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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번 님의 서재입니다.

마음을 울리는 음악

웹소설 > 작가연재 > 팬픽·패러디, 현대판타지

김현우
작품등록일 :
2015.04.16 13:27
최근연재일 :
2015.06.01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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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4.16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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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98쪽

마음을 울리는 음악 22장-24장

DUMMY

제22장 주현의 졸업식




자신의 숙소라고 한 곳에 도착한 창현은 두 눈을 휘둥그레 뜰 수밖에 없었다. 무려 40평이 넘는 거대한 숙소를 배정한 것이다.

창현이 윤진호를 보면서 물었다.

“여기가 앞으로 지낼 곳이라고요?”

윤진호도 창현의 숙소에 처음 와봤는지 놀란 표정을 짓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여기가 네 숙소다.”

“저 혼자 사는 곳이에요?”

“그건 잘 모르겠다. 일단 짐은 이삿짐 센터에 의뢰를 했으니 가지고 올 거야. 내가 알기로 이 근처에 연예인이 제법 많이 살아서 경비가 괜찮다고 알고 있거든.”

그 말에 창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으로 들어설 때 비밀번호를 입력해야 했고, 엘리베이터에는 CCTV가 설치되어 있었다. 게다가 바로 앞에 마트도 있었다. 최소한의 행동반경으로 필요한 모든 것을 구할 수 있었다.

“윤실장님이 잘 모르시면 아버지한테 물어보는 수밖에 없네요. 오늘은 스케줄 없죠?”

창현의 물음에 윤진호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품속에서 수첩을 꺼내들고 스케줄을 확인한 뒤 말했다.

“없다. 9일하고 10일 음악방송을 찍은 뒤 본격적으로 활동한다고 되어있네.”

아직 석규가 CF와 화보 촬영에 대해 결정을 내리지 않은 상태였기에 이렇다 할 스케줄은 없는 상태였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출연해달라는 제의가 물밀 듯이 몰려오고 있지만 당장 출연할 때가 아니고, 지금 제작하고 있는 미니 앨범을 굳이 PR할 필요도 없기에 예정은 없었다.

스케줄이 없다는 말에 창현이 화색을 하였다.

“그래요? 그럼 다행이네요.”

“난 이만 가보마. 일단 집안에 기본적인 건 다 세팅해놓았으니 당장 지내도 될 거야. 얼마 전에 백업해놓은 외장 하드도 가져다 놓았어.”

“네. 세세한 것까지 신경 써주셔서 감사해요.”

“지문 인식 시스템이니까 지금 등록하도록 하고.”

간단하게 등록 절차를 도와준 윤진호는 곧장 회사로 돌아가고 창현 혼자 남았다.

집을 둘러보니 혼자서 살기에는 지나치게 넓은 집이었다.

방은 네 개나 되었고, 창고로 쓸 만한 조그마한 공간이 있었다.

갑작스러운 소동이 아니더라도 곧 숙소를 옮길 거였다는 말이 사실답게 각종 가구들을 완비해놓은 상태였다.

창현은 자신이 잘 큰방에 놓인 침대를 보고는 거기에 눕고는 눈을 감는다.

“오늘 스케줄도 없다고 하니 늘어져도 상관없겠지.”


창현의 숙소 공개 사건은 얼렁뚱땅 마무리가 되었다.

AA엔터테인먼트의 신속한 대응으로 현을 찾아 모여든 팬들에게 간단한 싸인회를 개최한 뒤 큰 잡음없이 숙소를 옮기는데 성공하였다.

그 뒤 창현은 곧장 미니 앨범 제작에 착수하였다. 이번주에 있는 스케줄은 각각 금요일과 토요일에 있는 음악 방송에 나가는 것뿐이었고, 다음 주부터 본격적인 스케줄 일정이 잡혔기에 스케줄이 없음에도 일정을 타이트하게 하여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수영의 생일을 챙겨주는 세심함을 보였다. 2월 10일은 창현이 음악 방송에 출연하는 날이었기에 슬쩍 주현에게 정보를 얻어낸 창현은 일본 수입 과자를 사서 주현에게 전달해달라고 한 것이다.

굳이 생일을 챙겨줄 필요가 있느냐? 라는 말이 있지만 사람 관계란 것이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법이다. 저번 만남으로 창현은 수영과 효연이란 사람이 인간적으로 무척 마음에 들었다. 인간관계가 넓지 않은 만큼 작은 관계 하나하나를 소중하게 여기는 창현이었다.

마침내 2월 10일이 되었다.

주현에게 선물을 건네면서 대신 전해달라고 한 창현은 음악 방송 출연을 위해 M본부로 향했다.

어제 출연하였던 K본부에서도 창현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2월 4일 데뷔 무대에서도 엄청난 시청률과 함께 인기 상승을 가지고 온 가수 현의 인기는 끝을 모르고 치솟고 있던 것이다.

오늘 방송이 창현에게 있어서는 마지막 방송 출연이었다. 기존의 발매한 음반으로 부르고 있지만 이미 음반 발매가 상당시일 지났고, 미니 앨범 작업을 하고 있기에 새 곡으로 데뷔를 하려는 생각이었다. 그렇기에 방송사마다 하고 있는 음악 프로그램에 한 번씩 출연을 한 뒤 새로운 앨범으로 복귀할 생각이었다.

창현이 각 방송사마다 하는 음악프로에 참가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바로 어느 한 방송사에 밉보이는 것을 방지하려는 이유에서였다.

가수 현의 정체를 놓고 방송 3사에서 끊임없이 AA엔터테인먼트에 압력을 가해왔었다. 바로 현의 데뷔 무대를 자신의 방송국에서 치르게 하라고 말이다.

석규는 이것을 놓고 고민에 빠졌고, 그러던 차에 갑작스러운 왕지동의 일로 인해 사정이 급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협상 끝에 가장 S본부에서 데뷔 무대를 치르고, 각 방송사마다 한 번씩 무대 위에 선 뒤 미니 앨범으로 복귀하려는 계획을 세운 것이다.

이미 현의 등장으로 엄청난 시청률을 득본 S본부였기에 K본부와 M본부도 현이 무대 위에 서는 것을 바라는 눈치였다.

물론 이것은 현에게도 손해가 되지 않는 것이, 그의 다양한 매력이 담겨있는 무대를 본 팬들이 창현의 앨범을 찾게 되면서 뒤늦은 앨범 구매 열풍이 불고 있었던 것이다. 현재 현의 정규 1집 앨범 같은 경우 120만장을 돌파한 상태였다.

창현의 순서는 제일 마지막이었다. 무대를 거듭할수록, 인기도 면에서 엄청났기에, 무엇보다 오늘 CF와 화보 촬영 미팅이 있었기에 리허설도 참가하지 못한 채 방송국으로 들어서야 했다.

대기실에 들어서고, 서둘러 메이크업을 끝냈을 무렵, 밖에서 똑똑똑!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미 메이크업이 끝났기에 눈을 감고 간단한 휴식에 빠져있던 창현이 대답했다.

“들어오세요.”

“실례합니다.”

그 말과 함께 대기실로 들어서는 여성들이 있었다.

그녀들을 보면서 창현은 눈을 살짝 크게 뜨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기실에 들어온 사람은 다섯 명의 소녀들이었다.

그녀들이 자기소개도 하기 전에 창현이 먼저 아는 척을 하였다.

“아, 원더걸스네요. 이번에 데뷔 무대 하시는 건가요?”

“…어, 어떻게 저희를?”

창현의 말에 선두에 선 소녀가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본다.

그에 창현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대답했다.

“저도 연예인이잖아요. 부지런히 뉴스를 체크한답니다. 당연히 원더걸스도 알고 있고요.”

“아…….”

창현의 말에 납득을 한 듯 고개를 끄덕이지만 눈빛은 거세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뿐만 아니라 모든 소녀들이 그러했다.

그녀들에게 있어 현은 동경의 대상과도 같았다. 그가 관여한 모든 앨범이 대박이 터졌을 뿐만 아니라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거대한 스케일로 움직이는 가수였다. 이제 갓 데뷔한 그녀들에게는 엄청난 대선배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런 대선배가 자신들을 알고 있을 줄이야.

잠시 공황 상태에 빠져있던 원더걸스의 리더 선예는 자신이 생각에 몰두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창현에게 말했다.

“아, 제가 잠시 실례를. 안녕하세요, 원더걸스의 리더 선예입니다. 그리고…….”

선예가 멤버 한 사람씩 지목하며 자기소개를 하게 하였다.

그녀들은 현이 자신을 알고 있다는 사실과 방송에서만 보았던 그의 멋진 모습을 실제로 보게 되었다는 것에서 오는 감동, 당황함이 뒤섞여 허둥지둥하는 모습을 보였다.

창현은 그런 그녀들의 모습에 쿡쿡! 웃으면서 마주 대답했다.

“안녕하세요? 현입니다. 저도 만나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그런데 오늘 데뷔하시는 건가요?”

“네. 오늘 데뷔 무대를 하게 되었어요.”

창현의 말에 대답한 것은 선예였다. 아무래도 원더걸스 내에서 나이가 제일 많고 리더이다 보니 당황하지 않고 침착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원더걸스 다섯 멤버 중 선예와 예은은 창현보다 세 살이나 더 많았다. 그리고 나머지 세 멤버인 현아와 선미, 소희는 창현과 동갑이었는데, 자신과 동갑인 가수가 흔하지 않았기에 반가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가급적 친하게 지내고 싶은데 세 살이나 더 많은 선예가 존대를 하니 조금 불편했다.

창현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나이가 저보다 많은데 말을 좀 편하게 해주시면 안 될까요? 아, 초면에 편하게 해달라는 게 실례가 되나요?”

선예의 눈이 조금 커졌다. 가수의 입장에서 현은 두말할 것없이 대선배였다. 어느 정도 인기가 받쳐주지 않으면 말을 트기조차 힘들 정도로 심각한 인기의 간극이 존재한다.

그래서 내심 친분을 쌓는다는 것이 좋았지만 그 이상은 힘들 것이라 생각했는데 눈앞의 현은 그런 것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인 듯했다.

“편하게요? 그래도 될까요?”

“물론이죠.”

창현은 빙긋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웃음이 주는 마력이 정말 강렬하였기에 원더걸스 멤버들은 한순간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그, 그럼 말 놓을게…….”

“…나도 놓을게.”

창현을 슬쩍 보면서 선예와 예은이 말을 놓는다. 창현이 승낙했다고 하지만 기분 나빠할 수도 있었기에 그녀들의 행동은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그녀들의 예상과 달리 창현은 웃으면서 그녀들의 말을 받아주었고, 자신과 동갑인 현아, 소희, 선미에게도 말을 놓으라고 하면서 편한 관계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친분을 키워나갔는데, 이야기 도중 선미가 창현에게 앨범 100만장을 넘게 팔았으면 돈을 얼마나 버냐는 등의 질문으로 창현을 곤혹스럽게 만들기도 하였다.

짧지만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이야기를 나누다가 먼저 원더걸스의 차례가 되어 무대로 올라갔고, 방송이 끝날 무렵 창현이 무대 위로 올라가 최선을 다한 무대를 선보인다. 썬글라스를 벗으면서 안광을 뿜어내는 그의 모습에 관객들은 엄청난 함성을 지르며 호응해준다.

그런 관객들의 모습에 창현이 미소를 짓는다. 정식 데뷔 이후 세 번째 오르는 무대였지만 이제는 무대가 주는 강렬한 마력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렇게 M방송국의 방송 무대를 끝으로 창현은 짧은 굿바이를 하게 되었다. 미니 앨범 제작이 완료되는 2월 중하순 다시 컴백한다는 사실을 알리면서 말이다.


M본부 방송을 끝으로 창현은 본격적인 스케줄에 돌입하게 된다.

우선 미니 앨범 제작의 마무리였다. 이미 실력 면에서 완숙의 경지에 들었기에 창현의 앨범 제작 속도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한 번 노래를 부를 때마다 스스로의 눈에 고칠 점이 보였고, 그것을 차근차근 고쳐나가자 본인 스스로가 만족할 만한 노래가 나왔다.

게다가 미니 앨범이었기에 수록곡도 많지가 않았다.

단 삼 일만에 미니 앨범 전 곡을 녹음하자 AA엔터테인먼트에서는 곧장 발매를 위해 준비에 착수하였고, 그 사이 창현은 석규가 고르고 고른 CF촬영과 화보 촬영을 검토하고 있었다.

소속사의 연예인이지만 창현은 AA엔터테인먼트의 대주주이기도 하였기에 회사의 경영과 자신의 스케줄에 대해 자세하게 알 이유가 있었다.

창현은 석규가 건네준 서류들을 읽어보다가 말했다.

“어라, 이건 외국에서 촬영하는 거네요?”

석규는 창현의 말에 그 서류를 힐끗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따뜻한 남쪽으로 가서 촬영하는 거다. 상당히 인지도가 높은 곳에서 제의를 해왔어. 이미 이야기도 거의 끝난 상태이고, 그것은 반드시 해야 하는 종류에 속한다.”

“그렇군요. 상당히 괜찮아 보이네요. 게다가 여성층에게 어필하는 것도 있고요.”

“잘 촬영하기만 하면 가뜩이나 늘어나는 여성팬들의 가슴에 기름을 부어주는 격이 되겠지. 덤으로 외국도 가보고. 좋지 않으냐?”

“네, 나쁘지 않네요.”

고개를 끄덕이면서 창현은 서류를 모두 훑어보고는 하나의 이탈도 없이 모두 수락하였다. 이미 석규가 고르고 고른 것들이거니와 향후 현의 이미지를 만들어나가는데 나쁘지 않은 것들만 선별한 상태였다. 무엇보다 계약 조건도 전에 석규가 했던 것보다 훨씬 상승되어 있었다.

뭐랄까, 음악 방송에 출연하면서 이미지를 각인 시키는데 성공한 현의 인지도가 그 짧은 사이 껑충 뛰어 있던 것이다. 게다가 알게 모르게 예의도 바르고 무척 착하다는 소문이 호재로 작용하여 현의 이미지를 한층 더 업그레이드 시켜주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그것을 놓칠 석규가 아니었고, 무난하게 협상을 이끌어내어 톱스타에 비해 떨어지지 않는 조건으로 계약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석규는 창현에게 시선을 주면서 말했다.

“이걸 모두 소화하려면 타이트하게 움직여야 할 것이다. 게다가 너의 미니 앨범 활동도 해야 할 테니까. 그나저나 괜찮겠느냐, 뮤직비디오를 그대로 해도?”

“물론이죠. 잘 찍은 뮤직비디오가 있는데 뭣하러 새로 찍어요. 대신 몇 가지 추가할 장면만 더하면 될 것 같아요.”

“그렇다면 상관없겠지.”

창현의 말에 석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이유는 창현의 미니 앨범 타이틀 곡 때문이었다.

이번에 창현이 준비한 미니 앨범 타이틀 곡은 다름 아닌 <My Princess>란 곡이다.

그런데 이 곡은 라샤가 부른 곡과 연결점을 가진다. 바로 라샤의 타이틀 곡이던 <가면의 기사>와 연계되는 곡이었던 것이다.

<가면의 기사>는 라샤의 가창력을 입증해준 발라드 곡으로서, 가면을 쓴 창현과 소녀시대의 윤아가 출연하여 화제가 되었던 노래였다. 라샤는 <가면의 기사>로 컴백하여 기존의 매력을 더욱 발산하는데 성공하였고, 신인들의 징크스를 깨는데도 성공하였다.

무려 6주 동안 1위를 하였던 <가면의 기사>와 연계되는 <My Princess>는 남자의 관점에서 풀어나간 곡이었다.

두 노래가 연동되기에 창현은 <My Princess>의 뮤직비디오를 라샤의 <가면의 기사>에서 몇몇 필요한 부분만 더 촬영하고 덧붙여서 뮤직비디오로 했으면 좋겠다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이러한 경우가 여러 번 있었기에 석규는 고민을 하다가 승낙을 하였다.

“그럼 곧장 뮤직비디오 촬영을 하고 화보 촬영과 CF촬영에 들어가도록 하자.”

“네, 알겠어요.”

이것이 마지막 방송을 치르기 전 창현과 석규가 했던 이야기다.


화보 촬영은 창현이 무대를 모두 끝내고 난 다음 날인 2월 11일부터 2월 12일까지 이어지는 것이었다.

촬영지는 태국의 푸켓 섬이었다. 사시사철 쾌청하고 아름다운 해안은 관광지를 이루고 있기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관광지이기도 한 푸켓을 방문한다는 사실에 창현은 무척 들떠 있었다.

화보를 촬영할 촬영진과 합류한 창현은 공손하고 예의바른 모습을 보임으로써 호감을 얻을 수 있었다.

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 창현의 핸드폰이 울렸다.

번호를 확인하니 주현이었다.

창현은 핸드폰을 열고는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주현 누나?”

-응, 나야 창현아.

핸드폰 너머로 주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창현은 시간을 확인하면서 지금이 막 등교할 시간이란 것을 알고는 물었다.

“네, 알고 있어요, 주현 누나. 그런데 지금 막 일어난 거예요? 무척 이른 시간인데…….”

그에 주현의 답이 들려온다.

-아니, 학교 갈 준비 다하고 궁금한 게 있어서 전화한 거야.

“아, 그렇군요.”

창현은 주현은 상당히 성실한 학생이란 것을 떠올릴 수 있었다. 성적도 상당히 좋았었지. 모든 모범생들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모범생들은 일찍 일어나서 일찍 등교를 한다.

상황파악을 한 창현이 물었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일로 전화하신 거예요? 그것도 이른 아침에.”

창현의 물음에 잠시 주현이 침묵한다. 그러다가 힘겹게 말한다.

-…그게…… 혹시 내일 학교 나올 수 있어?

모습을 볼 수 없지만 음성에서 절박함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창현은 고개를 살짝 갸웃하다가 대답했다. 지금 촬영 때문에 외국으로 가고 있지 않은가.

“내일은 아무래도 힘들 것 같은데요. 저 지금 화보 촬영으로 인해서 출국하고 있거든요.”

그 말에 다시 이어지는 주현의 침묵. 그녀가 끊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그럼 어쩔 수 없네.

창현은 그런 주현의 목소리에 무언가 자신이 놓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물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왜 그러세요. 내일이 무슨 날인데요?”

그의 물음에 주현이 힘이 담기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한다.

-내일이 졸업식이거든……. 그래서 창현이 널 볼 수 없을까 해서 말한 거야.

“졸업식이요? 아!”

창현은 자신의 이마를 딱! 하고 쳤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했던 말을 간과하고 있던 것이다. 2월 12일이 졸업식이란 걸 말이다.

중학교 3학년인 주현은 내일 졸업하게 된다. 즉, 창현과 학교에서 만날 수 있는 마지막 날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졸업식인 만큼 학교에서 이런 저런 행사를 해준다. 주현은 그것이 궁금하여 창현에게 전화를 한 것이다.

잠시 고민에 빠져있던 창현은 비행기를 탈 시간이 된 것을 보고는 주현에게 말했다.

“일단 졸업을 축하드려요. 지금 비행기에 탑승해야 되니 나중에 연락 드릴게요.”

-응…….

힘이 없는 주현의 대답을 들으면서 통화를 끝낸다.

핸드폰을 닫은 창현이 비행기에 탑승한다.

얼굴에 한 가닥 근심을 담은 채.


한국에서 푸켓까지 무려 여섯 시간이란 시간이 걸린다.

비행기를 타면서 창현은 고민에 잠겨 있었다.

이것을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어떻게 보면 주현은 창현에게 있어서 학교에 단 하나뿐인 선배였다. 지난 일 년 동안 상당한 친분을 쌓아왔고, 알게 모르게 창현과 여러모로 엮이면서 보통 선후배 관계보다 훨씬 돈독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주현이 졸업하는 것이니 만큼 후배의 입장에서 당연히 참가해야 하는 것이 옳다. 실제로 전교생 모두가 등교를 하는 것이고 말이다.

창현도 가급적 참가를 하고 싶지만 지금 화보 촬영을 위해 떠나는 중이었다. 푸켓에 도착하면 아침 겸 점심을 먹은 뒤 간단하게 촬영을 할 것이다. 그리고 내일 본격적으로 촬영에 돌입한 뒤, 다음날 끝을 내는 것으로 알고 있다.

푸켓에 도착할 때까지 창현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이것을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창현이 마침내 결정을 내린 것은 푸켓에 도착하고, 머물기로 한 호텔 식당에서였다.

뷔페 형식이었기에 그릇을 들고 음식을 담은 창현이 앉은 곳은 바로 이번 화보 촬영의 감독 맞은 편이었다.

그릇을 든 채 창현이 조심스럽게 감독에게 물었다.

“감독님, 여기 앉아도 될까요?”

아무래도 화보 촬영의 책임자이고, 평소 꽤 엄한 편이었기에 감독의 주변에 아무도 앉아있지 않았다.

감독은 창현이 자신의 맞은 편에 앉겠다고 하자, 눈에 이채를 띠며 말했다.

“호, 나쁠 건 없지요. 자 앉으세요.”

“아, 감사합니다.”

간단한 인사와 함께 자리에 앉은 창현. 친분이라고는 공항에서 간단하게 인사를 한 것이 전부였기에 둘 사이에 대화는 존재하지 않았다.

잠시 음식을 먹는데 열중하면서 침묵이 흘렀다.

어느 정도 음식을 먹자, 창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촬영은 오후부터 시작하죠?”

“음! 점심식사 후 한 시간 정도 휴식을 취한 뒤에 간단하게 돌입하려고 합니다.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습니까?”

감독과 창현은 이십 년이 넘는 나이 차이가 존재하였지만 감독은 창현에게 존댓말을 하였다.

그만큼 현의 이름이 주는 인지도는 높았다. 게다가 감독의 눈에 현이란 소년은 어린 나이에 엄청난 인기를 얻고 있는 아이돌답지 않게 무척 예의가 바랐다. 그랬기에 존중하는 의미도 함께하고 있었다.

“음! 그럼 오늘 곧장 본격적인 촬영에 돌입해도 될까요?”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는 창현. 그가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것은 이번 화보 촬영의 주가 되는 것이 바로 그였기에 그의 요구를 이루려면 자칫 촬영 스케줄 전부를 바꿔야 하는 일이 발생한다. 좋게 봐주면 다행이지만 나쁘게 보면 자신의 입맛대로 촬영 스케줄을 바꾸려한다는 이미지를 얻을 수 있었기에 그의 태도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그런 창현의 의도가 보였는지 감독은 나쁘게 해석하기보다는 의아한 빛이 감도는 눈을 하며 물었다.

“무슨 일이 있으신지요?”

“아, 그것이… 실은 저희 학교가 내일 졸업식입니다. 일정이 2박3일이지만 스케줄을 보니 어느 정도 조정이 가능할 것 같아서 말씀드리는 건데요. 타이트하게 일정을 변경해서 소화를 하면 어떨까 싶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조금 건방진가요?”

창현의 태도는 여전히 조심스러웠다. 아직 어리기에 그는 자신의 의도를 숨기거나 하지 않고 모든 것을 드러냈다. 말을 돌려서 상대방의 의중을 캐거나 하는 것은 그가 구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감독은 그런 창현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자신의 의도를 딱히 숨기지 않는 것이 무척 신선했고, 졸업식을 참가하고자 하는 그의 마음도 느껴진 것이다.

“호, 졸업식 말입니까? 솔직히 못할 것은 없습니다. 오늘 간단하게 촬영을 한다고 한 이유는 바로 현씨를 배려하기 위함이었으니 말입니다. 현씨가 가능하다고 하면 곧장 촬영에 돌입할 수 있습니다.”

“그게 정말인가요?”

감독의 말에 화색을 띠는 창현. 솔직히 그도 스케줄 표를 보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간단한 촬영이라고 하지만 오후부터 저녁 시간까지 촬영이 있고 저녁 후부터 자유시간이었다. 오늘은 푹 쉬게 해주겠다는 의도가 보인 것이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봤는데 감독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이다.

화색을 띠는 창현의 얼굴을 본 감독이 웃으면서 말했다.

“현씨의 요청이 있다면 바꿔줄 수 있습니다. 우리 스태프들도 그것을 바랄 테니까요. 하지만 오늘 촬영을 끝내는 것은 글쎄요. 현씨가 잘해줄 경우에야 가능할 듯 싶군요. 어떻습니까?”

선심을 쓰듯 말하는 감독. 하지만 그것에는 그의 검은 속내가 어느 정도 깔려 있었다.

애초에 촬영 일정이 2박 3일로 잡혀있는 것은 현을 위해서 그런 것이다. 오늘 푹 쉬게 한 뒤 내일부터 본격적인 촬영을 하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현이 이렇게 의욕을 보이고 정말 오늘 촬영을 끝내게 되면 내일 시간이 많이 남게 된다. 즉, 감독과 스태프들은 2박 3일 일정대로 움직여야 했기에 하루하고도 반나절의 시간이 여유시간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세계적인 관광지 푸켓에 오고 관광을 하고 싶지 않다면 그것은 거짓일 것이다. 현의 촬영을 일찍 끝내고 하루의 자유시간을 주겠다고 하면 스태프들은 표정을 찌푸리기는커녕 오히려 환호성을 지를 것이 분명했다.

그러면서 현에게도 고마움을 사니 이 얼마나 좋은 일이란 말인가.

세상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서로가 원하는 것을 함께 얻을 수 있을 때 Win-Win 한다고.

창현과 감독 모두 즐거운 미소를 지은 채 점심식사를 마칠 수 있었다.


점심식사가 끝나고 감독은 곧장 스태프들에게 창현이 했던 말을 전달하였다. 그리고 감독의 예상대로 스태프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좋아했다. 그들 또한 푸켓을 관광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던 것이다. 다만 현의 촬영이 있고, 마지막 날 반나절 가량 자유시간이 있기에 어느 정도 위안을 삼고 있던 차였다.

그리하여 점심식사를 먹고 어느 정도 소화가 될 무렵, 본격적인 촬영을 시작하였다.

제대로 하지 못하면 내일까지 계속해서 촬영을 하겠다는 말에 창현은 진지하게 촬영에 임했다.

이미 그의 연기력은 공식적으로 입증되지 않았지만 뮤직비디오를 찍으면서 상당한 연기력을 보여준 바였다.

창현은 감독의 요구 조건에 따라 열정적으로 촬영에 임했고, 촬영은 순조롭게 이어졌다.

‘장난이 아니군. 이게 갓 데뷔한 가수의 내공이라고?’

감독과 스태프들은 촬영에 임하는 창현의 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이제 막 데뷔를 했다고 해서 얼마나 걱정을 했던가. 하지만 그 걱정은 모두 헛된 것이었다.

현은 노래 뿐만 아니라 연기에서도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있던 것이다.

까다로운 감독의 요구조건을 한 번, 두 번만에 모두 소화해낸다. 특히 표정과 포즈, 그리고 자연 환경이 만들어주는 분위기는 그만의 독특한 분위기로 승화되었다. 상체가 약간 노출되는 포즈를 보면서 몇몇 여자 스태프들은 얼굴을 붉히기도 하였다. 근육질이 아니지만 탄탄해 보이는 상체는 무척 유혹적이었다.

촬영은 저녁을 먹고나서도 계속되었다.

감독은 현의 뛰어난 연기력을 보고 이번 화보는 대박이 날 거라는 예감을 하면서 조금 무리할 정도로 강행군을 거듭하였다. 그럴수록 현은 지치기는커녕 오히려 요령을 터득하여서, 갈수록 더욱 멋진 장면을 촬영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촬영이 끝날 무렵, 감독은 입맛을 다실 수밖에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내일까지 촬영을 하자고 했어야 했는데.’

오늘, 하루라는 짧은 시간에 놀라울 정도로 괄목상대한 현이었기에 내일까지 촬영을 한다면 어떤 장면이 나올지 상상만 해도 흥분이 되었다.

하지만 현은 약속한 것을 지켰고, 충분하다 못해 넘칠 정도로 많은 장면을 촬영한 상태였다. 두 말이 필요 없이 OK였다.

OK 싸인을 받는 순간 창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 다행이군.’

화보 촬영이란 것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요구하는 포즈를 취하고, 스스로가 괜찮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더하면 감독이 만족할 만한 장면이 나오던 것이다. 하면 할수록 감독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알 수 있었고, 그것을 체득하면서 창현은 주변 환경과 자신이 동화되어 간다는 걸 느꼈다. 그리고 그렇게 동화될수록 더욱 멋진 장면이 나온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성공적으로 화보 촬영을 끝내자 창현은 곧장 방으로 들어가 잠이 들었다. 첫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창현을 따라온 사람들은 푸켓에 남기로 하였다. 자신의 개인적 볼일로 인하여 돌아가는 것인데 굳이 그들까지 한국으로 돌아올 이유가 없던 것이다. 이 기회에 푸켓 관광이나 즐기라고 말해주면서 창현은 혼자서 첫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어떻게 보면 당일치기였지만 창현의 마음은 편안했다.

