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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번 님의 서재입니다.

마음을 울리는 음악

웹소설 > 작가연재 > 팬픽·패러디, 현대판타지

김현우
작품등록일 :
2015.04.16 13:27
최근연재일 :
2015.06.01 17:02
연재수 :
5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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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96,4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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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4.16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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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82쪽

마음을 울리는 음악 64장-66장

DUMMY

제64장 재기의 시작




아침에 일어난 창현은 몸이 가뿐한 걸 느꼈다.

이렇게 상쾌한 아침을 맞이한 것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창현은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보다가 힐끗 시간을 확인한다.

이제 막 해가 떠오르고 있는 6시.

새벽 늦게 잠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평소 일어나던 시간에 일어났다. 어제 하루 종일 돌아다니고 늦게 잠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몸에 피로가 감돌기는커녕 오히려 힘이 남아 돌고 있었다.

“좋은데?”

심리적인 해방감을 느껴서일까. 피곤한 느낌은 들지 않고 무척 상쾌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뭐든지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의욕이 치솟고 있었다.

이게 다 태연 덕분이었다.

창현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걸렸다. 어제 있던 일들이 그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고 있었다.

“태연 누나 덕분이지. 나중에 확실하게 보답을 해야겠어.”

새삼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꼭 보답을 해야겠다는 마음이 가슴 속에 가득하였다.

자신을 위해서 여러 가지를 희생(?)하며 도와준 태연이었다. 사람 관계에 있어 그 진가는 진정 힘들 때 나타난다고 하지 않던가. 자신이 힘들어 할 때 발 벗고 나서 조언을 해주고 행동으로 실천해준 태연에게 무한한 고마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눈치가 제법 빠른 창현이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사리사욕을 채운 태연은 그야 말로 최고의 조련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자신의 이득을 확실하게 챙기면서 한편으로는 창현의 환심을 샀으니까.

간단하게 몸을 푼 창현은 곧장 씻은 뒤 옷을 갈아입었다. 오늘부터 촬영장으로 복귀한다.

촬영장으로 향하기까지 시간이 남아 있었지만 그 시간을 허투루 보낼 생각은 없었다.

어제 태연과 한 것들로 사랑이라는 것이 어렴풋 감을 잡으면서 그동안 막혀왔던 것이 일순간 뻥 뚫렸으니까.

그리고 쏟아지는 깨달음을 바탕으로 자신이 도전해보지 못했던 미지의 영역에 대해서 개척하고 도전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새벽 내내 곡을 쓰지 않았던가.

가사 또한 떠올라서 끄적인 것이 있었기에 아침에 시간 남는 것을 이용하여 곡을 만들어볼 생각이었다.

“제법 괜찮은 게 나올 것 같은데.”

치솟는 기대감에 창현은 미소를 지었다.


작업실에 도착한 창현은 자신이 어제 준비했던 것들을 바탕으로 곡을 만들어나가기 시작했다. 제법 바쁜 작업이었지만 이미 기반을 마련했기에 만드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미리 준비해둔 멜로디를 약간 손보면서 가사를 입히는 등 여러 가지를 해보기 시작한다.

그렇게 오전 시간을 내내 보내니, 한곡이 뚝딱 완성 되었고, 네 곡 정도가 어느 정도 틀이 잡혔다.

미니 앨범의 컨셉을 잡아놓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빠른 진척 속도에 창현은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좋아, 이 정도면 충분해.”

정작 완성한 것은 하나에 불과했지만 그것은 타이틀곡으로 삼을 것이었다.

아무래도 다른 곡들을 만드는 것보다 타이틀곡에 좀 더 정성이 들어가지 않겠는가? 책으로 치면 타이틀곡은 서문이었고, 사람으로 치면 얼굴이었다. 앨범의 첫 인상을 좌지우지하는 만큼 다른 곡들보다 알게 모르게 공이 더 들어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좀 더 가다듬기로 하고.”

촬영장에 갈 시간이 다 되어갔기에 창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통 한 시간 정도 먼저 도착해서 가고는 하지만 오늘은 좀 더 빨리 갈 예정이었다. 세희가 창현에게 전화를 하면서 점심을 먹었냐고 묻더니, 먹지 않았다고 하자 같이 먹자고 하면서 좀 더 일찍 찾아오기로 한 것이다.

점심시간으로 접어드는 정오가 될 무렵, 세희가 창현을 찾아왔다.

“창현아.”

“아, 누나 오랜만이에요.”

“괜찮은 거야?”

세희는 환한 미소를 지어보이는 창현을 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가 큰 슬럼프에 봉착했다는 이야기를 사장님에게 전해 듣지 않았던가. 은연중 그걸 깨닫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크게 도움이 되지 않자 세희는 자신의 한계를 은연중 느끼고 있었다.

현의 매니저로서 그의 문제점을 제대로 극복시켜줄 수 없다니.

좀 더 그와 친해졌고, 그의 능력을 십분 발휘할 수 있는 배경을 만들어주리라 결심했던 그녀는 무력감을 느껴야만 했다.

걱정이 담긴 세희의 목소리에 창현은 피식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 괜찮아요.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요.”

하지만 세희의 태도는 좀 더 단호했다.

일주일 동안 쉬었다고 해도 제대로 처방이 되지 않았다면 말짱 도루묵이다.

“안 돼. 슬럼프는 확실하게 극복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어. 힘들면 말하도록 해. 내가 책임지고 감독님에게 말해볼게.”

드라마도 중요하지만 다행히도 비축해놓은 분량은 제법 많다. 6화 7화까지 방영된 상태였고, 현재 13화까지 비축이 된 상태였으니까.

20화까지 촬영하려면 좀 더 촬영에 임해야 하지만 아직 시간이 어느 정도 남아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세희의 말에 창현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걱정은 감사하지만 괜찮아요.”

“정말 괜찮은 거야?”

“제가 괜찮지 않아 보여요?”

창현이 세희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그러자 맑게 빛나는 눈동자가 세희의 눈에 투영되었다.

그 속에 느껴지는 것은 슬럼프로 인한 한줄기 불안함이 아닌 무슨 위험에도 정면으로 맞설 수 있을 법한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세희는 절로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뭔가 달랐다.

여태까지 느껴졌던 것과 확연하게 다른 느낌이 느껴졌다.

자신의 그 기운을 세희가 느꼈다는 걸 깨닫자 창현은 피식 웃음을 지으며 그녀에게 말한다.

“괜찮죠?”

“그래, 괜찮아 보이네. 다른 사람에게 걱정 끼치지 않으려고 억지로 괜찮은 척 하는 거 아니지?”

“그건 한 번으로도 충분해요. 일주일 동안 푹 쉬어서 괜찮아졌으니까 안심하셔도 되요.”

피식 웃으면서 말을 하는 그의 모습에서 여러 감정이 묻어나왔다. 세희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정말 변한 게 있다고 느꼈다. 예전이라면 다른 사람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고 거짓말이라도 했을 텐데 자신의 약점을 서슴없이 말하고 당당히 맞서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기에 그렇다.

자신의 아픈 곳을 숨기는 것은 얼핏 보면 성숙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정말 성숙한 것은 자신의 아픈 점을 당당히 드러내고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다.

철부지의 세상물정 모르는 용기가 아닌, 세상의 어려움에 당당히 맞설 수 있는 용기야 말로 진정한 성숙한 사람이 낼 수 있는 것이었으니까.

“성장했네.”

세희의 말에 창현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요?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오늘 드라마 촬영을 하더라도 길게 하지 않을 거예요. 감독님은 아마 제가 슬럼프를 완벽하게 극복했다는 것을 알지 못할 테니까. 하더라도 간략하게만 하고 끝날 확률이 높아요. 그렇게 되면 오후에 시간이 남겠죠? 여름쯤에 해서 미니 앨범을 발매할까 싶은데 그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 나눌 게 있으니 누나가 사장님하고 약속을 잡아주었으면 해요. 약속이 있다면 가장 빠른 시간 안에 잡아주시면 되고요.”

“알았어. 그렇게만 하면 되지?”

“네, 그럼 이제 가도록 해요. 어제 저녁만 먹고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았거든요. 여러 가지를 분주하게 했더니 배가 고프네요. 다 먹고 살자고 하는 건데.”

배를 문지르며 익살스러운 표정을 짓는 창현이었다.

그 모습에 세희는 피식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성장했다고 해도 그 본 모습은 바뀌지 않았다고 생각하면서.

잠시 창현을 바라보던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먹고 살자고 하는 거니까 어서 가도록 하자. 최 매니저님도 점심을 드시지 않으셨다고 하니까.”

“그래요? 그럼 가도록 하죠.”

자리에서 일어선 창현은 소지품을 챙긴 뒤 움직였다.

세희도 그런 창현의 뒤를 따랐다.

최 매니저는 창현이 국내에서 활동할 때 배속된 로드 매니저였다.

드디어 그 성이 밝혀지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점심을 먹은 창현은 평상시와 달리 제법 아슬아슬한 시간에 촬영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창현이 탑승한 벤이 나타나자 촬영 스태프들은 다소 긴장감 어린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슬럼프에 빠졌었고, 김지환 감독의 불호령을 받아 촬영장을 이탈하면서 수많은 루머를 낳았던 것이다.

이번에 제대로 하지 않으면 드라마 일정이 상당히 타이트하게 변할 수 있었기에 창현에게 시선이 집중되는 것은 간단했다.

벤에서 내린 창현은 스태프들에게 인사를 하지 않은 채 조용히 연기자 대기실로 향했다. 그리고는 감정몰입을 위해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세희는 스태프들에게 돌아다니면서 양해를 구했다.

“현이가 감정 몰입을 위해서 가급적 다른 사람과 접촉을 하지 않으려는 거니 오해하지 말아주세요.”

이미지 나빠질 것을 염려하는 것이 아닌 쓸데없는 루머를 양산할까 싶어 미리 언질을 준 것이었다.

스태프들은 그런 창현의 상태를 이해해주었다.

연기자라면 감정 몰입을 위해 어느 정도 시간을 두는 경우가 종종 있으니까.

그동안 워낙 깍듯하게 인사를 먼저 해왔기에 은연중 인사를 바라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보통 톱스타들은 먼저 인사를 하는 경우가 많지 않은데 말이다.

그러다 보니 새삼 현이 대단한 위치에 서 있는 인물이란 느낌이 들었고, 그런 그가 감정 몰입을 위해 따로 시간을 가질 정도라면 보통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대로 임하는 느낌이 든다랄까.

어느덧 시간이 흐르고 창현이 촬영에 임해야 할 시간이 되었다.

세희는 시간을 확인하고는 눈을 감은 채 이어폰을 귀에 꼽고 감정 몰입을 하고 있는 창현에게 다가갔다.

“창…….”

손을 뻗어 살짝 그의 몸을 흔들려고 했던 세희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그녀가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창현이 감았던 눈을 살며시 뜬 것이다. 그리고 귀에 꼽힌 이어폰을 뽑아들고 mp3의 전원을 끄면서 세희에게 말한다.

“시간이 되었네요. 가도록 해요.”

평소 창현의 분위기와는 다소 다른 느낌이었다.

묘한 위화감이 느껴진다랄까.

하지만 결코 나쁜 느낌은 아니었다.

사람을 압도하는 박력이 실려 있어서 세희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하였다.

“으응, 알았어.”

혹시 긴장하고 있다면 조언이라도 해줄 요량이었는데 그의 모습을 보니 그럴 필요가 느껴지지 않았다. 혼자서도 잘 해낼 것 같은 든든한 느낌이 그에게서 느껴졌기에.

창현은 그대로 걸음을 옮겨 김지환 감독이 있는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김지환 감독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창현을 보고서는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일주일 동안 잘 쉬었나?”

지난 일주일 동안 수많은 루머가 퍼지면서 가장 많은 피해를 본 것이 바로 그였다. 감독이긴 하나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그에게 불호령을 내렸다는 것이 사람들의 비난을 샀던 것이다.

하지만 김지환 감독은 그런 사람들의 반응을 무시하듯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창현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잘 쉬었습니다. 다른 잡생각이 들지 않고 푹 쉴 수 있어서 체력도 비축할 수 있었습니다.”

“체력만 비축 된 건가?”

김지환 감독은 분명 그때 창현에게 약점을 지적해준 적이 있었다.

그것을 극복했느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그 물음에 창현이 묘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한다.

“그건… 촬영에 들어가고 나서 감독님이 직접 지켜보시면 아실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래?”

김지환 감독이 눈을 빛내며 창현을 바라보았다.

무척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이었다. 그 짧은 시간에 약점을 완벽하게 극복하기라도 했단 말인가? 무리라고 생각이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자각했다면 극복을 할 수도 있다 생각했다.

모든 것은 연기에 들어가 보면 알게 될 것이라.

“그럼 연기로 확인하도록 하지.”

“그러지요.”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창현이었다.

그리고 촬영은 시작되었다.


촬영이 시작되는 부분은 창현이 근영에게 고백을 하는 장면이었다.

이 장면을 제대로 처리해야만 드라마 내 본격적인 러브 라인이 확립되면서 극중 내 백은설이 질투의 화신으로 변모한다.

드라마 내에서 일종의 터닝 포인트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었기에 무척 중요했다.

근영은 오랜만에 보는 창현에게 반가운 표정을 지으면서 무어라 말을 하려고 했지만 멈칫하였다. 곧 촬영을 시작할 상황인데 창현의 표정이 심각하게 느껴질 정도로 경직되어 있던 것이다.

‘저렇게 힘이 들어가면 제대로 연기가 안될 텐데.’

걱정의 마음이 앞섰지만 일주일 동안 성과가 있었다고 말을 하는 그를 믿기로 하였다.

제대로 촬영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

창현은 결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번 장면을 제대로 해결해야만 자신이 진정으로 슬럼프를 극복했다 할 수 있다. 곡을 만들고 가사를 쓰는 것은 성공했지만 아직 드라마에 관련된 부분에 대해서는 슬럼프를 극복했다고 확언할 수 없었다.

드라마를 제대로 해내야 정말로 슬럼프를 극복했다고 할 수 있으니까.

본격적인 촬영에 들어가려 했지만 창현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저대로는 안 돼.’

근영은 창현의 표정이 지나치게 굳어있다는 것을 느끼고는 무어라 말을 하려다가 멈칫하였다.

나이는 많지 않지만 그녀는 연기 경험이 무척 긴 연기자. 촬영에 들어가는 순간 창현의 기질이 묘하게 바뀌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심각하게 표정을 굳히고 있었지만 그 느낌은 방금 전과 사뭇 달랐던 것이다.

방금 전까지만 하여도 창현은 어딘가 경직된 면이 없지 않아 있었고, 보는 사람마저도 심각하게 느껴질 정도로 강한 압박감을 느끼고 있는 듯하였다.

그런데 지금 그의 모습은 약간 달랐다.

결연함이 감돌기는 하되 압박감을 느낀다보다는 역경을 극복하겠다는 듯한 의지가 느껴졌던 것이다.

마치 지금 드라마 상황에 어울리는 듯한 모습을.

‘가만, 드라마 상황에 어울리는 분위기?’

근영은 창현이 드라마에 아주 어울리는 분위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니 그가 연기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제대로 임하려고 마인드 컨트롤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사이 창현의 연기가 시작되었다.

결연한 표정을 한 채, 자신들의 앞을 가로막는 모든 난관을 물리칠 의지를 보이면서.

“우리에게 수많은 장애물이 존재한다고 해도 나는 오직 너만 사랑할 자신이 있어. 생애 처음으로 찾아온 이 감정을 나는 소중히 하고 싶고 그 대상인 너를 영원이 아껴주고 싶어. 나의 고백을 받아줄래?”

지금 이 대사에 창현의 모든 정화가 깃들고 있었다.

자신이 느낀 사랑이라는 감정을 모두 끌어올리며 근영에게 쏟아붓고 있던 것이다.

사랑이라는 것에는 딱히 해답이 없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자신의 내면에 사랑이라는 감정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모르고 있었을 뿐이니까.

자신이 태연과 함께 하면서 느꼈던 순간적인 두근거림과 아껴주고 싶은 마음, 안아주고 싶은 마음, 함께하고 싶은 마음을 한데 담아 목소리로 발산하고 있었다.

그 음성에 느끼고 있는 감정이 묻어나오는 것이 창현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그의 노래가 사람의 마음을 울릴 수 있지 않은가.

감정을 목소리에 배어나오게 하는 그의 마력은 누구도 따라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경지에 도달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고백을 하는 창현의 음성에는 그러한 감정이 그대로 느껴지고 있었다.

화아악!

진심이 담긴 창현의 고백에 근영은 지금 이 순간이 드라마인 것도 잊은 채 얼굴을 붉혔다.

원래 대본대라로면 그 고백에 멈칫하면서 고민하는 기색을 보여야 한다. 하지만 지금 근영은 그 고백에 얼굴을 붉히며 고민에 빠진 것이다.

방향이 어긋난 것 같았지만 김지환 감독은 그것을 제지하지 않았다.

지금 장면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어울렸기에.

잠시 머뭇거리는 근영. 창현의 고백을 받아들여야 할지 시간대로 끌어야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약간 비틀렸다.

이렇게 달콤하고 멋진 고백을 가지고 시간을 끈다는 것은 그의 연기를 죽여 버리는 행동이었다.

연기 경험이 풍부한 배우답게 근영은 살짝 반응을 선회하여 대답한다.

“나를… 그 역경에서 지켜줄 거지?”

자신보다 다섯 살 어린 연하에게 마음이 두근거리는 상태라니.

미친 사람처럼 거세게 날뛰는 심장박동을 느끼며 근영은 창현을 그윽한 눈으로 바라본다.

그러자 창현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다가가 살짝 포옹을 해준다.

그것이 그 장면의 끝이었다.

“컷!”

김지환 감독의 외침에 창현과 근영이 포옹을 푼다. 그러자 근영은 속으로 아쉬움을 느꼈다. 마냥 어리고 주변 여자들을 꼬이게 만드는 천연 바람둥이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그 품이 포근하고 좋지 않은가?

‘이래서 여자들이 빠져드는가 보네. 칫!’

과연 대단하다고 생각하면서 근영은 창현에게서 떨어진다.

김지환 감독은 다소 경직된 표정을 지은 채 창현을 부른다.

“현.”

“네, 부르셨습니까, 감독님.”

자신은 최선을 다했다. 그럼에도 NG가 나고, 더 높은 것을 바란다면 그것은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는 일이다. 자신의 모든 힘을 발휘하였기에 창현은 담담한 얼굴로 김지환 감독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런 창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김지환 감독은 돌연 고개를 숙이면서 창현에게 사과를 하였다.

“미안하다.”

“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창현을 비롯하여 모두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여태까지 원로 배우를 포함하여 다른 배우들에게 잘못된 점이 있으면 버릇을 말아먹었다 할 정도로 혹독하게 몰아붙이던 그가 고개를 숙인 것이다. 너무나 의외였고, 짐작이 가지 않는 행동이었기에 배우 스태프 할 것 없이 경악한 표정을 짓고 있는다.

김지환 감독은 그런 창현에게 자신이 사과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사실 나의 요구는 너에게 무척 벅차던 것. 당장 그것이 극복하기 힘듬에도 불구하고 네게 무리한 요구를 하였다. 당연히 그에 너는 짜증을 낼 수도 있고 화를 낼 수도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내 말에 순순히 따르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보란 듯이 그것을 극복해냈지. 나한테는 흐뭇하고 보기 좋으면서 한편으로는 네게 상처가 될 말을 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을 금치 못하고 있다. 그래서 이렇게 사과를 하니 받아주었으면 좋겠다.”

창현을 걱정하는 마음, 그리고 미안한 마음이 구구절절 느껴지는 말이 아닐 수 없었다.

“…….”

그러한 말에 창현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다 이내 피식 미소를 지어보이고는 김지환 감독에게 말했다.

“잠시나마 원망을 한 적은 있어도 미워한 적은 없습니다. 저를 혼내는 이유 중 하나가 더 좋은 장면을 촬영하기 위한 것이란 걸 알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다음부터는 다른 사람이 있을 때 그렇게 혼내지 말아주세요. 그때 다른 마음보다 부끄러운 마음이 더 컸거든요.”

“용서해주니 고맙다. 앞으로는 유의하도록 하마.”

“네, 감사합니다.”

창현이 사과를 받아들이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말하자, 김지환 감독도 흔쾌히 그 말을 받아들였다. 확실히 그 부분은 애매하였기에 종종 불만으로 불거지는 부분이기도 하였다.

촬영장 분위기는 다시 화기애애하게 변했다.

가장 큰 문제점이 되던 장면을 NG 한 번도 없이 통과하였기에 김지환 감독을 비롯하여 배우들과 스태프들도 의욕을 가지고 임하기 시작했다. 목에 걸린 가시가 빠진 느낌이었다.


“창현아, 대단해!”

윤아는 창현의 고백 장면을 보고는 상기된 안색을 감추지 못한 채 감탄을 터뜨리기에 바빴다.

마치 자신이 직접 고백을 듣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그의 대사! 너를 위해서라면 이 세상의 모든 역경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 말을 하는 그의 말에 윤아는 하마터면 빨려 들어갈 듯한 느낌을 받아야 했다.

아마 이 방송분이 나가게 되면 대한민국은 뒤집히게 될 것이다.

그 말에 창현은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그렇게 대단하지는 않지만 최선을 다했어요.”

“어떻게 갑자기 그렇게 발전할 수 있는 거야? 예전하고 너무 달라져서 놀랐어.”

윤아는 놀랍기만 하였다.

일주일 동안의 변화치고 창현의 실력은 한 수 정도 높아진 게 아니라 단숨에 몇 수가 높아진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김지환 감독의 불호령을 받을 당시에는 고백을 하더라도 무미건조한 면이 있었고, 정말 상대방을 좋아해서 고백한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것을 윤아가 느낄 정도였으니 세세한 것을 따지는 김지환 감독은 오죽하겠는가.

하지만 이번에 바뀐 그의 모습은 마치 옆에서 달콤한 고백을 듣는 듯한 느낌을 물씬 풍기고 있었으니 그야 말로 일취월장이라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하, 열심히 수련을 했죠.”

확실히 태연과 사랑의 감정을 일깨우는 수련을 하기는 했다.

제3자의 눈에는 그저 데이트로 보이는 수련이었지만.

창현의 말에 윤아가 눈에 빛을 내면서 그를 졸랐다.

“그래? 어떤 수련인지 나한테 좀 가르쳐주면 안 돼? 나도 요즘 잘 막혀서 힘이 드는데…….”

요즘 연기가 벅차다는 것을 느끼는 윤아로써는 창현의 슬럼프 타파가 마냥 부럽기만 하였다. 기쁜 마음도 있었지만 제 코가 석자다 보니 어떤 방법으로 슬럼프를 극복했는지 알고 싶었다.

태연과 만남을 모르는 윤아는 창현이 무언가 대단한 비책을 마련하여 비밀 수련을 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하, 이건 연기에 딱히 도움이 되지 않아요. 저는 연기보다는 다른 것이 부족해서 그 부분을 단련한 거거든요.”

태연이 말하길,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과의 만남을 외부에 발설하면 안 된다고 하였다.

그게 밝혀지면 창현이 너는 은혜를 원수로 갚는 천하의 배은망덕한 놈이 된다나 뭐라나.

무시무시한 폭언을 아끼지 않는 그녀의 모습에 창현은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 또한 스캔들거리를 줄 수 있는 그 만남을 외부에 발설할 생각이 전혀 없었으니까.

“그래도, 좀 가르쳐주라. 응?”

사실 윤아도 연기를 하는데 상당한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이제 드라마가 후반부로 접어들면서 그녀가 맡은 백은설 역할이 질투의 화신으로 변모를 해야 하는데 그 한순간의 계기를 제대로 마련하지 못하여 지지부진한 모습을 보이고 있던 것이다.

다른 장면들을 촬영하고 있지만 질투의 화신으로서 변신하는 모습이 어설펐기에 김지환 감독은 몇 번 장면을 촬영하다가 개선이 되지 않는 것을 보고는 좀 더 머리를 식히고 오라 말을 한 상태였다.

정체 상태에 빠졌으니 윤아는 창현이 슬럼프를 어떤 방식으로 타파했는지 알고 싶었다.

그 슬럼프 타파를 위해 태연이 사사로이 조련 스킬을 이용하여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봤다는 것을 전혀 모른 채.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이 지금 상황처럼 어울리는 경우가 없으리라.

창현은 그런 윤아의 부탁을 애써 외면하였다.

“미안해요, 누나한테는 적합하지 않아서 알려드릴 수 없어요.”

“칫!”

그 방법이 제법 대단한 것이라 생각하면서 윤아는 한 발자국 물러섰지만 전혀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창현이 이렇게 나올 정도로 정말 대단한 방법이라 생각할 뿐.

‘무슨 비법인지 반드시 전수받고 말겠어!’

속으로 굳게 결심을 하는 윤아.

창현에게 비법(데이트)을 전수받고 싶은 윤아였다.


“축하한다.”

석규는 환한 표정을 지으며 창현에게 말했다.

창현이 예상했던 것처럼 촬영은 그리 오래하지 않았다.

그가 세희에게 언급했던 것처럼 오랜만에 왔고, 가장 어려운 장면을 촬영하였기에 한숨 돌리자는 의미에서 오늘 촬영은 일찍 끝내주었던 것이다.

세희에게 연락을 받은 석규는 만남을 갖자는 창현의 말에 의아함을 느끼면서 한편으로는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세희가 말하길, 창현의 슬럼프는 어느 정도 극복되었다고 했는데 그것이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그 또한 알고 있었기에 그렇다.

물론 마음속으로는 슬럼프를 극복했으면 좋다고 생각했지만 세상사 그리 쉽지는 않은 법이다.

그런데 창현이 막혔던 그 부분을 완벽하게 해냈고, 슬럼프마저도 극복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자 석규는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한창 꽃이 피어야 할 그의 재능이 슬럼프로 인해 저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무척 불안함을 느끼고 있었는데 자신의 불안감을 종식시키듯 창현은 훌륭하게 슬럼프를 극복한 것이다.

석규로써는 기쁠 수밖에 없었다.

창현은 석규의 말에 다소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하하, 어려웠지만 그래도 극복할 수 있었어요.”

“그래, 잘했다. 설마 이렇게 단기간에 해낼 줄 몰랐어. 궁금해서 그런데… 누구의 도움을 받았느냐?”

“네?”

조력자의 정체를 묻는 석규의 모습에 창현이 순간 움찔하였다.

설마 석규가 그것을 물어볼 줄 몰랐기에 그렇다.

그 모습에 석규는 무언가 내막이 있다는 것을 짐작했다. 그리고 순간 자신이 틀린가 싶어서 고개를 갸웃해야 했다.

‘내가 틀렸나?’

자신이 알기로는 창현과 가장 가까운 여자는 주현이었는데 그녀에게 딱히 도움을 얻은 것 같지가 않았던 것이다.

창현이 사랑에 대한 감정을 깨닫게 되었다면 여성의 도움이 컸을 확률이 무척 농후한데 그러한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의아한 표정을 짓는 석규의 모습에 창현도 고개를 갸웃하면서 긴장하였다.

설마 자신이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서 슬럼프를 극복했으리라 유추할 거라 그는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긴장하는 그의 모습에 석규가 미소를 지어보였다.

“너는 보통 자신의 일을 혼자서 해결하려고 하지. 스스로 해결하려는 태도가 좋기는 하지만 정작 큰 일이 생겼을 때는 혼자서 해결하는 것이 무척 어렵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받고는 하지. 이렇게 단기간에 해결했다는 것은 주변의 도움이 작용했다는 뜻일 테고. 말하기 싫다면 말하지 않아도 좋다. 하지만 네가 어려울 때 그렇게 도움을 준 사람에게 고마운 마음을 잊으면 안 된다. 사람 관계는 정말 자신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그 진가가 나타나는 법이니까.”

“네, 물론이에요. 저도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거든요. 확실하게 감사의 인사를 하려고요.”

“그래, 그러면 됐다. 슬럼프 극복을 축하한다. 그런데 무슨 일로 나를 보자고 한 것이냐?”

창현이 말하려고 하지 않았기에 석규도 굳이 깊게 파고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자신을 찾은 이유에 대해서 물었다. 세희에게 그냥 슬럼프 극복 이야기만 들었지 창현이 만나자고 한 이유에 대해서는 듣지 못했다.

그 말을 들은 창현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아, 다름이 아니라 미니 앨범을 기획하고 있는데 아버지랑 이야기를 나누려고요.”

“미니 앨범 말이더냐?”

석규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창현이 슬럼프를 극복한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다.

당장 봇물처럼 밀려들어오는 CF 제안을 수락하고 그의 이미지에 어울리는 것들을 골라내면서 마음 같아서는 앨범 준비를 했으면 싶으니까.

앨범을 낸지 벌써 다섯 달이 되어가니 제법 텀이 생겼고, 정규 앨범이 아닌 미니 앨범이라면 올 여름 시즌을 노리고 나와도 괜찮을 듯 싶었다.

순식간에 머릿속에서 여러 계산을 마친 석규가 말했다.

“미니 앨범이라면… 여름 시즌이 적합할 듯 싶은데?”

“네, 맞아요. 여름 시장을 노리고 있어요.”

자신의 의도를 단번에 눈치 채는 석규의 모습에 나직이 감탄사를 흘리는 창현이었다. 역시 사업을 하면서 느는 것은 눈치라더니 자신이 말만 하면 그 의도를 정확하게 짚어낸다.

감탄하는 창현의 모습에 석규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척하면 척이지. 게다가 방학 시즌이기도 하니까 음반 시장이 활성화 될 때이기도 하고. 그 부분에 대해서 나는 찬성이다. 여태까지 너의 슬럼프를 걱정하여 최대한 자제하자는 모습을 보였지만 슬럼프를 극복한 이상 너의 앞길을 막을 건 없으니까.”

“네, 감사해요. 미니 앨범 곡들은 현재 절반 가량 준비해둔 상황이에요.”

“잠깐만. 그보다 우선 CF 건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도록 하자. 이것을 다 해결한 다음에 속 시원하게 앨범 이야기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으니까.”

앨범을 준비하려면 새로운 시도를 곁들어야 했기에 제일 마지막에 이야기하는 것이 옳았다. 지금 석규는 창현에게 CF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를 할 생각이었다.

그간 드라마로 인해 한창 인기몰이를 하고 있고, CF계 블루칩으로 떠올라 있는 상황이었기에 약간의 정리가 필요했던 것이다.

“현재 CF 제의는 무척 많이 들어와 있다. 마음 같아서는 모두 해야겠지만 너무 많은 종류를 촬영하게 되면 이미지 소비가 빠른 법. 그렇기에 몇 개만 골라서 하는 게 좋을 듯 싶다.”

“그냥 아버지가 골라주시면 안될까요?”

외부에 자신의 이미지가 어떻고 그런 걸 잘 모르는 창현이었다. 근래 들어 슬럼프 때문에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없었고, 드라마 성공을 직접 몸으로 체험하지 못했기에 무엇이 적합하고 부적합한지를 알지 못한다.

그 말에 석규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더니 말한다.

“그럼 내가 추천을 해주도록 하마. 이 부분은 괜히 이야기를 꺼냈군. 그럼 CF 이야기는 나중에 하도록 하고 앨범에 대해 이야기를 하도록 하자.”

화제는 다시 앨범에 관한 것으로 넘어왔다.

창현은 우선 자신이 생각해놓은 컨셉을 석규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이번에 슬럼프를 겪으면서 한 가지를 깨달을 수 있었어요. 여태까지 저는 여러 가지 곡을 써왔지만 사랑에 관련된 이야기는 의도적으로 피해왔다는 것을요. 그래서 이번 음악의 컨셉은 사랑으로 하되 이성에게 적극적인 구애를 해보는 노래를 준비했어요.”

“적극적인 구애라? 무척 좋은데? 설마 좋아하는 여자라도 생긴 것이냐?”

갑자기 컨셉이 구애가 되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당혹스러울 법도 하지만 창현은 피식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요. 다만 이번에는 살짝 다르게 해보려고요. 좀 더 대중성에 무게를 둬서 제 음악만 추구할건지 아니면 대중성도 추구해볼지 결정을 해보려고요.”

앨범 시장은 점점 더 나빠지고 있었다.

월드스타로서 그 네임 벨류를 발휘하여 막대한 양의 앨범을 팔았지만 그것이 영원이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다. 현으로써 다시 비상을 하기 위해서는 미국으로 가 앨범을 성공하고 금의환향을 해야 하기에 그렇다.

정규 3집 앨범이 그러하였고, 이번 미니 앨범이 마지막 약발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이 앨범을 발매할 때쯤은 미국에서 귀국한지 딱 일 년이 되는 시점일 테니까.

“그리고 미국에도 가봐야 할 것 같아요. 마음 같아서는 한국에 있고 싶지만 이곳은 자국에서의 성적보다 외국에서의 성적을 더욱 중요하게 여기잖아요.”

“그래, 맞다. 그렇기에 네가 지속적으로 미국에서 활동을 해야 한다는 명제가 붙지. 이번 미니 앨범을 끝내고 나서 미국으로 가는 것도 괜찮을 듯 싶구나. 적극적으로 지원을 해줄 터이니 네 마음대로 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고.”

약간 독불장군식으로 자신만의 음악을 추구하던 창현이었다.

대 성공을 거두었기에 무어라 말을 하지 않고 있지만 가수가 지속적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대중성을 담아야 하는 것도 불가피하다.

음향총서의 위력을 발휘하여 많은 사람을 사로잡았지만 대중성도 한 번쯤 시험해볼 때가 된 셈이다.

“이번에는 지원도 좀 팍팍 해주세요. 뮤직비디오도 멋지고 화려하게 촬영을 하고, 앨범에도 돈 좀 많이 투자하고 이벤트도 많이 하는 형식으로요. 언론 플레이도 많이 해주시면 좋고요.”

한 번 놀아볼 거 거하게 놀아보고 싶다 생각하는 창현이었다.

어제 여러 생각을 하면서 창현은 한 가지 생각에 머물게 되었다.

자신의 이름값이 너무 높아져서 마음껏 노래를 하기 힘들어졌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방송 3사에서 컴백 무대를 처음으로 모셔가기 위해 다투다가 결국 전부 무대에 서지 않게 되지 않았던가? 만약 자신의 이름값이 낮았다면? 그런 일은 애초에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이름값이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더 좋다. 그렇지만 너무 높아진 이름값으로 인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하지 못하게 되면 없는 것만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번에는 복잡하게 머리를 굴리지 않고 정면돌파를 하여 해볼 생각이었다.

자신 또한 은연중 이름값에 무게를 느끼고 있던 것을 훌훌 털어버리고 즉석에서 떠오른 대중적인 이 느낌을 발산하여 대중성을 시험해보고 싶었고.

창현의 말에 석규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이 아버지의 선물이라 생각하고 네가 원하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지원하도록 하마. 뮤직비디오에도 원하는 만큼 투자를 해주고, 앨범도 고급스럽게 해주마. 그리고 이벤트도 많이 열고, 기자들에게 일러 언론 플레이도 해주겠다. 그런데 어떤 방식의 대중성이기에 네가 대중성을 논하는 것이냐?”

냉철하게 사업가 입장에서 말하면 이렇게 막대하게 지원을 해줘도 회사에 엄청난 이익이 남는다.

게다가 대중성을 노린다고 했으니 성공만 하면 기존의 앨범들과 비교 할 수 없을 정도의 돈을 벌어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내면에서 무슨 변화가 있었는지 모르지만 오늘의 창현은 적극적인 면이 있었다.

그동안 약간 수동적이었던 걸 감안하면 흐뭇한 변화가 아닐 수 없다.

대중성을 묻는 석규의 말에 창현은 슬쩍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했다.

“제가 말한 대중성은 사실 대중성인지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이번에는 약간의 변화를 주려고 하는데 그게 대중성이라 생각이 들어서요.”

“어떤 건데?”

시장을 보는 면은 창현보다 석규가 낫기에 그의 말을 들어보고 조언을 해주려는 생각이었다.

창현은 잠시 멈칫하며 자신이 구상하던 것을 털어놓았다.

“여태까지 앨범은 단순히 귀를 즐겁게 만들었다면 이번 앨범은 귀는 물론이고 눈까지 즐겁게 만들어주고 싶어서요.”

귀는 물론 눈까지 즐거운 음악!

그것은 노래는 물론이고 퍼포먼스까지 곁들이겠다고 선언한 것과 다름 없었다.

그리고 퍼포먼스를 잘 해내면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폭발력을 발산할 수 있게 되리라.

더불어 여성 팬들이 급증하는 효과를 누릴 수도 있을 테고.

탱구의 조련을 받아 여성 팬들의 마음을 조련하려는 계획이 은연중 드러나는 창현이었다.


한편, 소녀시대 숙소 내에서는 믿기 힘든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소녀시대 멤버들은 약 열흘 전, ‘태연의 혁명’이라 불린 사건에서 그녀가 보여준 신위에 대해 똑똑히 기억을 하고 있었다.

가히 수연을 압도하는 아우라와 윤아를 압도하는 괴력, 그리고 주현을 뛰어넘는 폭발력과 수영에 버금가는 말발을 앞세운 그녀는 단신으로 여덟 명의 멤버들을 압도하는 면모를 보인 적이 있다.

그때부터 다른 멤버들은 태연을 대하는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하위 랭크에 속하던 그녀였지만 그 일이 있은 뒤로 멤버들 모두가 태연의 눈치를 보는 일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실로 놀라운 신분 상승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 보이고 있는 일은 멤버들의 눈을 끔뻑거리게 만들었다.

“태연아 나 물 좀.”

“목말라? 알았어, 얼음물로 준비해올게!”

연습을 하고 온 뒤 효연이 태연에게 물을 부탁하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그녀는 재빨리 컵을 들고 얼음을 넣은 뒤 물을 따라서 효연에게 가지고 온다.

차가운 얼음물이 뿜어내는 냉기에 효연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고마워, 태연아.”

“으응. 앞으로 얼마든지 부탁해. 내가 도와줄 테니까.”

“그래.”

태연의 대답에 싱긋 미소를 짓는 효연이었다.

“…….”

그 모습을 보며 멤버들은 한동안 멍한 표정을 짓고 있어야 했다.

현재 소녀시대 구도는 수연을 정점으로 효연과 윤아가 포진되어 있는 상태. 그런데 수연을 압도한 태연이 효연의 앞에서 기를 피지 못하고 있으니 의아할 수밖에 없던 것이다.

“효연아, 탱구가 왜 너한테 저러는 거야?”

태연을 마음껏 다루는 것이 궁금했는지 수영이 효연에게 묻는다.

그러자 태연이 눈에 보이지 않게 흠칫하더니 효연을 힐끗 본다.

때마침 효연 또한 태연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녀는 피식 웃음을 지으면서 수영에게 대답해주었다.

“태연이가 뭘? 그동안 우리 사이가 좀 어색했던 거 같아서 좀 더 친해지기로 했어. 별 일이 아니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말라고.”

당장 여기다가 태연이 했던 행동을 말하고 싶었다. 입이 근질근질했지만 이미 약속을 했기에 말을 하지 않았다. 자신은 제법 신의가 있었으니까. 무엇보다 말을 번복하게 되면 태연이 지금 같이 자신을 대할 리가 없다.

게다가 좀 더 재미있는 상황을 만들기 위해서는 비밀을 지켜줘야 할 이유가 있고.

‘후후! 이 재미있는 걸 다른 사람과 공유할 수 없는 노릇이지.’

