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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번 님의 서재입니다.

마음을 울리는 음악

웹소설 > 작가연재 > 팬픽·패러디, 현대판타지

김현우
작품등록일 :
2015.04.16 13:27
최근연재일 :
2015.06.01 17:02
연재수 :
5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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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4.16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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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322쪽

마음을 울리는 음악 34장-36장

DUMMY

제34장 갈등




MKMF가 끝나고 세희가 본격적으로 창현의 매니저 일을 맡기 시작했다. 지난 한 달 동안 교육을 받고 준비를 하였기에 세희는 매니저 일을 수월하게 처리해나갔다.

물론 창현의 스케줄이 많지 않았기에 세희가 어렵지 않게 처리할 수 있었던 것도 있지만 차근차근 자신이 맡은 일을 처리하는 모습에 창현 또한 상당히 부담을 덜 수 있었다.

MKMF가 끝나고 창현은 이렇다 할 스케줄이 없었다. 키스 퍼포먼스 이후 번져나간 파장도 파장이지만 라샤가 본래 계획대로 일본을 중심으로 아시아 각국에서 순회 활동을 하였기에 창현이 신경 쓸 부분이 많이 사라진 상태였다. 아시아 각국을 돌기로 한 라샤의 활동지 중에서 중국은 배제된 상태였다.

라샤의 녹음도 모두 끝난 창현이 할 일은 자신의 앨범을 제작하는 것뿐이었다. 이제 시험도 모두 끝나고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내는 나날이었기에 창현은 자신의 앨범 제작에 충실히 임할 수 있었다. 녹음실 장소는 마련한 상태지만 아직 모든 준비가 완료되지 않은 상태이기에 소속사에 드나들면서 특별한 스케줄이 없는 날에는 앨범 제작에 임하고 있었다.

창현은 정규 3집 앨범을 발매할 생각이었다. 정규 2집 앨범은 미국에서 발매하였는데, 반응이 상당히 좋았다. 무엇보다도 <Minus>의 여파가 가라앉기 전에 앨범을 내놓아서 그런지 판매 또한 매우 많았다.

석규 또한 창현이 아이돌 가수들 같은 모습보다는 뮤지션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길 원했기에 방송보다는 음반 제작에 힘을 실어주고 있는 실정이었다.

조만간 Mnet에서 하게 될 이벤트 방송 밖에 예정에 없는 실정이었다.

다만 달라진 게 있다면 미영과 찍은 CF가 대박이 나면서 CF제의가 더욱 몰려왔다고나 할까? 현이라는 브랜드가 주는 파워를 제대로 실감하였기에 광고계에서 현은 떠오르는 블루칩이 되어 있었다. 당연히 몸값 또한 껑충 뛴 상태였고, 그중에서 현의 이미지를 고려하여 고르고 고른 CF를 창현에게 가지고 온다.

그럼 창현은 석규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할지 여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컨셉이나 스토리 같은 것이 걸리면 수정을 요구해보고, 거기에서 타협이 되지 않으면 무산되는 경우가 많다.

앨범 제작을 멈춘 창현이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뽑아먹다가 창문 밖을 바라본다.

자신이 오기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하늘에서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쏴아아아아.

장대비가 쏟아져 내리는 걸 보니 보통 수준이 아니었다.

“이제 완전히 겨울로 넘어가려고 비가 오는 건가.”

음료수를 한 모금 마시며 창현이 중얼거린다. 오늘 비가 온다는 소리를 못 들었는데 비가 이렇게 오고 있다.

“일찍 가야겠네.”

현재 시간은 여덟 시다. 평소 앨범 준비를 할 때는 열 시에 집에 돌아가고는 했는데 비가 오는 걸 보니 일찍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을 매일 바래다주는 로드 매니저도 운전을 조심히 해야 하고 말이다.

게다가 아무도 없는 우중충한 회사에서 바라보는 비보다, 혼자 머무는 집에서 여유롭게 커피 한잔 마시며 바라보는 광경이 훨씬 멋지다.

마음을 굳힌 창현이 막 움직이려 할 때, 그에게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세희였다.

창현은 세희를 보며 고개를 갸웃하고는 물었다.

“누나 무슨 일이세요?”

스케줄 이야기라면 보통 낮에 하는데 갑자기 세희가 자신을 찾자 의아한 창현이었다.

창현의 물음에 세희가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입을 열었다.

“후! 내가 낮에 깜빡한 게 있어서. 스케줄 때문에 상의할 게 있는데 괜찮겠니?”

“저야 상관없죠. 음, 지금 돌아가려고 하는데 누나도 같이 가는 게 어때요? 가면서 이야기 하면 되잖아요.”

세희의 집은 창현이 살고 있는 곳과 그리 멀지 않다. 로드 매니저에게 이야기를 하면 될 것이다.

게다가… 로드 매니저가 요즘 세희에게 관심을 갖고 있는 것 같고 말이다.

“으음!”

창현의 말에 세희는 잠시 고민했다. 어차피 창현과 이야기를 끝내면 퇴근이다. 그러니 호의를 거절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어차피 집도 근처고 말이다.

잠시 고민에 잠겨있던 세희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렇게 할게.”

“네, 그럼 퇴근 준비 하고 오세요. 저도 갈 준비 좀 해야 되니까요.”

“그래, 그럼 조금 있다가 보자.”

창현과 세희는 그렇게 조금 있다가 만나기로 한 후 각자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기 시작하였다.


“나 갔다 올게.”

오늘 밤에 스케줄이 있는 수영의 말에도 불구하고 반응은 냉정하기만 하다.

TV소리만 울려 퍼지는 소녀시대의 숙소는 조용하기만 하였다.

MKMF가 끝나고 본격적으로 <소녀시대>란 앨범을 들고 활동하고 있는 소녀시대의 분위기는 근래 들어 최악에 가까웠다.

소녀시대는 아홉 명의 소녀로 이루어진 여성 그룹이다.

초반 그녀들의 인기를 견인하기 위해 이미 왕성한 활동으로 자리를 잡은 슈퍼주니어의 이름을 빌려 여자 슈퍼주니어란 이름으로 데뷔를 하게 되었다.

그녀들의 인기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SM엔터테인먼트라는 대형 기획사가 야심차게 준비를 하였고, 쟁쟁한 선배 가수들도 존재하는 만큼 그쪽의 팬 층이 소녀시대란 그룹에 관심을 주어서 그렇다.

하지만 아직까지 그녀들이 많이 불리는 것은 그룹 소녀시대가 아닌, 여자 슈퍼주니어라는 것으로 더 많이 불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90년대 이승철의 히트곡인 <소녀시대>를 리메이크 하여 무대에 선 그녀들에 대한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원더걸스의 <Tell Me>가 활동을 접고 있는 공백기를 노린 것인데 그것이 어느 정도 주효한 것이다.

하지만 부작용은 그 이후에 나타났다.

사람들의 관심이 각 멤버들에게 골고루 나타난 것이 아닌, 극도로 편중되어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만난 세계>에서도 그랬지만 이번이 더욱 심했다.

뮤직비디오와 CF로 인지도를 착실하게 쌓아온 윤아가 소녀시대 내에서 톱 인기를 달리고 있었고, 태연은 귀여운 외모와 가창력으로 인기를 얻었으며, 티파니는 눈웃음으로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그 외 멤버들은 사람들에게 큰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소녀시대란 그룹이 아홉 명으로 이루어진 만큼 당장 관심 있는 몇 명밖에 알아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던 것이다.

그것이 다른 멤버들의 신경을 날카롭게 만들었다.

평균 5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연습생 생활을 거쳐 가수가 되었다.

인기란 것이 마음 먹은 것처럼 되는 것이 아니란 것을 알고 있지만 사람의 마음이란 것이 참으로 간사한 것이, 내가 하게 되면 잘될 거라는, 내가 하니까 잘될 수 있다는 이런 막연한 종류의 감정이 존재한다.

소녀시대 또한 사람인만큼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힘들게 인기를 얻었다고 하지만 자신들은 대형 기획사인 SM엔터테인먼트의 지원을 받고 있고, 그동안 열심히 노력을 하였다. 이제는 고생 끝, 행복 시작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세상은 만만치가 않았다.

처음 데뷔 무대부터 그녀들의 생각처럼 풀리지 않는가 싶더니, 이제 슬슬 인지도를 넓혀가는 순간에 원더걸스라는 경쟁 그룹이 나타나 모든 곳을 휩쓸기 시작한 것이다.

나이 대도 비슷하고, JYP엔터테인먼트와 SM엔터테인먼트라는 모종의 경쟁 관계에 놓인 대형 기획사인 만큼 원더걸스와 소녀시대는 필연적으로 경쟁적인 구도를 갈 수밖에 없었다.

원더걸스가 빛이라면 소녀시대는 어둠이었다.

<Tell Me>라는 곡으로 대한민국을 들썩이게 만든 원더걸스는 이미 소녀시대가 쫓을 수 없을 정도로 저만치 앞서 나가고 있던 것이다.

너무나 분한 현실이 아닐 수 없었다.

그에 소녀들은 지지 않고자 더욱 더 열심히 노력하였다. 자신들보다 앞서 나갔다고 해서 원더걸스에게 악감정은 없었다. 아니, 악감정보다는 부럽다는 감정이 앞섰다. 하지만 인기란 것은 바람과도 같은 것. 자신들도 열심히 노력하면 인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에 그녀들은 열심히 노력에 노력을 하였다.

그리고 <소녀시대>란 곡으로 어느 정도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거기서 발생한 것은 여러 멤버의 인기 편중이다.

인기를 얻게 된 멤버들로서는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한 멤버들은 상대적인 박탈감이 무척이나 심했다. 마치 자신들이 그동안 노력한 모든 것을 같은 멤버에게 빼앗긴 기분이었던 것이다.

그녀들도 물론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사람 마음은 정말 간사하지 않은가?

아니란 걸 알지만 마음이란 것이 그렇게 되지 않은가보다.

특히 인기를 이름을 알릴 법하게 되자 다시 터진 수연의 스캔들 기사로 인해 소녀시대 숙소 분위기는 최악을 향해 달리고 있었고, 그중에서도 수연의 신경은 극히 날카로웠다.

수연은 소파에 몸을 묻은 채 TV만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은 TV를 향하고 있지 않았다. 초점이 흐릿한 그녀의 눈은 그저 전방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멤버들 또한 근래 들어 인기 편중 문제로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그중에서도 제일 기분이 좋지 않을 수연을 위해 다들 그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조심하는 기색이었다. 한창 인기를 얻을 법한 시기에 편중된 인기로 인해 크게 지명도를 얻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스캔들로 인해 달리는 악플로 많은 상처를 받고 있었으니 말이다.

현재 숙소에는 수영과 윤아, 미영을 제외한 다른 멤버들만 남아 있었다.

태연은 방금 전 스케줄을 끝마치고 돌아온 상태였다.

아무래도 소녀시대란 그룹이 아홉 명에 달하는 만큼 모두 다 섭외한다는 것은 무척 큰 결심을 필요로 하기에 방송 관계자들은 아홉 명 모두를 초대하는 것이 아닌, 지명도가 높은 일부 멤버들만 섭외하는 방향을 노렸다. 그리고 그것은 인기의 편중을 더욱 극대화 시켰다.

그로 인해 멤버들간의 불화는 점점 더 커져만 갔고, 숙소 내 분위기도 험악해져갔다.

그렇게 숙소가 조용히 TV소리만 들려오던 숙소를 뒤흔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발걸음마저도 조용히 죽이며 걷던 주현이 물을 떠오다가 그만 유리컵을 놓쳐버린 것이다.

주현의 손을 벗어난 유리컵은 그대로 방바닥을 향해 곤두박질쳤다.

쨍그랑!

숙소를 뒤흔드는 큰 소리에 멤버들이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해 시선을 준다.

그곳에는 어쩔 줄 몰라하는 주현이 있었다.

그녀는 안절부절 못하는 얼굴로 고개를 꾸벅 숙였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어찌 보면 일상생활에서 흔하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지만 지금 같이 신경이 날카로운 상황에서는 무척 큰일이다.

사과를 하는 주현의 모습에 다른 멤버들은 짜증 어린 표정을 지었지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 사람만은 예외였다.

바로 수연이었다.

그녀는 가뜩이나 신경이 날카로운 상황에서 주현이 깜짝 놀라게 만들자 짜증이 가득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너 제대로 행동하지 못해!”

“죄, 죄송해요, 언니.”

주현은 눈물이 글썽이는 얼굴로 깨진 유리컵을 치우기 시작했다.

허겁지겁 치운 탓일까.

유리컵을 치우던 주현이 유리에 손가락을 베이고 만다.

“아얏!”

손에서 피가 흘러나오자 주현은 화들짝 놀라며 피가 흘러나오는 손을 입에 문다.

그리곤 지금 상황이 서러운지 눈물을 주르륵 흘리며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한다.

“흑흑!”

연습생 시절 늘 사이가 좋던 언니들이 이렇게 험악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는 것이 그녀는 싫었다. 하지만 그녀는 막내였고, 언니들의 기분 또한 최악을 달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오는 무력감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려야만 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모습은 다른 사람에게 짜증만 유발시키나보다.

눈물을 흘리는 그녀의 모습에 수연이 다시 한 번 소리친 것이다.

“뭘 잘했다고 눈물을 흘리는 거야? 어서 손이나 치료하고 치워!”

냉정하기만 한 수연의 목소리에 주현의 눈에서 흘러나오는 눈물의 양은 더욱 많아졌다.

그런 주현의 모습에 방에서 나온 태연이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짓더니 수연에게 소리쳤다.

“야! 정수연! 넌 그게 다친 주현이에게 할 말이야?”

그녀의 목소리가 숙소 전체에 울려 퍼졌다.

질책성이 담긴 태연의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수연은 밀리지 않았다.

그녀는 태연을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그럼 잘못한 걸 혼내지,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그 말이 아니란 걸 알잖아!”

태연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다른 멤버들의 시선이 모두 그녀와 수연에게 향한다.

씩씩거리던 태연이 수연을 노려보면서 입을 열었다.

“정수연 정말 이러기야? 네가 힘든 건 알고 있어! 하지만 이런 모습을 보이면 모두가 힘들어 하잖아!”

“그럼 나보고 어쩌라고! 혼자 방에 들어가서 있을까?”

수연 또한 태연의 말에 지지 않았다.

가뜩이나 우울한 나날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밝게 지냈던 자신의 모습이 신기할 정도로 지금은 우울하고, 당장이라도 연예인을 그만 두고 싶은 충동이 들 정도였다.

그토록 힘들게 달려왔는데, 그토록 열심히 달려왔는데 이런 모습에 이런 대우만 돌아온다. 뿐만 아니라 친구라 여겼던 같은 멤버마저도 이런 반응이다.

수연은 서러움에 눈물이 흘러나오려는 것을 꾹 참으며 태연을 노려보았다.

태연은 수연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 또한 근래 들어 숙소 분위기가 안 좋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나설 수가 없었다. 자신이 잘못 나섰다가는 소녀시대란 그룹이 그대로 허공에 붕 떠버릴 것이라는 걸 알고 있어서 그렇다.

현재 이런 분위기가 조성된 까닭은 인기 편중 현상 때문이다.

태연은 그중에서 인기를 얻은 축에 속한다.

대부분의 아이돌이 그러하듯 어느 특정 멤버가 먼저 인기몰이를 하면서 그 그룹에 대한 이름을 각인시키고, 그 이후로 각 멤버들을 하나씩 알게 만든다.

모두가 그렇지는 않지만 이런 방법이 상당히 많이 쓰인다.

인기를 얻은 입장에서 그녀가 인기 편중으로 인하여 신경이 날카로운 멤버들에게 뭐라 말할 여지가 없었다. 이럴 때야 말로 리더인 자신이 어떻게든 나서야 하지만 이번 사항은 그만큼 민감한 것이었다.

그녀는 수연의 격한 반응에 자신도 모르게 욱해서 나섰지만 이내 자신의 경솔함에 후회해야만 했다.

지금 수연의 상태는 불을 붙이기 직전의 화약고와도 같은 상황이었다. 한 번 불이 붙어버리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폭발을 일으키는 그런 화약고 말이다.

그리고 태연의 말로 인해 수연은 폭발하고야 말았다.

수연의 말에 태연은 인상을 찡그리고는 말했다.

“내 말이 그게 아니란 걸 알잖아.”

“아니면 뭔데?”

삐딱하게 묻는 수연의 모습에 태연도 점점 속에서 참을성이 사라지는 걸 느꼈다.

“주현이가 실수한 것쯤은 눈감아 줄 수 있는 거 아니야? 실수로 컵을 놓쳐서 깨뜨린 게 얼마나 큰 잘못이라고 그러는데?”

“나뿐만 아니라 다른 애들도 신경 다 날카롭거든? 그런 상황에서 평소에는 사소한 거라고 하더라도 잘못한 건 잘못한 거야.”

수연은 자신의 논리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지만 굽히지 않았다.

태연의 예상처럼 수연은 지금 꾹꾹 눌러왔던 짜증이 폭발한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그녀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고 싶지 않았다. 그저 내면에 쌓인 짜증을 모두 풀어내고 싶었다.

“지금 네 말이 말이 된다고 생각해?”

“그럼 말이 안 될 건 뭔데?”

두 사람은 한 마디도 지지 않은 채 대립했다.

평소 같으면 두 사람을 말렸을 멤버들도 그저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녀들 또한 상당히 기분이 저조한 상황이었기에 기인하는 바도 있다.

수연의 말에 태연은 인상을 찡그렸다. 평소의 수연이라면 이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이상했다. 마치 자신을 건드려주기를 바랐던 것처럼, 말도 되지 않는 것을 가지고 붙잡고 늘어진다.

이런 상대와 말싸움을 하는 것은 시간 낭비다.

태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입을 열었다.

“하아! 이야기를 말자. 수연이 오늘 넌 이야기가 통하지 않아.”

“…네가 뭘 아는데.”

수연의 작은 중얼거림.

태연은 그걸 듣지 못하고 짜증어린 기색으로 되묻는다.

“뭐?”

“네가 뭘 아는데! 이 멍청아!”

집이 떠나가라 소리치는 수연.

그런 수연의 모습에 태연은 물론 다른 소녀들도 당혹감 섞인 눈으로 수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침내 폭발하고 말았는지 수연이 씨익거리며 태연을 노려본다.

그녀는 태연에게 소리친다.

“7년이야! 무려 7년 동안 노력해왔어! 태연이 너도 노력한 건 알지만 7년 동안 연예인을 꿈꾸며 준비해온 내 마음을 알아? 기껏해야 수영이나 효연이만 내 맘을 알 거야!”

“…….”

수연의 외침에 태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런 수연을 바라보며 효연만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 사이 수연의 말이 이어졌다.

“7년이란 세월 동안 기다린 끝에 마침내 가수가 되었어.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가수가 되겠다는! 언제고 내 노래를 모든 사람들에게 들려주겠다는 야심한 포부를 갖고!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어. 바라던 인기는 얻지 못하고 있고, 그저, 그저 너희들의 배경처럼 서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어. 태연이 네가, 네가 그런 우리의 심정을 아냐고!”

7년이란 긴 시간 동안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언제고 연예인이 될 수 있을 것이란 희망과 화려한 스포라이트를 받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하였고, 지금 그 냉혹한 현실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그런 상황에서 하늘은 그녀를 도와주지 못할망정 고이 묻혀 있던 루머 파문이 다시 일어나고 있었다.

지금 수연에게 있어 하루하루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태연의 말은 그녀가 폭발하기에 충분했다.

태연이 나쁜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은 그녀 또한 알고 있었다.

체구는 작지만 태연은 언제나 엄마처럼 멤버들을 챙겨주는 믿음직한 리더였고, 그녀는 그런 태연을 믿고 따랐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자신이 고통스러워하고 힘들어하는 부분은 태연이 이해해줄 수 없는 영역에 존재하고 있다.

그랬기에 수연은 자신을 이해하려고 드는 태연의 모습이 가식적으로 느껴졌다.

전혀 이해해줄 수 없으면서.

전혀 공감해줄 수 없으면서.

그러면서 자신을 이해하려는 그녀의 모습이 가식적으로 보였다.

수연은 자신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이런 자신을 완벽하게 컨트롤 할 수가 없었다.

태연은 그런 수연의 말에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더니 이내 어이가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하! 그래서? 수연이 너도 이런 식으로 될 거란 걸 예상하고 있었잖아? 늘 삼촌이 말씀하시고 선배님들이 말하셨어. 인기란 것은 한순간에 얻으면 그만큼 쉽게 날아갈 거라고. 우리는 이제 데뷔한 지 세 달이 지난 신인 그룹이야. 처음 데뷔할 때 윤아를 중심으로 팬 층을 넓혀가자는 이야기를 잊은 거야? 네가 정말 근래 드러난 인기 편중 때문에 이런 모습을 보인다면 실망이다, 정수연.”

“너에게까지 그런 소리를 들을 줄 몰랐어.”

수연이 차갑게 얼어붙은 표정으로 태연을 바라보았다.

사람은 자신을 논리적으로 대하는 것보다 자신을 이해해주는 사람을 바란다.

그것은 수연 또한 마찬가지였기에 여태까지 넓은 마음으로 멤버들의 이야기도 들어주고 투정도 받아주는 태연을 진심으로 좋아했다.

태연의 말에 틀린 것은 없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말은 수연의 마음속에 일어난 파문에 더욱 큰 파문을 일으켰다.

애초에 이런 식으로 될 거란 걸 예상하고 있었다고?

그 입장이 되어보지 못하고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말이다.

옆에 있는 멤버가 폭발적인 인기를 얻어나가고 있는데 정작 자신은 인기가 없다고 생각해보라.

얼마나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질 것인가.

7년 동안 노력해온 것이 고작 다른 멤버들을 빛나게 해주기 위한 배경 역할이 끝이란 말인가.

도저히 납득할 수 없고, 도저히 인정할 수 없다.

“실망했다면 어쩔 건데?”

수연은 될대로 되라는 식이었다. 상황은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다.

그런 수연의 물음에 멤버들은 화들짝 놀란 반응을 보였다. 이런 흐름이라면 태연에게서 흘러나올 말이 무엇인지 뻔했던 것이다.

멤버들이 서둘러 태연을 말리려고 했지만 태연의 입에서 말이 흘러나오는 것이 더 빨랐다.

그녀는 수연을 차갑게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나가 버려, 소녀시대에서 탈퇴 해.”

“김태연!”

“태연 언니!”

태연의 말에 다른 멤버들이 소리쳤다.

