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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번 님의 서재입니다.

마음을 울리는 음악

웹소설 > 작가연재 > 팬픽·패러디, 현대판타지

김현우
작품등록일 :
2015.04.16 13:27
최근연재일 :
2015.06.01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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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4.16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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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4쪽

마음을 울리는 음악 76장-78장

DUMMY

제76장 성큼 다가오는 발걸음처럼




여름 가요제 콘서트가 본격적으로 개최되기 사흘 전.

파트너를 이루지 않은 태연, 미영, 윤아를 제외한 여섯 멤버들은 무한도전 촬영을 위해 대부분의 스케줄을 정리하고 파트너와 함께 노래를 완성하는데 전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설거지 1년 면제권이 걸린 상황이었기에 소녀시대 멤버들은 각자 총력을 기울여 무한도전 멤버들을 몰아치며 최고의 무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너무 몰아친 나머지 여름 가요제 콘서트에서 일이 터져버렸지만.

“하아! 힘든 걸?”

그 중에서 가장 평화로운 조가 있었다.

바로 전진과 파트너를 이룬 효연이었다.

수연은 무한 구박으로 명수를 굴복시키는데 성공하였으며, 순규는 특유의 병 주고 약 주기 스킬을 적극 활용하여 준하를 잘 조련시켰으며, 유리는 말빨로 국민 MC인 재석을 자신의 통제 하에 넣는데 성공했다.

수영은 특유의 드센 기질과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형돈을 주눅 들게 만들어 자신의 페이스로 끌어들였고, 조목조목한 무한 설교로 홍철을 휘어잡은 주현 또한 자신의 페이스로 밀어붙이고 있는 상황이다.

그에 반해 전진과 효연의 조는 화목함 그 자체다.

서로 의견이 맞아 강렬한 퍼포먼스 위주로 구성하여 단숨에 멤버들을 눌러버리겠다는 상의를 한 상태였기에 준비를 하는 것은 길지 않았다.

다만 약점인 예능용 웃음이 부족한 것을 채워 넣기 위해 치밀한 사전 준비와 구상이 필요했을 뿐, 독자적으로 다른 사람을 이끌고 나아가려는 다른 멤버들과 달리 효연은 무척 시간이 넉넉하였다.

“후후! 이번 1등은 당연히 내 것이지.”

쉽게 진행되는 탓에 몸도 마음도 여유가 넘치는 효연.

입가에 진한 미소를 지은 채 그녀는 내심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설거지 1년 면제권이라… 이보다 더 매력적인 상품은 없지.”

숙소 생활에서 모두가 꿈꾸는 그것!

그것이야 말로 설거지 면제권인 것이다!

혼자서 아홉 명이 먹은 양의 그릇을 설거지 하는 게 얼마나 힘들던가!

정기적으로 숙소를 청소해주시는 아주머니가 계셨지만 차마 쌓인 설거지를 해달라 할 정도로 뻔뻔한 사람은 없었다.

그렇기에 순번을 정해 설거지를 해결하고는 하는데, 거의 열흘에서 2주마다 한 번씩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무척 귀찮았다.

그렇기에 모두가 설거지 면제권을 취하기 위해 치열한 신경전을 벌이는 것이다.

“넌 또 숙소에 왜 있냐.”

아침 일찍 일어나 가볍게 스트레칭을 한 뒤 TV를 보고 있던 중 방밖으로 나온 순규의 목소리가 효연의 귀에 들렸다.

힐끗 목소리의 진원지로 시선을 옮기니, 잔뜩 표정을 찌푸린 채 자신을 바라보는 순규의 시선이 느껴졌다.

“왜?”

심드렁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효연.

그 모습이 더욱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순규의 표정이 한껏 찌푸려진다.

“너도 파트너랑 안무 짜야하는 거 아냐?”

“훗! 우월한 이 몸께서는 벌써 대부분의 안무를 짜놓았단 말씀. 세부 수정은 전진 오빠가 알아서 하시니 내가 할 건 별로 없지.”

무한도전 우등생인 전진의 진도는 무척이나 빨라 효연이 할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럼 오늘 나가지 않으려고?”

“왜 자꾸 날 내보내려 하는데? 태연이는 자고 있고… 늦게 일어날 테니까, 흐음! 그렇군!”

“뭐, 뭐가?”

갑자기 눈을 가늘게 뜨고 자신을 바라보자 뜨끔한 순규.

설마 태연을 끌어들이려는 자신의 속내를 알아차렸단 말인가!

그럴 수가! 탐정 스킬은 자신과 태연 밖에 없는 고유 스킬인데?

잔뜩 긴장한 표정을 짓자, 효연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걸린다.

“너 내가 나가면…….”

“…….”

최고조로 향하는 긴장감.

자신의 속내를 알아차린다면 순규가 준비한 모든 패는 무용지물이 된다.

어떻게 할까, 무력(?)으로 입을 막을까? 아니면 태연이가 자고 있는 틈을 이용하여 명탐정 코난에 나왔던 밀실 트릭을?

콩닥거리는 가슴을 가까스로 부여잡으며 효연의 말에 집중할 때, 이어진 그녀의 말에 순규는 다리가 풀리는 걸 느껴야만 했다.

“야동 보려고 하지?”

“하아?”

어처구니 없는 그녀의 말에 황당한 표정을 짓는 순규.

순간 힘이 빠져 비틀거린 그녀를 보며 효연이 외친다.

“역시 내 말이 맞구나! 그럼 그렇지, 내가 안 자고 있으니 당연히 눈에 거슬릴 수밖에! 이 야동 순규! 내가 그거 끊으라고 했지? 여자애가 남사스럽게 무슨 야동이야!”

“야동 안 볼 거거든!”

효연을 너무 과대평가한 것일까.

자신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끼며 버럭 소리를 지르는 순규였다.

“그리고 내가 언제 야동을 봤다고 그래! 다른 제휴 프로그램을 받았는데 그게 낚시라서 야동이었을 뿐이라고!”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며 자신의 오점에 대해 열심히 설명하는 순규였다. 이러다가 자칫 잘못해서 야동을 즐겨보는 이미지를 멤버들에게 심어두면 토크쇼에서 무슨 폭탄을 투하할지 모르는 일이다.

열심히 해명하는 그녀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효연이 간단하게 대답한다.

“아니면 말고.”

“…큭!”

너무나 쿨하게 인정하는 모습에 순규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생각도 하지 않고 인정해버리니 믿음이 가지 않는다고 할까.

‘저걸 그냥…….’

효연을 어떻게 해야 응징할 수 있을지 순규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을 무렵, 핸드폰 벨소리가 울리기 시작한다.

“응? 갑자기 무슨 일이시지?”

자신의 핸드폰에 뜬 번호를 본 효연이 고개를 갸웃한다. 전화를 한 사람은 다름 아닌 SM엔터테인먼트 소녀시대 기획실장이었던 것이다.

“누군데?”

전화 온 상대가 누군지 궁금했기에 물어보는 순규.

“기획실장님. 잠깐만.”

짤막하게 대답한 효연이 순규에게 양해를 구한 뒤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네, 네. 아, 네. 지금요? 알겠습니다. 그럼 최대한 빨리 준비하도록 할게요.”

전화를 받은 효연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시간을 확인하고는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통화를 끊는다.

“무슨 일이야?”

“기획실장님이 나보고 잠깐 회사에 들르라네?”

“너 농땡이 피우고 있는 거 알아차린 거 아냐?”

고소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하는 순규에게 효연이 어이없는 시선으로 바라보며 말한다.

“그걸 왜 기획실장님이 연락하시겠어.”

“그것도 그렇지.”

“어쨌든 난 나가봐야 하니까 곧장 준비해야겠다.”

이미 씻은 상태였기에 옷만 입으면 곧장 외출 준비가 완료되는 상황이다.

방에 들어가 옷을 후다닥 갈아입은 효연이 순규에게 손을 흔들어주고는 밖으로 나간다.

그녀를 배웅해준 순규는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주먹으로 손바닥을 탁! 치며 중얼거린다.

“아! 그러고 보니 효연이 나갔네?”

처음 자신이 의도했던 그대로 상황이 진행되자 순규의 눈이 반짝인다.

이제 태연을 설득해서 준하의 노래에 AR을 삽입할 차례였다.


“날 왜 부르는 거지?”

회사로 향하면서 효연은 의아한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기획실장은 말 그대로 소녀시대의 향후 행보에 대해 기획하는 사람이다. 여러 차례 만나본 적은 있지만 자주 만난 적도 없을뿐더러 만났을 때 모두 소녀시대 전체가 만났었다.

그렇기에 자신을 혼자 부르는 것이 의아하게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2집 앨범 때문에 그러시려나?”

그렇게 생각하던 효연은 고개를 젓는다.

그 문제라면 리더인 태연을 불러 이야기 했을 확률이 높으니까. 더군다나 오늘 태연이 스케줄이 없는 것을 알고 있을 테니 자신을 대신 부를 이유는 없다.

“도대체 뭐지.”

무슨 이유인지 몰라 머리가 지끈거리는 걸 느낀 효연은 완전히 변장을 한 채로 SM엔터테인먼트 건물로 들어간다. 그리고는 곧장 기획실장이 있는 실장실로 향한다.

똑똑똑.

“누구십니까?

“실장님. 저 효연이에요.”

“그래, 들어와라.”

승낙이 떨어지고, 실장실 안으로 들어가자, 효연의 눈에 사십대 초반의 백준범 기획실장을 만날 수 있었다.

그에게 다가간 효연이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한다.

“부르셨어요?”

“그래, 무한도전에 출연하고 있다 해서 스케줄이 안될 것 같았는데 맞아서 다행이구나.”

“갑자기 무슨 일로 절 부르신 건지?”

궁금한 표정을 지은 채 효연이 묻자, 백 실장은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적어도 나쁜 것은 아니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네에.”

나쁜 소식은 아니란 말에 한시름 놓은 효연이 고개를 끄덕이자, 백 실장이 말한다.

“너를 부른 이유는 회장님이 너를 보고자 하셔서 그런 것이다.”

“저를요? 삼촌이?”

한 번 만나기가 무척이나 힘든 회장님이다. 친근하게 부르라 하여 삼촌이라 부르지만 실제로는 까마득할 정도로 높은 상급자가 아니던가?

회장이 관련된 이야기란 말에 효연은 더욱 바짝 얼어붙은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긴장하지 않아도 된다. 어쨌든 회장님이 부르셨으니 가볼까.”

긴장한 효연의 표정을 풀어주려는 듯 어깨를 다독여준 백 실장이 앞서 나가자, 효연이 그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회장실이 있는 곳으로 향한 두 사람.

비서에게 이야기를 하니 곧장 만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한다.

회장실 안으로 들어선 백 실장과 효연은 고개를 꾸벅 숙인다.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안녕하세요, 삼촌.”

“음, 그래 이리 앉도록.”

인사하는 두 사람에게 고개를 끄덕인 수만이 자리를 권하자 조심스럽게 착석한다.

“백 실장, 서류를 줘보게.”

“예, 여기 있습니다.”

수만의 손에 서류 뭉치를 건네주는 백 실장.

서류를 받은 수만은 안경 너머로 눈이 빠르게 움직이며 서류를 읽어 들이기 시작한다.

그의 표정은 무척 심각하게 굳어 있어서 효연은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눈으로 보이지 않았지만 주변 공기가 점점 무거워지고 있는 것이 느껴졌던 것이다.

‘분명 백 실장님은 나쁜 일이 아니라 했는데?’

무슨 영문인지 몰랐기에 효연은 수만의 표정이 굳어있는 것을 보고는 잔뜩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사고라도 친 걸까?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그런 적은 없다. 방송 출연에서도 나온 분량은 많지 않고, 유감스럽지만 개인 스케줄도 없어서 방송상에서 실수한 게 거의 없을 정도니까.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효연은 씁쓸함이 들었지만 굳이 내색하지 않았다.

“흐음!”

나직한 침음을 흘리는 수만.

그에 효연은 자신도 모르게 깜짝 놀라 몸을 떨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그렇게 이어진 침묵도 잠시, 마침내 서류에서 눈을 뗀 수만이 효연을 바라보며 입을 연다.

“너 무슨 사고를 친 게냐?”

“네?”

사고라니?

뜬금없는 수만의 말에 효연의 표정이 급속도로 변하기 시작한다.

이건 말이 다르지 않은가?

그러면서 힐끗 백 실장님을 바라보니, 그 또한 수만의 말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고 한 번 단단히 쳤단 이야기다.”

“사고라니 제가 무슨 사고를…….”

팽팽 돌아가는 효연의 머릿속.

아무리 머릿속을 뒤져봐도 행하지 않은 일들이 떠오를 리가 없다.

‘아!’

그러다 불현 듯 한 줄기 생각이 머릿속에서 번뜩인다.

무언가 단단히 사고를 쳤다고 말할 정도라면 분명 그것뿐이리라.

효연이 떠올린 것은 다름 아닌 얼마 전 창현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스쿠터를 탄 것이다.

그때는 완벽하게 정체를 감추었을 텐데?

헬멧과 고글을 쓴 창현은 물론, 자신 또한 헬멧을 썼기에 다른 사람이 알아본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당장 생각나는 것이 그것밖에 없었다.

설마 수만이 그 사실을 입수했단 말인가?

‘창현이 스쿠터가 워낙 특이해서 알아차렸을지도. 하지만 아닐 수도 있어.’

자신의 설레발일 확률이 높았다.

분명 그럴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효연은 발을 빼기로 마음먹으며 모르겠다는 듯 말한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말을 한 효연은 수만이 그대로 넘어가주길 바랐다.

아니나 다를까, 심각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수만의 표정에 한순간 웃음꽃이 피어나며 굳어있는 그녀에게 말한다.

“하하! 모르는 게 당연하겠지. 농담 삼아 한 이야기다.”

“네에…….”

다소 어이없었지만 회장님이기에 차마 겉으로 내색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속으로는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고 있었다.

‘후우!’

“널 부른 이유는 백 실장이 이야기 했을지 모르지만 CF에 관련된 이야기다.”

“네? CF라고요?”

의외의 이야기에 효연은 자리도 잊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다소 높아진 목소리로 수만에게 묻는다.

“그래, CF. 네게 CF 출연 요청이 들어왔다. 물론 주연이 아닌 조연 역할이지만 사실상 주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지.”

“왜 제게…….”

얼떨떨한 표정을 지은 효연은 자신에게 CF 제의가 들어왔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 듯했다.

멤버 중 가장 인기가 많은 태연, 티파니, 윤아가 아닌 자신에게 제의가 오다니?

세간의 평가에 의하면 최하위를 달리고 있는 자신에게 CF 제의가 왔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 효연이었다.

냉정하지만 그것이 사실이었으니까.

“이유가 있는 법이지. 효연이 네가 참여할 CF는 현과 관련된 CF다.”

“아!”

현이라는 이름이 언급되자 효연은 대충이나마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창현이 관련되었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였으니까.

AA엔터테인먼트와 SM엔터테인먼트가 프로듀서라는 것을 통해 긴밀한 관계로 묶였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으니까.

그로 인해 현에 관련된 여러 행보에서 소녀시대에게 편의를 봐주고 있는 실정이고.

그 대가로 SM엔터테인먼트 측에서도 여러 가지를 주고 있는 상황이어서, 서로 상부상조하고 있는 입장이라 봐도 무방했다.

이번 CF 또한 창현의 입김이 작용했을 거란 게 효연의 생각이었다.

“그쪽에서 이야기한 것이, 춤을 감각적으로 추는 사람이 필요한데, 네가 적합하다는 이야기가 나와서 말이다.”

“춤이요?”

“그래, 춤 말이다. 하기야, 웬만큼 춤추는 애들과 너는 비교도 하기 힘들 정도 아니겠느냐? 특히 그쪽에서 원한 것은 감각적으로 춤을 추는 사람이었으니까.”

“네에…….”

괜히 수긍하면 자화자찬하는 꼴이어서 효연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만 하였다.

“이번 CF는 상당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소녀시대에 있어서, 그리고 네게 있어서도.”

처음 CF 제의를 받았을 때 수만은 이번이 절호의 기회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초기 데뷔 때 멤버들간의 인기 불균형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인기를 키워내기 위해 몇몇 멤버들을 앞세워 인기를 몰아 받게 한 뒤 차츰 다른 멤버들에게 분산시키는 전략은 곧잘 사용하고는 하였으니까.

하지만 데뷔 일 년이 되어가는 지금, 그러한 불균형은 좋지 않은 상황으로 작용하고 있다.

특히 효연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행실이 나쁜 것도 아니고, 말이 거친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 이유도 없이 안티가 많다.

대부분이 냄비 속성을 지닌 안티였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그녀가 힘들어하기에 충분했다.

자칫 그녀가 지쳐서 먼저 나가떨어질 상황이 만들어지고 있던 것이다.

‘그러면 곤란하지.’

효연이 소녀시대의 보이지 않는 축을 담당하고 있기에 그녀가 빠지면 급속도로 밸런스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 사실.

또한 활동 중인 그룹에서 멤버가 하나 빠진다는 것은 두고두고 가십거리가 될 것이기에 그럴 필요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당사자가 버티기 힘들어하면 이쪽도 곤란했기에 어떻게든 방안을 마련해야 하던 처지였다.

그러던 차에 들어온 CF 제의.

CF를 찍는 곳은 누구나 알 법한 유명 메이커였고, 촬영을 하는 사람은 굵직한 것들 중 알맹이만 취한다는 현이 직접 참여한다는 것이다.

당연히 그 파급력이 대단할 수밖에 없다.

미영 또한 창현과 함께 찍은 광고로 엄청난 인지도 상승을 겪었으니까.

‘이걸로 이미지 상승을 꾀하고 인기의 균형을 어느 정도 맞춰야 한다.’

이럴 때만큼은 무리해서라도 현을 SM엔터테인먼트의 프로듀서로 고용한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 수만이었다.

만약 이런 관계가 성립되지 않았더라면 과묵한 여우라 불리는 AA엔터테인먼트 강석규 사장이 순순히 수락하지 않았을 테니까.

‘서로 원하는 게 있으니 협력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일 터. 아쉬운 것은 이쪽이다.’

SM엔터테인먼트 측에서 제공하는 것이 더 많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결코 손해보는 것이 아니다.

현과 라샤라는 막강한 가수진을 보유한 AA엔터테인먼트는 규모 자체는 작지만 그 화력만큼은 최강을 자랑한다.

현재 엠넷과 사이가 극도로 안 좋아지고 있는 SM엔터테인먼트 입장에서는 양쪽에 절묘하게 줄타기를 하고 있는 AA엔터테인먼트를 아군으로 확보해둬야 하는 입장이었다.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파괴력이 있지만 공동전선을 형성하여 움직일 경우 그 파괴력은 곱절이 되니까.

‘게다가 미국 시장도 도움을 받아야 하고.’

생각을 정리한 수만의 시선이 효연에게 향하며 입을 연다.

“어때, 해보겠느냐? 아니, 해야 한다, 반드시! 효연이 네 앞날을 위해서라도!”

“…….”

강하게 말하는 수만의 모습에 효연은 침묵하였다.

생각해보겠다거나 그런 배부른 소리를 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CF에 참여한다는 것만으로도 자신에게 있어서 무척 큰 기회였으니까.

다만 입을 열지 않는 것은 창현에 대한 고마운 감정을 느끼고 있었고, 과연 자신이 잘 해낼 수 있을지 순간 고민이 들어서 그렇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젓는다.

‘일단 부딪쳐보자. 난 지금 그런 걸 생각할 만큼 여유롭지 않으니까.’

마음을 굳게 먹은 효연이 수만을 바라보며 강한 어조로 말한다.

“해보겠어요. 아니, 반드시 하도록 하겠어요.”

“잘 생각했다. 이번 CF는 네게 새로운 기회를 가져다 줄 것이다.”

자발적으로 나서는 효연을 보며 수만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타의에 의해 억지로 하는 것보다 자의에 의해 스스로 나서는 것이 보기 좋으니까.

“그럼 수락했으니 제대로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하지. 백 실장, 자세한 이야기를 하도록 하게.”

수만의 부름에 멀뚱하게 앉아있던 백 실장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구체적인 설명을 이어나가기 시작한다.

“예, 알겠습니다. 우선 CF는…….”

이야기를 듣는 효연의 눈은 별빛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이런, 너무 바쁘네, 요즘.”

불퉁한 표정을 지은 채 나직하게 불만을 토로하는 창현.

무한도전 여름 가요제 콘서트가 끝났지만 그를 반긴 것은 산더미와도 같은 스케줄이었다.

한시름 놓기는커녕 CF촬영과 함께 뮤직비디오 촬영과 재킷 촬영까지 남아있던 것이다.

이 모든 것을 보름 안에 소화해야 했기에 창현의 스케줄은 그야 말로 지옥의 레이스를 방불케 하고 있었다.

“내가 자초한 거니 뭐라 하기로 힘들고.”

CF 같은 경우 시간을 정한 것은 창현이었다.

좀 더 넉넉한 7월 초로 정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하면 파트너로 정한 효연의 일정에 펑크가 날 수 있다고 판단하여 여름 가요제 콘서트가 끝난 이후로 정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시간에 쪼들릴 수밖에.

그래도 후회는 하지 않았다.

“만약 그렇게 했으면 그렇게 훌륭한 무대가 나오기 힘들지 않았겠어?”

여름 가요제 콘서트를 떠올리며 창현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혈전을 방불케 하던 여름 가요제 콘서트는 그야 말로 흥미진진함 그 자체였다.

회식 자리에서 소녀시대 멤버들이 각각 설거지 면제권을 놓고 치열한 다툼을 벌였다는 이야기를 듣자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으니까.

설거지 면제권을 차지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 훌륭한 무대가 나오게 되었다는 것을 알자, 창현은 한차례 대소를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결과는 났으니 별 수 없지.”

중간 평가 때 강력한 임팩트를 주었던 형돈이 1위를 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1위를 차지한 것은 명수였다.

미칠 듯한 감정 이입은 창현조차도 감탄할 정도로 대단한 수준에 이르러 있었으니까.

다른 무대도 분명 훌륭했지만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분노가 생생하게 전달되게 만들 정도의 무대는 아니었다.

“창현아.”

“네, 아버지.”

석규의 부름에 창현이 정신을 차리고는 눈앞에 있는 사람을 바라본다.

그는 지금 CF 촬영을 떠나기 전 잠시 회사에 들려 석규와 독대를 하고 있는 상황이다. 본격적인 앨범 작업에 관련된 것과 뮤직비디오에 관련된 이야기를 끝맺음하기 위함이다.

“정말 뮤직비디오는 그렇게 해야겠나?”

방금 전 창현과 이야기를 떠올리며 석규가 묻는다.

그 모습에 창현은 고개를 살짝 갸웃하며 물음을 던졌다.

“그렇게 하는 것이 더 좋지 않나요? 아무래도 우리 회사랑 SM엔터테인먼트랑은 긴밀한 협약을 맺고 있잖아요?”

“어른의 사정이라는 게 있어서 그런 게다.”

쓴웃음을 짓는 석규.

사람들의 눈에 보이기에 AA엔터테인먼트는 마냥 SM엔터테인먼트와 친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걸 물어본다면 그렇다고 할 만큼 친한 사이인 것은 맞다.

하지만 근래 들어 그 입장이 살짝 곤란해진 것이 사실이다.

SM엔터테인먼트와 엠넷의 사이가 서서히 나빠지기 시작하면서 양쪽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AA엔터테인먼트는 어느덧 중앙에서 교묘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와 함께 현의 컴백 기운이 고조되기 시작하자 기 싸움은 팽배해지고 있는 상황.

그런 와중에 창현이 SM엔터테인먼트에 밀어주기식으로 해버리면 당연히 저쪽의 요구를 조금이나마 들어줄 수밖에 없다.

너무 한쪽에 편향되는 것은 석규가 바라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중간에 줄타기를 하면서 충분한 이득을 얻어낼 수 있는데, 굳이 한쪽에 충성을 바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제가 틀렸다면 바꾸는 게 옳겠죠.”

“음! 딱히 틀린 건 아니다. 다만 그 부분에 관련해서 네가 좀 더 귀찮아질 수 있어서 그런 건데…….”

“귀찮아진다고요?”

“그래, 자세한 건 말하기 어렵지만 지금 회사들의 교묘한 신경전이 있어서 말이다. 우리는 그곳들 신경전 중앙에 서서 줄타기를 하고 있고.”

“…….”

석규의 말이 다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고개를 끄덕이는 창현이다.

“그렇기에 한쪽에 너무 치우친 모습을 보이면 다른 한쪽은 이쪽을 버리는 패로 여길 수 있단 말이지. 모름지기 가장 좋은 상태는 써먹기 좋으면서 함부로 대하기 힘든 패가 아니겠느냐? 그런데 그 패가 적으로 돌변하면 죽자 살자 제거하려 들 수 있단 이야기지.”

“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결과적으로 자신의 행동이 반대쪽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니 그 부분의 균형을 맞추려면 한쪽의 요구도 들어줘야겠지. 아마 조만간 네 컴백에 맞춰 작은 프로그램을 촬영할 지도 모른다.”

“그 부분을 감수해야 한다는 이야기로군요.”

“그래.”

“그렇게 하도록 하겠어요. 그것이 회사에 도움이 된다면. 어차피 딱히 제게 손해가 되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건 맞는 말이다만…….”

너무나 흔쾌히 수락하는 창현의 모습에 황당한 표정을 짓는 석규였다.

그 모습에 창현은 어깨를 으쓱한다.

“정신없이 바빠질 예감이 들지만 어른들의 사정이란 게 있으니 제가 할 수 있는 건 해야겠죠. 괜히 저로 인해 아버지가 곤란에 처하는 것을 원하는 것도 아니고.”

“하하하!”

창현의 말에 나직하게 웃음을 터뜨리는 석규였다.

만약 그가 나서지 않았더라면 석규는 조금 강하게 말해서라도 그에게 강권을 하였을 것이다.

얼마 후 돌아올 라샤를 맞이할 준비 뿐만 아니라, 회사를 대대적으로 확장할 준비를 하고 있고, 중국 쪽도 일을 끝마치고 있어서 상당한 신경을 기울여야 한다.

이렇게 바쁜 상황에 다른 신경전에 휘말리면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한 상황에 처한다.

원만하게 해결 가능한 부분이었기에 당연히 그 쪽은 좋게 해결하고 싶었던 석규였다.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지. 한 사람은 라샤 내에서 정하는 건가?”

“네, 아무래도 그게 좋겠죠. 저도 너무 편향된 것은 바라지 않으니까요.”

“편향이라… 이미 편향되어 있는 듯하다만?”

“협력 체제라 우기면 되지 않겠어요? 어차피 조만간 계약이 끝나니까요. 좋은 비전을 제시해야 저쪽에서 다시 재계약 하려 달려들겠죠.”

“하하하! 그것도 맞는 말이다.”

창현 나름대로의 노림수를 제시하자 석규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더니 웃음을 터뜨린다. 생각없이 편향된 모습을 보이고 있던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럼 그 부분에 대해서는 아버지에게 맡기도록 할게요. 아무래도 제가 그쪽에 관련된 걸 잘 알고 있는 게 아니니까요.”

“그래, 이 애비에게 맡기도록 해라. 조만간 좋은 소식을 가져올 수 있을 테니까.”

“셋째가 출산이라도 되는 건가요?”

“아직 멀었다.”

은근한 어조로 묻는 창현의 말을 단호하게 끊어버리는 석규였다. 아들에게 이런 종류의 놀림을 당하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예예, 알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CF 촬영을 하러 가보도록 할게요. 제 임의대로 일정을 맞췄는데 일찍 가서 인사라도 해야죠.”

“그래, 아직은 어리니까 그렇게 하는 게 좋지. 하지만 너도 서서히 베테랑이 되어가니 다른 사람들에게 얕보일 정도로 얕은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 알겠지?”

“물론이에요.”

겸손한 이미지는 과하면 독이 되는 법.

충분한 기반을 마련하고, 그곳에 꽃을 피웠으니 톱스타로서 서서히 자신만의 아우라를 형성해나가고 있는 창현이었다.

그렇게 석규와 이야기를 마친 창현은 곧장 세희와 함께 벤에 탑승하여 촬영장으로 향하기 시작한다.


촬영장 안으로 들어선 창현의 눈에는 분주히 움직이고 있는 스태프들이 눈에 들어왔다.

오늘 그를 위해 수많은 스태프들이 움직이며 세트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역시 액수가 크긴 큰가 보네.’

슬쩍 세트장을 보고 눈을 빛내는 창현. 석규가 CF를 고를 때 여간 깐깐하게 나오는 것이 아니라서, 최종적으로 남아있는 CF 대다수가 엄청난 고액의 광고라고 하더니, 세트장 또한 상당한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세트장은 가게 매장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데, 주변에는 신발이 진열되어 있었고, 가운데 널찍한 공간이 자리하고 있었다.

오늘 저곳에서 춤을 춰야 하는 것이리라.

‘괜찮네.’

자신이 요구한 그대로 갖춰져 있는 세트장을 보고 입가에 미소를 지은 창현은 한차례 미팅을 가졌던 감독에게 다가가 인사를 한다.

“안녕하세요, 감독님.”

“어서 오십시오, 현 씨.”

이 바닥에서 상당한 베테랑으로 속하는 지명환 감독은 그의 등장에 술렁이는 주변 분위기를 읽고 그가 도착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있었다.

먼저 다가와 인사하는 창현의 모습에 푸근한 미소를 짓는다.

인상이 좋지만 한 번 촬영에 들어가면 빈틈이 없을 정도로 완벽함을 구사한다 들었기에 적잖게 긴장을 해야 하리라.

석규보다 훨씬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창현에게 존댓말을 쓰는 것은 그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그러는 것이리라.

“예, 조금 일찍오려고 왔는데 늦지 않은 건지 모르겠네요.”

“늦지 않았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니, 오히려 세트장 준비가 갖춰지지 않으니 일찍 오신 셈이군요.”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입가에 미소를 짓는 그의 모습을 보며 지 감독도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미소가 참 멋집니다. 오늘 CF는 광고주에서 상당한 기대를 하고 있으니 그 미소를 살려 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물론입니다. 제가 고집을 부린 것도 있는 걸요.”

창현이 CF를 수락하면서 제안한 것은 총 두 가지다.

하나는 파트너가 필요하다는 것. 둘째는 광고 콘티를 자신의 입맛에 맞춰 수정할 수 있을 것. 이것이었다.

두 가지 모두 제법 무리한 요구였지만 현재 현이란 이름의 브랜드는 월드 스타라는 것뿐만 아니라 드라마로 인해 고공행진을 거듭하고 있는 상태.

지금 이 인기를 CF로 이어나갈 경우 끼칠 파급력이 상상을 초월하기에 광고주 측에서는 기꺼이 수락을 하였다.

대신 광고 콘티는 감독과 함께 상의하여 최종적인 판단을 내려야 한다는 말과 함께.

그래서 창현이 자체적으로 수정한 광고 콘티를 지 감독과 함께 맞춰보고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고집을 부렸다고 해도 최종적으로 수락한 것은 광고주 측입니다. 당연히 그 콘티는 괜찮았고요. 그러니 그 부분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차분한 말로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마력이 있는 듯하다.

그 말에 내심 한 줄기 불안감을 가지고 있던 창현은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든든하네요.”

“가장 염려되는 부분은 광고 콘티에서 언급한대로 춤을 소화할 수 있느냐인데, 가능하신지요?”

지 감독이 한 가지 염려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광고 콘티에서 창현이 춤을 추는 장면이다.

여태까지 무대에서 격렬한 퍼포먼스를 선보인 적이 한 번도 없는 그였기에 그 방면으로는 아직 검증이 되지 않은 셈. 당연히 불안할 수밖에 없다.

그 염려를 알고 있었지만 숙달된 퍼포먼스는 완벽하게 펼쳐낼 자신이 있었기에 창현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감 넘치는 어조로 말한다.

“예, 가능합니다. 조금 있다가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그대로 가도록 하겠습니다. 아참, 현 씨와 함께 촬영하기로 한 효연 씨는 현재 단체 스케줄을 소화하고 오고 있는 중이랍니다. 늦지는 않겠지만 아슬아슬할 거라 생각하니 그 부분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고요. 그쪽에서 이미 양해를 구해놨으니.”

행여나 창현이 그 부분에 신경을 쓰고 있을까 싶어 말해놓는 지 감독이다.

괜히 그쪽으로 신경을 썼다가 자칫 진행에 차질이 빚어지면 손해를 보는 것은 자신들이니 언질을 해둘 필요가 있다.

“알겠습니다. 그럼 다른분들에게도 인사를 하러 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십시오.”

“그럼…….”

고개를 살짝 숙이고 걸음을 옮기는 창현.

지 감독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나직이 감탄사를 터뜨린다.

“대단하군. 저 자리에 오른 것이 우연이 아니라는 거군.”

톱스타의 위치에 있으면서 먼저 인사를 함에 있어 망설임이 없다. 뿐만 아니라 행동 자체에 비굴함이 없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굽히고 들어온다는 것이 아닌, 당당하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게 만들었다.

자신의 아우라로 다른 사람들을 동화시키는 재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지 감독의 감탄 어린 눈빛이 창현의 뒤를 쫓고 있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촬영 세트장 준비가 모두 끝났을 무렵.

창현이 분장을 하기 위해 막 메이크업실로 들어갔을 때, 광고 촬영장에 한 소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지방 행사를 마치고 부랴부랴 광고 촬영을 위해 세트장으로 온 효연이었다.

어찌나 급하게 왔는지 매니저는 저 멀리 뒤처져서 숨을 헐떡이며 달려오고 있었다.

얼굴에 흐르는 땀과 거친 숨결이 그녀로 하여금 얼마나 지쳐있는지 알려주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지 감독 앞으로 다가온 효연이 고개를 숙이며 사과한다.

지방 행사를 가고, 다소 시간이 지체되어 결국 예정된 시간보다 늦게 되었다.

이미 창현이 와 있다는 것을 들은 차였기에 미안한 감정은 더욱 컸다.

아직 신인 티를 완벽하게 벗어나지 못한 자신이 지각한 것은 중한 죄를 지은 것이나 다름 없었으니까.

연신 사과를 거듭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지 감독이 입가에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별로 늦지 않으셨으니 그렇게 사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녀의 모습을 보기만 해도 얼마나 급하게 달려왔는지 알 수 있었다. 여자 아이돌이라면 당연히 외모에 각별한 신경을 쓰고 있을 텐데 그녀는 그것마저 고려하지 않은 채 달려온 기색이 역력했으니까.

게다가 실제로 그렇게 늦은 것도 아니었고.

“그래도… 죄송합니다.”

괜찮다는 말에 한순간 마음을 놓을 뻔한 효연이었지만 자신이 늦은 것이 사실이었기에 연신 사과한다.

