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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번 님의 서재입니다.

마음을 울리는 음악

웹소설 > 작가연재 > 팬픽·패러디, 현대판타지

김현우
작품등록일 :
2015.04.16 13:27
최근연재일 :
2015.06.01 17:02
연재수 :
5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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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96,4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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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4.16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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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70쪽

마음을 울리는 음악 85장-87장

DUMMY

제85장 최후에 웃는 것이 장땡이다




검정고시가 무사히 끝났다.

그것은 지극히 창현의 입장이었고, 온라인에서는 현의 검정고시 사실이 급속도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분명 핸드폰은 1교시 때 반납했건만 언제 사진을 찍었는지 뚜렷한 사진이 인터넷에 올라와 있었고,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위엄!> 이라는 제목과 함께 후기가 자세히 올라와 있었다.

싸인을 부탁하여도 불편한 기색 하나 없이 해주었던 사실이 고스란히 알려졌고, 갈 때까지도 자신을 보러온 팬들에게 모습을 비추며 당부를 남긴 것까지 적혀 있었다.

역시 매너짱이라는 말과 함께 다시 한 번 현의 이름이 인터넷을 독차지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러면서 불거진 것이 현의 검정고시 성적이 어느 정도 나올까? 였고, 그에 따라 중학교 성적이 공개되자 사람들은 경악에 빠졌다.

전교 3-5등 사이에 반드시 이름을 걸쳤던 그의 성적은 놀라운 것이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과목들 대다수가 만점이었고, 점수가 깎인 부분이 수행평가라는 걸 감안하면 사실상 전교 1등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이 같은 소식은 전국의 백만 루저(?)들을 분노하게 만들었고, 그로 인해 현의 안티가 늘었다는 것은 결코 헛소문이 아니었다.


“힘들다, 힘들어.”

“아이고 나 죽네.”

지방 행사를 마치고 벤을 타고 서울로 올라오는 소녀들의 입에서는 곡소리가 절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침 일찍 출발하여 전라도와 경상도, 오는 길에 경기도까지 총 세 곳에 행사 스케줄을 돈 그녀들은 죽을 맛이었다.

추석 시즌이 다가오자 한동안 널널하던 그녀들의 스케줄이 다시 바빠지기 시작하였다. 추석 행사에 그녀들을 필요로 하는 곳이 많았고, 앨범은 쉬고 있지만 개인 활동으로 상당한 인지도를 획득한 <소녀시대>는 확실하게 이름을 굳히기 위해 지방을 마다하지 않고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평소 한두 개 정도만 했던 행사를 세 개나 하니 죽을 맛이었다.

“배고픈데 저녁 안 먹어요?”

2대 식신 윤아가 거뭇거뭇해지는 밖을 보더니 말한다. 행사를 부지런히 뛰느라 아직까지 저녁 식사를 하지 못한 상황이다.

그녀의 말에 떠오르는 꼬마 식신 순규가 맞장구 친다.

“맞아맞아, 이렇게 부려 먹어놓고 밥도 안주다니! 이건 분명한 부당 대우야.”

“으으, 옳소! 우리에게 밥을 달라!”

다른 소녀들 또한 배가 고픈 것은 마찬가지였기에 데모하듯 매니저에게 외친다.

아홉 소녀들의 칭얼거림에 당혹스러울 법도 했지만 매니저를 맡은 지 어언 1년이 되어가는 기범 옹께서는 여유로운 미소를 날리며 대답해준다.

“그럴 줄 알고 숙소 근처 갈비집을 예약해뒀어. 밤이 늦었으니 많이는 먹으면 안 되지만 돼지갈비를 사주도록 하마!”

“와! 돼지갈비!”

갈비 소리를 들은 소녀들의 눈이 별빛처럼 반짝이기 시작했다.

오죽하면 막내 주현까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갈비를 상상하겠는가.

그렇게 부푼 기대를 안고 기다리던 중, 윤아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가 입을 연다.

“그러고 보니 창현이 오늘 검정고시 본다던데 잘 봤을까?”

“잘 봤을 거예요.”

망설임 없이 대답하는 주현의 모습에 윤아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묻는다.

“너무 낙천적인 거 아니야?”

“낙천적인 게 아니라 원래 창현이가 공부를 무척 잘했어요. 같은 학년이 아니어서 모르겠지만 제가 듣기로 성적이 순위권이라 들었는 걸요?”

“순위권? 와! 나랑 언니들은 절대 들어보지 못했을 순위권이네.”

순수한 감탄 섞인 어조로 중얼거린 윤아였지만 그 말은 몇몇 소녀들을 발끈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이 악어융이! 감히 우리라는 단어를 쓰다니!”

버럭 외치며 말하는 태연이었지만 옆에 있던 순규는 코웃음치며 말한다.

“풉! 그렇게 말해도 탱구 너의 성적이 좋지 않다는 건 만인이 알고 있지.”

“이익! 어차피 너도 오십보 백보였잖아, 이 순규야!”

“뭐? 네가 감히! 순위는 내가 더 높았어!”

“비율로 따지면 내가 더 높은 거라고! 키도 내가 더 크고!”

“왜 갑자기 키로 이야기가 가는 거야! 이 멍탱이가!”

순식간에 파이트 모드로 들어가는 두 단신들.

멤버들은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 혀를 쯧쯧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미영이 궁금한 듯 주현에게 묻는다.

“그런데 어느 정도라서 잘한다고 말을 하는 거야?”

“음! 저도 구체적으로 잘 모르겠어요. 아! 저번에 들은 게 있는데, 3등 정도 했다고 하던데요?”

“3등이면 반에서 3등? 와! 그거면 엄청 공부를 잘한 거네.”

역시 창현이라 생각하며 감탄 섞인 어조로 고개를 끄덕이는 미영이었다.

그 말에 테클을 건 것은 수영이었다.

창현에게 엿 먹어! 하면서 그의 성적을 들었기에 주현의 말이 가소롭게 들렸다.

“반에서 3등은 무슨!”

“반에서 3등이 아니야?”

미영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묻자, 수영은 당연하다는 듯 말한다.

“그 정도면 잘하는 편이지만 감탄이 나올 정도는 아니잖아. 창현이는 전교에서 3-5등을 오고갔다 하던데?”

“3-5등을요? 말도 안 돼! 가수 생활을 하면서 어떻게…….”

같은 학교 출신인 주현이 가장 먼저 경악성을 터뜨렸다.

다만 미영은 수영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는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묻는다.

“전교가 뭔데?”

“그러니까, 학년 전체 인원을 말하는 거야. 반이 아닌, 같은 학년 모든 반을 통틀어서.”

옆에 있던 효연의 친절한 설명에 고개를 끄덕인 미영이 감탄사를 터뜨린다.

“와! 그럼 몇백 명은 될 텐데 거기에서 3-5등 사이? 정말 대단하구나, 우리 창현이!”

꿈틀!

우리 창현이라는 말에 자신도 모르게 반응하는 소녀들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피식 웃던 효연이 미처 모르고 있었던 것처럼 아! 하고 소리치더니 말한다.

“그러고 보니 최수영, 네가 어떻게 창현이의 성적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거지?”

효연의 적시타에 조용히 눈을 감고 이야기를 듣고 있던 유리가 눈을 뜨며 수영을 바라본다.

“그러고 보니…….”

“어떻게 알게 된 거야, 수영아?”

눈총을 받던 미영 또한 수영을 바라보며 묻는다.

“그, 그게 그러니까…….”

갑작스러운 효연의 배신에 원망스러운 눈빛을 날리며 말을 더듬는 수영.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머리가 새하얗게 변하는 기분이었다.

어느새 단신듀오도 싸움을 멈춘 채 수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절체절명의 상황.

이 난국을 어떻게 타개해야 할지 고민하는 그녀를 구해준 것은 다름 아닌 매니저의 목소리였다.

“자, 도착했다. 가서 돼지갈비 먹자.”

그 말은 시기적절하게 파고들어 무겁게 가라앉던 분위기를 단숨에 반전시켰다.

“와! 돼지갈비다! 돼지갈비!”

“먹자! 지금 움직일 연료가 부족해!”

그러면서 우르르 밖으로 나가는 소녀들.

“…….”

화제가 전환되자 수영은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쉰다. 그러면서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벤을 나서는 효연을 보더니 이를 부득 간다.

“효랭이 네 이년…….”

날카로운 살기를 날리지만 효연은 피식 웃음을 지어보일 뿐이었다.


치이익!

양념 된 갈색 돼지갈비가 회색으로 익어갈 때마다 소녀들의 표정이 황홀경에 빠져든다.

“맛있어!”

“눈물이 나려고 해!”

아침도 대충대충 먹고, 점심도 바쁜 행사 스케줄 때문에 가볍게 우유 하나로 때운 소녀들이다.

그러다 보니 불판에서 구워지는 갈비를 보는 그녀들의 눈빛은 헤어진 연인을 만난 것 마냥 반가움과 그리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빠른 속도로 사라지는 돼지갈비를 보면서 매니저가 사전에 못을 박아둔다.

“고기는 개인당 2인분씩이야.”

“왜요!”

“너무 적다! 우리가 움직인 양을 생각해달라!”

“우우우우!”

매니저의 말에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야유.

무려 아홉 소녀가 날리는 야유는 강력하기 그지없지만 면역력 100%에 달한 매니저는 가볍게 그 야유를 튕겨내며 말한다.

“너무 많이 먹으면 살찌니까 어쩔 수 없어. 대신 냉면 5그릇 시켜줄 테니 알아서 나눠먹도록…….”

매니저는 차마 말을 끝맺지 못했다.

냉면 5그릇이 언급되자마자 세 명씩 나뉘어 가위 바위 보를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이긴 최후의 승자가 냉면 한 그릇을 독식하는 영광을 누리게 되리라.

“아싸! 내가 이겼다!”

“크으! 어무이! 소녀에게 왜 주먹을 내려주지 않으셨나이까.”

“우하하하하!”

치열한 접전 끝에 승리한 순규가 승자의 웃음을 한껏 터뜨린다.

이 모습을 보고 누가 소녀시대라 생각하겠는가.

한숨을 푹 내쉰 매니저가 박수를 짝짝! 쳐서 주의를 끈 뒤 말한다.

“할 말이 남았으니까 조용히 하고 좀 듣도록 해.”

“네!”

먹을 것이 들어가니 그래도 순한 양이 되어 말을 하면 따르는 모습을 보인다.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은 매니저가 품에서 수첩을 펼쳐들며 말한다.

“저번에도 말했지만 내일 스케줄은 하나야. 대신 두 팀으로 나뉘어야 해. 한 팀은 다섯 명, 한 팀은 네 명, 이렇게.”

“뭔데요?”

“하나는 장기자랑을 하는 곳이고, 다른 하나는 추석특집 도전 1000곡이야.”

매니저의 말에 서로 쑥덕거리기 시작하는 소녀들.

“난 장기자랑이 끌리는데? 도전 1000곡은 많이 나가봤잖아.”

“나도 아무래도 장기자랑 쪽이 더 나을 것 같은데. 그쪽이 더 임팩트 있게 어필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평소에는 사이가 좋지만 방송 분량 이야기가 나오면 달라진다. 아홉 명이나 되는 많은 인원이다 보니 자신을 어필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임팩트를 주는 것이 필요했다.

수군거리는 그녀들을 보며 매니저가 말한다.

“그럼 인원을 나눠볼래?”

“각각 특징이 있나요?”

그래도 리더인 태연이 먼저 나서서 특징에 대해 묻는다.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라 프로그램 특징에 맞춰 나가는 것이 가장 나을 테니까.

그 물음에 매니저가 수첩을 살피며 말한다.

“일단 장기자랑 프로그램은 너희들이 말했다시피 강력한 임팩트를 줄 수 있을 것 같다. 일단 시간대도 저녁 시간이어서 상당히 괜찮고, 각자 한 타임씩 맡아서 무대를 펼치는 것이기에 매력 어필에 괜찮을 것 같으니까.”

매니저의 말에 의견은 삽시간에 한쪽으로 기울기 시작하였다.

“봐봐! 내가 그랬잖아. 장기자랑이 낫다니까.”

“나도 장기자랑으로 하고 싶다.”

“나도나도.”

그 말을 듣고 있는 건지 아니면 듣지 못한 건지 매니저는 다른 프로그램에 대해 설명을 한다.

“그리고 도전 1000곡 같은 경우는 기존의 것과 같은데 추석특집으로 무슨 이벤트를 한다는 것 같아.”

“봐봐, 저건 우리가 많이 참여해서 임팩트 주기가 힘들어.”

“이미 우승도 했는데 굳이 나갈 필요가 있나?”

“난 장기자랑 할래.”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장기자랑 쪽으로 의견이 많이 기울고 있는 소녀들의 말이었다.

하지만 그녀들이 피하려는 도전 1000곡에는 엄청난 메리트가 있었으니.

“그런데 현이 참가한다고 하더라고.”

“……!”

순간 번져나가는 침묵. 그와 함께 레이저를 방불케 하는 무시무시한 시선이 매니저를 꿰뚫기 시작한다.

아무리 말해도 되지 않던 시선 집중에 매니저가 몸을 움찔 떨며 말한다.

“왜, 왜 그래?”

“저요! 제가 도전 1000곡에 나가도록 할게요!”

빠르게 치고 나간 것은 다름 아닌 수연이었다.

모두가 장기자랑을 한다고 할 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고, 도전 1000곡에 창현이 참가한다고 하자, 재빨리 앞으로 나선 것이다.

용감하게 앞으로 나선 수연.

하지만 그녀의 말은 허망할 정도로 쉽게 묻히고 말았다.

찌릿 찌릿.

주변에서 압박해 들어오는 날카로운 시선이 그녀의 전신을 콕콕 찌르고 있었고, 그것을 견뎌내기에는 수연의 맷집이 너무나 약했다.

“으으, 으으으…….”

견뎌내고 어필하려는 수연이었지만 멤버들의 단체 눈총은 견뎌내기 힘든 것이었다.

결국 들었던 손을 조용히 내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틈을 절묘하게 채운 것이 바로 태연이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 마냥 자연스럽게 질문을 한다.

“그것보다… 현이 참가한다고요?”

“그래. 도전 1000곡은 장기자랑보다 임팩트가 적겠지만 현이 나온다고 하니 이것 자체로 상당한 시청률을 보장받을 수 있을 것 같아. 그런데 너희들…….”

기이할 정도로 조용한 분위기에 매니저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강렬한 기광이 감도는 그녀들의 눈빛은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럼 어떻게 나눠야 하죠?”

“방금 전에 장기자랑을 하겠다고 했었지? 태연이 너랑 유리랑 수영이랑…….”

매니저가 지목을 하자 그녀들은 고개를 황급히 저으며 말한다.

“아뇨! 제가 언제요! 전 메인 보컬이라고요! 당연히 도전 1000곡에 나가야죠!”

“언제까지 춤 담당으로 있을 수는 없죠! 전 도전 1000곡에 나가서 가창력을 인정받을 거라고요.”

“저도요!”

“…….”

갑자기 뒤바뀐 그녀들의 태도에 적응하지 못한 채 어안이 벙벙한 표정만 짓고 있는 매니저.

방금 전까지 장기자랑에 나가겠다 그러다가 돌변하니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던 것이다.

괜히 머리가 복잡해지는 기분이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입을 연다.

“태연아.”

“네, 오빠!”

갑자기 상냥해진 그녀의 말투에 매니저는 소름 돋는 걸 느끼며 말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리더인 네가 책임을 지고 배분하도록 해.”

“제가 나누라는 이야기인가요?”

표정을 활짝 핀 태연이 매니저를 바라보며 묻는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표정 변화에 매니저는 당황했지만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지금 여기에서 정하는 것보다 돌아간 뒤에 정하는 게 나을 것 같다.”

“네! 제가 책임지고 정하도록 할게요. 오빠는 저만 믿으세요.”

“그래, 이럴 땐 참 믿음직하구나.”

그렇게 태연에게 모든 전권을 위임하는 매니저.

태연은 입 꼬리를 살짝 말아 올린 채 멤버들에게 시선을 옮기며 말한다.

“들었지?”

“…….”

평소 리더를 심부름꾼처럼 여기던 멤버들의 표정이 급속도로 변하고 있었다.

대표로 궂은일을 도맡아하고, 깨지고 하던 리더에게 이런 막강한(?) 권한이 주어질 줄이야.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고, 도전 1000곡에 여러 번 나갔다는 것에 방심한 자신들의 불찰이었다.

“태연아! 오늘 스케줄 힘들었지? 내가 안마해줄게. 내가 안마를 참 잘하거든. 헤헤!”

가장 먼저 행동으로 옮긴 것은 미영이었다. 그녀는 태연과 환상의 친화력을 앞세워 자연스럽게 그녀의 호감을 사려는 행동을 하기 시작하였다.

“태연아! 다리 아프지? 내가 다리 길어지는 비법 아는데 알려줄게. 자 와봐!”

“목 마르지? 내가 음료수 따라줄게!”

“언니! 전 언니를 처음부터 존경하고 있었어요!”

권력자에게 부귀영화가 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

모든 멤버들이 태연에게 환심을 사고자 사바사바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즐기듯 바라보던 태연이 손을 들자, 아부를 하던 그녀들의 목소리가 뚝! 하고 멈춘다.

“모두 조용. 팀 배분은 숙소로 돌아가서 할 거야.”

“…….”

막강한 권력을 쥐게 된 태연의 말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는 소녀들이었다.

“그때까지 잘 해보라고. 대신 주어지는 것은 확실할 테니.”

창현과 함께 할 수 있는 스케줄.

막대한 떡밥이 걸린 이 회의를 주재하는 그녀는 권력을 움켜쥔 위대한 꼬꼬마 리더 탱구였다.


“…….”

식사가 끝나고, 숙소로 돌아가는 소녀들은 이상할 정도로 조용하였다.

원래 페이스라면 든든해진 배를 문지르며 재잘재잘 떠들어야 함이 옳은데, 오늘은 사뭇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던 것이다.

‘얘들이 왜 저러지?’

조용히 각자 저마다 생각에 잠겨있는 소녀들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짓는 매니저. 평소와 사뭇 다른 소녀들의 모습이 무척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설마 드디어 나를 생각하기 시작한 건가?’

여자 셋이 모이면 접시가 깨진다는 말이 있는데 이곳에는 무려 아홉 명이다. 아홉 명이 떠들기 시작하면 그 사이에 낀 남자는 가히 재앙과도 같은 상황이다.

그것 때문에 얼마나 괴로워했던가.

입만 다물면 한없이 예쁠 것들이 입만 열면 깨기 일쑤였으니, 매니저로서는 무척 괴로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마침내 자신의 입장(?)을 생각하고 배려해주는 것이다.

조용히 잠을 자고 있는 것이 아닌, 깨어 있음에도 조용히 침묵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 나도 앞으로 너희들을 더욱 열심히 보필하마.’

자세한 내막도 모른 채 혼자 김칫국만 열심히 들이키고 있는 매니저였다.

그 사이 벤은 숙소에 도착했다.


숙소 안으로 들어서자, 태연은 당당하게 소지품을 내려놓고 씻으러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평소였다면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누구도 화장실에 들어가는 태연을 만류하지 않았던 것이다.

화장실로 향하는 태연 또한 사뭇 여유로운 모습으로 향하고 있었고.

안으로 들어가 가볍게 씻고 나온 태연은 거실에 모여있는 멤버들을 보며 피식 웃는다.

“빨리 정하길 바라는 거야?”

거실에는 다른 소녀들이 넓게 둘러 앉아 있었다.

비어있는 자리로 향한 태연이 그곳에 털썩 앉는다. 그리고 멤버들을 한차례 둘러보더니 입을 열기 시작한다.

“우선 선택할 권리를 주겠어. 장기자랑 쪽에 나가고 싶은 사람?”

“…….”

침묵이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고 있었다.

그것이 뜻하는 바는 너무나 간단한 것.

태연은 멤버들을 둘러보더니 고개를 살짝 끄덕인다.

“그럼 모두 도전 1000곡에 참가하고 싶다는 거로군.”

그렇게 모두가 도전 1000곡을 하려고 하는 순간, 손을 들며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아니, 나는 장기자랑으로 갈게.”

“어? 효연이 너는 장기자랑하겠다고?”

“그래.”

알아서 장기자랑으로 빠져주겠다고 하자, 소녀들의 표정이 한순간 밝아진다. 아홉 명에서 다섯 명에 드는 것과 여덟 명에서 다섯 명 안에 드는 것은 달랐던 것이다.

‘나도 도전 1000곡에 가고 싶지만 아무래도 나한테는 장기자랑에 더 맞을 것 같으니까.’

살짝 아쉬움을 느끼는 효연이었지만 창현이 살려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와 함께 광고 촬영을 하면서 좀처럼 오르지 않는 인지도로 힘겨워하던 자신의 인지도가 제법 상승하기 시작하였고, 이번 장기자랑을 발판 삼아 좀 더 높은 인지도를 확보할 생각이었다.

도전 1000곡에 참가하고 싶었지만 경쟁률이 워낙 세니, 어쩔 수 없었다.

“또 다른 사람 없어? 장가자랑으로 가고 싶은 사람?”

“…….”

다른 지원자를 찾았지만 묵묵부답이었다.

태연은 자신의 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린다.

“흐음! 원하는 사람은 일곱 명인데 남은 사람은 네 명이라…….”

미리 자신은 도전 1000곡 멤버로 빼두는 뻔뻔함을 발휘하는 태연.

그 말의 의미를 모두가 파악했다.

하지만 여기에도 눈치 없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전대 권력자 폭군 싴에서 한순간 최하위 서열 싴순이로 밀려난 수연이었다.

손을 든 그녀가 태연을 보며 묻는다.

“왜 네 명이야? 다섯 명 아니었어?”

‘저런!’

‘눈치 없게.’

‘또 욕 먹겠군, 욕 먹겠어.’

소녀들은 눈치 없이 말하는 수연을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자폭도 유분수지, 그걸 이야기하다니.

수연의 말에 태연은 멤버들의 예상과 달리 화를 내지 않고 싱긋 미소를 지으며 친절하게 대답해주었다.

“응, 나는 리더니까 아무래도 인원이 많은 곳에 가서 너희들을 챙겨주려고. 안될까?”

상냥하게 미소를 짓고 있는데 뭔가 알 수 없는 오오라가 풍기고 있었다.

그제야 분위기가 이상하게 변했다는 것을 깨달은 수연은 온몸을 휘감고 있는 괴리감에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아, 안 될 거 없지.”

“그렇지? 난 수연이가 날 이해해줄 거라 믿고 있었어. 너희들도 날 이해해줄 거지?”

이번에는 대상을 바꿔 다른 멤버들에게 묻는 태연.

자연스럽게 상황을 끌고 나가면서 수연을 납득시키고, 여세를 몰아 멤버들에게 동조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물론이지!”

“리더님이잖아!”

“언니가 없으면 안 되죠!”

그런 태연을 열렬하게 지지하는 멤버들. 이로써 도전 1000곡 멤버로 태연은 확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고마워. 그럼 나머지 네 명을 뽑아야겠네. 어떻게 뽑아야 할까…….”

방법을 고민하는 태연에게 순규가 손을 들며 외친다.

평소에 투닥거리는 사이였지만 권력을 쥔 탱통령에게는 그녀도 상대가 안 된다.

“장신은 전부 장기자랑으로 보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호오! 괜찮은데?”

순규의 말에 눈을 빛내는 태연. 그동안 장신파 보스 수영에게 시달린 걸 생각하면 절로 이가 갈리니, 그녀의 제안은 복수와 함께 원하는 것을 멀리 날려버릴 수 있는 최고의 기회였다.

그러자 난리가 난 건 장신 라인(유리, 수영, 윤아, 주현)이었다.

“이러면 안 되지! 그러면 효연이가 선택한 건 뭐가 돼! 그리고 무엇보다 이건 공정성이 없어!”

“언니! 이러시면 안되요! 솔직히 키 가지고 그러는 건 너무하잖아요!”

격렬하게 항의하는 유리와 주현.

장신파를 장기자랑으로 모조리 보내버리는 것이 끌리던 태연은 입가가 파르르 떨리는 수연의 모습을 보고 움찔했다가 두 사람의 말을 듣고 생각을 바꾼다.

“그래? 음! 확실히 그러면 아쉬울 수 있지. 그럼 다른 방법 좋은 게 뭐가 있을까?”

“그동안 언니가 많이 고생했잖아요. 그러니 언니에게 무언가 하나씩 해주는 걸 제안해서 마음에 드는 걸 선택하는 게 어떨까요?”

폭군의 독재정권이 무너지고 다른 멤버들의 지지 속에 태연이 권력자로 등극하자, 무한수연교에서 다시 무한태연교로 바꾼 철새 윤아가 제안을 한다.

이렇게 하면 태연도 얻는 게 있고, 자신은 태연을 각별하게 여기는 걸 어필하게 되니, 일거양득이다.

“그러면 애들이 싫어할 텐데……?”

말은 그렇게 하지만 상당히 끌리는 표정이었다.

멤버들을 힐끗 바라보며 말하니, 그것이 좋다는 의미라는 걸 알아차리고는 단번에 동의하기 시작한다.

“난 좋아! 우리 리더가 고생을 많이 했잖아.”

“나도나도! 언젠가 한 번 뭘 해주고 싶었는데 잘 됐네.”

“저도 괜찮은 것 같아요.”

알아서 밑바탕을 그리고, 그림을 완성해주니, 태연은 기분이 좋아 함박 웃음을 짓는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하는 게 좋겠네. 이참에 호강 한 번 해볼까.”

자연스럽게 주변 사람을 이용하여 자신의 이익을 합리적으로 취하는 태연.

미영이 가장 먼저 나서면서 태연에게 말한다.

“태연아! 저번에 좋다고 했던 그 핑크색 모자 줄게.”

언젠가 태연이 한 번 갖고 싶다 한 것을 떠올린 미영이 말한 것이었다.

미영의 말에 태연이 눈을 빛내며 말한다.

“그 모자라면! 내가 무척 갖고 싶어했던 그!”

“응응, 그 모자.”

상당히 아끼는 거지만 미영에게는 여러 개의 핑크색 특제 모자가 존재했기에 마음 아프지만 기회를 잡기 위해서 숭고한 희생을 치를 의사가 있었다.

“괜찮네.”

“그렇지?”

화기애애하게 이야기가 이어지자, 다른 말을 듣지 않고 바로 미영의 것을 결정해버릴 것 같아 유리가 불쑥 끼어들며 말한다.

“태연아! 앞으로 내가 먼저 일어나서 멤버들 깨워줄게.”

“정말?”

유리의 말에 바로 끌리는 표정을 짓는 태연. 아무래도 리더다 보니 궂은일을 자주하게 되는데, 그 중에서 가장 고된 일이 바로 멤버들을 깨우는 일이다. 효연이나 유리, 주현도 일찍 일어나는 편이지만 멤버들을 깨우는데는 상당히 비협조적이었다.

그것을 대신해주겠다고 하니, 태연으로서는 끌리는 것이 당연했다.

점점 제시하는 조건이 강해지고 있었다.

위기감을 느낀 순규가 태연에게 외친다.

“얼마 후에… 알지? 날 뽑아주면 합당한 대가가 있을 게야!”

평소 대하던 것처럼 말하는 순규.

하지만 그녀는 중대한 실수를 범했으니, 지금 태연은 평소 투닥거리던 단신 듀오의 일원 태연이 아닌, 모든 멤버들의 소망권을 보유한 탱통령이라는 점이다.

대통령 각하께 그렇게 말하면 당장 잡혀간다.

“훗! 그런 건 필요 없다네, 순규 양. 혼자 열심히 하도록.”

“헉! 아니! 내 말을 다시 들어봐, 태연아!”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순규가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태연은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순규 탈락.

한 사람이 탈락하게 되자 경쟁은 더욱 과열되기 시작했다.

윤아가 손을 번쩍 들더니 태연에게 말한다.

“언니! 저번에 방영된 창현이의 특제 메이킹 필름 드릴게요!”

드라마가 종영되고 스페셜로 방영된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은 태연이 코웃음 친다.

“훗! 그건 이미 제휴 프로그램으로 받아놓았다고.”

“헉!”

발 빠른 태연의 행동에 사색으로 변하는 윤아. 나름 고르고 골라 제시한 조건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간 것이 주현이었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태연에게 제시한다.

“언니! 제 케로로 인형 일주일 동안 빌려드릴게요!”

이것은 주현의 초강력 한 수.

그녀의 케로로 인형에는 다름 아닌 창현의 음성이 녹음되어 있는 초특급 유니크 레어 얼티밋 아이템이었던 것이다.

파격적인 제시에 태연이 혹하는 표정을 짓는다. 그 인형은 주현이 숙소에 있을 때 몸에 떼고 있던 적이 없던 스페셜 아이템이다.

“조, 좋은데?”

“그렇죠?”

태연이 혹하는 듯하자 주현은 한시름 놓는 표정이었다.

수영은 무언가를 제시하려는 듯 생각에 잠겨 있었고, 수연은 멍한 표정으로 지금 벌어지는 상황을 바라보고 있었다.

전대 권력자에게 모진 태연은 수연을 보며 묻는다.

“뭐 생각한 거 없어?”

“…….”

아무 말도 못하는 수연.

그 모습에 태연이 눈을 가늘게 뜨더니 말한다.

“흐음! 없나 보군. 그럼 아쉽게도…….”

“태연아! 내가 얼마 전에 받은 화과자 세트 줄게!”

수연의 탈락을 외치려던 태연의 말은 수영의 외침에 묻혀버렸다.

파격적인 수영의 제안에 태연이 그녀에게로 시선을 옮긴다.

말하면서도 안타까운 듯 수영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있었다. 추석 선물로 받은 화과자 세트는 그야 말로 극강의 레어 아이템이었다. 하지만 촬영을 위해 기꺼이 포기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변수가 하나 있었다.

혹한 표정을 지었지만 바로 결정을 내리지 않은 태연이 입을 열었다.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될까?”

“뭔데?”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 자신도 모르게 긴장감을 느끼며 수영이 대답한다.

그녀의 모습에 태연은 상냥한 미소를 지어보인다.

“별 거 아니야. 그저 내 질문에 답해주기만 하면 돼.”

“뭐, 뭔데?”

“내가 아까 전에 벤에 타고 있을 때 말이야. 흥미로운 걸 기억하고 있어서 말이지. 수영이 네가 창현이의 성적을 어떻게 알고 있던 거야?”

“…….”

벤에 있었던 걸 그대로 기억하고 있는 태연의 모습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린 수영.

그것을 말하려면 자신이 마트에 간 걸 위장하여 엿 주러 간 것도 모두 설명을 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자폭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왜 대답을 안 해? 뭔가 할 수 없는 게 있는 건가?”

“그, 그건…….”

태연의 재촉에도 불구하고 말하지 못하는 수영.

어깨를 으쓱한 태연이 이번에는 수연에게 시선을 옮기며 말한다.

“수연아 너는?”

자신에게 마지막 기회가 왔다는 걸 깨달은 수연이 그 틈새를 공략한다.

“서, 설거지 한 달 대신 해줄게.”

“…결정 된 거 같군.”

“…….”

피식 웃으며 말하는 태연의 모습에 수영은 멍한 표정을 지어야만 했다.

엿 주러 갔다가 덜미를 잡히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도전 1000곡에 참가할 멤버가 정해졌다.


하루사이에 세상이 변했다는 말이 옳을 것이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폭군 싴의 지배는 어느 날 갑자기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그녀를 지지하던 기반이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몰락은 시작되었다.

무한도전 하찮은 박명수에게 정면으로 디스를 당하고 혼미하던 차에 일어난 멤버들의 반란.

탄압과 공포정치로 물들어있던 소녀시대 정권은 큰 변화를 일으켰고, 마침내 전대 권력자는 쓸쓸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만 했다.

그러고 나서 집권한 것이 나름 아닌 소녀시대 리더 태연이었다.

멤버들을 잘 아우르고 성격 또한 가끔 버서커 모드로 변하는 걸 제외하면 무난하였기에 책사인 미영과 유리는 그녀를 즉위시켰다.

초창기 권력은 없었지만 어제 이후로 급속도로 달라졌다.

매니저가 준 선택권은 태연의 권력을 굳건하게 해주었고, 멤버들에게 골고루 흩어진 권력을 단숨에 휘어잡는 권력을 낳게 되었다.

전대미문의 통일 집권자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도전 1000곡에 참가하게 해주겠다는 것을 빌미로 멤버들에게 많은 것을 갈취한 태연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잠에 들었다.

‘후후! 이제 세상은 내 것인 겨.’

폭군 수연의 통치 하에 벌벌 떨며 지내던 것이 엊그제 같았는데 어느새 자신이 폭군 수연을 싴순이로 만들게 되다니.

특히 그녀에게 한 달 설거지를 미뤄둘 수 있다는 것이 태연으로 하여금 행복하게 만들었다.

이 추세를 몰아 좀 더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다져 앞으로 리더의 말을 무시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태연의 목적이었다.

달콤한 미래를 꿈꾸며 그녀는 그렇게 잠이 들었다.

끼이익.

이른 아침, 태연과 유리, 윤아가 잠든 방문이 조용히 열렸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다름 아닌 수연이었다.

아침에 유독 약하다 알려진 그녀가 어떻게 일어난 것이란 말인가?

발자국 소리도 내지 않은 채 조용히 안으로 들어선 수연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의자에 앉는다.

그녀가 앉은 곳은 다름 아닌 태연의 앞.

새근새근 잠이 든 태연은 스무 살이라 하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앳된 외모를 하고 있었다.

“이렇게 보고 있으면 참 귀여운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수연.

그녀의 눈에는 묘한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태연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으음!”

다른 사람의 손길이 몸에 닿는 걸 느꼈는지 태연이 몸을 뒤척인다. 화들짝 놀란 수연이 손을 떼자, 태연이 다시 잠잠하게 변한다.

그리고 흘러나오는 나직한 목소리.

“수연이 네 이뇬… 넌 오늘부터 싴순이야. 헤헤헤!”

빠직!

자신을 싴순이라 칭하자 수연의 이마에 혈관 마크가 도드라졌다.

요즘 자신을 묘하게 갈구는 것 같더라니 설마 이런 생각을 품고 있을 줄이야!

괘씸한 마음이 들었다.

“어차피 복수하려고 온 것이지만.”

단순한 일대일 대결이라면 자신 있지만 태연은 많은 멤버들을 호위로 사용하기에 자신이 상대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이렇게 무방비하게 잠이 들어있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후후후! 오늘 한 번 혼나보라고.”

입가에 미소를 지은 수연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든다.

그녀의 손에 쥐어진 것은 다름 아닌 유성 매직이었다.

한때 정면 대결로 모든 멤버들을 올킬하던 수연은 이제 잠들어있는 틈을 타 매직으로 낙서를 하는 사람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뭔가 서글픈 느낌이 들어야 하건만 수연은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태연을 바라보며 야릇한 상상에 빠져든다.

“으흐흐흐! 어떻게 그려줄까.”

이번 범행은 어제 밤에 구상된 것이었다.

자신을 계속 갈구는 태연의 모습에 수연은 뿔이 날 수밖에 없었고, 결국 복수의 방법으로 택한 것이 그녀의 얼굴에 멋지게 낙서를 해주는 것.

그래서 그녀가 일어나기 전, 잠에서 깨어 미리 준비해둔 매직을 들고 온 것이다.

태연이 깨어난 후의 걱정? 전혀 없다.

자신이 아침에 약하다는 것은 모든 멤버들이 알고 있는 사항이다. 깨워도 절대 일어나지 않는 자신의 습관을 알고 있는 이상, 태연의 얼굴에 낙서를 한 사람이 자신이라는 걸 알아차릴 수 없을 것이리라.

“알려지더라도 이미 멤버들은 정해진 상태니까.”

장기자랑 프로그램에 나가기로 낙찰된 순규, 효연, 수영, 윤아는 평소 연습하던 퍼포먼스를 맞춰놓은 상태였고, 나머지 다섯 명 또한 도전 1000곡의 노래들을 익혀둔 상태였다.

오늘 와서 바꿀 수 없는 노릇이었다.

모든 준비가 철저하게 된 상황이었으니, 이제 남은 것은 태연의 얼굴에 멋지게 낙서를 날려주는 것뿐.

매직을 든 그녀의 손이 태연의 얼굴에게 향하기 시작한다.

얼굴이 하얀 게 장점이었던 만큼 검은 유성 매직의 위력이 더욱 빛을 발하리라.

야릇한 웃음과 함께 매직을 든 수연의 손이 태연의 얼굴에 가까워질 때, 번개같이 움직이며 그녀의 손을 속박하는 것이 있었다.

“……!”

너무나 놀라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는 수연.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자신의 팔을 굳게 붙잡고 있는 태연의 손이었다.

수연의 얼굴에 경악이 번져 나갈 때, 눈을 굳게 감고 있던 태연이 살며시 눈을 뜨며 묻는다.

“뭐가 그렇게 즐거우셔?”

“깨, 깼어?”

자신도 모르게 떨려나오는 목소리. 하지만 너무나 놀라서인지 머릿속이 뒤죽박죽되어 있어 뭐라 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응, 누가 자꾸 음흉한 웃음소리와 함께 날 욕하는 소리가 들리더라고. 귀가 간지러워서 계속 잠을 잘 수가 있어야지.”

“그, 그래?”

한 번 흐트러진 목소리는 좀처럼 진정이 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하고 있지만 지금 수연은 범행 현장이 덮쳐진 상태였다. 그 예로 매직을 든 그녀의 손이 태연의 손에 굳게 잡혀 있었다.

“그럼 이제 설명을 해보실까? 이른 아침에 왜 매직을 들고 우리 잠 많은 수연 양이 이 방을 찾은 것일까?”

“…….”

뭐라 변명할 여지가 없었다.

매직을 들고 그녀의 얼굴을 향하던 걸 붙잡혔는데 무어라 변명을 한단 말인가.

말을 하면 할수록 추해지는 것은 자신뿐이다.

“말을 하지 않는다는 건 인정한다는 이야기겠지?”

침묵하는 수연을 보며 눈을 가늘게 뜬 태연이 날카롭게 말한다. 그리고 수연의 양팔을 붙잡은 채 외친다.

“유리야, 연행해.”

“예, 탱통령 각하.”

어느새 잠에서 깬 유리가 수연의 뒤를 점하고 있었던 것이다.

완벽하게 그물에 걸려든 물고기 신세가 된 수연.

통발에 걸린 문어 마냥 그녀는 헤어나올 수 없는 곳에 발을 들이댄 것이다.

“나, 난…….”

“걱정 말게, 수연 양. 이제 진정한 싴순이가 되어야 하니.”

“…….”

수연을 향해 살인 미소를 짓는 태연이었다.