도저히 나와서는 안될 말이 태연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그런 멤버들의 외침에 태연 또한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이미 상황은 늦은 상태였다.

“…….”

태연의 말에 수연의 표정은 얼음장처럼 싸늘해졌다.

설마 태연에게서 그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

마음의 벽 하나가 무너진 듯 공허한 느낌이 그녀를 감싸고 있었다.

이렇게 무너지는 건가. 자신의 마음의 벽이.

수연의 마음이 복잡하게 얽혀갔다.

소녀시대는 아홉 명이다. 그리고 다른 멤버들 모두 풋풋하지만 아름답고 각자만의 매력을 가지고 있다.

아홉 명인 만큼 자신 하나가 빠져도 그리 티가 나지 않겠지?

그렇게 생각되자 수연의 마음이 편해졌다. 그래, 포기하면 된다. 자신이 포기하고 빠져도 소녀시대에 큰 폐가 되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인기도 못 끌고 악성 루머에만 휩쓸리고 있지 않은가. 오히려 이미지가 더 좋아졌으면 더 좋아졌지, 나쁘지 않을 것이다.

마음속에 깃든 어둠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그리고 그것은 수연의 마음을 빠르게 장악해나갔다.

왜 자신이 이렇게 고생하고 있는 거지? 이대로 포기하면 되는데.

허탈해서 웃음이 나왔다.

포기하면 이렇게 편한 것을 왜 자신은 여태까지 아등바등 붙잡고 있던 것일까.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온다.

슬퍼서 흐르는 눈물일까.

아니다. 기뻐서 흐르는 눈물일 것이다.

이제 더 이상 마음고생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

이제 더 이상 남들의 시선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마음에 오는 기쁨의 눈물일 것이다.

그럴 것이다. 정말 그런 것일 것이다.

고개를 들어 태연을 바라본다.

눈물 때문일까.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선명하게 보이던 태연이 뿌옇게 보였다.

그러자 왜 이렇게 서러운 감정이 복받쳐올까.

진정하자.

지금 자신은 기뻐서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모든 것에서 해방되었다는 해방감에 기뻐서, 너무 기뻐서.

그래서 우는 것이다.

눈물을 훔쳐내니 당황한 태연의 표정이 보인다. 자신의 말 때문에 당황한 듯했다.

그러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그래도 자신에게 미안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구나.

입가에 웃음을 지어본다. 힘들었지만 힘을 내어 웃음을 짓는다.

그리고는 걱정하지 않게, 미안하지 않게 입을 연다.

“그래, 그게 낫겠다. 여태까지 함께 해서 즐거웠어.”

그 말을 끝으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멤버들이 말리면 자신의 결심이 꺾을 것 같았기에. 그녀는 자신을 부르는 멤버들의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밖으로 나갔다.

숙소를 나서면서 왜 이렇게 마음은 아픈 것일까.

이대로 두 번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아파온다.

쏴아아아!

1층으로 내려오자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온통 비로 뒤덮인 세상이었다.

저 비가 자신의 복잡하게 얽힌 마음을 풀어줄 것 같았다.

눈앞에 깊게 고인 웅덩이가 보인다.

수연은 그 웅덩이에 그대로 발을 옮긴다.

차박.

차가운 느낌과 함께 웅덩이에 파문이 일어난다. 그리고 그 파문은 곧이어 사라진다.

자신 또한 이와 같겠지.

소녀시대에서 탈퇴했다고 하면 한동안 파문이 일어날 것이다. 하지만 그것 뿐, 아직까지 인지도를 형성하지 못한 상황이기에 분명 그 파문은 머지않아 가라앉을 것이다.

복잡한 마음 또한 마찬가지다.

머리가 터질 듯이 복잡했고, 가슴 또한 아팠지만 비를 맞으면 언젠가 그 아픔이 씻겨 내려갈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쏟아져 내리는 거리를 걷는다.

자신의 마음 속 가득 채우고 있는 아픔이 씻겨 내려가기를 간절히 원하면서…….


숙소 분위기는 최악이었다.

태연은 자신이 했던 말에 스스로 놀라 입을 떡 벌리고 있었고, 멤버들은 수연이 그런 태연의 말에 탈퇴를 하겠다며 집을 나선 것에 놀라 굳어 있었다.

설마 수연이 정말로 탈퇴를 하겠다고 선언할 줄이야.

미처 붙잡을 틈도 없었다.

수연의 탈퇴 선언에 멤버들이 놀라 굳어버린 사이 그대로 집밖으로 나선 것이다. 그것도 옷도 제대로 챙겨 입지도 않고 우산도 갖고 가지 않은 채 말이다.

주현이 눈물을 흘리면서 입을 열었다.

“어, 어떻게 해요! 수연 언니 정말 탈퇴하는 거예요?”

지금 일어난 일이 꿈과도 같은 주현이었다.

정말 수연이 탈퇴를 한다고 말한 것인지 아직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 주현의 말에 놀라움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던 소녀들이 정신을 차렸다.

먼저 소리친 것은 효연이었다.

“야! 김태연! 너 지금 수연이한테 뭐라고 한 거야?”

아무리 화가 나도 할 말이 있고 안 할 말이 있다.

태연이 수연에게 탈퇴하라고 이야기 한 것은 명백한 그녀의 잘못이다.

효연의 외침에 태연은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 그게 그러니까…….”

“할 말이 있고 안 할 말이 있잖아. 수연이가 그런 모습을 보여도 우리가 가만히 있었던 것은 지금 이 순간 가장 힘든 게 수연이어서 그런 거라고! 수연이거 얼마나 열심히 했는데! 무리 7년 동안 쉬지도 않고 매일 같이 연습을 한 게 수연이야! 가장 열심히 한 수연이가 되지도 않는 셀카 때문에 얼마나 마음고생을 하고 눈물을 흘렸는데 김태연 네가 그런 말을 하느냔 말이야!”

말을 하면서 감정이 복받쳤는지 효연의 눈에 눈물이 글썽인다.

연습생 생활을 가장 먼저 오래한 축에 속하는 그녀였기에 수연이 얼마나 열심히 연습을 해왔는지,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알 수 있었다.

어린 나이부터 연습생 생활을 한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지만 그것을 꿋꿋하게 이겨내고 가수가 된 지금, 돌아오는 것은 스포라이트가 아닌 악성 루머뿐이다. 그것만이면 상관없겠지만 인기의 편중으로 인해 자신이 과연 가수를 계속 해야 할지 회의감이 들고 있는 실정이었다. 효연 자신 또한 그런 감정을 느끼고 있고, 괴로운 실정인데 거기에 악성 루머에 시달리는 수연은 어느 정도겠는가.

효연의 외침에 모두가 놀란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그녀가 이렇게 소리칠 줄 몰랐고, 그녀의 말에서 진심으로 수연을 위한다는 감정이 묻어나오고 있던 것이다.

“…….”

태연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자신이 말하면서 경솔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지만 효연의 말을 들으면서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큰 실수를 저질렀는가를 느낄 수 있었다.

언제나 하나고, 언제나 자매처럼 지낼 수 있다고 여겼다.

지금은 힘들더라도 나중에는 같이 웃을 수 있고, 함께 역경을 극복하며 인기를 얻어나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착각.

자신이 힘들다고 여기는 것과 다른 멤버들이 힘들다고 여기는 것은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겪어보지 않고서는 모른다는 말이 있다.

태연은 막연하게 수연이 힘들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녀가 얼마나 힘들어 할지, 그녀의 감정이 어떠한 상태일지 생각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녀에게 그런 상황이 닥친 적이 없으니 수연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 했던 것이다.

조금만 더 신경 써서, 조금만 더 수연을 배려하고 이해했더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자신의 경솔함이 지금 같이 미울 때가 없었다.

‘일단 수연이를 찾자. 그리고 사과를 해야 해.’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깨닫자 태연의 두뇌 회전이 빨라졌다.

그녀는 고개를 들고 성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효연에게 말했다.

“미안해, 효연아. 내가 경솔했어. 사과는 수연이를 찾아오고, 수연이한테 용서를 빌면서 하도록 할게. 정말 미안해.”

그 말과 함께 태연이 방으로 들어가 옷을 챙겨 입고는 우산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그런 태연의 모습을 보면서 효연은 하아! 하고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입을 연다.

“태연이가 곧 있으면 수연이를 데리고 올 테니까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밝게 해놓자.”

“으응.”

“네, 언니.”

효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는 멤버들이었다.

약 삼십 분이 흐르고, 태연이 숙소 안으로 돌아왔다.

그녀의 얼굴은 파리하게 질려 있었다.

태연이 안으로 돌아오는 것을 본 효연이 물었다.

“왜 수연이는 없어?”

파랗게 질린 안색으로 태연이 대답했다.

“수연이가… 사라졌어.”

“뭐라고?”

태연의 대답에 효연은 물론 다른 소녀들 또한 경악한 표정으로 물었다.

수연이가 사라지다니?

삼십 분이나 흐른 만큼 태연은 아파트 단지 곳곳을 뒤져보고 돌아왔을 것이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게 아닐까.

소녀들의 얼굴에 불안감이 서리기 시작한다.

효연이 다급한 음성으로 태연에게 물었다.

“전화는? 전화는 해봤어?”

“해봤는데… 받지를 않아. 어떻게 하지? 수연이가 연락을 받지 않아.”

태연의 눈에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수연이 연락이 닿지가 않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게 아닐까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그녀의 말에 소녀들의 당황함이 더욱 커져가자 효연이 태연을 보며 말했다.

“우리가 나가서 찾아볼게. 태연이 넌 수연이한테 계속 연락해봐. 알았지?”

“알았어.”

“얘들아 나가자.”

그 말과 함께 효연을 비롯한 다른 소녀들이 옷을 챙겨 입고 우산을 들고는 밖으로 나갔다.

숙소에 홀로 남은 태연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수연에게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제발… 제발 받아줘.’

기도를 하듯 중얼거리며 전화를 연신 거는 태연.

그렇게 몇 번을 걸었을까.

대충 열 번은 넘게 전화를 건 것 같았다.

변함없이 들려오는 컬러링 소리에 태연은 점점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이렇게 전화를 했는데도 받지 않는다는 건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 컬러링이 끊기면서 전화를 받아드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태연의 표정이 환해졌다. 드디어 수연이 전화를 받은 것이다!

하지만 이내 들려온 목소리에 태연의 안색은 딱딱하게 굳고 말았다.


쏴아아아아!

하늘이 뻥 뚫린 것처럼 비가 쏟아져 내리고 있다.

거리를 질주하는 한 대의 벤이 있었다.

그 안에는 다름 아닌 창현과 세희가 탑승하고 있었다.

AA엔터테인먼트에서 나온 두 사람은 벤을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창현이 로드 매니저에게 세희도 함께 태워주면 안 되냐고 물으니 오히려 싱글벙글 웃음을 지으며 승낙을 한다. 먼저 창현을 집에 바래다주고 돌아가게 되면 그 시간은 세희와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이어서 그렇다. 자리를 만들어주는 창현에게 고마웠으면 고마웠지, 결코 거부할 거리가 아니었다.

그렇게 벤에 탑승한 두 사람은 곧장 방송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세희가 창현에게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은 Mnet에서 하기로 한 이벤트 방송 때문이다.

MKMF에서 창현과 세실리아의 키스 퍼포먼스 사건으로 인하여 2007 MKMF는 그야 말로 대박이 난 상태였다. 현의 존재만으로도 엄청난 인지도를 얻은 상태였는데 거기에 이슈 거리가 생기다 보니 그 관심이 엄청나게 쏠렸던 것이다.

그로 인해 Mnet은 이벤트 방송을 당초 예정보다 빠르게 하기를 원하고 있었다. MKMF에서 끌어올린 관심을 그대로 이벤트 방송에 유치시키려는 속셈이었다.

하지만 AA엔터테인먼트에서는 그리 급할 이유가 없었기에 천천히 결정을 내리겠다는 입장이었다.

이제 매니저인 세희가 본격적으로 활동하는 만큼, 창현의 일에 대해서는 그녀에게 전담하기 시작한 것이다. 일종의 시험이었다. 그녀가 잘 처리하는지 지켜보기 위한 것도 있었다.

세희 또한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열의를 갖고 열심히 하려고 하고 있었다.

창현이 세희를 보며 말했다.

“우선 이벤트 방송이니 만큼 천천히 기획을 했으면 좋겠는데요? 좀 더 내용을 알차게 해서요. 기획은 나쁘지 않지만 자칫 잘못하면 흐지부지 끝날 수 있을 것 같은데.”

창현의 말에 세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그렇네. 실제로 그럴 수도 있고. 어차피 급한 것은 아니니까 천천히 결정을 내리도록 하자. 이쪽 의견을 적극적으로 반영해주기로 했거든.”

“그럼 나쁠 것 없네요. 천천히 하는 방향으로 하면 되겠네요.”

그렇게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차였다.

창현이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로 막 들어설 무렵이었다.

무심코 바깥을 지켜보고 있던 창현이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반응을 보였다.

“응?”

무언가 익숙한 실루엣을 본 창현은 창문을 손으로 닦으며 밖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로드 매니저를 향해 외쳤다.

“형! 잠시만 차 세워줘요!”

“왜 그러는 거야?”

갑작스러운 창현의 모습에 세희가 물었지만 그는 대답할 겨를이 없었다. 그저 로드 매니저에게 다시 한 번 소리칠 뿐이었다.

“형! 세워주세요.”

“무슨 일인지 몰라도 알았다.”

로드 매니저는 창현의 다급한 목소리에 무언가 일이 생겼다는 것을 느끼고는 차를 세웠다.

그러자 창현이 문을 열고는 미처 우산을 챙길 겨를도 없이 뛰쳐나갔다. 뒤에서 세희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 목소리는 창현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창현의 시선은 한곳을 향하고 있었다.

약 10m 정도 떨어진 곳에는 우산을 쓰지도 않은 채 한 사람이 마치 유령처럼 걸어가고 있었다.

갈색기가 감도는 긴 검은색 머리를 지닌 여인은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창현은 황급히 여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자신의 예상이 맞았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는 여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입을 열었다.

“수연 누나? 수연 누나 맞죠?”

그렇다. 이렇게 비가 쏟아지는 길을 홀로 걷고 있는 여인은 다름 아닌 수연이었던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이대로 좋다는 생각을 하며 걸음을 옮기던 수연은 갑자기 자신의 어깨에 올라오는 손과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걸 느꼈다.

힘들 때 무척이나 듣고 싶은 목소리였고, 자신이 괴로울 때 늘 힘이 되어주던 목소리였다.

수연의 고개가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해 돌아간다. 그리고 익숙한 얼굴을 발견한 순간, 수연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맺힌다.

입을 열어 그의 이름을 불러본다.

“창현이……?”

그 사이 감기라도 걸린 것일까.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는다.

목이 무척 무겁다고 느끼면서 수연이 창현의 이름을 부른다.

그녀의 부름에 창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저에요, 창현이. 그런데 누나 무슨 일이에요. 왜 우산도 쓰지 않고 길을 걷고 있는 거예요?”

창현의 눈에 들어온 수연의 차림새는 결코 평범한 것이 아니었다. 우산을 쓰지 않고 비를 맞는 수연의 모습도 모습이지만 무엇보다 그녀의 옷차림은 실내에서 입을 법한 얇은 차림이었다. 12월이 다 되어가는 지금 같이 쌀쌀한 날에 이런 차림으로 돌아다니면 감기 걸리기 십상이었다.

그런 창현의 물음에 수연은 그저 미소를 지어보일 뿐이었다.

비를 맞으면 털어버릴 줄 알았던 감정의 찌꺼기들이 생각보다 끈질기게 버티고 있었다. 그래서 조금 더 맞으면서 길을 걷고 있었는데 마치 신이 운명을 점지해주신 것처럼 창현과 자신이 만날 수 있게 해준 것이다.

이 사실이 수연은 너무나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

“그냥… 비를 맞고 싶어서…….”

말을 하는데 목이 따끔하다. 아무래도 감기인가보다.

창현은 잔뜩 가라앉은 수연의 목소리에 그녀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선은 아무래도 좋았다. 비부터 피하게 만들어야 할 것 같았다.

“누나, 일단 제 벤으로 가요. 비 계속 맞으면 감기 걸려요.”

창현의 걱정에 수연은 입가에 미소를 더욱 진하게 지어 보인다.

자신이 힘들 때도 늘 기분을 좋게 해주고, 한결같이 대해주는 창현이었다. 창현을 보는 순간 수연은 자신을 괴롭히던 루머들도, 태연과 다투었던 것들도 모두 잊을 수 있었다. 창현 그 자체가 수연에게 특효약인 것처럼 그녀의 아픔을 모두 씻어 내려가게 만들어주었다.

수연이 손을 들어 창현의 볼을 만진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행동에 창현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행동에 놀란 것도 있지만 자신의 볼을 만지는 수연의 손이 불덩이처럼 뜨거웠던 것이다.

놀란 표정을 짓는 창현을 보며 수연이 입을 연다.

“창현이 널 보니까 기분이 무척…….”

그녀는 말을 끝맺을 수 없었다.

창현을 봐서 그런 것일까?

긴장의 끈이 풀리는 것을 느낀 순간 갑자기 머리가 핑 도는 것을 느낀 것이다.

그와 함께 의식의 단절.

수연의 몸이 그대로 무너져 내린다.

“수연 누나!”

말을 하던 수연이 쓰러지자 창현은 화들짝 놀라 그녀의 몸을 받아든다.

쏴아아아아!

쏟아지는 비는 마치 창현과 수연을 향해 내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수연이 쓰러지자 창현은 황급히 그녀를 안아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뜨겁다. 비를 맞아서 그런지 이마가 마치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이대로 두다가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

창현은 그녀를 안아들고는 그대로 벤을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어느새 벤에 나와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세희에게 외쳤다.

“누나, 수건 좀 준비해주세요.”

세희는 차에서 내린 창현이 갑자기 여자 하나를 안고 오자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이며 재빨리 벤 안으로 들어갔다.

“알았어. 일단 너도 안으로 들어와. 비를 맞으면 안 되니까.”

세희의 말에 창현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수연을 안아든 채 차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세희가 내미는 수건을 받아들고는 수연의 몸에 올려놓았다.

창현이 차 문을 닫으면서 로드 매니저에게 말했다.

“형, 저희 집으로 가주세요.”

그런 창현의 말에 세희가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럼 이 여자 분은 어쩌고?”

“어쩌긴요. 저희 집으로 데리고 가야죠.”

“뭐, 뭐라고?”

창현의 폭탄 발언에 세희는 물론 로드 매니저까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반문했다.

“너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어? 생판 모르는 여자를 집으로… 잠깐, 이 여자 소녀시대 제시카 아니야?”

따끔하게 창현에게 한마디를 하려던 세희가 쓰러진 수연의 얼굴을 알아보고는 말했다.

그런 세희의 말에 창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녀시대 숙소가 이 근처에요.”

“그런데 왜 네 숙소로 가자고 하는 건데?”

세희의 말에 창현이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지금 상황이 그러하니까요.”

수연이 왜 우산도 쓰지 않고 옷도 챙겨 입지 않은 채 밖을 나온 뒤 걷고 있는 것일까.

창현은 그런 수연의 모습을 보고 한 가지에 생각이 미쳤다.

바로 멤버들간의 불화 혹은 싸움이 일어났다는 가정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그녀가 이런 늦은 시간에 옷도 제대로 갖춰 입지 않은 채 밖을 나올 이유가 없다.

비가 맞고 싶어서? 말이 안 된다.

그리고 뛰쳐나왔다는 것은 다툼이 제대로 화해가 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수연을 숙소에 데려다주는 것은 좋지가 않다. 어떤 식으로든 확실하게 결론이 나지 않은 이상 불편하기만 할 테니 말이다.

무엇보다 자신들이 소녀시대 숙소로 간다는 것 자체가 무척 어려웠다.

창현의 숙소를 옮긴지 얼마 되지 않았건만 벌써 위치를 알아낸 기자들이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실정이었다. 사실 벤을 열고 수연을 부축하면서도 창현은 아차 하였다. 자칫 잘못 사진을 찍히다가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큰 기사거리를 제공하는 셈이니 말이다.

아파트 단지로 들어서는 초입이기에 기자가 없을 것이라 스스로 위안을 삼을 뿐이었다.

벤으로 소녀시대 숙소로 가려면 창현의 숙소와 반대 방향으로 가야 한다. 그런데 아파트 단지 내로 벤이 들어선 것을 본 사람이 있다면 분명 의아하게 생각할 것이다. 일반인이라면 상관없지만 기자가 본다면 창현이 탑승하는 벤과 소녀시대가 탑승하는 벤은 엄연히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러다가 창현이 소녀시대와 사적으로 접촉하는 장면을 들키기라도 하면 끝장이다.

소녀시대와 만나려면 단지 앞에서 만남을 가져야 하지만 창현의 집은 지하 주차장에서 곧장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으로 올라갈 수 있다. 보완 면에서 오히려 그 방법이 더 나았다.

그리고 창현이 굳이 수연을 데리고 가려던 이유는 또 있다.

쓰러지기 전 자신을 보고 미소를 짓던 수연의 모습이 뇌리에 강렬하게 각인되어서 그렇다.

안심한 듯한 그녀의 표정.

보통 때라면 분명 같은 멤버들이 의지가 되어주었을 것이다. 결코 자신을 보면서 안도의 감정을 느낄 수연이 아니었다.

정말 멤버들간의 불화가 있었다면 이것은 심각한 일이었다.

억지지만 창현은 SM엔터테인먼트와 계약한 프로듀서로서, 그리고 사적으로 친한 동생으로서 이번 일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기에 어찌 되었든 자신이 연관된 이상 자세한 연유를 알아보고 도울 수 있으면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창현이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오늘 비가 많이 와서 기자들이 없을 것이란 생각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추측일 뿐이다.

세희는 창현의 말에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난 창현이 네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어.”

이대로 제시카를 데리고 있다가 소녀시대에게 연락을 해서 데리고 가게 하면 끝날 일이다.

창현이 소녀시대의 연락처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은 말이 안 되는 이야기다. 사적으로 무척 친하다는 걸 알고 있는 만큼 그런 허술한 변명에 넘어갈 생각은 없었다.

창현은 세희를 설득하려니 머리가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순간 여러 생각이 머리에 감돌았지만 창현은 그 생각을 지웠다. 무엇을 말하던 간에 세희를 납득시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창현은 세희를 바라보더니 말한다.

“제 행동이 용납되지 않으면 오늘 누나도 제 집으로 오세요. 그럼 되죠?”

