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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번 님의 서재입니다.

마음을 울리는 음악

웹소설 > 작가연재 > 팬픽·패러디, 현대판타지

김현우
작품등록일 :
2015.04.16 13:27
최근연재일 :
2015.06.01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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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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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4.16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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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16쪽

마음을 울리는 음악 19장-21장

DUMMY

제19장 중국 진출




현의 백만 장 돌파 이후 가요계에서는 또 다시 폭풍이 몰아쳤다.

바로 라샤의 컴백이었다.

수많은 기대와 우려 속에서 뮤직비디오가 성공적인 인기몰이를 하고, 가창력도 한수준 업그레이드 되었다는 호평을 들으며 라샤는 데뷔를 하자마자 각종 음원 차트 상위권을 차지하고 가요 프로그램에서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한다.

압도적인 퍼포먼스와 중독성 있는 노래를 앞세워 성공적인 데뷔를 한 그녀들은 가창력을 중심으로 한 발라드로서 정상에 섬으로써 본격적인 팬 층을 거느리게 되었고, 국내 팬들도 라샤의 섹시한 매력에 빠져드는 것이 아닌, 그녀들의 노래가 주는 매력에 빠져들게 되었다.

특히 동시 일본 발매를 함으로써 그녀들의 인기는 한층 더 치솟게 되었는데, 타이틀 곡 <가면의 기사>가 6주 연속 1위, 후속곡이 3주 연속 1위를 함으로써 명실상부한 톱스타로서 떠오르게 된다.

탁월한 가창력과 비주얼로 대한민국 깊숙이 파고든 라샤는 더 이상 한국에 국한된 스타가 아니었다.

성공적인 일본 진출을 하였고, 각국의 팬 층을 확립하고 있는 지금 그녀들은 더욱 더 넓은 시장에서 원하고 있었다.


“허허, 이것 참 난감하군.”

말은 그렇게 하면서 석규는 웃음을 짓고 있었다.

라샤가 성공적인 데뷔를 함으로써 그동안 우려되던 점들을 모두 극복한 상태였다. 그녀들의 인기는 날이 갈수록 더해갔고,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빡빡한 스케줄을 소화해내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온 제의. 그것은 결코 평범한 것이 아니었다.

바로 라샤의 중국 진출 제의였던 것이다.

현재 라샤를 바라보는 각국 연예계의 시선은 그야 말로 탐욕 그 자체였다.

치열한 한국 시장 제패에 이은 일본에서의 성공까지 연이은 고공행진. 그리고 1집 징크스를 깨버리며 성공적인 데뷔와 함께 선풍적인 인기몰이. 한국이 좁은 시장에 반해 비정상적으로 치열한 곳이고, 일본은 각양각색 개성이 넘치는 사람들이 많은 곳이다. 그런 시장에서 성공을 했다는 것은 곧, 아시아에서 성공할 만한 발판을 갖추었다는 것이 된다.

그래서 각국 연예계 소속사에서 제의가 오고 있는 실정이었고, 석규는 그 제의를 보면서 고민에 빠져있는 것이다.

“이번 활동은 휴식을 취하면서 하기로 했는데 일본 활동 때문에 쉬지를 못했으니…….”

연예인도 피와 살로 이루어진 사람인 만큼 어느 정도 휴식은 반드시 필요하다.

5월달부터 시작하여 라샤는 지금까지 숨 가쁘게 달려왔다. 연말 가요제에 참석한 뒤 체력 보충의 의미로 어느 정도 휴식을 취해줄 필요가 있었다.

그러던 차에 온 제의. 워낙 좋은 조건들이 많았기에 석규로서는 고민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야기를 해봐야겠군.”

독단으로 결정할 수 있지만 의견을 구하고, 함께 진로를 정하는 것이 라샤에게도 좋은 일이었기에 석규는 라샤의 스케줄 표를 보고 회의 일정을 잡았다.

다음 날, 오전 스케줄을 마친 라샤는 AA엔터테인먼트 인근에 있는 음식점으로 향했다. 석규가 의논할 일이 있다고 하면서 이야기를 할겸 점심식사를 사주기로 한 것이다.

예약된 방으로 향한 그녀들은 방안에서 기다리고 있는 석규를 보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오, 일찍 왔구나. 들어와라.”

바쁜 스케줄로 인해 일주일 동안 못 봤기에 석규는 그녀들을 반갑게 맞아들였다.

그리고 석규가 권하는 자리에 앉은 그녀들.

곧이어 음식이 나오기 시작한다.

석규가 살짝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원래는 음식이 다 나오게 하고 너희들을 맞이하려고 했는데 이거 실패했구나, 하하!”

“음식점에서 음식을 기다리는 맛도 있어야죠. 사장님은 너무 신사적이시라니까.”

“아, 그런가? 내가 좀 신사적이긴 하지, 후후!”

미란의 칭찬에 미소를 짓는 석규. 하지만 이어진 세룬의 강력한 일격에 침몰하고 만다.

“분명 신사적이긴 한데 그렇게 음흉하게 웃으시면 변태 아저씨 같아요.”

“크윽! 세룬이의 한방은 여전하구나.”

“그런데 어쩐 일로 저희를 부르신 거예요, 사장님?”

가슴을 부여잡는 석규를 보며 용건을 묻는 시린. 분명 석규라면 순수한 마음으로 식사를 사줄 생각이 있을 테지만 아직 자신들은 활동 기간이다. 그런 기간에 휴식을 취하라고 하지, 용건없이 식사를 사주겠다고 스케줄 중간에 불러들일 리 없었다. 라샤의 리더답게 그녀는 상당히 날카로운 직관력을 가지고 있었다.

시린의 물음에 석규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시린이는 역시 날카롭구나. 우선 먹으면서 말하자꾸나.”

석규의 말에 세 여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천천히 식사를 한다. 바쁜 스케줄을 소화하느라 제대로 된 식사를 챙겨먹기가 무척 어려웠기에 그녀들은 오랜만에 접한 맛있는 식사에 열중하였다.

어느 정도 허기가 가실 무렵, 석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선 난 너희들이 무척 대견하다. 연습생 생활도 이겨내고 이렇게 데뷔하여 인기를 얻으면서 잘 활동하고 있는 게 말이다.”

석규의 말에 시린이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미소를 지은 채 말한다.

“저희가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사장님 덕분이에요. 솔직히 다른 아이돌 그룹들을 봐오면서 그들이 얼마나 힘들어하는지 알 수 있거든요. 그에 반해 저희는 즐겁게 활동하고 있잖아요? 모두 사장님이 저희를 배려해주셔서 가능한 일이에요.”

“하하! 막상 그런 칭찬을 들으니 쑥스럽구나. 이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도록 하마. 5월에 데뷔하여 그동안 너희들이 숨 가쁘게 활동해오지 않았느냐? 그래서 이번 연말 가요제를 한 뒤 너희들에게 한 달에서 두 달 가량 휴식을 주려고 생각하는데 말이다.”

“정말요?”

석규의 말에 반색하는 그녀들. 표정이 정말 밝았다. 그도 그럴 것이 미니 앨범 준비를 하면서 짧게 휴식을 취했지만 녹음에 매진하느라 푹 쉬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들은 현재 간절하게 휴식을 바라고 있었다. 모든 일을 할 때 열심히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만큼 휴식을 취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녀들이 반색하자 석규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 하지만 한국에서 너희들의 인기가 정말 대단하지 않느냐? 그래서 새로운 프로젝트를 할 겸, 휴식도 취하려고 해서 너희들을 부른 것이다.

“뭔데요?”

프로젝트란 말에 그녀들은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짓는다. 선풍적인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고 하지만 외부로 나갈 일이 거의 없고, 간간이 인터넷으로나 확인하는 정도였기에 피부로 느끼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세 멤버 모두가 궁금한 표정을 짓자 석규가 말한다.

“연말 가요제가 끝나고 곧장 중국 진출을 시도할 생각이다. 어떻게 생각 하느냐?”

석규의 말에 모두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짓는다./

“중국이요? 갑자기 중국은 왜…….”

시린이 놀란 표정을 짓다가 석규에게 묻는다.

그러자 석규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근 몇 달 동안 쉬지 않고 활동하지 않았더냐? 당장 활동을 접고 쉰다고 하여도 숙소에 머무는 것이 한계일 터. 그러니 이참에 중국 진출을 꾀할 겸 그곳에서 한 달 정도 휴식을 취하게 해줄 생각인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석규의 말에는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라샤가 휴식을 취하는 것이 단순히 집에서 쉬는 게 되지 않길 바라는 의미가 있었고, 무엇보다 중국이라는 넓은 시장을 노려봄과 동시에 아직 인지도가 적은 중국에서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쉬라는 의도가 섞여 있었다.

중국어 회화 등 해결할 문제가 많았지만 석규는 그것을 걱정하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공부 방면으로 해박한 세룬이 염려 섞인 목소리로 묻는다.

“하지만 저희는 중국어가 안 되는데…….”

기껏해야 자신이 간단한 말을 주고 받을 수 있을 정도? 시린과 미란도 한문을 공부하고 있긴 하지만 회화까지는 어림도 없는 수준이었다.

세룬의 말에 시린과 미란도 동의를 표하며 석규를 바라본다.

그러자 석규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한다.

“창현이가 있지 않느냐? 내가 알기론 그 녀석이 일본어보다 중국어가 더 능숙하다.”

“창현이가 함께 갈지 모르는 일이잖아요.”

그렇게 말하지만 시린의 얼굴에 생겨난 건 기대감이었다.

창현이 중국에 함께 간다면 휴식을 취하는 한 달 정도를 함께 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당연히 기대가 안 될 리 없다.

시린의 말에 석규가 아차한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그도 그렇군. 창현이가 안갈 수도 있지.”

어째서 당연히 가는 것처럼 생각한 걸까.

아무래도 그동안 너무 자신의 말에 잘 따라줘서 당연하게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런 석규의 모습에 라샤의 표정이 흐릿해진다. 석규가 창현을 언급할 때 당연히 이야기를 모두 끝내고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실망한 라샤의 표정을 보면서 석규가 위로하듯 말했다.

“그 점은 걱정하지 말아라. 내가 반드시 창현이를 설득해볼 테니까. 아마 그 녀석도 지난번 일본 방문 때 많은 것을 얻어서 이번에도 참여하고 싶어 할 것이다.”

확신에 찬 석규의 말에 그나마 표정이 밝아진다.

그 모습을 보며 석규는 창현이 라샤의 버팀목이 되어주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나이는 어리지만 믿음직하고 신중한 창현이 의지가 되는 것이겠지.

‘여자 문제는 우유부단하지만, 하하!’

윤아부터 시작하여 집에 끌어들인 정체모를 처자와 아사미 유키까지.

게다가 시린의 기세도 심상치 않다. 나름 잘생겼다고 생각하던 창현이 날이 갈수록 외모가 심상치 않게 변하는 걸로 보아 앞으로 더욱 더 많은 여자들이 엮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흠! 이건 주의시켜야겠지. 연예계에서 스캔들은 조심해야 하니까.’

생각을 정리한 석규가 물었다.

“그럼 너희들은 중국에 가는 걸 찬성하는 게냐?”

세 여인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인다. 알아보는 사람이 많은 한국 대신 중국에서 쉰다는 것이 마음에 든 듯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창현을 설득하겠다는 석규의 말이 주효했는지 라샤는 한결 밝아진 표정으로 식사를 마칠 수 있었다. 그녀들을 보면서 석규는 다시 고민에 빠져야만 했다. 이제 창현을 설득해야 한다.


창현을 설득해야 하는 임무를 가진 석규는 그날 곧장 집으로 향했다.

엊그제 집에 갔는데 다시 가게 되니 묘하게 감회가 새로웠다. 자신의 집을 가는데 이런 기분을 느끼다니, 그동안 무심해도 너무 무심한 듯했다.

“아버지, 웬일로 이렇게……? 아차, 들어오세요.”

석규의 방문에 놀란 목소리로 말하던 창현은 문을 열어주며 석규를 맞이한다.

집으로 들어선 석규가 웃음을 짓는다.

“하하! 창현이 네게 할 말이 있어서 이렇게 왔다. 잘 생각해보니 그동안 내가 너무 무심했던 것 같기도 하고.”

“무심하긴요. 집안일이나 제 일 정도는 스스로 할 수 있는 걸요. 커피 드실래요?”

물이 담긴 컵을 건네면서 말하는 창현. 석규가 고개를 끄덕이자 창현은 커피를 끓이러 간다.

잠시 후, 석규에게 커피를 건네면서 창현이 물었다.

“그런데 제게 할 말이 있으시다뇨? 유키의 곡이라면 작업 진척이 꾸준하게 이뤄지고 있는데요.”

석규가 찾아온 이유가 아사미 유키의 앨범 때문인 줄 아는 창현. 아사미 유키가 방문한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인지라 조금 촉박하다고 생각하는 그였다.

창현의 말에 석규가 고개를 저었다.

“내가 찾아온 이유는 그게 아니다.”

“그런가요? 솔직히 당황했어요. 유키의 앨범 제작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갑자기 독촉이 오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그 정도로 야박하게 굴지 않았는데 날 그리 본 게냐?”

“아니에요, 그냥 한 말입니다.”

우울한 표정을 짓는 석규를 보며 창현이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에 피식 웃은 석규는 커피를 한모금 마시면서 본론을 꺼냈다.

“내가 집을 찾은 이유는 말이다. 창현이 너 방학 때 중국 가볼 생각 없느냐?”

“중국이요? 설마, 라샤 누나들 중국 진출까지 하나요?”

눈치가 빠른 창현은 석규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알아차렸다.

“허허! 바로 알아차리는구나. 그래, 이참에 중국 진출을 꾀할 생각이다. 바로 할 생각은 없고… 라샤 아이들이 그동안 힘들게 활동하지 않았더냐? 그래서 중국에서 휴식을 취하게 할 생각이다. 하지만 중국어가 안 되기에 이참에 너도 함께 가서 하는 게 어떨까 싶어 말하는 게다.”

“중국에서 휴식이라… 그럼 막 이곳저곳 돌아다닐 수 있겠네요?”

“못할 것도 없지. 상해에서 며칠 있다가 북경으로 가서 움직여보는 것도 괜찮을 테고 말이다.”

“그것도 좋네요.”

석규의 말에 마음에 드는 듯한 기색을 보이는 창현. 그도 그럴 것이 어릴 적부터 한자를 배우고 중국어를 익혔지만 정작 창현은 중국에 가본 적이 없다. 즉, 중국어 회화가 된다고 하여도 반쪽짜리에 불과한 것이다.

당장 북경, 상해 출신 중국어 선생과 대화는 되었지만 저 멀리 사천성이나 운남 같이 멀리 떨어진 곳은 억양으로 인해 소통이 안 된다.

물론 그쪽 중국어가 안된다고 해도 북경과 상해쪽은 소통이 가능하나 실전에서 사용한 적이 없었기에 이 기회에 중국어를 능숙하게 할 수 있도록 연습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고민에 빠진 창현은 슬쩍 석규를 보면서 물었다.

“그런데 중국 가면 전부 아버지가 여비를 주시는 건가요?”

창현의 물음에 석규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허어! 네 녀석도 돈이 많지 않더냐? 이번에 일본 쪽에서 온 돈도 엄청난 걸로 아는데…….”

앨범 백만 장 판매와 일본에서 판매된 수익금은 모두 창현에게 돌아간다. 당연히 돈이라면 넘쳐날 터. 그런 와중에 돈 문제로 슬쩍 찔러보니 어이가 없을 수밖에 없었다.

창현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에이! 설마 중국에 갈 거냐고 권유하시면서 돈은 저보고 내라는 건 아닐 테죠? 회사 요즘 잘 돼서 돈 잘 버시잖아요.”

창현의 말에 석규는 백기를 드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하하! 알았다, 알았어. 한 번 우는 소리 더 했다가는 회사 수익까지 공개해야겠구나. 모든 경비는 내가 대줄 테니 간단한 용돈만 마련하여라. 설마 용돈까지 달라는 말은 하지 않겠지?”

우는 시늉을 하는 석규의 모습에 창현이 웃음을 지었다.

“설마요! 그 정도로까지 염치는 없죠. 최고급! 숙박 시설비용까지 모두 해결해주실 아버지께 용돈으로 부담을 더 앉겨드릴 수 없죠.”

최고급을 유난히 강조하는 창현. 아주 비싼 곳에서만 자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석규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이참에 아주 뽕을 뽑아 먹으려고 하는구나. 알았다, 알았어. 최고급 숙박 시설로 잡아줄 테니 푹 쉬어라. 대신 한 달 동안 놀고 그 다음부터는 라샤의 중국 진출 준비를 도와야 한다. 알겠지?”

창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아직 어려도 정신은 프로페셔널이라니깐요? 유키의 앨범 수록곡도 중국으로 가기 전에 모두 끝낼 테니 방금 전 말 바꾸시면 안 되요. 아셨죠?”

“알았다, 알았어.”

반드시 확답을 원하는 창현의 행동에 석규는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제대로 한건 당한 셈이다.

어쨌든 창현의 승낙을 얻어낸 셈이었다.

창현의 합류는 라샤의 중국 여행을 도와주고, 중국에 낼 앨범 준비를 도와줄 프로듀서를 구하게 된 것이 된다. 게다가 라샤가 창현에게 상당히 의지를 하고 있는 만큼 타지에서 알게 모르게 흔들릴 마음을 바로잡아줄 것이라. 창현의 합류 하나가 이 복합적인 불안요소를 모두 해결해주는 것이다.

석규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창현은 매주 토요일마다 보컬 트레이닝을 도와주고, 시간이 날 때마다 순규의 요구에 의한 스타크래프트 연습을 해주었다. 사실 창현이 순규의 요구를 수락한 것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는데, 그 이유는 바로 고정적인 게임 파트너의 획득이었다.

플레이 스타일이 상대방의 타이밍을 빼앗고, 철저하게 자신의 페이스로 임하는 창현의 게임 스타일은 상대방에게 있어 짜증을 유발시키는 플레이 그 자체였다.

화끈하게 대전투를 벌이고 패배하면 지더라도 상쾌한 기분은 든다. 하지만 창현은 철저하게 자신의 페이스로 반드시 이길 수 있는 상황을 조성할 수 있을 때까지 소규모 전투로 인한 상대방의 소모를 강요한다. 자신의 승리가 점쳐질 때까지 철저하게 상대방을 휘저으니 상대방으로서는 화가 날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창현과 게임을 원하는 사람이 없어졌고, 공방에서 게임을 하자니 실력 수준이 맞는 사람이 없었다. 즉, 창현 나름대로 게임 상대가 부족했던 차였다.

그런 와중에 순규가 창현과 게임을 하자고 한 것이다. 겉으로는 난색을 표한 창현이었지만 실제로는 그가 이득을 챙긴 것이다.

덕분에 매일 신나게 순규를 관광 보내주고 있다. 전력을 다해달라는 그녀의 말대로 아주 전력을 다하여 멋지게 관광을 보내주고 있는 것이다.

기말고사가 끝나자 학교 수업도 느슨해졌고, 날씨가 추워져 정자에서 주현과 만나는 경우도 점차 적어졌다.

창현은 아사미 유키의 새 앨범에 수록될 곡들을 가지고 와 학교에서 작사를 하곤 하였다.

MP3에 아직 가사가 입혀지지 않은 MR을 가져와 공책을 피고 작사를 한다.

하나의 노래가 나오는 과정에서 곡을 만드는 것이 가장 어렵다고 하지만 작사를 하는 것도 그만큼 어렵다. 곡 분위기와 잘 맞는 가사를 지어야 할 뿐만 아니라 음의 높낮이까지 부여해야 했기에 작사도 작곡만큼 어려운 분야였던 것이다.

그래도 학교에서까지 작업에 매진할 수 있게 되어 진척은 빨랐고, 방학이 될 무렵, 작업을 끝마칠 수 있었다.

“이제 나도 열여섯 살이네.”

제야의 종이 울리는 장면을 보면서 창현이 중얼거렸다.

1월 1일이 되었다. 이제 창현은 열여섯 살이 되었다. 저번 년도는 유난히도 일이 많았던 해가 아닐 수 없었다.

“앨범 작업도 모두 끝났고, 내일 모레면 중국으로 가는 건가?”

창현은 물론 연말 가요제를 끝으로 굿바이 무대를 펼친 라샤도 일주일 휴식을 취하고 있다. 아마 중국에 가서 어딜 갈지 정보를 구하기 바쁠 것이다. 막바지까지 앨범 작업에 몰두하는 창현과 달리 그녀들은 일주일 동안 휴가를 받았으니 말이다. 지금쯤 열심히 인터넷을 뒤지고 있을 것이다.

1월 2일은 창현의 생일이다.

빠른 년생으로 들어갈 수 있지만 나중에 사회에 나가면 빠른 년생은 인간 관계가 복잡해질 수 있다는 석규의 말에 창현은 제 나이 그대로 학교에 들어갔다.

중국으로 떠나기 바로 전날 생일 파티를 하였고, 주현 등에게 축하의 메시지를 받은 채 중국으로 떠났다.

떠나는 인원은 일본과 마찬가지로 석규와 창현, 그리고 라샤 멤버까지 총 다섯 명이었다.

현재 중국 기획사 여러 곳에서 라샤에게 러브 콜을 보낸 상태인데, 그중에 염두에 두고 있는 곳이 총 세 곳이었다. 그 세 곳 중에서도 가장 가능성이 큰 곳은 TTS란 곳인데, 그 까닭은 석규의 지인이 이곳을 추천해주어서이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제법 영업력을 갖추고 있다는 말을 듣고 있던 터였다.

우선 상해에 들린 그들은 호텔을 잡아놓고 놀러다니기 시작했다.

젊은 것들은 젊은 것들끼리 놀라는 말과 함께 석규는 모처럼 호텔에서 푹 쉬며 각종 안마나 헬스, 골프 등으로 시간을 보냈고, 창현과 라샤 멤버들은 인근 거리를 돌아다니며 중국의 각종 문화들을 감상하기 바빴다. 특히 한인 타운에 갔을 때 마치 중국 안에 한국이 있는 것 같아 무척 생소했다.

3박 4일 동안 상해 이곳저곳을 둘러본 그들은 소주와 항주까지 구경할 수 있었고, 열흘 동안 상해에서 머물다가 북경으로 향했다.

TTS기획사는 북경 근처에 있는 천진에 자리하고 있다. 우선 중국 진출과 관련된 일이었기에 그들은 천진으로 먼저 가서 TTS기획사에 들렸다.

TTS기획사의 사장은 왕지동이란 인물이었다. 그는 사십대 후반의 외모를 가지고 있지만 머리가 벗겨져 실제 나이보다 더 들어보였는데, 눈빛이 조금 간사한 느낌을 주는 인물이었다. 석규와 라샤가 직접 방문했다는 소식에 그는 밖으로까지 나와 환영인사를 표했다.

“어서오십시오, TTS를 맡고 있는 왕지동입니다.”

어눌하지만 한국어로 말하는 왕지동. 한국어를 구사하는 그를 보며 석규도 인사를 건넸다.

“반갑습니다, AA엔터테인먼트의 사장 강석규입니다. 그리고 이 아이는 제 아들 강창현이고, 이 애들은…….”

왕지동이 석규의 말을 끊고 나섰다.

“라샤 아닙니까! 중국에서도 라샤의 인기가 대단합니다.”

“흐음! 그렇군요.”

자신의 말이 끊겼기 때문일까. 석규의 눈에 조금 석연치 않은 기색이 맴돌았다. 하지만 그것을 티를 낼 정도의 일은 아니었기에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답했다.

그걸 알아차리지 못한 왕지동은 웃는 얼굴로 말했다.

“하하! 안으로 드시지요.”

그의 안내에 일행은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TTS기획사 내부는 화려했다. 규모 면에서 비교할 것이 못 되었지만 내부 모습은 가히 일본의 쟈니스와 비견될 정도로 화려했다. 그리고 AA엔터테인먼트가 비할 바가 못 되었다.

들어서는 내내 석규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TTS기획사는 중국 내에서 중소 규모라 들었는데 이렇게 화려해도 되는가?’

물론 중국 시장이 방대하다고 하지만 TTS기획사의 규모는 엄연히 말하면 한국에서도 중간보다 조금 더 큰 정도다. 그런 곳이 쟈니스에 버금 갈 정도로 화려한 시설을 갖추고 있다? 뭔가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석규는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중국 기획사 중 믿지 못할 곳이 많다는 것은 그 또한 자주 들었기에 기우라 생각했지만 뭐랄까, 왕지동의 첫 모습도 모습일 뿐만 아니라 내부 시설까지 보게 되자 알 수 없는 불안한 느낌이 든 것이다.

‘일단 지켜보자. 아직 계약은 하지 않았으니까.’

전에도 언급했지만 석규가 급해할 일이 아니었다. 아직 라샤에게 러브 콜을 보내고 있는 기획사는 여럿 있으니까. 아는 지인의 소개로 이곳에 왔지만 얼마든지 다른 곳으로 갈 수 있다.

일단 그런 기색을 보일 수는 없는 법. 왕지동의 안내로 회의실에 들어선 그들이 자리에 앉자, 이십대 중반의 늘씬하고 예쁜 검은색 투피스 차림을 한 여인이 차를 가지고 들어왔다.

왕지동은 웃으면서 차를 권했다.

“운남 보이차입니다. 맛 보십시오, 하하!”

운남 보이치라면 무척 비싸기로 유명한 차였다.

석규가 반색하며 그 차를 받아들였다.

“귀한 차로군요. 사장님의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하하! 보이차가 아무리 비싸도 이곳에 방문해주신 사장님과 라샤보다 더 하겠습니까. 아참, 소개하겠습니다. 이 사람은 왕영인 실장이라고 합니다. 무척 능력있는 사람이지요.”

왕지동의 소개에 석규는 차를 가지고 온 여인에게 시선을 옮기며 인사를 하였다.

“AA엔터테인먼트 사장 강석규입니다. 반갑습니다, 왕영인 실장님.”

석규의 인사에 그녀도 곱게 인사를 하였다.

“왕영인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려요.”

자기소개를 주고받자 왕지동이 미소를 띤 채 말했다.

“자, 이렇게 만나게 되었으니 계약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는 게 어떻습니까?”

곧장 본론으로 들어가는 왕지동. 그의 눈으로 직접 본 라샤는 보물 중 보물이었다.

중국에 수많은 한국인 유학생이 있고, 수많은 중국인들이 한국 스타들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런 그들에게 혜성처럼 등장한 존재가 바로 라샤였다.

며칠 지났지만 저번 년도를 제패했다고 과언이 아닌 무서운 신예 그룹, 라샤.

일본 오리콘 차트에도 입성한 그녀들은 후속곡도 성공을 이룸으로써 더 이상 불안한 신예 그룹이 아니었다. 지난 몇 년간 탄탄한 실력을 쌓아왔기에 단기간에 일본 진출을 성공하고, 이렇듯 중국 진출까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왕지동은 라샤에게서 충분히 시장성을 엿보았다. 그녀들이 본격적으로 중국 활동을 시작하면 충분히 성공할 것이 분명했다.

그랬기에 왕지동은 몸이 달았다. 근래 들어 소속사에 잘나가는 연예인이 없었기에 무섭게 확장했던 사업이 주춤한 채 수세로 몰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석규는 그리 만만치 않은 존재였다.

그는 당장 계약서를 꺼내들 듯 보이는 왕지동의 모습이 고개를 저어보였다.

“그리 급할 것이 있습니까? 그리고 보름 정도는 이 아이들이 휴식을 취하게 할 생각입니다. 이렇게 중국에 온 것은 계약도 계약이지만 휴식을 취하기 위한 이유도 있어서 말입니다.”

“허허! 그렇습니까? 그럼 구두로라도 계약을 하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석규가 살짝 돌려 거절의 뜻을 비추자 구두 계약을 꺼내놓는 왕지동. 하지만 석규가 그에 넘어갈 리 없었다.

“그리 급할 이유가 있습니까? 계약에 관해서는 천천히 이야기를 하도록 하시지요. 라샤 아이들이 쉴 기간도 필요하고, 무엇보다 여러 곳을 둘러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내포된 뜻을 모를 리가 없다. 저 휴식이란 건 핑계일 확률이 높았고, 실제로는 여러 기획사를 찾아 조건을 맞춰보려는 확률이 높았다.

그러자 왕지동의 표정이 다급해졌다. 그나마 석규가 가장 먼저 이곳을 찾았다는 것은 이곳을 가장 염두에 두고 있다는 이야기다. 우선 원하는 조건이라도 알아야 했다.

“워, 원하시는 조건이 있습니까? 최대한 맞춰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원하는 조건이라…….”

석규는 창현을 슬쩍 보며 말했다.

“원하는 조건이라면 있지요. 우선 라샤의 녹음 앨범에 프로듀서는 필요 없다는 점. 그리고 한국에서 했던 것처럼 어느 정도 휴식이 보장된 스케줄을 잡아놓을 것이라는 점? 이 두가지군요.”

어려울 것 없는 조건이었다. 왕지동의 표정이 밝아지며 말했다.

“모두 지켜드리겠습니다. 그러니 계약을…….”

석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제 말 뜻을 잘못 파악하셨나보군요. 전 왕 사장님과 계약하기가 싫어서 이러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라샤의 휴식이 필요하기에 하는 말씀입니다.”

이렇게까지 말하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더 밀어붙였다가는 역효과가 나기 십상이었다.

하는 수 없이 왕지동은 오늘 계약이 힘들다는 생각을 하면서 웃는 얼굴로 석규와 이야기를 나누기 바빴다. 친분이라도 쌓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왕영인으로 하여금 북경 관광을 도와주겠다고 이야기 했는데, 석규가 거부해도 왕지동이 한사코 권하는 바람에 별 수 없이 승낙하는 수밖에 없었다.

북경으로 돌아가는 길.

창현이 석규를 보면서 물었다. 대화 내용을 듣고 있어보니 석규가 무언가 석연치 않아 하는 구석이 있는 듯했다.

“아버지, 계약을 안한 데에 무슨 이유가 있던 거죠?”

석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TTS로 간 것은 아는 사람의 추천 때문이었는데 막상 가보니 내 생각과는 틀리더구나. 회사 규모에 비해 지나치게 호화스럽고 왕지동 사장의 성격이 마음에 걸리는구나.”

영업을 하다 보면 수많은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그러다 보면 사람 보는 안목이 길러지기 마련이다.

창현도 공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나이도 어리고 사람을 많이 만나보지는 않았지만 석규가 왕지동을 석연치 않게 여기는 듯하여 그를 세심히 살피고 있었다.

