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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번 님의 서재입니다.

마음을 울리는 음악

웹소설 > 작가연재 > 팬픽·패러디, 현대판타지

김현우
작품등록일 :
2015.04.16 13:27
최근연재일 :
2015.06.01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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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4.16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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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77쪽

마음을 울리는 음악 28장-30장

DUMMY

제28장 석규의 재혼




미국으로 돌아간 창현은 곧장 복귀하여 스케줄을 소화해나가기 시작했다.

이미 한국으로 귀국하던 시점에서 더 이상 스케줄을 잡아놓지 않았기에 미국으로 간 창현은 자잘한 스케줄을 소화해나가며 본격적인 유럽 콘서트를 준비해나간다.

유럽에서도 이미 창현은 톱스타였다.

동양인 출신으로 최초 빌보드 차트 석권!

그뿐만이 아니라 각종 광고나 화보집으로 인해 이국적인(서양인의 관점에서) 외모로 수많은 유럽 사람들의 가슴에 파문을 일으켰고, 동방예의지국이라는, 사람을 대함에 있어 무척 예의가 있다는 말에 수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들의 입장에서 창현은 무척 신선한 존재였다.

게다가 이제 열다섯 살에 불과한 천재적인 싱어송라이터! 그의 앨범은 유럽 각국의 두터운 팬층을 형성할 정도로 강렬한 마력을 담고 있어 유럽 콘서트를 한다는 말에 벌써부터 유럽 각지가 술렁일 정도였다.

그렇게 본격적으로 시작된 유럽 콘서트.

창현은 즐긴다는 마음으로 임하고 있었다.

대한민국 사람들이 언제 유럽을 가볼까.

가는 곳곳이 관광지인 유럽은 창현의 보는 시야를 넓혀주었고, 새로운 컬쳐 쇼크를 선사해주며 그의 안목을 성장시켜주고 있었다.

유럽 콘서트를 하게 되면서 창현은 Jive와 약속한 정규 앨범을 준비하기 시작했는데, 새로운 유럽의 관광지를 보는 자체만으로 새로운 곡상이 떠올라 창현에게 많은 도움이 되고 있었다.

미국을 제패하면 세계를 제패한다는 말이 사실인 것처럼 한 번도 가지 않았음에도 창현의 콘서트를 보기 위한 사람들이 넘쳐났다.

특히 현지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은 유난히 창현을 반겼는데, 그에게 대한민국의 자랑! 이라고 해주면서 응원을 하는데 무척 반갑기도 하고 고맙기도 해서 자칫 타지에서 느껴질 수 있는 외로움을 한층 덜 수 있었다.

깔끔한 무대 매너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가창력은 유럽의 수많은 사람들을 매료시켰고, 창현의 인기는 유럽 내에서도 점점 하늘을 찔러감에 따라 진정한 월드스타로 거듭나고 있었다.


그렇게 창현이 고공행진을 거듭하고 있을 무렵 석규도 한국에서 바쁘게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그동안 창현이 미국에서 활동하고, 라샤가 일본에서 활동을 했다고 하지만 사장의 결재가 필요한 업무가 상당히 쌓여있던 것이다. 게다가 창현이 월드스타로 거듭나게 되면서 그가 귀국하게 된 후를 노리는 각종 광고사들로 인해 머리가 터져나갈 지경이었다. 물밀듯 밀려오는 CF와 화보 제의를 선별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띵했다.

게다가 얼마 전부터는 라샤가 국내로 복귀함에 따라 휴식 겸하여 간간이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있는데, 라샤의 미국 진출 여부를 가늠하느라 안 그래도 아픈 머리가 한 층 더 아파왔다.

“후! 골치 아프군.”

석규가 이렇게 골머리를 앓는 이유. 그것은 바로 AA엔터테인먼트의 기형적인 구조 때문이다.

다른 기획사와 달리 AA엔터테인먼트는 현과 라샤가 전부인 작은 기획사다.

AA엔터테인먼트는 다른 기획사들이 거느리고 있는 연습생들이 하나도 없는데, 그도 그럴 것이 라샤가 데뷔하기 전만 해도 라샤는 얼굴없는 가수 현이 판매한 음반으로 근근이 버텨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석규는 AA엔터테인먼트의 미래를 라샤에게 올인하였고, 그로 인해 모든 연습생들을 떠나게 하였다.

어차피 몇 되지 않던 연습생들이었지만 그들도 지원을 제대로 해주지 않는 AA엔터테인먼트를 망설임없이 떠났다. 지금에 와서는 땅을 두들기며 슬퍼하고 있지만 말이다.

어쨌든 라샤가 대박이 터지고, 현도 월드스타가 됨에 따라 AA엔터테인먼트는 국내 대형 기획사 못지 않은 엄청난 자금을 벌어들이게 된다. 게다가 석규가 딱히 다른 사업을 하지도 않고 있었기에 엄청난 돈을 그대로 끌어안고 있었는데, 그 돈으로 연습생을 양성하는 것도 아니었다.

연습생을 뽑아서 현과 라샤의 뒤를 이을 가수를 양성해야 하지만 아직 회사를 확장할 마음이 없었기에 석규는 서서히 직원을 늘려가며 현과 라샤의 활동에 집중을 기하고 있었다.

그것이 AA엔터테인먼트의 문제였다.

바로 현과 라샤에게 회사의 모든 수입이 집중되어 있기에 자칫 잘못 선택을 하게 되면 회사 입장에서 막대한 타격을 입게 되는 것이다.

미국으로 진출하여 성공하게 되면 엄청난 이익을 얻게 되지만 만약 실패하게 되면 잃는 것이 너무 크다. 시간도 그렇고 그동안 라샤가 벌어들일 금액을 감안하면 엄청난 손해였다. 하지만 미국에서 성공하게 되면 얻는 것이 워낙 컸기에 석규는 갈등했다.

이미 미국에서 창현의 매니저를 하면서 차곡차곡 인맥을 쌓은 석규였기에 잘 연결을 하게 되면 라샤를 충분히 띄울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동양인에 대한 선입견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기에 불안감도 존재했다.

선택의 갈림길.

그것이 바로 현재 석규가 처한 입장이었다.

국내에서 착실하게 입지를 다지는 것도 나쁘지 않았기에 선택의 폭이 무척 넓어서 석규는 이걸 가지고 매일 같이 고민을 하게 된다.

연습생을 뽑아볼까 싶기도 했지만 아직 AA엔터테인먼트에서는 연습생을 체계적으로 길러내는 체제가 부족했다. 솔직히 AA엔터테인먼트에서 라샤 같은 그룹이 나온 것 자체가 기적에 가까웠다.

그러던 차에 라샤가 동남아시아를 돌며 무대를 선보이려고 떠났고, 석규는 라샤가 돌아온 뒤 향후 거취를 결정하기로 마음 먹으며 업무를 처리해나간다.

“후! 행복한 고민도 괴롭군.”

미국을 제외한, 국내와 일본, 동남아시아에서의 활동은 어디든지 성공이 거의 보장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랬기에 석규는 자신이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보름 동안 집에 들어가지 않았군.”

한가득 쌓인 빨래 더미를 보며 석규가 중얼거렸다.

업무를 처리하며 회사에 살다시피 하는 석규였기에 한국으로 귀국한 뒤 집에 들리지 않았다. 옷들도 대부분 입었기에 더 입을 옷이 없었다.

집에서 옷을 가져올 생각으로 회사를 나서는 석규. 지금 입고 있는 옷도 이틀 동안 입었기에 한시라도 빨리 집으로 향하고 싶었다.

차를 몰고 집으로 향한 석규.

주차장에 차를 주차시킨 그는 일층으로 올라와 집으로 향한다.

그가 살고 있는 곳은 창현과 함께 살고 있던 그 아파트였다.

창현은 이사를 갔지만 집은 남아 있었기에 석규가 혼자 살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가끔 현을 찾는 팬들이 오고는 하지만 그때마다 이사갔다고 친절하게 말해주며 위기를 피하곤 하는 석규였다.

“정말 오랜만인데?”

자신이 살고 있는 309동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는 석규.

익숙하다기보다 낯설게 느껴지는 집을 보며 자신이 너무 일에 열중했다는 것을 느꼈다.

1506호에 살기에 5-6라인으로 향하는 석규.

그의 눈에 노랑색 옷을 입은 여자와 노랑색 리어카가 눈에 들어왔다.

요구르트를 파나 보다.

석규는 그걸 보고는 요구르트가 땡기는 걸 느꼈다.

‘변비에는 유제품이 좋지.’

요즘 하루 종일 의자에 앉아있다 보니 속이 무척 좋지 않았기에 석규는 이참에 요구르트를 조금 사기로 마음 먹고는 그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요구르트 아줌마에게 말을 걸었다.

“아주머니, 요구르트 좀 볼 수 있을까요?”

석규의 말에 요구르트 아줌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세요. 어떤 걸 드릴까요?”

노랑색 바구니를 열자 여러 가지 요구르트가 눈에 들어왔다.

딱히 알고 있는 것도 없었기에 눈에 가는 것 몇 개를 고르자, 바구니를 꺼내 그것을 담는 요구르트 아줌마.

“5700원입니다.”

“여기 있습니다.”

석규가 만원을 내밀자 요구르트 아줌마가 ‘감사합니다.’라는 말과 함께 잔돈을 꺼내든다.

그런데 요구르트 아줌마를 보는 석규는 고개를 갸웃한다. 요구르트 아줌마의 목소리를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았던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요구르트 아줌마를 자세히 살피는 석규.

그 시선을 느꼈는지 잔돈을 챙기던 요구르트 아줌마가 흠칫하다가 석규를 본다.

순간 마주치는 두 시선.

서로의 얼굴을 확인한 두 사람은 화들짝 놀란다. 익히 알고 있던 얼굴이었던 것이다.

한동안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약 오 년 동안 보지 못했지만 틀림없었다.

석규가 요구르트 아줌마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 지선이 맞지?”

“…….”

석규의 말에 대답하지 못하는 요구르트 아줌마. 아니, 지선.

지선의 침묵에 석규는 자신이 알아 맞췄다는 것을 느꼈다.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양지선.

그녀는 다름 아닌 석규의 첫사랑이었다.

오 년 전 동창회를 끝으로 더 이상 만나지 못했는데 이런 자리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

석규는 야구르트를 판매하는 지선의 모습을 보았지만 믿을 수 없었다.

왜 아니겠는가. 오 년 전 동창회에서 만날 때만 해도 지선은 제법 부유한 남편을 만나 부족하지 않은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차려입은 옷들도 제법 값이 나가는 것들이었고, 행동이나 그런 것들로 보아 웬만한 중상층에 해당하는 가정을 꾸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지금 석규의 눈에 들어온 지선의 모습은 당장 자식의 학원비를 걱정하는 여느 평범한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오 년 전 지선이 품위 있는 귀부인이었다면 지금은 평범한 대한민국의 아주머니가 된 것이다.

“너 어쩌다가… 후! 아니다. 나랑 이야기 좀 하자.”

집으로 들어서려던 석규는 더 이상 발걸음을 옮기지 못한 채 지선을 보며 말한다. 집에 들어갔다가 나오면 이대로 지선이 사라져 있을 거란 생각이 든 것이다.

석규를 보는 순간 지선의 눈도 거세게 흔들렸다.

불과 오 년 전만 해도 당당한 자신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다. 실제로 남부럽지 않게 살아가고 있었고, 충분히 행복한 삶을 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행복은 순식간에 풍비박산이 나면서 갑자기 들이닥친 현실은 지선에게 있어 냉혹한 것이었다.

당장 내일을 걱정하며 살아가게 되었기에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되지 못했다.

그러다가 택하게 된 것이 요구르트 판매.

아는 사람을 보면 초라하다고 할 수 있는 자신의 모습이었다.

자신이 당당할 때는 상관이 없지만 부끄럽다고 여기게 되면 타인 앞에 나서는 것이 창피해진다.

지금 지선이 그러한 경우였다.

그녀는 석규의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말했다.

“나, 난… 요구르트를 팔아야 해서 안 돼. 오늘 만남은 모르는 걸로 해줘.”

그 말과 함께 석규를 지나치려 하는 지선.

그러나 석규가 그런 지선을 쉽게 놓아줄 리가 없다.

지나치려는 지선의 팔을 움켜쥔다.

그러자 지선의 몸이 석규를 향해 돌려졌고, 석규는 그런 지선을 보며 말했다.

“요구르트를 팔아야 한다고 하면 여기 있는 거 전부를 내가 사도록 하지. 근처로 가서 이야기 좀 하자.”

“…그래.”

강렬한 눈빛을 담은 석규의 말에 지선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요구르트가 담긴 리어카를 놔둔 채 석규와 지선은 근처 커피숍에 와 있는 상태였다.

간단하게 커피를 주문한 뒤 나온 커피를 들고 온 석규는 노랑색 모자를 벗고 있는 지선에게 커피를 내밀었다.

모자를 벗은 지선은 이제 갓 삼십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젊은 외모를 하고 있었다.

석규와 같은 학교를 다니던 시절부터 제법 앳된 외모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제 사십대 초반인 걸 감안하면 무척 젊어 보인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석규의 눈에는 지선이 그동안 무척 고생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화장을 했지만 얼굴 전체에서 피곤함이 느껴졌다.

석규는 지선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각자 결혼을 한 뒤 서로 친한 친구 관계로 지내기도 했다. 요 오 년 동안 기획사를 운영하면서 이래저래 바빴던 까닭에 연락을 취하지 못했지만 이렇게 변해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커피 한 모금을 마신 석규가 지선을 보며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동안?”

강경한 어조로 묻는다. 아무래도 지선이 밝히고 싶어하지 않는 것 같았지만 석규는 그 연유를 알고 싶었다.

지선은 석규에게 있어 첫사랑이기도 하지만 우상이기도 하였다.

그런 것 있지 않은가?

호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잘되길 바라는 마음.

학교를 다닐 적 지선은 석규에게 우상과도 같은 존재였기에 그녀가 행복하길 바랐고, 늘 웃기를 바랐다.

그런데 오늘처럼 초라한 모습을 보게 되자 그 이유를 알고 싶었다. 지선에게 다소 상처가 될 수 있는 것이었지만 석규는 꼭 듣고 자신이 도움을 줄 수 있다면 도움을 주고 싶었다.

“그게…….”

선뜻 말하길 꺼리는 지선.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의 치부라 할 수 있는 이야기를 쉽게 꺼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내가 도움을 주고 싶어서 그런 거야. 지선아, 우리가 알고 지낸 지가 벌써 삼십 년이 다 되어 간다. 졸업하고, 사회에 나온 뒤에도 가끔 고민 상담을 해줬잖아? 네게 고충이 있는 것 같으니 속 시원하게 털어놔봐.”

석규가 이렇게까지 말하니 더 이상 뺄 수가 없었다.

한동안 머뭇거리던 지선은 결심을 굳힌 듯, 입을 열었다.

“응. 그랬지. 실은…….”

지선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그녀의 남편은 제법 잘 나가는 회사를 운영하는 사장이었다. 중소 규모였지만 회사가 알찼기에 꾸준히 상승세를 보이며 성장에 성장을 거듭하였고, 버는 돈도 많았기에 불편함이 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슬하에는 딸 하나가 있었는데, 제법 늦둥이였기에 귀여워해주며 행복한 날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행복에 파국이 찾아왔다. 바로 남편의 회사가 부도가 난 것이다.

상식적으로 회사가 부도로 이어질 수 없는 상황이었다.

갑작스러운 소식에 남편은 이리저리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상황을 알아보기 바빴다.

나중에 되어서야 알 수 있었던 것.

바로 대기업에서 오래 전부터 남편의 회사에 눈독을 들이고 은밀하게 물밑작업을 해왔던 것이다.

행복했던 가정이 깨져버리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회사가 부도가 나면서 남은 것은 엄청난 빚이었다.

빚을 갚기 위해 백방의 노력을 아끼지 않았지만 남은 빚이 문제였다.

지선은 빚을 갚기 위해 여러 일들을 전전하며 돈을 벌어갔다. 그에 반해 지선의 남편은 날이 갈수록 폐인이 되어 가고만 있었다.

그로 인해 일어나는 불화.

두 사람의 언성은 날이 갈수록 높아져만 갔고, 결국 이혼을 하게 된다. 돈이 문제였던 것이다.

딸을 데리고 혼자 사회에 놓이게 된 지선은 딸을 번듯하게 키우기 위해 각종 일들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정말 각종 일들은 다해봤다고 할 정도로 지선은 열심히 일했다.

하지만 학업에 드는 돈이 무척 많고 여자가 벌 수 있는 돈은 그리 많지 않았다.

생활비와 딸의 뒷바라지를 위해 열심히 일을 하다 보니 날이 갈수록 힘에 부치는 걸 느끼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얼마 전에 알게 된 사실.

바로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이었다.

충격적인 사실이었지만 지선은 담담했다. 뭐랄까, 세상에 나와서 정말 고생을 하게 되니 눈물도 말라버렸다랄까?

불과 삼 년이었다. 남편과 이혼을 한 뒤 그 정도 시간이 흐른 것이다. 하지만 그 삼 년은 지선에게 있어 냉혹한 사회를 절감하게 하는 시간이었다. 그동안 얼마나 편하게 살아왔는지 알 수 있었으니까.

부모님의 도움을 조금씩 받고 있지만 형편이 넉넉한 것도 아니었기에 지선은 알게 모르게 힘에 부치는 상황이었다.

지선의 이야기를 들은 석규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 오 년 동안 지선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후! 그랬구나. 힘들었겠어.”

“…….”

석규의 말에 지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석규의 말을 듣고 있으려니 눈물이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녀가 사회의 냉혹함을 알게 된 것은 바로 친구들의 태도 변화였다.

남편 사업이 부도가 나면서 그 전까지만 해도 더없이 살갑게 굴던 친구들이 모두 등을 돌리고 지선의 어려움을 외면하였다.

그때 얼마나 서러웠던가. 만약 석규 같이 자신을 걱정해주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었더라면 큰 위안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한 감정들이 복받치는지 말없이 눈물을 흘리는 지선을 보면서 석규는 가슴이 아파왔다.

설마 지선이 이런 일들을 겪었을 줄이야.

석규는 지선을 도와주고 싶었다.

“지선아. 내가 힘닿는 데까지 도와줄 테니 걱정하지마.”

“하지만 석규 너도 힘들잖아…….”

지선은 석규를 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녀가 그렇게 판단하는 이유는 바로 석규의 복장을 보았기에 그런 것이다.

며칠 동안 입었기에 여기저기 구겨진 양복은 다른 사람이 보기에 썩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았다.

지선의 시선이 자신의 옷차림에 머물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석규는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하하! 나는 괜찮으니 부담 갖지 말아. 친구에게 이 정도 도움을 주는 건 나도 별로 힘든 건 아니니까. 알았지?”

앓는 소리를 했지만 석규의 말은 지선에게 있어 한줄기 빛과도 같았다.

“…응. 정말 고마워, 석규야.”

“이래 보여도 회사 사장이라고. 그러니 너무 부담 가질 필요 없어. 친구 좋다는 말이 있잖아, 안 그래?”

가슴을 떵떵 치며 말하는 석규의 모습에 지선이 웃음을 지었다.

뭐랄까, 오랜만에 만나서 그런 걸까. 아니면 자신을 따뜻하게 대해줘서 그런 걸까.

가슴이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지선의 미소를 보며 석규도 웃음을 지어보였다.

웃음을 짓는 그녀의 모습을 보니 불편했던 마음이 가시는 듯했다.


AA엔터테인먼트 직원들은 요즘 죽을 맛이었다.

갑자기 안 그러다가 사장인 석규가 어느 날부턴가 매일 같이 요플레와 요구르트를 사오기 시작한 것이다.

의자에 오래 앉아있는 직원들을 위해서라고 말하기는 하는데 이게 참 난감했다.

사오는 양이 워낙 많아서 한 사람에게 배당되는 양이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AA엔터테인먼트의 직원은 열두 명이다. 그런 직원들에게 배당되는 요구르트는 다섯 개, 요플레는 세 개였다.

처음에는 간식이라고, 사장님 최고라고 좋아하던 직원들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얼굴이 극도로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맛에 익숙해지니 매일 먹는 요구르트와 요플레가 고역이었다.

게다가 유제품이다 보니 먹으면 장기능이 활성화 되고, 그 결과는 결국… AA엔터테인먼트 화장실은 쉴 틈도 없이 사람들이 들락날락거리게 되었다.

AA엔터테인먼트 직원들은 결국 사장님의 이러한 행동을 만류하기 위해 윤진호 실장에게 부탁을 한다. 제발 좀 사장님이 요구르트와 요플레 좀 그만 사오게 해달라고 말이다. 먹기가 부담스러워서 조금씩 집에 가져가다보니 벌써 한가득이라고 울상을 짓는 직원들의 모습에 윤진호 실장은 차마 그런 직원들의 청원을 거절할 수 없었다.

‘평소에는 실장 취급도 안 해주더니 이럴 때만 실장 취급이야.’

단합하여 자신에게 부탁하는 터라 어쩔 수 없이 수락을 했지만 윤진호는 직원들의 행동에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평소에는 실장 취급도 안 해주면서 오늘 같은 날에만 하늘과도 같은 실장님이라고 대우를 해주니 말이다.

그렇게 말해도 윤진호 본인도 내심 석규가 사오는 유제품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기에 해결책을 마련해야만 했다.

이미 몇 번을 말했지만 석규는 듣지 않았다. 제발 직원들 부탁 좀 들어달라고 했지만 그럴 때마다 석규는 먹을 사람만 먹고 먹지 않을 사람은 먹지 말라고 하였다. 하지만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것들을 보노라면 도저히 거절할 수 없었고, 숫자에 맞게 나누다 보니 직원들은 매일 같이 요구르트와 요플레를 섭취하는 처지에 처하게 된 것이다.

“요구르트 파는 아줌마랑 바람이라도 난 건가. 두고 봅시다, 사장님.”

결국 윤진호는 최후의 방법을 택하고야 만다.


창현의 유럽 콘서트는 연일 대박행진을 이어나가며 유럽 각지에 Dark Star라는 이름을 알려나가고 있었다.

영국을 시작으로, 스페인, 프랑스, 이탈리아, 스위스, 독일 등 수많은 유럽 국가를 돌며 콘서트를 연 창현은 유럽에 Dar Star라는 이름으로 절대적인 탑 아티스트로 우뚝 서며 자신의 음악성을 세계에 널리 알리고 있었다.

길가에 있는 건물 하나하나가 수백 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는 유럽답게 창현이 콘서트를 다니는 곳들은 세계적인 관광지이자 긴 역사를 지닌 유적들이었다.

이국적인 유럽들을 둘러보며 창현은 한층 넓은 시야를 갖게 되었고, 그런 분위기 속에서 미국에 발매할 앨범 곡들을 하나하나 준비해나가고 있었다.

어느덧 유럽 콘서트는 막바지에 이른 상태였고, 곧 있으면 미국으로 돌아가 앨범을 낸 뒤 한국으로 귀국할 수 있다는 생각에 창현은 무척 들뜬 상태였다.

호텔 방에서 부지런히 가사를 적고 있던 창현은 갑자기 핸드폰이 울리자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누구 전화지?”

외국에 나가 있는 탓에 창현에게 전화를 하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이틀에 한 번씩 오는 석규의 안부 전화와 가끔씩 오는 라샤 누나들의 전화가 전부랄까? 그런데 번호를 보니 모르는 번호였다.

창현은 고개를 갸웃하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창현이? 나다, 윤실장.

창현에게 전화를 건 것은 바로 윤진호였다.

“아, 윤실장님. 무슨 일로 전화를 하신 거예요?”

자신에게 전화를 한 사람이 윤진호란 사실에 약간 놀라면서 의외의 표정을 짓는 창현.

그도 그럴 것이 일이 연관되어 있다면 석규가 사전에 연락을 해줬을 텐데 윤진호가 먼저 전화를 걸어왔으니 창현으로서는 의아할 수밖에 없던 것이다.

그런 창현의 물음에 윤진호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후우! 창현아, 우리 좀 살려줘라. 사장님이 우리를 죽이려 드신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윤진호의 말에 깜짝 놀라며 말하는 창현.

석규가 직원들을 죽이려 하다니?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이었다.

창현의 재촉에 윤진호가 간략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사장님이 요즘 매일 요구르트와 요플레 같은 걸 사오는데… 아무리 말려도 계속 사서 오신다. 직원들 먹으라고 사오는 걸 버릴 수도 없고, 아무래도 요구르트를 파는 사람하고 무슨 인연이 닿은 건지 직원들이 요구르트만 봐도 경기를 일으킨다. 부탁이니 창현이 네가 좀 사장님께 전화해서 우리를 도와주면 안 될까?

조금 황당한 말이었다.

석규가 매일같이 유제품 사오는 것을 유럽에 있는 자신이 말려달라니.

내심 어이가 없었지만 창현은 무슨 석규에게 무슨 사연이 있는 것 같았기에 승낙을 하였다.

“알았어요. 제가 아버지에게 전화를 해보고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도록 할게요.”

-고맙다, 정말. 그럼 부탁하마.

그 말과 함께 통화는 끊어졌다.

핸드폰을 바라보며 창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정말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일단 전화를 해봐야겠다.”

창현은 석규에게 통화를 시도했다.


석규는 요즘 하루하루가 너무나 즐거웠다.

지선에게 도움을 줄 방도가 없을까 생각하던 차에 기막힌 방법이 생각난 것이다.

바로 지선이 파는 유제품들을 모두 구입하여 직원들에게 나눠주는 것이었다.

자신은 지선을 도울 수 있기에 좋고, 직원들에게 건강을 걱정해주는 멋진 사장(?)으로 추앙받을 수 있지 않은가. 게다가 지선 또한 안정적인 공급처가 생기게 되니 손해보는 것이 없었다.

요즘 들어 몇몇 직원들이 죽는 소리를 하지만 그것을 간단하게 행복에 겨운 소리라 일축한 석규는 회사 일이 적은 날에는 지선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는 하였다.

지선은 지선 나름대로 자신에게 도움을 주는 석규의 도움이 처음에는 무척 부담스러웠지만 ‘내가 그 정도 능력도 없을 줄 알아?’ 라고 말하는 석규의 말에 아무 반박도 하지 못하고 말았다. 남자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를 함부로 잡고 넘어질 수 없던 것이다.

덕분에 지선은 꾸준한 판매고를 올릴 수 있었고, 여기저기 분주하게 움직일 필요가 없어졌기에 석규에게 너무나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처음 봤을 때는 구겨진 양복을 입고 있었기에 회사가 잘 안 나가는 줄 알았는데 요즘 만날 때마다 번듯한 복장을 하고 있어서 정말 사장님처럼 보였다. 게다가 매일 도움을 주는 모습을 떠올리니, 석규를 만날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 느끼는 지선이었다.

석규와 지선은 종종 만남을 가지면서 자기가 갖고 있던 힘들었던 일들이나 고민 등을 이야기 하면서 친분을 쌓아나가고 있었다.

오늘도 직원들에게 지선의 손길이 닿은(?) 유제품을 나눠준 석규는 업무를 모두 처리한 뒤 회사를 나섰다. 지선과 만나기로 약속을 한 탓이다.

회사를 나와 약속 장소로 향하던 석규는 핸드폰이 울리는 걸 알아차렸다. 번호를 확인하니 창현에게서 온 전화였다.

갑작스러운 창현의 전화에 고개를 갸웃하던 석규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창현이 네가 웬일이냐?”

-아버지? 아, 제가 전화 드린 이유는 물어볼 게 있어서요.

물어볼 것?

순간 석규의 고개가 갸웃했다. 물어볼 게 있다면 어제 전화에서 물어봤을 텐데 말이다. 갑자기 생긴 궁금증인 듯했다.

“그래, 뭔데 그러냐?”

석규의 승낙에 창현은 잠시 침묵을 하는 듯하더니 말했다.

-…요즘 만나는 여자랑 잘 되세요?

“……!”

창현의 말에 석규는 순간 돌이 되고 말았다.

도대체 그걸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

석규는 자신이 지선과 만나고 있는 사실을 창현이 알고 있자 너무나 놀라고 말았다.

아무도 모르는 일을 창현은 알고 있던 것이다.

수십 가지 생각에 석규의 뇌리에 스쳐지나갔다.

한동안 침묵하던 석규. 힘겹게 입을 연다.

“…어떻게 알고 있던 거냐? 누가 말해준 것이냐?”

너무나 무겁게 물어보는 석규.

하지만 들려온 대답은 황당 그 자체였다.

-그냥 장난으로 물어본 건데…….

“…….”

본의 아니게 유도 심문에 넘어가버린 셈이다.

창현의 대답을 들은 석규는 다시 한 번 돌이 되고야 말았다.

자신의 말에 낚여 사태를 실토하게 되자 창현은 석규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만나는 여자라니. 도대체 누구에요, 아버지?

“그게 그러니까…….”

잠시 말하기를 머뭇거리던 석규. 그러다 이내 결심을 굳힌 듯 창현에게 이야기를 시작한다.

지금 만나는 여자가 자신의 첫사랑이라는 것. 그리고 그 여자가 힘겨운 처지에 처하게 되었고, 처음에는 동정심으로, 그러다가 지금에 와서는 좋아하게 되었다는 것까지 말이다.

창현이 묻기 전까지 자신의 감정에 대해 명확하게 구분하지 못하던 석규는 말을 하면서 스스로 모든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자신이 정말 지선을 좋아했다는 것. 그리고 지금 어려운 처지에 놓인 그녀를 감싸 안아 주고 싶어 한다는 것까지 말이다.

-…….

창현은 그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석규는 그런 창현의 침묵을 내심 긴장하며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석규의 부인이자 창현의 어머니였던 선영은 정말 누가 봐도 반할 만한 여성이었다.

외모가 화려하게 아름답거나 그런 것이 아니었다. 선영은 수수하지만 볼수록 사람을 매료시키는 수수한 아름다움을 가진 여인이었고, 무엇보다 아름다웠던 것은 고운 심성이었다.

창현이 어릴 적 얼마나 선영을 따랐던가. 그가 어릴 적 매번 창현에게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라고 물으면 망설임 없이 엄마가 좋아! 라고 하던 것이 바로 창현이었다. 그만큼 창현은 선영을 따르고 좋아했다.

한때 창현이 극도로 어두운 기색을 띤 적이 있는데, 그것도 다 선영이 교통사고를 당한 후였다.

다행히 예전 같은 밝음을 되찾아 종종 석규에게 재혼하라고 농담을 던지던 창현이었지만 그것이 진짜 상황으로 들이닥칠 줄은 석규도 몰랐고 창현도 몰랐다.

아직 창현의 마음 속에 선영의 그림자가 얼마나 남아 있는 것일까.

석규도 선영이 불운의 교통사고를 당하게 되자 한동안 무척 괴로워하였다. 그 괴로움을 잊고자 회사 일에 몰두하게 되었고, 그야 말로 정신없이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것이 다 선영이 없는 현실을 잊고자 했던 나날이었다.

지금 가슴 속에 선영의 그림자가 아릿하게 남아 있지만 이따금 홀로 집에 들어설 때면 선영의 그림자보다 외롭다는 느낌이 더 강했다.

부인을 잃은 지 육 년이 되는 지금, 석규가 느끼는 감정이었다.

긴 침묵이 마침내 깨졌다.

창현이 무겁게 입을 연 것이다.

-저는…….

바짝 긴장하는 석규. 과연 무슨 말이 나올지 가슴이 쿵쾅거렸다.

그때, 창현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인 석규의 예상과 판이하게 다른 말이었다.

갑자기 창현의 어투가 밝아진 것이다.

-새어머니가 생긴다면 당연히 환영할 일이죠. 하하! 그래, 어디까지 이야기가 된 거예요?

“어, 어? 그, 그러니까…….”

예상과 전혀 다른 창현의 말에 당황하는 석규.

그런 석규의 모습이 연상되었는지 창현이 웃음을 터뜨린다.

-하하! 아버지 지금 표정 딱 연상 되요. 전 걱정하지 마세요. 제 가슴 속에 어머니의 그림자가 남아 있으면 그걸로 족하니까요. 아, 물론 새어머니를 안 모신다는 게 아니라, 제 어머니를 잊지 않겠다는 말이에요. 아버지가 그렇게 슬퍼하셨고, 제가 슬퍼했으니 어머니도 뭐라고 하시지 않을 거예요.

“고, 고맙다, 창현아.”

자신을 배려해주는 창현의 말에 순간 마음이 뭉클해지는 석규.

할 만큼 했다! 라고 말하는 창현의 말은 다분히 위로적이었지만 석규에게 이보다 더 힘이 되는 말은 없었다.

창현은 그런 석규의 대답에 연신 되물었다.

-아니, 그건 됐고, 어디까지 이야기를 하셨냐니까요? 설마 벌써 식장까지 잡으신 건 아니죠?

“그럴 리가 있겠느냐? 아직 만나는 수준이다. 게다가 지선이가 나에 대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도 잘 모르겠고…….”

-호오! 지선 아주머니라… 제 새어머니 될 분의 이름이죠?

좋은 정보를 얻었다는 듯 말하는 창현의 어투에 석규는 순간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

-하하! 죄송해요, 아버지. 제가 장난이 좀 지나쳤네요. 아버지가 그렇게 말씀하실 정도면 여러 번 만났다는 이야기인데 여자는 마음 없는 남자랑 자주 만나지 않아요. 그럴 땐 남자답게 밀어붙이세요! 아이고, 스케줄 시간이네요. 이동 중에 잠깐 전화했거든요. 그럼 전 이만 끊을게요. 그거, 새어머니랑 결혼하시는 건 저 한국 갈 때까지 하면 안되요. 아셨죠?

석규의 침묵이 자신의 장난 때문인 줄 알았는지 서둘러 말한 창현은 스케줄이 있는지 그 말을 끝으로 통화를 끊었다.

창현의 말을 듣고 한동안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짓는 석규.

이내 피식 웃음을 짓는다.

“허, 이것 참. 아직 연애도 해보지 못한 새파란 녀석한테 충고를 듣다니. 녀석아, 내가 이래보여도 너보다 연애는 많이 해봤다.”

괜히 창현의 충고로 인해 자신이 숙맥처럼 느껴졌기에 자기 위로처럼 중얼거리는 석규였다.

그래도 창현의 말은 적어도 석규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자신의 마음을 알고, 결심을 하게 되었으니까.

석규의 입에 흐릿한 미소가 맺혔다.


약속 장소는 인근 커피 숍이었다.

안으로 들어선 석규는 검은색 투피스를 차려입고 있는 지선을 발견하고 미소를 지으며 다가갔다.

“지선아.”

앉아서 기다리던 지선도 석규를 발견하자 미소를 지어 보인다.

“석규야, 왔어? 곧 올 것 같아서 커피 미리 주문했어.”

“그래, 잘했어.”

지선을 볼 때면 미소가 절로 흘러나오는 석규였다.

중학교를 졸업한 것이 벌써 26년이 흘렀기에 그때의 모습을 찾아보기가 힘들었지만, 희미하게 남은 그 당시의 모습과 성격은 석규로 하여금 중학생 시절을 떠올리게 해주었다.

잠시 후, 커피가 나왔다는 말에 석규가 커피를 가지고 왔고, 추가로 치즈 케이크까지 두 조각을 샀다.

치크 케이크와 커피를 마시며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 어느새 자연스러운 일상 이야기까지 하게 된 두 사람은 자식 이야기까지 도달하게 된다.

지선은 딸이 영특하다느니 싹싹하다느니 칭찬을 했지만 석규는 오히려 그 반대. 나이에 맞지 않게 능글맞다느니, 너무 조숙하다느니 죄다 험담이었다.

그런 석규의 이야기가 재미있었는지 지선의 입가에는 연신 미소가 떠나질 않았고, 듣는 사람이 재미있게 들어주니 석규도 흥이 나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렇게 분위기가 무르익어갈 무렵, 석규가 지선을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선아,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

갑작스러운 석규의 물음에 당혹한 표정을 지어보이는 지선. 하지만 석규의 표정이 워낙 진지했다.

그에 지선은 당황하면서도 자신의 생각을 말한다.

“나, 남자로서 능력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여자를 배려해주는 것도 있고…….”

솔직히 능력이 있다는 건 아직 구체적으로 확인을 해서 모른다. 하지만 매번 유제품을 구매해주고, 옷차림이나 그런 것이 정말 능력이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다음부터 나열하는 것은 지선이 느끼는 점들이었다.

지선의 말을 듣는 석규의 표정이 밝아졌다. 말 하나하나가 모두 칭찬 일색이기에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물론 지선이 자신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밝은 표정으로 한동안 지선을 바라보던 석규는 지선의 말이 끝나자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한다.

“지선아, 그럼…….”

말을 꺼내려는 석규. 하지만 뒤에 말을 이어나가려니 가슴이 쿵쾅쿵쾅거린다.

‘후우! 진정하고.’

가볍게 숨을 몰아쉬며 호흡을 고른 석규는 두눈 딱 감고 지선에게 말한다.

“나랑 정식으로 결혼하지 않을래?”

“……!”

난데없는 청혼!

석규의 말에 지선은 순간 얼빠진 표정을 지었고, 그것은 석규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가 말하려던 것은 이것이 아니었다. 차근차근 진도를 밟아나가면서 자연스럽게 청혼을 하려고 했는데. 아까 창현과 통화하던 것을 떠올리며 말하다 보니 교제가 아닌 결혼이란 단어가 튀어나온 것이다.

‘교제하자고 말하려 했는데…….’

석규의 얼굴에 난감한 기색이 서렸다./

그저 난감할 뿐인 석규에 비해 지선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표정이었다.

지선 또한 석규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 중학생 때 석규가 지선을 좋아했지만 지선 또한 석규를 좋아하고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그 시절 워낙 부끄러움을 탔기에 서로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결국 마음을 고백하지는 못했다.

그 시절 그런 감정 때문일까?

성인이 되고 어느덧 중년에 접어들었지만 마주하게 되면 그때 그 시절 모습이 나오는 듯했다.

호감을 가지고 있지만 결혼은 이르다. 이제 만난지 삼주 정도 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 결혼은 이른 듯했다.

물론 지선도 석규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지만 아직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다 문득 석규의 얼굴을 본 지선은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결혼하자고 한 석규가 정작 지선 본인보다 더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던 것이다.

그 모습에 지선은 맥이 탁 풀렸다. 석규와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고 의지가 되고는 했는데 이런 감정이 지속된다면 정말 결혼을 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솔직히… 석규가 아까웠으면 아까웠지 자신에게는 손해가 아니었다. 적어도… 제3자의 시선을 빌린다면 말이다.

그러나 혼자 결정할 수 없는 것이, 딸의 의견도 들어봐야 한다.

지선은 석규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제안은 고마워. 하지만 딸이랑 이야기를 해봐야 할 것 같아.”

적어도 거절은 아니었다.

그 말에 석규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망발(?)에 가까운 말을 했기에 이제 끝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지선이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던 것이다.


-하하! 죄송해요, 아버지. 제가 장난이 좀 지나쳤네요. 아버지가 그렇게 말씀하실 정도면 여러 번 만났다는 이야기인데 여자는 마음 없는 남자랑 자주 만나지 않아요. 그럴 땐 남자답게 밀어붙이세요!