“뭐라고?”

세희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창현의 말에 반문한다.

이게 무슨 말이란 말인가.

제시카를 데리고 가는 걸 막기 위해서 창현을 설득하려고 한 것인데 오히려 막무가내식으로 나오다니.

세희의 입장에서는 황당하고 어이가 없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창현도 전혀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수건으로 수연의 얼굴을 닦으면서 말했다.

“저도 짐작일 뿐이라서 아직 확답은 못 드려요. 하지만 제 예상이 확실할 거예요. 그러니 누나도 제 말에 따라주세요.”

평소 창현이라면 타당한 근거와 주장으로 설득을 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창현의 모습은 그야 말로 막무가내 그 자체였다.

세희는 그런 창현의 모습에 머리가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지금 창현은 전혀 말이 먹히지 않는 모습 그 자체였던 것이다.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은 세희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로 창현 혼자 제시카를 데리고 집으로 올라가게 하다가는 자신이 불안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것 같았다.

“알았어. 그럼 나도 따라가도록 할게.”

“저도 그게 편해요. 그럼 잘 부탁드릴게요.”

그 사이 벤은 주차장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기자들이 주차장까지는 들어오지 못한다. 감시 카메라로 실시간 외부 사람들의 유입을 막고 있었던 것이다.

벤이 주차를 하자 창현이 수연을 업어든다. 그리고 세희가 그 뒤를 따른다.

창현이 로드 매니저를 보며 고개를 숙인다.

“형, 미안해요. 사정이 이렇다 보니.”

그의 사과에 우울한 표정을 짓던 로드 매니저가 고개를 젓는다.

“아니다. 그럴 수도 있지. 어쨌든 이번 일은 사장님께 말하지 않을 거니까 잘 처리하도록 해.”

“알았어요. 그리고 고마워요.”

그렇게 로드 매니저와 인사를 나누고 일별한 창현은 수연을 업은 채 자신의 집으로 향한다. 그리고는 집안으로 들어서자 창현이 세희에게 말한다.

“누나, 안방에 제 옷장이 있거든요? 수연 누나 옷이 다 젖어서 그런데 누나가 좀 갈아입혀주셨으면 좋겠네요.”

아직 성장기라 남자들 치고 키가 작은 창현이었지만 수연보다는 체구가 컸기에 대충 헐렁한 옷들은 얼추 맞을 듯 싶었다.

“알았어.”

창현의 말에 세희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가 가르쳐준 안방으로 향한다.

그 사이 창현은 수연을 업은 채 침대에 그녀를 눕힌다. 그리고 옷을 들고 오는 세희를 보고는 말한다.

“그럼 부탁할게요.”

“맡겨둬.”

세희의 대답을 들은 창현이 그대로 방을 나선다. 그리고 주방을 뒤지면서 음식을 뒤적이기 시작한다.

“재료는 얼추 있구나.”

재료를 꺼내든 창현은 곧장 채소죽을 만들기 시작했다. 비를 맞아 감기에 걸린 수연을 먹이기 위한 죽이었다.

대충 재료 손질을 끝마친 창현이 방을 나오는 세희를 보며 물었다.

“다 하셨어요?”

세희는 아무런 말없이 창현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낯선 핸드폰을 창현에게 내밀었다.

“창현이 네가 일을 벌려놓았으니 네가 수습하도록 해.”

창현은 얼떨결에 핸드폰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액정을 확인하는 순간 세희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내민 것은 다름 아닌 수연의 핸드폰이었고, 핸드폰에는 한창 전화가 오고 있던 것이다. 액정 사이로 뜬 전화번호는 태여니♡ 라고 이름이 비춰지고 있었다.

창현의 예상처럼 무언가 일이 있었던 것이라.

순간 창현은 자신이 수연을 이곳에 데려오면서 소녀시대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급한 마음에 허둥지둥 서두르느라 연락까지는 고려하지 못한 것이다.

다만 자기 스스로 소녀시대 내에 불화가 있었다고 추측을 하고, 불편하게 만들기 않기 위해 이곳으로 데려오기 위해 애를 썼을 뿐이었다.

핸드폰을 받아든 창현은 고민에 빠졌다. 지금 이 전화를 받아야 할지 받지 말아야 할지 갈등이 되었던 것이다.

자신이 먼저 연락을 하는 것과 연락이 온 것을 받는 것은 종류가 다르다. 하물며 자신의 핸드폰도 아닌 수연의 핸드폰에 온 전화다.

고민을 하던 창현은 결정을 내렸다.

수연이 갑자기 숙소를 뛰쳐나온 것이라면 멤버들도 걱정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게 좋을 것이다.

핸드폰 폴더를 연 창현이 통화 버튼을 누르며 전화를 받아들었다.

“여보세요?”


한참 동안 수차례 수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혹시 무슨 일이 있을까봐, 자신의 말에 상처를 입어서 나가서 잘못된 것은 아닐까봐 걱정을 하며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수연은 받지 않았고 그럴수록 태연의 마음은 새까맣게 타들어갔다.

몇 번이나 전화를 했을까.

기계적으로 전화를 반복하길 수차례.

집요하다고 할 정도로 계속해서 전화를 하였다.

그러다가 전화가 연결되었다.

전화가 연결되었다는 사실에 태연의 얼굴이 환해졌다. 적어도 수연에게 다른 일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으니 말이다.

당장 자신이 잘못했다고, 미안하니까 아까 했던 말을 고려해달라고 이야기 하고 싶었다. 자신이 그만큼 경솔했다는 것을 자책하고 있었고, 수연에게 사과를 하고 싶었다. 효연의 말을 듣고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그동안 수연이 얼마나 심적 고생이 심했을지 알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뒤이어 건너편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태연은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들려온 목소리는 수연의 목소리가 아닌, 너무나 익숙한, 그리고 지금 이 상황에서 들릴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여보세요?

“…….”

창현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태연은 머리가 복잡해져갔다.

왜 창현이가 전화를 받는 거지? 자신이 전화한 상대는 다름 아닌 수연인데?

설마 창현이와 수연이가 같이 있는 것인가? 그런데 왜 수연이가 아닌 창현이가 받는 것일까.

혼란을 느낀 태연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할 때, 창현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온다.

-여보세요? 태연 누나 아니에요?

“나 태연이 맞아. …창현이 맞지?”

내심 창현이라는 것을 확신하면서 태연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면서 마음 한편에서는 창현이가 아니었으면 좋다고 생각하였다.

그가 수연이랑 같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기 싫었다.

그녀는 자신의 속마음에 놀라면서 한편으로는 이런 마음을 갖는 자신이 미웠다.

지금 가슴 속에 자리한 감정은 질투란 감정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녀가 바란다고 진실이 바뀌지는 않는다.

반대편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태연으로 하여금 진실을 깨닫게 해준 것이다.

-저 창현이 맞아요.

“…그렇구나.”

실망의 감정이 들었다. 수연이는 밖에 나가서 창현이와 함께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마음이 착잡했다.

입맛이 쓴 것을 느끼며 태연이 입을 열었다.

“수연이는 어때?”

이 질문에는 왜 수연 대신 네가 전화를 받느냐는 의미도 함께 포함하고 있었다.

태연의 질문에 잠시 멈칫거리는 것이 느껴지더니 창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수연 누나 제 침대에서 자고 있어요.

“뭐, 뭐라고? 왜?”

창현의 말에 화들짝 놀란 태연이 물었다. 창현의 침대라니! 얼핏 들으면 무척 불건전한 내용이 상상되는 말 아닌가?

놀란 태연의 목소리에 창현은 자신이 실수한 걸 느꼈는지 아, 하는 소리와 함께 자초지종을 설명하였다.

-그게 아니라요. 수연 누나 지금 아파요.

“수연이가 아프다고? 왜?”

태연은 소리치면서 수연이 아픈 이유를 직감할 수 있었다.

우산도 없이 밖으로 뛰쳐나가서 그런 것이다. 옷도 실내에서 입는 얇은 옷을 입고 나가서 비를 맞았으니 감기가 걸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녀의 예상처럼 창현의 답변도 비슷했다.

-비를 많이 맞아서 감기에 걸린 것 같아요. 차를 타고 돌아오는데 수연 누나를 만났거든요. 우산도 없이 비를 맞고 있어서 다가갔는데 갑자기 쓰러지더라고요. 그래서 제 집으로 데리고 온 거예요.

창현의 말을 들으면서 태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창현이 중간에 수연을 봐서 다행이었다.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하지 않았는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태연이 말했다.

“고마워. 창현이 네가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네. 집 주소 좀 말해줄래? 지금 데리러 갈게.”

옆집에 살고 있었지만 얼마 전에 창현이 이사를 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주소에 대해서는 들은 적이 없기에 주소를 묻는 것이다.

창현이 말해주면 태연은 통화를 끝낸 뒤 수연을 찾으러 간 멤버들을 불러서 같이 찾아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창현의 대답은 태연의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안될 것 같네요. 아니, 안 오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어째서?”

전혀 뜻밖의 말에 태연이 목소리를 높이며 물었다.

하지만 대답하는 창현의 목소리는 담담하기만 했다.

-그건 누나가 더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는데……. 물어볼게요. 누나, 수연 누나랑 무슨 일 있었죠?

“…….”

정곡을 찌르는 질문이었다.

태연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어떻게 창현이 알았는지 머리가 복잡했다.

분명 수연을 만나기는 했지만 만나는 순간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는 이야기를 들은 직후였다. 그렇다는 것은 창현 스스로가 짐작을 했다는 이야기였다.

태연은 창현의 물음에 대답을 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이번 일은 어떻게 보면 소녀시대 내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만큼 외부인은 상관하지 않는 것이 좋다.

하지만 자신들 선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에 창현이가 개입을 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창현도 알아야 한다는 것인데, 태연은 말하기가 꺼려졌다.

자신의 잘못한 일을 누구에게 털어놓고 싶겠는가.

그녀의 머뭇거림은 창현에게 있어 긍정으로 들렸다. 틀리다면 반박을 했을 테니 말이다.

짧게 한숨을 내쉰 창현이 말했다.

-하아! 역시 제 예상이 맞았네요. 안 그랬다면 수연 누나가 겉옷도 입지 않고 우산도 안 가지고 나온 채 나올 리가 없잖아요. 저한테 말해줄 수 없을 만큼 심각한 문제로 싸운 거예요?

“…응.”

태연은 그렇게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수연이 깨어나면 밝혀지겠지만 자신의 입으로 수연에게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을 고백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입으로 직접 말해서 창현에게 실망감을 줄 수 없었던 것이다.

-제가 보기에는 무슨 일이 있는 지금 상황에서 누나들이 오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해요. 혹시 제 집 밖에 있을 기자도 염려해야 하고요.

“그럼 어떻게 할 생각인데? 같이 하루를 보내겠다는 이야기야?”

집에 여자와 함께 있다는 것을 쉽게 생각하는 걸까.

불안한 마음에 태연이 묻자, 창현이 안심하라는 듯 말했다.

-집에 매니저 누나도 같이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고 재우겠다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수연 누나가 깨어나면 물어볼게요. 돌아갈 건지 말이에요. 그러니 누나가 다른 누나들에게 잘 말해주세요.

“알았어…….”

창현의 말에 태연은 그렇게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이 찾아간다고 해도 또 문제였다. 깨어난 수연이 과연 숙소로 돌아가려 할지 의문이었고, 자신의 사과를 받아줄지도 의문이었으니 말이다.

-그럼 끊을게요. 수연 누나가 깨어나고 이야기 나눈 뒤에 연락할게요.

“그래.”

그걸로 통화는 끝났다.

한동안 자신의 핸드폰을 바라보던 태연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러면서 그녀는 문자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아직도 밖에서 수연을 찾고 있을 멤버들에게 말이다.

문자를 작성하는 태연의 표정은 밝지 못했다.


“후우!”

태연과 통화를 끝낸 창현도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예상대로 멤버들간에 무언가 불화가 있는 듯했다.

척하면 척이라고 자신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는 태연의 모습에서 창현은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핸드폰을 식탁 위에 올려놓으며 창현이 생각했다.

‘잘한 거겠지.’

소녀시대 멤버들이 찾아오면 수연의 반응도 반응이지만 무엇보다 자신의 집 밖에 잠복하고 있을 기자의 존재가 걱정되었다. 만약 이곳으로 들어서다가 사진이라도 찍히면 무슨 제목을 달고 기사가 나갈지 모르니 말이다.

수연을 배려하기 위해, 그리고 자신과 소녀시대를 위해 이곳에 오는 것을 말린 창현이었다.

창현은 한쪽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세희를 보고는 말했다.

“누나는 안방 쓰세요. 혹시 손님이 올지도 몰라서 손님방으로 해놓았는데 잘 됐네요.”

“난 도대체 창현이 네가 일을 어떻게 처리하려는 건지 모르겠다. 후우!”

그가 통화하는 내용을 듣고 있던 세희는 사태가 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그랬기에 머리가 아파오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는 창현을 쳐다보며 말했다.

“피곤해서 그러니까 쉬고 있을게. 그렇다고 이상한 짓하면 안 돼.”

“절 뭐로 보고 그러시는 거예요. 쉬세요.”

세희는 안방으로 들어가고, 창현은 부엌에서 채소죽을 만들었다.

그리고 채소죽이 완성이 되자 가스 불을 끄고는 뒷정리를 한다. 그리 어질러 놓은 것이 없기에 금방 뒷정리를 끝마쳤다.

뒷정리를 모두 한 창현은 화장실로 들어가 씻기 시작했다. 창현의 집은 안방에 화장실이 있고, 거실과 주방 사이에 화장실이 있기에 겹칠 일이 없다.

간단하게 씻고 나온 창현은 거실 소파에 앉아서 생각에 잠겼다.

무작정 수연을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왔으니 이제 해결책을 고안해야 한다.

일단 소녀시대 내에서 어떤 불화가 있었다. 그리고 태연이 말하기를 꺼려할 정도로 제법 큰 일이 일어난 상태다.

창현은 솔직히 이 문제를 자신이 도움을 주기 힘들 것이라 생각했다. 소녀시대 내에서 분란이 일어났다면 그것은 소녀시대의 일이기 때문이다. 아무 상관이 없는 자신이 끼어들면 오히려 분란을 키우는 역할을 할 뿐, 사태를 수습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상황에 발을 걸치게 된 지금 창현은 어떤 형태로든 도움을 주고 싶었다.

단순히 친한 누나들이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햇수로 2년 동안 알아온 그녀들은 창현에게 있어 그저 친한 누나들이 아닌, 좀 더 발전된 의미로서의 누나였다. 그러니 그녀들이 힘들어한다면 자신이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다.

생각에 잠겨있던 창현은 저쪽 방에서 뒤척이는 소리를 들었다. 수연이 잠에서 깨어난 듯했다.

창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향했다.


몸이 무척 무거웠다.

그리고 마음이 아팠다.

지난 일을 돌이켜 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 많다.

인원수가 많은 만큼 초기에 인기의 편중은 당연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것은 태연의 잘못도 아니고, 윤아의 잘못도 아니고, 미영의 잘못도 아니다. 그저 사람들이 보고, 그냥 좋아할 뿐이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순간의 욱하는 성질을 참지 못해서 그랬다.

조금만 더 참았다면 좋았을 걸.

주현이 컵을 깨뜨린 것도 평소 같으면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갈 일이었다.

신경이 날카롭다 하여 사소한 것에 화를 내면서 내심은 이게 아닌데? 라고 생각하며 후회한다.

태연과 말싸움 이후 탈퇴 선언.

순간의 화를 이겨내지 못해서 일어난 일이다.

탈퇴할 마음이 없는데, 조금 더 연습을 해서 보란 듯이 인기를 얻고 자신을 욕하던 사람들에게 당당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비를 맞으면서 가슴 속 가득 채우고 있는 후회란 감정을 털어내고자 했지만 그 행위가 도움이 될 리가 만무하였다.

그 후회는 미련이 되어 가슴 속 구석구석 진득하게 붙어있는 걸.

눈을 뜬 수연의 눈에 보인 것은 낯선 곳이었다.

자신을 덮고 있는 이불도 낯설었고, 자신이 배고 있는 베개 또한 낯선 것이었다.

한 가지 익숙한 것이 있다면, 코끝으로 흘러들어오는 익숙한 향기였다.

단 한 사람에게서 느낄 수 있는 그런 향기.

“후읍!”

깊숙하게 그 향기를 코로 받아들인다. 그러자 머리가 아픈 것이, 몸이 무거운 것이 조금이나마 가시는 기분이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 눈에 들어오는 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창현이었다.

그의 모습을 보면서 수연은 아까 전 빗속에서 벌어졌던 만남이 꿈이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맺힌다.

창현은 미소를 짓는 수연의 모습에 자신 또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입을 열었다.

“괜찮으세요?”

“괜찮은 것 같아…….”

그렇게 대답은 했지만 전혀 괜찮지 않다는 것을 팍팍 티내고 있었다.

우선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이 그러했고,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열이 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두통이 물밀 듯이 몰려왔고, 몸에 열은 나는데 추웠다. 아무래도 몸살인 듯했다.

창현은 괜찮다고 대답해놓고 전혀 괜찮지 않아 보이는 수연의 모습에 짧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아! 누나, 이럴 땐 상대방에게 위로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솔직히 말하는 것이 좋아요. 일단 누워요.”

그러면서 수연을 눕힌 창현이 거실로 나가서 물에 적신 수건을 가지고 온다. 그리고 수연의 이마 위에 올려놓으며 묻는다.

“배고프지 않아요?”

“아니, 안 고프네.”

저녁을 먹지 않았지만 이상하게 배는 고프지 않았다. 머리가 복잡해서 그런 것일까. 먹을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그래요? 으음! 그럼 다행이고요.”

배가 고플까 싶어 채소죽을 끓였는데 조금 아쉬웠다.

고개를 끄덕이면서 창현이 수연을 바라보았다. 수연은 그런 창현의 시선에 살짝 고개를 돌렸다. 볼이 상기된 것이 느껴졌지만 그것이 열 때문인지 아니면 부끄러워서 그런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왜, 왜 그렇게 쳐다봐.”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어서요.”

창현의 진지한 표정.

그것을 본 수연 또한 쉬운 질문이 아니란 것을 느끼고는 물었다.

“뭔데?”

“다른 누나들하고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

창현의 물음에 수연의 표정이 착 가라앉았다.

무겁게 짓눌러오던 머리도 차가워지는 기분이었다.

어떻게 알았을까. 자신은 정신을 잃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텐데. 그 사이에 통화라도 한 것일까.

수연이 창현의 눈을 들여다보며 입을 열었다.

“어떻게 안 거야?”

“제 짐작이에요. 이런 밤에 우산도 없이 비를 맞고 있는 모습을 본다면 어느 정도 추측이 되지 않을까요?”

창현은 태연과 통화한 이야기를 빼놓은 채 말했다. 어차피 태연과 통화를 하기 전부터 그렇게 짐작하고 있었으니 딱히 거짓말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의 말에 수연이 입을 다물었다. 그의 말처럼 그렇게 생각 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저렇게 생각을 하다 보면 충분히 도달할 수 있는 범주였으니 말이다.

“……어.”

수연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청각이 극도로 발달한 창현이 잘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네?”

못 알아들은 듯 창현이 되묻자, 수연이 다시 한 번 말한다.

“소녀시대에서 탈퇴하겠다고 말했어.”

“그게 정말이에요?”

창현의 눈이 크게 뜨였다. 수연이 털어놓은 사실은 그가 예상하던 것보다 더욱 큰일이었던 것이다.

기껏해야 녹음이 잘 안 되었다거나 스케줄 조정 건 때문에 다툰 것 정도로 생각했는데 창현의 예상보다 더욱 큰일이었다.

설마 탈퇴하겠다고 말할 줄이야.

머리가 지끈거리는 걸 느끼며 창현이 물었다.

“설마 이수만 회장님한테 그러신 거예요?”

“그건 아니야. 애들한테만 이야기 한 거니까.”

그렇다면 다행이다. 탈퇴 선언만 철회한다면 다시 돌아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도 또 문제가 있다. 수연이 스스로 자신이 한 말을 철회 할 수 있느냐였다.

이것은 어찌 보면 자존심 문제였다. 자신이 한 말을 번복한다는 것은 무척 껄끄러운 일이다. 특히 자신이 불리하던 상황을 유리하게 번복하는 것은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무척 꺼려한다.

탈퇴를 하겠다는 사안은 무척 중대한 것이다. 데뷔를 한지 얼마 되지 않았고, 아홉 명이라는 인원인 만큼 탈퇴를 해도 크게 티가 나지 않겠지만 한창 인지도를 키워나가는 과정에서 탈퇴를 하면 불화설이니 왕따설이니 별별 말이 흘러나올 확률이 높았다. 가뜩이나 악성 루머에 시달리고 있는 수연의 입장에서는 상황이 최악으로 치달을 수도 있다.

창현이 수연을 보면서 입을 열었다.

“한 가지만 더 물어볼게요. 누나, 정말 소녀시대를 탈퇴하고 싶어요?”

“…….”

그의 말에 수연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정말 자신이 탈퇴하고 싶어서 그랬던 것일까? 라고 의문을 던지면 대답할 수 있다. 아니다, 라고 말이다. 인기 편중 현상과 악성 루머가 불거지면서 신경이 극도로 날카로워졌던 차에 한순간 감정 때문이었다. 이대로 다 때려 치고 싶은 마음에, 당장 이 괴로운 현실에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그랬던 것이다. 정말 탈퇴를 하고 싶었더라면 후회란 감정은 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가슴 속에 남아 있는 것은 후련함이 아닌 후회란 감정이었다.

소녀시대는 그녀가 길고 긴 연습생 끝에 마침내 결실을 맺은 열매다. 그 열매가 맛없게 익는가 맛있게 익는가는 자신의 노력에 달린 것이다.

이대로 탈퇴하기 싫었다. 그러기에는 자신이 해온 노력의 기간이 길었고, 앞으로 열심히 할 의욕이 있었다.

탈퇴를 했다고 생각하자 정말 알 수 없는 공허감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이제는 아홉이 아닌 혼자란 느낌이 들었고, 아홉이서 뭐든지 해낼 수 있을 것 같던 것이 이제는 혼자란 느낌에 맥이 쭉 빠지는 것 같았다.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창현은 확신할 수 있었다. 수연이 탈퇴를 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머뭇거리는 것은 탈퇴를 선언한 시점에서 그녀가 다시 탈퇴 선언을 철회 한다는 것은 무척 껄끄럽고 어려운 일이다.

