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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번 님의 서재입니다.

마음을 울리는 음악

웹소설 > 작가연재 > 팬픽·패러디, 현대판타지

김현우
작품등록일 :
2015.04.16 13:27
최근연재일 :
2015.06.01 17:02
연재수 :
5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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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96,4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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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4.16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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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글자
261쪽

마음을 울리는 음악 82장-84장

DUMMY

제82장 다큐멘터리




와아아아아!

꺄아아아아!

현! 현! 현!

지축을 뒤흔드는 듯한 함성 소리가 정겹게 귓가에 울려 퍼진다.

그 함성 소리를 듣기라도 하듯 입가에 훗! 하고 미소를 지어 보이는 창현.

그러한 그의 모습을 보는 팬들은 자지러질 듯 함성을 지른다.

본격적으로 컴백 무대에 선지 삼 일이 되었다.

그동안 창현이 가장 우선시 한 것은 K본부 컴백 무대에 이어 M본부 무대와 S본부 무대에 서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계단 춤’이라 명명한 이 춤은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단 하루만에 뮤직비디오 다운수 삼백만을 초과하였으며, 앨범 판매량 또한 백만에 육박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어디 그뿐인가.

곳곳에서 계단 춤을 패러디 하는 동영상들도 속속 올라오면서 그야 말로 돌풍을 일으키고 있었다.

계단 춤을 따라해 본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저으며 극찬을 금치 못했다. 난다 긴다 하는 사람들도 도전을 해봤지만 막상 보는 것처럼 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2단과 3단은커녕, 1단조차 흉내 내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그럴수록 계단 춤은 더욱 화제가 되었고, 그가 펼치는 계단 춤을 보고자 하는 사람들의 기대심리는 멈출 줄 모르고 치솟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안달이 난 것은 M본부와 S본부였다.

현의 컴백 무대를 가장 먼저 유치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였지만 결국 승리한 것은 K본부였다. 그로 인해 다소 삐져있는 상태였는데 현의 계단 춤이 상상을 넘어서는 대박을 터뜨리자 생각이 달라진 것이다.

계단 춤으로 K본부가 엄청난 재미를 보았지만 기대심리는 꺾인 것이 아닌 더욱 활활 타오르고 있는 중이다.

이것을 이용하면 뒤늦게 컴백 무대에 서더라도 충분히 대박이 가능하리라.

M본부는 즉각 AA엔터테인먼트에 연락하여 현의 컴백 무대뿐만 아니라, 아예 스페셜 스테이지에 세울 것을 제안하였고, 발 빠른 S본부는 그보다 먼저 연락하여 현의 컴백 무대를 2곡이 아닌, 3곡으로 늘려주겠다는 제안을 하였다.

결과적으로는 M본부의 제안은 받아들였지만 S본부의 제안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2곡에서 3곡으로 늘린다는 것은 결국 누군가 하나가 빠져야 한다는 이야기였고, 무대 위에 서는 창현이 의아할 정도로 힘들어하였다. 2곡까지 가능했지만 3곡까지는 무리라는 것이 석규의 생각이었다.

좋은 말로 타이르고, 무대를 좀 더 멋지게 꾸며주는 선으로 합의를 보았다.

까칠하게 굴던 AA엔터테인먼트에서도 협조적으로 나오니, M본부와 S본부도 순순히 따르며 현의 컴백 무대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후우우!”

1위를 수상한 창현이 앵콜 무대를 마치고 대기실로 들어서자 세희가 빠른 속도로 그에게 다가간다. 그리고 손에 든 수건으로 땀범벅이 된 그의 얼굴을 닦아준다.

“수고했어. 땀 좀 봐.”

“고마워요. 후! 물이나 음료수 있나요?”

“여기.”

가만히 서 있던 창현은 땀을 닦아주던 수건이 얼굴을 떠나자 곧장 음료수를 마시기 시작한다.

격렬한 운동을 마치고 마시는 듯한 그의 모습에 세희가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이상하네, 그렇게 격렬한 것 같지 않은 데 왜 그렇게 힘든 표정을 하는 거야?”

다른 사람의 눈에는 그렇게 힘든 것처럼 보이지 않으리라.

하지만 당사자인 창현은 죽을 맛이었다.

“글쎄요? 체력이 부족해서 그런 게 아닐까요. 하하.”

어색한 웃음으로 얼버무리는 그의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던 세희가 고개를 젓는다.

그가 정말 체력 부족으로 지쳐있는 것이 아니란 걸 알았지만 대답해줄 마음이 없다는 것은 눈치 챈 상태였으니까.

‘약간 섭섭하지만 어쩔 수 없지.’

그만의 비기가 따로 있고, 그로 인해 힘들어한다고 생각하면 되었으니 세희는 별다른 것을 묻지 않았다.

“그럼 가요. 오늘도 힘이 들어서 든든하게 먹어야겠네요.”

“무대 위에 서면 많이 먹더라? 적게 먹는 것보다는 덜 걱정되지만…….”

이틀 동안 컴백 무대 위에 선 창현은 무대가 끝난 직후 엄청난 양의 음식을 해치우는 모습을 보였기에 세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오늘도 그럴 것이라 생각하니 자신도 모르게 질려버린 것이리라.

“열심히 움직인 만큼 배가 고플 수밖에 없죠.”

“그래도 너만큼 많이 먹는 사람은 없다고. 그 음식들이 다 어디로 가나 몰라.”

“오늘은 컴백 무대도 모두 끝났고, 누나도 수고한 것 같아 차돌박이나 먹을까 했는데…….”

작은 창현의 중얼거림. 한우 꽃등심과 살치살, 목살에도 흔들리지 않는 세희였지만 그녀는 차돌박이를 무척 좋아한다.

오죽하면 한 달에 한 번은 반드시 먹어주어야 한다 말할 정도가 아닌가.

차돌박이 언급에 세희의 눈이 급격하게 흔들린다.

그 야들야들한 감촉을 떠올리니 자신도 모르게 고이는 침.

“먹을까요, 말까요.”

“머, 먹으면 좋지.”

흔들리는 마음을 가까스로 붙잡고 애써 태연한 척 하는 그녀.

하지만 이미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알았어요, 먹으러 가요, 그럼.”

“그, 그래. 내가 원해서 그런 게 아니야. 창현이 네가 먹고 싶어서 가는 거야. 맞지?”

괜히 자신의 속내를 들킨 것 같아 목소리를 높인다.

그 모습에 피식 웃음을 지은 창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기실을 나선다.

“맞아요. 하하!”

밖으로 나간 그를 보며 서둘러 가방을 챙겨드는 세희.

그녀의 입가에는 진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월급 굳었다. 아싸!’

연봉이 짭짤한 그녀는 시집 자금을 모으기 위해 용돈 생활을 하고 있었다.


폭풍과도 같던 주말이 지나갔다.

그동안 수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당연 화제는 현의 컴백 소식이었다.

압도적인 카리스마와 더불어 각각의 테마가 담긴 수록곡과 그것을 한데 아우르는 타이틀곡.

뒤떨어지지 않은 음악성과 상업성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면서 일으킨 거대한 시너지 효과는 여태껏 일어났던 현 효과와 차원을 달리할 정도로 엄청난 폭발력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한 대박행진 속에서 창현은 컴백 무대만 서며 시간을 보냈고, 나머지 시간들은 명상을 하면서 부족한 내공을 조금이나마 보충하는 시간을 가졌다.

지금 상태로 계단 춤을 출 수 있는 것이 그리 많지 않았으니까.

월요일.

주의 시작이 되는 날, 아침 일찍 일어난 창현은 곧장 AA엔터테인먼트로 향하고 있었다.

컴백 무대가 대박나면서 출연 요청이 쇄도하고 있다는 석규의 말 때문. 고르고 고른 스케줄이 있었지만 아무래도 최종 선택은 그의 몫인 경우가 많았다.

그랬기에 곧장 벤을 타고 회사로 향한 것이다.

사장실이 있는 곳으로 향하면서 창현은 향후 진로를 정리하고 있었다.

‘일단 계단 춤의 비법을 차근차근 공개하는 거야. 내공없이 펼치면 2단까지는 가능하니까.’

사람들이 계단 춤에 열광하는 것은 보면 신비로운 것이 첫째였고, 은근히 쉬워 보여 나도 할 수 있다는 것이 두 번째 이유다. 그리고 세 번째는 보이는 것에 비해 쉽지 않다는 걸 알고, 이것이 아무나 할 수 없다는 희소성 때문에 더욱 열광하게 되는 것이다.

창현은 이 춤의 비법을 단계별로 서서히 공개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가장 열광하는 3단은, 내공의 힘으로 발현되는 오로지 자신만의 춤으로 남겨둘 생각이었다.

‘어차피 흉내는 가능하지만 완벽하게 해내는 건 불가능하니까.’

남들은 어설프게 해낼 수 있고, 오로지 자신만 완벽하게 해낼 수 없다.

내공이 존재하는 창현의 계단 춤이 원 형태라면 다른 사람이 흉내 내는 것은 다운 그레이드 된 계단 춤일 것이다.

그렇게 자신의 춤에 대해 정리를 마쳤을 때, 사장실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비서의 눈이 며칠 전과 상당히 틀리다.

입가에 살짝 미소를 지은 창현이 인사하자 예전보다 어색해하며 부끄러워하는 기색을 보였으니까.

“들어가도 되죠?”

“사장님이 오시면 안으로 들여보내라 하셨어요.”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창현은 곧장 사장실 앞으로 다가가 입을 연다.

“저 왔어요. 들어가도 되죠?”

“들어와라.”

“네.”

짧은 대답과 함께 안으로 들어가는 창현. 마침 서류를 살피고 있는 석규의 모습을 힐끗 살핀 그는 소파에 다가가 앉는다.

서류를 정리한 석규가 창현에게 다가오더니 맞은편에 앉으며 말한다.

“아주 사고를 쳐도 단단히 쳤더구나.”

“이 정도는 되어야 실망하지 않을 테니까요.”

“대박을 쳐서 앨범도 예상보다 더 많이 팔리고 있고, 섭외 요청도 아주 빗발치고 있더구나. 네 계단 춤에 대한 원리를 파악하고 싶어 그런 거겠지.”

“쉽게 가르쳐줄 생각은 없는데요? 후후!”

다른 사람이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춤이니 만큼 튕겨주는 것이 좋다. 그래야 상대측에서 더욱 애가 탈 테니.

“그 정도야 다들 예상하고 있을 테니. 내가 널 부른 것은 섭외 요청이 많아서 그렇고, 한 가지 해야 하는 것도 있어서 그렇다.”

“해야 하는 거요?”

“일단 섭외 요청부터 봐라.”

서류를 건네주자, 그것을 받아든 창현이 부지런히 서류를 읽어나가기 시작한다.

이미 한 차례 걸러낸 것이니 만큼 굵직한 것들만 남아있는 상태였다.

“일단 타이트하게 할 생각은 없어요. 계단 춤이 생각보다 힘들어서 무대 위에 서는 날 다른 스케줄은 무리일 것 같아요.”

“흠! 그렇다면 그 날과 겹치는 것들은 가급적 빼야겠지.”

“그리고 9월 초중순부터 중순까지는 제가 개인적으로 약속한 것이 있어서요. 그것도 빼고 진행한다면… 이거랑 이거, 그리고 몇 가지는 더 살펴보고 결정을 내리면 되겠네요.”

“괜찮은데? 확실히 네가 예능 프로그램을 가리고 나가는 편은 아니니 그렇게 하는 게 좋겠군. 좋아, 이렇게 진행하도록 하자.”

몇 개는 확정적으로, 몇 개는 잠정적 유보 상태로 두는 창현.

게다가 9월 초에는 검정고시 시험을 봐야하기에 그것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리고 네가 해주었으면 하는 게 있는데.”

“뭔데요?”

“너도 알고 있겠지만 지금 우리 회사는 엠넷 측과 SM엔터테인먼트 측 중간에 자리하고 있는 걸 알고 있을 게다.”

“음, 잘은 모르지만 아버지가 그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죠.”

고개를 끄덕이는 창현. 자세한 상황은 모르지만 엠넷과 SM엔터테인먼트 측이 사이가 좋지 않아 파워 게임을 벌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리고 AA엔터테인먼트는 그 중간에 끼여 양쪽에서 압박을 받음과 동시에 이득을 취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SM엔터테인먼트와 굳건한 제휴 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엠넷 측에서는 현과 라샤라는 막강한 가수를 보유한 AA엔터테인먼트를 놓치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들의 존재만 있으면 엄청난 시청률을 끌어올릴 수 있다는 걸 그들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이번에 엠넷 측에서 제안을 하더구나. 창현이 네 생활을 3일 정도 찍어서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내보내고 싶다고.”

“다큐멘터리로요?”

“그래.”

황당한 표정을 그의 물음에 석규가 고개를 끄덕인다.

“제가 그걸 하는 게 좋을까요?”

“네 입장은 모르겠지만 팬들에게는 너의 생활을 알 수 있을 테니 나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넌 신비주의가 아니라, 고급화 전력을 사용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데뷔한지 4년차가 됨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네가 어떤 사람인지 알리는 게 부족했지. 팬들의 입장에서는 반길 것이다.”

“회사 입장에서는요?”

“엠넷의 요구를 들어줄 수 있으므로 이쪽도 무언가를 요구해줄 수 있으니 좋겠지.”

“음!”

석규의 말에 생각에 잠기는 창현. 그의 말마따나 여태까지 자신의 많은 것을 감추며 지내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딱히 공개할 마음이 없지만 일부분을 공개하는 것만으로도 팬들의 반응을 더욱 끌어낼 수 있지 않을까?

실망스러운 모습만 보이지 않는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였다.

“…나쁘지 않은 것 같네요. 저도 언제까지 꽁꽁 싸매고 있을 생각은 없었으니까요.

“그래, 그럼 조만간 추진하도록 하마.”

“예,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세요.”

그 후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창현은 안무 연습을 더 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창현이 밖으로 나가고 혼자 남게 된 석규.

그가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이자 석규는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젓는다.

“일단 한숨 돌렸군.”

행여나 창현이 거절을 했으면 상당히 복잡하게 일이 돌아갈 뻔하였다.

근래 들어 SM엔터테인먼트에게 많은 지원을 받다보니 엠넷 측과 서서히 멀어지는 기미가 보이고 있었다. 그러던 중 현의 컴백과 맞물려 다큐멘터리 기획안을 내놓자, 긍정적으로 검토하는 방향으로 하여 다시 관계를 이어나간 것이다.

뜯어먹을 것이 많은(?) 엠넷이었기에 이대로 놓아버리는 것은 다소 아까운 것이 사실.

그랬기에 창현을 케이블 TV에 내보내면서 이득을 취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도 결코 손해가 아니었고.

“일단 이걸로 한숨을 돌렸군. 제법 위험했단 말이지.”

원래대로라면 양쪽 중간에 서서 야금야금 이득을 취했어야 정상이다. 그런데 자칫 잘못했으면 두 번 다시 웃으면서 마주하지 못할 사이로 발전할 뻔했다.

일이 왜 이렇게 진행되었는지는 석규도 잘 알고 있었다.

어느덧 입에 익어버린 생강차를 마시며 웃음을 지었다.

“이 회장님, 만만치 않은 분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를 너무 얕보면 곤란하지요. 후후!”

돌연 SM엔터테인먼트가 적극적인 모습으로 나와 도와주니, 제3자의 시야로는 AA엔터테인먼트와 SM엔터테인먼트가 한 배를 탄 것처럼 보이리라.

그것을 누가 연출한 것인지 알고 있는 석규였기에 미소를 지은 것이다.

방심하고 주는 대로 받았더라면 그대로 한 배를 타는 운명이 되었으리라.

“좀 더… 좀 더 얻을 것을 얻고 결정을 내려야지. 누구도 무너뜨리지 못할 철옹성을 만든 뒤에.”

석규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더욱 짙어지고 있었다.


창현의 허락을 얻은 석규는 그때부터 거침없이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그와 이야기를 한 당일 점심, 시계를 확인한 석규는 약속 장소에 나갔다.

석규가 향한 곳은 인근에 제법 유명한 일식집이었다.

이야기 나누기 좋은 방을 빌린 그는 먼저 자리에 앉아 손님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밖에서 문이 열리더니, 사십대 후반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낸다.

사내는 자리에서 일어서는 석규를 향해 인사한다.

“이렇게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강 사장님. 저는 최재철이라고 합니다.

자리에서 일어선 석규가 그 인사에 답한다.

“반갑습니다, 최PD님. AA엔터테인먼트 사장 강석규입니다.”

“하하! 어떻게 AA엔터테인먼트의 강 사장님을 몰라보겠습니까. 이렇게 만나게 되어 진심으로 반갑습니다.”

“저도 명성이 자자하신 최PD님을 만나게 되어 좋군요. 앉으시지요.”

최재철이라 밝힌 사람에게 자리를 권한 석규가 뒤이어 자리에 앉는다.

그리고 컵에 물을 따라주며 입을 연다.

“제가 최PD님을 점심에 뵙자고 한 건 가급적 업무 이야기만 하기 위함입니다. 밤에 만나게 되면 저도 모르게 술을 마시게 되어서. 하하! 요즘 업무가 쌓이다 보니 술을 마시면 다음 날 무척 고생을 하게 됩니다.”

“강 사장님의 상황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저도 그 부분을 염두에 두고 있고, 휴일이 아니면 가급적 술을 피하는 주의라 그 부분을 개의치 않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면 화기애애함 그 자체였다. 하지만 현재 SM엔터테인먼트와 엠넷 양측에 줄타기를 하고 있는 AA엔터테인먼트의 사장이었기에 보이지 않는 탐색전이 숨어 있었다.

석규도 그것을 잘 알고 대응을 하고 있었고.

“술을 마시지 않기 위해 점심시간을 선택했지만 이곳의 음식이 맛있는 만큼 천천히 즐기시길 바랍니다.”

“제가 대접을 해야 하는데 오히려 대접을 받게 되어 몸둘 바를 모르겠군요.”

“서로 상부상조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어르고 달래는 솜씨는 누구도 따르지 못할 정도로 발달한 석규였다. 애초에 이것이 불가능했으면 중간에 줄타기를 하며 이득을 챙길 생각은 하지도 못했으리라.

연예계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고, 현의 컴백 무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음식이 들어오길 기다렸다.

잠시 후, 먹음직하게 썰린 회와 함께 각종 음식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본격적인 식사가 시작된다.

천천히, 차분하게 음식을 들면서 석규가 말하기 시작한다.

“오늘 이곳으로 청한 것은 짐작하고 계시다시피 얼마 전부터 꾸준히 제의가 들어왔고, 금요일에 최종 정리된 제안에 대해 답을 하고자 함입니다.”

“…예.”

현에 관련된 문제이니 만큼 최PD는 쉽게 넘길 수가 없었다.

그들도 소식통이 있는 만큼 요즘 들어 AA엔터테인먼트가 부쩍 SM엔터테인먼트와 가까이 지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드라마 앨범에서도 같이 하였고, 드라마도 같이 나오지 않았던가. 뿐만 아니라 뮤직비디오에서도 나온 것으로 보아 보통 사이가 아니란 걸 짐작하고 있다.

현과 라샤를 끌어들여 시청률을 당기고자 하는 엠넷 측에서는 두 회사가 서로 상부상조하는 것이 마음에 들 리 없었다.

그래서 AA엔터테인먼트가 군침을 흘릴 법한 조건을 걸어 제안을 하였고, 현의 컴백 소식이 돌기 시작할 때부터 꾸준히 제안을 해왔다.

특히 계단 춤이 완전 대박을 터뜨리면서 대한민국 전체가 현의 열풍으로 휩싸인 지금, 엠넷에서는 그를 어떻게든 끌어들이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 있었다.

오죽하면 자체적으로 회의를 하여 지금 현의 이미지에 타격이 되지 않으면서 그의 많은 것을 끌어낼 수 있는 아이템 회의까지 했던가.

조건도 조건이고, 프로젝트도 프로젝트인 만큼 자신했지만 마음 한쪽이 불안한 것은 사실이었다.

가슴을 졸이는 그의 심정을 알고 있는 것일까.

입가를 말아올리며 묘한 미소를 짓는 석규.

그는 그의 속을 풀어주듯 입을 연다.

“다행히 현이 엠넷 측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고 했습니다.”

“후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최PD였다. 혹시나 거절하면 어떻게 하나 싶었는데 기우였나보다.

‘하기야, AA엔터테인먼트 측에서도 거부하기 힘든 좋은 조건이었으니까.’

찬성은 당연한 것이라 생각하는 최PD였다.

그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하하! 강 사장님이 힘을 써주셨군요. 감사합니다.”

“예, 실은 현이 얼마 후에 검정고시를 보게 돼서 상당히 고민했는데 엠넷에서 배려해준 것처럼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말입니다.”

“거듭 강 사장님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뭘요. 서로 돕는 거지요.”

그 후에 이어진 것은 잠깐의 침묵.

이야기를 할까 말까 하던 최PD가 침묵을 깨고 입을 연다.

“저번에도 제안했다시피 저희 회사에서는 AA엔터테인먼트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싶어 합니다.”

“그것은 저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말인데… 라샤가 국내로 돌아오지 않았습니까?”

“예.”

“아마 앨범을 준비하고 있는 중일 테고요.”

“맞습니다.”

일 년 동안 국내 무대에 복귀하지 않았지만 조만간 국내에 컴백할 것이라 이야기를 해놓은 상태였다.

“그래서 말인데, 라샤와도 프로그램을 하나 짜보고 싶은데 말입니다.”

“라샤 아이들과 말입니까?”

“예, 일본과 동남아시아를 완전히 제패한 라샤라면 많은 시청률을 끌어들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 물론 라샤가 참여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내놓을 생각입니다.”

“그 부분은 우선 생각해볼 문제인 것 같군요.”

성급하게 답을 내리는 석규가 아니었다.

어제의 아군이 오늘의 적으로 변하는 상황이 발생하지만 그 반대의 성황도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다.

섣부른 확답을 내리지 않는 것이 서로에게 좋다.

최PD도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제가 좀 섣부르긴 했지요. 그 부분은 차근차근 생각해주시고, 현 씨가 승낙을 했다면 곧장 촬영에 들어가고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언제쯤 가능하신지?”

“수락이 떨어졌으니 지금부터 바로 준비하면 삼 일 후부터 가능합니다.”

스케줄에 쫓겨 언제 캔슬될 지 모르는 일이었다. 확답을 받았다 하더라도 가급적 빠르게 처리하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말하고서 느끼는 거지만 너무 빠른 감이 없지 않아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석규는 그 말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삼 일 후라, 괜찮을 듯 하군요. 하지만 현에게는 그 부분에 대해 말하지 않았으니 조금 기다리셔야 할 것 같습니다. 자세한 답은 내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늦더라도 다음 주 내로 촬영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서로 긍정적인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지는 두 사람. 각자 속에 품고 있는 생각은 달랐지만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일이었기에 협력이 이루어졌다.

각자 보장된 이익이 사라지면 언제라도 깨어질 유리와도 같은 협력이었다.


컴백 무대에 섰지만 창현의 스케줄은 무척 한산했다.

9월 초에 볼 검정고시 준비로 인해 스케줄을 가급적 잡지 않은 것이다. 덕분에 9월 초까지 해야 할 스케줄은 불과 두 개뿐이다. 무대에 서는 것을 제외하면 고작 두 개뿐이니, 당연히 공부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났다.

“하지만 좀 더 팽팽하게 당겨놓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

컴백을 했으면 정신없이 바빠야 하는데 한산하니 컴백을 하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 들고는 하였다.

배부른 소리였지만 오랫동안 가수로서 무대 위에 서지를 않았기에 예전에 겪던 것이 은근히 그립게 느껴지고는 하였다.

“오늘부터는 좀 바빠지겠지만.”

오늘은 석규가 이야기했던 엠넷 측에서 자신의 일상을 담는 다큐멘터리를 촬영하기로 한 날이다. 최대한 진솔 된 모습을 보여야 하지만 보이지 않아야 할 부분을 숨겨야 하는 것도 사실.

굳이 숨길 것도 없지만 어느 정도 주의가 필요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딩동딩동.

“응?”

아침 일찍 일어나 씻고 아침을 먹은 창현은 막 명상하려던 찰나, 벨소리가 울리는 것을 보고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거실로 걸음을 옮긴다.

그러면서 머릿속에 떠오르는 만약의 상황.

“설마…….”

그러면서 인터폰을 보니, 아니나 다를까, 카메라를 비롯하여 몇몇 사람들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을 본 창현은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진솔 된 모습을 촬영한다고 하더니, 아침에 부스스한 모습부터 촬영하려고 한 건가?”

힐끗 시계로 시선을 옮기니, 아직 한참 이른 시간인 6시 30분에 고정되어 있었다.

보통 연예인이 지금 깨어있을 확률이 거의 없을 테니, 아마 엠넷 측에서 막 잠에서 깬 현의 모습을 담아내기 위해 지금 온 것임이 분명하리라.

의도는 가상하지만 그것이 실패할 것을 생각하니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오는 창현.

“표정이 어떻게 될지 궁금한 걸?”

부스스한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던 그들이 말끔한 모습을 보고 어떤 표정을 지을까.

밖에서 기다리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는 창현이 대답과 함께 문쪽으로 향한다.

“네, 나가요.”

띠리리.

잠금 장치가 해제되는 소리와 함께 문을 여는 창현.

카메라 감독이 카메라를 들어 기습적으로 창현의 모습을 비춘다.

하지만 카메라에 들어온 것은 잠에서 막 깬 듯한 부스스한 모습이 아닌, 말끔하게 씻어 평상시와 다름 없는 모습!

전혀 예측하지 못한 모습에 제작진이 당황한 표정을 짓는다.

그 모습을 보며 빙그레 미소 지은 창현이 말한다.

“더우신데 일단 안으로 들어오세요.”

창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제작진이 안으로 들어선다.

야심차게 준비해온 계획들이 뭔가 처음부터 어긋나는 느낌과 함께.


“이른 시간에 오셨네요?”

집안으로 안내한 창현이 PD를 바라보며 묻는다.

그러자 PD는 어색한 웃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인다.

“네? 하하! 네. 그렇게 되었네요.”

카메라는 분주하게 움직이며 집안을 촬영하고 있었다. 평소에 집안에서 해결하는 것은 식사와 TV 시청 밖에 없었기에 깔끔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제법 넓직했지만 다른 연예인들의 숙소에 비해 화려하지 않았고, 전체적으로 깔끔하면서 약간 휑하다는 느낌을 주고 있었다.

“제 집을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카메라가 무질서하게 촬영하는 것보다 자신이 소개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에 집을 소개하기 시작한다.

방이 총 세 개인 창현의 집은 각각 간단한 작업을 할 수 있는 작업방과 잠을 자는 침실방, 그리고 옷을 두는 창고방으로 나뉘어 있었다.

가장 넓은 방이 작업방 역할을 하고 있었고, 중간 방이 침실을, 가장 좁은 방이 창고 형태로 쓰이고 있었다.

간단하게 집 소개가 끝나자 창현이 제작진을 보며 말한다.

“일찍 오느라 수고하셨어요. 더우실 텐데 음료수라도 한 잔 하시겠어요?”

“예? 예. 그래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의 집에 방문한 촬영진은 총 세 명이다. 카메라로 촬영하는 카메라 감독과 촬영 장소에서 즉각즉각 해야 할 것을 정리하고, 창현에게 알려줄 작가, 그리고 그것을 총괄하는 PD까지 총 세 명이었다.

냉장고로 향한 창현은 간단하게 섭취할 수 있는 이온 음료를 따라준다. 본래 손님이 오면 주스를 따라주지만 더운 여름에는 흡수율이 좋은 이온 음료를 종종 애용하고는 한다.

음료수를 마시고 촬영이 재개되었다.

“원래 아침에 이렇게 일찍 일어나시나요?”

“예, 아무래도 한창 성장기다 보니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습관이 들어서 말이죠.”

“보통 언제 주무시고 언제쯤 일어나시는지?”

부스스한 모습을 한 번 담고자 했는데 그것이 실패하자 창현의 취침 시간과 기상 시간을 묻는다.

그에 창현은 간단하게 대답한다.

“음, 특별한 스케줄이 없다면 가급적 밤 10시 이전에 잠에 들려고 노력합니다. 그리고 일어나는 시간은 5시에서 6시 사이?”

“엄청 일찍 일어나시는군요.”

“아침에 일찍 일어나면 하루가 긴 기분이라서요. 1분이라도 놓치기 싫은 마음에 이렇게 생활하게 되었는데 지금은 적응이 되어 무척 좋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방으로 향하는 창현.

오늘부터 시작된 촬영은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진행되는 것이기에 굳이 웃음을 유발할 필요가 없다. 가장 자연스러운 형태로 일상생활을 담아내는 것이기에 평소 하는 행동 그대로 보이면 되는 것이다.

‘명상은 하지 못하겠네.’

원래대로라면 명상을 해야 할 시간이지만 촬영진의 방문으로 그것이 무산되었다 생각하는 창현. 한창 내공을 활용할 시기에 명상을 하지 못한다는 점이 무척 아쉬웠지만 그것까지 보여줄 수 없는 노릇이다.

방에 도착한 그는 가방에 책을 넣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카메라를 보며 간단하게 말한다.

“집에서도 할 수 있지만, 아무래도 환경이 작업실에 더 적절하게 조성되어 있다 보니 작업실에 가서 공부를 하고는 합니다.”

얼마 후 검정고시가 있고, 사람들은 현이 검정고시에 응시하려는 것을 알고 있다.

포스트지가 붙어있는 참고서들을 가방에 넣은 그는 잠시 후, 말끔하게 옷까지 갈아입고 나온다.

이른 시간이라 그런 걸까?

등교를 위해, 아침 산책을 위해 나온 몇몇 사람들 밖에 보이지 않아 밖이 무척 조용하였다.

행여나 집 앞에 팬들이 있을까 걱정하던 창현은 한시름 놓은 채 밖으로 나와 작업실로 향한다.

작업실의 위치가 밝혀질까 싶어 카메라 감독은 카메라를 꺼두고 창현의 뒤를 따른다.

10분 정도를 걸어 작업실에 도착한 그는 촬영진과 함께 곧장 안으로 들어선다.

이미 <무한도전>을 통해 공개된 작업실이지만 눈으로 직접 본 것과는 다른 느낌일 수밖에 없다.

작업실 안으로 들어서 탁자 위에 가방을 내려놓은 창현이 촬영진을 바라보며 말한다.

“아침에 식사 하지 않으셨죠?”

“네? 네.”

“여기 맞은편에 위치한 상가에 맛있는 갈비탕 전문점이 있거든요. 24시간 하는 곳이니 그곳에서 아침을 드시고 오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전 이제부터 공부를 할 생각이라, 아침을 드시지 않으셨으면 함께 드시고 오는 게 좋으실 것 같은데.”

“그래도 되겠습니까?”

“네, 어차피 분량은 많이 나오지 않겠지만 제 일상을 촬영하려는 것이면 공부하는 장면도 어느 정도 나와야 할 테니까요. 음, 적절한 위치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가시면 될 듯 싶네요.”

“그럼 저기에 설치하는 건 어떻습니까?”

탁자와 주방까지 한눈에 보이는 위치를 가리키며 말하자, 창현이 고개를 끄덕인다.

잠시 카메라 설치 작업이 이어지고, 촬영진은 아침을 먹으러 밖으로 나간다.

주방 쪽으로 걸어간 창현은 주스를 한 잔 따라오고는 곧장 자리에 앉아 공부를 하기 시작한다.

그가 공부하는 과목은 수학이었다.

다른 과목도 괜찮지만 보여주기 위한 과목이라면 아무래도 펜을 분주히 움직이는 과목이 좋지 않겠는가? 더군다나 수학은 문제를 풀면서 풀이를 꽉 차게 적는 맛이 있었기에 수학을 무척 좋아하기도 한다.

‘푸는 맛이 있다랄까.’

정확하게 답이 떨어진다는 것이 특히 창현의 마음에 들었다.

언제나 확답이 나오지 않는 명제를 두고 고민하는 그에게 답이 하나 밖에 없는 수학이란 과목은 매력적으로 느껴졌으니까.

문제집을 분주하게 풀며 가끔씩 주스를 마시고 공부에 집중한다.

창현이 공부하는 페이스는 정해져 있다.

평소에는 아침 8시쯤에 도착하여 점심시간 직전인 12시까지 공부를 한다. 공부를 하는 페이스는 40분 동안 공부를 하고 20분 동안 휴식을 취하는 형태였다.

마음 같아서는 1시간 내내 집중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어느 정도 페이스를 조절해주며 하는 것이 더욱 집중력이 오래가고, 지치지 않는다. 그렇기에 휴식과 집중을 적절하게 섞어가며 공부를 하는 것이다.

‘오늘은 조금 길어질 것 같지만.’

약 한 시간 정도 지났을 무렵, 아침을 먹기 위해 나갔던 촬영진이 복귀하였다. 맛있는 곳이라 추천을 해줬는데 그들도 만족을 한 기색을 보이니 적잖게 마음이 놓였다.

특별히 하는 것도 없이 공부만 하는 모습을 촬영하게 하려니, 무언가 미안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이러한 모습을 원한 것은 자신이 아닌 저쪽이었기에 창현은 공부에 집중을 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약 세 시간이 더 흘렀다.

평소보다 약 한 시간 정도 공부를 먼저 끝낸 창현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공부를 마쳤으니 이제는 회사에 가려고 합니다.”

촬영진돠 부랴부랴 함께 뒤쪽으로 나가니, 그곳에는 언제 도착했는지 벤이 대기하고 있었다.

창현이 탑승하고 그 뒤를 이어 촬영진이 탑승한다.

안에 타고 있던 세희가 살짝 놀라며 묻는다.

“창현아, 벌써 촬영에 들어간 거야?”

“네, 일찍 찾아오셨더라고요. 그래서 아침부터 촬영하고 있었어요.”

“아침부터? 공부만 해서 무척 심심하셨겠네.”

왜 아침에 찾아왔는지 알겠다는 듯 미소를 짓는 세희.

그 모습을 보며 웃음을 지은 창현이 요란스럽게 세희를 소개한다.

“그럼 제 매니저를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얼마 전에 기사가 난 적이 있죠? 기자분들도 연예인으로 착각했던 미녀 매니저! 윤세희 님을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민망하게…….”

창현에게 눈을 흘긴 세희였지만 미녀라는 말이 결코 싫은 표정은 아니었다.

역시 미모 칭찬 앞에는 장사가 없는 듯했다.

“안녕하세요. 현의 매니저 윤세희입니다.”

“제 스케줄을 빠짐없이 꼼꼼히 챙겨주시는 분이죠. 많이 의지하고 있는 분이기도 하니 길에서 보시면 인사라도 해주세요. 하하!”

농을 던지는 창현의 모습에 세희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회사로 향하는 벤은 어느 가게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세희가 밖으로 내리자, 촬영진이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자 창현이 곧장 답한다.

“예, 지금 세희 누나는 점심에 먹을 도시락을 사러 갔습니다. 보통 아침은 집에서 해결하고, 점심은 도시락으로, 저녁은 장소에 따라 집에서 먹거나 밖에서 해결합니다.”

세희가 들어간 곳은 상당히 비싼 고급 도시락을 파는 곳이었다.

그녀가 도시락을 양손에 쥐고 들어오자, PD가 재빨리 나가 그녀의 짐을 들어준다.

“취향을 잘 몰라서 일단 돈까스 종류로 샀어요. 괜찮나요?”

자신들 것까지 챙겨주는 창현의 말에 촬영진이 모두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 모습에 미소를 짓는 창현.

그들을 태운 벤은 어느덧 AA엔터테인먼트에 도착하였고, 창현은 곧장 연습실로 향한다.

이어진 것은 개인 안무 연습이다.

요즘 들어 가장 화제가 되고 있는 <악마의 유혹> 안무였기에 카메라 감독이 눈을 빛내며 촬영을 한다.

부드럽게 이어지는 창현의 안무. 마치 땅을 미끄러지듯 걷는 듯한 그의 안무를 보며 모두가 감탄을 금치 못한다.

계단 춤이라는 것이 화제가 되었지만 기본 안무 또한 쉬운 수준이 아닌 것이다.

“계단 춤을 보여주실 수 있나요?”

아무래도 가장 화제가 되는 춤을 눈으로 직접 보고 싶은 PD의 말이었다. 옆에 있던 작가도 보고 싶은 듯 눈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었고.

기대감 섞인 그들의 눈에 창현은 피식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구석에 마련된 3단 계단을 가지고 오고, 곧장 음악을 튼다.

모든 것이 그의 손에서 이루어지는 최첨단 수동(?) 시스템이었다.

음악이 연습실을 감싸기 시작하며, 창현의 안무가 시작된다.

계단 춤은 3단까지 있지만 그가 보여준 것은 1단뿐. 하지만 이미 화제가 된 그 춤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낼 수밖에 없으리라.

입을 떡 벌리는 촬영진을 보며 미소를 지은 창현은 내일 무대를 위해 간단한 몸 풀기라는 말과 함께 더 이상 자신의 패를 보여주지 않았다.

아쉬웠지만 그것을 억지로 할 수는 없었기에 다음을 기약하는 수밖에 없었다.

안무 연습을 하던 창현은 도시락으로 점심을 먹고, 좀 더 연습을 하다가 시간을 확인하더니 카메라를 향해 말한다.

“이제 저희 AA엔터테인먼트에 하나 밖에 없는 연습생을 공개할 시간이 되었네요. 자, 그럼 연습실로.”

일상생활을 촬영하여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낸다는 말을 했을 때, 창현이 계획한 것이 있다.