순간 석규의 뇌리에 창현의 조언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아버지가 아들에게 조언을 듣고 확신을 갖다니.

‘허, 나도 한물 갔군.’

기분이 좋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입맛이 씁쓸한 석규였다.

뭐랄까, 아들에게 밀린 느낌이랄까.

어쨌거나 지선이 긍정적으로 대답해준 것에 대해서는 무척 기쁜 석규였다.

“갑작스럽게 말해서 미안하다. 후!”

“…아, 아니야. 난 오히려 기뻤는걸. 아무것도 없는 나에게 그런 말을 해줘서…….”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말하는 지선. 감정이 복받쳤는지 눈가에 눈물이 맺힌다.

그런 지선의 모습에 석규는 화들짝 놀라며 손수건을 건네주며 지선을 달랬다.

뭐랄까, 중년 커플답지 않은 풋풋한 모습이었다.


지선의 딸인 지영은 이제 갓 열네 살이 된 소녀였다.

1년 일찍 학교에 들어간 지영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이혼을 하는 힘든 일을 겪었지만 그런 주변 환경에 굴하지 않고 밝은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학교에서 돌아와 음악 감상을 하며 공부를 하고 있던 지영은 어머니인 지선이 모처럼 집에 일찍 들어오자 반갑게 지선을 맞이하였다.

“어서 와요, 엄마. 일찍 왔네요? 요즘 얼굴 밝아진 거 같아요.”

지영의 말에 지선이 미소를 지었다.

“요즘 일이 잘 돼서. 후후, 우리 딸, 엄마 걱정한 거야?”

“걱정이야 당연히 하죠. 엄마가 고생을 안 했으면 좋겠지만요.”

“지영아, 여기 앉아봐.”

지선은 지영을 보며 탁자에 눈짓을 줬고, 그에 지영은 고개를 갸웃하면서 탁자 앞에 앉았다. 지선도 탁자 앞에 앉으니, 마주 보고 앉게 되는 형국이었다.

“왜, 엄마? 무슨 일 있어?”

지영은 엄마인 지선의 갑작스러운 모습에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

“그런 건 아니란다.”

그런 지영의 말에 지선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듯하더니, 지선이 지영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영아, 만약에… 엄마가 재혼한다고 하면 어떻게 할 거니?”

“재혼? 엄마 설마 재혼하려고?”

동그랗게 눈을 뜨며 되묻는 지영. 재혼을 한다는 지선의 말이 놀라웠나보다.

그런 지영의 모습에 지선은 조금 부끄러웠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지영이 놀라워하면서 묻는다.

“어떤 분인데?”

“사업한다고 하던데…….”

“사업? 사업은 불안한데…….”

얼마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도 사업을 하다가 한순간에 망하지 않았던가? 지영은 나이가 어렸지만 사업의 위험성을 몸으로 직접 겪었기에 사업이란 것이 한순간에 끝장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말을 들은 지선이 변명하듯 말했다.

“재정적으로 아주 튼튼하다고 하던데…….”

하지만 사업에 대해 지선이 잘 알 리가 없으니 자연히 목소리에 힘이 실릴 리 없었다.

그런 지선의 모습에 지영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럼 성격은 어떠셔?”

“자상해. 그리고 배려해줄 줄도 알고…….”

그렇게 말하면서 스스로 고개를 끄덕이는 지선. 석규의 성격이라면 자상하고 자신을 배려해주는 성격이었다.

지영은 그 말에 눈을 빛냈다.

“그건 괜찮네. 그럼 엄마도 마음에 있는 거야? 사실 그게 가장 중요하잖아.”

나이는 어리지만 여자는 일찍 성숙해진다.

“어? 으응…….”

지영의 예리한 말에 지선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인다.

마음에 있다 없다를 놓고 말하면 당연히 있다였다. 조금 이르기는 하지만 정말 석규가 괜찮다면 이대로 결혼하는 게 어떨까 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으니까.

지선의 반응을 본 지영은 미소를 지었다. 엄마의 반응을 보니 나쁜 사람 같지 않았고, 능력보다 사람됨으로 반한 것처럼 느껴진 것이다.

그때, 지영은 무언가를 놓치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는 지선에게 물었다.

“아참! 엄마, 그럼 그 분에게 자식은 없어?”

그 말에 지선은 자신이 그 부분을 놓치고 있었다는 것을 느끼고는 대답했다.

“아들 하나 있다고 하던데…… 지영이 너보다 두 살 많다고 하던걸? 열여섯이라고 했으니까.”

“열여섯? 그럼 오빠네. 쳇, 동생 생길 줄 알고 좋아했는데.”

내심 동생이 생기길 바랐던 지영이었다. 아무래도 오빠나 언니보다는 동생이 생기면 조금 편할 테니 말이다. 게다가 평소 귀여운 남동생을 무척 갖고 싶어하던 지영이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얘가 못하는 말이 없어.”

지영의 말에 지선이 얼굴을 붉혔다. 지영의 말은 마치 자신과 석규가 공식적으로 결혼한다는 걸 인정하는 것처럼 느껴진 것이다.

그런 지선의 반응에 지영이 뚱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뭐가 못하는 말이 없어. 엄마도 좋다고 하고, 내 아빠가 되실 분의 성격도 좋다고 하시면 된 거지. 물론 나는 만나봐야 확신을 내릴 수 있겠지만 엄마가 좋다면 찬성이야!”

엄마의 사람 보는 눈을 믿는 지영이었다.

그런 지영의 말에 지선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자신을 믿어주는 딸의 모습에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세상에 자신만이 딸을 뒷받침 해줄 수 있다고, 아직 자신의 보호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리게만 느껴졌던 딸이 의젓하게 자라서 자신을 걱정해주는 것이다. 이럴 때 만큼은 든든하고 믿음직했다.

“그럼 한 번 만나보는 좋겠다. 고마워, 지영아. 엄마를 이해해줘서.”

감사의 인사. 그 말에 지영은 고개를 저으며 미소를 짓는다.

“고맙다니, 엄마랑 나는 가족이잖아. 그리고 난 엄마가 행복하길 바래! 솔직히 그동안 엄마가 고생하는 게 너무 미안했어. 나 때문인 것 같아서…….”

“아니야, 누가 그래. 난 지영이가 있어서 살아가는 거야. 그런 말 하지마, 지영아. 알았지?”

눈시울이 시큰거리는 걸 느끼며 지선이 지영을 껴안았다.

지영은 그런 지선을 마주 안으며 말했다.

“응, 알았으니까 울지마, 엄마. 이럴 땐 웃어야 하는 거야.”

“그래… 내일부터는 웃어야지. 내가 우는 건 그동안 우리 지영이가 이 엄마 모르게 마음고생이 심했을 것 같아서, 미안해서 우는 거야.”

한동안 서로를 꼬옥 안고 있는 모녀.

서로를 생각하고 배려하는 그 모습이 무척 훈훈했다.


지선과 헤어진 석규는 얼마 지나지 않아 기쁜 소식을 듣게 된다. 바로 지선이 자신의 딸 아이와 함께 만남을 가져보자는 말을 한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청혼을 신청하는 것과 같았기에 석규는 무척 기뻐하면서 창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창현은 석규에게 사건의 전말을 듣고는 폭소를 터뜨렸다.

-푸하하하하! 그러니까, 교제하자는 말이 잘못 나와서 결혼하자고 말했다는 거예요? 푸하하하하! 그게 뭐에요! 와, 아버지 혹시 개그맨 하실 생각 없으세요?

얼마나 웃었는지 창현의 목소리가 걸걸해졌다.

창현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교제하자는 말이 헛나와서 결혼하자는 말을 할 수 있을까.

자신의 어머니가 될 분의 표정을 상상하자니 절로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런 창현의 반응에 석규는 인상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그만 웃어라, 좀. 넌 어떻게 이 아비의 입장은 생각도 안 하는 거냐?”

솔직히 지선의 승낙을 받은 터라 기분이 날아갈 듯했지만 창현의 웃음소리를 들으면 창피한 것이 사실이었다. 결과는 좋다 쳐도 전개 과정은 그야 말로 코미디였으니 말이다.

날카로운(?) 석규의 목소리에 창현은 그제야 웃음을 멈추었다. 하지만 여전히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걸로 보아 간헐적으로 웃음을 짓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유럽에 있다고 아주 막 웃는군.’

석규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당장 앞에 있었으면 꿀밤 한 대를 강렬하게 먹여줬을 텐데, 이때 만큼은 유럽에 있는 창현이 눈앞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한동안 끅끅대던 창현은 무언가 생각난 듯 석규에게 말했다.

-아참! 새 어머니께서 승낙 하셨다고 바로 결혼식 하면 안 돼요! 아버지의 결혼식인데 당연히 제가 참석해야죠.

그런 창현의 말에 석규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별걸 다 걱정한다. 마음 같아서는 ‘걱정하지마라!’ 라고 말해주고 싶은 석규였지만 방금 전 창현에게 호되게 당해서 그런지 말이 곱게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너무 늦게 오지 않더냐? 9월말까지 보름 정도 남은 걸로 아는데…….”

-앨범 수록곡은 다 써놨어요! 녹음하고 부랴부랴 활동하면 앨범 발매하고 9월말에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어요. 그러니까 그때까지 결혼식 하시면 안 돼요! 설마 저를 아버지 결혼식에 참가도 못하는 배은망덕한 아들로 만들고 싶은 건가요?

창현이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것이, 결혼식을 잡더라도 날짜를 그렇게 빠르게 잡는 것이 힘들다는 걸 잘 모르는 듯했다.

석규는 그제야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하하! 그렇게 결혼식이 일찍 잡힐 리가 있겠느냐? 네 활동 잘 끝마치고 올 생각만 해라. 그럼 인사시켜줄 테니까. 알았지?”

-아, 맞다. 결혼식 빨리 잡기 힘들죠? 그런데 새 어머니가 저에 대해서 알고 계세요?

석규의 말에 결혼식을 빠르게 진행하는 건 힘들다는 것을 깨달은 창현은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자신의 새 어머니가 될 분이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그런 창현의 물음에 석규가 피식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니, 모른다. 내가 기획사 사장인 것도 말 안했거든.”

-정말요? 와, 그럼 정말 두분이 좋아해서 된 거네요? 대단하다.

놀라움이 담긴 창현의 말에 석규가 저도 모르게 콧대를 세우며 웃음을 지었다.

“하하하! 그야 뭐 그렇지. 사실 내 중학교 시절 친구였거든. 서로 호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어떻게 잘 되었다.”

-그러고 보니 새 어머니한테 딸이나 아들 없나요? 저 동생 갖고 싶은데…….

아무래도 처음 만나면 어색할 테니 동생을 원하는 창현이었다. 대체적으로 여성이 빠르게 결혼하는 편이니 그 희망은 아주 작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세상은 가끔 창현의 편을 들어주기도 한다.

“너에게 동생이겠지. 빠른 94라고 하니까 너보다 한 학년 낮을 거다. 여자고.”

-와! 그럼 여동생이 생기는군요. 기분 좋네요. 어쨌든 아버지, 저도 최대한 빨리 활동한 뒤에 한국 갈 테니까 기다려주세요.

“그래 알았다.”

그 말과 함께 통화가 끝났다. 석규는 창현에게 전화를 마치자 만족의 미소를 지었고, 날아갈 듯한 기분으로 주어진 업무를 스피디하게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석규의 청혼을 받아들인 뒤 지선은 하던 일을 모두 그만두었다. 석규가 더 이상 고생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면서 지선에게 힘든 일을 그만두라고 한 것이다.

지선은 아무래도 석규에게 너무 신세를 끼치는 것 같아 거절하려 했지만 이제 결혼할 사이라는 말에 얼굴을 붉히며 석규의 말에 따라야했다.

석규의 이러한 결정에 AA엔터테인먼트 직원들이 한동안 환호성을 질렀다는 믿지 못할 정보가 있다.

약 보름 정도 후에 앞으로 한가족이 될 자신의 아들과 지선의 딸이 한자리에 만나자고 하면서 석규는 지선에게 지영의 용돈을 넉넉하게 챙겨주었다.

이는 창현과 함께 만남을 가짐으로써 놀라움을 극대화시키기 위함이었는데, 그 전에 만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호감이 깎일 것 같아 호감 유지를 위해 지영에게 하는 로비(?)였다.

지선은 지영의 용돈까지 챙겨주는 석규의 모습에 다소 부담을 느꼈지만 미래의 딸에게 잘 보여야 자신이 편할 것 같다면서 전해달라는 석규의 행동에 결국 웃음을 지으며 지영에게 용돈을 전달해주는 수밖에 없었다.

많은 양의 용돈이 손에 들어오자 지영은 또래 소녀들처럼 좋다고 하면서 새 아빠가 최고라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용돈의 힘 때문인지 지영은 업무 때문에 보름 후에 만나자는 석규의 말을 듣고도 ‘바쁘면 그럴 수도 있지!’ 라고 일축하였다. 한시라도 빨리 새 아빠가 되는 분을 보고 싶어요, 라고 보채던 걸 감안하면 용돈의 힘은 놀라웠다.

날짜는 하루하루 빠르게 흘러갔고, 보름이란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갔다.

그 사이 유럽 콘서트를 끝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간 창현은 틈틈이 준비했던 앨범을 곧장 발매하게 된다.

창현의 <Minus>는 빌보드 차트 7주간 1위라는 업적을 세웠고, 9월 중순까지 빌보드 차트 중상위권에 머무는 어마어마한 괴력을 과시한다. 그리고 유럽 콘서트를 마친 창현의 앨범이 발매되자 그의 음악성에 매료된 사람들은 음반을 구매하게 된다.

유럽을 갔다 와서 그런지 한층 귀족풍의 신비로운 멋을 자아내는 창현의 모습은 사람들을 한층 더 열광하게 만들었다.

Jive에서는 당초 약속한 것보다 창현이 조금 더 활동해주길 바라는 듯했지만 이미 아버지의 결혼식에 정신이 팔린 창현은 그저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스케줄을 소화하면서 어서 귀국일이 다가오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마침내 만나기로 한 당일이 되었다.

약속 장소를 정하고, 한껏 옷을 차려입은 석규는 창현이 전화를 하자 받는다. 오늘은 창현이 귀국하기로 한 날이었다. 전처럼 은밀하게 귀국을 하는 것이기에 기자들이 공항에 없는 듯했다.

“그래, 일단 공항에서 택시 타고 청담동으로 와라. 위치는 근처로 오면 말해줄 테니까. 조금 늦는 것까지 어쩔 수 없지. 알았다.”

지금이 딱 저녁 식사 시간이었기에 약속 시간을 더 늦추기가 힘들었다.

석규는 창현이 조금 더 일찍 왔으면 했지만 오늘 온 것만으로도 정말 대단한 것이었기에 더 욕심을 부리지 못한 채 약속 장소로 향한다.

약속 장소로 향하자 석규의 눈에 한껏 차려입은 지선과 나이에 걸맞게 귀여운 차림을 한 소녀가 보였다. 아마 지선의 딸인 지영일 것이라.

지선과 지영은 갑자기 자신들 앞으로 고급 차가 다가오자 주춤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때, 창문이 열리면서 석규의 음성이 지선의 귀로 흘러들어왔다.

“일찍 나와 있었네. 쌀쌀하니 어서 타도록 해.”

지선은 고급 차 안에서 석규의 목소리가 들리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석규가 스스로 잘나가는 사업가라고 말한 것을 떠올리고는 지영을 보면서 말했다.

“지영아, 타자.”

“으응? 응.”

지영도 갑자기 고급 차가 나타나자 조금 당황한 모습이었다.

그런 지영의 모습에 지선이 미소를 짓고는 지영의 손을 잡으며 차 안에 탑승했다.

석규는 한껏 호감형(?) 미소를 지으며 지영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 지영아. 만나서 반갑다.”

“네? 네, 안녕하세요.”

친근한 석규의 인사에 다소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마주 인사를 하는 지영. 그 모습에 석규는 웃음을 지으면서 편하게 대하라고 말하면서 지영이 자신을 편하게 느낄 수 있도록 이런 저런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자 지영도 점차 석규가 좋은 사람이란 것을 느끼고는 이것저것 질문도 하고 말도 편하게 하게 되었다.

“이거 정말 아빠 차에요? 와, 대단하다. 아빠 부자였네요.”

어느새 어물어물하던 지영은 석규에게 아빠라고 할 정도로 친근하게 대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비장의 무기였던 호감형 미소가 대박을 터뜨린 듯했다.

석규는 귀여운 지영이 자신을 친근하게 대하자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하하! 부자라… 어떻게 보면 부자라고 할 수 있지. 엄마한테 들었을지 모르지만 이 아빠가 하는 사업이 제법 잘 되거든.”

“에… 하지만 사업은 망하면 큰일이잖아요.”

지영의 염려가 담긴 말 때문일까.

석규는 그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그렇지. 사업은 망하기도 하고 흥하기도 하니까. 하지만 옛날에 여러 번 망했고 이제는 망하더라도 돈은 한가득 챙길 수 있으니까 걱정 안해도 된단다.”

그것이 말처럼 쉬운 게 아니지만 지영은 어려서 그런지 순순히 납득하는 분위기였다.

“그래요? 다행이네요. 그런데 어디로 가는 거예요?”

“오늘 지영이랑 만나는 날인데 평범하게 할 수 없어서 근사한 레스토랑을 예약해놨지.”

“와! 레스토랑이요? 기대 되요!”

“기대해도 될 거다. 이름 난 곳이거든 하하!”

딸에게 자신의 능력을 선보일 수 있는 아버지는 늘 기분이 유쾌할 수 있다.

한창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던 지영은 무언가 깨달은 눈빛을 하더니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석규에게 물었다.

“그런데 제 오빠 될 분은 안 보이네요?”

“아, 그 녀석이 어디 볼일이 있어서 그걸 끝내고 오는 중이다. 아마 우리가 레스토랑에서 음식을 시켜놓으면 곧 올 거야.”

“그래요? 저 오빠가 생긴다고 해서 완전 기대 중인데 어때요?”

궁금함이 담긴 지영의 모습에 석규는 피식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봐도 완전 최고다. 외모면 외모, 능력이면 능력. 어디 하나 부족한 게 없지.”

“에? 저보다 두 살 많다면서요. 그럼 중학생인데 무슨 능력이에요. 설마 학교 안다니고 일하는 거예요?”

아주 끔찍한 상상(?)을 하며 말하는 지영의 물음에 석규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그 녀석 성적이라면 음… 대충 전교 5등 안에 드는 걸로 아는데.”

“진짜요? 공부 정말 잘하네요. 얼굴은요?”

“보면 알게다. 최고라니까. 하하!”

적당한 정보 누설과 차단은 궁금증을 더욱 자아낼 수 있기에 석규는 적절하게 정보를 흘리고 차단하면서 지영의 궁금증을 증폭시켰다.

그 사이 석규가 도착한 것은 유명한 호텔이었다. 오늘의 만남을 위해 호텔 레스토랑을 예약해둔 것이다.

지선과 지영은 이런 곳이 처음인 듯 신기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나하나 고급스럽지 않은 것이 없어, 마치 자신이 귀족이 된 것처럼 느껴졌다.

좋아하는 지영을 바라보던 지선이 슬쩍 석규에게 다가오며 물었다.

“너무 무리한 거 아니야?”

“무리? 하하! 무리한 거 아니야. 조금 있으면 알게 될 거야.”

그러면서 호텔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서는 석규. 문자로 창현에게 목적지를 찍어주었기에 택시를 타고 알아서 올 것이다.

예약된 자리로 가서 앉은 세 사람. 지선과 지영은 석규의 설명을 들으면서 석규가 음식을 주문해준다.

그리고 약 십여 분 정도 이야기를 나누던 그들은 갑자기 울린 전화에 의해 맥이 끊기게 된다.

석규는 창현의 전화인 걸 확인하고는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도착했다고? 아, 여기가 조금 구석진 자리라서 그런가 보군. 들어오면 좌측에서 바깥 전망이 보이는 곳에 앉아 있으니 그곳으로 오너라. 그래.”

“오빠에요?”

석규가 통화를 끝내자 지영이 묻는다. 아무래도 자신의 오빠가 될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했나보다.

적절한 떡밥을 뿌려놓았으니 궁금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완전 미남에 능력있고 공부까지 잘하는 엄친아였으니 말이다.

석규는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보면 알게다. 아마 깜짝 놀라게 될걸?”

지영의 반응을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지는 석규였다.

그때, 세 사람이 있는 곳으로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모자를 푹 눌러 쓰고 썬글라스를 쓴 소년이었는데, 모자와 썬글라스 때문에 얼굴이 분간되지 않았다.

소년은 석규를 보며 다짜고짜 핀잔을 던졌다.

“아버지는 왜 하필 자리를 이런 곳으로 잡아서 사람이 찾기 힘들게 만드는 거예요.”

석규는 갑자기 나타난 창현이 자신에게 핀잔을 날리자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지었다.

“이 자리가 제일 이야기 나누기 좋아서 잡은 걸 가지고 그러느냐?”

“그래도요. 찾는 사람 입장도 생각해주셔야죠.”

“잘 찾아왔으면서 뭘 그러느냐. 그나저나 인사해라. 여기는 네 새 어머니가 되실 분과 네 동생이 될 아이다.”

석규의 소개에 창현은 그제야 지선과 지영에게 시선이 갔다.

그리고 예의 바르게 사과를 하였다.

“이거 죄송합니다. 제가 외국에 있다 보니 그간 아버지에게 쌓인 게 있어서요.”

외국이라는 말에 순간 고개를 갸웃하던 두 사람. 하지만 창현이 모자와 썬글라스를 벗자 두 사람은 그만 돌이 되고 만다.

모자와 썬글라스를 벗은 창현이 정식으로 인사하였다.

“안녕하세요, 여기 부족하지만 그래도 성실함 하나 만큼은 최고인 아버지의 아들 강창현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는 지선과 지영.

두 모녀는 지금 보고 있는 것이 꿈인가 생시인가 혼동하고 있었다.

눈을 깜빡이며 다시 한 번 창현을 바라본다.

그도 그럴 수밖에.

지금 두 모녀의 눈앞에 있는 소년이 누구의 모습을 하고 있던가.

세계의 정상을 두고 톱 가수들이 다투는 빌보드 차트 7주 1위라는 빛나는 업적과 유럽 콘서트를 성공리에 끝마친 한국이 내놓은 불세출 천재! 바로 현이 아니던가?

이미 국내에서 두말하면 입이 아플 정도로 그 인기가 절대적인 현이었다.

현의 공식 팬 사이트인 다크 스타가 총 67만 명의 엄청난 회원을 거느리고 있으며, 해외 각지에서 현의 팬이 된 사람들이 다크 스타 지부를 만들어서 활동하고 있다.

게다가 현의 유럽 콘서트를 촬영한 영상을 제휴 프로그램으로 다운로드 서비스를 했는데, 그 다운 숫자가 십만 건에 달할 정도로 엄청난 관심을 받고 있다.

나날이 발전하는 천재, 한국이 낳은 보배 등 수많은 수식어가 현을 치장하고 있고, 그의 나이가 이제 열여섯인 걸 감안하면 앞으로 세계의 음악은 그를 중심으로 돌아갈 것이란 말이 나올 정도였다.

더하여 외모.

외모 또한 어떠한가.

미국에서 내로라하는 여자 톱스타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비주얼이 아니던가.

동생 같으면서 크게 부담이 느껴지지 않는 현의 외모는 그가 가진 가장 큰 장점이었다.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오면서 볼수록 사람을 매료시키는 그의 외모는 음악성과 더불어 한국이 지닌 보배라고 불릴 정도다.

당장 그가 입국을 한다고 하면 수백 명의 기자들과 수천 명의 팬들이 공항에 몰려올 정도로 대단한 인기를 보유하고 있는 현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이다.

분명 미국에 있을 텐데?

너무나 믿기 힘든 사실을 직면하게 되면 사람은 가끔 현실을 부정하고는 한다.

두 모녀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창현은 조금 당황한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어색한 표정으로 볼을 긁적이며 말했다.

“에… 그러니까… 난 당연히 알아볼 줄 알았는데. 나름 유명한 줄 알았는데 아직 아니었나.”

월드스타라고 불리는 자신을 몰라보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창현은 내심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아, 아니에요!”

그런 창현의 말에 지영이 고개를 강하게 저으며 말했다.

어찌 몰라볼 수 있겠는가! 존재 자체만으로 빛이 나는데!

지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물었다.

“현! 현, 맞죠? 설마 월드스타 현이 제 오빠가 되는 거예요?”

창현에게 묻는 것이 부담스러워서 그런 것일까?

묻는 대상이 창현이 아닌 석규였다. 아무래도 친해진 석규에게 묻기가 한결 편해서 그렇다. 지영의 마음 속에 있는 현은 세계적인 가수이자 월드스타였지 친오빠는 아니었다. 너무 갑작스럽다랄까.

석규는 그런 지영의 물음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여기 현이 나의 아들이다. 앞으로 지영이 네 오빠가 되는 셈이지. 정식으로 소개하면, 나는 AA엔터테인먼트 기획사의 사장 강석규다. 우리 회사에 소속되어 있는 가수로는 현과 라샤가 있지. 그리고 현은 나의 친아들이다.”

“…….”

석규의 말에 지선은 눈을 크게 뜨고 놀란다.

제법 잘나간다고 했지만 설마하니 석규가 AA엔터테인먼트의 사장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아니, 솔직히 지선은 AA엔터테인먼트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하지만 현과 라샤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

현은 두 말이 필요없을 정도로 잘 알고 있다. 그가 빌보드 차트 1위에 올라섰을 때 각종 대중 매체에서 누구를 막론하게 현이란 이름이 머리에 새겨질 때까지 떠들어댔으니 말이다.

게다가 라샤는 작년에 데뷔하여 일본에 진출한 여자 그룹으로서, 국내와 일본에서 무척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최근에는 동남아시아로 진출하여 그 세를 과시했다고 알고 있다.

연예인에 대해 약간의 관심만 알고 있으면 이 정도 정보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지선은 그런 현과 라샤가 소속되어 있는 기획사라면 당연히 돈이 엄청 많을 것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그리고 그 기획사의 사장이 다름 아닌 석규란다.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구겨진 정장이나 입고 다니던 동네 회사원 같던 석규가 설마하니 그런 회사의 사장이라니.

지선은 눈앞에 현이 있는 것이, 석규가 AA엔터테인먼트의 사장이란 것이 믿기지가 않았다.

“와아! 정말 대단해요! 아빠도, 오빠도요. 정말 이거 꿈 아니죠? 몰래 카메라도 아니죠?”

지영은 지금 상황이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나 보다.

하기야 어느 날 갑자기 세계적인 스타인 오빠가 생겨보라. 어떤 기분이 들겠는가?

막연하게 환상으로 여겨오던 사람이 자신과 한 가족이 된다는 것은 감히 무어라 표현하기 힘든 일임이 분명했다. 그저 가슴이 떨리고 흥분되며 들뜬다고 할 수 있는 것이 표현의 전부였다.

창현은 어느새 석규 옆에 앉아서 음식을 먹고 있는 중이었다.

장시간 비행기를 타고 온 터라 피곤하기도 했지만 그보다 함께 식사를 한다는 말에 아무것도 먹지 않았던 터였기에 식사에 열중하고 있었다.

지영은 그런 창현의 모습을 보면서 평소에 궁금했던 점 것들을 물어보고 있었다. 창현은 부지런히 음식을 먹으면서도 그런 지영의 물음에 성심성의껏 대답해주었다.

석규는 이야기를 나누는 창현과 지영의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지선을 보며 물었다.

“놀랐어?”

“당연히 놀랐지. 설마 석규 네가 그런 큰 회사의 사장일 줄이야…….”

“회사 규모는 별로 크지 않아. 다만 이 녀석과 라샤 아이들이 대단한 거지.”

그러면서 창현을 손으로 가리키는데, 그 모습을 보며 창현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들에게 이 녀석이 뭡니까. 전 회사를 위해 유럽하고 미국 출장(?)까지 다녀오는 열의를 보였는데 말입니다. 게다가 아들에게 삿대질 하는 아버지가 어디 있어요?”

“이게 무슨 삿대질이냐. 다 애정 표현이지. 게다가 유럽이랑 미국 가봤자 네가 더 많이 벌지 않느냐? 까탈스럽게 굴기는. 스케줄 이것저것 아주 빼곡하게 잡아서 곤란하게 만들어버릴라.”

“헉! 저 미국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그러시면 보이콧 할 겁니다.”

이쯤 되면 석규의 패배였다. 창현이 정말 보이콧을 해버리면 난감해질 테니 말이다.

결국 석규는 앓는 소리를 내며 패배를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끙! 그러면 내가 이길 수가 없군. 그래그래, 이 아비가 다 미안하니 식사나 열심히 하여라. 알았지?”

“후후후! 아버지가 전화를 했을 때부터 제 승리는 예견되어 있던 겁니다.”

승리자의 미소를 지으며 묘한 말을 꺼내는 창현.

그것은 창현이 석규에게 해주었던 연애 조언을 언급하는 것이었다.

창현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에 석규가 표정을 살짝 일그러뜨렸지만 사실이었기에 결국 후! 하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수밖에 없었다.

지영은 자신에게 톱스타 오빠가 생긴 게 믿기지 않는지 여전히 얼떨떨한 기색을 띠면서도 들뜬 표정으로 창현에게 붙어 여러 질문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석규와 지선은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제일 걱정되는 것이 창현과 지영의 불화였는데 이렇게 친밀한 모습을 보이니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그렇게 가족이 될 그들의 만남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막을 내릴 수 있었다.




제29장 만원의 행복




-현의 한국 귀환!


-미국에서 대성공을 거둔 현의 귀환!


-비밀리에 입국한 현, 앞으로 국내 활동 예정!


창현이 한국에 돌아온 다음 날 기사란을 도배한 제목들이었다.

지선과 지영을 만나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만남을 끝낸 다음 날 석규는 기자들에게 소식을 돌려 창현의 본격적인 국내 귀환 소식을 알렸다.

기자들은 한창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어야 할 현이 국내에 있다는 소식에 놀라며 AA엔터테인먼트가 기획한 기자회견에 참가한다. 현에 관한 기사라면 무조건 특종 취급을 하는 것이니 만큼 사전의 약속들은 모조리 취소한 상태였다.

무려 백여 명이 넘는 기자들이 모인 곳에서 시작된 기자회견.

직접 모습을 드러낸 창현은 간단하게 사진을 찍은 뒤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아직 나이도 어리고, 학업도 있는 만큼 한국에 머물며 활동할 것이라고 말하였고, 앨범은 한국에서 발매하되 미국에도 공동 발매하는 형식으로 할 것이라 말하였다.

기자회견은 길게 이어졌다. 기자들이 준비한 질문은 산더미와도 같았다. 예전에도 오랫동안 기자회견을 하기도 했지만 지금과는 분위기와, 기자들의 태도 자체가 달랐다.

창현이 공식 기자회견을 마지막으로 한 것이 미국으로 떠날 당시인 3월말이었는데, 반년만에 창현의 입지가 차원을 달리 할 정도로 성장한 것이다.

기자회견은 무려 다섯 시간 넘게 이어졌다. 중간에 점심을 먹기 위해 잠시 기자회견을 중단하고 식사를 하였는데, 그 사이에 뭐라도 건지려는 기자들 때문에 한바탕 곤욕을 치를 뻔하기도 하였다.

어찌어찌 힘들게 기자회견을 마친 창현은 AA엔터테인먼트로 돌아오면서 고개를 저었다.

“우와, 기자회견이 이렇게 힘든 줄은 오늘 처음 알았어요. 진짜 힘드네.”

“평범한 기자회견이라면 별로 힘들지 않겠지. 네 녀석 기자회견이라 힘든 게다. 인기가 엄청 나니 말이다.”

창현이 어깨를 으쓱했다.

“별로 실감은 안나요. 제 눈에는 그냥 정보 좀 캐보려는 사람들로 밖에 안 보이거든요.”

“능청 떨기는. 이번에 네가 해야 할 일이 많다. 팬 미팅도 해야 할 것 같고 말이다. 솔직히 그동안 팬 미팅 한 번 안했다는 게 말이 안 돼. 다크 스타의 요청도 있으니 팬 미팅을 하도록 하고, 방송도 출연시켜볼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방송이요?”

창현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석규가 갑자기 자신에게 방송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의아했던 것이다.

그런 창현의 모습에 석규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예능 프로그램에 나가서 웃기라는 그런 건 아니다. 그냥 뭐랄까, 너의 이미지를 너무 부담스럽게 않게 하기 위한 것이랄까? 그걸 위해 나가란 거다.”

“무슨 프로그램인데요?”

어떤 프로이기에 석규가 이렇게 말을 하는지 창현은 궁금증을 드러냈다. 웃음을 줘야하는 예능 프로 같은 경우 잘못하면 이미지를 깎아먹을 수도 있었기에 석규가 어떤 프로로 자신의 이미지를 바꾸려는 것인지 궁금했다.

“만원의 행복이란 프로그램이다. 알지?”

“아, 만원의 행복이요? 당연히 알죠. 만원으로 일주일 동안 사는 거잖아요.”

석규의 말을 듣고 나서야 그가 어떤 노림수를 노리고 있는지 알게 된 창현.

만원의 행복에 나가게 되면 알게 모르게 진실 된 모습을 보여줄 수밖에 없고, 그걸로 기존에 쌓아놓았던 이미지를 누그러뜨리려는 속셈인 듯했다.

물론 값싸 보이는 이미지를 주면 안 되고 그저 사람들에게 현도 인간이고,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구나, 라고 좋은 이미지를 줄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방송 출연을 극도로 자제하고 있는 탓에 현의 방송 출연에 대한 사람들의 요청이 쇄도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동안은 앨범을 준비한다느니, 곡을 녹음한다느니 하는 핑계로 방송에 출연하지 않았지만 이미 세계적인 스타로 발돋움을 한 지금 상황에서 다소 휴식을 취함과 동시에 이미지 변화를 위해 방송에 출연시키려는 생각이었다.

압도적인 현의 실력에 외부에 함부로 질투와 시기심을 비추지 못하지만 사람들은 막연하게 현의 성격이 오만하고 싸가지 없을 것이란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왜냐? 어린 나이에 세계라는 곳에서 성공했으니 당연히 자존심은 하늘을 찌르고 윗사람에게 싸가지가 없을 것이라는 것. 그것이 사람들이 가지는 연예인에 대한 편견이었다.

만원의 행복은 그런 막연한 이미지를 반전시키기 위한 하나의 노림수였다.

“대충 아버지가 생각하는 게 뭔지 알 것 같네요. 좋아요, 저도 그 프로그램을 즐겨봤고, 한 번쯤 참가해보고 싶었으니까요.”

“잘 생각했다. 아무래도 첫 방송 출연이니 너무 부담 가지고 할 필요는 없다. 그저 네 평소 모습을 보여주면 될 거다.”

창현에게 조언을 해주는 석규. 아무래도 엄청난 인기를 얻은 상태였고, 첫 방송 출연이다 보니 그가 부담감을 가질까 싶어 해주는 조언이었다.

“제가 누군데요. 저만 믿으세요.”

웃음을 지으며 자신감을 보이는 창현.

벌써부터 기대가 되는 듯했다.


딱히 방송 출연하는 것이 없기에 창현의 오프닝은 특이하게 해야만 했다.

바로 AA엔터테인먼트 앞에서 오프닝을 해야 했던 것이다.

창현은 촬영이 시작되기 전 AA엔터테인먼트까지 온 촬영진들에게 인사를 하였다.

“안녕하세요, 현입니다. 여기까지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방송국에서 일을 한다고 하지만 스타를 만난다는 건 언제나 떨리는 일이다.

하물며 상대방은 나이가 어리다고 하나 이미 그 인기는 세계적이라 할 수 있는 현이었다.

게다가 상당수의 톱스타들은 상당히 오만하고 콧대가 높기에 촬영을 온 스태프들은 창현이 이런 면모를 보일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창현의 인사에 스태프들은 당황한 표정을 지으면서 마주 인사를 하였다.

PD는 그런 창현을 보면서 소문처럼 그가 예의바른 사람이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창현에게 인사를 한 PD는 창현을 보며 말했다.

“그럼 촬영 시작하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촬영이 시작 되었다.

창현은 카메라를 보며 고개를 갸웃하고는 물었다.

“그런데 오프닝은 어떻게 하는 거죠?”

“지금 시작 했는데요.”

“네? 아!”

PD의 말에 당황한 표정을 짓는 창현. 무슨 대본이라던가 그런 걸 주고 시작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보다.

그런 창현의 모습에 스태프들은 모두 웃음을 지은 채 창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PD가 코인북을 내밀었다.

창현은 황급히 표정을 수습하며 코인북을 받아들었다. 그것이 도전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코인북을 소중하게 챙긴 창현이 물었다.

“그런데 도전 상대는 누구죠?”

그 말에 PD가 상대방의 사진이 담긴 책을 건네주었다.

그것을 받아든 창현. 조심스럽게 펼쳐본다.

“오…….”

사진의 주인공을 확인한 창현의 눈에 이채가 서린다.

만원의 행복 상대, 그것은 바로 소녀시대의 윤아였던 것이다.

창현은 설마 윤아가 자신의 상대일 줄 예상하지 못했기에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카메라를 향해 미소를 한껏 지어보이며 창현이 말했다.

“후후후! 승리는 바로 제 것이군요. 시청자분들은 잘 모르시겠지만 저 혼자 집안일을 한 경력이 무려 5년! 만원의 행복 역사상 최고의 자린고비 모습을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후후!”

자신감이 가득한 미소를 지어보임과 함께 간단한 오프닝 촬영이 끝이 났다.

창현은 PD를 보며 물었다.

“소녀시대 쪽은 벌써 오프닝을 했나요?”

“네, 소녀시대 쪽 오프닝 촬영을 끝마치고 이곳으로 온 겁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는 PD의 모습에 창현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앞으로 일주일 동안 촬영하게 될 텐데 편하게 대해주세요. 저도 그게 편해요.”

그런 창현의 말에 PD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거듭 말하는 창현의 권유에 고개를 끄덕이고 만다. 방송에서는 공대를 하되 평소 자리에서는 편하게 대해주기로 말이다.

PD가 창현에게 물었다.

“그런데 소녀시대가 오프닝한 건 왜 물어본 거야?”

그 말에 창현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촬영이 시작 되면 말씀드릴게요.”

PD는 창현이 무언가를 하려는 걸 느꼈다.

고개를 끄덕인 PD가 다시 촬영을 재개 시키자 창현이 웃음을 지으며 카메라를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방심은 할 수 없는 법!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백전백승이란 말이 있지요? 이제부터 저는 소녀시대가 있는 곳으로 염탐을 가도록 하겠습니다. 자자, 렛츠 고!”

갑작스러운 창현의 말에 깜짝 놀란 표정을 짓는 PD.

그러다 이내 창현이 하는 행동을 보고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참가자들끼리의 만남.

방송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는데 창현이 먼저 주도를 해주는 것이다.

게다가 창현이 SM엔터테인먼트에 프로듀서로서 계약을 했다고 하는데 가면 뭔가 재미있는 일이 일어날 것 같았다.

그렇게 창현과 촬영팀은 소녀시대의 스케줄을 확인한 뒤 SM엔터테인먼트로 향했다.