이것으로 졸업식에 참가할 수 있었기에.

몸은 고단했지만 마음은 편안한 상황이었다.


딸칵.

“후우!”

창현과 통화를 마친 주현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내심 예상은 하고 있었다. 활동을 마치고 미니 앨범을 준비하는 창현이 바쁘다는 것을.

한 가닥의 기대는 있었다. 어쩌면, 아주 어쩌면 내일 시간이 나서 창현이 참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신은 그런 기대를 들어주지 않았다. 그녀의 바람을 비웃기라도 하듯 창현은 스케줄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주현은 아주 혹시 하는 마음으로 말했다. 졸업식의 유무를.

만약 창현이 졸업식을 한다는 걸 알고 있다면 와줄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을 건 채.

아주 이기적인 생각이었다. 졸업식의 존재를 알아차리면 창현이 일말의 부담감을 느끼고 와줄 거란 생각을 하였으니 말이다.

자신을 위해, 창현에게 부담을 준다는 것이 내키지 않았지만 그것보다 창현을 보고 싶은 마음이 더욱 컸다. 학교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내일이 마지막이 아닌가.

그러나 그 계획마저도 무산되었다. 창현의 스케줄은 다름 아닌 외국에 있던 것이다. 비행기를 타고 외국을 가는 것이라면 제아무리 창현이라고 해도 어떻게 할 수 없을 것이다.

주현은 실망했다. 창현을 볼 수 없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일 부모님도 오시지 못한다고 하셨는데.”

정말 매정한 현실이었다. 다른 때라면 오셨을 부모님이었지만 내일은 부득이한 사정이 있다.

언니들이 와준다고 했지만 부모님이 오실 것 같아 거절한 상태였다. 지금 와달라고 하기엔 상황이 우습다.

그래서 내심 창현이 와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는데 못 온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주현은 기분이 무척 울적했다.

“이제 보기도 힘들 텐데.”

주현이 여태껏 창현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학교라는 매개체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제 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로 진학하게 되면 더 이상 창현을 만날 수 없게 된다.

사적으로 만나고 싶어도 창현은 이미 톱스타. 게다가 자신 또한 데뷔를 앞두고 있는 만큼 시간적 여유가 날 확률은 극히 미미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는 중학교에 대한 기대감과 부모님의 축하 속에 즐거운 마음으로 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하아!”

그저 우울할 뿐이었다.


아직 겨울의 여파 때문인지 아침이 되었음에도 해가 뜨지 않은 시각.

파카를 입고 모자와 안경을 쓴 채, 목도리로 완벽하게 얼굴을 가린 창현은 공항을 나서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후아! 완전 당일치기네, 당일치기.”

어제 이맘때 비행기를 타고 푸켓으로 갔다가 비슷한 시간에 돌아왔으니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간단한 짐만 가져왔기에 가방을 맨 창현은 곧장 택시 정류장으로 가서 택시를 탔다. 공항에서 곧장 집으로 가는 건 비싸지만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택시를 타고 집에 도착하니 시간을 확인하니 아홉시였다.

“아홉시네. 시간은 넉넉하구나.”

졸업식은 열한시부터 시작이었다. 3학년은 열시까지 등교하여 담임선생님에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듣는 형식이었고, 1학년과 2학년은 열한시까지 등교하여 졸업하는 선배들을 축하해준다.

창현 같은 경우 학교를 가더라도 열한시까지 등교하면 되었기에 두 시간이나 남은 셈이었다. 이사 온 이곳은 학교에서 약 십 분 정도 걸리는 곳이었기에 그리 멀지도 않다.

샤워를 한 창현은 머리를 말리면서 핸드폰을 열어 전화를 걸었다. 바로 담임선생님에게 거는 것이다.

원래 스케줄로 오늘 안 가기로 했으나 일찍 끝냈으니 갈 생각이었다.

“여보세요? 선생님, 저 창현이입니다. 네, 스케줄이 일찍 끝나서 학교에 갈 수 있을 것 같아서요. 네. 그리고 오늘 졸업식이라면서요? 그럼…….”

담임선생님에게 자신의 계획을 이야기하는 창현.

이미 학교 내에서 창현의 존재는 학교를 널리 알리는 존재이자 손꼽히는 모범생으로 여겨졌기에 담임선생님은 창현의 계획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통화를 끝낸 창현이 미소를 지었다.

“그럼 준비는 완료된 셈이군.”

모든 게 계획대로였다.

그가 계획한 것은 다름 아닌 졸업식에서 노래를 불러주는 것이었다.

깜짝 이벤트랄까? 그랬기에 창현은 이 소식을 주현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자신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알고 있는 상태에서 짠, 하고 나타난다. 그러면 놀라움도 더욱 클 것이다.

교복을 다 입은 창현은 간단하게 겉옷을 챙겨 입고는 집을 나섰다.


졸업식.

참으로 많은 감정이 교차하는 행사가 아닐 수 없다.

재학생들에게는 그저 선배들이 떠나가는 행사일 뿐이지만 졸업을 하는 학생의 입장에서는 학교가 바뀐다는 설렘과 불안한 마음이 교차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하아!”

학교에 나온 주현은 멍한 시선으로 교탁에 서서 이야기를 하는 담임선생님을 바라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고등학교 가서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는, 그래야 너희들의 미래를 개척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리면서 주현은 머리가 복잡했다. 마치 저 이야기가 남 이야기처럼 느껴지면서 한편으로는 자신이 가수로서 실패하게 되면 저 대열에 속하게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기분이 우울하면 뭐든지 안 좋은 방향으로 해석하고는 한다. 주현은 부모님이 졸업식에 오지 못한다는 이야기에, 그리고 언니들도 졸업식에 오지 않는다는 걸 알았기에 마치 세상에 홀로 고립된 느낌을 받고 있었다.

이럴 때 창현이 와주었다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외국으로 촬영을 간 창현이 학교에 올 리가 없었다.

이제 졸업을 하면 두 번 다시는 이곳에서 보지 못하게 될 텐데. 주현은 그 점이 너무나도 아쉬웠다.

그렇다고 외국에 있는 창현에게 와달라고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자신의 이기적인 행동은 어제만으로도 충분하다.

힐끗 복도를 보니 학부모와 형제 자매로 보이는 애들이 교실 안을 주시하고 있다.

그 모습을 보니 주현의 가슴은 다시 한 번 씁쓸함이 채워나간다.

‘후!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외로움을 탔지?’

문득 자신의 감정을 되돌아보는 주현.

외동딸이기에 어릴 적부터 외로움을 많이 느끼면서 자라왔다. 하지만 그 외로움을 이겨내는 방법 또한 일찍 터득할 수 있었다. 그 후 연습생으로 들어와 언니들을 만나면서 외로움을 느껴본 적이 없다.

잊었다고 생각하던 그 외로움, 그 감정을 지금 느끼고 있던 것이다.

간략하게 학생들에게 말을 한 선생님이 모두 강당으로 가라고 한다. 강당에서 교장선생님이 훈화 말씀을 하고, 후배의 졸업 축가와 선배들의 답가를 불러준 뒤 다시 교실로 모여 담임선생님의 간단한 말과 함께 졸업식이 끝난다.

학생들이 복도로 우르르 나오면서 저마다 부모님과 얼굴을 마주한 채 이야기를 나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주현의 입가에 다시 한 번 씁쓸함이 자리한다. 혼자는 외로운 법이다.

그렇게 강당으로 간 뒤 반별로 줄을 맞춰서 선다. 그리고 잠시 후 학생주임 선생님이 왁자지껄한 학생들을 조용히 시키면서 분위기를 잡아나간다. 워낙 큰 강당이었기에 1학년, 2학년, 3학년 학생들이 모두 들어오고 학부모들이 들어와도 수용이 가능했다.

소란스러운 분위기가 어느 정도 진정이 되자 학생주임 선생님이 간단한 당부와 함께 교장선생님을 소개한다.

마지못해 치는 박수소리와 함께 교장선생님이 등장하고, 제법 긴 연설이 시작된다. 너희들의 미래는 고등학교에 가서 어떻게 공부를 하는가에 따라 결정된다는 둥, 공부가 전부는 아니지만 그래도 공부를 제일 열심히 해야 한다는 둥, 하나부터 열까지 공부에 공부를 강조하는 말이었다.

그 진행방식이 익숙한 탓인지 학생들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 열심히 듣는 척 연기를 한다. 특히 유종의 미를 거두려는 3학년은 마치 사이비 교주에게 가르침을 받는 교도들처럼 열성적으로 듣는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실제로는 저 표정 다 뻥이다.

그렇게 십여 분간 교장선생님의 말씀이 끝났고, 거대한 스크린으로 졸업생들의 앨범 사진을 1반부터 차례차례 보여준다.

졸업사진이 테러된 것처럼 나온 학생들은 비명을 지르면서 거부하려고 했지만 마지막 졸업생의 모습을 하나하나 각인시켜준다는 명목 하에 거대한 스크린에 졸업생들의 모습 하나하나가 스쳐지나갔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졸업식 일정을 맞추기 위한 수작인 듯했다. 적어도 열두시가 넘어서 끝나야 가족들끼리 점심을 먹으러 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렇게 졸업사진 슬라이드 쇼가 끝나고, 마침내 졸업식 축가를 부르는 순간이 되었다.

1학년과 2학년 중에서 임원들이 강당 무대 위로 올라와서 흘러나오는 음에 맞춰 노래를 시작한다. 어차피 일반 학생들이 불러봤자 제대로 안 부를 것임을 알았기에 임원들만 뽑아서 시킨 듯했다.

제법 연습한 티가 나는 축가가 끝나고, 졸업생들의 답가가 시작되었다. 졸업생들의 답가는 3학년 전원이 부르는 형식이었다.

음악과 함께 졸업생들이 노래를 시작하였고, 노래 분위기와 가사가 마음에 와 닿는지 마음이 뭉클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특히 주현은 학교를 떠난다는 것이 많이 아쉬웠기에 답가의 분위기와 가사에 더욱 감정이 거세게 요동치는 걸 느꼈다.

마침내 답가가 끝나고 1학년과 2학년이 3학년들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면서 수고했다고 말해준다. 3학년들도 마주 인사를 하며 답해준다.

그것으로 졸업식은 끝이었다. 선생님들이 이야기해준 모든 절차가 끝난 것이다.

1학년과 2학년들은 화색이 돌았고, 3학년들 또한 이제 졸업을 한다는 것이 홀가분한지 한결 편안한 기색을 띠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마이크를 잡고 있던 학생주임 선생님이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를 한다.

“아쉽지만 졸업식은 아직 끝난 게 아니다.”

그러자 사방에서 야유가 터져 나왔다.

우우우우!

끝내주세요, 선생님!

평소 같으면 엄한 학생주임 선생님에게 아무 말도 못했을 학생들이지만 이제 끝났다는 기대감이 깨지는 데서 오는 허탈함과 졸업생들의 막장 스펙이 반항이란 걸 가능하게 만들어줬다.

그런 반응을 예상한 탓일까?

학생주임 선생님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말한다.

“잠시, 야유를 멈추고. 내 이야기를 들어라. 조용히!”

묵직하게 일갈을 터뜨리자 야유를 하던 학생들이 쥐 죽은 듯이 침묵한다. 학생주임 선생님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학생들에게 무서움과 공포의 대상이 되어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엄한 표정으로 학생들을 바라보던 학생주임 선생님이 말했다.

“오늘 3학년의 졸업식 축하를 위해 특별한 게스트가 왔다.”

게스트?

순간 학생들의 눈에 의문이 스쳐지나갔다.

그런 학생들의 반응을 즐기듯 보던 학생주임 선생님이 무대 위에 있는 문 쪽을 보면서 말했다.

“보면 알겠지. 자, 나와라.”

그 말과 함께 문이 열리면서 한 사람이 나온다. 학생들과 전혀 다를 바 없는 교복 차림새를 한 소년이었다.

……!

학생들은 그 소년을 본 순간 침묵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들의 입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온다.

와아아아아아아!

모습을 드러낸 소년은 다름 아닌 창현이었다./

사실 오늘 대다수의 학생들, 특히 3학년 학생들은 졸업식에 많은 기대를 하고 있었다.

바로 자신들의 졸업식에 가수 현이 출연을 하여 어떤 식으로든 졸업식을 축하해주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감이 존재하고 있던 것이다.

하지만 상당한 정보망을 구축하고 있는 학생들은 창현이 스케줄 때문에 졸업식 날 학교에 못 온다는 걸 전해 들었고, 그로 인해 적지 않은 실망을 하고 있던 차였다. 특히 졸업을 하는 여학생들이 그러했다.

방송사마다 하는 음악프로에 출연한 현의 인기는 당연 최고였다. 압도적인 비주얼과 가창력을 앞세운 현은 십대들에게 있어 최고의 아이돌로 급부상하였고, 십대 이십대 할 것 없이 수많은 여성들이 현의 외모에, 가창력에 빠져들어 환호성을 질렀다.

그것은 같은 학교 소속인 여학생들도 당연했고 말이다.

그랬기에 현이 가창력을 발휘하여 졸업식에 무언가 한곡이라도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현은 스케줄로 인해 졸업식에 못온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그로 인해 적잖이 실망하고 있었는데 현이 등장한 것이다.

창현은 환호성을 지르는 학생들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보이고는 학생주임 선생님에게 마이크를 건네 받고 말했다.

“안녕하세요, 현입니다. 우선 추운 날씨에도 선배님들의 졸업을 축하해주러 오신 1학년, 2학년 재학생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네 드립니다.”

와아아아아!

완전 멋지다!

현이 짱!

진행이 익숙한 MC처럼 말하는 창현의 모습에 환호하는 1학년과 2학년 학생들. 게다가 졸업식에 참가한 학부모들과 재학생들의 형제 자매들도 창현을 알아보고는 반가운 표정과 함성을 지르고 있었다. 이미 상당수의 학생들은 핸드폰을 들고 동영상 촬영을 하고 있었다.

그걸 보았지만 창현은 개의치 않은 채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선배님들의 졸업식을 축하해주러 몸소 오신 학부모님들도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선배님들의 졸업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원래 오늘 스케줄이 있었지만 졸업식으로 인해 일정을 타이트하게 소화해서 간신히 올 수 있었습니다. 저 잘했지요?”

노골적으로 자신의 행동을 칭찬해달라는 창현의 모습에 전교생들이 잘했다고 환호한다. 특히 여학생들은 아주 자지러지게 비명을 질러댔다.

그 모습에 다시 한 번 미소를 지어보인 창현이 말했다.

“졸업식 일정이 있지만 제가 양해를 구해서 이렇게 적은 시간이나마 선배님들의 졸업을 축하하려고 합니다. 선배님들의 졸업을 축하드리며 준비한 노래를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015B의 <이젠 안녕>.”

창현의 말과 함께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마이크를 잡은 창현이 노래를 시작한다. 은은하고 감미로운 창현의 목소리가 강당을 감싸기 시작한다.

이보다 더욱 큰 무대를 눈빛 하나만으로 사로잡은 창현이었다. 그런 그가 강당 하나를 장악하는 것은 이미 어려운 일이 아니게 되었다.

노래를 부르던 창현은 3학년 1반이 위치한 대열을 훑는다. 그러다가 자신을 바라보는 주현과 시선이 마주친다. 주현은 창현과 시선이 마주치자 흠칫했지만 창현이 미소를 지어보이자 그녀의 입가에도 절로 미소가 맺혔다.

창현의 노래를 들으면서 3학년 학생들은 지난 3년 동안의 학교생활을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몇몇 감수성이 예민한 학생들은 눈가에 살짝 눈물이 맺히기도 하였다.

길지 않은 창현의 노래가 끝이 나자 학생들은 한동안 여운에 잠겨있다. 그리고 그 여운에서 깨어난 학생들이 일제히 박수를 쳤다.

짝짝짝.

“감사합니다. 한곡으로는 조금 아쉬운 감이 있어서 마지막으로 한곡 더 부르겠습니다. 진추하의 <Graduation Tears>.”

한곡 더 불러주겠다는 말에 학생들은 열광하였고, 창현은 미소를 지은 채 한곡을 더 부르기 시작한다. 가사가 전부 영어로 되어있지만 음색과 창현의 감정 이입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학생들의 가슴에 마치 메마른 땅에 비가 오는 것처럼 스며들어간다.

노래가 끝나자 살짝 고개를 숙인 창현이 무대 밖으로 나간다. 아무래도 연예인이다 보니 학생들의 대열에 낄 수 없었다.

창현이 사라지자 학생주임 선생님은 학생들을 본격적으로 해산시켰다. 1학년과 2학년은 곧장 집으로 돌아갔고, 3학년은 교실로 올라갔다.


‘어, 어떻게. 창현이가?’

외국으로 나가 있어야 할 창현이 학교에 나타나자 얼떨떨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창현이 거짓말을 했을 리는 없다. 외국 촬영이라면 도저히 일정을 조율할 수 없을 텐데 졸업식에 참가하다니? 주현은 머리가 무척 혼란스러웠다.

‘설마 나 때문에?’

그렇게 생각했지만 주현은 고개를 젓는다. 아무리 창현이 자신과 친하다고 하나 스케줄을 펑크내고 올 정도는 아니었다.

그 사이 무대 위에 모습을 드러낸 창현은 간단한 진행과 함께 노래를 시작한다.

주현은 그런 창현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돌연 창현의 시선이 자신과 마주치는 것이 아닌가?

갑작스러운 일이었기에 주현은 흠칫했지만 창현의 입가에 미소가 맺히는 걸 보았다. 그걸 보자 복잡하고 우울했던 마음이 싹 사라지는 듯했다. 그러자 그녀의 입가에도 절로 미소가 맺혔다.

창현의 노래 실력은 당연히 발군이었다. 졸업을 축하해주는 그의 노래가 주는 여운에 빠져든 3학년들은 극도로 감정몰입을 하고 있었다. 노래 하나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가창력은 천의무봉의 경지에 올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두 곡을 모두 부른 창현은 고개를 숙여보인 뒤 나간다. 자신이 속한 2학년 대열에 들어서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나가는 것이다.

‘아…….’

주현은 그 모습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인간이란 동물은 정말 간사하지 않은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와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마음이 순식간에 바뀌니 말이다.

그래도 아쉬운 건 아쉬운 것이다. 이렇게 졸업식에 참석하게 되었으니 이야기라도 하고 싶었는데. 하지만 처음같이 우울하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다만 아쉬울 뿐이었다.

지이이잉.

그때 주현의 핸드폰에 진동이 일어났다.

주현은 고개를 갸웃하며 핸드폰을 열고 확인을 한다.

내용을 확인한 주현의 표정이 활짝 펴진다.

[졸업식 오려고 너무 무리를 했어요. ㅠ.ㅠ 많이 힘드네요. 어쨌든 누나 졸업 축하드려요. 축하의 의미로 밥이라도 사드리고 싶지만 졸업식이니까 힘들겠네요.]

창현이에게 온 문자였던 것이다.

그녀는 문자 내용을 확인하는 순간 머리가 차가워지면서 기민하게 돌아가기 시작하였다. 지금 창현이 보낸 문자의 내용은 자신에게 밥을 사주고 싶지만 졸업식에 참가한 부모님 때문에 못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지 않던가?

주현은 재빨리 답장을 보냈다.

[나 오늘 부모님 안 오셨어…….]

그리고 해산하여 교실로 올라갈 무렵이었다.

다시 핸드폰이 지이이잉 하면서 문자가 왔다.

주현은 서둘러 문자를 확인하였다.

[그래요? 졸업식에 아무도 안 오면 엄청 외로운데. 저도 초등학교 때 그걸 느껴서 알거든요. 그럼 제가 누나 졸업 축하해드릴 겸 점심 사드릴게요. 어때요?]

그 내용을 본 주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러나 한편으로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창현은 유명인이지 않은가? 위험할 수도 있다.

[나야 좋지만… 창현이 널 알아보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보내면서 그녀의 마음은 무척 쓰라렸다. 만약 자신의 말에 창현이 납득을 해버린다면? 하지만 자신이 창현의 걸림돌이 될 수는 없었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답장을 기다린다. 선생님의 마지막 말이 귀로 들어오는지 코로 들어오는지 파악이 안 될 정도로 핸드폰에 몰입하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다시 핸드폰이 지이이잉 하면서 문자가 온다.

마치 섬광과도 같은 손놀림으로 그녀가 문자를 확인한다. 그리고 초조하고 불안해하던 표정이 말끔하게 사라진다.

[누나 말에 순간 움찔해서 문방구에서 목도리 샀어요. 모자 쓰고 안경 쓴 뒤 목도리로 무장했으니 알아볼 사람이 없을 거예요. 교문에서 기다릴 테니 끝나면 나오세요.]

‘나오고 말고.’

얼굴 가득 미소를 지은 주현이 답장을 작성하였다. 그리고 선생님의 말을 끝으로 졸업식이 끝나자 간단하게 선생님에게 인사를 드린 뒤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과는 다르게 엄청난 속도로 교문을 향한다.

교문에는 남들보다 추위를 엄청 타는 듯 목도리를 칭칭 감은 사람이 보였다. 두말할 것 없는 창현이었다.

창현도 주현을 발견했는지 반가운 목소리로 말한다.

“누나, 졸업 축하드려요. 자 이거 받으세요.”

그러면서 창현이 뒤에 숨기고 있던 꽃다발을 주현에게 건넨다.

그녀는 갑작스러운 꽃다발에 당황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것을 받아든다.

“자, 그럼 가볼까요.”

“응!”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하는 창현.

그와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이 마냥 기쁜 주현은 활기찬 목소리로 대답한다.

마냥 우울했던 졸업식이었지만 마지막에 와서 그 우울함을 말끔하게 털어버릴 수 있었다.

감동의 졸업식은 그렇게 끝이 났다.




제23장 지옥의 Valentine's day




졸업식이 끝났지만 특별한 날이 또 다시 다가오고 있었다.

바로 발렌타인 데이가 그것이었다.

처음 유래는 다르건만 광고사들의 절묘한 광고 전략으로 인하여 여자가 좋아하는 남자에게 초콜릿이 주는 날이 되어 버린, 여성에게 있어서 무척 중요한 날 중 하나였다.

그것은 소녀들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그랬기에 소녀시대 숙소에서는 때 아닌 회의가 벌어졌다.

회의를 소집한 것은 다름 아닌 수연이었다.

주최를 한 것이 그녀였기에 가장 먼저 발언을 한 것도 그녀였다.

“이번 발렌타인 데이 때 난 고마움을 담아서 창현이한테 초콜릿을 줄 생각이야. 너희들은 어떻게 할 생각이야?”

소녀들의 분위기는 줘야 한다는 쪽으로 흘렀다. 작년에 워낙 많이 신세를 지기도 하였고, 가장 최근에 만난 수영 같은 경우 창현이 꼼꼼하게 생일까지 챙겨주기도 했다.

제일 먼저 찬성하고 나선 것은 바로 유리였다.

여러 가지 생각이 많을 윤아, 태연과 달리 유리는 창현에게 보컬 트레이닝으로 인해 많은 신세를 졌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난 찬성이야. 창현이한테 보컬 트레이닝도 받고 그랬는데 이 정도 성의는 표시해야지.”

유리의 적극적인 찬성에 자극을 받았는지 미영도 손을 들면서 나섰다.

“나도 찬성! 유리처럼 보컬 트레이닝을 받지는 않았지만 창현이는 내 음식을 처음으로 다 먹어줬거든. 당연히 고마움을 표해야지.”

“…….”

미영의 말에 한순간 싸늘한 침묵이 자리하였다.

소녀들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창현에 대한 안쓰러움과 걱정이었다.

수영은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면서 미영에게 물었다.

“미영아, 창현이가 네 음식을 먹고 괜찮디?”

“그게 무슨 말이야! 창현이는 내가 만든 샌드위치를 맛있게 먹어줬다고. 그것도 열아홉 조각이나!”

미영의 말에 주현을 제외한 모든 멤버들의 얼굴에 놀라움이 서린다.

특히 수영의 경우 더욱 그러했다. 살이 잘 찌지 않는 체질이기에 그녀는 소녀시대 멤버 중에서 간식을 자주 먹는 편인데, 종종 미영이 한 음식 지뢰를 밟아 몇 번이나 사경을 헤맨 적이 있다. 그런데 창현이 미영의 음식을 모두 먹고 맛있다고 말을 해줬다는 말에 식겁할 수밖에 없었다.

수영은 말을 더듬으면서 물었다.

“허억! 저, 정말? 창현이는 살아있고?”

미영이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무슨 말이야! 맛있다고 해줬다니까. 그때 주현이도 봤어. 창현이가 내 음식을 먹고 미소를 짓던 걸. 그치, 주현아?”

그러면서 주현을 바라보자 주현은 어색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때 창현이가 미영의 음식을 먹고 얼마나 자신에게 원망을 토로했던가.

그렇다고 그것을 미영에게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색한 미소를 지은 채 주현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미영이 의기양양한 얼굴로 수영을 바라보았다.

“봤지? 창현이는 내 음식을 맛있게 먹어줬다고.”

그 미소를 좋게 본 미영과 달리 수영은 주현의 미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순간 저도 모르게 나무아미타불을 외친 수영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쳐. 그래서 뭐 어쩌라고?”

수영이 인정해주자 미영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뭘 어쩌긴 어째. 내 음식 맛을 알아준 창현이에게 일반 시중에서 파는 초콜릿을 선물할 수는 없잖아? 내가 실력을 열심히 발휘해서 나만의 초콜릿으로 재탄생 시켜서 선물할 거야!”

“네, 네가 직접 만들겠다고?”

수영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다른 소녀들의 안색도 흐려졌다. 다른 의미로 마이더스의 손을 지닌 미영의 손맛은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신화경의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하지만 그런 소녀들의 반응을 눈치 채지 못한 미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내가 만들어서 줄 거야. 그럼 창현이가 당연히 내 초콜릿이 제일 맛있다고 해주겠지? 시중에서 파는 것을 사다준 너희들과 달리 내 정성이 듬뿍 들어간 거니까.”

그런 미영의 말에 정면으로 반박하는 사람이 있었다.

“누, 누가 시중에서 파는 걸 선물한다고 했어요!”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윤아였다.

윤아는 소녀들의 시선이 집중되자 얼굴이 살짝 붉어졌지만 미영에게 말했다.

“저도 만들어서 선물할 거예요. 아마 미영 언니보다 훨씬 맛있다고 해줄 걸요?”

평소 요리 이야기가 나오면 한없이 작아지는 것이 미영이었다. 요리를 하는 것은 좋아했지만 좋아하는 것과 달리 연습을 하지도 않고 적성에도 맞지 않았기에 요리를 할 때면 멤버들의 구박을 사기 일쑤였던 것이다. 그랬기에 기를 펴지 못했지만 창현이 연관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자신의 음식 맛을 알아준 사람이 있다면 무서울 것이 없었다.

백 명의 적이 눈앞에 있더라도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의 존재 여부에 따라 사정은 판이하게 달라진다.

미영은 윤아의 외침에 밀리지 않고 반박했다.

“흥! 보통 때라면 내가 물러나겠지만 지금은 이야기가 다르단 말씀! 난 창현이에게 샌드위치를 만들어 줘봤기에 창현이 입맛을 알고 있다고. 내가 압도적으로 유리해.”

가볍게 콧방귀를 뀌면서 윤아에게 냉소를 날려준 미영이 다른 소녀들을 보며 가소롭다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너희들 중에서도 초콜릿 직접 만들 사람 있어? 어차피 만들어봤자 창현이는 내 초콜릿을 가장 맛있다고 해줄 거야.”

소녀시대 내에서 가장 음식을 못하는 서열에 속하는 것이 바로 미영이었다.

그런 그녀가 오만한 모습으로 자신들을 깔아뭉개자 소녀들 모두가 발끈했다.

“좋아! 해보자, 황미영! 난 직접 만들겠어.”

“나도 직접 만든다! 미영이보다 못 만들면 혀를 깨물겠어.”

“정녕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뽑는구나, 네가.”

하나같이 들고 일어서는 소녀들. 생각에 골몰하던 태연마저도 그런 미영의 말에 발끈하며 일어설 정도였다.

그로 인해 시중에서 팔던 초콜릿으로 의리 표현을 하려던 소녀들은 난데없이 직접 초콜릿을 만들게 되었다.