“정말 죄송하다면 어서 땀을 닦고 준비를 하는 것이 좋을 듯 싶네요. 여기저기 사과를 하러 다니면 시간을 맞출 수 있는 걸 늦어버리게 되지 않겠습니까?”

“네? 아… 네. 알겠습니다.”

다시 한 번 고개를 꾸벅 숙인 효연이 서둘러 메이크업실로 향한다.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지 감독이 스태프들을 둘러보며 외친다.

“배우가 모두 모였으니 빠르게 준비를 마치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우렁찬 외침과 함께 세트장 준비를 마치기 시작한다.


“이거… 상당히 어색한데요?”

효연보다 한 발 앞서 메이크업을 마친 창현이 상당히 어색한 표정을 짓는다.

어차피 진한 화장을 하는 것이 아닌, 연한 화장을 하는 것이기에 메이크업에 걸리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지금 그가 어색한 표정을 짓는 것은 화장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니다.

다름 아닌 입고 있는 복장 때문에 그런 것이다.

현재 창현이 입고 있는 복장은 회사원들이 입을 법한 정장이었다. 다만 그가 입는 정장은 그를 위해 특별히 맞춤 되었다는 것 정도?

가장 최근에 정장을 입어본 것이 석규의 결혼식 때였으니 벌써 반 년 전 이야기였다.

“우와아아!”

약간 어색한 표정을 지은 채 세트장으로 향하니, 사람들의 입에서 절로 감탄사가 흘러나온다.

알 수 없는 그만의 아우라와 함께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도는 비율을 자랑하고 있으니 감탄사가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

하지장이 길어 웬만한 사람들이 소화하기 힘든 그의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 화보집 못지않은 강렬한 포스를 풍기고 있었다.

“저기, 사진 좀 같이 찍어주시면 안 될까요?”

여성 스태프가 용기를 내서 다가와 말한다.

그 말에 창현이 세희를 힐끗 바라보자, 그녀는 여성 스태프를 바라보며 묻는다.

“같이 촬영할 여자 배우는 도착했나요?”

“네, 메이크업하러 갔는데요?”

“그럼 약간의 시간이 있으니 같이 사진을 찍어도 되겠네요.”

시간을 보며 된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자 창현이 미소를 지은 채 말한다.

“그렇다네요.”

“감사합니다!”

나이는 훨씬 어렸지만 여성으로 하여금 기대고 싶은 마음을 들게 만드는 성숙함이 물씬 풍기는 그였다.

여성 스태프는 얼굴을 잔뜩 붉힌 채 창현과 함께 사진을 찍는다.

그러자 다른 스태프들도 사진 촬영을 희망하였고, 효연이 분장을 마치고 올 때까지 같이 사진을 찍어주어야만 했다.

이미지 관리를 위해서 함부로 거절하지 못한 면도 있지만 사람들이 좋아하니 자신 또한 기분이 좋아지고 있었다.

‘나쁘지 않은데? 오히려 기분 전환이 된 느낌.’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힐끗 돌리니, 어느새 메이크업을 끝마친 효연이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때마침 함께 사진을 찍던 것도 다 끝났기에 가벼운 미소를 지어주고는 그들과 일별하여 효연에게 다가간다.

아무래도 혼자서는 처음일 테니 자신이 도와주는 게 나을 것 같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느긋하게 그녀에게 다가가던 그는 그녀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는 것을 보고는 미소를 지으며 손을 든다.

“여! 효연 누나.”

손을 흔들며 다가오는 창현의 모습을 보고 순간 움찔한 효연이 입가에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한다.

“어, 응, 창현아.”

“긴장했나 봐요?”

어색한 미소, 어색한 행동.

척이면 척이라고, 한눈에 효연이 눈에 띄게 굳어있다는 것을 간파한 그였다.

“그렇게 보여?”

“그럼요. 행동에 고스란히 묻어나오는데요.”

아닌 척 은근히 강한 모습을 보이려는 효연의 행동에 창현은 가소롭다는 듯 피식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나 그렇게 긴장 안했거든!”

창현의 미소에 발끈한 듯 눈을 치뜨며 말하는 효연.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웃음을 유발하는 행동에 지나지 않았다.

생각해보라, 잔뜩 긴장한 것이 눈에 훤하게 보이는데 애써 강한 척하는 모습을 보면 웃음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입가에 걸린 그의 미소가 더욱 짙어지려하자 효연이 눈을 부릅뜬다.

“다 이해해요. 다 이해해.”

“너… 에휴!”

뭐라 말하려던 효연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다. 소녀시대 내에서 초딩 1,2위를 다투는 그녀였지만 긴장해서 그런지 장난기조차 발휘되지 않고 있었으니까.

“뭐 그럴 수도 있는 거죠. 어쨌든 긴장하면 누나한테 좋지 않다는 거, 알죠?”

“알지.”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가슴은 그것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이번이 좋은 기회라는 것을 수만에게 누누이 들었고, 기획실장에게도 귀에 딱지가 얹을 정도로 들은 상태였다.

자신의 연예인 생활 분수령이 될 수 있는 것이라고 하니, 첫 데뷔 무대보다 더욱 떨리고 있었다.

“그렇게 긴장하면 제 역량을 발휘하지 못할 텐데.”

턱을 쓰다듬으며 말하는 창현의 모습에 효연은 눈살을 살짝 찌푸린다.

자신은 입이 딱딱거릴 만큼 떨며 긴장하고 있는데 앞에서 한껏 여유로워 보이는 그의 모습을 보니 부아가 치밀었던 것.

효연은 더 이상 쓸데없는 객기를 부리지 않은 채 창현에게 말한다.

“하지만 떨리는 걸 어떻게 하라고.”

“충분히 그럴 수 있어요. 음! 그럼 이런 건 어때요? 길게 심호흡을 해봐요.”

“후읍! 훕! 이렇게?”

그대로 따라하는 효연. 심호흡을 길게 하니 어느 정도 편안해진 것 같지만 거세게 뛰는 심장 박동은 느려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다음에는 평화로운 일상을 떠올리는 거예요. 가령 거실에 과자 봉지와 옷 등등이 널린 곳에 편안하게 누워 TV를 보는 장면이라던가.”

그런 것이라면 상상하기가 너무나 쉬웠다.

바로 자신들 숙소의 평소 모습…….

“어, 어떻게 그걸!”

순간 생각을 마친 효연이 경악한 표정을 지으며 창현을 바라본다.

그녀가 놀란 까닭은 자신들의 숙소 광경을 창현이 꿰뚫어본 것처럼 말해서 그렇다.

“뭐가요?”

“아, 아니야.”

창현이 모르는 듯하자 효연은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말한다. 그러자 창현의 입가에 짓궂은 미소가 걸리더니 쐐기를 박는다.

“아아, 제가 말한 거요? 대충 누나들 숙소가 그런 광경일 거라 확신하고 말한 건 아니에요. 스케줄이 바쁘다 보면 그렇게 되는 건 종종 있던 일이어서요.”

정확히는 몇 번 가본 라샤의 숙소에서 보았던 풍경을 토대로 말하는 것이었지만.

“…윽!”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창현의 말에 꼼짝없이 걸려든 효연이었다.

멈칫하는 그녀의 모습에 피식 미소를 짓는 창현.

“좀 잘 맞추긴 하죠. 제가. 음, 어때요? 긴장감은 좀 가셨어요?”

“응? 어? 그, 그러고 보니…….”

몸을 달달달 떨고 있던 자신의 행동이 한결 나아진 것을 보고는 의아한 표정을 짓는 효연.

그것이 창현 덕분이라는 것을 알아차리는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

“딱히 고마워 할 건 없어요. 원활한 촬영을 위해서는 누나가 잘해주어야 하니까요.”

“으응.”

미소를 짓는 그 모습을 보니 눈이 부실 지경이다.

긴장감으로 인해 좁아진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지금 보니 창현의 복장이 무척이나 멋지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평상시 아무 옷이나 입는 것만 보아도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제대로 멋들어지게 차려입으니 평소와 달라보일 수밖에 없는 건 당연한 일이다.

‘멋지긴 하네.’

괜히 태연을 비롯한 다른 멤버들이 좋아하는 게 아니라 생각하며 효연은 자신도 그가 멋지다 생각을 한다.

과연 멤버들이 노릴 만하다고 생각하면서.

“그러고 보니… 창현이 네가 도와줬다면서? 고마워.”

문득 생각난 것이 있는지 창현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는 효연.

어른의 세계를 잘 알지 못하지만 그녀도 알고 있다.

창현이 자신을 CF에 꽂아줬다는 것을.

그 말에 창현은 여전히 멋진 미소를 머금은 채 어깨를 으쓱한다.

“아, 그거요? 별로 고마워하실 필요는 없어요. 마침 좋은 구상이 떠올랐고, 그에 가장 부합하는 것이 누나라 생각했을 뿐이니까요.”

“그래도 고맙다면 고맙다는 거야! 누나가 고맙다고 하면 그냥 받아주면 되지 매번 뭐가 이러니 저러니 하는 거야.”

순간 효연이 버럭하는 이유는 자신이 정말 고마워서 그러는 것.

그에게 있어서 어렵지 않은 호의일지 모르지만 그녀에게 있어서는 일생일대의 기회가 된 셈이었으니까.

“하하하.”

갑작스러운 효연의 버럭에 창현이 어색한 웃음을 짓자 효연이 그것을 확 끊어버린다.

“웃지 마, 정들어.”

“이것 참, 웃는 것도 힘들게 만드시네.”

“네가 그 웃음으로 여자들을 얼마나 홀리고 다니는지 알기나 해?”

웃음만으로 홀리는 것은 아닐 것이다. 본능적으로 흘러나오는 배려나 여러 가지 행동이 종합적으로 여성들을 홀리게 만드는 것이니까.

다분히 멤버들을 염두에 두고 말을 한 것이지만 창현은 순간 고개를 갸웃하며 묻는다.

“제가 언제요?”

“너… 흠흠!”

순간 태연과 그렇고 그랬던 것을 말하려던 효연은 자신의 실책을 깨닫고는 황급히 입을 다문다.

“너 뭐요?”

“아무것도 아니야.”

고개를 젓는 효연의 모습에 의아한 기색을 보이던 창현은 어느덧 준비를 마치고 있는 세트장을 힐끗 보며 말한다.

“어쨌든 누나가 제게 고마움을 가지고 있다면 제가 할 말은 하나뿐이에요. 제게 고마운 만큼 열심히 해달라는 것. 제가 누나를 추천한 만큼 누나가 못할수록 저한테 폐가 되는 건 알고 있죠?”

“당연하지.”

“게다가 누나의 전문 분야인 춤을 보고 초빙했는데 못하면 더더욱 그렇고요.”

“큼! 폐가 되지 않도록 할게.”

자존심을 살짝 건드렸는지 효연의 표정이 찌푸려진다.

변덕스러운 그녀의 심정을 반영하듯 언제는 너그럽다가 언제는 날카롭다가 그런다.

당초 목적이던 긴장 풀기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아차린 창현은 행여나 그녀가 폭발할까 싶어 슬그머니 뒤로 물러나며 말한다.

“그럼 곧장 가도록 하죠.”

“응.”

창현의 말에 정신을 차린 효연이 준비를 마치고 촬영 준비를 위해 움직이기 시작한다.


광고 촬영의 내용은 간단했다.

스마트한 컨셉의 직장인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창현.

멋들어진 정장을 차려입고 매장에 모습을 드러낸 그는 취미 생활을 위해 신발을 구입하고자 한다.

한참 동안 고민을 하던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효연.

트레이닝복을 입은 그녀는 리듬에 몸을 맞기며 리듬을 타더니, 고민하는 창현에게 다가와 신발을 권유한다.

그가 거절하자, 그 신발을 신은 효연.

현란한 그녀의 춤사위가 펼쳐지고, 그 모습을 본 창현의 눈이 크게 뜨이기 시작한다.

그렇게 현란한 춤사위를 마친 효연이 도발적인 행동을 보이자, 창현은 발끈한 표정으로 구두를 벗고 신발을 신는다.

그 후 현란하게 펼쳐지는 그의 춤에 효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본다.

마지막으로 창현이 웃음 한 방 날려주면 광고는 끝.


내용은 이러한 것이었다.

“촬영 준비 마쳤습니다. 그럼 본 내용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촬영 OK? 그럼 큐!”

스태프의 외침과 함께 본격적인 광고 촬영이 시작되었다.


“어째 요즘 나이에 맞지 않는 역할만 맡는 느낌.”

입고 있는 정장을 살짝 만지며 중얼거린다.

드라마 촬영 때도 그렇지만 요즘 들어 자신의 나이에 비해 부쩍 성숙한 역할을 맡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숙하다는 건 좋은 거겠지.”

나이에 비해 성숙하다는 말은 종종 들어봤다.

다만 그 말은 외모에서 오는 것이 아닌 자신의 분위기에서 오는 말.

좋다고 해야 할지 싫어해야 할지 상당히 헷갈리는 부분이었다.

“좋은 게 좋은 거니.”

그렇게 생각하면서 창현이 세트장 위로 올라선다.

오오오오!

그러자 한차례 술렁이는 분위기. 특유의 아우라를 지녔으면서 지나치게 자신의 색을 발휘하지 않는 그였기에 그 어느 장소에서도 어울리는 극강의 장점을 지니고 있다.

이곳에서 그 강점이 가감 없이 발휘되고 있는 것이다.

거부감 없이 세트장에 스며든 창현의 존재감은 고고히 빛을 발하고 있었으니까.

“머쓱하게.”

자신을 보고 감탄사를 터뜨리는 사람들의 모습에 창현은 피식 웃는다. 저렇게 관심을 표해주는 것이 스타의 입장으로서 기분이 좋기도 하고 약간 머쓱한 감정도 함께 하였다. 물론 그보다는 뿌듯한 감정이 더욱 컸지만.

자기 관리에 들이는 시간이 결코 헛되지 않은 것이다.

‘연예인인 이상 잘생긴 건 좋은 거니까.’

하나의 경쟁력인 이상 쉽게 포기할 생각은 어디에도 없었다.

워낙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것이기에 감탄사를 터뜨리는 사람들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저 미소를 지어보이는 것으로만 보였을 뿐.

그러자 사람들의 얼굴에 다시 한 번 감탄사가 떠오른다.

왜 사람들이 그토록 현, 현, 하는 지 알 수 있었다.

“대단한데?”

“그래요?”

뒤에서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였지만 창현은 알고 있었다는 듯 놀라움이 섞이지 않은 어조로 말한다.

“뭐야, 알고 있던 거야?”

“몰래 접근하려면 음흉한 웃음부터 지우고 오셨어야죠.”

“으, 음흉한 웃음이라니!”

제 딴에는 웃음소리를 죽이고 접근했다 싶었는데 그것이 아니었나보다. 방금 전까지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는 창현의 깜짝 놀랄 모습을 떠올리며 자신도 모르게 웃음소리를 흘렸나보다.

흐흐거리며 다가갔을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니 얼굴에 열기가 화끈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그럼 그냥 웃음소리라 해드릴게요.”

“흠흠! 난 처음부터 그렇게 웃지 않았다고.”

그렇게 말을 하는 것이 오히려 티 나게 만들고 있었다.

피식 웃음을 짓는 창현.

그 모습에 효연은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꼈지만 애써 태연한 척 하였다.

반응을 보이면 보일수록 창현이 더욱 즐거워할 것이란 걸 그녀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니까.

초딩 경험이라는 것을 무시할 것이 못되는 법이다.

본인 경험에서 우러러 나오는 산지식이었다.

“예예.”

그렇게 창현의 대답을 끝으로, 본격적인 촬영 준비를 끝마치고 촬영에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세트장에 마련된 곳에 서 있다가 큐 싸인이 떨어지자 문을 열고 매장 안으로 들어서는 창현.

취미 생활로 운동을 하기 위해 운동화를 구입하려는 그는 무슨 운동화를 구입할지 고민에 빠진다.

딸랑딸랑.

그렇게 운동화를 고르며 고심이 깊어질 무렵, 효연이 안으로 들어선다.

가게 안으로 들어선 효연은 몸에 리듬을 타며 능숙한 움직임으로 미끄러지듯 창현 앞으로 다가오며 그의 어깨를 툭툭 친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행동에 의아한 듯한 표정을 짓는 창현.

그 모습에 씨익 웃음을 지은 효연이 신발을 가리키며 말한다.

“뭘 고를지 모르는 거?”

어차피 CF는 소리가 나가지 않으니 개인적인 감정을 살려 말하는 효연.

그 물음에 창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씨익 웃음을 지은 효연이 다짜고짜 신발 한 켤레를 집는다.

그리고는 지금 신고 있던 신발을 벗은 채 새 신발을 신는다.

사전에 준비를 해놓았기에 신는 장면은 극히 찰나.

“봐봐.”

신발을 신고 자리에서 일어선 효연은 그대로 리듬을 타며 춤을 추기 시작한다.

능숙한 팝핀을 추는 효연. 보는 사람들도 순간 와! 하고 바라볼 만큼 능숙한 춤 사위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 범주에는 창현 또한 들어가고 있었다.

광고 콘티에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의 춤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 있지만 지금은 굳이 그것을 유도하지 않아도 그녀의 춤은 놀라운 면이 있었다.

“어때?”

춤을 춘 효연이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창현을 바라본다.

여태까지 보기 힘들었던 자신감 넘치는 그녀의 표정.

생동감 넘치는 모습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활력을 얻게 만드는 마력을 담고 있었다.

대단하다는 듯 엄지손가락을 추켜 세운 창현.

촬영이지만 진심이 담긴 그의 표정을 본 효연은 웃음을 짓는다.

“너도 한 곡?”

권유하는 효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창현이 자신 또한 매장에 놓인 신발을 신는다. 신발을 신은 창현은 본격적으로 브레이크 댄스를 추기 시작한다.

와아아!

지켜보고 있던 스태프들은 나직한 함성소리를 터뜨린다. 콘티에 창현이 춤을 춘다는 이야기는 있었지만 설마 그가 이런 춤을 선보일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기 때문.

특별한 모습이기도 했거니와 무엇보다 여태까지 그가 무대 위에서 춤을 춘 적이 없었기에 춤을 추는 그의 모습은 대단하게 보였다.

그렇다고 춤의 수준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초심자가 보기에도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로 뛰어난 춤 실력을 보이고 있었으니까.

스태프들의 함성 소리가 있었지만 충분히 무시할 만한 정도였고, 적절한 감정 이입이 되고 있었다. 수월하게 장면 촬영을 마치는가 싶을 때, 지 감독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컷! NG”

“……!”

모두 OK 싸인이 떨어질 것이라 생각했는지 지 감독의 말에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바라본다.

사람들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지 감독은 창현을 바라보고 있다.

당사자인 창현 또한 다소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지 감독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냐하면 본인이 추는 춤이지만 굉장히 잘 되고 있다 생각했으니까. 바로 OK 싸인이 날 거라 생각했는데 그것은 자신의 착각이었나 보다.

“전체적인 완성도는 높긴 한데 부족한 면이 있습니다.”

“어떤 점입니까?”

돈을 받은 이상 그는 프로.

스스로 부족한 점이 없다 생각했지만 지 감독은 이 바닥에서 베테랑으로 통하는 인물이다.

그가 부족한 점이 있다고 하면 있는 것이리라.

“효연 양과 춤이 일치했으면 좋겠습니다만.”

“춤… 말입니까?”

내심 자신의 춤이 괜찮다 생각하던 창현으로서는 머리가 띵해지는 충격을 받았다.

“그렇습니다. 보아하니 비슷한 종류인 것 같지만 장르는 다른 것 같더군요. 광고는 엄연히 말하면 효연 양이 먼저 춤을 보이고 현 씨가 신발을 신고 춤을 춤으로써 효연 양만큼 출 수 있다는 것을 보여드려야 합니다.”

“…….”

맞는 말이었다. 지 감독의 말을 듣는 순간 자신이 무엇을 간과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으니까.

“하실 수 있는지?”

이렇게 된 이상 해보는 수밖에 없다.

팝핀? 해본 적은 있다. 하지만 수박 겉핥기식으로 배운 그것으로 해낼 수 있을까?

일단은 한 번 도전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기에 창현이 말한다.

“많이 미숙합니다. 하지만 기회를 주시면 한 번 해보겠습니다.”

“좋습니다.”

그렇게 말한 창현이 효연을 바라본다. 그녀는 창현의 시선에 고개를 살짝 끄덕였고, 지 감독이 창현의 의지를 받아들인다.

“그럼 다시 촬영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다시 촬영을 시작한다.

하지만 촬영은 서서히 난항으로 빠져들기 시작한다.

팝핀을 배우기는 했지만 제대로 배운 적이 없는 그가 광고에서 통용될 만큼 전문적인 수준이 아니다.

연신 NG 세례를 받기 일쑤였다.

“아무래도 무리인 듯 싶습니다만.”

열 번 이상 NG가 나자 지 감독이 잠시 촬영을 중단하고 창현에게 말한다.

최소한 효연에 비견될 만큼 추어야 하지만 창현은 그 실력에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저기… 제가 바꾸면 안 될까요?”

창현이 혼나는 모습을 보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을까.

효연이 앞으로 나서면서 자신이 장르를 바꾸는 게 어떨지 제안한다. 웬만한 춤은 다 통달하고 있었으니 충분히 브레이크 댄스를 소화할 자신이 있었다.

“흐음!”

“감독님, 기회를 주시지 않겠습니까?”

“기회라면 드린 것 같습니다만… 묘한 위화감 때문에 힘들지 않겠습니까?”

창현이 춘 춤의 느낌 자체는 괜찮았다. 하지만 무언가 빠진 듯한 느낌을 감출 수 없었다.

그렇기에 거듭 NG가 나온 것이다.

“잠시 후면 점심시간이니 그때까지 시간을 주시면 안될까요? 효연 누나한테 요령을 배운 후 다시 도전을 해보겠습니다.”

거듭 NG를 내면서 창현이 생각한 것이 있었다.

바로 요령의 부족.

분명 배우기는 했지만 제대로 배운 것이 아니어서 그 느낌을 살리는 것이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신체 능력은 충분히 춤을 소화할 수 있지만 문제는 요령을 모른다는 것.

충분히 해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창현은 잠깐의 시간을 빌려 효연에게 팝핀을 배울 생각이었다.

자신의 습득력을 믿고, 신체 능력을 믿고, 효연의 실력을 보았기에 내릴 수 있는 결정이었다. 만약 자신의 판단이 틀리다면 효연에게 폐를 끼칠 수 있는 결정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하십시오. 하지만 그래도 되지 않으면 다른 방도를 강구해야 할 것입니다.”

“알겠습니다.”

기회를 얻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 창현은 지 감독에게 감사의 인사를 표했다.

그리고 효연을 바라보며 고개를 꾸벅 숙여 사과하였다.

“제 멋대로 결정을 내려서 미안해요. 그래도 가르쳐줄 수 있죠?”

“내가 가르칠 수 있을까?”

다소 불안한 표정을 짓는 효연. 창현의 독단적인 판단에 불만을 표하는 것보다 자신이 과연 잘 가르칠 수 있을지 의문을 갖는 듯하였다.

그 모습에 창현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누나를 믿으니까요.”

그 말이 왜 달콤하게 들리는 건지, 효연의 얼굴이 붉게 물들며 끄덕끄덕하였다.

평소였더라면 초딩 기질이 발휘하여 창현에게 무슨 딜을 걸지 모르던 자신의 변한 모습을 미처 자각하지 못한 채.


지 감독은 스태프들에게 아직 이른 점심시간을 주었다. 그러면서 조금 가다듬을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과 함께 자유시간까지 주었다.

그렇게 해서 주어진 시간은 약 두 시간.

점심을 빠르게 먹고 나니 한 시간하고도 삼십여 분 정도의 시간이 남은 상태다.

그때까지 부족한 팝핀 댄스를 완성해야 하는 것이 창현에게 주어진 과제.

“나로 괜찮은 거야? 아니, 정말 할 수 있겠어?”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는 효연이다.

한 시간 반 동안 팝핀을 완벽하게 익히게 만드는 것이 그녀에게 주어진 임무.

하지만 그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누구보다 그녀가 잘 알고 있다.

고작 한 시간 반이라는 시간 안에 어떻게 춤 하나를 익힌단 말인가?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더라도 할 수 있는 것이 있고 없는 것이 있는 법.

“익힌 적이 있으니 할 수 있을 거예요.”

그녀의 염려를 종식시키려는 듯 옅은 미소를 지으며 창현이 말한다.

“으응.”

그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긴장감이 풀리는 것을 느낀 효연.

그러다 이내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고는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짓는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지 않은가.

“아니, 할 수 있을 거예요가 아니잖아. 할 수 있어야지.”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하지만 사안은 생각보다 심각하다.

만약 창현이 주어진 시간 안에 팝핀을 소화해내지 못하면 광고 자체는 그가 아닌 지 감독의 의도대로 흘러갈 가능성이 농후했다.

별 거 아니지만 거기에서 오는 사소한 차이는 제법 크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요. 일단 해보면 알 수 있으니까요.”

걱정해주는 사람보다 당사자가 오히려 더욱 태평한 상황.

효연은 여유롭기까지 한 그의 모습에 황당함을 느꼈지만 무어라 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말하는 창현의 표정에서 자신만만함을 읽었기 때문.

“하아! 난 모르겠다. 어쨌든 창현이 네가 그걸 원했으니까 최대한 협조를 하도록 할게.”

“그래주시면 저야 고맙죠. 잘 부탁드립니다, 선생님.”

장난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효연에게 고개를 숙이는 창현.

그의 말을 들은 효연은 문득 자신이 창현의 선생님이 되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는다.

아까 전에는 예기치 못한 불의의 일격을 먹어서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달랐다.

초딩의 기질이 제대로 발휘되고 있던 것이다.

“음! 잘 부탁한다니 내 힘 써주도록 하지. 열심히 따라와서 낙오되지 않도록 하게나, 강 PD."

마치 방송국 국장이 된 것 마냥 어깨를 쭉 피고 턱을 치켜든 채 도도하게 말한다.

“큭! 알겠습니다.”

뻣뻣하게 힘주는 효연의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흘리며 대답하는 창현이다.

그렇게 본격적으로 시작 된 가르침.

팝핀을 기본적으로 배운 적이 있긴 하지만 효연이 알고 있는 것과 제법 차이가 있을 듯하여 처음부터 간단한 이론을 듣고 있는 창현이었다.

간단하게 풀어서 팝핀에 대해 이야기를 해준 효연이 창현을 보며 묻는다.

“어떤 원리인지는 알겠지?”

“음, 어렵지는 않네요. 알겠어요.”

자신이 들었던 것과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기본적인 원리는 같았기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창현.

그 모습에 미소를 지은 효연이 창현을 보며 입을 연다.

“흐흐, 그럼 본격적으로 시작해볼까?”

“뭐, 뭘요?”

순간 전신을 엄습하는 음침한 기운에 움찔하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서는 창현.

포식자 앞에 놓인 먹이 마냥 바들바들 떠는 듯한 모습이 투영되고 있었다.

그 모습에 효연은 더욱 짙게 미소를 띠면서 양손을 든다. 그리고 징그럽게 보일 정도로 꾸물꾸물거리며 창현에게 다가오기 시작한다.

“뭐긴 뭐겠어, 창현이 네가 춤을 배우기에 적합한 몸을 가지고 있는지 내가 직접 알아봐주겠다는 거지.”

“으윽!”

빠져나갈 구멍을 차단해버리는 효연의 말에 창현이 당했다는 표정을 짓는다.

저런 이유를 댄다면 자신이 무슨 변명을 할 수 없지 않은가.

그의 눈에 절망이 깃드는가 싶더니 저항을 포기한 듯 어깨를 축 늘어뜨린다. 그 모습이 영락없는 패잔병의 모습이다.

“흐흐!”

완벽하게 차단시킨 효연은 합법적으로 창현을 만질 수 있는 권리(?)를 얻어낸다.

이것은 여태까지 누구도 얻어내지 못한 엄청난 권리 그 자체!

비록 시간제한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소녀시대 멤버들 누구도 획득하지 못한 엄청난 권리임이 분명했다.

‘아니, 모든 여자 연예인들도 얻지 못했겠지?’

누구도 접근하지 못할 성역에 접근하는 사람 마냥 효연의 가슴이 거세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에베레스트 산을 처음 정복한 사람의 심정이 이러한 것일까.

저항을 포기한 듯한 창현에게 다가간 효연이 그의 앞에 바로 서서 시선을 아래부터 위까지 훑는다.

“흠!”

우선 몸 자체 비율만 보면 춤을 출 때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효과를 극대화 시킬 수 있는 형태를 가지고 있다.

춤을 추는 사람 입장에서 갖고 싶은 몸의 비율이라 할 수 있는 셈.

“벗어봐.”

“뭐, 뭘요?”

짧게 말하는 효연의 말에 창현이 당황한 표정을 짓는다.

이 누나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것이란 말인가?

당황하는 창현의 모습에 효연은 자신의 말이 이상하게 들릴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황급히 그에게 말한다.

“응? 아,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네 몸에 춤을 추는데 얼마나 적합한지 보려는 거야. 이상하게 해석하지 마!”

“아, 그런 거였어요?”

“그런 거지 그럼 내가 무슨 이상한 말을 하려고 한 줄 알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창현의 모습에 효연은 묘한 안도감과 함께 욱하는 감정을 느껴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만다.

“하하! 제가 언제 뭐라고 했나요.”

화를 내는 효연의 모습에 어색하게 웃음을 짓는 창현.

그 웃음이 주는 의미가 생생하여 효연의 눈에 꿈틀했지만 자신이 말려버리는 느낌을 받아 더 이상 화를 내지 않은 채 꾹꾹 눌러 담는다.

“장난은 그만하고, 정장 상의 좀 벗어봐.”

“알았어요.”

고개를 끄덕인 창현이 그녀의 말대로 정장 상의를 벗는다.

그러자 와이셔츠를 입은 창현의 모습이 드러난다.

현재 계절은 여름이기에 여름용 얇은 와이셔츠를 입은 창현의 모습은 보는 여성으로 하여금 침을 꿀꺽꿀꺽 삼키게 만드는 묘한 색기(?)를 지니고 있었다.

그 범주에는 효연 또한 속하는 것이 당연한 일!

사심이 깃들려는 것을 필사적으로 억제한 효연이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려 애쓰며 말한다.

“그럼 가만히 있도록 해.”

그렇게 말을 한 효연이 창현의 뒤로 다가간다. 그리고 안마를 하려는 듯 어깨를 주무르며 꾹꾹 눌러보다가 점차 그 대상을 확대하기 시작한다.

어깨부터 시작하여 팔 부분으로 그녀의 손이 침투한다.

희롱 당하는(?) 창현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지만 희롱 하는(?) 효연은 사심이 깃들고 있는 것을 필사적으로 억제하기 위해 애쓰기 시작한다.

어깨부터 팔까지 창현을 희롱한(?) 효연은 아쉬운 표정을 애써 감추며 손을 뗀다. 그리고 창현을 바라보며 확인을 구하듯 묻는다.

“음! 창현이 너 따로 운동하는 게 있어?”

“운동이요? 갑자기 그건 왜요?”

의아한 표정을 짓는 창현의 모습에 효연이 간단하게 대꾸한다.

“몸이 운동한 사람의 것 같거든. 한창 운동을 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음, 정기적으로 운동하는 사람의 몸 같다랄까?”

온몸이 근육질이 아닌, 말랑말랑하면서 묘하게 단단한 느낌이 드는 몸이었다.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는 것이 아닌 정기적인 운동을 하는 사람의 몸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운동이라… 정기적으로 조금씩 하기는 해요.”

극히 기초적인 스트레칭에 지나지 않지만.

근육질 몸매는 그리 좋아하지 않는 편이기에 창현은 웨이트 트레이닝을 많이 하는 편이 아니다.

그저 아주 기초적인 수준에서 몇 번 하는 수준일 뿐.

매일 연공을 함으로써 꾸준히 자기 관리가 병행되고 있기에 운동을 많이 하지 않더라도 효율은 다른 사람보다 월등한 편이다.

“그래. 어쨌든 근육 상태가 좋아서 춤을 추는데는 무척 적합한 것 같아.”

하체 근육도 어떤지 만져보고 싶은 욕망이 뭉클뭉클이었지만 거기는 그야 말로 성희롱에 해당하는 수준이어서 말을 하지 못하는 효연이었다.

상체 발달 수준으로 보아 하체도 나쁘지 않을 거라 여긴 효연은 음음! 하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나쁜 상념을 애써 털어버리며 말한다.

“그럼 본격적으로 춤을 연습하도록 하자. 보니까 기본 원리는 이미 배웠다고 했고, 내가 설명을 해줬으니 기본 부분은 생략하고 응용 부분부터 가르쳐주도록 할게.”

“네, 부탁드릴게요.”

창현 또한 그 부분을 가르쳐주길 바라고 있었다.

그와 함께 시작된 효연의 강의.

지금 그에게 부족한 것은 딱 하나였다.

바로 효연이 가르치고 있는 응용 부분.

수박 겉핥기식으로 춤을 배운 창현은 얼핏 보기에는 상당하다는 느낌을 주지만 정작 들여다보면 깊이가 없다는 것이 역력하게 느껴지고는 하였다.

어디까지나 춤을 추는 모습을 보이지 않던 그가 춤을 추기에 의외라는 느낌만 주고 있을 뿐, 춤의 진정한 깊이가 느껴지지 않으니 자칫 많은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살 수도 있음이다.

그 부분을 지 감독은 단번에 알아차렸고, 창현의 문제점을 지적한 것이다.

자신의 문제점을 스스로 자각하였기에 창현 또한 그 말을 순순히 인정했던 것이고.

그 깊이를 효연에게 얻기 위해 창현은 마지막 기회를 얻어낸 것이었다.

“우선 춤을 추는 것을 노래와 비슷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생각해. 창현이 넌 노래를 부르면 그 감정이 듣는 사람에게 생생하게 전달할 수 있잖아? 그것처럼 춤에도 자신의 느낌을 발산할 수 있어야 한다 생각해.”

“음! 그렇군요. 확실히 맞는 말이에요.”

그녀의 말에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창현이었다.

그러면서 효연의 말을 들으며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는 것 마냥 그녀의 논리를 습득하기 시작했다.

길지는 않지만 춤에 대한 지식만큼은 나이답지 않게 풍부한 효연이었다. 그녀가 그간 고민하면서 깨달았던 논리라거나, 스스로의 생각을 들으면서 창현은 본인 스스로 고안할 점을 깨달을 수 있었다.

결정적으로 자신에게 무엇이 부족한 것인지 깨달을 수 있었고.

“이해했어?”

