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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번 님의 서재입니다.

마음을 울리는 음악

웹소설 > 작가연재 > 팬픽·패러디, 현대판타지

김현우
작품등록일 :
2015.04.16 13:27
최근연재일 :
2015.06.01 17:02
연재수 :
5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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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4.16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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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347쪽

마음을 울리는 음악 46장-48장

DUMMY

제46장 Again 지옥의 Valentine's day?




수영의 생일이 끝나고, 다음 날 윤아가 드라마 오디션을 보면서 소녀들의 하루도 흘러가고 있었다.

그리고 남자에게 있어서 자존심을 세울 수 있느냐 없느냐가 결정되는 대망의 날! 2월 14일 발렌타인 데이가 다가오고 있었다.

작년에 초콜릿으로 치열한 접전을 벌였던 적이 있기에 소녀들 사이에서는 벌써부터 긴장감이 팽팽하게 감돌고 있었다.

2007년도에는 자신들이 데뷔를 하지 않았기에 자유로이 창현에게 초콜릿을 건네줄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약간 상황이 달랐다. 자신들도 데뷔를 하였고, 상당한 인지도를 쌓아올리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그렇다.

하지만 초콜릿을 전해주고 싶은 마음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렇기에 소녀들은 눈치를 보면서도 이야기를 섣불리 꺼낼 수가 없었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바로 초콜릿을 어떻게 건네느냐가 관건이었던 것이다.

다른 연예인이었다면 방송국에서 마주치고, 우연을 가장하여 소위 말하는 의리 초콜릿을 건네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창현은 방송국에서 보는 것이 하늘의 별따기와도 같다.

오죽하면 같은 연예인들도 창현을 보는 것이 연예인 보는 것만큼 어렵다고 할 정도일까.

연예인들에게 있어 연예인이 바로 창현이었다.

그렇기에 사적으로나마 창현과 친분을 나눈 소녀시대나 슈퍼주니어, 그리고 원더걸스는 다른 가수들에게 있어 창현과 소통할 수 있는 귀중한(?) 재원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그들에게 창현의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창현은 자신들의 것(?)이라는 일념 하에 강력한 보호막을 치고 있었기에 그녀들을 걸쳐 창현과 만남을 갖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어찌 되었든 중요한 것은 바로 창현에게 초콜릿을 건네느냐 마느냐였다.

소녀들 서로가 눈치를 살피고 있었기에 누구도 먼저 의견을 건네고 있지 않았다.

그러자 어수선한 분위기가 연출 되었고,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 어색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분위기에 살짝 비켜 있던 몇몇 소녀들이 있었다.

그랬기에 멤버들간의 묘한 기류를 감지하지 못한 채 앞으로 나서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얼마 전 창현에게 축하 노래를 선물 받았던-이라 쓰고 꽃등심과 차돌박이를 선물 받았다고 읽는- 수영이었다.

그녀는 주변을 휘휘 둘러보더니 멍하니 있는 멤버들에게 입을 열었다.

“뭐야? 아무도 준비하지 않는 거야?”

“뭘 준비한다는 거야?”

냉장고에서 아이스크림을 꺼내 먹고 있던 순규가 수영에게 물었다.

그에 수영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한다.

“발렌타인 초콜릿 말이야. 며칠 후면 발렌타인 데이잖아? 창현이한테 초콜릿 주려고 하는데 이번에는 아무도 나서려는 것 같지 않아서 말이야.”

발렌타인 데이를 언급하고, 창현의 이름도 오르자 거실에 모여 있던 소녀들의 어깨가 연쇄적으로 움찔하였다. 저도 모르게 반응을 한 것이다.

“왜 주려고?”

순규의 물음에 수영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한다.

“내 생일에 와서 예정에도 없던 노래를 불러줬잖아. 당연히 답을 해줘야지.”

그렇게 말을 했지만 그녀의 가슴은 표정과 달리 상당히 두근거리고 있었다.

어찌 그렇지 않을까.

아무렇지 않게 보려고 해도 자꾸만 팬 미팅에서 자신에게 불러주던 노래가 떠올랐다.

사람을 압도하는 듯한 가창력과 함께 가슴 속을 지배해나가는 음율.

그것을 본 수영은 미처 몰랐던 강렬한 떨림을 느낄 수 있었다.

왜 이런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일까.

‘축하해줘서 그런 게 아닐까?’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을 했다. 그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려 했지만 뭐라고 해야 될까. 전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쑥스러움을 느껴야만 했다.

그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려다가 자신도 모르게 차돌박이를 사달라고 했던 것이고 말이다.

자신의 감정을 확실하게 결정 내리지 못했지만 우선 이 떨림이라는 감정은 결코 나쁜 느낌이 아니었다. 그리고 창현을 다시 한 번 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에 발렌타인 데이라는 기념일을 빌려 다시 한 번 창현을 볼 생각이었다.

그런 수영의 속마음을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 다만 팬 미팅에서 어렵사리 참가해줬다는 수영의 그럴 듯한 이유에 대부분 공감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불안한 느낌을 받아야만 했다.

누가 나서지 않으면 자칫하다가는 수영이 혼자 독주할 가능성이 높았던 것이다.

지금 보아하니 창현에게 넘어가지 않은 듯하지만 남녀가 단둘이서 만나게 되면 묘한 감정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창현이 그런 쪽으로 감정이 둔한 편이지만 남자가 어디 믿을 만한 생물이던가!

게다가 창현이를 믿는다 하여도 당장 수영이 넘어가지 않는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누군가가 나서서 스타트를 끊어줘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총대를 드는 일이었기에 누구도 먼저 나서려 들지 않았다.

누가 총대를 들고 싶어 할까.

특히 창현의 문제가 얽히면 삼국지에서 최고의 전략가 중 한 사람인 제갈량 못지않은 기량을 선보이는 미영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수영이가 창현이랑 만나게 해서는 안 돼. 하지만 여기에서 내가 수영이한테 제동을 걸게 되면 나도 덩달아 견제를 당할 수도 있는데. 어떻게 하지.’

앞으로 나서게 되면 얻는 것도 있지만 잃는 것도 있는 법이다.

보통 남자였다면 앞으로 나설 경우 잃는 것이 있어도 그보다 더 얻는 것이 많지만 창현이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았기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유리 또한 먼저 나서기가 꺼려졌다.

만류귀종이라, 그녀도 미영과 비슷한 이유로 앞으로 나서길 꺼려했던 것이다.

자신의 정체를 철저하게 감추고 있는 지금, 앞으로 나선다는 것은 여태까지 쌓아놓은 은폐 작전들을 모조리 무효로 돌려버리는 일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나서야 해. 그렇다면…….’

돌연 유리의 눈이 빛났다. 괜찮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녀의 시선이 순간 옆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자신의 안색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있는 윤아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윤아 또한 당연히 창현에게 초콜릿을 전해주고 싶으리라.

그렇다면 윤아를 충동질하여 앞으로 나서게 만들면 되는 것이다.

평소 장난을 칠 때는 연기를 잘 해내더니 창현의 문제가 얽히게 되면 표정 관리가 되지 않는가 보다.

이러니 자신에게 기회가 오는 것일 테지만.

속으로 고소를 지은 유리는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으며 수영의 말에 맞장구를 쳐준다.

“맞아! 수영이 너를 위해 그렇게 해줬는데 당연히 그렇게 해줘야지. 아니, 그러지 말고 이참에 선물도 같이 해주는 건 어때?”

“그럴까?”

유리의 말에 수영이 마음이 동하는 표정을 짓는다. 하기야, 그때 창현이가 쓴 돈이 얼마인데. 당연히 선물도 해줘야 한다.

“그런데 아무도 안 주려고 하는 걸 보면 수영이 너 혼자 줘야겠네.”

“그런가? 뭐 상관없겠지.”

그렇게 말을 한 유리는 슬쩍 곁눈질로 윤아를 쳐다본다.

아니나 다를까. 윤아의 표정은 수습이 불가능한 지경으로 치닫고 있었다. 유리의 말에 급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부족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기에 유리는 조금 더 충동질을 한다.

“아무도 안 주면 단둘이 만나서 줘야겠네?”

묘한 뉘앙스의 말이었다.

그 말을 들은 윤아도 윤아지만 다른 소녀들의 표정도 확 변했다.

그와 동시에 윤아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누가 안 준다고 했어요! 저도 창현이한테 초콜릿 줄 거거든요?”

그 외침이 기폭제였다.

윤아의 외침의 뒤를 이어 소녀들의 외침이 연달아 터져 나왔던 것이다.

“나도 줄 거거든?”

“나도 창현이한테 초콜릿 줄 거야!”

“선수 치지 마셔!”

자칫 수영의 독주 체제로 이어질 수 있던 상황은 유리의 교묘한 상황 충동질로 인해 춘추전국시대로 접어들었다.

“그만! 그럼 주고 싶은 사람은 주면 되잖아.”

열폭하는 소녀들을 진정시킨 것은 다름 아닌 태연이었다. 위급한 상황에서 멤버들을 달래는 능력을 보이는 태연의 표정도 그리 좋지 않아 보였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하자.”

주고 싶은 사람이 주기로 결정 되자 수영의 표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잘하면 자신 혼자 창현을 만날 수 있었는데 아쉽게 기회를 놓친 것이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안도의 감정이 들었다. 혼자서 창현을 보려니 무언가 막막한 느낌이 들기도 했는데 아쉽기도 하고 안도의 감정이 들기도 하면서 묘한 느낌이 들었다.

“나도 창현이한테 초콜릿 줄래.”

그렇게 상황이 일단락되자 유리도 슬쩍 상황에 끼어든다.

그에 몇몇 소녀들이 ‘왜 너도 주냐?’라는 식의 시선을 보내자 유리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말한다.

“너희들도 다 주는데 나만 안 주면 창현이가 섭섭하잖아.”

은근슬쩍 자신도 리스트에 들어가는데 성공한 유리였다.

결국 소녀시대 전원은 창현에게 초콜릿을 주기로 결정이 되었다.


발렌타인 데이 초콜릿 전달은 조용한 침묵 아래 조용히 전개가 되는 듯하였다.

하지만 암암리에 펼쳐지는 견제는 소녀들로 하여금 극도의 경각심을 가지게 하였다.

작년에도 멤버들 간에 치열한 견제를 펼치지 않았던가?

그로 인해 주현은 초콜릿에 소금을 듬뿍 넣은 바다 향 솔솔 초콜릿을 창안해냈으며, 미영은 본인의 실수로 고추냉이가 듬뿍 들어있는 고추냉이 초콜릿을 창현에게 건네야만 했다.

초콜릿을 먹은 창현의 반응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고 있던 소녀들이었기에 이번에는 그런 실수를 범하지 않으리라 각오를 단단히 다지고 있었다.

특히나 작년 폭탄 초콜릿을 건네주었던 미영과 주현의 각오는 대단하였다.

무사히 초콜릿을 주기로 결정이 나자, 미영은 손으로 불끈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번에는 잘해야 돼! 애들의 술수에 말려들지 않고 나만의 초콜릿을 만드는 것이야!’

자신의 실수를 교묘하게 동료들의 책임으로 전가시키는 미영이었다.

그것이 그녀에게는 속 편한 행동이었다.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기에는 창현이 겪은 고통이 너무나 컸던 것이다.

그러니 어찌 자신의 실수를 인정할 수 있겠는가.

자신이 잘못한 것이 아니라, 멤버들이 중간에 방해를 해서 그런 것이다!

그렇게 믿고 싶은 미영이었다.

어쨌든 과거는 과거였기에 지금에 충실하면 된다.

이번에도 독창적인 초콜릿을 만들어 내서 창현의 마음을 기울게 만든다!

‘반드시…….’

미영의 눈은 전의로 뜨겁게 불타오르고 있었지만 그에 반해 주현은 담담한 안색이었다.

비록 소금 초콜릿으로 창현에게 강력한 핵폭탄을 안겨다주었지만 기본적인 바탕은 자신이 가장 탄탄하다.

‘언니들은 분명 인터넷에서 방법을 찾을 거야. 하지만 널리 알려진 방법으로 임하면 안 돼.’

벼락치기로 익힌 초콜릿 제작에 나서는 멤버들과 달리 자신에게는 어머니에게서 받은 필살의 제조법이 존재한다.

저번에는 실패했지만 이번만큼은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

경쟁이 치열한 만큼 자신의 초콜릿으로 다른 멤버들의 초콜릿 맛을 죽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대성공이리라.

‘이건 전쟁이에요, 언니들.’

작년 초콜릿 폭탄 제조자들은 야심차게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수영 언니! 감히 선수를 치려고 해?’

윤아는 아직 흥분이 덜 가라앉은 채로 수영을 힐끗 보면서 분을 삭인다.

얼마나 위험천만한 순간이던가.

체면을 차리고 있다가 자칫 잘못했으면 창현에게 초콜릿을 주지 못한 채 발렌타인 데이를 지나칠 뻔하였다.

유리의 말을 들으면서 얼마나 가슴이 철렁했는지 모른다.

다른 사람과 함께 만나는 것도 아니고 단둘이서 만나다니!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알고 있는 윤아로서는 분주하게 회전하고 있던 생각을 정리하지 못한 채 앞으로 나서야만 했다.

드라마를 하게 되면 자신에게 가장 많은 기회가 주어질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은 확정되었다는 정보도 없을 뿐만 아니라, 아직까지 창현의 마음에 플래그를 꼽아 넣지 못한 상태였다. 그런 만큼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한다.

‘다른 언니들도 주기로 한 이상 최고의 초콜릿을 제작하는 방법 밖에 없어.’

다른 때는 믿음직하지만 지금 만큼은 최악의 라이벌임이 분명했다.

반드시 그녀들을 꺾어주겠다고 굳세게 다짐하는 윤아였다.

필요하다면 약간의 반칙을 불사할 생각이었다.


비단 고민에 빠져 있는 것은 미영과 주현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소녀들도 초콜릿 제작을 위해 고민하기는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요즘 창현이랑 자주 이야기를 나누지 못해서 그런 건데. 설마 초콜릿을 준 것으로 오해는 하지 않겠지?’

다른 멤버들과 함께 주는 것이지만 태연은 살짝 걱정이 앞선다.

멤버들이 다 같이 초콜릿을 주기로 했지만 뭐랄까, 느낌이 묘했다.

초콜릿을 준다고 해도 어차피 같은 소속사 남자들에게도 준다.

의리 초콜릿이랄까? 하지만 창현에게 주는 것은 그 느낌이 사뭇 달랐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면 편하겠지만 창현에게 초콜릿을 준다는 것만으로도 태연은 묘한 기분이 들면서 동시에 초콜릿을 줘야 할지에 대해 고민을 하게 된 것이다.

어차피 연예인이 되나 되지 않았으나 다를 것은 없다. 그런데 자기가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모른 채 태연은 기이한 느낌에 휩싸여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을 했던 것이다.

자신이 초콜릿을 준다고 오해를 한다니.

그 대목에서 살짝 얼굴이 붉어지는 태연의 모습이 오히려 수상할 정도였다.

‘흥! 초콜릿 줬다고 오해하면 실망할 거라고, 강창현.’

인기를 얻은 후 묘하게 도끼병에 걸린 태연의 생각이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오해를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비밀이었다.


‘태연이도 수상한데?’

변화무쌍한 태연의 표정을 본 유리가 눈을 가늘게 뜬 채 생각에 잠긴다.

사실 그녀에게 있어 태연의 반응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지금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어떻게 하면 다른 멤버들을 누르고 자신이 돋보이느냐였다.

애초에 자신이 세운 모토는 보일 듯 말 듯하면서 서서히 창현의 마음속에 자신이란 존재를 심어주는 것이니 만큼 이번 발렌타인 데이는 상당한 계산을 요구하는 날이 아닐 수 없다.

초콜릿을 주되 자신이 무작정 돋보여서는 안 되고 근소하게 우위를 점해야 했기에 그렇다.

이는 매우 어려운 난제였다. 자신이 초콜릿을 만든다 하여도 멤버들보다 맛있게 만들지도 미지수인데 그들보다 아주 약간 뛰어나게 만드는 것은 매우 어려운 과제였던 것이다.

멤버들의 초콜릿 제작 상황을 모두 파악하고 그보다 아주 약간 뛰어나게 만드는 스킬을 발휘해야 하는 실정이었다.

‘어떻게 하지?’

전문가에게 의뢰를 해볼까 생각도 했지만 고개를 젓는다. 전문가에게 하면 티가 날 뿐만 아니라, 다른 멤버들의 강력한 견제가 있으리라 생각된 것이다. 게다가 자신의 활동 폭이 그리 넓지 않고 초콜릿 제작 전문가를 알지도 못한다.

유리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생겨났다. 그녀가 고민에 빠지면 자연스레 생겨나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유심히 살피고 있는 한 사람이 있었다.


‘얘들아, 머리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단다. 후후!’

효연은 멤버들의 모습을 살피면서 웃음을 지었다.

결국 창현에게 초콜릿을 주기로 결정을 내렸지만 작년 발렌타인 데이 때 주현의 소금 초콜릿으로 제법 짭짤한 소득을 올렸던 효연은 이번에도 어떤 식의 덫을 놓을까 궁리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멤버들을 살펴보게 되었고, 깊은 고민에 빠져 있는 몇몇 멤버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녀들 나름대로 필사적인 방법을 강구하고 있는 만큼 효연의 입가에 맺힌 웃음은 더욱 더 짙어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효연은 유리의 미간에 서려 있는 주름을 보고는 눈을 번뜩였다.

저것은 유리가 깊은 고민에 빠졌을 때 나타나는 것이었던 것이다.

‘유리 저것도 무언가를 고민하고 있는데? 설마 나와 같은 장난을?’

장난기 하면 유리도 만만치 않기에 자연스레 효연은 경계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자칫 자신과 유리의 장난이 충돌하기라도 한다면 애교로 넘어갈 수 있는 수준을 넘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 되면 한동안 곤욕을 겪을 것은 분명하다.

발렌타인 데이가 무슨 날인가! 호감이 있는 남성에게 초콜릿을 건네는 의미있는 날이 아니던가!

이 날을 산산이 망쳐버리게 되면 걷잡을 수 없는 후폭풍에 휘말리게 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유리와 협약을 할까?’

몇몇 멤버들은 창현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지만 유리는 전혀 티를 내지 않았기에 효연은 유리가 어떻게 하면 멤버들을 골탕 먹일지 고민하고 있는 것으로 오해를 하였다.

유리의 의도가 정확하게 먹히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런 효연의 모습을 유심히 살피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무표정으로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수연이었다.

창현에게 신세를 끼친 것이 많은 만큼 수연은 어떻게 하면 멋진 초콜릿을 그에게 건네줄지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돌연 그녀의 눈에 효연의 음흉한 표정이 보이지 않았던가.

이미 작년 발렌타인 데이 때 전과 1범을 기록한 효연이었기에 수연은 단숨에 효연의 의도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작년에는 주현이 당했지만 이번에는 자신이 당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이미지를 쌓아올리는 것은 힘들겠지만 한 번 깎인 이미지를 다시 회복하는 것에는 상상을 불허하는 엄청난 노력을 필요로 한다.

가뜩이나 좋은 이미지를 잔뜩 줘도 모자랄 판에 나쁜 이미지를 주는 것은 수연으로서 용납할 수 없었다.

눈을 살짝 가늘게 뜬 수연이 멤버들을 향해 말한다.

“한 가지는 확실하게 하도록 하자.”

“……?”

갑자기 말을 꺼내는 수연의 행동에 여러 가지 생각에 잠겨 있던 멤버들이 움찔하며 수연을 바라본다.

멤버들의 시선집중을 받게 되자 수연은 슬쩍 효연을 곁눈질하더니 입을 연다.

“아마 초콜릿을 구입하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만들려고 하는 사람도 있을 거야. 그렇지?”

수연의 말에 몇몇 소녀들이 어깨를 움찔 떤다. 정말 그 생각을 하고 있던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대다수가 그러했다.

그 반응을 확인한 수연이 말한다.

“만드는 것은 좋다고 생각해. 정성이 들어가는 초콜릿이니까. 하지만 거기에 분명 장난을 치려고 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야.”

수연은 대놓고 효연을 보면서 말한다.

그러자 소녀들의 시선이 전부 효연에게 집중 된다.

작년 전과 1범의 인물이 누구던가! 바로 효연이었다. 다른 소녀들에게 있어서 주현의 필살 초콜릿이 소금 초콜릿으로 바뀌게 되어 안도의 한숨을 흘리게 하였지만 그와 함께 자신의 초콜릿도 저 꼴이 날 수 있었던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그 기억을 떠올린 주현이 효연을 살짝 째려본다.

갑작스러운 시선집중에 효연의 몸이 움찔 떨린다.

설마 수연이 대놓고 이렇게 사실을 밝힐 줄 몰랐던 것이다.

“왜, 왜 그래?”

자신의 죄를 모르지는 않았기에 효연의 목소리는 눈에 띄게 줄어들어갔다.

그 모습을 보면서 수연이 말한다.

“인간적으로 노력해서 만든 거잖아? 그러니 장난은 하지 말자. 알았지?”

이는 강력한 경쟁자들의 전력을 그대로 보전 시키는 결과를 낳겠지만 누군가가 수작을 부릴 거라는 불안한 마음을 가진 채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방법이 아닐 수 없었다.

“좋아. 그게 좋겠네. 음식에 다른 짓을 하는 건 나쁘니까.”

“나도 동의! 수연이 말대로 하자.”

수연의 제안은 소녀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경쟁자들이 강력하긴 하지만 자신이 더욱 강력한 것을 준비하면 되는 것이다.

다른 곳에 신경을 쓰는 것이 아닌, 초콜릿 제작에 모든 전력을 기울이면 되는 것이기에 멤버들은 모두 찬성하는 모습을 보였다.

멤버들의 압도적인 지지 하에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킨 수연은 효연을 힐끗 보며 말한다.

“그러니까 우리 장난은 치지 말자. 모두 사이좋게 초콜릿을 창현이한테 주자고. 알겠지, 효연아?”

대놓고 효연의 이름을 언급한 것이다.

이로써 효연의 장난을 완전히 차단한 셈이다.

효연은 고개를 푹 숙였다. 이번에도 짜릿한 장난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수연의 블로킹이 너무나 강력했던 것이다.

“알았어.”

그렇게 발렌타인 데이 초콜릿 준비는 상호 평화 협정(?)에 의하여 순탄하게 흘러가는 듯하였다.


드라마 출연이 결정되자 연기에 관한 것들은 일사천리로 해결되기 시작하였다.

창현이 드라마 제의를 수락할 것이라 예상을 했던 석규는 이미 만반의 준비를 갖춰놓았던 것이다.

덕분에 스케줄 없이 한가하게 녹음실에서 시간을 보내던 창현은 일주일에 다섯 번 연기 연습을 받게 되었다.

드라마 캐스팅 완료 발표는 3월 초에 이루어질 계획이었고, 중순부터 본격적으로 드라마 촬영이 시작될 예정이었다.

그렇기에 창현에게 있어서 시간은 별로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불과 한 달 정도의 연기 수업만을 받은 채 연기에 임하는 것이었기에 불안할 법도 하였지만 이미 자신감을 어느 정도 회복한 창현이었기에 그마저도 즐기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어차피 세상의 모든 일에는 연속성을 지니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연기 또한 배역의 감정에 빠져들어 드라마 속 배역의 사람으로서 새로이 태어나야 한다. 노래의 분위기에 빠져들어 자신이 먼저 그 감정을 드러내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것과 다를 것이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 발성이나 발음 같은 것은 창현에게 있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창현은 고음을 무리없이 소화해낼 수 있었고, 당장 알려진 것만 해도 한국어와 일본어, 중국어, 영어, 4개 국어를 완벽하게 구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니 말이다.

그가 배워야 할 것은 연기자로서 갖춰야 할 소소할 것들이었다.

사람들이 수십 년 동안 연기에만 몰두한 연기자들의 내공을 원하지 않는 이상, 창현이 연기를 잘해낸다는 것을 의심할 사람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창현의 연기수업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드라마 캐스팅 수락 이후, 김지환 감독과 헤어지고 회사로 돌아온 창현은 석규에게 한 가지 제안을 받은 것이다.

“발렌타인 데이 초콜릿 제작이요?”

창현의 물음에 석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한테 초콜릿이 많이 오고 있지 않더냐? 그와 함께 연예인들이 나와서 초콜릿을 만들고 불우한 이웃들을 돕기로 해서 거기에 너도 출연을 시키기로 하였다. 내일 스케줄이 있는 건 너도 알고 있지 않느냐?”

“알고는 있지요.”

작년에도 초콜릿이 산더미처럼 왔지만 이번 년도에는 그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양의 초콜릿이 배달되고 있는 실정이었다. 작년에 비하면 거의 두 배로 직원이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업무가 마비될 정도였으니 말이다.

창현의 방식은 이번에도 변함이 없었다. 성의를 받아들이되 자신이 무리하게 초콜릿을 먹는 것보다는 불우한 이웃에게 기부하는 것으로 말이다.

이러한 자신의 의도를 이미 며칠 전에 팬 사이트 게시글로 올려놓은 상황이었다. 그에 창현의 팬들은 오히려 더 좋아하는 모습을 보였다. 어차피 자신들이 복지재단에 기부를 하거나 공공기관에 기부를 하여도 그 돈이 좋은 일에 쓰이는지 믿을 수가 없었는데 창현은 확실하게 불우이웃을 돕는다고 하여 그의 결정을 반기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이것은 작년에 창현이 초콜릿을 기부하면서 그에 대한 상세한 내역을 AA엔터테인먼트가 공개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러한 창현의 인하여 다시 한 번 현의 인지도가 상승하는 계기로 이어졌다. 초콜릿을 많이 받는 것이 자랑처럼 느껴지지만 자신에게 들어온 것을 베푼다는 것은 보통 마음으로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렇다.

몇몇 악플러들은 자신의 이미지 호전을 위해 현이 언론 플레이를 하는 것이라 비난했지만 원래 무슨 일을 하든 간에 질투를 하는 사람들은 존재하는 법이기에 그 말은 그리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좋은 일을 하겠다는 것이 무엇이 그리 잘못되었는가.

오히려 창현이 외부로 알리지 않은 채 팬 사이트 내에서 남긴 글로 기사화가 된 것이기에 정당성이 부족하다고 할 수 있다.

창현이 석규를 보면서 물었다.

“그럼 제가 초콜릿을 만드는 건가요?”

“그래. 만들어서 불우한 이웃에게 전달하는 식으로 한다고 하더구나.”

석규의 말에 창현은 잠시 침묵하더니 석규에게 묻는다.

“연예인들은 많이 나와요?”

“많이 나오겠지? 아무래도 좋은 일을 하는 것이니 만큼 이미지를 좋게 만들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렇군요.”

확실히 불우이웃을 도우면 이미지가 좋아진다. 언론 플레이라고 욕을 하겠지만 진심은 통하지 않던가? 그런 만큼 사심없이 선행을 하다 보면 언젠가는 누구나 인정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것이 창현의 생각이었다.

“뭐, 나쁘지 않네요. 좋은 일을 하는 거니까요. 내일 기쁜 마음으로 가면 되겠네요. 그렇죠?”

창현의 말에 석규가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인다.

“기쁜 마음이라… 슬럼프는 어느 정도 해소한 것 같구나.”

오랜만에 창현의 입에서 기쁘다는 언급을 들었기에 그렇다. 귀국한 지 불과 삼 일 밖에 되지 않았지만 세희의 말을 들어보면 그동안 창현은 당장 죽을 듯한 인상을 쓴 채 하루하루를 보냈다고 하니 말이다.

그 말을 들은 창현이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인다.

“마음 문제더라고요. 솔직히 슬럼프가 해소된 지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확실히 마음이 가벼워진 걸 보면 최악의 상태는 면한 것 같아요.”

“그것 잘 됐구나. 음! 그럼 내일 노래를 부를 수 있겠느냐?”

“갑자기 노래는 왜요?”

석규의 말에 창현이 의아한 표정을 지은 채 물었다.

갑자기 노래는 왜 말하는 것인가?

그에 석규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하! 실은 내일 스케줄에서 창현이 네가 오프닝으로 노래를 한 곡 불러주었으면 좋겠다는 요청이 들어와서 말이다.”

“저 말고는 가수가 없나보네요?”

그 말에 창현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석규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다. 가수들도 많지. 하지만 당장 음반을 내고 활동하는 가수는 없어서 그렇다. 아이돌 가수들도 있지만 전부 참석하는 게 아니라 몇 명씩 나오거든. 게다가 네 무대는 많이 볼 수 없지 않더냐? 그래서 부탁을 한 것 같다.”

“무대라… 어차피 굿바이 무대가 멀지 않았으니 상관은 없을 것 같네요. 하겠어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창현은 석규에게 승낙하였다. 스스로에게 자신감을 가지라는 지금 이 순간 자신에게 슬럼프는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자신감을 되찾았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망설임 없이 대답하는 창현의 모습에 석규가 순간 멈칫하였다. 아무래도 슬럼프가 마음에 걸렸기에 그렇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의견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인다.

본인이 자신감에 넘치니 그러는 것이리라.

“좋다, 그럼 그렇게 전하도록 하마. 스케줄 잘 하고 오도록 하고. 무대도 하기 힘들 것 같으면 거절하고 말이다.”

“알겠어요.”

창현이 라이브를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큰 여파가 불어 닥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의 인기의 원천이 바로 가수로서의 가창력이니 만큼 제대로 되지 않은 라이브는 독으로 작용할 것이다.

그리 되면 크게 이슈가 일어날 것이 분명했고, 거기에 연기를 한다는 이야기까지 더해지면 어떤 시너지 효과가 일어날지 상상도 하기가 힘들었다.

물론 그것은 대외적인 이유였다. 창현이 비록 어리기는 하지만 그 정도도 염두에 두지 못할 정도는 아니지 않은가.

충분히 자신이 있기에 그렇게 대답한 것이라 생각하는 석규였다.

“저만 믿으세요. 못난 모습은 보이지 않을 테니까요.”

어깨를 으쓱하며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보여주는 창현이었다.


“우와! 부럽다!”

한 가지 전달된 소식에 소녀들은 부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수연의 주도 하에 맺어진 상호 평화 협정 이후, 소녀들은 스케줄을 하러 나가면서 귀갓길에 인근 대형마트에 들려 초콜릿 제작에 필요한 것들을 구입하였다. 내일은 오후 스케줄이니 만큼 오전에 초콜릿 제작에 착수하여 승부를 보려는 속셈이었던 것이다.

그날 스케줄이 끝나고 숙소로 귀가하자, 내일 오전 스케줄이 있는 것은 순규뿐이었다.

그 소식에 멤버들은 순규에게 얄미운 표정을 지으며 장난스럽게 말을 건네기 바빴다. 하필 혼자서 오전 스케줄이라니. 원통할 법도 했던 것이다.

특히 태연과 수영의 놀림은 가관이었다.

저녁 늦게 라디오 스케줄을 함께 하는 그녀들이었기에 그녀들은 순규를 놀리기에 바빴다.

“어떻게 하나! 우리는 내일 오전에 쉬는데 써니는 혼자 스케줄 가고.”

“큭큭! 그러게! 순규가 소녀시대를 알리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야지 뭐.”

아주 보는 사람도 얄밉게 느껴질 만큼 약점을 툭툭 건드리며 자극을 가하는 두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놀림들도 이내 부러움으로 바뀌기 시작하였다.

내일 순규가 소녀시대를 대표하여 나가는 스케줄에는 다름 아닌 창현의 합류가 정해졌던 것이다.

그 소식을 들은 몇몇 소녀들은 스케줄을 바꾸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함부로 경거망동 할 수 없었다. 스케줄을 바꿔 창현을 보는 것은 좋았지만 그렇게 하다가는 내일 오전에 초콜릿 제작이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없었기에 그렇다.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얄밉게 놀리던 소녀들은 순규를 부러워하는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후후후! 이런 앙큼한 것들. 감히 나를 놀려 먹어?”

자신을 놀리던 멤버들을 보면서 순규는 입 꼬리 한쪽을 말아 올린 채 진한 비웃음을 자아내 보였다.

오전 스케줄이라 하여 기분이 좋지 않았는데 놀리던 꼴이란.

하지만 상황이 역전된 지금 그녀는 마음껏 웃어줄 수 있는 위치에 오를 수 있게 되었다.

아마 발렌타인 데이를 앞에 둔 시점이어서 그런 것이리라.

그녀는 멤버들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특히 나 놀렸던 수영이 너랑 태연이 너는 죽었으. 창현이한테 너희들 험담 잔뜩 늘어놓을 테다.”

전의를 불태우는 순규의 모습에 태연과 수영의 표정이 급변했다.

이렇게 되면 자칫 잘못하다가는 자신의 초콜릿을 거부당하는 대참사가 일어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여자 사전에 자존심이 있지! 이미 주기로 한 초콜릿을 거절당하면 어찌 되겠는가?

그 심정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참담할 것임이 분명하였다.

이미 주기로 결정을 본 상황이었기에 주도권은 순규에게 쥐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두 소녀는 필사적으로 순규에게 매달리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순규는 태연과 수영을 용서할 생각이 전혀 없어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벤 안에서 얼마나 놀림을 받았던가.

여자가 한이 맺히면 오뉴월에 눈이 내리는 것처럼 순규의 한은 깊고도 깊었다.

가뜩이나 소녀시대에서 제일 키가 큰 수영과 자신보다 근소하게 큰 태연 때문에 묘하게 자극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이런 식으로 자신을 놀리다니!

“흥! 너희들은 내일 두고 봐. 두 눈에서 피눈물 나오게 해줄 테니까.”

결국 태연과 수영은 잔뜩 마이너스 점수만 받은 채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오랜만에 스케줄을 하는 기분인데요?”

아침 일찍 이루어지는 스케줄이었기에 창현은 모처럼 일찍 일어나 준비를 한 뒤 자신을 데리러 온 벤에 탑승을 하였다.

공식 스케줄로서는 열흘 만이지만 그것은 졸업식 겸이었기에 스케줄보다는 자신의 개인 행사에 가까웠다. 그걸 제외하면 제대로 된 스케줄로는 소녀시대의 <Kissing You> 때 다음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소소한 인터뷰 스케줄 같은 것도 있었지만 무언가 단단히 마음의 가짐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들은 일로 취급하지 않는 창현이었다.

그것은 일종의 자기 최면이었다.

작은 스케줄마저도 하나하나 일로 인식하게 되면 끝이 없어진다.

일은 사람을 지치게 만들고 부담을 갖게 만든다.

그래서 창현은 스스로에게 최면을 건다. 저렇게 작은 일들은 일이 아닌, 일상생활의 일부분이라고. 마음의 짐으로 가져가는 것이 아닌, 편안하게 임할 수 있는 작은 일과라고 말이다.

그러한 최면은 제법 성공적이어서 스케줄에 치여도 창현이 받는 타격은 그리 없었다.

“그렇긴 하네. 인터뷰 같은 것들은 스케줄로 취급하지 않았지?”

세희는 창현이 이렇게 하고 있는 것을 알았기에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그에 창현은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살짝 고개만 끄덕인다.

“다행이네. 괜찮은 것 같아서.”

창현의 모습이 나아 보였기에 세희는 한시름을 놓일 수 있었다.

그렇게 벤은 곧장 행사가 이루어지는 곳을 향했고, 언제나 그러했듯이 창현은 본래 예정된 시간보다 다소 빨리 도착할 수 있었다.

벤에서 내린 창현은 세희와 함께 오늘 행사를 진행하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러 다니기 시작하였다.

“안녕하세요. 현입니다. 오늘 잘 부탁드려요.”

갑작스러운 현의 등장과 함께 PD와 스태프들은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그와 함께 인사를 나눈다. 그리고 살짝 변경된 일정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해준다.

본래 창현은 오프닝 무대에 서기로 하였는데, 그의 수락이 떨어지자 오프닝 무대가 아닌 엔딩 무대로 미루었다는 것이다. 이름 높은 현의 무대를 오프닝 무대로 전락시킬 수 없다는 것이 PD의 의견이었다.

“저야 상관없습니다.”

일정 변경에 쿨한 모습을 보이는 창현이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일정 변경은 창현에게 있어 곤혹스러운 것이었다.

무대를 서기 전 창현은 음식 섭취를 일체 하지 않는다. 음식을 먹지 않아야 소리가 좀 더 깊고 울림 있게 퍼져 나오기에 그렇다.

그래서 창현은 어제 석규의 말을 들은 직후부터 아무 음식도 섭취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당연히 허기가 지는 것은 당연한 상황.

오늘 행사도 늦은 오후까지 진행될 예정이었기에 결국 창현은 꼬박 하루 동안 굶어야 한다는 말이 된다.

제법 고된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참을 만하였기에 결국 동의를 표하는 창현이었다.

그런 창현의 모습에 세희가 다가오면서 조용히 말한다.

“괜찮은 거야? 하루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은 셈이잖아.”

걱정 어린 세희의 말에 창현이 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한다.

“괜찮아요. 한창 때인데 그 정도도 견디지 못하겠어요? 다만 조금 날카로울 수도 있는데 그게 걱정이네요.”

“날카로운 모습이라…….”

창현의 말에 세희가 잔뜩 긴장한 표정을 짓는다.

무대 위에 서기 전 창현의 모습은 세희가 보기에 섬뜩할 정도로 날이 곤두 선 모습을 보여준다. 창현 본인은 노래를 부르기 전 감각을 최대한 민감하게 곤두 세워서 최고의 무대를 선사하려는 것이지만 지켜보는 사람은 오금이 저릴 정도로 저릿한 인상을 받게 된다.

“일단 참기 힘들면 조금씩이라도 음식을 섭취하자. 참는 것보다는 그게 나을 테니까. 알겠지?”

세희의 말에 창현이 고개를 끄덕인다.

“네. 그럴게요. 다른 사람한테 피해를 끼치는 것보다는 그게 나을 테니까요.”

창현이 자신의 말을 순순히 들어주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세희였다.

뒤이어 연예인들이 속속 도착하기 시작하였다. 오늘 행사에는 많은 연예인들이 참석하고 있었다. 나이가 상당히 지긋한 연예인들도 좋은 취지에서 봉사 활동을 한다는 말에 모습을 드러냈으며, 당장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있는 아이돌 가수들도 모습을 드러냈다.

특히 창현을 발견한 연예인들은 그에게 다가와 인사를 나누기에 바빴다.

연예인 중 연예인이라 불릴 만큼 모습을 보기 힘든 것이 바로 창현이었기에 그렇다. 그중에는 창현의 싸인을 요구하거나 같이 사진을 찍길 바라는 사람들도 있어서 함께 사진을 찍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창현에게 다가오는 네 명의 여인이 있었다.

그녀들은 창현에게 다가와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하였다.

“안녕하세요! 카라입니다.”

창현에게 다가온 연예인은 다름 아닌 카라였던 것이다.

작년 2007 MKMF에서 봤던 기억이 있었기에 창현은 카라의 인사를 반갑게 받았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규리 씨, 승연 씨, 성희 씨, 니콜 씨.”

“와! 저희들 이름을 알고 계신 건가요?”

자신들의 이름을 직접 불러주자 네 소녀는 밝은 표정을 짓는다.

창현 같은 인지도 높은 선배가 자신들의 이름을 알아주자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걸려있던 것이다.

그 모습에 창현도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인다.

“알다마다요. 제가 제일 많이 하는 게 바로 인터넷인 걸요? 게다가 <Break It>도 잘 들었고요. 아… 그리고 니콜 씨.”

“네?”

갑작스레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니콜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창현을 바라본다.

그에 창현은 약간 무안한 표정을 지으며 니콜에게 사과를 한다.

“그게 그러니까… 작년에 있던 일은 죄송했습니다.”

“네? 그게 무슨…….”

창현의 사과에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니콜.

하지만 같은 멤버들 사이에서는 난리가 났다.

나머지 세 여인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니콜을 째려보았던 것이다.

“정니콜! 너 언제 현 선배님을 만난 거야!”

“어서 말하지 못해?”

말하지 않으면 당장 집단폭행을 할 기세였다.

니콜은 시시각각 좁혀오는 언니들의 압박에 두 손을 저으며 말한다.

“어, 언니들! 전 몰라요. 저기 현… 선배님? 도대체 무엇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무래도 니콜이 기억하지 못하는 듯하다.

‘그냥 넘길 걸 그랬나?’

작년 2007 MKMF에서 있던 일을 염두에 두고 있던 창현이었기에 니콜이 알고 있지 못하자 그냥 내색하지 않을 걸, 이라고 생각하다가 이미 말해버린 후였기에 한숨을 푹 내쉬면서 말한다.

“아, 제가 말한 건 다름 아닌 MKMF에서 있던 일 때문입니다. 그때 댄스 배틀이 있었는데 제가 니콜 씨의 손에다가 키스를 했거든요. 허락도 구하지 않은 채 즉석에서 한 것이기에 많이 당황하신 것 같아 사과를 한 겁니다.”

“아아…….”

창현의 말에서 그가 무슨 말을 한 것인지 알아차린 네 여인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함께 니콜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제야 무슨 말인지 깨달았던 것이다.

MKMF가 끝나고 창현이 니콜의 손에 입맞춤을 한 것도 상당한 화제가 되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세실리아와의 키스 퍼포먼스 때문에 묻히는 현상이 발생하였다. 그래도 현의 팬들이라면 알고 있을 정도로 상당한 파장을 일으켰던 일임이 분명했다.

니콜이 고개를 저으면서 말한다.

“아, 아니에요. 말 그대로 퍼포먼스였는 걸요.”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무척 귀여웠다.

그 모습에 창현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감사의 인사를 한다.

“그렇게 생각해주시면 저야 고맙죠.”

창현과 카라는 사소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SM엔터테인먼트에서도 온다고 들었는데 늦게 오는 듯하여 결국 나이 대가 맞는 카라와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실 알고 있는 연예인도 없었다.

그때, 창현의 뒤로 슬그머니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다.

“응?”

갑자기 이야기를 나누던 카라 네 여인이 멈칫하는 걸 본 창현이 고개를 갸웃하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 사람은 창현이 뒤를 보자 곧장 손을 뻗었다.

순간 창현은 그 손을 잡아채고는 살짝 비틀면서 그대로 몸을 돌렸다.

그러자 창현은 상대방의 팔을 꺾은 채 자신의 코앞에 다가온 한 사람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는 상대의 정체를 확인하자 창현은 놀란 표정을 짓고는 바로 손을 놓았다.

“아야!”

“헉!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누나?”

“너 무술 했어? 무슨 애가 그렇게 반사속도가 빨라? 하마터면 손 부러지는 줄 알았네.”

엄살을 피우며 탁탁 손을 두드리는 여인의 정체는 다름 아닌 이효리였다.

갑작스러운 효리의 등장은 창현의 놀라움을 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인상을 찡그린 효리를 보면서 창현은 다시 한 번 사과했다.

“미안해요, 누나. 무의식적으로 그만…….”

살짝 비틀렸던 탓에 눈살을 찌푸리며 팔을 주무르는 효리였다.

그에 창현은 거듭 사과의 인사를 건넸다.

“미안해요. 갑자기 뒤에서 뭔가 덮쳐오는 게 느껴져서.”

“더, 덮친다고? 내가 뭘 그랬다고 그래?”

덮친다는 뉘앙스가 묘했는지 당황한 표정을 짓는 효리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 발렌타인 데이를 맞이하여 불우이웃을 돕는 행사에 참가한 효리는 촬영 장소에 도착하자 창현이 있는 것을 보고는 놀려줄 요량으로 살금살금 그에게 다가갔던 것이다.

하지만 창현의 반사 신경은 그녀의 예상을 월등히 뛰어넘고 있었고, 지금과 같은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효리의 과한 반응에 창현은 어깨를 으쓱하면서 말한다.

“아니면 말고요. 왜 그렇게 과민 반응을 하세요.”

얄미운 반응이 아닐 수 없었다. 마치 할라면 하고 말라면 말라는 식의 반응으로 인하여 자신만 나쁜 사람이 되지 않았던가?

이래서 천재들은 피곤하단 말이지.

효리는 고개를 돌리고는 혀를 찼다.

“쳇! 나이도 어린 녀석이 상대하는 건 재석 오빠보다 까다롭단 말이야.”

“제가 뭘 그랬다고요. 아참, 누나, 인사하세요. DSP미디어 소속의 카라에요.”

툴툴거리는 효리를 보며 피식 웃음을 지은 창현이 자신 앞에 있던 카라를 소개하였다.

그 말에 효리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허! 설마 내가 얘들을 모를 거라 생각한 거야? 내 예전 소속사가 DSP미디어거든?”

그러고 보니 효리는 원래 솔로가 아니라 핑클이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모를 리가 없다.

어찌 보면 카라도 4인조 여성그룹으로서 차세대 핑클이란 이름을 달고 나오지 않았던가?

자신이 활동하던 그룹의 이름을 달고 나왔는데 효리가 모를 리가 없는 것이다.

“아, 그렇구나. 그럼 자주 보셨겠네요?”

그 말에 효리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닌데?”

“컥! 그래요?”

하기야 톱스타인 효리가 신인 그룹을 자주 만난다는 것도 어찌 보면 이상하긴 이상했다.

창현은 카라를 보면서 효리를 소개하였다.

“그럼 지금이라도 자주 보면 되는 거죠. 자, 인사하세요. 효리 누나 아시죠? 어떤 남자든 10분 내로 꼬실 수 있는 스킬의 소유자시죠.”

대한민국을 이효리 돌풍으로 몰아넣었던 <10Minutes>을 살짝 인용하여 말을 하는 창현이었다.

그 소개에 카라 네 여인은 허리를 90도로 굽히며 인사를 하였다.

“안녕하세요! 카라입니다!”

대선배인 효리가 등장할 때부터 뻣뻣하게 굳어있던 카라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효리는 그녀들에게 있어 십 년 후 아니, 오 년 후 반드시 되고 싶은 롤 모델과도 같은 인물이 아니던가?

여자 아이돌이라면 누구든 이효리 같은 사람이 되고 싶으리라.

후배들의 인사에 효리는 어느덧 자신이 이런 후배들의 인사를 받을 나이가 되었다는 것을 느끼고는 묘한 느낌에 사로잡혀 인사를 받아주었다.

“안녕! 반가워. 앞으로 잘 지내보자고.”

카라와 인사를 나누면서 가볍게 말을 주고받는 효리였다.

아무래도 효리와 함께 있는 것이 어려웠는지 카라는 다른 선배들에게도 인사를 하겠다는 말과 함께 자리를 벗어났다.

그러자 창현과 효리 둘만이 남게 되었다.

창현은 힐끗 효리를 바라보면서 물었다.

“누나는 가보지 않으셔도 되는 건가요?”

“내가 왜?”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되묻는 효리였다.

그에 창현은 황당한 표정을 지으면서 효리에게 말했다.

“아니, 누나도 인사하러 가야 되는 것 아니냐고요. 그게 궁금해서 물어본 건데…….”

그 말에 효리는 웃음을 짓더니 어깨를 으쓱하며 말한다.

“에이, 나도 여기서 나름 선배거든? 게다가 나이는 나보다 많더라도 내가 선배인 경우가 있고. 먼저 인사를 왔으면 와야지, 내가 먼저 가야 할 이유는 없잖아?”

“아, 그러네요.”

나이가 이제 서른이지만 데뷔한 지는 햇수로 11년이 되지 않았던가?

그럼 인사를 하러 다닐 시기는 지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뭐, 그렇게 치면 창현도 벌써 햇수로는 사 년이 되어가지만 말이다.

“그러는 넌 인사 안 하나?”

이번에는 효리가 물었다.

그에 창현은 아무렇지도 않게 주변을 둘러보면서 대답을 했다.

“전 일찍 왔잖아요? 이미 인사 다 했죠.”

“벌써?”

놀란 표정을 짓는 효리였다. 하기야, PD부터 시작하여 스태프들까지 숫자가 제법 되는데 그들에게 인사를 다 했다는 것이 놀라웠나보다.

창현의 말에 놀라움을 표하던 효리는 한동안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효리가 창현을 슬쩍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음! 주제넘을 지도 모르지만 내가 한 가지 충고를 해줘도 될까?”

충고라니? 자신에게 말인가?

