 된다. 반전의 연속이었고,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현이 어떠한 인물인지 어느 정도나마 알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이번 방송으로 인하여 소녀시대는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있었고, 그것은 인지도의 상승으로 이어졌다.

만원의 행복이 방영되는 동안 창현은 CF촬영 준비를 위해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우선 미영의 캐스팅을 확실하게 하였고, 미팅을 통해 전체적인 콘티를 보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창현은 CF컨셉이 제법 무난하다고 느끼면서 한편으로는 조금 밋밋하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괜찮은 내용이었기에 군말없이 OK하는 모습을 보였다.

미영은 그저 옆에서 멍한 모습만 보였고 말이다. 아직 CF경험이 없기에 그러한 것이었다.

마침내 CF촬영 당일.

창현은 촬영장 안으로 들어서던 도중 미영을 만날 수 있었다.

첫 CF촬영이라 그런지 바짝 얼은 미영.

장난기가 발동한 창현은 뒤로 살금살금 접근하여 그녀의 어깨에 턱하니 손을 올렸다.

“워!”

“꺄, 꺄아아악!”

창현의 장난에 미영의 몸이 움찔하더니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지른다.

그런 미영의 반응에 창현은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난다.

소리를 지르던 미영은 창현을 보더니 입을 연다.

“차, 창현이 너였어?”

“으! 귀가 떨어져 나갈 뻔했어요.”

창현이 먹먹해진 귀를 문지르며 말했다. 다른 사람들보다 청각이 더 뛰어난 창현이었기에 더욱 타격이 컸다.

미영은 그런 창현의 모습에 미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미, 미안.”

“하하, 아니에요. 제가 장난 친 것도 있으니 그럴 수밖에요. 그건 그렇고 미영 누나 너무 얼어있는 거 아니에요?”

창현은 미영이 너무 얼어있는 모습이 염려가 되었는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미영이 풀죽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푹 숙이더니 말한다.

“나도 긴장하고 싶지 않은데… 혼자는 처음이라 너무 긴장 돼. 감독님하고 스태프들에게도 인사를 해야 하는데…….”

아직 그녀는 신인이었다. 좋은 이미지로 남기 위해서 예의 바른 모습을 보이는 것은 반드시 필요했다.

창현은 그런 미영을 보며 말했다.

“음, 너무 긴장 되면 그럴 수도 있어요. 그럼 저랑 같이 인사해요. 저도 인사하려던 차였거든요.”

“그래도 돼?”

미영은 창현을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미 미팅을 통해서 창현의 위상이 얼마나 대단한지 느낀 미영이었다. 감독조차 창현에게 함부로 말을 놓지 못한 채 존중하는 모습을 보이고는 했으니 말이다. 평소에는 친한 동생처럼 느껴져서 그리 부담이 되지 않았지만 미영은 미팅 자리에서 창현의 인지도가 얼마나 대단한지 느낄 수 있었다.

걱정하는 표정을 짓는 미영의 모습에 창현이 가볍게 미소를 짓더니 대답했다.

“그게 뭐가요? 어차피 수고하시는 분들에게 인사하는 건데요, 뭐. 누나가 부담스럽다면 같이 안 해도 되고요.”

“아니야. 나야 좋지.”

아무것도 모르는 곳에 혼자 있는 것과 두 사람이 있는 것은 차원을 달리한다. 서로가 서로를 의지할 수 있고, 위안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미영은 창현이 같이 인사를 해주겠다는 말에 고마웠고, 의지하는 마음이 들었다.

자신보다 어린데도 이렇게 믿음직하다니.

창현은 미영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자, 가요.”

“응!”

그렇게 창현과 함께 미영은 촬영장 안으로 들어서서 먼저 감독님에게 인사를 한 뒤 직급 순서로 인사를 하기 시작하였다.

창현과 미영이 함께 인사를 하자 스태프들은 함부로 무시하지 못한 채 인사를 받아야 했고, 큰 위기 없이 인사를 끝마칠 수 있었다.

인사를 모두 끝마치자 창현은 미영을 보며 말했다.

“미영 누나는 대본 읽고 있으세요. 저 먼저 촬영이 있거든요.”

“먼저 촬영이 있다고?”

미영이 고개를 갸웃했다. CF줄거리를 보면 따로 촬영하는 것은 없는데 먼저 촬영을 하다니?

그런 미영의 의문에 창현이 웃으며 말했다.

“하하! 실은 CM송을 먼저 녹음하기로 했거든요.”

이번 음료수 광고를 찍게 되면서 광고주가 요청한 것은 바로 창현이 직접 작곡 작사한 CM송이었다. 어떻게 해도 좋으니 창현의 스타일로 CM송을 하나 만들어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물론 그로 인해 창현의 몸값이 더욱 뛰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창현은 CM송을 만들어온 상태였고, 정상적인 촬영에 들어가기 앞서 녹음을 하려는 것이었다.

그에 미영은 눈을 빛내며 말했다.

“나도 구경할래!”

창현의 라이브라니! 이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지 않은가?

미영의 말에 창현은 웃음을 짓더니 말했다.

“괜찮긴 하지만 촬영은 괜찮겠어요?”

이미 여러 번 촬영 경험이 있는 창현은 상당히 능숙했지만 미영은 아직 경험이 부족하여 미숙했다. 창현은 처음 하는 사람 경우 쓸데없는 힘이 많이 들어간다는 걸 알았기에 미영이 좀 더 연습하길 바란 것이다.

“많이 연습했으니까 괜찮아.”

웃음을 지으며 말하는 미영을 보고 창현은 더 권유할 수 없었다.

“알았어요. 그럼 절 따라오세요.”

창현은 CM송을 녹음하기 위해 준비된 녹음실로 향했고, 미영도 창현의 뒤를 따랐다.

녹음실로 들어서자 곧장 시작된 창현의 녹음.

촬영 스태프들 대부분이 녹음실에 모여서 창현이 노래하는 광경을 지켜본다.

세계를 제패한 창현의 라이브였다. 이렇게 그의 라이브를 들을 기회는 흔치 않았다.

녹음을 시작하자 부드러운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마치 전신에 저항 없이 스며드는 봄바람처럼 자연스러운 흐름이 느껴지는 멜로디였다.

눈을 감은 창현은 그 멜로디에 몸을 맡기듯이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사람의 마음을 휘어잡는 달콤한 목소리가 공간을 장악해나가기 시작한다.

CM송인 만큼 분량은 무척 짧았다.

약 1분가량 노래를 부른 창현이 노래를 끝맺었다.

와아아아!

노래를 듣던 미영은 물론, 스태프들도 감탄을 금치 못했다. 창현의 노래를 들으면서 그가 왜 세계를 제패했는가 알 수 있을 정도로 보통 가수들과는 차원이 다른 실력이었다.

더욱 더 놀라운 것은 한 번에 녹음을 끝마쳤다는 것이다.

아무리 대단한 가수라도 한 번에 녹음을 끝낸다는 건 무척 힘든 일인데 정말 경이로웠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 귀에 완벽하게 들린 노래에 창현은 어느 부분이 미흡했나보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창현이 입을 열었다.

“다시 녹음에 들어가겠습니다.”

“완벽하게 녹음이 된 것 같은데 왜 그러시는 거죠?”

노래를 녹음하던 프로듀서가 묻자 창현이 웃으며 말했다.

“34초 부근쯤에서 조금 음이 떨렸거든요. 한 번 틀어보시겠어요?”

창현의 말에 프로듀서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방금 전 녹음한 노래를 튼다.

그러자 창현이 부른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하고, 그가 언급한 34초 부분을 유심히 듣는다.

지켜보던 미영과 스태프들도 귀를 기울인다.

잠시 후, 창현이 지적한 34초 부분을 직접 캐치해냈고, 그 부분을 연속해서 틀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놀랍게도 창현의 말처럼 그 부근에서 미묘한 음의 떨림이 느껴졌다. 창현이 말했기에 망정이지 언급하지 않았다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미세한 떨림이었다.

그걸 들은 프로듀서가 혀를 내둘렀다.

“허어, 이걸 캐치하신 겁니까?”

“작은 떨림이지만 청각이 좋은 사람에게는 들려서요. 제가 좀 청각이 좋은 편이거든요. 어쨌든 다시 가도록 할게요.”

창현 스스로가 최고의 녹음을 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였으니 프로듀서도 그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창현은 노래를 세 번이나 더했고, 그때마다 부족한 점을 짚어내면서 차츰 녹음을 완성해나갔다.

“…….”

미영은 창현이 녹음하는 모습을 보면서 할 말을 잃었다.

누가 보아도 완벽, 최고에 가까운 실력을 지녔음에도 자만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노래에 임하는 창현의 모습이 너무나 멋있어 보였다.

이성을 유혹하는 듯한 달콤한 목소라라니.

미소를 지은 채 눈을 감고 노래에 심취한 창현의 모습을 보며 미영의 눈이 풀려간다. 남자의 매력 어필은 노래할 때 발휘되나보다.

“완전 멋있어…….”

창현의 목소리에 홀린 미영이 저도 모르게 흘린 말이었다./


“감사합니다.”

녹음이 성공적으로 끝나자 창현은 웃음을 지으며 인사를 하였다. 몇 번 불러보니 완벽하게 숙달되어 녹음을 빠르게 끝낼 수 있었다.

지금 CM송 촬영하는 것은 메이킹 필름을 제작하는데 포함시켰다. 광고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것도 있지만 방송 출연이 잦지 않은 창현의 팬들을 위해 제작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녹음실을 나선 창현은 앞에서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미영을 볼 수 있었다. 눈은 멍하니 풀려 있었고, 입은 헤, 하고 벌리고 있었다.

창현은 미영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란 것을 느끼고는 그녀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누나, 정신 차려봐요. 괜찮아요?”

“으엉? 아, 으응…….”

창현이 부르자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미영이 눈에 초점을 되찾으며 그를 바라보며 대답한다.

“피곤하면 피로회복제라도 드릴까요? 아까 전만 해도 괜찮아보였는데.”

연애 경험 한 번 없는 순진한 소년 강창현 16세.

그는 지금 미영의 모습이 피곤으로 인한 것인 줄 알고 있었다.

창현의 말에 그제야 미영은 자신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깨닫고는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지, 짓궂기는. 잠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어서 그런 거야.”

“그래요? 그럼 다행이네요. 곧 있으면 촬영 시작될 거예요.”

창현이 세트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CF의 컨셉은 연상의 귀여운 누나를 좋아하는 동생의 구애였다. 누나 역은 미영이었고, 동생 역은 당연히 창현이었다.

고등학생 교복을 입은 미영이 지나갈 때마다 중학생 교복을 입은 창현은 그녀를 보게 되고 눈웃음이 매력적인 그녀의 모습에 점점 빠져들게 된다.

그러다가 우연히 그녀가 마시는 음료수를 보게 되고, 창현이 그 음료수를 마시며 달콤한 사랑의 맛이라고 표현을 한다.

마지막 장면은 용기를 낸 창현이 다가가 음료수를 건네며 함께 마시는 장면인데, 괜찮은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밋밋한 느낌이 들기도 하였다.

촬영은 순조로웠다. 미영의 자신감이 거짓이 아닌 듯, 자연스럽게 촬영에 임하였고, 창현은 그런 미영의 모습이 의외라고 생각하면서 보조에 맞추며 촬영을 하였다.

처음에 창현이 바라보자 미영은 슬쩍 눈웃음을 지으며 지나치는 장면을 순조롭게 촬영하였고, 음료수 마시는 장면을 보고 따라서 그 음료수를 마시며 달콤한 사랑의 맛이라고 하는 장면까지 촬영하였다.

거기까지 촬영을 하자 점심시간이 되었다.

간단하게 도시락으로 점심을 먹은 뒤 잠깐의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하지만 자유시간은 길지 못했다.

일부러 흘린 건지 몰라도 연예뉴스인 섹션TV 촬영팀이 들어온 것이다.

그리고 리포터로 온 사람은 창현보다 키가 큰 여인이었다.

그녀는 창현을 보더니 눈에 하트를 그리며 자기소개를 하였다.

“안녕하세요! 섹션TV의 리포터 김새롬이에요. 완전 뵙고 싶었는데 이렇게 뵙게 되네요, 현 씨!”

“하하,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현이라고 합니다.”

갑자기 들이닥쳤지만 창현은 프로 정신을 발휘하여 웃음을 지은 채 인사를 하였다.

그리고 옆에 있던 미영도 인사를 하였다.

“안녕하세요, 소녀시대의 보석보다 빛나는 티파니입니다.”

“와! 요즘 떠오르는 걸 그룹 소녀시대의 티파니 양이시군요. 잠시 인터뷰를 해도 괜찮을까요?”

이미 하고 있으면서 무슨 대답을 바라는 건지.

하필이면 자유시간에 들이닥쳐서 휴식시간이 줄어든 것에 꿍얼거렸지만 내색하지 않은 채 대답했다.

“물론이죠. 마침 자유시간이거든요, 하하!”

“어머! 자유시간이면 빠르게 끝내야겠네요.

눈치가 빠른 건지 새롬이 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그리고는 먼저 미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선 티파니 씨에게 질문을 할께요. 대한민국 여성의 로망이라는 현 씨와 함께 CF를 촬영하게 되었는데요. 기분이 어떠신가요?”

“너무너무 좋죠. 평소에 현 군의 노래를 너무 좋아하고 동경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함께 CF촬영을 하게 되니 두근거려서 심장이 멈출 것 같아요.”

“어머! 저도 노래 너무 좋아요. 그럼 짧은 노래 좀 부탁해볼까요?”

아주 거부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드는데 도가 튼 듯했다.

잠시 난감한 표정을 짓던 창현은 무슨 노래를 할지 생각하더니 이내 결정한 듯 짧게 부르기 시작한다.

창현이 노래를 부르자 미영과 새롬은 빠져드는 표정으로 창현의 노래를 감상한다.

그리고 노래가 끝나자 아낌없이 박수를 친다.

“와! 역시 현 씨의 노래는 사람의 마음을 홀려버리는 능력이 있는 것 같아요. 특히 여자의 마음을요.”

“그런데 제대로 홀린 사람은 없더라고요.”

“에이! 겸손하시기는. 현 씨를 좋아하는 여성분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저부터 완전 팬이고요. 그런데 방금 노래는 그 빌보드 차트 1위를 했던 곡 아닌가요?”

새롬의 물음에 창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Minus>에요.”

“하지만 그건 영어로 되어 있지 않나요?”

“아, 영어로 앨범이 나왔지만 실제로 곡을 만들 때 먼저 한글 가사부터 작사해놓거든요. 한글 버전으로 불러드린 거예요.”

“한글 버전으로 들으니 무언가 새롭네요. 아참, 이야기를 하다 보니 인터뷰 방향에서 벗어났네요. 이번에 촬영하는 CF는 무엇인가요?”

창현이 미영을 슬쩍 바라보더니 대답했다.

“음료수 광고에요. 주제는 달콤함이고요.”

“달콤함! 그렇다면 현 씨와 티파니 씨의 알콩달콩한 스토리가 주가 되겠네요.”

“그렇겠지요?”

“짓궂으시기는. 조금 자세히 설명해주세요.”

애교를 부리며 말하는 그녀의 행동에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짓던 창현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하시니까 말해드릴 수밖에 없네요. 광고는 제가 티파니 씨를 보고 반해서 쫓아다니는 내용입니다. 자세한 것은 광고로 봐주세요, 하하하!”

능청스럽게 슬쩍 이야기하고 빠지는 창현의 모습에 새롬은 웃음을 지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해요. 와! 그나저나 현 씨가 쫓아다닌다니, 믿기지가 않네요. 티파니 씨는 정말 좋겠어요.”

“특히 저희 멤버들이 부러워할 거예요.”

“그게 무슨 말인가요?”

“CF촬영을 두고 멤버들간에 치열한 경쟁이 있었거든요. 그리고 제가 거기에서 승리한 것이고요. 아마 나중에 광고 나오면 막 부러워할 걸요?”

“호오! 그렇군요. 그런데 현 씨는 익숙하지 않겠어요. 늘 쫓기다가 여자를 쫓아다니는 역할을 하게 되었으니 말이에요.”

새롬의 말에 창현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전 쫓거나 쫓겨본 적이 없는데요?”

“에이, 설마 여자 친구도 안 사귀어 보신 거예요?”

아무렇지도 않게 한 질문이지만 무척 예민한 사항이었다. 질문을 하던 새롬도 말해놓고 아차하는 표정이었다.

창현은 그런 새롬의 질문에 웃으면서 잘 대처했다.

“에이, 이제 제 나이가 열여섯인데요. 연애의 연자도 구경하지 못했어요.”

“아차! 그런가요? 제가 실수를 했네요.”

창현에게 감사의 눈빛을 보내며 새롬이 소소한 질문들을 하였다.

그때마다 적절하게 대답하면서 길면서 짧은 인터뷰가 끝났다.

제법 일찍 끝나기는 했지만 애석하게도 자유시간도 끝이 나고 말았다.

미영이 창현을 보더니 울상을 지었다.

“제대로 못 쉬었네.”

창현은 그런 미영을 위로했다.

“그래도 인터뷰를 하게 되었으니 누나들 인지도는 올라갈 거예요. 너무 실망하지 마시고 열심히 노력해서 끝내도록 해요.”

“응, 그러자.”

미영이 밝은 표정을 지으며 촬영에 임하기 시작했다.

순조롭게 촬영이 이어지고 마침내 마지막 장면을 남겨두었다.

이 부분이 CF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늘 미영을 바라보고만 있던 창현이 마침내 용기를 내어 음료수를 내미는 장면이다. 그리고 동시에 음료수를 마시더니 한동안 서로를 바라보다가 웃음을 짓는 장면이었다.

마지막 장면인 만큼 감독도 물론 스태프들도 기대하는 표정이었다. 이걸 완벽하게 촬영해내면 끝이니 말이다.

그러나 촬영은 마지막에 와서 심하게 꼬이기 시작했다.

미영이 창현의 얼굴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던 것이다.

벌써 NG만 다섯 번이 났다.

컷!을 외친 감독이 미영을 보더니 말한다.

“왜 그렇게 NG를 내는 거야, 티파니 양?”

“그게 그러니까… 죄, 죄송합니다, 감독님.”

미영은 울상을 지으며 감독과 스태프들에게 고개를 연신 숙였다. 순조롭게 진행되던 촬영에 갑자기 NG를 내게 되자 그녀 또한 당황한 기색이었다.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힌 채 다시 촬영에 임했지만 NG의 연속이었다.

“컷! 티파니 양! 왜 그렇게 NG를 내는 거야?”

이 장면만 성공적으로 촬영하면 끝이다.

고지가 눈앞인데 미영이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다.

감독의 호통에 미영은 고개를 푹 숙였다.

이유가 있었지만 차마 감독에게 말할 수 없었다. 이유라기에는 너무나 부끄러운 이유였던 것이다.

‘어떻게 창현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다고 말을 해…….’

전에는 이러지 않았는데 갑자기 이런다.

창현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면 CM송을 부르던 모습이 떠올라서 얼굴이 화끈거리며 시선을 마주칠 수 없었다.

참고로 마지막 장면은 서로 눈을 마주친 채 한동안 바라봐야 한다.

그런데 부끄러운 나머지 제대로 감정 컨트롤이 되지 않는 것이다.

미영의 반응에 감독은 분통이 터진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러는지 원인을 알아내야 해결을 할 수 있을 텐데 무작정 입을 다물고 있으니 감독 입장에서는 복창이 터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거듭되면 될수록 부끄러운 감정은 더욱 커져만 갔다.

그 뒤로 몇 번의 강행군을 감행했지만 번번이 실패. 스태프들의 얼굴에도 서서히 짜증이 서리기 시작했다.

벌써 NG만 20번이 넘었던 것이다. 게다가 횟수를 거듭할수록 점점 나아지는 게 아니라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다.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창현은 촬영장 분위기가 심상치않다는 걸 느꼈다.

이대로 가다가는 미영에게 비난의 화살이 쏟아질 것은 자명할 터.

손을 든 창현이 감독에게 다가가더니 조용히 말했다.

“감독님, 제가 이유를 물어볼 테니 한 30분 정도 휴식시간을 주면 안 될까요?”

창현이 이렇게 말하는데 감독이 거부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거듭되는 NG로 자신은 물론 스태프들도 짜증이 치솟은 상태였으니 감정을 다스릴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게 하도록 하지. 꼭 이유를 알아내게.”

이쯤 되면 오기로라도 완수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가보다.

감독의 말에 창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절 믿으세요.”

“30분 동안 휴식! 모두 머리 식히고 오도록!”

감독의 외침에 스태프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들도 필요 이상으로 짜증이 난 상태를 자각하고 있었다.

창현은 미영에게 다가가더니 말했다.

“누나 괜찮아요?”

“미, 미안…….”

미영은 울상을 짓고 있었다. 자신 때문에 상황이 악화되자 너무 미안해서 어쩔 줄 몰랐다.

급기야 눈물까지 흘리자 창현은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미영의 손을 잡아 끈다.

“잠시 이야기 좀 해요.”

창현이 잡아끌자 미영도 순순히 따라간다.

그렇게 두 사람은 잠시 세트장을 이탈했다.


두 사람은 세트장에서 멀지 않은 비상구로 향했다.

창현은 손으로 미영의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누나 울지 마세요. 이런 일은 CF촬영을 하다가 누구나 있을 수 있는 일이니까요.”

“우는 건 아니야. 그냥 제대로 하지 못하는 내 모습을 생각하니 순간 한심해서…….”

눈물을 슥슥 훔치며 미영이 말한다.

그런 미영의 모습을 보며 창현이 조심스럽게 묻는다.

“누나, 저랑 눈을 마주치는 게 힘들어요?”

“…….”

미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너무나 간단한 일인데 거듭 NG를 낸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 한심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침묵은 긍정이라. 창현은 미영이 자신의 말에 긍정한다고 생각했다.

짧게 한숨을 내쉰 창현이 미영에게 말한다.

“누나 잠시 저랑 눈을 맞춰 봐요.”

창현의 말에 미영이 시선을 들어 그의 눈과 마주한다. 하지만 정면으로 바라볼 수 없었다.

전에는 자각하지 못했지만 한 번 자각하기 시작하니 조각과도 같은 그의 얼굴을 정면으로 응시할 수 없었다. 눈이 부셨고 부끄러웠다.

“하아! 정말 안 되나보네요.”

창현은 미영이 자신과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자 단기간에 고치기 힘들다는 걸 알아차렸다.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다가 한 번 이런 식으로 발목을 잡히게 되면 잘 극복이 되지 않는데, 아무래도 방향을 선회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미안해, 창현아. 나 때문에…….”

창현의 탄식을 들은 미영이 작은 목소리로 사과한다.

그에 창현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럴 수도 있는데요. 하지만 마주치는 걸로는 하면 안 되겠네요. 지금 당장 극복하기가 어려워 보이거든요. 누나고 그렇게 생각하죠?”

“으응.”

“그럼 마지막 부분을 수정해야 하는데… CF는 마지막이 하이라이트거든요. 음, 누나가 뭔가 고칠 점 같은 거 느낀 게 없어요?”

무작정 마지막 부분을 고치자고 말하면 감독이 OK 해줄 리가 없다. 감독이 납득 할 만큼, 기존의 마지막 장면보다 좀 더 임팩트 있는 것을 짜서 들고 가야 감독이 납득할 것이다.

웬만한 배우라면 엄두도 못낼 생각이었다. 의견을 첨부하는 정도는 가능하지만 CF의 전체적인 면을 좌우하는 순간에 결정적인 발언권을 행사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던 것이다.

하지만 창현이라면 가능했다. 그의 인지도나 그의 성공가도를 아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마련이다.

창현의 말에 미영도 고민하는 표정을 짓는다.

그러다가 그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우리 컨셉이 누나를 짝사랑하는 동생이잖아.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마지막까지 누나와 동생 사이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아.”

“음! 그것도 그러네요.”

미영의 말에 창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마지막 장면이 짝사랑을 하던 동생이 용기를 내 다가가 음료수를 건네며 함께 마시는 것이니 그렇게 느껴질 수도 있다. 어찌 보면 사랑의 시작이라 할 수 있겠지만 말 그대로 사랑의 시작이지 연인의 느낌은 전혀 나지 않으니 말이다.

창현이 긍정하자 미영은 조금 자신을 얻은 듯 대답한다.

“그러니까 조금 연인 컨셉을 짙게 해보면 어떨까?”

말을 하면서 얼굴은 왜 붉어지는 걸까. 이건 CF에 불과한데 말이다.

미영은 지금 나타나는 자신의 현상이 절대 연인 컨셉을 강조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거듭 NG를 내서 부끄러운 것이라고 자위했다. 그런다고 본질적인 것은 바뀌지 않지만 말이다.

한편 창현은 미영의 말에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으음! 연인 컨셉이라…….”

그녀의 말을 들으면서 창현은 무언가 떠오를 듯 말 듯하면서 여러 생각이 머릿속에서 교차되었다.

그렇게 생각에 잠겨있던 창현은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눈을 반짝이며 손가락을 튕겼다.

딱!

“맞다! 그렇게 하면 되겠다!”

좋은 생각이 난 듯 창현이 외쳤다.

그에 창현을 바라보던 미영이 물었다.

“뭔데?”

하지만 창현은 대답하지 않은 채 미영을 보며 씨익 웃음을 짓는다.

“조금 있다가 궁금증을 풀어드릴게요.”

무언가 기발한 생각이 난 듯 악동과도 같은 웃음을 짓는 창현이었다.

그런 창현의 모습에 미영은 궁금했지만 더 물어볼 수 없었다.

묻는다고 해도 창현이 대답해줄 기세가 아니었다.

“그럼 새로운 기획도 짰으니까 들어가도록 해요.”

이렇게 저렇게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자유시간이 다 끝나가고 있었다.

세트장 안으로 들어서자 감독을 비롯하여 스태프들이 돌아와 있었다.

“누나는 세트장에 가세요. 전 감독님께 새로운 걸 말해볼게요.”

“응.”

세트장으로 올라서는 미영은 자신을 바라보는 스태프들을 보며 다시 한 번 죄송하다는 인사를 했다.

미영을 세트장으로 보낸 창현은 감독에게 향했다.

감독은 창현을 보더니 물었다.

“그래, 티파니 양은 좀 괜찮아졌나?”

그에 창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조금 힘들 것 같아요. 간혹 그런 경우가 있잖아요? 그래서 아무래도 끝부분을 조금 변경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은데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음, 그렇게 하는 게 나을 것 같군. 그런데 현 군이 그렇게 말했다는 건 구상한 게 있다는 이야기겠지?”

감독이 창현을 보며 물었다. 창현이 이렇게 말한 것은 어찌 보면 감독의 영역을 침범한 것이라 할 수 있기에 조금 엄한 눈이었다.

그걸 느꼈지만 창현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물론이죠. 제 구상이 어떤 것이냐면요…….”

창현은 차근차근 감독에게 자신이 구상한 것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것을 묵묵히 듣고 있던 감독.

허나 창현의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감독의 눈은 반짝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창현의 이야기가 모두 끝나자 감독은 손바닥으로 무릎을 짝! 치며 말했다.

“역시 현 군이로군. 정말 대단한 발상이야. 그렇게 하면 기존의 광고보다 더욱 임팩트를 줄 수 있겠군. 정말 대단해!”

감탄을 금치 못하는 감독이었다.

그런 감독의 칭찬에 창현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다 기획된 것에 살짝 거들었을 뿐인 걸요. 감독님의 힘이 없으셨다면 이렇게도 하지 못했을 것이에요.”

서로에게 좋게 말을 해준다. 그러니 기분이 나쁠 리가 없다. 창현은 자신의 아이디어가 인정을 받았으니 기분이 좋고, 감독은 창현에게 능력을 인정 받았으니 기분이 좋아졌다.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지.”

“리얼리티가 생명이니 잘 부탁드릴게요.”

“하하! 의외로 짓궂은 면이 있단 말이야.”

이미 기획을 들은 감독이었기에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에 창현도 웃음을 지은 뒤 세트장으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미영을 보며 말했다.

“누나 시작할 거예요.”

“응. 그런데 새로 짠 건 안 가르쳐줘?”

방금 전까지 NG를 많이 내다보니 새로운 대본을 가르쳐주지 않는 것이 불안했나보다.

그런 미영의 모습에 창현이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이번 것은 리얼리티니까 누나가 제게 맞춰주시면 되요. 아셨죠?”

“알았어.”

뭔지는 몰랐지만 우선 창현이 하라고 하니 따르고 보는 미영이었다.

그렇게 촬영은 다시 재개 되었다.

용기를 낸 창현이 음료수를 들고 미영에게 다가간다. 그리고 미영에게 말을 건다.

“저… 누나.”

“응?”

길을 걷던 미영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시선을 옮긴다.

그러자 창현이 음료수를 미영에게 내민다.

“이거 받으세요.”

자신이 좋아하는 음료수였다.

미영은 그것을 받아들며 눈웃음을 지었다.

“고마워. 이거 내가 좋아하는 건데.”

그러면서 음료수를 딴 뒤 마시기 시작한다.

일단 대본대로 따라가고 있지만 미영은 속으로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대본이 주어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음료수를 마신 뒤 창현을 바라봐야 했던 것이다.

‘어떻게 해야 되지? 내가 창현이에게 맞춰줄 수 있을까? 그리고 음료수를 먹으면 눈을 마주쳐야 하는데… 그러고 보니 왜 음료수가 하나지?’

대본에서는 분명 두 개의 음료수를 들고 와야 하는데 생각해보니 창현은 음료수 한 개만 들고 왔을 뿐이었다.

미영의 머리가 복잡해질 무렵, 창현이 말을 걸었다.

“누나, 잠시 음료수 좀 줘보시겠어요?”

“응? 응.”

창현의 말에 미영은 저도 모르게 마시던 음료수를 창현에게 건넸다.

음료수를 받아든 창현. 그는 미영을 향해 미소를 짓더니 그 음료수를 그대로 마시기 시작했다.

그것도 미영이 마셨던 부분을 그대로 입에 댄 채 말이다.

“……!”

갑작스러운 창현의 행동에 놀란 표정을 지으며 창현을 바라보는 미영.

그에 실눈을 뜨고 미영을 본 창현이 웃음을 짓더니 음료수에 입을 떼고는 미영을 향해 말한다.

“달콤하네요. 누나의 입술도 이렇게 달콤할까요?”

그러면서 미영과 눈을 마주치는 창현.

미영은 그런 창현의 시선을 제대로 받아내지 못한 채 고개를 돌린다.

그런 미영을 바라보며 창현이 웃음을 짓는다.

“컷! 잘했어!”

창현이 웃는 장면까지 촬영한 감독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외친다. 그러자 스태프들도 얼굴이 환하게 바뀐다. 드디어 끝난 것이다.

미영은 감독의 만족스러운 목소리에 다소 어안이 벙벙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창현을 보며 물었다.

“끝난 거야?”

“네, 끝났어요. 제가 아까 말한 기획이 이거였거든요.”

“이거였다고?”

음료수가 한 개로 바뀌었고, 자신이 마시던 음료수를 받아 그대로 마셨다.

간접 키스.

그 사실을 떠올리자 미영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무엇보다 충격적이었던 마지막 창현의 말. 누나의 입술도 이렇게 달콤할까요, 라니.

미영은 치명적인 유혹을 뿜어내던 창현의 모습을 떠올리며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애를 썼다.

창현은 그런 미영을 보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해요, 누나 아무래도 실제 상황에서 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서 그랬어요.”

그는 미영의 얼굴이 붉어진 게 화가 나서 그런 건 줄 알았나보다.

창현의 말에 미영이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야. 나 화 안 났어. 그런데 용케도 감독님이 승낙을 해주셨네.”

“원래 마지막에 첫사랑의 달콤함처럼이라고 말하면서 음료수 이름을 말하는 거였잖아요. 그런데 앞에 나레이션을 조금 더 넣기로 했어요. ‘좋아하는 사람에게 때로는 강하게. 첫사랑의 달콤함처럼.’ 이렇게요.

“와…….”

창현의 말을 들으면서 미영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흘렸다.

그의 말대로라면 정말 대단한 CF가 나올 것이 분명하다고 느껴졌던 것이다.

치명적인 유혹을 발산하는 창현의 모습을 보여주며 저런 나레이션이 나오다니. 자신이 광고를 보더라도 당장 사먹을 것 같았다.

“어쨌든 화가 안 났으니 다행이네요. 수고하셨어요. 미영 누나.”

“응. 창현이 네가 도와줘서 그렇지. 고마워.”

“촬영이 끝났으니 저녁식사를 할 것 같은데 같이 먹을까요?”

창현의 말에 미영은 마음이 동하는 걸 느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마음이 조금 복잡했다.

“아니야. 난 숙소로 돌아갈게.”

“그래요? 아쉽지만 어쩔 수 없죠. 제가 잘 설명해놓을 테니 들어가서 푹 쉬어요.”

“오늘 고마웠어.”

그렇게 창현과 인사를 나눈 미영은 회사에 연락하여 촬영이 끝났다는 걸 알리고 벤을 탄 뒤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 안으로 들어서자 벌 떼같이 달려드는 멤버들이 보였지만 미영은 재빨리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근다.

밖에서 쾅쾅! 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미영은 그런 것에 아랑곳 하지 않은 채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 생각에 잠긴다.

노래 부르는 모습이 너무나 멋있다.

자신을 이끌어주는 모습이 너무나 듬직했다.

유혹하는 그의 모습이 너무나 끌렸다.

미영은 창현을 생각하자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

전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이었다.

생각만 해도 호흡이 가빠지고 조금이라도 그의 모습이 더 보고 싶어진다.

심장 부근에 손을 댄 미영은 거세게 뛰고 있는 자신의 심장 박동수를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이 창현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고 있다는 것을.

지금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

그것은 다름 아닌 창현에 대한 생각들이었다.

아까 전 저녁식사를 함께 하자고 하던 창현의 제의를 물리친 것이 지금에 와서는 너무나 후회되었다.

미영은 수연이 제일 아끼는 곰 인형을 품에 꼬옥 안았다. 그러자 조금이나마 마음이 안정되는 것 같았다.

연예인으로서 제일 품어서는 안될 감정을 품어버리게 되었다.

“나, 어떡해. 창현이 좋아하나봐…….”




제32장 팬 미팅(Fan Meeting)




“후아!”

10월 말이 되자 서서히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는 시기가 되었다.

교복 마이를 입은 창현은 정자에 누워서 저 앞에 존재하고 있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구름 한 점 없이 푸르기만 하다.

지금은 점심시간이다. 창현은 학교에 나와 점심시간이 되자 늘 그러하듯 정자로 나와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미영과 CF촬영을 끝낸 후, 특별한 스케줄이 없는 창현은 학교에 다니면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이미 라샤의 녹음도 끝이 나서 창현이 할 일은 거의 없었다.

창현이 본격적으로 등교를 하자 언제나 그러했듯이 학교는 한바탕 홍역을 앓았지만 하루가 거듭될 때마다 점점 나아지는 모습을 보였다.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동물원의 우리 안에 갇힌 동물처럼 관심의 대상이 되었지만 말이다.

그래서 점심시간이 될 때마다 창현은 정자로 나와 홀로 시간을 보내고는 한다.

근심 한 점 없어 보이는 듯한 그는 요즘 고민거리가 있었다.

“하아! 팬 미팅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요즘 창현의 머리를 아프게 하는 문제, 그것은 다름 아닌 팬 미팅이었다.

석규가 잡아놓았다고 한 팬 미팅은 10월말에 열리게 된다. 불과 오백 명밖에 참석하지 못하는 탓에 창현의 팬 미팅 경쟁률은 표 하나를 두고 1:1000까지 가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살인적인 경쟁률 때문에 일각에서는 참여 인원을 더 늘려달라고 했지만 오백 명에게 최상의 팬 미팅 서비스를 제공하고자 결정을 내리고, 준비에 착수한 뒤였기에 석규는 결정을 바꾸지 않았다.

“차라리 무대 위에서 노래만 하는 거면 좋을 텐데.”