미영은 유일하게 직접 만들겠다는 말을 하지 않은 주현을 보며 물었다.

“주현이 넌 어떻게 할 거야? 직접 만들 거야?”

자신을 지목하자 생각에 잠겨있던 주현이 놀라면서 대답했다.

“네? 아, 전 조금 생각해보고요.”

“그래? 결정 되면 말해줘.”

그러면서 미영이 소녀들을 보면서 말했다.

“그럼 내기하자, 우리. 창현이한테 초콜릿을 전해주고 가장 개성만점의 초콜릿을 만든 사람을 말해달라고 하는 거야. 맛은 물론 겉모양도 예쁘게 해야 되는 거지.”

예쁜 외모와 달리 소녀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 바로 게임, 내기, 도박이었다.

당연히 미영의 제안을 거절할 리 없다.

“콜! 난 참가!”

“1등은 설거지 3회 면제 어때?”

그 말을 듣는 순간 생각에 잠겨있던 주현의 눈이 빛났다.

“좋아! 해보자고!”

미영의 존재로 인하여 삽시간에 전투 분위기로 바뀐 숙소.

처음에는 조용하던 태연과 윤아마저도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주현이 조용히 속으로 생각해본다.

‘언니들 미안해요. 전 어머니의 레시피가 있어요.’

창현에게 몰래 주려고 했지만 주현의 마음이 변했다.

언제나 막내라는 이유로 제일 많이 설거지를 했어야 하던 주현. 그런 그녀에게 있어 설거지 3회 면제권은 결코 만만하게 볼 수 있는 권한이 아니었다. 언니들이 포만감에 배를 두드리며 편안하게 TV를 시청하던 것을 자신도 할 수 있게 된다는 이야기다.

얼마나 대단한 권한인가! 설거지 면제권!

그렇게 소녀들이 투닥거리는 가운데 주현의 참전은 조용히 이루어졌다.


사람에게 있어 경쟁 심리란 것은 무척 중요하다. 자신 스스로의 의지로 무언가를 이룩하는 것은 무척 어렵다. 하지만 그 어려움을 쉽게 극복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경쟁 심리라고 할 수 있다. 사람에게는 남에게 질 수 없다는 승부욕을 가지고 있기에 무언가 경쟁이 붙게 되면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상대방에게 절대 질 수 없다는 의지로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일을 이뤄내곤 한다.

지금 소녀들이 그러했다.

그녀들의 눈에는 절대 질 수 없다는 전의가 가득하였다.

소녀들의 전의를 불태우게 만든 것은 바로 미영이었다.

하지만 미영은 그런 것에 전혀 신경 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미영은 아주 태연했다. 마치 승자는 자신이라는 듯, 여유로운 모습을 감추려 들지 않았다.

그것이 더욱 소녀들의 심기를 거슬리게 만들었다.

요리 실력에서 최하위 실력을 지닌 미영이 아닌가? 평소 요리 이야기만 나오면 침묵하기에 바빴던 그녀가 이렇듯 오만한 모습을 보이다니. 소녀들의 속이 뒤집어질 만했다.

생각해봐라. 학교에서 성적이 전교 꼴등인 놈이 있다. 그런데 그놈이 유일하게 수학을 잘한다. 그런데 수학을 잘한다고 친구들에게 잘난 척을 한다고 해보자.

이미 성적에서 전교 꼴등이면 자신보다 아래라는 인식이 자리하게 된다. 그런데 고작 잘하는 거 하나 가지고 오만하게 굴면 기분이 어떻겠는가?

터놓고 말해서 한 대 때려주고 싶다.

지금 소녀들의 심정이 그러했다.

그렇다고 때릴 수는 없는 노릇. 저 오만한 콧대를 실력으로 눌러주고 싶은 것이 소녀들의 심정이었다.

주현도 뒤늦게 참전을 선언하고, 소녀들은 몇 가지 불가침 조약을 맺었다.

우선 첫 번째가 재료는 공동으로 구입하는 것이었다. 순수한 실력으로 평가를 받기로 한 만큼 재료는 다 함께 구입하고 다 함께 사용하기로 하였다. 그래야 공평하지 않은가? 재료를 구한 뒤 어떤 기교를 부려 초콜릿을 만들 건 그것은 자신의 실력에 달린 일이었다.

두 번째는 주방 사용이었다. 아홉 명인 만큼 세 조로 나누고 세 명씩 함께 만들게 함으로써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게 하였다. 그래야 혹시 모를 술수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어서이다. 특히 소녀들 중 음흉한 것들이 몇 명 있어서 이런식으로의 견제는 반드시 필요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창현의 판단에 전적으로 맡긴다는 것이다. 이걸 하지 않으면 온갖 로비가 성행할지도 모른다. 누가 협상을 걸어서 결과를 조작할지 모르기에 소녀들은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면서 견제하기에 바빴다.

그렇게 공동의 약조를 세운 그녀들은 다 함께 초콜릿을 사러 마트로 향했다. 첫 번째 약조인 초콜릿 공동 구매를 시작한 것이다. 소녀들은 초콜릿을 구입하면서 각각의 취향에 맞는 조미료들을 구입하였다.

이미 전쟁은 시작된 것이다.

재료들을 구입하는 소녀들의 모습은 마치 축구 경기를 앞둔 감독들의 전략전술을 짜는 모습과도 같았다.

설거지 면제권 하나로 사람이 얼마나 변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었다.


소녀들에게 있어 신성한(?) 날이라는 명목 하에 소녀들 아홉 명이 집단으로 청원을 넣어 13일과 14일 휴가를 얻는데 성공한다. 그동안 착실하게 연습을 해왔기에 회사에서 주는 특별 휴가였다.

휴가를 얻게 되자 곧장 그녀들은 초콜릿을 만들기에 나섰다.

세 명씩 세 조로 나뉜 그녀들에게 각각 주어진 시간은 세 시간이었다. 세 시간 동안 초콜릿을 만드는 작업에 착수하는 것이다.

그 와중에도 소녀들은 술수를 발휘하였는데, 바로 멤버들 중에서도 떠오르는 강자들에게 강력한 견제력을 가진 멤버들을 끼워넣은 것이다.

소녀시대 내에서 요리 상위 스펙을 가진 것은 당연 태연이었다. 그런 태연에게는 탁월한 견제력을 가진 효연과 순규가 배치되었다. 그리고 망할 것이 분명한 미영, 수연, 유리를 아예 한조로 묶어버렸고, 의외의 복병이 될 수 있는 윤아와 주현의 조에 수영이 투입되었다.

자신들의 요리 실력을, 그리고 멤버들의 요리 실력을 대략적으로나마 알고 있었기에 나올 수 있는 조 편성이 아닐 수 없다.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속으로 자신의 요리 실력을 자신하던 태연은 효연과 순규가 한조가 되자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효연과 순규는 아군일 때 든든하지만 적일 때는 한없이 까다로워지는 타입이었던 것이다.

수연과 유리는 실력이기도 뭐한 수준이었고, 그 둘에게도 미치지 못하는 미영은 그나마 어디서 나오는지 모르는 근원 모를 자신감으로 동일 선상에 놓였다. 솔직히 이 세 명은 가만히 놔둬도 알아서 자멸할 것이란 게 나머지 여섯 소녀의 생각이었다.

윤아와 주현은 음식을 잘하는 편이 아니지만 한 가지씩 잘 만드는 것이 있었다. 그랬기에 초콜릿 제조 과정에서 놀라운 성과를 보일지도 몰랐기에 견제력이 탁월한 수영이 투입되었다. 견제력은 탁월하지만 솔직히 수영의 음식 실력은 수연과 유리와 비교해도 전혀 나을 것이 없었기에 걱정할 것이 못 되었다.

이렇듯 완벽한 균형을 이룬 소녀들의 초콜릿 제조가 시작되었고, 인터넷을 이리저리 검색을 해보면서 초콜릿 제조 삼매경에 빠져든다.

첫 번째 조는 효연과 순규의 견제가 먹혔는지 태연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진 채 초콜릿 제조를 마쳤고, 두 번째 조는 예상보다 어려운 초콜릿 제조에 당황한 수연과 유리, 그리고 근원 모를 자신감을 가진 채 방긋방긋 웃고 있는 미영의 모습이 단연 돋보였다. 마지막 조는 수영이 견제를 하느라 자신의 것에 크게 신경을 쓰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하지만 소녀들의 요리실력을 감안하면 원형에 가까운 그녀의 초콜릿이 의외의 복병이 될 수도 있는 노릇이다.

초콜릿을 녹인 미영은 단맛을 조절한다. 그리고 살짝 맛을 보는데 고개가 갸웃한다.

‘조금 싱거운데? 그리고 맛이 너무 평범해. 그렇다면…….’

슬쩍 주변을 둘러보며 눈을 빛내는 미영. 수연과 유리는 자신의 것을 만드느라 신경조차 쓰지 못하고 있었다.

그 틈을 노린 미영이 조미료가 있는 곳으로 은밀하게 손을 뻗는다. 그리고 목표한 것을 독수리가 먹이를 낚아채는 것처럼 은밀하고 빠르게 낚아채고는 곧장 초콜릿에 ‘그것’을 첨가한다.

어느 정도 초콜릿에 ‘그것’을 넣은 미영이 살짝 저어보고는 맛을 본다. 독특하면서 강렬한 초콜릿의 맛이 혀끝에 전해져온다.

미영의 입가에 미소가 맺힌다.

‘승리는 내 거야!’

하지만 미영은 알지 못했다. 그녀가 넣은 ‘그것’을 고작 서너 번 휘휘 저었기에 덩어리가 초콜릿 밑에 가라앉아 있다는 것을 말이다.


초콜릿 제조를 마친 소녀들은 각자의 방식대로 포장을 하였다. 그리고 초토화 된 주방을 치우는데 무려 두 시간을 할애해야만 했다.

각각의 얼굴에는 불만족스러운 표정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초콜릿을 만드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가 않아서 자신이 원하던 작품이 나오지 않아서 그러했다.

어찌하였든 초콜릿이 완성된 것은 분명했다.

수연이 대표로 창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초콜릿을 만들었으니 전해주고 대망의 1위를 뽑는 것이 수순이었다.

혼자서 전화를 하면 수연이 무슨 협상안(?)을 내놓을지 모르기에 통화는 스피커 모드를 한 채 아홉 명이 동시에 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

길게 흘러나오는 컬러링.

“스케줄 있는 거 아니에요?”

창현이 받지 않자 주현이 조심스럽게 말한다. 그에 소녀들이 아! 하는 표정을 짓는다.

그러고 보니 창현은 요즘 무척 바쁘게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지 않은가?

결국 창현은 전화를 받지 않았고, 소녀들은 아쉬워하면서 흩어졌다. 수연은 문자로 창현에게 스케줄이 끝나면 연락을 해달라고 했다.

약 삼십 분 정도가 흘렀을 무렵, 수연의 핸드폰에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TV를 보던 수연은 핸드폰을 확인했다. 창현의 전화였다.

“얘들아, 창현이한테 전화왔어.”

그걸 확인한 수연이 외치자 소녀들이 모여들었다.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해놓은 수연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창현이?”

-네, 수연 누나. 저에요. 갑자기 무슨 일로 전화하라고 하신 거예요?

목소리가 상당히 잠겨 있었다.

수연은 그 목소리를 듣고는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스케줄 있는데 방해된 거 아니야?”

상당히 피곤해 보이는 목소리였기에 그럴 만했다.

하지만 창현의 목이 잠겨있는 건 그런 것이 아니었다. 다른 이유가 있었다.

-아, 그게 아니라 앨범 곡을 좀 들어보다가 잠을 잤거든요. 지금 일어나서 확인하고 전화 드린 거예요.

방해한 게 아니었다. 그에 소녀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수연이 용건을 말하려고 막 입을 열 때 미영이 먼저 말한다.

“창현아! 우리가 널 위해 초콜릿을 만들었어! 내일 잠깐 이 근처로 와줄 수 있어?”

그러자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창현의 목소리.

-정말요? 저야 기쁘죠! 저 그런 초콜릿 아직 받아본 적 없는데 완전 감동스럽네요. 아…….

말을 하던 창현이 잠시 말끝을 흐린다.

창현은 깨달은 것이다. 방금 전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군지. 그리고 그녀가 무슨 말을 했는지.

그걸 확인하기 위해 창현이 조용히 입을 연다.

-자, 잠깐만요. 혹시 지금 말한 거 미영 누나……?

“응. 나야.”

미영은 창현의 물음에 발랄하게 대답한다.

그에 창현이 잠시 침묵하다가 힘겹게 묻는다.

-…지금 누나가 직접 만들었다고…….

“풋!”

그 물음이 무엇을 뜻하는지 미영을 제외한 다른 소녀들은 곧장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리고 웃음을 참기 위해 소녀들은 손으로 입을 막아야 했다. 특히 하나에 빵! 터지는 기질이 있는 수연은 창현의 반응에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부들부들 떨었다.

그런 소녀들의 반응을 아는지 모르는지 미영은 창현과의 대화에 한껏 몰입되어 있었다.

“나도 만들었고 다른 애들도 만들었어. 그동안 창현이한테 감사한 마음을 담아서 열심히 만들었는데 내일 전해주려고 하거든. 내일 혹시 시간 어떻게 안 될까?”

-시간이요? 잠시만요.

그러면서 잠시 침묵이 흘렀고, 창현이 시간을 모두 확인한 듯 말했다.

-네, 여덟 시부터 아홉 시까지 시간이 비네요.

“그럼 여덟시 반쯤에 만나자. 어때?”

미영이 다른 소녀들을 둘러보며 물었고, 크게 이견이 없었기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때가 괜찮을 것 같네요. 그럼 내일 뵈요. 그리고 누나들에게 고맙다고 전해주시고요. 미영 누나도… 직접 만들어주셔서 고마워요.

“뭘! 내 음식 맛을 처음 인정해준 게 창현인 걸.”

마지막 말은 상당히 어렵게 하는 창현에게 궁극의 크리티컬을 날리는 미영이었다.

끝까지 창현의 태도에서 이질적인 모습을 발견하지 못하는 그녀의 모습에 소녀들은 모두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야만 했다.


“이것 참. 좋아해야 하는 건지…….”

소녀들과 통화를 끝낸 창현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신에게 주기 위해 초콜릿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듣자 무척 기분이 좋았다.

누가 자신을 위해 만들어준 음식을 싫어하겠는가.

다만 부담이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미영의 음식이 바로 그러한 경우이다.

그때 놀이공원에서 먹었던 샌드위치의 악몽을 떠올리면서 창현이 가늘게 몸을 떨었다. 샌드위치에서 느꼈던 당시의 맛은 창현이 여태까지 먹어오던 맛의 새로운 지평을 열던 것이었다.

이번엔 도대체 어떤 맛으로 찾아올까?

순간 불안한 생각이 들었지만 창현은 애써 고개를 저었다.

“에이, 그래도 초콜릿은 기본 맛을 바탕으로 하는 거잖아? 설마 저번처럼 그런 짓을 하지는 않겠지.”

그렇게 생각을 하고는 있지만 불안한 것이 사실이었다.

당시 먹었던 샌드위치가 워낙 강렬한 충격을 줘서 그렇다.

하지만 창현은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하였다.

“누나들도 같이 있으니 적당히 조언을 해줬겠지. 설마 선물할 건데 먹어보지도 않았을까.”

창현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훨씬 편했으니까.

방금 전 통화로 완전히 잠이 깨었기에 창현은 다시 일어나서 노래를 체크해본다. 이번 미니 앨범에 들어갈 곡을 최종적으로 검토하는 것이다. 본래 화보 촬영 일정이 오늘까지였기에 창현은 뜻하지 않은 휴가를 받은 셈이었다. 그 틈을 활용하여 앨범에 수록될 곡들을 마지막으로 점검하는 것이었다.

곡들을 하나하나 확인하던 창현은 최대한 냉정하게, 제3자의 시선을 유지하면서 노래를 들어본다.

녹음된 곡들을 들어보다가 창현은 노래에 의아한 점을 느끼게 된다.

“응, 좀 이상한데?”

저번에 들었을 때는 딱히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던 부분이었다. 대체로 잔잔하면서 부드러운 곡의 느낌은 잘 살렸지만 뭐랄까, 곡 특유의 밝은 느낌이 들지 않았다.

뭐랄까, 푸켓에 다녀와서 그런 것일까?

녹음할 당시 이 정도면 완벽하다고 여겨졌는데 그곳에서 본 풍경들을 떠올리니 지금의 곡이 다소 부족하게 느껴졌다. 좀 더 완벽하게 녹음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창현은 고민에 빠졌다.

“그 느낌을 살리려면 완전히 새로 불러야 하는데. 그러면 앨범 발매일을 늦춰야 하고…….”

고민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최종 점검을 하는 와중에 곡 하나를 새로 부르려면 적어도 앨범 발매일을 이틀 정도 늦춰야 한다. 그렇게 되면 이미 세워놓은 계획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일단 아버지랑 이야기를 해봐야겠네.”

남들이 잘 부른다고 추켜 세워주는 것 이전에 창현에게는 스스로의 기준이 존재한다. 그 기준에 부합하는 노래가 나와야 스스로가 정해놓은 만족선을 통과한다고 할 수 있다. 지금 다시 부르려는 곡은 당시에는 만족했지만 지금은 더 좋은 것이 떠올랐으니 이대로 앨범이 발매되게 할 수는 없었다.

일단 곡을 몇 번 더 들어본 창현은 구체적으로 고쳐야 할 점들을 떠올리면서 그것을 수첩에 메모하였다.

“역시 고쳐야겠네.”

들으면 들을수록 재녹음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창현은 음악을 끄고는 석규에게 전화를 걸었다.

♩♪♬

컬러링이 들리자마자 곧장 석규가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아버지, 저에요. 전화 일찍 받으시네요.”

-너에게 할 말이 있어서 전화를 들던 차에 전화가 오더구나. 그래, 무슨 일이냐?

아버지가 자신에게 할 말을?

창현은 순간 고개를 갸웃했지만 우선 자신의 용건을 먼저 꺼내놓았다.

“제가 전화 드린 까닭은 앨범 수록곡 중 하나를 다시 녹음해야 될 것 같아서요.”

-재녹음을? 어째서?

석규의 물음에 창현은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다.

“처음에 녹음할 땐 괜찮았는데 몇 번 들어보니 수정해야 할 점이 있어서요. 지금 재녹음을 하면 앨범 발매일이 늦어지겠지요?”

창현의 말에 석규가 조금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처음부터 다시 녹음하겠다는 게냐? 음! 네 속도라면 이틀 정도 늦어지겠구나. 상관없겠지. 더욱 완벽한 앨범을 위한 것 아니겠느냐? 상관없으니 네 생각대로 해라.

이미 완벽하게 짜여있을 일정이었다. 그럼에도 창현의 말을 믿고 따라주자 창현은 가슴이 뭉클해지는 걸 느꼈다.

“예, 감사합니다. 그럼 내일쯤 기획사에 찾아갈게요.”

-마침 너보고 회사에 오라고 말하려 했는데 잘 되었군. 그럼 내일 찾아오너라.

“네, 알겠어요. 그런데 뭐 때문에 그러시는데요?”

창현은 석규의 음성에서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있었다. 석규의 음성이 무언가 묘한 감정을 담고 있던 것이다.

그런 창현의 물음에 석규는 대답하지 않았다.

-내일 오면 알게 될 테니 그냥 오너라. 그럼 내일 보도록 하자.

그 말과 함께 석규가 전화를 끊었다.

통화가 끊긴 핸드폰을 보며 창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일이지.”


다음 날, 발렌타인 데이는 공교롭게도 초콜릿 CF를 찍는 날이었다.

촬영장에 창현이 들어서자 그는 여자 스태프들에게 초콜릿을 수북하게 받아야 했다.

설마하니 자신에게 초콜릿을 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기에 창현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초콜릿을 받으면서 연신 감사의 인사를 표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 처음 보는 스태프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설마하니 자신에게 초콜릿을 줄 거라고는 예상도 못했던 사항이었다.

하지만 이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방송 3사에서 성공적으로 무대를 치른 현의 존재는 여성들에게 있어 블루칩으로 떠오르고 있는 존재였다.

여성들을 사로잡는 강렬한 매혹을 지니고 있는 외모와 수천 명의 관객들을 한순간 압도하는 카리스마, 그리고 천재적인 음악적 재능은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부족하지 않았다. 실제로 방송 3사는 현이 출연하는 음악방송 같은 경우 시청률이 최소 두 배 이상 뛰는 경우를 보여주었다.

엄청난 노래 실력과 카리스마에 비해 보호해주고 싶은 충동이 들 정도로 순진함을 지니고 있는 외모는 엄청난 간극을 일으키면서 현이 발하는 이중적인 매력에 여성들의 마음을 사정없이 흔들렸다.

초콜릿 CF의 경우 현이 해줬으면 좋겠다는 엄청난 양의 의견이 밀려들어와 현을 캐스팅 했다는 이야기가 돌 정도였다.

어찌하였든 여성 스태프들에게 초콜릿을 받아든 창현은 간단한 인사와 함께 아침 일찍부터 촬영에 임하게 되었다.

촬영은 순조로웠다. 이미 정해진 시나리오대로 성실하게 임하였고, 뮤직비디오에서 연기력을 선보인 것답게 무난하게 촬영을 풀어나갔다.

아침부터 시작된 촬영은 점심시간이 되자 잠시 중단하고 점심을 먹었다.

그사이 창현은 새로 합류한 여성 스태프들에게도 초콜릿을 받았는데, 자신에게 초콜릿을 주는 스태프들의 모습에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었다.

‘여기 스태프들 중에서 날 좋아해주는 사람이 유난히 많은 건가?’

그렇게 생각하니 어느 정도 납득이 되었다. 여기에 자신의 팬이 특출나게 많다는 것을 말이다.

촬영은 오후까지 이어졌고, 저녁이 되기 전에 무사히 끝낼 수 있었다.

CF촬영이 끝난 뒤 창현은 곧장 AA엔터테인먼트로 향했다.

시간을 확인하니 다섯 시였다. 회사에 도착하고 석규와 이야기를 나눈 뒤 저녁을 먹으면 늦지 않을 듯 싶었다.

AA엔터테인먼트에 도착한 창현은 회사 앞에 예전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 놀랐다. 예전에는 라샤를 보러온 남자 팬들로 가득했는데 지금은 여성 비율이 더 높았다.

‘나 때문인가?’

창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괜히 스스로 비행기를 태우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평소에 팬들을 회사에 들이는 경우가 없는데 지금은 팬들이 품안에 무언가를 가지고 회사에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던 것이다.

무엇인가 싶었지만 창현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곧장 회사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곧장 사장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금쯤 도착할 것이라고 말해놓은 상태였기에 들어서는데 망설임은 없었다.

“아버지, 저 왔어… 응?”

사장실로 들어서던 창현이 멈칫했다. 사장실 안에는 석규 말고 다른 사람도 존재하고 있던 것이었다.

창현을 보며 방긋 웃고 있는 세 여인, 바로 라샤였다.

“이야, 누나들 무슨 일로 오신 거예요?”

창현의 얼굴에 반가운 기색이 서렸다. 현재 라샤는 미니 앨범 준비 중에 있으며, 창현이 2월 중하순에, 라샤가 3월 하순에 데뷔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앞으로 남은 한 달 동안은 일본에 갈 계획이어서 여러모로 바쁠 텐데 회사에 온 것이다.

창현의 물음에 방긋 웃던 라샤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석규는 그 모습을 피식 웃으면서 바라보고 있었다.

시린이 창현에게 물었다.

“너 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네, 뭐가요? 제가 뭘 몰라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되묻는 창현. 그 모습에 석규는 크크! 하고 웃음을 지었고, 시린은 물론 미란과 세룬도 벙찐 표정을 짓는다.

황당한 표정을 한 시린이 한숨을 내쉬면서 말한다.

“하아! 오늘이 무슨 날이야?”

“오늘이요? 수요일인데요? 아, 발렌타인 데이요?”

창현이 수요일을 언급하자 한순간 표정을 굳히자 뒤늦게 발렌타인 데이를 떠올리고는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그렇게 말을 하는 창현의 모습에 시린은 황당함을 넘어서서 차분한 표정으로 물었다.

“정말 우리가 왜 왔는지 몰라서 그런 거야?”

“솔직히… 잘 모르겠는데. 아, 설마 제게 초콜릿 주려고? 음, 이건 조금 현실성이 없고…….”

현실성이 왜 없단 말인가!

기껏 시간 내서 초콜릿을 들고 온 라샤가 황당해하는 순간이었다.

결국 미란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무슨 현실성이 없어! 기껏 초콜릿 준비해서 가져왔더니 그런 말이나 하냐?”

“에? 누나들이 왜 저에게? 설마…….”

그제야 라샤가 왜 회사에 왔는지 알아차린 창현. 그의 두 눈이 커진다. 그런데 반응을 보아하니 묘하게 오해를 한 듯하다. 소녀시대의 경우 신세 진 것을 갚기 위해서라는 말을 덧붙였지만 라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해를 한 것이다. 발렌타인 데이는 좋아하는 남성에게 초콜릿을 주는 날이라고 했으니까.

“아니야! 우리가 주는 건 의리 초콜릿이라고!”

다시 한 번 버럭하고야 마는 미란이었다.

창현은 볼을 긁적이며 사과했다.

“미안해요. 그런 건지 몰랐어요.”

“창현이 너 초콜릿 많이 받아보지 않았어?”

세룬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어본다. 창현이 외모 정도라면 초콜릿을 많이 받아봤을 텐데.

그에 창현이 고개를 젓는다.

“받아본 적 없어요. 가끔 사물함에 놓여있기는 했지만 직접 받아본 적은 없어요.”

“그래?

무척 의외인 듯 모두가 놀란 표정을 짓는다.

그 모습이 재미있어서 창현은 피식 웃는다. 그리고 의리 초콜릿을 받아든다.

감사의 인사를 하며 초콜릿을 받아든 창현이 석규를 보며 물었다.

“그런데 아버지, 왜 저한테 회사에 오라고 하신 거예요?”

창현의 물음에 석규는 물론 라샤의 입에도 미소가 걸린다.

무엇인가 싶어서 창현이 고개를 갸웃할 때, 석규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한다.

“말하는 것보다 직접 보는 게 낫겠지. 따라와라.”

그러면서 앞장 서서 걷는다. 창현이 그 뒤를 따르고, 라샤가 웃음을 지은 채 살며시 뒤를 따라온다.

석규가 도착한 곳은 연습실이었다.

창현은 연습실 문을 보면서 물었다.

“연습실이 왜요?”

“보면 안다.”

그 말과 함께 연습실 문을 여는 석규.

연습실 안의 모습이 드러났고, 그것을 본 창현이 두 눈을 휘둥그레 뜬다. 선물 산이 한가득 쌓여 있는 게 보였다.

이게 무엇이냐는 듯 석규에게 시선을 주자 석규가 말한다.

“오늘 발렌타인 데이 아니냐? 네 여성 팬들이 보낸 거다. 전부 초콜릿이다.”

“허… 저, 정말요?”

믿기지가 않는 듯 되묻는 창현. 여태까지 초콜릿을 받아본 적이 없는 인생이지 않은가?

석규는 고개를 끄덕이며 초콜릿을 가리켰다.

“택배부터 시작해서 직접 가지고 오기까지 하더구나. 그 성의를 무시할 수 없겠지? 윤실장에게 말해서 저거 다 옮기도록 할 테니 다 먹어라. 알겠지?”

쌓여있는 양은 거의 일 년 식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저걸 다 먹어야 한다고?

분명 좋아해야 하건만 창현은 저걸 언제 다 먹을지 눈앞이 깜깜해지는 걸 느꼈다.


이른 아침.

모두가 잠든,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이른 아침에 주현이 살며시 눈을 떴다.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난 주현은 룸메이트 언니들이 깰까 조심스럽게 방을 벗어난다.

그리고 가볍게 세수를 해서 잠을 쫓아버린 뒤 품속에서 종기를 꺼내드는 주현.

그걸 보는 주현의 입가에 미소가 맺힌다.

‘언니들, 미안해요. 설거지 면제권은 제 거에요.’

어제 만든 초콜릿은 말 그대로 언니들의 견제를 끌어내기 위한 것.

지금부터 만드는 것이 진짜 어머니 레시피가 담긴 초콜릿이다.

초콜릿 만들 재료를 모으는 주현의 입가에 승자의 미소가 걸렸다./

그도 그럴 것이 어제 언니들이 만드는 것을 본 주현으로서는 자신의 승리를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슬쩍 맛을 보니 기존의 초콜릿보다 오히려 맛이 하향화 된 경우도 있었다.