의문을 느낀 창현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효리의 말에 승낙의 표시를 한다.

“네, 말씀하세요.”

창현의 승낙이 떨어지자 효리는 살짝 숨을 고르더니 창현에게 입을 열기 시작한다.

“나는 솔직히 현이 네가 촬영 현장에 가서 PD나 스태프들에게 인사를 하는 것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아.”

“…….”

갑작스러운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자신이 인사를 하는 것이 무엇이 잘못되었다는 말이란 말인가?

의문을 표하고 싶은 창현이었지만 아직 효리의 말이 다 끝나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그러자 효리의 말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솔직히 갑작스러운 말일 수도 있어. 하지만 어느 정도 인지도를 얻은 연예인들이라면 다 그렇게 생각할 걸?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현이 네가 스태프들에게 필요 이상으로 예의를 갖추는 것도 아니라고 봐. 나는.”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조언이었다.

방송국 PD와 연예인은 서로 먹히고 먹는 관계에 놓여 있다. 신인 때는 PD의 명령에 따라 움직여야 하지만 어느 정도 인지도를 얻게 되면 PD가 오히려 연예인에게 매달려야 하는 상황이 오기도 한다.

그렇기에 신인 때는 PD의 말에 따라야 하지만 어느 정도 인지도를 얻으면 은연중 PD가 먼저 다가와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었다. 연예계에서 이는 보이지 않는 주도권 다툼이라 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창현의 존재는 무척 껄끄러웠다. 그가 인사를 함으로 인하여 소위 톱스타 반열에 든 스타들 대다수가 곤란한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예전에는 무게를 잡고 있으면 소위 톱스타로서의 당연한 행동 양식이라 여겨지던 것이 지금에 와서는 거만함으로 보는 사람들이 종종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효리는 지금 그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었다.

“…….”

창현은 그 말을 듣고 한동안 무슨 말인지 생각에 잠겨야만 했다.

지금 효리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아차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

한참동안 생각에 잠긴 끝에 창현은 그제야 효리가 무슨 말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점을 깨닫게 되자 입에서 절로 실소가 흘러 나왔다.

그 모습을 본 효리는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말한다. 자신의 말이 무시를 당한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왜 그런 반응을 보이는 건데?”

“절로 웃음이 나오네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저도 할 말이 있어요. 들어보시겠어요?”

효리가 그리 기분이 좋지 못한 모습을 보이자 창현은 웃음을 지우면서 말한다.

“말해봐.”

심기가 편치 않은 모습을 보이자, 창현은 입가에 살짝 미소를 그린 채 이야기한다.

“그건 어찌 보면 톱스타들의 오만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해요. 솔직히 먼저 인사를 하는 것을 가지고 그런 말을 하는 것도 우습지 않나요? 단지 프로그램을 촬영하기 위해 왔고,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줘야 촬영도 원만하게 이루어질 수 있으니까요. 단순히 먼저 인사를 하는 것 가지고 이렇게 저렇게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우습다고 봐요, 저는. 제가 나이가 어린 것도 있고, 먼저 인사를 한다는 것은 단순히 제가 예의 바르게 보이려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신인 때의 마음을 유지하기 위한 한 방편이라 할 수 있어요. 누구든 간에 먼저 인사를 받으면 기분 나빠하겠어요? 오히려 좋아했으면 좋아했지. 저도 좋고 상대방도 좋으면 모두가 좋은 것 아니겠어요? 이 점에 대해서는 저도 단호한 편이라서 굽힐 수가 없네요. 오히려 그 점은 다른 분들이 잘못된 것 같고요. 인사를 하는 것 가지고 그렇게 해석이 되는지 오히려 제가 궁금하네요.”

“…….”

길게 이어진 창현의 말을 들은 효리는 순간 말문이 턱! 하고 막히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말을 할 때는 느끼지 못했지만 창현의 말을 듣는 순간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의 말처럼 단순히 먼저 인사를 하는 것 가지고 저렇게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어찌 보면 창현의 말 그대로일 수 있다.

인사 하나 가지고 저렇게 해석하는 것과 좋지 않게 생각하는 것 등의 행동 등은 바로 자신의 자만심에 비롯된 것이라는 것을.

서로에게 인사를 하는 것 자체가 언제부터 자신의 자존심이니 뭐니 하는 것이 되었단 말인가?

효리는 자신의 말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하! 그 점은 내가 실수를 한 것 같네. 인사 가지고 너무 많은 것을 계산하고 있었어.”

이것이 효리의 장점이었다. 자신의 잘못된 점을 떳떳하게 인정할 수 있는 털털함.

창현은 효리가 자신의 말을 이해하는 듯하자 입가에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먼저 인사를 하는 건 좋다고 봐요.”

“그래, 현이 네 말이 맞아. 깨닫는 바가 있네. 그럼 나도 인사나 하고 와야겠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신인 때의 감정이 되살아나서 말이야.”

효리의 말에 창현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네, 다녀오세요.”

“그럼…….”

창현의 말과 함께 효리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는 PD와 스태프들이 있는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혼자 남게 된 창현은 주변을 슬쩍 둘러보다가 익숙한 벤이 다가오는 걸 볼 수 있었다.

“응? 저건…….”

자주 보던 벤이었기에 그걸 본 창현의 눈이 빛났다.

촬영 장소에 도착한 벤의 문이 열리면서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 사람의 정체를 확인한 창현이 반가운 미소를 지으며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손을 들며 반갑게 소리를 쳤다.

“순규 누나! 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네는 순간 벤에서 내려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던 순규는 번뜩이는 눈으로 창현을 바라보았다.


“도착했다. 어서 내려.”

아직 데뷔한 지 반 년 밖에 되지 않은 소녀시대는 신인에 속해 있기에 삼십 분 전에 도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로드 매니저의 표정은 밝지 못했다. 신인은 PD와 모든 스태프들에게 인사를 해야 하는데 자칫 촉박할 수도 있는 시간이었던 것이다.

“네, 알겠어요.”

순규도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어찌어찌 대답을 하면서 벤에서 내렸다. 오전 스케줄이라 제법 졸렸지만 창현에게 태연과 수영을 음해(?)할 생각을 하니 절로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이것들, 오늘 다 죽었어. 흐흐흐!”

그렇게 생각하자 희미하게 전해져 오는 태양의 열기도 그렇게 따스할 수 없었다.

입가에 미소를 지은 순규가 태양의 온기를 느끼며 입가에 진한 괴소를 짓고 있을 때, 그녀의 심기를 거스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순규 누나! 안녕하세요!”

누가 감히 자신의 이름을 부른단 말인가?

순간 화사하던 기분이 확 깨지는 걸 느끼며 순규가 날카로운 눈으로 목소리의 진원지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입가에 얄미운 미소를 지은 채(어디까지나 순규의 관점) 자신에게 손을 흔드는 창현의 모습에 눈에 들어왔다.

‘저것이 감히 순규란 이름을! 써니라 불러도 되는데.’

서서히 순규라 불러도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지는 자신의 놀라운 적응력이 새삼 두려워지는 것을 느끼면서 순규는 창현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을 한다.

“내가 순규라 하지 말랬지? 더군다나 여기는 촬영장이라고! 써니라 불러! 알았지?”

갑자기 낮은 목소리로 협박(?)을 하는 순규의 목소리에 창현이 움찔하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아, 제가 실수했네요. 알았어요.”

“그래, 그럼 나는 인사를 하고 올 테니까. 얌전히 있도록 해.”

“…알았어요.”

자신의 말에 움찔하며 뒤로 물러서는 창현을 보며 순규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후후! 할 말도 있으니까 기다리도록 해. 난 아직 신인이라서 인사를 해야하거든.”

그 말과 함께 순규는 PD와 스태프들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촬영 전까지 부지런히 돌아다닌 끝에 무사히 인사를 끝마칠 수 있었다.

인사를 모두 끝낸 순규가 창현에게 다가온다.

그러자 창현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그런데 저보고 기다리고 있으라고 한 건 무슨 뜻이에요? 생각해봐도 이해가 잘 되지 않아서요.”

알아서 먼저 질문하는 창현이었다.

그 질문에 순규가 입가에 진한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아, 그거 말이야? 후후후! 내가 널 위해 아주 대박 특종을 물어왔지.”

슬슬 밑밥을 던지는 순규였다.

데뷔를 한 지 어느덧 반 년. 이제 웬만큼 내공이 쌓여서 낚는 것도 능수능란해졌다.

이번에는 창현이라는 대어를 낚기 위해 물밑공작을 하고 있는 것이고 말이다.

감히 자신을 놀리던 두 앙큼한 것들에게 강력한 복수를 해주기 위하여!

“특종이라고요? 뭔데요?”

아니나 다를까. 특종이란 말에 반응을 보이는 창현이었다.

궁금한 표정을 짓는 창현을 보면서 순규는 순간 고민에 빠졌다.

조금 더 조여야 할지 아니면 이쯤에서 밑밥을 풀어야 할지 말이다.

그녀의 선택은 밑밥을 푸는 것이었다.

창현이 이 녀석은 보통 영리한 녀석이 아니어서 자신이 조금이라도 조이려는 움직임을 보이면 그것을 곧장 눈치 채고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설 인물이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계획이 물거품 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기에 이쯤에서 멈추고는 곧장 본론으로 들어갈 예정이었다.

순규가 묘한 표정을 지으며 창현에게 말한다.

“내일이 발렌타인 데이인 건 알고 있지?”

창현이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당연히 알고 있죠. 그것 때문에 오늘 촬영을 하는 거잖아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창현의 모습에 순규도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지. 그리고 내일 우리들이 창현이 너한테도 초콜릿을 주려고 하고 있단 말이야.”

이것은 어디까지나 밑밥이었다. 창현이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다면 이 정도쯤은 충분히 짐작이 가능할 것이다.

역시나, 창현은 거기까지 짐작을 했는지 표정이 환하게 변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요? 혹시나 했는데 정말 주실 줄은 몰랐어요. 감사히 받을게요. 후후! 근데 그걸 말해도 되는 거예요? 비밀로 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창현이 묻자 순규가 고개를 젓는다.

“아니야. 이건 너도 짐작하고 있었잖아? 다만 애들이 직접 만든 초콜릿이라는 점이 비밀이었지.”

“직접 만든 초콜릿이요?”

시중에서 파는 초콜릿과 수제 초콜릿의 위용은 그야 말로 하늘과 땅 차이다. 그 정성과 마음이 담긴 것과 어찌 비례할 수 있겠는가.

창현 또한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순간 멈칫했다가 이내 안색이 급변한다.

수제 초콜릿에 담기는 정성에 감동을 하다가 작년 발렌타인 데이 때의 악몽이 떠올랐던 것이다.

소금 초콜릿과 고추냉이 초콜릿의 악몽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안색이 하얗게 물들어가며 창현이 물었다.

“설마 벌써 다 만들어진 건가요?”

그런 창현의 반응이 너무나 재미있어서 순규가 즐거운 표정을 지으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다.

“응! 다 만들어졌어. 기대해도 좋을 거야. 맛이 괜찮거든.”

“커헉…….”

다 만들어졌다는 말에 순간 비틀거리는 창현이었다 제법 충격이 큰 듯했다.

아홉 개 중에 분명 테러에 버금가는 초콜릿이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순규는 사색이 된 창현을 안심시키듯 입을 열었다.

“괜찮아. 이번에는 다 맛을 점검하고 만든 거니까. 하지만 조심해야 할 게 있어.”

“조심 할 거요?”

방금 전만 해도 말하지 않아도 될 사실을 말하는 것이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완전히 뒤바뀐 순규의 역할이었다.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 폭탄을 피할 수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 것이다.

다급한 창현의 말에 순규가 씨익 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그래. 평소 창현이 너한테 고마움을 느낀 애들이 진심을 담아 초콜릿을 준비한 것도 있지만 그중에는 장난을 치려고 준비한 것도 있거든.”

“장난이라고요?”

역시나, 아홉 개의 초콜릿 중에서 폭탄은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란 말인가.

창현이 자신의 말에 몰입하는 듯하자 순규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장난. 조심해야 할 인물은 총 두 명이야.”

“누구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은근한 표정을 지으며 묻는 창현이었다. 작년처럼 아무것도 모르다가 죽을 듯한 고통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그에 순규는 속으로 웃음을 지으면서 짐짓 창현의 말에 넘어가는 척 말한다.

“응. 조심해야 할 사람은 총 두 명이야. 바로 태연이와 수영이. 두 사람을 조심해야 해.”

본격적인 순규의 복수가 발동되는 순간이었다. 인터넷에서 각종 레시피를 습득하여 자신만의 독창적인 초콜릿을 창안했던 두 사람이 졸지에 테러리스트로 둔갑되는 순간이었다.

그 말을 창현은 또 진중한 표정으로 받아들인다.

“태연 누나랑 수영 누나라고요? 흐음!”

“맞아. 소녀시대의 가장 단신과 장신의 조합이지.”

은근슬쩍 태연을 가장 단신으로 밀어넣는 순규였다.

하지만 그 말에 스리슬쩍 넘어갈 창현이 아니었다. 그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순규에게 물었던 것이다.

“가장 단신? 이상하네요. 제가 알기로는 누나가 더…….”

“시끄럿! 어쨌든 그렇게 알고 있어. 촬영 시작하는 듯하니까 난 이만!”

창현이 넘어가지 않자 순규는 속으로 아쉬움을 토로하며 후퇴를 한다. 태연을 최강 단신으로 만드는데 실패했지만 적어도 이간질을 하는데 성공했으니 말이다.

반쪽짜리 목표를 달성했음에도 불구하고 순규의 표정은 밝았다.


그렇게 시작된 촬영은 특별히 할 거리가 없었다.

가벼운 인터뷰와 함께 스타가 직접 제작한 초콜릿을 보여주는 것이었던 것이다.

창현은 전문가의 설명을 잘 듣고는 곧장 초콜릿 제작에 착수하였다.

각종 악기를 다루고, 게임 컨트롤이 능수능란했기에 창현의 손놀림은 무척 좋았다. 완벽한 하트 모양의 초콜릿을 만든 창현은 초콜릿 위에다가 아이싱의 기교를 부리기 시작하였다. 전문가에게 기초적인 아이싱을 배우기는 했지만 창현은 거기에 조금 더 욕심을 부려 자신만의 아이싱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완성된 창현의 초콜릿은 사람들의 감탄을 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오오!”

“이, 이거 창현이 네가 만든 거야?”

마침내 완성한 초콜릿을 선보일 때, 순규는 경악한 얼굴로 창현이 만든 초콜릿을 가리키며 묻는다.

그에 창현은 입가에 미소를 띤 채 고개를 끄덕인다.

“어때요? 잘 만들었죠? 저도 완성하고 놀랐다니까요. 저한테 이런 재능이 있을 줄이야. 잘 배워서 나중에 발렌타인 데이 초콜릿 장사를 해도 될 것 같네요.”

“설마 오늘 처음 만든 거야?”

창현의 말에서 느껴지는 뉘앙스가 그러했기에 묻는 순규였다.

그에 창현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처음이죠. 제가 초콜릿 만들 일이 어디 있겠어요.”

“그건 그렇지. 와… 정말 대단하네.”

감탄 밖에 나오지 않는 창현의 초콜릿이었다. 어차피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이기에 모양이 무에 그리 중요하다 말을 할 수 있지만 보기 좋은 떡이 맛도 좋다는 것처럼 창현의 초콜릿은 시중에 내다 파는 예쁜 초콜릿과 비교를 해도 손색이 없을 지경이었다.

초콜릿 제작 작업이 끝나고 연예인들 간에 초콜릿 디자인 순위를 매기기도 했는데, 거기에서 창현의 작품이 1위를 차지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렇게 초콜릿 제작이 모두 끝나고, 마침내 엔딩 무대를 가질 때가 되었다.

엔딩 무대에 서는 가수는 창현이었기에 디자인 시상식이 끝나자 곧장 무대에 설 준비를 하기 시작하였다.

“상태는 괜찮고.”

물로 살짝 목을 축인 창현은 자신의 몸 상태를 체크하면서 스스로에게 OK 사인을 내렸다. 배가 고프다는 점을 제외하면 노래를 부르기에 최적의 상태가 갖춰진 것이다.

어차피 이 무대가 끝나면 먹고 싶은 것을 실컷 먹을 테니 그리 상관이 없지만 말이다.

무대를 앞두고 창현은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방송에 나가는 무대는 연말 가요대전 이후 처음이었다. 그동안 슬럼프도 있었고, 마음껏 무대에 서지도 못했기에 여러 가지 불안요소가 존재했지만 이제부터라도 자신을 믿기로 결심을 굳힌 창현은 그마저도 곧 펼쳐질 무대에 속한 즐거움의 한 요소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잠시 후, 자신을 소개하는 멘트가 들려오고, 동시에 MR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무대 위로 올라서면서 창현은 마이크를 굳게 움켜쥔다.

자신의 마음을 거세게 뒤흔들고 있는 한줄기 불안함을 털어내려는 듯 박자에 맞추어 노래를 하기 시작한다.


“나 왔어.”

“언니 다녀오셨어요!”

“써니 왔어?”

스케줄을 끝낸 순규가 비틀거리며 숙소 안으로 들어서자 멤버들이 그녀를 맞이한다.

하지만 순규는 그런 멤버들의 말에 반응하지 않은 채 곧장 주방 안으로 들어가더니 싱크대 수납장 안에 놓여있는 자신의 초콜릿을 가져온다. 그리고는 포장을 뜯기 시작한다.

“야 뭐하는……?”

“언니! 그거 내일…….”

자신을 만류하는 멤버들의 말을 듣지 않은 채 포장을 모두 뜯은 순규는 초콜릿을 잘게 부수기 시작했다.

콰직! 콰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초콜릿이 잘게 부서지기 시작하였고, 작은 초콜릿 조각들을 먹기 시작한다.

그리 큰 크기가 아니었기에 초콜릿을 다 먹는데 얼마 걸리지 않았다.

순규가 모든 초콜릿을 다 먹어치우자, 태연이 앞으로 나서면서 물었다.

“갑자기 들어와서 왜 초콜릿을 다 먹는 거야? 이런 행동을 보인 것에 이유가 있을 거 아냐. 안 그래? 도대체 나가서 무슨 일을 겪었기에 그러는 거야?”

태연의 질문에 모든 멤버들이 순규에게 답을 구하는 듯 시선을 주었다.

그러자 순규는 아무 말도 안하다가 입을 열었다.

“…차마 이 초콜릿을 보여줄 수 없더라고.”

“그게 무슨 말인데?”

순규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차리지 못한 태연이 다시 묻자, 순규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한다.

“이 초콜릿을 창현이한테 줄 수가 없었다고!”

그게 무슨 말이란 말인가. 초콜릿을 줄 수가 없다니?

태연이 의아한 표정을 지은 채 순규에게 물었다.

“왜 줄 수 없는데?”

“민망해서!”

급기야 버럭 소리를 지르는 순규였다. 그에 모두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 의아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초콜릿을 건네주는데 왜 민망하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일까?

분명 오늘 있었던 어떤 일과 연관이 있다는 느낌을 받은 소녀들이 순규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순규의 입에서 오늘 있었던 일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오늘 초콜릿을 만들면서 가장 맛있는 초콜릿하고 가장 예쁜 초콜릿을 선발하는 것이 있었어. 거기에서 누가 우승을 했을 것 같아?”

오늘 초콜릿 제작하는 곳에 참여한 연예인만 오십여 명이 넘는다. 당연히 순규의 말에 누가 우승을 했을지 짐작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방금 전 순규가 밑밥을 깔아놓았음으로 소녀들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특히 창현에 관해서는 비상한 관심을 보이는 윤아가 흠칫하면서 입을 열었다.

“설마 창현이가?”

“…….”

다른 소녀들의 의견도 모두 같은 듯 아무 말도 하질 않는다.

그러자 눈살을 찌푸린 순규가 입을 연다.

“맞아. 창현이가 두 부문에서 1위를 했어. 오늘 초콜릿 제작하는 법을 배워놓고 1위를 했다더라. 말이 돼? 게다가 그 디자인은… 하아! 무난한 초콜릿을 주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초콜릿을 제작하는 모습을 보니까 말이 나오질 않더라.”

도대체 이렇게 말할 정도라면 어느 정도로 잘 만들었단 말인가.

소녀들의 마음속에 불안함이 싹트기 시작했다. 순규가 괜히 이런 반응을 보일 것이 아니었기에 그렇다.

멤버들이 그런 반응을 보이건 말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순규가 주방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난 다시 만들겠어. 창현이한테 주면서 부끄럽지 않은 초콜릿을 만들고 말겠어. 오늘 밤을 불사르더라도!”

굳은 각오를 보이는 순규였다.

그 모습에 소녀들은 혼란에 빠져들었다. 자신들의 초콜릿이 순규와 비슷했으면 비슷했지 결코 순규의 것보다 뛰어나다고 확언을 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잠시 머뭇거리며 생각에 잠기는 소녀들.

‘순규가 저런 반응을 보인다면 분명 무언가가 있다는 뜻이야. 그렇다면 나도 무언가를 해야 하는데…….’

‘써니 언니가 저렇게 나올 정도라면 창현이의 실력이 대단하다는 뜻인데. 새로 만들어야 하나?’

복잡한 생각이 머리에 감돌면서 떠나질 않고 있었다.

그때, 은밀하게 움직이는 소녀가 있었다.

바로 미영이었다.

그녀는 멤버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자 표정 하나 바꾸지 않은 채 말한다.

“써니가 저렇게 말할 정도라면 분명 대단하다는 뜻 아니겠어? 난 새로 만들래. 재료는 아직 충분하니까.”

초콜릿을 만들기 위해 재료를 한가득 준비해놓은 상황이었다. 혹시나 실패를 할까 염려를 하여 재료를 넉넉하게 준비를 해놓았는데 그것이 주효하게 된 것이다.

그 말과 함께 미영이 주방으로 향하자 더 이상 소녀들도 생각을 이어나갈 수 없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순규와 미영에게 선수를 빼앗겨 초를 칠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나도 새로 만들래.”

“나도…….”

그 말과 함께 주방으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그에 결국 소녀들은 순서를 차례차례 정하는 수밖에 없었고, 세 명씩 세 조를 짜서 초콜릿 제작 작업에 착수하기 시작하였다.

늦은 밤까지 초콜릿 제작에 심혈을 기울이고 나서야 소녀들은 잠에 빠질 수 있었다.

자신들의 초콜릿이 창현의 마음에 들 수 있기를 기원하면서.

초콜릿 제작에 열을 올리는 멤버들을 보면서 순규가 입 꼬리 한쪽을 말아올렸다.

‘성공이다.’

멤버들을 모두 낚는데 성공을 하였다!

본래는 태연과 수영만 낚으려 했지만 더 좋은 낚시감이 생겨서 전체 낚시를 유도, 성공을 한 것이다.

이것이 나의 복수다.


모두가 잠든 깊은 새벽.

잠에 빠져있던 미영은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났다. 그리고 소리가 나지 않도록 이불을 옆으로 밀어둔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척을 죽이고는 방문을 향해 조용히 발걸음을 옮기던 그녀가 힐끗 룸메이트들을 바라본다. 그러던 그녀의 시선이 문득 효연에게 머문다.

미영은 그런 효연에게 속으로 사과를 한다.

‘효연아, 미안,’

순규의 충동질로 인하여 초콜릿 제작을 한 멤버들의 초콜릿 퀄리티는 한층 상승해 있었다. 본래대로라면 자신의 승리를 점칠 수 있었으나 지금은 그것이 불투명한 상황.

이 상황에서 자신이 승리를 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불법적인(?) 방법을 사용해야만 했다.

그 방법으로 미영이 택한 것은 다름 아닌 테러였다.

자신의 모든 실력을 발휘했기에 초콜릿의 질을 더 상승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다른 초콜릿의 질을 떨어뜨려 자신의 초콜릿 질을 상승시키는 것이 승리의 관건이었다.

수연이 그것을 알았기에 초콜릿에 수작을 부리는 걸 금지 시켰으리라.

약속을 하긴 했지만 자신이 승리를 하기 위해서는 이 방법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미영은 자리에서 일어난 것이다.

나중에 그 사실이 밝혀진다 하더라도 효연이 뒤집어 쓸 테니 미리 효연에게 사과를 한 미영이 발걸음을 죽인 채 방을 벗어나기 시작한다.

목적지는 초콜릿이 보관되어 있는 주방이다!


미영이 막 자리에서 일어났을 무렵, 유리도 잠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났다.

그리고 주변을 휘휘 둘러보면서 룸메이트인 수연과 수영이 잠에 빠져있는지 확인을 한다.

두 사람 모두 깊은 잠에 빠져있는 것을 확인한 유리도 조용히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고는 방문을 향해 조용히 다가간다.

그녀의 입가가 말려 올라가며 진한 웃음이 맺힌다.

‘미안해, 효연아. 네가 좀 뒤집어 써야겠어.’

아까 밤에 멤버들이 고 퀄리티 초콜릿을 제작하는 걸 본 유리는 이대로 정면대결을 하다가는 자신의 초콜릿이 그저 그런 축에 속할 수밖에 없다는 걸 느끼고야 말았다. 그래서 그녀는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비겁하지만 멤버들의 초콜릿 질을 한층 낮춰주기로!

뭐 방법이야 간단하지 않겠는가? 멤버들의 초콜릿이 담긴 상자에서 내용물을 빼내고 300원짜리 가나 초콜릿을 넣어주던가 말이다.

이미 계획이 수립된 상황이었기에 유리의 입가에는 음산한 미소가 맺혔다.

‘후후후! 이렇게 되면 창현이는 다른 애들에게 실망을 할 테고, 정성껏 초콜릿을 준비한 나한테 감동을 받겠지? 그리고 아닌 듯하면서 서서히 다가가는 거야. 그렇게 되면 1년 후 창현이는 내 것이 될 수밖에 없는 이야기란 말이지.’

마치 제갈량이 유비에게 천하삼분지계를 이야기 한 것처럼, 아니, 주유가 손권에게 천하이분지계를 말한 것처럼 장기적인 안목으로 내다보는 유리였다. 당장 결과를 내기 어려운 만큼 서서히 다가가는 전략으로 창현의 마음을 훔치려는 그녀의 계획은 이번 발렌타인 데이가 분수령이 될 확률이 무척 컸다.

계획대로 이루어진다면 말이다.

그렇게 핑크빛 상상을 하면서 유리가 방문을 조용히 열고 거실로 나갔다.

그녀의 목적지도 다름 아닌 주방이었다.

방을 벗어난 그녀가 곧장 주방으로 발걸음을 옮길 때였다.

반대쪽에서 검은 그림자가 이쪽으로 오는 것이 아닌가?

처음에는 어둠에 적응이 되지 않아 잘 못 알아봤는데 어느 정도 적응이 되자 유리는 반대쪽에서 접근하는 검은 그림자의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저쪽에서 다가오던 검은 그림자의 정체는 다름 아닌 미영이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동시에 서로의 모습을 바라보고는 순간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경악한 얼굴로 손을 뻗어 서로가 서로를 가리켰다.

“너, 너…….”

“유, 유리? 네가 어떻게…….”

서로를 바라보며 두 여인은 한동안 굳어 있어야만 했다.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는 말이 있다.

미영과 유리는 서로 마주치는 순간 본능적으로 서로의 의도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각자 그런 마음을 품고 있었으니 서로의 의도를 훤하게 내다볼 수 있었던 것이다.

안 그러면 피곤해죽겠는데 지금 이 시간에 일어난다는 게 말이나 된단 말인가.

분명 자신과 비슷한 의도로 초콜릿에 어떠한 위해를 가하려 했던 것이리라.

두 사람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고 있었다.

특히 미영은 유리를 보면서 생소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유리가 전혀 이럴 것이라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설마 뒤에서 이런 짓을 할 줄이야.

이것이야 말로 뒤에서 호박씨 까는 상황이 아닌가?

‘전혀 티를 내지 않더니. 유리가 이럴 줄이야. 만약 내가 나오지 않았더라면…….’

상상만 해도 오싹해지는 순간이었다. 만약 자신이 나오지 않았더라면 다음 날 테러 당한 초콜릿을 보면서 영락없이 효연이 한 짓으로 알았을 것이다.

이런 장난을 칠 만한 사람은 효연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윤아도 초딩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만 언니들의 초콜릿에 테러를 가할 정도로 대담하지 않은 걸 감안하면 완벽한 함정이라 볼 수 있었다.

미영은 유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유리! 네가 어떻게 이럴…….”

저도 모르게 큰소리로 입을 열던 미영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갑자기 유리가 다가와 미영의 입을 막으면서 오른손 검지손가락을 들어 입가에 가져다 댄 것이다.

“쉿! 목소리가 너무 커. 애들이 다 깨길 바라는 거야?”

“…….”

그것은 미영도 바라는 바가 아니었기에 유리의 제지에 입을 다물었다. 여기에서 멤버들이 깨면 낭패도 이런 낭패가 없다.

“후우! 일단 조용히 이야기 하자. 목소리 죽이고 알았지?”

미영이 입을 다물자 곧장 말을 꺼내는 유리였다.

그녀의 머릿속은 지금 상황을 어떻게 최소화 시킬지 맹렬하게 회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방법이 선뜻 떠오를 리가 없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미영을 만났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유리에게 있어서는 큰 실수였다.

자신의 가장 큰 단점은 다름 아닌 나서는 듯하면서 나서지 않는 듯한 모습이었는데 미영에게 자신의 모습을 노출시킨 셈이었으니 말이다.

이렇게 되면 암중에서 무슨 일을 하려고 해도 상당한 제동을 걸릴 수밖에 없다.

그녀의 눈에 들어오는 미영의 모습은 평소와 다른 면모가 눈에 들어왔기에 그렇다.

큰 위기였기에 가급적 조용히 넘기는 것이 중요했다.

유리의 제안에 미영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또한 지금 상황이 크게 발전하는 것은 내키지 않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미영이 유리를 바라보면서 물었다.

“유리 네가 이 시간에 나온 거야? 늦은 밤까지 초콜릿을 만드느라 피곤했잖아.”

이미 의도를 파악하고 있지만 한 번 찔러보는 미영이었다.

그 질문에 유리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으며 대답한다.

“그러는 너는? 그건 오히려 내가 더 궁금한데.”

“…내가 먼저 물었어.”

잠시 침묵하다가 대답하는 미영이었다.

서로의 의도를 이미 꿰고 있지 않은가? 질문을 굳이 할 필요는 없지만 어느덧 미묘한 신경전으로 전개가 되고 있었다.

미영의 말에 유리가 묘한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한다.

“미영이 네가 대답하면 나도 대답하도록 할게. 어때?”

쉽게 넘어가지 않는 유리였다. 당장 득이 되는 건 없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밀린다는 것은 앞으로 미묘한 주도권에서 뒤처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장기적으로 보면 큰 손해였기에 물러설 수 없었다.

유리의 말에 미영은 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은 채 대답한다.

“나? 나는 목이 말라서 일어난 건데? 대답이 됐지? 유리 너는 무슨 일로 일어난 거야?”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대답하는 미영이었다.

뻔뻔하다고 할 수 있는 미영의 모습에 유리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설마 미영이 이런 식으로 나오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이게…….’

순간 버럭 소리를 지르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누른다.

서로가 서로의 의도를 꿰고 있는 상황에서 말려들면 순식간에 밀려버리게 된다.

‘진정해야 해. 여기서 밀려버리면 앞으로도 계속 밀릴 수밖에 없어.’

유리는 미영의 저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겉으로 드러나서 망정이었지, 만약 자신과 같은 전략을 선택했다면?

결정적인 순간에 뒤통수를 맞을 수 있었으리라.

방송상에서의 이미지도 그렇지만 멤버들 사이에서도 미영의 이미지는 약간 어벙한 축에 속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러한 어벙함 속에 이런 책사의 기질이 숨어 있을 줄 어떻게 알았던가.

가슴 한쪽이 서늘해지는 걸 느끼면서 유리도 표정 관리를 한 채 입을 연다.

“나? 나도 마찬가지야. 목이 말라서 일어난 거야. 그런데 미영이 네가 나와서 깜짝 놀랐지 뭐야?”

얼굴에 철판을 깐 채 대답하는 유리의 모습에 미영의 눈에 불똥이 튄다. 설마 그녀가 이런 식으로 빠져나갈 줄은 몰랐던 것이다.

유리도 그런 미영의 시선에 밀리지 않은 채 당당하게 시선을 마주한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미영과 유리는 서로를 바라보는 가운데 머릿속은 맹렬하게 회전에 회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단순히 시선을 마주하고 있을 뿐이지만 보이지 않는 치열한 심리전이 오고가고 있었다.

‘먼저 말을 꺼내볼까? 하지만 속내를 드러내다가는 견제를 받을 수 있는데.’

미영은 유리의 앙큼한 면(?)을 발견한 것이 큰 수확이라고 생각하면서 한편으로는 그녀에게 먼저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제안을 하여 손을 잡고 멤버들의 초콜릿을 파기하고 싶었지만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여태까지 두 얼굴로 자신을 속여 온 유리에게 어찌 먼저 제안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 고민은 유리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자신을 바라보는 미영의 시선을 느끼며 속으로 혀를 찼다.

‘미영이한테 들키다니. 내가 실수를 했어. 하지만 이미 상황은 어쩔 수 없잖아? 들켰지만 이번 일은 진행을 해야 해.’

자신의 정체가 노출 되었지만 그것을 미영에게만 국한 시킬 수 있다면 결코 손해는 아니다. 행동반경이 다소 좁아지기는 하겠지만 그것을 최소화 할 수 있다면 자신의 계획을 수정하지 않아도 된다.

당장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상황을 타개하는 것!

유리는 자신이 먼저 굽혀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미영에게서 도저히 먼저 굽히고 들어올 수 없다는 의지가 느껴졌기에 그렇다.

짧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유리가 입을 연다.

“하아! 이미 서로의 의도를 다 알고 있는 이상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어? 우리 서로 이러지 말고 손을 잡는 게 어때?”

아니나 다를까, 유리가 먼저 입을 열자 미영이 그 말에 반응을 한다.

“손을 잡는다고?”

손을 잡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리가 없다. 다만 겉으로 티를 내지 않은 채 고개를 갸웃해 보일 뿐이었다.

유리는 그런 미영의 모습이 가증스러웠지만 이왕 굽히고 들어가기로 한 것, 여기서 계획을 무산 시킬 수 없었다.

당장 한 소리 해주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면서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인다.

“그래. 손을 잡자고. 목적은 초콜릿을 파기하는 거잖아? 서로 그 생각을 할 줄 몰랐지만 이왕 들킨 거 목적은 이뤄야 한다고 생각 해.”

“난 별로 그럴 생각이 없는데?”

유리의 말에 튕기는 모습을 보이는 미영이었다. 절대 그런 생각을 했다는 의도를 보일 생각이 없는가 보다.

계속해서 튕기는 미영의 모습에 유리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갔다. 받아줄 수 있는 것에 한계가 있는 법인데 인내가 서서히 바닥을 드러내고 있던 것이다.

“정말 이러기야?”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유리가 말을 한다.

그러한 유리의 모습에 미영은 순간 움찔했지만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한동안 허공에서 만났다. 그러다가 이내 미영이 한숨을 짧게 내쉬면서 입을 연다.

“후! 알겠어. 유리 네 말대로 따를게. 그러니 그런 표정은 짓지마.”

끝까지 유리를 속아 넘기려고 했지만 자신의 의도에 걸려들지 않는 유리의 모습에 결국 사실을 인정하고야 마는 미영이었다.

사실을 인정하는 미영의 모습에 유리는 입가에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럼 이제 한 배를 탄 동지네. 그렇지?”

동지라는 말을 유난히 강조하는 유리였다. 미영에게 자신과 한 배를 탄 처지니까 자신의 실체를 알릴 생각을 하지 말라는 무언의 경고와도 같았다.

지금 상황에 극도로 예민한 미영은 유리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녀는 유리의 말에 밀리지 않은 채 그녀를 바라보면서 말을 한다.

“그렇지. 한 배를 탄 동지지. 그런데 우리 멤버들도 그와 같은 사실을 알고 있으려나.”

초콜릿을 파기하려는 것이 아닌, 지금과 같은 유리의 숨겨진 면을 꼬집는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이익!’

그 말의 의미를 파악한 유리가 속으로 이를 꽉 물었다. 미영의 말은 자신의 정체를 알리지 말라는 말에 정면으로 반박하는 말이었던 것이다.

여차하면 자신의 정체를 폭로하겠다는 미영의 협박도 곁들어져 있었기에 더욱 그렇다.

유리는 자신의 얼굴을 보며 씨익 웃는 미영에게 속으로 칼날을 갈았다.

‘두고 보자. 오늘은 일단 이렇게 물러나지만 다음은 없어. 각오해 황미영.’

지금은 이렇게 물러설 수밖에 없는 자신이 원망스러웠지만 다른 현실적인 대안은 없었다.

우위에 서 있는 것이 미영이었기에 유리는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가볍게 한숨을 고른 유리가 입을 열었다.

“일단 계획을 실행으로 옮기자. 더 이상 논쟁은 불필요하니까.”

“알았어.”

미영도 가뜩이나 수면이 부족한 상황에서 깜깜한 새벽부터 유리와 심리전을 벌이느라 머리가 아팠기에 유리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을 하며 본격적으로 활동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기척을 죽여 주방으로 발걸음을 옮기고는 초콜릿이 보관된 수납장을 열었다. 그러자 각양각색의 포장지로 포장된 초콜릿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거 받아.”

유리는 미영에게 세 개의 초콜릿을 건네고는 자신을 따라오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리고는 방을 나올 때 슬쩍 가지고 온 가방을 들고 베란다로 나갔다. 그리고는 베란다에서 포장지를 조심스럽게 뜯어 상자 안의 내용물을 빼고 동네 슈퍼에서 파는 초콜릿을 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는 다시 재포장을 하기 시작하였다.

“…….”

미영은 그러한 유리의 모습을 보면서 말을 잇지 못했다. 자신 또한 다른 멤버들의 초콜릿에 타격을 가할 생각이었지만 유리의 철두철미함에는 미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권유리! 가장 경계해야 할 대상이야.’

속으로 유리에 대한 경계심을 한 층 끌어올리며 그녀를 따라 포장을 뜯고 내용물을 바꾸며 재포장을 하고 있었다.

약 삼십분 간의 작업 끝에 초콜릿 테러 작업은 완료가 되었다. 다른 멤버들의 초콜릿은 옷장 깊숙한 곳에 보관하기로 합의를 본 미영과 유리는 초콜릿을 본래 있던 수납장에 넣어두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대로 방에 들어가 잠에 들었다.

혼자서 우위를 점할 수 없게 된 것은 안타깝지만 이것으로 다른 멤버들에게 제대로 타격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늦은 새벽에 잠이 든 미영과 유리는 아침 일찍 일어날 걱정도 하지 않은 채 오랜만에 늘어지게 잠을 잘 수 있었다. 오늘은 특별한 스케줄이 없어서 오전은 물론 오후까지 시간이 남아돌았던 것이다. 그리고 저녁에 라디오 스케줄이 있는데, 그때 나가기만 하면 되기에 두 사람은 마음을 놓은 채 수면을 취할 수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수면은 길게 이어질 수 없었다.

주변에서 시끌시끌한 소리 때문에 달콤한 수면을 이어나갈 수 없었던 것이다.

눈꺼풀이 무거운 것을 느끼면서 유리는 살짝 눈을 찌푸린 채 입을 열었다.

“으음! 뭐야? 뭔데 이렇게 시끄러워?”

그러면서 조금이라도 더 자기 위해 몸을 뒤적이던 유리는 문득 자신의 몸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자각할 수 있었다.

그러자 갑자기 불안한 마음이 엄습하는 것을 느끼고는 눈을 확 떴다.

“응? 이, 이게 뭐야?”

눈을 뜬 유리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는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침대에서 자고 있어야 할 자신이 왜 거실에 있단 말인가?

게다가 이불에 돌돌 말린 채 단단히 포박 당한 상황이었다. 덕분에 팔을 전혀 움직일 수 없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자신과 같은 모습으로 옆에 앉아있는 미영의 모습이었다.

불안함이 엄습하는 것을 느끼면서 유리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소파에 편안한 자세로 앉아 TV를 시청하고 있는 수연의 모습이었다.

아침에 약한 수연이 어떻게 이렇게 일찍 일어났단 말인가?

유리가 일어난 것을 확인한 수연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입을 연다.

“일어났어?”

너무나 평온한 그녀의 모습에 유리는 순간 이상함을 느끼고 있는 자신이 잘못되지 않은 건가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수연을 향해 외쳤다.

“수, 수연아! 왜 내가 이런 모습을 하고 있는 거야.”

그 말에 수연이 살짝 표정을 굳히더니 말한다.

“그 이야기는 파니가 일어나고 나서 이야기 하도록 하자.”

아침에 상당히 약한 면모를 보이는 미영이었기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은 채 다시 TV를 시청하는데 주력하는 수연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방에서 나온 멤버들과 씻고 나온 멤버들이 하나둘씩 거실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즈음 잠자리가 불편한 것을 느낀 미영도 몸을 뒤척이려다가 자신이 포박 당한 상태라는 것을 깨닫고는 눈을 뜨다가 놀란 표정을 짓는다.

“이, 이게 뭐야?”

“파니, 일어났어?”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미영이 시선을 홱 돌려 수연을 바라보면서 소리쳤다.

“제시! 이게 무슨 짓이야? 도대체 왜…….”

“다 나온 듯하니까 본격적으로 시작하자고.”

미영의 물음에도 불구하고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자신의 말을 하는 수연이었다.

도대체 무엇을 시작한단 말인가?

미영과 유리는 전신에 엄습하는 불안함을 몸으로 직접 느껴야만 했다.

수연을 비롯한 멤버들이 미영과 유리를 빙 둘러쌌다. 그러자 가장 앞으로 나선 것은 리더인 태연이었다.

그녀는 멤버들을 둘러보더니 미영과 유리에게 시선을 고정하고는 입을 열었다.

“지난 밤 우리들은 오늘 발렌타인 데이를 위해 초콜릿 제작에 고군분투를 하였습니다. 열심히 초콜릿 제작 삼매경에 빠진 멤버들은 성공적으로 초콜릿을 제작할 수 있었고, 각기 정성스러운 포장과 함께 수납장에 보관을 했습니다. 하지만 새벽 사이 불미스러운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바로 누군가의 장난에 의해 초콜릿 내용물이 바꿔치기를 당한 것입니다.”

“……!”

태연의 말에 미영과 유리는 속으로 자신들의 행동이 들켰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설마 포장을 뜯고 내용물을 확인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내용물이 뒤바뀐 것을 확인한 멤버들은 하나하나 자신들의 포장을 뜯어보았을 것이고, 그 결과 자신들의 초콜릿만 정상적으로 보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리라.

그것으로 자신들을 범인이라 단정지었을 확률이 높다.

그렇다면 아직 상황은 벗어날 수 있는 여지가 존재한다.

그 사이 태연의 말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분명 수연이의 제안으로 서로의 초콜릿에 위해를 가하지 않기로 상호 조약을 맺은 상황에서 이는 중대한 과실에 속합니다. 미영 양과 유리 양. 이에 대해 할 말이 있습니까?”

두 사람을 바라보는 멤버들의 시선이 사뭇 매서웠다. 서로 그러지 않기로 협약을 맺어놓고 그러리라고는 생각도 못했기에 그렇다.

미영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은 채 입을 연다.

“이것은 누군가의 음모라 생각해. 우리가 장난을 쳤으면 설마 우리 것만 온전하게 남겨두었을 거라 생각해? 누군가가 아침에 초콜릿을 개봉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솔직히 개봉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을 모면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미영의 말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너희들과 같이 지낸 게 몇 년인데 그러겠어. 이것은 분명 누군가의 음모라 생각해.”

몇 년을 함께 한 것을 방패삼아 자기 방어에 나서는 미영이었다.

그 말은 제법 효과가 있어서 태연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자 앞으로 나선 것은 순규였다.

그녀는 미영과 유리를 스윽 둘러보더니 말한다.

“그럼 너희들이 왜 제일 늦게 일어나는 건데?”

직설적으로 바꾸면 너희들이 새벽에 다른 짓을 하느라 제일 늦게 일어난 것이 아니냐는 식의 말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에 미영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나는 아침에 약한 편이고 유리는 어제 초콜릿을 만드느라 피곤해서 그런 거야. 그럴 수도 있는 것 가지고 그러는 건 좀 아니잖아.”

그렇게 말을 한 미영의 눈이 순간 유리의 눈과 마주쳤다. 그러자 그녀는 유리가 눈으로 감사의 인사를 표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흐음! 그것도 그러네.”

제법 설득력이 있었는지 순규는 이렇다 할 말을 덧붙이지 않은 채 물러난다.

그러자 전열을 가다듬은 태연이 다시 나서면서 입을 열었다.

“그러면 왜 하필 너희들인데? 너희 둘의 초콜릿만 온전하고 너희 둘이 제일 늦게 일어났어.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 말에 미영은 태연하게 대꾸했다.

“애초에 우리를 골탕 먹이려는 것일 확률이 있잖아. 나야 아침에 약한 편이고 유리는 어제 피곤한 모습을 보여서 그렇게 했을 수도 있고.”

“상황을 조금 더 냉정하게 바라봤으면 좋겠어. 일단 우리라고 확정 짓기에는 무리가 따르지 않아?”

삼국지에 나오는 와룡봉추를 연상시키는 미영과 유리의 합공은 강렬하였다.

제법 매서운 기세를 가지고 나온 태연조차 이렇다 말을 하지 못한 채 연신 뒤로 물러나는 모습 밖에 보일 수 없었으니 말이다.

으음! 하고 침음을 흘리면서 태연은 두 사람을 더 몰아붙이지 못한 채 뒤로 물러난다. 그리고 다른 멤버들도 깊은 생각에 잠기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미영과 유리가 범인이라 생각을 했는데 두 사람의 말을 듣고 보니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음모라 생각한 것이다.

어차피 장난이 목적이라면 그 대상물은 아무나 상관이 없지 않은가? 미영의 말처럼 몇 년을 함께 지낸 멤버인데 아침에 초콜릿 상태를 확인할 것을 예상하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다른 누군가의 장난이라는 뜻이 되는데.

멤버들의 시선이 일제히 수연에게 몰려들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초콜릿 포장을 열어본 것이 수연이었고, 다른 멤버들의 초콜릿 포장을 뜯어봄으로써 두 사람이 범인이라고 지목을 한 것도 다름 아닌 수연이었으니 말이다.

깊은 생각에 잠겨있던 수연이 입을 열었다.

“정말 너희가 범인이 아니라고?”

“아니라니깐.”

동시에 대답하는 미영과 유리였다.

그에 수연의 눈이 살짝 가늘어지면서 입을 열었다.

“흐응… 그래? 내가 어제 잠결에 느낀 건지 몰라도 유리가 방 밖으로 나가는 것을 봤는데? 그것도 잔뜩 기척을 죽이고선?”

자신의 알리바이를 깨버리는 수연의 말에 유리가 살짝 당황했지만 빠르게 평정심을 회복하면서 대답했다.

“그, 그건 화장실에 가려고 그런 거였어. 기척을 죽인 건 수연이 너랑 수영이가 잠에서 깨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랬던 것이고.”

거짓말 하나를 숨기기 위해서 거짓말 열 개를 한다는 말이 사실인 것처럼 말을 하다 보니 실제 자신이 겪었던 일인 것 마냥 말이 술술 나오는 유리였다.

말을 하면서 자신이 소설을 쓰는데 재능이 있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말이다.

제법 신빙성 있는 유리의 말은 깊은 수면에 빠져 있던 멤버들이 잠에서 깨지 않길 바라는 훈훈한 배려마저 숨겨져 있었다. 물론 뻥이었지만 그 말은 두 사람이 아직도 범인이라 생각하던 멤버들의 생각을 뒤흔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하지만 수연은 여전히 눈을 가늘게 뜬 채 유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유리에게 말했다.

“그렇게 말을 해도 소용이 없어. 나는 범인이 너랑 파니라는 걸 알고 있거든.”

그것은 추측이 담긴 그런 식의 말이 아니었다.