“뭔가 있는 것 같은데…….”

수영은 의구심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말했지만 그것을 효연이 말해줄 리 없었다.

“그렇게 말해도 나오는 건 없어. 뭐가 있다고 묻냐.”

“끙! 그러다가 뭐 나오면 각오해.”

“없는데 각오할 필요도 없지.”

“쳇!”

효연이 쉽게 넘어오지 않자 나직이 혀를 차는 수영이었다.

더 이상 캐내지 못했기에 수영은 고개를 저으면서 물러났고, 수연이 슬그머니 효연에게 다가오더니 은밀하게 묻는다.

“정말 아무 일도 없던 거지?”

“…아무 일도 없어. 있으면 너한테 말을 했겠지.”

지금 수연이 최종보스로서 군림할 수 있는 이유는 효연이 뒷받침을 해주기에 가능한 일. 효연 또한 새로운 권력 구도에 재미를 느끼고 있어서 협력을 하고 있지만 등을 돌리면 상황이 재미없게 돌아갈 수 있기에 수연도 함부로 하지 못한다.

“그래. 무슨 일 있으면 말해줘.”

효연이 그렇게 말을 하자 수연은 더 이상 무어라 하지 못한 채 순순히 물러난다.

그리고 그녀가 방으로 들어가자 윤아가 효연에게 다가오더니 말한다.

“언니, 저한테는 말해주면 안 돼요?”

“내가 뭘?”

마치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듯 묻는 윤아의 모습에 효연이 흠칫하며 묻는다.

그러자 윤아는 눈을 빛내며 좀 더 가까이 다가가며 말한다.

“다른 언니들을 속일 수 있어도 저는 속일 수 없다고요. 초딩 듀오 멤버로서 언니를 무척 잘 알고 있는데 제가 언니의 반짝이는 눈을 놓칠 것 같아요? 자, 순순히 말해주세요.”

윤아의 말에 효연은 속으로 경악했다. 설마 윤아가 그것을 눈치 채고 자신에게 말을 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매번 장난을 치곤 하였기에 무난하게 넘어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런 눈치를 보여주다니.

속으로 경악을 하면서 효연은 고개를 저어보였다.

“아무 일도 없었다니까.”

“에이! 정말 이러기에요?”

“그렇게 말해도 난 해줄 말이 없어.”

“언니, 어떻게 같은 초딩 멤버로써 이러기에요? 그동안 다른 언니들에게 초딩 취급을 받으면서 버틸 수 있었던 게 언니 덕분이었고, 나도 언니를 각별하게 생각했는데 나한테 숨기다니… 전 정말 슬퍼요.”

그러면서 처연한 표정을 짓는 윤아는 슬쩍 보기만 해도 절로 동정심이 들 정도였다.

효연은 그런 윤아의 마음에 순간 갈등이 일어났다. 그녀의 말처럼 같은 초딩 멤버로써 알게 모르게 서로에게 위안을 받은 것이 적잖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미 태연에게 말을 하지 않기로 약속을 한 상황. 약속을 저버리고 윤아에게 말을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때, 효연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아, 좀 다르게 해볼까?’

입가에 슬쩍 미소를 머금은 효연이었다. 제법 재미있는 생각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리고 생각을 정리하자, 효연은 윤아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윤아야, 너 요즘 연기가 잘 안된다고 했지?”

효연의 말에 순간 고개를 갸웃한 윤아였지만 요즘 잘 풀리지 않던 것이 떠올랐는지 시무룩한 표정을 지은 채 말한다.

“네. 요즘 잘 풀리지 않아서 감독님한테 자주 혼나고는 해요.”

“뭐 때문에 잘 되지 않는데?”

“극중에서 심경 변화로 성격이 뒤바뀌는 모습을 보여야 하는데 잘 되지가 않아요.”

극중에서 주연인 지훈과 예린이 사귀기로 했고, 그것을 본 은설은 본격적으로 질투의 화신으로 변해 두 사람의 사이를 방해해야 한다.

평소 도도한 아가씨의 모습과 두 사람의 사이를 필사적으로 찢어놓으려는 질투의 화신을 소화해야 하는데 그것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오디션 때보다 못하다는 이야기를 듣자 윤아는 이만저만 속앓이를 하는 게 아니었다.

“음! 왜 안 되는데?”

윤아의 말을 들은 효연은 자신의 예상대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물음을 던지자, 질문을 받은 윤아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부끄러운 듯 대답한다.

“질투의 감정을 몰입해야 하는데 잘 되지가 않아요…….”

아무래도 말하기 꺼려지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질투의 감정이 몰입되지 않아 연기에 막히다니.

하지만 요즘 이래저래 신경 쓸 일이 많고, 창현 또한 슬럼프를 겪는 모습을 보아서 그런지 쉽게 몰입이 되지 않았다.

효연은 그런 윤아의 말을 듣고는 자신의 예상이 맞았다는 걸 깨달았다.

‘역시. 더 재미있게 만들 수 있겠어, 후후!’

그리고 자신의 계획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속으로 음흉한 미소를 지어보인 그녀는 윤아에게 말한다.

“음! 그 부분은 내가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아.”

“정말요?”

처음 자신이 묻던 것은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자신이 처한 근래 상황이 좋지 못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고, 어떻게 타파해야 할지 생각만 해도 한숨이 나오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효연이 방법을 가르쳐주겠다고 하니 윤아로써는 눈이 빛날 수밖에 없었다.

고개를 끄덕인 효연이 말하기 시작했다.

“내가 말해주려던 건 윤아 네가 일부분이나마 눈치 챈 거랑 연관되어 있어.”

“연관이요……?”

무슨 뜻인지 몰라서 고개를 갸웃하는 윤아.

효연은 그 물음을 풀어주지 않은 채 자신의 말을 이어나간다.

“음, 일단 한 가지 물어볼게. 창현이 요즘 바뀐 거 없어?”

“바뀐 거요? 글쎄요? 잘 모르겠는…… 아!”

고개를 가로젓던 윤아는 무언가 생각이 났는지 눈을 크게 떴다.

그녀가 말하는 바뀐 점이 무엇인지 눈치 채지 못해 고개를 갸웃하다가 그녀가 말하는 것이 창현의 슬럼프에 관련된 것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눈치 챈 것이다.

효연은 창현이 슬럼프를 타파한 걸 알고 있었단 말인가?

윤아의 표정에 효연은 미소를 지었다.

“후후후! 내 생각이 맞나 보네. 바뀐 게 있지?”

“네, 있어요. 그거 어떻게 아셨어요?”

감탄 섞인 윤아의 눈빛에 효연은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괜히 의기양양한 기분이 들었다.

속으로 미소를 지은 효연은 윤아에게 운을 떼기 시작한다.

“음! 내가 해주려는 이야기는 비밀로 해야 하는데… 윤아 너만 알고 있어야 해. 알겠지?”

비밀을 강조하는 면이 사람의 호기심을 더욱 재촉한다.

윤아는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주먹을 불끈 쥔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었기에 대박 특종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이에요! 저만 믿으세요. 저 입 무거워요.”

“그래, 윤아 너만 믿고 말할게.”

그러면서 효연은 짐짓 주변에 누가 있는 것 마냥 휘휘 둘러보더니 윤아에게 슬그머니 말한다.

“창현이는 아마 슬럼프에서 벗어났을 거야. 맞지?”

“네, 맞아요. 역시 언니는 알고 계셨군요.”

효연이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이 확실해지자 윤아는 눈을 빛내며 그녀를 바라본다.

궁금증이 가득한 그녀의 눈빛을 한껏 즐긴 효연이 친절하게 말해주었다.

“창현이가 슬럼프를 벗어날 수 있었던 것에는 태연이랑 관련이 있어.”

“네? 태연 언니랑요?”

그게 무슨 말인가? 슬럼프에 벗어난 것이 태연과 관련이 있다니?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윤아의 눈빛에 효연이 말해준다.

“음! 뭐라고 해야 할까. 태연이가 먼저 선수를 쳤다고 해야 할까나? 내가 말해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

그렇게 말을 한 효연은 더 이상 설명을 해주지 않는다.

그녀가 한 말이라고는 태연이 선수를 쳤다는 이야기 뿐.

“…….”

아리송한 이야기였기에 윤아는 생각에 잠긴다. 그리고 효연의 말을 낱낱이 분해하기 시작했다.

다른 이유에서 그녀가 태연을 지칭하며 앞서 나갔다고 할 리가 없다. 그렇다면? 무언가 숨은 내막이 존재하는 것임이 분명했다.

도대체 숨은 내막이 무엇이기에 그러는 것일까.

태연은 분명 효연에게 친절하게 대했다. 그것은 그녀의 오랜 경험상 무언가 켕기는 것이 있어서 그런 것이다. 그렇다면 효연은 태연의 약점을 쥐고 있을 확률이 높고, 그것으로 인해 효연에게 아무 말도 못하는 것이리라.

약점을 잡혔다는 것. 그리고 효연이 말해준 태연이 선수친 것.

마지막으로 창현의 슬럼프 타파.

무언가 절묘하게 연결되기 시작했다.

태연이 선수를 치고 효연에게 들켜서 약점을 잡혔다. 그리고 태연이 선수친 모종의 행동 때문에 창현이 슬럼프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절묘하게 연결되었다.

그렇다면 태연이 창현에게 선수를 쳤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자신과 함께 촬영장에 있었기에 창현의 약점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태연이었다. 창현은 사랑이라는 감정에 전혀 몰입을 하지 못해 있었고, 그로 인해 김지환 감독이 호통을 쳤던 것이다.

그런데 그 슬럼프를 타파했다는 것은 사랑에 대한 일종의 실마리를 잡았다는 것.

그것이 태연의 선수 친 것과 관련이 있다면 사랑에 관련된 것이 아니겠는가.

그 순간 윤아의 눈이 경악으로 부릅 뜨였다.

“태연 언니가 설마…….”

추측에 추측으로 이어진 윤아의 추론 능력은 한편의 소설을 창작하고도 남을 정도의 상상력이 동반되었다.

그리고 상상력이 첨가된 그녀의 상상은 진실에 가깝게 완성되었다.

결국 태연은 자신에게 한마디 언급도 없이 창현에게 선수를 친 것이다.

설마 그런 행동을 하다니! 사랑에 대해 알려줬다면 자칫 이렇고 저렇고 아응아응한 것들을 했을 수도 있지 않은가!

자신에게는 제지를 하더니 정작 자신은 뒤통수 치는 행동을 하다니!

‘용서 못해!’

진실과 상상의 사이에서 여러 장면을 상상하던 윤아의 눈이 뒤집히기 시작했다.

그것은 가히 질투의 여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눈치 챘군.’

그 모습을 보며 효연은 윤아가 대충 내막을 눈치 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어떤 상상을 하고 있는지 가히 표정이 좋지 않았지만 효연이 알 바는 아니다.

그저 상황이 더 재미있어졌다고 생각할 뿐.

‘난 네가 창현이랑 키스 한 거 말하지 않았어.’

약속은 지킨 셈이었기에 양심이 찔리지는 않았다.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까.

눈이 뒤집힌 윤아를 보면서 막혀있던 연기가 잘될 것이라 효연은 의심치 않았다. 실제 상황이 대입되어 연기를 펼치게 되면 리얼리티는 넘쳐날 테니까.

약속을 지키면서 윤아의 문제점도 극복시켜주었다.

효연은 스스로 자화자찬하였다.

‘난 참 대단해.’

그녀의 양심은 둥글둥글하였다.


“…….”

주현은 고민에 빠졌다.

지금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그녀는 고민하고 있었다.

그녀가 고민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바로 기회를 틈타 창현과 만남을 갖고 그의 슬럼프를 자신이 극복할 수 있게 도와주려는 생각을 하고 있던 것이다.

하지만 다른 언니들이 반강제적으로 맺어버린 공동 조약 때문에 함부로 움직임을 보일 수 없었다. 자칫 잘못하다가 언니들에게 걸릴 경우 자신은 상상하기도 끔찍한 침몰을 겪을 것이다.

침착하게 기회를 엿보아야 하는데, 그 기회가 좀처럼 오지 않았다.

우선 창현이 아직 어떤 상태인지 정확하게 모를 뿐만 아니라 자연스럽게 둘이서 만날 시기를 놓쳤으니까.

일주일 동안 휴가를 받았다면 그 안에 만남을 가졌으면 될 터인데 그 휴가가 끝나서 더 이상 만나기가 힘든 상황에 처해버린 것이다.

주현으로서는 안타까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해야 되지?”

그녀가 가장 경계하고 있는 인물은 수연이었다.

자신의 장점을 은연중 간파하고 사전에 차단을 해버린 그녀의 심기는 놀라울 정도로 무섭고 섬뜩하였다.

게다가 은연중 그녀를 충동질한 미영과 유리 또한 만만치 않았다. 결국 그녀들의 행동은 자신이 먹지 못할 떡을 남도 못 먹게 만들어버린 것이니까.

만약 그 계략이 자신에게 미친다면?

틀림없이 고생을 하게 될 것임이 분명했다.

“적으로 삼으면 까다롭지만… 그렇다고 그냥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어.”

이렇게 숨을 죽이고 있는 것에 해결책은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이 가만히 있으면 다른 언니들이 한 걸음씩 전진할 것이란 걸 알고 있었기에.

결국 자신이 치열한 투쟁을 해야만 무언가를 얻더라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현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자신의 행동이 전혀 뒷북이라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한 채.

이미 태연이 재미를 다 보고 앞을 내다보며 조련하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석규와의 대화는 무척 유익한 것이었다.

적극적으로 나서는 창현의 모습에 석규는 그가 슬럼프에 벗어난 것을 크게 기뻐하면서 지원을 아끼지 않기로 단단히 약속을 하였다.

창현으로써는 상당히 설명을 해야 할 것이라 각오하고 있었는데 한시름 덜은 셈이다.

“일단 내가 준비를 끝마쳐야 한다는 점인데.”

자신이 무언가를 요구하더라도 먼저 스스로가 준비를 갖추어야 확실하게 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걸 그도 알고 있는 바였다.

그렇기에 당장 해야 하는 것은 미니 앨범에 수록할 곡들을 완벽하게 채우고 컨셉을 잡아야 한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내 경험으로는 좀 부족한데.”

여러 가지를 기획할 수는 있지만 자신이 해보지 않은 분야에 도전한다는 것은 무척 큰 모험이었다.

자칫 잘못된 방향으로 설정하면 모든 것을 다 뒤집어야 할지도 모르니까.

그리 되면 금전적으로 막대한 손해를 볼 수 있고, 자신이 계획한 것 또한 초기화시켜야 할지도 모른다.

♩♪♬

그때, 창현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응?”

의아한 표정을 지은 창현이 핸드폰을 들었다. 그리고 액정에 전화한 사람의 이름을 확인하니 주현이었다.

창현은 잠시 고개를 갸웃하다가 곧장 전화를 받아들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창현이 맞지?

“네, 저 맞는데요, 주현 누나. 그동안 잘 지냈어요?”

-그건 내가 해야 할 말 같은데.

주현은 창현이 슬럼프를 겪고 있다는 말을 들었기에 그의 상태가 걱정되었다.

그 말에 창현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제가 뭘요? 전 잘 지내고 있으니 누나한테 안부를 묻는 게 당연하죠.”

-그래?

전화를 하고 있던 주현의 음성에는 의아함이 가득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슬럼프를 겪고 있다면 목소리에 우울함이 깃들어있어야 정상인데 창현의 음성에는 전혀 우울함이 섞여 있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웃음기가 배어 있어서 주현이 의아할 정도였다.

웃음을 짓던 창현은 주현이 무슨 의도로 전화를 한 것인지 깨닫고는 묻는다.

“제가 슬럼프 겪고 있는 것 때문에 연락하신 거예요?”

-으응. 힘들 것 같아서 힘이 되어주려고 연락했지…….

“이젠 괜찮아요.”

-슬럼프, 극복한 거야?

창현의 말에 주현이 살짝 놀란 목소리로 묻는다.

극복하기가 쉽다면 그것이 슬럼프라 불릴 리 없다. 그만큼 극복하기 힘든 것으로 알려진 것이 슬럼프인데 그것을 극복했다고 하자 주현은 의아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네, 귀한 분이 도움을 주셨거든요.”

태연의 이름을 언급할 수 없어서 살짝 다른 이름으로 말을 하는 창현이었다.

그 말을 들은 주현은 아쉬움이 담긴 목소리로 말한다.

-그래… 슬럼프 극복했다니 다행이네. 그런데 내가 도움이 되어주지 못한 것 같아서 미안하기도 하고.

“괜찮아요. 이렇게 연락을 해준 것 자체만으로도 제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데요. 누나한테는 정말 고마움을 가지고 있으니 그런 말은 하지 마세요. 제가 정말 고맙게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알았죠?”

주현이 창현을 위로해주려다가 오히려 입장이 바뀌어서 창현이 주현을 위로해주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의 말에 주현은 아쉬운 마음을 추스르면서 창현에게 당부하였다.

-으응. 만약 또 힘든 일이 생기면 나에게 말해. 그때는 꼭 도움을 줄 수 있도록 노력할 테니까.

“알았어요.”

다른 사람들은 도움을 받지 못해서 안달인데 오히려 이쪽은 도움을 주지 못해서 몸이 달아있다. 그 마음 씀씀이가 너무나 흐뭇하여 창현은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자신이 혼자가 아니란 느낌을 다시 한 번 받는 순간이었다.

그 뒤 주현과 여러 이야기를 나눈 창현은 통화를 끝마칠 수 있었다.

통화를 끝낸 창현은 마음이 훈훈해졌다.

“좋네. 이 상태면 힘차게 임해볼 수 있겠어.”


그렇게 흐뭇함을 느끼고 있는 창현에 반해 주현의 표정은 묘했다.

얼핏 보면 일그러진 것 같기도 하였고 다르게 보면 안도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였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묘한 표정이 그녀의 얼굴에 감돌고 있었다.

창현과 통화를 끝낸 주현은 핸드폰 폴더를 덮으며 중얼거렸다.

“슬럼프를 극복했다고……?”

주현은 창현의 말을 선뜻 믿기 힘들었다. 하지만 창현이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슬럼프를 극복한 것이다.

창현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주현은 그가 아직 슬럼프의 늪에 빠져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혼자서 벗어나기 힘든 것이 바로 슬럼프라는 것이기에 제법 길게 이어질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슬럼프를 극복했단다.

이것은 분명 누군가의 도움이 작용했을 확률이 높았다.

주현의 눈이 스산하게 가라앉았다.

“누군가가 도움을 준 게 분명해. 그렇지 않으면 창현이가 슬럼프를 극복했을 리 없어.”

도대체 누가 창현의 슬럼프 극복에 도움을 준 것일까.

석규를 비롯한 가족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통화를 했을 때 석규 또한 창현을 걱정하는 마음이 가득하였다. 그렇다는 건 가족이 슬럼프 극복에 도움을 주었을 확률은 그리 높지 않다는 이야기였다.

“분명 이성이야. 창현이한테 도움을 준 것은.”

그것은 미래 예지에 가까운 본능적인 감각이었다.

흑화 한 서로로는 창현에 관련된 불길한 느낌에는 미래 예지에 가까운 능력을 발휘한다.

사랑에 대해 슬럼프를 겪던 그에게 도움을 준 것은 당연히 이성일 터. 그리고 슬럼프가 쉽게 극복되지 않는 만큼 상당히 쇼킹한 방법을 사용했을 확률이 높다.

지극히 예상이지만 선례를 감안해볼 때 그럴 확률은 무척 높았다.

“조사를 해봐야겠어.”

효연이 정보를 흘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알아서 냄새를 맡은 주현이었다.


“흐미, 하필이면 이 시간이야.”

창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본격적으로 퍼포먼스를 곁들인 앨범을 발매하기로 마음을 먹은 그는 전문적인 한 사람에게 조언을 구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아직 겪어본 적이 없는 자신으로서는 무턱대고 임하다가는 크게 데일 수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기에 전문가의 조언을 구해보고, 대략 생각해놓은 방향의 가닥이 맞는지 알아볼 생각이었다.

그래서 한 사람과 만남을 가지려고 부탁을 했는데, 시간이 밤밖에 안된다고 해서 결국 시간을 밤으로 정했던 것이다.

그것도 저녁 시간이 아닌 늦은 밤이었다.

키가 크기 위해 일찍 자는 창현에게 있어 늦은 시간의 약속은 쥐약과도 같았다.

“뭐, 이제 키도 충분히 컸으니까.”

무럭무럭 커버린 키는 어느덧 177cm에 도달해 있었다. 이 정도면 그렇게 큰 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하여 작은 편에 속하는 것도 아니었다. 아직 자신이 클 시간은 충분하니까 이제 일찍 자는 것에 목숨을 걸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약속 시간은 밤 11시였다.

그것도 어디 조용한 곳에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무척 시끌시끌한 곳이었다.

정체를 숨기고 갈 수도 없고, 굳이 정체를 숨기라는 말도 하지 않았기에 이래저래 고민을 하던 창현은 결정을 내렸다.

“뭐, 정체를 숨기지 않아도 된다 했으니 그러면 되겠지. 까짓 거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닐 테니…….”

그렇다고 정체를 드러내고 거리를 활보할 수 없는 노릇이다.

자칫 잘못하면 엉뚱한 사건에 휘말릴 수도 있으니까.

결국 창현은 로드 매니저에게 도움을 청했다. 제법 늦은 시간에 있는 약속이었고, 사사로이 로드 매니저에게 부탁을 하는 것이 좀 그랬지만 창현이 만나는 상대의 이름을 듣자 오히려 눈을 빛내며 제발 함께 하자고 이야기를 하였다.

약간 미안한 감이 없지 않아 있던 창현은 로드 매니저의 반응에 표정을 풀 수 있었다.

숙소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10시쯤 되자 슬슬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약속 장소에 늦지 않기 위해 주차장으로 향하자, 로드 매니저가 벤이 아닌 2005 SM3를 몰고 왔다. 굳이 이목을 집중 시킬 이유도 없을 뿐만 아니라 두 사람만 탈 차이니 만큼 크기가 작아도 괜찮을 거란 로드 매니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2005 SM3가 초라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차가 있는 것 하나만으로도 능력 있어 보였으니까.

차에 탑승한 창현은 곧장 약속 장소에 향하기 시작했다.

“다 도착했다.”

“네.”

약속 장소는 곱창집이었는데, 제법 큰 곳이었고, 주변에 주차할 공간도 제법 있었다. 주말이 아닌 평일이어서 그런지 주차할 공간이 아슬아슬하게 남아 있어서 다행히도 차를 댈 수 있었다.

일단 바깥에서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까 싶어 모자를 눌러쓴 창현이 차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약속 장소인 곱창집으로 향했다.

“저기 있네.”

안으로 들어선 창현이 고개를 휘휘 젓고 있을 무렵, 옆에 있던 로드 매니저가 창현에게 말했고, 가리킨 방향으로 시선을 옮기자 오늘 만나기로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창현의 시선이 그곳에 닿자, 자리에 앉아있던 사람도 그를 알아보았는지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리고 손을 흔들며 큰 목소리로 외친다.

“어이, 여기야. 어서 와.”

가게 안 손님들의 시선을 한눈에 받고 있던 그녀의 외침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창현에게 집중되었다.

창현이 오늘 만나기로 한 손님의 정체, 그녀는 그가 바라는 조언을 유감없이 해줄 수 있을 것이라.

오늘 만나기로 한 상대는 바로 이효리였다.


효리의 외침은 가게 안을 크게 울렸다. 누가 가수 아니랄까봐 성량이 보통이 아니었다.

안 그래도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던 효리였다. 그녀가 창현을 향해 손을 흔들며 외치자 주변 사람들의 시선도 당연히 그에게 향했고, 모자만 눌러쓴 채 변장을 하지 않은 그를 알아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누구지?”

“현 아니야? 현 맞네. 현이다, 현!”

누군가가 창현을 알아보고 확신 어린 어조로 말을 하자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정말 보기 힘든 스타가 그들의 눈에 등장한 것이다.

하지만 창현에게 다가가는 사람은 없었다.

그것은 이 가게의 암묵적인 룰이었는데, 이 곱창집은 효리가 자주 찾는 단골로 알려져 사람들은 그녀를 보기 위해 이곳을 자주 찾고는 한다. 특히 몇몇 사람들은 효리를 보기 위해 가게 주인에게 부탁까지 하고는 하는데, 아무래도 단골집이고 곧장 이곳에서 먹다 보니 불편함을 주지 않으려 한다.

게다가 종종 효리와 친한 연예인들도 오고는 하였기에 그때마다 사람들은 눈 호강을 하고는 하였다.

보통 술과 함께 곱창을 먹기에 이곳에 있는 사람들 대다수가 이십 살이 넘은 사람들이었기에 최소한의 예의는 갖추고 있었다.

그래도 등장한 사람의 정체는 다름 아닌 현이었다.

사람들이 가장 보기 힘든 연예인들이라 칭하며, 연예인들 사이에서도 가장 보기 힘든 인물이라 알려진 인물이 바로 그였다.

드라마를 통해, CF를 통해, 노래를 통해 사람들과 자주 만남을 갖고는 하지만 그가 한 일들은 가히 국위선양을 한 것이기에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은 경외감 바로 그였다.

세계적인 황태자라 불릴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얻고 있기도 하고.

할리우드 여배우들이 가장 만나고 싶어 한 가수 중 한 사람이 바로 그였고, 영화 OST를 가장 불러줬으면 하는 인물이 바로 그였다.

꾸준한 활동을 하고 있음에도 신비주의와도 같은 신비감을 자아내는 것이 바로 그였다.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자 창현은 살짝 당황했지만 접근하거나 그러지 않는 것을 느끼고는 약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좋은 것이 좋은 것이었기에 살짝 고개를 숙여 양해를 구하고는 효리가 있는 자리로 향한다.

효리는 테이블 두 개를 잡아놓은 상황이었다. 하나는 그녀가 앉아 있었고, 다른 하나에는 그녀의 매니저, 코디, 스타일리스트로 보이는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아무래도 창현이 로드 매니저와 함께 올 것이라 말하니 같이 데려온 듯하였다.

창현은 효리 맞은편에 앉으며 인사를 하였다.

“안녕하세요, 누나. 오랜만이네요.”

“오랜만이지. 거의 세 달 만인가? 발렌타인 데이 행사 때 만나고 처음이니까. 좀 자주 연락 좀 하고 살라고.”

“하하, 죄송해요. 저도 이래저래 많이 바빠서요.”

자신을 타박하는 효리의 말에 창현은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알아, 원래 스케줄이 바쁘면 연락도 하기 힘들지. 장난으로 한 말이니까 신경 쓰지 마.”

“그래도 연락을 자주 안한 건 죄송해요. 다음부터는 자주 연락할게요.”

효리는 창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은 채 미간에 주름을 살짝 잡으면서 말한다.

“너나 재석 오빠나 가장 많이 하는 거짓말이 뭔지 알아? 바로 자주 연락한다고 하는 거야.”

“그, 그래요? 그것도 그러네요.”

어색하게 대답하는 창현의 모습에 효리는 피식 미소를 지었다. 무대를 보면 카리스마가 넘치는데 지금은 마치 나이 대에 맞는 모습을 하고 있지 않은가.

그 모습이 무척 귀엽다고 생각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일로 연락을 한 것이여?”

“아, 좀 상의할 게 있어서요. 그런데 누나도 요즘 활동 안하고 있지 않아요?”

“앨범 준비하고 있잖아. 그래서 바빴지. 아, 맞다!”

그러면서 무언가 생각이 난 표정을 짓는 효리. 그리고는 뿔난 표정으로 창현을 바라보면서 말한다.

“내가 저번에 곡 좀 써달라고 했는데 깔끔하게 무시하더라?”

노려보는 눈길이 제법 매섭다.

창현은 땀을 찔끔 흘리면서 그녀의 말에 양손을 들어 좌우로 흔들며 말한다.

“저, 저도 나름 바빠서 그랬던 거예요. 게다가 곡을 주려면 사장님하고 상의를 해야 해서…….”

슬쩍 석규를 팔아서 위기를 모면하려는 창현이었다.

하지만 효리도 만만치 않았다. 잠시 무언가 생각에 빠져들더니 창현에게 묻는다.

“사장님이라면 너희 아버지 아니야?”

역시 알고 있는 효리.

정곡을 찌르는 그녀의 말에 창현은 묘하게 말끝을 흐렸다.

“그렇긴 한데…….”

“곡을 주는 것도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우선 계약은 그렇게 되어 있어요.”

“칫! 곡 좀 뽑아내려고 했는데 쉽지가 않네.”

순순히 넘어오지 않는 창현의 모습에 혀를 차는 효리였다. 제법 순진한 모습을 보여서 살살 꼬드기면 넘어올 것 같았는데 아버지라는 방패를 내세우니 무어라 할 말이 없었다.

“헐! 설마 곡 얻으시려고 연기하신 거예요?”

황당한 표정을 지은 창현이 묻자, 효리는 그저 먼 곳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그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창현. 설마 연기까지 동원할 줄은 몰랐다.

그러다가 무언가 생각이 난 듯 묻는다.

“그러고 보니 앨범 준비하신다면 컴백 시기도 정해졌겠네요? 언제 컴백하시려고 그러세요?”

“대충 7월쯤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그건 왜?”

“아, 저도 미니 앨범 낼 계획이라서요. 그에 대한 조언을 얻으려고 누나에게 연락한 거고요.”

“뭐라고?”

창현의 말에 효리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 소리에 안 그래도 집중되던 사람들의 시선이 한 층 더 집중되었다.

하지만 효리는 그러한 사실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사람들이 바라보건 말건 목소리를 높인 채 창현에게 말한다.

“왜 하필 내가 컴백할 때 나오려는 건데! 너 나한테 불만 있어? 이러면 안 되지! 네가 나오면 나는 어쩌라고! 제발 부탁이니까 좀 늦게 나와라. 응? 좀 늦게 나와!”

당장 멱살을 잡을 기세였다.

하기야 오랜만에 컴백을 하려는데 난데없이 창현이 비슷한 시기에 앨범을 발매한다고 하다니. 이건 가히 재앙 수준이 아닌가? 같이 맞붙으면 음원 손해도 손해고 본격적으로 준비하며 일으키던 열풍도 사그라들 확률이 높았다.

당장 달려들 듯한 그녀의 모습에 창현이 서둘러 변명한다.

“저, 전 8월에 컴백할 거예요. 한 달 정도 차이가 나니 괜찮지 않을까요?”

“흐음!”

그 말을 들은 효리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슬쩍 창현을 바라본다.

자신의 컴백 시기는 대략 7월 초. 창현은 8월이라 했으니 초순일 수도 있고 중순일 수도 있고 하순일 수도 있다. 어느 때 내더라도 한 달 정도 차이가 존재하는 것은 분명했다. 그 정도 차이라면 자신도 큰 손해를 보지 않을 테고.

“그래, 그렇다 치고 나한테 조언을 얻는다는 건 무슨 이야기야? 네가 나에게 조언을 얻을 게 있기나 하나?”

그녀에게는 무척 유감이지만 가창력 면에서는 비교하기 힘들었고, 노래 퀄리티에 있어서도 타에 추종을 불허할 정도가 아닌가. 게다가 SM엔터테인먼트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이상 언론 플레이 또한 문제가 없다.

유일하게 앞선 것은 먼저 데뷔했다는 것과 나이가 많다는 것, 그리고 무대 경험이 더 많다는 것인데… 창현은 미국과 유럽, 일본을 돌아다니며 무대 위에 섰으니 그것도 우위를 점하지 못한다.

무얼 물어보려고 온 것일까?

의아한 표정을 지은 효리에게 창현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한다.

“하하! 실은 이번 앨범에 퍼포먼스를 곁들이려고 하거든요. 그래서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려고 했는데 떠오르는 사람이 누나밖에 없더라고요. 이효리 하면 파격적인 컨셉과 퍼포먼스 아니겠어요? 그래서 누나에게 조언을 구하려고 온 거죠.”

창현에게 이런 인정을 받으니 효리의 기분이 단숨에 업 되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창현에게 이런 조언을 듣다니.

흐뭇한 마음이 절로 드는 효리였다.

그러다가 무언가 떠오른 듯 눈썹을 꿈틀거린다.

“방금 반말 한 거 같은데?”

창현의 몸이 움찔한다. 그리고 서둘러 변명을 하였다.

“음음! 누나를 지칭한 게 아니라 누나의 이름하면 떠오르는 걸 말한 거예요.”

“…넘어가주도록 하지. 일단 퍼포먼스에 대해서는 조언을 해줄 수 있어. 그런데 너 정말 이것저것 다 해보려고 하는구나? 이거 어떻게 해야 할지. 성공하면 그야 말로 대박이지만 잘못되면 리스크가 큰 건 알고 있지?”

“리스크야 뭐… 춤을 충분히 연습하면 되죠.”

“하지만 춤을 추면서 노래하는 것도 전혀 다른 문제라고. 그거 연습을 충분히 거쳐야 해. 만만하지도 않고.”

진지하게 조언을 해주는 효리였다.

가만히 서서 노래를 부르는 것과 격렬한 안무를 소화하면서 노래를 부르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일 정도로 큰 차이를 동반한다. 당장 호흡 조절부터 시작하여 안무와 노래를 동시에 해내야 했기에 무척 힘이 들었다.

“그건 알고 있어요. 하지만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고 싶은 욕심이 커서요. 도와주실 수 있죠?”

굳게 다짐이 선 얼굴로 말을 하는 그의 모습에 효리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알았어. 내가 조언해줄 수 있는 게 있다면 조언을 해줄게. 무슨 조언을 구하고 싶은데?”

“우선 컨셉에 대해서 누나의 의견을 들어보고 싶어서요.”

“컨셉? 생각해둔 게 있어?”

“네, 있죠.”

앨범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컨셉이다. 소설로 치면 일종의 주제와도 같은 것인데, 이것이 잘 잡혀 있어야 앨범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전달할 수 있다.

“그럼 말해 봐.”

효리의 말에 창현은 이번 컨셉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물론 다른 사람이 듣지 못할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여태까지 시도하지 않았던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구애를 하는 내용을 담은 노래를 타이틀곡으로 할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 컨셉은 악마 컨셉을 하여 한때 돌풍을 일으켰던 ‘악마의 유혹’이 떠오르게 할 생각이라는 것을 말했다.

창현의 말을 들은 효리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지극히 평범한 컨셉이었고, 정석적이었지만 그가 하게 되면 어떤 파급이 일어날지 감히 상상도 할 수가 없던 것이다.

거기에 적절한 퍼포먼스가 어우러지고 가창력만 뒷받침이 되면 이건 엄청난 폭풍을 일으킬 것이다.

“너 아주 제대로 계획하고 있구나?”

나쁜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는 건 자신의 계획이 나쁘지 않다는 이야기.

그것만으로도 창현은 마음이 놓이는 것을 느끼며 미소를 지었다.

“계획이라기에는 아직 부족한 게 많아요. 여러 가지 생각하고 있는 건 많은데 냉정하게 판단해줄 사람도 부족하고요.”

“아냐, 부족하지 않아. 사람들은 복합하게 꼬아놓은 것보다 간단하고 이해하기 쉬운 걸 좋아해. 그런 면에서 네 컨셉은 아주 확실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어. 거기에 퍼포먼스가 잘 어우러지면 여성 팬들은 난리가 날 걸? 아주 여성 팬들을 휘어잡으려고 한 느낌이 드네.”

“따, 딱히 그런 건 아닌데…….”

살짝 땀을 흘리며 말을 하는 창현이었다.

그 모습에 효리는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 않기는 뭐가 아니야. 내가 듣기로는 딱 그건데. 네가 유혹하는 퍼포먼스를 펼치면 전부 홀라당 넘어갈 걸? 곡 같은 건 어때?”

“타이틀곡 같은 경우는 완성한 상태에요. 수록될 곡들도 준비하고 있고요.”

준비가 제법 빠른 듯했다. 곡이 다 준비되면 녹음을 하고 안무를 짜고 뮤직비디오를 찍을 테니 시간이 좀 걸릴 테지. 제법 타이트하게 하면 8월까지 넉넉하게 준비가 가능할 듯 싶었다.

“나한테 듣고 싶은 조언은 당연히 퍼포먼스 부분이겠지?”

“네, 퍼포먼스에 대해 누나의 조언을 듣고 싶어요.”

자신이 그쪽에 문외한이니 만큼 효리의 조언을 듣고 자신이 생각한 것을 정리하고 싶었다.

효리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창현에게 말한다.

“좋아, 도와줄게. 대신 내 부탁 한가지만 들어줘.”

“물론이에요.”

자신의 요청을 받아들여주었기에 자신 또한 주는 것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쉽게 승낙하는 창현의 모습에 효리가 웃음을 짓더니 말한다.

“내가 부탁하고 싶은 건 간단해. 6월부터 S본부에서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을 촬영하기로 했거든. 고정 멤버 일곱 명이 활동하고 게스트 한 명이 매주 오는 건데, 거기에 한 번 와줘. 내가 요청하고 싶은 건 바로 그거야.”

재석의 도움으로 S본부 ‘패밀리가 떴다.’에 캐스팅이 된 효리.

그녀는 시청률 상승을 위해 ‘패밀리가 떴다.’ 에 창현을 즉석 캐스팅하였다.

높은 시청률을 위해 인지도 높은 창현을 끌어들이려는 효리.

그가 게스트로 나온다면 시청률 30% 이상은 보장된다.

흥행보증 수표! 괜히 그런 말이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진정한 프로였다.


창현은 효리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물론이죠. 누나가 나오는 프로라면 시청률은 따놓은 당상이잖아요.”

“그, 그런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말을 하는 창현의 모습에 효리는 정말 그런 게 아닐까 싶은 느낌을 받았다.

묘하게 설득력 있는 말이었다.

“그럼요, 누나가 출연하면 시청률은 그야 말로 대박이죠.”

“그, 그래.”

묘한 박력이 느껴지는 창현의 말에 효리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와 줄 거야?”

“네. 그럴게요. 다만 당장은 답을 드리기가 힘들어요. 제가 나온다고 하더라도 스케줄 조정 같은 것은 해야 할 테니까요. 게다가 이번 연말까지 바빠질 확률이 높아서요.”

드라마 촬영부터 시작하여 그동안 밀린 CF와 앨범 준비까지.

지금부터 올해 말까지 바쁠 것임이 분명했다.

“그래? 흐음! 그럼 어쩔 수 없지. 하지만 시간이 나게 되면 꼭 나와 줘야 해.”

“불러준다면 제가 영광입니다.”

그렇게 창현의 캐스팅은 허무할 정도로 완료되었다.

효리는 창현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본격적인 용건에 들어가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창현이 네가 나한테 듣고 싶은 것은 퍼포먼스에 관련된 거지?”

“네, 제가 구상하고 있는 건 있어요. 하지만 무턱대고 하는 것보다 조언을 듣고 하는 게 훨씬 나을 것 같아서요. 게다가 누나는 퍼포먼스에 있어서 최고잖아요.”

창현의 칭찬에 효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라고 해야 할까, 그가 인정해주니 새로운 차원의 인정을 받은 느낌이랄까?

사람은 상대방이 얼마나 이룬 자이냐에 따라 느끼는 바가 다르다.

일반 서민이 자신을 인정한 것과 대한민국 톱스타가 인정한 것은 하늘과 땅 차이가 존재하니까.