수연의 모습에 창현은 자신이 도와줄 수 있는 부분이 생겼다고 생각했다.

이런 경우에는 본인들이 해결하는 것보다 제3자가 중간에서 적절하게 말을 전달해주는 것이 중요하다.

“이거 받아요.”

창현이 수연에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그녀의 핸드폰이었다.

수연이 창현을 바라보자 그가 턱짓을 하며 말한다.

“통화 기록 한 번 보세요.”

그의 말에 수연이 핸드폰을 열고는 통화 기록을 살핀다.

그러자 그녀의 눈에 들어오는 빼곡한 태여니♡가 보였다. 대충 내려보니 스무 번이 넘게 전화 한 것을 볼 수 있었다.

수연의 시선이 다시 창현에게 향하자 그가 말한다.

“태연 누나가 그만큼 전화를 한 거예요. 정말 누나가 탈퇴하기를 바랐다면 그렇게 전화하지 않았겠죠?”

“…….”

창현의 말에 수연은 아무말없이 핸드폰을 바라본다.

전화 통화가 이루어지기까지 끊임없이 전화한 것이 눈에 보였다.

그렇게 소리를 치면서 싸워놓고, 이렇게 미안하게 만들다니.

이건 반칙이지 않은가.

수연의 표정에 미안한 감정이 떠올랐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창현이 입을 열었다.

“누나, 소녀시대로 다시 돌아가고 싶죠?”

창현을 힐끗 본 수연이 입을 열지 않은 채 고개를 작게 끄덕인다.

“어떤 상황인지 대충 짐작이 가요. 아마 누나는 즉흥적으로 말하셨을 거예요. 소녀시대에서 탈퇴하겠다고. 맞죠?”

다시 한 번 수연이 고개를 끄덕이자 창현은 마음을 굳힐 수 있었다.

단 한 번의 말실수로 모든 것을 저버리기에는 그녀가 쌓아온 것이 많다.

창현은 긴 시간 동안 노력해온 그녀가 잘 되길 바랐다.

그래서 번거로움을 무릅쓰고 도와주겠다고 마음을 굳힌 것이다.

“그럼 제가 도와드릴게요. 누나가 탈퇴 선언을 한 지금 그것을 철회하고 다른 누나들과 화해하는 게 중요할 테니까요. 제가 그걸 도와드릴게요.”

“…고마워.”

수연은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릴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은 혼자라 생각하였다.

하지만 자신의 곁에는 창현이 있었다. 악성 루머에 휩싸일 때도, 이렇게 힘들어 할 때도 창현이 곁에 있어 주었다.

그것이 너무나 고마웠다.

수연의 눈시울이 붉어지자 창현은 괜히 머쓱해져 머리를 긁적였다.

약간 어수룩한 창현의 모습에 수연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짓는다.

그 모습에 창현이 뭐라 입을 열려고 할 때, 그들의 귀로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꼬르륵.

분명한 것은 창현의 배에서 들린 소리가 아니란 점이다.

창현의 시선이 절로 수연에게 향했다.

방금 전 소리는 수연의 배에서 난 것이었다.

워낙 머리가 복잡하고 몸이 아팠던 탓에 배가 고픈 줄도 모르고 있던 수연이었지만 도움을 주겠다는 창현의 말에 일순간 긴장이 풀려 버리면서 몸이 정직하게(?) 반응을 한 것이다.

창현의 시선을 받은 수연의 얼굴에 붉게 달아올랐다. 열 때문에 원래 붉었지만 지금은 마치 토마토처럼 붉었다.

“배, 배가 고파서 나는 소리 가지고 뭘 그렇게 신기하게 바라봐.”

타박을 주는 수연이지만 그 목소리는 마치 개미 목소리마냥 작았다.

그런 수연의 모습에 창현은 피식 웃음을 짓고는 말했다.

“신기하게 안 봤어요. 그냥 본 건데요, 뭐. 그래도 누나가 먹을 수 있게 죽을 준비했는데 다행이네요. 잠시 기다려요, 죽 좀 들고 올 테니까요.”

잠시 후, 창현이 그릇에 죽을 들고 가져왔다.

그리고는 수연에게 죽을 내밀었다.

“별로 뜨겁지 않으니까 드세요.”

그때, 갑자기 수연이 베개에 몸을 푹 파묻었다. 그리고는 짐짓 힘든 표정을 지으며 힘겹게 팔을 들어 이마에 땀을 훔치며 말했다.

“하아! 힘들어서 그런데… 좀 먹여주면 안 돼?”

“……!”

수연의 말에 창현이 퍼뜩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말대로 정말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붉게 상기된 얼굴과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까지.

감기 몸살이어서 아직도 아파 보이는 그녀를 보며 창현은 한동안 머뭇거렸다.

자신이 이 채소죽을 수연에게 먹여주어야 할지 고민이 되었던 것이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자신이 남에게 먹여준다는 것 자체가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이건 마치 가족 관계 혹은 연인 관계에 놓인 사람만이 하는 것 같았기에 창현은 고민해야만 했다.

지금이 수연에게 채소죽을 먹여준다는 것은 제3자에게 있어서는 연인들의 닭살 행각으로 밖에 보이지 않을 테고 말이다.

머뭇거리던 창현은 결심을 굳혔다.

아픈 사람에게 이 정도도 못해준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수연이 누워있는 침대 앞에 의자를 가지고 온 창현은 의자에 앉고는 수저로 죽을 떠서는 그녀의 입가로 내밀었다.

“별로 뜨겁지 않으니까 조심해서 드세요.”

“으응…….”

정말 창현이 먹여줄 것이라 생각하지 못한 수연은 살짝 놀란 표정을 짓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입을 벌려 죽을 먹는다.

적당하게 간이 된 채소죽이 무리 없이 넘어가는 것이 느껴진다.

창현이 먹여주는 모습에 수연은 지금 상황이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한순간 긴장이 풀리면서 몸이 천근만근 무거워져서 무심코 말한 것인데, 창현이 정말로 먹여줄 줄이야. 고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부끄럽기도 하였다.

얼굴이 화끈거린다. 아마 몰라도 제3자가 보면 얼굴이 극도로 붉어진 것이 보이리라.

‘이건 부끄러워서 그런 게 아니라 열 때문에 그런 걸 거야. …아마도.’

마치 연인들이 할 법한 행동을 하고 있으니 어찌 부끄럽지 않을까.

마음의 충격을 받은 것이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그런 감정은 수연의 가슴 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만큼 창현을 믿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창현이 먹여주는 죽을 먹으면서 수연은 조금씩 포만감이 드는 것을 느꼈다.

잘 먹던 수연의 얼굴에 포만감이 드러나자 창현은 먹여주던 것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했다.

“그럼 한숨 주무세요. 제가 태연 누나한테 연락을 할 테니까요.”

“고마워. 하지만…….”

자신보다 세 살이나 적은데 어찌나 저렇게 든든할까.

수연은 지금 이 순간만큼은 동생이 아닌, 든든한 오빠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창현의 말처럼 이곳에서 잘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곳이 창현의 집인 만큼 한집에서 잔다는 행위는 꿈도 못 꿀 성질이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차린 창현이 말했다.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 것 같네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요. 누나가 그럴 것 같아서 제 매니저 누나도 데리고 왔거든요. 안방에 계시니까 같이 주무셔도 되고요.”

“그래? 그럼…….”

창현이 거짓말을 할 리가 없으니 괜찮으리라.

나직이 고개를 끄덕인 수연이 침대에 몸을 묻고는 눈을 감았다.

“…….”

수연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창현은 뭐랄까 마음이 복잡했다.

너무 쉽게 믿는다고 할까.

그런 수연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걱정이 되었다. 세상에는 믿을 사람이 많지 않은데 믿음이 너무 많은 것 같아서 말이다.

결과적으로 자신을 믿는다는 이야기인데 좋기도 하면서 조금 걱정이 되기도 하였다.

“믿어주는 거니 좋아해야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거실로 나가는 창현이었다.


한편, 창현과 통화를 끝낸 태연은 곧장 문자를 보내 수연과 통화가 되었다고 알렸다. 그러자 알겠다는 문자와 함께 수연을 찾으러 나섰던 소녀들이 숙소로 돌아왔다.

하지만 숙소로 돌아온 그녀들은 의아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수연과 통화가 되었다면서 숙소에는 수연이 없었던 것이다. 마침 스케줄을 끝내고 들어온 미영과 수영, 윤아는 다른 멤버들에게 이야기를 듣고는 표정을 굳히고 있는 상황이었다.

의아한 기색을 띠고 있는 그녀들에게 태연이 말했다.

“방금 전에 통화를 했는데… 수연이 감기 걸렸데.”

태연의 말에 다른 소녀들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묻는다.

“감기라고? 어떻다는데?”

“그럼 어디에 있는 건데? 설마 병원?”

빗발치는 물음과 함께 숙소가 시끌시끌해졌다.

잠시 조용해지길 기다린 태연은 소란이 가라앉자 입을 열었다.

“지금 수연이는 잘 쉬고 있데. 전화를 받은 건 수연이가 아니야.”

“누가 받았는데? 나쁜 사람 만난 건 아니고?”

다급한 안색으로 묻는 효연의 물음에 태연이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리고는 순규를 바라보며 물었다.

“순규야, 혹시 창현이 집이 어디인지 알아?”

태연의 물음에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순규였다. 그녀가 가장 먼저 창현의 이사 소식을 알기는 했지만 그의 숙소가 어디인지는 모른다. 물어보지도 않았고, 창현이 가르쳐주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아니, 몰라. 저번에 숙소를 옮겼다는 이야기 들은 게 전부야. 아, 혹시?”

지금 상황에서 태연이 필요 없는 질문을 할 리가 없다.

순규가 무언가 눈치를 챈 듯 태연을 바라보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인다.

다른 소녀들도 순규처럼 무언가를 깨달은 듯 태연을 바라보았다. 자신들의 짐작이 사실이냐는 무언의 물음이었다.

그녀들의 시선에 태연이 고개를 끄덕인다.

“맞아. 수연이는 지금 창현이 집에 있어.”

“뭐라고?”

놀란 소녀들이 한 목소리로 소리친다. 설마 수연이 창현의 집에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태연은 그녀들에게 창현과 이야기 나누었던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러자 소녀들의 표정에는 놀라움이 서렸다가 이내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바뀌어간다. 만약 수연이 창현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어떤 지경에 처했을지 상상하기 힘들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효연이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창현이가 지금 수연이가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알고 있다는 거네?”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눈치 채고 있는 것 같았어.”

태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효연이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열었다.

“그럼 창현이한테 수연이를 설득해달라고 하는 게 어때?”

“설득을?”

효연의 제안에 태연이 눈을 빛냈고, 다른 소녀들도 눈을 빛냈다. 비록 어리기는 하지만 수연이 상당부분 창현을 의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괜찮은 방법이라 생각했다.

“좋은 방법인 것 같아. 창현이가 설득한다면 수연이는 분명 다시 생각하게 될 거야.”

태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모두가 동의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럼 내가 전화를 해볼게.”

자신이 일을 저지른 것이니 자신이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에 태연이 핸드폰을 들었다. 창현에게 연락을 하여 부탁을 할 생각이었다.

그때, 뭐라고 해야 될까. 마치 전화를 할 것이라고 알고 있던 것처럼 벨소리가 울리면서 전화가 왔다.

누구인지 확인을 하니 창현이었다.

태연은 눈을 빛내면서 전화를 받아들었다.

“여보세요?”

-태연 누나, 저 창현이에요.

건너편에서 창현이 말한다.

그에 태연이 멤버들에게 눈짓을 하였다. 창현이란 뜻을 담아서 말이다.

창현이 전화를 하자 소녀들은 눈을 빛낸다. 그리고 조금씩 핸드폰으로 모여든다.

그것을 알기라도 하는 듯, 창현이 말했다.

-누나 혹시 다른 누나들 주변에 있나요?

그 말에 태연의 핸드폰으로 다가가던 소녀들이 움찔한다.

태연은 그런 멤버들의 모습에 짧게 실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있는데, 왜?”

-그럼 스피커 모드로 바꿔주겠어요?

창현의 말에 태연의 표정이 변했다.

“이런, 스피커 모드 안 되는데.”

-그럼 스피커 모드 되는 다른 누나 있어요?

태연이 눈짓으로 물어보자 윤아와 주현이 번쩍 손을 든다. 손을 든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보다가 슬그머니 손을 내린다.

그러자 미영이 태연을 톡톡 치더니 말한다.

“나 되니까 나한테 하라고 해.”

“아, 알았어. 창현아, 미영이가 스피커 모드가 된다고 하네.”

-그래요? 그럼 미영 누나 핸드폰으로 전화 할 테니 스피커 모드로 좀 해달라고 해주세요.

그 말과 함께 창현이 전화를 끊었다.

윤아와 주현은 당했다는 표정으로 미영을 바라보았다. 너무 빠르게 반응을 해서 조금 머쓱하여 손을 내렸는데 그 틈을 타 미영이 치고 들어온 것이다.

미영은 그런 두 사람에게 살짝 웃음을 지어보인 뒤 분홍색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창현이가 전화를 한 것이다.

“여보세요?”

핸드폰을 열며 미영이 전화를 받자 창현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미영 누나, 저 창현이에요. 태연 누나한테 들으셨죠?

스피커 모드를 말하는 것이다.

미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들었어. 지금 스피커 모드로 전환할게. 그런데 모두한테 할 말이 있는 거야?”

스피커 모드로 전환하려던 미영이 궁금했는지 물었다.

그러자 창현이 대답한다.

-지금 문제가 심각하다는 거 아시잖아요. 소녀시대와 관련된 문제인 걸요. 스피커 모드 해주시면 말해주세요.

대답을 하는 창현의 목소리는 심각했다.

미영은 그런 창현의 목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표정을 굳히며 대답한다.

“알았어.”

그리고는 스피커 모드로 전환을 한 뒤 멤버들이 모두 들을 수 있게 핸드폰을 세워놓고는 말한다.

“스피커 모드로 전환했어. 이제 이야기 해.”

-네, 고마워요, 누나. 제 목소리 잘 들리나요?

“응, 잘 들리니까 이야기 해.

미영의 대답을 들은 창현은 잠시 목을 가다듬더니 말을 꺼내기 시작한다.

-태연 누나와 통화하면서 어렴풋 알게 되었어요. 누나들 사이에 안 좋은 일이 있었다는 걸요. 그리고 조금 전에 수연 누나가 깨어나서 이야기를 해봤거든요.

수연과 이야기를 해봤다는 말에 소녀들의 안색이 심각하게 굳는다. 그렇다는 건 탈퇴 선언을 했다는 것도 창현이 알았다는 걸 뜻하기 때문이다.

그녀들의 그런 표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창현이 말을 이어나갔다.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고 있지만 그런 일이 왜 일어났는지 전 솔직히 모르겠거든요. 그걸 좀 설명해주시겠어요?

“…….”

창현의 질문에 소녀들이 표정을 굳혔다. 창현은 지금 소녀들간에 불화가 왜 일어났는가를 직접적으로 묻고 있는 것이다.

이건 무척 민감한 사항이었다. 이로 인해 수연이 탈퇴를 선언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잠시 침묵하던 소녀들 중에서 입을 연 것은 태연이었다.

엄연히 말하면 창현은 제3자지만 수연을 구해주고 대략적인 상황을 알고 있는 이상 관계자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그 일은…….”

그녀가 창현에게 설명하기 시작하였다.


“…….”

태연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창현의 표정이 굳었다.

설마 그런 일이 있었을 줄이야.

연예인에게 있어서 인기란 것은 무척 중요하다는 것을 창현 또한 잘 알고 있다. 그 또한 인기를 먹고 활동하는 가수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는 솔로이고, 그룹이 아니기에 그러한 상황 자체를 모르고 있었다. AA엔터테인먼트에 라샤가 있다고 하나 그녀들은 불과 세 명 밖에 되지 않았고, 각자의 개성으로 누구 하나 뭐라고 할 것 없이 고르게 인기를 얻고 있었으니 말이다.

아홉 명이란 인원이다 보니 처음 보는 사람은 누가 누구인지 모를 것이 분명했고, 소속사 입장에서는 우선 인지도 있는 멤버들 몇 명을 토대로 인기몰이를 하기 위해 마케팅을 할 것이다. 우선 인기 있는 멤버들로 해당 그룹을 좋아하게 만들면 팬들이 그 멤버들을 하나하나 알게 될 테니 말이다.

그러나 인기 편중이란 것은 사람을 무척 힘들게 만드는가 보다.

인기를 얻고 있는 멤버는 인기를 얻지 못하는 멤버의 눈치를 보면서 미안한 감정을 가져야만 하고, 인기를 얻지 못하는 멤버는 자신이 인기 있는 멤버의 배경이 되어 가는 게 아닐까 싶은 불안감이 들 테니 말이다.

태연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창현은 사태가 매우 심각하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자신이 겪어보지 못한 상황이다.

우습지만 창현은 가수로서 처음부터 성공가도를 달린 케이스였다.

흔히 남들이 말하는 무명 시절을 겪지 않았으며, 데뷔를 하면서부터 화려한 스포라이트를 받고 엄청난 팬들의 열광 속에 인기를 얻어나갔다. 화려한 엘리트 코스를 밟아나가고 있는 것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힘든 시절이라면 10살부터 14살까지, 음향총서를 얻기 전의 방황하던 시절뿐이다. 음향총서를 얻고 난 뒤 창현의 행보는 그야 말로 탄탄대로였다.

그런 자신이 수연의 입장을 완전히 이해해준다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그녀를 동정한다고 하나 그녀가 느꼈을 감정을 창현은 겪어보지 못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한 가지는 알 수 있다.

무척 힘든 상황이라는 것. 그리고 자신에게 늘 변함없이 대하는 소녀시대였지만 실은 힘든 신인시절을 겪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 힘든 것을 공감하지 못하는 창현으로서는 순간 자신이 도움을 주어야 할지에 대해 고민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번 일은 내가 도와야 해.’

수연의 탈퇴 선언을 철회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나서서 중간에서 말을 전달해주는 것이 가장 좋다. 창현은 자신이 나서는 모양새가 좋지 않다는 것을 느꼈지만 그래도 도와주기로 하였다. 수연이 소녀시대를 탈퇴하는 것만큼은 막아야 했으니 말이다.

생각을 정리한 창현이 입을 열었다.


-수연 누나는 소녀시대를 탈퇴하고 싶어하지 않아요.

태연이 오늘 일어난 일을 설명하고, 한동안 이어진 침묵 끝에 흘러나온 말이다.

창현의 말을 들은 태연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그, 그게 무슨 말이야, 창현아?”

-제 말 그대로에요. 수연 누나는 한순간 욱해서 그런 말을 했지만 원래는 소녀시대를 탈퇴하고 싶어 하지 않았어요. 한마디로 말실수를 했다는 거죠.

“그게 정말이야?”

-네.

창현의 대답에 태연은 물론이고 다른 소녀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토록 걱정하던 수연의 탈퇴 선언이 일단락 되는 듯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난관은 아직 존재하였다.

그녀들이 미처 좋아할 사이도 없이 창현의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어려운 점이 존재해요. 이미 말해놓은 걸 수습해야 한다는 점이 있어요.

“…….”

창현의 말에 밝은 표정을 짓고 있던 소녀들이 무언가를 깨달은 듯 퍼뜩 놀란 표정을 짓는다. 그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차린 것이다.

자존심이 없는 사람은 없다.

사람은 한 번 말을 잘못 흘리면 그 말을 번복하지 못하여 때때로 후회를 하고는 한다. 사항이 크면 클수록 그런 현상은 더욱 자주 일어나고는 한다.

수연의 탈퇴 선언은 무척 사항이 민감하다. 그녀의 인생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선택일 뿐만 아니라 소녀시대 전체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사항이었다.

특히 수연의 경우 자존심 뿐만 아니라 고집도 상당히 세서, 실수를 했다고 해도 말을 번복하려 하지 않을 확률이 높았다.

그녀들의 침묵에 창현이 대답을 해주었다.

-그것 때문에 제가 자세한 사정을 알고자 했던 거예요. 수연 누나도 탈퇴하겠다고 말한 것은 후회하는 듯했지만 다시 돌아가겠다는 말은 선뜻 못했거든요. 이럴 경우에 제3자가 도움을 주면 의외로 일은 쉽게 풀려요. 제가 그 역할을 하려고 누나한테 자세한 사정을 물은 거예요.

창현의 말을 들은 소녀들의 얼굴에 감동이 서리기 시작했다. 창현은 생각 없이 끼어든 것이 아니라 이미 여러 가지를 염두에 두고 상관하고 나선 것이다.

“정말 고마워, 창현아.”

태연은 모든 일이 수월하게 풀릴 수 있을 거란 예감에 눈물을 찔끔 흘리며 말한다.

물기 어린 그녀의 목소리에 창현이 어색하게 웃는다.

-하하! 그 인사는 모든 상황이 잘 풀리면 받도록 할게요. 아직은 진행 상황이니까요. 일단 수연 누나가 지금 자고 있으니까 아침 일찍 제가 수연 누나랑 함께 그곳으로 찾아가도록 할게요. 그럼 되겠죠?

“응, 그런데 들키지 않을 수 있겠어?”

세계적인 스타인 창현의 집 주변에는 항상 수많은 기자들이 우글거린다. 뿐만 아니라 근래 들어서는 사생팬들 또한 합류하여서 단지 내 슈퍼 매상이 세 배나 뛰었다는 웃지 못할 통계까지 나온 상태였다.

그렇게 많은 기자들과 사생팬을 뚫고 창현이 소녀시대로 올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벤을 타고 가더라도 소녀시대가 살고 있는 숙소로 온다면 분명 기자들은 창현과 소녀시대를 연관시키려 들 것이고, 그리 되면 창현에게 마이너스가 되니 말이다.

걱정이 담긴 태연의 물음에 창현이 자신 있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저도 나름 한 수가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시고요. 제가 가기 전에 연락을 할 테니 아침 일찍 일어나 있으세요. 아침에 스케줄 있으세요?

창현의 물음에 태연은 스케줄이 적혀 있는 화이트보드로 시선을 옮기고는 대답했다.

“아니, 없는데.”

-그럼 되겠네요. 수연 누나 데리고 갈 테니 잘 대해주시고요.

“알았어.”

-그럼 아침에 뵈요.

그 말과 함께 창현이 전화를 끊었다.

전화가 끊기자 소녀들은 서로를 바라본다. 그리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수연이 탈퇴를 철회한다고 하니 정말 다행이었다.