절대적인 확신이 담긴 그런 말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유리는 수연을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수연은 자신을 범인이라고 단정 짓고 있었다. 어떠한 증거도 존재하지 않지만 확신 어린 수연의 말은 멤버들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에 유리가 최후의 수단을 사용하기로 하였다.

아무리 확신이 있어도 증거가 없는 확언은 신빙성이 존재하지 않는 법이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했다는 증거 있어? 증거가 있으면 깨끗이 인정할게.”

수연이 조금이라도 주춤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한 말이었다.

그러나 그 말을 마치 기다렸다는 듯, 수연의 입에서 차가운 미소가 걸렸다. 사람의 마음을 사정없이 불안하게 만드는 미소였다.

“훗! 그래? 그 말이 나오기를 기다렸어. 너희들이 했다는 결정적인 증인과 증거가 있지. 자, 나와, 증인.”

그녀의 말과 함께 한 사람이 앞으로 나섰다.

앞으로 나선 사람은 미영과 유리에게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언니들. 증거라면… 있어요.”

나직한 사과와 함께 나선 인물은 다름 아닌…….

손에 핸드폰을 쥐고 있는 주현이었다.


‘불안해.’

초콜릿을 다시 제조했지만 주현은 불안한 마음을 금치 못했다.

작년에도 회심의 초콜릿을 제조했지만 중간에 효연의 방해가 개입되어 엄청난 폭탄 초콜릿을 제조하지 않았던가.

미영 또한 폭탄 초콜릿을 제조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본인의 실수이지, 자신처럼 외부 요소가 끼어들어 망치게 된 케이스가 아니었다.

이번에는 시간에 쫓길 필요가 없었기에 틈틈이 맛을 확인하면서 완벽한 초콜릿을 만드는데 성공하였다.

그런데 초콜릿이 완벽하게 성공하자 주현의 마음에 불안함이 싹텄다.

왜 그런 거 있지 않은가?

돈이 하나도 없으면 괜찮은데 자신에게 귀중품이 잔뜩 있으면 행여 잃어버리지 않을까 하는 불안한 마음 말이다.

주현이 느끼고 있는 감정이 바로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초콜릿이 너무 완벽하게 완성되자 누군가가 장난을 하지 않을까 불안했던 것이다.

이미 수연이 언니들에게 못을 박아두었다고 하지만 이 세상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근래 들어 느끼고 있었다.

말 한마디로 모두가 성실히 지킨다면 세상에 왜 법이 존재하겠는가.

누군가는 반드시 움직일 것 같다는 불안한 마음이 들었기에 주현은 힐끗 시선을 옮겨 한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 끝에는 미영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미 한 차례 미영의 본 모습(?)을 보았기에 주현은 그녀가 무슨 짓을 저지를 것 같다는 예감을 받았다.

‘미리 준비를 해둬야 해. 그렇지 않으면 당할 수 있어.’

유비무환이란 말을 평소 곧잘 하는 주현으로서는 미리 준비를 해두지 않고서는 마음이 놓이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피곤한 몸을 애써 겨누며 컴퓨터에 앉았다.

초콜릿 제조 이후 모두가 피곤한 상황이었기에 각자 씻은 뒤 잠자리에 들려던 차였다.

주현이 컴퓨터 앞에 앉아 인터넷을 뒤적거리고 있을 때, 씻고 나온 미영이 주현에게 묻는다.

“주현아, 안 씻어?”

“아! 네? 아, 컴퓨터 좀 하고 씻으려고요.”

갑작스러운 미영의 부름에 화들짝 놀란 주현이었지만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며 대답을 한다.

그러한 주현의 모습에 미영은 무언가 의아함을 느꼈지만 딱히 이상한 점은 없었기에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래? 일찍 자도록 해.”

“네. 언니도 주무세요.”

“응. 굿 나잇!”

그 말과 함께 미영은 침대에 누웠고, 주현은 조심스럽게 키보드를 두드리며 컴퓨터를 했다.

“이렇게 해서 이렇게 해킹을 하는 거구나. 그리고 이렇게 해서…….”

한동안 컴퓨터를 만지작거리던 주현은 이내 작업을 끝내고는 침대에 몸을 눕힌다. 그리고 피곤했던 탓에 침대에 눕기 무섭게 잠에 빠져든다.


스륵. 스르륵.

무언가 이불이 살갗에 스치는 소리.

평상시라면 무심코 넘겼을 소리였지만 그것을 듣는 순간 잠에 빠져있던 주현은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을 느꼈다. 누군가가 이불을 뒤척이는 소리라기에는 소리가 조금 컸던 것이다.

이 소리는 누군가가 침대에서 벗어나는 소리였다!

“……!”

서늘한 느낌과 함께 정신이 번쩍 든 주현은 살짝 실눈을 떠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직 어둠이 걷히지 않은 까닭에 앞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서서히 적응이 되자 문을 향해 살금살금 도둑고양이처럼 다가가는 한 사람이 보였다.

그리고 그 사람의 정체를 확인하는 순간 주현은 눈을 부릅 뜰 뻔하였다.

시야에 들어온 사람의 정체는 다름 아닌 미영이었던 것이다.

도대체 미영이 왜 움직인단 말인가?

‘설마?’

주현은 머릿속에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지금 이 시간에 일어났다는 것. 단순히 화장실을 가기 위해 일어난 것일 수도 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미영이 조심스럽게 방을 벗어나자 주현이 몸을 일으키고는 조용히 닫힌 문을 향해 귀를 기울인다. 하지만 방음이 제법 잘된 탓에 문 너머로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주현은 문을 살짝 열고는 바깥 상황을 지켜보았다.

거실에 시선을 옮긴 주현은 다시 한 번 놀라야만 했다.

그곳에는 미영 혼자만이 아닌 유리도 함께하고 있었던 것이다.

유리는 이 시간에 왜 거실에 나와있는 것이란 말인가.

화장실을 간다고 하기에는 타이밍이 너무나 공교롭지 않은가.

순간 주현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평소 멤버들에게는 약간 빈틈이 많은 모습을 보이지만 창현에 관련된 일에 대해서는 웬만한 책사 못지않은 모습을 보여주는 미영과 장난기가 많은 유리의 조합.

두 사람의 이 점을 끌어내 보면 한 가지 공통분모가 나온다.

주현은 한 가지 결과를 도출하기에 이른다.

두 사람아 지금 시간에 일어난 이유. 그것은 바로…….

‘미영 언니와 유리 언니가 동맹?’

한 가닥 남아있던 잠결마저 말끔하게 사라지는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미영과 유리는 무언가 심각한 대화를 나누는가 싶더니 이내 함께 주방으로 사라진다.

그러자 주현은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주방을 간 이유가 무엇인지 짐작이 되었기에 그렇다.

당장 나가서 제지할까 마음이 들었지만 그것도 힘들었다. 자신이 나서서 뭐라 말해도 증거가 없는 이상 두 언니를 궁지로 몰아넣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던 것이다.

그 사이 두 사람은 초콜릿을 들고는 거실로 나온다. 두 사람이 들고 있는 초콜릿 숫자가 정확히 일곱 개인 걸 보니 자기들 것만 쏙 빼고 들고 온 것임이 분명했다.

초콜릿을 든 두 사람은 거실이 아닌 베란다로 향하는 것이 보였다. 자는 언니들을 의식하여 조심스럽게 작업을 하려는 것임이 분명했다.

“…….”

주현은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속으로 분노를 피워 올렸다. 그리고는 핸드폰을 열었다. 이것은 반드시 증거로 남긴 다음에 고발을 해야 한다. 증거를 남기지 않으면 분명 발뺌할 것이 분명했기에 그렇다.

이럴 때를 대비하여 핸드폰 카메라 촬영을 무음으로 해킹하지 않았던가.

역시 준비된 자에게 기회가 온다는 말이 사실인 듯했다.

‘찰칵, 찰칵.’

분노를 담은 주현의 카메라 촬영은 용량이 꽉 찰 때까지 계속되었다. 무려 수십 장에 달하는 사진을 찍은 것이다. 날이 어두워서 제대로 모습이 보이지 않았지만 얼핏 실루엣만 보아도 미영과 유리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리는 것은 같은 멤버들에게 있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래도 다행인 건 바꿔치기 한 내용물을 버리지 않고 그대로 들고 와 옷장에 숨겨두었다는 점이다.

초콜릿을 들고는 방으로 돌아오는 미영의 모습을 확인한 주현은 그대로 침대에 누워 잠에 빠진 척 한다.

방에 들어온 미영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침대에 누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대로 잠에 빠져든다.

그 모습을 본 주현은 속으로 칼날을 갈았다.

‘두고 봐요, 언니. 반드시 후회할 거예요.’

밤새 주현은 거의 뜬눈으로 자다시피 하였다. 그리고 아침 일찍 일어난 그녀는 곧장 수연에게 달려갔다.

아침에 약한 수연이었지만 초콜릿이 테러 당했다는 주현의 언급에 눈을 번쩍 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주현에게 그게 무슨 말이냐고 다그치기 시작했다.

일단 모든 사실을 말하기가 뭐했기에 주현은 일단 초콜릿 내용물을 확인한 뒤 이야기를 하자고 하였고, 수연은 한달음에 달려가 내용물을 확인하였다.

그러자 주현의 말처럼 자신이 정성스럽게 만든 초콜릿은 온데 간데 사라져 있고 동네 슈퍼에서 파는 초콜릿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것이 아니던가?

깜짝 놀란 수연이 주현에게 다가와 물었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누가 그런 거야?”

한기가 휘몰아치는 수연의 모습은 무시무시했다.

주현은 그녀의 심기를 상한 모습을 확인하고는 속으로 OK사인을 내리고는 말한다.

“범인은 다른 초콜릿 포장을 다 뜯어보시면 아실 수 있을 거예요.”

“…어떻게 범인을 알아냈는지 모르지만 일단 확인해보겠어.”

범인의 정체를 알고 있는 듯한 주현의 말에 약간 의구심을 표시하는 수연이었지만 우선 중요한 것이 그것이 아니었기에 곧장 범인 확인을 위해 포장을 뜯기 시작한다.

그 사이 일어난 다른 멤버들은 포장을 뜯는 수연의 모습에 화들짝 놀라 달려들었지만 누군가가 자신들의 초콜릿을 바꿔치기 했다는 말에 정색을 하며 순순히 협조를 하기 시작했다.

아홉 개의 초콜릿을 다 개봉하자 결과가 나왔다.

“이것들이…….”

표정을 굳힌 수연이 주현을 보며 물었다.

“이 두 사람이 맞아?”

주현은 망설일 것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들었지? 이불 채로 포박해서 데려와. 따끔하게 심문을 한다.”

그렇게 하여 계획이 성공했다고 생각한 미영과 유리는 잠에 빠진 채 이불 채로 들려나와 포박당한 것이다.

잠시 후 잠에서 깨어난 두 소녀를 보면서 주현은 이것이야 말로 손 안대고 코푸는 격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미영과 유리는 뻔뻔했다. 막강한 화술을 앞세운 두 사람은 소위 말하는 말발로 취조하는 태연을 밀어붙이고 순규를 격퇴하는 등 강력한 면모를 보인 것이다.

그 모습을 보면서 주현은 기가 막히는 것을 느꼈다. 이러다가는 자칫 두 사람이 용의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상황까지 닥칠 수 있다고 여긴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선 것은 다름 아닌 수연. 그녀는 두 사람의 화술에 쉽사리 넘어가지 않은 채 말한다.

그러자 유리가 증거를 제시하라는 말을 한다. 그에 결국 주현은 자신이 나서야 일이 매듭을 지어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앞으로 나선 주현은 손에 핸드폰을 꼭 쥔 채로 입을 연다.

“언니들. 그냥 순순히 혐의를 인정하는 것이 괜찮을 텐데요…….”

핸드폰에 찍혀 있는 사진 만큼은 보여주고 싶지 않은 주현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주현의 배려를 증거가 없는 것으로 오해한 유리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은 채 말한다.

“혐의라니? 우리는 그런 적이 없다니까? 증거가 있으면 증거를 제시해 봐. 방금 전에도 말했듯이 나는 새벽에 화장실이 가고 싶어서 일어나기는 했어. 하지만 이번 일과는 무관해. 증거 자료도 없고.”

결국 증거 제시만이 두 사람의 혐의를 밝힐 수 있는 수단이었다.

주현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 언니가 그렇게 나오시니 어쩔 수 없네요. 언니들, 모여보세요.”

“응, 왜?”

주현의 말에 다른 소녀들이 의문을 느끼면서 모여든다.

자신을 중심으로 모여들자 주현은 핸드폰 폴더를 펼치면서 사진 보관함에 들어가며 말한다.

“제가 두 언니를 범인으로 지목한 증거가 바로 이거에요.”

그 말과 함께 주현이 태연에게 핸드폰을 건넨다.

핸드폰을 받아든 태연은 사진 목록을 천천히 살피기 시작한다. 그리고 잠시 후, 핸드폰을 쥐고 있는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이, 이것 좀 봐. 허어…….”

충격에 휩싸인 태연은 수연에게 핸드폰을 넘겼고, 수연도 사진을 확인하고는 태연과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그렇게 다른 멤버들도 차례차례 사진을 확인하였다.

윤아를 마지막으로 핸드폰을 받아든 주현이 유리에게 핸드폰을 보여준다. 거기에는 베란다에서 초콜릿 포장을 뜯고 있는 미영과 유리의 모습이 마치 슬라이드처럼 찍혀 있었다.

“…….”

그것을 확인한 유리는 할 말을 잃었다. 설마 주현이 이렇게 사진으로 남겨두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한 것이다.

주현이 유리를 바라보며 슬픈 표정을 짓는다.

“언니 실망이에요. 설마 이렇게까지 부인을 할 줄이야…….”

“어, 어떻게 이걸… 사진도 들리지 않았는데…….”

경악에 빠진 유리는 마침내 사실을 인정하는 말을 흘리고야 만다.

그에 주현은 핸드폰을 갈무리하며 말한다.

“혹시 몰라서 무음 모드로 해킹을 해놓은 상태니까요. 이걸로 증거가 되었죠?”

완벽한 증거를 제시한 상황인데 무어라 변명을 한단 말인가.

유리의 표정이 하얗게 질려갔다.

“우리… 다시 이야기 해볼까?”

“그러자고, 후후!”

그곳에는 악마의 웃음을 짓고 있는 수연과 태연을 센터로 멤버들이 포진해 있었다.

살벌한 기세를 띤 멤버들을 보면서 유리는 신변의 위협을 강하게 느꼈다.

‘위험하다. 잘못하면 여기서 죽을지도 몰라.’

자신들이 속았다는 것을 깨달은 멤버들의 기세는 정말 살벌 그 자체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어느 정도 분위기가 잡혀 있을 때 자백할 것을, 괜히 끝까지 아니라고 당당한 모습을 보인 듯했다.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참혹한 결말만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유리는 먼저 선수를 치기로 하고는 소리쳤다.

“자, 잠깐!”

“왜?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말이라도 있어?”

갑자기 소리치는 유리의 모습에 살벌한 기세를 띤 채 다가가던 소녀들이 멈칫하고는 입을 열었다.

그에 유리는 재빨리 입을 열었다.

“미안해, 얘들아! 실은 내가 그랬어! 장난을 치고 싶은 마음에… 미안!”

“지금 자백한다고 해도 늦었다는 걸 알 텐데?”

태연이 굳은 안색으로 유리의 말에 대답한다. 하지만 설마 유리가 먼저 이렇게 말을 할 것이라고는 예상을 못한 듯, 순간 멈칫하는 모습이 보였다.

유리는 그 틈을 파고들려고 하였다.

“너희들이 너무 열심히 만드는 것 같아서… 장난을 좀 치려고 했던 것뿐이야. 만약 끝까지 눈치 채지 못했으면 바로 말할 생각이었어. 그렇지, 미영아?”

미영에게 말을 돌리면서 도움을 청하는 눈길을 보내자, 비슷한 처지에 놓여있던 미영이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초콜릿도 그대로 보관하고 있는 걸?”

“흐음! 어떻게 할래?”

미영의 말에 완전히 흐름을 잃어버린 태연은 수연에게 시선을 옮기면서 말한다.

이대로라면 제대로 처벌한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결정적인 순간에 범행 사실이 발각되었지만 빠른 움직임으로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는 모습을 보였으니 말이다.

가장 중요한 범행 사실 시인과 초콜릿 내용물의 행방을 실토하고 있으니 강력 처벌을 가하려던 소녀들로서는 맥이 빠지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좀 더 아니라고 우겨야 화끈하게 처벌을 가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태연의 질문에 수연은 아직 덜 풀린 표정으로 말한다.

“인정한다고 해도 끝까지 부인하다가 들킨 것은 변함이 없어.”

유리가 어물쩍 넘어가려던 요지를 정확하게 집어내는 수연이었다.

그녀가 괘씸하게 여기는 것은 바로 자신들을 속이려고 했다는 것! 그것이 기분 나쁜 것이지 다른 부분이 기분 나쁜 것이 아니었다.

“음! 그것도 그렇지.”

수연의 말에 멤버들이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의 말처럼 자신들을 속인 유리의 교활한 세치 혀에 분노를 한 것이다. 다른 것은 어느덧 2차적인 것에 불과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자, 잠깐! 미안하다니깐?”

슬쩍 넘어갈 수 있었던 유리는 수연이라는 장애물을 만나 상황이 여의치 않게 되자 필사적인 몸부림을 보이며 소리쳤다.

“그럼 왜 그런 건데?”

수연이 유리를 보며 차갑게 물었다.

그녀가 묻는 것은 다름 아닌 장난을 친 이유에 대해서였다.

그 질문을 받은 유리는 빠르게 머리를 회전 시켰다.

여기에서 만약 ‘창현의 마음을 독차지하기 위해!’ 라고 대답을 하면 그것은 그야 말로 Sad Ending이다. 어떻게든 제대로 된 변명거리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 그녀의 상황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걸 들키면 안 돼. 그럼 모든 게 끝장이야.’

미영에게 들킨 것만으로도 계획이 크게 틀어졌는데 모두가 알게 되면 그야 말로 대참사였다.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면서 유리는 무언가가 생각난 듯, 외친다.

“그, 그러니까… 그때 효연이가 친 장난이 너무 재미있어 보여서 그런 거야. 마지막에 준 대반전! 장난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는 그런 결말이 나오길 꿈에도 바란다고! 안 그래, 효연아?”

“흠흠! 유리 네가 무엇을 알긴 아는구나. 확실히 그 장난이야 말로 내 인생에 있어 베스트3에 들어가는 최고의 장난 중 하나였지.”

유리의 물음에 효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랑스럽게 대답을 한다.

마지막 순간에 뒤통수를 치려던 주현의 초콜릿 제조에 결정적인 방해를 가한 효연의 장난이야 말로 우연과 잔머리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최고의 장난 중 하나였다.

장난을 좋아하는 효연은 같은 부류인 유리가 그런 감정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른 바 궁극의 장난이랄까? 장난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한 번쯤 해보길 원하는 그런 장난이었으니 말이다.

효연이 수긍을 하자 수연은 맥이 탁 풀리는 것을 느꼈다.

소녀시대 내에서 가장 오랜 연습기간을 거친 멤버 중 하나인 효연의 발언권은 강력했던 것이다.

“그럼 강력 처벌은 뒤로 미루자는 건가?”

“…….”

멤버들을 둘러보며 수연이 묻자 아무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에 수연이 무언가 생각이 난 듯, 입가에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이건 어때? 어떤 방법이냐면…….”

그 표정과 함께 수연이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기 시작하였다.

수연이 무언가 그럴 듯한 방법을 제시하려는 듯하자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멤버들은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듣고는 밝은 표정을 지었다.

그에 반해 미영과 유리의 표정이 시커멓게 죽어가기 시작했다.

“제, 제발! 제시! 이건 아니야!”

“수연아! 우리가 잘못했어!”

두 사람이 애절하게 수연에게 애원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수연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연다.

“이미 상황은 종료 되었다고? Say Good Bye."

절묘한 수연의 해결책이 그대로 멤버들의 동의하에 채택 되었다.

“…….”

이러한 상황을 주현은 침묵을 지킨 채 입가에 미소를 띠고는 바라보고 있었다.


작년부터 산더미와 같은 초콜릿을 받게 된 창현은 자체적으로 팬레터를 따로 분류하고 초콜릿은 기부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작년보다 인맥이 늘어나서 그런지 어제 방송 출연을 했을 때 여자 스태프들이나 연예인들에게 받은 초콜릿도 제법 되었다.

“흐음! 초콜릿이라. 좋네, 좋아.”

개인적으로 초콜릿이 좋다거나 그런 것이 아니었다. 다만 남자로서 여성에게 초콜릿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기분이 좋았고, 작년보다 자신의 대인관계가 한결 나아진 것 같아 기분이 좋았던 것이다.

“어제 무대도 제법 괜찮았고.”

촬영을 하면서 마지막 엔딩 무대를 꾸밀 때도 괜찮은 느낌을 받았다. 예전과 같은 벅차오르는 느낌은 없었지만 전과 같은 걸리적거리는 느낌은 사라졌다랄까? 확실히 문제점은 존재하는 듯했지만 적어도 슬럼프는 벗어난 듯했다.

발렌타인 데이임에도 불구하고 창현은 오늘도 회사에 나가서 연기수업을 받고 있었다. 단기속성으로 1차 코스를 끝마쳐야 했기에 본격적인 촬영에 들어가는 3월까지 어느 정도 기본을 갖춰야만 했다.

그러던 차에 창현에게 초콜릿이 또 다시 배달되었다.

그것은 팬이 보낸 초콜릿이 아니었다. 바로 소녀시대에게서 의리 초콜릿이라고 하면서 창현에게 개인적으로 초콜릿이 배달이 된 것이다.

회사에서 연기수업을 받고 집으로 돌아올 때 받은 것이기에 창현은 뜻하지 않은 선물을 받은 것 같아 기분이 무척 좋았다. 순규에게 언질을 받기는 했지만 언제부터인가 까먹고 있던 탓에 전혀 예상치 못한 깜짝 선물을 받은 것 같았다.

기분 좋은 마음으로 쇼핑백을 들고 집으로 돌아온 창현은 내용물을 꺼내들었다. 그리고는 포장지를 벗기려고 하는 순간 멈칫하였다.

어제 순규가 말했던 내용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때 분명 태연 누나랑 수영 누나가 장난 칠 거라 했었지?”

기억력 하나 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기에 대화 내용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는 창현이었다. 그래서 각자 누가 주는 초콜릿인지 알아야 했기에 먼저 초콜릿을 분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폭탄이라 간주되는 태연과 수영의 것부터 먼저 포장지를 개봉하였다.

일단 첫 모양은 무척 훌륭했다. 간단한 하트 모양이었지만 그 위에 그려진 아이싱도 엉성한 가운데 정성이 느껴지고 있던 것이다.

그 초콜릿을 보는 순간 창현은 순간 의아함을 느껴야만 했다.

장난을 친 초콜릿 치고는 너무 정성이 들어가지 않았던가?

“이것에 장난을 쳤다고? 안 믿기는데.”

그 말과 함께 창현이 초콜릿 모서리 부분을 툭 떼어서 먹어보았다. 장난을 친 게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지만 돌다리도 두드리고 넘어가야 한다는 말이 있듯이 경계해야 할 건 경계해야 한다.

그리고 태연의 초콜릿 맛은 창현이 잔뜩 긴장한 것이 어이가 없을 정도로 탁월한 맛을 자랑하고 있었다.

적당히 달콤한 맛이 느껴지는 초콜릿 맛에 창현은 긴장한 표정이 그대로 풀려버린다.

“맛있는데? 설마 순규 누나가 거짓말 친 건가?”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평소 모습을 생각하면 충분히 장난을 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 것이다.

뒤이어 창현은 수영의 초콜릿도 맛을 보았다. 수영의 초콜릿은 태연의 초콜릿보다 더 달달했지만 예상했던 강렬한 맛은 존재하지 않았다. 결국 순규의 말은 뻥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맥이 풀린 창현은 그대로 피식 웃음을 흘렸다.

“어휴! 초딩도 아니고 이런 걸 거짓말 하는 건 뭐야.”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초콜릿을 야금야금 먹으면서 창현은 주현의 초콜릿을 개봉하였다.

작년에는 강력한 소금 초콜릿으로 큰 타격을 주지 않았던가? 고추냉이 초콜릿을 만든 미영도 미영이지만 방심하고 당했다가 강력한 소금 공격을 당한 주현의 초콜릿에서 받은 일격도 만만치 않았다.

다소 긴장감이 흐르는 가운데 초콜릿 시식이 계속되었다.

주현의 초콜릿을 맛보는 순간 창현은 긴장감이 스르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진한 달콤한 맛이 느껴지는 주현의 초콜릿은 먹으면 먹을수록 입맛을 자극하는 그런 맛이었던 것이다.

“후! 미영 누나 초콜릿만 무사하면 괜찮겠지.”

마지막 한줄기 긴장감을 풀지 않은 채 창현은 초콜릿을 하나하나 개봉했다. 그리고 유리의 것과 미영의 것을 개봉하는 순간 황당한 표정을 지어야만 했다.

다른 누나들은 직접 만든 초콜릿을 보냈는데 미영과 유리는 동네 슈퍼에서 파는 초콜릿을 보낸 것이다.

당황한 표정을 짓던 창현은 두 사람이 제법 바쁠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서 자기 위로를 하였다.

“두 누나가 바쁜가? 음! 보내는 사람의 마음이 중요한 법이니까.”

그렇게 말을 했지만 마음 속 한편에 약간이나마 섭섭한 마음이 드는 것은 별 수 없나보다. 작년 고추냉이 초콜릿으로 인하여 미영은 그럴 수 있다 쳐도 유리는 왜? 라는 생각이 메아리쳤던 것이다.

“내 욕심이 과한 거지. 감사하게 받자.”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 보내준 초콜릿을 하나하나 먹어보는 창현이었다.

그러나 그는 모를 것이다.

지금 이 자리에 도착하기까지 소녀들 간의 심리전이 얼마나 치열하게 전개가 되었고, 자신들의 독주를 바라던 미영과 유리가 수연의 처분에 어떠한 표정을 지었는지. 그것을 알았더라면 결코 이런 마음이 들지는 못했을 것이다.

작년은 창현에게 있어 지옥의 발렌타인 데이였다면 올해는 소녀들에게 있어 지옥의 발렌타인 데이였다.




제47장 라디오 스타(Radio Star)




발렌타인 데이를 분기점으로 창현의 하루하루가 무척 바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다가온 드라마 촬영을 위해 매일같이 연기수업에 매진을 해야 했던 것이다.

이번 연기가 자신에게 있어 얼마나 큰 계기가 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 창현은 연기수업을 받음에 있어 마치 수험생을 연상시키듯 치열하게 연기에 임하고 있었다.

창현에게 연기를 가르치는 선생님은 입버릇처럼 말을 하고는 한다.

그 배역으로서 완전히 몰두했다는 것을 느꼈을 때는 자신 속에 또 다른 사람의 그림자가 생겨났을 때라고. 그때가 되어서야 드라마 속 캐릭터는 단순히 드라마 속 캐릭터가 아닌 자신 속에서 한 사람의 모습이 되어 살아 숨 쉬는 진정한 배역이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말이다.

이 말이 무척 어려웠고, 아직 창현에게 있어 완전히 이해하기 힘든 말이지만 무슨 의미로 그런 말을 하는 것인지는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음악이라는 것도 비슷한 갈래의 말이 있었기에 그렇다.

창현이 습득한 음악강론에서는 마음을 울리는 음악을 만들기 위해서는 본인의 마음부터 먼저 울려야 한다는 구절이 있다. 남에게 보여주는 어떠한 것을 하기 전에는 먼저 자신부터 앞서 느껴야 한다는 말이었기에 그 말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그만큼 드라마 속 배역을 단순한 배역으로 여기는 것이 아닌, 살아 숨 쉬는 또 다른 삶이라 생각하라는 것일 테지.

어려운 내용이지만 그 의미를 파악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창현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까닭은 연기수업도 연기수업이지만 지영에게 보컬 트레이닝을 시켜줘야 했기에 그렇다. 어느 정도 소기의 성과에 다다를 정도로 진척이 되었기에 지영의 보컬 트레이닝에 박차를 가하면서 여러 가지 시도를 해보고 있는 중이었다. 지영 또한 워낙 열심히 임하고 있었기에 보컬 트레이닝의 진척은 상당히 빨랐다.

지영까지는 어찌어찌 시간이 되었지만 창현을 정말 바쁘게 만드는 것은 다름 아닌 라샤의 보컬 트레이닝까지 맡고 있다는 점이었다.

가수가 되었다고 하여 보컬 트레이닝이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사람들 앞에 서게 되는 이후에 받는 보컬 트레이닝이 더욱 혹독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것은 상당한 인지도를 쌓은 라샤라고 해서 피해갈 수 없는 것이었다.

라샤 세 명 중 리드보컬이 시린이라고 하지만 창현은 세룬이나 미란도 모두 리드보컬인 시린에 버금 갈 정도의 실력을 원했다.

어차피 실력이라고 해봤자 조금 더 오랜 기간 보컬 트레이닝을 받아온 시린이 약간 위에 있지만 그것은 노력 여하에 따라 언제든지 뒤집힐 수 있는 수치였다.

다른 사람에게 무대를 선보이는 시간은 극히 짧지만 그 짧은 순간 자신의 모든 기량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노력을 필요로 한다.

게다가 전국투어 콘서트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었기에 그녀들도 보컬 트레이닝을 통해 한 단계 더 높은 경지로 도약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원래 지금 시기라면 본격적으로 미니 앨범을 준비할 시기였지만 창현이 슬럼프 상황이었기에 그 일정이 상당 부분 미뤄진 상태였다. 당장 중요한 것이 전국투어 콘서트였기에 그것에 집중을 하기로 결정을 내린 것이다.

창현의 보컬 트레이닝은 무척 혹독하기로 널리 알려져 있었기에 보는 사람의 안색이 창백해질 정도로 몰아친다.

오늘도 녹음실에서 라샤는 창현에게 사정없이 깨지고 있었다.

“너무 기교를 부리지 않아도 된다니까요? 거기에서는 기교보다 감정을 담는 것이 중요해요. 다시 한 번 해보세요.”

“랩을 할 때 발음을 뭉개면 안 된다는 거 알고 계시죠? 입 제대로 풀고 다시 한 번 해보세요.”

“지금 건 괜찮았는데 음을 끌지 말고 살짝 민다는 느낌을 줘보세요. 그리고 적당 부분에서 잘라야 해요.”

끊임없이 지적을 당하면서 라샤는 노래를 보완에 보완을 거듭하고 있었다.

예전에는 지적받지 않던 점들을 지적받고 있다는 것은 그녀들의 실력이 한 층 더 발전되었다는 뜻이었다. 동남아시아 투어 콘서트를 할 때도 틈틈이 보컬 트레이닝을 해왔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기에 창현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할게요. 수고하셨어요.”

“후우! 네 보컬 트레이닝은 여전히 혹독하다니까. 난 랩퍼가 아닌데 너무 단기간에 일류 랩퍼의 수준을 바라는 거 아니야?”

헤드셋을 벗으며 엄살을 떠는 미란을 보면서 창현이 웃음을 지었다.

“다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시키는 거예요. 결국 시키는 대로 잘하면서 뭘 그렇게 엄살을 부려요.”

“우우! 원래 인간은 시키면 다 하게 된다니까? 난 절대 네가 무섭다거나 표정을 찡그리면 무섭다거나 녹음을 중단시키면 무섭다거나 해서 열심히 하는 게 아니야. 다 나의 미래를 위해! 열심히 하는 거야. 알고 있지?”

아주 대놓고 무섭다는 말을 하는 미란이었다.

그 말에 창현은 웃음을 지었다.

“무섭기는요, 무슨. 어차피 녹음할 때만 그런 거잖아요? 그러니 너무 무섭다는 말을 하지 말아요. 저 상처 받는다니까요.”

“상처는 무슨…….”

가슴을 움켜쥐는 창현의 모습에 피식 웃음을 지으며 말하는 미란이었다.

뒤이어 부스를 나오던 시린은 창현을 보면서 말했다.

“창현이 너도 오늘은 더 할 일 없지?”

창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연기수업도 끝났고, 오늘 지영의 보컬 트레이닝은 없는 날이었기에 이것이 끝이었다.

“네, 이걸 끝으로 스케줄은 더 이상 없네요. 그건 왜요?”

“끝났으면 같이 밥이나 먹으러 갈까 해서 그랬지.”

시린의 말에 미란이 손을 번쩍 들면서 외친다.

“고기 먹자! 기름기가 좔좔 흐르는 고기! 고기 먹어본 지가 너무 오래 됐어!”

“생선회도 좋을 것 같고. 오랜만에 고기도 좋을 것 같은데.”

세룬도 미란의 말에 동감이라는 듯 고기를 먹는 것에 동의를 표한다.

그에 창현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갑자기 무슨 고기에요? 아, 설마 다이어트에 들어가는 거예요?”

3월부터 전국 투어 콘서트를 하는 만큼 몸매 관리는 반드시 필요했기에 다이어트에 들어간다. 다이어트라고 해봤자 음식을 적게 섭취하는 것이 아닌, 식단관리에 들어가는 것이지만 말이다. 충분한 영양소와 칼로리를 섭취하지만 문제는 그 메뉴에 고기는 없다는 점이다.

창현의 말에 세룬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후! 아마 다이어트에 들어가게 되면 최소 두 달 동안 고기 구경은 힘들 걸? 우선 전국 투어를 한 후에 곧장 일본으로 가야 할 테니까. 일본에서도 식단 관리를 해야 할 테고…….”

머리 좋은 사람은 이것이 좋다. 무슨 일이든 간에 빠르게 판단을 내려버리니 말이다. 세룬이 시무룩해 하는 것은 당장 고기를 먹지 못해서가 아니라 두 달 동안 식단 관리에 들어간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일본이 언급되자 미란은 그나마 밝은 표정을 지은 채 말한다.

“그래도 일본은 괜찮아! 생선회를 많이 먹을 수 있으니까. 쟈니스는 남자 관계에 있어서는 엄격하게 관리를 하지만 다른 것에 있어서는 융통성을 발휘하니까.”

일본 내 탑 남자 아이돌을 거느리고 있는 쟈니스였기에 유일 여자 그룹 소속인 라샤에 대한 관심도는 무척 높았다. 하지만 아이돌에게 있어서 연애는 무척 민감한 사항이었기에 관리가 무척 심각한 편이었다.

다행이라면 라샤 세 여인 모두 당장 연애에 대해서는 적극적이지 않다랄까?

그녀들도 평범한 여성인 이상 어찌 이성에게 끌리지 않겠는가.

하지만 당장 정상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이상 일에만 집중을 하는 것이 그녀들에게 훨씬 이득이었다. 그녀들이 이성을 사귄다고 하여 그들이 자신의 배경을 보고 달려든 확률이 높을 테니 말이다. 낭만과 로맨스를 꿈꾸는 이상 정상의 위치에 서 있을 때는 여러모로 조심해야 할 점이 많다. 그중에서도 여성 그룹이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이 바로 남자였다.

AA엔터테인먼트에서도 크게 터치를 하고 있지 않은 이유는 바로 라샤가 스스로 자기관리를 어느 정도 잘 하고 있기에 그러는 것이다.

그녀들의 생각은 공통된 것이었다.

계약 기간은 총 오 년. 이제 이 년이 흐른 만큼 앞으로 삼 년 동안 바짝 당겨서 활동을 할 생각이었다. 삼 년 후 재계약을 하더라도 지금 같은 인기를 구가할 확률은 그리 높지 않을 테니 말이다. 어느 정도 풀어지는 분위기가 만들어지면 그때 천천히 연애를 해도 늦지 않으리라.

“융통성이 중요하죠. 이것도 일의 일환이니까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시고요.”

“그건 당연해. 우리가 뚱뚱하게 변해버리면 좋아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

대중 앞에 서는 가수의 비애라면 비애였다. 조금이라도 살이 찌거나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면 자기관리가 부족하다는 비판이 서슴없이 들어오니 말이다.

그렇기에 애초에 그런 말이 나올 여지를 제거해버리는 것이 좋다.

노래를 부르는 가수지만 귀만 즐겁게 만드는 가수가 아닌, 눈도 즐겁게 만드는 가수였으니 말이다.

“그럼 오늘 외식을 하도록 하죠. 일단 사장님에게 보고할 것이 있어서 사장실에 갔다 올 테니 기다리도록 해요.”

“알았어! 굿! 창현이 네가 사주는 거지?”

“…왜 맨날 제가 사는 거죠? 누나들이 사주는 것도 한 번 먹어보고 싶은데.”

어이를 상실한 듯한 창현의 말에 순간 멈칫한 미란이 무언가 큰 결심을 했다는 듯 외친다.

“알았어! 오늘은 우리가 화통하게 한 턱 쏜다!”

“어휴! 기다리기나 해요.”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녹음실을 벗어나는 창현이었다. 그리고는 곧장 사장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비서에게 먼저 말하고는 사장실 안으로 들어선 창현이 석규를 바라보며 말했다.

“라샤 누나들 실력이 수준급으로 올라선 것 같아서요. 이제 타이트한 보컬 트레이닝보다는 자율 트레이닝을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찾아왔습니다.”

“그래? 네가 말하는 거니 어느 정도 맞는 말이겠지. 그나저나 연기수업은 할 만하더냐?”

석규의 물음에 창현이 어깨를 으쓱하면서 말한다.

“다른 분야지만 공통점이 많다 보니 재미있더라고요. 실력 면에 대해서는 아직 확답을 드리지 못하겠지만요.”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그나저나 내가 말했던가?”

뭘 말했다는 건가?

창현은 의아한 안색으로 물었다.

“뭘요?”

“내일이나 내일 모레쯤 라디오 스타 작가가 너한테 전화를 할 텐데. 내가 말을 했던가?”

“네?”

갑자기 라디오 스타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처음 듣는 말이었기에 창현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창현이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는 식의 반응에 석규가 도리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듣지 못했나? 윤 매니저가 말 안했고?”

라디오 스타에 관해서는 처음 들었다. 자신이 세희랑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가?

그것도 아니었다. 요 며칠 사이 연기 수업으로 인해 무척 바빴으니까.

창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세희 누나가요? 못 들었어요.”

“그래?”

인상을 살짝 찌푸린 석규가 인터폰을 누르더니 비서실에 말한다.

“윤세희 사원을 불러오도록.”

그렇게 하고 호출을 끝내는 모습을 보이자 창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설마 혼내시려고 그러는 거예요?”

라디오 스타에 관련된 사항을 듣지 못했지만 그것으로 혼나는 것은 내키지 않는 창현이었다. 석규와 세희 둘이 있는 자리에서 혼나는 것이면 모르지만 자신이 보고 있다면 자존심이 상할 법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에 석규가 표정을 굳히면서 나직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합당한 이유가 없다면 혼을 내야겠지.”

“으음!”

이것은 창현이 관여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만약 세희가 잊어버리고 그랬다면 엄연한 근무태만이니 말이다.

잠시 후, 석규의 호출을 받은 세희가 사장실 안으로 들어섰다.

“부르셨습니까, 사장님.”

“어서 오게, 윤 매니저. 일단 여기 앉지.”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는 세희에게 자리를 권하는 석규였다.

그리고 세희가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자, 석규가 창현을 힐끗 바라보고는 입을 열었다.

“오늘 스케줄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데 창현이가 라디오 스타에 출연하는 걸 모르더군. 말을 안한 건가?”

그 말을 들은 세희가 아! 하고는 석규에게 고개를 숙였다.

“근래 들어 창현이가 슬럼프에 빠져 있다가 연기 수업 때문에 무척 바빠 보여 이야기를 할 틈이 없었습니다. 제 실수 때문에 늦어졌는데 죄송합니다.”

“음! 스케줄에 관해서는 항상 최우선으로 보고해야 하네. 그건 알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죄송합니다, 사장님, 창현아.”

한 번 걸고넘어지려던 일을 간단하게 석규가 넘어간 것은 세희의 말에서 진심이 느껴졌던 것도 있지만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아차 했던 점도 있었다.

라디오 스타는 1월말에 제의가 들어온 것으로, 얼마 전까지 보류를 해놓았다가 해외에서 자신의 승인을 얻어 허락한 스케줄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창현의 슬럼프 문제가 겹치면서 세희가 눈코 뜰 사이 없이 바빠진 것이다. 그로 인해 놓쳤다는 걸 깨닫자 마냥 세희 탓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놓치고 있었던 것이 잘한 것은 아니었기에 주의를 주는 석규였다.

“음! 이점에 대해 물어보려고 했던 거니 이만 돌아가도 좋네. 다음부터는 주의하도록 하고. 라디오 스타에 관련된 것은 내가 일러둘 테니 그렇게 알도록.”

“네, 사장님. 다시 한 번 죄송합니다.”

축객령을 내리자 세희는 자리에 일어서서 고개를 다시 한 번 숙이고는 사장실을 벗어난다.

세희가 밖으로 나가자 창현이 석규를 바라보며 말한다.

“꼼꼼한 누나인데 실수도 다 하네요.”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들어온 스케줄이라서 중간에 공백이 생겼다. 그것 때문에 그렇지. 그렇다 하여도 실수를 한 것은 분명하니 혼낸 것이다. 일단 라디오 스타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겠지? 어떤 프로인지는 알고 있나?”

석규의 물음에 창현이 망설일 것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네, 물론이죠. 제법 공격성 있는 프로그램으로 알고 있는데요.”

“음! 공격성이 있다고 해도 너한테는 함부로 못할 게다. 토크쇼 형식의 프로그램에는 첫 출연이 아니겠느냐? 아마 출연하면 시청률이 어마어마하게 몰려들 걸?”

“그런가요? 아직 해보질 않아서 잘 모르겠는데요.”

살짝 고개를 갸웃하면서 말을 하는 창현이었다.

물론 자신의 존재로 인해 시청률을 끌어올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라디오 스타 같은 경우 기본적으로 2주에 걸쳐서 하는 프로그램이 아닌가?

앞편이 재미가 없으면 뒤편 본방사수를 해달라 하기가 힘든 것이 바로 예능 프로그램이다.

게다가 창현은 아직 토크쇼에 출연한 경험이 없다.

경험이라는 것이 무척 중요하게 작용하는 만큼 창현에게도 어느 정도 마이너스 요소가 될 것임이 분명했다.

그렇다고 하여 첫 토크쇼 출연에 필요 이상으로 긴장하거나 그러지는 않을 것이다. 미국에서도 각종 토크쇼에 출연한 경험이 있으니 말이다. 다만 한국에서 첫 출연이라는 점이 상당한 불안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

석규도 그 맹점을 잘 알고 있었다.

“일단 한국에서는 토크쇼가 처음이지 않느냐? 그래서 라디오 스타에 너를 혼자 내보내는 것이 아닌, 라샤도 함께 내보내기로 결정을 내렸다.”

“누나들도요? 음! 괜찮은데요?”

잠시 생각에 잠겼던 창현이 나쁘지 않은 판단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인다.

자신과 달리 여러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한 경험이 있는 라샤라면 자신의 경험 부재를 훌륭해 커버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창현이 흔쾌히 승낙하자 석규도 다소 안도하는 기색을 보이며 말한다.

“그리고 아마 출연할 때쯤에는 드라마에 대한 소식도 어느 정도 흘러갈 것이다. 그때쯤이면 드라마 제작 발표회를 한 직후일 테니 홍보 효과를 노릴 수 있을 테지.”

그 말에 창현이 잠시 멈칫하더니 석규에게 물었다.

“촬영 날짜가 언제인데요?”

“2월 말이다. 그리고 방송 날짜는 3월 중순이지.”

“그렇군요. 3월 중순이라… 그러고 보니 고등학교 진학을 하지 않는 사실도 공표해야 되지 않나요?”

3월은 창현에게 있어서 제법 고단한 한 달이 될 것이 분명했다.

드라마를 촬영한다는 것이 결코 좋은 쪽으로 말이 나올 것이 아니었고, 고등학교를 진학하지 않겠다는 것은 사람들의 기본 인식에서 벗어난 행동이기에 진통을 일으킬 것임이 분명했던 것이다.

그 말에 석규도 표정을 살짝 굳히고는 말한다.

“어쩔 수 없지 않느냐? 제법 힘들겠지만 이겨내리라 믿는다.”

“힘들어도 설마 미국에서 만큼 힘들겠어요? 잘해낼게요.”

어찌 보면 앞으로 다가올 상황은 미국을 진출할 때와 비슷한 전개가 될 것임이 분명했다.

공식 데뷔 이후 창현에게 호의적인 기사들만 쏟아지다가 처음으로 부정적인 기사가 쏟아지기 시작한 것이 바로 미국행 결정 이후였다. 성공에 의문을 표하는 기사들이 범람하기 시작하면서 한동안 대대적인 공격을 받아야만 했다.

지금 상황이 그때와 비슷했다.

미지의 영역에 대한 도전.

게다가 이미 한 방면에서 대성공을 거둔 직후에 언론의 공격이 그때보다 더욱 거셀 것임이 분명했다.

“그래, 잘 해내면 되겠지. 네 실력을 믿어라. 그러면 될 것이다.”

솔직히 드라마 캐스팅에 대해서 지금이라도 취소하고 싶은 것이 석규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석규가 창현에게 드라마를 하도록 권유를 한 것은 다름 아닌 슬럼프 때문에 그랬던 것이다. 그런데 창현이 김지환 감독과의 만남 이후 슬럼프가 말끔하게 회복된 것이 아닌가?

본인은 아직 슬럼프를 완벽하게 극복하지 못했다고 말을 하지만 석규가 보기에는 위험한 수준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였다.

슬럼프에서 벗어난 이상 득보다 실이 많은 드라마를 할 이유가 사라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약속을 한 뒤였고, 더 이상 물릴 수도 없는 분위기였기에 강행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제가 드라마에 관련해서 질문을 받는 거면 라샤 누나들은 전국 투어 콘서트인가요?”

“음! 그렇다고 볼 수 있겠지? 그런데 시기가 그리 좋지 않아. 그때쯤이면 이미 전국 투어 콘서트를 시작하고 있을 거거든. 물론 광고는 되겠지만 메인은 너라는 걸 알아야 한다.”

라디오 스타 방송이 3월 초에 방영되고, 라샤의 전국 투어 콘서트도 3월 초에 방영 된다. 겹치는 만큼 큰 홍보 효과를 누리기에는 역부족이란 생각이었다.

창현도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리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좋게는 창현의 지원군이 되어주기 위한 것이고, 나쁘게는 창현의 불안요소를 채워주기 위한 빈틈 막이용이었던 것이다.

“그렇군요. 음! 라샤 누나들한테 감사해야겠네요.”

“그래, 열심히 감사의 인사를 해라.”

메인이 창현이 된다는 이야기였지만 그래도 라샤에게 전혀 실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감사한 것이었기에 창현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석규에게 말한다.

“안 그래도 내일부터 본격적인 몸매 관리에 들어간다고 하던데요? 오늘 아버지가 라샤 누나들 저녁 사주시는 게 어때요?”

“흠! 내가? 내가 왜?”

의문을 표하는 석규의 모습에 창현이 강하게 대답한다.

“제가 신세를 끼치는 거니까요. 당연히 아버지가 감사의 의미로 저녁을 사줄 수 있는 것 아닌가요?”

“허허! 그런 법은 어디서 만들어진 것이냐? 게다가 너도 돈이 많지 않느냐? 그런데 왜 내가 사야 하는데?”

“그러지 마시고 사주세요. 내일부터 힘들 텐데요.”

튕기는 석규에게 사달라고 요청을 하자 결국 두 손을 들고 항복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알았다, 알았어. 어차피 오늘 할 일도 다 끝냈으니 사주도록 하마.”

“감사합니다, 아버지.”

석규의 승낙에 미소를 짓는 창현이었다.

그 모습이 징글 맞아 석규가 한마디 툭 던진다.

“네가 그렇게 미소 지어봤자 나는 여자가 아니라서 흔들리지 않는다. 징그럽게 그런 미소 짓지 마라.”

대놓고 타박을 주자 창현이 무안한 표정을 짓는다.