어찌 보면 중구난방에 체계적이지 않다 할 수 있지만 그 의미만큼은 제대로 전달되고 있는 셈.

“이해했어요.”

“그래? 그럼 보도록 할까.”

자신 있게 말할 정도라면 무언가 깨달은 게 있을 터.

효연은 자신이 말해놓고 제대로 정리가 되지 않는 말을 단번에 이해했다고 하는 창현의 모습에 그가 정말 깨달아서 말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의례상 그렇게 말을 한 것인지 알고자 하였다.

“그래요. 저도 확신은 못하겠는데 원리는 알 것 같거든요. 한 번 봐주세요.”

그러면서 음악이 흘러나오지도 않건만 창현은 리듬을 타기 시작하더니 본격적으로 춤을 추기 시작한다.

“으음!”

범상치 않은 느낌에 효연은 자신도 모르게 자세를 고치며 창현의 춤을 지켜보기 시작한다.

그리고 자신도 깨닫지 못한 사이 눈을 빛내며 그의 춤에 빠져들기 시작한다.

‘핫! 내가 언제…….’

자신도 모르게 창현의 춤에 몰두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효연은 화들짝 놀라고 만다.

미처 자각하지도 못한 사이 창현의 춤을 보고 빠져드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던 것이다.

이것은 그만큼 창현이 발산하는 분위기에 자신도 모르게 매료되었다는 것을 뜻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다고…….’

효연은 짧은 시간에 눈이 부실 정도로 발전을 한 창현의 춤 실력에 놀라움을 넘어서 두려움마저 느꼈다.

약점으로 지적되던 깊이를 단숨에 극복해내니, 어찌 대단하지 않겠는가.

도대체 어느 정도 수준까지 올라설지 생각만 해도 두려울 지경이었다.

“어때요?”

한차례 춤사위를 마친 창현이 효연을 바라보며 묻는다.

그 물음에 어안이 벙벙하여 그를 지켜보던 그녀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으응, 괘, 괜찮은데?”

괜찮은 정도가 아니다. 아주 죽여줄 정도로 잘 춘다. 자칫 잘못하면 촬영에서 자신이 먹혀버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춤을 추는 사람으로서 심각한 위기감을 느낄 정도로.

“그래요? 아직 부족한 점이 많은 것 같은데.”

효연은 괜찮다 했지만 정작 본인은 괜찮지 않은 듯했다.

그녀의 말을 듣고 깨달은 것이 많았는데 자신이 그 깨달음을 춤에 제대로 녹여내지 못하고 있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보는 시야 자체가 다르구나.’

창현의 행동에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효연이었다.

자신이 보기에 엄청난 발전이라 생각되었는데 정작 본인은 만족하지 않는 모습이다.

발전에 대한 욕심이 얼마나 큰지, 보고 있는 것이 얼마나 먼 곳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좀 더 하도록 할게요. 지적해주세요.”

“그래…….”

허탈한 마음이 느껴졌지만 한편으로는 포기하니 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레벨이 다르고, 노는 물이 달랐다.

다시 춤을 추는 창현을 지켜보면서 효연은 점점 멍한 표정을 짓기 시작한다.

‘진짜 잘 추네. 제대로 가르치면 어느 정도 수준까지 오를까?’

생각만 해도 흥분이 될 지경.

그러면서 본인이 자각하지도 못한 사이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종종 언급한 적이 있다.

자신의 이상형은 춤을 잘 추는 사람이라고.

창현을 보면서 분명 잘생기고 능력 또한 대단하다 생각했지만 자신의 이상형에 부합되지 않는다 여겼다.

그는 춤을 제대로 춰보지 않은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막상 춤을 추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효연은 자신이 단단히 착각을 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그는 못하는 것이 아닌, 안하고 있던 것이란 걸.

“효연 누나?”

춤을 다 춘 창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멍한 표정을 짓는 효연을 부른다.

두어 번 더 부르고 나서야 반응을 보이는 효연.

“어? 어? 으응? 불렀어?”

얼떨떨한 표정과 함께 대답하는 효연.

“갑자기 왜 그렇게 멍한 표정을 짓는 거예요. 좀 나아진 것 같아요?”

효연의 반응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창현이 묻는다.

“그래, 많이 나아졌는데?”

그러면서 효연은 자각하지도 못한 사이 창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정말 멋있다는 생각과 함께.

‘이렇게 멋진 녀석을 눈앞에 두고 그동안 난 어디를 보고 있던 거야.’

스스로 자괴감을 느끼며 효연이 힐끗 창현을 바라본다.

그녀의 복잡한 심사를 모르는 창현은 의아한 표정을 지은 채 묻는다.

“왜 그래요? 얼굴이 붉어진 것 같은데.”

얼굴이 붉어졌다는 말에 효연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얼굴에 얹는다.

화끈한 느낌.

자신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체온에 효연은 자신이 달아올라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황급히 고개를 돌리며 말한다.

“안 붉어졌어!”

“붉어진 것 같은데…….”

“안 붉어졌다니까! 그리고 창현이 너 지금 실력이면 충분하니까 여기까지 하도록 하자.”

그렇게 말한 효연은 도망치듯 후다닥 자리를 벗어났다.

뛰어가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창현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효연을 불렀지만 그녀는 그 말을 듣지 않았다.


“하아!”

화장실에 도착한 효연은 세수를 하려다가 멈칫했다. 자신이 세수를 하면 네추럴하게 한 화장이 지워진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함부로 세수 또한 하지 못하는 처지라니.

뭔가 아쉬움이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차분하게 생각할 시간이 생긴 것 같았다.

“내가 왜 이러지.”

춤을 추던 창현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른다.

다른 전문 춤꾼보다 부족하지만 누구보다 자유롭게 춤을 추는 창현의 모습. 다른 계산이 깃들지 않은 채 오로지 자신이 전달해준 내용을 체득한 창현의 춤은 효연의 가슴 가장 깊숙한 곳에 와 닿는 춤을 추고 있었다.

그것은 하나의 거대한 충격 그 자체.

그 모습은 효연이 미처 자각하지 못하던 창현의 매력을 느끼게끔 만들어주고 있었다.

“내가 어떻게 된 건가.”

창현은 다른 멤버들이 좋아하는 남자였다.

겉으로 티를 내지 않고 있지만 척이면 척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하는 행동을 보면 다른 멤버들이 창현을 좋아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랬기에 의도적으로 더욱 피했을지도.

멤버들이 서로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좋아한다는 것은 그가 품은 매력이 그만큼 치명적이라는 뜻일 테니까.

“내가 지금 좋아하게 되면 나쁜년이 되니까.”

효연은 친구들에게 자신이 나쁜년으로 남길 바라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들에게 도움이 되는 친구의 모습으로 남고 싶었지.

하지만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떨리는 가슴과 움직이는 마음은 그녀가 다잡기에 너무나 힘이 들었다.

자신이 그토록 바라던 이상형의 모습이 눈앞에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담담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

“후우! 일단은 지켜보자. 일단은.”

스스로 힘겹게 주문을 걸 듯 중얼거린 효연이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히고는 촬영장으로 나온다.

어느덧 점심시간은 모두 끝났고, 촬영이 재개할 시간이 되어 있었다.

“괜찮겠습니까?”

지 감독은 창현을 바라보며 묻는다.

단기간에 춤의 오의를 습득할 수 없으리란 확신이 있었기에 물어보는 것이었다.

“예, 괜찮습니다.”

하지만 창현의 대답은 지 감독이 예상한 것과 전혀 다른 종류의 것.

괜찮다 이야기하는 그의 모습에 지 감독은 효연을 바라본다.

그녀가 춤을 가르치기로 했으니 그녀가 보기에 어떨지 궁금했던 것이다.

“괜찮을 것 같습니다. 아니, 기대 이상으로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호오! 알겠습니다. 그럼 촬영을 재개하도록 하지요.”

효연까지 그렇게 말하자 지 감독도 더 이상 뭐라 하지 않은 채 본격적인 촬영 시작을 선언한다.

신발을 보고 고민하는 창현을 보며 등장한 효연은 사뭇 도발적인 표정으로 그의 앞에 선다.

처음 촬영보다 훨씬 능숙하게 변한 효연의 연기. 춤 또한 물 흐르듯 흐르는 것이, 처음 촬영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힘이 넘치고 있었다.

그것은 효연의 도발이었다.

창현의 춤 실력이 늘었음으로 인해 오만해질 수 있다는 것을 방지하고자, 스스로의 자존심을 세우고자 최선을 다하여 춤을 추고 있는 것이다.

“…….”

그런 효연의 의지는 춤에서 그대로 묻어나오고 있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지켜보던 창현의 얼굴에 살짝 미소가 걸린다.

그것은 연기였지만 순수한 감정의 발산이기도 하였다.

그녀의 도발을 읽었기에 창현은 그에 응하기로 하면서 신발을 갈아 신은 뒤 춤을 추기 시작한다.

자신의 의지를 담아서, 그녀에게 지지 않겠다는 대답을 담아서.

“오오…….”

지켜보고 있는 지 감독의 눈에 이채가 서린다.

춤을 추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느껴질 정도로 생생하게 전달되고 있던 것이다.

“멋지군. 아주 멋져.”

순수한 감탄.

광고 촬영을 떠나 춤을 추는 두 사람의 모습은 한폭의 그림이라 해도 괜찮을 만큼 멋졌다.

이런 광고 촬영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지 감독에게 의미 깊게 다가오고 있었다.

“확실히 대단하군.”

약점을 단숨에 극복하는 창현의 모습에 나직이 감탄을 흘리는 지 감독이었다.

왜 CF계에서 그의 몸값이 최고로 통하는지, 모두가 그를 원하는지 다시 한 번 깨달을 수 있었다.

그 후에 이어진 촬영은 성공적이었다.

창현과 효연의 춤을 카메라에 모두 담아낸 지 감독은 그 자체만으로 완벽에 가깝다는 찬사를 보내고 세부적인 촬영을 한 뒤 종료를 선언한 것이다.

저녁 시간까지 이어질 것이라 생각되던 촬영이 빠르게 끝난 순간이었다.

“수고했어요.”

“응, 너도.”

촬영이 모두 끝나고, 창현과 효연은 서로를 바라보며 인사를 하였다.

빠르게 촬영을 끝낸 두 사람의 입가에는 만족할 만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효연의 도발 의사가 담긴 춤으로 자신도 모르게 응한 창현이었지만 그 자체만으로 훌륭한 그림이 나왔다.

“누나는 어떻게 할 거예요, 회식?”

“회식?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아. 참여해야 함이 옳지만 상황이 영…….”

사실 참여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창현이 회식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정보를 사전에 입수한 상태. 그가 함께하지 않으면 꿔다 놓은 보릿자루가 될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그래요? 음!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아쉬운 표정을 짓는 창현.

그 모습에 효연에게 무척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의 표정 하나에 왜 이렇게 큰 감정 변화를 겪어야 하는 건지, 그녀로서도 혼란스러웠다.

“춤을 가르쳐준 건 정말 고마워요. 다른 곳에서도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내가 한 게 뭐 있다고. 네가 잘해서 그런 거니까 고마워하지 않아도 돼.”

“그렇게 말하셔도 고마운 건 고마운 거예요. 나중에 그에 대한 보답은 확실히 하도록 할게요. 당분간은 앨범 준비 막바지 박차를 가해야 할 것 같아서 힘들고요.”

“으응.”

평소라면 쿨하게 ‘보답은 필요없어.’ 라고 말할 테지만 묘한 감정의 끈이 그런 말을 가로막고 있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어울리지 않게 ‘으응’ 하고 대답할 뿐.

“그럼 다음에 만나요. 시간이 좀 남게 되었으니 전 이 시간도 빠듯하게 활용해야 할 처지여서.”

“그래.”

다시 한 번 그가 대단한 위치에 오른 스타라는 것을 느끼며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효연이었다.

먼저 벤에 탑승하여 곧장 자리를 벗어나는 그의 모습을 그녀는 조용히 바라만 보고 있는다.

멍하니 자신도 모르게 바라본다.

그리고 느낀 감정은 아쉬움이었다.

좀 더 함께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운 감정이랄까?

문득 자신이 느끼고 있는 감정을 깨달은 효연은 화들짝 놀란다.

지금 자신이 느끼고 있는 감정 자체가 멤버들에 대한 배신이라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내가 왜 이러는 거야!”

스스로 단호하게 고개를 젓지만 사람의 마음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법이다.

괜히 더 복잡해지는 것 같았기에 효연은 매니저에게 말해 먼저 벤에 탑승한다. 그리고 의자를 뒤로 젖힌 채 몸을 눕히며 눈을 감는다.

조금이라도 잠을 자면 지금 이 복잡한 마음이 해소될 것이란 생각과 함께.

“어떻게 되겠지.”

복잡한 생각을 조금이라도 해소하기 위한 방법.

효연은 자신의 마음을 억누르고자 잠을 선택했다.

자신의 마음을 인정한 것도 아니고, 인정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야 말로 어중간함 그 자체.

갑자기 찾아온 감정과 멤버들에 대한 배려, 그리고 그녀들이 느낄 배신감에 대한 생각 때문에 효연은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방치해두었다.

하지만 효연은 모르고 있는 것이 있다.

그리고 멤버들도 모를 것이다.

때로는 어중간한 게 제일 무서운 것을.

복잡한 마음을 애써 숨긴 채 효연은 깊은 잠에 빠져간다.

거미줄에 칭칭 감겨 다시는 벗어나지 못할 가녀린 나비가 된 꿈을 꾸면서.




제77장 금발이 너무해!




현玄이라는 이름이 시사하는 바는 무척이나 크다.

얼굴 없는 가수로 데뷔하여 순수한 실력으로 앨범 판매고를 올린 가수이기도 하며,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전세계에 알린 인물이기도 하다.

정상의 자리에 우뚝 선 그는 상대의 스타일에 맞춰 성공한 것이 아닌, 순수한 자신만의 스타일로 우뚝 섰기에 그 의미는 더욱 크다.

그가 미국에서 활동을 마치고 돌아온 지 일 년이란 시간이 되었다.

그간 앨범을 발매하고, 드라마 촬영도 하며 왕성한 활동을 보였다.

현이 출연한 드라마는 평균 시청률 40% 중반대를 기록하며 성공적으로 끝맺음을 하였기에 그 인기는 가히 전국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태까지 그가 출연해서 30%대 아래로 시청률이 떨어진 적이 없으니까.

케이블도 그에 준하는 성과를 올릴 정도였다.

그야 말로 검증된 시청률 보증 수표.

현이란 이름이 주는 파급력은 그만큼 대단한 것이다.

그뿐인가.

<무한도전>이라는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자, 성황리에 콘서트를 마칠 수 있었으며, 그 후, 콘서트 후기가 속속 올라옴에 따라 관심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대표 팬 사이트인 다크 스타, 블랙 큐트 내에서 사전 접수를 받아 보장된 앨범 판매가 30만 장이었으며, 일반인들 또한 이 소식을 알게 되자 대대적인 앨범 판매 물결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7월 17일 성공적으로 콘서트를 끝마치고, 19일, 첫 방영이 되자, 시청률은 단번에 39.7%라는 엄청난 시청률을 기록하며 높은 관심을 사게 된다.

그동안 단 한 번도 공개되지 않았던 현의 작업실 등장은 팬들로 하여금 신기함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종종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드라마에도 출연하였지만 그의 이미지는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는 상태.

그런 상황에서 일부분이나마 작업실이 공개되고, 방송용이 아닌, 평상시 복장을 하고 있는 모습은 시청자로 하여금 현의 새로운 모습을 볼 수 있게 하였다.

당연히 그 반응은 폭발적.

일부 골수팬들은 사전 통보도 없이 찾아간 것이 무례한 게 아니냐는 말이 있지만, 그 이야기는 금세 묻혔다.

왜냐하면 당사자인 현이 기분 나빠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으니까.

더욱이 준비된 모습이 아닌, 깜짝 놀라는 그의 모습을 보며 리얼리티를 살렸다는 호평이 대다수였다.

엄청난 가격을 자랑하는 곡을 선뜻 내놓는 그의 모습에 시청자들은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였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모습에 다시 한 번 감탄을 하였다.

그리고 이어진 2주차 방송분 예고를 보면서 무한도전 멤버들이 준비하는 과정을 보여주었는데, 이 부분에서 소녀시대가 등장하는 것에 대해 반발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현이 의도적으로 소녀시대를 함께 끌고가는 것이 아니냐는 말.

하지만 어차피 세상사가 그러한 법이다.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라고.

소형에서 중견 기획사로 올라서기 위해 AA엔터테인먼트는 SM엔터테인먼트에 도움을 받는 중이고, SM엔터테인먼트는 AA엔터테인먼트와 제휴를 맺음으로써 일본 진출 원활함과 미국 진출 교두보 마련을 하려 한다.

회사끼리 친하고, 손이 부족해 도움을 청하는 것 가지고 욕을 한다 한들 그 목소리는 극히 소수에 불과한 것.

오히려 본인의 앨범 준비 이야기를 흘림으로써 곧 컴백할 거라는 기운을 고조시키니, 소수의 불만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게 묻혀버리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연말에 앨범을 발매하고, 제대로 된 정규 방송에 등장하지 않았기에 현의 팬들은 그의 컴백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던 것.

그렇기에 앨범 준비 소식은 그야 말로 가뭄의 단비와도 같은 것이었다.

다만 앨범이 언제 발매될지 몰라 초조할 뿐.

<무한도전> 자체가 엄청난 이슈를 만들어냈지만 그와 별개로 현의 컴백 또한 수많은 기사를 쏟아내고 있었다.

현의 파워가 만들어낸 파동이라 할 수 있는 셈.

그러던 중 현의 팬들에게 결정적이라 할 수 있는 소식이 전달된다.


찰칵찰칵.

눈부신 플래시 세례와 함께 공항에서 일단의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오오오오오!

꺄아아아아!

소위 말하는 멋진 공항 패션을 한 여인들이 경호원들의 삼엄한 경계를 받으며 모습을 드러내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탄성을 터뜨린다.

사람들의 시선은 일제히 세 명의 여인들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모습을 드러낸 여인들은 일본 활동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온 라샤였다.

작년 연말부터 시작하여 동남 아시아와 일본 활동에 주력한 그녀들이 마침내 모든 앨범 활동을 끝마치고 국내로 귀국한 것이다.

귀국 전 일본 매체를 통해 한국에서 새로운 앨범을 발매할 예정이라 말했기에 다크 레이디 소속 팬들의 기대감은 무척 높은 상태였다.

라샤 멤버들은 한쪽에 마련된 인터뷰석으로 향한다.

공항의 협조에 의해 넓은 공간이 만들어지고, 연예 기자부 소속 사람들이 다가와 라샤 멤버들과 인터뷰를 나누기 시작한다.

“일본 활동을 마치고 귀국하셨는데 당분간 스케줄이 어떻게 되시는지?”

한 기자의 물음에 리더 시린이 말한다.

“당분간 휴식을 취할 생각입니다. 작년 연말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제대로 휴식을 취하지 못한 채 움직였기에 조금 쉬면서 자기 계발 시간을 가질 생각입니다. 그리고 죄송하게도 그간 뵈지 못하던 국내 팬 분들과의 만남을 위해 준비할 기간도 필요하고요.”

와아아아!

암묵적으로 국내 컴백을 의미하는 시린의 말에 한쪽에서 함성이 터져 나온다.

일본 매체에서 보도를 하였기에 설마 했는데 라샤의 컴백이 사실화 되었기 때문이다.

팬들로서는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첫 인터뷰가 끝나자, 다른 연예 기자가 묻는다.

“일본 스케줄이 어제 막 끝난 걸로 아는데, 너무 일찍 귀국한 감이 없지 않아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아무 영양가 없는 질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제 막 스케줄을 끝마치고, 다음 날 한국으로 귀국한 것은 일부 사람들에게 의아함을 심어주고 있었다.

무언가 있는 것이 확실하다!

그것이 몇몇 눈치 빠른 연예 기자들의 생각이었다.

그렇기에 아무 의미없는 질문이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묻는 것이다.

“그 부분은…….”

대답을 하던 시린이 멈칫하며 말끝을 흐린다.

그 모습은 무언가 있다는 것을 뜻했기에 사람들의 눈이 번뜩이게 만들기 충분했다.

“뭔가 있는 건가요, 역시?”

팬들이 몰려있는 상황이기에 욕을 먹을 수도 있지만 시린을 좀 더 몰아치는 기자. 좀 더 긁어내면 엄청난 정보가 나올 것 같다는 느낌이 팍팍 들었다.

재촉하는 물음에 시린이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그 모습이 무언가 있다는 걸 뜻했기에 연예 기자들의 표정에도 기대감이 떠오른다.

하지만 대답이 나오지 않자, 옆에 서 있던 미란이 입가에 미소를 띤 채 끼어든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제가 대답을 해도 될까요?”

“예! 그래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대답하지 않는 시린 대신 나서주니, 기자들로서는 감사한 셈.

그러자 시린이 미란에게 눈을 흘기며 작게 속삭인다.

‘야, 그걸 말하면 어떻게 해. 잘못하면 폐가 될 수 있다고.’

‘그 부분이라면 괜찮아. 내가 이미 사장님한테 허락을 맡아놨다고! 게다가 알려지면 다른 여주인공에 비해 네가 훨씬 선점할 수 있다는 거 알지? 내가 도와줄 테니 꿩 먹고 알 먹고 하셔.’

‘…아, 알았어.’

전폭적인 지지를 약속하는 미란의 모습에 결국 수긍하는 시린.

그 모습을 보며 미란은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후후!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건 불구경이요, 싸움구경이지만, 사랑싸움도 재미있는 법이지.’

속으로 계산을 마친 미란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기자들에게 시선을 둔다.

특종을 바라는 그들의 모습을 볼 때면 언제나 물어뜯기 위해 준비하는 하이에나 같지만, 때로는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방향을 이끌어주는 충실한 부하 같은 느낌을 받고는 한다.

양날의 검이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스스로 조심하면 될 일.

적절하게 기자들의 속을 태운 미란이 입을 연다.

“저희 라샤가 빠르게 귀국한 이유는 모국인 대한민국에서 휴식을 취하기 위한 것도 있지만, 여기 리더 시린 씨의 스케줄을 위해서 온 것도 있습니다.”

“스케줄이라면……?”

뭔가 대단한 걸 기대하다가 시린의 단독 스케줄 때문이란 말에 기자들은 다소 맥이 빠진 표정을 짓는다.

생각한 것보다 약한 느낌이 들었으니까.

그러자 미란은 진한 미소를 짓더니 큰 걸 빵 터뜨린다.

“예, 바로 많은 분들이 오매불망 기다리고 계신 현 씨의 새로운 앨범 타이틀곡 뮤직비디오 촬영을 위해서죠.”

“……!”

미란의 핵폭탄급 발언에 기자들은 물론 공항에 모인 사람들 또한 놀란 표정을 짓는다.

잠시 후, 공항에서 거센 함성이 터져 나온다.

꺄아아아아!

라샤의 팬 층은 대부분 현과 겹친다. 그렇기에 라샤를 좋아하면 현을 좋아하는 팬들이 대다수인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 또한 현의 컴백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였다.

당연히 열광할 수밖에 없다.

“혀, 현 씨의 앨범이라니! 그럼 언제 앨범이 발매되는 것입니까?”

경악하며 허겁지겁 묻는 기자들의 모습에 미란은 속으로 웃음을 짓는다.

기자들로 인해 몇 번 고생을 한 적 있는 그녀로서는 좋은 감정이 없다. 그렇다고 복수를 할 수 있는 입장도 아니니, 그들이 가장 바라는 특종으로 속 태우는 것을 즐기고는 한다.

오죽하면 몇몇 기자들 사이에서는 그녀를 피하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겠는가.

나이는 어리지만 몇 년간의 경험으로 기자들마저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스킬을 터득한 상태였다.

“그것은 비밀입니다. 하지만 뮤직비디오 촬영에 들어갈 테니 조만간 발매가 되도록 하겠죠?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생각하는데요.”

너무 많은 것을 먹으려 하면 탈이 나는 것은 당연한 사실.

선을 그으며 말하는 미란의 말에 기자들은 고개를 끄덕인다.

그 뒤에 이어진 질문은 소소한 것들이었다.

다음 컴백 시기를 어느 정도 생각하는지, 활동 방향을 어디로 중점을 두고 있는지 등등.

미리 석규와 상의를 해놓은 상태였기에 허용된 범위 내에서 성심성의껏 대답한다.

약 한 시간여 동안 인터뷰가 이어지고, 휴식을 위해 본격적으로 공항을 벗어나기 시작한다.

발걸음이 막 공항을 벗어나려 할 무렵, 미란이 몸을 빙글 돌리더니 아직까지 자신들을 바라보는 팬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외친다.

“여러분! 조만간 현이 컴백할 테니 많은 사랑 부탁드려요!”

와아아아아!

현! 만세! 라샤 만세!

그녀의 돌발적인 행동에 팬들은 열광하며 함성을 터뜨린다.

그 함성 소리를 들으며 공항을 벗어나 준비된 벤에 탑승하는 라샤 멤버들.

시린이 미란을 바라보며 황당한 표정을 짓는다.

“넌 행동이 너무 톡톡 튀는 것 같아.”

“훗! 그게 나의 매력 아니겠어?”

오만하게 웃음을 짓는 미란을 보며 시린이 고개를 젓는다. 리더로서 그 점을 종종 지적하지만 그 점이 자신의 매력이라면서 고치지 않는 그녀의 행동으로 포기한지 오래였다. 다른 말들은 잘 들으면서 왜 이런 점은 잘 듣지 않는 건지.

그래도 이러한 점 때문에 지금의 인기를 구가하게 되었으니, 잔소리용으로 밖에 등장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확실하게 찍었지?”

“완벽해!”

조용히 침묵하고 있던 세룬이 고개를 끄덕이자, 미란은 입 꼬리 한쪽을 말아올린다. 왠지 모르게 매우 비열한 느낌이 드는 미소였다.

“자, 그럼 현을 PR 해줬으니 저녁 식사는 현을 뜯어먹으러 가자.”

“OK.”

미란의 목적은 창현을 홍보해줬다는 명목 하에 그를 뜯어먹으려는 셈.

사전에 연락을 해두었으니 남은 것은 찾아가서 살점 하나 남기지 않고 뜯어먹어주는 것뿐이다.

이미 점심은 석규와 약속이 되어 있는 상태고.

점심은 석규, 저녁은 창현.

라샤에게 나란히 식사를 뜯기고 있는 부자지간이었다.


“이것 참, 미란 누나가 한 건 했네.”

라샤가 귀국하고 다음 날, 인터넷을 뒤적거리던 창현은 인터넷 연예 기사란을 도배하고 있는 것들을 보고는 입맛을 다신다.

그곳에는 당당하게 자신의 앨범 발매 임박 사실이 적혀 있던 것이다.

어제 귀국한다는 라샤를 맞이하여 회사에서 같이 점심식사를 하고, 일본 활동 쫑파티를 해야 한다는-창현은 왜 아직도 일본 활동 쫑파티를 한국에서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명목 하에 함께 작업실로 와서 광란의(?) 쫑파티를 즐기다가 저녁 식사로 최고급 한우 전문점에서 한껏 뜯기고 귀환할 수 있었다.

어제 내내 붙잡혀 있어서 지금에서야 기사를 확인할 수 있었다.

창현으로서는 종종 기밀(?)을 누설하는 미란의 행태에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이건 굳이 밝혀질 필요가 없는 내용인데.”

괜히 이러다가 앨범 발매가 연기되면 자신만 욕먹게 될 테지.

준비는 대부분 끝냈지만 세상사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는 이상, 여유를 가지고 하는 것이 좋은데 이로 인해 조금 더 압박을 받게 되었다.

그의 입장에서 입맛이 쓸 수밖에 없다.

“한 소리 해도 흘려들을 테고. 음, 그렇게 생각이 없는 누나도 아닐 테니… 우선은 아버지에게 물어봐야겠네.”

안 그래도 뮤직비디오에 관련된 이야기 때문에 회사에 한 번 갈 생각이었다.

준비를 마친 창현은 곧장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 미리 대기하고 있던 벤에 탑승하였다.

곧장 AA엔터테인먼트로 향하는 벤.

도착 후 회사에 올라간 그는 곧장 사장실로 향한다.

사장실 앞에 도착하여 비서에게 말하니, 돌아온 대답은 예상과 다른 것이었다.

“현재 사장님은 계시지 않습니다.”

“예?”

“사장님은 현재 밖에 나가 계신 상태입니다.”

“그래요?”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한 창현이 시계를 힐끔 본다. 현재 시간은 점심시간이 끝나고 있는 오후 2시였다. 만나기로 한 시간이 지금인 만큼 석규가 있어야 할 텐데 없다는 것이 그로 하여금 의아하게 만들고 있었다.

자신이 약속에 철저한 것은 석규를 닮았기 때문.

“급하게 약속이 생기셔서 늦으실 수 있다 하셨습니다. 늦으시면 연락을 하신다 했으니 조금만 기다리세요.”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달리 방법도 없어서 고개를 끄덕인 창현은 휘적휘적 걸음을 옮긴다.

업무를 보는 직원들 말고는 아무도 없었기에 녹음실도, 연습실도 모두 텅텅 비어있는 상태였다.

시간이나 보내고자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창현의 핸드폰에 연락이 온다.

아니나 다를까, 석규의 전화였다.

바로 핸드폰을 오픈한 창현이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그래, 창현아, 나다.

“네, 아버지. 오늘 약속 있는 거 아니었나요? 지금 도착했는데 계시지 않는다고 하셔서요.”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전화했다. 갑자기 약속이 생겨서 나갔는데 조금 늦게 되었거든. 워낙 중요한 이야기가 오고갔던 지라 미리 일러둘 시간이 없었다. 한 십 분 후면 도착할 테니 조금만 더 기다리고 있어라.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

“예, 그럼 천천히 오세요.”

확실하게 연락이 닿은 셈이니 통화를 끝낸 창현은 천천히 위층으로 올라간다.

아무래도 근처에서 약속이 있었나본데, 업무적으로 무척 중요한 일이었나 보다.

느릿하게 사장실로 올라가니, 잠시 후, 석규가 모습을 드러낸다.

“미안하다. 안으로 들어가자.”

“네.”

사장실 안은 냉방시설이 잘 갖춰져 있지만 기밀 서류가 많아 석규가 없으면 출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설사 창현이어도 그것은 마찬가지.

석규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니, 잠시 후, 찬 기운이 사장실에 감돌기 시작한다.

“미안하다, 말했던 것처럼 갑자기 약속이 생겼거든.”

“업무적으로 중요한 이야기였다면서요. 뭔데요?”

“음! SM엔터테인먼트 이수만 회장님과 갑자기 잡힌 약속이라서. 이번에 이쪽에 도움을 청하는 이야기여서 나가게 되었다. 미국 쪽 관계자와 이야기를 나누는데 나한테 자문을 구하고 싶다 하더군.”

회사 규모에서 비교 자체가 되지 않지만 이미 현이 미국에서 성공함에 따라 그의 매니저 역할을 했던 석규는 무시하지 못할 인맥을 쌓아놓은 상태였다.

미국 시장을 염두에 두고 있는 수만으로서는 석규의 조언이 필요했으리라.

“네, 그래서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가 아니었기에 창현은 궁금증을 드러낸다.

“일단 회장님은 그쪽을 굉장히 대단하게 생각하고 있지만 내가 보기에는 영 아니더구나. 이쪽에서 힘을 쓰면 저쪽에서 접촉한 사람하고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괜찮은 사람을 소개시켜주는 것이 가능하지. 아무래도 정보가 많지 않은 걸 보고 이용하려 온 것 같았는데, 긴밀한 사이로서 가감 없이 이야기를 해줬지.”

“왠지 반응이 기대되는데요?”

“하하! 네 말처럼 회장님의 반응이 장난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그쪽에 대한 정보가 부족해서 그런 거겠지. 어쨌든 이 이야기로 인해 신뢰를 더욱 쌓았다고 할 수 있지. 이쪽에서 도움을 줄 수 있다는 뉘앙스를 풍기니 의존하는 경향을 보였거든.”

통쾌하게 웃음을 짓는 석규.

아마 수만 또한 그의 속내를 알고 있을 확률이 높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존하는 성향을 보인 것은 칼자루를 이쪽에서 쥐고 있기 때문일 테지.

“협력 관계긴 하지만 저쪽에서 생각하는 거랑 이쪽에서 생각하는 거랑은 살짝 다르잖아요.”

“그 정도는 회장님도 이해하고 계시지. 협력이니, 제휴니 뭐니 해도 결국 회사는 이득에 따라 움직이는 법이야.”

“줄타기도 복잡하겠어요.”

그쪽으로는 전혀 경험이 없는 창현이었기에 막막하게 느껴졌다.

물론 석규의 능력을 신뢰하기에 자신이 몰라도 딱히 상관은 없지만.

“그건 그랬지. 하지만 너랑 라샤가 있으니 내가 실수만 하지 않으면 된다.”

“그렇겠죠. 그럼 그 이야기만 하신 거예요?”

“아니지, 네 뮤직비디오에 대한 이야기도 나눴다. 이번에 좀 더 파이를 나눠서 공고하게 하기 위함이지. 마침 밑밥을 풀어서 신뢰를 줄 수 있었고.”

“근데 그렇게 하시면 아버지가 말씀하신 것과 달리 한쪽에 편향된 모습을 보이는 것 아닌가요?”

조금은 걱정스러운 창현의 물음이었다.

현재 석규가 원하는 것은 사이가 틀어진 SM엔터테인먼트와 엠넷 사이에서 줄타기를 함으로써 원하는 것들을 얻어내는 것이다.

이쪽은 아쉬울 게 전혀 없으니 양쪽으로서는 이쪽과 선을 대기 위해 무언가를 토해내야 하는 상황.

그런 상황에서 계속 SM엔터테인먼트와 긴밀한 관계를 보이니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뭐 그렇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느냐. 저쪽에서 주는 것이 있는 만큼 이쪽에서도 주는 수밖에.”

줄타기라 말했지만 어차피 회사는 이득 관계에 따라 움직인다.

당연히 받는 게 있는 만큼 주는 게 있어야 하는 법이고.

그런 걸 보면 수만의 사업 능력은 무척 탁월한 것이다.

석규가 줄타기를 하고 있는 것을 눈치 채고, 곧장 이쪽에 전폭적인 지원을 함으로써 상대측에다 이쪽과 더욱 친하게 지내고 있다는 것을 어필하고 있는 셈이니.

마냥 이용당하고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어른들 문제는 잘 모르겠어요.”

고개를 젓는 창현의 모습에 석규가 말한다.