그에 반해 자신은 어머니에게서 직접 전수 받은 초콜릿 레시피가 있지 않은가?

어릴 적 좋아하는 남자가 생기면 써먹으라고 가르쳐주신 비법.

혹시 까먹을까 싶어 전날 기억을 더듬어서 종이에 꼼꼼하게 적어놓은 상태였다.

탁월한 준비성!

다른 소녀들과 주현이 확연하게 차이나는 점이었다.

주방으로 나온 주현이 가장 먼저 한 것은 자신의 초콜릿 포장을 조심스럽게 뜯는 것이었다.

무난하게 만들었지만 레시피에 의하여 창조된 것이 아니었기에 주현은 초콜릿을 야금야금 먹기 시작했다. 가장 확실한 처리방법이었다.

아침이라 배가 고팠기에 주현은 금새 초콜릿을 다 먹을 수 있었다. 그리곤 곧장 가스 불을 키고 초콜릿을 잘게 썰어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

초콜릿을 만드는 그녀는 정말 신중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주현은 요리를 만들 때 절대 맛을 보지 않는다.

그 이유는 중간에 맛을 보면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이리저리 조미료를 첨가하다가 곧잘 음식을 망치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현은 항상 음식을 만들 때 정확한 양을 계산하고 맛을 보지 않는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완성된 음식은 제법 괜찮은 맛을 보이고는 한다.

방금 먹은 초콜릿의 맛도 나쁘지 않았다.

즉, 제 실력을 발휘할 수만 있다면 자신의 예상대로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언니들이 불빛에 깰까 싶어 주방 불조차 키지 않은 채 조심스레 녹은 초콜릿을 휘저으며 설탕이 담긴 통을 꺼내든다.

“두 스푼이지? 일단 두 스푼을 넣고…….”

행여 계산이 어긋날까 싶어 자신의 전용 티스푼을 가지고 와서 계산하는 치밀함을 보이는 주현이었다.

조심스럽게 저으면서 주현은 레시피에 적힌 것들을 차례차례 넣는다. 그리고 자신이 준비한 틀에 맞춰 초콜릿 형태를 굳힌다.

‘완성이야.’

입가에 미소를 짓는 주현. 초콜릿이 마침내 완성되었다.

그리고 포장을 하려고 할 때, 방에서 언니들이 잠에서 깨는 소리가 들려왔다.

주현은 화들짝 놀라면서 서둘러 초콜릿 포장을 한다. 그리고 후다닥 소파로 달려가서 앉은 채 TV를 튼다.

잠시 후, 방에서 두 사람이 걸어 나온다. 효연하고 태연이었다.

주현까지 합쳐서 세 사람이 소녀시대 멤버들 중에서 가장 일찍 일어나는 편이다.

눈을 비비면서 걸어나오는 언니들을 보며 주현이 미소를 지어보였다.

“일어나셨어요, 언니들?”

“우우! 졸리네. 주현이 일찍 일어났네?”

눈을 비비면서 주현을 바라보는 태연. 그와 달리 효연은 곧장 화장실로 가서 세면을 하고 나온다.

태연은 세수를 하지 않은 채 그대로 소파에 앉아 주현에게 몸을 기대고 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언니에게 기댄 여동생 같았다. 언니와 여동생 배치가 달랐지만 말이다.

물 한컵 벌컥벌컥 마신 효연이 소파에 앉으면서 태연에게 물었다.

“태연아, 넌 안 씻어?”

“우음! 씻기 싫네. 주현이 품이 편안하기도 하고.”

그러면서 주현의 허벅지에 눕는데, 주현은 미소를 지으며 태연의 삐친 머리를 쓸어내려준다.

그런 다정한 모습에 심통이 났는지 효연은 입술을 삐죽이며 주현에게 물었다.

“주현아, 초콜릿 아무도 안 만졌지?”

일어나자마자 묻는 첫 질문이 초콜릿에 관한 것이어서 속으로 당황했지만 주현은 내색하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무도 안 만졌어요.”

“그래? 그럼 다행이고.”

그러면서 효연이 TV로 시선을 옮긴다.

잠시 후, 소녀들이 하나둘씩 깨어나기 시작했고, 오늘은 휴식이었기에 TV앞에 옹기종기 모여 TV를 시청하기 시작한다. 몇몇 소녀들은 일어나자마자 효연과 같이 초콜릿의 안위를 걱정한다. 설거지 면제라는 권한이 걸려 있는 만큼 한 치의 방심도 허용되지 않았다.

창현이 초콜릿을 받으러 오는 시간은 저녁이었기에 소녀들은 각각 조를 짜서 외출을 하기로 하였다.

소녀들이 하나둘씩 외출을 하고, 각기 즐겁게 쇼핑을 한 뒤 숙소에 도착했다.

숙소에 도착한 효연은 가장 먼저 주방으로 향한다. 그리고 [설탕]이라 붙여진 통을 열어본다. 어제 그녀가 직접 흔들어서 평평하게 만들어놓은 설탕 통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숟가락의 침범을 알리듯 이렇게 저렇게 파여 있었다.

효연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걸렸다.

“훗! 누군지 몰라도 걸렸군, 걸렸어.”

멤버들 중 반드시 누군가가 초콜릿을 다시 만들 것이라 예상한 효연.

그랬기에 그녀는 잠자기 전에 설탕 통에 든 설탕을 모두 다른 통에 옮겨놓고 그 통에 소금을 잔뜩 채워놓았다.

중간에 맛을 보았으면 모르겠지만 그것 나름대로 초콜릿을 망쳤을 것이고, 맛을 보지 않았으면 두말 할 것 없이 소금 폭탄 초콜릿이 완성되었을 것이다.

“으흐흐흐!”

누군지 어렴풋 알 것 같았기에 효연은 웃음을 지었다.

그녀의 시선이 멤버들이 만든 초콜릿에 향했다.

그리고 누군가의 초콜릿에서 바다 냄새가 물씬 풍기는 듯 하였다.


원래대로라면 일곱 시까지 진행되었어야 할 CF촬영을 일찍 끝낸 창현은 자신 앞으로 배달된 초콜릿을 박스에 밀봉하여 벤에 실었다. 냉장고가 들어가는 거대한 박스로 무려 다섯 박스 분량이 나왔다.

그것을 벤에 실은 뒤 석규와 몇몇 간부진, 그리고 창현과 라샤는 저녁식사를 하였다. 밥을 먹으면서 창현과 라샤의 향후 일정들을 이야기하는 자리였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창현은 직원이 셋이나 동원되어 초콜릿을 집으로 옮겨야만 했다.

“후아! 힘들다.”

집까지 초콜릿을 모두 옮긴 창현은 팔을 주무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석규 말로는 지금도 계속해서 초콜릿이 오고 있다고 한다. 내일모레까지 받은 뒤 또 옮겨주겠다고 하니 창현으로서는 초콜릿 복에 터졌다고 할 수 있다.

“빨리 먹어야한다는 이야기네. 이거 다 먹다가 이 다 썩겠어.”

창현이 기가 질려 할 정도로 초콜릿의 양은 실로 방대하였다.

박스를 뜯은 창현은 포장된 것을 뜯고 내용물을 꺼내보았다. 그러자 초콜릿과 함께 편지 하나가 모습을 드러낸다.

자신을 다크 스타 회원이라고 밝힌 여성은 창현의 노래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팬이 되었다고, 앞으로도 좋은 노래를 불러달라는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그 편지를 읽은 창현의 입가에는 절로 미소가 맺혔다. 그리고 초콜릿 포장을 뜯어서 먹는데, 기분이 좋아서 그런지 맛도 좋았다.

대부분의 초콜릿에 편지가 담겨 있었다. 창현은 그것을 읽으면서 초콜릿을 조금씩 먹어나갔다.

“벌써 여덟 시네.”

한 시간 동안 편지를 확인하고, 초콜릿을 먹던 창현은 시계를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덟시 반에 만나기로 했으니 이제 슬슬 가보아야 했다.

두툼한 파카를 입고 모자와 안경을 쓴다. 그리고 목도리를 한다. 요즘 창현이 외출할 때 가장 즐겨하는 스타일이었다. 이렇게 하고 여태까지 정체를 들킨 적이 한 번도 없어서 그러하다.

“준비를 마쳤으니 가봐야겠네. 아, 혹시 누나들 저녁은 먹었으려나.”

자신을 위해 초콜릿을 준비해준다고 하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창현은 그 보답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핸드폰을 꺼내 수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언제부턴가 소녀시대 멤버들과 소통을 할 때면 수연에게 전화를 거는 버릇이 생겼다.

‘리더는 태연 누나인데, 섭섭해 하려나?’

♩♪♬

-여보세요?

컬러링이 시작되려는 순간 수연이 바로 전화를 받았다. 빠른 반사신경이었다.

“여보세요? 수연 누나. 저에요. 네, 지금 가려고요. 늦지 않을 것 같아요. 그런데 혹시 저녁 드셨어요? 음, 그렇군요. 네, 알겠습니다. 그럼 조금 있다 만나요.”

간단하게 전화 통화를 마친 창현은 핸드폰을 덮고는 완전무장을 한 채 집을 벗어났다.


같은 시각, 창현과 통화를 마친 수연이 소녀들에게 외쳤다.

“얘들아! 창현이 온데.”

수연의 말에 소녀들의 눈이 빛났다.

“그래? 드디어 명암을 뚜렷하게 가를 수 있겠군.”

“너희들 입에서 곡소리가 흘러나올 것이야. 흐흐!”

각기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는 소녀들. 그 자신감이 어디에서부터 흘러나오는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초콜릿은 창현이 숙소 앞까지 오면 전해주기로 하였다. 누군가가 대표로 나가면 분명 이의제기가 들어올 것이고, 밖에서 만나면 아홉 명이 다 나가야 한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아홉 명의 여자가 밖에서 한 남자에게 초콜릿을 주는 것도 모양새가 그리 좋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창현이 숙소 앞까지 오고, 초콜릿을 전해주기로 하였다. 숙소는 가급적 남자를 들이지 않는 금남 구역의 성격을 띠고 있기에 숙소에 들이지 않고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을 택했다.

“그런데 우리 밥은 뭐 해먹지?”

조용히 있던 수영이 퍼뜩 떠오른 듯 물었다. 각기 쇼핑하러 나가서 가볍게 요기를 했지만 저녁을 먹지 않은 상태였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밥을 하기도 귀찮았다.

“그냥 창현이한테 초콜릿 준 다음에 편의점에서 사먹자. 지금 하기 귀찮다.”

외출하고 돌아와서 밥을 해야 하는 것만큼 귀찮은 것은 없다. 더군다나 밥을 하는 경우 태연이 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그녀 같은 경우에는 더욱 그러했다.

“그럼 사먹자!”

“밥하기 귀찮아.”

태연의 주도(?) 하에 어느새 여론은 사먹는 쪽으로 굳어졌다. 이미 외출을 했던 차였기에 딱히 준비할 필요도 없었다. 단지 막판 뒤집기를 노리는 몇몇 요망한 소녀들의 존재를 견제하는데 여념이 없을 뿐이었다.

그렇게 순식간에 삼십 분의 시간이 흘렀고, 숙소에 초인종 소리가 울려 퍼졌다.

띵동!

소녀들이 인터폰으로 달려가 초인종을 누른 인물을 확인하니 창현이었다.

그녀들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전쟁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창현에게 그것을 내색할 수 없는 노릇, 그녀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은 채 문을 열어 창현을 반긴다.

문을 여니 중무장을 한 창현의 모습이 보였다.

소녀들은 저마다 신발을 신고 복도로 나가면서 창현을 반긴다.

“어서와! 춥지는 않았고?”

“춥기는요. 완전 무장하고 왔는데요.”

목도리를 풀며 창현이 빙긋 웃음을 지어 보인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다. 단지 서 있을 뿐인데 지금 창현의 모습은 연예인이다! 라는 느낌이 풍기고 있었다. 전과는 다른 느낌이랄까? 어쨌든 그러한 느낌이 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불쾌한 것은 아니었다. 이제 연예인이 되고 본격적으로 그러한 느낌이 난다는 것이지, 다른 사람과 벽을 만드는 그러한 분위기는 아니었으니까.

수연이 초콜릿이 담긴 쇼핑백을 창현에게 건넸다.

“자, 이거 우리가 만든 초콜릿이야. 맛있게 먹어줘.”

창현이 쇼핑백을 받아들며 감사의 인사를 하였다.

“고마워요. 여태까지 제대로 된 초콜릿 하나 받아본 적 없는 제가 갑자기 호강하네요. 하하!”

그런 창현의 모습에 수연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그런데 부탁 좀 해도 될까?”

“네? 무슨 부탁이요?”

창현의 물음에 갑자기 소녀들의 눈에 이채가 번뜩인다.

수연이 채 말하기도 전에 나선 것은 미영이엇다.

“창현이 네가 초콜릿을 먹고 가장 개성만점인 걸 말해줬으면 해.”

“개성만점이요?”

순간 무슨 말인가 싶어 의문을 표하는 창현.

그에 미영이 웃음을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응. 우리 초콜릿을 만들면서 누가 가장 개성만점의 초콜릿을 만드는가 내기를 했거든. 그래서 창현이 네가 초콜릿을 먹고 판단을 내려줬으면 좋겠어.”

“내기라… 음! 알았어요.”

그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소녀들의 개성만점 초콜릿을 맛보고 판단을 내려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다만 가장 걱정이 된다면…….

“미영 누나, 초콜릿에 이상한 거 안 넣었죠?”

걱정스러운 창현의 물음에 미영이 눈웃음을 지었다.

“물론이지! 맛보면서 만들었는 걸? 아마 말 그대로 개성만점의 초콜릿일 거야.”

“그래요? 기대할게요.”

그렇게 말하면서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창현이었다. 맛을 보면서 만들었다고 하니 적어도 이상한 맛이 나지는 않으리라.

창현은 쇼핑백을 살짝 안으면서 말했다.

“누나들에게 정말 고마워요. 발렌타인 데이에 제 초콜릿을 이렇게 챙겨주셔서요. 무척 기쁘네요.”

그런 창현의 말에 수연이 손을 들어 그의 말을 제지했다.

“그런 말 하지마. 그동안 우리가 너에게 신세를 진 게 얼마나 많은데 그래? 우리가 그동안 창현이 네게 많이 신세를 졌고, 그에 대한 자그마한 보답이라도 하고 싶어서 이렇게 초콜릿을 선물하는 거야.”

“야! 우리는 아니라고!”

수연의 말에 불만이 있었는지 수영이 외쳤다.

그에 수연의 시선이 수영에게 향하자 수영이 말했다.

“우리도 그 신세란 걸 지고 싶었는데 너희들이 알려주지 않았잖아! 이 가증스러운 것들아!”

“맞아맞아! 너희들이 창현이를 독식해서 말이지.”

효연도 수영의 편을 들었다.

수연은 갑자기 치고 나서는 두 사람을 째려보며 말했다.

“흥! 어찌됐든 우리는 팀이니까 하나야. 우리가 신세를 끼쳤으니 너희도 창현이한테 신세를 진 거라고.”

“그런게 어딨…….”

반박하려던 수영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수연을 비롯하여 다른 소녀들이 일제히 수영을 노려본 것이다.

멤버 내에서 강력한 스펙을 지니고 있지만 일대다수를 이길 수 없는 노릇. 수영은 물론 효연까지 멤버들의 눈빛 포화에 결국 꼬리를 내리고 만다.

수연의 주도 아래 두 반동분자를 성공적으로 제압하였고, 알 수 없는 박력에 창현은 압도되고 말았다. 수영과 효연이 무언가 말을 했는데 순식간에 파바박 하면서 진압되었다.

‘여, 역시 화가 나면 무섭네.’

그렇게 생각하던 창현은 소녀들의 시선이 다시 자신에게 향하자 흠칫하면서 눈빛을 고친다. 그러기 위해서는 웃음을 짓는 것이 최고다.

창현은 빙긋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잘 먹을게요, 누나들.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애초에 창현은 스케줄을 조정하여 온 것이기에 길게 있을 시간이 없었다.

창현의 말에 소녀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

“응, 잘가. 초콜릿 우리가 만든 거니깐 꼭 먹어보고. 나중에 전화로 결과 알려주는 거 알지?”

그러면서 소녀들이 전부 자신의 것을 뽑으라는 압박을 팍팍 풍겼다.

더 있다가는 결정을 내리지 못하게 될 것 같아 창현은 시선을 외면하면서 말했다.

“네, 알았어요. 그런데 누나들 저녁 안 드셨죠?”

“으응. 그러고 보니 배가 고프네.”

“저녁이 좀 늦었네.”

그 반응에 창현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한 십분 정도 기다려보세요. 그럼 좋은 일이 생길 테니까요.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영문 모를 말을 한 창현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라졌다.

남은 소녀들은 집에 들어오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말이지?”

“몰라! 어쨌든 배가 고프니까 심부름 할 사람을 선발하자. 세 명 정도 어때?”

“뭘로? 가위바위보?”

“그건 좀 식상한데…….”

“하지만 그것보다 나은 건 없잖아.”

심부름 할 사람을 뽑는 것으로 숙소는 시끌시끌해졌다.

그것도 잠시, 투닥거리던 소녀들은 결국 가위바위보가 제일 효과적인 방법이란 것을 느낄 수밖에 없었고, 결국 치열한 가위바위보 혈전이 펼쳐진다.

“아싸!”

“히잉!”

이기고 지면서 점점 포위망이 좁혀짐에 따라 소녀들의 표정에 명암이 뚜렷하게 갈렸다.

그리고 마침내 네 명이 남은 상태에서 숙소 내 긴장이 극도에 달하였을 무렵이었다.

갑자기 띵동!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지?”

인터폰에서 제일 가까이 있던 유리가 화면에 비춰진 사람을 보면서 고개를 갸웃하고는 인터폰을 받아든다.

“누구세요?”

“치킨입니다.”

치킨이라니? 누가 배달을 시켰단 말인가?

유리가 의뭉스러운 표정으로 소녀들을 바라보았지만 그녀들은 한결같이 고개를 저었다.

“저희 치킨 안 시켰는데요.”

그 모습을 본 유리가 대답했다.

그러자 배달원이 기다렸다는 듯 대답한다.

“아, 배달은 창현이라는 남자 분이 하셨습니다. 이미 돈은 지불하신 상태고요. 치킨만 받아 가시면 됩니다.”

“창현이?”

배달원의 말에 소녀들이 반응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창현이가 십 분 정도 기다려보라고 하지 않았던가?

눈치 빠른 소녀들은 그제야 창현이가 말했던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창현이가 시켜줬나봐!”

“어서 문 열어!”

소녀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문을 열어주었고, 배달원이 숙소 안으로 들어와 치킨과 콜라를 건네고는 사라진다.

“이, 이게 전부 몇 마리여.”

배달원이 놓고 간 치킨을 보면서 눈을 휘둥그레 뜨는 소녀들.

창현이 시켜준 치킨은 무려 다섯 마리였다. 게다가 콜라도 1.5L 다섯 병이나 시켜주었다. 아홉 명의 소녀들이 먹기에는 많은 양이었다.

치킨 숫자를 본 소녀들이 킥킥 웃었다. 창현이가 왜 이렇게 많이 시켜줬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창현이가 수영이의 용량을 제대로 알고 있나보네.”

“그럼. 우리가 반 마리씩 먹고 수영이한테는 아예 한 마리 먹으라고 하는 거 같은데? 아니지. 우리가 다 못 먹을 걸 생각해서 수영이한테 더 배당해준 걸 수도 있어.”

“킥킥킥!”

“야! 너희들이 그렇게 말하면 내가 대책 없이 많이 먹는 줄 알잖아. 그냥 너희보다 조금 많이 먹는 수준이란 말이야.”

조금 많이 먹는 수준이란 것이 두 배였다.

소녀들은 수영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킥킥거리면서 대답했다.

“그래? 그렇다고 쳐줄게.”

“그렇고말고. 암! 아주 조금이지.”

“아씨! 뭐 너희들이 놀리는 건 하루 이틀이 아니니 더 반응 안할래. 치킨 식겠다. 치킨이나 먹자.

“그래. 먹자. 창현이가 시켜준 거잖아.”

소녀들은 치킨이 박스를 봉지에서 꺼냈다.

가장 열성적으로 임하던 수영은 봉지 안에 무슨 종이가 있는 걸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라? 얘들아 뭔가 있는데?”

하지만 치킨에 눈이 먼 소녀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수영도 소녀들의 반응을 기대한 것이 아닌지 종이를 펴보기 시작했다. 쿠폰이나 상품권 같은 것은 아니었기에 호기심을 드러냈다.

종이가 하나씩 펴지자 모습을 드러낸 것은 가지런한 글씨였다.

수영이 그걸 보고는 소리쳤다.

“어라? 창현이가 메시지를 남긴 거였네.”

그러자 곧장 반응을 보이는 소녀들.

“뭐라고?”

“창현이가?”

“읽어봐, 어서!”

“알았어! 저리 떨어져!”

종이를 뺏으려고 달려드는 소녀를 뿌리치며 수영이 종이에 적힌 글자를 읽기 시작했다.

“저를 위해 초콜릿을 만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누나들. 아직 저녁을 들지 않았다고 하시기에 치킨을 시켰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라는데?”

“오! 역시 창현이! 매너가 좋은데?”

“그러게. 역시 뭔가 아는데?”

창현의 행동에 칭찬을 하는 소녀들. 세심한 그의 행동이 조금이나마 감동을 한 상태였다.

수영은 종이를 수연에게 건네고는 외쳤다.

“창현이가 우릴 이렇게 챙겨주니 기쁘네. 치킨 먹자. 그게 창현이가 바라는 거일 거야.”

“으이구! 그래, 먹자 먹어!”

“수영이 식욕은 못 말리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하는 소녀들의 모습에 닭 날개를 뜯던 수영이 외쳤다.

“이것들이! 너희들도 먹을 거면서 나한테 뭐라고 하지마!”

하지만 이미 치킨 먹기에 바쁜 소녀들은 수영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면서 수영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후우! 매일 내가 돼지지 돼지야. 이 나쁜 것들.”

그렇게 말하지만 치킨을 제일 많이 먹은 것은 수영이었다.

창현이 산 치킨으로 인하여 소녀들은 무사히 저녁을 먹을 수 있었다.


자신의 숙소로 돌아간 창현은 곧장 스케줄에 참가해야했다. 간단한 인터뷰였는데, 저번 푸켓에서 촬영한 화보에 실을 것이었다. 늦은 시간이었고, 비교적 간단한 걸 물어보았기에 짧게 인터뷰를 끝낼 수 있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니 열한 시였다.

오늘 스케줄을 모두 마쳤기에 샤워를 하고 나온 창현은 주스를 마시면서 미소를 지었다.

“후! 오늘도 어찌어찌 버텨냈구나.”

얼마 되지 않은 연예인의 생활이었다. 그랬기에 아직까지는 적응이 힘들었다. 하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 그런지 처음보다는 나아진 상태였다.

다 씻은 상태였기에 창현은 노곤한 몸을 이끌고 소파에 앉아 TV를 키며 이리저리 채널을 돌렸다.

잠시 후 개그 프로그램에 몰두하는 창현.

그때, 핸드폰에 지이이잉 하는 소리와 함께 진동이 울렸다.

핸드폰을 확인하니 석규였다.

“뭐지?”

왜 전화하신 거지? 라고 고개를 갸웃하면서 창현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아직 안자고 있었구나.

“네, 무슨 일 있나요?”

지금 이 시각에 전화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기에 창현이 물었다.

-일? 있다면 있겠지. 아주 큰일이 일어났다.

“큰일이라고요?”

화들짝 놀라며 되묻는 창현.

그에 석규가 침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아주 큰일이다. 업무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을 정도야.

“무슨 일인데요? 그만큼 안 좋은 상황인가요? 당장 갈게요.”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말하는 창현.

석규는 창현이 행동하고 있는 게 빤히 보이는 것처럼 말했다.

-됐다. 농담 좀 한 거다.

“네? 농담이라고요?”

옷을 부랴부랴 챙겨 입던 창현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야심한 밤에 전화를 해서 농담을 하다니?

황당한 표정을 지우지 못한 창현이 막 입을 열려던 순간 석규가 먼저 선수를 쳤다.

-네가 간 뒤로 계속 초콜릿이 와서 그런 게다. 도대체 인기가 얼마나 많은 건지. 계속 초콜릿이 배달 와서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야.

“초콜릿이요?”

창현의 얼굴에 다시 자리한 것은 황당함이었다.

초콜릿이라니? 도대체 얼마나 배달이 왔기에 저런 말을 하는 것이란 말인가?

창현은 황당한 감정을 담아 물었다.

“어느 정도 배달 왔기에 그러시는 건데요?”

석규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대답했다.

-음! 아까 가져갔던 양의 절반 정도? 지금도 계속 오는구나. 아마 내일까지 계속 올 것 같다.

“저, 절반이요?”

석규의 말에 창현은 입을 쩍 벌렸다.

아까 전 산을 이루고 있던 초콜릿은 양만 보아도 기가 질릴 정도였다. 그런데 그에 절반 정도라니?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양이었다. 게다가 계속 오고 있다는 건 조만간 비슷한 양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이 된다.

‘이것 참. 갑자기 인기 폭발이네. 생전 받지 못하던 초콜릿을 무더기로 받다니 말이야.’

그 사이 석규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어쨌든 다 받고 있다. 허참, 초콜릿 받는 것 하나로 이렇게 곤욕을 치러야 하다니. 너 이 초콜릿 다 먹어야 한다.

복수를 하겠다는 듯 으르렁거리며 말하는 석규.

그 말을 듣는 창현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다 먹다니요, 하하! 농담이시죠?”

-농담 아니다. 네 초콜릿 받아주느라 경비원도 지쳤다. 오죽하면 배달 오는 택배 직원이 아예 트럭을 빌려서 내일 몰아서 가지고 오겠다고 하더구나. 그러니 다 먹어라. 설마 팬들의 선물을 거절할 생각은 아니겠지? 업무가 밀려서 이만 끊으마.

뚝.

그 말과 함께 정말 끊어버리는 석규. 창현은 한동안 핸드폰을 든 채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다 먹으라고? 하하, 이것 참.”

충격에 빠져있던 창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 먹으려 들다가는 정말 배가 터져 죽을지도 모를 거란 생각이 들었다.

잠시 멍하니 초콜릿의 처분을 놓고 고민하던 창현은 쇼핑백을 보고는 잊고 있던 것을 떠올렸다.

“아, 그러고 보니 누나들이 준 초콜릿을 잊고 있었네.”

자리에서 일어난 창현이 쇼핑백을 들고 와서 자리에 앉는다. 그리고 쇼핑백 안에 있는 것들을 하나씩 꺼내든다.

포장지에 싸여있는 것을 보며 창현이 이리저리 살펴본다.

“친절하게 포장까지 했네. 이름까지 적혀있고. 그런데 누구 것부터 먹어야지?”

초콜릿을 놓고 고민에 빠진 창현.

마음같아서는 가장 먼저 미영의 초콜릿을 먹고 싶었다.

왜냐고?

매도 먼저 맞는 것이 나은 법이니까.

맛을 보면서 만들었다고 하나 미영의 미각 구조는 조금 독특하지 않은가? 저번에 온갖 조미료가 들어간 샌드위치를 맛있게 먹었으니 말이다.

“미, 미영 누나 거는 제일 마지막에 먹자.”

유감스럽게도 미영의 음식 테러를 겪어본 창현은 고대로부터 내려온 속담을 단호하게 저버렸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두려움이라면 제일 뒤로 미뤄두는 것이 좋으리라.

무엇부터 먹을지 고민하던 창현.

“일단 미영 누나 건 제일 마지막에 먹고 나이 순서대로 먹어보자.”

창현이 가장 먼저 집어든 것은 주현의 초콜릿이었다.

아무래도 주현이 가장 무난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이다.

포장지를 벗긴 창현은 하트 모양의 초콜릿을 볼 수 있었다. 모양은 무척 훌륭했다.

“맛있어 보이네.”

초콜릿을 보며 감탄사를 흘리는 창현. 일단 외양으로 볼 때는 시중에서 파는 초콜릿에 비해 뒤떨어지지 않았다.

문제는 맛이다.

“주현 누나가 실수할 리는 없지.”

예전에 수학 여행에서 주현이 싼 김밥을 먹어본 창현으로서는 어느 정도 안심하고 있었다. 그때 김밥 싸는 실력이 제법이었는데 설마하니 초콜릿이 이상할 리는 없을 것이다.

그러면서 초콜릿을 크게 한입 베어먹는 창현.

그리고 우물거리기 시작한다.