“좋아서 그러는 것 가지고 왜 그러세요.”

“뭐 그냥 그렇다는 거다.”

점점 이목구비가 뚜렷해지는 창현의 외모는 날이 갈수록 빛을 발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몇몇 사람들이 성형 의혹을 제기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럴 때마다 과거 사진을 제공함으로써 성형 의혹을 잠재웠지만 석규마저도 창현의 변화에 신기함을 느낄 정도였다.

“다 노력의 결과니까 너무 질투하지 마시길. 게다가 아버지는 이미 어머니가 있는데 무슨 외모에 신경을 쓰시는 거예요.”

“…내가 언제 외모에 신경 썼다고 그러느냐? 이제 외모보다는 힘에 신경 쓸… 흠흠!”

자신도 모르게 진심을 털어놓던 석규는 흠칫하면서 헛기침을 흘린다. 흥분한 나머지 말하지 않아야 할 사실을 말한 것이다.

그런 석규의 말에 창현이 호오! 하는 소리를 흘리면서 입가에 묘한 미소를 짓는다.

그 표정이 보기 싫어 석규가 고개를 돌려 외면한다.

그러자 창현이 자리에 일어나면서 석규에게 말한다.

“그럼 라샤 누나들에게 오늘 저녁은 아버지가 사주신다고 전할게요. 그렇게 말하면 되죠?”

다행히 화제가 전환되는 듯하자 석규는 나직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다.

“그러도록 하여라.”

“네, 그렇게 전할게요. 그럼 전 이만…….”

고개를 살짝 숙인 창현이 사장실을 벗어나려다가 무언가 생각난 듯 멈칫하더니 석규에게 묻는다.

“아참! 깜빡한 게 있는데요. 제 동생은 언제 생길 예정이에요?”

아무렇지도 않게 묻는 창현의 질문에 석규도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다.

“글쎄다. 노력은 하고 있지만 잘 되질 않는데? 그래도 얼마 안 있으면 좋은 소식이… 헙!”

무심코 술술 이야기하던 석규는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깨닫고는 하던 말을 황급히 멈췄다. 완전히 관심을 거둔 것 같아 마음을 풀어놓은 순간 창현의 질문이 치고 들어온 것이다.

석규의 대답을 들은 창현이 씨익 웃음을 지었다.

“그래요? 그럼 기대하도록 할게요. 전 그럼…….”

그 말과 함께 사장실을 벗어나는 창현이었다.

“…….”

그리고 그 모습을 석규는 멍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마음 놓고 있다가 창현에게 완벽히 한 방 먹은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창현이 사장실을 나선 것을 확인한 석규가 망연한 표정을 짓다가 중얼거린다.

“정말 저질러야 하나…….”

제법 위험한 발언이었다.


라디오 스타를 촬영하겠다는 소식을 접한 그날, 석규가 사주는 저녁을 먹은 창현은 다음 날도 일찍부터 연기수업을 받다가 라디오 스타 작가의 방문을 받았다.

회사로 직접 찾아오자 창현은 의아한 안색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작가를 맞이하였다.

“반갑습니다, 현으로 활동하고 있는 강창현입니다.”

회사를 방문한 작가는 이십대 중후반의 여성 작가였다.

그녀는 창현의 인사에 얼굴을 확 붉히고는 창현에게 마주 인사를 하였다.

“예, 예! 안녕하세요. 라디오 스타 막내작가 이현주(가상인물)라고 합니다. 이름이 자자한 현 씨를 만나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자신을 보며 어찌 할 바를 몰라 하는 이현주 작가를 보면서 창현은 미소를 지었다.

“뭘요. 저도 만나서 반가워요. 라디오 스타가 제법 센 프로그램이라고 이름이 자자하더라고요. 살살 부탁드릴게요.”

“세다니요! 라디오 스타는 전혀 안세요! 그러니 그러지 않으셔도 되요.”

살짝 엄살을 부리는 창현의 말에 벌떡 일어서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이현주 작가였다.

워낙 적극적인 모습에 창현은 흠칫했지만 나쁜 뜻은 없는 것 같아서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데 라샤 누나들은 없는데 괜찮나요?”

자신과 함께 출연하는 만큼 라샤도 인터뷰를 하고 대본을 작성해야 하지 않는가?

창현의 물음에 이현주 작가가 고개를 저으면서 말한다.

“아, 라샤 분들은 이미 인터뷰를 했고, 대략이나마 대본이 정리된 상황이에요. 현 씨만 인터뷰를 하고 대본을 작성하면 되요.”

“아, 그런가요? 제가 이런 형식의 프로그램은 첫 출연이라서요. 그럼 뭘 대답하는 거면 되죠?”

창현의 말에 이현주 작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창현에게 말을 건넨다.

“우선 인터뷰를 하기 전에… 싸인 좀 받으면 안 될까요? 사진도 함께 찍어주시면 좋겠는데…….”

자신보다 거의 열 살 정도 차이나건만 그 말을 꺼내는 모습은 마치 수줍어하는 어린 아이와도 같았다.

그에 창현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렵지 않은 일인데 뭘 그리 어렵게 말씀하세요. 물론이에요.”

“와! 그럼 부탁드릴게요. 우선 싸인부터…….”

그렇게 말하며 이현주 작가는 가방을 열고는 차곡차곡 앨범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그녀가 꺼낸 앨범의 양은 실로 방대하였다.

첫 미니 앨범인 <Go&Stop>부터 시작하여 정규 1집 앨범과 싱글 앨범들을 차곡차곡 꺼내더니, 정규 2집 앨범과 최근 발매된 정규 2집 앨범까지 꺼내는 것이 아닌가?

그것 하나만으로도 그녀가 창현의 광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시리즈별로 모은 자신의 앨범을 보면서 창현은 혀를 내둘렀다.

“허어! 제 팬이셨던 거예요?”

“네? 네! 물론이죠. 그래서 오늘 직접 찾아온 것이기도 하고요. 다른 작가 언니들도 찾아오겠다고 했는데 제가 제비뽑기에 이겨서 오게 된 거랍니다.”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아주 당당하게 대답하는 이현주 작가였다.

그 모습에 창현은 미소를 지으면서 펜을 꺼내들더니 앨범을 가리키며 말한다.

“앨범에 싸인을 하면 되는 거죠?”

“네, 이왕이면 제 이름도 넣어주시면 감사하겠는데…….”

“그럴게요.”

앨범 하나하나에 싸인을 하면서 오늘 날짜와 간단한 멘트를 적어준 창현은 앨범을 이현주 작가에게 건넸다.

그녀는 창현에게서 받은 앨범을 소중하게 갈무리하며 말한다.

“보물로 간직할게요. 감사해요.”

“뭘요. 그럼 이제 인터뷰를 해볼까요?”

본격적으로 본론에 들어가길 원하는 창현이었다.

그에 앨범을 챙겨 넣은 이현주 작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미리 준비해둔 것들을 창현에게 질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창현의 대답을 들으면서 대본에 필요한 것들을 정리하였다.

그것을 보면서 창현이 넌지시 물었다.

“그런데 원래 대본을 그렇게 상세하게 짜는 건가요?”

“예? 아니에요. 현 씨가 토크쇼가 처음이라기에 대본을 상세히 짜는 건데 왜 그러세요?”

원래 방식이 아니라는 말에 창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워낙 꼼꼼하게 챙겨주는 모습에서 정성이 느껴지는 것 같아 좋긴 했지만 약간 답답한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이걸 토대로 대본을 짜면 말 그대로 연극을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판단한 창현이 자신의 의견을 살짝 내놓았다.

“음! 그렇다면 조금 방식을 바꾸면 안 될까요?”

“방식을요? 어떻게요?”

아무래도 인지도가 높기 때문일까. 아니면 창현의 팬이기 때문일까.

웬만하면 창현의 말을 다 들어주려는 모습이 보였다.

그에 창현은 잠시 머뭇거렸지만 그래도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방법을 말하는 게 나을 것 같아 입을 열었다.

“너무 대본을 상세하게 짜면 답답한 마음이 들어서 제대로 할 수 없을 것 같거든요. 그러니 굵직한 줄기로 간략하게 대본을 짰으면 하는데 어떨까요?”

“굵직하게요? 그렇게 할 수는 있지만 힘드실 텐데…….”

창현의 제안에 염려스러운 표정을 짓는 이현주 작가였다.

그가 제안한 방법은 토크쇼에 어느 정도 숙달된 사람에게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굵직한 토대를 제시함으로써 자신이 그에 알맞게 애드리브를 해야 했기에 자칫 잘못하면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묻혀버리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 방법은 토크쇼에 처음으로 참여하는 창현에게 있어 무척 위험한 발상이었다.

이현주 작가가 걱정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기에 창현은 살짝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한다.

“된다니 다행이네요. 한국에서는 처음이지만 미국에서는 토크쇼를 많이 출연해봤으니 괜찮아요. 그러니 그렇게 할 수 있으면 그렇게 해주셨으면 좋겠네요.”

“음… 현 씨가 그렇게 말씀하시니 그렇게 하도록 할게요.”

창현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 여긴 이현주 작가는 순순히 창현의 말에 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는 처음과 달리 세세하게 물어보는 것이 아니라, 굵직한 줄기를 가지고 인터뷰를 하기 시작했고, 그것을 토대로 간략한 대본을 짜기 시작했다.

약 삼십여 분이 흐르자 마침내 인터뷰를 끝맺을 수 있었다.

“수고하셨습니다.”

“현 씨도 고생 많으셨어요.”

“전 재미있었는 걸요, 뭘.”

삼십 분 동안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제법 친근하게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현주 작가는 염려스러운 표정으로 창현을 바라보면서 말한다.

“경험이 있으시다 하여 이렇게 짜기는 했지만 힘드실 수도 있을 텐데 괜찮으시겠어요?”

“괜찮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여차 하면 라샤 누나들도 있으니까요.”

이럴 때를 대비한 라샤가 아니던가?

물론 개인적인 자신감도 있었지만 말이다.

“그것도 그러네요. 오늘 즐거웠습니다. 싸인도 감사하고요. 그럼…….”

마중해주겠다는 창현의 말에 정중히 거절한 이현주 작가가 막 나가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듯 창현이 그녀를 부른다.

“잠깐만요.”

“네? 무슨 일이라도?”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묻는 이현주 작가를 보며 창현이 말했다.

“한 가지 잊으신 게 있잖아요.”

“잊은 거요? 잊은 거 없는데.”

자신의 가방을 뒤적이며 말을 하는 이현주 작가의 모습에 창현이 어깨를 으쓱한다.

“같이 사진 찍자고 하셨잖아요? 사진 안 찍었는데 정말 그대로 가실 거예요?”

창현의 말을 들은 이현주 작가의 표정이 순간 환하게 변했다.

“기억해주신 거예요? 와…….”

“그럼요. 그걸 잊어먹으려고요.”

“전 부담되는 줄 알고 그랬거든요.”

대부분의 톱스타가 원래 비싼 사람이 아니던가? 창현이 흔쾌히 허락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내심 힘들 것이라 생각하던 이현주 작가였다. 그래서 포기하고 있었는데 창현이 그걸 기억해주고 먼저 사진을 찍자는 말을 하자 감동을 받은 것이다.

“부담은 무슨. 루머에 휩싸이면 기념사진 찍었다고 하면 되는 걸요.”

“그래도 감사한 건 감사한 거죠. 정말 고마워요.”

본인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것인데도 불구하고 상대방에게는 무척 고마운 것일 때가 있다. 지금 이현주 작가의 상황이 그러했던 것이다. 창현의 작은 배려 하나가 그녀를 감동시켰으니 말이다.

품에서 디지털 카메라를 꺼내든 그녀가 막 사진 찍자, 창현이 무언가를 잊고 있었다는 듯 말한다.

“아차! 그러고 보니 메이크업 안 했는데.”

“메이크업 안해도 멋지기만 한 걸요.”

이현주 작가의 칭찬에 창현은 미소를 지었다.

“칭찬은 감사합니다. 그런데 메이크업하지 않으면 돌아다니지도 말라는 매니저 누나의 엄명이 있어서. 뭐, 이미 찍었으니 어쩔 수 없겠죠?”

그러면서 악동같이 씨익 웃음을 지어보이는 창현에게 마주 웃음을 지어보이는 이현주 작가였다.

그렇게 사진도 함께 찍고 인터뷰를 마친 그녀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회사를 나설 수 있었다.

단단히 팬 서비스를 받은 만큼 대본에도 그만한 성의가 들어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라디오 스타 촬영일은 2월 말인 2월 24일이었다.

열흘이라는 시간 동안 창현은 연기수업을 받으면서 라샤의 콘서트 준비를 위한 개인 트레이닝 계획을 짜주는 등 바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다듬고 다듬어진 대본을 확인하면서 촬영을 준비하기 위해 완벽하게 대본을 숙지한 상태였다.

그리고 마침내 촬영 날짜가 되자 창현은 라샤와 함께 벤을 타고 이동을 한다. 어차피 합쳐봤자 네 명 밖에 되지 않는 숫자였기에 차를 낭비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M본부 방송국에 도착한 창현은 밖을 내다보다가 말한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도 이렇게 한 번 같이 간 적이 있잖아요. 그때가 아마 누나들 데뷔 무대였던가?”

라샤의 데뷔 무대를 가질 당시 창현은 얼굴 없는 가수로서 상당한 인지도를 얻고 있을 당시였다. 그때가 벌써 2년 전이라니 참 감회가 새로울 수밖에 없었다.

“그때가 벌써 2년 전이라니. 정말 시간이 빠르네.”

그때가 떠오르는 듯 감회 어린 목소리로 말하는 시린이었다.

“그러게. 그때도 우리는 파릇한 신인이었는데.”

옆에 있던 세룬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 동조한다.

그리고 미란도 한마디 한다.

“그러게 말이야. 그때 창현이 키가 160대 초반이었는데 벌써 170대 중반을 넘어가고 있다니. 참 시간은 빠르단 말이야.”

기억하고 싶지 않은 순간을 콕 집어내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창현이 표정을 찡그리면서 미란에게 일침을 가한다.

“왜 거기서 제 키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뭐 그렇다는 거지. 그래도 지금은 어느 정도 평균 키잖아? 창현이 너 키가 몇이지?”

눈살을 찌푸린 창현이 자신의 키를 당당하게 말한다.

“176cm 다 되어가요. 정확히 175.7cm지만. 이 추세면 내년에 180cm 넘을 걸요?”

“와우! 정말 성장이 빠른데? 그래서 네가 매일 밤 10시가 되면 칼같이 자는 거구나?”

“그때가 키 크는 시간이니까요. 어쨌든 평균 키는 되었으니 앞으로도 잘 크겠죠. 나중에 내가 누나보다 한 뼘 정도 더 커지면 단단히 놀려줄 테니 각오해요.”

창현의 말에 미란이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려면 네 키가 190cm는 되어야 할 걸? 흥이다!”

실제 키가 169cm인 미란보다 한 뼘 정도 더 크려면 그녀의 말처럼 거의 190cm에 달하는 키가 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창현은 자신 있었다. 열일곱 살의 나이에 175cm를 돌파했는데 앞으로도 키 클 날이 짱짱하게 남아있었으니 말이다.

주먹을 불끈 쥔 그가 미란을 보면서 말한다.

“그 말 후회할 거예요.”

키 이야기만 나오면 묘하게 전의에 불타는 창현이었다.

그렇게 오랜 추억 이야기를 하면서 네 사람이 방송국 안으로 들어섰다.

그들이 함께 다니는 것은 당연히 화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방송국에서 워낙 모습을 발견하기 힘든 창현과, 걸 그룹 중에서 확고한 자기 위치를 굳히고 동남아 투어 콘서트를 성공리에 끝마친 라샤는 화제를 몰고 다니는 인물들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라샤는 창현과 달리 예능 프로그램에도 상당수 출연한 경력이 있었기에 곳곳에서 아는 척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녀들이 인사를 하면 창현도 얼떨결에 같이 인사를 하고는 하였다.

그렇게 라디오 스타 촬영이 이루어지는 세트장에 도착한 네 사람은 곧장 인사를 하기 시작한다.

우선 PD부터 시작하여 스태프들에게 인사를 하고 MC인 김국진과 윤종신, 김구라와 신정환에게도 차례대로 인사를 하였다.

그리고는 가벼운 사담을 나눌 사이도 없이 곧장 촬영 준비를 하기 시작하였다.

미란이 대본을 보고 있는 창현을 툭 치면서 말한다.

“긴장 안 돼?”

“긴장은요, 무슨. 말실수만 안 하면 되죠, 뭐.”

“그래도 떨리잖아.”

그렇게 말을 하는 미란은 적잖게 긴장되는 듯했다.

그 모습을 보며 창현은 피식 웃음을 짓고는 말했다.

“어차피 무대를 서는 것보다 떨릴 수는 없잖아요? 사전에 인터뷰도 했고, 우리에게 알맞은 대본도 만들어졌으니 충분히 숙지해둔 뒤 편안하게 임하면 되요. 전 그렇게 하려고요.”

“…네가 그렇게 말하니 긴장한 나만 괜히 이상해보이네.”

그래도 창현의 말에 힘을 얻은 듯한 미란이었다. 한결 풀어진 안색을 보이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시린이 창현에게 말한다.

“창현이 네가 우리보다 낫네. 우리가 널 돕기 위해 왔는데 오히려 도와주는 걸 보니.”

“돕고 안 돕고 따지는 게 뭐 중요하겠어요. 서로 잘하면 되는 거죠. 안 그래요?”

“그건 그래.”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며 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대본을 숙지하면서 시간을 보냈고, 마침내 촬영 시작 사인이 떨어졌다.

창현과 라샤 세 여인은 부스 안으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촬영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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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현과 라샤가 막 부스 안으로 들어서려고 할 무렵, 부스 안에서는 네 명의 MC가 사담을 나누고 있었다. 일종의 오프닝 멘트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국진이 세 MC를 둘러보면서 입을 열었다.

“요즘 시청률이 떨어져서 말이야. 제작진들이 아주 초강수를 준비했나봐.”

옆에 있던 종신이 국진을 보며 물었다.

“초강수라면 뭐, 톱스타라도 준비했다는 건가요?”

“그렇다는 것 같은데. 이거 힘들겠어.”

“톱스타면 시청률은 올라가지만 안티는 급증할 수도 있겠는데요, 이거.”

국진과 종신의 염려 섞인 대화를 듣고 있던 구라가 말한다.

“상대가 톱스타라 하여도 공격적인 자세를 잊으면 안됩니다. 이것이야 말로 우리가 살 길이니까요.”

옆에 있던 정환이 그런 구라에게 타박을 준다.

“무슨 살 길씩이나. 일단 손님이 누구인지나 만나보죠? 아리따운 여자 톱스타는 안 나오나.”

그 말과 함께 본격적인 촬영 시작 소리가 들려오고, 잔잔한 음악이 깔리는 가운데 가장 연장자인 국진부터 시작하여 종신, 구라, 정환이 입을 열기 시작한다.

“여러분 죄송합니다. 애드리브가 부족하여 빵 터지는 웃음을 드리지 못합니다.”

“죄송합니다. 말로 웃기지 못하여 얼굴로라도 웃기려고 합니다.”

“죄송합니다. 생긴 것이 워낙 비호감이라 보기만 해도 욕이 나오시죠?”

“나는 애드리브도 빵빵하고 얼굴도 안 웃기고 호감형이라 어떻게 하지?”

“…….”

잘난 척하는 정환의 말에 한순간 부스 안은 침묵이 감돌았다.

싸늘한 MC들의 시선을 감당하기 어려웠는지 정환이 시선을 스윽 옮기면서 사과를 한다.

“죄송합니다. 웃기고 싶어서…….”

웃기기는커녕 분위기를 완전히 말아먹는 말이었다.

국진이 재빨리 수습하기 위한 멘트를 날린다.

“하지만 그 노력은 결코 다른 프로그램에 뒤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 같이 미리 준비한 멘트를 하였다.

“우리는 고품격 음악 방송, 들리는 TV 라디오 스타입니다.”

잔잔한 분위기가 끝나자, 구라는 의자에 몸을 묻으면서 말한다.

“이야, 역시 저희는 짜고 치면 안 되나 봅니다.”

방금 전 분위기가 심히 마음에 들지 않았나보다.

그것인 종신 또한 마찬가지였던 듯, 동조하는 말을 꺼낸다.

“그러게 말입니다. 역시 우리는 마구 던져줘야 해요.”

“그건 종신 씨나 그런 거고요.”

종신에게 타박을 주는 정환이었다. 그렇게 말을 하는 정환에게 구라가 시선을 주며 물었다.

“그나저나 2008년은 무슨 띠였죠? 쥐띠였나?”

“땀띠 아닌가요? 땀띠!”

정말 막 던진다고 하더니 정막 막 던지는 종신이었다.

그러자 MC들은 어색한 리액션이 담긴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는 소소한 잡담과 함께 분위기를 무르익게 만들고는 본격적으로 게스트를 모실 흐름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오늘 모실 손님들은 말이죠. 역대 라디오 스타 게스트 중에서 가장 거물급 인사입니다. 월드 아티스트죠! 그리고 그의 손에서 탄생한 세 송이 아름다운 꽃들이 함께 해주셨습니다.”

과장 섞인 국진의 말에 종신이 감탄사를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인다.

“아아! 드디어 그분들이 오시는 건가요! 제작진들이 시청률을 올리기 위해 초강수를 두었군요.”

그런 종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구라가 눈살을 찌푸리며 지적한다.

“거물이라니까 또 공손해지는 것 봐.”

구라의 타박에 종신도 무안함을 느꼈는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이게 바로 세상사는 방법이라고요.”

분위기가 삼천포로 빠지려고 하자, 정환이 재빨리 방향을 바로잡는다.

“어쨌든 어서 게스트를 모시도록 합시다. 작가들이 손으로 독촉하는 거 안 보여요?”

“어어, 그렇군요. 자, 그럼 게스트를 모시도록 합시다. 현 씨! 그리고 라샤!”

그 말과 함께 시린을 선두로 라샤 세 여인이 먼저 안으로 들어섰고, 창현이 가장 뒤늦게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이 부스 안으로 들어서자 네 MC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시린을 시작으로 세룬과 미란까지 악수를 나눈다.

가장 먼 자리에서 가장 빠르게 달려와 라샤와 악수를 나눈 정환이 창현을 보면서 말한다.

“현 씨는 아시죠? 남자는 남자랑 악수를 나누지 않는 거?”

“네? 아, 네.”

처음부터 독한 멘트를 날릴 줄 몰랐기에 창현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리에 앉으려고 하자, 구라가 창현에게 말한다.

“자, 현 씨는 남자잖아? 남자는 저기 앉아야 돼.”

구라가 가리킨 곳은 다름 아닌 가장 외곽에 위치한 자리였다.

“그, 그러죠.”

그에 창현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가장 바깥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시린을 시작으로 라샤가 자리에 앉기 시작하였다.

모두 자리에 앉자, 종신이 밝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 오늘 방송 너무 좋아요! 가요계의 꽃이 왔습니다. 분위기가 너무 화사하고 좋네요.”

라샤만 배려하는 종신의 멘트에 국진이 타박을 주었다.

“왜 월드 아티스트이신 현 씨를 무시하고 그러세요? 자, 인사부터 하시죠.”

“네, 안녕하세요, 월드 아티스트…는 아니고 가수 현입니다.”

창현이 자기소개를 하자, 시린이 신호를 주었다.

“하나, 둘, 셋.”

“안녕하세요! 라샤입니다.”

상큼하고 발랄한 목소리로 인사를 하는 라샤였다.

MC들은 물론이고 카메라 감독들도 훈훈한 미소를 짓고 있는 걸 보면 그 인기가 얼마나 대단한지 짐작할 수 있었다.

분위기가 라샤에게 일방적으로 쏠리는 듯하자 국진이 나서면서 말한다.

“우리가 제대로 해야 해요. 오늘의 메인은 다름 아닌 현 씨입니다. 라샤 분들은 현 씨를 지원하기 위해 나온 것이고요.”

국진의 말을 들은 구라가 주변을 둘러보며 설득하듯 말했다.

“현 씨가 방송에서 잘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지만 그건 라샤 분들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현 씨가 메인이라면 우리 허심탄회하게 먼저 라샤 분들을 자세히 파헤친 다음에 낱낱이 해부하도록 해봅시다!”

“하지만 메인은 현 씨인데…….”

국진이 말끝을 흐리자 구라가 더욱 강하게 밀어붙인다.

“다름 아닌 현 씨잖습니까! 이참에 4주 특집으로 때려서 가는 겁니다. 라샤 2주 현 씨 2주. 딱 비중도 맞고 좋잖아요?”

대놓고 라샤부터 조명하자는 구라의 말에 정환이 위협적인 말을 꺼냈다.

“그러다가 다크 스타에 몰매 맞는 수가 있어요. 현 씨 다크 스타 회원이 몇인지 알아요? 자그마치 구십만이에요, 구십만. 구라 씨 팬클럽에는 몇 명이나 가입 되어 있죠?”

“몇백 명 수준이긴 한데. 그마저도 반 이상이 안티인지라… 현 씨, 기분 나쁜 건 아니죠?”

정환의 위협적인 말이 먹힌 듯, 방송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구라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그것이 식은땀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정환이 혀를 끌끌 찼다.

“이러다가 내일 구라 씨 욕으로 인터넷이 가득 도배되는 게 아닐까 몰라.”

“으음! 저는 성숙한 팬 문화를 믿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현 씨?”

슬쩍 위기를 모면하려는 구라의 모습에 창현이 묘한 미소를 띠면서 대답한다.

“예에. 그렇겠죠. 오늘 구라 씨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요.”

호락호락하게 넘어가지 않는 창현의 모습에 다른 MC들은 물론 라샤도 감탄 섞인 눈빛을 띤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순간 오! 하게 만드는 장면이었던 것이다.

창현의 말에 구라는 다시 한 번 손수건으로 땀을 훔치면서 카메라를 응시하고는 말한다.

“다크 스타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저는 현 씨를 매우 좋아합니다. 그것 하나만은 알아주세요.”

“이 분은 자신에게 상황이 불리해지면 이 말을 하니 크게 신경 쓸 필요 없어요. 그런데 현 씨는 왜 라샤 분들과 함께 나오게 된 것입니까?”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듯 구라에게 깐족거리는 모습을 보인 종신이 창현에게 질문을 던진다.

자신을 조명해주는 종신에게 고마운 감정을 느끼면서 창현은 간략하게 설명했다.

“음! 아무래도 제가 예능 프로그램 출연이 적고, 더군다나 이렇게 토크 형식으로 진행되는 프로그램에는 처음으로 출연하다 보니 라샤 누나들이 함께 나와준 게 아닐까 싶습니다.”

“오! 누나라고 부르는군요? 평소에 무척 친한 사이인가 봅니다?”

남녀 연애사 밝히기를 무척 좋아하는 구라는 창현이 부른 누나라는 단어를 놓치지 않고는 눈을 빛내면서 창현에게 묻는다.

그에 창현이 예의 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친한 사이이긴 하죠. 같은 소속사니까요. 하지만 구라 씨가 질문한 의도에는 고개를 한 번 갸웃하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네요.”

그러면서 정말로 고개를 갸웃하는 창현이었다.

그걸 본 정환이 감탄사를 터뜨렸다.

“오우! 현 씨가 예능을 할 줄 아는 분이네! 구라 씨가 꼼짝도 못해요. 이거 딱히 라샤 분들이 도움을 주지 않아도 될 듯 싶은데요? 첫 토크쇼라면서 벌써 구라 씨를 쥐락펴락 하고 있어요.”

게스트들 중에서 이렇게 구라를 농락한(?) 인물이 없었기에 정환이 흥분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의 말에 미란이 한마디 한다.

“현이 토크쇼 출연이 처음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한국에 국한된 거예요. 미국 TV 토크쇼에는 무수히 많이 출연을 했는 걸요? 거기에서도 상당히 이름을 날린 만큼 저희들의 도움은 거의 필요없다고 봐도 무방해요.”

미란의 말에 국진이 감탄사를 터뜨렸다.

“오우! 역시 월드 아티스트!”

“뭐만 나오면 전부 월드 아티스트야. 월드 아티스트랑 토크쇼에서 말을 잘하는 거랑 무슨 상관입니까?”

종신이 타박을 주자 국진이 뭘 모른다는 듯 말한다.

“원래 세계에서 노는 사람들은 다 잘하는 법이야. 그러니 월드 아티스트지.”

“그, 그런가?”

묘하게 설득력 있는 말에 종신이 고개를 갸웃한다. 확실히 여러 가지를 잘하니까 세계에서 노는 것이 아닌가?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지만 묘하게 설득력이 있는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자신을 칭찬하는 미란의 말에 창현이 살짝 미소를 짓고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 정도는 아니고요. 적어도 토크쇼에서 어물거리는 수준은 아닌 것 같아요.”

“겸손하기까지! 역시 월드 아티스트.”

아예 창현을 칭찬하는 걸로 밀고 가기로 작정했는데 연신 월드 아티스트를 연발하는 국진이었다.

그에 창현이 조금 쑥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하! 그렇게 칭찬해주시면 몸둘 바를 모르겠는데요.”

그때, 제 안색을 회복한 구라가 절묘하게 빈틈을 치고 들어왔다.

“자, 오래 전부터 궁금한 게 있는데 말이죠. 물어봐도 됩니까?”

“네, 물어보세요.”

창현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자 구라가 진지한 표정을 짓더니 창현에게 질문을 한다.

“이건 팬분들도 무척 궁금해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도대체 1년에 얼마나 법니까? 내가 이게 궁금해서 밤에 잠이 오지 않을 정도야.”

“…….”

강력한 구라의 멘트에 순간 할 말을 잃은 창현이었다.

별로 세게 하지 않는다고 하더니 초반부터 수입을 묻는 질문이라니.

‘세, 세다.’

창현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생각이었다.

제법 쉽지 않은 방송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정확히 아는 바가 없었다.

CF 같은 것은 어느 정도다! 라고 받는 몸값이 정해져 있지만 저작권료부터 시작하여 음반에서 벌어들이는 돈도 있지 않은가? 정산이 될 때마다 금액이 새로 갱신되는 개념이었기에 창현은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네요. 어느 정도인지는.”

그 대답에 정환이 혀를 내두르며 호들갑을 떤다.

“허! 측정이 불가능한 수준이라는 건가요? 이것이 그 전설의 돈이 너무 많아 추산이 불가능한 그건가요?”

국진도 정환의 말을 거든다.

“월드 아티스트 아닙니까? 쓰는 것보다 들어오는 게 더 많겠죠.”

분위기가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자 창현이 서둘러 제지에 나섰다.

“그게 아니라 아버지가 다 관리하고 계셔서요.”

“아버지? 설마 AA엔터테인먼트 사장이신 강석규 사장님 말씀하시는 건가요?”

구라가 눈을 번뜩이며 물었다.

“네, 맞습니다.”

창현이 소속사 사장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이미 널리 퍼진 사실이었기에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그럼 강석규 사장님이 다 갖는 겁니까?”

“그럴 리가요. 엄연히 제 돈인 걸요. 다만 제가 미성년자고 돈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몰라서 아버지가 맡아두고 계신 것뿐입니다.”

그 말에 구라가 혀를 차며 말했다.

“그거 위험한데요. 보통 설날에 부모님들이 그러지 않습니까? 세뱃돈 받은 거 다 크면 돌려줄 테니 내놓으라고. 그거 위험한 겁니다. 절대 부모님이 내놓지 않아요.”

“구라 씨가 그렇게 하나보죠?”

옆에서 종신이 묻자 구라는 입맛을 쩝! 다시더니 고개를 젓는다.

“동현이는 어릴 때부터 돈에 대해서는 철두철미 해서. 다 애 엄마가 관리하고 있지만 통장에 입금된 걸 보여주지 않으면 절대 주지 않죠.”

“하기야 어릴 적부터 돈을 버니 그쪽으로는 눈을 빨리 떴겠군요.”

“어쨌든 부모님들의 심리는 다 같습니다. 자식 돈 어떻게든 자기 돈으로 삼고 싶은 기분! 현 씨도 그걸 조심해야 합니다. 제가 현 씨를 좋아하니까 이런 말을 하는 거예요.”

아까 전 한 멘트가 신경 쓰이는지 창현을 좋아한다는 말을 강조하는 구라였다.

그 모습에 창현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아버지는 그러지 않으시니 안심하시길.”

어째서 자신이 안심하라고 말을 하는지 모르지만 분위기가 그렇게 되었다.

실제로 아들의 돈이라고 해서 석규가 창현의 돈을 막 쓰는 경우는 없다. 회사에서 벌어들이는 돈만으로도 충분했기에 그렇다. 아니, 충분하다 못해 넘치고 있는 실정이었다.

갑작스러운 팽창보다는 서서히 정예화 시키며 알찬 회사를 키우는 것이 목표인 만큼 섣불리 자금을 쓰지 않고 끌어안고 있는 실정이었기에 굳이 창현의 돈까지 손을 댈 필요가 없다.

필요하다고 하면 창현은 기꺼이 줄 의향이 있지만 말이다.

“아!”

그러다가 문득 생각난 것이 있는 창현은 저도 모르게 소리를 흘렸다.

그러자 구라가 무언가 이상 기류를 발견하고는 물었다.

“무언가 생각난 거죠? 그런 거죠?”

“그러고 보니 아버지가 딱 한 번 제 돈을 쓴 적이 있네요.”

창현의 반응에 구라는 손벽을 짝! 치며 말한다.

“이거 봐봐. 이래서 부모님들은 믿으면 안 된다니까요. 자, 강석규 사장님이 얼마나 당겨썼습니까? 10억? 100억?”

“월드 아티스트니 1000억 단위가 아닐까요?”

뜬금없는 종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정환이 인상을 찌푸린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하세요, 아까부터 정말 막 던지네.”

“국진 씨가 월드 아티스트라잖아요. 월드 아티스트는 그 정도 스케일로 움직이지 않나요?”

티격태격하는 MC들을 보며 어색한 표정을 짓던 창현이 빨리 입을 열었다.

“그 정도는 아니고요. 얼마 전에 제 개인 녹음실을 내는데 아버지가 제 돈을 쓰셨거든요. 그래서 언급한 건데 설마 그렇게 말하실 줄은. 분명 모니터링 하실 텐데.”

모니터링을 할 수 있다는 말에 MC들은 정신을 되찾고는 헛기침을 한다.

“험험! 그렇죠. 역시 아들을 위해 쓰시는군요. 이것이 바로 부모님의 마음입니다.”

“그렇고 말고요. 이것이야 말로 아들을 생각하는 부모님의 마음이죠.”

“현 씨의 수입이 궁금하신 분은 AA엔터테인먼트 홈페이지에 문의해주시기 바랍니다.”

서둘러 어영부영 수습을 한 MC들은 황급히 다른 질문으로 넘어갔다.

본인이 모른다고 하는데 더 이상 수입에 대해 캐묻기 힘들었던 것이다.

게다가 교묘하게 창현이 낚시성 멘트를 한 탓에 MC들이 이상한 방향으로 말을 하게 된 것도 있었다.

국진이 다음 진행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자, 그럼 근황 토크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갑작스러운 국진의 진행에 종신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이거 있던 코너인가요? 회의에서는 없는 걸로 하자고 한 걸로 아는데?”

“아까 통과가 되었습니다. 자! 그러니 어서 질문을 하도록 합시다.”

없다는 말에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짓던 국진이 서둘러 진행을 한다.

그러자 종신이 대본을 보고는 국진에게 물었다.

“제가 먼저 해야 되나요?”

“그럼요. 먼저 하세요.”

“그럼 제가 하도록 하겠습니다. 음! 현 씨에게 질문을 해야겠네요. 현 씨. 2006년도는 <Yesterday>와 <Laser>, 그리고 <가면의 기사> 등 가히 라샤의 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고, 2007년도는 국내를 비롯한 일본을, 그리고 2008년 초에는 동남아시아에서 엄청난 호응을 얻었는데요. 라샤의 문화적 영향은 어떻다고 보는 건가요?”

즉석에서 나온 질문이 아닌 준비된 대본에서 나오는 질문이었다.

상세하게 대본을 짰다면 답을 알고 있겠지만 굵직하게 짠 상황이기에 창현이 어떤 말을 할지 몰랐다.

라샤 세 여인은 긴장한 표정으로 창현을 바라보았다.

그에 창현은 피식 웃음을 짓고는 입을 열었다.

“음! 글쎄요? 문화적 파급력이라… 솔직히 데뷔곡부터 엄청난 성공을 거두지 않았습니까?”

구라가 끼어들며 맞장구친다.

“그렇지. 현 씨의 후광을 제대로 받아 초대박을 터뜨리지 않았습니까?”

그 말에 어색하게 미소를 짓는 라샤 세 여인이었다. 그 말이 사실이기도 했기에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딱히 부인은 못하겠지만 어쨌든 처음부터 큰 성공을 거두면서 누나들이 많이 굳어버리더라고요. 웬만한 성공이라면 기뻐하기라도 하고 하루가 다르게 치솟는 인기를 즐기기라도 할 수 있을 텐데 말이죠.”

“너무 큰 인기가 오히려 부담을 준 경우군요?”

“맞아요. 그것 때문에 치솟는 인기를 즐기지도 못한 채 연습에만 몰두해야 했죠. 저한테 단기속성으로 실력을 늘리는 방법을 묻기까지 하더라고요.”

창현의 말에 라샤 세 여인은 그때 그 시절이 떠올랐는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긍정의 표현을 한다. 지금도 더욱 정진해야 하긴 하지만 그때는 훨씬 심했었지.

단기속성이란 말에 종신이 무언가 생각난 듯 창현에게 말한다.

“그러고 보니 현 씨가 라샤의 보컬 트레이닝을 맡기도 했죠. 데뷔 초에도 실력이 괜찮기로 유명했는데 지금은 그 실력에 대해 아무도 의심을 하지 않을 정도로 노래 실력을 키워주었는데요. 그게 바로 단기속성에 해당하는 건가요?”

라샤에 성장에 대해 말을 할 때 창현은 절대 빼놓을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시린의 언급 때문에 그런데, 라샤가 예능 프로그램에 나올 당시, MC가 질문으로, 하루가 다르게 실력이 발전하는데 무슨 비법이 없냐고 하자, 시린이 자신들은 현이 보컬 트레이닝을 해준다고, 자신들을 낳아준 것은 강석규 사장님이시지만 자신들을 키워준 것은 현이라고 말할 정도였던 것이다.

그렇게 말할 정도로 곡부터 시작하여 녹음과 보컬 트레이닝까지 모든 것을 창현이 전담하였기에 그런 것이다.

그 말로 인해 한동안 인터넷에서 화제가 된 적이 있었기에 종신이 그걸 기억해내고는 물은 것이다.

종신의 질문에 창현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단기속성은 절대 아니고요. 오히려 저는 장기속성이라고 할 수 있어요. 우선 누나들이 실력을 는 것은 본인의 피나는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거죠. 그 토대 위에 제가 약간의 도움을 준 것이고요. 어쨌든 너무 큰 인기로 인해 무거워진 양어깨의 짐을 놓아둘 필요가 있었어요. 실력이 늘어서 본인들이 떳떳해진다면 많은 인기에도 자연스럽게 적응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거죠.”

“그렇다면 결국 현 씨가 한 건 없다는 거군요?”

“…….”

순간 치고 들어온 구라의 멘트에 할 말을 잃은 창현이었다.

그러자 라샤가 구라에게 원망의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으세요. 현이가 얼마나 성심성의껏 저희한테 해줬는데.”

“그러게요. 한 게 없다니요. 그건 조금 심했어요.”

“현이가 얼마나 신경 썼는지 알면 절대 그런 말씀 못하실 걸요.”

자신의 말이 설마 이런 원망을 살 줄 몰랐던 구라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나는 그게 그러니까…….”

“아, 들리는군요. 김구라 씨가 구십만 다크 스타와 사십만 다크 레이디스의 적으로 규정되는 것이. 이거 조만간 김구라 씨에게 작별 인사를 해야겠는 걸요?”

김구라 보내버리기 식의 말이 이어지자 창현은 그를 구원하기 위해 웃음을 지으며 끼어든다.

“하하, 한 건 없다고 말하면 제가 조금 섭섭하죠. 어쨌든 라샤의 문화적 파급력이라고 하면 음반계에 활력을 심어주고, 진한 사랑이 아닌 풋풋한 사랑과 로맨스가 담긴 사랑 이야기 돌풍을 일으켰다고 할까요? 인스턴트식 사랑에서 벗어난 진정한 사랑에 조금이라도 일조했다고 생각합니다.”

라샤의 히트곡인 <Yesterday>는 소년의 수줍은 첫 사랑을 노래한 곡이고, <가면의 기사>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며 소녀를 사랑한 애틋한 사랑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다.

창현은 그 점을 집어내어 이야기를 한 것이다.

“음!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현 씨. 제가 정말 팬인 거 아시죠?”

집중공격을 당할 뻔한 구라는 식은땀이 맺힌 이마를 닦으며 창현에게 친근함이 담긴 멘트를 날린다.

그에 창현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물론이죠.”

창현의 파트가 끝나자, 이번에는 라샤에게 질문을 한다.

“현 씨의 대답을 잘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라샤 분들은 어떻습니까?”

“행복합니까?”

“…….”

갑자기 끼어든 정환의 말로 인해 한순간 부스는 침묵이 감돌았다.

자신에게 집중되는 시선을 느끼고는 정환이 헛기침을 하며 사과한다.

“험험! 죄송합니다. 계속하시죠.”

그러자 질문을 받은 세 여인이 고개를 끄덕이고, 시린이 대표로 말한다.

“물론이죠, 저희는 행복해요. 저희에게 많은 사랑을 보내주셔서 감사하고요.”

“현 씨는 라샤에게 있어 어떤 사람입니까?”

“예전에도 말한 적이 있지만 저희를 만들어주신 건 사장님이시지만 저희를 키워준 것은 바로 현이에요. 저희에게 있어서 은인이나 다름이 없죠.”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입니까? 어떻습니까, 세룬 양.”

국진이 세룬을 바라보며 묻자, 세룬이 대답한다.

“시린의 생각이 곧 저희들의 생각이에요. 현이가 있기에 저희가 이렇게까지 오게 된 것 같아요. 저희에게 말 그대로 은인이죠.”

“미란 양은 어떻습니까?”

“제 생각도 같아요. 아까 구라 아저씨 말에 발끈했던 것은 저희가 그만큼 현이에게 받은 은혜가 크기 때문이에요. 현이가 미국 진출 할 때 아시죠?”

미란이 구라 아저씨라 그러자 구라가 잠시 움찔했지만 고개를 끄덕인다.

“알고 있죠. 역사적인 순간이니까요.”

“그때 현이가 한국으로 못해도 반년동안 돌아오지 못할 예정이었어요. 그때 현이가 저희에게 준 게 바로 반년 동안 해야 할 보컬 트레이닝 노트였어요. 한 명 한 명의 분량이 작은 노트 한권이 될 정도로 상세하게 적힌 내용이었죠.”

“허! 그 정도로…….”

감탄을 금치 못하는 MC들이었다.

특히 음반을 내는 가수이기도 한 종신이 눈을 빛내며 창현에게 말한다.

“현 씨 저한테도 어떻게 보컬 트레이닝 안 될까요?”

나이는 두 배 차이가 넘게 나는데 보컬 트레이닝을 부탁하다니.

보통 말을 할 때 나이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지만 이건 좀 부담이 된다.

창현은 슬쩍 웃음을 지으면서 농담조로 말한다.

“저희 기획사로 오신다면 한 번 생각해볼게요.”

“…….”

불가능한 창현의 말에 순간 할 말을 잃은 종신이었다.

구라는 그런 종신을 보면서 타박을 주었다.

“아니, 그러니까 왜 불가능한 걸 부탁하고 그럽니까. 현 씨, 이번에는 제가 질문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창현의 수락이 떨어지자 구라는 대본을 슬쩍 보고는 질문을 하였다.

“이미 미국에서 대성공을 거두고 빌보드 차트 1위라는 업적을 달성한 만큼 냉정하게 보고 말해주십시오. 한국을 비롯하여 일본과 동남아시아에서 대성공을 거둔 새로운 한류 열풍의 라샤! 과연 라샤가 미국에 가도 성공할 수 있을까요?”

제법 강한 질문이었다. 라샤가 이곳에 있는데 설마 이 질문을 할 줄이야.

세 여인의 시선이 창현에게 집중되었다.

그러자 창현이 살짝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수입 질문에 이어 이런 질문을 할 줄이야.

이제 초반부인 걸 감안하면 만만치 않다는 걸 느끼고 있는 창현이었다.

이게 별로 세지 않다면 도대체 세게 하면 어느 정도란 거지?

살살 할 거라는 이현주 작가의 말이 슬쩍 머릿속에 맴돌았다.

창현이 당황한 것에는 이유가 있다. 제법 센 질문이라고 해도 대본에 있으면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다. 어느 정도 답을 생각하고 나올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수입에 관한 질문이라던가 지금 같은 질문은 대본에 전혀 없는 의외의 질문이다. MC들이 사적으로 궁금해 하던가, 아니면 진실 된 답을 듣고자 갑작스러운 상황을 조성하는 것이다.

라샤의 미국 진출이라.

석규는 생각해본 적이 있겠지만 자신은 없었다. 국내에서 입지를 다지고, 일본에서도 인지도를 얻었지만 동남아시아 투어 콘서트로 방향을 돌린 것으로 보아 우선 아시아에서 확고한 위치를 다지려는 것으로 보았기에 그렇다.

이후에 중국 시장을 어떤 식으로든 합의를 보면 중국으로 진출할 가능성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미국으로 진출할 수도 있는 노릇이다.

다른 가수들과 달리 아니, 다른 기획사와 달리 석규는 창현이 미국 진출 당시 그의 매니저로 활동하면서 수많은 인맥을 쌓아놓았으니 말이다.

게다가 라샤는 미국에 가게 되면 ‘현이 프로듀싱 한 그룹.’ 혹은 ‘현이 키운 그룹.’ 이라는 타이틀을 들고 진출을 하면 상당한 이목을 모을 것이다. 운이 따르고 실력이 받쳐주기만 하면 빌보드 차트 Top 100에 들 수도 있는 노릇이고 말이다.

물론 안정성을 따지면 미국이 아닌 다른 곳에서 활동하는 것이 훨씬 이득이지만 인지도를 얻는 것만큼은 미국에 따를 곳이 없다.

미국은 곧 세계라는 인식이 박혀 있는 만큼 라샤의 미국 진출 여부는 제법 관심거리가 될 듯 싶었다.

“음! 제법 어려운 질문이네요.”

아무래도 톡톡 튀는 애드리브보다는 진짜 자신의 생각을 원하는 듯하였기에 창현은 곰곰이 가능성을 따져보았다.

그가 깊은 생각에 잠기자, MC들은 물론 라샤도 긴장한 표정을 짓는다.

질문을 할 때는 별것 아닌 것처럼 했지만 창현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이슈가 되는 지금 상황에서 공중파 방송에, 그것도 라샤 당사자들이 있는 곳에서 한 말은 틀림없이 이슈가 될 것임이 분명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저 막연하게 느껴질 테지만 창현은 직접 미국에서 활동을 하였고, 누구도 갖지 못한 ‘경험’ 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친한 누나들이라서가 아닌, 정말 성공여부를 검토하는 프로듀서의 입장에서 냉정한 말이 나오기를 바랄 것이리라.

여러모로 따져보던 창현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결과부터 이야기 하자면 당장 미국 진출은 힘들다는 것입니다.”

“하아…….”

창현의 말에 MC들과 라샤는 아쉬움이 담긴 목소리를 흘렸다.

힘들다는 뜻은 미국 진출이 어렵다는 이야기와 다름이 없었다.

어려울 것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막상 당사자에게 이야기를 들으니 실망스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실망한 안색의 라샤를 보면서 창현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지요? 당장 힘들다고 했지, 불가능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 진출을 하면 가능성은 있습니다.”

“라샤가 미국에서 성공할 수 있는 가능성 말입니까?”