데뷔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소녀시대 내에서 가장 인지도가 높은 것은 바로 윤아였다.

아침 일찍, 연습실에서 간단하게 만원의 행복 오프닝을 하던 소녀들은 한동안 난리가 났다.

윤아와 자웅을 겨룰 사람이 다름 아닌 창현이었던 것이다.

상대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소녀들은 난리법석을 피웠다.

바로 자신들이 대신 참가하겠다는 말.

이는 방송인지라 어느 정도 의도적으로 보이는 리액션이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소녀들은 진심으로 하는 행동이었다.

창현과 만원의 행복을 하게 되다니!

윤아는 속으로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 창현이 한국에 돌아왔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요즘 점점 인지도가 높아짐에 따라 보기가 힘들어지고 있었기에 아직까지 보질 못했다. 하지만 만원의 행복을 하게 되면 종종 마주치게 될 테니 윤아는 기분이 무척 좋았다.

그렇게 오프닝 촬영을 끝마친 뒤, 촬영팀은 창현의 오프닝을 찍어야 한다는 말과 함께 돌아갔고, 소녀들은 연습실에 남아 안무 연습을 하게 되었다.

코인북을 넘기라는 언니들의 협박(?)에도 윤아는 꿋꿋하게 버티면서 전의를 불태웠다.

이왕 시작한 마당이니 반드시 승리를 거둘 생각이었다.

안무를 연습하는 윤아의 입가에는 미소가 맺혀 있었다.


SM엔터테인먼트로 향한 창현은 간단한 절차를 밟고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그가 향한 곳은 연습실이었다. 오늘 스케줄이 없는 소녀시대가 연습실에서 안무를 맞춰보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것이다.

슬쩍 연습실 문을 열어서 안쪽 상황을 살펴보는 창현. 방금 전 연습을 모두 끝마쳤는지 연습실 곳곳에 널브러져 있는 소녀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창현은 웃음을 지으며 카메라를 향해 말했다.

“후후! 제가 SM엔터테인먼트 프로듀서인 만큼 여러 가지 전략을 생각해뒀습니다. 우선 첫 번째는 노래 연습을 계속 시켜서 배가 고프게 만드는 건데… 너무 치사한가요?”

그 말에 카메라가 위아래로 흔들린다. 창현의 수법이 치사하다는 것이다.

카메라의 반응을 본 창현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음! 아쉽지만 그럼 어쩔 수 없죠. 자, 그럼 기습을 하도록 해요. 지금 안무 연습이 끝났는지 다 널브러져 있거든요. 최초 공개! 소녀시대는 안무 연습 후 이런 모습을 보인다! 버전 1입니다. 그럼 하나, 둘… 셋!”

숫자를 중얼거리던 창현은 셋을 외치며 다짜고짜 연습실 문을 열고 들이닥쳤다.

“꺅!”

갑자기 연습실 안으로 들어서는 괴한(?)의 존재로 인해 연습실 바닥에 편하게 주저앉아 있던 소녀들이 비명을 질렀다.

“자, 여기 소녀시대 팬분들 보십시오! 이것이 바로 소녀시대의 실체입니다.”

어디서 주워왔는지 막대기 하나를 들고 리포터처럼 카메라를 향해 말하는 창현. 카메라를 들고 있는 VJ가 웃음을 참는 모습이 꽤 괴로워보였다.

“뭐, 뭐야.”

갑작스러운 창현의 등장에 패닉에 빠져있던 소녀들은 연습실에 들이닥친 인물이 누구인지 알아차리고는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창현은 그런 소녀들을 보며 당당하게 말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 오늘부터 저의 적이 된 윤아 누나를 탐색하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자연스럽게 윤아를 누나라 칭하는 창현. 아무래도 씨라고 지칭하는 것보다 그냥 편안한 사이로 보이는 게 나을 것 같았기에 처음부터 누나라고 하였다. 어차피 창현이 SM엔터테인먼트와 계약되어 있는 것은 다 알고 있을 테니 어느 정도 선에서 납득할 것이다.

창현의 말에 소녀들이 웅성거린다.

윤아는 그런 창현을 보면서 싱긋 웃음을 짓더니 말한다.

“적의 소굴로 오다니 정말 용감하시군요, 강 선생님.”

창현이 편안하게 대하는데 반해 윤아는 함부로 말을 놓을 수가 없었다. 워낙 인기 차이가 심했던지라 자칫 잘못하다가는 현의 팬들에게 집중포화를 당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바로 선생님이란 호칭이었다. 프로듀서로서 대하겠다는 이야기였다.

윤아의 말에 창현도 미소를 지었다.

“후후! 적의 소굴이라고 해도 하나로 뭉치지 않았다면 두려워 할 이유가 없지요. 누나들은 알지 못하겠지만 저는 회사 일로 바쁘신 아버지로 인해 집안일만 혼자서 5년을 해냈습니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면 제가 패할 이유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후후후!”

자신감이 가득한 창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은 수연이었다. 이미 창현의 집에 한 번 방문하여 그의 음식 솜씨를 경험해본 수연은 창현의 말이 주는 의미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소녀들은 그런 창현의 말에 발끈하는 모습이었다. 창현의 말은 마치 ‘너희들은 하나로 뭉치지도 못하고 집안일에 관해서도 부족하니 내 상대가 안된다.’ 로 들린 것이다.

소녀시대의 리더 태연이 앞으로 나서서 말했다.

“뭔가 착각하고 계십니다, 강 선생님. 비록 우리가 집안일에 대해서 부족하긴 하지만 소녀시대는 언제나 하나입니다. 이번 승부는 강 선생님이 패할 것입니다. 우리 여덟 명은 윤아를 전폭적으로 지원해줄 생각이니까요.”

한 명보다 두 명이 낫고, 두 명보다 세 명이 낫다. 아홉 명의 소녀시대가 하나로 뭉친다면 창현에게 큰 위협이 될 것은 당연지사.

그러나 창현은 오히려 미소를 지어보였다.

“안녕하세요, 소녀시대의 꼬꼬마 리더 태연 누나. 아주 잘 어울리는 별명을 가지고 계시네요.”

“…….”

창현의 강렬한 한방에 말을 잃어버린 태연.

그 전에도 작다는 말이 있었지만 첫 데뷔 무대 때 창현이 카메라에 잡히고, 그것은 한동안 엄청난 화제가 되었다.

그런 관심은 자연히 소녀시대에게도 집중이 되었는데, 그때 이후로 굳어진 태연의 별명이 바로 꼬꼬마 리더였다. 그 까닭은 창현이 들고 있던 피켓에 꼬꼬마 리더라고 적혀있던 것이다.

자신의 작은 키가 늘 마음에 걸렸던 태연으로서는 창현에게 엄청난 원한(?)을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촬영 중이다. 당장 성격 같으면 창현의 목을 졸라서 ‘다 너 때문이야!’ 라고 소리 치고 싶었지만 카메라가 있었기에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누르는 수밖에 없었다.

오랜만에 만나서 태연에게 강렬한 한방을 먹인 창현은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누나들은 공인이에요. 거짓말을 하면 안 됩니다. 솔직히, 누가 이길 것 같아요? 제가 이길 것 같지 않나요?”

객관적인 전력은 창현의 명백한 우위였다. 집안일 경력 5년이라면 감히 자신들이 상상하지 못한 노하우들을 습득하고 있을 테니까.

몇몇 소녀들이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것을 확인한 창현의 입가에 짙은 웃음이 걸리며 태연을 바라본다.

“후후! 보셨지요. 소녀시대 몇몇 분은 제 승리를 예상하고 있습니다. 하나가 되기는 힘들어 보이는군요.”

창현의 말에 발끈한 표정을 짓는 윤아. 창현하고 같이 하게 돼서 기분이 좋았는데 자꾸 도발을 하려고 하니 결국 한마디 하고야 만다.

“좋아요! 그럼 우리 내기하죠. 이번 만원의 행복에서 이기면 패자가 승자의 소원 하나 들어주기로요.”

프로그램에서 거는 것이 아닌 정말 사적인 내기였다. 윤아는 이렇게라도 해서 자신을 스스로 옥죄어 승리를 향한 집념을 불태울 생각이었다.

그 제안을 거절할 창현이 아니었다.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 웃음을 지은 창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어디 해보죠. 하지만 제게 지게 되면 조금 괴로워질 겁니다. 흐흐!”

그런 창현의 모습에 뒤로 주춤 물러난 윤아는 소녀시대 멤버들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언니들 내게 힘을 줘.”

“그래! 우리가 윤아 너를 응원해주겠어. 강 선생님! 우리를 얕본 걸 후회하게 해드리겠습니다.”

꼬꼬마 리더 크리티컬 때문일까.

윤아의 말에 가장 열렬하게 호응한 것은 태연이었다.

창현은 그런 태연의 모습에 피식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훗! 다른 누나들이라면 모르겠는데 태연 누나는 별로 도움이 안될 듯요.”

“뭐, 뭐시라…….”

태연의 눈 꼬리가 파르르 떨린다. 하지만 방송의 힘을 빌리면 창현은 무적이 된다.

윤아는 창현을 보며 당차게 외쳤다.

“우리는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릴 거예요. 긴장하셔야 할 걸요?”

“그 말을 하시니 저도 편해지는군요. 저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생각이었거든요.”

창현과 윤아의 눈빛이 서로 얽히며 파지직! 스파크를 일으킨다.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보인 창현이 소녀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자, 그럼 이제 안무 연습은 그만하시고 녹음실로 갈까요. 노래 연습을 해야 하잖아요? 아니면 제가 안무를 봐드릴까요?”

선공은 창현이 먼저 가했다.

바로 프로듀서의 입장으로 소녀들의 체력을 소진 시키려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런 창현의 말을 들은 소녀들은 속으로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는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바로 프로듀서의 권한을 악랄(?)하게 이용하여 자신들의 체력을 뺏으려는 것!

체력을 소모하게 되면 당연히 배가 고파질 수밖에 없을 것이고, 배가 고프면 밥을 먹어야 하니 돈을 써야 한다.

간단하지만 실로 악랄한 방법이 아닐 수 없었다.

그때, 옆에 있던 태연이 무언가를 떠올린 듯 외친다.

“선생님! 저희가 오랜만에 선생님의 노래를 듣고 싶은데 어때요?”

태연의 말에 소녀들이 눈에 빛을 냈다. 순식간에 교환되는 눈빛. 정말 1초도 안 되서 아홉 명의 눈빛이 얽혔다가 서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는 일제히 창현에게 집중 포화를 퍼붓기 시작했다.

“그래요! 빌보드 차트 1위 하신 선생님의 노래를 듣고 싶어요.”

“저 <Minus> 듣고 싶어요!”

“유명 팝송도 상관없어요!”

“선생님, 시청자들이 보고 계세요.”

여러 사람이 한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다.

창현은 모든 것이 자신의 의도대로 돌아가자 흡족한 마음을 감추지 않고 있다가 소녀들의 일격에 큰 충격을 받은 듯 비틀거린다.

그러고 보니 이 누나들은 한 사람을 이런 식으로 몰아버리는데 도가 튼 인물들이었다.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자신이 거절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렇게 되면 얼마나 매몰차 보이겠는가.

‘방심했다.’

창현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꼼짝없이 당하게 생겼다.

슬쩍 소녀들을 바라보니 저마다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카메라를 보며 도움의 눈길을 청했지만 창현이 노래를 불러준다면 시청률 상승에 더욱 도움이 될 것이었기에 오히려 VJ와 PD는 승낙하라는 재촉의 눈길을 보냈다. 그야 말로 사면초가였다.

그러자 더욱 엄습해오는 패배감. 창현은 자신의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에는 강한 일격을 준비해주겠다.’

소녀들의 체력을 뺏으려다가 자신의 체력을 소모하게 된 창현의 어깨는 축 처졌다.

그래도 한 가지 사실은 깨달을 수 있었다.

싸우려면 홈 그라운드에서 싸워라.

무척 값진 교훈이었다.


창현과 윤아가 본격적인 만원의 행복에 돌입하게 되면서 피 말리는 신경전이 시작되었다.

노래 연습을 시켜서 윤아의 체력을 빼앗으려던 창현은 되려 역공을 맞아 시청자들을 위한 서비스랍시고 노래를 연달아 뽑아야 했다. 처음에는 미영의 신청곡을 받아서 팝송을 부르게 되었는데, 연달아 신청곡을 신청한 탓에 창현은 무려 아홉 곡이나 불러야 했다. 슬쩍 그만두려고 하면 소녀들이 왜 내 신청곡은 무시하는데! 라고 하면서 엄청난 포화를 퍼부었던 것이다.

그로 인해 창현은 아홉 곡이나 불러야만 했고, VJ와 PD는 방송 분량 아주 넉넉하게 건졌다고 하면서 좋아했다.

아홉 곡이나 부른 창현은 소녀들에게 역공을 가하려고 했지만 낌새를 눈치 챈 소녀들은 빠르게 도주를 하였다.

창현이 이를 가는 사이, 소녀들은 음료수를 뽑아서 창현 앞에서 마심으로써 약을 올렸다.

그런 소녀들의 공작에 결국 창현은 갈증을 이기지 못하고 음료수 500원짜리를 뽑아먹게 되어 초반은 윤아가 우세를 점하게 되었다.

창현이 택한 방법은 바로 라샤에게 빌붙는 것이었다.

4월경에 새 앨범으로 활동한 라샤는 일본 활동과 함께 최근에 동남아시아를 돌며 콘서트를 열었다. 결과가 제법 만족스러운 수준이어서, 라샤의 이름이 아시아 각국으로 울려 퍼지고 있었다.

숙소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기에 라샤와 창현은 무려 반년만에 재회를 할 수 있었다.

녹음실에 있던 창현이 안으로 들어서는 라샤 멤버들을 보며 웃음을 지어보였다.

“오랜만이에요, 누나들.”

그런 창현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라샤 멤버들.

녹음실에 둘러앉게 되었는데, 미란이 VJ가 들고 있는 카메라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런데 저 카메라는 뭐야?”

창현이 카메라를 힐끗 보더니 대답했다.

“아, 저 만원의 행복 출연하거든요. 지금 도전 중이에요.”

“호오! 만원의 행복이라고라?”

미란의 입가에 씨익 웃음이 맺혔다. 그런데 그 웃음이 상당히 불길해보였다.

분명 자신을 약올리려는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

그런 미란을 보며 창현이 따끔하게 일침을 놓았다.

“지금 저 어떻게 놀릴지 생각하고 있죠?”

창현의 말에 움찔하는 미란.

더 웃긴 건 지켜보고 있던 시린과 세룬도 움찔했다는 것이다.

그 모습을 본 창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리고 강력하게 경고하였다.

“같은 기획사 출신인 누나들이 어찌 제게 그럴 수가 있나요! 저를 도와주지 않고 약 올리기만 해봐요. 이번 앨범에서 개인 파트 확 줄여버릴 테니!”

“크윽!”

창현의 강력한 일격에 신음을 흘리는 미란. 그녀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이번 기회만 잘 살리면 실컷 놀려줄 수 있을 텐데.

슬쩍 곁눈질로 확인하니 시린과 세룬도 아까워하는 눈치였다.

정말 이 누나들이.

소녀시대는 하나로 뭉쳐서 자신을 갈구느라 바쁘더니만 동료라 여겼던 라샤 누나들마저도 자신을 괴롭힐 방법이나 강구하고 있는 것이다.

내부에도 적이 있다니.

창현은 속으로 이를 갈면서 라샤와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늘 라샤가 AA엔터테인먼트에 온 것은 컴백을 준비하면서 그녀들의 이번 앨범 컨셉을 정하기 위함이었다.

워낙 중요한 이야기였기에 창현과 라샤도 간략한 이야기만을 나누었고, PD와 VJ도 지금 흘러나오는 이야기가 제법 중요한 이야기라는 걸 알았기에 조심스러운 모습이었다.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점심시간이 되었다.

슬쩍 시계를 본 미란이 세룬에게 눈짓을 주자, 세룬은 눈웃음을 지어보이더니 시린에게 슬쩍 시선을 준다.

그러자 미소를 짓는 시린. 미란과 세룬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눈치 챈 것이다.

시린이 슬쩍 고개를 돌리며 시계를 보고는 소리나게 말한다.

“어라, 벌써 이렇게 시간이 되었네?”

연기를 해도 손색없을 만큼 자연스러운 대사였다.

시린이 적절하게 스타트를 끊어주자 미란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점심시간이네? 점심 먹자. 우리 뭐 먹을까?”

“음, 찌개류가 먹고 싶은데?”

세룬의 적절한 후속타.

라샤 세 멤버가 말하는 것을 본 창현의 표정이 점차 일그러져 갔다. 지금 그녀들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대략이나마 느낄 수 있던 것이다.

만원의 행복을 촬영하는 동안 만큼은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대가를 지불하고 먹거나 남는 음식을 먹어야 한다.

그러자 창현은 급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음식들은 괜찮지만 찌개 같은 음식은 냄새가 사방에 진동하는 것이라 배고픈 상태에서 잘못 상황을 직면하게 되면 돈을 내고 먹을 수밖에 없어진다.

배고픔 앞에서 사람이 냉정한 판단을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니까.

창현은 빠르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라샤 누나들에게 눈짓을 하였다.

눈짓을 받은 라샤 멤버들은 슬쩍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것은 결코 창현에게 호의적인 웃음이 아니었다.

건수를 발견했다는… 회심의 미소였다.

그런 라샤 누나들의 모습에 창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크, 크윽!’

자신에게 아군으로 남아야 할 라샤가 이런 모습을 보이다니.

창현은 타협이 필요하다는 걸 느꼈다. 그리고 카메라가 보이지 않는 각도에서 라샤를 보며 입모양으로 말했다.

‘개인 파트 분량 늘려드릴게요.’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게 있어야 하는 법.

자신들이 원하던 답을 얻자 라샤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여 보인다.

협상 완료.

그룹의 이미지와 인기도를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것이 고작 밥 한끼에 뒤바뀌었다는 것이 창현은 쉽게 믿기 힘들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만원의 행복을 하게 되면 가장 필요한 것이 라샤 누나들의 전폭적인 협조였는데.

“하아!”

언제나 호시탐탐 자신을 골탕 먹이려는 라샤의 모습을 보며 창현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창현이 이렇게 내부의 적을 교화(?)시키느라 바쁠 무렵, 윤아는 나름대로 순탄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언니들의 도움으로 50원이라는 저렴한 가격에 돈까스를 먹을 수도 있었고, 중간에 교묘한 전략을 활용하여 음식을 먹으려 했지만 실패, 하지만 다른 멤버들이 윤아를 도와주고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창현이 소녀들에게 전쟁을 선포한 시점에서 소녀시대는 이미 하나가 되어 있었다.

집안일 5년의 경력이라는 말에 솔직히 창현의 우세를 점치기도 했지만 자신들 아홉 명이 뭉친다면 충분히 창현을 물리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소녀들이 초점을 맞춘 것은 바로 창현과 윤아의 내기였다.

스케줄을 위해 차를 타고 이동하던 유리가 윤아를 보며 물었다.

“윤아야, 만약에 네가 이기면 소원 뭐로 할 거야?”

유리의 물음에 윤아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소원이요? 음, 글쎄요?”

즉흥적으로 말했던 것이기에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럴 듯한 화두가 흘러나오자 소녀들은 왁자지껄 떠들며 자신들의 생각을 늘어놓았다.

“이기면 이건 어때? 강 선생님은 부자니까 우리를 단체로 싸이판에 보내달라고 하는 거야.”

“그거 좋네! 이건 어때? 숙소를 73평짜리 아파트로 바꿔달라고 하는 거야.”

“앞으로 우리 앨범은 전부 강 선생님이 만들어주는 걸로 하는 건 어떨까?”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며 자신의 생각을 늘어놓는 소녀들.

그 속에서 윤아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정말로 이겨서 소원을 빌겠다고 하는 것이 아닌, 이번 승부에서 이기겠다는 집념으로 했던 것이었기에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다.

하지만 자신이 이기게 된다면?

창현은 자신의 소원 하나를 들어줘야 한다.

생각만 해도 뿌듯했다. 무슨 소원을 비는 것이 좋을까 고민 되었다.

김칫국을 마시고 싶지 않아도 절로 상상하게 된다. 현실에서는 하지 못해도 상상하는 것만큼은 자유가 아닌가.

윤아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일단 어떤 소원을 말할지 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자신이 이겨서 소원을 하나 저장해두는 것.

그것만으로 기분이 좋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이겨야 한다. 자신 있게 자신의 승리를 선언할 만큼 창현은 자신이 있는 듯 했으니까.

‘꼭 이기는 거야. 그리고 소원을 얻자.’

언니들과 주현의 도움만 있으면 가능 하리라.

윤아의 눈에 굳은 전의가 서렸다.


가까스로 라샤와의 타협을 이끌어낸 창현은 음식을 넉넉하게 시킨 덕택에 남은 음식을 한껏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라샤가 지나치게 음식을 많이 시키는 듯하자 의도를 알아차리고 PD가 제지하려 했지만 아침까지 굶고 왔다는 말에 별다른 제지를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식사를 무사히 마친 창현은 라샤와의 미팅을 마친 뒤 CF와 화보 촬영 미팅을 해나갔다. PD는 윤아가 있는 곳으로 향했고, VJ만이 창현을 따라다니며 그가 하는 일을 카메라에 담을 뿐이었다.

삼 일째 되는 날, VJ가 창현에게 미션 종이를 건네준다.

창현이 그것을 확인하니, 천원의 만찬을 하라는 내용의 미션이었다.

자신에게 가장 많은 도움을 준 분에게 천원의 만찬을 해주라는 이야기였다.

이왕 할 것이면 제대로 해보겠다고 생각한 창현.

곧장 밖으로 외출을 한다.

창현이 향한 곳은 시장이었다.

천원의 만찬을 위해 재료를 구입하러 간 것이다.

한 번 하기로 마음 먹었으면 확실하게 하는 것이 바로 창현의 스타일이었기에 행동에 임하는 것도 달랐다.

시장에 갑자기 벤이 등장하자 무슨 연예인이 왔나 궁금했는지 사람들이 벤 근처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벤에서 나오는 창현의 모습을 보고는 환호성을 질렀다.

와아아아아!

현이다! 현!

그 외침과 함께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아침 시간이었기에 학생들은 없었지만 장을 보러 온 아줌마들이 창현에게 모여들었다.

요즘 30대가 넘어가고 40대 정도가 되면 젊은 가수들의 얼굴을 잘 모르지만 현의 경우는 특별했다.

빌보드 차트 석권을 이룩했을 때 대대적으로 보도가 되었기에 세대를 불문하고 현의 얼굴과 이름을 알고 있는 상태였다.

그도 그럴 것이 대한민국의 소년이 음악으로 세계의 정상에 우뚝 섰는데 어찌 그것을 모를 수 있겠는가. 쉽게 타오르는 특성을 가지고 있는 만큼 현의 그러한 기록들은 그대로 한국에 전해졌고, 중년 세대 또한 현의 얼굴과 이름을 알고 있는 상태였다.

지금 모여든 것도 30대에서 40대 정도에 속한 아줌마들이었다.

벤에서 내리던 창현은 아침, 그것도 어중간한 시간에 사람들이 모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기에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

그것도 잠시, 벤에서 내린 창현은 모여든 사람을 보며 인사를 하였다.

“안녕하세요, 현입니다. 오늘 제가 만원의 행복을 촬영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입니다. 조금 있다가 아르바이트를 할 생각인데 제가 하게 되면 좀 도와주세요, 하하!”

그 말과 함께 창현은 시장 안으로 들어섰고, 그 뒤를 사람들이 우르르 뒤따랐다.

창현이 도착한 곳은 해산물을 파는 곳.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십대 후반의 아줌마를 본 창현이 반갑게 불렀다.

“아주머니, 오랜만이에요.”

창현의 외침에 장사 준비를 하고 있던 중년 여인이 반색하며 창현을 반겼다.

“어이구, 정말로 왔네. 오랜만이여.”

“그러네요, 하하. 제가 좀 바빠서요.”

창현이 찾은 이곳은 그가 데뷔하기 전에 자주 들렸던 시장이었다.

오늘 천원의 만찬을 위해서 그는 일을 해주고 원하는 것을 싸게 구입하기로 했는데, 누가 들어도 이득이 나는 일이었기에 흔쾌히 승낙을 받았다.

아주머니가 건네주는 작업복을 입은 창현이 가게 앞에 섰다.

옷은 투박했지만 창현의 외모가 워낙 뛰어나서 그런지 서 있는 것만으로도 빛이 나는 듯했다.

작업복을 입은 창현은 먼저 배달 온 물건들을 부지런히 운반하기 시작했다.

그리 크지 않은 키에 호리호리한 몸을 가지고 있는 창현은 일견하기에 그리 힘을 쓸 것 같은 이미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의 예상을 무색하게 만들기라도 하듯 창현은 해산물이 가득 담긴 스티로폼 팍스를 거뜬하게 옮겼다.

약 십여 분 동안 이십여 개의 박스를 모두 옮긴 창현은 본격적으로 해산물 판매에 나섰다.

수많은 사람들이 창현이 일하고 있는 가게에 몰려 있었다.

창현은 아주머니가 건네주는 확성기를 받아들며 그걸로 말하기 시작했다.

“아아, 안녕하십니까. 지금부터 약 삼십여 분 동안 가게에서 일하게 된 현이라고 합니다. 맛 좋고 싱싱한 해산물을 값싸게 파니 모두 골라보세요. 낙지도 있고 오징어도 있습니다. 삼치도 있어요.”

능숙한 말투와 능숙한 진행.

창현의 호객 행위에 모여있던 사람들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물건을 고르는 아줌마들.

창현은 바쁘게 이리저리 물건 가격을 말해주고, 계산을 하면서 물건을 팔아나갔다.

잔돈을 거슬러주면서 아줌마들은 창현의 손을 붙잡고는 했는데, 그때마다 창현은 웃음을 지으면서 손을 빼고는 부지런히 물건을 팔았다.

삼십 분이라는 시간은 그야 말로 총알과도 같았다.

정신없이 물건을 팔다보니 어느새 물건이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고, 시간을 확인하니 삼십여 분이 흘러가 있었다.

창현은 물건을 사는 사람이 뜸해지자 주인 아주머니를 보며 물었다.

“아주머니, 다 된 것 같은데요. 이거 한 마리 정말로 500원에 주시는 거 맞죠?”

작업복을 벗으면서 창현이 챙긴 것은 바로 낙지 한 마리였다.

한 마리로 따로 사려면 낙지 가격은 약 1000원에서 2000원 사이인데, 그러면 천원의 만찬이 불가능하니 좀 더 싸게 구입하기 위해 오늘 아르바이트를 지원하고 나선 것이다.

휴식기지만 이런 저런 스케줄이 있기에 길게는 못하고 약 한 시간 정도 일한 뒤 얻게 된 낙지.

금전적으로 따지면 터무니없이 적은 금액이었지만 나쁘지는 않았다.

낙지를 성공적으로 얻은 창현은 곧장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창현이 모든 일을 끝낸 듯하자, 주변에 넓게 포진해 있던 아줌마들이 창현에게 싸인을 부탁한 것이다. 다 집에 아들과 딸이 있는 아줌마들인 만큼 세계적인 스타인 창현의 싸인을 받아두고 싶었던 것이다.

결국 창현은 약 삼십여 분 동안 꼼짝없이 붙잡혀 싸인회를 해야만 했다.

밥과 여러 가지 일부 재료들로 창현이 만든 것은 낚지 볶음밥이었다.

정말 낙지를 싸게 사긴 했지만 저렴한 재료들로 만든 것이었고, 모양이나 냄새도 천원의 만찬 중에서 최고라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창현이 감사하는 마음을 가진 것은 바로 아버지인 석규였다.

연예인들과 이렇다 할 인연이 없는 창현에게 있어 가장 감사하는 대상은 아버지이자 소속사 사장님인 석규였던 것이다.

석규는 만원의 행복을 하는 창현이 자신에게 천원의 만찬을 선사하자 놀라워하면서 고마움을 표했다.

그리고 낙지 볶음밥을 먹은 뒤 엄지손가락을 피면서 훌륭하다는 표현을 하였다. 창현의 요리 실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다.

그렇게 천원의 만찬까지 끝낸 창현에게 중간 점검의 순간이 다가왔다.

얼핏 듣기로는 윤아도 무척 순조롭게 돈을 아끼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내기가 걸려있다 보니 필사적으로 임하는 것일 테지.

중간 점검의 순간이 다가오자 창현은 라샤에게 도움을 청했다.

상대는 SM엔터테인먼트에서 여자 슈퍼주니어라고 하여 데뷔 시킨 9인조 여성 그룹 소녀시대였다. 숫자에서 창현이 상당히 밀리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랬기에 머리수를 채우고자 창현이 선택한 것은 라샤의 섭외였다.

어차피 앨범 활동도 접은 상태인 만큼 스케줄도 비어 있기에 라샤는 창현의 제안에 흔쾌히 동의하였다. 창현을 위해서(?)라는 거창한 대의명분으로 참가를 선언한 것이다./

그렇게 중간 점검의 날이 왔다.

창현과 라샤는 만원의 행복 중간 점검을 위해 M본부로 향했다.

대기실로 향하자 보이는 것은 소녀시대였다.

아무래도 윤아를 응원하기 위해 모두가 출동한 듯했다.

창현과 윤아의 시선이 서로를 보다가 마주쳤다.

윤아의 눈은 이글거리고 있었는데, 그 눈에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돈을 많이 아낀 듯했다.

하지만 중간 점검의 묘미는 바로 잔액을 교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창현 또한 돈을 무척 아꼈지만 만약 윤아가 돈을 많이 쓴 뒤 잔액 교환 찬스를 써버리게 되면 도로아미타불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오늘 중간 점검에서 반드시 이겨서 잔액 교환 찬스를 획득해야 한다. 그래야 승리에 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창현이 먼저 윤아를 보며 말했다.

“돈을 많이 아끼셨나봐요. 얼굴이 야윈 것 같으니 말이에요.”

그런 창현의 말에 윤아가 흠칫했지만 이내 웃음을 띤 채 되받아쳤다.

“많이 아끼긴. 오히려 너무 많이 써서 오늘 잔액 교환 찬스를 쓸 생각인 걸.”

지금은 카메라가 없는 상황이었기에 윤아는 말을 편하게 하고 있었다.

지금 윤아는 복잡한 수 싸움을 전개시키고 있었다.

돈을 많이 썼다고 함으로써 잔액 교환을 하겠다는 것. 이는 창현이 게임에서 이길 경우 잔액 교환을 함부로 할 수 없게 만드는 요소였다.

“후후후! 그래요? 일단 뚜껑을 열어보면 되겠죠.”

창현도 윤아의 심리 작전에 휘말리지 않은 채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 사이 소녀시대는 라샤와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처음 만나는 사이이건만 어느새 친해져서 하하, 호호, 하고 웃으며 즐겁게 나누는 그녀들의 모습에 창현은 살짝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설마 배신을 하지는 않겠지.

라샤 누나들은 모른다고 생각하겠지만 창현은 만원의 행복을 언급하는 순간 미묘한 변화를 보였던 것들을 다 체크하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자신을 괴롭힐 좋은 이유가 하나 생겼다는 표정이었다.

개인 파트를 늘려준다는 것으로 협상을 봤지만 아직은 안심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방심하면 안 돼.’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면서 창현은 경계심을 끌어올렸다.

잠시 후, 중간 점검이 시작되었다.


만원의 행복 MC를 보고 있는 것은 이혁재와 신주아였다.

소녀시대와 라샤가 차례대로 등장하자 혁재의 표정이 환해졌다. 예쁜 여자들이 우르르 몰려나오니 남자인 혁재가 싫어할 리가 없던 것이다.

그리고 뒤이어 창현이 나오자 신주아의 표정이 환해진다.

간단하게 오프닝 무대로 시작하는 중간 점검.

소녀시대가 먼저 앞으로 나와 대열을 갖추더니 흘러나오는 팝송에 몸을 맡겨 춤을 추기 시작한다.

데뷔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인답게 풋풋하면서 힘이 넘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뒤이어 나온 것은 라샤였다.

지금은 추억이라 할 수 있는 <Laser>의 안무를 보여주면서 카리스마적인 모습을 각인시켜주었다.

마지막으로 나온 것은 창현.

아직 춤 실력에 대해 알려진 게 없었기에 혁재와 주아는 물론 촬영진들도 흥미진진한 표정을 짓는다.

앞으로 나온 창현은 소녀시대에게 힐끗 시선을 옮기더니 말한다.

“유리 누나, 서현 누나 도와주세요.”

방송이기에 주현이 아니라 서현이라 칭하는 창현이었다.

창현의 호명에 유리와 주현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앞으로 나온다.

그러다가 음악이 흘러나오자 두 사람은 물론 남은 소녀시대 멤버들과 라샤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짓는다.

흘러나온 음악은 다름 아닌 <다시 만난 세계>였던 것이다.

MR에 맞춰 격렬하게 안무를 추는 창현.

유리와 주현도 그런 창현에게 질 수 없다는 듯 음악에 몸을 맡겨 안무를 추기 시작한다.

이미 전에 창현이 소녀시대의 안무를 손봐준 적이 있었기에 창현이 하는 안무는 어디 하나 나무랄 데 없을 정도로 훌륭했다.

마지막 발차기 안무까지 소화해낸 창현이 만족의 미소를 지으며 자신과 함께 안무를 해준 유리와 주현에게 감사의 인사를 표한다.

“고마워요, 유리 누나, 서현 누나.”

창현과 안무를 처음 맞춰본 것이기에 유리와 주현은 다소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양팀이 모두 오프닝 무대를 열자 혁재가 진행을 한다.

“자, 중간 점검에는 잔액 교환 찬스가 걸려있죠? 이번 주 게임은 바로 점프 점프 줄넘기입니다.”

점프 점프 줄넘기는 개인전과 단체전으로 나뉘는 게임이었다.

이 게임에서 이겨야만이 잔액 교환 찬스를 획득할 수 있다.

윤아를 비롯한 소녀시대의 눈에 굳은 전의가 서렸다.

창현도 질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유감스럽게도 창현을 도우러 온 라샤는 그저 그런 표정이었다.

그것을 보면서 창현은 위험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잘못하다가는 자신이 질 수도 있다는 걸 느낀 것이다.

힘들게 돈을 아꼈는데 잔액 교환 찬스를 당해버린다면… 상당히 골치 아파 질 것이다.

처음은 퍼스트 맨? 창현이었다.

엎드려서 줄넘기를 넘는 미션이었다.

손으로 땅을 짚은 채 신중하게 줄넘기를 바라보는 창현.

줄넘기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안정된 자세로 줄넘기를 넘기 시작한다.

하나, 둘, 셋…….

안정된 자세로 줄넘기를 넘는 창현은 무려 삼십삼 개나 한 뒤 발이 줄넘기에 걸렸다.

더 할 수는 있지만 자신을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무슨 괴물 쳐다보듯이 놀라움이 뒤섞여 있었기에 적절하게 숫자를 조절하는 수밖에 없었다.

뒤이어 나선 것은 윤아였다.

남자인 창현은 엎드린 채 줄넘기를 넘어야 하지만 여자인 윤아는 쪼그려 앉아서 줄넘기를 넘어야 한다.

수월하게 줄넘기를 넘는 윤아. 역시 춤으로 다져진 체력이라 그런지 안정감 있게 줄넘기를 넘는다.

하나씩 쌓여나갈 때마다 서서히 불안해지는 창현의 표정.

스물다섯 개가 넘어가자 윤아도 힘들었는지 얼굴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다. 그래도 질 수 없는지 입술을 질끈 깨문 채 줄넘기를 넘는다.

그리고 마침내 서른 개.

지쳤는지 윤아가 비틀거린다. 그러면서도 줄넘기를 하나씩 넘는다.

서른한 개, 서른두 개.

고지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느꼈는지 모든 힘을 쥐어짜내며 줄넘기를 넘는다.

서른세 개.

줄넘기가 다시 돌아가고 윤아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 줄넘기를 넘는다.

그와 함께 윤아가 털썩 주저 앉았다.

서른네 개. 윤아가 점프 점프 줄넘기 개인전에서 승리한 것이다.

그 모습을 보면서 창현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윤아가 서른네 개까지 버틸 줄이야.

두 번째 시합은 단체전이었다.

단체 줄넘기를 하면서 미션을 하는 것이다.

라샤가 자신들만 믿어! 라고 했는데…….

결과는 패배였다. 미란이 의도한 건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불과 미션2에서 발이 걸려버린 것이다.

망연자실하는 창현.

그에 반해 소녀시대 측은 축제 분위기였다. 잔액 교환 찬스를 손에 넣음으로써 한층 유리한 고지에 우뚝 설 수 있게 된 것이다.

‘윤아 누나가 바꿀까? 아냐, 바꾸지 않을 수도 있어. 초반에 내가 500원을 허무하게 쓴 걸 봤으니까.’

창현의 머리가 복잡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자신이 윤아보다 많은 금액을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는 창현이었다. 처음에 소녀들의 계략으로 인해 제일 아끼겠다는 것은 무산되었지만 이래저래 알뜰하게 돈을 썼기에 자신이 더 많은 돈을 보유하고 있을 거란 확신이 있었다.

탁자가 옮겨졌고, 코인북과 현재 윤아와 창현이 보유하고 있는 금액 표가 탁자 위에 놓였다.

잔액 교환의 순간이었다.

윤아는 코인북 양쪽에 손을 뻗으며 고민을 하고 있었다.

과연 어떤 결정을 내릴까.

창현은 윤아가 자신의 코인북을 지켰으면 했다.

그래야 자신이 이길 수 있을 테니까.

그때, 윤아의 눈이 살짝 창현에게 향했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초조해보이는 창현의 안색을.

그것은 극히 미미한 표정이었지만 윤아의 눈에는 선명하게 들어왔다. 그 표정을 보면서 창현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씨익, 웃음을 짓는 윤아. 그리고는 창현의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의 코인북을 잡아든다.

잔액 교환을 한 것이다.

그런 윤아의 결정에 소녀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중간 점검까지 오면서 윤아가 얼마나 알뜰살뜰하게 돈을 아꼈는지 알았기에 소녀들은 설마하니 윤아가 잔액 교환을 할 줄 몰랐던 것이다.

혁재가 윤아의 손에 들린 창현의 코인북을 보며 말했다.

“아! 잔액 교환을 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서로의 잔액이 바뀌게 되죠. 자, 그럼 이제부터 잔액을 확인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잔액 교환을 당한 현 씨부터 잔액을 확인하겠습니다.”

그러면서 금액 표를 개봉하는 혁재.

남은 금액은 5850원이었다. 제법 훌륭한 성적이었다.

금액을 확인한 혁재가 감탄사를 터뜨렸다.

“오! 많이 아끼셨는데요? 이거 윤아 양이 잘못된 선택을 했을 수도 있겠는데요?”

하지만 이미 잔액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 있는 창현은 침울한 표정이었다.

설마 윤아가 정말 바꿀 줄이야.

그 사이 혁재는 금액표를 개봉하고 있었다.

창현의 남은 금액은 윤아보다 무려 850원이나 많은 6700원이었다.

와아아아아!

금액을 확인한 소녀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윤아의 잔액 교환이 성공한 것이다.