“넌 그것들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 앨범 준비에 박차를 가하면 돼. 그래서 이번 뮤직비디오도 시린이와 SM엔터테인먼트 소속 연예인 한 사람을 넣기로 했다. 말이 나오겠지만 너도 알지?”

은근한 표정으로 창현을 바라보는 석규의 표정은 악동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지은 창현이 고개를 끄덕인다.

“물론이죠,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거.”

가장 간단한 진리다.

사람들이 뭐라고 해도 결국 세상 이치가 그러한 법이다.

미국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지만 한국은 그렇지 않으니까.

그 논리에 충실하는 편이 오히려 더욱 편한 법이다.

“그럼 누구를 할 테냐? 아마 생각한 이미지가 있을 텐데?”

자신과 생각이 일치하는 창현의 모습에 미소를 지은 석규가 묻자, 창현은 생각에 잠긴다.

“흐음!”

그의 물음처럼 이미 생각해놓은 바는 있다.

처음 염두에 둔 것은 세 명이었고, 그녀들 중 한 사람을 선택할 생각이었지만 한 명은 탈락, 최종적으로 남은 사람은 두 명이었다.

그녀들도 각각 일장일단이 있었기에 결정을 내리는 것이 쉽지가 않았다.

“정하지 못한 거냐?”

“두 명까지는 좁혔는데 여기에서 결정이 나질 않네요.”

각각 장단점이 있다고 하며 생각한 바를 털어놓으니 석규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생각에 잠긴다.

창현의 말처럼 각각 장단점이 있어 결정을 내리기가 쉽지 않았다.

“그럼 본인의 의사를 묻는 게 가장 좋지 않겠느냐? 네 말처럼 각각 장단점이 있는 만큼 결정을 내리기가 쉽지 않을 테니. 어떠냐?”

“그렇게 하는 게 좋겠죠?”

창현도 그 방법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다만 자신이 정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되도록 그가 결정을 내리려 했을 뿐.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자.”

최종적으로 결정을 내리는 석규.

그와 이야기를 끝낸 석규는 곧장 SM엔터테인먼트에 전화를 걸어 창현의 결정을 이야기한다.

그 내용은 이번 현의 미니 앨범 타이틀곡 뮤직비디오에 출연할 여자 연예인에 관련된 것.

AA엔터테인먼트에서 지목한 사람은 두 명이다.

바로 이연희와 제시카.

두 사람이 각각 이미지에 어울릴 것 같아 최종 엔트리에 올랐다.

그것은 전쟁을 알리는 서막이었다.


원래 후보는 총 세 명으로 내정해두고 있었다.

바로 이연희와 제시카, 그리고 윤아가 그 주인공이었다.

하지만 창현은 최종 리스트에 올랐던 윤아는 빼버렸다.

아무리 협력적인 모습을 취한다 하더라도 정도가 있는 법.

같이 드라마에 출연하고 예능 프로그램에도 출연했었기에 뮤직 비디오에서도 얽히면 구설수가 일어나기 쉽다는 점이 발목을 붙잡았다.

어차피 최종적으로 한 명만 뽑는 것이기에 그러한 이유 때문에 그녀를 뽑을 수 없었다.

결국 윤아는 탈락이고, 이연희와 제시카만 남게 된 것이다.

‘일하는 면에서는 이연희 씨가 편하긴 하겠지. 아무래도 연기자니까. 하지만 수연 누나하고는 친하니까 좀 더 호흡이 잘 맞을 텐데…….’

각각 장점이 존재했기에 창현은 선택을 망설일 수밖에 없었고, 결국 선택을 하지 못했다.

석규는 창현이 고민하는 점을 알고 있었기에 그 부분을 그가 신경 쓰지 않게 하기 위해 SM엔터테인먼트에서 자체적인 결정을 맡겼다. 그리고 두 사람으로 하여금 할 의사가 있을 경우 자체적인 면접을 보고 최종적으로 결정을 내리기로 하였다.

이것이 최선의 방법.

모두가 신경을 적게 쓸 수 있는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창현이는 아직 할 일이 많으니까.’

앨범 준비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는 창현이었기에 뮤직비디오 촬영 건으로 많은 신경을 쓰게 하기 싫었다. 마지막 작업을 하면, 프로듀싱을 해야 하기에 가급적 신경 쓸 일이 적은 것이 좋았다.

SM엔터테인먼트에 연락하여 곧장 수만과 통화를 한 석규는 전화를 끊고는 창현에게 말한다.

“이야기를 전했다. 며칠 후 최종적인 이야기가 나올 테니 그 부분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예, 감사합니다.”

“아무래도 그 일은 네가 가급적 신경을 쓰지 않는 게 좋다. 왜냐하면 앨범 작업도 마무리를 못하지 않았더냐? 그런 만큼 앨범 마무리 작업에 최선을 다하는 게 좋다.”

“그건 그렇죠. 일단 곡 자체 준비는 끝났기에 그 부분은 제가 컨디션이 좋은 날 틈틈이 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요.”

석규가 생각하는 바가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창현이다.

그렇기에 석규의 노림수를 알고는 순순히 그의 말에 응한 것이기도 하고.

“그래, 너를 믿으니 그 부분은 맡기도록 하마.”

“예.”

“일단 배우가 선정되면 즉시 촬영에 들어갈 것이다. 이미 자체적인 회의를 하고, 정해진 컨셉은 잘 알고 있겠지?”

“물론이죠, 제가 정한 컨셉인데요.”

이번에 퍼포먼스를 곁들이는 창현은 확실한 변화를 위해 비주얼적인 면 또한 변화를 일으키기로 내부적인 논의를 나눈 상태였다.

그것을 위해 차근차근 준비를 하고 있기도 하고.

“그래, 그럼 그 부분은 네게 맡기도록 하마. 나머지는 나한테 맡기도록 하고.”

“예, 그럼 저는 이만 가보도록 할게요. 검정고시도 멀지 않아서 미리미리 공부를 해둬야 해서요.”

“할 게 많구나. 그래,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여라.”

자리에서 일어선 창현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밖으로 나간다.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고 석규가 턱을 쓰다듬는다.

“이제 슬슬 준비 완료로군.”

이번 변신으로 일으킬 파장이 어느 정도일지 사뭇 기대되는 석규였다.


한편, 석규에게 이야기를 전달 받은 수만의 입가에는 진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좋군, 좋아.”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그.

그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오늘 얻은 수익이 제법 많아서 그렇다.

미국 진출 건으로 유명 프로듀서가 왔다 하여 수만은 직접 약속을 잡고 장소로 나서려다가 석규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어떨까 싶어 갑작스럽지만 그를 불러냈다.

다행히도 석규는 약속이 없는 상태.

함께 약속 장소로 향하여 이야기를 나눠보고, 석규와 별도로 이야기를 나눠보니, 수만은 자신이 단단히 착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름만 들으면 알 수 있는 곡들을 프로듀싱한 프로듀서였지만 수만이 생각하는 것만큼 대단한 존재가 아니었던 것이다.

아니, 충분히 대단하기는 하지만 수만이 생각하는 만큼의 수준은 아니었다.

차 한 잔 하면서 수만은 석규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원한다면 미국의 유명 프로듀서를 소개시켜줄 수 있다는 말까지 듣게 되었다.

그로서는 절실히 바라던 것이 이루어진 셈.

고맙다는 인사를 하면서 수만은 석규가 바랄 법한 여러 가지 이권을 나눠주겠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그야 말로 상부상조. 서로 한 가지씩 주고 받음으로써 이와 잇몸처럼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게 만드는 것이었던 것이다.

“강 사장의 의도는 알지만 순순히 말리면 안 되지.”

이미 수만은 석규가 SM엔터테인먼트와 엠넷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은 사업가라면 당연한 선택이다.

규모는 작지만 AA엔터테인먼트는 현과 라샤라는 막강한 두 가수를 거느림으로써 두 곳에 모두 필요성을 강하게 어필한 상태였으니까.

알면서도 말리지 않은 것은 사업가로서 당연한 행동이기에 그런 것이고, 이미 보이지 않고 행동으로 옮겼기에 그렇다.

사업가로서 대단한 기질을 지녔지만 수만은 오랜 세월을 살아오면서 축적한 연륜이라는 것이 있다.

뛰어나기에 오히려 동류로서 그의 의도를 알 수 있었고, 보이지 않게 행동으로 옮긴 것이다.

석규는 Give & Take 정신이 뛰어나다.

주는 게 있으면 받는 것이 있고, 그것은 즉각 이루어진다는 장점이 있는 것이다.

수만은 그 점을 적극적으로 이용하였다.

바로 먼저 나서서 석규에게 이권을 주기 시작한 것이다.

기브 앤 테이크 정신이 뛰어난 석규는 SM엔터테인먼트에서 주는 것만을 마냥 보고 있을 위인이 아니다.

당연히 저쪽에서도 주는 것이 있을 테고, 그 성과 중 하나가 바로 오늘의 것이다.

이쪽과 교류가 활발해지면 줄타기를 하고 있는 상태라 하더라도 상대방 측에서는 그렇게 보일 리 없겠지.

그가 노린 것이 바로 그것이다.

아마 석규는 알만서도 당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좋은 게 좋은 거겠지. 우리만으로도 충분하지만 힘겨운 싸움이 될 테니까. 그 진흙탕 싸움에 AA엔터테인먼트를 끌어들일 수 있다면 힘든 싸움도 해볼 만한 싸움이 된단 말이지.”

그렇게 중얼거린 수만은 비서가 종이를 들고 안으로 들어오자 손짓을 하여 곧장 그것을 받아든다.

“흐음! 저녁이라도 먹으면서 만나면 되겠군.”

그가 받아든 것은 이번 AA엔터테인먼트에서 지목한 이연희와 제시카의 스케줄 표였다.

드라마 촬영을 하고 있는 연희는 저녁 시간이 되어서 끝이 나고, 수연 또한 지방 공연을 갔기에 저녁이 될 무렵 서울로 돌아온다.

“제법 늦은 저녁이 되겠지만 파이가 큰 것이니까. 일단은 그렇게 하도록 해야겠군.”

작게 중얼거린 수만은 곧장 전화를 들고 기획실장과 연결한다. 그리고는 두 사람의 스케줄 표를 바라보면서 지시를 내리기 시작한다.

“아, 백 실장. 이연희랑 소녀시대 제시카한테 연락을 보내도록 하게. 저녁을 먹지 말라 하고, 오후 8시까지 회사 앞 한식집으로 오라고 하게. 그래, 그렇게 하면 되네.”

전화기를 내려놓은 수만은 입가에 진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한편, 지방 공연을 끝마치고, 소녀시대 멤버들은 각각 벤 안에 축 늘어져 있었다.

로드 매니저가 차를 모는 소리만 조용히 들리고 있었고, 보조석에는 매니저가 앉아 통화를 하고 있었다.

“예, 제시카를요?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예, 아마 늦지 않을 듯하니 그렇게 하도록 하지요.”

통화를 끝낸 매니저는 핸드폰을 갈무리 하고는 몸을 뒤로 빙글 돌린다.

그러자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 밖을 멍하니 바라보는 수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태연아, 시카 좀 불러줄래?”

“네. 수연아, 매니저 오빠가 부르는데?”

보조석과 가장 가까운 곳에 앉아있던 태연이 밖을 멍하니 바라보던 수연을 툭 치며 말한다.

“응? 갑자기 왜?”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듣고 있었기에 수연은 지금 상황이 파악되지 않는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다.

“내가 불렀다, 시카야.”

“네. 무슨 일이세요?”

갑자기 자신을 부른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는지 의아한 표정을 짓는 수연.

“회장님이 부르셔서 말이다. 아무래도 숙소에 돌아가자마자 밖으로 나가야 할 것 같은데?”

“네? 저를요?”

“그래.”

수만이 자신을 부른다는 말에 수연이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뿐만 아니라 옅게 자고 있던 다른 멤버들도 잠에서 깨어나 그들의 대화를 듣고는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삼촌이 왜 나를…….”

“음! 아무래도 업무적인 것 때문에 그렇다고 하더구나. 자세한 건 나한테도 알려주지 않았고. 어쨌든 나쁘지 않은 거니 좋게 생각하면 될 듯하다.”

“네…….”

업무적인 것이라면 자신이 무언가 스케줄을 해야 한다는 건데, 웬만하면 수만이 직접 찾을 리 없을 테니 무언가 대박인 것이 걸려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앨범이 기약 없고, 고정 스케줄도 없는 만큼 고정 하나 생기거나 개인 스케줄이 생기는 건 그만큼 인지도 상승을 꾀할 수 있는 것이니까.

“도대체 뭐기에 그렇지?”

“짐작도 안 가네.”

다른 멤버들은 수만이 수연을 직접 불렀다는 이야기에 웅성웅성하고 있었다.

“아, 그리고 저녁을 함께 하면서 이야기할 예정이니까 시카 너는 저녁 먹지 말고 가도록 하여라.”

“네, 그렇게 할게요.”

늦은 저녁일 테지만 다이어트는 일상 다반사였기에 참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부럽다. 삼촌이 맛없는 거 사줄 리 없을 텐데.”

“나도 먹고 싶다.”

수영의 식신 은퇴 후 제2대 식신으로 올라선 윤아와 꼬마 식신이라는 별명으로 떠오르고 있는 유망주 순규가 부러운 표정을 짓는다.

“으이그, 식신들.”

제1대 식신 수영의 말에 순규와 윤아가 발끈한 표정을 짓는다.

이 무슨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소리란 말인가!

스스로는 식신을 은퇴했다 하지만 수영은 소녀시대 멤버들에게 있어 영원한 식신이었다.

“뭐라고?”

“언니가 원조 식신이잖아요!”

“내가 무슨 식신이야!”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맞받아치니, 삽시간에 벤 안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한다.

“시끄러워! 모두 조용히 하기나 해! 괜히 운전하는 사람 심기 어지럽게 하지 말고!”

매니저의 일갈과 함께 벤 안은 침묵이 찾아왔다.

그녀들은 입을 다물고 부리부리한 눈으로 서로를 노려봄으로써, 숙소에 돌아갈 경우 2차 대전이 벌어질 것을 암시하고 있었다.

그렇게 숙소에 도착한 소녀시대 멤버들은 각각 휴식을 취하기 시작했고, 수연은 수만을 만나기 위해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제시, 가는 거야?”

“응? 응.”

막 나가려던 수연은 미영이 자신을 부르자 고개를 갸웃하다가 대답한다.

그러자 미영은 눈웃음을 지으며 수연의 어깨를 툭툭 친다.

“삼촌이 부르는 거면 나쁜 게 아닐 테니 열심히 해봐.”

“…마치 언니가 동생을 격려하는 것 같은데?”

표정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지만 미영은 여전히 생글생글 웃고 있다.

저번 여름 가요제 콘서트 이후 위엄이 많이 떨어져서 이제 그녀가 표정을 찌푸려도 물러서는 사람은 없었다.

“난 제시가 잘 되길 바라서 그러는 건데? 잘하고 와.”

“알았어. 나도 잘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건 사실이니까.”

쿨하게 고개를 끄덕인 수연이 문을 열고 숙소를 나선다.

그런 수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미영이 주먹을 불끈 쥔 채 외친다.

“제시 파이팅!”

만약 이번 스케줄이 창현의 뮤직비디오 촬영이었다면 미영은 결코 파이팅을 외치지 못했을 것이라.

파이팅을 외치던 미영은 순간 이상한 기분이 들자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린다.

“응? 왜 이러지? 몸이 안 좋아진 건가? 그럼 쉬어야지.”

몸을 가꾸는 것도, 관리하는 것도 프로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

미영은 자신의 몸에 엄습한 이 기분이 단순히 장기간 차를 타서 그런 것이라 치부했다.

그 사이 수연은 한 걸음 성큼 다가갈 수 있는 기회를 향해 접근하고 있는 것을 모른 채.


“좀 오래 걸렸다?”

주차장으로 내려간 수연은 기다리고 있던 매니저와 로드 매니저를 만날 수 있었다.

기왕 온 김에 수연을 데려가고자 주차장에서 기다린 것이다.

“이 정도면 짧은 거예요. 화장도 다시 고치려다가 그냥 나온 건데.”

그들이 기다린 시간은 약 삼십여 분.

제법 긴 시간이었지만 여자가 작정하고 준비하면 얼마나 길게 시간을 끌 수 있는지 알고 있었기에 새침하게 말하는 수연의 말에 매니저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아직 폭군의 카리스마는 완벽하게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카리스마에 압도된 두 매니저는 입을 꾹 다문 채 목적지로 수연을 모시고(?) 가는 수밖에 없었다.

“도착했다.”

매니저의 말에 수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며 말한다.

“네, 그럼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오빠들.”

“그래. 너도 잘하도록 하고.”

“네, 뭔지는 몰라도 일단 최선을 다해볼게요.”

그렇게 대답한 수연이 문을 닫으니, 벤이 곧장 밖으로 나선다.

주차장을 벗어나는 걸 지켜보던 수연은 무언가 떠오른 듯 중얼거린다.

“그러고 보니 돌아갈 때 어떻게 하지?”

그걸 미처 염두에 두지 못해서 살짝 걱정이 되었지만 수만이 어떻게든 잘 해결해줄 것이라 생각하며 수연은 곧장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저…….”

안으로 들어간 수연은 어떻게 해야 할지 순간 어리둥절했다. 예약한 사람의 이름을 이수만이라 하면 안내해주는 걸까?

난감한 표정을 지은 수연이 카운터에 서 있는 사람을 향해 말을 거니, 그 사람은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말해준다.

“36호실로 가시면 됩니다.”

“네?”

“SM엔터테인먼트 쪽 손님 아니신가요?”

“맞는데…….”

“그럼 36호실이 맞습니다. 먼저 손님 한 분이 그곳으로 가셨으니 손님도 그곳으로 가시면 됩니다.”

여지를 주지 않고 파바밧 하고 말하는 종업원의 말에 수연은 고개를 끄덕인다.

“네, 그럼 수고하세요.”

그렇게 말한 그녀가 곧장 36호실을 찾아 걸음을 옮긴다.

잠시 후, 36호실 앞에 도착한 수연이 노크를 한 뒤 안으로 들어선다.

“안녕하세요, 삼촌.”

안으로 들어간 수연은 눈에 들어오는 수만에게 인사를 하였다.

“그래, 어서 와라. 자, 여기 앉도록 해라.”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인사를 받은 수만이 자리를 권하니, 수연이 그가 권한 자리에 앉으려다가 순간 멈칫한다.

그제야 자신 말고 다른 한 사람이 왔다는 말이 이해가 되었던 것이다.

수만의 맞은편에는 연희가 앉아 있던 것이다.

“안녕, 시카야.”

“네, 언니. 오랜만이에요.”

한 식구로서 무척 오랫동안 SM엔터테인먼트에 몸을 담고 있었기에 두 사람은 상당히 친했다.

“그렇지?”

“요즘 언니가 너무 바쁘니 보기가 힘들더라고요.”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두 여인.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수만은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입을 연다.

“해후를 나눴나?”

“아, 죄송해요, 삼촌.”

“죄송합니다.”

수만을 앞에 두고 이야기 했다는 것을 깨달은 두 여인이 황급히 사과를 한다. 소속사 회장을 앞에 두고 이야기를 나눈 것은 그리 좋게 생각할 수 없는 부분이다.

“누가 보면 내가 무척 엄하다고 생각하겠구나.”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보이는 수만.

다른 사람들의 눈에 어떻게 보일지 모르나 적어도 같은 식구에게 있어서는 든든한 인물이었다.

문이 열리고 밑반찬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밑반찬이 모두 세팅되자, 수만은 물을 한 컵 따라 마신 뒤 말한다.

“별로 개의치 않으니 그런 표정을 지을 필요는 없고. 짐작은 하고 있을 테니 말하도록 하마. 오늘 너희들을 이곳에 부른 것은 한 가지 일이 들어와서 그렇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저도요.”

연희와 수연이 대답하자 수만은 턱을 쓰다듬다가 음식이 들어오기 시작하자 먼저 들면서 말한다.

“내가 너희 두 사람을 부른 것은 그쪽에서 너희들을 지목해서 그렇다. 하지만 두 명이 모두 하는 것은 아니고, 두 명 중 한 사람만 하게 되는 거라 할 수 있지.”

“저를 부르실 정도라면 건수가 무척 큰 것 같은데요?”

젓가락으로 음식을 깨작깨작하던 연희가 말한다. 드라마 촬영장에서 저녁을 먹지 않고 왔기에 무척 배가 고픈 상태였다.

“맞다, 무척 큰 건수라 할 수 있지.”

드라마 촬영으로 근래 들어 무척 바쁜 연희였다.

당분간 드라마에 집중하는 것이 좋은 선택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부를 정도라면 그만큼 건수가 큰 것이라 할 수 있다.

수연 또한 음식을 깨작거리면서 눈을 빛내며 수만을 바라본다.

도대체 무엇이기에 수만이 큰 건수라 이야기하는 걸까.

그곳에 자신이 캐스팅 될 수 있다 생각하니, 무척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

“어떤 건데요?”

“뮤직비디오 여배우로 참여하는 거랄까?”

연희의 물음에 대답해주는 수만. 그녀들을 놀라게 해주기 위해 현의 뮤직비디오라는 사실은 말하지 않고 있었다.

“뮤직비디오요?”

“그래.”

“뮤직비디오도 분명 큰 기회기는 하지만 그래도…….”

김이 빠진 듯한 연희의 목소리였다.

현재 그녀가 참여하고 있는 드라마는 창사 특집으로 이루어지는 큰 스케일의 드라마였다.

그렇기에 아무리 뮤직비디오가 주는 메리트가 있다 하더라도 드라마에 비할 수 없다.

그것을 모를 수만이 아닌데 도대체 무슨 의도로 그렇게 말을 한 것이란 말인가.

살짝 김이 빠진 것은 수연 또한 마찬가지.

하지만 뮤직비디오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감지덕지였다.

적어도 자신과 연희가 지목되었다는 것은 두 사람 중 한 사람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이었으니까.

연기에 딱히 자신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에게 기회가 온다면 최선을 다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허허! 아무래도 뮤직비디오라는 말에 실망한 듯하구나.”

“…죄송해요.”

자신의 배가 불렀다는 의미로 들려서 연희는 부끄러운 마음에 고개를 숙였다.

“아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지. 하지만 말이다, 이번 뮤직비디오는 네가 생각하는 그 정도 수준의 것이 아니다.”

“……?”

무슨 말인지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아 의아한 표정을 짓는 연희.

그녀의 모습에 수만은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그 뮤직비디오는 추후 미국 빌보드 차트로 진출할 수 있거든.”

“비, 빌보드 차트요? 게다가 미국?”

화들짝 놀라는 연희. 아무리 그녀가 연기자라 하더라도 미국의 빌보드 차트를 모를 리 없다. 그 정도 수준이라면 국내와 아시아 수준에 머무를 드라마에 비해 스케일 자체가 더욱 크다 할 수 있고.

“어디 그뿐이냐, 각국의 차트는 모조리 들 수 있는 엄청난 파워를 지니고 있다 할 수 있지. 아마 뮤직비디오에 출연하면 얼굴만큼은 세계적으로 알릴 수 있다는 뜻이다.”

“어, 엄청나네요.”

멍한 표정을 지은 채 중얼거리는 연희였다.

만약 수만의 말대로라면 지금 자신이 촬영하고 있는 드라마보다 파급력이 대단하다는 뜻 아니겠는가?

그저 평범한 뮤직비디오라 생각했지만 그녀의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스케일의 뮤직비디오였다.

“엄청나다 할 수 있지. 그 기회를 붙잡는 것도 무척 힘들었고. 후후!”

연희가 놀라는 모습을 보며 입가에 미소를 짓는 수만이었다.

“…….”

수연은 수만의 말을 듣고 무언가 머릿속에서 번쩍이는 것이 있었다.

일전에 현의 제스처만으로 창현이 현이라는 것을 알아낸 수연이었다. 평상시에는 추리력이 뛰어나지 않지만 현과 관련된 분야에서는 독보적인 추리력이 발동하고는 한다.

그것은 지금 또한 마찬가지.

세계적인 파급력이라는 것과 뮤직비디오라는 화두는 수연의 추리력을 자극하고 있었다.

그리고 빠르게 회전하는 그녀의 두뇌.

‘얼마 후면 창현이가 컴백을 한다고 했어. 그리고 AA엔터테인먼트는 우리 소속사랑 긴밀한 관계니까…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

번쩍이며 안광을 발하는 수연의 눈.

만약 수만이 받은 제의와 자신이 생각한 것이 일치한다면 이것은 엄청난 기회다!

더 이상 궁금증을 참지 못한 수연이 수만을 바라보며 묻는다.

“삼촌! 뮤직비디오를 제안한 것이 설마…….”

“아! 눈치 챘나? 하기야, 그 정도면 충분히 눈치 챌 만하지. 네 예상대로다. 바로 현의 뮤직비디오 여자 주인공으로 너희 두 사람이 지목되었다.”

미리 짐작하고 있었음에도 그 말이 주는 충격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설마 했는데 현의 뮤직비디오에 자신들 두 사람이 지목되다니.

“아아…….”

수만의 말을 들은 연희는 그제야 이해가 가는 표정이었고, 수연은 자신의 예상이 맞아떨어지자 눈을 더욱 빛낼 뿐이었다.

“저쪽에서는 너희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출연해줬으면 한다고 했다. 그리고 너희들의 의사를 전해달라 했지.”

창현이 두 사람 중 한 사람을 좁히지 못한 채 SM엔터테인먼트에 결정권을 넘긴 것은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거부하거나 스케줄 여건상 참여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전 하도록 할게요. 꼭 하고 싶어요.”

현의 뮤직비디오라는 말을 듣자마자 수연은 결정을 내리고는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힌다. 인지도 상승을 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창현과 함께 한다는 메리트를 그녀가 저버릴 리 없다.

“흠! 그래, 시카는 정했고, 연희 너는 어떠냐?”

“저는…….”

연희는 자신의 결정을 막 말하려 하다 순간 몸을 움찔 떨었다.

갑자기 옆에서 어마어마한 압박감이 전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의아한 표정을 지은 그녀가 옆을 바라보니, 수연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음식을 깨작깨작 먹고 있는 상태였다.

‘내가 잘못 느낀 건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하던 연희는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는 수만에게 자신의 결정을 털어놓는다.

“저도 하고 싶어요.”

드라마 촬영이 있지만 모처럼 찾아온 기회를 저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 둘 모두 하겠다라… 흐음!”

수연이 먼저 하겠다고 해서 양보할 줄 알았던 연희도 하겠다 하자 수만은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긴다.

두 사람이 모두 하겠다고 하면 결국 한 사람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뜻.

그 점이 아쉬웠지만 어차피 자리는 하나이기에 별 수 없다.

“좋다, 그럼 최종적인 결정은 현에게 직접 맡기는 것으로 하자. 가수가 직접 선택하는 것인 만큼 혹시 선택되지 못하더라도 섭섭해 하지 말도록 하고. 알겠지?”

자칫 이번 일로 관계가 틀어질 수 있는 것을 방지하는 수만이었다.

“네, 그렇게 할게요.”

“네, 삼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 두 여인은 각자 생각에 잠긴다.

‘연희 언니 연기력이 좋아서 창현이가 날 선택하지 않을 것 같은데…….’

‘현이 소녀시대랑 친하다는 걸로 보아 내가 힘들 것 같기도 하고…….’

그렇게 두 사람이 각각 생각에 잠긴 사이 식사는 차분한 분위기에서 이루어졌다.

“그럼 너희들의 결정을 회사에 알리도록 하마.”

“네, 삼촌. 수연이는 제 차로 데려가도록 할 테니 가도록 하세요.”

“그래?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마.”

따로 벤을 부를 생각이던 수만은 연희가 알아서 해결해준다는 말에 흔쾌히 수락하고는 가게를 떠난다.

“수연아 같이 가자.”

“네, 언니. 마침 할 말도 있었고요.”

“그래? 나도 있었는데.”

두 여인은 미소를 지으며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 속에는 날카로운 비수가 숨어 있었다.

바야흐로 현의 뮤직비디오 출연을 놓고 용호쟁투가 벌어지려 하고 있었다.


“여기 세워주면 돼?”

연희와 수연을 태운 벤이 향한 곳은 소녀시대 숙소가 위치한 아파트 단지.

두 사람을 태우고 도착한 로드 매니저가 묻는다.

“네, 수고하셨어요. 가보셔도 되요.”

벤에서 내린 연희가 매니저를 보며 싱긋 미소를 짓는다. 남자가 보면 환장할 만큼 아름다운 미소였다.

“응, 그래. 그런데 괜찮겠어? 아무래도 걱정이 되는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우려를 표하는 매니저.

그도 그럴 것이 연희가 한 말이 매니저로 하여금 쉽게 발길을 돌리지 못하게 만들기에 그렇다.

연희의 요구는 바로 이곳에서 자신들을 내려준 뒤 돌아가라는 이야기였다.

소녀시대 숙소와 연희가 머물고 있는 숙소는 상당한 거리.

그녀 또한 상당히 얼굴이 알려진 배우인 만큼 매니저로서는 걱정할 수밖에 없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요. 밤이라서 얼굴을 알아볼 사람도 없으니까요. 용무를 끝마치면 곧장 택시 타고 갈 예정이거든요.”

“음! 그래도…….”

담당 연예인이 이상한 일에 휘말리면 그 책임은 모두 매니저에게 돌아온다.

그것도 있고, 자기가 맡은 연예인에 대한 애정 또한 존재하는 바, 야심한 밤에 여자 연예인을 보내주려니 선뜻 내키지가 않았다.

그 걱정을 눈치 챈 것일까.

연희가 적절한 타협안을 제시한다.

“그러면 제가 돌아갈 때 핸드폰으로 택시 번호를 찍어서 문자로 보내드릴게요. 그럼 되죠?”

그렇게까지 말하니 매니저로서는 별 수 없다.

연희의 결심은 확고한 듯하였고, 자신이 말린다고 해서 말을 들을 것 같지도 않았으니까.

그렇게라도 한다면 어느 정도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해.”

“네, 그럼 가도록 하세요.”

“그래.”

“가세요.”

차를 얻어탄 수연 또한 인사를 하자, 매니저는 손을 흔들고는 차를 몰아 그대로 자리를 벗어난다.

벤이 떠나자 연희가 수연을 바라보며 여유로운 미소를 짓더니 말한다.

“그럼 우리는 잠시 이야기를 하도록 할까?”

“좋아요, 저도 이야기 할 게 있었으니까요.”

여유로운 연희의 모습에 수연은 왠지 모르게 자신이 말리는 것 같아 분한 마음이 들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대답한다.

두 여인은 밤까지 하는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각각 아메리카노를 시킨 두 여인.

“…….”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아메리카노를 보며 수연은 문득 옛 생각에 빠져든다.

불현 듯 창현과 만나서 이야기를 하던 순간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창현이를 처음 만났을 때 참 재미 있었지? 커피 전문점에 와서 딸기주스를 시켰으니까.’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재미있는 광경이었다 생각하며 수연이 연희를 바라본다.

참으로 이기적으로 예쁜 외모의 소유자가 아닐 수 없다.

여태까지 부럽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었다. 각각의 개성이 있는 법이고, 자신 또한 뒤처진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남자가 좋아할 법한 상이라는 것이 참으로 마음에 걸리게 하였고, 은연중 창현이 저런 스타일을 좋아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하였다.

무엇보다 자신과 한 살 차이이건만 자신은 갖추지 못한 성숙한 무언가가 있지 않은가.

‘홀려버리면 창현이한테 좋지 않은 영향이 미칠 테니…….’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며 수연은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신다.

“서로 이야기 할 주제는 같다고 생각해.”

“언니는 정말로 뮤직비디오에 출연할 생각이에요?”

“배우로서 기회가 찾아왔으니 당연히 해야 하지 않겠어?”

연예인은 한 방이라는 말이 있는 만큼 기회를 잘 붙잡아야 한다.

그것은 연희 또한 마찬가지.

현의 뮤직비디오 참여라는 메리트는 감히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상상 초월의 메리트를 지니고 있다.

그녀로서는 포기할 수 없는 달콤한 과실과도 같은 것.

하지 말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할 수 있다고 하니, 어찌 포기하려는 마음이 들겠는가.

당연히 하고 싶은 마음이 앞서는 것이 사실이었다.

“드라마 촬영을 해야 하잖아요?”

“드라마 촬영? 물론 해야지. 하지만 드라마는 아직 시작하지 않아서 어느 정도 여유가 있어. 게다가 뮤직비디오 촬영은 그렇게 길지 않다는 걸 수연이 너도 잘 알잖아? 고로 스케줄에 관련해서는 전혀 문제가 없다는 말씀.”

“으음!”

역시 포기할 생각이 없는 듯하였다.

막강한 적의 등장에 수연의 눈썹이 순간 찌푸려졌다가 곧바로 펴진다.

안 그래도 멤버들의 견제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데 연희까지 자신의 사랑을 이루는데 방해물(?)로 등장할 줄이야.

멤버들로 벅찬 중인데 난데없이 등장한 막강한 적이었기에 그녀로서는 골머리가 아플 수밖에 없다.

“수연이 너도 할 마음이 있다고 했지?”

“물론. 언니와 경쟁을 하는 한이 있어도 제가 할 거예요.”

“경쟁이라면 이미 연습생 시절에 이골이 나 있었으니 괜찮아. 그럼 서로 최선을 다하는 게 어때?”

“그, 그건…….”

쿨하게 모든 것을 정리해버리는 연희의 말에 말을 더듬는 수연.

그녀가 굳이 이야기를 나누자고 했던 것도, 은연중 드라마 스케줄을 언급했던 것도 다 이유가 있다.

바로 연희가 스스로 포기를 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에 압박을 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그녀의 의욕이 불을 지핀 꼴이 되었다.

스스로 무덤을 판 격이었기에 수연은 어물어물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마음먹고 나선다면 자신이 불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서로 최선을 다하고 누가 되던 간에 원망하지 않기야. 원망하기보다는 축하해주는 것이 보는 사람도 좋지 않겠어?”

“그것도 그렇지만…….”

“왜? 할 말이라도 있는 거야?”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한 수연을 보며 싱긋 미소를 짓는 연희였다.

마치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듯한 그녀의 모습에 수연은 음습한 기분이 들었지만 겉으로 내색하지 않는다.

지금 그녀가 신경 쓰고 있는 부분은 그것이 아니었으니까.

“아니에요.”

고개를 한 차례 저으며 부인하는 수연.

그러나 눈치가 빠른 연희는 그녀의 반응에 무언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수연을 재촉한다.

“뭔데? 말해봐. 들어줄게.”

뭐든지 말해보라는 식의 말에 머뭇거리던 수연은 입을 열기 시작한다.

“창현이는 낯을 많이 가리는 편이고… 아무래도 친한 사람이랑 하면 좀 더 작업이 수월해질 것 같고…….”