무대 위에서 노래만 부르라고 하면 자신 있었다. 노래를 불러서 듣는 사람의 마음을 울리게 하는 경지에 도달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외의 것이라면?

자신감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직 자신의 방송 경험은 지극히 짧다. 2월에 데뷔한 자신보다 8월에 데뷔한 소녀시대가 오히려 방송 경험이 더 많을 정도로 말이다.

왜 방송을 적게 잡냐고 물었더니, 석규가 너무 많은 방송에 나가는 것은 오히려 역효과라면서 적당하게 한 번씩 출연하자고 이야기를 하였다. 어차피 여기저기에서 창현을 섭외하려고 몸이 달아 있으니 말이다.

사실 창현은 모르지만 석규도 석규 나름대로 고충이 있었다. 그 또한 창현의 방송을 잡아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방송 3사에서 서로 데려가려고 신경전을 벌이는 실정이었기에 어디에 딱히 창현을 출연하게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쪽에 출연하게 되면 저쪽에도 출연을 해야 하는데, 창현에게 미칠 영향이나 보여줄 이미지 등을 고려하다 보면 계산을 하기가 무척 힘들었다.

불러주는 곳이 너무 많아 오히려 고려해야 하는 점이 늘어난 셈이다.

물론 창현이라면 잘 해낼 것이라 생각했지만, 아직 급할 것은 없으니 천천히 방송에 적응해나가게 할 생각이었다.

“일단 팬 미팅 일정을 알아보고 어떻게 할지 해봐야겠다.”

예비종이 울리자 창현이 몸을 일으키며 중얼거렸다.

이미 중학교 진도는 모두 뗀 창현에게 있어 수업은 무척 지루한 것이었다.


수업을 모두 끝낸 창현은 곧장 AA엔터테인먼트로 향했다. 석규에게 팬 미팅 일정을 물어보기 위함이다.

곧장 사장실로 들이닥친 창현은 안에 있는 사람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사장실 안에는 지선이 있던 것이다.

석규와 지선은 이야기를 나누다가 창현이 안으로 들어오자 반겨주었다.

“어서 오렴, 현아.”

“크흠! 어서 와라. 그런데 왜 하필 지금이냐. 분위기 잡고 뽀뽀 좀 하려고 했더니.”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말하는 석규의 모습에 지선이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어머, 그런 말은 좀.”

“하하! 너도 싫지는 않았구나. 그런데 창현이 네가 갑자기 무슨 일로 온 것이냐?”

싫지 않은 듯한 지선의 반응에 석규는 창현이 돌아가면 시도해보기로 생각하면서 창현이 온 이유를 물었다.

그에 창현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이거, 분위기 깨서 죄송해요. 궁금증만 풀고 금방 돌아갈게요. 아버지가 아직 팬 미팅 일정을 알려주지 않으셨잖아요. 그거 물어보려고 왔어요.”

“아, 그랬나? 알려준다는 게 깜빡했나보구나. 특별할 건 없지만, 자 받아라.”

석규가 무언가 주섬주섬 꺼내들더니 창현에게 건넨다.

그걸 받아들고 읽어보니, 팬 미팅 일정에 대해 적혀 있었다.

눈으로 읽어본 창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크게 어렵지 않네요. 그런데 게스트는 누가 오나요?”

“무슨 게스트 말이냐?”

창현의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묻는 석규.

그에 창현은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서, 설마 게스트를 섭외하지 않았단 말인가?

분명 일정 제일 앞에는 게스트의 축하공연이 적혀 있는데?

창현은 당황한 기색을 애써 숨기며 석규에게 말했다.

“에이, 거짓말하지 마시고요.”

“거짓말이라니? 내가 저번에 네게 말하지 않았더냐. 게스트 섭외는 네게 맡기기로 했다고.”

“저, 정말요?”

석규가 정말 그런 말을 했단 말인가?

창현은 자신이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는지 떠올리기 위해 머리를 굴려보았다.

하지만 생각이 나지 않았다. 설마 자신이 무심코 흘려버렸단 말인가?

이렇게 중요한 일을 잊어버리고 있다니!

그런 창현의 모습을 보며 석규가 말했다.

“일단 MC는 섭외해놓았으니 게스트만 섭외하여라. 라샤 아이들은 당연히 참가하기로 했으니 게스트 하나만 더 섭외하면 되겠구나. 아, 원더걸스는 바빠서 안 된다고 하더구나. 그럼 알아서 섭외해봐라.”

“이, 이걸 이제 말해주면 어떻게 해요! 아이고! 그럼 전 가볼게요!”

창현은 석규에게 인사를 하고는 사장실을 벗어났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석규가 혀를 찼다.

“이런이런.”

“왜 그러는 건데?”

옆에 있던 지선이 석규가 혀를 차는 모습에 물었다.

그러자 석규가 어깨를 으쓱했다.

“저 녀석이 어떻게 행동할지 빤히 보여서. 저 녀석 인간관계가 정말 좁거든.”

“창현이가?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

석규의 말이 믿기지 않는가보다. 지선의 음성에는 놀라움이 가득했다.

그도 그럴 것이 창현은 무척 예의가 바르고 호감형이어서 처음 보는 사람과 금방 친해질 수 있는 듯한 인상이었다. 그런 창현이 인간관계가 좁다니? 믿기지가 않는 일이었다.

그런 지선의 반응에 석규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저 녀석이 저렇게 된 건 나 때문이지. 내가 창현이를 외면했기에 저 녀석이 저렇게 되었어. 그러니 지선아 네가 창현이를 잘 좀 보살펴주었으면 좋겠어.”

지금도 대단하지만 석규는 창현이 가족의 정을 느껴서 예전의 밝은 창현으로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선에게 창현이 잊어버린 엄마의 정을 느끼게 해주었으면 했다.

석규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창현이 어떻게 자라왔는지 알고 있는 지선이었다.

그녀는 항상 밝고 여유 있어 보이는 창현이 그런 과거를 안고 있었다니.

“알았어. 힘내볼게.”

의욕을 불태우는 지선의 모습에 석규가 웃음을 지었다.

자신의 이야기로 분위기가 어두워질 뻔했으니 이제 분위기를 밝혀야 한다.

석규는 지선에게 입술을 쭈욱 내밀며 말했다.

“자, 그럼 창현이도 갔으니 아까 못했던 쪽이나 해볼까.”

“아유, 늑대. 남자는 다 늑대라니까.”

“그래, 남자는 늑대지. 나 빼고 말이야. 하하!”

“정말 못말려.”

눈을 흘기면서 그런 석규가 밉지 않은 듯 미소를 짓는 지선이었다.


사장실을 나선 창현의 머리가 바쁘게 돌아갔다.

팬 미팅까지 불과 3일 밖에 남지 않은 실정이었다.

과연 이 짧은 시간에 자신이 게스트를 섭외할 수 있을까?

“음! 원더걸스가 바쁘다고? 그럼…….”

순간 창현은 게스트로 나올 만한 연예인이 누가 있는가 생각해보았다.

핸드폰을 열면서 전화번호부를 살피는 창현.

결과는 처참했다.

게스트로 나오는 라샤와 바쁘다는 원더걸스를 제외하면 창현이 알고 지내는 연예인은 소녀시대 밖에 남지 않았던 것이다.

창현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와! 나 정말 연예인 맞아? 진짜 처참하네. 어떻게 이렇게 인간관계가 좁을 수 있지?”

남들은 월드스타라고 치켜 세워주는데 정작 알고 지내는 사람은 이렇게 적을 줄이야.

스스로 대인관계가 넓지 않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현실에 직면하게 되니 그 느낌은 남달랐다.

“앞으로는 조금 더 적극적으로 활동해야겠네. 진짜 내가 이럴 줄이야.”

씁쓸하게 입맛을 다시며 창현은 태연의 전화번호를 찾았다.

라샤와 원더걸스를 제외하니 소녀시대 밖에 안 남았고, 창현은 소녀시대에게 연락을 하여 도움을 청할 생각이었다.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불과 3일 밖에 남지 않은 팬 미팅이었다. 소녀시대가 비록 신인 그룹이지만 SM엔터테인먼트라는 거대한 기획사에서 야심차게 밀어주고 있는 만큼, 스케줄의 양이 만만치 않은 편이었다. 게다가 요즘에 신곡을 녹음하고 있다고 하기에 평소보다 더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것임이 분명했다.

연락을 하면서 창현은 스스로도 느꼈다. 자신이 생각하는 정도라면 소녀시대를 섭외하기가 힘들다고 말이다.

그래도 알고 지내는 연예인 중에 소녀시대 밖에 없었기에 창현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연락을 하였다.

♩♪♬

컬러링 소리가 들린다.

잠시 후, 뚝! 하는 소리와 함께 컬러링이 끊기더니 태연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여보세요?

태연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창현은 장난기가 들어 태연의 목소리를 그대로 위조하여 말해보았다.

“여보세요?”

-…창현 씨. 아직 이사 안 가신 거 알거든요? 이따가 면담 좀 하고 싶으신가요?

“어떻게 알았어요?”

창현은 자신의 정체를 너무 쉽게 알아차리자 맥이 풀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건너편에서 태연이 잠시 침묵하더니 말했다.

-너 바보지? 핸드폰으로 전화를 했으면 번호가 뜨는 건 당연하잖아.

“아 참, 그렇지. 하하! 경황이 없다보니 실수를 했네요.”

-으이구! 넌 노래 할 때나 다른 거 할 땐 엄청 대단한데 평소에는 덤벙대는 면이 있다니깐. 그런데 무슨 일로 연락한 거야?

짧게 창현에 대해 평하던 태연은 용건을 물었다.

그에 창현은 자신의 용건을 떠올리고는 태연에게 말했다.

“그게… 그러니까… 조금 무리한 부탁일 수도 있는데요.”

-뭔데? 말해봐.

창현이 말끝을 흐리며 말하자 궁금해진 태연이 대답을 재촉했다.

그러자 창현이 어렵사리 말했다.

“제가 3일 후에 팬 미팅을 하거든요……. 그래서 누나들이 좀 게스트로 와줬으면 해서요.”

천하의 현이 게스트 섭외 때문에 이런 모습을 보일 줄이야.

말을 하면서 창현은 스스로도 쪽팔림을 느꼈다. 그래도 제법 잘나가는 스타인데 게스트 하나 제대로 섭외 못하는 자신의 좁은 인맥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팬 미팅이라고?

“네. 팬 미팅이요.”

그에 태연은 한동안 침묵했다.

창현은 그 침묵이 거절의 의미로 받아들였다.

하기야, 3일 전인데 스케줄이 비워지지 않았다면 모를까 한창 바쁘게 움직여야 할 신인이라면 어려운 일이겠지.

내심 창현이 포기하려고 할 때, 태연의 황당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소리야? 우리 이미 네 팬 미팅에 가기로 했는데?

이게 무슨 말이란 말인가? 가기로 되어 있다니?

석규가 게스트가 섭외 되지 않아서 자신에게 섭외하라고 하지 않았던가?

설마…….

태연의 말을 듣는 순간 창현의 뇌리에 한 마디가 스쳐지나갔다.

‘낚였다!’


석규에게 낚였지만 창현은 차마 아버지를 탓할 수 없었다.

아버지를 탓하기 이전에 자기 자신의 인맥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 것이다.

내심 자신의 대인관계가 좁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직접 이야기로 들은 것보다 깨달은 것이 더욱 절실하게 다가왔다.

창현은 자신의 대인관계가 얼마나 좁은지 깨달을 수 있었다.

“하아! 조금 우울하네.”

진실이란 것은 가혹한 법이다. 특히나 자기자신에게 엄격한 기준을 적용시키는 창현의 경우가 더욱 그러했다.

대인관계가 좁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능력이 출중하다면 주변에 사람이 모여들 테니까.

창현은 그 말을 신봉하였고, 길지는 않지만 자신의 인생관으로 삼아오고 있었다.

그리고 여태까지 그 점에 대해서 딱히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그렇지 않은가?

중간에 장애물이 있었다고 하나 창현의 행보는 그야 말로 탄탄대로였으니 말이다.

그러다가 팬 미팅이라는, 말 그대로 작은 이벤트에서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일에서 세상의 이치를 깨달은 셈이다.

물론 창현이 겪는 일상이란 것은 일반인들과 다르지만 말이다.

“외국으로 나가면 그래도 친분은 좀 있는데.”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면서 창현이 중얼거렸다.

국내에서 방송 생활이 얼마 안 되었기에 대인관계가 극히 좁았지만 외국의 경우는 달랐다.

지극히 개인주의가 발달한 미국의 경우 창현의 생각과 부합하는 면이 무척 많았다.

생각이 맞으면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는 것도 쉬웠다.

게다가 어린 나이지만 뛰어난 실력과 열정을 지닌 창현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무척 많았다.

그랬기에 지금 언급을 하기만 하여도 사람들이 화들짝 놀랄 만한 거물급 가수들을 수두룩하게 알고 있다.

만약 미국에서 팬 미팅을 했다면?

자신의 인맥을 십분 발휘하여 그들을 끌어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곳은 한국.

그것도 팬 미팅이 불과 3일 남은 시점에서 그들에게 비행기를 타고 먼 거리를 와달라고 할 수 없다. 창현도 세계적인 스타지만 그들 또한 세계적인 스타라고 할 수 있으니 말이다.

“어이구!”

집으로 돌아가는 창현.

요 며칠 동안 창현은 극비리에 이사를 추진하고 있었다.

이따금 자신의 집으로 오고자 하는 소녀들의 진입을 막아내면서 창현은 이삿짐을 하나씩 싸기 시작하였고, 치밀한 준비 끝에 이사를 하는데 성공하였다.

새로 옮긴 곳은 소녀시대 숙소와 멀지 않은 곳이었다.

같은 단지 내라고 할까? 하지만 동수로는 차이가 좀 있어서 한 십분 정도 걸어가야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이 정도면 같은 단지 내에 산다고 해도 스캔들을 내기 쉽지 않을 것이다. 대충 우연이라고 하면 될 테니 말이다.

창현의 정보를 캐기 위해 파파라치들이 잠복하기도 하였지만 워낙 복잡하게 움직이는 창현의 행동으로 인하여 그가 소녀시대 숙소 옆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지 못했다. 하지만 방심할 수 없는 사실이었고, 근래 들어 냄새를 맡은 기자들이 있는 것 같았기에 서둘러 이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소녀시대 멤버들은 아직도 창현이 옆집에 살고 있는 줄 안다.

이거 분명히 나중에 알게 되면 한 소리 하겠지. 자신들에게 아무 말없이 이사를 갔다고 말이다.

하지만 창현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소녀들에게 말해준다면 또 소란이 일어날 테니 말이다.

숙소를 옮겼지만 같은 단지 내에 있는 곳인지라 구조는 똑같았다. 게다가 물건들도 그대로 배치를 해두었더니 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소파에 앉으면서 창현은 석규가 준 서류를 읽어보기 시작한다.

서류에는 팬 미팅 일정에 관한 것과 주의해야 할 점 등이 적혀 있었다.

우선 팬 미팅은 AA엔터테인먼트에서 기획을 하였다.

팬 미팅 MC를 보는 사람을 본 창현이 눈을 빛냈다.

창현의 첫 팬 미팅 MC를 봐주는 인물은 다름 아닌 유재석이었다.

“오오, 아버지가 힘 좀 쓰셨나보네?”

국민 MC라고 불리는 유재석이라면 분명 최고의 팬 미팅이 진행될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자신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캐릭터를 적절하게 살려주는 진행 솜씨는 대한민국에서 일절이라 불려도 부족함이 없다.

강호동이 주도적으로 진행을 하는 스타일이라면 유재석은 다른 사람들을 아우르는 진행 스타일을 지니고 있다. 이는 각각 장점을 지니고 있기에 딱히 꼬집어 누가 낫다 이러기는 힘들다. 다만 강호동 같은 경우는 처음 대할 때 조금 부담스러운 반면 유재석은 그런 게 덜하다고 할까?

물론 이것은 창현의 개인적인 생각이었다.

아무래도 창현의 나이가 어리다 보니 그런 면을 신경 쓸 수밖에 없었다.

팬 미팅은 소규모로 진행되지만 이것저것 신경을 많이 쓴 듯하였다.

우선 개개인에게 창현의 상징과도 같은 검은색 별이 새겨진 손수건이 사은품이었고, 이벤트를 통해 창현의 싸인이 들어간 앨범 CD를 주기로 하였다. 뿐만 아니라 팬들도 참여할 수 있는 여러 이벤트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은 노래를 불러야 했다. 이 점은 어차피 예상을 했다지만 몇몇 주제를 놓고 좌담회와 함께 개인기, 춤까지 보여주어야 한다고 적혀 있었다.

아이고, 3일 밖에 남지 않았는데 준비 할 것이 산더미였던 것이다.

다행이라면 개인기는 목소리 변조가 가능하니 그것으로 대체할 수 있고, 춤이라면…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와 원더걸스의 <Tell Me>를 익혀뒀으니 딱히 문제가 될 것은 없어보였다. 다행이었다.

서류를 천천히 읽던 창현이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이건 또 뭐지?”

몇몇 팬들에게는 추첨을 통해 백허그니 프리허그니 해주는 것이 있었다. 순결한(?) 창현에게 있어서 포옹 같은 경험은 전무하였기에 팬 미팅에 적혀 있는 걸 보고 황당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팬 미팅에서 무슨 포옹질이란 말인가!

창현은 석규의 만행에 이를 갈았다.

“이 아버지가 정말…….”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지기로 결심을 하며 창현은 서류를 끝까지 다 읽었다. 3일 밖에 남지 않았지만 특별히 연습할 것은 없었다. 선보일 춤은 가볍게 몸에 익혀두고, 첫 미니 앨범인 <Go&Stop>부터 여태까지 발매한 곡들을 다 연습해두면 될 듯 싶었다.

팬 미팅에 대해 한시름 덜어낸 창현은 편안한 표정으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

벨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뭐지…….”

낮잠에 빠져 있었던 창현은 벨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자 인상을 찡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핸드폰을 잡았다.

번호를 확인하니 순규의 번호였다.

이 누나가 갑자기 왜 전화를 하는 거지?

의아함을 느낀 창현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무슨 일로 연락하신…….”

창현의 말은 끝맺지 못했다. 건너편에서 다급한 순규의 목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창현아! 너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순규의 말에 창현은 의아함을 느끼며 대답했다.

“제가 무슨 일이 있어요? 아, 지금 목소리가 이러는 건 방금 자다 일어나서 그런 거예요.”

-여태까지 잤다고? 밖에서 그렇게 불러댔는데?

“그게 무슨 말이에요?”

창현은 여전히 순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에 순규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까부터 계속 너희 집 앞에서 초인종을 누르면서 널 불렀다고. 핸드폰은 받지도 않고, 로드 매니저분은 집에 들어갔다고 하고.

어느 샌가 창현의 로드 매니저 번호까지 따놓았나보다.

평소에 소녀시대 팬이라고 하더니만 번호를 교환하여 자신의 정보를 흘리고 있을 줄이야.

창현은 속으로 이를 갈면서 대답했다.

“설마 찾아간 곳이 옆집은 아니겠죠?”

-그게 무슨 말이야? 너희 집은 우리 옆집이잖아.

창현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순규였다.

그에 창현이 피식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누나 완전히 헛다리 짚으셨네요. 전에 말했잖아요. 저 이사갔다고요. 지금 그 집에 저 없어요. 텅텅 비었거든요.”

-…….

창현의 말에 순규는 할 말을 잃은 듯했다.

그것도 잠시, 곧이어 엄청나게 큰 소리가 창현의 귀를 향해 덮쳐온다.

-이 나쁜 자식아아아! 왜 이사를 간다고 말을 안 해준 거야?

창현이 말해주지 않은 것이 어지간히 섭섭했나보다.

그에 창현은 얼른 사과를 하였다.

“미안해요. 하지만 이사 가는 건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아서요. 누나들에게도 곧 말해줄 생각이었어요.”

-정말이지?

의심이 담긴 순규의 말에 창현은 얼른 대답했다. 그녀도 내심 창현의 처지를 이해하고 있는 것이라.

“네, 물론이에요. 그런데 무슨 일로 절 찾으신 거예요?”

-별거 없고… 그냥 스케줄 다 끝나서 같이 게임이나 하자고 하려고 했지.

순규의 말에 창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한창 새 앨범을 위해 녹음을 하고 있지 않던가? 그런데 시간이 나다니 조금 이상했다.

“그래요? 녹음은 어떻게 하고요?

-내 파트 녹음은 끝났어. 애들하고 다 같이 부르는 것도 끝났고. 아직 개인 파트 녹음이 안 끝난 애들은 녹음하고 있을 걸?

순규의 말에 창현은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라샤도 녹음을 할 때 단체 파트부터 녹음을 하고 개인 파트를 녹음하고는 하는데 컨디션이 좋아 먼저 녹음을 끝내는 멤버가 있기도 하였다. 그렇게 되면 먼저 녹음을 끝낸 멤버는 자유 시간을 갖게 된다. 순규도 그 경우인 듯했다.

“그렇구나. 녹음 끝낸 거 축하드려요. 그 축하의 의미로 제가 누나를 관광 보내드릴게요.”

친절한(?) 창현의 말에 순규가 이를 갈았다.

-으득! 오늘은 쉽지 않을 것이야.

회심의 5드론 이후 순규는 창현을 이긴 적이 없다.

순규는 그 후에도 5드론을 몇 번이나 시도했지만 한 번 당한 전략에 다시 한 번 당항 정도로 창현은 녹록치 않았다.

그 결과 대결은 매번 순규의 패배였다.

그뿐인가?

자신의 패배를 설욕하기라도 하듯 항상 잔인한 수법을 멈추지 않는 창현이었다.

확실하게 승기를 잡아놓고 다크 아콘으로 순규의 드론을 마인드 컨트롤하여 저글링을 뽑고는 본진을 밀어버린 적도 있다.

그럴 때마다 순규의 분노 게이지는 상승하였지만 그녀가 어찌 할 수 있겠는가.

스케줄로 인하여 창현을 보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렇다고 게임 실력으로 창현을 꺾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결국 그녀가 게임을 신청하는 것은 또 다른 스트레스의 생성에 불과했다.

매일 패배를 당함에도 끈질기게 대결 신청하는 그녀의 근성은 참으로 대단하다 할 수 있다.

“하하하! 그래요, 그래.”

창현은 변함없는 순규의 모습에 웃음을 지었다. 팬 미팅에 대한 부담감을 덜어낸 뒤였기에 기분이 몹시 가벼운 상태였다.

틱틱거리는 순규를 상대하면서 창현은 컴퓨터를 켰다. 그리고 게임을 즐기면서 팬 미팅에 대한 부담감을 털어냈다.

이제 처음으로 겪는 팬 미팅에 대한 경험만 쌓으면 두려울 것은 없을 것 같았다.

대인관계에 대한 문제는 잠시 미뤄둔 지 오래였다.


3일이란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갔다.

팬 미팅에 대한 부담감을 덜어버리기는 했지만 긴장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상이었다.

당일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부지런히 연습에 매달리면서 창현은 다가오는 팬 미팅에 긴장감을 가졌다.

무대 위에 서는 것이나 사인회를 하는 것과는 다른 긴장감이었다.

팬 미팅이 있는 당일은 일찍 가서 여러 가지 맞춰볼 것이 있었기에 창현은 부득이 학교에서 일찍 조퇴를 해야만 했다.

그리고 팬 미팅 장소에 일찍 도착한 창현.

팬 미팅이 열리는 곳은 그리 큰 곳이 아니다.

참가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불과 오백 명밖에 되지 않았기에 굳이 큰 장소를 빌릴 이유가 없던 것이다. 대신 만족스러운 무대를 펼칠 수 있도록 무대 장치만큼은 확실한 곳을 골랐다.

팬 미팅은 오후 다섯 시에 열리는데, 창현이 장소에 도착한 것은 오전 열시였다.

장소에 도착한 창현은 분주하게 움직이는 스태프들에게 인사를 하였다.

“안녕하세요!”

거물인 창현의 인사였다.

바쁘게 움직이던 스태프들은 창현의 등장에 멈칫하였고, 그의 인사에 화답을 하였다. 여자 스태프들은 물론 남자 스태프들까지 창현에게 다가와 싸인을 부탁하기도 하였다.

자신의 팬 미팅을 준비해주는 스태프들의 부탁이다.

창현은 당연히 기쁜 마음으로 싸인을 해주었고, 엄청난 인기에 비해 오만하지 않고 소탈한 모습을 보이는 창현의 행동에 역시 되는 사람은 다르다고 생각하며 창현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하였다.

장소에 도착한 창현이 한 것은 간단한 리허설이었다.

창현이 노래를 부를 때에는 분주하게 움직이던 스태프들이 멈추고 주목을 할 만큼 창현의 노래 실력은 대단하였다.

노래가 끝날 때마다 박수갈채가 이어지자 창현은 조금 머쓱해졌다. 자신이 노래로 스태프들의 주의를 끌어서 일을 방해하는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그 사이 점심 시간이 되었고, 창현은 스태프들 사이에 껴서 같이 점심을 먹게 되었다. 본래대로라면 시작하기 한두 시간 전에 왔어야 할 창현이지만 무척 일찍 왔기에 따로 준비할 수 없었다.

그에 책임자는 무척 미안한 표정을 지었지만 창현은 오히려 자신이 실례를 했다면서 간신히 달랠 수 있었다. 자신이 마음대로 행동해놓고 특별 대우를 바랄 정도로 창현의 얼굴은 두텁지 않았다.

그렇게 점심식사가 끝나고 몇 번의 연습을 통해 자신의 상태 점검을 끝낸 창현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마음 같아서는 장기로 보여줄 춤도 연습하고 있지만 스태프들이 보고 있는 상황인지라 연습하기 민망했다.

팬 미팅 도중에 하라고 하면 눈 딱 감고 저지르면 되지만 말이다.

약 세 시가 되었을 무렵, 창현은 오늘의 팬 미팅에 중요한 역할을 맡아줄 인물을 만나게 된다.

바로 MC를 봐줄 유재석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팬 미팅이 다섯 시에 시작되는 걸 감안하면 두 시간이나 일찍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창현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유재석을 맞이하였다.

“안녕하세요? 유재석 선배님.”

유재석 씨라고 부를까 하다가 선배님으로 호칭하는 창현이었다. 가수 출신이기에 선배라기에는 뭐하지만 방송 경력에서는 선배였으니 그것이 편할 듯 싶었다.

가볍게 스태프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던 유재석은 창현이 자신에게 인사를 건네자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 안녕하세요, 현 씨. 일찍 오셨군요.”

설마 창현이 와 있을 줄은 몰랐던 유재석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현이란 이름이 주는 무게가 엄청난 만큼 팬 미팅이 거의 시작할 때쯤 되어서야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재석의 말에 창현은 웃음을 지었다.

“하하! 그러니까 그게… 팬 미팅은 처음이라서 긴장이 되어가지고요. 연습하려고 학교에서 조퇴하고 아침부터 연습하고 있었어요.”

“정말입니까? 이거 제 생각과는 많이 다르네요.”

정말 그런 듯, 재석의 얼굴에는 놀라움이 서려 있었다.

아무래도 어린 나이에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보니 자기중심적이고 오만할 줄 알았는데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게다가 아침 일찍 와서 연습했다는 것은 성격이 성실하고, 자기 일에 대한 철저함이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결정적으로 먼저 와서 인사를 했다는 것은 자신의 인기에 의존하지 않은 채 기본적인 예의를 갖추고 있다는 걸 뜻했다.

본래 사람을 볼 때 이것저것 많이 따지지 않는 재석이었지만 아무래도 창현의 인기가 엄청난 만큼 여러모로 그에 대한 선입견이 존재하였고, 처음 본 창현의 이미지와 대조시킬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생각하셨는데요? 기왕이면 좋은 쪽이면 좋겠네요.”

“좋은 쪽이니 안심하십시오, 하하!”

“아, 기왕이면 말을 놓아주시는 게 어떨까요? 제가 나이가 어리다 보니 존대가 조금 불편해서요.”

창현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비록 자신이 인기가 있지만 유재석은 연예인 중에서 유일하게 안티가 없는 연예인이라 불릴 정도로 국민들에게 호감을 주는 인물이었다. 전체적인 인기 면에서 비교할 바가 못 되었지만 개인적으로 유재석을 무척 좋아했기에 창현은 편한 사이가 되고 싶었다.

그런 창현의 말을 재석은 기다리고 있었나보다.

TV에서 보았던 친근한 미소를 활짝 지은 채 창현에게 말한다.

“그래도 될까?”

“물론이죠. 음! 그럼 뭐라고 불러야 될까요? 아무래도 형보다는 삼촌으로…….”

“형이라 불러!”

삼촌이란 말에 재석의 표정이 확 뒤바뀌더니 형이라고 부르기를 강요한다.

그에 창현이 재석을 보면서 말했다.

“저희 아버지가 올해 마흔셋이시거든요. 아마 제가 알기로는…….”

말끝을 흐리는 창현. 그러면서 재석을 힐끗 본다.

재석의 나이는 서른다섯. 아빠 벌은 아니지만 삼촌 벌이라기에는 충분하다 못해 넘쳤다. 창현의 나이가 열여섯이었으니 무려 열아홉 살 차이였다. 형보다는 삼촌에 가까웠다.

하지만 재석은 요지부동이었다.

생각해보라, 앞으로 창현이 방송에 출연하게 되면 분명 재석과 마주치게 될 텐데 거기에서 삼촌이라 불리면 자신이 뭐가 되는가?

친한 동생과 친한 조카는 엄연히 다른 법이다.

게다가!

창현이 삼촌이라 불리면 파릇파릇한 창현과 나이 대가 비슷한 아이돌들도 전부 재석을 삼촌으로 부를 것임이 분명했다.

그런 대형 참사는 막아야 했기에 재석은 필사적이었다.

“형이라 불러. 원래 방송계에서는 남자 선배는 다 형이고, 여자 선배는 다 누나야.”

급기야 형 소리를 듣기 위해 말도 안 되는 방송계의 규칙까지 만들어내는 재석이었다.

하지만 더 웃긴 건 창현이 그 말을 믿었다.

대(?)선배인 재석의 말이었다.

그가 어찌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겠는가.

거짓말에 홀딱 넘어간 창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아, 제가 그걸 몰랐네요. 죄송해요. 그럼 앞으로 재석이 형이라 부를게요.”

“하하! 그래, 그거야.”

재석은 순진한 사람 하나를 속인 것에 죄책감이 들었지만 뭐 어떠랴, 양심에 찔리는 것 치고는 성과가 대단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일찍 오신 거예요?”

국민 MC라 불리는 만큼 재석의 스케줄은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여기저기서 그를 원하는 곳이 많았고, 그로 인해 웬만한 아이돌보다 더 촘촘한 스케줄을 소화해내고 있다.

창현의 물음에 재석은 웃음을 지었다.

“오늘 MC를 보게 되었으니 스태프들과 인사를 나눌 겸 무대가 어떤 구조로 되어 있는가 보러 왔지. 무대 구조에 따라 진행 방식도 약간씩 달라지거든.”

역시 톱 MC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닌 듯, 자신만의 노하우가 있는 듯했다.

재석의 이야기를 들으며 창현은 고개를 끄덕인다. 하나하나 허투루 들을 말들이 없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시간은 네 시가 되어가고 있었고, 그러자 오늘의 게스트인 라샤와 소녀시대도 도착하였다.

방송 경험이 제법 축적된 라샤는 노련미가 느껴지는 모습으로 인사를 하였고, 소녀시대는 신인의 패기와 발랄함이 느껴지는 모습으로 인사를 한다.

칙칙한(?) 남자 둘이서 이야기를 하다가 꽃다운 여인들과 상큼한 소녀들이 등장하자 재석의 입이 쩍 벌어진다.

어느새 재석과 친해진 창현은 그 모습을 지적한다.

“그렇게 입이 벌어지면 점수 깎여요, 형.”

“헙! 고맙다.”

자신의 추태를 사전에 막아준 창현에게 감사의 인사를 표하며 재석은 라샤와 소녀시대에게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이미 라샤와는 방송에서 여러 번 마주친 상태였기에 친근한 말이 오고갈 수 있었고, 소녀시대와는 직접적으로 방송을 하지 않았지만 방송국에서 여러 번 만났기에 인사 정도는 나눈 사이였다.

소녀시대 멤버들은 처음에는 대선배인 재석을 무척 어려워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이내 재석의 화술에 긴장감을 풀고 편안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창현은 혀를 내둘렀다.

“정말 대단하네. 사람들을 저렇게 잘 이끄는 걸 보니.”

“국민 MC는 아무나 하나. 정말 대단하단 말이야. 재석 아저씨는.”

창현 옆에 서 있던 미란이 말한다.

그러자 창현이 미란을 힐끗 보더니 말한다.

“아저씨 소리 들으면 분명 뭐라고 하실 텐데.”

“후후! 당연히 방방 날뛰기는 했지만 내가 이겼단 말씀!”

승리의 브이자를 그리는 미란을 보며 창현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거 이겨서 뭐에 좋다고요.”

“뭐든지 이기는 게 중요하거든?”

못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창현이 미란을 보며 말했다.

“그나저나 오늘은 잘 부탁드릴게요. 전 이런 게 처음이라서요.”

“후훗! 그래, 우리가 최선을 다해 도와줄게. 이럴 땐 우리밖에 없다는 거 느끼지?”

미란의 말에 창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을 훔치는 시늉을 한다.

“네네, 누나들 밖에 없답니다. 슬픈 내 신세, 흑흑.”

“너 죽을래?”

“죄송요.”

그렇게 가볍게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본격적으로 팬 미팅 참가자들이 입장하기 시작했다.

무대 앞에 마련된 오백 자리 중에서도 제일 앞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전날 새벽부터 줄을 선 사람이 있다고 할 정도였다.

창현은 그런 팬들의 정성에 혀를 내둘러야만 했다. 팬 미팅을 참가하기 위해 전날부터 와서 기다린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마침내 다섯 시가 되자 본격적으로 팬 미팅을 시작하였다.

가장 먼저 무대 위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MC를 맡은 재석이었다.

와아아아아아!

그가 모습을 드러내자 관중석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하하하! 역시 관중분들은 현 군처럼 센스쟁이로군요. 아참, 방금 전에 현 군을 만나보았는데 정말 센스가 넘치는 소년이었습니다. 여러분들도 만나보고 싶죠?”

네에!

오백 명에 달하는 팬들이 지르는 소리가 어마어마하였다.

그런 관중들의 반응에 재석이 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자, 주인공을 모시기 전에 오늘 팬 미팅을 축하해주기 위해 오신 분들의 무대를 보시죠. 첫 무대는 떠오르는 신생 여그룹 소녀시대의 무대입니다. 큰 박수와 환호 부탁드리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재석이 무대 옆으로 물러났고, 조명이 꺼짐과 동시에 무대 위에서 소녀시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녀들의 데뷔곡인 <다시 만난 세계> MR이 울려 퍼지기 시작하였다.

본격적인 팬 미팅의 시작이었다.


언제나 봐도 격렬한 안무였다.

“보기만 해도 숨이 차오르네.”

창현은 아홉 명이 한 사람처럼 동작을 맞추어 추는 소녀들을 보며 나직이 감탄사를 자아냈다.

확실히 인간이란 것은 발전하는 생물인가보다.

첫 데뷔 무대에서의 어색함은 사라진지 오래였고, 지금은 몸에 익은 안무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기야 자신이 특훈까지 해줬는데 발전이 없다면 섭섭하지.

그 사이 태연이 노래를 부르면서 스타트를 끊으며 노래를 시작하였고, 어느새 완숙된 <다시 만난 세계>의 안무를 수월하게 소화해내며 안정된 무대를 선보인다.

오랫동안 춤을 춘 것이 아니지만 격렬한 안무로 인하여 소녀들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창현은 고마움을 느껴야만 했다.

자신을 위해 수고를 해준다는 것.