자칭 미국 물 좀 먹은(?) 국진의 물음에 창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미국은 멜로디도 중요하지만 가창력이 정말 중요해요. 그리고 무대 장악력도 중요하죠. 직접 보지 않아도 듣는 순간 확 휘어잡는 느낌이랄까? 그런 게 있어야 해요. 기교적인 면에서는 많이 안정되었지만 강렬한 카리스마를 주기에는 부족해요. 특히 동양인인 이상 그 한계를 깨버리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요소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가능성이 있다는 말에 라샤의 표정은 한결 밝아졌다.

그의 말은 지금 당장은 어렵지만 실력을 더 쌓으면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였으니 말이다.

확신이 담긴 창현의 말에 구라가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현 씨가 성공이라 생각하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그 물음에 창현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빌보드 Top 10입니다.”

“…헉! Top 100이 아니라 Top 10이라는 겁니까?”

창현의 말을 듣고는 헛바람을 집어삼키는 구라였다.

그도 그럴 것이 Top 100에만 들어도 난리가 나는 시점인데 창현은 Top 10을 언급하고 있던 것이다.

스케일이 틀려도 단단히 틀리다고 볼 수 있다.

놀란 나머지 입을 흉하게 벌리고 있던 구라가 다시 물었다.

“아니, 여기 있는 사람들은 전부 Top 100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역시 월드 아티스트는 스케일이 다르긴 다른가봐. 그럼 라샤가 당장 미국에 가도 Top 100은 힘들다는 겁니까?”

그 물음에 창현은 고개를 저었다. 마케팅을 잘하고 좋은 곡만 받을 수만 있다면 충분히 들 수 있는 고지라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오, 충분히 Top 100 안에는 들어갈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다는 군요. 이 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시린 양?”

구라가 시린을 보며 묻자 시린이 정중한 표정으로 대답한다.

“저희야 영광입니다.”

분위기가 다소 무거워지자 정환이 끼어들며 호들갑스러운 어조로 말한다.

“이거 내일 기사 뜨는 게 딱 보이는데요. ‘현, 라샤의 빌보드 차트 입성을 장담하다!’ 이거 라샤가 미국 진출해서 빌보드 차트에 들지 못하면 상당히 곤란해지겠어요?”

“하하! 들 수 있도록 노력해야죠. 가장 중요한 건! 라샤 누나들은 아직 미국 진출 일정이 없다는 거죠. 너무 과도한 추측은 금물입니다.”

“그렇죠, 하하하!”

정환의 농에 맞추어 창현도 능청스럽게 말하자 웃음을 지어 보인다.

그렇게 라샤의 미국 진출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일단락이 되자, 이번에는 라샤에게 방향을 돌려 국진이 질문을 한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방송국 내에서는 예의 바르고 인사를 먼저 잘하기로 소문난 현 씨가 보컬 트레이닝을 할 때는 호랑이 선생님으로 돌변한다고 하는데 그게 사실인가요? 시린 양?”

국진이 시린을 보며 묻자, 창현에게 힐끗 시선을 준 시린이 씨익하고 웃음을 짓는다.

뭔가 불안한 느낌에 창현이 휩싸인 창현이 나서려 할 때, 구라가 그 모습을 보고는 창현을 제지한다.

“잠시, 현 씨는 가만히 계셔야 해요. 우리는 시린 양의 솔직한 답변을 듣고 싶으니까요. 시린 양. 혹시 솔직하게 대답한다고 해서 현 씨에게 위협을 당하거나 그러지는 않겠죠?”

“글쎄요? 방송에서는 잘 그러지 않지만 묘하게 뒤끝이 있어서…….”

묘한 표정을 지으며 시린이 말끝을 흐리자 구라가 말한다.

“그럼 여기서 확답을 받읍시다. 현 씨, 우리 마음 넓은 사람답게 오늘 말하는 것은 가슴에 담아두지 않기로 합시다.”

“저 뒤끝 별로 없는데… 음, 어떤 이야기를 하던 간에 여기에서 끝내기로 하겠습니다.”

창현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정환이 신나서 말한다.

“자, 무대는 갖추어졌습니다. 시린 양, 말씀하시죠.”

“감사합니다, 구라 아저씨, 정환 오빠. 그럼…….”

시린이 구라와 정환에게 감사의 인사를 표하자, 구라와 정환의 표정에 희비가 교차했다. 구라는 자신이 아저씨가 되자 표정이 과히 좋지 않게 변했고, 정환은 오빠라 불린 사실에 기뻐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세룬과 미란도 무언가 할 이야기가 많은 듯 속닥거리고 있었다.

옆에 있던 창현은 무슨 말이 나올지 몰라 속으로 조마조마했다.

자신이 보컬 트레이닝을 할 때 제법 강하게 갈군 기억이 났기에 그렇다.

그 사이 시린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우선 현이가 보컬 트레이닝에만 들어가면 호랑이 선생님으로 변한다는 루머는 사실이에요.”

“정말인가요? 정말 무서워요?”

“네, 사람들은 아니, 특히 팬 분들은 순한 현이가 어떻게 호랑이 선생님이 되냐고 묻는데, 보컬 트레이닝이나 프로듀싱을 할 때는 정말 무서워요. 무표정한 얼굴로 잘못된 점을 조목조목 집어주는데, 차라리 화를 내주면 싶더라고요.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기대를 거는 듯한 모습에 뭐라고 해야 될까, 기대를 배반할 수 없다고 해야 되나? 필사적으로 되더라고요.”

“구체적으로 어떤 식으로 그럽니까?”

보컬 트레이닝에 관심이 많은 종신이 슬쩍 끼어들어 질문을 하였다.

그러자 시린이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입을 연다.

“발성 연습을 해요. 그런데 소리가 나올 때 흔들리지 않고 곧게 나오게 해야 하는데 그게 상급 과정이라서 쉽지가 않거든요. 굉장히 안정된 자세로 해야 하는데 흔들리면 음도 떨려서 나오거든요. 잘못하거나 요행으로 성공하는 건 귀신 같이 알아내서 지적을 해줘요. 그리고는 차분한 목소리로 잘못된 점을 지적해주고 보완 방법을 가르쳐줘요.”

“그건 좋은 거 아닌가요?”

종신이 갸우뚱하며 묻자 시린이 고개를 젓는다.

“처음에는 좋죠. 하지만 보컬 트레이닝이 끝나면 깨닫게 되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현이에게 시종일관 휘둘렸다는 것을요. 목소리에, 행동에 저도 모르게 끌려가는 거죠. 보컬 트레이닝이 끝나면 얼마나 오싹한지 몰라요.”

“사람을 무서울 정도로 잘 다룬다는 것이 무서운 점이군요.”

정환이 무슨 말인지 알아차리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자 구라가 물었다.

“보컬 트레이닝이 혹독하지는 않습니까?”

“엄청 혹독하죠.”

시린이 말을 제법 길게 했기에 대답을 한 것은 세룬이었다. 시린에게 살짝 눈짓을 한 세룬은 자신이 입을 열기 시작하였다.

“현이는 보컬 트레이닝을 시킬 때 저희가 극한에 다다를 때까지 몰아붙여요. 한계선까지 다다라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는 말과 함께요. 하지만 말이 쉽지, 한계까지 도달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거든요. 저희가 힘들다고 해도 한계선까지 도달하지 못하면 끝까지 몰아붙여서 한계에 도달하게 만들죠.”

“효과는 있습니까?”

한계에 다다라야 그 다음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는 말이 있기에 종신이 궁금한 듯 물었다.

그에 세룬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효과는 당연히 있죠. 그렇지 않으면 순순히 따르지 않았죠. 효과는 확실하지만 그만큼 힘들다는 점이죠.”

“그럼 처음부터 순순히 따랐다는 겁니까? 처음에는 효과를 몰랐을 텐데?”

구라가 궁금한 듯 물었다. 시린과 세룬의 말을 들어보면 분명 혹독하게 몰아붙인 듯한데 반항을 하지 않았을 리 없지 않은가?

연애와 분쟁, 돈 문제에 관해서는 호기심이 무척이나 왕성한 구라였다.

그 질문에 나선 것은 미란이었다.

그녀는 슬쩍 창현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보컬 트레이닝에 대해서는 그런 적이 없고 녹음 때는 그런 적이 있어요.”

“녹음! 그러고 보니 현 씨가 녹음을 할 때도 혹독하게 몰아붙인다는 소문이 있던데. 사실인가 봅니다?”

“네, 아주 혹독해요. 보컬 트레이닝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결코 모자라지 않아요.”

말을 하는 미란은 옆에서 창현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애써 그걸 무시했다. 이번 방송을 빌미로 그동안 쌓아온 앙금을 풀 생각이었다.

후환이 살짝 두렵기는 했지만 이미 뒤끝을 보이지 않기로 방송에서 말하지 않았던가!

방송을 믿고 있는 미란이었다.

역시나, 녹음에서도 무언가 일이 있는 듯하자, 구라가 눈을 빛내며 미란에게 물었다.

“호오! 도대체 어떤 에피소드가 있었기에?”

“저희가 첫 앨범 수록곡인 <Laser>를 녹음할 때였어요. 그 당시 현이는 얼굴 없는 가수였기에 저희는 단순히 능력 있는 싱어송라이터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죠. 그때 저희들의 노래를 프로듀싱 해준다는 것에 기대감 반 불안한 마음 반이었고요.”

MC들이 눈을 빛내며 미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고, 시린과 세룬은 과거가 떠올랐는지 회상하는 모습이었다. 다만 창현만이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녹음에서 무슨 일이 발생했구나?”

구라의 말에 미란이 고개를 끄덕인다.

“네, <Laser>는 본래 저희들의 타이틀곡이 될 뻔한 곡이거든요. 각자의 개성을 살려주는 곡인데, 저희는 실력 이상의 것을 발휘했다고 생각하면서 녹음을 하고 있는데 현이가 계속 녹음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는 거예요.”

“기대치가 높았던 거구나?”

종신의 말에 미란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기보다는 저희가 그보다 더 잘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던 거였어요. 하지만 저희가 해내지 못하고, 계속해서 개선을 요구하자 결국 저희가 폭발했죠. 그러니까 현이가 와서 시범을 보여주더라고요. 이 부분은 이렇게 하는 것이 좋다,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래서 실력을 보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냉정한 가수들의 실력 사회를 알고 있던 종신의 물음에 미란이 고개를 끄덕인다.

“현이 말대로 따르니까 결국 저희가 생각했던 최고의 실력이 최고의 실력이 아니더라고요. 더 잘할 수 있었던 거죠. 그때부터 저희는 현이를 믿기 시작했죠. 아, 현이의 말을 따르면 우리의 꿈을 이룰 수 있겠구나, 하고 말이죠.”

폭로전 양상으로 향하다가 미란이 마무리를 훈훈하게 맺자 창현의 안색도 한결 누그러졌다.

구라가 그것을 보고는 입가에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결국에는 현 씨의 칭찬으로 끝나는군요. 혹시 현 씨의 뒤끝이 무서워서 그런 건 아닌지?”

“그건 아니에요. 현이는 공과 사가 분명하거든요. 그래서 혹독할 땐 혹독하고 사적인 자리에서는 그야 말로 귀여운 동생이죠. 저희 고생한다고 종종 맛있는 고기도 사주는 걸요?”

“사장님이 식단 관리를 하라고 할 때도 현이가 중간에서 조율을 해주기도 해요.”

“가끔 몰래 고기를 사주기도 하고요.”

시린과 세룬의 지원타가 이루어지자 분위기는 더욱 화기애애하게 변했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구라가 종신을 바라보면서 물었다.

“이거 더 강하게 해도 모자랄 판에 너무 화기애애한데. 좀 더 센 질문 없습니까?”

“없긴요. 당연히 있습니다.”

미소를 지은 종신이 대본을 보다가 창현에게 시선을 주면서 입을 열었다.

“루머의 해명을 하는 시간이 있겠습니다. 현 씨, 솔직하게 대답해주셔야 합니다.”

“네, 얼마든지 물어보세요.”

창현의 수락을 얻자 종신이 곧바로 질문을 하였다.

“혹독한 보컬 트레이닝 루머에 이은 두 번째 루머는 바로 소녀시대와 현 씨의 관계에 대해서입니다.”

대본에 없던 혹독한 질문의 연속이었다.

갑자기 소녀시대에 관한 질문이 나왔지만 창현의 안색은 담담했다.

대본에는 없었지만 지금 대화의 흐름이라면 언급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예상 외의 질문이었지만 창현은 당황한 기색 없이 물었다.

“어떤 관계에 대해서 묻는 것이죠?”

당황한 모습이 아닌, 너무나 태연한 모습으로 묻자, 질문을 꺼낸 종신이 오히려 당황할 지경이었다.

“그, 그러니까 소녀시대와의 관계에 대해서…….”

“서로 특별한 사이냐고 묻는 것입니다.”

종신이 버벅거리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구라가 옆에서 지원사격을 한다.

그 질문에 창현이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특별한 사이라? 구체적으로 어떤 사이를 의미하는 거죠?”

“이성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이성으로 생각하냐는 물음이었다.

그 질문에 창현은 표정 변화없이 담담하게 말했다.

“글쎄요, 많은 분들이 그런 의혹을 보이시고는 하는데 저는 기본적으로 SM엔터테인먼트와 프로듀서 계약을 맺고 있습니다. 본격적인 활동을 하고 있지 않지만 그것은 회사 간의 일이라 잘 모르고요, 어쨌든 그 계약 건으로 인해 SM엔터테인먼트 소속 연예인들과 제법 친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소녀시대와의 관계에 대해 곧잘 언급이 되고는 있지만 동방신기와 슈퍼주니어, 두 그룹하고도 친하게 지내는 편이고요. 저뿐만 아니라 라샤 누나들도 SM엔터테인먼트 소속의 연예인들과 제법 친해요. 특히 일본에서 활동하는 동방신기와 많이 친한 편이죠.”

“호오! 동방신기와 라샤가 친하다는 겁니까?”

다른 사람의 연애사에 민감한 구라가 창현이 말한 것을 놓치지 않고는 눈을 빛내며 묻는다.

그에 창현은 입가에 미소를 짓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친하죠. 물론 이성적인 감정을 가질까 싶어 제가 중간에 끼어드는 형국이지만요. 회사 소속 연예인이지만 사적으로는 사장님의 아들인지라 감시를 할 수밖에 없죠.”

그 말을 듣고 있던 미란이 창현에게 핀잔을 주었다.

“알고 보면 현이가 매니저보다 더 심하게 관리를 해요. 종종 저희들한테 딱 5년만 참고 열심히 일한 뒤에 마음껏 연애를 하라고 한다니까요? 거의 세뇌 수준으로 말하는 터여서 지금은 거의 포기 수준이고요.”

“그렇다면 소녀시대와는 그저 친할 뿐이다? 이거로군요?”

자칫 삼천포로 빠질 수 있는 말을 종신이 잡아주자 창현은 잠시 멈칫했다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게 되네요. 친한 누나들이니까요.”

물론 이성적인 느낌을 받은 적이 없지 않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 감정도 없이 자신에게 아메리카식 인사라고 입맞춤을 한다거나 뽀뽀 등 애정 표현을 할 리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을 친한 남동생으로 여겨서 그러는 것인지 아니면 이성으로 여기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성적인 감정이라는 것은 아직 창현에게 있어 경험해보지 못한 미지의 감정이었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망설임 없이 친한 누나들이라고 못을 박아둘 수 있었던 것이다.

너무나 수월하게 창현이 빠져나가자 구라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살짝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조용히 있던 그가 창현에게 물었다.

“이번 발렌타인 데이 때 소녀시대에게 초콜릿 받았습니까?”

촬영하고 있는 지금 날짜는 발렌타인 데이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지만 방송을 될 때는 상당히 흘렀을 때일 것이다. 아마 화이트 데이가 얼마 남지 않았을 시점이니 말이다.

이것이 중요한 사실은 아니었지만 화이트 데이가 떠오르자 창현은 자신도 보답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받았습니다.”

창현이 순순히 대답하자 MC들은 물론 라샤 멤버들도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본다.

그러자 창현이 어깨를 으쓱하면서 말한다.

“의리 초콜릿이라고 해야 되나? 그렇다고 하면서 주던데요? 덕분에 입 호강 좀 많이 했죠. 아마 동방신기나 슈퍼주니어 형들에게도 줬을 거예요.”

동방신기와 슈퍼주니어를 방패막이로 썼지만 구라에게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뭔가 특종을 잡았다는 듯 구라가 눈을 빛내면서 묻는다.

“그렇다면 멤버들 전원한테 받은 겁니까?”

“네. 누나들이 전부 주시더라고요. 아홉 개요.”

서슴없이 대답하는 창현의 모습에 구라가 고개를 갸웃한다. 한 명 혹은 소수의 멤버들이 줬으리라 생각했는데 아홉 개 모두 주다니. 자신의 예상이 틀린 것이다.

“그럼 아닌데…….”

끝까지 스캔들로 몰고 가려는 구라의 모습에 창현이 미소를 지으면서 말한다.

“그렇게 치면 끝도 없는 것 같아요. 이번에 라샤 누나들한테도 초콜릿을 받았는데 말이죠. 너무 한쪽으로 부각이 되는 것 같아요. 공적인 면을 제외하면 서로가 모두 친한 건데 말이죠.”

“이성적인 감정은 전혀 들지 않고?”

구라가 기습적으로 묻자 창현은 잠시도 망설이지 않은 채 대답한다.

“네. 이성적인 감정 없이요.”

“아니, 주변에 예쁘장한 여자들이 그렇게 많은데 그런 마음이 들기나 하나?”

믿기지 않는다는 듯 말하는 구라에게 창현이 대답했다.

“저는 아직 이성을 사귀어본 적이 없어서요. 흔하디 흔한 첫사랑이라는 것도 해보지 못했고요. 그래서 그런 감정이 드는 것 같네요.”

다른 아이들이 흔히 십대 초반에 첫 사랑을 만나고는 하지만 창현은 그럴 겨를이 없었다.

너무나 잘 따르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가 일에 몰두하면서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기 위해 오로지 자기개발에 힘을 쓰지 않았던가? 그런 그에게 그때 저런 감정들은 사치에 불과하였다.

무언가를 얻는다면 잃는 것도 있는 법. 그것은 창현에게 남들보다 훨씬 뛰어난 집중력을 가져다주었지만 불행히도 그에게 어릴 적 형성되었어야 할 사랑의 감정이라는 것을 앗아가 버린 것이다. 그랬기에 이성 문제가 얽히기만 하면 놀라울 정도로 둔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첫 사랑도 해보지 않았다는 창현의 말에 MC들이 모두 놀란 얼굴로 바라본다.

특히 창현의 스캔들을 캐보려던 구라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말한다.

“에이! 믿지 못하겠는데? 보통 그 나이 대면 다 첫사랑을 해보지 않나? 세룬 양은 언제 첫사랑을 해보았나?”

“음! 저야 초등학교 3학년 때? 이웃집 오빠를 보고 좋아했던 적이 있죠.”

“미란 양은?”

“저도 어릴 때 좋아했던 적은 있는 것 같네요.”

세룬도, 미란도 첫사랑에 대해 언급을 하자 구라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한다.

“이것 봐. 십대 초반이면 대부분 첫사랑은 해본다니까? 정말 해본 적 없습니까?”

“죄송하지만 없네요. 전 그 나이 때부터 음악 공부를 하고 있어서 제가 얼굴 없는 가수로 데뷔한 게 열네 살 때라는 거 아시죠?”

“…….”

열네 살이란 말이 나오자 순간 할 말을 잃은 구라였다.

그도 그럴 것이 열네 살이 자기 노래를 스스로 작곡 작사하고 녹음을 하려면 도대체 어느 정도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지 상상도 가질 않았던 것이다.

저렇게 노래에 모든 것을 바쳤다면 첫사랑 같은 것은 해보지 않았을 확률이 높았다.

천재들은 조금 괴팍한 면이 있지 않은가?

눈앞의 창현은 음악에 있어서 천재라 불리는 인물이었다.

당연히 정상인의 범주로 생각하면 조금 힘들 것임이 분명했다.

결국 구라는 입맛을 다시며 취조를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할 말이 없군요. 음, 그러면 다음에 이성 친구를 사귀게 되면 제게 연락을 주시기 바랍니다, 현 씨.”

“아니, 현 씨가 여자 친구를 사귀는데 왜 구라 씨한테 말을 합니까?”

정환의 타박에도 불구하고 구라는 태연한 표정으로 말한다.

“그래야 내가 어디 나가서 유용하게 써먹지…….”

“허참!”

“하하, 그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는 창현이었다.

이성 친구를 사귀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이번에 구라는 은밀한 어조로 창현에게 물었다.

“그럼 여태까지 여성에게 대시를 받은 것은 몇 번이나 됩니까?”

“대시? 이성한테요?”

의문을 표하며 묻는 창현의 모습에 구라가 고개를 끄덕인다.

“인기가 많으니까 이성에게 많이 대시를 받았을 것 같은데 아닌가?”

“거 왜 자꾸 그쪽으로 몰아갑니까. 구라 씨가 그런다고 호동 씨 같은 스타일은 되기 힘들다니까?”

중매 형식으로 몰아가는 강호동 스타일을 따라하자 기어코 한마디 하는 종신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짓고 있던 창현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한다.

“대시라… 저는 잘 모르겠는데요? 데뷔를 하기는 했지만 방송 경험은 그리 많지 않고 여자 연예인들도 많이 알고 있지 않고요. 저와 비슷한 또래 연예인은 소녀시대를 빼면 원더걸스와 카라 밖에 없고요.”

“원더걸스? 설마 <Tell Me>의 원더걸스를 말하는 겁니까?”

원더걸스라는 말에 바로 반응하는 정환이었다.

갑작스러운 그의 반응에 창현이 의아한 표정을 짓다가 고개를 끄덕인다.

“네? 네. 그 원더걸스요.”

“이해하세요, 현 씨. 정환 씨가 워낙 원더걸스 팬이어서 그런 거니까.”

국진이 점잖게 말하자 정환이 자신의 추태를 깨닫고는 큰 웃음을 흘리면서 말한다.

“하하하! 사실 저는 라샤가 더 좋으니까 괜찮습니다.”

“어쨌거나 원더걸스와도 알고 있습니다. 선미랑 소희가 저랑 동갑이어서 친해졌거든요. 이성에게 대시라… 제가 사랑을 몰라서 그런 걸까요? 그것도 잘 모르겠네요.”

“미국 같이 개방적인 곳에서 적극적으로 스킨십을 해오던 여자는 없습니까?”

이성 관계를 알아내는 것도 실패하고, 대시한 여자들의 유무도 알아내지 못하자 속이 타는지 구라가 물을 마시면서 창현에게 묻는다.

그러자 창현이 곰곰이 생각하다가 무언가 생각난 듯 순간 멈칫한다.

2007 MKMF에서 자신에게 기습적으로 키스를 한 세실리아의 모습이 순간 떠올랐던 것이다. 그 외에도 한창 미국에서 활동할 때는 물론이고 유럽 투어 콘서트를 할 때도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는 여자들은 많았다.

“있기는 했지만 제가 다 중간에서 차단을 해서 말이죠. 금발 미녀들도 분명 예쁘지만 저는 한국 사람이기에 한국 사람이 좋습니다. 사교 파티 같은 것도 자주 참여한 편이 아니어서 대시를 받은 적은 없네요.”

“으음! 월드 스타면서 이성 관계가 너무 깨끗해. 이러면 재미가 없는데 말이지.”

창현의 말에 구라가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그러자 종신이 옆에서 구라를 툭 치며 말한다.

“그런 위험한 발언을 하면 다음 주에 폐지된다니까요? 게다가 현 씨가 사람들에게 인기 많은 이유가 바로 깨끗한 사생활 때문인데 그런 말은 하지 맙시다.”

“아쉬워서 그래요. 내가 현 씨였다면 제2의 카사노바가 되었을 텐데 말이죠. 현 씨는 지금 행복하시죠?”

구라의 질문에 창현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질문한다.

“당연히 행복하죠. 제가 하고 싶은 음악을 할 수 있고, 친한 사람들과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제가 세상에서 가장 행운아라 생각합니다.”

“자, 구라 씨의 말도 안 되는 취조는 그만 하도록 하고요. 제법 센 질문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마음의 준비 해주시고요.”

창현에게 마음의 준비를 할 것을 말하는 정환.

이미 제법 센 질문들을 받았기에 창현은 담담한 안색으로 말한다.

“네, 상관없으니 얼마든지 해보세요.”

“그렇게 말씀하시니 바로 질문 들어가겠습니다. 사실 현 씨의 루머에서 빠질 수 없는 부분이죠. 2007 MKMF 미국의 떠오르는 섹시 여배우 세실리아와의 키스 퍼포먼스! 여기에서 세실리아가 미국으로 돌아가면서 현 씨에 대한 호감을 표명하였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세실리아에 관한 질문이 나올 줄은 몰랐다.

자신도 모르게 세실리아와의 퍼포먼스를 떠올리고는 그에 대한 질문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것 때문일까?

전혀 예상치 못했기에 창현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찔 떨었다. 조건 반사로 그녀와의 입맞춤이 떠올랐던 것이다.

눈부신 외모와 당당한 자신감으로 자신에게 말하던 세실리아의 모습.

창현은 저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세실…이요?”

자신도 모르게 떨려나온 목소리였다.

가뜩이나 청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MC들이 그것을 놓칠 리가 없었다.

특히나 구라가 지대한 관심을 표하면서 창현을 몰아쳤다.

“지금 목소리 떨렸죠? 게다가 세실이라! 이게 바로 그 친한 사람들에게만 불러준다는 애칭이라죠?”

“애칭이라! 서로 친한 사람들끼리 부르는 호칭이죠. 방금 전 이성에게 관심이 없다고 한 현 씨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어요.”

깐족하면 빠질 수 없는 종신이 끼어들어 추가타를 날린다.

잠시 머뭇거리자 순식간에 위기에 몰려버린 창현이었다.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던 창현은 양손을 저으며 말한다.

“그런 건 아니고요. 세실 이야기가 나오니 미국으로 돌아가면서 했던 말이 떠올라서요.”

“미국? 아, 그 고백 말입니까? 그게 엄청난 화제를 일으켰죠.”

미국에서의 스타가 방문하면 한국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는 만큼 그 파장은 정말 대단하였다.

그걸 모르는 사람은 여기에 아무도 없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한동안 연예계의 뜨거운 핫이슈가 되던 것을 재조명하고 있었다.

창현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면서 구라가 말했다.

“자! 처음으로 현 씨의 안색이 변하는 군요. 이거 뭔가 있는 것 같단 말이죠.”

“하하하.”

창현은 그저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예상치 못한 순간 허점을 찔려서 놀라버렸는데 그 점을 보고는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는 거죠?”

정곡을 찌르는 구라의 질문이었지만 이미 더 큰 난관이 닥쳤기에 창현은 담담한 안색으로 입을 열었다.

“음, 참 난감한 질문이네요. 솔직히 세실은 예쁘잖아요? 당연히 고백 비슷한 걸 받으니 기분은 좋죠. 하지만 난감한 것도 사실이에요. 결론적으로는 좋긴 하지만 이성적인 감정은 없지만 패스죠.”

짧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창현이었다. 그리고 다른 질문으로 넘어가 화제가 바뀌길 원했다.

하지만 바란다고 그걸 순순히 해줄 리가 없었다.

화제가 바뀌기는커녕 오히려 심화 과정으로 들어가는 듯했으니 말이다.

“그러고 보니 세실리아 씨와 알게 된 게 그 뮤직비디오였죠? 빌보드 차트를 휩쓸었던 그 <Minus>? 맞죠?”

국진의 질문에 창현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화제가 바뀌길 원했는데 쉽지가 않았다.

“네, 맞아요. 거기에서 만났죠.”

“아! 한국에서 화제가 된 그 뮤직비디오! 잘 봤죠. 흰 가운이 잘 어울리던데요?”

종신이 알고 있다는 듯 끼어들자, 구라가 옆에서 툭 던진다.

“이거 왜 이래. 종신 씨는 현 씨 노래 듣기 위해 그런 게 아니라 세실리아 양의 간호사 복을 보려고 본 거잖아?”

그러자 순간 시선이 종신에게 집중되었다.

그 시선을 받은 종신은 화들짝 놀라면서 양손을 저었다.

“아, 아닙니다. 전 정말 노래가 좋아서 그런 거예요!”

“그렇다고 칩시다.”

그렇다고 쳐주지만 정말 그렇게 쳐주는 것 같지는 않았다.

정환이 창현을 보며 질문했다.

“현 씨의 곡 중에서 어찌 보면 <Minus> 현 씨의 저력을 입증해준 곡이라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여태까지 곡들 중에서 가장 많은 인기를 얻었고요. 뭔가 특별한 사연이 있어서 만들게 된 겁니까?”

그 질문에 창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당연히 있죠. 특별하다기보다는 제가 평소에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담겨 있다고 할까요? 곡의 제목은 <Minus>지만 그걸 한국식으로 잘못 듣게 되면 Minus가 아닌 My Nurse가 되어버려요.”

“그렇죠. 혀를 조금만 굴리면 잘못 되니까. 그래서 내 영어가 한국에서 잘 안 통하는 겁니다.”

미국 물 먹은(?) 국진이 옳다구나 하면서 끼어든다.

그에 창현은 입가에 미소를 짓고는 말을 이어나간다.

“뮤직비디오를 보셨다면 잘 아시겠지만 의사가 되려던 남자아이에게 한 여자아이가 고백을 하죠. 하지만 남자아이는 여자아이에게 넌 Minus라고 해요. 그런데 여자아이는 그걸 잘못 알아듣고는 My Nurse, 나의 간호사가 되어달라는 말로 잘못 듣게 되죠. 말 한마디에 다른 사람의 인생이 크게 뒤바뀔 수 있고, 말을 할 때 신중하게 하자는 제 생각을 담은 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공이 났기에 널리 알려진 것 같아 기분이 좋고요.”

짝짝짝!

창현의 말을 들은 MC들은 물론 라샤가 박수를 친다. 특히 작곡 작사를 하는 종신은 창현의 말에 감명이 깊은 듯 열렬하게 박수를 친다.

“작곡가나 작사가들은 모두 현 씨를 닮아야 해요. 단순히 노래가 좋은 건 물론이고 그런 메시지까지 담아내다니. 게다가 복잡하지도 않고 간단하게 알 수 있어서 더욱 멋진 명곡이 아닐까 싶네요.”

“어린 친구가 참 멋진 생각을 하고 있어. 참 멋지네.”

막말을 잘 하는 구라도 창현의 말에 깊은 감명을 받고는 엄지 손가락을 세운다.

“당시 인기는 엄청났죠?”

정환의 물음에 창현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인기가 엄청났다고 하긴 하는데 제가 느낄 사이는 없었던 것 같아요. 한국에 빨리 돌아가고 싶어서 스케줄을 몰아서 했거든요. 그래서 <Minus>로 활동을 할 때 집으로 들어간 적이 없어요. 온통 차나 비행기로 이동하면서 수면을 보충했거든요. 하루에 두 시간에서 많으면 네 시간 정도 밖에 못 잤죠. 전부 차에서요.”

“참 대단해. 나라면 활동을 적게 하고 사교 파티에서 할리우드 스타들이나 만났을 텐데. 여자 배우들 위주로.”

창현을 추켜 세워주면서 무엇이 그리 아쉬운지 입맛을 다시는 구라였다.

가만히 듣고 있던 정환이 창현에게 물었다.

“그럼 무언가 특별한 에피소드가 있을 것 같은데요. <Minus>로 활동할 때 뭔가 재미있는 거 없나요?”

“아, 당연히 있죠. 별로 말하고 싶진 않지만…….”

“뭡니까? 그런 건 살짝 말해줘야 방송이 살아요.”

정환이 눈을 빛내면서 창현을 재촉하였다. 구라도 무언가 창현이 숨기고 있는 듯하자 같이 재촉한다.

“그래요, 속 시원하게 말해봐. 현 씨 팬들은 매너가 좋아서 다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거야.”

두 사람의 뒤에 마치 검은 날개가 달려있는 것처럼 착각이 들었다.

창현은 피식 웃음을 지으면서 그때 일을 이야기하였다.

“그렇게 비밀인 건 아니고요. 제가 그때 키가 작았거든요. 그래서 뮤직비디오 촬영을 할 때 키 높이 신발을 거의 10cm 넘게 깔고 했어요.”

10cm를 넘게 신고 다녔다는 이야기에 MC들이 모두 혀를 내둘렀다. 라샤는 창현이 그때 키가 작았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담담했지만 MC들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허! 10cm 넘게? 도대체 현 씨 키가 몇이기에?”

“지금은 175cm고요. 미국에 있을 때는 160cm 후반 대였어요. 세실의 키가 거의 170cm인가? 넘었나? 그럴 거예요. 그래서 부득이 신발의 도움을 빌릴 수밖에 없었죠.”

“그래도 너무 많이 깔았어.

“하하!”

MC들의 말에 창현은 어색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미국에 있던 일들을 간략하게 이야기하고, 국진이 창현의 인맥에 대해 물었다.

“미국에서 절정의 인기를 구가한 만큼 친한 가수들도 많을 텐데 누구와 특히 친했나요?”

“음! 미국에서 친한 사람은 무척 많았어요. 우선 제가 있던 Jive 소속 가수들과 친했고요, 한국에서 유명한 가수들하고 교류를 많이 했어요.”

창현의 언급에 입이 떡 벌어지는 MC들이다. 자신들에게 있어서는 먼 나라 톱스타들이었던 것이다.

“대단한데요? 그 사람들하고 친하게 지내면 보통 뭐하고 놉니까?”

어째 생각하는 게 다 그쪽으로만 돌아가지는지… 창현은 구라의 질문에 쓴웃음을 짓고는 대답한다.

“놀지는 않고요. 음악적 교류를 하는 것이죠.”

“동양인이라서 무시하지는 않고요?”

국진의 물음에 창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 그런 기색이 있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하지만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서로의 장점을 보게 되는 거죠. 특히 저 같은 경우는 나이가 어려서 응용보다는 이론에 치우쳐 있거든요. 그래서 이야기를 나누면서 각종 경험이나 그런 걸 간접적으로나마 얻게 되는 거죠. 저에게 큰 도움이 되었어요.”

“정말 부러운 인맥입니다. 저도 어떻게 해보고 싶은데 말이죠. 음, 이대로 넘기기 좀 그런데 노래 한 곡 어떻습니까?”

노래시키기 전담인 정환이 창현에게 한곡 부탁한다.

이것은 대본에도 있는 내용이고, 중간 흐름의 전환 의미도 있었기에 창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럴게요. 마침 준비를 했거든요.”

“멋진 자세입니다. 자, 부르실 곡은요?”

정환의 질문에 창현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제가 부를 곡은 Ne Yo의 <So Sick>입니다.”

“팝송 좋아하는 사람들한테는 전설적인 곡이죠.”

“부르기 무척 힘들던데…….”

우려를 표하는 MC들의 모습에 창현은 부스 안쪽에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그곳에는 기타와 마이크가 준비되어 있었다.

의자에 앉은 창현이 기타를 디리링! 하고 쳐보더니 코드를 맞추고는 본격적으로 노래를 하기 시작한다.

기타로 치니 색다른 느낌의 멜로디가 흘러나왔고, 비음과 간주음 같은 것도 흉내를 내면서 본격적으로 노래를 하기 시작한다.

코러스가 없어서 약간 이상한 느낌이 들 수도 있었지만 창현은 그걸 보완하기라도 하듯 멜로디에 살짝 변화를 주고, 속도에 변화를 줌으로써 노래를 보완하였다.

마음을 뒤흔드는 목소리와 현란한 기교가 어우러지자 보는 사람들이 눈을 떼지 못할 정도로 강렬한 몰입력이 발산되고 있었다.

원곡의 뿌리는 유지하고 있지만 자신에게 맞게 살짝 살짝 변화를 가미한 노래는 창현에게 훨씬 잘 어울리게 변모해 있었다.

노래를 부르면서 창현은 자신의 노래가 나무랄데가 없다는 것을 스스로 느꼈지만 아직 슬럼프가 완전히 끝난 게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예전에는 노래를 부를 때 무척 즐겁고 그랬는데 지금은 즐겁다기보다는 하나의 흐름처럼 느껴진 것이다. 즐거운 것보다는 일 같다는 느낌이 든다랄까?

음이탈이라든가 박자를 놓친 것은 아니지만 창현에게 있어서 그 작은 변화는 무척 크게 느껴졌다.

그래도 노래에 몰입이 된다는 것은 크게 심하지 않다는 걸 의미했으니 그것만으로도 한줄기 위안이 되었다.

실수없이 노래를 끝낸 창현은 입가에 미소를 짓고는 고개를 숙인다.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짝짝짝!

고개를 숙이는 창현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는 MC와 라샤였다. 게다가 촬영을 하고 있던 PD와 스태프들도 박수를 쳤다.

창현이 자리로 돌아오자 정환이 카메라 쪽을 가리키며 말한다.

“이거 봐요, 완전 작가들의 눈이 하트로 변해 있어요. 살다살다 눈이 이렇게 변하는 건 처음보네.”

그러자 카메라가 작가들이 포진해 있는 곳을 촬영하였고, 작가들은 얼굴을 가리거나 고개를 돌림으로써 카메라를 외면하였다.

“아, 역시 월드 아티스트에요. 노래 하나로 분위기를 완전히 바꿔버렸어요.”

국진의 칭찬에 구라도 맞장구쳤다.

“가수가 저 정도는 해야 하는데 말이야.”

그러면서 슬쩍 종신을 바라보자 외면하며 그 시선을 피하던 종신은 계속해서 자신을 바라보는 구라의 시선에 대본을 내려놓으며 말한다.

“저 정도가 안 되니까 여기서 MC 보고 있는 것 아닙니까?”

“아니, 누가 뭐랍니까? 그냥 쳐다본 것뿐인데.”

“그럼 쳐다보질 마세요.”

“알겠습니다.”

단호하게 고개를 돌린 구라가 창현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루머에 관련된 것도 들어보았으니 이제 국내로 방향을 전환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현 씨.”

“네, 살살해주세요, 하하!”

그렇게 말을 했지만 오늘 센 질문들을 무사히 넘겼기에 창현의 모습에서 여유가 넘쳤다.

그 모습에 마음에 들지 않는 듯 구라가 인상을 찌푸린다.

“우리가 너무 살살했어. 현 씨 여유 넘치는 것 좀 봐.”

“여유 넘치는 것 아닌데. 살살 해주세요.”

“그런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여유가 넘친다는 겁니다. 자, 그럼 질문하도록 하지요. 현 씨. 인터넷 자주하시죠?”

갑작스러운 질문이었지만 이미 한 번 겪어보았기에 당황하지 않으며 고개를 끄덕여보인다.

“네, 자주합니다.”

“게시글도 자주 작성하고요?”

“네, 자주 작성합니다. 일주일에 세 번은 작성하는 것 같네요.”

“그게 매번 기사화가 되던데, 혹시 그걸 알고 의도적으로 하는 것은 아닙니까?”

하나만 걸려도 특종인 만큼 창현이 게시글을 남기면 그것을 긁거나 캡처를 해서 곧장 기사로 작성하는 기자들이 있다.

그걸 창현도 모를 리 없다.

심지어 자신이 게시글을 남겼는지 삼십 분도 되지 않아 기사로 나오자 놀란 적도 있으니 말이다.

“음, 의도적이라고 하면 어떤 의미로 말씀하시는 건데요?”

섣불리 자신이 대답하는 것은 옳지 않다.

스리슬쩍 MC들의 말을 유도하면서 질문의 확실한 의도를 끌어낸 뒤 자신의 말을 하는 것이 바로 정답이다.

창현의 질문에 구라가 입맛을 다셨다.

“이거 잘 안 먹히네.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현 씨의 게시글이 기사화가 되면서 일각에서는 언론 플레이가 아니냐는 말이 나오는데 말이죠. 그 점을 알면서도 게시글을 올리는 건지 궁금한 겁니다.”

방송에 잘 나오지 않는 만큼 근황을 올리는 것만으로 기사란 상위권에 랭크가 되니 묻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로 물어본 것인지 알고 있었지만 구라의 말로 질문의 의도가 확실해져 오해의 소지가 사라지자 창현은 입가에 미소를 짓고는 말한다.

“우선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기사화 된다는 것도 알고 있고요.”

“그것이 사람들에게 언론 플레이로 비춰진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까?”

연예인 본인이 이미지 관리를 잘한다고 해도 팬들이나 기자 때문에 이미지가 망가지는 경우가 있다.

특히 창현의 경우 일주일에 두세 개, 잦으면 다섯 개가 넘는 게시글을 올리고는 하는데, 그것이 족족 기사화가 되니 삐뚤어진 시각으로 보는 네티즌들은 현의 언론 플레이가 장난 아니라는 식의 비난을 하고 있기도 하다.

제법 악플이 만만치 않았기에 창현이 절대 잊을 수 없는 것이기도 하였다.

“음, 그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계속 게시글을 올린다는 건 의도적인 거 아닙니까?”

그 말에 창현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닙니다.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일단 저는 언론 플레이 같은 걸 하는 스타일이 아닙니다. 과분할 정도로 팬 분들의 사랑을 받고 있어서요. 제가 게시글을 남기는 것은 언론 플레이 같은 것이 아니라, 방송에 자주 못 나오는 팬 분들에게 전하는 저의 근황을 적은 것뿐입니다. 그것을 캡처하여 기자 분들이 기사화 시키는 거죠.”

“그렇다면 기자들의 잘못이라는 거로군요?”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구라였다.

그 말에 창현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잘못인지 잘못이 아닌 지는 잘 모르겠네요. 기자라면 당연히 기사거리를 잡아내는 건 당연한 거니까요. 딱히 누가 나쁘다고 말을 하기에는 뭐하군요.”

“참 애매하게 말을 끝맺으시네. 이러면 현 씨에게 좋지 않을 텐데.”

“저는 언제나 진실 된 모습을 보여드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만큼 저는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팬들과의 소통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죠.”

그렇게까지 말을 하니 더 이상 창현에게 무어라 말을 할 수가 없는 구라였다.

예민해질 수 있는 부분이었기에 더 깊게 파고들 수가 없던 것이다.

옆에 있던 정환이 창현에게 물었다.

“아까 전 질문과 비슷한 겁니다. 현 씨는 본인의 문화적 파급력이 어느 정도라고 생각합니까?”

“파급력이요? 흐음.”

이건 얼핏 보면 센 것 같지 않지만 속 내용은 상당히 센 질문이었다.

자칫 잘못 대답하다가는 오만하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기에 그렇다.

자신감 넘치는 대답을 하게 되면 오만하다고 할 것이고, 지나치게 겸손한 모습을 보이면 가식적이라는 말을 들을 것이다.

중간 지점 대답을 캐치하는 것이 중요한데 약간 난감한 질문이었다.

“솔직히 파급력은 상당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것이 그렇게까지 크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상당한데 크지 않다? 모순되는데요, 말이?”

곧바로 종신이 지적하자 창현이 하하! 웃으면서 말을 수정했다.

“상당하긴 하지만 그것이 전 국민에게까지 번지지 못한다는 거죠. 과분한 사랑을 받고 있지만 아직 저 스스로 만족할 만한 음악을 하지 못하고 있고요. 계속해서 도전을 해보는 것 같아요. 부분 부분 좋아해주시지만 그것이 전체적으로 번져가기에는 크지 않죠. 게다가 제가 무대 위에 서지 않는 것도 한 몫 하는 것 같고요.”

“그러니까, 상당한 관심을 끌어 모으기는 하지만 신드롬을 일으킬 정도는 아니다?”

간단하게 정리해주는 국진의 말에 창현이 고개를 끄덕인다.

“네, 그런 것 같아요.”

“그런데 왜 무대 위에 서지 않는 것입니까?”

조용히 침묵하고 있던 종신이 툭 던진 질문이었다.

그 질문에 창현은 속으로 다소 당황했다. 석규에게서 대충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그것을 방송 중에서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살짝 미소를 지은 창현이 어영부영 넘어가려고 한다.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어른들만의 사정이 있는 듯하네요.”

“아, 그렇군요. 어른들의 사정입니다.”

종신이 고개를 끄덕이며 화제를 전환하려고 했지만 구라가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검지와 엄지 끝을 붙여 동그라미를 그리며 입을 연 것이다.

“어른의 사정이라면 이거죠, 이거. 이게 맞지 않아서 안된 듯합니다.”

“그건 아니고요. 다른 사정이 있는 것 같아요.”

그 말에 눈살을 찌푸리던 구라가 무언가 걸리는 게 있는 듯 창현을 보며 외쳤다.

“어라? 방금 모른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런데 돈 문제가 아니라고 하는 걸 보면 알고 있는 게 있다는 건데?”

구라의 말에 창현은 속으로 아차 했지만 표정으로 드러내지 않은 채 조용히 대답한다.

“아, 돈 문제로 구애 받는 건 아니라고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저도 의문을 느끼고 물어봤는데 그 이야기만 하시더라고요.”

실제로 돈은 아니고, 다른 복합한 이해관계 때문이라고 했으니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능구렁이 같이 스리슬쩍 빠져나가는 창현의 모습에 구라가 입맛을 다신다.

“더 알고 있는 것 같은데. 현 씨 말 너무 잘하는 거 아니야? 이참에 MC로 진출하면 대박날 것 같은데.”

MC로 들어서길 권유하는 구라의 모습에 창현이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그건 가수를 좀 더 해보고 생각해볼게요.”

“으음! 그러도록 하시고요.”

“자, 이번에는 라샤 분들에게 질문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동남아시아 투어 콘서트를 성공적으로 끝마치고 이번에 전국 투어 콘서트를 한다고요?”

정환이 새로운 질문을 하자 화제가 창현에게서 라샤에게 옮겨갔다.

미란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다.

“네, 이번에 발매된 앨범과 여태까지 냈던 곡들을 추려서 전국 투어 콘서트를 하려고요.”

“사실 많은 가수들이 콘서트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라샤의 콘서트만큼 빠르게 매진이 된 적은 드물다고 하던데 말이죠.”

“저희는 당연히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방송을 하기에는 동남아시아에서의 일정이 길어졌고, 이제 서는 것도 힘들 것 같아서 투어 콘서트 형식으로 열게 되었어요.”

한창 <Tell Me>로 열풍을 일으키고 있던 원더걸스와 정면충돌을 하지 않고 동남아시아부터 시작하여 영향력을 키운 뒤 국내로 복귀하고 일본으로 가려고 했다.

하지만 동남아시아에서 라샤의 인기는 그야 말로 폭발적이었다.

첫 동남아시아 순회임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반응 때문에 조금씩 양을 늘리다 보니 국내에서 활동할 시기를 놓쳐버린 것이다.

그것 때문에 방송에 복귀하는 것이 아닌, 투어 콘서트 형식으로 팬들을 집중 공략하고는 일본으로 떠나려는 것이다.

콘서트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구라가 툭 센 질문을 던졌다.

“그러고 보니 들리는 소문으로는 당시 원더걸스와 충돌을 피해 동남아시아로 갔다고 하던데?”

옆에 있던 종신도 동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 이야기는 제법 유명했죠. 그러고 보니 그걸 해명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는데?”

실제로 라샤가 앨범 발매를 하고 동남아시아로 떠나자 말이 많았다. 엄청난 폭풍을 일으키고 있던 원더걸스와 충돌을 피해서 도망쳤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AA엔터테인먼트에서 아무런 답도 하지 않자 그런 분위기는 곧이어 수그러들었다. MKMF에서의 화제에 묻혀버린 것이다.

세룬에 그 점에 대해 해명을 하기 시작했다.

“그건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고 할 수 있어요.”

정환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무슨 말이죠? 원더걸스를 피한 게 반은 맞았다는 건가요?”

“음, 일단 주변 상황부터 설명 드리도록 할게요. 사실 그때 녹음을 마치고 저희들은 정말 자신이 있었어요. <Tell Me>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해도 그에 지지 않을 정도로요.”

“확실히 앨범이 나오고 상위권을 휩쓸기는 했었죠.”

종신이 맞장구 쳐주자, 시린이 말을 이어나갔다.