“확실히 눈이 빠르게 움직이는 사람인 거 같았어요.”

“무언가 불안한 마음에 든다. 거절했는데도 굳이 왕영인이란 여인을 붙여준 것도 말이다. 전부 붙어 다니는 것은 아니니 행동에 제약이 가해지지는 않겠지만 함께 할 때는 조심하여라.”

“네.”

전부는 아니라지만 조금이나마 제약이 가해진다는 느낌에 라샤의 안색이 조금 우울해졌다.


북경에 도착한 일행은 고급 호텔에 자리 잡고 하루 푹 쉰 뒤 본격적인 관광에 나섰다.

첫날의 우울함을 모두 날려버린 채 창현과 라샤는 미리 눈여겨보던 천안문, 고궁, 베이징 동물원 등 여러 곳을 돌아다녔고, 특히 북경에 오면 북경오리요리를 먹어야 한다고, 이것을 먹지 않으면 북경에 와도 온 게 아니라는 미란의 괴상한 이론 아래 사람들에게 묻고 물어 북경오리 원조격이라는 가게를 찾아 먹게 되었다.

확실히 일국의 수도인 만큼 볼거리가 많고 놀거리도 많았다.

한국 유학생이 많은 만큼 정체를 들키고는 했지만 특유의 스킬 덕택에 큰 소란을 일으키지 않은 채 북경에서 유유자적 관광을 즐기며 편안하게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약 열흘 동안 격일로, 하루는 관광을, 하루는 휴식을 취하며 보냈다. 그리고 남은 오 일은 TTS기획사의 왕영인 실장과 함께 하게 되었다.

그녀는 창현과 라샤가 돌았던 관광지를 다시 돌며 상세하게 설명을 해주었는데, 확실히 인터넷에서 벼락치기로 익힌 것보다 중국인이 해주는 가이드는 급이 달랐다. 흘려보던 것도 설명을 들으면서 보니 새롭게 느껴졌다.

자금성 앞에 선 일행을 보며 왕영인이 말했다. 며칠 사이 친해져서 말을 놓는 사이로 발전했다.

“너희들 단체 사진은 찍었니? 자금성에 왔으면 기념으로 한 장 찍어야지.”

단체 사진을 찍었을 리가 없다. 한국인들도 많은 데다가 모르는 사람에게 디카를 맡기면 그대로 가지고 도주할 수도 있다는 말을 봐서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왕영인이 사진을 찍어준다는 말에 미란이 반색하며 외쳤다.

“안 찍었어요. 언니가 좀 찍어주시면 안 될까요?”

“그래? 그럼 찍어줄게.”

그러면서 왕영인이 디카를 꺼내 사진을 찍어준다. 시린이 멈칫했지만 포즈를 취하고 있는 멤버들을 보며 나직이 한숨을 내쉬고는 같이 포즈를 취한다.

그런 시린의 모습에 창현이 의아한 표정을 짓다가 결국 사진을 찍는다.

사진을 찍은 왕영인이 아차 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이거 내 디카인데 잘못 찍었네. 너희들 디카 있니?”

왕영인의 말에 미란이 아차하는 표정을 지으며 품속에서 디카를 꺼내든다.

“그러고 보니 그러네요. 여기요!”

“응. 자, 다시 포즈 취해봐.”

디카를 받아든 왕영인이 다시 사진을 찍는다. 그리고 웃는 얼굴로 디카를 건네준다.

그걸 받아든 미란이 이리저리 둘러보며 잘 찍혔다고 환호한다.

왕영인의 안내로 자금성 안에 들어가 예복을 입어보기도 하고, 진짜 숨겨진 북경오리 원조 가게에 찾아가서 오리 요리를 먹기도 하였다.

앞서 여기저기 다녔던 것도 즐거웠지만 과연 중국인이라 그런지 왕영인이 데려다주는 곳이 더욱 유익하고 재미가 있었다.

특히 야시장을 돌아다닐 때 미란의 입이 찢어졌다. 세룬도 너무나 즐거운 표정이었다.

다만 시린만이 조금 불편한 표정이었다.

그 기색을 읽은 창현이 시린의 옷깃을 살짝 잡았다. 그러자 시린이 창현을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인 뒤 뒤로 살며시 빠진다.

창현이 목소리를 죽여 물었다.

“아까부터 불편해보이던데 무슨 일 있으신 거예요?”

“응? 아… 딱히 특별하지는 않지만 조금 걸리는 일이 있어서…….”

“무슨 일인데요? 다같이 즐겨야지 누나만 불편한 표정을 지으니 조금 그래요.”

창현의 말에 시린이 흠칫하며 물었다.

“내가 그랬어?”

“저한텐 그렇게 느껴졌어요.”

살짝 미소를 지어보이는 창현. 그에 시린의 얼굴에 웃음이 맺힌다.

몇 년 동안 함께 해온 멤버들도 알아차리지 못한 자신의 표정이었다. 그것을 창현이 알아차렸다니 조금 기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는 조금 염려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마음에 걸려 하는 건… 아까 전 자금성 앞에서 찍은 사진 때문이야.”

창현은 아까 전 왕영인이 자신의 디카로 찍었던 사진을 떠올리며 말했다.

“사진요? 아! 영인 누나가 찍은 것 때문에요?”

“응.”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는 시린의 모습에 창현이 고개를 갸웃한다.

“그게 왜요? 누나들이 중국에 왔다는 건 어차피 공공연한 사실이잖아요. 사진도 나쁘게 찍힌 것도 아니고요.”

자신을 걱정해주는 말이다. 시린은 이럴 때만큼 창현이 둔감할 때가 없다고 여겼다.

그녀는 말의 요지를 파악 못하는 창현에게 아프지 않게 꿀밤을 놓으며 말했다.

“으이구! 내가 걱정하는 건 그게 아니라고. 내가 걱정하는 건 바로 너 때문이야.”

시린의 말에 창현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묻는다.

“저요? 제가 왜요?”

“아직도 모르는 거야? 네 정체가 현이잖아. 만약 TTS가 네 정체를 알아차리면 저 사진으로 복잡한 짓을 할 수도 있어.”

걱정이 담긴 시린의 말. 하지만 그것은 기우일 확률이 높았다.

창현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분명 시린 누나의 말도 맞지만 그럴 확률은 높지 않잖아요. 전 또 더 큰 걱정인 줄 알았네요. 자, 가요. 그런 걱정은 하지 마시고 놀아요. 이제 녹음 준비도 하고 그래야 하잖아요.”

그러면서 시린의 팔을 잡고는 차이가 벌어진 일행에 합류하려고 발걸음을 빨리한다.

앞서가는 창현의 모습을 보며 시린이 중얼거렸다.

“나도 내 기우였으면 좋겠어.”

불안한 예감은 너무나 잘 들어맞기에 문제였다.


“왔느냐.”

적막에 휩싸인 밤.

그 와중에 환한 불이 밝혀진 TTS기획사에는 왕지동과 왕영인이 자리하고 있었다.

“사진은?”

왕지동은 입가에 미소를 흘리며 왕영인에게 물었다.

“…….”

왕영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디카를 내민다. 그리고 왕지동은 그 디카를 받아들여 사진을 확인한다. 세 여인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그 앞에는 허리를 굽히고 미소 짓는 소년의 모습이 찍혀 있었다.

완벽한 사진이었다.

그것을 보며 왕지동이 웃었다. 그의 시선은 사진에 찍혀있는 잘생긴 소년을 향하고 있었다.

“큭큭! 나도 속고 세상도 속았지. 누가 알았을까? 이 작은 소년이 한국과 일본, 아니, 아시아 각국을 농락한 가수란 것을 말이야.”

“하지만 확실한 증거는 없잖아요.”

왕영인의 말에 왕지동이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 말한다.

“증거? 굳이 찾을 필요가 있을까? 이미 심증만으로도 충분해. 강석규 사장이 왜 내가 구두 계약 이야기를 꺼낼 때 프로듀서 이야기를 언급했을까?”

“그거야…….”

뭐라 반박하려던 왕영인의 말은 끊겼다. 왕지동이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

“복잡하게 생각할 이유가 없다. 간단해. 라샤의 프로듀싱을 맡을 현이 근처에 있다는 거지. 그리고 마침 아들을 함께 데려왔어. 강석규 사장은 한국이랑 일본에서 철저한 사업가로 알려져 있거든. 그런 그가 아들을 대동하고 이곳에 온다? 사업에 관련이 없다면 북경에 두고 왔을 테지. 안 그래?”

“…….”

왕영인은 대답할 수 없었다. 다르게 말을 해보려 했지만 그녀도 솔직히 왕지동과 같은 생각이었던 것이다

“작명센스도 좋지. 강창현. 뒤에 현 하나 따오면 간단하잖아?”

왕영인이 왕지동을 보며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어쩌긴. 네가 찍어온 사진은 아주 중요한 것이다. 전략적 우위를 점할 수 있게 해주는 거거든. 이걸로 라샤와 계약을 해야겠다. 우리쪽에 아주 유리하게 말이지, 흐흐!”

왕지동이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사실 그도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았다. 가급적이면 AA엔터테인먼트의 요구를 들어주는 선에서 계약을 성사시키려 하였다. 물론 계약 후 돈이 될 만한 활동 위주로 하여 TTS의 이득을 꾀했을 테지만 말이다.

하지만 AA엔터테인먼트의 사장 강석규는 감이 좋은 인물이었다. 그는 왕지동의 성격을 파악한 것인지 섣불리 계약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먹음직한 떡밥만 흘려놓고 여러 기획사를 돌아다니며 조건을 저울질 하였다.

왕지동은 그것을 참을 수 없었다. 중국 사정에 어두운 강석규는 잘 모르지만 중국 내에 있는 기획사들은 아니, 연예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다 안다. TTS기획사가 그리 평판이 좋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강석규가 다른 기획사를 돌아다니면서 TTS기획사에 대한 정보를 입수한다면 계약을 하지 않을 확률이 높았다. 구두 계약이라고 했지만 그런 것쯤이야 얼마든지 깨질 수 있는 것 아닌가. 왕지동에게 있어 진짜 필요한 것은 종이로 이루어진 계약서였다.

“하지만 협박을 하면서 계약을 요구하면 역효과가 날 수 있습니다.”

걱정이 담긴 왕영인의 말에 왕지동이 피식 웃었다.

“괜찮다. AA엔터테인먼트에서는 현의 정체를 공개하려 하지 않을 테니.”

“그걸 어떻게…….”

“굳이 현의 정체를 안 밝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왕영인 실장 아니, 내 딸 영인아. 네가 할 일은 그 사진과 함께 먹음직한 먹이를 중국, 한국, 일본 각국에 흘릴 준비를 하는 것이다. 증거가 부족하면 어떻더냐? 이미 심증은 확실한데. 나머지 증거는 기자들이 알아서 채워 넣어줄 거다. 그들이 필요한 것은 정확한 사실이 아닌 많은 사람들이 봐줄 흥밋거리거든.”

각국 언론에 정보를 흘릴 준비를 마침과 동시에 계약을 성사시키려는 행동이었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왕영인이 살짝 표정을 찡그리며 말했다.

“만약에 그들이 거절하면요?”

“거절? 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언론의 난도질로 신비주의가 벗겨지는 걸 감안하면 승낙할 확률이 높을 것이다. 거절한다면 이 도박은 실패하는 것이지. 흐흐!”

거절이란 말에 흠칫한 왕지동이 음침한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그는 자신의 행동이 도박이란 걸 안다. 하지만 이 도박은 승리할 확률이 높은 도박이었다. 최소한 그들이라면 현의 정체를 그런 식으로 밝히고 싶지 않을 테니까.

왕영인은 그런 왕지동을 보며 말했다.

“실패하면 많은 것을 잃어야 할 겁니다.”

“더 이상 우리가 잃을 것은 없다.”

TTS기획사는 근 몇 년 동안 인기 연예인의 부재로 규모의 축소를 거듭해왔다. 내색은 하지 않지만 TTS기획사는 궁지에 몰려 있었다. 그랬기에 왕지동은 마지막 도박을 거는 것이다. 라샤라는 한류 스타를 낚기 위한 거대한 낚시를 말이다.

자체적으로 인기 스타를 배출할 수 없을 정도로 경영이 악화된 왕지동은 마지막 도박을 걸은 셈이다.

핸드폰을 든 왕지동은 전화를 건다. 대상은 바로 강석규였다.

“강석규 사장님. 내일 비즈니스 일로 이야기할 것이 있습니다. 예, 라샤분들도 데리고 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하하! 알겠습니다.”

통화를 끝낸 왕지동. 그는 왕영인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도박은 시작 되었다.”


딸칵.

“이상하군.”

통화를 마친 석규는 고개를 갸웃했다.

갑작스러운 왕지동의 통화. 이미 TTS기획사와 손잡을 수 없었던 석규로서는 의외의 전화가 아닐 수 없었다.

중국 여러 기획사를 돌면서 석규가 알아본 TTS기획사의 평가는 매우 안 좋았다.

그에 석규는 자신의 직감이 정확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하여도 TTS기획사는 인기 연예인도 보유한 제법 괜찮은 기획사였다. 하지만 사장 왕지동에 관련된 안 좋은 기사가 터지면서 급격한 추락을 거듭하였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자금의 압박을 받을 정도로 사정이 좋지 않았다.

TTS기획사를 추천했던 지인은 아마 몇 년 전 TTS기획사의 규모를 보고 석규에게 추천을 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주변에서 들은 바로는 TTS기획사가 접대를 잘하기로 유명하다는 것에, 결코 여러 면을 고려하여 추천을 한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그래서 내심 TTS기획사에 대한 선택을 아예 고려하고 있지 않던 차에 왕지동에게서 전화가 온 것이다.

“무슨 전화기에 그리 심각한 표정을 지으시는 거예요?”

석규의 심상치 않은 표정을 알아본 창현이 물었다.

그러자 석규가 창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방금 왕지동 사장에게 전화가 와서 말이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드는구나.”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창현의 물음에 석규가 대답했다.

“너도 알아야겠지. TTS기획사는 말이다…….”

석규는 자신이 여러 곳에서 알아본 바를 토대로 창현에게 TTS기획사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창현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석규의 말을 들어보니 TTS기획사가 결코 좋지 않은 곳이란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모든 이야기를 들은 창현이 물었다.

“그렇다면 아버지가 TTS기획사와 계약하지 않을 거란 걸 그쪽에서도 알고 있을까요?”

석규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정도 정보망이 있다면 바로 알아차렸겠지. 내가 여러 기획사를 들렸다는 것 정도는 알았을 테니까. 무언가 짚이는 게 있느냐?”

창현의 표정에서 무언가 있음을 느낀 석규가 물었다.

그러자 창현이 심각한 표정을 지은 채 말했다.

“아무래도… 협박을 당할지도 모르겠네요.”

그 말과 함께 창현이 낮에 시린과 이야기 나누었던 부분에 대해 석규에게 말했다.

TTS기획사 실장 왕영인이 자신들에게 사진을 찍어주었다는 이야기를 듣자 석규의 표정도 침중해졌다. 여기저기서 들은 안 좋은 평가와 공교롭게 찍힌 사진 등을 조합하면 확실하지 않아도 하나의 밑그림이 그려졌던 것이다.

“큰일이군. 그쪽에서 네 정체를 알아차렸을 가능성이 높다.”

침중한 안색으로 석규가 말했다. 만약 그들이 창현의 정체를 알아차렸다면 그걸 빌미로 무엇을 요구할 것이 분명했다. 기획사들 중 상대방의 약점을 잡아서 자신들이 유리하게 계약하는 경우가 제법 많다.

현재 가수 현은 정체를 감추고 있는 신비주의 컨셉의 가수다. 그걸 빌미로 협박을 한다면 상당히 곤란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

당장 올해 초에 정체를 밝히고 데뷔하겠다고 했지만 직접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데뷔하는 것과 상대의 협박에 못 이겨 데뷔하는 것은 이야기가 다르다.

이럴 경우 석규 아니, AA엔터테인먼트에서 대응할 방법은 단 두가지 뿐이다.

정면으로 맞서거나 상대방의 협박에 응하거나.

정면으로 맞설 경우 이쪽에서도 만만치 않은 출혈을 감수해야 한다. 정체를 밝히더라도 안 좋은 꼬리가 붙을 수 있어서이다.

그렇다고 협박에 굴한다? 이것은 석규의 성정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TTS기획사에서 창현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가정 하에 여러 생각을 하려니 골머리가 아파왔다.

현에 관한 문제라면 그 혼자 어쩔 수 없는 문제였다.

석규가 창현에게 말했다.

“만약 저들이 너의 정체를 알고 있다면 그것으로 협박을 해올 수 있다. 그걸 빌미로 라샤와 너를 대상으로 계약을 하려고 할 수 있겠지. 이 경우 정면으로 맞서는 방법과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정면으로 맞설 경우 우리 측에서, 특히 창현이 네게 안 좋은 꼬리표가 붙을 수도 있다. 이 문제는 나 혼자서 결정할 수 없는 문제다. 창현이 네 생각을 듣고 싶다.”

“…….”

창현은 생각에 잠겼다. 석규의 말을 들으니 아까 전 시린과 이야기 했던 것이 정말 사실로 되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던 것이다.

그러자 겉잡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자신의 정체 문제로 이렇듯 곤란을 겪을 수 있다니.

무엇보다 협박에 굴한다는 말에서 창현은 자신의 행동이 경솔했다는 것을 느꼈다.

만약 자신이 적극적으로 임했다면? 아니, 애당초 정체를 숨기려 들지 않았다면 이런 일에 봉착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창현은 아직 어리고 경험이 부족하다. 그러다 보니 정작 큰일에서는 과단성을 보여주기가 힘들다.

하지만 그런 사람 중에서 할 땐 하는 사람이 있다.

석규의 말은 창현으로 하여금 더 이상 물러날 수 없다는 마음을 심어주었다. 그리고 그것은 창현에게 확고한 결심을 심어주는 결과를 초래했다.

자신의 생각을 정리한 창현이 말했다.

“전 상관없습니다. 정말 TTS기획사에서 그러하다면 정면으로 붙어주세요, 아버지. 가수는 언론 플레이가 아닌 무대 위에서 말하는 법입니다. 전 제가 무대를 치름으로써 그런 오욕쯤은 뒤집어쓰겠어요. 그런 시덥지 않은 협박에 굴하느니 오욕을 택하겠습니다.”

확고한 창현의 표정. 그것을 보며 석규도 결심을 굳힐 수 있었다.

“네 결심이 그러하다면 나도 힘껏 돕겠다. 우선 준비를 해야겠구나.”

그러면서 석규는 핸드폰으로 부지런히 통화를 하기 시작했다. AA엔터테인먼트의 사장인 만큼 각지에 인맥이 풍부했다.

석규는 지금 자신이 알고 있는 연예 언론과 접촉을 하고 있었다.

왕지동이 정말 현의 정체를 빌미로 협박을 하려 한다면 각지에 정보를 흘릴 준비를 하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그렇다면 현의 정체가 먼저 밝혀지는 것보다 이쪽에서 공개한다는 것이 한층 좋았다. 비록 협박 때문에 정체를 밝혔다는 이야기는 있겠지만 저쪽에서 먼저 공개되고 어쩔 수 없이 뒤이어 공개하는 식보다는 월등히 낫다.

몇몇 연예 언론에 정보를 전달한 석규는 좋은 정보를 제공하겠다는 말로 끝을 맺었다. 만약 왕지동이 창현의 정체를 빌미로 협박하지 않을 경우 라샤의 계약 건을 전달할 속셈이었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부지런히 전화를 한 석규가 창현을 보며 말했다.

“일단 내가 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해놓았다. 설사 왕지동이 네 정체를 가지고 협박을 한다고 하여도 발 빠르게 대처를 할 수 있을 게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라.”

창현이 웃음을 지었다.

“제가 걱정할 필요가 있나요. 고생은 아버지가 하시는데요. 이참에 데뷔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네요. 제 정체가 협박의 빌미가 될 수 있다는 걸 알았고, 그것으로 인해 아버지와 라샤 누나들이 고생하는 것도 싫고요. 조금 갑작스럽지만 올해 초에 데뷔를 하기로 한 만큼 거리낌은 없네요.”

자신의 정체가 이렇게까지 문제가 될 줄은 몰랐던 창현은 이번 일로 크게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확고하게 결심을 굳힐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안이했는지, 세상에 호의적인 사람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석규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가 결심을 굳혔다니 나도 기쁘구나. TTS기획사에서 협박을 하더라도 의지를 보여주겠다. 우리가 결코 그곳에 밀릴 이유는 없으니까.”

“확실히 해둬야겠죠. 아직 정해진 건 아니지만 전 TTS기획사가 그렇게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이거 라샤 누나들한테도 말해놓아야겠지요?”

“그래, 그 아이들도 알아야겠지. 그래야 내일 무슨 말이 나오더라도 덜 놀랄 테니까.”

“제가 불러올게요.”

자리에서 일어서는 창현. 곧이어 라샤를 불러온다.

방에서 쉬고 있던 그녀들은 창현의 부름에 의아해하며 오다가 이어진 석규의 이야기에 표정이 굳고 말았다.

많은 생각이 오가는 밤이었다.

창현도 잠이 오지 않아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명상에 빠져든다.


날이 밝자 일행은 곧장 천진의 TTS기획사로 향했다.

가는 내내 일행의 표정은 밝지 못했다.

석규가 라샤의 표정을 보며 말했다.

“너무 안 좋은 표정 짓지 마라. 아직 확실한 일도 아니지 않느냐.”

“하지만 협박을 받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기분 나빠요. 게다가 저희가 창현이의 짐이 된 것 같고요.”

미란이 침울한 어조로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사진을 찍는데 가장 주도했던 사람이 바로 그녀였다. 그런데 그 사진이 문제의 소지가 될 수 있다는 말에 그녀가 무척 우울해졌다. 자신들의 버팀목이자 가장 큰 도움을 준 창현의 발목을 잡은 느낌을 받아서이다.

그녀의 말에 창현이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요. 전 오히려 이번 일이 계기를 준 것 같다고 생각해요. 그러니 너무 그러지 마세요.”

“그래도…….”

말끝을 흐리는 미란. 정말 TTS기획사에서 협박을 하지 않는다고 해도 미안한 건 미안한 것이다. 중국에 와서 즐겁게 놀면서 너무 마음이 풀어졌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일단 TTS기획사에 도착해서 이야기해요. 저들이 정말 그렇게 나오면 그때 다시 이야기해도 되잖아요.”

“응.”

창현의 말에 한결 편안해진 표정을 짓는 미란이었다.

그렇게 일행은 천진으로 가서 TTS기획사 안으로 들어섰다.

왕지동이 그런 일행을 반겼다.

“어서오십시오, 강석규 사장님, 라샤 여러분. 그리고…….”

창현을 힐끗 바라보는 왕지동. 무언가 알고 있는 듯한 표정을 지어보인다.

그 모습에 이미 사건의 전말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는 일행은 왕지동의 표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었다.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니었기에 석규는 그런 왕지동의 모습에 티내지 않으며 말한다.

“용건이 있으셔서 부르셨겠지요? 일단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아, 그러시지요.”

그러면서 석규 등을 예의 회의실로 안내한다.

회의실 안으로 들어선 왕지동이 말한다.

“사장님도 짐작하고 계시지만 제가 이렇게 사장님을 청한 이유는 저번에 이야기 했던 바와 같이 라샤와 계약을 하고 싶어서입니다.”

“흐음! 라샤와요?”

침착한 표정으로 왕지동을 바라보는 석규. 그는 왕지동이 아직 타협의 여지를 남겨두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미 현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가정 하에 그가 이렇게 말한다는 것은 대화가 통할 때 어느 정도 적정 선에서 서로가 좋게 계약하고 싶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미 TTS기획사에 정이 떨어질대로 떨어진 석규가 계약에 응할 리 없었다.

석규는 솔직하게 말했다.

“저희 AA엔터테인먼트는 유감스럽지만 TTS기획사와 계약할 의사가 없습니다.”

“호오! 그렇습니까? 그것 정말 아쉽군요.”

입 꼬리 한쪽을 말아 올리는 왕지동. 벗겨진 머리와 간사한 눈빛이 어우러져 무척 비열하게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는 한장의 사진을 석규에게 내밀며 말했다.

“이걸 보시겠습니까?”

사진을 받아드는 석규. 그리고 그것을 보며 신음을 흘린다.

“이건…….”

우려하던 사태가 발생했다. 정말 라샤와 창현이 찍은 사진을 왕지동이 확보하고 있던 것이다.

왕지동은 여전히 비열한 웃음을 지은 채로 석규에게 말했다.

“정말 놀라운 사실이 아닙니까? 눈앞에 있는 소년이 아시아를 넘어서 미국에까지 그 명성을 떨치고 있는 가수 현이란 것을.”

“…….”

왕지동의 말에 석규는 물론 창현과 라샤 모두 침묵했다.

라샤는 날카로운 눈으로 왕지동을 노려보았다. 석규와 창현의 이야기를 듣고 설마설마 했는데 정말로 사진을 가지고 협박을 가할 줄 몰랐던 것이다.

미란이 왕지동 옆에 앉아있는 왕영인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럼 우리와 친해졌던 것들 모두가 계획되었던 건가요, 영인 언니?”

“…….”

미란의 예기가 깃든 말에 왕영인은 차마 그녀와 시선을 마주하지 못했다. 그녀들을 대했다는 것이 진심이었다고 말하고 싶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런 말을 해봤자 더욱 악화될 뿐이었다.

석규는 정말 왕지동이 협박을 가하자 사진을 내려놓으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곤 말했다.

“그래서, 왕지동 사장님이 원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별것 없습니다. 라샤와의 계약 정도? 아니, 이왕 당사자도 있으니 현과도 계약을 하면 좋겠군요.”

느물느물 웃는 왕지동은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예상하고 어느 정도 대비를 한 것과 아무것도 모르는 채 당한 것과는 상당한 차이가 존재한다.

석규는 왕지동의 그런 모습에 당황하기는커녕 피식 웃으면서 대응했다.

“만약 계약을 안 하겠다면 어떻게 되겠군요?”

“아마 원치 않는 사태가 발생하겠지요, 후후!”

왕지동의 입가에 여유로운 미소가 맺힌다. 원치 않는 사태란 것은 연예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알 만한 것이었다. 필시 정보를 흘리겠다는 무언의 협박이리라.

석규는 여전히 여유를 잃지 않은 채 말했다.

“왕지동 사장님은 정보가 조금 어두우시군요? 가수 현은 이미 올해 초에 데뷔하기로 했던 바, 공개해도 큰 타격은 없을 것입니다.”

여유롭게 맞대응하는 석규였지만 왕지동도 만만치 않았다. 그는 내심 올해 초에 데뷔한다는 말을 듣고 흠칫했다. 대충 루머 정도로 생각했는데 정말이었던 것이다. 미란이 루머성 발언을 한 것만 보고 방심해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여유를 잃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가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후후후! 사장님의 영업 능력이 뛰어나다는 건 이야기로 들었지만 정말로 그러하군요. 그렇다고 하나 자신이 직접 공개하는 것과 억지로 공개하는 것은 많은 차이가 있지요.”

“그렇습니까? 그럼 더 이상 이야기는 필요없겠군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석규. 그러자 라샤도 자리에서 일어난다.

“이, 이게 무슨…….”

갑작스러운 그들의 행동에 왕지동이 당황한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석규에게 외친다.

“이, 이대로 가버리면 정말로 언론에게 흘릴 거라고! 그렇게 되면 현에게 치명적인 흠이 될 것이다!”

발악하듯 외치는 왕지동.

그런 그를 보며 유일하게 자리에 앉아있던 창현이 탁자를 똑똑하고 손가락으로 두드린다.

그러자 왕지동이 창현을 바라보다가 흠칫한다. 창현의 눈에 푸른 기운이 어른거리고 있던 것이다.

창현은 내면에 잠들어있는 내공을 모두 끌어올리고 있는 중이었다.

설마 했지만 정말로 왕지동이 이걸 빌미로 협박을 가할 줄은 몰랐다.

만약 자신이 끝까지 정체를 숨기고자 했으면?

석규와 라샤는 왕지동의 비열한 수작에 넘어갔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걸 생각하자 창현은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창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상체를 왕지동 쪽으로 기울였다.

내공이 담겨 이글거리는 창현의 안광과 마주하는 순간 왕지동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이것이 정녕 열다섯 살의 소년의 눈빛이란 말인가.

씹어 내뱉듯, 창현이 한글자 한글자 중국어로 또박또박 말했다.

“당신이 나의 앞길을 훼방 놓아도 상관하지 않아. 난 가수답게 무대 위에서 내 모든 것을 소화해낼 테니까. 하지만 나를, 아버지를, 라샤 누나들을 건드린 것을 뼛속까지 후회하게 해주겠어.”

그 말과 함께 창현은 미련이 없다는 듯 회의실을 벗어난다.

석규는 그런 창현의 뒷모습을 쫓다가 왕지동을 보며 말한다.

“유감이지만 우리는 이미 귀 측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현의 정체를 공개하기로 한 상태요. 정보를 흘려봤자 잘 무마할 수 있는 수준이겠지. 지금부터 우리 AA엔터테인먼트는 추후 TTS기획사와 어떠한 제휴도 맺지 않을 것이며 사업적으로 공격을 펼칠 것이오. 이 모든 것이 당신이 자초한 것이니 후회는 하지 말길.”

말을 마친 석규는 미련없이 몸을 돌린다. 라샤 멤버들도 왕지동을 노려보며 회의실을 나선다.

“…….”

순식간에 회의실에 남겨진 왕지동은 넋을 잃은 표정이었다. 방금 전 마주했던 창현의 표정이 너무나 강렬하게 인식된 탓이다.

왕영인이 그런 왕지동을 보면서 말했다.

“아버지 아니, 사장님은 사람을 잘못 건드린 것 같습니다. 그들은 결코 협박에 굴할 사람들이 아니었어요.”

걱정이 담긴 그녀의 말에 왕지동은 악을 쓰듯 소리쳤다.

“닥쳐라! 이렇게 된 거 어디 힘껏 훼방을 놓아주겠다! 너는 당장 한국, 일본, 중국 언론사에 정보를 흘려! 어디 한 번 해보자! 그리고 나를 적으로 삼은 것을 후회하게 해주겠다!”

악을 쓰며 외치는 그였지만 AA엔터테인먼트를 적으로 삼게 되었다.