중간 점검 시점에서 850원이나 우위에 섰다는 것은 윤아가 그만큼 승리에 한걸음 더 가깝다는 것을 의미했다.

남은 잔액을 확인하며 창현이 고개를 저었다.

‘후우!’

지금부터 알뜰살뜰 아껴도 자신이 이기기는 힘들 것이다.

침울해하는 창현과 달리 윤아의 얼굴에는 함박 웃음이 맺혀 있었다.

혁재는 윤아의 탁월한 선택을 칭찬하면서 만원의 행복에 도입된 새로운 제도를 설명한다.

그것은 바로 헬프 데이.

하루 동안 다른 사람에게 대신 만원의 행복을 체험하게 해주는 제도였다.

윤아는 헬프 데이에 대해 듣자 무척 좋아했다. 그에 반해 창현은 표정이 어두웠다.

헬프 데이. 과연 자신에게 도움이 될까.

그런 회의감 속에서 중간 점검은 끝을 내렸다.

잔액 교환으로 인하여 윤아는 6700원. 창현은 5850원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내가 져.”

중간 점검에서 잔액 교환을 당한 창현은 입술을 질겅질겅 씹으며 생각에 몰두하고 있었다.

850원이란 금액이 차이나는 상황. 남은 날짜가 3일 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뒤집기가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것을 윤아가 모를 리가 없다는 것이다.

윤아는 남은 3일 동안 최대한 돈을 아낄 터.

자신 또한 최대한 아끼겠지만 850원이라는 차이가 존재하는 만큼 그 차이를 좁히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그 차이를 좁히기 위해서는 어떠한 수단을 써야 한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창현은 그것으로 고민을 했다.

“어떻게 하지.”

대책을 강구하기 위해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는 창현.

그러나 마땅한 대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솔직히 창현은 중간 점검에서 자신이 질 거라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중간에 스태프들이 자신을 괴물 쳐다보듯이 하는 바람에 그만두기는 했지만 엎드린 채로 줄넘기를 서른세 개나 했기에 내심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허나 윤아는 이를 악 물고 줄넘기에 임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이것은 윤아 또한 진지하게 임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진지하게 게임에 임하는 자에게 자신 또한 진지하게 임해야 예의다.

여태까지 장난으로 임한 것은 아니지만 창현은 윤아의 각오가 생각보다 대단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뒤집을 한 수가 없을까.”

무언가 수가 있을 것이다.

창현은 그것을 찾고 싶었다.

850원. 시간이 촉박한 지금 이 시점에서 매우 크게 느껴지는 돈이었지만 시각을 달리하면 그렇게 큰돈이 아니었다.

자신이 어떻게 개입을 잘 하기만 한다면 순식간에 그 차이를 없애버릴 수 있는 그런 차이였다.

“일단 스스로가 아끼려고 할 테니 그냥 내가 아끼다가는 승산이 없어. 그렇다면 외부적 작용을 줘야 한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그렇게 중얼거리던 창현은 무언가가 떠오른 표정을 짓는다.

입가에 맺히는 미소. 그것은 어떠한 방법을 찾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구나. 나에게 희망이 남아있어.”

창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어디론가 향했다.


갑자기 일어나서 창현이 향한 곳은 SM엔터테인먼트였다.

창현이 연습실로 향하자 그곳에는 소녀시대가 안무 연습을 끝내고 쉬고 있었다.

소녀들은 갑자기 창현이 연습실에 방문하자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창현을 맞이한다.

윤아가 창현을 보더니 슬쩍 미소를 짓고는 물었다.

“갑자기 무슨 일로 온 거야?”

카메라도 없겠다, 윤아는 한껏 승자의 표정을 지으며 창현을 대했다.

그 모습에 창현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잔액 교환만 당하지 않았다면 지금 저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은 자신이었을 것이다. 무척 억울했다.

하지만 그것을 외부로 표할 수 없었기에 창현은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마지막으로 탐색하러 온 거예요. 비록 돈의 차이가 있다고 하나 제가 질 일은 없을 테니까요.”

도대체 어디서 이런 자신감이 나오는 것일까.

윤아는 창현의 말에 그가 무엇인가 믿는 것이 있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순간이었다.

지금 우위에 선 것은 자신이었다. 게다가 돈도 거의 쓰지 않고 있으며, 내일까지 잘 버티고 내일 모레 헬프 데이에서 조심하기만 한다면 승리는 자신의 것이 된다.

윤아는 함박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후후! 창현이 네가 그렇게 여유를 부린다고 해도 내 잔액은 지금 너보다 많다는 말씀. 뒤집기란 불가능 할 거야. 그리고 패자는 승자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한 거 기억하지? 쉬운 거 빌지 않을 테니 각오 단단히 해두라고.”

“흥! 승자는 제가 될 겁니다. 윤아 누나의 여유도 오늘까지일 거예요.”

다른 소녀들은 창현과 윤아의 설전을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들 중 누구도 창현이 승리할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이미 850원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만 아니라 윤아는 자신들 모두가 뒤에서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고 있다. 당장 윤아가 최대한 아끼고 아낀다면 만원의 행복이 끝나는 날, 창현이 가지고 있는 잔액보다 많이 남을 수도 있는 노릇이다.

대세는 윤아였다.

윤아는 그런 창현을 보면서 그저 방긋 미소를 지어줄 뿐이었다.

지금 급한 것은 창현이지 자신이 아니었다.

쉽게 도발에 넘어오지 않는 윤아를 보며 창현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허허실실 전략으로 윤아를 어떻게든 꾀어내서 마음의 동요를 일으켜볼까 싶었는데 자신의 우위를 확실하게 자각하고 있는 윤아는 쉽게 창현의 언변에 넘어가질 않았다.

이렇게 된 이상 계획대로 하는 수밖에 없었다.

창현은 화가 난 것처럼 고개를 홱하니 돌리고는 연습실 구석으로 향했고, 나름대로 침울한 모습을 연출하였다.

윤아와 다른 소녀들의 눈에는 자신의 계획이 먹히지 않아 암울해하는 모습으로 보였겠지만 그것은 다 창현의 연기에 불과했다.

연습실 구석에 붙어있는 ‘그것’을 확인하고 미소를 짓는 창현. 이거라면 자신에게 반전의 기회를 줄 것이다.

한동안 암울한 분위기를 연기한 창현은 성큼성큼 연습실 문으로 향하더니 소녀들에게 외친다.

“오늘은 이대로 물러나지만 각오하세요. 반드시 제가 막판 뒤집기 할 겁니다.”

그 말과 함께 창현이 연습실을 벗어났다.

창현이 나가고 소녀들만 남은 연습실.

소녀들은 방금 전 창현이 남긴 말을 떠올리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푸훗! 푸하하! 각오하래! 이미 역전할 여지가 없는데 어떻게 각오를 하란 거야.”

“창현이도 막바지로 몰리니까 귀엽다. 마지막에 지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해. 쿡쿡쿡!”

“그러게 말이야. 창현이도 귀여운 면이 있네. 그런데 윤아야, 너 이기면 무슨 소원 빌 거야?”

저마다 웃음을 지으며 한마디씩 하는 소녀들은 어떠한 소원을 빌 거냐는 말에 윤아를 바라보았다.

정말 윤아가 창현에게 어떤 소원을 빌지 궁금했던 것이다.

그 시선이 윤아는 어색한 미소를 짓다가 잠시 생각하고는 말한다.

“글쎄요. 딱히 생각해보지 않아서요. 우선 이긴 뒤에 Keep해두려고요.”

“그것도 나쁘지 않네. 당장 급할 게 없으니까. 그나저나 창현이가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네. 이대로 순순히 패배를 인정할 것 같지 않은데. 안 그래?”

태연이 다른 소녀들을 보며 묻자 소녀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제법 차이가 크긴 하지만 뒤집지 못할 금액은 아니었다.

소녀들이 조금 염려하는 기색을 보이자 윤아가 나서서 말했다.

“일단 제가 돈을 최대한 아낄 거니까 괜찮을 거예요. 창현이가 어떤 수를 쓰더라도 제가 넘어가지 않고 제 페이스를 유지하면 되니까요.”

“그래, 그거면 돼. 윤아 네 페이스만 유지하면 창현이 코를 납작하게 해줄 수 있을 거야. 파이팅!”

“저만 믿으세요.”

윤아는 자신만만했다.


“난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어.”

SM엔터테인먼트를 벗어난 창현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도저히 불리한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모습이었다.

“정정당당하게 이기고 싶었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니 어쩔 수가 없지.”

창현은 아무 대책없이 SM엔터테인먼트로 간 것이 아니다.

마지막 역전을 위해 창현은 회심의 전략을 세웠고, 그 계획을 완벽하게 수립하기 위해 소녀시대 연습실을 방문한 것이다. 그리고 계획은 성공적으로 완성되었다.

이제 시기에 맞춰 상황을 뒤집어버릴 만한 일격을 선사해주면 되는 것이다.

창현은 연습실에서 봤던 ‘그것’을 떠올렸다.

여기서 말하는 ‘그것’이란 소녀시대의 스케줄 표를 말한다.

“내일 아침에는 스케줄이 없었지. 그렇다는 건… 하늘이 날 버리지 않았다는 걸 의미하는 거야. 후후후!”

창현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맺혔다.

마지막 한 방이 남아 있었다.


다음 날이 되었다.

창현은 이름 아침 일찍 일어나서 AA엔터테인먼트로 향했다.

PD와 VJ는 이미 AA엔터테인먼트에 와서 창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리게 한 것 같아 사과를 한 창현은 촬영을 시작한 카메라를 보며 미소를 지어보였다.

“중간 점검에서 제가 잔액 교환을 당하기는 했지만 아직 숨겨둔 마지막 한 수가 있습니다. 오늘 제가 이것으로 멋지게 역전을 시켜 보이겠습니다.”

갑작스러운 창현의 말에 PD와 VJ는 깜짝 놀라는 표정이었다.

창현이 역전하겠다고 말한 것이 무슨 이유인지 궁금했던 것이다.

그 궁금증을 풀어주기라도 하듯 창현은 갑자기 목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목소리를 바꾸기 시작했다.

“아아! 아아!”

“……!”

바뀌기 시작하는 창현의 목소리에 경악하는 PD와 VJ.

그도 그럴 것이 서서히 바뀌어가는 창현의 목소리는 흡사 태연의 목소리와 비슷했기 때문이다.

사실 창현은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다.

정정당당하게 겨루고 싶었지만 이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면 자신이 이길 수 없다.

승리를 위해 창현은 결국 숨겨두었던 천음변성록까지 사용하는 처지에 이르게 된 것이다.

물론 천음변성록이 만능은 아니었기에 남자가 여자 목소리를 완벽하게 구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거의 비슷하게 들리게 구사할 정도는 되었다.

목소리를 바꾼 창현의 현재 목소리는 태연의 목소리와 비슷했다. 물론 완전히 같다기보다는 조금 더 묵직한… 아니, 잠겨있는 목소리랄까.

경악하고 있는 PD와 VJ를 보며 싱긋 웃어 보인 창현은 시간을 확인했다.

아침 8시.

지금쯤이면 한창 등교를 하고 있을 때였다.

창현은 발신자 번호 표시 금지를 건 채 전화를 걸었다.

전화는 수신자 부담 전화였다.


윤아는 주현과 함께 대영고등학교를 다닌다.

아침 시간에 스케줄이 없으면 주현과 함께 벤을 타고 등교를 하고는 한다.

여느 날처럼 상쾌한 기분을 느끼며 학교를 가는 날이었다.

만원의 행복도 확실하게 우위를 점하고 있고, 요즘 하는 일도 잘 풀리는 것 같았다. 자연히 윤아의 기분도 상당히 들떠 있는 상태였다.

“언니, 기분이 좋아 보여요.”

주현이 윤아의 얼굴을 살피며 말했다.

“그래 보여? 주현이 네가 그렇게 보면 그런 거겠지. 요즘 나쁘지는 않으니까.”

그러면서 웃음을 지어보이는 윤아.

주현은 윤아가 왜 그런 표정을 짓는지 알 것 같았다.

“창현이를 이겨서 그런 거예요?”

“그거야 당연하지. 그리고 요즘 우리도 서서히 인지도를 쌓고 있는 것 같아서. 뭐랄까, 조금씩 인기를 얻고 있는 느낌이랄까? 술술 풀리는 것 같아서 좋아.”

“전 아직 잘 모르겠는데…….”

데뷔를 한지 두 달이 지났지만 아직까지 자신의 인기를 실감하지 못하는 주현. 무대 위에도 서고 사인회도 해보고 그랬지만 아직까지 인기가 잘 실감되지 않나보다.

그런 주현의 모습에 윤아가 어깨를 토닥여줬다.

“곧 있으면 알게 될 거야. 실제로 내가 이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당연히 있죠. 저희들 중에서 언니가 제일 인기가 많으니까요.”

“그건 좀… 미안하더라고.”

부인할 수 없을 만큼 인기의 편중이 심했기에 윤아가 조금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말하는 건 상처를 줄 수 있는 말이다. 아직 데뷔 초이기에 인기가 집중되어서 나타나고 있었다. 활동을 할수록 인기 분포가 퍼져 나갈 테지만 아직까지 그 단계에 이르지는 않았다.

그렇게 윤아와 주현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갑자기 윤아의 핸드폰 벨이 울렸다.

“뭐지?”

딱히 전화 올 곳이 없었기에 윤아가 고개를 갸웃한다. 발신자 금지였다.

뭔가 불안한 느낌이 들었지만 우선 전화를 받는 윤아.

그녀의 귀에 들린 것은 여성의 친절한 안내 소리였다.

-콜렉트 콜입니다. 상대방의 목소리를 확인해보세요.

“뭐, 콜렉트 콜?”

VJ가 촬영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윤아는 전화를 끊으려 했다.

하지만 안내 멘트 뒤에 들려오는 소리에 윤아는 전화를 끊을 수 없었다.

잔뜩 목이 잠긴 태연의 목소리가 건너편에서 들려왔던 것이다.

-콜록콜록! 윤아야, 전화 좀 받아줄래? 언니가 지금 많이 아프…….

그 말이 끝이었다. 뒤이어 들려온 것은 다시 안내 멘트였다.

-상대방과 통화를 원하신다면 통화 버튼을 눌러주세요.

이건 고민하고 자시고도 필요가 없는 문제였다.

방금 전 목소리. 틀림없는 태연의 목소리였다.

아침에 자신이 숙소를 나설 때만 해도 태연은 괜찮아 보였다. 평상시와 같이 일찍 일어나 자신을 깨워줬으니 말이다.

‘그러고 보니…….’

태연이 자신을 깨워주던 모습을 생각하자 윤아는 무언가 의아한 점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을 깨워주던 태연의 얼굴에 평소보다 더 피곤해보였던 것이다.

소녀시대 내에서 일찍 일어나는 멤버는 태연과 효연, 그리고 주현이다. 그중에서 태연은 소녀시대 내에서 엄마 역할을 하고 있어, 잠을 자고 있는 멤버들을 깨우고는 한다.

요즘 스케줄이 늘어난 탓일까?

태연의 얼굴이 어두웠다는 것을 느낀 윤아.

그렇다는 건 정말 태연에게 문제가 있다는 뜻이었다.

무슨 일이 있는 것일까.

너무나 걱정이 되었다.

VJ가 촬영을 하고 있다. 콜렉트 콜이니 만큼 통화를 하게 되면 자신의 돈에서 통화료가 차감된다.

고민을 했지만 선택의 순간은 찰나였다.

아무리 승부가 중요하다고는 하나 태연의 안위보다 중요할 수는 없었다.

최대한 빨리 통화를 끝내면 되니까.

결정을 내린 윤아는 그대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는 속사포로 말을 하였다.

“언니, 무슨 일이야? 괜찮은 거야?”

그러자 반대편에서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는다. 정말로 무슨 일이 있는 게 아닐까 싶어서 윤아는 마음을 졸였다.

그러던 차에 들려오는 기침 소리.

그리고 목이 잠겨 있는 태연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콜록! 미, 미안. 아무래도 감기에 걸렸나봐……. 여보세요, 윤아야? 내 목소리 들려?

“응, 들려. 무슨 일 있는 거지? 빨리 말해봐, 언니.”

윤아는 태연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아 대답을 재촉했다.

하지만 그런 윤아의 다급한 마음과는 다르게 반대쪽에서 들려오는 답은 느리기만 했다.

-미, 미안. 잘 안 들려서 대답이 늦네……. 지금 학교 가는 중이지?

“학교 가는 중이야. 거의 다 도착했고. 그러니까 빨리 말해봐. 언니 갑자기 왜 그래.”

다급한 윤아의 목소리. 전화조차 제대로 듣지 못하는 태연이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아 그녀의 마음은 다급하기만 하였다.

-아침에는 괜찮았거든. 그래서 근처 마트에 들렸는데… 갑자기 머리가 핑 도는 거 있지? 그래서 정처 없이 걸었는데…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어. 혼자 움직이기도 힘들어서 전화한 거야. 윤아 네가 주변 지리에 밝잖아…….

태연이 길치였던가?

순간 윤아는 그런 의문이 떠올랐지만 그 의심은 빠르게 지워나갔다. 당장 태연이 아픈 상황에서 모르는 곳에 있다고 하자 그에 대한 걱정이 앞선 것이다.

“언니 지금 어딘데? 내가 설명해줄게. 위치 말해봐.”

태연에게 묻는 윤아의 목소리는 점점 다급해져 갔다. 그리고 윤아는 태연의 설명을 들으며 이런 저런 설명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주현은 무언가 의아한 점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당사자인 윤아는 갑작스러운 태연의 모습에 당황을 한 듯하지만 제3자인 주현이 보기에는 무언가 석연치 않은 느낌이 든 것이다.

고개를 갸웃하는 주현.

그녀는 조심스럽게 윤아에게 물었다.

“언니,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예요?”

주현의 물음에 정신없이 태연에게 길을 설명해주던 윤아는 주현을 보더니 말한다.

“태연 언니가 지금 무척 아프데. 그런데 길까지 잃어버렸다고 해서 길을 설명해주는 거야.”

“그래요?”

주현은 무언가 석연찮은 느낌이 들었다.

길을 잃어버려서 전화한 것은 옳다 치자.

하지만 지금 자신과 윤아 언니는 학교를 가는 중이다.

전화를 한다면 다른 사람에게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텐데?

의아함을 느낀 주현은 윤아를 슬쩍 보더니 핸드폰을 열어 전화를 건다.

아침 일찍 일어나는 효연에게 전화를 건 것이다.

♩♪♬

-여보세요? 주현아,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컬러링과 함께 효연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하지만 오전에 스케줄이 없어서 그런지 자다가 일어난 티가 역력했다.

주현은 침착하게 효연에게 물었다.

“언니, 지금 심각한 일이 일어났어요.”

-뭐, 심각한 일? 그게 뭔데?

심각한 일이 있다는 말에 효연은 잠이 싹 달아난 듯 주현에게 묻는다.

그에 주현은 윤아를 힐끗 보더니 말한다.

“지금 태연 언니가 밖에 나왔다가 길을 잃었나봐요.”

-그럼 길 설명해주면 되는 거잖아. 뭘 그거 가지고 그래.

김이 빠졌다는 듯 맥 빠진 목소리로 말하는 효연. 길을 잃어버렸으면 설명을 해주고, 찾아오게 하면 되는 일이다. 심각한 일이 아니다.

그에 주현이 차분하게 설명을 하였다.

“그냥 길을 잃은 게 아니에요. 태연 언니가 스케줄 때문에 요즘 많이 피곤했나봐요. 지금 길을 잃었는데 몸까지 안 좋다고 해요.”

-뭐? 그게 정말이야?

그 말과 함께 쿠당탕! 하는 소리가 들렸다. 효연이 방을 나서는 소리인 듯했다.

그와 함께 한동안 쿵쾅쿵쾅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철컥!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잠시 후 들려온 것은 황당함이 가득한 효연의 목소리였다.

-…주현아.

“네? 언니 왜요?”

-너 지금 나랑 장난치자는 거지?

분노가 가득 담긴 효연의 말에 주현은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설마…….

주현은 자신의 예상이 틀리길 빌면서 물었다.

“왜 그러시는 거예요?”

-태연이가 밖에 나오긴 뭐가 나와! 지금 방에서 눈뜨고 잠꼬대 하면서 아주 잘 자고 있는데!

엄청난 반전이었다.

주현은 효연의 말에 그만 돌이 되고 말았다.

“네?”

-에휴! 너 때문에 괜히 잠만 다 깼네. 태연이 여기서 잘 자고 있다고! 아무래도 누가 장난을 쳤나본데, 앞으로 잘 좀 확인하고 전화해! 나는 좀 더 잘 테니 이만 끊는다.

그 말과 함께 통화는 끊겼다.

“…….”

휴대폰을 들고 있는 주현은 멍한 표정이었다.

효연의 말에 의하면 태연은 방에서 아주 쿨쿨 눈뜨고 잠꼬대 하면서 잘 자고 있단다.

그렇다면 바깥에 나와 있다는 것은 거짓말이 된다.

도대체 무슨 뜻일까?

진짜 태연은 잠을 자고 있는데 윤아는 지금 태연과 통화를 하고 있단다.

설마 태연이 둘이라도 된단 말인가?

주현은 윤아가 콜렉트 콜을 받는 순간 어마어마한 가설을 세우고 말았다.

그것은 바로 보이스 피싱이었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창현은 천의 목소리를 가졌다고 칭해질 만큼 다양한 장르의 노래를 소화한다. 음역이 넓은 것은 물론이고, 본인의 의지에 따라 각양각색의 목소리를 낼 수 있다.

그렇다는 건 다른 사람의 목소리도 비슷하게 낼 수 있다는 이야기.

상식 선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창현이라면, 정상의 범주에서 한참 벗어나 있는 그라면 알 수 있는 일 아닐까?

다급하게 이야기를 하는 윤아를 보면서 주현은 그 가설을 세울 수 있었다. 왜냐하면 태연과 이야기를 나누는 윤아는 도통 진도를 빼고 있지 못하던 것이다.

주현은 마음이 급해졌다.

모든 상황을 판단한 지금, 윤아는 창현의 마수에 빠져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황급히 윤아의 팔을 흔든 주현은 윤아에게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언니, 그거 강 선생님 같아요. 제가 효연 언니한테 전화 해보니까 태연 언니 지금 주무시고 계시데요.”

“뭐, 뭐라고?”

여전히 태연에게 길을 설명해주고 있던 윤아는 주현의 말에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는 표정이 심각하게 굳기 시작한다.

주현의 말을 듣는 순간 자신이 지금 하고 있던 통화에서 느껴지던 석연치 않던 점들이 명확하게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태연이 지나치게 자신의 설명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태연의 이해력이 뛰어났으면 뛰어났지 결코 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안 들린다는 이유로,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거듭 설명을 해야 했던 윤아는 그제야 자신이 한편의 연극에 속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주현이 뭐라고 했나. 태연은 집에서 자고 있단다.

그렇다면 자신이 통화하고 있는 사람은 누굴까?

주르륵.

윤아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다.

설마… 설마 자신이 속은 것이란 말인가?

이렇게 목소리가 똑같은데?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윤아는 아주 조심스럽게 천천히 물어보았다.

“설마… 여태까지 모두 연극?”

-…….

윤아의 목소리에 반대편에서는 아무런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 반응에 윤아는 설마설마하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 정말 자신은 낚시에 걸린 물고기였던 것인가?

아니라고 믿고 싶었지만 상황은 명백했고, 심증은 너무나 확실했다. 하지만 현실은 믿고 싶지가 않았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답을 기다리던 윤아는 들려오는 목소리에 순간 철렁하고야 만다. 반대편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잔뜩 잠겨 아픈 것 같은 태연의 목소리가 아닌 지금 이 순간 가장 듣고 싶지 않은 목소리였던 것이다.

-…칫! 들켰나?

들려온 목소리.

그것은 다름 아닌 창현의 목소리였다.


창현은 콜렉트 콜로 전화를 한 뒤 자신의 전화를 받아든 윤아의 모습을 상상하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좋아! 완벽하게 걸렸어.’

이제부터 시간을 어떻게 끄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라질 것이다.

창현은 잔뜩 잠긴 태연의 목소리로 최대한 아픈 연기를 하면서 시간을 끌기 시작했다.

경악의 표정을 짓고 있는 PD와 VJ에게 산뜻한 미소를 지어보이면서 창현은 때로는 안 들리는 척, 때로는 아픈 척을 하며 철저하게 시간을 끌었다.

슬쩍 시간을 확인하니 어느새 3분여가 흘렀다.

이 정도 시간을 끈 것도 대단하지만 좀 더 끌어야만 했다.

그렇게 5분 정도가 되었을 무렵, 창현의 입가에 맺힌 미소는 더욱 짙어지고 있었다. 여전히 윤아는 자신이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아주 좋은 현상이었다.

하지만 복병은 따로 있었다.

바로 윤아 옆에 있던 주현이었던 것이다.

어찌어찌 알아듣는 척을 해서 시간을 끌던 창현의 귀에 주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니, 그거 강 선생님 같아요. 제가 효연 언니한테 전화 해보니까 태연 언니 지금 주무시고 계시데요.

‘이런! 하필 지금!’

인상을 살짝 찡그리는 창현.

조금 더 시간을 끌면 자신의 승리가 완벽하게 굳어지는데 주현이 초를 친 것이다.

자신이 생각해도 윤아와 대화를 나누면서 수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다만 자신의 연기가 워낙 출중(?)하다 보니 그에 휘말린 윤아가 제대로 된 상황 파악을 못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잠깐의 침묵.

그러나 그것마저도 시간이었고, 콜렉트 콜이었기에 돈은 끊임없이 나가고 있었다. 들킨 것 같았지만 창현은 최대한 윤아의 돈을 소모시키고자 침묵하고 있었다.

잠시 후, 윤아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설마… 여태까지 모두 연극?

확신이 담긴 말이었다.

그에 창현은 들켰다는 것을 깨닫고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긴가민가하는 터였다면 조금 더 혼란을 심어줄 수 있었을 텐데.

윤아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고, 창현은 들켰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최대한 시간을 소모시키고자 한껏 윤아를 기다리게 만든 뒤 입을 열었다.

“…칫! 들켰나?”

알아차리긴 했으니 적어도 놀라는 척은 해줘야했다.

그런 창현의 말에 윤아는 경악을 했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창현은 그런 침묵을 즐길 뿐이었다. 어차피 콜렉트 콜이었으니 말이다.

잠시 후, 윤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 어떻게…….

입가에 한가득 미소를 지어보이며 창현이 대답해주었다.

“제가 다른 사람 목소리를 흉내 내는 게 특기여서 말이죠. 거의 똑같았죠? 앞으로 특기로 삼아야 할까 봐요. 후후!”

-이익!

창현에게 속은 것이 분한지 윤아의 분노 어린 목소리가 들린다.

그럴수록 창현의 입가에 맺힌 미소는 더욱 짙어질 뿐이었다. 슬쩍 시간을 확인해보니 어느덧 통화는 6분이 넘어가고 있었다.

창현은 분노 게이지가 Max까지 치달은 윤아에게 마지막 일격을 날렸다.

“길 열심히 설명해주셔서 고마워요. 나중에 근처에 놀러갈 일이 생기면 유용하게 사용할게요.”

뚜뚜뚜…….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창현의 도발에 분노를 참지 못한 윤아가 통화를 끊어버린 것이다.

창현이 시간을 확인해보았다. 정확히 6분 21초 동안 통화를 하였다.

하필이면 1초에 끊겨버리다니. 창현이 전화를 건 콜렉트 콜은 1초가 될 때마다 요금이 갱신된다.

창현은 윤아가 이번 통화로 얼마나 돈을 소모했는지 계산해보았다.

“10초에 24원이니까 1분에 144원. 6분이니까 864원. 거기에 72원을 더하면…… 훗! 936원 소모했네요. 이로써 내가 우위를 점하게 된 건가?”

방금 전 통화는 850원 뒤처지고 있던 창현이 70원 가량 우위를 점하게 해주었다.

역전에 성공한 창현의 입가에는 한껏 미소가 걸렸다.

70원 차이가 그리 큰 것이 아니지만 동등한 조건이라면 자신이 질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승부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다 못해 창현에게 승리추가 약간 기운 상태였다.


“이, 이럴 수는 없어!”

통화를 끝낸 윤아는 자신이 방금 전 창현과의 통화로 인해 무려 936원을 소모했다는 소식을 듣자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이렇게 당하게 될 줄이야.

창현이 연습실에 찾아와서 의미심장한 미소를 남길 때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 그저 허장성세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런 일격을 먹일 줄이야.

창현의 능력이 그 정도일 줄 몰랐고, 시야를 넓게 보지 못한 윤아의 실책이었다.

옆에서 주현이 윤아를 위로했지만 그 위로가 먹힐 리가 없다.

850원 우위를 점하던 것이 백지화 되었고, 오히려 자신이 열세에 처하게 된 것이다.

초반에 500원을 어이없이 썼음에도 불구하고 돈을 엄청나게 아껴서 중간점검 때 자신보다 많은 돈을 남겼다.

이 추세라면 만원의 행복이 끝날 때가 되면 자신이 패배할 것임이 분명했다.

다 이긴 승부를 한 번의 실수로 인해 패배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그 때문인지 윤아는 종일 우울한 표정이었다.

학교에서도 표정이 무척 어두웠고, 하굣길에도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스케줄을 위해 다른 멤버들과 합류했을 때도 윤아의 표정은 어두웠다.

그걸 의아하게 여긴 태연이 주현을 보며 물었다.

“주현아, 윤아 표정이 왜 그렇게 어두워?”

태연의 물음에 주현은 아침에 있었던 일들을 설명해주었다.

주현의 설명을 듣고 경악의 표정을 짓는 소녀들.

특히 태연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뭐, 뭐라고? 차, 창현이 그 녀석이 내 목소리를 흉내내면서 윤아에게 콜렉트 콜을 걸었다고?”

카메라가 없는 상황이었기에 서슴없이 그녀석이라 해버리는 태연. 그만큼 그녀는 놀라고 있었다.

누가 감히 여자 목소리를 위조하여 낚시를 하려고 할까!

태연과 몇 년 동안 알고 지낸 윤아인 만큼 웬만큼 비슷하지 않고서는 속이기 어려울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윤아가 속았다는 것은 그만큼 흡사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다른 사람 목소리를 완벽하게 흉내내는 재주가 있을 줄이야. 가슴 한켠이 서늘해지는 걸 느끼는 태연이었다.

“윤아야. 정말 창현이가 내 목소리랑 비슷했어?”

“…응.”

태연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는 윤아.

윤아는 고개를 들어 태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창현이가… 언니 아픈 걸 연기하는데, 진짜 언니가 아플 때보다 더 리얼하게 연기를 하더라. 급조해서 그런지 다시 생각해보면 여기저기 허점이 있긴 했지만… 정말 다급하고 아픈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그런 건 자각하지 못할 만큼 빠져들 수밖에 없었어.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철렁해.”

윤아가 이렇게 말할 정도면 말을 다한 것이다. 윤아가 멍청해서 당한 것이 아니라 창현이 대단해서 윤아가 당한 것이다.

소녀들은 입을 딱 벌리며 놀라워했다.

태연도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윤아에게 물었다.

“그, 그럼 콜렉트 콜로 돈을 얼마나 썼는데?”

“…936원. 무려 6분 21초나 속고 있었어. 주현이가 아니었다면… 더 속았을지도 몰라.”

“…….”

윤아의 말에 소녀들은 할 말을 잃었다.

936원을 콜렉트 콜로 날렸다면 지금 잔액의 우위는 윤아가 아닌 창현이 점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승부추가 창현에게 기우는 것은 당연한 일.

그제야 윤아가 우울해하는 것이 단순히 콜렉트 콜에 당한 것이 아닌, 패배가 유력해져서 그렇다는 것을 소녀들은 깨달을 수 있었다.

설마하니 거의 마지막 순간에 와서 이런 일이 발생할 줄이야.

침울해지는 분위기를 피부로 느끼며 태연이 애써 밝은 표정을 지은 채 격려했다.

“일단 방법을 생각해보자. 돌파구는 있을 거야. 응?”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하지 않던가.

그 말이 있긴 하지만 지금 딱히 피부에 와 닿지는 않았다.

스케줄을 위해 잠시 미용실에 들린 차였기에 소녀들은 머리를 하면서 침묵에 빠져들었다.

특히 윤아가 더욱 그러했다.

어떻게 하면 역전을 할 수 있을까.

마음 같아서는 자신도 회심의 한 수를 준비해서 창현에게 먹여주고 싶은 심정이 가득했다. 하지만 창현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이 역공을 당할 확률이 높았다.

그래도 한 방 먹여주고 싶은 마음은 여전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할 무렵 윤아의 머리가 끝났다.

소파에 앉아서 생각을 이어가려던 윤아는 자신을 톡톡 건드리는 손길을 느끼고는 시선을 옮겼다. 그곳에는 먼저 머리를 끝낸 수연이 있었다.

간단한 눈짓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수연.

그것이 따라오라는 뜻이란 것이었기에 윤아 또한 자리에서 일어나 수연을 따라간다.

밖으로 나온 수연은 윤아를 보며 말한다.

“만원의 행복에서 이기게 되면 창현에게 소원을 빌 수 있게 되잖아?”

윤아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것 때문에 지금 이기려고 노력하는 것이지만 말이다.

수연은 그런 윤아를 보며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말했다.

“그 소원을 나에게 주지 않을래?”

이게 무슨 말인가? 소원을 달라니?

순간 수연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윤아가 의아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런 윤아를 보며 수연이 싱긋, 밝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내게 지금 상황을 역전시킬 한 수가 있어.”

“언니에게 역전 시킬 방법이 있다고요?”

수연의 말이 믿기지 않는 듯 윤아가 되물었다.

지금 상황을 역전 시킬 한 수라니. 수연의 표정을 보니 반드시 역전 시킬 자신이 있는 듯했다.

“있어.”

윤아의 물음에 수연은 확신이 담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런 수연의 말에 윤아는 고민에 빠져들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자신의 패배는 거의 확정적이다.

자신이 패배하게 된다면 창현의 소원을 들어주는 것은 필연적인 것.

정정당당한 승부였다면 윤아는 기꺼이 승패에 승복했을 것이다.

하지만…….

창현이 자신에게 어떤 행동을 했던가.

아주 교활한, 차마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악랄한 방법으로 자신의 돈을 소모시키지 않았던가?

만약 창현이 정정당당하게 임했다면 윤아는 수연의 제안을 거절했을 것이다.

어찌 되었건 간에 자신에게 주어진 미션이었고, 활동이었기에.

그러나 창현의 교활한 수법에 당한 지금 윤아에게 눈에 들어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 옛날 전성기를 구가하던 신라도 결국 고구려와 백제의 연합 공격을 맞이하여 외세의 힘을 빌리지 않았던가?

반쪽짜리 통일이라고 하나 당장 위기에서 벗어나는 것이 중요하다.

배고픔 앞에서 체면 따지는 사람 없는 것처럼 말이다.

한참 생각에 빠져있던 윤아가 입술을 질끈 깨물며 결정을 내렸다.

“좋아요. 언니의 제안을 받아들일게요. 대신 그 방법이 어떤 것인지 가르쳐주세요.”

이 말을 하면서 윤아의 내심은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소원을 넘겨준다는 것.

이것은 만약 수연의 도움으로 윤아가 승리할 경우 수연이 창현에게 소원을 빌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수연이 어떤 소원을 빌까.

창현을 좋아하고 있는 만큼 윤아는 수연이 창현에게 관심 아니, 그 이상의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랬기에 혹시나 승리할 경우 수연이 어떤 소원을 창현에게 말할지 궁금했다.

‘만약에 사귀자거나 그런 걸 말하려는 건 아니겠지? 아닐 거야.’

불안한 내심을 숨기며 수연을 바라보는 윤아.

그런 윤아의 시선에 담긴 의미를 알아차린 걸까.

수연은 피식 웃음을 짓더니 윤아에게 말했다.

“알았어. 알려줄게. 대신 라샤 언니들이랑 연락 좀 해줄래? 만나고 싶다고…….”

“만원의 행복이랑 관련된 건가요?”

“응. 아마 창현이라면 분명 라샤 언니들 중 한 사람에게 헬프 데이를 사용할 걸?”

그건 윤아도 동감하는 바였다. 정말 어이가 없지만 창현은 엄청난 인기에도 불구하고 대인관계가 라샤와 소녀시대가 전부였다. 만원의 행복을 촬영하는 동안 소녀시대와는 적대관계이니까 분명 라샤 중 한 사람에게 헬프 데이를 사용할 것임이 분명했다.

수연의 말에 윤아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럼 내일 전화하는 게 더 좋지 않아요?”

“내일? 흐음! 그것도 그러네. 아직 헬프 데이 대상이 정해진 것은 아니니까.”

수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마음이 조금 급해진 듯했다. 내일 라샤에게 전화를 해서 협상을 유도해도 상관이 없다.

“그래도 일단 연락을 해야 하지 않겠어? 라샤 언니들 스케줄도 있을 텐데.”

“아! 그것도 그러네요. 그럼 연락해볼게요.”

내일부터 헬프 데이였기에 오늘 약속을 잡고 내일 협상을 하는 것이 좋다.

윤아는 핸드폰을 열어 라샤와 접촉을 시도했다.

♩♪♬

컬러링이 들리면서 반대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이, 윤아. 무슨 일로 전화한 거니?

윤아가 전화한 대상은 다름 아닌 시린이었다.

그룹을 포섭할 때 리더부터 포섭하라는 말이 있다. 시린을 포섭하면 라샤 전체를 포섭한다고 볼 수 있기에 윤아는 시린을 상대로 협상을 하기로 마음 먹었다.

“안녕하세요, 시린 언니. 제가 연락드린 건요…….”

-아마 만원의 행복 때문이겠지? 창현이가 우리에게 헬프 데이를 신청할 테니까.

윤아가 전화한 이유를 꿰뚫고 있는 시린. 평소 문자로 안부 인사나 하던 차에 갑자기 전화를 했다는 것은 어떠한 이유를 동반하고 있다는 것인데, 지금 창현과 윤아가 만원의 행복을 촬영하고 있으니 연결될 만한 것은 그거밖에 없다.

-왜 아니야? 내가 틀렸나.

“아, 네. 아니에요. 언니 말이 맞아요. 하하!”

시린의 예리한 지적에 한동안 말을 잃었던 윤아는 사실을 인정하며 수긍했다.

-흐응. 안 그래도 창현이가 아까 내게 말해주더라고. 헬프 데이를 나한테 부탁할 거니까 잘 좀 해달라고. 이야기를 들어보니 창현이한테 한방 먹은 것 같던데? 틀려?

뿌드득.

창현의 보이스 피싱(?)에 당한 것을 떠올린 윤아가 이를 갈며 대답했다.

“네. 아주 크게 한방 먹었죠. 그것 때문에 제가 지고 있고요.”

-그래? 안 됐네. 자, 그럼 협상을 해보실까. 나에게 맨입으로 무언가를 부탁하려는 것이 아닐 테잖아? 안 그래?

“무, 물론이죠.”

대놓고 협상을 유도하는 시린의 말에 윤아가 더듬거리며 대답한다. 설마하니 시린이 이렇게 툭 까놓고 나올 줄은 몰랐다.