“그때도 현이한테 엄청 혹독하게 시달리면서 고생고생 해서 만든 앨범이었거든요. 그런데 사장님이 고민에 빠지신 거예요. 원더걸스가 휩쓸고 있는 상황에서 진입을 할지에 대해서요.”

“그런 상황에서 동남아시아로 빠졌다면 도망친 거 아닌가?”

구라가 심기를 긁는 말을 했지만 시린은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라 예전부터 동남아시아 각국에서 러브콜이 들어오고 있었거든요. 마침 새 앨범이 나오는 만큼 앨범 판매를 확장하기 위해 사장님은 원더걸스와의 대결보단 동남아시아 투어를 결정하신 거죠. 원더걸스가 상승세를 타고 있는 상황에서 굳이 저희들이 끼어들어 서로에게 피해를 끼칠 필요는 없으니까요.”

게다가 말은 하지 않았지만 대형 소속사 간에 그런 게 있지 않은가? 자신들 소속 가수가 나올 때 살짝 비켜 가주는 그런 양보. AA엔터테인먼트가 규모는 작지만 무척 내실은 탄탄했기에 그런 점도 한몫하였다.

“확실히 라샤의 앨범이 잘나가긴 잘나갔어요. 이번 앨범이 삼십만 장이나 나갔거든요.”

국진이 나쁜 분위기로 흐르지 않게 잘 정리를 하자, 구라가 뭔가 아쉬운 듯 코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확실히 그렇긴 하지만 붙었으면 재미있었을 텐데. 라샤 분들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원더걸스와 붙었으면 이겼을 거라 생각합니까?”

라샤에게 센 질문이었다.

잘못하다가는 싸움이 날 수 있는 질문이었다.

세룬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건 아무도 모르죠. 원더걸스가 워낙 막강했으니까요.”

시린이 나서서 중간에서 말을 정리해준다.

“지금 전개가 좋다고 생각해요. 원더걸스는 인기몰이를 하는데 성공했고, 저희는 동남아시아에서 인지도를 얻는데 성공했으니까요. 서로서로 좋게 되었으니 잘 되었다고 봐요.”

“이거 너무 잘 빠져나가는데.”

시린의 절묘한 빠져나가기에 구라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현에 이어 라샤도 너무나 잘 빠져나가는 것이다. 이 이상 물어보면 자신이 나쁜 놈이 될 처지였다.

결국 구라가 한마디 한다.

“혹시 AA엔터테인먼트에서는 토크쇼를 어떻게 하라고 강의도 합니까?”

“그럴 리가요. 다만 말을 할 때 신중하게 하는 편이죠.”

“큼! 약간 실수를 해줘야 재미있는데 말이지. 그게 좀 아쉽네.”

자신에게나 재미있을 것을 이야기 한 구라가 아쉬운 마음에 입맛을 다실 때, 국진이 창현을 바라보며 말한다.

“자, 이제 시청자 여러분들이 궁금해하실 질문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현 씨.”

“네.”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창현이 대답하자 국진이 질문한다.

“이번에 드라마를 하신다고요?”

드디어 나왔다.

드라마 이야기.

창현은 정신을 바짝 차렸다.

어찌 보면 라디오 스타에 나오게 된 것도 다 드라마 때문이 아니겠는가?

적절하게 자신의 의견을 말해서 오해가 생기지 않게 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그랬기에 조금 전 방송에 임하던 것보다 훨씬 신중하게 임해야 한다.

창현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좋은 기회가 닿아 드라마에 출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가수가 드라마라… 보통 하락세를 타는 루트 아닙니까?”

구라의 부정적인 말에 정환이 옆에서 타박했다.

“무슨 말씀을. 다른 사람도 아닌 현 씨가 하는 건데.”

“왜, 이효리도 그렇게 해서 망했고, 가수 출신으로 도전 했다가 망한 게 수두룩하잖아. 아, 그래도 주연이 아니면 되겠다. 조연 정도면 괜찮겠지. 조연으로 출연하는 겁니까, 현 씨?”

거침없는 폭언과 함께 구라가 묻자, 창현이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아니오, 주연인데요. 망할 것 같나요?”

“아우! 주연은 힘든데 말이지. 혹시 계약이 완료된 게 아니면 빠지는 게 어떤가? 앞날도 쨍쨍한데 벌써 망할 수는 없잖아.”

이미 망하는 것을 기정 사실로 가정하고 말을 하는 구라였다.

그 말에 창현은 여전히 웃음을 지은 채로 대답한다.

“음. 아직 하지도 않았는데 망할 것 같나요? 다른 분들도 그렇게 생각하세요?”

화살이 자신들에게 쏠리자 MC들이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우리는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이건 어디까지나 구라 씨만의 생각입니다.”

“그렇게 말하면 난 뭐가 돼.”

구라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을 하자, 정환이 구라에게 한마디 한다.

“촬영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잊고 있나 본데, 구라 씨 눈앞에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월드 스타 현 씨입니다? 구십만 다크 스타가 무섭지도 않나요?”

“무섭지 않기는 다만 사실이 그렇다는 거지.”

무섭지 않다고 말을 하기는 하지만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 모습을 보면서 창현이 입을 열었다.

“상당한 불안요소가 많다는 건 알아요. 솔직히 드라마 제안을 받았을 때도 많이 고민을 했고요. 그리고 거절의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었고요. 하지만 감독님의 말을 들어보면서 할 수 있겠다라는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고, 이렇게 하게 되었네요.”

“감독이 누구입니까?”

구라의 질문에 창현이 망설임없이 대답했다.

“김지환 감독님이십니다. 이번에 첫 드라마 촬영을 맡게 되셨죠.”

“신인 감독에 가수 출신 주연이라. 이거 망하는 요소가 너무 많은데.”

계속해서 망할 것이라는 말을 면전 앞에서 들으니 기분이 그리 좋지는 않았지만 창현은 내색하지 않았다.

MC들도 그 기색을 눈치 채지 못했지만 라샤는 달랐다.

창현의 기분이 그리 좋지 않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이미 몇 년 동안 보아온 사이인 만큼 그가 기분이 좋고 나쁘고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

그가 화나면 정말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원래 평소 화를 내지 않는 사람이 한 번 화내면 무섭다고 하질 않던가?

창현이 바로 그런 경우였던 것이다.

라샤가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을 보이자 눈치가 빠른 종신과 정환이 재빨리 창현의 심리를 알아차렸다.

그리고는 종신이 구라에게 타박을 주었다.

“하지도 않은 것 가지고 너무 그러지 맙시다. 어째 공중파에 나와서도 예전하고 다를 바가 없어.”

“그러게 말이죠. 그나저나 어떤 내용의 드라마인지 궁금한데요. 간략하게 말해주실 수 있나요?”

종신의 타박과 정환의 질문으로 분위기가 살짝 전환되었다.

창현도 방송이 방송인지라 화를 낼 수 없었기에 살짝 억누르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자 라샤가 가볍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고비는 넘긴 것이다.

“일단 드라마는 뭐랄까? 복잡해요. 여러 가지 요소가 복합적으로 섞여 있다고 해야 할까? 일단 전체적인 줄거리는 기업물이에요.”

“기업물이라… 그럼 현 씨가 신입사원으로?”

“비슷한 거죠. 고등학생이었다가 대기업에 취직하고, 그런 거죠.”

그러면서 창현은 드라마의 간략한 줄거리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였다.

줄거리를 들으면서 MC들은 감탄도 하면서 이런저런 질문을 창현에게 하였다.

그때마다 창현은 성실하게 대답하면서 최대한 성실한 답변을 하였다.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딱히 흠을 잡을 만한 게 없는 답변이었다.

그렇게 드라마에 대한 이야기가 끝나자 마침내 녹화가 끝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하였다.

슬슬 마무리를 지으려던 차, 종신이 무언가 떠오른 듯 창현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현 씨가 그렇게 개인기를 잘한다면서요?”

“개인기? 그런 것도 있습니까? 이거 세상이 너무 불공평한 것 같아요.”

구라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있는 걸 어떻게 하겠는가.

“개인기라면 있긴 있죠.”

“그렇죠? 제가 직접 들은 겁니다. 그것두 무려 유재석 씨에게요!”

“유재석? 설마 유재석 씨도 알고 있습니까?”

정환이 놀라 묻자, 종신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왜 이래요? 나 이래 보여도 유라인이에요.”

당당하게 말하는 종신을 보면서 정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고는 손가락질을 한다.

“어제는 신라인 하겠다면서요? 이거 양다리 아니야?”

“저런 사람은 오래 못가요. 그냥 버리는 게 좋습니다, 정환 씨.”

구라가 정환을 말리지만 이미 엉망진창 되기 일보직전이었다.

그때, 국진이 끼어들면서 MC들을 진정시켰다.

“자자, 게스트들 앞에서 무슨 추태입니까. 그나저나 현 씨의 개인기라니. 뭔지 궁금한데 말이죠. 뭡니까, 종신 씨?”

“제가 개인적인 정보망에 의하면 현 씨가 성대모사를 그렇게 잘한다고 하더군요. 만원의 행복 보신 분 있습니까?”

종신의 말에 구라가 무언가 떠오른 듯 말한다.

“아! 그거 말하는 건가요? 만원의 행복에서 태연 흉내를 내서 콜렉트 콜로 윤아를 낚았던 그?”

“낚았다는 표현은 좀 그렇고, 어쨌든 감쪽같이 흉내 낸 적이 있죠. 게다가 재석 씨 흉내도 엄청 잘했다고 하더군요. 라디오 스타에 나왔으니 개인기 한 번 봐야죠. 보여줄 수 있죠, 현 씨?”

졸지에 개인기를 하는 분위기가 되었지만 창현은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 생각해보니 심각한 이야기만 줄줄 늘어놓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이제 촬영이 끝나가고 있는 시점이니 한 번 빵 터뜨려줘도 좋다고 생각했다.

“물론입니다.”

“자! 자그마치 현 씨의 개인기입니다. 채널 고정! 개인기 부탁드리겠습니다, 현 씨!”

“네, 다른 건 이미 보여드렸으니 김구라 씨 성대모사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창현의 말에 정환이 경악한 표정을 지으며 호들갑을 떨었다.

“김구라 씨를요? 와! 여태까지 김구라 씨 흉내 내는 사람은 한 번도 못 봤는데?”

“김구라 흉내라니. 상상만 해도 끔찍하지만 한편으로는 기대가 되는군요.”

“김구라가 두 명이어서 그렇겠지만 한 번 기대해봅니다.”

종신과 국진도 경련을 일으킬 정도로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자 구라가 불편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미 대세는 기운 상황이었다.

그 모습을 미소 짓고 바라보던 창현이 서서히 목을 가다듬기 시작한다.

“험험! 아, 아아! 아아아!”

“……!”

창현의 목소리를 듣던 MC들과 라샤, 스태프들 전원이 경악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목소리를 가다듬던 창현의 목소리가 점점 구라의 목소리와 비슷해져가더니 이내 똑같아졌던 것이다.

완벽하게 구라의 목소리를 복제한 창현이 구라의 말투로 종신에게 말한다.

“그러니까 왜 자꾸 막 던져요. 그냥 주워 먹는 게 최고라니까? 종신 씨는 그냥 주워 먹기나 하세요.”

그렇게 말한 창현이 이번에는 국진에게 시선을 옮기며 말한다.

“미국 물을 먹었으면 영어로 좀 말을 해봐요. 아이 참 답답하게.”

그리고 창현이 정환에게 말을 하였다.

“매일 신라인 하는데 도대체 한 명밖에 없는 곳에 무슨 라인이야? 그냥 나랑 티격태격하는 게 제일이라니까?”

그렇게 말을 한 창현이 카메라를 바라보며 마무리를 한다.

“이건 모두 상황에 만들어진 말일 뿐, 농담이라는 것 여러분도 아시죠? 여전히 채널고정 부탁드려요, 하하하!”

구라의 특유 웃음소리까지 내자 부스 안은 완전 초토화가 되었다.

창현에게 한 방씩 먹은 MC들은 멍한 얼굴로 창현을 바라보고 있었고, 자신의 말투는 물론 목소리까지 그대로 복제한 창현의 모습에 구라는 멍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진짜 김구라랑 똑같네요. 와! 완전 똑같아서 놀랐습니다.”

엄지 손가락을 번쩍 보이며 감탄을 금치 못하는 종신이었다.

“감사합니다.”

그 모습에 창현이 빙긋 웃음을 지으며 감사의 인사를 하였다.

그렇게 창현의 개인기로 분위기가 확 띄워진 채 훈훈하게 마무리를 향하고 있었다.

국진이 마무리 멘트를 하기 시작하였다.

“자, 가요계의 산소와도 같은 존재죠! 사라지면 호흡을 못할 것만 같은 현, 라샤와 함께 한 라디오 스타였습니다. 오늘 해보니까 어떠셨어요? 좌측, 시린 씨부터.”

시린이 먼저 자기 소감을 말하였다.

“오늘 제법 긴 촬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즐겁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고요. 평소 하지 못했던 말도 할 수 있는 것 같아 속이 시원한 그런 기분입니다.”

뒤이어 세룬이 말한다.

“평소 모르던 부분도 알게 되고, 알고 있던 부분도 서로 함께 나누게 되면서 즐겁게 이야기를 한 것 같아요.”

“MC 삼촌 분들과 친해질 수 있어서 기분이 좋았어요. 앞으로 오빠처럼 친근하게 대할게요.”

“그거 참 유익한 말입니다.”

미란의 말에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하는 구라였다.

마지막으로 창현이 말했다.

“평소 말하고 싶던 부분을 말할 수 있어서 좋았고, MC분들과 라샤 누나들이 함께 해서 부담없이 편안하게 방송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말은 별로 세지 않았다는 건가요?”

정환의 질문에 창현이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딱히 고전을 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거, 다음 주부터는 더 세게 나와야겠는 걸요?”

“우리가 오늘 너무 약해졌어. 다음에 나오면 아주 강하게 밀어 붙이자구.”

창현의 말에 자극을 받아 전의를 다지는 정환과 구라였다. 덕분에 다음주 출연자만 죽어나게 생겼다.

“자, 이제 마지막 공식 질문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시린 양.”

“네.”

국진의 질문에 시린이 마지막이라는 말에 정신을 다잡으며 대답을 한다.

그러자 국진이 시린에게 질문을 하였다.

“시린에게 라샤란?”

“제 또 다른 가족? 반드시 있어야 할 곳이고, 반드시 지켜야 할 곳. 저의 가족인 것 같아요.”

미리 준비를 한 듯 라샤의 리더로서 멋진 말을 하는 시린이었다.

멋진 말을 하자, 이번에는 예능용으로 질문한다.

“그럼 시린에게 고기란?”

“마지막 행복? 몸매 관리에 들어가면 꿈도 못 꾸니…….”

다이어트와 전쟁을 벌여야 하는 여자 그룹의 비애가 깃든 말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재미있었는지 MC들이 웃음을 짓는다.

이번에는 종신이 세룬을 보며 물었다.

“세룬에게 외고란?”

세룬이 외고 출신이기에 묻는 것이다. 그것 때문에 한때 상당한 주목을 받기도 했고 말이다.

그 질문에 잠시 멈칫거렸던 세룬이 대답한다.

“저의 과거 중 유일한 자랑거리?”

“그렇다면 현재 자랑거리는 무엇입니까?”

“지금은 당연히 저를 비롯한 멤버들이 구성하고 있는 라샤죠. 앞으로도 미래에도 저의 자랑거리가 될 거예요.”

그 모습을 보면서 구라가 못마땅한 듯 한마디 한다.

“아무래도 이쪽 회사에서 예능 강의를 하는가 본데? 말을 너무 잘해.”

“그런 거 아니니까 조용히 하시고요. 이번에는 미란 양에게.”

구라를 침묵 시킨 정환이 미란을 보며 물었다.

“미란에게 김구라란?”

“아저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하는 미란이었다.

그 대답에 가뜩이나 구겨진 구라의 얼굴이 다시 한 번 팍 일그러진다.

일그러진 구라의 모습을 웃으며 바라보던 정환이 다시 미란에게 묻는다.

“자, 이번에는 훈훈하게 가봅시다. 미란에게 신정환이란?”

훈훈함을 강조하는 정환이었지만 애석하게도 미란은 무척 솔직했다.

“예비 아저씨?”

“…….”

좋은 대답을 해주리라 믿었는데 그 예상을 멋지게 빗나가자 정환은 침묵하였고 다른 MC들은 크게 웃음을 터뜨린다.

“아주 좋아요. 아주 훈훈해.”

자신을 아저씨라고 한 미란임에도 불구하고 정환에게 한 방 먹인 미란에게 최고라는 듯 엄지 손가락을 치켜 세워주는 구라였다.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좋아하던 구라가 이번에는 창현을 바라보며 묻는다.

“자, 마지막으로 현 씨에게 묻습니다. 현에게 음악이란?”

“제 영혼과도 같죠. 음악을 빼면 빈껍데기가 남는 것처럼. 음악은 제 영혼, 소울과도 같습니다.”

“아, 영어는 됐고요.”

감동스러운 말이었지만 그건 구라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정말 훈훈해질 뻔한 분위기를 단번에 끊어버린 구라가 질문 하나를 더한다.

“한 가지 더 묻겠습니다. 현에게 있어 소녀시대란?”

‘어휴!’

이 말을 하는 걸 보니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한 듯하다.

속으로 한숨을 내쉬는 창현이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자세한 내용은 방송을 통해 나오리라.

그렇게 고생이 많던 라디오 스타 촬영이 마침내 끝났다.




제48장 드라마 제작 발표회




2월 말과 3월 초는 창현에게 있어서 그야 말로 폭풍과도 같은 시기였다.

라디오 스타 촬영을 하기 전인 2월 중순부터 다크 스타에서 묘한 루머가 돌기 시작하였다.

바로 현이 고등학교에 진학을 하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어디에서부터 흘러 나왔는지 모르지만 그것은 수많은 추측을 낳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팬들이 창현에게 수많은 질문을 하였지만 그에 대한 답변을 하지 않았다. 고등학교 진학을 안 하는 것이 사실이었고, 그에 대한 답변을 준비하고 있었기에 그렇다.

그리고 라디오 스타 촬영이 끝난 다음 날, AA엔터테인먼트는 창현의 고등학교 진학에 관련한 소식을 알렸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우선 이런 논란이 일어나게 된 것에 미리 공지하지 않은 점 깊이 사과드립니다.

본론으로 들어가면 현의 고등학교 진학은 이루어지지 않을 예정입니다. 앞으로 수많은 활동을 하려면 고등학교 생활이 여의치 않을 것이라는 판단이 들었고, 고등학교 생활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데 학교에 진학하여 급우들에게 피해를 끼치고 반에 분위기를 해치는 일을 초래하고 싶지 않다는 현의 의견을 받아들여 오랜 시간 동안 심도 있게 이야기 한 끝에 고등학교 진학을 하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대신 검정고시를 응시하기로 결정을 내렸으며, 추후 본인의 의지에 따라 대학 진학 여부를 결정을 내리기로 하였습니다.

고등학교 진학을 하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사회에서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기에 차근차근 준비를 하던 차에 루머가 흘러 나와 이렇게 공식적으로 입장을 밝히게 되었습니다. 팬 여러분들의 관심 부탁드리면서, 조금이라도 더 많은 분들에게 다가가고자 하는 현에게 비판과 질타보다는 칭찬과 격려를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AA엔터테인먼트>


이와 같은 공문은 AA엔터테인먼트 홈페이지를 시작으로 다크 스타에 이어 현의 다른 팬 카페로 퍼져 나가면서 곧장 기사화가 되었다.

이 기사 내용은 많은 파장을 일으켰다.

사회 풍토는 중학교를 졸업하면 곧장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대학교를 가야 한다는 방향이었기에 그렇다.

특히 연예인을 좋지 않게 보는 시각이 있지 않은가?

연예인이니 학교를 가지 않는다는 건 잘못되었다는 말도 흘러나올 정도였다.

물론 이것은 극히 소수의 의견에 불과하였다.

대다수 사람들은 현의 결정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고등학교에 진학했다가 중퇴를 하는 것도 아닌, 애초에 진학을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 이유가 자신으로 인해 학교에 끼칠 피해 때문이라고 말을 했고.

그렇게까지 언급을 해놓았는데 더 따지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이상한 것이다.

특히 여기에는 현의 성적표 공개가 주효한 모습을 보였다.

출처는 모르지만 공개된 현의 성적은 전교 5등 안에 드는 엄청난 것이었다. 중학교는 조금이라도 공부를 하면 상위권에 든다고 말을 하지만 최상위권은 어디든 간에 치열한 경쟁을 담보로 하는 곳이기에 그렇다.

게다가 깎인 점수는 대부분 수행평가를 제대로 못해서 그런 것이고, 시험에서는 거의 완벽한 모습을 보였다.

그걸 확인한 네티즌들은 현의 우월한 두뇌에 감탄을 터뜨리면서 한편으로는 성숙한 그의 결정에 찬사를 보냈다.

그의 이러한 결단은 학교를 다님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출석조차 하지 않는 연예인들과 확연히 비교되는 처사이기에 그렇다.

어차피 검정고시에 응시한다고 말을 하지 않았는가?

그런 만큼 고등학교 진학을 안한 것 가지고 무어라 하는 것이 우스웠다.

현 같은 사람에게는 검정고시가 고등학교를 다니는 것보다 훨씬 나았으니 말이다.

공부도 못하는 사람이 진학을 하지 않겠다고 했으면 뭇매를 맞았을 테지만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 진학을 하지 않겠다고 하자 오히려 검정고시가 더 효율적이라는 말이 나오는 현실이었다.

일부 네티즌들은 가뜩이나 열등감을 일으키는 현이 공부까지 완벽한 그야 말로 퍼펙트한 사람이라는 사실에 질투심을 가지고는 악플을 달기도 하였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열등감의 표출에 지나지 않았다.

“후우! 다행히 심각하지는 않은 것 같네요.”

분위기가 생각보다 심하게 진행되지 않자 창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에 석규가 빙긋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행이구나. 어느 정도 심각하게 번질 수도 있다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반응이 적어서 다행이야.”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석규도 많은 걱정을 하였다. 이번 일로 인하여 창현의 이미지가 많이 깎이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자칫 연예인이라 하여 학업을 등한시하는 이미지를 줄 수도 있었기에 걱정이 많았다.

하지만 은밀하게 성적표를 공개하는 것이 주효했다.

출처를 알 수 없다 알려진 성적표는 실은 석규가 공개를 한 것이다.

창현은 성적표 공개를 꺼려했지만 그래야 사태를 최대한 완화시킬 수 있다고 설득을 했다.

우리나라만큼 학교 성적에 의해 이미지가 좌우되는 나라는 많지 않았기에 석규는 그 점을 노린 것이다. 전교권에 드는 창현의 성적을 공개하면 그가 공부를 하기 싫어서 가는 것이 아닌, 연예인이라는 직업에 충실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어필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 노림수는 훌륭하게 먹혀들었다.

성적표를 공개함으로써 네티즌들의 의견을 ‘공부하기 싫어서 진학하지 않았다.’에서 ‘공부를 할 수 있지만 연예인 활동에 전념하고 싶어 진학하지 않았다.’ 로 바꿀 수 있었으니 말이다.

이래서 언론 플레이가 무섭다는 것이다.

속으로 안도하면서 석규가 창현에게 일러두었다.

“검정고시는 반드시 봐야 한다. 연예인은 한 번 한 말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건 알고 있겠지?”

연예인의 공식선상에서의 발언은 무척이나 중요하다.

몇몇 연예인들은 자신이 공인이 아니라고 주장을 하고는 한다.

엄밀하게 따지면 연예인은 공인이 아니다.

하지만 사회에서는 그들을 공인이라고 말을 한다.

그것은 그들이 대중에게 끼치는 영향이 지대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들이 공인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이미 공인이라 할 수 있다. 사회가 그렇게 인정하고 있고, 그들의 영향력을 감안하면 충분히 인정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런 만큼 연예인은 자신이 한 말에 대해서는 반드시 지키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들의 행동 자체가 사회에 좋은 예가 될 수 있고, 나쁜 예가 될 수 있기에 그렇다.

특히 그중에서도 현의 영향력은 발군이다.

그가 30대, 40대 팬들에게 각광을 받는 이유가 바로 단정한 모습에 있기에 그렇다.

행동도 예의 바르고, 옷차림도 흐트러짐 없는 현의 모습이 청소년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게다가 30대나 40대 중 상당수가 보수적인 성향이 있기에 그렇다.

어쨌건 석규의 말은 아무것도 아닌 듯하면서 무척 중요한 말이었다.

자신이 한 말을 지킨다.

언행일치는 말하기 쉽지만 지키는 것은 무척 어렵다.

공인의 말은 특히 그 무게가 남다르기에 석규는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말을 한 것이고 말이다.

그 무게를 창현이 절실히 깨닫지는 못하고 있지만 자신이 한 말에 대해서는 반드시 책임을 지켜야 한다는 것은 동의하는 바였다.

“물론이에요. 검정고시는 볼 생각입니다. 틈틈이 공부도 하고 있고요.”

연기수업을 마치고, 보컬 트레이닝을 끝낸 뒤 집으로 돌아가면 창현이 하는 것이 바로 유료 인터넷 강의를 시청하는 일이었다. 본래는 곡의 멜로디를 구상하거나 좋은 가사 구절을 찾기 위해 책을 읽고, 메모를 하거나 그러는데 근래 들어 자신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는 검정고시를 볼 마음을 굳힌 채 공부를 하고 있던 것이다.

중학교 때 공부를 잘했다고 하여 고등학교 때 공부를 잘하는 것이 아니다.

흔히 중학교 때는 좋은 머리와 약간의 노력이 합쳐지면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지만 고등학교 때는 좋은 머리는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자신의 머리를 믿다가 발목을 붙잡히는 경우가 허다하다.

고등학교에서 중요한 것은 좋은 머리보다는 우직함이고, 약간의 노력이 아닌 끊임없는 노력이다.

거기에 응용문제를 풀기 위한 약간의 요령은 당연히 필요한 것이다.

그 말을 듣고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몰랐던 창현이었지만 고등학교 진도를 나가면서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 느낄 수 있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검정고시를 보기 위해 준비에 들어갔다는 점이다.

그로 인해 스케줄은 별로 없지만 개인 사생활 스케줄은 무척 촘촘하게 짜여 있어 몸이 두 개라도 부족했다. 다음 달부터 촬영에 들어가야 하고, 올해 검정고시를 보는 것이 목표인 만큼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래, 그 부분에 대해서는 널 믿으마. 공지에 올린 것처럼 너의 의견을 수렴한 것이니까.”

창현이 공부에 돌입했다는 말에 한결 마음이 놓이는 석규였다.

그가 안도하는 모습을 보이자, 창현이 석규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진학 문제는 그렇다 쳐도 드라마 문제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드라마에 관련된 루머도 서서히 흘러나오고 있었다.

제작발표회가 얼마 남지 않은 만큼 얼마 후면 자신이 드라마 캐스팅에 포함된 것이 알려질 것이고, 그러한 루머가 다크 스타 내에서 서서히 돌고 있는 실정이었던 것이다.

루머가 하나씩 터지면 상관이 없지만 지금 학교 진학 문제로 한 번 터진 만큼 연이어 드라마에 관련된 사실이 밝혀지면 상당히 곤란할 것임이 분명했다. 가수가 연기자로 변모하는 경우가 많기는 하지만 성공 사례는 극히 드물었기에 그렇다.

그 말에 석규는 담담한 안색으로 대답했다.

“어떻게 하긴? 처음부터 반응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지 않았더냐? 지금 네가 해야 할 것은 연기력을 길러서 의문을 표할 대중들을 납득시키는 것이지, 이렇다 할 반응에 휘둘리는 것이 아니다.”

“아…….”

석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창현이었다.

주변 반응에 신경을 쓰기는 하지만 이 정도로 신경을 쓴 적은 거의 없다. 예전에는 최선을 다하면 인정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약간 상황이 달라진 것이다.

그것은 아무래도 자신의 어깨에 실린 짐이 많아서 그런 것이리라.

인기라는 기대감을 안고 있는 만큼 팬들을 실망시키지 않을 의무가 있다고 본인 스스로 강한 압박감을 느끼고 있던 것이다.

“일단 연기수업은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말이죠.”

“음! 그것도 그렇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석규는 창현이 잘해낼 것이라 의심치 않았다.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창현의 연기에 대해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던 석규였지만 창현에게 연기를 가르치는 선생이 창현의 연기에 대해 극찬을 한 것을 듣고 생각을 달리할 수 있었다.

노래에 감정몰입이 빠른 만큼 배역에 감정몰입이 빨리되어 단기속성으로 익힌 뒤 꾸준히 실전을 경험해나간다면 대배우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다는 말을 들은 상태였다. 입에 발린 칭찬이 아닌, 혹독하기로 소문이 난 연기 선생의 말인 만큼 그 말의 신뢰도는 무척 높았다.

창현이 잘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석규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김지환 감독과 제작발표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마. 그러니 너는 당장의 문제에만 신경을 쓰도록 하여라.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해줄 테니.”

이것이 석규가 줄 수 있는 도움이었다. 간단하게 말을 했지만 결코 쉬운 사항이 아닌 만큼 많은 고민을 필요로 할 것임이 분명했다. 창현도 그걸 알았기에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석규가 워낙 단호한 모습을 보였기에 무어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창현과 석규의 대화가 끝났다.


“음!”

창현과 이야기를 끝맺고 석규는 고민에 빠졌다.

자신이 알아서 해주겠다고 했지만 이제부터 자신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기에 그렇다.

드라마 캐스팅 관련 발표 소식은 연예인 현의 이미지에 큰 굴곡을 가져다 줄 수 있다. 그런 만큼 어느 시기에 발표하느냐와 어떤 형식의 기사로 발표를 하느냐가 중요하였다.

직원들이 일찍 퇴근을 하였지만 석규는 퇴근을 하지 않고 있었다. 조만간 캐스팅 발표를 할 텐데 그 점에 대해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었기에 그렇다.

♩♪♬

그때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지선에게 연락이 온 것인가 싶어서 확인을 하니 지선이 아닌 김지환 감독에게서 온 전화였다.

마침 그 일로 고민하던 차였기에 석규는 잘 되었다고 생각을 하면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접니다, 형님.

석규의 목소리가 다소 가라앉아 있다는 것을 느낀 김지환 감독이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한다.

“그래, 번호를 등록했으니까 알고 있다. 무슨 일이냐?”

-캐스팅 발표에 대해서 의논을 드려야 할 것 같아서 연락을 드렸습니다. 갑작스럽기는 하지만 시간이 언제쯤 되시는지 알 수 있습니까?

말 그대로 갑작스러운 제안이었다. 석규가 고민을 하고 있는 것처럼 김지환 감독도 캐스팅 건에 대해서 많이 생각을 하고 있는 듯했다.

석규가 슬쩍 스케줄 표를 보더니 말한다.

“갑작스러운 말이라서 시간이 안될 듯한데? 내일부터 일정이 잡혀있는 터라. 시간이 있다면 지금밖에 없는데.”

-지금이라고요? 마침 저도 집으로 돌아가려던 차인데 그럼 같이 식사라도 하는 게 어떻습니까? 현의 캐스팅 건에 힘을 써주신 것에 감사를 표하고 싶은데 제가 한 끼 대접하고 싶군요.

김지환 감독의 제안에 석규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슬픔을 나누면 반이 된다고 하지 않은가? 고민도 나누고 함께 할 수 있다면 반이 된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김지환 감독도 자신긔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을 테니 말이다.

“음, 나쁘지 않겠지. 어디로 가면 되지?”

-제가 예약을 잡아놓고 연락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지금이 7시니까 8시쯤 뵐 수 있으면 좋겠네요.

“8시? 가까운데 위치해 있나 보군.”

한 시간 내로 만나자는 걸 보니 식사를 할 곳이 가까운데 위치해 있는 듯했다.

-예, 강남에 있습니다. 그럼 제가 예약 문의를 해본 뒤 잠시 후 연락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연락 기다리마.”

그렇게 통화는 끊어졌다. 통화를 종료한 석규는 핸드폰 액정을 바라보면서 핸드폰을 조작하였다.

“오늘은 들어가지 못하니 연락을 해야겠군.”

주부들의 고충 중 하나가 바로 언제 집으로 들어올지 모르는 남편의 귀환이었다. 남편이 언제 집에 들어오는지 알아야 타이밍을 맞추어 저녁을 준비할 수 있으니 말이다. 오늘은 늦게 들어간다는 말만 한 터였기에 석규는 전화를 하여 자세한 사정을 지선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신혼은 신혼인 것일까.

통화를 하는 내내 석규는 즐거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잠시나마 복잡한 고민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에 그러는 것이다.

그렇게 통화를 끝낸 석규는 잠시 후 다시 걸려온 김지환 감독의 전화를 받고는 자세한 위치를 전달 받은 뒤 회사를 나섰다. 그리고는 약속장소인 음식점을 향하기 시작했다.


석규가 도착한 곳은 한식 전문점이었다.

가게 안으로 들어서니 이미 김지환 감독이 도착하여 석규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형님.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고생은 무슨. 가까우니까 아무래도 좋긴 하군. 앉지.”

“예.”

석규가 자리에 앉으면서 권하자, 김지환 감독도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밑반찬이 차려지는 것을 보면서 석규가 입을 열었다.

“캐스팅 건에 대해서 머리가 많이 아플 거야. 맞지?”

석규의 말에 김지환 감독이 고개를 끄덕인다.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이미 석규도 자신과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지 않은가? 괜한 겸양을 보이는 것보다 솔직하게 인정하는 모습이 더 나을 것이다.

“네, 맞습니다. 아무래도 초호화 캐스팅인 데다가 현의 문제도 걸려있는 상황이니 말입니다.”

자신이 거의 억지로 창현을 설득하여 캐스팅 한 만큼 김지환 감독은 다각도로 현의 상황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었다.

드라마를 퀄리티 있게 제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도 바로 마케팅이다.

현을 캐스팅했다는 것 자체만으로 막대한 돈을 들이지 않은 채 마케팅이 가능하다. 드라마에 캐스팅을 한 만큼 현의 많은 팬들이 드라마에 관심을 가질 것은 당연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현은 연기자가 아닌 가수 출신이다. 그런 만큼 당연히 연기력 논란은 피할 수 없다. 우선 현의 연기력은 자신이 장담을 하고 있지만 드라마 촬영에 들어가기 전부터 현의 이미지가 깎이는 일이 발생하면 안 되지 않겠는가? 그랬기에 자신이 할 수 있다면 현의 이미지를 손상시키지 않은 채 드라마 촬영에 들어가는 것이 중요하였다.

자신이 캐스팅했다는 것도 있지만 선배님의 아들이라는 점도 한몫을 하였다.

그 고민이 너무 깊고, 자신이 함부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사항이 아니었기에 석규에게 함께 저녁식사를 하자고 제안을 한 것이다.

물을 한 잔 마시면서 김지환 감독이 석규에게 물었다.

“우선 형님의 생각은 어떠신지 알고 싶습니다.”

그에 석규가 고개를 저으면서 대답했다.

“나는 아직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지에 대해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네 생각부터 말하는 것이 좋을 것 같구나.”

여러 가지 고려해야 할 점이 너무 많다 보니 뭐라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 말을 들은 김지환 감독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신의 생각에 대해 말하기 시작하였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복잡하게 여러 가지를 고려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렵고 복잡할 때는 그저 단순하게 나가는 것이 최고라 생각합니다. 현의 좋은 이미지 중 대표적인 것 하나가 바로 진정성 아니겠습니까? 이리저리 수를 써봤자 요즘 대중들은 영리해서 다 간파하고는 합니다. 그러니 수를 쓰는 모습보다는 진실 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복잡한 고민 끝에 나온 답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복잡하게 고민을 하면 끝이 없다. 이걸 고려하면 저것도 고려해야 하고, 그렇게 물고 물고 이어지다 보면 끝도 없이 이어진다. 머리만 아파질 뿐이었다.

그래서 내린 김지환 감독의 결정은 간단하게 정면돌파를 하는 것이다. 그것이 현에게도 가장 좋을 것이라는 생각도 함께하고 있었다.

“…….”

김지환 감독의 말을 들은 석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생각에 잠겼다.

그 모습을 김지환 감독은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자신의 말을 듣고 생각을 정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렇다.

생각에 잠겨있던 석규가 입을 열기 시작했다.

“네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이렇게 복잡하게 얽힌 상황에서는 뚝심 있는 정면돌파가 좋게 작용할 수 있지.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부족하다. 네 생각을 자세히 털어놓아봐라.”

이 정도면 일단 자신의 의견이 어느 정도 동의를 받은 것이라는 뜻이었다.

행여 석규가 반대 의사를 표할까 걱정하던 김지환 감독은 자신의 의견에 동의를 해주는 석규의 모습에 표정을 밝게 하였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대답한 김지환 감독이 자신이 생각한 바를 구체적으로 설명을 하길 시작했다.

석규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지적을 하기도 하면서 점차적으로 보완에 보완을 거듭하기 시작하였다.

전체적인 기둥은 잡았지만 그것을 세세하게 가다듬는 것이 중요하였다. 무슨 일이건 간에 그 발단은 사소한 것에서 시작되는 만큼 꼬투리를 잡힐 내용을 사전에 차단하는 것이 중요했기에 그렇다.

그렇게 두 사람의 대화가 곧 있으면 연예계 소식을 발칵 뒤집어질 내용이 정리되고 있었다.


2월이 끝나가는 마지막 날.

연예계 소식은 여느 날처럼 조용하였다. 불과 며칠 전에 현의 고등학교 진학 소식으로 인해 떠들썩했지만 AA엔터테인먼트의 훌륭한 대응으로 인해 잠잠해진 상황이었다. 오히려 호의적인 여론을 끌어낸 채 마무리 지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흐음! 오늘은 별달리 재미있는 소식이 없네. 간단하게 게임이나 할까.”

모처럼 쉬는 날, 윤아는 컴퓨터를 하면서 인터넷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있었다.

인터넷을 하게 되면 가는 곳들은 뻔했다. 우선 자신들의 팬 카페에 들어가서 어떤 게시글이 올라왔나 눈으로 구경을 하고, 인터넷 기사란에 자신들 기사가 올라왔나 찾아보고는 한다. 그럴 때마다 악플들을 보게 되면서 마음이 쓰라렸지만 그에 못지않게 자신들을 응원해주는 리플들이 있었기에 힘을 낼 수 있었다.

그렇게 매일 도는 코스를 모두 돈 윤아는 할 것이 없어지자 게임을 할까 싶었다.

그리고는 곧장 자신의 방에서 게임 삼매경에 빠진 순규에게 도전장을 건넨다.

“언니! 한 게임 하죠!”

게임에 몰두하고 있던 순규는 자신에게 도전하는 한 마리의 어린 양을 쳐다보고는 입가에 씨익 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감히 나한테 도전을 하겠다고? 우리 윤아가 많이 컸구나.”

“많이 크긴요. 고수랑 많이 해야 실력이 늘어난다고 한 건 언니라고요.”

자신을 가소롭다는 눈으로 바라보는 순규에게 눈썹을 꿈틀거리며 항의하는 윤아였다.

그 모습에 순규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 윤아 양의 도전인데 내가 어찌 거부하겠어. 그 도전을 받아들이도록 하지.”

“이번에는 따끔하게 한방 먹여드릴 테니 각오하세요.”

윤아가 순규에게 도전하는 게임의 종목은 다름 아닌 스타크래프트였다.

창현이 스타크래프트를 즐겨한다는 소식을 들은 소녀들은 언제부터인가 스타크래프트를 조금씩 하기 시작했다. 그녀들을 가르치는 사람은 다름 아닌 순규였는데, 열의를 갖고 하고 있었기에 소녀시대는 어느덧 쉬는 날이면 무슨 프로게이머 구단과도 같은 모습을 보였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컴퓨터에는 온통 스타크래프트가 자리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소녀시대 내 스타크래프트 실력구도는 일강 삼중 오약이었다.

일강은 당연히 순규였다. 그리고 삼중은 기존에 스타를 하던 태연과 윤아, 주현이었는데 세 사람 모두 하루가 다르게 그 실력이 일취월장하고 있었다.

윤아는 번뜩이는 재치와 엽기적인 플레이로 상대방의 허를 찌르는데 능했으며, 주현은 본래 똑 부러지는 성격 때문인지 탄탄한 정석 플레이를 하며 안정된 게임 플레이를 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윤아를 대하는 순규는 다소 긴장한 표정이었다. 자신을 꺾어보겠다고 4드론을 하던 윤아의 모습을 잊을 수 없기에 그렇다.

그렇게 게임에 들어갔고, 이번에도 엽기적인 도박 플레이를 하다가 맥없이 패한 윤아는 GG를 선언하고는 게임에서 나왔다. 게임은 이겨야 제 맛인데 순규가 너무 잘해서 상대가 되질 않았다.

그렇게 스타크래프트를 끝낸 윤아가 인터넷을 돌아다닐 때였다. 갑자기 실시간 급상승 어와 함께 기사란을 도배하다시피 하는 것이 보였다.

“이건… 헉!”

기사 제목을 확인한 윤아가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눈에 들어온 기사는 다름 아닌 드라마 캐스팅 확정건에 관련된 것이었던 것이다.

이 기사가 왜 지금 올라온단 말인가?

윤아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본래 계획이라면 바쁘게 스케줄을 하는 가운데 기사가 올라오고, 그때 말하려고 했다고 말을 하면서 얼렁뚱땅 넘기려고 했는데 하필이면 멤버들이 모두 쉬고 있는 오늘 기사가 올라온 것이다.

멤버들을 못 보게 해야 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일단 숙소를 벗어나는 것이 관건이었다. 멤버들이 확인을 하고 화를 내려고 해도 자신이 숙소에 없다면 결국 허탕만 치게 되고 화도 한결 누그러질 테니 말이다.

‘빨리 움직이자.’

화장을 하지 않았지만 아침에 씻은 것이 천운이라 생각하는 윤아였다. 옷만 입으면 바로 나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렇게 생각한 윤아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할 때였다. 옷만 입고 숙소를 나서면 사태를 어느 정도 완화 시킬 수 있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쉽게 돌아가지 않는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윤아의 뒤에는 한 사람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것은 은신술(?)에 버금가는 접근이 아닐 수 없었다.

윤아의 뒤를 점한 인물은 다름 아닌 주현이었다. 모니터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윤아의 모습에 혹시 야한 동영상을 보는 게 아닐까 염려하며 다가온 주현이 기사 제목을 읽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본 주현은 저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헉! 새로운 드라마, 주연은 현과 문근영? 그리고 조연은… 소녀시대의 윤아?”

쩌렁쩌렁한 그녀의 목소리가 숙소를 울렸다. 그와 함께 윤아의 얼굴에 핏기가 빠르게 사라지기 시작하였다.

‘거, 걸렸다!’

윤아의 얼굴이 울상으로 변해갔다. 신은 자신을 버린 것이란 말인가? 도주를 결심하는 순간 바로 걸리다니.

하지만 상대는 주현이다. 동정을 사면 어떻게든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윤아가 경악한 주현을 외면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곧장 옷을 입기 시작하였다.

한동안 멍하니 있던 주현이 정신을 차리고는 윤아를 바라보았다. 그 사이 윤아는 옷을 다 갈아입은 상태였다. 초인적인 속도가 아닐 수 없었다.

주현이 윤아를 보며 물었다.

“언니!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그게 그러니까…….”

윤아로서는 무어라 할 말이 없었다. 자신은 드라마에 캐스팅이 되었고, 창현도 드라마에 캐스팅이 되었다. 거기에 더 무어라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아니, 변명은 할 수 있다. 그러나 상대도 상대 나름이다. 논리정연하게 조목조목 따지는 주현에게 있어 자신의 설명에 개연성을 부여하려면 상당한 시간을 들여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야 한다.

그 사이 멤버들은 모여들 것이고 자신은 처참한 침몰을 하게 될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설명을 하지 않은 채 빠르게 자리에서 벗어나는 것이 관건이었다.

“하하하! 주현이 목마르지? 응 안 마르다고? 하지만 나는 목이 마르네. 음료수를 사올 테니 잠시 기다리도록 해. 내가 얼른 나가서 사올 테니까.”

그렇게 말한 윤아가 그대로 주현을 지나쳐 방문을 벗어나려고 하였다. 방을 벗어나면 문과는 최단거리! 주현의 외침을 들은 언니들의 마수에서 벗어나 밖으로 탈출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윤아의 생각에 불과하였다.

창현과 관련되기만 하면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는 주현에게 있어 어설픈 윤아의 설명은 도리어 그녀의 분노를 일으켰던 것이다.

덥썩!

막 방을 벗어나려던 윤아의 팔을 잡아버리는 주현이었다.

“주, 주현아?”

갑작스러운 주현의 행동에 윤아가 당혹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설마 주현이 이런 행동을 보이리라고는 생각도 못한 것이다.

그 사이 윤아의 팔을 잡은 주현은 그대로 윤아를 양팔로 껴안았다. 그리고는 깍지를 단단하게 끼고는 윤아를 포박하였다.

“주, 주현아! 이게 무슨 짓이야. 어서 놔!”

포박 당한 윤아는 당혹감이 가득한 목소리로 주현의 포박을 벗어나기 위해 바동거렸다. 숙소를 벗어나야 하는데 설마 주현에게 잡혀버릴 줄이야! 하지만 자신의 힘이 더 세다고 생각하면서 주현의 포박을 풀어버린 채 도주를 꿈꾸는 윤아였다.

그러나 그것은 윤아의 착각이었다. 사람은 절박해질수록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지 않은가? 숙소를 탈출해야 한다는 윤아도 절박했지만 반드시 진실을 알아내야 한다는 주현의 절박감이 훨씬 강력하였다.

포박을 풀어버리기 위해 바동거리던 윤아는 꿈쩍도 하지 않는 주현의 포박에 경악해야만 했다. 힘윤아라 불릴 정도로 멤버 내에서 힘으로 따지면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자신이 전력을 다하고 있는데 포박에서 벗어날 수 없다니!

윤아는 주현에게 간곡한 어조로 부탁했다.

“주현아! 언니가 부탁할게. 이것 좀 놔줘. 응? 우리 이야기로 풀자.”

우선 주현의 포박을 푸는 것이 관건이었기에 거짓말을 하는 윤아였다. 주현이 포박을 풀면 곧장 도주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주현에게 통하지 않았다. 함께 지낸 것이 몇 년인데 저런 말에 속을까.

“거짓말 하지 마세요. 이 이야기는 언니들과 함께 나눠야겠어요.”

그렇게 말을 한 주현이 윤아를 껴안은 채 거실로 나갔다.

“아아…….”

거실에 나서자 윤아의 입에서 절망스러운 소리가 흘러나왔다. 거실에는 이미 멤버들이 포진해 있던 것이다.

그녀들은 하나같이 눈에 의아함을 담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저 의아함이 살기로 뒤바뀌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니, 눈에 보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막내! 무슨 일 있었어? 왜 소리를 지른 거야?”

점심을 막 먹은 후였기에 설거지를 하고 있던 태연이 분홍색 고무장갑을 낀 채 주현에게 묻는다. 워낙 갑작스럽게 뛰어온 뒤라 고무장갑에는 세제가 묻어 있었다.

“아니, 그보다 윤아는 왜 껴안고 있는 거야? 그 자세는 뭐고?”

수연은 주현이 윤아를 껴안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자 주현이 윤아를 슬쩍 보더니 콧방귀를 뀌고는 입을 열었다.

“흥! 언니가 먼저 말씀하세요. 자백할 기회를 드릴게요.”

“…….”

그러나 윤아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한줄기 보이던 희망이 완벽하게 차단당하자 엄습하는 절망에 정신을 놓기 일보직전이었던 것이다.

윤아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주현은 다시 한 번 콧방귀를 뀌더니 말했다.

“언니가 말하지 않으니 제가 말하도록 할게요. 언니들, 윤아 언니가 드라마에 캐스팅 된 거 아시죠?”

“당연히 알고 있지.”

모를 리가 없었다. 그 드라마 캐스팅 건으로 자신들이 내기도 했고, 소녀시대의 이름을 알릴 수 있는 기회가 된다고 했기에 함께 기뻐하지 않았던가? 그런 만큼 잊을 리가 없었다.