이참에 지영이 AA엔터테인먼트 연습생에 대한 말이 많은 것을 단번에 정리하기로. 그간 이렇다 할 해명을 하지 않았던 걸 오늘 촬영을 빌려 말끔하게 정리하기로 말이다.

그 말과 함께 창현이 다른 연습실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였다.


“오빠!”

창현인 연습실 안으로 들어오자 지영은 눈을 빛내며 쪼르르 그에게 달려간다.

그러나 그녀의 걸음은 멈추는 수밖에 없었다.

안으로 들어서는 창현의 뒤를 따라 카메라가 속속 들어오고 있던 것이다.

순간 멈칫한 지영이 다소 당황한 어조로 창현에게 묻는다.

“오, 오빠. 이게 뭐야?”

“응? 말 안했나. 이번에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일상생활을 촬영하기로 했어.”

“그, 그럼 나도 나오는 거야?”

“그렇겠지?”

“내가 TV에?”

적잖게 긴장이 되는 듯한 표정을 짓는 지영이었다.

그녀의 모습에 미소를 짓는 창현. 사람의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어주는 편안한 미소였다.

그리고 성큼 앞으로 걸음을 옮겨 지영에게 다가가는 창현. 그녀에게 접근한 그는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기 시작한다.

“잘 들어, 지영아. 너도 알고 있겠지만 네가 AA엔터테인먼트의 연습생이 된 것에 말이 많은 걸 알고 있을 거야.”

“…….”

살짝 표정을 굳힌 채 고개를 끄덕이는 지영. 그녀 또한 인터넷을 하기에 자신을 비꼬는 글과 상처가 되는 코멘트 등을 많이 봤다.

그것이 아니라고 변명하고 싶지만 이 세상은 많이 뒤틀려 있어, 해명하는 쪽이 오히려 병신 취급을 받는 세상이다.

몇 번이고 나서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지만 상처가 되어 그녀의 가슴 속에 남아 있었다.

창현은 거기까지는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사람들의 그러한 말이 지영에게 상처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트레이닝을 받는 모습이 방송으로 나간다면 그 말들은 어느 정도 가라앉을 거라 생각해.”

“괜찮을까, 오빠?”

평소에 당찬 모습을 보여주지만 TV를 이용한 본격적인 언론(?) 플레이를 한다는 말에 지영은 적잖게 긴장이 되는 듯했다.

“괜찮아. 오빠만 믿어. 아버지도 허락해주신 거니까 내 말만 잘 따르면 될 거야. 알겠지?”

“응…….”

석규도 허락했다는 말에 한결 마음이 놓이는 표정을 짓는 지영. 뿐만 아니라 창현이 자신을 위해서 이렇게까지 해주니, 그녀로서는 감사하고 또 감사할 따름이었다.

“대신 평소보다 더 혹독하게 할 거야. 이 기회에 잘못된 점들을 모조리 짚어줄 테니까.”

“응.”

“그리고 노래 테스트도 할 거야. 거기에서 네가 발휘할 수 있는 모든 실력을 발휘해봐. 네 실력을 보여준다면 악플들은 사그라들 테니까.”

“응응.”

“좋아, 그럼 잘해보자.”

“응응응.”

“그럼 파이팅이다.”

살짝 미소 지은 채 지영의 머리를 쓰다듬은 창현은 촬영진에게 다가간다.

“…….”

그런 그의 모습을 몽롱한 눈으로 바라보는 지영. 자신을 위해주는 오빠를 만나 그녀는 정말 다행이라 생각하였다.

자신을 생각해주는 그를 배신하지 않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은 최선을 다하는 일뿐.

“열심히 하겠어.”

주먹을 불끈 움켜쥔 지영은 의욕을 다져나갔다.

하지만 그녀의 그 결심은 시작되자마자 흔들리기 시작했다.

“좀 더 배에 힘을 줘.”

“숨을 배 끝까지 끌어내리는 듯한 기분으로. 좀 더 해봐. 아니, 아직 아니야. 좀 더 해낼 수 있어. 그러니 좀 더 참고 해봐. 할 수 있는 거 아니까 엄살 피우지 말고. 그래.”

“목에 힘을 풀어!”

“소리를 머리끝에 스쳐지나간다는 생각으로!”

엄격하게 하겠다는 말이 있었지만 그것은 지영의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엄격하였다.

미리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지영이 순간 눈물을 찔끔할 정도였으니까.

촬영진도 그 분위기에 적잖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보컬 트레이닝에 들어가면서 창현은 평소 이미지와 다른 엄격한 선생님 같이 변했다.

그렇다고 하여 다른 엄한 선생님들 같이 화를 내느냐?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고저가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더욱 무섭게 들렸고, 잘못했을 때마다 그 점을 척척 짚어내며 지적하자, 감히 방심하지 못하고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었다.

진지하게, 그리고 엄격하게 나오는 그의 모습은 여태까지 수많은 말이 돌았던 것들이 사실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일례로 창현과 라샤가 라디오 스타에 나갔을 때 엄격하다는 말이 나오긴 했지만 사람들은 실제로 정말 그럴까? 하는 의문을 가졌기에 그렇다.

하지만 실제로 드러난 것은 상상 이상이었다.

혹독한 보컬 트레이닝은 약 두 시간 가량 이어졌다.

보컬 트레이닝을 끝낸 창현은 지영과 함께 녹음실로 향했다.

진지한 그들의 분위기에 감히 말을 걸지 못하고 조용히 뒤따르는 촬영진.

녹음실 안으로 들어선 창현은 곧장 지영에게 노래할 것을 주문한다.

“그럼 시작해봐.”

창현의 말과 함께 이은미의 <애인 있어요.> MR이 흘러나오기 시작했고, 지영은 마이크를 들고 본격적으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

지영의 노래를 듣고 깜짝 놀란 표정을 짓는 촬영진. 노래를 부르는 지영의 실력이 예상 외로 뛰어났던 것이다.

그러나 노래를 듣는 창현은 전혀 만족한 표정이 아니었다.

그가 무표정이라는 것은 무언가 고칠 점이 있다는 것이었으니까.

MR을 무심하게 꺼버린 창현이 지영에게 말한다.

“방금 전에 박자가 조금 빨랐어. 너의 스타일을 만드는 것은 좋지만 그 스타일이 좋은 방향으로 만들어져야지. 너의 박자를 고집하지 말고 노래에 맡겨봐. 알겠지?”

부드럽게 타이르듯 말하는 창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지영. 그리고 다시 시작된 노래.

그 후에도 창현의 지적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지영이 한 곡을 완벽하게 완주하는 데는 무려 30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웬만한 가수 급은 되는 것 같은데?’

‘아직 어리지만 압도하는 무언가가 있어요.’

‘저 정도면 충분히 데뷔해도 될 것 같은데…….’

촬영진은 서로 쑥덕거리며 지영의 실력을 평가했다. 하지만 그들보다 훨씬 눈이 높은 창현은 지영의 약점을 지적해주었다.

그렇게 녹음 작업이 끝나고, 지영은 근래부터 시작한 안무 연습을 위해 다른 연습실로 향했다.

모처럼 개인적인 시간을 갖게 되자, PD가 질문한다.

“지영 양의 실력이 무척 뛰어난 것 같은데요. 혹시 데뷔 계획이 있는지?”

“지영의 실력을 괜찮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아직 부족하다 생각하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너무 기준치가 높은 것이 아닌지……?”

“지영이가 좋든 싫든 데뷔를 하게 되면 제 이름의 영향을 받게 될 것입니다. 저는 오빠로서 지영이가 저와 비교 당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지영이가 홀로 꿋꿋하게 설 수 있는 실력이 될 때까지 데뷔 계획은 없을 것입니다.”

그 뒤에도 몇몇 질문이 이어졌고, 창현은 망설임 없이 질문에 대답했다.

그렇게 보컬 수업을 끝낸 창현은 세희가 협찬 받아온 옷을 입고 약속 장소로 떠난다. 오늘은 저녁을 함께 하며 진솔한 이야기를 나눠보는 인터뷰가 스케줄로 예약되어 있었다.

고급 식당에 도착한 창현은 인터뷰를 하러 온 리포터와 인사를 나누며 식사를 하면서 인터뷰를 하기 시작한다.

차분하면서 망설임 없이 대답하는 그의 모습은 카메라에 그대로 담기고 있었다.

인터뷰 스케줄을 끝낸 창현은 저녁 8시쯤에 집으로 도착한다.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고 가볍게 씻은 그가 카메라를 보며 말한다.

“이로써 오늘 스케줄이 모두 끝났습니다.”

그렇게 말한 창현은 컴퓨터를 키고 간단하게 게임을 하기 시작한다. 이 모습은 굳이 담고 싶지 않았지만 담고 싶다는 카메라 감독의 말에 어쩔 수 없이 게임하는 모습도 담을 수밖에 없었다.

1시간 정도 게임을 한 창현은 10시가 되자 촬영 끝을 알리며 잠에 빠져든다. 카메라로 잠든 모습을 촬영하고 싶다는 말에 카메라를 한쪽에 설치해두고, 촬영진을 보낸 뒤 잠에 든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난 창현은 일어나자마자 생각한 것이 카메라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불 속에서 간단하게 머리를 정리한 그는 살짝 감겨있는 눈으로 카메라 있는 곳을 보다가 거실 밖으로 나간다.

곧장 씻고 아침을 해결하니, 어제보다 조금 빠른 시간에 촬영팀이 도착한다.

하지만 이미 준비가 완료된 상태.

잠이 덜 깬 모습이라도 보려던 촬영팀은 의도가 어긋나자 묘하게 일그러진 표정을 짓고 말았다.

그 후에 이어진 오전 일상은 똑같았다.

작업실로 향한 뒤 공부를 한 그는 기획사로 가서 안무 연습을 하였던 것. 하지만 오후 스케줄부터는 다른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오늘은 금요일, K본부의 뮤직뱅크 무대 위에 서는 날인 것이다.

의상을 받아오고, 곧장 방송국으로 향하여 대기실에 들어서는 장면까지 그대로 촬영되고 있었다.

“잠시 밖으로 나오시겠어요?”

무대 위에 서기 20분 전.

돌연 대기실 안에 있던 코디들이 밖으로 나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세희가 촬영을 하고 있는 촬영팀을 향해 나가자는 이야기를 하였다.

“밖으로요?”

“네, 현은 무대 위에 서기 20분 전부터 정신집중을 하기 시작해서 혼자 둬야하거든요.”

“알겠습니다. 카메라 설치해둬.”

집중을 방해할 수 없기에 카메라를 설치한 뒤 대기실을 벗어난다.

“…….”

카메라가 촬영하고 있지만 창현은 변함없이 집중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정확히 20분이 흐르는 순간, 그의 눈이 번쩍 뜨인다.

그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선 그는 간단하게 몸을 풀고는 곧장 밖으로 나간다.

오늘도 최고의 무대를 선보이기 위하여.


무대 위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는 관객들을 바라본다는 것은 마치 마약과도 같다.

한 번 빠져들면 절대 헤어 나올 수 없는 강렬한 중독성을 지니고 있는 듯하다.

와아아아아!

거세게 터져 나오는 함성.

자신에게 열광하는 관객들을 보며 미소가 절로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저들이 있기에 지금의 자신이 있고, 더욱 더 멋진 모습으로 보답할 수 있게 되었다. 초심을 잃지 않는다는 것, 말로는 쉽지만 그것이 너무나 어렵다는 것을 창현 스스로 느끼고 있었다.

‘그럴수록 다잡아야지.’

내면에서 치밀어 오르는 교만이라는 감정을 억누르며 무대에 충실하고자 한다.

자신의 손짓 하나에, 몸짓 하나에 열광하는 팬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마치 마술을 부리는 마술사가 된 듯한 느낌이다.

아니, 지금 그의 모습은 팬들에게 있어 마술사였다.

절대 해내지 못할 듯한 무대를 연출하는 무대 위의 마술사.

1단과 2단 계단 춤으로 무대는 열기로 뜨거워진 상태. 마지막 3단 춤을 출 때는, 무대가 고요하게 변하기 시작한다.

그 속을 타고 울려 퍼지는 뚜렷한 발자국 소리.

뚜벅. 뚜벅. 뚜벅.

허공을 걸을 때 울려 퍼지는 선명한 발자국 소리는 관객들의 귀에 천둥처럼 울려 퍼지고 있었다.

어떻게 저것이 가능한 것일까.

허공에 떠 있는 시간이 남들보다 좀 더 길었으며, 그 속에서 동작의 전환이 자유롭다.

등장한지 일주일 밖에 되지 않았지만 계단 춤에 대한 여러 가지 분석이 이루어지고 있는 지금, 현의 계단 춤은 일반상식의 범주 밖으로 벗어난 춤이라는 것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상황이다.

어떻게 저것이 가능할까.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보이게 만드는 것.

그것이 가능하기에 창현은 무대 위의 판타지 스타다.

마지막 악마가 절규하는 장면과 행복한 로맨스를 펼치며 노래가 끝맺을 때, 조용했던 무대가 다시 한 번 거센 함성에 휩싸이기 시작한다.

꺄아아아아아아!

혀언! 혀언! 혀언!

무대가 끝난 뒤 반겨주는 이 함성 소리가 자신을 칭찬해주는 것 같아 기분이 좋다.

입가에 미소를 지은 창현이 고개를 숙인다.

“하! 감사합니다.”

그의 무대가 끝남과 동시에 곧장 순위 발표가 이어진다.

일주일만에 앨범 판매 100만 장을 돌파하고, 디지털 차트를 점령하고 있는 현을 이길 수 있는 가수는 아무도 없었다.

당연히 1위는 창현의 것.

2주 연속 1위라는 타이틀과 함께 축하한다는 멘트를 듣고 곧바로 앵콜 무대에 들어간다.

무대를 가득 채우는 팬들의 함성 소리를 들으며 앵콜 무대까지 무사히 마친다.

그리고 무대 뒤로 가서 곧장 대기실로 향하는 창현.

그의 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엠넷 촬영진이 대기실로 들어서는 창현을 촬영한다.

무언가 말을 걸려던 PD는 너무나 힘들어 보이는 그의 모습에 멈칫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 사이 수건을 들고 온 세희가 땀으로 푹 젖은 창현의 머리 위에 수건을 얹어준다.

“지금 현이 너무 힘들어해서요. 말을 하는 게 어려울 것 같네요.”

“너무 힘들어 보이는데… 무대 위에 서는 것이 그렇게 힘든 건가요?”

“현의 경우 완벽한 무대를 선보이기 위해 지나칠 정도로 신중을 기하거든요. 그래서 무대를 하고 나면 녹초가 되어서 온답니다.”

사실 세희도 자세한 연유는 모르지만 컴백 이후 무대 위에 설 때마다 창현이 부쩍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녀도 이유는 모르지만 방금 전 말한 것이 가장 통상적인 이유라는 건 분명했다.

“후우! 이제야 한숨 돌리겠네.”

수건으로 땀에 젖은 머리를 닦은 창현이 한숨을 푹 내쉬며 말한다.

세희가 시선을 돌리며 창현을 향해 핀잔을 준다.

“적당히 해야지.”

“하하, 미안해요. 함성소리에 끌리다 보니 저도 모르게 있는 힘 없는 힘 다 쥐어짜버렸네요.”

“못 말린다니까, 정말.”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세희였다.

대기실에서 떠날 준비를 마친 창현은 곧장 주차장이 있는 곳으로 향한다. 주차되어 있는 벤에 탑승한 창현은 카메라를 보며 말한다.

“힘든 무대를 치렀으니 맛있는 저녁을 먹으러 갑니다.”

그 말을 끝으로 벤은 출발하였고, 그들이 도착한 곳은 고급 한식당이었다.

모두 창현이 쏘는 것이기에 함께 촬영하는 엠넷 촬영진도 덩달아 포식을 할 수 있었다.

식사 후, 창현은 다른 곳에 들르지 않고 곧장 집으로 향한다.

집에 도착한 그는 간단하게 씻은 뒤 컴퓨터 앞에 앉는다.

“하루에 컴퓨터를 몇시간 정도 하시나요?”

PD의 물음에 창현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말한다.

“하루에 평균 2시간 정도는 하는 것 같아요.”

“컴퓨터를 하면 보통 게임을 하시는지?”

“예, 아무래도 저도 사람인만큼 스트레스를 풀 곳이 필요하잖아요? 어른들이 술도 마시고, 함께 어울려 놀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것처럼 저는 간단한 게임을 통해 스트레스를 풉니다. 아무래도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기에는 저를 부담스러워 하시는 것 같아서요.”

그 말을 끝으로 스타크래프트를 킨 창현은 게임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

게임하는 장면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카메라에 담는다.

현란하게 움직이는 마우스와 요란하게 울리는 키보드. 그리고 빠르게 전환되는 화면은 마치 프로게이머가 게임을 하는 듯한 착각을 심어줄 정도였다.

게임을 끝낸 창현은 PD와 마지막 인터뷰를 한다.

삼 일 동안 진행될 녹화였지만 그가 이틀 동안 보여준 것만으로도 충분한 분량이 확보되어 있다. 어차피 내일 그가 움직이는 스케줄도 오늘과 다를 바가 없어서, 오늘 촬영을 끝으로 막을 내리기로 결정을 내린 것이다.

Q:이틀 동안 함께 하면서 현 씨의 생활하는 모습을 살펴보았는데요. 본인은 스스로 지금 이 생활에 대해 만족하시는지 궁금합니다.

A:전에도 그랬지만 전 지금 살고 있는 현실 자체가 행복합니다. 설명 힘든 일이 있고, 괴로운 일이 있다 하더라도 그 일들이 행복해지기 위한 한 과정이라 생각하고 나아가기에 언제나 만족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좀 더 높은 고지에 오르고자 노력을 합니다. 만족을 함과 동시에 욕심을 부리고 있다랄까요?

Q:아침부터 저녁까지, 컴퓨터를 키고 게임하는 것 하나하나까지 정해진 스케줄처럼 보이는데 혹시 이러한 고정된 스케줄이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는지?

A:반복되는 일상이라는 것은 지루함을 심어줄 수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요. 다른 분들의 눈에 제 일상이 지루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어제와 조금은 달라진 하루가 눈에 들어오며, 공부를 할 때 서서히 진도를 떼는 제 모습이 눈에 보입니다. 지영의 보컬 트레이닝을 시켜줄 때, 그녀의 실력이 하루하루 발전하는 게 느껴지고, 무대 위에 설 때, 노래를 부를 때 점점 능숙해지고, 발전하는 제 모습이 느껴집니다. 하루하루 조금씩 변하기에 지루하다 느껴본 적이 없습니다.

Q:남들이 이루고자 하는 부와 명예를 모두 이루었는데요, 모든 것을 이룬 현 씨에게도 목표가 있는지?

A:다른 분들의 눈에 제가 모든 것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발전을 하려면 욕심을 가져야 하고, 제 주제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하기에 저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고 조금씩 높은 고지를 바라보려 합니다. 당장 목표는 이번 앨범이 잘되는 것이고, 미국으로 가서 다시 한 번 제 노래를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것이 나중 목표입니다. 천리 길도 한 걸음이라는 말처럼 한 발자국씩 걸어가며 점점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Q:이번에 드라마를 대박치면서 연기력을 인정받으셨는데, 드라마로 다시 복귀하실 생각은 없으신지?

A:저는 연기자보다 가수라는 인식이 더 강하기에 당분간 가수로 집중할 생각입니다.

Q:마지막으로 연애 계획은 어떻게 되시는지?

A:워낙 바쁘고 여유가 없는 나날이기에 생각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인연이 닿는다면 좋은 분을 만나는 날이 오겠지요.

언제 나올까 싶던 연애 부분이 나오자 은근슬쩍 대답하는 창현이었다.

그것을 끝으로 창현의 촬영은 끝을 맺었다. 이틀이었지만 자신을 쫓아다니느라 고생이 많았던 촬영팀과 인사를 나눈 창현은 그들이 밖으로 나가자 안도의 한숨을 가볍게 내쉰다.

“후우! 이제 명상을 조금 할 수 있으려나.”

자신의 모습을 팬들에게 보여준다는 것이 나쁘지 않았지만 하루종일 따라다니는 것이 은근히 부담된다는 것을 느낀 창현이다.

그래도 나쁘지 않은 경험이라 생각하며 일찍 잠자리에 든다.

내일 일어나면 곧장 명상을 하리라 생각하며.




제83장 패밀리가 떴다




계단 춤으로 화려하게 컴백을 한 현.

그의 돌풍은 거대하여 현재 음반시장에서 누구도 꿈꾸지 못하는 100만 장이라는 기록을 단숨에 돌파하였고, 150만 장의 기록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중이다.

컴백한 지 채 2주밖에 되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판매량이 아닐 수 없다.

사람들은 기존에 밋밋하던 비주얼을 화려하게 바꿔 등장한 그에게 열광하였으며, 흘러내린 앞머리 사이로 번뜩이는 그의 눈빛을 따라 하고자 앞머리를 기르는 스타일이 유행을 하기 시작하였다.

어디 그뿐인가.

마치 중세 왕자님의 복장 같은 그의 옷은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하였고, 현이 이번 컨셉을 위해 의상에 투자한 돈만 무려 5천만원이라는 사실에 많은 사람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보기에는 어렵지 않아 보이지만 실제로 하면 불가능하다 알려진 계단 춤.

3단은커녕 1단 춤만 완벽하게 춰도 칭송을 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한 와중에 마침내 계단 춤 1단을 완벽하게 구사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그 사람은 단숨에 인터넷 스타가 되었고, S본부의 방송 스타킹에 캐스팅되는 영광을 누렸다.

단순히 춤을 하나 따라하는 것 가지고 그 정도 인기를 얻게 할 만큼 현의 파급력은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의 궁금증은 차츰 의문으로 변하기 시작하였다.

겉보기에는 쉬워 보이는 계단 춤이 실제로는 1단도 완벽하게 해내기 어려운 고난이도의 춤이란다. 그러한 춤을 현은 어떻게 3단까지 거뜬히 해낼 수 있는 것일까.

그러한 의문이 서서히 퍼져 나갈 때, 한 가지 게시글이 인터넷을 시끄럽게 만든다.

바로 현의 계단 춤에 관련하여 분석한 글이었다.


현의 계단 춤, 무언가 속임수가 숨어 있음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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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08.08.29 04:11 작성자 By 현은외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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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이 이번 4집 프로젝트 앨범 A를 발매하며 타이틀곡 <악마의 유혹>에서 들고 나온 계단 춤의 호응이 대단하다.

수많은 사람들이 계단 춤을 따라하고자 하였으며, 보기와 달리 상상을 뛰어넘는 난이도에 실패를 맛보고 절망을 하고 있다.

이에 나는 여러 연구를 통해 현이 무언가 장치를 취해두었음을 알아차렸다.

계단 춤! 그것은 인간의 신체능력으로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내려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남보다 비정상적으로 긴 체공시간.


무대에 빠져든 사람들은 눈치 채지 못했지만 동영상을 여러 번 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현이 계단 춤을 출 때 남보다 체공 시간이 길다는 것을. 그리고 그는 그 체공 시간을 이용하여 계단 춤을 펼치고 있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긴 시간이고, 보통 사람들이 허우적거리는 것처럼 보일 때, 그는 정확하게 걸음을 내딛는 모습을 보였다. 마치 무언가가 받쳐주고 있는 것 마냥.

이것만 보아도 무언가 장치가 취해졌음이 분명하다. 처음 컴백 무대를 가졌을 때 K본부 사람이 장치가 없다 말했지만 그것은 모두가 속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현의 이미지가 워낙 진솔 된 것이라는 것을. 만약 방송국과 모종의 합의를 보고 계단 춤을 펼쳤다면, 그는 대국민 사기극을 한 것과 다름 없다.


2. 도약의 부재.


계단 춤은 허공을 뛰어 올라가며 마치 허공에서 계단을 밟고 있는 듯한 모습을 연출하는 것이다. 당연히 계단을 밟고 올라가면서 마지막에 도약을 하여 허공을 밟는 모습을 연출해야 한다.

하지만 현은 어떤가?

그는 어떠한 도약도 없이 자연스럽게 계단 춤을 구사하였다. 우리는 계단 춤 그 자체만을 보고 감탄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그 놀라움을 부추기고 있는 것은 어떠한 도약의 기미도 보이지 않은 그의 발동작 때문에 더욱 경악하고 있는 것이다.

도약도 하지 않고 높은 곳을 향해 뛸 수 있다?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현은 같은 형태로 1단, 2단, 3단 춤을 구사하고 있다. 이것은 그가 무슨 장치를 해놓지 않았다면 불가능하다는 것을 뜻하고 있다.


3. 비정상적인 모습.


보통 컴백을 하면 PR을 위해서라도 수많은 프로그램에 모습을 드러낸다. 현 자체가 처음부터 신비주의 컨셉이었고, 지금은 럭셔리 컨셉으로 나가고 있지만 앨범이 발매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예능 프로그램에 나기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바로 요즘 가장 화제가 되는 계단 춤에 대한 질문이 나올 것임이 분명했던 것이다.

내 생각대로 현이 무언가 장치를 취했다면 예능 프로그램에서 보여주기가 불가능하다. 왜냐고? 무대 위에 설 때는 희뿌연 안개가 밑을 가려주고 있고, 무언가 음침한 분위기가 우리들의 시야를 어둡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현은 아무런 장치도 없이 계단 춤을 펼친 것처럼 말했다. 하지만 그 춤이 인간의 신체 능력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그는 해명을 해야 할 것이다. 만약 장치를 해놓고 거짓을 말하는 것이라면, 그는 국민 모두를 속인 것이다.

그것은 설령 그가 월드 스타라 하더라도 사과를 해야 할 일인 것임이 분명했다.


Best 리플

김예린 작성일 08.08.29 06:32

추천(7732) | 신고(19)


님의 게시글을 참 잘 봤습니다. 얼핏 보면 옳은 것 같지만 참 궤변에 연속을 보는 것 같네요. 제가 보기에 당신은 계단 춤을 따라하지 못해서 현을 무작정 깎아내리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뭐? 대국민 사기극이라고요? 참 어처구니가 없어서. 현은 데뷔한지 4년이 되어가는 스타입니다. 자신의 고유 스타일을 갖춘 그가 무엇이 아쉬워서 사기를 치려할까요? 언제나 최고의 무대를 선보이려는 현을 모욕하는 것 같아 기분이 무척 나쁘네요.

현이 체공 시간이 긴 것은 돼지처럼 뚱뚱한 당신보다 날씬해서 그런 거고요, 도약이 크지 않은 것도 당신처럼 뚱뚱하지 않아도 힘이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참 웃긴 게, 현은 9월 초에 볼 검정고시 때문에 다른 프로그램에 나오지 않기로 이미 사전에 공지를 해둔 상태입니다. 현의 계단 춤이 나오고 몇 주가 되어가는 지금 시점에, 서서히 따라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있는데 그것을 대국민 사기극으로 몰아넣는 형태가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괜히 욕할 거리 찾아서 시간 낭비하지 마시고 그 잉여 노동력을 나라의 발전을 위해 힘써주시길 바랍니다. 현아! 우리 블랙펄은 변함없이 너를 믿을 거야!



이 글은 큰 파장을 일으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한창 계단 춤에 대한 화제가 되고 있는 시점이었고, 보기와 달리 너무나 어렵다는 말이 속출하고 있던 시점에 등장한 말이었던 것이다.

게시글을 본 사람들의 반응은 크게 두 개로 나뉘었다.

개인적인 잣대로 판단하여 현을 사기꾼으로 몰아넣는다는 것에 대한 비판의 의견과 정말 현이 그렇게 했을 수도 있다는 말. 그리고 대부분 계단 춤을 도전해봤던 사람들은 현이 속임수를 썼을 것이란 것에 무게를 두고 있었다.

이 게시글을 본 기자들은 곧장 기사로 내보내기 시작하였고, 인터넷상은 계단 춤에 대한 공방으로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하였다.

“이것 참, 사람들이 참 성급하네.”

인터넷을 자주하는 창현이 이 기사를 읽지 못할 리 없다.

그의 팬들은 그를 굳건하게 믿어주고 있었지만 내심 계단 춤에 의혹을 가지고 있던 다른 사람들은 벌 떼처럼 일어나 그를 향해 침을 톡톡 쏘아대고 있는 상황이었다.

“굳이 일일이 대응할 필요는 없으니까.”

예상보다 빠른 사람들의 반발에 당혹스러웠지만 서서히 계단 춤을 따라하고 있는 사람들이 등장하자 한결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그들의 존재가 자신의 방패가 되어줄 것이라 예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다.

다만 시기가 조금 빨라 당혹스러웠을 뿐.

인터넷은 발칵 뒤집혔지만 정작 오프라인은 변함이 없었기에 창현은 스케줄을 해나가며 계단 춤의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것을 더욱 세련되게 갈고 닦아야 자신에게 의구심을 품고 있는 사람들에게 단번에 뒤집을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스케줄이 없을 때는 연습실에서 분주하게 안무를 연습하곤 하였다.

♩♪♬

한창 연습 삼매경에 빠져있을 때 울려오는 핸드폰.

“누구지?”

특별히 연락올 사람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창현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핸드폰을 든다.

전화를 한 사람은 다름 아닌 재석이었다.

이 시간에 재석이 왜?

의아한 표정을 지은 창현이 전화를 열어 받아든다.

“여보세요?”

-패밀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유재석입니다. 이번 우리 패밀리는 강원도 평창 방림면으로 모입니다. 내일 아침 9시까지 노인회관 앞으로 한 사람도 빠짐없이 와주시기 바랍니다. 이상 통신 끝.

그 말과 함께 통화가 진짜 끊겼다.

“뭐, 뭐야?”

갑자기 온 전화의 정체에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는 창현.

그때, 세희가 문을 열고 연습실 안으로 들어오더니, 오디오 위에 놓여있던 가방을 들고 유유히 밖으로 나간다.

“…….”

벙찐 있는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창현.

세희가 나가자, 그제야 정신을 어느 정도 차린 그가 중얼거린다.

“서, 설마 저게 카메라?”

자신이 완전히 낚였다는 것을 알아차린 창현이었다.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그곳을 바라보고 있던 창현.

분명 석규에게 패밀리가 떴다 녹화에 참가하기로 했지만 빨라도 너무 빨랐다.

“모니터링을 많이 안했는데.”

석규가 알려주면 모니터링을 해서 철저하게 준비할 생각이었는데 그것은 물 건너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잠시 고민에 빠지는 창현.

어떻게 할지 생각에 잠겨있던 그가 이내 무언가 떠올린 듯 눈을 빛낸다.

“아! 그러고 보니 태연 누나가 패떴 촬영에 참가했다고 했지?”

그것을 떠올린 창현은 곧장 핸드폰을 열어 태연에게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행사 스케줄을 끝내고 잠시 휴식 시간.

노트북으로 웹서핑에 빠져있는 태연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그녀가 보고 있는 것은 바로 연예 뉴스란. 지금 연예 뉴스란을 도배하고 있는 있는 것들은 다름 아닌 현에 관련된 기사였다.

“창현이가 사기극을 벌였다고?”

정말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현이 사기극을 벌이다니.

기사를 접하는 순간 한동안 무언가 싶어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깨달을 수 있었다. 한 사람의 게시글로 인해 기자들이 열심히 퍼나르면서 본격적으로 사건이 커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말이다.

“말도 안 되는 말이네.”

기사들을 보니 현의 두터운 팬 층이 두툼한 방어막을 쳐주고 있지만 방심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계단 춤에 대해 의혹을 드러내고 있던 것이다.

그만큼 보기와 달리 어려운 춤이라는 사실이었지만 마치 물 만난 물고기처럼 진상을 규명해달라며 리플을 달아대는 사람들을 보자니 어이가 없었다.

자기들이 해내지 못하는 것 가지고 왠 열폭질이란 말인가.

“창현이가 얼마나 열심히 했는데.”

얼마나 열심히 했으면 자신과 함께 일일 커플을 하겠는가.

그것이 기회가 되어 자신의 조련 기술로 열심히 조련을 해놓을 수 있었고, 덕분에 확실한 도장도…….

“우흐흐흐!”

그때 그 촉감을 마치 동영상 재생하듯이 플레이 시킨 태연의 입가에 웃음이 걸리다가 뚝 멈춘다.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흐뭇한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조금만 더 자주 만났더라면 확실하게 낚을 수 있었을 텐데.”

그 점이 너무나 아쉬운 태연이었다.

조금만 시간이 있고, 만남의 기회가 잦았더라면 확실하게 창현을 끌어 당길 수 있었을 텐데.

밀고 당기기는 할 줄 모르지만 그녀에게는 그것을 뛰어넘는 조련(?) 스킬을 가지고 있다. 이것만 있다면 마음 먹은 사냥감은 얼마든지 낚아챌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창현의 스케줄은 바빴고, 개인적으로 만날 시간은 전무했다.

그녀로서는 아쉬운 순간이 아닐 수 없다.

“계단 춤이 뭐가 어때서! 정말 대단하건만.”

허공을 걷는 듯한 창현의 춤. 노래 가사처럼 승천을 하려는 악마의 몸짓이 느껴져 무척 감명 깊었던 춤이다.

그런 춤을 사기극으로 몰아넣는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노력한 결과물을 사기로 몰아버리는 모습이라니.

“뮤직비디오도 엄청 멋있었지만…….”

빠드득!

뮤직비디오를 떠올리던 태연은 자신도 모르게 이를 갈고 말았다. 그 내용을 떠올리기 시작하니, 마지막 장면에서 창현과 수연의 키스신이 떠올랐던 것이다.

당사자-제시카-의 말에 의하면 직접 입맞춤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마지막에 서로의 고개가 차츰 가까워지며 두 입술 사이에 새하얀 빛이 비추며 끝이 나는데, 이것이 했을 수도 있다는 묘한 상상을 자극해서 태연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였다.

자신이 찍어놓은 도장에 누가 덧대어 도장을 찍어놓는 듯한 기분이랄까.

“괜찮아, 수연이가 정말로 했으면 여자 스태프들이 가만히 있었을 리 없겠지. 하지 않았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놓인다.

그럼 그렇지, 그 어떤 여자가 감히 창현의 입술을 빼앗도록 가만히 놔두겠는가.

하지만 분한 마음은 풀리지 않는다.

태연은 저 멀리 소파에 편안하게 앉아있는 수연을 훔쳐보며 중얼거린다.

“내가 예전에 했던 일들을 그대로 시켜야 돼. 싴순이로 만드는 거야.”

전대 권력자 수연의 횡포를 떠올리며 차근차근 계획을 세우는 태연.

정작 그녀는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현 정권자인 자신 또한 수연에게 무지막지한 횡포를 가하려는 것을.

가해자가 피해자의 심정을 모른다는 것이 지금 이 상황을 뜻하는 것이리라.

수연을 싴순이로 만들려는 생각과 함께 인터넷을 하는 태연.

하지만 대부분이 현의 안무를 다룬 기사여서 다시 걱정으로 물든다.

“창현이가 걱정할 텐데…….”

♩♪♬

그렇게 걱정에 빠져있을 때 그녀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려 퍼지기 시작한다.

핸드폰을 바라보는 태연. 곧이어 그녀의 표정이 환하게 변하기 시작한다.

“아싸! 창…….”

큰 목소리로 외치던 태연이 입을 다문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자 멤버들이 모두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것과 달리 큰 목소리는 멤버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 충분했다.

“태연아, 무슨 일이야?”

순규의 물음에 태연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응? 아, 아니야. 카드놀이 깨서 나도 모르게 환호성을 질렀네. 난 전화가 와서 잠시 나가볼게.”

“늦지 말고. 곧 준비해야 하니깐.”

“응.”

그렇게 말한 태연은 최대한 평정을 유지한 채, 발은 파워 워킹을 방불케하는 속도로 움직였다.

순식간에 대기실을 벗어난 그녀는 핸드폰을 들어 전화를 받는다.

‘흐흐흐! 창현이가 힘들 땐 나를 찾는구나. 역시 나의 조련 스킬은 죽지 않은 겨.’

그가 전화한 것이 힘든 일(?) 때문이라 생각하는 태연.

최대한 목소리를 깔고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아, 태연 누나. 저 창현이에요.

듣고 싶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입가에 자꾸 지어지려는 미소를 애써 지우며 태연이 최대한 담담하게 대답한다.

“응, 창현아. 갑자기 무슨 일로 전화한 거야?”

‘원래는 밀어줘야하지만 그때로부터 상당한 시간이 지났어. 이렇게 되면 시간이 자연스럽게 밀어주는 역할을 하니 지금은 당겨야 할 때야.’

속으로 수많은 계산을 하며 창현과 관계에 대한 밀고 당기기를 분석하는 태연.

이러한 연산 속도로 공부를 했더라면 이공계에 찬란한 빛을 발하는 별이 되었을 것이리라.

-아, 다름이 아니라 누나한테 묻고 싶은 게 있어서요.

‘후후! 고민이 생길 땐 나를 찾는 게 정답이랑께. 말해보렴, 창현아. 이 누나가 성인의 매력(?)으로 녹여줄게.’

절로 지어지는 흐뭇한 미소를 감추지 못하고 묻는다.

“뭔데?”

-누나가 패밀리가 떴다에 출연했다는 말을 들었거든요.

콰과과광!

순간 태연의 머리에 벼락이 내리쳤다.

머릿속에 맴돌던 수많은 상황이 거짓말처럼 흩어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녀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리기 시작한다.

‘이, 이건 내 예상에 없던 전개인데?’

그녀의 예상은 창현이 지금 기사가 뜬 것으로 무척 힘들어하여 자신에게 상담을 부탁하는 것이고, 자신은 그것을 빌미로 하여 자연스럽게 그와의 만남을 주선, 다시 한 번 예전의 일일 커플을 부활시켜 이번에는 확실하게 도장을 찍고 완벽하게 해피 엔딩으로 끝을 맺는 것이었다.