그 뒤에 이어지는 이야기.

그것은 다름 아닌 연희보다 자신이 할 경우 더 나아질 점들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허나, 그녀의 말은 대부분 틀린 것.

인간관계가 폭 넓지 못하나 다른 사람을 만남에 있어 창현은 딱히 제한을 두는 사람이 아니었고, 작업을 하는 관계와 친분 관계는 어느 정도 선이 그어져 있다. 물론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논리에 의해 친분 위주로 기용을 하지만 작업 능력이 따라오지 않을 경우 애초에 함께하지 않는다.

당황스러운 마음에 창현에 대한 정보를 자체적으로 바꿔버린 채 이야기하는 수연이었다.

“그러니까, 수연이 네가 해야 한단 이야기네?”

이야기를 들은 뒤 간단하게 결론을 내버리는 연희.

“따, 딱히 그런 의도로 이야기 한 건 아니고…….”

“그게 아니면 뭔데?”

“그게 그러니까… 그게…….”

“흐응?”

변명하듯 말하는 수연의 모습을 묘한 콧소리를 내며 재촉하는 연희였다.

그녀의 그러한 모습에 수연은 그야 말로 속수무책. 소녀시대 내에서 절대적인 카리스마로 폭군 행세를 하는 그녀였지만 연상이자, 강력한 연적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는 연희를 상대로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

약한(?) 것들만 상대하다가 너무 강한 적을 만나서 그런 걸까.

갑작스럽게 이어진 연타에 할 말을 잃어버린 수연을 향해 싱긋 웃어 보인 연희가 힐끗 그녀를 보고는 말한다.

“분명 수연이 네 말이 옳긴 한데 둘도 없는 기회일 뿐만 아니라 상대가 바로 현이잖아? 우리 기획사 프로듀서로 계약을 했다지만 난 한 번도 못 봤다고. 정말 보는 여자들이 족족 상사병에 걸려버릴 정도로 잘생겼는지 궁금하고, 그렇게 높은 인기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겸손하고 착한지도 궁금하단 말이야.”

“그, 그건…….”

차마 모두 맞다고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소문들이 맞으면 딱 내 이상형인데 말이야.”

저런 형태니까.

딱 연희의 이상형 그 자체였다.

네 살이라는 터울이 존재하지만 그 정도쯤은 의학(?)의 힘으로 얼마든지 극복이 가능하니, 적극적으로 나설 확률이 농후했다.

‘후후!’

시시각각 변하는 수연의 표정을 무척 즐기는 연희였다.

살살 반응을 보며 말할 때마다 움찔움찔 반응을 보여주니 이 얼마나 즐거운가.

하지만 방금 전 그녀가 했던 말들은 모두 사실이다.

그만큼 현과 함께 한다는 것은 매력적이었고, 배우로서 놓치기 힘든 기회였으니까.

“흐음! 뭐, 수연이 네가 그렇게 이야기하는 이유는 나도 알 것 같아.”

“어, 어떻게 알아요!”

묘한 콧소리를 흘리며 마치 “나는 모든 걸 알고 있다!” 라는 식의 표정을 짓는 연희를 보며 수연은 목소리를 높이고 말았다.

소녀시대 멤버들이었다면 그녀의 위압에 바로 짓눌렸을 테지만 연희는 여유롭게 수연을 진정시키며 말한다.

“진정하고. 내 예상이 틀릴 수도 있겠지만 그런 경우는 거의 없다는 걸 너도 잘 알고 있잖니?”

“으윽!”

연희의 말에 꼼짝없이 침몰하고 마는 수연.

웬만해서는 자신의 생각을 바꾸지 않을뿐더러 예측 또한 정확한 사람이었기에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수긍은 하지 않았지만 푹 숙인 고개가 사실을 인정하는 꼴인 것 같아 수연은 왠지 모를 패배감에 휩싸였다.

“뭐, 그건 그렇게 알고 있도록 할게. 수연이 네 마음도 잘 알았으니까.”

“…….”

싱글벙글 웃음을 짓는 연희를 보고 있자니 수연은 덫에 걸린 것이 그녀가 아니라 자신이었다는 것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이 잘 말하면 포기할 줄 알았던 그녀가 역으로 함정을 파 자신의 감정을 알아차리는 상황이 되어버렸으니까.

“물론 비밀로 해줄게. 나도 그 부분은 어느 정도 필요하다 생각하니까.”

“…그건 고마워요.”

속으로 그녀가 그걸 빌미로 협박하면 어떻게 하나 싶었던 수연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생각해보면 그녀와 함께 한 시간이 얼마인데 그것 가지고 염려하다니. 괜히 자괴감에 빠져들었다.

“어쨌든 나도 현을 한 번 만나보고 싶다고. 만나면 앨범에 싸인도 받고, 함께 사진도 찍고… 혹시 또 알아? 이번 뮤직비디오에 키스신이라도 있을지? 호호! 그럼 이만 난 가볼게. 계산은 내가 할 테니 천천히 나와.”

묘한 떡밥을 흘린 연희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선다.

치고 들어갈 때와 물러설 때를 제대로 파악해야만이 진정한 낚시꾼이 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그녀는 훌륭한 낚시꾼이었다.

연희가 나가고 자리에는 수연만 남게 되었다.

이야기를 나누던 그녀는 떠났지만 수연은 여전히 자리를 지킨 채 침묵하고 있었다.

수연은 연희가 마지막에 남긴 말을 곰곰이 곱씹고 있었다.

자신의 마음을 걷잡을 수 없게 떨리게 만든 그 단어!

‘키, 키스신이라고?’

들리지 않게 작게 중얼거리던 수연의 눈에 강렬한 열망이 서리기 시작한다.

절대 물러설 수 없는 한 가지 이유가 추가 되는 순간이었다.


“수연아 어서와!”

“언니, 어서 오세요!”

숙소 안으로 들어가자, 멤버들이 반겨준다.

하지만 연희가 던진 키스신이라는 떡밥으로 인해 머릿속이 분주하고 움직이고 있던 수연은 그 인사에 답을 하지 못한다.

“응?”

터벅터벅 안으로 들어서는 수연을 보며 태연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그녀에게 다가가 어깨를 살짝 치며 말한다.

“왜 그래, 수연아? 우리 인사도 못 듣고?”

갑작스러운 태연의 행동에 수연이 화들짝 놀랐다가 그녀의 말을 듣고는 대답한다.

“으응? 인사 했나? 응, 그래.”

“뭔가 이상한데? 흐음!”

수연의 반응에 이상한 점을 발견해낸 것일까?

태연은 데뷔 전 수연이 남몰래 창현에게 보컬 트레이닝을 발각해낸 그때 마냥 날카로운 직감을 보이며 그녀의 행동에 의심을 보이기 시작한다.

“뭐가 이상한데?”

연희에게 맥없이 당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소녀시대 내에서는 아직까지 먹이사슬 최상위에 군림하고 있는 수연이었다.

속으로 무척 당황했지만 그녀는 겉으로 내색하지 않은 채 쿨한 모습으로 태연을 대했다.

“응? 아, 아냐. 그런데 오늘 이야기는 어때? 잘 됐어?”

수연의 눈매가 날카로워지는 것을 보고는 황급히 이야기 전환을 시도하는 태연.

딱히 트집을 잡을 만한 행동을 하지 않았기에 수연은 꼬투리를 잡지 못하고는 그녀의 말에 응한다.

“이야기? 잘 됐지. 잘 하긴 했어…….”

“뭐였는데? 스케줄에 관련된 거라면서?”

“그건…….”

막상 그 부분에 도달하자 수연은 대답할 수 없었다.

지금 자신의 입에서 현의 뮤직비디오에 출연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면 상황은 어떻게 될까?

그야 말로 초토화 그 자체가 될 것임이 분명하다.

가뜩이나 연희와의 경쟁에 모든 힘을 쏟아야 하는 수연에게는 재앙이나 다름없겠지.

연희와 경쟁에 힘을 쏟아도 부족할 판에 멤버들의 견제마저 견뎌낼 자신이 없었기에 수연은 확정될 때까지 이야기하지 않기로 결심한다.

‘요즘 애들이 반역을 꾀하는데 빌미를 주면 안 되지.’

정권을 지키기 위해서(?) 수연은 갑자기 졸린 듯 눈을 껌뻑이더니 손으로 눈을 비비고는 말한다.

“음! 나 졸린데 씻고 자면 안 될까?”

나긋나긋한 말이었지만 그 속에는 말리면 절대 가만두지 않겠다는 칼날이 숨겨져 있었다.

수연의 연기가 통했음일까.

태연은 다소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그, 그래.”

“응, 그럼 난 좀 쉴게.”

그러면서 씻기 위해 곧장 화장실로 향하는 수연이었다.

“…….”

그녀의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는 태연.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어안이 벙벙하여 수연에게 압도 당하던 모습을 보이던 그녀의 눈이 순간 날카롭게 벼려지며 예기를 뿌리기 시작한다.

“흥! 내가 너의 발연기에 넘어갈 것 같아?”

나름대로 연기를 한답시고 연기를 했지만 너무나 갑작스러운 화제 전환은 개연성 부족을 유발하였고, 추리의 촉이 본격적으로 발동하기 시작한 태연의 후각에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이미 추리력이 본격적으로 발동한 상태였기에 수연은 태연의 레이더망에 벗어날 수 없었다.

“분명 뭔가 있어. 숨길만한 무언가가.”

날카로운 예기를 뿌리며 태연은 계획을 세우기 시작한다.

기습적으로 물어봤음에도 불구하고 수연이 대답하지 않았다는 것은 무언가 숨길만한 일이라는 것.

그렇다는 것은 무언가 비밀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라 단정지을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발달한 태연의 촉은 자꾸만 창현과 연관된 무언가라 생각되었다.

만약 그렇다면 절대 간과할 수 없는 문제.

아닐 확률이 농후하지만 만약의 가능성이 초래할 수 있는 파장은 상상을 초월했기에 태연은 곧장 계획을 세우기 시작한다.

그녀가 선택한 대상은 수영이었다.

키가 클 뿐만 아니라, 상당한 기개(?)를 지녔기에 수연의 아우라에도 쉽사리 밀리지 않는 수영이라면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 생각되었다.

‘좋아, 수영이! 너로 정했다.’

그렇게 마음을 굳힌 태연이 TV를 시청하고 있는 수영에게 향한다.

그녀에게 다가가던 태연의 발걸음이 문득 멈추고 수영에게 향한다.

아무리 먹어도 살이 찌지 않는다는 그녀는 얼마 전 식신 은퇴 선언과 함께 가급적 밤에 먹는 것을 자제하고는 하였다.

그것은 놀라울 만한 성과를 안겨다 주었는데, 가뜩이나 늘씬하던 다리가 더욱 더 날씬해지는 효과가 발휘되었던 것이다.

가뜩이나 길쭉한 다리가 더욱 가늘어지니 태연으로서는 분통이 터질 수밖에 없다.

자신은 아무리 가늘어도 화면으로 나오면 본전치기 밖에 하지 못하는데 수영은 길어서 더욱 가늘어 보이니 이 얼마나 억울한 상황이란 말인가!

‘저기에서 5cm만 내 것이었어도 내 팬 층이 다섯 배는 늘었을 텐데!’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면서 태연은 수영 앞에 도달한다.

“왜 그래, 탱구?”

소파에 앉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키 차이가 얼마 나지 않자, 태연의 이마에 혈관 마크가 파직! 하고 돋아났다가 사라진다.

“잠시 할 이야기가 있어.”

“뭔데 그래?”

드라마를 한창 보던 중 태연이 불러서인지 수영은 불만스러운 기색을 보였다.

“창현이랑 관련된 일일지도 몰라.”

태연의 말에 수영의 얼굴이 진지하게 변하더니 묻는다.

“…말해봐, 탱구.”

“사실은 말이야…….”

자신이 의심하고 있는 바에 대해 수영에게 털어놓는 태연.

이야기를 듣던 수영의 표정은 진지하였으며,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하는 태연의 말에 동조하기 시작하였다.

“어때?”

“가능성뿐이지만 상당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어.”

그녀의 말처럼 태연의 말은 단순한 추측일 수도 있지만 상당한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만약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야 말로 핵폭탄급 충격이 휩쓸고 지나간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내가 세운 계획이 있는데…….”

“그래? 말해봐.”

계획을 세웠다는 이야기에 수영은 태연이 자신을 왜 불렀는지 알아차리고는 눈을 빛낸다.

“내가 세운 계획은 바로…….”

속닥속닥 이야기하는 태연.

그 이야기를 듣는 수영은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한다.

살짝 불안한 기색을 보였지만 가장 가능성이 높은 이야기였기에 결국 태연의 계획에 동의하고 만다.

두 사람의 계획이 본격적으로 발동되는 것은 내일 아침이었다.


하루가 지났다.

이른 아침 소녀시대 숙소는 고요하였다.

가장 먼저 일어나는 축에 속하는 태연, 효연, 주현의 기상 시간은 아침 7시에서 8시 사이였고, 나머지 멤버들은 각각 개인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그 중에서도 아침에 약한 수연과 미영은 상당히 늦게 일어나는 축에 속했는데, 누가 깨워주기 전까지 푹 잠드는 스타일이었다.

오전 8시.

아침 스케줄이 없기에 깨어나기에 이른 시간이건만 일찍 일어난 두 사람이 있었다.

바로 전날 계획을 세운 태연과 함께 실행에 옮기기로 한 수영이었다.

오늘 이 계획을 위해 드라마를 포기하고 일찍 잠에 들었다.

그렇기에 두 소녀는 만반의 준비를 갖춘 상태였다.

이제 남은 것은 실행으로 옮기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취하는 것뿐이다.

“준비 됐어?”

“물론이지.”

“수연이는?”

“평소랑 같아. 세상모르게 자고 있어.”

“좋아, 그럼 작전 개시다.”

룸메이트 수영의 제보로 확신을 얻은 태연은 곧장 작전에 들어가기 시작한다.

태연이 세운 계획은 간단한 것이다.

바로 잠에 든 수연의 상태를 이용하는 것.

비몽사몽에 빠진 수연은 귀찮게 굴며 질문을 하면 무엇이든지 술술 말하고는 한다.

아침 스케줄이 있을 때면 이것을 이용하여 적절하게 수연을 낚시했던 태연이었기에 이 점을 이용하기로 한 것.

오늘은 상당히 예민한 질문이 포함되어 있기에 방패막이로 수영을 합류시킨 것이다.

준비 완료된 것을 확인한 두 사람은 곧장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한다.

수연이 잠든 침대로 향한 두 사람은 자세를 갖춘다. 그리고는 수영이 수연의 몸을 흔들며 깨우기 시작한다.

“수연아, 일어나.”

아침에 상당히 약한 수연은 자신의 몸을 흔들어 깨우는 손길을 느끼자 얼굴을 살짝 찌푸리더니 늘어지는 목소리로 말한다.

“왜에? 나 졸린데에…….”

상당히 애교스러운 목소리여서 평소 이미지와 사뭇 다르다.

간간히 터지는 애교는 그야 말로 레어, 유니크, 신급!

태연과 수영은 그러한 모습을 귀엽다 생각하면서 좀 더 박차를 가하기 시작한다.

“수연아, 그럼 한 가지만 물어볼게. 대답해주면 귀찮게 굴지 않을게. 어때?”

한동안 수영의 견제(?)로 달콤한 수면을 이루지 못한 수연에게 있어 태연의 말은 엄청난 유혹과도 같았다.

달콤한 그 제안을 수연은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뭔데에?”

“음! 다름이 아니라 수연이 네가 어제 삼촌하고 이야기 나눈 스케줄 제의가 뭔지 궁금해서 말이야.”

“그건 왜 묻는 건데에?”

곧바로 대답할 줄 알았던 수연이 다시 한 번 묻자 태연은 순간 움찔했지만 그녀의 목소리에 서려있는 감정은 견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 의아해서 묻는 것 같았기에 한시름 놓으며 답한다.

“멤버들간에 무엇을 하는지 알아야 하잖아. 다른 애들도 궁금해 하는 눈치라서 묻는 거야. 다른 의도는 없고.”

떡밥은 모두 던져놓았다.

이제 대어가 떡밥을 물고 낚이는 것을 기다릴 뿐.

평소에는 빈틈없는 행동과 강렬한 카리스마로 멤버들을 올킬하고 다니는 폭군 수연이었지만 지금은 비몽사몽 잠에 취해 단 5분을 10시간 마냥 즐기며 잠들 수 있는 상태였다.

철저하게 준비한 태연의 떡밥을 그녀는 물 수밖에 없었다.

“그냥… 창현이 뮤직비디오에 참여할 수 없냐고…….”

비몽사몽 잠에 취해 이야기를 하던 수연은 순간 잠기운이 확 달아나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이야기를 무의식적으로 발설해버렸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평소 많았던 잠기운이 썰물처럼 사라져버린 것이다.

‘내가 지금 무슨 이야기를…….’

입으로 직접 이야기를 했지만 수연은 자신이 이야기 하지 않았기를 간절히 바랐다.

이 이야기가 몰고 올 후폭풍이 얼마나 클지 그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제발 자신이 지금 꿈꾸고 있는 것이길 바라면서 수연은 서서히 고개를 돌렸다.

헉!

지금 상황은 결코 꿈이 아니었다.

고개를 돌린 수연의 눈에 들어온 것은 두 눈이 활활 타오르고 있는 장신 한 명과 단신 한 명이었다.

“호오, 그러셔? 그렇단 말씀이지? 호홋! 우리 수연이가 참으로 대어를 낚았네.”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은 활활 타오르고 있는 태연이었다.

“멋진데, 정수연? 감히 그런 사실을 감추려고 했어?”

옆에 있던 수영 또한 맞장구친다.

“난 그저…….”

“변명은 필요 없다고, 정수연 양. 자세한 이야기는 조금 있다, 차근차근 풀어서 들을 테니까.”

그러면서 수연의 오른쪽을 점하며 팔을 붙잡는 태연. 그러자 수영이 자연스럽게 왼쪽을 점하며 팔을 붙잡는다.

꼼짝없이 두 사람에게 제압된 수연이었다.

막 일어난 상태라 그런지 몸에 힘도 들어가지 않았다.

그저 무력한 모습으로 제압되는 수밖에.

“연행해.”

태연의 말과 함께 수영은 곧장 그녀에게 협력하여 수연을 데리고 거실로 향한다.


좌 수영, 우 태연에 의해 양팔이 단단히 결박된 수연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과거 소녀시대 내 폭군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한때 정권을 좌지우지(?) 했던 지배자였건만 지금은 소파에 내동댕이쳐지는 신세.

“윽!”

막 일어난 터라 힘도 제대로 들어가지 않아 수연은 그대로 소파에 널브러진다.

하지만 방금 전 수연이 실토(?)한 내용 때문에 태연과 수영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

처참하게 몰락한 옛 정권자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태연이 수영에게 말한다.

“수영아! 애들 다 모아봐.”

그저 간단하게 말하는 것이었지만 수영은 평상시와 다른 엄청난 압박감을 받았다.

마치 폭군 시절 수연이 압박을 주는 것과 비슷한 압박감을 느꼈다랄까?

가끔 폭주하여 멤버들을 올킬하던 버서커 탱구의 모습이 다시금 드러나고 있었다.

“애, 애들이 일어나려 할까?”

자신도 모르게 말을 더듬는 수영. 그도 그럴 것이 아침에 약한 멤버들이 몇몇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시간은 아직 이른 시간. 오늘 오전 스케줄이 없다하여 대부분 늦게 잤기에 잠을 깨우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임이 분명했다.

염려 섞인 수영의 말에도 불구하고 태연은 대수롭지 않은 듯 답한다.

“창현이에 관련된 일이라고 하면 다 일어날 거야.”

“알았어.”

태연의 낌새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아차린 수영은 후다닥 움직인다.

그러자 거실에 남은 것은 태연과 수연 뿐.

소파에 널브러졌던 수연이 몸을 일으키며 날카로운 눈으로 태연을 바라본다.

예전이었다면 단숨에 그녀를 압도했을 얼음 레이저였다.

하지만 지금 부러움으로 인해 버서커 모드로 변해버린 태연이 얼음 레이저에 당할 리 없다.

“태연이 네가…….”

“이야기는 조금 있다가 하기로 해. 곧 있으면 애들이 나올 테니까.”

그 말을 하기 무섭게, 우당탕! 하는 소리와 함께 멤버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다.

태연의 명령(?)대로 수영이 충실히 이행한 듯 싶었다.

“태연아! 무슨 말이야! 도대체 무슨…….”

“조금 기다려봐. 다 나오면 이야기를 시작할 테니까.”

다급한 어조로 묻는 미영을 진정시킨 태연. 잠시 후, 모든 멤버들이 거실에 나와 수연을 중심으로 넓게 포진하였다.

모두 잠기운이 묻어나오고 있었지만 창현에 관련된 이야기라는 걸 전해들은 상황이라 그런지 눈이 부리부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멤버들을 한차례 스윽 둘러본 태연이 입을 열기 시작한다.

“어제 수연이가 삼촌에게 부름을 받아 밖에 나간 걸 알고 있을 거야.”

“스케줄에 관련된 것이라 들었어요, 언니.”

주현이 손을 들며 말하자, 태연은 고개를 끄덕인다.

“주현이 말대로야. 삼촌이 갑자기 부르시기에 우리 모두 그렇게 알고 있었지. 그리고 어제 수연이가 집에 돌아왔을 때, 나는 수연이한테 스케줄에 관련된 것을 물어봤어. 무엇인지 궁금하기도 했고, 우리들끼리 굳이 감출 것도 아니라 생각했기에.”

“…….”

모두가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다른 멤버들에게 스케줄이 생겼다면 축하해줄망정 시기나 질투는 하지 않으니까.

“그런데 수연이가 대답을 해주지 않더라고? 오히려 피곤하다는 말로 일축하며 대답을 회피했지. 나는 그 태도에 의구심을 느꼈지. 그리고 나의 예민한 감각이 속삭이기 시작했어. 지금 수연이가 나에게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고. 마치 예전 몰래 보컬 트레이닝 때처럼!”

그러면서 이글이글 불길이 타오르는 눈동자로 수연을 바라보는 태연이었다.

그 시선에 수연 또한 지지 않고 시선을 마주하기 시작한다.

아무리 늙었어도 사자는 사자인 법. 여덟 명의 적(?)들에게 포위당한 상태였지만 그 기개만큼은 여전하였다.

“당시 나의 추리가 들어맞아 몰래 창현이의 보컬 트레이닝을 독점하던 수연이의 마각을 벗겨낼 수 있었지.”

‘그냥 미행을 하신 거잖아요.’

바른 소녀 주현은 그 점을 지적해주고 싶었지만 반쯤 버서커화 된 태연에게 그런 말을 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옳은 말을 꺼내기 힘들 만큼 버서커 탱구는 무서웠으니까.

“그리고 이번에도 마각을 알아차리는데 성공했어. 바로 수연이의 스케줄이 뮤직비디오 제의였으며, 그것이 본능적으로 창현이의 뮤직비디오 촬영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

태연의 외침에 수영을 제외한 멤버들이 설마설마하다가 모두 경악한 표정을 짓는다.

“태, 태연 언니! 지, 지금 수연 언니가 창현이의 뮤직비디오에 출연한다는 말이에요, 언니?”

경악한 목소리로 묻는 윤아였다.

“맞아, 창현이의 뮤직비디오 여배우에 캐스팅 되었다고 하더군.”

경악과 충격.

특히 윤아가 받은 충격은 큰 것이었다.

뮤직비디오 전문 배우(?)가 바로 여기에 있는데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캐스팅 되다니!

배가 아파도 이렇게 배가 아픈 상황이 없으리라.

다른 멤버들도 모두 표정이 좋지 않았다.

“난… 난 말이지…….”

모두가 부러움과 아쉬움, 배가 아픈 표정이 그대로 얼굴에 드러나고 있을 때 태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선이 태연에게 향하자, 그녀의 몸은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무언가 끓어오르는 것을 애써 참는 듯한 모습이었다.

“난 결코 부러워서 그러는 게 아니야. 그래, 수연이가 나한테 말해주지 않은 게 섭섭해서! 섭섭해서 그러는 거야! 너희들도 그렇지!”

대의명분을 갖추는 것은 무척이나 중요하다.

그것 하나로 모두가 단결할 수 있으며, 힘을 합칠 수 있으니까.

전직 폭군이라는 강력한 적 앞에 태연은 결코 부러워서 그러는 것이 아닌, 스케줄에 관련된 내용을 털어놓지 않아서 섭섭하다는 것을 제시하였다.

그것을 소녀들이 알아차리지 못할 리 없다.

“그러게, 우리는 부러워서 그러는 게 아니야. 다만 말해주지 않은 수연이한테 섭섭해서 이러는 거지.”

“맞아요, 결코 배가 아파서 그러는 게 아니에요. 그렇죠?”

그러면서 슬금슬금 수연에게 다가가는 멤버들.

그 모습을 보면서 수연의 안색이 점점 하얗게 변하기 시작한다.

유독 예민한 자신이 간지럼 형벌에 처하게 될 경우 얼마나 처참해질지 그녀 스스로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자, 잠깐! Stop!”

다가오는 사람들 중에는 한때 그녀의 충실한 수족노릇을 하던 효연과 윤아도 포함되어 있었다.

“실행해!”

마치 조폭 두목과도 같은 태연의 명이 떨어지자 소녀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수연을 처벌하기 시작한다.

사지를 붙잡고 간지럼 형벌에 처하기 시작한 것.

소녀들은 결코 부러워서 그러는 것이 아닌, 말해주지 않은 것에 대해 섭섭함을 느껴서 그런 것이라 말해주었다.

수연의 사지를 붙잡고 있는 유리와 수영, 그리고 흐뭇한 미소를 지은 채 지켜보고 있는 태연, 그리고 유한 성격을 지닌 주현을 제외한 다섯 쌍의 손이 그녀의 몸 곳곳을 누비기 시작한다.

“히히히! 히힝! 제, 제발 용서해줘!”

한때 숙소 분위기를 좌지우지하며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폭군의 모습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그저 간지럼에 몸을 바동거리며 애처롭게 몸을 떠는 옛 정권의 몰락 장면만 비춰지고 있을 뿐.

“후! 스트레스가 좀 풀리네!”

“부족한 듯하지만 이 정도면 뭐…….”

한동안 하얗게 불태운 소녀들이 하나둘씩 물러서기 시작한다.

그러자 그곳에는 사지를 결박당한 채 몸을 간헐적으로 떨고 있는 수연의 모습만이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지옥은 끝난 건가?’

견디기 힘들었던 간지럼 지옥이 끝났다는 생각이 미치자 수연의 얼굴에 한줄기 희망이 서리기 시작한다.

그때, 수연의 머리 위에 드리우는 한 사람의 그림자.

수연이 고개를 올려 그 그림자의 정체를 확인하니, 바로 여태까지 침묵하고 있던 주현이었다.

허공에서 마주치는 두 여인의 눈동자.

잠시 수연을 바라보던 주현이 돌연 고개를 꾸벅 숙이며 수연에게 사과를 한다.

“언니 미안해요.”

“마, 막내 너마저……”

지옥이 모두 끝났다는 안도감 뒤에 덮쳐오는 절망과, 믿고 있던 막내에 대한 배신감이 수연의 얼굴을 물들이기 시작한다.

그런 수연의 반응에도 불구하고 주현은 서서히 수연에게 다가간다.

“이것이 대세니까요. 그리고…….”

말을 잠시 멈춘 주현은 서서히 양손을 든다.

그와 함께 꼬물거리는 열 개의 손가락. 제각각 수려한 움직임을 보이는 열 개의 손가락에 몸에 닿게 되면 어떻게 될지 상상만 해도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리는 듯했다.

“전 언니가 너무너무 부러워요. 미안해요 언니.”

스케줄을 말해주지 않았다는 대의명분으로 포장한 다른 멤버들과 달리 솔직한 자신의 진심을 털어놓으며 그대로 수연의 몸으로 향하는 주현의 양손.

“히익!”

하얗게 질린 수연은 사지를 결박당한 채 그대로 주현의 손에 농락(?)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날 소녀시대 먹이사슬 최상위에 군림하던 얼음공주는 최하위 띨파니보다 하위로 내려앉게 되었다.

본격 하찮싴의 탄생이었다.


“그러니까… 아직 확정된 게 아니라는 거지?”

“맞아. 아직 확정되지 않은 거라서 이야기를 하지 않은 건데… 너무해, 너희들.”

“미, 미안!”

예전처럼 위압감 있게 나무라는 것이 아닌, 투정부리듯 이야기하는 수연의 모습에 멤버들은 그 모습이 무척 귀엽다고 느꼈다.

진즉에 이런 모습을 보일 것이지.

사태를 주도한 태연은 괜히 머쓱해져서 고개를 돌린다.

실수라는 걸 알고 있지만 사과하기에는 너무나 먼 길을 와버렸다.

‘그래도 할 수 있는 거니까…….’

그렇게 합리화시키는 태연이었다.

“그런데 두 명이라고 했잖아? 우리 SM엔터테인먼트 출신이라 했는데 누구야?”

머쓱해하며 자리에서 일어선 태연의 빈자리를 잽싸게 차지하여 질문을 날리는 유리.

그녀는 첩보 활동을 게을리 하지 않는 유능한 재원이었다.

“연희 언니.”

“연희 언니? 으엑! 연희 언니라고?”

수연의 말에 비명과도 같은 소리를 흘리는 유리. 다른 멤버들 또한 그녀와 다를 바 없는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그녀들이 그런 반응을 보이는 이유는 간단했다.

이연희!

그녀는 폭군 시절 수연의 카리스마와 리더 태연의 통솔력, 윤아와 비등 혹은 우위에 선 미모와 유리의 지략을 지닌 여인이었다.

연습생 시절 그야 말로 공포의 대마왕이라 불리던 존재!

화사하게 지은 미소 속에 숨겨진 비수는 얼마나 날카롭던가!

수연이 백두산이라면 연희는 에베레스트 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폭군을 뛰어넘는 대마왕이 바로 연희였던 것이다.

“하필이면 연희 언니랑 경쟁을 하게 되다니…….”

유리의 얼굴이 안쓰러움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그만큼 연희는 상대하기 힘든 강적임이 분명했다.

다른 멤버들 또한 수연을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런 시선들이 거북했지만 수연은 멤버들이 자신을 걱정해주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난 포기하지 않을 거야. 나한테 찾아온 기회니까.”

“그건 그렇지. 하지만…….”

“상대가 너무 강해.”

작게 중얼거리는 유리의 말을 미영이 받아준다.

그녀들이 생각하는 연희는 그 정도로 강한 적이었다.

“연희 언니가 아무리 강하더라도 맞부딪치면 승산은 있어. 난 포기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너희들이 협력을 하지 못하더라도 방해는 하지 말아줬으면 해.”

협력이라는 말에 움찔하던 멤버들이 이어진 수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알았어, 난 방해하지 않을게. 아니, 오히려 수연이 너의 승리를 빌어줄게.”

“나도 마찬가지야.”

그녀들이 그런 반응을 보인 것은 자칫 연희가 자신들의 협력을 알아차릴 경우 후환이 그대로 돌아올 것을 염려했기에 그렇다.

공포의 대마왕은 주변에 협력한 인물들 또한 모조리 초토화시켜버리는 것으로 유명했으니까.

“그거면 돼.”

수연도 그 이상을 바라지 않고 있었다.

기왕이면 멤버들이 자신을 도와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지만 그것은 자신의 과욕이라는 것을 그녀 스스로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창현과 관련된 일인 이상 오히려 방해를 걱정해야 할 처지였으니까.

그러던 중 연희의 등장으로 멤버들의 방해를 견제할 수 있게 되자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괜찮아. 애들이 방해하지만 않으면 나에게도 가능성이 있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계획을 세우기 시작하는 수연이었다.


그렇게 폭풍과도 같은 오전 시간이 지나고, 오후 스케줄이 있는 멤버들은 본격적으로 스케줄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오늘은 고정 스케줄이 있는 멤버들을 제외한 다른 멤버들도 예능 프로그램 촬영이 있기에 시간이 비는 것은 수연밖에 없었다.

“수연아, 어떻게 할 거야? 숙소에 있으려고?”

막 준비를 마친 수영의 물음에 수연이 고개를 젓는다.

“아니, 숙소에 혼자 있으면 좀 그러니 나도 회사에 가보려고.”

“회사에? 흠! 하기야, 숙소에 혼자 있으면 쓸쓸할 수 있으니 그것도 괜찮겠네.”

그렇게 멤버들이 차례차례 씻고, 스케줄이 없지만 가던 도중 회사를 지나칠 일이 있기에 수연은 벤을 타고 SM엔터테인먼트까지 손쉽게 도착할 수 있었다.

간단하게 신분을 증명하고 회사 안으로 들어선 수연은 곧장 위층으로 올라가기 시작한다.

그녀가 향한 곳은 소녀시대 기획을 전담하고 있는 기획실장실이었다.

백 실장은 수연을 보고는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맞이한다.

“어서 와라, 시카야. 마침 잘 왔다. 널 부를까 싶었는데.”

“저를요?”

나름대로 목적을 가지고 왔던 수연은 백 실장이 자신을 반겨주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다.

“그래, 오디션이 3일 후로 잡혔거든. 그래서 그에 대한 시나리오를 건네주려 했지.”

“아, 네!”

안 그래도 수연이 찾아온 이유가 이번 창현이 촬영하게 될 뮤직비디오 시나리오를 받기 위함이었다. 뮤직비디오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좀 더 자신에게 맞는 이미지를 찾는다면 오디션에서 잘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으니까.

시나리오를 주겠다고 하던 백 실장이 아무것도 건네주지 않자 수연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다.

‘왜 시나리오를 안 주시는 거지?’

그러면서 달라는 표시로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백 실장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묻는다.

“뭐하는 거냐?”

“시나리오 주시는 거 아닌가요?”

도리어 묻는 수연의 모습에 백 실장은 피식 웃음을 짓고는 말한다.

“아아, 그거 말이냐? 시나리오는 지금 회장님이 갖고 계시다. 아마 직접 건네주실 생각이신 것 같던데? 할 이야기가 있던 것 같고. 비서실에 내가 연락을 해놓을 테니 회장실에 올라가도록 해라.”

“네. 그렇게 할게요.”

수만이 직접 건네준다는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짓던 수연은 이번 일이 그가 공을 들이고 있다는 것을 떠올리고는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였다.

기획실을 벗어난 그녀는 곧장 회장실로 향한다.

현재 손님이 있고, 잠시 기다려야한다는 비서의 말에 자리에 앉아있던 수연은 회장실에서 나오는 사람을 보고는 멈칫한다.

회장실에서 나온 사람은 다름 아닌 연희였던 것이다.