힘없이 끌려간 수연의 범행은 멤버들에게 알려졌고, 그녀는 범행을 계획한 대가로 일주일 동안 아침 식사를 준비해야 하는 중형에 처하게 되었다.

더하여 한 달 동안 대신 해주기로 한 설거지가 두 달로 대폭 늘어났다.

진정한 싴순이가 되어가는 수연이었다.


아침에 작은 소란이 일어나고, 스케줄을 위해 하나둘씩 깨어난 소녀들은 준비를 하기 시작하였다. 태연에게 말했던 것처럼 유리가 일어나서 멤버들을 깨우기 시작했고, 하루 사이 급속도로 상승한 리더의 지휘 아래 일시분란하게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역모(?)를 계획한 대가로 수연은 유니크 아이템 비커를 이용하여 아침을 만들어야 했고, 화장실 또한 막내인 주현보다 늦게 쓰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준비 다했으면 가자.”

도전 1000곡에 참여하는 멤버들부터 가야했다.

태연을 선두로 멤버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역모죄로 태연의 짐을 든 수연이 터덜터덜 힘없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주현이 그런 수연을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옆으로 다가와 그녀를 토닥여준다.

“힘내세요 언니.”

“…….”

막내에게마저 힘내란 말을 듣자 수연의 기분은 더욱 침울하게 가라앉는다.

그 모습이 무척 측은하여, 주현이 묻는다.

“언니, 제가 짐 들어드릴까요?”

“막내!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어서 와!”

“네? 네, 언니…….”

낌새를 눈치 챈 태연이 주현을 부르자,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대로 태연이 있는 곳으로 향한다.

부들부들.

멀어지는 주현의 모습을 보며 수연은 가방을 쥔 손을 떤다.

만인지상의 위치에 서 있던 자신이 이렇게 가라앉을 줄이야.

‘언젠가 반드시…….’

재집권을 노리는 수연의 눈이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그럼 갈까?”

스케줄에 가는 멤버들을 모두 확인한 매니저가 활기찬 어조로 말한다. 어제 자신을 위해주는(?) 소녀들의 모습에 그는 깊은 감명을 받은 상태였다.

하지만 그것이 착각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출발하자마자 이어지는 수다 폭풍.

끊이지 않는 이야기를 들으며 매니저는 무방비 상태로 당해 멀미가 나는 것을 느꼈다.

자신을 생각해주기는 개뿔.

매니저는 자신이 잘못 생각해도 아주 단단히 잘못 생각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어제 조용했던 것에는 다른 모종의 이유가 존재했던 것이다.

그걸 가지고 착각하다니. 매니저는 배신감에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으으, 내가 다시는 감동을 받나 봐라.’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는 매니저였다.


역적모의가 실패로 끝나고, 수연은 가장 허름한 자리인 짐을 놓는 뒷자리에 앉아 멍하니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쩌다 자신이 이런 처지에 놓이게 된 건지 아직까지 어안이 벙벙하였다.

한때 강력한 권력을 휘두르던 자신의 모습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자신의 말 한마디에 벌벌 떨던 멤버들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고, 이제는 모두 자신을 구박하는 적으로 돌변한 상태였다.

전대 권력자이기에 더욱 그런다는 걸 그녀는 잘 알고 있었지만 더욱 슬픈 것은 지금 상황을 반전시킬 만한 한 수가 없다는 점이다.

멤버들의 지지를 받는 태연은 아주 뛰어난 독재자였다.

수연이 실패한 사례를 보았기에 그녀는 권력을 자신의 멋대로 휘두르지 않고, 멤버들에게 최대한 공정한 처사를 하려 노력하였다.

어디 그뿐인가, 그러면서 아주 교묘하게 자신의 이익을 챙기니, 수연이 보기에 어떠한 곳도 공략할 틈이 보이지 않았다.

‘분명 틈이 있을 거야. 그 틈을 파고들어야 해.’

자신을 유난히 갈구는 태연에게 복수를 다짐하는 수연.

앞에 앉아 음악을 듣고 있던 태연이 움찔하더니 고개를 돌리며 묻는다.

“왜 그래?”

“아, 아니야.”

미처 자각하지 못한 사이 태연에게 얼음 레이저를 쏘아 보냈나 보다. 예전 같았으면 자신의 눈빛에 스턴 상태에 걸렸을 텐데 이제는 면역이 되어 전혀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

어색하게 대답하는 모습이 순간 가늘어지는 태연의 눈.

“흐음!”

무언가 의심이 들었지만 더 추궁할 수도 없다.

지금 상황 자체가 수연에게 있어서는 무척 수모였을 테니까.

‘계획을 계속 꾸미고 있지만 나는 혼자가 아니니까.’

계속해서 기미가 보였기에 조만간 확실하게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집권자였기에 그녀는 자신의 의도를 숨기고 시치미 떼는 것이 능수능란하지 못했다.

그러니 계속 발각되고 갈굼을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마음 같아서는 단번에 처리하고 싶었지만 무리한 권력 남용은 자신의 집권 시기를 단축시킬 수 있기에 태연은 힘들게 참아냈다.

언젠가 반드시 수연을 하찮 싴 of 하찮 싴으로 만들어주겠다 다짐하며.

재집권을 노리는 수연과 하찮 싴으로 전락시키려는 태연의 불꽃 튀기는 신경전이 보이지 않게 전개되고 있었다.


“도착했다. 오늘 선배 가수 분들이 많이 참여하시니까 잘 하도록 하고. 알겠지?”

“네!”

매니저의 당부에 낭랑하게 대답하는 소녀들.

다섯 명 밖에 되지 않아 상당히 적은 느낌이 들었지만 움직이는데 우르르한 느낌이 덜 들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대기실에 도착한 그녀들은 간단하게 짐을 풀어놓고 메이크업을 받기 시작하였다.

협찬 받은 옷을 입고, 한 명씩 준비를 끝마친 뒤 본격적으로 인사를 위해 움직이기 시작한다.

데뷔한지 1년이 넘었지만 이 정도면 아직 신인이었다.

대기실을 나선 그녀들은 선배들이 있는 대기실을 방문하며 인사를 하기 시작하였다.

“안녕하세요, 소녀시대입니다.”

낭랑한 목소리로 꾸벅 90도로 허리를 숙이며 인사하는 그녀들을 선배들은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아이구! 어서 와. 그런데 아홉 명이라 들었는데 다섯 명밖에 안 되네?”

“스케줄이 있어서 저희 다섯 명만 오게 되었습니다.”

“그래, 오늘 촬영 열심히 하고.”

“네!”

나이가 지긋한 선배들은 소녀들에게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챙겨주는 그 모습에 소녀들 또한 힘차게 대답을 하고 다른 대기실로 인사하러 걸음을 옮겼다.

하나하나 대기실을 옮기며 인사를 하니, 마지막 대기실 앞에 서게 되었다.

오늘 촬영에서 가장 큰 대기실을 배정받은 사람은 다름 아닌 창현이었다.

태연은 대기실에 걸린 현이란 글자를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멤버들에게 말한다.

“드, 들어갈까?”

묘하게 떨리는 목소리.

다른 선배들의 대기실에 갈 때도 떨린 적 없었건만 지금은 왠지 떨리고 있었다.

“그, 그래.”

“가요, 언니.”

그 떨림이 다른 멤버들에게도 전해진 듯 몸을 살짝 떨고 있었다.

다들 떨고 있었지만 그 가운데에 역시 리더, 태연이 앞으로 성큼 나서더니 대기실을 향해 노크를 한다.

똑똑똑.

선명한 소리와 함께 내려앉는 무거운 침묵.

잠시 후, 안쪽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누구세요?”

“언니, 저 태연인데요.”

여성의 목소리가 세희의 것이란 걸 알아차린 태연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자, 바로 반응이 온다.

절대 열리지 않을 것 같던 문이 바로 열리더니, 세희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어서 와. 인사하려고 온 거야?”

“네? 네.”

“그래, 마침 너희들도 있던 걸 보던 차야. 자자, 어서 안으로 들어와.”

그렇게 말한 세희가 한 명씩 대기실 안으로 끌어들이기 시작한다.

얼떨떨한 표정을 지은 그녀들이 대기실 안에 들어가자, 의자에 앉아있는 창현과 코디 두 명이 눈에 들어왔다.

창현이 미소를 지으며 그녀들을 반겨준다.

“어서 와요. 인사하러 온 거예요?”

“으응? 그, 그렇지.”

태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어떻게 알았냐는 듯 바라보자, 창현이 피식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밖에서 누나들 목소리가 쩌렁쩌렁 들리더라고요. 모르는 척 하려고 해도 알 수밖에 없죠.”

“우리 목소리가 그렇게 컸나?”

바깥에서 자신들의 목소리가 들렸을 걸 생각하니 창피하고 부끄러운 태연이었다. 원래는 안으로 들어와서 자연스럽게 누나로서의 모습을 보이며 어필을 할 생각이었는데 처음부터 단단히 꼬여버리고 말았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창현은 미영과 유리, 주현과도 차례차례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뒤에 멀찍이 떨어져있는 수연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하며 묻는다.

“어서 와요, 수연 누나. 뮤직비디오 촬영 이후 오랜만이죠?”

“으응, 그러네.”

다소 침울한 느낌이 드는 그녀의 목소리에 창현은 의아함을 느꼈는지 연유에 대해 묻는다.

“누나 목소리가 왜 그래요? 그러고 보니 왜 그렇게 뒤에 떨어져 있는 거고요?”

“그게 그러니까…….”

멤버들을 힐끗 바라보며 말끝을 흐리는 수연.

그녀의 눈빛을 받은 소녀들(특히 태연)은 뜨끔했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척 내색하지 않았다. 특히 주동자인 태연은 암암리에 압박을 주고 있었는데, 여기서 발설하면 앞날이 평탄치 못할 신호였다.

그것을 본 수연은 입을 열지 못했고, 더 이상 말을 하지 않는 그녀의 모습에 창현이 물음표를 띄우며 말한다.

“그러니까 뭐요? 혹시 누나들에게 혼난 거예요? 하하하!”

뒤에 축 처져 있는 모습이 마치 그렇게 보여 농을 던지는 창현. 하지만 그것이 사실인 만큼 소녀들은 순간 가슴이 거세게 뛰는 걸 느껴야 했다. 특히 태연은 귀신같은 창현의 찍어 맞추기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듯했다.

“그, 그럴 리가.”

“그렇죠?”

다소 떨린 수연의 목소리였지만 창현은 그 부분을 개의치 않는 듯했다.

그러다 무언가 생각이 난 듯 눈을 크게 뜨며 탄성을 흘린다.

“아! 그러고 보니 누나한테 줄 게 있거든요.”

“나한테?”

자신에게 줄 게 있다는 말에 눈을 빛내는 수연. 무엇인지 몰라도 기대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녀의 눈빛에 창현은 가방을 가지고 오더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수연에게 내민다.

“이거, 저번에 뮤직비디오 촬영할 때 재킷 촬영도 겸했잖아요? 비록 앨범에 수록되지는 않았지만 버리기에는 너무 아까워서 제가 받아왔어요.”

“으응. 그랬지.”

창현의 말에 사진 촬영도 했던 걸 떠올리며 수연이 그걸 받아든다. 그리고 어떻게 촬영되었을까 싶어 펼쳐드는 순간, 탄성이 터져 나온다.

“와!”

탄성을 흘린 것은 수연이 아닌, 그녀의 뒤에 모여든 소녀들이었다.

사진이 정리된 책자는 일종의 화보집 같았는데, 그곳에는 창현과 시린, 수연이 각종 포즈를 취한 채 찍은 사진들이 있었다.

붉은 머리를 한 창현, 시린과 금발 머리를 한 수연은 포샵(?)의 효과인지 최고의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특히 두 명이 붉은 머리라 그런지 수연의 금발이 더욱 튀는 느낌이었다.

“잘 나왔네.”

설마 기대도 안했던 것에 이런 성과물이 나오자 수연은 흡족한 미소를 짓는다. 그에 반해 다른 소녀들의 눈에는 질투심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한다. 세 명이서 촬영을 했지만 간간이 두 명이서 촬영을 한 것도 있고, 그 중에는 창현과 수연이 다정한 포즈를 취한 채 찍은 사진들도 있었던 것이다.

연인 컨셉이었다는 건 알고 있지만 서로 손을 잡고 찍은 거라던가, 품에 안겨있는 거라던가 하는 건 질투심을 불사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수연의 뒤에 서 있었지만 질투심 때문에 제대로 볼 겨를이 없었다.

결국 수연이 혼자 먼저 보게 되었고. 다른 멤버들은 질투심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창현과 수연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탁.

마침내 수연이 화보집을 다 보자, 태연이 그녀 앞에 다가가 손을 내민다.

“우리도 좀 보면 안 될까?”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표정은 씰룩이고 있었다.

아마 속으로 치솟는 질투의 감정을 간신히 억누르고 있는 것일 테지.

그 모습에 수연은 왠지 모를 승리감이 드는 걸 느꼈다.

‘너는 이렇게 해본 적도 없지? 난 이것보다 더한 걸 촬영 때 많이 했다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내내 침울하던 수연의 얼굴에 한줄기 호선이 그려진 것은 모든 것을 설명하고 있었다.

까드득.

그 의미를 읽은 태연의 입에서 섬뜩한 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더 자극하고 놀려주고 싶었지만 역효과가 날 것 같아 수연은 화보집을 태연에게 건네준다.

“여기. 천천히 잘 봐봐. 무척 잘 나왔네.”

숙소에 나설 때는 싴순이였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다른 멤버들을 루저로 만든 위너 수연이었다.

화보집을 건네받자, 태연을 중심으로 미영과 유리, 주현이 한 장씩 그것을 넘기기 시작한다.

세 명이 찍은 것은 상관이 없지만 이번 곡의 컨셉이 수연과 연인 컨셉인 만큼 두 사람이 마치 사귀는 사이인 것처럼 팔짱을 끼고 있는 것도 있었다.

이런 것은 참을 수 있었지만 문제는 넘어가면서 서서히 짙어지는 농도.

특히 서로 손을 깍지 낀 채 그윽한 눈으로 바라보는 것은 불난 집에 가솔린을 통째로 들이붓는 것과 같은 효과를 일으키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화보집을 보는 멤버들의 눈에 질투가 타오르고 있었고, 마지막 장면에 수연이 창현의 품에 안겨 있는 것은 인내심의 한계를 테스트하게 하였다.

“…….”

화보집을 덮고, 자연스럽게 형성된 침묵.

“미영아.”

본능보다 이성이 강한 유리가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리고는 질투심을 활활 불태우고 있는 미영의 귀에 무언가 속삭이기 시작한다.

진지한 표정으로 유리의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미영.

지금 두 소녀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하나였고, 그것은 어떤 한 사람에게 가히 재앙과도 같은 결과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좋아, 전폭적으로 협력하겠어.”

질투에 휩싸인 미영이 흔쾌히 허락하자, 유리가 수연을 힐끗 보고는 섬뜩한 미소를 짓더니 태연의 귀에 무언가를 속삭이기 시작한다.

그 이야기를 듣는 태연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번져나가기 시작한다.

“좋아. 아주 좋은데?”

유리가 그녀에게 들려준 것은 아주 간단하게 요약이 된다.

우리들을 마소처럼 부려먹던 전대 권력자를 좀 더 괴롭혀주자는 것.

화보집을 보고 질투심을 불태우던 그녀들의 응어리를 풀어줄 수 있는 아주 좋은 건수였다.

“그럼 숙소로 돌아가는 즉시 시작하도록 하자. 물론, 장기자랑에 간 멤버들에게 협력을 구해서.”

섬뜩한 태연의 말.

그녀의 선언은 수연을 더욱 하찮게 만드는 결정적인 요소였다. 수연은 자신을 괴롭힌 태연에게 자랑하기 위해 화보집을 보여주었지만, 그녀의 근시안적인 태도는 호미로 막을 수 있는 것을 걷잡을 수 없게 만들고 말았다.

한 방 먹이고 떡실신 할 때까지 얻어맞을 위기에 처한 수연이었다.


“반갑습니다. 이휘재입니다.”

“반갑습니다, 정형돈입니다.”

MC의 소개 멘트와 함께 본격적으로 도전 1000곡 녹화가 시작되었다.

게스트들은 MC 뒤에 서서 박수를 치며 시작을 반겼다.

그러자 이휘재가 뭐가 그리 신명난 지 기분 좋은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자! 오늘 도전 1000곡 한소절 노래방이 추석 특집을 맞이하여 그야 말로 초호화 캐스팅을 했습니다. 여기 보이십니까? 이 초대 손님들을?”

그러면서 집중적으로 창현을 조명하는 카메라.

휘재가 계속해서 멘트를 이어나갔다.

“꼭 한 번 모시고 싶었던 손님! 모든 사람들이 한 번씩 바라던 손님이 오셨습니다.”

“제가 이 손님하고는 또 무척 친하죠.”

거들먹거리며 앞으로 나서는 형돈. 무한도전에서 상당한 친분을 쌓았기에 휘재가 호들갑 떠는 창현의 존재에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디서 친분을 쌓았죠?”

“그…….”

뭐라 말하려던 형돈이 멈칫한다. 그도 그럴 것이 친분을 쌓은 곳은 M본부 무한도전이었으니 타 방송국에서 그것을 언급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왜 대답을 못하시죠?”

“그게…….”

“사실 그렇게 친하지 않죠?”

“……”

할 말을 잃은 형돈. 그 모습을 본 게스트들은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거만한 뚱보가 휘재의 말빨에 휘말려 침몰하는 모습이 무척 재미있었다.

“자, 정형돈 씨가 그리 친하지 않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시청자 여러분들은 오해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친한데 정말…….”

궁시렁거리지만 이미 배는 떠나가 있었다.

휘재는 가운데에 서 있는 창현을 보며 소개를 한다.

“자, 그럼 소개를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대한민국이 낳은 진정한 월드 스타! 음반 시장 침체기에도 불구하고 나오는 족족 1위! 1위! 또 1위! 새롭게 역사를 써나가는 우리 현 씨를 소개하겠습니다.”

와아아아아아!

짝짝짝!

대부분의 관객이 여자였기에 그 함성의 소리는 그야 말로 스튜디오가 떠나갈 정도로 우렁찼다.

마이크를 든 창현이 여성 관객들의 뜨거운 반응에 고개를 숙이며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오늘 이렇게 어렵게 모시게 되었습니다. 과연 얼마나 멋진 무대를 보여주실지, 기대가 되는데요?”

“완전 개인 콘서트죠, 콘서트.”

형돈의 추임새에 창현은 미소만 짓고 있었다. 말도 하지 않고 있지만 알아서 척척 가져다 붙여주니 간단하게 대답만 해주면 되는 것이다.

휘재가 대본을 보더니 창현에게 질문을 한다.

“그러고 보니 검정고시는 잘 보셨는지?”

“예, 많은 분들이 염려해주셔서 잘 본 것 같습니다.”

“합격하실 것 같습니까?”

“그건… 결과가 나와봐야 할 것 같습니다.”

기습적으로 치고 들어오는 휘재의 질문을 살짝 흘려넘기는 창현이었다.

그 대답에 휘재가 고개를 저으며 나직이 감탄사를 흘린다.

“아, 이거 쉽게 넘어가지 않는데요. 오늘 상당한 고전이 예상되네요.”

“게스트와 무슨 신경전입니까, 신경전은. 그러고 보니 이번 현 씨 앨범 뮤직비디오 여자 주인공으로 나온 제시카 양이 있는 소녀시대가 나오지 않았습니까.”

형돈의 언급에 다섯 소녀들이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를 한다.

“안녕하세요, 소녀시대입니다.”

“뮤직비디오에 출연한 제시카 씨!”

“네!”

명랑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수연의 모습에 형돈이 그녀를 살피며 의아한 목소리로 묻는다.

“뮤직비디오에는 금발로 나오시더니 지금은 금발이 아니시네요?”

“뮤직비디오 컨셉에 필요한 거여서 그때만 염색을 했습니다.”

“그렇군요.”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하는 형돈과 달리 휘재는 전혀 다른 대답을 하였다.

“그런가요. 아! 아까워라.”

“뭐가 아깝나요, 이휘재 씨?”

“사실 제가 뮤직비디오에 나온 제시카 씨 모습에 한눈에 반해버렸거든요.”

“그 말 신뢰가 안 가시는 거 아시죠? 그리고 염색을 했다 뿐이지, 같은 제시카 씨인데 지금은 반하지 않았다는 겁니까?”

형돈의 날카로운 지적이 휘재가 순간 당황한 표정을 짓다가 말한다.

“뮤직비디오에 나온 제시카 씨와 여기 제시카 씨는 다릅니다.”

“…….”

휘재의 말에 입을 다물고 조용히 그를 바라보는 수연. 멤버들에게 먹히지 않지만 다른 사람에게 그녀의 얼음 포스는 위협적이다.

“화났다, 화났어!”

악마의 아들 명수가 수연에게 철저하게 밀리는 걸 보았기에 형돈은 호들갑을 떨며 휘재를 몰아세웠다.

“하하! 여기서도 예쁜 건 변함이 없죠. 농담입니다. 농담.”

신변에 심각한 위기감을 느낀 휘재가 서둘러 변명을 하자 분위기가 가라앉기 시작한다.

그 외 다른 게스트들도 소개를 마치고, 본격적으로 1라운드에 들어간다.

총 여덟 팀이 출전을 하였기에 두 MC는 제비뽑기로 팀을 추첨하기 시작한다.

“혼자이신 분은 그냥 뽑으시면 되고, 두 명 이상인 팀은 대표 분이 나오셔서 투표를 하시면 됩니다. 가장 먼저 현 씨!”

휘재의 호명에 창현이 앞으로 나가서 먼저 표를 뽑아든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뽑아든 창현의 번호는 8번이었다.

“자, 현 씨는 8번을 뽑으셨고요.”

다음 게스트를 호명하여 번호를 뽑게 하였고, 차례차례 나온 사람들은 1번과 7번을 제외한 모든 번호를 뽑았다.

그러자 돌아가는 분위기로 무엇인지 알아차린 소녀들이 태연을 응원하기 시작한다.

“태연아, 힘내! 7번이야, 7번!”

이미 여러 번 도전 1000곡에 참여한 적이 있기에 그녀들은 이 번호가 각각 팀을 이룬다는 걸 직감하고 있었다.

1번과 7번이 남았으니, 7번을 뽑으면 창현과 한 팀이 되어 1라운드를 거칠 수 있다.

태연은 멤버들의 응원에 어깨를 쭉 피며 당당하게 말한다.

“나만 믿어! 이럴 때 리더의 진가가 발휘되는 것이여!”

자신만만하게 외친 태연은 휘재의 호명에 앞으로 나서서 제비 뽑기를 시작한다.

당당한 척했지만 그녀의 손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남은 것은 1번과 7번.

1번을 뽑으면 그녀는 역적이 될 것임이 분명하고, 7번을 뽑게 되면 멤버들의 압도적인 지지 속에 더욱 더 확고한 권력 기반을 다질 수 있게 될 것이다.

‘이거다!’

보이지도 않건만 직감적으로 7번이라 생각한 것을 집어든 태연. 순간 눈에 푸른 광선이 뿜어지는 듯했다.

“자, 들어주세요.”

휘재의 재촉에 눈에 광채를 뿜어낸 그녀가 잡은 번호를 들기 시작한다.

눈을 질끈 감으며 든 것은 다름 아닌 7번이었다.

“……!”

“와아아아!”

“만세! 7번이다!”

50%의 확률을 뚫고 태연이 해내자 서로 얼싸안고 기뻐하는 소녀들. 단순히 같은 팀이 되었을 뿐이지만 기뻐하는 모습이 무척 흐뭇했다.

더욱 가관인 것은 제비를 뽑은 태연이었다.

의기양양하게 다가간 그녀가 전매특허로 알려진 아줌마 웃음을 터뜨린 것이다.

“으허허허허! 봤능가? 내가 바로 이런 사람이랑께!”

줌마탱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 때문에 자제하던 웃음이 자연스럽게 터져 나오며 사투리까지 섞여 나왔다.

그 장면이 고스란히 촬영되고 있지만 태연은 그것을 개의치 않았다. 아니, 자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멤버들이 자신을 추켜세워주는 지금 이 순간을 한껏 즐기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팀이 나눠지고, 소녀시대 다섯 명과 창현은 한 팀이 되었다.

팀 이름을 정해야 해서 창현에게 의견을 묻자, 좋을대로 하라고 말한다.

그러자 다섯 명은 쑥덕거리더니, 팀 이름을 알려달라는 휘재의 물음에 답한다.

“팀 이름이 뭐죠?”

“<현은 소녀시대를 좋아해>입니다.”

“네?”

“방금 말한 그건데요?”

“그, 그렇군요.”

황당한 팀 이름에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휘재. 형돈 또한 황당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자, 그럼 본격적인 규칙을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총 8팀이 각각 팀을 이뤄 4팀으로 나뉘었는데요, 노래가 나오고, 그 노래를 1절까지 부르시면 됩니다. 번갈아가면서 부르면 되고, 총 2팀이 남을 때까지 노래는 계속될 것입니다. 모두 이해하셨죠?”

“네!”

모두가 한 목소리로 대답하자, 본격적으로 1라운드가 시작된다.

가장 먼저 1팀이 노래를 선택하여 부르기 시작하였다.

무난한 곡이 나오자 어렵지 않게 노래를 소화해내는 1팀.

성공 소리와 함께 어렵지 않게 첫 번째 노래를 부른다.

뒤이어 부른 2팀과 3팀 또한 마찬가지였다. 4팀을 제외하고는 연륜 있는 게스트와 신세대 게스트가 결합되어 있기에 상당한 강세가 예상되고 있었다.

그에 반해 4팀은 평균 나이 20세도 되지 않는 젊은 팀이다.

비록 소녀시대가 챔피언이 된 적이 있지만 추석 특집을 맞아 전 연령을 두루두루 아우르는 노래를 하는 것이기에 상당한 고전이 예상되었다.

“자! 3팀까지 클리어하였고, 4팀은 몇 번으로 하시겠습니까?”

휘재의 말에 소녀들은 창현을 바라보더니 말한다.

“네가 골라.”

“그럼 제가 고를게요. 657번이요.”

“657번, 시작해주세요.”

♩♪♬♩♪♬

휘재의 외침과 함께 흘러나오기 시작하는 MR.

“?????”

그 노래를 듣는 순간 소녀들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같았다.

다만 창현만이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휘재가 그 심각한 표정을 보고는 말한다.

“이거 상당히 유명하지만 무척 어려운 곡이 걸렸네요. 들고양이들의 노래 <십오야>입니다. 1979년! 4팀 소속원 중 누구도 태어나지 않던 때에 불러지던 노래군요.”

1팀, 2팀, 3팀이 불렀던 노래들과 난이도를 달리하는 노래였다.

태어나기도 훨씬 전에 불려졌던 노래의 등장에 소녀들은 창백하게 변했다.

이거, 나오자마자 탈락할 판이었다.

창현은 그녀들을 보며 묻는다.

“누나들 알아요?”

“아, 아니. 몰라.”

“어떻게 하지? 아예 모르겠는데…….”

“설마 이 노래가 나올 줄이야.”

창백하게 변한 얼굴로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 그녀들의 모습에 창현이 말한다.

“그럼 제가 부를게요.”

“할 줄 알아?”

놀란 듯 묻자, 창현은 입가에 미소와 함께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능숙하게 박자를 맞추며 노래를 부르는 창현.

제법 어려운 노래였기에 고전이 예상되었는데 막힘없이 부르는 창현의 모습에 MC들은 물론 게스트들까지 놀란 표정을 짓는다.

흔하게 등장하는 1차 경고도 나오지 않은 채, 무사히 노래를 완주한다.

“4팀 <현은 소녀시대를 좋아해> 성공!”

“와아아아!”

“짱짱!”

위기를 무사히 넘긴 창현에게 엄지 손가락을 추켜 세운다. 초반 탈락이라는 수모를 예상했는데 창현 덕택에 무사히 위기를 넘긴 것입니다.

“아, 설마 이 노래를 부를 줄이야.”

“옛날 노래도 많이 알고 있는 것 같은데요. 한두 번 불러본 솜씨가 아니에요.”

휘재와 형돈의 감탄에 창현은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본 휘재가 정신을 차리고 말한다.

“자! 모두 한 곡씩 무사히 완주하셔서 분위기가 서서히 달아오르고 있는데요. 이쯤에서 챔피언에게 주는 상품을 소개해도 되겠죠?”

휘재의 말과 함께 무대 뒤쪽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들.

등장한 상품을 본 사람들의 눈에 휘둥그레 변하기 시작한다.

“오늘은 상품이 무척 푸짐합니다. 일단 참가한 게스트분들에게는 추석 선물 세트가 주어지고요, 2등을 하신 분에게는 한우 세트가, 그리고 대망의 1등을 차지하신 분에게는 무려 금 한 냥의 목걸이와! 현 씨가 직접 송편을 먹여주는 것입니다.”

“……!”

오늘 게스트 대부분이 여성인 점이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창현의 눈이 커지기 시작했고, 그 뒤에 서 있던 소녀들이 좋아하던 것을 멈추고 순간 눈에 불길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금 한 냥보다 한우 세트가 더 끌리던 그녀들이었지만 1등 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상품을 듣고 완전 이성을 상실하기 직전이었다.

직접 송편을 먹여준다!

이것은 하나의 로망이 아닐 수 없다.

결연한 표정으로 멤버들을 둘러보는 태연.

말하지 않았지만 그녀들의 생각은 하나로 통일되었다.

“모두, 할 수 있지?”

“물론!”

상품 공개는 소녀들을 전투모드로 만들어주었다.

왜 소녀시대가 챔피언인지 진면목을 보여주겠다 생각하면서.

아무래도 오늘 노래에 집중해야 할 듯 싶다.


“소녀시대 태연 성공!”

“소녀시대 서현 성공!”

“소녀시대 유리 성공!”

“소녀시대 티파니 성공!”

“소녀시대 제시카 성공!”

불이 붙어 버렸다.

현이 직접 먹여준다는 호화 상품은 소녀들로 하여금 의욕을 불사르게 하였고, 그것은 초고속 승승장구를 예약한 특급 티켓과도 같았다.

그야 말로 파죽지세 그 자체였다.

눈에 레이저를 뿜어내며 노래를 완벽하게 소화하는 그녀들의 모습은 MC인 휘재와 형돈은 물론이고, 다른 팀의 기세를 꺾어놓기도 하였다.

“…….”

그 모습을 보는 창현은 할 말을 잃은 채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이 나서기 전 알아서 다 처리를 해버리니 그로서는 나설 틈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우와! 4팀의 기세가 만만치가 않은데요?”

감탄사를 흘리며 말하는 형돈에게 휘재가 말을 덧붙인다.

“아무래도 현 씨가 직접 송편을 먹여주겠다는 것이 의욕을 불사르게 만든 것 같은데요?”

“그 정도면 사실 호화 상품이죠. 누가 감히 월드 스타가 직접 내미는 송편을 먹어보겠습니까! 이건 그야 말로 호화 상품인 거죠.”

“하지만 현 씨가 거부하면 모든 게 허사가 되는데요.”

그런 셈이다. 이번 이벤트는 제작진이 기습적으로 준비한 것이지만 문제는 창현의 허락을 받고 하는 이벤트가 아니라는 것.

창현이 이벤트 자체를 거부하면 이번 이벤트 자체가 무산되어버리는 것이다.

“…….”

정곡을 찌르는 휘재의 말에 사람들의 시선이 창현에게 집중되기 시작했다.

잘 나가다가 갑자기 자신에게 집중되는 시선이 창현은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짓는다.

그 모습을 묘한 미소를 지은 채 바라본 형돈이 묻는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마치 곤란한 상황에 처한 자신의 모습을 즐기는 듯한 형돈의 모습에 창현은 순간 표정을 찌푸릴 뻔하였다.

누군가가 그렇게 하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으니까.

창현의 대답을 기다리는 것은 형돈뿐만이 아니었다. 오늘 나온 게스트들 또한 긴장감 어린 시선으로 창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차피 이것은 예능이고, 과도한 것을 바라는 것도 아니었다.

어려운 것이 아니었기에 창현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한다.

“…어렵지 않은 거니 하도록 하겠습니다.”

“아! 너무 쉽게 허락하는데요? 제작진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군요.”

너무 간단하게 대답하는 창현의 모습에 형돈은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고, 휘재는 제작진 쪽을 살피고는 미소 지은 채 말한다.

“후!”

창현의 허락이 떨어지자 여기저기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모처럼 마련된 이벤트는 무리없이 진행될 예정인 듯 싶었다.

“자, 그럼 4팀의 거센 공세를 훌륭하게 버텨낸 1팀의 노래가 시작되겠습니다.”

현재 2팀이 떨어진 상태였기에 1팀, 3팀, 4팀이 각축전을 벌이고 있는 상태였다. 여기에서 한 팀이 더 떨어져야 두 팀만 남게 될 것이고, 그리 되야 본격적인 본선이 시작될 것이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노래가 나오기도 하고, 최근 한창 인기를 떨치고 있는 노래가 나오기도 한다.

1팀과 3팀이 무사히 노래를 마치고, 차례는 4팀이 된다.

주현이 나서서 번호를 부른다.

“305번이요.”

주현의 말에 기기에 305번을 입력하기 시작했고,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와아!

노래가 흘러나오자 환호성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지금 무대에 울려 퍼지고 있는 곡은 다름 아닌 소녀시대의 노래인 <Kissing You>였던 것이다.

자기 노래가 나온 셈이었기에 그야 말로 거저 먹는다는 표현이 부족하지 않을 정도.

“이거 상당히 기세를 타겠는데요? 하지만 몰라요. 자기 노래에서 자기가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거저 먹는 거 같은데요? 아!”

말을 하던 형돈이 탄성을 터뜨린다.

4팀에서 나온 것은 소녀시대가 아니었던 것이다.

무대 위에 올라온 것은 여태까지 멀뚱하게 구경하고 있던 창현이었다.

“어어? 왜 그러세요?”

미영과 유리에게 양팔을 붙잡힌 창현이 얼떨결에 무대 위로 올라선다. 그러자 옆으로 다가온 태연이 그에게 무언가를 내민다.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창현의 얼굴에 순간 허탈한 미소가 흘러나온다.

태연이 내밀고 있던 것은 다름 아닌 사탕 마이크였던 것이다.

“제가 하라고요?”

“응. 멋지게 불러줘.”

“알았어요.”

이미 무대 위에 올라온 이상 물러설 수 없는 노릇. 본격적으로 하겠다 마음을 먹은 창현은 태연이 내민 사탕 마이크를 들고 안무를 추기 시작한다.

뒤에 선 소녀들이 맞춰주니, 소녀시대에 완벽 빙의를 한 것 같아 모두의 얼굴이 흥미가 서리기 시작한다.

창현의 <Kissing You> 무대는 완벽했다. 깜찍발랄한 무대를 선보이자, 지켜보던 관객들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고, 여성 게스트 또한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다만 부작용이 있다면 남자들의 반응은 가히 가관이었다는 점.

창현에게 열광하는 여성 게스트들이 있어 내색하지 못했지만 그들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폭발적인(?) 무대가 이어지고, 다음 차례 팀들도 차례차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1팀은 무사히 노래를 불렀지만 3팀은 모르는 노래가 나왔는지 우왕자왕하다가 그대로 1차 경고에서 2차 경고로 이어져 탈락하고 말았다.

“아! 3팀 탈락입니다!”

“이렇게 되면 1팀과 4팀이 결승 진출이네요!”

치열한 접전 속에서 마침내 승리를 일궈내자 소녀들은 어깨 동무를 하고 기뻐한다.

“꺄! 우리 진출이야!”

“아직 갈 길이 남아 있어. 방심하지 말자.”

“알았어!”

기뻐하는 멤버들을 다독이는 태연이었다. 그녀 또한 지금의 승리가 기뻤지만 당장의 승리가 가져다주는 달콤함에 빠져들면 앞으로 펼쳐질 대결에서 좋지 못한 성적을 낼 수도 있다.

어디까지나 자신들의 목적은 최종 ‘우승’이지 당장의 ‘승리’가 아니다.

기뻐해야 함이 옳지만 다독여야 하는 것이 옳은 선택이었다.

“이제부터는 적이네.”

2회전부터는 팀을 해체하고 각각 개별 팀으로 노래를 부른다.

방금 전 했던 것과 같이 서바이벌 형태로 치러지며, 최종 한 팀이 남을 때까지 끊임없이 노래는 이어진다.

태연의 말에 창현은 미소 지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네요.”

“각오해야 할 거야. 우리는 예전에 우승도 여러 번 했다고.”

“기대되네요, 하하!”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데 저 표정에 저 말투가 위협적이라 느끼는 걸까? 태연의 모습에 그저 웃음만 흘러나오는 창현이었다.

그 웃음에 담긴 의미가 전해지는 것 같아 표정을 살짝 찡그린 태연이 말한다.

“겪어보면 알겠지. 봐주지 않을 테니 우리들의 무서움을 겪어보라고!”

“기대할게요.”

“이익…….”

권력에 달콤함에 물들었는가. 창현의 모습에 태연은 독오른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녀를 제지한 것은 수연이었다. 그리고 창현을 바라보며 말한다.

“창현아, 태연이는 원래 저러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 결과에 상관없이 우리 최선을 다하자.”

“물론이죠. 수연 누나도 힘내세요.”

“응, 너도.”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창현과 수연.

몸을 돌린 창현이 멀어지자,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던 수연은 뒤에서 느껴지는 싸늘한 한기에 몸을 부르르 떨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태연을 비롯하여 그녀의 좌우에는 미영과 유리가, 그리고 뒤에는 주현이 포진되어 있었다.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수연을 포위하는 소녀들.

멤버들에게 전해지는 알 수 없는 위압감에 몸을 파르르 떨은 수연이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말한다.

“왜, 왜 그래, 너희들.”

“굳이 말이 필요할까?”

입가를 비튼 태연의 모습은 저승사자가 미소를 짓고 있는 듯했다. 방금 전 수연의 행동은 그야 말로 자신을 나쁜년으로 만드는 최적화된 것이었다.

달콤한 밀어를 속삭이며, 밀고 당기기에 스퍼트를 걸려던 찰나에 들어온 견제라니!

그로 인해 태연은 여태까지 공들이던 것이 한순간 엇나갔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바로 눈앞의 싴순이 때문에!

“그토록 경고를 했건만…….”

“나, 나도 사람이야! 나도 행동할 권리가 있어!”

강렬한 압박감이 주변에서 전해져왔지만 수연은 자신의 인권을 외치며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예전 얼음 포스로 멤버들을 휘어잡던 폭군 수연은 사라진 채, 이제는 태연의 포스에 바들바들 떠는 가녀린 초식 동물이 되고 말았다.

“행동할 권리는 있지. 하지만 말이야…….”