그래도 창현의 아군인데 너무 쉽게 협상에 응하는 게 아닌가?

설마 함정이 아닐까?

윤아의 내면에서 의심이 자라나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언니 혹시 창현이가…….”

-노노. 아니야. 난 그저 이득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이랄까? 창현이는 내게 헬프 데이를 부탁하면서 새 앨범 개인 파트를 늘려주기로 했어. 과연 윤아 네가 그것보다 더 좋은 걸 나에게 제시할 수 있을까?

시린의 말에 윤아는 가슴이 철렁이는 걸 느꼈다.

설마 창현이 새 앨범 개인 파트를 걸고 시린에게 부탁할 줄이야. 떡밥이 커도 너무 크지 않은가?

‘아, 이거 너무 강력해서 상대가 안 되잖아.’

윤아의 얼굴이 암울하게 물들어갔다. 수연이 자신만만해 하지만 설마 개인 파트가 늘어나는 것만큼 큰 미끼일까. 당장 소녀시대 내에서 개인 파트를 두고 쟁탈전을 벌이면 서로 물어뜯는 풍경이 발생할 것이다. 그만큼 개인 파트는 가수에게 있어 중요했다.

핸드폰을 잠시 귀에서 뗀 윤아가 수연에게 조용히 말했다.

“언니, 어떻게 하죠? 창현이가 제시한 떡밥이 너무 커서 시린 언니를 설득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은데요?”

불안함이 담긴 윤아의 말에도 불구하고 수연은 담담했다.

“일단 만날 수 있냐고 물어봐. 그것만 해주면 돼.”

“알았어요.”

윤아는 불안했지만 수연을 믿어보기로 하며 시린에게 말했다.

“언니, 일단 내일 언제쯤 뵐 수 있을까요? 일단 만나서 이야기를 해요.”

-호! 제법 큰 건가보네. 알았어. 우리는 딱히 스케줄이 없거든. 계속 회사에 있을 거야. 아마 아침부터 저녁 7시까지 있을 것 같으니까 그 시간 안에 회사로 오면 돼. 시간 될 것 같니?

개인 파트를 늘려주겠다는 미끼를 말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만나자고 하는 건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뜻.

시린은 흥미를 보이며 윤아의 말을 수락하였다.

그렇게 끝난 통화.

통화를 끝낸 윤아가 수연을 보며 묻는다.

“자, 언니가 말해준대로 모두 했어요. 이제 제게 보여주세요. 도대체 무엇이기에 언니가 그렇게 자신감을 보이는지.”

가수에게 있어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개인 파트.

그걸 과연 수연이 넘을 수 있을까?

“어쩔 수 없지.”

강력한 의지가 담긴 윤아의 말에 수연은 체념의 표정을 지으면서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 속에는 강렬한 자신감이 동반하고 있었다.

“한가지 경고할 게 있다면 내가 보여주는 걸 보고 물린다거나 그런 말하기 없기야. 알았지?”

수연의 말은 윤아의 호기심을 더욱 부채질하는 것이었다.

“알겠어요.”

도대체 저 자신감은 어디에서 흘러나오는 것인지 몰랐기에 윤아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보여줄게. 이건 여태까지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거야.”

수연이 핸드폰을 펼치더니 버튼을 누른다.

그리고 윤아에게 핸드폰을 내민다.

그것을 받아든 윤아.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핸드폰에 시선을 옮긴다.

액정을 확인하는 순간 윤아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한다.

“이, 이건…….”

“알겠지? 왜 내가 승리를 확신하는지.”

윤아를 바라보는 수연의 입가에는 승리자의 미소가 걸려 있었다.


“자, 오늘의 헬프 데이를 해주실 분은 바로 라샤의 시린 양입니다.”

이른 아침.

아침 일찍부터 AA엔터테인먼트로 온 창현이 먼저 한 것은 코인북 증정식이었다.

PD와 VJ가 이른 아침부터 촬영을 하고 있었으며, 창현이 내미는 코인북을 시린은 방긋 웃음을 지으며 카메라를 향해 인사했다.

“현 군의 상승가도를 이어나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파이팅!”

귀엽게 파이팅을 외친 시린.

오프닝 촬영이 끝나자 창현이 시린에게 살그머니 다가와서 말한다.

“오늘 잘 부탁해요, 누나.”

시린은 어제 윤아에게 왔던 전화를 말하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대신, 알지?”

은밀한 거래를 하는 두 사람.

창현은 고개를 끄덕인다.

“물론입니다. 기브 앤 테이크! 미국에서 철저하게 겪고 왔으니 저만 믿으세요. 받는 게 있으면 확실하게 드리는 것도 있을 테니까요.”

“알았어. 그럼 나만 믿어.”

원래 창현이라면 시린에게 부탁하는 정도로 끝이 났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창현은 아침부터 CF촬영 미팅과 인터뷰가 있었기에 AA엔터테인먼트에 있질 못하게 되었다.

자칫 한순간에 힘들게 역전 시킨 모든 것을 잃을 수 있기에 창현은 결국 시린에게 큼지막한 미끼를 걸고 협상을 시도하게 된다.

개인 파트를 늘려주겠다는 창현의 은밀한 언질에 단숨에 거래를 수락하는 시린. 어차피 오늘 하루 종일 AA엔터테인먼트에 있을 예정인지라 세룬과 미란의 음식 유혹만 견뎌낸다면 많은 양의 개인 파트는 자신의 차지였다.

“그럼 누나만 믿을게요.”

시린을 믿는다는 말과 함께 벤을 타고 이동하는 창현.

그 모습을 지켜보는 시린의 입가에는 미소가 맺힌다.

“미안, 창현아. 방송의 진정한 묘미는 돌발 상황인 법이야.”

시린은 오늘 윤아가 어떠한 떡밥을 가지고 올지 너무나 기대가 되었다.


부지런히 음악 방송 스케줄을 소화하는 소녀시대.

스케줄을 모두 마치고 나니 오후 4시였다.

시간을 흘낏 확인하는 윤아.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맺힌다.

‘생각보다 방송이 일찍 끝났어!’

자칫 잘못하다가는 시간이 늦을 수 있어서 얼마나 마음을 졸였던가.

빨리 끝내고자 열심히 노력을 하였고, 그 노력이 빛을 발한 탓인지 스케줄이 무사히 끝났다.

방송국 주차장으로 온 소녀들.

윤아가 수연과 함께 옆으로 빠지더니 소녀들에게 말했다.

“언니들, 그리고 주현아. 저랑 수연 언니는 만원의 행복 촬영 때문에 조금 늦게 들어갈 것 같아요. 먼저 들어가서 쉬세요.”

“촬영? 너는 그렇다 치고 수연이는 왜?”

태연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묻자 수연이 대답한다.

“내가 이번에 윤아에게 도움을 줄 일이 있거든. 별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고 들어가서 쉬어. 늦지 않을 테니까.”

“흐음! 알았어. 너무 늦게 들어오지 말고.”

태연은 수연의 말에서 무언가 의아한 점이 느껴졌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일찍 들어오라는 당부와 함께 벤에 탑승한다.

다른 소녀들도 촬영을 하러 간다는 말에 별다른 말을 하지 않는다. 다만 일찍 들어오라는 둥, 조심하라는 둥, 당부의 말만 남길 뿐이었다.

그렇게 두 명만 남게 된 상황.

윤아와 수연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친다. 두 소녀의 입가에 미소가 맺힌다. 그리곤 준비된 차에 탑승하여 목적지인 AA엔터테인먼트로 향한다.

“이 작전은 창현이가 절대 눈치 채지 못하게 해야 돼. 그래야 뒤집을 수 있어. 알겠지?”

“물론이에요. 그리고 시린 언니와 조용히 먼저 만나서 이야기를 끝내야 해요. 다른 언니들에게 들키면 안 되니까요.”

윤아가 조심해야 할 점을 덧붙여 주었다.

두 소녀가 이렇게 협력하게 된 계기.

그것은 바로 어제 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윤아는 수연이 보여준 걸 보고 경악에 빠진다.

수연의 핸드폰 액정에 투영된 것. 그것은 결코 일반적인 경로로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 이걸 어떻게 언니가!”

경악한 윤아가 수연을 보며 묻자 고개를 돌려 외면한 수연이 말한다.

“내가 예전에 힘들어할 때 창현이한테 위로 받은 적이 있어. 그때 아침밥을 해주겠다고 했었는데… 그 복장으로 나와서 나도 모르게…….”

수연이 윤아에게 보여준 것.

그것은 다름 아닌 창현의 앞치마 차림의 모습이었다.

현재 돌아다니는 창현의 사진 중에서 구할 수 없는 신급 사진이었다.

이것이라면 엄청난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그, 그래도…….”

윤아는 앞치마를 차려입은 창현의 모습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수연이 창현과 사귀지 않는다는 걸 알았기에 내심 안도하기는 했지만 사진을 보는 순간 마음이 철렁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저 그냥 이대로 촬영할래요.”

단호한 윤아의 태도.

그런 윤아의 모습에 수연이 당황한 모습을 보인다.

“가, 갑자기 왜 그러는데?”

“이런 걸 보여주고 협상을 하면 당연히 응할 거 아니에요. 그냥 제가 지는 걸로 할래요.”

사진을 보는 순간 윤아는 깨달을 수 있었다.

수연이 창현에게 특별한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안 그렇다면 굳이 남자의 집까지 찾아갈 이유가 있단 말인가?

사진을 보면 시린의 마음이 바뀔 확률이 높다. 그렇게 되면 만원의 행복은 윤아의 승리로 돌아갈 확률이 높고, 자신이 승리하게 되면 소원은 수연의 것이 된다.

수연이 창현에게 호감 이상의 감정을 품고 있는 상황에서 소원을 말할 수 있는 권리를 주는 것은 무척 위험한 일이었다.

‘내가 너무 성급했어.’

수연은 윤아에게 사진을 보여준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

이럴 것 같아서 나중에 보여주려고 한 것인데.

윤아가 재촉하는 바람에 섣불리 보여주는 바람에 상황이 꼬이고 말았다.

그렇다고 물러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이미 사진은 보여준 터. 어떻게든 윤아의 협력을 받아야 한다.

수연은 자신이 손해를 조금 감수하기로 하였다.

“윤아야. 그럼 이렇게 하자. 내가 소원을 갖는 게 아니라 서로 상의해서 소원을 비는 걸로. 어때?”

이를 테면 한 개의 소원을 가지고 두 사람이 이득을 취하자는 이야기였다.

수연의 말에 윤아가 솔깃한 표정을 짓는다. 윤아가 걱정하고 있는 부분은 수연이 소원을 혼자 독식하여 그 소원으로 창현에게 모종의(?) 부탁을 하지 않을까 염려했는데 같이 소원을 빌게 되면 그 점을 방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잠시 고민하는 윤아.

이런저런 생각을 재보며 고민하던 윤아는 고개를 끄덕인다.

“알았어요. 그렇게 할게요.”

“좋아. 그럼 만원의 행복이 끝날 때까지 우리는 동료야.”

“좋아요. 힘을 합쳐서 창현이를 무찔러버려요.”

수연이 손을 척 내밀었다.

윤아는 그 손을 마주잡고 흔들었다.

그렇게 수연과 윤아는 동맹을 맺게 되었다.


차를 타고 AA엔터테인먼트에 거의 다 도착한 윤아는 핸드폰을 열고 시린에게 전화를 한다.

“여보세요, 언니, 저에요. 네, 지금 거의 다 도착했어요. 5분 정도 걸릴 것 같아요. 네. 그럼 안에 들어갈게요. 네. 그럼 조금 있다 뵈어요.”

통화를 끝마친 윤아. 그녀의 표정은 사뭇 비장했다. 옆에 있는 수연조차 긴장될 정도였다.

AA엔터테인먼트에 도착한 두 소녀는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섰다.

건물 안으로 들어선 소녀들이 향한 곳은 휴게실.

자판기가 옆에 있고, 옆에 앉아서 바깥을 내다볼 수 있는 곳에 시린이 자리하고 있었다.

수연과 윤아가 휴게실 안으로 들어서면서 시린에게 인사를 한다.

“안녕하세요, 언니.”

밖을 내다보던 시린이 수연과 윤아를 반갑게 맞이한다.

“그래, 어서와. 제시카도 왔네? 자, 여기 앉아.”

시린의 권유에 맞은편에 자리하는 수연과 윤아. 협상을 앞에 두고 있는 만큼 그 기세가 비장하다.

그 모습에 웃음을 지은 시린이 입을 연다.

“자, 그럼 준비해온 것들을 제시해봐. 뭐든지 협상은 밀고 당기는 것이 제 맛 아니겠어? 난 이미 창현이에게 만족스러울 만큼의 조건을 제시 받은 상태니까 그걸 뛰어넘는 걸 제시해봐.”

“…….”

시린의 말에 수연과 윤아의 시선이 마주친다. 그리고 동시에 고개를 끄덕인다.

수연이 핸드폰을 꺼내들면서 시린에게 말했다.

“물건은 아주 실(?)해요. 대신 단 한 번만 보여드릴 거예요. 그걸 보시고 언니가 판단하시면 되요.”

“호오! 자신만만한데?”

흥미로운 표정을 짓는 시린. 수연과 윤아가 무엇을 준비했을지 기대하는 눈치였다.

그에 수연이 핸드폰 앨범을 열더니 창현의 앞치마 차림을 액정에 띄운다. 그리고는 시린을 보며 말했다.

“딱 3초간 보여드릴게요.”

그 말과 함께 수연이 핸드폰 액정이 시린에게 보이게끔 내민다.

당연히 시린의 시선이 핸드폰 액정으로 향한다.

그리고 굳어버리는 것은 당연지사.

1초. 2초. 3초.

순식간에 시간이 흘러가고, 수연은 핸드폰을 회수한다.

“아……!”

핸드폰을 회수하자 시린이 안타까움이 가득한 목소리를 흘린다.

곧이어 시린은 경악이 가득한 눈으로 수연을 바라보았다.

“너, 너 그걸 어떻게…….”

예상을 뛰어넘는 시린의 반응이었다.

수연과 윤아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맺혔다. 특히 수연은 한껏 여유가 담긴 미소를 지어보이며 시린에게 말했다.

“노코멘트. 어떻게 하실래요, 언니?”

“그, 그건…….”

상황은 뒤바뀌었다. 기껏해야 이런저런 뇌물을 준비했을 거라 생각하던 시린의 생각은 완전히 빗나간 셈이다.

설마하니 저런 유니크 아이템을 준비해올 줄이야. 시린으로서는 한방 단단히 먹은 셈이었다.

긴 고민에 빠진 시린. 그런 시린을 바라보는 수연과 윤아의 시선이 초조해 보인다. 시린이 거절하게 되면 윤아의 패배로 직결된다고 보면 된다.

그때 갑자기 시린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두 사람을 바라보며 싱긋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갑자기 목이 마르네. 시원한 음료수라도 마실까?”

승낙인가!

우회적인 시린의 말에 수연과 윤아의 표정이 환하게 넘어갔다.

시린이 넘어간 것이다!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을 바라보는 시린.

수연과 윤아의 표정은 환하기만 하다.

시린이 자신들의 협상에 응한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녀를 설득한 이상 승리는 보장된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황. 소원은 획득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들의 착각에 지나지 않았다.

“에잇!”

갑자기 주먹을 들어 보인 시린이 수연과 윤아에게 아프지 않은 꿀밤을 한 대씩 먹인 것이다.

머리에서 전해지는 느낌에 수연과 윤아는 아프지도 않지만 본능적으로 머리를 감싸며 비명을 질렀다.

“아얏!”

갑자기 시린이 왜 때리는 걸까?

수연과 윤아가 의문이 가득한 시선으로 시린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시린은 수연과 윤아를 번갈아보더니 입을 열었다.

“너희들은 지금 큰 실수를 할 뻔한 거야. 알아?”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언니.”

“저희가 실수를 하다니요.”

의아한 기색을 감추지 않는 두 소녀.

그 모습에 시린이 한숨을 푹 내쉬더니 말했다.

“으휴! 나도 아직 신인이지만 방송계에 몸을 담은 선배로서 말해줄게. 너희들, 이 사진이 어떤 여파를 가지고 올지 알고 있니?”

“…….”

시린의 말에 수연과 윤아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만약 이 사진이 방송에 유출될 경우를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 애초에 유출될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시린에게 보여주고 몰래 협상을 하면 모든 게 끝이라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그냥 당사자들끼리 조용히 하면 될 텐데 어째서 유출이 된단 말인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두 소녀의 표정에 시린이 설명해주었다.

“너희들 내 입장은 생각하지 않았구나. 만약 지금 내가 여기에서 사진을 받고 돈을 써서 창현이를 패하게 만든다고 쳐봐. 물론 어느 정도 선에서 돈을 쓰는 것은 괜찮을 거야. 하지만 창현이가 패할 경우에는 달라져. 이미 창현이와 나 사이에 코인북이 오고가는 장면이 이미 촬영 되었거든. 그러니 합당한 이유없이 돈을 쓰게 되면 나는 여론에 몰매를 맞게 돼. 너희들 창현이 인기가 어느 정도인지 아니?”

대충 짐작만 할 뿐 제대로 알고 있을 리가 없다.

수연과 윤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보이자 시린이 머리가 아픈 듯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아직 살고 있는 곳이 유출되지 않아서 숙소 근처에는 없지만 회사 근처에 깔린 게 사생팬이야. 그리고 기자들도 수십 명이나 깔려있고. 그들이 모인 건 단 하나야. 창현이와 이야기 한마디라도 해보는 것. 이미 존재 자체만으로 특종이 되어버렸으니까. 그리고 그거 알아? 창현이 스케줄 표가 유출된 적이 있는데 그게 무려 50만원에 팔렸어.”

시린의 말에 수연과 윤아가 입을 떡 벌렸다. 단 하나의 스케줄 표가 50만 원이라니 믿기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다.

“창현이가 패할 정도로 돈을 쓰게 되면 나는 너희들과 협상이 있었다는 것을 밝힐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사진까지 공개해야 돼. 그럴 경우 어떻게 될 것 같아? 참고로 창현이의 팬 사이트인 다크 스타 회원은 칠십만 명이 넘어. 그것도 모두 창현이 앨범을 산 사람들이야.”

다크 스타 이야기가 나오자 수연의 안색이 헬쓱하게 변했다.

무려 특별회원인 수연이 어찌 다크 스타의 무서움을 모르겠는가. 당장 여론 몰이만 되면 연예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정도로 성장한 곳이 바로 다크 스타였다.

만약 사진이 공개되기라도 한다면 팬들은 분명 사진의 출처를 추적할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감춘다고 하여도 결국 창현과 수연이 만났다는 것도 밝혀질 확률이 높다.

그렇게 된다면?

이것은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었다.

시린은 다크 스타 칠십만 회원을 들먹였지만 해외에는 더욱 많은 팬들이 존재한다. 당장 미국이나 유럽만 하여도 수백만에 달하는 팬클럽 회원들이 존재한다.

동방신기나 슈퍼주니어와는 차원이 다른 스케일로 발전하는 것이다.

이미 악성 루머로 심한 마음 앓이를 한 적이 있기에 수연은 시린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이 짧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데뷔한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범한 실수였다.

“무엇보다 만원의 행복을 방영하게 되면 창현이의 팬들이 많이 볼 거야. 평상시 같으면 쉽게 넘어갈 일들도 심각하게 변질될 수 있어. 그러니 조심해야지. 안 그래?”

“그, 그러네요.”

수연이 고개를 끄덕이자 시린이 싱긋 웃음을 지어 보인다.

“그럼 협상은 결렬되었습니다! 자, 이제 협상이 끝났으니 녹음실 가볼래? 지금 애들 다 녹음실에 있거든.”

“괜찮을까요? 신곡 준비하신다면서요.”

윤아가 조심스러운 기색으로 묻자 시린이 문제될 것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아직 파트가 정해지지 않았어. 그리고 녹음실에 창현이가 막 여러 노래 녹음해놓은 거 있거든. 어때?”

창현이가 부른 다른 노래라!

윤아는 구미가 확 당기는 걸 느꼈다.

하지만 수연의 의견을 무시할 수 없었기에 윤아가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수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찬성! 꼭 가게 해주세요.”

순간 윤아의 얼굴이 황당해진다.

“언니! 하아…….”

“왜? 문제가 되는 것도 아닌데. 그럼 부탁드릴게요, 시린 언니.”

“그래.”

갑자기 당차게 나오는 수연의 모습에 시린은 조금 당혹한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렇게 협상은 결렬되었다.


헬프 데이가 끝나고 마지막 날까지 보내자 마침내 만원의 행복이 끝이 났다.

협상이 실패로 돌아갔기에 윤아는 최대한 근검절약을 하기 위해 노력을 하였고, 헬프 데이로 윤아를 도와준 태연 또한 상당히 노력을 하였기에 많은 금액을 남긴 채 만원의 행복을 끝낼 수 있었다.

창현과 윤아는 둥근 기구 같은 것 위에 앉아 있었다. 창현의 곁에는 신주아가 앉아 있었고, 윤아의 곁에는 이혁재가 앉아 있었다.

먼저 발표한 것은 이혁재였다.

“윤아 양의 생활비는… 어이구, 이거 많이 쓰셨네. 통화비 936원에…….”

통화비를 언급하자 창현의 입 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갔고, 윤아는 그런 창현을 째려보았다. 보이스 피싱만 아니었으면 완벽한 자신의 승리였을 텐데.

“벌금은 없고, 생활비 총 6256원!”

그래도 상당히 아껴 쓴 윤아였다.

윤아의 남은 금액을 듣는 순간 창현의 안색이 확 변했다.

그걸 확인한 윤아는 순간 혼란에 빠졌다.

창현의 저 표정, 과연 연기일까 진심인 것일까.

혁재가 발표하자 이번에는 주아가 발표하였다.

“현 씨의 생활비는… 통화비를 합쳐서 5950원! 306원 차이로 현 씨가 승리하셨습니다.”

주아의 발표가 끝나자 창현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그 모습에 윤아가 뭐라고 말하려 했지만 갑자기 자욱한 연기가 뿜어지면서 기구가 빙글빙글 돌았기에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한동안 연기를 흠뻑 맞으면서 기구에 몸을 맡기던 윤아가 내리면서 비틀거린다.

창현은 그런 윤아를 부축해주었다.

“괜찮아요?”

“누구 때문에. 흥!”

촬영이 잠시 중단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모습에 창현은 미안함을 느꼈는지 윤아에게 사과했다.

“콜렉트 콜 한 건 미안해요.”

“…….”

하지만 윤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콜렉트 콜 때문에 단단히 토라진 것이다.

“이런.”

그런 윤아의 반응에 난감한 표정을 짓는 창현. 안 그래도 자신이 조금 심하다고 생각하던 차였는데 윤아가 이런 반응을 보이자 한층 미안한 감정이 강해졌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창현이 입을 열었다.

“그럼 소원까지는 아니고 부탁 하나는 들어드릴게요. 어때요?”

“…부탁, 정말이지?”

창현의 말에 윤아가 반응을 보였다.

부탁이란 말에 바로 반응을 보이는 윤아의 모습에 창현은 순간 자신이 속은 게 아닐까 생각했다. 뭐랄까, 아무 반응도 안하던 윤아가 부탁이란 말에 반응해서 그런 느낌이 들었다.

어차피 해버린 말.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농담이었어요! 라고 말하면 다시 토라질 것이 분명했기에 창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대신 부탁 숫자를 늘려달라거나 제가 생각하기에 무리인 건 안 되요. 알았죠?”

“알았어.”

안 그러면 창현이 부탁을 안줄 태세였기에 윤아는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창현의 능력은 대단하니까 무리 범위를 벗어나지 않아도 얼마든지 기상천외한 것들이 가능했다.

안된다고 하면 우기면 될 테니 말이다.

‘그래도 부탁 하나는 건졌네.’

속으로 삐진 척하길 잘했다고 생각한 윤아.

하지만 이어진 창현의 말에 윤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럼 소원 하나 잘 받아둘게요. 소원 백 개로 늘려달라거나 그런 초등학생 같은 소원은 안 빌 테니 안심하시고요.”

창현의 말에 윤아가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윤아가 창현에게 이기면 일단 소원 백 개로 늘려달라고 하려던 차였다.

지금 상황에서 그걸 말하면 초등학생 인증하는 것과 다름없었기에 윤아는 억지 웃음을 짓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호호!”

억지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는 상황.

그 모습을 보면서 창현은 묘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흥 다음에 보자고.’

윤아는 속으로 칼날을 갈면서 겉으로는 화기애애한 표정을 지은 채 방송을 할 수밖에 없었다.

만원의 행복 현-윤아 편은 306원 차이로 창현이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제30장 공포의 이웃사촌, 세기의 대결




만원의 행복 촬영이 끝나고 창현은 본격적으로 라샤 앨범 녹음 작업에 들어갔다.

CF 계약 기간이 남아 있었기에 CF 콘티를 읽어보기도 하고, 라샤의 앨범에 수록될 곡들을 작곡하면서 창현은 무척 바쁜 나날을 보냈다.

만원의 행복을 촬영하면서 어느덧 10월로 접어들었다.

그간 학교를 결석하던 창현은 시험을 보게 되자 벤을 타고 학교로 등교를 한다.

창현의 깜짝 등교에 학생들은 놀란 표정을 짓다가 이내 와! 하는 함성과 함께 창현에게 모여든다.

갑자기 모여드는 학생들을 보며 당황한 표정을 짓는 창현.

3월말에 미국으로 떠날 당시만 하여도 힐끔 멀리서 쳐다보는 정도였는데 오늘은 갑자기 달려드니 당황한 것이다.

학교로 데리고 와준 로드 매니저의 도움으로 간신히 학교에 들어가게 된 창현.

교실로 들어서자 쏟아지는 시선에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하하, 안녕.”

“와! 창현아!”

창현의 등장에 교실은 축제 분위기로 바뀌었다.

학우들은 창현에게 달려들면서 그의 손을 잡기도 하고 볼을 잡아보기도 하는 등 난리법석을 떨었다.

평범한 중학생인 그들이 어찌 진정할 수 있겠는가.

자신들과 같은 학교를 다니고, 같은 반인 강창현.

한국인 아니, 동양인 누구도 해내지 못했던 빌보드 차트를 제패하였으며, 세계적인 신드롬을 일으킨 인물이 아닌가? 3월에 떠날 때와는 감히 비교를 거부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세계적인 스타가 된 창현이었다.

학우들은 창현에게 공책을 내밀며 싸인을 해달라고 하였다.

이 소란을 들은 옆반에서도 학생들이 몰려오고 있었는데, 그들은 하나같이 창현의 얼굴을 보고자, 싸인을 받고자 하였다.

갑작스러운 소란에 선생님까지 등장하였지만 창현이 등교한 것을 보고는 가장 먼저 한 것이 싸인을 받은 뒤 학생들을 진정시키는 것이었다.

시험을 보러왔다가 졸지에 싸인회를 열게 된 창현.

그래도 기분이 썩 나쁘지는 않았다. 학우들의 반응은 곧 자신의 인기를 나타내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소란스러운 사건이 있은 후 창현은 2학기 중간고사를 치르게 된다.

시험을 치기 위해 학교에 등장한 창현의 모습은 곧장 인터넷으로 올라갔고, 기자들은 기사거리가 딱히 없는 탓인지 창현의 사진을 입수하여 성적이나 간단한 학교생활에 대해 기사를 올렸다.

그런데 그런 소소한 기사마저도 클릭수 최고에 오르게 되니, 현의 인기가 얼마나 대단한지 넷상에서 보여주고 있었다.


“아이고, 학교 가기도 힘드네.”

시험을 무사히 치른 창현은 도망치듯 후다닥 학교에서 나와 벤에 탑승하자 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중간고사인 만큼 시험은 총 3일 동안 치르게 되는데 가는 날마다 이러면 무척 피곤할 것 같았다.

물론 자신을 반겨주는 학생들이 싫다는 것이 아니다. 자신을 좋아해주는 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 하지만 창현의 입장에서 학생들이 조금 과도하게 좋아해주니 부담스러운 면이 없지 않아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어떻게 조치를 취해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미국 진출을 하게 되면서 창현은 3학년 때 학교 출석을 거의 하지 못했다. 그랬기에 학교 측에다가 무언가를 부탁하는 것 자체가 미안했다.

하지만 이 추세라면 학교 생활이 고달파질 것임이 분명했기에 창현은 머리를 부여잡으며 고민에 빠져야만 했다. 그래도 딱히 생각나는 것은 없었다.

“이것 참 머리가 아프네.”

라샤의 앨범도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가야 했기에 창현은 여러 생각이 머릿속에서 복잡하게 엉키는 걸 느끼고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리고 AA엔터테인먼트로 향하는 도중에 가방에서 책을 꺼내 공부를 하였다. 내일 볼 시험 과목을 공부하는 것이다.

이미 영어 같은 경우에는 미국에서 활동하면서 완벽하게 통달하였기에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국어나 수학은 공부를 해야만 했다. 아무리 잘했다고 하나 오랫동안 공부를 하지 않았으니 그만큼 잊어버린 부분이 많았던 것이다. 다른 암기 과목들은 벼락치기로 외우면 되니 큰 문제가 될 것은 아니었다.

요점이 지적되어 있는 참고서를 보던 창현은 어느덧 AA엔터테인먼트에 도착했다는 로드 매니저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벤에서 내렸다. 요즘 창현이 AA엔터테인먼트에 드나든다는 것을 안 사생팬들이 무척 많이 몰려 있었기에 창현은 최대한 조용히 회사 안으로 들어서야만 했다.

“이거… 생각보다 너무 힘든데.”

회사에 들어서는 것조차 조심해야 하자 창현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온다. 왠지 모르게 자신의 처지가 기구하다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무사히 회사 안으로 들어선 창현은 곧장 녹음실로 향했다. 곡을 완성했으니 이제 자신이 먼저 불러보고 파트를 나누는 등의 기타 작업을 해야 할 차례였다.

이번 앨범은 라샤의 정규 2집 앨범이었기에 수록할 곡들의 숫자가 무척 많았다.

먼저 완성된 세 곡을 녹음하던 창현은 어느 정도 만족할 만한 녹음이 되자 목을 부여잡고 인상을 찡그린다.

“여자 노래라서 그런지 부르면 목이 아프네. 내가 이 정도니 누나들도 각오해야 할 걸. 큭큭!”

회심의 미소를 짓는 창현. 만원의 행복 촬영 때 자신을 약올리려던 라샤 누나들의 만행을 잊지 않았기에 이번 앨범 수록곡들은 유난히 고음 부분을 많이 넣어놓았다. 고음을 매끄럽게 처리해야 실력이 있다. 라는 생각이 팽배한 대한민국이었기에 라샤의 가창력을 돋보이게 해주는 곡들을 선별하여 넣었다.

라고 라샤 누나들에게 말해줄 생각이었다.

실상 창현이 고음 부분을 많이 넣은 것은 뒤끝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자신은 당한 만큼 철저하게 갚아주는 도시 남자였으니까.

“파트야 뭐, 난 약속을 지켰으니까.”

창현은 시린과의 약속을 떠올리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만원의 행복 헬프 데이를 대신 해주면 개인 파트를 늘려주기로 하지 않았던가?

시린은 헬프 데이를 대신 해줬다. 하지만 돈을 써서 문제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시린이 윤아, 수연과 접촉을 했다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왠지 세룬과 미란의 핑계를 대면서 돈을 쓸 수밖에 없다고 말하더니 은밀한 뒷거래가 있었나보다.

실상은 시린이 윤아와 수연을 도와주겠답시고 돈을 조금 썼는데, 결과는 창현의 승리가 된 것이었다.

그것을 모르는 창현으로서는 모종의 거래가 있었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그래서 시린에게 복수를 할 생각이었다.

신용 없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 약속까지 지키면서 말이다.

창현의 복수.

그것은 바로 새 앨범 수록곡 고음 파트를 시린에게 할당 시켜버린 것이다.

원래 고음을 잘 소화해내기는 하지만 이번 만큼은 힘들 것이다.

라샤의 가창력이 어느 정도인지 상세하게 꿰뚫고 있는 창현이 힘들다고 생각할 수준으로 음을 올려버렸으니 말이다.

“후후! 노래를 완벽하게 소화하게 되면 잘 부른다고 칭찬 받을 테니 날 원망하지 마시길.”

창현의 입가에는 짙은 미소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점심시간이 지났을 무렵 라샤가 AA엔터테인먼트로 왔다.

창현은 그런 라샤에게 방금 전에 완성한 세 곡을 들려주었다. 그리고 각자 맡을 파트와 합동 파트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다.

그리고 음악을 다시 들려주었다.

음악이 끝나고, 라샤 세 명의 안색은 질려 있었다. 노래 난이도가 전보다 훨씬 높아져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시린의 안색은 파랗게 질려 있었는데, 노래의 클라이막스에 해당하는 자신의 부분은 마치 뭐랄까, 창현의 첫 미니 앨범인 <Go&Stop>의 고음 부분과 비슷하다고 느껴질 만큼 높았던 것이다.

창현은 파랗게 질린 시린의 표정을 즐기듯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표정은 왜 그러는 것인지 모른다는 것처럼 말이다.

“누나 왜 그래요. 표정이 안 좋아요.”

“이, 이걸 어떻게 하라는 거야!”

버럭 소리치는 시린의 모습에 입가에 창현은 입가에 웃음이 걸리려는 것을 참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왜요. 누나라면 가능하잖아요. 설마 고음이 안 되요?”

“아, 아니 된다 쳐도 이건…….”

안된다고 말하면 왠지 패배자가 되는 것 같아서 시린은 창현의 말을 인정하지 못한 채 말끝을 흐린다.

그 모습을 보면서 세룬과 미란은 소리 죽여 웃음을 지었다.

제3자의 입장에서 보고 있기에 그녀들은 창현이 지금 시린을 놀리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놓칠 수 없었기에 그녀들은 시린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표정 관리에 들어갔다.

“누나라면 가능할 거라 생각했어요! 전 누나를 믿어요.”

“그, 그래.”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에게 실망을 안겨주고 싶은 사람은 없는 법. 창현의 기대감이 잔뜩 담긴 눈을 마주한 시린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완벽하게 낚인 것이다.

창현은 그런 시린에게 웃음을 지어보이며 말했다.

“그럼 오늘 하루 동안은 하루종일 노래를 들으면서 귀에 익혀두세요. 녹음은 내일부터 들어갈 테니까요. 알았죠?”

“으응…….”

“그래, 알았어.”

“오케이! 믿으라는 말씀. 그런데 시린이는 어쩌냐. 푸훗! 푸하하! 시린이 죽어나겠네.”

대답하던 차에 미란의 웃음보가 터지고 말았다.

그 웃음에 시린은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날카로운 눈으로 미란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는 창현을 바라보았다.

그때는 창현도 웃음을 짓고 있었다. 웃음이 전염된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미란이 웃음을 터뜨리자 창현도 애써 억누르고 있던 웃음을 참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시린.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창현을 가리킨 시린이 소리쳤다.

“너, 너 설마!”

♩♪♬

시린이 뭐라고 외치려던 찰나 울린 핸드폰.

창현은 하늘이 자신을 돕는다고 생각하면서 전화를 받았다.

전화한 사람은 석규였다. 회사에 있으면서 직원을 시키지 않고 창현에게 전화를 한 것이다.

“아버지, 왜요? 잠시 사장실로 오라고요? 알았어요. 네. 지금 갈게요.”

일부러 소리 내서 말한 창현은 통화를 끊고는 장난기가 가득한 얼굴로 시린을 보면서 말한다.

“이런! 아버지가 부르시네요. 전 그럼 슈슝!”

“야! 강창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창현을 부르는 시린이었지만 이미 창현은 녹음실을 벗어난 상태였다.

당한 것을 그대로 돌려주는 도시남자(?)의 진정한 면모를 보여주는 창현이었다.


적절한 석규의 호출로 시린에게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창현은 곧장 사장실로 향했다.

녹음실에서 사장실까지 그리 멀지는 않지만 직원들도 함부로 들어서지 못하는 곳이 녹음실이었기에 석규가 창현에게 전화를 건 것이다.

사장실에 도착한 창현은 예의상 노크를 한 뒤 안으로 들어섰다.

“부르셨…….”

안으로 들어서던 창현은 흠칫했다. 사장실 안에는 석규만 있던 것이 아니다.

사장실에 비치된 소파에는 한 여성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긴 생머리를 살짝 웨이브를 한 검은색 투피스 차림의 미인이 앉아 있었다.

여성은 창현을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고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오늘부터 AA엔터테인먼트에 채용된 윤세희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려요.”

“네? 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현으로 활동하는 강창현입니다.”

얼떨떨한 모습으로 대답하는 창현의 모습은 무척 귀여워보였다.

무대 위에서 관객들을 사로잡는 카리스마적인 모습을 보다가 이런 모습을 보게 되니 무척 귀여웠다.

평소 창현의 팬이던 세희는 이색적인 창현의 모습이 재미있었는지 입가에 살풋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후후! TV에서 보던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네요. 앞으로 자주 보게 될 것 같으니 예쁘게 봐주세요.”

“자주 봐요?”

고개를 갸웃하는 창현.

그런 창현의 반응에 세희가 의아한 기색으로 석규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석규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하하하! 그러고 보니 내가 말을 하지 않았구나. 여기 윤세희 양은 앞으로 창현이 네 매니저가 될 분이란다.”

“네에?”

화들짝 놀라는 모습을 보이는 창현.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의 매니저라니. 전혀 들어보지 못한 소리였다.

창현이 놀라는 모습에 세희는 조금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석규에게 말했다.

“사장님, 설마 아무 말씀도 안 하신 거예요? 현 씨가 난감해하시는데…….”

“으음! 내가 그만 깜빡하고 말을 하지 않아서. 여기 윤세희 양은 경쟁률 53:1의 확률을 뚫고 채용되었다. 내 나름대로 기준으로 보면 매니저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지. 세희 양이 앞으로 창현이를 잘 이끌어주게나. 애늙은이 같기는 하지만 하는 짓은 초등학생이나 다를 바가 없으니까.”

“초등학생이라뇨. 저같이 조숙한 초등학생이 어디 있습니까.”

석규의 말에 창현이 발끈하며 말했다. 방금 전 시린에게 장난을 친 것 때문에 뜨끔한 것이다. 평소라면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넘길 말이었는데 말이다.

“찔리는 게 있다면 그런 반응은 안 보이겠지.”

창현의 과민반응에 석규는 씨익 웃음을 짓더니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그리고는 세희를 보며 말했다.

“이제부터 세희 양도 한 식구니까 몇가지 알아야 할 점이 있을 것 같아서 널 부른 것이다. 여태까지 매니저가 없지 않았더냐?”

미국에서 활동할 땐 석규가 매니저 역할을 해주었지만 한국에서는 로드 매니저를 제외하고는 스케줄을 관리해주는 매니저가 없었다. 석규는 앞으로 창현의 스케줄을 관리하고 길잡이를 해줄 사람의 필요성을 느꼈고, 그 나름대로의 기준으로 고르고 골라서 뽑은 사람이 바로 윤세희였다.

유명한 대학교의 연극영화과를 졸업한 세희는 대학 생활을 하면서 자신은 연예인보다는 그 연예인을 관리하고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더 끌린다고 생각하여 AA엔터테인먼트 채용 시험에 응시한 것이다.