연희가 밖으로 나오는 것을 본 수연이 순간 얼어붙었다. 설마 그녀가 회장실에 먼저 향했을 것이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녀는 밖으로 나오다가 수연을 보고는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인사를 한다.

“수연아 안녕?”

“언니가 어떻게 여기에…….”

“내가 뭐 못 올 곳 왔니?”

여유롭게 미소 짓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수연은 불안한 마음이 불쑥 치솟았다.

‘설마 이 언니가 나랑 비슷한 생각을?’

가뜩이나 불리한 상황이건만 자신보다 한 발 앞서 철저함을 보인다면 승산은 너무나 낮다.

밑바닥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패배감을 힘껏 억누르는 수연. 아직 단언하기에는 이르렀고, 결과를 미리 도출하는 것도 어리석은 선택이다.

“그건 아니고요.”

“할 이야기가 있어서 잠시 온 거야. 나 다음으로 올 손님이 너였나보구나? 어서 안으로 들어가도록 해.”

“네…….”

수만을 기다리게 할 수 없는 노릇이기에 수연은 상념을 접어두고 안으로 들어간다.

안으로 들어서는 그녀의 모습을 미소 지은 채 바라보던 연희는 발걸음을 옮긴다.


수연이 들은 이야기는 별다른 것이 없었다.

AA엔터테인먼트로 오디션을 보러 가면 주의해야 할 점들을 여러 가지 주지시킨 것뿐. 이쪽에서 아무렇지도 않을 이야기가 저쪽에서는 기분 나쁠 수도 있고, 예민하게 반응할 수도 있는 것들이 있기에 그 부분에 대한 것을 주의를 주었던 것이다.

충분히 그럴 수 있었기에 수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하였고, 창현의 뮤직비디오에 관련된 시나리오를 받고 숙소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게 창현이의 뮤직비디오 시나리오…….’

다크 스타 우수회원이라는 어마어마한 위엄을 자랑하며, 얼마 후면 최우수회원으로 등급 조정이 가능해질 수연은 창현의 뮤직비디오가 기존의 것과 궤를 달리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노래는 듣지 않았지만 뮤직비디오를 보는 것만으로도 바뀐 것이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특히 뮤직비디오 같은 경우 기존의 것과 스케일 자체를 다르게 한다는 것으로 보아 이번에는 시각적인 측면도 상당한 신경을 쓰는 듯하였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시나리오를 훑어보며 수연은 자신이 어떻게 하면 오디션에서 더욱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을까 곰곰이 생각에 빠진다.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을까.

“…….”

그렇게 시나리오를 한 번 읽고, 또 다시 한 번 읽으며 생각에 잠겨있던 수연의 눈이 순간 크게 뜨인다. 무언가 떠오른 것이다.

그 길로 즉시 그녀는 발걸음을 돌렸다. 적어도 쉽게 밀리지 않을 방법이 떠올랐다.


소녀시대 숙소.

모두가 잠든 이른 시간,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나는 사람이 있었다.

잠에서 깨어 자리에 일어서는 여인의 정체는 다름 아닌 수연이었다.

아침에 약하다는 말을 저버리기라도 하듯 누구보다 일찍 자리에서 일어난 것이다.

아직 남아있는 잠결을 쫓아내기 위해서인지 자리에서 일어나 간단한 스트레칭을 하는 수연.

잠결을 모두 쫓아낸 것인지 한결 맑아진 눈빛을 띤다.

그리고 양손으로 볼을 짝짝! 치며 스스로 다짐한다.

“오늘이야.”

오늘은 그녀가 현의 뮤직비디오 여배우를 선정하는 오디션에 참가하는 날이다.

SM엔터테인먼트에 들려 대본을 받은 뒤 수연은 자신이 연희보다 강한 임팩트를 줄 수 있고, 좀 더 뽑힐 확률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는데 성공하였다.

다만 그 방법을 시전 할 경우 끼칠 여파가 만만치 않아 고민했지만 앞뒤를 재고 있을 만큼 여유가 없는 상태.

큰마음을 먹고 일을 저지르기로 마음을 굳혔다.

“할 수 있어!”

공포의 대마왕을 반드시 꺾어주겠다 마음먹으며 수연은 방 한쪽에 마련해둔 것을 챙겨든다.

며칠 전 은밀하게 공수(?)해온 필승 아이템들이었다.

이것만 있다면 자신이 강렬한 임팩트를 주는 것이 가능할뿐더러, 연희와 일전을 불사할 수도 있으리라.

필승 아이템을 들고 조용히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는 수연.

행여나 멤버들이 깰까 싶어 그녀의 발걸음은 무척 조심스러웠다.


소녀시대 숙소는 특별한 오전 스케줄이 없으면 아침 9시에서 10시쯤에 본격적으로 활동이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7시에 일어나 맑은 정신으로 아침 독서를 하는 주현과 달리 일찍 일어나는 군에 속하는 태연, 효연은 스케줄이 없는 날은 오히려 늘어지는 경향이 있기 때문.

오히려 9시에서 10시쯤에 일어나는 유리가 더 빠를 경우가 종종 있다.

주현은 일어나더라도 독서를 하느라 좀처럼 방을 벗어나지 않으니, 누군가를 깨우지 않는 한 가장 먼저 일어나는 것은 유리이리라.

“룰루루. 오늘도 맛있게 한 잔.”

자리에서 일어난 유리는 콧노래를 부르며 마즙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재료에 따라 수많은 맛의 차이를 보이는 마즙은 몸매 유지에 좋을 뿐만 아니라 건강에도 좋아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반드시 챙겨먹고는 한다.

위이이잉.

믹서기에 갈리는 마를 보면서 유리는 가볍게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마를 모두 갈고 여러 가지 재료가 첨가 되어 본격 유리표 마즙이 완성되었을 무렵, 화장실 문이 벌컥 열린다.

“응?”

주현을 제외하고 아무도 깨어있지 않다 생각하던 유리는 의아한 표정을 지은 채 화장실로 시선을 옮긴다.

그리고 화장실에서 나오는 사람을 보고는 눈을 휘둥그레 뜬다.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다름 아닌 아침에 가장 약한 수연이었던 것이다.

유리가 놀란 것은 화장실에서 수연이 나와서 그런 것이 아니다.

종종 있는 일이지만 기적(?)처럼 수연이 일찍 일어나는 경우가 있었으니까.

그녀가 놀란 이유는 따로 있었다.

“수, 수연이 너…….”

놀란 목소리로 말하려던 유리는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

수연이 손을 들어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하자 눈치 빠른 유리는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차리고는 입을 다문 것이다.

“애들 깨지 않게 해.”

“수연이 너 그게 무슨 모습이야?”

조용히 하라는 뜻이 전달되었기에 나직한 목소리로 묻는 유리.

그 물음에 수연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을 한 채 말한다.

“뭐가?”

“하지만 너 지금…….”

“오디션에 붙기 위해 내 나름대로 비장의 수를 발휘한 거야.”

“그, 그래?”

얼떨떨한 표정, 얼떨떨한 어조.

어벙해 보이는 유리의 모습이 우스웠는지 수연은 피식 웃는다.

“곧 있으면 매니저 오빠가 올 테니 난 슬슬 내려가 볼게.”

“그, 그래.”

놀란 유리를 뒤로하고 수연은 곧장 자신의 방으로 향한다.

방에 들어가자 아직도 잠에 빠져든 멤버들이 눈에 들어왔고, 그녀들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옷을 차려입은 수연은 곧장 거실로 나온다. 그리고 구두를 신으며 문득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본다.

“It's okay.”

살짝 미소를 지은 수연은 그대로 숙소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이었다.


“너? 너…….”

약속 시간에 맞춰 내려가자 벤이 대기하고 있었고, 곧장 벤 안에 들어간 수연은 자신을 보고 놀라는 로드 매니저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오디션을 위해서 그런 거니 놀라지 않으셔도 되요.”

“그, 그래?”

“네, 저는 좀 피곤해서 그런데 갈 때까지 조금 자도 될까요?”

“그래. 그렇게 하도록 해라.”

적잖게 놀랐지만 수연의 반응이 너무 덤덤하니 로드 매니저 또한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못한 채 조용히 차를 몰았다.

“…….”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수연은 그대로 의자에 몸을 묻고 눈을 감았다.

잠을 자겠다고 했지만 마음 편히 잘 수 있을 만큼 그녀의 속은 편하지 않았다. 머릿속은 온통 어떻게 하면 오디션에서 승리할 수 있을지 그쪽으로 향해 있었다.

‘일단 승부수는 띄웠어. 여기에서 내가 승리할 수 있을지 여부에 대해서는 창현이가 판단할 거야.“

오디션을 보는 사람은 AA엔터테인먼트 사장인 석규와 뮤직비디오 주인공역을 맡는 창현, 그리고 뮤직비디오를 촬영하게 될 감독님이 본다고 했다. 오늘 만나면 오디션을 봄과 동시에 미팅도 한다고 했으니까.

승부수를 띄웠으니 그들이 판단해줄 터.

걷잡을 수 없이 두근거리는 마음을 억누르며 수연은 편안한 마음을 가지고자 하였다.

하지만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이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었다.

‘이씨, 상대가 너무 벅차잖아.’

자신이 상대해야 하는 존재가 연희라는 걸 떠올리자 표정이 팍 일그러지는 수연이었다.


AA엔터테인먼트에 도착한 수연은 로드 매니저와 함께 곧장 오디션이 행해지는 5층으로 향했다. 저번에 한 번 방문했던 곳으로, 연습실로 사용되는 곳인데, 오늘 이곳에서 오디션을 본다 했다.

건물 안에 들어설 때도 그렇고 엘리베이터에 탑승할 때도 그렇고 로드 매니저는 힐끗힐끗 수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연은 그 시선을 신경 쓰지 않은 채 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잠시 후, 5층에 도착하고, 엘리베이터에 내린 두 사람은 곧장 연습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연습실 앞에 도착한 수연은 오디션을 보려는 사람이 자신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로드 매니저에게 묻는다.

“그러고 보니 연희 언니는요?”

“모르겠는데? 그 부분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니까. 어쨌든 이쪽은 미리 연락해두었으니 안으로 들어가 봐.”

“네, 그럴게요.”

연희가 먼저 온 것일 수도 있으니 수연은 굳이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를 견제하며 오디션을 볼 만큼 자신이 여유 있는 상황은 아니었으니까.

“후읍! 후우!”

침착하게 심호흡을 한 수연은 연습실 문을 붙잡고 천천히 열기 시작한다.

문이 열림에 따라 서서히 드러나는 안의 풍경.

그녀가 생각했던 것처럼 기다란 탁자에 세 사람이 착석해 있었다.

‘오디션은 당당하게.’

그래야 떨어지더라도 후회가 없을 듯했으니까.

그렇게 마음을 먹은 수연은 당당하게 안으로 들어선다.

“…….”

수연의 모습을 본 세 사람의 시선은 둥그렇게 변했다.

연습실 안으로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낸 수연의 머리칼은 다름 아닌 밝은 금색을 띠고 있던 것이다.


밝은 금색으로 물들인 수연의 모습은 여태까지 보아왔던 것과 사뭇 다른 이미지를 주고 있었다.

얼음공주라는 이미지와 달리 좀 더 발랄하고, 생기 넘친다고 해야 할까?

가장 중요한 것은 금발이 무척 잘 어울린다는 점이다.

수연은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창현을 보면서 지금 분위기가 나쁘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나쁘지 않아.’

창현의 뮤직비디오 시나리오를 받는 순간 수연은 깨달았다.

기회가 찾아왔다는 것을.

자신이 맡을 수 있는 여자 주인공은 무척 발랄한 성격을 지니고 있으면서 속으로는 상처를 품고 있다는 설정이다.

상처를 숨기기 위해 자신을 더욱 더 밝게 포장하려는 여자 주인공.

그것을 본 순간 수연은 그것을 표현하기 위한 것으로 머리색을 밝게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머리 염색을 감행한 것이다.

“안녕하세요? 제시카입니다.”

“음, 반갑습니다, 제시카 양. 여기 계신 이분은 이번 현의 뮤직비디오를 제작해주실 감독님이십니다.”

석규가 소개한 사람은 40대 초반의 남자였다. 과거 현이 신비주의로 활동할 때, 그의 정규 1집 타이틀곡인 <Bad Boy> 뮤직비디오를 촬영하기도 했다.

인간적인 신의도 있고, 뮤직비디오 제작 실력 또한 초일류였기에 이번 현의 정규 4집 앨범 타이틀곡 뮤직비디오를 맡기로 한 상태였다.

“안녕하세요. 제시카입니다.”

석규의 소개에 바로 인사하는 수연.

“반갑습니다.”

가볍게 인사를 하는 감독.

여태까지 조용히 침묵하고 있던 창현이 손을 들더니 수연을 향해 묻는다.

“그런데 생각했던 것과 이미지가 다른데요? 원래 갈색 머리로 알고 있었는데…….”

창현의 물음.

오늘 오디션에서 가장 큰 발언권을 지니고 있을 인물의 물음이다.

그에게 시나리오를 보고 자신의 해석을 들려주고 싶었다.

“예, 이번 오디션을 위해 밝은 금색으로 염색을 했습니다.”

“어째서 염색을 하신 거죠?”

“이번에 제가 맡을 수도 있는 여자 주인공은 상처를 감추기 위해 의도적으로 밝은 모습을 보이려 노력합니다. 저는 그것을 보고 항상 밝은 표정만 짓는 것 가지고 부족하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상처를 감추기 위해 자신을 더욱 밝게 포장하는 것이 정답이라 생각했고, 제 나름대로의 정답을 보이고자, 더욱 더 밝은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는 금발로 염색을 한 것입니다.”

“흐음!”

자체적인 수연의 해석에 창현은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 앉아 있던 석규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하는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그렇군. 밝은 모습을 보이기 위해 머리색 자체를 밝게 한다라. 확실히 별다른 설명 없이 눈에 보이는 것 자체만으로 어필하기가 더욱 쉽겠어. 음!”

뮤직비디오 시나리오를 가장 많이 본 사람 중 한 사람이 바로 석규다.

그렇기에 수연이 어떤 의미로 밝은 금발로 염색하고 왔는지 알 수 있었고,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나름대로 생각한 것이 있지만 수연의 말대로 한다면 더욱 간단하고 의미 전달이 쉽게 될 것이란 생각이 들었으니까.

“감독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석규의 물음에 감독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한다.

“저도 아주 괜찮다 생각합니다. 자체적인 해석으로 캐릭터를 새롭게 승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한단계 발전을 시킨 것 같군요. 머리색 하나만 바뀌었을 뿐이지만 그것이 주는 의미가 많으니, 캐릭터에 대한 이해도 잘하고 계신 것 같고요.”

“그렇지요? 창현이 너는 어떻게 생각하나?”

“…….”

수연이 긴장한 표정으로 창현을 주시한다. 사장님과 감독님은 모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그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모든 것이 말짱 도루묵이 되어버린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오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릴 것이다.

“전…….”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던 창현이 입을 열기 시작한다.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창현의 입을 주시하는 수연.

딱딱하게 굳어있는 수연의 표정을 본 창현은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기 시작한다.

“저도 괜찮은 것 같네요. 우선 캐릭터를 자체적으로 해석하여 새로운 모습을 도출해냈다는 것 자체가 제 시나리오를 유의 깊게 봐주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것 하나만으로 높게 평가해주고 싶은데 더욱 발전시킨 모습을 보여주셨으니 전 개인적으로 무척 만족스럽네요.”

“에… 시나리오를…….”

수연은 창현이 직접 시나리오를 짰다는 것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예, 제가 직접 짠 겁니다. 그래서 기쁘네요.”

싱긋 미소를 짓는 창현의 얼굴을 본 수연은 얼굴에 홍조를 일으키면서 한편으로 무척 기쁜 마음을 느꼈다.

모두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는 건 자신이 붙을 확률이 높았다는 걸 뜻했으니까.

“그럼 여자 주인공 역할로 제시카 양으로 확정하자꾸나. 그래도 되겠지?”

“예, 저는 좋아요.”

“괜찮은 것 같습니다.”

석규의 말에 모두가 찬성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자 수연은 기쁜 마음보다는 당혹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분명 연희도 오디션을 봐야 하는데 너무 빠르게 결정이 되는 것 아닌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몰라 수연은 손을 들고는 입을 연다.

“저기…….”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제시카 양?”

석규가 부드러운 어조로 대답하자, 수연도 용기를 얻어 말할 수 있었다.

“예, 오늘 이연희 씨도 오디션을 보기로 한 걸로 알고 있는데…….”

수연의 물음에 석규가 고개를 갸웃한다.

“응?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이연희 씨는 3일 전 오디션을 볼 수 없다고 SM엔터테인먼트 측에서 연락이 왔습니다만?”

“네에?”

“아무래도 착오가 있었나 보군요. 이연희 씨는 오디션을 포기하셨습니다. 그래서 여주인공 역으로 제시카 양이 적합한지 오디션을 본 것입니다. 결과는 합격이고요.”

“네…….”

뭐가 뭔지 자세히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한 가지만큼은 확실했다.

자신은 오디션에 붙은 것이고, 현의 뮤직비디오 여주인공으로 합격했다는 것.

연희가 오디션을 보지 않았다는 것이 의아하기는 했지만 어쨌던 좋은 게 좋은 것이었다.

“그럼 뮤직비디오에 관련된 미팅을 시작하도록 할까요? 제시카 양, 회의를 해야 할 것 같은데 스케줄은 어떻습니까?”

“예? 예. 오늘 스케줄이 없어서 상관이 없는데…….”

다른 멤버들은 모두 스케줄이 있는데 자신은 비어있는 것으로 보아 회사가 알아서 조치를 취한 것 같았다.

“잘 됐군요. 그럼 곧장 회의를 하도록 하지요.”

그렇게 순식간에 오디션에 합격하여 미팅 자리에 합류할 수 있게 된 수연이었다.

아직까지 상황이 제대로 파악되지 않아 얼떨떨했지만 자신에게 기회가 왔다는 것이 사실.

‘좋았어.’

기쁜 마음에 수연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3일 전 SM엔터테인먼트 회장실.

소파에는 중년인과 아리따운 여인이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그래서, 이번 뮤직비디오는 포기하겠다는 것이냐?”

앉아있는 중년인은 SM엔터테인먼트의 회장 이수만이었다.

그가 다소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마주 앉은 여인에게 묻는다.

수만의 물음에 연희가 고개를 끄덕인다.

“네,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아서요.”

“흠! 포기하면 제시카가 할 수 있으니 딱히 상관은 없다만 갑자기 포기하는 것이 이해가 되질 않는데?”

얼마나 큰 기회인지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하고자 하는 의욕을 보이던 연희가 갑자기 마음을 바꾸니 수만으로서는 의아할 수밖에 없다.

그 물음에 연희가 예쁘게 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아무래도 전력으로 임할 수 없는 저보다는 모든 전력을 쏟을 수 있는 수연이가 나을 것 같아서요. 게다가 저보다 더욱 절실한 것 같기도 하고, 당장 제게 기회가 하나 왔는데 다른 기회를 붙잡고자 친한 동생의 기회를 빼앗는 것도 내키지가 않아서요.”

하고자 하는 의욕을 보였지만 세상사가 모두 뜻대로 될 수 없는 법이다.

지금 그녀가 촬영하고 있는 드라마 <에덴의 동쪽>은 결코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하나에 집중해도 모자랄 판에 다른 것 하나까지 겸하려는 것은 아직 자신의 역량으로 무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무엇보다 친한 동생의 기회를 빼앗아서 할 만큼 자신이 악독하지도 못했고.

그녀의 본(?) 모습을 알고 있는 연습생들이 경기를 일으킬 말이었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군. 하지만 네가 그런다는 게… 흠흠!”

믿기지 않는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던 수만은 느껴지는 연희의 눈초리에 고개를 돌리고는 헛기침을 하였다.

그리고 다시 슬쩍 눈을 마주치니, 화사하게 웃고 있는 연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게 네 생각이라면 받아들이도록 하마. 하지만 아깝지 않느냐?”

“아깝기야 아깝죠. 그래도 지금 온 기회에 만족하려고요. 모두가 행복한 세상, 그게 좋잖아요?”

“그렇겠지. 좋다, 그렇게 하도록 하마.”

연희의 말을 수락하는 수만이었다.

“감사합니다.”

입가에 미소를 지은 연희는 꾸벅 고개를 숙인다.

그러면서 속으로 음흉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제 수연이한테 이걸로 생색내면서 현을 좋아한단 걸 가지고 살살 긁어낼 수 있겠지? 그럼 그럴 때마다 귀여운 반응을 보일 테고!’

하나를 버리고 하나를 얻어낸다.

뮤직비디오 배역을 수연에게 양보했지만 연희는 앞으로 두고두고 수연을 가지고 놀 수(?) 있게 되었다.

“히잉! 머릿결 다 상했네.”

이런 연희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뮤직비디오에 관련된 회의를 끝내고 숙소로 돌아온 수연은 푸석푸석해진 머릿결을 보며 울상을 짓고 있었다.




제78장 <악마의 유혹>




오디션으로 마지막 남아 있던 여자 주인공까지 선발하자 본격적인 뮤직비디오 제작에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두 개로 나뉘어 등장하게 될 창현의 4집 4-A 미니 앨범의 타이틀곡 제목은 다름 아닌 <악마의 유혹>으로 정해졌다.

모 커피 음료와 이름이 같기에 걸리는 감이 있었지만 이 문제는 진즉에 해결을 본 상태.

<악마의 유혹> 커피 음료는 창현이 미영과 함께 촬영했던 음료 회사의 제품이었기에 협상을 함에 있어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다.

왜냐하면 현의 타이틀곡으로 <악마의 유혹>이 될 경우 커피 음료 판매에 영향이 있을 거라 생각되었기 때문. 뿐만 아니라 CF에서 대박을 터뜨렸고, 연장 가능성까지 긍정적으로 검토한다 하였기에 제목을 정함에 있어 어려움은 없었다.

그렇게 정해진 창현의 곡은 프로젝트성 앨범으로 4-A, 4-B로 나뉘어 나올 예정이며, 오늘 촬영하는 뮤직비디오는 기존의 뮤직비디오와 달리, 4-A의 타이틀곡 <악마의 유혹>과 4-B의 타이틀곡에 사용될 분을 한꺼번에 촬영하게 된다.

한편의 뮤직비디오가 두 편으로 나뉘어지게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여태껏 촬영했던 뮤직비디오와 스케일을 달리하기에 무척 많은 자본이 들어가 있는 상태였다.

시나리오를 받고 어느 정도 스케일이 크다 생각했지만 회의를 나누면서 자신의 상상을 뛰어넘는 크기를 자랑하자 수연은 입을 떡 벌릴 정도였다.

만약 자신들이 이렇게 한다면 절대 불가능하다 생각이 될 정도로 큰 금액이 들어가는 뮤직비디오였기 때문.

‘역시 창현이라 가능하다니깐.’

세계적인 인지도를 가지고 있는 그만이 가능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자신의 일도 아니건만 괜히 그 부분에 대해 뿌듯함을 느꼈던 수연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뮤직비디오 촬영일이 되자 그녀는 아침잠을 잊은 채 일찍 일어나 치장하기에 바빴다.

“룰룰루!”

평소 차가운 모습을 유지하며 소녀시대의 정권을 좌지우지했지만 하찮싴으로 전직(?)하게 되면서 통하지도 않는 시니컬함 따위는 저 멀리 날려버린 수연이었다.

그저 오늘 있을 일을 떠올리며 콧노래를 흘리고 있을 뿐.

염색 후 푸석푸석해져 있던 금발은 회사에서 적극적인 지원을 해줘 찰랑거리며 빛을 발하고 있었다.

“즐거워 보이네?”

아침 일찍 일어나 씻고, 거울을 보며 빗질을 하는 수연의 뒤로 태연이 모습을 드러낸다.

막 일어난 태연은 아직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일찍 일어난 수연의 모습이 무척 신기하게 여기고 있었다.

“뭐, 오랜만에 일을 하러 가는 거니까.”

지방 행사도 그렇지만 아무래도 자신에게 개인 스케줄이 생겼다는 기쁨이 없을 리 없다.

더군다나 합법 하에 창현과 로맨스를 즐기러(?) 가는 것 아니겠는가.

콧노래가 흘러나오는 것은 물론, 덩실덩실 춤을 춰도 모자랄 판이었다.

“윽! 그러고 보니 오늘…….”

수연의 말에 그녀가 오늘 어디로 가는 것인지 알아차린 태연이 잠에서 퍼뜩 깨고는 얼굴 가득 부럽다는 표정을 팍팍 띄우기 시작했다.

그런 태연의 모습에 수연은 더욱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는다.

왜 그녀의 표정에 먹구름이 끼었는지 알고 있었지만 예전의 복수를 하려는 듯 얄밉게 묻는다.

“우리 탱구가 왜 그렇게 표정이 어두워졌을까?”

“크윽! 수연이 너…….”

얄미워 보이는 수연의 모습에 태연이 주먹을 불끈 쥔다.

예전 같으면 전혀 보일 수 없는 상황.

언제나 주먹을 불끈 쥐며 위협하는 것은 수연이었고, 가련하게 당하는 것은 태연이었다. 하지만 3차 반란 후 완벽하게 뒤집혀버린 서열 구도는 태연 > 제시카라는 어마어마한 신분 변화를 일으켰다.

아니나 다를까, 태연을 놀리던 수연은 주먹을 불끈쥐는 그녀의 모습에 멈칫한다.

“나도 스케줄만 없으면 따라갔을 텐데…….”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말하는 태연의 모습에 수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자칫 잘못 건들면 버서커 모드로 접어들 수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더 놀려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굳이 긁어 부스럼 만들 이유는 없다.

“그건 아쉽네.”

그렇게 말을 하지만 전혀 아쉬운 감정이 들어있지 않았다.

태연도 그걸 알고 있었기에 이를 갈았지만 별다른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신은 폭군이었던 누구와 달리 평화와 화합을 중시하는 리더였으니까!

배가 아프지만 이미 트집을 잡아 괴롭혔으니 더 이상 무어라 하기 뭐했다.

“큭! 걱정해줘서 고마워.”

“고맙긴, 뭘.”

전 정권자와 현 정권자의 눈싸움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흥미를 유발시킬 정도로 재미있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지켜보는 사람이 없다는 것뿐.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이 하나둘씩 일어나기 시작했다.

효연, 주현의 뒤를 이어 유리가 일어났고, 다른 멤버들도 한 명씩 일어나기 시작했다.

잠에서 깬 미영이 머리를 손질하고 있는 수연에게 쪼르르 달려와 그녀를 바라보며 말한다.

“흠! 제시, 금발이 생각 외로 잘 어울려.”

“그래?”

“응! 이참에 다음 컨셉은 금발로 잡는 게 어때?”

처음 수연이 금발로 염색했을 때 소녀시대 숙소 자체가 발칵 뒤집혔다.

설마 수연이 무단으로 머리를 염색하고 오디션에 임했으리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SM엔터테인먼트 측에서도 경악을 했다고 하니 오죽하겠는가! 그러다 나중에 AA엔터테인먼트 측에서 금발 컨셉이 잘 어울린다 하여 그 컨셉으로 밀고 나가자는 말을 해줘 금발로 밀고 나갈 수 있었다.

오히려 저쪽에서 마구 칭찬을 해줘 SM엔터테인먼트에서도 독단적인 행동을 보인 수연의 행동을 혼내기는커녕 칭찬을 해주는 어이없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그건 내가 할 일이 아니니까.”

“그래도… 아쉽네.”

수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쉬운 표정을 짓는 미영이다.

그러자 수연은 표정을 살짝 찡그리며 말한다.

“빗어놓은 거 헝클어지잖아!”

“미안. 그래도 보면 만지고 싶은 걸.”

“…….”

천진하게 말하는 미영의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수연이었다. 만지지 말라 해도 결국 만지는 미영의 모습을 보면 허탈할 때가 종종 있다.

그래도 어쩌랴, 자신에게 의존하는 미영의 모습을 보면 모질게 대할 수도 없는 걸.

한숨을 푹 내쉰 수연은 다시 머리를 빗기 시작한다.

그 모습을 보며 미영은 ‘헤헤!’ 하고 웃음을 지으며 뭐가 그리 좋은지 수연의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부럽다, 나도 뮤직비디오 참여해보고 싶은데.”

“얼핏 들으니 엄청난 스케일로 촬영한다 하던데? 그걸 가지고 미국에 그대로 방영한다는 말도 있고.”

“우와! 그럼 수연이는 미국 방송도 나가는 거야? 좋겠다.”

“그 뿐만이 아냐! 출연료도! 츄르릅!”

점점 포커스가 돈으로 맞춰지자 못들은 척하던 수연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서서히 변하고 있는 저 눈초리는 틀림없는 압박이다.

밥을 사라는 무언의 압박. 그것도 아주 비싼 것을 사라고 하는 압박이다.

수연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윤아가 드라마에서 대박이 나고 혼자서 CF를 여러 개 촬영하게 되면서 멤버들에게 엄청나게 뜯겼다는 것을.

그때 자신이 주도하였기에 윤아가 얼마나 많이 뜯겼는지 잘 알고 있다.

수연은 땀 한 방울 흘리며 뒤로 주춤 물러선다.

“나, 난 그렇게 많이 받지 않아.”

“에이, 왜 그러시나. 프로들끼리. 대충 견적서가 나오는데 어디서 내뺄라고 해? 흐흐!”

음흉한 웃음을 지으며 앞으로 나서는 태연. 건수를 잡아낸 그녀의 눈은 번들번들 빛나고 있었다.

비어버린 폭군의 자리를 차지하여 훌륭히 제 몫을 해내고 있는 리더님이시다.

“난 그저…….”

사면초가의 위기에 몰려버린 수연은 어떻게 하면 빠질 수 있을지 부지런히 눈알을 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빠져나갈 곳은 전무. 그야 말로 사면초가의 위기였던 것이다.

앞은 태연이 서 있었고, 방으로 향하는 문에는 어느새 주현이 가로막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왼쪽은 베란다여서 그쪽으로 향하면 궁지에 몰리게 되고, 곧장 문으로 탈출하자니, 퇴로를 막아서고 있는 미영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포기하고 한 턱 쏠 수밖에 없는 상황.

왠지 모를 자괴감에 수연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려 할 때, 주방에서 수영이 무언가를 들고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면서 그녀는 손에 든 것을 수연에게 내민다.

“수연아, 오늘 촬영할 때 힘들 텐데 이거라도 마셔.”

수영의 등 뒤에 광휘가 아른거리는 것은 그녀의 착각일까.

모두가 자신을 핍박(?)할 때 자신에게 격려의 메시지를 보내주는 수영이 너무나 고마웠다.

“고, 고마워, 수영아.”

“뭘! 친구끼리 이 정도는 기본이지.”

감격 어린 수연의 목소리에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하는 수영이었다.

평소에는 기 센 모습만 보이더니 이럴 때는 쑥스러워한다.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지은 수연이 건네받은 컵을 바라본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표정이 굳어버리기 시작한다.

“이, 이게 뭐야?”

떨려오는 목소리. 그리고 떨리는 손.

대답을 바라는 수연의 목소리에 수영이 미소를 지으며 활기찬 어조로 대답한다.

“뚜영이 즙!”

“…….”

뭔가 기괴한 기포가 일렁이는 즙이었다.

수연은 그것을 거부하려 했지만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수영의 눈빛으로 인해 결국 뚜영이 즙이라는 보랏빛 정체불명의 즙을 마셔야만 했다.

그리고 수연은 깨달을 수 있었다.

‘수영이 저것이 제일 문제였어…….’

수영은 웃음을 가장한 채 자신을 암살(?)하려 했다는 것을.

뚜영이 즙이라는 괴상한 즙을 마신 수연은 무료로 돌아가신 증조 할머니를 뵐 수 있었다.


“…….”

잠에서 깬 창현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보통 사람이라면 잠결이 묻어나올 법도 하지만 그의 얼굴은 평온 그 자체.

그의 시선은 맞은편에 위치한 거울에 향해 있었다.

거울로 드러나는 자신의 얼굴.

철저한 자기 관리 덕택에 티 하나 없는 피부와 흠잡을 곳 없는 이목구비가 만족스럽다.

“이 머리도 오늘까지로군.”

오늘은 뮤직비디오를 촬영하기로 한 날.

대대적인 컨셉 회의가 열리고, 이번 앨범을 통해 기존의 현 이미지를 완전히 뒤바꾸기로 했기에 머리 또한 염색을 하기로 결정을 한 상태였다.

이것은 창현 나름대로 큰 결심을 한 셈.

뿐만 아니라 귀걸이를 위해 귀까지 뚫은 상태였다.

“이래저래 고생이 많겠어.”

그러면서 입가에 지어진 것은 미소.

머리를 염색하고, 귀를 뚫는 둥 여러 가지 변화를 꾀한 것이 나쁘게 여겨지지 않았다. 오히려 쌓인 스케줄을 소화하고 본업인 가수로 돌아가는 첫 걸음을 떼는 것 같아 흐뭇한 미소가 절로 나왔으니까.

간단하게 씻은 창현은 여느 아침처럼 명상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명상을 끝낸 창현은 시간에 맞춰 벤에 탑승하여 곧장 이동을 하였다.

세희는 묘하게 긴장하고 있는 창현의 모습을 보고는 의아한 어조로 묻는다.

“무슨 마음의 각오를 한 사람처럼 그래?”

“염색이잖아요. 한 번도 해보지 않아서 나름대로 긴장하고 있다고요?”

“그게 무슨 긴장할 거리라고.”

긴장하는 창현의 모습에 세희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지었다. 염색 하는 것 가지고 긴장하는 창현의 모습에 웃음을 주체할 수 없던 것이다.

설마 염색하는 것 가지고 이런 긴장감을 보일 줄이야.

어른스러우면서도 이런 면들은 아직 어린 아이 같다는 느낌을 주었다.

“그렇게 긴장할 것 없어. 미용사 입장에서 네 머리를 염색한다는 것 자체만으로 영광으로 여길 걸? 그냥 조용히 있으면 알아서 다 끝날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예이, 알겠습니다.”

세희의 말에 창현은 괜히 긴장한 자신의 모습이 바보 같아 살짝 퉁명스러운 어조로 대답한다.

그 모습을 보며 세희는 피식 웃음을 짓는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빠른 속도로 움직인 벤은 곧장 미용실로 향한다.

여느 연예인들처럼 창현 또한 전용 미용실이 존재하고 있는데, 드라마에서는 따로 머리를 해주는 사람이 있어서, 창현이 미용실에 들르는 경우는 무대 위에 설 때나 CF 촬영 때밖에 없다.