왕지동의 명령으로 걸음을 옮기는 왕영인의 입가에 한숨이 맺혔다.

자신 있어 하던 그의 도박은 완전한 실패였다.




제20장 공식데뷔




한국 언론은 물론 일본 언론도 난리가 났다.

가수 현, 그의 실체가 마침내 벗겨진 것이다.

처음 발표는 AA엔터테인먼트에서 나왔다. 갑작스레 걸려온 전화에는 현의 데뷔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모든 연예 언론에 공개할 것이라 말했다.

이른 아침에 전해진 정보였지만 그것은 기자들의 잠을 확 달아나게 하기에 충분했다.

석규가 기자들에게 소식을 전한 것은 북경 시간으로 8시, 서울 시간으로 9시였다. 그런데 아침 10시가 되자 인터넷 뉴스에 현의 데뷔에 대해 범람하듯 넘쳐흐르기 시작하였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가수 현의 특종이다. 국내 백만 장이라는 말도 안 되는 판매고를 이룩하였으며, 데뷔가 채 일 년도 되지 않아 국내 정상에 군림한 라샤의 모든 곡을 만들고 녹음한 존재!

그뿐만이 아니라 일본에서는 천상의 목소리라 불리우는 아사미 유키의 노래까지 만들어 그 인기는 다른 가수들과 차원을 달리한다.

무엇보다 신비주의 컨셉을 표방하며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현은 수많은 팬들의 궁금함을 자아내게 하였다. 연예 기자들 중에서는 현의 정체를 파헤치기 위해 AA엔터테인먼트에 잠복근무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신비주의라고 하나 라샤의 데뷔 무대에서 모습을 보였고, 그의 정규 1집 앨범에도 모습을 드러냈다. 그걸 토대로 그들이 가지고 있는 현의 전제는 몇 가지가 있다.

우선 첫 번째는 다름 아닌 십대란 점이다. 라샤의 데뷔 무대에서 수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것으로, 현의 정체에 대해 알려진 것이라고는 고작 남자라는 사실 하나에서 수많은 팬들의 놀라움을 심어주었던 부분이었다. 자신의 모든 곡을 스스로 작곡, 작사하고 녹음까지 하는 현을 누구도 십대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십대라고 하던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던 부분이었다.

그런 사람들의 인식을 깨고 나타난 것이 바로 현이었다.

두 번째는 키가 약 170cm에서 175cm정도란 점이다. 데뷔 무대에서 등장할 당시 그 정도 키였고, 사람들은 대부분 현의 키를 그 정도 선에서 생각하고 있다.

마지막은 얼굴 그 자체였다. 라샤의 무대에서도 그러하고, 뮤직비디오에서도 그러했다. 세룬의 언급에서도 볼 수 있듯이 현의 얼굴은 범상치 않은 미남일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너무 막연하고 터무니없는 것들이었기에 알아내기란 불가능했다. 그래서 기자들은 AA엔터테인먼트 사장인 강석규에게 잘 보이기 위해 라샤에게 호의적인 기사를 써주면서 눈도장을 찍어놓았다. 훗날 현이 데뷔할 때 빠르게 정보를 얻을 수 있다면 대박은 따놓은 당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 가수 현의 데뷔 소식이 전해졌다. 그들로서는 안달이 날 만한 소식이었다.

삽시간에 대형 포탈 사이트 뉴스에는 현의 데뷔 사실이 도배되다시피 하였고, 검색어에도 현의 데뷔 등, 현에 관련된 수많은 검색어가 상위를 차지하였다.

놀라운 소식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중국 측에서 현으로 추정되는 소년의 사진이 흘러나왔던 것이다.

그것은 중국 자금성을 배경으로 라샤와 한 소년이 친근한 모습으로 찍은 사진이었는데, 중국 측에서 흘러나온 정보에 의하면 그 소년이 바로 현이라고 하였다.

확실하게 증명되지 않은 사진이었지만 기자들이 언제부터 사실유무를 중요하게 여겼던가? 아니, 중요하게 여기고야 있지만 현실은 그들에게 사실유무의 확인보다는 좀 더 자극적이고 흥미로운 소재를 필요로 하였다. 당연히 사진 속 소년이 현이건 아니건 그들에게는 당장 수많은 사람들이 봐줄 정보가 더욱 중요하였다.

결국 사진 유출과 함께 창현의 모습이 기사에 대대적으로 실렸다. 몇몇 눈치 있는 기자들은 이 정보를 물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재 라샤가 중국으로 출국한 상태인데, 중국 측에서 이러한 정보가 흘러나왔다는 것은 곧 AA엔터테인먼트와 모종의 마찰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AA엔터테인먼트가 비록 규모는 크지 않지만 현과 라샤가 소속되어있다는 것, 그리고 일본 거대 기획사 쟈니스와 제휴를 맺고 있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파워를 가지고 있다. 굳이 눈밖에 날 짓을 할 필요는 없다.

그럼에도 몇몇 언론사에서는 이 사진과 함께 기사를 실었다. 라샤와 함께 찍은 소년을 현이라 단정 지은 채 말이다.

그것 때문에 연예 뉴스와 포털 사이트는 한동안 난리가 났다. 사진은 얼굴을 식별할 수 있을 정도여서, 창현의 정체는 금방 밝혀졌고, 포털 사이트는 현의 사진, 강창현, 라샤와 현이라는 등 현과 창현의 단어로 도배가 되다시피 하였다.

이럴 때 나선 것이 다크 스타였다.

특별회원 중 몇몇 사람들은 기사에 실린 창현의 사진이 현일 확률이 높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을 기사에 실려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정보의 출처가 AA엔터테인먼트가 아닌 중국 측에서 흘러나온 것이어서이다.

그렇다는 건 현에게 결코 이득이 안 된다는 것이 된다.

그러던 차에, 현의 글이 올라왔고, 중국 측 소속사와 안 좋은 일이 있어서 자신의 정보가 흘러갔을 거란 글이 올라왔다. 이에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가 본격적인 공식 데뷔를 하겠다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에 다크 스타란 이름으로 기사를 올린 기자들에게 기사를 내려줄 것을 요구하였다. 현이 원치 않는 정보가 유출된 만큼 그의 권리를 보호해줘야 한다는 명목 하에 이루어진 항의였다.

그에 몇몇 기자들은 기사를 내렸지만 그 말을 깔끔하게 무시하는 기자들도 존재하였다.

다크 스타 내에서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은 기자들을 블랙리스트에 올렸고, 현의 데뷔를 축하하며 본격적인 팬의 활동을 부추기기 시작하였다.

그동안 공식 활동이 없는 현으로 인하여 얼마나 조용했던가. 기껏해야 앨범 구매 운동 정도만 하던 그들에게 있어 현의 데뷔는 가뭄의 단비와도 같았다. 정말 현의 노래가 좋아서 모여든 사람들이니 만큼 그의 노래를 라이브로 들을 수 있다는 것에서 오는 기쁨이었다.

다크 스타 내에서 현의 공식 무대가 어디에서 펼쳐질지부터, 사진의 진위 여부까지 다양한 주제로 오랜만에 활기를 띠고 있었다.


한국이 떠들썩할 무렵, 일행은 TTS기획사를 나서고 있었다.

라샤는 왕지동을 욕하였다.

“완전 최악이었어. 설마 했지만 정말 협박을 할 줄이야.”

“연예계의 더러운 면을 본 것 같아 완전 기분 안 좋네요.”

“그래도 창현이 완전 멋있었어. 눈빛만으로 압도하는 게 완전…….”

창현은 자신을 보는 라샤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머쓱한 웃음과 함께 석규를 보며 말했다.

“한국에 소식이 잘 전달 되었을까요?”

석규가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잘 되었을 게다. 기자들이란 족속들은 원래 특종을 노리고 있지 않더냐? 너의 데뷔라면 충분히 특종 거리가 되지.”

하지만 창현의 걱정거리는 그것이 아니었다.

그가 진짜 걱정하는 것은 왕지동이 정보를 흘리는 것이었다.

“그게 아니라 왕지동이 악의적으로 나쁜 정보를 흘릴 수도 있잖아요.”

걱정이 담긴 창현의 말에 석규가 피식 웃는다. 아직 창현이 어른의 사회를 잘 몰라서 하는 말이었다.

석규가 친절하게 말해주었다.

“아마 TTS기획사에서 정보를 흘리더라도 많은 기자들이 그걸 물지는 않을 것이다. 이미 라샤와 함께 출국하면서 기자들은 어렴풋이 예상을 하고 있겠지. 라샤가 중국 진출을 꾀하려고 한다는 것을. 그런 와중에 내가 너의 데뷔 소식을 알렸다. 그런데 중국에서 상세한 정보가 흘러나온다면? 너라면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창현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말했다.

“이미 AA엔터테인먼트에서 공표한 사실인데 중국에서 같은 정보가 좀 더 상세하게 흘러나오니 의아해하겠죠. 그리고 그 정보를 받으면서 생각하겠죠. 왜 두 곳에서 정보가 흘러나왔을까? 하고요.”

“정확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기자들은 고민하다가 무언가를 깨닫겠지. 우리가 중국 쪽과 이야기가 안 좋게 흘렀고, 그쪽에서 고의로 정보를 흘렸다고 말이다. 창현이 네가 기자라면 이럴 때 어떻게 하겠느냐?”

“제가 기자라면요?”

진지하게 고민하는 창현. 아무래도 자신의 문제이다 보니 소홀히 할 수 없었다. 곰곰이 생각에 잠긴 창현은 자신의 생각을 말한다.

“아무래도… AA엔터테인먼트에서 먼저 정보를 보냈으니까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기자들이 일단 조심할 것 같네요. 아버지가 어떻게 정보를 주었는지 모르겠지만 중국 쪽과 불화가 있었다는 걸 직감했다면 함부로 그걸 받아들이지 않겠지요.”

석규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이 거의 맞았다. 규모 면에서 AA엔터테인먼트는 작기 그지없지만 너와 라샤의 존재로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기자들이 오죽하면 네 정보를 원하면서 라샤에 대해 거의 찬양에 가까운 기사들을 써냈겠느냐? 그만큼 네 인지도가 높다는 뜻이지. 어느 정도 감을 가지고 있다면 함부로 받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받아들이는 곳이 있겠지만 네가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일본 측에도 쟈니 회장님에게 부탁을 해놓았다. 그러니 염려하지 마라.”

철두철미한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수십 년 동안 연예계에 종사한 석규는 그들의 생리가 어떠한지 모두 꿰뚫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최소한의 피해로 창현의 성공적인 데뷔를 치르게 해주려고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말대로라면 창현은 걱정하던 것과 달리 무난한 데뷔 무대를 치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놀라운 것은 일본까지 조치를 취했다는 것이다.

일본 내에서 쟈니스의 위치가 엄청난 만큼 그곳에서 흘러나온 정보를 토대로 기사를 쓰겠지만 왕지동의 정보는 함부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럴 경우 AA엔터테인먼트는 둘째 치고 당장 쟈니스와 척을 져야 하는 입장에 놓이게 되니 말이다.

석규의 말에 창현이 한시름 놓은 표정을 지었다.

“정말 아버지가 아니었으면 어떻게 했을지 깜깜했을 거예요.”

그 말에 석규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이건 당연히 내가 해야 할 일 아니겠느냐? 대신 쟈니스의 힘을 빌린 만큼 보답도 해야 하고 내가 이리저리 뛰게 만들었으니 창현이 네가 몸으로 갚아야겠다. 데뷔 한 이상 곡소리가 나오도록 일하게 만들 테니 게으름 피울 생각 말아라. 알겠지?”

창현은 웃음을 지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이왕 하는 거 확실하게 해보죠. 그래도 최소한 잠잘 시간은 주셔야 해요?”

“네가 어떻게 하는지에 따라 달라질 게다. 하하!”

석규와 창현이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분위기는 차츰 밝아졌고, 내심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던 라샤는 사태가 최소화 될 수 있을 거란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일행은 그날 밤 곧장 비행기를 타고 북경을 떠났다. 더 이상 중국에 있기 싫었을 뿐만 아니라 창현의 스케줄이 잡혀서이다.

탈이 많았던 중국행.

그것은 창현에게 새로운 계기를 주었다.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이 많은 기분이었다.


일행의 귀국은 무척 은밀하게 이루어졌다. 아니, 은밀하게 이루려고 하였다.

현의 데뷔와 왕지동의 정보로 인하여 기자들 대다수가 현과 라샤가 중국에 있다는 것을 알았고, 조만간 귀국한다는 것을 어렴풋 알아차렸기에 공항에서 대기 아닌 대기를 하고 있던 것이다.

그래서 일행이 공항에 도착했을 때, 그들을 맞이한 것은 무려 백여 명이 넘는 기자들과 오백 명에 달하는 현의 팬이었다.

기자들이 있을 거라 예상했기에 석규는 경호원을 요청해놓은 상태였지만 솔직히 팬들이 이렇게 올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창현은 본의 아니게 모자를 푹 눌러쓰고 경호를 받으면서 공항을 나서야했는데, 자신을 보기 위해 몰려온 사람들에게 너무 미안하기도 해서, 모자를 살짝 올려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는 매너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그런 창현의 매너에 호의적인 기사가 따랐음은 물론이다.

공항을 벗어난 일행은 둘로 갈라졌다. 여행에 지친 라샤는 그대로 숙소로 돌아가 쉬기로 하고, 석규와 창현은 AA엔터테인먼트로 향한 것이다.

집으로 향할까 했지만 그것은 그만두었다. 창현의 정체가 노출된 만큼 집으로 찾아올 사람이 있다면 운신이 복잡해질 수 있어서이다. 다행히 AA엔터테인먼트에 창현도 여러 벌의 옷을 두고 있었기에 활동하는 데에는 불편함이 없다.

회사에 도착한 석규는 곧장 사장실로 들어섰다. 창현의 스케줄을 확실하게 하기 위함이다.

창현은 녹음실로 향했다. 자신의 데뷔가 다가온 만큼 그동안 자신이 불렀던 노래를 재점검함으로써 만전의 상태로 무대에 임하기 위함이었다.

얼마나 녹음실에 있었을까.

밖에서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리니 석규가 있었다.

창현이 녹음실을 나서면서 물었다.

“무슨 일이세요, 아버지?”

“네 스케줄이 정해졌다.”

“제 스케줄이요? 벌써요?”

석규의 말에 창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스케줄은 보통 그 방송사와 여러 협상을 한 뒤에 형성되는 것이 아닌가? 단기간에 뚝딱 정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알고 있다.

창현의 의문스러운 표정을 본 석규가 말했다.

“네 데뷔 무대가 아니더냐? 이미 예전부터 방송사들과 협상을 하고 있었지. 그리고 이번 보도와 함께 이야기를 하니 바로 자리를 내주겠다고 하더구나. 방송시간을 연장해서라도 말이지.”

“그래요? 그럼 다행이네요.”

데뷔가 빠르면 빠를수록 창현에게 좋을 것임이 분명했다. 왕지동이 어떤 루머를 흘릴지 모르는 지금, 빠르게 데뷔를 하고 무대 위에서 팬들의 마음을 확고하게 사로잡고, 제대로 된 의견 표명을 통하여 안정적인 데뷔를 하는 것이 그에게 좋았다.

그런 창현의 생각을 알기라도 하듯 석규가 말했다.

“네 스케줄은 이틀 뒤 S본부의 인기가요다. 라샤의 <Yesterday>와 너의 <Go&Stop>, <Bad Boy>를 부르기로 했다.

석규의 말에 창현이 놀란 표정을 짓는다.

“세 곡이나요? 시간 편성이 힘들었을 텐데…….”

“약간 늦게 끝나더라도 괜찮다고 하더구나. 뭐, 그들로서도 시청률을 높일 수 있을 테니 나쁘지 않겠지, 하하!”

웃음을 짓는 석규를 보며 창현이 물었다.

“그런데 라샤 누나들은 왜 같이 하는 거죠? 저야 상관없지만 미안한데…….”

말끝을 흐리는 창현의 모습에 석규가 웃음을 멈추면서 말했다.

“그건 내 생각이 아닌 라샤 아이들의 생각이었다.”

“누나들의 생각이요?”

뜻밖이라는 표정을 짓는 창현. 그런 창현을 보며 석규가 말했다.

“이번 너의 데뷔가 어찌하였든 본의가 아닌 면도 있지 않더냐? 라샤 아이들은 그 문제로 고민을 많이 하더구나. 자연스럽게 데뷔를 했을 너에게 몹쓸 짓을 했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그래서 그 아이들 나름대로 너에게 보답할 방법을 강구한 것이다. 같이 무대 위에 섬으로써 너의 데뷔 무대를 최고로 장식해주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겠지.”

“미안해 할 필요가 없는데 그러네요, 누나들이.”

창현은 결코 라샤의 탓을 해본 적이 없다. 약간 수동적인 면이 있는 자신에게 있어 오히려 이것은 확고한 결심을 서게 하는데 도움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라샤 누나들이 미안해하는 모습을 보니 못내 마음에 걸렸다.

그런 창현의 말에 석규가 웃음을 지었다. 이쪽도 저쪽도, 상대방에게 미안해하는 모습이 훈훈해보였다. 자기자신만 아는 이기적인 모습이 아닌 게 자랑스러웠다.

“네 생각도 있는 것처럼 그 아이들도 나름대로 생각이 있는 게지. 창현이 네가 굳이 거부할 필요가 없다. 어찌 보면 너를 위한 것도 있지만 라샤 아이들이 마음의 안정을 찾기 위한 자기 위로적인 면도 있으니까. 네가 부담을 갖고 그러면 그건 오히려 그 아이들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 알겠지?”

이해하기가 쉬운 석규의 말이었다. 창현은 그런 석규의 말에 너무 자신의 생각만을 고집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세상을 살다 보면 가끔 그런 것 있지 않은가. 훈훈하게 받아들여야 할 호의 같은 것 말이다.

창현에게 결코 거부할 이유가 없는 호의였다.

“국내 정상 아이돌 그룹인 누나들이 도와준다면 저야 좋죠. 어쨌든 데뷔 무대라니 새삼 떨리네요.”

석규가 피식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지금 네 모습이 떨리는 녀석의 모습이라고? 내가 보기에 넌 딱 무대 체질이다. 무대 위에서 네 스스로 살아있음을 느끼고, 무대 위에 서야 진정으로 삶의 의미를 찾는 스타일이지. 떨리는 마음은 나쁜 것이 아니다. 적당한 긴장이 자신의 실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으니까. 저번에도 말했지만 창현이 너의 첫 무대는 중요하다. 네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동안 너를 따르던 팬들을 모두 흡수하고 새로운 팬들을 더 얻어낼 수 있는 기회니까. 알겠지?”

부담을 팍팍 주는 말이었지만 말하는 석규에게는 거리낌이 없었다.

자신의 아들이지 않은가? 창현의 성격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거는 기대가 클수록, 부담감이 더해지면 더해질수록 자신의 능력을 뛰어넘는 한계치까지 도달하는 것이 창현이었다. 이런 부담감에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부담감을 안고 한층 더 높게 날아오를 것이라 그는 확신했다.

석규의 말에 창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최선을 다해야죠. 앞으로 많은 무대 위에 서겠지만 첫 데뷔 무대는 단 한 번밖에 없는 거잖아요? 당연히 제 모든 것을 쏟아 부을 생각입니다.”

“좋은 모습이다. AA엔터테인먼트 사장으로서, 아비로서 난 네가 진정으로 잘되길 빈다. 그럼 계속 연습하거라. 난 이만 나가볼 테니.”

“일하시려고요?”

나갈 듯한 모습을 보이는 석규를 보며 창현이 묻자 피식 웃으며 대답한다.

“당연하지 않겠느냐? 네가 데뷔를 한다고 했으니 이것저것 스케줄을 아주 꽉꽉 채워줄 생각이다.”

북경에서 했던 말이다. 정말 진심으로 했던 말인 듯했다.

창현은 양손을 들며 항복하듯 말했다.

“너무 몰아세우시진 마세요. 너무 힘들면 다 포기하고 도망갈 수도 있어요.”

“그래, 알았다. 연습 열심히 해라.”

웃음을 지어보인 석규는 녹음실을 나섰다.

석규가 나가자 창현은 의자에 털썩 앉으며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자, 이제 공포의 대마왕을 설득할 시간인가…….”

정체가 언론을 타고 흘러갔을 때부터 창현은 핸드폰을 꺼둔 상태였다. 연락이 폭주할 것을 염려하여서이다.

아니나 다를까, 핸드폰을 키자 백여 번이 넘는 연락과 메시지들이 쌓여 있었다. 모두 소녀시대 멤버들에게서 온 것이었다.

‘미치겠네. 이렇게 많이 왔다면 나중에 죽을지도 모르는데.’

메시지를 다 확인할 엄두가 안 나서 창현은 수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체가 밝혀지기 전 유일하게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던 만큼 수연을 통해서 자비를 구하려는 속셈이었다.

♩♪♬

아주 보란 듯이 창현의 노래인 <Bad Boy>가 컬러링으로 흘러들어온다.

잠시 후, 딸칵하는 소리와 함께 통화가 이어진다.

창현은 반가운 마음에 말한다. 전화와 메시지를 무시했으니 기분이 안 좋을 터, 선수를 쳐야했다.

“여보세요? 수연 누나에요? 저 창현이에요.”

-여보세요? 아무리 전화를 해도 안 받는 창현이라면 전 잘 모르는데요.“

역시 화가 난 듯했다. 그래도 생각보다 화가난 것 같지는 않아서 창현은 약간 저자세로 말했다.

“정체 밝혀지면 이리저리 연락이 많이 올 것 같아서 그랬어요. 정말 미안해요, 누나. 화 좀 풀어주시면 안 될까요?”

간절하게 말하는 창현.

그 진심이 먹혔는지 건너편에서 한결 풀어진 목소리가 들려온다.

-…알았어. 솔직히 화 별로 안 났어. 창현이 네가 유명인인 걸 알고, 그게 최선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그런데 왜 전화한 거야?

창현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왜 핸드폰 꺼놓은 건 이해한다면서 자신이 전화를 건 이유는 모른단 말인가.

“왜라니요. 지금 태연 누나나 다른 누나들 심각하지 않나요?”

-당연히 심각하지. 심지어 순규는 갑자기 숫돌 사오더니 생전 잡지도 않던 식칼을 꺼내서 날을 벼려놓고 있어.

수연의 말에 창현이 대경하며 외친다.

“헉! 정말요?”

-농담이야. 하지만 분위기는 정말 안 좋아. 어떻게 보면 멤버들 거의 대부분하고 알고 지냈잖아? 네 입장을 이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배신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함께 웃고 떠들고 그러면서 자신의 정체를 감추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 입장을 이해하지만 전신에서 스멀거리며 올라오는 배신감은 어쩔 수 없으리라.

창현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그 점에 대해서는 정말 제가 할 말이 없네요. 그래서 말인데… 이틀 뒤 제가 데뷔 무대를 서거든요. 그때 누나들이 S본부로 와주실 수 있으세요?”

-주말이니 애들 다 시간이 되고, 갈 수야 있어. 그런데 왜…….

“이해를 해주신다고 해도 배신감은 들 거잖아요? 저도 숨긴 게 있으니 용서를 빌어야죠. 이대로 어영부영 넘어가기에는 사태가 조금 큰 거니까요. 그래서 누나가 다른 누나들을 조금 설득 시켜주셨으면 해요.”

창현의 말에 수연이 한동안 침묵하다가 입을 연다.

-…너 나한테 정말 어려운 부탁하는 거 알지?

“네. 정말 어려운 부탁이죠. 하지만 누나밖에 없어서 그런 거예요. 부탁할게요.”

수연이 볼 수도 없건만 양손을 모으며 말하는 창현이었다.

그가 그렇게까지 말하니 수연은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었다.

-알았어. 말해볼게. 그런데 우리 방송국 입장 어려운데…….

“그건 제가 처리하도록 할게요. 정말 고마워요, 누나.”

-칫! 나중에 밥이나 사줘. 이제 활동하면 돈도 많이 벌 텐데.

수연의 승낙으로 인해 한결 마음이 편해진 창현은 웃으면서 대꾸했다.

“물론이죠. 비싼 걸로 사드릴게요.”

웃음기가 배어있는 창현의 목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음일까?

수연이 조금 뾰루퉁한 목소리로 말한다.

-설득은 할 수 있지만 맞아도 난 몰라. 그것까지는 설득 안할 거야.

창현이 대경하며 외쳤다.

“자, 잠깐만요! 그것까지 해결해주셔야…….”

그러나 그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수연과의 통화가 끊어졌기 때문이다.

잠시 허탈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바라보던 창현. 이내 그의 입에서 한숨이 맺혀나온다.

“후우! 그걸 가장 설득해주길 바랬던 거라고요.”

깔끔하게 사라졌던 그의 얼굴에 다시 근심이 드리우고 있었다.


“후우!”

통화를 끝낸 수연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창현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녀는 정말 그가 데뷔를 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연습을 끝마치고 집으로 돌아가 인터넷 뉴스를 보았을 때 얼마나 놀랐던가?

단순한 데뷔 사실이라면 그렇게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이미 AA엔터테인먼트에서 정보가 흘러나왔고, 암묵적으로 현의 데뷔가 올해 초에 이루어질 것이란 말이 흘러나오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녀가 정말 놀란 것은 다른 인터넷 기사를 봐서 그랬다. 인터넷 연예 뉴스에 대문짝만 하게 적혀 있는 기사 제목, 그것은 바로 <현의 정체? 사진 대공개!>라는 충격적인 제목이어서이다.

수연은 당연히 그 기사를 클릭해보았다.

그러자 눈에 선명하게 들어오는 창현의 모습. 중국 자금성을 배경으로 라샤와 함께 찍은 사진이 기사에 실려 있었다.

다시 봐도, 눈을 씻고 봐도 틀림없는 창현의 모습이었다.

수연은 기사 아래에 있는 리플들을 확인했다.

리플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라샤의 팬들이 역시 라샤는 생얼도 미인이라면서 찬양을 하였고, 정말 현의 얼굴이냐는 질문과 함께 어느 정도 아는 척을 하는 사람들, 소수의 악플러 등 관심도가 폭주하고 있었다.

그걸 보면서 새삼 창현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수연은 느낄 수 있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섭섭한 감정이 들었다. 창현이 중국에 있다는 건 알지만 갑작스럽게 데뷔한다는 사실을 자신에게 알려주지 않아서이다. 그동안 만만치 않은 신분을 쌓았다고 생각했는데… 문자를 하고 전화를 해도 받지 않는 창현의 행동에 수연은 이해를 하면서도 섭섭한 마음은 감출 수 없었다.

“창현이도 나름대로 사정이 있었겠지.”

마음은 이해를 한다. 하지만 괘씸한 마음은 지울 수 없었다.

그래서 수연이 마지막에 말한 것이다. 맞을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당황하던 모습은 조금 귀여웠지만 쿡쿡!”

마지막 말에 당황하던 창현의 모습을 떠올리며 수연이 웃음을 지었다.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섭섭했던 기분이 한결 가셨다.

자리에서 일어난 수연은 거실을 힐끗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자, 이제 애들을 어떻게 설득하느냐가 관건이네.”

어려운 난제였지만 그녀의 얼굴에 걱정은 없었다.

알고 지낸 기간이 있는 만큼 창현의 정체가 밝혀진 이상 반드시 풀어내야 할 것이 있을 테니까.

그리고 가만히 생각해보면 창현과 알고 지낸 일곱 명 중 연락을 받은 건 자신이 아닌가? 그걸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거실로 나서는 수연의 입가에 미소가 맺혀 있었다.


미영은 인터넷에 빵하고 터진 기사를 보았다. 현에 관련된 기사였다.

그녀는 당연히 그 뉴스를 보았다. 평소 현의 노래를 즐겨 듣고 노래를 부르는 사람으로서 현에게 경외의 감정을 느끼고 있던 탓이다. 같은 십대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했다.

게다가 잘생기기까지 하지 않았다고 하지 않던가?

당연히 좋아할 수밖에 없다. 천재적인 음악 감각과 뛰어난 외모. 누구나 좋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현의 사진이 있다는 기사를 클릭하는 순간 그녀는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라샤와 함께 찍힌 사진에는 주현의 생일을 기념하며 함께 놀이공원에 갔던 창현이 있던 것이다.

놀라는 한편 그녀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자신의 음식 맛을 유일하게 알아주었던 소년.

그가 바로 가수 현이었던 것이다.

너무나 놀라워 그녀는 한동안 말을 잊을 정도였다.

‘창현이가 현이었다니. 그러고 보니 이름도 비슷하네? 창현이가 정말 현이라면… 내가 좋아하는 팝송을 불러달라고 해야지.’

미국에서 살다온 그녀답게 좋아하는 노래 대다수가 팝송이었다.

언제고 현의 라이브를 보면서 그녀는 감동에 빠져있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고, 그가 라이브로 부르는 팝송을 듣고 싶던 차였다.

그런데 지척에 두고도 몰라보았던 것이다. 비록 만남은 한 번이었지만 자신의 음식 맛을 알아준 창현이었기에 그녀는 창현에게 친근감을 가지고 있었고, 문자와 통화도 곧잘 하는 편이어서 상당한 친분을 가지고 있었다.

‘저번에 봤을 때보다 더 예뻐진 것 같아.’

미영은 저번에 봤던 창현의 모습을 떠올리며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나중에 전화를 걸어서 팝송을 불러달라고 할 생각이었다.


유리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근래 들어 창현에게 보컬 트레이닝을 받으면서 그가 얼마나 대단한 실력을 지니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창현의 보컬 트레이닝은 마치 마법 같았다.

그렇다고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다.

다만 창현의 보컬 트레이닝은 대상자로 하여금 그동안 쌓아온 노력과 재능의 범주 내에서 최대한의 효과를 끌어내준다.

그의 보컬 트레이닝을 처음 받고 얼마나 놀랐던가? 그동안 막혀있던 무언가가 뻥 뚫리는 느낌과 함께 갑자기 실력이 확 늘어난 느낌을 받았다.

그에 창현은 웃음을 지으면서 그것이 자신에게 가장 맞는 방법이라고, 그동안 쌓아온 노력의 산물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래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유리의 눈에 비춰진 것은 마치 창현이 마법을 부린 것처럼 보일 정도였던 것이다. 새삼 SM엔터테인먼트의 박예민 보컬 트레이너가 창현을 극찬했던 것이 떠오른다. 이 정도면 보컬 트레이닝이 아니라 마법 수준이었다.