그들이 지닌 무게는 엄청난 파급력을 몰고 다니기에 그럴지도 모른다.

저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지은 효리가 창현에게 말한다.

“일단 내가 해줄 수 있는 퍼포먼스에 대한 조언은 간단해. 우선 격렬한 안무를 할 때야.”

“…….”

효리의 이야기가 시작되자 창현은 자세를 바로하고 경청하기 시작한다.

마치 수업을 듣는 학생과도 같은 모습에 효리는 선생님이 된 느낌을 받으며 조언을 해나간다.

“격렬한 안무를 할 때는 호흡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거든. 숨소리가 거칠어져서 노래를 하기가 힘들어. 그래서 상당수 가수들은 격렬한 안무를 할 때 AR로 대체하고는 해.”

AR은 말 그대로 대신 불러주는 것이다. 즉, 격렬한 안무를 하면서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닌, 노래는 자동으로 해주고 안무에만 집중을 한다는 뜻이었다.

그 말에 창현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에요. 저는 전부 라이브로 하고 싶거든요.”

“그렇다면 방법을 약간 선회해야 해. 격렬한 안무를 할 때는 잠시 간주중일 때 하는 거지. 아니면 격렬한 안무를 제외해야 하고.”

“누나가 생각하기엔 어떤 것이 좋다고 생각하세요?”

효리의 의견을 묻는 창현이었다.

그가 효리를 청한 이유는 이 자리에 그녀의 의견을 듣기 위한 것.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효리는 생각한 바를 털어놓는다.

“우선 각자 장점이 있고 단점이 있어. 하지만 네가 퍼포먼스를 곁들일 거라면 나는 격렬한 안무를 배제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

“격렬한 안무를 배제요?”

놀란 눈으로 효리를 바라본다. 아예 하지 말라는 말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기에.

하지만 자신이 한 말이 사실이라는 듯, 효리는 말을 이어나간다.

“창현이 넌 처음으로 퍼포먼스를 곁들이는 거야. 그런 만큼 처음부터 격렬한 안무를 할 필요가 없어. 사람들도 거기까지 바라지 않을 걸? 게다가 내가 생각하는 건, 꼭 격렬한 퍼포먼스가 대단한 건 아니야.”

“…….”

조용히 효리의 말을 듣는다.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듣고 있자 효리가 신이 난 듯 말을 이어나간다.

“내 말이 무슨 뜻이냐면 안무에 강조 포인트를 넣는 거지. 예를 들어줄게, 창현이 너는 계속해서 싱거운 음식을 먹어서 그 맛에 길들여졌어. 그러다가 갑자기 짠 음식을 먹으면 어떨 것 같아?”

“짜겠죠. 먹기 힘들 만큼.”

“그래, 맞아. 하지만 상황을 바꿔서, 매일 같이 짠 음식을 먹었어. 그러다가 위에서 먹었던 음식과 같은 걸 먹었어. 그렇다면 얼마나 짜게 느껴질까?”

“아…….”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걸 깨달은 창현이었다.

효리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일종의 대비 효과였다.

매일 싱거운 음식을 먹다가 짠 음식을 먹게 되면 그 짠 맛은 더욱 강해진다.

하지만 짠 음식을 매일 먹으면 그 짠 맛은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녀의 말은 굳이 격렬한 안무를 고집할 필요없이 잔잔하게 하다가 한 번씩 포인트를 넣어주라는 이야기였다.

간단한 안무를 하다가도 남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안무를 펼치면 그것 하나만으로 강조가 될 것이기에.

창현이 자신의 말을 이해한 듯하자 효리는 손가락 두 개를 펼친다. 그리고 손가락 하나를 더 피면서 말한다.

“딱 두 개 아니면 세 개야. 너무 많은 강조는 사람들을 피곤하게 만들어. 두 개에서 세 개에 해당하는 포인트 안무를 만들어. 나머지는 무난한 것으로 이어나가면 돼.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지?”

깨달은 바가 컸다.

퍼포먼스를 곁들인다고 해서 처음부터 막연하게 춤을 추면서 노래를 부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퍼포먼스에도 단계가 존재했다.

걸음마도 제대로 떼지 못한 자신이 벌써부터 뛰려고 하면 안 된다.

천천히 걸음마를 배우면서 달리기를 배워나가면 되는 거니까.

“네, 알겠어요.”

깨달은 자는 그 눈빛부터 달라진다.

효리는 창현의 눈빛을 보고 그가 달라졌다는 것을 깨닫고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 깨달았다니 다행이네. 하지만 너무 무리는 하지 마. 네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면 되는 거야. 그것은 반드시 빛을 발할 테니까. 알겠지?”

“네.”

힘차게 대답하는 창현.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알아차리는 문일지십 제자가 아닐 수 없다.

이 맛에 사람을 가르치는 게 아닐까 싶다고 생각하며 효리는 미소를 지은 채 위에 놓여있던 병을 집어든다.

“좋아! 그런 의미에서 한 잔 해야지.”

“네? 저 미성년자인데…….”

“괜찮아! 누나가 주는 건데 한 잔쯤 어때. 여러분! 제가 현이한테 딱 한 잔만 주려고 하는데 어때요?”

주변을 둘러보며 큰 목소리로 말을 하는 효리였다.

그러자 반응은 바로 나오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잠시 웅성거리더니 일제히 효리의 편을 들기 시작한 것이다.

“딱 술 배울 나이인데! 확 들이키십쇼!”

“한 잔 먹고 죽지 않으니 지금부터라도 익히는 게 좋습니다.”

졸지에 한 잔 먹는 분위기로 흐르기 시작했다.

창현은 자신이 꼼짝없이 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필이면 이곳이 효리의 단골집이었고, 사람들 모두 효리의 팬이라는 것을 잠시 망각하고 있었다.

“킁! 여기가 효리 누나의 홈 그라운드라는 걸 깜빡했네요.”

“후후! 알면 됐어. 자, 한 잔만 받아. 딱 한 잔이야.”

“알았어요.”

효리의 말에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창현이 잔을 내밀었다.

그리고 그녀가 든 병을 보고 순간 고개를 갸웃했다.

“어라, 참이슬이 아니네요?”

“뭐라?”

순간 효리의 눈이 매섭게 변했다.

자신이 실수한 게 있는가 싶어 창현이 흠칫하였다. 도대체 자신이 무슨 실수를 했기에 저렇게 도끼눈을 뜬단 말인가?

영문을 알아차리지 못하자, 효리는 병을 톡톡 가리키며 말한다.

“너는 지금 주워 담지 못할 엄청난 말을 내뱉었어.”

“……헉!”

그녀가 가리킨 곳을 본 창현은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효리의 손끝이 향한 곳에는 처음처럼이라는 제품명이 적혀 있었고, 그곳에는 효리의 사진이 걸려있던 것이다.

처음처럼이 효리가 광고하는 소주인데 자신은 그것도 모른 채 경쟁 업체의 술인 참이슬을 언급한 것이다.

이런 치명적인 실수라니.

창현은 곧장 효리에게 사과를 하였다.

“죄, 죄송해요, 누나.”

“음! 아직 아성을 넘기 힘든가 보지.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 미성년자인 창현이 네가 술 광고에 대해 잘 알 리가 없으니까.”

그렇게 말을 하는 효리의 입가에는 씁쓸함이 맺혔다.

그러자 창현은 더욱 미안한 감정이 들어야만 했다. 자신이 무심코 던진 말에 그녀가 상처 입었다고 생각하자 무관심한 자신의 태도를 원망했다.

그리고는 그녀가 든 병을 받아들며 말한다.

“죄송해요, 제가 한 잔 따라드릴게요.”

“…….”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잔을 내미는 효리였다.

빈 잔에 창현은 소주를 따르기 시작했다.

쪼르르! 하는 소리와 함께 소주가 잔을 채웠고, 효리는 단숨에 한 잔을 넘겼다.

“크으! 좋다, 한잔만 더 따라줄래?”

창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병을 들어 잔을 채워주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효리가 병을 잡으며 창현에게 말한다.

“자, 채워줄게. 받아.”

“네.”

창현이 잔을 내밀자 효리가 잔을 채워준다. 그리고 그녀가 잔을 들며 창현에게 내밀었다.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어. 하지만 다음에도 실수하면 나 화낼 거다?”

“네, 죄송해요. 제가 잘 몰라서 실수했어요.”

“뭐, 괜찮아. 난 쿨 하니까. 자, 건배.”

짜안!

두 잔이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효리는 거침없이 소주를 마셨고, 창현 또한 고개를 살짝 돌리며 한입에 소주를 털어 넣었다.

쓴 맛이 목을 괴롭히며 힘겹게 넘어간다.

“크으!”

인상이 절로 찌푸려진다. 도대체 이런 걸 왜 마시는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창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말한다.

“이렇게 쓴데 왜 마시는 건지 모르겠어요.”

“후후! 인생의 쓴맛이라는 거지. 화끈하게 넘어가는 게 마치 인생의 쓰디 쓴 일들 같지 않아?”

“글쎄요…….”

잘 모르겠어서 고개를 젓는 창현이었다.

효리도 그런 창현을 너그러이 이해해주었다.

“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 아직 쓴 맛을 이해하기에는 경험이 적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나중에 네가 이 맛을 이해할 수 있는 날이 되면 나보다 더 매니아가 될지도 몰라.”

“그 날이 올련지 잘 모르겠네요.”

“오게 될 거야, 아마도. 후후! 자, 그럼 창현이 너는 여기까지. 여기 곱창이 맛있으니까 맛있게 먹고 가자. 다음에 또 와도 되고.”

“네.”

고개를 끄덕인 창현은 함께 곱창을 구워 먹기 시작했다. 과연 그녀의 말처럼 땅콩 가루를 살짝 뿌려먹는 맛은 일품이었다. 아직 술 맛이 잘 이해되지 않았지만 저걸 마시면서 이걸 먹으면 괜찮은 조합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퍼포먼스에 대한 조언을 얻었고, 자신이 지닌 것에 대한 고민을 해볼 수 있었기에 무척 유익한 만남이란 생각이 들었다.

먹구름이 끼어있던 하늘이 맑아지기 시작했다랄까.

마냥 춤을 추는 것이 다라 생각하던 편견은 말끔하게 사라졌다.

근황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앨범에 대한 이야기도 하면서 창현은 유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황당한 것은 로드 매니저 형이 분위기에 취해 술에 입을 댄 탓에 대리 운전을 불러야 했던 점이었다.

그래도 무척 유익한 시간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

집으로 돌아가는 창현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맺혔다.

누구도 할 수 없는, 자신만의 안무가 머릿속에 떠오르고 있었다.




제65장 G4 정상 회의




태연은 기이한 느낌을 연달아 받아야만 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숙소에서 윤아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를 확 바꾸었던 것이다.

평소에 자신이 자잘한 부탁을 하면 흔쾌히 들어주고는 하던 윤아였다.

어제 있던 일을 떠올려보았다.

라디오 스케줄을 마치고 태연은 편의점에서 물을 사먹는 것도 그랬기에 서둘러 숙소로 돌아왔다.

그리고 숙소 안으로 들어서던 차에 윤아가 보였는데, 먼저 옷을 갈아 입을 요량으로 윤아에게 부탁을 했다.

“윤아야, 물 한 잔만 줄래?”

보통 같으면 ‘네, 언니!’ 이러면서 쪼르르 달려가 물이 담긴 컵에 얼음 한두 개 서비스는 기본이었다. 태연도 내심 그걸 기대하였고, 윤아가 그러해주기를 바랐으니까.

하지만 그녀의 태도는 태연이 전혀 예측하지 못한 바로 흘러갔다.

태연을 본 순간부터 눈 꼬리가 확 치켜 올라가더니, 이내 고개를 홱 하니 돌리며 한마디 내뱉은 것이다.

“흥! 언니가 드세요.”

“어어?”

영문을 알 수 없는 윤아의 모습에 태연의 입에서 황당함이 담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금 자신이 본 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분간이 가지 않아 어안이 벙벙하였다.

어쩔 수 없이 무언가 심각한 생각에 잠겨있던 주현에게 부탁을 하였고, 항상 언니들을 걱정해주는 막냉이 2호는 태연의 부탁에 순순히 응하며 물을 따라주었다.

어디서 본 건지 물 급하게 먹으면 체한다며 화분 이파리 하나 떼어 물 위에 띄워주면서…….


이런 일은 다음 날 아침에 또 일어났다.

보통 숙소 내에서 가장 일찍 일어나는 멤버는 부지런한 주현이나 아침에 먹어야 보양식이라면서 마를 갈아먹는 유리, 그리고 리더로서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 태연이었다.

종종 효연도 가장 일찍 일어나기도 한다.

그런데 어제 라디오 스케줄에서 라이브를 하고 말을 많이 해서 피곤이 쌓였는지 다소 늦잠을 자게 되었다.

오전 스케줄이 있어서 허겁지겁 일어나 씻으려고 했는데, 화장실에는 윤아가 먼저 자리하고 있었다.

태연은 자신이 먼저 스케줄이 있었기에 윤아에게 양해를 구했다.

“윤아야, 나부터 씻으면 안 될까?”

“흥! 저부터 씻을 거예욧!”

어제와 같이 까칠한 태도로 태연을 대한 윤아는 화장실 문을 쾅 닫았다.

“…….”

윤아의 저런 태도에 태연은 화가 나기보다는 황당한 마음이 들었다. 도대체 무슨 이유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저렇게 나오는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영문을 알지 못한 채 당하자 황당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태연은 막 일어나 방에서 나오던 효연에게 물어보았다.

“효연아, 윤아가 왜 저러는지 알고 있어?”

그 물음에 효연은 고개를 살짝 저으면서 말한다.

“난 잘 모르겠는데? 음, 태연이 너한테만 그러는 게 아니라 좀 날카로워 보이던데? 그날 아니려나? 요즘 스케줄 가장 바쁘니까 그러려니 해.”

윤아가 왜 저러는지 알고 있지만 대답하지 않는 효연이었다. 만약 그 출처가 들키면 확 올라간 자신의 신임도가 곤두박질 칠 테니까.

제법 그럴 듯한 효연의 말에 태연은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가? 윤아 원래 저러지 않았는데. 음! 무언가 알기라도 한 건가?”

마지막 말은 무척 작았지만 효연의 귀에 생생히 들려왔다.

그 말을 들은 효연은 뜨끔하면서도 태연한 표정을 가장하였다.

그리고 속으로 굳게 다짐을 했다.

‘윤아가 저렇게 나오니 이상한 걸 눈치 챌 수밖에 없지. 으이구, 임초딩. 주의를 좀 줘야겠구만.’

이렇게 들켜버리면 재미가 반감될 것이기에 윤아에게 조언을 해주어야겠다고 생각하는 효연이었다. 그러면서 스스로 뿌듯함을 느껴야 했다.

자신은 정말 동생을 생각해주는 착한 언니라고.

세상에 착한 사람이 다 죽은 듯하였다.


“흥!”

빠르게 준비를 마치고 촬영장으로 가는 윤아는 연신 콧김을 뿜어내고 있었다. 주현이 화가 날 때 콧김을 내뿜는 걸 보면서 왜 저러나 싶었는데 막상 화가 나면 콧김이 거칠게 뿜어진다는 것을 얼마 전에 느낄 수 있었다.

윤아는 태연을 용서할 수 없었다.

“나한테는 가만히 있으라고 해놓고. 엄연한 배신 행위를 하다니.”

그녀가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간단했다.

왜냐하면 그녀가 알고 있는 태연은 가히 고타마 싯다르타의 환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룸비니 동산이 고향이기라도 하듯 그녀의 자애로움은 가히 부처의 수준에 도달해 있어서 수연의 라인으로 갈아탄 윤아마저도 흔들리게 만드는 어마어마한 위엄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자신은 수연을 따르지만 한편으로는 태연을 따를 수밖에 없다고 은연중 생각하던 윤아였다.

그런데 그런 태연이 자신의 뒤통수를 때렸다!

창현의 어려움을 보면서 서로 도움이 되어주자고 말하던 태연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하지만 돌아온 결과는 무엇인가. 자신을 언변으로 현혹시킨 채 정작 본인은 살그머니 창현에게 접근하여 이렇고 저렇고 아응아응한 것들을 하지 않았던가.

치료 방법 중 충격 요법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있는 만큼 윤아는 태연이 창현에게 저 충격 요법을 한답시고 아응아응한 것들을 했을 것이라 예견하였다.

왜냐하면 자신이 단독 찬스를 잡더라도 저렇게 했을 테니까.

그렇기에 윤아가 분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신이 하지 못한 걸 다른 사람이 하니 배가 아팠고.

까드득!

섬뜩하게 이 가는 소리에 로드 매니저가 움찔했지만 윤아는 개의치 않았다.

“위선자, 위선자, 이제부터 태연 언니는 위선자야.”

촬영장으로 향하는 윤아의 눈에는 새파란 귀화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자신의 뒤통수를 치는 것이 난무하는 세계이니 만큼 더 이상 망설이지 않으리라!

“내가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하는 착각.

내가 마음만 먹으면 세상이라도 바꿀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는 한다.

그것은 윤아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자신이 전력투구를 하면 지금의 소강상태를 완벽하게 깨버리고 독주할 수 있다 생각하였다.

그것은 지켜보아야 할 일이다.


“윤아 누나, 안녕하세요.”

“어어? 응. 아, 안녕!”

창현과 마주한 윤아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며 말을 더듬었다. 두 살 연상의 위엄을 보여주며 남성들이 선호하는 누님 캐릭터로 단번에 휘어잡아주겠다고 결심을 했는데 시작부터 어긋나기 시작한 것이다.

졸리면 잠이 오고, 배가 고프면 식욕이 일어나는 것처럼 창현을 보면 자연스럽게 머릿속이 텅 비고 여유가 사라지는 윤아였다.

시작이 어긋났다는 것을 느낀 윤아였지만 어쩌겠는가. 창현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미소가 절로 흘러나오는데.

첫 단추를 잘못 꿰었지만 윤아는 지금 이 시간이 마냥 좋았다.

왜냐고? 호시탐탐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창현과 만날 단독 찬스를 노리는 멤버들에 비해 자신은 언제나 이 촬영 시간에 함께 할 수 있으니까.

“헤헤!”

독점의 우월감을 만끽하며 미소를 짓는 윤아를 보며 창현도 미소를 지어보이며 묻는다.

“갑자기 기분이 좋아 보이네요?”

“어응? 아아, 그냥 기분이 좋아서.”

“오늘 연기 잘 풀리실 것 같은데요? 잘 됐으면 좋겠어요.”

“그렇지. 그런데 오늘은 잘될 것 같아.”

자신감을 불태우는 윤아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은연중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창현의 말에 절로 의욕이 치솟으면서 잘할 수 있을 것이란 느낌이 마구 들었다.

“잘하길 바랄게요. 제가 풀리기 시작했는데 누나가 막혀버리면 어쩌겠어요. 누나도 잘 되어야 저도 좋죠.”

묘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말이었다.

그에 윤아는 함박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그렇지?”

“그렇죠.”

“그럼 최선을 다할게.”

주먹을 불끈 쥐며 의욕을 불태우는 윤아였다.

연기에 들어가기 전 늘 먹던 청심환을 복용하지 않아도 될 듯 싶었다.

창현의 응원이 청심환의 효과를 뛰어넘으니까.


“오늘은 잘할 수 있겠나?”

촬영에 들어가기 전, 김지환 감독이 윤아를 바라보며 묻는다.

요 며칠 전부터 윤아는 한 장면에서 정체되어 있었다.

바로 그녀가 맡은 백은설이 한지훈에게 맹목적인 사랑을 바라다가 그가 최예린과 사귀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질투의 화신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담아야 하는데, 이 드라마의 백미 중 하나라 꼽을 수 있는 부분이었기에 무척 공을 들이는 장면이었다.

오죽하면 오디션에서 이 부분을 모토로 하여 상황극을 했겠는가.

그렇기에 김지환 감독이 윤아에게 거는 기대는 무척 컸다.

이 장면이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드라마의 시청률이 변동될 수도 있을 테니까.

“네! 잘할 수 있습니다.”

활기차게 대답하는 윤아의 모습에 힘이 넘쳐보였다.

평소와 약간 다른 모습이었지만 저 모습도 나름대로 의욕이 넘쳐 보였다. 그리고 잘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고.

“좋아, 그럼 오늘은 기대하도록 하지. 잘 해보라고. 처음 오디션 때 보여준 그 연기는 정말 소름 끼칠 정도로 대단했으니까.”

위로의 의미를 담아 윤아의 어깨를 다독여준 김지환 감독이 촬영을 위로 세트장을 벗어난다.

윤아는 김지환 감독의 말을 곱씹는다.

“처음 오디션 때?”

그때 감정을 다시 떠올려 몰입을 해보라는 이야기일 것이다.

어느새 윤아의 곁에 다가온 근영이 말을 건넨다.

“너무 부담 갖지 말고 잘하자.”

“네.”

대답을 하는 윤아의 모습이 심상치 않았기에 근영도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물러난다.

그리고 본격적인 촬영을 시작한다.

“…….”

시작 싸인이 떨어졌지만 윤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서 있었다. 그 모습에 조감독이 NG를 내야 한다고 말을 했지만 김지환 감독은 고개를 저었다. 그의 눈에 들어온 윤아는 예전의 감정을 찾아 몰입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어차피 장면의 시작은 윤아의 대사를 시작으로 시작되는 것이니 앞부분은 다소 시간을 지체해도 상관이 없다.

그런 김지환 감독의 생각처럼 윤아는 감정에 한껏 몰입하고 있었다.

오디션을 볼 때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 몰입을 했던가.

그녀는 오디션에서 몰입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바로 세실리아였다.

2007 MKMF에서 창현과 키스 퍼포먼스로 화제가 되면서 했냐 안했느냐 의혹을 사면서 수많은 화제를 몰고 다닌 키스 퍼포먼스.

당시 윤아는 그것을 보면서 엄청난 질투심을 느껴야 했다. 그랬기에 그 감정을 떠올리며 한껏 몰입하여 마침내 질투의 여신으로 변모하는데 성공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때는 세실리아가 몰입을 하는데 도움을 주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녀보다 더욱 몰입을 잘할 수 있게 도와주는 존재가 있던 것이다.

그 존재는 바로 태연. 앞과 뒤의 행동이 다른 위선자 태연의 행동이 떠올랐던 것이다.

효연의 은근한 언질이 없었으면 영원히 묻혔을 진실의 한 자락. 언제인지 짐작이 가지 않지만 슬럼프에 빠진 창현을 불러내 아무것도 모르는 그에게 슬럼프에 도움이 된다면서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본다. 그리고 충격 요법이 슬럼프에 도움이 된다면서 하이라이트에 해당하는 응응한 것들도 했을 테지.

순전히 창작이고, 상상력이 가미된 것이지만 그것만으로도 그녀의 질투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충분했다.

세실리아 같이 외부의 인물이라면 차라리 경계심을 끌어올릴 수 있지만 태연은 소녀시대의 리더이자 윤아가 존경하는 언니였다. 그랬기에 그녀에게 느껴지는 배신감과 자신이 먼저 하지 못했다는 것에서 오는 질투심은 삽시간에 윤아의 전신을 뒤덮기 시작했다.

살벌하게 변해가는 윤아의 기세에 마주 선 근영이 흠칫할 정도였다.

한껏 감정에 몰입한 윤아는 대사를 하기 시작한다. 백 번이 넘게 났던 NG. 그랬기에 대사는 머릿속에 또렷하게 박혀 술술 흘러나온다.

“어떻게 나를 두고 너희 둘이 만날 수 있지? 그는 네 원수와도 같은 인물이라고! 그런 사람을 만날 만큼 네가 사람이 좋았어? 아니잖아! 넌 이기적이잖아! 복수를 위해서 이 회사에 입사했을 만큼! 그런데 지금 그와 사귄다는 것이 말이 돼? 어서 헤어져! 헤어지라고!”

음성에서 질투와 원망의 감정이 뚝뚝 묻어나온다. 지켜보고 있는 김지환 감독은 물론 스태프들도 경악한 눈빛으로 바라볼 정도.

근영 또한 속으로 경악하면서 프로답게 연기에 몰입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난… 이미 좋아하게 되었는걸. 아니, 사랑하게 됐어.”

“난 인정 못해! 원수에게 사랑을 느낀다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해? 아니, 절대 가능하지 않아! 헤어져! 당장! 지훈이는 처음부터 내 것이었고, 앞으로도 내 것이야. 네가 들어올 자리는 없어!”

“…그 말은 못 들은 것으로 하겠어.”

한이 절절하게 맺힌 윤아의 외침을 뒤로하고 한마디 한 근영이 그대로 몸을 돌린다.

그리고 장소에서 벗어나고 윤아 혼자 남게 된다.

그녀는 입술을 지근지근 깨물면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못 들은 것으로 하겠다고? 감히 나 백은설을 이렇게 대해? 다 부숴버리겠어. 날 선택하지 않은 것이 후회하게 만들어주겠어.”

마지막으로 빛을 발하는 표독한 눈빛은 사람들의 마음을 얼어 붙이기에 충분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 모두 충격에 빠져있을 정도였으니까.

“…….”

잠시 그것을 보고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김지환 감독이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큰 목소리로 외친다.

“컷! 아주 잘했어!”

김지환 감독의 OK가 떨어지자 윤아가 그대로 그 자리에서 무너진다. 연기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한순간 자신의 모든 힘을 분출한 것이다.

그녀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김지환 감독에게 물었다.

“하아아! 잘한 거죠?”

“잘하다마다! 아주 시청률은 따놓은 당상이야. 하하하하! 이렇게 잘할 줄이야! 오디션에서 한 만큼만 해도 대박이라 생각했는데 그걸 뛰어넘었어. 아주 잘했어.”

“정말요? 감사합니다.”

잘했다는 이야기를 듣자 윤아의 표정이 한결 풀렸다.

그런 윤아에게 근영이 다가오면서 말했다.

“윤아야, 방금 전 연기였지? 와! 정말 대단해. 잘못하면 한 대 맞을 줄 알았다니까?”

“에에?”

근영의 말에 윤아가 황당한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그것이 거짓이 아니라는 듯, 김지환 감독이 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정말 한 대 때려도 이상하지 않을 기세였지. 정말 대단한 몰입도였어. 다음 드라마에 악녀 역할이 있으면 내가 추천해주도록 하지. 어때?”

“네에?”

근영에 이은 김지환 감독의 일격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윤아였다.

그녀는 자신이 지금 펼친 연기로 어떤 이미지를 주었는지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방금 전 연기에 몰입한 그녀는 그야 말로 질투에 잠식당해 주변 상황이 보이지 않는 사람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었으니까.

주변을 볼 수 없으니 자신이 어떤 모습을 보였는지도 제대로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연기는 단지 사랑을 위해 비겁한 짓을 하던 캐릭터가 일순간 두 사람의 사랑을 방해하는 악녀 캐릭터로 탈바꿈 하게 되었다.

그것은 사랑이라는 것이 변질 되면 집착으로 바뀐다고 말하려는 작가의 의도를 완벽하게 표현하는 것이었다.

고작 한 장면으로.

윤아는 모르고 있었다.

이 장면 하나로 자신이 악녀 연기 역의 섭외 1순위로 떠올랐다는 것을.


“이, 이건…….”

자신이 촬영한 장면을 본 윤아의 표정이 급변하였다.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피하는 느낌이 들어서 묘했는데 지금 카메라로 보이는 장면은 그렇게 만들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근영에게 악을 쓰듯 외치는 자신의 눈에는 푸른색 귀화가 서려있는 듯하였고, 말 한마디 한마디에 감정이 구구절절 배어나오고 있던 것이다.

잘해도 너무 잘했다.

윤아의 머리에 스치고 지나간 말이었다.

분명 잘하려고 하긴 했지만 이건 예상 이상이다.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독하고 백은설의 변화가 잘 된 듯 싶지만 문제는 후에 자신에게 끼칠 이미지였다.

이렇게 독한 모습이라니.

이미지로 먹고 사는 아이돌이 아닌가?

그런데 저렇게 질투에 사로잡힌 모습을 보여준다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윤아는 김지환 감독에게 필사적으로 매달리기 시작했다.

“가, 감독님! 저 이 장면 다시 촬영하면 안 될까요?”

이 장면이 나가면 절대 안 된다!

그 생각이 윤아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허어! 이렇게 잘 나온 장면을 놔두고 다시 촬영한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 하나?”

김지환 감독의 입장에서 가당치 않은 요구였다. 드라마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 중 하나가 나왔는데 그것을 버리고 다시 촬영하다니? 이건 마치 뽑기 경품 2등을 노리고 했는데 특상이 나와서 다시 해달라고 하는 격이 아닌가.

완고한 김지환 감독의 태도에 윤아는 몸이 달았다.

그러나 저 장면이 유출되는 것만큼은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필사적으로 애원했다.

“감독님! 저 장면 나가게 되면 저는 어떻게 하라고요. 제발 다시 촬영해주세요! 네?”

“아아, 그것 때문이었나.”

윤아가 왜 다시 촬영하자고 하는지 알아차린 김지환 감독이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윤아에게 타이르듯 말한다.

“분명 생각처럼 저 장면이 나오게 되면 타격이 있을 수 있지. 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이익으로 돌아올 것이 분명하다.”

손해로 돌아오는 게 아닌 이익이라니? 솔깃한 말이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며 답을 바라듯 김지환 감독을 바라보니, 그는 미소를 지으며 말해준다.

“주제 넘을 것 같아 언급을 하지 않았는데 지금 이것하고 연관이 되니 말해주도록 하마. 여자 아이돌이니 만큼 짧은 수명에 이런저런 고민이 있을 거라 생각한다. 맞지?”

“……네.”

귀한 조언을 해줄 것 같은 분위기에 윤아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 방편 중 하나가 연기라 생각했을 테고. 생각해봐라, 아이돌 출신 연기자는 필연적으로 연기력 논란에 휩싸일 수밖에 없다. 이 논란을 극복하려면 남들보다 훨씬 뛰어난 연기력을 지녀야 해. 하지만 윤아 너는 내가 보기에 아직 그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

냉정한 평가였다. 하지만 냉정하였기에 현실적이기도 하였다.

윤아는 그 말이 껄끄럽게 들렸지만 그 이유는 진실이었기에 그렇다. 여기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사람과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나뉘게 된다.

차마 대답하기 힘들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김지환 감독은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것도 용기지. 어쨌거나 그런 너에게 이번 장면은 감독들에게 무척 중요하게 다가올 거다.”

“어떤 의미로요?”

궁금한 듯 묻자, 자세히 설명해준다.

“아이돌 출신을 배우로 캐스팅하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그 팬들을 끌어들여 시청률로 삼기 위한 것도 있다. 하지만 아이돌의 생명이 끝나는 순간에 더 이상 그 팬들을 끌어들일 메리트는 사라지겠지. 말 그대로 실력으로 임하게 되는 것이다. 만약 그때 네가 다른 연기자보다 뛰어난 연기력을 지니지 않았다면 드라마에 출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

그건 생각해볼 문제였다. 기획사의 힘이라면 캐스팅이 될 수 있기는 할 테지만 예전과 같은 파급력이 들지 않을 테니.

윤아가 생각에 잠긴 사이 김지환 감독이 설명해준다.

“그럴 때 저 장면 하나가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드라마가 보통 방영되더라도 인상 깊은 장면은 그리 많지가 않지. 지금 네가 저 장면을 끌어냈다는 것은 잘 몰입이 될 경우 저런 장면을 더 나오게 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건 감독들에게 엄청난 메리트지. 장면 하나가 잘 되어서 시청률이 단숨에 치솟는 경우도 있으니까. 그렇기에 저 장면 자체가 네게 아주 소중한 경력이 될 것이다.”

“아…….”

그제야 김지환 감독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눈치 챈 윤아였다.

지금 이 장면은 엄연히 말하면 실력 이상의 것을 발휘한 것이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운도 절묘하게 맞아 떨어져야 나올 수 있는 그런 장면인 셈.

역량 이상의 것을 발휘했지만 이것마저도 실력으로 평가를 해주는 세계였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

“네, 알겠습니다. 괜히 고집 부려서 죄송해요.”

그러면서 고개를 꾸벅 숙이는 윤아였다.

그에 김지환 감독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어보였다.

“하하! 아니다. 네 걱정도 충분히 이해가 되는 바니까. 게다가 저 장면이 나오게 되면 당분간 논란이 될 테고. 제법 재미 있을 테니 지켜보는 재미도 쏠쏠할 테니까. 하하하!”

“아…….”

김지환 감독의 말에 현실로 돌아온 윤아의 안색이 사색으로 변한다.

“험험! 촬영을 하러 가야겠군.”

다시 그를 붙잡으려고 했지만 촬영을 해야 한다는 핑계로 김지환 감독이 자리를 피한다.

“…….”

순식간에 홀로 남게 된 윤아는 말을 잃은 채 서 있는다.

그리고 이내 울상을 지었다.

“어, 어떻게 하지.”

아무래도 한동안 논란을 겪어야 할 듯 싶었다.

그 순간 언젠가 효연이 해주었던 말이 떠올랐다.

포기하면 편해져 라는 말을…….


결국 윤아는 현실과 타협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당장은 논란을 겪겠지만 자신의 연기력이 입증된 것이나 마찬가지니 그냥 눈 딱 감고 넘기기로 한 것이다. 미래를 위해 보험을 들어놓아야 하기도 했고.

그렇게 결심을 내리자 편해졌다. 확실히 포기하면 편해진다는 말이 사실인 듯했다. 괜히 고민할 때는 끙끙거리다가 머리만 아파왔는데 지금은 편했으니.

윤아는 창현을 보고는 그에게 다가갔다.

“창현아!”

“누, 누나.”

그녀는 반가운 마음에 다가갔지만 창현의 반응은 사뭇 달랐다.

윤아를 본 그는 흠칫하더니 뒤로 물러났던 것이다.

그 모습을 보면서 윤아의 표정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자신을 보고 물러서는 창현을 보면서 섭섭함을 느낀 것이다.

자신의 행동을 깨달은 창현이 멋쩍은 웃음을 흘린다.

“하, 하! 미안해요. 저도 모르게…….”

“그래도 설마 그럴 줄이야. 섭섭한데.”

안 그래도 다른 스태프들이 은연중 자신을 피해서 속이 상했는데 창현마저 그러자 윤아가 느낀 섭섭함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섭섭한 표정을 짓는 그녀를 보면서 창현은 거듭 사과를 하였다.

“미안해요.”

“알았어. 대신 다음에도 그러면 안 돼?”

자신이 너무 창현을 몰아붙이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윤아는 여기서 쿨한 누님의 면모를 보여주기로 하였다.

“물론이죠.”

“그래! 그럼 됐어. 난 다른 거 안 바라거든.”

제대로 쿨한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하면서 만족의 미소를 짓는 윤아였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창현은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가 문득 무언가 떠올랐는지 윤아에게 말했다.

“아참, 그러고 보니 사흘 후에 누나 생일이잖아요.”

“으응, 그렇지.”

윤아는 내심 창현이 언급을 하지 않아서 행여 잊어버리지 않았을까 염려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기억하고 있자 기쁜 표정을 지어보였다.

“뭐 바라는 거 없어요? 생각해봤는데 뚜렷하게 생각나는게 없어서요.”

“바라는 거? 으음! 글쎄…….”

고민에 빠진 척을 했지만 윤아는 내심 바라는 것이 너무 많아서 문제였다.

하루 시간을 내서 데이트를 하며 태연이 창현에게 했을 법한 이렇고 저런 아응아응을 해보고 싶기도 했지만 그것은 자신의 바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물질적인 것을 바라자니 괜히 된장녀가 된 느낌이 들고, 자신의 선에서도 구할 수가 있어서 싫었다.

잠시 고민을 하던 윤아는 미소를 지어보이더니 말한다.

“다른 건 필요 없고 정성이 들어간 선물이면 만족해.”

윤아의 말에 창현이 순간 멈칫한다.

“정성이요? 참 어려운 말인데요. 음! 고민해볼게요.”

“응응!”

고민을 할수록 더 정성 어린 선물이 나올 것 같았기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는 윤아였다.

그렇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색한 분위기가 한결 완화되었다. 그리고 윤아를 바라보던 스태프들의 눈도 많이 안정되어 있었다. 연기는 연기일 뿐이라는 것을 그들 또한 알고 있지만 윤아의 연기가 워낙 실감이 났기에 한순간 적응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달리 말하면 그만큼 윤아의 연기가 대단했다는 뜻이기도 하고.

촬영은 밤늦게까지 계속 되었다.

드라마는 연장되어 7월에 끝이 나지만 촬영 자체는 6월 중순에 끝낼 계획이었다. 게다가 서서히 스퍼트를 올리고 있는 상황이어서 제대로 된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 NG가 속출하고 재촬영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리고 먹은 저녁이 모두 소화될 때까지 촬영을 하고 10시에 끝이 났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내일 다시 하도록 합시다. 서서히 끝이 가까워지고 있으니 모두 힘내세요. 여러분이 노력할수록 시청률은 좋게 나올 겁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스태프들이 큰 목소리로 인사하고, 배우들도 인사를 하면서 촬영은 끝이 났다.

그러다가 김지환 감독이 무언가 생각이 난 듯 말한다.

“아참, 이거 받아 가십시오.”

그러면서 배우들에게 나눠준 것은 대본이었다. 현재까지 준 대본은 18화 분량이었는데, 감독이 준 것은 20화 종방에 해당하는 분량까지 자리하고 있었다.

대본을 받아든 배우들이 하나둘씩 돌아가기 시작했고, 윤아 또한 지친 몸을 이끌고 숙소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창현이 자신의 선물을 준비해준다는 것과 좋은 장면을 촬영했기에 기분은 좋았다.

물론 싱숭생숭한 면도 있었지만 포기하니 편했다.

“대본이나 볼까…….”

괜히 그냥 돌아가는 것이 뭐했기에 윤아는 벤 안에서 대본을 보기 시작했다.

차분히 대본을 읽어가던 윤아의 눈이 한순간 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본을 잡은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21.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 거리. 낮.


예린 앞에 선 지훈,

그녀의 양 어깨를 잡으며 뜨거운 눈빛을 보낸다.

지훈:(절대 놓아주지 않겠다는 표정을 하며)넌 영원히 나를 벗어날 수 없어.

지훈, 예린을 끌어당겨 그대로 입맞춤을 한다.


“이, 입맞춤?”

마우스 투 마우스?

설마 키스신이란 말인가?

윤아의 표정이 창백하게 질려갔다.

/

“키스신이라니.”

윤아는 숙소로 돌아가는 내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에 로드 매니저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무슨 일이 있느냐 물었지만 그녀가 대답할 리 만무. 그저 피곤하다는 말을 하고는 자리를 벗어났다.

숙소로 올라가면서도 윤아의 심각한 표정은 펴질 줄 몰랐다.

그녀는 끊임없이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지.”

입술을 질겅질겅 씹고 있는 것도 모른 채 그녀는 고민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 사이 숙소에 도착하였고, 그녀를 맞이한 것은 공교롭게도 막 도착한 태연이었다.

띵동.

“어, 윤아네?”

옷을 갈아입고 씻은 그녀는 초인종을 누르는 소리에 윤아가 도착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문을 열며 반갑게 인사를 하였다.

‘이번에 관계를 개선하는 거야.’

윤아가 자신을 쌀쌀맞게 대해서 알게 모르게 섭섭함을 느끼고 있는 태연이었다.

그랬기에 관계 개선을 위해 반가운 표정을 지은 채 인사한다.