이럴 때만큼은 창현의 존재가 정말 고맙고 다행이라 생각하는 소녀들이었다.


“나도 조금 자야겠네.”

통화를 끝마친 창현은 시계를 보면서 중얼거렸다.

이제 10시에 불과했지만 아침이 되면 바로 소녀시대 숙소로 갈 생각이기에 일찍 수면을 취할 생각이었다.

안방은 세희가, 자신의 방은 수연이 차지하고 있었기에 창현은 작은 방으로 향했다. 그곳은 임시로 녹음작업을 하는 곳인데, 종종 이곳에서 자고는 했기에 수면을 취하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눈을 붙인 창현이 눈을 뜨니 시간은 아침이라기도 뭐하고 새벽이라기도 뭐한 6시였다. 여름철이면 벌써 날이 밝았을 테지만 겨울로 접어드는 지금은 아직 깜깜했다.

“으음!”

가볍게 기지개를 킨 창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평소 같으면 이 시간에 명상을 하면서 머리를 맑게 할 테지만 오늘은 따로 할 일이 있으니 그것은 생략이다.

“응?”

방문을 열고 나온 창현은 거실과 주방에 불이 켜져 있는 걸 보고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주방에서 세희가 나오는 걸 보고는 표정을 풀며 말했다.

“누나 일찍 일어나셨네요.”

“일어났어? 아침 먹어야지.”

세희는 어제와 다른 화장을 지운 모습이었다. 화장을 지웠음에도 그녀의 피부는 무척 하얗고 고와서 미인이란 느낌이 절로 들었다.

내심 창현은 세희가 배우를 해도 부족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을 하면서 물었다.

“그런데 누나 요리 할 줄 알아요?”

“계란 후라이만 하면 될 것 같던데…….”

창현의 물음에 살짝 얼굴을 붉히며 말하는 세희였다. 아무래도 요리에는 취미가 없는가보다.

하지만 그녀의 말처럼 이미 찌개는 창현이 해놓은 상태였고, 밑반찬도 넉넉했으니 그녀가 계란 후라이 하나를 하는 것만으로도 상차림이 완성이 된다.

웃음을 지어보인 창현이 거실로 가자, 소파에 앉아있는 수연의 모습이 보였다. 어제와 달리 혈색이 도는 걸 보아 감기가 호전된 것으로 보였다.

“누나 몸은 어때요?”

수연은 창현을 발견하고는 대답했다.

“많이 괜찮아졌어. 어젠 정말 고마워…….”

그렇게 말하는 수연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어제 죽을 먹여달라고 하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서 그런 것이다.

그런 수연의 모습에 창현은 가볍게 웃음을 지어보이는 걸로 대신하고는 세희가 상차리는 것을 도와주었다.

수연은 아직 감기가 다 낫지 않았기에 어제 창현이 한 채소죽을 먹게 되었고, 창현과 세희는 간단하게 아침을 먹었다.

아침을 모두 먹자 창현이 세희를 보면서 말했다.

“누나는 이대로 돌아가시고, 저는 수연 누나를 소녀시대 숙소로 데려다주고 올게요.”

“데려다주고 온다고? 그게 가능해?”

세희가 슬쩍 밖을 살펴보니 아파트 밖에 기자들과 사생팬들이 있는 것을 목격하였다. 창현이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는데 수연을 데리고 소녀시대 숙소로 가겠다고 하자 의아했던 것이다.

창현이 슬쩍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저 나름대로 방법이 있어요.”

“후! 그래, 알았어. 네가 저지른 일이니까 알아서 하겠지.”

한숨을 내쉬면서 세희가 힐끗 수연을 보자, 수연이 미안한 듯 고개를 푹 숙인다.

“그러지 마세요. 이번 일은 무리가 가지 않게 잘 처리할 거니까요.”

“…알았어. 저도 나쁜 의미로 그런 게 아니니까 너무 그러지 마세요, 제시카 씨.”

“…네.”

세희의 말에 수연이 작은 목소리로 대답한다.

그렇게 세희는 출근을 위해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수연은 창현을 보며 물었다.

“어떻게 가려고?”

베란다에서 밖을 내려다보니 눈으로 확인될 정도로 사람이 모여 있었다. 한눈에 보아도 사생팬들과 기자였다.

“다 방법이 있어요. 저만 믿어요.”

그렇게 대답한 창현은 교복을 챙겨 입고 겉에 코트를 걸쳤다. 그리고는 엘리베이터를 잡았다.

엉뚱하게 창현은 1층이 아닌 꼭대기 층을 눌렀다.

수연이 의아한 표정을 지어보였지만 창현은 웃음으로 무마를 하며 제일 위층에 도착을 하였다.

그리고 창현은 곧장 옥상을 향해 올라갔다 수연이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옥상 문은 잠겨 있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옥상 문은 대부분 잠가놓는다.

수연은 문을 열어보려다가 잠겨 있는 걸 확인하고는 창현에게 말한다.

“여기 잠겨있는… 아!”

창현에게 시선을 준 수연은 탄성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창현의 품에서 열쇠가 나왔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옥상문을 여는 열쇠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열쇠로 잠긴 옥상 문을 열며 창현이 말했다.

“경비원 아저씨한테 말해서 얻은 거예요.”

그러면서 옥상 문을 연 창현이 옥상으로 나간다. 그리고는 문을 닫고는 다시 잠근다.

옥상으로 나온 창현은 수연과 함께 옆 동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다시 옥상 문을 열고는 잠근 뒤 엘리베이터에 탑승한다.

1층으로 나온 창현과 수연은 재빨리 아파트에서 나온다.

기자들과 사생팬들은 창현이 살고 있는 동에 정신이 팔려 있기에 그런 두 사람을 발견하지 못한다.

수연은 창현을 신기한 듯이 바라본다.

“언제 이렇게…….”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터득이 되더라고요. 자, 그럼 가볼까요.”

“응.”

창현과 수연은 곧장 소녀시대 숙소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집을 나서면서 태연에게 연락을 하였기에 창현은 소녀시대 숙소 앞에 도착하자 안절부절 못하는 수연을 뒤로하고 곧장 초인종을 눌렀다.

“누구세요?”

건너편에서 유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창현이 곧장 대답했다.

“누나, 저에요.”

“알았어. 잠깐만 기다려.”

그 말과 함께 잠시 후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서려던 창현이 수연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머뭇거리는 그녀의 모습에 창현이 그녀의 손목을 잡아 끌며 말했다.

“이미 하기로 해놓고 뭘 그렇게 부끄러워하시는 거예요. 들어오세요.”

“으응…….”

그렇게 숙소 안으로 들어선 창현과 수연이었다.

이른 아침이었지만 소녀들은 모두 잠에서 깨어 있었다.

어찌 보면 소녀시대의 존속 여부가 달려있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들은 어제 창현과 통화를 끝낸 후 잠자리에 일찍 들었다. 그랬기에 딱히 피곤한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창현이 숙소에 온다고 해서 그런지 그녀들은 평소 집안에서 하지 않는 간단한 화장을 한 채 창현을 맞이하였다.

그 뒤를 따라 수연이 들어왔지만 어색하기만 하다. 탈퇴 선언을 하고 와버렸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숙소 안으로 들어선 창현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신이 사는 것과 같은 구조였지만 전체적으로 짐이 많아서 상당히 좁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열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런가 보다.

그래도 상당히 깔끔한 것이, 여자가 사는 곳인가 싶었다.

…속고 있는 줄 모른 채 말이다.

소녀시대 숙소에 들어선 창현이 느낀 점은 짐이 많지만 깔끔하게 정리를 해놓고 산다는 느낌이었다.

잠시 주변을 둘러본 창현이 소녀들에게 시선을 주며 입을 열었다.

“제가 왜 왔는지 아실 거라 믿어요.”

“…….”

창현의 말에 거실은 한동안 침묵이 감돌았다.

그가 이곳에 온 이유. 그것은 다름 아닌 수연을 소녀시대로 돌려보내기 위함이다.

조용해지자, 창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솔직히 제 입장으로 보면… 누나들에게 미안하지만 처음부터 인기를 얻어서 그 심정을 제가 헤아릴 수 없었어요. 하지만 제3자의 입장에서, 누나들을 햇수로 2년 동안 알아온 친한 동생으로 하고 싶은 말은, 누나들은 아홉 명일 때 가장 빛이 나요. 전 그런 누나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싶고, 앞으로도 그렇게 활동을 했으면 해요.”

그러면서 창현이 뒤로 한걸음 물러나 수연과 나란히 섰다.

자연히 소녀들의 시선이 수연에게 향했고, 시선을 받은 수연이 움찔한다.

창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한 번 엎지른 물을 다시 담기 힘든 것처럼 수연 누나가 탈퇴 선언을 했지만 그것이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누나들이 더 잘 알고 있으리라 믿어요. 안 그래요?”

그렇게 말하면서 창현이 태연에게 시선을 준다.

시선을 받은 태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맞아. 어제는 내가 괜히 욱해서 수연이에게 화를 낸 거야. 그것 때문에 일이 일어난 거고. 사과하는 것이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사과할게. 미안해, 수연아. 내가 너무 경솔했고 네 마음을 제대로 알지 못했어.”

태연이 말을 하자 이번에는 미영이 나서면서 말한다.

“제시, 우리 다시 소녀시대로 활동하자. 네가 없으면 나는 어떻게 하라고. 난 너랑 함께 활동하고 싶다고.”

“언니, 앞으로 제가 잘할게요. 다시 돌아오세요.”

멤버들이 하나둘씩 앞으로 나서면서 수연을 설득한다.

대부분이 그녀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그리고 돌아와달라는 말을 하고 있었다.

그런 멤버들의 말을 들으면서 수연의 눈에 점차 눈물이 고이기 시작한다.

자신 또한 잘한 게 하나도 없는데.

오히려 주현의 사소한 실수로 화만 내고 그랬는데.

억지를 부리듯 화풀이를 하고, 그러다가 욱해서 탈퇴를 하겠다고 말해버렸는데, 멤버들은 오히려 자신에게 사과를 하고 있다.

너무 미안했다.

그리고 이런 멤버들을 저버리려고 했던 자신이 미웠다.

이윽고 눈에 눈물을 흘리면서 수연이 말한다.

“너희들이 그렇게 말하면… 내가 너무 나쁜년이 되어버리잖아. 내가 얼마나 미안하게 생각했는데… 너희들이 나한테 그렇게 말하면… 흑!”

기어코 눈물을 참아내지 못한 수연이 손으로 눈을 가린다.

그 모습에 다른 소녀들은 울컥하여 수연에게 다가간다.

“수연아!”

“언니!”

그러면서 그녀를 둘러싼 채 전염이라도 된 듯 한동안 서로 눈물을 흘린다.

수연의 옆에 서 있던 창현은 갑자기 소녀들이 달려들자 옆으로 비켜선 채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거 참… 난감하네.’

창현은 난감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어색하게 볼을 긁적였다.

제3자의 입장인 만큼 극적인(?) 화해를 하는 그녀들의 모습이 흐뭇하기는 하였지만 뭐랄까, 지켜보고 있자니 상당히 낯간지럽다고 할까. 무엇보다 이렇게 홀로 동떨어져서 지켜보고 있자니 속된 말로 참 뻘줌하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눈물을 흘리며 서로를 부둥켜안고 있던 그녀들이 슬그머니 떨어진다.

창현이 그 모습을 보고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풉!”

그가 웃음을 흘린 이유는 바로 아침부터 눈물을 흘려 눈이 퉁퉁 부은 모습을 보아서 그렇다.

게다가 화장을 해서 그런지 눈물 때문에 화장이 번진 모습은 그야 말로 코미디가 따로 없었다.

갑자기 웃음을 짓는 창현의 모습에 소녀들은 어리둥절하다가 이윽고 거울에 투영된 자신의 모습을 보고는 꺄악! 하며 후다닥 방으로 사라진다. 전광석화를 방불케 하는 몸놀림이었다.

그러자 거실에는 창현과 수연만이 남았다.

창현은 수연을 보면서 웃음을 지었다.

“다행이네요. 잘 해결 되서.”

염려한 것치고는 허망할 정도로 쉽게 해결되었다.

그런 창현의 말에 수연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게 다 창현이 덕분이야. 정말 고마워. 정말…….”

“뭘요. 저도 누나가 다시 돌아가게 되어서 기쁜 걸요. 비가 온 뒤에 땅이 굳는 것처럼 이걸 발판으로 누나들이 더욱 끈끈한 관계를 이뤘다고 생각해요.”

그러면서 웃음을 짓는 창현의 모습을 수연은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잠시 후, 어느새 수정(?)을 마친 소녀들이 거실로 다시 나오기 시작했다.

태연이 대표로 창현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고마워, 창현아. 네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이렇게 쉽게 화해하지 못했을 거야.”

“제가 도움이 되었다니 정말 다행이에요. 제3자인 제가 끼어들어서 오히려 방해가 되는 게 아닐까 걱정을 했거든요. 누나들이 화해를 해서 정말 다행이라 생각하고, 앞으로 싸우지 않고 더 친하게 지낼 수 있을 거라 믿어요.”

“믿어! 꼭 그렇게 할 테니까.”

양 주먹을 불끈 쥐며 대답하는 태연의 모습에 창현이 피식 웃음을 짓는다.

그때, 수영이 살짝 인상을 찡그리더니 윤아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고 보니 윤아야, 아침밥 안 먹어서 그런지 배가 고프지 않아?”

“그러게요. 생각해보니 어제 저녁도 제대로 안 먹었는데…….”

“그치? 수연이 일도 있고 해서 배고픈 줄 몰랐는데 갑자기 배가 고프네. 아침이나 먹자. 수연아, 넌 밥 먹었어?”

“으응? 응. 난 아침 먹었는데… 창현이가 해줘서…….”

수영의 물음에 수연이 얼떨떨한 안색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그 대답은 엄청난 폭풍을 일으켰다.

수연의 대답을 들은 소녀들의 안색이 확 뒤바뀌더니 일제히 창현에게 시선이 꽂히기 시작한 것이다.

갑작스러운 소녀들의 시선 포격에 창현이 움찔하며 뒤로 물러난다.

“왜, 왜 그래요?”

“호오! 수연이는 밥을 해줬다라… 그러고 보니 창현이 음식 실력이 무척 뛰어나다고 했지? 수연아, 창현이가 해준 밥 어땠어?”

눈을 가늘게 뜨며 묻는 태연의 모습에 수연은 창현을 힐끗 보더니 대답했다.

“당연히 최고였지.”

“그래? 정말 대단하네. 노래도 잘하고 요리도 잘한다니. 창현군, 우리도 그 요리 실력을 좀 보면 안 될까? 유감스럽게도 우리들 중에서 요리를 잘하는 사람이 없어서 말이야.”

SM엔터테인먼트에서 음식을 만들어주시는 아주머니를 고용하였지만 밑반찬뿐이다. 그걸로도 충분히 끼니를 해결할 수 있지만 태연은 칭찬이 자자한 창현의 음식을 먹기 위해 거짓을 섞었다.

태연의 말이 기폭제였다.

다른 소녀들이 그녀의 말에 동의가 담긴 눈으로 창현을 바라보며 은연중 압박을 가한 것이다.

졸지에 음식을 만들게 된 창현이 주춤했다.

이대로 만들 것인가 아니면 회피할 것인가.

하지만 분위기가 좋지 않은가. 이 분위기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한몸 희생하는 것이 옳으리라.

한숨을 후우! 내쉬며 창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제가 할게요.”

“와아! 창현이 요리다!”

창현의 승낙에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조금 전 우울했던 분위기나 감동적인 분위기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졸지에 가정부로 전락한 창현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그런 창현을 툭 치는 인물이 있었다.

고개를 돌리니 그곳에는 수연이 있었다.

“정말 고마워. 창현이 네가 아니었으면 어떻게 되었을지…….”

“뭘요. 아까 했던 말이잖아요. 계속 그러면 낯간지러워요.”

“응. 그리고 창현아…….”

“네?”

조금 진지한 표정을 짓는 수연의 표정에 창현이 대답했다.

“나도 아침 먹고 싶거든. 죽은 소화가 빨라서… 내 것도 부탁할게.”

“하아…….”

수연의 말에 창현은 힘 빠진 소리를 흘릴 뿐이었다.


그렇게 창현이 차려주는 아침을 먹고, 다시 밝아진 분위기 가운데 수연은 샤워를 하기 위해 샤워실로 들어섰다.

뜨거운 물을 맞으면서 그녀는 눈을 감았다.

근심거리가 사라진 탓일까. 감기 기운이 싹 가신 것 같다.

“정말 고마워, 창현아.”

수연이 창현을 떠올리면서 나직이 중얼거렸다.

정말 고맙다는 말밖에 떠오르지가 않았다.

그가 아니었으면 어떻게 되었을지.

자신을 위해 나서준 그가 너무나 고마웠고, 한편으로는 미안했다.

늘 친절하고 배려를 아끼지 않는다.

그 점이 수연은 너무나 좋은 한편 불안했다.

창현의 친절에 반하지 않을 여자는 거의 없을 테니까.

어느 사이엔가 두근거리는 자신의 심장에 수연은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이 창현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자제하는 마음이 생겼다.

아직 자신이 창현에게 마음을 고백하기에는 자신이 너무나 부족하다. 창현은 세계에서 알아주는 슈퍼스타다. 그에 반해 아직 자신은 갓 데뷔한 신인. 그에게 자신은 어울리지가 않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점을 어렴풋 알아차리고 있었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더욱 인기를 얻고 싶었다. 그리고 창현에게 어울리는 인지도를 쌓고, 그에게 고백을 하고 싶었다. 정말 좋아한다고.

사랑은 신분을 초월한다는 그런 것이 아닌, 그에게 당당해질 수 있는 그런 인기를 얻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은 침묵해야 한다. 지금은 때가 아니니까. 앞으로 더욱 더 열심히 해서 착실히 인기를 쌓아나가는 수밖에 없다.

창현 앞에서 당당해지고 싶었다.

“창현이에게 어울리는 위치에 서자. 그리고 내 마음을 고백하는 거야.”

이번 일은 수연의 마음을 확실하게 만들어준 계기였다.

뜨거운 물을 맞는 수연의 얼굴은 붉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 때문인지는 오로지 수연만이 알고 있으리라.




제35장 역관광&역관광




소녀시대가 무사히 화해를 하게 되자 창현도 한결 마음을 편안하게 일상생활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본격적으로 정규 3집 앨범을 준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창현이 정규 3집 앨범을 준비에 들어간 지 어언 한 달이 되어가지만 아직 그 진도는 많이 진척되지 못한 상황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정규 3집 앨범을 준비하기 시작한 지 한 달이 되어가지만 그간 라샤의 녹음 문제와 함께 MKMF준비, 그리고 이번 일까지 하여 여러모로 일이 많았던 것이다.

게다가 창현의 야욕(?)이 존재하기까지 하였다. 미국, 유럽을 돌아다니면서 기존에 자신이 갖고 있던 음악의 틀을 깨고 한 차원 높은 단계에 도달하게 되다 보니, 자신이 태어난 국가인 이곳에서는 그야 말로 혼신의 힘을 다한, 그런 앨범을 제작하고 싶은 욕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너무 큰 밑바탕을 그리면서 시작했는데, 문제는 욕심은 많은데 주변 여건 때문에 한곳에 집중하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었다.

그래도 주변에 산재해 있던 일들이 어느 정도 일단락되자 앨범 제작도 빠르게 진도가 나가기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중간에 소녀시대 분위기를 살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자신도 어느 정도 그 상황에 연관이 된 만큼 근황을 살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다행히도 수연은 완벽하게 멤버들 사이에 녹아들 수 있었고, 인기 편중 현상은 여전했지만 소녀시대 자체의 인지도가 올라감에 따라 그녀들도 예전보다 한결 바쁜 스케줄을 소화해나가고 있다고 하였다.

모든 것이 잘 진행되자 창현으로서는 만족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차에 창현은 석규의 호출을 받는다. 오늘 녹음이 끝나면 찾아오라는 말이었다.

근래 들어 창현은 석규와 마주친 적이 많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세희가 창현의 매니저 역할을 맡게 되면서 모든 지시사항은 그녀에게 전달되어 창현에게 전달이 되었다. 스케줄에 관한 것도 굵직한 CF나 음반에 관련된 것이 아니면 대부분 세희 선에서 처리되곤 하였던 것이다.

아침 일찍 학교를 가고 오전 수업만 하고 AA엔터테인먼트로 온 창현은 한 시간 정도 녹음 작업을 하다가 석규가 부른다는 말에 세희와 함께 점심을 먹고는 그녀에게 커피를 내밀면서 물었다.

“그런데 누나, 아버지가 저 왜 부르신지 아세요?”

세희는 창현이 내민 커피를 받아들고는 한 모금 홀짝 마시면서 말한다.

“고마워. 아, 그거? Mnet에서 하기로 한 이벤트 방송 있지? 그것 때문에 그러시는 걸 거야.”

“이벤트 방송 때문에요? 그거 충분히 논의를 했었잖아요.”

창현이 고개를 갸웃하면서 묻는다. 이미 세희와 이야기가 끝난 부분을 굳이 석규와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니 의아함을 감출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창현의 반응에 세희는 왜 그런지 설명을 해주었다.

“아, 그게 말이야, 네가 의견을 낸 것을 Mnet에 말했더니 좋다고 하면서 모두 반영을 하겠다고 하더라고. 그런데 Mnet이 거기에서 한 가지를 덧붙이면 더 시너지 효과를 일으킬 거라고 말을 했나봐. 아마 그것 때문에 사장님이 널 부른 걸 걸?”

“그래요?”

그녀의 설명을 듣자 석규가 자신에게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이해한 창현이었다. 그러면서 자리에서 일어난다. 석규와 대화를 나누기 위해 사장실에 찾아갈 것을 생각하니 오랜만에 생강차가 마시고 싶었다. 한 번 맛을 들이면 절대 끊을 수 없는 그 맛은 창현을 강렬하게 유혹하고 있었다.

“그럼 전 곧장 아버지한테 가볼게요. 누나도 일 잘하세요.”

“응.”

세희의 대답을 들으며 창현은 곧장 사장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근래 들어 직원들을 몇 명 뽑아서 그런 것일까.

예전에는 산더미 같이 쌓여 있던 서류의 양이 눈에 띄게 줄어 있었다. 직원들이 기존에 석규 하던 잡다한 업무들도 다 처리하니, 매일같이 엄청난 양의 일을 소화해내던 석규가 여유로워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사장실을 방문한 창현이 석규를 보며 입을 열었다.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셔서 이렇게 먼저 찾아왔어요. 무슨 말을 하려고 하시는지 궁금하기도 하고요.”