뛰어난 보컬 트레이닝과 잘생긴 얼굴. 그리고 모나지 않은 성격까지.

어디 하나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이 없었다.

창현은 비밀로 해달라 했지만 내심 그녀는 SM엔터테인먼트에 말해서라도 창현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창현에게 트레이닝을 받고 싶었다. 무엇보다 친한 동생으로서 친근감도 한몫하였다.

누나들에게 친절하게 대해주고 얼굴도 누구의 비교도 거부할 정도로 잘생겼으니 누가 놓치고 싶어하겠는가?

무엇보다 창현의 모습은 평소 사근사근하고 배려심 깊은 성격이지만 보컬 트레이닝에 들어가면 성격이 확 뒤바뀐다.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강력한 카리스마로 무장하는 것이다.

평소 자상하고 부드러운 모습에서 한순간 돌변하는 남자다운 그 모습에 유리는 매료되었다.

그랬기에 창현이 가수 현이란 사실이 알려져서 놀랄지언정 배신감이나 섭섭함은 들지 않았다. 과연! 이라는 생각만 들었을 뿐이었다.

‘창현이가 데뷔하면 보컬 트레이닝도 못 받을 테고 보기도 힘들어질 텐데… 아쉽네.’

그녀의 아쉬움은 컸다.

창현을 못 봐서 그런지, 보컬 트레이닝을 못 받게 되어서 그런 것인지는 스스로도 잘 모르고 있었다.


창현이 가수 현이다!

순규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설마하니 창현이 가수 현일 줄이야.

사실 그녀는 창현을 SM엔터테인먼트 보컬 트레이너로 넣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거의 억지나 다름없게 보컬 트레이닝을 받게 되었지만 그의 실력은 누구보다 뛰어났다.

게다가 노래 실력. 이따금 보컬 트레이닝을 받을 때 보여주는 그의 가창력은 보통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정모에서 만났을 때 노래를 부르던 창현은 모두를 압도하는 카리스마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래서 범상치 않다는 걸 느꼈는데 그가 가수 현일 줄이야.

그녀는 창현이 인간 같게 느껴지지 않았다.

“도대체 못하는 게 뭐야?”

얼굴은 그래, 타고 났다 치자. 하지만 보컬 트레이닝 실력은 뭐란 말인가? 게다가 노래 실력도 그렇고. 게다가 스타크래프트 실력까지!

주현에게 슬쩍 정보를 캐보니 세상에나! 공부도 전교권이란다.

그런데도 성격마저 나쁘지 않으니 정말 신동이 따로 없다.

창현이 정체를 숨겨서 느껴지는 배신감? 그런 것은 없었다.

자신이었다면 당연히 정체를 숨겼을 테니까. 단지 느낌이라면 원래 대단하던 녀석이 생각보다 더 대단하다는 느낌이랄까?

제법 짧지 않은 시간을 알아온 만큼 순규는 창현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었다.

다만…….

“격투 동영상에서 봤던 것을 한 번…….”

오가는 관절기 속에서 절친한 우정(?)이 생긴다고 하지 않던가.

그녀는 창현과 좀 더 친해질 것을 생각하며 입가에 웃음을 지었다.


“그 녀석이 현?”

인터넷 뉴스를 본 태연은 큰 충격을 받았다.

우연찮게 데이트 아닌 데이트를 했을 때 그녀는 창현의 가창력에 큰 충격을 받았었다. 내심 자신이 있었던 가창력 부분에서 완벽하게 압도를 당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한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연에게 보컬 트레이닝을 시켜줄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놀랐다. 소녀시대란 그룹이 만들어지고, 자신과 수연이 메인보컬로 인정받았다. 아홉 명 중 메인보컬이란 것은 가창력이 제일 낫다는 것을 의미했다.

당연히 어느 정도 실력이 있다는 것을 뜻했고, 웬만한 보컬 트레이너가 아니고서는 지적하기가 힘들다.

그런데 자신도, 다른 멤버들도 놀랄 만큼 뛰어난 가창력에 보컬 트레이닝 실력까지.

무엇보다 그녀는 데이트를 하면서 창현의 다른 면들도 보지 않았던가? 게임도 잘할 뿐만 아니라 몸을 움직이는 것도 잘한다. 그리고 조폭들에게서 구해주기까지 하였다.

나이답지 않게 성숙하면서 여자에게는 조금 어렵게 대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자신보다 어리다는 느낌을 받지만 다른 때, 특히 보컬 트레이닝 때 보면 동생이 아닌 무서운 선생님과 마주하는 느낌이다.

그와 별개로 태연이 창현에게 느끼는 감정은 무척 복잡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오만불손한 이미지로 낙인되었다가 점차 그것이 바뀌어갔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는 자신이 창현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확신을 할 수 없었다. 자신보다 어림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장난치던 모습과 자신을 위기에서 구해주던 모습, 그리고 이벤트에서 보여주던 모습이 합쳐지면서 그녀를 혼란으로 몰아넣은 것이다.

그래서 그녀도 자신의 감정에 대해 종잡을 수가 없었다.

수연과 함께 있던 창현의 모습을 보았을 때 왜 가슴이 아파왔는지, 보컬 트레이닝을 승낙받았을 때 왜 다른 의미로 기뻐했는지 파악하기 힘들었다.

그래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평범하게 친한 것은 넘어섰다는 것이다.

평범한 동생이라기엔 한참이나 부족했다.

그것 때문일까?

창현의 정체가 현이라는 게 밝혀지자 그녀는 마음 한구석이 답답해졌다. 분명 그와 같은 비밀을 공유할 정도로 친한 게 아니건만 이유 없이 가슴이 답답했다.

이제 창현은 톱스타로서 활동할 것이다. 그에 반해 자신은 연습생의 신분이다.

현격한 차이에 태연은 의미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답답하네.”


윤아는 인터넷 뉴스를 보는 순간 큰 충격을 받았다. 정확하게 사진까지 첨부되어 있는 인터넷 기사에는 그녀에게 원치 않던 떨림을 심어준 장본인이 자리하고 있던 것이다.

“차, 창현이가 현이었다고?”

이제는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다. 그때로부터 몇 달이란 시간이 지났으니까. 무너진 마음의 벽을 차곡차곡 다시 쌓으면 예전같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이 착각이었다는 걸 깨닫는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사진을 보는 순간, 창현의 정체가 현이었다는 순간 걷잡을 수 없이 쿵쿵 뛰는 마음. 그것은 지난 시간 그녀가 힘겹게 쌓아올렸던 마음의 벽이 모래성처럼 허물어지는 순간이었다.

걷잡을 수 없이 흐르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그것을 붙잡는 것도 당연히 어려움이 따랐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힘겹게 다스리며 윤아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인터넷 기사를 보고 또 보고 있었다. 내심 잘못된 정보이길 바라면서… 하지면 기사는 제법 그럴 듯한 사실을 담아내고 있었고, 창현이 AA엔터테인먼트 강석규 사장의 아들이라고 하나 여러 가지 의문점이 많은 것이 사실이었다.

윤아는 뮤직비디오 미팅을 위해 AA엔터테인먼트를 찾은 적이 있다. 그때 그녀는 창현에게 현을 본 적이 있냐고 물었다. 하지만 창현은 그 대답을 절묘하게 회피했다.

그땐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지금 와서는 왜 그렇게 대답을 했는지, 라샤가 왜 창현을 친하게 대하면서 한편으로는 어렵게 대했는지, 무엇보다 쉽게 들어설 수 없는 녹음실을 제 집처럼 드나들었는지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창현이가 현이어서 가능했던 일이었어. 그리고 내게 주었던 선물도 그가 직접 건넸으니…….”

그것은 확신에 가까웠다.

강창현, 그가 현이다.

마음 속에 들어온 그를 밀어내려고 하면서도 그녀는 한편으론 기대했다.

창현이 현이라는 건 데뷔를 하면 활동하면서 같이 볼 수 있다는 이야기겠지?

그러한 사실을 깨닫는 순간 그녀의 가슴은 다시 두근거렸다.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달콤한 두근거림이었다.

“하아!”

의지와 다르게 두근거리는 자신의 심장 박동을 느끼며 그녀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녀의 입가에는 미소가 살짝 맺혀 있었다.


“…….”

창현이 현이라는 사실을 알고 난 다른 사람들은 놀라움에 담긴 무슨 소리를 흘리고는 하였지만 주현의 반응은 사뭇 달랐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모니터만 바라보고 있던 것이다.

다른 멤버들이 받은 충격보다 주현은 더욱 큰 충격을 받았다. 이미 창현의 정체를 알고 있던 수연이나 아예 모르고 있던 다른 언니들과 달리 주현은 창현을 한차례 의심하다가 완벽하게 그 의심을 지운 상태였다. 그러던 차에 창현의 정체가 밝혀지자 그녀는 걷잡을 수 없는 우울함이 몰려왔다.

근래 들어 그녀는 무척 우울한 상태였다. 자신의 감정을 외부로 발산하지는 않지만 그녀는 심적으로 무척 우울해 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이제 곧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로 진학하기 때문이다.

윤아가 있는 고등학교로 진학하기로 결정되었는데, 고등학교에 가게 되면 더 이상 창현과 만남의 기회가 없어진다. 학교를 다니면서 종종 정자에 만나서 이야기도 나누고 했던 것이 이제는 불가능해진다는 이야기가 된다.

더군다나 데뷔가 점점 가까워짐에 따라 연습할 것이 부쩍 많아지고 있었다. 꿈에 한층 가까워지기에 설레었지만 그와 반대로 우울한 마음도 커져만 갔다.

그러던 차에 들려온 현의 데뷔 소식과 그의 정체에 관련된 기사.

거기에서 주현이 받은 배신감은 상상을 초월했다. 자신이 의심을 할 때 창현이 말해주었다면 둘만의 비밀로서 간직했을 텐데. 괜히 창현에게 믿음을 주지 못한 것 같았고, 창현이 자신을 믿지 않은 것 같아서 더욱 기분이 울적해졌다.

그녀도 자신이 이기적이라는 것을 안다. 창현으로서는 당연히 감춰야 할 비밀이었고, 그것을 자신에게 말해주고 이해를 구하는 것보다 말하지 않고 스리슬쩍 넘어가는 것이 더 나았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란 동물이 다 그러하듯이 그녀는 창현의 상황을 알면서도 섭섭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후우!”

닫혀있던 그녀의 입에서 마침내 한숨이 비집고 흘러나온다. 꾹꾹이라 불릴 만큼 모든 것을 감내하는 그녀가 내쉬는 한숨이니 만큼 그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다.

가슴이 답답했다. 현의 데뷔 기사를 보고 충격받은 멤버들로 인하여 오늘 하루 특단의 휴식 조치를 받았기에 쉬고 있지만 쉬는 게 결코 쉬는 게 아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흘러나오는 것은 깊은 근심이 담긴 한숨뿐이었다.


숙소의 분위기는 착 가라앉아 있었다.

멤버들 중 무려 여섯 명이 이렇다 할 반응조차 보이지 않은 채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있던 것이다. 그중에서도 심각하고 덜 심각한 것이 나뉘었지만 전체적으로 조용하니 분위기가 가라앉은 것은 틀림이 없었다.

그 사이에서 가장 답답함을 느껴야 하는 것은 바로 수영과 효연이었다.

다른 멤버들과 달리 유감스럽게도 그녀들은 창현과 인연을 맺지 못했다. 그래서 다른 멤버들이 경악할 때, 그녀들은 그저 놀라움 정도만을 표했을 뿐이다.

수연이 거실로 나오면서 거실을 힐끗 바라본다. TV를 틀어놨지만 TV에 집중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미 각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는 탓이다.

그녀는 엉거주춤 떨어져 있는 수영과 효연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쟤들 아직도 저러는 거야?”

수연의 물음에 수영이 답답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한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거야? 쟤들 왜 계속 저래.”

“보니까 어제부터 계속 저러던데. 그거, 현의 데뷔 사실을 보고 멍 놓고 있던데?”

효연이 나서서 설명을 해준다. 수연은 그녀들이 왜 이런 모습을 보이는지 알고 있었다. 그만큼 창현의 정체가 충격적이어서 그러할 것이다.

수연이 한숨을 푹 내쉬며 중얼거린다.

“후! 그럴 수밖에.”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본 수영이 물었다.

“너 쟤들이 왜 저러는지 알고 있는 거야?”

수영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인 수연은 수영이 재차 묻기도 전에 시선을 멤버들에게 주며 큰소리로 말했다.

“너희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야. 분명 충격적이긴 하지만 이게 현실이잖아? 모두 정신 좀 차려봐, 창현이한테 연락이 왔으니까.”

……!

수연의 말에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이들이 퍼뜩 정신을 차린다. 그리고 일제히 수연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그런 멤버들의 모습에 수연은 다시 한 번 한숨을 푹 쉰 뒤 말했다.

“일단 창현이가 다른 말은 안 했어. 다만 이틀 뒤에 S본부로 와 달래. 방송국에 들어서는 건 자신이 알아서 해주겠다고 하더라. 어떻게 할래?”

“…….”

수연의 물음에 소녀들이 침묵에 빠졌다. 갖가지 생각들이 그녀들의 표정에 묻어나왔다.

그에 반해 아무런 사정도 모르는 수영과 효연으로서는 답답할 노릇이었다.

결국 짜증기가 묻어나오는 표정을 지으며 수영이 물었다.

“아! 도대체 뭔데 말을 안 해주는 거야? 좀 속 시원하게 말 좀 해봐!”

“…너희 둘은 잠깐 이리로 와.”

수연은 아무런 사정도 모르는 수영과 효연을 이끌고 방으로 들어갔다. 멤버들이 생각할 시간을 주기 위함인 것도 있지만 수영과 효연에게 그간의 사정을 설명해주기 위함도 있었다.

방안에 들어선 수연은 두 사람에게 여태까지 일어났던 일들을 설명해주었다. 지금 멤버들이 왜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지, 그리고 창현이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말이다.

수연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두 사람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효연이 믿기지 않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쟤들은 이미 현을 알고 있었단 거네?”

“가수인지는 모르고 있었지만 사적으로 알고 지낸 건 맞아.”

“몇 달 전부터 갑자기 가창력이 늘었다고 칭찬을 받더니 그런 내막이 있었군! 내 이것들을!”

수영은 그제야 모든 내막이 이해가 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괘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감히 자기들끼리 작당한 채 초일류라 칭해지는 현의 보컬 트레이닝을 받고 있던 것이다.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럼 쟤네들은 현이었다는 걸 아무도 몰랐다는 거네?”

“맞아. 그래서 충격이 컸나봐.”

효연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는 수연.

하지만 이어진 질문에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너는 알고 있었어?”

심상치 않은 수연의 반응에 효연과 수영이 수연을 바라본다.

잠시 머뭇거리던 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난 알고 있었어. 창현이가 말해준 게 아니라 내가 알아차렸거든. 하지만 비밀로 해달라고 해서 말을 할 수 없었어.”

“그랬군.”

“그런데 우리는 이틀 뒤에 어떻게 해야 돼? 따라가도 되는 거야?”

아무래도 그것이 마음에 걸렸던 듯, 수영이 물었다.

그에 수연이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상관없겠지. 너희도 우리 멤버잖아? 이참에 창현이랑 인사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고. 괜찮겠지?”

효연이 반색하며 대답했다.

“우리야 완전 환영이지! 안 그래, 수영아?”

“당연하지. 얼굴만 알려져 있지 않을 뿐이지 완전 톱스타잖아.”

“그래. 그럼 말해놓을게. 애들한테 가보자.”

두 사람의 의사를 확인한 수연이 방을 나선다.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줬다고 생각했다.

방을 나선 수연이 물었다.

“어떻게 할 거야?”

“난 갈래! 만나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가장 먼저 대답한 것은 미영이었다. 그러자 유리와 순규도 순순히 가겠다고 했다. 창현이 현이란 이름으로 데뷔를 하는 만큼 앞으로 보기 힘들 것 같았기에 내린 결정이었다.

“나도 갈래.”

태연도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한다.

그러자 남은 사람은 두 사람이었다.

“…….”

윤아와 주현은 심각하게 굳은 표정을 지은 채 섣불리 대답하지 않았다.

윤아는 창현과 다시 만나는 것에 멈칫하였다. 지금 창현을 다시 보면 자신의 마음에 남은 마지막 벽마저도 허물어질 듯한 느낌을 받은 것이다.

그래서 안 가겠다고 말하려다가 멈칫했다. 창현을 안 만난다는 것 자체가 마치 그를 피하는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이대로 안 만난다면? 영원히 안 만날 것인가? 그것은 또 아니다. 언젠가 좋든 싫든 만나게 될 것이고 그리 되면 오늘과 같은 경험을 다시 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도망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피하지 말고 부딪쳐보자.’

입술을 질끈 깨물며 결심을 다진 윤아는 수연을 보며 말했다.

“저도 가겠어요.”

남은 것은 주현 하나뿐이었다.

주현은 머리가 복잡했다.

당장 창현에게 찾아가 묻고 싶은 것이 산더미 같았다.

생각을 정리한 주현은 표정을 굳힌 채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저도 갈게요.”

“…응, 그, 그래.”

평소 화를 잘 내지 않는 주현인데 굳은 표정을 보니 순간 느껴지는 위화감에 말을 더듬는 수연이었다.

수연은 멤버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틀 뒤 S본부야. 그때 약속 있는 사람은 모두 취소해. 난 창현이한테 말해서 방송국 출입 여부를 물어보도록 할게.”

그 말과 함께 수연은 방으로 들어갔다. 좀 전처럼 창현의 정체를 알고 있었냐고 추궁 당할까 염려스러워서이다.

수연이 방으로 들어서자 수영이 효연을 보며 말했다.

“아, 배고프다. 오늘은 애들 요리할 기분도 아닌 것 같으니 시켜 먹자. 효연아, 뭐 먹을까?”

“중국집에서 시켜먹자. 난 짬뽕.”

“좋아. 난 짜장면. 너희들은 뭐 먹을래?”

이틀 뒤 창현을 볼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인지 분위기는 한결 풀어졌고, 다른 사람들에 비해 멍한 정도가 그리 심하지 않던 미영과 유리, 순규의 존재로 인하여 소녀들은 평상시와 같은 모습을 회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틀 뒤를 기다리는 그녀들의 머릿속은 각기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다.


이틀이 빠르게 지나고 마침내 현의 데뷔 날이 다가왔다.

현의 구체적인 데뷔 소식은 인터넷을 다시 한 번 뜨겁게 달구었다. 데뷔를 한다고 하여도 일정을 잡고 그러면 조금 늦을 줄 알았는데 데뷔 발표가 무섭게 그 일정이 정해진 것이다.

창현은 자신의 데뷔 소식을 제일 먼저 다크 스타에 올렸다. 그러자 다크 스타 내에서 난리가 났다. 미처 예상하지도 못할 정도로 현의 데뷔가 빠르게 이루어진 것이다.

그럼에도 다크 스타 회원들의 반응 속도는 놀라울 정도여서, 창현의 데뷔 무대에 오겠다고 하는 사람이 모이고 모여들었다.

그 사실을 확인한 창현은 자신을 응원해주는 팬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현의 데뷔 무대는 라샤의 데뷔 때보다 더 많은 관심을 끌어모았다.

라샤가 1집의 성공과 미니 앨범의 성공으로 확실한 인기 스타가 되었지만 어떻게 보면 그 라샤를 키워낸 것이 바로 현이었다. 더군다나 국내에서 백만 장이라는 앨범 판매기록을 세우면서 제2의 서태지라 불릴 만큼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단순히 판매를 했을 뿐인데도 일본에서 오리콘 차트 위클리 3위를 차지할 정도의 기염을 토한 현의 인지도는 이미 국내를 넘어서 아시아 전역에 퍼져 있을 정도로 대단했다. 당연히 그의 실체를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은 것은 당연했다.

얼굴이야 이미 왕지동으로 인하여 볼 사람은 다 본 상태였다. 게다가 공항에서 창현이 모자를 들고 인사를 하는 모습도 누군가가 찍었기에 창현의 얼굴은 널리 알려졌다.

그에 사람들은 아무런 메이크 업을 하지 않았음에도 찬란하게 빛나는 그의 외모를 놓고 갑론을박을 펼칠 정도였다. 몇몇 악플러들은 열여섯에 불과한 소년이 얼굴 전체를 수십억 들여서 뜯어고쳤다는 말을 할 정도로 말이다.

데뷔 날이 되자 창현은 아침 일찍 일어났다.

현재 창현은 집에 들어가지 않은 채 AA엔터테인먼트에서 머물고 있다. 행여 집에 갔다가 운신의 폭이 좁아질 것을 염려하여 당분간 AA엔터테인먼트에서 머물고, 본격적으로 독립하여 앞으로 살아갈 새로운 숙소를 구하는 중이었다.

간단하게 씻은 창현은 모자를 쓰고 나가 인근 분식점에서 아침을 해결하고 회사로 돌아와 곧장 녹음실로 향했다. 데뷔 날인 만큼 만전의 상태로 임하고 싶었기에 녹음실에서 간단하게 노래를 부르면서 목을 풀었다.

막 점심시간이 될 무렵, 라샤가 찾아왔다.

가볍게 노래를 부르다가 이런 저런 시도를 해보면서 다양한 노래를 부르던 창현은 라샤의 방문을 반겼다.

“어서와요, 누나들. 오늘 제 데뷔 무대 도와주신다고 했다면서요? 고마워요.”

창현의 환영 인사에 시린이 화답했다.

“고맙긴! 네가 우리 데뷔 무대를 도와준 것처럼 우리도 널 도와주고 싶을 뿐이야.”

옆에서 미란이 거든다.

“그건 맞아. 하지만 너 잘해야 할 걸? 우린 처음 데뷔하던 그때와는 차원이 틀리다고. 열심히 안하면 무리한테 묻힐 수도 있어.”

그 말에 창현이 피식 웃으면서 몸을 부르르 떨어보였다.

“이거 무서워서 최선을 다해야겠는데요? 한국은 물론 일본마저 제패한 라샤에게 짓눌리지 않으려면 말이죠.”

“맞는 말이긴 한데 왜 기분이 묘하게 나쁘지.”

창현의 말에 표정을 살짝 일그러뜨리며 말하는 미란의 모습에 모두가 웃는다.

“모두 모여있구나.”

즐겁게 웃고 떠드는 사이 석규가 들어왔고, 간단하게 점심을 챙겨먹은 그들은 S본부에 가기 위한 준비를 했다.

석규가 창현을 보며 말했다.

“창현아, 네 매니저는 조만간 뽑도록 할 테니 조금만 참아주어라. 아무래도 믿을 만한 사람을 뽑다보니 조금 지체가 되는구나.”

“저야 상관없어요.”

다행히 라샤를 담당하는 매니저가 총 셋이었기에 어느 정도 빈자리를 채우는 것에 어려움은 없었다.

창현의 스케줄 조정으로 인하여 석규는 미처 창현의 데뷔 무대에 참석하지 못하게 되었고, 창현과 라샤, 그리고 매니저와 코디 등이 S본부로 가게 되었다.

이제 갓 데뷔 무대를 치를 것이기에 늦으면 안 된다는 창현의 주장 하에 그들은 상당히 일찍 도착하게 되었다.

그런데 S본부에 도달할 무렵, 창현은 물론 차 안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마치 뱀처럼 기다란 줄을 만들어낸 채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피켓을 들고 있었는데, 대부분이 현에 관련된 피켓이었다. 대다수가 현을 보러 왔다는 이야기다.

창현은 그 광경을 보고 입을 떡 벌렸다.

“설마 저 사람들…….”

“과연 창현이네. 와…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다 창현이를 응원하러 온 거야?”

“짱이다, 진짜.”

“현의 인기가 어느 정도인지 알 것 같네. 와아!”

감탄을 금치 못하는 라샤 멤버들. 그녀들도 한국에서, 일본에서 정상의 인기를 경험했지만 이 정도로 많은 숫자의 사람들이 응원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모여든 것은 본 적이 없었다. 그만큼 그들이 현의 노래에 매료되어 있다는 것이었고, 그만큼 현의 데뷔를 기다려왔다는 뜻이 된다.

머쓱했는지 창현이 볼을 긁적이며 말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온다니 조금 쑥스럽네요.”

그런 창현의 모습에 라샤 멤버들이 피식 웃음을 지었다. 말은 저렇게 하는데 창현의 표정에는 긴장한 기색이 하나도 안 보였다.

그렇게 그들을 태운 벤은 방송국 안으로 들어섰다.

창현과 라샤에게 배정된 대기실은 두 개였다. S본부에서 엄청나게 신경 써준 모습이 보였다. 특히 창현의 대기실은 다섯 명 이상으로 이루어진 그룹이 쓸 법한 커다란 대기실이었다.

“그럼 이따 리허설에서 뵈요.”

“그래. 조금 있다가 보자.”

라샤와 일별한 창현은 대기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곧장 의상을 갖추고 분장을 하려고 하는데, 코디가 꺼내든 의상을 본 창현의 표정이 급변했다.

“이, 이게 뭐에요?”

코디가 꺼내든 의상은 검은색 의상이었는데, 마치 여성이 입는 드레스처럼 하늘하늘 흩날리는 것들이 많은 의상이었다. 게다가 상체 부분은 촘촘한 망사로 되어 있었는데, 속이 비추지 않더라도 언뜻하면 속살이 보일 정도로 야한 의상이었다.

창현의 외침에 코디가 웃음을 지은 채 말했다.

“요즘 가수들은 이게 기본이야. 그러니 입도록 해. 이미 사장님도 허가하셨어.”

“아, 아버지가 허락하셨다고요?”

얼빠진 표정을 짓는 창현. 설마 석규가 이런 의상을 허락했을 줄이야.

그도 그럴 것이 석규는 창현의 첫 데뷔 무대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길 바랐다. 물론 창현의 실력을 믿는 바였지만 기왕이면 의상을 비롯한 비주얼이 따라주면 더욱 좋지 않겠는가? 여자 가수의 치마도 나날이 짧아지고, 남자 가수의 옷도 점점 작아지는 지금, 창현이 입을 법한 의상은 그리 수위가 높지도 않으면서 창현의 잘생긴 외모를 제대로 어필할 수 있는 옷이기도 하였다.

이리저리 반항을 하는 창현이었지만 결국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코디가 아주 단단하게 마음을 먹고 왔는지 들고 온 의상 외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안 들고 왔던 것이다.

모든 것을 포기한 듯한 표정을 지은 창현은 탈의실로 가서 옷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의상을 갖추고 나오자 코디가 눈을 크게 뜨며 환호성을 질렀다.

“꺄아! 완전 멋있어, 창현아! 너 정말 멋있어. 그리고 섹시해. 겉모습만 보면 그냥 빼빼 마를 줄 알았는데 몸 엄청 좋다.”

창현이 입은 옷은 웬만한 외모의 소유자가 아니면 언밸런스함으로 인하여 자멸을 피할 수 없는 옷이었다. 게다가 몸매 또한 상당히 중요했는데, 상체가 촘촘한 망사에 의해 얼핏 드러날 수도 있는 것이었기에 몸매가 좋지 않으면 소화하기가 힘든 옷이었다.

코디는 내심 창현의 몸매가 매우 말라서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런 생각을 말끔하게 털어버리듯 창현은 탄탄한 몸을 가지고 있었다. 여자라면 누구나 매료될 만큼 섹시한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한동안 창현의 모습에 꺄꺄 거리던 코디는 이내 가까스로 정신을 수습하고는 곧장 창현의 분장을 시작했다. 워낙 인물이 되는 탓에 짙은 화장은 필요 없었다. 오히려 화장이 외모를 가릴 수도 있었기에 최소한의 메이크업을 하고, 본격적인 머리 스타일을 만들어나갔다. 전문가가 관리라도 한 것처럼 창현의 머릿결은 무척 좋았기에 코디가 의도한대로 완벽하게 메이크업을 마칠 수 있었다.

화장과 머리 스타일까지 모두 끝마친 코디가 창현을 보며 엄지 손가락을 내밀었다.

“완전 굿! 창현이 내일 네 팬 사이트에 여성 팬 오만 명이 추가 된다에 내 월급을 걸 수 있을 것 같아.”

졸지에 인형 신세를 져야만 했던 창현이 그 말을 놓치지 않고 눈을 게슴츠레 뜨며 코디를 바라보았다.

“그 말 정말이죠? 저랑 내기 하실래요?”

어릴 때 바비 인형 갖고 놀듯이 창현의 머리를 이리저리 만지면서 좋아하던 코디는 창현의 눈길을 받자 움찔하며 손을 내린다.

“아, 아니. 생각해보니 내가 실수한 것 같네. 방금 이야기는 취소할게.”

“…후우!”

그런 코디를 보면서 한숨을 내쉬는 창현. 그리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분장도 모두 끝났으니 전 다른 분들께 인사를 하고 올게요. 오늘 데뷔인 만큼 제가 먼저 찾아가서 인사를 드리는 게 나을 것 같네요.”

신인가수가 선배가수에게 인사를 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창현이 신인가수라 볼 수 없지만 그가 워낙 일이나 공적인 것에서는 예의를 중요시한다는 걸 알기에 코디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래? 그럼 인사하고 오도록 해. 난 여기 있을 테니까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오도록 하고.”

“네.”

대답을 한 창현은 대기실에서 나와 오늘 가요 프로에 참여하는 가수들에게 찾아가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설마하니 현이 먼저 인사를 하러 올줄 몰랐기에 화들짝 놀라며 그를 맞이했고, 그의 외모와 복장을 보면서 감탄을 금치 못했다. 노래 실력도 실력이거니와 외모와 몸매까지 받쳐주니 절로 감탄이 흘러나오는 것이다. 특히 몇몇 짓궂은 여가수들은 창현의 상반신을 쓰다듬는 장난까지 해보여 창현을 당황케 만들었다.

어찌 하였든 성공적으로 모든 가수들에게 인사를 끝마친 창현이 막 자신의 대기실로 돌아왔을 때였다.

그때, 전화기가 울렸다. 전화번호를 확인하니 수연의 번호였다. 아무래도 방송국에 도착한 듯했다.

“여보세요, 수연 누나? 네, 도착하셨어요? 네, 알았어요. 그럼 제가 아는 분에게 출입증 끊어달라고 할게요. 네, 그럼…….”

통화를 끊은 창현은 대기실에 쉬고 있던 코디에게 부탁했다.

“코디 누나, 제가 아는 사람들 방송국에 지금 도착했데요.”

미리 이야기를 해뒀기에 코디는 무슨 말인지 바로 알아차렸다.