말끝을 흐리는 태연이 미영과 유리, 주현과 한차례씩 눈빛을 주고받는다.

그러자 나직이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들.

그 모습이 수연으로 하여금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행동에는 책임이 따르는 법이야. 그 책임이 무엇인지 알려주겠어.”

“살… 읍!”

말로 설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여긴 수연이 소리를 질러 상황을 벗어나고자 했지만 섬광처럼 빠르게 다가온 주현의 손에 입이 봉인되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미영과 유리가 수연의 양팔을 포박한 뒤 조용히 끌고 가기 시작한다.

“완벽한 싴순이로 거듭나게 해주겠어.”

확고한 권력을 다지기 위해 전대 권력자를 가혹하게 다루는 태연이었다.

하찮아져버린 자신의 위치를 더욱 확실하게 깨닫게 하고, 먼저 창현에게 다가갈 엄두가 나지 않도록. 그렇게 되지 않으면 될 때까지 해줄 것이다.

싴순이의 미래는 어둡기만 하다.

/

“촬영 들어갑니다.”

앙증맞은 반란으로 인해 권력자 태연이 횡포를 부리고 있을 때, 수연을 위기에서 구한 것은 촬영을 재개한다는 이야기였다.

휴식 시간이 끝났다는 말이 들려오자, 태연의 얼굴에 진한 아쉬움이 생겨났다.

“칫! 너무 빨리 끝나네.”

그 말과 함께 태연이 쪼르르 걸음을 옮겨 촬영장에 합류하였고, 다른 멤버들도 그 뒤를 따랐다.

수연 또한 자리에서 일어나 힘겹게 걸음을 옮겨 그 뒤를 따랐다.

육체적으로 힘들지 않았지만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었다.

본격적으로 촬영이 다시 시작하면서, 휘재가 남은 네 팀을 보며 흥미로운 표정을 짓는다.

“자! 이제 총 네 팀이 남아있는데요. 여기에서 누가 우승할 것 같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소녀시대가 유력합니다. 숫자도 숫자이거니와 오늘 걸린 상품이 만만치 않다 보니 기합이 그대로 느껴지거든요. 디펜딩 챔피언의 면모를 제대로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소녀들이 발산하는 아우라는 형돈으로 하여금 움찔하게 만들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이미 여러 차례 우승 경험이 있는 만큼 숫자에서 우위를 점하는 그녀들이야 말로 가장 유력한 우승후보였다.

“제가 아까 대기실에서 했던 말을 그대로 따라하시는군요.”

멘트를 강탈 당한 휘재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형돈을 바라보자, 멋쩍은 웃음을 지은 형돈이 빠르게 진행시키기 시작했다.

“하하! 자, 그럼 본격적으로 대결에 들어가도록 할까요?”

“…그렇게 하도록 하죠.”

두 팀이 살아남았고, 그들은 각각 개별로 찢어지게 되면서 총 네 팀이 남게 되었다.

창현은 네 번째였고, 소녀시대는 세 번째였다.

각자가 경쟁자였지만 이번만큼은 승리를 위한 협력자였다.

대결에 앞서 태연은 본격적인 계획을 설명하기 시작한다.

“일단 아는 노래면 지원을 하도록 해. 그리고 모르는 노래면 각자 아는 부분을 짜 맞춰서 하는 거야.”

“응!”

“네, 언니.”

예전 같았더라면 모르는 노래가 있다면 포기했을 테지만 지금은 다르다.

반드시 승리하겠다는 전의가 그녀들의 전신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도전자가 어렵지 않게 성공을 하고, 세 번째 차례는 바로 소녀시대였다.

태연이 번호를 부르고,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하자, 몇몇 소녀들의 표정이 흐릿하게 변한다.

모르는 노래인 것이다.

“이 노래 누가 알아?”

모르는 곡이었기에 태연은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멤버들을 둘러본다.

그 위기를 구원하고 나선 것은 바로 주현이었다.

“저요!”

“그래, 확실하게 부르고 와.”

이럴 때 막내가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믿음이 담긴 태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주현이 앞으로 나섰고, 소녀들이 뒤에 서서 리듬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한다.

띠링 띠링.

제법 오래 된 노래라 그런지 노래를 부르다가 1차 경고가 주어진다.

한 번 더 틀리면 탈락이기에 소녀들의 표정이 조마조마하게 변해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주현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은 채 어렵지 않게 노래를 소화해나간다.

“소녀시대, 통과!”

휘재의 통과 선언에 소녀들이 기뻐하며 주현을 얼싸안기 시작한다.

“꺄아아아!”

“잘했어, 막냉이!”

이제 첫 걸음을 떼었건만 격렬하게 기뻐하는 소녀들이었다.

“다음은 현!”

마지막 주자로 나선 것은 다름 아닌 창현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받았지만 흔들리지 않는 표정으로 선곡한 창현은 옛날 노래임에도 불구하고 어렵지 않게 소화해낸다.

환호와 박수 갈채가 쏟아지는 가운데 입가에 미소를 지은 창현이 자리에서 내려온다.

너무나 여유로운 그 모습을 보면서 소녀들은 순간 욱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 미소에 서린 의미는 마치 절대 져줄 생각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았던 것이다.

“창현이가 아무래도 따끔한 맛을 보고 싶어하는데?”

묘한 미소를 지은 유리가 말하자, 옆에 있던 미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한다.

“우리의 힘을 보여주자.”

“동감이에요. 오늘 확실하게 판가름 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학교 선배 주현도 절대 질 수 없다는 선배의 심리가 발동한 듯했다.

“…….”

입을 열지 않고 있던 수연은 무언가 생각한 뒤 입을 열고자 했지만 태연이 그녀의 말을 가로 막고 말았다.

“좋아, 열심히 해보자. 우리의 저력을 보여주는 거야.”

“응!”

태연의 말에 하나가 되어 승리하고자 하는 전의를 다지는 소녀들이었다.

졸지에 말을 가로 막힌 수연은 뻐끔거리며 태연을 바라보고 있을 분이었다.

그 눈빛을 알아챘는지 태연이 즉각 수연에게 시선을 옮긴다.

죄를 지은 것도 아니건만 당한 게 있는지 수연은 태연의 시선을 받자 자신도 모르게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짓는다.

현 권력자의 횡포에 의해 전임 권력자 수연은 철저하게 싴순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수연아, 너의 도움이 절실해. 그러니까 적극적으로 좀 도와줘. 모두가 잘 되고자 하는 거니까. 응?”

“…알았어.”

이렇게 부탁해오는데 거절할 만큼 수연은 냉혹하지 못했다. 또한 까칠하게 나오다가 갑자기 순한 모습으로 말하는 태연을 보니 차마 거절할 수도 없었고, 오히려 친근하게 느껴져 고맙기도 하였다.

“잘 해보자.”

“알았어. 파이팅.”

자신의 손을 움켜쥐는 태연의 손길이 유난히 따뜻하다고 느끼는 수연이었다.

“…….”

앙증맞게 파이팅 포즈를 취하는 수연을 보면서 태연은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철저한 탄압 이후 살짝 베푸는 사소한 정은 당사자에게 무척 크게 느껴질 것이다.

‘수연이 넌 이제 영원한 싴순이야, 후후!’

수연을 조련하고 있는 태연이었다.


대결은 치열하게 이어지기 시작했다.

의욕에 찬 멤버들은 적극적인 자세로 임하고 있었고, 전대 챔피언답게 소녀들은 그야 말로 빈틈없는 완벽한 무대로 관객들의 환호성을 자아냈다.

하지만 사람들을 더욱 놀라게 한 것은 창현이었다.

운이 없게도 선곡하는 족족 시대가 들쭉날쭉하게 곡이 선정되고는 하였다.

특히 60년대 곡 같은 것은 다른 도전자라면 백 번 탈락을 해도 부족할 만큼 생소한 곡들이었다. 하지만 창현은 운이 좋은 건지, 실력이 좋은 건지 그 곡들 또한 어렵지 않게 소화해내고는 하였다.

로테이션으로 하나하나 극복해나가는 소녀들과 달리 창현은 혼자서 모든 것을 해결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언니, 창현이가 너무 잘하는데요?”

완벽하게 곡을 소화하는 창현을 보고 있자니 주현이 불안함을 감추지 못한다.

만약 자신들이 저 곡을 골랐다면 탈락했을 테니까.

“괜찮아! 창현이도 여유가 있어 보이지만 우리랑 비슷한 마음일 거야. 이럴 때일수록 마인드 컨트롤을 하도록 해. 평온한 표정으로, 마치 우리는 모든 걸 알고 있었다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는 거야. 알겠지?”

“네.”

그렇게 주현을 설득하였지만 정작 태연 본인도 불안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위태위태한 위기가 여러 번 있었던 자신들에 비해 창현은 여태까지 한 번도 경고를 받은 적이 없다.

‘기회가 올 거야. 반드시…….’

그때까지만 버티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기회가 오기도 전에 소녀시대에 위기가 봉착했다.

태연의 우려처럼 마침내 멤버들 전원이 모르는 곡이 출연한 것이다.

멤버들이 머리를 쥐어짜내며 대항하려했지만 2차 경고까지 받고 탈락하고 말았다.

“자! 이렇게 되면 현 씨가 무사히 곡을 부르게 되면 우승입니다.”

“이렇게 여성들의 바람이 무산되고 마는 걸까요?”

두 MC는 망연한 표정을 짓고 있는 소녀들을 보며 창현에게 팍팍 부담감을 주기 시작했다.

“하하!”

웃음을 지은 창현은 번호를 선곡했고, 흘러나오는 곡은 바로 소녀시대의 1집 앨범 수록곡 <Ooh La-La>였다.

아는 노래였기에 자신감 어린 표정으로 마이크를 드는 창현.

“아……!”

그 모습을 보며 소녀들은 아쉬움이 가득 찬 소리를 흘린다. 1집 앨범은 자신들이 직접 건네주었던 만큼 창현이 알고 있을 확률이 농후한 곡이었다.

그 표정은 창현의 눈에 생생히 들어왔다.

‘너무 실망스러운 표정이네.’

1등을 하지 못하는 것이 그렇게 실망스러운 걸까.

자신도 모르게 피식 미소를 지은 창현의 귀에 경고음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띠링 띠링!

“어?”

반주 타이밍을 잘못 알은 창현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반주가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짧았고, 다른 생각을 하다 보니 완전히 감각을 잃고 말았다.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부르려 했지만 이미 1차 경고가 나오고, 2차 경고가 누적되고 있었다.

“현, 실패!”

“이런.”

잠시 딴 생각을 하는 사이 낭패를 보고 만 창현이었다. 아는 곡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순간의 방심이 낳은 실수가 아닐 수 없다.

고개를 저은 창현은 소녀들을 힐끗 본다. 다시 우승할 기회가 생겼으니 기분이 좋지 않을까?

하지만 창현의 예상은 틀렸다.

“…….”

소녀들은 자신의 곡을 틀린 창현을 보며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망설이고 있었다.


“일단은 승리하는 게 중요해. 모두들 정신 차려.”

태연의 말에 소녀들은 정신이 번쩍 깨는 걸 느꼈다.

그리고 태연을 바라보자, 착 가라앉은 눈을 한 그녀가 멤버들에게 말한다.

“이건 두 번 다시 오기 힘든 기회야. 창현이가 한순간 방심해서 온 기회인만큼 최선을 다하도록 하자.”

태연의 말에 모두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자신들의 노래를 틀린 것이 섭섭했지만 반대로 승리할 수 있다는 희망을 얻게 되었다.

그것은 곧 창현이 먹여주는 송편을 먹을 수 있다는 뜻!

“파이팅!”

눈을 빛낸 소녀들이 주먹을 불끈 쥐며 승리를 다짐한다.

멤버들이 전의를 찾은 것 같아 태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더니 두 눈을 형형하게 빛내며 창현을 바라본다.

그리고는 자신 있게 나서서 선곡을 한다.

“607번이요.”

노래를 신청한 태연은 자신감 넘치는 태도로 단숨에 노래를 클리어한다.

“점점 흥미진진해지는데요?”

“이거, 현 씨의 실패로 소녀시대의 기세가 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이러면 말리기 힘들어지죠.”

치열해지는 대결의 양상이 재미있는 듯 휘재와 형돈이 눈을 빛내며 지금 이 상황을 전달하기에 바빴다.

창현 또한 승부욕에 불타고 있는 소녀들의 모습을 보고는 자신도 질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쉽게 져줄 수 없지.’

옛날 노래는 많이 알고 있지만 문제는 십여 년 전 노래는 많이 알지 못하는 것. 그 노래들에 취약했기에 창현으로서는 선곡을 잘 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저쪽은 다섯 명이었지만 자신은 혼자였으니까.

‘승부욕이 드는 걸?’

가요 프로그램 1위도 그리 욕심을 내본 적이 없는데 자신에게 전의를 불태우는 소녀들을 보니 쉽게 져주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915번이요.”

창현도 선곡을 한 뒤 노래를 손쉽게 해낸다. 그리고 입가에 여유로운 미소를 지은 채 소녀들을 한 번 스윽 훑어보다가 제자리로 돌아간다.

점점 치열해지는 열기는 지켜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손에 땀을 쥐게 하였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그들의 대결은 정말 이대로 대결이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 정도였으니까.

“소녀시대 티파니 성공!”

안정감 있게 노래를 끝내자, 소녀들이 하이파이브를 하며 기뻐한다.

벌써 열 곡을 넘게 불렀기에 창현은 상당히 부담이 되는 걸 느끼며 앞으로 나선 뒤 선곡한다.

“717번이요.”

노래를 선곡한 창현은 반주가 깔리기 시작하자 입가에 싱긋 미소를 짓는다.

“……!”

그 표정을 보고 불안한 표정을 짓는 소녀들.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은 창현의 모습을 보니, 이번 곡도 무리 없이 해낼 거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창현이 어렵지 않게 곡을 소화하자, 소녀들의 안색은 불안하게 변한다.

그가 해낼수록 자신들에게 향하는 부담감은 커지니까.

곡을 소화해낼수록 밝은 표정을 짓고, 호들갑스러운 모습을 보였던 것은 그녀들 마음속에 이대로 한 번 삐끗하면 패배하는 게 자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런 것이다.

“124번이요.”

대표로 나선 태연이 번호를 선곡한다.

그러자 124번이 입력되고 노래가 흘러나온다.

“이런…….”

자신도 모르게 탄식을 흘리는 태연. 전혀 모르는 멜로디가 울려 퍼지고 있던 것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멤버들을 둘러보지만 그녀들도 모두 고개를 젓고 있었다.

태연의 얼굴에 절망이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띠링 띠링!

곡이 시작되자 1차 경고가 울려 퍼졌지만 마이크를 든 태연은 석고상처럼 굳어 있었다.

뒤이어 2차 경고까지 울려 퍼지자, 마침내 태연은 양팔을 축 늘어뜨린다.

“소녀시대 탈락! 현 승리!”

휘재의 외침과 함께 창현의 승리가 결정된다.

눈앞에 다가왔던 우승이 멀어져가는 느낌에 소녀들 모두 허탈한 표정을 짓는다.

그 모습을 보고 웃음을 지은 창현이 앞으로 나와 간단하게 인터뷰에 응한 뒤 형돈에게 말한다.

“아무래도 그 이벤트는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엉? 무슨 이벤트를?”

촬영이 모두 끝났기에 형돈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묻자, 창현이 말한다.

“송편 이벤트요. 너무 아쉬워하는 걸 보니 제가 다 안타까워서요.”

“그래? 그거야 어렵지 않지. 감독님!”

창현의 말에 형돈이 PD에게 달려가 오늘 있었던 이벤트 속행에 대해 말한다.

그 이야기를 들은 PD가 눈을 빛내며 OK 싸인을 하였고, 종료되었던 송편 이벤트가 졸지에 속행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것은 여성 게스트들의 환호를 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잠시 후, 송편이 든 바구니가 등장하고, 그것을 든 창현이 여성 게스트들에게 하나씩 먹여주기 시작했다.

투철한 팬 서비스(?)에 모두가 감동한 표정을 짓는다.

그렇게 하나하나 먹여주던 창현은 소녀들이 있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고, 송편을 하나씩 입에 넣어주었다.

“맛있다!”

“창현이가 주니까 더 맛있네!”

“미영이 너…….”

유리는 자신이 하려던 말을 미영이 가로채자 날카로운 눈으로 노려보았지만 선수를 취한 와룡 파니는 그런 유리를 가소롭다는 듯 비웃을 뿐이었다.

그런 신경전이 벌어지는 가운데, 창현이 주는 송편을 받아먹은 주현은 왠지 모르게 로맨틱한 분위기에 빠져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소녀들을 이끌고 창현을 함락시키려 했던 태연은 왠지 모르게 동정을 받는 것 같아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패자에게 동정을 바라지 않지만, 준다고 했으니까…….”

동정을 바라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주는 것을 마다하지는 않는다.

“하하! 다음을 기대할게요, 그럼.”

얼마든지 도전을 받아주겠다 말하는 그의 모습이 자신의 밀고 당기기 실패를 알리는 것 같아 태연의 안색이 살짝 어두워졌다.

자신의 계산대로라면 은근히 어려워하면서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여야 했는데…….

‘저 싴순이 때문에!’

밀고 당기기의 맥을 정확하게 끊어버린 수연을 탓하는 태연이었다.

그 사이 수연에게 다가간 창현이 송편을 집으려 하자, 그것을 만류한다.

“난 괜찮아.”

“네?”

“승부는 우리가 졌잖아. 그런데 동정심이라면 난 받지 않겠어. 정정당당한 승부였고, 거기에서 졌을 뿐이니까.”

“…….”

정색하며 말하는 수연의 모습에 창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모습이 왠지 모르게 멋있게 보였다.

잠시 수연을 바라보는 창현. 그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조용히 시선을 마주한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눈으로 교감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잠시 수연을 바라보던 창현이 이내 고개를 끄덕인다.

“누나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어쩔 수 없죠. 하지만 동정한 건 아니니까 그 점은 꼭 알아주셨으면 해요.”

“물론이야.”

수연도 정색을 풀고 입가에 미소를 짓는다.

그러자 창현은 왠지 머쓱한 듯 머리를 긁적인 뒤 말한다.

“이거 괜히 빚을 진 기분이네요. 얼마 후에 미국에 가게 되는데 그때가 되면 누나가 원하는 거 하나 정도 구해드릴게요.”

“그런 건 상관없고, 나중에 밥 한 번 사줘. 맛있는 곳으로 단 둘이. 알겠지?”

은근한 어조로 말하는 수연의 눈이 예사롭지 않게 빛나고 있었다.

“흐음, 그럴게요.”

대수롭지 않게 수락하는 창현이었지만 그 내용은 듣고 있는 입장에서 결코 쉽게 흘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경악한 듯 눈을 크게 뜨고 있는 다른 소녀들이었지만 창현은 그것을 보지 못한 듯 자리로 돌아간다. 송편 이벤트도 끝났으니 돌아갈 시간이었다.

그가 모습을 감추자, 본성을 누르고 있던 소녀들이 눈에 불을 킨 채 수연을 노려본다.

특히 수연으로 인해 밀고 당기기를 실패한 태연이 맹렬한 기세로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이 무슨 눈 뜨고 뒤통수 얻어맞는 상황이란 말인가.

“너, 너 지금 뭘 한 거야!”

“뭐긴? 그냥 밥 한 번 같이 먹자고 한 건데.”

“나도 같이 가!”

“싫어. 아까 못 들었어? 단 둘이서 가기로 했다고.”

단 둘이서라는 단어를 아주 강조하며 말하는 수연이었다.

그것을 들었기에 태연이 이런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기도 했지만.

“스캔들 나면 어쩌려고?”

“조심할 테니까 신경 쓰지 말아줘. 내 사생활은 내가 알아서 잘 할 거야.”

소녀시대 멤버 중에서 스캔들로 가장 고생을 한 것이 수연이었기에 사생활 관리가 가장 철저한 것도 그녀였다.

“…….”

그걸 알기에 할 말을 잃은 태연이었다.

독재자 탱통령에게 당할 만큼 당한 수연도 만만치 않게 독이 오른 상태였다.

날카롭게 응수하는 그녀의 모습에 태연은 한순간 할 말을 잃었다가 날카로운 눈으로 그녀를 노려본다.

“이 불여우가…….”

“흥!”

사나운 태연의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수연은 고개를 홱하니 돌렸다.

더 이상 무기력하게 당할 수 없었다. 그렇게 되면 태연을 따르는 멤버들이 더욱 기가 살아 자신을 괴롭히게 될 터.

예전의 영광을 알고 있기에 수연은 이대로 물러서지 않고 다시 한 번 찬란했던 권력의 옥좌에 올라서기로 마음을 먹었다.

‘어디 한 번 해보자고, 독재자 탱구.’

태연의 싴순이 프로젝트가 실패로 끝나고, 새로운 춘추전국시대의 막을 올리고 있었다.

최후에 웃는 것은 자신이 될 것이다.

‘두고 봐, 탱구. 아무리 권력을 쥐어도 넌 탱구에 불과해.’

‘완전한 싴순으로 만들어주겠어. 발버둥쳐도 벗어날 수 없어.’

전대 권력자와 현 권력자의 전쟁이 본격적으로 막을 올리고 있었다.




제86장 순규와 게임을




대한민국은 현의 시대가 찾아왔다.

누구도 완벽하게 흉내 내는 것이 어려운 판타스틱한 계단 춤을 완벽하게 소화해내면서 댄스곡도 완벽하게 소화할 수 있다는 걸 알림과 동시에 여태까지 굳어진 이미지를 탈피하는데 성공한다.

비단 그의 신드롬은 대한민국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다.

미국에서 높은 인지도를 가지고 있는 만큼 미국을 중심으로 세계 곳곳에 그에 대한 관심은 거미줄처럼 뻗어나가기 시작했으며, <악마의 유혹> 뮤직비디오는 최단기간 누적 조회수 1천만을 돌파하는 기염을 토해낸다.

뿐만 아니라 앨범 또한 국내에서만 발매되었기에 해외 시장에서 구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상태.

동양인으로서 세계를 제패한 첫 가수였던 만큼 현이 상징하는 것은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 그 이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좋지 않군, 좋지 않아.”

SM엔터테인먼트 대표 이사 수만은 현의 이러한 고공행진 소식을 듣자 표정이 심각하게 변해갔다.

AA엔터테인먼트와 긴밀한 관계를 맺어놓고 있지만 그곳의 사장인 석규는 명분과 실리를 취하는 인물이었기에 수만은 불안한 마음에 들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동안 주춤했던 석규가 다시금 엠넷과 친밀하게 지내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던 것이다.

SM엔터테인먼트와도, 엠넷과도 친하게 지내고 있지만 막상 두 곳은 사이가 그리 좋지 않다. 그렇기에 수만은 석규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여 함께 엠넷을 견제하려 했지만, 걸려들 듯하면서 쉽게 걸려들지 않았다.

오히려 가운데에서 줄을 타며 양쪽에서 취할 수 있는 이득을 취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수만의 입장에서 결코 좋게 볼 수 없는 상황이다.

“AA엔터테인먼트만 끌어들인다면 무서울 게 없는데.”

문제는 자신들은 아쉽고, AA엔터테인먼트는 아쉽지 않다는 점이다.

해외 쪽에도 자사를 두고 있지만 엄연히 모태가 되는 곳은 바로 대한민국이다. 이곳에서 탄탄하게 기반을 다녀놓아야 일본과 중국을 비롯한 동남아시아에서도 큰 인기를 떨칠 수 있다.

그렇기에 국내 시장에서 기반을 다져놓아야 했고, 그러다 보니 엠넷과의 충돌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그에 반해 AA엔터테인먼트는 국내 기반을 다지되, 이곳와 비교도 할 수 없는 미국이라는 시장을 이미 제패해놓은 상태였다.

막말로 당장 국내에서 엔터테인먼트 사업을 접으면 현은 지금보다 더욱 큰 인지도를 얻을 수 있을 정도였다.

더 큰 이득을 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이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은 그가 대한민국을 사랑하기 때문이고, 이곳을 편안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AA엔터테인먼트 사장인 석규 또한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려는 인물이다.

수만의 입장에서는 그것을 최대한 이용해야 했다.

문제는 석규가 쉽게 넘어오지 않는다는 것.

한동안 친하게 지내는 제스처로 엠넷이 많이 불편해하며 떨어져 나갈 듯하더니 현의 다큐멘터리로 다시 친밀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속을 어지간히 태우는 군. 좀 더 친하게 보여주는 제스처를 취하면 좋을 텐데.”

AA엔터테인먼트와 혈맹 관계만 된다면 미국 진출로 확보는 물론, 유럽 시장까지 진출이 가능했기에 수만은 모든 수를 써서라도 붙잡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것이 쉽지 않으니 그로서는 답답할 따름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을 해보지만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가 않는다.

사용할 방법은 무척 많지만 능구렁이 석규가 그것을 간파할 가능성이 높았기에 수만으로서는 석규가 눈치 채지 못하면서 혈맹 관계로 보일 법한 방법을 모색해야만 했다.

시시각각 자신들을 압박하는 엠넷의 면상에 강한 일격을 한 대 퍼붓고 싶었기에.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는 수만의 귓가에 비서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회장님, 써니 양이 도착했습니다.”

“흠, 들이도록.”

자리에 서 있던 수만은 순규가 도착했다는 말에 여유로운 표정을 되찾으며 자리에 앉는다.

잠시 후, 문이 열리며 순규가 안으로 들어와 꾸벅 인사를 한다.

“안녕하세요, 삼촌.”

“그래, 어서 와라. 이리 앉고.”

수만의 말에 순규가 걸음을 옮겨 수만의 맞은편에 앉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수만이 인터폰을 들어 차를 주문한다.

“녹차 두 잔으로.”

주문을 마친 수만은 자신 앞에 앉아있는 순규를 조용히 바라본다.

오늘 이 만남은 순규가 개인적인 용무를 위해 수만을 찾은 것이었다. 마침 약속이 잡혀있지 않았기에 수만은 약속을 잡았고, 이렇게 찾아온 것이다.

“그래, 무슨 일로 찾아온 것이냐?”

“저번에도 말했지만 개인적인 용무 때문에 삼촌을 찾았어요.”

오늘은 회사 회장님과 소속사 가수의 관계가 아닌, 삼촌과 조카의 관계로서 말을 하러 온 순규였다.

“뭔데 그러느냐?”

“제가 저번에 저희 스케줄을 하루 정도만 빼달라고 한 적이 있잖아요? 그리고 제 스케줄도 빼달라고 한 적 있고.”

“음, 기억하고 있지. 그리고 많은 것도 아니어서 어렵지 않게 조절도 가능했고.”

순규의 말이 기억나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하는 수만.

근래 들어 원더걸스의 기세가 심상치 않아 소녀시대의 앨범을 잠정적으로 보류하고 있었기에 예능 프로그램이나 지방 행사를 제외하면 시간이 넉넉하게 남는다.

그 시간을 연습으로 보내야 함이 옳지만 순규가 워낙 강력하게 말했던 터라 수락해준 상태였다.

어차피 그렇게 크게 시간을 허비하는 것도 아니었다.

“근데 무슨 일로 시간을 조절해달라고 했던 거냐?”

스케줄 조정만 해달라고 했을 뿐, 정작 용건을 밝히지 않은 순규였다.

그 물음에 순규가 씨익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요번에 제가 게임 대회에 나가거든요. 그래서 시간이 필요해가지고요.”

“게임이라고? 맙소사!”

머리가 띵한 듯 손으로 머리를 짚는 수만이었다.

무언가 보람찬 일을 하기 위해 시간을 내달라 한 줄 알았더니 게임 대회에 나가기 위해 조절해달라고 했단다.

연습생 시절 때도 그녀가 얼마나 게임에 시간을 할애했는지 알고 있었기에 수만은 머리가 아파오는 걸 느꼈다.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그가 말한다.

“게임 대회에 나가려고 스케줄을 조절해달라 한 거냐?”

“네! 그런데 이번 대회는 상당히 유명한 거라서요. 제가 잘만 하면 TV에도 나올 수 있을 걸요?”

“TV라고?”

TV 출연이 가능하다는 말에 혹한 표정을 짓는 수만이었다.

연예인인 그녀가 게임 대회에 출전하여 좋은 성적을 거둔다면 상당한 관심을 받게 될 것이 분명했다.

“네. 만약 제가 본선 진출을 하고, TV에 나가게 되면 삼촌이 스케줄을 좀 조정해줘서 애들이 축하무대를 같이 해주면 더 좋고요.”

“흐음! 나쁘지 않구나.”

조카인 순규가 게임 중독에 허덕이는 건 반대해야 함이 옳지만 게임 방송에 출연하여 그 무대를 소녀시대가 장식한다는 것은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잘 몰이만 한다면 게임 팬들을 한 번에 소녀시대로 끌어 담을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빠르게 머리를 굴리며 수만이 순규에게 묻는다.

“그래, 네가 하는 게임이 뭐지?”

“스타크래프트요! 제가 이것만 중점적으로 하는 거 아시잖아요.”

“아아, 그랬지, 스타크래프트. 그렇다면 확실히 나쁘지는 않은데…….”

게임 방송 중에서도 가장 많은 시청자를 보유한 게임이 스타크래프트였기에 상당한 메리트가 있었다.

더군다나 인위적으로 조성한 것이 아닌, 순규가 게임을 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조성되는 것이기에 팬 층을 늘릴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날짜가 어떻게 되지?”

“저번에 말했던 거하고 비슷해요. 본선은 9월 25일, 26일 동안 이어지고요, 아마 방송 분량으로는 짧게 나올 거예요. 그리고 27일이 본격적인 이벤트여서, 그게 TV로 나갈 확률이 높아요.”

“흐음!”

생각에 잠겨드는 수만이었다.

스타크래프트라는 게임을 알고 있지만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고 있다.

TV에 나오는 대회라면 경쟁률도 상당할 텐데, 솔직히 순규가 그것을 잘 해낼지 의심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만약 탈락하게 되면 죽도 밥도 안 된다는 건데.’

뭐든지 상황은 최상이 아닌, 최악을 가정하고 조성해놓아야 한다.

만반의 준비를 갖춰놓았는데 순규가 탈락해버리면 모든 것은 말짱 도루묵이 되어버릴 테니까.

잠시 고민하던 수만이 순규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TV에 나갈 자신은 있고?”

“삼촌! 저를 뭘로 보시는 거예요! 데뷔하면서 실력 상승 곡선이 많이 죽었지만 아직도 실력은 건재하다고요! 프로게이머가 아니면 절 쉽게 제압할 사람은 없어요.”

‘그 녀석만 빼고요. 아차차, 이런 말투는 안 되지.’

순간 매일 자신을 관광 보내던 창현을 떠올린 순규가 두 눈에 귀화를 번뜩 피워 올렸지만 이내 그가 소녀시대 내전의 종결 카드라는 것을 떠올리고는 표정을 바꾼다.

하지만 자신을 관광 보낼 때만큼은 살기가 불쑥 치밀어 오르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렇군. 하지만 만약이라는 경우도 있으니까 말이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순규가 웬만해서 호언장담을 안한다는 걸 알았기에 수만의 마음은 상당 부분 기울어져 있는 상태였다.

잘만 이용하면 소녀시대의 팬 층을 크게 늘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여겨질 정도였으니까.

그런 수만의 속내를 모르는 순규로서는 계속해서 확답을 내려주지 않는 그의 모습이 답답할 따름이었다.

“삼촌! 절 믿어보시라니까요.”

“널 믿기는 한데, 회사 입장에서 널 믿고 며칠 스케줄을 빼놓는다는 게 상당한 부담이 되니 말이다.”

엄살을 피워보는 수만이었다. 3일 정도 쉬는 걸로 크게 손해를 보지는 않지만 실제로 행사 일정을 풀로 잡아서 돌리면 짭짤한 건 사실이었다.

쉽게 풀리던 대화가 어른의 사정이 끼어들게 되면서 복잡한 양상으로 흐르게 되자, 순규는 답답한 듯 가슴을 쾅쾅 두드리며 말한다.

“믿어도 된다니까요!”

“게임이라는 것은 뭐든지 변수가 있지 않느냐?”

“제가 못해도 괜찮아요! 왜냐면 같이 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응? 같이 하는 사람이라고?”

순규가 혼자 출전할 줄 알았던 수만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묻는다.

“저 혼자 출전하는 게 아니라, 2인 1조로 출전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괜찮다고 한 거고요.”

“2인 1조로? 한 명은 순규 너일 테고…….”

소녀시대 중 한 명? 아니면 슈퍼주니어 멤버 중 한 명?

특별한 언급이 없었던 것으로 보아 슈퍼주니어는 아닌 것 같았고, 그렇다면 소녀시대 멤버 중 한 사람이 유력하다는 뜻인데…….

‘여자들은 스타크래프트를 그렇게 잘하지 못한다고 하던데.’

의아한 표정을 지은 채 순규를 바라본다.

그 시선을 받은 순규가 깜빡 했다는 듯 눈을 크게 뜨더니 탄성을 흘린다.

“아! 그러고 보니 삼촌에게 말씀드리지 않았었네요. 이번 게임 대회는 프로게이머를 제외한 일반인 대회거든요. 그런데 딱히 연예인 출전 금지라는 말이 없어서 저도 출전하게 되었어요. 주변에 스타크래프트 잘하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한 명 더 끼워서 같이 하게 되었고요.”

“그 한 사람의 실력도 상당하겠구나?”

수만의 물음에 순간 순규의 표정이 기괴하게 일그러진다.

“물론이죠! 제가 매일 당할 정도라니까요? 아마 실력도 프로게이머에 비해 처지지 않을 걸요? 진짜 완전 괴물이에요, 괴물. 어떻게 바쁜 스케줄을 소화하면서 그 실력을 유지하는 건지…….”

“그 사람이 누군데 그러냐?”

말해줄 듯하면서 말해주지 않는 순규의 행동에 애가 닳은 수만이 재촉하자 순규가 말한다.

“저랑 함께 출전하는 사람이요?”

“그래.”

“창현이에요. 아, 창현이보다는 현이 삼촌에게 더 익숙하려나?”

“현이라고?”

순간 커지는 수만의 눈.

방금 전 들은 말이 환청이 아닐까 하여 순규를 바라보지만 그녀의 표정을 보니 거짓이 아닌 듯했다.

머릿속이 이건 ‘대박의 기회다!’ 라고 외친 수만이 말한다.

“좀 더 자세히 이야기 해보도록 해라.”


“네?”

갑자기 돌변한 수만의 모습에 순규가 깜짝 놀라며 반문한다.

“방금 했던 이야기 말이다.”

“방금 이야기요? 아! 현이랑 같이 출전한다는 거 말인가요?”

수만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차리지 못하던 순규가 무엇인지 파악하고는 언급하자, 수만이 눈을 빛내며 말한다.

“현이랑 같이 출전한다고?”

“네, 이번 대회는 일대일 게임 두 판과 이대이 팀플이 한 게임 있어서요. 두 명이어야 출전이 가능한데, 현이 실력이 대단하거든요. 그래서 같이 출전하자고 제안했고, 온라인 예선을 성공적으로 통과했어요.”

“그래?”

순규의 말을 들은 수만의 머릿속이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현과 함께 출전한다면 그야 말로 대박은 따놓은 당상이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재 가장 큰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 현이다.

그와 함께 출전한다면 좋든 싫든 순규에게 조명이 집중되는 것은 물론이고, 이 기회를 잘 살리는 게 가능하다면 소녀시대의 인지도도 껑충 띄울 수 있다.

불투명한 계획이 완벽하게 자리 잡을 수 있는 찬스가 찾아온 것이다.

“현이 실력이 대단한가?”

마음이 기울었지만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수만.

순규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솔직히 꾸준히 연습만 하면 프로게이머를 해도 부족하지 않을 걸요? 제가 프로게이머랑 직접 게임을 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요.”

“흐음, 프로게이머라.”

그 정도 수준이라면 본선은 따놓은 당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게임 폐인이라 불리며 걱정을 샀던 순규와 프로게이머에 견줄 수 있는 현의 조합이라면 아마추어 중에서 최상위에 해당할 테니까.

“…….”

“삼촌! 어떻게 하실 거예요?”

곰곰이 생각에 잠겨있는 수만에게 순규가 답을 구한다.

그녀의 말에 정신을 차린 수만이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찬성이다. 출전하는데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도록 하마.”

“…정말요?”

자꾸만 대답을 질질 끄는 수만의 모습에 불안한 마음을 갖던 순규는 갑자기 태도를 바꿔 적극적인 지지를 보내자 표정이 밝아지면서 한편으로는 묘한 불안감을 갖게 된다.

“생각할 게 있어서 그런 거니 불안해하지 않아도 된다. 네가 할 것은 본선을 통과하여 TV에 나올 수 있도록 하는 거다. 그것도 소녀시대의 홍보 일환이 될 수 있으니까. 그 부분에 대해 생각한 거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불안한 마음을 갖지 않게 솔직한 속내를 말한다.

어차피 현과 함께라면 집중 조명을 받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지만.

좀 더 파고들어서 사실을 언급하자면 다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을 얻는 정도?

“그렇게도 되나요?”

“아이돌이 게임을 좋아한다. 그것도 인기가 가장 많은 종목인 스타크래프트에서. 남자 시청자들이 절대적으로 많은 만큼 이 기회를 어떻게 살리느냐에 따라 순규 네 팬 층을 늘릴 기회가 될 게다.”

“열심히 해야겠네요!”

자신의 인지도가 상승한다는 말에 홀라당 넘어간 순규가 주먹을 불끈 쥐며 의욕을 불태우기 시작한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수만이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의욕을 심어주는 것도 좋겠지.’

순규가 힘을 낼수록 기회는 자신에게 찾아온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SM엔터테인먼트와 소녀시대에게 기회가 찾아오는 셈.

어린 아이처럼 좋아하는 순규를 보며 수만 또한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수만의 허락을 받은 순규는 그 날 스케줄이 모두 끝난 뒤 멤버들에게 공개적으로 이야기를 하였다.

그 이야기를 전달 받은 멤버들은 경악을 감추지 못하며 순규를 바라보았다.

“뭐야! 순규 네가 언제 창현이랑 작당을 한 거야?”

“작당이라니! 난 그저 오래 전부터 나가고 싶은 대회를 창현이랑 함께 나가는 것뿐이라고!”

폭군 수연을 끌어내린 뒤 멤버들의 과반수 지지 속에서 권력자로 등극한 탱통령 태연이 순규를 보며 날카로운 눈빛을 거두지 않았다.

“그래도 리더인 내게 아무 말도 없이 행동하다니! 너무 하잖아.”

“그게 뭐가 너무해! 난 그저 같이 게임 대회에 나가자고 했을 뿐이야.”