그런데 예상이 빗나가버렸다.

그것도 아주 단단히.

‘설마 내가 패떴에 출연할 때 홍기랑 같이 출연한 걸 알고?’

망상이 풍부해진 태연은 창현이 전화한 이유가 자신이 패떴에 출연할 때 이홍기랑 같이 출연해서 그런 것이라 생각했다.

이걸 창현이가 알게 되면?

그동안 쌓아온 모든 게 한방에 무너질 수 있는 노릇이다.

“그, 그걸 갑자기 왜 묻는 거야?”

감추려고 해도 감출 수 없는 떨리는 목소리.

그 물음에 창현이 간단하게 대답한다.

-패밀리가 떴다에 출연했다는 말을 들었는데 사실이 아닌가요?

“으응, 맞아. 출연 했었어.”

-역시 맞군요.

거짓말을 할 수 없다. 어차피 방송이 될 것이고, 자신이 감추려 해도 감출 수가 없다. 그렇다면 차라리 진실을 인정하고 돌파구를 찾는 것이 낫다. 거짓말이 거짓말을 낳지만 진실과 거짓이 뒤섞이면 도대체 뭐가 뭔지 알아차릴 수 없는 진실 같은 거짓이 만들어지니까.

맹렬하게 돌아간 태연의 머리가 변명을 생산하기 시작한다.

“하, 하지만 난 절대로 홍기랑… 아, 아니! 홍기 씨랑 친하지 않아. 그저 같이 출연하게 된 것뿐이야. 그러니까 이상한 오해는 하지 말아줬으면 해.”

말해놓고 아차 하는 태연. 그렇게 주의를 해야 하던 부분에서 틀려버리는 우를 범한 것이다.

그리 친하지는 않지만 패떴에 함께 출연하면서 말을 놓게 되었는데, 그 부분을 미처 신경 쓰지 못한 것이다.

실수도 이런 실수가 없다.

-아, 단독 게스트가 아니었나 봐요?

그 말이 마치 태연의 귀에 비꼬는 것처럼 들렸다.

알고 있는데 모르는 척하는 것이지 않은가? 삐져도 단단히 삐졌나보다.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그, 그러니까… 미안해, 창현아!”

어떠한 변명을 해도 수습하기에는 늦었다 생각한 태연은 사과를 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왜 사과를 해요? 누나는 잘못한 게 없는데.

그 말이 더더욱 태연의 가슴에 비수를 꽂고 있었다.

“아냐! 내가 잘못한 거야! 미안해! 잘못했어!”

-잘못한 게 없다니까요. 음, 누나한테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대답해주시겠어요?

“응응, 얼마든지 물어봐.”

멤버들의 신체 사이즈를 물어봐도 대답해줄 테세였다. 그만큼 그녀는 다급하였고, 어떻게든 토라진(?) 창현의 마음을 풀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정작 본인의 착각인지도 모른 채.

지금 그녀의 지상과제는 엎지른 물을 다시 떠담는 것이다.

-제가 이번에 패밀리가 떴다에 출연하게 되었는데요. 모니터링을 할 시간이 없다보니 누나의 조언을 좀 듣고 싶어서요.

냉정하게 들어보면 창현의 목적이 그거였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패닉 상태에 빠진 태연은 창현은 자신이 바람 핀(???) 것처럼 보이는 상황을 들켰고, 패밀리가 떴다에 출연하게 된 것을 겸하여 창현이 전화한 것이라 생각했다.

밀고 당기고 자시고를 생각할 필요도 없이 그녀는 곧장 입을 열어 자신의 경험담을 꺼내놓는다.

“얼마든지 말해줄게. 그게 그러니까…….”

조심해야 할 사항과 적극적으로 해야 할 사항들을 이야기해주는 태연.

그녀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창현이 감사의 인사를 한다.

-고마워요. 다음에 보답으로 밥 한 번 살게요. 그럼 쉬세요.

“으응, 창현이 너도 쉬어.”

한결 목소리가 풀린 것처럼 느낀 건 그녀의 착각일까.

방금 전보다 사근사근하게 변한 듯한 그의 목소리에 태연은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후우!”

통화를 끊은 태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찌 되었든 위기를 잘 넘겼다는 것에 생각이 미친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그녀의 얼굴이 울상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흐잉, 촬영 한 번 잘못한 것 가지고 완전히 까먹었잖아.”

한숨을 돌리게 되니, 그제야 자신이 하려던 것을 완벽하게 말아먹었다는 걸 떠올릴 수 있었다.

살짝 도도하면서 성인(?)의 매력으로 창현을 당겨줄 생각이었는데 이게 무엇이란 말인가.

도도하기는커녕 매달려서 사과하기 바빴고, 성인의 모습을 보이기는커녕 어린 아이처럼 칭얼거리며 용서를 구하기 바빴다.

즉, 자신이 열심히 쌓은 것들이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져버렸다는 것이다.

탑을 쌓는 것은 어려워도 무너뜨리는 것은 너무나 쉽다.

자신의 노력이 한순간 허물어졌다는 생각에 태연은 허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대기실로 향하는 그녀의 어깨가 축 늘어져 있었다.

앞으로 남자와의 촬영은 신중하게 결정해야 할 듯 싶다.


“이것 참, 뭐가 미안하다는 거야?”

태연과 통화를 끝낸 창현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지었다.

당황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니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이홍기 씨랑 함께 한 게 뭐가 미안해서?”

피식 미소를 지었지만 창현은 자신도 모르게 꿈틀했던 것을 느끼고 있었다.

묘하게 불쾌한 느낌.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고 적극적으로 해명하는 태연의 말에 기분이 풀린 지 오래였다.

“이런 느낌은 전에도 느껴본 것 같은데.”

이 느낌은 무얼까.

스멀스멀 가슴을 잠식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 기분을 불쾌하게 만든다.

자기 자신을 다스리는데 특화된 창현마저도 쉽게 컨트롤되지 않는 감정.

“질투라도 하는 건가?”

그렇게 중얼거린 창현은 자신도 모르게 어처구니 없는 표정을 지었다.

아직 누구를 진심으로 사랑한 적도 없고 그러한 감정을 자각하지도 못했다.

그런데 질투라니.

“앨범 주제에 너무 몰입해 있었나봐.”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창현이 걸음을 옮긴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본인도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 서서이 그 감정들이 가슴을 잠식해가고 있다는 점이다.


집으로 돌아간 창현이 가장 먼저 한 것은 패밀리가 떴다 방송분을 모니터링하는 것이다.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파죽지세로 시청률을 올려나가는 패밀리가 떴다. 유재석을 비롯하여 윤종신, 김수로, 이효리, 이천희, 박예진, 대성이라는 멤버들이 포진된 그들은 빠른 속도로 캐릭터를 잡아 색다른 풍의 예능 프로그램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재미있는데?”

처음에는 다소 어색했지만 회를 거듭할수록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재미를 유발하게 만들고 있었다.

물론 따지길 좋아하고, 매사에 비판적인 사람에게는 다소 작위적인 느낌이 들겠지만, 적어도 보면서 즐기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프로그램임이 분명했다.

게스트들 또한 화려하였고, 친숙한 시골 마을의 풍경과 재미있는 게임이 잘 어우러진 프로그램이었다.

“기본 대본은 있지만 나머지는 애드리브랬지.”

리얼을 표방하지만 기본 대본이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재석의 전화가 있은 후, 창현에게 기본 대본이 전해졌고, 그것을 숙지한 뒤 방송을 보면서 감각을 익혀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나저나 아침 9시라… 형이 고생 좀 하겠군.”

일단 새벽 5시에 오라고 해놓은 상태다. 무척 이른 시간이었기에 내일을 위해 로드 매니저도 일찍 퇴근을 하였고, 세희 또한 일찍 퇴근을 한 상태다.

특히 세희는 몰래 카메라를 한 전과(?) 때문인지 창현의 말에 꼼짝없이 따르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게 누가 몰래 하래.’

살짝 삐친 모습을 보이니, 세희가 어리둥절하는 모습과 함께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던 게 떠올라 키득거린다.

남을 속이는 것 자체를 개인적으로 싫어해서 토라진 모습을 보였는데 세희가 멋지게 속아 넘어간 것이다.

당분간은 이러한 시니컬한 모습을 유지할 것이다.

세희가 먼저 사과할 때까지.

‘의외로 여리니까 금방 사과할지도.’

그렇게 생각하며 창현은 일찍 잠자리에 든다.

만나기로 한 시간은 새벽 5시.

평소에 일어나는 시간이지만 그때까지 준비를 완료해야 하는 걸 감안하면 조금 더 빠른 새벽 4시에 일어나야 함이 옳으리라.

잠자리에 들면서 창현은 입가에 미소를 짓는다.

“이렇게 일찍 잠자니 곧 180cm를 넘겠지.”

꿈도 야무진 창현이었다.


새벽 4시에 일어난 창현은 곧장 씻고 간단하게 아침을 먹는다. 아침이라고 해봤자 빵에 두유 정도였지만 공복 상태로 가는 것보다는 나으리라.

그렇게 준비하던 그는 도착했다는 세희의 문자를 받은 뒤 곧장 주차장 아래로 내려간다.

주차장에는 벤이 깜빡거리며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있었다.

엘리베이터로 지하 1층에 내린 창현은 카메라를 들고 자신을 촬영하는 카메라 감독을 보며 말한다.

“고생하시네요.”

“뭘요.”

“별 거 아니지만 이거라도 드세요.”

“감사합니다.”

작은 병에 담긴 포도 주스였지만 그것만으로도 감격한 표정을 짓기에 충분했다.

원래 잘 촬영해야 하지만 이렇게 사소한 것도 신경 써주니 멋진 각도로 찍어주고 싶은 마음이 팍팍 들었다. 자연히 길지는 않지만 짧은 촬영에도 박력이 들어가고 있었다.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살짝 숙인 창현이 벤의 문을 열고 안에 탑승한다.

안에 타고 있던 세희가 창현을 보고는 인사를 한다.

“창현아 안녕.”

“이거 드세요.”

세희의 인사에 답하지 않고 창현은 로드 매니저와 그녀에게 주스를 건넨다.

“고마워.”

“전 자도록 할게요. 도착하실 때까지 깨우지 마시고요.”

감사의 인사를 건네지만 창현은 그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말한다.

로드 매니저는 무언가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지만 끼어들 구석을 찾지 못하고 창현의 말에 대답한다.

“알았다.”

“예, 그럼 고생해주세요.”

그 말과 함께 의자에 몸을 묻은 창현이 그대로 눈을 감는다.

“…….”

평소와 달리 냉정한 그의 모습에 세희는 안절부절 못한다. 창현에게 무언가 말을 걸려고 했지만 눈을 감아버리는 그의 모습에 그저 발만 동동 구른다.

‘그것도 이해해주지 않고…….’

야속했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일은 저질러졌고, 자신이 잘못한 것인데.

언제나 숨기지 않고 모든 걸 이야기하던 창현이었기에 배신감이 클 수밖에 없었다.

몰래 카메라를 한 뒤 사과를 했더라면 이러지 않았을 텐데.

어어하는 사이 상황이 심각해진 것 같아 세희는 창현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잘못을 알았기에 더더욱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들었고.

창현을 속인 벌을 톡톡히 받고 있는 셈이다.

‘사과해야겠네.’

잘못한 만큼 사과 해야겠다 굳게 다짐하는 세희였다.


AM 8:01

시골의 맑은 공기가 기분 좋게 느껴지는 이른 아침, 미리 도착한 재석은 노인 회관 앞에서 서성이며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메인 MC이기에 일찍 오지만 남들보다 일찍 온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늘 다른 사람들보다 일찍 일어나고 일찍 출발해야 했기에 고생이 무척 컸다.

“이거 너무 일찍 왔나.”

산으로 둘러싸인 곳이라 덥기는커녕 오히려 쌀쌀하게 느껴지는 날씨다.

시계를 보며 시간을 확인하던 재석은 멀리서 차 한 대가 오는 것을 보고는 눈을 빛낸다.

“어, 왔다!”

눈을 빛낸 그가 차에 시선을 고정한다.

그를 향해 오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스타크래프트 벤.

육중한 덩치답게 묵직한 느낌을 주며 접근하는 벤을 보던 재석이 고개를 갸웃한다.

벤을 타고 다니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묘한 이질감이 들었던 것이다.

“누구지?”

여러 차례 함께 촬영을 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타고 다니는 차를 모두 알고 있었지만 지금 등장한 벤은 약간 낯선 느낌이 들었다.

카메라가 모두 집중하고 있는 가운데, 재석 앞에 벤이 멈춰선다.

그리고 잠시 후, 문이 드르륵 열리며 한 사람이 내린다.

재석은 벤에서 내리는 사람을 보고는 경악성을 터뜨린다.

“헉! 현이?”

벤에서 내린 사람은 패밀리가 떴다의 멤버가 아닌, 오늘의 게스트 창현이었던 것이다.

다른 멤버일 줄 알았던 재석은 게스트가 먼저 등장을 하자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창현 또한 재석의 표정을 보고 당황하는 듯했다. 다른 멤버들이 일찍 올 줄 알았건만 아무도 없고 재석만 있었던 것이다.

“안녕하세요, 그런데 재석이 형밖에 없으시네요?”

“혀, 현이 너 왜 이렇게 일찍 온 거야?”

“저 원래 일찍 다니는 거 아시잖아요.”

“아, 그랬지.”

무한도전 촬영 때도 그랬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이는 재석. 조용히 납득하던 그가 이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아니, 그게 아니라, 현아? 내 말을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말고 들어볼래?”

“뭔데요?”

“보다시피 다른 사람들이 아무도 오지 않았잖아?”

“네, 그렇죠.”

주변을 둘러보니 먼저 도착한 촬영팀과 재석 밖에 없었다. 다른 멤버들은 아무도 오지 않은 상태였던 것이다.

간단하게 납득하는 모습을 보이자 재석이 말을 잇는다.

“원래 게스트는 가장 늦게 나타나야 해. 그래야 멤버들의 환호를 받으며 멋있게 두둥! 하고 등장할 수 있지 않겠어? 더군다나 벤을 타고 오면서 현이 네 모습을 보면 재미가 없잖아.”

“…….”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창현은 묘한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거듭 이어지는 재석의 설명은 간단하게 요약이 되었다.

자신이 먼저 나타나서 프로그램의 초반 재미가 창출될 수 없다.

그건 곧 자신이 늦게 나타나줘야 한다는 이야기인데, 이미 나타난 상황이다.

그럼 어떻게 하란 말인가?

서서히 재석이 하는 말이 무엇인지 알아차리기 시작한 창현이 조심스레 입을 연다.

“형, 그럼 설마…….”

“그래, 현아, 미안하다.”

사과를 하며 창현의 어깨에 손을 올리는 재석. 그리고 그와 눈을 마주하며 나직하지만 단호한 어조로 말한다.

“뒤로 갔다가 다른 멤버들이 오면 다시 등장해주지 않을래?”

“…….”

창현은 할 말을 잃어야 했다.

너무 일찍 온 것이 죄가 되었다.

그 장면은 모두 카메라에 담기고 있었다.


“자! 그럼 모두 모였고, 이제 게스트만 오면 되겠는데요.”

“오빠! 오늘 누가 오는 거야? 왜 말을 안해주는 거야?”

기대감 서린 재석의 얼굴을 보며 효리가 뚱한 표정으로 묻는다. 아까 전부터 계속 물었지만 대답을 해주지 않고 음흉한 미소만 짓고 있어서 그렇다.

“흐흐흐! 조금 있으면 등장할 거야. 아마 너랑 예진이는 좋아서 춤을 출 거다.”

“도대체 누군데 그래요, 오빠.”

예진도 궁금한 듯 콧소리를 섞어 말하지만 이미 단련이 된 재석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다.

“곧 도착할 거라니깐.”

게스트가 현이라는 것을 오로지 재석 밖에 모르는 상황.

도착하면 효리와 예진이 좋아서 춤을 출 것이라 이야기 했으니 일단 여성 게스트가 아니라는 것은 확실했다. 그랬기에 남자 멤버들의 표정은 어두웠다.

“오빠, 계속 숨기면 좋지 않을 거야.”

“어서 말해주세요.”

“오늘 잠자리 순위 있는 거 알지? 또 6위 하고 싶어?”

“정말 6위로 해버릴 거예요!

재석의 약 올리기가 도가 지나쳤음일까.

참을성의 한계가 드러난 효리가 본성(?)을 보이며 재석을 압박하기 시작한다. 예진도 그에 편승하여 재석을 한껏 압박한다.

“그, 그러니까 그게… 어! 저기 온다!”

궁지에 몰려있던 재석은 저 앞에서 벤이 등장하는 것을 보고는 소리친다. 아주 적절할 때 오기 시작한 것이다.

두 번째로 도착했지만 재석의 말로 인해 한 시간 가깝게 숨어있던 벤이 카메라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서서히 다가오는 벤.

패밀리 멤버들은 벤을 보고는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벤이 무척 큰데?”

“저거 대인원 아이돌이나 대형 스타들이나 탄다는 스타크래프트 벤인데요?”

“그럼 오늘 오는 사람은 설마 한류 스타?”

“아이돌 스타일 수도 있죠.”

“동방신기? 슈퍼주니어? 빅뱅?”

“빅뱅이요? 듣지 못했는데.”

“너한테 비밀로 하고 올 수도 있는 거 아니겠어? 효리랑 예진이랑 좋아한다면 아이돌 스타일 확률이 높다고.”

“으으, 남자 아이돌이면 잠자리 순위가 위험한데…….”

그렇게 쑥덕거리는 사이 서서히 다가온 벤이 멈춰 선다.

그리고 열리는 천천히 열리기 시작하는 문.

열린 문에서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를 본 재석을 제외한 패밀리 멤버들의 눈이 서서히 커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함성을 지르기 시작한다.

“우와! 현이다! 현!”

“현이 왔어! 한류 스타가 아니라 월드 스타잖아!”

“으아악! 오늘 잠자리 순위 어떻게 해!”

함성에서 이내 절규로 변하는 남자 멤버들과.

“와! 현이다! 현! 어서 와!”

“내, 내가 현을 보게 되다니, 감독님 사랑해요!”

재석의 말처럼 환호성을 지르는 효리와 예진.

그들의 격렬한(?) 환영 인사에 창현이 어색한 미소를 짓는다. 어색해하는 이유를 알았기에 재석이 서둘러 그를 소개하며 인사를 시킨다.

“오늘의 게스트는 한창 뜨겁죠, 여심을 녹이는 악마로 돌아온 월드 스타 현!”

“안녕하세요. 현입니다.”

최대한 애써 담담한 척하며 인사를 하는 창현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숨길 수 없는 어색함이 있었다. 웬만해서는 눈치 챌 수 없지만 방송을 보는 사람은 그 이유를 알 것이라.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지만 창현은 모를 것이다.

방송에서는 그가 두 번째로 도착하고, 재석의 설득에 의해 벤을 타고 다시 돌아가는 모습이 카메라에 담겨 방송에 그대로 나갔다는 것을.

패밀리가 떴다가 방영될 때 이 모습을 본 팬들은 엉거주춤한 그의 모습과 어색한 그의 표정을 보고는 대폭소를 터뜨렸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현의 굴욕’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시작부터 뭔가 조짐이 심상치 않았다.


굴욕(...)적인 등장을 마치고 본격적으로 오프닝을 시작하는 재석.

그는 효리와 예진을 힐끗 보더니 입가에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떠들기 시작한다.

“오늘 효리랑 예진이가 왜 이렇게 조신해진 거야?”

“평소대로 해, 평소대로. 닭살 돋는단 말야.”

재석 옆에 선 종신이 깐족거리는 말투로 말한다.

빠직!

그 말을 들은 효리와 예진의 이마에 혈관 마크가 도드라지기 시작하자 재빨리 입을 다무는 종신. 가장 연장자지만 연장자라는 느낌보다는 나이 많은 개구쟁이 같은 느낌이다.

단번에 종신을 제압한 효리와 예진.

효리가 재석의 말에 곧장 반박하기 시작한다.

“우리가 언제 조신한 척 했다고 그래? 원래 우리는 조신했어.”

“마, 맞아요! 우리는 원래 조, 조, 조신했다고요!”

막힘없이 말하는 효리와 달리 자신이 조신하다는 말을 하는 것이 상당히 무안한 듯 말을 더듬는 예진이었다.

솔직히 그렇지 않은가.

맨손으로 닭을 잡고, 칼로 숭어 눈알을 튀어나오게 하며, 패밀리 남자들도 하지 못하는 물고기 손질의 대가가 아니던가.

“너희가 조신했다고? 푸훕!”

비웃음을 감추지 못하는 재석.

패밀리 남자들을 단숨에 휘어잡는 여장부 효리가 조신하다니!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말에 재석은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하!”

“왜 웃어!”

짝!

효리의 손바닥에 등에 작렬하자 재석의 웃음이 바로 그치며 곡소리가 흘러나온다.

“악! 때리지 마! 효리야! 너 손이 엄청 맵다고! 그걸로 때리면 나 죽어요!”

“그러니 인정하라고! 내가 조신하단 걸!”

“그, 그래! 국민요정 이효리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조신한 여자입니다!”

“그거 명심하도록 해.”

폭력 앞에 재석은 한없이 작아지며 진실을 왜곡하는 우를 범할 수밖에 없었다.

패밀리 남자들은 서슬 퍼런 효리의 모습이 주눅든 모습을 보여야 하고.

다만 효리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은 지금 그러한 모습 자체가 조신함과 거리가 멀다는 것이었다.

빙그레 미소 짓고 있는 창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대성이 한숨을 푹푹 내쉰다.

효리의 매운 손바닥에 괴로워하던 재석은 또 덤앤더머라고 그런 대성의 표정을 놓치지 않고 묻는다.

“아니, 대성아, 왜 그렇게 죽을상을 짓고 있어.”

“오늘 잠자리 순위가 너무 뻔한 것 같아서…….”

대성의 말을 들은 패밀리 다른 남자들의 표정도 좋지 않게 변한다.

이거 완전 해보나마나인 대결 아닌가.

절대 이길 수 없을 상대의 등장은 그들로 하여금 전의를 상실케 하기 충분했다.

“오늘은 1등은 정해진 것과 다름없고 2등이라도 하기 위해서 노력해봐.”

“하지만 난 만년 6위잖아.”

잠자리 선정에서 만년 6위를 하는 재석이었기에 더더욱 전의를 잃은 표정이었다.

너무나 침울한 그의 표정에 창현이 나서서 위로를 해주었다.

“형,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아는 효리 누나는 형이라고 해서 불이익을 주는 사람이 아니에요. 형이 열심히 하시면 상위권에 드실 수 있을 거예요.”

창현의 위로에 고개를 숙였던 재석이 고개를 든다. 하지만 고개를 든 재석의 표정은 한가닥 희망이 비치는 것이 아닌, 어이가 상실된 얼굴이었다.

“현아! 네가 아직 효리를 잘 모르나 본데…….”

숨겨진 효리의 면을 폭로하려는 재석.

그보다 더욱 빠르게 그의 입을 봉인하는 손길이 있었다.

“읍읍!”

재석의 입을 깔끔하게 봉인한 것은 다름 아닌 효리의 손이었다.

“오빠! 내가 뭘 그랬다고 그래! 현이 말대로 나같이 공평한 여자가 세상에 어디 있다고!”

“읍읍읍!”

소리가 막혀서 나오지 않고 있었지만 그것이 마치 ‘말도 안 돼! 네가 공평하다고?’ 이렇게 들리는 것이 창현의 착각일까.

어쨌든 투닥거리는 국민남매의 모습을 보면서 창현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잠시 자리를 옮긴 그들은 노인 회관 근처에 있는 정자에 자리를 잡았다.

창현의 맞은편에 앉은 천희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창현에게 인사를 한다.

“안녕하세요, 현 씨?”

그러면서 손을 내미는 그를 보며 창현이 미소를 지으며 그 손을 잡는다.

“예, 안녕하세요. 편하게 대해주세요. 비록 1박 2일뿐이지만 저도 패밀리니까요.”

가운데 앉아있는 재석이 또 그걸 참지 못하고 끼어들며 말한다.

“맞아, 천희야. 현이가 워낙 인기가 많고, 보기 힘들지만 성격이 나쁜 애가 아니에요. 오히려 다가가는 사람에게 친절하게 대해준단 말이지. 용기 있는 자만이 친해질 수 있는 거야.”

“그럼 현이라고 불러도 되나요?”

조심스러운 천희의 말에 창현이 고개를 끄덕인다.

“네, 물론이에요.”

“천희가 편하게 부르면 나도 편하게 불러도 되겠지.”

엉성천희와 콤비를 이루는 김계모, 수로의 말에 창현은 미소를 짓는다.

“예. 물론이에요. 영화 잘 보고 있어요.”

“이거 월드 스타가 내가 나온 영화를 본다니 쑥스러운데?”

머쓱하게 웃음을 짓는 수로를 보며 창현도 웃음을 지었다.

“반가워, 현아. 한 번 만나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네.”

깐족 캐릭터 종신은 제법 각을 잡으며 창현에게 말한다.

창현도 그런 종신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한다.

“예, 안녕하세요, 선배님. 뵙게 되어 영광이에요.”

“아니! 종신이 형한테 무슨 영광을!”

극진한 예우에 재석이 불만을 드러내자 종신이 재석을 밀며 말한다.

“왜 그래, 나 후배한테 영광이란 소리 듣는 선배라고.”

“하하! 맞아요, 가수 선배시잖아요.”

“나도 선배인데?”

효리가 끼어들며 말하자 창현이 은근하게 말한다.

“효리 누나랑은 친해서 그런 건데… 그럼 선배로 예우를…….”

“아, 아냐! 그러지 않아도 돼! 암! 우리가 좀 친하긴 하지.”

관계가 다시 리셋되려 하자 경악하며 달려드는 효리였다.

그녀 옆에 있던 예진이 창현에게 인사를 하였다.

“안녕하세요, 박예진입니다앙.”

과도한 콧소리로 인해 패밀리 남자들은 모두 우억! 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창현은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을 뿐.

그 모습을 보며 예진은 좋다고 난리다.

“어우, 너무 멋지다.”

“하하하…….”

노골적인 칭찬에 창현은 그저 웃음만 짓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나서 찾아든 것은 적막.

마지막으로 대성이 인사를 해야 했지만 대성은 슬금슬금 창현의 눈치를 보며 선뜻 입을 떼지 못하고 있던 것이다.

“아니, 대성아, 넌 왜 인사를 안 해.”

보다 못한 재석이 나서자, 대성은 창현을 힐끗 보더니 어렵게 인사를 한다.

“아, 안녕하세요, 강PD님…….”

“아니! 왜 그렇게 어색하게 인사하는 거야.”

“그게 그러니까…….”

우물쭈물하며 입을 열지 못하는 대성. 그러다 주변의 시선이 온통 자신에게 집중되자 어렵사리 입을 열기 시작한다.

“예전에 드라마 OST를 하면서 프로듀싱을 해줬는데 그게… 너무 무서워서…….”

그때 기억이 떠오르는지 대성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녹음은 일찍 끝났지만 밀도 높은 갈굼은 감히 상상도 못할 지경이었기에.

“대성아! 네가 형이야! 강하게 나가야지!”

본인은 정작 그렇게 하지 못하면서 대성에게는 강하게 나갈 것을 요구하는 재석.

그 말을 들은 대성이 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용기를 내어 창현에게 인사한다.

“바, 반가워, 혀, 현아. 오, 오늘 잘해보자.”

더듬거리며 끊어 말하는 대성의 모습은 애처로울 지경이었다.

“예, 잘 부탁드릴게요. 편하게 대해주세요.”

“으응.”

대성의 반응에 괜히 자신이 무서운 사람이 된 것 같아 창현은 어색하게 볼을 긁적였다.

그 분위기를 타파한 것이 재석이었다.

소위 말하는 마가 끼려는 것을 간파한 그가 자신의 손에 쥐어진 것을 창현에게 건넨 것이다.

“자! 이 지도를 보고 오늘 머물 집을 가시면 됩니다.”

“…….”

재석의 말에 가만히 지도를 보는 창현. 상당히 조잡한 그림 솜씨로 그려진 지도였지만 워낙 구조가 단순하여 알아보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두리번거리던 창현이 한곳에 손을 뻗으며 말한다.

“바로 저기네요.”

“너무 쉽게 찾네. 그럼 바로 가보도록 할까요? 고고!”

허탈한 재석의 말과 함께 패밀리가 자리에서 일어나 오늘의 목적지로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이거, 오늘 1위는 정해져서 2위 쟁탈전이 되는 건가?”

“오늘 남자분들은 좀 열심히 하셔야 할 거에요.”

재석의 말에 효리가 도도하게 말하자 분한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크윽! 저번 주에 태연 양이 와서 좋았는데!”

“그 말은 지금 현이가 와서 싫다는 말?”

“와! 오빠 용감하다! 감히 현 씨가 온 걸 싫어하고 있어!”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오해에요! 전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효리와 예진의 2연타에 재석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며 황급히 외친다.

그 모습을 보며 뒤에서 킥킥 웃음을 짓는 창현.

재석이 그에게 다가와 바짝 옆에 붙으며 말한다.

“현아! 네가 해명해줘! 내가 절대 그런 의도로 그러지 않았다는 걸.”

“물론 알고 있죠. 오해하지 말아주세요.”

스스로 상황극을 만들어주니, 창현이 하는 것은 날름 주워 먹는 것뿐이다.

효리는 창현 옆에 붙어서 살랑거리는 재석을 보더니 인상을 찌푸린다.

“오빠는 왜 자꾸 현이 옆에 붙어서 친한 척하는 거야.”

“친한 척하는 거 아니거든요! 나랑 현이는 원래 친하거든요!”

이미 결혼식에 참여한 것으로 상당한 친분이 존재하는 것을 인증하였지만 효리는 그것이 쌍방통행이 아닌, 일방통행으로 보고 있었다.

더군다나 오늘 촬영으로 인해 합법적으로 독점할 수 있는데 자꾸 재석이 옆에 붙어 있으니 못마땅할 수밖에 없었다.

효리의 맹공을 피해 창현 옆에 붙은 재석은 조잘조잘 떠들며 이야기를 해나간다.

“그럼 오늘 계단 춤 한 번 볼 수 있는 겁니까?”

“아주 화제가 되고 있는 춤이던데, 그걸 볼 수 있다는 거야? 와우!”

환호성과 리액션을 넣어주며 게스트를 띄워주니, 창현은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기회가 된다면요.”

“기회는 만들면 되는 겁니다!”

“왜 그래, 난 오늘 현이랑 뮤지션에 관한 이야기를 나눠야 돼. 개그맨이랑 배우들은 저리 빠져.”

종신이 불쑥 끼어들며 뮤지션 선배(?)로서 위치를 행세하려 한다.

그 말에 효리와 대성도 끼어들며 말한다.

“나도나도.”

“저도요!”

“와! 진짜 종신이 형하고 너희들! 와! 개그맨하고 배우들 이렇게 차별하는 거야?”

배신감에 가득찬 재석의 말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구원을 청하는 눈으로 수로를 바라보는 재석이었지만 이미 수로는 천희와 예진을 규합하여 연기자 파로 독립한 상태였다.

“…….”

혼자 개그맨인 재석은 외톨이가 되어 고개를 푹 떨구고 말았다.


오늘 하루 머물 집에 도착한 패밀리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배웅하고 본격적으로 촬영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써놓은 할 일을 재석이 읽기 시작한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물고기를 잡아놓아라! 그리고 이걸로 알아서 매운탕을 끓여먹어라?”

알아서 잡아서 매운탕을 끓여먹으라는 말에 황당한 표정을 짓는 재석. 다른 패밀리들 또한 비슷한 표정이었다. 보통은 물고기를 잡아놓으라고 하는데 그게 아니라 저녁 먹을거리가 없을까봐 저녁으로 해먹으라는 뜻이었다.

이곳은 바로 앞에 평창강이 자리하고 있어 그물만 있으면 물고기를 잡는 것이 가능했다.

“이것 참. 그리고… 옥수수랑 고추를 따놓아라. 앞에 채소밭이 있으니 저녁 식사를 하는데 보태 먹어라. 음!”

“할아버지 할머님의 인심이 매우 후한데?”

“그건 좋은 거지 뭐! 어쨌든 가도록 하죠. 물고기를 잡아야 저녁을 먹을 수 있으니까요.”

“네!”

재석의 말에 모두가 한 목소리가 되어 대답한다.


집에 마련된 그물과 물고기를 담아놓을 통을 든 패밀리는 곧장 앞에 위치한 강으로 향한다.

산과 함께 어우러진 강은 아름다운 절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캬! 멋있다!”

한차례 감탄사와 함께 패밀리는 본격적으로 강에 들어갈 준비를 한다.

“근데 현이는 뭘 입어도 맵시가 나네?”

“하하, 맵시요?”

“보니까 상당히 옷발이 잘 받는데? 옷 입을 맛이 나는 것 같아.”

모델 출신인 천희의 말에 창현은 그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자신을 칭찬해주는 모델 출신의 말에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 본격적으로 물고기를 잡아볼까요?”

재석의 말과 함께 본격적으로 물고기를 잡기 위해 강으로 들어가기 시작한다.

2인 1조로 구성된 고기잡이는 치열한 경쟁 끝에 창현과 효리가 한 조가 되었다.

게스트와 함께 한다는 것은 방송 분량이 확보된다는 것!

재석은 효리를 보며 툴툴거렸다.

“효리는 아닌 척하면서 계속 현이랑 붙어있더라.”

“내가 언제! 현이가 나랑 친해서 계속 옆에 있다고 했단 말이야!”

버럭 소리를 지르며 말도 안 되는 말을 하는 효리.

당연히 그 말을 재석이 믿어줄 리가 없다.

“에이! 현이 표정이 전혀 아니라는 뜻인데?”

“뭐라고? 현아! 정말 그런 거야?”

“네? 음! 친하나 건 사실이지만 계속 옆에 붙어있으려고 하는 건…….”

두 사람 중 누구의 편을 들어야 할지, 참으로 난감한 수준이어서 어색한 웃음과 함께 얼버무린다.

“쳇!”

자신의 편을 들어주지 않자 두 사람은 아쉬운 듯 혀를 차며 본격적으로 물고기 잡이에 몰두하기 시작한다.

“효리 누나, 제가 알기로 중앙에서 저쪽 벽으로 몰면 물고기가 잡히는 걸로 알고 있거든요. 한 번 해보지 않겠어요?”

모범생 창현은 오늘 도착지 앞에 강이 있다는 것을 보고는 물고기 잡이를 예견하였고, 미리 어떤 식으로 물고기를 잡을지 조사를 해온 상태다.

다함께 하면 좋겠지만 어느 샌가 팀으로 경쟁하는 구도가 되어버렸기에 초반부터 치고 나갈 생각이었다.

효리는 당연히 창현의 말에 찬성하였다.

“물론이지!”

그 말과 함께 두 사람은 그물을 양쪽에서 잡고는 중앙에 서서 벽쪽을 향해 빠르게 달려가기 시작한다.

여자지만 춤으로 단련된 효리는 처지지 않고 빠른 속도로 질주하기 시작한다.

촤촤촤촤촤!

물보라가 일어났지만 그것을 개의치 않은 채 곧장 달려가는 두 사람.

벽까지 달려간 뒤 그물을 들어 올리자, 파닥거리는 은빛 물고기들이 그들을 반긴다.

“와! 잡았다!”

“후! 잡았네요.”

두 사람은 그물에 파닥이는 물고기를 보고는 환호성을 질렀다.

그러자 모여드는 패밀리들. 창현과 효리 두 사람의 그물에는 무려 다섯 마리의 물고기가 파닥거리고 있었다.

한 마리는 메기였고, 다른 것들은 흔히 말하는 송사리 종류였다.

다만 크기가 작은 편이 아니어서 매운탕에 넣어 끓여먹기에 괜찮아 보였다.

“말도 안 돼! 물고기도 잘 잡아!”

물고기 잡는 것만큼은 압도해주겠다 다짐하던 천희는 창현이 물고기마저 잘잡자 좌절하는 액션을 취한다.

“자자! 이러지 말고 우리도 물고기를 잡자고! 질 수 없잖아!

“물론이에요!”

재석의 말에 패밀리가 다시 전의를 불태우며 몰이 사냥을 시작한다.

하지만 방금 전 수법으로 톡톡히 재미를 본 창현, 효리 연합군을 이길 수 없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다시 서서히 몰이 사냥을 시작하는 두 사람.

요령이 붙은 것인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서서히 몰아붙이다가 고지에 다다르자 빠른 속도로 달려가 단숨에 몰아버린다.

그리고 그물을 들자 다시 한 번 환호성을 터뜨린다.

“오예! 오늘 완전 대박!”

“이 정도면 매운탕 걱정은 없겠네요.”

그물에는 아까 전보다 훨씬 많은 물고기가 파닥거리고 있었다.

아주 작은 송사리들은 제외하더라도 무려 일곱 마리의 물고기가 파닥거리고 있던 것이다.

두 사람의 환호성을 들은 패밀리가 다시 한 번 몰려들었고, 그들이 잡은 물고기를 보고는 부러움을 감추지 못한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세 번이나 더 몰이 잡이를 한 끝에, 물고기 통에는 스무 마리가 넘는 물고기가 자리하고 있었다.

모두 두 사람이 잡은 것이다.

“안 되겠어! 잘된 건 벤치마킹을 해야지. 이대로 0마리의 수모를 당할 순 없다!”

재석의 말과 함께 다른 패밀리들도 눈빛이 바뀐다.