“아, 그 할 이야기가 있다던? 아까 실장 오빠가 출입증 다 끊어놨다고 하니까 내가 전해주러 갈게. 네가 돌아오면 일층에 가서 좀 쉬려고 했으니까.”

“네, 고마워요.”

“뭘, 이거 가지고. 대신 내가 아까 너무 좋아했다는 건 그냥 잊어달라고. 알았지?”

창현을 인형 취급 했던 것을 말하는 것이다.

“하하! 알았어요. 역시 세상에는 공짜가 없네요.”

“당연하지. 그럼 난 가볼게.”

그 말과 함께 코디가 대기실을 나섰고, 대기실에는 창현 혼자 남았다.

홀로 남은 창현은 의자에 앉아 눈을 감았다. 그리고 복잡한 상념에 빠져든다.

“하아! 많이 실망했을 텐데.”

조금 있으면 오게 될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고민하는 창현이었다. 자신이 딱히 잘못한 것은 아니지만 상대적으로 느꼈을 감정도 생각해야 했다. 자신이 현이란 것에 큰 충격을 받았을 사람이 분명 있을 것이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고민을 해봤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창현이 얼마나 고민에 빠져 있었을까.

똑똑똑.

대기실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창현은 직감적으로 소녀들이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자세를 바로하며 말했다.

“들어오세요.”

덜컹.

창현의 승낙과 함께 바로 문이 열린다. 그리고 문앞에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안으로 들어섰다.

“…….”

대기실 안으로 들어선 소녀들은 창현의 모습을 보면서 할 말을 잃었다.


대기실로 들어선 소녀들은 총 아홉 명이었다. 수연이 아직 인사를 못 나눈 멤버들도 데리고 오겠다고 해서 그렇다.

소녀들은 대기실에 들어서고, 창현의 모습을 보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창현의 의상과 분장한 모습에 넋을 잃은 것이다.

수영과 효연은 평소 창현의 모습을 보지 못했지만 나머지 소녀들은 종종 창현의 모습을 보곤 하였다.

그때마다 창현은 별로 꾸민 것이 없는 모습이었다. 옷은 제법 패션을 갖추었지만 머리 스타일은 평범했고, 이렇다 할 화장 같은 것을 한 적이 없다.

남자는 머리 스타일이 반이라는 말이 있다. 기본적인 얼굴만 되도 머리 스타일이 받쳐주면 제법 괜찮아진다는 이야기다.

머리 스타일이 달라지면 사람이 얼마나 달라지는지 지금 여기서 보여주고 있었다.

거기에 살짝 분장까지 하니 평소 모습보다 더욱 성숙해보였다.

평소에는 무척 잘생겼다는 느낌이라면 지금은 정말 연예인이라는 느낌이 물씬 풍겼다. 일반 연예인과 궤를 달리하는 정상에 군림하는 톱스타의 느낌말이다.

창현은 자신에게 집중되는 시선을 느꼈다. 아무래도 연습생이라지만 이런 대기실은 생소할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창현은 먼저 자신과 아직 인사를 나누지 못한 두 소녀를 향해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강창현이라고 합니다. 수영 누나와 효연 누나 맞죠? 아, 누나라 부르는 게 실례가 되나요?”

자신의 이름을 아는 창현의 모습에 수영과 효연은 화들짝 놀랐다. 적어도 그녀들에게 있어서 가수 현이란 존재는 구름 밖에 존재하는 톱스타였기 때문이다.

그런 톱스타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다? 당연히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다.

키가 큰 소녀, 수영은 아직도 얼떨떨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물었다.

“우리의 이름을 아네…요?”

“하하! 그럼요. 아직 데뷔하지 않아도 여러 활동으로 무척 유명한 걸요? 게다가 다른 누나들하고 아는 사이고요. 말은 편안하게 해주셔도 되요. 제가 더 어리니까요.”

“그래? 그럼 편하게 대할게.”

수영이 창현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심통 났는지 효연이 옆에서 끼어든다.

“수영이가 편하게 대하면 나도 편하게 대해도 되지?”

“네, 물론이죠.”

“그런데 애들은 어떻게 만나게 된 거야?”

그리고 수영과 효연의 질문을 답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상당한 친분을 쌓을 수 있었다. 분위기 또한 한결 가벼워졌다.

수영과 효연은 창현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창현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가수 현이라는 사실과 몇몇 고얀(?) 것들에게 보컬 트레이닝을 해주었다는 것뿐이었다.

그걸 빼면 솔직히 창현에 대해 아는 것이 없으므로 인식이 좋을 수가 없었다. 어린 나이에 그렇게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다면 대부분 성격이 오만하고 자기중심적일 것임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곳에 오면서도 염려했던 것이 사실이다. 인기란 것은 사람을 변하게 만드는 고약한 것이기도 해서, 자칫 멤버들이 창현의 돌변한 모습에 상처를 입을까 걱정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두 사람의 기우에 불과했다. 염려와 달리 창현은 싹싹했고, 무척 예의가 바랐다. 걱정하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눈치가 빠른 수영은 분위기가 어느 정도 풀어지자 창현에게 말한다.

“창현이 너 우리 애들한테 할 말이 있다면서. 그것 때문에 불렀던 거 아니야?”

“네, 맞아요. 음!”

고개를 끄덕이면서 창현이 시선을 소녀들에게 옮긴다. 그리고 하나하나 그녀들의 시선과 마주한다.

시선이 마주치자 눈웃음을 지어보이는 미영이나 밝은 표정으로 화답해주는 유리는 괜찮다. 분명 웃고 있는데 흐릿한 살기가 감도는 순규도 그래, 어찌어찌 괜찮다고 할 수 있다. 다만 태연, 윤아, 주현의 눈은 무척 심각했다. 지금 마음이 복잡한 듯했다.

“제 정체가 밝혀지고 많이 놀라셨죠? 정말 미안해요, 누나들.”

“…….”

창현의 인사에 세 소녀는 여전히 심각한 표정을 풀고 있지 않았다.

그런 무거운 분위기를 느꼈음일까, 수연이 앞으로 나서며 분위기 전환을 위해 대답했다.

“놀랐지만 이해해줘야지. 창현이도 사정이 있었잖아. 안 그래?”

유리와 미영을 보면서 말하는 수연.

그녀의 질문을 받은 두 소녀도 분위기가 자못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눈치가 빠른 유리가 수연의 말에 바로 대답했다.

“난 이해해! 오히려 놀라운 걸? 창현이가 현이었다니! 우린 그동안 엄청난 행운을 가지고 있던 거잖아? 다만 이제 연예인이 되니 도움을 못받는 게 조금 아쉬울 뿐이지.”

“유리야, 그게 무슨 말이야? 도움이라니?”

유리의 말에 의아함을 느낀 미영이 의문을 드러냈다.

그러자 유리는 씨익 웃음을 짓고 승자의 표정으로 말했다.

“나랑 태연이랑 순규랑 수연이는 창현이한테 보컬 트레이닝 받았거든.”

마치 어린 아이가 부모님에게 장난감을 선물 받은 것처럼 자랑스럽게 말하는 유리의 모습. 더욱 가관인 것은 그런 유리의 말에 미영은 부러워하는 어린 아이의 모습을 그대로 연출하고 있었다.

“저, 정말? 와! 왠지 요즘 칭찬을 많이 받더라니! 부럽다. 혹시 창현이가 팝송 부르는 것도 봤어?”

“그러엄. 완전 끝내주지. 안 그래, 순규야?”

“응, 그렇지. 정말 잘하더라고.”

그러면서 순규가 창현에게 웃음을 지어 보인다. 분명 웃고는 있는데 무언가 섬뜩한 느낌이 들어 창현은 그 웃음을 마주하지 못하고 찔끔하여 시선을 피한다. 분명 웃고 있고, 풀어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섭섭한 게 조금은 있었나보다.

그래도 마음에 담아두지는 않을 테니 큰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문제는 아직도 표정이 풀어지지 않는 세 사람이다.

창현이 태연에게 다가간다. 한창 성장기인 창현은 처음 태연과 만났을 때 163cm였지만 거의 일 년이 흐른 지금 창현의 키는 169cm까지 자랐다. 게다가 약 5cm정도 높은 신발을 신었기에 상당한 차이가 났다.

태연에게 다가간 창현이 허리를 살짝 굽혀 태연과 시선을 마주한다. 은은하게 풍기는 향수와 창현 특유의 체취가 태연에게 스며든다.

화들짝 놀란 태연이 한걸음 뒤로 물러선다. 지금 창현의 모습은 정면으로 마주하기 부담스러울 정도로 눈부셨다. 게다가 정리되지 않은 마음이 그녀를 뒤로 물러나게 만들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창현이 태연에게 말했다.

“많이 섭섭했죠? 미안해요. 꼭 숨기려고 한 건 아니에요. 다만 여러 사람이 알면 안 좋을까봐 말하지 않았던 거예요. 미안해요, 누나.”

창현의 사과에 태연은 복잡했던 생각에 스르르 사라지는 걸 느꼈다.

따지고 보면 자신에게 미안할 문제도 아니지 않은가?

그녀가 복잡해하던 문제는 엄연히 말하면 창현의 데뷔 소식에서 오는 섭섭함이 아닌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자신의 마음에서 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보고 창현이 사과하자 그녀는 맥이 풀렸다. 자신으로 인하여 창현이 필요없는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

태연은 자신에게 고개를 숙인 창현을 바라본다. 그리고는 저도 모르게 손이 그의 머리 위에 올린다. 살짝 올렸기에 머리 스타일이 망가지지는 않았다.

다만 머리 위에 손을 올림으로써 보고 있던 소녀들이나 창현에게 놀라움을 심어주기에는 충분했다.

태연은 손을 치우면서 고개를 든 창현에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난 별로 섭섭하지 않아. 다만 창현이 네가 현이라는 것에 놀랐을 뿐이지. 그러니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고마워요.”

태연의 말에 창현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고마움을 담아 살짝 고개를 숙여보인 창현이 이번에는 윤아에게 향한다.

그녀는 여전히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활발하게 소녀들과 문자를 자주 주고받던 창현은 근래 들어 윤아와 연락을 한 적이 없다. 아마 그 시점이 뮤직비디오 촬영이 끝났을 무렵이었을 것이다.

곧잘 창현이가 종종 안부 문자를 보내곤 했지만 윤아에게서 도저히 답장이 오질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창현은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게 아닐까 무척 걱정을 하였다.

윤아에게 다가간 창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요즘 무슨 일 있으신 거예요, 누나?”

창현의 물음에 소녀들의 시선이 윤아에게 향한다. 그리고 그녀들의 눈에 깃든 것은 의아함이었다.

무슨 일이 있다니? 하루종일 같이 생활하는 그녀들은 그런 느낌을 받은 적이 전혀없다. 그러니 창현의 갑작스러운 말에 의문을 느낄만도 했다.

윤아는 창현의 물음에 화들짝 놀라며 양손을 저어 부인의 뜻을 보였다.

“내, 내가 뭘! 아무 일도 없었어.”

그러다가 그녀는 흠칫하며 얼굴을 붉혔다. 창현의 얼굴이 자신과 너무 가깝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그러자 뮤직비디오 촬영 때의 일이 떠올라 그녀의 머릿속에는 부끄러움이란 감정이 가득 차오르기 시작했다.

붉어진 윤아의 얼굴을 보며 창현이 살짝 뒤로 물러서며 싱긋 웃음을 지었다.

“그래요? 아무 일이 없었다니 다행이네요. 그런데 누나는 제가 정체를 숨겨서 화가 난 거예요?”

“응? 아니. 난 화 안 났어…….”

“그래요? 다행이다. 그럼 예전처럼 다시 연락하고 지내도 되는 거죠?”

거의 세 달 동안 연락이 되지 않았기에 묻는 것이었다.

윤아는 그러고 보니 그동안 자신이 창현의 모든 연락을 무시했다는 것을 깨닫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난 괜찮아.”

“잘 됐네요. 전 누나가 저에게 화가 난 줄 알고 걱정했거든요.”그러면서 웃음을 지어 보이는데, 윤아는 차마 그 웃음을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인다.

‘그런 게 아니라 네 그런 웃음을 보면 내 마음의 벽이 다시 무너져서 그랬던 거야.’

그렇게 생각하는 그녀의 얼굴에는 더 이상 복잡한 표정은 존재하지 않았다. 벽이란 것은 창현의 얼굴을 본 순간 다시는 쌓아올릴 수 없을 정도로 산산이 부서진 상태였다.

더 이상 마음의 벽을 쌓는 것은 무리다. 이미 터진 둑을 다시 쌓으려고 해봤자 금방 무너질 테니까.

이렇게 된 이상 남은 것은 정면 돌파뿐이었다.

‘피하려 들지 말자. 정면으로 맞서는 거야. 창현이가 톱스타인 만큼 나도 톱스타가 되면 돼. 우선 그것만을 목표로 삼자.’

윤아가 주현에게 향하는 창현의 모습을 쫓으며 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마지막은 주현 누나인데…….’

모든 난관을 돌파한 창현은 주현에게 접근하면서 침이 바싹 마르는 걸 느꼈다.

지난 시간 동안 소녀시대 멤버들 중에서 창현과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한 것이 주현이었다.

학교에 마련된 정자에서 처음 만난 둘은 보컬 트레이닝을 계기로 친해졌고, 놀이공원과 수학여행 등을 함께 하면서 돈독한 친분을 쌓은 상태였다.

그녀가 창현을 현이라 의심할 때도 있었지만 창현은 그것을 무사히 넘기는데 성공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현이란 것이 밝혀졌다. 처음부터 몰랐다면 차라리 편했을 것이다. 하지만 창현은 좋든 싫든 주현을 속인 상태였다.

그 매듭을 확실하게 풀어야 한다.

다른 누나들에게 대할 때와 달리 창현은 무척 조심스러운 모습으로 주현에게 물었다.

“주현 누나, 화 많이 나셨어요?”

“…….”

창현이 말을 걸자 주현은 복잡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러면 안 되지 하면서도 창현을 보는 순간 섭섭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의상을 갖추고 분장을 한 창현은 가만히 있어도 절로 빛이 났다. 연예인이라는 느낌. 사적으로 만날 때 외모가 뛰어나다는 걸 알았지만 제대로 꾸민 창현은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는 뛰어난 외모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주현이 느끼는 괴리감은 더욱 컸다.

현은 국내에서만 백만 장이 넘는 앨범을 판 가수다. 가창력은 국내 정상급이고,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그의 멜로디는 대중들을 열광시킨다.

그뿐만이 아니라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 각국에서도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다. 국내를 넘어선 아시아 스타인 것이다.

생각해보라.

호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수천만 아니, 수억 명의 환호를 받는 스타가 되었다고 보자. 그럼 그 사람은 어떤 감정을 느끼겠는가?

축하하는 마음도 분명 있을 것이다. 아니, 있다. 하지만 그보다 만만치 않게 가슴을 채우는 것은 허탈한 마음이다.

친근하다고, 가깝다고 생각하던 대상이 어느 순간 저 멀리 떨어져 있는 기분은 생소하면서도 두 번 다시 느끼고 싶은 감정이 아니었다.

그랬기에 주현이 섭섭한 마음을 느끼는 것이다. 누구보다 창현과 친하다고 생각했기에, 자신이 어느 정도 알아차리고 있었음에도 창현이 그 비밀에 대해 말해주지 않아서 말이다.

물론 그건 자신만의 생각이었다. 만약 자신이 창현이었더라도 가수였다는 것을 숨겼을 것이다. 모든 이유를 떠나 인간대인간으로서 친분을 가지고 있고, 호감을 느끼고 있다면 그러한 요소들을 배제한 채 순수한 만남을 가지고 싶었을 테니까. 정체가 밝혀지면 상대나 본인이나 부담스러워할 것임이 분명했다.

머리로는 이해를 하는데 가슴은 이해를 하지 못한다. 창현의 입장을 이해하면서도 한편으로 섭섭한 감정이 느껴진다는 건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간사하다는 건지 그녀는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이래서 공식데뷔 전에 먼저 이야기를 하려고 한 건데.’

창현은 속으로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걸 염려하여 데뷔 사실을 보도하기 전에 모두에게 먼저 말을 하려고 했다. 자신이 직접 말하고 이해를 구한다면 어떻든 간에 모든 사태를 최소화로 줄일 수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왕지동으로 인하여 그 계획은 산산이 부서졌고, 결국 쫓기듯 부랴부랴 데뷔를 하게 되었다. 데뷔 사실이 보도되고 난 후에 이렇게 이해를 구하는 것과 먼저 이야기를 하는 것은 상당한 차이가 있다.

씁쓸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일은 벌어졌고 수습은 불가능한 상태였다.

“주현 누나. 많이 섭섭한 건 저도 알아요. 하지만 저도 어쩔 수가 없었어요. 기분이 좋지 않겠지만 절 이해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입술을 질끈 깨물며 창현이 말한다. 이게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사과였다. 이것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그도 실망할 것이다.

그런 창현의 모습에 주현은 살짝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그의 어조는 강했고, 상대방에게 답을 요구하고 있었다.

주현은 자신이 실수를 했음을 깨달았다. 지금 창현은 자신에게 굳이 사과하지 않아도 될 일을 사과하고 있는 것이다.

판단이 서자 그녀는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솔직히 섭섭하기는 했지만 난 창현이 네 입장을 이해해. 그러니 사과 하지마. 내가 너무 미안하잖아.”

주현의 말을 듣는 순간 창현은 맥이 탁 풀렸다. 자신이 사과를 함에도 아무 대답이 없는 주현의 모습에 살짝 뿔이 났었는데 그녀의 대답을 듣는 순간 자신에게 화를 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 나름대로 생각이 복잡해서 그러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창현은 웃음을 지었다.

“미안하긴요. 전 가수 현으로서 말하는 것이 아닌 누나의 후배 창현으로서 말하는 거예요. 그럼 화 푸신 거죠?”

창현의 표정이 풀어지자 주현은 안심한 표정을 지으며 웃음을 지어보였다.

“애초에 화가 나지 않았는 걸? 창현이가 가수 현이 되었지만 앞으로도 나 모른 척하면 안 돼?”

주현의 말에 창현이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하하하! 물론이에요. 가수이기 전에 전 한 사람의 강창현으로서 남고 싶으니까요. 주현 누나의 후배이고, 다른 누나들의 친한 동생 강창현이요. 전 그렇게 생각하는데 설마 누나들은 아니었나요? 제가 인기를 얻었다고 누나들을 모른 척 할 만큼?”

소녀 하나하나와 시선을 마주하며 창현이 묻자 그녀들은 고개를 도리도리한다. 그녀들도 알고 있던 것이다. 창현이 진즉에 인기를 원하고, 연예인이 되고 싶었더라면 첫 앨범인 <Go&Stop> 때 이미 데뷔를 했을 거란 것을. 그때 데뷔를 했어도 창현은 충분히 성공을 했을 것이다. 당시 반응도 엄청났었으니 말이다.

이제 갓 창현을 만난 수영이나 효연은 모든 사정을 모르지만 지금 보여준 창현의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그에게 신뢰를 줄 수 있었다.

그녀들의 모습에 창현이 미소를 짓는다. 언제나 그러하지만 남에게 신뢰를 얻는다는 것은 사람을 기쁘게 만든다.

창현은 그녀들의 반응에 기분이 좋아짐을 느끼며 외쳤다.

“누나들이 절 믿어주니 정말 좋네요. 좋아요! 오늘 저녁은 제가 사겠습니다.”

“와!”

창현의 외침에 터져 나오는 소녀들의 환호. 원래 석규와 라샤가 함께 회식을 하자고 했지만 같은 기획사 안에서 언제든지 만날 수 있는 그녀들과 달리 눈앞의 소녀들은 이제 만나기가 힘들지 않던가? 그래서 사전에 양해를 구해놓은 상태였다.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어느덧 본방 시간이 다가왔다. 리허설은 못한 상태. 하지만 얽힌 매듭을 모두 푼 창현은 만전의 상태였다.

자신의 차례가 다 되었다는 스태프의 말에 창현이 소녀들에게 말했다.

“관객석에서 지켜봐주세요. 저의 첫 데뷔 무대를.”

창현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자리하고 있었다.


대화가 생각보다 길어졌기에 창현은 리허설에 참가를 하지 못하였다. 보통 리허설에 참가하지 못하게 되면 담당 PD나 스태프들이 기분 나빠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가수 본인이 아닌 매니저나 다른 코디 등이 와서 사정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창현이 직접 찾아와서 양해를 구하니 그들은 화를 낼 수 없었다. 이미 국내에서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그의 명성은 오늘 방송 시간마저 재편성 할 정도로 엄청난 파워를 가지고 있었다. 보통 그 정도 인기가 있는 사람은 엉덩이가 무겁고 거드름을 피울 법했다. 특히 창현 같이 어린 나이에 많은 인기를 얻으면 교만에 빠져서 그런 경우가 종종 발생하곤 한다.

허나, 창현은 그런 아이돌과 달리 직접 찾아와 공손하게 사정을 말하고 선처를 구했다. 예상과 다른 공손하고 예의바른 모습에 그들은 이해하고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소녀들과 이야기를 끝내고 대기실을 나서니 어느새 창현의 차례가 다가왔다.

우선 소녀들을 관객석 근처로까지 안내한 창현은 대기실로 향한다. 차례를 보니 바로 다음이 자신의 곡이다.

원래 창현이 나오지 않았다면 1위 후보곡으로서 피날레를 장식했을 것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창현의 데뷔로 인하여 피날레를 위한 들러리로 주저앉게 되었다.

마침내 1위 후보곡들이 모두 공연을 끝마쳤다. 본래대로라면 이제 1위를 선발해야겠지만 예정이 변경 되었다.

와아아아아아아!

공연이 끝나자 마침내 마지막 무대가 남았다는 걸 안 관객들이 함성을 지른다.

MC는 그런 관객들을 보며 웃으면서 큰소리로 말한다.

“자! 이제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분이 오셨습니다. 국내 음반 시장을 뒤흔든 장본인이자, 한국, 일본,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각국과 미국마저 지배할 작곡계의 마이더스 손! 가요계의 뮤즈! 라샤와 함께 펼쳐 보일 그의 최고의 무대를 함께 보시죠! 라샤의 <Yesterday>!”

♩♪♬♩♪♬

잔잔하게 깔리는 MR과 함께 무대 위에 세 여인이 등장한다. 바로 8주 연속 1위라는 기염을 토한 <Yesterday>를 부른 라샤였다.

와아아아아아아!

라샤의 등장에 환호를 터뜨리는 관객들. 이미 국내에서 그녀들의 인기는 절대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정규 1집 때보다 한층 성장된 가창력과 표정 연기로 관객들을 사로잡는 그녀들의 달콤한 목소리. 어제의 일을 회상하는 소녀의 두근거리는 마음이 그대로 목소리와 표정에서 묻어나오는 듯하였다.

노래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이미 정상의 자리를 차지한 라샤는 창현의 지도하에 부르는 노래의 매력을 끌어내어 듣는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어찌 보면 라샤는 아직 데뷔가 1년도 되지 않은 신예 그룹이었다. 하지만 무대 위에 선 그녀들의 무대 장악력이나 가창력은 이미 몇 년 동안 경험을 쌓아온 가수들에게 뒤처지지 않았다.

그랬기에 그녀들이 부르는 <Yesterday>는 신예 그룹의 패기 넘치는 신인의 열정과 성숙한 가수의 노련미가 공존하고 있었다. 이런 느낌을 주는 그룹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전보다 더욱 능숙하고 세련된 가창력을 선보이자 관객들도 감탄을 금치 못한다. 청순하면서 도발적인 섹시함을 가진 시린과 눈웃음과 품위가 있어보이는 세룬, 도도하면서 한편으로는 소녀 같은 감성을 지닌 미란의 모습은 보는 관객들을 매료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마침내 그녀들의 파트가 끝나고, 현의 파트가 찾아왔다.

그러자 무대 뒤쪽에서 푸쉬! 하는 소리와 함께 하얀 연기가 뿜어져 나온다.

그것은 마치 라샤의 데뷔 무대를 재현하는 것과 같았다.

짙은 안개가 낀 것 마냥 한치 앞도 분간이 안 되는 곳.

새하얀 백색의 공간에 드리우는 검은 실루엣이 있었다.

약 십여 초의 간주 구간이 마치 타임 슬립의 순간처럼 마법같이 펼쳐진다.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그는 당연히 가수 현으로서 정식 데뷔 무대를 갖는 현이었다.


모습을 드러낸 창현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절로 탄성이 터져 나올 정도로 준수한 모습이었다.

메이크업을 하지 않은 사진이 인터넷에 유포되었을 때도 말이 많았던 창현의 외모였다.

오죽하면 음반을 발매하고 그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까닭이 음악해서 번 돈으로 외국에 가 수십억을 들여 성형할 시간을 벌려고 했다는 말이 돌 정도였겠는가? 그만큼 창현의 외모는 남자들의 질투를 뛰어넘어 동경의 대상으로 자리할 정도로 대단했다.

그 외모에 약간의 분장을 곁들이니 무대 위에서 더욱 빛을 발할 수밖에 없었다.

살짝 흘러내려 눈을 가리는 머리는 마치 샴푸 광고처럼 찰랑거림을 자랑하였고, 눈에는 썬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그리고 하늘하늘하면서 촘촘한 망사로 되어 있는 상의는 과하지 않으면서 여성으로 하여금 섹시함을 느끼게 해주고 있었다. 상의와 연결되어 있는 하의는 창현의 긴 다리를 더욱 돋보이게 해주고 있었다.

십여 초의 간주는 마치 마법과도 같았다.

시끄럽던 관객들은 입을 다문 채 가수 현의 등장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현의 등장에 집중한 나머지 그의 몸짓, 손짓 하나에 점차 빨려 들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라샤가 있는 무대 중앙에 도착하자 창현의 파트가 시작된다.

입가에 살짝 미소를 지은 창현의 입에서 달콤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달콤한 두근거림, 달콤한 회상. 시린에게 다가간 창현은 그녀의 머릿결을 살짝 매만지면서 행복한 미소를 짓고, 어제의 회상에서 헤어 나와 오늘의 현실에 마주한다.

창현은 시린의 머릿결을 매만졌고, 세룬의 눈물을 훔쳐주며, 미란의 콧등을 살짝 눌러주었다. 과격한 의사표현은 하나도 없었건만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누구보다 다정하고 달콤하게 보이는 스킨쉽이었다.

약 삼십여 초의 파트가 모두 끝나고, 다시 라샤의 파트로 돌아온다. 그녀들은 창현의 애드리브에 가까운 즉석 행동에 다소 당황하면서도 자신의 파트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뒤에서 창현이 화음을 넣어줌으로써 기존에 들을 수 없던 완벽한 <Yesterday>가 라이브로 구현되었다.

마침내 노래가 끝나자 관객들의 해일과도 같은 함성이 들려온다.

와아아아아아!

그에 라샤 멤버들은 모두 싱긋 웃으면서 감사의 인사를 표한 뒤 퇴장을 하였다.

관객들은 라샤와 현이 선사한 최고의 무대를 음미할 시간이 미처 없었다.

뒤이어 창현의 데뷔 곡 <Go&Stop>이 흘러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한 소년의 용기와 희망, 시련을 담아낸 이 곡은 유행에 편승하지 않은 독창적인 멜로디로, 햇수로 이 년이 되었음에도 아직도 엄청난 인기를 얻고 있다.

<Yesterday>가 달콤한 분위기였다면 <Go&Stop>은 한 소년의 일대기를 펼쳐놓은 복합적인 분위기의 노래였다.

때론 슬프고 때론 기쁘다. 음에 완벽한 감정 이입이 안 된다면 시도조차 해보지 못할 노래가 바로 <Go&Stop>이었다.

창현은 지금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끌어내어 노래를 부르는 중이었다. 음향총서에 수록된 음악강론에는 무려 수백 가지의 노래 기교가 존재한다. 궁극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것을 목표로 하는 이러한 창법 중 몇 개는 이미 완벽하게 익힌 상태였다.

만류귀종이란 말이 있듯이 궁극은 하나로 통하게 된다. 슬픔에는 수많은 종류가 있지만 그것을 세세하게 표현하지 않아도 된다. 단지 커다란 줄기인 슬픔 하나만 담아내면 그 음악을 듣는 사람은 각각 자신 속에 존재하는 슬픔이라는 키워드가 작용하여 자신만의 슬픔이 떠오를 테니까.

그가 하는 것은 커다란 맥을 잡아 다수의,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울릴 수 있는 그런 노래를 하는 것이었다.

관객들은 창현의 노래에 압도된 나머지 함성조차 지르는 것을 잊은 채 그의 노래에 몰두한다. 무대 위는 오로지 창현의 목소리만이 울리고 있었다. 누구도 의식하지 못한 사이 창현의 목소리가 이미 무대는 물론 관객마저도 장악한 것이다.

노래를 부르던 창현이 마침내 도달한 것은 <Go&Stop>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고음 부분.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고음은 힘들고 고된 일상생활을 이어나가는 사람의 마음을 뻥 뚫어주는 마력을 담고 있었다.

창현의 고음 파트에서 관객들은 그제야 정신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함성을 질렀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무대를 진동시키는 엄청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이것은 하나의 경이였다. 그 누가 눈앞의 가수처럼 관객들을 압도한단 말인가. 그것은 놀라움, 경악을 넘어선 경외에 가까웠다.

하이라이트 부분이 끝났지만 창현은 마지막마저 소홀하지 않았다. 뭐든지 시작하는 것은 좋으나 마무리를 하는 것은 힘든 법이다. 관객들의 엄청난 호응 속에 마음이 풀어질 법도 하였지만 창현은 결코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아버지가 왜 날 무대 체질이라 했는지 알 것 같아.’

자신의 노래를 듣고 호응을 보내는 관객들의 모습을 보면서 창현은 자신의 심장이 거세게 뛰는 것을 느꼈다. 과격한 안무로 인하여 심장이 뛰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는 자신의 존재 증명이었다. 관객들이 함성을 터뜨리는 순간 겉잡을 수 없는 희열이 온몸을 휘감았다.

관객들의 엄청난 함성 속에 마침내 <Go&Stop>도 끝이 났다.