권위적인 태연의 행동에 순규도 물러서지 않은 채 날카로운 눈으로 태연을 바라본다.

두 소녀의 시선이 허공에서 파지직! 스파크를 일으키며 격렬하게 얽히고 있었다.

그것도 잠시, 어차피 대회 예선은 통과된 상태였기에 자신이 우위에 서 있다는 걸 깨달은 순규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어쨌든 이미 예선은 통과했고, 본선도 나갈 거야. 삼촌에게 허락도 맡았으니 태연이 네가 할 수 있는 건 없어. 아니, 있긴 있다. 내가 창현이랑 같이 TV에 나가게 되면 무대를 장식하게 될 텐데, 불만이 있으면 나오지 않아도 돼. 후후!”

“으으…….”

한껏 여유를 부리는 순규의 모습에 태연은 이를 갈 수밖에 없었다.

분하지만 지금 칼자루를 쥐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순규였기에.

분노를 감추지 못한 태연이 한껏 웃음을 짓고 있는 순규를 보며 적개심 어린 어조로 중얼거린다.

“단신 주제에 행동만 빨라서…….”

“뭐시라? 거기에서 왜 키가 나와?”

한껏 태연을 약 올리며 창현과 함께 한다는 걸 어필하던 순규는 약이 오른 표정으로 태연에게 버럭한다.

“키가 제일 작은 건 사실이잖아!”

“너나 나나 도토리 키 재기라고!”

순식간에 번져가는 단신 듀오의 말 싸움이었다.

그것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보던 수영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젓고 만다.

“쯧쯧! 이제 그만할 법도 됐는데 아직까지 저러니, 좀 한심하네.”

그 말을 듣지 못한 것인지 두 사람의 대결은 점점 격렬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하지만 확실한 건 순규가 수만의 허락을 받은 이상 모든 것은 그녀의 통제 하에 있다는 것이다.

오래 전부터 준비해온 그녀의 계획이 마침내 싹이 트고, 자라나 훌륭한 결실을 맺은 순간이었다.

미영과 유리마저도 순규의 완벽한 계획에 빈틈을 찾아내지 못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익! 저 단신 탱구가…….”

한바탕 태연과 말다툼을 벌인 순규는 방으로 물러나 이를 부득부득 갈 수밖에 없었다. 하위 서열에서 권력을 쥔 권력자가 되더니 태연은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이래서는 예전의 폭군 수연과 다를 바 없지 않던가.

그래도 수연은 순규 그녀에게 별다른 터치가 없었지, 태연은 매번 단신도 서열을 갈라야 한다는 식으로 그녀를 최단신으로 만들어버리니, 이를 갈 수밖에 없었다.

“저걸 언제 한 번 눌러줘야 하는데.”

태연을 제압하고, 다시 춘추전국시대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순규의 생각이었다. 태연을 중심으로 미영과 유리가 포진되어 있고, 무력 담당인 윤아마저 있으니, 예전에는 요리하기 어렵지 않던 단신 탱구가 이제는 끝판왕이 되어 있었다.

“내가 도와줄까?”

“으헉?”

혼자 중얼거리던 순규는 갑자기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기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니, 그곳에는 수연이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순규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 뭐야. 수연이 너였어? 후! 간 떨어지는 줄 알았네.”

수연의 등장에 한숨을 푹 내쉬는 순규. 기척없이 목소리가 들려와서 순간 귀신이 아닐까 착각을 했을 정도였다.

“미안. 그런데 방금 전 이야기 정말이야?”

“이야기?”

“태연이를 눌러준다는 거.”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조용히 다가와 순규의 맞은편에 앉는 수연.

발걸음을 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수연의 모습을 보면서 순규는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얼음공주가 점점 인간의 영역을 벗어나는 느낌?’

얼음 포스로 무장하여 멤버들을 탄압하던 수연의 모습은 솔직히 무서웠으니까.

“나야 뭐, 그렇게 되면 좋긴 하지.”

차라리 폭군 수연이 더 나았다고 생각하는 순규였다.

그 말에 미소 지은 수연이 순규에게 달콤한 제안을 한다.

“그럼 같이 힘을 합치지 않을래?”

“힘을 합쳐?”

“너도 알잖아. 요즘 내가 태연이에게 어떤 취급을 당하고 있는지.”

“아…….”

잘 알고 있었기에 순규는 고개를 끄덕인다.

권력을 잡은 태연은 전대 권력자인 수연을 난폭하게 취급하고 있는 중이었다. 전대 권력자의 참혹한 말로를 보여주며 공포 정치를 하려는 것일까. 한때 얼음 포스로 멤버들을 올킬하고 다니던 수연을 싴순이로 만들어버리겠다며 종종 그녀에게 달려드는 태연의 모습은 정말 ‘많이 컸다.’ 라는 느낌을 물씬 풍겼다.

“솔직히 나 혼자서는 무리야. 하지만 써니, 네가 도와준다면 가능해.”

“흐음!”

결연한 표정의 수연을 보면서 순규는 그동안 그녀가 많이 당하긴 많이 당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수연이 네가 권력을 잡아도 예전 같은 상황이 돌아가지 않을까?”

“많이 반성하고 있어. 내가 지금 원하는 건 권력을 잡는 것보다는 태연이를 권력자의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거야. 써니 너도 많이 당해서 알고 있잖아.”

“흠!”

끌리는 표정으로 고민에 잠겨드는 순규.

그 모습을 보며 수연이 눈을 빛낸다.

‘거의 다 넘어왔어.’

순규를 동료로 만든다면 반 탱구 연합 조성에 탄력을 받을 것임이 분명했기에 수연이 좀 더 입에 기름칠을 하며 설득한다.

“만약 날 믿지 못하겠다면 써니 네가 권력을 쥐어도 돼. 나도 권력의 부질없음을 느꼈으니까.”

부질없음을 느끼기는 개뿔. 다시 잡는다면 아주 철저하게 하찮탱구로 만들어줄 생각이었다.

다만 이렇게 배짱 튕길 수 있는 건 순규의 성격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기에 그렇다.

“음! 난 솔직히 그런 거에 관심 없어. 하지만 탱구를 자리에서 끌어내린다는 건 끌리는군.”

수연의 예상과 똑같은 반응을 보이는 순규.

그 모습을 보며 수연은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단신 듀오의 키 다툼이 이럴 때 유용하게 사용될 줄 몰랐다.

“근데 창현이랑 본선은 언제 하는 거야?”

“본선? 아쉽지만 너희들은 그때 스케줄이 있더라고.”

“윽!”

자신의 질문 의도를 꿰뚫어 본 듯한 말에 수연이 신음을 흘리자, 순규가 만족의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아쉬워 하지마. TV에 나가게 될 때 얼마든지 만날 수 있으니까.”

“알았어. 그럼 우리 힘 합치는 거지?”

“물론! 나도 태연이 고것이 미영이랑 유리 믿고 까부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으니까. 힘을 잘 합쳐보자고.”

순규가 손을 척하니 내밀자, 수연은 그 손을 마주잡고 흔든다.

권력의 독주는 언제나 불만을 야기하는 법.

그 맛을 알아버린 태연은 변했고, 수연으로 하여금 반란을 계획하게 만들었다.

‘두고 봐, 하찮탱구.’

태연을 끌어내리기 위해 수연은 첫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본선 진출 이후 순규는 창현과 본격적인 게임 연습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바쁜 스케줄 와중에도 하루 두 시간 정도씩 꾸준히 호흡을 맞춰온 두 사람은 약 4개월가량 호흡을 맞춰온 사람들답게 팀플에서 환상의 호흡을 보여주고는 한다.

팀플을 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채팅을 동반하게 되는데, 창현과 얼굴을 직접 맞대고는 아니지만, 채팅을 한다는 것 자체가 순규로 하여금 흡족하게 하였다.

‘후후! 직접 만나거나 문자로 하는 건 아니지만 이런 형태로 한다는 건 너희들이 모르고 있었겠지.’

무대 위에 설 때는 믿음직한 동료지만 한 남자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모두가 적이다.

개별 행동은 물론, 심지어 통화나 문자까지 조심해야 하는 것이 그녀의 입장이었다.

하지만 평범하게 게임을 즐기는 스타크래프트는 누구도 터치를 하지 않으니, 4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순규는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은 채 창현과 친분을 다져왔다.

연습 마지막 날인 오늘, 창현과 순규는 유명 길드 팀플 조합을 화끈하게 깨부순 뒤, 최상의 컨디션으로 본선에 임하게 되었다.

다음 날, 본선이 열리는 곳에 창현과 순규가 도착했다.

이동의 편이성을 위해 창현이 타는 벤을 타고 이동하는 순규였다.

수만에게 부탁하여 자신만 스케줄을 빼놓은 상태였기에, 순규는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무혈입성으로 창현과 함께 이동할 수 있었다.

‘후후! 약오르겠지, 탱구?’

이를 부득부득 갈던 태연의 모습을 떠올리며 웃음을 감추지 못하는 순규였다.

“그런데 난 써니가 그렇게 게임을 잘할 줄 몰랐어.”

세희가 감탄 섞인 얼굴로 순규를 바라보며 말한다.

그녀 또한 창현이 즐겨하는 게임이 스타크래프트라는 걸 잘 알고 있고, 몇 번 해보려 해도 어려워서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런데 창현과 순규가 콤비를 이뤄 치열한 예선전을 뚫고 본선으로 진출했다는 게 마냥 신가한가 보다.

순규는 그 칭찬이 쑥스러운지 입가에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잘하긴요. 창현이가 너무 잘해서 저는 묻어가는 수준인 걸요.”

“두 명이서 같이 한다며? 그럼 서로간에 호흡이 잘 맞아야 하는데 누가 잘하고 누가 못하고가 어디있어. 안 그래, 창현아?”

“맞아요. 사실 소녀시대 누나들에게 물어보면 알겠지만 써니 누나가 엄청난 게임광이어서 실제 실력도 아마추어 중에서는 최상급이에요.”

“자기가 매일 관광 보내면서 칭찬하기는…….”

툴툴거리며 말하는 순규였지만 기분 나쁜 표정은 아니었다.

분위기가 어색하게 변하려하자, 세희가 순규를 바라보며 말한다.

“어쨌든! 창현이가 이 대회 나가려고 스케줄 조정 많이 한 거 알지? 괜히 본선에서 떨어져가지고 허공에 붕 뜨게 하지 마. 알겠지?”

“물론이죠. 저희 조합이면 웬만해서는 안 질 거예요. 게다가 3판 2선승제니까요. 그치?”

“그렇죠. 사실 제가 할 필요도 없이 누나 선에서 다 끝나죠, 뭐.”

“그런가?”

창현의 칭찬에 마냥 기분 좋은 표정을 짓는 순규였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본선이 열리는 PC방에 도착할 수 있었고, 창현과 순규는 모자를 푹 눌러쓴 채 PC방 안으로 들어서기 시작한다.

32강부터 시작되는 본선은 최후의 두팀이 남을 때까지 치열한 대결을 벌이게 된다. 그리고 내일 TV로 방영되는 곳에서 결승전을 치른 뒤, 이긴 팀은 프로게이머 두 명으로 구성된 팀과 대결을 하게 된다.

“창현아, 안 떨려?”

“떨리긴 하는데 무대 위에 서는 것만큼 떨리지는 않네요.”

짧게 말한 창현이 앞장 서고, 순규가 그 뒤를 따른다.

그리고 PC방에서 자격을 증명하면서 한차례 놀람이 있었지만, 세희가 나서서 미리 커트해줬기에 별다른 소란없이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PC방 안으로 들어선 창현은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다가 순규가 정했던 이름을 떠올리고는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다.

“누나, 근데 팀 이름이 좀…….”

“팀 이름이 왜? 좋잖아.”

“그래도 좀…….”

창현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결코 무리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순규가 지은 팀 이름은 바로 <소녀시대의 햇살>이라는 닭살스러운 이름이었던 것이다.

팀 이름에 별다른 흥미가 없어 마음대로 지으라 했다가 벌어진 참사였다.

“에휴!”

자신이 뭐라 해도 좋아라 하는 순규를 보면서 창현은 한숨을 푹 내쉴 수밖에 없었다.

“13팀 <소녀시대의 햇살> 팀분들은 안으로 들어와 주세요.”

“우리 차례다!”

기다리고 있던 순규가 눈을 빛내며 창현을 잡아 끈다.

이미 기다리며 이야기를 나누던 창현은 다소 지친 얼굴로 순규에게 끌려가는 수밖에 없었다.

팀 이름이 특이했지만 사람들은 그저 소녀시대 팬이려거니 할뿐이다.

창현으로서는 무척 다행이었다.

‘후후!’

자신에게 몸을 맡기는(?) 창현의 모습에 미소를 짓는 순규.

여기서 그녀의 노림수가 또 다시 드러나게 된다.

차례차례 두 팀씩 붙어 두 개씩 경기가 벌어지는데, 그 시간 동안 창현과 순규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밖에 없다.

이것은 멤버들이 그토록 바라던 단둘만의 시간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

누나의 위치를 이용하여 자연스럽게 리드하면서 대화를 이끌어내는 순규는 모든 것이 자신의 시뮬레이션대로 흐르는 것 같아 흡족함을 감출 수 없었다.

“지쳤더라고 플레이는 지치지 않은 것처럼 해야 돼. 알겠지?”

“물론이죠.”

자리에 앉은 창현이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인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헤드셋을 쓴 그의 모습은 쉽게 식별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남녀혼성팀이라는 것 자체가 무척 희귀했기에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첫 경기는 팀플이었고, 창현과 순규는 환상의 호흡을 자랑하며 상대를 단숨에 밀어버린다.

빈집털이를 오려 했지만 탄탄한 방어진을 펼치자, 결국 맥없이 무너지고 만다.

그 뒤 이어진 일대일 대결 또한 마찬가지였다.

배틀넷에 존재하는 상위 길드에서 최상위 실력을 자랑하던 순규의 실력은 프로게이머가 아니라면 제압하기 힘든 경지에 다다라 있었다.

팀플에서 이긴 여세를 몰아 단숨에 상대방을 무너뜨린 순규는 환호성을 터뜨린다.

“이겼다!”

“잘했어요.”

순규가 이겨서 자연스럽게 2:0이 되었기에 창현까지 나설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 16강에 진출한 창현과 순규는 자연스럽게 다음 경기를 기다리며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고, 8강도, 4강도 무사히 올라가게 된다.

하지만 모든 것이 순조로울 수 없는 법.

4강에서 창현과 순규는 이번 대회 우승후보로 꼽히는 상대를 만나게 된다.

배틀넷에서 소수 정예로 이름 높은 길드원 두 명이 출전했던 것이다. 모두 아마추어 중에서 최상위에 손꼽히는 실력자들로, 배틀넷에서 한다면 프로게이머도 이길 수 있는 실력자들이었다.

“창현아, 이길 수 있겠지?”

여태까지 상대했던 사람들과 차원이 다른 실력자들이었기에 순규가 떨리는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창현에게 묻는다.

그 모습에 창현이 미소 지으며 말한다.

“가슴 졸일 필요 없어요. 그냥 평소대로 하면 되요. 특히 팀플은 오랫동안 호흡을 맞췄으니 잘 하면 되요. 알겠죠?”

“응.”

상대방 종족은 테란과 저그였다. 초반에 다소 취약하지만 중반부터는 상대하기 까다로운 조합이었기에 초반부터 몰아붙이기 시작했지만 쉽게 무너뜨리기 힘들었다.

중반이 지나게 되면서 순규가 위기에 처하게 되었고, 창현은 헬프를 감과 동시에 과감하게 병력 생산을 멈추고 멀티를 먹었다. 그 후, 취약한 타이밍을 순규가 매꿔 주면서 폭발하기 시작한 창현의 물량으로 단숨에 승기를 휘어잡는데 성공한다.

와아!

극적인 역전승을 거둔 창현과 순규를 보며 구경하던 사람들이 탄성을 내지른다.

우승 후보를 꺾고 기선제압을 한 두 사람의 실력이 새삼 대단하게 보였다.

“후! 힘들다.”

“잘했어요, 누나.”

“응, 근데 일대일 대결로 내가 이길 수 있을지 모르겠네.”

상대방의 실력이 워낙 뛰어났기에 순규가 불안한 표정으로 중얼거린다. 상대방의 개개인 실력이 자신보다 더 대단하다는 걸 느꼈기에 나온 불안함이었다. 다만 손발이 잘 맞지 않고, 창현이 잘 해내서 간신히 이길 수 있었다.

“부담 갖지 말고 평소 실력을 발휘하는데 중점을 두세요. 알겠죠?”

“알았어. 열심히 해볼게.”

창현의 말에 용기를 얻은 순규가 두 번째 게임에 임하기 시작한다.

그녀의 상대는 다름 아닌 테란.

초반 벙커링을 막아낸 순규는 본격적으로 무탈 견제를 시작하면서 순조롭게 멀티를 해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상대 테란 또한 만만치 않아서, 빠른 베슬을 통한 한 박자 빠른 진출을 시도했고, 여기에서 순규가 좀 더 손해를 보게 되면서 대결은 원점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후반에 접어들면서 순규는 확장을 해나가기 시작했고, 테란 또한 하나의 멀티를 더 확보하면서 순규가 하이브로 가기 전 진출을 시도, 중원 싸움에서 순규가 집중력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이면서 GG를 선언하고 만다.

와아!

팽팽한 두 사람의 대결에 사람들은 함성을 지른다. 정말 치열한 대결이었고, 프로게이머들이 펼치는 대결 못지않은 멋진 대결이었다.

“미안.”

자신의 선에서 끝낼 수 있던 걸 실패하자 순규가 의기소침한 표정으로 사과한다.

창현은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은 뒤 말한다.

“괜찮아요, 제가 있으니까요. 믿고 보세요. 알겠죠?”

“응.”

믿음직한 말에 자신도 모르게 의지하게 된다.

뒤이어 두 번째 대결이 펼쳐진다. 양쪽 다 두 사람 중에서 에이스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기에 사람들의 시선은 흥미진진함으로 가득 찬다.

프로토스와 저그의 대결로 시작된 두 사람의 대결은 그야 말로 허망함 그 자체였다.

더블 넥서스를 시도한 창현은 빠른 하이템플러로 히드라 웨이브를 막아내는데 성공하였고, 본격적으로 발업 질럿을 시도하면서 적의 병력을 제거하는데 성공한다.

특히 허공 전체를 뒤덮는 듯한 사이오닉 스톰은 PC방 전체를 함성으로 뒤덮을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단숨에 적의 병력을 몰살시켰지만 러커의 존재 때문에 창현은 전진하지 않고 본격적인 굳히기에 나섰다.

옵저버와 드라군을 추가함과 동시에 추가 멀티를 가져가기 시작했고, 끈질긴 멀티 견제와 하이템플러 드랍으로 인해 저그의 페이스는 조금씩 늦춰지게 되었고, 후반에 진입하게 되자, 저그는 서서히 말라가기 시작했다.

이럴 경우 저그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드랍 밖에 없었고, 그것을 정확하게 꿰뚫어 본 창현은 드랍하려는 순간, 병력을 전진시켜 단숨에 저그의 본진을 밀어버린다.

GG를 선언하게 되자 여기저기서 탄식이 흘러나온다. 팀플은 질 수 있다 쳐도 일대일 대결에서 완벽히 압도된 모습은 그들로 하여금 경악을 금치 못하게 만들었다.

“와! 이겼어!”

“운이 좋았네요.”

상대를 완벽하게 압도했건만 운이 좋은 걸로 치부하는 창현이었다.

그때, 키보드를 뽑고 자리에서 일어난 상대가 창현에게 다가와 손을 내민다.

“완패입니다. 정말 잘하시네요.”

“감사합니다. 좋은 대결이었어요.”

미소 지으며 그 손을 마주잡는 창현이었다. 그러자 상대는 입가에 미소를 짓더니 창현에게 묻는다.

“실력이 상당하시던데, 배틀넷에서 제법 유명할 것 같은데요?”

“하하! 그다지 유명하지는 않아요. 소속 길드도 없거든요.”

“실례가 안된다면 아이디가 어떻게 되시는지?”

본선에서 창현이 사용한 아이디는 1234였기에 그게 본 아이디가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다.

그의 물음에 창현은 잠시 망설이다가 자신의 아이디를 말한다.

“제가 배틀넷에서 쓰는 아이디는 다크소드라고 합니다.”

“다크소드? 다크소드라면…….”

서서히 경악이 번져나가는 상대방의 눈. 다크소드라면 한때 프로게이머들이 연습 상대로 삼길 소망하던 최강의 아마추어 플레이어 중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근래 들어 활동이 뜸해졌다고 하지만 배틀넷 몇 년 한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아는 아이디였다.

상대방을 뒤흔드는 플레이!

그리고 칼같은 타이밍!

그것은 다크소드의 상징과도 같은 플레이였다.

겪어보니 소문이 사실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래서였군요. 확실히…….”

자신이 진 이유를 납득했는지 고개를 끄덕인다.

“시간이 없어서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음에 귓말 주시면 한 번 더 하도록 하죠.”

“아, 알겠습니다.”

그리고 창현은 순규와 함께 PC방 주인에게서 내일 일정이 적힌 종이를 받았고, 간단한 이야기를 들은 뒤 PC방을 나섰다.

“창현이 너 상당히 유명했나 보네?”

“좀 날리긴 했죠, 하하!”

가자미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순규의 시선에 창현이 어색한 미소를 짓는다. 한때 음악보다 게임을 더 열심히 하던 때가 있었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흐응! 그럼 내일도 믿어도 좋으려나?”

“저를 믿기보다는 누나 선에서 끝내길 바랍니다. 누나도 지는 거 싫어하잖아요.”

“당연히 싫지! 내일은 반드시 내가 다 꺾어주겠어!”

방금 전 진 것도 무척 분했기에 순규가 입술을 질끈 깨물며 눈을 빛낸다.

눈앞에 호랑이가 있다면 당장 덮칠 기세였다.

그 모습에 창현은 슬쩍 한 걸음 물러서더니 그녀에게 말한다.

“오랫동안 게임 했는데 배고프지 않아요? 밥이나 먹으러 가요.”

“그래! 밥 먹어야지. 배고프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창현의 손을 끌고 가는 순규. 창현은 자각하지 못하는 듯했지만 이렇게 자연스러운 스킨십이 하나씩 쌓여 나중에는 큰 것이 된다.

티끌 모아 태산이 된다.

그것이 바로 순규가 구사하는 스타크래프트 전략이자, 연애 전략이기도 했다.

‘후후후!’

창현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순규가 음흉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예?”

창현은 지금 무척 황당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것은 눈앞의 순규로 인해 비롯된 일이었다.

놀란 표정을 짓는 창현을 보며 순규가 대수롭지 않은 듯 말을 이어나간다.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오늘 결승전에 올라가는 4강전에서도 상당히 고전을 했고. 약점을 보완하려면 연습을 더 하는 수밖에 없지.”

순규가 창현에게 제안한 것은 밤늦게까지 함께 연습을 하자는 것이었다.

오늘 일대일에서 패한 뒤 순규는 자신의 부족함을 통감했다. 창현이 승리를 거둬 결승전에 진출하게 되었지만 자신이 짐으로 전락한 것 같아 기분이 유쾌하지 않았다.

그래서 좀 더 연습을 하고 내일 대결에 임하고자 하였다.

물론 그것은 외적인 이유고, 내적인 이유는 따로 존재했다.

“음! 확실히 그것도 있죠. 누나의 약점은 상대방이 흔들면 그때부터 집중력이 조금씩 떨어지는 것이거든요.”

창현도 순규의 말에 납득했는지 고개를 끄덕인다.

그 말을 들은 순규가 눈을 빛내며 말한다.

“그래! 나도 그걸 알고 있는데 좀처럼 고칠 수가 없더라고. 그러니까 좀 도와줘. 그래야 내일 잘할 수 있을 거 아니야. 안 그래?”

“으음!”

고민하는 창현을 보면서 순규는 그가 거의 다 넘어왔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말마따나 자신의 실력은 기복이 좀 심한 편이다.

무난하게 흘러가거나, 자신의 의도가 먹히게 되면 창현조차도 버겁게 여길 정도의 실력을 발휘하게 되지만, 초반에 의도대로 진행되지 않으면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는 경향이 있다.

단기간에 그것이 극복될 리 없지만 순규가 창현에게 부탁한 이유는 간단했다.

좀 더 함께 있으면서 티끌을 끌어 모을 계획이었던 것이다.

“알았어요. 하루만에 극복하기 힘들지만 어느 정도 단련을 해두는 게 좋을 것 같네요.”

“그렇지? 그런데 게임은 어디에 가서 하지?”

컴퓨터가 여러 대 있는 곳으로 가야 했기에 순규가 은근한 어조로 묻는다.

그 물음에 창현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말한다.

“제 작업실로 가면 되죠. 거기가 누나 숙소랑도 가깝고, 컴퓨터도 두 대 설치되어 있으니까요.”

“그게 낫겠지? 그럼 그렇게 하자!”

활짝 미소를 지은 순규가 핸드폰을 열어 문자를 작성하기 시작한다.

[나 오늘 늦게 들어갈 예정. 왜인지는 묻지 말아줘. 부끄럽거든. 헤헷! ^~^]

묘한 뉘앙스를 남긴 문자를 멤버들에게 보낸 순규가 문자 전송 완료가 뜨자마자 핸드폰을 주머니에 봉인한다.

부르르!

주머니 안으로 들어간 순규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지만 순규는 그것을 신경 쓰지 않은 채 창현의 팔을 잡아끌며 말한다.

“가자, 고고!”

“알았어요.”

게임을 빙자한 리드를 하는 순규였다.


그 시간, 소녀시대 숙소에서는 순규의 예상처럼 한바탕 난리가 났다.

가장 먼저 문자를 받은 것은 태연이었다.

시계를 바라보며 그녀는 무언가에 쫓기는 듯 초조한 얼굴로 핸드폰과 TV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 순규가 왜 외출을 했고, 아직까지 들어오지 않는지 알고 있었기에 태연의 얼굴에 서린 불안함은 사라질 줄 몰랐다.

늦게 들어오면 들어올수록 그녀의 상상은 다른 곳으로 뻗어나가고 있었다.

먼저 연락을 하면 될 테지만, 창현과는 그녀만의 밀고 당기기가 시전되고 있었고, 순규에게 먼저 전화하기에는 그녀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그러다 문자가 도착하고, 그것이 순규에게 왔다는 걸 깨달은 태연이 번개같이 핸드폰을 열어 문자 내용을 확인한다.

[나 오늘 늦게 들어갈 예정. 왜인지는 묻지 말아줘. 부끄럽거든. 헤헷! ^~^] 최단신 순규

“…….”

문자 내용을 확인한 태연은 한동안 할 말을 잃고 만다.

그것도 잠시, 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한 태연이 폭발하기 시작한다.

“아악! 이건 안 돼! 이 다리 짧은 순규가!”

그러면서 초고속으로 문자를 보냈지만 답장은 날아오지 않는다. 그럴수록 태연의 머리에는 열기가 뻗히기 시작한다.

“뭐, 뭐야! 왜 그래?”

“태연아, 왜 그래?”

옆에 앉아있던 유리와 미영이 묻자, 태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손으로 그녀들의 핸드폰을 가리킨다.

마치 의도라도 한 것처럼 그녀들의 핸드폰이 부르르 떨리더니 문자가 전송되었다는 메시지가 뜬다.

“이, 이건…….”

“써니가 이런 행동을…….”

핸드폰을 열어 내용을 확인한 그녀들의 표정이 굳는다.

당해도 단단히 당했다는 생각이 그녀들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다.

“어떻게 처리해야 되지?”

“피의 처벌이 필요할 듯 싶은데.”

태연의 말에 유리가 싸늘한 어조로 말했지만 미영이 고개를 저으며 말한다.

“하지만 처벌할 명분이 없어. 아마 써니는 그냥 예선전 치르고 왔다고 할 걸?”

“윽!”

미영의 말에 태연은 정곡을 찔린 듯 표정을 찌푸리며 뭐라 말을 잇지 못한다. 그녀의 말처럼 순규가 그렇게 변명을 하면 멤버들의 집단 다구리를 할 명분이 사라지는 것이다.

“없으면 만들어야지.”

“만들자고? 만드는 건 어렵지 않지만…….”

표정을 굳힌 유리를 보며 미영이 말끝을 흐린다.

그녀의 말처럼 명분을 만드는 건 가능했지만 그렇게 하면 왠지 모르게 자신들이 패배자 그룹이 된 것 같아 내키지 않았다.

“어떻게 하려고?”

“우선은 게임 대회가 끝난 뒤에 계획을 수립하도록 하자. 순규가 즉각 대응하는 면에서 떨어지지만 장기적인 계획을 수립하는데 무척 능한 모습을 보이고 있어. 우선 그 맥을 잘라버리고 우리 페이스로 끌어들이는 게 중요해.”

“좋아! 아주 하찮순규로 만들어주지.”

유리의 말에 태연이 밝은 표정으로 주먹을 불끈 쥔다.

얼마 후면 순규에게 복수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속이 후련해지는 기분이다.

“난 별로 내키지 않는데…….”

그렇게 중얼거리는 미영이지만 대세는 이미 기울어 있었다.

명분이 없다면 명분을 만들어서라도!

사마율의 그물망에 걸려든 이상 순규의 평탄한 세월도 모두 안녕이었다.

그녀들이 이야기를 나누며 계획을 수립하고 있을 때, 그곳을 바라보는 한 사람이 있었다.

누구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은밀한 기척을 지닌 인물은 다름 아닌 수연이었다.

형형하게 빛나는 눈으로 태연을 바라보던 수연이 중요한 이야기를 모두 엿들은 뒤 조용히 방문을 닫는다.

“하찮게 되는 건 순규가 아니라 바로 너야, 태연이. 그리고 유리와 파니, 너희들도 태연이를 따른 대가로 하찮은 취급을 당하게 해주겠어.”

태연의 레이더망이 순규에게 돌려진 사이, 전대 폭군은 서서히 부흥을 위한 날개짓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일단 중심을 잡고 게임을 하는 게 중요해요. 상대가 누나를 아무리 괴롭혀도 난 아무렇지 않다는 흔들리지 않는 뚝심이랄까?”

“그건 어려운 거 아냐?”

창현의 녹음실은 때 아닌 게임 연습장이 되어 있었다.

저녁을 먹은 뒤 창현과 순규는 따로 녹음실로 가서 컴퓨터를 킨 뒤 스타크래프트 연습에 빠져 있었다.

“물론 어렵죠. 하지만 그것도 하나의 포인트가 될 수 있어요. 상대방의 견제에도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면 역으로 누나가 상대방을 흔들리게 할 수 있거든요.”

“그렇구나. 스타크래프트는 달리 심리 싸움이기도 하니까.”

“상대방의 수를 내다보는 것도 중요해요. 그러니 그것을 파악하면서 누나의 중심을 잡고, 누나의 페이스로 끌어당겨야죠.”

“프로게이머가 그 수법에 통할까?”

“어렵겠지만 그렇게 해야죠.”

냉정하게 들리지만 그 말이 사실이었기에 순규도 고개를 끄덕이며 게임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단순히 말뿐인 조언이었지만 그녀가 느끼는 바가 있고, 즉각 수정을 하였기에 그녀의 플레이는 평소와 다른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괜찮은데요?”

“그래?”

“내일도 이렇게만 할 수 있으면 괜찮을 것 같아요.”

“당연하지! 어떻게 진출한 결승전인데. 당연히 이겨야지.”

게임을 통해 마음을 놓이게 만들고, 서서히 친분을 만들어나간다.

그러면서 순규는 은근슬쩍 창현의 마음을 떠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런데 스타크래프트를 하는 걸 보면 여성 팬이 더 늘어나는 거 아냐?”

“그럴 리가요. 제가 재미있어서 하는 거죠.”

“그렇긴 하지. 그래도 예쁜 팬이 생기면 마음이 흔들릴 거 아냐?”

“하하! 아직은 그쪽에 대해 잘 모르겠어서요.”

게임을 통해 친한 누나라는 지위를 성립하는데 성공했지만 그것은 자칫 족쇄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순규는 그것을 타파할 자신이 있었기에 먼저 창현이 자신을 친근하게 여기고, 나중에는 의지할 수 있는 누나로 자리매김하려 하였다.

“시간이 늦었네요. 제가 바래다 드릴게요.”

“그래줄래?”

연습을 하다 보니 어느덧 오후 10시가 되어 있었고, 창현은 순규에게 바래다주겠다고 하였다.

그 호의를 거절할 리 없는 순규였다. 창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테지만 연인끼리 데이트 할 때 마지막은 남자가 바래다주는 게 로망 아니겠는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걷는 두 사람.

어둑한 밤에 길을 걸으니 묘한 감흥에 젖어들며 순규가 문득 창현을 바라보다가 말한다.

“그러고 보니 키 정말 많이 컸네? 예전에는 태연이랑 그렇게 차이가 안났다며.”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난 효과죠. 하하!”

“그래? 그것도 그러네.”

녹음실에서 숙소까지 가까운 거리였기에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아파트 단지 앞에 선 순규가 창현을 바라보며 말한다.

“오늘 신세 많이 끼쳤는데 잠깐 들어오는 게 어때? 애들도 한 번 보고.”

“여자들이 사는 곳인데 연락없이 들어갈 수는 없죠.”

“그래도 한 번 들어가 보고 싶지 않아? 애들 평소에 어떻게 하는지?”

“궁금하긴 하지만 폐가 될 것 같아서요. 하하!”

“그럼 가보자.”

순규의 제안에 창현은 떠밀리듯 그녀와 함께 숙소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 순규는 문앞에 서서 손가락으로 쉿! 하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내 뒤에 서 있으면 돼. 그리고 내가 말할 때까지 들어오면 안 돼. 알겠지?”

“네.”

창현이 수긍하자 순규가 비밀번호를 누르더니 문을 활짝 열며 외친다.

“얘들아! 언니 왔다!”

당당하게 개선장군처럼 입장하는 순규였지만 소녀들의 입장에서 지금 그녀는 대역 죄인과도 다를 바가 없었다.

“왔어? 제삿날인 건 모르고 있나? 잡아!”

“언니, 모든 건 언니가 자초했어요!”

태연의 날카로운 목소리와 함께 눈부신 속도로 달려든 윤아가 순규의 양팔을 포박한다.

아무 저항없이 제압당하는 순규.

여유가 넘치는 그녀의 모습에 태연이 표정을 찌푸리며 말한다.

“뭐가 그렇게 여유가 넘쳐?”

“후후후! 어쩌면 이렇게 내 예상이 틀리지 않니?”

그러면서 조용히 자신의 뒤를 가리키는 순규.

“응?”

그녀의 몸을 포박하고 있던 윤아가 그것을 따라 뒤로 시선을 옮겼다가 그대로 석고상이 되어버렸고, 태연 또한 순규의 손을 따라 시선을 옮기다가 그대로 굳어버렸다.

“헉!”

굳어버린 그녀들의 시선 끝에는 다름 아닌 창현이 서 있었다.

“하하, 안녕하세요.”

지금 상황을 보고 어색한 미소만 짓는 창현이었다.


새파랗게 질려있는 윤아의 얼굴.

그녀는 지금 상황이 현실이라는 것을 믿기가 싫었다.

태연의 명령에 의해 무한태연교 제일교도인 그녀는 잽싸게 몸을 날려 순규의 몸을 포박하는데 성공한다.

“차, 창현이가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거예요!”

“왜일까? 후후!”

야릇한 미소를 짓는 순규. 그럴수록 윤아의 안색은 더욱 파랗게 질려가고 있었다.

우선은 재빨리 순규의 몸을 포박하고 있는 팔과 다리를 뺀다. 그리고 어색하지만 빠르게 표정을 바꾼 뒤 창현에게 인사를 한다.

“아, 안녕, 창현아?”

“안녕하세요. 순규 누나 바래다주고 잠시 들르라해서 온 건데 폐가 된 게 아닐까 싶네요.”

“폐, 폐는 무슨. 전혀 폐가 되지 않았어.”

그러면서 순규의 뒤로 걸음을 옮기는 윤아였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그녀에 비해 태연은 대처가 빨랐다.

속으로 무척 놀랐지만 그녀는 빠르게 마인드 컨트롤을 한 뒤 윤아보다 차분한 안색으로 창현을 맞이한다.

“순규 바래다준 거야? 고마워라. 우선 안으로 들어와. 초대한 것 같은데.”

“그래, 음료수 한 잔이라도 마시고 가.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가는 건 뭐하잖아.”

순규까지 거들자 창현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안으로 들어선다.

“그럼 실례할게요.”

창현이 안으로 들어서자, 윤아가 재빨리 냉장고로 달려가 음료수를 컵에 따라 창현에게 내민다.

“자, 여기.”

“아, 고마워요.”

“다른 멤버들은 지금 라디오 스케줄 갔거든. 미영이랑 유리는 잠깐 밖에 나갔거든. 수연이는 지금 자고 있고. 타이밍이 참 공교롭네.”

태연의 말에 창현이 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그럴 수도 있죠. 괜히 저 때문에 불편할 수도 있고요. 하하!”

“불편하기는. 근데 오늘 본선은 잘 했나 봐?”

“네, 잘했죠. 순규 누나가 워낙 실력이 많이 늘어서요. 내일 TV에 나올 수 있을 것 같아요.”

“잘하기는. 내가 실수해서 누가 뒷수습을 다했는데.”

창현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순규가 툴툴거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하하!”

그 말에 창현은 그저 어색하게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래? 잘 됐네. 내일 우리가 거기 오프닝 무대를 맡기로 했거든.”

“그래요? 순규 누나는 무대에 서고, 게임도 하려면 상당히 힘들 텐데. 고생이 많네요.”

“뭐 그 정도쯤이야 언제든지 해낼 수 있게 체력을 길러놓았단 말씀!”

어깨를 쭉 피며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말하는 순규는 자신만만 그 자체였다.

그 모습을 보고 빙그레 미소 짓던 창현이 음료수를 쭈욱 마신 뒤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럼 전 이만 슬슬 가보도록 할게요.”

“벌써 가려고?”

태연은 추석 특집 때 창현을 봤지만 윤아는 무척 오랜만에 창현을 보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의 얼굴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오늘 게임 한 것도 있고, 내일 준비를 해야 할 것도 있어서요.”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아쉬움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말하니, 창현은 어색하게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는 순규를 바라보며 당부를 잊지 않는다.

“더 연습하지 말고 피로를 푼 뒤 푹 쉬어요. 쉬는 게 내일 경기에 더 좋은 영향을 끼칠 테니까요.”

“알았어. 창현이 너도 쉬어.”

“네, 그럼 내일 만나요.”

그러면서 현관문으로 걸음을 옮기던 창현이 태연과 시선이 마주한다.