나이는 어리지만 열정을 가지고 일하려는 그녀의 모습이 마음에 든 석규가 채용을 한 것이다.

처음에 예비 매니저를 뽑는 줄 알고 있던 세희는 석규가 다짜고짜 자신이 현의 매니저를 맡게 된다는 말에 당황하면서 한편으로는 기뻤다.

세계적인 스타 현의 매니저 자리를 맡겨줄 정도라면 석규가 그만큼 자신을 인정해주고 있다는 뜻인 것이다.

TV속에서나 볼 수 있던 현은 세희가 가졌던 환상처럼 정말 환상적인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잡티 하나 없는 깨끗한 피부와 미소를 머금은 듯한 입매. 그리고 호수처럼 잔잔하면서도 맑은 눈동자.

오히려 실물이 나았으면 더 나았지 결코 화면 빨이 아니라는 걸 느꼈다.

석규는 서류를 다 검토했는지 서류를 정리하면서 창현에게 말했다.

“창현아, 생강차 좀 타거라. 세희 양은 뭐로 하겠나? 커피? 녹차?”

“네? 저, 전 녹차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사장님 말 놓으세요. 사장님이 직원에게 존대를 해주시는 것은 좀…….”

AA엔터테인먼트에 입사 신청을 하기 전에 세희는 회사에 대해 조사를 조금 했는데, 주목할 점은 회사의 기이한 구조와 사장 강석규의 성격이었다.

단기간에 엄청난 돈을 벌어들였지만 그 돈을 꽉 쥐고 있다는 것과 엄청난 돈을 벌어들인 회사 사장답지 않게 소탈한 성격이라나? 스스로에게 엄격한 사람이라는 평이 대체적이었다.

입사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게 무슨 말인지 잘 몰랐는데 지금 직접 보게 되니 대충 어떤지 알 것 같았다.

일개 직원인 자신에게 존대를 사용하는 것과 창현에게 차를 타오라고 시키는 것까지 말이다.

세상에나, 세계적인 스타에게 차나 타오라고 시키다니!

정말 상상하던 것과 너무 달라서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었다.

세계적인 스타이기에 조금은 도도하고 시니컬 할 줄 알았는데 그러기는커녕 정말 석규의 말처럼 장난기 있어 보이는 또래 소년으로 보였다.

졸지에 월드스타가 타준 녹차를 마시게 된 세희였다.

먼저 녹차를 타온 창현은 세희에게 녹차를 내밀었다.

“이래보여도 제가 차는 조금 잘 타거든요. 드세요.”

“이 녀석아! 사장님인 내게 먼저 주는 게 예의 아니냐? 지금 남녀차별 하는 것이냐?”

창현이 세희에게 먼저 차를 건네주자 호통을 치는 석규였다.

그런 석규의 호통에 창현은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지으면서 대답했다.

“언제부터 그런 걸 따졌다고 그래요. 그리고 전 아버지랑 같은 차 마시려고 하니까 먼저 녹차를 타서 드린 것뿐이라고요.”

월드스타는 생강차를 즐겨 마시나 보다.

입사 첫날부터 여러 가지 정보를 얻게 되는 세희였다.

생강차를 타온 창현은 석규에게 내밀고는 자신도 자리에 앉는다.

석규는 생강차를 한모금 마시고는 만족의 미소를 띠더니 입을 열었다.

“음, 우선 윤 매니저가 알아야 할 사항은 천천히 교육을 받도록 할 것이고, 우선 인사부터 해야 할 것 같아서 부른 것이네. 창현이가 라샤 앨범을 녹음 중이어서 AA엔터테인먼트에 자주 들리지만 본격적인 활동을 하게 되면 오지 않게 될 거란 말이지.”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저도 사장님이 주신 정보를 토대로 공부해왔습니다. 제 생각을 말씀드려도 될까요?”

본격적인 대화로 들어서자 세희는 녹차를 한모금 마시면서 목을 축였다. 기분이 상쾌해지는 녹차 향이 입가에 감도는 것이 무척 감미로웠다.

“말해보게나.”

석규의 승낙이 떨어지자 세희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입을 열었다.

“우선 현 씨의 개인 녹음실을 갖추는 것이 시급하다고 생각합니다.”

“음!”

세희의 말에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석규. 그 반응에 힘을 얻은 세희가 말을 이었다.

“현 씨의 곡들은 값어치를 함부로 매기기 힘들 만큼 엄청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아무리 회사의 녹음실 시설이 훌륭하다고 하나 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는 이상 자칫하면 곡이 사전에 유출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회사가 점점 커지면 직원들 숫자도 늘어날 테고 그런 위험에 노출될 확률이 높겠지요. 게다가 제가 살펴보니 현 씨가 AA엔터테인먼트에 자주 출입한다는 걸 알아차린 팬들이 인근에 모여 있는 것도 보입니다. 이것도 자칫하면 문제를 야기할 수 있는 문제로 보이고요. 현 씨가 AA엔터테인먼트에 들르는 것은 스케줄에 관련된 것이어야지, 녹음에 관련된 일로 방문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세희의 말은 창현이 개인 녹음실을 가져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녹음을 회사에서 하게 되면 곡이 유출될 수 있고, 잦은 회사의 출입으로 인해 모여드는 팬들로 인해 생겨날 문제를 설명하는 세희의 말은 타당한 근거를 뒷받침하고 있었다.

석규는 그런 세희의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음! 윤 매니저가 한 말이 맞네. 그리고 실제로 창현이의 녹음실을 마련하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알아보고 있지. 날카로운 지적 좋았네.”

“감사합니다, 사장님.”

“몇 가지 당부 사항만 알아두면 본격적으로 매니저 일을 시작하게 될 테니 이야기를 나누게나. 잠시 외출할 일이 있어 나가볼 테니.”

“아, 아버지!”

영문 모를 짓궂은 미소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서는 석규. 그리고 창현의 목소리를 뒤로한 채 사장실을 벗어난다.

“…….”

순식간에 둘만 남게 된 상황.

아직은 서먹한 사이였기에 창현과 세희 사이에는 묘한 침묵이 만들어진다.

“저기…….”

먼저 입을 연 것은 창현이었다.

창현이 말을 걸자 세희는 움찔 떨며 대답했다.

“네, 말씀하세요.”

“일단 제 매니저를 하게 되시면 자주 보게 될 텐데 먼저 말부터 놓아주세요.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한 번 입을 열자 창현에게 어색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세희는 그것이 창현 특유의 자신감이자 그만이 가지고 있는 매력이라고 생각했다. 할 땐 확실하게 휘어잡는 카리스마가 창현에게는 존재하고 있던 것이다.

“스물네 살이에요.”

“저보다 누나시네요. 누나라고 부를게요. 저도 편하게 대해주세요.”

애절한(?) 눈으로 바라보면서 말을 하는데 어찌하겠는가.

세희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으응. 알았어.”

그녀의 수락에 창현이 웃음을 지어보였다.

“잘됐네요. 실은 제가 나이가 어린 편이잖아요? 그래서 관계를 확실하게 확립해놓는 걸 좋아해서요. 그런데 한 가지 질문이 있는데 해도 괜찮을까요?”

편하게 자신을 누나라고 불러주자 세희도 한결 긴장이 풀렸는지 입가에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했다.

“응. 쓰리 사이즈를 가르쳐 달라는 질문 빼고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서 대답할게.”

세희의 농에 창현은 얼굴을 살짝 붉히며 말했다.

“흠! 누나가 그렇게 말해주시니 궁금해지기도 하는… 아, 이게 아니라. 솔직히 전 누나가 제 매니저라고 하는 순간 놀랐거든요. 누나 스스로가 연예인을 해도 손색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연예인이 되실 생각은 없으신 거예요?”

창현의 말처럼 세희는 연예인에 비해 손색이 없는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긴 생머리에 다소곳한 행동. 그리고 청순한 외모는 남자의 마음을 뒤흔들어놓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세희는 창현의 질문에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실은 나도 연예인이 목표였어. 대학교도 연극영화과에 갔었고.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뭐랄까, 연예인은 내게 맞지 않는다는 걸 느꼈어. 다른 사람들에게 있는 끼나 재능 같은 게 내게는 없었거든. 무엇보다 나 스스로 연예인을 하는 것보다 연예인을 곁에서 지켜보는 게 더 즐겁더라고. 그래서 AA엔터테인먼트에 입사 신청을 한 것이고. 솔직히 매니저로 바로 발탁될 줄은 몰랐지만.”

그녀의 말은 창현에게도 공감을 심어주었다.

자신의 재능이 이것밖에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순간, 어린 마음에 얼마나 큰 절망감을 느꼈던가. 자신의 수준을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크기를 알았을 때 느낄 충격을 견뎌내는 것도 중요했다.

창현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음.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저도 비슷한 게 있었거든요. 어쨌든 이곳으로 오게 되셨으니 잘 부탁드려요. 저희 아버지는 직원들을 한 가족이라 생각하시거든요. 그것은 저도 마찬가지고요. 앞으로 잘 부탁드릴게요, 누나.”

벽에 가로막힌 경험담을 들어서일까?

세희가 한층 더 친근하게 느껴지는 창현이었다.

그런 창현의 말에 세희는 말을 하면서 자칫 심각해질 수 있었던 무거운 기분을 털어낼 수 있었다.

“아니야. 나야 말로 아무런 경험도 없는 생초보인 걸.”

“그럼 인사도 나눴으니 일어설까요? 누나 혹시 라샤 누나들 아세요?”

모를 리가 있나. 연예계에 관심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당연히 듣게 되는 가수가 바로 라샤였다.

세희가 관심을 보이자 창현이 미소를 지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제가 인사드릴게요. 앞으로 한 가족이 될 사이니까 인사는 해놓는 게 좋을 거예요. 라샤 누나들도 모두 좋은 분들이니 금방 친해질 수 있을 테고요.”

“응.”

창현의 말에 세희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새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하던 어색함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여태까지 매니저가 없던 창현에게 윤세희라는 미녀 매니저가 생기는 순간이었다.


“후우!”

집으로 돌아온 창현은 소파에 털썩 앉으며 숨을 길게 내쉬었다.

세희를 데리고 녹음실에 간 것은 창현의 일생일대 실수였다.

녹음실에 도착하는 순간 뉴 페이스인 세희의 시선은 고려하지 않은 채 다짜고짜 달려들어 창현에게 분노의 목조르기를 감행하는 시린.

세룬과 미란에게 구원의 눈빛을 보냈지만 그저 상황을 즐기고 있을 뿐이었다.

세희의 만류가 없었다면 창현은 돌아가신 어머니와 만났을지도 모르리라.

그렇게 라샤와 세희의 만남을 주도한 창현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뒤 무사히 이야기를 끝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된 것이다.

“오랜만에 일찍 왔는데 게임이나 할까.”

창현은 오랫동안 게임을 안했기에 오랜만에 스타크래프트나 할 생각으로 컴퓨터를 켰다.

그리고 배틀넷에 접속하는 순간, 창현의 눈에 낯익은 아이디가 눈에 들어왔다.

“어라? 누나가 스케줄이 없나? 일찍 들어왔네.”

창현은 반가운 마음에 말을 걸었다.

<To:DarkSword>:하이! 순규 누나 게임 중이십니까. 스케줄 없어요?

스타크래프트에 들어와있는 것은 다름 아닌 순규였다. 오늘은 스케줄이 없는 날인 듯했다.

창현이 귓속말을 날리자 곧장 답장이 들려왔다.

<From:SNSD)SunNy>:스케줄 방금 다 끝나서 게임하는 중이야. 내일 오전까지 스케줄이 없거든. 너 지금 들어온 거지? 나랑 게임 한판?

창현으로서는 두 팔을 벌려 환영하는 바였다.

귓속말을 나누는 도중 슬쩍 전적을 쳐봤는데 짬짬이 게임을 했는지 전적이 꽤나 쌓여 있었다. 데뷔 이후 길드에서 탈퇴한 순규는 혼자서 SNSD(소녀시대) 길드를 만들어서 활동 중이었다.

<To:DarkSword>:순규 누님의 게임 신청이라면 얼마든지 환영입니다. 그럼 방 만들 테니 들어오세요.

<From:SNSD)SunNy>:알았어! 오늘은 반드시 패배의 분루를 흘리게 해주마.

언제나 이 말을 하는 순규. 그러나 정작 창현을 꺾은 적은 없다.

창현이 방을 만들자 잠시 후 순규가 방에 접속한다. 그리고 간단한 채팅 투닥거림과 함께 게임을 시작한다.

오랜만에 하는지라 창현이 게임에 적응하는 시간이 어느 정도 필요로 했다. 순규 또한 실력자였기에 그런 창현의 버벅거림을 비집고 들어와서 한차례 위기를 겪기는 했지만 이내 경기 감각을 되찾아감에 따라 게임은 창현의 승리로 끝을 맺게 된다.

창현은 자신이 승리하게 되자 마음껏 승자의 웃음을 날려준다.

<To:DarkSword>:크흐흐! 나의 승리네요. 제법 힘들기는 했지만 누나는 아직 내 밥임! 전 한 5분 정도 쉬면서 승자의 기분을 만끽하고 오겠음!

그런 도발적인 창현의 말을 본 순규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아니나 다를까, 날이 잔뜩 선 내용의 대화가 올라온다.

<From:SNSD)SunNy>:으드득! 이게 넷상이라고 막말하네. 직접 보기만 해봐라!

<To:DarkSword>:^ㅠ^)//

그저 비웃음을 날려줄 뿐이었다.

그리고는 사뿐하게 Quit 버튼을 누른 창현은 오디오를 튼다. 상쾌하게 순규를 발라줘서 그런지 기분이 무척 후련했다.

“게임 승리 후 노래 한곡은 들어줘야지.”

이럴 때 혼자 사는 게 좋다. 집안에 노래를 마음껏 틀어놔도 누가 뭐라 할 사람이 없으니 말이다.

노래를 크게 틀어놓은 창현은 그제야 화장실에 들어가서 씻기 시작한다.

승리 후 음악 감상과 세수는 꿀맛이었다.


그 시각 한줄기 괴성이 소녀시대 숙소를 뒤흔들었다.

“아악! 분해!”

방에서 게임을 하던 순규가 창현에게 처참한 패배를 당한 뒤 소리를 지른 것이다.

일반인의 성량을 상회하는 순규의 괴성에 한 소녀가 방안에 들어서면서 핀잔을 준다.

“뭐야, 또. 순규 너 게임에서 져서 그러는 거지?”

“응! 태연아, 창현이한테 또 졌어. 너무 분해.”

방안에 들어선 태연의 품에 안기며 자신의 서글픈 심정을 토로하는 순규. 평소 키 작은 것이 자주 언급되었던 터라 알게 모르게 단신 듀오의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기에 순규는 태연에게 자신의 분한 마음을 털어놓았다. 그리고 조금씩 스타크래프트를 하기에 이야기를 할 사람이 태연 밖에 없었다.

태연은 그런 순규를 토닥여주면서 위로한다.

“일단 최선을 다해봐. 창현이가 아무리 엄친아라 그래도 틈은 있을 거야.”

“하지만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고. 도대체 그 녀석은 어느 별에서 온 외계인이야!”

급기야 창현이를 외계인으로 만들어버리는 순규.

그런 순규의 모습을 한심하게 바라보던 태연이 말한다.

“그냥 포기해. 그럼 편해.”

“…….”

한순간 순규는 할 말을 잃었다. 태연의 말처럼 포기하면 편해진다. 하지만 순규는 포기할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게임. 그것만큼은 패배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특히 상대로 하여금 아주 얄미운 감정을 유발시키는 창현에게 말이다.

순규는 태연의 품에서 벗어나며 말했다.

“포기할 수 없어! 언젠가 반드시 꺾고 만다. 그나저나 출출하네. 아직까지 저녁 시간 좀 남았지? 우리 간식거리나 사러 갈까?”

게임에서 패한 스트레스를 푸는데는 먹는 게 최고였다.

혼자서 나가는 것은 뭐했기에 태연을 꼬드기는 순규.

그런 순규의 모습에 태연은 골치 아프다는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으이구, 알았어. 마침 먹을 것도 없으니 사놓도록 하자. 아주머니가 해주신다고 해도 어느 정도 한계가 있으니까.”

소녀시대가 데뷔하면서 먹는 것에 불편함이 없도록 음식을 해주는 아주머니를 SM엔터테인먼트에서 고용한 상태였다. 밖에서 먹는 것보다 훨씬 나았지만 입이 아홉 명인 터라 이래저래 사소한 반찬들은 소녀들이 직접 해결하는 편이었다.

마침 반찬이 떨어진 터라 나갈까 말까 생각 중이었는데 순규가 나가자고 하니 태연은 그에 응한 것이고 말이다.

아직 신인이지만 제법 얼굴이 알려진 터였기에 옷을 입고 모자를 푹 눌러 쓴 것으로 변장을 마친 두 소녀는 사이좋게 집을 나섰다.

밖으로 나온 소녀들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 채 엘리베이터가 올라오기를 기다리다가 이상한 소리를 듣게 된다.

♩♪♬♩♪♬♩♪♬

“……?”

태연과 순규는 서로를 쳐다본다. 그리고 고개를 젓는다.

복도에서 들려온 것은 노래 소리였다. 그런데 숙소에서 노래를 튼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노래 소리가 들려오자 의아한 표정을 지은 것이다.

“이거 옆집에서 들리는 거 아냐?”

숙소에서 들릴 이유가 없었기에 남은 것은 옆집뿐이었다.

순규의 중얼거림에 태연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다? 우리가 이사 올 때만 해도 옆집에 아무도 살지 않았잖아? 이사 온 건가?”

“어디 외국 갔다가 온 걸 수도 있잖아.”

“그럴 수도 있겠네.”

제법 그럴 듯한 순규의 말에 태연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에 태연이 옆집 문을 보더니 말한다.

“그럼 인사나 할까?”

“괜찮을까? 옆집에 사는 거 들키면 안 좋을 수도 있잖아.”

순규가 걱정스러운 음성으로 말하자 태연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옆집에 살면 언젠가 들키게 되어 있어. 그냥 먼저 인사하고 좋은 인상을 심어주는 게 더 낫지. 안 그래?”

“그것도 그러네.”

태연의 말을 들어보니 그게 더 좋을 듯 싶었다.

순규도 동의하자 태연은 초인종을 누르려다가 멈칫하며 말한다.

“그, 그럼 누른다.”

모르는 집에다가 다짜고짜 초인종을 누르는 것이기에 조금 떠는 듯했다.

그 모습이 묘하게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답답하게 만들었기에 순규는 손으로 가슴을 팡팡 두들기며 말했다.

“으이구! 무대에 서면서 뭐 그런 거 가지고 부끄러워 해. 힘들면 내가 누를게.”

그 말과 함께 앞으로 나선 순규가 벨을 눌렀다.

띵동♪

벨소리와 함께 알 수 없는 숨막히는 적막감이 주변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룰루루!”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간단하게 씻고 나온 창현은 물을 마시기 위해 냉장고를 막 열어 물통을 꺼낼 때였다.

띵동♪

갑자기 울리는 초인종 소리.

막 물을 마시려던 창현은 초인종 소리를 듣고는 멈칫했다.

“아, 노래 소리가 조금 컸나.”

갑자기 들려온 초인종 소리에 생각이 미친 창현은 자신이 노래를 너무 틀어놓은 게 아닐까 생각하면서 인터폰으로 향했다. 자신의 집에 올 사람이 아무도 없기에 미친 생각이었다.

내심 자책하면서 인터폰으로 향하는 창현.

인터폰을 받아들려던 창현은 자신의 초인종을 누른 사람들을 보고는 흠칫했다.

전혀 예측하지 못한 두 사람이 복도에 있던 것이다.

자신의 집 초인종을 누른 것은 다름 아닌 태연과 순규였다.

창현은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는 경악한 표정을 짓는다.

“뭐, 뭐야. 왜 이 누나들이 여기에 있는 거야?”

불과 십 분 전만 하여도 자신과 순규는 게임을 같이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게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설마 자신이 약 올렸기에 쫓아온 것일까?

아니다. 소녀시대 멤버 중에서 자신의 집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창현도 그걸 알았기에 순규를 놀릴 수 있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시간도 얼마 흐르지 않은 상태였다.

이건 마치 옆집에 사는 것이 아니면 불가능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순간 창현의 몸이 움찔했다. 옆집이라고 하니 말도 안 되는 가정이 떠오른 것이다.

“설마 옆집?”

믿을 수가 없었다. 설마, 설마 소녀시대 숙소가 자신의 옆집일까?

순식간에 수많은 생각을 한 창현은 인터폰을 받아든다.

일단 자신이라는 걸 들키면 안 된다. 다른 때라면 모를까 지금은 상황이 좋지 않았다.

가볍게 목을 푼 창현은 목소리를 굵게 내면서 인터폰을 받았다.

“누구세요?”

창현의 목소리 변조는 신의 경지에 올라 있었기에 평소 그의 목소리가 아닌, 굵직한 성인 남성의 목소리로 변해 있었다.

태연과 순규는 굵직한 남자의 목소리에 움찔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이내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옆집에 사는 사람이에요. 앞으로 잘 부탁드린다고 인사드리러 왔어요.”

이제 데뷔한 지 두 달 정도에 들어갔기에 태연과 순규는 옆집에 사는 사람이 자신들의 얼굴을 모른다고 생각했다. 굵은 목소리로 인해 창현이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채 말이다.

창현은 옆집이라는 태연의 말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진짜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일어난 것이다.

‘여, 역시 옆집이었어.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일어나다니.’

일단 지금 위기를 넘기는 것이 중요했다.

태연과 순규를 보며 창현은 변조한 목소리로 웃음을 지었다.

그러면서 슬쩍 드는 장난기.

창현은 회심의 한 수를 날렸다.

“하하! 옆집에 이렇게 아름다운 소녀 분들이 사시다니 기분이 좋네요.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데 혹시 자매이십니까?”

콤플렉스 부분을 제대로 건드리는 창현의 일침에 미소를 짓고 있던 태연과 순규의 입가가 순간 씰룩였다.

만약 창현이 면전에서 그러했다면 강렬한 보복이 들어왔을 터.

하지만 지금은 정체 모를 옆집 남자를 연기하는 중이었다.

즉, 창현은 제3자의 입장에서 진지하고 냉철하게 두 사람의 모습을 그대로 말한 것에 불과했다. 아마도.

그나마 태연보다 더 작아서 키 작다는 말에 더욱 면역력이 높은(?) 순규가 한층 빠르게 회복하며 입을 열었다.

“호호! 저희 중학생 아니에요. 열아홉 살이랍니다. 그런데 이렇게 가녀린 저희들을 복도에 세워두실 생각이신가요?”

슬슬 본성을 드러내는 순규. 창현이 키를 건드려서 그런지 옆집에 사는 남자의 얼굴을 보고 싶었나보다.

그것에 말려들 창현이 아니었다. 이미 두 사람의 정체를 알고 있는 창현은 순규의 말에서 순간 헛구역질이 나올 뻔했다.

가녀리긴 개뿔.

겉보기에는 가녀려보여도 수년간 단련된 소녀들은 그야 말로 근육걸들이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맞으면 뭐가 아프겠냐 하겠지만 실제로 맞으면 뼈와 살이 분리되는 듯한 충격을 느끼게 된다.

순규의 말에 창현은 의도적인 기침을 터뜨렸다.

“콜록콜록! 그러고 싶지만 제가 지금 감기에 걸려서요. 옮으실 수도 있어서 다음에 초대하도록 하겠습니다. 옮을 수도 있거든요.”

자신들을 친절하게 배려해주는데 어쩌겠는가.

순규의 눈 꼬리가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본 창현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물러날 수밖에 없으리라.

“그, 그럼 다음에 뵙도록 할게요. 다음에는 꼭 뵈었으면 좋겠네요.”

“다 나으면 꼭 알려주셔야 해요!”

옆에 있던 태연도 데미지를 모두 회복했는지 거든다.

그녀들의 눈은 자신들의 콤플렉스를 건드린 옆집 남자를 반드시 봐야겠다는 의지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런 소녀들의 모습에 창현은 자신이 실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한순간의 장난 충동을 이기지 못해서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드린 것이다.

하지만 이미 일은 저질러진 터.

옆집이지만 안 들키면! 안 만나면 되는 것이다.

창현의 표정은 울고 있었지만 목소리는 웃어야만 했다.

“하하, 알겠습니다. 저도 귀여운 숙녀 분들을 초대하도록 하지요. 그럼 즐거운 하루되세요.”

그래도 마지막에 칭찬을 곁들어서 그런지 태연과 순규는 한결 안색이 풀어진다.

화기애애한(?) 이웃간의 대화가 끝나자 창현은 다급해졌다.

한차례 위기를 넘겼으니 이제 어떻게든 대책을 세워야 한다.

“일단 내일 회사에 가면서 아버지에게 이야기를 해봐야겠다.”

소녀들에게 자신이 옆집에 산다는 걸 들킬 경우를 생각한 창현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지영은 여자 중학교에 재학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자신을 힘들게 뒷바라지 해주는 어머니의 기대에 부흥하고자 지영은 공부를 무척 열심히 하여 학교에서 모범적인 학생이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힘겨운 가정 형편 때문에 본의 아니게 이래저래 위축되는 경우가 있었는데, 근래 들어와서는 그런 경향이 말끔하게 사라졌다.

무척 활발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지영은 친구들과도 잘 어울리는 성격이었는데, 그동안 어머니 지선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고자 용돈을 아껴서 쓰느라 방과 후에 잘 어울리지 못했다. 그러나 석규는 물론 창현까지 두둑하게 용돈을 챙겨주자 지영은 친구들과 함께 즐거운 학교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돈을 막 쓰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친구들과 놀 수 있는 정도의 수준이 된 것이다.

지영은 아직 친구들에게 자신의 오빠가 현이라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제 인기를 제대로 실감 못하는 현과 달리 유행에 민감한 지영은 현의 인기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고 있었기에 소란거리가 될 말을 하지 않고 있던 것이다. 아마 알려지면 무척 귀찮아질 것이란 것은 어린 지영도 알고 있었다.

방과 후, 청소 당번인 지영에게 단짝 친구 둘이 다가온다.

초등학교 때부터 절친하게 지낸 두 친구들은 지영과 절친해서, 지영의 집안 사정이 어떤지조차 알고 있는 친한 친구들이었다.

“지영아, 청소 다 끝나면 노래방 가지 않을래?”

“저기 사거리 옆에 괜찮은 노래방 생겼다고 하던데. 시험도 끝났으니까 노래방 가자. 응?”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용돈이 빠듯한 지영에게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 친구들이었지만 근래 들어서 지영이 돈 많이 벌고 성격 좋은 새 아버지가 생겼다는 말과 함께 자신들과 어울려주자 함께 노는 것에 맛이 들려버린 친구들이었다.

지영은 친구들의 제의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도 같이 가고 싶지만 오늘은 안될 것 같아. 약속이 있거든.”

“무슨 약속? 우리를 버리다니. 애정이 식은 거 아니야? 흑흑!”

“요즘 지영이가 변했어. 예전엔 우리에게 비밀이 없던 아이였는데. 어느새 다 커버려서 이렇게…….”

과장된 몸짓을 하며 반응하는 친구들의 모습에 지영은 어이없는 표정을 짓다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오늘 아빠 회사에 가기로 했거든. 마중은 오빠가 나오기로 했고.”

“오빠? 너 오빠도 생기는 거였어?”

“어떻게 생겼어? 잘생겼어?”

오빠라는 말에 순간 눈이 번쩍이며 묻는 소녀들. 사춘기 때인 만큼 이성에 대한 호기심이 왕성(?)할 때였다.

자신의 오빠에 대해 묻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 지영.

그녀는 친구들의 질문에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대답했다.

“잘생겼냐고? 음… 잘생겼다는 건 상대적이라서 확답을 해줄 수 없지만 내가 보기에는 세상에서 제일 잘생겼어! 게다가 노래도 진짜 엄청 잘하고, 능력도 있어. 아마 너희들 보면 눈에 하트 뿅뿅 생길 걸?”

그동안 입이 근질거렸던 것을 보상이라도 받듯 물 흐르듯 마구 말해버리는 지영.

그런 지영의 말에 친구들의 눈이 반짝인다. 평소 지영의 눈이 얼마나 까다로운지 알고 있었기에 호기심이 생겼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궁금하다. 우리랑 인사 시켜주면 안 돼?”

“그러게. 얼마나 잘생겼는지 궁금하다. 보고 싶네.”

“음! 어떻게 할까.”

친구들의 말에 지영은 순간 고민에 빠졌다. 친구들에게 오빠의 정체를 공개해도 될지 고민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초등학교 때부터 가장 친한 친구들인데 이 정도쯤은 알려줘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물론 깜짝 서프라이즈를 위해 지금 말할 생각은 아니었다.

“알았어. 그럼 나 청소 좀 도와줘. 오빠 보더러 조금 일찍 오라고 할 테니까. 알았지?”

“응! 미남을 보는데 그 정도쯤이야 충분히 감수할 수 있지!”

친구들의 승낙에 지영은 창현에게 와달라는 문자를 보내고는 청소를 끝냈다.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 교문 앞으로 나왔다.

지영은 창현이 보낸 문자를 확인하더니 친구들에게 말했다.

“곧 올 거야. 놀랄 준비 단단히 하라고.”

잠시 후, 벤 한 대가 교문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벤은 정확히 지영 앞에 섰다.

벤 안에 창현이 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지영.

친구들에게 눈짓으로 따라오라고 한 지영이 차문으로 향했다.

그러자 차문이 열리면서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영아 타. 친구 분들도 같이 태우고.”

“응. 오빠. 너희들도 타.”

지영이 벤에 탑승하며 말하자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던 친구들도 벤 안에 탔다.

그리고 문을 닫자 벤이 출발했다.

지영이 창현에게 자신의 친구들을 소개했다.

“오빠, 내 친구들이야. 초등학교 때부터 제일 친하게 지낸 친구들.”

“그래? 안녕하세요. 지영이 오빠인 강창현입니다.”

창현은 문을 여는 순간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혹시 정체가 들킬까봐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었는데, 더 이상 쓰고 있을 이유가 없어서 인사하면서 모자를 벗었다.

그러자 드러나는 창현의 얼굴.

그 모습을 본 지영의 친구들은 딱딱하게 굳어갔다.

그것은 너무나 의외의 상황에 직면했을 때나 나타나는 반응이었다.

그녀들은 지금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소년의 얼굴.

어찌 이 소년의 얼굴을 모를 수 있겠는가.

그녀들은 뻣뻣하게 굳은 목을 돌려 지영을 바라보았다.

지영은 그런 친구들의 모습을 생글생글 웃으면서 바라보고 있었다.

친구들의 시선을 받은 지영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말했지? 우리 오빠가 세상에서 제일 잘생겼다고. 노래도 세상에서 제일 잘해! 왜냐하면 우리 오빠는 바로 현이란 말씀!”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었다.

난데없이 벤이 오기에 뭔가 싶었는데 설마 그 벤 안에 현이 타고 있을 줄이야.

게다가 지영의 오빠 될 사람이 바로 현이란다.

그녀들은 믿기지 않는 사실을 연이어 접하게 되자 정신이 멍해졌다.

그 모습에 창현이 웃음을 지었다.

“지영이가 장난을 쳤나보네요. 지영아, 이런 장난은 치면 안 되지. 친구 분들이 난감해하시잖아.”

“그냥 놀랄 줄 알았지, 이런 반응을 보일 줄은 몰랐어. 미안, 오빠.”

“딱히 타박하는 건 아니야. 다만 친한 친구라면 조금 더 아껴줘야지.”

물론 친한 친구가 없는 자신이 딱히 해줄 말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창현은 여전히 굳어있는 소녀들을 보며 말했다.

“지영이가 놀라게 했으니 제가 사과의 의미로 점심 사드릴게요. 형, 저번에 갔던 거기로 가요, 제가 살게요.”

어느 날 갑자기 세계적인 스타와 직접 마주치게 되면 그 충격은 대단할 것이다.

지영의 오빠라기에 그저 잘생긴 오빠 정도로 연상하던 소녀들은 지영의 오빠가 세계적인 스타인 현이란 것에 너무 놀라 한동안 말을 하지 못할 정도였다.

창현이 친근하게 말을 걸어주며 분위기를 전환 시켜주기 위해 노력하자 그제야 제 정신을 찾았고, 놀랍다느니, 믿기지 않는다느니 여러 말을 들으면서 점심식사를 마칠 수 있었다.

인근 버스 정류장까지 데려다 준 뒤 창현과 지영은 회사로 향했다.

창현은 지영을 보면서 말했다.

“오늘 아버지가 일이 많아서 회사에 안 계셔. 대신에 라샤 누나들이 회사에 있거든. 인사 시켜줄게.”

“나야 완전 좋지! 아빠를 못 보는 건 조금 아쉽네.”

“그러게 말이야. 나도 무척 보고 싶었는데 말이지.”

진짜 아쉬워하는 지영과 다르게 활활 타오르는 눈으로 말하는 창현이었다.

숙소 문제로 너무 어이가 없는 나머지 창현은 석규에게 전화를 하였다. 중간에 자신이 미국에 가기는 했지만 숙소를 옮긴 시기는 2월 달이었다. 그에 반해 소녀시대는 6월즈음에 숙소를 옮겼으니 자신이 먼저 살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게 어떻게 된 거냐고 따진 창현.

하지만 돌아온 것은 뚜뚜뚜… 전화 끊긴 소리 뿐이었다.

다시 전화했지만 절대 전화를 받지 않는 석규.

무언가 농간이 있다고 여긴 창현은 이를 부드득 갈면서 오늘을 기다렸다.

회사에 가면 석규가 있을 것이기에.

그러나 들려온 소식은 석규가 업무로 회사를 비웠다는 것이었다.

분명 석규가 무슨 실수를 해놓고 그것을 수습하지 않으려고 내빼려는 것임이 분명했다.

어차피 영원히 자신과 마주치지 않을 수 없기에 마음을 편안하게 가지려는 창현이었지만, 마음 한켠에서 당했다는 분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AA엔터테인먼트에 도착한 창현은 지영을 데리고 녹음실로 향했다. 그리고 라샤에게 지영을 소개 시켜주었다.

귀여운 지영을 보면서 환호하는 라샤는 특유의 친화력으로 지영과 급속도로 친해져갔다. 그러면서 녹음실의 기기들을 이용하여 함께 노래도 불러보고 각자 노래도 부르면서 친분을 쌓아나갔다.

창현은 그런 모습을 지켜보면서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녹음실을 무슨 노래방처럼 활용하고 있던 것이다.

“허, 이것 참. 설마 이럴 줄이야. 그런데 지영이 노래 잘하네?”

아직 다듬을 부분이 많이 보였지만 재능 자체만으로는 상당히 괜찮았다. 꾸준히 1년에서 2년 정도 가다듬으면 가수를 해도 괜찮을 정도?

창현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시린이 옆으로 다가오면서 말했다.

“지영이 노래 잘하네? 좀 다듬은 다음에 라샤 네 번째 멤버로 넣으면 안 될까?”

장난스럽게 말하는 시린. 하지만 지영이 노래를 잘한다는 것은 인정하는 듯했다.

시린의 농에 창현이 피식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못할 것도 없겠지요. 음! 지영이를 라샤에 넣은 뒤 리더 자리를 줘버리는 건 어때요?”

“……!”

창현의 말에 시린의 표정이 확 변했다.

그러자 창현이 깨갱하면서 황급히 말을 돌렸다.

“물론 거짓말이죠. 음! 지영이가 시린 누나 만큼 되려면 한 십 년은 연습해야 할 테니까요. 안 그래요?”

그제야 표정이 조금 풀린 시린이 대답한다.

“십 년은 아니지만 조금 오래 연습은 해야겠지.”

“에구. 그나저나 지영이가 저렇게 노래에 맛들이면 분명 가수를 하고 싶어할 텐데. 오빠 입장에서는 찬성을 해줘야 할까요?”

“그거야 창현이 네가 판단하면 되는 거지. 한 가지 확실한 건 창현이 너 같은 오빠를 뒀다면 연예인을 해도 피해보는 건 거의 없을 거야. 물론 그만큼 노력을 기울여야 하겠지. 안 그럼 오빠의 그늘에 그대로 묻혀버릴 테니까.”

“그것도 그러네요. 아직 어리니까 급하게 결정 내릴 이유는 없겠죠”

“그렇게 말하는 너도 어리답니다.”

소소하게 이야기를 주고 받고 있을 때, 노래를 끝낸 지영이 창현을 보면서 말했다.

“오빠도 노래 불러줘요!”

“내가?”

창현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라샤도 거들기 시작한다.

특히 가장 열성적인 것은 시린이었다.

시린은 지영 옆에 서서 부추겼다.

“지영아 너 창현이가 부르는 <Go&Stop> 들어봤어? 장난 아니야. 들어보고 싶지?”

“네. 언니가 그렇게 말해주시니 듣고 싶어지네요. 오빠! 한 번만 불러줘요.”

“그, 그래, 알았다.”

동생이 간절한 눈으로 말하는데 거절할 오빠는 거의 없을 것이다.

창현은 날카로운 눈으로 시린을 째려보았다. 그러자 시린은 지영의 뒤에서 혀를 날름 내밀어 창현을 약 올렸다. 무지막지한 고음 파트를 줘버린 창현에게 하는 소심한 복수였다.

결국 창현은 지영을 옆에서 부추기는 시린의 농간에 의해 판타지를 넘나드는 고음 노래를 열창해야만 했다.

‘두고 보자.’

서로 한방씩 주고받았건만 당한 것만 생각한 채 복수를 기약하는 창현이었다.


오늘은 중간고사 마지막 날이다.

창현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씻은 뒤 교복을 입었다. 오늘 시험이 끝이었기에 시험을 본 뒤 당분간 스케줄이 전념해야 할 듯 싶었다.

“마지막 날이니 유종의 미를 거둬야겠지.”

준비를 모두 끝마친 창현은 도착했다는 로드 매니저의 연락을 받고는 집을 나섰다.

그리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기다리는 창현.

엘리베이터가 천천히 올라오고 있을 무렵, 창현은 옆집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느꼈다.

순간 창현의 표정이 변했다. 불길한 생각이 든 것이다.

“설마…….”

옆집 문으로 귀를 기울이는 창현.

그러자 부산스러운 소리가 들려온다.

“수연아 빨리 준비해!”

“윤아야, 그게 아니야. 어, 그거야! 그래!”

“우리 늦었어! 빨리 나가야 돼. 어서 준비해.”

보아하니 아침 스케줄 때문에 나오려는 듯했다.

창현의 표정이 급변했다.

“이거 설마 대위기?”

엘리베이터를 확인하니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다.

창현은 그것을 보며 고민에 빠졌다.

이대로 엘리베이터를 기다릴지 아니면 잠시 몸을 숨겼다가 소녀들이 나선 뒤에 움직일지.

“아직 준비하는 중인 것 같으니 엘리베이터 타고 가자.”

창현의 결정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가는 것이었다. 부산스럽기는 하지만 준비가 다 되지 않은 듯했으니 괜찮을 것 같았다. 더군다나 엘리베이터가 거의 다 도착한 상태였다.

막 엘리베이터가 도착할 때, 옆집에서 유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씨! 내가 먼저 엘리베이터 잡아놓을 테니까 빨리 나오도록 해!”