노래가 끝나자 창현은 가볍게 숨을 몰아쉬었다. 도저히 인간이 내는 소리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질러댔으니 약간 과부하가 걸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모든 힘을 다한 탓인지 창현의 몸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몸에도 땀이 나서 옷이 착 달라붙었는데, 그것은 여성이 보기에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섹시했다. 근육이 있는 몸은 아니었지만 창현의 체구는 외모와 달리 제법 탄탄해서 그렇다. 촘촘한 망사 때문에 안이 보이지 않지만 살짝 비춰지는 것만으로도 욕망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십여 초의 공백 끝에 다시 MR이 흘러나온다. 무려 백만 장을 넘게 판 가수 현의 정규 1집 앨범 타이틀 곡 <Bad Boy>인 것이다.

나쁜 소년이라는 제목답게 <Bad Boy>는 약간 건방지고 톡톡 튀는 음미 인상적이라 할 수 있다.

썬글라스 아래로 드러난 창현의 입가에는 살짝 미소가 걸렸다. 소위 말하는 나쁜 남자의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밉지 않게 느껴지는 건 잘생기면 뭐든지 좋게 보이는 말이 맞다는 걸 증명하고 있었다.

약간 건방진 듯한 목소리와 사람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가사는 여성에게 어필하기 위해 비주얼을 중심으로 한 남성 아이돌과 달리 남자들에게도 강렬한 공감대를 심어주고 있었다. 왜 자신이 나쁜 남자가 되어야 했는지, 왜 높은 이상을 가지고 있는 자신에게 이런 현실이 닥치는지, 공감대를 형성하고 그것을 나쁜 남자의 컨셉으로 위트 있게 풀어낸 <Bad Boy>는 감정과 공감대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는 노래였다.

<Bad Boy>의 하이라이트라면 당연히 썬글라스를 벗는 장면일 것이다. 당시 뮤직비디오의 어두운 조명 아래 현이 썬글라스를 벗으면서 화면을 쳐다보는 눈빛은 수백만 명의 여성 팬들을 매료시킬 만큼 엄청난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 부분이 다가오자 점점 관객들의 눈에 기대감이 서리기 시작한다.

입가에 여전히 건방진 미소를 지은 채 마침내 하이라이트 부분이 되자 창현은 눈앞을 가리는 머리를 살짝 쓸어 올린다. 그리고 썬글라스를 잡으며 거칠게 벗어버린다.

창현은 자신의 무대에서 이 부분이 제일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저번에 석규와 이야기를 나눌 때, 창현은 현의 얼굴을 모르던 관객들에게 자신의 이미지를 확고하게 각인 시키기 위한 방법을 고안했다고 하였다. 그것이 바로 지금 이것이었다.

그에게는 남들이 가지지 않은 것이 있지 않은가? 내공! 바로 그것이었다.

썬글라스를 벗는 순간 창현은 자신이 가진 모든 내공을 한 번에 터뜨려버리듯이 그것을 안광으로 뿜어낸다.

그러자 눈에 보이지 않는 엄청난 양의 기파가 창현의 눈에서 뿜어진다. 그것은 마치 해일처럼 관객들에게 퍼져나가면서 한순간 그의 눈빛에 넋이 나가버린다. 완전히 압도된 것이다.

<Bad Boy> 자체가 눈빛이 강렬한 주인공이 늘 썬글라스를 쓰고 다니면서 여러 여자와 어울리는 이야기였다. 창현의 표정 연기는 나쁜남자지만 매력적인 남성의 모습을 연출했고, 하이라이트인 썬글라스를 벗는 부분에서는 내공을 사용함으로써 관객들에게 절대 잊을 수 없는 강렬한 이미지를 각인 시켜주었다.

함성마저 멎어버린 채 자신에게 집중하는 관객들에게 미소를 지어보인 창현의 눈이 빠르게 움직인다. 그리고 한쪽 관객석에서 넋을 잃은 채 자신을 바라보는 아홉 명의 소녀들이 보였다.

노래가 끝날 때, 싱긋 미소를 지어보인 창현이 그때까지 손에 쥐고 있던 썬글라스를 힘껏 던졌다. 썬글라스가 날아가는 것은 아홉 명의 소녀가 있는 곳이었다.

……!

와아아아아아아!

관객들은 그런 창현의 행동에 의아함을 느끼다가 이내 함성을 터뜨린다. 무대 장악력과 가창력, 모든 것이 최고인 무대였다.

노래가 끝났음에도 환호성은 여전했다.

창현은 그런 관객들의 반응에 흘러내린 머리를 다시 쓸어올리며 기쁨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외쳤다.

“감사합니다!”

더할 나위 없는 최고의 무대였다.


현이 보인 무대는 충격적이었다.

뒤늦게 MC가 나와 1위를 발표했지만 관객들의 정신은 온통 다른 곳에 팔려 있었다. 그만큼 현의 무대는 그들에게 있어 강렬한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었다.

무대에서 내려온 창현은 곧장 대기실로 돌아왔다.

대기실 안으로 들어서자 코디와 임시 매니저가 있었다.

창현은 코디를 보며 입을 열었다.

“자, 이제 가죠. 저 어땠어요, 오늘?”

“…어, 응? 뭐라고?”

제정신이 아닌 듯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창현을 바라보는 코디.

그 모습을 보며 창현이 기괴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표정이 그래요? 어디 아파요, 누나?”

창현의 물음에 고개를 저은 코디는 창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 아냐. 그보다 더 무대…….”

코디가 말끝을 흐리자 창현이 재촉했다. 본인 스스로는 만족했지만 제3자의 시점에서 바라본 무대는 어땠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무대 뭐요? 어땠어요?”

창현의 재촉에 코디가 그를 본다. 그녀의 눈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완전 짱이었어! 주변에서 대박대박 했지만 솔직히 실감을 못했거든. 창현이 너 노래 완전 잘하더라! 짱이었어 정말.”

그러면서 이리저리 말을 더하면서 찬사를 하는데, 듣는 창현의 얼굴이 화끈해질 정도로 칭찬 일색이었다.

그 칭찬에 창현은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솔직히 일말의 불안함이 있었는데 이렇게까지 말해줄 정도라면 적어도 반응이 나쁘지 않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하하, 그래요? 다행이네요. 그럼 이제 가야죠.”

창현의 말에 코디가 그제야 정신을 되찾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분장 지워야지. 그리고 옷도 갈아입어야 하고.”

코디의 도움을 받아 분장을 모두 지워낸 창현은 벤을 탄 채 곧장 방송국을 벗어났다.

벤을 타고 창현이 도착한 곳은 AA엔터테인먼트가 아닌 그가 살고 있는 집이었다. 데뷔 무대를 성공적으로 하였기에 더 이상 회사에 머물 이유가 없는 것이다.

벌써 창현의 거처를 알아냈는지 몇몇 사람이 아파트 주변에 포진해 있었다.

창현은 그걸 모르고 있었는데, 막 들어서려고 할 때 일단의 무리가 창현의 앞을 가로막았다. 모자를 눌러 썼음에도 그를 알아보는 사람들은 바로 기자들이었다.

기자들이 대단해서도, 창현이 어수룩해서도 아니다. 단지 경험이 조금 부족해서 그런 것이었다. 그리고 기자들이 있을 것이란 건 어느 정도 예상을 했던 바였다.

창현의 앞을 가로막은 기자가 물었다.

“가수 현씨가 맞습니까?”

창현은 순순히 대답했다.

“기자님이 생각하시는 가수 현이라면 제가 맞을 겁니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 정중하게 나온 탓일까?

창현의 모습에 기자의 눈에 이채가 서리더니 자기소개를 한다.

“N뉴스의 서병태라고 합니다. 간단한 인터뷰가 가능하겠습니까?”

그 모습에 창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금은 인터뷰를 할 때가 아니었다.

“이곳에 계실 줄 어렴풋 알았지만 정말 있을 줄은 몰랐네요. 질문에 답을 해드리고 싶지만 저희 기획사 사장님께서 오늘은 조용히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유감이지만 질문에 대한 답은 못해드릴 것 같습니다.”

“그, 그런…….”

부드러운 거절에 살짝 당황한 모습을 보이는 기자들. 이렇게 웃으면서 거절하면 뭐라고 하기도 힘들지 않은가. 게다가 창현은 아직 소년이었고, 윽박지르기에는 그의 이름이 너무 크다.

당혹하는 기자들의 모습에 창현은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언론을 적으로 돌리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 줄 알고 있다. 이들은 자신을 취재하기 위해 여기서 오랫동안 기다렸을 터. 그러다가 목표물인 자신을 발견했으니 어떻게든 한건을 물고 가고 싶겠지. 여기서 일방적으로 거절의 의사를 보이면 자신에게 반감을 가질 수 있으리라.

적당한 당근이 있어야 함을 깨달은 창현이 기자들에게 말했다.

“제가 이렇게 일방적으로 요구하기는 솔직히 뭣하죠. 절 만나기 위해 오랫동안 기다리셨을 테니까요. 그러니 한 가지 권한을 드릴게요. 아마 내일 오전쯤이면 AA엔터테인먼트에서 연락이 오겠지만 오후에 공개 인터뷰를 할 생각입니다. 내일 인터뷰에서 질문을 할 수 있는 권리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어떻습니까?”

창현의 말에 실망한 기자들의 눈에 빛이 났다. 눈앞의 소년은 어리지만 밀고 당기기를 분명히 할 줄 아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질문을 할 수 있는 권리는 그들에게 있어 무척 요긴하게 사용될 수 있다. 그만큼 예리한 질문을 하면 가수 현의 실체를 좀 더 깊게 파헤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기자회견이 끝날 경우 누구보다 빠르게 기사를 작성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제일 확실한 현의 정보를 제일 먼저 보도할 수 있다는 뜻이다.

급 화색을 띠는 기자들의 모습에 창현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명함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아무래도 제가 기자님들의 이름을 모르니까요.”

창현의 말에 기자들은 저마다 명함을 꺼내 창현에게 내민다.

“여기 있습니다.”

“저도…….”

총 다섯 장의 명함을 받은 창현이 그것을 잘 챙긴다.

지갑에 명함을 꽂은 창현은 여전히 미소를 지은 얼굴로 그들에게 말한다.

“그럼 내일 뵙도록 하겠습니다. 약속은 반드시 지킬 테니 염려하지 마시고요.”

그러면서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 뒤 엘리베이터를 잡고 올라가는데, 그 모습을 지켜보는 기자들의 표정은 묘했다.

여태까지 연예인의 뒤를 쫓으면서 이런 경험은 처음이리라.

그들은 기자 인생 중 처음으로 취재 인물을 눈앞에 두고 놓친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기분이 나쁘지 않은 것은 정말 묘한 경험이 아닐 수 없었다.


집으로 돌아온 창현은 곧장 씻은 뒤 외출 준비를 하였다.

그가 가요 프로가 끝나자마자 급히 집으로 돌아온 까닭은 소녀시대 멤버들에게 저녁 식사를 사기 위함이었다.

오늘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지 않았던가. 내일부터 활동을 시작하면 앞으로 사적인 자리에서 만나기는 힘들어질 것이다. 게다가 자신의 정체를 숨겼던 것도 있기에 사과도 할겸 하여 저녁을 대접할 생각이었다.

아직 날씨가 쌀쌀했기에 겨울용 분홍색 후드티를 입은 창현이 모자를 쓰고 거울을 보다가 멈칫한다.

“오늘 방송을 했으니 알아볼 수도 있겠지.”

아직 인기를 실감하지 못하고 있지만 이제부터 자신이 공인이라는 의식은 있었다. 행여나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생기면 일이 복잡해질 수도 있기에 창현은 모자를 쓰고, 도수 없는 안경까지 꺼내 쓴다. 패션의 일종으로 사놓았던 건데 이렇게 변장을 할 땐 유용했다.

“오케이, 변장 완료.”

분장을 하고 노래를 부른 모습은 나이에 비해 성숙해 보이는 모습이었다면 지금은 어딜 봐도 패션 스타일이 좋은 소년에 불과해보였다. 여기에 자신이 조심만 한다면 들키는 일은 없을 것이라.

옷을 빠르게 갈아입은 창현은 집을 나서다가 다시 멈칫한다.

“그러고 보니 돈이 충분한지 모르겠네.”

써도 써도 마르지 않을 정도로 돈이 많았기에 대충 뽑아서 얼마가 남았는지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썼기에 당장 지갑에 얼마가 있는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지갑이 얇다는 걸 느낀 창현은 근처 편의점에 가서 돈을 뽑았고, 곧장 약속 장소로 향했다. 자신은 집에 들렸다가 약속장소로 가는 것이고, 소녀시대 멤버들은 방송국에서 곧장 오는 형태였다.

약속장소에 도착하니, 다행히 늦지 않을 수 있었고 곧이어 소녀시대 멤버들과 만남을 가질 수 있었다.

그녀들은 창현의 무대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였는데, 마지막 부분에서 창현이 던진 썬글라스를 자신이 받았다고 연신 자랑하던 미영은 좌 수연 우 윤아 전 태연 후 주현에게 사방을 점거 당한 뒤 처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그 모습을 보면서 창현은 웃음을 지었지만 한편으로는 숨겨진 그녀들의 내면을 본 것 같아 속으로는 바짝 쫄았다. 그래도 앙금은 모두 풀렸는지 창현에게 불똥이 튀지는 않았다.

약속 장소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고기집에 도착한 그들은 고기를 먹으면서 남은 앙금들을 말끔하게 털어낼 수 있었다. 특히 창현은 쾌활한 수영과 쿨한 효연하고 짧은 시간에 돈독한 친분을 쌓을 수 있었다.

밥을 먹고 난 뒤 소화를 시킬 겸 노래방을 갔다. 그리고 소녀들은 아주 죽도록 노래만 불러댔는데, 창현도 그 대열에 합류하여 마음껏 스트레스를 품으로써 남아있던 고민의 잔재를 말끔하게 털어낼 수 있었다.


밤 9시가 되자 창현과 소녀들은 헤어졌다. 자주 연락하자는 의미에서 핸드폰 번호를 교환하였고, 만나기 전보다 밝은 얼굴로 헤어질 수 있었다.

곧장 집으로 향한 창현은 아까 전과 다른 기자들을 볼 수 있었지만 워낙 변장을 잘한 탓인지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집에 도착한 창현은 가볍게 씻은 뒤 인터넷을 켜보았다. 자신의 무대가 어떠했는지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연예 뉴스란으로 들어가니 온통 자신에 관한 뉴스뿐이다.


-가수 현, 파란의 데뷔.


-미래의 월드스타, 현玄.


-백만 여성 팬을 사로잡은 현의 데뷔.


기사들을 스윽 훑어보니 나쁘게 다룬 것은 없었다. 오히려 찬양에 가까운 기사들뿐이었다. 리플도 간간이 성형의혹을 나타내는 소수의 악플을 제외하고는 대체적으로 호의적이었다. 특히 방송을 본 사람들은 창현의 얼굴이 후끈거릴 정도로 찬양에 가까운 리플을 남기고 있었다.

자신을 칭찬하는데 기분이 나쁠 리가 없다.

모니터를 보는 창현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자리하고 있었다.

데뷔는 성공적이었다.




제21장 공식 기자회견




데뷔 무대를 치르고 다음 날이 되었다.

아침 일찍 일어난 창현은 양치를 한 뒤 세면을 끝내고 머리를 감았다. 그리고 머리를 말리면서 교복을 챙겨 입었다.

오늘은 개학식을 하는 날이었다. 석규와 라샤가 창현과 함께 중국에서 급하게 돌아온 감이 있었던 것은 본래 계획에서 어긋난 것도 있지만 창현의 데뷔 문제와 그의 개학도 함께 하고 있어서이기도 했다. 본래 계획대로였다면 창현 혼자 귀국하고 석규와 라샤는 중국에 남아 기획사들과 여러 협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교복을 입고 머리를 말리면서 거울을 들여다보던 창현이 중얼거렸다.

“학교에 가는 건 어쩔 수 없는 사항이지만 조심해야 하나?”

자신의 인기를 제대로 실감하지 못하는 창현이었지만 연예인이 된 이상 모든 행동 하나하나를 조심해야 한다. 전과 같이 모든 것에 무관심하게 임한다면 분명 좋지 않은 말이 나올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매사에 웃음을 지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결국 여러모로 신경을 써야한다는 말이 된다.

혹시 몰라 어제 외출 때 변장에 지대한 공헌을 했던 안경까지 쓴 창현은 거울을 보며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부터 시작이구나.”

나직이 한숨을 내쉰 창현이 집을 나섰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온 창현은 주변에 산재해 있는 사람들의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제법 일찍 나왔음에도 밤새도록 기다리고 있는 기자들은 물론, 몇몇 학생들까지 기웃거리고 있는 형태였다.

그 숫자가 제법 만만치 않았기에 창현은 표정을 살짝 찌푸렸다. 그리고는 얼굴을 가린 채 달리기 시작했다.

“현이다!”

근처를 서성이던 학생 하나가 그런 창현의 모습을 보고는 외친다.

창현을 보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은 그 외침을 듣고는 달려가는 창현의 뒤를 쫓는다. 하지만 전력을 다한 창현을 달리기로 쫓을 만한 사람은 없었기에 아파트 단지를 벗어날 무렵 모든 추격자를 따돌릴 수 있었다.

자신의 뒤를 쫓는 사람이 없다는 걸 느낀 창현은 뒤를 돌아보며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연예인들은 다 이런 건가.”

그것은 아닐 것이다. 아직 자신은 이런 생활에 익숙하지 않고, 초기인지라 사람들의 반응이 뜨거운 것일 테니까.

가볍게 숨을 몰아쉬며 창현은 학교로 발걸음을 옮겼다.

길거리는 출근을 하는 직장인들로 가득했다. 상당수가 나이가 지긋한 중년 남성들이었기에 창현은 정체를 들키지 않은 채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그러나 창현의 발걸음은 곧이어 멈출 수밖에 없었다.

어디 출근을 하는 듯하던 이십대 중반의 여성이 창현의 얼굴을 보고 고개를 갸웃하는가 싶더니 다가오기 시작하던 것이다.

그 모습을 보며 창현이 움찔했다. 알아본 것이라 여긴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창현에게 접근한 여성이 그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가수 현 맞죠?”

다수가 아닌 한 사람뿐이었기에 창현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네. 알아보시네요.”

“와! 혹시나 했는데 정말이었네요. 이 근처 사시나보네요.”

창현의 수긍에 표정이 화악 밝아지는 여성. 설마하니 출근길에 어제 충격적인 무대를 선보인 현과 만나리라고는 생각도 못한 듯했다.

“어제 무대 완전 잘 봤어요. 답답한 마음이 뻥 뚫리는 것 같더라니까요?”

비록 길거리에서 붙잡힌 것은 원치 않는 상황이었지만 칭찬은 사람의 기분을 좋게 만든다.

여성의 칭찬에 창현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하하, 감사합니다.”

“혹시 싸인 부탁드려도 될까요?”

아무래도 창현의 복장이 교복이다보니 등교 시간에 폐가 되지 않을까 싶어 그 태도가 사뭇 조심스러웠다.

“네, 상관없어요.”

딱히 거절할 명분도 없고, 칭찬에 기분도 좋았기에 창현은 흔쾌히 승낙했다.

그에 여성의 표정이 활짝 펴지더니, 가방에서 펜과 함께 무언가를 꺼내든다. 슬쩍 보니 그의 첫 앨범이라 할 수 있는 <Go&Stop>이었다.

설마 이걸 가지고 다닐 줄이야.

창현의 얼굴에 놀라움이 번졌다.

그에 여성이 약간 쑥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 노래를 제가 무척 좋아하거든요. 답답한 마음이 뻥 뚫리는 느낌이라서. 늘 갖고 다니면서 감상을 하곤 하는데 싸인까지 받게 되니 행운이네요.”

“…….”

여성의 말에 창현은 가슴이 뭉클해지는 걸 느꼈다. 자신의 노래를 이렇게까지 좋아해줄 줄이야. 가십거리가 섞인 백마디의 기사보다 지금의 한마디가 더욱 가슴 속 깊게 와 닿았다.

펜과 CD를 받아든 창현이 싸인을 해준다. 그리고 이름을 물어 이름까지 적어주고, 감사하다는 말까지 남겨준다.

진심이 담겨있음을 느낀 탓일까, 여성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창현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남긴다.

진짜 팬이란 사람을 만난 것 같아 학교로 가는 창현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창현이 살고 있는 집에서 학교까지 걸어서 약 십오 분이 걸린다. 대충 시간 비율로 따지면 아파트 단지를 나오는데 오 분이 걸리고, 버스가 다니는 큰 길을 걷는데 약 오 분이 걸린다. 그리고 학교가 위치한 길이 나오는데, 여기로 들어서서 약 오 분을 걸어야 학교가 나온다. 이른바 학교 학생들만 접어드는 학교 전용 길이었다.

당연히 이 길은 해당 학교 학생들과 교직원들만 이용하는 길이다.

이 길로 접어들자 창현은 수많은 시선들이 자신에게 집중되는 것을 느꼈다.

지금 이 시대 유행의 흐름에 가장 민감한 것은 다름 아닌 십대 청소년들이다. 국내 최고 아이돌이라 할 수 있는 라샤를 모르는 학생들은 없었고, 그녀들을 알고 있다면 당연히 현을 모르는 학생들도 없다. 그렇다는 건 당연히 현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가 되고, 어느 정도 팬이라면 인터넷 연예 기사란을 도배하다시피 한 그의 데뷔 소식을 모를 리가 없다.

그렇다는 건? 당연히 창현의 모습을 알아본다는 것이다.

변장을 한답시고 안경을 썼지만 모자도 쓰지 않은 채 그의 외모를 가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더군다나 인터넷 기사에 대대적으로 그의 사진이 보도되지 않았던가? 관심이 조금 있는 학생들이라면 가수 현이 자신 학교 출신이라는 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래도 연예인에 대한 환상이 있는 탓인지 일정 거리 안으로 그에게 접근하지 않았다. 데뷔를 하기 전에도 그는 학교에서 무척 유명한 존재였고, 타인과 접촉을 잘 하지 않는 사람이어서 그렇다.

교문에 도달하니 유난히 학생들이 많다. 등교하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임에도 그들이 이렇듯 일찍 등교한 이유는 간단하다.

바로 자신들과 같은 학교를 다니는 가수, 창현을 보기 위함이다.

어제 TV를 시청하면서 창현의 무대를 보고 얼마나 감탄했던가. 저 멀리 방송국에서 부르는 것이건만 마치 눈앞에서 부르는 것처럼 생생하고 압도적이었다.

평상시 모습은 그저 조용한 학생 강창현이었지만 무대 위에 선 그는 보는 사람을 압도하는 최고의 가수였다.

수십 명의 학생이 모여든 교문을 지나는 모습은 마치 대선배 하나가 후배 수십 명에게 환영받는 듯한 모습이었다. 단지 다른 것이 있다면 창현을 바라보는 학생들의 눈에는 동경의 빛이 담겨있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아직 그런 것이 어색한 창현이었기에 어색한 표정을 지은 채 교문을 통과한다. 평소 교우 관계가 그렇게 원만한 편이 아니었기에 그를 아는 척하며 붙잡을 만한 사람은 없었다.

“하아!”

교실로 무사히 들어선 창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뛰어온 것은 아니지만 누군가 말을 걸까 싶어 잔뜩 긴장을 하고 있었다. 전에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이었지만 지금은 행동 하나하나에 신경을 써야했기에 무척 피곤했다.

안으로 들어서자 이미 교실 안으로 와 있는 몇몇 학생들이 있었지만 창현은 그들의 존재는 개의치 않은 채 자신의 자리에 앉아 그대로 엎드렸다. 괜히 깨어 있다가는 이리저리 말을 걸 것 같아서 자는 모습을 보여줘서 말을 걸게 하지 않으려는 심산이었다.

제법 날씨가 쌀쌀했기에 온풍기를 틀어놓은 상태였다. 창현의 자리는 온풍기 바람이 솔솔 오는 곳이었기에 따뜻한 공기 속에서 곧바로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잠을 자고 있던 창현은 옆에서 톡톡 건드리는 것을 느끼고는 눈을 한두 차례 깜빡이다가 고개를 든다.

그리고 자신을 건드린 상대에게 시선을 옮기니, 그의 짝궁이 어색한 표정을 지은 채 창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창현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왜……?”

“조, 종쳤어.”

그녀도 창현의 데뷔 무대를 보았기 때문일까. 창현과 시선을 마주하는 순간 얼굴을 붉히면서 말했다.

그런 짝궁의 모습에 창현은 빠르게 삐친 머리를 정리하면서 시계로 힐끗 시선을 옮겼다. 수업 시작하기 예비종을 칠 시간이었다.

‘여덟시가 되기 전에 잤는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한 시간이나 잔 건가?’

슬쩍 주변을 둘러보니 반 친구들 모두가 창현을 주시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야기가 꼬리를 물고 퍼지다보니 모두가 알게 되었나보다. 복도 쪽에도 몇몇 여학생들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을 마주하니 꺄악거리는 모습이 생소하게 느껴진다.

‘앞으로 학교생활이 조금 어렵겠네.’

오늘만 해도 이렇게 심적으로 힘이 드는데 앞으로 어떻게 다닐지 깜깜했다.

물론 데뷔가 나쁜 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무대 위에 올라서 얻는 쾌감은 그 여태까지 느껴보았던 것들과 감히 비교를 거부할 정도로 대단했으니까.

“깨워줘서 고마워.”

일단 창현은 짝궁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만약 깨워주지 않았더라면 수업이 시작해도 자고 있을 확률이 높았을 테니까.

창현의 인사에 짝궁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푹 숙인다. 전과 대함에 있어 다르게 한 적이 없는데 반응은 확연하게 틀려졌다.

아이돌, 연예인이란 신분이 그만큼 청소년들에게 강력한 배경이 되는가보다.

피식 웃음을 지은 창현은 MP3를 틀고는 이어폰을 꽂아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든다. 반 친구들도 창현을 힐끔거리기만 할뿐, 그 외의 행동을 보이지는 않았다.

개학식인 만큼 학교는 일찍 끝났다. 선생님의 간단한 말씀과 함께 교장선생님의 훈화, 그리고 언제 봄방학을 하는지 간단한 일정만 말해주고는 수업을 끝냈다.

수업이 끝나자 창현은 곧장 가방을 챙겨들고는 교실을 벗어났다.

다른 반보다 비교적 먼저 끝났기에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창현은 그대로 본관으로 가서는 교장실로 향했다.

교장실에 도착한 창현은 침착하게 심호흡을 한 뒤 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들어오시게.”

승낙이 떨어지자 창현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검은색으로 머리를 염색하여 사십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교장선생님이 보였다.

창현은 교장선생님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인 뒤 말했다.

“안녕하세요, 교장선생님. 2학년 7반 강창현이라고 합니다.”

“그래, 창현군. 무슨 일로 온 건가?”

창현의 소개에 교장선생님은 고개를 살짝 고개를 끄덕인 뒤 물었다.

그에 창현은 현재 자신의 입장을 간단하게 말했다.

자신이 연예인이 되었다는 것과 연예계에서 활동을 하게 되면 앞으로 자주 학교에 나오지 못할 것이란 점. 그리고 그에 대한 방안에 대해서 묻는 등 여러 말을 하였다.

“…….”

교장선생님은 그런 창현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잠시 후, 입을 연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창현의 칭찬이었다.

“연예인이라고 해서 학업을 등한시 할 줄 알았는데 창현군은 전교권에서 노는 학생이더군. 순수 시험 성적으로는 전교 1등이고 말이야. 학업과 꿈 둘다 열심히 했구만.”

“감사합니다.”

칭찬은 감사하게 받아들인다. 학교에서 가장 높은 교장선생님에게 받는 칭찬인 만큼 기분이 나쁘지도 않았다.

그러나 뒤이어 흘러나온 말은 창현에게 황당함을 심어주었다.

“그런데 창현군은 잘 모르고 있나보군. 이미 그 사항에 대해서는 창현군의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었다네.”

“…예?”

황당한 얼굴로 되묻는 창현.

그 모습이 우스웠는지 교장선생님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미 창현군의 아버지와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네. 오전 스케줄이 있는 날은 오후 수업을 듣고, 오후 스케줄이 있다면 오전 수업을, 오전, 오후 모두 스케줄이 있으면 학교에 잠시 들릴 경우 조퇴처리로 해주기로 했지. 하지만 성적이 많이 떨어질 경우 편의를 봐주지 않기로 말이야. 어떤가?”

창현에게는 더없이 훌륭한 조건이었다.

그는 생각할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에게는 결코 나쁠 것이 없는 제안이네요.”

“허허! 성적을 유지해야 하는 게 쉽지 않을 텐데 자신감이 넘치는군. 그래, 우리 아이들도 TV를 보면서 창현군을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더군. 나가기 전에 싸인이나 좀 해주게.”

“물론이죠.”

자신의 아들보다 어린 창현을 대하면서 끝까지 예의를 지켜주는 교장선생님의 모습은 창현으로 하여금 미소를 지을 수 있게 해주었다.

올 때와 달리 가벼운 마음으로 교장실을 나선 창현은 어느새 휑하니 비어버린 학교를 여유롭게 나서면서 큰길로 나아가 택시를 잡았다.

그가 향하는 목적지는 AA엔터테인먼트였다.

점심을 먹고 오후에 열릴 공개 인터뷰에 참가하기 위함이었다.

창현을 태운 택시가 AA엔터테인먼트를 향했다.


AA엔터테인먼트에 도착한 창현은 곧장 사장실로 쳐들어갔다.

쾅!

“아버지!”

문을 힘차게 열고 사장실로 들어선 창현. 아니나 다를까, 석규는 업무를 보고 있었다.

서류를 검토하던 석규는 갑자기 등장한 창현을 힐끗 보더니 다시 서류로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창현이냐. 아직 업무가 남아 있으니 잠깐 앉아 있어라.”

“…….”

창현은 그런 석규를 보더니 가방을 내려놓고는 녹차를 타서는 자리에 앉는다. 그리고 MP3를 틀고는 이어폰을 귀에 꼽아 노래를 감상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잠시 후, 석규가 모든 업무를 끝냈는지 서류를 정리하고는 차를 타서 창현의 맞은 편에 앉는다. 냄새를 보아 생강차였다.

석규는 따뜻한 생강차를 한모금 마셨다. 오늘 공개 인터뷰 아니, 공식 기자회견이 있는 날이다. 창현과 같이 점심을 먹은 뒤 오후에 있을 공식 기자회견에 참석하고, 창현의 데뷔를 축하할 겸 직원들과 라샤까지 함께 하여 회식을 할 생각이었다.

일이 끝나고 마시는 차는 무척 달콤했다. 창현의 데뷔도 성공적이지 않았던가? 생방송으로 지켜보던 석규는 그의 무대를 보는 순간 전신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엄청난 무대였다.