예전에는 태연과의 키스로 인해 제대로 시선도 마주하지 못하던 창현이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허공에서 정면으로 시선이 마주쳤음에도 불구하고 창현의 시선은 담담했다.

그것을 알아차린 태연의 눈썹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한다.

“태연 누나도 쉬세요.”

“으응, 그래.”

힘겹게 대답하는 태연의 속은 참담함 그 자체였다.

자신의 능숙한(?) 딥키스로 창현의 마음을 사정없이 뒤흔들어놓지 않았던가!

그 효과를 바탕으로 적절한 밀고 당기기를 하여 완벽하게 자신의 포로로 만들어버리려 했는데, 지금 창현의 반응을 보니, 딥키스의 유통기한은 끝난 듯했다.

‘강창현 이 바보. 연인으로서 처음한 키스인데 그걸 벌써 잊어버려?’

이런 전개는 예상하지 못했기에 태연은 마치 실연당한 것 마냥 몸에 힘이 쭉 빠지는 것 같았다.

그 사이, 창현은 인사를 한 뒤 숙소를 벗어났다.

숙소에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는 순규와 참담한 표정을 짓고 있는 태연, 그리고 아까 전 창현에게 보여주었던 행동으로 인해 안절부절 못하는 윤아만 남았을 뿐이었다.

무슨 연유인지 모르지만 참담한 표정을 짓는 태연을 보면서 왠지 모를 유쾌함을 느낀 순규가 기지개를 피며 말한다.

“아흠! 오늘 창현이랑 너무 오래 있었더니 피곤하네. 좀 씻어야겠다.”

한껏 자극하는 말을 남긴 채 화장실로 사라지는 순규.

그 말을 듣고 윤아는 즉각 도발되어 부리부리한 눈을 한 채 태연에게 말한다.

“언니! 저 말을 듣고 왜 가만히 계세요?”

“…나 지금 그럴 기분 아니야.”

“무슨 말씀이세요?”

“일단은 내일을 지켜보도록 하자. 순규가 저럴 수 있는 것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미영과 유리가 본격적으로 술수를 쓰기로 했다. 그렇게 되면 없던 죄 또한 완벽하게 위장되어 만들어질 것이 분명할 터.

최후가 정해져 있는데 굳이 열폭하여 헛 힘을 쓸 이유가 없다.

“네, 언니…….”

창현이도 사라졌겠다, 다시 순규를 포박할 준비가 되어있던 윤아는 맥이 풀린 듯한 태연의 모습에 의아함을 느끼면서 순순히 따랐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생각에 잠긴 태연은 머릿속으로 계산에 계산을 거듭하고 있었다.

“아직 기회는 많으니까. 천천히, 천천히 다시 기회를 만드는 거야.”

자신의 조련 기술이 건재한 만큼 언젠가 다시 한 번 완벽하게 조련에 걸려들 것이다.

그때는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완벽하게 조련을 하겠다 다짐하였다.

멤버들의 다굴을 벗어나기 위해 창현을 끌어들였던 순규는 태연의 숨겨진 조련 본능을 완벽히 각성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갔다.


그 시각, 인터넷에서는 난리가 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일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일반인 듀오 최강자전에 현재 절정의 신드롬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가수 현과 소녀시대의 멤버인 써니가 출연한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졌던 것이다.

처음 게임 방송국에서는 참가 신청을 한 두 사람의 존재를 정확하게 모르고 있었다. 그러다 두 사람이 본선이 진출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환상적인 실력으로 내일 방송에 나올 수 있는 결승전까지 진출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본격적으로 광고하기 시작했다.

현이라는 이름 자체는 두말이 필요없는 최고의 보증 수표였다.

그 이름이 달리게 되자, 조회수와 리플이 눈두덩처럼 불어나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현이 남다른 스타크래프트 실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 다시 한 번 감탄을 감추지 못한다.

다큐멘터리에서 스타크래프트를 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설마하니 아마추어 중에서 최상위를 달리는 실력자라는 걸 몰랐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현과 함께 듀오를 이룬 써니의 존재 또한 부각되었다.

종종 여자들이 스타크래프트를 하고는 하지만 그 실력은 썩 훌륭하다고 볼 수 없는 수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과 함께 팀을 이뤄 아마추어 최상위에 해당하는 실력을 지니고 있다는 걸 증명하니, 많은 남성팬들이 써니에게 열광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평범한 이벤트에서 갑자기 엄청난 대축제 분위기로 변하는 것은 그야 말로 순식간.

여기에 SM엔터테인먼트의 보이지 않는 도움까지 더해지니, 내일 방송은 웬만한 공중파 프로그램 못지않은 시청률을 기록하게 될 것이라 예상될 정도였다.

“좋군, 나쁘지 않아.”

SM엔터테인먼트 대표 수만은 인터넷에 돌아가는 상황을 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게임 방송국에서 먼저 사실을 알아차리고 보도하기 시작했을 때, 수만은 미리 준비해둔 대비책을 발동하여 본격적으로 인터넷 여론을 달구기 시작했다.

현의 이름이 들어간 결과 두말할 필요도 없이 대성공!

내일 게임 방송의 관심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가기 시작했고, 그럴수록 소녀시대 써니에 대한 관심 또한 늘어가고 있었다.

여자의 몸으로 아마추어 최상위 실력을 찍었다는 것 자체가 스타크래프트 팬들에게 관심의 대상이었다.

“여기서 더 기름칠을 하여 굳히고 싶지만, 보는 눈이 있으니.”

슬슬 흘러나오는 현과 써니의 열애설이 직격탄을 가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AA엔터테인먼트의 시선을 의식하자니, 여기까지 한계라는 게 느껴졌다.

만약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게 되면 두 회사의 사이는 틀어질 수도 있을 테니까.

달콤한 결실이 눈앞에 있지만 먼 미래를 내다보고 한 발자국 물러서는 수만이었다.

열애설로 슬쩍 엮으면 소녀시대 전체로 인지도 상승이 가능했을 테니까.

“아쉽지만 그건 놔두고. 난 내일 이벤트만 기대하면 되는 건가.”

내일 방송에서 얼마나 멋진 대결을 펼치느냐에 따라 분위기는 달라질 것이다.

만약 결승전에서 승리하고, 프로게이머로 이루어진 팀과 멋진 대결을 펼친다면, 써니의 인지도는 게임 방송 팬들에게 절대적이게 되리라.

“내일이 기대되는군.”

그리고 내일이 찾아왔다.


날이 밝았다.

밤새 상상도 하지 못할 엄청난 반응을 샀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한 채, 창현은 여느 때처럼 일찍 일어난 뒤 가볍게 씻고, 컴퓨터에 앉았다.

평소라면 명상을 했을 테지만 오늘은 달랐다.

컴퓨터 앞에 앉아 곧장 스타크래프트를 킨 것.

DarkSword라는 아이디가 제법 유명해졌기에 창현은 그 아이디 말고 요번에 새로만든 연습용 아이디로 게임을 한다.

“이거 순규 누나가 보면 재미있겠는데?”

오늘이 기대된다고 생각하며 창현은 게임에 임하기 시작한다.

게임을 하는 그의 얼굴은 무척 진지했다.

순규에게 긴장하지 말라 했어도 그 또한 긴장이 되고 있던 것. 그녀의 실력이 아마추어 중에서 최상위를 달린다고 하나, 프로게이머에 견주기는 부족하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내가 더 잘해야겠지.”

자신이 순규의 단점을 완벽하게 보완해줄 정도로 잘해야 한다.

그것이 가능할까?

불가능하다 말하겠지만 해보지 않고서는 모르는 일이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게임에 임하는 창현의 표정은 진지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더욱 날카롭게 실력을 벼려놓기 위해.

그리고 오늘 게임에서 반드시 승리하기 위해.

승부욕하면 사실 창현도 만만치가 않다.


“와! 장난 아니네.”

아침부터 연습을 하는 창현과 달리 순규는 아침 일찍 일어나 컴퓨터를 킨 뒤 웹서핑을 하고 있었다.

어제 순간적으로 발휘된 재치로 인해 간신히 멤버들의 다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다른 멤버들이 한바탕 당했던 것을 감안할 때, 그녀는 무척 양호한 셈이었다.

푹 쉬는 것이 더욱 전력 증강에 도움이 된다는 창현의 말을 성실히 따라, 순규는 게임을 하지 않고 간단하게 인터넷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입이 떡 벌어지는 것을 닫을 수 없었다.

연예 뉴스란부터 시작하여 스포츠란까지 모두 자신과 창현의 스타크래프트 대회 결승 진출에 대해 다루고 있던 것.

평소라면 기사 한두 개 나갈까 말까 하던 것이 현의 이름 파워로 인해 두 곳을 모두 점령할 정도가 된 것이다.

“정말 삼촌 말대로네?”

어딜 가나 소녀시대 써니라는 이름이 빠지지 않는 걸 보아 순규는 수만이 말했던 것처럼 이번 게임 대회 출전이 자신의 인지도 상승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느꼈다.

자신은 그저 창현과 단 둘이 있을 시간을 마련하고, 함께 추억을 만들 생각으로 했던 것인데 이것은 상상 이상이었다.

“후후후!”

일석이조라는 말이 이런 경우에 쓰이리라.

흡족한 미소를 짓는 순규의 뒤로 으스스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순규.”

“헉! 수, 수연이? 기, 기척 좀 내고 다녀.”

웃음을 짓던 순규는 뒤에 나타난 수연을 보고는 기겁한 표정을 지었다.

그 말을 들은 건지 듣지 못한 건지 수연이 날카롭게 순규를 바라보며 묻는다.

“어제 창현이 데리고 왔었다며?”

“아, 응. 근데 십 분도 있지 않았어. 좀 붙잡아 두려고 했는데 수연이 너 일어나지도 않던데?”

“윽!”

피곤해서 일찍 잠을 잤던 수연은 순규의 말에 곧바로 할 말을 잃는다.

원망스러운 마음에 달려왔지만 자신이 웬만해서 일어나지 않는 것을 간과하고 있던 것이다.

“어쨌든 오늘은 나의 날이니까 방해하지 마셔. 스타크래프트 대회 1등을 하게 되면 소녀시대도 유명해질 테니까.”

“그래?”

“못 믿겠어? 여기 봐봐.”

그러면서 컴퓨터를 가리키자, 수연이 그것을 보고는 눈이 동그랗게 변한다.

기사란 대부분을 뒤덮고 있는 것이 놀라웠던 것.

놀란 수연의 모습을 보며 순규가 어깨를 쭉 피며 말한다.

“나 이런 사람이야.”

미래의 노래 제목을 지어준 순규 양이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오전 시간이 지나고 오후 시간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써니 네가 정말 잘하긴 잘하나 보다. 매일 게임 할 땐 그냥 폐인인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까 완전 일반인 중 최강급이잖아?”

“에헴! 내가 좀 하긴 하지.”

효연의 칭찬에 어깨를 으쓱하며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는 순규.

그 모습을 태연이 아니꼬운 표정으로 바라본다. 자신의 조련 유통기한이 끝났다는 걸 알아차린 태연은 아직까지 심각한 데미지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근데 결승전이 어디서 열린다고 했지?”

“서울대공원. 그리 멀지 않지?”

“별로 안 머네? 난 또 부산 광안리인가? 거기서 열리는 줄 알고 잔뜩 긴장했는데.”

긴장한 표정을 짓던 효연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한다. 차 타고 부산까지 가려면 최소 4시간 이상은 걸렸으니, 그동안 차에 시달릴 것을 생각하면 암담했던 것이다.

그런데 다행히 가까운 곳에서 결승전이 열린다고 하니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점심을 먹은 소녀들은 곧바로 머리를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늘 저녁 시간에 열리는 결승전 오프닝 무대를 장식해야 했기에 빨리 준비를 마치고 가서 리허설 무대를 서야만 했다.

특히 선수인 순규는 게임 장비도 맞춰봐야 하고, 사전 인터뷰도 해야 했기에 무척 바빴다.

바빠도 순규의 입가에는 미소가 서려 있었다.

“오늘은 내가 소녀시대의 중심이라구!”

늘 외곽을 담당했었기에 그 무엇보다 뿌듯한 날이었다.

미용실에 가서 가장 먼저 머리를 하는 것도 순규였다. 사전 인터뷰를 위해서 먼저 준비를 마치고 움직여야 했던 것이다.

가장 먼저 머리를 한 순규가 입가에 함박 미소를 짓고는 멤버들에게 손을 흔든다.

“난 그럼 창현이랑 사전 인터뷰 하러 갈게. 너희들은 천천히 와도 돼. 바이바이!”

얄미운 한마디와 함께 미용실을 벗어나는 순규였다.

상대방의 성질을 돋우는 그녀의 말은 소녀들의 심기를 건드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순규가 피를 부르는 말을 하는군.”

“주먹을 부르는 것만으로 부족했는가.”

“언니, 내 눈이 사신의 눈이었어요? 순규 언니의 수명이 보여요.”

“…….”

으스대다가 여덟 명의 적을 만드는 것은 그야 말로 순식간이었다.


“창현아 안녕!”

“어서 와요.”

차에서 간단한 화장을 한 순규는 먼저 도착한 창현에게 인사를 건넸다. 두 사람은 현재 사전 인터뷰를 위해 먼저 와 있는 상태였다.

오늘 사전 인터뷰 뒤에 무대 위에 서야 하고, 게임에도 참가해야 했기에 가장 바쁜 것은 바로 그녀였다.

“오늘 바쁠 텐데 괜찮겠어요?”

“이 정도야 기본이지. 무대 여러 번 뛰어도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셔! 창현이 말처럼 푹 쉬었으니 체력을 충분히 비축해뒀어.”

“그럼 다행이네요.”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하는 창현이었다.

현재 두 사람은 대기실에 대기하고 있는 상태였는데, 매니저들과 촬영진이 이야기를 나누더니, 잠시 후, 카메라와 함께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낸다.

오늘 대회의 해설위원 중 하나인 전용준 캐스터였다.

“안녕하십니까, 현 씨, 그리고 써니 씨.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안녕하세요, 현입니다.”

“소녀시대의 활력소 써니입니다!”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었기에 두 사람은 방금 전과 사뭇 다른 태도로 임하기 시작한다.

고개를 나직이 끄덕이며 감탄사를 흘린 전용준 캐스터가 입을 연다.

“어제 한바탕 게시판이 폭주했었습니다. 왜인가 싶었는데 현 씨와 써니 씨가 대회에 출전하여 결승전까지 올라가는 성과를 이루셨다고 했는데요, 두 분이 팀을 결성하게 된 계기가 있습니까?”

그 말에 대답한 것은 창현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스캔들로 이어질 수 있기에 잘 포장해야 했다.

“배틀넷에서 프리 유저로 활동하던 도중에 써니 누나와 우연히 만나게 되었고, 연예인이 되면서 게임을 자주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써니 누나가 이런 대회가 있으니 한 번 출연해보자고 제안을 했고, 그 제안을 받아들여 짧은 기간이나마 연습을 하여 출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군요. 이야기를 들어보니 써니 씨는 배틀넷에서 무척 유명한 길드 소속원이었다는 정보기 입수되었는데요.”

“네! 제가 워낙 게임을 좋아했거든요. 특히 스타크래프트를 너무 좋아해서, 연습생 시절에 길드를 가입해서 종종 게임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군요. 여자의 몸으로 스타크래프트를 잘하기 힘든데, 정말 대단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현 씨의 아이디가 배틀넷에서 유명한 아마추어 고수 다크소드라 들었는데 사실입니까?”

“예, 맞습니다.”

순규의 길드도 알아내고, 자신의 아이디도 알아낸 것을 보면 상당히 자세히 조사를 하고 인터뷰를 하는 듯했다.

“다크소드! 방송에서 언급된 적은 없지만 프로게이머들 사이에서 한 번쯤 상대해보고 싶은 무명의 고수로 유명했는데, 그게 현 씨였군요. 정말 대단합니다.”

“하하, 과찬의 말씀을.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그 후에도 간단한 질문이 오고갔다. 창현과 순규가 연예인이라서 그런 걸까? 다른 인터뷰보다 제법 긴 느낌이 들었지만 어련히 알아서 편집하겠거니 생각하며 편하게 인터뷰에 응했다.

“그럼 오늘 대회에 임하는 각오를 들을 수 있을까요?”

“부족하지만 결승전까지 올라온 이상 반드시 우승하고 싶군요. 더불어 우승 뒤 프로게이머분들과 꼭 한 번 해보고 싶습니다. 한 수 배워간다는 마음으로 임하도록 하겠습니다.”

“출전했으니 반드시 우승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우승이라는 단어에서 무척 표정이 간절해지셨는데 무슨 사연이라도 있으신지?”

전용준 캐스터의 물음에 순규가 순간 울상으로 변하더니 말한다.

“멤버들이 우승하면 한턱 쏘라고 해서요. 만약 우승하지 못하면 제 용돈은… 흑흑!”

눈물을 흘리는 시늉을 하는 순규였다.

그 모습을 보고는 전용준 캐스터와 창현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이거, 반드시 승리 하셔야겠군요. 오늘 정말 멋진 대결이 기대됩니다. 그럼 인터뷰는 여기까지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인터뷰가 끝나고, 전용준 캐스터는 창현과 순규를 바라보며 말한다.

“오늘 해설위원들은 물론이고, 프로게이머들도 많이 기대를 하고 있더군요. 멋진 대결 부탁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예, 열심히 하겠습니다.”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이겨야죠!”

전의에 불타는 표정으로 주먹을 불끈 쥐는 순규였다.

그 모습을 보며 전용준 캐스터가 웃음을 지었다.


사전 인터뷰가 모두 끝나고, 창현은 대기실에 마련된 컴퓨터로 간단하게 게임을 하며 감각을 다지고 있었고, 순규는 리허설 무대를 오고가며 오프닝 무대를 위한 메이크업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오늘 대회가 시작할 시간이 되었다.

서울대공원에 마련된 자리는 만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본래 의도대로라면 절반 정도 자리만 차도 성공이라 생각했지만 현의 파워가 막강하여 엄청난 숫자의 관중들을 불러모은 것이다.

마련된 의자는 물론, 대형 스크린이 보이는 자리까지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여기에 근 절반 정도가 여성들로 이루어졌다는 걸 감안하면 그야 말로 엄청난 밀도라 할 수 있었다.

웅성웅성거리며 얼른 대회가 시작되길 기다리는 사람들.

그 순간, 환하게 비춰져 있던 무대가 불이 뚝! 하고 꺼진다.

그러자 마법처럼 웅성거림이 잦아들더니, 흥미로운 눈으로 무대를 바라보기 시작한다.

잠시 후, 팟! 하는 소리와 함께 무대가 환하게 밝혀진다.

그 무대 위에 서 있는 아홉 소녀들.

동시에 <Kissing You> 반주가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본격적인 오프닝 무대의 시작이었다.


와아아아아!

사탕을 흔들며 노래를 부르는 소녀들의 무대에 남자들은 거센 함성을 지르며 환호해주었다.

원더걸스의 강력함에 밀려버린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그래도 라이벌 구도를 이뤄오며 착실히 인지도를 쌓아온 소녀시대였다.

개별 활동으로 멤버들이 각각 인지도를 쌓았기에, 소녀시대 그룹 전체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각 멤버들을 좋아하는 남자들은 많았다.

상큼발랄한 소녀들의 무대는 남성 팬들의 가슴에 불을 지르기에 부족함이 없었고, 열렬한 지지 속에서 소녀들은 첫 무대를 무사히 치를 수 있었다.

하지만 오프닝 무대는 한 곡이 아닌, 두 곡을 부른다.

오늘 초청될 다른 가수가 물망에 올랐지만 SM엔터테인먼트 측에서 끼어들어 소녀시대가 그 자리를 독차지하게끔 한 것이다.

<Kissing You>가 끝나고 흘러나온 반주는 바로 <소녀시대>였다.

가볍게 호흡을 고른 소녀들은 다시 한 번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남성 팬들의 환호 속에, 분위기에 휩쓸린 여성 팬들의 지지 속에서 무사히 무대를 마칠 수 있었다.

무대가 끝난 뒤, 소녀들은 호흡을 고르고 있었고, 그 사이 전용준 캐스터와 엄재경, 김태형 해설위원이 걸어 나와 인사를 하였다.

“안녕하십니까, 오늘 해설을 맡은 전용준.”

“엄재경.”

“김태형입니다.”

와아아아!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며 등장한 해설위원들.

전용준 캐스터가 일렬로 선 소녀들을 보면서 입을 열기 시작한다.

“오늘 특별히 이곳에 와주신 소녀시대 분들에게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박수와 환호성 한 번 부탁드리겠습니다.”

짝짝짝짝!

와아아아아!

말이 끝나기 무섭게 터져 나오는 함성 소리와 박수 소리였다.

“자, 그럼 각각 간단한 소개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안녕하세요, 소녀시대 태연입니다.”

“소녀시대 제시카입니다.”

“소녀시대…….”

각각 자기소개를 하기 시작하는 소녀들. 간략한 소개가 끝나자, 인터뷰는 순규를 중심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오늘 열정적인 무대를 보여주셨는데, 게임에 지장이 있으시지 않은가요?”

“아뇨! 어제 이걸 예상하고 일찍 자고 아침, 점심 든든하게 먹고 왔습니다.”

하하하하!

순규의 말에 관객석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해설위원들도 그 말에 웃음을 감추지 못한 채 말한다.

“그렇군요. 오늘 경기는 일반인들이 프로게이머와 한 번 경기를 해보자는 의미에서 기획된 것인데 참 묘한 구도가 되어버렸습니다. 오늘 출전하는 미르팀이 이기게 되면 본래 의도대로 프로게이머와 일반인의 경기가 성사될 것이고, 소녀시대의 햇살팀이 이기게 되면 프로게이머와 연예인의 대결이 성사되겠군요?”

“소 뒷걸음질 치다가 쥐 잡은 격이 되네요.”

“그러네요. 하하!”

김태형 해설위원의 한마디에 웃음을 짓는 전용준 캐스터였다.

그 뒤에 간단한 인터뷰가 이어졌고, 순규는 경기 준비를 위해 먼저 퇴장하였다.

소녀시대 멤버들도 몇마디 이야기를 더 나누다가, 순규 없이 <다시 만난 세계>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경기 시작을 위해 사전 인터뷰 공개가 이어지기 시작했다.

창현과 순규가 상대해야 할 결승전 상대는 4강에서 겨뤘던 상대만큼 버거운 팀이었다.

미르라는 길드의 최상위 실력을 지닌 인물들로, 처음 출전할 때부터 강력한 우승 후보로 꼽히던 인물들이었다.

테란과 저그 조합이었기에 초반에 약한 모습을 보이지만, 중반으로 넘어가게 되면 그들만의 페이스로 끌어당기게 되어 상대하기 무척 난해했다.

해법이 있다면 오로지 초반에 승부를 내는 것이라 말할 정도였으니까.

먼저 미르팀의 사전 인터뷰가 공개되었고, 그 다음 공개된 것은 창현과 순규 팀의 인터뷰 공개였다.

꺄아아아아!

창현의 모습이 드러나자 여성 팬들이 격렬한 함성으로 반겨준다. 직접 모습을 드러낸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환호성이었다.

“그럼 2008 일반인 사이버 스타 대회 결승전을 치르도록 하겠습니다. 우승팀에게는 오백만 원의 상금을 드릴 예정이며, 프로게이머 인기투표로 꼽힌 김택용 선수와 이제동 선수와의 친선 대결이 있습니다. 많은 기대 부탁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양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두둥! 둥! 둥!

치이이이!

웅장한 배경음과 함께 무대 위에 자욱한 연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을 신호로 양쪽에서 오늘 결승전을 치를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왼쪽에서는 오늘 결승전 상대인 미르팀 두 명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고, 오른쪽에서는 창현과 어느새 옷을 갈아입은 순규가 올라오고 있었다.

와아아아아!

거센 함성 소리가 노래를 부르기 위해 무대 위에 오를 때와 다른 느낌을 주고 있었다.

“후우!”

가볍게 숨을 내쉰 창현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무대 중앙으로 걸음을 옮긴 두 팀이 해설위원이 있는 곳에 나란히 선다.

“양팀을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가장 막강한 화력으로 결승전에 올라온 미르팀입니다. 간략한 자기소개 부탁드려도 될까요?”

“강릉에 살고 있는 24살 김도욱입니다.”

“강릉에 살고 있는 23살 백천기입니다.”

각각 저그와 테란이 주종족인 그들이 어제 펼친 경기가 간략하게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빠른 9드론에 의한 초반 견제에 이은 테란의 중반 게임 지배는 이질감 없이 완벽하게 이뤄져 스타크래프트를 제대로 모르는 사람도 절로 압도되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오랫동안 손발을 맞춘 그들은 개개인의 실력은 물론, 조직력까지 흠잡을 곳 없는 막강한 실력을 자랑하고 있다.

와아아아아!

자료 화면을 보면 그야 말로 프로게이머 못지않은 실력이었기에 남성 팬들은 그들의 실력에 열광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번에 소개할 팀은 이변에 이변!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다크호스 소녀시대의 햇살팀입니다. 이거 팀 이름이 참 독창적이군요. 하하! 간략하게 소개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네.”

대답을 한 창현은 자기소개를 할 수 없었다.

방금 전까지 침묵하고 있던 여성 팬들이 그가 말문을 떼려는 순간 격렬한 함성으로 그를 맞이했던 것이다.

꺄아아아아!

마이크를 들고 잠시 침묵하던 창현은 어느 정도 함성이 잦아들자, 자기소개를 한다.

“서울에 살고 있고, 직업은 가수인 강창현이라고 합니다.”

현! 현! 현! 현!

소개하는 것만으로도 무대를 울리는 듯한 거센 함성소리가 연이어 터져나온다.

그 함성소리가 가라앉자, 마이크를 든 순규가 자기소개를 한다.

“소녀시대의 활력소 써니입니다. 서울에 살아요.”

와아아아아!

이번에는 남성 팬들의 열렬한 환호가 이어졌다. 여자의 몸으로 아마추어 최상위 실력을 지닌 순규는 이미 스타크래프트 남성 팬들의 로망이 되어 있었다.

환호성과 함께 자료화면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프로토스와 저그라는 흠잡을 곳 없는 종족 조합과 확실하게 분담된 두 사람의 역할.

창현의 운영 능력과 순규의 물량은 적을 무력하게 만들었고, 확실한 결정타로 적을 완벽하게 제압한다.

앞서 보여준 미르팀과 전혀 다른 스타일이었지만 화려한 점은 닮아 있었다.

“양팀의 특징은 모두 뚜렷한데요. 저도 오늘 대결이 어떻게 진행될지 무척 기대가 되네요.”

초반의 위기를 넘기고 중반 이후를 노리는 미르팀과 게임 운영의 묘를 살려 각자의 장점을 극대화 시키려는 소녀시대의 햇살팀은 각자 장단점이 뚜렷했다.

간단하게 인터뷰를 나눈 뒤 두 팀은 각각 부스 안으로 들어가 컴퓨터를 세팅하기 시작했다.

필요 없는 키를 뺀 전용 키보드를 연결하고, 마우스를 연결한다. 그리고 스타크래프트를 실행하여 자신에게 맞는 감도를 조정하며 세팅에 들어간다.

“누나 어때요?”

“응? 감이 좋은데?”

어제 창현의 말을 따른 덕일까?

마우스 움직임도 그렇고, 키보드를 두드리는 느낌도 최상이었다.

이대로 게임을 하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듯한 자신감이 샘솟았다.

다만 마음속에 한줄기 아쉬움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제 이 대회가 끝나면 더 이상 창현과 끈끈한 연결고리가 사라지니까.

또 다른 계획을 세워야 할 테지만 미영과 유리가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 이상 활동에 제한이 올 것임이 분명했다.

순규의 그러한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창현은 미소를 짓는다.

“그래요? 잘됐네요. 이왕 여기까지 온 거 이기고 프로게이머하고도 한 번 해봐요.”

“그래야지.”

그렇게 말을 한 창현이 세팅 완료 소식을 전했다.

미르팀도 조금 전에 세팅이 완료되었기에 방을 생성하고 기다리고 있던 차였다.

처음 게임은 팀플레이였다. 그 뒤에는 일대일 게임을 하는 것이고.

아이디를 입력한 뒤 순규가 먼저 방에 입장한다. 순규의 아이디는 예전 길드명에서 소녀시대의 이니셜인 SNSD를 붙여 SNSD)SunNy로 입장했다.

그리고 잠시 후, 창현이 아이디를 입력하고 방에 입장한다.

그 순간 관객석에서 웃음이 터져 나온다.

푸하하하!

“무슨 일이 있나요? 응? 하, 하하하!”

“저게 뭡니까. 하하!”

“왜 그러시죠?”

의아한 표정으로 두리번거리던 해설위원들의 시선이 대형 스크린으로 향했고, 그들 또한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해설위원과 관객들에게 또렷하게 보이는 것.

그것은 바로 창현의 아이디였다.

다크소드라 알려진 그가 방에 입장한 아이디는 다름 아닌 SNSD)SoonKyou였던 것이다.

순규의 콩글리쉬 발음이 바로 그것이다.

소녀시대 순규로 등장한 창현이었다.


“너, 너…….”

경악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순규였다.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녀의 눈에 선명하게 들어오는 창현의 아이디.

사전에 창현의 아이디 또한 SNSD가 들어가게 하기로 했다.

이것은 소녀시대를 홍보하기 위한 순규의 전략. 창현은 그 제안을 순순히 수락했고, 창현은 그 약속을 지켰다.

단지 그 아이디가 다크소드가 들어간 SNSD)DarkSword)가 아닌, SNSD)SoonKyou라서 문제였지만.

예상하지 못한 일격이었기에 순규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간단한 농담이에요, 하하. 긴장이 좀 풀려요?”

“…….”

창현의 말에 순규의 표정이 착 가라앉는다. TV에 방영되는 대회여서 그녀는 잔뜩 긴장한 상태였다. 그것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창현이 간단한 농담으로 그녀의 긴장을 풀어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의도는 성공적이어서 순규의 긴장을 풀어주는 역할을 하였다.

단점이 있다면 풀어줘도 너무 풀어줬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두고 봐, 너.”

“하하!”

눈을 흘기는 순규를 보며 창현은 그저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다행히도 긴장을 풀어주는 것을 성공한 듯했다.

한편,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던 해설위원석에서는 저것을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써니 선수가 눈을 흘기고 있습니다. 현 선수! 이거 뒷감당을 해야 할 처지가 되었는데요.”

“게임을 하기 전 팀킬을 한 상황이 되었는데요.”

“처음부터 불협화음이 일어나면 좋지 않죠. 현 선수가 웃음을 지으면서 무마하려는 것 같은데 과연 어떨지 잘 모르겠군요.”

“맵은 파이썬입니다. 대결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카운트 다운이 들어가기 시작했고, 본격적인 대결이 시작되었다.

창현은 12시 프로토스가 걸렸고, 순규는 8시 저그가 걸렸다.

상대 조합이 테란과 저그였기에 초반에 파상공세로 나오기가 힘들 것이다.

하지만 초반을 무사히 버텨내게 되면 중반부터 매섭게 몰아칠 것임이 분명했다.

거기에 대비하여 창현과 순규는 사전에 이야기를 나누었던 대로 플레이를 하기 시작했다.

“아! 현 선수! 투 게이트를 간 뒤 더블 넥서스를 가는데요!”

“써니 선수가 저글링을 대량으로 생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상대팀의 이점을 빼앗아오겠다는 의도인 것 같은데요.”

중반 이후부터 강력한 화력을 발휘한다면, 이쪽도 처음부터 중반을 준비하겠다는 속셈이었다.

투 게이트에서 질럿을 생산하며 더블 넥서스를 가져간 창현은 드라군 테크트리를 타기 시작했다.

이를 간파한 미르팀 저그가 저글링을 동원하여 본진 침투를 노렸지만 써니의 노련한 방어에 오히려 손해를 입고 물러나야만 했다.

멀티가 본격적으로 돌아가기 시작하고, 창현은 게이트를 두 개에서 다섯 개까지 늘리기 시작했다.

막 자원을 생산하기 시작하는 이 시점에 가장 취약한 타이밍이다.

“아! 테란 진영에서 마린 메딕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마린 메딕의 숫자가 많지 않아요! 대신 탱크가 있습니다.”

“메카닉을 염두에 두고 있다가 현 선수가 더블 넥서스를 가는 걸 보고 방향을 급선회 했어요. 이거 좋지 않습니다.”

벌쳐를 가도 상관이 없지만 그렇게 되면 드라군을 뽑는 창현에게 큰 타격을 입히는 것이 힘들었다. 그렇다고 탱크에 올인하자니, 저글링 숫자에서 압도적인 순규 때문에 그것도 불가능했다.

결국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바카닉이었다. 적당량의 바이오닉 병력과 탱크는 저글링의 호위를 받으며 창현의 진영으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창현은 병력을 슬금슬금 뒤로 물리며 시간을 끌기 시작했다.

5게이트에서 물량이 폭발할 시간을 벌어두려는 것이다.

저글링이 잽싸게 튀어나오려 하지만, 뒤를 점하려는 순규의 저글링이 이것을 견제하고 있었다.

일진일퇴의 거듭, 그것은 먼저 멀티를 먹은 창현에게 극히 유리한 순간이었다.

마침내 5게이트에서 뿜어지기 시작한 물량으로 창현이 전진하기 시작했고, 순규의 저글링이 양쪽으로 나뉘어 상대팀을 잡아먹기 시작했다.

“교전! 교전이 일어납니다.”

“5게이트에서 물량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합니다. 아! 저글링! 드라군을 잡으려 해도 앞에 있는 질럿들이 가로막습니다.”

“초반에 살려둔 질럿이 살아남은 게 이런 악수로 작용하는 군요.”

“그 사이 써니 선수의 저글링이 바카닉 병력을 모두 쌈싸먹습니다. 써니 선수! 발군의 저글링 컨트롤입니다. 정말 대단해요!”

와아아아아!

한차례 교전은 창현과 순규의 대승이었다. 초반에 뽑아둔 질럿과 드라군 조합은 달려드는 저글링을 어렵지 않게 막아냈고, 그 사이 순규의 저글링이 바카닉 병력을 깔끔하게 싸먹었다.

그 사이 상대팀 저그는 뮤탈 테크를 완성하여 순규의 본진을 노렸지만, 스포어 콜로니를 만든 순규는 오로지 저글링 생산만 거듭한다.

5게이트에서 물량이 쉼없이 쏟아져 나오는 창현은 질럿 드라군, 그리고 순규의 저글링과 합쳐 저그 진영으로 진격하기 시작한다.

엄청난 물량에 저그 본진은 손을 쓸 틈도 없이 단숨에 밀려버린다.

“정말 대단합니다! 단숨에 밀렸어요!”

“아군이 밀리는 동안 테란은 써니 선수의 진영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아, 써니 선수! 저글링으로 막아보려 하지만 힘들어요!”

상대팀 또한 호락호락하지 않았기에 순규의 빈집 공략에 들어갔고, 바이오닉 병력에 순규의 저글링이 허망하게 녹아가기 시작했다.

창현이 막 템플러 테크를 갖추고 있는 시점이어서 도와주기가 마땅치 않았다.

결국 순규 또한 GG를 선언할 수밖에 없었고, 상대팀 저그 또한 GG를 선언하게 되어 대결 구도는 일대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상황은 창현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했다.

“현 선수가 기선을 잡은 상태입니다. 멀티가 있기 때문이죠.”

“일대일 구도로 간다는 걸 알아차린 순간 현 선수는 두 번째 멀티를 가져가고 있어요. 상대도 앞마당을 가져가고 있지만 이렇게 되면 물량에 큰 차이가 나게 되죠.”

두 번째 멀티를 가져간 창현은 단숨에 세 번째 멀티를 가져갔고, 테란을 공략하지 않은 채 조용히 입구에 병력을 배치해두며 장기전으로 끌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셔틀 하이 템플러 조합으로 적을 뒤흔들며 캐리어 테크를 타기 시작했다.

“방법이 없습니다! 방법이 없어요."

앞마당 SCV가 타격을 입었기에 상황은 더욱 암울해졌다.

“진출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습니다.”

“지금 진출해서 저 병력을 다 제거하지 않으면 이기기 힘들어요.”

그 말을 듣기라도 한 듯 테란은 어느새 메카닉으로 전환하여 전진하기 시작했고, 창현은 병력을 슬금슬금 뒤로 빼면서 진영을 갖춰나가기 시작했다.

서서히 전진하기 시작하는 테란.

센터로 밀고 나오며 진영을 취하고 있을 때, 창현은 여태까지 뽑은 병력으로 전진하기 시작한다.

언덕에 모드 된 탱크의 힘이 미치지 않는 중원 싸움은 그야 말로 순수한 힘대 힘의 대결이었다.

“대규모 교전! 대규모 교전이 일어납니다.”

“아! 테란 진영이 탄탄해요. 하지만 현 선수의 물량도 엄청 납니다.”

“박빙! 박빙입니다. 테란이 잘 막고 있지만 현 선수의 물량이 너무나 엄청나요.”

본진 7게이트와 멀티 3게이트에서 질럿이 꾸준히 생산되며 중원을 밀어버리는데 성공했다.

엄밀히 말하면 본전치기였지만 상황은 창현에게 기울고 있었다.

“캐리어가 나옵니다! 서로 병력을 모두 소진했지만 현 선수에게는 캐리어가 있어요!”

“이제 골리앗이 나오고 있는데 8캐리어를 상대하기에는 힘겹죠.”

앞마당 쪽으로 전진한 캐리어는 언덕의 이점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공격을 하기 시작했고, 어느새 생산되기 시작한 지상군이 테란을 압박해나가기 시작했다.

그 사이 멀티를 하나씩 늘려나가자, 결국 테란은 GG를 선언한다.

“GG입니다. 완벽한 승리였습니다.”

“현 선수의 운영 능력이 돋보인 경기였습니다.”

“이렇게 되면 스코어가 1대0으로 소녀시대의 햇살팀이 우위를 점하게 되었군요.”

경기가 끝나자 창현과 순규는 하이파이브를 하며 승리를 자축했다.

“누나 잘했어요.”

“물론이지! 너도 잘했어.”

옆에서 생생하게 지켜볼 수 있었기에 순규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괴물 같은 운영 능력을 옆에서 직접 지켜본 셈이었으니까.

고개를 절로 젓게 만드는 생산력과 컨트롤은 그녀로 하여금 의욕이 꺾이게 만들었다.

‘이런 괴물을 어떻게 이겨.’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반드시 이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다음은 누나에요. 확 꺾어버려요. 알겠죠?”

“훗! 나만 믿으라고.”

자신만만한 어조로 말하는 순규였다. 게임을 해보면서 느꼈지만 실력 차이가 한끗발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렇게 되면 누가 더 심리적인 우위를 차지하느냐가 승패의 분수령이 될 것이다.