“안녕! 윤아야…….”

인사를 하던 태연의 표정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숙소 안으로 들어선 윤아의 표정은 무척 심각했는데, 태연이 인사한 것조차 눈치 채지 못한 채 방으로 쏘옥 들어가버린 것이다.

“…….”

순식간에 인사를 무시 당해버린 처지가 된 태연은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어야 했다.

설마 윤아가 자신의 인사마저 무시할 줄이야.

그녀는 증명을 바라듯 TV를 보고 있는 수영에게 묻는다.

“수, 수영아. 지금 윤아가 나 무시한 거 맞지?”

그러나 애석하게도 수영 또한 태연의 편이 아니었다.

그녀는 태연에게 시선을 옮기며 고개를 갸웃하더니 말한다.

“엉? 못 봤는데?”

그 말을 들은 태연은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윤아가 저런 태도를 보인단 말인가.

비록 멤버들 사이에서 효연과 함께 초딩 듀오로 통하기는 하지만 자신 앞에서 만큼은 비밀이 없고 꾸밈없이 맑은 아이였는데.

‘아무래도 이야기를 해봐야겠어.’

앙금을 풀지 않은 채 시간을 보내면 시간이 흐를수록 그 틈은 더욱 커질 터.

어떻게든 초기 상황에 봉합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태연은 윤아와 이야기를 해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방 앞에서 고민하는 기색을 띠더니 이내 결심을 굳힌 듯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다.


한편, 숙소 안으로 들어선 윤아는 누가 열어주었는지 자각조차 못한 채 방안으로 들어간 상황이었다.

그녀는 아직도 키스신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이미 대본이 나온 이상 수정될 확률은 극히 희박했다.

드라마가 엄청난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으며, 마지막 장면을 장식하기에 키스신만큼 어울리는 것은 없을 테니까.

오히려 시청률에 비해 키스신이 딱 한 번밖에 없는 걸 감지덕지해야 할 상황이었다.

‘그래도 싫단 말이야.’

아직 자신이 맛(?)보지도 못한 입술을 다른 사람이 맛보다니!

물론 창현이 첫 키스가 아니라 하지만 윤아는 다른 의미의 첫 키스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바로 창현의 마음이 들어간.

이건 희망사항일 뿐, 마음 같아서는 무력(?)을 이용해서라도 하고 싶은 것이 그녀의 마음이었다.

마음이 넓은 여자라면 내 남자의 비즈니스라면서 너그러이 넘어갔을 테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녀는 마음이 넓지 못하다. 좋아하는 사람이 키스하는 걸 눈앞에서 빤히 바라봐야 한다면 어떤 느낌일까?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차라리 보지 않으면 모를까, 그 자리에 자신이 있을 것임이 분명했다.

보지 않으려 해도 볼 수밖에 없는 자신의 상태를 그녀는 잘 알고 있는 셈이었다.

‘머리를 굴려야 해. 방법을 찾아보자.’

언니들에게 장난을 치던 잔머리를 총동원하여 고민을 하는 윤아였다. 그만큼 그녀는 지금 필사적이라 할 수 있었다.

윤아가 이렇게 격한 반응을 보이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그녀가 창현과의 키스에 과민 반응을 보이는 이유.

그것은 제작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년 전 현이 얼굴 없는 가수로 활동을 하고, 그의 서포트를 받은 라샤가 거침없는 인기몰이를 하고 있을 때였다.

라샤가 새로운 앨범으로 컴백을 하고, 그 타이틀곡의 제목이 <가면의 기사>였다.

그리고 윤아는 <가면의 기사>에서 뮤직비디오 여주인공으로 출연한 적이 있었다.

남주인공은 당연히 창현.

거기에서 두 사람은 마지막 장면에 키스를 하는 장면을 보인다.

그것으로 인해 한동안 했느니 안했느냐 하는 말이 나올 정도였으니까.

결과적으로 하지 않았지만 지금에 와서는 왜 하지 않았나 그렇게 아쉬울 때가 없다.

어찌나 간절히 바랐던지 가끔 꿈에서도 아른아른거리며 나오기도 한다.

물론 그때처럼 미완성이 아닌 완성형으로.

그래서 현실에서 그 꿈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은연중 기대도 하였다.

그렇게 창현과 키스를 할 법한 상황까지 갔다가 자신의 마음이 사정없이 흔들렸기에 윤아로써는 입맞춤에 민감한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방법을 찾을 수 없어.’

어떻게 하면 키스신을 막을 수 있을지 생각할 수 없었다.


그때, 방밖에서 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윤아야.”

익숙한 목소리, 그것은 바로 태연의 목소리였다.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윤아는 상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는 태연을 향해 입을 열었다.

“왜요?”

“이야기를 좀 할까 싶은데.”

“…….”

태연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긴 윤아. 그녀가 이야기를 하자는 순간 하나의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지금 자신의 이 고민을 태연에게 말하고 자문을 구해보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윤아는 고개를 거세게 저었다.

‘아냐! 언니는 나를 배신한 위선자야. 그런 언니에게 사실을 털어놓고 도움을 청할 수는 없어. 분명 또 내게 참으라 해놓고 뒤에서 다른 짓을 할지 몰라. 이번에도 당할 줄 알고? 흥!’

상처 입은 맹수는 더욱 짙은 살기를 뿜어낸다.

지금 윤아의 경우가 그러하다 할 수 있다.

태연에게 한 번 당한 만큼 독이 바짝 오른 상태였으니까.

그런 자신의 마음을 감춘 채 윤아가 대답한다.

“좋아요, 들어오세요.”

윤아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방문이 열리면서 태연이 안으로 들어왔다.

안으로 들어온 그녀는 곧장 윤아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한동안 아무말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그녀를 바라본다.

윤아 또한 질 수 없다는 듯 시선을 들어 태연의 시선과 마주하기 시작한다.

잠깐의 시선 교환이 이어지고, 태연의 입이 열렸다.

“우리 할 이야기가 있지 않니, 윤아야?”

“말씀 잘 하셨어요. 저도 언니에게 할 이야기가 있었거든요.”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태연을 바라보는 윤아.

그 모습이 무척 매섭게 느껴졌지만 태연은 위축되지 않은 채 입을 연다.

“도대체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나는 네가 왜 화가 났는지 모르겠어. 나에게 이야기를 해줄 수 있겠어? 앙금이 있다면 그걸 풀어야 하니까.”

영문을 모르겠다고 하면서 말을 하는 태연의 모습에 윤아의 눈이 가늘어지기 시작한다.

“정말… 정말 제게 아무 말도 할 게 없으세요?”

“…….”

말해보라는 듯 조용히 윤아를 바라본다.

미동도 않는 그녀의 모습이 더욱 마음에 들지 않아서일까.

윤아의 눈매가 한층 더 날카로워지더니 태연에게 말한다.

“창현이가 얼마 전에 슬럼프를 타파했더라고요.”

“그게 왜?”

태연은 속으로 움찔하였다. 윤아가 지금 저렇게 말하는 이유는 자신이 숨기려고 했던 진상을 그녀가 알아냈을 확률이 높다고 판단되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윤아는 태연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속사포로 퍼붓기 시작한다.

“창현이의 슬럼프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고 있는 사람은 저와 언니밖에 없어요. 그런데 창현이가 갑자기 슬럼프를 타파할 수 있게 되었어요.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언니도 아실 거라 생각해요.”

효연의 언질과 윤아의 추리. 두 가지가 절묘하게 합쳐지면서 완벽에 가까운 사실 추론이 가능해졌다.

윤아의 말에 태연은 속으로 당황의 감정을 느껴야만 했다.

설마 그녀가 대략적으로 알고 있으리라 생각을 못했던 것이다.

그러자 그녀의 행동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만약 자신이 먼저 선수 친 것을 알게 되었다면 엄청난 배신감을 느끼게 되었을 것은 당연했다.

순간 태연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

‘설마 효연이가 말한 건가?’

그럴 리는 없다. 장난기가 심하기는 하지만 효연은 한 번 한 말을 지키는 믿을 수 있는 친구였다. 그녀는 분명 비밀을 지켜준다고 했기에 윤아에게 말했을 확률은 극히 적었다.

그렇다면 윤아가 어떻게 알아낸 것이란 말인가.

‘아.’

윤아가 슬럼프 타파에 대해 이야기 꺼낸 것을 상기했다. 그것이 극복되지 않아 감독에게 호통을 들은 창현이 일주일 후에 보란 듯이 슬럼프를 극복해서 돌아왔으니 의심이 갈 수밖에 없을 테지.

그녀가 왜 그런 반응을 보이는지 알아차린 태연이었다. 그리고는 윤아가 진실을 알아낼 수도 있다는 생각에 황급히 생각해두었던 말들을 하기 시작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라면 나도 할 이야기가 있어.”

“어떤 건데요? 저는 이미 할 이야기를 모두 했어요.”

지금부터 태연이 무슨 변명을 하는지 들어보겠다는 듯, 자세를 취하는 윤아였다.

그 모습에 태연은 혹시 다른 멤버들이 냄새를 맡았을 경우를 대비하여 준비한 변명을 하기 시작한다.

“그 점은 오해라 할 수 있어. 윤아 네가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듯하니 말해주도록 할게. 난 창현이랑 만난 적이 있어.”

“역시.”

알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지만 그녀의 눈은 더욱 타오르고 있었다.

마치 지옥의 염화와도 같은 그녀의 눈빛에 태연은 서둘러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네가 상상하는 그런 건 없었어. 왜냐하면 내가 그때 물건들을 사온 적이 있을 거야. 물건을 사러 가면서 창현이를 볼 수 있었어. 막 서울에 올라왔는지 마트 근처에 있더라고. 그러면서 나를 보고는 상담을 해달라고 했어. 그래서 상담을 해줬어. 거기에서 창현이가 무언가 깨달은 것 같은 표정이었거든.”

“설마 그게 다란 이야기는 아니겠죠?”

“그게 다야. 설마 내가 창현이랑 만날 시간이 있었다고 생각해?”

“…….”

그 말에 윤아는 순간 태연의 스케줄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태연이 말한 날 다음 날과 그 다음 날은 스케줄이 꽉 차 있었고, 다음 날은 휴일이라고 하면서 전주에 간 날이다. 그때 태연이 언제 올지 몰라 집에 연락까지 해봤으니 전주에 간 것은 분명할 터.

거기까지 생각한 윤아는 자신이 너무 과민반응을 했다는 걸 떠올렸다.

그렇다고 하여 완벽하게 태연을 믿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말에 여러 가지 석연찮은 점이 존재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무턱대고 상상한 뒤 적대한 것은 자신의 잘못이었다.

윤아는 태연에게 고개 숙여 사과하였다.

“미안해요, 언니. 제가 너무 과하게 생각했나 봐요.”

“아니야, 그럴 수도 있지. 난 이해해.”

거짓을 말하지는 않았다. 다만 앞뒤 순서가 뒤바뀌고 교묘한 말장난이 존재하고 있을 뿐.

그랬기에 태연은 떳떳했다.

그녀는 윤아가 어느 정도 풀린 기색을 보이자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다. 후후!’

윤아와 예전 같은 관계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태연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알지 못했다.

아직 그녀에 대해 윤아가 완벽히 의심을 푼 것이 아니라는 것을.

한 번 금이 가기 시작한 신뢰 관계는 회복하기 힘든 법이다.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태연이 방을 나가고, 윤아는 고심 끝에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말이 있듯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결정을 내린 것이다.

태연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있지만 그녀의 말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있고, 믿음에 균열이 일어난 상태였기에 그녀의 말을 쉽사리 믿기 힘든 실정이었다.

신뢰를 잃는 것은 한순간이지만 회복하는 것은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니까.

‘일단은 지켜볼게요, 언니.’

그것이 윤아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정말 자신이 착각한 것일 수도 있으니까. 다만 그녀의 말을 듣고 확신이 서지 않았다.

어찌어찌하여 태연과 앙금을 털어버렸지만 그렇다고 하여 단기간에 해결하는 것은 어려운 일. 자신 혼자서 해결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은 윤아는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하였다. 거기에서 가장 먼저 제외된 것은 태연이었다.

그녀가 정한 대상은 바로 수연.

자신이 따르는 언니이자, 긴 연습생 생활을 거치면서 세상의 여러 일(?)들을 겪어온 그녀는 날카로운 직관력을 지니고 있다.

그렇기에 도움을 청하기에 무척 적합했다.

사실 도움을 청하는 사람으로 치면 태연이 더 적합했지만 그녀는 예외 대상이었기에 수연이 선택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수연 언니라면 좋은 답을 줄 거야.”

어찌보면 비밀이라고 할 수 있는 일을 수연에게 털어놓을 결심을 하게 된 이유는 간단하다.

이번 일은 누군가가 독점한다고 하여 이득을 볼 수 있는 형태의 일이 아니었다.

요컨대 비유를 하자면 한민족 출신의 국가가 아홉 개로 갈라져 있는데, 그들 모두가 이웃나라에 군침을 흘리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그 나라를 집어삼키기 위해서는 그 나라의 왕과 혼인을 해야 하는데 전혀 엉뚱한 다른 민족 출신 국가가 와서 맞선을 본다는 것이었다.

감히 자신들이 있는데 다른 출신과 맞선이라니!

은연중 서로 적대하고 있지만 공동의 적이 생길 때만큼은 놀라울 정도의 공동체 정신을 보였다.

수연이라면 그 방안을 모색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여차하면 모든 멤버들에게 말해도 좋고.

하지만 그녀가 망설이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선수를 쳤다 생각되는 태연의 행동 때문이었다.

평소의 언니들은 믿지만 창현과 관련된 일에 대해서는 믿음이 그리 가지 않았으니까.

잘못해서 일을 그르치게 되면 모든 일이 말짱 도루묵이 되는 건 식은 죽 먹기다.

그렇게 결정을 내린 윤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서 수연이 있는 방으로 향한다.

그녀가 있는 방에 도착하여 살짝 문을 여니 책상 앞에 앉아 잡지를 열심히 읽으려다가 잠이 든 수연의 모습에 눈에 들어왔다.

슬쩍 다가간 윤아는 잠든 수연의 얼굴을 보면서 웃음을 짓는다.

평소에는 난폭한 카리스마로 멤버들을 압도하고는 하는데 잠든 모습은 귀여움 그 자체였다.

사진이라도 찍어두고 싶지만 그러다 자칫 폭발할 수도 있기에 어디까지나 자신의 사적인 감정일 뿐.

충동적인 감정을 억누른 윤아는 수연을 살짝 흔들어 깨웠다.

“언니, 일어나봐요.”

“으응? 왜에? 나 좀 더 자고 싶은데…….”

잠결이라 그런지 말투에서 애교가 묻어나왔다.

귀여운 모습에 순간 확 껴안아주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누르며 윤아가 말한다.

“잡지를 설마 베개 대용으로 산 건 아닐 테죠? 언니 침으로 인해 축축해졌……”

“아, 아냐! 난 잡지 읽으려고 샀어!”

윤아의 말에 비몽사몽이던 수연은 자신이 잡지를 읽으려다가 잠들었다는 것을 자각하고는 정신이 확 깨는 걸 느끼며 외친다.

그러자 윤아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그러니까 잠시 일어나 봐요.”

“정말이라니깐.”

아무래도 윤아가 믿지 않은 채 건성으로 대답하고 있다 생각했나보다.

“알겠다니까요..”

“그런데 갑자기 왜 깨운 거야?”

화제를 돌리고자 했던 것일까.

잡지에 대한 언급을 멈춘 채 윤아에게 잠을 깨운 용건을 묻는 수연이었다.

그 물음에 윤아는 자신이 수연을 찾은 이유를 자각하고는 입을 열기 시작한다.

“맞다, 언니에게 할 이야기가 있어요. 창현이에 관해서에요.”

“창현이에 관해서?”

아직도 흐릿하던 수연의 눈에 순간 초점이 잡히기 시작한다.

그리고 답을 바라는 눈으로 윤아를 바라보자, 갑자기 돌변한 수연의 모습에 그녀는 침을 꿀꺽 삼킨 뒤 말한다.

“잠시만요. 다른 사람이 들으면 안 되거든요.”

“알았어.”

자리에서 일어선 수연은 망설임 없이 문을 닫고 잠근다. 그리고 침대에 앉으면서 윤아에게 물었다.

“자, 말해봐. 대신 작은 소리로 말해.”

수연은 예전 피처링 문제로 태연과 미영이 경쟁을 할 때 문을 잠갔음에도 불구하고 윤아와 주현의 밀담을 엿들은 경력이 있었다. 도둑이 제 발 저리는 것처럼 그녀는 행여나 다른 멤버들이 자신과 같은 방법으로 엿들을까 염려하여 작은 목소리로 말할 것을 주문하였다.

윤아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제가 언니를 찾은 이유는 간단해요. 드라마 대본을 받았거든요. 19화 20화 대본을.”

“그런데……?”

묘하게 불안한 마음이 들어 수연이 묻는다.

그러자 윤아의 표정이 서서히 굳기 시작하더니 선고를 내리듯 수연에게 말한다.

“나와 버렸어요. 창현이의 키스신이.”

“……!”

그녀의 말을 들은 수연의 눈이 한순간 커졌다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큰 파문이 일어났지만 순식간에 마음을 다스린 것이다.

이미 예상하던 바가 아닌가? 로맨스가 곁들어진 드라마에 키스신이 있는 것은 거의 필수공식과도 같은 일이다. 그렇기에 크게 놀라지 않았다.

다만 막연하게 나올 것이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나오게 되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 뿐.

“그걸 내게 말하는 이유는 뭐야?”

“언니가 도와주셨으면 해서요.”

“내가 뭘?”

말 그대로였다.

자신이 뭘 돕는단 말인가.

이미 드라마 대본이 나오고 곧 있으면 촬영에 임할 텐데 자신이 도울 것이 무에 있단 말인가.

수연의 얼굴에 서린 의문을 읽었는지 윤아가 말한다.

“대본을 수정하고 싶어요.”

“뭐라고……?”

윤아의 말에 수연이 경악을 감추지 못한 채 목소리를 높인다. 그리고 곧장 자신의 실수를 알아차린 뒤 목소리를 낮췄지만 경악스러운 표정은 감춰지지 않았다.

수연은 윤아에게 다시 한 번 물었다.

“지금 뭐라고 했어?”

“대본을 수정하고 싶어요. 드라마라 해도 키스신 같은 건 보고 싶지 않아요.”

말을 하는 윤아의 표정은 마치 전장에 나가기 전 계백 장군마냥 결연한 표정이었다. 오천의 병력으로 신라의 오만 병력을 상대하던 그의 의지를 계승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 의기는 대단했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다.

수연이 고개를 저으면서 부정적인 전망을 보였다.

“하지만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해?”

“불가능 하다고 생각하세요, 언니는?”

결연한 윤아의 표정을 보면 무언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정말 가능할까?

그러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 해. 인기 드라마의 대본을 바꿀 수 있을 거라 생각해? 아무리 윤아 네가 잘 나가는 연예인이 된다고 해도 어려워.”

이른 바 대세라는 것이다.

그 대세를 거스르기 위해서는 가히 어마어마한 힘이 작용해야 한다.

평균 시청률 40%가 넘는 드라마의 대본을 자신들이 바꾼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랬기에 수연은 윤아에게 불가능하다고 말을 하였다.

하지만 윤아는 포기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아니에요. 언니가 도와주신다면 가능해요.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은 없어요. 그렇게 생각하면 저희가 어떻게 재능 있는 수많은 언니들을 제치고 살아남을 수 있었으며, 난다 긴다 하는 가수들을 상대로 1위에 올라섰겠어요. 처음부터 불가능한 건 없어요. 도전을 하고 힘껏 부딪치면 결과를 바꿀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요, 저는.”

설득에 열을 올리는 윤아의 말은 큰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말처럼 다른 쟁쟁한 연습생 언니들도 결국 데뷔를 하지 못하고 사라졌다. 그걸 보면서 자신도 저렇게 될 것 같다는 불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기 위해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팀이 결성되고 경쟁 끝에 데뷔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처음부터 가능할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결과를 꿈꾸며 한 발자국씩 노력을 했을 뿐.

윤아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것이었던 것이다.

그 말은 수연에게 있어 큰 파문을 일으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왜냐하면 윤아의 말은 자신이 어린 시절부터 겪었던 말들을 한 번에 망라하는 말이었으니까.

“…….”

큰 파문이 일어난 탓인지 수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침묵을 지켰다. 윤아 또한 수연의 대답을 들으려는 것인 듯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수연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었다.

만약 자신이 나선다고 해도 대세에 큰 변화를 끼칠 수 없다.

드라마에 연고라고는 OST밖에 없는 자신이 어떤 형태로든 나서는 것이 불가능했으니까.

하지만 돌파구는 존재할 것이다. 그 돌파구를 찾아낸다면 정말 윤아의 말처럼 불가능한 일도 가능하게 만들어낼 수 있으리라.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고민.

끝없이 고민을 해봤지만 해결책은 나오지 않았다.

역시, 답은 없는 것이란 말인가.

수연은 윤아에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말을 하려 하였다. 그녀가 자신을 믿어주는 건 고마웠지만 고민을 해봐도 떠오르지 않는 것을 어쩌겠는가.

자신이 너무 무력하게 느껴졌다.

그러다가 초롱초롱 빛나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윤아를 볼 수 있었다.

그 모습에 순간 멈칫하는 수연.

믿음이 가득한 저 눈을 보면서 그녀에게 배신감을 안겨다주기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수연의 뇌리에 스치고 지나가는 한 가지 생각이 있었다.

그와 동시에 눈을 반짝이는 그녀. 완벽한 방법은 아니지만 한줄기 가능성을 발견한 것이다.

“확실한 방법은 아니지만 가능성은 있을 것 같아.”

“뭔데요?”

윤아가 눈을 빛내며 수연을 바라본다. 그녀의 눈은 수연에 대한 믿음으로 충만해 있었다.

그 눈빛을 받으며 수연이 짧게 말한다.

“파니와 유리, 두 사람의 머리가 필요해.”


자신 또한 어느 정도 머리를 굴릴 수 있지만 이번 일에 관련된 것은 자신이 없었다.

순간적인 대처 능력으로 위기 상황을 모면할 수 있지만 이번 일은 잘못 건드리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질 수 있다.

그리 되면 여파가 자신들에게 돌아올 수도 있는 일.

결국 수연이 내린 결정은 뛰어난 계략을 세울 수 있는 미영과 유리의 도움을 청하는 것이었다.

두 사람이라면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을 터.

“미영 언니하고 유리 언니를요?”

황당한 표정을 짓는 윤아였다.

그도 그럴 것이 와룡 파니와 사마율의 존재를 모르는 그녀로서는 의아함이 들 수밖에 없는 순간이었다.

다른 멤버들 중에서 하필이면 미영과 유리라니?

미영은 다른 사람들이 잘 알다시피 ‘띨파니’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얻을 정도로 허점이 많다. 유리 또한 다분한 장난기로 멤버들 사이에서 효연과 윤아, 그리고 유리를 더하여 초딩 트리오라 칭해질 정도로 낮은 정신연령대를 보여준다.

결코 이번 일의 해결책을 제시할 인물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두 사람의 진가를 모르는 윤아의 판단이다.

그만큼 두 사람이 잘 속이고 있다는 이야기기도 하고.

“두 사람의 진가를 모르니 그런 말을 할 수밖에 없는 거야. 도움을 청해보면 아마 깜짝 놀랄 걸?”

“으음, 그럼 일단 도움을 청하도록 해요.”

자신감 넘치는 수연의 모습에 의아함을 느낀 윤아였지만 그녀의 말을 따르기로 하였다.

방금 전에도 생각했지만 이번 일은 많은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고 궁리할수록 좋은 방법이 나올 수 있을 테니까.

“그럼 두 사람 불러와. 다른 애들은 데려오지 말고.”

“네.”

고개를 끄덕인 윤아는 곧장 방을 나서서 미영과 유리를 데려왔다.


“뭐야?”

“갑자기 왜 그러는 건데?”

윤아에게 다짜고짜 끌려온 두 사람은 반쯤 짜증이 섞인 눈을 하다가 방안에 수연이 있는 것을 보고는 곧장 표정을 바꾸었다.

막내인 윤아에게 짜증을 부릴 수는 있지만 폭군 수연에게는 짜증을 부릴 수 없었다.

무슨 짓을 당할지 몰랐으니까.

두 사람이 잠잠해지자 윤아는 그제야 용건을 꺼내놓기 시작하였다.

“수연 언니가 두 언니에게 도움을 청하라고 했어요.”

“도움? 무슨 도움을 말하는 건데?”

유리가 의아한 듯 윤아에게 묻자 그녀가 수연을 슬쩍 바라보았고, 그 시선을 받은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도 좋다는 뜻.

“그러니까…….”

그리고 시작된 윤아의 이야기.

드라마 19화와 20화 대본을 받았다는 이야기부터 시작하여 20화에 창현과 근영의 찐한 키스신이 있다는 이야기를 강조하여 말해주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두 소녀의 표정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수면이 부족한 듯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미영이 ‘핫!’ 하는 소리와 함께 눈에 초점이 돌아오기 시작했고, 마냥 귀찮은 표정을 짓고 있던 유리는 순식간에 진중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두 소녀의 변화에 이야기를 하는 윤아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을 정도였다.

분위기 자체가 달라진 두 소녀를 보며 수연이 입을 열었다.

“들었지? 키스신이 있다고 해.”

“키스신이라니…….”

작게 중얼거리는 유리의 음성에는 여러 가지 감정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예전에도 생각했지만 내 남자의 비즈니스라고 해서 용납할 수 있는 것에는 엄연한 한계가 존재하는 법이다.

자신 같은 경우 마음이 넓고 쿨해서 포옹까지는 넘어가줄 수 있지만 키스신은 도저히 용납이 안된다.

아니, 애초에 용납이라기보다는 자신이 해보지 못해서 그런 것일 테지만.

“…….”

미영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지만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드라마 속 키스신 방해하는 법 77가지가 치밀하게 가능성을 도출하고 있었다.

감히 자신이 먹으려고 침을 발라둔 떡에 다른 사람이 간을 보려고 하다니.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

“너희들의 의견을 빌리고 싶어서 부른 거야. 알고 있는 사람은 여기 있는 사람들이 끝이고.”

불이 붙은 두 소녀의 모습에 자신의 용건을 털어놓는 수연.

그녀의 말을 들은 미영과 유리의 시선이 순간 허공에서 만난다.

그와 함께 살짝 끄덕여지는 두 소녀의 고개. 서로 힘을 합쳐서 이번 난관을 타개하자는 암묵적인 동맹의 성립이었다.

유리가 수연을 바라보며 동의를 표했다.

“좋아, 협력하겠어. 창현이가 그렇게 되는 건 우리도 원하는 바가 아니니까.”

“나도 마찬가지야.”

평상시에는 모두가 경쟁자였지만 지금같이 공동대응이 필요할 때는 누구보다 믿음직한 우군이었다.

암묵적인 동맹이 채결되자 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두 소녀에게 묻는다.

“좋아, 그럼 너희들의 의견을 듣고 싶어. 윤아는 키스신의 대본을 바꾸고 싶어 해. 하지만 우리들의 힘으로 대본을 바꾼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수연이 네 말대로야. 대본을 바꾸는 것은 무리야.”

“역시 무리일까요?”

시무룩하게 중얼거리는 윤아.

미영과 유리의 힘을 빌리면 무언가 되는가 싶어서 희망을 걸었지만 유리의 입에서 나온 말은 희망의 씨앗을 짓뭉개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자신들이 무슨 힘이 있어서 대본을 바꾼단 말인가.

그때, 미영이 꺼져가는 희망의 불씨를 되살려주었다.

“그렇다고 방법이 없는 건 아니야.”

“방법이… 있어요?”

윤아가 고개를 들어 미영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녀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늘 생글생글 웃는 미영의 모습이 아닌, 침착하게 가라앉은 눈을 한 모습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녀가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인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방법은 있어.”

“어, 어떤 방법인데요?”

“창현이한테 직접 말하는 거야.”

“직접이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기에 윤아가 화들짝 놀라며 되묻는다.

직접 묻는다고 하여 창현이 그 말에 따를까?

그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할 수 있다. 키스신이라는 것은 드라마의 시청률을 높여줄 수 있는 하나의 수단과도 같은 것이고, 마지막 화에서 나오는 것이기에 드라마의 화룡정점을 찍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창현에게 말한다고 하여 쉽게 허락될 리가 없다.

부정적인 표정을 짓는 윤아를 보며 미영이 미소를 지었다.

“불가능할 것 같지만 의외로 가능할 수도 있어. 정확히는 창현이가 아닌 소속사 사장님에게 말하는 거야.”

“사장님에게 말한다고 달라질까요?”

“물론이지. 내가 미국에서 오면서 가장 절실하게 느낀 게 뭔지 알아?”

“글쎄요?”

윤아가 고개를 갸웃하자 미영이 단호하게 말한다.

“바로 미성년자에게 묘하게 엄하다는 점이야. 미국에서 키스신이 나와도 아무도 무어라 하지 않지. 일종의 인사와도 같은 거니까. 하지만 한국은 달라.”

다른 점은 너무나 많다.

미국에서는 여자끼리 손을 잡으면 레즈비언으로 통하고는 하니까. 그에 반해 한국은 여자끼리 손을 잡아도 아무런 의심을 하지 않는다.

다만 남자끼리 손을 잡으면 더럽다고 손짓을 하고는 하지만.

그러면서 자신이 생각한 바를 털어놓았다.

“그 점을 증폭시키면 돼. 미성년자인 현에게 키스신은 드라마 상에서는 어울릴 수 있으나 그의 나이를 감안하면 아직 자제해야 한다는 것으로. 이게 방송으로 나가면 일이 제법 커질 수도 있어서 사장님도 생각해볼 수밖에 없을 걸?”

“그, 그러네요.”

윤아의 얼굴에 감탄의 물결이 퍼져나갔다. 그녀의 말마따나 창현은 드라마 주연이지만 아직 미성년자였다. 엄청난 파급력을 몰고 다니는 그가 키스신을 할 경우 수많은 사람들이 열광하겠지만 시점을 달리하면 미성년자에게 키스신을 했다는 것은 자칫 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소지가 존재한다.

드라마 제작 측에서는 불명예스런 논란에 휩싸이길 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만큼 소속사에서 강력하게 이의를 제기하면 키스신은 다른 방향으로 대체될 수도 있다.

감탄하는 윤아를 보며 미영이 고개를 저었다.

“그게 끝이 아니야.”

“그럼 더 있는 거예요?”

“주요 요점은 저걸로 두고 다른 것도 해야겠지. 무엇보다 창현이가 원하지 않는 상황이 되어야 키스신이 이루어지지 않을 테니까. 그 점을 노리고 설득을 해야 키스신을 완벽하게 없앨 수 있어. 내 생각이지만 창현이는 드라마에서 키스하는 걸 원하지 않을 거야.”

논란의 여지부터 시작하여 창현의 본인 의지까지.

두 가지가 갖춰지면 키스신을 충분히 없앨 수 있다고 판단하는 미영이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키스신 장면을 없애기 위해 자신들이 직접 나서면 안 된다는 점이다.

윤아를 제외하고 다른 멤버들은 드라마와 상관이 없으니까.

“하지만 창현이가 키스신을 부정하게 만드는 것이 어렵지 않을까요?”

드라마를 위해서 한다고 해버리면 모든 계획은 물거품이 되어버린다.

그 언급에 미영은 웃음을 흘렸다.

“후후후! 그건 어렵지 않지. 윤아 네가 시시각각 밑바탕을 만들어두기만 하면 돼. 직접적으로 말고, 은연중에 언급을 하는 거지. 아직 이르다는 식으로, 그리고 안 좋은 쪽으로 인식하게끔. 그리고 창현이의 생각을 바꾸는 것은 소속사 사장님이 될 거야. 우리말보다 그분의 말이 더 잘 통할 테니까.”

굳이 자신들이 손을 쓸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였다.

미영의 말처럼 밑바탕만 깔아놓으면 일은 알아서 처리가 될 테니까.

그리고 그 정도는 윤아 혼자서도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일이었다.

“정말 대단해요, 언니! 그 정도는 저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 오늘 창현이도 대본을 받고 고개를 순간 갸웃했으니까! 있을 거라고 예상을 했지만 정작 상황이 닥치니 여러 가지 느낌이 들었을 거예요.”

“그 틈을 노려야 해. 창현이는 마음을 굳히면 절대 움직일 수 없으니까 재빨리 틈을 파고들어야 하고. 윤아 너의 임무가 막중하다는 거 알지?”

“네, 물론이에요.”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윤아의 모습에 미영은 미소를 짓다가 유리를 슬쩍 보면서 중얼거린다.

“하지만 이 방법은 성공할 확률이 반 정도밖에 되지 않아. 윤아가 밑바탕을 만들어놓고 소속사 사장님이 창현이의 마음을 바꿔야 한다는 전제가 있으니까.”

미영의 시선이 유리에게 향하는 것을 보고는 수연이 입을 열었다.

“유리 너는 생각해놓은 것 있어?”

괜찮은 방법이라고 생각하지만 여러 허점이 존재하기에 유리의 의견을 묻는 수연이었다.

그 물음을 기다렸다는 듯이 유리는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한다.

“미영이의 방법도 괜찮긴 하지만 여러 운이 맞아 떨어져야 한다는 것 정도는 알지?”

그녀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인다.

성공 가능성도 있지만 실패 가능성도 무척 큰 계획이다. 하지만 뚜렷한 대책이 존재하지 않는 지금 상황에서 모험을 걸어볼 만한 계획이기도 했다.

자신의 말을 납득하는 듯하자 유리는 생각해두었던 계획을 털어놓기 시작하였다.

“나는 미영이가 계획한 것과 방향 자체가 달라. 하지만 그 확률만큼은 확실하지.”

확률이 확실하다는 것은 100% 성공할 수 있다는 뜻!

“정말요?”

윤아가 환한 표정을 지으며 묻자, 유리는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장점이 존재하는 만큼 단점도 존재하는 법! 이 계획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어.”

“도대체 뭔데요?”

“내 계획은 말이지…….”

미영이 내놓은 방법은 정도라면 유리가 내놓을 방법은 사도였다.

자신에게 집중되는 시선에 유리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간단했다.

“굳이 우리가 힘을 쓸 필요가 없다는 뜻이야.”

“그게 무슨 뜻이야?”

이해가 되지 않기에 반문하는 수연.

유리는 미소를 머금은 채 그녀의 물음에 답해준다.

“말 그대로야. 우리가 직접 나설 필요가 없다는 점이지. 이번 계획에서 가장 결정적인 것은 윤아를 제외하고 우리들이 나설 수 없다는 점이지. 아니, 윤아도 큰 역할을 하기가 힘들어. 미영이의 계획대로 하더라도 창현이가 윤아의 의도를 잘 따라줘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있으니까.”

“…….”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는 윤아.

미영의 계획에 감탄을 했지만 여러 가지 문제점이 걱정되는 것은 사실이었다.

다만 가능성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였을 뿐.

“그럼 확실한 방법은 뭔데?”

100% 확실하다는 방법이 무엇인지 어지간히도 궁금했나보다.

수연의 재촉에 유리는 미소를 지으면서 입을 열었다.

“굳이 우리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거야.”

“……?”

처음과 같은 말이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몰라 수연과 윤아는 의문 부호를 그려내며 유리를 바라본다.

그리고 그녀를 조용히 바라보던 미영의 눈이 한순간 커지더니 유리를 보고 놀란 얼굴로 말한다.

“유, 유리 너 설마…….”

같은 지력 99 캐릭터의 생각이다. 추구하는 방향은 다르다지만 세상에는 만류귀종이라는 말이 존재하듯, 작은 힌트만 주면 상대방의 의도를 꿰뚫어보는 건 일도 아니다.

미영의 외침에 유리가 씨익 웃는다.

“눈치 챘어?

“도대체 뭔데?”

수연이 재촉하자 유리는 웃음을 거두고 설명을 하기 시작한다.

“미영이 네가 눈치 챈 것 같은데 설명을 대신 해줄래?”

정말 미영이 계획을 알아차린 것인지 궁금했나보다.

유리의 말에 미영은 잠시 멈칫하면서 수연과 윤아에게 말한다.

“이 방법은 유리가 말한 것처럼 확실해. 하지만 잘못하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일이 커져.”

조금 전 유리가 했던 말하고 한 치도 틀림이 없었다.

“일단 듣고 결정을 내릴 테니까 말해 봐.”

무슨 계획인지 일단 들어보아야 결정을 내릴 수 있지 않겠는가.

수연의 재촉에 미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고는 입을 열기 시작한다.

“유리의 계획을 자세히는 알지 못해. 하지만 내가 눈치 챈 것은 우리가 직접 나서는 게 아니라 창현의 팬들을 움직이려는 걸 거야. 내 말 맞지?”

“맞아.”

미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유리였다. 그리고 수연과 윤아에게 시선을 옮기더니 자신이 계획한 바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작한다.

“우리의 힘은 미약하기에 대본을 바꿀 힘은 없어. 그렇다고 하여 좌절할 이유는 없지. 힘이 부족하다면 강한 힘을 지닌 자들을 끌어내면 되니까. 그리고 그 강한 힘을 지닌 존재들은 바로 창현이의 팬들이야. 수연아, 네가 소녀시대의 제시카가 아닌 다크 스타 특별회원의 입장에서 말해줘. 창현이가 만약 키스신을 촬영한다고 하면 어떨 것 같아?”

“…….”

유리의 말에 수연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녀의 말에 자신의 입장을 대입해보기 시작한 것이다.

만약 다크 스타에 창현이의 키스신 촬영 소식이 올라왔다 치자. 창현의 팬들은 초창기 그의 음악을 좋아하고 몰려든 사람들이지만 지금은 그의 라이브 무대를 보고 매력을 느껴 가입하게 된 여성 팬의 숫자도 무사하지 못할 정도로 탄탄한 층을 형성하고 있다.

그녀들 중 소위 말하는 빠순이라 불리는 극성팬들도 존재한다.

활동을 거의하지 않는 창현의 근황에 대해 빠삭하게 알고 있을 정도로 그녀들의 정성은 대단하다.

현이 극성팬들의 여러 폐해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극히 자제하지만 그녀들 중에서 능력자들도 상당하였다.

그녀들이 키스신 촬영에 대해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

상황은 일파만파 퍼져서 수습이 불가능할 정도로 커지게 될 것이다.

현의 팬들 중 내 남자의 비즈니스를 너그러이 용납할 여성 팬들은 그리 많지 않을 테니까. 아마 바뀔 때까지 엄청난 파동이 일어날 것임이 분명하였다.

수연의 얼굴에 서서히 굳기 시작했다. 윤아의 표정도 마찬가지였다.

“유리 네가 계획하고 있는 게 바로 이거야?”

“그래, 확실하지?”

“…확실해. 너무 확실해서 두려울 정도야.”

미소를 짓는 유리가 처음으로 무섭다는 걸 느낀 수연이었다. 그녀가 계략에 능하다는 걸 알고 있지만 이 정도 실력 발휘는 폭군인 그녀조차도 두렵게 만들기 부족함이 없었다.

상대방을 제압함에 있어 가장 이상적인 형태는 자신이 힘을 쓰지 않은 채 다른 자의 힘을 이용하여 제압하는 것이다. 그것도 대가 하나 지불하지 않은 채.

지금 유리는 그 방법을 사용하려고 하는 것이다.