SM엔터테인먼트에서도 여러 가지 치밀한 계산을 거친 뒤 팬 미팅에 오는 것을 허락해줬겠지만 마음이 내켜서 하는 것과 내키지 않는 상태에서 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지금 소녀들의 모습을 보면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사실 그녀들은 무척 긴장을 하고 있었다.

다름 아닌 현의 첫 팬 미팅 오프닝을 자신들이 장식하고 있다.

평소에는 평범한 동생 같은 창현이지만 그 실체는 국내에서만 80만 열성 팬을 보유하고 있는 현이었다.

최소한 현의 앨범을 구매해야만 가입이 승인되는 다크 스타의 응집력은 다른 팬 사이트보다 훨씬 대단했다. 그리고 그들이 발휘할 수 있는 힘 또한 대단했다.

창현에 대해 부정적인 기사를 올렸던 기자가 있었는데, AA엔터테인먼트에서 기사를 시정해달라고 요구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 기자는 그것을 거부하였다. 근거없는 루머로 기사를 작성한 것이지만 현의 이름이 담긴 것 하나만으로 엄청난 조회수를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때 나선 것이 다크 스타였는데, 단 하루만에 그 기자가 짤려 버리는 일이 발생했다.

결코 칭찬받을 수 없는 일이지만 다크 스타라는 거대 팬 사이트가 갖고 있는 힘을 보여준 것이 되었다.

그중에는 오로지 현만을 외치는 열성팬들도 상당수 있는데, 이들 같은 경우 창현이 종종 게시글을 올려 잘 구슬러 놓는 편이기에 이렇다 할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

그 예로 만원의 행복에서 윤아와 함께 찍을 때 상당히 친근한 모습을 보였던 것에 대해서 예전부터 알고 지냈던 사이라고 선수를 쳤으니 말이다.

열성팬들로 인해 해당 연예인의 이미지를 손상시키는 경우가 종종 있기에 이런 점에서 창현은 팬들의 관리를 무척 잘한다고 할 수 있다.

와아아아!

열정적인 소녀시대의 무대가 끝나자 관중들이 함성을 지른다.

현의 팬 미팅 참가자 오백여 명 중 사백오십여 명 정도가 여성인 걸 감안하면 대단한 반응이었다.

사전에 재석이 호응해줄 것을 유도했던 것도 있지만 이곳에 온 사람들은 적어도 현에 관해서 무척 관심이 많은 팬들이 대다수였다. 그런 만큼 현이 알고 있는 얼마 되지 않는 연예인 중 하나인 소녀시대를 알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에 대한 예의를 보여준 것이다.

무엇보다 열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데 특별한 악감정이 없다면 박수를 쳐주고 환호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예상했던 것보다 반응이 좋자 소녀들이 인사를 하며 무대 뒤로 물러난다.

창현은 그런 소녀들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수고했어요, 누나들.”

그의 인사에 소녀들이 미소를 짓는다.

신기하게도 창현이 표하는 고마운 감정이란 것이 그녀들에게 그대로 전달되고 있었다.

소녀들이 미소를 짓자 창현도 마주 미소를 지어보이더니 물었다.

“그런데 누나들은 이제 어떻게 하실 거예요? 스케줄 따로 있어요?”

“아니, 스케줄 없어. 오늘은 팬 미팅 스케줄만 있거든.”

“그럼 어떻게 하실 거예요?”

창현은 팬 미팅에 와준 소녀시대에게 어떻게든 감사의 인사를 표하고 싶었다. 그래서 내심 조금 더 머물러주었으면 하는 마음에 물었다.

그런 창현의 마음을 눈치 챈 것일까?

소녀들은 자기들끼리 눈을 마주치더니 가볍게 웃었다.

태연은 창현을 보며 말했다.

“괜찮다면 좀 지켜보고 싶은데 괜찮을까?”

“물론이죠.”

그럴 줄 알고 자리를 준비해놓은 상태였다. 준비한 게 무색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그럼 우리는 옷 갈아입은 뒤에 오도록 할게.”

길지 않은 무대였지만 짧은 시간 격렬하게 움직였기에 소녀들 대다수가 땀범벅인 상태였다.

“그러세요.”

“그럼 조금 있다가 봐.”

창현이 비켜서자 소녀들이 짧은 인사를 한 뒤 자리를 벗어났다.

그 사이, 소녀시대 무대로 후끈 달아오른 무대를 재석이 노련하게 이끌고 있었다.

“발랄한 아홉 소녀의 열정적인 무대로군요. 소녀시대가 띄워준 분위기를 노련하게 이끌고 갈 분들입니다. 현과는 떼어놓을 수 없는 여 그룹! 라샤를 모시겠습니다.”

와아아아아!

재석의 외침과 함께 관중들의 환호가 터져 나왔다.

그와 함께 세 여인이 무대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라샤는 싱어송라이터인 현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존재였다.

그의 곡을 받고, 그의 프로듀싱 하에 모든 곡들을 녹음한 그녀들은 현의 능력을 입증한 존재였다.

게다가 아이돌답지 않게 실력이 무척 뛰어났으며,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분위기로 수많은 인기를 얻고 있다.

때문에 현의 팬들은 대부분 라샤를 좋아한다.

흘러나오는 MR은 라샤의 첫 앨범에 수록된 <Laser>다. 분위기를 띄우는 데에는 이만한 곡이 없었다.

한층 더 발전된 모습으로, 한층 더 노련한 모습으로 곡을 마친 라샤는 폭발적인 환호성을 받으며 무대를 마친다.

하지만 라샤는 무대 위에 선 채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 라샤의 모습에 의아함을 가질 때, 다시 MR이 울려 퍼진다.

바로 데뷔와 함께 라샤에게 명예의 1위를 가져다 준 곡, <Yesterday>가 흘러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능숙하게 노래를 부르는 라샤. 한창 활동하던 때보다 떨어지는 면이 없었다.

소녀와도 같은 수줍음을 잘 표현해내는 라샤의 모습에 지켜보던 관중들은 점점 노래에 심취해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침내 라샤의 파트가 모두 끝났다.

그와 동시에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폭죽이 터졌다.

갑작스러운 폭음에 관중들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이내 만면에 미소를 띠더니 환호성을 지르기 시작한다.

와아아아아!

무대 뒤에서 마이크를 든 창현이 서서히 걸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오늘은 공식 무대에 서는 것이 아닌지라 협찬을 받지도 못하고 그저 외출할 때나 입는 평범한 옷을 입은 상태였다.

하지만 그런 창현의 모습도 관중들에게는 후광이 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피처링 부분을 부르면서 창현이 중앙으로 서서히 걸어왔다.

창현의 라이브를 직접 들으면서 관중들은 그의 노래 실력이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선명하게 가슴에 전달되는 가사와 절묘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음의 조절.

무엇보다 압권인 건 감정 이입 부분이었다.

<Yesterday>는 어제의 달콤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수줍음과 그리움, 달콤함을 그려낸다.

노래를 듣는 관중들은 창현의 노래에서 소년의 수줍음을, 어제 만났던 소녀에 대한 그리움을, 그리고 그 순간 느껴질 법한 달콤함을 느낄 수 있었다.

노래에 감정을 실어서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능력이다.

가수가 부르는 노래에 따라서 듣는 사람들 모두가 기뻐할 수도 있고, 슬퍼할 수도 있으며, 분노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창현의 라이브를 들으면서 관중들이 노래의 여운에 취하고 있다면, 재석은 창현의 노래에서 전신에 전율이 일어나는 걸 느꼈다.

어린 나이에 세계적인 스타 반열에 올랐다고 하여 그를 과대평가하여 보지 않았고, 그렇다고 과소평가하지도 않았다. 그저 보이는 그대로 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조금 심하지 않는가.

자신의 가슴에 스며드는 창현의 노래에 그는 창현이 정말 무서운 인물이라는 걸 느꼈다.

‘현… 아니, 창현이는 물건이다! 세계를 휘어잡을 인물이야.’

각종 예능 프로그램의 MC를 맡고 있는 재석은 다른 출연자의 캐릭터를 부각시켜주는 능력이 뛰어나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에 대해 잘 파악하는 것이 중요했다. 게스트가 잘하는 것을 파악하고 그 부분을 부각시켜야 캐릭터가 살아나니 말이다.

그러 면에서 창현은 이미 스스로 찬란한 광채를 뿌리고 있는 보석이었다. 누가 띄워주지 않아도 홀로 고고히 빛을 뿌리는 그러한 보석.

이제 열여섯 살 소년이 이런 광채를 뿌리고 있는 것이다.

나이를 감안하면 앞으로 어디까지 뻗어나갈 것인가.

현에 대해서는 이야기만 들어오던 재석은 이제라도 창현을 만나게 된 것을 다행이라 생각했다.

딱히 기회주의자라거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런 인물은 일찍 알아놓으면 알수록 손해 보는 것은 없다.

창현과 친분을 트고자 이번 팬 미팅 MC제의를 수락한 것인데 재석은 자신의 판단이 틀리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는 사이 창현의 피처링 부분은 어느새 끝나가고 있었다.

뒤이어 라샤가 노래를 불렀지만 관중들에게 큰 감흥을 주지 못했다.

이런 예가 있다.

처음에 엄청 매운 음식을 먹는다. 그리고 그 다음에 약간 매운 음식을 먹어본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

처음에 먹었던 매운맛으로 인하여 그 다음에 먹는 음식의 매운맛이 죽어버린다. 분명 매운맛이지만 처음이 워낙 강렬하여 뒤이어 느껴야 할 매운맛이 죽어버리는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분명 라샤의 가창력은 뛰어났지만 압도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창현의 노래 이후였다.

노래를 부르는 라샤는 그걸 느끼고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그녀들도 지금의 상황을 깨달은 것이다.

창현과 함께 노래를 부르면 그는 다른 사람의 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돋보이게 해준다. 상대에 대한 배려다.

지금 라샤가 부르는 <Yesterday> 또한 마찬가지다. 분명 창현의 가창력이 월등하지만 라샤의 노래가 묻히지는 않았다.

그런데 상황이 달라졌다. 창현의 노래는 여전했다. 결코 상대방의 노래를 죽이는 식의 그런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녀들의 노래는 죽어 있었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극복할 수 없는 실력의 차이가 생긴 것이다.

너무 차이가 나다 보니 창현이 커버해줄 수 있는 범위를 이탈해버린 것이다.

라샤와 창현의 실력 차이가 10이었다면 지금은 그 범위를 이탈해 있었다.

화려했던 처음과는 달리 끝은 아름답지 못했다.

그걸 알았기에 라샤는 사죄의 의미를 담아 고개를 숙인 뒤 무대에서 물러났다.

관중들은 괜찮다고 응원해줬지만 그와 별개로 허탈함이 그녀들의 가슴에 자리하고 있었다.

무대 뒤로 물러난 라샤를 보며 창현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해요, 누나들.”

창현의 말에 시린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우리 실력이 부족해서 그런 건데, 뭘. 좀 더 노력해야겠다.”

“어떻게 하실 거예요?”

“우리도 구경하려고. 응원할 테니 잘하도록 해.”

“알았어요. 그리고 고마워요.”

그렇게 라샤는 옷을 갈아입기 위해 사라졌고, 재석이 자신의 이름을 부름과 동시에 오백 명의 팬들이 자신을 부르자 창현이 무대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관중석은 난리가 났다.

창현을 실물로 가까이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없었던 것이다.

특히 오백 명 중 대부분을 차지하는 여성팬들은 좋아서 죽을 지경이었다.

그녀들은 자신들이 만든 피켓을 흔들면서 창현을 향해 함성을 질렀다.

와아아아아아아!

꺄아아아아! 현!

창현아 사랑해!

현이는 내꺼야!

창현이 앞으로 나가자 일부 팬들은 격하게 애정을 표현하는 말을 하기도 하였다.

그런 팬들의 반응에 창현이 다소 당황한 듯 엉거주춤한 표정을 지었다.

처음하는 팬 미팅이었기에 갑작스러운 팬들의 반응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그런 창현의 모습마저도 팬들에게는 신세계였다. 늘 무대 위에서 카리스마 있는 모습만을 보여주고, 화보나 광고에서는 성숙하고 설정된 모습만을 보여주던 창현이 정말 당황한 표정을 짓자 그렇게 예뻐 보일 수가 없었다.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하던 창현은 우선 마이크를 고쳐잡고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현이라고 합니다. 오늘 이렇게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창현이 인사를 하자 다시 한 번 무대가 들썩일 정도로 큰 환호성이 들려왔다. 저러다가 오늘 다 목이 쉬어서 돌아가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어느 정도 소리가 잦아들자 창현이 마이크를 들고 입을 연다.

“우선 시작하기 전에 제 노래 한곡부터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얼굴을 알리기 전이었죠. 학교생활을 하고 싶다는 고집을 부리면서 얼굴 없는 가수로 여러분을 처음 찾아뵈었던 곡. 그때 생각하면 많이 미숙하다고 생각되네요. 지금도 부족한 것 같지만요. 우선 한곡 부르겠습니다. <Go&Stop>.

어느새 첫 미니 앨범을 발매한지가 2년이 되었다.

그때를 떠올리면 창현은 자신이 무슨 생각을 했을까 싶었다.

음향총서를 얻고 자신을 가로막았던 벽을 부수면서 자신감을 얻었지만 한편으로는 두려움을 가졌다. 자신이 힘의 유혹에 취해 헤어 나오지 못할 것 같아서, 남들보다 낫다고 그것에 만족해버릴 것 같아서 창현은 함부로 행동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공식적으로 데뷔하기까지의 기간은 자신을 다스리는 기간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덮쳐오는 자만심이라는 적을, 자신의 안에서 치솟아 오르는 오만함이라는 적을 다스릴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다.

와아아아아!

<Go&Stop>의 MR이 흘러나오기 시작하자 관중들이 함성을 터뜨린다.

지금의 다크 스타를 이끌어가는 주축이, 현의 팬이 된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곡이 바로 <Go&Stop>이었다.

힘들고 지친 삶의 답답한 가슴을 뻥 뚫어주는 시원한 이 곡은 누구도 따라하기 힘들 정도로 어려웠지만 듣는 사람의 마음에 가장 진한 여운을 남긴다.

오랜만에 관중 앞에서 <Go&Stop>을 부르게 되자 창현은 긴장되는 걸 느꼈다.

혼자서 많이 연습은 했다. <Go&Stop>은 창현에게 초심을 일깨워주는 노래지만.

흔히 창작을 하는 사람들이 자주 듣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첫 작품에 어설프지만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붓는다는 이야기다. 그 말은 기교면에서는 완숙되지 않았지만 처음 자신이 창작하는 창작물에 대해서는 모든 정성을 쏟는다는 이야기다.

그것은 창현에게도 통용되는 이야기여서, 자신의 앨범이 나올 수 있다는 사실에 만족하며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그리고 완성된 것이 바로 <Go&Stop>이다.

자신의 어두웠던 순간들과 그것을 극복했을 때의 감정을 그대로 옮겨온 노래.

그 당시에는 기교의 완숙함이 부족했지만 지금은 달랐다.

좀 더 완벽하게, 좀 더 세밀하게 그때의 그 감정을 끌어낼 수 있다.

마지막 클라이막스 부분.

여기가 <Go&Stop>의 모든 부분을 장식한다.

마이크를 높게 들며 창현은 서서히 고음을 끌어올리기 시작한다.

음이 떨리지 않게. 더 높게.

자신의 혼을 노래에 쏟아붓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창현은 고음 부분을 소화해냈다.

그리고 노래의 끝.

마이크를 내리고 길게 숨을 몰아쉬며 창현이 관중석을 바라본다.

보는 사람들의 입은 떡 벌어져 있었다.

그들은 창현의 노래가 끝난 것조차 잊은 채 놀라움에 빠져 있었다.

인간의 영역이 아닌 것 같이 느껴지는 고음의 영역.

한국사람 대부분이 고음을 소화해내야 노래를 잘한다고 느끼기에 그들은 이런 인간같지도 않은 고음을 소화해낸 창현의 모습에 할 말을 잃어야만 했다.

침묵을 깬 것은 재석이었다.

그 또한 창현의 노래 실력에 할 말을 잃고 지켜볼 정도였지만 이미 괴물 같은 창현의 능력을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었기에 회복하는 것도 빨랐다.

무대 중앙으로 걸어 나오며 재석이 말했다.

“정말 대단한 무대였습니다! 큰 박수 부탁드립니다.”

재석의 말에 그제야 관중들이 정신을 차린 듯하다.

그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치며 함성을 지른다.

짝짝짝짝!

와아아아아!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관중들은 자신이 이번 팬 미팅에 온 것 자체만으로 하늘에 감사했다. 자신이 이곳에 올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면 이런 전율스러운 무대를 접하는 것은 불가능 했을 테니 말이다.

창현도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인사를 하였다.

“감사합니다.”

그러면서 힐끗 시선을 옆으로 하니, 한켠에 마련된 자리에 소녀시대가 착석해 있는 모습이 보였다.

싱긋 웃음을 지어보인 창현이 자신의 옆으로 다가온 재석을 바라본다.

재석은 그런 창현에게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질문을 한다.

“정말 보는 사람의 속이 뻥! 뚫리는 시원한 노래였는데, 목이 아프지는 않습니까?”

팬 미팅이기에 반말이 아닌 존대를 하는 재석이었다.

그런 재석의 물음에 창현이 웃음을 지었다.

“아프지 않습니다. 목이 재산이기에 무리하는 선까지 안 건드리거든요.”

“허, 듣는 사람의 숨이 넘어가는 정도인데 도대체 목에 무리가 갈 정도면 어느 정도로……? 설마 무대가 찢어질 정도는 아니겠지요?”

농담을 하는 재석의 모습에 창현이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요, 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네요.”

“그럼 한 번 해볼…….”

말을 하던 재석이 움찔한다. 그리고 시선을 돌리더니 어색한 웃음을 짓던다.

관중들은 감히 억만불(?)의 가치를 지닌 창현의 목을 망가뜨리려 한 것이다. 이렇게 무례한 짓을 하려고 하다니! 제아무리 국민 MC라도 참아줄 수 없었다.

재석은 사나운 관중들의 눈에 손을 가로저으며 외쳤다.

“하하! 농담이에요, 농담! 봐주십시오! 전 절대로 그런 의도가 없었습니다. 암요! 하하!”

빠른 재석의 해명에 그제야 관중들의 눈길이 가라앉는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재석은 창현을 보면서 말한다.

“자, 그럼 간단한 개인기를 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현 씨가 춤을 그렇게 잘 춘다고 들었는데 그게 사실인가요?”

오오오오!

춤! 좀 보여줘요!

관중들도 창현에게 춤을 요구하자 머쓱한 표정을 지은 창현이 말했다.

“사실 춤을 잘 추지는 못해요. 취미도 없고요. 그러다가 이번에 소녀시대 춤을 눈여겨 볼 기회가 있었거든요. 아시죠? 제가 SM엔터테인먼트 프로듀서로 계약한 걸요. 그것 때문에 연습하는 걸 몇 번 보다가 <다시 만난 세계> 안무를 익히게 되었습니다. 이거라도 보여드릴까요?”

“그것도 좋지요! 음악 주세요!”

재석의 외침과 함께 기다렸다는 듯 음악이 흘러나온다.

마이크를 재석에게 건넨 창현은 <다시 만난 세계>의 음악에 몸을 맡겨 춤을 추기 시작한다.

소녀시대가 추는 안무와는 사뭇 다르게 절도 있는 동작으로 춤을 추는 창현.

그 모습에 관중들은 웃음을 참을 수가 없는 듯 입가에 웃음을 짓는다.

분명 비슷하면서 미묘하게 다른 것이 묘한 느낌을 주었던 것이다.

특히 <다시 만난 세계>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발차기 안무에서 마치 태권도 앞차기를 하는 듯한 창현의 모습에 관중들은 웃음을 터뜨리고 만다.

안무가 모두 끝나자 MR이 중지되었고, 창현이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마이크를 받아든다.

그런 창현의 모습을 보며 웃음을 짓던 재석이 말했다.

“하하하! 정말 멋진 안무였습니다. 소녀시대가 아니라 소년시대인데요? 춤이 아주 절도가 있어요.”

창현은 부끄러웠는지 머리를 흩트리며 말했다.

“아, 분명히 예전에는 잘 췄는데 미국물을 먹었더니 이렇게 변했네요. 미국은 브레이크 댄스가 유행이거든요.”

“정말인가요? 와우! <다시 만난 세계>의 미국 버전이군요.”

“그, 그렇죠.”

호들갑을 떨며 말하는 재석의 모습에 조금 얼떨떨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창현이었다. 그 말이 진실일 리가 없었기에 재석의 입가에는 미소가 맺혀 있었고, 관중들의 입가에도 미소가 맺혀 있었다.

거짓말을 말해도 어찌 저렇게 티 나게 할까.

그 모습마저도 귀엽게 보였다.

“자, 그럼 두 번째로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보통 같으면 이쯤에서 그만! 이라고 하겠지만 제 정보통에 의하면 현 씨는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를 제외하고도 원더걸스의 히트곡인 <Tell Me> 춤을 기가 막히게 춘다고 들었습니다. 아닌가요?”

재석의 말에 창현이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사실은 극비에 가까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기, 기가 막히게는 아니지만 그걸 어떻게…….”

요즘 대한민국을 휩쓸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Tell Me>는 안무가 무척 따라하기 쉬웠기에 창현은 AA엔터테인먼트에서 종종 노래와 함께 안무를 춰보고는 하였다.

그걸 아는 사람은 자신을 통틀어 채 열 명도 되지 않을 것이 분명한데 그것을 알다니.

재석의 정보통이 무엇인지 무서운 창현이었다.

하지만 창현은 몰랐을 것이다.

재석에게 정보를 제공한 것은 다름 아닌 석규였다는 것을 말이다.

창현이 <Tell Me> 안무를 취미로 추고 있다는 것을 석규는 알고 있었고, 그것을 팬들에게 어필할 수만 있다면 큰 인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재석에게 슬쩍 정보를 흘린 것이다.

창현은 그걸 알 리가 없겠지만 말이다.

재석의 유도로 졸지에 <Tell Me>까지 추게 된 창현이었다.

“음악 주세요!”

그의 외침과 함께 <Tell Me>의 MR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잠시 얼빵한 표정을 짓던 창현은 곧장 안무를 추기 시작한다.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안무. 한두 번 연습해본 게 아니라는 것이 절로 드러났다.

창현의 안무를 지켜보던 관중들은 물론이고 소녀시대 또한 눈을 빛냈다. 창현이 <다시 만난 세계> 안무를 추는 것을 제외하고 춤을 추는 것은 처음이었던 것이다.

처음 추었던 <다시 만난 세계> 안무와 달리 <Tell Me>의 안무는 완벽 그 자체였다. 원더걸스가 눈앞에서 안무를 춘다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특히 원더걸스 멤버 중 소희를 국민 여동생이라 칭하게 만들어준 ‘어머나’ 파트에서 창현이 지은 깜찍한 표정에 관중석은 난리가 났다.

꺄아아아아아아아!

창현아! 이리와!

누나가 격하게 아껴줄게!

엄청난 환호. 그만큼 창현의 안무가 대단했다는 뜻이라.

그렇게 <Tell Me> 안무가 끝났고, 가볍게 숨을 몰아쉬는 창현에게 재석이 다가왔다.

그 또한 창현의 안무에 놀란 상태였다. 감탄이 절로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원더걸스가 직접 이 자리에 와 있는 것 같았습니다. 특히 그 어머나 파트! 정말 대단한데요?”

재석의 말에 다시 한 번 관중석에서 ‘꺄아아아아!’ 하고 함성이 터져 나온다.

“감사합니다.”

관중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넨 창현이 숨을 몰아쉰다.

잠시 호흡이 안정되길 기다린 재석은 창현을 보면서 말한다.

“자, 그럼 첫 번째 개인기를 보았으니 다음 개인기를 보아야겠지요?”

쉼 없이 창현을 몰아치는 재석. 평소와는 다른 진행 방식이다.

이제 막 호흡을 고른 창현은 황당한 시선으로 재석을 바라본다.

그런 창현과 시선이 마주친 재석이 씨익 웃음을 짓더니 말한다.

“만원의 행복을 본 분이라면 누구나 알 것입니다. 현 씨의 목소리 변조 능력!”

재석의 외침에 관중석이 술렁이기 시작한다. 그도 그럴 것이 만원의 행복에서 창현이 보여준 목소리 변조 능력은 완벽에 가까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갑작스러운 재석의 진행에 당황한 표정을 짓던 창현이지만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곤란한 걸 시킬 줄 알았건만 그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목소리 변조라. 개인기 종목으로 나올 것이라고 충분히 예상했던 것이다.

창현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하죠. 원하신다면 보여드릴 수도 있어요. 그럼 보여드릴까요?”

관중석을 바라보며 의중을 묻자 대답은 바로 터져 나왔다.

보여줘요!

한 목소리가 되어 외치는 관중들이었다.

그에 창현은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었다.

“OK, 알겠습니다. 그럼… 태연 씨? 잠시 올라와주시겠어요?”

관중석을 향해 OK사인을 보낸 창현이 갑자기 태연을 보며 무대 위로 올라와달라고 하자 태연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고는 ‘나?’ 라고 한다. 그러자 창현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선 태연이 무대 위로 올라온다.

창현은 그런 태연을 바라보다가 관중들에게 말했다.

“만원의 행복에서 제가 여기 태연 씨의 목소리를 흉내내지 않았습니까? 직접 보여드리도록 할게요. 아무거나 말해보세요.”

태연에게 마이크를 건네는 창현.

그런 창현의 모습에 태연은 불쑥 장난기와 함께 괘씸함이 치밀어올랐다.

감히 자신의 목소리로 윤아를 속여서 승리를 한 주제에 이렇게 당당하게 요구하다니!

창현을 단단히 곯려주리라 결심한 태연은 마이크를 받아들고는 난데없이 열창을 하기 시작한다.

그것도 Kelly Clarkson의 <Because of you>였다.

갑자기 태연이 팝송을 부르자 창현이 다소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창현의 모습에 훗! 하고 웃음을 지은 태연이 큰 무리없이 클라이막스 부분까지 소화해내고 마이크를 뗀다.

그러자 관중석에서 짝짝짝! 하고 큰 박수소리가 울려 퍼졌다. 태연의 가창력이 뛰어났던 것이다.

그리고 창현에게 여유있는 모습으로 마이크를 건네는 태연.

재석이 이 상황을 보고는 입을 연다.

“아! 현 씨가 한방 먹었군요. 목소리를 흉내내는 것만으로도 힘들 텐데 과연 저게 가능할까요?”

“…….”

창현은 태연에게 받아든 마이크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리고 시선을 들어 태연을 바라본다.

태연의 입가에는 가느다란 미소가 맺혀 있었다.

분명 창현의 곤란함을 즐기고 있는 것이리라.

하지만 상대를 잘못 골랐다.

태연은 반드시 후회하리라.

돌연 창현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자신감이 가득한 미소였다.

갑자기 창현이 미소를 짓자 태연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창현은 그 표정을 감상할 사이도 없이 마이크를 입으로 가져가더니 입을 열기 시작한다. 그리고 태연이 방금 전 불렀던 Kelly Clarkson의 <Because of you>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목소리는 태연의 것과 정확하게 일치하였다.

창현의 열창에 관중들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지금 상황을 판단할 수 없었다.

지금 흘러나오는 이 노래. 과연 창현이 부르고 있는 것이 맞는가? 혹시 태연이 부르고 있는 것이 아닐까?

당황한 안색으로 태연을 바라보지만 그녀의 얼굴은 관중들보다 더 놀랐으면 놀란 표정이지 결코 아무렇지 않은 모습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립싱크도 아닌 것 같았다. 그것을 분간 못할 정도로 바보인 관중은 없었다.

그렇다는 건 정말로 창현이 부르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관중들은 놀라움에 입을 떡 벌리고야 말았다.

세상에나! 이렇게 똑같이 노래를 부를 수 있다니.

클라이막스 부분까지 똑같은 목소리로 소화해낸 창현이 마이크를 뗀다.

그러자 경악한 관중들이 저도 모르게 박수를 친다.

짝짝짝짝짝!

박수 소리가 주변을 가득 채운다.

창현은 만면에 미소를 띤 채 인사를 한다.

“감사합니다. 태연 씨도 수고하셨어요.”

“네? 네…….”

태연은 어안이 벙벙한 안색으로 내려간다. 창현을 곯려주려고 하다가 도리어 당한 태연이었다.

재석은 창현을 보면서 감탄사를 터뜨렸다.

“정말 대단합니다! 어떻게 완벽한 목소리 변조가 가능한 거죠? 이거 정말 놀랍다 못해 믿기지 않는 수준인데요?”

재석의 극찬에 창현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한다.

“어쩌다 보니 되더라고요.”

“혹시 다른 사람은 안 됩니까?”

창현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무언가를 떠올린 듯 입가에 미소를 짓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되긴 하는데 보여드릴까요?”

“저희야 보여주면 좋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네에에에!

반응 만큼은 최고로 해주는 관중들이었다.

재석이 창현을 보며 물었다.

“그런데 누구 목소리를 변조하실 생각입니까?”

“보시면 알겁니다.”

입가에 미소를 지은 창현이 목을 가다듬는다. 그리고는 재석을 보며 미묘한 미소를 짓더니 입을 열기 시작했다.

“아아, 오늘 팬 미팅에서 유재석 씨의 요청으로 목소리를 변조하게 되었습니다. 어떻습니까, 팬 여러분? 똑같습니까?”

“…….”

관중들은 물론 재석의 입까지 떡 벌어졌다.

그가 흉내낸 인물은 다름 아닌 재석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태연과 한 치의 다를 바 없는 완벽한 변조였다.

창현은 놀란 표정을 짓는 재석을 보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목소리는 여전히 재석의 것이었다.

“왜 그렇게 놀라십니까? 이 정도는 기본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지, 진짜 내 목소리랑 똑같잖아.”

너무나 놀란 나머지 혼잣말을 흘리는 재석이었다.

그런 재석의 모습에 싱긋 웃음을 지은 창현이 결정타를 날렸다.

양손을 모으더니 열손가락을 쫙 피며 외친 것이다.

“무한~ 도전!”

와아아아아아아아!

창현의 결정타에 함성을 터뜨리는 관중들이었다.

“어때요? 비슷했나요?”

완전 똑같아서 더 말할 여지가 없을 정도였다.

재석은 창현이 무한도전 오프닝 흉내까지 똑같이 내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와, 완전 똑같습니다. 정말 대단하네요. 우와…….”

앞으로 성대모사 하는 사람들은 눈에 들어올 것 같지 않았다.

이렇게 사람의 목소리를 완벽하게 복제하는 것을 보았는데 어찌 다른 사람이 눈에 차겠는가.

“너무 놀라워서 한동안 할 말을 까먹을 정도였네요. 다시 생각하느라 고생했습니다.”

하하하하하!

재석의 말에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어떤 상황에서도 웃음을 창출하는 것이 그의 능력이다.

한차례 웃음이 지나간 뒤, 재석이 다음 코너를 진행 시켰다.

“자, 현 씨의 개인기를 보았으니 이제 현 씨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는 질문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겠습니다.”

재석의 말과 함께 스태프 두 명이 탁자를 가지고 온다. 그리고 그 위에 커다란 상자를 가져온다. 상자 위에는 커다란 동그라미 구멍이 뚫려 있었다.

상자를 가리키며 재석이 말했다.

“이 상자 안에는 팬 미팅 참가자 여러분들의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현 씨가 직접 뽑아서 질문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현 씨는 어떠한 질문에도 대답하실 각오가 되어 있으십니까?”

“물론입니다. 너무 난감한 질문은 자제해주세요, 하하.”

질문이 조금 묘했지만 창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리고는 상자에 손을 넣더니 잠시 뒤적인다. 잠시 후, 종이 하나를 집고는 꺼내든다.

종이를 펼친 창현이 마이크를 입에 대고 말한다.

“부산 사하구에 사시는 김주희 씨.”

창현의 지명과 함께 관중석 한쪽에서 손을 번쩍 드는 여인이 있었다.

그러자 스태프가 빠르게 마이크를 들고 손을 든 여성에게 다가갔다. 간단하게 신분을 확인한 뒤 스태프가 여성에게 마이크를 넘긴다.

“아, 안녕하세요?”

이십대 후반의 여성인 김주희는 조금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창현에게 인사를 한다.

창현도 그런 주희에게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한다.

“안녕하세요? 부산에서 오셨다면 정말 멀리서 오셨네요. 이곳까지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아니에요. 제가 좋아서 그런 걸요.”

무척 수줍음을 타는 성격인 듯했다.

창현은 여전히 미소를 지은 채 물었다.

“평소 궁금하신 게 있으시면 가감 없이 물어보세요. 최선을 다해 대답하겠습니다.”

“에… 그, 그러니까… 그동안 앨범을 파셔서 얼마나 버셨어요?”

질문을 던진 주희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근래 들어 결혼 문제로 이것저것 돈 문제로 고민할 것이 많았는데, 당혹스러운 나머지 돈에 관련된 문제를 질문한 것이다.

창현도 설마 돈에 관련된 질문을 받을 줄 몰랐기에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정확하게 세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네요. 하지만 무척 많다고만 알아주세요. 하하하! 그러니까 다음 질문자를 뽑을게요.”

첫 질문이 무척 엉뚱한 것이었기에 창현은 스스로 말하고도 어색했는지 상자에 손을 넣고는 다음 종이를 뽑아든다.

“서울시 동작구에 사시는 송미정 씨.”

창현의 말과 함께 손을 드는 여인이 있었다.

이에 스태프가 아까 전과 같이 여인에게 다가가서는 간단하게 신분을 확인한 뒤 마이크를 건넨다.

송미정이란 이름을 가진 여인은 마이크를 잡고는 창현에게 당당히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현 씨. 이렇게 직접 만나게 되어 정말 영광이에요. 다크 스타 트리플 스타 송미정입니다.”

와…….

트리플 스타란 말에 많은 사람들이 탄성을 흘렸다. 그녀가 말한 트리플 스타란 것은, 다크 스타 내에서 등급 업이 힘들다는 특별회원 중에서 가장 높은 계급이었던 것이다. 80만 다크 스타에서 특별회원의 숫자는 약 1만 명이었고, 그중에서 트리플 스타는 채 5백 명도 되지 않는다.

즉, 창현의 팬 중에서도 가장 열성팬에 해당한다는 뜻이다.

창현도 트리플 스타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기에 대답했다.

“네, 안녕하세요.”

“정말 솔직히 대답해주시는 건가요?”

창현에게 묻는 송미정. 정말 진실되게 대답할 것인지에 대해 묻고 있었다.

그에 창현은 그녀가 제법 강도 높은 질문을 할 것이란 느낌이 들었다.

불안했지만 그렇다고 솔직하지 않게 대답할 것이라고 말할 수 없는 노릇.

창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솔직히 대답하겠습니다.”

창현의 대답에 송미정이 미소를 짓더니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그럼 질문 할게요.”

송미정이 갑자기 창현과 눈을 맞춘다. 마치 진실을 파악하려는 것처럼.

그와 함께 그녀의 질문이 입에서 흘러나왔다.

“첫 키스 해보셨나요?”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

기껏해야 스캔들이나 루머에 대해 질문할 것이라 생각하던 창현의 예상이 완전히 어긋난 순간이었다.

“…….”

전혀 예측하지 못한 질문은 당혹스러움을 동반한다.

창현은 빈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송미정의 질문에 말을 잃었다.

그와 함께 머리가 멍해지는 걸 느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한단 말인가.

창현은 힐끗 한쪽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멈춘 곳.

그곳에는 다름 아닌 수연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렇다, 창현의 인생에서 첫 키스라 할 수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수연과의 입맞춤이었던 것이다.

수연은 자신을 보는 창현의 시선을 느끼고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송미정이라는 여자가 창현에게 키스에 대한 질문을 했을 때부터 수연은 눈에 띄게 동요를 보이고 있었다.

그녀의 질문으로 인해 작년에 자신이 창현에게 했던 기습적인 입맞춤을 떠올렸던 것이다.