‘침착하게, 내 실력을 모두 발휘하는 거야.’

마음을 가다듬으면서 마인드 컨트롤에 들어가는 순규.

어제 창현이 해주었던 말을 떠올리며 자신을 가다듬기 시작한다.

잠깐의 휴식 시간이 주어졌을 때, 순규는 눈을 감고 마인드 컨트롤에 여념이 없었다.

“…….”

그 모습을 지켜보던 창현이 조용히 부스를 나선다. 개인전 1경기는 순규의 몫이었기에 경기를 하지 않는 선수는 밖으로 나와 관전해야 한다.

와아아아아!

거센 함성이 자신을 반겨주자, 창현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든 뒤 고개를 살짝 숙이고 마련된 자리로 걸음을 옮긴다.

잠시 후, 해설위원의 멘트와 함께 순규의 경기가 시작되었다.

그녀의 상대는 방금 전까지 창현과 접전을 벌였던 테란 유저였다.

흔히 저그와 테란은 상성상 테란이 우위를 점하고 들어간다.

초반에 게임의 흐름을 주도하는 것이 테란이었고, 유닛 상성도 테란이 유리한 면이 있기에 그렇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초반부터 초중반 이야기지, 경기를 잘 풀어나가면 테란이 도저히 저그를 이길 수 없는 상황이 만들어지고는 한다.

순규는 압도적인 물량 생산 능력이 일품이었기에 자기 페이스로 잘 이끈다면 승리는 그녀의 몫이 될 것이다.

“앞마당 무사히 가져갑니다.”

“테란도 무난하게 가는데요. 저그의 앞마당을 틀어막고 앞마당을 가져가려는 듯합니다.”

무난하게 진행되는 경기. 그것은 순규에게 나쁘지 않은 흐름이었다.

본격적으로 뮤탈이 나오기 시작한 순규는 뮤탈로 견제에 들어가기 시작했고, 테란의 병력을 끊어버린 뒤, 저글링과 합세하여 잡아먹는데 성공한다.

그 후 이어지는 것은 추가 멀티였다.

간간이 견제에 들어갔지만 견제보다는 본인의 멀티를 확충시킴으로써 압도적인 물량 체제를 갖춰나가고 있었다.

거기에 시기적절한 유닛 업그레이드까지 곁들어, 후반을 착실히 대비해나가기 시작했다.

테란은 저그의 추가 멀티를 파괴하기 위해 병력 진출을 시도했지만 무난한 흐름은 순규에게 사기적인 물량을 생산하게 해주었다.

엄청난 양의 병력이 네 방향에서 달려들며 퇴로부터 끊어버리자, 테란은 어찌 할 틈도 없이 저그 병력과 치열하게 싸우다가 전멸한다.

순규의 병력도 엄청난 타격을 입었지만 여기서부터는 같이 공멸해도 이득이다.

“써니 선수! 물량이 엄청난데요.”

“방금 전 교전으로 확실하게 히드라 럴커 체제로 전환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추가 멀티를 무사히 가져간 써니 선수의 페이스죠.”

본진과 멀티까지 합쳐 여섯 개의 해처리에서 생산되는 순규의 물량은 그야 말로 엄청났다.

테란은 드랍쉽을 이용하기도 하고, 중원 진출을 하기도 하며 멀티 견제를 하려 했지만 물량이 뿜어지기 시작한 순규를 막을 수 없었다.

결국 차곡차곡 멀티를 하나씩 빼앗겼고, 순규는 하이브까지 올려 울트라리스크를 생산하여 단숨에 적을 밀어버리기 시작했다.

“아! 써니 선수! 마치 목동 저그 조용호를 떠올리게 만드는 듯한 울트라입니다.”

“이렇게 되면 테란이 도저히 손을 쓸 수가 없죠.”

“GG네요.”

울트라가 모든 병력을 밀어버리자, 테란은 GG를 선언하며 게임을 포기한다.

이렇게 되면 현과 순규 팀이 2대0으로 완승을 거두게 되면서 일반인 대회 우승을 차지하게 되었다.

밝은 표정으로 순규가 밖으로 나가서 창현과 하이파이브를 하며 즐거워한다.

“아싸! 내가 이겼어.”

“잘했어요. 확실히 실력이 늘었는데요?”

“그래?”

잘한다고 말하니 그걸 또 좋아라 하며 물어보는 순규였다.

그 모습에 귀엽다 생각하며 창현은 미소 지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물량이 장난 아니에요. 앞으로 누나랑 하기 버겁겠어요.”

“거짓말, 그렇게 말해놓고 매번 날 관광 보내는 게 누구더라?”

“하하! 앞으로 달라지겠죠.”

“그건 두고 봐야지.”

그렇게 말을 한 두 사람은 우승 소감을 말하기 위해 무대 중앙으로 걸어가기 시작한다.

와아아아아!

관객들의 뜨거운 함성이 두 사람을 반긴다. 설마 했지만 정말 뛰어난 실력이었다. 특히 순규의 실력에 남성 팬들은 매료되어 그녀의 이름을 열창하고 있었다.

순규! 순규! 순규!

자신을 보고 환호하는 남성 팬들의 반응에 기쁜 표정을 짓던 순규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지며 웃음을 간신히 참고 있는 창현에게 표정을 찌푸려보인다.

“우씨!”

오늘 이 시간부로 스타크래프트의 여신 되었다.

여신 이순규로.


“우승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해요.”

우승을 했지만 아직 실감이 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넘어야 할 산이 있기 때문일까? 우승을 했지만 창현과 순규는 그리 기쁜 기색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묘한 긴장감이 두 사람의 얼굴에 서려 있었다.

그것을 깨달은 전용준 캐스터와 엄재경, 김태형 해설위원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우승 상금을 받으셨습니다. 써니 씨는 이걸 받으시면 소녀시대 분들에게 한 턱 쏘시기로 하셨지요?”

“네! 하지만 이렇게 생긴 상금을 그렇게 쓴다는 건 아쉬워서, 현과 협의한 결과 불우한 이웃에게 기증하기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와아아아아아!

순규의 말에 남자들이 열렬한 환호성을 터뜨렸다.

스타크래프트를 잘하는 것만으로도 예뻐 보이는데 마음씨마저 천사 같지 않은가.

남자 팬들이 늘어나는 소리에 순규가 입가에 미소를 짓는다.

뒤에 들려온 소리만 없었다면.

순규! 순규! 순규!

“…….”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라는 노래가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다 좋은데 순규라니.

‘이번 대회는 득보다 실이 많은 것 같아.’

왠지 이번 대회 나와서 자신의 본명이 순규라는 것을 버젓이 광고한 것 같아 순규의 마음은 참담함 그 자체였다.

그 원인제공을 한 녀석은 자신의 이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정말 좋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승자에게는 특별한 이벤트가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전용준 캐스터의 말에 창현과 순규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인다.

“물론입니다.”

“네! 결승전에서 승리하고 꼭 이 이벤트를 하고 싶었습니다.”

“알고 계셨군요. 오늘 우승자에게는 2008년도 스타리그에서 시청자들이 투표한 인기 순위 1위와 2위에 해당하는 프로게이머와 게임을 할 기회가 주어집니다.”

와아아아아!

이벤트가 있다는 말에 다시 한 번 열광하는 관객들.

그들이 열광하는 이유는 모습을 드러내는 프로게이머들이 이번년도 최강이라 칭해도 부족함이 없는 실력자들이었던 것이다.

일반인 중에서 최강이지만 과연 프로게이머와 상대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기대가 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오늘 함께 해주실 분들은… 바로 김택용 선수와 이제동 선수입니다.”

두두둥!

웅장한 느낌이 드는 배경음과 함께 무대 뒤에서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낸다. 2008년 스타리그에서 인기투표 1위와 2위를 차지하여 오늘 이벤트에 참석하게 된 최강의 프로게이머 두 사람이었다.

와아아아아!

본격적인 등장에 환호성을 내지르는 관객들.

걸음을 옮긴 그들은 해설위원들이 서 있는 곳 왼쪽에 선다.

“어서 오십시오.”

전용준 캐스터의 인사에 고개를 숙이는 두 사람.

그들을 바라보며 전용준 캐스터가 말한다.

“오늘 현 씨와 써니 씨가 우승을 하게 되어 두 분과 게임을 하게 되었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영광이라 생각합니다. 평소에 현, 소녀시대의 팬이어서 더욱 기대가 되네요.”

“마치 팬 미팅에 참가한 팬인 것 마냥 두근거립니다.”

이제동과 김택용이 각각 짧게 인터뷰 소감을 남겼다. 평소 TV에서 보단 스타를 직접 보게 되니 그들로서도 신기한 마음이 드는가 보다.

그것도 그것이지만 그들은 현의 아이디가 다크소드라는 것에 놀라고 있었다.

배틀넷 최상위 아마추어 고수 중 한 명인 다크소드는 그들이 배틀넷에서 활동할 때도 유명했던 게이머였다.

그런 그를 지금 이 자리에서 만나게 되니 얼떨떨하면서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

“하하! 두 분도 긴장을 한 듯하네요. 현 씨와 써니 씨는 어떻습니까?”

“최강의 프로게이머분들과 게임을 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당장 게임하고 싶은 걸요?”

창현과 순규의 말에 분위기는 더욱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전용준 캐스터가 규칙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게임은 동일 규정으로 적용하도록 하겠습니다. 단, 이벤트니까 게임을 거르는 것 없이 2대0으로 승부가 나더라도 마지막 게임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보통 때라면 2대0이 되면 게임이 끝났을 테지만 창현과 순규가 포함되어 있는 만큼 이벤트 시간이 늘어나면 날수록 그들에게 이득이었다.

그랬기에 규정을 스리슬쩍 바꿔 적용한 것이다.

그것을 모르는 창현과 순규는 고개를 끄덕일뿐이었다.

“그럼 엔트리를 적어주시기 바랍니다.”

엔트리라고 해도 1대1로 하는 게임에서 순서를 정하는 것뿐이었다.

“누나가 먼저 하세요.”

“응, 그럴게. 마지막을 장식하기에는 내가 좀 부담이 되니까.”

마음 같아서는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싶지만 그 부담감이 보통이 아닐 것임이 분명했다. 그렇게 되면 제 실력을 모두 발휘할 수 없을 것 같았기에 순규는 순순히 창현에게 마지막 순서를 양보했다.

두 프로게이머도 엔트리를 정하고 있는지 쑥덕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잘 해결되지가 않는지 이내 두 팔을 걷어 부친다.

“아! 두 선수, 가위바위보를 하네요.”

“순서를 정하는 것에서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나 보네요.”

그렇게 말하는 사이 가위바위보 승자가 결정되었다.

주먹을 낸 이제동이 가위를 낸 김택용을 이긴 것이다.

아쉬워하는 김택용과 기뻐하는 이제동.

그렇게 그들의 순서를 모두 정할 수 있었다.

“그럼 본격적으로 게임을 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창현과 순규는 곧장 부스 안으로 들어가 게임을 위해 컴퓨터를 세팅하기 시작한다.

빠르게 이루어진 세팅은 순식간에 끝났고, 만들어진 방에 순규가 먼저 들어간다.

그리고 창현이 접속하려는 것을 본 순규가 그를 툭툭 치더니 주먹을 들어보이며 경고한다.

“너 또 순규로 들어오면 죽어.”

“…….”

여신이란 단어는 좋지만 여신 순규는 그리 좋지 않은 순규였다.


창현과 순규가 먼저 들어와서 기다리고 있자, 잠시 후, 두 프로게이머가 안으로 들어온다.

실력적인 측면에서 두 사람이 월등할 테지만 창현과 순규는 전혀 기가 죽은 기색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팀플은 실력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파트너와의 호흡이 중요하니까. 아무래도 손발을 많이 맞춰본 자신들이 더 유리할 것이란 생각이 있었다.

“같은 종족 조합이고, 맵의 조건도 같아요. 반드시 이기죠.”

“응!”

고개를 끄덕인 순규의 눈도 형형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 사이 카운트 다운이 시작되었고, 첫 번째 경기인 팀플레이가 시작되었다.

순규는 12시 저그가 걸렸고, 창현은 2시 프로토스가 걸렸다.

이렇게 되면 상대방은 각각 8시와 6시라는 이야기가 된다.

무난한 게임 운영을 위해 창현은 투 게이트를 갔고, 순규는 9드론을 갔다.

오버로드가 정찰을 하니, 8시는 김택용, 6시는 이제동이 걸렸다.

프로브를 6시로 보내 저그 진영을 정찰한 창현이 순간 멈칫한다. 저그임에도 불구하고 이제동이 9드론이 아닌, 12드론 투해처리 빌드를 간 것이다.

빠른 타이밍으로 생산된 순규의 저글링이 곧장 6시를 향해 뛰었지만 성큰 콜로니를 만들자, 후퇴를 할 수밖에 없었다.

뒤늦게 순규가 해처리를 지었고, 저글링과 질럿 조합을 먼저 갖춘 두 사람이 초반을 주도해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초반에서 중반으로 넘어가면서 본격적인 열세가 이뤄지기 시작했다. 투해처리를 먼저 간 제동의 해처리에서 끊임없이 저글링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면서 초반 교전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꾸준히 저글링을 뽑은 탓에 밀리지 않았지만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먼저 드라군 테크를 탄 김택용의 드라군이 서서히 두 사람을 밀어붙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각 진영이 멀리 떨어졌지만 게이트 숫자와 해처리 숫자를 먼저 점함으로써 밀어붙이는 프로게이머 팀.

창현 또한 쓰리 게이트에서 곧바로 드라군 테크트리를 넘어가기 시작한다.

순규와 창현은 서로 본진 방어를 하면서 타이밍을 노리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써니 선수가 상당히 위험한데요.”

“현 선수의 병력이 헬프를 가면 막을 수 있지만 피해를 복구하면 차이는 더 벌어집니다!”

“선택의 순간입니다. 헬프를 가느냐, 빈집을 가느냐!”

두 종족 조합의 공격이 순규의 본진으로 쳐들어왔던 것이다.

황급히 컨트롤하면서 순규는 자신을 헬프하기보다는 빈집을 가라고 한다.

알겠다는 말과 함께 곧장 6시 이제동 본진으로 빈집털이를 가는 창현.

“빈집을 갑니다! 빈집!”

“병력이 상당히 많아요! 이제동, 수비하지 않으면 밀립니다.”

“현 선수의 물량은 정말 대단하군요. 만약 이제동 선수가 밀리게 되면 전판과 같이 김택용 선수와 현 선수의 일대일 구도가 만들어지겠는데요.”

순규는 완전히 밀려버린 상태였고, 창현의 병력은 6시로 진군하면서 이제동을 밀기 위해 공격을 감행한다.

빈집털이였기에 방비를 갖췄다 해도 막기 힘든 공격이었다.

12시 순규를 민 병력이 뒤를 점하자, 거의 다 밀릴 뻔하던 이제동이 간신히 살아남는다.

그리고 김택용이 계속해서 병력을 보내며 방어를 하니, 창현은 6시로 병력을 보내지 않고, 8시 김택용의 본진으로 드라군을 배치한다.

언덕 위를 점하고 있는 드라군을 뚫을 수 없었기에 한 발자국 물러선 드라군이 김택용의 입구에 늘어서기 시작한다.

그걸 본 해설위원들이 흥분해서 말한다.

“아! 저렇게 하면 김택용 선수 뚫기 힘들어지죠.”

“발업 질럿이나 리버가 아니면 저 드라군을 뚫기 힘들어요.”

“몇 년 전에 유행하던 방법인데 저걸 여기서 보게 되는군요.”

좁은 입구로 내려오게 되면 그곳을 포위한 드라군이 집중 공격을 할 수 있는 진영을 완성한 창현.

그리고 방어 모드를 취하며 곧장 앞마당 멀티를 가져간다.

두 프로게이머 모두 멀티를 가져가지 못했지만 두 명이라는 이점은 상당하다. 멀티를 먼저 가져가고, 폭발적인 물량으로 한군데를 확실하게 밀지 못하면 승산은 없다.

멀티를 늘림과 동시에 게이트를 늘린 창현은 곧장 미네랄 멀티까지 가져간다.

그리고 7게이트를 만들어 폭발적인 물량을 쏟아내려 할 때, 취약 타이밍을 비집고 들어오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이제동의 뮤탈이었다.

창현에게 유리하게 흘러가던 상황이 서서히 뒤집히기 시작하자 해설위원들이 흥분하며 말한다.

“아! 이제동의 뮤탈! 신의 컨트롤입니다. 현 선수의 프로브를 계속해서 사냥합니다.”

“드라군이 공격을 해도 무시하고 프로브만 사냥합니다. 이렇게 프로브를 잃게 되면 현 선수, 폭발적인 물량을 뽑아내는 게 불가능하죠.”

“포톤을 만들고 있지만 이제동의 뮤탈은 그냥 뮤탈이 아니에요. 뭉쳐서 한 개씩 확실하게 프로브를 사냥하고 있어요.”

“조용히 침묵하고 있던 김택용 선수도 다크 템프러를 동원해서 진출하기 시작합니다. 현 선수 핀치!”

“각개격파를 하면 아직 승산이 있어요.”

“각개격파를 위해 움직입니다! 아! 그 타이밍을 또 이제동 선수의 뮤탈이 비집고 들어와요. 프로브 사냥 또 사냥 당합니다.”

“현 선수 그냥 무시하고 전진하는데요. 확실하게 이제동 선수의 본진을 밀겠다는 생각 같습니다.”

“7게이트에서 뿜어지는 물량이 엄청납니다.”

프로브를 많이 잃었지만 창현은 개의치 않고 6시를 밀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러자 8시에서 진출한 김택용의 병력과 6시 이제동의 병력, 그리고 뮤탈이 합세하여 한바탕 대규모 접전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병력의 숫자는 무척 많았지만 앞뒤에서 압박해오는 두 프로게이머의 컨트롤 실력은 보통이 아니었다.

전투에서 승리하기는 했지만 전체적인 면에서 결코 승리라 할 수 없었다.

“아! 하이템플러만 있었더라면! 현 선수, 병력의 대부분을 잃습니다.”

“저 병력으로 6시를 미는 것은 불가능하죠. 8시를 미는 것도 불가능하니 현 선수, 진퇴양난에 빠졌습니다.”

“그 사이, 김택용 선수의 다크 템플러가 본진으로 드랍됩니다. 아! 뮤탈로 인해 포톤이 모두 파괴되어 다크 템플러를 막을 수가 없어요!”

“본진 넥서스 파괴되네요.”

본진 넥서스가 파괴되었지만 두 멀티를 돌림으로써 생산된 병력으로 6시 이제동의 본진을 미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이미 섬 멀티를 가져간 이제동은 뮤탈로 끊임없이 창현을 견제했고, 그 사이 앞마당을 가져간 김택용이 물량을 뿜어내기 시작하자, 창현은 결국 GG를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GG! 현 선수 마침내 GG를 선언합니다.”

“대단한 경기였습니다. 정말 대단하네요.”

“대단한 기량을 선보였습니다. 정말 명경기였어요.”

“이제동의 뮤탈과 김택용의 다크 템플러 공세에도 물러서지 않는 강인함을 보였습니다.”

칭찬에 칭찬이 이어졌지만 어두운 안색을 한 창현은 헤드셋을 벗으며 고개를 저었다.

프로게이머 팀과의 첫 팀플 대결은 창현과 순규의 패배였다.


“후우!”

한숨을 내쉬는 창현. 열심히 분투했지만 돌아온 결과는 패배였다.

그것도 뭐라 변명할 여지가 없는.

순규를 도와줘봤자 손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병력은 이미 이제동의 본진으로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끝을 내지 못했다. 순규의 희생을 무의미하게 날려버린 것이다.

“미안해요, 누나.”

“아냐, 잘했어. 그럴 수도 있지. 잘했으니까 사과하지 않아도 돼.”

고개를 저으며 창현의 사과를 거부하는 순규.

그녀의 말처럼 창현은 최고의 경기를 보여줬고, 손에 땀을 쥐는 순간의 연속이었다.

두 종족 연합의 공격을 제대로 막아내지 못한 자신이 오히려 한 소리를 들어야지, 끝까지 고군분투한 창현이 잘못한 것이 아니다.

“그래도…….”

“그만! 그렇게 따지면 오히려 공격을 막지 못한 내 잘못이야.”

단호하게 창현의 말을 끊는 순규였다.

엄한 그녀의 표정에 고개를 젓던 창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하는 수밖에 없었다.

“알았어요.”

“최선을 다했지만 지는 건 어쩔 수 없지. 저쪽은 프로게이머잖아. 그래도 명승부를 펼쳤으니 다행이라 생각해. 프로게이머 둘을 상대로 팽팽한 대결을 벌이다니, 굉장한데?”

“하하! 결국 져버렸지만요.”

순규의 칭찬에 어색한 웃음을 짓는 창현이었다.

한바탕 치고 받았지만 결국 승리하지 못했기에 그 칭찬이 무척 어색하게 들렸다.

“이번에는 내가 잘 해보도록 할게. 이긴다고 말하지 못해도 멋진 경기 보여줄 테니까 부족한 점들 좀 지적해줘.”

“알았어요.”

그렇게 말한 창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부스를 벗어난다.

제2경기는 순규의 개인전이 벌어진다.

와아아아아!

창현이 부스 밖으로 나가자 관객들의 거센 함성이 그를 반긴다.

최고의 대결을 선보인 창현에게 환호를 하고 있는 것이다.

관객들은 2008년 최강 프로게이머라 칭해도 부족함이 없는 김택용과 이제동을 상대로 혼자서 치열한 접전을 벌인 창현의 실력에 감탄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 함성에 창현이 고개를 꾸벅 숙이더니 그대로 걸음을 옮긴다.

반대쪽에서는 이제동이 부스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제2경기는 써니와 김택용의 대결이 성사된 셈이다.

‘프로토스면… 제대로 만났네.’

주종족이 프로토스인 자신과 매일 게임을 하다 보니 순규가 가장 특화되어 있는 종족전이 바로 프로토스였다.

부스에서 각 팀의 인원이 한 명씩 나오자 해설위원들이 해설을 시작한다.

“자, 그럼 바로 제2경기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제2경기 맵은 동일하게 파이썬으로 적용됩니다. 제2경기에 임하는 선수는 김택용 선수와 써니 선수입니다.”

“프로토스 대 저그전인데요. 써니 선수가 현 선수와 매일 연습을 하였기에 프로토스 전에 특화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럼 재미있는 경기를 예상해볼 수 있겠네요.”

“대 저그전 최강자인 김택용 선수를 맞아 써니 선수가 어떤 전략을 펼칠지 기대가 되네요.”

해설위원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본격적인 게임이 시작되었다.

순규는 12시 저그였고, 김택용은 6시 프로토스가 걸렸다.

오버로드를 2시 방향으로 보내며 게임을 시작하는 순규.

12드론 앞마당을 가져가면서 드론을 8시로 정찰보낸다. 그리고 2시와 8시에 상대가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곧장 6시로 드론을 보냈다.

김택용은 파일런을 짓고 상대가 8시도, 2시도 아니란 걸 확인하자 곧장 더블 넥서스를 간다. 그 후 포지를 짓고 포톤으로 방어를 하기 시작한다.

“완벽한 더블 넥서스에요.”

“이렇게 되면 중반으로 흘러갈 경우 써니 선수가 불리해지겠는데요.”

“아! 써니 선수! 곧장 미네랄 멀티를 가져가네요. 나쁘지 않은 판단입니다.”

“이대로 자원을 생산하게 되면 특유의 어마어마한 물량이 쏟아져 나올 가능성이 큰데요.”

더블 넥서스를 간 김택용은 커세어를 뽑아 순규의 본진과 멀티를 한바퀴 둘러보았고, 빠르게 템플러 테크를 타기 시작했다.

본진과 멀티까지 합쳐 4해처리까지 늘린 순규는 히드라덴을 올려 커세어의 위협에 노출된 오버로드를 보호하며 히드라를 모으기 시작한다.

한바탕 히드라 웨이브가 이어지려는 순간이었다.

“히드라 물량,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4해처리에서 쏟아지는 히드라로 단숨에 앞마당을 밀려는 속셈이에요.”

“말씀하신 순간 써니 선수의 히드라가 남진하기 시작합니다. 남진에, 남진! 엄청난 숫자에요!”

밑으로 내려가기 시작한 히드라는 물경 두 부대에 달하는 엄청난 숫자였다.

앞마당에 생산되어 있는 질럿 몇 기와 포톤으로 막기에는 불가능에 가깝다.

순규의 히드라가 그것을 확인하고는 곧장 앞마당을 밀고 내려온다.

“김택용 선수! 앞마당 밀릴 수도 있어요.”

“포톤 깨집니다. 질럿들도 힘을 발휘하지 못해요!”

“아! 이렇게 되면 앞마당이… 아! 다크 템플러! 다크 템플러가 생산됐습니다.”

“오버로드? 오버로드 없나요?”

“김택용 선수가 미리 주변에 있는 오버로드를 모두 커세어로 처리해놨습니다.”

포톤이 모두 깨지는 순간, 다크 템플러가 생산되었고, 얼마 남지 않은 히드라는 후퇴하는 수밖에 없었다.

재빨리 포톤을 재생산하며 다크 템플러로 순규의 멀티를 견제해나갔다. 그리고 커세어로 구석구석 정찰하며 오버로드를 사냥하고 나선다.

어느새 레어를 올린 순규가 히드라 럴커 체제로 변환했고, 그 틈을 타 질럿 하이 템플러 체제를 갖춘 김택용이 진출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중간에서 히드라 럴커와 함께 대규모 접전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럴커가 있기에 써니 선수가 유리합니다.”

“하지만 옵저버까지 있어서 한 번 상대해볼 만합니다.”

“아! 대규모 교전! 양쪽 모두 큰 피해를 입고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후퇴합니다.”

“이렇게 되면 미네랄 멀티를 먼저 먹은 써니 선수가… 아!”

멀티가 하나 더 많은 순규가 소모전에서 유리하다 말하려던 엄재경 해설위원의 입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온다.

그러자 옆에 있던 김태형 해설위원이 놀라움 가득한 목소리로 말한다.

“다크 템플러네요. 교전이 벌어지는 순간 써니 선수의 본진에 다크 템플러가 떨어져서 드론을 몽땅 사냥했습니다.”

“그것뿐만이 아니에요. 앞마당으로 향한 하이 템플러가 드론의 대부분을 사냥했습니다. 미네랄 멀티도 마찬가지고요.”

“드론을 모조리 잃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김택용 선수에게 기우는데요.”

교전이 벌어지는 순간 셔틀을 사용하여 다크 템플러로 본진의 드론을 학살하고, 앞마당과 미네랄 멀티에 큰 타격을 입혔다.

드론을 대부분 잃은 순규는 물량이 뜸해지기 시작했고, 뒤이어 이어진 앞마당 교전에서 프로토스에게 대패를 하게 되면서 결국 GG를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GG! 써니 선수가 GG를 선언합니다.”

“초반부터 중반까지 무척 유리하게 승부를 이끌고 나갔지만 역시 김택용입니다. 대 저그전 스페셜리스트라는 말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네요.”

“트레이드 마크인 다크 템플러가 위기에서 구해주고, 승부를 결정 짓는 조커 역할을 했네요. 써니 선수가 잘했지만 김택용 선수가 너무 잘했습니다.”

양 선수를 칭찬하기 바쁜 해설위원들이었다. 순규 또한 발군의 기량을 선보였지만 현역 프로게이머 중 최고조에 이른 김택용을 넘어서기에는 무리였다.

“미안, 져버렸네.”

부스 밖으로 나온 순규가 양손을 모으며 창현에게 용서를 구한다.

그에 창현이 미소를 짓고 고개를 저으며 말한다.

“잘했어요. 좀만 더 몰아붙였으면 누나가 이겼을 수도 있었을 걸요?”

“그래? 아니야. 해보니까 알겠더라. 실력 차이가 엄청나게 난다는 걸. 난 그 교전에 모든 신경을 쏟아 부었는데 결국 거기에서도 이득을 못 봤잖아. 기량의 차이지 뭐.”

“그래도 잘했는데요.”

“그렇다 치지 뭐. 어쨌든 내가 졌으니까 창현이 네가 한판이라도 이겨서 체면치레를 해야지 않겠어? 꼭 이겨야 돼. 알겠지?”

“할 수 있다면요. 하하!”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서는 창현. 하지만 그의 얼굴에 묘한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과연 자신이 저그 프로게이머 중 최강이라 칭해지는 이제동을 넘을 수 있을까?

자신감은 있지만 실력이 거기까지 미칠지는 미지수였다.

아마추어들보다 한단계 높은 프로게이머들 중에서 최상위에 존재하는 프로게이머였으니까.

“일단은 해봐야겠지.”

나직한 중얼거림에는 창현의 각오가 그대로 배어나오고 있었다.

곧장 자리에 앉은 창현은 빠른 속도로 세팅을 하기 시작한다. 좀 더 예민해진 자신의 플레이 스타일을 살려줄 수 있는 정밀한 세팅.

컴퓨터 모니터를 바라보는 창현의 눈이 날카로워지기 시작한다.

방금 전 경기에 대해 정리의 말을 남긴 해설위원들이 이번에는 창현과 이제동의 대결에 초점을 맞춘다.

“이번에는 현 선수와 이제동 선수의 대결입니다.”

“무척 기대가 되는 대결 중 하나죠. 현 선수는 예선전부터 그랬지만 압도적인 기량을 선보였습니다. 특히 배틀넷에서 다크소드라는 아이디를 사용하고 있는데, 한때 프로게이머 제의가 갈 정도로 뛰어난 유저였다고 하네요.”

“저도 다크소드가 현 선수일지 생각도 못했습니다. 굳이 따지자면 운영 능력에 탁월한데요. 컨트롤과 타이밍, 물량 생산 능력 등 부족한 면이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지만 현 선수의 상대는 폭군이라 불리는 이제동 선수입니다. 폭군의 아성을 넘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대결이 펼쳐질지 정말 궁금하네요.”

배틀넷에서 유명한 다크소드와 저그 프로게이머 중 최고치를 달리고 있는 이제동의 대결이었다.

세팅을 마친 창현이 접속하자, 카운트 다운과 함께 본격적인 게임이 시작되었다.


창현의 진영은 6시였고, 이제동은 8시였다.

게임이 시작되자, 6시로 오버로드를 보내는 이제동.

허공에 뜬 오버로드가 천천히 전진하기 시작하며 6시로 향하기 시작한다.

프로브를 생산하며 날카로운 눈빛으로 화면을 바라보는 창현.

6시로 향하던 오버로드는 미네랄 끝에서 일을 하고 있는 프로브를 보고 곧장 방향을 돌린다.

“아! 이제동 선수! 프로브를 보자마자 오버로드를 돌립니다.”

“저렇게 되면 현 선수가 오버로드를 봤을 확률이 무척 희박한데요.”

8시 방향에서 오버로드가 날아오지 않으면 다른 진영에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거기까지 계산한 이제동은 12드론까지 간 뒤 곧장 앞마당을 가져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파일런을 지은 창현은 게이트를 한박자 빠르게 건설하고 있었다.

“현 선수의 게이트 타이밍이 빠른 것 같은데요?”

“이제동 선수가 해처리를 건설하는 것보다 먼저 게이트가 올라갔어요.”

“프로브가 여덟 마리, 8게이트입니다!”

“아! 현 선수가 초반부터 강수를 두는데요.”

눈썰미가 남다른 해설위원들은 창현이 무슨 테크트리를 탔는지 알아차리고는 호들갑스러운 모습으로 외친다.

창현이 올린 테크트리는 7파일런, 8게이트라 불리는 것으로, 아주 빠른 타이밍에 질럿이 나와 저그에게 강력한 압박감을 줄 수 있는 테크였다.

하지만 제대로 타격을 주지 못할 경우 손해를 입고 게임을 시작하기에 프로토스 유저들이 잘 사용하지 않는 수법이기도 했다.

게이트웨이가 완성되고 곧장 질럿 생산에 들어간 창현은 질럿이 나오려 하자, 프로브 한 마리를 대동하고 곧장 본진을 벗어난다.

“아! 질럿과 프로브가 8시로 향하고 있어요.”

“아까 이제동 선수의 오버로드를 봤나봅니다.”

“질럿 도착! 그런데 스포닝폴은 이제 완성되어갑니다.”

“이제동 선수, 잘못하면 큰 피해를 입겠는데요.”

질럿 한 마리의 공격력이 16, 프로브의 공격력이 5다. 이렇게 되면 두 유닛이 드론을 합공하게 되면 정확히 두 번만에 사냥이 가능하다.

난입한 질럿을 피해 드론이 뭉치면서 프로브를 먼저 강타한다.

드론 한 마리를 잃었지만 프로브를 죽이는데 성공하는 이제동.

그 사이 두 번째 질럿이 도착했고, 그 순간 6저글링이 완성된다.

“아! 현 선수, 컨트롤이 뛰어납니다. 질럿이 죽지 않아요.”

“투 게이트에서 본격적으로 질럿이 나올 텐데요. 이제동 선수, 이걸 제대로 막지 못하면 단숨에 밀립니다.”

창현의 질럿 2마리가 저글링 6마리와 대치하면서 눈치 싸움을 벌이는 사이, 이제동의 앞마당에는 실드 배터리가 지어지고 있었다. 아까 전 프로브가 올라오기 전에 파일런을 앞마당에 지어놓았던 것이다.

앞마당과 본진에서 저글링 생산에 들어간 이제동은 본진과 앞마당의 이점을 이용하여 압박하기 시작했다.

질럿 4마리인 창현에 비해 저글링이 한부대나 되는 이제동이었지만 상대하기 쉽지 않았다.

질럿 2마리가 언덕 입구를 막아섰고, 나머지 두 마리가 앞마당에서 생산된 저글링 4마리를 상대하고 있던 것이다.

궁여지책으로 언덕을 가로막은 질럿을 두드리는 이제동.

“아! 저글링 계속 잃습니다.”

“그에 비해 현 선수는 질럿을 잃지 않았어요.”

저글링 세 마리를 잡는데 성공한 언덕 질럿은 체력이 바닥이 되자 후퇴를 하였고, 곧장 실드 배터리에서 충전한다. 그리고 합류한 5질럿으로 앞마당 공략에 나서는데, 어느새 늘어난 저글링 한부대 반과 드론이 몽땅 몰려나와 단숨에 질럿을 감싸고 교전을 벌인다.

절정에 달한 이제동의 저글링 컨트롤이 빛을 발한 것이다.

“아! 현 선수, 질럿을 모두 잃고 맙니다.”

“하지만 손해가 아니에요. 이제동 선수가 저글링을 생산하느라 타이밍을 많이 빼앗겼거든요.”

“상황은 현 선수에게 유리하게 돌아갔지만 이제동 선수, 아직 포기하기에는 일러요.”

7파일런, 8게이트 체제를 간 창현은 초반에 끝낼 요량이었지만 그것이 실패하자 그도 제법 타격이 있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타격이 있어도 우위에 서 있다는 것.

질럿을 꾸준히 생산하며 창현은 곧장 앞마당을 시도했다.

테크트리로 우위를 점하는 것보다 앞마당을 먹고 물량으로 압도하겠다는 생각이었다.

“잠시 소강 상태로 접어듭니다. 타격을 입은 이제동 선수는 드론 생산에 박차를 가하며 레어로 넘어갑니다. 히드라덴을 짓지 않는 걸로 보아 뮤탈로 갈 듯하네요.”

“가장 자신 있는 카드를 선택한 거네요. 현 선수는 물량으로 이제동 선수를 밀어붙이려는 생각인 듯 싶습니다.”

레어를 올린 이제동은 곧장 스파이어를 올렸고, 창현은 멀티가 완성되자 게이트를 늘리며 템플러 테크를 타기 시작한다. 그리고 질럿 한 마리로 정찰을 시도하지만 탄탄한 방어에 막혀버리고 만다.

체제를 확인하지 못했기에 무탈과 럴커, 두 개 모두 염두에 두어야 했고, 창현은 앞마당과 본진에 포톤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제동 뮤탈! 나옵니다.”

“뮤탈로 타격을 주지 못하면 게임은 완전히 기울 거예요.”

“하나로 뭉친 뮤탈, 날기 시작합니다.”

한부대 단위로 뭉친 뮤탈은 곧장 창현의 본진을 공략한다.

포톤이 세 개 박혀있는 본진은 순식간에 쑥대밭이 되기 시작한다. 뮤탈 한부대로 포톤을 하나씩 파괴한 뒤 착실히 프로브를 학살한다.

아칸을 만든 창현이 아칸을 가지고 뮤탈을 막아서려 하지만 요리조리 피하면서 프로브를 학살한다.

“아! 뮤탈! 프로브를 잡습니다.”

“뮤탈하면 이제동이죠. 아칸을 상대하지 않고 프로브만 잡습니다.”

“이렇게 피해가 누적되면 오히려 불리해지는 건 현 선수죠.”

아칸으로 뮤탈을 쫓아내는데 성공한 창현이었지만 프로브는 큰 타격을 입은 상태였다. 본진에 있던 프로브를 앞마당으로 대피시킨 뒤, 포톤을 다시 생산하기 시작한다.

그 사이 이제동의 뮤탈은 더욱 불어나기 시작한다.

아칸 두 마리를 배치 시켰지만, 한부대 반 정도 되는 뮤탈이 사방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아칸 한 마리를 잡는다. 그리고 곧장 완성되지 않은 본진 포톤을 공략한다.

“아! 오늘 이제동! 절정의 기량을 보여줍니다. 이건 김택용 선수와의 대결에서도 보여주지 않은 컨트롤이에요!”

“그만큼 집중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제동 선수! 오늘 자신의 하이라이트를 여기서 펼쳐내네요.”

한 마리 더 남은 아칸으로 뮤탈을 상대하는데 무리가 따른다 판단한 창현은 게이트에서 생산된 하이템플러를 모두 아칸으로 만들었고, 질럿 두 부대와 아칸 세 마리, 하이템플러 한 기를 데리고 곧장 이제동의 앞마당을 습격한다.

창현의 그런 공격을 예상하기라도 한 듯 이제동의 앞마당에는 여섯 개나 되는 성큰 콜로니가 박혀 있었다. 그리고 저글링이 뒤를 점하고, 뮤탈이 날아오면서 대규모 교전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대결! 대결이 벌어집니다.”

“아! 현 선수! 질럿이 공 1업이 되어 있어서 저글링을 학살합니다.”

“하지만 뮤탈 컨트롤로 아칸을 집중 공략하고 있어요! 아칸이 모두 잡히면 질럿, 무방비 상태에 놓입니다.”

지상군 대결에서 창현이 승리했지만 아칸은 뮤탈을 절반도 잡아내지 못한 채 모조리 죽어버렸다. 그리고 질럿 여덟 마리로 본진을 침투하여 드론을 최대한 사냥했지만, 손해였다.