창현의 막강한 팬들의 힘을 이용하여.

“하, 하지만 그렇게 되면 드라마 제작진이 피해를 입게 되요.”

일이 이렇게 커질 줄 몰랐기에 윤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그에 유리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생각하지 마, 윤아야. 우리는 무슨 일을 일으키려는 것이 아니라 창현이의 팬들에게 검사를 맡자는 거야. 드라마의 시청률 상당수가 창현이의 팬들인 건 부정할 수 없잖아? 그런 팬들에게 물어보는 거야. 창현이의 키스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 하냐고.”

“만약에 허락하면요?”

세상일은 예측한대로 돌아가지 않는 법이다.

만약 예상에 어긋난 채 괜찮다는 식의 분위기로 흘러가게 되면 그때는 빼도 박도 못하게 된다.

윤아의 걱정이 담긴 말에 유리는 고개를 저었다.

“왜 그런 생각을 하는데?”

“창현이의 팬들은 관대한 면이 있잖아요.”

극성 여성 팬들이 다크 스타의 한 축을 맡고 있지만 전체 의견을 내기에는 힘들다. 그의 음악을 좋아하는 팬들이 대부분의 간부직을 차지하고 있기에 원하는 방향으로 유도하는 건 힘들다.

그 말의 의미를 알아차린 유리가 미소를 지었다.

“굳이 그렇게 생각할 필요가 있을까? 그리고 윤아 네가 결정적으로 착각하고 있는 게 있어. 뭔지 알아?”

“뭔데요?”

“왜 사실이 알려지는 게 다크 스타라고 생각하는가에 대해서 말이지.”

“다크 스타가 아니라면요……?”

얼떨떨한 얼굴로 묻는 윤아에게 유리가 대답한다.

“다크 스타는 창현이의 팬들 중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있어. 그곳에 알리게 되면 뜻을 이루기가 힘들지. 하지만 블랙 큐트라면 어떨까?”

블랙 큐트(Black Cute), 현의 팬 카페 중 한 곳으로 공식 사이트는 다크 스타지만 그곳은 현의 음악성을 좋아하는 곳이고, 블랙 큐트는 현을 비쥬얼 위주로 좋아하는 여성 팬들이 만든 곳이다. 특히 다크 스타에 소속된 극성팬들 중 대다수가 블랙 큐트에 소속되어 있을 정도였으니 행동력에 있어서는 다크 스타에 밀리지 않을 정도의 전력을 보유하고 있다.

카페 회원의 숫자는 대략 33만.

결정적으로 블랙 큐트 카페 매니저도 현의 극성팬인 30대 골드 미스였다.

TV에 나왔을 정도로 대단했고, 실제로 AA엔터테인먼트에 찾아가 현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주겠다고 하면서 사장인 석규와 창현, 라샤와 함께 찍은 사진을 개재함으로써 성지 인증까지 했으니까.

“블랙 큐트라면 분명…….”

상상도 못할 여파가 불어 닥칠 것이 분명했다.

현의 여성 팬들 중 극성팬들만 모여 있는 그녀들이 움직이면 드라마 제작 측은 완전히 뒤집어질 테니까.

윤아의 중얼거림에 유리는 설명을 이어나간다.

“그 블랙 큐트 카페 매니저에게 메일로 보내는 거지. 현의 드라마 19화, 20화 대본이라는 것과 함께 미영이가 말했던 것까지 더해서. 미성년자인 창현이가 키스신을 촬영해도 될지에 대해서 매니저님은 어떻게 생각 하냐고.”

“…….”

모두가 질린 표정으로 유리를 바라본다.

그녀의 말에 내포된 것은 처음부터 자신들의 의도대로 끌어나가자는 것이었다. 만약 대본만 언급한다면 객관적인 판단을 하겠지만 미성년자인 창현이가 키스신을 하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하냐는 것은 은연중 생각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존재였다. 게다가 그 말은 팬들이 적극적으로 키스신을 방해하는 명분으로 삼을 수 있고.

유리는 처음부터 이걸 모두 계산하고 있던 것이다.

“대, 대단해요, 언니…….”

탄성 밖에 나오지 않는 윤아였다.

자신과 효연, 그리고 유리까지 더하여 초딩 트리오라 생각했는데 이런 심계를 지니고 있었다니.

간단한 몇가지 공작으로 엄청난 파장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 현실적이지 않게 느껴질 정도였다.

감탄하는 윤아의 얼굴에 유리는 미소를 지었다.

“나머지는 팬들에게 맡기는 거야. 그 파장이 얼마나 커질지는 나도 모르지. 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결과가 나올 가능성은 무척 크다는 걸 장담할 수 있어. 어때?”

그러면서 방안에 있는 소녀들을 둘러보는 유리였다.

‘이 정도였다니… 앞으로 더욱 바짝 조여야겠어.’

‘이게 숨겨진 유리의 면모였어?’

경천동지한 유리의 계책에 경계심을 한 층 끌어올리는 수연과 미영이었다.

그리고 윤아는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한 채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며 그녀의 계획에 찬성한다.

“저는 좋아요. 그렇게만 하면 반드시 결과가 나올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적극적으로 찬성하는 그녀의 모습에 유리가 말한다.

“부담 가질 필요 없어. 이건 말 그대로 팬들에게 창현의 키스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 하냐고 물어보는 거니까. 팬들이 부당하다고 생각하면 스스로 나설 것이고 부당하지 않다고 하면 나서지 않을 거야. 우리 잘못은 아무것도 없어. 단지 팬들에게 알 권리를 주는 것이니까. 죄책감 가질 필요 없이 그냥 지켜보면 되는 거야. 알겠지?”

그렇게 말을 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대로 끌고 나갈 것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면서 스스로 위로할 수 있는 명분까지 취할 수 있고.

“네.”

고개를 끄덕이는 윤아를 일별하며 유리가 입을 열었다.

“너희들은?”

“난 괜찮다고 생각해.”

“나도…….”

계획 자체는 무척 훌륭하였기에 수연은 순순히 동의를 표했고, 미영 또한 자신이 세운 것보다 훨씬 성공 확률이 높은 계획이라 판단하였기에 그 의견을 거부하지 않았다. 자신이 세운 계획이 정도라면 유리가 세운 계획은 사도에 가까운 계획이니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녀의 계략은 청순한 외모와 달리 너무나 음험함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것이 진정한 암중 모략가 사마율의 진가였다.


최미경은 올해 33세로 골드 미스다.

연봉 5천만 원이 넘고, 그 돈을 재테크로 잘 활용하여 남부럽지 않은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직장에서도 그 능력을 인정받아 몇 년 후까지 탄탄하게 버텨낼 수 있을 것 같고, 퇴사를 하더라도 그동안 모아놓은 돈으로 재테크를 잘 해놓았기에 적어도 다른 사람에게 굽실거리면서 살지 않아도 된다.

행여 몸을 망칠까 싶어 회식 자리는 가급적 피하고 나가지 않는 그녀는 일주일에 한 번씩 걷는 지역 사회 모임에 가입해 있었다.

집에서는 결혼하라고 난리가 아니었지만 그녀는 아직 결혼에 크게 생각이 없었다.

함께 결혼하면 집안일 같은 것은 정확하게 나눠야 하고 서로가 서로를 신경 써줘야 하는 일이 많은데, 아직 그녀는 그럴 각오가 되지 않았다.

구시대적인 남녀차별이 많이 완화되었다고 하나 아직 결혼은 여자가 불리한 점이 많다 생각하는 그녀였다. 자신에게 어느 정도 돈이 있고, 남자에게 혼자 집을 사라 할 생각이 없는 만큼 그녀의 눈이 너무 높은 건지도 모른다.

그뿐인가? 애를 낳아도 조기 유학이니 사교육이니 해서 휘청거리는 친구들의 모습을 볼 때면 결혼할 마음이 절로 싹 가시고는 한다. 골드 미스로서 너무 자유분방하게 살아서인지 절대 결혼을 하지 못할 것 같기도 했고.

그런 그녀에게 얼마 전 한 가지 취미가 생겼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작년 초부터 생긴 취미라 할 수 있었다.

취미라기도 뭐한 것이, 한 사람의 팬이 되어 온라인에서 활발한 행동을 하고 있는 만큼 정확히는 취미라기보다 팬질이라 해야 함이 옳으리라.

올해 33세인 그녀를 주책 맞게 팬 문화로 입문 시킨 존재는 다름 아닌 현이라는 예명을 가진 창현이었다.

작년 2월,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그가 불미스러운 일로 얼굴 없는 가수에서 본격적으로 얼굴을 공개하고 데뷔 무대를 갖게 되자, 무심코 TV를 보던 그녀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자신이 예상한 것보다 현의 나이가 훨씬 어렸던 것이다.

그때부터 현의 존재를 자각했다 할 수 있다.

“세상에나, 저 나이에 벌써 저런 위치에 올라섰다고?”

그녀가 현에 대해 자세히 몰랐지만 얼마나 유명한지는 알고 있다.

2006년도를 휩쓸었던 라샤의 프로듀서이자, 얼굴 없는 가수로서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앨범을 판매한 가수. 비단 한국 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 전역에서 상당한 인지도를 얻고 있는 가수가 바로 현이었다.

그런 현의 실제 나이가 자신의 조카뻘 밖에 되지 않았다니.

그야 말로 충격 그 자체였다.

그리고 그녀는 현의 무대를 집중해서 보게 되었다.

나이를 제외하고 무대를 장악하는 카리스마와 폭발하는 듯한 가창력은 왜 노래에 빨려 들어간다고 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의 표정, 그의 음성에 느껴지는 감정 하나하나에 반응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을 때, 어느 샌가 현이라는 마약에 중독되어 있었다.

특히 인간의 한계를 넘나드는 듯한 고음 영역은 전형적인 고음병인 그녀에게 있어 큰 감흥을 주었다.

“정말 대단해.”

그녀를 감탄하게 만든 것은 가창력뿐만이 아니다.

장래가 촉망되는 저 잘생긴 얼굴 또한 흥미를 끌고 있으니까.

무언가 범접하기 힘든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으면서 단정한 느낌과 모범생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얼굴 또한 몇 년 후가 지나면 꽃봉오리가 화려한 만개를 할 듯, 아니, 지금도 충분히 만개를 한 상황이었지만 앞으로가 더욱 기대가 되었다.

게다가 부르는 노래 하나하나가 마음을 끌지 않는 노래가 없었다.

<Go&Stop>이라는 노래는 답답한 마음을 뻥 뚫어버리는 듯하였고, <Bad Boy>라는 노래는 자신이 남자도 아니건만 공감을 해버리고 있었으니까.

무대를 장악하는 아우라와 폭발하는 가창력, 그리고 표정에서 묻어나오는 감정이 일품이었다.

저 나이에 저런 실력을 지닌 가수가 있었나?

고개를 갸웃하던 사이 어느덧 그녀는 현의 팬이 되어 있었다.

“좋아! 앞으로 너의 팬이 되어 주겠어!”

그가 낸 미니 앨범과 정규 1집 앨범을 구매한 미경은 곧장 인터넷으로 들어가 현의 공식 팬 사이트인 다크 스타에 가입을 하였다.

인기 아이돌의 팬덤을 가뿐하게 눌러버리는 듯한 숫자에 그녀는 감탄을 연발해야만 했다.

“정말 대단한데?”

본격적으로 자각하고 보게 되니 그의 인기를 실감하게 된다고 해야 할까?

특히 마음에 든 것은 무언가 정돈이 된 듯한 팬 사이트 분위기였다. 나이가 제법 많은 자신도 혼란을 겪지 않고 무난하게 적응을 할 수 있다는 점이랄까.

그런데 마음에 들지 않는 점도 있었다.

앨범을 구매한 팬들만 가입 인증이 된다는 건 그렇다 쳐도 팬 사이트 분위기가 지나치게 가라앉아 있던 것이다.

현이 자주 게시글을 남긴다고 하지만 그것 뿐, 다크 스타는 원천적으로 현의 음악성을 좋아하여 가입한 사람들이지, 몇 년 후 피어날 그의 비주얼과 가창력에 대해서 마음껏 이야기를 나눌 기반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주류는 현의 음악성을 논하는 팬들일 뿐, 자신과 같은 팬들은 밑바탕을 형성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원하는 건 이게 아니야. 내가 원하던 것은 자유롭게 현의 미래성에 대해서 토론해보고 싶었을 뿐이라고!”

그러면서 그녀는 현의 새로운 팬 카페를 만들게 되었다.

카페를 개설하고, 자신의 아는 동생들(아는 동생도 현의 골수 팬이었다.)을 동원하여 팬 카페를 화려하게 꾸미고, 카페가 원하는 방향부터 시작하여 자신이 생각하는 바들을 진솔하게 털어놓았다.

이름 또한 현이 귀엽다는 뜻에서 블랙 큐트라 이름을 지었다.

마침 그 날이 현의 공식적인 데뷔 날이었기에 수많은 팬 카페가 생성되었지만 여러 사람들과 의견을 나누는 것에 만족하였기에 별로 카페를 키우거나 개의치 않았다.

하나둘씩 인원이 늘어나기 시작하자 어느 순간 카페 인원은 백 명이 넘어가기 시작했다.

대다수가 미경과 같은 골드 미스였다.

현실적으로 누군가를 30대에 들어서면 누군가를 좋아한다고 하면 주변 시선이 상당히 부담스러워진다.

남자 아이돌 같은 경우 특히 그런데, 이상하게도 현의 팬이라 그러면 특별히 그런 제약이 없다.

무척 신기한 일이었지만 그는 비주얼로 먼저 얼굴을 알린 가수가 아닌, 가창력으로써 먼저 자신의 실력을 입증한 인물이었기에 거기에서 오는 인식의 차이라 볼 수 있었다.

그러던 중 어느 순간부터 회원 숫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야금야금 회원 숫자가 늘어나 천 명이 넘어가더니, 돌연 만 명까지 눈두덩처럼 회원이 불어난 것이다.

10대, 20대의 폭발력은 누구도 감당할 수 없지만 젊음의 열정과 중년의 노련함이 맞물리는 30대의 힘은 대단하다.

현의 얼굴이 등장하고, 수많은 팬 카페가 생성되었지만 미경이 설립한 블랙 큐트 같은 회원간의 끈끈함이 유지되지 못했던 셈이다.

기본 활동 인원이 보장되고, 현에 대해서도 활발하게 토론을 하다 보니 인원은 차츰 늘어나 어느덧 일만이 넘어버리고, 점점 그 숫자가 불어나기 시작하였다.

마치 돈이 돈을 부른다는 말과 같이 팬이 팬을 부르는 셈이었다.

게다가 현을 남자 아이돌처럼 열광하는 여성 팬들은 다크 스타에 상당한 불만을 가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직접적이지 않지만 간접적으로 자신들을 탄압하고 있다는 느낌이 물씬 들었나보다.

그랬기에 블랙 큐트를 정식 팬 카페로 승격시키려는 움직임이 일어났고, 그리 되면 현과 자체적인 팬 미팅 같은 것도 열 수 있을 것 같았기에 미경을 비롯한 간부진들은 AA엔터테인먼트에 협상을 시도하여 마침내 성공을 거두게 된다.

사장인 석규와도 인사를 나누고, 마침 앨범을 준비 중이던 라샤와도 만남을 가질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현과의 만남.

미경을 비롯하여 초창기 멤버 다섯 명의 간부들은 현과의 만남을 무척 학수고대하면서 한편으로는 긴장감을 감추지 못했다.

어린 나이에 정상의 자리에 올라선 젊은 황태자. 행여 그가 성공으로 자만하고 자아도취에 들어서 있지 않을까 걱정을 하고 있었다. 만약 그가 성공이 주는 달콤함에 빠져 있다면 팬으로서 상당한 실망을 할 수밖에 없기에.

그러나 그것은 착각에 불과한 기우였다.

세계적으로도 성공한 자신들의 젊은 황태자는 겸손하고 소탈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며, 자신을 믿고 지켜봐주는 팬들을 진정으로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인물이었다.

잠깐의 성공에 취하여 반짝이는 스타가 아닌, 진정으로 오랫동안 대중들의 사랑을 받을 만한 가수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비주얼, 가창력에 감동을 받았지만 이제는 성격에서도 반해버린 셈.

‘누나들이 팍팍 밀어줄게!’

흡족한 만남 속에서 앞으로 잘 부탁드린다는 창현의 말과 함께 정식 팬 카페로 승격하는데 성공한다.

아울러 현이 가입을 하였고.

그 증거물로 사장인 석규와 현, 라샤와 찍은 사진을 메인에 올려놓으니, 블랙 큐트의 회원 숫자는 단숨에 십만을 넘어서 이십만, 삼십만을 넘어서게 된다.

전부 행동파라 불리는 팬들이 모여 있었기에 그 파급력은 다크 스타에 못지않을 정도로 커진 곳이 바로 블랙 큐트였다.

그러나 정작 다크 스타와는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다 같은 현의 팬일 뿐만 아니라 다크 스타에서는 처리하기 골치 아픈 팬들을 블랙 큐트에서 데려간 격이었기에 싫어할 이유가 없던 것이다.

게다가 다크 스타의 주인장과 미경의 나이가 비슷하여 간부진끼리 만남을 가질 정도였다.

신기하게도 다크 스타의 간부들은 남자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블랙 큐트 간부진과 비슷하게 전부 골드 미스터여서 만남의 자리가 졸지에 미팅의 자리로 변하게 된 적도 있었다.

그러다가 정말 커플로 발전한 곳도 있는데, 간부 중 두 명이 서로 결혼을 약속할 사이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일을 계기로 다크 스타와 블랙 큐트의 관계는 더욱 공고하게 변했고, 그 커플은 올해 하순에 결혼을 하기로 날짜까지 잡고 있다고 하였다.

같은 연예인을 좋아하는 팬 카페 간부들의 결합이었기에 이것은 무척 큰 화제가 되었다.

그것은 현의 귀에까지 들어가, 결혼 축하 게시글을 남기면서 시간이 맞으면 축가를 불러주겠다고 하니 제대로 된 팬 서비스의 연속이었다.

손에 잡히지 않을 정도로 높은 곳에 있으면서 행동 하나하나에 인간미가 묻어나오는 연예인이 바로 현이었다.

엄연한 직장을 다니고 있기에 미경이 블랙 큐트를 관리하는 시간은 딱 두 시간이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관리를 하고 퇴근 후 관리를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블랙 큐트를 개설하니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버릇이 들어 아침형 인간이 되어버렸다는 점이다.

매일 같이 관리한다는 것이 일종의 스트레스가 되었지만 자신을 든든한 후원군으로 여겨주는 현의 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흐뭇한 미소를 짓고는 한다.

“오늘도 힘내볼까.”

그러면서 가장 먼저 메일함에 들어가는 미경.

로그인을 하고 메일을 확인하는 순간 그녀의 눈길을 잡아끄는 것이 있었다.

“응?”

처음 보는 주소로 한통의 메일이 도착해 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제목이 범상치 않았다.

메일의 제목이 바로 현의 키스신이 성립되어서는 안 되는 7가지 이유라 되어 있던 것이다.

현재 현은 드라마 촬영을 하고 있는 상황.

달달한 로맨스에 들어서게 되면 키스신이 나올 것이라 은연중 생각하고 있었다.

제작사 측하고 불협화음이 있다는 루머가 돌기는 했지만 정상적으로 촬영하고 있다면 드라마 촬영이 거의 막바지에 접하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게다가 대본이 나왔다면 키스신이 있을 확률도 농후할 테지.

“설마…….”

미경의 표정은 자신도 모르게 메일을 클릭하고 말았다.

그러자 그녀의 눈에 들어오는 간략한 소개 글.

법에 접촉되기에 대본은 보여주지 못한다는 말이 있었지만 아직 그에게는 키스신이 적합하지 않다는 말과 함께 그가 키스신을 하지 말아야 하는 7가지 이유에 대해 상세히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

메일을 읽는 미경의 표정이 점점 굳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메일 내용에 세뇌되어 키스신을 하면 안 된다는 식의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 메일에는 왜 하면 안 되는지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고 있었고, 팬이라면 당연히 막아야 한다는, 그렇지 않으면 진정한 현의 팬이 아니라는 식으로 적혀 있었다.

메일을 다 읽은 미경은 곧장 컴퓨터를 껐다. 카페를 관리해야 하지만 오늘은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정말 메일의 내용인지 사실을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누군가의 장난이라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내용이 상세하고 목적이 뚜렷했다.

“…조사를 해봐야겠어.”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곧장 핸드폰을 들어 어디론가 연락을 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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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의 키스신 파동!

드라마 촬영이 막바지에 이르면서 키스신이 삽입되어 있다는 소문이 퍼져 나가자 넷상에서 난리가 나기 시작했다. 드라마 속 키스신을 가지고 현의 팬들이 대대적으로 난동을 일으키기 시작했던 것이다.

각종 게시판부터 시작하여 키스신 삭제 청원글까지, 인터넷에 수많은 글들이 올라오기 시작했고, 키스신에 대한 반대 의견을 펼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화제가 된 것은 현이 키스신을 해서는 안 되는 7가지 이유였다.

현의 팬 사이트 할 수 있는 곳은 다크 스타였지만 행동력만큼은 그에 못지않은 블랙 큐트가 중심이 되어 수많은 동맹 카페가 반대 운동에 나섰다.

그 파급력은 만만치가 않았다.

팬들 중 능력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처음에는 유출되지 않았던 대본이 이내 유출되어 인터넷에 떠돌기 시작하였고, 그것을 접한 사람들은 키스신이 정말 루머가 아닌 사실이라는 것을 인정하고야 말았다.

그리고 찬반이 뚜렷하게 갈리기 시작하였다.

현재 드라마의 흐름을 보면 키스신이 나와도 딱히 이상할 것은 없다. 아니, 오히려 한지훈, 최예린, 백은설 삼각관계에서 결국 해피엔딩으로 끝이 날 한지훈과 최예린의 달콤한 키스신을 바라는 사람들이 많을 정도였다.

이들은 대다수가 그저 드라마를 좋아하는 팬들의 의견이었다.

하지만 현의 팬들은 그 의견이 달랐다.

그들이 키스신에 반대하는 여러 이유가 존재하고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바로 현이 아직 미성년자라는 점이었다.

미성년자인 그가 성인의 역할을 맡는 것은 문제가 없지만 미성년자인 그가 키스신을 촬영한다는 것 자체가 사회적으로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이것은 어찌 보면 그들이 내세운 대의명분에 불과했다.

실제로 그들이 반대하는 이유는 그것이 아닌 단지 내 남자의 비즈니스를 용납하지 못할 뿐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의견이 힘이 실리는 이유는 아직 미성년자라는 점이 크게 작용하기에 그렇다.

현실은 미성년자 커플이 거리낌없이 입맞춤을 하는 시대가 되었지만 아직까지 보수적인 성향이 강한 사람들은 종종 그것을 용납하지 못하고는 하니까.

그리고 그 대의명분은 보수적인 사고를 가진 40대 이상의 층이 동의하게 만드는데 성공을 하였다.

드라마에서 보는 것만으로 그가 갓 20대에 올라선 청년인 줄 알았던 사람들은 그의 나이가 아직 고등 학생 격이라는 것에 반응을 보인 것이다.

자신의 아들 딸이 키스를 하고 다닌다고 대입을 해보라.

쿨하게 신경 쓰지 않을 부모들도 있지만 상당수 부모들은 그것이 신경 쓰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것이 큰 공감을 얻어내는데 성공했다.

이번 키스신 반대를 요구하고 나선 대표는 블랙 큐트의 매니저 최미경이었다.

한 언론의 인터뷰 요청에 그녀는 자신의 의견을 짤막하게 대답했다.

“어차피 직접 입맞춤을 하지 않더라도 키스신은 얼마든지 연출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로즈업을 한 채로 입맞춤을 하는 장면을 촬영한다는 것은 시청률을 높이기 위한 얄팍한 술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외에도 수많은 이유가 존재하고 있다.

키스신 파동이 일어난지 단 이틀이 지났지만 그 여파는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로 커진 상황이다.

블랙 큐트 측에서는 드라마 측에 대본 수정을 요구한 상태였고, 일부 극성팬들은 벌써부터 움직임을 보일 듯 들썩거리는 모습을 보였다.

그나마 극성팬들이 조용할 수 있었던 것은 블랙 큐트가 그동안 잘 통제를 한 덕분인데, 이번에는 전혀 그런 통제를 할 움직임이 보이지 않았다.

일부 팬들은 드라마 보이콧을 하겠다고 말을 할 정도니까.

그렇게 되자 사람들의 관심은 드라마 측과 현에게 집중되기 시작했다.

키스신이 있다는 것은 드라마 측에서 당연히 할 수 있는 시도였지만 팬들이 일어난 이상 그것을 무시하기 힘들어진다.

왜냐하면 드라마를 시청하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현의 팬일 테니까.

그 팬들이 돌아서게 되면 시청률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현의 반응이었다.

다른 배우였더라면 키스신이 나오더라도 별다른 대책을 세울 수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현은 다르다.

드라마 내에서 그의 존재감은 절대적이라 할 수 있기에 키스신을 거부한다면 충분히 대본 수정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팬들은 드라마 측에 대본 수정을 요구하면서 한편으로는 현에게 요구를 하였다.

키스신 수정을 요구해달라고.

특히 그를 상상의 연인처럼 여기는 극성 10대 팬들의 외침은 가히 광기에 젖어 있을 정도로 강렬하였다.

현이 그것을 싫어한다는 게 널리 알려져 있었기에 아직 움직임을 보이지 않은 것이지, 마지막 마지노선이 깨져버리면 어떻게 움직일지 가히 상상도 하기가 힘들 정도였다.

키스신 수정 요구는 드라마 측과 현 측 모두 바쁜 움직임을 보이게 만들었다.

“이거 엄청 난감해졌구나.”

석규는 창현을 부르고는 볼을 긁적였다.

인터넷에 일어난 소동을 본 그는 창현의 파급력에 혀를 내두르면서 한편으로는 그가 가진 영향력에 대해 다시 한 번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다른 배우였더라면 그저 그렇게 넘어갔을 텐데 현이 키스신을 한다니까 이런 파동을 일으키다니.

현의 공식 팬 사이트인 다크 스타의 접속자 숫자는 평소보다 두 배 가량 늘어나 있었고, 블랙 큐트 같은 경우 33만의 회원 숫자에서 이틀 동안 무려 7만이 증가하여 40만에 육박하고 있었다. 그리고 접속자의 숫자는 무려 열다섯 배 이상이 늘어나 있었다.

만약 현이 키스신에 대해 언급을 한다면 블랙 큐트에다가 가장 먼저 공지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너는 어떻게 생각 하냐? 네 생각이 가장 중요하게 대두되고 있는데.”

자신 앞에 심각한 표정을 앉아있는 창현을 향해 묻는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이렇게 심각해질 줄은.”

대본을 받아든 창현은 키스신이 있는 것을 보고 한동안 멍한 표정을 짓기는 했었다. 분위기 상 키스신이 나올 것이라 생각하긴 했는데 정말 나올 줄은 몰랐으니까. 아니, 나올 것이라 생각했지만 정말로 입을 맞추는 식의 연출을 할 줄 몰랐다.

키스신이라는 것은 어찌 보면 드라마의 하이라이트와도 같은 장면이다. 그렇기에 촬영을 하다 보면 한두 번만에 OK가 떨어질 가능성은 극히 희박, 결국에는 여러 번 해야 하기에 창현은 나름대로 고민을 많이 하였다.

이것이 외부에 알려지게 되면 어떤 반응을 일으킬지 상상이 되기도 하였고.

이번 일이 터지기 전에도 키스신에 대해서 몇몇 네티즌들이 분석에 가까운 글을 올리고는 하였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파장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이렇게 큰 파장이 일어난 까닭은 블랙 큐트가 정면으로 들고 일어나서 그런 것이긴 하지만.

“설마 미경 누나가 그렇게 들고 일어날 줄이야.”

“그 사람은 너의 모든 것을 좋아한다고 할 수 있다. 나쁜 의미가 아닌, 정말 너를 지켜주고 싶고, 후원해주고 싶다고 했지. 그런 만큼 그 사람의 마음은 다 너를 위한 마음이라 할 수 있다. 솔직히 아직 이른 감이 없지 않아 있기도 하고.”

차라리 외국이었다면 별 말이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곳은 한국. 상당히 개방적으로 변했다 하나 의식 아주 깊숙한 곳에 박혀있는 보수적인 사고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렇기에 누구에게도 무어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 아이들이 그렇게 철회 요구를 하는 것에는 이유가 충분히 있다. 그런 만큼 네가 의견을 내는 것이 사태 진화를 위해 유리할 것이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사태는 악화될 확률이 높을 것이고.”

“…왜 이렇게 일이 진행된 거죠?”

“생각보다 커지기는 했지만 어차피 예견한 일이 아니더냐? 이미 예상한 일을 가지고 무어라 하기에는 우스운 일이지.”

말은 하지 않았지만 석규도 상당히 기분이 언짢았다.

들고 일어난 팬들 때문이 아니다. 석규는 드라마 제작 측에 화가 난 것이다.

김지환 감독이 그의 후배이기에 여러 면에서 너그러이 눈 감아 준 것이 있지만 이번 키스신은 석규가 들고 일어날 수 있는 여지를 가지고 있었다.

현을 캐스팅하면서 그에게 최대한 배려를 아끼지 않겠다고 했으면 키스신을 넣을 때 당연히 자신에게 먼저 알리는 것이 예의였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소속사 측에서 톱스타 연예인의 ‘키스’는 속된 말로 비싸게 팔아먹을 수 있는 하나의 장치니까.

당장 창현을 뮤지컬에 투입하고 키스신을 넣는다는 전제로 계약하게 되면 넣지 않는 것과 그 금액은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그 정도로 큰 파급력을 지닌 것이 바로 키스신이다.

그런 키스신을 자신의 동의도 구하지 않은 채 멋대로 넣으려 했다?

언짢을 수밖에 없다.

“아버지도 그리 기분이 좋지 않으신가 보네요.”

창현의 말에 석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로서도 좋아할 수 없는 일이라 할 수 있지. 흐름상 키스신은 필요하지만 정말 입을 맞추지 않고도 촬영이 가능할 테니까. 그것을 이쪽에 밝히지 않았다는 것이 조금 불쾌할 뿐이다. 하지만 이것은 나의 생각일 뿐, 지금 중요한 것은 네 생각이다.”

“솔직히 어떻게 해야 할지 단번에 결정을 내리기가 힘들어요. 이미 대본은 나와 있고 드라마 측에서도 대본을 바꾼다는 게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닐 테니까요.”

창현은 양측의 입장에서 고민을 하고 있다.

팬들이 정녕 그것을 원한다면 자신이 나서서 대본 수정을 요구하는 것이 옳다. 하지만 드라마 제작 측의 의도를 감안하면 그대로 따르는 것도 옳은 일이다.

두 가지가 서로 대립되기에 창현은 괴로웠다.

이럴 때는 당장 움직임을 보일 듯, 은연중 자신에게 압박을 가하는 극성팬들의 존재가 싫기도 하였다.

“어떻게 해야 하지?”

차라리 자신만 국한된 일이라면 그냥 넘어갈 테지만 팬들이 관련되어 있기에 창현은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그 모습에 석규가 물었다.

“극성팬 때문에 그러는 것이냐?”

“…….”

대답하지 않은 채 창현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석규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입을 열었다.

“아마 너는 극성팬들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할 게다. 맞지?”

“네. 솔직히 이해하기가 힘들어요.”

자신을 좋아해주는 것은 고맙지만 왜 그렇게까지 좋아해주는지 솔직히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왜냐하면 자신은 그런 적이 없으니까.

경험에도 없는 일이기에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럼 극성팬의 입장을 이해하면 결정을 내리는데 용이하겠구나.”

“그럴 것 같아요.”

지금 창현의 마음속에서 가장 걸림돌이 되는 건 다름 아닌 극성팬들이었다.

슬쩍 팬 카페에 들어가서 동태를 확인해보니 심상치 않은 기운이 감돌고 있었으니까.

“극성팬의 입장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줄 사람이 있다. 그 이야기를 들어보고 네가 결정을 내리도록 하여라. 그러면 되겠지?”

“극성팬의 입장에 대해서요? 설마 밑에서 데려오기라도 하시려고요?”

이미 몇몇 극성팬들은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AA엔터테인먼트의 건물 앞으로 다가와 키스신을 반대해달라는 청원을 넣고 있었으니까.

놀란 창현의 얼굴을 보며 석규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다른 극성팬이지. 회사 내에도 극성팬이 있다는 것을 몰랐나 보구나.”

“그랬나요?”

고개를 갸웃하는 창현을 보면서 석규는 피식 웃음을 짓고는 인터폰을 꾸욱 눌러 비서실에 연결하여 말했다.

“연습실에 있는 지영이를 데려오도록 하게. 급한 일이니까 지금 당장.”

그렇게 말하며 전화를 끊는 석규를 보며 창현이 놀라 물었다.

“지영이는 갑자기 왜요?”

“극성팬의 입장을 설명해줄 사람이다.”

지영이가 극성팬의 입장을 설명하다니?

그게 무슨 말이란 말인가?

창현의 얼굴에 짙은 의혹이 서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지영은 사장실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석규를 보고 창현을 보더니 순간 멈칫하다가 입을 연다.

“갑자기 무슨 일이에요, 아빠… 아니, 사장님.”

정규수업이 끝나면 주 5일 AA엔터테인먼트에 오고는 한다. 다른 기획사 연습생들은 어떻게 하는지 모르지만 주말은 특별 연습이 존재하지 않는 한 오지 않으니까.

지영이 등장하자 석규는 미소를 지으며 그를 맞이한다.

“그래, 어서 와라.”

“무슨 일로 부르신 거예요?”

석규만 있었으면 좀 더 편안하게 말을 했을 테지만 창현이 있기에 조심스럽다. 그것은 그녀가 인터넷 상에서 벌어진 일들을 알고 있기에 그렇다.

“일단 앉아라.”

조심스러운 그녀의 모습에 석규는 자리를 권했고, 지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자신을 부른 용건을 말해달라는 듯 석규를 바라보자, 그가 입을 열기 시작한다.

“우선 사장으로, 보컬 트레이너로 만난 것이 아니니 편안하게 해도 된다. 네 의견을 듣고 싶어서 부른 거니까.”

“그래요? 알았어요.”

“널 부른 이유는 간단하다. 창현이, 네가 말해라.”

어찌 보면 이번 일은 창현의 의견에 전적으로 알려있는 셈. 석규도 그 부분에서 기분이 상당히 언짢은 상황이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창현의 의견이다.

그의 말에 창현은 지영에게 시선을 고정하며 말했다.

“지영이 너도 알 거야, 지금 드라마 내 키스신 가지고 논란이 되고 있다는 걸.”

“…….”

창현의 말에 지영의 표정이 사라지면서 살짝 고개를 끄덕인다. 그 모습만 보아도 그녀가 키스신에 대해 그리 좋게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영으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설마 했건만 정말 키스신이 나올 줄이야.

물론 나올 수도 있다 생각했지만 세상에 수도 없이 많이 존재하는 것이 키스신이다. 그리고 그 중에는 절묘한 카메라 각도로 키스를 하지 않아도 한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방법이 있다.

직접 하지 않더라도 카메라 감독의 훌륭한 기술로 한 것처럼 보이게 하여 수많은 사람들의 상상을 자극할 방법이 있지 않은가!

그런데 직접 키스신이라니!

지영은 속으로 열불이 치밀어오르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그 작가가 분명 오빠를 싫어하거나 여자 주인공을 통해 대리만족을 하려는 것일 거야.’

그렇게까지 생각하는 지영이었다.

그 정도로 그녀는 창현의 키스신에 대해 좋게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왜냐하면 창현의 키스신은 ‘내 남자의 비즈니스’가 아닌 ‘내 오빠의 비즈니스니까.’

팬들의 입장보다 훨씬 강력한 파괴력을 지닌 말이 아닐 수 없다.

그랬기에 그녀는 인터넷 상에서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블랙 큐트의 입장에 대대적인 찬성하는 입장이었다.

단순히 키스신이 싫다고 하면 속이 좁은 여인의 억지가 된다. 하지만 블랙 큐트에서 내세운 대의명분(?)을 대입하면 창현의 키스신을 막을 수 있는 훌륭한 핑계거리가 마련된다.

합법적으로 키스신을 반대할 수 있다는 뜻!

물론 창현의 결정이 존중되기는 하겠지만 제동을 걸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훌륭하다.

“키스신에 대해서 말이 많더라고.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 나는 아직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 널 부른 거야.”

“어떤 부분이 이해가 안 되는데요?”

지영의 물음에 창현은 순간 무어라 말해야 할지 멈칫했다.

그러자 석규가 창현이 할 말을 대신해주었다.

“극성팬들의 극단적인 행동을 말하는 것이다. 아무래도 제 입으로 말하려니 좀 그렇겠지.”

“극성팬들의 반응 때문에요? 그게 왜요?”

얼핏 듣고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을 짓는 지영의 모습에 석규는 친절하게 세세한 설명을 덧붙여주었다.

“창현이는 극성팬들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널 불러 네 의견을 들어보려 한 거야.”

“아아, 그렇군요.”

석규의 설명을 듣고 완전히 이해한 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그녀는 순간 멈칫하였다. 분명 그 말을 듣고 납득하기는 했는데 묘하게 자신의 머리에서 걸리는 내용이 존재했던 것이다.

지영은 석규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황당한 표정을 지은 채 물었다.

“잠시만요, 그런데 왜 극성팬의 행동을 제게 묻는 거예요?”

“하하하! 그 이유는 간단하지 않느냐? 바로 네가 여동생을 가장한 극성팬이니까 그러는 게지.”

지영의 습성을 정확하게 꿰뚫어보는 석규였다.

하기야, 키스신 이야기가 나올 때부터 표정이 사라지고 눈은 활활 타오르고 있는데 눈치 채지 못하면 그것이 더 이상할 것이다.

남들이 보기에는 그저 흐뭇한 동생의 반응이라 볼 수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예전 불미스러운 일도 있고, 지영이 필요 이상으로 창현을 따르는 모습을 볼 때마다 석규는 그녀가 그를 얼마나 생각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녀가 인정하던 말든 이미 석규의 머릿속에서는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극성팬 1호였으니까.

“후우!”

자신을 극성팬으로 단정 짓는 석규의 모습에 한숨을 푹 내쉬는 지영이었다. 무어라 말을 하고 싶지만 이미 단정지어버린 것을 되돌릴 만큼 힘이 남아돌지 않았다.

진실은 언제나 껄끄러운 법.

자신도 마음 한편에서는 극성팬이라는 것을 묘하게 인정하고 있기에 지영은 변명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창현을 바라보며 묻는다.

“정확하게 극성팬의 무엇이 궁금하신 건데요?”

“간단해, 왜 극성팬이 그렇게 극단적인 반응을 보이는 건지 이해를 못하겠어.”

“으음! 만약 오빠가 키스신을 그냥 하겠다고 하면 극성팬들이 극단적인 행동이 마음에 걸려서 그런 거네?”

“그렇다고 할 수도 있지.”

본인 또한 극성팬이라는 것을 입증하듯 정확하게 꿰뚫어보고 말하는 지영이었다.

맞다는 듯 창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지영은 순간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다는 건 키스신을 그대로 진행할 가능성이 높다는 뜻 아닌가?