설마 그것이 창현의 첫 키스였을까.

수연은 반신반의하면서 창현의 안색을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창현의 안색은 확 변해 있었다. 그리고 슬쩍 시선을 자신에게로 향한다.

수연도 창현을 바라보고 있었으므로 눈이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창현이 고개를 돌렸고, 수연 또한 고개를 푹 숙였다.

옆에 있던 유리가 수연을 보더니 물었다.

“갑자기 왜 그래, 수연아.”

“아무것도 아니야.”

고개를 저은 수연은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이야기를 나눠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자신이 했던 입맞춤이 창현의 첫 키스였다는 것을.

그것을 깨닫게 되자 수연은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

기뻤다. 자신의 첫 입맞춤이 창현의 첫 입맞춤이라는 것을.

그리고 기뻤다. 자신의 입맞춤을 첫 키스로 인식해주는 창현이의 모습에.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던 창현이 빠르게 표정을 수습했다. 자신에게 집중되는 오백 쌍의 시선이 있었던 것이다.

혀로 입을 축인 창현이 결심을 굳힌다.

이것이 얼마나 큰 파장이 될지 모르지만 어차피 첫 키스 같은 것들은 나중에 추억으로 다 밝히지 않던가?

창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키스가 입맞춤을 지칭하는 것이라면… 해본 적이 있습니다.”

아아아!

창현의 대답에 관중석에서 아쉽다는 소리가 흘러나온다.

설마 창현이 첫 키스를 했다고 대답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아이돌은 말 그대로 우상이란 것을 뜻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바라는 우상인 그들의 어깨에는 대중의 바람이 무겁게 얹혀 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창현 같은 경우 그런 경향이 무척 심하다.

창현의 팬들은 그가 한 마리의 고고한 학으로 남아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누구에게도 주기 싫은, 이상향과도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첫 키스를 해보았다는 이야기를 수긍하자 관중석이 술렁인다.

그때, 송미정이 마이크를 든 채 묻는다.

그녀는 자신의 질문에 창현이 긍정하자 당황한 표정이었다.

설마하니 창현이 첫 키스를 해보았다고 인정할 줄 몰랐던 것이다.

“저, 정말인가요? 그럼 누굴 사귀…….”

창현이 손을 들어 송미정을 제지한다. 그리고 미소를 지으며 대답한다.

“거기까지입니다. 질문은 한 개씩이니까요.”

“…알겠습니다.”

송미정은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마이크를 스태프에게 건네고 자리에 앉는다. 그녀가 무슨 질문을 하려고 했는지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관중석에는 절로 긴장감이 퍼져 나갔다.

창현은 분위기가 조금 이상해졌다는 생각을 하면서 상자에 손을 넣어서 종이 하나를 뽑은 다음 펼치고 읽었다.

“성남시 분당구의 박미란 씨. 어라? 미란 누나랑 동명이인이네요.”

이름을 부르던 창현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중얼거렸고, 그 사이 스태프가 박미란이라 불린 여성을 찾아 마이크를 건넨다.

박미란이란 여성은 학교 끝나고 바로 팬 미팅에 참석한 듯, 교복을 입고 있는 여고생이었다.

마이크를 받아든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물었다.

“키스를 해보았단 것은 사귀는 사람이 있었다는 이야기인가요?”

정말 바로 흘러나오는 질문이었다.

그 질문에 관중들이 모두 눈을 빛내며 창현의 대답을 기다렸다.

여자 친구의 여부!

아이돌에게 가장 치명적인 것이 될 수 있는 문제였다.

박미란의 질문에 창현은 웃음을 지은 채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사귀어 본 사람은 없어요. 여태까지 연애는 한 번도 안 해보았는 걸요? 여덟 살 때부터 작곡을 배우기 시작해서 전부 그쪽으로 시간을 할애해야 했거든요.”

창현의 대답에 관중들은 환한 표정을 짓는다. 여자 친구가 없다는 창현의 대답에 한시름 놓은 것이다.

“그럼 조금 전 키스 여부는 무엇이죠?”

질문을 했던 박미란은 그런 창현의 대답에 표정이 한결 풀어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키스의 진위 여부는 모호했다.

“에… 그게 그러니까…….”

그에 창현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어색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 그러니까… 실은 당했어요.”

자신의 첫 키스가 당한 것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남자가 몇이나 될까.

창현은 부끄러운 마음에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말고도 정말 부끄러워서 쥐구멍으로 숨고 싶은 기분이었다.

꺄아아아아아아!

창현의 충격 고백에 여성 팬들은 자지러질 듯한 비명을 질렀다.

설마! 자신들의 창현이 첫 키스를 빼앗기다니!

여성 팬들에게서 엄청난 분노가 발산되기 시작했다.

그런 여성 팬들의 모습을 본 창현이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분위기가 많이 다운되었네요. 비록 당했다고 하지만 아직 이성을 사귀어본 적은 없으니까, 첫 키스를 안 한 것으로 생각해주세요. 나중에 사귈 분을 위해 첫 키스를 아껴놓았다고 하고 싶거든요. 저 때문에 분위기가 다운 되었으니 노래 하나 부르겠습니다. 절 빌보드 차트 1위로 만들어준 고마운 곡이죠. <Shield&Spear>로 가도록 하겠습니다.”

창현의 말과 함께 MR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멋지게 마무리 한 창현의 말에 감동한 관중들은 흘러나오는 MR을 듣고는 함성을 지른다. 미국에서 발매한 곡을 한국에서 부른 것은 처음이었던 것이다.

흘러나오는 MR을 음미하며 창현이 유창한 영어로 노래를 시작한다.

세계를 제패했던 창현의 노래를 들으며 관중들은 노래가 주는 느낌에 빠져들기 시작한다.

감동받게 만드는 목소리와 매료될 수밖에 없는 목소리.

영어 일색 가사이기에 내용을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생생하게 전달되는 감정 전달은 노래의 분위기를 그대로 전달해주고 있었다.

사람들의 얼굴에는 차츰 감동이 서려갔다.

노래를 끝낸 창현이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연다.

“그럼 질문을 계속 하도록 하겠습니다.”

질문은 계속되어 이어졌다.

그러자 여러 가지 질문이 창현에게 주어졌고, 창현은 자신에게 주어진 범위 내에서 성실하게 답변을 해주었다.

창현은 총 스무 개의 질문만 받았다. 더 질문을 받고 싶었지만 열다섯 개에서 다섯 개를 더 늘린 상태였기에 더 늘리는 건 불가능했다. 아쉽지만 여기까지였다.

질문 타임이 끝나자 본격적인 싸인과 프리 허그가 시작되었다.

특별히 제작된 창현의 브로마이드에 싸인을 해주고 원하는대로 프리 허그를 해주는 시간이었다.

창현은 자신의 모습이 큼지막하게 박혀 있는 브로마이드에 싸인을 하자니 여간 쑥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이런 경험이 거의 없다보니 그런 듯했다.

어색한 창현의 모습이 더욱 새롭게만 보이는 팬들이었다.

주변에서, 특히 인터넷 상에서는 희대의 천재라 그 콧대는 하늘을 찌르느니 뭐느니 하면서 방송에 출연하지도 않는다고 비꼬는 말이 있는데 지금 모습에서 전혀 그런 걸 느낄 수 없었다.

그래도 한 번 두 번 하다 보니 점점 능숙해지는 느낌이었다.

문제는 프리 허그였다.

포옹이란 것을 막상하려니 영 익숙치 않았던 것이다.

그나마 미국에서 여러 연예인들과 함께 안아보기도 하고 그랬지만 자신을 좋아하는 팬들과 안아보는 건 처음이었다. 특히 대부분의 팬이 여자인 걸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잠시 머뭇거리던 창현은 결심을 굳혔다.

이렇게 빼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예의가 아니란 생각이 든 것이다.

‘에잇, 나를 좋아해준다는데 머뭇거리지 말자.’

그렇게 결심을 굳힌 창현은 본격적으로 포옹을 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적극적(?)으로 변한 창현의 태도에 팬들은 당황하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환호하면서 품에 포옥 안겼다.

포옹을 할수록 주변의 눈초리(소녀시대와 라샤)가 묘하게 변하는 걸 느꼈지만 창현은 애써 무시하며 팬들에게 싸인을 해주고 포옹을 해주었다.

그것이 팬 미팅 일정의 끝이었다.

마지막으로 인사를 하면서 팬 미팅을 모두 끝낸 창현은 무대 뒤로 나오고는 재석에게 감사의 인사를 표했다.

“오늘 재미있게 MC를 잘 봐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재석 형.”

재석은 창현의 인사에 웃음을 짓더니 묘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내 일을 열심히 했을 뿐인데 뭘. 그나저나 너 장난 아니더라? 아주 빠르게 능숙해지던데.”

“그래요? 하하!”

칭찬을 들으니 기쁘기도 하고 머쓱하기도 한 창현이었다. 아무래도 재석이 칭찬한 것은 포옹을 말한 것일 테니 말이다.

“맞다, 뒤풀이를 할까 생각 중인데 어떠세요? 제가 미성년자라 술은 못하지만 같이 식사하는 방향으로 해볼까 생각 중인데요.”

웃음을 짓던 창현이 재석에게 물었다. 재석의 스케줄이 워낙 살인적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조심스럽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창현의 물음에 재석은 씨익 웃음을 짓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나 해서 스케줄을 잡지 않았는데 잘 되었네. 좋지, 뒤풀이. 그런데 누가 사는 거지?”

재석이 묘한 표정으로 창현을 바라보자 다소 당황한 표정을 짓다가 대답했다.

“아, 그러네요. 제가 쏠게요. 하하!”

“미국에서 아주 돈을 긁어 들인다고 하더니, 오늘 맛있는 거 먹겠네. 하하!”

창현이 당황하는 모습에 재미있었는지 웃음을 짓는 재석이었다.

그런 재석을 보며 웃음을 지어보인 창현이 무대로 나왔다. 그리고는 분주히 움직이는 스태프들을 보며 외쳤다.

“오늘 뒤풀이는 제가 쏘도록 할 테니 모두 참가해주세요!”

오오오오!

창현의 외침에 함성을 지르는 스태프들이었다.

그런 스태프들의 모습에 창현은 어깨를 으쓱하였다. 저들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자신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늘 큰맘 좀 먹었나보네? 쏘겠다고 하는 걸 보니.”

고개를 돌리니 라샤와 소녀시대가 창현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말을 건넨 것은 미란이었다.

“뭘요. 저를 위해 수고해주셨는데 이 정도는 기본이죠. 대신 술은 안되요.”

미란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창현은 선을 그어버렸다.

이제 막 성인이 되었지만 그녀가 만만찮은 애주가라는 사실을 알고 있어서이다.

아니나 다를까, 창현의 말에 미란이 울상을 짓는다.

“왜? 일하고 난 뒤 반주는 삶의 즐거움인데.”

“먹는 즐거움으로 대체하시길 빌겠습니다.”

“안 돼! 제발!”

절규를 터뜨리는 미란을 매몰차게 외면하는 창현은 소녀시대에게로 시선을 옮기다가 흠칫한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았던 것이다.

창현은 저도 모르게 흠칫하며 물었다.

“왜 그러세요?”

가장 선두에 있던 태연이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정말 대단하다 싶어서…….”

성공적인 팬 미팅을 보고 느낀 것이 많았다.

저렇게 되고 싶다는 목표가 생겼고, 더 잘하고 싶다는 자극제가 되었다.

무대 위에서 빛나는 창현의 모습.

그렇게 되고 싶었다.

처음으로 열린 창현의 팬 미팅은 성공적으로 끝을 맺을 수 있었다.




제33장 2007 M.net KM Music Festival




팬 미팅을 성공적으로 끝낸 뒤 창현은 순조로운 행보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창현의 팬 미팅은 끝난 직후 곧바로 기사로 작성되어 인터넷을 달구었다. 누가 촬영을 했는지 모르지만 상당한 고화질로 팬 미팅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담아서 동영상 파일로 인터넷에 올렸던 것이다.

오프닝 소녀시대의 무대를 본 사람들은 처음보다 발전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는 평가를 하였고, 라샤의 실력 또한 놀라울 정도로 발전했다는 평가를 내렸다. 하지만 <Yesterday>에서 창현의 가창력에 묻혀버리는 사태가 발생하자 현이야 말로 그릇이 다르다는 평가가 줄을 잇게 된다.

현의 팬 미팅에서 화제가 되었던 것은 두 가지다.

첫 번째는 바로 현의 음성 변조 능력이었다.

이미 만원의 행복에서 소녀시대의 리더 태연의 목소리를 완벽하게 변조하여 윤아를 낚았던 창현은 팬 미팅에서도 유감없이 그 실력을 발휘하였다.

뿐만 아니라 창현은 MC를 맡았던 유재석의 목소리 또한 완벽하게 변조함으로써 그의 목소리 변조 능력이 광범위하게 걸쳐져 있음을 알려주었다. 기존의 성대모사와는 비교를 거부할 정도로 완벽한 변조였다.

이것이 팬 미팅을 보던 사람들의 놀라움을 자아냈다면 그들의 분노를 자아냈던 것도 있다.

바로 창현의 첫 키스 발언이 그것이다.

짧은 시간 안에 대한민국 여성의 로망으로 자리 잡은 현은 놀랍게도 첫 키스를 한 적이 있다!

그 인기는 세계적인 수준이지만 나이는 아직 어린 소년인 현이다. 그런 현은 수많은 여성에게 있어 동경의 대상이다. 진정한 의미의 아이돌인 것이다.

그런 현이 첫 키스를, 그것도 당했다는 입장에 전달되자 그의 여성 팬들은 난리가 났다.

당장 현의 입술을 빼앗은 요녀(?)를 처단해야 한다고 인터넷이 들썩일 정도였다. 그로 인해 ‘현, 첫 키스를 당하다.’ 라는 등의 자극적인 제목으로 한동안 인터넷 뉴스 상위권은 전부 현의 첫 키스에 관련된 것으로 도배될 정도였다.

사람들이 소위 말하는 네티즌 수사대가 조직되어 현의 첫 키스 상대를 찾는 등 여러 움직임을 보였지만 그 성과는 미미하였다.

현의 과거만 해도 알려진 것이 극히 미미했던 것이다.

데뷔 전 창현은 학교에서 무척 조용한 모범생이었다. 흔한 친구들도 없었고, 오로지 학교에서 조용히 하루하루를 보냈기에 무엇을 했는가 알아차리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러던 중 떠오른 것이 바로 소녀시대의 서현이었다.

창현과 서현이 같은 학교 출신이고, 작년 수학여행에서 듀엣 곡을 부르는 등 여러 사실이 알려지자 사람들은 창현의 첫 키스를 빼앗은 것이 서현일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분명 자신의 발언이 문제가 될 거라 생각하던 창현은 전혀 엉뚱한 곳으로 추측이 이어지자 재빨리 글을 올려 사태 완화에 나섰다. 미국에서 아는 누나에게 인사의 의미로 당했다는 말을 덧붙인 것이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주현이 마녀사냥을 당할 판이었다.

인사의 의미로 당했다는 창현의 말에 격분하던 여성 팬들의 움직임이 상당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개방적인 미국이라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여성 팬들은 여태까지 여자를 사귀어본 적이 없다는 창현의 말에 위안을 얻으며 상당히 안정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자칫하다가 애꿎은 주현에게 피해를 줄 뻔했다는 생각에 창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야만 했다.

그렇게 우여곡절 많은 팬 미팅 여파가 가라앉을 무렵, 창현이 미영과 함께 찍은 CF가 방영되기 시작하였다.

CF는 당연히 대박이었다.

미영이 마시던 음료수를 빼앗아 마셨던 부분을 그대로 입을 대며 “달콤하네요, 누나의 입술도 이렇게 달콤할까요? 라는 부분이 대박이 났다.

안 그래도 얼마 전까지 첫 키스 파문으로 논란의 중심이 되던 차에 저런 대사가 나오자 이슈가 되는 것은 당연했다.

CF를 보는 사람들은 강렬한 마력으로 상대방을 유혹하는 창현의 매력에 푹 빠져들었다.

그리고 이어진 것은 당연하게도 음료 판매의 급증이었다. 광고 회사에서는 엄청난 돈으로 창현을 캐스팅 한 것을 제대로 효과 본 셈이다.

팬 미팅과 CF로 대중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게 된 현은 또 다른 것을 놓고 관심을 받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관심이 되고 있는 화제는 AA엔터테인먼트에 전달되었다.

AA엔터테인먼트의 사장 강석규는 이 문제를 놓고 창현을 찾는다.


“그러니까… MKMF에 참가하라고요?”

창현은 석규를 보며 조금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런 창현의 물음에 석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Mnet에서 너의 출연을 원하더구나.”

“왜 제가 출연하길 원하는지 모르겠네요.”

석규의 대답에 창현은 고개를 저으면서 자신의 심정을 털어놓았다.

그도 그럴 것이 창현은 이번 2007년도에 한국에서 앨범을 발매한 적이 없다. 2월경 중국에서 TTS기획사 파문으로 인하여 부득이하게 데뷔를 하게 되었지만 그가 불렀던 노래는 2007년도가 아닌 2006년도에 발매한 앨범 수록곡이었다. 그리고 곧장 미국으로 가서 싱글 앨범을 냈을 뿐, 이번년도에 곡을 내지 않았기에 MKMF에서 창현은 어떠한 것에도 해당되지 않는 상황이다.

그런 상황에서 왜 자신을 참가해달라고 한단 말인가?

창현의 말에 석규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뭐 간단하지 않겠느냐? 네 이름값이 워낙 높다보니 너의 출연으로 관심도를 끌어올려 보겠다는 이야기겠지.”

“아버지는 어떻게 생각하시는데요?”

창현은 석규의 생각이 궁금했다.

MKMF는 가수들에게 있어 무척 큰 행사 중 하나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MKMF가 창현에게 가져다 줄 이득은 없다. 이번 해에 활동한 것이 없으니 상을 받을 것도 없고 말이다.

“흠! 내 생각 말이더냐? 나는 네가 어떤 선택을 해도 상관없다. 참가를 해도 되고 안 해도 상관없지. 하지만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하면 참가하라고 말 하고 싶구나.”

“어째서요?”

남의 잔치라 할 수 있는 MKMF에 참가하라는 석규의 생각이 궁금한 창현이었다.

창현의 물음에 석규가 피식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남의 잔치라 할 수 있지만 Mnet은 케이블 채널 중에서 상당한 인지도를 가지고 있다. 게다가 Mnet과는 얼마 후 프로젝트 이벤트 방송 하나를 하기로 했기에 그렇다. 네가 MKMF에 참가하면 이득이 되었으면 되었지 손해는 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굳이 얼굴을 붉히느니 서로 좋게좋게 가는 것이 좋겠지.”

석규의 설명을 대충이나마 알아들은 창현이었다.

창현은 그것보다는 석규가 말한 이벤트 방송이란 것이 귀에 걸렸다.

“이벤트 방송이라고요? 그건 또 뭐죠?”

“아직 확실하지 않아서 대답해주기가 그렇구나. 일단 기획 단계가 있으니 구체적으로 정해지면 이야기를 해주마. 내 생각을 말했으니 네 생각을 알고 싶구나. 어쩌겠느냐?”

“으음!”

창현이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석규의 말대로라면 그리 어렵지 않은 일 가지고 서로 얼굴 붉힐 일을 만들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이 좋은지 알지 못하는 이상 참가가 조금 망설여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MKMF에 참가함으로써 얻는 것은 뭐죠?”

“일단 방송에 출연했다는 것에 의의가 있다. 아무리 네 인기가 엄청나다고 하지만 연예인인 이상 방송에 얼굴을 비춰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MKMF는 좋은 기회라 할 수 있지.”

다른 방송에 출연하는 것도 어렵지 않지만 이리저리 저울질을 해야 한다. 그런 반면 MKMF는 가수들의 축제인 만큼 창현이 얼굴 비추는 것이 용이하다는 장점이 있다.

“그렇군요.”

창현은 석규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았다. 그 또한 근래 들어 석규가 자신의 방송 출연을 놓고 고심이 깊다는 것을 알았기에 MKMF라는 기회를 놓치고 싶어 하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참가하는 쪽이 좋겠네요. 저도 참가할게요.”

“잘 생각했다.”

“그럼 제가 어떤 일을 하면 되는 거죠?”

MKMF에서 자신의 역할을 묻는 창현.

석규는 서류를 들여다보더니 대답한다.

“네가 할 것은 여자그룹 신인상을 발표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자그룹 하나와 퍼포먼스를 맞추면 되는구나. 그리고 네 곡인 <Minus>도 부르면 될 것 같고.”

이야기를 듣고 있던 창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그룹 신인상을 발표하는 거야, 주어지는 대본을 읊으면 되는 것이고 <Minus>는 자신의 곡이니 굳이 준비할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준비해야 할 것은 하나였다.

창현이 석규를 보며 말했다.

“그럼 여자그룹하고 퍼포먼스를 맞추는 것이 중요하네요.”

“그것도 그렇지. 그런데 <Minus>는 어떻게 할 생각이더냐?”

“어떻게 할 생각이라니요?”

고개를 갸웃하며 묻는 창현의 모습에 석규가 입을 열었다.

“<Minus> 말이다. 이 곡이 아마 한글 버전도 따로 있지 않더냐? 내 생각에는 한글 버전으로 부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아! 그거요? 물론 있죠. 한글 버전으로 부르는 것도 어렵지 않고요. 그러고 보니 이곳은 한국이니까 한글 버전으로 부르는 게 나을 듯 싶네요.”

창현이 미처 고려하지 못한 점이었다. 아무래도 미국에서 발매된 싱글 앨범이다 보니 영어로 부르는 것이 일반화되어서 그런가 보다. 하지만 이곳은 한국이니 만큼 영어보다는 한글이 더 친숙하게 느껴질 것이라.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한 창현이 물었다.

“그런데 퍼포먼스를 저 혼자 하는 게 아니라 여자그룹이랑 하는 거라고요?”

창현의 물음에 석규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 아무래도 너는 혼자가 아니더냐? 게다가 춤 쪽으로는 아직 약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실정이고. 그래서 여자그룹 하나와 맞춰서 퍼포먼스를 준비하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나보더구나.”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

“제가 메인이되 여자그룹이 받쳐주는 형식으로 해서 하려는 건가보군요.”

“그렇다고 볼 수 있지.”

“그럼 저와 퍼포먼스를 맞출 여자그룹은 누군데요?”

창현은 자신과 퍼포먼스를 맞춰볼 여자그룹이 누구인지 궁금한 듯 물었다.

그러자 석규가 창현의 물음에 대답해주었다.

“너와 함께 퍼포먼스를 맞출 여자 그룹은 바로 원더걸스다.”

“원더걸스요?”

창현의 얼굴에 뜻밖이라는 표정이 떠올랐다.

설마하니 자신과 함께 퍼포먼스를 맞출 여자 그룹이 원더걸스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적어도 창현은 쥬얼리나 라샤가 파트너가 될 줄 알았다. 아니, 라샤는 같은 소속사니까 석규가 이렇게 말할 정도라면 쥬얼리일 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예상이 빗나간 것이다.

창현의 표정을 본 석규가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 아마 라샤나 쥬얼리 정도로 생각했겠지만 올해 여자그룹 신인상은 원더걸스가 받을 확률이 높다.”

“그건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것은 창현도 동의하는 바였다.

올해 원더걸스나 소녀시대, 카라 같은 여성 그룹이 데뷔하였지만 그중에서 가장 두각을 드러낸 것은 원더걸스였다. 당장 그녀들이 활동하고 있는 곡인 <Tell Me>는 엄청난 인기몰이를 하면서 마치 전염병처럼 퍼져나가고 있는 실정이었다.

소녀시대와 카라가 넘기에는 원더걸스의 인기 상승세가 두려울 정도였다.

창현이 동의하는 모습을 보이자 석규가 말한다.

“그래서 그러는 게다. 한창 뜨고 있는 원더걸스와 함께 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원더걸스는 너의 존재로 더욱 이름을 알릴 수 있을 테고, 너 또한 혼자가 아니라는 부담감을 덜어내고 무대에 설 수 있겠지.”

그러기에는 창현이 얻는 메리트가 너무 적었다.

마치 자신이 원더걸스의 이름을 알리는 홍보대사가 된 느낌이랄까?

해명을 요구하는 눈빛을 보내자 석규가 턱을 매만지더니 대답한다.

“사실 Mnet에서는 여자그룹 신인상 후보에 오른 그룹 중 하나와 퍼포먼스를 준비해달라고 했다. 하지만 그중에서 소녀시대는 배제한 상태다. 왜 그런지 아느냐?”

“…….”

석규의 물음에 창현은 대답할 수 없었다.

그의 대답이 어떤 것인지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석규는 창현이 예상했던 말을 꺼낸다.

“너도 예상하고 있겠지만 근래 들어 너와 소녀시대가 너무 가깝지 않냐는 말이 나오고 있다. 일각에서는 SM엔터테인먼트가 AA엔터테인먼트에 돈을 먹여 소녀시대를 의도적으로 띄워주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여기에서 퍼포먼스를 같이 맞추다가 어떻게 될지 알겠지?”

창현이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그 또한 근래 느끼고 있는 것이었고, 주변에서 자주 흘러나오는 말이었다.

자신은 개인적 친분을 중심으로 친하게 지내는 것이었지만 다른 사람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가 보다.

다행히 창현이 납득하는 분위기자 석규가 설명을 이어나간다.

“그렇게 소녀시대를 제외하고 나면 남은 것은 원더걸스와 카라지. 카라 또한 나쁘지 않지만 이미지 자체가 카리스마가 있고 실력파의 이미지를 담아내고 있기에 너와 상성이 맞지 않는다. 그녀들이 아무리 실력이 있다고 하나 네 실력에 눌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지. 실력을 부각시켜도 모자랄 판에 그것을 눌러버리면 너에게나 카라에게나 득될 것이 없다. 그렇게 되면 어찌 되겠느냐?”

간단한 결론이다.

소녀시대도 배제되고 카라도 배제되면 남는 것은 원더걸스 뿐이다.

창현은 그제야 왜 석규가 원더걸스를 택했는지 알 수 있었다.

인기 면에서도 그렇고, 이미지 면에서도 원더걸스가 가장 무난한 선택이었던 것이다.

“왜 원더걸스인지 알겠네요.”

“이해를 했다니 다행이구나. 그럼 원더걸스로 알고 있어라.”

고개를 끄덕이는 창현이었다.

그때, 창현이 무언가 생각난 게 있는 듯 석규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라샤 누나들 바로 일본으로 간다면서요? 국내 활동은 어쩌고요?”

라샤의 앨범 작업이 끝나고 발매를 앞에 두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런 와중에 석규는 한국에서 컴백 무대를 갖는 것이 아닌 일본에서의 컴백 무대를 잡아놓은 상태였다.

창현의 의문은 당연했다.

“당장 활동하고 싶긴 하지만 원더걸스의 <Tell Me>와 정면대결을 하고 싶지가 않다. 서로에게 득이 되지 않는 손해만 돌아올 것이야.”

석규가 정면 대결을 거부할 정도로 원더걸스의 기세는 대단하였다. 요즘 길을 걷다 보면 주변에 들리는 것은 모두 <Tell Me> 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안무도 간단하고 따라하기가 쉬워서 전국적으로 엄청난 열풍을 일으키고 있다.

그런 와중에 라샤가 컴백한다는 것은 원더걸스와 정면대결을 벌인다는 것을 뜻했다.

그러나 이것은 기자들에게 맛있는 먹잇감을 제공할 뿐, 원더걸스와 라샤 두 그룹에게 모두 이로울 것이 없다.

만약 라샤가 성공적으로 데뷔 무대를 치러낸다면 원더걸스의 열풍은 누그러질 것이 분명했고, 라샤가 실패한다면 한국은 물론 일본과 동남아시아 각국의 활동에 지장을 초래할 것이 분명했다.

그것은 AA엔터테인먼트와 JYP엔터테인먼트가 감수하기에는 서로의 출혈이 너무나 컸다.

여태까지 충돌 없이 지내온 두 기획사였기에 가급적 충돌하는 것을 바라지 않고 있었다. 특히나 원더걸스와 라샤는 걸 그룹이었기에 충돌하는 사태가 발생하면 엄청난 여파로 번질 것임이 분명했다.

그랬기에 석규가 택한 것은 프로모션을 하는 것이다.

우선 일본에 순회 콘서트를 한 뒤 동남아시아를 차례대로 돌고 그 다음에 한국으로 귀환하는 것이다.

국내에서 돌풍을 일으킨 뒤 외국으로 진출하는 것과는 반대 방향을 구상한 것이다.

어찌 보면 원더걸스의 기세가 무서워 물러난 것이라 볼 수 있지만 사업가인 석규의 입장에서 서로가 손해되는 입장보다는 서로가 이득 되는 입장을 추구하는 것이 옳다.

JYP엔터테인먼트도 그것을 알고 있기에 이러한 석규의 결정에 감사의 인사와 함께 업무 제휴를 추진하고 있었다.

그들로서도 라샤의 컴백 시기가 다가오는 것은 상당한 부담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연예인의 인기란 것은 마치 바람과도 같아서, 한 번 불어올 때 그 흐름을 타지 못하면 그 바람이 언제 다시 불어올지 아무도 모른다.

지금 원더걸스는 그 바람을 탄 존재와도 같았다.

그런 와중에 라샤의 컴백은 원더걸스의 앞에 나타난 거대한 장애물과도 같았다.

<Tell Me>라는 곡으로 엄청난 흐름을 일으킨 원더걸스라지만 상대는 다름 아닌 라샤다. 이미 한국과 일본을 제패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고, 현재 대한민국의 걸 그룹 정점을 찍고 있다고 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더군다나.

라샤의 뒤에는 현이 있다.

세계를 제패한 현이 돌아와 본격적으로 작곡과 프로듀싱을 한 라샤의 앨범.

이것 하나만으로 JYP엔터테인먼트가 엄청난 돈을 들인 마케팅을 가뿐하게 뛰어넘을 수 있다. 현의 존재는 그 정도로 대단했다.

그러니 어찌 초조하지 아니하겠는가.

그런데 라샤가 한국부터 컴백 하는 것이 아닌, 일본에서부터 활동을 재개한다는 소식은 가슴을 졸이던 JYP엔터테인먼트에게 있어 가뭄의 단비와도 같았다.

석규는 교묘하게 JYP엔터테인먼트에 이와 같은 사실을 흘림으로써 알게 모르게 그들의 양보를 얻어낼 수 있었다.

서로가 피해를 입지 않기 위해 움직임을 보인 것임에도 AA엔터테인먼트가 확연한 우위를 보이며 이익을 취한 것이다.

창현은 석규의 생각이 어떤 것인지 대충이나마 알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걱정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국내 팬들에게는 뭐라고 하실 건데요?”

“우선 음반 발매가 될 거고, 네가 MKMF에 출연한다는 소식을 퍼뜨릴 것이니 무난하게 묻힐 것이다. 아니면 외국에서 활동 후 좀 더 성장한 모습으로 팬들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형식으로 말해놓아도 되고.”

라샤의 팬 사이트인 다크 레이디스는 회원이 사십만에 육박할 정도로 덩치가 크다. 그랬기에 석규는 다크 레이디스의 항의를 벗어나고자 여러 가지 이유를 준비해놓은 상태였다.

이것이 일반적인 기획사의 움직임이다.

하지만 창현은 그런 석규의 모습이 적응되지 않았다.

여태까지 그가 보아온 석규는 인간미가 넘치고, 소속사 가수들에게도 배려를 아끼지 않는 사장이었으니 말이다.

창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입을 열었다.

“후! 왠지 아버지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지네요.”

그런 창현의 반응에 석규가 냉담하게 대답했다.

“사업가는 사기꾼이라고 보면 된다. 그럴 듯한 거짓에 진실을 첨가하여 대중들이 믿게 만들어야 하지. 이번에도 이유는 그럴싸하겠지만 본질은 원더걸스와의 정면대결 회피다. 지금의 흐름으로 라샤와 원더걸스가 부딪치면 서로의 역량을 깎아먹는 것밖에 되지 않아. 나는 사업가로서 최선의 선택을 한 것이고 그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결정을 내린 지금 내가 해야 할 것은 여러 가지 루머들을 최대한 무마시키면서 라샤의 활동을 보조하는 것이다. 이런 나를 이해해야 한다, 창현아.”

냉정한 석규의 표정. 창현으로서는 처음 보는 것이고, 처음으로 접하는 진실이었다.

여태까지 너무나 인기가 있었기에 고려할 필요가 없었지만 상대 측 또한 인기가 절정에 달하자 결국 이런 선택을 하게 된 것이다.

다른 기획사에서 흔하게 택하는 방법이지만 창현에게 있어서는 충격이었고, 믿기지 않는 현실이었다.

“현실이 그러한 걸요. 제가 낯설게 느꼈다면 아직 연예계의 현실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 것이겠죠.”

창현은 석규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세상에 누굴 믿지 못해도 가족 만큼은 믿어야 한다.

그는 석규의 선택을 믿었고, 잘못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런 창현의 말에 석규가 웃음을 지었다.

“이야기가 갑자기 심각해졌구나. 어쨌거나 그 정도로 원더걸스가 대단하다는 이야기다. 아마 이 추세로 나아간다면 라샤 만큼의 인지도를 얻는 건 금방일 게다.”

“인기몰이를 성공적으로 한다면 그렇겠죠.”

창현 또한 <Tell Me> 열풍을 몸으로 직접 느끼고 있었기에 납득했다.

“그럼 퍼포먼스는 원더걸스와 맞추기로 결정이 된 거네요?”

창현의 물음에 석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봐야겠지. 왜, 싫으냐?”

“그럴 리가요. 여자그룹하고 친하게 지내는 일인데 누가 싫어하겠습니까.”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하는 창현이었다.

능글맞은 창현의 모습에 석규가 입가에 웃음을 짓고 눈을 가늘게 뜨면서 그를 바라보았다.

“너 그거 아느냐? 미국에서 돌아온 직후로 제법 어른 티가 나는 걸 말이다.”

석규의 말에 창현이 웃음을 지었다.

“훗! 아버지도 알고 계셨군요.”

순순히 대답하는 창현의 모습에 석규가 다소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뭐? 정말이더냐?”

“물론이죠. 아버지가 신경 쓰지 않으시는 줄 알았는데 알고 계시니 무척 기쁘네요.”

석규의 말에 기쁜 표정을 짓는 창현. 석규는 그런 창현의 모습을 보고는 황당한 기색이 담긴 어조로 말했다.

“그러니까… 미국에서 여자를 사귀어봤다는 게냐?”

이번에는 창현의 표정이 급변했다.

그제야 창현은 자신의 이야기와 석규의 이야기 방향이 어긋났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창현이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석규에게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죠?”

“나는 네 녀석이 능글맞게 변했기에 미국에서 여자를 사귀었는가 짐작하고 물었는데 네가 긍정하지 않았더냐?”

석규의 대답을 들은 창현은 자신이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은 다른 의미로 말한 것인데 석규의 짐작을 긍정한 것이라면 엄청난 것으로 번지기 때문이다.

창현은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전 그게 아니라 키가 컸다는 이야기였는데요? 그리고… 능글맞아졌다는 것은 자연스럽게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어요. 미국에서 만나는 여배우들하고 여가수들이 절 친근하게 대해주었거든요. 덕분에 여성에 대한 면역은 상당히 늘었죠.”

어째 말하는 것이 변명 식으로 변하는 듯했다.

“그렇구나. 뭐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 어쨌거나 조만간 퍼포먼스를 맞추기 위해 네가 JYP엔터테인먼트로 가보아라.”

“제가 직접요?”

“이곳보다는 그곳이 더 나으니 하는 말이다. 게다가 너는 특별히 스케줄도 없지 않더냐? 조만간 일정을 알려줄 테니 찾아가도록 하고. 알겠지?”

아무래도 한창 활동하는 원더걸스보다는 놀고 있는(?) 자신이 가는 것이 더 나으리라. 게다가 그쪽은 다섯 명이니 한 명인 자신이 움직이는 것이 더 편할 테지.