“이제동 선수로 분위기가 넘어오기 시작합니다.”

“본진 수비를 갖춘 현 선수지만 피해가 너무 막심해요.”

이미 두 번째 멀티를 성공적으로 가져간 이제동은 본격적으로 물량을 뿜어내기 시작했고, 창현 또한 꾸준히 병력을 생산하며 일전을 준비한다.

하지만 결정적인 역할을 한 건 역시 이제동의 뮤탈이었다.

본진을 급습한 뮤탈은 하이 템플러를 먼저 사냥한 뒤, 포톤을 모조리 부숴버린다. 그리고 강력한 화력으로 단숨에 넥서스를 부순다.

‘후!’

본진이 날아가자 한숨을 내쉬는 창현. 병력을 끌고 이제동의 멀티를 부숴버렸지만 본진이 날아간 자신이 손해라는 것을 스스로도 더 잘 알고 있다.

이기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드라군을 추가하며 뮤탈을 견제하려 했지만 이제동의 뮤탈은 사기적이었다.

급습하듯 달려와 하이템플러를 하나씩 사냥했고, 그것을 피하기 위해서 창현은 병력을 앞마당쪽으로 후퇴시켜야만 했다.

그러자, 어느새 생산된 이제동의 럴커가 조이기를 시도했고, 옵저버를 생산한 창현이 럴커를 제거하며 센터 진출을 시도했다.

“중앙에서 대규모 교전이 일어나려 합니다.”

“이 승부에서 이긴 사람이 게임을 제압할 것입니다.”

“추가 멀티를 실패한 이제동 선수와 본진을 잃은 현 선수의 대결!”

해설위원의 말과 함께 중앙에서 사활을 건 전투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질럿, 드라군, 아칸, 하이템플러를 갖춘 창현과 저글링 히드라, 럴커, 뮤탈 조합을 갖춘 이제동의 대결.

저글링이 사방에서 덮쳐오기 시작했고, 럴커와 히드라가 주 화력을 담당, 그리고 뮤탈이 하이 템플러를 사냥하기 위해 날아온다.

저 뮤탈의 공격을 피하는 것은 불가능하단 걸 잘 안다.

그걸 알았기에 창현은 달려오는 저그 병력들에게 사이오닉 스톰을 미리 뿌린다.

치열한 접전에 접전. 진영은 두 종족 모두 나쁘지 않았지만 불행한 점이라면 저그 진영에서 좀 더 가까운 곳에 전투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본진과 앞마당에서 저그 병력이 충원되자, 결국 창현의 병력은 전멸을 하고 만다.

일점사로 하이 템플러가 먼저 죽고, 그 후 아칸이 죽자, 창현의 병력은 맥없이 몰락했다.

‘졌네.’

거의 다 잡았다 생각하던 경기를 놓쳤다는 걸 깨달은 창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이내 GG를 선언한다.

와아아아아!

헤드셋을 벗자 엄청난 함성 소리가 울려 퍼진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에게 향하는 것이 아닌 것 같아 창현은 고개를 젓는다.

다 이긴 게임을 놓친 것 같아 마음이 착잡했다.

부스 밖으로 나간 창현이 순규을 보고는 웃음을 지었다.

“져버렸네요, 하하.”

웃음을 짓지만 그것이 어색하다는 것을 순규는 눈치 챘다.

“힘 내.”

지금 해줄 수 있는 말은 그것 뿐.

창현과 순규가 무대 중앙으로 걸어갔고, 박빙이었던 게임에 대해 칭찬을 들으면서 악수를 한다. 오늘 프로게이머의 벽이 높다는 것을 깨닫게 된 날이었다.

멋진 대결을 펼쳤지만 대결의 결과는 3대0. 창현과 순규로서는 무척 아쉬운 순간이 아닐 수 없다.


대회가 끝나고, 대기실 쪽으로 향한 창현과 순규는 돌아갈 준비를 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쉬운 표정을 지은 순규가 기지개를 키며 말한다.

“에휴! 결국 이렇게 되어버렸네.”

“그래도 우승은 했잖아요.”

“그래도… 난 솔직히 프로게이머한테도 이기고 싶었거든.”

솔직히 이길 수 있다 생각했다. 자신의 실력이 부족하지만 창현과 협력하면 시너지 효과가 발휘된다 생각했기에. 하지만 결국 자신의 역량 부족으로 패배하고 말았다.

프로게이머의 벽이 얼마나 높은지 새삼 깨닫게 된 날이었다.

“창현이 넌 정말 아까웠어. 난 네가 이길 줄 알았는데.”

“너무 잘하더라고요. 특히 뮤탈 컨트롤이. 악몽에 나올까 무섭던데요.”

“그렇지? 정말 소름 끼치더라.”

TV에서 볼 때는 별 거 아닌 것처럼 보이다가도 막상 게임을 하게 되면 그 위압감과 실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렇게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대기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일단의 무리가 난입한다.

“재밌었어!”

“멋진 대결이었는데?”

“아쉬웠지만 멋졌어요.”

대기실 안으로 들어온 것은 다름 아닌 소녀들이었다.

그녀들은 각각 위로가 담긴 말을 해줬지만 창현의 반응은 담담함 그 자체였다.

괜히 머쓱해지는 걸 느낀 소녀들은 타겟을 순규로 옮긴다.

“써니! 네가 그렇게 잘할 줄 몰랐어.”

“정말 멋졌어요. 프로게이머와 일전을 벌일 정도의 실력이라니.”

“에헴! 내가 좀 하지. 그동안 실력이 많이 늘었거든.”

멤버들의 칭찬에 어깨를 쭉 피며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는다. 이 추세라면 앞으로도 소녀시대 내에서 자신의 스타크래프트 랭킹은 부동의 위치를 고수할 것이다.

“…….”

그 모습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소녀가 있었으니, 바로 태연이었다.

태연은 자신에게 반기를 들었던 순규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고, 어떻게 하면 골탕을 먹일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다 무언가 떠오른 듯 한순간 표정이 환해지더니, 이내 얼굴에 음흉한 미소가 걸린다.

“흐흐흐! 순규 양?”

“뭐, 뭐야?”

음흉함이 감도는 태연의 표정에 움찔하며 뒤로 물러나는 순규.

태연의 전신에서 음산한 아우라가 번져 나오고 있었다.

그 반응에 신경 쓰지 않은 채 태연이 말한다.

“순규 네가 아까 전에 했던 이야기가 기억나는데 말이야. 아까 우리한테 저녁을 쏘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 그건…….”

태연의 노림수가 무엇인지 알아차린 순규의 표정이 급변한다.

인터뷰를 하다가 자연스럽게 나온 말이었는데 태연이 그것을 기억하고 물고 늘어질지 몰랐던 것이다.

그 말을 들은 소녀들의 표정도 급변하기 시작한다.

안 그래도 창현을 데려와서 이미지를 망친 윤아나 태연은 불만이 팽배한 상태였고, 잠을 자고 있던 수연과 편의점에 갔던 미영, 유리, 그리고 스케줄로 보지 못했던 다른 멤버들도 은연중 벼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건수를 태연이 친절하게 제공해주었다.

“나도 기억이 나네.”

“나도나도! 분명 그랬었어.”

“우리 활력소 써니 양이 산다니 먹어야지.”

“꽃등심으로!”

마지막 악센트를 주며 깔끔하게 마무리하는 꽃등심 애호가 수영의 말에 순규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린다.

“히, 히익!”

점심도 제대로 먹지 않은 멤버들이 꽃등심을 먹게 되면 이건 먹는 수준이 아니라 완전히 들이붓는 수준이 된다.

그렇게 되면 자신은 단숨에 파산날 것임이 분명했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에 순규가 고개를 들려 지원군이 되어줄 창현을 바라본다.

애절한 눈빛이 순규의 눈에서 발산되기 시작한다.

“차, 창현아…….”

지금 이 상황에서 믿을 수 있는 것은 창현밖에 없었다.

순규는 그를 믿었다. 자신을 이 상황에서 구해줄 것이라고!

하지만 순규가 간과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창현은 소녀시대에게 몇차례 식사를 쏜 적이 있다는 것이다.

애절함이 드는 눈빛을 보면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생겨났지만 그보다 더욱 큰 감정이 창현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창현은 고개를 돌려 순규의 시선을 외면했다.

그녀들의 식욕을 감당하려면 제아무리 그더라도 큰 출혈을 감수해야 한다.

한 명만 죽으면 되는데 굳이 두 명이 죽을 이유가 없다.

“미안해요, 누나.”

애절한 눈빛을 보면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아 순규를 외면한 채 말한다.

그 말에 충격을 받은 순규가 비틀거리며 경악한 얼굴로 창현을 바라본다.

“어, 어떻게 네가…….”

“미안해요.”

그 말뿐이었다.

순규는 무어라 더 말하려 했지만, 어느새 다가온 미영과 유리에게 완전히 포박되어서 질질 끌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태연이 창현을 바라보며 말한다.

“창현아, 너도 먹지 않았으면 같이 먹자.”

“그럴까요?”

막판에는 상큼하게 배신까지 때려주는 창현.

“웁웁웁!”

인원이 늘어나는 것을 본 순규가 안된다고 외치려 했지만 입을 틀어막은 유리의 손은 억셌다.

간단하게 김밥천국에서 김밥 한 줄씩 사주고 저녁이라 말하려던 순규의 의도가 원천 봉쇄되고 어느덧 저녁은 초호화 꽃등심과 육회 안심, 등등 초호화 한우 스페셜로 바뀌었다.

양팔과 입을 봉인 당한 순규는 결국 한우전문점으로 끌려가야 했고, 멤버들이 먹어치우는 꽃등심의 양을 보고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갔다.

거기에 창현까지 가세하니, 접시는 산처럼 쌓여가기 시작했다.

이대로 가면 파산이라는 생각에 순규가 매니저에게 간절한 눈빛으로 말한다.

“오, 오빠! 우리 우승상금으로 계산하면 안되요?”

“그거 이미 기부했는데?”

“…….”

요즘은 초고속 기부도 가능한 세상이었다.

마지막 희망까지 사라진 순규의 얼굴에 절망이 서렸다.

‘자, 장기를 팔아야 하나?’

계산을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해지는 순규였다.




제87장 친구는 많을수록 좋고, 적은 적을수록 좋다




스타크래프트 대회가 성공리에 끝나고, 창현은 다시 일상생활로 돌아왔다.

프로게이머 못지않은 기량을 보여준 창현과 뛰어난 실력을 보인 순규에 대한 기사는 상당히 많았다.

일각에서 서로 연애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 나왔지만 그 의견은 그야 말로 극소수에 가까웠고, 두 사람의 행동이 연인보다는 친한 누나 동생에 가까웠기에 별다른 말이 나오지 않았다.

SM엔터테인먼트가 마지막 고지를 남겨두고 한 발자국 물러선 것이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떼면 그때부터는 서로 얼굴을 붉힐 수 있는 영역이었으니까.

“SM엔터테인먼트에 가보라고요?”

“그래.”

창현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는 석규였다.

두 개의 앨범으로 나눈 프로젝트 앨범 4집 중 4-A 앨범 활동이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원래 예정대로라면 최소 세 달에서 많게는 반년 정도를 활동해야 했지만 프로젝트 앨범은 각각 4-A와 4-B로 나뉘어 있었고, 타이틀곡 또한 각각 달랐다.

게다가 10월 말까지 활동한 뒤 창현은 미국으로 갈 예정이었기에 활동 기간이 그리 많지 않은 상황이었다.

때문에 4-A앨범 활동을 접고, 4-B 앨범 활동을 위해 준비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 와중에 석규가 창현에게 SM엔터테인먼트로 가라는 이야기를 한 것이다.

“갑자기 거기는 왜요?”

“가면 이수만 회장님이 이야기를 해주실 게다. 별다른 건 아니니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가라고 하면 가야겠지만.”

별다른 일이 아니라는 말에 순순히 납득하는 창현이었다.

하지만 무슨 일 때문에 자신을 보내려는 것인지 솔직히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석규는 끝까지 말해주지 않았다.

결국 창현은 SM엔터테인먼트로 향해서 의문을 풀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안 피곤해?”

“뭐가요?”

SM엔터테인먼트로 가기 위해 벤에 탄 창현에게 세희가 뜬금없이 피곤 유무에 대해 묻는다.

의아한 표정을 지은 채 창현이 묻자, 세희가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어제 그렇게 게임을 하고 달렸잖아. 피곤할 법도 한데?”

“누나는 제가 그 정도로 피곤할 것 같아요? 아! 누구랑은 달라서 제가 아직 체력 하나는 으뜸이죠. 누구랑은 나이 차이가 벌써… 악!”

돌연 장난기 어린 표정을 지은 채 세희에게 눈치를 팍팍 주며 말하던 창현은 팔뚝을 꼬집히자 비명을 지른다.

나이 공격에 발끈한 세희가 눈부신 속도로 팔뚝을 꼬집어 비튼 것이다.

값비싼 스타였지만 세희에게 있어서는 자신을 놀리는 간악한 녀석에 불과했다.

“장난 좀 한 거 가지고.”

“그런 장난 한 번 더 하면 알지?”

“…알았어요.”

날카롭게 눈을 뜬 세희의 눈은 마치 살쾡이를 연상시키는 것 같아 창현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어진 것은 잠깐의 침묵.

그것을 참지 못한 창현이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다가 세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근데 누나는 알고 있어요?”

“뭘?”

“제가 SM엔터테인먼트로 가는 거요.”

“아니. 나도 사장님에게 이야기를 듣지 못했어.”

고개를 젓는 세희를 보며 창현은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했지만 선뜻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뭐지. 아버지는 괜히 궁금하게 만들고.”

머리를 긁적이는 창현이었다. 머리 스타일 헝클어진다고 말하며 세희가 날카롭게 바라보자 바로 손을 떼어야 했지만.

요즘 들어 단속이 점점 심해지는 세희를 보면 창현은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에휴!’

아무리 생각해봐도 뭔지 떠오를 것 같지 않으니 그냥 의자에 몸을 묻고 눈을 감아버린다.


SM엔터테인먼트는 동방신기와 슈퍼주니어의 폭발적인 인기로 인해 항상 팬들이 북적거리고는 했다. 때문에 조용히 차를 몰아 SM엔터테인먼트 지하 주차장에 차를 주차해놓은 뒤 건물 안으로 진입했다.

“규모에 비하면 여기도 상당히 허름한 거 같아요.”

“근데 그건 우리 회사도 마찬가지잖아.”

“그건 그렇죠? 하하!”

뭐라 하기 전에 자신부터 돌아봐야 한다고, 여기가 허름하다면 AA엔터테인먼트는 그야 말로 다 쓰러져 가는 폐가 수준이었다.

리모델링을 하자고 해도 석규는 조만간 할 거라는 말밖에 하지 않았고, 나중에는 그냥 이대로도 좋으려니 하고 포기해버린 상태였다.

“난 여기까지. 회장님은 창현이 너만 만나기로 되어 있어.”

카운터에서 이야기를 한 세희가 말하자 창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묻는다.

“그래요? 그럼 누나는 어쩌고요?”

“손님들이 쉴 수 있는 곳에 데려다 준다네? 난 좀 편히 쉬고 있을 테니까 일 보고 와.”

“알았어요.”

“시간 걱정할 필요 없으니까 제대로, 확실하게 끝내야 해.”

행여나 자신이 기다릴 걸 염두에 두고 서둘로 돌아올 것을 염려해 강조하듯 말하는 세희였다.

“네네.”

고개를 끄덕인 창현이 그대로 엘리베이터에 향한다. 같이 엘리베이터에 탄 SM엔터테인먼트 직원들은 창현의 얼굴을 보고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짓는다. 그러다 그가 회장실이 있는 층을 누르는 걸 보고는 무언가 일이 있어 왔겠거니 한다.

좋은 점이 있다면 팬이라고 접근하는 사람이 없다는 거랄까.

회장실에 도착한 창현은 곧장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어서 오게.”

“예, 안녕하세요.”

거대 기획사의 사장과 함께 있지만 그리 어색하지는 않다. 그만큼 얼굴을 익혀놓았고, 창현이 어느 정도 위치에 있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 자체가 익숙해졌다는 이야기이리라.

“음, 바쁜 사람을 여기까지 오라고 해서 미안하군.”

“스케줄도 없던 걸요. 게다가 아버지가 가보라고 한 것도 있고요.”

“그래? 하하! 강 사장님에게 신세를 졌군.”

창현을 이곳으로 청한 것은 다름 아닌 수만이었다. 그 뒤에 석규가 있었으니, 이번 건으로 신세를 끼친 셈이었다.

그 대가로 SM엔터테인먼트가 무언가를 해줘야 할 테지만 그로 인해 두 기획사의 교류는 더욱 원활한 것처럼 보일 테니, 수만의 입장에서 손해가 아니었다.

“이곳으로 청한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부탁할 것이 있어서라네.”

“아무리 물어봐도 아버지가 알려주지 않더라고요. 무엇 때문에 그런 거죠?”

“아, 그건 아무래도 이번 일이 현 군의 허락이 필요해서 그런 걸 테지. 이쪽에서 부탁을 해야 하는 것이거든.”

“부탁이라… 먼저 들어보고 결정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창현은 석규와 달리 협상 같은 것에 능하지 못한다.

상대방의 심리, 사정 등을 꿰뚫어 보고, 탁월한 안목으로 결정을 내려야 하는 협상은 아직 어린 창현이 최적의 결과를 이끌어내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적어도 신중하게 결정을 내릴 줄은 알았다.

뭘 하려면 설사 입으로 내뱉은 말이라 하더라도 나중에 발목을 잡힐 수 있기에 말 한마디 한마디도 신중하게 해야했다.

“음! 우리가 부탁하고 싶은 것은 현 군의 미국 스케줄과 관련이 있다네?”

“미국 스케줄이요?”

석규가 언론에다가 미국 진출에 대한 것을 어느 정도 알려두기는 했지만 구체적인 일정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렇기 때문에 수만 또한 갖고 있는 정보가 한정적일 터.

“이번에 미국 진출을 하게 되면 어느 정도 머물지 물어봐도 되겠나?”

“음, 구체적인 건 정해지지 않았고, 일단 올해 끝날 때까지는 있을 것 같아요.”

계속해서 미국 활동을 하면 그만큼 벌어들이는 돈도 많을 테지만 어린 나이부터 성공에 너무 집착하기 싫었다. 음식도, 문화도, 사람도 모두 한국에 맞는 한국 사람이었기에 미국에 오래 있는 것보다 한국에 머물며 자신을 기다려주는 팬들을 위해 미국에 가는 것이 더 좋았다.

그 이면에는 수만에게 함부로 확실한 정보를 줄 수 없다는 계산이 깔려있지만.

그걸 알고 있다는 듯 수만은 입가에 미소를 짓는다.

“하하! 그렇군. 올해라, 그럼 얼추 시기가 맞겠어. 내가 제안하려고 하는 건 말이네, 현 군이 미국 진출을 하게 되면 콘서트를 열 것 같아서 말이지.”

“아무래도 그렇겠죠?”

“그럼 그 일정이 정해지면 우리와 어느 정도 합작을 할 수 없겠나?”

“합작이요?”

“아아, 우리 소속사 가수들을 콘서트에 참가시켜달라는 게 아니라, 이번에 촬영할 프로그램에서 미국으로 가게 될 때 현 군의 힘이 조금 필요해서 말이지.”

“일종의 협력이군요. 협력하는 건 어렵지 않지만…….”

말끝을 흐리는 창현이다. 함부로 결정하기 어려운 사항이니 만큼 독단으로 결정을 내리기 힘들었다.

“결정 부분에 대해서는 강 사장님이 현 군에게 다 맡긴다고 했지. 그러니 현 군이 결정을 내리기만 하면 된다네.”

“제 결정이라…….”

그 말에도 불구하고 창현은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누군가의 결정에 의존하다가 막상 자신이 결정권을 얻게 되면 그 사람은 자신의 선택에 대해 불안함을 갖게 된다. 만약 잘못 선택할 경우 모든 책임이 자신에게 돌아오기 때문이다.

“조금 생각해보면 안 될까요?”

자신에게 오는 손해는 없지만 반대로 자신에게 오는 이익도 없다.

“생각해봐도 상관없지. 하지만 가급적 빠르게 결정을 내려주었으면 좋겠네. 왜냐면 자칫 잘못할 경우 소녀시대가 해체될 수 있거든.”

“……소녀시대가요?”

수만의 말에 경악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창현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수만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맺히기 시작했다.


“무슨 말씀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음! 내부 사항이라 이야기하기 어렵지만 협력을 구해야 하는 처지니 간략하게 이야기 하도록 하겠네.”

수만의 이야기는 간단한 것이었다. SM엔터테인먼트에서 소녀시대에 투자하는 만큼의 이익이 나지 않는다는 이야기였다.

그 어떠한 회사도 적자를 바라고 운영하는 곳이 없다. 소녀시대가 데뷔한지 일 년이 지났고, 팬들도 착실히 쌓아가는 지금 서서히 흑자로 돌아서야 하는데 여전히 적자를 보고 있으니 회사 내에서 말이 많다는 것이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창현이 반색하며 말했다.

“제가 알기로 인기가 적은 편이 아닌데…….”

“적은 편은 아니지. 개개인의 멤버들은 인지도가 무척 높아졌지. 하지만 그에 비해 소녀시대라는 그룹 자체의 인지도는 높아지지가 않아. 참 이상한 일이지.”

개개인의 인지도를 착실하게 쌓아나가고 있다. 특히 윤아는 드라마로 이름을 널리 알렸고, 태연은 라디오를 통해, 미영은 광고와 MC를 보며 알려졌고, 수연도 최근에 창현의 뮤직비디오에 출연하면서 인지도를 쌓았다.

그리고 바로 어제, 순규가 스타크래프트 대회에 나가면서 인지도를 쌓는데 성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녀시대 자체의 인지도는 큰 성장을 이루지 못했다.

전략 기획부조차 의아할 정도로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군요. 회사가 적자를 보는 건 말도 안 되는 거니깐요.”

“그렇다네. 차라리 그룹을 해체하고 개별 활동을 시키자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니까. 총 책임자는 나지만 어른의 사정이 복잡하게 얽혀 있으니 말이네. 그들의 의견을 무시할 수 없지.”

“으음. 구체적으로 뭘 합작하는 건지 이야기를 들어봐도 될까요?”

“지금 소녀시대가 촬영하고 있는 게 있다네. 그리고 앨범을 준비하고 있고. 거기에 소녀시대의 사활을 걸 생각이라네. 여기에서 여태까지 쌓아온 것이 제대로 터지면 계속해서 그룹 생활을 이어나갈 것이고, 만약 실패를 하게 되면 그룹을 해체한 뒤 개개인 단위로 흩어지겠지.”

“……."

조용히 침묵하는 창현이었다.

소녀시대가 해체 된 누나들이라.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에 무척 낯설게 느껴졌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잘 되었으면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가지만 더 물어볼게요. 아버지는 회장님의 제안을 어떻게 생각하셨죠?”

어린 나이에 큰 결단을 내린다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

도와주고 싶은 생각이 컸지만 창현은 자신의 판단이 잘못될 수 있다는 것을 지우지 못했다.

그래서 수만에게 물었다. 석규는 어떠한 반응을 보였는지.

긍정적이다, 부정적이다, 이런 건 상관없다. 그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만 알면 된다.

그 물음에 수만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현 군이 이곳에 온 것, 그것이 강 사장님의 대답이라는 걸로 모든 게 설명이 되겠군.”

“그렇군요.”

고개를 끄덕이는 창현.

직감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이곳이 자신을 시험하는 무대라는 것을. 석규는 자신을 이곳으로 보내 어느 쪽이든 결정을 하게 한 뒤 그 부분에 대한 책임을 지게 할 생각이었다.

언제까지 아버지의 품에서 먹이만 받아먹을 수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그 의도를 알아차린 창현은 입가에 미소를 짓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무슨 뜻인지 알겠네요. 좋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제가 도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정말인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하는 창현을 보며 수만이 눈을 크게 뜬다. 쉬워도 너무 쉽게 허락하는 것이 아닌가?

“제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면 친한 사람들을 위해 한 번쯤 도움을 주고 싶네요. 미국에 가더라도 스케줄을 며칠 동안은 느슨하게 해놓으면 되니까요.”

“스케줄에 이상이 생길 수도 있지 않나?”

“회장님, 미국에서 제 위치가 어느 정도라 생각하시죠?”

“…….”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창현이 묻자, 수만은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지금에서야 깨달은 것이다. 눈앞에 있는 소년은 자신의 뜻대로 휘두를 수 있는 장기말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통하는 아티스트라는 것을.

그가 그렇게 할 의향이 있으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거기에 어떠한 이견도 필요치 않는다.

“내가 실수를 했군.”

“딱히 실수는 아니었어요.”

“이해해주니 고맙네. 그럼 그렇게 알고 있겠네. 하하!”

“그렇게 하도록 하죠. 음! 누나들은 연습실에 있나요?”

이야기는 모두 끝났다. 돌아가는 길에 소녀들을 보고 갈까 싶어 묻자, 수만이 고개를 끄덕인다.

“마침 연습실에 있지. 만나려면 만나도 좋네. 어제 순규가 신세를 졌다고 들었으니까.”

“하하!”

수만의 인사에 창현은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어제는 정말 도와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소녀들이 반강제적으로 순규를 끌고 간 다음 한우를 무지막지하게 먹어댔으니까.

그것을 보며 얼굴이 푸르죽죽하게 변하던 순규의 얼굴이 아직까지 떠올린다. 그리고 계산할 때쯤이 되자, 가게 주인에게 다가가 ‘장기도 받아주나요?’ 라고 할 때 하마터면 넋을 놓을 뻔했다.

결국 창현이 식신시대의 식사값을 지불하고 말았다.

안그러면 순규는 정말로 장기를 팔 기세였다.

“그럼 저는 일어나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정말 고맙네. 이 은혜는 잊지 않을 거야.”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제 아버지에게 이야기를 해주세요. 어린 저는 어른들의 일을 잘 모르니까요.”

“그러도록 하지. 하하!”

결정을 내렸지만 아직까지 이 부분에 끼어드는 것이 어색한 창현은 뒷일을 석규에게 떠넘겼다.

자리에서 일어난 창현이 들고 온 가방을 뒤적이더니 무언가를 꺼내 수만에게 내민다.

“그리고 이건 선물입니다.”

“이건?”

“곧 있으면 발매될 4-B 앨범이에요. 완성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회장님께 드리라고 하더라고요.”

“이런 걸 다. 고맙네.”

“그럼 전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창현은 그대로 회장실을 벗어난다.

그를 배웅한 수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앨범을 개봉한 뒤 CD를 넣고 노래를 감상하기 시작한다.

가장 먼저 수록된 곡은 4-B의 타이틀곡이라 알려진 <Devil Cry>였다.

악마의 울음이라 칭해지는 두 번째 곡.

잔잔하게 흘러드는 멜로디에 이어 섬뜩함이 드는 분위기 전환과 동시에 음울하게 젖어들자, 한순간 소름이 돋고 말았다.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닌, 단순히 귀로 듣는 것인데 마치 노래가 자신의 감정을 조종하는 듯한 느낌이었으니까.

섬뜩한 느낌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수만이 작게 중얼거린다.

“현이라, 현…….”

닦으면 닦아낼수록 빛나는 그의 재능.

절대 놓칠 수 없다는 생각이 수만의 뇌리를 지배해나가기 시작했다.


회장실을 나선 창현은 곧장 연습실로 걸음을 옮겼다.

명예직에 가깝기는 해도 창현은 SM엔터테인먼트의 프로듀서라는 자리를 맡고 있다. 회사를 자유로이 다닐 수 있는 직함이 있었기에 누구의 제지도 받지 않고 움직일 수 있었다.

“위층은 연습실이고… 아래층인가?”

비상구로 나와 아래층으로 걸음을 옮기던 창현은 순간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야 했다.

“창현 오빠!”

“응?”

고개를 돌린 창현은 순간 자신에게 다가오는 한 소녀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소녀의 정체를 확인하자,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수정이구나, 안녕.”

“안녕하세요! 그런데 오빠가 이곳에 어쩐 일로?”

“업무적인 일로 왔어. 온 김에 잠깐 누나들 좀 보고 가려고 했지.”

“와! 언니들은 보고 가려 했으면서 나는 안 보고 가려 했어? 오빠 나빴다.”

“하하하, 미안하다.”

실망한 표정을 짓는 수정을 보며 창현은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아니에요, 그럴 수도 있지. 마침 언니들도 휴식 시간일 거예요. 가보려면 어서 가보세요.”

“그래야지. 그런데 같이 온 분도 좀 챙겨줘야지?”

“응? 아! 빅 엄마!”

“빅 엄마?”

엄마라기에는 너무 젊고 예쁜 여자였다.

의아한 표정을 지은 창현이 고개를 갸웃하자, 수정이 어색하게 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헤헤, 제가 실수했네요. 이 언니의 예명이 빅토리아에요. 이름은 송치엔. 언니! 이 오빠 아시죠?”

“어? 어어! 모를 리가 없지.”

어색한 어투로 흘러나오는 한국말. 그것은 인상이 찌푸려지기보다 하나의 매력으로 작용하는 것 같아 창현은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현입니다.”

“아, 아, 안녕하세요. 송치엔입니다.”

허둥지둥 인사하는 그녀의 모습이 재미있었다.

자신보다 확실히 연상이란 느낌이 들었지만 행동은 마치 여동생 같은 느낌이 들었으니까.

빅토리아는 뜬금없이 회사 안에서 현을 만나자 어안이 벙벙했다.

평소 그토록 만나고 싶어 하던 이와의 만남이 아닌가?

팬으로서 한 번쯤 꼭 만나보고 싶었기에 그녀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눈치 빠른 수정이 그 반응을 놓칠 리 없다.

‘이거 위험한데.’

언니를 팍팍 밀어주겠다고 한 이상 미래의 경쟁자는 미리 떼어두는 게 좋았다.

수정은 양팔로 낑낑 빅토리아를 밀며 창현에게 말한다.

“아! 좀 더 자세히 소개시켜주고 싶었는데 이만 가야되네. 빅 엄마! 제가 다음에 창현 오빠 제대로 소개시켜드릴게요.”

“응, 그래. 나도 그럼 내려 가볼게. 다음에 뵙겠습니다.”

“네? 네.”

빅토리아는 뭔가 더 이야기 하고 싶은 표정이 간절했지만 수정에게 질질 끌려가버리고 말았다.

자신보다 월등히 큰 빅토리아를 끌고 가는데 수정은 모든 힘을 소모하고 말았다.

‘언니, 내 공을 잊으면 안 돼.’

이렇게 팍팍 밀어주고 있었지만 정작 수연은 숙소 내에서 싴순이 취급당하며 태연에게 구박을 당하고 있었다.

여동생의 지원이 이뤄지지만 슬픈 현실에 놓여있는 수연이었다.

아래층으로 내려간 창현은 소녀시대 전용 연습실을 발견하고는 가만히 귀를 기울인다. 음악소리가 들리지 않는 걸로 보아 수정의 말처럼 휴식을 취하고 있는 듯했다.

“차, 창현아.”

“응?”

밖에서 노크를 하려던 창현은 순간 멈칫하며 시선을 옮긴다.

그곳에는 양손에 봉지를 가득 든 수연의 모습에 눈에 들어왔다. 봉지에는 무거운 음료수가 가득 담겨 있었다.

“아, 수연 누나. 그건 뭐에요?”

“응? 이, 이건… 가위바위보 져서…….”

차마 하찮싴이 되어 생전 해보지도 않았던 음료수 심부름을 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없는 수연이었다. 언제나 시키는 입장에서 하는 입장이 되어버린 걸 말하는 것만큼 부끄러운 것은 없을 테니까.

그 순간 수연의 머리가 맹렬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여자의 매력은 연약함을 보여줄 때 배가 된다. 여자의 연약함은 남자의 보호 본능을 불러일으키며, 그것은 곧 연애의 필수 포인트가 될 것이다.]

‘남녀간에 밀고 당기기 100가지 비법. 167쪽 제9장. 남자의 마음을 단번에 휘어잡기, 7줄에서 12줄까지’

얼마나 많이 읽었던지 정확한 책의 정보가 떠오른다.

그와 함께 비닐을 쥔 손에 힘을 풀며 몸을 휘청인다.

“괜찮아요?”

수연의 모습에 화들짝 놀라 다가오는 창현.

그 빈틈을 파고드는 수연의 절묘한 폭풍 애교가 작렬한다.

“무거워, 히잉.”

“…무거울 텐데. 제가 들어드릴게요.”

잠깐의 침묵 후 창현이 봉지를 들어준다. 호리호리하지만 힘 하나만큼은 무척 세기에 음료수를 번쩍 든다. 이 정도면 여자 혼자서 들기 힘들 정도로 무척 무거웠다.

‘됐어.’

자신의 연약함이 충분히 어필 되었을 터.

속으로 미소를 지은 수연이 입을 연다.

“고마워, 그런데 여긴 어쩐 일이야?”

“잠깐 일 때문에 왔다가 누나들 보려고 들렸죠. 음악 소리가 들리지 않는데 휴식 시간인가 봐요?”

“그렇지, 뭐.”

일부러 음료수를 사오지 않은 채 자신을 시켰으니까.

순간 눈에 불길이 일어나던 수연이 무언가 떠오른 듯 입가에 미소를 짓더니 말한다.

“그럼 들어갈까?”

“네.”

창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수연이 곧장 연습실 문을 연다.

그러자 후각을 자극하는 퀴퀴한 땀 냄새. 그리고 시각으로 스며드는 널브러진 소녀들의 자태.

수연이 먼저 들어오자, 대자로 퍼진 탱통령 태연이 외친다.

“왜 이렇게 늦은 거야! 이 싴…….”

싴순이라 외치려던 태연은 순간 얼음이 되고 말았다.

옆에 누워있던 미영은 그 모습을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태연이 바라보는 곳으로 시선을 옮긴다.

“왜 그래, 태연아? 꺄악!”

“뭐, 뭐야! 왜 그래!”

미영의 비명에 소녀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난 뒤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으로 고개를 돌린다.

“안녕하세요.”

어색하게 미소를 짓고 있는 창현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양손 가득 음료수를 든 채로.

창현을 본 소녀들은 조용히 자신의 모습을 살핀다.

땀에 절은 채 머리는 산발이 되고, 메이크업도 하지 않은 자신의 모습은 그야 말로…….

“꺄아아악!”

단체로 비명을 지르는 소녀들이었다.

오늘, 그녀들은 창현에게 본(?) 모습을 들키고 말았다.


꺄아아악!

뇌리를 울리는 날카로운 고음이 연습실에 울려 퍼진다.

그 진원지에는 창현과 수연이 서 있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태연에게 싴순이 취급을 당하며 연습생 시절에도 해보지 않았던 음료수 심부름을 하게 된 수연.

바깥에 나가야 했기에 수연은 연습 후 적당히 꾸밀 수 있었지만 다른 멤버들은 전혀 아니었다.

고된 연습 이후 땀 냄새를 풍기며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것이 그녀들의 상황이었다.

“뭐, 뭐여! 왜 창현이 네가 여기 있는 거여?”

“What? what?"

당황한 태연의 입에서는 전라도 특유의 억양이 배어나오고 있었고, 미영 또한 제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방황하고 있었다.

그만큼 창현의 기습 방문은 그녀들의 머리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당황하던 태연의 시선이 순간 수연에게 향한다. 자신을 제외한 다른 멤버들의 굴욕적인 모습을 창현이 목격하게 되자 그녀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예쁜 모습을 보여주는 건 실패했지만 다른 멤버들의 충격적인(?) 민낯을 보여주는데 성공했으니 이로써 자신의 독주가 시작될 것이다.

날카롭게 작렬하는 태연의 눈빛을 받아내며 수연이 말한다.

“여기 앞에서 만났어.”

“잠깐 볼 일이 있어서 오게 되었거든요. 그리고 회장님이 누나들을 한 번 보고 가는 게 좋다고 말씀하셔서 왔는데, 하하하!”

그 뒤에는 차마 뭐라고 말을 하지 못하는 창현이었다.

사실 민낯에다가 땀에 푹 절어있는 모습이 흉하지 않았지만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다른 법이니까.

“으윽! 너 거기서 꼼짝 마!”

창현의 말에 신음을 흘린 태연이 뒤로 시선을 돌리자, 이미 몇몇 멤버들은 발 빠르게 탈의실로 향하고 있었다.

저곳에 들어간 뒤 잠시 후면 변신을 마치고 나올 것이라.

“이 치사한!”

자신을 버리고 대부분의 멤버들이 탈의실로 들어간 걸 본 태연이 재빨리 뛰어간다.

입가에 어색한 미소를 매달고 있는 창현에게 수연이 말한다.

“이해해. 원래 스케줄을 하지 않으면 저러거든.”

“하하하.”

그저 웃음만 흘리는 창현이었다.

이제 메이크업이 끝날 때까지 자신과 둘만의 시간을 갖게 될 터.

‘후후, 이 정도쯤이야.’

모든 게 자신의 뜻대로 돌아가는 것 같아 수연은 미소를 지었다. 마치 미영과 유리의 두뇌가 자신에게 빙의된 듯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일은 생각보다 쉽게 풀리지 않았다.

가장 먼저 모습을 감췄던 존재감 무의 존재가 탈의실 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냈던 것.

“창현아 안녕?”

“어, 주현 누나.”

탈의실 밖으로 나온 사람은 다름 아닌 주현이었다.

그녀 또한 연습실 안으로 들어서는 창현을 보고 화들짝 놀랐지만 행동은 더욱 빨랐다. 재빨리 탈의실로 피한 그녀는 간단한 응급조치를 취했고, 수연의 빈집털이를 막기 위해 광속으로 나왔다.

“으윽!”

자신의 예상을 뛰어넘는 주현의 행동력에 신음을 흘리는 수연. 그리고 날카로운 눈으로 주현을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보지 못한 척 고개를 돌렸다.

하찮아진 싴순이는 이제 막내조차 버거워질 정도로 약해져 있었다.

“괜히 폐를 끼쳤네요. 열심히 연습하고 있는 사람들한테…….”

휴식시간이라는 말이 거리낌 없이 들어간 것인데

“아냐, 안 그래도 언니들한테 너무 퍼져 있는 게 아니냐고 말했거든. 오히려 창현이의 방문이 앞으로 언니들의 행동가짐을 좀 더 조심스럽게 만들어줄 수 있을 것 같아.”

“그래요? 그렇게 되면 괜찮겠지만…….”

“그런 거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알았어요.”

강하게 말하는 주현을 보며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창현이었다.