“음, 맛이… 크, 크헉!”

맛이 괜찮다고 하려던 창현은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처음 살짝 엄습해왔던 달콤함은 어디론가 사라진 채 입안 한 가득 채우는 짠맛!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 창현은 방방 날뛰다가 화장실로 황급히 달려가고야 만다. 그리고 초콜릿을 뱉어냈다.

“허억, 헉!”

초콜릿을 뱉은 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창현.

냉장고로 곧장 걸어가 물을 벌컥벌컥 마신다. 그리고 떨리는 눈길로 초콜릿을 바라보았다.

“저, 저 초콜릿 뭐야.”

아직도 입안에 감도는 짠맛의 여파에 몸을 부르르 떠는 창현. 뱉어냈건만 아직도 짠맛이 전신을 휘감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주현이 초콜릿에 넣은 설탕(소금)의 양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주현이 어머니에게 전수받은 레시피의 정체는 바로 엄청나게 달콤한 초콜릿을 만드는 것이었다.

창현이라면 수많은 초콜릿을 받을 것이라 계산한 주현.

평소 그녀답지 않은 계산적인 두뇌로 그녀는 언니들과의 경쟁에서 자신의 승리를 모색해야만 했다. 그러던 차에 옛날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어머니에게 전수받은 필승의 초콜릿을.

그것은 바로 무지하게 달콤한 초콜릿을 선물하는 것이었다.

우선 그녀가 신경 쓴 것은 달콤하면서 거부감 없이 넘길 수 있는 초콜릿이었다. 그것을 위해 그녀는 새벽 같은 이른 아침에 일어나 초콜릿을 제조하였고, 지속적으로 두 스푼씩 넣어 초콜릿의 달달함을 더해나갔다. 처음에는 두 스푼이었지만 그렇게 열 번을 했으니 무려 스무 스푼이나 넣은 셈이다.

주현이 예측하길, 창현이 자신의 초콜릿을 가장 먼저 먹거나 마지막에 먹을 거라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녀들은 언니들의 초콜릿의 맛을 반감시키기 위해 초콜릿을 지나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달콤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되면 가장 먼저 먹을 경우 엄청 달다고 느낄 테지만 뒤이어 먹는 언니들의 초콜릿 맛을 제대로 느끼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그리 되면 승리는 자신의 것이 된다.

제일 마지막이어도 상관없다. 창현이 언니들의 초콜릿을 먹고 단맛에 어느 정도 무감각해졌을 때 자신의 초콜릿을 먹는다면 누구의 것보다 달콤하게 먹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런 의도로 만들었지만 그녀의 의도는 완전히 어긋나고 말았다. 바로 효연이 설탕 통에 소금을 채워넣은 것이다.

이른 아침에 초콜릿을 제조하느라 주현은 미처 그것을 확인할 수 없었고, 결국 설탕인 줄 알고 엄청나게 퍼부은 것이 바로 설탕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창현은 그 초콜릿의 희생자였다.

창현은 주현의 초콜릿을 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으, 도저히 못 먹겠어. 도대체 소금 초콜릿을 준 이유가 뭐지? 어쨌든 도저히 먹을 엄두가 안나네요. 미안합니다, 주현 누나.”

차마 주현의 초콜릿을 더 먹지 못하고 포기하는 창현.

물로 몇차례 입가심을 더 하고 나서야 간신히 제정신을 되찾을 수 있었다.

“후! 설마 누나들이 단체로 날 골탕 먹이려는 건 아니겠지?”

그러면서 윤아가 건네준 초콜릿을 조심스럽게 뜯었다. 그리고 끝부분을 살짝 맛보았다.

달달하다기보다는 조금 쓰다고 할까? 카카오 72%를 먹는 듯한 느낌. 결코 나쁜 맛이 아니었다.

“맛있네.”

초콜릿을 맛있게 먹는 창현. 윤아의 것을 말끔하게 먹을 수 있었다.

뒤이어 수영, 유리의 것을 차례대로 맛보면서 창현은 다른 초콜릿의 맛도 무난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수영 누나는 모양만 바꾼 거 아닌가? 가나 초콜릿이랑 맛이 똑같은데… 뭐 상관없겠지.’

그러면서 초콜릿을 차례차례 다 먹는 창현의 입가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소녀 각각의 개성답게 초콜릿도 각각의 맛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 주현의 소금 초콜릿은 엄청난 크리티컬이었지만 어찌했든 다른 초콜릿은 제법 괜찮은 맛이었다.

다시 생각해도 주현의 소금 초콜릿은 정말 충격이 컸다.

다른 소녀들의 초콜릿을 만족스럽게 먹은 창현의 시선이 어디론가 향했다.

이제 마지막 관문이 남은 것이다.

‘남은 건 미영 누나 초콜릿뿐인데…….’

힐끗 미영이 만든 초콜릿을 바라보는 창현. 그의 눈은 애처롭게 떨리고 있었다.

믿었던 주현이 소금 초콜릿으로 엄청난 타격을 준 상태였다.

만약 저것마저도 자신에게 타격을 준다면?

상상만 해도 두려웠다.

어떤 인간이 그랬던가. 인간은 미지의 공포를 두려워한다고.

눈앞에 당면한 공포를 놓고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덜덜덜.

미영의 초콜릿으로 손을 뻗는 창현의 손은 애처롭게 떨리고 있었다. 창현의 뇌리에는 저번에 겪었던 미영의 근원을 알 수 없던 긴 이름의 샌드위치가 트라우마처럼 떠오르고 있었다.

힘겹게 초콜릿을 집은 창현은 포장지를 양파 껍질 벗기듯 천천히 벗기고 있었다. 마음은 빨리 벗겨서 맛을 보라고 아우성치고 있지만 몸은 그의 의지를 배반했다.

마침내 다 벗겨지고 윤곽을 드러낸 초콜릿. 왜 이렇게 포장지를 벗기는 순간이 짧게 느껴지는 걸까.

상자 안에 있는 초콜릿을 꺼내든다. 겉모습은 평범하다.

하지만 누가 알겠는가? 저 평범함 안에는 가히 빅뱅을 일으킬 만한 위력의 맛이 숨어 있다는 것을.

떨리는 손으로 초콜릿을 꺼내든 창현.

문득 자신의 상태를 깨달은 창현은 불쑥 오기가 치민다.

저 초콜릿이 무엇이기에 자신을 이렇게까지 만드는 걸까.

어차피 판결을 위해서는 피해갈 수 없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마지막을 불사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창현의 눈에 독기가 생겨났다. 까짓 거, 먹고 죽지는 않겠지.

그 결심과 함께 창현은 미영이 만든 초콜릿을 들고 입을 크게 벌린다. 남자라면 한방이다!

창현은 뇌리에 Made by 미영이라 새겨진 듯한 로고가 떠오름과 동시에 초콜릿이 입안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것을 한뭉큼 베어 우물우물 씹는다.

자, 와라, 미지의 맛들아. 내가 너희들과 맞서 싸워주겠다.

초콜릿을 우물우물 씹으며 곧이어 자신을 덮쳐올 맛에 마음을 다지는 창현.

하지만 그의 입안에 느껴진 맛은 그의 각오와 사뭇 다른 맛이었다.

분명 맛은 독특했다. 하지만…….

응?

창현이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예상과 전혀 다른 맛이었다.

“어라? 맛있네?”/

정말 의외였다. 입에서 느껴지는 맛은 분명 독특했지만 먹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아니, 도리어 미영이 강조하던 개성만점의 맛에 가까웠다.

달콤함과 동시에 살짝 느껴지는 매콤함. 혀를 녹여주는 듯한 달콤함과 살짝 톡 쏘는 매콤한 맛이 절묘한 하모니를 이루고 있었다.

자칫하면 달콤함과 매콤함의 조화가 떨어질 수 있을 터. 그런데 미영의 초콜릿은 그 중심점을 제대로 잡아내고 있었다.

창현의 눈에 감탄이 서렸다.

“미영 누나가 샌드위치만 못하는 거였나?”

생각해보니 창현이 미영의 음식을 먹어본 것이라고는 더블 디럭스 콤보 샌드위치라 이름 붙은 온갖 첨가물이 들어간 샌드위치밖에 없다. 다른 음식을 잘할 여지가 충분히 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생각은 잠시 후 접어야만 했다. 수위를 조절하지 못하여 온갖 조미료를 첨가하던 미영의 말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 말을 토대로 생각해보면 미영이 음식을 잘한다고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초콜릿만 잘 만드는 것일 수도.”

차라리 그게 더 신빙성이 있다. 하지만 기본 실력이 뒷받침이 되지 않는데 잘할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또 의문이 들었다.

설마… 그때 이후로 부지런히 음식을 연습했다던가?

연습했다고 생각하니 상당히 설득력이 있었다.

어찌하였든 지금 중요한 것은 이 초콜릿의 맛은 상당히 훌륭하다는 것이다. 달콤함과 매콤함이 조화된 초콜릿은 상당히 중독성 있었다.

야금야금 초콜릿을 먹는 창현. 먹을수록 더욱 당기는 매력이 있었다.

그렇게 초콜릿을 절반 정도 먹었을 무렵, 창현은 마침내 초콜릿을 크게 한입 베어 문다. 맛있는 것을 먹을 때 점점 속도를 내기 마련 아닌가? 그만큼 Made by 미영의 초콜릿은 창현에게 초콜릿의 새로운 맛의 지평을 열어주고 있었다.

정말 독특한 맛이었다. 달콤함과 매콤한 맛이 먹을수록 구미를 당기게 한다고 할까나?

초콜릿을 크게 베어 문 창현은 초콜릿을 씹으면서 중얼거렸다.

“도대체 초콜릿에 뭘 넣은 거지? 고추냉이인가?”

고추냉이의 조화로 초콜릿의 맛에 이렇게 변화를 줄 수 있다니. 여태까지 누구도 이런 방법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초콜릿을 맛있게 씹던 창현은 어느 순간부터 매콤한 맛이 점차 강해지는 걸 느꼈다.

그리고 갑자기 강렬해지는 매운맛.

순간 뇌리에서 빅뱅이 일어나는 듯한 강렬한 충격이 창현의 뇌리에 쩌엉! 하고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해일처럼 몰려오는 매운맛.

연쇄폭발이 이런 느낌일까?

창현은 입에서 퍼져 나가는 매콤함에 입을 쩍 벌리며 신음을 흘렸다.

“꺼, 꺼헉!”

너무나 강렬한 맛. 창현은 모르고 있지만 미영이 초콜릿을 만들면서 고추냉이를 초콜릿에 부었고, 그 와중에 고추냉이가 덩어리가 졌다. 그리고 마지막에 떨어진 소량의 고추냉이가 미영의 국자에 의해 초콜릿에 퍼져 나갔다. 덩어리 진 것은 제일 아래로 가라앉았고, 초콜릿 색깔에 둔갑되어 있던 것이다.

강렬한 맛을 간직한 고추냉이를 창현이 한입에 베어 물고 열심히 먹은 것이다.

안심하고 먹다가 온 갑작스런 매운맛이었기에 창현이 느낀 충격은 더욱 컸다.

“무, 물!”

한동안 바닥에 쓰러져 이리저리 뒹굴며 고통을 호소하던 창현은 초콜릿을 뱉어버리며 간신히 물병을 집어들어 물을 벌컥벌컥 마신다.

“후욱! 훅!”

물을 마신 뒤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창현.

하지만 그 여파는 쉽게 가시지 않았다. 아직도 혀는 화끈거렸고, 입안에 매운맛도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으으. 이런 맛이라니.”

한순간 당했다는 생각과 함께 미영의 초콜릿을 맛있었다고 생각한 자신을 저주하는 창현이었다.

오늘은 정말 창현에게 날이 아닐 수 없다. 제일 믿고 있던 주현의 초콜릿에서 소금 폭격을 맞게 되고 제일 경계하던 미영의 초콜릿을 먹고 감탄을 하다가 마지막에 엄청난 크리티컬을 맞고 말이다.

도대체 고추냉이를 얼마나 넣은 것이란 말인가?

창현은 혀가 얼얼한 자신의 모습에 어이가 없었다. 그리고 시험 삼아 다른 초콜릿을 한입 베어 물었다.

우물우물 초콜릿을 먹는 창현. 분명 초콜릿이 치아에 의해 부서지고 있는데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는다.

순간 M본부에서 하던 초대박 드라마 대장금이 떠오르는 창현.

거기에서 이런 것이 나오지 않던가? 미각을 잃었다는…….

지금 자신의 처지가 딱 그러했다.

미영이 얼마만큼의 고추냉이를 넣었는지 모르지만 그로 인해 당장 맛을 느낄 수 없는 처지에 이르렀다.

창현은 자신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현재 시간은 열한시 삼십분. 아주 야심한 시간이었다.

“개성만점 초콜릿을 뽑아달라고 했지? 으드득!”

평소라면 전화 받는 사람의 입장을 생각하여 전화를 걸지 않았을 창현의 눈에 새파란 귀화가 번뜩이면서 자신을 이 상태로 몰아넣은 소녀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녁을 치킨으로 때운 소녀들은 각자의 시간을 보냈다.

창현을 꺾겠다며 저녁 식사 후 곧장 컴퓨터로 달려간 순규와 고등학교 진도를 위해 공부에 매진하는 주현과 달리 다른 소녀들은 TV앞에 옹기종기 모여 드라마를 시청하고 있었다. 선호하는 드라마가 달랐기에 거실과 안방 TV로 찢어진 상태였다.

한창 방영되던 드라마가 끝나고,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을 시청하던 수연이 문득 말했다.

“그러고 보니 창현이한테 언제 초콜릿 심사를 해달라고 할지 말을 안 했네.”

거실에서 TV를 시청하고 있는 것은 태연과 수연, 미영과 유리였다.

수연의 말에 태연이 눈을 반짝 빛내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아! 정말 그러네. 그럼 어떻게 하지?”

세 소녀가 소파 위를 차지하고 있었기에 바닥에 누워서 TV를 시청하던 유리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어떻게 하긴. 초콜릿 받았으니 조만간 먹어보고 알아서 말해주겠지.”

“물론 1등은 나일 테지만! 설거지 면제권은 내 거야.”

자신감이 묻어나오는 미영의 모습에 소녀들이 그녀를 째려본다. 도대체 저 출처를 알 수 없는 자신감은 어디서 흘러나오는지 모르겠다.

그러다 수연이 문득 깨달은 게 있는지 말한다.

“그러고 보니 개성만점이란 것이 다르게 해석 되서 정말 미영이가 1등하는 거 아냐? 개성만점이란 게 맛으로 치부되는 게 아니잖아.”

태연과 유리의 몸이 움찔했다. 수연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았던 것이다.

개성만점이란 것이 그런 함정을 내포하고 있을 줄이야.

“헉! 그것도 그러네.”

“서, 설마! 아니겠지.”

그녀들이 창현에게 가장 맛 좋은 초콜릿을 골라달라 하지 않고 개성만점의 초콜릿을 골라달라고 한 것은 스스로의 실력을 어느 정도 자각하고 있어서 그렇다. 누가 먹어도 아! 하고 감탄이 나올 정도가 되어야 맛을 평가해달라고 하지 오히려 원래 사놓은 초콜릿보다 떨어질 법한 맛으로 재탄생 시켜놓고 자신들의 창작물이라 하기에는 낯부끄러운 면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래서 개성만점 초콜릿이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자세히 생각해보니 다른 의미로 해석될 여지가 있지 않은가!

그것까지 미처 고려하지 못한 소녀들이었다.

자신들의 실수를 자각했을 때, 수연의 핸드폰이 울렸다.

야심한 시간에 핸드폰이 울리자 살짝 눈가를 찌푸린 수연이 핸드폰을 들어 전화 건 사람의 이름을 확인하다가 눈이 휘둥그레진다. 전화를 건 사람이 다름 아닌 창현이었던 것이다.

수연이 리모콘을 가지고 있는 태연에게 말했다.

“창현이야. 볼륨 좀 줄여.”

태연이 음향을 줄이기 시작했고, 수연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수연 누나죠? 초콜릿 먹어봤어요. 그래서 누나들이 말했던 심사인가 그거 말해드리려고요.

“뭐, 벌써 먹었다고? 잠시만.”

통화기에서 귀를 뗀 수연이 집이 떠나가라 소리쳤다.

“얘들아, 모여봐! 창현이가 초콜릿 먹고 평가 해주겠데!”

수연의 말을 들은 소녀들이 즉각 반응을 보였다.

“뭐? 벌써 먹어본 거야?”

“설거지 면제권이다! 어서 모여!”

안방에서 TV를 보던 효연, 수영, 윤아가 튀어 나왔고, 컴퓨터를 하던 순규와 공부를 하던 주현까지 거실로 나왔다.

멤버들이 모두 나오자 수연이 핸드폰을 스피커 모드로 전환하며 말했다.

“창현아 애들 모두 나왔어. 말해줘. 누구 초콜릿이 가장 개성만점이었어?”

“나일 게 분명하다니까!”

미영이 강력한 자신감을 선보였다.

그러자 그녀에게 쏟아지는 소녀들의 시선들.

그 시선에 압도된 미영이 처량한 표정을 지은 채 어깨를 축 늘어뜨린다.

그때 핸드폰에서 창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금 말한 거 미영 누나죠?

“으응.”

목소리가 심상치 않다는 걸 느꼈음일까. 수연이 얼떨결에 대답했다.

수연의 대답에 건너편에서 전해져오는 소리.

그 소리는 분명 으드득! 하는 소리였다. 이를 가는 소리 말이다.

-미영 누나랑 주현 누나의 초콜릿 아주 잘 먹었습니다. 너무 강렬한 맛이었어요.

절대로 맛있게 먹었다는 뉘앙스가 아니었다.

창현의 말에 주현의 안색은 흐려졌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느낀 것이다. 그 모습을 보면서 효연이 실실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런 창현의 뉘앙스를 느끼지 못한지 미영은 웃음을 지으며 자신감 가득한 얼굴로 소녀들을 보고 있었다. 미영의 모습을 본 소녀들은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하지만 이어진 창현의 말에 그녀들은 모두 아연실색 해야만 했다.

-개성만점 초콜릿은… 도저히 한 명만 뽑을 수가 없네요. 미영 누나와 주현 누나가 공동 1등입니다.

“……!”

창현의 말에 모두가 놀란 표정을 짓는다.

그러다 미영이 주현을 바라보다가 그녀를 와락 껴안으며 외친다.

“와! 주현아! 우리가 1등이래!”

“어, 언니!”

주현은 당혹스러운 표정이었다.

방금 전 느껴진 창현의 목소리는 결코 좋은 의미가 담긴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고, 내심 설거지 면제권을 포기해야 하나 실망하고 있었는데 1등이라니?

더욱 믿기지 않는 것은 미영도 1등이란 이야기였다.

그렇다는 건 자신의 초콜릿이 미영과 동급이라는 뜻?

엉뚱한데서 어퍼컷 한 대를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분명 1등이긴 한데 미영과 음식 실력을 동급으로 인정 받은 기분이랄까? 무척 찝찝했다.

하지만 그 감정도 잠시였다. 미영의 말을 듣는 순간 주현의 표정이 급변했다.

“주현아! 설거지 면제야! 설거지 면제!”

“아……!”

그렇다! 설거지 면제권을 획득한 것이다.

미영의 말을 듣는 순간 주현의 표정이 환하게 변했다. 그리고 그녀도 미영을 마주 껴안았다.

“…….”

반면 다른 소녀들의 표정은 참담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설마하니 자신들이 패하다니!

저마다 조금이나마 자신이 있던 그녀들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참패였다.

“주현이는 그렇다 쳐. 하지만 미영이한테 지다니…….”

“세상 살기가 싫어졌어…….”

-맛이 그냥…….

창현이 뒤이어 뭐라 말을 했지만 그것은 소녀들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충격이 큰 수연은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통화를 끊었다. 그리고 피곤하다면서 씻으러 간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 공동수상을 좋아하는 미영과 주현.

“뭐지? 소금이 아니었나? 아니면 창현이 입맛이 원래 이상한 건가?”

정황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효연은 그저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제24장 탄탄대로




지옥의 발렌타인 데이가 끝나고 하루하루가 흘러갔다.

발렌타인 데이 다음 날, 창현은 전날과 비슷한 양의 초콜릿을 받게 되었다. 그 때문에 사십 평이 넘는 그의 집이 박스로 빼곡해졌는데, 창현은 한동안 초콜릿을 두고 고민에 빠져야만 했다. 이 어마어마한 양의 초콜릿을 다 먹을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창현은 마침내 특단의 조치를 내리게 된다. 바로 초콜릿을 고아원에 기부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자신에게 처치 곤란한 초콜릿이었지만 이 정도 되는 양이라면 처지가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즉, 자신에게 효용이 없는 것이 남에게는 큰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다.

그렇다고 초콜릿을 보내준 팬들의 성의를 무시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하나하나 모든 초콜릿을 뜯어보며 안에 있는 편지를 읽으면서 창현은 초콜릿을 보내준 팬들의 성의를 받아들였고, 일주일이란 시간 동안 자신에게 보내진 초콜릿의 모든 편지들을 읽어봄으로써, 팬 사이트에 자신의 이름을 밝힌 모든 사람의 이름을 적어넣고 감사의 인사와 함께 초콜릿을 고아원에 기부하겠다는 말을 남겼다.

이러한 창현의 행동은 호평에 호평으로 이어져서 그의 이미지를 한단계 더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창현은 의도하지 않았는데 의외의 한 수가 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창현의 행동에 유일하게 이견을 제시한 사람이 있으니, 바로 석규였다.

발렌타인 데이로 인하여 AA엔터테인먼트에 초콜릿 융단 폭격이 이어짐에 따라 가장 신경이 예민해진 것은 다름 아닌 석규였다. 시도때도 없이 몰려드는 초콜릿 때문에 업무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탓이다.

그 때문일까? 창현이 초콜릿을 기부하겠다고 말할 때 가장 많은 반발을 보인 인물이 바로 석규였다.

팬들의 성의를 무시할 거냐는 말도 안 되는 말부터 시작하여 이런저런 말을 거침없이 하던 석규. 하지만 애초에 성의를 거절하지 않기 위해 편지를 모두 읽고, 좋은 일에 기부를 하겠다는 창현에 비해 명분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침음성과 함께 침몰할 수밖에 없었고, 이를 악 물고 도와준 석규에 의하여 초콜릿은 무사히 고아원에 전해질 수 있었다.

발렌타인 데이가 끝난 뒤 창현은 바쁜 일정을 소화해야 했다.

CF촬영과 화보 촬영이 연일 이어졌고, 모든 녹음이 끝났던 앨범의 마지막 한 곡을 새로 녹음까지 해야 했다.

예능 프로그램 섭외와 행사 같은 것도 물밀 듯이 몰려왔지만 모두 거절한 상태였다. 석규가 판단하길 아직 창현은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할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

물론 부족하다는 것이 아니다. 연예인으로서 창현은 무척 예의가 바르고 끼가 넘친다. 하지만 예능이 출연하는 것은 주로 음반 PR을 위해 나가는 것이 대부분인데, 현재 현의 미니 앨범 준비가 막바지에 이르렀다고 하자 그 관심은 폭주하고 있었다.

그 까닭은 간단하다. 바로 창현이 굿바이 무대를 한지 얼마되지 않은 시점에서 음반 발매 준비가 한창이었던 것이다.

앨범을 내고, 활동을 하면서 다음 앨범이 나오기까지 시간이 존재하는데, 이 여세를 곧장 몰아가느냐 안 가느냐가 무척 중요하다. 너무 오래 쉰다면 자칫 팬들의 머리에서 잊혀지는 사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창현은 현으로서 데뷔 무대를 가지면서 최고의 카리스마로 모든 무대를 마칠 수 있었고, 곧장 미니 앨범 발매를 위해 박차를 가했다. 그가 굿바이 무대를 한 것이 2월 10일이고 새앨범 발매일이 2월 20일이었으니 불과 열흘의 텀밖에 두지 않은 셈이다. 즉, 열흘이란 기간은 공백기라기보다 도리어 팬들의 궁금증을 더욱 불사르게 만드는 시간이 된 셈이다.

그동안 모든 앨범을 실패하지 않고 항상 대중들을 만족시켜온 현이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런 와중에 굳이 창현을 예능 프로그램에게 출연시킬 이유는 없다. 이미 앨범 PR이 되어가고 있는데,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함으로써 초래할 수 있는 막대한 손해를 감수할 만큼 얻는 것이 없었다. 현의 매력을 아직은 조금 더 베일에 감싸둠으로써 팬들의 관심을 이끌어낼 필요가 있었다.

시간이 흘러 마침내 앨범 발매일 이틀 전이 되었고, 석규는 이번 현의 타이틀 곡 <My Princess>의 뮤직비디오를 공개하였다.

이미 이번 창현의 타이틀 곡인 <My Princess>가 라샤의 미니 앨범 타이틀 곡 <가면의 기사>와 이어지는 곡이란 사실에 사람들은 많은 기대를 하고 있던 차였다. 라샤가 발라드 곡을 타이틀 곡으로 내세움으로써 그 가창력을 인정받았듯이, 현의 발라드 곡이라면 어떨지 수많은 사람들이 기대하고 있던 것이다.

수많은 궁금증을 가진 현의 팬들과 네티즌들이 <My Princess>의 뮤직비디오를 보았고, 결과적으로 만족스러웠다. 어찌 보면 재탕이라 할 수 있는 뮤직비디오의 호응도가 무척 좋았고, 가면의 기사 입장에서 새로 그려진 뮤직비디오가 기존의 관심도에 한층 더 관심이 더해지면서 폭발적인 관심을 끌어낸 것이다.

덕분에 윤아의 존재가 다시 한 번 부각되는 계기가 되었고, 그로 인하여 소녀시대의 관심도가 한층 더 높아졌다. 그리고 소녀시대가 데뷔 초읽기에 들어갔다는 소문이 돔에 따라 서서히 팬층도 형성되고 있는 분위기였다.

그것은 부수적인 것이고, 더욱 들불같이 퍼져나간 것은 가면의 기사의 정체에 관한 것이었다. 전에 라샤가 데뷔할 당시 유야무야 묻혀 넘어갔던 사항이지만 현이 복귀하고 뮤직비디오가 다시 돌풍이 됨에 따라 뮤직비디오에 출연한 가면의 기사 정체가 다시 한 번 핫이슈로 떠올랐다.

이에 대해 AA엔터테인먼트는 침묵하였다. 속시원하게 말할 수 있는 사항이기도 하지만 현재 한창 소위 말하는 빠순이 층을 형성하고 있는 현이 뮤직비디오에 출연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다가는 자칫 엄한 윤아에게 빠순이들의 눈먼 화살이 쏟아질 수 있을까 염려한 까닭이었다.

이러한 AA엔터테인먼트의 배려를 알아차린 SM엔터테인먼트에서는 감사의 인사를 표했고, AA엔터테인먼트는 국내 굴지 기획사 중 하나인 SM엔터테인먼트와 친분을 쌓을 수 있게 되었다.

현의 미니 앨범 선주문은 삼십만 장이었다. 음반 시장이 극도로 어려운 지금 이 시점에서 현이란 이름이 가진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석규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창현에게 말했다.

“이번 앨범도 대박이구나. 아주 잘했어.”

“…….”

창현은 그런 석규를 못마땅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생강차를 마셨다.

그런 창현의 모습에 석규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너 표정이 왜 그러냐?”

“…정말 몰라서 묻는 건가요, 아버지?”

어이가 없었던지 잠시 말을 잃은 창현이 석규를 보며 묻자 험험! 하면서 고개를 슬쩍 돌린다.

그런 석규의 모습에 창현이 생강차를 다시 한 모금 들이키며 말했다.

“아니, 발렌타인 데이에 받은 초콜릿을 고아원에 기부했다고 일주일 동안 삐치는 사람이 어디있어요? 그것도 좋은 일에 쓰겠다고 하는데 다 먹으라고 하다니! 정말 제가 얼굴이 화끈했다니까요.”

사건의 발단은 이러했다.

석규는 창현에게 초콜릿을 다 먹으라고 윽박질렀지만 창현이 거부한 채 초콜릿을 모두 고아원에 기부하자 석규는 삐쳐버려서 한동안 창현과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그 기간이 무려 6일이었다. 일주일 가까운 시간 동안 석규가 창현에게 말을 걸지 않은 날의 숫자였다.

그리고 앨범 선주문이 만족스러운 수준에 이르자 갑자기 표정을 달리한 채 창현에게 말을 건 것이다.

창현의 말에 발끈한 석규가 말했다.

“일주일이라니! 6일이다. 험험!”

자신이 말하고도 조금 무안했는지 헛기침을 하는 석규였다.