이대로 가다가는 제대로 물고기도 잡지 못하는 모습만 방송에 나가게 되리라.

굴욕적이지만 벤치 마킹을 하여 물고기를 잡아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창현과 효리가 했던 방법을 그대로 따라하기 시작한다.

잠시 후, 그물에 퍼덕이는 물고기를 본 패밀리가 환호성을 지른다.

“와아아!”

“물고기다!”

“우리가 드디어 잡았습니다! 우와아아!”

매우 기뻐하는 재석이었다. 모진 굴욕을 딛고 마침내 잡는데 성공한 물고기! 이것이야 말로 그들의 눈물이고 땀이었다.

하지만…….

“네? 뭐라고요?”

PD의 말을 들은 재석과 패밀리들은 얼빠진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물고기를 잡고 기뻐하는 그들에게 내려진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

창현과 효리가 잡은 물고기 양으로도 충분하니 더 이상 잡을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였다.

정말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어떻게 심기일전하여 물고기를 잡았는데, 다시 놓아주라는 말이나 듣다니.

“이건 말도 안 돼!”

절규하는 재석과 패밀리들.

그런 패밀리들을 보며 효리는 피식 웃음을 짓고는 말한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잘했어야지.”

“으으으!”

얄미운 그녀의 말에 신음만 흘릴 뿐이다. 맞는 말을 하고 있으니 뭐라 대답하기도 난감했다.

그 모습을 얄미운 듯 바라보던 예진이 몸을 돌린 효리에게 슬금슬금 다가간다.

그녀의 접근을 알아차린 효리가 몸을 돌릴 무렵, 예진이 그녀의 얼굴에 물세례를 날리기 시작한다.

“언니 받아욧!”

촤악! 촥!

“너, 웁! 뭐, 뭐야! 어푸어푸!”

갑자기 얼굴에 쏟아지는 물세례에 효리는 혼비백산하여 마주 물세례를 날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싸움을 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선빵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여장부 효리였지만 예진에게 먼저 물세례를 선빵으로 맞으니,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으하하하! 받아랏, 효리야!”

여기에 언제 끼어들었는지 재석도 웃음을 터뜨리며 효리에게 물세례를 퍼붓고 있었다.

순식간에 궁지에 몰린 효리.

“두, 두고 봐! 어푸! 예진이 너! 그, 그리고 풉! 재석이 오빠도!”

“나중에 죽어도 지금 너를 공격할란다!”

위협적인 효리의 말에도 불구하고 재석은 물러서지 않고 더욱 강한 물세례를 퍼부었다.

두 사람의 공세에 점점 뒤로 밀리기 시작하는 효리.

한 걸음, 한 걸음 물러서던 효리의 몸이 순간 기우뚱하더니 그대로 균형을 잃기 시작한다.

밑에 자리한 돌에 다리가 걸린 것이다.

“어어?”

얼굴에 물이 쏟아지고, 몸은 균형을 잃은 상태.

몸을 바동거리던 효리가 무의식적으로 뒤에 있던 창현의 팔을 잡는다. 그리고 일어서기 위해 그를 꾹 누른다.

“어?”

효리가 물세례 맞는 것을 구경하던 창현은 갑자기 효리가 넘어지려 하자 받아주려 나서다가 늦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멈춰 섰다. 그런데 바동거리던 효리가 그대로 그의 팔을 붙잡는 것이 아닌가.

넘어지던 효리는 간신히 몸을 지탱하는데 성공했지만 문제는 그녀의 모든 체중이 창현에게 쏠렸다는 것이다.

순간 중심을 잡지 못한 창현의 몸이 그대로 기울기 시작한다.

그리고 원래 넘어지려던 효리를 대신하여 물에 빠져든다.

그것도 뒤로 굴욕스럽게 안면으로.

첨벙!

“…….”

안면부터 입수한 창현의 모습에 패밀리들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창현의 두 번째 굴욕이었다.


창현의 안면 입수는 패밀리의 물고기 잡이 하이라이트와도 같은 장면이 되고 말았다.

효리의 육중한(?) 무게에 균형을 잃어 단숨에 넘어가 안면으로 입수하게 된 창현.

그의 입수에 패밀리들은 한동안 멍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다 이내 터져 나오기 시작하는 웃음.

배꼽이 빠지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될 정도로 패밀리들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졸지에 몸 개그의 절정을 보여준 창현은 웃는 패밀리들을 보면서 어색하게 하하! 하고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어때, 힘들지 않아?”

물고기 잡이 녹화가 끝나고 잠시 휴식 시간.

본격적으로 게임을 하기 위해 젖은 몸을 뜨거운 태양에 말리고 있는 와중에 재석이 다가와 창현에게 묻는다.

“힘들지는 않아요. 오히려 놀러온 것 같아서 기분이 좋은데요?”

“현이 네가 고정 멤버로 오면 절대 이런 말이 나오지 않을 텐데. 으으!”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부들부들 떠는 재석이었다.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국민 MC였고, 당연히 그를 원하는 곳은 많았다.

스케줄이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인 뒤 패밀리가 떴다에 참여하는 것이니 괴로울 수밖에 없다.

처음에는 쉬는 것이라 생각하고 좋아했지만 그것이 아니라는 걸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오빠! 또 거짓말 하는 거야?”

이야기를 듣고 있던 효리가 난입한다.

창현의 굴욕샷을 선사한 것이 다름 아닌 그녀였기에 어떻게 다가갈지 눈치를 보다가 재석의 이야기를 듣고 슬그머니 끼어든 것이다.

“내가 무슨 거짓말을 했다고 그래, 효리야.”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항의하는 재석.

그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은 채 효리가 말한다.

“현아, 저 말 뻥이야! 오빠가 집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얼마나 좋아하는데! 게다가 저번 주에 태연이 오니까 아주 입이 헤벨레 하더라고! 뭐, 여기가 천국 같다나?”

“효리야! 그러지 마라! 현아! 저 말 거짓말이야! 믿지마!”

양손을 저으며 극구 부정하는 재석이었지만 대세는 효리에게 기울어 있었다.

창현은 안쓰러운 눈으로 재석을 보면서 말한다.

“신혼이신데… 재석이 형 많이 힘드신가 봐요.”

“매 맞는 새신랑이라니깐.”

“커헉!”

2연타로 얻어맞은 재석이 목을 부여잡으며 비틀거린다.

많이 힘들고, 매맞는다니.

너무나 억울해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자신이 얼마나 남자다움을 어필했는데! 이런 억울한 루머가 돌고 있다니!

“현아! 왜 내 말을 믿어주지 않는 거야!”

억울함이 구구절절 맺혀있는 재석의 외침.

그 물음에 창현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마무리 한다.

“효리 누나는 가수니까요.”

“…….”

혼자 개그맨이라는 것이 너무나 비참하게 느껴졌다.


“힘들지 않어?”

재석이 침몰하자, 슬금슬금 다가오던 종신이 매몰차게 재석을 밀어버리고 합류한다.

그 말에 창현이 고개를 젓는다.

“힘들지 않아요. 이제 시작인 걸요.”

“오늘 현이 덕분에 내가 가수 선배로서 존경도 받고 참 좋아.”

라디오 스타에서 한 번 만난 적이 있는 두 사람.

당시에는 그다지 인사를 나누지 못했는데 이렇게 패밀리가 떴다에서 다시 만나게 되니 무척 반갑게 느껴졌다.

그때는 MC로서 창현을 대했지만 오늘은 가수 선배로서 대접을 받는다.

대본에 종신의 기를 세워 그의 깐족거림을 키워주자는 의견이 있었는데, 그것을 보고 창현이 즉석으로 가수파를 조직했고, 눈치 빠른 수로가 연기자파를 조직하여 재석을 불쌍하게 만드는데 일조했다.

평소 뒷방 노인데 컨셉에서 현 같은 월드 스타의 선배로서 의기양양하게 어깨를 필 수 있으니, 기분이 좋았다.

싱글벙글 웃고 있던 종신이 좌절하는 재석을 보며 말한다.

“쯧쯧! 개그맨들은 저래서 안 된다니까.”

“그렇게 말하면 재석이 형이 토라져요.”

“안 삐져. 쟤가 얼마나 활발한데.”

“맞아, 재석 오빠 사전에 토라진다는 건 없어. 그러니 안심해도 돼, 창현아.”

재석이 은근히 이쪽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효리가 아예 대놓고 들으라는 식으로 말한다.

“재석이 넌 그거 가지고 토라지냐.”

수로의 말에 대성이 그래도 덤앤더머라고 다가가며 재석을 위로한다.

“형, 괜찮아요?”

“대성아! 나는 정말! 너밖에 없다!”

모두가 자신을 비웃을 때 위로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너무나 고맙게 느껴지고 소중하게 느껴진다.

혼자 개그맨이라 고립되어 있던 재석은 자신을 위로해주는 대성을 보면서 그간의 서러움을 말끔하게 해소할 수 있었다.

“대성아 이리와!”

대성을 붙잡고 늘어지는 재석을 본 효리가 외친다.

“에? 하지만…….”

차마 형을 버리고 갈 수 없는지 머뭇거리는 대성.

그를 보며 종신이 깐족거리며 마무리 한다.

“어서 이리와, 개그맨 저리 놔두고. 현이랑 잘 이야기하면 혹시 알아, 솔로 앨범 곡도 줄지?”

“저, 정말요?”

눈을 번쩍 빛낸 대성이 서서히 넘어가기 시작한다.

사태의 위급함을 느낀 재석이 대성의 팔을 꽉 잡으며 외친다.

“대성아 안 돼! 저 사람들은 널 꼬시려고 거짓말을 하는 거야!”

중간에 끼여 좌우로 고개를 돌리며 난감한 표정을 짓는 대성이었다. 마음은 저쪽으로 향하고 있는데 처량한 재석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개그맨이랑 놀지 말고 어서 이리 와.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치면 너만 후회해.”

그 말이 결정타였다.

재석을 힐끔 본 대성이 나직하게 입을 연다.

“형… 미안해요.”

“대성아!”

애처롭게 외치지만 덤앤더머 동생은 노인네-윤종신-의 꼬임에 넘어가고 말았다.

OTL 자세를 취하며 절망에 빠져드는 재석.

버려진 자의 모습은 너무나 처량하였다.

한동안 그렇게 주저앉아 있던 재석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다. 그리고 자신을 압박하던 사악한 악의 종자-가수파-들을 보며 외친다.

“게임 합시다!”

“아직 휴식 시간 5분 정도 남았는데?”

“게임해요! 지금 게임하면 게임 마왕도 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활활 타오르는 재석의 눈에 그 무엇도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전의 하나만큼은 패밀리 내에서 으뜸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최악의 한 수가 되고 말았다.

“그러니까 지금, 유재석이가 나를 이길 수 있다고?”

게임 마왕은 다름 아닌 수로를 지칭하는 말이었던 것.

자신을 꺾을 수 있다는 재석의 말은 잠자는 게임 마왕의 의욕을 불태우는 결과를 낳았다.

“수, 수로 형 그게 그러니까…….”

“게임 합시다! 난 특별히 재석이하고 붙겠어.”

무어라 변명하려던 재석의 말을 가로막은 수로가 외친다.

궁지에 몰린 재석을 보면서 패밀리들은 흥미로운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어차피 5분밖에 남지 않았으니 이 정도 휴식 정도는 반납해도 상관없으리라.

게임 마왕에게 철저하게 발리는 재석의 모습이 기대되었으니까.

“으으으…….”

괜히 의욕에 불타올랐다가 게임 마왕을 자극하게 되어버린 재석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절로 흘러나왔다.

그런 재석에게 다가간 창현이 작게 속삭인다.

“형! 제가 도와드릴게요.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번에 형이 게임 마왕을 꺾을 수 있다는 것을 한 번 보여주시는 거예요.”

그것은 달콤한 속삭임.

잔뜩 쫄아 있었지만 다른 사람이 자신보고 이길 수 있다 말해주자 서서히 의욕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래, 자신이라고 해서 이기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늘 당하는 역할이었지만 한 번쯤은 가해자의 입장도 되어보고 싶다!

눈에 생기가 돌아온 재석이 게임 마왕 수로를 바라본다.

저 사람을 꺾어서 이변을 일으키고 싶다!

창현의 한 마디에 불이 붙은 재석이 고개를 끄덕인다.

“좋아, 내가 진짜 한 번 제대로 해보겠어.”

“그래야죠.”

재미있어질 것 같은 느낌에 창현이 미소를 지었다.

재석은 자신을 믿으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패밀리들을 향해 외친다.

“자! 그럼 팀을 뽑도록 하죠.”


팀을 뽑기 위해 나온 것은 창현과 종신이었다.

같은 뮤지션(?)으로서 선후배간의 대결이라나.

앞으로 나선 종신이 툴툴거린다.

“왜 하필 현이랑 하는 거야. 명색이 선배인데 뒤에서 편히 쉬게 해줄 수 없어?”

“선후배라서 같이 하게 하는 겁니다. 그럼 가위 바위 보를 하세요.”

재석의 말에 어쩔 수 없다는 듯 가위 바위 보를 준비하는 종신과 창현.

“현아 힘내! 이겨서 나 뽑아줘!”

“현 씨! 힘내세요!”

효리와 예진은 일방적으로 창현을 응원하기 시작한다.

그 응원이 심기에 거슬렸는지 눈썹을 꿈틀거리는 종신. 그리고는 효리를 바라보더니 토라진 목소리로 입을 연다.

“이 여사, 이러기야? 우리의 지난날 추억들을 모두 잊은 거야?”

뜬금없는 상황극. 뿐만 아니라 그 상황극이 자신의 과거(?)를 파헤치는 것이었기에 효리는 고개를 젓더니 앙칼지게 외친다.

“어디서 이 여사래! 난 당신 같은 사람 몰라!”

“이 여사!”

“자, 어서 가위 바위 보나 합시다.”

중간에 재석이 개입하며 상황을 강제로 종결시킨다.

효리는 홱하니 고개를 돌리고 있었고, 종신은 하염없이 바라보는 중이었다. 윤 회장과 이 여사의 묘한 조합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미소 짓게 만들기 충분했다.

한편의 상황극을 끝낸 종신이 본격적인 승부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창현을 잠시 바라본 종신이 손을 들자, 재석이 외친다.

“자, 그럼… 가위 바위 보!”

파바밧!

허공에서 변화를 일으키는 두 개의 손!

하나는 가위를 내고 있었고, 하나는 보자기를 내고 있었다.

“아아!”

터져 나오는 탄성.

가위 바위 보의 승자는 다름 아닌 종신이었다.

“내가 이겼다!”

아이처럼 좋아하는 종신. 가위 바위 보였지만 창현을 이겼다 생각하니 마치 가요 프로그램에서 1위를 한 것 마냥 기뻐하였다.

“자, 그럼 골라볼…….”

승자의 입장을 한껏 즐기며 패밀리들에게 시선을 옮긴 종신이 할 말을 잃었다.

모든 패밀리가 그를 등진 채 모른 척하고 있던 것이다.

졸지에 붕 떠버리게 된 종신.

섭섭한 표정을 지은 그가 패밀리들에게 말한다.

“정말 이러기야?”

“…….”

그렇게 말하지만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 패밀리들. 종신과 팀을 이루기 싫다는 간접적인 의사의 표현이었다.

종신의 시선이 여자 패밀리들에게 향한다.

효리와 예진은 가관이었다.

아예 몸 자체를 돌린 채 종신에게 등만 보이고 있던 것이다.

예진은 바닥을 바라보며 발로 땅을 꾹꾹 누르며 딴청을 피우고 있었고, 효리는 휘파람을 불며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여사.”

“…….”

대답하지 않는 효리. 못들은 척 하늘을 바라보고 휘파람만 불고 있을 뿐이다.

“계속 못들은 척하면 내가 뽑아버릴 건데?”

“으응, 윤 회장.”

바로 몸을 돌리며 종신과 시선을 마주하는 효리였다.

그를 보며 종신이 불길한 미소를 짓기 시작한다.

“이 여사.”

“왜 불러 윤 회장.”

자신을 뽑을까 싶어 효리가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한다.

그 모습을 즐기듯 종신은 천천히 뜸을 들이고 있었다. 어느새 다른 패밀리들은 두 사람의 상황극을 재미있게 바라보고 있었고.

“나는 이 여사가 참 좋단 말이지.”

“나도 윤 회장을 싫어하지는 않아.”

어쩌다 이런 상황이 되었단 말인가.

얼굴로는 싫은 기색이 역력했건만 진실을 말할 수 없는 이 참담한 입장.

이 순간만큼은 왕 부럽지 않은 종신이었다.

“자, 빨리 정하세요! 시간 지나갑니다.”

효리가 쩔쩔 매는 모습을 더 보고 싶었지만 시간 관계상 빨리 정해야 했기에 재촉을 하는 재석.

그 말에 종신이 재석을 바라보며 말한다.

“지금 제게 재촉하는 건가요?”

“그게 그러니까…….”

자신을 고를 느낌이 물씬 풍기자 머뭇거리는 재석. 그를 향해 싱긋 미소를 지은 종신이 말한다.

“그럼 고르도록 하겠습니다.”

손을 든 종신이 누군가를 향한다.

그러자 패밀리들의 얼굴에 희비가 교차한다.


“와아아!”

“으아악!”

희비가 교차하는 패밀리들.

종신에게 지목당하지 않은 패밀리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좋아하였고, 그에게 지목당한 사람은 머리를 감싸쥐며 괴로워하였다.

“형! 왜 절 뽑으신 거예요!”

절규를 하며 외친 사람은 다름 아닌 막내 대성이었다.

원망하듯 외치는 그를 향해 종신이 간단하게 말한다.

“너 가수 막내잖아. 부려먹기 편할 것 같아서.”

“…….”

깔끔한 답에 할 말을 잃은 대성이다.

현이 오기는 했지만 게스트고, 그는 상대편이다. 그를 제외하면 막내는 당연히 대성이었다.

더군다나 가수이기도 했고.

할 말을 잃은 대성이 고개를 푹 떨어뜨리고 양 어깨를 늘어뜨린 채 종신의 뒤에 섰다.

종신에게 선택받지 않은 재석은 활기찬 어조로 외친다.

“자! 그럼 다시 가위 바위 보를 하겠습니다. 가위 바위 보!”

허공에서 교차하는 두 개의 손.

그것은 두 사람의 희비를 가르고 있었다.

“와아아! 현이가 이겼다!”

“만세! 현이가 이겼어!”

종신이 가위를 내고, 창현이 주먹을 내서 이겼다. 그의 승리에 모든 패밀리들이 기뻐하며 눈을 빛낸 채 자신을 뽑아주길 기다린다.

“하하!”

부담스러운 패밀리의 눈빛에 어색한 웃음을 짓는 창현.

모두 자신을 뽑아달라고 눈빛을 보내는데, 수만 명 관객 앞에 선 것보다 더욱 부담이 되고 있었다.

‘재미를 위하느냐, 게임 승리를 위하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주제를 놓고 중간에서 고민을 하던 창현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재석을 가리키며 말했다.

“전 재석이 형!”

“말도 안 돼!”

“어떻게 재석이 오빠야! 수로 오빠도 아니고!”

믿기지 않는 듯 얼빠진 표정을 짓던 패밀리가 격렬하게 항의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당사자인 재석은 그것을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좋아한다.

“예스! 봤지? 나랑 현이가 아주 친하다니깐.”

창현의 호명에 주먹을 불끈 쥐며 히딩크 퍼포먼스를 펼친 재석이 오두방정을 떨며 메뚜기처럼 여기저기 뛰어다니다가 패밀리들에게 으스대는 표정을 짓는다.

그 모습이 보기 싫었음일까.

뚱한 표정을 지은 효리가 창현의 뒤로 쪼르르 달려온 재석의 엉덩이를 발로 찬다.

퍽!

“아이고 효리야!”

엉덩이를 감싸쥐며 괴로워하는 재석. 별로 세게 찬 것도 아닌데 엄살 하나는 일품이었다.

흥! 하고 고개를 팩 돌리는 효리를 보며 재석은 다시 발길질이 날아올까 싶어 엉거주춤 자리를 잡는다.

그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은 창현이 다시 종신과 가위 바위 보를 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팀이 정해진다.

창현의 팀에는 재석과 천희, 효리가 배정되었고, 종신의 팀에는 수로와 예진, 대성이 배치되었다.

단순 전력으로 보면 창현 팀의 완전 열세였다.

메뚜기 유재석은 종신과 함께 패밀리가 떴다가 공인하는 잉여 전력이었고, 천희 또한 엉성한 캐릭터로 게임에서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한 채 몸 개그 담당으로 전락한 인물이었다.

그나마 전력이라고 할 수 있는 건 효리였는데, 효리 또한 여자의 몸이었기에 게임을 잘한다기보다는 반칙을 잘하는 것이다.

창현 또한 겉모습을 보면 그렇게 힘이 세보이지 않는 체구다. 현재 포탈사이트에 그의 이름을 검색하면 나오는 것이 키 176cm에 60kg으로 나오니까. 지금은 조금 더 커서 178cm에 63kg의 몸무게였다.

얼핏 들어봐도 그리 힘이 셀 것 같지는 않은 것이다.

회의에 돌입하자 여유로운 종신팀에 반해 현팀의 분위기는 좋지 못했다.

“일단 내가 에이스로 나설게.”

당당하게 스스로를 에이스라 일컫다니.

호랑이가 없는 곳이 메뚜기가 왕이라 칭하는 상황이 아닐 수 없다.

“말도 안 돼! 오빠가 무슨 에이스야!”

당연히 격렬하게 반발하는 효리였다.

그녀의 타박에 재석이 반박한다.

“내가 에이스지 효리야. 솔직히 여기에서 나보다 잘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형 그래도 제가…….”

은근히 에이스 자리에 욕심 있던 천희가 끼어들며 에이스라 어필하려 했지만 재석에게 어림반품어치도 없는 말이었다.

“천희 너는 가만히 있어. 가만히 길을 걸어도 넘어지는 네가 에이스라고?”

“…….”

재석의 말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린 천희.

그런 천희를 신경 쓰지 않은 채 효리가 반박한다.

“현이도 있잖아.”

“에이! 솔직히 현이가 운동을 잘하기는 하지만 저 몸을 봐. 힘을 쓰게 생겼어?”

그 말에 효리가 창현을 빤히 바라본다. 벗겨놓고 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반팔, 반바지 밖으로 드러난 팔다리는 가늘었다. 운동을 했는지 각이 잡혀있지만 가늘어서 힘을 쓸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았다.

“으음!”

효리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곧 무언의 긍정이란 뜻이었다.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모습을 보이자, 재석이 신나게 이야기를 한다.

“현이도 힘들고, 천희는 못 믿지. 그럼 에이스는 나란 말이지!”

“오빠도 그다지 믿음직하지 못한데…….”

“날 좀 믿어봐라, 효리야! 오빠를 믿어야지!”

“오빠가 믿을 수 있는 행동을 안 하잖아!”

“효리야! 네가 그러고도 동생이냐! 오빠를 믿어!”

한 번 믿어보라고 하는 쪽이나 믿지 못하겠다고 하는 쪽이나.

티격태격 싸움만 하고 아무런 계획도 세우지 않는 둘을 보며 창현이 끼어들었다.

“저기, 저 생각보다 힘 센데…….”

많은 근력 운동을 하지는 않지만 몸 곳곳에 스며든 내공의 힘으로 웬만한 성인 남성보다 더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창현이었다. 거기에 내공까지 더해지면 지구력도 유지가 되고.

보는 것이 다가 아니란 걸 말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이미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재석이 창현에게 시선을 옮기더니 정중하게 타이른다.

“현아, 그렇게 말하고 싶은 마음은 알겠지만 객관적으로 보자. 현이 너 많이 허약해보여.”

“…….”

충격적인 재석의 말에 할 말을 잃고 멍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는 창현이었다.

그런 그를 매몰차게 거절한 재석은 효리와 티격태격한 끝에 마침내 승기를 가져오기 위한 선봉의 자리를 꿰차는데 성공한다.

그렇게 전략 회의가 모두 끝나고, 재석은 본격적으로 게임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한다.

“자, 그럼 본격적으로 게임 방법을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게임 방법은 릴레이 형식이고요, 2인 1조가 되어서 한 사람이 매달리고, 한 사람은 그 사람을 붙잡고 물 위를 걷는 게임입니다. 엎드린 형태로 매달리고, 다리를 붙잡아 주시면 되고요, 매달린 사람의 팔에는 물 위에 뜨는 장치가 장착됩니다. 이걸로 물을 해치고 부표를 돌면 됩니다.”

재석의 설명이 끝나고, 제직진이 게임에 필요한 준비물을 주었다.

손에 장착할 수 있게 개조된 수영보드를 끼우니, 마치 도라에몽 손 같은 모습이 연출되었다.

무척 우스운 모습이었기에 모두가 풉! 하고 웃음을 지었다.

현팀의 첫 번째 주자는 재석과 효리였다. 그리고 종신팀의 첫 번째 주자는 종신과 예진이었다.

각 팀의 주장을 들어보면 에이스라고 하는데, 어째 분위기는 마치 버려지는 패가 처음으로 등장한 것처럼 보였다.

“준비… 시작!”

임시 심판을 맡은 수로의 외침에 두 조가 쏜살같이…는 아니고 엉금엉금 출발하기 시작한다.

재석이 붙들고 있는 효리는 손에 장착된 수영보드를 이용하여 성큼성큼 앞서 나가기 시작했고, 종신은 예진을 받쳐주는 것이 버거웠는지 벌써부터 휘청휘청하고 있었다.

“오빠! 힘 좀 써봐요!”

보다 못한 예진이 소리를 질렀지만 종신은 당장이라도 무너질 듯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이, 이게 한계야!”

그 말과 함께 종신은 급속도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어어! 꺄아아! 안 돼!”

종신이 예진을 놓아버리며 물속으로 벌러덩 넘어졌고, 수영보드를 이용한 예진은 가까스로 물에 입수할 뻔한 상황을 벗어난다.

그 사이 국민남매 재석과 효리는 저만치 앞서 나가고 있었다.

“오빠! 잘하는데!”

부표 위를 돌고 있는 효리가 재석의 엄청난 힘에 감탄하며 말을 건다. 새 신랑이 되었더니 예전과 다른 박력이 느껴지고 있었다.

“…….”

그렇게 칭찬을 했지만 재석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의아함을 느낀 효리.

평소 재석이라면 이 칭찬에 좋다구나 달려들어서 의기양양할 텐데?

효리가 다시 한 번 재석에게 말을 걸었다.

“오빠 뭐해?”

“……마.”

뭐라 중얼거렸지만 워낙 작아서 효리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다시 한 번 말해보라는 듯 효리가 말한다.

“뭐라고?”

“헉! 마, 말 걸지 말라고! 헉! 당장 쓰러질 것 같아.”

역시 재석은 괜히 유재석이 아니었다. 효리는 그에게 남다른 힘이 있다 여기며 감탄을 했지만 이미 재석의 체력은 한계에 다다랐던 것이다.

말을 함과 동시에 재석은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롭게 비틀비틀거리기 시작했다.

“오빠! 안 돼! 조금만 버텨! 조금만!”

고지가 멀지 않은 상태였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참으면 편해질 수 있기에 효리는 적극적으로 재석을 독려하였다.

하지만 이 정도도 참을 만큼 참은 상태.

말을 함으로써 여태까지 집중하던 모든 것이 무너지는 느낌과 함께 재석의 몸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미, 미안하다, 효리야!”

“꺄아아아!”

그대로 무너지는 재석이었다. 문제는 그 나름대로 집념을 보였는데 그 집념이 그대로 끼고 있던 효리의 허벅지까지 함께 잡고 넘어졌다는 것.

수영 보드로 입수를 막으려던 효리였지만 넘어지는 재석의 힘에 의해 그녀는 손만 둥둥 뜬 채 물속에 가라앉을 수밖에 없었다.

“…….”

우스꽝스러운 몸 개그에 두 팀 모두 얼빠진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재석과 효리가 입수하여 물을 한껏 들이키고 있는 사이, 종신과 예진은 다시 협력하여 빠른 속도로 치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종신의 저질 체력을 알았기에 예진은 살짝 몸만 걸친 채 수영 보드를 이용하여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

물이 입수했던 재석과 효리가 일어나 빠르게 나아가기 시작했지만 상황은 백중지세.

승부는 2라운드로 넘어오게 되었다.

“어서요!”

“그, 그래!”

2번 주자는 첫 번째에서 받쳐주는 역할을 했던 사람이 수영 보드를 끼고 전진하는 것이었다.

효리가 끼고 있던 수영 보드를 건네받은 재석이 재빨리 착용하여 도라에몽 손 상태가 되었고, 창현은 재석의 다리를 끼고 앞장 서 나가기 시작한다.

“우와! 현이 완전 힘 세! 우와아아!”

현에게서 느껴지는 탁월한 안정감에 재석이 환호성을 지르며 앞장 서나가기 시작한다.

반면 종신팀 2번 주자는 종신과 대성이었다. 예진이 많이 배려해주었지만 저질 체력은 어디로 간 것이 아니었기에 종신은 헐떡이며 느릿하게 전진하기 시작한다. 빠르게 나아가지 않으면 받쳐주는 사람도 지친다는 장점이 있었다.

그들이 출발하는 사이, 재석과 창현은 어느덧 부표를 돌고 있었다.

“좋아! 가는 거야!”

느껴지는 안정감에 재석이 호기롭게 외친다. 누구 때문에 망칠 뻔했는데 하는 모습을 보면 영락없는 1등 공신이다.

창현도 그런 재석을 받쳐주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돌연 그의 발목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어어?”

돌에 걸린 창현의 몸이 순간 기우뚱하였다.

마음만 먹으면 중심을 잡을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예능.

이대로 순조롭게 나가면 재미가 없지 않을까?

‘게다가 훨씬 앞서 있기도 하고.’

그렇게 생각하니 중심을 잡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재석이 따지면 돌에 걸려서 넘어졌다고 하면 될 테고.

재미를 보여주기 위한 프로그램에서 멋지게 보이려는 것은 아무래도 아니리라.

그렇게 생각되자, 창현은 그대로 중심을 잃어버린 채 살짝 무릎을 꺾는다.

“어어? 어어어?”

갑작스러운 중심 이동에 허우적거리는 재석. 제철 만난 메두기가 아닌, 소금쟁이 마냥 물살을 가르던 그는 손을 허우적거리기 시작하더니 그대로 바동바동 움직이다가 얼굴을 강에 박고 말았다.

파닥파닥.

뒤로 젖혀진 두 손을 열심히 허공으로 휘저으면서.

그 모습은 물에 얼굴을 처박은 채 날개짓을 하는 메뚜기처럼 보였다.

푸하하하하!

재석의 몸 개그에 패밀리와 스태프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물속에 머리를 박은 채 팔을 뒤로 젖혀 파닥거리는 모습이라니.

너무 웃겨서 배가 당겨올 지경이었다.

‘미안해요, 재석이 형. 다 재미를 위해서에요.’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중심을 잡지 않은 것은 예능 프로그램으로서 웃음을 주기 위함이다.

절대 재석이 자신보고 허약해 보인다고 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절대 그런 것이 아니다.

단지 웃음을 위해 그런 것이다.

‘정말 웃음을 위해서 그런 거야. 난.’

암 그렇고 말고.

그래도 퍼덕거리는 재석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살짝 미안한 마음이 드는 창현이었다.

절대 개인적인 원한으로 그런 것이 아니다.

절대로.

파닥파닥.

아직까지 고개를 박고 팔을 허우적거리는 그의 모습을 보니 마음이 찡해졌다.

그렇게 재석은 몸 개그로 주변을 초토화 시켜 개그파의 존재를 널리 알렸다.


재석의 몸 개그를 하이라이트로 게임은 끝을 맺었다.

절정에 달한 메뚜기 개그를 보인 재석은 게임이 끝나고 창현에게 다가가 따지듯 물었다. 그가 보기에는 무언가 조작(?)의 냄새가 솔솔 풍겼던 것이다.

그 물음에 창현은 모르쇠로 일관했다. 잘 가다가 다리가 삐끗하여 균형을 잃은 것이라 말한 것이다. 다만 균형을 잡을 수 있던 걸 굳이 잡지 않았다는 걸 빼먹었을 뿐.

창현의 말에 재석은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그냥 그대로 넘어갔으면 좋았을 것을, 효리가 들어서 일이 급속도로 확대되어 혼자인 개그맨 파가 철저하게 탄압을 당했던 것이다.

결국 재석은 넉다운 될 수밖에 없었고, 촬영은 그대로 이어졌다.

게임을 끝내고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저녁식사를 만드는 것이었다.

물고기를 잡으면서 휴식을 취할 때 간단하게 점심을 해결했기에 몹시 배가 고픈 상태였다.

패밀리들의 눈에 참을 수 없는 식욕이 서려 있었다.

“자, 그럼 본격적으로 저녁을 만들어야 하는데요.”

“분담을 해야죠?”

“그렇죠, 오늘 메뉴는 매운탕이니까 앞에 밭에 가서 야채들을 좀 따와야 해요.”

“그럼 야채 조부터 정하죠?”

“그럴까요?”

정하자는 재석의 말에 종신이 의아한 표정을 짓더니 말한다.

“정하긴 뭘 정해, 야채 조는 원래 덤앤더머 역할이잖아.”

“그럼 나랑 대성이가 갔다 올게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답하는 재석. 그리고 슬쩍 대성을 바라보니, 그 또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효리가 그것을 보고는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표정을 찌푸리며 말한다.

“안 돼! 저 두 사람이 가면 또 딴 길로 빠질 수 있어.”

“효리야! 우리가 무슨 한두 살 먹은 어린애도 아니고!”

“맞아요, 누나. 저랑 재석이 형이 어린애도 아닌데.”

반발하는 덤앤더머. 하지만 효리는 그 말에도 불구하고 눈 하나 꿈쩍하지 않은 채 가차없이 탄압한다.

“어린애가 아닌데 하는 행동은 어린애잖아!”

“우, 우리가 무슨 어린애라고…….”

억울한 듯 말하지만 목소리는 점점 기어들어가고 있었다.

효리는 못미더운 덤앤더머를 보면서 인상을 찌푸리다가 이내 결정을 내린다.

“안 되겠어! 내가 따라가도록 할게. 아무래도 저 두 사람은 감시자가 필요해.”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였다.

남자 둘이서 오붓하게 가겠다는데 신성한 자리에 여자가 끼어들다니!

재석의 표정이 급속도로 변하며 절규하듯 외친다.

“효리야! 왜 그렇게 우리를 못 믿냐!”

“맞아요, 누나. 우리 좀 믿어줘요.”

“믿고 싶은데 믿음이 영 가지 않아. 자, 가도록 하자.”

재석과 대성 중간에 자리 잡은 효리가 두 사람을 이끌고 채소를 따러 밖으로 나간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종신이 패밀리들을 둘러보며 입을 연다.

“그럼 우리도 본격적으로 일을 나눠서 해볼까?”

노인네(?) 종신은 불 피우기를 하기로 하였고, 수로와 천희는 매운탕을 끓이기 위한 준비 작업을, 예진과 창현은 물고기 손질을 하기로 하였다.

“현 씨는 물고기 손질 해본 적 있어요?”

“아뇨, 이번이 처음이에요.”

“그럼 제가 한 번 보여드릴게요. 한 번 해보시겠어요.”

바로 자리를 잡으며 칼을 드는 그녀의 모습에서 장인의 느낌이 물씬 풍겨나왔다.

시퍼렇게 빛나는 칼날과 퍼덕이는 물고기를 보면서 인상을 살짝 찌푸린 창현이 어렵게 입을 연다.

“저… 다른 거 하면 안 될까요?”

“왜요? 설마…….”

“아뇨, 아니에요. 할게요.”

눈을 살짝 좁히며 물어오자, 창현은 고개를 저으며 예진의 옆에 앉는다.

“제가 하는 걸 잘 보세요.”

그 말과 함께 물고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꺼낸 예진이 칼등으로 퍽! 하고 물고기를 기절시킨다.

퍼덕이던 물고기가 축 늘어지는 것은 당연한 현상.

그녀는 능숙한 칼질로 물고기의 내장을 발라내기 시작한다.

“…….”

그 모습을 보는 창현의 표정은 방송에서 볼 수 없었던 기괴함을 띠고 있었다.

빠른 속도로 물고기를 손질한 예진이 창현을 바라보며 말한다.

“자! 다 했어요. 어때요? 하실 수 있겠어요.”

“저기…….”

“네?”

머뭇거리는 창현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짓는 예진. 그녀를 보며 잠시 멈칫거리던 창현이 이내 결심을 굳힌 듯 그녀의 귀에 살짝 속삭이기 시작한다.

그 이야기를 들은 예진이 눈을 크게 뜨더니 묻는다.

“정말이에요?”

“네, 어떻게 안 될까요?”

“어렵지는 않지만…….”

이렇게 하면 재미가 사라질 수 있기에 망설이는 예진. 하지만 현의 부탁이었기에 거절하기도 어려운 순간이었다.

그녀의 망설임은 오래 가지 않았다.

바로 뒤에서 재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뭐! 징그러워서 손질을 하지 못하겠다고?”

예진과 창현 뒤에는 어느 틈엔가 재석이 자리하고 있던 것이다.

창현을 바라보며 음흉한 미소를 짓는 재석. 그의 눈에는 한 건 잡았다는 득의양양한 기색이 역력하게 배어 있었다.

“흐흐흐! 다 들었지.”

“형이 어떻게 여기에…….”

채소 따러 간 재석이 왜 이 자리에 있단 말인가.

그 물음에 재석은 손에 든 것을 들어보이며 말했다.

“채소 담을 걸 들고 가지 않아서 말이지. 그런데…….”