그러면서 창현은 곧장 생강차 두 잔을 타기 시작한다.

생강차를 들고 창현이 소파에 앉는다. 그리고는 어느새 자신의 맞은 편에 앉은 석규에게 생강차를 내민다.

“…….”

두 사람은 말없이 먼저 생강차를 한 모금 마신다.

찻잔을 내려놓은 석규가 창현을 보면서 말한다.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건 오랜만이구나.”

“그래봤자 얼마 되지도 않았어요. 그런데 이제 많이 바빠 보이지 않으시네요?”

창현이 서류가 쌓여있는 곳을 힐끗 보며 석규가 웃음을 짓는다.

“이제 직원들도 많이 확충이 되었으니까 그렇지.”

그렇게 말을 했지만 석규도, 창현도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동안 석규가 직원들을 뽑을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처음 현의 앨범이 잘 되었을 때 그렇고, 라샤가 선풍적인 인기 몰이를 할 때도 그러했다.

충분히 돈이 있었기에 석규가 마음만 먹었다면 직원들은 얼마든지 뽑을 수 있었다.

하지만 석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많은 양의 업무를 소화하는 것이 석규를 지탱해주는 근원과도 같은 것이어서 그렇다.

부인을 잃고 난 뒤 석규는 그 슬픔을 이겨내기 위해 택한 방법은 오로지 일에 열중을 하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집안에 소홀하게 되었고, 창현에게 소홀하게 되었지만 결과적으로 지금은 모든 게 잘 해결된 편이다.

그러던 차에 석규가 지선을 만날 수 있었고, 창현의 승낙을 얻어 냄으로써 그동안 마음을 괴롭히던 잔재를 말끔하게 털어버릴 수 있게 되었다.

그랬기에 더 이상 잡다한 업무까지 자신이 세세하게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여겨 직원들을 더 뽑은 것이다. 지금도 직원들을 꾸준히 채용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창현은 웃음을 지으면서 입을 열었다.

“이제 결혼도 멀지 않았으니까요. 좀 더 편해지시려면 직원들도 더 뽑아야겠죠.”

“그래야지. 실제로도 그러려고 하고 있으니까.”

석규와 지선의 결혼식이 두 달도 남지 않은 상태였다. 재혼을 하게 되면 본격적으로 신혼 생활을 즐길 생각이었기에 석규는 창현의 말에 여유 있는 모습을 보일 수 있었다.

여유가 넘치는 석규의 모습에 창현은 무언가 떠오른 듯 눈을 빛내며 묻는다.

“아참, 그러고 보니 궁금한 게 있거든요. 좀 민감한 질문일 수도 있는데 괜찮아요?”

이렇게 떡밥을 뿌리면 어찌 궁금증이 안 일 수 있겠는가.

석규가 턱짓을 하며 말한다.

“뭔데 그러냐? 말해봐라.”

“음, 제 동생이 생길까 싶어서요.”

의미심장한 창현의 말에 석규는 잠시 갸웃하다가 이내 안색을 굳힌다. 창현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깨달은 것이다.

“…허허.”

창현의 말이 뜻하고 있는 것은 바로 2세의 의미를 담고 있던 것이다.

석규로서는 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창현의 질문이 아주 예리했던 것이다.

그 또한 그 부분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는 부정적이었다.

자신은 문제가 될 것이 없지만 지선의 나이가 마흔이 넘은 만큼 출산에 부담이 될 것 같아서 그렇다. 석규야 좋지만 지선을 생각하면 그것은 과도한 욕심이다.

석규의 웃음에 창현이 사과하였다.

“죄송해요. 조금 민감한 질문인데. 궁금해서 그런 것이었어요.”

“아니다. 궁금할 수도 있겠지. 음, 뭐라고 해야 할까. 지선의 건강을 생각하면 안 하는 게 좋겠지. 나도 지선이도 40이 넘었으니까.”

“그렇지요. 그래도 조금 아쉽네요. 예쁜 여동생이 생겼으니 남동생도 하나 생겼으면 하는 욕심이 있었거든요.”

머쓱하게 웃음을 짓는 창현의 모습에 석규가 웃음을 터뜨린다.

“하하! 이럴 때 보면 넌 참 욕심이 많아. 손만 뻗으면 뭐든지 다 쥘 수 있으면서 말이야. 이번 앨범도 그렇고 말이다.”

석규의 입장에서 창현의 앨범 발매는 싱글 혹은 미니 앨범을 제작하는 것이 더욱 좋다. 그 이유는 제작 기간이 그리 길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단기간 내에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을 수 있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정규 앨범은 제작 기간이 무척 길고, 가격 면에서 미니 앨범보다 비싸다. 그리고 싱글 앨범이나 미니 앨범보다 훨씬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한다.

빠른 회전율을 보이는 미니 앨범이 회사 입장에서는 훨씬 이득이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정규 앨범 준비가 잘못된 선택은 아니지만 말이다. 다만 창현은 자신이 하는 일에 있어 분명한 자신의 욕심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제가 원래 욕심은 좀 많죠. 그건 아버지도 알고 계시잖아요.”

“그래, 알고 말고. 그 욕심이 있으니까 네가 이렇게 성공할 수 있었던 거다 그나저나 왜 불렀는지 궁금하다고 했지?”

석규의 물음에 창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건 세희 누나한테 들었어요. 이벤트 방송 때문에 그러셨다면서요?”

“알고 있으니 다행이구나. 사실 네가 이렇게 저렇게 아이디어를 첨부해서 보완한 걸 Mnet에 보여주니 대박감이라고 하면서 칭찬을 하더구나. 그런데 거기에서 조금 더 욕심을 부려 우리에게 제안을 한 것이지. 물론 네 의견이 반영될 것이다.”

“Mnet에서 무슨 의견을 말했기에 그러시는 거예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세희에게 듣지 못했기에 창현이 궁금한 표정으로 묻는다.

그에 석규가 씨익 웃음을 짓더니 말한다.

“뭐, 간단하다. 기존의 방송을 네가 주도적으로 이끌되 Mnet에서는 그런 너를 보조할 보조 진행자를 투입하자는 이야기를 하였다.”

“그건 상관없지 않아요? 어차피 제가 MC경험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 방송 진행을 위해서는 저를 보조해줄 사람이 필요한 건 사실이잖아요.”

이벤트 방송 내용을 떠올리며 말하는 창현이었다.

그 말에 석규가 고개를 저었다.

“그 이야기가 아니다. 원래 방송을 하게 되면 MC들이 따로 있고, 네가 주 게스트로 나오기로 되어 있었다. 이건 알지?”

“알고 있죠.”

세희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의견을 반영했기에 그것은 당연히 알고 있다.

석규는 창현이 내용을 알고 있자 그것을 수정해준다.

“그런데 Mnet에서는 기존에 계획한 MC를 투입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MC들을 배제하고 너와 보조 진행자들로 하여금 방송을 이끌게 하자고 하였다.”

“그렇게 한다고요? 저야 상관은 없지만 경험이 부족해서 잘못하면 방송을 망칠 수도 있을 텐데요?”

“어차피 네 팬들을 겨냥하고 만든 시스템이어서 망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네가 허둥대면 더 좋아했으면 더 좋아하지, 싫어하지는 않을 걸?”

그 증거로 만원의 행복에서 창현이 해산물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그나마 방송에서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는 창현의 모습 중에서도 가장 파격적인 모습이었으니 말이다.

웃음을 지으며 말하는 석규의 말에 창현은 머리가 복잡한 듯 긁적인다.

그리고 석규를 보며 물었다.

“그렇다 치고, 그럼 보조 진행자는 누구인데요? 보조 진행자가 경험이 풍부하면 제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 아니에요.”

창현은 보조 진행자에게 희망을 걸고 있었다.

그러나 석규의 대답은 그런 창현의 상상을 완전히 깨는 것이었다.

“보조 진행자는 여자 아이돌로 하기로 하였는데?”

“…….”

자신의 예상을 완전히 깨버리는 석규의 대답에 창현은 할 말을 잃었다.

그나마 기대를 걸고 있던 부분이 완전히 어그러진 것이다.

여자 아이돌이 진행에 능숙할 리가 없다. 그렇다는 것은 완전히 무풍지대에서 자신이 모든 것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창현이 석규에게 물었다.

“그런데 왜 여자 아이돌이에요?”

“이번에 네 이벤트 방송 성격이 그런 방향이 아니지 않겠느냐?”

창현이 Mnet에서 이벤트 방송을 하기로 한 것은 다름 아닌 일종의 코디를 받는 방송이었다.

평소 방송에서 무척 보기 힘든 인물이 바로 현이었기에 이벤트성 방송으로 Mnet에서 시청자의 의견을 받아 고르고 고른 의견으로 창현을 코디한다는 성격의 방송이었다. 시청자의 입장에서는 창현의 새로운 면모를 볼 수 있으니 대환영이라 할 수 있다.

“그게 무슨 상관인데요.”

당연히 알고 있지 않느냐는 식의 물음에 창현은 이해하지 못한 표정으로 말한다.

그에 석규가 친절하게 설명을 해준다.

“여자 아이돌이 대부분 너와 비슷하거나 조금 나이가 많지 않더냐? 게다가 여자 아이돌이 요즘 가장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 가장 동경하는 대상이 바로 너다. 어찌 보면 아이돌로서 출연하는 것이 아닌 한 사람의 팬으로서 출연하는 거지. 그렇게 되면 시청자들의 의견에 상당히 싱크로율을 높일 수 있고.”

처음에는 뚱한 반응을 보였지만 Mnet의 제의를 듣고 괜찮다고 생각하는 석규였다.

아무래도 말이 나올 수 있지만 능구렁이 같은 MC들이 아닌 풋풋한 아이돌이 함께 한다면 조금 더 친근감 있게 다가갈 수 있는 이미지를 조성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기에 그렇다.

석규의 긴 설명에 창현이 조금 맥빠진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럼 여자 아이돌은 누가 출연하기로 했는데요?”

“그건 아직 안 정했다. 네가 한다고 말을 하지 않았는데 누구로 할지 정해놓았겠느냐?”

옳은 말이었다. 이번 방송에는 창현의 의견이 적극적으로 반영되기로 했으니 말이다. 지금 저 사항도 단순한 의견 제시일 뿐, 창현이 싫다고 하면 원래 방식대로 바뀔 것이다.

창현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대답한다.

“으음. 좋아요.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죠. 대신 참여할 여자 아이돌은 제가 정해도 되죠?”

“물론이다.”

“그럼 정했어요. 소녀시대로 할게요.”

순간 석규의 표정이 멍해진다. 설마하니 창현이 소녀시대를 선택할 줄 몰랐던 것이다.

“…소녀시대라고? 왜 하필?”

“제 마음대로 정하라면서요. 그래서 소녀시대로 정한 건데 왜요?”

“정말 몰라서 묻는 거냐?”

석규의 표정이 굳었다.

MKMF에서 퍼포먼스를 맞춰봐야 한다고 할 때도 그랬지만 현재 현과 소녀시대 관계가 지나치게 가까운 것이 아니냐는 말이 나오고는 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만원의 행복에서, 광고에서, 팬 미팅에서까지 현과 소녀시대가 연관된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이 점을 피하고자 MKMF때 석규는 원더걸스와 합동 퍼포먼스를 추진했던 것이다.

그런데 창현이 소녀시대와 퍼포먼스를 하겠다고 하니 황당할 수밖에 없다.

창현은 그런 석규를 보며 말했다.

“어차피 SM엔터테인먼트랑 저랑 계약이 되어 있는 상태잖아요. 그걸 슬쩍 흘리면서 하면 될 것 같아요. 그리고 이벤트 방송인만큼 가급적 편안하게 하고 싶고요.”

어차피 떠오르는 여자 아이돌이라고 하면 원더걸스와 소녀시대, 카라가 전부다. 그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창현은 소녀시대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원더걸스는 <Tell Me>로 인해 인지도가 무척 높아 케이블 방송에 출연하려고 할지 미지수였다. 일전에도 한 번 데인 적이 있지 않은가? 창현은 그때의 일을 아직도 마음에 두고 있었다. 카라는 아직 그 인지도가 소녀시대보다도 현저하게 낮았다.

그렇게 되면 남는 것은 소녀시대 뿐이다. 창현은 소녀시대와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기도 하였고, 상황적인 측면으로나 심적으로나 그녀들과 하는 것이 가장 나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석규가 창현을 보며 물었다.

“정말 그것 뿐이냐?”

이번에 소녀시대와 함께 한다고 하면 분명 잡음이 일어날 것이다. SM엔터테인먼트와 계약이 되어 있다는 걸 흘리더라도 분명히 말이다.

염려하는 석규의 모습에 창현이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소녀시대를 언급한 건 원더걸스나 카라보다 더 적합하다고 여겨서 그런 거니까요. 솔직히 여자 아이돌 건을 제가 승낙하겠다고 하면 아버지는 누구를 섭외할 건데요?”

“…….”

창현의 말에 석규는 입을 다물었다. 그의 물음처럼 막상 섭외할 여자 아이돌을 생각하니 별로 없던 것이다. 원더걸스는 단기간에 너무 커버렸고, 카라는 인지도가 많이 낮으니 말이다. 그에 반해 소녀시대는 Mnet에서 많은 방송 활동을 하였기에 상대적으로 인지도도 있고 괜찮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석규가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알겠다. 그렇게 하도록 하마. 후우!”

승낙을 하기는 했지만 걱정이 앞서는 석규였다.

창현은 그런 석규를 위로하듯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사전에 입조심을 하도록 할 테니까요. 게다가 오히려 소녀시대 누나들이 나오는 것이 더 좋을 수도 있어요. 왜냐하면 그 누나들은 데뷔 전부터 저랑 알고 지내던 사이인 만큼 최대한 객관적으로 할 수 있잖아요. 시청자들 의견을 가장 많이 반영할 것 같기도 하고요.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소녀시대 때문에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너 때문에 걱정하는 것이다.”

어디로 통통 튈 줄 모르는 창현이 이렇게 골치 아프게 느껴진 적은 처음이었다.

한 번 결심을 굳히면 그것을 결코 뒤집지 않는 고집까지도 말이다.

머리를 짚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석규를 보며 창현이 물었다.

“그럼 녹화는 언제 할지 이야기가 나왔어요?”

“대충 열흘 뒤로 생각하고 있다.”

“12월 넘어가서 녹화를 하겠네요.”

창현은 적당하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한동안은 녹음에 집중을 해야 할 테니 딱히 짧다고 할 수 없는 열흘이면 아주 적당한 시간이다. 그리고 열흘이란 시간이 주어지면 갑작스럽게 스케줄을 제의한다고 해도 소녀시대가 충분히 합류할 수 있으리라. 아직 신인인 만큼 스케줄 조정에 있어서 어느 정도 자유로울 테니 말이다.

“아, 맞다. 이건 어때요?”

녹화 시기에 대해 만족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던 창현은 무언가 생각이 난 듯 석규를 보며 말했다.

“뭘 말이냐?”

석규가 묻자 창현이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방송을 좀 더 재미있게 할 방법이 떠올랐는데 말이죠.”

갑자기 생각난 것치고 창현의 눈은 무척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자신감이 넘치고 있는 것이다.

무엇이 그리 자신감에 넘치는 것일까.

그런 창현의 모습에 석규도 흥미를 보였다.

“그래? 말해봐라.”

“그러니까…….”

석규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 시작하는 창현.

창현의 의견을 듣는 석규의 눈이 점차 커진다. 창현이 설마 이런 의견을 낼 줄은 몰랐던 것이다.

놀란 석규의 반응을 보면서 창현이 입가에 미소를 짓는다. 자신 혼자 대박이라고 생각했지만 석규의 반응을 보니 이것은 초 대박이라 생각한 것이다.

‘이벤트 방송인만큼 확실한 재미는 줘야겠지. 후후!’

자신이 생각하는 그림을 그리며 입가에 미소를 짓는 창현이었다.

상상만 해도 즐거운 계획.

어서 녹화 시기가 다가오길 기다려질 정도로 짜릿한 계획이었다.

과연 그 계획이 잘 실행될지에 대해서는 지켜볼 일이었다.


이벤트 방송을 어떻게 할지 결정이 되었다.

석규는 창현의 의견을 수렴하여 Mnet과 협상에 들어갔고, 창현의 의견을 들은 Mnet에서도 좋다고 하면서 수락을 하였다.

그와 함께 본격적인 방송 편성에 들어가기 시작하였고, 그 기간 동안 창현은 앨범 제작에 착수한다. 이미 준비를 해두었기에 차근차근 진행을 하면서 정규 3집 앨범 제작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학교도 3학년들은 풀어주는 분위기였기에 얼마 전부터는 아예 나가지를 않고 있었다. 창현의 성적이 떨어지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3학년들이 자유롭게 풀어지자 인근 중학교에서 현을 보기 위해 모여드는 사람들이 무척 많았다. 그랬기에 학교에서 현에게 출석 인정을 해주기로 합의를 한 상태였다.

학교를 쉬게 되자 창현은 하루 종일 회사에 틀어박혀 녹음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전폭적으로 늘어난 만큼 모든 신경을 음반 제작이 몰두하고 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창현의 집중력은 불가피하게 깨지고 말았다.

한국을 관광하고 돌아다니던 세실리아가 미국으로 돌아가면서 폭탄발언을 한 것이다.

가라앉기는 했지만 아직도 키스 퍼포먼스의 사실 여부에 대해서 이런저런 말이 많은 실정이었다.

세실리아는 그것을 알고 있는지 모르고 있는지 용기 있는 여자가 미남을 차지한다는 식의 뉘앙스를 풍기고 사라진 것이다. 스캔들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말이었다.

남은 사람은 어쩌라고 그러는 것인지.

그녀의 발언 때문에 인터넷 기사는 온통 현과 세실리아의 관계에 초점이 맞추어진 기사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세실리아가 노골적으로 현을 좋아한다고 표현한 만큼 둘 사이에 관한 추측성 기사가 많았다.

미국에서 뮤직비디오 촬영 때부터 깊은 사이였을 수도 있는 추측부터 시작하여, 키스 퍼포먼스도 실제로 했다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등, 몇몇 기사들은 아예 소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추측성 기사가 넘쳐 흘렀다.

그중에서 창현이 읽다가 뜨끔한 것은 기사 중에서 실제 무대 위가 아닌 다른 곳에서 키스를 했다는 근거 없는 목격담이 실려 있어서 가슴이 철렁한 적이 있다.

“끝까지 조용히 있지를 못하네, 세실은.”

난처해진 자신의 입장에 창현은 콧잔등을 긁적였다. 어차피 세실리아는 미국으로 돌아갔으니 잠잠해지겠지만 그래도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개인적으로 사양이었다.

석규도 오죽하면 창현에게 할 거면 대놓고 하라고 말을 하겠는가. 그만큼 추측 여부를 준다는 것 자체가 창현에게 있어서 결코 좋은 것이 아니었다.

마음이 조금 싱숭생숭해서 진도는 더 나아가지 않고 기존의 곡들을 다시 한 번 훑어보며 보완을 하던 창현은 이벤트 방송 캐스팅 건으로 석규가 할 말이 있다고 하자 녹음을 조금 이른 시간에 끝내고는 사장실로 향했다. 이벤트 방송 건은 처음에는 세희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석규와 이야기를 나누는 체제가 되었다.

사장실로 들어선 창현은 전처럼 생강차를 타서 석규에게 내민다. 그리고 한모금 살짝 맛보면서 석규의 말을 기다린다. 언제나 느끼지만 씁쓸하면서 묘하게 땡기는 맛이다.

“캐스팅 건이 왜요? 무슨 일이 있는 거예요?”

무난하게 캐스팅이 되었다면 석규가 자신을 굳이 부를 이유가 없다.

창현의 질문에 석규가 씁쓸한 미소를 짓더니 대답한다.

“무슨 일이라면 무슨 일이지. 문제가 생겼다.”

“무슨 문젠데요? 설마 제안을 거절한 거예요?”

말을 하는 창현의 표정이 점차 굳어간다. 열흘 정도 기간이 남았기에 스케줄 조정이 될 줄 알았는데 안 된 건가 보다. 스케줄이 있어서 안된 것이라면 어쩔 수 없지만 뭐랄까, 거절당했다는 느낌에 조금 씁쓸했다.

그런 창현의 모습에 석규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다. 소녀시대를 섭외하기는 했는데 전부 다 섭외를 못해서 부른 거다.”

“아, 그래요? 뭐야, 별 거 아니었네요.”

석규의 말에 창현이 한시름 놓은 표정을 짓는다. 또, 뭐라고, 창현은 섭외를 실패해서 석규가 부른 것인 줄 알았다.

“몇 명이 나올 수 있다는데요?”

창현은 아홉 명 중 몇 명이 나올지 물었다.

그에 석규가 조금 전 연락 받았던 것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세 명이 나온다고 하더구나.”

“세 명이면 적당하네요. 아홉 명이면 솔직히 좀 많잖아요.”

창현은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하였다. 아홉 명이면 솔직히 너무 많지 않은가. 비록 처음은 아홉 명을 의도 했다고 하나 스케줄이 먼저 잡혀 있다고 하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오히려 스케줄이 있는데 이쪽에 참가를 하겠다니 다행이겠지. 뭐, 그쪽에서도 계산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있기에 세 명이라도 참가하겠다는 의향을 밝힌 것이겠지만 말이다.

세 명이라고 하니 갑자기 창현은 누구인지 궁금했다.

그는 석규를 보며 질문을 던졌다.

“그럼 소녀시대 측에서 나오는 세 명은 누구누구인데요?”

“참가하는 세 명 말이냐? 왜, 궁금하냐?”

석규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서린다. 마치 비밀을 가르쳐줄까 말까 고민하는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본 창현은 그가 장난을 치려 하는 것이라는 것을 느끼고는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가르쳐주기 싫으면 마시고요. 방송에서 보면 되는데요 뭐.”

예상보다 격한 창현의 반응에 석규는 무안한 표정을 지은 채 헛기침을 내뱉었다.

“흠흠! 알았다. 가르쳐주마.”

그러면서 석규가 누구인지 말하기 시작했다.

창현은 석규에서 흘러나오는 이름을 들으며 눈을 빛내고 있었다.


한편, 창현과 석규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며칠 전에 소녀시대 숙소 내에서도 난리가 났다.