“아놔!”

유리의 말을 들은 창현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치며 문이 막 열리는 엘리베이터에 탑승하고는 닫기 버튼을 연타했다.

그리고 문이 막 닫히려고 할 때, 옆집 문이 열리더니 유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자, 잠깐!”

유리는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것을 보고는 황급히 엘리베이터를 향해 달려들었다.

창현은 그 모습을 보고는 닫기 버튼을 더욱 연타했다.

하지만 문과 엘리베이터의 거리는 불과 한두 걸음 밖에 차이나지 않았다.

문이 다 닫히기 전 유리가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하는 것을 본 창현이 비명을 질렀다.

“아, 안 돼!”

드르륵.

창현의 외침이 무색하게 거의 다 닫히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말았다.

유리는 뚱한 표정으로 엘리베이터에 탑승한 사람에게 말했다.

“이봐요! 잠깐이라고 했는데 그냥 닫으시는 게… 어라?”

훈계를 하던 유리는 엘리베이터 안에 있는 사람의 모습을 보고는 황당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엘리베이터 안에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창현은 자신을 바라보는 유리의 시선을 느끼고는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인사하였다.

“하하, 유리 누나 안녕하세요?”

그런 창현의 인사에 반응하지 못한 채 유리는 멍하니 창현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때, 문이 열리면서 소녀시대 멤버들이 복도로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들이 볼 수 있던 것은 교복 차림의 창현이었다.

“…….”

순간 복도에는 무거운 침묵이 자리하였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유리였다.

유리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은 채 창현을 보면서 물었다.

“창현이 네, 네가 왜 여기에 있는 거야?”

그 질문을 받는 순간 창현은 머리가 아득해져오는 것을 느꼈다.

사람이 위기에 처하게 되면 순간 머리가 하얗게 비게 된다. 그리고 정상적인 사고가 힘들어지는데, 지금 그 상황이 바로 그 짝이었다.

그래도 창현의 임기응변 능력은 제법 뛰어나서, 일찍 정신을 수습할 수 있었다.

하지만 변명의 부재.

무엇이라고 말해야 지금 상황을 슬기롭게 벗어날 수 있을까.

애초에 같은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타다가 걸렸다는 것 자체가 이미 올가미에 걸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창현은 빠르게 머리를 굴리다가 자신을 바라보는 소녀들의 시선을 느꼈다.

그리고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입에서 흘러나오는 그대로 말해버렸다.

“그러니까… 오늘 누나들 아침 스케줄인 거 알고 응원하러 왔어요!”

“…….”

전혀 믿어주는 눈치가 아니다.

솔직히 창현도 말해놓고 스스로의 말에 개연성이 없다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 아침 일찍 누가 응원을 하러 오겠는가.

“거짓말 할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걸?”

창현의 변명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선 이가 있었으니, 바로 순규였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창현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네 스케줄을 소화하는 것도 바쁠 텐데 우리를 응원하러 왔다는 게 말이 안 돼. 게다가 난 분명히 들었어. 유리가 잠깐이라고 외치는 걸 말이야. 유리야, 네가 나올 때 엘리베이터가 닫히고 있었지?”

“으응. 엘리베이터가 닫히고 있어서 잠깐이라고 외쳤어.”

“그래서 엘리베이터가 열렸어? 아니면 닫혔어?”

“열리지 않고 닫히던데…….”

“거봐. 응원하러 온 사람이 문을 닫아?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

사건의 핵심을 단번에 짚어내고 유리의 증언까지 첨부해버리자 창현은 순간 할 말을 잃어버렸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사건이 일어났는데 증거는 물론 증인까지 다 갖춰진 상태였다.

이대로 가다가는 꼼짝없이 모든 진실을 들킬 판이었다.

창현은 어떻게 할까 하다가 시계를 보더니 말했다.

“그러고 보니 누나들 스케줄 가야 한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늦은 거 아니에요?”

“……!”

“아차!”

창현의 말에 소녀들이 그제야 스케줄에 늦었다는 것을 떠올렸는지 분주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한다.

후다닥 엘리베이터에 탑승하는 소녀들.

스케줄의 힘을 빌려 어느 정도 화제를 돌린 것 같아 창현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 하였다.

그러나 그때 절묘하게 치고 들어오는 순규의 한마디.

“이걸로 화제를 돌렸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크윽!”

이틀 전에 스타크래프트로 관광버스를 태워주고 오만한 모습을 보여준 게 실수였다. 그것만 아니라면 지금쯤 순규도 자신의 화술(?)에 휘말려 중요한 것을 잊었을 텐데 말이다.

어느덧 엘리베이터는 1층에 도착하였고, 문이 열리자 소녀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온다.

1층에는 벤 2대가 있었다. 하나는 소녀들이 타고 갈 벤이었고, 하나는 창현이 타고 갈 벤이었다.

창현은 소녀들을 보면서 말했다.

“하하, 그럼 스케줄 잘 해내세요. 저는 학교에 가야 돼서…….”

끝까지 스케줄하는 걸 응원하러 오는 것처럼 연기하는 창현이었다. 머릿속으로 ‘이게 아니면 죽는다!’ 라는 한마디가 맴돌고 있었다.

“으응. 고마워.”

“창현이 너도 시험 잘봐.”

다른 소녀들은 그런 창현의 말에 어느 정도 납득하는 모습이었다. 억지가 있다고 해도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 것처럼 자신들을 응원하러 왔다고 하는데 딱히 의구심을 내비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한 사람만은 달랐으니, 바로 순규였다.

그녀는 창현의 곁에 다가오더니 입을 열었다.

“오늘은 스케줄 때문에 그냥 가지만 좋아하지는 마. 확실하게 기억해두고 있을 테니까.”

창현은 속으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저는 누나들 응원하러 왔다니까요.”

“지금 내가 속으로 생각하는 답이 있어. 그리고 아마 그게 정답일 걸? 나중에 모든 사실이 밝혀질 때 애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

“…….”

순규의 말에 창현은 속이 철렁하는 걸 느꼈다.

그녀의 말대로 자신이 옆집에 산다는 것은 언젠가 들킬 문제였다.

만약 그때 들키게 되면 소녀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 엄청난 원망을 듣게 될 것임이 분명했다.

성질 급한 몇 명은 주먹다짐을 하려고 할지도 모르지.

속으로 식은땀을 흘리는 창현이었지만 당장이 중요했다. 미래따위는 개나 줘버리라지.

창현은 자신의 눈을 응시하는 순규에게 진실을 들키지 않고자 힘겹게 대답했다.

“저, 전 찔리는 거 없어요.”

“그래? 훗! 좋아. 그럼 오늘은 이만 넘어갈게. 하지만 조만간 좋은 소식이 있을 테니 기다리라고. 알았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한 순규는 창현에게 아찔한(?) 눈웃음을 지어보인 뒤 벤으로 달려갔다.

그 모습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던 창현. 속은 낭패감으로 가득했다.

“젠장! 하필 여기서 들켜버리다니. 큰일 났다.”

소녀들이 탄 벤은 어느새 출발을 하였고, 창현은 무거운 발걸음을 터벅터벅 옮기며 대책 강구에 나섰다.

하지만 좋은 생각이 날 리가 없다. 이틀 동안 고민했어도 좋은 방법을 발견하지 못했는데 지금 당장 좋은 방법이 생각날 리 없었다.

“그냥 회사에서 살까…….”

극단적인 방법까지 생각하는 창현이었다.


시험이 모두 끝나고 창현이 향한 곳은 AA엔터테인먼트였다. 오늘은 석규가 출장을 가지 않았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불시에 회사로 쳐들어간 것이다.

쾅!

강렬한 기세를 머금고 사장실 안으로 들어선 창현.

업무를 보던 석규는 갑자기 들어온 창현을 보더니 눈에 띄게 움찔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 모습에 창현이 눈에 불길을 토해내며 석규에게 말했다.

“아버지! 어떻게 저한테 이러실 수가 있어요?”

한순간 움찔한 석규는 창현의 일갈에 평정을 되찾으며 물었다.

“음! 그게 무슨 말이냐, 창현아.”

그러나 석규의 연기는 이미 창현이 아침에 써먹은 것들이었다.

표정을 한껏 일그러뜨린 창현이 석규를 보며 말한다.

“연기하실 생각 하지마세요. 제가 이미 상황을 다 말했는데 모르시는 척해봤자 제가 속을 것 같아요?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이에요?”

“후! 속지 않는구나. 과연 내 아들.”

자신의 연기가 통하지 않자 아쉬운 표정을 짓는 석규.

감히 발연기(?)를 하면서 자신을 속이려 들다니.

창현의 표정이 심상치 않게 변하자 석규가 사정을 설명한다.

“으음! 그게 말이다. 네가 미국에 가기 전 집 주소가 유출된 적이 있지 않느냐?”

그것이라면 창현도 기억하고 있는 것이었다. 데뷔 직후 집 주소가 유출되어서 팬들이 몰려든 적이 있지 않은가?

그때 급하게 창현의 숙소를 옮긴 적이 있다. 아마 그때를 이야기 하는 듯했다.

“네, 기억 나네요.”

창현도 그때가 기억나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석규가 말한다.

“그때 네 숙소를 구하던 중인데 갑자기 일이 터졌단 말이지. 구한 상태가 아니었단 말이다. 그런데 갑자기 일이 터지자 네 숙소를 옮길 필요가 있었지. 그렇다고 당장 숙소를 구하자니 그것도 여의치가 않아서 내가 선택한 방법이 SM엔터테인먼트에 부탁하는 것이었다.”

“SM엔터테인먼트에다가요?”

창현의 표정이 기괴하게 변했다.

소녀시대도 SM엔터테인먼트다. 당연히 같은 회사인 만큼 숙소도 가까운 곳에 잡힐 수 있다는 건 누구나 생각할 수 있다.

“그럼 설마…….”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석규를 바라보는 창현.

그에 석규는 가차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한다.

“그래, 그 설마다. 우리 회사에서 네 숙소를 정식으로 구입했던 차에 소녀시대가 그 옆에 들어선 것이지. 아마 이수만 회장님의 결정을 안 거치고 들어갔을 것이야. 그러니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이지.”

“그럼 어떻게 되는 건데요?”

“못해도 반 년 정도는 있어야 할 게다. SM엔터테인먼트 측에 물어보니 숙소가 빈 곳은 여러 개가 있긴 하지만 아홉 명을 수용할 곳은 없다고 하더군. SM엔터테인먼트 잘못이긴 하지만 우리 측의 과실도 어느 정도 있기에 함부로 따질 수도 없는 상황이다.”

“끄응.”

석규의 말은 사실이다. 숙소란 것을 함부로 옮길 수 없는데, 여러 가지 조건도 따져봐야 하지만 무엇보다 돈 문제가 가장 심각했다.

‘돈?’

순간 돈 문제를 떠올린 창현이 석규에게 말한다.

“잠깐만요. 돈이라면 저희가 많잖아요. 그럼 이쪽에서 옮기면 되잖아요?”

“그러고 싶지만 문제가 있다.”

심각한 표정을 짓는 석규.

그에 창현도 덩달아 긴장을 하며 조심스럽게 묻는다.

“뭐, 뭔데요?”

“세금 때문에 좀…….”

“…….”

순간 창현은 할 말을 잃었다.

그런 창현을 보면서 석규가 말했다.

“너는 잘 모르겠지만 그 숙소를 내 이름으로 해서 사버렸거든. 그러니 그걸 팔고 옮겨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세금을 물게 되어서 말이다.”

“하지만 돈 많잖아요.”

할 말을 잃었던 창현이 정신을 수습하고는 반박한다.

그러자 창현을 한심한 눈으로 바라보는 석규. 그 방면으로 아는 것이 제대로 없는 창현은 그런 석규의 눈에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든다.

“돈이란 것은 벌을 수도 있고 잃을 수도 있는 것이다. 창현이 네가 돈을 많이 벌었지만 나는 허투루 쓰지 않기를 바란다.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지?”

“…네.”

창현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다.

“일단 최대한 SM엔터테인먼트와 접촉하여 이야기를 해보도록 할 테니 힘내도록 하여라. 알겠지?”

“알겠어요.”

석규가 해주겠다고 하니 창현으로서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전 그럼 라샤 누나들 녹음 문제 때문에 이만 가볼게요.”

“그래. 수고하여라.”

그렇게 이야기를 끝마치고 녹음실로 향하는 창현.

그런데 뭔가 당했다는 생각이 가시질 않는다.

“내 착각인가?”


스케줄을 모두 소화한 소녀들은 벤을 타고 숙소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오늘은 오전 스케줄만 있어서 오후에는 시간이 넉넉했는데, 소녀들은 모두 오후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 토의를 하고 있었다.

“쇼핑을 할까?”

“이제 슬슬 추워지는 것 같은데 나가기 싫어. 숙소에 있을래.”

“TV나 보면서 푹 쉬는 게 최고!”

소녀들이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순규는 태연과 이야기 중이었다.

순규는 아침에 창현의 모습을 보고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태연을 은밀하게 끌어들인 뒤 속삭였다.

“태연아, 아무래도 창현이가 우리 옆집에 사는 것 같아.”

“…정말?”

순규의 말을 들은 태연의 얼굴에 놀라움이 서린다. 그러고 보니 아침에 마주친 것이 무언가 수상했다.

태연의 얼굴에 의구심이 깃들자 순규가 다시 말한다.

“저번에 우리가 옆집에 인사하려고 했을 때 있잖아. 기억나지? 이틀 전에 말이야.”

“기억나지. 네가 창현이한테 스타크래프트 졌다고 방방 뛸 때잖아.”

태연의 말에 순규의 눈이 순간 빛났다. 그녀의 말을 듣고 잊고 있던 것까지 떠오른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것도 있었구나. 으득!”

이를 갈던 순규는 창현에게 한층 더 적대감(?)을 불사르며 태연에게 말했다.

“그때 우리가 옆집에다가 인사를 했잖아. 그런데 그때 옆집 사람이 우리보고 뭐라고 했지?”

“…중딩 같다고 했지?”

그러자 무언가 익숙한 느낌과 함께 태연의 눈이 번뜩인다.

그걸 확인한 순규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목소리는 바뀌었지만 말하는 패턴 같은 걸 떠올려봐. 창현이 말투랑 비슷하지?”

“생각해보니 그러네. 정말 비슷해. 설마…….”

하나하나 대조하기 시작하니 정말 비슷했다.

목소리는 중요하지 않다. 이미 만원의 행복을 촬영하면서 창현의 보이스 피싱(?)에 당한 윤아가 증언하지 않았던가. 창현이 무려 태연의 목소리를 그대로 재현해냈다고.

특정 인물의 목소리를 재현할 수 있는 사람에게 그저 모르는 사람의 목소리를 내는 것은 손쉬운 일일 것이다.

“확인해봐야겠지?”

눈을 빛내며 말하는 순규. 하지만 태연은 조금 부정적인 기색이었다.

“하지만 집안에서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끝인데?

“안으로 들어서기 전에 급습하면 되지.”

“어떻게?”

창현이 집으로 들어서는 타이밍을 어떻게 알아낸단 말인가?

고개를 갸웃하는 태연의 모습에 순규가 혀를 차며 손을 흔들었다.

“쯧쯧! 우리 명탐정 꼬꼬마 리더께서 추리력이 많이 떨어지셨군.”

“꼬꼬마 리더라고 하지마라! 키는 네가 더 작거든?”

“흥! 그래도 꼬꼬마는 너거든? 어쨌건! 방법은 간단해. 창현이가 오늘 특별한 스케줄이 없는 걸로 알고 있거든. 아마 라샤 언니들 녹음하고 있을 거야. 그게 무슨 뜻이냐면 라샤 언니들 녹음이 끝나면 집으로 돌아온다는 사실이지. 즉, 라샤 언니들에게 물어보고 시간을 체크해서 잠복하면 된다는 말씀!”

“오! 그런 방법이 있구나!”

순규의 말에 태연이 감탄을 터뜨렸다. 그런 방법이 있었을 줄은 몰랐다.

이렇다 할 스케줄이 없는 창현은 분명 녹음이 끝나면 곧장 숙소로 귀환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때를 노리다가 급습하게 되면 창현은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이 될 것이 분명했다.

태연이 순규를 보면서 목소리를 죽였다.

“일단 우리 둘이 하도록 하자. 확실한 건 아니니까.”

“물론이지. 라샤 언니들을 포섭해놨으니 이제 맛만 보면 되는 거야.”

두 소녀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자리하고 있었다.


라샤의 녹음은 순조롭지 못했다.

창현이 노래의 난이도를 무진장 올려버린 탓에 라샤가 단기간에 소화해내기가 무척 어려웠던 것이다.

특히 세 사람 중에서 가장 고전하는 것이 바로 시린이었다.

창현은 고음을 제대로 소화 못하는 시린을 보며 말했다.

“고음이 잘 안 올라가잖아요. 제가 가르쳐드린 방법대로 하셨어요?”

녹음에 들어가게 되면 창현은 무서운 호랑이 선생님이 된다.

무섭게 호통 치는 창현의 말에 시린은 목을 움츠리며 사과한다.

“죄송합니다. 아직 익숙하지가 않아서.”

“후! 노래 난이도가 높지만 저는 충분히 소화할 수 있는 선이라 생각했어요. 남자인 저도 어찌어찌 되잖아요? 연습하시면 분명히 할 수 있을 겁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게요. 당장 녹음보다는 연습이 필요할 것 같네요.”

“수고하셨습니다.”

라샤의 인사와 함께 녹음이 끝났다.

창현은 라샤가 녹음실에서 나오자 사과를 하였다.

“조금 말이 심한 것은 사과드릴게요. 하지만 정말 연습하셔야 되요. 안 그러면 일정에 차질이 생길 것 같으니까요.”

“으응. 알았어. 미안해. 열심히 하도록 할게.”

녹음에 들어가면서 자신이 조금 오만했다는 것을 느끼는 시린이었다. 창현이 분명 고음 파트를 주긴 했지만 충분히 소화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쉽지가 않았다.

오늘 창현의 호통을 들으면서 데뷔 전 녹음하던 순간을 떠올릴 수 있었고, 자신이 조금 오만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데뷔 전 누나들의 열정이라면 충분히 이 슬럼프를 극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럼 전 이만 숙소로 가보도록 할게요.”

녹음이 끝나면 딱히 할 일도 없기에 창현은 인사를 한 뒤 녹음실을 벗어난다.

그런 창현의 모습을 바라보던 시린이 길게 한숨을 내쉰다.

“후우!”

“너무 의기소침해 하지마. 그럴 수도 있는 거지.”

한숨을 내쉬는 시린의 옆으로 다가와 위로의 말을 건네는 세룬.

그런 세룬의 위로에 시린은 그저 미소를 지어보일 뿐이었다.

씁쓸해하는 시린의 모습에 세룬은 괜히 어색해져서 주변을 둘러보다가 문자를 하는 미란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물었다.

“그런데 미란이 넌 뭐해?”

“응? 아, 그냥…….”

미란은 세룬의 부름에 움찔하다가 시린을 보고는 말한다.

“에이! 오늘은 숙소로 돌아가자. 기분이 우울하면 안 되니까 숙소에서 기분 화끈하게 풀자고. 알았지?”

“그래, 그러는 게 낫겠다.”

녹음 첫날부터 완전히 깨졌기에 라샤에게 있어서는 조금 씁쓸한 하루였다.


그 시각, 순규는 핸드폰에 온 문자를 보고 눈을 빛내며 태연을 불렀다.

“태연아! 문자가 왔어.”

순규 옆에서 TV를 시청하고 있던 태연이 물었다.

“그래? 벌써 끝났다고?”

“응. 숙소로 간다고 하고 회사를 나섰다는데?”

정보 제공자는 다름 아닌 미란이었다. 순규는 미란에게 정보 제공을 부탁하였고, 미란은 별로 어려운 것도 아니었기에 흔쾌히 승낙을 하고 창현이 숙소로 돌아가는 순간 정보를 제공한 것이다.

태연이 순규를 보며 물었다.

“회사에서 여기까지 어느 정도 걸리지?”

“음! 지금 퇴근시간도 아니니까 20분도 안 걸릴 걸?”

“좋아! 그럼 준비하도록 하자.”

후다닥 옷을 입는 두 소녀.

그런 두 소녀를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멤버들이었지만 그런 시선에 개의치 않은 채 옷을 입는다.

옷을 다 입은 태연은 소녀들을 보며 말했다.

“나랑 순규는 여기 앞에 마트 좀 갔다 올게.”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소녀들의 주문을 받아든 태연과 순규는 자연스러운 몸놀림으로 숙소를 빠져나온다. 그리고 복도에 자리한 엘리베이터를 응시하기 시작한다.

계단에 자리한 태연은 순규를 보면서 말한다.

“순규야, 우리 이러고 있으니 왠지 서글퍼 보이지 않아?”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

순규도 계단에 앉아 있으면서 그런 느낌이 든 모양이다.

“창현이 이 녀석은 우리가 이렇게까지 하게 만들다니! 정말 옆집이면 가만두지 않겠어!”

“그건 옆집일 때 할 수 있는 이야기지. 딱 십 분 정도 기다리다가 안 오면 그냥 들어가자.”

“그래.”

그렇게 오 분 정도 기다렸을 무렵, 엘리베이터에 불이 들어왔다. 그리고 천천히 한층씩 올라오기 시작했다.

점점 엘리베이터가 다가오기 시작하자 태연과 순규는 서로를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 직감적으로 올라오는 것이 창현일 거라는 느낌이 든 것이다.

자연스럽게 엘리베이터 앞에 선 두 소녀.

그리고 거짓말 같이 엘리베이터는 소녀들이 있는 곳에 딱 멈춘다.

띠잉!

드르륵!

도착했다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그 안에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창현.

아무생각 없는 얼굴로 엘리베이터에 내리려던 창현이 앞에 있는 두 소녀를 보며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짓는다.

순규가 그런 창현을 보며 함박 웃음을 지은 채 말한다.

“창현아! 웰 컴 투 더 헬!”

“지옥에 온 것을 환영한다!”

옆에서 태연이 친절하게 해석해주었다.

하지만 창현의 반응은 그녀들이 예상한 것과 사뭇 달랐다.

지금 상황에서 창현의 눈에 자신들은 마치 지옥의 야차와도 보였을 것이다.

당연히 움찔하거나 그런 반응을 보여야 한다.

그런데 창현의 반응은 그녀들의 예상을 철저하게 빗나가게 만들었다.

힐끗 두 소녀를 본 창현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연 것이다.

“…알아내신 거예요?”

매일 변함없는 창현의 목소리를 들었던 창현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되려 순규와 태연이 당황한 표정을 지은 채 대답을 한다.

“어어? 응…….”

“일단 들어와요.”

창현이 앞으로 나서면서 열쇠를 꺼내 집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다.

태연은 순규를 보면서 소리 죽여서 묻는다.

“순규야, 창현이 기분 안 좋아 보이는데?”

“내가 이럴 줄 알았냐고! 기분 안 좋아 보이니까 건드리지 말자.”

“그나저나 기분 안 좋은 모습은 처음 봤어.”

태연과 순규는 조심스럽게 집 안으로 들어섰다.

집안은 깔끔했다. 거실에는 소파 하나와 탁자, TV만 있었고, 곳곳에 쓸데없는 짐이 없어서 집이 무척 넓어보였다.

“여기 앉으세요. 마실 거라도 내올 테니까요.”

“으응.”

창현의 권유에 집안을 이리저리 둘러보던 두 소녀는 조심스럽게 소파에 앉는다.

태연이 주방으로 사라지는 순규를 보며 조용히 속닥인다.

“집 정말 넓어보이지? 우리 숙소는 아홉 명이 바글거려서 그런지 좁은 느낌인데.”

“그러게. 우리 숙소가 이렇게 넓은지는 처음 알았다.”

“그나저나 창현이 어떻게 할 거야? 기분 안 좋아보이는 게 우리 탓 같잖아.”

“나보고 어쩌라고!”

서로 투닥거리던 그녀들은 창현이 쟁반을 들고 오자 행동을 멈춘다.

창현은 오렌지 주스가 담긴 컵을 그녀들에게 내밀면서 말했다.

“어떻게 아신 건지 모르지만 가급적 비밀로 해주셨으면 해요. 아셨죠?”

창현의 모습은 진지하기만 하다.

이런 창현의 모습을 겪어본 것은 보컬 트레이닝 때밖에 없었기에 태연과 순규는 창현의 모습에 압도되어 있었다.

그녀들은 자신도 모르게 창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 말을 끝으로 창현과 두 소녀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자리하였다.

태연과 순규는 애꿎은 주스만 계속 마시고 있었고, 창현도 이렇다 할 말없이 주스만 마시고 있었다.

얼마나 침묵이 흘렀을까.

주스를 모두 다 마신 태연이 조심스럽게 컵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창현아, 무슨 일이 있어서 그러는 거야?”

한 번도 이런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어서 그런 것일까.

태연은 늘 웃음을 짓고, 장난기 넘치던 창현의 모습만을 봐왔기에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그에 창현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별다른 일은 없어요. 그냥 오늘 녹음을 완전 망쳐서요. 그것 때문에 조금 심란해서 그런 거예요.”

“그럼 다행이고…….”

녹음을 망쳤다는 것은 라샤의 녹음을 말하는 것이라. 그녀들도 가수였기에 녹음이 잘 안되는 날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고, 녹음이 안 되는 날은 본인도 답답하지만 녹음하는 프로듀서도 그만큼 복창이 터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아마 창현이 망쳤다고 할 정도면 꽤 심각하리라. 좋았던 기분도 말끔하게 말아먹는 것이 녹음이었으니 말이다.

창현이 이유를 말해주자 분위기가 한결 누그러진 듯 싶었다.

그러자 순규가 창현을 보며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 숙소 옆으로 온 거야?”

그 말에 창현이 살짝 어이없는 표정을 짓더니 대답했다.

“제가 누나들 숙소 옆으로 온 게 아니라 누나들이 제 숙소 옆으로 이사 온 거예요. 제가 숙소로 온 건 2월달이거든요.”

아무래도 순규의 말이 거슬렸나보다. 하기야 그녀들이 숙소에 들어선 것은 6월이지만 창현은 2월부터 살았으니 창현의 말이 정답이었다.

평소 같으면 그저 웃으면서 넘겼을 말을 까칠하게 짚고 넘어가자 순규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 그래?”

“네. 엄밀히 말하면 제가 먼저 온 셈이죠.”

“그, 그렇구나.”

“걱정하지 마세요. 아버지는 안 된다고 하셨지만 조만간 숙소를 따로 구할 생각이거든요. 그러니 누나들이 비밀을 좀 지켜주셨으면 해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까요.”

석규는 반 년 정도를 기다리라고 했지만 창현은 그 기간 동안 기다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이 모은 돈으로 어떻게든 숙소를 구해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창현의 말에 그를 말리려던 태연이 멈칫했다. 생각해보니 창현을 말릴 명분이 없던 것이다. 어찌 보면 늦게 온 자신들이 숙소를 옮기는 것이 옳지만 아홉 명이나 되는 인원인데다가 SM엔터테인먼트에서 조치를 취해줄지 의문이었다. 그에 반해 창현은 소녀시대보다 한결 행동하기가 편하니 그게 더 나을 것이다.

말이 더 이상 나오지 않자 분위기는 다시 무거워졌다.

태연은 창현의 눈치를 힐끔힐끔 살피고 있었고, 순규는 이 침묵이 견디기 힘들었는지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더 이상 무거운 분위기를 견디지 못한 순규가 외친다.

“못 참겠다! 창현아!”

“네. 말씀하세요.”

갑작스러운 순규의 모습에 예전 같으면 ‘네?’ 라고 놀랐을 테지만 지금은 차분하기만 하다.

순규가 그런 창현을 보며 말했다.

“지금 기분 별로지?”

“…딱히 좋지는 않네요.”

솔직하게 말하는 창현이었다. 라샤의 녹음이 망해서 그런 것도 있지만 숙소 문제 때문에 머리가 무척 복잡한 상태이기도 했다.

“기분이 좋지 않을 땐 풀어줘야 해. 안 그래?”

“그렇긴 하죠.”

마음 같아서는 창현도 기분을 확 풀고 싶었다. 아마 누나들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집안으로 들어와 음악을 크게 틀어놓은 뒤 잠을 자거나 게임을 했으리라.

순규는 창현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럼 우리 게임하자! 스트레스에는 게임이 최고야!”

“무슨 게임이요?”

창현의 물음에 씨익 웃음을 짓는 순규. 그녀가 창현을 향해 말한다.

“우리가 언급할 만한 게임이 무엇이겠어. 바로 스타크래프트지.”

“스타요?”

순규의 말에 창현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순간 어이가 없던 것이다.

여태까지 한 번도 이기지 못한 그녀가 자신에게 스타크래프트를 하자고 하다니. 매번 게임에 져서 주먹다짐까지 가려고 하지 않았던가? 창현의 입장에서는 어이가 없기도 하고 가소롭기도 하였다.

그런 창현의 표정을 못 읽을 순규가 아니었다.

그녀는 창현이 웃음을 짓기에 다행이라고 여기는 한편 자신을 우습게 보는 것 같자 발끈했다.

“너 지금 그 웃음 날 얕본 거지?”

순규의 말에 창현이 웃는 표정을 싹 지우더니 말한다.

“얕보다니요. 전 그런 적 없어요.”

“이익! 좋아! 우리 내기하자. 진 사람이 이긴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는 거야. 윤아랑 만원의 행복 때 했던 것처럼. 어때?”

창현의 도발에 바짝 약이 오른 순규. 급기야 창현에게 내기까지 제안을 한다.

말해놓고 순간 아차 했지만 한 번 한 말은 주워 담을 수 없었다.

창현은 자신의 입을 틀어막는 순규를 보더니 웃음을 지었다.

“그 말 정말이죠? 좋아요. 하도록 하죠.”

“윽! 조, 좋아! 의기소침해 있는 녀석의 플레이를 무서워 할 내가 아니라고.”

“소원 잘 받아가도록 할게요.”

순규의 노력 때문인지 어느새 평상시 모습을 보이는 창현.

하지만 그로 인해 순규는 졸지에 창현과 소원을 놓고 스타크래프트 대결을 놓고 겨루게 되었다.

대결을 위해 순규와 태연은 숙소로 가게 되었다. 숙소 컴퓨터로 접속하여 배틀넷에서 만나 대결을 한다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

순규는 태연을 보면서 애처로운 표정을 지었다.

“태연아, 나 어떻게 하지. 말실수를 해버려서…….”

“너라면 이길 수 있어! 못 이기더라도… 네 덕이 창현이 기분이 풀어진 거니까 너무 슬퍼하지마.”

전혀 위로 같이 들리지 않는 태연의 말이었다.

그에 순규가 코를 찡긋하더니 말한다.

“이렇게 된 이상 반드시 이겨주겠어. 기분이 우울해서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할 때 한 번 이겨주는 거야!”

전의를 불태우는 순규. 그 모습에 태연이 무언가 생각에 잠겨있는 듯하더니 이내 눈을 빛낸다.

“순규야 이건 어때?”

귓속말로 속삭이는 태연. 그 말을 듣고 있던 순규의 표정이 차츰 밝아진다.

이야기를 다 들은 순규의 표정은 환해져 있었다.

순규는 태연을 보더니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든다.

“Okay! 나의 승리!”

태연의 조언으로 순규는 필승의 전략을 손에 넣게 되었다.


“이거 참.”

창현과 이야기를 나눈 직후, 석규는 무척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막상 창현에게는 장난처럼 말을 했지만 문제가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세금이니 뭐니 말했던 것은 아직 완전히 정해진 게 없어서 그러했던 것이다.

석규는 스케줄 표를 보면서 중얼거렸다.

“오늘 미팅이 잡혔으니 다행이지.”

점심식사 약속이 잡혀 있는 상태였다.

약속 시간으로부터 한 시간도 채 남지 않았으니 슬슬 일어날 때였다.

옷을 갖춰 입은 석규가 차를 타고 향한 곳은 SM엔터테인먼트 인근에 있는 음식점이었다.

전날 이수만 회장과 만남을 가지려다가 시간이 안 맞아 만나지 못했다가 오늘 급하게 일정을 맞춰 만남을 갖게 된 것이다.

음식점에 도착한 석규는 안으로 들어섰다.

“어서오세요. 예약하셨나요?”

카운터를 보고 있는 젊은 여성이 석규에게 말을 건네왔다.

석규가 고개를 끄덕이며 예약되어 있는 이름을 말했다.

“이수만 씨 이름으로 예약되어 있는 방이 어딥니까?”

“예, 16번방이 예약되어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수고하십시오.”

짧게 인사를 건넨 석규가 16번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방안으로 들어서자 먼저 자리하고 있는 수만을 볼 수 있었다.

아직 약속 시간이 남아 있었는데 먼저 와 있자 석규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인사를 하였다.

“먼저 와계셨군요. 늦어서 죄송합니다, 이 회장님.”

석규의 인사에 수만이 자리에서 일어나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닙니다, 강 사장님. 저도 막 왔습니다. 앉으시지요.”

“예, 그럼.”

수만과 석규가 자리에 앉았다.

석규는 컵에 물을 따라서 한 모금 마시고는 입을 열었다.

“갑자기 만나 뵙자고 해서 죄송합니다.”

“하하! 아닙니다. 오늘 점심 스케줄이 비어서 혼자 먹어야 하나 했는데 마침 강 사장님이 만나자고 하시니 오히려 저야 좋았습니다.”

석규와 거의 열다섯 살 정도 차이가 났지만 수만은 석규를 편하게 대하지 않았다.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석규는 자신과 동급 선상에 놓인 인물이었다. 기획사의 규모도, 자금도 더 컸지만 AA엔터테인먼트는 현이란 존재 하나만으로 SM을 뛰어넘을 만한 저력을 지닌 곳이었다. 게다가 석규란 인물이 신의가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사업적인 관계를 맺으면 어느 한 사람에게 일방적인 이득이 아닌 양쪽이 모두 만족할 만한 성과를 낼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SM엔터테인먼트 소속 가수 몇몇을 미국 진출 시키려는 지금 시점에서 먼저 미국에서 만만치 않은 인맥을 쌓은 석규는 무척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수만은 웃음을 지어보이며 석규에게 말했다.

“그래, 무슨 일로 만나자고 하신 건지요?”

“저는 가급적 회장님에게 지긋지긋한 신경전을 벌이고 싶지 않으니 직설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회장님을 뵙고자 한 건 바로 현 아니, 창현이 숙소에 관해서입니다.”

“…….”

석규의 직설적인 말에 수만의 표정이 한순간 굳었다.

그리고 그것은 석규가 원하던 반응이었다.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보통 자신의 속내를 숨긴 채 말을 빙빙 돌려가면서 차근차근 상대의 속내를 먼저 파악해낸다. 당연히 지루한 신경전이 펼쳐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석규는 역발상을 하였다.

갑작스러운 사실로 하여금 상대방의 반응을 이끌어내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상대는 분명 산전수전 다 겪은 능구렁이 중 능구렁이였지만 갑작스러운 말을 듣게 되면 한순간 반응을 보이기 마련이다.

석규는 그 점을 노렸고, 그의 예상대로 수만이 반응을 보였다.

짧은 순간이지만 수만의 반응을 분명히 체크해낸 석규. 거침없이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저도 며칠 전에야 알 수 있었습니다. 창현이의 숙소와 소녀시대 아이들의 숙소가 곁에 있다는 것을. 그리고 이것은 무척 중요한 사항이라는 것을 회장님도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저는 이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자 오늘 회장님과의 만남을 이끈 것입니다.”

“으음!”

수만의 입에서 무거운 침음이 흘러나왔다. 석규의 안색을 살짝 살피니 이미 상당한 조사를 하고 온 듯하였다. 게다가 몇몇 숨겨진 의도 또한 모두 간파하고 있는 것 같았으니 자칫 잘못하다가는 그동안 쌓아온 모든 관계가 허사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수만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우선 그 점에 대해서는 사과를 드립니다. 강 사장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저번 현의 집 주소 유포 사건 이후 AA엔터테인먼트는 SM엔터테인먼트에게 남아있는 숙소 한 채를 부탁하였고, SM엔터테인먼트에서는 숙소를 양도하였습니다. 음, 돈을 받았으니 판매했다고 해야겠지요. 어쨌든 그 이후 현은 한동안 활동을 하다가 미국으로 갔고, 숙소는 자동으로 비게 되었지요. 그러면서 숙소에 대한 기억은 잊혀졌고, 미처 그 사항에 대해 알지 못하던 직원들이 비어있는 옆집에 소녀시대 숙소로 배정한 것입니다.”

수만의 말에는 거짓이 없었다. 실제로 AA엔터테인먼트에 숙소를 급매한 뒤 한동안 잊어버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뒤늦게 알아차리기는 했지만 이미 창현은 귀국한 상태였고, 소녀시대도 숙소를 옮긴 채 데뷔한 후였다.

그 말을 들은 석규가 한숨을 내쉬었다.

“후! 일단 회장님의 말씀을 들으니 대충 어떻게 일이 된 건지 알겠습니다. 일단 이번 일 같은 경우 가급적 조용히 묻어두고 싶습니다. 현재 저희 AA엔터테인먼트에서 총력을 기울여 현의 새 거처를 알아보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다소 시일이 걸릴 것 같아서 회장님께 부탁을 드리고자 합니다. 잡음이 흘러나오지 않게 막아주십시오.”

비록 현과 라샤로 인하여 상당한 자금을 보유하게 되었지만 아직 AA엔터테인먼트는 각지로 뻗어나가는 인맥이 상당히 부족한 상태였다. 당장 현의 숙소 문제만 하여도 당장 옮겨야 하는 처지였지만 AA엔터테인먼트에서는 여분의 숙소가 없었기에 SM엔터테인먼트의 손을 빌린 것이다.

지금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당장 문제는 알게 되었지만 갑작스러운 일이라서 현의 숙소를 당장 옮기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랬기에 석규는 수만의 협력을 요구한 것이다.

수만이 비록 몰랐다고 하지만 자신들보다는 훨씬 먼저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석규는 사업가이기에 수만의 속내를 어느 정도 꿰뚫고 있었다.

창현의 숙소 옆에 소녀시대 숙소가 들어섰음에도 가만히 있었던 이유.

그것은 바로 스캔들이 터지길 바랐던 것일 것이다.

당장 창현의 이름은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 각국을 울릴 정도로 대단한 상태였다. 국민들 중 빌보드 차트를 제패한 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고, 그에 대한 관심도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대단하다.

만약 그런 창현이 소녀시대 일원과 스캔들이 난다면 어떻게 될까?

바로 노이즈 마케팅 효과로 소녀시대는 단번에 엄청난 유명세를 탈 수 있게 될 것이다.

SM엔터테인먼트에서 야심차게 밀고 있는 아이돌 그룹인 만큼 현과의 스캔들로 인해 얻는 유명세는 상상을 초월할 것임이 분명했다. 적은 돈으로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성과를 얻게 되는 셈이다.

아마 수만은 그것을 바라고 있었을 것이고, 일정 시기가 되도 터지지 않았다면 고의적이라도 터뜨렸을 것이다. 실제로 그런 움직임을 보였다는 걸 체크해냈으니 말이다.