입가에 씨익 웃음을 짓는 재석.

그 미소를 본 창현이 불안한 표정을 지을 때, 재석의 말이 이어진다.

“설마 물고기 손질을 무서워할 줄 몰랐어. 현이라면 그런 것도 척척 잘 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끄응!”

재석에게 발각되자 앓는 소리를 낸 창현. 예진에게 말하고 조용히 넘어가려 했는데 하필이면 개그파 출신 게릴라(?) 재석에게 걸리다니.

“케케케! 현이도 못하는 게 있구나! 현이는 물고기 손질을 못한데요. 왜냐하면 무서워서요!”

마루 위에 올라와 깨방정을 떠는 재석. 그 모습을 보며 창현은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어색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예진이 외친다.

“그런데 오빠도 못하잖아요!”

“나는 못해도 상관없지만 현이가 못하는 건 문제가 되지롱!”

도대체 뭐가 문제가 되는 건지.

아까 전 안면 입수에 대한 것을 복수하려는 것인지 물고 늘어지는 재석이었다.

욱한 창현이 재석에게 말한다.

“그냥 좀 징그러워서 그런 거예요. 저도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어요.”

“그래? 그럼 어디 한 번 보여줘 봐.”

“조, 좋아요.”

고개를 끄덕인 창현이 예전에게 인수인계를 받아 시퍼렇게 빛나는 칼을 쥔다. 그리고 칼등으로 곧장 물고기의 머리를 찍었다?

퍽!

둔중한 타격음과 함께 형편없이 으깨지는 물고기 머리.

그것을 본 재석이 헛바람을 집어 삼켰다.

“헉!”

“으으…….”

으깨진 머리를 본 창현의 표정이 좋지 않게 변했다. 힘이 과했는지 기절 시키는 게 아니라 아예 물고기 머리를 부숴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머리를 부수면 어떻게 하냐.”

“저도 이렇게 될 줄 몰랐어요.”

대답하는 창현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징그러워서 물고기 손질을 못하겠다고 말한 것인데 머리통을 아에 으깨버렸으니 오죽하겠는가.

결국 창현은 예진에게 물고기 손질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재석은 늑장을 피운다며 교육이 필요하다는 말과 함께 효리에게 질질 끌려가고 말았다.

“이봐, 후배.”

“네, 선배님.”

두리번거리던 창현을 부른 것은 종신이었다.

종신은 피워놓은 불을 가리키며 창현에게 말한다.

“부채질 좀 해봐.”

“네.”

열심히 부채질을 하는 창현. 종신은 그 위에 장작을 올려놓고 있었고, 불 앞에 선 창현은 땀을 뻘뻘 흘리며 부채질을 하여 불을 피운다.

잠시 후, 안정권에 들어서자, 창현은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특별히 할 일이 없게 되자 창현이 말한다.

“할 일도 없는데 간단하게 음식이라도 만들게요.”

“그럼 좋지. 근데 요리 잘해?”

“어느 정도는요. 그럼 준비할게요.”

그렇게 말을 한 창현이 부엌 안으로 들어가 냉장고를 열고 재료를 살핀다. 재료를 종합적으로 모아보니, 채소가 들어간 계란말이 정도는 가능할 것 같았다. 거기에 재석 팀이 돌아오면 남는 것을 이용하여 채소 볶음을 할 수 있을 것 같고.

“많이는 필요없을 테니까.”

굳이 많은 반찬을 만들 필요가 없다 생각하며 창현이 재료를 가지고 온다. 그리고 요리 도구를 가지고 와 본격적으로 음식 준비를 시작한다.

탁탁탁. 착착착.

현란하게 움직이는 창현의 손길에 모든 사람들의 눈이 집중되기 시작한다.

서서히 날이 어두워지면서 불을 쬐고 있던 종신이 슬그머니 다가와 창현에게 묻는다.

“현이 너 장난이 아닌데? 뭐 만들려는 거야?”

“계란말이요. 채소가 남으면 채소 볶음도 만들려고요.”

“호오! 상당히 능숙한 거 보면 좀 많이 해봤나 본데?”

“집에서 음식 만드는 경력이 5년이 넘거든요. 웬만한 음식은 다 할 줄 알죠.”

“이거 오늘 음식은 현에게 맡겨야 하는 거 아냐?”

창현의 말에 놀라워하며 음식 만드는 것을 지켜보는 종신이었다.

버너로 불을 피우고 후라이팬에 계란말이를 만든 현은 물고기 공포증을 극복하고 다시 선망 어린 시선을 회복할 수 있었다.

계란말이에 이어 재석 팀이 가지고 온 채소들을 이용하여 본격적으로 채소볶음을 만드니, 효리가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며 말한다.

“아, 채소볶음은 내 전문 분야인데.”

“효리가 만든 것보다 맛있으면 어떡하지?”

“설마…….”

그렇게 말하지만 확언은 하지 못하는 효리였다.

창현이 그렇게 음식 실력을 뽐내는 사이 매운탕도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먼저 물을 끓이고, 국물의 간을 맞춘 뒤 예진이 손질한 물고기를 넣는다. 그리고 팔팔 끓인 뒤 채소들을 넣고 잠시 또 끓인다.

어느 정도 맛이 우러나왔다 생각한 순간, 재석이 국자를 들고 국물을 떠서 살짝 맛을 본다.

“음!”

국물을 맛본 뒤 고개를 갸웃하는 재석. 그는 뒤이어 종신에게도 국물을 권한다.

“이거 좀 심심한데?”

“그렇지?”

“현아, 너도 한 번 먹어봐.”

“네.”

계란말이와 채소볶음을 마친 창현이 재석의 권유에 다가가 국물을 맛본다.

약간 밍밍했지만 좀 더 끓이면 자연히 맛을 갖출 것 같았다.

하지만 재석과 종신의 생각은 다른 듯했다.

“아무래도 만능 조미료의 손이 필요할 것 같아.”

“미식 연구가의 힘을 발휘해봐?”

“오빠들 뭐해.”

그때, 그들의 위대한 맛의 창조를 방해하는 제1의 방해자 효리가 상을 준비하다가 불쑥 물음을 던졌다.

재석은 당황하며 대답한다.

“응? 아, 아냐. 국물이 어떤지 맛 좀 보려고.”

“그런데 왜 목소리는 떨리는 거야? 오빠들 설마 또!”

“설마 뭐? 우리가 뭘 했다고.”

“오늘은 제발 좀 가만히 냅둬. 또 이상한 짓하면 가만 안 놔둘 거야.”

단단히 엄포를 놓는 효리. 단 한순간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움직이면서 틈틈이 매운탕 쪽을 살피고 있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판단한 재석이 창현에게 속삭인다.

‘안되겠다, 현아, 협력 좀 해줘.’

‘제가요?’

‘그래, 매운탕의 맛을 찾으려면 현이 네 도움이 필요해.’

‘알았어요.’

가만히 놔두면 괜찮아질 것 같지만 이렇게 상황극을 만드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았다. 어차피 여덟 명이 먹는 매운탕에 하나 넣어봤자 크게 티도 나지 않을 테니.

“무슨 작당을 하는 거야, 거기서?”

수상하게 여긴 효리가 묻자 재석이 답한다.

“응? 아냐, 날씨가 좀 추워지는 것 같아서.”

“네, 제가 반팔 티만 가지고 와서 재석이 형한테 긴팔 있냐고 물어봤어요.”

재석의 말은 수상하게 여겼지만 창현의 말을 들은 효리는 의심을 푼다.

“그래? 날씨 추워지니까 두툼하게 입어. 괜히 감기 걸릴라.”

“네, 그렇게 할게요.”

그렇게 효리의 의심을 푸는데 성공한 두 남자. 종신에게 다가가 짧게 설명을 마친 재석은 창현에게 눈빛을 보내 본격적으로 작전 시작을 알린다.

재석의 눈빛을 받은 창현이 고개를 끄덕이고 행동을 보인다.


“형, 제가 도와드릴게요.”

불을 피우는 종신에게 다가간 창현이 슬쩍 손을 내밀자, 종신이 손에 쥐고 있던 만능 조미료(?)를 건넨다.

그것을 성공적으로 건네받은 창현. 윗 봉지를 가위로 깔끔하게 잘라내었기에 매운탕 위에 붓기만 하면 성공이다.

하지만 문제는 눈을 부릅뜨고 바라보는 효리였다.

그녀의 시선을 피해야만 성공적으로 매운탕 조리가 이루어질 수 있다.

재석과 종신이 허공에서 시선을 마주하며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두 사람은 곧장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한다.

효리가 계속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면 방법은 한 가지 밖에 없다.

바로 인간 장벽을 쌓아 그녀의 시야를 가로막는 것!

그 틈을 타 창현이 만능 조미료를 매운탕에 부으면 모든 것은 성공이다.

“음음!”

“으흠흠!”

헛기침을 하며 창현에게 신호를 보내는 두 사람. 그 신호를 알아차린 그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 매운탕을 향해 다가가자 종신과 재석이 순간 효리 앞에 서며 시야를 가린다.

“효리야, 이거 네가 한 건가?”

“맛있어 보이는데?”

마침 효리는 창현이 만든 채소볶음을 그릇에 담아 상에 올려놓고 있었다.

“무슨 소리야! 이거 현이가 만든 건데. 엇! 현이 너 지금 뭐하는 거야! 오빠들 비켜!”

뜬금없는 두 중년인의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짓던 효리는 창현이 매운탕으로 손을 올리는 걸 보고는 외치며 두 사람을 옆으로 밀어낸다.

창현은 국자를 든 채 효리를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왜 그러세요, 누나?”

“너 지금 뭐하는 거야?”

“국물 맛 좀 보려고요. 아까는 좀 싱거웠는데 지금 어느 정도 끓인 상태라 괜찮을 것 같아서 맛 좀 보려고 하는데… 뭐가 잘못 되었나요?”

“그래? 흐음! 아무것도 아니야. 두 오빠가 워낙 수상해서.”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창현을 살피던 효리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제 자리로 돌아간다.

시선이 거둬지자 창현은 국자를 매운탕에 넣고 잠시 가만히 있는다. 그 순간 그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맺힌다.

창현을 살피던 효리는 눈치 채지 못했다.

국자에 붉은 스프가 자리하고 있던 것을. 그리고 매운탕에 국자가 들어간 지금, 만능 조미료가 매운탕에 섞여 더할 나위 없이 친숙한 맛을 만들어내고 있단 것을 말이다.

라면 스프가 담긴 봉지를 들고 있으면 효리의 시선을 벗어나지 못할 것 같아 창현은 국자에다가 미리 스프를 부어놓은 것이다.

치밀한 두뇌가 있었기에 무사히 스프는 매운탕에 안착할 수 있었다.

국자를 넣고 잘 휘젓는 창현.

그 사이 효리에게 혼쭐이 난 종신과 재석이 슬그머니 창현에게 다가와 묻는다.

“성공했어?”

대답 대신 미소를 지은 창현이 국물을 퍼서 건넨다.

“맛 좀 보시겠어요?”

그것은 간접적으로 성공했다는 것을 알리는 말과도 같았다.

눈을 빛낸 재석과 종신이 번갈아가며 매운탕의 국물을 맛본다.

그와 동시에 터져 나오는 감탄사.

“캬! 찾았네.”

“그래, 이 맛이라고. 우리 패밀리에게는 항상 일관된 맛이 존재하고 있어. 이거야.”

“역시 현이가 잘하네.”

“그런가요? 하하.”

감탄하는 두 사람을 보며 웃음을 터뜨리는 창현이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이런 순간만큼은 두 사람이 덤앤더머 같다고 해야 할까.

그렇게 만능 조미료가 들어간 매운탕은 우수한 맛을 자랑하며 완성되었다.

치이익.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남겨준 고기가 붉은색에서 회색으로 물들어가고 있었고, 고기를 다 구움으로써 마침내 저녁 준비가 완료되었다.

“자! 그럼 본격적으로 식사를 합시다.”

재석의 말과 함께 본격적으로 시작된 식사.

가장 먼저 맛본 것은 메인 메뉴인 매운탕이었다.

“맛있다!”

“맛있는데?”

매운탕을 맛본 패밀리들은 맛있다를 연발하며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무슨 맛이라고 해야 할까.

상당히 시원하면서도 입에 착착 감기는 익숙한 맛이 감돈다고 해야 할까?

“어디서 많이 먹어본 맛도 나는데?”

날카로운 미각을 지닌 효리가 의문을 제기했지만 그 의견은 빠르게 묻혔다.

그 뒤에 이어진 것은 창현이 요리한 계란말이와 채소볶음 시식이었다.

음식을 먹은 패밀리들은 다시 한 번 감탄사를 터뜨린다.

“현이 요리 진짜 잘한다.”

“엄마의 손길이 느껴지는데?”

“감사합니다.”

자신의 요리가 칭찬 받자 기분 좋은 듯 미소를 짓는 창현.

효리는 그런 창현을 바라보며 강력하게 권유하기 시작한다.

“시집 가도 되겠어. 나한테 시집 안 올래?”

“에이, 효리야. 그건 오바다. 나이 차이가 몇인데…….”

아니나 다를까, 재석이 중간에 끼어들어서 핀잔을 준다. 주된 이유는 역시나 나이 차이였다. 하기야 두 사람 나이 차이가 띠 동갑을 돌고도 한 살이 남았으니.

민감한 나이 이야기가 나오자 효리가 눈을 부릅뜨고 재석을 바라본다.

“오빠, 지금 뭐라고 했어?”

“아무것도 아니야.”

바로 깨갱하며 백기를 들고 투항하는 재석이었다.

매운탕도 있고, 반찬도 많았고, 고기까지 있었다. 푸짐한 저녁 반찬에 패밀리는 마음 놓고 마음껏 음식을 먹고 있었다.

창현은 재석이 손수 따온 깻잎에 쌈을 하나 만들더니 옆에 시무룩하게 앉아있는 천희에게 건넨다.

“형, 이거 먹고 힘내세요.”

언급되지 않았지만 천희는 식사 준비를 위해 김계모 밑에서 모진 고난을 겪어야만 했다. 이제는 그것이 당연하게 여겨져 다른 패밀리들은 별달리 신경 쓰지 않았지만 창현은 고생하는 천희를 위해 쌈 하나를 싸준 것이다.

“고맙다, 현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자신의 고난을 알아주는 사람이 나타났다는 것에 천희는 감격하고 또 감격하며 창현이 싸준 쌈을 맛있게 먹는다.

“현아 나도!”

천희에게 쌈 싸주는 걸 봤는지 효리도 자신에게 쌈을 하나 싸주길 강력하게 원한다.

어려운 것도 아니기에 창현은 기꺼이 그 말을 받아들이며 효리에게도 쌈을 싸준다.

창현이 직접 입에 넣어주자, 효리는 그 쌈을 오물오물 씹더니 이내 꿀꺽 삼키고는 의기양양한 어조로 외친다.

“봤지? 난 현이 쌈을 직접 싸서 입에 넣어주는 여자야!”

별 걸 가지고 다 의기양양하지만 그것을 보고 부러워 할 여자는 한 둘이 아니리라.

그것을 본 재석이 창현을 바라보며 말한다.

“현아, 나도 쌈.”

재석의 요구에 황당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창현. 천희는 의기소침해져서 기운을 돋아주려고 그런 거지만 재석은 언제나 활기찼다. 굳이 쌈을 싸줄 필요도 없고.

“형도요? 남자가 싸준 쌈을 먹고 싶다니…….”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보자, 다른 패밀리들도 이상한 시선으로 재석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아, 아냐! 난 그냥 해달라고 한 것뿐인데…….”

이상한 사람 바라보듯 보는 시선에 당황한 재석이 서둘러 해명한다.

하지만 그 시선은 쉽사리 거둬지지 않았다.

효리가 그런 재석을 향해 적시타를 날린다.

“내가 그랬잖아. 재석 오빠는 매 맞는 새신랑이라고.”

“뭐야, 그럼 제수씨에게 받지 못한 애정을 현이한테 갈구하는 거야?”

“아니야! 종신이 형! 형은 왜 날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어요!”

졸지에 한참 어린 동생에게 관심을 바라는 사람이 되어버리자 재석은 펄쩍 뛴다.

그러나 이미 형성되기 시작한 여론을 거스를 힘은 재석에게 없었다.

여러 사람이 합심하면 한 사람 바보로 만드는 것은 손쉬운 일 아니겠는가.

“미치겠네, 진짜!”

재석으로서는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일이었다.

그런 그가 안쓰러웠음일까.

모두가 재석을 몰아붙이고 있을 때, 창현은 재석을 위해 쌈을 제조하기 시작했다.

비록 매 맞는 새신랑이지만, 자신이 용기를 줘야하지 않겠는가.

쌈을 완성한 창현이 재석에게 내민다.

“형, 이거 드시고 힘내세요. 비록 현실은 암담하지만 언젠가는 환하게 비칠 날이 있을 거예요.”

“고맙다, 현아. 크윽!”

자신을 위로해주는 창현의 태도에 감동한 듯 재석이 눈물 흘리는 시늉을 하며 그가 내민 쌈을 받아먹는다.

손수 먹여주는 장면에 다시 우우! 하는 야유가 터져 나왔지만 재석은 개의치 않았다.

“크윽! 눈물 젖은 쌈을 먹지 못한 자는 쌈을 논하지 말라.”

그렇게 말한 재석은 창현이 정성을 담아 만든 쌈을 먹기 시작한다.

적절하게 들어간 밥의 양과 쌈장이 묻은 고기의 맛이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그리고 뒤이어 씹히는 다수의 생마늘과 고추가…….

“……!”

마늘과 고추를 씹는 순간 재석의 눈이 찢어져라 커지기 시작했다. 맛있는 쌈의 맛이 순간 엄청난 열기를 동반하며 재석의 입속을 강타했던 것이다.

그것은 소리없는 비명.

어찌나 충격이 강렬했던지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였다.

어째서, 어찌하여…….

배신감이 가득 찬 눈으로 창현을 바라보는 재석.

그런 재석을 향해 창현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기운 나죠? 힘내세요, 형.”

절대 자신이 물고기 손질하지 않으려던 이유를 폭로해서 그런 게 아니다.

절대로.

끄아아악!

마늘과 고추의 후폭풍에 터져 나오는 재석의 비명소리가 이제는 정겹다.

그 비명소리를 반주 삼아 우여곡절 많던 식사 시간이 끝나고 잠자리 선정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저녁을 먹은 후 잠깐의 휴식 시간이 주어졌다.

이것저것 권하며 받아먹기도 많이 먹었기에 창현은 소화도 시킬 겸 밖으로 나와 산책을 하고 있었다.

밖에는 스태프들의 차부터 시작하여 각 연예인들의 벤까지, 차곡차곡 진열되어 있는 벤은 마치 주차장을 방불케 하였다.

“역시 공기가 좋네.”

시골 공기는 서울 공기와 사뭇 다른 느낌을 물씬 풍기고 있었다.

가슴이 시원해지는 느낌과 함께 밤의 차가운 기운을 느끼며 창현은 걸음을 옮겼다.

“응?”

길을 걷던 창현은 가로등이 끝나자, 발걸음을 돌리려 하다가 익숙한 사람을 발견하고는 반응을 한다.

그의 시선 끝에는 세희가 자리하고 있었다.

세희 또한 창현을 알아봤는지 그에게 다가오며 말을 걸었다.

“창현아, 촬영 중 아니었어?”

“아, 세희 누나.”

짧게 그녀의 이름을 부른 창현이 더 이상 입을 열지 않는다.

세희는 그런 창현을 보면서 전날 있었던 일을 떠올리고는 입을 다물었다. 이쯤이면 풀어졌으리라 생각했는데 아직까지 어제 일을 기억하고 토라져 있던 것이다.

“저… 창현아.”

“네.”

“어제 일은 미안해.”

“어떤 거요?”

알고도 모르는 척하는 걸까 아니면 몰라서 묻는 것일까.

세희는 전자라 생각하였다.

‘알고 있으면서!’

한마디 확 쏘아붙여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말짱 도루묵이 될 터. 세희는 자신이 했던 행동에 대해 말하기 시작하였다.

“촬영이 있는 걸 미리 말하지 않아서. 내가 먼저 말해줬어야 했는데…….”

그 말을 끝으로 세희는 입을 꼭 다물고 창현의 말을 기다린다.

세희의 말을 듣고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던 창현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한숨을 푹 내쉬며 말한다.

“후! 그건 솔직히 누나가 잘못한 거예요. 제가 왜 가만히 있었냐면 누나가 사과하기를 기다려서 그런 거예요.”

“알고 있어.”

“누나가 처음 매니저로 오고, 친해질 때, 서로 이야기를 했죠. 업무에 관해서는 서로 숨기는 게 없기로. 저는 그 말을 지켜서 제가 슬럼프로 힘들어할 때 누나에게 솔직히 털어놓았어요.”

“…….”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세희는 아주 사소한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것이 창현에게 있어서는 민감할 수 있던 사안이었던 것이다.

자신은 모든 것을 털어놓았는데 정작 상대는 아무것도 털어놓지 않으니 어찌 기분이 좋을 수 있겠는가.

창현이 언짢아하는 것이 이해가 되는 세희였다.

친한 사이일수록 관계가 틀어지는 것은 사소한 일이 원인이 되는 경우가 많았으니까.

그가 왜 토라졌는지 알아차린 세희는 단번에 그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실수를 했구나.’

이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속이 좁은 것은 창현이 아니라 자신이었다.

사소한 걸로 왜 토라지냐고 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서로 약속한 것을 어겨서 틀어질 수 있을 빌미를 제공한 자신이 잘못한 것이다.

“미안해, 창현아. 내가 잘못 생각했어. 내 생각이 짧았네.”

고개를 숙이며 잘못을 빈다.

그녀의 음성에 진실이 배어 있었고, 창현은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창현은 그녀에게 미소를 지어주며 말했다.

“사과해주시니 다행이에요. 전 누나가 깨닫지 못하면 어쩌나 싶었거든요.”

“응…….”

어째, 자신이 동생이 되고 창현이 오빠가 된 것 같아 세희는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그런데 밖에는 무슨 일이에요?”

“잠이 오지 않아서. 심란하기도 했고. 창현이 네가 계속 화가 나 있는 것 같아 찜찜했거든.”

“그래요? 그럼 지금은 풀렸겠네요.”

“그렇지.”

차가운 공기를 쐬면 마음이 풀리지 않을까 싶어 나왔는데 우연히 창현을 만났고, 오해를 풀게 되었으니 세희로서는 최상의 시나리오가 실행된 셈이다.

“그럼 들어가세 쉬세요. 저도 들어가 보려고요.”

“그래, 촬영 잘하고.”

“즐기는 거죠.”

그렇게 말을 한 창현이 세희에게 고개를 살짝 숙인 뒤 자리를 벗어난다.

그를 잠시 바라보던 세희도 이내 잠자리로 걸음을 옮긴다.


“자, 그럼 시작하도록 할까. 잠자리를 선정해야 하니 각자 자리에 서보도록 하세요.”

재석의 말과 함께 촬영이 시작되었다.

마루 위에 효리와 예진이 올라가 있었고, 남자 패밀리들이 바닥에 내려와 가로로 늘어서 있었다.

“창현아, 잠시만.”

“네? 네.”

자신을 잡아끄는 재석의 손길에 창현은 그를 따라 가장 왼쪽에 선다. 그리고 재석이 은근슬쩍 창현의 왼쪽에 자리한다.

지금 서 있는 위치는 각자 생각하는 예상 순위였다.

수로와 천희, 대성은 1등을 포기하고 2등 자리를 노리고 있는데 반해 만년 하위권인 종신은 체념한 표정으로 제일 오른쪽에 서 있었다.

그에 무언가 의아함을 느낀 종신이 재석을 바라보더니 황당한 표정을 짓는다.

“너 뭐야, 왜 거기 서 있어.”

재석이 서 있는 위치는 다름 아닌 1등 자리였던 것이다.

아주 당당하게 서 있는 그를 보며 종신은 황당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도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1등 자리에 선 것이란 말인가.

종신의 타박에 재석은 어깨를 쭉 피고 당당하게 말한다.

“왜요, 제가 여기 서면 안 되는 법이라도 있습니까.”

그러자 뒤에서 섬뜩한 효리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현실은 만년 6위니 예상 순위라도 1위를 하고 싶은 거겠지.”

그 말에 멈칫하는 재석. 곧이어 그의 목이 느릿하게 돌아가기 시작한다.

불안한 시선으로 효리를 바라보며 재석이 묻는다.

“효리야, 그 말 지금 날 6위로 만들겠다는 건 아니겠지?”

“오빠가 하기 나름이지. 그런데 지금 이 상황을 보면 어떻게 생각될까. 재석 오빠가 현이를 제치고 1위를 한다? 저번주에 2위를 하더니 거품이 많이 들어간 것 같은데.”

얼굴은 웃고 있지만 협박이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효리의 말은 지금 그 자리에서 비키지 않으면 6위를 주겠다는 말과 다름없었다.

그 뜻을 알아차린 재석이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서 비켜선다.

“아, 아니야! 내가 여기 서 있는 건 현이가 설 수 있게 덥혀놓으려고 그런 거야.”

그러면서 비켜선 재석이 창현을 1위 자리에 올려놓는다.

그러자 재빨리 옆으로 붙는 패밀리들.

졸지에 자리를 잃은 재석이 종신을 옆으로 밀어내려 한다.

그 행동에 종신이 거세게 저항하며 재석을 밀친다.

“왜 이래!”

“솔직히 내가 형보다는 위잖아! 오늘 형이 6등이니까 비켜!”

“넌 저번주에 운을 다 써서 이번 주는 무리야! 네 위치로 가셔!”

그러면서 재석을 강하게 밀치니, 결국 그는 눈물을 머금고 6위 자리에 설 수밖에 없었다. 단순한 예상 순위에 불과했지만 그 결과 그대로 나올 확률이 높았기에 그렇다.

종신과 재석의 티격태격이 있고 난 뒤, 재석이 본격적인 진행을 하기 시작한다.

“자, 그럼 본격적으로 순위를 정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효리 씨! 오늘 할 게 뭐죠.”

“네, 우선 오늘 감히 모시기 힘든 초호화 게스트가 오신 만큼 멋진 공연을 하나 보고 싶은데요.”

“빼놓을 수 없죠. 여심을 녹이는 달콤한 목소리! 들어봐야지요! 그리고 화제가 끊이지 않는 춤! 계단 춤도 봐야지요!”

진행을 효리에게 양도해놓고 진행병을 벗어나지 못해 혼자 흥에 취하여 진행을 파바박 해버리는 재석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마당에 언제 준비했는지 3단 계단을 내려놓는 걸 보면서 창현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서 하라고요?”

“못할 거 뭐 있나요! MR도 준비했고, 계단도 준비해놨으니 확실하게 보여주세요!”

정말 재석의 말처럼 제작진이 단단히 마음을 먹었는지 3단 계단을 총 다섯 개 준비해놓았고, 무대 위에서 배치하는 것과 똑같게 배열을 해놓은 상태였다.

이렇게 준비를 해놓았는데 뺄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요즘 한창 논란이 되고 있기도 하고.

자신이 생각하던 것과 다소 다른 진행 방식에 당황했던 창현이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 계단 앞에 선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MR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그 리듬에 몸을 맡긴 창현이 가볍게 몸을 풀기 시작한다.

“이야호!”

“와우!”

가볍게 움직이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패밀리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리액션을 넣는다.

그 반응에 더욱 힘을 얻은 창현이 가볍게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화제의 계단 춤을 추기 시작한다.

빠르지 않게, 그렇다고 느리지도 않게 마치 일상생활에서 계단을 밟고 올라가는 것처럼 창현이 계단을 밟고 올라가기 시작한다.

“…….”

눈을 크게 뜨고 그 장면을 바라보는 패밀리들.

마지막 계단을 박찬 창현의 몸이 공중에 뜨더니, 그대로 계단을 걷듯 한 발자국 올라간다.

“와!”

환호성을 질렀지만 아직 이른 시기. 맞은편 계단에 사뿐하게 착지한 그가 계단에서 내려와 두 번째 계단을 올라서기 시작한다, 이번에는 좀 더 크게 도약하여 두 칸을 올라선다.

“…….”

눈으로 직접 보고 있지만 믿기지 않는 상황에 점점 커지는 눈동자.

마지막으로 세 번째 계단을 오를 때, 허공에서 세 칸을 올라가는 모습을 본 패밀리들이 열광의 도가니에 빠져든다.

“와! 말도 안 돼!”

“저게 어떻게 가능한 거야?”

“저런 춤은 본 적도 없어!”

“장치가 있는 게 아니잖아!”

눈으로 직접 봤음에도 불구하고 믿기지 않는 현상이었다.

경악을 감추지 못하는 패밀리들에게 시선을 옮긴 창현이 살짝 고개를 숙이자 그들은 손바닥이 부을 정도로 크게 박수를 쳤다.

“정말 대단한 춤입니다!”

재석이 엄지손가락을 들며 말하자 창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다.

“감사합니다. 사실 이 춤을 연습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거든요. 원하신다면 가르쳐드릴 수 있는데…….”

창현의 말에 패밀리들의 눈이 순간 변한다. 계단 춤은 요즘 가장 떠오르는 핫 아이콘 중 하나다. 그것을 가르쳐주겠다고 하니, 배우고 싶은 것이 당연했다.

가장 먼저 행동으로 옮긴 것은 수로였다.

손을 번쩍 든 그가 창현에게 외쳤다.

“나, 나! 나 배우고 싶어!”

“으음!”

수로의 묘한 신음을 흘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창현.

그 모습을 본 수로가 묘한 불안함에 져들기 시작한다.

잠시 그를 바라보던 창현이 고개를 젓는다.

“죄송해요, 수로 형은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아요.”

“…왜?”

잔뜩 기대하던 수로는 배우기 힘들 것 같다는 말에 맥이 빠진 듯 창현에게 묻는다. 배우지 못하더라도 그 이유에 대해 듣고 싶었다.

그 물음에 창현은 간단하게 말한다.

“근육이 많으면 안 되거든요.”

“…….”

“그리고 몸무게가 가벼워야 해요.”

“…….”

창현의 말에 얼빠진 표정을 짓는 수로였다.

계단 춤은 근육이 많으면 하기 힘든 춤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날씬해야 한다.

운동을 많이 한 수로가 해내기에는 힘든 춤이 바로 계단 춤이었다.

배울 수 있다는 희망에 달려들던 그의 어깨가 축 쳐졌다.


“왜 수로 형은 배우지 못하는 거죠?”

의문을 제기하고 나선 것은 천희였다. 마른 듯 보이지만 그도 제법 운동을 많이 하기에 자신도 배우지 못한다는 말처럼 들렸기 때문.

그 물음에 창현이 간단하게 답했다.

“어느 정도 수준은 배우는 게 가능해요. 하지만 기껏해야 1단 정도밖에 안 될 것 같거든요.”

“왜 그런 거죠?”

“몸이 무겁기 때문입니다. 천희 형 몸무게가 어느 정도 되죠?”

“73kg인데…….”

키 186cm에 73kg라면 상당히 가볍다 할 수 있다.

하지만 창현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 몸무게면 2단은 될지 모르겠네요. 우선 몸이 무거워서 하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몸이 무거우면 그만큼 체공 시간이 짧아지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높이 뛰는 것도 상대적으로 힘들고요. 무리가 가거든요.”

체공 시간, 즉 공중에 떠 있는 시간이 적다는 이야기였다.

근육 양이 많지 않으면 상관이 없겠지만 수로의 경우 근육이 무척 많다. 상대적으로 체공 시간이 짧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재석이 형이 가장 잘하실 수 있을 것 같네요.”

“제가요?”

뜬금없이 자신이 지목되자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앞으로 나서는 재석.

창현이 그를 보며 묻는다.

“키랑 몸무게가 어떻게 되시죠?”

“178cm에 몸무게가 65kg정도 됩니다. 밥을 먹으면 67kg까지 나가고요.”

“65kg이면 저랑 비슷하네요. 제 몸무게가 63kg이거든요.”

“역시, 현이랑 나랑 잘 맞는다니까. 키도 비슷할 걸? 키 몇입니까?”

“178cm에요.”

“캬! 이것 봐. 역시 나랑 현이랑 찰떡궁합이라니까. 이참에 나도 예명을 하나 지을까?”

친한 척하며 창현과 친분을 과시하는 그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음일까.

종신이 곧바로 타박을 준다.

“현미 해, 현미.”

“현미 좋다! 현미로 해, 오빠.”

왠지 원로 가수를 연상하게 만드는 예명이 아닐 수 없다.

“아니, 왜 현미입니까. 좀 더 멋진 걸로 지어주세요.”

“그럼 현질 어때, 현질?”

“그냥 현미할게요. 어쨌든 현이랑 나랑 무척 잘 맞아요.”

무한 친분 과시에 창현이 어색하게 미소를 짓더니 말한다.

“어쨌든 제가 보기에 저랑 체격 조건이 가장 비슷한 재석이 형이 잘 해내실 수 있을 것 같아요.”

“계단 춤을 추기 위해서 필요한 신체 조건 같은 게 있나요?”

효리의 물음에 창현이 짧고 간단하게 말한다.

“우선 몸이 가벼워야 해요.”

“그렇데, 효리야. 너는 안 될 것 같아.”

“오빠!”

자신이 안된다는 것은 무거워서 그렇다는 것 아닌가.

효리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재석은 고개를 돌려 딴청을 피우더니 창현에게 말한다.

“자, 그럼 가르쳐주시죠.”

“네, 일단 계단 춤을 추기 위해서 전제가 되는 건 가벼운 몸이고, 체공 시간이 길어야 합니다. 그리고 몇가지 요령이 있어야 하는데요.”

원래 오늘 계단 춤에 대한 것을 공개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인터넷에서 난리가 난 것을 보고 미리 공개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서서히 따라하고 있는 사람들이 속출하고 있지만 그 속도가 무척 느렸기에 요령을 공개함으로써 2단까지 무난하게 해낼 수 있는 사람들이 속출해야 소란이 가라앉을 것 같았던 것이다.

‘3단은 힘들 거야.’

자신이 요령을 가르쳐준다 해도 일부 축복받은 신체를 지닌 사람이 아니고서는 3단은 힘들 것이다. 신체 능력이 아시아 사람보다 월등히 좋은 흑인이면 몰라도.

“우선 발가락의 힘이 강해야 해요?”

“발가락의 힘이요?”

“예, 마지막으로 올라설 때 발가락으로 딛고 허공으로 올라가야 하기 때문이죠.”

그렇게 말하면서 창현이 가볍게 박차자, 허공에 붕 떴다가 아래로 착지한다.

“오오…….”

그것만 보고도 탄성을 자아내는 패밀리들. 분명 평소 걸음과 비슷했는데 창현의 몸이 위로 튕겨 올라간 것이다.

“나도 한 번…….”

재석이 눈을 빛내고 따라하지만 그의 몸은 바로 추락한다.

그러자 곧바로 터져 나오는 야유.

“에이!”

“무슨 메뚜기가 그것 밖에 못 뛰어! 더 높이 뛰어봐!”

“오빠! 메뚜기란 이름이 아깝다!”

“잠깐, 이게 보는 것처럼 쉬운 게 아니에요.”

패밀리들의 야유에 재석이 억울한 듯 외친다.

그로서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창현이 하는 것을 보고 당장 자신이 할 수 있다 생각하고 했는데 생각대로 되지가 않았던 것이다.

분명 위로 폴짝 뛰었는데 발가락이 아파오면서 높이 뜨지도 못했다.

“발가락으로 하시는 건 힘드실 거예요. 이걸 하려면 단련을 많이 해야 하거든요. 대신 살짝 무릎을 이용해서 하면 자연스럽지는 못해도 높이 떠오르는 건 가능해요. 이렇게요.”

창현이 시범을 보여주자 재석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의 특징이던 물 흐르듯 자연스러움은 반감되었지만 힘들이지 않고 높이 뛰는 것이 가능했던 것이다.

곧바로 재석이 따라하자, 아까처럼 높이 점프하는 것에 성공한다.

“됐다, 됐어!”

고작 점프만 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린 아이처럼 좋아하는 재석. 하지만 그를 바라보는 패밀리들의 시선은 싸늘했다.

혼자 좋아하던 재석은 괜히 머쓱해져서 슬그머니 창현에게 다가온다.

“그럼 다음 단계로 넘어갈게요.”

계단 춤의 단계는 여러 개로 나뉜다.

처음은 바로 발가락만으로 하는 도약. 발가락에 힘을 주고 도약을 하지만 마치 계단을 걷는 것처럼 자연스러움을 주기 위해서는 다른 발의 힘이 아닌, 순전히 발가락만의 힘으로 도약을 해야 한다.

그것이 가능해지면 그 뒤에 이어지는 것은 바로 계단을 걷는 듯한 퍼포먼스를 펼치는 것이다.

허공에 뜨는 것이 가능해도 행동을 제대로 펼칠 수 없으면 말짱 꽝이다.

1단을 오를 때 큰 모습으로 펼치고, 2단을 펼칠 때는 1단보다 다소 작게, 보폭을 작게 하여 계단을 밟고 올라가는 듯한 단계를 단숨에 펼쳐낸다.

3단계는…….

거기까지 설명하던 창현이 말을 멈추며 말한다.

“최소 몇 달 이상 훈련을 하고 펼치셔야 해요. 1단 같은 경우는 무리가 되지 않지만 2단부터는 발가락에 상당한 무리가 가거든요. 그것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 골절을 입을 수도 있어요. 차근차근, 꾸준히 단련을 해야 계단 춤을 펼칠 수 있습니다.”

이 부분 때문에 창현은 제법 많은 고민을 했었다.