“그렇게 하도록 하죠.”

석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창현이었다.

괜히 그의 이상한 말 때문에 근래 들어 키가 174cm에 달했다는 것은 자랑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창현은 그것이 조금 아쉬웠다.


현의 MKMF출연 소식은 곧장 기자들을 통해 퍼져 나갔다.

기자들은 현이 MKMF에 출연하여 특별한 퍼포먼스를 선보이겠다는 이야기를 전달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창현이 MKMF에 출연한다는 소식에 들떴다.

음향기기 문제나 공정성 문제로 매해마다 곤욕을 앓는 MKMF지만 그것이 가수들의 축제라는 것은 변함이 없는 사실이다.

현의 팬들은 현이 MKMF에서 어떠한 퍼포먼스를 펼칠지 기대하는 눈치였다. 언제나 사람들을 실망시키지 않았던 현이었기에 그런 사람들의 기대는 덩달아 높아져만 갔다.

그러자 MKMF의 인지도는 단번에 껑충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현의 출연 소식 하나만으로 MKMF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도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Mnet에서도 이러한 의도를 가지고 현을 출연시키려 한 것이지만 생각보다 훨씬 폭발적인 반응에 어안이 벙벙한 기색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람들의 반응이 폭발적인데에는 이유가 있다.

바로 현의 방송 출연 빈도 때문이다.

3월말에 미국으로 출국하여 9월말이 되어서야 돌아온 현은 여태까지 공식적으로 단 한 개의 방송에만 출연했을 뿐이다. 바로 만원의 행복이 그것이다.

현의 팬들은 만원의 행복에서 현의 새로운 모습을 볼 수 있었고, 놀라운 능력(음성변조)과 숨겨진 음식 실력 등 베일에 감춰져 있던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어 즐거움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팬들의 갈증을 식힐 수 없었다.

현의 팬들은 현이 좀 더 많은 방송에 출연하기를 원했고, 그러한 염원은 AA엔터테인먼트에까지 전달되고 있는 실정이었다.

당연히 AA엔터테인먼트 사장 강석규는 이에 대해 고민에 빠지게 된다.

그 또한 현의 방송 출연으로 이미지를 공고히 하고 싶지만 여러 가지 조율해야 할 점들이 너무나 많았다. 그렇다고 그것들을 모두 고려한다면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이 분명하였다.

그러던 차에 석규의 눈에 들어온 것이 바로 MKMF였다.

가수들이 참가할 수 있는 만큼 창현이 참가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올해 앨범을 발매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현의 가치를 저버릴 만큼 MKMF가 여유 있는 것도 아니었고 말이다.

더군다나 MKMF에서도 관심도를 끌어올리고자 현의 출연을 원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현의 방송 출연을 원하는 AA엔터테인먼트와 Mnet의 이해가 일치하는 순간이었다.

뿐만 아니라 Mnet에서는 현을 중심으로 한 이벤트 방송을 제안한 상태였다. 케이블 방송이기에 지명도가 낮은 것은 사실이지만 지상파 방송사들의 견제가 덜하다는 장점이 있다.

현의 지명도라면 Mnet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충분히 시선을 끌어모으는 것이 가능하다. 게다가 웬만한 가정 집이라면 Mnet은 나오기에 팬들이 사전에 알고만 있다면 지상파와 다를 바가 없는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랬기에 석규는 Mnet의 제안을 수락한 뒤, 본격적으로 지상파 방송과 협상에 나섰다. 말 그대로 임시방편의 성격이 강했기에 지상파 방송 3사와 결판을 낼 필요성이 있었다.

그렇게 현의 MKMF출연 소식이 전해졌고, 본격적으로 준비에 돌입하기 시작하였다.

다만 아쉬운 점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짧은 준비 시간이었다.

창현이 본격적으로 MKMF출연을 수락했을 때에는 이미 10월이 끝나가는 시점이었다.

MKMF가 11월 중순에 열리는 것을 감안하면 준비시간이 터무니없이 짧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창현과 퍼포먼스를 맞출 사람들은 다름 아닌 원더걸스였다. 요즘 최고의 주가를 달리고 있는 여자 아이돌 그룹인 것이다. 당연히 스케줄은 살인적일 수밖에 없고, 그만큼 준비할 시간이 짧을 것은 분명했다.

“시험공부도 해야 하는데. 이거 미치겠네.”

일단 석규의 말인지라 수락은 했지만 창현은 자신의 스케줄을 짜보고는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지어야만 했다.

공교롭게도 MKMF는 11월 17일에 열리는데 창현은 11월 12일부터 15일까지 기말고사가 겹쳐 있던 것이다.

아무리 좋은 성적을 유지하고 있다고 하나 시험 전에 공부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MKMF 행사 준비까지 함께 해야 하니 졸지에 창현의 스케줄이 장난이 아니게 된 셈이다.

MKMF에 출연할 퍼포먼스 준비로도 벅찬 마당에 시험공부까지 병행해야 하니 말이다.

11월 1일인 오늘, 창현은 JYP엔터테인먼트에 방문하기로 하였다.

매일같이 스케줄을 소화하느라 시간을 낼 수 없던 원더걸스가 오늘이 되어서야 어느 정도 시간이 비었던 것이다.

아직 창현과 어떤 퍼포먼스를 펼칠지 감안하면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창현은 3일 동안 스케줄이 꽉꽉 차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인상을 찡그렸다.

“준비할 시간이 부족해서 미치겠는데 오늘이 되어서야 만날 수 있다니.”

원더걸스의 인기를 실감하면서 한편으로는 기분이 좋지 않은 창현이었다. 그래도 세계적인 스타인 자신인데 3일 동안 바람을 맞혔으니 말이다. 머리로는 이해를 했지만 가슴으로는 뚱한 감정을 감추기가 힘들었다.

정상수업을 마친 뒤 창현은 벤을 타고 곧장 JYP엔터테인먼트로 향했다. 퍼포먼스 준비로 인해 좀 더 빨리 갈 수 있었지만 이미 사전에 좋은 감정이 없었기에 정상수업을 모두 듣고 난 뒤에야 약속을 잡은 것이다.

JYP엔터테인먼트가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었기에 창현은 일찍 도착할 수 있었다.

자신의 정체가 들키는 것은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니었기에 모자를 푹 눌러 쓴 창현이 석규가 미리 준비해준 출입증을 보여주며 유유히 JYP엔터테인먼트 안으로 들어섰다.

JYP엔터테인먼트에 들려본 적이 없었기에 자세한 지리를 모르는 창현은 층마다 무엇이 있는지 알려주는 곳으로 가서 JYP엔터테인먼트의 구조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이곳이구나.”

연습실 위치를 확인한 창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더걸스가 몇 번 연습실을 사용하고 있는지 알았으니 이제 그곳으로 향하면 된다. 상당히 일찍 도착했으니 그곳에서 기다리면 되겠지.

창현이 막 발걸음을 옮기려고 할 때, 그에게 다가오는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다짜고짜 창현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의아한 표정을 지은 창현이 고개를 들어 상대를 바라보려고 할 때, 상대방의 입에서 먼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디션을 보러온 학생인가?”

“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다짜고짜 자신을 지망생으로 만드는 말에 어이가 없어서 창현은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상대방은 삼십대 중반의 잘생긴 남성이었다.

그는 창현에게 자신의 명함을 건네며 말했다.

“흐음! 아직 공개 오디션 시간이 되려면 좀 남았는데 일찍 오다니 정신이 되어 있군. 나는 JYP엔터테인먼트 스카웃 담당 정경주 실장이라고 한다. 이름은?”

“강창현입니다만?”

창현은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모자를 벗고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면 끝날 일이었지만 눈앞의 남자가 언제 자신의 정체를 알아차리는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정경주라 밝힌 이 남자는 창현의 이름을 듣고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그저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흐음! 어디서 들어본 이름이랑 비슷한데. 뭐 이름이야 예명으로 활동하면 상관없을 테니 그렇다 치고… 흠! 키가 조금 작은 게 문제로구만.”

빠직.

정경주 실장의 중얼거림에 창현의 이마에 혈관 마크가 도드라져 나왔다.

하필이면 자신의 콤플렉스를 건드리다니.

창현은 당장 모자를 벗고 눈앞의 남자에게 한마디 쏘아주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눌렀다.

그렇게 분노를 다스릴 때, 뒤이어 나온 말을 듣고 간신히 진정시킬 수 있었다.

“아직 중학생인 듯하니 얼마든지 더 클 수 있겠군. 그 점은 괜찮아. 잘하는 게 뭐지?”

하지만 감정이 풀린 것이 아니었기에 창현이 뚱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노래 분야는 다 잘하는데요.”

“자신감이 대단한데? 흠! 모자를 쓴 건 무슨 의도인가?”

창현은 이 남자를 골탕 먹이기로 작정했다. 민감한 키 이야기를 하다니. 가뜩이나 자신을 바람맞힌 것 때문에 영 좋지 않았던 기분이 더해지니 더욱 그런 충동이 들었다.

“실력으로 인정받고 싶어서요. 얼굴을 보면 바로 합격이거든요.”

창현의 말에 정경주 실장이 놀란 표정을 짓는다. 보통 연습생 지망생이면 어딘가 자신감이 결여되고 주눅 든 모습을 보이기 마련인데 이렇게 자신감에 넘치는 모습을 보이니 그로서는 의외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정경주 실장은 눈앞의 소년이 물건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이런 타입의 경우 정말 자신의 실력이 자신 있어서 하는 말일 확률이 높았다. 십 년이 넘는 기간 동안 스카웃을 해온 자신의 감각이 말하고 있었다.

“놀라운 자신감이군. 그 말처럼 실력이 있기를 바래보지. 오디션은 3층에서 한다네. 나를 따라오도록.”

그렇게 말한 그는 앞장 서서 걷기 시작했다.

창현은 그런 정경주 실장의 모습을 보다가 뒤를 따라갔다. 과연 언제 자신의 정체를 알아차릴지 궁금하였고, 오디션이 어떤 형식으로 치러질지 궁금하기도 하였다.

3층에 도착하자 오디션을 보기 위해 몇몇 사람들이 있는 것이 보였다.

정경주 실장은 창현을 보더니 말했다.

“잠시 기다리도록. 신청서를 작성하지 않았으니 내가 말해놓아야 오디션을 볼 수 있을 게야.”

도대체 오늘 생전 처음 본 창현에게 무엇을 그리 기대하는지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그였다.

창현은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어느새 시작된 오디션의 차례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오디션을 보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채 일 분도 되지 않아 나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십 분가량 있다가 나오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표정은 대부분 어두웠다. 긴장한 나머지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한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일곱 명이 오디션을 보았을 무렵, 안쪽에서 창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창현 군의 차례입니다.”

갑작스러운 자신의 호명에 창현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안에서 정경주 실장이 나와 창현을 손짓하자 창현은 안으로 들어설 수밖에 없었다.

오디션 시험장 안으로 들어서자 창현은 놀란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오디션 장소에는 심사위원들 뿐만 아니라 원더걸스도 자리하고 있던 것이다. 아무래도 참관인으로 참가를 했나보다.

창현의 등장에 심사위원들은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스카웃 담당인 정경주 실장이 강력하게 추천을 했기에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심사위원 중 하나가 창현에게 입을 열었다.

“강창현 군이라고 했는데, 무엇을 보여주실 겁니까.”

“노래를 하도록 하죠.”

창현은 짧게 대답했다.

그는 지금 무척 기분이 나쁜 상태였다.

자신과 약속이 잡혀 있는 원더걸스가 이 자리에 있어서 그렇다.

분명 약속시간이 지금보다 늦은 시간이기는 하지만 자신은 장장 3일이나 기다려서 오늘 약속을 잡을 수가 있었다.

그렇다면 조금이라도 일찍 기다려주는 게 예의가 아닐까?

비록 그녀들이 이곳에 와 있는 것이 자의인지 타의인지 모르지만 창현은 그 모습에 무척 기분이 나빴다.

그리고 그 심정은 그대로 행동에 묻어 나왔다.

“마침 여기 원더걸스 분들도 계시니 이분들의 데뷔곡인 <Irony>를 제 나름대로 편곡한 형태로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비록 <Irony>가 여자 곡이기는 하지만 창현에게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이미 머릿속으로 빠르게 편곡이 되고 있었고, 간단하지만 창현이 아니면 할 수 없는 형태로 편곡이 된 상태였다. 오디션이 MR없이 노래를 부르는 형식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마이크를 잡은 창현이 숨을 길게 들이쉬면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아이러니는 여자 노래이긴 하지만 남자가 소화하지 못할 노래는 아니었다. 그렇게 높지 않을 뿐만 아니라 노래 난이도가 그렇게 높은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렇다.

창현은 치솟은 짜증이란 단어를 노래에 모두 쏟아붓기 시작했다. 그 감정은 힘이 되어 노래에 실리기 시작하였고, 창현 특유의 가창력이 진가를 발휘하면서 노래가 오디션장 전역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이를 지켜보던 심사위원들은 물론이고 원더걸스 또한 입이 떡하니 벌어진다. 다소 오만하다고 할 수 있던 소년이 경악스러운 수준의 라이브를 보여주고 있던 것이다.

설마하니 이런 가창력을 보유하고 있을 줄이야.

한쪽에서 지켜보던 정경주 실장의 입에 득의만만한 미소가 서렸다.

‘역시 내 눈은 틀리지 않았군. 이런 대어를 낚다니, 엄청난 기회다.’

소정의 연습생 기간만 거친다면 대한민국 최고의 가수가 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아니, 대한민국을 넘어서 현처럼 세계적인 가수도 능히 가능하리라.

1절을 모두 부른 창현이 노래를 멈추었다. 그리고 푹 눌러쓴 모자 사이로 드러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심사위원들과 원더걸스는 여전히 경악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창현의 입가에 미소가 서렸다.

“어떻습니까?”

“…….”

그의 물음에 모두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뭐라고 평가를 해야 할까.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러다가 한 심사위원이 입을 열었다.

“험! 정말 대단하군. 하지만 고칠 점이 있어보이네.”

“고칠 점이라고요?”

심사위원의 말에 창현이 어이가 없다는 듯 물었다. 고칠 점이라니? 이 세상에서 자신을 가장 냉정하게 대하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자기 자신을 꼽는 것이 창현이다. 그만큼 자신에게 엄격한 기준을 세워놓고 스스로를 끊임없이 채찍질 한다.

그런 창현의 입장에서 지금의 라이브는 성공적이었으면 성공적이었지 결코 실패한 것이 아니었다.

황당함이 담긴 창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심사위원이 입을 열었다.

“우선 합격이네. 하지만 자네는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이야. 우리가 이것을 가다듬기만 하면 충분히 가수로 성공할 수 있을 거네.”

그 말을 들은 창현은 눈앞의 심사위원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정말 자신의 실력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니리라.

그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다른 것에 있었다.

‘이게 협상인가?’

상대를 깎으면서 조건 협상에 들어가는 것.

아무래도 자신의 기를 꺾어놓은 뒤 고분고분하게 만들어서 계약 조건을 낮게 책정하려는 생각인 듯했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벌써 계약을 염두에 두고 이런 일을 벌이다니.

국내 3대 기획사라는 자존심인가?

창현은 웃음이 흘러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으며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만 전 계약할 생각이 없습니다만?”

“……!”

창현의 말에 모두가 ‘이건 무슨 소리?’ 라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에 창현은 여태까지 눌러 쓰고 있던 모자를 벗었다.

그러자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창현의 얼굴.

창현의 얼굴을 확인한 사람들의 얼굴이 멍하게 변한다.

설마하니 방금 전 노래를 불렀던 인물이 현일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창현은 웃음기가 도는 얼굴로 방금 전 자신에게 고쳐야 할 점이 있다느니 하던 심사위원에게 시선을 주며 물었다.

“제 고칠 점이 어디인지 알려주신다면 겸허하게 그 부분을 고쳐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조언 부탁드릴게요.”

할 말이 있을 턱이 없다.

정말 창현이 못 불러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의 짐작처럼 계약을 염두에 두고 사전 작업을 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걸 제하더라도 창현의 가창력은 흠잡을 데가 없을 정도로 완벽하다.

그 누가 창현의 가창력을 지적한단 말인가?

세계에서 난다긴다하는 평론가들도 엄지를 추켜세운 존재가 바로 창현이었다.

창현을 바라보는 심사위원의 얼굴이 붉게 변했다. 정면으로 무안을 당했으니 화가 날 수밖에 없었지만 그것을 분출할 수가 없었다.

자신 앞에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현이었으니 말이다.

도대체 왜 그가 이곳에 있단 말인가.

그 의문을 풀어주기라도 하듯 창현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황당함이 가득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정경주 실장이 보였다.

“왜 제 이야기를 듣지 않고 이곳까지 데려왔는지 모르겠군요. 저에게 말할 시간을 주었다면 말을 해주었을 텐데 말입니다.”

정경주 실장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곳까지 오는 내내 창현이 뭐라 말을 하려고 했지만 그때마다 자신이 다른 말을 하지 못하게 했으니 말이다.

뭐라고 말을 하고 싶지만 자신의 실수로 비롯된 일이라 추궁하기도 어려웠다.

창현의 시선이 이번에는 원더걸스로 향했다. 개인적으로 자신과 친분이 있다. 하지만 기분이 몹시 좋지 않았다.

“스케줄이 바쁜 것도 이해하지만 나도 나 나름대로 위치가 있는데 스케줄 하나 있다는 것만으로 3일 동안 기다리게 만들고, 일찍 도착할 것을 염두에 두지도 않은 채 이곳에 있는 것이 무척 실망스럽군요.”

그 말과 함께 창현은 몸을 돌렸다. 하나하나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화를 낼 것 같아 아예 외면한 채 입을 열었다.

“합동 퍼포먼스는 없던 것으로 하지요. 해결은 제가 알아서 할테니 그렇게 알고 계세요.”

이렇게 결정을 내리니 편했다.

자신이 왜 굳이 매달려야 했는지 몰랐고, 무엇보다 아쉬운 것도 없었다.

여태까지 너무 꾹꾹 눌러와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개인적인 친분에 의한 것이라면 얼마든지 받아줄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그 차원을 넘어선 문제였다. 창현의 위치를 고려한다면 당장 원더걸스가 달려와서 자신 위주로 스케줄을 잡는 것이 옳다. 하지만 창현은 원더걸스를 배려해주었고, 그녀들의 스케줄에 맞추어주었다.

하지만 결과는 이것이다.

관계라는 것이, 개개인이건 기업과 기업이건 간에 사소한 배려가 결여되면 결정적으로 마이너스를 받게 된다. 그런 면에서 JYP엔터테인먼트는 창현에게 소소한 배려가 부족했다.

그로 인해 창현은 기분이 나빴고, 더 이상 함께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마음 같아서는 더 쏘아붙이고 싶지만 이것은 원더걸스가 잘못한 것이 아니란 걸 알았기에 창현은 더 말하지 않고 오디션장을 벗어났다.

그를 붙잡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디션장을 나선 창현은 곧장 핸드폰으로 로드 매니저를 호출하였다.

이렇게 관계가 틀어진 이상 합동 퍼포먼스는 무리다.

나머지는 석규가 알아서 해줄 것이라.

벤에 탑승하여 AA엔터테인먼트로 향한 창현은 새로운 방법을 강구해야만 했다.

원더걸스와 함께 하지 못하게 된 이상 그에 대한 대책을 마련해둬야 한다.

잠시 고민하던 창현은 무언가 생각난 듯 핸드폰을 연다. 그리고 저장된 번호를 찾다가 Cecilia를 찾고는 눈을 빛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

익숙한 노래가 들린다. 다름 아닌 <Minus>였다.

들리는 노래소리에 창현은 입가에 웃음을 지었다.

“변함이 없구나.”

잠시 후, 통화가 연결되며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이! 마이 달링, 현?

변함없이 대책 없는 반응에 창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유창하게 영어로 대답했다.

“오랜만이야, 세실. 나 현이야.”

-정말 오랜만이야! 왜 이제야 연락했어? 기다리느라 힘들었잖아.

창현이 연락한 상대는 다름 아닌 세실리아였다.

본래 무명이었던 그녀는 창현이 미국에서 활동할 당시 빌보드 차트 1위를 7주간 차지했던 <Minus>의 여주인공 역할로 출연하여 일약 스타덤에 오른 인물이었다.

그 이후 각종 CF나 여러 화보 촬영을 통해 지금은 상당한 인지도를 쌓은 스타가 되어 있었다.

밝은 세실리아의 목소리를 듣게 되자 창현은 입가에 미소를 띨 수 있었다. 무척 쿨한 성격을 지닌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짜증이 가시는 기분이었다.

“그럼 네가 연락하면 되잖아. 뭐 그것 가지고 그래.”

-흥! 원래 이럴 때는 남자가 먼저 연락해야 로맨틱한 거 몰라? 그런데 웬일로 연락을 한 거야?

<Minus> 이후 상당한 인지도를 쌓은 세실리아였기에 스케줄도 무척 바빴다.

그녀의 물음에 창현은 세실리아의 근황을 물었다.

“요즘 어때? 아직도 스케줄 바빠?”

-아니, 잠시 휴식기라서 바쁘지 않아. 한 달 후부터 바쁠 예정이지만.

휴식기란 말에 창현의 눈이 빛났다. 그렇다면 시간이 남는다는 이야기였으니 창현에게는 기회였다.

“그래? 다행이다. 그럼 혹시 한국에 와줄 수 있어?”

-왜? 설마! 내가 보고 싶어서 그런 거야? 베리 굿! 나도 현이 너무너무 보고 싶었다고!

세실리아가 들뜬 목소리로 시끄럽게 말한다.

그에 창현은 귀를 틀어막으면서 말했다.

“그런 거 아니거든? 실은 내가 방송이 잡힌 게 있는데 네가 좀 도와줬으면 해서 그러는 거야. 물론 사례는 톡톡히 할게.”

이제 막 스타덤에 오른 세실리아지만 현의 <Minus>에 출연한 탓에 한국에서 상당한 인지도를 가지고 있다. 그 이후 여러 화보를 통해 모습을 드러낸 그녀의 국내 팬 층은 결코 만만치가 않다.

창현은 원더걸스와의 퍼포먼스를 파토 내는 대신 세실리아를 불러 함께 퍼포먼스를 펼쳐 보일 생각이었다.

미국에서의 인기는 곧 세계적인 인기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사람들이 더욱 환호했으면 환호했지 외면하지는 않으리라.

-사례? 와아! 그럼 나랑 사귀는 거야?

세실리아의 나이는 올해 열일곱. 한국 나이로는 열여덟이기에 창현보다 두 살이 많다.

한창 활동할 때이건만 그녀는 무엇이 그리 좋은지 창현에게 적극적인 대시를 하고는 하였다.

열일곱 살이지만 그녀는 무척 아름다운 외모에 성숙한 몸매를 지니고 있었기에 창현이 곤혹스러워 할 때가 한둘이 아니었다.

“그건 안 돼. 너랑 나랑은 한창 활동할 때라고.”

창현은 정중하게 세실리아의 말을 거절하였다.

그러자 세실리아가 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그래도 싫다고는 안하네? 후후!

“끙! 너랑은 이야기 하는 게 힘들다. 어쨌든 와줄 거야, 안 와줄 거야?”

창현은 가슴 속으로 조마조마했지만 애써 태연을 가장했다. 세실리아가 안 오겠다고 하면 상황이 난감해질 수 있다.

그런 창현의 말에 세실리아가 여유 넘치는 태도로 대답했다.

-내가 어쩌길 바라는데? 평소 나에게 연락하지 않다가 했다는 건 그만큼 상황이 급박하다는 이야기 아니겠어? 안 그래?

눈치는 무지 빠른 세실리아였다.

창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항복 선언을 할 수밖에 없었다.

“후! 그래, 내가졌다, 졌어. 나 지금 상황이 무척 절박하거든? 너의 도움이 필요해. 그러니 좀 와주라, 응?”

애원에 가까운 창현의 말에 세실리아는 잠시 침묵하더니 이내 결정을 내린 듯 대답했다.

-Ok. 마이 달링인 현이 절박하다니 그곳으로 가도록 할게. 마침 현이 태어난 한국이란 곳을 가보고 싶기도 했고. 그리고 나 이래보여도 제법 비싼 몸이니 몸값은 톡톡히 받을 거다?

세실리아의 승낙을 얻자 창현은 밝은 표정을 지었다.

“좋아, 사례는 두둑하게 하도록 할게. 정말 고마워, 세실.”

-그러니 앞으로 나한테 잘하라고. 음, 이틀 후에 마지막 스케줄이 있고, 이걸 끝으로 한 달 정도 휴식을 취하기로 했거든. 3일 후에 가도록 할게.

3일이 지난다고 해도 연습 기간은 열흘이 넘게 남는다. 새로운 춤을 익히는 것이 아닌 이상 시간은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드문드문 스케줄이 잡혀있는 원더걸스와 달리 세실리아는 스케줄 없이 오는 것일 테니 말이다.

창현은 한결 밝아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예, 알겠습니다. 아, 나 회사 도착했다. 이만 끊을게. 와주기로 한 건 정말 고마워, 세실.”

-응, 내 꿈꾸도록 해, 굿나잇. 쪽!

“여긴 아직 낮이다.”


“일 하나 거하게 질렀구나.”

AA엔터테인먼트로 돌아온 창현을 보며 석규가 꺼낸 말이다.

그에 창현은 찡그린 표정으로 석규를 바라보았다.

자신은 절대 잘못을 하지 않았다는 표정으로 말이다.

그런 창현을 바라보던 석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가 잘못했다는 게 아니니 표정부터 풀어라.”

“아버지라면 저를 이해해주실 것이라 믿었어요.”

석규의 대답을 들은 창현이 표정을 풀었다.

그런 창현의 모습에 피식 웃음을 지은 석규가 입을 열었다.

“그래, 일을 저질렀으니 이유나 들어보자. 뭣 때문에 그렇게 화가 난 것이냐?”

“아버지, 지금 다 알고 계시면서 말하시는 거 맞죠?”

모든 정황을 석규가 모르고 있을 리 없다. 이미 JYP엔터테인먼트에서 이야기를 했을 테니 말이다. 물론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이야기를 했을 테지만.

창현의 대답에 석규가 웃음을 지우고는 말했다.

“JYP엔터테인먼트의 이야기는 들었다. 하지만 네 이야기도 들어보아야 내가 냉정하게 판단할 수 있지 않겠느냐?”

석규의 말에 창현이 한숨을 길게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후우! 아버지도 아실 거라 생각해요. 원더걸스가 스케줄로 인해서 저를 3일 동안 기다리게 한 걸 말이에요. 게다가 MKMF를 시작하기 전에 학교 시험까지 있거든요. 그래서 마음이 조급했어요.”

학교가 창현에게 주는 부담감은 무척 컸다.

우선 미국에서 활동할 때부터 시작하여 귀국 후 여러 스케줄 때문에 학교 생활에 충실하지 못했다. 아마 평범한 학생이었다면 출석일수가 부족해서 졸업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연예인이라는 특혜 때문에 여태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창현에게 있어 학교에서 꼭 해야 할 수행평가 같은 것들도 스트레스였고, 무엇보다 시험 성적에 대한 스트레스도 장난이 아니었다.

3학년에 올라가기 직전, 교장선생님과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가. 성적을 떨어뜨리지 않겠다고.

약속을 하면 반드시 지키려고 하기에 창현은 자신의 성적을 지켜야 한다는 압박감을 받고 있었다. 이미 중학교 과정을 마스터 했다고 하나 그것은 마스터 했을 뿐이지 지속적인 복습이 없다면 잊어버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게 신경이 날카로운 와중에 JYP엔터테인먼트의 여러 사소한 실수가 창현의 짜증을 폭발시킨 것이다.

“사소한 배려가 결여되어 있는 모습에 더 참을 수가 없더라고요. 제가 경솔한 건 인정해요.”

말을 하면서 창현은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한순간의 감정으로 모든 것을 결정해버렸으니 그에게도 일말의 책임이 있었다.

그런 창현의 모습에 석규는 조용히 생각에 잠겨 있다가 입을 열었다.

“아니다, 오히려 잘했다.”

“뭐라고요?”

창현은 순간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닐까 싶었다.

퍼포먼스를 파토내고 온 것이 잘했다니?

스스로도 잘못한 걸 알았기에 어느 정도 혼날 것을 각오하고 있었는데 오히려 잘했다는 소리를 들으니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었다.

불신 섞인 창현의 시선에 석규가 웃음을 짓더니 말을 이어나갔다.

“아무래도 JYP엔터테인먼트가 우리를 쉽게 본 모양이구나.”

그 원인 제공은 원더걸스와의 정면대결 회피 때문일 확률이 높았다.

그로 인해 AA엔터테인먼트가 JYP엔터테인먼트의 여러 양보를 얻어내기는 했지만 AA엔터테인먼트를 어느 정도 얕보는 계기가 되었을 수도 있다.

특히나 예의 바르게 사람 좋기로 소문난 현이었기에 어느 정도 선까지 원더걸스의 스케줄을 소화시킨 뒤에 만나게 하려고 했나보다.

3일간의 스케줄은 도저히 뺄 수 없다는 JYP엔터테인먼트 측의 답변에 석규는 승낙을 했지만 그는 바보가 아니다.

스케줄이란 것이 충분히 변동 가능한 것이 있고, 일정 조정이 가능한 것도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상대가 다름 아닌 월드스타 현인 걸 감안하면 있는 스케줄도 취소를 해서 현에게 맞추는 것이 예의다. 합동 퍼포먼스를 할 경우 얻는 것은 원더걸스가 월등히 많지, 현이 이득을 취하는 것이 아니니 말이다.

그 사실로 인해 석규도 내심 기분이 언짢은 상태였는데 창현이 사고를 치고 온 것이다.

만만치 않은 사항이었지만 석규는 개의치 않았다. 사소한 것에서부터 점수를 깎아먹고 들어간 상태였기에 창현이 화를 내지 않았더라면 오히려 그가 화를 냈을 것이다.

지난 3일간 창현을 기다리게 한 것은 명백한 JYP엔터테인먼트 측의 잘못이다.

“상대가 이쪽을 만만하게 본다면 굳이 저쪽에게 좋은 일을 시켜줄 이유가 없겠지요.”

창현은 AA엔터테인먼트가 JYP엔터테인먼트에 결코 부족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규모나 다른 면에서 AA엔터테인먼트가 열세지만 현과 라샤가 있기에 그런 차이는 무의미했다.

당장 창현이 적극적으로 나서고 라샤가 컴백을 한다면 원더걸스의 열풍을 잠재우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창현의 존재 하나가 이미 거대한 태풍의 핵이었으니 말이다. 그가 마음만 먹으면 태풍을 일으키는 것은 일도 아니다.

아무리 돌풍이 대단하다고 하나 태풍을 이길 수 없는 법이다.

현의 이름은 대한민국 가요계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위치에 서 있다.

그렇기에 창현이 이런 자신감을 선보일 수 있는 것이다.

“그래, 이쪽이 아쉬울 것은 없다. 원더걸스와의 퍼포먼스는 없던 걸로 하자꾸나. 하지만 다른 퍼포먼스로 대체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겠지?”

기자들이 보도한 기사에 이번 2007 MKMF에서 현이 퍼포먼스를 하겠다는 사실만 알렸을 뿐 원더걸스와 하겠다는 소식을 이야기한 적은 없다.

그 이야기는 현이 퍼포먼스를 강행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석규는 창현을 보며 물었다.

“전에도 말했지만 퍼포먼스를 맞추기에는 소녀시대나 카라는 적합하지 않다. 하지만 퍼포먼스 상대를 정해야 하지. 이미 퍼포먼스 상대를 정했다고 했으니 말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한 번 저지른 일은 반드시 책임을 동반한다.

석규는 창현이 파토를 낸 만큼 스스로 책임지기를 바랐다.

생각없이 일을 저지른 것이라면 지금이라도 수습하라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런 석규의 말에 창현은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 점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요. 이미 퍼포먼스를 맞출 상대를 섭외했거든요.”

창현의 말에 석규의 눈에 놀라움이 서린다.

“벌써 말이더냐?”

이렇게 발 빠르게 움직일 줄은 몰랐다는 반응이었다.

놀란 석규의 반응에 창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나름대로 생각을 하고 있었죠. 파토를 선언하고 왔지만 제대로 수습하지 않으면 일이 커질 수 있잖아요. 그래서 섭외 요청을 했는데 다행히 승낙이 떨어졌네요.”

“누구를 섭외했는데 그러는 것이더냐?”

석규가 궁금함을 드러냈다.

창현의 인맥 상황을 거의 정확하게 알고 있지만 마땅히 섭외할 인물이 없다. 근래 들어 유재석과 친분을 텄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는 퍼포먼스에 적합하지 않은 인물이니 말이다.

궁금증을 드러내는 석규의 모습에 창현이 웃음을 짓더니 대답한다.

“세실리아라고 하는데, 아세요?”

“세실리아? 설마…….”

석규는 경악이 가득 담긴 눈으로 창현을 바라보았다.

그가 말하는 세실리아라면 한 사람 밖에 없었던 것이다.

바로 미국에서 근래 들어 최고의 주가를 달리고 있는 여성 스타 세실리아를 말하는 것이리라.

창현의 곡인 <Minus> 뮤직비디오에 출연하여 스타 반열에 오른 세실리아는 현재 미국에서 엄청난 인지도를 얻으며 성장하고 있었다.

그런 세실리아를 섭외할 줄이야.

정말 대어를 낚은 셈이다.

원더걸스와 퍼포먼스가 무산 되어 내심 걱정하던 석규는 그런 걱정이 말끔히 사라지는 걸 느꼈다.

하지만 염려되는 면이 있었기에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정말 세실리아가 온다고 하더냐?”

한창 최고의 주가를 달리고 있는 만큼 스케줄 비우는 것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석규의 물음에 창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도 스케줄이 염려되어서 물어보았더니 이틀 후 스케줄을 끝으로 한 달 정도 스케줄이 빈다고 하더라고요. 3일 후에 온다고 했으니 그때부터 준비하면 될 듯 싶고요.”

“그래, 네가 그렇게 얘기하니 한시름 놓이는구나. 그럼 그렇게 알고 있으마.”

“저만 믿으세요. 그런데 JYP엔터테인먼트와는 어떻게 끝을 맺으려고요?”

대비책을 세워뒀지만 JYP엔터테인먼트와 잡음 없이 일을 처리하는 것이 중요했다. 창현은 그 부분이 걱정되었다.

그런 창현의 걱정에 석규가 대답했다.

“그 부분은 걱정하지 말아라. 내가 잘 정리하도록 할 테니. 너는 세실리아가 오면 퍼포먼스를 어떻게 할지 신경을 기울이도록 하여라. 그리고 알지? 스캔들 조심하도록 하고.”

<Minus> 뮤직비디오가 공개되고, 한정판 화보집까지 나오면서 이미 미국에서 한차례 스캔들에 휘말린 적이 있었다.

그때는 어찌어찌 좋게 묻어둘 수 있었지만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바로 세실리아가 창현에게 적극적으로 대시한다는 점이다.

창현은 이런 세실리아를 대하기가 무척 난감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파파라치에게 찍혀서 곤욕을 치를 수도 있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그래서 이번에 세실리아가 오면 행동거지에 각별히 조심할 생각이었다.

세실리아가 극비리에 한국으로 입국하는 것이니 만큼 자칫 잘못하다가는 한동안 스캔들 논란에 휩싸일 수 있으니 말이다.

“명심하도록 할게요.”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하는 창현의 모습에 석규가 말했다.

“JYP엔터테인먼트 사장과는 조만간 만나서 이야기 할 테니 걱정마라. 잘 해결할 테니.”

“네, 감사해요, 아버지. 솔직히 많이 걱정했거든요.”

일을 저지른 것이 처음이었기에 가슴이 몹시 두근거리던 창현이었다.

그런 창현의 모습에 석규는 웃음을 지어보였다.