석규는 창현이 연예계에서 가급적 자유롭고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길 원했지만 창현이 희생양이 되는 걸 원하지는 않았다. 행여 그가 상처를 받을까 싶어 거짓을 말했고, 오늘 모든 이야기를 끝맺기 위해 수만과 만남을 가진 것이다.

수만은 가슴이 철렁했다. 석규의 눈은 말하고 있던 것이다. 모든 정황을 알고 오늘 만남을 가진 것이라고. 사실 수법이 뻔하기는 했지만 한순간 충동을 이기지 못했다. 소녀시대란 그룹을 단기간에 유명하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이 눈앞에 놓이다보니 판단이 흐려진 것이다.

그 이면에는 AA엔터테인먼트 사장 강석규를 어느 정도 얕보는 마음도 있었다. 단기간에 AA엔터테인먼트를 급격히 키워내기는 했지만 사업적인 수완에서는 자신보다 몇단계 아래일 거라는 생각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오산이었다는 것을 오늘 이 자리에서 깨닫고 말았다.

수만은 자신이 씻을 수 없는 큰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후! 내가 악수를 두었군. 관계를 회복하는데만 오래 걸리겠어.’

사업적인 관계에서 만나 친분을 쌓는 것은 어렵지만 신뢰가 깨지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수만은 자신의 판단이 그동안 쌓아온 신뢰를 깨뜨렸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여기서 변명을 하는 것도 우습고 해명을 하는 것도 우습다. 어차피 사업이란 것이 다 물리고 물리는 것이니 만큼 자신의 행동을 깨끗이 인정하는 것이 낫지, 구질구질하게 변명하는 것은 그의 자존심이, 체면이 용납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지요. 후우! 그리고 죄송합니다, 강 사장님.”

자신의 잘못을 깨끗하게 인정하는 수만.

국내에서 둘째가라하면 서러울 정도의 대규모 엔터테인먼트 회장 치고는 놀라울 정도로 유연한 대처였다. 그의 사과는 한순간 자존심을 굽히는 것이었지만 석규의 기분을 어느 정도 풀어주는 효과를 동반하고 있었다.

자신의 잘못을 깨끗이 인정하자 석규도 더 이상 뭐라고 할 수 없었다.

“아닙니다. 저는 그저 SM엔터테인먼트와 신뢰 관계가 깨지는 것을 원치 않았을 뿐입니다. 다만, 서로가 지켜야 할 선은 지켜주셨으면 좋을 것 같아서 한 말일 뿐입니다.”

수만이 깨끗하게 인정해버리자 석규는 한순간 당황을 했었다. 설마하니 그가 고개를 숙이고 들어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이런 인물이기에 SM엔터테인먼트 같은 거대 기획사를 이끌고 있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었다.

그렇게 창현의 숙소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깨끗하게 마무리를 지은 두 사람은 그래도 얼굴을 붉히지 않은 채 헤어질 수 있었다.


창현은 태연과 순규가 숙소로 돌아가자 곧장 컴퓨터를 켰다. 게임을 하기 위함이었다.

컴퓨터를 키는 창현의 입가에 슬쩍 미소가 걸렸다.

“내 기분을 풀어준다고 해도 뻔한 승부에 소원을 걸다니.”

창현의 기분이 가라앉아 있던 이유는 라샤의 녹음이 여의치 않아서 그런 것도 있지만 숙소가 바로 옆이라는 것도 그러했다.

관심이 없는 분야는 아직 나이가 어리기에 상식이 부족하지만 자신이 몸담고 있는 분야 만큼은 제법 해박한 창현이었다.

소녀시대 숙소와 자신의 숙소가 이웃해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창현의 뇌리에 가장 먼저 스친 것이 바로 스캔들로 인한 노이즈 마케팅이었다.

한국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파파라치들이 우글거리는 미국에서 활동했던 창현이다. 당연히 자신과 소녀시대의 숙소가 이웃해 있을 때 생길 법한 일이 얼마나 큰 파장으로 퍼질지 예측할 수 있었다.

그나마 미국보다 상대적으로 덜한 한국이기에 위장을 한 채 이리저리 외출을 하고는 하지만 미국에 있었을 때는 그런 일을 꿈도 꾸지 못했다. 방송 활동을 제외하고 밖으로 나간 적이 한 번도 없을 정도였다.

자신의 위치가 어느 정도인지는 충분히 자각하고 있다.

자신과 소녀시대가 엮여서 스캔들이 터지고, 그로 인해 노이즈 마케팅이 된다면 소녀시대는 단번에 그 이름을 대한민국에 널리 알리게 될 것이다.

하지만 달리 노이즈 마케팅이라 불리는 것이 아니다.

창현과 엮인 채 이름을 알릴 수 있겠지만 그와 스캔들로 엮인 사람은 팬들의 집중포화를 면치 못할 것이다.

극성팬이라는 것이 있지 않은가? 미국에 있으면서 극성팬의 무서움을 몸소 겪어보았기에 창현은 걱정이 앞섰다. 이것은 아홉 명의 소녀시대를 띄우기 위해 한 명을 버리는 것과 같았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창현은 자신의 숙소가 소녀시대 옆에 있다는 것을 들키면 안된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눈치 빠른 두 명으로 인해 들켜버렸지만 말이다.

석규는 잘 모르겠지만 창현도 나름대로 정보통이 있어서 자신의 숙소가 SM엔터테인먼트를 거쳤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걸 깨닫는 순간 이렇게 숙소가 옆에 붙어 있게 된 것이 이수만 회장과 연관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뭐, 사업적인 면에서는 최고의 한 수가 될 수 있을 테니까.”

내일 다시 한 번 말해보고 그래도 석규가 자신의 뜻에 응하지 않으면 스스로 숙소를 옮길 생각이었다. 비록 미성년자지만 돈이야 충분하니까. 전세가 안 되면 월세라도 하면 된다.

창현이 생각하는 사이, 컴퓨터가 켜졌다. 스타크래프트 아이콘을 클릭한 창현은 곧장 배틀넷에 들어간다. 그러자 곧바로 순규의 접속 메시지가 뜬다. 참 비슷한 타이밍에 들어온다.

하지만 조금 놀려주고 싶어서 창현은 순규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To:DarkSword>:왜 이렇게 늦게 들어오는 거예요. 한참 기달렸는데.

그러자 순규의 답이 온다.

<From:SNSD)SunNy>:미안. 애들이 컴퓨터를 잡고 있어서 밀어내느라 시간이 좀 걸렸어.

아직 창현의 기분이 다 풀리지 않았다고 여기는지 말하는 것이 조심스럽다.

그런 말투에 창현은 피식 웃음을 지으면서 진지하게 고민한다.

‘앞으로는 계속 기분이 꿍해 있는 것처럼 보여줄까?’

안하무인(?)으로 자신을 대하던 누나들이 조심스러운 모습을 보이니 그러고 싶은 충동이 조금 생긴다.

생각을 접어둔 창현이 순규에게 귓속말을 보냈다.

<To:DarkSword>:저도 얼마 기다리지 않았으니까 괜찮아요. 방 만들 테니 들어오세요.

순규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은 채 곧장 방을 만든다. 맵은 언제나 그러했듯이 로스트 템플이었다.

창현이 방을 만들자 순규도 바로 들어온다. 잠시 잡담을 나누다가 게임을 시작한다.

“흠!”

창현의 스타팅 포인트는 2시였다. 붉은색 프로토스가 걸렸는데, 좋아하는 색에다가 가장 좋아하는 위치가 걸렸기에 창현은 기분 좋게 게임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창현의 화면에 띠딕! 하더니 메시지가 뜨기 시작하였다.

그것을 본 창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뭐야, 이거.”

화면에 뜨는 메시지.

그것은 다름 아닌 맵핵을 알리는 메시지였다.

순규와 게임하는 것을 제외하고 가끔 프리배틀넷 래더 최상위 고수들과 게임을 하는 창현은 맵핵을 쓰는 유저들을 분간하기 위해 맵핵 감지 프로그램을 틀어놓고 게임을 하고는 한다. 이것은 스타크래프트를 하기 전 틀어놓는 거라 거의 습관에 가깝게 실행하고는 하는데, 지금 순규가 맵핵을 썼다고 반응한 것이다.

프로그램이 거짓을 말할 리가 없다.

그렇다는 건 순규가 맵핵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

창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 누나가 소원이 걸렸다고 하니 눈에 보이는 게 없나보군.”

사실을 밝힐 생각은 없다.

이에는 이였다.

살짝 alt+Tab을 누른 창현은 바탕화면에 있는 맵핵을 켰다.

맵핵을 사용하는 자에게는 맵핵으로 응수하리라. 그렇게 되면 똑같은 조건이 되는 것이다.

“여기였군.”

맵핵을 키자 로스트 템플 맵이 환하게 밝혀졌다. 창현은 그중에서 8시에 위치한 순규의 저그 본진을 보고는 눈을 빛냈다.

순규 정도의 실력자가 맵핵을 키고 한다면 자신이 질 확률이 높지만 똑같이 맵핵을 키면 자신이 질 확률은 거의없다. 하물며 상대는 자신이 맵핵을 사용하는지 모르고 있지 않은가. 오히려 자신이 더 유리하다.

창현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면서 더블 넥서스를 하였다. 2시와 8시인 만큼 러쉬 거리가 상당히 멀었기에 초반부터 자원을 확보하려는 생각이었다.

더블 넥서스를 하는 것을 다 봐서 그런지 순규는 드론 하나를 12시로 보내서 두 번째 멀티를 가져간다. 순수 물량전으로 승부를 보려는 속셈인 듯했다.

그 플레이에 창현이 피식 웃음을 지으며 질럿을 뽑기 시작하였다. 순규가 초반 러쉬를 오는 게 아니란 것을 깨닫는 순간 게이트웨이를 지어서 질럿을 뽑고 있었다.

그리고 질럿이 4마리가 되는 순간 창현은 우연찮게 프로브로 12시 멀티를 발견하는 척하면서 질럿 4마리를 보냈다.

창현의 정찰에 놀란 순규가 질럿이 달려오려고 하자 놀라면서 멀티를 취소하였다.

그 뒤에 이어진 플레이도 전부 창현이 치고 순규는 놀라서 빠지는 식이었다.

우연이 중첩되는 것처럼 점점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가자 순규는 의아함을 느낀 듯했다.

그녀는 분명 맵핵을 키고 하고 있고, 창현은 맵핵을 키지 않았다고 생각할 텐데 상황은 압도적이었던 것이다.

순규는 멀티 두 개로 근근히 버티는데 반해 창현은 멀티가 무려 네 개였다. 게다가 캐리어까지 나오고 있어서 승부를 뒤집기가 어려워보였다.

결국 GG를 선언하는 순규.

창현은 그것을 보면서 피식 웃음을 짓는다.

“소원 하나 잘 챙겨갑니다.”

쾅쾅쾅!

웃음을 짓기가 무섭게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에 창현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자리에서 일어나며 문을 연다. 그러자 얼굴이 붉어진 순규가 집안으로 들어온다.

그녀는 창현을 보며 외친다.

“강창현! 너 설마…….”

“쯧쯧, 그러니까 왜 맵핵을 씁니까.”

“그, 그걸 어떻게…….”

창현의 말을 듣는 순간 순규의 안색이 하얗게 질린다. 창현은 자신이 맵핵 쓴 것을 알고 있던 것이다.

그런 순규의 반응에 창현은 어깨를 으쓱했다.

“맵핵을 쓰고도 지셨으니 하실 말은 없겠죠. 소원 하나 잘 받아갈게요.”

“으으…….”

자신이 잘못한 것이 있기에 순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신음만 흘렸다.

망연자실한 순규의 모습을 보면서 창현은 웃음을 짓는다. 승자의 여유였다. 확실히 게임에서 이기니 확실하게 기분이 풀리는 듯했다.

창현은 얄밉게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누나 덕분에 기분이 싹 풀렸어요. 고마워요.”

“으으! 다, 다시 해!”

창현의 웃음을 본 순규는 순간 너무나 얄미워 보이는 창현의 모습에 소리치고 만다.

그에 창현이 의문 섞인 시선으로 순규를 바라보았다.

“뭘요? 설마 소원 내기를 또 하자고요?”

“그래! 이번엔 소원 두 개 걸고 해!”

바짝 약이 오른 순규의 눈에는 지금 보이는 게 없었다.

창현은 이성을 잃은 채 외치는 순규의 모습에 웃음을 지었다.

“두 개라… 좋습니다. 이번에 지면 설마 다음번에는 세 개를 걸고 게임하자고 하는 건 아닐 테죠?”

순간 순규가 움찔한다. 반응을 보니 정말 그러려고 했나보다.

그 반응이 귀엽다고 느낀 창현. 염려되었던 노이즈 마케팅 걱정은 잠시 사그라드는 기분이었다.

“좋아요. 두 개 걸고 하도록 하죠. 이번에도 맵핵 쓸 건가요?”

“안 써! 정정당당하게 이겨주겠어!”

맵핵을 쓴 것이 일생일대의 오점으로 느끼는지 인상을 구기며 버럭 소리를 지른다.

그런 순규의 모습에 창현이 미소를 짓는다.

“그럼 저야 좋지요. 정정당당하게 하는 게 좋으니까요. 그럼 정정당당한 게임을 부탁드릴게요.”

일부러 정정당당을 강조한 창현의 말에 순규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리고 몸을 홱하니 돌리며 말한다.

“방 만들어놔. 바로 들어갈 테니까.”

“좋아요.”

“…태연이가 말해준 필승 전략은 안 쓰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지.‘

창현의 대답을 들은 순규는 작게 중얼거린 뒤 망설임 없이 집밖으로 나간다. 창현도 곧장 방을 만든다.

“태연 누나의 필승 전략이라고? 기대해보죠.”

순규가 집을 나서면서 중얼거렸던 내용을 떠올리며 창현이 미소를 지었다. 과연 태연이 어떤 전략을 조언해줬을지 기대가 되었다.

잠시 후, 순규가 방에 접속하였다.

종족을 선정한 뒤 곧장 게임을 시작하는 창현.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가득하다.

두 번째 게임이 시작되었다.

창현의 스타팅 포인트는 전판과 같은 2시였다. 색깔은 싫어하는 갈색이었지만 2시라는 사실이 창현으로 하여금 기분 좋게 만들었다. 하늘도 자신을 돕는 기분이랄까.

“소원 세 개 챙겨서 두고두고 우려먹어야지.”

방심은 하지 않는다. 자신이 방심하면서 이길 만큼 순규의 실력이 낮지는 않으니 말이다.

파일런을 건설한 창현은 12시 방면에서 오버로드가 날아오지 않자 순규가 6시 혹은 8시일 것이라 예상한다.

잠시 더블 넥서스의 유혹에 시달리던 창현은 안전하게 게이트웨이부터 올린다. 그리고 프로브를 곧장 6시로 보낸다. 정찰이 조금 늦기는 했지만 원 게이트로 충분히 9드론 저글링을 막을 자신이 있었다.

그렇게 게이트가 막 완성되고 질럿을 생산할 무렵, 창현은 패닉에 빠지고 만다.

자신은 질럿을 이제 생산하기 시작했는데 갑자기 저글링 여섯 마리가 언덕 위로 올라오고 있던 것이다.

“…….”

얼마나 황당했던지 창현은 순간 할 말을 잃는다.

이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이 방법 밖에 남지 않았어.”

창현과 두 번째 게임을 하기 전, 순규는 결연한 표정으로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첫 번째 판은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허망하게 당했다.

소원이 걸린 게임.

순규는 이기기 위해 약간 치사한 방법을 동원하였다.

바로 맵핵이 그것이었다.

맵핵은 맵 전체를 볼 수 있는 핵 프로그램.

아무리 창현이 잘한다고 하나 맵핵을 킨 자신을 이길 수 없으리라 여기고 게임에 임하였다.

하지만 결과는 처참한 패배였다.

창현은 귀신이 곡할 노릇의 플레이를 선보였고, 순규는 어이가 없다 못해 말조차 안나오는 창현의 플레이에 할 말을 잃어야만 했다.

그리고 내린 그녀의 결론.

창현도 맵핵이라는 것.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멀티가 완성되자마자 공격을 오는 것이며, 자신이 공격하거나 확장을 할 때 귀신같이 정찰오고, 쳐들어오는 것이란 말인가.

“졌네. 맵핵 키고도 못 이기네.”

옆에서 게임을 지켜보고 있던 태연이 한 말이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까지 치닫자 순규는 GG를 선언하였고, 화가 단단히 난 얼굴로 창현의 집에 쳐들어갔다.

그러나 창현은 오히려 순규를 추궁하였다. 그녀가 맵핵을 사용한 것을 알고 있던 것이다.

그에 순규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창현은 자신이 맵핵 킨 것에 증거를 잡은 것에 비해 자신은 아무런 증거도 없이 심증만 가지고 있던 것이다.

결국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채 마지막으로 내민 것이 소원 두 개를 걸고 하는 게임이었다.

소원이 세 개가 되었다며 희희낙락하는 창현의 모습을 보면서 순규는 반드시 이겨야겠다는 결의를 다졌다.

숙소로 돌아온 순규는 태연을 보며 말했다.

“태연아, 아무래도 네가 말한 전략을 써야겠어.”

창현과 나누었던 이야기를 하자, 태연이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순규야! 그것밖에 남지 않았어.”

“운이 따라줘야 해.”

순규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굳은 결의로 게임에 임했다.

태연이 순규에게 말해준 전략.

그것은 다름 아닌 저그의 로망(?)인 5드론이었다.

그야 말로 성공 확률은 낮고 실패 확률은 높아서 사장되다시피 한 전략이었다.

이 전략은 자리 운이 따라야하며, 상대방의 정찰 운이 안 좋아야 성립될 수 있는 작전이었다.

간절히 바라는 가운데 게임은 시작되었다.

우선 자리는 12시였다. 일단 자리는 괜찮았다. 여기에 창현이 2시에만 있으면 금상첨와이리라.

조심스럽게 오버로드를 위쪽으로 보내면서 넥서스가 간신히 보일 만한 위치까지 접근시킨다. 그리고는 스포닝 풀을 올리면서 오버로드를 살짝살짝 접근시킨다.

그러자 희끗하게 보이는 넥서스.

순규는 그때 자신도 모르게 브라보! 를 외쳤다. 그리고 창현이 제발 12시로 정찰오지 않기를 간절히 빌었다. 위치는 좋다고 하여도 창현이 먼저 발견하고 프로브로 대비책을 세우면 그녀로서는 속수무책이었던 것이다.

하늘은 그녀를 돕고 있었다.

창현의 프로브는 정찰이 오지를 않았던 것이다.

그 사이 6마리 드론을 만든 순규는 스포닝 풀이 완성되자 저글링 6마리 생산하였다. 그리고 나오는 라바로 곧장 오버로드를 생산한다.

생산되자마자 달리는 저글링들. 거침없이 창현의 본진으로 올라선다.

본진으로 들어서는 순간 순규는 하늘이 자신을 다시 한 번 돕는다고 생각했다.

창현의 파일런과 게이트웨이가 언덕에 바짝 붙어있던 것이다. 이렇게 되면 자신이 공략하기 쉬워지는데 반해 프로브밖에 없는 창현은 컨트롤에 상당한 난항을 겪게 될 것이다.

때마침 오버로드가 완성되었고, 모여있는 라바로 저글링을 생산하며 순규는 본격적인 저글링 컨트롤에 나섰다.

파일런을 공격하자 프로브가 몰려나오기 시작한다.

뭉쳐있는 프로브와 정면 대결을 하는 것은 명백한 자신의 손해.

저글링을 본진 깊숙이 들여보내면서 남아있는 잔여 프로브를 공략한다.

그 프로브들조차 잃지 않기 위해 창현이 컨트롤을 하지만 두 마리를 잡는데 성공한 순규는 창현의 본진을 자신의 앞마당인 마냥 저글링을 움직인다.

그 사이 창현의 게이트웨이에서 질럿 한 마리가 나온다. 그리고 프로브와 함께 저글링을 잡기 위해 뛰어온다.

순규는 질럿이 따로 떨어질 듯 싶으면 달려드는 모습을 보이면서 본진에서 생산된 저글링으로 언덕을 막고 있는 프로브를 죽이고 다시 파일런 공략에 나선다.

질럿과 프로브가 우르르 몰려나오지만 파일런은 부서지고 만다.

다시 파일런을 생성하기는 하지만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 분명한다. 순규는 남아있는 여섯 마리 저글링으로 창현을 괴롭히면서 저글링을 끊임없이 생산, 어느새 모여 있는 미네랄로 해처리를 하나 더 짓는다.

정면대결에서 창현이 이길 리가 없기에 순규는 끊임없는 컨트롤로 프로브들을 한 마리씩 잡아나갔다. 창현에게는 위기의 순간이었다. 저글링을 잡기 위해서는 질럿과 프로브가 힘을 합쳐야 하는데 그러면 프로브가 미네랄을 캐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방치하자니 질럿이 위험하고 프로브도 위험에 처한다.

야금야금 프로브를 잡아나가는 사이 파일런이 완성되고 질럿 한 마리가 더 나온다. 두 질럿으로 언덕을 비집고 올라오는 저글링을 막아보지만 어느새 합류한 저글링은 열두 마리, 한부대였다.

저글링으로 파일런을 부수기를 시도하면서 싸움을 건다. 창현도 대응을 해오지만 질럿 숫자가 부족해서인지 이내 물러선다. 그리고 게이트웨이와 파일런이 저글링에 의해 파괴된다.

넥서스 주변에 파일런을 지은 창현은 포지를 짓고 있었다. 포톤으로 방어를 굳힌 뒤 승부를 보려는 생각인가보다.

질럿 두 마리가 프로브가 일하는 곳에 섞여 있어서 함부로 공략이 어려웠다.

포지가 완성되자 창현은 곧장 포톤을 생산하기 시작한다.

그것을 보면서 순규는 차근차근 저글링을 합류시키자 어느새 저글링이 두 부대에 달했다. 투 해처리에서 나오는 만큼 저글링의 숫자가 급격히 증가한 것이다.

두 부대에 달하는 저글링을 그대로 돌격 시키는 순규. 아무리 창현이 뛰어나다고 해도 질럿 두 마리와 프로브로 저글링 두 부대를 막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자신도 컨트롤을 하니 말이다.

프로브로 열심히 질럿을 호위하면서 전투에 임하지만 속속 합류하는 저글링의 존재로 인해 결국 질럿은 다 죽고 포톤도 부서진다.

이제 남은 것은 먹음직스러운 프로브들뿐이었다.

이거야 뭐 그냥 어택 땅이닷!

저글링이 달려드는 순간 GG를 외치는 창현이 보였다.

그것을 본 순규가 소리를 한껏 지른다.

“꺄아! 태연아! 내가 이겼어!”

“시끄러워!”

밖에서 수영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순규의 귀에는 들려오지 않았다.

오로지 승리했다는 것이 중요할 뿐!

순규가 기뻐하며 방방 뛰자 태연도 같이 기뻐해준다.

“잘했어!”

“응! 어서 가자! 가서 막 거드름 피워줘야지.”

자리에서 일어난 순규가 태연과 함께 집을 나선다.

멤버들이 왜 자꾸 들락날락거리냐는 시선을 보냈지만 그런 시선들은 사뿐히 무시해주며 곧장 옆집으로 향한다. 그리고 옆집 문을 활짝 연다.


“말도 안 돼!”

창현은 순규에게 4드론? 5드론을 당해서 패배를 당하자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토록 빠르게 저글링이 올 수 있었다는 건 순규의 위치가 12시라는 걸 의미한다.

어찌 이렇게 운이 맞아떨어질 수 있을까.

언덕 방어를 위해 파일런과 게이트웨이를 언덕에 바짝 붙여 지은 것이 화근이었다. 거리가 멀어서 프로브로 효과적인 방어가 불가능했던 것이다.

게다가 순규의 저글링 컨트롤도 보통이 아니었다. 정말 에너지가 1남은 저글링조차 반드시 살려내는 그녀의 컨트롤에서 반드시 이기겠다는 집념이 느껴질 정도였다.

이래저래 막아내기 위해 애를 써보았지만 강력하게 허를 찔린 상태라 결국 창현에게 돌아온 것은 패배였다.

설마 자신이 5드론에 당하는 날이 올 줄이야.

정말 꿈에도 몰랐다.

“제, 젠장.”

자신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욕설.

기상천외한 전략에 당해서 졌다면 모를까. 하필이면 5드론이라니.

정말 창피하기 그지없었다.

“순규 누나를 어떻게 보지.”

처음으로 져서 그런 것일까.

창현은 당장 달려올 순규의 의기양양한 모습이 두려웠다.

그렇게 생각하던 창현이 돌연 화들짝 놀란다. 잊고 있던 사실이 있던 것이다.

“문 잠그지 않았지!”

순규가 뛰쳐나갔으니 문이 잠글 리가 없다.

황급히 현관문으로 달려가는 창현. 이대로 문을 잠가버릴 심산이었다. 아무래도 맨날 이기던 사람에게 진 상황이고 소원까지 걸린 상태라 조금 쪽팔려서 그렇다.

문앞에 도착한 창현이 막 손을 뻗을 때였다.

갑자기 확 열리는 문.

손을 뻗던 창현이 그대로 굳어버렸고, 문밖에는 순규와 태연이 서 있었다.

특히 순규의 표정이 눈에 띄었다.

싱글벙글 웃음을 짓고 있는 순규의 모습.

그녀는 창현을 보더니 반갑게 손을 들어 인사한다.

“안녕! 창현아!”

“끄응!”

웃음을 짓고 있는 순규의 모습을 보니 절로 앓는 소리가 흘러나오는 창현이었다.

한발 늦었다는 생각이 뇌리에 감돌고 있었다.

조금만 더 빨랐다면 문을 잠글 수 있었을 텐데.

자신이 너무 방심했다는 생각이 뇌리에 감도는 창현이었다.

씁쓸한 표정을 짓는 창현의 얼굴을 보면서 순규는 한 층 더 승리감에 고취되어 창현에게 말한다.

“뭐야, 우리 언제까지 바깥에 세워둘 거야?”

그 모습이 창현에게는 그렇게 얄미워 보일 수가 없었다.

“…들어오시죠.”

턱밑까지 차오르는 분함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창현이 말했다.

그러자 순규와 태연이 안으로 들어선다.

당당하게 소파에 앉은 순규가 창현을 보며 말한다.

“자, 일단 음료수 좀 따라와 봐.”

그런 순규의 당당한 모습에 창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너무 당당한 거 아니에요?”

“흥! 내가 몇 번이나 해서 널 이긴 건데. 너한테 깨진 것만 200번은 넘을 걸? 힘들게 얻은 승리의 기분을 쉽게 놓칠 수는 없지!”

200번이 넘었다는 말에 창현은 순간 순규와 게임했던 숫자를 떠올린다. 그리고 정말 200번 가깝게 게임을 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설마 그것을 다 기억하고 있을 줄이야. 놀라울 정도로 집요한 면이 있었다.

창현은 순규의 집념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음료수를 따라 내민다. 순규에게는 콜라, 태연에게는 주스였다.

콜라가 든 잔을 본 순규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왜 하필 나는 콜라야?”

창현이 싱긋 웃음을 짓는다.

“누나가 음료수 달라면서요? 저는 누나가 원하는 걸 드린 죄밖에 없다는 말씀. 태연 누나는 아무 말도 없으셨으니 주스로 드린 거고요.”

“나도 주스 마실래.”

“교환 따위는 없습니다. 그냥 마시세요.”

창현 나름대로 소심한 복수였다.

그런 창현의 심기를 느꼈는지 순규가 콜라를 벌컥벌컥 마신다.

그리고 분노에 찬 일갈을 내뱉는다.

“흥! 졌으니까 심통 부리는 거겠지.”

“맞습니다. 설마하니 누구누구께서 5드론을 할 줄은 몰랐거든요.”

“…….”

심통 부리는 걸 솔직히 인정해버리자 순규는 할 말이 사라졌다. 괜히 뻘줌해졌다.

창현이 그런 순규를 보며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5드론 할 생각을 한 거예요?”

“얘가 권유하던데?”

순규가 태연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에 창현이 태연을 보며 물었다.

“누나는 어디서 5드론을 안 거예요?”

창현의 물음에 태연이 웃음을 짓더니 말했다.

“내가 순규 덕분에 스타크래프트를 조금 할 줄 알거든. 그래서 하는데 어떤 유저가 나한테 5드론을 하는 게 아니겠어? 정말 아무것도 못하고 당하니까 화가 나더라고. 그 뒤부터 내가 저그를 한 다음에 5드론을 하는데 의외로 잘 먹히더라고. 그래서 순규에게 권한 거야.”

자세한 내막은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그저 잘 먹혀서 권유한 것이 되어버린 것이다.

창현은 물론 순규도 황당한 표정으로 태연을 바라본다.

그런 두 사람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태연이 슬쩍 시선을 피하면서 말한다.

“왜 그런 시선으로 봐? 어차피 순규 넌 이겼으니까 된 거잖아.”

“아참! 그렇지. 소원 두 개. 호호호!”

태연의 말에 정신을 차린 순규가 웃음을 짓는다. 정말 고의적으로 짓는 가식이 가득한 웃음이었다.

그 웃음을 들으니 기분이 나빠진 창현이 인상을 찡그렸다.

“호호호!”

창현이 표정을 찡그리니 더욱 더 웃음을 짓는 순규.

한동안 웃음만 짓고 있던 그녀가 말한다.

“자, 그럼 무슨 소원을 할까나. 이거 생각해보니 소원 빌게 너무 많네. 음, 우리 멤버 아홉 명에게 최신형 컴퓨터 사주기? 아니야, 창현이는 돈이 많으니까 이건 간에 기별도 안 가겠지. 그럼 하루 동안 우리 식사 챙겨주기? 어때, 태연아?”

“좋은데? 창현이가 집안일 경력 5년이라고 했으니 음식도 분명 잘할 거야.”

순규의 물음에 눈을 빛내며 말하는 태연이었다.

현이 해주는 밥이라니. 레전드였다.

그럴수록 창현의 표정은 더욱 더 일그러지고 있었다.

“아니면 이건 어때. 창현이가 우리 은퇴할 때까지 곡 써주기.”

“오오! 그것도 좋다!”

순규의 말에 태연이 감탄사를 연발한다.

창현이 작사 작곡해준 곡을 소녀시대가 부른다라. 우선 창현이 연관되어 있는 만큼 대박은 따놓은 당상이었다.

“아아! 너무 일찍 정하면 재미가 없지? 우선 하나는 저장해두고 나머지 하나만 말해볼까나.”

밉살맞게 말하는 순규의 모습에 창현이 뭐라 말하려 할 때, 태연이 손을 들어 순규를 제지한다.

“순규야 너무 그렇게 말하면 안 돼.”

태연의 제지에 순규는 창현의 표정을 힐끗 보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그, 그래. 내가 조금 심했나보네.”

창현의 일그러진 표정을 본 순규가 꼬리를 만다.

그렇다고 소원을 고민하는 행위는 멈춘 게 아니었다.

잠시 고민하던 순규는 자신의 머리를 부여잡았다.

“아악! 소원을 빌 만한 게 너무 많아서 뭘 할지 모르겠어. 머리 아파!”

“어차피 시간은 많으니까 천천히 고민하는 게 어때?”

“그래도 지금 정하고 싶단 말이야.”

마치 어느 장난감을 고를지 고민하는 어린 아이처럼 고집을 부리는 순규였다.

태연은 그런 순규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말한다.

“그럼 이건 어때? 우선 소원 하나로 창현이가 앞으로 우리 모든 곡들을 써주고, 다른 소원 하나로 내년 여름에 우리 전부 데리고 싸이판이나 푸켓으로 놀러가주기! 모든 비용은 창현이가 부담!”

“오오! 좋은데?”

과장된 반응을 보이며 순규가 힐끗 창현을 본다. 창현은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누나들 계속 이러깁니까?”

“뭘? 소원 가지고 고민하는 것뿐인데.”

으쓱하며 대답하는 순규.

태연은 창현을 힐끗 보더니 중얼거렸다.

“정말 창현이가 곡을 써준다면 좋을 텐데…….”

첫 번째 내용은 정말 진심이 섞여 있는 듯했다.

그에 창현은 순간 마음이 약해지려는 것을 느꼈지만 이것은 개인적 문제를 넘어선 회사의 문제였다. 함부로 속단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그 사이 고민에 빠져있던 순규는 창현을 보더니 외쳤다.

“창현아! 소원 정했어.”

“뭔데요?”

“태연이가 두 번째 말한 소원! 내년 여름에 우리 전부 데리고 푸켓에 데리고 가줘!”

말도 안 되는 소원이었다.

당장 내년에 그녀들의 스케줄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도 물론이고, 푸켓에 온 수많은 관광객들이 창현을 알아볼 것이 당연했다.

월드스타인 그가 아홉 소녀와 함께 푸켓에 간다면?

아주 각국 신문에 대문짝하게 실릴 것이다. 나이도 어린 녀석이 여자 아홉 명이나 끼고 외국으로 놀러다닌다고 말이다.

그것은 창현이 들어줄 수 없는 소원이었다.

창현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안 돼요!”

“변장하고 가면 되잖아. 응? 우리도 쉬고 싶단 말이야!”

“안…….”

다시 한 번 안 된다고 말하려던 창현은 무언가가 떠오른 듯 말을 멈춘다. 그리고 입가에 미소를 띠기 시작했다.

그런 창현의 모습에 순규는 알 수 없는 불안함을 느껴야 했다.

창현은 순규를 보며 물었다.

“순규 누나 그거 아세요?”

“뭐, 뭘?”

목소리가 떨려나온다. 도대체 창현이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제게도 소원 한 가지가 있다는 것을.”

“…아!”

그제야 왜 불안함을 느껴야 했는지 깨달은 순규.

그렇다. 소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순규 뿐만이 아니었다. 창현도 소원을 하나 가지고 있는 것이다.

창현은 입가에 짙은 조소를 지은 채 말했다.

“제 소원을 말할게요. 제 소원은 누나가 가진 두 가지 소원을 모두 무효로 만드는 거예요.”

“……!”

창현의 소원에 순규는 물론 태연도 입을 떡 벌렸다. 설마 창현이 이런 소원을 말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한동안 충격에 빠져서 어버버 하는 순규를 보면서 창현은 만족의 미소를 지었다. 흔히 말하는 ‘쌤통이다.’ 하는 표정이었다.

소원 두 개를 가졌다고 좋아하더니 된통 한 방 먹은 셈이다.

게임에 졌는데도 창현은 마치 자신이 승리한 것마냥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느꼈다.

한참을 침묵하던 순규.

그녀의 첫 말은 절규에 가까운 외침이다.

“인정할 수 없어! 그럼 나도 소원 빌래! 우선 네 소원을 없애줘! 하나씩이니 퉁 칠 수 있는 거 아냐?”

그녀의 말에 창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검지를 펼쳤다. 그리고 좌우로 흔들어보였다.

“쯧쯧! 어디서 그런 섭섭한 말씀을. 제가 먼저 이기고 먼저 소원을 획득했잖아요? 당연히 소원도 제가 먼저 빌어야 정상이지요. 그리고 제 소원은 누나의 소원 두 개를 없애는 것이니 이로써 각자 빌 소원이 없어졌네요. 결국 원점이란 이야기입니다. 제대로 퉁 쳐졌네요.”

객관적으로 들어보아도 창현의 말이 순규의 말보다 훨씬 논리적이었다. 그걸 알았기에 순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입을 떡 벌리고 있어야만 했다.

♩♪♬

그때, 창현의 핸드폰에서 벨소리가 울려 퍼졌다.

창현은 마침 잘됐다는 듯, 웃음을 짓더니 순규를 보며 말한다.

“전화가 왔네요. 마침 작업할 것도 있으니 다음에 뵙도록 해요.”

그것은 축객령이었다. 하지만 순규는 나가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뚱한 표정으로 창현을 노려보며 농성할 듯한 기미마저 보이고 있었다.

창현은 그런 순규를 어이없다는 시선으로 보더니 말한다.

“누나 빨리 안 가시면 강제권을 행사할 거예요.”

“흥! 어디 해보시지.”

순규의 표정은 마치 ‘칠 테면 쳐보시지?’ 라고 하는 자해공갈단원과 흡사했다.

하지만 창현도 보통이 아니었다. 순규의 말에 곧장 그녀에게 다가가더니 공주님 안기로 그녀를 번쩍 안아든 것이다.

“그래요? 읏차!”

“야! 너, 너 뭐하는 거야?”

“뭐하긴요. 강제권 행사죠.”

“이거 놔!”

바동거리는 순규를 들고 창현은 밖으로 친절하게 모셔주었다. 그리고 잽싸게 문을 닫으며 말했다.

“그럼 다음에 보도록 하죠. See you later!”

콰앙! 철컥! 철컥!

문을 닫는 소리와 장금장치를 설정하는 소리가 아주 적나라하게 들려왔다.

태연은 아직도 씩씩거리는 순규의 모습을 보더니 말했다.

“후! 순규야, 아무래도 네가 진 거 같다. 창현이도 오늘 보니 보통이 아니네.”

태연의 말에 순규가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더니 울상을 짓는다.

“흐잉! 내 소원. 흑흑!”

승부에서 이겼으니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는 처참한 말로였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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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마음을 울리는 음악 시즌2 제4화 +7 15.04.24 3,979 89 10쪽
40 마음을 울리는 음악 시즌2 제3화 +6 15.04.22 4,427 82 10쪽
39 마음을 울리는 음악 시즌2 제2화 +9 15.04.20 4,517 91 11쪽
38 마음을 울리는 음악 시즌2 제1화 +10 15.04.17 7,376 95 10쪽
37 ▲▲▲▲▲시즌2 시작!▲▲▲▲▲ +5 15.04.17 5,425 65 1쪽
36 마음을 울리는 음악 106장-108장 +8 15.04.16 6,414 106 230쪽
35 마음을 울리는 음악 103장-105장 +1 15.04.16 4,245 82 3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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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마음을 울리는 음악 40장-42장 +3 15.04.16 8,909 183 320쪽
13 마음을 울리는 음악 37장-39장 +2 15.04.16 9,615 224 397쪽
12 마음을 울리는 음악 34장-36장 +8 15.04.16 9,524 189 322쪽
11 마음을 울리는 음악 31장-33장 +8 15.04.16 10,355 261 345쪽
» 마음을 울리는 음악 28장-30장 +5 15.04.16 10,659 260 277쪽
9 마음을 울리는 음악 25장-27장 +7 15.04.16 11,040 267 233쪽
8 마음을 울리는 음악 22장-24장 +4 15.04.16 10,924 261 198쪽
7 마음을 울리는 음악 19장-21장 +4 15.04.16 11,492 270 216쪽
6 마음을 울리는 음악 16장-18장 +5 15.04.16 11,544 242 163쪽
5 마음을 울리는 음악 13장-15장 +5 15.04.16 14,536 297 237쪽
4 마음을 울리는 음악 10장-12장 +8 15.04.16 13,738 352 171쪽
3 마음을 울리는 음악 7장-9장 +10 15.04.16 14,554 362 142쪽
2 마음을 울리는 음악 4장-6장 +11 15.04.16 16,842 421 120쪽
1 마음을 울리는 음악 프롤로그-3장 +47 15.04.16 29,905 545 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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