‘그건 안 돼! 나는 블랙 큐트를 적극 지지하는 사람으로서 현의 여성 팬들에게 희망을 줄 의무가 있어. 내가 반드시 마음을 돌려놓겠어.’

굳게 다짐을 한 지영은 빠르게 머리를 회전시켰다. 그리고 극성팬들의 장점과 단점을 분류한 뒤 창현에게 천천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일단 극성팬들이 왜 오빠한테 열광하는지 알아?”

“음악이 좋아서일까?”

둔감한 걸까, 아니면 자신에 대해 자각을 못하는 걸까.

지영은 문득 이 사람을 좋아하는 유리 언니가 무척 힘들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면 뭔가 치밀한 계획을 세울 텐데 늘 아는 듯하면서 모르는 듯하니 갈피를 잡기가 힘들어보였다.

한숨을 푹 내쉰 지영이 간단하게 설명했다.

“그런 점도 분명히 있어. 하지만 약간 다른 점도 있어. 그게 뭔지 알아?”

“글쎄…….”

“간단해. 음악이 좋은 것도 있지만 오빠의 존재 자체로 희망을 얻고 있기 때문이야.”

진실 속에 거짓을 섞으면 설득력이 생기지만 창현은 그것에 속을 만큼 녹록하지 않다. 그렇기에 지영은 진실 속에 거짓을 넣지 않고 진실을 과대 포장하여 들려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나에게 희망을?”

“간단해. 사람들에게는 자신이 원하는 우상이 있어. 의미는 약간 다르지만 그 사람들을 아이돌이라 하지. 오빠는 알지 모르지만 지금 수많은 사람들의 우상으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어. 그 사람들은 오빠의 음악을 듣고, 드라마 혹은 CF, 음악 프로그램에서 나오는 오빠의 모습을 보고 마음의 위안을 얻지.”

일종의 안정제와도 같은 역할을 한다.

자신이 힘이 들고 괴로울 때 좋아하는 누군가를 보게 되면 마음이 편해지고는 한다. 극성팬들 상당수에게 있어 창현은 그녀들에게 그런 작용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뭘 했다고…….”

정작 당사자인 창현은 납득하기가 힘든가보다. 자신에게 위안을 얻다니, 차라리 음악을 듣고 위안을 얻었다고 하면 설득력이 있을 텐데 이렇게 말하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람들에게는 상상력이라는 것이 존재하잖아. 오빠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방송에서 비춰진 오빠의 이미지는 무척 좋아.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확실한 자신의 꿈을 가진 사람이고, 노래 또한 잘 부르지. 능히 천재라 불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겸손한 모습을 보여 사람들에게 호감을 샀어. 어디 그뿐이야? 만원의 행복에서 가정적인 모습을 보여주었고, 천의 매력에서는 천의 매력을 뽐내며 가능성을 보여주었지. 뿐만 아니라 연말 가요제에서 음향 시설이 안 좋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을 압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어. 드라마에서는 여자들이 그토록 열광하는 나쁜 남자의 모습을 보여주었지. 곧잘 방송에 등장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굵직한 매력을 여러 차례 보여준 오빠를 보면서 여성팬들은 무어라 생각하겠어?”

“…….”

새로운 지영의 견해를 들으며 창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사이 지영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빙산의 일각이라는 말이 있잖아. 여성 팬들에게 있어 오빠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점이 무궁무진한 빙산의 일각과도 같아. 그리고 오빠를 보면서 이러이러한 매력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라고 상상하면서 빠져드는 거지. 그 강도가 다른 팬들보다 심해진 것이 바로 극성팬이라 할 수 있어.”

결국 자신만의 상상력으로 극성팬이 되어버렸다는 이야기였다.

“그녀들에게 있어 오빠는 희망과도 같은 존재야. 나는 잘 모르지만 요즘 세상 살기가 무척 어려워졌다는 말을 하고는 하잖아? 사람들은 힘든 일이 있을수록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 그래서 정세가 어지러울 때 곧잘 종교가 출몰하는 것이기도 하고. 그런 점에서 오빠는 많은 여성 팬들의 왕자님이 되어 있어. 왕자님은 언제나 고귀하길 원하고, 자신만의 것이 되길 바라지. 그렇기에 키스신을 피할 수 있음에도 피하지 않는 오빠가 다른 결정을 내려주길 원하고, 자신들의 희망을 뭉개버리는 드라마 제작 측에 분노하고 있는 것이야.”

극성팬들의 입장을 말하고 있지만 자신의 생각도 살짝 섞여있다.

그것을 은연중 느낀 지영이지만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신이 곧 극성팬이기에 그 뜻이 극성팬들의 뜻과 같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럼 내가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묵묵히 지영의 말을 듣고 있던 창현이 한 말이었다.

원래 생각은 좋든 싫든 대본대로 나아가는 것이었는데 그녀의 말을 듣고 나서 생각이 바뀌었다.

자신으로 인해 희망을 얻는다, 그것은 음악으로 희망을 주겠다는 의도와 다소 달랐지만 방향만큼은 같았다. 자신의 노래가 아닌, 존재 자체로 희망을 얻는다는 것은 옛날로 치면 미륵 혹은 성자와도 같다는 이야기니까.

방금 전까지만 해도 단순히 삐뚤어진 애정을 보여주고 있다 생각했다면 지금은 자신의 존재 자체로 희망을 얻고 있는 그들이야 말로 자신에게 가장 큰 사랑을 베풀어주는 존재가 아닐까 생각되었으니까.

그들이 원하고, 팬들도 원한다면 자신의 생각을 한 번쯤 꺾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 창현이었다.

지영은 자신의 말에 넘어온 창현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어차피 극성팬들도 억지를 부리지 않아. 키스신을 없애라는 이유가 아니라 수정을 해달라는 것뿐이잖아? 대리만족으로 그것을 보는 사람도 있겠지만 아직 오빠가 미성년자이기에 소중히 여겨주려는 팬들의 마음을 저버리면 안 된다고 생각해. 키스신을 없애는 것이 아닌, 직접 하지 않고 살짝 수정하는 것만 하면 모든 일은 무마될 거라 생각해.”

그것이 결론이었다. 그리고 창현이 생각하는 타협점이기도 하였고.

그 말에 잠시 생각에 잠기던 창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팬들이 정말 그렇게 하길 원한다면 행동하는 게 옳겠지.”

“그렇게 결정을 내렸으면 그렇게 하도록 해라. 김지환 감독에게는 내가 잘 말을 하도록 하마. 기분 나쁘지 않은 선에서 이야기를 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네, 아버지만 믿을게요.”

그러면서 창현은 지영을 바라보며 고개를 꾸벅 숙인다.

“마냥 어리다고 생각했는데 이럴 때만큼은 도움을 얻네. 의견을 내줘서 고마워, 지영아.”

“내, 내가 뭘. 그냥 내가 생각한 바를 털어놓은 건데…….”

정중한 모습을 보여주는 창현의 행동에 지영이 얼굴을 붉히고는 말을 더듬는다.

그 모습에 싱긋 미소를 지은 창현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고마워서 그러는 거니까 순순히 받아들여.”

“으응.”

“그런 의미에서 오늘 맛있는 거나 먹으러 갈까?”

고민이 풀리니 여유가 돌아온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식사할 겨를조차 없었는데 결정을 내리니 행동도 여유롭게 변했다.

“응, 밥 먹으러 가자. 맛있는 걸로.”

“그래그래.”

다시 어린 아이 같은 모습으로 돌아온 지영의 모습에 창현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키스신에 대한 창현의 결정은 ‘수정’이었다.




제66장 버프해주는 소녀들




키스신에 대한 소동은 창현이 직접 게시글을 올리는 것으로 잠잠해졌다.

석규가 김지환 감독과 전화를 하여 키스신에 대한 협상을 먼저 하였고, 그 과정에서 김지환 감독은 가급적 키스신을 강행하고 싶어 하였지만 석규도 완고하게 대응하였기에 결국 의견을 굽힐 수밖에 없었다.

만약 평소 상황이었더라면 자신의 의견대로 밀고 나갔을 테지만 이미 그가 슬럼프를 겪으며 한차례 소동이 일어났고, 그로 인해 현과 드라마 제작 측에 불화가 존재한다는 의구심이 더욱 짙어질 수 있다고 판단해서 수락하는 수밖에 없었다.

더 나아가자면 창현의 슬럼프를 극복하는데 자신이 도움을 주지 못하고 윽박지르기만 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도 있었고.

블랙 큐트에 직접 키스신을 수정했습니다, 라는 게시글을 작성하자 그것은 기자들에 의해 가공되어 연예란을 도배하다시피 하기 시작했고, 미성년자에게 키스신은 너무 하다는 우려의 목소리를 간신히 잠재울 수 있었다.

이번 일은 현의 팬들이 얼마나 큰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에 대한 하나의 사건으로 남기에 충분한 일이었다.

소위 말하는 ‘누나 팬’들의 힘이 가장 강력하게 발휘되었던 사건이니까.

“후우! 이번 드라마는 이래나 저래나 쉽지가 않네요.”

간신히 소동이 조용해지는 듯 싶자 창현은 거듭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석규는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후후! 그런 면도 있지만 얻는 것도 있지 않느냐? 이번 드라마는 네게 있어서 결코 손해가 아니라 할 수 있다.”

“그건 그렇죠.”

그 말에 대해서는 창현도 동의하는 바였다. 드라마를 하면서 자신이 알지 못하던 것들을 깨달을 수 있었고, 그것은 결과적으로 자신을 한 단계 발전시키는데 도움이 되었으니까.

“앨범은 어떻게 되고 있나? 잘 되고 있어?”

“음! 노래를 준비하는 건 어렵지 않은데 안무를 짜는 건 좀 힘이 드네요.”

“그건 안무 팀에게 맡겨도 되지 않나? 왜 굳이 직접 하려고 하는 거지?”

노래가 완성되면 그에 어울리는 안무를 안무 팀이 자체적으로 만든다. 그리고 그 춤 이름에 가명을 붙여놓고 티저 영상이나 뮤직비디오를 공개할 때 춤의 이름을 흘려 유행을 시도한다.

안무 팀에게 맡겨도 될 것을 창현이 직접 세세하게 신경 쓰려고 하니 석규가 그렇게 말하는 것은 당연했다.

하물며 그는 현란하게 춤을 추며 노래를 해본 적이 없으니까.

“그것도 그렇지만 효리 누나에게 힌트를 얻어서 제 힘으로 직접 해보고 싶거든요.”

미소를 지으며 말을 하는 창현의 모습에 석규는 어깨를 으쓱했다.

“뭐 그럴 수도 있겠지.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면 곤란하다. 우선 대략적인 것은 짜놓고 포인트 안무에 대해서는 네가 몇 가지를 만드는 것이 어떻겠냐?”

“그것도 괜찮네요.”

처음부터 자신이 다 할려고 하니 어려운 것은 당연했다.

그런 만큼 자신이 모든 것을 다 해내려는 것보다 도움을 받고, 자신이 몇 가지를 준비하는 것이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석규와 충분히 이야기를 나누었기에 이런 조언도 들을 수 있는 것일 테지만.

“그럼 그 부분은 그렇게 하도록 하지. 처음부터 모든 걸 다 하려고 하면 힘이 드니까. 게다가 드라마 촬영도 얼마 가지 않으면 끝이 나니까 너무 무리하지 말도록 하여라.”

“알았어요.”

약 네 달가량 이어지던 드라마 촬영이 마침내 끝이 보인다.

후련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섭섭한 마음이 드는 것이, 드물게 굴곡이 많아서 그런 느낌이 드는 듯했다.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창현의 모습에 석규는 속으로 진한 웃음을 지었다.

이번 드라마 촬영은 득보다 실이 많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결과적으로 창현이 한꺼풀 허물을 벗는데 성공하게 되었다.

“다음 앨범이 기대되는군.”

솔직한 석규의 마음이었다.

어떤 앨범이 나올까.


수연은 오랜만에 SM엔터테인먼트 건물을 방문하였다. 스케줄이 없는 멤버들은 종종 가위 바위 보를 하여 자신들에게 도착한 선물이나 팬레터를 분류하는 작업을 하고는 하는데, 그동안 무패에 가까울 정도로 전승 기록을 보유하고 있던 수연이 져버린 것이다.

SM엔터테인먼트에 방문한 수연은 오랜만에 동생을 볼까 싶어 수정이 있는 연습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녀가 연습실 안으로 들어서자 수정이 반가운 표정을 지은 채 그녀에게 쪼르르 달려온다.

“언니!”

“그동안 잘 지냈어?”

“잘 지냈지. 그게 무슨 말이야. 매일 전화하면서.”

시간이 나면 틈틈이 전화를 하고는 하는데 마치 오랜만에 만나는 것 마냥 이야기를 하니 어색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가? 어쨌든 얼굴을 보는 건 오랜만이잖아.”

“그것도 그렇지. 그런데 언니, 혹시 그 이야기 들었어?”

갑자기 작아지는 수정의 목소리.

“뭘?”

의아한 표정을 지은 수연이 멀뚱한 얼굴로 수정을 바라보자 그녀는 좌우를 살피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현 오빠 키스신 말이야, 키스신.”

“아아, 그, 그거……?”

수연의 목소리가 드물게 떨려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키스신에 관련된 이번 일이 이렇게 커지게 된 것은 자신들이 한몫을 했기에 찔릴 수밖에 없던 것이다.

행여 일을 벌이게 되면 통제할 수 없다던 유리의 말이 정말 사실로 드러나서, 가히 인터넷 공간 자체가 뒤집어지는 듯한 충격을 일으켜야만 했다.

대본 유출도 하지 않았기에 저지른 죄는 없지만 자신들의 제보로 인해 엄청난 일이 발생하였으니 그런 마음이 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왜 말을 더듬어? 어쨌든 그거 잘못했으면 큰일 날 뻔했잖아. 하마터면 현 오빠가 키스신을 촬영했을 테니까!”

물론 일이 이렇게 커지고, 마치 현이 피해자인 것처럼 포장되자 근영의 팬들도 반대의 입장을 내면서 합세하자 분위기가 상당히 묘해져 버렸다.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 팬들 모두 키스신을 바라지 않는 상황이 되었으니까.

그래도 수정이 현의 팬인 만큼 현이 더 아깝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지. 큰일 날 뻔했어.”

“그동안 언니는 뭘 했어?”

“으응?”

다짜고짜 진도를 물어오는 수정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하는 수연.

그러자 수정은 답답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한다.

“현 오빠랑 진도 말이야. 진도. 어서 진도를 빼야 현 오빠가 다른 곳으로 외도를 하지 못하지. 현 오빠를 노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이러다가 언니가 빼앗길 수도 있다고.”

“그, 그건…….”

그에 대해서 할 말이 없는 수연이었다.

확실히 요즘 기회를 노리지를 못하게 되었다. 소녀시대 내 권력 구도를 확립하는데 정신을 쏟았었고, 막내인 주현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는 걸 보고 방해하기 바빴으니까.

그것만으로 되리라 생각했는데 수정의 말을 들어보니 자신이 너무 안이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직접 앞으로 나서는 자만이 결과물을 취할 수 있을 텐데 현상유지만으로 은연중 만족하는 모습을 보였으니까.

첫 키스를 취했다고 하나 그것이 벌써 햇수로 2년이 넘어간 걸 감안하면 효과는 슬슬 바닥이었다.

수연이 퍼뜩 깬 표정을 짓자 수정은 열심히 바람을 넣었다.

“언니는 아직 스케줄이 태연 언니나 윤아 언니처럼 많지 않잖아. 그것이 단점이 될 수 있지만 연애 사업에서는 그것이 장점이 될 수 있다구? 게다가 현 오빠도 드라마 촬영이 끝나면 다시 바빠질 확률이 높은데 지금 기회를 잘 살려야지, 안 그러면 차츰 멀어지다가 이내 바이바이 하는 상황이 될 수도 있어.”

“…….”

마치 지켜보고 있는 것처럼 상황을 정확하게 진단하는 그녀의 모습에 수연은 말을 하지 않은 채 입술을 꼬옥 깨문다.

옆에서 부채질하는 수정의 말 때문일까? 은연중 괜찮을 것이라 생각하던 마음은 사라지고 점점 급한 마음을 느끼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방심해서는 안 돼, 언니. 다 잡은 물고기도 손에서 벗어날 수 있는데, 아직 현 오빠는 언니 손에 잡히지 않았어. 이대로 방심하다가 다른 사람이 채어버리면 어떻게 할 거야.”

그 말이 결정적이었다.

자신이 가만히 있어도 현을 노리는 사람은 무수히 많다.

당장 멤버들 내에서도 보이지 않는 치열한 경합이 벌어지고 있었으니까.

다만 그것이 표면화 되면 멤버들 내 갈등이 깊어지고, 더 이상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골이 깊어질 것 같아 누구도 언급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누구도 못 믿는 상황. 모두가 적이라 할 수 있었다.

폭군은 권력의 정점에 위치해 있지만 누구보다 외로운 자리였다.

정작 믿고 의논을 할 사람은 없었으니까.

그런 상황에서 수정은 수연에게 있어 한 줄기 광명과도 같았다.

자신이 약한 점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의논할 수 있었으니까.

다섯 살이나 어리지만 이 영악한 동생은 이론에 있어 무척 능통했다.

“…어떻게 해야 되지?”

“우선은 만나야 해! 어디 만날 수 있는 합당한 이유 없어?”

“…별로 없는데 최근 본 건 윤아가 드라마 촬영을 가서 같이 따라간 것밖에 없거든.”

답답한 수연의 모습에 수정은 가슴을 탕탕 두드렸다.

“으이구! 윤아 언니가 함께 가면 언니가 나아갈 수가 없잖아. 혼자서 만날 수 있는 그럴 듯한 이유를 만들어내야지. 가령 요즘 노래를 부르는데 슬럼프가 왔다거나 아니면 도움을 청하고 싶은 일이 있다거나, 상담을 하고 싶다거나.”

“와…….”

청산유수처럼 흘러나오는 수정의 말에 수연이 감탄사를 절로 흘렸다.

멤버들 중 파니나 유리도 대단한 두뇌를 지니고 있다 생각했는데 수정도 그에 못지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그 분야가 달라 파니는 기본기가 바탕 된 정도의 계략에 능통하였고, 유리는 허점을 찌르는 사도의 계략에 능통하였다.

정도의 계략은 그 효과가 크지는 않지만 꾸준하고, 연환계를 사용할 수 있는 장점이 존재하고 있다. 그에 반해 사도의 계략은 성공하면 크게 한 건 할 수 있지만 실패하게 되면 이도저도 아니게 되어 오히려 역효과를 발생하기도 한다.

수정은 정도도 아니고, 사도도 아니다. 굳이 말하면 중도? 중도라고 해봤자 거창한 것도 아니고, 정도와 사도를 오고가면서 부족한 점을 채우고 있는 것은 동생이라는 것과 순간적인 대처 능력이 뛰어난 잔머리였다.

잔머리라 하여 별 것 아닌 느낌이 들고는 하지만 오히려 거창한 계획보다 순간적인 잔머리가 도움이 될 때도 있는 법이다.

“후후! 역시 언니는 내가 도와줘야 한다니까? 언니가 뚜렷한 계획을 세우지 못한 듯하니까 내가 도와주도록 할게. 창현 오빠가 나는 그렇게 경계하지 않을 거니까 내가 두 사람을 이어준 다음 스윽 빠지고 두 사람이 같이하는 거야. 어때?”

“조, 좋은데?”

이보다 더 좋은 계략은 없을 것이다.

단 둘이 만난다고 하면 우선 의심부터 할 테지만 수정이 함께 하고 말을 맞춰준다면 제법 큰 위력을 발휘할 테니까.

더군다나 수정은 아직 멤버들이 모르고 있는 수연의 히든카드와도 같은 존재였다.

“그럼 곧장 계획을 잡도록 할게.”

이왕 이렇게 된 거 쿨하게 계획을 진행하는 수정이었다.

핸드폰을 연 뒤 곧장 창현에게 연락을 한 것이다.

전화를 위해 고개를 돌린 그녀의 얼굴에는 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후후! 언니를 핑계로 연락도 하고, 오랜만에 창현 오빠 얼굴도 보면 나도 손해는 아니지. 그러니까 좀 더 분발해달라고, 언니!’

수연을 도와준다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제보다는 젯밥에 관심이 있는 바, 아무래도 창현과의 만남이 더욱 기대가 되는 수정이었다.

그렇다고 양심이 찔리거나 그러지는 않는다.

왜냐고 묻는다면 언니를 도와주려는 마음은 정말이니까.

단지 우선순위가 조금 갈릴 뿐이다.

‘나도 좋고 언니도 좋잖아?’

자신은 현 오빠를 볼 수 있어 좋고, 수연은 자신으로 인해 좀 더 사이가 가까워질 수 있을 테니까.

수정도 현을 좋아하기는 한다. 하지만 그것은 이성이라기보다는 동경의 대상이랄까? 자신과 불과 두 살 차이밖에 나질 않는데 싱어송라이터로서 세계에 이름을 널리 알린 그가 너무나 대단하게 느껴졌다.

물론 만난 것이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 것일 테지만.

아마 몇 번 만나보고 그에 대해서 알게 되었으면 자신도 반했을 확률이 99.9%다.

게다가 나이 차이도 얼마 나지 않지.

두 살 차이라면 딱 좋지 않은가?

‘하지만 언니가 좋아한다고 하니까…….’

만약 수연이 좋아하지 않았더라면 한 번 노려봤을 텐데. 자신의 스킬(?)이라면 수연을 상회한다고 생각하고 있기에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지만 아쉽게도 자신감과 실전은 달랐다.

그랬기에 언니를 도우면서 자신은 팬으로서 그 입장을 즐기기로 마음을 먹었다.

동경하는 스타와의 만남은 언제나 설레는 법이니까.

수정이 그렇게 생각에 잠긴 사이 통화가 연결 되었다.

♩♪♬

-여보세요?

통화가 연결되자 수정의 눈이 영악하게 빛나면서 순식간에 예의바른 여동생으로 변모한다.

“안녕하세요, 오빠! 저 수정이에요.”

“…….”

옆에 서 있던 수연은 수정의 변화에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여자의 변신이 무죄라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설마 이렇게 변화무쌍한 모습을 보일 줄이야. 자신에게 대하는 태도와 창현에게 대하는 태도가 너무 달라서 어이가 없었다.

뒤통수가 따끔한 걸 느꼈지만 수정은 그 시선을 받지 않은 채 창현과의 통화에 집중하였다.

-응, 알지. 갑자기 무슨 일로 전화한 거야?

“네! 실은 오빠 드라마 촬영이 거의 다 끝나가는 것 같아서 축하하는 의미로 하루 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요! 물론 시간을 내주시기 어렵겠지만 특별히 시간 좀 내주면 안 될까요?”

직구 승부를 하는 수정이었다.

상식적으로 창현이 시간을 내준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 그러나 그녀는 남다른 눈썰미로 창현의 성격을 어느 정도 파악해둔 상태였다. 말은 바쁘다고 했지만 이미 드라마가 어느 정도 막바지에 이르렀다는 걸 알고 있기에 노린 말이었다.

‘이게 확률적으로 높단 말이지.’

그러면서 수정은 한마디 덧붙였다.

“물론 저 혼자 만나자고 하는 건 아니에요. 저희 언니도 같이 가기로 했거든요.”

은근슬쩍 수연을 끌어들이는 수정. 그 말에 수연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 긴장 어린 표정을 지은 채 창현의 말을 기다렸다.

나름대로 치열한 계산을 거친 뒤 한 말이지만 세상에는 언제나 예외가 있는 법이다.

-요즘 바쁘긴 해. 드라마 촬영이 끝나면 CF 촬영도 해야 하고 곧장 앨범 준비도 해야 하거든. 으음, 어떻게 한다.

수락할 줄 알았던 창현이 바쁘다는 말을 하자 수정이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바, 바쁘다고요? 그런데 앨범 준비하는 건 말해도 되는 거예요?”

-응. 앨범 낸 지 꽤 됐잖아. 게다가 이번에 좀 깨달은 게 있어서 알차게 꾸며보려고. 그리고 컴백 시기를 말한 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당황해.

“그, 그래도요. 팬으로서 오빠가 컴백하는 시기를 안다는 건 큰 거니까요!”

현의 컴백 소식에 흥분하던 수정은 그가 힘들다는 말을 한 걸 깨닫고는 다소 풀 죽은 목소리로 말한다.

“컴백 준비를 하신다면 힘들겠네요. 아쉬워라, 오빠 만나려고 휴가도 꼭꼭 챙겨두었는데.”

뻥이다, 실은 한 번 노는 거 거하게 놀려고 휴가를 비축해둔 것뿐이다.

말을 살짝 바꿔 마치 창현을 만나기 위해 휴가를 비축한 것처럼 말을 하는 수정이었다.

옆에 있던 수연은 이미 실망이 얼굴에 만연하였다. 아무래도 힘들 것이라 생각한 거겠지.

그렇게 말을 하긴 했지만 내심 힘들 것이라 생각하는 수정이었다. 스케줄이라는 것이 뺀다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던가.

희망을 솟구치게 만드는 창현의 말이 들려왔다.

-음! 이번 주 일요일에 시간이 비어서 작곡을 하려고 했는데…….

순간 수정의 눈이 반짝였다. 그날 작곡을 하려고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창현의 개인적인 시간이다. 그러니 충분히 만남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수정이 재빨리 머리를 굴리며 말했다.

“그, 그럼! 일요일에 만나요! 혹시 알아요? 만나서 더 좋은 악상이 떠오를지!”

모든 사람들에게는 욕심이 있다.

가수에게는 가창력 욕심이 있고, 작가는 작품에 대한 욕심이, 그리고 작곡가에는 더 좋은 곡에 대한 욕심이 있을 것이다.

창현 또한 작곡가이니 만큼 그 범주에 벗어나지 않으리라.

아니나 다를까, 수정의 말을 듣고 창현이 혹하는 기색을 보인다.

-그런가?

“그렇고 말고요! 게다가 SM엔터테인먼트에서 아름답기로 소문난 정자매와 이대일 데이트라고요! 이런 기회는 흔치 않아요!”

아주 대놓고 저지르는 수정이었다. 순간 적반하장이라는 말이 떠오르기는 했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제법 견고한 철가면이 자리하고 있었기에 말끔하게 무시를 해주었다.

“수, 수정아…….”

자화자찬이 극에 이른 수정의 말에 수연이 당황한 표정으로 그녀를 부르지만 그녀는 듣고 있지 않았다.

오직 창현의 대답만을 기다리고 있을 뿐.

-으음! 어떻게 한다.

정해진 스케줄을 바꾼다는 것은 상당한 마음의 각오를 필요로 한다. 그것은 창현 또한 마찬가지였고. 하지만 이미 앨범 수록곡들이 거의 다 완성된 상태고, 드라마도 거의 다 끝나가니 기분 전환을 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민하던 창현은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어느새 마음이 그쪽으로 기울고 있었고, 수정이 간곡하게 부탁하니 괜찮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하자.

“야호! 그럼 일요일 스케줄을 짜서 보내드릴게요.”

-네가 짜려고?

“그럼요! 제가 만나자고 했으니 제가 책임져야죠. 저만 믿고 몸만 오시면 되요, 오빠.”

뭔가 위험한 수위를 드나드는 말이었지만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신경 쓰는 사람이 있다면 수연 뿐.

그녀는 기어코 창현과 약속을 잡아낸 수정을 보면서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정말 자신의 동생이지만 대단하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몇마디 더 이야기 나눈 수정은 마침내 통화를 끝냈다. 그리고 수연에게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어보이더니 V를 그리며 수연에게 말한다.

“어때? 한 건 했다고.”

“정말 대단해…….”

진심이 섞인 감탄이었다. 그 감정이 그대로 느껴졌기에 수정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러다가 수연이 무언가 떠오른 듯 묻는다.

“그런데 일요일에 만나서 뭘 하려고?”

“뭘하긴, 당연히 데이트 코스인 놀이공원에 가야지!”

“놀이공원? 거긴 왜?”

“아니, 왜라니? 당연히 데이트 코스는 놀이공원이잖아.”

어디서 주워들은 것이 있는지 수정은 수연에게 적극적인 어드바이스랍시고 여러 가지 이야기를 주저리 하기 시작하였다.

바이킹에서 피어나는 사랑이라던가, 롤러코스터에서 느껴지는 스릴감이 사람의 감각을 예민하게 만들어 이성을 더욱 예뻐 보이게 만든다는 말도 안 되는 말이라던가.

끊임없이 말이 이어지려는 기색을 보이자 수연은 수정을 제지하였다.

“알았어, 왜 놀이공원인지 알겠어.”

“알겠지? 그리고 놀이공원에서 절호의 매력 어필 기회가 있어!”

“매력 어필 기회?”

솔깃한 표정으로 수정을 바라보는 수연.

말 잘 듣는 학생과도 같은 그녀의 모습에 미소를 지어보인 수정은 매력 어필의 수단을 말해준다.

“그건 바로… 도시락!”

순간 수연의 몸이 뻣뻣하게 굳으며 중얼거렸다.

“도, 도시락?”

“응! 남자는 모름지기 요리를 잘하는 여자에게 끌리는 법! 그런 점에서 요리야 말로 최강의 매력 어필 수단이 될 수 있지. 언니만의 개성을 담은 맛있는 요리로 현 오빠를 단숨에 넉다운 시켜버리는 거야!”

그 넉다운이 그 넉다운이 아니건만 수연의 머릿속에서는 순간 자신의 요리를 먹고 게거품을 물며 쓰러지는 창현의 모습이 생생하게 보였다.

“…….”

“왜 그래? 도시락이야 말로 비장의 수단인데.”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자, 수연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한다.

“하지만 난 요리를 못하는 걸…….”

미영의 경지(재료와 재료의 조합으로 제3의 맛을 창출)에 도달하지는 못했지만 수연 또한 요리 재료로 폭탄을 제조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결국은 요리를 못한다는 말.

수정은 그걸 알고 있었다는 듯 수연에게 말한다.

“아아, 그건 괜찮아. 요리책이 있잖아.”

“요리책을 보고 해도 요리가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았던 걸.”

사람에게는 각각 상성이 맞는 것이 존재한다.

묘하게 기계와 상성이 맞지 않아 남들은 몇 년 동안 사용하는 기계를 몇 개월밖에 사용하지 못한다거나, 분명 책에서 시키는 대로 했건만 예상했던 맛이 나지 않는다거나.

수연은 요리와 상성이 맞지 않았다.

그녀가 그렇게까지 말을 하자 수정의 표정도 심각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간단한 요리도 못해?”

“…라면도 제대로 못하는 걸. 볶음밥이라면 태연이가 몇 번 하는 걸 보긴 했지만 하는 방법을 모르고.”

라면도 많이 끓여보지 않았고, 열량이 무척 높았기에 잘 먹지를 않았기에 가장 간단한 라면조차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이 실력으로 발렌타인 데이 때 초콜릿을 만들겠다고 달려든 것은 실로 엄청난 용기가 동반된 것임이 분명했다.

“하아! 이러면 좀 곤란해지는데…….”

설마 수연이 이 정도로 요리를 못할 줄 몰랐기에 수정은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마음 같아서는 자신이 도와주고 싶지만 유감스럽게도 자신 또한 요리는 젬병이다.

그렇다고 김밥천국 같은 곳의 김밥을 사서 했다고 할 수도 없지 않은가.

답답한 표정을 지은 수정이 수연에게 물었다.

“도대체 왜 요리책을 보고도 요리를 못하는 건데?”

“막 하더라도 물 양이 제대로 조절 되지 않고, 시간도 잘 알지 못해서…….”

아주 고질적인 문제였다.

요리책을 보고 하더라도 정작 기본 단계에서 망쳐버리니 완성품이 제대로 될 리가 없다.

그 말을 듣던 수정은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럼 물 양하고 시간을 제대로 맞추면 중간은 할 수 있겠네?”

“그렇지 않을까……?”

그렇게 해본 적이 없기에 제대로 된 답변은 어려웠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는지 수정은 몸을 돌리며 외쳤다.

“잠시만 기다려봐, 언니!”

그녀는 한곳으로 부리나케 달려갔고, 수연은 그녀의 말에 착실히 따르며 멀뚱한 표정으로 수정이 다시 오길 기다렸다.

약 삼 분 후, 다시 모습을 드러낸 수정의 양손에는 한 개씩 물건이 들려 있었다.

수정은 그것을 수연에게 내밀었다.

“언니, 이거.”

“이게 뭔데?”

그녀가 내민 것은 각각 비커와 스톱워치였다.

일단 내미는 것이기에 받아들었지만 그걸 보며 수연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수정은 비커와 스톱워치를 가리키면서 각각 용도를 설명했다.

“이걸로 물의 양을 정확하게 하고, 저걸로 시간을 정확하게 맞춰서 해. 알았지?”

“…….”

획기적인(?) 수정의 말에 할 말을 잃은 수연이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수정이 큰 목소리로 말했다.

“힘을 내, 언니! 일요일 날 전에 알던 언니가 아닌, 새로워진 언니의 모습으로 현 오빠를 단숨에 함락시켜버리는 거야!”

전의가 물씬 풍기는 수정의 모습에 수연은 저도 모르게 의욕이 치솟는 것을 느꼈다.

연습실에 왜 이것이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준비는 갖춰진 셈이다.

이렇게까지 준비를 해줬는데 해내지 못하면 바보였다.

수연은 주먹을 불끈 쥐며 외쳤다.

“좋아, 해보겠어.”

“오오!”


“좀 갑작스럽게 잡아버린 걸까나.”

수정의 전화로 약속을 잡아버린 창현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즉흥적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갑작스레 약속을 잡아버렸다.

다소 후회가 되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했다.

왜냐고 묻는다면 이유는 간단했다.

그동안 너무 촘촘하게 짜인 스케줄대로 생활을 했으니까.

철저하게 자기관리를 하는 사람은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기에 여유가 존재하지 않는다.

정확하게 몇 시에는 무엇을 하는지 정해져 있으니까.

그것은 창현 또한 마찬가지. 다른 스케줄이 없으면 대부분을 자기 개발을 위한 시간으로 한다.

몇 년 되지 않는 내공을 쌓는다거나 그러는 식으로 말이다.

내공이 많아지면 머리가 맑아지고 집중력이 높아진다.

창현의 집중력이 워낙 뛰어난 편이지만 내공의 힘을 빌리면 그 위력은 배가 되고는 한다.

게다가 힘도 세지고 건강 또한 좋아지니, 내공은 그야 말로 만능인 셈이다.

“가끔은 돌발적인 것도 좋지.”

다소 답답했는지도 모른다.

왜냐고 묻는다면 일주일의 휴가에서 사흘 동안 여행을 한 여파 때문이랄까?

한동안 모든 것을 잊고 놀러다닌 것이 기억에 인상적으로 남았기에 은연중 다시 놀러나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나 보다.

한순간 유혹에 져버릴 정도라면 그 열망이 제법 컸을지도.

“이왕 약속을 잡은 거, 재미있게 놀면 되겠지.”

간단하게 생각을 하는 창현이었다.

만약 앨범 작업을 얼마 전 착수했다면 이런 일탈 행동도 하지 않았을 테지만 ‘그때’ 일로 영감을 얻어 순식간에 타이틀곡을 완성하였기에 부릴 수 있는 여유였다.

좀 더 보완을 하겠지만 굵은 줄기가 잡혀있으니 음악이 중요한 게 아니라 안무가 더 중요한 시점이었다.

“게다가 더 중요한 것도 있고.”

그보다 지금 그를 걱정하게 만드는 것은 따로 존재하고 있었다.

내일 드라마 촬영이 바로 그것이다.

키스신 파동 이후 처음 만나는 것이기에 묘하게 만남이 꺼려진다랄까?

나중에 알았지만 수정을 하겠다는 것이 굉장히 큰 결단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외압에 의해 키스신을 수정했다고 하지만 김지환 감독은 결코 외압에 흔들리는 인물이 아니다. 부러질 수는 있어도 꺾이지는 않는다랄까? 그런 김지환 감독이었기에 드라마 장면을 수정했다는 것이 묘하게 걸렸다.

어쩌면 자신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어떻게 되겠지. 후우!”

창현 같은 사람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하겠지만 늘 위험부담을 갖고 있다.

걱정이 너무 많기에, 사소한 것에서 느끼는 스트레스가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그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종종 게임을 하고는 하는데 지금은 게임을 하기에도 뭐한 상황이었다.

“그러고 보니 얼마 안 남았네.”

순규와 약속했던 것을 떠올리며 창현은 자신이 너무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냈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의 생일 선물 대신 약속을 한 것인데 여러 가지로 바쁘다 보니 제대로 임하지 못한 것이다.

“좋은 성적 내지 못하면 엄청 욕 먹을 텐데.”

드라마 마무리부터 시작하여 앨범 준비와 그리고 윤아 생일과 순규의 약속까지.

일요일에 만나기로 한 것도 포함시키면 앞으로 엄청 바쁠 듯 싶었다.

“오빠, 안 오고 뭐해?”

제법 바빠질 것 같은 예감에 머릿속에서 스케줄을 하나하나 풀어나갈 때, 지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창현은 아차 하는 소리와 함께 시간을 확인하고는 혀를 찼다.

“아,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나?”

“응. 뭐 그렇게 생각에 잠겨 있던 거야?”

“음?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해 생각을 했다고 할까나? 뭐 그런 거야. 자, 들어가자.”

지영의 보컬 트레이닝을 봐주면서 잠시 휴식 시간을 주고 생각에 잠겨 있던 것인데 제법 시간이 흘렀던 것이다.

안으로 들어선 창현은 지영의 보컬 트레이닝을 봐주기 시작했다.

이제 어느 정도 틀이 잡혔기에 간단한 화두만 던져주어도 곧잘 해내는 지영이었다. 감정 이입도 잘 되고, 기교 또한 날로 늘어나니, 잘 다져진 기반에 탄탄한 건물을 세우는 것과 같았다.

‘가수가 될지도 모르겠는 걸.’

이런 발전 속도라면 약속을 지켜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보컬 트레이닝이 모두 끝났다.

엄격한 보컬 트레이너에서 상냥한 오빠로 돌아온 창현은 지영에게 이온 음료 하나를 건네주면서 말했다.

“수고했어.”

“응, 고마워. 나 요즘 어때?”

창현은 많이 늘었다고 생각하지만 지영은 묘하게 막히는 것을 느끼고 있었기에 답답함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이럴 때 선배로서, 경험자로서의 조언이 큰 위력을 발휘한다.

“실력이 많이 늘었는데? 하지만 지금이 중요해서 꾸준히 연습을 해야 해. 당장은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테지만 흔히 한단계 높은 곳으로 도약하기 위한 정체라 하거든. 실망하지 말고 꾸준히 연습을 하면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을 거야.”

그런 조언은 큰 힘이 된다.

지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어보였다.

“응, 고마워, 오빠.”

“수고했어.”

“음, 오빠, 다른 스케줄 있어?”

“아니, 없는데?”

갑자기 자신의 스케줄을 물어오는 지영의 모습에 창현이 고개를 저어보였다.

그러자 지영은 잘 됐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오랜만에 집에서 자고 가. 엄마가 오빠 보고 싶다고 데려오라 했거든.”

“어머니가?”

“응응!”

그러고 보니 지선은 한창 배가 불러오고 있어 무척 예민한 시기였다. 석규도 요즘 밤새도록 업무를 보던 예전과 달리 일찍 퇴근하고 자택에서 서류 처리를 한다고 하던데 그것 때문에 그런 듯했다.