“네가 다른 사람에게 맞춰주려고 하지 마라.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하지. 너는 세계적인 스타다. 주변 사람이 너를 맞춰줘야 하지, 네가 다른 사람을 맞춰주려고 하면 그 사람들은 피곤할 수밖에 없다. 창현이 넌 그것이 예의라고 하지만 네 위치로 볼 때 그것이 예의가 아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이번 일도 어찌 보면 그랬기에 일어난 일이다. 창현이 애초에 조금 깐깐하게 행동했었더라면 JYP엔터테인먼트에서 알아서 맞췄을 것이다.

창현은 그런 석규의 말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동안 자신이 너무 안이하게 행동했었다. 오만하지 않다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 예의를 갖추고, 먼저 행동으로 보이고는 했는데 그것이 상대로 하여금 자신을 얕잡아 볼 수 있게 하는 이유를 제공했나보다.

이번 기회를 통해 자신에게 시니컬한 면이 필요하다는 걸 느낀 창현이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앞으로는 그렇게 하도록 할게요.”

“그래, 그럼 된 거다.”

창현과 석규의 대화는 그것이 끝이었다. 서로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었기에 만족스러운 대화였고, 창현은 자신에게 필요한 것들을 깨달을 수 있었기에 손해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11월 4일.

뉴욕에서 출발하여 서울에 도착한 비행기에는 한 여인이 여행용 가방을 끌며 모습을 드러냈다.

여인이 모습을 드러내자 공항 내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모여들었다.

그만큼 여인의 미모가 대단했던 것이다.

아니, 얼굴은 드러나지 않는다. 큼지막한 썬글라스가 그녀의 얼굴 대부분을 가리고 있던 것이다. 썬글라스로 얼굴이 가려질 정도니 그녀의 얼굴이 얼마나 작은가 알 수 있었다.

여인은 부츠를 신고 있었고, 무릎부터 허벅지까지 드러난 새하얀 다리는 남성들의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그녀는 붉은색 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허리를 졸라맨 터라 개미처럼 가느다란 허리와 함께 몸매가 드러나고 있었다. 그리고 코트와 같은 붉은색 챙모자를 쓰고, 썬글라스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코트 뒤로는 탐스러운 금발이 허리 근처까지 부드럽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한껏 예쁘게 차려 입은 금발 미녀의 등장은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부족하지 않았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금발 미녀는 이곳저곳을 둘러보면서 연신 감탄사를 터뜨리기에 바빴다.

“와우! 이곳이 바로 현이 태어난 곳. 후읍! 공기는 그리 좋지 않지만 왠지 모르게 현의 냄새가 나는 곳이네.”

여인의 이름은 세실리아.

현재 미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배우가 바로 그녀였다.

이틀 전 스케줄을 끝으로 한 달간 휴식을 받은 그녀는 휴가를 즐길 겸, 그녀의 달링(?)이기도 한 현의 부탁으로 한국을 방문한 것이다.

“기다려, 현! 이번에는 반드시 내 것으로 만들어주겠어.”

현을 볼 수 있다는 기대감에 세실리아는 의욕에 불타오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세실리아가 한국으로 들어섰을 무렵, 석규는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거물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이 AA엔터테인먼트를 방문한 것이다.

AA엔터테인먼트를 방문한 인물은 다름 아닌 JYP엔터테인먼트의 사장인 박진영이었다.

그는 AA엔터테인먼트로 찾아와 사장실로 들어서고는 정중하게 인사를 하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JYP엔터테인먼트의 사장인 박진영이라고 합니다.”

진영의 인사에 석규 또한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한 태도로 그 인사를 받으며 인사를 하였다.

“AA엔터테인먼트의 사장인 강석규입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조금은 유감입니다, 박 사장님. 일단 이리로 앉으시죠.”

석규가 자리를 권하자 진영이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비서를 부른 석규가 진영을 보며 물었다.

“무슨 차로 하시겠습니까?”

“전 녹차로 하겠습니다.”

“녹차 한 잔과 생강차 한 잔으로 하지.”

잠시 후, 차가 나오고 두 사람은 조용히 차를 한모금 마셨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진영이었다.

그는 먼저 석규에게 사과를 하였다.

“우선 이런 일이 일어난 것에 대해서는 저희 측의 불찰입니다. 죄송합니다.”

그가 사과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존재하고 있었다.

바로 세계적인 스타인 현을 건드렸다는 점이다.

이미 세계를 제패한 현은 국내 가수들에게 있어 감히 넘을 수 없는 불가침 영역에 다다른 가수라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평소 성격이 무척 좋다고 알려진 현이 화를 냈다는 사실이 퍼져나가기만 하더라도 JYP엔터테인먼트에 악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아무리 국내 3대 기획사라고 하나 현이 그동안 심어놓은 이미지는 절대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를 만난 사람 중 누구도 그에게 악감정을 가진 사람이 없었고, 예의바르고 열성적인 그를 싫어할 사람은 없었다.

그런 현이 화를 냈다는 것 자체만으로 큰 이슈가 될 텐데, 거기에서 더 파고들 기자들이 아닌가? 그렇게 되면 당연히 현이 원더걸스와의 합동 퍼포먼스를 위해 3일간 기다렸다는 사실이 퍼져나오게 될 것이고, 그리 되면 JYP엔터테인먼트는 현의 팬 사이트인 다크 스타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음과 동시에 대중들에게 날카로운 질책을 받을 것이다.

80만을 훌쩍 넘어선 다크 스타의 위력도 위력이지만 현을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대중들의 숫자가 엄청난 만큼 JYP엔터테인먼트에서는 AA엔터테인먼트에게 굽힐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현이 사회에 미치는 파급력은 대단했던 것이다.

게다가 결정적인 건 이번 일 때문인지 라샤가 외국에서의 활동 계획을 접은 채 국내에서 컴백 무대를 하려고 한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 뒤에는 현의 적극적인 서포트가 있을 것이란 소리가 들려왔다.

한창 인기를 얻고 있던 원더걸스에게 재앙에 가까운 소리가 아닐 수 없었다.

진영의 사과에 석규는 생강차를 한모금 마시면서 입을 열었다.

“솔직히 그 일에 대해서는 무척 기분이 안 좋았습니다. 박 사장님도 아실 것이라 믿습니다. 원더걸스의 스케줄에 맞추어 기다려준 것과 직접 그곳으로 찾아간 것은 저희들의 양보가 있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으음!”

석규의 말에 진영은 신음을 흘리며 아무 말도 못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석규의 말이 모두 옳았고, 자신들의 실수가 맞았기 때문이다.

“그저 죄송하다는 말 밖에 달리 할 말이 없군요.”

진영의 재차 사과하자 석규는 더 이상 따질 수가 없었다. 오늘 작정하고 와서 사과를 하는 듯한데 그런 상대에게 더 이상 이야기를 해보았자 자신만 약점을 물고 늘어지는 나쁜 놈이 되는 셈이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사과를 받아들이겠습니다. 현도 경솔한 면이 있었으니까요.”

사실 이번 일은 JYP엔터테인먼트 측의 잘못이 크긴 하지만 그렇다고 창현의 잘못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어찌 되었건 합동 퍼포먼스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뒤 나서버렸으니 말이다.

다만 JYP엔터테인먼트의 잘못이 컸기에 창현의 잘못이 부각되지 않을 뿐이었다.

그런 석규의 말에 진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합동 퍼포먼스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지……?”

진영이 AA엔터테인먼트를 찾은 이유는 자신들의 실수를 사과하기 위한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현이 안 하겠다고 선언한 합동 퍼포먼스를 성사시키기 위해 온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현과의 합동 퍼포먼스는 가뜩이나 상승세를 달리고 있는 원더걸스의 인기를 한층 확고하게 다져줄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런 기회를 저버릴 만큼 진영은 바보가 아니었다.

조심스럽게 묻는 진영의 모습에 석규는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그로서는 참으로 우스울 수밖에 없었다.

있을 때 잘하라는 말이 있다.

AA엔터테인먼트에서는 여자그룹 신인상 후보에 오른 여자그룹 중에서 원더걸스와 함께 합동 퍼포먼스를 하겠다고 하였고, JYP엔터테인먼트에서도 그것을 수락했다. 그런데 창현의 신경을 건드려서 퍼포먼스를 무산시켜놓고 이제 와서 다시 하자고 매달리는 것이다.

배는 떠나갔고, 이미 상황은 종료가 되었는데 뒤늦게 수습을 하려고 해봤자 뭐하겠는가.

웃음이 밖으로 흘러나오려는 것을 참으면서 석규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힘들 것 같습니다. 현이 워낙 완고한 모습을 보이는 터라… 게다가 현은 AA엔터테인먼트의 얼굴이기도 합니다. 유감스럽지만 이번 일로 인해 JYP엔터테인먼트에 대한 실망이 크기에 합동 퍼포먼스는 없던 일로 했으면 좋겠습니다.”

정중하고 부드럽게 말했지만 사실상 안하겠다는 선언과도 같았다.

그런 석규의 말에 진영의 표정이 다급해졌다.

어려울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더욱 완고하지 않은가.

진영은 조급함이 담긴 어조로 물었다.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AA엔터테인먼트의 사장인 강석규가 현의 아버지라는 것은 웬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현이 아버지의 뒷배경으로 연예계에 입문했다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석규가 밝힌 사실 중 하나가 바로 현을 연예계로 입문하게 만든 것이 바로 석규란 사실이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현이 가급적이면 석규의 말을 듣는 것도 웬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진영 또한 석규가 창현을 설득해주면 어떻게든 퍼포먼스가 이루어질 것이라 생각했기에 그에게 매달리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그런 진영의 모습에 석규가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힘들 것 같습니다. 현이 녀석이 화가 많이 났는지 어제 JYP엔터테인먼트를 박차고 나가면서 곧장 다른 사람을 섭외했기 때문입니다.”

창현이 다른 인물을 섭외했다는 말에 진영은 말을 잇지 못했다. 막연하게 현이 화가 나서 일을 저질렀다고만 생각했지, 설마하니 뒷일까지 모두 염두에 두고 일을 저지를 줄 몰랐던 것이다. 창현을 단순히 성격의 변동이 심한 청소년으로 생각한 그의 불찰이었다.

진영인 석규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합동 퍼포먼스를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서 그는 현과 함께 합동 퍼포먼스를 할 인물로 소녀시대를 떠올렸다.

현과 소녀시대가 친하다는 사실은 이미 연예계에서 유명하다. 현이 SM엔터테인먼트와 계약을 맺었다는 것도 있고, 사적으로 친한 누나와 동생 관계라는 것도 있다.

만약 상대가 소녀시대라면 진영은 합동 퍼포먼스 상대를 다시 원더걸스로 옮길 자신이 있었다.

석규와 창현의 대화에서도 나왔지만 이미 일각에서는 현과 소녀시대가 너무 친하지 않느냐는 말이 나오고 있는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소녀시대는 현을 이용하여 유명세를 떨칠 수 있지만 그에 반해 현에게는 마이너스적인 요소만 된다. 이걸 바탕으로 설득을 하게 되면 충분히 원더걸스로 그 대상을 돌릴 수 있다.

진영은 그것을 기대하고 있기에 석규의 입에서 소녀시대란 이름이 흘러나오길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석규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름은 진영의 예상을 산산이 깨버리는 이름이었다.

“합동 퍼포먼스를 하기로 한 사람은 세실리아입니다.”

외국인의 이름이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름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진영의 눈이 이내 커진다. 미국 쪽 사정에 밝은 만큼 석규가 언급한 세실리아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진영은 석규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세실리아라면 설마 <Minus>에서 나왔던 그……?”

“그렇습니다. 그 세실리아입니다.”

“하…….”

바람 빠지는 소리를 흘리며 진영은 말을 잇지 못했다.

설마하니 현이 초대한 상대가 세실리아일 줄이야.

너무 강적이 아닌가.

원더걸스가 아무리 선풍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지만 세실리아는 미국에서 이미 스타 반열에 오른 인물이었다. 미국과 한국의 시장 크기가 차원을 달리하는 것처럼 그 인기도 또한 차원이 다르다.

Mnet 입장에서는 현이 원더걸스와 합동 퍼포먼스를 하는 것보다 세실리아와 함께 하는 합동 퍼포먼스가 더욱 나을 것이라 생각할 것이다. 당장 JYP엔터테인먼트 사장인 진영 또한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 두 말이 필요 없다.

진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현이 정말로 세실리아를 초대했다면 승부는 해보나마나였다.

그는 석규를 바라보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렇게 되었다니 아쉽군요.”

“저도 무척 아쉽습니다. 원더걸스와 함께 합동 퍼포먼스를 한다고 해서 무척 기대를 했는데 말입니다.”

“…저는 이만 일어서도록 하겠습니다.”

석규의 대답을 들으며 진영이 힘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목적하던 바를 이루지 못해서 그런 것일까.

뿐만 아니라 괜찮다는 석규의 이야기를 들었지만 현과 직접 대면하여 앙금을 푼 것도 아니었다.

진영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석규도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는 진영을 보며 말했다.

“살펴 가십시오. 오늘 박 사장님이 오셔서 사과한 것에 대해서는 현에게 잘 말해놓을 테니 너무 염려하지 마시길.”

“강 사장님만 믿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그 말과 함께 진영이 사장실을 벗어났다.

그런 진영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석규의 입가에는 미소가 맺혀 있었다.


택시 두 대가 AA엔터테인먼트 앞에 선다.

그와 함께 다섯 명의 외국인이 택시에서 내린다.

가장 먼저 택시에서 내린 외국인은 붉은색 모자와 붉은색 코트를 입고, 부츠를 신은 금발의 외국인이었다. 썬글라스를 썼지만 그 외모가 무척 아름다울 것이라 추정되는 여인은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는 코트를 입고 있었기에 보는 사람의 시선을 한눈에 사로잡고 있었다.

여인의 정체는 바로 세실리아였다.

공항에서 바로 택시를 타고 AA엔터테인먼트에 도착한 것이다.

그녀는 AA엔터테인먼트 건물을 보고는 놀라운 표정을 지었다.

“현은 정말 이런 회사에서 활동한 건가?”

미국에서 엄청 큰 곳만 다녀서 그럴까.

세실리아의 눈에 비친 AA엔터테인먼트는 무척 초라한 곳이었다.

놀라움은 그쯤으로 하고 세실리아는 자신과 함께 온 동료들과 함께 AA엔터테인먼트 안으로 들어섰다.

이미 석규의 지시가 있었기에 안내 카운터 여직원은 놀란 기색을 보였지만 망설임 없는 기색으로 세실리아를 안내하였다.

세실리아를 비롯한 일행은 곧장 응접실로 향했다. 사장실로 안내되어야 하지만 일행이 많았기에 손님을 맞이하는 응접실로 안내한 것이다.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응접실 안으로 들어서는 세실리아.

응접실 안으로 들어선 그녀의 눈에는 AA엔터테인먼트 사장인 석규와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창현이 보였다.

창현을 발견한 세실리아가 썬글라스를 벗었다.

환하게 드러난 그녀의 얼굴은 햇살처럼 밝게 웃고 있었다.

“정말 오랜만이야, 현!”

“오랜만이야, 세실.”

반갑게 인사를 하는 세실의 모습에 창현도 미소를 지은 채 인사를 받아주었다.

창현이 <Minus>로 히트를 친 후 곧장 한국에 돌아와서 만나지를 못했으니 근 네 달만에 만나는 셈이었다.

한동안 반가운 표정으로 창현과 인사를 나누던 세실리아가 석규를 보고는 잊고 있던 게 있었다는 듯, 움찔하고는 공손하게 배꼽 인사를 석규에게 하며 어색한 한국어로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세실리아입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갑작스러운 세실리아의 인사에 석규는 물론 창현도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이런 모습을 보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석규는 세실리아를 향해 영어로 인사를 하였다.

“반갑습니다, 세실리아 양. 저는 AA엔터테인먼트의 사장인 강석규입니다. 그리고 여기 현의 아버지이기도 하지요.”

세실리아의 눈에 놀라움이 서린다.

“현의 파파라고요?”

<Minus> 뮤직비디오를 촬영할 당시 세실리아는 석규를 본 적이 있지만 단순한 한국인 매니저로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석규가 현의 아버지일 줄이야.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놀란 표정을 짓는 세실리아를 보면서 창현이 입을 열었다.

“아버지 말이 모두 사실이니까 그렇게 놀란 표정 짓지 말라고. 그런데 그 인사는 어디서 배운 거야?”

세실리아는 창현의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그가 배꼽인사에 대해 묻는 것이란 걸 알아차리고는 대답했다.

“아, 이 인사? 한국에 오면 한국의 예절을 배워야 하지 않겠어? 그래서 배워온 거야.”

“그래? 참 장하다, 하하!”

“호호! 고마워.”

창현은 조신하게 앉아서 웃는 세실리아의 모습에 내심 혼란스러움을 느껴야만 했다.

미국에 있을 때 항상 자신에게 육탄 돌격(?)을 감행하던 세실리아였다. 그런데 오늘은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은 채 무척 조신하게 행동을 하니 내심 이 세실리아가 미국에 있던 세실리아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인기를 얻고 철이 든 걸 수도 있겠지.’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하면서 창현은 어느새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경청하고 있었다.

석규는 세실리아를 비롯하여 다른 사람들이 머물 곳에 대해서 설명하였다. 이쪽에서 초대를 한 만큼 머물 곳은 AA엔터테인먼트에서 제공하기로 한 것이다.

“그럼 출연료는…….”

숙소에 대해서 이야기를 마친 석규가 출연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세실리아가 손을 들더니 석규의 말을 제지하였다.

의문이 담긴 석규의 표정에 세실리아가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이번 한국 방문은 현을 돕기 위한 것도 있지만 관광을 하기 위한 것도 있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휴가를 즐기러 왔다가 현을 돕는 거니 출연료는 받지 않겠어요.”

석규로서는 나쁠 것 없는 제안이었다. 스타 반열에 든 세실리아에게 출연료를 지급하려면 엄청난 돈이 필요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도리라는 것이 있다. 그녀 같은 스타를 개런티 없이 출연시킨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창현이 나섰다.

“하지만 세실…….”

창현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세실리아가 창현의 말을 끊은 것이다.

“내가 정말 좋아서 하는 거니까 그러지 말아줘. 난 현 네가 아니었다면 이 정도 인기를 얻을 수 없었을 테니까. 넌 나의 은인. 알았지?”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고마워.”

워낙 강경한 모습을 보이자 창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석규를 바라보았다.

석규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락의 의미를 표했다.

“세실리아 양의 배려에 감사합니다. 그렇다면 우선 숙소로 가야겠군요. 여기 현에게 자세한 위치를 일러두었으니 안내를 해줄 것입니다.”

“현이 안내를요?”

세실리아가 눈을 빛내며 묻는다.

그러자 석규도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직접 안내를 하라고 했으니 정체를 들키지 않는 선에서 함께 하셔도 무방합니다. 물론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요.”

“아버지.”

창현이 석규를 부르자 그는 오히려 창현을 나무랐다.

“그럼 네 녀석은 멀리 직접 미국에서 온 세실리아 양을 그대로 놔둘 생각이더냐? 너도 정체를 들키지 않게 요령껏 해서 세실리아 양과 함께 식사를 하던가 하여라. 어차피 다음 날부터는 MKMF 퍼포먼스 준비로 이곳에만 있어야 할 테니까.”

석규가 그렇게까지 말하니 창현으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알겠어요.”

그에 세실리아가 손을 뻗더니 좌우로 흔들며 말했다.

“그렇다면 그 식사는 킵 해놓을게요. 퍼포먼스 연습을 한 뒤에 함께 식사하는 걸로요.”

“그래도 되겠습니까?”

석규의 물음에 세실리아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지요.”

그 말과 함께 석규가 숙소를 안내해주겠다면서 몸을 일으켰다.

그렇게 세실리아가 한국에 들어서게 되었다.


시차 적응이 필요했기에 세실리아는 하루 동안 푹 쉰 뒤 AA엔터테인먼트로 왔다. 창현과 본격적으로 퍼포먼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 위함이었다.

“일찍 왔네, 세실.”

5시에 만나기로 했지만 30분 일찍 나와서 기다리고 있던 창현은 얼마 지나지 않아 세실리아가 모습을 드러내자 반갑게 그녀를 맞이하였다.

그런 창현의 모습에 세실리아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설마 기다린 거야?”

그녀의 말에 창현이 어깨를 으쓱했다.

“난 원래 약속시간보다 조금 일찍 나오거든.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대답해줄 수 있어?”

“뭔데?”

세실리아가 궁금한 듯 되묻자, 창현은 자신이 어제부터 느껴온 의문을 꺼내들었다.

“너… 정말 세실 맞아?”

“…그게 무슨 말이야, 현? 내가 세실이 아니면 누가 세실이겠어.”

눈을 날카롭게 만들며 뾰족한 음성으로 말하는 세실리아였다.

창현은 그녀가 오해를 한 것 같아 손을 저으며 말했다.

“아니, 그게 아니고… 왠지 말하는 거나 행동하는 게 예전하고 달라서…….”

그의 해명에 세실리아는 자신이 착각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창현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게 아니라 뒤바뀐 자신의 행동에 혼란을 느낀 것이었다.

달링(?)이 그런 말을 하자 섭섭해서 저도 모르게 화를 낸 세실리아였다.

“아, 그런 거였어? 호호! 내가 예전보다 많이 조신해졌지. 그때보다 행동거지에 조금 조심하려고 생각하는 중이야.”

‘한국 남자들은 이렇게 행동하는 여자를 좋아한다고 하던데.’

…성격이 어디 갈 리가 없었다.

그렇다, 한국행이 결정된 뒤 세실리아는 한국에 대해 여러 가지 조사를 하였다.

그리고 한국 남자들이 좋아하는 여성의 모습에 대해 철저하게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였다.

그런 연구 끝에 나온 결론은 하나였다.

한국 남자들은 적당하게 내숭을 떠는 여자를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행동거지와 말이 차분하면 더욱 호감을 느낀다는 것은 옵션이었다.

세실리아는 그런 조사 내용을 바탕 삼아 철저하게 연기를 하고 있던 것이다.

그것을 모르는 창현으로서는 세실리아가 갑자기 뒤바뀐 것처럼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모습이 더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세실리아의 생각대로 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창현의 관심사가 이쪽으로 쏠리게 되면 자칫 어색한 부분이 드러나 들킬 염려가 있었기에 세실리아는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퍼포먼스는 어떻게 할 생각이야, 현? 생각해둔 것이라도 있어?”

세실리아의 물음에 창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생각해둔 게 있어.”

“어떤 건데?”

“내가 보기에는 뮤직비디오 설정대로 하면 될 것 같은데? 뮤지컬 같은 느낌으로 하는 거야. 즉석에서 연기를 하는 걸로. 세실리아 넌 가수가 아니라서 춤에 능한 편이 아니잖아. 나 또한 춤이 그렇게 뛰어난 편이 아니고. 그래서 뮤직비디오를 토대로 스토리를 전개하는 방식이 괜찮을 것 같아.”

현의 <Minus> 뮤직비디오는 무척 유명하다. 그렇기에 MKMF에서 뮤직비디오와 같은 모습을 보여주면서 퍼포먼스를 펼치게 되면 분명 뜨거운 반응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퍼포먼스만으로는 뭔가 부족했던 모양인가보다.

세실리아가 창현을 보며 물었다.

“설마 그게 끝이야? 더 생각해놓은 건 없고?”

창현이 고개를 저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생각에 다른 것은 생각해놓지 않은 상태였다.

“딱히 없는데…….”

“음!”

창현의 대답에 세실리아가 생각에 잠겨들었다.

분명 괜찮은 생각이긴 하지만 무언가 부족함이 느껴졌다.

세실리아는 창현이 세계적인 스타인만큼 이번 퍼포먼스도 무언가 특별한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보는 사람들이 아! 역시 세계적인 스타는 달라도 뭔가 다르구나! 라고 하지 않겠는가?

그녀는 더욱 특별하고 파격적이면서 대담한 퍼포먼스를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

한동안 생각에 잠겨있던 세실리아가 무언가가 떠오른 듯 탄성을 터뜨렸다.

그런 세실리아의 모습에 창현이 물었다.

“왜 그래? 뭐 좋은 거라도 생각난 거야?”

“응? 아니, 아니야.”

창현의 물음에 세실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그에 창현이 고개를 갸웃하다가 말한다.

“뭐 좋은 게 생각나면 내게 말해줘.”

“알았어.”

그러면서 고개를 돌린 세실리아는 가슴을 쓸어내린다. 하마터면 자신이 생각한 것을 창현에게 들킬 뻔하였다.

잠시 화장실을 갔다 오겠다고 하면서 연습실을 벗어난 세실리아가 방금 전 떠올린 것을 생각하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저대로 끝낸다면 너무 시시해. 그렇다면? 깜짝 퍼포먼스를 준비하면 되는 거지. 아무도 모르게… 심지어 현도 모르게 말이야…….”

중얼거리는 세실리아의 눈은 반짝이고 있었다.


AA엔터테인먼트에서는 창현과 세실리아의 합동 퍼포먼스 이야기로 시간을 보낼 때 JYP엔터테인먼트의 분위기는 극히 좋지 않았다.

석규와의 만남 이후 회사로 돌아온 진영이 원더걸스 스케줄을 담당한 실장부터 시작하여 현을 오디션 지망생으로 착각하고 데리고 온 정경주 실장까지 불러 줄줄이 깨버렸던 것이다.

“지금 착각하는 거 아냐? 아무리 인기가 있다고 해도 그렇지, 상대는 다름 아닌 세계적인 스타라고! 지훈이를 그렇게 어려워하면서 어떻게 현에게 그런 대접을 할 수 있어? 뭐라고 말이라도 좀 해봐!”

미국에 진출하여 월드스타라고 불리는 비는 JYP엔터테인먼트 직원들이 대하는 태도는 극히 공손하다.

그도 그럴 것이 비는 그 행보로 워낙 많은 집중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언론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하였기에 그렇다.

하지만 비의 이러한 행보는 극히 과장된 언론 플레이였다.

미국에서 인기를 얻었다고 하나 일각에서 인기를 얻었을 뿐, 현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였던 것이다.

그에 반해 현은 미국을 비롯하여 유럽 전역을 돌면서 투어 콘서트를 성공적으로 끝마쳤다. 인기도나 스케일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데 어찌 대하는 태도가 이리도 다르단 말인가.

그 이유는 언론에 있다.

현의 행보에 대해서는 워낙 굵직한 것들만 일부분 반영하였기에 직접 현을 본 JYP엔터테인먼트는 그가 그렇게 대단하다는 사실을 피부로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근래 들어 원더걸스가 엄청난 상승세로 인기를 얻고 있었기에 그런 것도 있다.

그것이 그들의 실책이었다.

현이 어리다는 것과, 성격이 좋다는 이야기를 믿고 너무 뻣뻣한 모습을 보인 것이다.

그로 인해 현과는 회복하기 힘든 악화일로를 걷게 되었다.

이번 일에 직접 관여하지 않은 진영으로서는 미칠 노릇이었다.

그는 언제고간에 JYP엔터테인먼트 소속의 가수들을 데리고 미국 진출을 꾀할 생각이었다. 본인이 미국 쪽 인맥을 보유하고 있지만 미국으로 진출할 경우 AA엔터테인먼트의 도움을 받으면 지금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순탄한 길을 걸어나갈 수 있다.

그것 때문에 SM엔터테인먼트도 AA엔터테인먼트에 꼼짝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기획사에게 있어 인맥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현이 활동하면서 석규가 매니저로 함께 하고 인맥을 구축한 것이 결코 헛된 짓이 아니란 이야기다.

한 번 깨진 신뢰를 다시 회복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본능보다 이성이 강한 석규의 경우 관계 회복을 꾀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사업가인 만큼 이익이 되는 한 직접적인 원한만 없다면 충분히 관계 개선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 같은 경우는?

무척 어려웠다.

10대는 이성보다는 감성에 의해 좌지우지 많이 된다.

물론 현을 일반적인 10대의 범주로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틀어진 이상 그와의 관계 개선은 무척 어렵다.

제아무리 석규를 설득한다고 하여도 현을 설득할 수 없으면 말짱 도루묵이다.

석규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현의 의견을 존중하여 그의 결정대로 행하는 경우가 많다는 걸 들어서 그렇다.

어찌 되었건 JYP엔터테인먼트에서는 현의 자존심을 정면으로 건드리는 행위를 하고야 말았다.

이 사실에 진영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걸 느끼면서 원더걸스를 사무실로 불렀다.

그의 호출에 원더걸스는 잔뜩 긴장한 안색으로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들도 바보가 아니기에 현과 회사간의 무언가 트러블이 있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평소 하염없이 높게만 보이던 실장님들이 줄줄이 깨지는 모습을 보고는 그녀들은 실감하고 있었다.

자신들과 함께 웃고 떠들던 현이 갖는 파워가 엄청나다는 것을 말이다. 평소 이야기를 할 때는 그 친근함에 느끼지 못하지만 실제로 현은 그 존재만으로 대형 기획사를 흔들리게 할 만한 파워를 가지고 있었다.

진영이 선예를 보며 물었다.

“한 가지만 물어보자. 너희들 현이랑 친해?”

그 물음에 선예는 우물쭈물하는 모습을 보였다.

막상 대답하려니 애매했다. 과연 자신들이 현이랑 친한 걸까? 분명 같이 웃고 떠들고 했으니 어느 정도 친한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대놓고 정말 친하냐? 라고 물으면 확답은 할 수 없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선예가 대답했다.

“…솔직하게 말하면 그렇게 친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알고 지내는 사이에요.”

“그래? 너희들, 이번에 무슨 변고가 일어난 건 알고 있지?”

진영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현과 무언가를 하려고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는데 뭐 때문인지 현이 화를 내고 돌아가는 바람에 트러블이 생겼다는 것 정도가 그녀들이 아는 전부였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으로 보이는 그녀들에게 진영이 무슨 이야기가 오고갔었고, 뭐 때문에 일이 벌어졌는지 설명을 해주었다.

그리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바보 같은 실장들이 욕심만 부리지 않았으면 너희들이 한단계 더 도약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을 텐데 너무 아쉽구나.”

“…….”

진영의 설명을 들은 원더걸스 멤버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속마음 같아서는 실장님들에게 한마디 해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녀들이 듣기에도 정말 절호의 찬스를 놓친 것이다.

“정말 아까운 기회를 놓쳤어. 지금에 와서 그걸 되돌리기에도 늦었고. 그래서 너희들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하고자 한다. 아니, 반드시 해야만 해.”

중요한 사실을 말하려는 듯한 진영의 모습에 원더걸스가 잔뜩 긴장한 표정을 짓는다.

그에 진영이 무거운 표정으로 그녀들에게 말한다.

“이번 MKMF에서 현을 보게 되면 반드시 사과부터 하도록 해. 지금 할 수 있는 방법 중에 최선의 방법이 이거니까. 알겠어?”

“네, 그렇게 하도록 할게요.”

진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는 원더걸스였다.

“후! 그래, 그럼 너희들만 믿으마.”

원더걸스의 대답을 듣자 표정이 조금이나마 환해지는 진영이었다.


“그러니까… 한국을 좀 둘러보고 싶다고?”

퍼포먼스를 연습하던 창현은 세실리아의 말을 듣고 표정을 찡그렸다.

고분고분하게 잘 따르던 세실리아가 갑자기 보이콧(?)을 선언하며 한국을 둘러보고 싶다고 한 것이다.

일그러진 창현의 표정을 보면서 세실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어차피 퍼포먼스는 예전에 하던 거라 많은 연습이 필요한 것도 아니잖아? 경주나 그런 곳을 가자고 하는 것도 아니고 경복궁이나 숭례문 같은데 구경 좀 하고 싶다고.”

세실리아가 이렇게 말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바로 퍼포먼스 이후에 벌어질 여파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한국에 대해 이래저래 조사를 하던 세실리아는 현의 인기가 한국에서 거의 절대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특히 창현을 열렬하게 숭배하는 여성 팬들 같은 경우 세실리아가 소름이 돋을 정도로 엄청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녀로서는 대비책을 마련해둬야만 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아무것도 해보지 못한 채 미국으로 도망치듯 출국해야 하는 사태가 발생할지도 몰랐던 것이다.

그럼에도 자신이 계획한 퍼포먼스를 포기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녀의 열의가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창현도 자신을 위해 한국까지 찾아와준 세실리아에게 보답해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자신 또한 유명인이고 세실리아 또한 유명인이지 않은가? 특히 세실리아 같은 경우 한국 사람들과 섞이면 확연하게 드러나는 금발과 착한(!) 몸매를 가지고 있기에 사람들이 금방 알아볼지도 모른다.

만약 같이 있는 모습을 찍히다가는 그대로 스캔들이다.

스캔들만큼은 절대적으로 사양하고 싶은 창현이었다.

“하지만 너랑 내가 다니면 곤란하다고. 그걸 몰라?”

“그거야 알지만…….”

‘나는 상관없는데…….’

세실리아로서는 창현과 스캔들이 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지만 말을 하지 못했다. 이 말까지 하면 창현이 어떤 모습을 보일지 눈에 선했으니 말이다.

“하아!”

세실리아가 고개를 푹 숙이자 창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해야 지금 이 상황을 슬기롭게 빠져나갈 수 있을지 대응책이 생각나질 않았던 것이다.

자신과 세실리아가 함께 나가게 되면 십중팔구 들키게 될 것이고, 그리 되면 곧장 스캔들이다. 그럼 한동안 시끄러워질 것은 분명했고, 자신 또한 적잖은 곤욕을 치르게 될 것이다.

하지만 세실리아가 구경을 하고 싶다고 하니 창현으로서는 가급적 들어주고 싶었다.

자신은 움직이지 않은 채 세실리아를 구경하게 만드는 방법.

잠시 고민에 빠져있던 창현이 손바닥을 쳤다.

“아, 그러면 되려나.”

“무슨 방법이 생각난 거야?”

창현의 모습을 본 세실리아가 눈을 빛내며 묻는다.

그에 창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이 생각한 것을 말했다.

“이건 어때?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널 안내해주는 거야. 우리 회사에 라샤라는 여가수들이 있거든. 그 누나들하고 함께 다니는 건 어때?”

창현의 말을 들은 세실리아가 눈을 빛내며 말한다.

“라샤? 나 라샤 아는데.”

“네가 어떻게 라샤를 알아? 어떻게?”

“라샤는 한국 가수잖아. 그리고 일본에서도 유명하던데?”

창현은 놀라웠다. 설마하니 세실리아가 라샤를 알고 있을 줄 몰랐던 것이다.

그는 세실리아를 보면서 말했다.

“라샤는 우리 소속사 가수야. 네가 안다니 마침 잘됐네.”

세실리아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라샤가 여기 소속 가수라고? 대단하네. 그럼 그 곡들 다 창현이 만든 거? 나 완전 좋아하는데.”

“그래? 이거 기분 좋네. 세실리아가 내가 만든 것들을 좋아할 줄이야, 하하!”

웃음을 짓는 창현.

하지만 창현은 모르고 있었다. 세실리아가 라샤를 좋아한다고 한 것을, 그리고 곡들을 좋아한다고 한 이유를 말이다.

원래 라샤를 알고 있기는 했지만 세실리아가 라샤를 딱히 좋아한다기보다는 현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모르는 척 라샤를 안다고 하고 곡들을 좋아한다고 함으로써 현의 점수를 따놓은 것이다.

실로 대담한 전략이 아닐 수 없었다.

그것도 모르는 채 창현은 세실리아가 자신이 만든 곡을 좋아해주자 웃음을 짓고 있었다.

세실리아는 속으로 웃음이 흘러나오려는 것을 참은 채 말했다.

“그럼 라샤 분들하고 같이 구경하면 되는 거야?”

“그러면 되겠네. 어차피 컴백이 며칠 안남았고, 아직 스케줄도 없는 편이라 놀고 있거든. 누나들 모두 착하니까 친절하게 대해줄 거야.”

창현의 말에 세실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창현을 보며 미소를 지어보였다.