그런 석규의 모습에 창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휴! 알았어요, 일단 이 일은 덮도록 하고. 컴백 무대는 어디서 하기로 했어요?”

그걸 알려주기 위해 석규가 창현을 부른 것이었다.

석규는 창현이 그냥 넘어가주겠다고 말하자 안도의 한숨을 살짝 내쉬고는 말했다.

“라샤가 M본부에서 데뷔무대를 가졌고 네가 이번에 S본부에서 데뷔무대를 가지지 않았느냐? 그래서 이번에는 K본부에서 컴백 무대를 가지기로 하였다. 마침 금토일 연달아 이어지니 제대로 각인만 시킨다면 다음주에 앨범 판매가 더 활발하게 이루어질 거란 생각이다.”

“금요일이라… 얼마 안 남았네요.”

“촉박하지만 괜찮지 않겠느냐? 네 실력이라면 잘 해내겠지.”

고작 이틀 밖에 남지 않았건만 아주 태연하게 말하는 석규.

그 모습에 창현은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믿어줘서 고마워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무관심하다고 화를 내야 하는 건지 헷갈렸다.

하지만 어쩌랴. 이미 모두 정해진 것을.

자신은 그저 계약에 묶인 가련한 존재일 뿐이다.

“하아! 알겠어요. 아버지가 절 너무 믿어주시는 것 같아 어깨가 무겁네요.”

“하하! 내가 널 믿고 있다는 걸 알고는 있구나.”

비꼬는 의미에서 한 말이었지만 석규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는 웃을 뿐이었다.

“후우!”

창현의 한숨이 다시 한 번 퍼져 나갔다.


이틀 동안 창현은 컴백 무대를 위해 연습에 매진해야만 했다.

<Bad Boy>때는 강렬한 눈빛으로 관객들을 압도하는 카리스마적인 면모를 보였다면 이번 <My Princess>에서는 부드러운 모습을 보여줄 생각이었다.

그걸 생각함으로써 창현은 그냥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닌, 피아노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결정을 하였다. 물론 노래를 부르는 내내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이 아닌, 1절만 피아노를 연주하고, 2절은 앞으로 나아가 부를 생각이었다. 피아노를 연주함으로써 단순히 노래만 잘하는 가수가 아닌 악기에도 능통한 가수란 것을 입증할 수 있고, 이번 컨셉인 부드러운 남자로서의 면모도 각인시킬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이틀 동안 피아노로 어느 정도 숙달시킨 창현은 컴백 무대를 위해 움직였다.

AA엔터테인먼트에 보유하고 있는 벤은 총 두 대였는데, 이번에 창현이 데뷔함으로써 총 세 대가 되었다. 라샤와 창현이 각각 한 대씩 배정되었고, 나머지 한 대는 혹시나 모를 일에 대비하여 배치해두는 것이다. 덕분에 벤을 구입할 때 석규가 한동안 구입 여부를 놓고 상당한 고민을 했어야 했다.

“허! 이번에도 사람이 엄청 많네.”

K본부로 들어서던 창현은 줄지어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입을 쩍 벌렸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현에 관련된 피켓을 들고 있는 걸 보면 누굴 보러왔는지 알 수 있었다.

“이렇게 관심 받는 건 무감각해지지 않네.”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받는다는 건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특히 연예인에게 있어 관심은 필수적인 요소인 만큼 창현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방송국 안으로 들어선 창현은 곧장 배정된 대기실로 향했다.

현이란 이름이 주는 보증수표답게 그의 곡이 발표됨과 동시에 각종 음원 차트를 휩쓸었다. 게다가 엄청난 앨범 판매량으로 인하여 컴백 첫주만에 1위 후보에 올랐으며, 사실상 경쟁할 의미도 없이 1위가 낙점된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이었다.

솔직히 앨범을 제작한 창현의 입장에서 그러한 것들은 무척 기뻤지만 함부로 내색할 수 없었다. 아직 컴백 무대를 성공적으로 치르지 못한 시점에서 교만에 빠지다가는 자칫 여태까지 쌓아온 것들을 한순간에 물거품으로 만들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한 사실들에 교만해질 창현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미연의 사태를 방지하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다.

이번 창현의 의상은 부드러운 이미지답게 깔끔한 정장 차림의 옷이었다. 입고 나니 처음에는 상당히 어색했지만 메이크업을 하자 마치 어린 신사와도 같은 느낌이 들어 무척 만족스러웠다.

창현의 순서는 제일 마지막이었고, 출연한 가수들의 노래를 들어보면서 서서히 마음을 다잡아나갔다.

‘리허설 때처럼만 하자. 그럼 되는 거야.’

창현이 리허설을 할 때 난리가 났었다. 본방도 아니건만 보는 사람들의 함성이 무대를 뒤덮을 정도로 엄청났고, 언제 외워왔는지 창현이 부르면 노래를 따라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노래가 끝날 때 보인 폭발적인 반응은 결코 전보다 떨어지지 않았다.

프로페셔널답게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지만 무대를 앞두면 두근거리는 마음은 같았다.

어느덧 창현의 순서가 되었다.

침착하게 숨을 몰아쉬면서 창현이 무대 위로 올라갔다.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자리를 가득 채운 관객들이 모습을 드러낸 창현의 모습에 환호성을 지른다.

창현은 그런 관객들에게 빙긋 웃음을 지어보이며 피아노 앞에 앉는다. 그리고 가볍게 손을 풀 듯이 피아노 건반을 누르며 연주를 시작한다.

MR이 흘러나오지 않는 까닭은 가수 현이 피아노 앞에 앉은 것이 단순한 쇼맨십이 아닌 정말 피아노로 연주한다는 사실감을 부여하기 위함이었다.

곧이어 MR이 흘러나오기 시작했고, 창현의 피아노 소리와 함께 조화를 이루며 노래가 시작된다.

<가면의 기사>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슬픈 감정을 담은 채, 묵묵히 그녀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마음을 표현하며 창현의 음색에 슬픔이 젖어든다.

그 슬픔 음색이 마음을 적셔서 그러할까. 처음에는 엄청난 환호성을 보여주던 관객들이 쥐죽은 듯이 조용해진다.

한 소절마다 흘러나오는 슬픔과 심금을 울리는 피아노의 선율.

창현이 익힌 음향총서는 비단 노래뿐만 아니라 모든 악기에도 감정을 실을 수 있다. 창현은 노래를 하면서 그것을 운용한 것이다.

1절이 끝나고, 간주가 흘러나오면서 피아노에 설치된 마이크를 뽑아든 창현. 마이크를 들고 앞으로 나와 노래를 부른다.

그녀를 무력하게 보내줘야 했던 남자의 심정.

그녀를 영원히 지켜주지 못한 남자의 심정.

마지막 그녀의 사랑한다는 슬픈 한마디에 슬픔을 내색하지 않고 억누르는 남자의 심정을 담아내며 관객들에게 감정을 전달한다.

이것은 마음을 울리는 노래가 아니다.

듣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노래였다.

“Good bye, My Princess."

짝짝짝짝!

와아아아아!

노래가 끝나고 창현은 뮤직비디오의 대사를 말하자 노래의 여운에 취해있던 관객들이 우레와도 같은 박수와 함성을 지른다.

스스로가 만족한 무대였고, 보는 사람들에게도 완벽한 무대였다.

무대가 끝났지만 창현은 내려가지 않았다. 그가 마지막 무대였고, 1위 후보였기에 1위 시상식을 위해 무대 위에 있어야 했던 것이다.

무대 위로 올라온 MC는 간단한 멘트와 함께 1위곡을 뽑았다.

이미 시상식을 하기도 전에 결정이 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만 창현은 가슴이 두근두근거리는 걸 느꼈다.

생각해보니 엄청난 양의 앨범을 팔고, 아시아 스타라고 불리지만 창현은 데뷔 이후 1위란 것을 해본 적이 없다.

그랬기에 더욱 떨리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창현의 시선이 MC의 입에 고정되어 있었다. 저 입이 열리는 순간 1위가 누구인지 밝혀질 것이라.

그리고 서서히 MC의 입이 열렸다.


1위는 두말할 것도 없이 창현의 것이었다.

처음으로 1위를 차지하였기에 창현에게 있어 각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석규에게, 라샤에게 감사의 소감을 전달한 창현은 왜 1위를 한 가수들이 상투적인 소감을 말할 수밖에 없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정말 기쁘면 생각나는 것도 비슷한가보다. 엉뚱한데서 만류귀종이란 단어를 느끼는 창현이었다.

그렇게 창현의 1위를 기념하여 석규가 AA엔터테인먼트 회식을 열었고, 창현은 감사의 인사를 하면서 저녁을 먹을 수 있었다.

어른들은 2차로 계속 가고, 창현은 내일 방송을 위해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온 창현은 우유를 마시기 위해 냉장고 문을 열었다. 지난 일 년 동안 6cm가 넘게 컸지만 아직까지 많이 부족한 키였다. 조금 더 크기 위해서는 우유를 많이 마시고 일찍 자는 것이 필수였다.

냉장고를 연 창현의 표정이 찡그려졌다.

요 며칠 동안 마트에 가질 않았더니 냉장고가 텅텅 비어있던 것이다.

“으, 기껏 들어왔더니 다시 나가야겠네.”

우유만 없는 거면 그냥 집에 있었을 테지만 냉장고에 있는 거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당장 내일 아침 대용으로 할 시리얼조차 없는 상태였다. 게다가 이것저것 다 먹은 상태였기에 창현은 어쩔 수 없이 생필품 보급을 위해 다시 집밖으로 나와야 했다.

근처 마트로 향한 창현은 우유를 비롯하여 계란이나 시리얼, 쌀 등 떨어진 생필품들을 사들였다. 외출할 때 파카와 안경, 모자를 하였기에 창현을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간단하게 장을 본 창현은 마트를 나오다가 입맛을 다셨다.

“그러고 보니 갑자기 생과자가 먹고 싶네.”

근처에 생과자를 파는 곳이 있다는 것을 떠올린 창현.

제법 무거웠지만 생과자에 대한 열망이 자리하고 있었기에 인근에 위치한 생과자 전문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저기 맞네.”

우연히 지나치다가 본 기억을 더듬어서 길을 걷던 창현은 저 멀리 생과자 전문점이 보이자 환한 표정을 지은 채 생과자 전문점에 향했다.

“응?”

생과자 전문점에 거의 다 도착했을 때, 창현은 가게 앞에 익숙한 모습의 소녀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낯익은 뒷모습.

창현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소녀를 불러보았다./

“수영 누나!”

“……!”

그렇다. 생과자 전문점에 서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수영이었던 것이다.

자신의 이름이 뒤에서 들려오자 수영의 몸이 움찔하더니 뒤로 돌아간다. 아무래도 자신의 이름이 나올 수 없는 상황에서 이름이 나오다 보니 행동이 조심스러운가보다.

조심스럽게 시선을 뒤로 옮긴 그녀는 이내 맥이 탁 풀린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이름을 부른 것이 누구인지 알아차린 것이다.

하지만 확신은 하지 못했는지 작게 물었다.

“설마 창현이?”

조심스럽게 묻는 그녀의 모습에 창현이 싱긋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수영이 반가운 표정으로 창현에게 다가온다.

“와! 설마하니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 맞다! 너 1위했더라. 축하해.”

1위를 하고 회사 사람들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받는 첫 축하. 물론 문자로도 받았지만 얼굴을 맞대고 받는 첫 축하 인사였다.

창현은 목도리를 풀며 웃음을 지어보였다.

“고마워요, 누나. 그런데 누나가 여기 웬일이에요?”

“응? 그러는 넌?”

오히려 되묻는 수영의 모습에 창현이 앞에 있는 생과자 전문점에 눈짓을 하면서 말했다.

“그야 당연히 생과자를 사러 왔죠.”

“나도 마찬가지야. 생과자 좋아해서 사러왔거든.”

그러고 보니 소녀시대가 머무는 숙소와 창현이 살고 있는 곳과 거리가 그리 멀지 않다. 생과자를 좋아하고, 우연찮게 사러온 시간이 맞아떨어지면 충분히 만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군요. 누나도 생과자 좋아할 줄 몰랐어요.”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애들이 말하길, 너 딸기 주스 좋아한다고 하던데?”

매우 좋아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결코 밝히고 싶지 않은 진실이었다.

창현은 살짝 충격을 받은 듯 비틀거리며 말했다.

“컥! 그거 누가 말해줬어요?”

“태연이가 말해주던데? 창현이 너가 딸기 주스만 마셔서 키가 작다고.”

“익! 제가 작긴 어디가…….”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반박하려던 창현은 눈앞에 선 수영을 보더니 점점 말끝이 흐려졌다.

얼핏 봐도 수영의 키가 창현과 비슷하거나 좀 더 큰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런 창현의 모습에 수영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쿡쿡! 왜 그런지 알 것 같네. 그런데 넌 뭐 사러왔어?”

“저요? 당연히 생과자 사러왔죠. 그중에서도 김 맛 나는 거 있잖아요. 그게 진짜 맛있더라고요.”

너무 오랫동안 먹어보지 못한 탓일까.

한순간 창현의 눈이 몽롱해졌다.

그 모습을 본 수영이 웃음을 짓더니 말했다.

“그것도 맛있긴 맛있지. 하지만 제일 맛있는 건 가운데 땅콩이 박힌 거야. 야금야금 과자를 먹다가 마지막에 땅콩 있는 부분을 딱 먹을 때 느껴지는 고소함이야 말로 최고지!”

그것은 창현도 동의하는 바였다.

하지만 자신의 말에 웃음을 지은 수영의 모습 때문일까?

창현은 그 말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 이면에는 자신보다 키가 큰 수영에 대한 질투심도 함께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제가 말한 게 더 맛있어요. 아마 가게에서도 제일 많이 팔릴 걸요?”

그 말에 수영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한다. 감히 자신의 과자 예찬론을 정면으로 거부하다니!

“흥! 그건 네가 모르는 소리야. 생과자 하면 내가 말한 과자지. 생과자 중에서도 으뜸이라고. 당연히 제일 많이 팔리는 것도 이거고.”

“아니라니까요! 제가 말한 게 최고에요.”

묘한 데서 경쟁심이 붙어버린 두 사람이었다.

결국 신경전으로 번져버리자 수영이 창현을 보며 말했다.

“좋아! 그럼 내기를 하자. 지금 가게 안으로 들어가서 주인 아저씨한테 물어보는 거야. 네가 말한 게 더 많이 팔린 지 아니면 내가 말한 게 더 많이 팔린 지. 그리고 내기에서 진 사람이 이긴 사람에게 과자 사주기. 어때? 뭐 자신 없으면 거절해도 상관없고.”

그러면서 창현을 도발적으로 눈으로 바라보는 수영.

창현은 발끈하며 대답했다.

“좋아요! 해보죠, 그 내기!”

“훗, 좋아. 내기 성립. 자, 들어가자고.”

두 사람이 함께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수영이 주인으로 보이는 아저씨에게 다짜고짜 물었다.

“아저씨, 이 가게에서 이 과자가 제일 잘 팔리나요, 아니면 이 과자가 제일 잘 팔리나요?”

물어보는 수영은 주인 아저씨에게 시선이 향해 있었고, 창현도 주인 아저씨를 바라보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주인 아저씨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가게 안에 들어왔으면 과자나 구경하던가 맛을 보고 결정을 내려야지 다짜고짜 과자 판매량을 물어보는 것은 무슨 행동이란 말인가?

하지만 주인 아저씨도 굴러먹을대로 굴러먹은 프로였다.

재빨리 정신을 수습하며 수영의 물음에 대답해줬다.

“이 과자가 제일 잘 팔리는데?”

주인 아저씨가 가리킨 것은 창현과 수영이 말한 과자가 아닌 엉뚱한 과자였다.

“…….”

“…….”

자신들의 선택이 어긋나자 창현과 수영은 한순간 꿀 먹은 벙어리처럼 할 말을 잃었다. 설마 둘 다 틀릴 줄이야. 그것도 모르고 아는 척을 했다니. 얼굴이 뜨끈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대로 승부를 포기할 수 없는 노릇.

수영이 재차 물었다.

“그럼 이 두 과자 중에서 어느 게 더 많이 팔렸나요?”

“두 과자 중에서? 잠시만.”

주인 아저씨는 무언가를 가지고 오더니 그것을 확인하기 시작한다. 아무래도 과자를 판 내역서인 듯했다.

내역서를 확인한 주인 아저씨가 더 많이 팔린 과자를 가리켰다.

“이 과자가 50g 정도 더 많이 팔렸네.”

주인 아저씨가 가리킨 과자.

그것은 바로 수영이 말했던 땅콩이 박힌 과자였다.

자신의 승리가 확정되자 수영이 주먹을 불끈쥐었다. 그에 반해 창현의 고개는 푹 떨궈졌다.

“아싸! 내가 이겼다.”

수영이 왜 좋아하는지 모르는 주인 아저씨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이번에는 김 맛이 나는 과자를 가리켰다.

“어제는 이게 80g 더 많이 팔렸네. 둘 다 인기가 많은 과자라서 판매량은 비슷비슷해.”

“윽! 하, 하지만 내가 이겼어.”

창현을 보면서 말하는 수영. 창현도 이견은 없었다.

“후! 오늘 날이 안 좋았네요. 제가 졌어요.”

“아싸! 창현이 너 생각보다 대인배인데? 쉽게 인정하는 걸 보니.”

“휴우! 과자나 고르세요. 내기에서 졌으니 제가 살게요.”

창현은 그저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이렇게 패배할 줄이야. 내기에 강한 자신이 운에서 밀렸다는 게 쉽게 인정되지 않았다.

그에 반해 내기에서 이긴 수영은 희희낙락이었다.

수영은 밝은 표정으로 이것저것 과자를 고르고 있었다.

“이것도 주시고요. 네, 이것도요. 그리고 이것도 주세요.”

그렇게 해서 그녀가 고른 과자의 총 양은 무려 다섯 근이었다. kg으로 하면 3kg이나 산 것이다. 100g당 천원이니 3kg면 무려 3만원이나 된다는 이야기다.

수영은 창현과 시선이 마주치자 웃음을 흘렸다.

“헤, 헤헤! 너무 많이 사버렸네.”

그렇게 말하지만 덜 생각은 없어보였다.

창현은 자신의 눈치를 보는 수영의 모습에 피식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에구, 돈에 제한을 걸지 않은 제가 실수했네요. 돈 버는 입장이니 이 정도는 크게 부담 안가요. 대신에 누나 혼자 드시지 말고 다른 누나들이랑 같이 드세요.”

“내, 내가 언제 혼자 먹으려 했다고 그래!”

정곡을 찔린 것일까. 수영이 소리를 버럭 지른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말했으니 혼자서 먹지 않으리라.

그래도 혹시나 몰랐기에 창현이 말했다.

“누나들한테 전화해서 확인할 테니까 혼자 먹으면 안 돼요.”

“쳇!”

창현의 말에 혀를 차며 아쉬워하는 수영이었다.

그 사이 창현은 자신이 먹을 과자를 고르고 함께 계산을 하였다. 그리고 과자를 수영에게 건넸다.

“들어드리고 싶은데 저도 짐이 있어서요. 이해해주세요.”

“과자도 사줬는데 뭘. 이 정도는 나도 충분해.”

가뿐하게 과자를 드는 수영. 그녀의 얼굴은 싱글벙글이었다.

가게를 나선 두 사람은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며 걸었다.

그러다 수영이 무언가 떠오른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아! 그런데 창현아!”

“네, 왜요?”

“너 발렌타인 데이 때 왜 미영이랑 주현이를 뽑은 거야? 솔직히 주현이 혼자면 이해를 하겠는데 왜 미영이까지…….”

“아, 발렌타인 데이요?”

수영의 말에 잊고 싶은 발렌타인 데이를 떠올린 창현.

그의 입에서 으드득! 하고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 옆을 보니 수영이 움찔한다. 생소한 창현의 모습에 당혹스러운 듯했다.

창현이 당시 그 상황을 떠올리며 말했다.

“아주 인상 깊은 발렌타인 데이였지요. 주현 누나의 초콜릿은 소금 맛이 너무 강렬해서 한동안 고생을 했고, 미영 누나의 초콜릿은 고추냉이가 안 보이게 덩어리가 져서 마음 놓고 먹다가 덩어리를 씹어버렸거든요. 누나들이 개성만점 초콜릿을 골라달라고 해서 두 초콜릿을 골랐어요.”

그러면서 수영을 보니 수영은 창현을 보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뭐? 주현이는 소금, 미영이는 고추냉이라고? 아, 그래서 개성만점이었구나. 풋, 푸하하하! 너 고생 좀 많이 했겠다.”

“끄응! 그 일로 인해서 제가 한동안 미각을 잃었다니까요? 무슨 대장금도 아니고.”

창현의 말에 수영은 계속 폭소를 터뜨리고 있었다.

계속해서 웃던 그녀는 배를 부여잡으며 간신히 웃음을 그쳤다.

“끄흑흑! 너무 웃긴다! 그런데 너 그거 알아? 네가 그때 말해준 개성만점 초콜릿 선정으로 인해서 미영이랑 주현이가 설거지 당번에 제외되었거든.”

창현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나쁜 의미로 했는데도요?”

“그때 그걸 알 리가 있나. 우리는 그냥 당첨된 거에 망연자실하고 있었지. 그런데 그런 에피소드가 있었다니. 애들에게 말해줘야지. 킥킥!”

이야기가 끝날 무렵, 갈림길이 나왔다.

창현은 수영을 보면서 말했다.

“이미 지난 일이니 어쩔 수 없죠. 에휴! 절 골탕 먹였기에 저도 맞불 놓은 건데 결과적으로 도움만 준 꼴이네요. 어쨌든 누나 잘 들어가시고 과자 꼭 나눠 드세요.”

“알았어. 창현이 너도 조심해서 들어가고.”

그렇게 창현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가는 수영.

그녀의 입가에는 미소가 맺혀 있었다.

“미영이 너 한동안 자기가 요리 잘한다고 잘난 척 했었지? 넌 오늘부로 끝이야.”

지난 일주일 넘게 숨겨졌던 진실은 수영을 통하여 숙소로 향하고 있었다.


“얘들아, 나왔어!”

개선장군처럼 당당하게 문을 열고 숙소 안으로 들어서는 수영.

“왔어?”

막 드라마가 시작될 시간이었기에 TV앞에 옹기종기 모여있던 소녀들이 심드렁하게 수영을 반겼다.

마음에 들지 않는 소녀들의 리액션에 수영의 눈이 가늘어졌다.

“호오! 너희들이 그런 반응을 보인단 말이지?”

“언제부터 그렇게 리액션에 신경을 썼는데.”

톡 쏘며 말하는 수연. 수영의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았나보다.

하지만 수영 또한 만만치 않은 스펙의 소유자. 쉽사리 밀리지 않았다.

아니, 도리어 입가에 미소를 지어보였다.

“나에게 이렇게 나오겠다 이거지? 그럼 어쩔 수 없지. 이건 다 내가 먹는 수밖에.”

거실로 들어선 수영은 품안에 큰 봉투를 한아름 안고 있었다.

그것을 본 소녀들의 눈이 빛났다.

유리가 수영을 보면서 물었다.

“수영아, 그게 뭐야? 뭘 그렇게 가지고 있는 거야.”

유리의 물음에 수영이 씨익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이거 전부 생과자야. 무려 3kg나 된다는 말씀!”

“뭐? 생과자? 그것도 3kg이나 된다고? 얘들아! 수영이가 생과자 엄청 사왔다!”

유리의 외침이 숙소를 뒤흔듬에 따라 소녀들이 우르르 방에서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망설임없이 곧장 수영에게 달려들었다.

“야! 이것 놔! 이 쪼그만 것들이!”

수영은 강력한(?) 힘으로 자신의 팔 하나씩을 붙잡는 태연과 순규를 보며 소리를 질렀다. 일대일이었으면 능히 제압할 수 있겠지만 각각 팔 하나에 올인하는 상황. 수영은 맥없이 두 소녀에 의해 진압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 품안에 안고 있던 생과자를 빼앗은 소녀들은 봉투를 열고 생과자를 꺼내놓기 시작했다.

무려 3kg나 되는 생과자의 양은 어마어마했다.

“우와! 이렇게 많이! 만세!”

소녀들은 엄청난 양의 생과자를 보고 환호성을 질렀다. 소녀들 중 생과자를 싫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아, 안 돼!”

수영은 자신의 생과자에 마수를 뻗히는 소녀들의 모습에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정면에서 뻗어오는 주현의 손에 의하여 입이 봉해질 수밖에 없었다. 주현도 생과자를 무척 좋아한다.

“읍! 읍!”

포박에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치는 수영이었지만 세 소녀의 힘을 당해낼 수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소녀들에 의해 3kg에 달하는 생과자는 무참하게 찢겨져 나갔고, 수영 앞에 남은 것은 얼마 되지 않는 양뿐이었다. 수영을 포박하고 있던 태연과 순규는 이미 일정 지분을 약속받았기에 과자의 양을 보고도 웃음을 짓고 있었다.

“이, 이것들이! 내 생과자를… 흑흑!”

포박에서 벗어난 수영이 엉금엉금 생과자 앞으로 기어가서 통한의 눈물을 흘린다. 하지만 그런 수영의 모습을 동정하는 소녀는 없었다. 생과자의 양이 현격하게 줄었다고 하나 수영의 앞에 남은 것이 제일 많은 양이었던 것이다.

태연이 승리자의 미소를 지으며 생과자 한조각을 베어 물며 물었다.

“그런데 수영이 네가 웬일로 생과자를 이렇게 많이 산 거야? 이 정도면 돈 엄청 썼을 텐데.”

그 말에 다른 소녀들도 동감이라는 눈빛으로 수영을 바라본다. 평소 간식거리를 사오면 혼자서 은밀하게 처리하는 수영이 이렇게 눈에 띌 정도로 어마어마한 양을 사오다니 조금 의외였다.

우울한 기색으로 생과자를 바라보던 수영은 태연의 질문에 무언가 생각난 듯 입가에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했다.

“아, 이거 내 돈으로 산 거 아니야. 창현이가 사준 거야.”

“뭐, 창현이?”

수영의 말에 소녀들이 흠칫하면서 즉각 반응을 보인다. 설마하니 여기에서 창현의 이름이 나올 줄 몰랐던 것이다.

그런 소녀들의 반응에 수영이 한껏 미소를 지어보인다. 그것은 승리자의 미소였다.

“훗! 역시 놀라는군. 생과자를 사려고 가게에 갔는데 창현이도 왔더라고. 그래서 이야기를 나누는데 언쟁이 붙은 거야.”

“언쟁? 창현이 성격에 먼저 싸움을 걸 리 없을 테니 네가 먼저 건 거 아니야?”

자신을 아주 파이터로 만드는 수연의 말에 수영이 발끈했다.

“아니거든! 창현이가 먼저 걸었어! 물론 내가 딸기주스 좋아하는 거랑 키로 조금 놀리기도 했지만.”

“키? 키라면 창현이가 조금 예민하지.”

키 이야기에 태연이 웃음을 짓는다. 처음 만났을 때 자신과 비슷하던 모습을 떠올린 것이다.

창현의 키가 별로 크지 않다는 것을 아는 소녀들도 수영의 말에 대강 납득하는 표정이었다.

수영의 말이 이어졌다.

“그래서 서로 선호하는 과자로 언쟁이 붙었는데 결론이 안 나서 주인 아저씨에게 물어보기로 했거든. 그래서 내기를 하게 되었지. 어느 과자가 더 많이 팔리느냐 하고 말이야. 그리고 진 사람이 이긴 사람에게 과자를 사주기로 했어. 결과적으로 내가 이기기는 했는데 비슷하게 팔린다고 하더라고. 어쨌든 이겼기에 들뜬 마음에 이것저것 골랐는데 무려 3kg나 사버렸어. 창현이가 그냥 사주더라고. 그래서 냉큼 가져왔지.”

“하지만 3kg면 좀 많지 않아? 돈 많이 나왔을 텐데.”

걱정스러운 태연의 물음. 그러면서 과자는 깨작깨작 먹고 있다.

수영이 어깨를 으쓱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창현이가 사주더라고. 자기 돈 잘번다고.”

“하기야, CF도 찍고 음반도 엄청 많이 팔리니까 돈 많이 벌겠지. 어쨌든 창현이가 사줬다는 거네.”

“괜히 수영이한테 고마워했네. 자, 모두 창현이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먹자.”

“이, 이것들이!”

소녀들의 반응에 다시 한 번 발끈하는 수영. 하지만 이내 그녀의 입가에는 미소가 자리했다. 창현에게 들은 에피소드가 떠오른 것이다.