엄밀히 말하면 계단 춤은 내공을 사용하지 않고도 펼칠 수 있다. 하지만 창현은 계단 춤에 내공을 곁들임으로써 좀 더 손쉽고 완벽하게 펼쳐내는 것이 가능했다.

특히 마지막 3단계 같은 경우는 내공의 도움이 없고서는 제대로 펼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순수한 육체적 능력으로 펼치려면 상당한 무리가 간다.

그렇기에 창현은 내공으로 발을 보호하면서 퍼포먼스를 펼쳤고, 밑에 가려진 안개를 이용하여 좀 더 도약력을 높여 선명하게 퍼포먼스를 펼쳤다.

이 미세한 차이를 알아차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다만 아쉬운 점은 2단까지 해내는 사람이 등장하기도 전에 의혹 제기가 되었다는 점이니까.

“어때요? 하실 수 있겠어요?”

창현의 물음에 재석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무대에서 펼치는 걸 보고 2단과 3단은 힘들더라도 1단은 어렵지 않게 펼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상당히 어려웠던 것이다.

“이게 보는 거랑 달리 엄청 어렵네.

그러면서 계속해서 계단에 올라가 퍼포먼스를 펼치려는 재석. 하지만 공중에 점프하는 것이 어색했고, 점프하면서 흔들리는 몸을 간수하느라 계단을 걷는 모션을 취하는 것도 하지 못했다.

어색함의 연속.

그럴 때 한쪽에서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했다!”

그곳으로 시선을 옮기니, 수로가 희열에 찬 표정을 짓고 있었다.

창현의 표정을 묵묵히 듣고 있던 그가 몇 번 연습을 하더니 1단을 성공했던 것이다.

“형 정말 했어요?”

“한 번 보여줘요!”

패밀리의 시선에 수로가 당당하게 계단 앞으로 걸어가 방금 성공했던 감각을 떠올리며 계단 춤을 펼친다.

다소 동작이 어설펐지만 허공에 도약하여 한 칸 올라서는 듯한 모습과 함께 착지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패밀리들이 함성을 터뜨린다.

“오오! 오빠 짱이야!”

“어떻게 이걸…….”

감탄하는 패밀리의 모습에 수로가 으쓱하는 모습을 보인다.

“내가 이래봬도 근성이 좀 있지.”

곧장 2단 계단 춤을 연습하려는 수로였다.

하지만 창현의 말처럼 근육이 많은 그는 체공 시간이 짧았고, 2단 춤을 펼치는 것은 무리였다.

오히려 처음에 버벅거리던 재석이 1단 춤을 어설프게나마 성공하더니, 불완전하지만 2단 춤까지 성공한다.

“드디어 내게도 개인기가!”

볼품없지만 성공했다는 것 자체가 재석으로 하여금 환호성을 지르게 하였다.

파이팅 포즈를 취한 그가 신기한 듯 바라보는 효리를 바라보며 약올린다.

“으하하하! 효리 너는 하지 못하는 계단 춤을 난 완벽하게 익혔다! 어떠냐! 약 오르지!”

“…….”

재석의 말에 효리는 그저 침묵할 뿐. 다만 그녀의 눈이 위험하게 빛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침묵의 효과는 잠시 후 발휘되었다.

“6위는 재석 오빠!”

“으악! 왜 내가 6위냐! 효리야! 계단 춤도 엄청 잘 췄는데!”

유일하게 계단 춤 2단까지 성공한 자신이 6위라는 사실에 절망하는 재석이었다.


그 후에 이어진 순위는 예정된 수순이었다. 계단 춤을 훌륭하게 소화했지만 효리의 눈 밖에 난 재석은 만년 6위답게 6위를 하였고, 그와 호각지세를 이루는 종신이 5위를 차지하였다. 천희는 멋있는 척하려다가 오히려 역효과가 나서 4위를 차지하였고, 수로는 3위를, 대성이 아이돌다운 저력을 과시하며 2위를 차지하였다.

마지막으로, 창현은 너무나 당연하게 1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효리와 예진이 처음부터 창현을 따로 떼어놓고 순위를 매기고 있었으니까.

불공평한 남자 순위 선정이 끝나고, 바야흐로 여자 순위를 정할 때가 되었다.

“오늘 왠지 불타오르는 걸?”

“저도요. 봐주지 않을 거예요.”

“호오! 해보자는 건가.”

예진의 말을 들은 효리가 눈을 빛내자, 그녀도 질 수 없다는 듯 눈을 마주한다.

그 대치 상황을 깬 것이 재석이다. 6위를 했지만 지금부터 자신이 먹이사슬 상위에 속해있다는 생각에 음흉한 미소를 지은 그가 효리와 예진에게 말한다.

“자, 그럼 본격적으로 여자 순위를 매겨보도록 하겠습니다. 여자 순위는 오늘 게스트인 현 씨에게 모든 걸 일임하도록 하겠습니다. 현 씨는 어떤 여자가 좋으신가요?”

“저요?”

“예! 지금 하려는 게임은 현 씨가 원하는 여자가 되어라! 이런 거거든요. 좀 더 현 씨의 이상형에 맞는 여자를 흉내내면 승리하실 수 있습니다.”

재석의 말에 효리가 발끈하며 말한다.

“현이는 나를 이상형이라 했다고. 그냥 나 자체가 이상형이야.”

대한민국 섹시 아이콘 이효리가 아닌가!

그녀를 좋아하는 남자들은 손에 꼽을 수 없을 만큼 많았다.

당연히 자신감에 넘치는 효리였다.

하지만 재석은 냉정하게 그 말을 잘랐다.

“아니, 달라. 여기 효리랑 무대 위의 효리랑 다르다고.”

“뭐가 다른데!”

“정말 몰라서 물어?”

“그, 그건…….”

말문이 턱하니 막혀버리는 효리. 무대 위에서 효리와 이곳에서의 효리는 다를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는 노 메이크업에 촌스러운 옷을 입고, 망가지는 걸 주저하지 않으니까.

“거기 효리는 얼마나 예쁜데.”

“오빠!”

“자, 그럼 본격적으로 들어볼까요? 어떤 여자가 좋나요?”

효리의 말을 못 들은 척 창현에게 묻는 재석이었다. 그 모습에 뿔난 표정을 지은 효리였지만 그녀도 창현이 무슨 대답을 할지 궁금했나보다. 입을 다물고 조용히 창현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으니.

“음! 저는 일단 저를 이해해줄 수 있는 여자가 좋을 것 같네요.”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창현의 말이었다.

그 말에 재석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에이! 그런 거 말고요. 좀 더 구체적으로. 예를 들면 이랬으면 좋겠다! 싶은 건?”

“예를 들면… 제가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하니 같이 노래를 부르거나, 혹은 들어주었으면 좋겠고요.”

“저, 저! 저 자신 있어요! 들어주는 거 완전 자신 있어요!”

손을 번쩍 들며 외치는 예진. 누가 노래를 불러주는데 감히 거부하겠는가. 돈을 주고도 듣기 힘든 그의 노래를 감상할 수 있다니, 이건 완전 복이 터진 것이다.

예진의 오두방정에 창현이 어색하게 웃음을 짓는다.

“하하, 그리고 함께 취미 생활을 즐겼으면 좋겠어요. 제가 게임을 좋아하는 편이라 같이 게임을 해도 좋고, 아침에 일어나 맑은 공기를 마시며 같이 산책을 해도 좋고요.”

“외모적인 측면으로 바라는 건 없나요?”

“외모적인 측면으로는… 일단 부담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부담이 없으면 좋겠다, 너무 예쁜 건 싫다는 건가요?”

“좋기야 하겠지만 같이 연인이 될 거면 좀 부담될 것 같아서요.”

솔직하게 대답하는 창현이었다. 그러면서 자신의 대답 중 몇몇 사람들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에 고개를 살짝 갸웃한 그였지만 일단 그랬으면 좋겠다고 말한 상태였다.

“자, 정리하자면, 현 씨는 자신을 잘 이해해주고, 함께 취미 생활을 즐길 수 있는 편안한 이미지의 여자가 좋다, 이거로군요.”

“네, 그렇게 되네요.”

실감이 나지 않지만 종합해보니 그렇게 되었다.

그 말에 재석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효리와 예진을 바라본다.

“자, 들으셨죠? 현 씨는 편안한 이미지의 여자가 좋다는군요.”

“…….”

효리와 예진은 할 말을 잃었다. 성격적인 측면은 꾸며서 보여줄 수 있었는데 그가 원하는 이미지는 두 사람 모두 해당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무래도 그러한 면들은 보여주기 어려울 것 같으니 방향을 바꾸는 게 나을 것 같네요.”

재석의 말에 창현이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그에게 다가가 속삭인다.

“이건 어떨까요. 그러니까…….”

이어지는 창현의 말.

그 이야기를 들은 재석이 미소를 짓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현 씨가 주문을 하셨습니다. 현 씨의 주문은 바로 악녀 연기! 두 분의 악녀 연기를 보고 싶으시답니다.”

효리가 눈을 날카롭게 뜨더니 재석을 바라보며 묻는다.

“정말 현이 주문한 거 맞나요? 재석 오빠가 사적으로 주문한 게 아니라?”

“아, 아닙니다! 제가 왜 그럽니까.”

“현이가 그런 제안을 할 것 같지 않은데.”

“내키지 않으면 하지 않으시면 됩니다. 그리고 2등을 하면 되는 거죠.”

“…….”

도도하게(?) 말하는 재석의 모습에 할 말을 잃은 효리였다. 평소였더라면 버럭 소리를 질러주었을 텐데 오늘의 1위에게는 현의 옆에서 잘 수 있다는 큰 메리트가 있다. 절대 포기하고 싶지 않은 메리트였다.

암묵적으로 효리가 동의하자, 상황극은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시작하였다.

즉석에서 상황을 만든 재석이 주문한다.

“상대역은 현 씨가 맡아주시는 거고요. 상황은 여자가 남자에게 이별을 통보하는 것입니다. 잔인하고 매서울수록 점수가 높으신 거 알아야 하시고요. 그럼 시작해볼까요.”

먼저 시작한 것은 정통 연기자 예진이었다.

악녀 역할을 해야 한다는 말에 그녀는 곧장 거만한 포즈로 자리에 앉았다.

허리를 뒤로 재끼고 턱을 살짝 들어 도도한 표정을 짓는다.

창현이 맞은편에 앉으면서 미소를 짓는다.

“미안, 내가 늦었지.”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아니야, 내가 늦었는걸.”

도도한 그녀에게 서둘러 사과하지만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평소였다면 시끄럽게 굴 텐데 어찌하여 그러는 걸까?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니, 한껏 도도한 표정을 지은 예진이 말한다.

“왜냐면 우리 더 이상 만날 일이 없을 것 같거든.”

“그게 무슨 말이야……?”

표정을 살짝 굳히며 간절한 눈으로 바라보는 창현을 보니 예진은 순간 이별 통보하려던 독한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것을 느꼈다.

‘안 돼! 이대로 가면 효리 언니가 이길 거야.’

힘겹게 마음을 다잡으며 연기에 몰입하는 예진. 눈앞에 거대한 장애물이 있지만 그녀는 필사적인 인내로 정신을 다잡으며 말했다.

“너한테 흥미가 떨어졌거든.”

“왜, 왜 흥미가 떨어졌는데? 돈? 어떻게든 마련해볼게. 명품? 어떻게든 마련해볼게. 제발 날 버리지 마.”

한껏 연기에 몰입하는 창현을 보면서 모두가 비슷한 표정을 짓는다. 그만큼 남자역을 맡은 창현의 연기가 애절했던 것이다.

예진은 그런 창현의 말에 피식 웃으며 말한다.

“그런 건 필요없어. 너는 이미 흥미를 잃어버린 장난감과도 같은 거니까. 게다가 그렇게 차려입으면서 돈은 별로 없다니? 찻값은 내가 계산할게. 돈 없는 너를 위해 마지막으로 내가 해줄 수 있는 거니까. 그럼 이만. 우리 다시 보지말자.”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기는 예진이었다.

재석은 박수를 치며 외쳤다.

“와! 정말 멋진 연기였습니다.”

“예진 누나 진짜 악녀 같았어요. 나 소름 돋았다니까.”

대성이 혀를 내두르며 엄지손가락을 내밀자 예진은 싱긋 미소를 짓는다.

다른 패밀리들도 그런 예진을 칭찬하기 바빴다.

그러자 불안해진 것은 효리였다.

묘한 미소를 지은 재석이 효리를 바라보더니 외친다.

“자, 그럼 이번에는 이효리 씨가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현아, 잘 맞춰줘.”

“네.”

효리의 당부에 창현이 고개를 끄덕이고, 본격적인 상황극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도입부는 아까 전과 같았다. 효리가 먼저 기다리고 있고, 창현이 뒤늦게 들어가는 상황.

“미, 미안.”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내가 언제 그런 거 신경 쓰는 거 봤어?”

쿨한 모습을 보이며 미소를 짓는 효리. 초반부터 굳어있던 예진과는 전혀 다른 편안해 보이는 느낌의 미소였다.

전혀 이별의 느낌이 묻어나오지 않았기에 지각한 창현도 편안한 표정으로 돌아온다.

“밥은?”

“먹고 왔어. 너는?”

“나도 먹었어. 잘 됐네.”

사소한 근황을 사근사근하게 물어오는 효리의 모습에 창현도 맞춰주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악녀의 모습은 느껴지지 않았다.

“한 가지 물어봐도 돼?”

“뭔데?”

“날 사랑해?”

뜬금없는 질문. 갑자기 진지한 질문에 창현은 맞춰주기 위해 고개를 끄덕인다.

“당연하지.”

“그럼 다행이네. 그런데 어쩌지? 나는 널 사랑하지 않는데.”

“…….”

무언가 심상치 않은 공기가 휘몰아치기 시작하자 패밀리들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하기 시작한다.

그와 동시에 효리의 기질도 변했다. 방금 전까지 편안한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지금은 무언가 섬뜩한 느낌이 드는 미소였다.

“어, 어째서?”

“어째서냐고? 간단해.”

오른쪽 입매를 살짝 말아 올린 효리가 허리를 뒤로 재끼며 턱을 살짝 든다. 그리고 다리를 꼬며 사탕이 실종된 츄파츕스 막대를 입에 물고 살짝 뗀다.

“후우! 더 이상 네게 흥미가 가지 않거든.”

“……!”

갑자기 변한 효리의 분위기에 경악을 넘어서 섬뜩함마저 느끼는 패밀리들이었다. 편안한 이미지를 보이다가 한순간 뒤바뀌는 그녀의 행동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창현 또한 놀랐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고 그녀에게 매달린다.

“어, 어째서? 내가 잘할게. 제발 떠나지 마.”

“아쉽지만 불가능할 것 같네. 처음부터 내가 흥미를 느낀 것은 네 마음을 가지고 노는 것이었으니까. 충분히 즐겨서 이제는 흥미가 식어버렸어. 괜찮아, 시간이 흐르면 나을 테니까. 걱정하지 말아.”

상처를 준 사람이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위로해주는 상황.

섬뜩함이 느껴지는 연기를 해내는 효리였다.

그러면서 시계를 힐끗 본 효리가 창현에게 말한다.

“난 그럼 가보도록 할게. 그동안 즐거웠어.”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난 효리가 돌연 창현에게 고개를 가까이 한다. 그리고 사탕이 실종된 츄파츕스 막대를 떼며 바람을 분다.

“후! 더 이상 날 찾지 말고. 그럼 안녕.”

미소를 지으며 한 번 더 비수를 박은 효리가 유유히 퇴장한다.

완벽한 악녀의 재림이었다.


와! 짝짝짝!

환호성을 지르며 박수를 치는 패밀리들. 연기를 그만둔 효리가 머쓱한 표정을 짓는다.

그 뒤에 흘러나온 것은 열연을 펼친 효리의 칭찬이었다.

재석 또한 감탄을 금치 못하고 효리를 칭찬한다.

“정말 최고다, 효리야. 넌 정말 타고난 악녀야!”

“그 말은 좀 기분이 나쁜데?”

“그, 그런가? 하하!”

효리의 눈 째림에 꼬리를 말며 뒤로 물러나는 재석.

잠자리 순위는 이미 결정된 것이나 다름 없었다.

열연을 펼치긴 했지만 파격적인 연기를 펼친 효리에게 대부분의 패밀리들이 마음을 주었던 것이다.

“1위는 여기 현 씨가 꽃목걸이를 걸어드릴 것입니다. 두 분은 눈을 감아주세요.”

그렇게 말하자 효리와 예진이 눈을 감고 서 있었고, 뒤로 조심스레 접근한 창현이 1위에게 꽃목걸이를 걸어준다.

창현이 1위를 상징하는 꽃목걸이를 건네준 사람은 바로 효리였다.

자신의 목에 목걸이가 걸리는 느낌을 받은 효리가 눈을 뜨며 환호성을 지른다.

“아싸!”

승리한 기쁨에 주먹을 쥐며 좋아하는 효리.

창현이 좋아하는 효리를 보며 그녀가 1위를 한 까닭에 대해 설명을 해준다.

“멋진 연기가 일품이었습니다.”

“자, 그럼 이제 슬슬 잘까요.”

재석의 말과 함께 방안으로 들어서는 패밀리. 이불을 깔고 오늘 배정된 잠자리 순위대로 눕기 시작한다.

창현이 자리에 눕자, 효리가 옆에 눕는다.

수줍게 눕는 그녀를 보면서 재석이 야유를 날린다.

“뭐냐! 마치 첫날밤 부끄러워하는 새색시처럼!”

“우우우!”

패밀리의 야유에 효리가 버럭 소리를 지른다.

“왜 그래! 나도 나름대로 부끄러움 탄다고!”

해명(?)에도 불구하고 야유는 가라앉을 줄 몰랐다.

그러자 인상을 찌푸린 효리가 외친다.

“이씨! 덤벼!”

전투태세로 돌입하는 효리의 모습에 패밀리들에 그제야 잠잠해진다.

어차피 옆에 잔다고 해도 제법 거리가 떨어져 있고, 무엇보다 카메라가 돌아가지 않는가.

차례대로 자리에 누우니, 오늘 고단했던 촬영 내용이 떠오르면서 피곤함이 몰려오기 시작한다.

“현아, 어떻게 하면 그렇게 노래를 잘할 수 있냐.”

누워서 계속해서 쫑알거리던 재석이 돌연 창현을 향해 타겟을 돌려 묻는다.

“잘한다는 건 상대적이지만, 제 마음이 전달되는 것 같아요. 진정성이랄까.”

“진정성, 참 어렵지. 참…….”

작게 중얼거리는 재석의 말. 목소리가 점점 잦아드는 것으로 보아 잠에 빠져들고 있음이 분명했다.

이내, 낮게 코고는 소리와 함께 잠자리는 침묵에 빠져든다.

창현 또한 그 분위기에 취해 서서히 잠에 빠져들기 시작한다.

평소보다 늦은, 새벽 2시에 취하는 수면이었다.


인간의 습관이라는 것은 때때로 무섭다.

아무리 피곤하고, 몸 상태가 좋지 않아도 습관대로 움직이는 경우가 종종 있던 것이다.

창현의 경우가 그러하였다.

AM 5:30.

사람들 하나 깨어있지 않은 이른 시간이었지만 창현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떴다.

“…….”

그리고 잠시 주변을 둘러보는 창현. 양옆에 있는 효리와 대성을 힐끗 보고는 패밀리가 떴다 촬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떠올리고는 살짝 고개를 끄덕인다.

손으로 머리를 잘 가다듬어 형태를 갖춘 창현이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간다.

짹짹짹.

새가 지저귀는 소리와 함께 선선한 바람이 불어온다. 여름이 끝나가는 시기답게 바람이 제법 차가웠다.

“잠을 많이 자지 못해서 피곤하네.”

가볍게 몸을 푼 창현이 세수를 하고, 양치를 한 뒤 본격적인 아침을 시작한다. 그리고 주변을 가볍게 한바퀴 산책을 하니, 아침 6시가 되는 건 금방이었다.

슬슬 패밀리들을 깨우기 위해 다가오던 막내 PD가 마당에 서 있는 창현을 보고는 경악성을 터뜨린다.

“헉!”

“일어나셨어요?”

“벌써 일어나신 겁니까?”

“네, 아무래도 일찍 일어나는 습관이 배어 있어서요.”

미소를 짓는 창현의 모습에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막내 PD. 그리고 이내 창현에게 확성기를 건네주면서 말했다.

“원래는 재석이 형이 해야 하는데 현 씨가 대신해주실 수 있을까요?”

“이거 한 번 해보고 싶었는데, 잘 됐네요.”

확성기를 받아든 창현의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패밀리가 떴다를 보면서 반드시 해보고 싶었던 것이 바로 이 확성기로 패밀리들을 깨우는 것이었다.

확성기를 들고 성큼성큼 방 앞으로 다가가는 창현. 카메라가 뒤쫓아오는 것을 본 순간, 문을 살짝 열더니 그 틈으로 확성기를 집어넣고 전원을 킨다.

위이이이이잉!

고막을 뒤흔드는 듣기 싫은 소리가 집안에 쩌렁쩌렁 울려 퍼지기 시작한다.

확성기에서 나오는 소리에 패밀리들이 순간 움찔하더니 표정이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그 모습을 슬쩍 본 창현이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본격적으로 방안에 침투한다.

가장 먼저 공략한 것은 재석이었다. 원래 그의 몫이었던 만큼 듬뿍 확성기의 소리를 들려줄 생각이었다.

위이이이잉!

“으으음!”

귓가에서 울려 퍼지는 신음을 흘리며 몸을 뒤척이는 재석이었다. 그러다 이내 힘들게 눈을 뜨자, 그곳에는 미소 짓고 있는 창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일어나셨어요, 형.”

“현이 네가 어떻게…….”

“일찍 일어나서 대신 하게 되었어요.”

“그래? 하아!”

귓가에 여전히 울려 퍼지는 확성기 소리에 재석은 늑장을 피우지도 못한 채 자리에서 부스스 일어선다. 여기저기 흐트러진 머리는 그가 막 일어났다는 것을 리얼하게 알려주고 있었다.

창현에게 확성기 인계 작업을 받는 재석. 입가에 미소를 띤 그는 요리조리 메뚜기처럼 뛰어다니며 확성기로 공략하기 시작한다.

“으으으!”

기상이 빠른 수로는 확성기에 당하기 전 자리에 벌떡 일어났고, 어버버하는 사이 종신과 천희, 대성은 확성기의 제물이 되어 부스스한 모습을 가감 없이 카메라에 보여줘야만 했다.

약 삼십여 분간의 혈투 끝에 모두 기상하는데 성공한 패밀리들.

퉁퉁 부은 효리의 얼굴은 카메라에 클로즈업 되어 화제가 되었다.

PD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던 재석이 입가에 씨익 미소를 지으며 창현을 힐끗 보더니 귀에 무언가를 속삭인다. 그리고 협상을 마친 그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대본을 받아오고는 본격적으로 촬영에 들어간다.

“자, 그럼 오늘 아침 식사 당번 선정은 퀴즈로 하도록 하겠습니다. 문제를 낼 것이고, 그것을 맞추면 당번에서 제외가 됩니다. 당번으로 선정된 사람은 두 사람을 고를 수 있는 거고요. 모두 준비되셨죠?”

“네!”

재석의 설명에 모두 낭랑한 목소리로 외친다.

“그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패밀리들이 빠른 걸음으로 후다닥 달려간다.

예상 외로 1등을 차지한 것은 다름 아닌 종신이었다. 수로와 천희가 합작을 벌여 날쌔 보이는 창현을 제지하는 사이, 종신이 그 틈을 파고들어 1등을 차지한 것이다. 2등은 종신의 뒤를 따른 대성이었고, 3등은 집요한 견제를 받은 창현이었다.“

재석은 종신을 보고는 문제를 내기 시작한다.

“우리가 찾아온 이곳은 강원도 평창군 방림면입니다. 오대산이 근처에 있고, 공기가 맑은 이곳은 배산임수의 조건을 그대로 만족하고 있는데요. 여기에서 강에 해당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강? 강이라면…….”

생각에 잠겨드는 종신. 그가 요 앞에 있는 강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 리가 없다.

맞추지 못하는 그를 향해 재석이 카운트다운을 세기 시작한다.

“5초를 드리겠습니다. 참고로 강은 이곳 지명과 관련이 있습니다. 5, 4, 3…….”

점점 줄어드는 숫자.

힌트를 들은 종신은 모 아니면 도였다. 지명과 관련이 있다고 하니, 둘 중 하나였던 것이다.

결정을 내린 종신이 힘차게 지른다.

“평창강!”

“평창강이요? 으음! 평창강이라…….”

잠시 말끝을 흐리는 재석. 그러더니 힐끗 종신을 보며 입가에 미소를 짓더니, 힘차게 외친다.

“평창강, 정답입니다.”

“예쓰! 오늘은 잘 수 있어!”

파이팅을 하며 쪼르르 달려가는 종신.

첫 문제에 통과자가 생겨나자 패밀리들의 얼굴에 긴장이 서린다. 문제 난이도가 쉬웠기에 앞에 있는 사람이 유리했고, 자칫 한 번 삐끗하면 뒷사람들이 줄줄이 맞춰버릴 가능성이 높았다.

대성이 긴장한 표정으로 앞으로 나선다. 그리고 재석을 향해 미소를 짓자, 덤앤더머라고 재석 또한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 사심이 듬뿍 담긴 초 저난이도 문제를 낸다.

“이곳에는 사람들이 신성시 여기는 것이 있다고 하는데요. 이 집 뒷마당이 있기도 한 200년 된 이 나무는 무엇일까요?”

너무나 쉬운 문제. 어제 잠시 쉬는 시간에 재석과 함께 주우러 가기도 했다.

누워서 떡먹기만큼 쉬운 문제에 대성은 실실 웃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제딴에는 어렵다는 식의 표정을 짓기 시작하더니, 정답을 말한다.

“으음! 밤나무?”

“정답!”

“우와아앗!”

정답을 맞춘 대성이 환호성을 지르며 마당을 질주한다. 그 모습을 다른 패밀리들은 부러움이 가득 담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다음 차례는 다름 아닌 창현이었다.

그가 앞으로 나서자 재석이 묘한 미소를 흘리기 시작한다.

그러더니 그가 든 것은 방금 전과 다른 대본용 종이가 아닌, 뭔가 빽빽하게 적힌 A4용지였다.

‘저게 뭐지?’

의아한 마음이 든 창현이 무엇인지 물어보려 할 때, 재석의 입이 열린다.

“자, 그럼 다음 문제를 내도록 하겠습니다. 원산지는 멕시코에서 남아메리카 북부라고 하는 이 식물은 원종이 아직까지 명확하지 않으므로 그 기원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설이 있다고 합니다. 적어도 수천 년 전에 재배된 이 식물은 주작물로서 남북 아메리카 대륙에 걸쳐 널리 재배되었다고 합니다. 1492년 콜럼버스가 종자를 에스파냐로 가지고 돌아간 후부터 30년 동안에 전유럽에 전파되었으며 그 후 인도나 중국에도 16세기 초에는 널리 퍼졌다고 합니다. 한국에는 16세기에 중국에서 전래된 것으로 알려진 이 식물은 무엇일까요?”

“…….”

파격적인 난이도 상승이 아닐 수 없다.

할 말을 잃은 창현이 재석을 멍하니 바라보았고, 다른 패밀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시선을 받으면서 재석이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계획했던 복수의 순간이 도래한 것이다.

실수로 자신을 안면 낙하시켰으며(고의로 했지만 재석은 실수라 생각하고 있다.), 위로해주는 척하면서 자신에게 마늘과 고추가 듬뿍 담긴 쌈을 건넸다.

어디 그뿐인가!

패밀리 내에서 가수파, 배우파, 개그파로 나누기도 하였다.

시작은 종신이 했지만 가만히 있는 것이 더 얄미워 창현 또한 가담했다 생각하고 있었다.

게다가 마지막으로 오늘 아침에 자신에게 확성기 러시를 감행하였다.

그것이 분명 재미있기는 하지만 억울한 것이 사실이었고, 소심한 재석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다가 지금 기회를 잡는데 성공한 것이다.

다른 패밀리들의 문제는 쉽게 내고, 창현의 문제는 어렵게 내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창현은 아침 당번이 될 것임이 분명했다.

‘흐흐흐! 어디 당해봐라.’

지금 이 순간만큼은 현의 팬들이 무섭지 않은 재석이었다. 아니, 그 부분을 아예 고려하지 않고 있다 해야 함이 옳으리라. 그만큼 그는 지금 복수에 몰입해 있었다.

그간 당했던 것들을 한방에 되갚는 회심의 복수였다.


“…….”

파격 난이도 상승에 창현은 물론이고, 패밀리들도 할 말을 잃었다. 지금 재석이 말한 문제의 답은 둘째 치고, 난이도가 너무 수직 상승을 했던 것이다.

이곳에서 유일하게 즐거운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은 재석 뿐.

소심한 복수가 성공할 수 있다는 생각에 그는 싱글벙글한 얼굴로 창현을 재촉한다.

“자, 어서 정답을 말해주세요.”

“왜 제 난이도만 이렇게 오른 거죠?”

창현의 물음에 재석이 씨익 웃는다. 이 질문이 나올 것 같아 미리 답을 준비해둔 상태였던 것이다.

“아, 우연찮게 세 번째 문제가 이거네요. 현 씨가 참 운이 없는 겁니다. 운이 없는 거예요.”

그 말을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패밀리들의 눈에 훤하게 들어오고 있는 문제 용지.

그들에게 내던 문제가 적힌 대본용 종이와 달리, 창현에게 낸 문제는 A4용지에 적혀 있었다.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자, 어서 맞추지 않으면 곤란합니다. 뒤에 분들이 기다리고 계시잖아요.”

한껏 창현을 약 올리는 재석. 그는 이 문제를 맞추지 못할 것이라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

아니나 다를까, 그의 예상처럼 창현은 침묵하고 있었다.

조금 기다려주던 재석이 마지막 시간을 준다.

“5초 드리겠습니다. 5, 4, 3…….”

카운트다운을 세는 재석을 보며 혀로 입술을 축이는 창현.

전혀 모를 것이라 생각하던 그의 예상과 달리 창현은 대충이나마 정답을 알고 있었다. 그가 공부하는 사회 탐구 영역 과목 중 하나가 바로 세계지리였고, 이 부분에 대해 공부한 적이 있던 것이다.

‘일단 주작물이라 했으니까 담배나 카카오는 아닐 확률이 높고, 커피는 에티오피아, 아프리카니까 아니야. 주작물이니까 아무래도 식량일 텐데, 식량이면 감자나 옥수수, 둘 중 하난데. 흐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는 창현.

그 사이 카운트다운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3, 2, 1…….”

점점 다급해지자 창현의 머리가 더욱 분주하게 돌아간다.

그 순간, 무엇이 떠올랐는지 창현의 눈이 빛난다.

“아!”

그와 함께 정답 신호를 드는 창현.

이제 망신당할 때가 왔다 생각했는지 재석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묻는다.

“자, 정답은?”

“옥수수입니다.”

고민하던 것과 달리 자신감 있게 외치는 창현.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재석이 문제를 설명할 때 멕시코 혹은 남아메리카 북부라 하였다. 그런데 감자는 남아메리카 안데스 산맥이 원산지로 알고 있다. 게다가 콜롬버스가 처음 착륙한 곳도 남아메리가 아닌 중북쪽으로 알고 있고. 그렇다면 아무래도 정답은 감자보다 옥수수에 무게가 기우는 것이 당연했다.

“…….”

창현의 대답에 재석은 순간 할 말을 잃는다.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문제가 적힌 A4용지를 바라보고 있지만 잘 살펴보면 그의 볼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의 침묵에 패밀리들도 과연 정답일까 기대감 어린 눈으로 재석을 바라본다.

잠깐의 침묵 끝에, 재석이 마침내 정답을 말한다.

“정답은… 옥수수, 맞습니다.”

맞췄다는 생각에 창현은 주먹을 불끈 쥐며 기쁜 표정을 짓는다.

패밀리들도 문제를 맞힌 창현이 놀랍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 전 식사 당번 제외인 거죠?”

싱글벙글 기분 좋은 표정을 짓고 있는 창현의 표정이 거슬렸는지 재석이 냉담한 척 대답한다.

“아뇨, 탈락한 사람이 현 씨를 뽑을 가능성이 아~~~~~주 높으니 거기 앉아계세요.”

“…….”

문제를 맞히고 좋아하던 창현이 침묵한 채 조용히 마루에 걸터앉는다.

그 뒤에 이어진 문제는 창현에게 내는 것과 차원이 다른 저급 문제였다.

패밀리들은 줄줄이 문제를 맞히기 시작하였고,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효리와 예진이었다.

그리고 치열한 경합 끝에 승리한 것은 효리였다.

“아싸! 내가 이겼다!”

좋아하며 방방 뛰는 효리. 그에 반해 아침 식사 당번이 된 예진은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패함으로써 아침 수면은 날아가버린 것이다.

“으하하하! 예진아, 불쌍해서 어떻게 하냐, 으하하하!”

풀 죽은 예진을 보며 한껏 웃음을 터뜨리는 재석.

그 모습을 날카로운 눈으로 바라보던 예진이 엄포를 놓는다.

“그렇게 나오시면 오빠를 뽑을 거예요.”

“…….”

바로 고분고분해지는 재석이었다. 첫날밤을 맞이하는 새색시 마냥 조신하게 변하는 재석의 모습에 피식 웃음을 짓는 창현.

예진이 갑자기 고개를 홱 돌려 자신을 바라보자 창현이 움찔한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려 모른 척 딴청을 피운다.

그렇게 모른 척 해봤자 게스트가 아침 음식을 할 확률은 99%였다.

“일단 한 사람은 현 씨로 할게요.”

“아싸!”

“좋구나! 역시 아침은 게스트가 해야지!”

창현이 호명되자 다른 패밀리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하지만 아직 마지막 한 명이 있었다.

“현 씨, 잠시만요.”

예진이 창현에게 손짓을 하자, 창현이 그녀에게 다가간다. 그러자 그의 귓가에 귓속말을 소곤소곤하기 시작한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인 창현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느릿하게 걸음을 옮기며 패밀리들을 한 사람씩 훑어본 창현이 효리 옆으로 다가간다. 그리고 마이크를 세워 들리도록 설정한 뒤 그녀의 귓가에 속삭인다.

“효리 누나, 아침 식사 당번 잘 부탁한데요.”

“…….”

이로써 아침 식사 당번이 모두 정해졌다.

“힘내라, 얘들아. 우린 자러 간다, 으하하!”

얄미운 재석의 웃음소리와 함께 마당에는 세 사람만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넓은 마당에 단 세 명 밖에 없으니 무척 휑한 느낌이 감돌고 있었다.

잠시 멍하니 있는 세 사람.

가장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것은 효리였다.

“좋아, 오늘 아침 맛있게 만드는 거야. 나도 있고, 현이도 있으니까 아주 진수성찬을 차려보자.”

“저도 힘껏 도울게요.”

예진도 주먹을 불끈 쥐며 말하자, 효리가 미소를 짓는다.

“그런데 오늘 아침 메뉴는 뭐로 하시려고요?”

창현의 물음에 효리는 거기까지 생각하지 않았는지 움찔 몸을 떨더니 입을 연다.

“아침답게 간단하면서 그럴싸한 걸로 차리는 건 어떨까?”

“그럴싸한 거라면, 김치찌개나 된장찌개 어떨까요?”

“찌개로? 괜찮다! 그럼 김치찌개로 하자. 어제 김치를 먹어보니까 굉장히 맛있던데, 잘 하면 굉장히 맛있을 것 같아.”

“그럼 김치찌개로 하고, 여러 가지 반찬들을 만들도록 해요.”

이야기를 나누며 단숨에 메뉴를 정해버리는 창현.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효리가 돌연 음흉한 미소를 짓는다.

“그런데 그냥 요리를 하면 재미가 없지 않겠어?”

“네? 무슨 재미요?”

“아침도 재미있게 만들어야지.”

“언니, 또 무슨 생각을 하는 거예요.”

효리의 미소가 불길하게 느껴졌는지 예진이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묻는다.

그 모습에 효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다.

“간단하게 해보자. 이른 바 하인 게임이랄까?”

“하인 게임이요?”

“가위 바위 보해서 꼴찌가 되는 사람은 시키는 사람의 말대로 열심히 일을 하는 거야. 이긴 사람들은 편하게 음식을 만들면 되고. 어때?”

“괜찮은 거 같은데요?”

예진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만약 창현이나 효리가 하인이 되면 무척 재미있을 것 같았고.

그에 반해 창현은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그 모습이 답답하게 느껴졌는지 효리가 말한다.

“뭘 그렇게 고민해. 가위 바위 보만 이기면 되잖아.”

그녀의 말대로였다. 세 명이니까 꼴찌를 할 확률은 정확히 33.4%, 걸리지 않을 확률은 66.7%다. 즉, 걸리지 않을 확률이 더 높다는 이야기였다.

게다가 가위 바위 보는 상당히 자신이 있는 종목.

‘그래, 나만 아니면 되잖아.’

그 생각이 창현으로 하여금 결심을 굳히게 하였다.

“좋아요, 하도록 할게요.”

“좋은 생각이야. 그럼 우선 가위 바위 보를 하도록 할까.”

본격적으로 시작된 세 사람의 대결.

그들의 머릿속에는 전부 ‘나만 아니면 돼.’ 라는 생각이 맴돌고 있었다.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마침내 외침이 터져 나오기 시작한다.

“가위 바위 보!”

파바바밧!

허공에 수십 가지 변화를 일으키는 듯한 착각과 함께 세 사람의 손이 각각 한 가지를 그려낸다.