그녀들 또한 인터넷을 하고 있기에 인터넷 기사란을 도배하다시피 한 세실리아의 폭탄 발언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설마 미국으로 가면서 이런 폭탄을 터뜨릴 줄이야.

뉴스를 확인한 소녀들은 세실리아가 남긴 마지막 말에 큰 충격을 받았다.

‘용기 있는 여자가 미남을 차지할 수 있다… 분하지만 옳은 말이야.’

‘하지만 용기만으로는 안 돼. 그에 어울리는 인기를 얻어야지.’

세실리아의 말은 옳은 것이었다. 용기 있는 남자만이 미녀를 차지하는 시대는 끝났다. 때는 바로 남녀평등의 시대! 이제는 여자도 용기가 있어야 미남을 차지할 수 있는 시대가 도래 하였다.

폭탄 선언 이후 인터넷을 다시 뒤덮은 것은 현과 세실리아의 스캔들에 관련된 루머였다.

그것을 보면서 몇몇 소녀들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했지만 이내 안색이 담담해진다. 근거 없는 추측성 기사라는 것을 눈치 챈 것이다.

그렇게 소란이 일단락되고, 그녀들의 숙소에 매니저가 방문을 하였다.

갑작스러운 스케줄이 잡혔다고 하면서 말이다.

“너희들 스케줄 잡혔는데 마침 그날 여섯 명이 참가하기로 한 스케줄이 잡혀 있거든. 어떻게 할래?”

“어떤 스케줄인데요?”

태연이 매니저를 보며 물었다. 여섯 명이 하는 스케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이야기가 되어 있던 차였다. 팀 내에서 인기편중 현상으로 인해 태연과 미영, 윤아를 제외한 나머지 여섯 명이 나가기로 했는데 다른 스케줄도 잡혔나보다.

소녀시대도 스케줄에 대해 이야기만 들었을 뿐 어떤 것인지 모른다.

태연의 물음에 매니저가 대답한다.

“으음! 여섯 명이 나가기로 한 건 공중파 방송이거든. 원래 태연이랑 티파니랑 윤아가 빠지기로 했지만 다른 스케줄도 들어왔으니 다른 멤버들을 이끌기 위해서 태연이가 그쪽으로 가야겠지?”

리더인 만큼 아무래도 여섯 명이 가는 곳을 책임지라는 이야기인 듯했다.

그 말에 일리가 있었기에 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게 할게요. 그런데 새로 들어온 스케줄은 뭔데요?”

“아, 새로 들어온 스케줄은 Mnet에서 이벤트 방송을 하게 되는데 여자 아이돌을 섭외하고 싶다고 해서 그런 거야. 원래 소녀시대 전체를 섭외하려고 했는데 마침 그날 방송이 있잖아? 그래서 세 명도 괜찮냐고 하니까 다행히 OK를 해주더라고.”

매니저의 말에 그때까지 잠자코 있던 윤아가 비명을 질렀다.

“엑? 세 명이라고요? 설마 저도 가는 거예요?”

마침 스케줄이 있는 그날은 윤아가 드라마 촬영이 있는 날이었다. 하지만 우연찮게 드라마 스케줄이 취소된 상태였고, 모처럼 쉬는 날이라 좋아하던 차였다.

그런데 매니저가 세 명이란 언급에서 은연중 자신을 끼워 넣자 윤아가 끼어든 것이다.

쉬는 날인 줄 알았는데 꼼짝없이 스케줄을 소화해야 할 판이 아닌가?

윤아는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설마 저도 스케줄에 포함되는 거예요?”

그녀의 물음에 매니저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드라마 스케줄이 취소되었잖아? 그러던 차에 새 스케줄이 들어온 거지. 이쪽에서도 놓치기 아까운 방송이어서 어쩔 수가 없었어. 대신 Mnet쪽에 넣어줄게. 그쪽이 더 쉬울 것 같거든.”

위로 아닌 위로였지만 윤아는 그 위로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오히려 바닥에 철퍼덕 쓰러지며 비운의 여주인공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아이… 하필이면 그때 들어올 게 뭐야. 잔뜩 놀 계획을 세워놓았는데. 흑흑!”

모처럼 드라마 스케줄이 펑크가 나서 쉴 수 있던 차에 스케줄이 들어오자 윤아가 눈물을 훔치는 시늉을 하였다. 저쪽이 더 쉽다고 해도 결국 스케줄은 스케줄. 그녀로서는 모처럼 쉴 수 있던 날이 덧없이 날아가게 되자 아쉬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Mnet에서 하는 방송이 무엇이기에 놓치기 아깝다고 말씀하신 거예요?”

태연이 궁금한 듯 묻자 매니저가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아, 사실 그 이벤트 방송은 우리 측에서 먼저 하고 싶다고 해도 해줄지 의문일 정도로 큰 스케일이거든. 아니, 스케일이 크다기보다는 시청률이 보장되었다고 할까? Mnet이 케이블 방송이긴 하지만 잘만 하면 공중파 방송보다 더 시청률이 좋게 나올 수도 있어.”

“정말요? 뭔지는 몰라도 대단한 방송이네요.”

매니저의 말에 감탄을 흘리는 소녀들이었다.

이렇게 말할 정도라면 분명 대단한 방송일 텐데 그런 곳에 섭외가 들어오다니. 내심 인지도가 올라갔다는 뿌듯함과 함께 그 방송이 무엇인지 궁금증이 몰려왔다.

태연이 다시 한 번 물었다.

“그거 뭐하는 방송인데요?”

그녀의 물음에 매니저가 어깨를 으쓱한다.

“구체적으로 무슨 방송인지는 모르고 대략적으로나마 어느 방송인지는 알고 있지.”

“어떤 건데요?”

매니저의 말에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매니저를 바라보는 소녀들. 도대체 무슨 방송이기에 놓치기가 아깝다느니, 시청률이 공중파 방송보다 더 높게 나올 수 있다고 하는 것일까. 정말 궁금했다.

그런 소녀들의 모습에 매니저가 피식 웃음을 지으며 대답한다.

“그 Mnet 이벤트 방송의 주인공이 현이거든. 현이 주체가 되는 방송이어서 시청률이 보장되고 있다고 한 거야. 회사에서도 Mnet과 다를 바 없이 생각하고 있고. 오히려 우리 측이 부탁을 해야 하는데 그쪽에서 지명을 해줬으니 고마워하고 있을 뿐.”

“현이라고요?”

매니저의 말에 눈초리가 확 뒤바뀌는 소녀들이었다.

그녀들의 눈은 정말 사실이 맞냐고 매니저를 추궁하고 있었다.

무시무시한 소녀들의 눈빛 폭격에 매니저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 맞아. 그런데 너희들 눈빛이 왜 그러냐.”

갑자기 확 뒤바뀐 그녀들의 눈빛에 매니저는 압도되어 뒤로 한걸음 물러난 상태였다.

이 아이들에게 이런 면이 있었단 말인가.

늘 열심히 스케줄에 임하면서 힘들 때면 투정을 부리곤 하면서 인간적인 면을 보여주었는데 지금은 마치 눈빛만으로 사람을 제압하는 강렬한 카리스마를 보이고 있었다.

마냥 소녀라고 알고 있던 생각에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가장 먼저 정신을 수습한 태연이 손을 번쩍 든다.

“오빠! 저 Mnet 방송에 출연할래요.”

그런 태연의 모습에 다른 소녀들이 퍼뜩 정신이 든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매니저가 뭐라 입을 열기도 전에 그녀들이 태연에게 집중 포격을 가한다.

“야! 너는 리더로서 공중파 방송에 참가하는 멤버들을 이끌기로 했잖아. 그러니 포기해.”

“맞아맞아! 리더가 멤버들을 이끌 생각을 해야지, 자기 이득(?)만 챙기려 들어? 정신 차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언니는 리더니까 공중파 방송에 참가하도록 하세요.”

먼저 선수를 쳤다가 멤버들에게 집중 공격을 받는 태연이었다.

그런 멤버들의 반응에 태연의 하얀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다. 울화가 치민 것이다.

“이것들이! 평소에는 리더 대접도 해주지 않다가 이럴 때만 리더를 따져? 나도 소녀시대고 참가할 권리가 있단 말이다!”

발악하듯 버럭 외치는 태연이지만 아쉽게도 그녀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이미 공중파 방송에 참가하는 멤버들을 이끌겠다고 방금 전에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갑자기 돌변한 소녀들의 반응에 매니저는 머리가 아픈 듯 머리를 잡고는 상황을 정리한다.

“태연이는 우선 공중파 방송에 참가하는 애들을 이끌기로 말했으니 공중파 방송을 하기로 하자. 그리고…….”

“매니저 오빠! 저는 Mnet 방송에 참가하는 거 맞죠?”

방금 전까지만 해도 스케줄 소화하기 싫다고 죽을상을 짓던 윤아가 손을 번쩍 들며 말한다. 초롱초롱 눈이 빛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방금 전까지 비운의 여주인공 역을 훌륭히 소화해내고 있던 것을 떠올리지 못할 만큼 확연하게 변해 있었다.

돌변한 윤아의 모습에 매니저가 얼떨떨한 안색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 그래. 맞기는 한데… 싫으면 바꿔도…….”

“아니에요! 할게요! 매니저 오빠가 하라고 하셨잖아요! 그러니 당연히 해야지요. 할게요. 하하!”

공중파로 빠질 수 있는 여지를 언급하려 하자 재빨리 말을 끊고 쐐기를 박는 윤아였다.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고.”

그런 윤아의 말에 매니저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수밖에 없었다.

세 개 밖에 없는 자리 중에 하나를 윤아가 꿰차자 소녀들의 눈빛이 한층 날카로워졌다. 남은 자리는 고작 두 개뿐이다. 일단 공중파 스케줄에 참가하기로 한 태연을 제외하더라도 일곱 명이 남는다. 경쟁률이 제법 치열하다.

소녀들의 분위기가 조금 변했다는 것을 느낀 매니저는 본격적으로 스케줄을 정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자, 그럼 공중파 방송은 태연이가 확정되었고, Mnet 방송은 윤아가 확정되었네. 간단하게 Mnet 방송에 참여할 두 사람을 뽑고 나머지는 공중파 방송으로 하도록 하자.”

그 말을 듣는 태연의 어깨가 축 처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자신만만하게 하겠다고 하는 것이 아니었는데. 괜히 의욕적으로 임했다가 손해를 보는 기분이었다.

그 사이 매니저의 말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자, 그럼 Mnet 방송에 참여 할 사람?”

휙휙휙휙!

매니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마치 손을 든 순서를 경쟁하는 것처럼 네 개의 손이 위로 올라왔다.

손을 든 사람을 확인한 매니저가 입을 열었다.

“음, 손을 든 사람들은 제시카랑 써니, 티파니, 서현이네. 효연이랑 유리, 수영이는 공중파 방송에 참가할 거고?”

그 물음에 수영이 대표로 대답을 하였다.

“네, 뭐… 저희들도 Mnet 방송이 더 끌리지만 보다시피 경쟁률이 심하니까요. 그냥 애들한테 양보할게요.”

경쟁이 치열할 것이라는 것을 눈치 채고 있었기에 알아서 포기한 세 사람이었다.

“그래, 그렇게 하자. 그런데 자리는 두 개인데 신청한 사람은 네 명이네. 어떻게 한다?”

세 명이 참가하기로 하였으니 부득이하게 두 명은 떨어뜨려야 한다.

매니저가 수연과 순규, 미영과 주현을 차례대로 보며 말하자 태연이 의견을 낸다.

“왜 참가하고 싶은지 물어보면 되지 않을까요? 참가하고 싶다고 했으니 각자 이유가 있을 거 아니에요?”

그럴 듯한 태연의 말에 매니저가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은 제안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래, 그게 좋겠네. 그럼 티파니부터 말해봐. 왜 Mnet 방송에 나가고 싶은 건데?”

갑작스러운 매니저의 질문에 미영이 당혹한 표정을 짓다가 입을 열았다.

“에… 그, 그게 그러니까… 그냥요…….”

차마 ‘창현이가 좋아서 그가 나오는 프로그램에 참가해서 함께 하고 싶어요.’ 라고 말할 수 없는 미영이었다. 그럴 듯한 이유가 떠올랐으면 좋을 법도 하건만 갑자기 질문을 받은 터라 미처 생각할 틈이 없었다.

우물쭈물하며 이상한 대답을 꺼내놓은 미영의 모습에 피식 웃음을 지은 매니저가 주현을 보며 묻는다.

“서현이는?”

“저도 딱히… 아니, 아무래도 이쪽이 더 나아 보여서요.”

뭐라 말을 하긴 했지만 말에 근거가 없는 주현이었다. 그녀 또한 갑작스러웠던 탓에 대답할 수 없었다.

주현마저도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자 매니저가 고개를 갸웃하며 수연에게 물었다.

“제시카는?”

앞서 당황하여 제대로 답하지 못한 두 사람과 달리 수연은 이미 매니저의 물음에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공중파 방송은 토크 쇼 형식이잖아요. 제 이미지 때문에 토크 쇼에 완벽하게 적응할 자신이 없어서요. 그에 반해 이벤트 방송은 제가 여태까지 잘해왔잖아요. 그리고 딱딱한 형식이 아닌 이벤트 방송이다 보니 이쪽이 더 잘맞을 것 같고요.”

토크쇼 같은 경우에는 주로 대화를 나누면서 분량을 확보해야 하는데 수연의 경우 이미지가 얼음공주다 보니 토크쇼에서 빛을 많이 발하지 못하는 타입이었다. 그에 반해 MTV에서도 상당히 잘 활동을 하였으니 그녀의 말은 나름대로 타당한 것이었다.

“음, 그렇구나. 확실히 그랬지.”

그럴 듯한 수연의 말에 매니저는 공감을 얻은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자 미영과 주현이 아뿔싸! 하는 표정을 지은 채 수연을 바라본다. 우물쭈물하며 대답하지 못한 자신들과 달리 수연은 완벽에 가깝게 대답을 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수연은 거의 확정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후!’

속으로 길게 한숨을 내쉬는 미영과 주현이었다.

그 사이 매니저는 순규에게 시선을 주며 물었다.

“써니 너는 왜 하려고 하는 건데?”

제일 마지막에 지목을 받았고, 수연이 말을 길게 한 만큼 순규에게는 충분히 생각할 시간이 주어진 셈이다.

그녀는 매니저의 질문에 여유롭게 대답했다.

“솔직히 말하면 이쪽이 더 재미있을 것 같아서요. 이벤트 방송이라니 무엇일지 궁금하거든요. 그런데 또 이유가 생겼네요. 여기서 누가 되던 간에 솔직히 입담이 조금 부족하잖아요. 제가 얘네들을 보조해주면 될 것 같네요.”

입담이 나쁘지 않은 태연과 윤아, 수영, 유리와 달리 다른 멤버들은 다소 입담이 부족하다. 특히 Mnet 방송에 참여하겠다고 말한 수연이나 미영이나 주현이나 모두 입담이 조금 부족하다. 그랬기에 순규의 이러한 말 자체가 훌륭한 이유가 된다.

“하아…….”

순규의 말을 들은 미영과 주현의 입에서 한숨이 절로 흘러나온다.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승패는 정해진 것이라 생각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순규의 말이 끝나자 매니저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제시카는 자신의 특성을 잘 파악하고 있고, 순규는 다른 애들을 잘 보조해줄 생각까지 하고 있구나. 너희 두 사람이 Mnet 방송에 나가기로 하자. 너희가 나가고 싶은 이유를 가장 잘 설명했으니까.”

매니저의 말에 수연의 표정이 환해졌다.

“고마워요, 매니저 오빠.”

순규는 매니저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기 전에 먼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순규라 하지 말고 써니라고 부르세요! 저도 고마워요, 매니저 오빠.”

“큼! 내가 실수를 했네. 그래, 미안하다. 어쨌건 두 사람으로 정해진 거다. 티파니랑 서현이, 뭐 할 말이라도 있어?”

“아니오, 없어요.”

“하아! 포기에요.”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현실에 순응하는 두 소녀였다. 자신들이 너무 운이 없었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준비가 너무 부족했다.

두 사람이 수긍을 하자 매니저가 윤아와 수연, 순규를 차례대로 보면서 말했다.

“그럼 윤아랑 제시카랑 써니 세 사람이 참가를 하는 걸로 정해진 거다. 그렇게 알고 있도록 해.”

“그런데 매니저 오빠. 도대체 무슨 이벤트 방송이에요?”

적어도 무슨 방송인지는 알고나 부러워하자, 하는 마음에 태연이 묻자 매니저는 깜빡하고 있었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는 입을 열었다.

“아, 그러고 보니 그걸 말하지 않았네. 이번 이벤트 방송은 현을 중심으로 한 거야. 즉, 현의 팬들 때문에 특별 편성이 된 거지. 이벤트 방송 이름은 ‘천의 매력 현玄’ 이란 건데, 시청자들이 원하는 스타일을 골라서 현의 패션을 정해주는 거야. 그리고 그 패션을 선별하는 것은 게스트인 너희 세 사람이 되는 거고.”

“호오…….”

매니저의 말이 이어질수록 수연, 순규, 윤아의 눈에는 빛이 서리기 시작하였고, 나머지 소녀들의 얼굴에는 짙은 아쉬움이 서리기 서렸다. 그중에서 미리 포기한 효연과 유리, 수영의 얼굴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신청할 걸.’

하지만 이미 배는 떠났기에 아쉬움을 표현하는 것 외에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 사이 매니저의 이야기는 계속 되었다.

이야기를 끝마친 매니저가 숙소를 나서면서 수연, 순규, 윤아 세 사람에게 말한다.

“촬영은 일주일 후로 잡혀 있으니까 그렇게 알고 있도록 해. 시청자들 의견은 사흘 후에 접수가 완료되어 너희들에게 도착할 거야. 그럼 난 간다. 편히 쉬도록 해.”

“네, 조심히 가세요, 매니저 오빠.”

“안녕히 가세요…….”

활발하게 인사를 하는 Mnet 방송 참가자 3인들에 비해 나머지 6인의 목소리는 착 가라앉아 있었다.

그런 멤버들에게 승자의 미소를 지어보인 세 사람은 각각 상상에 빠져든다.

어떤 시청자의 의견을 수렴해야 할지에 대해서…….

그중에는 분명 자신의 취향에 부합하는 것이 있을 테니 그녀들로서는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울 수밖에 없었다.

세 소녀의 입가에는 미소가 한가득 머금어져 있었다.


“방송에 출연하기로 한 소녀시대 멤버는 제시카, 써니, 윤아라고 하더구나.”

“그래요? 흐음!”

석규의 말에 창현이 나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굳이 석규에게 방송에 참가하게 된 멤버들을 물어보았냐면, 궁금한 것도 있었지만 그 나름대로 계획도 있어서 그렇다.

창현이 석규에게 했던 제안이 바로 그것이다.

방송에 참가하는 멤버의 정체를 알아야 성공적으로 계획을 수립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왜, 뭐라도 문제가 있느냐?”

석규는 생각에 잠긴 창현을 보며 물었다. 말을 듣고서 아무 반응도 없는 창현의 모습에 의아함을 느낀 것이다.

그런 석규의 물음에 창현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런 건 아니에요. 잠시 생각할 게 있어서요.”

“흐음! 그래? 그런데 정말 자신 있느냐?”

“뭐가요?”

석규의 물음에 창현이 묻자,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너와 소녀시대 관련 논란 말이다. 아무리 네가 SM엔터테인먼트와 계약 관계라고 하나 소녀시대와 여러 면으로 관련이 되면 말이 나올 수밖에 없어. 그걸 모르고 있는 건 아닐 테지?”

창현이 여태까지 여성 아이돌과 얽힌 것을 보여준 것은 소녀시대가 유일하다. 만원의 행복과 음료수 광고, 팬 미팅 등에서 소녀시대와 함께 하는 모습을 보여 팬들에게 의혹을 산 적이 있던 것이다. 그런 이미지를 타파하고자 MKMF에서 원더걸스와 함께 퍼포먼스를 맞춤으로써 소녀시대하고만 친해 보이는 모습을 지워보려 했지만 JYP엔터테인먼트와의 불화로 실패를 한 마당에, 소녀시대와 또 다시 한 프로그램에서 출연을 하게 된다면 분명 다른 말이 나올 것임이 분명했다.

석규는 그 점을 걱정하고 창현에게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번 방송에서는 가급적 소녀시대와 하는 것을 원하지 않고 있었다.

이제 열여섯 살이기에 앞으로 창현에게 펼쳐진 연예계의 생활은 무궁무진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와중에 석규는 창현이 이상한 구설수에 휩싸이는 것을 원치 않았다.

만약 창현이 소녀시대 멤버 중 한 사람과 사귀고 있었다면 석규가 어떤 식으로든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뛰어난 외모로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창현이었지만 그의 인기는 엄연히 말하면 가창력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누구누구와 사귀고 있다는 식의 소문이 나온다면 분명 잠시 동안 인기가 떨어지겠지만 그것은 오히려 거품을 빼는 효과로 나타날 것이다.

거품이 빠지게 되면 창현은 자신의 인기를 한층 더 폭발적으로 구가할 수 있을 것이고, 연애도 성공적으로 함으로써 1석2조의 효과를 얻게 된다. 하지만 창현이 소녀시대 멤버 중에 사귀는 사람이 없다면, 지금 같이 가까이 지내는 것은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그 독은 창현보다 소녀시대에게 더욱 크게 미칠 것임이 분명했다.

석규는 그 점을 염려하고 있는 것이다.

창현은 석규의 말에 어깨를 으쓱해서 문제 될 것 없다는 듯 말한다.

“에이, 저도 바보는 아닌데 그걸 모르겠어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말이 나오겠지만 제가 잘 수습을 해볼 테니까요.”

폭발적으로 인기를 얻고 있는 배우나 가수들은 대부분 스케줄로 인해 무척 바쁜 나날을 보낸다. 그러다 보니 팬들과 제대로 된 커뮤니케이션을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스타들에 비해 창현은 무척 널널하다면 널널하다고 할 수 있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랬기에 창현은 자신의 팬 사이트인 다크 스타를 자주 찾고는 하였고, 앨범의 진척 상황이나 앞으로 할 스케줄 계획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서 소통에 상당히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종종 셀카를 찍어서 올리고는 하였기에 다크 스타 팬들은 그런 창현의 글에 열렬한 호응을 보내면서 한편으로는 그가 부탁하는 것들을 들어주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고는 한다. 창현이 늘 말버릇처럼 하는 것이 바로 팬 분들이 자신의 얼굴이며, 당신들의 행동이야 말로 자신의 이미지를 결정한다고 말하고는 하여서 그렇다. 가끔은 기습적인 이벤트를 열어 당첨된 사람에게는 싸인 앨범을 보내주기도 하였다.