불과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도 그런 창현의 무대에 매료되어 벌써 몇 개의 CF제의가 와 있었고, 화보 촬영 제의도 산더미같이 쌓여 있는 상태였다. 가창력은 물론 비주얼도 받쳐주니 이런 것까지 함께 딸려오는 것이리라.

미소를 지은 석규가 창현을 보며 말했다.

“그래, 무슨 일 때문에 갑자기 쳐들어온 것이냐?”

“정말 모르셔서 하는 말씀이세요?”

석규의 말에 창현이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에 석규가 고개를 갸웃한다.

“네 녀석 눈에 어떻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이래 보여도 한 회사의 사장이다. 내가 처리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데 네 의중을 어떻게 콕 집어내겠느냐? 어려도 네 심중은 헤아리기가 힘들어. 머리가 복잡한 건 싫으니 어서 말해보아라.”

석규의 말에 창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 저번에 학교 문제 말씀하셨잖아요. 그래서 해결하려고 교장선생님한테 찾아갔더니 이미 아버지가 다 이야기를 해놓으셨던데요?”

창현의 설명에 고개를 갸웃하던 석규가 그제야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파악한다.

“아, 그거 말이더냐? 설마 직접 찾아가서 이야기를 한 것이냐?”

창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때 있었던 일을 설명하였다.

“찾아가서 자세하게 설명했죠. 이번에 연예인이 되어서 제대로 출석을 못할 것 같다고요. 그런데 다 알고 계시더라고요. 얼마나 황당하던지…….”

표정을 살짝 찌푸리는 창현을 본 석규는 웃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푸하하하! 정말 이야기를 했었구나. 난 장난으로 했던 이야기인데 설마 진짜 찾아가서 이야기를 할 줄이야. 많이 황당했겠구나, 큭큭큭!”

“…….”

너무나 즐거워하는 석규를 보며 창현은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제대로 한방 먹은 기분이었다.

한동안 웃음을 터뜨리던 석규는 간신히 진정하고는 생강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그나저나 정말 대단한 무대를 보여주었더구나. 무대 위에 섰을 때 기분이 어땠느냐?”

석규의 물음에 창현은 무대 위에서 노래를 부르던 그때를 떠올려보았다.

모든 공간이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일 것 같은 느낌. 관객들의 환호성 하나하나가 전신의 세포를 일깨우는 듯하는 극한의 카타르시스는 여태껏 느껴보았던 그 무엇보다도 짜릿한 느낌을 주었다.

그때를 떠올리니 입가에 절로 미소가 맺혔다.

“최고였죠. 솔직히 라샤 누나들 데뷔 무대 때 올랐던 것하고는 비교도 안 되는 기분이었어요. 앞에 위치한 모든 관객들이 저의 손짓 하나에 움직일 듯한 착각이 들었을 정도니까요. 무대 위에서 마치… 뭐랄까, 슈퍼맨이 된 듯한 느낌?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을 느꼈어요.”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는 창현은 정말로 즐거워보였다.

석규는 그런 아들의 모습에 대견한 표정을 지었다. 무엇이든지 자신이 하는 일이 즐겁지 않으면 그것은 괴롭게 된다. 어떤 방식이든 심적으로 부담이 쌓이고, 짐이 되어 근심으로 발전하고 사람을 힘들게 한다.

그런 면에서 보면 창현은 천생 가수의 운명을 타고 났다고 할 수 있다. 무대 위에서 살아있음을 느끼고, 무대 위에서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성취감을 느낀다는 것은 그가 진정 많은 사람에게 음악을 들려주는 것을 즐긴다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석규는 미소를 머금은 채 창현에게 말했다.

“그것은 너의 무대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네가 진정으로 즐거워하니 나의 마음이 편해지는구나. 데뷔를 했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움직이자꾸나.”

창현이 씨익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물론이죠. 이왕 시작한 거 정상을 노려보겠어요.”

그가 말하는 정상은 국내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좀 더 높은, 전세계의 정상에 우뚝서고 싶어 하였다.

지금 그것을 위해 차근차근 발판을 다져나가야 할 단계였다.

석규는 그런 창현의 목표에 동의하였다.

“너라면 가능할 것이다. 누구도 이룩하지 못한 것을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국내의 입지를 확고하게 다져놓아야 한다. 어제 네가 보인 엄청난 무대로 수많은 팬들을 거느릴 수 있게 되었지만 아직 안심할 수 없는 단계다. 언제든지 등을 돌릴 수 있는 팬들이기에 한동안 입지를 다지면서 국내 정상에 서야한다. 나머지는 이 아버지에게 맡기고 너는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하여 네 노래를 들려주면 된다. 알겠지?”

창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에요. 제가 아버지를 믿지 않으면 누굴 믿겠어요.”

“그래, 믿음을 주니 고맙구나. 그럼… 예전에 했던 이야기를 그대로 진행해야겠지?”

갑자기 석규의 입가에 걸리는 음흉한 미소. 그걸 보는 순간 창현은 마음이 불안해지는 걸 느끼며 물었다.

“무, 무슨 이야기요?”

석규는 여전히 음흉한 표정을 지우지 않은 채 말했다.

“전에 이야기 하지 않았더냐? 네가 데뷔하면 아주 열심히 활동하게 해주겠다고. 다행히 너의 인지도가 엄청나서 순식간에 CF제의와 화보 촬영이 오더구나. 전부 인지도 있는 것들이니 잡아놓아야겠지? 흐흐흐!”

“그, 그야 당연히 열심히 활동을 하겠다고 했지만 그건 그때 분위기상…….”

석규의 모습에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낀 창현이 더듬거리며 나름대로 반박을 하려고 했지만 석규는 그 반박조차 차단했다.

“허어! 그게 무슨 말이더냐? 남자라면 응당 자신이 한 말을 지켜야지! 네가 열심히 활동하겠다는 말에 감동하여 그 제의들을 모두 수락하고 스케줄을 맞춰놓았단다. 그러니 열심히 활동할 생각을 하여라. 알겠지?”

CF같은 것으로 버는 돈은 엄청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가수 현 같은 경우 얼굴이 알려지지 않았기에 인지도가 낮았지만 얼굴이 알려진 지금 가히 태풍의 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인지도는 톱스타를 뛰어넘을 정도인데 반해 그를 캐스팅하는 비용은 톱스타에 비해 반수에서 한수가량 떨어지기 때문이다. 가격에 비해 엄청난 가치를 지니고 있는 창현을 놓치는 것은 바보나 하는 짓이었다.

그리고 얼굴을 알리는데 CF가 큰 도움이 된다는 걸 알았기에 석규는 그 제의를 모두 수락할 예정이었다. 아직 수락은 안 했지만 분명 그 말을 하면 창현이 반발할 것이 분명하였기에 약간의 거짓말을 가미한 것이다.

모두 창현을 위한 것이 아닌가? 거짓말을 했지만 석규는 떳떳했다. CF를 함으로써 아들도 좋고 회사도 좋지 않은가? 일석이조였다.

게다가 창현의 성격이 약간 수동적이기에 특별히 나쁘거나 옳지 않은 일이 아니라면 이끄는 대로 따라오는 타입이었다. 하물며 자신에게 좋은 일이고, 좋은 의도로 그랬는데 이미 결정된 사항을 거절할 리가 만무했다.

석규가 모든 제의를 수락했다는 말에 창현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그래, 열심히 해봐라. 솔직히 우리 회사에 연예인이라고는 너와 라샤뿐이지 않느냐? 연습생을 뽑아야 하긴 하는데 아직 너와 라샤도 어떻게 보면 방송에서 신인이라 할 수 있기에 당장 규모를 부풀리기보다는 하나하나 입지를 굳혀놓고 싶은 게 내 생각이다.”

창현과 라샤가 가수인 만큼 회사의 수익이 음반에서 나오지만 CF에서 나오는 수익도 만만치가 않다. 가수의 수익은 음반도 음반이지만 행사에서 벌어들이는 수익도 엄청난데, 라샤도 행사를 참가하긴 하지만 너무 과도한 스케줄을 방지하기 위해 그리 많은 행사를 하는 편은 아니었다.

하물며 창현이 행사를 하겠는가? 석규는 창현을 세계적인 가수로 키우기 위해서 많은 방송에 내보내지 않을 생각이었다. 너무 쉽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주면 그만큼 이미지가 가볍게 보일 수도 있어서이다. CF같은 것은 많이 움직일 필요도 없으면서 꾸준히 방송이 되는 것이기에 얼굴을 알리기에도 적합하고 수익도 상당하다. 폭발적으로 치고 올라가는 현의 이미지를 국민적으로 각인시키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창현이 그런 석규의 노림수를 전부 알 리가 없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AA엔터테인먼트가 가진 취약한 점을 알고 있었고, 지금 상황이 중요한 터닝 포인트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속사의 가수인 만큼 굳이 기획사의 경영에 참가하지 않아도 되지만 석규가 <Go&Stop>을 발매할 당시 정말로 창현에게 주식을 떼어서 주었기에 어찌 보면 창현은 AA엔터테인먼트의 대주주라고 볼 수도 있다. 그랬기에 석규가 창현에게 이런저런 설명을 해주는 것이다.

아직 세상 견문이 넓지는 않지만 어리석지는 않았기에 창현은 석규의 뜻에 동조하였다.

“저도 비슷하게 생각해요. 솔직히 기획사의 규모를 불리고 싶었다면 벌써 할 수 있었잖아요? 저도 라샤 누나들도 그런 것은 굳이 반기지 않으니 아버지의 뜻에 적극적인 지지를 보낼 거예요. 아니면 이런 건 어때요? 케이블 방송국 한 곳에 제의를 해서 연습생 뽑는 걸 방송으로 하는 거예요. 부족하지만 저랑 라샤 누나들이 심사위원을 해도 되고, 아버지도 함께 하는 방식으로요.”

“호오! 그것도 괜찮겠구나. 공개 오디션이라…….”

이미 몇차례 있었던 시도였기에 석규는 창현의 말을 긍정적으로 검토하였다. 물론 이것은 당면한 문제가 아닌 나중에 할 일이었기에 세부적으로 파고들지는 않았다.

“아참, 그리고 어제 집으로 돌아가는데 기자들이 있더라고요. 인터뷰를 신청하기에 거절하고 오늘 공식 기자회견에서 우선 발언권을 주기로 했거든요. 괜찮을까요?”

석규는 대수롭지 않은 듯 대답했다.

“상관없다. 어차피 공식 기자회견은 꽤 길게 할 예정이니까 그 정도는 상관없지. 이번 공식 기자회견은 무척 중요하다. 너도 그걸 알고 있겠지?”

창현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당연하죠. 이번 공식 기자회견으로 제 정체를 완전히 밝히고 정식 데뷔를 알리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TTS에 정식 전쟁선포를 하는 것이기도 하고요.”

TTS기획사를 언급할 때 창현의 눈에서 분노가 일렁였다.

능글능글한 표정을 지으며 협박을 가하던 왕지동의 모습을 생각하면 아직도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기분이었다. 올해 초에 데뷔하기로 했지만 왕지동으로 인하여 상당한 예정 변경이 이루어져야만 했다.

그뿐인가? 창현은 친하게 지내던 소녀시대 누나들하고도 서먹한 사이로 변할 뻔했다. 대인관계가 넓지 않은 창현으로서는 친하게 지내는 사람 하나하나가 무척 소중했다. 그랬기에 그 관계가 어색해질 뻔한 단서를 제공한 왕지동을 용서할 수 없었다.

석규는 그런 창현을 진정시켰다.

“너무 흥분하지 말아라. 이럴 때 이상적인 것은 가슴은 뜨겁게, 머리는 차갑게 하는 것이다. TTS기획사가 비록 영향력이 많이 줄었지만 중국 내에서는 아직 영향력이 남아있다. 오늘 공식 기자회견으로 전쟁선포를 하는 한편 앞으로 지루하고도 긴 싸움을 펼쳐야 할 것이야.”

“상관없어요. 왕지동에게 절망감만 안겨줄 수 있다면요. 솔직히 전 그동안 연예계가 더럽다 더럽다 하는 말은 많이 들었지만 그걸 본 적은 없거든요. 그런데 왕지동에게서 그걸 본 것 같아 기분이 무척 나빴어요.”

석규는 창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연예계란 곳이 그런 세계다. 갖가지 더러움이 공존하곤 하지. 그걸 타파하고 싶지만 나 혼자의 힘으로는 어렵지 않겠느냐? 그러니 네가 유명해져야 한다. 그럴수록 우리는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고, 발언권이 더욱 강해질 테니까. 창현이 네가 정상에 우뚝 서는 날, TTS는 몰락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모두 이 아비가 진행하도록 하마. 너는 최고를 향해 달리기만 하면 된다. 그럴 수 있지?”

창현은 석규의 말에서 그의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

왕지동의 행동으로 분노한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석규도 창현 못지않게 분노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아들을 협박의 대상으로 삼은 것에 진심으로 분노하고 있었다. 다만 그의 말처럼 가슴은 뜨겁고 머리는 차갑게 하느라 여태까지 제대로 분노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은 것이다.

지금도 분노하고 있는 모습은 아니었지만 그것을 억제하고 있을 뿐, 음성에서, 눈빛에서 강렬한 분노가 묻어나오고 있었다.

“후우!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서 화풀이를 해봤자 도움이 되는 건 없다. 진정으로 복수를 하기 위해서는 더욱 더 강해져야 하는 것뿐이지.”

가볍게 숨을 몰아쉬고 눈을 감았다 뜬 석규에게서 더 이상의 분노는 묻어나오지 않았다. 오랜 사회생활을 한 그는 자신의 감정을 다스릴 수 있는 경지에 오른 상태였다.

“점심 먹으러 가자꾸나. 이야기는 천천히 해도 되니까.”

식어버린 생강차를 모두 마신 석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을 보니 어느새 점심을 먹을 시간이 되었다.

창현도 식어버린 녹차를 모두 마신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 회사를 나서는 두 부자는 폭풍전야처럼 고요하였다.


석규가 공식 기자회견을 생각한 이유는 간단하다.

우선은 창현의 정체를 공식적으로 밝힐 자리가 필요했다.

S본부에서 충격이라 할 만큼 대단한 무대를 치러냈으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한 감이 없지 않아 있는 것이 사실이다.

더군다나 창현의 데뷔는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닌, TTS기획사의 사장 왕지동에 의하여 반강제적이로 이루어진 것이다.

현의 데뷔를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중국에서 은밀하게 흘러나온 정보로 인하여 대부분의 기자들이 이 점을 눈치채고 있었다. AA엔터테인먼트와 중국 측 기획사가 마찰이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 부분을 해소시키고 정식으로 현의 데뷔를 알릴 필요가 있었다. 특히 어제 방송 이후 연예 기사란을 도배하다시피 한 현의 압도적인 무대는 연예 기자들을 술렁이게 할 만큼 큰 것이었으니 말이다. 기자들은 특종을 원하고, AA엔터테인먼트에서는 호의를 보임으로써 아군을 늘리고 현의 데뷔를 알릴 필요가 있었다. 서로의 이해가 맞아떨어졌기에 석규가 공식 기자회견을 계획한 것이다.

물론 노림수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공식 기자회견을 개최함으로써 석규가 노리는 것이 몇 가지 더 있었다.

공식 기자회견을 함으로써 얻게 될 것들을 생각하며 석규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세상에 당하고만 살면 재미가 없는 법이지. 당한 만큼 이자를 쳐서 되갚아줘야겠지.”


밖으로 나와 점심을 해결한 석규와 창현은 곧장 기자회견장으로 향했다.

기자회견할 장소를 빌린 석규는 아침에 기자들에게 연락을 하였다.

갑작스러운 기자회견에 각 기자들은 화들짝 놀랐지만 석규의 연락에 호응해왔다. 연예계의 이러저러한 소식을 취재하는 그들은 당연히 현의 데뷔 무대를 지켜보았고, 거기에서 느껴진 강렬한 충격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런 현이 함께 하는 기자회견이라면 당연히 특종이 터져 나올 것임이 분명했기에 그들은 석규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다.

석규와 창현이 기자회견장으로 들어섰을 때에는 이미 오십 명에 가까운 기자들이 와 있는 상태였다.

창현은 AA엔터테인먼트에서 옷을 갈아입은 상태였다. 그랬기에 교복은 석규의 차 안에 있었다.

기자회견은 점심식사를 마칠 무렵인 두시로 잡혀 있었는데, 대부분의 기자들이 점심을 거르고 모인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좋은 자리에 위치해야, 질문을 하는데 용이했기에 때 아닌 자리다툼을 벌여야만 했다.

잠깐의 배고픔이 대박으로 이어질 수도 있으니까.

기자회견 시간이 되자, 장내에 석규와 창현이 모습을 드러냈다.

찰칵! 찰칵!

오십 명의 기자들이 석규와 창현의 사진을 찍었다.

각자 자리에 도착하자 석규가 먼저 인사를 하였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AA엔터테인먼트 사장 강석규입니다.”

“현이란 예명으로 활동하고 있는 강창현입니다.”

창현도 석규 옆에 서서 인사를 하였다. 그리고 살짝 고개를 숙인 뒤 두 사람이 자리에 앉았다.

석규가 기자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우선 이렇게 갑작스레 기자회견을 열게 된 까닭은 그동안 베일에 가려졌던 현이 공식적으로 데뷔했음을 알리고자하는 의도에서입니다. 기자 여러분이 질문을 하시면 저 또는 여기 현이 대답할 예정이니 질문을 해주십시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여러 기자가 손을 번쩍 들었다.

석규가 기자 한 명을 지목하자 그가 자기소개를 하며 물었다.

“Y뉴스의 배영만 기자입니다. 방금 전 가수 현씨의 본명이 강창현이라고 했는데 사장님의 성함과 성이 같군요. 무슨 연관이 있는 것입니까?”

그 질문에 창현이 마이크를 들었다. 그러고 보니 외부적으로 아직 이 사실이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저와 여기 강석규 사장님은 사적으로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가 됩니다.”

“……!”

“오!”

창현의 대답에 기자들이 놀랍다는 듯 감탄하면서 수첩에 빠르게 적어간다.

눈치 빠른 기자들답게 석규와 창현의 이름을 듣고 어느 정도 의심을 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정말 부자지간이라고 하니 놀라움을 표하는 것이다.

실제로 석규와 창현은 그렇게 닮은 편이 아니었다. 석규는 선이 굵고 남자다운 외모를 한데 반해 창현은 선이 얇고 남자답기보다는 아름답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AA엔터테인먼트 사장 강석규와 가수 현이 부자지간이라는 것은 충분히 놀라운 사실이었다.

첫 질문이 나오자 본격적으로 다음 질문을 위해 기자들이 손을 들었다.

창현은 어제 한 약속을 잊지 않고 있었다.

손을 든 기자들을 둘러보다가 그는 익숙한 얼굴을 발견하고는 묻는다.

“N뉴스 서병태 기자님. 질문해주시죠.”

창현의 호명에 어제 약속을 받았던 서병태 기자는 약간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정중하고 예의바른 모습을 했지만 정말로 약속을 지킬 줄은 몰랐다.

그는 자신에게 모여드는 시선에 가볍게 헛기침을 하면서 질문을 던졌다.

“험! N뉴스의 서병태입니다. 가수 현의 정규 1집 앨범이 발매된지 상당한 시일이 흘렀습니다. 그렇기에 1집 앨범으로 활동하기에는 시기가 상당히 늦었다고 볼 수 있는데 향후 일정을 간략하게 알 수 있을지요?”

그 질문은 창현이 아닌 석규가 대답했다.

“우선 현이 가요 프로그램에서 무대를 치른 것은 그가 가수이기에 당연히 데뷔는 무대에서 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향후 활동 계획은 구체적이지 않으나 미니 앨범을 냄으로써 활동을 이어나갈 생각입니다.”

실제로 구체적인 기획은 세워졌으나 그것을 시시콜콜 이야기 할 이유는 없다. 적당한 정보를 제공하고 기자들이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하는 것이 현에 대한 신비감 조성이나 무게를 주는데 도움이 된다.

물론 현재 미니앨범 계획도 어느 정도 확립된 상태였다.

석규의 대답에 기자들이 수첩에 무언가를 부지런히 적는다.

그 이후 기자들이 질문을 하고, 석규와 창현이 대답하는 형식이 여러번 오고갔다.

창현은 우선 자신이 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먼저 발언권을 주기로 한 기자들을 차례차례 호명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혹시나 하는 마음을 가지면서도 정말로 창현이 질문을 해주자 얼굴에 화색을 띠며 준비해온 질문을 차례차례 하였다.

대부분 그동안 베일에 가려졌던 창현에 대해 묻는 것이었기에 거침없이 대답해줄 수 있었고, 그때마다 기자들은 정신없이 수첩에 정보를 적어나갔다.

약 스무 번의 질문이 나왔을 무렵에는 대부분의 질문들이 나온 상태였다.

마침내 한 기자가 예민한 질문을 하고야 말했다.

“B뉴스의 오정훈 기자입니다. 현씨의 데뷔 소식이 AA엔터테인먼트에서 흘러나온 것도 있지만 중국 측에서 흘러나온 것도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점에 대해 연예 언론은 AA엔터테인먼트와 중국 측 기획사의 불화로 인한 것이라 하던데 그게 궁금합니다.”

말해놓고 자신이 총대를 메었다는 것을 안 탓인지 잔뜩 긴장한 모습이었다.

그 질문에 석규는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1월초, 라샤의 휴식과 중국 측 기획사와 접촉하기 위해 중국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여러 곳의 기획사를 돌아다니며 조건을 협상하던 도중 사단이 발생했습니다. 중국 측 기획사 하나가 라샤와 현의 사진을 찍어놓고 자신들과의 계약을 종용한 것입니다. 이에 저는 물론 현과 라샤는 극도로 분노하였습니다. 아마 그쪽에서는 지금 현의 정체를 확신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중요하지는 않았지요. 우선 기자분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특종을 발견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들은 현의 정체를 가지고 협박을 하였고, 그로 인해 기존에 계획하던 현의 데뷔를 강행하게 되었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무척 유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석규의 말은 지난 며칠 동안 의문을 가지고 있던 기자들의 궁금증을 말끔하게 해소시켜주는 것이었다. 분명 중국 측과 안 좋은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AA엔터테인먼트에서 언급을 하지 않으니 그들도 언급을 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 질문이 나왔고, 석규가 답을 한 것이다.

궁금했던 점이 어느 정도 해소되자 기자들의 눈에 또 다른 의문이 퍼져나갔다.

그리고 궁금증을 참지 못한 기자 하나가 손을 들며 물었다.

“S뉴스의 박진만 기자입니다. 강석규 사장님께서는 불화가 생긴 중국 측 기획사의 이름을 밝혀줄 수 있는지요? 그리고 향후 현과 라샤의 중국 진출 여부가 궁금합니다.”

기자의 질문에 석규는 잠시 멈칫했다. 여기서 TTS기획사의 이름을 밝혀도 좋은지 순간 멈칫한 것이다.

하지만 그 고민도 찰나에 불과했다.

정면대결도 불사하지 않겠다고 마음 먹지 않았던가?

빠르게 생각을 굳힌 석규가 거침없이 대답했다.

“못 밝힐 이유가 없겠지요. 저희를 상대로 협박을 한 곳은 TTS기획사입니다. 왕지동이란 분이 사장님으로 계신 분이지요. 저를 비롯하여 현과 라샤는 TTS기획사의 행동에 분노하여 저들이 공식적 사과를 하고 스스로 자제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 한 현과 라샤의 중국 진출은 하지 않을 예정입니다. 이는 현의 팬 사이트인 다크 스타와 라샤의 팬 사이트 다크 레이디스에게도 공문으로 띄워놓을 생각입니다. 추후 저희 AA엔터테인먼트에서 발휘할 수 있는 모든 역량을 발휘하여 TTS기획사 소속 연예인이 참가한 것들을 보이콧 할 생각입니다.”

아주 강경하면서 소름 돋는 대응안이었다.

지금 석규의 말은 중국 기획사에 대한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TTS기획사라면 근래 들어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한국에서 비교해보면 그리 작은 기획사가 아니다. 그에 반해 한국에서도 중소 규모인 AA엔터테인먼트가 일전을 불사하겠다는 선전포고는 얼핏 보면 우습게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 AA엔터테인먼트가 그 규모 면에서는 중소일지 모르지만 그 실속은 엄청나다. 현과 라샤는 이미 국내를 넘어서 타국에서도 알아주는 인기 가수들이었기 때문이다.

정식 활동을 한 적은 없지만 그들이 중국 내에서 갖는 파워는 만만치가 않다. 이미 한국과 일본에서 유행을 주도하는 앨범을 발매하였기에 중국 내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즉, 이것은 기회를 잘 잡기만 한다면 엄청난 돈을 끌어들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TTS기획사의 야욕으로 인하여 현과 라샤가 중국에서의 모든 활동을 사전에 차단하겠다고 한다는 것은 엄청난 후폭풍으로 다가올 수 있는 일이었다. 돈에 눈이 먼 중국 측 대형 기획사가 TTS기획사를 무너뜨리고 제안을 할 수 있을 정도로 현과 라샤는 군침이 도는 아이콘이었다.

워낙 충격적인 석규의 발언 탓인지 뒤이어 나오는 질문은 별볼일없는 것들이었다.

더 이상 질문이 나오지 않자 석규는 기자회견을 마쳤다. 오늘 이 기자회견은 현에 대한 일정선의 정보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AA엔터테인먼트의 공식 입장을 밝혔다고 볼 수 있다.

기자회견을 마치고 나온 창현은 석규를 보며 말했다.

“어찌 보면 이제 전쟁이네요.”

석규가 고개를 끄덕였다.

“보이지 않는 전쟁의 시작이지. 하지만 TTS기획사도 제법 저력이 있으니 쉽게 물러서려 하지 않을 것이다.”

“저와 라샤 누나들이 더욱 열심히 하면 되요. 저희들이 더욱 인기를 얻고 더욱 실력이 는다면 그만큼 전력에 도움이 될 테니까요.”

“그거야 물론이지. 하지만 이걸 명심해라. 지금 상태로도 충분히 TTS기획사에 물 먹이는 것은 가능하다. 하지만 복수를 위해 네 실력을 늘리려고 하지 마라. 어디까지나 네가 좋아하는 음악을 즐기려고 한다면 네 실력은 더욱 늘 테니까. 알겠지?”

그것은 석규의 걱정이자 충고였다.

창현은 석규의 충고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괘씸하긴 하지만 그걸로 인해 제 자신을 망칠 정도는 아니에요.”

“그래. 그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되는 것이다.”

석규는 창현에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런 아들이 있기에 얼마나 든든한지 모른다.

기자회견 장소를 벗어난 석규와 창현은 AA엔터테인먼트로 돌아갔다. 그리고 석규는 추후 현의 활동에 대한 기획을 재검토하였고, 창현은 얼마 후 발매할 미니 앨범을 구성하였다.

시간이 흘러 저녁 무렵이 되자 라샤가 AA엔터테인먼트에 도착하였고, 석규는 직원들과 함께 현의 데뷔 축하 회식을 하였다.

본격적인 보이지 않는 전쟁의 서막을 올림과 함께 현의 본격적인 활동을 알리고 있었다.


기자회견에서 나왔던 것들은 곧장 기사로 가공되어 인터넷 뉴스에 퍼져 나갔다.

그중 가장 상위를 차지한 것은 당연하게도 현에 관한 기사와 AA엔터테인먼트에서 TTS기획사에 공식적인 선전포고에 관련된 것이었다.

네티즌들은 기사를 보고 일제히 TTS기획사를 욕하였다. 연예계에서는 상당히 평판이 좋은 AA엔터테인먼트지만 일반인들에게 있어서는 그저 현과 라샤가 소속된 기획사에 지나지 않는다. 즉, 이렇다 할 악감정이 있을 이유가 없다. 그런 바탕에 TTS기획사의 행동을 발표하자 네티즌들은 삽시간에 무리를 이루어 AA엔터테인먼트를 옹호하고 TTS기획사를 욕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도 그럴 것이 근래 들어 동북공정 같은 걸로 인하여 중국에 대해 상당히 안 좋은 인식이 자리하고 있었다.

AA엔터테인먼트가 TTS기획사에 선전포고를 한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회사와 회사간에 보이지 않는 신경전을 벌이는 경우는 종종 있었지만 이렇듯 대놓고 둘 중 하나가 죽을 때까지 싸우자라고 하는 경우는 거의 없던 것이다. 특히 AA엔터테인먼트 같이 자그마한 회사가 TTS기획사 같이 제법 큰 규모를 가지고 있는 회사에게 당당하게 선전포고를 하는 경우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보는 사람들은 흥미진진한 기색으로 AA엔터테인먼트와 TTS기획사간의 싸움을 즐겨보려 하였다.

물론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은 사람들이었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현의 정체가 본격적으로 밝혀진 것에 초점을 모았다.

그리고 그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현의 나이가 이제 16세라는 점과 AA엔터테인먼트 사장 강석규의 아들이라는 점은 팬들은 물론 관심 없던 사람들의 놀라움을 사기에도 충분했던 것이다.

이제 16살인 소년이 한국은 물론 일본마저 제패한 엄청난 음악들을 작곡하고 작사했다니? 정녕 믿기 힘든 사실이 아닐 수 없었다.

현의 팬이던 사람들은 그 사실을 보고 경악을 하였고, 관심이 없던 사람들도 현에게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사람들은 누구나 영웅을 동경한다. 하지만 정작 영웅이 등장하면 시기하고 질투를 한다. 영웅의 능력은 범인으로서 감히 넘볼 수 없는 것이기에 영웅을 깎아내림으로써 영웅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고, 가학적인 즐거움을 얻으려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정도가 넘어서면 질투도, 시기도 할 수가 없다. 현실이 아닌 판타지의 영역에 누가 감히 침범하려 하는가. 질투와 시기가 차지하던 자리는 동경과 경외심으로 가득차게 된다.

현의 경우가 그러하다.

기자회견에서 현은 성형의혹을 제기한 기자의 질문에 미리 준비한 어린 시절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성형의혹을 불식시켰다. 어릴 때는 지금 만큼 잘생기지 않았지만 이목구비나 얼굴 형태에서 바뀐 것은 없었다. 즉, 성형의혹은 말 그대로 루머에 불과했다는 것이 증명된 셈이다.

게다가 상상을 뛰어넘는 작곡 능력. 그것 또한 어린 시절부터 홀로 독창적이고 자신만의 방법으로 곡을 만들고 가사를 입혀왔다고 말했다. 작곡 작사 능력 모두가 현의 순수 능력 범위 안에서 벌어졌다는 이야기다.