그리고 이야기가 끊기자, 조용히 연습실을 둘러본다. 예전에도 방문한 적이 있지만 그때는 연습을 하던 도중이 아닌, 사전답사 형태에 가까웠다. 그때와 지금 눈에 들어오는 건 같았지만 느껴지는 것은 달랐다.

좀 더 활동적이고, 사람 사는 냄새가 느껴지고 있었다.

땀 냄새가 결정적이었지만.

“그런데 무슨 일로 온 거야?”

“예? 아, 업무차 볼 일이 있어서 오게 됐어요. 그러다 그냥 가기 아쉬워서 오게 된 거고요.”

“그렇구나.”

4집 앨범을 발매한 이후 창현의 스케줄은 점점 바빠지고 있었기에 이렇게 개인적으로 방문하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었다.

어제 스타크래프트 대회에 출연한 것이 이례적이라는 평가를 들을 정도였다.

창현과 주현의 이야기가 진행되자, 그것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수연이 흐름을 끊는다.

“막내야, 음료수 마셔.”

“네? 네.”

“창현이도 마셔. 나를 위해 들어준 보상이야.”

“네, 감사합니다.”

일부러 들어줬다는 것을 강조하며 음료수를 내미는 수연이었다. 순간 주현의 눈이 날카로워졌지만, 수연은 그 반응에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음료수를 들며 시간을 보내자, 탈의실 안으로 들어갔던 멤버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낸다.

가장 먼저 나온 것은 순규였다. 한 듯 안 한 듯 자연스러운 메이크업으로 모습을 드러낸 그녀는 창현을 바라보며 말한다.

“갑자기 무슨 일로 방문한 거야?”

“그냥요. 그런데 누나는 표정이 밝네요?”

“응? 뭐가?”

“어제 장기를 팔아도 되냐고 말했던 사람 같지 않아서요.”

“푸하하하!”

창현의 말에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수연이 빵 터져버리고 말았다.

어제 한우 전문점에서 천문학적으로 쌓인 계산서를 보고 파랗게 질린 순규가 가게 주인에게 장기도 받아주냐고 말했던 것이 떠올랐던 것이다.

한 번 스위치가 켜지면 좀처럼 꺼질 줄 모르는 수연은 바닥에 털퍼덕 쓰러져 뒹굴기 시작했다.

“터졌네요.”

“우씨! 그건 말하지 말라고!”

얼굴이 붉어진 순규가 버럭하며 역정을 낸다. 어제 있었던 일은 그녀에게 있어 일생일대의 굴욕과도 같은 날이었다.

말 한마디 실수한 것으로 엄청난 덤터기를 쓸 뻔했으니까.

창현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정말로 장기를 팔아야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순규와 이야기를 나누던 창현은 탈의실 쪽으로 시선을 옮기더니 말한다.

“그런데 정말 일이 커지는 거 아니에요? 전 그냥 간단하게 인사만 하고 가려 했는데.”

“뭐 지네들이 알아서하겠지.”

전혀 신경 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순규의 말에 창현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 사이, 변신(?)을 마친 소녀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낸다. 평소 만날 때 모습 그대로 갖춘 소녀들은 방금 전 스크림을 연상시키던 비명을 숨겨둔 채 평상시 행동을 보이고 있었다.

“갑자기 들어오면 깜짝 놀라잖아.”

어느새 전라도 억양을 갈무리한 태연이 차분한 어조로 말한다.

확연하게 변한 모습에 창현이 미소 지었다.

“하하! 미안해요. 하지만 민낯도 괜찮던 걸요.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되는데요.”

“그렇게 말하면 좋지만, 우리는 안 괜찮아.”

변신을 마친 소녀들은 트레이닝복을 입은 채 자리에 둘러앉기 시작했다.

“이거, 간단하게 인사 좀 하려고 했는데 일이 커지는 기분인데요?”

“그런 거야? 그렇다면야 뭐…….”

창현의 말에 아쉬운 표정을 짓지만 후회는 하지 않았다. 여자라면 어느 때나 완벽한 변신을 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방금 전 깨달을 수 있었으니까.

몸으로 직접 겪었기에 앞으로 두 번 다시 실수하지 않을 자신이 생겼다.

“그런데 무슨 일로 회사에 온 거야?”

“업무적인 일 때문에요. 아마 조만간 회장님이 말씀해주실지도?”

“그렇구나.”

미영의 물음에 창현이 두루뭉술하게 대답한다.

아직 자신들이 알아서 안된다는 걸 알아차린 미영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다.

많은 것을 알려고 들면 이 바닥에서 오래 살아남기 힘들다.

아는 건 알더라도 필요 없는 건 과감히 넘기는 기술이 필요했다.

간단하게 음료수를 마시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눈다.

창현이 말했던 것처럼 찾아온 데 별다른 이유가 존재하지 않은 듯했다.

“휴식 시간 끝났죠?”

“응? 5분 더 있으면 끝날 거 같아.”

수연의 대답에 창현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한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도록 할게요.”

“벌써?”

아쉬운 표정을 짓는 소녀들이었다. 올 때는 발칵 뒤집어놓고 갈 때는 홀연히 사라지겠다고 하니 그녀들로서는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 다음에 기회가 되면 만나요.”

그렇게 말한 창현이 연습실을 나서려 할 때, 무언가 떠오른 게 있는 듯 소녀들을 향해 시선을 옮기며 입을 연다.

“아! 효연 누나.”

“응? 엉? 나?”

“네. 누나요. 왜 그렇게 놀라요.”

갑작스러운 자신의 지명이 당혹스러웠는지 효연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창현이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저번에 맡겨놓은 거 돌려드리려고 하는데 주차장까지 배웅 좀 해주시겠어요?”

“맡겨놓은 거?”

자신은 맡겨놓은 게 없는데 맡겨놓은 걸 돌려준다니?

의아한 마음이 들었지만 의미심장하게 들리는 창현의 말에 효연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여태까지 창현 쟁탈전에 참가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던 효연. 평소에는 모호한 모습을 보였지만 도전 1000곡에 출연할 때 자발적으로 다른 프로그램을 선택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그것 때문인지 다른 소녀들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서로 견제하기 바빴지만 효연은 제외대상이었던 것.

이것이 후일 얼마나 큰 오류로 나타날지 그녀들은 알지 못했다.

창현과 효연이 함께 연습실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창현과 함께 연습실 밖으로 나온 효연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갑자기 왜? 난 너한테 맡긴 게 없는데.”

“맡긴 건 없는데 제가 줄 게 있거든요. 아무래도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 다른 누나들도 같이 나올 것 같아서요.”

“그거야 그렇지.”

멤버들의 습성을 파악하고 있기에 효연은 창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충분히 따라오고도 남을 녀석들이었다.

“그런데 뭘 주려고?”

“하하! 그건 그때의 재미를 위해 숨겨두도록 할께요.”

그러면서 효연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타는 창현이었다.

창현이 누르는 층을 본 효연이 그를 제지하며 말한다.

“어? 거긴 주차장이 아닌데?”

“아래층에 세희 누나가 있거든요. 같이 온 터라 데리고 와야죠.”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인 효연이 손을 거뒀고, 1층에 도착한 창현은 효연과 내린 뒤 곧장 핸드폰을 열어 연락을 시도했다.

“여보세요? 네, 일 모두 끝났어요. 지금 1층이요. 누나랑 같이 가려고 기다리고 있으니까 엘리베이터 있는 쪽으로 오세요. 알았어요.”

통화를 끝낸 창현이 핸드폰을 덮었고, 잠시 후, 세희가 저쪽에서 다가온다.

그리고는 효연을 본 뒤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손을 든다.

“안녕, 효연아.”

“안녕하세요, 언니.”

“응, 그런데 창현이랑 함께 내려와 있네?”

“창현이가 뭐 줄 게 있다고 해서요.”

“그래? 아항! 그게 그거였구나.”

의아한 표정을 짓던 세희가 무언가 떠오른 듯 입가에 미소를 짓더니, 묘한 미소를 머금고 창현을 바라본다.

그 미소에 창현이 눈썹을 찌푸린다.

“갑자기 그 표정은 뭐예요.”

“내가 뭘?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그렇게 말하지만 지켜보는 입장에서 기분이 그리 좋지 않았다.

은근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세희의 모습에 표정을 찌푸리는 창현. 그리고는 아무 말없이 엘리베이터에 탑승하여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간다.

로드 매니저가 도착하길 기다리며, 창현은 효연을 바라보며 말한다.

“누나 잠깐만 여기서 기다려주세요. 물건 가지고 올게요.”

“으응.”

방금 전까지 묵묵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기에 효연은 분위기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창현은 세희와 함께 벤으로 향했고, 잠시 후, 창현이 무언가를 들고 온다.

네모난 박스와 지관통을 가지고 온 창현은 그것을 효연에게 내민다.

“이거 받아요.”

“엉? 이게 뭐야?”

의아한 표정을 지은 효연이 그것을 받아든다. 네모난 상자는 그리 크지 않았다. 크기로 따지면 책 정도? 안에 덜컹거리는 것으로 보아 무언가 내용물이 있는 듯했다.

그리고 창현이 내민 지관통은 무슨 브로마이드나 포스터 같은 것인 듯했다.

차례차례 그것을 받아들자 창현이 입가에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하하! 늦어서 미안해요. 그건 누나 생일 선물이에요.”

“생일 선물?”

뜬금없는 창현의 말에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은 채 그를 바라본다.

고개를 끄덕인 창현이 말한다.

“네, 제가 저번 주 누나 생일 때 선물을 드리지 못했잖아요. 그 날 스케줄이 너무 바빠서 도저히 시간이 나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기회가 닿으면 드리려고 했는데 마침 이렇게 기회가 닿게 되더라고요. 늦었지만 생일 축하해요. 이미 늦어버려서 미안하지만요.”

“…….”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묵묵히 침묵하는 효연이었다.

9월 22일은 자신의 생일이다. 벌써 일주일이 지나기도 하였다.

자신의 생일 날, 창현은 아침 일찍 축하한다는 문자를 보냈다. 그러면서 스케줄이 바빠 직접 찾아가 축하 인사를 건네지 못하는 것에 미안하다 하였다.

그렇게 양해를 구했지만 효연은 먼저 축하해주는 창현이 너무나 고마웠다. 자신의 생일을 축하해주는 멤버들이 고마웠고, 창현도 고마웠다.

솔직히 스케줄이 바쁘다 하여 선물까지 기대하지 않았다. 그저 축하한다는 인사 한마디로 만족했던 것이다.

하지만 끝까지 기억하고 이렇게 선물을 챙겨줄 줄이야.

너무 고마워서 눈물이 찔끔 나올 뻔한 걸 간신히 억눌렀다.

“고마워, 정말로.”

“그렇게 고마워하면 제가 민망해지잖아요. 그렇게 대단한 것도 아닌데. 하하!”

“그래? 하지만 너무 고마운 걸.”

잊지 않고 이렇게 챙겨주었다는 것 자체가 고마웠다. 마치 자신이 창현에게 필요한 존재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고, 속에서 무언가 알 수 없는 감정들이 꾸물꾸물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 선물은 뭐야?”

“그건… 그러니까… 하하!”

말을 하지 못한 채 어색하게 미소를 짓는 창현.

그 모습에 효연이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눈을 하자, 결국 말하고 만다.

“제 앨범이에요. 이번에 4-A 앨범을 끝마치고 4-B로 활동할 예정이거든요. 아직 발매되지 않은 4-B 앨범이에요.”

“발매되지 않은 앨범이라고?”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박스를 바라보는 효연이었다. 박스 안에 든 것이 앨범이라면 이 지관통은 분명…….

“민망하지만 제 포스터죠. 사촌 여동생이 있으면 좋아하지 않을까요? 하하하!”

좋아하기는 개뿔. 원수 직전까지 내몰린 관계마저도 단숨에 함께 죽고 함께 사는 자매로 만들어줄 유니크 아이템 중 유니크였다.

“이거 한정판 아니야?”

“한정판이에요. 아버지 말에 의하면 천 개 정도만 제작해서 발매한다고 하더라고요.”

첫 날 발매라면 천 개라 하더라도 구매하는데 경쟁이 붙을 수밖에 없으리라.

현의 팬 규모를 감안하면 사실상 구하기 불가능한 유니크 아이템이었다.

만약 멤버들이 보게 되면 눈에 불을 키게 되리라.

조용히 박스와 지관통을 바라보던 효연이 창현에게 묻는다.

“그럼… 내가 이 앨범 1호로 받게 되는 거네?”

“그렇겠죠? 오늘 회사에 도착한 한정판이니까요.”

수만에게 준 것이 있지만 일반 앨범과 한정판 앨범의 가치는 비교하기 힘들다.

“고마워, 정말로.”

“하하! 좋아하니 다행이네요. 싫어하면 어떻게 하나 싶었는데.”

“아니야, 정말로 고마워.”

늦게라도 이렇게 선물을 준 것이 너무나 고마웠다. 그리고 자신에게 미발매 앨범을 줬다는 것 성의가 고마워서 뭐라 표현하고 싶어도 고맙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럼 다행이에요. 시간이 늦었으니 전 이만 가보도록 할게요. 연습 열심히 하세요.”

“응. 알았어. 가봐.”

“네.”

벤에 탄 창현은 효연의 배웅을 받으며 주차장을 벗어난다.

“…….”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효연은 입술을 다문다.

여기서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자신을 챙겨주는 섬세함과 선물 받는 이의 마음을 배려한 특별함의 부여, 그리고 치명적인 분위기 조성까지.

“완전 바람둥이잖아.”

본인은 자각하지 못하지만 창현은 바람둥이다.

효연은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왜냐고? 여태까지 방관자의 입장에서 멤버들을 조용히 지켜보았으니까.

특히 태연은 절묘한 알리바이를 만들어놓고 창현과 어른의 키스를 하는 것까지 목격한 적이 있었다. 당시 태연은 자신에게 비밀로 해줄 것을 부탁하면서 무언의 압박을 주었다.

절대 자신의 것을 넘보지 말라고.

그때는 자신 있게 대답했을 테지만 지금은… 솔직히 모르겠다.

스스로 바람둥이란 걸 아는 사람보다 바람둥이인지 모른 채 페로몬을 뿌리고 다니는 남자가 더욱 위험하다.

그를 좋아하는 여자들의 마음을 시시각각 조여올 테니까.

처음부터 마음을 닫고 대하는 것이 가장 편한 길이지만…….

문제는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후우!”

가볍게 한숨을 내쉰다.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는 자신의 마음을 다잡기 위한 행동이다.

박스를 열고 그 속에 든 앨범을 꺼내든다. 고급스러운 포장지에 감싸져 있는 앨범은 신비하면서 고급스러운 느낌이 물씬 풍겼다.

여자들이 간절히 바랄 현의 앨범. 그것을 가장 처음으로 받은 사람이 바로 자신이다.

“이러면 안 되는데…….”

이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자신의 마음은 움직이고 있었다.

그 자리에 서 있는 효연은 한참 동안이나 움직일 줄 몰랐다.


“갔다 왔어?”

“으응.”

연습실 안으로 들어오자, 멤버들이 효연을 반겨준다.

다소 어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효연. 그 모습을 본 주현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묻는다.

“언니, 뭔가 문제 있으세요?”

“응? 아니, 그런 거 없어.”

자신의 속마음이 들키기라도 한 것 같아 깜짝 놀랐지만 겉으로 티를 내지 않은 채 태연하게 대답했다.

평온한 표정을 하고 있는 효연을 보며 주현도 더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창현이한테 뭘 맡긴 거야?”

“아, 내가 예전에 맡긴 게 있어서 별 거 아니야.”

“그럼 그건 뭔데?”

창현과 함께 나간 뒤 효연이 양손에 들고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이 창현에게 받은 것일 거라 생각에 유리가 날카로운 눈을 거두지 않은 채 효연을 추궁한다.

“아, 이거? 올라오는데 내 생일 선물로 도착한 게 있다고 해서 수령해왔어. 내가 예전에 갖고 싶어하던 외국 앨범이더라고.”

막힘없이 능숙하게 말을 이어나가는 효연의 모습에 유리마저도 더 이상 의심할 수 없었다.

“그래? 그렇구나.”

“그럼 연습하자. 효연아, 바로 준비해.”

“알았어.”

태연의 말에 효연은 곧바로 움직이며 연습에 참가한다.

묘하게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을 애써 억누르며.


“앨범 일정이 미뤄졌다.”

“또요?”

기획 실장을 맡고 있는 백 실장의 말에 소녀들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앨범이 나온지 벌써 반년이 지나가고 있었다.

경쟁 그룹인 원더걸스는 승승장구하며 계속해서 활동을 하고 있는데 자신들은 여전히 앨범이 나오지 않고 있다.

심기일전하여 반격을 준비해야 했지만 정작 회사에서는 앨범 준비조차 확정되지 않은 상황이다.

소녀들의 표정이 좋지 않게 변하자, 백 실장이 말한다.

“회사 내에서도 여러모로 고심한 뒤 내린 결정이다. 여기에서 바뀌는 것은 없어.”

“그럼 앨범을 언제 준비하게 되는 거죠?”

불안한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태연이 대표로 묻는다.

앨범이 나온 지 반년이 넘은 만큼 늦을수록 떠안게 되는 리스크는 커지기 시작한다.

요즘같이 흐름이 빨라지기 시작한 가요계에서 반년 넘게 무대 위에 서지 못한다는 것은 잊혀진다는 것을 뜻했으니까.

“흐음, 글쎄다.”

“글쎄라니…….”

확언을 하지 못한다는 것은 더 미뤄질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기에 다른 소녀들의 안색이 좋지 못하게 변해갔다.

그 모습을 보며 백 실장이 말한다.

“솔직히 너희들의 개인적인 인지도는 만족스러운 수준이다. 갑작스럽게 원더걸스가 치고 올라오게 되면서 방향을 급선회했고, 그 의도가 성공했던 것이지. 하지만 거기에서 더 이상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

“…….”

백 실장의 말을 소녀들이 모두 이해할 수도 없었다.

그녀들이 회사의 전략을 알아차리기에는 이쪽 세계가 너무나 복잡했다.

말을 하고 있는 백 실장도 소녀들이 이해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한 말이 아니었다.

‘괜한 말을 했군.’

흐려지는 그녀들의 표정에 고개를 저은 백 실장이 말했다.

“어쨌든 그 부분에 대해서는 곧 이사 회의에서 결정이 내려질 거다. 아직 일정이 잡히지 않았을 뿐이지, 곧바로 결정이 나고 준비하게 되면 11월이라도 앨범을 낼 수 있으니까 너무 실망하지 말도록.”

“네…….”

막연한 희망을 바라는 것과 같았기에 소녀들의 목소리는 기어들어갔다.

그 모습을 보는 백 실장의 표정도 좋지는 않았다.

회사가 기획했던 것처럼 소녀시대 멤버들의 개개인 인지도를 상당 수준까지 끌어올리는데 성공했다. 이제 그 인기를 하나로 모아 뻥 터뜨리기만 하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매우 좋은 기폭제를 설치해놓아야 한다.

자칫 잘못 터뜨리게 되면 원하는 방향이 아닌, 엉뚱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으니까.

“저녁 스케줄은 윤아만 있으니 그렇게 알고 있도록 하고. 그럼 물러가봐.”

“네, 알겠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물러가는 소녀들이었다.

연습은 끝났고, 이제 숙소로 돌아가는 일만 남았다.

“…….”

이제부터 휴식이었지만 소녀들의 표정은 밝아질 줄 몰랐다.

기약 없는 기다림이란 그녀들을 모두 불안에 떨게 하였다.


앨범 일정이 확실하게 잡히지 않은 채 연습에만 매진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오전부터 저녁 시간 전까지 연습을 한 뒤, 스케줄이 있는 윤아는 방송국으로 이동했고, 스케줄이 없는 멤버들은 숙소로 돌아갔다.

윤아를 제외한 다른 멤버들은 모두 숙소로 돌아왔고, 각자 방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하기 시작한다.

숙소 안의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앨범 계획이 잡혀있지 않다는 것이 그녀들의 감정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앨범이 나올 수 있는 걸까.

경쟁 그룹인 원더걸스는 연타석 홈런을 날리며 계속해서 고공비행을 달리고 있다.

SM엔터테인먼트의 언론 플레이로 소녀시대가 경쟁 그룹으로 부각되고 있지만 그룹 자체의 인지도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개개인의 멤버들 인지도는 크게 밀리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룹 인지도에서는 상대가 되지 않는 기이한 상황이 발생하고 있었다.

한시라도 빨리 이것을 뒤집고 싶다.

그룹으로 데뷔했기에 소녀들은 그것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먼저 씻을게.”

“그래.”

권력에 맛을 들여 득의양양한 모습을 보이던 태연의 목소리는 침울했다. 리더로서 중압감을 많이 느끼고 있는 만큼 지금 상황이 그녀에게 있어 무척 암울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왠지 미안하네.’

씻으러 가는 태연을 보며 효연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마음을 다잡으려고 해도 자꾸만 기우는 마음을 다잡기가 힘들었다.

서로 입맞춤을 하는 것까지 봤지만, 사람의 마음이 쉽게 조절된다면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 같은 것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랬기에 태연에게 더욱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룹의 일로 인해 착잡함을 느끼고 있는 그녀의 뒤통수를 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으니까.

“후우!”

태연은 씻으러 갔고, 유리는 다른 방으로 가 있는 상태.

계속해서 멤버들과 함께 있기에 그 시선을 벗어나기 힘든 걸 감안하면 지금이 기회였다.

“한 번 볼까.”

효연은 창현이 선물로 준 앨범을 먼저 펼쳐들기 시작한다.

고급스러움이 물씬 풍기는 앨범은 사는 것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럭셔리한 느낌이 물씬 풍기고 있었다.

앨범을 열어보니, 섬뜩한 악마를 연출하고 있는 창현의 모습과 함께, 왼쪽에는 붉은 머리를 한 시린의 모습이, 오른쪽에는 금발을 하고 있는 수연의 모습이 보였다.

“예쁘네.”

시린이나, 수연이나 창현 양옆에 서 있는 것이 무척이나 예쁘고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들을 오히려 돋보이게 만드는 창현의 외모 또한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나도 저러면 좀 바라봐 줄까?”

자신이 좀 더 예쁘면 창현이 봐줄지 생각하게 되는 효연.

서서히 부피를 키워나가는 묘한 감정은 점점 그녀게 절제하기 힘들 정도로 커져나가기 시작했다.

참기 힘든 그 감정은 효연으로 하여금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젓는다. 아직까지 자신의 마음을 인정하고 있지 않은 효연이었다. 자신이 마음을 확고하게 하기에는 멤버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컸다.

무엇보다 그녀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자신의 행동이 낯설게 느껴져서 그렇다.

마음을 다잡은 효연은 다시 앨범을 살펴보기 시작한다.

“그런데 진짜 앨범 잘 만들었네.”

고급스러운 앨범과 극강의 비주얼을 자랑하는 모습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탄을 절로 나오게 만들었다.

“땡스투도…….”

앨범에 적어놓은 창현의 땡스투가 눈에 확 들어온다.

그녀가 가장 신기하게 느낀 것은 창현이 음악이거나 가사로 무언가를 표현하려 할 때, 듣거나 보는 사람이 그것을 확연하게 느낄 수 있다는 점이었다.

“우리 이름도 있네.”

도와준 사람들 중에 자신들의 이름도 있다는 사실에 효연은 눈을 빛낸다. 왠지 모르게 그녀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걸린다.

“이제 하이라이트를 볼까나.”

자꾸 미소가 지어지는 것을 간신히 억제한 효연이 지관통을 바라본다.

한정판 앨범의 위엄! 창현이 자신에게 처음으로 준 한정판 앨범의 포스터를 보기 위해 효연이 지관통 뚜껑을 열고 안의 내용물을 꺼내들기 시작한다.

이번 창현의 4-B 앨범의 컨셉은 듣기로 악마가 소중한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는 것이라 하였다.

포스터를 펼쳐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벽을 향해 펼친 효연이 압정을 찾아 고정한다.

그리고 뒤로 떨어져 천천히 포스터를 감상하기 시작한다.

“와아…….”

절로 터져 나오는 탄성. 애써 마음을 다잡으려고 하지만 나오는 탄성을 감출 수 없었다.

전지 정도 크기의 포스터는 고급스러운 재질에 코팅까지 되어 있어 쉽게 구겨지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거대한 크기에 맞게 제작되어서 그런지 퀄리티 또한 상당했다.

포스터에는 의자에 앉은 창현이 다리를 꼬고 앉은 채 오만하게 아래를 내려다보는 모습이었다.

평소 예의 바르고 선해 보이는 인상과는 확연하게 다른 모습이었다.

정장 슈트 차림에 망토를 두른 창현은 살짝 눈 꼬리가 올라간 메이크업을 하여 시크한 멋을 살리고 있었다.

그리고 손에 든 와인 잔과 붉은 머리는 여성들의 마음을 사정없이 뒤흔들고 있었다.

“이렇게 멋져도 되는 거야?”

마치 창현은 새하얀 도화지 같았다. 색으로 물들이게 되면 그 색으로 거부감없이 물드는 새하얀 도화지.

착하고 선한 이미지의 창현이 한순간 세상을 굽어보는 악마처럼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특히 오만한 눈빛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찡한 울림을 느끼게 하고 있었다.

“사기 캐릭터네, 사기 캐릭터.”

그렇게 감탄하면서 효연은 고개를 끄덕인다. 정말 창현은 사기 캐릭터였다. 인기도 엄청나게 많으면서 성격도 착하고, 다양한 매력도 지니고 있고.

노래 실력도 실력이지만 이렇게 고급스러움을 지닌 앨범은 충분히 소장 가치가 있었다.

당장 이 포스터만 해도 나중에 얼마나 프리미엄이 붙을지 상상도 하기 힘들었다.

“이렇게 멋진 건… 나만 독점하는 게 좋겠지?”

자연스럽게 든 독점욕.

이렇게 멋진 것을 남들과 나누는 것이 좋지만 효연의 머릿속을 지배한 것은 이 한정판 앨범 포스터를 자신이 독점하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자신만 보고, 자신만 품고 싶었다.

그렇게 하면 그 순간만큼은 창현이 자신의 것이 된 듯한 기분이었으니까.

“태연이 오기 전에 어서 정리해야겠다.”

효연이 포스터를 떼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할 때였다.

하지만 신은 효연의 그런 독점욕에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덜컹!

방문이 활짝 열리며 평소보다 훨씬 빠르게 씻은 태연이 방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효연아, 이제 너 씻…….”

효연에게 씻으라 말하려던 태연의 표정이 순간 굳어버리고 말았다. 자리에서 일어섰던 효연 또한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어어?”

“너, 이거 뭐야.”

차갑게 굳은 표정으로 태연이 효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태연의 기분은 좋지 않았다.

언제 컴백이 이뤄질지 불투명한 상황이었다. 리더의 입장에 있다 보니 그 사실들이 부담으로 다가왔고, 요즘 들어 수연을 싴순이로 만드는 계획이 점점 난항을 띠고 있어 태연의 마음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후우!”

샤워 후 간단하게 몸을 씻은 태연은 방안으로 들어간다. 괜히 자신이 저기압인 걸 팍팍 풍겨서 효연의 기분에 영향을 끼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꾸 이렇게 되네.”

폭군을 몰아내고 자신의 주도 하에 넣게 되면서 서서히 변하는 것을 스스로 느끼고 있었다.

변하는 것을 나쁘게 여기지 않았지만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바로 몇몇 다른 멤버들은 건드리면 안 되는 것이다.

특히 그 중에서 효연은 태연이 건드려서 안 되는 멤버였다.

왜냐하면 효연은 자신의 결정적인 약점을 쥐고 있었으니까.

“그것만 들키지 않았다면 좋았을 텐데.”

아쉬움을 느끼면서 태연이 방안으로 들어섰다가 굳어버리고 말았다.

문을 연 태연이 처음 본 것은 다름 아닌 창현의 모습이었다.

새하얀 벽지가 자리하던 곳에 악마로 변한 창현이 오만하게 자신을 내려다보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큰 충격과도 같은 것.

섬뜩한 악마의 느낌은 손짓 하나하나 묻어나오고 있었기에 태연은 순간 얼어붙었다. 포스터만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황홀한 기분에 빠져버리는 기분이었다. 그 자체에 발산되는 아우라는 자신을 어김없이 매료시키고 있었다.

‘헛!’

그러다 태연은 문득 불같이 치밀어 오르는 기분에 정신을 차렸다.

이게 왜 방안에 붙어있는 것이란 말인가!

날카롭게 눈을 치뜬 태연이 효연을 바라보며 묻는다.

“말해 봐, 이게 뭐야.”

“이, 이건…….”

이번만큼은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효연이었다.

하필이면 이런 거사(?)를 치를 때 문 잠그는 것을 깜빡한 것이다.

문을 잠그지 않고, 태연이 좀 더 뒤에 들어올 것이라 생각한 효연의 실수였다.

“이게 뭐냐고.”

섬뜩함이 묻어나오는 태연의 말에 효연은 압도되는 것을 느끼며 결국 시인하는 수밖에 없었다.

“실은 창현이가 생일 선물로 줬어…….”

“선물? 그럼 아까 창현이랑 같이 나갔던 게?”

“으응. 생일 선물을 주겠다고 하면서 줬어.”

숨기는 것이 무리라 판단한 효연은 순순히 말했다.

“설마 이거 창현이 새 앨범이야?”

이런 컨셉은 기존에 발매한 4-A의 컨셉과 같았지만 한정판 앨범을 구매한 태연은 이런 포스터가 있다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

게다가 4-A 앨범의 컨셉은 행복함이 묻어나오고 있는 것이기에 이렇게 음울한 분위기가 묻어나오지 않는다.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태연의 말에 효연은 고개를 끄덕인다.

“맞아. 새 앨범이야.”

“새 앨범을 왜…….”

“한정판인데, 나한테 선물이라고 하면서 주더라고. 나한테 가장 먼저 주는 거라네.”

“선물로?”

그렇게 말을 하는 태연의 눈에 불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생일 선물로 줬다고 하지만 마음속에서 스멀스멀 솟아나는 열기를 억누르는 것이 힘들었다.

생일 선물이라지만 곧 발매될 앨범을 가장 먼저 주다니!

질투심을 억누르느라 애쓰는 태연의 모습이 애처롭게 보였다.

마음을 다스리는 태연이 눈을 꽉 감는다. 그리고 이내 눈을 뜬 태연이 다시 평온해진 모습으로 입을 연다.

“한 가지 말할게, 효연아.”

“응.”

“저번에 목격해서 알겠지만 난 창현이를 좋아해.”

“…….”

태연이 말하는 것은 창현이 슬럼프에 빠졌을 때 그것을 빌미로 데이트 했던 것을 말한다. 그때 태연은 창현의 일일 연인이 되어주었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창현의 마음을 거세게 뒤흔드는데 성공한다.

그 후 결정타를 먹이지 못하여 그녀의 모든 노력이 수포가 되어버렸지만.

당시 태연은 연인의 입장에서 창현의 첫 키스를 훔치는데 성공했다.

창현은 다른 여자에게 당했다고 하지만 연인으로서 한 것이니 자신이 창현의 첫 번째 상대다! 이것에 엄청난 자부심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유일하게 목격한 사람이 바로 효연이었다.

“효연아, 난 네가 협력해줬으면 좋겠어. 내가 누구를 좋아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는 거 잘 알지?”

“…내가 협력해달라는 거야?”

“응.”

여자의 직감이었는지도 모른다.

태연은 이대로 놔두면 효연이 아주 강력한 경쟁자가 될 수도 있다 생각했다.

자신이 더욱 높은 고지를 선점하기 위해서 자라나는 새싹을 다시는 자라나지 못하게 짓이기고 짓밟아줄 필요가 있다.

지금 그 새싹을 태연은 짓밟고 있는 것이다.

애초에 적으로 설 수 없도록 원천 봉쇄를 하려는 셈이었다.

만약 효연도 창현을 좋아하게 된다면 그녀 특유의 매력이 창현에게 강하게 어필될 수 있다.

그래서 더욱 불안감을 불러일으킨 걸지도 모른다.

“내가 무엇을 협력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효연이 네가 창현이를 좋아하지 않겠다고 맹세해줬으면 좋겠어.”

“…내가 왜?”

그녀가 간과한 것이 있다면 효연은 지금 창현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상태가 아니라, 거의 다 넘어와 스스로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않느냐 기로에 서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감정을 조종하려는 듯한 태연의 말이 마음에 들 리 없었다.

효연의 삐딱한 말투에 태연은 잠시 멈칫하다가 말을 잇는다.

“난 효연이 네가 나와 경쟁자가 되길 바라지 않으니까. 맹세해줄 수 있어?”

사랑에 눈이 먼 여자는 이기적으로 변해간다.

태연이 그토록 수연을 싴순이로 만들려는 것인 그녀가 전대 권력자라는 점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창현을 차지하는데 가장 큰 연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어서 그런 것이다.

끊임없이 하찮게 만들면 지쳐버린 싴순이가 모든 걸 포기할 것 같았으니까.

“아니, 할 수 없어.”

“어째서?”

“다른 건 둘째 치더라도 내 마음을 정하라고 하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거든.”

효연의 말투와 기질이 바뀌었다. 그 모습을 접한 태연은 아차했다. 자신의 말이 역효과를 불러일으켰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불안감이 치솟았다. 쿨한 그녀가 자신의 말에 따르지 않았다는 것은 자신이 예상했던 것보다 창현을 생각하는 그녀의 마음이 더욱 클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난 네가 연적이 되지 않았으면 해. 그러니 마음이 있다면 포기해줘.”

“싫어. 누가 내 결정을 좌지우지 한다는 게 싫어.”

“…좋아.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하지만 효연이 네가 적이 된다면 난 무척 슬플 테니까.”

효연을 빤히 바라본 태연이 몸을 돌려 방을 벗어난다. 경계해야 할 대상이 한 명 더 늘어났다는 착잡함이 온몸을 휘감았다.

덜컹.

“후우!”

태연이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본 효연은 고개를 저으며 벽에 붙어있는 포스터를 떼고 지관통 안에 갈무리 하였다.

그때, 닫혀있던 문이 벌컥 열린다.

“헉?”

화들짝 놀란 효연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문쪽을 바라본다.

안으로 들어온 소녀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효연에게 묻는다.

“왜 그렇게 놀라?”

“아, 아냐. 그런데 무슨 일로 들어온 거야?”

“음, 네게 할 이야기가 있어서 말이야.”

방안으로 들어온 소녀는 다름 아닌 수연이었다.

입가에 묘한 미소를 띤 수연은 효연의 기색을 살피더니 입을 열었다.

“뭔가 일이 있었나 봐?”

“일이라니?”

설마 태연이 그 사이에 이야기를 한 것인가?

바짝 긴장감을 끌어올린 효연이 특유의 능청을 발휘하며 모른 척했지만 수연은 여전히 여유로운 미소를 지은 채 말한다.

“그렇게 능청 떨기에는 태연이의 반응이 너무 생생해서 말이야.”

“…윽!”

신음을 흘리는 효연이었다. 태연은 속일 수 있어도 연습생 내공이 가장 풍부한 수연을 속이기는 힘든 일이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음으로써 무언가 일이 있었다는 걸 인정하자, 수연이 말한다.

“한 가지 제안할 게 있는데.”

“뭔데?”

“태연이랑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표정을 보면 무언가 좋지 않은 일이 있었던 것 같아서 말이야.”

“…….”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이야기를 듣는 효연. 그녀는 수연이 자세한 내막을 모른 채 자신에게 온 것이라 확신할 수 있었다. 만약 자세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이런 사근사근한 모습을 보일 리 없을 테니까.

수연은 무언가 목적을 가지고 자신에게 다가온 것임이 분명했다.

그 사이 그녀의 이야기는 이어지고 있었다.

“요즘 태연이가 권위적이지 않아?”

“…그건 맞아.”

예전의 태연은 좀 더 소심했고,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폭군을 밀어낸 뒤 정권을 장악하게 되면서 감히(?) 자신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정도로 크게 되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권위적으로 변한 것이다.

“그래서 말인데, 내가 태연이의 자리를 대신하려고 해. 협력해줄 수 있어?”

“넌 이미 한차례 물의를 빚었잖아.”

수연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놀이에 동참했지만 폭군의 자취는 아직까지 소녀들에게 진하게 남아 있었다.

“그렇긴 하지만 이제는 안 그럴려고. 한 번만 믿어주면 안 될까? 한 번 실수를 범한 이상 태연이보다는 잘할 자신이 있어.”

“…매력적인데?”

서서히 독재자의 기질을 보이는 탱구보다는 한차례 쓴 맛을 본 폭군 싴이 더 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효연의 입에서 긍정적인 말이 나오자, 수연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효연에게 손을 내민다.

“실수하거나 그런 일은 없을 거야. 내가 지금 바라는 건 날 싴순이로 만들려는 탱구를 하찮탱으로 만들려는 생각뿐이니까. 잘 부탁해.”

“좋아, 협력하지.”

수연의 손을 맞잡는 효연이었다.

권위적으로 자신을 마음대로 하려던 태연의 행동은 효연의 내면에서 갈팡질팡하던 마음을 바로잡아주었다.

맞잡은 손을 흔들며 효연은 눈을 빛냈다.

‘한 번 해보자면 화끈해게 해주겠어.’

탱구의 독재가 또 다른 참전을 불러일으키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수연은 그 틈을 타 순규에 이어 강력한 동료를 얻을 수 있었다.

‘조금만 기다려, 탱구. 널 하찮게 만들어줄게.’

은밀하게 세력을 불리는 싴순이의 반격이 멀지 않았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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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마음을 울리는 음악 시즌2 제4화 +7 15.04.24 3,979 89 10쪽
40 마음을 울리는 음악 시즌2 제3화 +6 15.04.22 4,427 82 10쪽
39 마음을 울리는 음악 시즌2 제2화 +9 15.04.20 4,516 91 11쪽
38 마음을 울리는 음악 시즌2 제1화 +10 15.04.17 7,376 95 10쪽
37 ▲▲▲▲▲시즌2 시작!▲▲▲▲▲ +5 15.04.17 5,425 65 1쪽
36 마음을 울리는 음악 106장-108장 +8 15.04.16 6,414 106 230쪽
35 마음을 울리는 음악 103장-105장 +1 15.04.16 4,244 82 3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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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마음을 울리는 음악 16장-18장 +5 15.04.16 11,544 242 163쪽
5 마음을 울리는 음악 13장-15장 +5 15.04.16 14,536 297 237쪽
4 마음을 울리는 음악 10장-12장 +8 15.04.16 13,737 352 171쪽
3 마음을 울리는 음악 7장-9장 +10 15.04.16 14,552 362 142쪽
2 마음을 울리는 음악 4장-6장 +11 15.04.16 16,838 421 120쪽
1 마음을 울리는 음악 프롤로그-3장 +47 15.04.16 29,902 545 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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