수영은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얘들아, 내가 창현이한테 그 발렌타인 데이 판정에 대해 물어봤거든?”

그 말에 반응을 보이는 그녀들.

솔직히 발렌타인 데이 때 창현의 판정은 그녀들에게 있어 세계7대 불가사의 다음으로 의혹이 가는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주현이 1등을 할 수 있다. 요리도 제법 하는 편이고, 차분한 성격으로 초콜릿을 충분히 맛있게 만들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녀들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미영이 주현과 공동 1등을 했다는 것이다. 주현의 음식 솜씨는 어느 정도 인정받고 있지만 미영이 1등을 했다는 것은 그녀들의 상식 선상에서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발렌타인 데이 이후 미영이 어찌나 요리 강론을 펼쳤는지 소녀들의 내면에 살기가 충만할 정도였다.

수영은 자신에게 집중되는 시선에 씨익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주현이랑 미영이가 1등은 맞아. 큭큭큭!”

창현에게 들었던 사실이 떠오르자 웃음을 참지 못하는 수영.

그런 수영의 모습에 소녀들의 눈에 의문이 생겨난다. 분명 무언가가 있는 것임이 틀림없었다.

한동안 웃음을 짓던 수영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창현이가 말했던 개성만점이란 것은… 아주 맛이 제대로 폭탄이었던 걸 의미하고 있었어. 주현이 너! 초콜릿에 아주 소금을 듬뿍 넣었다며?”

수영의 말에 효연을 제외한 다른 소녀들이 모두 놀란 시선으로 주현을 바라본다.

주현은 화들짝 놀라면서 손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네? 제, 제가요?”

“그래. 창현이가 네 초콜릿을 먹는 순간 너무 짜서 물을 한통 다 마셨다고 하더라고.”

“그, 그럴 리가……. 전 분명 서, 설탕을 넣었는데.”

당혹한 주현이 말을 더듬었다. 분명 레시피대로 설탕을 넣었는데 짠맛이라니? 설마 자신이 소금을 넣었다는 이야기인가?

그런 주현을 당혹감에서 해방시켜준 것은 효연이었다.

효연은 주현을 보며 중얼거렸다.

“역시 내 생각에 맞았네.”

“…….”

효연의 중얼거림에 소녀들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효연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사실 너희들이 밤에 몰래 초콜릿을 다시 만들까봐 내가 설탕 통에 소금을 넣어놨거든. 중간에 맛을 보면 초콜릿을 망치는 거고 맛을 안 보면 소금 초콜릿이 만들어질 거라 생각했는데 주현이가 제대로 넣었나보네. 얼마나 많이 넣었으면 창현이가 그런 반응을 보였을까.”

효연의 말에 주현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어, 언니가 소금을 넣었다고요?”

“응. 결과적으로 주현이 네가 이기긴 했지만 창현이가 불쌍하게 희생되었구나. 크크!”

웃음을 짓는 효연의 모습에 주현의 고개가 푹 숙여진다. 1등을 했다고 좋아했지만 결과적으로 상처뿐인 승리였다.

소녀들은 그런 주현을 안쓰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럼 미영이는 뭐로 개성만점이었는데?”

효연의 물음에 소녀들의 시선이 미영에게 집중되었다.

시선집중을 받은 미영은 잔뜩 긴장한 표정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하여도 자신이 정말 초콜릿을 잘 만들어서 1등을 한 줄 알았는데 수영의 설명과 주현의 반응을 보니 뭔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수영이 미영을 보면서 물었다.

“일단 말하기 전에 한 가지 물어보자, 미영아. 너 그때 초콜릿에 뭐 넣었어?”

“고추냉이를 넣었는데…….”

작은 목소리로 대답하는 미영. 하지만 소녀들은 그것을 들을 수 있었다.

모두가 놀란 시선으로 미영을 바라본다. 설마하니 초콜릿에 고추냉이를 넣을 줄은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그 시선을 받으면서 미영이 고개를 숙인다.

“분명 내가 먹을 땐 맛있었는데…….”

수영이 그 말을 인정해주었다.

“응, 맞아. 창현이가 네 초콜릿 맛있었데.”

그러자 미영의 고개가 다시 들리면서 환한 표정을 지어보였고, 소녀들의 얼굴에는 말도 안 돼! 라는 표정이 생겨났다.

수영이 미소를 지어보였다.

“후후! 바로 처음에만 말이지. 미영아, 넌 그거 알아? 네가 넣은 고추냉이가 다 풀어지지 않고 덩어리가 져서 초콜릿에 포함되었다는 걸.”

“……!”

수영의 말에 소녀들은 물론 미영까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고추냉이 덩어리라니. 너무 상상력을 자극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창현은 그것을…….

소녀들의 상상을 알아차린 듯, 수영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맞아. 창현이는 미영이의 초콜릿을 맛있게 먹었고, 그걸 와그작 씹어버린 거지. 그로 인해 창현이가 미각을 잃었다고 하더라. 마치 대장금처럼, 큭큭큭!”

고추냉이 덩어리를 씹었다고 말하던 창현의 표정이 떠올라서였을까. 수영은 배를 부여잡고 웃음을 지었다.

미영은 고개를 푹 숙였다. 결국 자신이 초콜릿을 잘 만들어서 이긴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소녀들은 그런 미영을 불타는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진실이 이러한데 그동안 감히 우리에게 자기가 요리를 잘한다고 요리를 선보이는 만행을 저지르다니…….”

“미영 양의 죗값은 추후에 톡톡히 치르도록 하지.”

곧 있으면 드라마가 할 시간이었기에 미영은 소녀들의 폭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과자를 바리바리 싸들고 TV 앞으로 향하는 소녀들을 보며 수영이 외쳤다.

“야! 너희들 창현이가 문자로 과자 먹은 거 물어보면 내가 나눠줬다고 해!”

그러면서 수영도 과자를 싸들고 TV 앞으로 향한다.

처음 이 자리에 남은 것은 아직도 충격에 빠져있는 주현과 미영뿐.

둘 모두 상처뿐인 영광만을 얻게 되었다.


“이게 뭐죠, 아버지.”

창현은 석규가 내민 스케줄 표를 보고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금요일에 K본부에서 컴백 무대를 가진 창현은 토요일, 일요일 모두 성공적으로 무대를 치르면서 S본부 가요 프로그램에서도 1위를 하는 기염을 토한다.

창현의 노래는 여태까지 그러했던 것처럼 하나의 폭풍을 일으키며 대한민국을 휩쓸었다.

가창력이 돋보이는 발라드 장르를 택한 창현의 노래는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힘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 음악에 매료된 사람들은 기존의 팬들을 한층 더 확고하게 다지는 계기가 되었고, 순수한 음악성에 이끌려 온 팬들도 창현의 팬으로 소화하게 되었다. 이번 앨범이 일종의 굳히기가 된 셈이다.

그동안 창현은 첫 미니 앨범인 <Go&Sop>에서 신비주의라는 컨셉으로 폭발적인 가창력과 신비함으로 팬들을 끌어들였으며, 정규 1집 앨범인 <Bad Boy>에서 다양한 장르의 노래와 한층 더 강렬해진 부분 노출로서 신비함을 더욱 부채질함으로써 팬들을 끌어들였다. 그리고 이번 두 번째 미니 앨범인 <My Princess>에서 잔잔하면서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가창력으로 다시 한 번 노래 실력을 인정받았을 뿐만 아니라 나쁜 남자에 이은 부드러운 남자로서 그 비주얼도 인정받게 되었다.

솔로로 활동하게 되면 자연스레 그룹에게 비주얼 면에서 압도당할 수밖에 없는데, 창현은 나쁜 남자의 모습과 부드러운 남자의 모습을 모두 소화해 냄으로써 1인 그룹이라 불릴 정도로 비주얼로서도 사람들에게 각광을 받고 있었다.

단 한 번도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지 않았고, 아직까지 그 모든 것들이 베일에 감싸져 있는 창현이었기에 여러 예능 프로그램 게스트 섭외 순위 1위이기도 하였다. 방송사에서는 창현을 출연시키라는 압박을 AA엔터테인먼트에 가할 정도로 창현의 인기는 폭발적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 인지도에 비해 창현의 스케줄은 그리 타이트한 편이 아니다. 물론 전보다 훨씬 타이트 했지만 확실하게 휴식을 취할 시간이 주어졌기에 다른 연예인들보다 훨씬 낫다고 볼 수 있다.

밀려오는 각종 CF제의와 화보 촬영, 그리고 인터뷰 요청은 석규로서도 난감하게 만들 정도로 쌓여나가고 있었다. 남들은 어떻게든 따내기 위해 고심하는 것을 석규는 어떻게 하면 잘 거절할지 고민하는 처지였으니 말이다. 괜찮은 CF와 화보 촬영 등을 선별하느라 요즘 골머리가 썩을 지경이었다.

그 와중에 발렌타인 데이로 인한 초콜릿 폭격이 이어졌고, 그로 인해 업무에 차질이 빚어져서 초콜릿을 다 먹으라고 했는데 창현은 앙큼하게도 그것을 다 기부하겠다고 말했다.

그래서 석규는 모종의 복수를 결심하게 되는데, 바로 창현의 스케줄에 고아원 봉사를 넣어버린 것이다.

당연히 그것을 본 창현은 황당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석규가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뭐긴 뭐냐. 네가 저번에 초콜릿을 기부함으로써 좋은 일을 하지 않았더냐? 그래서 고아원에 가서 좋은 일좀 하라고 스케줄에 넣어준 게다.”

“설마 언론에 보이기 위한 그런 거 아니겠죠?”

창현이 표정을 미묘하게 일그러뜨리며 석규에게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창현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가식적인 것을 무척 싫어한다. 지금도 석규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자신에게 봉사활동을 하라고 한 것일까 생각되어 물은 것이다.

석규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있겠느냐? 네가 좋은 일 좀 하라고 보내는 게다. 크흐흐!”

“…….”

웃음을 짓는 석규의 모습을 본 창현은 석규가 왜 이런 스케줄을 넣었는지 알 수 있었다.

바로 발렌타인 데이 때 자신이 초콜릿을 기부해버린 것에 대한 앙갚음이었던 것이다.

‘이런 속 좁은 아버지 같으니라고!’

치졸한 수법에 당할 생각이 없던 창현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봉사활동 안 할래요.”

하지만 석규도 만만치 않게 준비를 해둔 상태였다.

석규는 준비해둔 말로 창현의 입을 벙어리로 만들어버렸다.

“너희 학교 봉사활동 시간 채워야 한다면서? 이런 나의 배려가 없으면 언제 네가 봉사활동을 할래?”

“그, 그건… 방학 때가 되면 제가 알아서…….”

“그때 어떻게 될지 누가 알겠느냐? 난 다 네가 원만하게 학교를 졸업하기를 바라는 마음에 이런 스케줄을 짠 게다. 설마 이 아비의 마음을 모른다고 하지는 않겠지?”

‘모를 리가요. 제게 복수하려는 밴뎅이 아버지의 속을 누가 모르겠습니까.’

속으로 궁시렁거린 창현이었지만 겉으로 내색할 수 없었다. 생각해보니 1년마다 봉사활동 시간을 8시간씩 채워가는 게 있던 것이다. 안 채워가면 상당히 곤혹스러울 것이라는 선생님의 협박도 함께 하고 있다.

결국 창현은 한숨을 내쉬면서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후! 알겠어요. 아버지의 배려라고 생각하고 봉사활동을 하겠습니다.”

아버지의 배려란 부분을 아주 악센트를 주어서 말하는 창현이었다.

그에 석규가 움찔했지만 이내 웃음을 지어보였다. 승자는 바로 자신이었던 것이다.

기분 좋은 미소를 지은 석규는 무언가 생각난 듯 서류를 보더니 창현에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한 가지 말을 안 했구나. 이번주 수요일에 약속이 있다.”

창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약속이요? 스케줄이 아니라요?”

“그래. 식사 약속이다. SM엔터테인먼트 회장인 이수만 씨와 만나기로 했다.”

“예? 그분을요? 무슨 일로… 사업적 이야기면 굳이 제가 갈 필요가 있나요?”

의아한 기색으로 묻는 창현. 그도 그럴 것이 사업적 이야기는 AA엔터테인먼트 사장인 석규와 SM엔터테인먼트 이수만 회장 혹은 김영민 대표이사가 만나서 할 이야기다. 굳이 자신이 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창현의 말에 석규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니다. 사업적 이유도 있지만 이수만 회장이 네게 개인적으로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고 하더구나. 사업적인 이야기를 하는 이유도 있지만 개인적 친분을 쌓고 싶다는 것도 있고 말이다.”

“제게 고마운 이유요? 그런 게 있나요?”

창현으로서는 금시초문이었다. 자신이 SM엔터테인먼트에 무언가 고마운 것을 해준 적이 있던가? 기억을 더듬어봐도 그런 것은 없었다.

석규가 아직도 자신의 이름이 주는 힘을 제대로 자각하지 못하는 창현의 모습에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넌 아직도 모르는 게냐? 라샤의 <가면의 기사>에서 뮤직비디오 여주인공 역할을 윤아 양으로 캐스팅한 것이 바로 너지 않느냐? 그로 인해 SM엔터테인먼트에서 야심차게 준비하던 소녀시대란 그룹이 상당한 관심을 받게 되었지. 그리고 데뷔를 준비하던 차에 이번에 네가 다시 한 번 그 뮤직비디오를 부각 시켜줬으니 이수만 회장으로서는 고마울 수밖에 없는 게다. 게다가 너의 작곡 실력이나 프로듀싱 실력이 탐이 나서 도움을 받고 싶어하는 것이겠지.”

석규의 말에 창현은 그제야 무엇이 고마워한다는 것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 그거였군요. 전 또 뭔가 있나 싶었어요.”

“네가 아직 네 이름이 주는 파워를 확실하게 자각하지 못하고 있어서 그런 거다. 차차 느끼게 되겠지. 어쨌든 불편할 수도 있지만 대형 기획사인 SM엔터테인먼트와 사이가 좋아져서 나쁠 것이 없어. 어떻게 보면 너도 우리 회사의 대주주니까 사업적인 일에 참여해도 상관없지. 안 그러냐?”

“끙! 억지에 가까운 말이네요. 뭐, 어찌됐든 저야 나쁠 것이 없죠. 제 실력을 원한다는 이야기가 되니까요.”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창현.

석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다. 네 실력은 누구나 탐낼 정도지. 너와 라샤 덕택에 우리 회사가 이렇게 클 수 있었지만 아직 대형 기획사에 비하면 축적된 노하우가 터무니없이 부족해. SM엔터테인먼트와 교류를 함으로써 우리에 맞는 적합한 것들을 가져올 필요가 있지. 쟈니스도 있지만 일본과 한국은 다르니까.”

“그럼 스케줄을 소화하다가 수요일에 뵈면 되겠네요.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네요. 전 이만 가볼게요.”

시간을 확인하니 어느덧 창현은 스케줄 시간이 되었다.

사장실을 벗어나기 위해 막 문을 열던 창현을 보며 석규가 그를 부른다.

“창현아.”

“……?”

창현이 뒤를 돌아보자 석규가 씨익 웃음을 지으며 엄지 손가락을 내민다.

“1위 축하한다.”

그러자 창현의 입가에도 미소가 맺힌다.

“누구의 아들인데요.”

두 사람의 입가에는 비슷한 미소가 맺혀 있었다.


석규가 잡아 놓은대로 창현은 토요일과 일요일에 정말 고아원에 봉사하러 갔다.

봉사시간을 받기 위한 일개 봉사원으로서 참가하였기에 처음에는 고아원에서 그냥 저냥이라는 반응을 보였지만 곧이어 창현의 정체가 드러남에 따라 패닉에 빠져들었다.

지금 한창 최고의 주가를 달리고 있던 스타가 자신의 고아원에 방문했으니 어안이 벙벙했던 것이다.

자신의 고아원에 초콜릿이 기부될 때만 해도 그저 언론에 알리기 위한 일종의 언론 플레이로 보았던 그들이었다. 하지만 창현의 이러한 행동은 언론에 알려지지 않았고, 뒤늦게 이 사실을 알아차린 기자가 작게 보도를 하였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봉사활동을 왔단다. 자신의 선행을 알리기라도 하듯 카메라를 동원하고, 기자들을 불러들이는 그런 식의 봉사활동이 아닌, 일개 학생으로서 봉사활동을 참가했다는 것은 무척 의외의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간단한 정리를 끝으로 창현은 아이들과 놀아주는 형식으로, 작은 콘서트 자리를 마련하여 고아원의 아이들과 노래를 부르며 함께 놀아주었다. 무척 훈훈한 모습이었고, 그 모습에 가식이 느껴지지 않았기에 아이들이 창현을 무척이나 따랐다.

이러한 사실을 AA엔터테인먼트에서 외부에 알리지도 않았건만 고아원에 봉사하러 온 학생들이 이러한 창현의 모습을 담아서 인터넷에 올렸고, 의도하지 않았지만 봉사활동이 창현의 이미지를 한단계 상승시키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렇게 주말동안 봉사활동을 하여 8시간을 모두 채운 창현은 월요일부터 다시 스케줄을 소화해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수요일이 되었다.

SM엔터테인먼트에 방문하기로 하였기에 창현은 수요일 하루 스케줄을 비운 채 이른 아침에 AA엔터테인먼트에 방문하였다. 모처럼 스케줄이 비는 날이니 만큼 라샤의 곡들을 준비할 시간을 가지려는 생각이었다. 아직 자신만의 녹음실이 없는 창현이었기에 부득이하게 녹음할 일이 생기면 AA엔터테인먼트로 와서 작업을 하곤 하였다.

작곡과 작사에 몰두하는 사이 어느덧 시간이 되었고, 석규와 창현은 택시를 타고 SM엔터테인먼트로 향했다. 벤을 끌고 가려면 석규가 운전을 해야 하는데 모양새가 그리 좋게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택시를 타고 SM엔터테인먼트로 향한 것이다. 한 회사의 사장, 떠오르는 스타답지 않은 소탈함이었다. 다행히 아직 날씨가 쌀쌀했기에 창현이 얼굴을 가리는 데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딱 제 시간에 도착했구나.”

SM엔터테인먼트 앞에 도착한 석규가 시계를 보면서 중얼거렸다. 약속 시간은 11시. 지금 시간은 11시 5분전인 10시 55분이었다. 아주 제대로 맞춰온 것이다.

석규나 창현이나 약속에 철저하였기에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오는 편이지만 SM엔터테인먼트라는 거대한 기획사를 이끌어나가는 입장이라면 스케줄의 유기적인 변화가 불가능할 정도로 빼곡한 편이었다. 오늘의 만남도 SM엔터테인먼트에서 먼저 청해온 만큼 굳이 먼저 와서 한수 접고 들어가는 모습을 보여줄 수 없는 노릇이었다.

“네. 아주 시간이 괜찮은데요?”

창현도 시간을 확인하면서 말했다. 택시가 조금 막혔다면 11시가 넘어서 도착할 수 있었고, 너무 일찍 왔다면 한 10분 전에 도착했을 텐데 운이 좋았는지 딱 5분 전에 도착한 것이다.

석규가 웃음을 지어보였다.

“이게 다 나의 선견지명이 아니겠느냐? 자, 들어가자꾸나.”

“네.”

석규가 앞장 서고, 창현이 그 뒤를 따르는 형식으로 SM엔터테인먼트에 들어섰다. 그리고 안내 카운터 앞으로 가서 용건을 꺼냈다.

“AA엔터테인먼트 사장 강석규입니다. 오늘 SM엔터테인먼트 이수만 회장님과 약속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확인해주십시오.”

망설임없이 당당하게 용건을 꺼내놓는 석규의 모습에 안내 카운터에 서 있던 여인이 약속 유무를 확인하면서 말했다.

“네, 약속이 있으신 게 맞네요. AA엔터테인먼트 사장이신 강석규님과 AA엔터테인먼트 이사 현……?”

현이란 말에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목도리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창현의 얼굴을 보는 여인.

그 시선에 창현이 목도리를 풀어내며 얼굴을 드러냈다.

“제가 현입니다.”

안경을 썼지만 충분히 분간이 가능한 얼굴이었다. 저런 외모를 한 사람은 연예계에서도 몇 없을 만큼 대단한 얼굴이었으니까.

“아… 팬이에요. 싸인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SM엔터테인먼트 안내 카운터를 맡고 있다보니 소속사 연예인들을 많이 보곤 하지만 다른 소속사 연예인들은 자주 접할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여인의 반응은 연예인을 만난 일반인의 반응과 다를 것이 없었다.

하물며 지금 모습을 드러낸 것은 현재 최고의 주가를 달리고 있는 가수가 아닌가? 외모면 외모, 노래면 노래. 모든 면에서 부족함 없는 현은 여성 팬들에게 있어 반드시 만나고 싶은 인물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창현은 빙긋 웃으면서 싸인 요청을 수락했다. 그러자 종이와 펜을 내놓는 여인.

석규는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말했다.

“엘리베이터 잡아놓으마.”

그 말과 함께 석규가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으로 향했고, 창현은 싸인을 해준 뒤 석규의 뒤를 따랐다.

엘리베이터에 탑승한 석규와 창현은 곧장 회장실이 있는 곳으로 올라갔고, 회장실 앞에 있는 비서들에게 확인 절차를 거친 뒤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회장실 안으로 들어서자 오십대 초반의 중년 사내가 석규와 창현을 맞이했다.

“이거, 어서 오십시오, 강석규 사장, 그리고 현군. 내가 바로 SM엔터테인먼트의 회장직을 맡고 있는 이수만입니다.”

두 사람을 맞이한 것은 바로 SM엔터테인먼트의 이수만 회장이었다.

수만의 인사에 석규와 창현이 인사를 하였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AA엔터테인먼트의 사장 강석규입니다.”

“현입니다.”

석규, 창현 순으로 수만과 한 차례 악수를 나눈 뒤 자리에 착석하였다.

수만은 두 사람의 맞은 편에 앉으며 먼저 사과를 하였다.

“이거, 제가 약속을 청해놓고 찾아오시게 하여 죄송합니다.”

확실히 먼저 청해놓고 상대방으로 하여금 찾아오게 한 것은 옳지 못한 것이었다.

그에 석규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어보였다.

“아닙니다. 제가 시간이 남았고, 회장님의 스케줄이 꽉 차 있던 상황이 아닙니까? 점심 식사는 회장님께서 사주신다고 하셨으니 미안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게 말씀해주신다니 감사합니다.”

상대방이 미안한 감정을 느끼지 않게 해준다.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지만 무척 큰 배려다.

수만은 석규가 사업적 수완이 뛰어나면서 적어도 상대방의 약점을 잡고 구질구질하게 붙잡고 늘어지는 인물이 아니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런 사람이라면 사업에 관한 어떤 이야기를 하더라도 웃으면서 헤어질 수 있다.

“그래도 발걸음을 하게 했으니 일단 목부터 축이시는 게 좋겠지요. 좋아하는 차가 있습니까? 웬만한 건 대부분 구비가 되어 있습니다.”

“음! 그럼 전 생강차로 하겠습니다.”

석규가 선택하자 수만의 시선이 창현에게 향했다.

“저도 생강차로 하겠습니다.”

“…미스 김, 여기 녹차 한잔과 생강차 두잔 부탁함세.”

어린 창현이 생강차를 고르자 잠시 말을 잊은 수만은 비서에게 차를 부탁하였다.

잠시 후, 차가 나오고 각자 한모금씩 차를 들었다.

녹차로 입을 축인 수만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의 만남은 그가 용건이 있기에 부른 것이다.

“우선 내가 이렇게 강사장과 현군을 청한 이유는 짐작하다시피 현군의 곡을 우리 SM에서 받고 싶기 때문입니다. 물론 값도 현군의 인지도나 위치를 고려하여 최고의 대우를 해줄 것이고, 이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수만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현재 현이 작곡한 곡은 단순히 곡이 좋고 나쁨을 떠나 하나의 브랜드를 이룩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람들이 가방이나 신발을 살 때 나이키, 아디다스라는 메이커를 보는 것처럼 노래 그 자체에서도 현이 작곡했다면 그것 자체가 나이키나 아디다스처럼 하나의 메이커로서 위력을 발휘한다.

그것은 여태까지 현의 곡이 대중들에게 실망을 사지 않았기 때문이고, 본격적으로 연예계에 뛰어든 지금, 나이와 가능성을 고려할 때 앞으로 그의 이름은 세계적으로 뻗어나갈 것임이 분명했다.

수만은 그런 현의 가치를 알아보았고, 지금 한창 뻗어나가는 현을 SM과 연계시키기 위해 오늘의 만남을 주선한 것이다.

SM엔터테인먼트의 기획력이나 영업력은 연예계에서 자타공인 최고의 수준이다. 비주얼과 실력을 중심으로 한 가수들에게 현의 이름이 덧씌워진 곡이 더해진다면 SM엔터테인먼트는 그야 말로 호랑이가 날개를 다는 격이 된다. SM엔터테인먼트의 기획력과 영업력이 1이고, 현의 곡이 1이면, 두 가지가 합쳐짐으로써 2나 3이 아닌 10 이상의 효과를 노릴 수 있다.

그것은 석규 또한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작은 기획사의 사장이지만 그의 역량은 하나의 회사를 이끌어나감에 있어 부족함이 없다. 대형 기획사의 강점이 바로 기획력과 영업력이었으니 말이다.

석규는 생강차를 한모금 마시면서 대답했다.

“우선 회장님께서 현의 가치를 높게 평가해주신 것에 대해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회장님의 말씀을 들어보니 무엇을 노리는지 대략적이나마 알겠군요.”

수만의 입에 미소가 걸렸다. 그것은 가식이 깃든 미소가 아닌 감탄이 담긴 미소였다. 그는 석규의 말을 듣는 순간 자신이 노리는 수가 모두 들켰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자신의 말을 듣는 순간 곧장 흥정에 들어갔을 텐데 석규는 상대방의 노림수를 모두 파악하고, 상대방의 주도권을 자신에게 가져오려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이것은 결코 작은 기획사가 큰 기획사에 보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석규가 이런 모습을 보일 수 있는 것은 현이라는 스페셜 조커가 손에 쥐어져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허허! AA엔터테인먼트가 비록 규모가 작지만 강사장님의 실력이 대단하여 대형 기획사의 입지를 흔들 것이라 하더니 명불허전이군요.”

“빈말이라도 감사합니다.”

미소를 지으며 담담하게 대답하는 석규. 수만이 반응을 보이지 않자 여전히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결국 수만은 끙! 하는 소리와 함께 자신이 먼저 조건을 제시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거, 정말 만만치 않군요. 강사장님은 사업에 있어 신용이 확실한 분이라고 알려져 있으니 제가 먼저 제시를 하겠습니다. 우선 현군이 저희와 계약을 맺을시 최고의 조건으로 맞춰줄 것을 약속하며, 음반 판매가 일정 수치가 넘을시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옵션으로 달겠습니다.”

파격적인 말이었다. SM엔터테인먼트를 책임지는 그의 입에서 나오는 옵션이라면 결코 범상치 않은 것임이 분명했다.

“회장님이 말하실 정도면 엄청난 조건이군요. 넌 어떻게 생각하느냐?”

“…….”

석규의 물음에 창현은 침묵했다. 난데없이 자신의 의견을 묻는 석규의 의중을 알아차릴 수 없었던 것이다.

솔직히 창현은 수만의 제안이 끌리지 않았다. 금전적인 면에서 보면 엄청난 조건을 제시한 것임이 분명하지만 현재 그가 금전적인 면에서 아쉬워 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무엇보다 자신의 곡과 라샤의 곡을 감당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수만은 석규가 창현에게 의견을 구하는 모습을 보자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결정권은 사장님이 아닌 현군이 가지고 있는 것입니까?”

그도 그럴 것이 석규가 창현에게 말하는 것이 의례적으로 묻는 것이 아니라 마치 ‘네 맘대로 해라!’ 식으로 느껴졌던 것이다.

석규는 수만의 물음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하! 실제로 회사의 사장은 저입니다만 저희 회사의 최대 주식 보유자가 바로 현입니다.”

“그렇습니까?”

몰랐던 사실이었기에 수만의 눈이 조금 커진다.

그런 반응에 석규가 숨겨졌던 사실을 말해주었다.

“회장님도 아시겠지만 현과 라샤가 나오기 전 저희 회사는 무척 재정적으로 어려웠습니다.”

그것은 수만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사실 수많은 군소 기획사가 존재하지만 그들 중 제대로 자금력이 뒷받침되는 곳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과 라샤가 등장하기 전 AA엔터테인먼트도 그런 군소 규모의 기획사 중 하나였다.