“고마워, 현. 내가 고집 부렸는데 들어줘서.”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래. 세실 너는 날 위해서 한국까지 와줬잖아. 내가 더 고마운 걸.”

“호호! 그래도 알긴 아네? 고마우면 나한테 좀 더 잘하도록 해.”

콧대를 높이며 도도하게 말하는 세실리아였다.

그런 세실리아의 모습에 창현이 표정을 찡그렸다.

“이게 진짜.”

“어쨌든 난 현만 믿을게. 한국 구경 꼭 하고 싶었거든.”

그러면서 세실리아가 창현에게 다가간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의 볼에 입을 맞춘다.

“……!”

창현이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자 세실리아가 윙크를 한다.

“이건 내 고마움의 표시. 그럼 부탁할게.”

그 말과 함께 연습실을 벗어나는 세실리아였다.

창현은 그런 세실리아를 바라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것 참, 도대체 바뀐 건지 안 바뀐 건지 헷갈린다니까.”

세실리아의 적당한 내숭이 먹혀들고 있다는 증거였다.


연습 이후 창현은 한국의 관광 명소를 구경하고 싶다고 떼를 쓰는 세실리아를 라샤와 소개 시켜주었다.

소개를 시켜주자 한동안 서로 멀뚱히 바라보던 그녀들은 이내 창현의 주도 하에 친해지는데 성공한다.

다행이라면 세룬이 어느 정도 영어가 되기에 친해지기에 큰 무리가 없던 것이다.

세실리아는 라샤에 대해 사전 조사를 해왔기에 그녀들을 비교적 잘 알고 있었고, 라샤 또한 창현과 함께 <Minus> 뮤직비디오를 촬영한 세실리아를 잘 알고 있었다.

창현은 세실리아를 소개시켜주면서 서울 구경 좀 시켜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이것은 조금 사적인 부탁이었기에 창현은 내심 긴장을 하며 부탁을 했는데 의외로 라샤가 쉽게 부탁을 수락해주었다.

현과 JYP엔터테인먼트간에 신경전으로 인해 석규가 라샤의 국내 컴백을 노리는 듯한 모양새를 띠고 있었기에 당분간 스케줄이 잡히지 않았던 차였다. 그러던 차에 세실리아를 소개받게 되었고, 다른 곳도 아니고 서울을 구경 시켜달라는 말에 흔쾌히 수락을 한 것이다.

외국에서는 한두 살 정도 나이는 무시하고 친구를 먹었기에 세실리아는 라샤와 언니 동생 관계가 아닌 친구 관계를 맺었는데, 이로 인해 자신도 세실리아의 친구니까 우리도 친구 아니냐고 라샤에게 말했다가 창현은 한차례 목숨 위협을 받아야만 했던 에피소드가 있었다.

하루 날을 정해서 아예 세실리아에게 휴가를 주었던 창현은 다음 날 석규의 전화로 일어나게 되었다.

“무슨 일이에요, 아버지.”

-우선 인터넷이나 켜보고 말을 해봐라.

석규의 말을 들은 창현은 정신이 번쩍 들면서 곧장 컴퓨터를 켰다. 그리고 포털 사이트에 들어가 보니 아니나 다를까, 세실리아에 대한 기사와 검색어가 한가득이었다.

검색어에는 온통, 세실리아 경복궁, 세실리아, 솜사탕, 경복궁 세실리아, 라샤와 세실리아, 현 세실리아 등 세실리아에 관련된 검색어가 한가득이었다.

창현이 검색어를 보고는 본능적으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차리고는 석규에게 말했다.

“아버지, 이거 설마?”

-그래, 세실리아 양이 솜사탕 먹고 싶다고 뛰어다니다가 어떤 사람한테 발각되었더구나. 라샤 아이들이 빠르게 잘 대처를 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큰일이 날 뻔했다.

“하아! 세실…….”

창현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말 못 말리겠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들킬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했지만 설마하니 곧장 바로 들킬 줄이야.

MKMF가 시작되기 전까지 가급적이면 비밀로 간직한 채 퍼포먼스를 하려던 창현이었다. 그런데 일이 중간에 틀어지게 된 것이다.

“어떻게 하시려고요, 아버지?”

-일단 들켰으니 어쩔 수 없지 않느냐? 아침부터 기자들에게 전화가 한가득이어서 일단 세실리아가 한국에 온 경위를 설명하려고 한다. 세실리아는 2007 MKMF 퍼포먼스를 위해 한국에 왔다. 현을 도운 뒤 관광을 하는 것이 목적. 이 정도로 하려고 하는데 어떠냐?

이미 세실리아가 한국에 있다는 것을 들킨 이상 빠르게 대처하지 않으면 현과 세실리아를 엮어서 온갖 구설수를 만들어낼 것이다.

석규의 말을 들은 창현이 잠시 고민을 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겠네요. 하지만 그것만으로 잠잠해질까요?”

-거기에서 더 섣부르게 생각하게 되면 기자들이 각오를 해야겠지. 다른 연예인이면 몰라도 현의 이미지를 깎는 행위는 기자를 그만둘 각오를 하지 않고서는 못하게끔 강력하게 경고를 줄 생각이다.

석규의 태도는 완고했다. 현이 언론 플레이를 안하기에 이따금 현을 얕보는 사람들이 존재했는데, JYP의 경우도 그렇고, 석규는 연예계에 강력한 경고를 날려줄 생각이었다.

그 말을 들으면서 창현은 조금 과격하다고 생각을 했지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창현 또한 어느 정도 언론 플레이가 필요하다고 느낀 것이다.

정직하고 꾸밈없는 모습으로 다가가는 것이 최선이라고 했지만 그러한 것 때문에 오히려 배짱식으로 나오는 사람들도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다.

특히 현의 이미지 같은 것은 2년이라는 시간 동안 힘겹게 형성한 것이다. 대한민국 최고의 실력파 가수이자, 성격도 좋고 매너도 좋은 사람이란 이미지를 만들어내지 않았던가. 하지만 거기에 한 가지 더 추가 하려고 한다.

원한은 백배로 갚아준다는 식의 이미지를 말이다.

“전 아버지만 믿을게요. 세실리아의 문제도 잘 해결해주시고요.”

-그래, 알았다. 오늘 세실리아 양이 연습실에 올 거니까 뭐라고 하지 마라. 비록 정체를 들키기는 했지만 너를 위해 먼 길을 오지 않았더냐? 그녀도 많이 상심했을 테니 위로를 해줘야 한다.

“물론이죠. 아버지는 아직도 절 너무 어리게 보신다니까요, 하하!”

석규의 말에 웃음을 지으며 대답하는 창현이었다.


오늘도 약속된 시간에 연습실에 가자 세실리아가 먼저 와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창현이 연습실 안에 들어선 것을 보고 시선을 이쪽으로 하다가 창현과 눈을 마주치고는 깜짝 놀라 고개를 푹 숙인다.

풀 죽은 그녀의 모습에 창현은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으며 세실리아에게 입을 열었다.

“왜 그래? 나에게 무슨 죄라도 졌어?”

“그게 그러니까… 미안.”

창현에게 다가온 세실리아는 고개를 숙이며 사과를 했다.

관광을 한다고 고집을 부리면서 그녀는 분명히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겠다고 호언장담을 하며 나갔다.

그런데 결과는 사람들에게 들키고 비밀리에 준비하던 퍼포먼스를 들키게 되었으니 면목이 없었다.

“하아!”

고개를 숙인 세실리아를 보던 창현이 손을 들었다.

그러자 세실리아가 움찔하면서 고개를 푹 숙였다. 자신을 때리려는 것으로 착각을 했나보다.

창현은 그런 세실리아의 모습을 보더니 미소를 지은 채 그녀의 탐스러운 금발에 손을 올리고는 머리를 쓰다듬었다.

갑작스러운 창현의 행동에 잔뜩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세실리아.

그런 세실리아를 웃는 얼굴로 바라보며 창현이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다음에는 좀 주의를 하라고. 이 정도 사고는 수습할 수 있지만 그 이상은 힘들다고. 알았지?”

“으응…….”

대답을 하는 세실리아의 목소리가 불안정하게 떨렸다.

무슨 일이 있는 것인가, 하여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세실리아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이내 창현에게 웃음을 지어보이면서 아무 일도 없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창현은 그런 세실리아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했지만 그녀가 특별히 언급을 하지 않았던 터라 아무말없이 넘어갔다.

우울한 분위기를 젖혀둔 채 창현과 세실리아는 다시 퍼포먼스를 맞춰보는 분위기로 흘러갔다. 그래도 자신이 잘못한 것을 알긴 아는지 세실리아는 무척 열심히 퍼포먼스에 임했고, 창현도 열심히 하면서 서서히 몸에 익어가는 분위기였다.

AA엔터테인먼트에서 발표한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갑작스러운 세실리아의 내한 방문에 대한 내용을 발표했던 것이다.


-세실리아, MKMF에서 현과 호흡을!

-미국의 떠오르는 샛별 세실리아, 현과 함께하다!

-미국에서 볼 수 있었던 현과 세실리아의 찰떡 호흡!


온갖 떡밥을 던지면서 사람들의 욕구를 자극하는 제목으로 기사가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기사를 접한 사람들의 기대는 한껏 부풀어 오르기 시작하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실리아가 누구인지 몰랐지만 기사 내용에 그녀가 창현이 미국 활동당시 빌보드 차트 7주 연속 제패했던 곡 <Minus> 뮤직비디오에서 일약 스타 덤에 오른 인물이란 탓에 호기심을 갖게 된 것이다. 덕분에 <Minus> 뮤직비디오 조회수가 폭발적으로 오르기 시작하였고, 한국 내에서 세실리아의 인기가 급증하기 시작했다. 한국 남자들이 꿈꾸는 금발 미녀의 로망 조건을 모두 갖춘 세실리아에게 남자들이 빠져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덩달아 MKMF 또한 기대도가 급증하기 시작하였다.

작년보다 훨씬 화려해진 출연진과 요란한 기사 보도로 인해 관심이 쏠리기 시작한 것이다.

덕분에 MKMF 관계자들의 입만 좋아라 찢어질 뿐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기대 속에서 하루하루가 흘러갔고, 창현과 세실리아도 어느 정도 퍼포먼스에 익숙해질 무렵, 창현에게는 피해갈 수 없는 시험기간이 다가왔다.

중학교에서 보는 마지막 시험이었기에 창현은 평소보다 훨씬 신중한 자세로 시험에 임했고, 제 실력을 다 발휘하여 좋은 성적으로 시험을 끝마칠 수 있었다.

“후우! 시험을 모두 다 끝났구나.”

시험이 모두 끝나자 창현은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퍼포먼스를 준비하는 내내 창현은 시험을 신경 쓰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었다. 마치 목구멍에 걸린 가시처럼 신경 쓰고 싶지 않아도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내심 마음을 다스리며 시험을 의식하지 않고자 애를 썼지만 결국에는 실패였다. 결국 포기하고 시험에 열중하기는 했지만 그 덕분에 퍼포먼스 연습을 이틀이나 쉬게 되어 세실리아에게는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실은 퍼포먼스를 쉬자고 하니 세실리아가 무척 좋아했지만 말이다.

그렇게 시험이 끝나고 다음 날 마지막으로 퍼포먼스를 맞춰 보자, 마침내 MKMF 당일인 11월 17일이 되었다.

“오늘은 잘 해보자.”

MKMF 당일이 되자 창현은 굳게 주먹을 움켜쥐며 중얼거렸다.

오늘 수많은 가수들이 모이게 될 것이다. 당연히 리허설도 할 것이고, 그럼 사전에 가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창현은 오늘 가수들과 만나면서 가급적 많이 안면을 트고 친분을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지난 번 팬 미팅 때 자신의 인관 관계가 얼마나 처참한지 실감한 창현이었기에 오늘 이 기회를 발판 삼아 자신의 인간관계를 한층 개선하고 싶은 욕심이 든 것이다.

세실리아와 함께 벤을 탄 창현은 곧장 MKMF가 열리는 곳을 향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대기실로 발걸음을 옮겼는데, 움직이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받아야만 했다.

본래 현 자체가 수많은 시선을 몰고 다니는 사람인데다가 금발의 아름다운 미녀인 세실리아까지 함께 하자 모든 시선을 독점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것도 모른 채 세실리아는 창현의 옆에서 떠들기에 바빴다.

“현, 사람들이 우리를 너무 쳐다보는데?”

“세실, 네가 예뻐서 그런 거야.”

“호호! 정말?”

“응, 세실은 한국 남자들이 정말 좋아하는 타입이거든.”

창현의 친절한 설명에 세실리아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근데 왜 정작 넘어오라는 사람은 안 넘어오는 거지?”

“뭐라고?”

세실의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창현이 되묻자 세실리아가 고개를 저으며 창현에게 다가갔다.

“아니야. 그나저나 대기실이 많네.”

“가수들이 많이 참석하니까 그런 거야.”

대기실에 도착한 창현은 우선 짐을 풀어놓은 채 밖으로 나왔다.

무대 근처로 가자 벌써부터 리허설 무대를 갖는 가수들이 보였다.

창현은 그걸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런 창현에게 다가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린 창현은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어, 오랜만이에요, 누나들.”

그에게 다가오는 사람들은 다름 아닌 소녀시대였던 것이다.

창현이 반갑다는 듯 손을 흔들자, 소녀시대도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창현에게 다가온다.

“누나들 새 앨범 잘 된다면서요, 축하드려요.”

먼저 꺼낸 말은 앨범의 순항에 대해 축하하는 말이었다.

그런 창현의 말에 소녀들은 고맙다고 말을 하였다.

간단하게 말을 나누었을 때, 주현이 창현을 보면서 물었다.

“창현아 근데… 세실리아라는 분하고 무슨 퍼포먼스를 하는 거야?”

주현이 불안한 안색으로 묻자 다른 소녀들도 살짝 고개를 끄덕이더니 창현의 답을 바라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녀들이 데뷔 전날 미영에게 온 생일 선물을 보면서 파격적인 화보를 보지 않았던가. 특히 서로 껴안고 그러는 걸 보면서 이번 퍼포먼스에 어떠한 것이 나올지 가슴이 조마조마하였다.

창현은 주현의 물음에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아, 제 뮤직비디오 중에서 나오는 스토리를 간단하게 퍼포먼스로 준비했어요. 이상한 건 없으니까 안심하세요.”

많은 사람들이 보는 것인데 어찌 다른 마음을 먹고 할 수 있겠는가.

창현의 말에 소녀들은 안심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가 그렇게 말할 정도라면 무난한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현!”

그때, 창현의 이름을 부르면서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다.

순간, 창현을 비롯하여 소녀시대 전원의 고개가 목소리의 진원지로 향했다.

그곳에는 세실리아가 손을 흔들며 창현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세실리아는 창현에게 다가와서는 섭섭한 표정을 지었다.

“왜 나만 두고 간 거야. 섭섭하게.”

그런 세실을 맞이하면서 창현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아, 미안. 세실. 혼자 있는 게 편할 줄 알고 가만히 있었지.”

“난 한국에 아무런 연고도 없단 말이야. 현이 아니면 아는 사람도 없는 걸.”

“하하, 알았어. 미안해.”

그렇게 세실리아와 대화를 나누던 창현은 자신에게 집중되는 시선을 느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땀을 흘리면서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아니나 다를까, 자신을 도끼눈으로 쳐다보는 아홉 쌍의 시선이 느껴졌다.

창현은 어색하게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하하하! 그러고 보니 서로 모르는 사이네요. 여기 소개할게요. 미국에서 제 뮤직비디오 여주인공을 맡아주었고, 오늘 퍼포먼스를 함께 해줄 세실리아에요. 세실, 여기 이분들은 한국 아이돌 그룹 소녀시대야. 인사하도록 해.”

그의 말에 세실리아가 소녀시대라 불린 그룹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는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반가워요, 소녀시대분들. 왜 소녀인지 알 것 같네요. 후후!”

빠직.

세실리아의 인사에 혈관 마크가 도드라지는 두 사람이 있었다. 바로 수연과 미영이었다.

영어에 능통한 그녀들은 세실리아의 눈빛과 말투가 무엇을 뜻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기에 자신도 모르게 표정을 일그러뜨린 것이다.

세실리아의 눈빛은 명백히 자신들을 깔보는 눈빛이었다.

뭐랄까, 마치 너희들은 라이벌도 안 된다는 느낌?

하지만 그녀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세실리아는 소녀시대 내에서 최고로 키가 큰 수영보다도 키가 더 커보였고, 육감적인 몸매와 금발에 푸른 눈동자는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던 것이다.

“에… 그러니까 세실리아가 반갑다고 하네요, 하하!”

창현은 세실리아의 인사에 조금 당황한 표정을 짓다가 적절하게 수위를 맞추어 번역을 해주었다.

그러자 소녀시대 멤버들 하나하나가 세실리아와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소녀들이 먼저 말하고 창현이 세실리아에게 전달하는 형식이었다.

허나, 두 소녀만큼은 달랐다.

수연은 세실리아를 보더니 영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멀리 오셨다니 환영합니다, 세실리아. 하지만 곧 돌아가셔야 할 테니 당신에게 많은 기회가 주어지지 않겠네요.”

“응?”

뜻 모를 수연의 말에 창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나 세실리아는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차렸다.

수연의 말을 듣는 순간 세실리아의 이마에 혈관 마크가 돋아났다.

감히 자신에게 도발을 한 것이다.

뭐라고 한마디 해주고 싶었지만 현이 앞에 있는 상황이었기에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네, 반가워요.”

다분히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받는 것밖에 말이다.

그 뒤를 이어 인사를 한 것은 미영이었다.

그녀는 근래 들어 남자들의 애간장을 녹이는 백만불짜리 눈웃음을 지으며 세실리아에게 인사를 하였다.

“퍼포먼스 소문은 잘 들었어요. 저희들이 잘 지켜보고 있을 테니 멋진 퍼포먼스 부탁드릴게요.”

요컨대 우리가 두눈을 부릅 뜨고 지켜볼 테니 허튼 짓하지 말라는 말이었다.

그런 미영의 말에 세실리아의 미간이 꿈틀거렸지만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못했다.

소녀시대의 리허설 시간이 되었기에 짧은 인사와 함께 무대 위로 올라갔던 것이다.

창현은 입 꼬리가 부들부들 떨리는 세실리아의 모습을 보고는 물었다.

“왜 그래, 세실리아.”

“아무것도 아니야.”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지만 세실리아의 눈에는 독기가 서렸다.

현을 좋아하는 그녀는 소녀들의 눈빛을 보고 그녀들이 어떠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저것들 중 몇몇은 현을 좋아하는 것 같단 말이지. 오늘 지켜보라고! 좋아하는 남자가 눈앞에서 어떤 퍼포먼스를 펼쳐보일지.’

그걸 생각하니 입가에 절로 미소가 맺히는 세실리아였다.

자신의 생각대로 성사될 경우 눈앞에서 지켜보던 소녀시대 소녀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생각만 해도 기대가 되었던 것이다.

한동안 무대를 지켜보던 창현과 세실리아에게 다가오는 또 다른 소녀들이 있었다.

“응?”

무대를 지켜보던 창현이 고개를 돌리니 그곳에는 원더걸스가 창현을 보고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창현은 그런 원더걸스에게 손짓을 하였다.

“무슨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이리로 오세요.”

직접 부르자 원더걸스 멤버들이 다소 밝은 표정을 지으며 창현에게 다가온다. 그리고는 조금 전과 같이 세실리아와 먼저 인사를 시켜준다.

세실리아는 원더걸스라 밝힌 여자 그룹에서는 현을 좋아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조금 전과 전혀 다르게 환한 미소를 지은 채 인사를 하였다.

그렇게 인사를 하자, 창현은 선예를 보며 물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그러시는 거예요? 안색을 보니 인사를 하려고 온 것 같지는 않은데요.”

창현의 물음에 선예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게 그러니까… 창현이 너랑 우리 회사랑 안 좋은 일이 있었다면서……?”

“그 일인가요?”

선예의 말에 창현이 표정을 굳혔다.

그런 창현의 표정을 처음 본 원더걸스 멤버들은 당혹한 표정을 짓는다. 그녀들은 언제나 웃음을 짓는 창현의 모습만 보았기에 더욱 그러했다. 이런 표정을 짓는 창현의 모습을 처음 본 것이다.

창현은 선예를 보면서 말한다.

“그 일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할 이유가 없는 것 같네요. 한 가지 말하자면 전 개인적으로 원더걸스에게 유감이 있는 게 아니에요. 다만 절 무시한 모습을 보여준 그쪽 회사에 조금 실망을 한 것뿐이죠. 그 일은 기획사 사장님들끼리 처리할 문제인 것 같아요. 그러니 그 이야기는 하지 말도록 하죠.”

“으응…….”

확실하게 선을 긋고 말하는 창현의 모습에 선예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굳은 표정을 짓고 있던 창현이 표정을 풀며 말했다.

“그나저나 오늘 여자그룹 신인상에 유력한 후보던데요? 축하드려요.”

갑자기 돌변한 창현의 모습에 선예가 다소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아, 고, 고마워.”

적응이 어려워서 그런지 말까지 더듬는 선예였다.

그 모습에 창현은 웃음을 지었다.

“너무 어려워하지 마세요. 누나가 그러면 제가 미안하잖아요.”

“아, 아니 난 그런 게 아니라… 미안.”

창현의 타박에 어쩔 줄 몰라 하던 선예는 결국 사과를 할 뿐이었다.

그런 선예에게 창현은 그저 가볍게 미소를 지어보일 뿐이었다.

한동안 침묵이 흐르고, 어느덧 원더걸스의 리허설 무대 차례가 되었다.

창현은 그녀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파이팅입니다. 열심히 하세요.”

“응, 고마워.”

원더걸스가 무대 위로 올라가 리허설 무대를 펼치는 것을 본 창현은 그녀들의 무대가 끝나자 세실리아에게 말했다.

“이만 들어갈까?”

소녀시대가 리허설 무대를 하면서, 원더걸스가 리허설 무대를 하는 동안 창현은 여러 가수들과 인사를 나눈 상태였다. 아무래도 세실리아 같은 아름다운 금발 미녀가 있다 보니 남자 가수들이 먼저 와서 인사를 하는 실정이었다. 창현은 그들과 인사를 나누며 어느 정도 안면을 트는데 성공했다.

당초 목적을 이룬 셈이다.

세실리아는 창현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응? 현은 리허설 무대 안 해?”

“난 원래 리허설 무대 안하거든. 왜, 불안해? 그럼 리허설 무대를 하고.”

창현의 물음에 세실리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안할 수 있으면 나도 안 할래. 사실 본 무대에 오르기 전에 땀 흘리는 건 싫거든.”

세실리아의 대답에 창현이 웃음을 지었다.

“그건 나랑 비슷하네. 난 모든 힘을 끌어 모아서 한 번에 터뜨리는 게 좋더라고.”

“훗! 현은 그런 거고 난 리허설에 힘을 소모하는 걸 싫어할 뿐이라고.”

“그게 그거지 뭐. 어쨌든 대기실로 가자.”

“오케이!”

창현과 세실리아는 대기실로 향했다. 현이 리허설 무대를 서지 않는 것은 이쪽 세계에서 제법 유명했기에 별다른 말은 없었다.

대기실에서 쉬고 있던 창현은 잠시 후, MKMF가 시작한다는 말을 듣고는 무대와 멀리 떨어지지 않는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꺄아아아아아!

창현이 모습을 드러내자 관중석에 앉아있던 관중들이 소리를 질렀다. 거대하게 [Dark Star ★ 사랑해요 현] 이렇게 적혀 있는 걸로 보아 다크 스타에서 단체로 온 듯했다.

자신을 보며 함성을 질러주는 팬들에게 가볍게 미소를 지어주며 손을 흔들어 보인 창현은 여유 있는 모습으로 자리에 앉는다.

그런 창현을 보면서 세실리아가 눈을 빛냈다.

“예전엔 쑥스러워하더니 이제는 자연스럽네?”

“뭐, 자리가 사람을 만들다고 하잖아. 나도 나름 스타라고, 세실.”

“호호! 그거야 알고 있지. 그냥 바람직하게 변해서 물어보았던 것뿐이야.”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본격적으로 MKMF가 개최되기 시작했다.

화려한 오프닝과 함께 성대하기 열린 MKMF 무대를 보며 창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시아를 아우르는 스케일로 개최를 했다고 하더니 정말 그런 말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큰 스케일을 보이고 있었다.

창현의 옆에 앉은 세실리아 또한 흥미롭다는 눈을 하고 있었다.

이따금 카메라가 자신을 잡을 때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손을 흔들어주면, 그때마다 자지러지는 함성이 잠실 실내 체육관을 뒤덮고 있었다,

현의 인기가 얼마나 대단한지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그렇게 MKMF가 시작되고, 여자 신인상으로 윤하가 상을 받았다.

뒤이어 슈퍼주니어가 나와 남성 신인상 후보를 거론할 무렵, 무대 스태프가 창현을 찾아왔다.

창현은 스태프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러시죠?”

그러자 스태프가 상황을 설명하였다.

“신인상 여자 그룹 부문을 할 때 특별한 퍼포먼스가 준비 되어 있습니다. 준비를 해야 하기에…….”

“아, 그렇군요. 그러겠습니다.”

신인상 남자 그룹 부문을 하고 있어서 그쪽으로 시선이 집중된 상태였기에 창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자신을 바라보는 세실리아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시상식을 해야 해서 잠시 갔다 올 테니 얌전히 있어.”

“시상식? 뭘 하는데?”

“여자 그룹 있지? 신인상 발표를 내가 하게 되었어.”

창현의 말에 세실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창현의 인지도를 그녀도 익히 알고 있는 만큼 단순히 그가 퍼포먼스만을 할 것이라 생각하지 않던 차였다.

“너무 늦으면 안 돼.”

“늦을 이유가 뭐 있겠냐. 알아서 잘 하고 올 테니 얌전히 있기나 하셔.”

세실리아를 타박한 창현이 스태프를 따라 무대 뒤로 향했다. 곧 있으면 시작될 신인상 여자 그룹 부문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신인상 남자 그룹 부문을 차지한 것은 FT아일랜드였다.

눈물 어린 소감과 함께 신인상 남자 그룹 부문이 끝을 맺었고, 뒤이어 신인상 여자 그룹 부문에 대한 것이 시작되었다.

먼저 후보에 오른 여자 그룹들이 차례차례 소개되기 시작하였다.

소녀시대부터 시작하여 원더걸스, 카라까지 소개가 되었고, Battle Of Princess라는 문구와 함께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 것은 카라였다.

박규리, 한승연, 김성희, 니콜, 총 네 명의 멤버로 구성된 카라는 카리스마 있고, 파워풀한 컨셉으로 데뷔한 신인가수들이었다. 특히 실력파를 표방하고 있었기에 여자 그룹 신인상 부문 후보에 오른 것이다.

무대 위로 올라온 카라는 <Break It>이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털기 춤과 파워풀한 안무가 인상적이었다.

카라의 뒤를 이어 무대 위로 나온 것은 소녀시대였다.

<다시 만난 세계>가 흘러나오면서 무대 위로 나온 아홉 명의 소녀는 빠르게 진영을 갖추고는 안무를 추기 시작한다.

특히 발차기 안무를 할 때 터져 나오는 함성은 압권이었다.

소녀시대의 뒤를 이어 무대 위에 등장한 것은 원더걸스였다.

<Irony>를 부르는 그녀들을 향해 함성이 터져 나왔다. 앞서 등장한 두 그룹보다 상대적으로 큰 함성이었다.

원더걸스의 무대도 무사히 끝을 맺었다.

<Irony> MR이 꺼지면서 다른 MR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세 그룹이 무대 중앙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무대 중앙에는 계단 형식으로 3단 정도 높이의 둥근 원형이 존재하고 있었고, 그 위에는 의자 하나가 존재하고 있었다.

각 그룹에서 한 명씩 그 원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카라에서는 니콜이 위로 올라왔으며, 원더걸스에서는 선예가, 소녀시대에서는 효연이 위로 올라왔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주변 조명이 꺼지면서 어두워졌다. 어느 샌가 MR도 멎어 있었다.

그리고 무대 뒤쪽에 조명이 집중되기 시작하였다.

그곳에서 한 사람이 모습이 드러나고 있었다.

깔끔한 검은색 턱시도를 차려입은 잘생긴 소년.

바로 창현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자리에 앉아있던 창현이 어느 사이엔가 무대 위로 모습을 드러내자 관중석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꺄아아아아아아!

그런 관중들의 함성에 가볍게 미소를 지어보인 창현이 무대 중앙으로 걸어나오기 시작했다.

확연하게 다르게 느껴지는 공기층. 오늘 퍼포먼스를 위해 창현은 무려 6cm에 달하는 키높이 구두를 신은 상태였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창현의 키가 180cm를 넘어서고 있었다.

작년 3월에 창현의 키가 162cm였던 걸 감안하면 엄청난 발전이었다.

기분이 무척 좋았기에 입가에 웃음을 띤 창현이 중앙으로 나와서는 그곳에 놓인 의자에 앉는다.

그러자 곧장 흘러나오기 시작하는 MR.

그와 동시에 카라의 니콜이 창현에게 다가와 춤을 추기 시작했다.

모든 아이돌 가수가 그러하듯 몸매를 강조하기 위해 꽉 끼는 옷이나 노출도가 상당히 높은 옷을 입기 마련이다.

카라의 의상 또한 상당히 노출도가 높은 의상이었다. 어깨는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의자에 앉은 창현은 속으로 무척 당황했다. 특별한 조인트 무대를 준비했다고 해서 간단한 댄스 배틀이나 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 정도 차원을 넘어선 것이었던 것이다.

자신을 중앙에 두고 각 그룹에서 한 명씩 나와 벌이는 댄스 타임이라니.

속으로 당황한 창현이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을 보이려는 순간, 춤을 추는 니콜의 눈과 마주쳤다. 그녀의 눈은 웃고 있었다. 비웃음이나 그런 의미를 담은 것이 아니지만, 그녀의 눈은 다분히 사심이 담긴 것이 아닌, 성실하게 무대에 임하는 눈이었다.

그런 눈을 본 창현은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괜히 섣부르게 반응 할 뻔한 자신이 경솔하게 느껴졌다. 이건 무대다. 별다른 마음을 가질 필요가 없는 것이다.

어느새 니콜의 댄스가 끝나가고 있었다.

창현은 자신의 어깨를 잡고 웨이브를 하면서 물러나려는 니콜의 손을 잡았다.

“……!”

갑작스러운 창현의 행동에 니콜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뜬다.

그런 니콜의 표정을 보면서 창현은 조금 전 상황이 역전된 것처럼 느껴져 입가에 맺힌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

그녀의 손을 잡은 창현이 자신의 입으로 가져가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꺄아아아아아아!

돌발적인 창현의 행동에 관중석은 물론 지켜보던 가수들 또한 비명을 질렀다. 그만큼 창현의 행동은 파격적이었던 것이다.

얼굴이 홍시처럼 붉게 변한 니콜을 보면서 창현은 가볍게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러자 그녀는 창현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한 채 푹 숙이고는 자리로 돌아간다.

본래대로라면 남자 측이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고 있어야 하는데 조금 상황이 달라진 셈이다.

창현의 갑작스러운 행동으로 인해 한동안 소란스러웠지만 무대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다른 MR이 틀어지자 이번에는 선예가 나와서 창현에게 다가가 춤을 추기 시작하였다.

선예는 아무래도 창현과 JYP엔터테인먼트간에 일어난 일을 의식한 탓인지 니콜처럼 적극적으로 다가가 춤을 추는 행동을 보이지는 못했다.

그랬기에 창현도 그녀의 춤에 맞춰주는 행동을 보일 수 없었다.

그렇게 선예의 차례가 끝나면서 효연의 차례가 되었다.

MR이 바뀌고, 창현에게 다가온 효연은 다른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춤을 추기 시작했다.

바로 천을 흔들면서 창현에게 다가오더니 그 천으로 창현의 목을 쓰다듬듯 스치더니 춤을 추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는 천을 던져버리고는 격렬한 춤을 선보이면서 댄스 타임을 끝맺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곧이어 익숙한 팝송이 흘러나오더니 세 사람이 함께 맞춰온 듯 춤을 추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걸 본 창현이 마이크를 들고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흘러나오는 노래와 거부감 없이 섞여든 창현의 노래에 맞추어 거침없이 안무를 소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노래가 끝나갈 무렵, 창현에게 다가오더니, 각각 손을 그의 어깨에 뻗고는 안무를 끝낸다.

실내 체육관을 뒤흔드는 듯한 함성과 함께 준비한 조인트 무대가 끝을 맺었다.

무대가 끝이 나자 잠시 쉬어가는 시간과 함께 창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카라와 소녀시대, 원더걸스와 각각 눈을 마주치고 인사를 하였다. 그리고는 본격적인 시상식을 위해 마련된 단상 위로 올라갔다.

그러자 여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면서 창현을 소개하기 시작한다.

-지금 이 순간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 세계를 제패한 대한민국의 천재 뮤지션, 현을 소개합니다.

꺄아아아아아!

창현이 단상 위로 올라서면서 고개를 숙이자 함성이 터져 나왔다.

함성이 잦아들기를 기다린 창현은 서서히 함성이 잦아들자, 마이크로 고개를 가져가며 인사를 하였다.

“안녕하세요, 소개대로 지금 이 순간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 현입니다.”

넉살 좋게 입을 여는 창현의 모습에 함성이 터져 나온다.

그런 반응에 웃음을 지어보인 창현이 말을 이어나갔다.

“정말 멋진 무대 잘 봤고요, 이런 자리에 오게 되어서 무척 다행입니다. 제가 안 왔다면 이런 부러운 자리를 다른 분이 차지했을 테니까요, 하하하!”

웃음을 터뜨린 창현은 주변을 슬쩍 둘러보다가 자신을 바라보는 세실리아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저도 모르게 그녀와 마주친 시선을 회피한 창현은 전방을 향해 시선을 고정하고는 입을 열었다.

“솔직히 이번 MKMF에 나오면서 전 개인적으로 무척 고민이 많았습니다. 미국 활동을 하면서 한국에서 정식으로 앨범을 낸 적이 없으니까요. 앨범을 내지 않았으니 당연히 상도 받지 못하는데 왜 MKMF를 참가하느냐, 라고 하는 분들도 계시더라고요. 솔직히 이 점이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저 또한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가수가 아니겠습니까? 비록 이번 해에 활동을 하지 못했지만 열심히 노력을 해서 내년에는 상을 받고 싶네요. 많은 응원 부탁드리겠습니다.”

창현의 긴 말에 관중들은 환호로서 대답하였다.

미국에서 창현은 앨범을 발매했지만 그것은 미국에서 발매한 것이지 한국에서 발매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창현은 상을 받을 자격을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한국 사람들은 미국에서 발매된 창현의 앨범을 살 정도로 열광을 했지만 엄연히 다른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기에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이다.

잠시 호흡을 고른 창현이 입을 열었다.

“제가 시상식 관계자라면 세 그룹 모두에게 신인상을 드렸을 텐데 그러지 못해서 정말 아쉽고요, 모두 뛰어난 분들인데 상은 하나 밖에 없다는 점이 무척 아쉽네요.”

그러면서 창현이 2007 신인상 여자 그룹 부문이 적혀 있는 종이를 펼치기 시작했다. 마치 답안지를 확인하는 기분이었다.

종이를 펼쳐든 창현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역시나, 처음 했던 예상이 뒤바뀌지 않았다.

가볍게 목을 가다듬은 창현이 입을 열었다.

“2007 Mnet KM Music Festival 신인상 여자 그룹 부문을 발표하겠습니다. 신인상 수상자는… 축하드립니다, 원더걸스입니다.”

창현의 발표와 함께 <Irony> MR이 흘러나오면서 원더걸스가 걸어 나왔다. 전국적인 <Tell Me> 열풍을 일으킨 만큼 유감이지만 소녀시대와 카라는 원더걸스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마이크 앞에 선 원더걸스 멤버들은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물기 어린 선예의 소감을 들으면서 창현은 힐끗 소녀시대를 향해 시선을 주었다.