효리는 주먹을, 예진은 보자기를, 창현은 주먹을.

“아싸! 이겼다! 난 아니다, 호호호호!”

자신의 승리를 확인한 예진이 폴짝폴짝 뛰며 승리를 자축하였다.

“…….”

창현과 효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로를 바라본다.

이로써 걸릴 확률이 33.4%에서 50%로 올랐다.

나 아니면 상대방이 걸리는 확률.

두 사람의 눈이 날카롭게 엉켜들기 시작했다.

그때, 효리가 창현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한다.

“창현아, 우리 가위 바위 보 말고 묵찌빠로 하는 게 어때?”

“묵찌빠요?”

“응, 그게 더 재미있을 것 같은데.”

“좋아요.”

묵찌빠라면 자신의 장기 중 하나였다. 절대 지지 않는 방법을 알고 있었기에 창현은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승리는 따놓은 당상이었다.

“자, 그럼… 가위 바위 보!”

효리의 말과 함께 허공에서 펼쳐지는 두 사람의 손.

마치 생사대적을 만난 것 마냥 두 사람은 서로의 손 움직임에 엄청난 집중력을 보이고 있었다.

서서히 펴지는 창현의 손. 일단 펴진다는 것은 보자기 아니면 가위라는 이야기였다.

날카로운 효리의 시선에 창현이 본능적으로 보자기를 펼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펼치고 있는 것은 가위.

1차 계획이 달성되는 순간, 효리는 창현이 반응하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손을 움직이며 외친다.

“빠!”

그것은 한순간 벌어진 일이었다.

창현의 손이 보자기를 내고 정지하는 순간, 가위를 낸 효리가 즉각 손을 활짝 펴져 공세를 가한 것이다.

그 외침에 창현은 미처 대응할 틈이 없었다. 그야 말로 완벽한 기습 공격. 그의 빠른 반사신경도, 묵찌빠를 절대 지지 않는 비기를 사용할 겨를도 없었다.

처음부터 자신이 이길 것이라 생각하고 거세게 밀어붙인 효리의 작전이 제대로 주효한 것이다.

“내가 이겼다! 와아아아!”

“언니 잘했어요! 언니 완전 짱!”

예진이 그녀의 승리를 기뻐해주며 같이 껴안는 두 자매.

“…….”

그 모습을 창현은 허탈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설마 효리가 갑작스러운 기습을 가할 줄이야. 예상하지 못하고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던 자신의 패배였다.

한동안 기쁜 표정을 지으며 예진과 얼싸안고 좋아하던 효리.

이내 정신을 차린 그녀가 입가에 묘한 미소를 지으며 창현을 바라본다.

무언가 불길한 느낌이 뭉클뭉클 피어오르는 미소였다.

“자, 그러면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해보도록 할까? 잘 부탁해, 일일 하인.”

아주 열심히 부려 먹어주겠다는 기세를 팍팍 풍기는 효리를 보며 창현은 직감적으로 고생길이 훤하게 열렸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방심의 대가는 가혹했다.

하인 게임.

내가 걸리지 않으면 된다 했지만 정작 내가 되니 장난이 아니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이건 대본도 아니고, 의도한 것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마치 재미를 위해 자신이 떡하니 걸러버렸다.

효리와 예진은 입가에 벌써 함박웃음이 걸려 있었다.

“어이, 현?”

“네…….”

마루에 앉아 편안하게 앉아있는 효리의 부름에 창현이 쪼르르 달려간다.

옆에 앉은 예진은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창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 요리를 시작해야 하니까 준비물들 좀 부엌에서 가지고 오겠어?”

“…….”

“대답은?”

“알겠습니다.”

능숙하게 부려먹는 효리의 모습에 창현이 부엌으로 후다닥 달려간다. 그리고 요리에 필요한 버너부터 시작하여 갖가지 요리 기구들을 가지고 온다.

“우선 뭘 만들까, 우리?”

“뭘 만들다뇨? 김치찌개를 만들기로 분명…….”

“그건 현이 네가 만들기로 한 거지. 현이 넌 김치찌개를 만들어. 나랑 예진이는 음, 뭘 만들지?”

“감자가 있던데 감자조림 어때요?”

예진의 제안에 잠시 고민에 빠지는 효리. 메인 요리로는 김치찌개가 되어 있고, 반찬들도 몇 개 있으니, 감자조림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생각되었다.

“감자조림? 감자조림 좋겠다. 그럼 감자조림으로 하자.”

“네.”

“현아, 그럼 부엌으로 가서 감자를 좀 가지고 와.”

영락없는 하인 신세인 창현은 부엌으로 달려가 감자를 가지고 올 수밖에 없었다.

감자를 가지고 온 뒤 감자 껍질을 따로 담을 작은 그릇을 가지고 와야 했고, 각종 조미료 또한 가지고 와야 했다.

영락없는 하인 신세에 창현이 헥헥거릴 무렵, 마침내 효리와 예진이 감자조림을 만들기 위한 준비에 착수하기 시작하였다.

창현도 간신히 메인 음식인 김치찌개를 만들 여유를 얻게 되었다.

김치를 살짝 볶으며 본격적으로 김치찌개를 만들기 시작하는 창현. 고소하게 볶아지는 맛있는 냄새에 효리와 예진이 감탄한다.

“음! 냄새 좋은데?”

“현 씨가 요리를 참 잘하는 것 같아요.”

“어떻게 요리를 잘하게 된 거야?”

효리의 물음에 창현은 김치를 볶으면서 대답한다.

“아무래도 아버지가 바쁘시다 보니 저 혼자 요리를 자주 하게 되었거든요. 처음에는 음식을 못했는데 몇 번 하다 보니까 기왕 할 거면 맛있게 해서 먹고 싶어 레시피를 찾아 요리를 하다 보니까 남들 하는 만큼 하게 되더라고요.”

“그래? 난 혼자 살아도 요리 실력이 늘지 않던데.”

“언니는 매일 사드시잖아요.”

“그런가? 그래도 나도 몇 개 잘하는 거 있다고.”

농담 삼아 못한다고 했는데 졸지에 못하는 사람이 된 것 같아 반박하는 효리였다.

투닥거리는 그 모습을 보고 피식 웃음을 지은 창현이 본격적으로 김치찌개를 끓이기 시작한다.

물을 끓인 뒤 김치를 넣고 다진 마늘과 고춧가루, 소금을 넣어 간을 맞춘다. 그리고 기름을 쫙 뺀 참치를 넣어 팔팔 끓이기 시작한다.

끓이면서 짜투리 시간이 남게 되자 계란을 들고 온 그는 계란을 툭툭 까서 다른 음식을 만들기 시작한다.

“다른 거 만들려고?”

“계란 찜 하려고요. 아무래도 반찬이 심심할 것 같아서.”

“진짜 할 줄 아는 거 많구나.”

“그렇진 않고, 계란으로 하는 종류를 많이 하게 되더라고요.”

“그 정도면 잘하는 거야.”

“맞아요, 그것도 못한다 하면 저랑 효리 언니는 뭐가 되겠어요.”

“하하하.”

요리 실력을 칭찬해주는 효리와 예진의 말에 창현은 머쓱하게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그렇게 계란찜을 만들고, 김치찌개도 완성되자, 풍기는 냄새에 이끌린 패밀리들이 하나둘씩 밖으로 나오기 시작한다.

막내 대성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상을 피기 시작했고, 효리의 주문에 창현은 수저와 젓가락을 올려놓아야만 했다.

“자! 이건 우리가 만든 감자조림!”

효리가 자신 있게 올려놓는 감자조림을 보면서 패밀리들이 감탄사를 흘린다.

그러자 와! 하고 감탄사를 흘리는 패밀리.

그 모습을 보고 피식 웃은 예진이 계란찜을 올려놓으며 말한다.

“이건 현 씨가 한 계란찜이에요.”

창현이 한 계란찜은 하나가 아니었다. 인원이 많은 걸 고려하여 두 개나 한 것이다.

큼지막한 뚝배기에 가득한 계란찜을 보며 패밀리들이 눈을 빛낸다.

“마지막으로 메인 요리 김치찌개 등장이요.”

창현이 양손에 부엌 장갑을 끼고 김치찌개를 올려놓는다.

그것을 보고 눈을 빛낸 종신이 냉큼 숟가락으로 한 수저 떠먹는다.

그리고 눈을 감으며 맛을 음미하더니 눈을 번쩍 뜨며 말한다.

“음! 맛있어! 그리고 나의 미각에 의하면 만능 조미료를 사용하지 않았군.”

만능 조미료를 애용하는 미식 연구가(?)답게 김치찌개에 라면 스프가 들어갔는지 여부에 대해 가늠하고 있던 것이다.

입맛이 까다로운 종신이 맛있다는 말을 하자 패밀리들이 김치찌개를 떠먹기 시작한다.

그리고 연속으로 터져 나오는 맛있다는 말.

창현은 그 말을 들으며 입가에 미소를 짓고 식사를 시작할 수 있었다.

별 거 들어가지 않은 찌개와 반찬이었지만 상쾌한 공기와 함께 야외에서 하는 식사라 그런지 맛있게 끝을 맺을 수 있었다.

하하호호 웃음이 흘러나오는 식사 자리에 창현은 유쾌한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이게 끝이 아닙니다.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어요.”

즐거운 아침 식사가 끝나고, 패밀리들이 일렬로 서 있는 상태에서 재석이 말한다.

무슨 일이 남아있냐 묻자, 재석이 간단하게 말한다.

“오늘 군내에서 군 어르신들이 모이는 큰 축제가 있다고 합니다. 거기에 깜짝 게스트로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들도 그곳으로 오시기로 했고요.”

마침 군내에서 행사를 한다고 하자 오지랖 넓은 제작진은 그곳과 접촉하여 패밀리가 떴다 멤버들이 잠시 참석할 수 있게 양해를 구해놓은 상태였다. 행사 주최 측에서는 귀한 게스트가 참석한다고 하니 당연히 OK였다.

“무슨 행사인지는 알아야 하지 않나요?”

효리의 물음에 재석이 간단하게 답한다.

“군 어르신들이 모여서 즐기는 자리입니다. 가서 각자 장기 하나씩 보여드리면 될 것 같네요.”

“장기라, 장기…….”

각자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인다. 무슨 장기를 펼칠지 생각에 잠긴 것이리라.

그 모습을 보며 재석이 씨익 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자, 그럼 준비를 마치고 가도록 할까요.”

재석의 말에 패밀리들은 각자 흩어져 메이크업을 받고, 본격적으로 축제에 참석하기 위한 준비를 갖추기 시작한다.

준비를 모두 갖춘 패밀리는 대형 버스에 탑승하여 축제가 벌어지는 곳으로 향했다.

축제가 벌어지고 있는 곳은 거대한 야외 무대였다. 마치 전국 노래 자랑 세트를 방불케 하는 곳에 수많은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앉아 있었고, 많은 팀들이 그곳에서 탈춤을 추기도 하고, 공연을 보여주기도 하면서 함께 웃고 즐기고 있었다.

인적이 드문 곳에 내린 패밀리들. 그들은 행사 주최측의 안내에 따라 조용히 무대 뒤로 다가가기 시작한다.

“이거 괜히 잘못해서 분위기 망치는 거 아니야?”

흥겹게 달아오른 분위기를 엿본 재석이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관객층이 젊은 층이었으면 상관없겠는데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많으니 그 웃음 포인트를 잘 맞출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걱정하지 마세요, 잘할 수 있을 거예요.”

창현의 위로에 재석이 그를 바라본다. 긴장에 떨고 있는 자신과 달리 그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현이 너는 어쩜 그렇게 담담할 수 있냐. 아주 심장이 강철이야, 강철.”

“딱히 강철은 아닌데. 그저 사람이 많은 곳 자체가 좋다고 할까요.”

“참 특이하단 말이야.”

이해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젓는 재석의 모습을 보며 피식 웃는 창현이었다.

그렇게 공연도 모두 끝나고, 마침내 패밀리들이 무대 위에 올라가는 순서가 되었다.

“오늘 참 오기 힘든 분들이 오셨습니다. S본부 방송 패밀리가 떴다에 출연하시고 계신 패밀리 여러분들이 이곳에 특별 게스트로 방문하셨습니다. 모두 박수 치며 맞이해주세요.”

짝짝짝짝!

그리 크지 않은 박수소리와 함께 패밀리들이 무대 위로 올라선다. 관객인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패밀리들을 알아본 듯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웅성거리고 있었다.

“이거 굉장히 뻘쭘한데.”

웅성거리는 관객들의 시선을 받으며 패밀리들은 뻘쭘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젊은 층이면 격한 환호성을 질렀을 텐데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모두 할아버지 할머니들이다 보니 제대로 된 반응이 나오지 않고 있던 것이다.

각자 마이크가 하나씩 주어지고, 슬쩍 옆으로 걸어간 창현이 MC와 무언가를 이야기 나누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이곳으로 온다.

그 사이 재석이 자기소개를 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유재석입니다.”

짝짝짝!

TV에 자주 나오고, 프로그램을 진행해서 그런지 재석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뒤이어 다른 패밀리들도 자기소개를 하였고, 본격적으로 행사에 참가하기 시작했다.

MC가 패밀리들을 바라보며 외친다.

“자, 아직은 어색한 듯한데 이 분위기를 달구기 위해 초특급 게스트인 현 씨가 한 곡 부르겠다고 하십니다. 너무나 유명한 그 곡! <남행열차> 가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경쾌한 MR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대한민국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유명한 트로트가 나오고 있는 것이다.

패밀리의 등장에 다소 루즈해지는 경향이 있던 분위기가 경쾌한 MR로 인해 후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럼 한 곡 뽑겠습니다!”

마이크를 든 창현이 큰 목소리로 외치더니 본격적으로 노래를 하기 시작한다.

구수하게, 그리고 절묘하게 꺾이며 시원시원하게 부르자,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들썩이며 리듬을 타기 시작하였고, 한결 풀린 분위기로 인해 패밀리들도 다소 편안해진 기색을 보일 수 있었다.

창현의 곡이 끝나고, 본격적인 패밀리들의 공연이 시작되었다.

김계모와 천데렐라의 듀엣 공연이 있었고, 절친 자매의 무대, 덤앤더머의 무대와 원로 가수 종신의 무대 등, 가볍고 즐길 수 있는 무대에 그들은 성공적으로 무대를 끝마칠 수 있었다.

처음과 확연하게 다른 환호를 받으며 퇴장하는 패밀리.

방송의 끝을 장식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훈훈한 장면들이었다.

그렇게 패밀리가 떴다 촬영이 끝이 났다.




제84장 검정고시




패밀리가 떴다 촬영 이후 시간은 흐르고 흘러 9월로 접어들었다.

그 기간 동안 온라인은 난리가 난 상태였다.

현의 계단 춤 의혹이 불거지면서 인터넷을 가득 채운 상태였고, 이것을 현이나 AA엔터테인먼트에서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고 있자 몇몇 사람들은 정말 현이 사람들을 상대로 사기극을 했다 생각하는 수준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가 조성되자 판을 치는 것은 악플러들이었다.

원래 현은 악플러들에게 있어 절대 공격하지 말아야 할 불가침 영역에 속해있는 인물이었다. 아직 미성년자임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의 이름을 세계에 널리 알렸으며, 철저한 자기관리와 팬들을 생각하는 마음은 무결점 연예인으로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던 것이다.

하지만 분위기가 바뀌고 있었다.

현과 AA엔터테인먼트에서 이렇다 할 반응이 없자 의심을 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던 것이다.

그러던 중 엠넷에서 <현의 하루>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가 방영되었다.

퇴근 시간과 평일이라는 악조건 속에서도 불구하고 케이블로 드물게 13%라는 경이로운 시청률을 기록한 <현의 하루>는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한 수가 되었다.

새벽 6시에 기습 방문한 촬영팀을 맞이한 것과 흔들림 없이 몇 시간이나 공부하는 모습이 시청자들을 감동시켰던 것이다.

이것은 몇몇 악플러들이 검정고시를 핑계로 변명거리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의혹을 완전히 말소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왜냐하면 촬영 날짜는 의혹이 처음 나오기 시작한 것보다 훨씬 이전이었기에.

결정적으로 다큐멘터리에서 현의 계단 춤 연습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환하게 밝은 연습실에서 펼쳐지는 계단 춤은 그간 불거지던 의혹을 말끔하게 해소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다큐멘터리에서 나온 현의 동생 지영의 노래 실력 또한 방송을 탐으로써 상당한 실력을 지녔다는 찬사를 받을 수 있었고, 스케줄을 소화하는 모습부터 시작하여, 철저하게 시간 관리하는 그의 모습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다시 한 번 감탄하게 만들었다.

특히 사람들을 감탄시킨 것은 무대 위에 설 때 보여준 프로페셔널함이었다.

무대에 서기 20분 전, 모든 사람들을 내보내고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그를 보며 최고의 무대가 괜히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하였다.

최고의 무대를 선보인 그의 모습에 사람들은 다시 한 번 현에 빠져드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잠들기 전 가볍게 게임 한 판하는 그의 모습은 더더욱 친밀함을 가져다주었고.

그것 덕분에 여성들에게 스타크래프트 붐이 일었다는 것은 후일담이다.

모든 의혹이 해소되고 다시 현에 대한 평가가 호평으로 돌아서는 듯하였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현의 계단 춤에 의혹을 갖고 있던 사람들은 그가 연습하는 장면에서 3단 춤을 한 번도 펼치지 않은 것으로 의혹을 제기한 것이다.

처음 그들의 주장은 1단, 2단, 3단 춤을 특별한 장치로 펼친다는 것이었지만 1단과 2단 계단 춤을 쉽게 펼쳐내자 3단 춤에 무언가 장치가 있다 주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현의 사기극은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황당하네요.”

다큐멘터리가 방영되고, 분위기가 호전되는 것을 본 창현은 검정고시를 위해 박차를 가하고 있던 도중 석규의 부름을 받고 회사에 왔다가 그가 보여준 것을 보고는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지었다.

계단 춤 자체가 사기극이라 할 땐 언제고 이제는 3단 춤이 사기라 주장하는 모습이라니.

황당한 표정을 짓는 창현에게 석규가 간단하게 말한다.

“이게 우리나라의 현실이다.”

“…….”

현재 계단 춤은 국내에서도 열풍이지만 해외에서는 더욱 열풍이 불고 있다.

국내 이외에 앨범을 전혀 발매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해외 팬들이 접할 수 있는 것은 인터넷 영상뿐이었고, 그가 계단 춤을 추는 걸 본 해외 팬들은 경악하면서 그 춤을 따라하고자 하였다.

그들은 단 한 번도 현이 속일 거라 의심한 적이 없으며, 오히려 인간이 가장 추기 힘든 판타스틱한 춤이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는 사기극이라 모함을 받으며 먹지 않아도 될 욕을 듬뿍 먹고 있는 것이다.

“실망스럽겠지.”

“그런 마음도 있지만, 이 정도를 보여주고도 믿지 못한다면 어떻게 하더라도 믿지 않을 기세인데요?”

직접 눈앞에서 보여주더라도 무언가 술수를 부렸다고 주장하겠지.

“합당한 지적은 받아들인다. 하지만 인격 모독은 받아들이면 안 되겠지. 보아하니 네 이미지를 떨어뜨리기 위해 주도면밀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더구나. 단순한 악플러인지, 다른 회사가 고용한 사람들인지는 모르지만 일단 사이버 수사대에 조사를 의뢰했고, 신원이 확인되면 법적인 절차를 거칠 생각이다.”

악플은 무서운 것이다.

옛말에 말로 천 냥 빚 갚는다는 말도 있다. 그만큼 말의 위력은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다.

악플에 시달려 자살한 연예인이 몇 명이던가.

현재 네티즌들은 인터넷이라는 익명성을 믿고 지나치게 상대를 공격하는 성향이 있다. 익명이 보장될 경우 사람이 공격 성향이 약 20배 정도 상승한다고 하는데, 이럴 경우 특별한 공격거리가 없더라도 무작정 공격에 편승하고는 한다.

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는 나라를 빛낸 인물이지만 피해의식이 짙은 사람은 그를 추락시키고 싶어 하였다.

정상의 자리에 선 그가 추락하면 어떤 표정을 지을 것인가. 얼마나 절망할 것인가. 단순히 그것이 보고 싶어 그를 공격하는 것이다.

그리고 영웅이 추락한 모습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편승하여 그를 공격하는 것이다.

석규는 이것을 가만히 두고 보지 않았다.

침묵하는 동안 그는 무차별하게 현을 욕하는 사람들을 고소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일벌백계라는 말이 있다.

한 사람에게 벌을 줌으로써 백 명에게 경고를 한다는 뜻.

진정성이 담긴 다큐멘터리를 봤음에도 불구하고 무작정 욕을 한다는 것은 더 이상 대화가 불가능한 이들이란 뜻이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그들을 고소할 것이고, 하나도 빠짐없이 벌을 받게 만들 생각이다.

현은 언제나 대중들에게 친숙하면서도 우상시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타국에서는 몰라도 대한민국에서는 그렇게 되어야만 했다.

“그렇군요.”

“이번 일은 용서를 하지 않을 생각이다. 네가 용서해달라 하더라도.”

“저도 딱히 용서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네요.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저들은 절 증오하는 것 같으니까요.”

“네가 너무 높은 자리에 있기에 추락시키고 싶은 것이겠지.”

“그런 이유라면 좀 슬픈데요. 열심히 해서 올라선 이 자리에서 저를 끌어내리려 하다니.”

미소를 지었지만 그 속에 담긴 감정은 슬픔이었다.

결국 한 쪽이 박살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얼굴도 알지 못하는 상대방이 자신을 공격한다는 사실이 슬펐고, 자신이 앞으로 보호받기 위해서라도 그들을 처벌해야 한다는 사실이 슬펐다.

‘역시 세상은 다 같이 행복하기 힘들어.’

공산주의라.

공유재산제도를 통해 빈부차이를 없애려는 사상.

무엇보다 이상적이고, 아름다운 것이지만 이 제도는 결국 실패했다.

왜냐?

인간의 본성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한 체제이기에 그렇다.

모두가 함께 한다면 인간은 누군가 나 대신 한다는 생각과 함께 게으르고 나태해진다. 그리고 누군가가 자신보다 더 갖게 되면 그것이 싫어서라도 더욱 열심히 일을 하려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난 성악설을 믿는 건가?’

문득 거기까지 생각이 번져 나가자 자신이 성악설을 믿는 것인가 생각해본다.

엉뚱한 생각이었지만 지금 상황이 물고 늘어지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자신은 딱히 손해를 입힌 적이 없는데 결국 저들은 자신에게 이빨을 드러내고 물고자 하고 있었으니까.

“그래봤자 널 끌어내릴 수는 없지. 그 부분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내가 알아서 잘 처리해줄 테니까."

“예, 부탁드릴게요.”

창현이 그리 내키지 않는 것 같았기에 자신이 주도적으로 처리한다는 걸 강조해서 말하는 석규였다.

‘당분간은 스케줄을 촘촘하게 해야겠군. 검정고시가 끝나면 바로…….’

악플에 대해서 의연한 모습을 보이지만 아직 어린 나이다. 게다가 혼자 살기에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이기도 하다. 이는 자칫 잘못하면 우울증으로도 번질 수 있기에 스케줄을 촘촘하게 함으로써 그럴 생각의 여지를 없앨 생각이었다.

“검정고시가 끝나면 본격적으로 스케줄을 진행할까 싶은데.”

굳이 오래 끌 것 없이 곧바로 입을 여는 석규.

그 말에 창현이 무언가 생각이 난 듯 그에게 말을 한다.

“아, 그러고 보니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요.”

“뭔데 그러냐?”

“실은…….”

이어지는 창현의 말.

그 말을 들으면서 석규는 고개를 끄덕인다. 창현이 한 말은 3일 동안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시간을 비워달라는 말이었고, 하루는 아예 스케줄을 비워 달라 말하고 있었다.

“어렵지 않다. 그런데 갑자기 왜?”

시일이 상당히 남아있기에 비우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왜 비워 달라는 것인지 궁금했다.

“그게 그러니까…….”

잠시 머뭇거리던 창현이 설명을 하기 시작한다.

그 이야기를 들은 석규가 웃음을 터뜨린다.

“하하하! 그런 것이냐? 그것도 재미있겠군. 그런데 자신 있나? 그렇게 비워 달라고 할 만큼 만만한 곳이 아닐 텐데?”

“곧 보여드릴게요.”

입가에 미소를 씨익 짓는 창현이었다.

‘휴우! 그래도 풀린 것 같군.’

창현이 다소 밝아진 것 같아 석규는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다큐멘터리로 어느 정도 일단락이 되고, 계단 춤에 대한 논란도 서서히 사그라 드는 기미를 보였다.

계속해서 논란이 될 수 있었지만 논란이 점점 사라진 이유는 유투브 같은 곳에 많은 사람들이 계단 춤을 흉내내기 시작했다는 점과, 얼마 전 촬영을 마친 패밀리가 떴다 측에서 공식적인 보도로 촬영 중 아무 장치 없이 시골집 마당에서 계단 춤을 펼쳤다고 했기에 그렇다.

서서히 논란이 줄어들면서 다시 한 번 강타한 것은 AA엔터테인먼트 측에서 무분별한 악플을 단 악플러들을 고소하고 나서겠다는 소식을 보도하였기 때문.

이에 다시 한 번 연예 기사란은 현의 소식으로 뒤덮이기 시작하였고, 현을 욕한 적이 있는 사람들은 뜨끔하여 가슴을 졸여야만 했다.

그 사이 현은 검정고시 준비를 위해 막바지 박차를 가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틀 뒤에 창현이가 검정고시를 본다고 하네.”

“그래? 얼마 안 남았구나.”

순규가 마우스 휠을 주르륵 내리며 검정고시 일시를 확인하자 그 뒤에 선 수영이 대답한다.

“아무래도 지금 공부하느라 바쁠 테니 응원 문자를 하는 게 낫겠지?”

“그렇지 않을까?”

“으음!”

응원 여부를 놓고 고민하는 두 소녀.

뮤직비디오 촬영을 함께 한 수연조차 창현을 최근에 본 것이 한 달이 넘어가니 다른 소녀들이 창현을 본 것은 그보다 훨씬 길다. 그렇기에 그녀들 대부분 창현을 보고 싶은 것이 개인적인 생각.

그래서 그런지 얼마 전 단체 문자를 보낸 사건도 흐지부지 묻혀버린 지 오래였다.

‘뭐 나야 한 수가 있으니까.’

순규는 숨겨둔 한 수가 있다 보니 적잖게 여유가 있었지만 수영은 달랐다.

그녀는 무언가 다급한 듯 입술을 지그시 깨물면서 검정고시가 시작되는 날짜를 살피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순규가 피식 웃음을 짓더니 말한다.

“조만간 내가 창현이를 보게 해줄까?”

“창현이를 어떻게?”

“그건 애들이 다 오면 이야기해주도록 할게. 다짐받을 것도 하나 있고.”

도대체 무엇이기에 볼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일까.

수영은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순순히 대답해주지 않을 것 같아 결국 입을 다물고 멤버들이 다 모일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멋진 제안이 있다 들었어.”

멤버들이 모두 모인 야심한 시간.

소녀들은 거실에 집합하여 둥글게 둘러앉았다.

최근 폭군 싴을 밀어내고 정권을 차지한 태연이 체구가 작은 주제에 가장 넓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반면, 전 정권자이자 이제는 싴순이가 되어버린 수연은 막내인 윤아와 주현 사이에 끼어 가장 좁은 자리에 앉아야만 했다.

무척 불만스러운 기색이었지만 유감스럽게도 이곳에 그녀의 아군은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다.

그저 입을 다물고 상황이 돌아가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내가 어째서!’

순간 삐끗했을 뿐인데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한없는 추락이었다.

그 점이 너무나 억울한 수연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자신을 수시로 갈구는 저 뻔뻔한 짜리몽땅 탱구를 밀어내고 원래 자리를 되찾고 싶지만 그녀의 좌우에는 대한민국을 뒤집을 수 있는 참모진이 포진되어 있었고, (좌 유리 우 미영) 자신을 시시각각 감시하는 장로진(순규, 효연, 수영)이 포진되어 있으며, 무력과 비밀병기가 그녀를 보호하고 있다. (윤아, 주현)

아무리 강한 포스를 지닌 자신이라 하더라도 여덟 명은 무리였다.

게다가 요즘 들어 멤버들이 점차 얼음 포스에 익숙해져 가는 상태여서 더욱 절망적이었다.

수연이 속으로 무엇을 공모하건 말건 소녀들은 그에 신경 쓰지 않고 순규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입가에 묘한 미소를 띤 순규가 태연을 바라보더니 입을 연다.

“원래는 내가 부탁하려고 했는데 상황이 조금 달라질 것 같네. 우선 내가 이번에 삼촌에게 부탁을 하나 하려고 하는데, 그 부탁이 창현이와 관련이 있는 거거든.”

“뭔데?”

오만한 순규의 모습에 태연이 욱했지만 그 감정을 억누르며 묻는다.

그 물음에 순규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한다.

“며칠 후에 말이지…….”

서서히 열리기 시작한 순규의 말. 그 이야기를 듣는 소녀들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태연이 자리에서 확 일어서면서 외친다.

“네가 어떻게!”

“후후! 뭐가 잘못되었나? 난 그저 순수한 의미로 함께하는 것뿐이야.”

욱한 태연과 달리 순규는 여유로움 그 자체였다.

그 모습을 보는 태연의 표정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설마 순규가 이런 술수를 부려놓을 줄 몰랐던 것이다.

그녀를 여유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순규가 묻는다.

“어때, 태연 양? 만약 오지 않겠다면 말리지 않을게.”

“크으으…….”

한 방 먹은 표정을 지으며 신음을 흘리는 태연이었다.

이건 선택이고 자시고, 자신들에게 처음부터 선택권이 없는 문제였던 것이다.

순규의 간악함에 몸을 부들부들 떠는 태연이었다.

권력자로 등극한 뒤 종종 텃세를 부리던 태연이었기에 순규는 그녀의 분한 표정을 즐거움으로 받아들였다.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다른 의견 있어? 빠질 사람은 빠져도 좋아.”

“…….”

빠질 사람이 있을 리 없다. 단체로 빠진다면 모를까, 개별적으로 움직인다면 그녀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각개격파뿐이다.

“후후후!”

자신의 뜻대로 돌아가는 상황이 마음에 들었는지 입가에 미소를 짓는 순규였다.

모든 것은 그녀 뜻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한 가지 더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

모든 멤버들의 동의를 얻어 합의를 본 뒤, 순규가 한 마디 더한다.

“뭔데?”

순규의 의도에 맥없이 말려서 기분이 저기압인 태연이 묻는다.

그 물음에 순규는 어깨를 살짝 으쓱하며 말한다.

“얼마 후 창현이가 검정고시를 보잖아. 그에 관련된 말을 하려고 그런 거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뭔가 불길한 느낌이 들어 순규를 빤히 바라보는 태연.

그녀의 시선을 즐기듯 느끼며 순규가 입을 연다.

“아마 여기에 몇 명은 생각하고 있을 거야. 검정고시를 잘 보길 바란다면서 선물을 가져갈 생각을.”

“…….”

몇몇 소녀들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순규의 말처럼 창현의 검정고시 순항을 기원하며 그것을 구실로 만날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부처님 손바닥 안이지.’

속으로 미소 짓는 순규.

먼저 만나게 되면 자신의 입지가 줄어드는 것도 있고, 연적들을 활개 치게 놔둘 생각도 없었다.

공동 계약으로 묶어 누구도 만나지 못하게 조치를 취해놓으면 결국 이익을 보는 것은 자신이다.

그 작업을 위해 순규는 지난 며칠 동안 머리를 끙끙 싸매고 계획을 세워야만 했다.

‘내가 미영이나 유리였으면 금방 세웠을 텐데. 으이구!’

빠르게 계획을 세우지 못하는 자신의 머리가 원망스러웠지만 지금 계획을 완성하였기에 상관없다.

짐짓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그러니까, 너희들, 창현이가 한창 검정고시 준비 중인데 찾아갈 생각이었던 거야? 창현이 공부 집중 못하게?”

강력한 일격.

자신들의 방문이 공부에 방해가 된다는 사실을 듣자 소녀들은 순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리고 만다.

“…….”

“어쨌든 응원은 문자로 간략하게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해. 검정고시를 본 뒤에 얼마든지 축하해줘도 되는 거고. 내 말이 틀려?”

“아니, 네 말이 맞는 것 같아.”

“나도 그런 거 같아.”

동의하고 나선 사람은 다름 아닌 유리와 미영이었다.

두 사람은 순규가 무엇을 계획하고 있는지 눈치 채고 동의를 표한 것이다.

그러자 대세는 순식간에 기울기 시작했다.

“창현이 공부 방해하지 않기야. 알겠지?”

“알았어.”

“그래.”

순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는 소녀들이었다.

단 한 사람만은 속으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채로.


다음 날, 이른 아침.

은밀히 숙소를 벗어나는 한 사람이 있었다.

아직 더운 여름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후드티를 입고 푹 눌러쓴 이의 정체는 다름 아닌 수영이었다.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기면서 그녀는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애들은 창현이를 너무 얕본단 말이야.”

전날, 멤버들과 함께 창현이를 방해하지 않기로 협약을 맺었다.

하지만 수영은 창현을 방해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단지 선물을 전달하려고 할 뿐.

“그 정도로 집중력이 깨질 창현이가 아니잖아? 게다가 아주 잠깐, 아주 잠깐 방문하는 건데, 뭐.”

절대 극강의 집중력을 자랑하는 창현이 잠깐의 방문을 한다 하여 집중력이 흐트러진다?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는 수영이었다.

만약 그 방송을 보기 전이라면 수영도 최대한 자제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방송에서 본 창현은 자신의 의지대로 집중 여부를 정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창현이의 다큐멘터리를 보지 않았더라면 나도 가지 않을 뻔했지.”

그러다 무언가 떠올랐는지 수영이 이를 부득 간다. 어제 있었던 일이 떠올랐던 것이다.

지략 캐릭터가 아닌 그녀였지만 곰곰이 생각해본 결과 왜 창현과 만나지 못하게 하려는지 알 수 있었다.

순규가 공동 협약으로 묶은 이유는 뻔하다.

“자기의 발언권을 더욱 높이려고 하는 걸 테지.”

공동으로 협약이 된 이상, 멤버들이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는 체제가 이뤄진다. 수영이 이렇게 빠져나올 수 있던 것은, 아직 완전히 탈피되지 않은 식신 캐릭터를 활용하여 먹을 것을 사오겠다 말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여전히 식신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거짓말을 했다는 찜찜함도 없었다.

“왜냐하면 난 거짓말을 한 게 아니니까.”

창현에게 선물을 전달한 뒤 정말 마트로 가서 먹을 것을 사서 들어갈 생각이다. 이렇게 되면 자신은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고, 단지 창현을 만나러 갔다는 것을 생략했을 뿐이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는 수영이었다.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며 점점 작업실이 있는 곳에 가까워지니 그녀는 급 고민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창현이한테 뭐라고 말하지?”

만날 수 있는 시간은 짧기에 되도록 짧지만 임팩트 있는 말을 해주어야 한다.

단순히 시험 잘 봐, 이러면 영양가가 없지 않은가. 좀 더 임팩트 있고, 기억에 남을 수 있으며, 그에게 유익한 말을 해주는 것이 좋다 생각하였다.

“뭐가 있을까. 날 생각하면서 잘 봐? 이건 너무 낯간지럽고, 그럼 평소 해온 대로 열심히 해? 이것도 너무 무난한데…….”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는 수영.

그 사이 그녀는 창현의 작업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사전에 연락을 하지 않았지만 다큐멘터리를 보았기에 그녀는 확신하고 있었다.

지금 이 시간 창현이 작업실에 나와 공부하고 있는 중이란 것을.

“후웁!”

크게 숨을 들이쉰 수영이 그대로 손을 뻗어 작업실 초인종을 누른다.

띵동.

초인종을 누른 뒤 수영은 인터폰에서 자신을 볼 수 있도록 앞에 선다.

잠시 후, 건너편에서 창현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수영 누나? 갑자기 무슨 일로 찾아온 거예요?

‘예스! 역시 있었어!’

창현의 목소리가 들리자 수영은 속으로 환호성을 지르며 목소리를 깔아 대답한다.

“으응, 창현아, 잠시만 나와 줄 수 있어? 공부 방해 되지 않도록 아주 잠깐만 시간을 내주면 되는데…….”

-알았어요.

어렵지 않은 듯 대답과 함께 창현이 문을 열고 고개를 빼꼼 내민다.

“갑자기 무슨 일이에요?”

그의 얼굴을 보게 되자 수영은 무척 기뻤지만 오늘은 함께 만나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닌 그를 격려하기 위한 선물을 건네주기 위한 자리였다.

“차, 창현아! 이거!”

자신이 준비한 선물을 대뜸 창현에게 내미는 수영.

막상 말을 하려니 머리가 새하얗게 변해서 준비했던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자신이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 어떻게 하면 창현이가 자신에게 좀 더 고마움을 느끼고, 마음 속 깊은 곳에 각인이 될지 다 잊어버렸다.

결국 수영은 나오는 대로 말하고 말았다.

다른 의미로 아주 강력한 임팩트가 남고, 창현이 영원히 잊지 않을 말을.

“엿 먹어!”

‘헉!’

수영의 말에 할 말을 잃은 창현이었고, 말이 잘못 나온 수영은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어떡해! 어떡해!’

속으로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하는 수영.

방금 전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로 인해 당황한 그녀는 머리가 하얗게 비어버리는 기분이었다.

그 많은 말들 중에서 하필이면 엿 먹으라는 말이라니.

‘요놈의 주둥이!’