이래저래 일이 바빠져 버리니 제대로 신경을 쓰지 못했다.

“그래야겠다. 나도 그동안 너무 무심했네. 어머니가 말하기 전에 먼저 찾아갔어야 했는데.”

“그럼 오는 거지?”

“그래, 같이 가도록 하자.”

“응! 아싸!”

주먹을 불끈 쥐며 좋아하는 지영이었다. 역시 오빠는 효자라서 엄마의 말도 잘 듣는 착한 아들이었다.

생글생글 미소를 지으며 지영은 창현에가 바짝 달라붙어 팔짱을 끼고는 말한다.

“이대로 쭉 머물렀으면 좋겠다. 아예 주말까지 집에 머물면 안 돼? 하루만 머물면 엄마가 섭섭해할 것 같은데.”

창현에게 지선이 즉효약이라는 걸 방금 경험했기에 슬쩍 언급을 하면서 그의 반응을 보는 지영이었다.

오늘이 수요일이었으니, 목, 금, 토, 일을 연달아 머물러 달라 말한 것이다.

말해놓고 나니 자신의 부탁이 조금 무리였다는 것을 느꼈다.

아니나 다를까, 미소를 지어보인 창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고 싶지만 안 돼. 스케줄이 있거든.”

“주말에는! 아니, 일요일에 시간 있지 않아? 그럼 집에 오면 안 돼?”

여동생으로 위장한 극성팬 1호인 지영은 창현의 일주일 단위 스케줄을 정확하게 꿰뚫어보고 있다. 이것이 바로 여동생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언제 스케줄이 없고 언제 스케줄이 있는지 알 수 있었으니까.

“아, 그날은 약속이 있어서 안 돼.”

“약속? 약속이라고? 누구랑 있는데?”

순간 지영의 기도가 일변한다. 그날 그냥 쉴 줄 알았던 창현이 약속이 있다고 하자 의외라는 생각과 함께 누구랑 약속이 있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그녀의 감각에 기묘한 위화감이 들었기에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이었다.

묘하게 날카로워진 지영의 모습에 창현이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면서 말한다.

“치, 친구랑 있는데?”

극성팬 모드로 변한 지영은 창현조차 껄끄러울 만큼 모든 능력이 급격히 상승한다.

그녀는 창현의 말에 냉담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한다.

“미안한 말이지만 오빠 친구 없잖아.”

“크흠흠!”

정곡을 찌르는 지영의 말에 창현은 헛기침을 하고 말았다. 급한 마음에 친구와 약속이 있다고 말을 했는데 무리수였던 것이다.

“사실대로 말해줘. 오빠가 나한테 무언가 숨기는 게 있다는 걸 깨달으면 무척 슬프단 말이야.”

씁쓸한 표정을 짓는 지영의 모습에 창현은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하나 밖에 없는 동생인데 숨기려 들던 자신의 행동이 부끄럽기도 하였다.

‘그래도 동생인데…….’

그렇게 생각한 창현이 침울한 표정을 지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지영을 보면서 입을 열었다.

“사실은…….”

그러면서 창현은 수정과 있던 통화 내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수정은 SM엔터테인먼트로 지영과 동갑이라는 점. 그리고 소녀시대 제시카의 친동생이라는 점과 이번 주 일요일에 같이 만나기로 했다는 것까지 말이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지영은 수정이라는 소녀의 의도에 대해서 꿰뚫어볼 수 있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는 법.

그리고 극성팬은 극성팬을 알아보는 법이다.

제법 고단수였지만 지영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요망한 년!’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을 한 지영은 창현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러자 눈가에 아른거리던 푸른 귀화는 어느새 사라지고 잔잔한 물결을 그려내고 있었다.

놀라울 정도의 마인드 컨트롤이었다.

“나도 가면 안 될까?”

“너도?”

창현이 다소 놀란 얼굴로 지영을 바라보며 말한다.

그러자 지영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한다.

“나는 안 돼? 어차피 데이트도 아니고 그냥 놀러가는 거잖아.”

“으음.”

고민하는 창현의 모습에 지영의 눈이 샐쭉하게 변한다.

“설마 양다리로 데이트 하려는 건 아니지?”

경을 칠 노릇이다. 양다리라니! 게다가 자매에게 양다리를 한다는 것이 말이나 된단 말인가.

“그럴 리가 있겠어?”

황당한 표정을 지은 채 창현이 말하자 지영이 말한다.

“그럼 나도 갈게. 난 아직 오빠랑 한 번도 놀러가 본 적이 없단 말이야.”

그러면서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 지영의 모습에 창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뭐, 어차피 놀러가는 건데.’

그렇게 생각하며 창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 하자, 그럼. 내가 말해놓을게.”

“고마워, 오빠.”

‘잘한 걸 거야.’

고개를 꾸벅 숙이는 지영의 모습에 창현은 속으로 그렇게 위안을 하였다.

한편, 지영은 수많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때 본 수연의 모습을 떠올려보았다.

멍한 표정을 짓고 있고 체구 또한 작아 얼핏 보면 무척 만만하게 느껴졌지만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이야기는 달랐다.

야무지게 방해 하겠다 결심을 했지만 감각이 무척 좋은 지영은 폭군의 난폭한 기세가 떠올라 한차례 몸을 떨었다.

‘그 언니는 조금 무서운데…….’


유리의 교묘한 전략전술로 인해 지영은 창현을 보호하는데 상당한 위기감을 느낀 적이 있다.

그녀는 창현을 굳게 믿고 있지만 여자는 요물인 바, 스스로도 여자였지만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변할 수 있는지 알고 있었기에 안전장치를 해둬야만 했다.

그러던 중 지영은 유리를 막아줄 인물을 골라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른 바, 대항마를 고르는 것이었는데, 거기에서 그녀는 소녀시대 멤버들을 자세히 살펴볼 기회를 갖게 되었다.

결과적으로는 순규가 당첨되었지만 그녀는 유리를 가장 효율적으로 제압할 수 있는 인물이 수연이라 생각되었다.

얼핏 보면 작은 체구와 이따금 멍한 표정을 짓는 것이 무척 만만하게 보였지만 그녀의 내면에 갈무리 된 아우라를 지영은 느낄 수 있었다.

제6감이라 할 수 있는 것이 강렬하게 경고를 해왔던 것이다.

수연을 활용하면 유리를 제압할 수 있겠지만 늑대를 내쫓기 위해 호랑이를 불러들인 격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당시 지영이 원하던 것은 자신의 뜻대로 다룰 수 있는 인물이었다.

제법 만만하면서 호기심이 많고 창현에게 관심이 없는 사람. 그래서 순규가 당첨되었고, 물밑작업을 치밀하게 하는 중이었다.

지영은 수연이 창현과 함께 간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하필이면 그 언니라니… 설마 그 언니가 오빠를 좋아한다거나?’

그럴 수도 있다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아니, 그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고? 상대가 다름 아닌 창현이었으니까.

그의 주변에 자주 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뻔했다.

결론은 그녀가 창현을 좋아하는 것이고, 수정이라는 동생의 도움을 받고 있다는 뜻이었다.

당장 수연만 감당하는 것도 불가능한 현실이다.

‘하지만 나 혼자서 그 언니를 감당할 수 없어.’

아니, 그 동생도 만만치 않은 년(?)일 것임이 분명했다.

여동생으로 위장한 극성팬의 눈은 모든 상황을 적나라하게 꿰뚫어볼 수 있게 하였다.

만약 수연이 창현을 좋아한다면 그걸 이용하여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려는 것이겠지.

지영의 얼굴에 짙은 분노가 서렸다.

‘요망한 년!’

여동생 캐릭터는 자신만으로 족하건만 감히 창현을 노리다니!

그를 이성적으로 생각하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적인 것만은 분명하였다.

‘오빠 주변에 알짱거리지 못하게 만들어주겠어.’

주먹을 불끈 쥐며 결심을 하는 지영이었다.

그리고 지원군을 청하기 위해 곧장 연락을 하기 시작한다.


순규는 오늘도 열심히 스타크래프트를 연습하고 있다.

앨범 활동이 끝이 났고, 대학 축제 시즌이어서 제법 바쁜 시기를 보냈지만 슬슬 그 시기도 끝나갔기에 스케줄은 많지 않은 상황이다. 공연 스케줄을 종종 하고 이따금 예능 프로그램에 나가는 것이 전부였기에 연습에 몰두할 수 있었다.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창현과 약속했던 것을 떠올리며 순규는 열심히 스타크래프트 연습을 하였다.

앞으로 남은 시간은 대략 두 달여. 시간이 제법 있었지만 자신의 부족한 기량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그랬기에 순규는 오늘도 열심히 스타크래프트를 연습하고는 한다.

♩♪♬

“응?”

갑자기 울려 퍼지는 벨소리에 순규가 고개를 돌린다. 때마침 게임이 끝났기에 그녀는 핸드폰을 열며 전화를 받아들었다.

“어, 지영아. 갑자기 무슨 일이야?”

-언니의 도움이 필요해요.

다짜고짜 도움이 필요하다 말을 하는 지영.

하지만 제법 감각이 좋은 순규는 그녀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눈치 채고는 눈을 빛내며 물었다.

“무슨 일인데? 창현이 일?”

-네, 맞아요. 언니의 도움이 필요해요.

지영은 아직 순규가 창현을 좋아하기로 한 것을 모른다. 그저 창현에게 관심이 없고, 다른 멤버들을 위해 방해공작을 펼치려고 하는 것으로 알고 있을 뿐.

제법 가엾지만 자신이 창현을 낚아채면 모든 것이 평안(?)해질 것이라 생각하면서 순규가 지영의 말에 답한다.

“말해봐, 내가 도와줄게. 약속했잖아.”

마치 선심 베풀 듯이 말하는 순규였다.

그 말에 지영은 또 속아 넘어가서 감격의 기색을 띤다.

-고마워요, 언니. 그러니까…….

의심 없이 용건을 술술 털어놓는 지영이었다.

순규는 지영의 말을 들으면서 눈이 점점 커져가기 시작했다.

설마 그런 암중모의(?)가 일어났으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바였다.

그리고 수연이 동생까지 동원했다는 이야기를 듣자 순규는 결심을 내렸다.

자신조차도 수연을 감당하기가 힘든데 지영이 수연을 감당할 수 있을 리 없다.

그나마 순진무구한 수정은 효과적으로 감당할 수 있을 테지.

소녀시대 멤버들에게 있어 수정은 순수함 그 자체였다.

“그래? 알았어. 일요일에 시간이 되니까 도와줄게. 응, 그래.”

그렇게 대답을 한 순규가 통화를 끝냈다.

지영과 한 약속은 일요일에 만나기로 한 것에 자신도 합류하기로 한 것. 데이트의 의미보다는 그저 만나서 즐겁게 시간을 보내는 것에 의의를 두고 있지만 실제로는 누군가가 독주하지 못하게 만들기 위한 장치라 할 수 있다.

통화를 마친 순규는 짙은 미소를 지었다.

“후후! 이렇게 방해하기만 하면 7월말에 내가 득세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지. 그때까지만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게 하면 돼.”

자잘한 공격보다는 커다란 한 방이 더욱 효과를 발휘하는 시점이다.

그렇기에 순규는 자신이 준비하고 있는 한 방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지금은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을 정도로 미약한 존재감이지만 최후에 웃는 것은 바로 자신이리라.

순규의 참전이 확정되었다.


드라마 시청률은 8화에 이르러 40%가 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키스신 파동으로 대본 수정을 하지 않을시 보이콧을 하겠다는 움직임을 보였지만 발 빠른 대처가 있었기에 시청률을 그대로 유지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게다가 본격적으로 삼각관계가 이루어지고, 한지훈과 최예린의 관계가 진척되면서 한영 그룹의 후계 구도도 만들어지기에 앞으로 시청률이 상승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창현은 상당히 긴장한 얼굴로 촬영장으로 향했다.

대본 수정 요청이 있은 후였기에 상당히 어색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다행히도 차별 없이 대해주었다.

아니, 오히려 작가는 자신의 욕심이었다면서 창현에게 사과를 하기도 했으니 오히려 창현이 미안함을 느껴야만 했다.

“그래도 잘 된 거야.”

그렇게 생각하면서 창현은 방금 촬영을 마친 윤아를 보며 반갑게 인사를 하였다.

“윤아 누나, 안녕하세요.”

“으응, 창현아. 아, 안녕.”

앞에 서 있던 윤아는 창현의 접근에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짓는다.

그에 창현이 고개를 갸웃하면서 묻는다.

“왜 그러세요? 마치 저한테 죄 지은 사람처럼.”

“으응? 그게… 아하하! 좀 예민해서 그랬던 거야. 그런 거지.”

그렇게 말을 했지만 사실 윤아는 창현에게 찔리는 것이 있었다.

바로 키스신 파동의 원인이 자신으로 인한 것이란 걸 알았기에 도둑이 제 발 저리는 심정이었던 것이다.

대본 유출은 조금 그래서 마지막 선을 넘지 않았지만 상당히 찔리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래서 창현을 보는 것이 상당히 꺼려지는 마음도 존재하고 있었다.

물론 마음 깊은 곳에서는 자신이 창현의 순결(?)을 지켜냈다는 자부심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래요? 드라마 촬영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페이스 조절을 잘 해야 되요. 여기에서 몸이 상하면 안 되니까요.”

“응, 고마워.”

드라마 촬영이 끝나면 주조연들이 함께 토크쇼에 출연하기로 하였고, 이래저래 함께 할 스케줄도 제법 있었다.

창현은 윤아가 드라마 촬영이 거의 다 끝나가면서 긴장감이 풀린 것이라 판단하여 그랬던 것이지만.

윤아가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하자, 창현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녀에게 USB를 내밀었다.

“자요.”

“응? 이게 뭐야?”

창현이 내밀기에 일단 받아들었지만 윤아의 머리 위에는 물음표가 생겨나 있었다.

그러자 창현은 잠시 멈칫하다가 윤아에게 묻는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요, 누나 영어 알죠?”

“영어?”

순간 팍 일그러지는 윤아의 얼굴. 그 모습만 보아도 영어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그러자 창현은 어색한 표정으로 볼을 긁적였다.

“이러면 곤란한데.”

“왜? 갑자기 영어는 왜 묻는 거고?”

“아, 누나가 생일 선물로 정성 어린 걸 받고 싶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여기 안에 제가 짧게 영어로 녹음 된 모닝콜을 녹음했거든요.”

“정말?”

순간 윤아의 얼굴에 기쁨이 서린다. 키스신 파동으로 인해 생일은 살짝 뒷전이 되어 있었는데 창현이 기억해주고 자신을 위해 선물을 준비했다고 하자 기쁜 마음이 절로 들었던 것이다.

“네, 파일 변환한 것도 넣어놓아서 핸드폰에 넣으면 모닝콜로 활용할 수도 있어요.”

컴퓨터 프로그램에 대해서는 잘 몰랐기에 이걸 만들기 위해 제법 머리를 부여잡았었다.

그 말에 윤아는 더욱 기쁜 표정을 짓는다.

“응응, 고생 많이 했어. 그렇다면 앞으로 이걸로 모닝콜을 해야겠다.”

자신만의 보물이 생겼다는 생각에 윤아는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창현의 선물로 케로로 인형에 녹음된 음성이 소녀시대 숙소 내 최고의 보물로 꼽혔지만 지금은 그 우선순위가 달라진 셈이다.

“혹시 일요일에 시간 되요?”

갑자기 시간을 묻는 창현의 말에 윤아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대답한다.

“일요일? 되고 말고! 우리 그때 전부 휴일이거든.”

“약속은 있고요?”

“다른 언니들은 전부 약속 잡혀있어. 나만 없고.”

자세한 영문은 몰랐지만 사전에 차단해버리는 영악함을 보이는 윤아였다.

그러자 창현은 고개를 나직이 끄덕이더니 윤아에게 말한다.

“일요일에 지영이랑 같이 놀러 가기로 했거든요. 그때 누나 생일은 지났지만 함께 같이 노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서요.”

창현이 윤아를 부르는 이유는 간단했다.

생일임에도 불구하고 선물이 약소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수연, 수정과 함께 만나는데 지영이 가면 다소 어색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다. 아무래도 자신은 중간에 서게 될 듯 싶은데 그리 되면 지영을 잘 신경 써줄 수 없으니 윤아에게 지영을 부탁할 생각이었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더 있다면 힘이 날 테니까.

지영이 함께 간다는 것이 옥의 티였지만 윤아는 창현이 자신을 불러준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다른 멤버들이 같이 가지 않는다는 것에 흔쾌히 수락을 하였다.

“응, 나도 갈게.”

“네, 그러죠.”

윤아가 흔쾌히 수락을 해주자 창현은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이미 지영이 스스로 부족함을 느끼고 순규를 청한 것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여기에서 비롯된 사소한 오해가 있었다.

윤아는 행여 창현이 다른 멤버들을 데려갈까 싶어 일이 있다고 했지만 정작 창현은 윤아가 그렇게 말한 것이 수연도 함께 한다는 걸 알고 있어서 그런 줄 알고 있었다.

‘지영이한테 좋은 이미지 심어줘야겠다.’

그것도 모른 채 셋이서 함께 간다고 좋아하는 윤아였다.

진실을 전혀 모르고 있어서 좋아할 수 있던 거지만.

환하게 미소를 짓는 그녀의 얼굴에 일요일 날 어떻게 뒤바뀔 지 두고 볼 일이다.


“나 집에서 자고 올게.”

수연은 이틀 전 수정이 챙겨준 비장의(?) 유니크 아이템을 들고 멤버들에게 말했다.

토요일 오전 스케줄을 끝으로 모처럼 휴일이 찾아왔다. 다음 날인 일요일까지 스케줄이 없었기에 수연은 오랜만에 집으로 간다 하였고, 다른 멤버들은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

집이 제법 먼 거리에 있는 태연이나, 미국에 있는 미영은 부러운 표정을 지을 뿐.

그렇게 수연은 집을 나섰다.

“…….”

그 모습을 순규는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다른 멤버들은 모르고 있지만 그녀는 이미 수연이 내일 같이 움직인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흥! 순진한 수정이를 꼬드겨서 약속을 잡은 듯하지만 쉽지 않을 거라고.’

소녀시대의 폭군이지만 순규 또한 만만치 않은 포스를 보유하고 있기에 수연에게 순순히 밀릴 생각은 없었다.

내일 만남을 위해 순규는 부지런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흐흥.”

윤아는 신이 나 있었다.

내일 창현과 함께 만나는 날이었던 것이다.

지영이 함께 하고 있지만 불러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할 판이었기에 그녀는 불만을 표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번 만남을 기회로 삼을 생각에 빠져 있었다.

“지영이를 잘 꼬드기면 편해질 테니까.”

지극히 기본적인 생각이었지만 윤아는 이런 생각을 한 자신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창현을 공략하는 게 쉽지 않으니 주변을 둘러보며 공략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다니.

마치 자신이 키스신 저지를 위해 계획을 세우던 유리가 된 것 마냥 어깨가 으쓱해진다.

“유리 언니도 내가 본격적으로 머리를 쓰기만 하면 뭐. 후후!”

착각도 이런 착각이 없었지만 불행하게도 그녀를 제지할 사람이 없다는 점이다.

“일단…….”

창현에게 이야기 듣길, 약속 장소는 놀이공원이라고 한다.

제법 많은 놀이기구를 탈 계획이니 치마를 입는 것보다는 바지는 입는 것이 중요할 터.

윤아의 눈이 옷장을 빼곡이 채우고 있는 옷에 향하고 있었다.

“무엇을 입을까나…….”

내일이 기다려지는 윤아였다.


수연은 오랜만에 집에 돌아와 가족들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며 모처럼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만족스러운 저녁을 먹고, 수정이 수연의 방을 찾아와 말한다.

“언니, 내일이야.”

“응.”

결연한 수정의 표정을 보고는 수연의 얼굴에 긴장감이 서린다. 그리고 굳은 각오가 담긴 얼굴로 고개를 살짝 끄덕여 보인다.

수정이 그런 수연에게 묻는다.

“잘할 수 있겠어?”

“물론이야. 네가 준 비커와 스톱워치만 있으면 가능해.”

자신감이 넘치는 수연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얼마 전 수정이 건네준 비커와 스톱워치를 활용하여 음식을 해보았다.

도전 종목은 바로 라면이었다.

물의 양부터 조절하지 못하여 멤버들에게 손 대는 것조차 금지 당한 것이 바로 라면이었다.

수연은 그 라면을 꺼내고, 비커를 활용하여 정확하게 550ml를 냄비에 넣었고, 물이 팔팔 끓인 뒤 면과 분말 스프, 야채 스프를 넣고 4분 30초를 스톱워치로 정확하게 잰 뒤 완성된 라면을 수영에게 시식 시켰다.

그녀가 끓인 라면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수영은 처음에 질색하며 거부했지만 폭군의 포스를 유감없이 발산하며 압박해오자, 결국 못 이기는 척 라면을 먹게 되었다. 폭탄 치고는 그 냄새가 주는 유혹이 너무나 강렬했던 것이다.

그리고 라면을 먹은 수영의 눈은 지금도 기억에 선할 정도로 대단했다.

부릅 뜬 두 눈에는 불신이 가득 담겨 있었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 젓가락이 3배속으로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연신 맛있다를 연발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수연은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다.

비커와 스톱워치만 있으면 자신도 요리사가 될 수 있다고.

착각도 이런 착각이 또 없지만 여태까지 번번이 실패작만 양산하던 그녀에게 있어 이것만으로도 가히 혁명에 가까운 성과였다.

“좋아! 언니를 믿을게. 내일이야 말로 결전의 날이야. 언니가 준비한 특제 점심으로 단번에 매력 어필을 하는 거야.”

“나만 믿어.”

“믿을게. 언니니까!”

“응.”

두 자매는 서로를 뜨거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녀들은 서로 자매임과 동시에 최고의 파트너였다.

여러 가지 의미로.


다음 날, 수연은 자리에서 일찍 일어났다.

오늘 있을 대망의 순간을 위해 일찍 일어나 준비에 착수했던 것이다.

보통 일찍 수면을 취하더라도 다음 날 아침까지 늘어지는 것이 일상이었지만 오늘 있을 기회는 결코 쉽게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바, 새벽같이 눈을 뜬 것이다.

완벽하게 잠을 쫓아내기 위해 찬물로 세수를 한 수연은 주방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그녀의 양손에는 각각 비커와 스톱워치가 쥐어져 있었다.

혹시 잊어버릴까 싶어 어제 내내 손에 놓지 않고 있었고, 자기 전까지 손에 쥐고 있었다.

그만큼 비커와 스톱워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난 할 수 있어.”

주방 앞에 선 수연은 진지하다 못해 경건하게 느껴지는 모습으로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 듯 말한다.

나는 할 수 있다. 수영에게 끓여주었던 라면처럼 해낼 수만 있다면 오늘의 주인공은 자신이리라.

그렇게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 듯 중얼거리며 수연은 본격적으로 요리를 하기 위해 준비하기 시작했다.

우선 그녀가 할 음식들은 김밥과 샌드위치였다.

어머니에게 말하여 기본 재료들을 모두 세팅해놓은 상황이다. 자신이 할 것은 지극히 간단한 일밖에 없는 셈.

그러나 이것마저도 하는 사람에 따라 맛이 달라질 수 있었기에 수연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임하기 시작한다.

“우선은…….”

갓 지은 밥으로 김밥을 싸야 맛이 있다. 그렇기에 수연은 밥을 먼저 짓기로 마음을 먹었다.

밥이 맛있다면 김밥 맛 또한 한층 상승할 테니까.

수연은 비커를 바라보면서 간절하게 말한다.

“나에게 힘을 줘!”

자신의 요리를 한 층 맛있게 해줄 비커의 정령(?)에게 부탁한 수연은 본격적으로 밥을 짓기 위해 비커를 활용하려다가 순간 멈칫한다.

“잠깐.”

무언가 스쳐가는 생각.

잠시 후, 그녀는 자신이 중대한 착각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바로 밥을 짓는 것에는 비커가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냥 쌀을 씻고 물 양만 맞추면 밥은 알아서 되는 것, 비커는 쓸모가 없다.

“그렇구나.”

묘하게 불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밥을 지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주현의 말에 의하면 밥은 밥통이 알아서 해준다고 하지만 그것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을까?

태연이 밥을 짓던 모습을 떠올려보던 수연은 별다른 과정이 없었다는 것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나직이 끄덕인 뒤 본격적으로 쌀을 씻기 시작한다.

라면을 끓이는 것보다 쉬운 것이 밥을 짓는 것이라 했으니 자신 또한 충분히 지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수영이 자신의 라면을 맛있게 먹는 모습에 자신감을 얻기도 했고.

그렇게 힘든(?) 라면도 대성공을 거두었는데 하물며 밥조차 못할까.

“이 정도는 나에게 쉬운 일이지. 요리를 조금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거니까.”

착각에 빠진 채 쌀을 씻고 물을 흘려버리는 수연이었다. 밥을 지어본 적이 없지만 그 기초는 제법 튼튼하다.

두어 번 정도 씻고 물을 흘려보낸 뒤 물을 받기 시작한다.

그리고 손을 넣어 물의 양을 맞춘다.

직접 해본 적은 없지만 들은 것은 있었기에 물의 양도 적절하게 맞추는데 성공한다.

쌀을 씻는 것부터 시작하여 물을 받는 것까지 성공한 수연은 본격적으로 밥을 지으려다가 순간 멈칫한다.

한 가지 의문이 그녀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던 것이다.

자신이 무언가 중대한 사실을 놓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밥을 계속 먹다 보면 단맛이 나잖아?”

계속 꼭꼭 씹어 먹으면 적은 양을 먹고도 배가 부르기에 곧잘 사용하는 방법이다. 수연은 밥을 꼭꼭 씹어 먹을 때 밥에서 단맛이 느껴지는 걸 깨닫고는 고개를 갸웃한다.

“단맛이 그냥 날 리가 없어. 그렇다는 건 어느 정도 설탕으로 간을 한다는 거겠지?”

음식을 못하는 사람들이 음식을 곧잘 망치는 공통적인 이유가 욕심이 많아서 그렇다.

세상에 달콤시큼 매콤 짭짜름 씁쓰름한 음식은 없으니까.

여러 가지 맛을 담으려고 할수록 망조로 들어서는 일이라는 것을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자신의 실수를 자책한 수연은 설탕을 퍼서 넣기 시작한다.

너무 조금 넣으면 단맛이 약해질까 싶고, 너무 많이 넣으면 달달할까 싶어 다섯 스푼을 넣고 본격적으로 밥을 짓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시간을 보내자 잠시 후, 달콤한 밥냄새가 코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것을 킁킁, 귀엽게 맡으며 그녀는 미소를 짓는다.

“좋아, 대성공이다.”

음식을 망치는 사람들의 공통점 중 또 하나는 자신의 음식을 맛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늘 예감이 좋다는 생각과 함께 수연의 자신감이 팽배해지고 있었다.

필살必殺의 도시락으로 창현의 넋을 쏙 빼놓으리라.

그 사이 설탕밥은 달콤한 향기를 풍기며 완성되고 있었다.

그리고 필살의 도시락은 정말 창현을 필살 시킬 듯 싶었다.

/

수연 만큼은 아니지만 수정도 아침 일찍 일어났다. 오늘 창현을 만난다는 것이 그녀로 하여금 기대감을 자아내게 하였기에 마치 소풍가기 전날처럼 가슴이 두근두근하여 일찍 일어난 것이다.

졸린 눈을 비비며 방에서 나온 수정은 부엌에서 맛있는 냄새가 느껴지는 것을 깨닫고는 눈을 크게 떴다.

그러자 1차적으로 눈에 들어온 것은 초토화 되어 있는 식탁이었다.

그 모습에 수정의 눈이 커지다가 옆에 차곡차곡 쌓여있는 샌드위치를 보고는 묻는다.

“이거 모두 언니가 만든 거야?”

“일어났어? 내가 만들었지. 어때?”

놀라는 수정을 보며 수연이 당당한 여자의 미소를 지었다. 글로벌 시대(?)가 되면서 여성도 요리를 못하는 게 흠이 되지 않는 사회가 되었지만 그래도 요리를 잘하면 두 어깨가 쭉 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듯했다.

“하나 먹어봐. 맛이 어떤지.”

“응.”

한눈에 보아도 무척 먹음직한 샌드위치였다.

수정은 수연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으며 식탁에 수북하게 쌓여있는 샌드위치 하나를 집어 들고는 맛을 본다.

냠냠.

수연이 준비한 샌드위치는 참치 샌드위치인 듯, 씹자마자 마요네즈에 간이 된 참치 맛이 느껴졌고, 아삭한 양상추와 달콤새콤한 토마토의 맛이 느껴졌다.

샌드위치 먹기를 잠시, 수정의 눈이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수연은 긴장한 안색으로 조심스럽게 묻는다.

“어때?”

말이 필요 없는 맛이다. 수연은 수정에게 엄지 손가락을 척 치켜세웠다.

“완전 맛있어! 이거 정말 언니가 한 거야?”

“정말? 내가 했지. 그럼 누가 했겠어.”

어깨를 쭉 피며 자랑스러운 표정을 짓는 수연이었다. 혹시나 했는데 맛있다는 평가를 들으니 자랑스러운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예감이 무척 좋았는데 후한 평가에 수연은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면 현 오빠가 완전 새롭게 볼 걸? 정말 놀랐어. 나도 언니가 이렇게 잘할 줄 몰랐거든.”

호평의 연속이었다. 수정은 수연이 이렇게 잘해낼 줄 몰랐기에 흥분한 안색으로 말한다.

“고마워, 오늘 예감이 좋아.”

한방에 창현을 넘겨버릴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 말에 수정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면서 다른 것도 묻는다.

“그런데 샌드위치만 준비한 거야?”

“아니, 김밥도 준비했어. 김밥은 먼저 다 해놓았거든.”

그러면서 커다란 도시락 통을 가리키는 수연이었다.

수정은 그것을 보고는 그녀가 얼마나 철저하게 준비를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설마 샌드위치에 이어 김밥도 다 해놓았을 줄이야.

오늘 수연은 뭔가 다르다고 생각하면서 수정은 결전의 날일 수도 있다 생각하였다.

‘이 정도 퀄리티라면 김밥도 분명…….’

샌드위치에 이은 김밥의 연속 크리티컬.

창현도 분명 새로워진 수연의 음식 실력이 감탄사를 흘리며 그녀를 새로이 보리라.

“김밥도 먹어볼래?”

“아니, 굳이 먹어보지 않아도 될 것 같아. 샌드위치만큼만 하면 언니는 오늘 현 오빠한테 점수를 딸 수 있을 거야.”

괜히 자신이 도시락 통을 열어서 가지런히 놓여있는 김밥을 하나 쏙 빼먹고 싶지 않았다.

샌드위치를 만든 것으로 보아 김밥도 그 맛이 괜찮을 테니까.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했기에 수연의 실력을 굳게 믿고 있는 수정이었다.

그것이 얼마나 큰일을 야기하는 것인지 모른 채.

“그렇겠지? 하기야…….”

수정의 칭찬에 고무되어 있던 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자신의 생각도 비슷했기에 그렇다. 샌드위치는 그저 평범한 실력으로 만들었지만 김밥은 그녀가 여러 가지 야심작들을 넣어 만든 음식이다. 그 정성이 샌드위치에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첨가되어 있으니 맛 또한 샌드위치와 비슷하거나 우위에 있을 것임이 분명했다.

“응, 오늘이야 말로 결전의 날이야. 알지? 내가 팍팍 지원해줄 테니까 같이 유령의 집이라도 들어가버려.”

“유, 유령의 집.”

자신이 무서워하는 것이 언급되어서 살짝 겁에 질린 수연이었지만 창현과 함께 들어갈 생각을 하니 표정이 환하게 변한다.

좋아하는 사람과 들어가면 그걸 빙자하여 마음껏 품에 안길 수 있는 권리(?)가 발생하니까.

“헤헤!”

미소를 짓는 수연을 보면서 수정도 미소를 지었다.

이런 식으로 멋진 형부를 점 찍어놓으면 자신은 합법적으로 만날 수 있는 구실이 생기니 나쁘지 않았다.

그녀는 주먹을 불끈 쥐어 수연에게 내보였다.

“언니, 파이팅이야.”

“응, 파이팅!”

두 사람은 오늘을 결전의 날로 삼았다.

전혀 다른 의미의 결전이 날이 될 것을 모른 채.


“룰루루.”

소녀시대 숙소는 아침부터 부산스럽다.

모처럼 휴일이기에 멤버들 대다수가 집으로 돌아간 상황이었고, 집이 먼 태연과 미영, 그리고 약속이 있어서 남은 윤아밖에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윤아는 얼굴을 깨끗하게 씻는다.

원래 관리가 잘 되어서 피부가 무척 좋지만 날이 날이니 만큼 공을 들이는 정도가 여느 날과 틀렸다.

게다가 어제 잠에 들기 전에 수면팩까지 했기에 오늘 피부 상태는 그야 말로 뽀송뽀송함 그 자체.

윤아는 자신의 얼굴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후후, 좋아.”

모공 하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완벽함을 자랑하는 자신의 모습에 윤아는 자신감이 새록새록 솟아나는 것을 느끼며 재빨리 옷을 입기 시작한다.

오늘의 약속 상대는 약속 시간보다 일찍 나오기로 유명한 사람이었으니까.

어제 미리 골라둔 옷을 챙겨 입은 윤아는 모자를 푹 눌러쓰고 얼굴의 절반 이상을 가려주는 썬글라스를 착용한다. 놀이공원은 사람이 많아서 인파에 묻히는 것이 쉽지만 반대로 사람이 많아서 정체를 들킬 확률도 무척 높다.

그랬기에 변장은 필수 요소였다.

“뭐, 이 정도면 되겠지.”

드라마로 인해 인지도가 높아져서 근래 들어 알아보는 사람이 무척 많아진 상황이다.

그렇기에 변장을 하는데 유난히 공을 들인 윤아는 완성된 자신의 변장을 본다.

그리고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말았다.

“이거… 중대한 착오를 범했는데.”

창현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는 예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변장도 하고 예쁜 모습도 보여주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이것저거 화려하게 하다 보니 마치 짝퉁 헐리우드 패션이 되어버린 것이다.

변장의 기본은 눈에 띄지 않는 패션인데 이렇게 되면 사람들의 시선을 한눈에 받을 것 같았다.

“에잇, 이것들은 입지 말자.”

고민하던 윤아는 정체를 들키면 이도저도 되지 않는다는 생각에 과감하게 걸치고 있던 옷 몇 개를 포기했다. 그리고 무난해 보이는 옷들을 입기 시작했다.

그러자 아까에 비해 평범하게 바뀌었지만 어필하고자 하던 점이 팍 죽어버려 윤아를 실망하게 만들었다.

“어쩔 수 없지. 후우……”

둘 중에 하나는 선택해야 했기에 윤아는 화려함보다 변신에 중점을 두기로 하면서 결국 복장을 결정하고 만다.

이틀에 걸쳐서 고민한 패션이었는데,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었다.

“에휴!”

그래도 어쩌겠는가.

오늘 만남을 무사히 즐기려면 하나는 포기해야 하는데.

결국 윤아는 겉의 화려함보다 실속을 선택하였다.

“가야지.”

아직 꿈나라에 빠져있는 태연과 미영의 눈길을 피해 윤아는 조심스럽게 숙소를 나섰다.


“지영아.”

“언니!”

휴일을 맞아 순규도 집으로 돌아간 상황이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숙소를 벗어나려면 다른 멤버들의 눈을 피하기가 상당히 까다로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에 집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오랜만에 부모님을 보고 싶기도 했고.

전날 가족들과 오붓한 하루를 보낸 순규는 부지런히 준비를 갖춘 뒤 지영과 만나서 같이 가기로 결정을 하였다.

“그동안 잘 지냈어?”

“저야 잘 지냈죠. 언니도 요즘 활동 많이 안하시던데 어때요?”

“이제 슬슬 2집 준비를 하고 있지.”

간단한 안부를 주고받으면서 걸음을 옮기는 두 사람이었다.

지영은 원래 창현과 함께 가려고 했지만 그의 집 앞에는 항상 팬들이 서식하고 있는 것을 알았기에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가지 않았다. 무엇보다 순규를 만나서 여러 가지 당부를 해야 할 것도 있었기에 그녀를 만난 것이다.

“오늘 잘 해주셔야 해요.”

“알아, 수연이는 강적이거든. 방심하면 안 되지.”

그녀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모를 순규가 아니었다.

수연은 현재 소녀시대 내 폭군으로 그 권력을 무한정 휘두르고 있는 존재였다. 휘하에는 효연과 윤아가 있었기에 다른 소녀들도 함부로 하지 못할 만큼 막강한 권력 구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본인 또한 만만치 않은 포스를 간직하고 있기에 순규로서는 상당히 상대하기 까다로운 상대였다.

하지만 수연 혼자라면 순규가 막을 수는 있었다.

“수연이는 나한테 맡겨. 대신 지영이 너는 수정이를 막아야 해.”

“수정이라면 제시카 언니 동생이죠?”

“그래, 수연이 동생인데, 무척 착하고 순진하거든. 어렵지 않은 상대이니 만큼 네가 막는 건 어렵지 않을 거야.”

“착하고 순진하다고요?”

순규의 말에 한순간 굳어버리는 지영이었다.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것과 전혀 틀렸던 것이다.

자신이 알기로 수정이라는 아이는 그야 말로 영악함 그 자체였다. 언니를 이용하여 사사로이 창현을 만나려고 하며, 촘촘한 스케줄을 하고 있는 그를 놀이공원으로 끌어낼 정도의 수완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내심 지영의 머릿속에 ‘요망한 년’으로 저장이 되어 있는데 순규는 그녀를 지칭하며 착하고 순진하다고 한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두 가지일 것이다.

자신이 착각하고 있거나 정말 요망한 년이어서 순규를 속이고 있다거나.

왠지 모르게 후자에 무게가 실리는 지영이었다.

딱히 세상을 삐뚤어지게 보려 하지 않아도 세상에는 믿지 못할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는 하니까.

‘언니가 속고 있을 확률이 높아.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일단은 지켜보자. 지켜보면 결론이 나올 거야.’

그렇게 생각하며 지영은 순규와 함께 약속 장소로 향했다.

약속 장소는 잠실역이었다. 오늘 가기로 한 곳은 다름 아닌 롯데월드였기에 잠실역에서 만나 같이 이동하기로 하였다.

지하철을 타고 약속 장소에 도착한 두 사람은 두리번거리며 창현을 찾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지영이 창현을 찾았는지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막 발걸음을 옮기려 하였다.

“오… 언니 왜 그래요?”

창현에게 다가가려던 지영은 순규의 표정이 굳는 것을 보고는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에 시선을 둔다.

변장을 했지만 몇 년을 함께 해온 멤버를 몰라볼 리가 없다.

저 몸매, 저 얼굴 크기, 저 옷차림. 한눈에 봐도 딱 윤아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윤아 또한 순규를 알아봤는지 표정을 굳히고 있었다. 그녀가 왜 이곳에 왔는지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거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얼굴을 가린 수연과 수정이 나란히 약속 장소에 도착한다.

그녀들은 순규와 윤아, 지영을 보고 순간 멈칫한다.

“…….”

다섯 명의 여인들은 각각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한동안 말을 잃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윤아였다.

그녀는 지금 눈에 들어오는 같은 멤버들의 존재로 인해 어안이 벙벙한 상황이었다.