그렇기에 미용실을 자주 들르는 보통 연예인들과 달리 창현은 미용실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래서 몇몇 연예인들은 자신과 현이 같은 미용실인 것을 알면서도 정작 그의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발생하였다.

실제로 창현이 미용실을 이용하면서 연예인을 본 적이 거의 없으니까.

그가 안으로 들어서자, 미용실 원장이 호들갑스럽게 다가오며 그를 맞이한다.

“어서 와요! 자주 좀 오지.”

“하하, 앞으로는 자주 올 것 같아요.”

“그럼 나야 좋지! 현 씨를 보고 싶어 하는 연예인들이 얼마나 많은데.”

환영해주는 원장의 모습에 어색한 웃음을 짓는 창현이었다.

“오늘 현이 머리를 염색하고 싶어서 찾아왔는데요.”

세희가 앞으로 나서서 오늘 미용실을 찾아온 목적에 대해 이야기 한다.

그 이야기를 들은 원장이 눈을 빛내며 말한다.

“염색을? 얼마든지 환영이에요! 머릿결이 상하지 않게 심혈을 기울여서 염색을 하도록 할게요. 맡겨만 주세요.”

자신감 넘치는 어조로 말하는 원장의 모습에 창현은 살짝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분명 잘하는 곳이긴 하지만 저렇게 호들갑스러운 모습을 보이면 괜히 불안해진다.

원장이 직접 해주겠다는 말과 함께 창현을 의자에 앉혔다.

거울에 비치는 창현의 모습을 바라보며 원장이 묻는다.

“그럼 어떤 색으로?”

“예, 일단 검붉은색으로 하려고 하는데요.”

“검붉은색?”

“음, 그러니까…….”

머릿속으로 떠오르는데 그것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쉽지가 않았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어물거리는 창현을 제지한 세희가 앞으로 나서면서 사진 한 장을 원장에게 내민다.

“이런 이미지로 하려고 하는데요. 염색을 해주시고, 살짝 커트를 해서 이런 모양으로 해주시면 될 것 같아요.”

말로 하면 굉장히 어려워서 아예 이미지로 출력을 해온 상태였다.

“와우! 이렇게 하면 굉장할 것 같은데요? 어떤 스타일을 원하는지 잘 알았어요.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죠."

척이면 척, 어떤 스타일을 하고자 하는지 바로 이해한 원장이 곧장 창현의 머리를 염색하기 시작한다.

과연 염색 후 어떤 모습을 보이게 될까.

머릿속에 상상한 이미지가 있지만 그것이 현실과 얼마나 잘 매치가 될지 몰라 창현은 두근두근거리는 마음을 붙잡고 있었다.

첫 염색이라는 묘한 설렘도 함께 한 채.


시간이 흐르고, 창현의 머리를 염색한 원장은 세희가 내민 사진대로 살짝살짝 머리를 커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다 잘랐는지 스펀지로 머리를 탁탁! 털어내고는 말한다.

“자, 다 됐어요.”

원장의 말을 들은 창현이 감았던 눈을 뜨고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

한차례 이어진 침묵. 그것은 창현뿐만이 아니라, 미용실 안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동시에 침묵하였다.

거울 속에 비친 창현의 모습은 들어설 때와 전혀 다른 이미지를 풍기고 있었다.

들어서기 전 창현은 제법 긴 머리를 보이며, 자유스러운 느낌과 함께 동화 속에 나오는 왕자님 느낌을 풍겼다면, 지금은 검붉은 머리색과 살짝 날카롭게 잘라낸 그의 모습은 시니컬(Cynical) 하면서 한편으로는 시크(Chic)한 느낌을 절로 풍기고 있었다.

여기에 살짝 메이크업을 하면 뱀파이어 느낌을 살리는 것도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완전 잘 어울리는데?”

세희는 자체적으로 이야기 나눈 컨셉과 놀라울 정도로 완벽한 싱크로율을 보이는 창현의 모습에 감탄사를 흘렸다.

정말 대단하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잘 어울릴 것이라 막연하게 생각은 했지만 설마 이렇게 거부감없이 어우러질 줄이야.

“잘 어울리는 건가요?”

“그래, 잘 어울리는 거 맞아. 여기에 메이크업만 더해지면 완전 대박일 것 같아.”

자신이 직접 촬영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지만 세희는 가슴이 두근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일말의 걱정을 날려버리고 확신을 얻은 것이다.

아무리 얼굴이 잘생겨도 분위기와, 컨셉 자체가 어우러지면 그 생김새를 제대로 살릴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어디에서나 거부감 없이 어우러지는 천의 얼굴적인 면모가 창현이 지닌 가장 큰 장점이 아닐까 싶다.

“음! 확실히 나쁘지는 않네요.”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창현이었다.

염색을 하고 살짝 커트를 한 것만으로 분위기 자체가 바뀌었다는 것을 그 또한 느끼고 있었으니까.

“거기에 메이크업만 더해지면 대박이라니까!”

“하하! 일단 메이크업을 받아보고 결정을 내리죠, 그건.”

어쨌든 잘 어울리는 듯하니 창현에게 있어 나쁜 현상이 아니었다.

“너무 잘 나와서 그런데 사진 한 장 찍으면 안 될까요?”

원장의 제안에 창현이 세희를 힐끗 본다.

그러자 세희가 멈칫하더니 말을 꺼낸다.

“하지만 이번 차림새는 앨범 컨셉이라 먼저 공개하시면 무척 난감한데…….”

“앨범 나오기 전까지 보이지 않을게요. 기념으로 한 장 가지고 싶어서 그래요.”

“그럼 그렇게 하세요. 저희 라샤가 몇 년 전부터 함께 해왔으니 원장님을 믿으니까요.”

“호호! 감사합니다.”

세희의 허락에 기뻐하는 원장이었다.

그렇게 사진을 한 장 찍은 창현은 아직까지 어색한 자신의 머리를 보고는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미용실 밖으로 나온다.

“잘 어울리니 걱정하지 마.”

“하하, 그랬으면 좋겠네요.”

“가서 메이크업을 해보면 알 거라니까.”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며 그를 태운 벤이 뮤직비디오 촬영 세트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촬영장에 도착한 창현은 차에서 내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세희에게 묻는다.

“제가 먼저 도착한 거예요?”

“응? 아니. 들어보니까 시린 씨가 먼저 도착하셨다고 하던데?”

나이는 어리지만 회사에 들어온 시기가 더 빠르고, 개인적으로 그렇게 친하다고 할 수 없기에 시린에게 존칭을 붙이는 세희였다.

“그래요? 일단 안으로 들어가 봐야겠네요.”

일본에서 돌아오고 한차례 만났지만 서로 스케줄로 인해 자주 볼 기회가 없으니 볼 때마다 반가운 그런 것이 있다.

오늘 여자 주인공 중 한 사람을 맡기로 한 시린이 있다는 말에 창현은 밝은 표정을 한 채 촬영장 안으로 들어선다.

촬영장의 세트들은 그야 말로 성대하게 차려져 있었다.

오늘 촬영할 스케일을 크게 키울 것이니 만큼 세트장에 꾸며진 것들 또한 웬만한 것들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대단했다.

사실 창현 같은 경우 유럽에서 뮤직비디오 촬영을 주장했지만 중간에 스케줄이 워낙 바빠져서 어쩔 수 없이 세트장에서 촬영을 하기로 한 상태였다.

유럽에 직접 가질 못하니 아무래도 세트장을 차리는 스케일이 커질 수밖에 없다.

“안녕하세요.”

안으로 들어선 창현은 가장 먼저 감독에게 먼저 인사를 한다. 그리고 기타 스태프들과 인사를 나누는데, 다들 몇 년 전에 한 번씩 만났던 사람들이었다.

익숙한 사람들이었기에 한결 부담감이 덜어지는 것 같아 창현은 편한 표정을 지을 수 있었다.

창현을 마주한 사람들은 모두 바뀐 그의 얼굴을 보면서 감탄하였다.

부드러운 이미지를 보이던 그가 살짝 날카로운 이미지를 가진 모습을 보이고 있었으니, 진짜 시점을 달리하면 사람이 달라졌다 해도 과언이 아닌 수준이었던 것이다.

“오! 누나!”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던 창현의 눈에 메이크업을 먼저 끝내고 나오는 시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머리를 전체적으로 창현과 비슷하게 염색한 그녀의 모습을 보는 순간 그의 눈이 살짝 커졌다.

검붉은 머리칼을 한 시린의 모습은 그간에 보아왔던 것들과 상당히 다른 이미지를 주었던 것이다.

물론 그것은 어디까지나 창현에게 그러할 뿐, 본래 강렬한 이미지를 바탕으로 했던 터라 사람들에게는 다른 종류의 강렬함으로 비춰질 뿐이었다.

“어라? 너 창현이 맞아?”

시린은 자신과 비슷한 색으로 염색한 청년이 다가오자 의아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그가 창현임을 알아보고는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짓는다.

“맞죠. 설마 저도 못 알아보는 건가요?”

“아니야, 그럴 리가 있겠어? 다만 머리색하고 이미지가 너무 달라져서 그런 거지. 진짜 창현이 맞구나.”

“저는 잘 모르겠는데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제가 많이 바뀌긴 바뀌었나 봐요.”

“응, 많이 바뀌었지. 그래도 괜찮은데?”

그녀의 말은 진심이었다.

부드러운 이미지와 함께 나이에 비해 성숙한 느낌을 주는 창현이었다. 아니, 원래 본인 스스로가 지닌 아우라가 성숙한 느낌을 주니 그것은 기본 베이스로 깔고 지나간다 하더라도 기존의 이미지를 탈피하여 새로운 이미지를 주는 창현은 그야 말로 새로웠다.

살짝 날카로운 그의 모습은 어떻게 연기에 임하냐에 따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강렬한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을 테니까.

그동안 창현의 인기가 폭발적이었다고 하나, 지금 이미지로 잘 메이킹을 하면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파급력을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 다행이네요.”

“연기 어떻게 할지 모르지만 정말 잘 어울려. 기대되는데?”

“하하! 오늘 제가 악마인 걸 알고 있죠? 말 안들으면 피를 쪽쪽 빨아먹을 줄 알아요.”

“여자 피를 빨겠다고? 창현이 변태 다 됐네.”

농담으로 한 말인데 그것을 슬쩍 돌려 한 마리의 늑대로 만들어버리는 시린이었다.

“아니, 어떻게 이야기가 그쪽으로…….”

“뭐, 그렇다는 거지. 아직 메이크업을 하지 않은 상태지? 정말 기대되는 걸?”

과하게 기대를 하니 오히려 이쪽에서 부담이 된다.

“너무 기대하시면 곤란한데요.”

“뭐 그렇다는 거야. 나는 창현이 네 모습 자체를 기대할 뿐이니까. 그런데 슬슬 메이크업에 들어가야 하지 않겠어?”

“그렇겠죠?”

창현이 힐끗 시계를 보면서 대답하자, 시린은 피식 웃으며 뒤를 가리킨다.

“매니저분이 오고 계시잖아.”

“아! 그러네요.”

고개를 돌린 창현은 세희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 사이 창현에게 다가온 세희가 입을 연다.

“창현아, 메이크업하러 가야지.”

그동안 수수한 이미지를 보여주었던 것과 달리, 오늘은 화려함을 살린 컨셉을 살릴 생각이기에 메이크업을 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무척 길다.

용건을 전달한 세희는 시린에게 시선을 옮기더니 인사를 한다.

“시린 씨,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언니? 편하게 대해주시라니까요.”

시린은 종종 세희에게 말을 놓으라고 말을 하지만 세희는 요지부동이다. 그것은 그녀가 그어놓은 선이고, 라샤는 자신이 맡은 연예인이 아니었기에 최대한 예의를 지키고자 선을 넘으려 하지 않았다.

“좀 친해지고요.”

“칫! 세희 언니는 너무 깐깐하다니까요. 언니 입장도 있으니 이해는 하지만…….”

“다음에 같이 술 한 잔 마시면서 친해지면 되죠.”

“그렇겠죠? 그때가 오길 기대할게요.”

세희의 말에 시린의 표정이 다소 밝아진다. 세희에게도 입장이란 게 있기에 그녀도 굳이 재촉을 하지 않고 있었다.

“쳇! 술 마시지 못하는 사람 앞에 두고 무슨 소리하는 거죠?”

두 여인 사이로 들려오는 창현의 불퉁한 목소리.

시선을 옮긴 세희는 삐져있는 듯한 창현의 표정에 피식 웃음을 지었다.

“설마 질투하는 거?”

“내가 왜 두 사람 사이를 질투해요. 어서 안으로 들어가기나 해요.”

괜히 이상한 사람으로 몰릴 수 있어 화제를 전환하는 창현.

세희나 시린이나 그런 창현을 놀려주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농담 따먹기를 할 정도로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었기에 장난을 이쯤에서 접어둔다.

“그럼 안으로 들어가자. 해야 할 게 많다는 걸 알고 있지?”

“제가 하는 건가요. 코디 누나들이 고생하는 거지.”

그러면서 창현과 세희가 분장실 안으로 들어선다.

안으로 들어선 그의 눈에 오늘 뮤직비디오 촬영에 입어야 할 복장이 눈에 들어왔고, 갖가지 메이크업 도구들이 눈에 들어왔다.

“음…….”

저렇게 많은 것들을 주렁주렁 달고 움직여야 한다니 창현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치장을 앞에 두고 긴장하는 창현의 모습에 세희는 피식 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어쨌든 오늘부터는 완벽하게 변신을 해야 해. 마인드 컨트롤 잘 하고. 알겠지?”

“알았어요.”

고개를 끄덕인 뒤 분장실 앞에 앉는 창현이었다.

서서히 다가오는 메이크업 도구들은 그를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언니.”

“어서와, 시카야.”

촬영장에 도착한 수연은 감독을 비롯한 스태프들에게 인사를 한 뒤 시린에게 다가가 인사를 하였다.

인사를 나눈 뒤 시린의 모습을 찬찬히 훑어본 수연이 나직이 감탄사를 터뜨린다.

“와아! 언니, 너무 잘 어울리세요.”

“그래? 나쁘지는 않은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해주니 기분이 좋네.”

“아니에요, 정말 잘 어울리세요.”

그것은 가식적인 말이 아닌 순수한 진심이 담긴 말.

거듭되는 수연의 칭찬에 시린은 피식 웃음을 짓더니 그녀의 금발을 살짝 매만지며 말한다.

“시카 너도 금발이 잘 어울리는데? 이번 컨셉에서 시카 네가 자체적인 변화를 일으켰다고 하던데 감독님이나 창현이나 아주 긍정적으로 보고 계시더라고.”

“그래요? 다행이네요. 버릇없게 보이면 어떻게 할지 고민했거든요.”

“버릇없기는. 나름대로 고민을 해서 내놓은 답일 텐데, 그것 가지고 무시할 사람은 별로 없지. 어쨌든 시카 네가 한 건 대단한 거 같아. 설마 시나리오를 읽고 자체적으로 이미지를 그렇게 변화시킬 줄 몰랐거든.”

“그 정도는 아니에요. 순간적인 느낌을 받았을 뿐이죠. 그리고 언니 일본 활동하신 것도 잘 봤어요. 대단하시던데요.”

“대단하긴, 미란이가 주절주절 떠들어서 곤욕만 치렀는 걸.”

두 여인은 그렇게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수연은 힐끔힐끔 주변을 보고는 했는데, 아닌 척해도 제3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너무나 잘 알 수 있었다.

피식 웃음을 지은 시린이 수연에게 말한다.

“시카, 네가 찾는 창현이는 현재 메이크업 중이야.”

“네? 제, 제가 뭘 찾았다고 그러세요.”

당황하는 수연이다. 자신의 마음을 단번에 알아 맞춰서 그런지 뜨끔했다.

“아니야? 그러면 말고. 어쨌든 창현이는 메이크업하러 간지 꽤 시간이 지났으니 곧 있으면 나올 거야.”

“네…….”

이미 자체적으로 메이크업을 다 받고 온 수연과는 달리 창현은 이곳에서 머리를 제외한 메이크업과 의상 등 모두 해결하니까.

수연도 의상을 갈아입어야 했지만 창현이 곧 있으면 나올 거란 이야기에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그를 기다리기 시작한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돌연 스태프들 사이에서 오오오!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의식적으로 시린과 수연의 시선이 한곳으로 향했다.

그곳에 걸어 나오는 사람의 모습을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뜬다.

그리고 그와 함께.

“와아아아!”

“우와…….”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터뜨리고 있었다.

그녀들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어느덧 분장을 모두 마친 창현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

메이크업을 하는 내내 창현은 눈을 감고 있었다.

그는 지금 이때가 되면 뭐라고 해야 할까, 안도감과 동시에 무력감을 느끼고는 한다.

안도감을 느끼는 이유는 자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메이크업을 완성할 수 있다는 것은 의지할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 때문이었다.

그리고 무력감을 느끼는 이유는 조용히 가만히 있는 채 메이크업을 받는 자신의 모습에서 느껴졌다.

아무것도 도움이 되지 않는 느낌이랄까.

왜냐하면 얼굴에 무언가를 덕지덕지 바르고, 몸 전체 곳곳에 치장하는 것도 자신의 의지는 박탈된 채 코디들이 하는 그대로 따라야 했으니까.

무력감과 함께 마네킹이 된 듯한 느낌을 받고는 한다.

특기 분야가 아니기에 그럴 수밖에 없지만, 이러한 정신적 고민이야 말로 창현이 성숙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다.

“다 됐어. 창현아.”

얼마나 메이크업을 받고 있었을까.

마침내 메이크업이 끝났다는 말이 들려왔다.

그런 그녀의 목소리가 떨리는 것처럼 느껴지는 건 자신의 착각일까?

귀를 뚫고, 제법 큰 귀걸이를 해서 그런지 귀가 묵직한 느낌이 들고, 얼굴에는 마치 가면을 쓴 듯한 느낌은 참을 수 없을 만큼 어색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이 얼마나 바뀌었을지 기대되는 마음이 있는 것도 사실.

세희의 목소리를 듣고 서서히 뜨이는 창현의 눈.

오랫동안 눈을 감고 있어 그런지 단번에 시야가 확보되지 않았지만 잠시 후, 자신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

그리고 이어지는 침묵.

다른 코디들 또한 창현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침묵하고 있었다.

얼마나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을까.

어느 정도 충격에서 회복한 창현이 자신의 모습을 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이게… 나라고요?”

거울 속에는 전혀 다른 사람이 서 있었다.

검붉은 머리칼이 네추럴한 모습으로 빗겨져 부드러운 듯하면서 강렬한 느낌을 주고 있었고, 옆머리는 빗겨져 붉은 루비가 반짝이는 귀걸이가 채워져 있었다.

부드럽게 완만한 곡선을 그리고 있던 눈은 살짝 세워 날카로운 느낌을 주었다.

전체적인 붉은 복장은 수백만 원에 해당하는 고가의 옷으로서, 귀족이나 왕족들이 입을 법한 고급스러운 느낌을 그대로 살린 옷이었다.

그야 말로 붉은 이미지 그 자체였다.

날카로운 이미지와 붉은 이미지가 합쳐진 창현의 모습은 누구도 섣불리 건드리지 못할 것 같은 귀공자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어때? 자신이 기획한 컨셉의 완성형을 보는 느낌은?”

세희는 지금 창현의 모습을 보면서 믿기가 힘든 표정이었다.

어느 정도 머릿속에서 시뮬레이터가 돌아가고 있기는 했다. 이번 현의 컨셉에서 그가 어떠한 변화를 보일지, 충분히 예상을 해보았고, 이러이러한 느낌을 줄 것이라 그녀 스스로도 생각해봤으니까.

하지만 이것은 상상 이상이다.

전보다 짧아진 검붉은 머리는 강렬함을 줌과 동시에 귀부터 시작한 목선까지 말끔하게 쳐내 보는 여성들로 하여금 ‘섹시하다!’라는 느낌이 절로 들게 만들어주었으며, 귀공자스러우면서도 묘한 섹시미가 느껴지는 창현의 모습은 판타스틱하다는 말이 절로 나오고 있었다.

게다가 여태까지 줄곧 거부하던 진한 메이크업의 모습을 마침내 볼 수 있지 않던가.

다른 연예인들보다 결코 진하게 한 것이 아니었지만 메이크업의 힘은 정말 위대하여 창현의 외모를 더욱 빛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나쁘지는 않네요.”

자신의 모습이 어색했지만 창현의 솔직한 심정으로는 만족이었다.

악마 컨셉으로 좀 더 날카로운 느낌을 주어야 하지만 그것은 자신 스스로가 해내야 해야 할 일이니까.

이번 앨범 과제 중 하나인 비주얼 살리기가 어느 정도 성공한 듯하니 어색하면서 만족감이 들었다.

“그럼 나가보도록 하죠.”

“나가면 난리 날 텐데?”

장난기 감도는 표정으로 세희가 말하자 코디들도 웅성거리며 동의하는 듯한 목소리를 낸다.

지금 창현의 변신은 그만큼 파격적인 것이기에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줄 것이란 것이 그녀들의 생각이었다.

“뭐 이 정도 가지고 난리가 나요. 어차피 촬영 시간도 그렇게 많이 남지 않았는데 나가서 익숙해지게 하죠.”

그러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곧장 대기실을 나서는 창현이었다.

그런 창현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세희는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젓는다.

“하여간 참…….”

자신의 겉모습에 대해 저렇게 자각이 없어서야.

그 점이 매력이기도 하지만 앞으로는 장점보다는 단점으로 부각될 확률이 높았다.

“좀 더 자각을 가져줬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혀를 끌끌 찬 세희가 창현의 뒤를 따르기 시작한다.

이럴 때 주변 정리를 해주는 것이 자신이 해야 할 일이니.


“…….”

창현이 촬영장에 모습을 드러내자 모두 침묵에 빠져들었다.

단순히 검붉은 머리로 바뀐 것만으로도 엄청난 변화인데 복장부터 시작하여 메이크업까지 모두 갖춰지자 평소 그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진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붉은 귀공자의 등장은 여성들의 판타지를 자극하기에 충분했고, 남성들에게는 현실과 공상의 경계를 오고 가게 만들었다.

“음?”

사람들의 반응이 심상치 않자 창현은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적어도 부정적인 반응은 아닌 듯했으니까.

“아!”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창현은 금발을 한 수연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그곳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자신이 메이크업을 하는 사이 온 듯했다.

‘확실히 금발이 어울려. 그리고 저런 모습은… 귀엽네. 실례려나?’

자신의 모습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수연의 모습에 실례지만 자신도 모르게 귀엽다 생각하는 창현이었다.

“수연 누나 왔어요?”

“으응? 응응.”

창현의 인사에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얼굴에 열기가 화끈 올라오는 것을 느꼈지만 창현과 시린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으로 보아 두꺼운 메이크업이 감춰주고 있는 듯했다.

내심 다행이라 생각하며 수연은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창현의 모습을 바라본다.

‘완전 상상 이상이야.’

평소 부드러운 이미지의 창현도 좋았지만 이렇게 나쁜 남자의 냄새(?)가 풍기는 모습도 좋았다.

뭐든지 다 좋지만 그래도 나쁜 남자에게 여자들이 열광하지 않던가.

‘애들은 이 모습을 나보다 훨씬 뒤에 보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흐뭇한 마음이 절로 들었다.

그것은 남들보다 내가 먼저 볼 수 있다는 우월감이다.

나 빼고 모두 적이라는 공식이 성립하고 있기에 수연은 이렇게 멋진 창현의 모습을 자신이 가장 먼저 본다는 것이 무척이나 흐뭇하였다.

“어때요?”

“뭐, 뭐가?”

자신도 모르게 창현의 모습을 훑어보던 수연은 그가 무언가 물어보았다는 것이 깜짝 놀라며 묻는다.

놀라는 그녀의 모습에 창현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한다.

“제 모습이요. 컨셉 회의만 했지, 실제로 옷을 입어보고, 메이크업을 한 건 처음이거든요. 잘 어울리는지 궁금해서요.”

그 말에 수연은 한순간 황당한 표정을 짓고 만다.

‘조금이라도 자각을 하란 말이야! 지금 나랑 시린 언니의 모습이 보이지도 않아?’

그렇게 직설적으로 말하다가는 호감이 팍팍 깎일 것임이 분명했기에 수연은 속으로만 그렇게 말할 뿐, 겉으로는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잘 어울려. 아마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할 걸? 무척 잘 어울리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럼 다행이네요. 전 아직 어색해서요.”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창현이었지만 시린은 조금 다른 듯하였다.

“악마 컨셉인데 잘할 수 있으려나?”

“……?”

“창현이 네가 악마 컨셉을 잘 소화할 수 있느냐 걱정이 되는 거지.”

“그건 촬영을 해봐야 알 듯 싶네요.”

충분히 걱정할 수 있는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그쪽 이야기가 나오자 오히려 여유로운 미소를 짓는 창현이었다.

자신감이 넘치는 그의 모습.

수연은 그의 모습이 눈부시다 생각되었다.

좀처럼 자신감을 보이지 않는 그가 이렇게 외부로 자신감을 발산하니, 왠지 모르게 더더욱 멋있어 보였다.

“자신감 넘쳐보이는데?”

시린 또한 창현의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보고는 놀란 표정이다.

“나름 연기도 했으니까요. 그쪽 분야는 시린 누나보다 선배라고요?”

“그거야 그렇지.”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창현과 시린.

‘부럽다…….’

그 모습을 보면서 수연은 부럽다는 생각을 한다. 자신도 좀 더 자연스럽게 창현과 이야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채우고 있었다.

“그런데 수연 누나 괜찮아요?”

“으응? 뭐가?”

갑자기 이야기의 화살이 자신에게 돌려지자 수연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으며 묻는다.

“곧 있으면 촬영할 시간인데 아직 옷도 갈아입지 않고 계셔서요.”

“……!”

그 말을 들은 수연은 지금 자신의 상태를 깨달을 수 있었다.

창현의 변한 모습을 보고자 기다리고 있던 것이, 이렇게 시간을 지체하는 결과를 낳게 된 것이다.

“어, 어마! 나 어떡해!”

당황한 표정을 지은 수연은 자리를 후다닥 벗어난다.

한차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늦지 않게 뮤직비디오 촬영 준비를 끝마칠 수 있었다.


뒤늦게 합류한 수연을 끝으로 뮤직비디오 촬영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모두 준비를 마쳤다.

이번 현의 뮤직비디오는 같은 세계관에서 두 개의 타이틀곡이 모두 진행된다.

두 개의 타이틀곡이며, 동일한 배경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지만 그 내용은 판이하게 다르다.

4-A 미니 앨범 타이틀곡은 <악마의 유혹>이라는 제목을 지녔다. <악마의 유혹>의 제목에서 등장하다시피 한 악마가 인간 여자를 유혹하게 되면서 내용이 시작된다.

영겁의 세월을 살아온 악마가 유희를 위해 마침 눈에 띈 두 인간을 유혹하게 되는 내용.

인간 여자를 유혹하던 악마가 사랑을 깨닫게 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진실 된 것인지 방황하며, 악마로서의 자존심 발동, 그러면서 인간 여자에게 느끼는 애틋함과 간절히 그녀에게 호소하는 내용이 <악마의 유혹>에서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에 반해 4-B 미니 앨범 타이틀곡은 4-A 미니 앨범 타이틀곡인 <악마의 유혹>과 상당한 분위기 차이를 지니게 된다.

4-B 미니 앨범 타이틀곡 제목은 <Devil Cry>라 지어져 있다.

악마의 외침이라 해석되는 <Devil Cry>는 달콤한 사랑을 노래하는 <악마의 유혹>과 달리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다가 그 여자에게 배신을 당하게 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전체적인 알콩달콩함을 지닌 <악마의 유혹>과는 판이하게 다른 분위기를 지닌 곡이다.

첫 4-A곡의 히로인은 소녀시대의 멤버 제시카가 맡기로 한 상태며, 4-B곡의 히로인은 라샤의 시린으로 정해진 상태였다.

평범한 인간에게 빠져든 것이 <악마의 유혹>이라면 <Devil Cry>는 거짓된 악마의 속삭임에 빠져들어 종래에는 배신을 당하게 되고,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입어 괴로워하는 악마의 울부짖음을 노래한 것이다.

창현이 굳이 4집 앨범을 한 번에 합치지 않고, 4-A와 4-B로 나눈 까닭은 간단했다.

바로 4집 A, B 버전 두 가지를 동시에 관통하는 것이 찰나의 선택에 따른 미래의 결정이었던 것이다.

이는 미래를 어떻게 나아가느냐에 따라 판이하게 달라질 수 있는 바를 의미했으며, 순간의 선택을 잘 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4집 앨범을 한꺼번에 내는 것이 아닌, 4-A와 4-B로 나눠서 앨범을 발매하려는 것이었다.

“어때, 창현아?”

분장을 마친 수연이 가장 먼저 창현에게 다가가 묻자, 그녀의 모습을 발견한 그의 눈이 커진다.

메이크업을 마치고, 옷을 차려입은 수연의 모습이 무척이나 아름다웠던 것이다.

“누나 엄청 예쁜데요?”

“정말?”

원하던 말을 듣게 되자 수연의 표정이 활짝 펴진다.

소녀 컨셉으로 인해 옅은 화장을 하게 되었지만 이번 뮤직비디오 촬영은 판타지 풍으로 하는 거라서 그런지 메이크업이 무척 짙었다.

또한 복장 또한 시상식 때 입을 법한 드레스였는데, 옷이 날개라는 말처럼 입는 사람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어주는 드레스였다.

이 드레스를 만드는데 수백만 원이 들었다는 이야기에 수연은 화들짝 놀라야만 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드레스는 이번 뮤직비디오 촬영을 위해 오로지 그녀를 위해 맞춤 형식으로 된 것이었으니까.

여자로서 자신만의 드레스를 얻게 되었으니 수연으로서는 뛸 듯이 기쁠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창현이 자신을 위해서(?) 맞춰준 것이 아니겠는가.

“네,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은 했는데 생각보다 훨씬 잘 어울리네요. 누나는 화장이 잘 받는 것 같아서 더 그런 것 같아요.”

“그 말은 내가 화장빨이라는 거야?”

절대 그렇게 들리지 않았지만 창현이 그렇게 말한 것일 수도 있어 수연이 샐쭉한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하하, 그럴 리가요. 화장이 잘 받는다는 이야기죠.”

제법 민감한 부분을 건드린 것 같아 어색한 웃음을 짓는 창현이었다.

“알아, 나도. 드레스는 정말 예쁜 것 같아. 고마워, 날 위해서 이렇게 맞춰주고.”

이번 뮤직비디오 비용은 모두 현이 부담한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감사의 인사를 표하는 수연이었다.

“뭘요, 대신 열심히 해주시면 되요.”

“물론이지!”

주먹을 불끈 쥐며 전의를 다지는 수연의 모습에 창현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알콩달콩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을 때, 한쪽에서 뾰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창현아, 이게 뭐야?”

“네? 뭐가요?”

고개를 돌리니 눈을 가늘게 뜬 시린이 서 있었다.

그녀는 드레스를 차려입은 수연을 힐끗 가리키더니 불퉁한 목소리로 말한다.

“시카는 아름다운 드레스고 나는 왜 원피스인데? 사람 차별하는 거 아냐?”

시린의 불만처럼 수연과 차림새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그녀의 옷차림도 상당히 아름다운 축에 속했지만 수연에 비하면 조족지혈이었으니까.

빈틈을 노리는 날카로운 말이었지만 창현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식의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짧고 굵게 말한다.

“누나는 악역이니까요.”

“윽! 악역 차별하는 거냐? 나빴다.”

“대신 누나도 마지막에 예쁜 드레스 입을 거잖아요. 그걸로 참아주세요.”

시린도 4-B 뮤직비디오를 촬영하면서 마지막에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기로 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건 그렇지만…….”

“그것도 비싼 드레스거든요? 게다가 각자 매력이 있는데 너무 욕심내면 좋지 않아요.”

“알았어.”

요리조리 잘 피해나가는 창현의 말에 시린은 더 이상 그를 타박할 수 없었다.

어차피 그에게 불평 불만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수연과 알콩달콩한 분위기가 샘나서 그런 것이니까.

“그럼 곧장 촬영에 들어가도록 하죠. 스태프분들 기다리고 계시잖아요.”

“응. 그래야지.”

활기찬 표정으로 대답하는 수연.

그 모습을 본 시린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수연에게 말한다.

“흐응! 우리 시카 양이 묘하게 들떠 있네? 알콩달콩 러브 스토리 촬영할 생각에 기분이 좋나봐?”

“어, 언니! 제가 언제요!”

자신의 속내를 그대로 들킨 탓일까.

수연은 얼굴을 붉히며 버럭 시린에게 소리를 질렀다.

그 모습이 재미있었는지 시린은 입가에 진한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인다.

“아니면 아니라 해줄게. 어차피 나도 만족할 만한 씬이 있으니까. 시카 너도 즐겁겠지만 나도 즐겁다고.”

“윽!”

묘한 뼈가 깃든 시린의 말에 좋아하던 수연은 아차! 하는 표정을 짓는다.

그녀가 즐거워하는 이유를 시린이 그대로 꿰뚫어보고 있던 것이다.

수연이 즐거워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직접 하는 것은 아니지만 키스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누나 연기는 처음이죠?”

“응…….”

마침내 촬영을 앞에 두고, 창현이 수연을 바라보며 물었다.

시린은 일본에서 풍부한 경험(?)을 한 데 반해 수연은 뮤직비디오 같은 종류의 연기 경험이 많지 않으리란 것이 창현의 생각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수연은 살짝 부담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이미 연습생 때 SM엔터테인먼트에서 철저한 연습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앙큼하게 속내를 숨기고 수긍하는 수연이다.

‘난 떨려서 그러는 거야. 실제로 해본 적도 없고…….’

스스로를 그렇게 위로하고 있었고.

수정의 조언에 의하면 남자들은 자신이 보호하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게 만드는 여성에게 빠져든다고 했다.

동생님의 지시대로 충실하게 따르는 수연이었다.

“확실히 처음이 힘들죠. 저도 그쪽으로 경험이 풍부한 편은 아니지만 리드해볼게요.”

“응.”

“별로 마음에 없는 사랑 연기를 하게 돼서 어렵겠지만 잘 좀 부탁드릴게요, 하하!”

분위기를 누그러뜨리기 위함인지 농담을 하는 창현.

그 말은 수연으로 하여금 발끈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마음에 없기는 무슨! 헉!”

마음에 없는 사랑이란 말에 발끈하던 수연은 자신의 실수를 알아차리고는 헛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제대로 된 공략(?)을 하지도 않았는데 이런 중대한 실수를 범하다니!

“누나 설마…….”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창현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한다.

‘어떻게 해! 들킨 거 아냐?’