평소에는 매끄럽게 작동하다가 가끔씩 오작동을 일으켜 급발진하는 차 마냥 날뛰는 자신의 입이 원망스러운 수영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자리한 무거운 침묵.

그 침묵이 마치 오늘 이후 벌어질 거리 마냥 수영에게 멀게 느껴졌다.

어떻게 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을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수영은 끝내 입을 열지 못했고, 먼저 분위기를 해소하고자 입을 연 것은 다름 아닌 창현이었다.

“누나는 농담도 참.”

다소 어색한 미소와 함께 꺼내지는 그의 말. 어색한 태도였지만 수영은 그 말이 너무나 고맙게 느껴졌다.

“으응, 농담이었어. 그런데 너무 굳어버려서 나까지 놀라버렸네. 하하, 하하하…….”

어떻게든 무마하고자 하는 마음이 발현되어 창현에게 말하는 수영.

그 말을 들은 창현은 어색함을 풀며 말한다.

“그런 거였어요? 갑자기 그런 말을 해서 굳어버렸지 뭐에요.”

“미안 미안. 내가 너무 성급했네. 강한 이미지를 준다는 게 말이 헛 나왔어.”

쿨한 척하며 말하지만 속으로는 조마조마함의 연속이었다.

검정고시를 축하해주겠다고 해놓고 뜬금없이 엿 먹어라고 말했으니 얼마나 당황했던 것인가. 자칫 이번 일로 사이가 어색해져도 뭐라 변명할 수 없을 것이다.

“이거 검정고시 잘 보라는 의미로 주는 선물이야, 받아.”

“내용물은 엿이겠죠?”

엿이 있으니 엿 먹으라 한 거 아니겠는가? 만약 아니라면 놀리려고 한 말일 테지.

“응. 주현이 말을 들어보면 창현이 너 공부 엄청 잘했다고 하던데?”

은근슬쩍 화제를 돌리려는 수영이다. 아무래도 엿 먹으라 한 것 때문에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제법 많았다. 그렇기에 화제를 돌려 주위를 환기시키고자 했다.

창현도 그 기색을 읽었는지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젓는다.

“그다지 잘하지는 못했어요.”

“잘하지 못했다고? 주현이 말이랑 다르네. 어느 정도 했었는데?”

“음… 그냥 잘하는 편이었어요.”

“말을 해봐. 몇 등이었는데.”

대답을 해주지 않자 더욱 흥미가 동하여 창현을 재촉하는 수영.

그 물음에 잠시 머뭇거리던 창현이 대답한다.

“3등에서 5등 정도 했어요.”

“뭐? 3등에서 5등? 그 정도면 엄청 잘하는 거잖아! 주현이 말을 들어보면 대충 한 학년에 300명인데 반에서 3등 5등 할 정도면 전교에서 20등 안에 들어간다는 이야기 아니야!”

자신이 한 번도 이뤄보지 못한 엄청난 성적을 이뤄내고서 별로 잘하지 않았다는 말을 하다니!

엿 먹어 쇼크를 잊어버린 채 버럭 소리를 지르는 수영이었다.

그녀의 외침에 어색한 미소를 지은 창현이 말한다.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면 뭔데? 이씨! 우리 멤버들 중에서 가장 똘똘한 주현이도 반에서 10등 내외였는데! 이런 말도 안 되는!”

노래도 잘하고 작곡, 작사도 잘하고, 잘생기고, 운동도 잘하고!

거기다가 공부까지 잘하다니.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스펙이란 말인가.

괜히 대단하게 느껴져 더욱 멀어 보이는 창현이었다.

그리고 엄청난 성적에 질투심이 폭발하여 자신도 모르는 사이 열폭을 하고 있었고.

“그게 아니라, 누나가 말한 곳에서 3등 5등 한 게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고?”

순간 굳게 입을 다물고 창현을 바라보는 수영. 이내 그녀의 눈썹이 꿈틀 떨리기 시작하더니 입가가 파르르 떨리기 시작한다.

창현이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 깨닫고 있던 것이다.

“서, 설마 반에서 3등 5등 한 게 아니라 전교에서?”

“…네.”

콰과과광!

전교에서 3~5등 사이에서 놀았다는 말에 수영은 머릿속에서 벼락이 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잠시 비틀거린 그녀는 창현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고개를 홱 돌리며 말한다.

“…나 갈게. 괜히 걱정했네.”

그녀의 머릿속에서 행여나 창현이 검정고시에 떨어질 거란 불안함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아니, 오히려 그러한 걱정을 한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괜히 그녀를 토라지게 만든 것 같아 창현은 미안한 마음을 담아 말한다.

“엿 고마워요. 잘 가요, 누나.”

“으응.”

사과한다고 또 그 말을 듣고 금방 풀어지는 수영이었다.

아무래도 그녀는 연애의 정석(?)인 밀고 당기기를 하기가 힘든 타입인 것 같았다.


“최수영! 왜 이렇게 늦었어.”

“미안미안, 뭐 살지 고민하다 보니 늦었네.”

창현에게 선물을 건네주고, 마트로 가서 부랴부랴 먹을 것을 사온 수영은 멤버들에게 타박을 들어야만 했다.

물건 사는 시간과 왕복 시간이 총 30분 정도 밖에 걸리지 않는 곳을 한 시간이나 걸려서 갔다 오니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너무 늦었잖아! 어디 다른 곳으로 샌 거 아니야?”

사도 계략가 유리의 날카로운 추궁에 수영은 눈썹을 꿈틀 떨더니 유리에게 버럭 소리를 지른다.

이럴 때는 방귀 뀐 놈이 성낸다의 법칙을 그대로 활용하는 것이 좋다.

“다른 곳으로 샜으면 내가 이 몰골로 가겠냐! 계속 추궁할 거면 넌 먹지 마!”

“내가 언제 안 먹는다고 했어.”

화내는 수영의 모습에 힐끔 그녀의 눈치를 보며 조용히 봉다리로 향하는 유리였다.

아직 아침 시간이었기에 좀비 같은 몰골을 한 채 봉지로 향하는 소녀들.

주섬주섬 간식들을 챙기는 멤버들을 보던 수영은 문득 소파에 앉아있는 효연을 발견하고는 묻는다.

“효연아, 넌 안 먹어?”

“난 그냥. 그런데 수영아, 즐거웠어?”

“뭐, 뭐가?”

순간 뜨끔한 수영이 말을 더듬으며 묻자 입가에 걸린 미소가 더욱 짙어진다.

그녀는 여유로운 미소를 유지한 채 지나가는 말로 수영에게 말한다.

“배가 조금 볼록해진 것 같은데?”

“……”

할 말을 잃은 수영이었다.

그녀가 지적한 배는 다름 아닌 자신이 창현에게 줄 선물을 숨겨두었던 곳이었던 것이다.

설마 자신이 선물을 전해주러 간 것을 알게 된 것일까.

아니, 아직 모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수영은 잡아 떼었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네.”

“그래? 배에다가 소중하게 포장된 무언가를 들고 나가던데. 내 생각에는 아마도… 읍읍!”

무언가를 말하려던 효연은 긴 다리로 단숨에 거리를 좁힌 수영에게 입이 봉해졌다.

답답한 듯 몸을 뒤트는 효연의 눈을 바라본 수영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한다.

“우리 잠깐 이야기 해.”

끄덕끄덕.

수영의 말을 들은 효연이 고개를 끄덕이자 두 사람은 조용히 방으로 들어간다.

그 사이 다른 멤버들은 좀비 같이 흐느적거리며 봉지에 담긴 음식 지분을 나누느라 치열한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아무도 효연과 수영이 은밀하게 사라진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찰칵.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야.”

문을 잠근 수영이 효연을 바라보며 묻는다. 그녀의 표정은 무표정하여 멤버들이 상당히 무서워하는 종류의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효연은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지금 칼자루를 쥐고 있는 것은 자신이지, 수영이 아니었다.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배에 무언가를 숨기고 가서 마트 근처에 있는 누군가한테 줬다거나?”

“윽!”

정곡을 찌르는 효연의 말에 비틀거리며 신음을 흘리는 수영이었다.

모두의 눈을 피해 빠져나갔다 생각했는데 설마 효연의 눈에 걸릴 줄이야.

초딩 기질이 있는 그녀는 가장 골치 아픈 상대 중 한 명이었다.

“원하는 게 뭐야?”

“내가 원하는 게 있을 것 같아?”

“애들한테 폭로하지 않고 날 따라왔다는 건 무언가 바라는 게 있다는 거 아냐?”

“그렇게도 해석이 되는군.”

입가에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효연. 사실 그녀는 확신하지 못하고 두리번거리며 혼자 빠져나가려는 수영의 모습에 혹시나 하고 찔러본 것인데 그녀의 반응은 효연으로 하여금 확신을 얻게 해주었다.

“원하는 게 뭐야. 어서 말해.”

이 사실을 모르는 수영은 완전 범죄가 가능했을 법한 순간이 물거품이 되자 속으로 조마조마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가 입을 벙긋하는 순간 자신의 운명은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라 알고 있기에.

‘수연이처럼 될 수는 없어.’

전대 권력자 수연이 막내 주현보다 못한 취급을 받고 있는 걸 보았기에 수영은 효연의 입을 막아야 한다는 조급증을 느꼈다.

“지금 딱히 원하는 건 없어. 그러니 부탁 하나를 킵 해두도록 할게. 어때?”

“좋아, 나도 일이 알려지길 바라지 않으니까.”

흔쾌히 계약에 응하는 효연을 보며 수영은 무언가 자신이 손해 본 느낌이 강하게 들었지만 일이 이렇게 해결되었다는 것에 만족했다.

효연은 다급해 보이는 수영의 모습에 미소를 지었다.

‘하나하나 공략을 시작하는군. 점점 재미있게 되는 걸.’

방관자 같은 모습을 취하는 효연.

태연이 창현을 공략(?)하는 것도 보았고 다른 멤버들이 움직임을 보이는 것도 보았다.

모두 제각각의 방법으로 공략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뭔가 기분이 찜찜하네.’

자신은 방관자 입장에 서 있는데 기분이 왜 이런 걸까.

가슴 속에 무언가 불편한 느낌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는 것을 그녀는 그저 기분 탓이라 치부하고 있었다.

그 감정이 그녀도 모르는 사이 생겨난 질투의 감정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창현의 하루하루는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이대로 가면 검정고시에 합격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듯 싶었다. 원래 중학교에서 기초를 탄탄하게 다져놓았고,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않으면서 인터넷 강의와 문제집 등으로 꾸준하게 실력을 길렀으니까.

남들이 3년에 걸쳐 배우는 사회 탐구 영역에서 다소 약한 모습을 보이겠지만 자신 있는 과목들을 집중적으로 파고들었기에 낙제점을 받지는 않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몇몇 과목은 만점 받을 자신이 있었다.

“과분하게 사랑을 받네.”

작업실에 쌓인 선물을 보면서 중얼거리는 창현.

그가 검정고시를 본다는 소식이 전해짐에 따라 매일같이 선물이 배달되고 있었다.

특이한 것은 예전에 선물하던 사람들이 10대 20대 여성층이었다면 이번에는 30대 40대 주부층이 비약적으로 늘었다는 것.

금요일 저녁 시간대와 토요일, 일요일에 방영되는 음악 프로그램에서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할 강렬한 퍼포먼스를 펼치며 여심을 뒤흔드니, 주부층 마음도 뒤흔드는 효과를 나타낸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전에 드라마를 촬영한 것이 효과를 발휘하여 그 파괴력은 더욱 강해지고 있었다.

10대 20대 여성층은 용돈을 털어 합격을 기원하는 엿이나 휴지, 포크 등 각종 물건들을 보내왔고, 30대 40대 주부층은 각종 보양식들을 보내고는 하였다.

그것들이 배달될 때면 자신이 정말 과분한 사랑을 받고 있구나 생각하는 창현이었다.

“이런 생각도 여유가 있으니까 가능한 거겠지.”

솔직히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것도 생활에 여유가 있어서 가능한 것이라 생각한다.

만약 자신이 돈에 쫓긴다면?

이런 여유도 발휘하지 못했을 테지.

하지만 자신은 과분하게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관심을 받고 있다.

자만할 수도 있지만 이것이 한순간의 삐끗함으로 모조리 사라질 수 있다니 자만보다는 오히려 더욱 조심해야겠다는 마음이 강해진다.

선물꾸러미를 뒤적거리는 창현.

보내온 선물에는 대부분 편지가 함께 동봉되어 있다.

이것들은 읽고 물건에는 가급적 손을 대지 않는다.

마음만 먹으면 이런 보양식이나 물건들은 얼마든지 구입이 가능하다.

자신이 얻는 것은 이러한 물질적인 것이 아닌, 자신을 위해주는 팬들의 마음이었다.

편지들은 하나하나 읽어보고, 물건들은 따로 분류를 하여 기부를 한다.

이것은 발렌타인 데이 때 처리 불가능한 초콜릿들을 기부하면서 시작되었는데, 현에게 선물을 보내는 팬들 또한 이것이 대부분 기부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이 현을 더 좋아하는 것이기도 하니까.

“일단 보양식들은 양로원 같은 곳에 보내면 좋을 것 같고, 엿이나 찹쌀떡 같은 건 아무래도 아이들이 좋아하겠지. 유통기한이 짧은 것들부터 먼저 처리하기로 하고…….”

차곡차곡 물건들을 분류한 뒤 가볍게 한숨을 돌린다.

굳이 자신이 하지 않아도 될 일이지만 하는 이유는 무슨 선물을 보냈는지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고, 직접 분류하면서 편지를 읽는 재미도 제법 쏠쏠하였다.

약 두 시간 정도 그렇게 분류를 한 뒤 다시 자리에 앉아 복습을 한다.

내일이 검정고시인 만큼 이제 와서 공부를 하는 것은 늦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여태까지 공부한 것들을 되돌아보고, 사소한 것에서 실수하지 않도록 주의력을 분산시키지 않는 것이었다.

“갑자기 이게 헷갈리네.”

가장 난관이 되는 것은 수리 영역이었다.

다양한 문제 형태가 있고, 함정들도 있기에 머리를 굳히고 있으면 문제의 답이 오리무중이 되어버린다.

머리가 굳어 있으면 안 되고 늘 창의성이 있어야 해야 할까?

어딘가 하나에 답을 얻으면 그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성질이 있어 이것이 가장 골치 아픈 문제 중 하나였다.

“일단 그렇게 어렵지는 않다니까…….”

그것을 위안으로 삼는 창현이었다.


복습하는 시간이 끝나고, 마침내 검정고시를 보는 당일이 되었다.

아침 일찍 일어난 창현은 준비를 마치고 참고서를 한 번 훑어보는 시간을 갖고 있을 때였다.

띵동띵동.

요란하게 울려 퍼지는 벨소리.

조용히 거실에서 책을 보고 있던 창현은 의아한 표정을 지은 채 시계를 바라본다.

“아직 세희 누나가 올 시간이 아닌데?”

검정고시를 보는 중학교까지 8시 40분까지 입실하면 되기에 넉넉하게 8시에 찾아오기로 하였다. 그런데 아침에 벨이 울리니 그로서는 의아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창현이 인터폰을 살피더니 눈을 크게 뜨며 빠르게 문으로 달려간다.

그러자 재빠르게 안으로 들어온 소녀가 말한다.

“오빠! 오늘 시험이라며.”

“응. 그런데 일찍 왔네?”

창현의 집을 방문한 사람은 다름 아닌 지영이었던 것이다.

눈을 빛내고 있는 지영은 양손에 꼭 쥔 것을 창현에게 내민다.

“이건 오빠 꼭 합격하라는 의미에서 주는 선물!”

지영이 내민 것은 다름 아닌 찹쌀떡이었다.

그것을 받으며 의아한 눈빛을 보내자, 지영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들더니 찹쌀떡 위에 콕 찍는다.

다름 아닌 포크였다.

“자, 이걸로 푹푹 찍어서 먹어. 그리고…….”

가방을 뒤적거리며 두루마기 휴지를 꺼내든 지영이 상 위에 올려놓는다.

합격에 좋다는 물건은 총동원해온 듯했다.

“하하.”

“오빠! 찹쌀떡 바로 먹어야 해. 내가 오빠 먹이려고 어렵게 사왔어.”

“알았다, 알았어.”

자신을 생각해주는 마음에 창현은 기분이 무척 유쾌해지는 걸 느꼈다.

제법 긴장하고 있었는데 지영의 모습을 보니 한순간 부담감이 날아간 기분이었던 것이다.

지영의 채근에 포크를 들어 찹쌀떡을 먹는 창현. 아침을 먹어서 많이 먹지는 못했지만 동생의 성의를 생각하니 먹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오빠라면 꼭 붙을 거야.”

“붙는 게 문제가 아니야.”

“응? 그게 무슨 말이야?”

창현의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묻는 지영.

그녀의 표정에 창현이 피식 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너 오빠가 공부를 좀 했다는 걸 잘 모르고 있구나?”

“모르긴! 내가 엄마한테 그것 때문에 얼마나 꾸지람을 듣고 있는데.”

표정을 와릭 일그러뜨린 지영이 재잘재잘 신세 한탄을 하기 시작한다.

뛰어난 오빠를 둔 죄로 그녀는 시시때때로 갈굼을 받는 가련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 지선은 늘 창현을 예로 들어 그녀의 성적을 꾸짖었고, 그로 인해 지영은 알고 싶지 않아도 창현의 성적을 알 수밖에 없었다.

가수 생활을 하면서 전교권에 노는 말도 안 되는 성적이라니.

그 점이 무척 마음에 들지 않는 지영이었다.

“검정고시 커트라인 자체는 높지 않아. 다만 열심히 했으니 높은 점수를 노릴 뿐이지.”

“어느 정도를 노리는데?”

“음, 응시과목 절반은 만점을 노린다랄까?”

“우웩! 뭐야! 그럼 합격은 따놓은 당상이라는 거잖아!”

행여나 창현이 떨어질 수도 있어 얼마나 노심초사하며 찹쌀떡이며 포크며, 휴지를 가지고 왔는데!

왠지 모르게 허탈해지는 지영이었다.

“방심은 할 수 없지. 어쨌든 최선을 다할 생각이야.”

“오빠라면 어렵지 않겠지.”

무한한 믿음을 보여주는 지영.

그녀를 잠시 바라보던 창현이 시계를 힐끔 보더니 지영에게 말한다.

“음, 지영이 너도 오늘 학교 좀 늦게 가지?”

“응? 아무래도 그렇겠지.”

학교를 늦게 가도 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일찍 온 지영이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창현이 그녀를 타박하며 말한다.

“굳이 일찍 올 필요가 없는데 그랬어. 그럼 집에 좀 쉬었다 가. 왠지 일찍 온 것 같더라니.”

“헤헤헤!”

지영은 어색하게 웃음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보며 창현은 피식 웃음을 지었고.

자신을 이렇게 응원해주는 사람이 있으니 더욱 큰 힘이 되는 것 같았다.

지영이 찾아와서 한 번 훑어보던 참고서를 보지 못하게 되었지만 그것도 상관없다.

오히려 지영의 방문으로 굳어 있는 마음이 풀려버리는 계기가 되었으니까.

지영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창현.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듯 주제가 악플 쪽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악플러들! 본때를 보여줘야 해. 감히 오빠를 사기꾼으로 몰다니!”

주먹을 불끈 쥐며 말하는 지영의 모습에 창현이 피식 웃음을 짓는다.

“사람마다 시각이 다른 법이지. 어쨌든 아버지가 알아서 다 처리해준다 하셨어.”

“아빠가 오히려 나보다 더 가혹할 텐데. 그 악플러들 아마 고생 좀 할 걸? 내가 아무리 달아도 결국 오빠를 욕하는 게 목적인 것들이더라고.”

“그런 사람들이 있는 법이지.”

그러다 핸드폰이 울리자, 창현이 전화를 받았다.

“세희 누나네. 여보세요? 네, 누나. 도착하셨다고요. 알았어요. 곧장 내려가도록 할게요.”

통화를 끝낸 창현이 지영을 바라보며 말한다.

“지영아, 그럼 난 이만 가보도록 할게. 좀 쉬다 학교에 가.”

“응, 알았어. 시험 잘 봐야 해.”

“그래.”

대답과 함께 집을 나서는 창현.


“표정이 생각보다 밝네?”

검정고시에 대한 부담이 생각보다 커보이던 창현이 의외로 밝은 표정을 하고 있자 세희가 궁금한 듯 묻는다.

그 말에 창현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한다.

“글쎄요, 행운의 요정이 방문했다고 할까.”

“행운의 요정? 표현도 참. 어쨌든 열심히 했으니 잘 볼 거야.”

“그러길 바라야죠.”

부르릉.

창현을 태운 벤이 검정고시가 시작되는 곳을 향해 출발하기 시작했다.


검정고시가 열리는 학교 분위기는 한마디로 무거움 그 자체였다. 일 년에 단 두 번밖에 없는 기회이니 만큼 긴장감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저마다 각자의 사정을 담아, 치러지는 검정고시장의 분위기는 여느 때처럼 묵직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한 대의 벤이 등장하기 전까지.


창현이 검정고시를 보기 위해 향한 곳은 같은 구내에 있는 중학교였다.

원래 그가 다니던 곳에서 한 동 떨어져 있는 여자 중학교.

검정고시를 보기 위해 사람들의 발걸음이 이어지던 이곳에 한 대의 벤이 진입하고 있었다.

한 눈에 보아도 연예인이 타고 다닐 법한 벤이었다.

그 벤을 발견한 사람들이 눈을 빛내더니 수군거리기 시작한다.

“저거 봐봐.”

“연예인이 타고 다니는 벤 아니야?”

“연예인? 연예인 중에 누가 검정고시를 보나?”

“그러고 보니…….”

벤을 보고 수군거리던 사람들은 연예인 중 한 사람이 검정고시를 보겠다고 말한 것이 떠올랐다. 그는 국내에서 감히 적수가 없는 절정의 인기를 누리고 있으며, 모든 좋은 면을 두루두루 갖추고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결정적으로 그는 이곳 근처에 살고 있다 알려져 있다.

사람들의 추측이 진행될 무렵, 운동장 깊숙하게 진입하여 주차한 벤의 문이 열린다.

드르륵.

열린 문틈으로 한 사람이 사뿐하게 내려선다.

그 모습을 확인한 사람들의 입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온다.

벤에서 내려선 인물은 다름 아닌 현이었던 것이다.

꺄아아아아!

현이다! 현이다!

운동장이 떠나가라 외치며 우르르 몰려드는 사람들. 그 숫자는 많지 않았지만 그 기세는 사뭇 매서웠다.

순식간에 십여 명의 사람들이 벤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

창현이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안에 있던 세희가 밖으로 나오며 큰 목소리로 외친다.

“잠시만요!”

“……!”

그녀의 외침에 멈칫하는 사람들. 세희는 그들을 한 차례 둘러보고는 말한다.

“오늘 현은 검정고시 응시자로서 이곳에 온 것입니다. 반가운 마음이 들겠지만 오늘 그의 신분은 연예인이 아닌, 한 사람의 응시자. 반가워하는 마음까지는 어쩔 수 없지만 조금 배려를 해주시면 고맙겠어요. 여러분들의 지나친 관심이 자칫 현에게 안 좋은 결과를 낳을 수 있으니까요.”

담담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으로 파고드는 말이었다.

세희의 말에 압도된 사람들이 뒤로 주춤 물러서자, 창현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한다.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니 사람들은 더 이상 뭐라 할 여지가 없었다. 세희와 창현의 태도는 정중했고, 충분히 이해가 될 만한 것들이었으니까.

저 멀리서 사람들이 창현을 발견하고 다가오기 시작하자, 세희가 시간을 확인하더니 말한다.

“늦지 않았으니까 잘 찾아서 올라가도록 해.”

“알았어요.”

“여기 가방.”

참고서가 든 가방까지 받아든 창현은 사람들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더니 그대로 후다닥 건물 안으로 들어선다. 그러자 밖에서 와! 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개의치 않고 자신이 시험볼 장소를 찾기 시작했다.

복도를 거닐던 사람들은 창현을 보고 흠칫하고 화들짝 놀라기 일쑤였다. 다만 건물 안이었기에 함성은 지르지 않고 조용히 다가와 싸인을 부탁했을 뿐.

싸인을 해주면서 창현은 교실을 물어보았고, 그곳을 향해 움직였다.

다만 그를 발견한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며 싸인 공세가 심각해지자 나중에는 양해를 구하고 검정고시장으로 향했다.

드르륵.

교실에 도착한 창현이 문을 열자 담당 선생님이 벌써 교실 안에 들어와 있었다.

혹시 자신이 늦은가 싶어 시간을 확인하니, 아직 시험 시간이 아닌 8시 50분이었다.

창현은 다시 한 번 시간을 확인하고는 그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짓는 담당 선생님에게 묻는다.

“혹시 늦은 게 아닌지요?”

“느, 늦지 않았으니 들어오세요.”

갑작스레 등장한 그의 모습에 담당 선생님은 적잖게 놀란 듯했다. 창현이 있는 곳 교실을 맡고 있는 담당 선생님은 삼십대 초반의 여성이었고, 창현의 팬인 듯 단번에 그를 알아본 듯 싶었다.

창현이 자신의 자리에 앉자, 담당 선생님이 조용히 다가와 묻는다.

“현이 맞나요?”

“네, 맞습니다.”

“오늘 이 교실에서 이뤄질 시험을 담당하게 된 오현주라고 해요. 현을 만나게 되어 영광이에요.”

“오늘 잘 부탁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선택 과목 1과 2를 제외하면 계속 이 선생님하고 마주해야 하는 것이리라.

“…….”

드라마를 보고 팬이 되어 그의 앨범을 듣고 광팬이 된 오현주 선생님은 마음 같아서는 현과 이야기를 더 나누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시험 시간이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더군다나 다른 응시자들도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상태.

그녀는 아쉬움을 접고 교탁 앞에 서서 시험에 유의할 사항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늦었지만 창현은 시험 볼 준비물을 꺼내놓고, 손목에 걸린 시계를 풀어놓는다. 그는 시간을 분배하여 시험을 보는 스타일이어서, 항상 시계를 확인하고는 한다.

“그럼 책을 모두 가방 안에 넣어주세요.”

핸드폰을 걷은 뒤 책들도 모두 없앤다. 그 후 책상 위에 무언가 부정한 행위를 한 것이 있는지 보조 선생님들이 살핀 뒤, OMR 카드를 나눠주기 시작한다.

“미리 이름과 과목 코드를 적어놓으세요. 잘못 적으신 분은 손을 드시고요.”

시험을 시작하고 나눠주고 하면 나중에 시간에 쫓길 수 있는 것을 배려한 것이리라.

‘괜찮은 선생님이네.’

속으로 그렇게 평가를 하며 마킹을 하기 시작했고, 종이 울리자, 시험지를 나눠주며 본격적인 시험을 보기 시작한다.

1교시 시험은 국어였다.

국어는 지문을 읽다가 집중력이 흩어지면 시간을 그대로 허공에 날려버릴 수 있기에 극도의 집중력과 철저한 시간 배분이 중요했다.

“…….”

우선 문제 유형을 본 뒤, 눈으로 빠르게 지문을 읽으며 펜으로 문제에 해당하는 부분을 줄 그어놓는다.

그리고 풀어나가기 시작한다.

‘어렵지 않다!’

국어 시험은 예상대로 그리 어렵지 않았다.

흔히 말하길, 쉬운 문제 30% 보통 문제 60% 어려운 문제 10% 비율이라 하는데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쉬운 문제 어려운 문제를 가려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쉬운 문제라 생각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긴장감이 풀려버리고 주의가 산만해지게 된다.

그러면 집중력이 깨지니, 처음부터 그 부분을 자각하면 안 되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가 술술 풀리는 것과 그것은 다른 영역의 것.

참고서로 풀던 문제보다 난이도가 쉽자, 창현은 날개 돋힌 듯 문제를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

그 모습을 선생님들은 멍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고.

뭔가 눈이 사삭! 하고 움직이는가 싶더니 어느새 문제를 풀고 있으니 선생님들로서는 어처구니가 없었던 것이다.

만약 그가 평범한 사람이었더라면 컨닝을 의심할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삭삭삭.

눈부신 속도로 문제를 푼 창현은 어느새 앞면에서 뒷면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문제를 다 푼 뒤 시간을 확인하니 9시 20분이 넘어가고 있었다.

‘이제 슬슬 마킹을 해볼까.’

문제를 한 번 풀었으니 그 다음 해야 할 것은 놓친 점이 없는지 확인하는 것과 마킹이었다.

차근차근 다시 한 번 읽어보며 답을 확인해보고, 놓친 점이 없으면 마킹을 하는 것이다.

마킹까지 모두 끝내니 시간은 9시 35분.

끝나기 5분 전에 이상적으로 끝을 낸 것이다.

‘좋아, 국어는 문제 없고.’

입가에 미소를 지은 창현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시험 시간이 끝나길 기다린다.

9시 40분이 되자 종이 울렸다.

“뒤에서 걷어오세요.”

제일 뒤에 앉은 사람이 OMR 카드를 걷어가기 시작했고, 창현은 시험지를 접어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 가방 안에서 수학 문제집을 꺼냈다. 2교시 시험인 수학을 공부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 뜻은 처음부터 이뤄지지 않았다.

“저기 싸인 좀 해주시면 안 될까요?”

“저도요!”

공책과 펜을 들고 달려든 사람들의 존재 때문이었던 것이다.

이미 준비 완료였지만 한 번 더 훑어볼 생각이던 창현은 싸인 공세에 붙잡혀 난데없는 싸인회를 열어야만 했다. 한 10분 정도 이어졌을 때, 선생님들의 만류로 간신히 멈출 수 있었지만 그 다음 교시에도, 그 다음 교시에도 싸인 공세가 이어졌다.

마침내 4교시가 끝나자, OMR 카드를 걷게 한 오현주 선생님이 창현을 지목한다.

“강창현 씨?”

“네, 선생님.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4교시 시험이 끝나면 점심을 먹어야 하는데, 싸인 공세로 어떻게 할지 골머리를 앓던 창현이 대답한다.

“잠시 따라오세요.”

“예에…….”

뭔지 모르지만 심각해보였기에 창현은 혹시 몰라 가방을 들고 OMR 카드를 든 오현주 선생님의 뒤를 따랐고, 응시자들은 의아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현주 선생님이 창현을 데리고 간 곳은 다름 아닌 휴게실.

안으로 들어선 그녀는 창현을 보고 묻는다.

“시험은 볼 만한가요?”

“예? 예. 괜찮습니다.”

“싸인 공세에 시달리셔서 제대로 공부를 하지 못하시는 것 같아서요. 아직 볼 과목이 네 개나 남았는데 점심시간마저도 빼앗기면 힘드실 것 같아 이곳으로 데려왔어요.”

“아… 감사합니다.”

그제야 의도를 알아차린 창현이 감사의 인사를 건넨다.

그 말을 들은 오현주 선생님이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이곳은 교직원들이 사용하는 휴게실이니까 점심 드시고 천천히 나가셔도 되요.”

“예, 배려에 감사합니다.”

“뭘요. 대신 저도 싸인 한 장 얻을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아무래도 오현주 선생님이 이곳으로 데려온 이유는 싸인을 받기 위함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잠시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평온한 점심시간을 보낸 뒤, 5교시 시험이 시작되었다.

5교시 과학 과목을 본 뒤 6교시와 7교시는 선택 과목이었기에 반을 옮겨야만 했다.

6교시 도덕을 보기 위해 옮겼을 때, 선생님의 통제가 제대로 되지 않아 반이 소란에 휩싸여 분위기가 상당히 어수선했고, 7교시 스페인어는 그래도 차분한 분위기가 이어져 시험을 보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마지막 8교시 국사를 모두 보니, 마침내 시험이 끝이 났다.

OMR 카드를 걷은 오현주 선생님이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수고하셨어요. 이제 시험이 모두 끝났어요. 합격 발표는 9월 30일에 있으니 그때 확인하시면 될 거예요. 그럼 핸드폰 찾고 가보셔도 되요.”

창현을 보고 다소 아쉬운 눈빛을 남겼지만 오늘은 스타와 팬이 아닌, 담당 선생님과 검정고시 응시자로서 만났기에 싸인만으로 만족하였다.

교탁으로 간 창현이 핸드폰을 찾고 가방을 챙겨 교실 밖으로 나가니, 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1교시부터 7교시 쉬는 시간까지 대부분의 시간 동안 싸인을 해주어야 했기에 오늘 검정고시를 본 사람들 중에서 싸인을 안 받은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다행히도 싸인을 해달라 다가오는 사람이 없었다.

핸드폰을 연 창현은 곧장 세희에게 전화를 하였다.

“여보세요? 세희 누나 어디에요?”

“여기야.”

들려온 것은 핸드폰이 아닌, 뒤쪽에서였다.

깜짝 놀란 창현이 고개를 돌리니 그곳에 세희가 서 있었다.

“왜 이곳에?”

의아한 창현의 목소리에 세희가 머리를 짚으며 절레절레 젓는다.

“일이 좀 발생해서. 벤은 운동장이 아니라 주차장에 주차해놨어. 뒤로 가야 해.”

“네.”

고개를 끄덕인 창현이 세희의 뒤를 따라 주차장으로 향한다.

그곳에 주차 된 벤에 탑승하고, 본격적으로 출발한다.

그러자 세희가 창현을 보며 말한다.

“놀라지마.”

“뭘요?”

의아한 듯 물어보았지만 세희는 거기에서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하는 창현이었지만 벤이 운동장으로 나오고, 교문쪽으로 향하자 세희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꺄아아아아아!

귀를 파고드는 날카로운 함성 소리.

교문 밖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대기하고 있던 것이다.

어디에서부터인지 몰라도 이 학교에 현이 검정고시를 보고 있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왔고, 그 이야기를 접한 학생들이 현을 보기 위해 물밀 듯이 모여들었던 것이다.

“너 보려고 저렇게 모여든 거야.”

“하하하…….”

불퉁한 세희의 목소리에 창현은 어색하게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벤이 앞으로 나아가자 인파가 서서히 옆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이대로 가는 게 미안했음일까.

창문을 살짝 연 창현이 손을 흔들어주며 말했다.

“오늘은 검정고시 응시자로서 왔으니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까지 와주셔서 감사하고, 부디 하시는 일들 잘 되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말을 한 창현은 창문을 재빨리 닫았고, 벤은 학교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꺄아아아아!

뒤에서 엄청난 함성소리가 들리자, 세희는 감탄 섞인 시선으로 말한다.

“그 사이에도 팬 관리를 하네. 정말 대단하다, 대단해.”

“이 정도는 기본이죠.”

어깨를 으쓱한 창현은 뒤를 힐끗 돌아본다. 벤을 따라 열심히 뛰어오는 여학생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그는 피식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훗! 이놈의 인기란.”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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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마음을 울리는 음악 시즌2 제3화 +6 15.04.22 4,427 82 10쪽
39 마음을 울리는 음악 시즌2 제2화 +9 15.04.20 4,516 91 11쪽
38 마음을 울리는 음악 시즌2 제1화 +10 15.04.17 7,376 95 10쪽
37 ▲▲▲▲▲시즌2 시작!▲▲▲▲▲ +5 15.04.17 5,425 65 1쪽
36 마음을 울리는 음악 106장-108장 +8 15.04.16 6,414 106 230쪽
35 마음을 울리는 음악 103장-105장 +1 15.04.16 4,244 82 314쪽
34 마음을 울리는 음악 100장-102장 +2 15.04.16 4,413 68 229쪽
33 마음을 울리는 음악 97장-99장 +1 15.04.16 4,389 63 264쪽
32 마음을 울리는 음악 94장-96장 +1 15.04.16 4,379 80 2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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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마음을 울리는 음악 85장-87장 +1 15.04.16 4,711 83 270쪽
» 마음을 울리는 음악 82장-84장 +2 15.04.16 4,913 85 261쪽
27 마음을 울리는 음악 79장-81장 +1 15.04.16 4,580 87 241쪽
26 마음을 울리는 음악 76장-78장 +1 15.04.16 4,753 74 244쪽
25 마음을 울리는 음악 73장-75장 +1 15.04.16 4,939 111 327쪽
24 마음을 울리는 음악 70장-72장 +1 15.04.16 4,755 82 2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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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마음을 울리는 음악 46장-48장 +3 15.04.16 7,158 149 3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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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마음을 울리는 음악 40장-42장 +3 15.04.16 8,909 183 320쪽
13 마음을 울리는 음악 37장-39장 +2 15.04.16 9,615 224 397쪽
12 마음을 울리는 음악 34장-36장 +8 15.04.16 9,524 189 322쪽
11 마음을 울리는 음악 31장-33장 +8 15.04.16 10,355 261 345쪽
10 마음을 울리는 음악 28장-30장 +5 15.04.16 10,659 260 277쪽
9 마음을 울리는 음악 25장-27장 +7 15.04.16 11,040 267 233쪽
8 마음을 울리는 음악 22장-24장 +4 15.04.16 10,924 261 198쪽
7 마음을 울리는 음악 19장-21장 +4 15.04.16 11,492 270 216쪽
6 마음을 울리는 음악 16장-18장 +5 15.04.16 11,544 242 163쪽
5 마음을 울리는 음악 13장-15장 +5 15.04.16 14,536 297 237쪽
4 마음을 울리는 음악 10장-12장 +8 15.04.16 13,737 352 171쪽
3 마음을 울리는 음악 7장-9장 +10 15.04.16 14,552 362 142쪽
2 마음을 울리는 음악 4장-6장 +11 15.04.16 16,838 421 120쪽
1 마음을 울리는 음악 프롤로그-3장 +47 15.04.16 29,900 545 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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