“그러던 중 현이 음반을 내고 회사의 재정적 구멍을 매울 수 있게 되었죠. 그런데 음반을 판매한 돈을 주려고 하는데 부족하더군요. 그래서 물었더니 주식을 달라고 하기에 회사 주식을 돈 대신 지급하다 보니 어느새 저보다 많은 주식 보유자가 되었더군요. 하하하!”

마치 우스개 이야기를 하듯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석규였지만 그의 말은 AA엔터테인먼트의 확고한 기반과 경영권을 알려주고 있었다. 최대 주주가 현이고, 그 다음이 석규라면 두 사람이 부자 관계인 이상 AA엔터테인먼트의 경영에는 누구도 침범할 수 없다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현과 라샤로 인해 AA엔터테인먼트의 주식이 하루가 다르게 상승세로 돌입한 것으로 보아, 그들의 주식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될 것임이 분명했다.

수만은 눈앞의 창현이 단순한 싱어송라이터가 아닌 AA엔터테인먼트의 엄청난 실세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 열여섯이라더니 엄청나군. 허어.’

석규의 이야기를 듣는 창현은 어이가 없었다. 이거 말이 의견을 묻는 것이지 사실상 자신에게 결정권을 떠맡긴 것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평소 이런 결정을 내리는 것을 창현은 무척 싫어한다. 자신의 성격이 약간 우유부단하다는 걸 알았기에 순간 빛을 발하는 빠른 판단력이 부족한 면이 있고, 무엇보다 하나의 열매를 놓고 그것으로 얻을 수 있는 득실을 따지는 것을 판단할 수 없었다. 아직 사회경험이 부족한 탓이다.

그런데 자신에게 결정권을 떠맡기다니. 분명 석규는 스스로 어떤 답을 내렸을 것임에도 자신을 골탕 먹이려는 의도로 이런 짓을 하는 것이 분명했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창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우선 제 곡을 드린다는 것은 확답을 해드리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당장 여분의 곡이 많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직 제 곡을 자신 있게 다른 분에게 보여드리기에는 부끄러움이 있어요. 당장 제 앞가림도 힘든 마당에… 대신 프로듀싱을 도와드릴 수는 있습니다.”

창현이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우선 말한 것처럼 자신의 곡을 돈 받고 넘기는 것은 아직 그에게 있어 부담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라샤 같은 경우 아버지의 회사란 점이 있기에 마음 편하게 임할 수 있지만 SM엔터테인먼트와는 돈이 걸려 있는 문제였기에 내키지가 않았다.

하지만 프로듀싱은 달랐다. 음향총서를 기반으로 하는 그의 프로듀싱은 보컬 트레이닝처럼 남들과 다른 독자적인 체계를 구축하고 있었다. 그런 프로듀싱 실력이라면 더 좋게 곡을 끌어낼 수 있을 것이고, 무엇보다 SM엔터테인먼트 소속의 가수들의 노하우를 습득할 수 있다.

창현으로서는 확고한 노림수가 있는 셈이다.

그러나 창현의 이런 말이 수만은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그는 이맛살을 찌푸린 채 중얼거렸다.

“프로듀싱이라…….”

SM엔터테인먼트 내에도 유능한 프로듀서들이 많다.

그가 원한 것은 현이 작곡한 곡이었지 프로듀싱이 아니었다.

그런 수만의 모습을 본 석규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석규는 대략적으로나마 창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파악할 수 있었다.

석규가 수만을 보며 말했다.

“회장님의 마음에 차지 않는 듯한데 그럼 한 번 테스트를 해보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테스트를?”

수만은 석규가 자신의 속내를 정확하게 꿰뚫자 흠칫하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창현의 프로듀싱 실력은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프로듀서에 비해 부족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한 번 보시고 결정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어떻습니까?”

“테스트라…….”

수만으로서는 손해가 될 것 없는 제안이었다. 오히려 이참에 익히 알려진 현의 프로듀싱 실력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아닌가?

“저야 좋습니다.”

승낙이 떨어지자 석규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대상은 소녀시대 소녀들이 어떻습니까?”

“소녀시대 아이들을 말입니까? 이유라도 있습니까?”

수만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석규가 굳이 소녀시대를 언급하는 것을 보니 무언가가 있음을 느낄 수 있던 것이다. 솔직히 수만은 아직도 윤아가 라샤의 <가면의 기사>에 캐스팅 된 것이 의아하던 차였다. 무언가 내막이 숨어있다고 생각하고 있던 것이다.

석규는 수만의 물음에 현을 가리키며 말했다.

“소녀시대 중에 이 녀석의 선배가 있다고 하더군요. 네가 말해보아라.”

창현이 수만을 보며 말했다.

“소녀시대 멤버 중에 주현 누나가 제 선배입니다. 그리고 윤아 누나는 보컬 트레이닝 문제로 만나게 되었다가 알게 되었고요. 윤아 누나가 캐스팅 된 것은 라샤 누나들의 뮤직비디오 여주인공 역에 적합하다고 생각되어 그리 한 것입니다.”

“오호…….”

창현의 설명에 그제야 의문이 풀린 표정을 짓는 수만. 덧붙여 한때 SM엔터테인먼트를 떠들썩하게 했던 보컬 트레이너의 정체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창현이 말한 보컬 트레이닝이란 단어에서 어느 날 갑자기 결점을 극복한 주현과 윤아의 일을 연관 지을 수 있던 것이다.

‘보컬 트레이닝에도 재능이 있나 보군. 허, 정말 대단해.’

현이 윤아, 주현과 관계가 있다면 다른 소녀시대 멤버들과도 관련이 있을 확률이 높았다. 작년 들어 소녀들의 노래 실력에 갑자기 안정되었다는 말이 곧잘 나오곤 했으니 말이다.

“그랬군.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지요.”

속으로 재미있어질 거라 생각한 수만은 비서에게 연습실에 있는 소녀들을 녹음실로 오라고 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녹음실로 가보지요. 현군의 실력을 한 번 보고 결정을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어느새 주객이 전도된 상황. 하지만 석규와 창현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자신감이었다.

창현의 프로듀싱 실력을 본 뒤 수만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확신하는 자신감!

석규가 창현의 실력을 믿고, 창현이 자신의 실력을 믿어야만 나올 수 있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세 사람은 녹음실로 향했다.


연습실에 있는 소녀들은 한창 몸매를 가꾸기 위한 트레이닝이 한창이었다.

그룹 가수의 강점은 노래보다는 다양한 비주얼에서 오는 대중의 취향 충족이었다. 그랬기에 얼굴도 중요하고, 몸매도 무척 중요했다. 그래서 소녀들은 매일 안무 연습을 비롯하여 보컬 트레이닝과 몸매를 가꾸기 위한 운동을 병행하고 있었다.

운동이 모두 끝나자 소녀들은 자리에서 널브러졌다. 운동 직후 그대로 앉아버리면 엉덩이가 커진다는 주현의 유언비어(?)로 인하여 한동안 벽에 기대던 소녀들이었지만 당장 힘든 것 앞에서는 그런 유언비어도 무의미했다.

“에고, 힘들다.”

“죽겠네, 죽겠어.”

“아직 해야 할 게 산더미인데. 이러다 죽을지도 몰라.”

여기저기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제 점심시간이 되어 가는데 늦은 밤까지 연습할 것을 생각하면 앞이 깜깜해지는 느낌이었다.

고된 운동 후 휴식 시간은 짧게 느껴지는 법이었다.

황금 같은 십 분의 휴식이 다 흘러갈 무렵, 소녀들을 구원해주는 빛이 있었다.

연습실 문이 열리면서 수만을 보좌하는 비서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녀는 소녀들을 보며 말했다.

“얘들아. 회장님께서 녹음실로 모이래.”

소녀들의 리더이자 대표인 태연이 물었다. 다음에 이어지는 것은 지독히도 힘든 안무 연습. 내심 녹음실로 오라는 말에 쾌재를 불렀지만 내색하지 않은 채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하였다.

“녹음실로요? 안무 연습은요?”

“일단 녹음실로 오라고 하셨어. 안무 연습은 나중에 하도록 해. 회장님께서 유망한 프로듀서를 부르셨나봐.”

프로듀서를 섭외하면 보통 연습생이나 가수를 통해 곡을 녹음함으로써 실력을 선보이고는 한다. 지금도 그러한 경우인가 보다. 정말 좋은 타이밍이 아닐 수 없다.

“네. 얘들아 들었지? 녹음실로 가자.”

“고고싱!”

힘든 안무 연습을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에 소녀들도 밝은 표정을 짓고는 연습실을 벗어났다.

그리고 녹음실에 들어서면서 그녀들은 힘차게 인사했다. 연습생에게 있어 가장 우선되는 것은 첫째도 예의 둘째도 예의였다.

“안녕하세요! 삼촌!”

수만은 예의 바르게 인사하는 소녀들의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래, 어서 와라. 왜 부른지 이유는 들었지?”

“네. 프로듀서 분이 오셔서 녹음을 한다고…….”

“프로듀서? 음, 어느 정도 맞다고 할 수 있지. 자, 인사해라. 오늘 너희들의 곡을 녹음해줄 프로듀서다.”

수만이 녹음실 안에 앉아있던 창현을 가리키며 소개했다.

그러자 창현과 소녀들의 눈이 마주쳤다.

순간 소녀들은 돌이 되었고, 창현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안녕하세요, 오늘 영광스럽게도 소녀시대의 프로듀싱을 맡게 된 현입니다.”

누나와 동생이 아닌 프로듀서와 연습생이란 신분으로 만나게 된 창현과 소녀들이었다.


“정말 반가워요.”

창현의 입매는 사악하게 말려 올라가 있었다.

SM엔터테인먼트에 정식으로 프로듀싱을 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는 건 지금 자신과 소녀들의 관계는 평소 알고 지내던 누나 동생이 아닌 연습생과 프로듀서의 관계였다.

즉,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자신의 신분이 더 높았다.

창현은 이 기회를 빌어 자신의 묵은 감정을 풀어내기로 마음 먹었다.

의자에 턱하니 앉은 창현은 다소 오만한 눈으로 소녀들을 둘러보다가 입을 열었다.

“우선 시간이 많지 않으니 노래를 총 세 번씩 부르도록 하겠어요. 한 번 부르고 난 뒤 제가 지적을 하고, 고쳐나가는 방식으로 하겠습니다. 시범을 보여 달라고 하면 보여드릴게요. 아시겠죠?”

“네.”

사적인 자리가 아니었기에 창현을 보며 존댓말로 대답하는 소녀들.

그 모습을 보며 창현은 씨익 웃음을 지었다.

“그럼 두 명씩 세 조와 세 명 한 조를 이뤄서 노래를 하도록 할게요. 우선…….”

창현의 시선이 두 소녀에게 향했다. 그의 눈은 이글거리고 있었다.

“고추냉이를 무척 좋아하는 분과 소금을 아주아주 좋아하는 분이 먼저 나오세요.”

“…….”

창현의 말에 소녀들이 그 자리에서 그대로 굳어버렸다.

특히 발렌타인 데이 때 창현의 미각을 제대로 공략했던 미영과 주현은 더욱 굳어 있었다.

수만과 석규는 그런 광경을 흥미로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무언가 창현과 소녀들간의 이상 기류가 느껴졌던 것이다.

창현은 나오지 않고 우물쭈물하는 두 소녀를 보며 다시 말했다.

“왜 안 나오시나요. 고추냉이를 덩어리지게 해주신 분하고 소금을 아주 쏟아 부으신 두 분.”

거듭된 창현의 재촉에 결국 나올 수밖에 없는 미영과 주현.

“히잉…….”

앓는 소리와 함께 녹음실로 들어간다.

두 소녀가 녹음실 안으로 들어서자 창현이 물었다.

“자, 두 분이서 하실 곡 있으신가요?”

“<Because of you>를…….”

미영이 조심스럽게 곡을 선정했고, 창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녹음을 시작했다.

MR이 흘러나오자 시무룩하던 반응과 달리 노래에 열정적으로 임하는 두 소녀. 아무래도 창현이 보고 있다는 생각에 평소보다 더욱 노력하는 듯했다.

오랜 시간 연습해온 그녀들답게 제법 안정적이게 노래를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창현의 눈에는 단점 투성이였을까.

창현은 노래가 끝나자 곧장 부족했던 부분을 지적하기 시작했다.

“이 부분을 날카롭게 끊기보다는 조금 끈다는 느낌으로 해주시고요, 음을 비축했다가 서서히 끌어올리는 듯한 느낌으로 해주셔야 해요. 그리고…….”

미진했던 부분을 일일이 짚어주며 간간이 시범까지 보여주는 창현.

그의 프로듀싱을 처음 경험한 소녀들은 창현의 지적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크게 보이는 단점들부터 시작하여 세세한 것들까지 지적하는 창현의 말은 틀린 것도 없었고, 이해하지 못할 경우 시범까지 보여주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지적을 하다보면 가수가 자신감을 잃을 수도 있는데, 창현은 간간이 칭찬을 섞어가면서 그녀들이 실의에 빠지지 않게 보조하고 있었다.

처음 노래 이후에는 창현이 굵직한 단점들을 지적하였고, 두 번째 노래를 할 때 듣는 사람이 훨씬 나아졌다고 느낄 정도로 발전해 있었다. 그리고 두 번째 노래 이후 세세한 점들을 지적해주고 다시 부르게 하자 세 번째에는 놀라울 정도로 노래의 완성도가 높아져 있었다.

그것을 본 수만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창현이 지적하고 노래를 총 세 번 부를 동안 소요된 시간은 불과 이십 분밖에 안 되었다. 그런데 이 짧은 시간 동안 놀라울 정도로 노래가 나아진 것이다. 마치 한편의 마술과도 같았다.

“수고하셨습니다.”

창현은 노래를 모두 부르고 나온 미영과 주현을 보며 미소를 지어보였다.

두 소녀는 창현의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한편 가슴이 벌렁거리던 걸 느꼈다. 방금 프로듀싱을 하던 창현의 모습은 놀라울 정도로 카리스마가 있으면서 절대로 거절할 수 없는 강력한 설득력을 내포하고 있었다.

아직도 얼떨떨한 모습을 하고 있는 두 소녀를 보며 창현이 말했다.

“방금 전 제 말을 기억하시고 꾸준히 연습하시면 더 나아질 거예요. 수고하셨어요.”

“네, 네. 수고하셨습니다.”

고개를 푹 숙인 두 소녀가 소녀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창현은 다음 선정을 위해 소녀들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 입가에 씨익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거기 피부 하얗고 키 작은 분?”

창현의 말에 태연이 발끈한 표정을 짓다가 고개를 홱 돌렸다. 사적인 자리가 아니었기에 화내는 모습을 보일 수 없던 것이다.

그 모습에 입가를 말아 올린 창현이 태연을 대놓고 바라보며 말했다.

“왜 대답이 없으세요. 키 작고 고양…….”

“네! 저에요!”

고양이를 언급하려 하자 대뜸 앞으로 나서는 태연. 키가 작다는 말에 반응하지 않으려 했지만 고양이를 언급하려 하자 어쩔 수 없이 앞으로 나서는 모습이었다.

창현은 킥킥! 웃음을 지으면서 순규를 보며 말했다.

“게임광에 승부욕 엄청 강하신 분?”

순규가 움찔한다. 하지만 반응하지 않으려 애를 쓴다.

창현은 피식 웃고는 연타를 날린다.

“게임광에 승부욕 엄청 강하고 키도 작으며 격투 동영상을 즐겨보는…….”

“네, 접니다! 저에요!”

창현이 모든 걸 언급하자 앞으로 나서면서 큰 목소리로 창현의 목소리를 묻어버리는 순규.

웃음기를 띤 창현이 녹음실로 들어서라는 눈짓을 하자 태연과 순규가 순간 눈빛 교환을 하다가 녹음실 안으로 들어선다.

툭!

녹음실로 들어가던 태연이 창현을 친다. 자연스레 시선이 그곳으로 향한 창현은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마치 야차같은 표정을 띤 태연과 순규가 창현을 노려보고 있던 것이다.

“나중에 길가다가 나랑 만나지 않길 바라라고.”

섬뜩한 어조로 말한 태연이 녹음실 안으로 들어선다.

‘제, 젠장. 심했나.’

그 모습에 창현은 자신이 너무 심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미 기호지세의 상황. 여기서 물러서다가는 잡혀 먹힐 뿐이었다. 좀 더 시크하게! 좀 더 강렬하게 나가야 한다.

그리고 노래를 부르자 엄청나게 지적을 해대기 시작했다.

그것이 분명 뼈가 되고 살이 되는 지적이었지만 묘하게 자존심을 긁어내린다랄까?

일단 수만이 보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창현의 말에 순순히 따르는 두 소녀였지만 노래를 한 차례 부를수록 그녀들의 이마에 생겨난 혈관 마크는 점점 도드라지고 있었다.

그러나 노래만큼은 놀라울 정도로 진보되어 있었다. 특히 두 소녀는 창현에게 지속적으로 보컬 트레이닝을 받아왔던 만큼 효과가 톡톡했다.

녹음실로 나오는 두 소녀를 보면서 창현이 결정타를 날렸다.

“이야, 정말 잘하셨어요. 키가 작은 게 비슷해서 그런가? 작은 키에서 어떻게 그런 음성과 조화가 나오는지 모르겠네요.”

신경을 살살 긁으면서 키 작은 것을 언급하는 창현.

그러자 이마에 도드라져 있던 두 소녀에게서 일순간 빠직! 하는 소리가 들렸던 것은 창현의 착각일까.

뿌득!

창현은 나직하게 이를 가는 태연의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너, 너 나중에 보자.”

“살 생각은 버리는 게 좋을 거야.”

“…윽!”

두 소녀의 위협에 창현이 신음을 흘렸다. 잘못 걸렸다가는 최소 사망이란 것을 느낀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각오하던 것이 아닌가?

분명, 분명 굳게 다짐했는데 시간이 흐름에 따라 초조해지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미 저지른 일이야. 당당해지자. 저 누나들이랑 따로 안 만나면 돼.’

그렇게 자신에게 스스로 최면을 건 창현은 얼음땡, 멀대란 호칭으로 수연과 수영을 호명했고, 역시나 눈에서 쏟아지는 무시무시한 살기를 받아내며 노래를 시켰다. 그 다음 윤아, 유리, 효연에게는 이렇다 할 감정이 없었기에 소녀시대 전체를 적으로 돌리는 우를 범하지는 않았다.

그동안 쌓인 것을 앙갚음 하는 식으로 하였지만 창현의 프로듀싱은 정말 놀라웠다. 노래 실력이 부르면 부를수록 나아지는 모습을 보였으니 말이다.

프로듀싱 장면을 지켜보던 수만은 자신이 창현의 프로듀싱 실력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허, 이런 실력이면 곡의 느낌을 최대한 살리면서 가수의 실력도 끌어낼 수 있겠군. 정말 대단해.”

그러면서 석규를 보며 말한다.

“강사장님과 현군이 왜 그렇게 자신감을 보였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점심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를 더 하지 않겠습니까?”

석규의 예상대로 창현의 프로듀싱 실력을 보고 마음이 바뀐 수만이었다.

창현과 석규가 순간 눈이 마주쳤고, 석규가 잘했다는 눈빛을, 창현은 웃음으로 대답을 했다.

그때, 갑자기 석규의 눈빛이 변하더니 소녀들을 보며 말했다.

“회장님, 오늘 녹음으로 여기 소녀시대 분들이 고생을 했으니 하루 연습을 빼주시는 게 어떻습니까? 여기 현과 소녀시대가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인 것 같기도 하고 말입니다.”

석규의 말에 창현은 화들짝 놀랐다. 그의 의도가 무엇인지 바로 알아차린 것이다.

현재 소녀들이 창현을 바라보는 눈빛은 그야 말로 살기등등이었다. 석규와 수만이 있기에 내색하지 않을 뿐이지, 눈빛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수천 번을 죽였을 것 같은 눈을 하고 있던 것이다.

한마디로 맹수 무리에 자신 혼자 던져두겠다는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창현이 뭐라 반응하려던 차에, 수만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음! 그것도 그렇군요. 현군, 우리 아이들을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수만의 말에 소녀들의 눈에 급격히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하지만 창현에게도 변명거리가 있었다.

창현은 정말 순수한 생존본능으로 입을 열었다.

“하, 하지만 저 혼자서 하면 조금…….”

“괜찮다! 회장님이 괜찮다고 하시지 않느냐? 요즘 돈도 잘 버니 네가 수고해준 소녀시대 분들에게 밥 좀 사드리고 그래라.”

말을 하는 석규의 입가에는 사악한 미소가 맺혀 있었다.

창현이 마지막 구명줄과 같은 수만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모르고 있었다. 이미 수만은 순규와 눈빛으로 사전 교감을 끝냈다는 것을 말이다.

소속사 회장과 연습생이라면 밑도 끝도 없는 엄청난 신분 차이가 존재하지만 삼촌과 조카의 관계라면 압도적인 조카의 강세였다.

수만은 창현의 애절한 시선을 외면하며 대답했다.

“허험! 현군, 부탁하도록 하겠네. 아이들이 천방지축이지만 현군이라면 잘해내겠지. 자, 강사장님. 여기는 현군에게 맡기고 우리는 식사를 하러 가지요.”

“알겠습니다.”

석규는 창현에게 상큼한 미소를 지어보이더니 수만과 함께 녹음실을 벗어났다.

그러자 녹음실에 남은 것은 창현과 아홉 소녀뿐.

남자라면 꿈에도 바라마지 않을 상황이었지만 그것은 겉모습일 뿐이었다. 만약 러시아제 최신 적외선 투시 망원경으로 지금 녹음실을 비춰봤다면 가련하게 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는 토끼 한 마리와 그 토끼를 중심으로 천라지망을 구축하고 있는 흉폭한 시베리아 야생 호랑이 아홉 마리가 포진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삽시간에 반전된 상황에 창현의 어깨가 절로 움츠러들었다. 슬쩍 문쪽으로 시선을 옮겼지만 석규와 수만이 나간 시점에 미영과 주현이 문을 가로막고 있는 상태였다. 자신들의 잘못을 알고는 있지만 창현의 놀림이 어지간히 섭섭했나보다.

“강창현.”

소녀들 중 앞으로 나선 것은 리더 태연이었다.

그녀는 한눈에 봐도 불량한 포스를 팍팍 풍기면서 짝다리를 한 채 창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창현은 태연이 한걸음 앞으로 나오자 저도 모르게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서면서 나름대로 시크하게 맞받아쳤다.

“왜, 왜요.”

“삼촌 계시니까 아주 프로듀서로서 우리를 물 만난 물고기처럼 갈구더라?”

“전 그저 누나들의 노래 실력 향상을 위해…….”

재빠른 두뇌 회전으로 변명을 해보지만 이어진 태연의 말에 벙어리가 되고 만다.

“그런데 왜 거기에서 키 작은 이야기가 나오는데?”

“…….”

창현이 침묵하자 소녀들이 연달아 치고 나온다.

“과도한 승부욕은 왜 나와?”

“얼음땡은 왜 나오고?”

“멀대는 무슨 상관인데?”

“그, 그건…….”

당혹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리며 변명을 강구하는 창현.

하지만 태연은 그런 창현의 변명을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손을 들어 창현을 가리킨 태연이 명령을 내렸다.

“유리, 효연, 윤아는 저 녀석을 포박해.”

태연의 말에 세 소녀가 일시분란하게 움직이며 각각 창현의 팔 하나씩을 붙든다. 그리고 윤아가 창현의 뒤에 서서 혹시 모를 저항에 대비한다.

창현은 그런 소녀들을 보면서 애처로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누나들은 제가 안 놀렸잖아요. 봐줘요.”

“미안. 이게 세상의 이치야.”

“…….”

세상의 이치라는데 뭐라고 말을 할까.

그때, 태연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진압해! 아주 세상이 노랗게 보일 정도로 끝장 내버려.”

그 외침과 함께 순규, 수영, 수연이 번개같은 속도로 창현에게 달려들어 간지럼을 피기 시작한다.

불행히도 창현은 지독하게 예민한 몸을 가지고 있어서 간지럼은 쥐약이나 마찬가지였다.

“크, 크윽! 제, 제발 자비를! 하하! 하하하하!”

옆구리와 목을 간질이기 시작하자 창현이 몸을 이리저리 꼬아대며 바동거린다.

“미영, 주현! 너희들도 합류해!”

태연의 외침에 문을 지키고 있던 미영과 주현도 합류해서 창현을 간질였다.

약 십 분 동안 아홉 소녀들에게 빠짐없이 당한 창현은 하얗게 재가 된 후였다.

녹음실에 널브러져 있던 창현은 다시 한 번 간지럼 피겠다는 위협을 태연에게 듣고 나서야 간신히 정신을 수습할 수 있었고, 완전 무장을 한 뒤 소녀들을 우르르 끌고 나가 인근 갈비집으로 가서 점심을 사야만 했다.

한 번 시크해지려다가 몸도 지갑도 털린 하루였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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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마음을 울리는 음악 시즌2 제4화 +7 15.04.24 3,978 89 10쪽
40 마음을 울리는 음악 시즌2 제3화 +6 15.04.22 4,425 82 10쪽
39 마음을 울리는 음악 시즌2 제2화 +9 15.04.20 4,515 91 11쪽
38 마음을 울리는 음악 시즌2 제1화 +10 15.04.17 7,375 95 10쪽
37 ▲▲▲▲▲시즌2 시작!▲▲▲▲▲ +5 15.04.17 5,423 65 1쪽
36 마음을 울리는 음악 106장-108장 +8 15.04.16 6,411 106 230쪽
35 마음을 울리는 음악 103장-105장 +1 15.04.16 4,242 82 314쪽
34 마음을 울리는 음악 100장-102장 +2 15.04.16 4,411 68 229쪽
33 마음을 울리는 음악 97장-99장 +1 15.04.16 4,387 63 264쪽
32 마음을 울리는 음악 94장-96장 +1 15.04.16 4,377 80 230쪽
31 마음을 울리는 음악 91장-93장 +1 15.04.16 5,125 76 268쪽
30 마음을 울리는 음악 88장-90장 +1 15.04.16 4,927 98 332쪽
29 마음을 울리는 음악 85장-87장 +1 15.04.16 4,709 83 270쪽
28 마음을 울리는 음악 82장-84장 +2 15.04.16 4,913 85 261쪽
27 마음을 울리는 음악 79장-81장 +1 15.04.16 4,579 87 241쪽
26 마음을 울리는 음악 76장-78장 +1 15.04.16 4,752 74 244쪽
25 마음을 울리는 음악 73장-75장 +1 15.04.16 4,939 111 327쪽
24 마음을 울리는 음악 70장-72장 +1 15.04.16 4,755 82 200쪽
23 마음을 울리는 음악 67장-69장 +1 15.04.16 4,742 80 210쪽
22 마음을 울리는 음악 64장-66장 +1 15.04.16 4,955 75 282쪽
21 마음을 울리는 음악 61장-63장 +2 15.04.16 5,256 79 316쪽
20 마음을 울리는 음악 58장-60장 +1 15.04.16 5,246 74 186쪽
19 마음을 울리는 음악 55장-57장 +2 15.04.16 5,590 95 215쪽
18 마음을 울리는 음악 52장-54장 +1 15.04.16 6,506 110 349쪽
17 마음을 울리는 음악 49장-51장 +2 15.04.16 6,418 119 2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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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마음을 울리는 음악 37장-39장 +2 15.04.16 9,611 224 397쪽
12 마음을 울리는 음악 34장-36장 +8 15.04.16 9,520 189 322쪽
11 마음을 울리는 음악 31장-33장 +8 15.04.16 10,351 261 345쪽
10 마음을 울리는 음악 28장-30장 +5 15.04.16 10,656 260 277쪽
9 마음을 울리는 음악 25장-27장 +7 15.04.16 11,034 267 233쪽
» 마음을 울리는 음악 22장-24장 +4 15.04.16 10,920 261 198쪽
7 마음을 울리는 음악 19장-21장 +4 15.04.16 11,489 270 216쪽
6 마음을 울리는 음악 16장-18장 +5 15.04.16 11,539 242 163쪽
5 마음을 울리는 음악 13장-15장 +5 15.04.16 14,530 297 237쪽
4 마음을 울리는 음악 10장-12장 +8 15.04.16 13,733 352 171쪽
3 마음을 울리는 음악 7장-9장 +10 15.04.16 14,547 362 142쪽
2 마음을 울리는 음악 4장-6장 +11 15.04.16 16,831 421 120쪽
1 마음을 울리는 음악 프롤로그-3장 +47 15.04.16 29,889 545 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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