수연의 심장이 작게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아직 제대로 된 공략을 하지도 못했는데, 아직 보여줄 것이 많은데 이대로 들켜버린다면 이렇게 허망한 경우도 또 없지 않은가.

제발 창현이 알아차리지 않았기를 바라고 있지만 그의 표정은 이미 모든 것을 알아차린 명탐정의 눈이었다.

마침내 창현의 입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한다.

수연의 모든 신경은 그의 입에 쏠려 있었다.

“저 위로해주려고 그런 거예요? 하하! 고마워요. 설마 그렇게 절 생각해주실 줄 몰랐어요.”

“…하아?”

심각한 표정을 푼 채 말하는 창현의 모습에 힘이 빠진 듯한 소리를 흘리는 수연이었다. 설마 알아차리지 못한 건데 표정만 심각했던 것이란 말인가?

정말 그렇다는 걸 깨닫게 되자 수연은 극심한 허탈감을 느껴야만 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창현은 자신의 말만 한다.

“아무래도 사랑 연기는 상당한 감정 이입을 필요로 하니까요.”

“…그런 말은 하지 마.”

“네?”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하자, 곧장 반응을 보이는 창현.

“섭섭하게 그런 말 하지 말라고. 창현이 너랑 내가 알고 지낸지가 얼만지나 알아? 햇수로만 해도 벌써 3년이야. 그런데 그렇게 말하면 난 정말 섭섭해.”

그것은 수연의 진심이었다. 서로 알고 지낸지 제법 시간이 흘렀고, 그를 좋아하게 된 그녀는 그에게 각별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비록 그가 둔탱이라 알아주지 못한 상태에서 하는 말일지라도 섭섭함이 들게 만들기 충분했다.

“…….”

수연의 섭섭한 표정을 보면서 창현은 느끼는 바가 있었다.

자신 딴에는 수연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고자 한 말인데 그것이 그녀로 하여금 섭섭한 마음을 느낄 수 있게 할 수 있다는 걸 알아차린 것이다.

‘수연 누나가 날 아껴주는구나.’

그녀의 섭섭함은 곧 그것을 뜻하기도 했으니까.

자신을 이렇게 동.생.으.로.서 아껴주니 창현도 생각을 달리 해야 했다.

무조건 내빼는 것은 그녀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것을.

확실하게 마음을 먹은 창현은 수연에게 고개를 숙여 사과한다.

“미안해요.”

“미안한 걸 알면 된 거야. 나도 돈을 받는 프로라고? 그러니 내가 실수를 하지 않게 잘 이끌어줘.”

그가 무안함을 느끼지 않게 부드러운 어조로 말하는 수연.

이럴 땐 확실히 누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알았어요.”

창현이 수연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자, 그녀 또한 마주 미소를 짓는다.

지금 창현의 속내를 알면 땅을 치고 후회할지도 모른 채.

그것도 모른 채 그녀는.

‘아싸! 모처럼 누나다운 모습을 보였다. 창현이도 나를 다시 보았겠지?’

누나로서 다시 보게 되었다는 것을 그녀는 알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일진일퇴를 거듭하고 있는 수연이었다.


뮤직비디오 촬영은 크게 두 방향으로 나눠진다.

4-A버전의 타이틀곡 <악마의 유혹>에 쓰일 뮤직비디오는 첫 스타트 부분에서 시린과 수연, 두 여인을 만나게 되면서 수연에게 비중이 감으로써 그녀와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중간중간에 시린이 나오는 장면을 함께 촬영하면서 수연과 함께하는 장면을 중점적으로 촬영한다.

상당히 길어질 염려가 있지만 오늘 내로 끝내지 못하더라도 4-A <악마의 유혹> 장면은 모두 끝낼 예정이었다.

‘난 오늘 창현이를 사랑하는 역할이야. 마음껏 내 진심을 보여줘도 돼.’

<악마의 유혹> 뮤직비디오는 유희로 시작된 악마의 유혹에 인간 여자가 넘어가게 되면서 그를 향해 헌신적인 자세를 보이고, 한낱 노리개감으로 생각하던 악마는 그런 인간 여자의 정성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는 식의 스토리였다.

즉, 스토리 초중반부터 후반 끝부분까지 수연이 창현에게 헌신적인 사랑을 바치는 장면을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다.

창현은 이 부분을 염려했지만 이 부분이야 말로 수연이 가장 자신 있는 부분이었다.

그간 숨겨왔던 자신의 마음을 마음껏 펼쳐 보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니던가.

비록 창현이 이런 자신의 진심을 알아주지 못하더라도 그녀는 이러한 기회가 온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서서히 공을 들여 그를 공략하고 있는 지금, 언젠가는 그가 자신에게 이런 극진한 사랑을 줄 것이라 굳게 믿고 있기에.

촬영이 시작 될 무렵, 창현은 계속해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수연을 바라본다.

본래 그가 짠 스토리는 대체적으로 잔잔했지만 너무 약하다는 스토리 작가의 의견으로 인해 약간의(?) 개선을 하게 되었는데, 그 개선이 제법 컸다.

우선 스킨십을 하는 장면이 좀 더 농밀(?)하게 변했으며, 뮤직비디오 마지막에 주는 충격적인 장면 또한 더욱 강하게 변했다.

물론 이러한 변화가 수연에게 있어서는 좋은 것이었지만.

아까 전 수연과 한 이야기가 있어서 그녀에게 이야기는 하지 못하고 괜히 그녀에게 걱정스러운 시선을 비치는 창현이었다.

그러한 창현의 모습에 수연은 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난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믿을게요.”

지금 상황에서 그녀를 믿지 못하겠다고 하는 것도 모양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수연을 믿기로 한 창현은 감독의 지시에 따라 촬영에 들어가기 시작한다.

파앗!

촬영에 들어가자 창현의 표정이 급속도로 변하기 시작한다.

이번 ‘악마’ 설정은 여러 가지 노림수를 가지고 있다.

우선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악마라는 대상을 선택함으로써 판타지풍의 느낌을 강하게 하였고, 악마라는 존재가 주는 사악함은 현재 유행하고 있는 나쁜 남자 코드를 접근성 있게 만들어주고 있다.

현이 악마 컨셉이다! 이 말 하나만으로 두근거릴 여성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악마라는 컨셉이 주는 의미는 그만큼 많은 것이었다.

촬영이 시작되자 창현의 표정이 급속도로 변하기 시작한다.

천의 얼굴이라는 칭호를 받을 만큼 상황마다 적응하는 그의 능력은 일품이다.

어린 나이에 상대방으로 하여금 쉽게 보지 못하는 아우라부터 시작하여 상황에 맞게 자신을 재설정하는 능력이 무척이나 뛰어났으니까.

그렇기에 많은 사람들은 그가 이번 악마 컨셉을 어렵지 않게 소화할 것이라 굳게 믿고 있었다.

어둡지만 은은한 분위기가 서려 있는 곳에서 새로운 흥밋거리를 찾아다니던 그에게 밝은 표정으로 뛰노는 여인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악마인 그에게 있어 플러스 감정은 기분 좋지 못한 것.

즐거워 보이는 여성들을 보면서 그는 문득 저 여인들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게 만들어주었다가 한순간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은은한 조명의 힘으로 새하얀 피부에 붉은 눈동자와 붉은 머리를 한 창현은 기괴하면서도 신비스러운 매력을 가감 없이 발휘하고 있었다.

배경은 바뀌어 창현과 시린, 수연이 함께 만나는 장면으로 향한다.

넓게 펼쳐진 꽃밭에서 만남을 가진 그들.

부드러운 미소와 적절하게 갖춘 매너는 여성의 마음을 거세게 뒤흔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4-A 버전이기에 중점을 두게 된 것은 바로 수연.

그녀는 창현의 모습을 보고 한눈에 반한다.

연기라기에 너무나 리얼하고 자연스러웠기에 감독들은 물론 염려하던 스태프들 또한 놀란 표정을 짓는다.

아무래도 연기에 이렇다 할 경력이 없는 수연이었기에 걱정을 사고 있었는데 자연스럽게 해내는 모습을 보고 감탄한 것이다.

그 중 여성 스태프들은 모두 속이 쓰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비록 뮤직비디오지만 그와 함께 알콩달콩한 열연을 펼칠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부러웠던 것이다.

그 뒤에 이어진 것은 창현과 수연의 달콤한 로맨스 장면이었다.

함께 요리를 하기도 하고, 함께 정원을 손질하기도 하고, 함께 꽃밭에 가기도 하고…….

그들이 보이는 것은 연인들이 꿈속에서 행할 법한 것들이라는 것.

내내 수연은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보는 사람들이 배가 아플 만큼 완벽하게 여자 주인공에 몰입하여 촬영에 임하고 있었다.

‘아아, 행복해.’

자신의 진심을 이렇게 가감 없이 발휘할 수 있는 순간이라니.

수연은 지금 이 순간이야 말로 자신이 가장 행복하다 생각했다.

창현과 함께 팔짱을 끼기도 하고, 그와 손을 깍지 껴서 마주 잡기도 한다.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기도 하며, 달콤하게 귓속말을 속삭이기도 한다.

대본에 있는 것들과 그녀의 애드리브가 적절하게 조화된 달달한 애정 표현의 최종 진화판과도 같다. 예정에 없던 그녀의 행동에 감독은 눈을 크게 떴지만 그것이 오히려 뮤직비디오의 달달함을 살려준다고 판단하여 오히려 수연의 애정 행각을 독려하는 분위기가 되어가고 있었다.

감독의 지원에 힘입어 수연은 자신이 하고 싶어 하는 판타지들을 마음껏 펼치고 있는 중이었다.

현과 뮤직비디오를 촬영하게 되면 여성 배우로서는 걱정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악플이 그것이다.

하지만 수연의 머릿속에 악플 따위는 저 멀리 사라진지 오래였다.

‘악플은 상관없어.’

이럴 때는 데뷔 전의 경험이 오히려 고맙게 여겨지는 수연이었다. 악플로 인해 자신이 창현의 집에 무혈입성(?)하는 성과를 이룩하였고, 그 덕분에 그의 첫 키스를 훔치는 혁혁한 성과를 거두지 않았던가.

이번에도 그와 함께 연인 분위기를 만인에게 풍길 수 있는데 악플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수연이었다. 오히려 자신이 부러워서 악플을 달아대는 사람들을 보며 자신 있게 비웃어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어쩌다 보니 악플을 비웃으며 지켜볼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한 수연이었다.

수연의 자연스러운 애정행각에 창현은 당혹스러운 마음을 가졌지만 오히려 그것이 더욱 분위기를 잘 살려준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었다.

‘오히려 내가 리드 당하는 느낌이네.’

자신이 잘 이끌어주겠다고 했는데, 오히려 수연의 연기가 자연스러워 자신마저도 그에 맞춰 텐션을 잘 유지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전체적인 달달한 로맨스를 유지하면서 중간중간 창현의 개인적인 장면 촬영이 이어졌다.

인간 여자를 농락하기 위해 시작한 유희였지만 그녀의 헌신적인 사랑에 악마는 점점 자신의 마음이 바뀌는 것을 느껴야만 했던 것이다.

상위 종족인 악마로서 가져야 할 자존심과 인간 여자에게 느끼는 고민스러움, 그리고 본인도 자각하지 못한 사이 서서히 싹트는 사랑이라는 감정.

마침내 그 사랑의 감정이 꽃을 피울 때, 악마는 자신의 본질마저 저버리며 사랑이라는 감정에 충실하기 시작한다.

그로 인해 자신이 지닌 힘을 잃어도 그녀를 사랑하겠다고.

자신의 존재 자체가 희미해지더라도 그녀를 사랑하겠다고.

검은 마음을 서서히 잊고, 행복한 마음을 느끼며 사랑을 갈구하게 된다.

그의 고민은 드라마를 촬영하게 되면서 사랑이란 감정에 대해 고민하던 그것과 흡사하였다.

아직까지 그의 내면에서 확실하게 결정이 난 것이 아니었기에 고민이 무척 깊었다.

고뇌가 절로 묻어나오는 그의 모습에 내심 이 부분을 고비라 여기던 감독은 미소를 지으며 OK 싸인을 내린다.

그렇게 어렵게 여기던 부분까지 넘기게 되자 마침내 한 장면만을 남겨두게 되었다.

자신의 존재 자체를 벗어던지고 한 여자만 사랑하게 된 악마의 결심이 가장 짙게 묻어나오는 장면.

바로 키스신이었다.

아름다운 백색 성 테라스에 서로 마주한 남녀는 뜨거운 키스를 하면서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게 되고 <악마의 유혹> 노래가 끝을 맺게 된다.

테라스 앞에서 시선을 마주하는 두 사람.

창현은 수연의 눈이 잘게 떨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떨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창현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녀의 모습만 보고 있으면 키스를 정말 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진짜로 하는 게 아니니까 긴장하지 않으셔도 되요.”

“내, 내가 언제 긴장했다고 그, 그래.”

펄쩍 뛰며 긴장하지 않았음을 어필하는 수연이었지만 행동부터 시작하여 말하는 것까지 그녀가 긴장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아니, 예전에는 아메리카식 인사라 그래놓고 이렇게 긴장하면 어떻게 해요.”

그렇게 말한 창현도 예전의 기억이 떠올라 얼굴에 열기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수연 또한 창현이 그때를 기억하고 있자 고맙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여 얼굴을 붉힌다.

“그, 그땐 너무 고마워서…….”

“하, 하. 저도 알아요.”

괜히 이야기를 꺼냈다 생각하는 창현이었다. 수연의 얼굴이 더욱 붉어지고, 긴장한 기색이 역력해졌으니까.

‘실수했네.’

그렇게 생각할 무렵, <악마의 유혹> 뮤직비디오 마지막 장면 촬영 준비가 끝났다.

“…….”

수연은 부끄러운 마음에 고개를 숙였지만 속으로는 엄청난 파장을 일으킬 음모(?)를 세우고 있었다.

‘창현이 말대로야. 이미 한 번 해봤는데 그것 가지고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어. 어차피 욕먹을 거, 더 화끈하게 먹어도 되지 않겠어?’

이미 일은 한 번 저지른 것 아니겠는가. 처음이 어렵지 두 번이고 세 번이고 그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다.

기호지세라는 말이 수연의 머릿속에 맴돌고 있었다.

“마음을 좀 가다듬어야 하지 않을까요?”

촬영을 시작하려 하자, 창현이 걱정스러운 어조로 묻는다.

그에 수연이 미소를 살짝 짓고 고개를 젓자, 마침내 촬영이 시작된다.

뜨거운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

살짝 붉어진 수연의 얼굴이 여인의 수줍음을 잘 나타내고 있어 오히려 호재로 작용하고 있었다.

잠시 동안 시선을 마주하던 두 사람의 고개가 서서히 가까워지기 시작한다.

이대로 조금 더 좁아지면 OK 싸인이 나올 것이고 촬영은 끝날 것이다.

오늘 충분히 애정행각을 펼쳤지만 수연의 갈증은 풀리지 않았다.

아무리 용을 잘 그리면 뭐하는가. 화룡정점을 찍어야 완성이 되는데. 백 번의 애정행각도 좋지만 한 번의 입맞춤만 못하다는 것이 수연의 생각이다.

파르르.

눈꺼풀이 떨리면서 실짝 실눈을 뜬 수연의 눈에 클로즈업되기 시작하는 창현의 입술.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그의 입술을 보며 고민에 잠기기 시작한다.

‘이대로 해버려?’

선택의 순간이다.


맛있는 음식을 눈앞에 두고 참으라고 하면 무척 곤욕스럽다.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욕망 중 하나라 칭해지는 것이 식욕이었으니까.

흔히 사람들이 말하길, 공부와 다이어트는 몰라서 못하는 것이 아니다. 전부 자신의 의지가 되지 않아 해내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그 사이에 요령이라는 것이 존재할 테지만 기본적인 것은 인간의 의지라는 점이다.

그런 면에서 수연은 특화되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연습생 때 정기적으로 치러지는 테스트에서 그녀는 훌륭하게 살아남았다.

소녀시대 내에서 가장 긴 연습생 생활을 했다는 걸 감안하면 그 의지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뛰어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맛있는 것을 먹고 자랄 시기를 맛있는 음식과 싸우면서 보냈지만 꿈이 있었기에 그녀는 힘들지만 참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그 충동을 참아내기 힘들었다.

지금 수연의 상황은 간단했다.

바로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 고민을 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그녀 앞에 놓은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은 바로 창현의 입술이다.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고 하는 ‘척’만 해야 한다는 것이 그녀로 하여금 너무나 괴롭게 만들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좁히면 쪽! 소리가 나는 입맞춤이 가능한데, 그것을 하지 못한다고 하니 이 얼마나 괴로운 상황이란 말인가.

할 수 있을 듯하면서 할 수 없으니 더욱 괴롭다.

왜 그런 것 있지 않은가.

사람은 자신이 쥘 수 있는 것보다 쥘 수 있을 듯하면서 쥐지 못하는 그런 것에 더욱 환장한다는 것을.

지금 수연이 놓인 상황도 그러하다.

눈앞에 바로 놓여있지만 할 수 없는 그런 상황.

더군다나 여성 스태프들은 질투심이 활활 타오르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게 느껴진다.

‘그러니까 더욱 하고 싶은 거라고.’

많은 여자들 앞에서 도장을 콱 찍어주고 싶은 것이 수연의 생각이었다.

특히 촬영 전 보았던 시린의 눈빛 때문에 그렇다.

마치 자신보고 할 수 있으면 해보라는 식의 눈빛.

너는 절대 못할 거라는 눈빛을 했기에 수연은 더욱 울컥했다.

‘어떻게 하지?’

콱 질러서 시린의 콧대를 납작하게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보는 눈이 너무 많다.

만약 자신이 해버리면 살아 돌아갈 수 있을까?

이성과 본능 사이에서 고민하는 수연. 하지만 그녀에게 주어진 시간은 짧았고, 현실은 그녀에게 선택을 종용하고 있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수연은 마침내 결정을 내린 듯 눈을 빛낸다.

그리고 곧장 행동으로 옮긴다.

번개처럼 움직이는 수연의 고개는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 섬광처럼 움직인다.

쪽!

허공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

결코 요란한 소리가 아니었지만 촬영장에 마치 천둥처럼 울려 퍼지는 소리.

“……!”

그 소리가 울려 퍼짐과 창현이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뒤로 물린다. 전혀 예상하지 못하던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꺄아아아아!

그와 함께 울려 퍼지는 여성 스태프들의 비명소리.

그녀들은 보고야 말았다.

한순간이지만 수연의 입술이 창현의 입술에 맹렬하게(?) 돌진하여 그의 입술과 붙었다 떨어진 것을.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상황이란 말인가!

뾰족한 목소리로 비명을 지르던 여성 스태프들은 마치 불구대천 원수를 만난 것 마냥 수연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감히 자신들의(?) 현의 입술을 훔치다니!

아무리 세상이 문란해졌다(?) 해도 이것은 아니지 않은가!

날카로운 여성 스태프들의 시선이 온몸에 꽂히고 있었지만 정작 당사자인 수연의 표정은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이미 일을 저지르고 시식(?)을 마쳤으니 그녀로서는 지금 상황에 만족할 따름이었다.

다만 아쉬운 것이 있다면.

‘칫! 창현이 반사 신경이 보통이 아니네.’

입술이 닿는 순간 창현이 곧장 떨어져서 제대로 음미할 시간이 없다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좀 더 길었으면 좋았을 텐데.

막상 일을 저지르니 더욱 더 용감해지는 수연이었다.

“누, 누나 지금 무슨…….”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은 창현이 자신의 입술을 매만지며 수연에게 묻는다.

단순히 장면을 연출하는 선에서 끝을 내야 하는데 수연이 직접 입맞춤을 해버리니 그로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상대는 좋으나 싫으나 자신의 첫 키스를 뺏어간 상대가 아닌가.

그런 만큼 그 파장은 더욱 크게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창현의 물음에 보통 때라면 당황하며 허둥지둥거렸을 수연이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의 입술을 훔치기로 결심을 한 상태였기에 그녀는 더욱 용감해졌고, 뻔뻔해졌다.

“미안, 난 장면을 위해 얼굴을 내민 건데 눈을 감고 있어서 간격을 제대로 조절하지 못했네?”

아주 당당하게 말하는 수연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허둥지둥거리면 손해 보는 것은 자신 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아닌 척, 우연히 일어난 사고인 것처럼 행동하는 수밖에.

방귀 뀐 놈이 성내는 격이었지만 그러한 수연의 전략은 제대로 먹혀들었다.

“그, 그런 거예요?”

“그런 거야. 설마 내가 일부러 했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건 아니지만…….”

다른 때는 단호하지만 이럴 때만큼은 우유부단한 면모를 보이는 창현이었다. 이런 면모가 무척이나 답답할 때가 많지만 상황을 무마시키는 데는 최적의 요소를 제공하고 있다.

“그렇군요.”

고개를 끄덕이며 순순히 납득하는 창현. 그 모습을 보며 수연은 입가에 흐릿한 미소를 띠었다가 재빨리 지운다.

당사자를 납득시켰으니 완벽 범죄가 성립된 것이다.

더욱 완벽을 기하기 위해 수연은 감독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인다.

“감독님, 간격 조절을 잘못해서 NG를 냈습니다. 죄송합니다.”

전신을 난자할 듯한 날카로운 시선들이 느껴졌지만 깨끗하게 무시하는 센스.

‘실수로 한 거니까.’

검은 속내를 말끔하게 숨긴 채 실수인 척 가장하는 수연이었다.

그리고 진짜 입맞춤 한 걸로 뮤직비디오를 제작할까봐 NG라고 스스로 시인하는 센스까지.

잘 짜인 한편의 범죄 드라마가 아닐 수 없다.

‘주현이가 자주 보는 명탐정 코난이 와도 이건 어쩔 수 없을 걸?’

완벽 범죄를 성립시킨 스스로에게 큰 자부심을 느끼며 수연의 시선이 움직인다.

그곳에는 자신을 매섭게 노려보는 시린의 시선이 눈에 들어왔다.

자신이 직접 입맞춤을 할 줄 몰랐기에 저런 모습을 보이는 것이리라.

‘훗! 언니, 세상은 변했어요. 용기 있는 여자가 미남을 휘어잡는 시대라고요.’

그렇게 중얼거렸지만 스스로 용기가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수연이었다.

지금 이 입맞춤도 발전의 계기로 삼을 수 있었지만 결국 주변 상황과 본인의 결심 부족으로 한순간 만족감으로 밖에 삼지 못했으니까.

“저, 저게…….”

범죄를 저지른 수연이 오히려 가소롭다는 미소를 짓자 시린은 발을 동동 구르며 이를 간다. 하지만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

피해자인 창현은 가해자인 수연이 너무나 당당하게 나오자 무어라 말하기 힘든 상황이 되었다.

그저 그러려니 하면서 사고로 여긴 채 다시 촬영에 임할 뿐.

“그럼 다시 촬영에 들어가겠습니다.”

감독의 목소리를 들으며 다시 키스신에 들어가는 두 사람이었다.

수연은 다시 접근하는 창현의 입술을 보면서 갈등한다.

‘실수라 하고 한 번 더 할까?’

이미 자신이 밑밥을 완벽하게 깔아둔 상황이다. 여기에서 한 번 더 한다고 해서 크게 개연성에 흠집이 날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문제는 주변에서 자신을 주도면밀하게 살피는 여성들의 시선이었다.

한 번은 실수로 넘길 수 있지만 두 번까지는 순순히 용납할 것 같지 않았다.

‘한 번으로 만족하자.’

고민하던 수연은 결국 실행으로 옮기지 않기로 했다. 모든 화는 과욕에서 시작되는 것으로, 두 번 하려고 하다 자칫 유혈 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다.

폭군싴의 자리에서 하찮싴으로 밀려나기까지 그녀가 얻은 교훈은 무척 큰 것이었다.

나아가야 할 때와 물러나야 할 때를 알게 되었으니까.

“컷! OK!"

아슬아슬한 간격을 두고 두 사람의 입술이 닿을 듯하자 감독이 OK 싸인을 내고 장면 촬영이 끝난다.

후우우우!

그러자 가슴을 졸이고 지켜보던 여성 스태프들이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쉰다. 자칫 잘못하면 저 도둑고양이가 두 번이나 창현의 입술을 훔치는 엄청난 사건을 일으킬 뻔한 것이다.

“후우!”

얼떨결에 수연과 한차례 입맞춤을 하게 되고, 장면 촬영을 끝맺게 되자 창현은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쉰다. 이제 수연과 촬영을 끝맺게 되었으니, 시린과 촬영만이 남은 셈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수연에게 다른 의미로 다가온 듯하였다.

서운한 표정을 지은 수연이 창현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창현이 너는 나랑 촬영 끝낸 게 무척 좋은가 봐.”

“네?”

갑작스러운 말에 창현이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짓는다.

그러자 수연의 표정이 더욱 시무룩하게 변한다.

“방금 전에 한 실수 때문에 나는 곧 세상을 하직하게 될지도 모르는데…….”

“그게 무슨… 아!”

풀 죽은 수연의 표정을 보면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창현은 주변 여성들의 심상치 않은 시선이 그녀에게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당장 죽여도 이상하지 않을 듯한 날카로운 눈초리.

그제야 창현은 방금 전 일어났던 사고(?) 때문에 그런 것이란 걸 알아차린다.

“아니, 전 그다지 나쁘게 생각한 적이 없는데…….”

“정말?”

“에… 그러니까… 이 부분은 원래 여자들이 손해를 보는 편이잖아요? 그래서 누나한테 피해가 갈까 싶어서 그런 건데… 아, 아까 전에 한 말이라 기분이 나쁘려나?”

수연이 자신에게 했던 말을 떠올리고는 조심스럽게 묻는다.

하지만 나쁘게 생각한 적이 없고, 오히려 자신을 걱정해주는 듯한 그의 모습에 수연은 원기회복한 상태였다.

“아니, 전혀 나쁘지 않아. 창현이 네가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다니 좋은 걸?”

“그래요? 하하!”

상황이 묘하게 흘러가는 걸 느낀 창현이었지만 지금 와서 무어라 하기에도 뭐했다. 아니,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처해버렸기에 그는 스태프들을 둘러보며 당부를 하기에 이른다.

“방금 전은 서로 실수가 있어서 그렇게 된 거니 가급적 비밀로 해주세요. 저는 그렇다 쳐도 여기 제시카 양은 여성 아이돌로서 연예계 생활에 큰 타격을 입을 수도 있으니까요.”

간곡한 어조로 그가 부탁하니, 모든 스태프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한다.

“…….”

수연은 마치 사과하듯 고개를 푹 숙이며 불쌍한 모습을 연출하고 있었다.

그녀의 그러한 모습은 동정심을 유발하여, 남자 스태프들도 비밀을 함구하게 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스스로 만들어놓은 트릭과 피해자인 창현의 보호까지.

저지른 사고를 완벽하게 봉해버린 수연이었다.

‘후후! 다음에도 이런 기회가 왔으면 좋겠는 걸?’

창현의 뮤직비디오에 출연하고, 그의 입술을 맛보았으며, 연약한 여인으로서 어필까지 하게 되었다.

일타삼피(!)의 효과를 얻은 수연이었다.


그렇게 유쾌한 기분으로 이어지는 촬영을 지켜볼 수 있게 된 수연.

숙소로 돌아가도 되지만 뮤직비디오 촬영을 끝내고 있을 회식에 참여하기 위해 그녀는 촬영장에 남아 다른 장면 촬영들을 지켜보기로 하였다.

수연과 촬영을 끝낸 창현은 시린과 함께 4-B 타이틀곡 <Devil Cry> 뮤직비디오 분을 촬영하고 있었다.

알콩달콩한 로맨스를 하던 <악마의 유혹>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연출하는 <Devil Cry>의 뮤직비디오 마지막은 사랑하던 여인에게 버려지면서 충격적인 결말을 동반한다.

바로 지금 촬영하는 장면이 그것이다.

콰득!

“큭!”

창현과 포옹한 시린이 하얗게 드러난 그의 목을 깨무는 장면이었다.

첫 곡과 달리 시린을 사랑하게 된 창현은 마지막에 와서 그녀에게 배신을 당하고, 모든 피가 빨리게 되면서 생을 마무리 하는 장면이었다.

실은 시린이 악마의 피를 탐하는 흡혈귀라는 충격적인 결말과 함께.

무너지는 창현을 앞에 두고 요사스러운 미소와 함께 입맛을 다시는 그녀의 모습은 섬뜩함 그 자체였다.

보는 사람이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 정도였으니까.

그 장면을 끝으로 감독의 OK 싸인이 떨어졌고, 마침내 모든 촬영은 끝나게 되었다.

“아야야, 누나 너무 세게 깨물었어요.”

시린이 깨문 곳을 매만지며 창현이 불퉁한 목소리로 말한다.

“미안미안, 리얼함을 살려야 한다고 해서 나도 모르게 세게 깨물었다.”

“끙! 이거 자국 남겠는데요?”

거울에 목을 비춰본 창현은 벌겋게 남아있는 잇자국을 보면서 아픈 듯 그곳을 매만진다.

“미안. 며칠 뒤에 없어질 테니 좀 참아 봐.”

양손을 모으며 사과하는 시린을 보자니, 무어라 말하기 힘든 창현이었다.

“그런데 이거 키스 마크 같은데?”

“예? 키스 마크요?”

“응, 키스 마크 같잖아? 내가 창현이한테 키스 마크 남긴 건가. 킥킥!”

장난스럽게 웃음을 짓는 시린.

그 모습을 보며 창현은 피식 웃음을 짓는다.

“에이, 키스 마크는 무슨.”

촬영이 끝난 창현을 격려하기 위해 다가가던 수연은 키스 마크란 말에 멈칫한다. 그리고 그의 목에 남은 잇자국을 조용히 바라본다.

정말 시린의 말처럼 키스 마크처럼 보이는 자국이 남아 있었다.

“…….”

왠지 모를 복잡한 감정을 느끼는 수연.

그녀의 그러한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창현이 수연을 발견하고는 다가간다.

“수연 누나, 기다리기 힘들었죠?”

“어어? 응? 으응.”

촬영이 끝나 반가웠지만 키스 마크란 말을 들어서 그런지 표정 관리가 쉽게 되지 않는 수연이었다.

“이제 회식할 거니까 같이 가요. 회식 때문에 남으신 거 맞죠?”

“그렇지.”

“그럼 곧장 준비하도록 하세요. 어라? 그런데 아직도 옷을 갈아입지 않고 계셨네요?”

창현의 말처럼 수연은 촬영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드레스를 벗지 않은 상태였던 것이다.

“아… 옷이 너무 예뻐서…….”

자신에게 딱 맞춰 제작된 드레스라 그런지 너무나 마음에 드는 옷이었다.

오늘 이후 다시 입을 수 없어서 그런지 더욱 각별하게 느껴지기도 했고.

아쉬움을 드러내는 수연을 보며 창현이 고개를 갸웃한다.

“어라? 말 안했던가? 이거 제 사비로 만든 거라서 오늘 촬영이 끝나면 누나한테 줄 예정이었는데요?”

“정말?”

“네, 이제 드레스 누나 거예요. 어차피 누나에게 맞춤한 거니까 다른 사람은 맞지도 않을 테고요.”

“와! 고마워, 창현아!”

어린 아이처럼 기뻐하는 수연의 모습에 창현도 웃음을 지었다.

“그럼 어서 갈아입고 회식 가도록 해요.”

“응응!”

활기찬 대답과 함께 빠르게 움직이는 수연이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온통 창현이 선물해준 드레스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여자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생명체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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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마음을 울리는 음악 시즌2 제4화 +7 15.04.24 3,979 89 10쪽
40 마음을 울리는 음악 시즌2 제3화 +6 15.04.22 4,427 82 10쪽
39 마음을 울리는 음악 시즌2 제2화 +9 15.04.20 4,516 91 11쪽
38 마음을 울리는 음악 시즌2 제1화 +10 15.04.17 7,376 95 10쪽
37 ▲▲▲▲▲시즌2 시작!▲▲▲▲▲ +5 15.04.17 5,425 65 1쪽
36 마음을 울리는 음악 106장-108장 +8 15.04.16 6,414 106 230쪽
35 마음을 울리는 음악 103장-105장 +1 15.04.16 4,244 82 314쪽
34 마음을 울리는 음악 100장-102장 +2 15.04.16 4,413 68 229쪽
33 마음을 울리는 음악 97장-99장 +1 15.04.16 4,389 63 264쪽
32 마음을 울리는 음악 94장-96장 +1 15.04.16 4,379 80 230쪽
31 마음을 울리는 음악 91장-93장 +1 15.04.16 5,125 76 268쪽
30 마음을 울리는 음악 88장-90장 +1 15.04.16 4,929 98 332쪽
29 마음을 울리는 음악 85장-87장 +1 15.04.16 4,711 83 270쪽
28 마음을 울리는 음악 82장-84장 +2 15.04.16 4,913 85 261쪽
27 마음을 울리는 음악 79장-81장 +1 15.04.16 4,580 87 241쪽
» 마음을 울리는 음악 76장-78장 +1 15.04.16 4,752 74 244쪽
25 마음을 울리는 음악 73장-75장 +1 15.04.16 4,939 111 327쪽
24 마음을 울리는 음악 70장-72장 +1 15.04.16 4,755 82 200쪽
23 마음을 울리는 음악 67장-69장 +1 15.04.16 4,742 80 2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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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마음을 울리는 음악 61장-63장 +2 15.04.16 5,259 79 3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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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마음을 울리는 음악 40장-42장 +3 15.04.16 8,909 183 320쪽
13 마음을 울리는 음악 37장-39장 +2 15.04.16 9,615 224 397쪽
12 마음을 울리는 음악 34장-36장 +8 15.04.16 9,524 189 322쪽
11 마음을 울리는 음악 31장-33장 +8 15.04.16 10,355 261 345쪽
10 마음을 울리는 음악 28장-30장 +5 15.04.16 10,659 260 277쪽
9 마음을 울리는 음악 25장-27장 +7 15.04.16 11,040 267 233쪽
8 마음을 울리는 음악 22장-24장 +4 15.04.16 10,924 261 198쪽
7 마음을 울리는 음악 19장-21장 +4 15.04.16 11,492 270 216쪽
6 마음을 울리는 음악 16장-18장 +5 15.04.16 11,543 242 163쪽
5 마음을 울리는 음악 13장-15장 +5 15.04.16 14,536 297 237쪽
4 마음을 울리는 음악 10장-12장 +8 15.04.16 13,737 352 171쪽
3 마음을 울리는 음악 7장-9장 +10 15.04.16 14,552 362 142쪽
2 마음을 울리는 음악 4장-6장 +11 15.04.16 16,837 421 120쪽
1 마음을 울리는 음악 프롤로그-3장 +47 15.04.16 29,899 545 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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