그녀들은 원더걸스가 하염없이 부러운 듯, 그녀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그녀들을 보면서 창현은 무대 뒤로 퇴장을 하면서 중얼거렸다.

“신인상도 중요하지만 좀 더 노력하면 될 거라 생각해요. 앞으로도 열심히 하시길.”

뭐랄까, 왠지 모르게 입맛이 씁쓸한 창현이었다.

신인상 여자 그룹 부문을 발표한 뒤 창현은 곧장 자신의 자리로 복귀하였다. 이 이후 창현에게 남은 것은 세실리아와 함께 보일 합동 퍼포먼스 밖에 없었다.

창현이 자리로 돌아오자 세실리아가 눈을 가늘게 뜬 채로 창현을 맞이하였다.

“현, 좋았어?”

그 물음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었지만 창현은 시치미를 떼며 세실리아에게 물었다.

“내가 뭘?”

“예쁜 여자들이 춤을 추고 그러니까 좋았냐고.”

창현이 능청을 떨자 대놓고 물어보는 세실리아였다.

그런 세실리아의 물음에 창현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좋고 싫고가 뭐 있겠어. 어차피 퍼포먼스의 일종이었는데. 굳이 좋고 싫고를 따진다면 좋았겠지?”

미리 준비해온 창현의 변명을 비집을 틈이 없었다.

그럴 듯하게 대답하는 창현의 모습에 세실리아가 안타까운 듯 혀를 찬다.

“칫!”

창현과 세실리아는 자리에 앉아서 여러 가수들이 준비해온 무대들을 관람하기 시작했다. 다양한 볼거리들을 많이 준비하였기에 편안하게 볼 수 있었다.

중간에 소녀시대가 이번에 이승철의 곡을 리메이크 한 새 타이틀 곡 <소녀시대>를 부르는 것도 보았다. 귀엽고 발랄한 그녀들의 모습을 보면서 창현은 혀를 내둘러야만 했다.

분명 현실에서는 저런 모습과는 전혀 다른, 달리 말하면 폭력시대, 소녀폭력단 등 여러 명칭이 떠오를 정도로 과격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말이다.

그렇게 퍼포먼스를 관람하면서 MKMF는 점점 끝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간간히 자신을 잡는 카메라를 향해 웃음을 짓고, 손을 흔들어주면서 무대를 관람하던 창현은 스태프들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는 세실리아를 불렀다.

“세실, 이제 우리 차례가 다 되어가나 봐.”

창현의 말에 세실리아가 눈을 빛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조금 지루해지려던 참인데 잘 되었네.”

“그런 말은 실례라고.”

가볍게 세실리아를 타박한 창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세실리아와 함께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창현의 퍼포먼스 순서는 당연하게도 MKMF 제일 마지막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인지도나 실력 면에서 가장 압도적인 스펙을 자랑하는 만큼, 마지막 무대를 그가 장식하기로 결정된 것이다.

무대가 점점 끝을 향해 달리자 관객들의 얼굴에도 서서히 기대감이 서리기 시작했다. 점점 현의 차례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그들 또한 체감하고 있던 것이다.

게다가 아까 전부터 간간이 잡히던 현의 모습이 조금 전부터는 전혀 잡히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현의 자리를 알고 있었기에 꼼꼼하게 체크하던 관중들은 현이 모습을 감춘 것을 보고는 그의 무대가 멀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어느새 또 하나의 무대가 끝이 났다. 그리고 화려하게 비춰지던 조명이 모두 꺼졌다.

그러자 잠실 실내 체육관에 한줄기 안내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미국에서 빌보드 차트를 제패하고, 유럽 투어 콘서트를 성공적으로 끝마친 음악의 황태자가 귀환하였습니다. 현, 그가 준비한 무대입니다. 한국에서 처음 선보이는 그의 무대, <Minus>가 시작됩니다.”

그 말이 흘러나옴과 동시에 무대 조명에 불이 들어오면서 곳곳에서 불꽃이 퍼벙! 하면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관객들은 현의 무대를 볼 수 있다는 것과, 화려한 이펙트를 눈으로 보면서 실내 체육관이 떠나가라 함성을 지르기 시작하였다.

와아아아아아아!

꺄아아아아아아!

체육관이 뒤흔들린다고 생각될 정도로 엄청난 함성이었다.

그와 함께 잔잔한 MR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무대 위에는 의자에 앉아 있는 창현의 모습이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조명이 자신을 비추자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는 창현. 그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마이크를 잡고 랩을 하기 시작했다. 오늘 퍼포먼스를 위해 편곡을 해놓은 상태였다.

음성에서 묻어나오는 감정은 물론 주변을 압도하는 듯한 카리스마는 당연코 압권이었다.

창현의 라이브를 눈앞에서 듣는 사람들은 그가 왜 세계를 제패할 수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차원이 틀리다는 말이 있다. 창현의 노래가 그러했다.

단순히 랩인데도 이 정도라면 도대체 제대로 노래에 임하게 되면 어느 정도란 말인가.

창현이 랩을 못한다는 말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랩을 잘한다고 한 적도 없었다.

그랬기에 사람들은 랩을 하는 창현의 새로운 모습에 눈을 빛내면서, 본격적인 무대의 시작을 기다리고 있었다.

랩이 끝나면서 무대 뒤에서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정열을 상징하는 붉은색 드레스를 입은 세실리아였다.

어깨 라인이 그대로 드러나고, 가슴 굴곡이 드러난 붉은색 드레스를 입은 세실리아의 모습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녀의 몸매는 신이 내렸다고 할 정도로 대단했던 것이다.

그녀는 마이크를 들고 있었다. 오늘의 합동 퍼포먼스는 창현 혼자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닌 세실리아와 함께 하는 무대였다.

무대 위로 나오면서 세실리아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가사는 영어가 아닌 한글이었다. 한글로 된 가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도 어눌한 발음이 아닌, 한국인 못지않은 유창한 발음이었다.

이는 창현의 노력이 빛을 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세실리아가 한국에 오고, 함께 무대를 준비하면서 창현이 가장 심혈을 기울인 것이 바로 세실리아의 발음 교정이었다. 노래 가사가 한글로 바뀐 만큼 세실리아가 한글로 노래를 불러야 하는데 외국인인데다가 한글에 능통하지 않은 그녀가 완벽하게 한글로 노래를 부른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던 것이다. 게다가 특유의 억양이나 그런 것이 존재했기에 창현은 그녀의 억양을 고쳐나가는 한편, 한글 발음을 고치는데 주력하였다.

다행인지 그런 노력은 빛을 발하였고, 완벽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어눌하거나 특유의 억양이 느껴지지 않는 정도로 수정을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세실리아의 노래 실력은 결코 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웬만한 가수에 비견될 정도의 가창력을 지니고 있었기에 관중들은 의외로 노래를 잘하는 세실리아의 모습에 눈을 빛내고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Minus>가 영어 버전으로 밖에 공개된 것이 없지만 그 곡을 들어본 사람들이라면 곡의 가사가 담아내고 있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대부분 알고 있다.

<Minus>는 비슷한 발음에서 시작된 말장난 형식으로, 말 한마디로 사람의 인생이 변할 수도 있다는 교훈을 담고 있다.

이번에 편곡을 하면서 창현은 <Minus>를 3인칭 시점이 아닌, 각각 남자와 여자의 1인칭 시점으로 곡을 재편성한 상태였다. 전체적인 테두리는 똑같았지만 실제로는 전혀 새로운 곡이라 할 수 있었다.

본래 채 4분도 되지 않는 곡이 6분이 넘어갈 정도로 늘어났으니 말이다.

먼저 시작한 세실리아의 파트는 처음 본 남자에게 반한 내용과, 용기를 내어 그에게 다가가는 내용이었다.

거기까지 부르자 창현의 파트가 시작되었다.

처음 파트를 끝내면서 다가간 세실리아가 창현에게 손을 내미는 모습을 보였고, 창현은 그런 세실리아의 손을 뿌리치면서 너는 Minus라고 한다. 그리고 매정하게 등을 돌리고는 자신의 길을, 자신의 꿈을 읊조리듯 중얼거리며 노래를 불러나갔다.

창현이 세실리아와 함께 노래를 부르면서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이 바로 그녀의 노래가 묻히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팬 미팅에서 경험을 했지만 실력 차이가 크다 보면 상대방 측이 일방적으로 묻혀버리는 경우가 발생한다. 창현의 경우 전문적인 가수가 아닌 세실리아가 그런 일이 발생할까 싶어 필사적으로 세실리아를 억누르는 것이 아닌, 조화롭게 이끌어나가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지금도 창현이 이렇게 부르는 것 자체가 모두 세실리아를 위한 것이었다.

창현의 파트가 끝나자, 다시 세실리아에게 넘어온다.

그녀는 창현에게 떨어져서 물기 어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그가 했던 말을 되씹고, 그에게 다가가겠다는 마음을 갖는 결심을 굳히며 노력하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럴수록 떨어져 있던 거리가 서서히 가까워지기 시작하였고, 그것은 노래속 두 남녀의 사이가 그만큼 가까워지는 것을 의미하고 있었다.

창현은 그런 세실리아의 파트를 보조하면서 자신의 노래를 소화해나가고 있었다.

관중들은 그런 두 사람의 노래를 들으면서 하염없이 빠져들고 있었다.

이색적인 세실리아의 노래와 사람의 마음속 깊이 스며드는 창현의 음색이 절묘하게 조화가 되어 노래를 듣는 사람들의 눈앞에 마치 노래 속 상황이 상상이 되는 듯했다.

어릴 적 만났던 두 사람은 어느새 성인이 되었고, 한 병원에서 마주한 순간, 남자는 자신의 말을 잘못 알아들은 어릴 적 소녀가 자신 앞에 나타난 것을 보고 놀라면서 한편으로는 감탄을 한다. 그리고 자신을 위해 그토록 노력을 기울인 그녀에게 사랑을 느낀다.

노래가 끝을 향해 가면서 창현과 세실리아도 서로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6cm 정도의 키높이 구두를 신고 있었기에 창현이 세실리아보다 약간 더 큰 상황이었다.

노래가 끝이 나면 두 사람은 살며시 포옹을 하고, 조명이 꺼지면서 퍼포먼스는 끝을 맺는다.

처음에는 저만치 떨어져 있던 두 사람이 노래가 끝을 향해 닫는 순간, 지척거리에서 서로를 마주보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노래가 끝이 나면서 창현이 세실리아를 살짝 끌어안는 순간, 실내 체육관에서는 꺄아아아아! 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목소리 톤으로 보건대 여성 뿐만 아니라 남자들의 비명 소리도 섞여 있었다. 금발 미녀의 표본을 보여주는 세실리아의 모습은 남성들의 질투를 자아내기에 부족함이 없었던 것이다.

살짝 세실리아를 껴안자 그녀가 품안으로 쏙 들어온다. 그리고 서로를 바라보면서 입가에 살짝 미소를 지으면 무대는 끝이 난다.

창현은 시선을 내려 세실리아를 바라보았다. 이제 세실리아가 창현을 바라보면 끝이다.

그런데 세실리아가 시선을 들지 않았다.

그녀가 약속된 퍼포먼스를 진행하지 않자 창현은 의아함을 느껴야만 했다.

‘응?’

그때였다.

어색하게 내려져 있던 세실리아의 양손이 창현의 양볼을 잡더니, 숙여져 있던 세실리아의 고개가 갑자기 위로 올라오기 시작한 것이다. 세실리아는 살짝 까치발을 들고 있었다.

그녀의 입술은 바로 창현의 입술을 향해 정면으로 달려들고 있었던 것이다.

예정에도 없었던, 오로지 세실리아만이 처음부터 세워놓았던 퍼포먼스를 실행에 옮긴 것이다.


갑작스러운 세실리아의 기습적인 입맞춤 시도.

원래 이야기가 되었던 퍼포먼스를 세실리아가 하지 않자 의아하게 여기던 창현은 세실리아가 갑작스레 자신의 양볼을 잡은 채 입맞춤을 시도하자 그의 눈이 급격하게 커지기 시작했다.

설마하니 세실리아가 기습적인 입맞춤을 시도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세실이 어째서?’

그녀를 바라보는 창현의 눈에는 수많은 의문이 맴돌고 있었다.

하지만 세실리아는 그런 창현의 의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눈은 웃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 눈을 보면서 창현은 처음부터 세실리아가 이것을 의도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어쩌려고 이런 짓을 한단 말인가.

공식적인 활동을 하고 있지 않지만 꾸준하게 활동을 하고 있고, 현재 현의 문제로 가장 민감한 사항이 바로 키스였다.

질문 시간에 대답한 첫 키스에 대한 사건 때문에 아직까지도 그 여파가 다 가라앉지 않은 실정인데 세실리아가 키스를 시도하는 것이다.

‘세실, 너 한국에서 쫓겨날 수도 있다고.’

자신은 원하지 않는다고 해도 자신의 팬들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 이 퍼포먼스가 성사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추후에 어떤 폭풍을 일으킬지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팠다.

점점 다가오는 세실리아의 입술을 보면서 창현의 뇌리에는 수많은 상념이 감돌았다.

분홍빛으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 세실리아의 입술.

절로 키스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는 입술이었다.

창현도 나이가 어리긴 하지만 남자는 남자다.

아름다운 여자를 보고 좋아하며, 예쁜 입술을 보면 본능적으로 충동에 휩싸이는 건 당연하다.

이대로 콱 해버릴까 싶을 정도로 세실리아는 매력적이지 않은가.

게다가 세실리아의 입장도 있고 말이다.

여기서 만약 자신이 거절을 하면 그녀의 입장이 뭐가 되겠는가.

그러니… 해도 되지 않을까?

한순간 충동에 휩싸이는 창현.

어차피 세실리아가 주도하는 것이었기에 이대로 모르는 척 가만히 있는 것도 나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코앞까지 다가온 세실리아의 입술을 보는 순간 불현 듯 수연의 얼굴이 떠오른 것이다.

그때 수연은 기습적으로 자신의 입술을 훔쳤었지.

수연을 떠올리다 보니 왠지 모르게 소녀시대 멤버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왜 그런지는 모른다.

그러나…….

지금 여기서 입맞춤을 하게 되면 한 가지 사실은 알고 있다.

아마 추후에 지긋지긋하게 시달릴 수 있을 거란 걸 말이다.

‘크, 그건 좀 싫은데.’

입맞춤을 하게 되면 사회적으로 큰 파장이 일어날 것이 분명했다.

그런 일 만큼은 사양하고 싶었다. 이러다가 한 번 이슈 메이커로 찍히게 되면 수많은 파파라치들이 자신에게 붙을 것이 분명했으니 말이다. 가뜩이나 지금 상황도 불편한데 더 늘어나면 더욱 난감해질 것이다.

결심을 굳힌 창현은 살짝 고개를 틀었다.

그러자 막 닿으려던 세실리아의 입술이 창현의 입술이 아닌, 볼에 닿게 되었다.

하지만 확실한 건, 제3자가 보기에는 마치 입맞춤을 한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자 잠실 실내 체육관은 한동안 적막이 감돌았다. 기사에 깜짝 퍼포먼스를 준비했다고 하더니 설마 이걸 의미했단 말인가?

그러나 특이한 것은 대형 스크린에서 보인 창현의 모습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저게 만약 연기라면 연기 대상을 받을 정도로 판단할 만큼 창현의 표정은 리얼했다.

그렇다는 것은 즉석 퍼포먼스라는 이야기인데, 관중들은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세실리아 또한 놀란 표정이었다.

갑작스럽게 입맞춤을 시도했는데 설마하니 창현이 피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놀란 그녀의 눈을 보며 창현도 눈짓을 보내고 있었다.

창현의 양볼을 잡고 있던 그녀의 손이 내려갔다.

그러자 창현이 검지손가락을 들어 세실리아의 이마를 툭하고 밀쳤다.

그에 세실리아가 뒤로 두 걸음 물러서며 창현을 본다.

창현은 웃음을 지으면서 그녀에게 말한다.

“빠른 진도는 아직 이르다고.”

그 말과 함께 조명이 모두 꺼졌다. 퍼포먼스의 끝을 알리는 것이었다.

퍼포먼스가 모두 끝나자 그제야 관중석에서 비명과도 같은 함성이 터져 나온다.

꺄아아아아아!

안 돼애애애애애!

관중들은 혼란스러운 기색이었다. 특히 여성팬들은 패닉에 빠져있었다.

그들이 보기에 창현과 세실리아는 방금 전 분명히 키스를 한 것처럼 보였다.

손에 가려져서 정확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관중들의 뇌리에 기사에 났던 ‘특별한 퍼포먼스’라는 내용이 오버랩 되면서 실제로 한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그런데 방금 전 창현의 말을 들어보면 하지 않은 것처럼 말을 한 것이다.

그랬기에 사람들이 혼란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정말 한 것일까, 안한 것일까.

그 사이 창현과 세실리아가 무대 아래에서 내려왔다.

창현은 세실리아를 보며 황당한 표정을 지은 채 물었다.

“무슨 짓을 하려고 한 거야, 세실.”

그 물음에 세실리아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내가 뭘? 난 힘들게 이곳까지 보러 와준 분들에게 특별한 퍼포먼스를 보여주려고 한 것뿐인데.”

방귀 뀐 놈이 성을 낸다고, 세실리아도 딱 그 짝이었다. 오히려 창현에게 당당히 말하고 있던 것이다.

그런 세실리아의 모습에 창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애초에 그녀는 미국인이었고, 입맞춤에 대해서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한국과는 다른 것이다.

“하아! 세실, 한국에서는 단순한 입맞춤도 큰 의미를 가진다고.”

“…미안해.”

세실리아는 창현을 보며 사과를 하였다. 그녀 또한 한국에 대해 어느 정도 조사를 했기에 이곳 문화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다. 한국에서 입맞춤은 미국과 그 의미가 틀리다는 것도 말이다.

그녀의 사과에 창현은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입맞춤을 한 것도 아닌데 자신이 너무 과민반응을 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아냐. 어차피 입맞춤을 한 것도 아닌데 내가 좀 심했네.”

그러면서 창현은 고개를 푹 숙인 세실리아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그러자 세실리아의 몸이 창현의 품으로 안겨들었다.

창현은 갑자기 안겨오는 세실리아의 모습에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세실리아가 이렇게 섬세했었나?’

고개를 갸웃하는 창현이었다. 세실리아가 이렇게 섬세한 성격을 지니고 있을 줄 몰랐는데 말이다.

어쨌든 그녀가 침울한 안색을 띠고 있는 것이 자신의 탓 같았기에 창현은 그녀를 안고는 토닥여주었다.

“현.”

창현의 품에 안겨있던 세실리아가 창현을 불렀다.

그녀의 부름에 창현이 시선을 아래로 하였다.

“왜, 세실.”

그때였다.

창현의 품에 얼굴을 묻고 있던 세실리아가 창현의 목 뒤로 깍지를 끼더니 그대로 입을 맞춘 것이다.

“……!”

갑작스러운 그녀의 행동에 창현은 미처 대응조차 할 수 없었다.

무대 위에서는 세실리아가 천천히 입을 맞춰왔기에 피할 틈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야 말로 전광석화와 같이 입을 맞춘 것이다.

두 사람은 한참동안 입술을 맞대고 있었다. 창현은 처음에 이어 두 번째마저도 자신의 의지가 아닌 당했다는 무력감에 힘이 쭉 빠져 어떻게 행동할지 몰라 하였고, 세실리아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당혹감으로 얼룩진 창현의 눈을 보고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하염없이 흘러갔다.

무려 삼 분 동안이나 창현과 입술을 맞대고 있던 세실리아가 목 뒤로 감고 있던 손을 풀었다. 그리고 살며시 창현에게서 떨어졌다.

창현은 여전히 혼란스러운 얼굴이었다. 세실리아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무척 당혹스러워하는 기색이었다.

세실리아는 그런 창현의 모습이 너무나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서양인이 보기에 창현의 외모는 무척 서구적이면서 한편으로는 동양인의 특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인간이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동경하는 것처럼 서양인도 동양인에 대해 어느 정도 환상을 가지고 있다. 물론 무시하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지만 세실리아는 그런 선입견은 없다. 오히려 동양인에게 있어 불모지인 미국에 와서 자신만의 음악으로 우뚝 선 현을 보고 호감을 느꼈었다.

현의 외모는 뭐랄까, 모든 사람이 호감을 느낄 수 있는 외모였다. 한눈에 딱 보면 정말 잘생겼다! 라는 느낌이 들면서 전혀 부담이 들지 않았다. 그리고 보면 볼수록 질리는 얼굴이 아니라, 보면 볼수록 새로운 매력을 발견할 수 있고, 보면 볼수록 사람들로 하여금 빠져들게 만들었다.

그만큼 매력이 있다는 이야기다.

멍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창현을 보면서 세실리아가 쿡쿡! 웃음을 지었다. 정말 자신이 예상했던 것과 한치도 틀리지 않는 반응을 보이는 창현이었다.

“놀랐어?”

“그, 그럼 놀라지 않을 리가 있겠어?”

세실리아의 물음에 버럭하다가 목소리가 줄어드는 창현이었다. 이곳은 무대 관계자가 지나다니는 길이기에 자칫 목소리를 듣고 무대 관계자가 오게 되면 난감해지는 건 창현뿐이었으니 말이다.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는 창현을 보면서 고혹적인 미소를 지어보인 세실리아가 물었다.

“기분은 어때? 좋았어?”

참으로 대담한 세실리아였다. 자기가 입맞춤을 해놓고 대놓고 좋았냐고 물으니 말이다.

남자의 입장에서 창현의 기분이 나쁠 리가 없다. 미인의 입맞춤은 그만큼 남성에게 황홀한 감정을 심어주니 말이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창현은 자신이 당했다는 것에 상당한 자괴감을 느끼고 있었다. 뭐랄까, 모든 일에서는 자신이 어느 정도 주체적으로 하고 있지만 여자 관계에 있어서는 그러지 못하고 있다고 할까.

창현이 대답을 하지 않자 세실리아가 그의 대답을 재촉했다.

“응? 좋았냐니깐.”

“나쁘지는 않았어. 하지만… 앞으로 이런 일은 없었으면 좋겠어.”

결국 세실리아의 물음에 솔직하게 대답하는 창현. 하지만 자신의 기분은 명확하게 밝혔다.

그런 창현의 말에 세실리아가 움찔한다. 그러다가 이내 얼굴에 미소를 짓는다. 그래, 창현도 남자인 만큼 자존심이 있을 테니 말이다. 세실리아는 창현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좋았다니 다행이야. 나 혼자 좋았다면 미안할 게 분명하잖아.”

그러면서 세실리아가 창현에게 다가왔다.

창현은 아무 움직임도 보이지 않은 채 세실리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약 세 걸음 정도 떨어진 곳까지 접근한 세실리아가 창현과 눈을 마주한다.

그리고 붉은 혀로 분홍빛 입술을 요염하게 핥으며 말했다.

“현의 입술 달콤했어.”

창현이 미영과 함께 찍은 CF 마지막 대사와 묘하게 일치하는 말이었다.

그 말을 들은 창현의 눈이 흔들리자 훗! 하고 웃음을 지은 세실리아가 몸을 돌린다.

“퍼포먼스를 한 대가라고 생각할게. 그럼 난 퍼포먼스도 끝냈으니 이만 호텔로 돌아간다. 다음에 봐, 현!”

“자, 잠깐!”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벗어나는 세실리아를 보며 창현이 손을 뻗었지만 그녀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사라진 세실리아의 뒷모습을 쫓으며 창현이 거칠게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후우! 나보고 어쩌란 건지.”

퍼포먼스는 성공적이었지만 창현의 마음은 복잡하기만 하였다.


복잡한 마음을 정리하고 창현이 막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길 때, 그런 창현에게 다가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발랄한 매력으로 분위기를 한껏 띄우는데 성공했던 소녀시대였다.

그녀들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창현을 발견하고는 빠르게 다가와서 그를 둘러싼다. 그리고는 다급한 목소리로 묻기 시작한다. 그 질문의 공통분모는 정말 키스를 했냐는 것이었다.

아홉 명의 소녀가 이야기를 하니 무척 소란스러웠다.

그에 안 그래도 마음이 복잡한 상황에서 옆에서 재잘재잘거리자 짜증이 난 창현이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한 사람씩 말해요, 한 사람씩.”

“…….”

짜증어린 창현의 모습에 소녀들이 순식간에 입을 다물었다. 이런 창현의 모습은 처음이었기에 다들 마음 속에서 무언가 쿵! 하고 떨어지는 충격을 느껴야만 했다.

그런 소녀들의 모습에 창현은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느꼈지만 사과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자신 또한 여유가 없기에 그런 것이다.

그러다가 창현은 주현과 시선을 마주쳤다. 그리고는 몸을 움찔 떨 수밖에 없었다.

창현과 마주친 주현의 눈에 눈물이 서려 있었던 것이다.

그런 주현의 모습에 창현은 자신도 모르게 품속에서 손수건을 꺼내고는 주현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눈물을 닦아주며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주현 누나. 저도 갑작스러워서 조금 혼란을 겪고 있었거든요.”

“정말 입맞춤 한 거야……?”

주현이 창현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예전에는 창현이 살짝 올려다 봤어야 했는데 이런 상황이 되니 조금은 감개가 무량했다.

물기 어린 주현의 물음에 창현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 아니오, 안했어요. 손에 가려져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저도 갑작스러웠던 터라 피했거든요. 그래서 입이 아니라 볼에 닿았어요. 여기 보세요.”

창현이 고개를 살짝 돌리며 볼을 가리키자 지워지기는 했지만 분홍빛이 감도는 볼이 보였다.

그런 창현의 대답에 소녀들은 조금 안심하는 기색을 보였다. 멀리서 볼 땐 영락없이 입맞춤을 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창현이 하지 않았다고 하니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쉰 것이다.

‘하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소녀들을 보며 창현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뭐랄까, 자신의 대답에 안도하는 소녀들을 보아하니 왠지 모르게 자신이 잘못했다는 느낌이 든다랄까.

창현이 소녀들을 보며 물었다.

“그런데 누나들 이거 끝나고 스케줄이 어떻게 되요?”

“우리 스케줄 없어.”

물음이 채 끝나기도 전에 수영이 발랄하게 대답한다.

창현의 물음이 무엇을 뜻하는지 간파한 것이리라.

그 대답에 창현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럼 같이 밥이나 먹으러 갈까요? 누나들 새 앨범 나온 거 보름이나 지났는데 싸인 CD도 못 받았잖아요. 물론 사기야 했지만 싸인 CD가 더 의미 있는 거 아시죠? 대신 싸인 해주시면 제가 밥 사드릴게요. 어때요?”

“그거 좋지!”

창현의 제안에 흔쾌히 응하는 소녀들이었다.

그때, 주현이 창현을 보면서 물었다.

“그런데 같이 밥 먹으러 가면 세실리아도 같이 가는 거야?”

그 물음에 밝아졌던 분위기가 싸 해졌다.

아무래도 방금 전 창현과 논란의 여지가 있는 퍼포먼스를 해서 그런 듯하다.

조금 불편하겠지.

창현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고개를 저었다.

“세실리아는 일이 있다고 먼저 가버렸어요.”

“그래? 아쉽네…….”

전혀 안 아쉬운 표정으로 주현이 말했다.

그 모습에 창현은 가볍게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그렇게 말도 많고 탈도 많을 MKMF가 끝이 났다.

무시못할 후폭풍을 예고하면서 말이다.


이슈가 되는 것은 하루도 안 지났을 때였다.

MKMF가 끝나기도 전에, 입맞춤 퍼포먼스가 벌어진지 채 한 시간도 되지 않아 인터넷 매체를 뜨겁게 달구기 시작한 것이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 실시간 검색어에는 온통 창현과 세실리아 키스신에 대한 이야기가 가득하였다.

특히 현의 여성팬들 사이에서는 난리가 났다.

팬 미팅 첫 키스 파문이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서 현의 키스 퍼포먼스가 일어났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키스 퍼포먼스를 할 당시 MKMF 대형 스크린에 드러난 창현의 표정은 놀라움이 뒤범벅 된 것이었기에 네티즌들은 이것이 예정된 퍼포먼스가 아니라, 세실리아의 단독 퍼포먼스라고 결정을 내렸다. 일각에서는 현이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이라 했지만, 이미 절정의 인기에 다다른 그가 굳이 키스 퍼포먼스로 이슈를 일으킬 이유도 없고, 무엇보다 생생하게 전달되는 표정이 연기로 보기에는 무리가 좀 있었다.

이미 그 인기가 절대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현이다.

그의 입장에서 앨범을 내기만 하여도 굳이 언론을 동원하지 않아도 알아서 언론 플레이를 해줄 것이다. 현이 갖는 그런 이미지는 이미 절대적으로 각인되어 있는 상태였고, 그의 행보 자체가 국민들을 사로잡는 수준에 이르렀으니 말이다. 굳이 키스 퍼포먼스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 모을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그러자 네티즌들, 특히 여성 네티즌들은 세실리아에 대한 집중 포격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 소위 네티즌 수사대라 불리는 사람들이 동영상 판독에 나섰다. 일부 사람들이 키스 퍼포먼스가 성공하지 못했다는 의견을 제시하고 나선 것이다.

이런 말이 불거진 이유는 퍼포먼스를 끝내면서 창현이 한 말 때문이다. ‘빠른 진도는 아직 이르다고.’ 말하던 창현의 말에 사람들은 의문을 느껴야만 했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동영상 판독을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결론은 ‘하지 않았다.’ 였다. 세실리아의 손에 가려져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입술과 입술 위치가 맞닿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서로 떨어지고 난 후의 모습을 확대해서 보니 창현의 볼에 분홍색 입술 모양 립스틱 자국이 남아 있는 것이 보였다. 즉, 입술에 한 것이 아닌 볼에다가 한 것이다.

사실 그 부분에 대한 판독이 먼저 이루어져야 했지만 성급한 네티즌들이 먼저 세실리아를 타박하고 나선 것이었다.

대부분 난리를 친 것은 여성 팬들이었다.

오히려 남자들은 현이 부럽다는 반응을 보일지언정 세실리아를 뭐라고 하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다.

이 소란으로 인해 세실리아는 한국 내에서 단숨에 유명인이 되었다. 본인이 의도한 건지는 모르나 현과의 퍼포먼스를 하고, 키스 퍼포먼스 파문으로 인해 인터넷에 도배되다시피 하여 한국 내에서 단기간에 인지도가 급상승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한국 남자들의 로망이라 불리는 금발 미녀의 조건을 그대로 갖추고 있는 세실리아는 단기간에 두터운 남성 팬 층을 거느리게 되었다.

키스 퍼포먼스가 사실이 아니란 것이 밝혀지자 파문은 빠르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하지만 몇몇 골수팬들은 키스를 안했을 뿐이지 만약 현이 피하지 않았다면 세실리아와 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말하며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고는 하였다. 그러나 그 숫자가 그리 많지 않아 파문은 금방 가라앉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11월 하순이 되자 세실리아는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인터넷 여론이 뜨겁건 말건 세실리아는 당초 계획했던 한국 관광을 즐겁게 즐겼던 터였다. 동영상 판독 또한 MKMF가 끝난 지 하루 만에 이루어진 것이기에 현의 팬들도 딱히 세실리아에게 위협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관광지 위주로 돌아다니다 보니 현의 골수 팬이라 할 수 있는 10대에서 20대 초반 사이의 여성들이 많지 않았던 것이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한국을 관광한 세실리아는 전날 창현과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었고, 공항으로 향했다.

공항에는 수많은 기자들이 모여 있었다. MKMF가 끝나고 워낙 불규칙하고 은밀하게 움직였기에 세실리아와 접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러다가 이번 기회를 통해 그녀와 간단한 인터뷰라도 하기 위해 모여든 것이다.

비행기 시간까지 상당히 남은 상태였고, 자신도 모르게 상당히 인지도가 쌓인 상태였기에 세실리아는 기자들의 질문에 흔쾌히 대답해주기로 하고는 즉석에서 기자 회견을 열게 되었다.

기자 한 명이 먼저 손을 들더니 질문을 하였다.

“이번에 한국에 오게 된 것은 MKMF에 참가가 결정된 현의 퍼포먼스를 돕기 위한 것이었습니까?”

질문이 나오자 옆에서 영어로 번역을 하여 세실리아에게 들려주었다.

그에 세실리아가 나직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영어로 대답하기 시작했다.

“지금의 인기를 얻게 된 것은 모두 현의 덕분이에요. 전 그에게 은혜를 갚고자 한국으로 온 것이랍니다. 물론 한 달이란 휴식 기간 동안 한국을 관광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어요.”

그 질문과 함께 뒤이어 여러 가지 질문이 흘러 나왔다.

대부분의 질문은 아무래도 현과 관련된 것이었다. 그리고 국내 활동 여부에 대해서도 질문하는 기자가 있었다.

어느덧 후반부로 접어들고, 기자 한 명이 손을 들더니 질문을 하였다.

“이번 MKMF에서 키스 퍼포먼스를 하였는데 실제로 입술이 닿은 것입니까?”

동영상 판독으로 안했다라는 것이 밝혀진 상태였지만 아직 당사자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아니, 현 측에서는 안했다라고 밝혔지만 세실리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기자를 만날 기회가 없어서 그런 것이지만 가급적 그녀의 입에서 직접 듣고 싶었다. 동영상으로 판독이 났다지만 실제로 입에서 흘러나오는 것과 상당한 차이가 존재하니 말이다.

그 질문을 들은 세실리아가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아쉽지만 말이죠. 전 정말로 하고 싶었는데 현이 거절을 하더라고요. 미국에서 인사의 의미와 달리 한국에서는 입맞춤도 소중하다나? 그래서 납득은 했지만 거절당한 것 같아 무척 서운했죠.”

세실리아의 말에 기자들이 부지런히 받아 적었다.

그에 기자 한 명이 손을 들더니 질문을 하였다.

“그렇다는 것은 현에게 이성적인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것입니까?”

통역해서 질문을 듣자 세실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현은 제가 달링을 삼고 싶은 1순위 남자랍니다. 하지만 현이 너무 고고해서 제가 유혹을 해도 넘어오지 않으니 기회만 보고 있지요.”

세실리아의 대답을 들은 기자들의 눈이 빛났다. 이건 특종이었다.

그렇게 기자들의 질문 타임이 모두 끝나고 세실리아가 마지막 한마디를 하였다.

“저 또한 인터넷을 해보았기에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는지 알고 있답니다. 하지만 이것을 알아두세요. 용기 있는 남자가 미녀를 차지하는 것처럼 용기 있는 여자가 미남을 차지할 수 있다는 것을요.”

짧지만 아주 강력한 여파를 남기면서 미국으로 떠난 세실리아였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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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마음을 울리는 음악 시즌2 제1화 +10 15.04.17 7,376 95 10쪽
37 ▲▲▲▲▲시즌2 시작!▲▲▲▲▲ +5 15.04.17 5,425 65 1쪽
36 마음을 울리는 음악 106장-108장 +8 15.04.16 6,414 106 230쪽
35 마음을 울리는 음악 103장-105장 +1 15.04.16 4,245 82 3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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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마음을 울리는 음악 34장-36장 +8 15.04.16 9,524 189 3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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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마음을 울리는 음악 22장-24장 +4 15.04.16 10,924 261 198쪽
7 마음을 울리는 음악 19장-21장 +4 15.04.16 11,492 270 216쪽
6 마음을 울리는 음악 16장-18장 +5 15.04.16 11,544 242 163쪽
5 마음을 울리는 음악 13장-15장 +5 15.04.16 14,536 297 237쪽
4 마음을 울리는 음악 10장-12장 +8 15.04.16 13,738 352 171쪽
3 마음을 울리는 음악 7장-9장 +10 15.04.16 14,556 362 142쪽
2 마음을 울리는 음악 4장-6장 +11 15.04.16 16,843 421 120쪽
1 마음을 울리는 음악 프롤로그-3장 +47 15.04.16 29,906 545 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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