지영이야 오는 것을 창현에게 들어서 알고 있지만 순규가 함께 오다니?

게다가 수연은 동생 수정과 함께 온 상황이다.

놀란 그 마음이 그대로 밖으로 흘러나왔다.

“어떻게 언니들이…….”

“그건 내가 물어봐야 할 말인데, 윤아야? 여기는 어떻게 온 거야?”

수연과 수정이 올 거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설마 윤아가 올 것이라는 것은 예상 외. 어제부터 묘하게 들떠 있는 것 같더라니 설마 그녀가 이곳에 등장할 줄 몰랐다.

그 물음에 윤아는 어깨를 쭉 피며 당당하게 말했다.

“저는 당연히 창현이가 초대해줘서 왔죠! 언니는 어떻게 오신 건데요?”

순규는 여유롭게 대답한다.

“나는 지영이가 초대해줘서 온 건데?”

“…….”

여유가 넘치는 그녀의 말에 일순간 윤아는 할 말을 잃어야만 했다.

그리고 수연에게 시선을 옮기면서 묻는다.

“수, 수연 언니는요?”

“난 처음부터 약속을 잡았어. 수정이가 창현이를 보고 싶다고 해서 보호자 겸 같이 간 거거든.”

오늘 창현을 위해 만든 샌드위치와 김밥이 담긴 바구니를 잡은 손에 힘이 꾸욱 들어간다.

이 자리에 있어야 할 사람은 자신과 수정, 그리고 창현뿐이어야 하는데 설마 예상하지 못한 사람들이 이렇게 나올 줄이야. 계획이 어그러져도 단단히 어그러진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분위기가 좋지 않아.’

수정은 그런 수연의 기색을 읽어 들이고는 황급히 앞으로 나서며 말한다.

“제가 창현 오빠를 너무 보고 싶어서 염치 불구하고 청했어요. 그러니 그런 안색을 띠지 마세요. 좋게좋게 생각하고 오늘 재미있게 놀면 되잖아요.”

괜히 자신이 세운 계획으로 인해 같은 그룹 멤버들의 사이가 벌어질까 싶어 수정은 간절한 어조로 말했다.

“…….”

그 말을 들은 수연과 윤아는 입을 다물었다. 수정의 말처럼 오늘 이렇게 만난 것이 오히려 다행일 수 있다. 수연의 입장에서는 방해받은 기분이 강했지만 창현이 직접 불렀다고 하니 무어라 할 수 없었다. 애초에 데이트가 아닌, 함께 휴식을 취하자는 의미로 만남을 약속한 것이었으니까.

만약 자신이 약속을 하지 않았더라면 창현이 윤아와 함께 데이트를 즐겼을 것이라 생각 되었다.

‘좋아, 지금은 아니야. 손해 본 것도 있지만 견제를 할 수 있게 된 것도 있으니까. 흥분하지 말자.’

침착하게 자신을 다스리는 수연이었다.

윤아 또한 처음부터 약속을 한 상대가 수연이라는 사실에 창현에게 서운한 마음을 느끼면서 한편으로는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괜히 수연에게 기회를 주는 처지가 되어버릴 뻔했으니까.

‘순규 언니는 괜찮다 치더라도 이 문제만큼은 물러설 수 없어. 우선은 견제가 가능하다는 것에 만족하자.’

비슷한 생각을 하는 두 사람이었다.

“안녕하세요, 언니들. 갑자기 끼어드는 것이 좀 그렇게 보일지 모르지만 한마디만 할게요. 기왕 이렇게 만나게 된 거 즐겁게 즐기면 좋다고 생각해요. 어차피 처음 목적은 그거 아니었나요? 아니면 다른 목적이 있다거나…….”

나이는 어리지만 지영의 말이 지닌 파워는 엄청난 것이었다.

그녀는 창현의 동생으로서 누구보다 강력한 파워를 발휘할 수 있는 입장이었다. 그렇기에 수연이나 윤아에게 있어 지영의 말은 웬만해서는 거스를 수 없는 말이었다.

소녀시대에게 있어 가히 만인지상의 위력을 발휘하는 지영이었다.

“그래, 알았어.”

“응, 그렇게 할게.”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두 소녀의 모습에 지영은 미소를 짓는다.

“네, 언니들. 제 말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 사람, 보통이 아니야.'

수연이나 윤아는 창현과 관련되어 있는 지영에게 꼼짝할 수 없는 처지였지만 그에 비해 상당히 자유로운 수정은 지금 상황을 냉정하게 지켜볼 수 있었다.

지영의 행동을 지켜보고 깨달은 것은 그녀가 보통이 아니라는 것이다.

뭐라고 해야 할까, 교묘하게 자신의 장점을 발휘한다고 해야 할까? 말은 죄송하다고 했지만 그녀의 음성에는 은연중 확신이 깃들어 있었다. 자신의 말을 반드시 따라야 한다는 식의 확신이었다.

그러다 순간 지영과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지영의 눈에 귀화가 피어오르다가 사라졌다.

수정은 그것을 느끼고는 잔뜩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지영의 얼굴에 떠올랐던 것은 틀림없는 적대감이었다.

자신이 적대감을 느낄 만한 행동을 한 적이 있던가? 오늘 만난 것이 처음인데.

‘일단 사이가 나빠져서는 안 돼.’

그렇게 생각한 수정이 지영에게 다가가 인사를 하였다.

“안녕하세요, 언니? 수연 언니의 동생 정수정이라고 해요.”

먼저 다가오는 그녀의 모습에 살짝 놀란 표정을 짓던 지영이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창현 오빠의 동생 최지영이에요. 학년은 내가 하나 높더라도 나이는 같으니까 말을 편하게 해도 되요.”

“그래도 될까……요?”

“응, 물론이지. 편하게 대해줘.”

빠른년생은 그런 점이 무척 불편하다.

나이는 한 살 어린데 학년은 빨라서 그렇다랄까?

한학년 어려도 자신과 동갑인 경우가 많은데 괜히 언니나 누나 소리를 들으면 불편하고는 하였다.

물론 처음에는 그것이 당연하다 여겼지만 이래저래 불편함을 겪다 보니 차라리 마음 넓게 두 학년 모두 친구를 먹기로 마음을 먹은 상황이었다.

자신으로서는 당연히 결심한 바를 말한 것이지만 수정으로서는 뜻밖일 수밖에 없는 상황.

지영은 속으로 자신이 한 수 먹고 들어갔다는 생각을 하며 입가에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응, 그럼 그렇게 할게.”

“그래,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 제시카 언니 동생이라면 너도 연습생?”

“응, 나도 연습생이야. SM엔터테인먼트에서 연습생 생활을 하고 있어. 멀지 않아 데뷔할 것 같기도 하고…….”

“좋겠다. 난 아직 멀었거든. 삼 년 동안 트레이닝을 받으며 결정하기로 했는데 아직 확실하지가 않아.”

풀죽은 듯 말하는 지영의 모습에 수정이 위로를 해주었다.

“그래도 창현 오빠 동생이잖아. 언니가 말하는 걸 들어보니 창현 오빠의 보컬 트레이닝은 대단하다고 하던 걸? 복 받은 거라 생각해.”

“그렇겠지?”

동갑의 두 소녀는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빠르게 친분을 쌓아나갔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서로의 의중을 파악하느라 바빴다.

수정이 무슨 꿍꿍이로 창현에게 접근하려는 것인지, 그리고 지영이 무슨 이유로 자신에게 적대감을 내비쳤는지 말이다.

여러 이야기를 나누던 지영은 문득 창현이 시간을 확인하는 모습을 보고는 말했다.

“아, 약속 시간이 지나겠네요. 오빠 기다리고 있겠어요. 가죠.”

“맞다! 가자. 얘들아.”

“으응.”

창현을 깜빡하고 있던 그녀들은 아직도 약속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던 창현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창현과 합류한 일행은 곧장 놀이공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주말이 아닌 평일이었지만 시험이 끝나고 학교에서 제법 많이 놀러오기에 사람은 부적거리는 편이었다.

자유이용권을 끊으면서 창현은 윤아를 바라보며 물었다.

“생일 때 어땠어요?”

“좋았지, 당연히! 창현이가 준 것도 너무 좋았어. 나 벌써 이걸로 모닝콜 해놓았다?”

그러면서 자신의 핸드폰을 열어 모닝콜에 대한 것을 클릭하며 보여주는 윤아였다.

그 모습에 창현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좋다니 다행이네요. 누나가 영어를 잘 못 알아들으면 한국어로 할라 했거든요.”

“나, 나도 영어 잘 하거든?”

정곡을 찔렸는지 순간 말을 더듬는 윤아였다.

그 모습에 창현은 피식 웃음을 짓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이, 예이.”

“너어…….”

한눈에 보아도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기에 윤아의 눈이 도끼눈으로 변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현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어깨를 으쓱 해보일 뿐이었다.

티격태격하면서 자유이용권을 끊을 수 있었다.

창현은 자유이용권을 바라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요즘 여기 자주 오네.”

옆에 서 있던 윤아의 눈이 순간 날카롭게 변했다. 놀이공원에 자주 온다? 뭔가 냄새가 나는 말이 아닌가.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창현에게 추궁하듯 물어보았다.

“자주 온다고……?”

“네? 아아, 저번에도 한 번 올 기회가 있어서요.”

속으로 당황했지만 침착하게 대답을 하며 넘어가는 창현이었다. 너무나 여유롭게 대처하는 그의 모습을 본 윤아는 무어라 말을 하지 못한다.

창현과 윤아를 마지막으로 모두가 자유이용권을 구매할 수 있었다. 그들이 다가가니, 순규가 수정 옆에 서면서 슬쩍 옆을 보더니 묻는다.

“으으, 수정이 너 키 또 컸네? 너 키 몇이야?”

“이제 157cm 됐어요.”

“헉! 157cm? 이, 이럴 수가! 나보다 크잖아!”

다섯 살이나 어린 새파란 핏덩이(?)가 자신보다 커졌다는 사실에 절규하는 순규였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자신이 내려다보며 키가 작다고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것이 어제 같은데! 이제 자신보다 커지다니! 조만간 자신을 내려 볼 기세였다.

“저보다 지영이가 더 큰 걸요, 뭐.”

그 말에 순규가 시선을 옮겨 지영에게 시선을 둔다.

과연, 키 높이 신발을 신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대등한 키를 자랑하고 있었다.

순간 속으로 열불이 확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끼며 순규가 묻는다.

“…지영아, 너는 키 몇?”

“166cm요.”

“…….”

소녀시대에 들어오면 단숨에 장신파에 들어올 수 있는 키였다. 넘을 수 없는 벽에 내심 저렇게 큰 여자들이 많으니 몇 년만 지나면 자신과 같이 작은 여자들이 대세가 될 것이라 위로하였다.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언니, 그건 뭐에요?”

서로에 대한 경계심을 풀고, 오늘 만큼은 피 튀기는 혈투보다 즐겁게 놀이기구를 즐기기로 마음을 먹은 두 여인의 대화에는 평화가 넘쳐 흘렀다.

수연은 바구니를 슬쩍 들어보이더니 말한다.

“점심이야. 놀이공원은 비싸니까 준비해봤어. 왜?”

“점심이요? 어, 언니가?”

그녀가 요리를 했다는 말에 윤아는 화들짝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말을 더듬는다. 수연은 미영의 뒤를 바짝 쫓고 있을 만큼 요리 스킬이 최하위에 속하는 인물 중 한 사람이었다. 누굴 죽이려고 요리를 준비한 것인가.

윤아가 놀라는 이유를 알고 있었기에 수연은 살짝 표정을 찡그리며 말한다.

“그 표정 실례되거든? 수정이가 맛봤어. 맛이 괜찮다고 하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수정이가요? 흐음! 그러면 괜찮으려나…….”

정상적인 미각을 지니고 있는 수정이 괜찮다고 하면 제법 믿을 만하였다.

윤아가 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리자 수연의 표정이 사납게 변해갔다.

“뭐야, 그렇게 날 믿지 못한다는 거야?”

당장이라도 포효를 터뜨릴 것처럼 으르렁거리는 그녀의 모습에 윤아가 황급히 손을 저었다.

“아, 아니에요. 그럴 리가요. 수정이가 맛있다고 하면 맛있는 거겠죠.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아하하하!”

변명하듯 말을 했지만 불안함이 드는 것은 사실이었다.

미영과 수연의 요리세계는 소 뒷걸음질 치다 쥐 잡은 격도 없을 정도로 절대적인 확률을 자랑하고 있었으니까.

윤아가 자신의 말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수연은 겉으로 표현하지 않았다.

모든 것은 점심시간에 확실해질 것이다.

‘믿지 않을수록 더 놀랄 걸? 굳이 나서지 않아도 이 요리 하나로 엄청난 점수를 딸 수 있을 테니까…….’

오늘 즐기기로 한 이면에는 그런 계산이 치밀하게 숨어 있었다.

승부는 바로 점심시간이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창현은 슬쩍 놀이공원 입구를 바라보며 말한다.

“자, 그럼 들어갈까요?”

“응!”

그렇게 한 명의 소년과 다섯 명의 소녀가 놀이공원 안으로 들어섰다.


“뭐부터 탈까?”

“우선 내부 안에 있는 것들부터 탄 다음에 밖으로 나가서 타는 게 어때요?”

시험이 끝났다고 하나, 소풍 시즌이 지나서인지 태연과 함께 왔을 때보다 사람이 많지 않았다.

낮 시간에 제법 많이 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창현이 제안하자 모두 고개를 끄덕인다.

밖으로 나가면 여러 가지 변칙적인 요소가 많으니까. 가령 바람이 불어서 모자가 날아가 버리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회전목마 타자, 바이킹!”

윤아가 활발한 어조로 회전목마부터 탈 것을 주장하였다.

모름지기 놀이공원에 오면 회전목마로 워밍업(?)을 해줘야 정석이 아닌가!

그러자 지영이 그런 윤아의 모습을 힐끔 바라보더니 순규와 쑥덕거린다.

그리고는 순규가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말한다.

“그것보다 후렌치 레볼루션부터 타는 게 어때? 가면 준비한 다음에 사진 찍힐 때 모두 가면을 쓴 담에 찍는 거야.”

추억거리로 만들 법한 제안이었다.

자신의 제안과 상반되는 순규의 제안에 순간 윤아가 멈칫한다.

그때, 수연이 수정과 눈을 마주친 후 의견을 교환하는 듯하더니 말한다.

“바이킹이 어때? 바이킹 타면 재밌을 것 같은데.”

“…….”

수연과 수정마저도 다른 의견을 내놓자 윤아는 울상을 지었다. 순규에게는 지영이, 수연에게는 수정이 도움을 주고 있는데 자신은 혼자가 된 것 같아 우울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내심 창현이 자신의 편을 들어주길 바라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하, 난감하네요.”

다른 소녀들도 이미 창현을 바라보고 있는 중이었다.

은연중 그에게 결정권을 주고 있는 상황.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던 창현은 예리한 소녀들의 시선에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면서 말한다.

“그러지 말고 하나씩 번갈아가면서 타요. 후렌치 레볼루션부터 타고, 그 다음 바이킹, 그리고 회전목마요.”

“회전목마는 좀 그렇지 않아? 우리가 어린애도 아니고.”

“그래도 윤아 누나가 타고 싶다는 걸요. 다같이 여유롭게 타기도 좋잖아요.”

“응, 알았어. 다 같이 즐긴다면 그러는 게 좋지.”

순규의 말에 창현이 자신의 의견을 차분하게 말하자 납득하는 표정을 짓는다.

그 모습에 윤아는 살짝 감격한 표정을 짓는다.

자신의 의견이 아예 받아들여지지 않을 뻔한 것에 서운한 마음을 느꼈었는데 창현이 자신을 위해서(?) 끝까지 주장을 하니 기분이 좋았다.

“그럼 가도록 하죠. 세 개 다 타면 얼추 점심 먹을 시간이 되겠네요.”

“점심이라면 내게 맡겨. 준비해왔거든.”

수연이 바구니를 살짝 들어 보이며 자신 있는 목소리로 말하자 창현이 그것을 보고는 은근한 어조로 묻는다.

“자신 있는 거죠?”

“물론이야! 수정이가 맛있다고 했어. 안 그래, 수정아?”

“으응. 언니가 이번에는 제대로 된 유니크 아이템을 들고서 만든 거니까 믿어도 되지. 손해보는 셈치고 한 번 먹어봐요 오빠, 결코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

“그래? 그렇다면 먹어야지.”

자신을 위해 준비했다니 먹는 것은 인지상정이었다. 다만 걱정이 되기는 하지만 수정이 먹어봤다고 하니 믿고 먹어보기로 결심을 내렸다.

창현으로서는 제법 큰 결정을 내린 것이다.

“…….”

그 모습을 보며 지영이 눈을 가늘게 떴다.

뭐라고 해야 할까, 자매가 아주 착실하게 창현을 공략해오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랄까.

수연이 화두를 던지고 수정이 마무리 한다. 핵심은 수연이지만 수정이 여러 테두리를 맡아줌으로써 창현을 효과적으로 설득하고 있었다.

‘대단한데? 방심할 수 없겠어. 역시 제시카 언니도 오빠를 좋아하는 거였어.’

좋아하지 않는 남자를 위해 점심을 준비해오는 여자는 없을 것이다.

지영은 수연 또한 창현을 노리는 여우라 판단하였다. 그 아우라만큼은 늑대를 뛰어넘는 강력한 여우라 생각하면서. 그리고 그 여우를 돕고 있는 수정 또한 꼬리가 세 개 정도 달린 여우였다.

‘방심하면 안 되겠어.’

경계심을 끌어올리는 지영이었다.

그것도 모른 채 윤아는 창현이 자신의 편을 들어주어 기분이 좋은지 유쾌한 어조로 외친다.

“자자, 그럼 놀이기구 타러 렛츠 고!”

그렇게 그들은 놀이기구를 타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법 철저한 변장을 한 상황이었기에 들킬 염려는 거의 없었다.

일단 기본적으로 모자를 푹 눌러쓰고, 썬글라스가 아닌 커다란 안경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리고 헤드셋이나 여러 가지 소품을 이용하여 효과적으로 얼굴을 감추니, 근접한 사람들이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는 한 들킬 염려는 없었다.

몇몇 사람들은 윤아와 수연의 익숙한 모습을 보고는 소녀시대가 아닐까 의심을 했지만 결과적으로 그녀들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왜냐하면 소녀시대 제시카하면 가장 유명한 것이 팔자걸음인데 그녀는 신경 써서 제대로 걷고 있었기에 비슷한 사람으로 치부된 것이다.

팔자걸음을 하지 않았기에 들키지 않은 어이없는 상황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후렌치 레볼루션을 타면서 순간적으로 가면을 쓴 뒤 사진을 찍고 그것을 구입한 뒤 곧장 바이킹을 타기 위해 움직였다.

바이킹에서는 자칫 정체를 들킬 뻔하였으나 지영과 수정의 효과적인 방어로 사태를 벗어날 수 있었다.

얼굴을 가렸지만 스타일이나 몸매가 다른 일반인들과 비교가 되었기에 그들은 움직일 때마다 사람들의 관심을 받아야만 했다.

스릴 넘치는 바이킹을 탄 뒤 회전목마로 둥실둥실 주변 구경을 마친 그들은 지쳐버렸다.

“하아! 세 개밖에 타지 않았는데 지치다니, 나도 늙긴 늙었구나.”

스무 살이 되면서 부쩍 체력이 힘에 부치는 것을 느끼며 순규가 앓는 소리를 냈다.

“저는 스무 살도 아닌데 왜 이렇게 지친 걸까요.”

윤아는 아직 파릇한 열아홉 살임에도 불구하고 체력이 서서히 방전되는 것을 느끼며 아픈 다리를 토닥이고 있었다.

“…….”

수연 또한 제법 지쳤지만 그런 티를 낼 수 없었다. 이제 대망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기에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던 것이다.

지영과 수정은 한창 때라 그런지 아직 체력이 넘쳐흐르는 듯하였다.

지친 멤버들과 아직 힘이 넘치는 두 명을 보던 수연이 창현에게 말했다.

“이제 점심 먹어야지.”

“그래야죠. 기대 되는데요?”

“기대해도 좋을 거야.”

오늘 이십 년 동안 살아오며 최고의 요리를 완성했다 자부하는 수연이었기에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저 정도면 진짜인 것 같은데?’

그것은 단순히 근거 없는 자신감이 아니었기에 창현은 제법 기대감이 생기는 것을 느꼈다.

저 정도 자신감을 보일 정도라면 정말 무언가가 있을 것 같았으니까.

점심을 먹기 위해 자리를 옮긴 일행은 막 점심을 다 먹은 사람들이 자리를 비우는 걸 보고는 그쪽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자 수연이 들고 있던 바구니를 식탁 위에 올려놓고는 안의 내용물을 꺼내들기 시작했다.

“사람이 이렇게 많을 줄 몰라서 조금 부족할지도 몰라. 넉넉하게 싸온다고 했지만 어디까지나 세 명 수준에서 넉넉한 거니까. 부족하면 더 시켜먹으면 되니 일단 먹도록 하자.”

그러면서 수연이 먼저 풀어놓은 것은 참치 샌드위치였다.

먹음직하게 잘라놓은 것을 보고는 창현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모양은 아주 괜찮은데요?”

“맛도 괜찮을 거야. 한 번 먹어봐.”

수정의 미각을 믿는다!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창현에게 샌드위치를 권하는 수연이었다.

그것을 받아든 창현은 망설임 없이 샌드위치를 먹어간다.

한입 크게 베어 물고 우물우물 씹는 창현.

그의 눈이 점점 커지기 시작한다.

“저, 정말 맛있는데요?”

놀라움이 역력한 목소리였다. 수연이 자신을 한다고 해서 그럭저럭 먹을 수준이면 놀라울 정도라 생각했는데 이것은 상상 이상이었던 것이다. 시중에서 내다파는 참치 샌드위치라 해도 믿을 정도의 맛이었다. 게다가 자신을 위해 아침 일찍 일어나 만든 정성(?)이 가득 녹아 있었기에 그 맛은 창현을 감동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긴장감이 가득하던 수연의 얼굴에 일순간 환희가 깃들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자신감 넘치는 표정을 지으며 창현에게 말한다.

“어때? 맛있지?”

“정말 맛있어요. 누나한테 이런 면이 있을 줄 몰랐는데요? 오늘 새로 보이네요. 와, 정말 대단해요.”

요리는 여자를 더욱 아름다운 모습으로 보이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다. 매번 망작에 가까운 요리를 배출하던 수연이 이런 수작을 만들어내자 창현이 느끼는 감탄은 대단한 것이었다.

수연에 대한 호감이 치솟는 것을 보며 순규와 윤아는 위기감을 느끼고는 샌드위치에 손을 뻗었다.

“어디어디, 나도 먹어보자.”

“저도요!”

그러면서 샌드위치를 집어든 두 소녀는 망설임 없이 입에 넣는다. 그리고 그녀들도 창현처럼 놀란 표정을 짓기 시작한다.

어떻게 저 저주 받은 손에서 이런 수준의 음식이 나올 수 있단 말인가!

미영의 뒤를 바짝 쫓는 소녀시대 요리 못하는 부동의 랭킹 2위 수연이 이렇게 발전했다는 사실에 두 소녀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러면서 연신 샌드위치에 손을 뻗고 있었다.

창현은 물론 멤버들마저 감탄하는 모습에 수연은 그저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순식간에 샌드위치가 동이 나자 수연이 이번 점심 요리의 하이라이트인 김밥을 꺼내놓았다.

샌드위치에 이어 김밥으로 굳히기를 한다면 자신의 호감은 단숨에 급상승할 것이다.

“샌드위치로 부족할 것 같아서 김밥도 준비했어. 먹어 봐.”

“오, 겉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대단해보이는데요?”

김밥의 모습을 보며 감탄을 터뜨리는 창현이었다. 샌드위치도 괜찮았지만 겉모습만 보면 김밥도 정말 굉장하게 느껴졌다.

“맛도 괜찮을 걸? 사실 샌드위치보다 이게 자신작이거든.”

요리 앞에서 작아지던 수연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상황이다. 이제는 요리로 소녀시대 정점에 군림하던 태연의 자리를 넘보는 정 셰프가 바로 그녀였다.

“그래요? 그럼 어디…….”

김밥에 손을 뻗은 창현은 하나를 집어 든다. 햄, 단무지, 우엉, 당근, 계란, 게맛살, 치즈가 들어간 것이 보인다. 오이를 싫어한다더니 오이는 들어있지 않았다.

치즈가 들어갔으니 치즈 김밥이라 생각하며 창현은 김밥을 입에 넣기 시작한다.

그 모습을 보며 수연은 눈을 빛냈다.

‘드디어…….’

필살必殺의 김밥을 시식하는 창현이었다.

저것으로 이제 자신의 호감도는 최고조를 달리게 되리라.

밥에 솔솔 뿌렸던 설탕의 달콤함처럼 자신 또한 달콤하게 불러주겠지.

Game Over라 생각하며 속으로 미소를 짓는 수연이었다./

샌드위치에서 상상 이상의 맛을 보았기에 창현은 수연이 만든 김밥에 대한 기대감이 상당히 높았다.

예전에는 그토록 요리를 못한다고 하더니 언제 이렇게 실력이 늘은 걸까. 괜히 그런 게 아닌 것 같으면서도 자신에게 음식을 대접하기 위해 실력을 늘린 것 같아 뿌듯한 창현이었다.

정말 그 생각이 사실인지도 모른 채.

모양이 그럴 듯했기에 망설임 없이 입에 넣은 창현은 그대로 김밥을 씹기 시작한다.

샌드위치와 다른 맛이 느껴지기를 바라면서.

그리고 그 소망은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가 바라던 것처럼 샌드위치가 전혀 다른 맛을 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것도 상상을 초월하는 다른 방향으로.

“……!”

입속에서 번져가는 맛을 느낀 창현의 눈이 크게 뜨이기 시작한다.

태초에 빅뱅이 이러하였을까.

연원을 알 수 없는 맛의 폭발이 연쇄적으로 터져 나가기 시작하며 형용하기 힘든 맛의 향연이 줄줄이 이어지기 시작한다.

‘판타스틱(Fantastic)!'

창현의 뇌리에 스치고 지나간 단어였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좋은 의미에서 터져나온 단어가 아니었다.

한순간 정신이 멀어지는 듯한 충격을 느낀 그는 순간 몸을 비틀거리더니 왼손으로 머리를 부여잡는다.

“차, 창현아?”

잔뜩 긴장한 얼굴로 그의 반응을 살피던 수연은 머리를 부여잡고 고개를 푹 숙이는 창현의 모습에 화들짝 놀라며 그의 이름을 부른다. 하지만 창현은 애석하게도 지금 그녀의 말을 들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것으로 보아 당장이라도 정신줄을 놓고 싶은 심정이 가득했으니까.

그것도 모른 채 수연은 그가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안절부절 못하며 말한다.

“차, 창현이가 왜 이러는 거지? 왜 이러는 거야?”

옆에 서 있던 수정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수연의 필살 김밥으로 창현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김밥을 먹고 정신이 혼미한 듯한 모습을 보이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어, 언니가 김밥에 뭐 잘못 넣은 거 아냐? 아니면 오빠가 이런 반응을 보일 리 없잖아.”

“나, 난 넣지 않았어. 그냥 책에 나온대로 재료들을 넣었을 뿐인데…….”

당황하는 수연의 모습은 누가 보아도 결백 그 자체였다.

하지만 김밥은 결백하지 않은 듯하였다.

정상적인 미각을 지닌 창현이 이런 반응을 보였다는 것은 김밥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걸 뜻했으니까.

윤아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슬그머니 손을 뻗어 김밥을 짚어들고는 조심스레 입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눈을 질끈 감은 채 김밥을 씹기 시작했다.

“……!”

입속에 퍼져 나가는 판타스틱한 맛에 윤아의 눈이 왕방울만큼 커지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맛이란 말인가.

그녀는 참아내지 못한 채 기어코 김밥을 뱉어내며 고개를 저었다.

“우웩! 어, 언니! 여기에 도대체 뭘 넣은 거에요? 이건 도대체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고요!”

“머, 먹을 수 없다고? 그럴 리 없는데…….”

거침없는 혹평에 새하얗게 질린 수연이 말한다. 하지만 눈앞에 증거가 있지 않은가. 발뺌을 해도 창현이 인증하고 윤아가 인증한 이상 수연에게 빠져나갈 구멍은 없었다.

지영도 윤아의 말에 손을 뻗어 김밥을 집어들더니 맛을 보기 시작한다.

그리고 윤아보다 훨씬 빨리 뱉어내며 표독한 눈으로 수연을 노려보며 외쳤다.

“어, 어떻게 이런 음식을! 도대체 뭘 넣은 거에요! 당장 말하세욧!”

소녀시대 서열 1위에 해당하는 폭군 수연이었지만 창현이 그로기 상태에 빠져들고, 윤아와 지영마저 인증한 이상 빠져나갈 구멍은 존재하지 않았다.

매섭게 몰아붙이는 지영의 말에 제대로 반격조차 못한 채 수연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재료를 읊기 시작했다.

“나는 그냥 시중에 파는 김이랑 햄, 계란, 게맛살 등 기본 재료를 사고 정상적으로 밥을 했을 뿐인데… 조금 단맛을 강하게 하려고 설탕을 넣기는 했지만…….”

정상적인 재료를 늘어놓는 수연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하던 여인들은 마지막에 언급된 설탕에 눈을 크게 뜨며 외쳤다.

“서, 설탕이라고? 언니! 김밥에 설탕을 넣는 사람이 어디 있어!”

경악 어린 수정의 외침과 함께 순규의 조심스러운 물음이 이어졌다.

“수연아, 너 정말 설탕 넣은 거야?”

“응… 설탕 넣으면 안 되는 거야?”

“안 되고말고! 밥에 설탕을 넣으면 그야 말로 둘이 먹고 둘 다 죽는 살인적인 맛이 된다고!”

순규의 경악 어린 외침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지영이 김밥을 들어 수연에게 내밀며 냉랭한 어조로 말한다.

“언니가 한 번 먹어보세요. 언니가 김밥 맛을 먼저 보았다면 이런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 거예요.”

“…….”

지영의 말에 무어라 말을 하지 못한 채 수연이 김밥을 받아먹는다. 그리고 우물거리며 씹기 시작하다가, 얼굴이 하얗게 질리기 시작하더니, 그대로 김밥을 더 먹지 못한 채 뱉어낸다.

“켁! 어, 어떻게 이런 맛이…….”

자신이 한 김밥이지만 그 맛은 상상을 하기 싫을 정도로 끔찍한 맛이었다. 설마 설탕을 넣은 것만으로 이런 끔찍한 맛이 형성될 줄이야. 두려움이 절로 엄습하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그걸 오빠는… 오빠! 괜찮아요?”

지영은 염려 가득한 눈으로 창현을 바라보며 걱정 어린 눈으로 그를 바라본다. 그렇지만 창현은 여전히 아무 반응도 하지 않는다.

수연이 그의 앞에 조심스럽게 다가가며 묻는다.

“창현아… 괜찮아?”

이렇게 말을 하는 것이 본인 스스로도 염치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녀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속으로 울상을 짓고 있었다. 샌드위치가 성공하여 내심 창현의 마음속에서 호감 게이지가 높아졌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김밥으로 인해 공든 탑이 단숨에 무너져내리게 생긴 것이다.

상상만 해도 끔찍한 순간이 아닐 수 없다.

겉으로 내심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그 표정을 유지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그때, 창현의 작은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요.”

“응?”

무슨 말을 했기에 수연이 반응을 보이자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창현이 고개를 든다. 그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지만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는 수연을 바라보며 위로하듯 말한다.

“맛이 참 독창적이라고요. 딱히 좋다고 할 수는 없지만… 누나가 오늘을 위해 싸준 거니 끝까지 맛을 봐야 하지 않겠어요?”

그러고 보니 창현은 김밥을 끝내 뱉지 않았다. 미련하다 할 수 있을 만큼 끝까지 김밥을 억지로 넘겨버린 것이다. 뱉어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연을 위해서 김밥을 먹은 것이다.

바로 자신을 위해서!

“차, 창현아…….”

수연의 얼굴에 감동이 서린다. 김밥을 먹게 한 것만으로도 미안해 죽겠는데 설마 그것을 모두 먹어줄 줄이야. 너무나 고맙고 한편으로는 미안했다.

창현은 여전히 하얗게 질린 얼굴로 물을 마시더니 수연에게 말한다.

“다음부터는 최소한 맛을 보고 싸주세요. 물론 다음 기회가 있다는 가정 하에 말이에요. 알았죠?”

“으응. 고마워.”

이해해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울 따름이었다. 창현은 자신이 실패한 음식을 먹여서 화가 난 것이 아닌, 오히려 그 정성을 보아주었으니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그의 넓은 마음에 감탄 또 감탄을 거듭하는 수연이었다.

“물 좀 더 없나요? 억지로 넘겼더니 여파가 만만치 않네요.”

물을 찾는 창현에게 수연이 서둘러 물통을 내밀었다.

“여기 물.”

“고마워요.”

그러면서 물을 단숨에 들이키는 창현이었다.

“…….”

그것을 지켜보는 여인들의 얼굴은 평균적으로 좋지 못했다.

수정은 그래도 넓은 마음을 지닌 창현으로 인해 일이 훈훈하게 끝맺음을 하게 되자 역시 창현 오빠라 생각하며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었고, 그 외 여인들은 수연을 단번에 보내버릴 찬스였음에도 불구하고 창현이 너그러이 인정해주자 불편한 표정이었다. 게다가 수연이 창현에게 다소곳하게 물을 건네주는 모습을 보아하니 이가 갈릴 지경이었다.

숙소 내에서는 은나라 주왕을 저리가라 할 정도로 폭군의 면모를 보이면서 이곳에서는 현모양처와도 같은 모습이라니.

게다가 더 열이 받는 건 그 모습이 한 폭의 그림이 된다는 점이다.

“점심은 이만 먹고 놀이기구 타러 가요.”

절묘하게 흐름을 끊으며 제안을 하는 지영이었다.

“그래, 그렇게 하자.”

창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하자 윤아가 앞으로 나서면서 의견을 제시한다.

“응. 좀 격렬한 거 탈까?”

“안 되요! 오빠는 지금 상태가 좋지 않으니까 잔잔한 걸 타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안 그래요, 언니?”

“그게 나을 것 같네. 창현이를 좀 더 배려해줘야지.”

“오빠는 어때요?”

순규도 동의를 표하자 졸지에 창현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버린 윤아의 안색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한줄기 희망을 걸고 창현을 바라보았지만 그의 대답은 윤아가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그래, 그게 낫겠네. 속이 그렇게 좋지 않아서 좀 편안한 걸 타면 좋겠다. 아니면 재미있는 걸 타고, 난 밖에서 구경하면 되고.”

그 말에 수정이 나서며 전면 부인하였다.

“그럼 안 되죠! 다 같이 즐기려고 온 만큼 다 함께 타는 게 당연한 거죠! 안 그래요 언니?”

수정이 수연의 의견을 구하고 나서자 그녀는 거듭 창현에게 사과를 하였다.

“그건 맞는 말이야. 창현아, 미안해. 나 때문에…….”

“하하, 아니에요. 그럴 수도 있는 거죠. 게다가 속이 편해지면 재미있는 것들 타면 되니까요.”

“으응.”

넓은 창현의 이해심에 그저 고마움을 느낄 따름이었다.

“…….”

그에 반해 졸지에 자신의 의견이 묵살 당하게 된 윤아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기분 전환을 위해 제시한 것인데 졸지에 창현의 몸 상태를 제대로 알아보지 않은 채 철없이 제안을 해버린 여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게다가 수연이나 순규처럼 자신의 의견을 받침해줄 수정과 지영의 존재가 없었기에 더욱 외롭게 느껴졌다.

‘창현이가 생일 축하 기념을 위해 불러준 건데 이게 뭐야…….’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 없는 윤아였다. 믿을 수 있는 창현마저도 수연의 필살 김밥에 의해 정말 생사를 오가는 경험을 하여 자신을 챙겨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으니까.

괜히 외톨이가 된 느낌에 윤아가 고개를 푹 숙일 때,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는 것이 느껴졌다.

화들짝 놀란 윤아가 고개를 돌리니, 그곳에는 창현이 빙긋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 놀란 거에요? 미안해요.”

윤아의 반응이 놀란 것이라 생각하고 어깨에 손을 뗀 뒤 사과하는 창현이었다.

그 말에 윤아는 고개를 저었다. 절대 그걸로 화가 난 게 아니었으니.

“아니야, 그런 거 아니니 사과할 필요 없어.”

“다행이네요. 그런데 뭐하는 거예요? 뒤로 처지고.”

“으응? 나, 난 그냥…….”

차마 소외감을 느껴서 뒤로 처진 것이라 말하기 어려웠다. 왠지 모르게 어린 아이의 투정 같은 느낌이 들어 부끄러움이 앞섰으니까.

괜히 부끄러운 마음에 윤아가 고개를 푹 숙이자, 창현은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그녀의 마음이 울적하다는 것을 알아차렸기에 빙긋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오늘 즐기러 온 거니까 함께 놀아요. 누나가 타고 싶어 하던 놀이기구도 같이 타면 되니까요.”

아무래도 그는 윤아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이유가 격렬한 놀이기구를 타지 않아서 그런 것이라 판단하였다.

윤아도 그 말의 뉘앙스를 알아차릴 수 없었지만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괜히 자신의 치기 어린 생각보다는 이것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으응.”

“그럼 가요.”

그녀의 손을 잡아끌며 걸어가는 창현이었다. 그 행동에 윤아는 못 이기는 척 그 뒤를 따른다.

그 모습을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여럿 있었다. 바로 창현과 윤아를 제외한 다른 여인들은 은연중 그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던 것이다.

‘윤아 언니도 은근히 적극적이네. 안 되겠어, 앞으로 윤아 언니도 철저히 감시해야겠어.’

윤아의 행동으로 보아 창현에게 마음이 있다고 판단하며 굳게 결심을 내리는 지영이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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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마음을 울리는 음악 시즌2 제1화 +10 15.04.17 7,375 95 10쪽
37 ▲▲▲▲▲시즌2 시작!▲▲▲▲▲ +5 15.04.17 5,423 65 1쪽
36 마음을 울리는 음악 106장-108장 +8 15.04.16 6,411 106 230쪽
35 마음을 울리는 음악 103장-105장 +1 15.04.16 4,242 82 3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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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마음을 울리는 음악 34장-36장 +8 15.04.16 9,522 189 3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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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마음을 울리는 음악 28장-30장 +5 15.04.16 10,658 260 2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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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마음을 울리는 음악 22장-24장 +4 15.04.16 10,922 261 198쪽
7 마음을 울리는 음악 19장-21장 +4 15.04.16 11,490 270 216쪽
6 마음을 울리는 음악 16장-18장 +5 15.04.16 11,541 242 163쪽
5 마음을 울리는 음악 13장-15장 +5 15.04.16 14,534 297 237쪽
4 마음을 울리는 음악 10장-12장 +8 15.04.16 13,736 352 171쪽
3 마음을 울리는 음악 7장-9장 +10 15.04.16 14,550 362 142쪽
2 마음을 울리는 음악 4장-6장 +11 15.04.16 16,834 421 120쪽
1 마음을 울리는 음악 프롤로그-3장 +47 15.04.16 29,895 545 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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