모두 고개를 끄덕이자 주현이 말을 했다.

“그 드라마에 주연이 누구인지 아세요?”

“윤아가 말하지 않았던가? 아, 그러고 보니 윤아가 말을 한 적이 없네. 주연이 누군데?”

대답을 하던 유리가 무언가 놓치고 있던 것을 깨닫고는 주현에게 물었다.

그러자 주현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방금 인터넷 기사에 올라왔어요. 윤아 언니가 출연하는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이 바로 창현이라고요.”

“…….”

한순간 숙소는 침묵에 빠져들었다.

그녀들은 지금 자신이 들은 말이 사실이 아니라고 여겼다.

조용한 침묵이 흐르던 것을 깬 것은 미영이었다.

“지, 지금 뭐라고 한 거야, 막내야?”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 미영. 그녀가 받은 충격에 제법 강한 듯했다.

그러자 주현이 또박또박 대답하기 시작했다.

“윤아 언니가 출연하는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이 바로 창현이라고요. 지금 컴퓨터에 그 기사가 올라와 있으니까 확인하고 오세요.”

쿠당탕!

주현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소녀들이 우르르 몰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굳은 표정을 한 채 방을 나왔다. 컴퓨터에 올라온 기사를 정독하고 온 것이다.

언니들의 굳은 표정을 본 윤아의 표정이 더욱 암울하게 변해간다. 이제는 발뺌하지도 못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윤아 너… 알고 있었어?”

수영이 드물게 가라앉은 표정으로 물었다.

그 질문에 한순간 윤아의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진실을 말해야 할지 아니면 거짓을 말해야 할지. 진실을 말하게 되면 자신은 강력한 응징을 당하게 될 것이고, 거짓을 말하자니 당장 상황을 모면할 수 있지만 후환이 두렵다.

결국 윤아가 택한 것은 진실과 거짓을 섞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당장 상황을 넘기는 것이 약간 힘들 수도 있지만 재치를 발휘하면 넘길 수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나중에 진실이 밝혀져도 변명의 여지가 있는 만큼 유야무야 넘길 수 있었다.

눈빛이 돌아온 윤아가 입을 열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창현이가 주연인 줄은 몰랐어요. 캐스팅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창현이가 드라마 제안을 수락한 적은 없잖아요? 저는 당연히 포기하고 다른 사람이 주연이 될 줄 알았어요.”

창현이 주연으로 캐스팅이 된 걸 알고 있었지만 될 줄 확신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될 줄 알았다는 것은 거짓이다. 매일 자면서 기도한 것이 창현이 드라마 캐스팅을 수락하게 해달라고 한 것이니 말이다.

“…….”

윤아의 변명에 멤버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각자 생각에 잠겨있던 것이다. 단단히 포박을 하고 있던 주현도 어느새 포박을 풀고는 윤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말 사실이야?”

태연의 물음이었다. 약간 거짓이 섞이기는 했지만 진실이 50% 이상 섞여 있다. 딸기 우유에 딸기가 100% 들어있다고 딸기 우유라 불리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약간의 진실이 첨부된 이상 충분히 진실이라고 말을 할 수 있었다.

“네, 사실이에요.”

“흐음! 정말이지?”

너무나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윤아의 모습에 의심이 가시지 않은 듯하지만 어느 정도 납득하는 모습을 보이는 태연이었다.

그러나 태연을 넘겼다고 하여 위기가 다 사라진 것이 아니다.

아직 남은 사람이 일곱 명이나 되었던 것이다.

특히 그중에서 까다로운 사람이 몇 명 있는 이상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만 했다.

‘정면으로 맞서서 넘겨야 해. 그렇게 하면 오히려 기회가 생길 수 있어.’

위기 속에 기회가 생긴다고 했던가.

주현에게 포박 당하면서 상황이 최악으로 흘러가는 듯했지만 위기 속에서 기회는 오는 법이다. 지금 상황을 잘 타개하기만 하면 자신이 생각했던 최선의 방법보다 훨씬 낫게 상황을 종료할 수 있게 된다.

탈출이 좌절된 이상 지금 상황에 모든 전력을 집중해야 한다.

태연이 뒤로 물러서자 주현이 앞으로 나서면서 말한다.

“그런데 왜 언니들하고 저한테는 이야기하지 않으신 거예요?”

“확실하지 않은 이야기여서 해줄 수가 없었어. 김칫국 마시는 것 같아서 말이야.”

위기가 닥치면 인간은 극한의 능력을 발휘하게 된다. 평소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떠오르지 않던 순간 대처 능력이 지금은 최고조로 발휘되고 있었다.

윤아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을 했지만 주현은 찌푸려진 안색이 펴질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이야기 해주셔야 하는 것 아닌가요?”

제법 곤란할 수 있는 질문이었지만 윤아는 이미 그에 대한 대비를 하고 있었다.

“내가 그때 드라마 캐스팅 되면서 언니들이 막 괴롭혔잖아. 그래서 말을 하려다가 까먹고 있었어. 나는 말하려고 했는데 말이지. 그래서 말을 한 줄 알고 있던 거야. 나도 말 안한 걸 오늘 알았어. 일단 그 점에 대해서는 미안하게 생각해.”

이렇게까지 말을 하는데 더 따질 수 없는 노릇이었다. 주현은 무언가 걸리는 듯했지만 완벽하게 자신의 공격을 블로킹 해낸 윤아에게 더 이상 공격을 할 수 없었다.

뒤이어 효연과 순규가 나섰지만 그때마다 윤아는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변명으로 벗어났다.

그리고 나선 것이 수연이었다. 거의 최종보스나 다름이 없는 존재. 그랬기에 윤아의 눈에는 한층 긴장감이 서렸다.

도대체 어떤 질문을 할 것일까.

‘하지만 난 지금 최고조에 있어.’

지금 상태라면 어떠한 질문이라도 받아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수연은 윤아에게 말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저 윤아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을 뿐.

무언가 행동을 보이지 않고 바라보고 있기만 하자 윤아는 찜찜한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결국 그녀가 먼저 수연에게 말을 하였다.

“언니도 무슨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거 아닌가요?”

“…있지.”

“그럼 하세요. 상세히 답해드릴게요.”

윤아의 말에 수연은 살짝 미소를 짓더니 그대로 윤아에게 다가오기 시작한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접근에 윤아가 놀라 뒤로 물러서려 하자, 수연이 윤아의 어깨를 잡으며 말한다.

“움직이지 마. 그리고 나를 봐.”

그렇게 말을 한 수연이 약 30cm의 거리를 두고 윤아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감정이 담기지 않은 차가운 눈빛이었다. 사람의 마음이 눈에 투영된다는 것을 감안하면 지금 수연은 지극히 냉정한 상태로 윤아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 시선을 받는 윤아는 주체 없이 떨려오는 것을 느꼈다. 말로는 속일 수 있지만 눈빛으로 진실을 캐내려는 수연의 방법에 대책이 없던 것이다. 어떻게든 안정시키려고 노력을 하지만 사람의 감정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 법이다.

결국… 시선을 마주하고 있는 윤아의 눈이 사정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녀가 여태까지 거짓말을 했다는 걸 의미하는 행동이었다.

“지금 눈 떨리고 있어!”

뒤에서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유리가 강력한 한방을 날린다.

그 말이 결정타였다.

멤버들도 윤아가 거짓말을 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이럴 수가, 유리가 이럴 때 배신할 줄이야.

윤아의 원망스러운 시선이 유리에게 향한다.

다시는 윤율 커플을 논하기만 해봐라.

그렇게 생각하건 말건 지금 중요한 것은 거짓말 했다는 걸 들켰다는 점이다.

현실을 자각한 윤아의 눈이 절망으로 물들기 시작하였다.


창현의 드라마 캐스팅 소식은 연예 소식란을 후끈 달아오르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여태까지 도전해본 적 없는 미지의 첫 행보였기에 그렇다.

눈치가 있는 사람이라면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창현에게 드라마 러브 콜이 예전부터 들어왔을 것이라는 걸 말이다. 그런 루머도 돌았지만 AA엔터테인먼트에서 대응을 하지 않았고, 결국 의심으로 끝을 맺었지만 현이 드라마 제안을 받았을 법 하다는 생각을 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현의 이미지를 생각하여 연기자로 데뷔를 시키지 않는 것이라 생각했을 수도 있다.

보통 경우 가수로서 인지도를 쌓으면 연기나 다른 분야에 진출을 하는 것이 일종의 관례가 되었기에 그렇다.

요즘은 그래서 만능 엔터테이너가 유행이지 않은가?

사람들은 충분히 현에게 만능 엔터테이너의 자질이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이것은 아니었다.

만능 엔터테이너라 믿었지만 그 방식이 틀려버린 것이다.

연기를 하겠다고 하면 밑에서부터 차근차근 치고 올라갈 줄 알았다. 그것이 여태까지 현의 방식이었고, AA엔터테인먼트의 방식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사람들의 예상을 완전히 어긋나게 해버린 것이다.

첫 드라마 출연에 조연도 아닌 주연이라니.

사람들은 드라마 캐스팅 소식이 공개되자 혼란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루머는 루머로 남는 경우가 많긴 하지만 현의 경우 최근 들어 루머 두 개가 연달아 사실로 드러났기에 그렇다.

학교 진학 루머부터 시작하여 드라마 루머까지.

그러다 보니 각종 루머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였다. 마치 소설을 쓰는 것처럼 말이다.

사람들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었다.

첫 번째는 현의 드라마 행보에 대해 비판을 하는 입장이었다.

가수로 보면 현은 최고의 가수지만 연기자로 보면 검증되지 않은 신인에 불과하다. 상당수의 CF를 촬영하기는 했지만 그것이 그의 연기력을 입장하기는 어렵지 않은가? 그런 만큼 드라마 전체의 분위기를 좌지우지하는 주인공 캐스팅으로서 부적합하다는 의견이었다.

그리고 그 의견에 맞서 현의 캐스팅이 적절하다는 의견도 있었다.

현의 인지도를 감안하면 드라마 제작 측에서 주연 정도의 배역을 주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의견이었다.

하지만 그들조차도 현의 연기력에 대해서는 입을 열지 못했다. 현은 아직 연기력이 검증되지 않은 신인에 불과하였기에 그렇다.

드라마 캐스팅 발표는 연예 소식란을 후끈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이것은 학교 진학 문제와 달리 앞으로 시작인 것과 다름이 없었기에 당분간은 피곤할 듯 싶었다.

“하아! 이런 반응이라니. 너무 강한데요?”

인터넷 기사를 본 창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말한다.

오늘도 회사로 와서 연기 수업을 받고 지영의 보컬 트레이닝을 봐준 창현은 인터넷 연예 기사를 보면서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어느 정도 각오는 하긴 했지만 그래도 호의적인 반응이 나오지 않아서 씁쓸한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그것은 석규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는데 결국 이런 식이군. 그래도 옹호하는 의견도 있으니까 너무 실망할 필요는 없다.”

정면돌파를 하고 싶다는 김지환 감독의 의견에 힘을 실어 계획을 짰지만 예상보다 좋지 않은 반응이었다. 무엇보다 그들에게는 아직까지 검증되지 않은 연기력으로 주연의 자리를 꿰찬 현에게 의문을 표하고 있었다.

이것은 드라마가 방영되기 시작하고 어느 정도 정상궤도에 오를 때까지 뗄 수 없는 낙인이 될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언제나 선플을 받는 입장이었는데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되니 씁쓸한 건 어쩔 수 없네요.”

다소 힘이 빠진 모습을 보이는 창현이었다.

어느 정도 각오는 하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호의적으로 흐를 것 같다는 여론은 자신에게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당장 자신의 팬 사이트인 다크 스타 내에서도 왜 연기를? 이라는 반응이 나올 정도니 오죽하겠는가.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끔찍한 상황인 것임이 분명했다.

“네가 선택한 길이다. 후회는 하면 안 돼.”

“그건 그렇죠. 후우!”

한숨을 내쉬는 창현의 모습이 안타까웠음일까?

옆에 있던 지영이 이해가 가지 않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오빠가 연기를 하는 것이 그렇게 잘못된 거예요? 뭐가 잘못된 건지 모르겠는데.”

아직 어린 것일까 아니면 직접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일까.

창현이 왜 수많은 악플을 받아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 지영이었다.

다른 것은 모르지만 악플이 얼마나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지 지영은 알고 있다.

악플은 인터넷이 낳은 최악의 산물이다. 인터넷 상의 익명을 빌려 사람을 비난하는 것이야 말로 사람들의 삐뚤어진 욕망의 분출구가 되는 것이다.

물론 익명성의 장점도 있지만 단점이 훨씬 많다.

지영의 옹호에 창현이 입가에 미소를 짓는다. 불리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편을 들어주는 가족과 팬들이 있으니 어느 정도 위안이 되었다.

“본업은 가수라서 그런 거야. 연기가 검증되지 않은 내가 주연의 자리를 꿰찬 것도 문제가 있는 거고. 가수인 내가 주연을 차지하니 다른 연기자들이 설 자리를 잃는 거잖아? 적어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보이겠지.”

그렇게 말을 했지만 저 부분에 대해서는 창현은 인정하지 않았다.

그에 어울리지 않은 실력을 가졌다면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 어울리는 실력을 선보일 수 있다면 주연의 자리건 조연의 자리건 차지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실력이 말해주는 사회가 아닌가?

주변의 배경도 실력이 있을 때 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런 만큼 어느 정도 자신감을 회복한 창현은 흔들리지 않았다.

창현의 말을 들은 지영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하지만 오빠는 연기를 잘하잖아? 당연히 주연을 해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보컬 트레이닝을 받기 위해 회사에 오지만 춤 연습도 같이 병행한다. 그렇기에 지영은 종종 창현이 연기 수업 받는 것을 보고는 했는데, 그의 연기 실력이 웬만한 연기자보다 부족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지영은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창현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지영이가 그렇게 생각해주니 고맙긴 한데 다른 사람들이 내 연기를 본 건 아니잖아? 그러니 어쩔 수 없는 거야.”

그 정도도 이해하지 못할 지영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창현이 쓴소리 듣는 지금 상황이 수긍되는 것은 아니었다.

“으음! 연예인은 너무 어려운 것 같아. 아직 뭘 하지도 않았는데 욕을 먹는 걸 보면…….”

“그렇다고 안할 건 아니잖아?”

은근한 어조로 말하며 슬쩍 지영을 바라보는 창현이었다.

그 모습에 지영이 눈을 살짝 찌푸리더니 말한다.

“오빠가 그렇게 말해도 할 거야. 포기하지 않을 거거든?”

“그래, 포기하지마. 잘하고 있으니까.”

웃음을 지은 창현이 어깨를 으쓱하며 수긍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그 모습을 쉽사리 넘길 수 없는 지영이었다.

“흥! 그러면 앞으로 조심하도록 해.”

보컬 트레이닝을 할 때는 꼼짝도 못하는 지영이었지만 평상시로 돌아오면 창현을 잡는 면모를 보인다. 아무래도 보컬 트레이닝에서 시달린 것에 대한 복수(?)인 듯했다.

앙큼한 지영의 모습에 창현은 입가에 맺힌 웃음을 지울 수 없었다.

나이로는 두 살 차이고, 학년으로는 하나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데 어떻게 이리도 귀엽게 느껴질까.

손을 뻗어 지영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창현이 말한다.

“예이, 미래의 대스타분에게 실례를 저지를 수 없는 노릇이죠.”

자신의 머리를 사정없이 헝클어뜨리는 창현의 손길에 지영이 분노의 일갈(?)을 내지르며 창현의 손을 떼어낸다.

“이잇! 머리 스타일 망가진다고. 얼마나 열심히 손질한 건데!”

“손질? 잘 보일 사람이 어디 있다고? 남자친구라도 사귀어?”

“오빠!”

짓궂은 창현의 말에 결국 소리를 빽 지르는 지영이었다.

이런 둔감한 사람 같으니! 여자가 꾸미면 전부 남자를 만나는 거란 말인가?

지영은 창현의 둔감함에 속으로 혀를 차면서 입을 열었다.

“여자들은 남자 만날 때만 손질하지 않거든? 평상시에도 예뻐 보이고 싶은 게 바로 여자야.”

“그런 거야? 흐음! 난 좋아하는 사람 만날 때만 그렇게 하는 줄 알았지.”

턱을 쓰다듬으며 말하는 창현이었다.

그 모습에 지영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으이구! 그렇게 여자를 몰라서 어떻게 하려고? 오빠 나이가 많은 건 아니지만 연애 경험도 없으니 앞으로 여자들을 어떻게 대하려고 그래? 걱정이다, 걱정.”

물론 그렇게 말을 했지만 창현에게 다가오는 여자들은 힘껏 블로킹 해줄 생각이었다.

그것이 바로 시누이의 권한이 아니겠는가!

어찌하다 유리의 화술에 말려 그녀만큼은 방해하지 않기로 약속했지만 세상에는 보이지 않게 방해할 방법이 무궁무진하였다.

‘나 때문이 아니야! 오빠는 월드 스타니까 오빠만 바라보는 수많은 소녀 팬들의 환상을 깨서는 안 돼! 고로 오빠는 서른 살까지 여자 친구를 사귀면 안 돼! 오빠에게 접근하는 여자들을 내가 힘껏 방해해주겠어!’

소녀 팬들의 환상을 깨지 않겠다는 대의명분 하에 창현의 서른 살 솔로 계획을 야심차게 세우는 지영이었다.

그런 지영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 지 창현은 피식 웃음을 지으면서 지영에게 말한다.

“내가 여자를 모른다고 치자. 그러는 지영이 넌 남자를 많이 사귀어봐서 나한테 이런 조언을 하는 거니?”

예상치 못한 창현의 일격에 지영이 펄쩍 뛰면서 말한다.

“그, 그럴 리가 없잖아! 내가 언제 남자를 사귀어 봤다고 그래?”

“그냥 물어본 것 가지고 왜 그래? 그렇게 반응 보이니까 더 수상한데?”

그러면서 눈을 가늘게 뜨고 지영을 바라보는 창현이었다.

그에 지영이 석규에게 시선을 돌리며 지원을 청한다.

“아빠, 오빠가 저한테 말하는 것 좀 봐요.”

지영의 눈빛을 받은 석규가 창현의 마수에서 구해준다.

“그래, 지영이가 무슨 남자를 사귀었다고 그러느냐. 아니라고 하는데.”

“음, 그렇긴 하지만 조금 털어보면 뭔가 나올 것 같기도 한데…….”

석규가 나섰기에 더 뭐라 말을 하지 않는 창현이었지만 아쉬운 기색은 감추지 못하였다.

그 모습을 보면서 지영은 한줄기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창현에게서 느껴지는 집념 때문이었다.

나중에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지영이 석규에게 말한다.

“어쨌건 오늘 이렇게 모이게 되었으니 엄마랑 같이 해서 오랜만에 외식해요.”

“외식 나쁘지 않구나. 오랜만에 가족이 모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안 그러냐?”

지영의 제안에 제법 만족스러웠기에 석규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창현을 바라본다.

창현도 신혼여행을 다녀온 직후 본 뒤 쭉 지선을 보지 못했기에 괜찮은 제안이라 생각했다. 어차피 집에 가봤자 혼자고, 기분이 다소 가라앉은 오늘 같은 날 가족과 함께 있는 것이 좋으리란 생각이었다.

“저도 좋아요.”

“그래, 그럼 그렇게 하자꾸나. 맛있는 집으로 가자.”

그렇게 말을 한 석규가 종종 찾곤 하는 음식점을 예약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창현은 입가에 살짝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이럴 때 의지할 가족이 있다는 것이 무척 기분이 좋았다.


“흐윽!”

한편, 숙소 거실에 널브러진 윤아의 입에서는 신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수연의 눈빛에 결국 진실을 들켜버린 윤아는 멤버들에 의해 철저한 응징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멤버들 사이에 비밀은 없어야 한다. 라는 말도 안 되는 규칙을 들면서 멤버들은 강력한 고문을 윤아에게 가했다.

끝까지 몰랐다고 주장을 했지만 이미 진실은 드러난 상황이 아닌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 윤아의 모습은 멤버들의 분노를 더욱 일으킬 뿐이었다.

결국 이어진 것은 삼십 분이 넘는 시간 동안 이어진 철저한 구타와 간지럼이었다.

평소 힘윤아라는 별명답게 격렬한 반항을 하면서 중도 탈출의 꿈을 꾸었지만 멤버들 중 숨겨진 강자들의 제지로 인해 탈출 계획은 원천봉쇄 당한 채 철저하게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모처럼 만의 휴일을 윤아라는 샌드백을 만나 스트레스를 마음껏 푼 멤버들은 윤아를 버려둔 채 각자 방으로 향했다. 믿었던 주현마저도 윤아를 외면한 채 방으로 들어간 상태였다.

결국 너덜너덜하게 변한 윤아 만이 겨울에서 뭐 마려운 강아지마냥 끙끙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두고 봐. 내가 이렇게 당하지만 드라마 촬영을 하게 되면 창현이랑 같이 있는 시간이 비약적으로 늘어나니까. 다른 언니들이랑 주현이는 만나지도 못하게 해주겠어.”

자신이 당한 것에 대한 분노를 멤버들에게 돌리는 윤아였다.

“윤아야, 지금 뭐라고 했어?”

움찔!

내면의 분노를 키우며 유치한 계획(?)을 수립하던 윤아는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몸을 떨었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혹시나 자신의 이야기를 들었을까 걱정하면서 말이다.

시선을 돌리자 그곳에는 유리가 생글생글 웃음을 짓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을 확인하자 윤아는 갑자기 분노가 확 치미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수연과 시선을 마주할 때 떨리는 것을 공식 인증한 것이 유리가 아니던가!

게다가 자신이 멤버들에게 일방적인 구타를 당하고 있을 때 유리는 옆에서 도와주기는커녕 오히려 추임새를 넣어 구타를 부추기는 역할을 하지 않았던가?

혼내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얄밉다고 말한다.

지금 윤아가 유리에게 느끼는 감정이 바로 그 종류의 것이었다.

윤율 커플이니 뭐니 다 필요 없었다. 정작 도움이 필요할 때 배신을 하는 사이가 아닌가!

삐져도 단단히 삐진 윤아였다.

윤아가 노려보았지만 유리의 안색은 변함없이 싱글벙글이었다.

그녀는 분노가 담긴 윤아의 시선을 받자 작게 중얼거렸다.

“방금 윤아 네가 뭐라고 했을까… 그걸 애들에게 다시 말해볼까?”

“헉!”

유리의 말에 윤아는 식겁했다. 설마 했는데 유리가 자신의 말을 들었을지 몰랐던 것이다.

윤아의 안색이 푸르죽죽하게 변해갔다. 만약 유리가 멤버들에게 말한다면 좀 전보다 더 심한 구타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기에 그렇다.

그런 윤아의 반응을 본 유리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녀는 힐끗 시선을 옮기면서 다시 한 번 입을 연다.

“어떻게 할까나.”

그 모습이 마치 멤버들에게 말할까 말까 고민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에 윤아는 서둘러 유리의 입을 막을 필요성을 느끼고는 소리쳤다.

“어, 언니!”

“으응? 왜 그러니, 사랑스러운 윤아야?”

자신의 생각을 다 알고 있으면서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능청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유리가 얄미운 윤아였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지금 칼자루를 쥐고 있는 것은 자신이 아닌 유리였다. 미래의 달콤함을 위해 지금은 굽히는 수밖에 없다.

한고조 유방을 도와 한나라를 건국한 공신 한신도 어린 시절 모욕을 견뎌내며 건달의 가랑이 사이를 지나가지 않았던가!

오나라의 왕 부차는 아버지 합려왕의 복수를 하기 위해 가시방석에 앉고 쓸개를 맛봤다.

미래를 위해 지금은 잠시 굽히는 모습을 보여야 할 때였다.

윤아는 스멀스멀 치밀어 오르는 자신의 감정을 꾹 억누르며 유리에게 말한다.

“어디까지 들은 거예요?”

“별로 듣지 못했는데? 다만 우리 윤아가 누구씨를 독점하고 다른 애들을 방해하겠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말이지.”

별로 듣지 못하기는 개뿔. 저 내용을 알고 있으면 중요한 요점은 다 들은 게 아닌가?

웃음을 짓고 있는 유리에게 강한 살기를 느낀 윤아였지만 곧 있으면 드라마 촬영에 들어가는 연기자답게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고는 유리에게 말한다.

“원하는 게 뭐에요?”

“음! 원하는 거라… 사실 원하는 건 없고 아까 전 윤아에게 미안해서. 애들을 창현이랑 못 만나게 해주는 걸 도와주도록 할게.”

“에?”

윤아로서는 전혀 의외의 말이 아닐 수 없었다.

분명 자신의 말로 어떠한 빌미를 잡아내서 쥐고 흔들려고 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자신을 도와준다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어차피 유리에게 들킨 이상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지 않은가? 그런데 멤버들에게 알리기는커녕 자신에게 협조를 해주겠다는 유리의 말은 윤아에게 있어 전혀 의외이면서 반가운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정말이에요?”

믿기지가 않는지 다시 한 번 묻는다.

그 질문에 유리가 고개를 끄덕인다.

“물론이지! 아까는 미안했어. 내가 장난이 과했지?”

“어, 언니!”

자신에게 사과를 하는 유리의 모습에 감동받은 표정을 짓는 윤아였다.

그래! 유리는 이런 언니였다. 장난이 심하기는 하지만 힘들 때 힘이 되어주는 그런 사람! 윤아는 자신이 유리를 나쁘게 생각했다는 것이 부끄러워졌다. 이렇게 좋은 언니를 나쁘게 대하려 했다니!

윤율 커플 타도라는 생각은 말끔히 소거되었다. 과거에도 윤율 앞으로도 윤율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래그래, 내가 최선을 다해서 도와줄게.”

자신에게 안겨오는 윤아를 안는 유리였다.

하지만 윤아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짓고 있는 유리의 표정은 가관이었다.

데스노트라는 만화책이 있다. 사신의 공책으로 이름과 사망시간을 적으면 죽는데, 치열한 두뇌 싸움이 벌어지는 만화책이다.

그 만화책 주인공의 이름이 야가미 라이토인데, 그가 라이벌인 L을 제거할 기회를 얻었을 때 짓는 미소가 인상적이다.

지금 유리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말이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계획대로다!’

말 그대로 계획대로였다.

윤아에게 너무 심했던 것 같아서 달래주려던 유리는 남몰래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던 윤아의 말을 듣고는 계획을 바꾸었다. 윤아를 위하는 척 말을 했지만 결국에는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전개가 된 것이다.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모습으로 보이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도 윤아를 따라 창현과 자주 만나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겉으로는 관심이 없는 척하면서 서서히 자신에 대한 관심도를 끌어올리는 것이다. 윤아가 옆에 있어서 어렵겠지만 아홉 명이 함께 있는 것보다 어렵지는 않다.

가뜩이나 미영의 견제를 받고 있는 실정에서 윤아의 견제까지 받으면 상황이 너무 복잡해진다.

윤아를 달래러 나왔다가 의외의 수확을 얻게 된 유리였다.

‘후후후! 윤아야 고맙다. 너로 인해 내가 기회를 얻게 되었어.’

그것을 모르는 윤아는 유리의 품에 안겨있을 뿐이었다.

그녀를 안고 있는 유리의 손길이 무척 부드러웠다.


“드라마 출연, 드라마 출연이라.”

태연은 컴퓨터 앞에 앉아 창현의 캐스팅에 관련된 기사를 보면서 중얼거렸다.

창현의 드라마 캐스팅에 관련된 기사에 좋은 평가는 거의 없었다. 아무래도 연기력이 검증된 바가 없으니 우려의 목소리가 높았던 것이다.

“하지만 윤아가 말했지. 회사에서도 성공을 점치고 있는 드라마라고.”

대형 기획사인 SM엔터테인먼트가 그렇게 말을 할 정도라면 상당히 성공할 확률이 높은 드라마라는 이야기였다.

게다가 캐스팅 된 연기자들 면면도 화려하지 않은가? 그런 만큼 창현의 연기가 어느 정도 받쳐주기만 하면 드라마가 성공할 확률은 극히 높아진다.

지금 캐스팅 건으로 인해 연예 소식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드라마 이름을 알게 되었을 확률이 높으니 말이다. 거기에 드라마가 본격적으로 방영되기만 하면 창현의 팬들이 우르르 몰려들 것임이 분명했다.

즉, 모든 것은 창현의 연기력이 좌우되는 것이다.

하지만 태연은 창현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결코 준비되지 않은 분야에 도전할 인물이 아닌 것이다.

“그 엄친아가 못할 리가 없잖아? 분명 평균 이상으로 할 수 있으니 수락을 한 것일 거야. 그렇다는 건 드라마 성공 가능성이 무척 높다는 이야기가 되지.”

신빙성 있는 추측을 하며 생각에 잠기는 태연이었다.

지금 와서 자신이 드라마에 출연하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자신은 애초에 가수를 준비했기에 연기 수업을 받지 못했던 것이다. 지금 와서 연기 수업을 받는 건 너무 늦었고, 드라마 중간에 배역을 얻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더 나았다.

맹렬하게 회전에 회전을 거듭하던 태연의 두뇌가 이윽고 한 가지 방안을 찾아냈다.

무언가 번뜩이는 걸 느낀 태연이 자신도 모르게 박수를 짝 쳤다!

“그거야! 그거면 돼. 후후후!”

태연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생겨났다. 자신이 생각해도 기방한 방법이 생각난 것이다. 왜 이걸 지금에서야 생각해낸 것일까. 너무나도 간단하면서 확실한 방법인데 이제야 생각한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질 정도였다.

“드라마 OST가 있지. 그걸 하면 되는 거였어.”

그렇다. 태연이 생각해낸 방법, 그것은 다름 아닌 드라마 OST 참여였다.

이미 드라마 배역 같은 것은 다 정해졌을 확률이 높지만 드라마 OST는 다르다. SM엔터테인먼트에서 힘을 쓰면 한 파트를 얻어내는 것이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게다가 제작 발표회도 하지 않은 만큼 아직 드라마 촬영에 들어가지도 않았을 테고, 그런 만큼 드라마 OST도 결정이 나지 않았을 확률이 높다.

게다가 자신은 가수가 아닌가?

드라마보다 OST 형식으로 참가하는 것이 훨씬 이득이다.

태연이 절대적으로 자신하는 것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바로…….

“나는 드라마 OST 경험이 있잖아? 경험은 무시할 것이 못 되지.”

그녀가 자신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한차례 드라마 OST를 부른 자신의 경험이 있기에 그런 것이다. 드라마 OST를 부름으로써 이미 솔로 가수로서의 가능성을 보였기에 SM엔터테인먼트의 지원을 얻어낼 수만 있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거기에 태연은 한 가지 더 진보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참에 좀 더 힘을 쓰게 만들어서 창현이의 곡을 받게 하면…….”

자신이 만든 곡은 반드시 자신이 프로듀싱한다고 알려진 창현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곡을 받은 태연은 창현과 단둘이서 녹음 작업에 착수할 확률이 높다.

무려 단둘이서 말이다.

“후후, 후후후!”

단둘이라는 단어에 흡족한 기색을 띠는 태연이었다. 드라마라는 끈으로 연결도 되고, 녹음이라는 이름하에 단둘이서 있게 되니 이 얼마나 이득이란 말인가? 게다가 남녀가 단둘이 있게 되면 묘한 감정의 기류가 흐르게 되니 이것이야 말로 자신이 원하는 전개였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구상일 뿐이다. 계획은 실현되었을 때 비로소 빛을 발하는 만큼 이제부터 구상을 실현으로 옮기기 위한 움직임을 보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장 회사로 달려가 안무 연습을 복습하는 성실함을 보여야 함이 옳지만…….

“평소에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이잖아? 괜찮겠지. 내일모레 회사에 갈 일이 있으니 한 번 말해봐야겠다.”

평소 자신이 성실하다고 믿는 태연은 자신의 말 한마디면 허락이 될 것이라 굳게 믿고 있었다.

과연 그게 그녀의 계획대로 될지 두고 볼 일이었다.


시간은 흐르고 흘러 마침내 제작 발표회가 있는 3월 3일이 되었다.

드라마 제작 발표회는 무척 많은 관심을 끌어 모으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최고의 주가를 달리고 있는 현이 이례적으로 드라마에 캐스팅 되었고, 그 외 다수의 스타들이 참가하여 호화 캐스팅이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였던 것이다.

게다가 라디오 스타에 출연한 현이 드라마에 대한 언급을 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사람들의 관심은 나날이 증폭되고 있는 실정이었다.

처음 드라마 캐스팅 발표가 이루어졌을 때는 부정적 여론이 많았지만 지금은 많이 완화가 된 상황이었다. 그것은 현이 미국에서 활동을 할 때 미국 드라마나 영화 출연 제의를 받았다는 사실 덕분이었다. 외국의 것을 높게 쳐주는 우리나라의 풍토상 외국 사람들조차 캐스팅하려는 했다는 것은 현에게 그에 어울리는 실력이 뒷받침 된다는 인식을 심어주었기에 그렇다.

그렇다고 하나 아직까지는 불안요소가 많은 것이 현실이었다.

그것을 극복하는 것은 드라마 방영이 될 때쯤이니 이래저래 마음고생이 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드라마 제작 발표회 당일이 되자 창현은 협찬 의상을 입고는 곧장 드라마 제작 발표회가 이루어지는 곳을 향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오늘 드라마 제작 발표회는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 모으고 있었다. 그렇기에 질문 하나하나에 대답을 잘해야 한다. 자신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사람들이 드라마에 대한 호기심을 더욱 증폭시킬 수도 있고, 재미를 반감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자신을 믿어야지. 내 모든 것을 보여주면 분명 달라질 테니까.”

굳게 마음을 먹은 창현은 평소와 달리 약간 심각한 모습이었다. 예전에 보여주었던 여유가 존재하지 않는 모습이랄까? 그런 그의 심각한 분위기를 알았기에 세희도 창현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무언가 조언을 하고 싶어 하기도 하는데 말이다.

예정 시간보다 일찍 드라마 제작 발표회를 하는 곳에 도착한 창현은 제작 발표회에 참가하는 사람들이 대기하는 곳으로 곧장 발걸음을 옮겼다.

주변을 둘러보던 창현이 나직이 감탄사를 흘렸다.

“장소 화려한데? 음!”

아직 다른 사람들은 없고, 스태프들만 있었기에 창현은 조용히 대기실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약 오 분여 정도 흘렀을까.

대기실 문이 열리면서 한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윤아였다.


윤아는 드라마 제작 발표회에 맞추어 다소 서두르는 모습을 보였다. 가뜩이나 가수 출신이면서 연기에 도전하는 것으로 상당한 눈총을 사고 있는 실정인데 늦는 모습까지 보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윤아는 꼭두새벽에 일어나 의상을 갖춰 입고 헤어 샵에 들려 머리까지 하고는 드라마 제작 발표회가 이루어지는 곳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막상 도착하고 보니 자신이 너무 일찍 도착한 듯하였다.

“너무 일찍 왔네. 에휴!”

상당한 관심을 모으고 있는 만큼 수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려야 하는데 지금 한적하다는 것은 자신이 일찍왔다는 걸 뜻한다.

아무도 없을 것이란 생각에 그녀는 기대감 없이 대기실 문을 열었다.

그런데 그녀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다름 아닌 창현이 아니던가?

윤아가 화들짝 놀라 창현에게 말했다.

“어? 창현이…….”

“윤아 누나? 일찍 왔네요.”

창현도 윤아를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순간 윤아는 초고속 시선처리로 자신의 복장을 살폈다. 이상 무였다. 대기실에 들어서기 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만반의 준비를 갖춘 것이 주효하는 순간이었다.

윤아는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창현에게 말한다.

“웬일로 이렇게 일찍 온 거야? 깜짝 놀랐네.”

“연기자로 보면 신인이잖아요. 게다가 약속이 있으면 일찍 도착하는 편이어서요.”

입가에 미소를 짓는 창현의 모습에 눈부시다. 그러면서 윤아는 창현에 대한 정보를 입력하고 있었다.

‘약속시간에 일찍 도착하는 편이었구나. 좋은 사실을 알았어.’

앞으로 함께 할 자리가 있으면 조금 일찍 와야겠다고 생각하는 윤아였다.

그런 그녀에게 창현이 물었다.

“그러고 보니 놀랐어요. 설마 누나가 이 드라마에 출연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거든요. 캐스팅 사실을 알고는 많이 놀랐는데, 어떻게 출연하게 된 거예요?”

창현이 네가 출연할지도 모른다는 말에 출연한다고 했어. 라고 말을 하고 싶은 윤아였지만 그렇게 말하면 자신이 너무 가벼워 보일 수 있었기에 사실을 살짝 각색해서 이야기하였다.

“회사에서 추천을 해줘서 하게 됐어. 워낙 스토리가 마음에 들기도 했고.”

“그렇군요. 이렇게 같이 하게 된 걸 보면 뭔가 인연은 인연인가 봐요. 뮤직비디오도 함께 했었잖아요.”

라샤의 뮤직비디오 <가면의 기사>에서 호흡을 맞춘 것을 언급한 것이다.

그때의 키스신을 떠올린 윤아가 살짝 홍조를 띠면서 얼른 고개를 끄덕여 수긍을 한다.

“응. 그런 것 같아. 인연은 인연이지.”

‘그대로 이어지면 더 좋겠지만…….’

아직은 자신의 희망사항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그녀였다.

하지만 그 생각을 겉으로 드러낼 수 없는 노릇이었다.

윤아가 창현에게 물었다.

“드라마는 어때? 연기는 잘할 자신 있고?”

“연기 수업은 받았지만 잘 모르겠어요. 실전을 경험해봐야 잘할 수 있을지 없을지가 결정될 것 같아요.”

그렇게 말을 하긴 했지만 창현의 모습에서 일말의 여유를 느낄 수 있었다.

윤아는 그 모습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한다.

“잘할 거야. 뮤직비디오 때도 잘했잖아? 잘할 거라 생각해.”

뮤직비디오에서 보여주었던 만큼만 한다면 분명 합격점이리라.

그녀의 격려에 창현이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누나는 어때요? 자신 있어요?”

창현의 물음에 윤아는 순간 멈칫했다가 대답한다.

“자신은… 잘 모르겠어. 최선을 다해야지. 이래 보여도 내가 너보다 연기로는 선배인 거 알아? 난 잘해낼 수 있단 말씀.”

자신 없는 모습을 보이다가 문득 자신이 선배(?)라는 것을 깨닫고는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보이는 윤아였다.

그 모습에 창현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래요. 잘해낼 거라 믿어요. 같이 멋진 드라마 만들어봐요.”

“그래. 파이팅이야.”

창현의 응원에 윤아의 입가에도 미소가 맺혔다.

그때, 두 사람 사이로 한 사람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이런, 그런 파이팅을 나 빼고 하다니 섭섭한데?”

그 목소리에 창현과 윤아의 시선이 동시에 움직였다. 그리고는 두 사람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감독님.”

창현과 윤아에 이어 김지환 감독에 도착한 것이다.

그는 창현과 윤아에게 빙긋 미소를 지어보이더니 입을 열었다.

“일찍 도착해서 기다리는 모습이 보기 좋네. 그 의욕으로 드라마 촬영에 임해주면 좋은 결과가 나올 것 같아.”

김지환 감독의 말에 창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물론 열심히 할 겁니다. 제가 선택한 거니까요.”

이에 질세랴 윤아도 힘차게 대답했다.

“저도요.”

두 사람의 의욕이 전해지는 것 같아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 김지환 감독이 시계를 들여다보고는 말한다.

“곧 있으면 배우들이 도착할 거야. 앞으로 함께 할 한식구들이니 인사를 잘 하도록 하고. 제작 발표회도 잘 임해주었으면 좋겠어.”

인지도 같은 면에서는 창현이 압도적이지만 배우들 중에는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다수 있었기에 아무래도 창현이 먼저 인사를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하는 말이었다. 게다가 상대는 가수도 아니고 배우였기에 더욱 그렇다.

“물론입니다.”

잠시 후, 드라마에 캐스팅 된 배우들이 속속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그중에는 자신만의 경지를 개척한 배우들도 있었고, 창현과 비슷하게 이 작품이 데뷔인 신인 연기자도 있었다.

창현은 선배 배우들에게 먼저 인사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주변에 섞여들지 못하는 신인 배우들과도 인사를 나누면서 분위기를 어색하지 않게 만들어나갔다.

하지만 그런 창현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 있었다.

바로 선배 배우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 때문이었다.

자신의 인지도 때문일까? 인사를 하면 반갑게 받아주기는 하지만 그들의 눈빛은 말하고 있었다.

자신을 연기자가 아닌 가수라고 말이다.

그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연기에 임하는 이상 그 순간만큼은 가수 현이 아닌 연기자 현이 되고 싶은 창현이었다. 그렇기에 자신을 배우가 아닌 가수로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거북했다.

그렇다고 하여 그것을 겉으로 드러낼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우선 자신이 연기자로서 사람들에게 자신의 연기를 보여줄 기회가 있어야 한다. 그때까지는 조용히 있는 것이 좋았다. 연예계는 말로만 떠들어서 되는 곳이 아닌 ‘실력’ 만이 모든 것을 증명하는 세계니 말이다. 자신의 실력을 보여주고, 사람들이 자신의 실력을 인정하게 되면 그때는 자신의 주장에 힘이 실릴 것이다.

마지막으로 도착한 것이 바로 이번 드라마의 여주인공을 맡게 된 문근영이었다.

국민 여동생의 원조답게 창현보다 무려 다섯 살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창현과 별 차이가 나지 않는 외모를 하고 있었다. 창현이 딱히 나이에 비해 성숙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근영은 대기실 안으로 들어오자 먼저 감독님과 선배 배우들에게 인사를 하였다. 그리고는 자신에게 다가오자, 창현은 그녀에게 먼저 인사를 하였다.

“안녕하세요, 현입니다.”

“문근영이에요. 이렇게 현 씨와 연기를 하게 되니 믿기지가 않네요. 평소 무척 팬이어서요.”

“저도 팬이었는데요? 참, 저보다 나이가 많으시니 편하게 대해주세요. 그래야 저도 한결 편할 것 같아서요.”

아무래도 외모에서 그리 나이 차이가 나지 않는다고 해도 실제 나이가 다섯 살 정도 차이가 나는 만큼 확실하게 호칭 정립을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창현이었다.

그에 근영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래도 돼? 음! 그러면 편안하게 부르도록 할게. 현이는 나한테 누나라 불러.”

“그럴게요.”

그러면서 창현은 근영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주로 드라마에 관련된 이야기였는데 나이에 비해 연기 경험이 풍부한 근영과의 대화는 무척 유익한 것이었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창현은 무언가 근질근질한 시선이 느껴졌지만 대화중에 주변을 함부로 둘러볼 수도 없어 근영과의 대화에 몰두해야만 했다.

그렇게 배우들이 각자 시간을 보내면서 제작 발표회 준비가 끝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스태프 한 명이 안으로 들어와 김지환 감독이 앉아있는 곳으로 다가와 그에게 귓속말을 하였다.

귓속말을 듣던 김지환 감독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박수를 짝짝! 쳐서 주변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지금부터 드라마 제작 발표회를 시작할 것입니다. 우선 주연 분들과 주조연 분들이 나갈 겁니다. 포토타임을 갖고, 본격적인 제작 발표회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말을 한 김지환 감독이 앞장 서 걷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주연인 창현과 근영이 뒤를 따랐고, 윤아를 비롯한 주조연들이 뒤를 따랐다.

마침내 말도 많고 탈도 많던 드라마 제작 발표회를 시작하게 되었다.


가장 먼저 갖는 것은 주연과 주조연들의 포토타임이었다.

이번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을 맡게 된 창현이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기자들이 일제히 사진을 찍기 시작하였다.

캐스팅도 캐스팅이지만 이번 드라마에서 가장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이 바로 창현의 존재였다.

톱 가수에서 연기자로의 변신. 많이 있는 사례였지만 성공을 거둔 사례는 그리 많지 않기에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사고 있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창현이 모습을 드러내어 잠시 포토타임을 갖고, 물러났다. 뒤이어 여주인공역을 맡은 근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늘 포토타임을 의식한 듯 이제 다가오는 봄에 어울리는 의상을 갖추고 있었다.

이번 드라마에 주연은 창현과 근영이었고, 주조연을 맡은 인물들은 김승우와 이천희, 소녀시대 윤아가 맡게 되었다.

한 명씩 나와 포토타임을 갖은 뒤 마지막에는 다 함께 서서 사진을 찍는 시간을 가졌다.

정신없이 사진을 찍는 기자들을 보면서 드러나지 않지만 창현은 제법 긴장을 하고 있었다. 새로운 분야에 대한 도전 때문일 확률이 높았다.

그렇게 주연과 조연들의 등장이 이어지고, 뒤이어 모습을 드러낸 것이 김지환 감독이었다.

기자들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인 그는 본격적인 제작 발표회를 시작하도록 하였다.

“드라마 [소년왕]에 대한 제작 발표회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연기자 현으로서 첫 데뷔 작품을 하게 된 드라마의 이름은 바로 [소년왕]이었다. 장르는 현대 기업물로서, 다각적인 만족 요소로 높은 시청률을 노리는 드라마였다.

[소년왕]의 줄거리는 전형적이면서 사람들이 좋아하는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국내에서 손꼽히는 기업의 회장이 어느 날 돌연 은퇴를 선언하면서 한 번도 외부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는 자신의 손자에게 회장의 자리를 물려준다.

그 회장의 자리를 물려받게 된 것은 다름 아닌 평범한 고등학생 현이었다.

고등학교에서 밴드 생활을 하는 것을 제외하면 평범한 청년에 속하던 현은 갑자기 자신이 대기업의 회장이 되자 어리둥절해 하면서 숨겨진 집안의 비사를 듣게 되자 회장의 자리를 수락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회장 취임에 격렬히 반발하는 이사진들과 한 가지 내기를 하게 되고 회장이되 새로 신설되는 부서에 신입사원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곳에서 만난 직장 동료들과 함께 한 가지 프로젝트를 하면서 정상을 향해 달려가는 드라마였다.

현의 번뜩이면서 천재성이 넘치는 모습과 과감하게 직장 상사와 맞설 수 있는 모습은 직장에서 상사들에게 시달리는 직장인들의 대리만족을 노리고 있었으며, 자칫 일방적이고 막나갈 수 있는 진행을 조연들의 연기로서 긴장감 고조와 주의 분산을 노리고 있었다.

여자 주인공인 근영의 역할은 현이 다니던 고등학교 재학생으로서, 원래 집안이 재벌가였으나 현의 할아버지의 공격으로 인해 모든 것을 잃게 된 집안이었다. 재벌가에서 한순간 평범한 가정으로 주저앉게 된 근영은 현과의 사랑, 집안간의 묵은 감정 사이에서 고민하는 모습을 그려내야 한다.

윤아가 맡은 조연의 역할은 현의 약혼자였다.

할아버지가 내정한 재벌가의 영양인 윤아는 현을 보고 한눈에 반하는 역할이며, 처음에는 그를 발견하고 모든 것을 희생할 듯한 지고지순한 사랑을 보여주다가, 자신의 사랑을 거부하고 근영을 좋아하는 현의 모습에 질투의 화신으로 변하게 되는 모습을 보이고, 현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연기를 선보여야 한다.

김승우는 회장의 전속 비서로서 암중에서 현에게 여러 조언을 해주면서 회사 경영에 대해 가르치고 그의 앞날을 가르치는 존재였다. 신비하면서 카리스마가 넘치는 연기를 하는 것이 관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천희는 겉모습만 멋진 신입사원으로서 현이 입사하게 되면서 새로 개설되는 신설 부서의 신입사원으로 들어오게 된다. 평소에는 이래저래 폼을 잡다가도 여지없이 엉성한 모습을 보이면서 의외의 상황에서 진지한 면을 보여주는, 진지함과 코믹을 넘나드는 고난이도의 연기를 필요로 한다.

드라마 내용에 대해 간략한 발표를 거친 뒤 배우들에게 각자 소감 한마디씩 하는 자리가 주어졌다.

가장 먼저 화제의 중심인 창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소감을 말하게 되었다.