그 기사를 본 네티즌들은 현의 엄청난 능력에 감탄하면서 질투와 시기보다는 한국이라는 한계를 뛰어넘어 미국의 정상에서도 군림할 수 있을 거란 희망을 심어주었다. 한민족이라는 자부심이 있었기에 뭉치는 것 하나만큼은 세계적이라 할 수 있다.

기자회견 덕택에 현의 인기는 하루 만에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치솟았다.

그리고 그것은 다음 날 곧장 창현에게 반응으로 나타났다.

등교를 하던 창현은 어제와 비교도 안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받았던 것이다. 특히 30대에서 40대에 이른 아저씨들과 아주머니들은 웃음을 지으며 창현을 대했고, 20대와 10대 남녀들은 경외와 동경이 담긴 시선으로 창현에게 싸인을 부탁했다.

자신을 좋아해주는 사람들인 만큼 어찌 그 부탁을 거절할 수 있겠는가?

창현은 때 아닌 길거리에서 싸인회 아닌 싸인회를 하게 되었고, 처음에는 서너 명이던 것이 늘어나고 늘어나 거의 백여 명에게 싸인을 해주게 되었다. 나중에 등교시간이 촉박하게 되어 양해를 거듭 구하고 나서야 간신히 자리를 벗어날 수 있었다.

“후아! 장난이 아니네.”

길거리에서의 싸인 부탁은 전초전에 불과하였다.

학교에 도착하자 학교 학생들도 창현에게 다가와 싸인을 부탁한 것이다. 같은 학교 출신이라는 생각 때문일까? 창현에게 싸인을 부탁하는 학생들 대부분이 그의 앨범을 가지고 와서 싸인을 부탁했다. 창현은 그 부탁을 차마 거절할 수 없어서 때 아닌 싸인회를 또 여는 수밖에 없었다.

어째, 싸인을 부탁하는 사람들이 처음에는 적었는데 시간이 가면 갈수록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만 갔다.

기어코 수업 시간이 되어서야 창현의 싸인회는 끝이 나게 되었는데, 선생님이 교실에 오자 창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어제랑 확연하게 다르네. 기자회견의 힘이 그렇게 컸나?’

회식 이후 집으로 돌아간 창현은 당연히 인터넷을 체크하였고, 기자회견에서 했던 이야기들이 상당히 좋은 호응을 얻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관심이 이렇게 폭주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것은 창현의 착각이었다. 그에 대한 관심 폭주는 기사의 힘도 있지만 그것은 단지 기폭제 역할을 했을 뿐, 본래 현은 국내에서 최고의 작곡, 작사가, 최고의 가수로 알려져 있다. 특히 유행에 민감한 십대 청소년들 같은 경우 비주얼과 가창력, 그리고 뛰어난 곡까지 갖춘 라샤에 열광을 하였고, 지금의 그녀들을 있게 해준 현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현의 엄청난 데뷔 무대를 보게 되었고, 처음에는 조심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인터넷 뉴스를 도배하다시피 한 기사를 보고는 현에게 열광하게 된 것이다.

원래는 서서히 벌어질 일이 단기간에 해일처럼 덮쳐오니 창현으로서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점심시간이 될 때까지 계속 되었다.

쉬는 시간마다 학생들이 반에 쳐들어오다시피 하면서 창현에게 싸인을 부탁하고, 같이 사진을 찍는 등의 행동을 보인 것이다.

그것이 나쁘지 않지만 너무 과한 관심에 창현은 적잖이 부담이 되는 걸 느꼈다.

너무 부담이 된 나머지 점심시간이 되는 순간, 창현은 재빨리 교실을 벗어났다. 갑자기 폭발적으로 증가한 관심이 너무나 부담되어서이다.

창현이 향한 곳은 바로 학교 뒤에 존재하는 정자였다.

학교에서 자신과 주현 밖에 모르는 공간. 적막한 이곳이 지금 창현에게 있어 최고의 휴식 장소였다.

정자에 도착한 창현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점심시간 동안은 편안하겠다.”

하루아침에 인기인이 된다면 어떨지 누구나 한 번쯤 상상해본다. 창현도 자신이 공식 데뷔를 하게 되고 인기를 얻게 되면 어떻게 될지 생각을 해보았다. 그의 생각은 기존의 학교생활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란 것이었다.

어차피 학교에서 딱히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고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던 창현이다. 연예인이 되면 당연히 학급 친구들이 섣불리 접근하려 들지 않을 것이고, 결국 알게 모르게 벽을 형성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기존에 영위하던 학교 생활과 크게 다를 바가 없을 것임이 분명했다.

허나 지금 이것은 그의 상상과는 너무나 다른 학교 생활이었다. 학생들의 관심은 지나치다 못해 폭주하는 정도여서, 창현에게 무척 부담스럽게 작용하였다.

정자에 드러누우며 창현이 중얼거렸다.

“어휴! 인기가 너무 많아서 고민하게 될 줄은 몰랐네.”

아직 쌀쌀한 겨울바람을 느끼며 창현이 눈을 감았다. 남들보다 추위를 덜 타기에 쌀쌀하다고 느끼는 것이지, 다른 학생들 같으면 추워서 애초에 밖으로 나오려 하지도 않을 것이다.

다른 학생이 오지 않을 것이란 생각에 창현은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약 오 분 정도 눈감고 있었을까?

“……!”

겨울바람의 쌀쌀함과 조용한 적막을 즐기던 창현은 누군가가 정자에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누구지?’

귀찮게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창현이 살며시 눈을 뜬다.

그리고 다가오는 사람을 확인한 순간, 창현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왜 그렇게 조용히 다가오는 거예요, 주현 누나. 깜짝 놀랐잖아요.”

창현에게 다가오던 사람은 다름 아닌 주현이었다.


학교에 나온 주현이 가장 먼저 들은 이야기는 바로 창현에 관한 것이었다.

교실은 온통 창현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었다. 남녀 가릴 것 없이 창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몇몇 친구들은 싸인을 받았다고 자랑하였다. 그리고 지금 가면 싸인을 해주니 가보라고 추천하기까지 하였다.

그 모습을 보면서 주현은 직감적으로 창현이 무척 곤란해 할 거라 생각하였다.

예전부터 엄청난 능력을 지니고 있지만 능력에 비해 지나치게 소탈한 것이 바로 창현이었다.

당연히 갑자기 늘어난 인기에 곤혹스러워 할 것임이 분명했다.

그리고 점심시간이 되면…….

“분명히 그곳으로 갈 거야.”

확신에 찬 어조로 주현이 중얼거렸다.

엊그제 창현을 보았지만 주현은 그와 만나고 싶었다. 창현이 현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몰려오던 허탈감은 컸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알고 있던 창현이 어디로 간 것은 아니었다. 전처럼 창현과 웃으면서 다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것이 그녀의 심정이었다.

점심시간이 되자 주현은 점심을 먹지도 않은 채 교실을 벗어났다. 창현이라면 반드시 정자로 갔을 거란 확신을 가진 채 말이다.

그리고 정자가 보일 무렵, 그녀는 자신의 생각이 옳았음을 알아차렸다. 정자에 창현이 와 있는 것을 본 것이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다잡으며 정자에 접근하던 그녀는 멈칫하였다. 창현이 누워있는 걸 확인한 것이다.

‘피곤한 건가?’

휴식을 취하고 있다면 방해하지 않는 것이 옳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창현의 얼굴을 보고 가지 않으면 아쉬울 것 같았기에 그녀는 살금살금 창현에게 다가갔다.

마치 도둑고양이처럼 조용히, 은밀하게 다가오던 주현은 창현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자신을 부르자 움찔하였다.

“일어났네. 내가 방해한 거야?”

주현의 말에 창현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잠시 누워있던 거예요.”

“그래? 다행이네. 혹시나 자는 걸 방해한 줄 알고 걱정했어.”

창현이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는 걸 방해하지 않았지만 휴식을 방해한 건 맞는데요? 보상을 해주셔야겠어요.”

가수로 데뷔했어도 변함없는 미소였다.

주현은 그 미소를 보면서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입가에 미소가 맺히며 창현에게 물었다.

“피곤한가봐?”

그 물음에 창현은 힘없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좀 그렇더라고요. 연예인이 많이 힘들다는 걸 새삼 느끼고 있어요.”

“그건 창현이 네가 현이라서 그런 거야. 톱스타 중 톱스타니까 그럴 수밖에 없어.”

주현의 말에 창현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누나도 나중에 겪을 일이에요. 무슨 남 일처럼 말하고 그래요.”

“우리도 그렇게 될 수 있으려나?”

창현의 말에 주현의 표정이 어색하게 변했다. 말에는 힘이 별로 담겨 있지 않았다. 창현의 인기는 현재 최절정. 그렇게 된다는 건 꿈도 꾸기 힘든 일이었다.

그런 주현의 반응에 창현이 웃음을 지었다.

“그 자신감 없는 말투는 뭐에요. 누나들은 가능하다니까요. 설마 제 말을 믿지 못하시는 거예요?”

서운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는 창현. 나이는 어리지만 라샤의 모든 것을 담당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창현의 말이었다. 그 무게가 결코 가벼울 리 없었다.

주현은 황급히 양손을 저었다.

“그, 그럴 리가 있겠어? 다만 실감이 나지 않을 뿐이지. 우리가 톱스타라니…….”

실감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아직 데뷔도 멀어 보이는 신인 그룹이었으니 그럴 만도 하였다.

“차근차근 단계를 밟고 올라가면 가능하죠. 솔직히 누나들 만큼 연습 기간이 긴 사람들이 어디 있어요? 그동안 쌓아온 노력은 누나들을 배반하지 않을 겁니다.”

창현의 말에 주현이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아마 언니들이 들었으면 힘을 낼 수 있었을 거야.”

“그런 의도로 한 말은 아니에요. 진실인데요, 뭐.”

주현은 창현의 말에 밝은 표정을 짓다가 문득 깨달았다.

‘내가 위로를 해주려고 했는데 도리어 위로를 받았네.’

연예인이란 것이 무척 힘든 것이고, 창현 같은 경우 그동안 막혀왔던 둑이 한 번에 터져 나오는 것처럼 억눌려 있던 인기가 분출되고 있는 시점이다. 당연히 사람들의 관심이 폭발적으로 몰려들 것이고, 갑작스러운 만큼 창현은 당혹스러울 것이다.

주현이 생각에 잠겨있을 때, 창현이 무언가 생각 난 듯, 그녀를 바라보며 묻는다.

“그런데 누나 점심 안 드셨죠?”

“…….”

먹었을 리가 없다. 창현이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바로 왔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주현이 왔으니 말이다.

주현의 표정만을 본 것만으로도 충분한 답이 되었기에 창현은 조금 짓궂은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그럼 같이 점심이나 먹으러 가지 않을래요?

“점심을? 하지만…….”

창현의 제의에 주현은 화색을 띠다가 말끝을 흐렸다. 지금 그의 인기가 최고조인 만큼 어딜 가나 그의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으로 넘쳐난다. 그런데 어디서 점심을 먹는단 말인가? 괜히 먹다가 걸리면 골치 아픈 일에 휩싸일 것이 분명했다.

그런 주현의 반응에 창현은 피식 웃었다. 무얼 걱정하는지 알아차린 것이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러면서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드는 창현.

그가 꺼낸 것은 다름 아닌 모자였다.

모자를 쓴 창현은 주머니에서 안경을 꺼내 쓴다. 그리고 파카 지퍼를 올리자 여간해서는 알아볼 수 없는 모습이 되었다.

주현은 두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창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 창현이 조금 어색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사실 누나가 안 오셨으면 저 혼자 나가서 먹으려고 했거든요. 어차피 수업 시간에 선생님들은 들어오지도 않으니까요.”

현재 봄 방학을 하기 직전인지라 학교 수업은 일체 이루어지지 않은 채 학생들은 학교에서 영화나 보고 있는 실정이었다. 몇몇 애들은 수업을 통째로 빼먹은 채 PC방에 가기도 하였기에 선생님들도 아이들을 딱히 통제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즉, 밖에 나가도 붙잡을 사람이 없다는 뜻이었다.

주현은 창현이 변장을 하자 표정을 밝게 하며 대답했다.

“응, 가자! 창현이가 사주는 거지?”

“물론이죠.”

주현의 합류에 창현이 미소를 지었다.

혼자서 먹는 밥보다는 둘이서 먹는 밥이 더욱 맛있는 법이다.


주현과 함께 인근 가든으로 가서 각각 갈비탕과 영양돌솥밥으로 점심을 때운 창현은 조심스럽게 교실로 돌아갔다.

학생들이 이리저리 수선을 피울 정도로 주목을 받고 있는 만큼 자신의 부재는 결코 숨길 수 없는 사항이어서이다.

아니나 다를까, 5교시가 시작되었음에도 창현이 들어오지 않자 선생님들은 창현의 부재를 곧장 알아차렸고, 5교시가 거의 끝날 무렵에야 교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선생님에게 밖에서 점심을 먹었다고 말함으로써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수업을 모두 끝마친 창현은 곧장 집으로 돌아갔다. 사람들의 관심이 고맙긴 하지만 아직은 고마움보다는 부담이 더욱 컸다.

행여나 남이 알아볼까 싶어 집으로 돌아올 때는 숨겨두었던 모자와 안경을 썼다. 그리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자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후! 학교 생활이 고달프네. 일 년을 어떻게 참지?”

이제 본격적인 스케줄을 하려는 참이었기에 차츰 괜찮아질 것임이 분명했지만 그것이 힘든 법이었다. 흔히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하지만 그 적응기간을 견디지 못하고 포기하곤 하니까.

물론 창현이 그럴 리는 없지만 조금 부담이 되는 건 사실이었다.

“에휴! 모르겠다. 이것 가지고 징징댈 수 없지.”

오늘은 스케줄이 없었기에 창현은 컴퓨터를 키고 이리저리 인터넷 뉴스를 보다가 밀렸던 애니메이션 감상을 한다. 그리고 밤이 되어서 순규와 스타를 하여 스트레스를 풀며 하루를 마무리 하였다.

다음 날 학교를 가기 위해 아침 일찍 일어나서 준비를 하며 교복을 입은 창현은 문득 밖이 시끌시끌하다는 걸 느꼈다.

“뭐지?”

옆집은 신혼부부가 살고 있는데 이웃이었기에 사적으로 창현과 형 누나하는 사이였다. 아직 아기를 낳지 않았기에 시끄러울 일이 없는데 이상하게 시끌시끌한 것이다.

의문을 느낀 창현은 인터폰으로 복도의 모습이 보이게 한다.

그리고 드러난 복도의 모습에 창현은 식겁하는 수밖에 없었다.

“헉!”

복도에 족히 열 명이 넘는 여자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창현과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소녀들이었는데, 시선을 향하고 있는 것이 옆집이 아닌 이쪽인 것으로 보아 자신의 집을 찾아온 것이 분명했다.

안에 창현이 있는 것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것일까?

밖에서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쾅! 쾅! 쾅!

띵동! 띵동!

창현은 그것에 대답하지 않은 채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서 석규에게 전화를 한다.

♩♪♬

컬러링과 함께 석규가 전화를 받자 창현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 큰일났어요!”

-알고 있다. 인터넷 확인해봤느냐?

창현의 말에 모든 사정을 다 알고 있다는 듯 대답하는 석규.

그 말에 창현은 정신이 퍼뜩 깨는 걸 느끼면서 컴퓨터 전원을 키고 대답한다.

“아니오, 아직 확인하지 않았어요.”

-일단 컴퓨터로 확인부터 해보아라. 대형 포탈 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순위를 보면 알게다. 지금 그 대책을 세우고 있으니 조금 있다가 다시 전화하도록 하마.

“네, 알았어요.”

그 말과 함께 통화를 마친 창현은 곧장 인터넷 창을 킨 뒤 대형 포탈 사이트로 들어간다. 그 후, 석규가 말했던대로 실시간 검색어를 확인한다.

그리고 실시간 검색어를 확인하는 순간 창현은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지었다.

실시간 검색어는 다름 아닌 ‘현의 집 주소’가 실려있던 것이다.

현이 사는 곳, 현의 집 주소, 현의 집 등 무려 십여 개의 연관 검색어가 상위를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지은 창현은 ‘현의 집 주소’로 검색을 한 뒤 글 하나를 클릭해본다.

그러자 창이 띄워지면서 나타나는 그의 집 주소.

틀림없이 지금 자신이 살고 있는 집 주소였다.

그 출처를 찾고 찾던 창현은 마침내 어디서 자신의 집 주소가 흘러나왔는지 알 수 있었다.

다름 아닌 자신이 졸업한 초등학교 졸업 앨범에서 나왔던 것이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는 졸업을 하면서 각각 졸업앨범을 찍는다. 그리고 그 앨범에 연락망을 형성하고는 하는데, 바로 집 주소와 집 전화번호를 기입해놓는 것이다.

당시에는 아무 쓸모없는 자료였지만 지금 그가 가수로 데뷔한 만큼 이 자료는 엄청난 위력을 발휘한다.

글을 읽는 창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런 터무니없는…….”

당장 이 글만 해도 클릭수가 오천 개가 넘었다.

단 하나의 글이 이런 조회수가 된다. 그렇다는 건 다른 것들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보았다는 것인가.

슬쩍 창현이 베란다로 나가서 아래를 내려다본다. 그러자 집 앞에 백여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있는 것이 보였다. 경비원들이 제지를 하려고 하지만 애초에 여기는 일반 서민이 사는 아파트였다. 제대로 될 리가 없다.

복도를 보니 여전히 사람들이 넘쳐났고, 계속해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초인종 소리, 심지어 전화 벨이 울리기까지 하였다.

집안을 가득매우는 소리를 들으며 창현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오늘 학교는 못 가겠네.”

석규가 조치를 취해준다고 했으니 그걸 기다려야 할 뿐이었다.


석규는 점심식사를 한 후부터 새벽까지 업무를 보곤 한다.

보통 자정까지 업무를 보던 석규는 오늘만큼은 서류 처리를 할 것이 무척 많았다.

바로 창현에게 온 각종 CF와 화보 촬영 제의 때문이다.

창현에게 CF들을 수락했다고 하지만 무턱대고 결정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석규는 창현에게 온 CF 중에서도 그에게 도움이 되고, 추후 이미지 상승에 도움이 될 법한 것들을 가지고 회사 실무진과 회의에 회의를 거듭하였고, 늦은 시간까지 고민에 빠져야만 했다.

자신의 아들인 걸 떠나 창현은 가요계의 폭풍을 일으킨 톱스타였다. 회사의 도움없이 스스로 그 위치까지 올라 선 것이다. 톱스타까지 올라가는데 도움을 못 주었으니 그 위치를 지키고, 이미지를 만들어나가게 해주는 것은 회사의 몫이었다.

“CF제의가 너무 많아도 문제군. 확실히 광고주들 중에 능력있는 사람이 많단 말이지. 이 틈을 파고들다니.”

이미 노래를 듣는 대중들에게 있어 현의 가창력이나 노래는 최고로 평가받고 있지만 막 얼굴을 드러내고 비주얼로서 승부수를 던진 현은 그 인기가 폭발적으로 치고 올라오고 있는데 반해 아직 CF같은 곳에서는 신예로 속했다.

하지만 인지도는 톱스타에 비해 부족하지가 않았다.

비주얼과 인지도가 받쳐주는데 신예이다.

그렇다는 건 비싸지 않게, 상대적으로 저렴하게 CF를 캐스팅 할 수 있다는 뜻이 된다.

물론 석규가 능력을 십분 발휘하여 협상을 할 수 있지만 아직 검증이 되지 않은 창현을 내세워 올릴 수 있는 금액에는 한계가 있다.

돈이 급하여 CF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앞으로 활동을 위해서 더욱 더 많은 인지도를 쌓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CF를 찍는 것이 좋았다.

어차피 돈이라면 당장 넉넉했으니까. 보통 수익을 올리면 다른 곳에 투자를 하여 사업 영역을 넓히는 다른 회사와 달리 석규는 흑자를 본 돈들을 그대로 보유하고 있는 상태였다. 연예계에서 확고한 신용을 얻고 회사 내의 자생력을 길러줄 연예인들을 양성하기 위해서는 좀 더 탄탄한 시스템을 도입할 생각이었고, 그것을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현과 라샤가 확고하게 입지를 다지면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거대 엔터테인먼트로 발돋움을 할 계획이었다.

어찌하였든 현의 광고 선택을 놓고 이리저리 고민하던 석규는 몇 가지 CF를 선별한 뒤 새벽 3시가 되어서야 잠이 들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수면은 길지 못했다.

아침 7시가 되었을 무렵, 갑자기 비서가 석규를 깨우기 시작한 것이다.

“일어나세요, 사장님. 큰일났습니다.”

“음! 무슨 일인데 그래, 미스 김.”

부스스한 몰골과 갈라지는 목소리로 석규가 일어나며 물었다.

잠을 조금밖에 자지 못했기에 몸은 천근만근 무거웠고, 눈을 뜨기조차 힘들었다.

“아, 일단 좀 씻어야겠군. 잠시 기다려보라고 해.”

그렇게 말한 석규는 화장실로 가서 세수를 한 뒤 사장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는 직원의 보고에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뭐라고? 창현이의 집 주소가 노출 되었다고?”

믿기 힘든 보고에 석규는 서둘러 문제의 게시글을 찾아보았고, 창현과 같은 초등학교 출신의 학생이 졸업 앨범에서 주소를 찾아내어 인터넷에 올린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일이 생각보다 커질 조짐을 보이자 석규는 서둘러 대처를 해야 함을 느꼈다.

“이번주 내로 숙소를 옮기려 했는데 기어코 일이 터지는군. 우선 창현이가 머물 숙소 세팅을 마치도록 해.”

마음 같아서는 인터넷에 퍼진 정보를 막아버리고 싶었지만 그것이 불가능한 걸 알았기에 석규는 창현이 조금 고생해야 함을 느꼈다.

잠시 후, 창현에게서 전화가 왔고, 집밖에 수많은 사람들이 와 있다는 말에 예상대로라고 생각하면서 직원 세 명을 파견했다. 이미 창현이 머물 숙소는 마련된 상태였고, 이삿짐 센터에 의뢰를 하여 짐을 옮기면 되었기에 우선 지금의 사태를 무마시키는 것이 중요했다.

석규가 파견한 직원 세 명 중 가장 직급이 높은 사람은 윤진호란 사람으로, 실장직을 맡고 있다.

그는 석규의 명령으로 창현이 사는 곳으로 갔고, 집밖에 무려 수백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고는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거 인기가 엄청나군.”

윤진호는 모여든 인파에 혀를 내둘렀다. 함께 온 직원 두 명도 마찬가지 반응이었다.

현이 첫 앨범을 낼 때부터 일하던 그들이었기에 현의 인기가 대단하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정도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직접 겪어보질 못했으니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몸은 이해를 거부하고 있던 것이다.

주소가 본격적으로 퍼져 나간 게 채 반나절도 되지 않았는데 이런 인파가 모여들다니.

새삼 그들은 현이 백만 장을 넘게 판 탑 클래스 가수라는 것을 떠올리게 되었다.

차를 주차시킨 그들은 아파트 안으로 들어서려고 하였다.

하지만 이미 사태가 심각하다는 걸 알아차린 경비원들이 모여서 경비를 서고 있는 상태였다.

윤진호는 자신을 가로막는 경비원에게 명함을 건네며 말했다.

“AA엔터테인먼트의 윤진호 실장입니다. 지금 이 사태는 이곳 아파트에 유명 연예인이 살고 있어서 그렇습니다. 저희가 수습하도록 할 테니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윤진호의 차분하고 조리있는 말에 경비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을 했다. 그리고 직원 두 명에게 준비해온 것을 펼치라고 한 뒤 자신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15층으로 올라갔다.

띵!

15층에 도착한 윤진호가 먼저 본 것은 십여 명의 여학생들이 진을 치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른 바 사생팬이라 불리는 사람들이었다.

이제 데뷔 한 지 삼 일 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이런 인기라니.

윤진호는 다시 한 번 현의 인기를 느끼며 말했다.

“여러분들 혹시 현을 보러 오신 분들입니까?”

“…….”

여학생들이 윤진호에게 시선을 준다. 그것은 긍정의 의미였다.

가볍게 한숨을 내쉰 윤진호가 자신의 소개를 하였다.

“AA엔터테인먼트의 윤진호 실장입니다. 현을 만나기 위해 오신 분들 맞습니까?”

윤진호가 정체를 밝히자 그제야 여학생들에게서 반응이 나온다.

“맞아요. 지금 현이 집안에 있죠?”

“만나서 사진도 찍고 싸인도 받고 싶은데 어떻게 안 되나요?”

여학생들의 말에 윤진호가 차분하게 말했다.

“우선 집안에 현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지금 모여든 분들로 인하여 곤란에 처해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오늘이나 내일 중으로 숙소를 옮길 생각이었는데 공교롭게도 인터넷에 주소가 퍼졌더군요. 여기 모이신 분들은 모두 현이 좋아서 온 것이겠지요?”

여학생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인다. 현의 노래에 중독되다시피 하였고, 그의 뛰어난 외모에 반해서 이렇게 온 것이 아닌가? 인터넷에 떠도는 정보라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왔는데 AA엔터테인먼트 사람이 온 것을 보아 확실한 정보인 듯했다.

윤진호는 침착하게 말했다.

“여러분들의 관심은 감사하지만 그것이 과하면 오히려 독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 바깥에 모인 분들로 인해 현이 집에 나오지도 못하고 학교에도 못가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팬인 여러분들을 쫓아낼 수도 없는 노릇. 이렇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현재 밖에서 저희 직원들이 준비를 해놓고 있습니다. 즉석 싸인회를 말이지요. 여러분들이 순순히 아래로 내려가주신다면 현과 함께 사진을 찍고 싸인을 받도록 해드리겠습니다. 어떻습니까?”

아주 군침이 도는 제안이었다. 언제 나올지 모르는 현을 기다리는 것보다는 함께 사진을 찍고 싸인을 받는 것이 훨씬 시간 절약이 되고 확실한 방법이 아닌가?

복도에 모인 여학생들은 모두 좋다고 하였다.

그에 윤진호는 가벼운 미소를 지으면서 그녀들을 보낸다.

여학생들을 모두 보낸 윤진호가 핸드폰으로 창현에게 연락을 한다.

전화를 받은 창현이 문을 열었다. 그리고 아무도 없자 화색을 띠며 말했다.

“모두 해결 된 건가요, 윤실장님?”

그 모습을 본 윤진호는 창현이 아직 자신의 인기를 완전히 실감하지 못하는 것 같아 한숨을 내쉬었다. 사생팬들이 어디 쉽게 물러가는 족속이던가. 간신히 내려보내는 게 고작이었는데.

윤진호는 고개를 저었다.

“해결된 게 아니라 일을 해야 할 것 같구나. 사장님께서 밖에 모여든 팬들을 함부로 할 수 없다고 하여 즉석 팬 싸인회를 조직하였다. 어차피 오늘 네 숙소를 옮길 테니 이런 일은 발생하지 않을 거다. 데뷔 초창기인 만큼 네 이미지가 나쁘게 나면 안 되니 최대한 웃으면서 임해야 한다.”

그 말에 창현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렇게 되었군요. 그럼 어쩔 수 없지요. 솔직히 부담스러운 걸 빼면 절 좋아해주시는 건데 기분이 나쁠 리가 없지요. 우선 옷부터 갈아입어야겠네요.”

“그래. 난 밖에 나가서 설명을 할 테니 옷 잘 차려입고 나와라. 그리고 오늘은 학교 쉬도록 하고. 싸인회가 끝나면 곧장 새 숙소로 갈 테니까.”

“알았어요.”

대답과 함께 창현은 다시 집안으로 들어갔고, 윤진호는 1층으로 내려가 모여든 팬들에게 자세한 설명을 한다. 그리고 경비원들에게 부탁하여 난데없는 즉석 팬 싸인회를 열게 되었다.

갑작스러운 팬 싸인회였지만 창현은 자신을 좋아해주는 팬들에게 덕담을 들으면서 새삼 그들이 자신의 노래를 좋아해준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반강제적이었지만 나중에는 기쁜 마음으로 싸인회에 임할 수 있었다.

싸인회를 하던 도중 계속해서 모여든 사람들의 존재로 인하여 본래 예상했던 시간보다 더 지체되었지만 무사히 싸인회를 마칠 수 있었다.

폭풍과도 같던 싸인회가 끝나자 창현은 곧장 윤진호가 운전하는 벤을 타고 새 숙소로 향했다.

그렇게 가수 현의 집 주소가 유포된 헤프닝은 싸인회라는 이벤트로 무사히 무마시킬 수 있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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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마음을 울리는 음악 시즌2 제1화 +10 15.04.17 7,373 95 10쪽
37 ▲▲▲▲▲시즌2 시작!▲▲▲▲▲ +5 15.04.17 5,421 65 1쪽
36 마음을 울리는 음악 106장-108장 +8 15.04.16 6,409 106 230쪽
35 마음을 울리는 음악 103장-105장 +1 15.04.16 4,242 82 3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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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마음을 울리는 음악 40장-42장 +3 15.04.16 8,904 183 320쪽
13 마음을 울리는 음악 37장-39장 +2 15.04.16 9,610 224 397쪽
12 마음을 울리는 음악 34장-36장 +8 15.04.16 9,520 189 322쪽
11 마음을 울리는 음악 31장-33장 +8 15.04.16 10,351 261 345쪽
10 마음을 울리는 음악 28장-30장 +5 15.04.16 10,654 260 277쪽
9 마음을 울리는 음악 25장-27장 +7 15.04.16 11,032 267 233쪽
8 마음을 울리는 음악 22장-24장 +4 15.04.16 10,917 261 198쪽
» 마음을 울리는 음악 19장-21장 +4 15.04.16 11,484 270 216쪽
6 마음을 울리는 음악 16장-18장 +5 15.04.16 11,536 242 163쪽
5 마음을 울리는 음악 13장-15장 +5 15.04.16 14,527 297 237쪽
4 마음을 울리는 음악 10장-12장 +8 15.04.16 13,727 352 171쪽
3 마음을 울리는 음악 7장-9장 +10 15.04.16 14,540 362 142쪽
2 마음을 울리는 음악 4장-6장 +11 15.04.16 16,820 421 120쪽
1 마음을 울리는 음악 프롤로그-3장 +47 15.04.16 29,872 545 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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