“첫 드라마 출연에서 주연의 자리를 거머쥐게 되어 부담이 큽니다. 하지만 감독님이 저의 가능성에 기대를 걸어주신 만큼 그 기대를 실망으로 번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도록 하겠습니다. 많은 기대 부탁드려요.”

그 말과 함께 창현이 근영에게 마이크를 넘겼고, 기자들이 의례적인 박수를 친다.

그렇게 배우들이 한마디씩 하는 자리 다음 이어진 것은 기자들의 질문 시간이었다.

기자들의 관심은 아무래도 현에게 집중되고 있었다.

가장 먼저 손을 든 기자가 자신의 질문을 하였다.

“NS일보의 박영근 기자입니다. 현 씨에게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그러자 창현이 마이크를 들어 그 질문에 대답했다.

“예, 질문하십시오.”

“드라마에 출연하게 된 계기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것이 궁금합니다.”

기자들이 가장 궁금해 하는 부분이 바로 그것이었다.

갑작스러운 창현의 드라마 출연이 화제가 되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이미 예전부터 여러 차례 그에게 드라마에 출연해달라는 러브콜이 들어온 상태였다. 기자들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AA엔터테인먼트에서는 그 제안을 모두 거절하였다. 그중에는 지금 제작 발표회를 하고 있는 [소년왕]보다 더 화려한 스케일을 지닌 드라마도 있었고, 심지어는 할리우드에서도 제의가 온 적이 있다.

그것들을 모두 거절한 상황에서 드라마에 참가했다는 것.

무언가 이유가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기자들의 후각을 자극하고 있었다.

그 질문에 창현은 잠시 생각을 정리하더니 질문에 답하기 시작했다.

“계기라고 하면 무척 간단합니다. 드라마 자체에 메리트를 느꼈기 때문입니다.”

“…시나리오가 마음에 들었다는 이야기인가요?”

순간 이해를 하지 못한 듯하다가 묻는 기자의 물음에 창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분명 조건 면에서는 이보다 더 좋은 것들도 있었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제가 잘 해낼 수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긍정적인 측면으로 고민을 하게 되었고, 기회가 닿게 되어 드라마 제작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창현의 말은 확실하게 선을 그어놓고 있으면서 다른 말을 할 여지를 주지 않고 있었다.

드라마 시나리오가 마음에 들어서 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무어라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간단하지만 가장 확실한 자기 의견이 아닐 수 없었다.

조금 더 집요하게 파고들 수 있겠지만 기자들은 함부로 그러하지 못했다. 자신들이 건드리기에는 너무 거물이었던 것이다.

첫 번째 질문이 끝나게 되자 그 다음 발언권을 갇게 된 기자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자기소개를 하였다.

“PS일보의 전형석 기자입니다. 첫 드라마 도전인 만큼 연기력 논란을 피할 수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연기력 논란. 아직 촬영에 들어가지 않았음에도 참으로 말이 많은 부분이었다.

그 부분에 대한 해명도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기에 창현은 차근차근 대답하기 시작했다.

“연기력 논란은 당연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아직 그 분야에 대한 것을 보인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따로 드릴 말씀은 극히 제한적이라는 점입니다. 제가 여기서 백날 말을 한다 하여도 한 번 행동으로 보이는 것보다 부족하기 마련입니다. 그런 만큼 연기력 논란은 방영될 드라마에서 직접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당찬 이야기였다. 연기력 논란에 대한 이야기는 드라마가 방영된 뒤 이어서 해달라는 말이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니 기자들이 무어라 더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다.

한 차례 질문이 끝나고 또 다시 질문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발언권을 얻은 기자는 쥐상의 얍삽한 느낌이 드는 외모를 하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선 그는 자기소개를 먼저 하였다.

“JA일보의 박일순 기자입니다. 현 씨가 이번 드라마에 출연하게 된 것과 소녀시대의 윤아 양이 출연하게 된 것에는 어떠한 내막이 존재하는지 궁금합니다.”

“……!”

순간 모인 사람들 모두가 창현과 박일순 기자에게 집중되었다.

그러고 보니 박일순 기자는 연예인들을 엮는 것을 잘하는 기자였다. 많은 연예인들이 그가 낸 스캔들 기자로 인해 피해를 보아야만 했고, 연예인들 사이에서는 스캔들로 피해야 할 1순위에 해당하는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창현과 윤아의 고의적인 스캔들을 일으킬 조짐을 보이고 있던 것이다.

이것은 누구에게도 이득이 되는 것이 아니었기에 그리 좋은 일은 아니었다.

다시 마이크를 들게 된 창현이 박일순 기자에게 입을 열었다.

“어떠한 의도로 물어보시는지 잘 모르겠군요.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윤아 씨가 캐스팅 되었었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저는 캐스팅 권유에 마지막까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었고, 아마 배역 중에서 가장 늦게 합류하게 된 사람이 저일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감독님께서 이야기해주시리라 믿습니다.”

창현이 김지환 감독에게 바통을 넘기자,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주었다.

“모두 아시다시피 현 씨는 드라마에 출연을 한 적이 없기에 드라마 출연에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러다가 마지막까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드라마 출연을 결심하게 되었고, 방금 현 씨가 말을 한 것처럼 캐스팅 인물들 중 마지막으로 합류하게 된 것입니다.”

이 정도면 제법 해명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창현이 몰랐다고 말을 했으니 더 따질 여지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박일순 기자는 집요하였다. 이 정도에서 물러선다면 그가 연예인 스캔들 전문 기자로 이름을 날릴 수도 없게 되었을 것이다.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가 반문했다.

“드라마 출연 여부에 대해 고민을 하다가 윤아 양이 출연한다는 말에 생각을 달리 했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고 할 수 있다. 그의 말은 창현이 윤아가 드라마 캐스팅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드라마 캐스팅에 임하게 되었다는 뜻이었으니 말이다.

그 말을 들은 창현의 눈썹이 꿈틀거렸지만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다. 기분이 불쾌했지만 지금 이 자리는 공식선상인 것이다. 여기에서 화를 낼 수 없는 노릇이었기에 창현은 최대한 마음을 다스리면서 대답했다.

“제가 아니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분명 사적으로 소녀시대와 친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원더걸스와도 친합니다. 단순히 친하다는 사실로 이성적으로 엮인다는 것입니까? 그리고… 박일순 기자님에게 묻겠습니다. 제가 누구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위축되기는커녕 당당하게 말을 하는 창현의 모습에 박일순 기자가 움찔하며 대답한다.

“당연히 현 씨입니다.”

“제가 세계에서 갖는 위치가 어떠한 것인지 알고 계십니까?”

“…….”

창현의 말에 할 말을 잃은 박일순 기자였다.

지금은 드라마 출연 건으로 수많은 구설수에 휩싸였지만 창현이 누구인가! 대한민국에서 누구도 이루지 못한 빌보드 차트를 제패한 천재 아티스트였다.

그런 그가 갖는 무게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대단하다.

드라마 출연과 연기력 논란으로 다소 위축된 모습을 보이기는 하지만 그가 결코 이런 대접을 받을 인물이 아닌 것이다.

오죽하면 기자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인물이 바로 현이겠는가?

그의 말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에 박일순 기자는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느꼈다.

어리고 온순하다기에 얕잡아보는 마음이 없지 않아 있었는데 그는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지금은 달려들 때가 아닌 물러날 때였다.

“제가 경솔했습니다. 발언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대답한 박일순 기자가 자리에 앉았다.

확실하게 자신의 의견을 말한 창현도 기자들을 스윽 둘러보고는 몸에 준 힘을 풀었다. 방금 한 말은 다른 기자들에게도 함부로 하지 말라는 무언의 경고였다.

그러자 창현에 관련된 질문은 확실하게 적어지기 시작하였다. 그걸 시작으로 다른 배우들에게 질문을 하기 시작하였고, 발언이 이루어질 때마다 다른 기자들이 분주히 받아 적었다.

그렇게 점점 제작 발표회가 후반으로 접어들 무렵, 발언권을 얻은 기자가 윤아에게 한 질문으로 인해 분위기가 기묘하게 돌아가기 시작하였다.

“OS신문의 남상근 기자입니다. 윤아 씨에게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자신에게 질문을 하겠다고 하자 윤아가 긴장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질문 받도록 하겠습니다.”

“아이돌 가수로서 드라마에 출연한 경력이 있는데, 전작을 촬영할 때 상당한 연기력 논란에 휩싸인 적이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 그건…….”

질문을 받은 윤아는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연기력 논란. 그녀가 어찌 이 질문을 예상치 못했겠는가.

드라마에 출연을 할 때부터 연기력 논란은 꼬리표처럼 달라붙어 떼어내고픈 것이 아닐 수 없었다.

하면 할수록 나아진다는 평가를 듣기는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던 것이다.

어찌 그러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가수에게 있어 가창력 논란은 가장 큰 불명예인 것처럼 연기자에게 있어 연기력 논란도 큰 불명예라 할 수 있다. 그런 만큼 연기력 논란은 윤아에게 있어 마음을 아프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였다.

연기력 논란만 일어난다면 상관이 없다. 하지만 그녀를 슬프게 만드는 것은 가수로서도 종종 가창력 논란에 휩싸이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악플러들에게 이도저도 아니라는 평가를 듣게 된 만큼 연기력 논란만큼 그녀를 예민하게 만드는 요소는 없었다.

이번에는 잘할 수 있다, 라고 스스로 결심을 다지고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잘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마음을 굳게 다진다고 해도 그녀는 이제 데뷔한지 반년이 조금 넘은 신인에 불과하다. 자신의 인지도로 기사를 단숨에 찍어 누를 수 있는 것도 없고, 배짱도 없다. 그리고 창현처럼 마음이 강하지도 못하다.

그래서일까.

어느 정도 질문을 예상하기는 했지만 막상 질문을 받게 되자 마음이 크게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몸에 힘이 쭉 빠져 하마터면 마이크를 잡고 있던 것을 놓칠 뻔하기도 하였다.

흔들리는 그녀의 모습을 다른 기자들도 목격하였다.

그것을 본 기자들은 눈을 빛냈다. 그들에게 있어서 저렇게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기사거리를 제공해줄 뿐이었다.

어떻게든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윤아는 주변을 스윽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창현과 시선이 마주쳤다.

시선이 마주친 시간은 극히 짧았다. 하지만 그 순간이 윤아에게는 무척 길게 느껴졌다.

그와 시선을 마주치자 윤아는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창현은 더 심한 질문에도 여유를 가지고 돌파해나가는 모습을 보였는데 자신이 고작 질문 하나에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줄 수 없는 노릇 아닌가.

이를 꽉 문 윤아가 마이크를 들고는 대답했다.

“분명… 아직 미숙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앞으로 더욱 발전된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지켜봐달라고 하고 싶습니다. 저 자신을 믿고, 오디션을 보고 저를 뽑아주신 감독님을 믿습니다. 제 연기력에 의구심을 가진 분이 계시다면 지켜봐달라고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할 말은 여기까지입니다.”

오디션을 보고 통과했다는 말에 기자들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SM엔터테인먼트가 기획사의 힘으로 조연에 밀어넣은 것이라 생각했는데 자신들의 생각과 틀렸던 것이다.

“김지환 감독님! 윤아 씨가 오디션을 보고 캐스팅 되었다는 것이 정말입니까?”

자신에게 질문의 화살이 돌아오자 김지환 감독이 마이크를 들고는 말한다.

“맞습니다. 여덟 명의 배우들이 극중 백은설의 역할을 맡기 위해 오디션을 보았고, 그중에서 윤아 씨가 뽑히게 되었습니다.”

“오디션은 무슨 방법으로 본 것인지요?”

그 질문에는 묘한 저의가 깔려 있었다. 바로 SM엔터테인먼트가 뒤에서 모종의 압박을 주지 않았냐는 뉘앙스가 풍기고 있던 것이다.

그런 느낌이 물신 풍기자 김지환 감독이 눈썹을 꿈틀거렸지만 다른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여기서 흥분하면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침착한 안색으로 대답하기 시작했다.

“간략하게 설명을 했지만 백은설은 주인공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캐릭터로서 강력한 질투심을 보이는 캐릭터입니다. 윤아 씨는 백은설 캐릭터에 어울리는 모습을 훌륭해 소화해냈습니다. 가장 잘 어울리는 것 같아 뽑았을 뿐 다른 의도는 없습니다.”

그렇게까지 말을 하는데 더 이상 뭐라고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 뒤에도 여러 가지 질문이 흘러 나왔지만 대부분 어렵지 않게 답을 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특히 자신의 인지도를 새삼 기자들에게 확인시켜준 탓인지 창현에게 강한 질문을 하는 기자들은 없었다.

질문 시간이 모두 끝나자 다함께 사진을 찍게 되었다.

웃는 얼굴로 사진을 찍고 나자 마침내 드라마 제작 발표회는 끝을 맺을 수 있었다.

제작 발표회가 모두 끝나자 수고했다는 말과 함께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숙소로 돌아가고 싶어.’

모처럼 창현과 함께 있는 자리였지만 윤아는 당장 숙소에 돌아가고 싶은 충동이 강하게 들었다.

제작 발표회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자세히 몰라서 SM엔터테인먼트에서는 오후 스케줄을 넉넉하게 잡아놓은 상황이었다. 지금 돌아가면 다섯 시간 정도는 넉넉하게 쉬다가 라디오 스케줄을 하러 가면 될 테니 숙소로 돌아가 푹 쉬고 싶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심적 고생을 했기에 그런가 보다.

그런 윤아에게 창현이 조심스럽게 다가오면서 물었다.

“괜찮아요, 누나?”

“응? 으응…….”

윤아는 갑작스러운 창현의 접근에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윤아를 보면서 창현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말아요. 연기로 말하면 되는 거니까요.”

“그래야지. 그래야 하고말고.”

창현의 말에 어느 정도 위로가 되는 기분이었다.

복잡했던 마음이 한결 편안해지는 걸 느끼면서 윤아가 창현을 바라본다.

“창현아.”

“네?”

“나 힘낼 거다. 힘 잔뜩 내서 저런 질문 다시 나오지 못하게 만들 거야.”

그것이 윤아의 진심이었다. 오늘 보면서 정말 잘해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저런 말을 다시는 못하게 해줘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동안 곪고 곪아오던 상처가 터져서 그리 된 것이지만 창현이 자세한 내막을 알 리가 없다.

다만 윤아가 실의에 빠지지 않고 열심히 하겠다고 하니 응원하는 모습을 보일 뿐이었다.

“그래요, 그게 옳은 선택이에요. 실력으로 말하면 누구도 뭐라 말을 못할 거예요. 누나 결심이 옳아요.”

자신을 응원해주는 모습에 윤아가 미소를 지었다.

“응. 지켜봐줘. 혼자서 하는 것보다는 옆에서 지켜봐주는 사람이 있으면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럼 당연히 지켜봐야죠. 저도 그런 말이 나오는 건 싫으니 서로 노력해요. 알았죠?”

“응!”

창현도 자신도 비슷한 입장이라서 그런 걸까.

우울했던 기분이 한결 가시는 것 같았다.

그런 그들에게 근영이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야? 즐거워 보이네.”

윤아로서는 즐거운 순간에 끼어든 불청객이 아니었다. 마음 같아서는 훠이훠이! 하면서 손을 내젓고 싶었지만 눈치가 없는 창현은 친절한 미소를 지어보이면서 근영을 맞이한다.

“즐겁다기보다는 서로 연기력을 더 기르자고 다짐을 했다랄까요? 아무래도 저랑 윤아 누나는 가수 출신이라서 그 점에 더 엄격하잖아요.”

“윤아 누나? 그러고 보니 소녀시대랑 친하다고 했지. 이렇게 친근하게 부르는 걸 보면 많이 친해졌나 보네. 나는 그러고 보니 윤아 씨랑 인사도 못했는데.”

근영이 제작 발표회 시작 직전에 도착했기에 모든 배우들과 인사를 나누지 못했다. 게다가 윤아는 근영에게 경계를 하는 면이 있었기에 인사가 이루지지 못했던 차였다.

그 말에 창현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소개를 하기 시작하였다.

“윤아 누나, 인사하세요., 저도 오늘 알게 되었지만 이번 드라마를 함께 하게 된 문근영 누나에요.”

‘통성명을 한 지 하루도 안 됐는데 뭐 저렇게 친하게 부르는 거야.’

속으로 궁시렁거렸지만 그것을 내색할 수 없는 일. 쿨한 이미지를 보여야 했기에 윤아는 내색하지 않으며 근영에게 인사를 하였다.

“안녕하세요! 소녀시대의 윤아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선배님.”

외모적인 측면에서는 친구를 해도 괜찮을 정도였지만 나이는 근영이 세 살이나 더 많고 까마득한 선배였기에 공손한 자세를 취하는 윤아였다.

그녀의 인사에 근영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받았다.

“문근영이라고 해요. 앞으로 자주 볼 사이인데 편하게 해도 되겠죠?”

“물론이죠! 저도 언니라 불러도 될까요?”

“응. 그럼 편하게 대해. 나도 편하게 대할게.”

그러면서 순식간에 호칭 정립에 들어가는 두 여인이었다.

그러다가 무슨 화제가 나왔는지 갑자기 근영이 창현을 바라보고는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전에 너 멋지더라.”

이야기 내용을 모르던 창현으로서는 뜬금없는 말이었다.

갑자기 멋있다고 하는 말에 창현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네? 뭐가요?”

“그 기자가 했던 말 되받아치는 거 말이야. 그 기자가 연예계에서 악명 높은 기자라는 거 알고 있지?”

스캔들 전문으로 악명 높은 기자였지만 창현이 그걸 알 리가 없다. 평소에 그 분야는 석규가 다 알아서 처리했기에 창현으로서는 굳이 이름을 기억하고 있지 않았던 탓이다.

“그래요? 전 몰랐는데.”

“헐! 그걸 모른다고? 모르면 연예인이 아닌데?”

“그거 하나 모른다고 연예인이 아니라는 건 좀 그러네요.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러세요.”

담담하게 말하는 창현의 모습에 오히려 근영이 당황할 정도였다.

그래서 윤아를 바라보니 원래 그런 애라는 눈빛을 보낸다.

그러자 근영이 아! 그렇구나, 라는 식의 의미를 담아 고개를 끄덕이고는 창현에게 말했다.

“아까 전에 너의 위치를 말하고 그랬던 거 말하는 거야. 정말 세계에서 노는 사람답더라고.”

근영의 말에 창현이 무슨 상황인지 알아차리고는 피식 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세계는 무슨. 오만해보이지 않았을까 걱정이 되긴 하네요. 그때 조금 울컥하기는 했거든요.”

“오만하긴! 너 정도 위치면 그건 오만한 게 아니라 당연한 거야.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걸? 오히려 지나치게 겸손해보이더라?”

“그래요?

고개를 갸웃하며 창현이 묻자 근영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조금 오만해도 돼. 물론 오만이라는 단어보다는 자부심이라는 단어가 옳겠지? 그래야 사람들이 만만하게 보질 않거든.”

근영의 말에 창현은 웃음을 지으면서 대답했다.

“하는 만큼 대해주려고 그러는 거예요. 어차피 제가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더라도 대접해줄 사람은 다 대접을 해주더라고요. 다만 제가 겸손하게 하려고 하면 그걸 가지고 좀 얕보는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그 사람들에게는 자부심을 가진 모습을 보여주는 거죠. 제가 별로 티내는 거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라서 그래요.”

“멋져라! 혹시 여자 친구 있어?”

창현의 말이 근영의 마음에 단단히 든 듯하다.

그런 근영의 말에 윤아가 얼굴을 붉히며 견제에 나섰다.

“언니!”

“왜 소리를 지르니. 귀 아프잖아.”

엄살을 피우는 근영의 모습에 창현이 피식 웃음을 지었다.

“하하!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잘 몰랐는데 누나 참 친근하게 대하네요. 혹시 주변에서 넉살 좋다는 이야기 안하나요?”

“음! 종종 듣기는 해. 하지만 방금 말은 진심이니까 곰곰이 생각해봐.”

“농담도 참.”

“어휴!”

자신의 말을 농담으로 치부하는 창현의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근영이었다. 그리고는 기어코 창현에게 한마디 하고야 만다.

“너랑 사귀려는 사람은 고생 좀 하겠다. 설마 했는데 이렇게 둔하다니.”

“…그러게 말이에요.”

근영을 견제하려던 윤아는 그 말을 듣고는 동감이라는 듯 작게 중얼거렸다.

그렇게 드라마 제작 발표회는 끝났다. 하지만 그것은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그리고 드라마 제작 발표회는 창현과 윤아에게 연기력 논란에 벗어야 한다는 과제를 주었다.

그것을 어떻게 풀어나갈지는 지켜보아야 할 일이다.


드라마 제작 발표회가 이루어질 무렵, 태연은 회사에 들릴 일이 있어 오랜만에 SM엔터테인먼트에 들리게 되었다. 이제 소녀시대도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나가고 있는 만큼 그룹의 일정에 관련해서는 일대일로 이야기가 가능할 정도였다. 물론 멤버들이 원하는 방향의 것들이나 의견 제시는 불가능했지만 이렇게 리더로서 일대일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위치에 성장했다는 것만으로도 큰 성과였다.

“어서 오너라.”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SM엔터테인먼트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알고 있던 사람들이 반겨준다. 태연은 그들에게 공손히 인사를 하면서 곧장 회장실로 향한다.

향후 소녀시대의 행보에 관련이 있는 만큼 김영민 사장이 아닌, 이수만 회장과 직접 독대를 하는 것이었다.

띵동!

회장실로 향하는 태연의 가슴은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적잖게 만나보고는 하였지만 독대를 하는 경우는 거의 드물었기에 그렇다. 평소 사석에서 만날 때는 순규의 삼촌이어서 친근한 이미지를 주고는 하지만 일에 있어서는 무척 냉정한 모습을 보이는 이수만 회장이었기에 회장실로 향하는 태연의 긴장감은 점점 고조되고 있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자신이 왔다는 것을 알리자 예쁘게 생긴 비서가 잠시 기다리라는 말을 한다. 그리고 약 오 분여를 기다리자, 들어가라는 말이 들려왔고, 태연이 조심스럽게 회장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입가에 웃음을 짓고 있던 수만이 태연을 맞이하였다.

“오느라 수고하였다.”

“아니에요.”

“이리 앉아라.”

머뭇거리는 태연에게 자리를 권하는 수만이었다.

그리고는 태연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 뭘 마실 테냐?”

“전 평범하게 녹차로…….”

“녹차. 그래. 커피 한잔하고 녹차 한잔.”

인터폰을 눌러 비서에게 커피 한잔과 녹치 한잔을 주문한 수만이 태연을 바라보며 물었다.

“요즘 활동은 할 만하고?”

큰 스케줄에 관련된 것은 자신의 손을 거치지만 자잘한 것들은 그렇지가 않다. 그래서 대략적인 상황만 알고 있을 뿐, 세세한 상황들은 모른다. 아무래도 조카가 있는 그룹인 만큼 조금이라도 더 신경 써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에 수만은 무언가 부족한 점이 없을까 싶어 태연에게 물었다.

그 물음에 태연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스케줄이 많기는 하지만 다 저희들을 알리기 위한 것이니까 기쁜 마음으로 하고 있어요.”

태연의 말에 수만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 차근차근 인지도를 쌓아나가는 것은 훗날 너희들에게 이롭게 작용할 것이다. 세상의 모든 이치가 같은 법이다. 빠르게 쌓아올린 인기는 순간의 달콤함이 존재하지만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다는 단점이 있다. 그러나 탄탄한 토대를 쌓아놓으면 점점 급가속도로 인기를 얻게 되겠지. 당장 인기몰이를 하지 못한다고 해서 너무 실망하지 말고.”

수만의 조언에 태연은 한줄기 안도의 감정을 느끼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물론이에요. 지금도 적은 인기가 아닌 걸요.”

“그런 마음가짐이면 된다. 게다가 윤아가 이번에 드라마 캐스팅이 된 것 때문에 상당한 인지도 상승을 불러일으킬 것 같고. 요즘 들어 좋은 일만 겹치는구나.”

수만이 밝은 표정을 짓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바로 윤아가 출연하는 드라마에 창현이 캐스팅 되었기 때문에 그렇다.

드라마 출연을 권했던 것은 드라마 자체의 성공 확률이 높다고 판단했기에 그런 것이다. 그런데 그 드라마에 창현이 캐스팅됨으로써 엄청난 관심 집중을 받게 된 것이다. 이것은 엄청난 마케팅 효과를 누리게 만들 수 있다.

SM엔터테인먼트에서 마케팅에 가장 많은 돈을 들이는 것을 감안하면 돈을 들이지 않고 엄청난 마케팅 효과를 보게 된 셈이니 그만큼 돈을 절약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어디 그뿐인가?

막대한 양의 돈을 들이더라도 마케팅이 성공할 확률은 반반이다. 이것도 최대치로 잡아서 반반이지 어설프게 하면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것이 바로 마케팅이다. 그런 만큼 창현과 관련된 마케팅은 가장 확실하면서 돈이 들지 않은 것이다.

창현의 드라마 캐스팅으로 덩달아 소녀시대의 마케팅 효과를 띠게 되었으니 수만이 기쁜 안색을 숨기려 해도 숨길 수가 없었다.

드라마가 언급되자 순간 태연이 눈을 번뜩였지만 이내 잠잠해졌다. 아직 자신의 속내를 드러낼 순간이 아니었기에 그러는 것이다.

그 사이 수만의 입에서 앞으로의 활동 계획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우선 <Kissing You> 앨범과 <Baby Baby> 앨범이 나올 예정이다. 그리고 곧 있으면 원더걸스가 나올 테니 한동안 쉬면서 재충전 시간을 갖고 정규 2집 앨범을 준비하도록 하자.”

‘아, 역시 원더걸스가 나오니 활동을 그만두는구나.’

애초에 알고 있었지만 이야기를 듣는 순간 살짝 실망스러운 것은 어쩔 수가 없나보다.

마음 같아서는 원더걸스와 정면으로 붙어보고 싶지만 그 결과는 실로 참담하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무어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하는 수밖에.

수만이 재충전이라고 했지만 사실상 재충전도 재충전이 아니었다. 소녀시대라는 이름이 잊혀지지 않기 위해서는 꾸준히 예능 프로그램과 라디오 활동을 해야 했으니 말이다. 그래도 하루 종일 행사를 하는 것보다는 나았기에 충분히 체력을 회복할 틈은 있었다.

“네, 그러면 당분간은 휴식이라고 볼 수 있네요?”

“그렇다고 할 수 있지. 하지만 앨범 활동 휴식이지 방송 활동 휴식은 아니다. 요즘은 워낙 빠르게 급변하고 있는 걸 알고 있겠지? 얼굴이 나오지 않으면 잊혀지기 마련이다. 그러니 앨범 활동을 잠시 접어두더라도 방송에 꾸준히 나와야 한다.”

당연한 말이면서 한편으로는 잔인한 말이었다. 얼굴이 잊혀지지 않기 위해서는 꾸준히 방송 활동을 해야 한다는 말이었으니 말이다.

솔직히 힘든 면이 많았지만 어쩔 수 있겠는가.

이것이 다 자신들이 선택한 일인 걸.

조금만 더 쉴 틈을 달라고 말을 하고 싶었지만 애초에 이 독대는 자신이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그저 일방적인 통보를 전달받을 뿐이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지금 이 이야기를 멤버들이 거부감 없이 전해들을 수 있게 하는 것이 전부였다.

새삼 자신들이 아직 많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태연이었다. 언젠가는 반드시 성공하여 당당하게 의견을 제시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광고도 하나 계획 중이기는 한데 그것은 잘 모르겠구나. 일단 광고가 하나 들어올 수 있다는 것만 알아두도록 하여라.”

“네. 어떤 종류의 광고인데요?”

“핸드폰 광고다. 동방신기와 관련된 광고인데 아직 스케줄이 어떻게 될지 몰라서 이 부분은 조금 논의를 해봐야 하니 일단 광고가 있다는 것 정도만 알아두어라.”

아무래도 동방신기는 국내와 일본에서 알아주는 그룹이고 자신들은 신인이기에 맞춰갈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자신이 리더라서 이러한 사실을 먼저 접하고는 하지만 솔직히 이렇게 불확실한 것들을 전해 들으면 힘든 것은 사실이었다. 어떤 장단에 맞춰야 할지 몰랐으니 말이다. 그래도 일단 전해들은 이야기였기에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네, 그럴게요.”

“음! 그럼 내가 할 이야기는 다 끝났다. 할 이야기라도 있니?”

의례적으로 묻는 것이라는 것을 무엇보다 잘 알고 있는 태연이었다.

평소라면 없다고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했을 테지만 오늘은 할 이야기가 있다.

우선 단번에 이야기를 꺼내면 이상할 것임이 분명했기에 다소 망설이는 듯한 기색을 보였다.

“저기…….”

“음? 할 이야기가 있나보군. 이야기 해보아라.”

말 그대로 의례적으로 꺼낸 이야기였는데 태연이 무슨 할 이야기가 있는 듯하자 발언권을 주는 수만이었다.

태연이 리더가 된 것은 생일이 가장 빠른 것도 있지만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오랫동안 생각한 뒤 차분하게 자신의 의견을 내놓는다는 점도 한몫을 하였다. 게다가 책임감도 있고, 마냥 위에 서려는 것도 아닌, 친근함도 지니고 있어 리더에 무척 잘 어울리는 인물 중 하나였다.

그렇기에 수만도 태연을 상당히 신뢰하고 있었다. 태연이 선두에서 잘 이끌어준다면 소녀시대가 다른 방향으로 삐끗하지 않을 것이란 확신이 들었으니 말이다.

수만이 말할 기회를 주자 태연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주어진 기회를 손에 놓는 것은 바보나 하는 짓이었다.

태연이 곧장 입을 열었다.

“그 윤아가 참여하는 드라마 있잖아요.”

“그래, 윤아가 참여하는 드라마. 성공 가능성이 무척 높단다. 게다가 소녀시대의 이름을 앞세웠으니 너희들의 이름도 더 알려질 테고. 드라마에 관련된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느냐?”

태연의 입에서 드라마가 언급되자 다소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묻는 수만이었다.

그에 태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드라마가 곧 촬영을 시작하게 되면 사용될 OST도 녹음하게 될 것 같아서요.”

아직 촬영도 들어가지 않은 상황에서 드라마 OST를 논한다는 것은 시기상조였지만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거기에 희망을 거는 태연이었다.

수만도 눈치가 없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태연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금세 파악하였다.

“드라마 OST라… 설마 드라마 OST에 참여하고 싶어서 그런 것이냐?”

“…네. 한 번 경험해보았으니 경험을 쌓아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요.”

이미 한 차례 드라마 OST를 경험해보았으니 굳히기 형식으로 들어가려는 태연이었다. 회사에서도 이미 자신의 솔로 가능성을 본 만큼 가능성이 있다면 밀어줄 것이라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었다.

다만 자신의 개인 활동을 늘려달라는 말이었기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행동도 조심스럽게 하는 것이었다.

“흐음!”

태연의 말에 수만이 생각에 잠기는 눈치였다. 그 모습을 조심스럽게 살피면서 태연이 회장실에 들어설 때보다 더 긴장되는 것을 느꼈다.

그의 말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 될 것이라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잠시 후, 수만의 입이 열렸다. 그의 대답은 태연의 기대감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말이었다.

“아쉽지만 어려울 것 같구나.”

“네?”

어찌하여?

태연의 얼굴에 의문이 번져나갔다. 도대체 왜?

그러자 수만이 그 이유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하였다.

“이미 다른 사람이 드라마 OST를 하기로 해서 그렇다.”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되질 않는다.

드라마 OST를 하더라도 여러 명이 하지 않는가?

그런 만큼 자신이 충분히 들어갈 자리는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렵다니 아쉬움이 남았다.

하지만 의문이 생기는 것은 사실이었기에 태연이 조심스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혹시 다른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을까요?”

다른 사람이 하더라도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에 묻는 것이었다.

태연의 물음에 수만은 음! 하더니 태연에게 말했다.

“아직 확정은 되지 않았지만 수연이가 하기로 잠정적으로 결정이 된 상태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태연의 눈가가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지금 이게 무슨 말이란 말인가? 수연이라니? 설마 자신이 알고 있는 그 수연이란 말인가?

떨리는 목소리로 태연이 물었다.

“수, 수연이? 설마 제가 알고 있는 그 수연인가요?”

“그래, 너희 멤버 제시카를 말하는 게다.”

태연은 순간 현기증이 도는 것을 느꼈다.

도대체 언제 수연이 드라마 OST를 협의 봤단 말인가? 거의 스케줄이 겹쳐서 할 틈이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의아함을 느낀 태연이 수만에게 물었다.

“어, 언제요?”

“좀 됐다. 윤아가 오디션을 보기 전이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이렇게 부탁하는 경우는 처음이어서 의아하긴 했지만 태연이 너도 드라마 OST를 경험해보았으니 수연이도 경험해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수락을 했다.”

윤아가 오디션을 보기 전이라면 수영이의 생일 전이라는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훨씬 전인 삼주 정도 된 이야기란 말이었다.

어떻게 알고 윤아가 드라마 오디션을 보기도 전에 드라마 OST 참가 의지를 밝힌단 말인가?

무언가 있다는 것을 강하게 느끼는 태연이었다.

그녀가 아직도 진정이 되지 않은 듯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다면 벌써 다 결정된 건가요?”

“흐음! 그건 아니다. 일단 수연이로 정해진 상황이지만 곡을 받은 것은 아니어서 말이지.”

그렇다면 파고 들 여지는 있는 셈이었다. 확정되지 않았다면 수연을 설득하여 어떻게든 자신이 끼어드는 상황을 만들면 되니 말이다.

하지만 이어진 수만의 말은 태연의 표정을 팍 일그러지게 만들었다.

“자체적으로 해결해도 좋지만 수연이가 현의 곡을 받아서 부르고 싶다고 말을 해서 말이다. AA엔터테인먼트에 요청을 한 상황이긴 한데 기다려달라는 말만 들은 상황이어서 아직 결정 난 건 없다.”

“…….”

어떻게 자신의 생각과 이렇게 똑같을 수 있단 말인가.

태연은 이를 악 물었다. 수연이 선수를 쳤다는 것을 느낄 수 있던 것이다.

자신과 같은 생각을 했다는 것이 불쾌했고 자신이 선수를 빼앗겼다는 것이 불쾌했다. 이렇게 되면 자신이 파고들 틈이 없지 않은가?

복잡한 태연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수만이 말한다.

“그렇게 되었으니 이번 기회는 수연이에게 양보해야 한다. 알겠지?”

“…네. 전 이만 가볼게요, 삼촌.”

“그래, 조심히 가도록 하고.”

자리에서 일어선 태연이 고개를 숙이고는 회장실을 벗어났다. 그리고는 곧장 숙소로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눈에는 강렬한 눈빛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두고 보자, 정수연!”


숙소로 도착한 태연은 순간 멈칫하였다. 숙소 안으로 들어서니 오늘 스케줄이 없는 수연과 유리, 윤아, 주현이 있었다.

수연은 쉬는 날이라 그런 지 간단하게 씻은 뒤 소파에 앉아 TV를 바라보고 있었고, 유리는 화장실에 들어가 머리를 감고 있었다. 그리고 윤아는 방금 숙소에 도착한 듯 옷을 갈아입고 있었으며, 주현은 수연 옆에 앉아 TV를 보고 있었다.

윤아가 옷을 다 갈아입고 나오자 태연은 수연에게 시선을 주면서 입을 열었다.

“정수연.”

“응, 왜?”

본래대로라면 TV를 시청하는데 방해한 태연에게 시크한 모습으로 받아쳤을 테지만 태연의 기색이 심상치 않아 그녀를 바라보며 시선을 주는 수연이었다.

그녀가 자신을 바라보자, 태연이 말한다.

“너 드라마 OST 하기로 했다면서?”

자신이 내용을 밝히면 적어도 수연이 당황한 모습을 보일 줄 알았다.

하지만 수연의 표정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녀는 어떻게 알았냐는 식으로 태연을 바라보면서 물었다.

“그거 어떻게 알았어?”

“회장님께 들었어.”

“응, 그렇게 되었어. 나도 한 번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무난한 말로 넘어가려는 수연이었지만 호락호락한 사람이 어디 있는가? 윤아와 주현은 드라마 OST라는 말이 나오자 설마 하는 얼굴로 수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기에 태연이 결정타를 날렸다.

“드라마 OST는 상관없어. 그런데 우리 회사에서 만든 곡이 아니라 창현이가 만든 곡으로 부르고 싶다고 했다더라?”

“……!”

태연의 말은 거실에 있던 윤아와 주현의 반응을 불러일으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윤아는 놀란 시선으로 수연을 바라보고 있었고, 주현은 격앙된 어조로 수연에게 물었다.

“언니! 그게 정말이에요?”

설마 태연이 그렇기 깊은(?) 사실까지 알고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한 수연이었다.

그녀가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마침 머리를 다 감고 화장실에서 나온 유리가 수건으로 감싸고 나오면서 물었다.

“뭐야, 무슨 일 있어?”

제법 만만치 않은 입담의 소유자인 유리가 나오자 태연은 그녀의 힘을 빌리고자 그녀에게도 수연의 만행(?)을 말하였다.

“그러니까… 수연이가 창현이 곡으로 드라마 OST를 부르고 싶다고 했어. 이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유리야?”

“으응?”

태연의 말에 기이한 반응을 보이는 유리였다. 그리고 그녀의 시선이 한순간 허공에서 수연의 눈과 마주쳤다.

수연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고, 그에 따라 유리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가 사라졌다. 워낙 순식간이어서 아무도 그 표정을 보지 못했다.

“그렇단 말이지?”

“응! 우리에게 말도 하지 않은 채 혼자서 하려고 했어.”

순식간에 표정을 수습한 유리에게 태연이 동조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그녀의 참전을 종용한다.

그러자 살짝 눈썹을 찡그리던 유리는 태연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말을 꺼내놓는다.

“그런데…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니야?”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응?”

당연히 자신의 편을 들어주리라 생각했던 유리가 지금 무슨 말을 한 것이란 말인가?

순간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유리를 바라보자 그녀는 태연을 바라보면서 말한다.

“태연이 너도 드라마 OST를 한 적이 있잖아. 그런데 그거 가지고 뭐라고 하는 건 조금 아닌 것 같은데.”

“유, 유리! 네가 어떻게…….”

전신을 휘어감는 배신감에 태연이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그런 태연을 지원한 것은 다름 아닌 주현이었다.

그녀는 유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수연 언니는 회사의 곡이 아닌 창현이의 곡을 원했다고 했잖아요. 이건 뭔가 아니지 않은가요?”

제법 만만치 않은 공격이었다. 회사에서 충분히 퀄리티 있는 곡을 공급할 수 있음에도 굳이 창현의 곡을 원했다는 것은 사심이 작용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던 것이다. 그리고 수연의 드라마 OST 참여에 있어 가장 걸림돌이 되는 요소가 아닐 수 없었다.

빠져나가기 까다로운 소재였지만 유리가 괜히 잔머리의 대가라 불리는 것이 아니었다.

한순간 그녀는 이미 그 질문에 대한 타당한 대답을 마련해놓은 상황이었다.

안색 하나 바꾸지 않은 채 유리가 말한다.

“회사에서도 곡을 받을 수 있지만 가수라면 당연히 좋은 곡을 받는 것이 목표잖아? 창현이의 곡은 엄청난 퀄리티를 자랑하는 건 누구나 인정하는 건데 그럴 수 있지 않겠어? 수연이도 이왕 하는 거라면 좋은 곡으로 참여하고 싶을 테고 말이야. 주현이 너라면 그렇지 않겠어?”

역지사지. 너라면 과연 그렇지 않겠냐는 말로 역공을 가하는 유리였다.

그 말은 엄청난 파괴력을 지니고 있었다. 올곧고 항상 올바른 길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주현에게 있어 유리의 말은 반박할 여지를 주지 않고 있었다.

“그건…….”

어찌 자신도 그러지 않겠는가. 자신이 수연이었더라도 창현의 곡을 받고 싶다고 말했을 확률이 높았다.

그걸 알았기에 주현은 차마 말을 이을 수 없던 것이다.

“그치?”

주현이 말을 잇지 못하자 유리가 씨익 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하지만 아직 모든 난관을 넘어선 것이 아니었다.

윤아는 수연을 바라보며 섭섭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렇다고 해도 어떻게 저한테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수 있어요? 섭섭해요, 언니.”

그 말에 수연이 즉각 반응을 보였다. 태연의 말에는 담담한 모습을 보였지만 윤아에게는 곧장 사과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앞으로 창현과 드라마를 함께 할 윤아였기에 잘 보여두는 것이 나쁘지 않을 것이라는 그녀의 생각이었다.

“그건 미안하게 생각해, 윤아야. 태연이가 드라마 OST를 부른 것을 보고 나에게도 좋은 기회가 될 거라 생각했거든. 말을 하려고 했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까 늦게 되었네. 이해해줄 수 있지?”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여기서 자신이 그런 말을 하면 속이 너무 좁아보이지 않겠는가?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수락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미 결정된 걸 제가 이해하고 안 하고가 없잖아요. 하지만 이왕 하게 된 거 잘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것만큼은 진심이었다. 수연이 창현과 붙어 있는 것은 절대 반대! 였지만 잘되었으면 하는 것은 진심이었으니까.

연습생 생활을 가장 오래한 축에 속하는 수연이었기에 잘 되었으면 하는 마음은 진심이었다.

“고마워.”

가장 큰 방해꾼이라 할 수 있던 윤아를 설득해낸 수연이었다.

그러자 그녀의 시선이 주현에게 향했다.

그녀의 시선을 받은 주현이 움찔하면서 입을 연다. 이미 유리의 말로 인해 전의가 꺾인 상황이었다.

“잘하셨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말을 하지만 그것이 억지로 나온 말이라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수연에게 있어서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이제 마지막으로 태연만이 남았다.

수연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자 태연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그리고는 슬쩍 유리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유리가 시선을 외면한다.

유리가 자신을 도와주기만 했다면 수연을 궁지로 몰아넣을 수 있었을 텐데! 생각만 해도 이가 갈리는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으으!’

몸을 부들부들 떨던 태연이 이내 몸을 축 늘어뜨렸다. 자신이 혼자 난리를 친다 해도 이미 상황은 기울어버린 것이다.

결국 고개를 푹 숙인 태연이 수연에게 말한다.

“힘 내. 응원할 테니까…….”

축 처진 목소리는 듣는 사람도 처지게 만들었다.

수연은 살짝 미안한 감정이 들었지만 어쩌겠는가. 세상은 약육강식의 세계이고, 먼저 선점한 자가 우위에 서는 세상이었다. 그렇기에 미안한 감정이 들었지만 결코 자신의 결정을 물릴 생각은 없었다.

그랬기에 그녀는 활짝 웃음을 지으며 감사의 인사를 표한다.

“고마워.”

그것이 끝이었다. 과반수 이상의 멤버들을 납득시킨 이상 반발을 하더라도 억누를 수 있으니까.

수연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걸렸다.

그 모습을 보는 태연과 유리의 표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그렇게 수연은 드라마 OST의 자리를 무난하게 획득할 수 있었다.

이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암투가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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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마음을 울리는 음악 시즌2 제14화 +10 15.05.20 3,768 95 8쪽
50 마음을 울리는 음악 시즌2 제13화 +18 15.05.13 3,572 71 10쪽
49 마음을 울리는 음악 시즌2 제12화 +8 15.05.11 3,675 90 10쪽
48 마음을 울리는 음악 시즌2 제11화 +9 15.05.08 3,778 86 10쪽
47 마음을 울리는 음악 시즌2 제10화 +21 15.05.06 3,747 86 10쪽
46 마음을 울리는 음악 시즌2 제9화 +10 15.05.04 3,692 94 10쪽
45 마음을 울리는 음악 시즌2 제8화 +17 15.05.02 4,029 92 10쪽
44 마음을 울리는 음악 시즌2 제7화 +10 15.05.01 4,127 92 10쪽
43 마음을 울리는 음악 시즌2 제6화 +7 15.04.29 3,695 89 10쪽
42 마음을 울리는 음악 시즌2 제5화 +15 15.04.27 3,712 97 9쪽
41 마음을 울리는 음악 시즌2 제4화 +7 15.04.24 3,976 89 10쪽
40 마음을 울리는 음악 시즌2 제3화 +6 15.04.22 4,424 82 10쪽
39 마음을 울리는 음악 시즌2 제2화 +9 15.04.20 4,514 91 11쪽
38 마음을 울리는 음악 시즌2 제1화 +10 15.04.17 7,373 95 10쪽
37 ▲▲▲▲▲시즌2 시작!▲▲▲▲▲ +5 15.04.17 5,421 65 1쪽
36 마음을 울리는 음악 106장-108장 +8 15.04.16 6,409 106 230쪽
35 마음을 울리는 음악 103장-105장 +1 15.04.16 4,242 82 314쪽
34 마음을 울리는 음악 100장-102장 +2 15.04.16 4,411 68 229쪽
33 마음을 울리는 음악 97장-99장 +1 15.04.16 4,387 63 264쪽
32 마음을 울리는 음악 94장-96장 +1 15.04.16 4,376 80 230쪽
31 마음을 울리는 음악 91장-93장 +1 15.04.16 5,124 76 268쪽
30 마음을 울리는 음악 88장-90장 +1 15.04.16 4,926 98 332쪽
29 마음을 울리는 음악 85장-87장 +1 15.04.16 4,708 83 270쪽
28 마음을 울리는 음악 82장-84장 +2 15.04.16 4,911 85 261쪽
27 마음을 울리는 음악 79장-81장 +1 15.04.16 4,579 87 241쪽
26 마음을 울리는 음악 76장-78장 +1 15.04.16 4,752 74 244쪽
25 마음을 울리는 음악 73장-75장 +1 15.04.16 4,938 111 327쪽
24 마음을 울리는 음악 70장-72장 +1 15.04.16 4,754 82 200쪽
23 마음을 울리는 음악 67장-69장 +1 15.04.16 4,741 80 210쪽
22 마음을 울리는 음악 64장-66장 +1 15.04.16 4,953 75 282쪽
21 마음을 울리는 음악 61장-63장 +2 15.04.16 5,253 79 316쪽
20 마음을 울리는 음악 58장-60장 +1 15.04.16 5,244 74 186쪽
19 마음을 울리는 음악 55장-57장 +2 15.04.16 5,589 95 215쪽
18 마음을 울리는 음악 52장-54장 +1 15.04.16 6,504 110 349쪽
17 마음을 울리는 음악 49장-51장 +2 15.04.16 6,418 119 283쪽
» 마음을 울리는 음악 46장-48장 +3 15.04.16 7,155 149 347쪽
15 마음을 울리는 음악 43장-45장 +1 15.04.16 7,117 129 198쪽
14 마음을 울리는 음악 40장-42장 +3 15.04.16 8,904 183 320쪽
13 마음을 울리는 음악 37장-39장 +2 15.04.16 9,610 224 397쪽
12 마음을 울리는 음악 34장-36장 +8 15.04.16 9,520 189 322쪽
11 마음을 울리는 음악 31장-33장 +8 15.04.16 10,351 261 345쪽
10 마음을 울리는 음악 28장-30장 +5 15.04.16 10,654 260 277쪽
9 마음을 울리는 음악 25장-27장 +7 15.04.16 11,032 267 233쪽
8 마음을 울리는 음악 22장-24장 +4 15.04.16 10,917 261 198쪽
7 마음을 울리는 음악 19장-21장 +4 15.04.16 11,484 270 216쪽
6 마음을 울리는 음악 16장-18장 +5 15.04.16 11,536 242 163쪽
5 마음을 울리는 음악 13장-15장 +5 15.04.16 14,527 297 237쪽
4 마음을 울리는 음악 10장-12장 +8 15.04.16 13,727 352 171쪽
3 마음을 울리는 음악 7장-9장 +10 15.04.16 14,540 362 142쪽
2 마음을 울리는 음악 4장-6장 +11 15.04.16 16,820 421 120쪽
1 마음을 울리는 음악 프롤로그-3장 +47 15.04.16 29,872 545 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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