그런 식으로 다크 스타 회원들을 꽉 쥐고 있는 창현은 팬들의 반응에 대해 그리 걱정하지 않았다.

석규는 그런 창현의 모습에 너무나 안일하게 보였다.

본인이 해명한다고 하여도 다른 사람들의 눈에 이상하게 보이면 그것이 끝이다. 하지만 창현은 여러 번의 일들이 너무 쉽게 풀리자 그것을 미처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가 보다.

결국 그는 한숨을 길게 내쉬면서 창현에게 말했다.

“후! 네가 그렇게 말하니 더 이상 언급을 안하겠다만 잘 생각해보아라. 이런 식으로 가다가 분명 말이 나올 것이다. 그리고 그 불똥은 너에게 튀는 것이 아니라 소녀시대에게 튈 것이야. 그걸 잘 알고 있어라.”

석규가 이렇게까지 말하니 창현으로서 무시하고 넘어갈 수 없었다.

그는 장난스러운 안색을 지우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어요. 노력해볼게요.

다 자신이 잘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하는 말이란 것을 알기에 창현은 고개를 끄덕임으로서 긍정의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선 창현이 석규에게 말했다.

“그럼 이야기도 들었으니까 전 다시 녹음에 열중하러 가보도록 할게요.”

“그래, 그렇게 하도록 해라. 아, 그런데 창현아.”

석규가 사장실을 나서려던 창현을 불러 세웠다.

그에 막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려던 창현이 동작을 멈추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네, 왜요?”

“앨범은 언제쯤 나올 것 같으냐?”

창현이 앨범 제작에 착수했다는 것만 알고 있지 나머지에 대해서는 아직 모르고 있는 석규였다. 다만 창현이 이번 앨범 제작은 오래 걸릴 것 같다고 했기에 구체적인 날짜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앨범이요? 흐음…….”

잠시 생각에 잠겨있는 창현.

현재 구상해놓은 곡들 중 절반을 채워 넣었으니 진도는 절반이나 나간 셈이다.

혹시 모를 변수까지 감안한 창현이 모든 계산을 끝내고는 말한다.

“오래 걸리면 한 보름 정도 더 걸릴 것 같네요.”

창현의 대답에 석규가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입을 연다.

“그래? 그럼 올해 나올 수 있겠구나. 음! 조금 서둘러서 크리스마스 전에 음반을 내면서 캐롤송을 하나 넣는 건 어떠냐?”

크리스마스 전에 앨범을 내면서 펼치는 일종의 마케팅이었다.

창현은 그 말에 눈을 빛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호오! 그거 괜찮겠는데요? 아, 진즉에 이럴 줄 알았으면 라샤 누나들도 함께 참여해서 녹음할 텐데 아쉽네요.”

“하하! 마음이 내켰다니 다행이구나. 그럼 그건 그렇게 하도록 하자.”

창현이 흔쾌히 승낙을 하자 미소를 짓는 석규였다.

이미 은연중 창현의 정규3집 앨범이 준비되고 있다는 정보를 흘리고 있기에 음반 회사에서 매일 같이 AA엔터테인먼트에 연락을 해오고 있는 실정이었다. 뿐만 아니라 방송 3사에서 현의 컴백 무대를 자신의 방송국에다가 해달라고 은연중 부탁을 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라샤가 데뷔할 때만 하더라도 부탁이 아닌 압박을 하던 방송 3사에서 부탁을 해올 정도면 그만큼 창현의 입지가 높아졌다는 것을 뜻한다.

규모는 작지만 현과 라샤가 소속되어 있음으로 인하여 AA엔터테인먼트의 입지는 연예계에서 나날이 커지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럼 전 이만 가보도록 할게요.”

방송에 대한 이야기부터 앨범 이야기까지 모두 끝낸 창현이 석규에게 인사를 한 뒤 사장실을 나섰다. 그리고 그가 다시 향한 곳은 녹음실이었다.

그런데 녹음실에 도착한 창현이 한 것은 녹음 작업이 아니었다.

그는 녹음실 한곳에 마련된 탁자로 향하더니 공책을 펼쳐든다. 그리고 입가에 한껏 미소를 지은 채 펜을 꼭 쥐고는 음산한 웃음을 흘린다.

“흐흐흐! 누나들 각오하라고요!”

그렇게 웃음을 짓던 창현이 갑자기 멈칫한다. 막상 자신이 하려던 짓을 떠올리니 마음이 약해진 것이다.

잠시 생각에 잠긴 창현이 볼을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조금 심한가? 으음! 어떻게 하지.”

창현으로서는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여태까지 자신이 골탕을 먹이려다가 다수의 힘 앞에서 무너진 적이 얼마나 많던가. 무슨 일을 할 때 실패를 하지 않으려면 우선 철저하게 적을 탐색하고, 계획을 철저하게 세워놓으면 패배를 하려고 해도 하지 않는다.

손무도 말하지 않았던가!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고!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이야기다. 그만큼 적의 속내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창현은 펜을 놓고는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수연과 순규, 윤아의 번호를 선택한 뒤 문자를 보낸다.

문자 내용은 지금 한가하냐는 내용의 문자였다.

잠시 후, 문자가 도착한다. 답장이 온 사람은 순규였다. 수연은 지금 자고 있고, 윤아는 스케줄 중이란다.

순규가 답장을 보내자 창현은 곧장 그녀에게 전화를 건다.

♩♪♬

컬러링이 들려오더니, 잠시 후, 통화가 연결되며 순규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여보세요? 갑자기 왜 우리 스케줄을 물어보는 거야?

“아, 누나 오랜만이에요. 그냥 물어본 거예요. 그런데 누나도 이벤트 방송에 참가한다면서요?”

-아, 그것 때문에 문자를 보낸 것이었어?

주변에 스타크래프트 고수가 있다면 익히 알 것이다. 그들은 늘 사람을 상대로 게임을 하는 것이기에 각종 전략 전술을 파악해야 한다. 그랬기에 상대방의 심리를 읽어 들이는데 능숙하고, 눈치 또한 무척 빠르다.

순규는 창현의 말에 그가 무슨 의도로 전화를 한 것인지 대략 파악한 듯했다.

그런 뉘앙스를 받은 창현은 순간 뜨끔해진 걸 애써 담담한 척하며 말한다.

“네, 뭐가요? 전 그냥 같이 방송을 하게 되었으니 잘해보자고 말하려던 건데요?”

능청스럽게 대꾸하는 창현이었지만 순규 또한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다.

확실하게 기회를 잡으면 그것을 놓치지 않지 않았던가?

순규는 창현에게 5드론을 하여서 승기를 잡은 것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던 것처럼 말 꼬리를 잡는다.

-호오? 그게 아닐 텐데. 아아, 잘해보자는 게 그런 의미였던가? 후후후!

참으로 불안한 느낌이 드는 웃음이었다.

창현은 속으로 ‘젠장!’ 이라고 말을 터뜨리고는 순규에게 말한다.

“쳇! 잘 부탁한다고요. 제가 누나들이랑 알고 지낸 게 짧은 기간이 아니잖아요?”

-호호! 그건 그렇지. 우리가 잘 대해줄 테니까 너는 몸만 오면 되는 거잖아. 안 그래? 방송에서 넌 그냥 마네킹처럼 서 있으면 되는 거야.

아예 창현을 대놓고 마네킹 취급하는 순규였다.

‘왜 하필 이 누나밖에 답장이 안온 거야.’

눈치 빠르게 자신의 약점을 파악하여 파고드는 순규와 통화한 것을 후회하는 창현이었다.

그래도 마지막으로 기회를 얻어보고자, 창현이 말한다.

“누나, 우리 이러지 말고 서로 좋게좋게 가자고요. 네? 그게 좋잖아요. 누나들도 좋고. 나도 좋고. 모두가 행복한 세상. 안 그래요? 하하!”

어색하게 웃음을 지으며 선처를 빌어보지만 순규는 그런 창현에게 자비를 베풀 생각이 전혀 없는가 보다.

-방송에서 창현이는 울상을 짓더라도 우리와 시청자는 즐거워질 수 있지. 유감이지만 그렇게는 못하겠네.

“누나 정말 이러기에요?”

-내가 뭘? 그냥 방송에 충실하겠다는 이야기인데.

도저히 타협의 여지를 보여주지 않는 순규의 모습에 창현은 마침내 포기하고야 만다.

길게 한숨을 내쉰 창현이 말한다.

“후우! 누나가 그렇게 나온다면 어쩔 수 없죠. 좋아요. 방송은 전쟁입니다. 누나가 아무리 울고 불며 저한테 선처를 구해도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워낙 강하게 나온 창현의 모습 때문일까.

건너편에서 시종일관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던 순규가 일순간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자신의 페이스를 회복한 순규가 당당하게 외친다. 당당해야 하는 것은 자신들이다!

-좋아! 전쟁이야. 우리도 봐주지 않을 테니까 어디 웃을 수 있을 때 웃어 놓으라고! 아주 바비 인형처럼 취급해줄 테다!

“훗! 어디 해봅시다.”

그걸로 전화를 끊으면서 창현의 눈에 짙은 전의가 서렸다.

협상을 시도 했지만 실패로 끝이 났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전쟁 뿐.

펼쳐진 노트를 바라보던 창현이 다시 펜을 집어 들며 중얼거렸다.

“각오해야 할 겁니다. 후후후!”

전쟁을 선포한 이상 자비는 사치다.

오로지 적의 말살만 있을 뿐.

과연 창현의 그런 의도가 잘 먹힐지 지켜볼 일이었다.


Mnet에서 본격적으로 광고를 하기 시작하였다. 바로 천의 매력을 지닌 소년, 현의 특별 이벤트 방송 편성을 사람들에게 알린 것이다.

시청자들 중 상당수가 Mnet이 현을 중심으로 하여 이벤트 방송을 기획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 사실이 알려지자마자 곧장 인터넷을 타고 널리 퍼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시청자들은 Mnet이 자신들을 중심으로 하여 현의 매력 어필을 할 수 있게 기회를 부여한다는 것에 열광을 하였다.

이벤트 방송의 이름은 ‘천의 매력 현玄’ 이었는데, 시청자들의 코디에 따라 현이 이런저런 옷차림을 한다는 것으로 알려진 것이다.

시청자들이 직접 참여한다는 것에 호응을 이끌어낼 수 있었고, 무엇보다 자신들의 코디가 선택되면 현의 싸인이 담긴 애장품을 선물로 준다는 것에 열광하였다. 그만큼 자신이 선망하는 스타의 애장품은 엄청난 가치를 지니고 있던 것이다. 특히 현의 애장품은 가치가 그만큼 대단해서, 당장 받기만 해도 그 가격이 엄청나다는 것은 두 말이 필요 없다.

그렇게 열렬한 호응 속에서 작은 마찰이 일어나게 되었다.

바로 소녀시대의 출연이 그것이었다.

이미 창현이 사전에 다크 스타에 올려놓으면서 이유를 설명하긴 했지만 그것을 알지 못한 일부 사람들은 현과 소녀시대가 너무 친하지 않느냐는 식의 의견을 내놓기 시작했던 것이다.

몇몇 심한 말들 중에서는 SM엔터테인먼트가 현에게 돈을 먹여서 이런 식의 편성을 한 것이 아니냐는 말을 했다가 테러를 당한 사람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추측성 글은 용납하지만 직접적으로 비방하는 글들에 대해서는 가차없는 응징이 오고가곤 하였다.

그러다가 현이 다크 스타에 올린 글이 기사화가 되었는데, 원더걸스는 절정의 인기를 구가하면서 함께하기 힘들었고, 평소 친한 소녀시대 누나들에게 참가를 요청하게 되었다면서 오해를 하지 말아달라는 창현의 글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러자 이게 뭐냐는 식의 비방 글은 급속도로 사라지기 시작했고, 근래 들어 인지도가 상승하기 시작한 소녀시대 팬들도 합류를 하게 되면서 방송이 무척 기대된다는 식의 반응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촬영 일주일 전에 본격적으로 시청자들의 의견을 접수하기 시작하였는데, 그날 무려 십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현의 코디에 참가하여 사이트가 다운되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그만큼 현의 인기가 대단하다는 것을 뜻했다.

어쨌든 그렇게 폭발적인 관심 속에서 시청자들의 의견을 수렴할 수 있었고, 그것을 선별하는 것은 다름 아닌 수연과 순규, 윤아였다.

십만 개의 코디 중에서 1차로 걸러내자 무려 18000여개가 남았다. 그리고 2차로 선별작업을 하자 남은 것은 약 2000여개였고, 이 중에서 몇 가지를 선별하여 최종선택을 하는 것이 바로 세 사람의 몫이었다.

촬영 시작 날은 멀었지만 그녀들이 무슨 코디로 정할지 의견을 선별하는 과정을 카메라에 담아야 했기에 2000개가 넘는 것들 중 고르는 모습을 먼저 촬영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너무나도 많은 의견에 무엇을 골라야 할지 고민하던 세 사람이었지만 하나하나 펼쳐보면서 그것은 점점 행복한 비명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걸로 하면 완전 대박이겠는데?”

“이것도, 이것도! 정말 멋지겠다.”

“우와! 이런 것도 올라오네. 이거 소화하기 무척 힘들 텐데…….”

그러면서 하나하나 코디를 확인하면서 그런 옷을 입은 창현의 모습을 떠올리며 즐거운 상상에 빠진 세 사람이다.

정말 고르기가 힘들 정도로 어렵게 결정한 세 사람은 삼 일 후 촬영을 한껏 기대하였다.

그날 만큼은 세계적인 스타라도 한낱 마네킹으로 전락하리라.


눈 깜짝할 사이에 3일이란 시간이 흘러갔고, 마침내 이벤트 방송 녹화의 날이 다가왔다.

아침 일찍 눈을 뜬 창현은 눈을 빛내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녹화가 있는 오늘.

바로 창현에게 있어서 전쟁의 그날이었다.

“전쟁의 시작인가.”

분명 재미있을 것 같은 방송이지만 창현은 마네킹으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 그 나름대로 여러모로 신경을 쓴 상태였다.

가급적 평화롭게(?) 방송을 하고 싶은 창현이었지만 어쩌겠는가. 상대가 자신과 일전을 벌이고 싶다는데 말이다.

간단하게 샤워를 끝낸 창현이 아침을 챙겨먹으면서 중얼거렸다.

“분명 난 평화롭게 해결하고 싶었는데 누나들이 자초한 것이니까.”

나중에 울고불고 매달리고 하여도 절대 자비를 베풀지 않으리라.

그것이 창현의 결심이었다.

아침을 다 먹은 창현이 5분 후에 도착한다는 로드 매니저의 문자를 받고서는 옷을 입은 뒤 집을 나선다.

그의 표정은 사뭇 비장하였다.


“안녕하세요!”

촬영장에 일찍 도착한 창현은 벤에서 내려 이번 방송의 책임을 맡은 감독부터 시작하여 스태프들에게 인사를 하기 시작하였다.

감독들과 스태프들은 창현이 먼저 자신들에게 인사를 하자 놀란 기색을 보였지만 현이 무척 예의가 바르다고 알려져 있었기에 이내 적응한 모습을 보며 마주 인사를 하곤 하였다. 그중에서 상당수 스태프들은 창현에게 싸인을 부탁하였고, 창현은 그런 스태프들의 제의에 흔쾌히 응하며 싸인을 해주었다.

간단한 소재 이야기를 감독과 나누면서 시간을 보내던 창현은 한 대의 벤이 촬영장에 모습을 드러내고, 그곳에서 세 소녀가 내리는 것을 보았다.

바로 수연과 순규, 윤아였다.

그녀들은 벤에서 내리자 곧장 감독에게 다가와 인사를 하였다.

“안녕하세요, 소녀시대입니다.”

감독을 시작으로 스태프들에게도 인사를 나눈 그녀들은 창현과도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창현을 바라보는 그녀들의 눈빛은 사뭇 강렬하였다. 그 눈빛이 마치 ‘오늘 단단히 각오해야 할 것이다.’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러한 눈빛에 창현은 가슴 한곳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지만 그것을 밖으로 내색하지 않았다.

전쟁은 시작되었다. 여기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면 저 악마(?)들이 더욱 득세할 여유를 줄 뿐이었다.

창현은 그녀들에게 미소를 지은 얼굴로 인사를 하였다.

“안녕하세요, 누나들? 오늘따라 얼굴에 유난히 화색이 도네요.”

“호호! 촬영이 무척 재미있을 것 같아서 그런가봐.”

순규가 그런 창현의 말에 여유롭게 대꾸한다.

“오늘 촬영이 너무 기대되네.”

“이렇게 즐거운 마음으로 촬영을 하는 건 처음인 것 같아.”

수연과 윤아도 그런 순규의 말을 보조한다.

그녀들의 그러한 반응을 창현이 눈치 채지 못할 리 없었다.

아마 자신을 마네킹처럼 취급할 것에 큰 기쁨을 느끼고 있는 것이리라.

이대로 순순히 당해줄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창현이 그녀들에게 물었다.

“호오, 그래요? 촬영을 즐겁게 임하게 되다니 다행이네요. 저도 오늘 무척 기대가 되거든요.”

그런 창현의 말에 세 소녀들의 얼굴에 의아함이 서린다.

자신들이 즐거운 이유는 있다 쳐도 창현은 왜 즐거운 것일까? 꼼짝없이 마네킹 신세가 될 텐데?

의아한 그녀들의 표정을 즐기듯 바라보던 창현은 순규에게 시선을 주더니 입을 열었다.

“제가 분명히 순규 누나한테 말했었죠? 서로 좋게좋게 하자고. 하지만 그걸 싫다고 했으니 후회하게 될 겁니다. 서로 즐겁게 하자던 저의 제안을 거절한 걸 말이죠.”

“흐음, 우리가 후회를 한다고? 어째서?”

도대체 창현의 저 자신감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궁금했던 순규가 질문을 던졌지만 그것을 창현이 쉽게 대답해줄 리가 없다.

그는 어깨를 으쓱함으로써 대답을 대신하였다.

“그건 조금 있으면 알게 될 거예요.”

“가르쳐주지 않겠다는 이야기네?”

“처음 전쟁 선포는 누나가 먼저 했어요.”

창현이 피식 웃음을 지으며 말하자 순규가 인상을 찡그리더니 말한다.

“좋아. 그렇게까지 한다니 우리도 전쟁을 하는 자세로 임해주겠어. 우리도 제법 강한 걸로 골라왔거든. 각오해야 할 걸?”

그러면서 씨익 웃음을 짓는 순규의 모습은 누가 봐도 불길한 느낌이 드는 그런 종류의 웃음이었다.

하지만 창현은 그런 순규의 웃음에 넘어가지 않았다.

“훗! 전 다 알고 있거든요? 이미 누나들이 며칠 전에 코디를 다 정해놓았다는 것을요. 지금 굳이 마음을 달리 먹는다고 코디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잖아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한 창현의 모습에 소녀들이 당황한 표정을 짓는다. 설마 그가 이런 것을 알고 있으리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그, 그걸 어떻게…….”

깜짝 놀라게 하기 위해서 아무 정보도 주지 않았을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었나보다.

당혹한 표정을 짓는 그녀들의 모습에 창현이 웃음을 지었다.

“이번 방송 기획에는 저도 참가를 했다고요? 그러니 알고 있을 수밖에요. 후후후!”

“그렇다면 설마 다른 코너도…….”

“훗!”

윤아가 창현을 보며 불길한 표정을 짓는다.

이번 방송 기획에 참가했다는 것은 자신들이 모르고 창현이 알고 있는 부분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저렇게 자신감을 보이는 창현의 모습이 이해가 간다.

윤아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차린 수연과 순규의 표정도 덩달아 굳었다.

전신을 휘감는 불길함에 그녀들이 몸을 가늘게 떨었다.

창현은 그런 그녀들의 모습에 승자의 미소를 지어보였다.

“후후후! 그건 방송이 시작되면 알게 될 일입니다. 기대하세요, 누나들.”

잠시 후, 방송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미리 나누어준 대본을 숙지하고 본격적으로 녹화를 시작한다.

카메라가 일제히 창현에게 집중되기 시작하였고, 시작 싸인이 떨어지자 창현이 입가에 조금 쑥스러운 미소를 띤 채 입을 연다.

“하, 이거 참 제 입으로 말하기가 쑥스러운데요?”

그러면서 본격적인 스타트를 끊는다.

“지금부터 천의 매력 현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현입니다. 오늘 이렇게 팬 분들을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오늘 이렇게 특별 방송의 주인공이 된 것에 무척 영광이고요, 오늘 저를 도와주실 분들을 모셨습니다. 바로 떠오르는 걸 그룹의 강자, 소녀시대입니다. 한 사람씩 소개를 하도록 하죠.”

창현이 수연을 보며 말하자 그녀가 고개를 숙이면서 자기소개를 한다.

“안녕하세요, 소녀시대의 얼음공주 제시카입니다.”

얼음공주란 별명답게 방송에서는 다소 딱딱한 모습을 보이는 수연이었다. 그에 반해 옆에 있던 순규는 생글생글 미소를 띤 채 인사를 한다.

“소녀시대의 활력소 써니에요. 반갑습니다.”

“꽃사슴 윤아에요. 이렇게 초대 되어서 영광이에요.”

어느 정도 방송에 내공이 쌓였는지 무난하게 인사를 하는 소녀들이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창현은 속으로 치를 떨었다.

‘저런 가식적인 누나들이 있나.’

방금 전까지만 해도 얼마나 흉험한(?) 기세를 흘리고 있던가. 그런데 지금은 정말 남성 팬들의 마음을 두근거리게 만들 정도로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웃음 뒤에 숨겨져 있는 사악함을 알고 있는 창현으로서는 한방 터뜨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게 들었다.

하지만 어찌 자신이 그럴 수 있겠는가. 방송에서 자신 또한 소정의 가면을 쓰고 있으니 말이다. 서로 폭로전을 하면 결국 결론은 자폭이었다.

창현은 가식적인(?) 소녀들의 웃음을 애써 웃어넘기며 입을 연다.

“오늘 방송에 초대 되어서 소감이 어떤지 한 번 들어보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이벤트 방송인 ‘천의 매력 현玄’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창현이 친절하게 마네킹이 되어 시청자들의 의견을 수렴한 코디에 응하는 것이다. 방송에 참여하는 소녀들도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그녀들은 진행을 하면서 묘하게 자신들에게 질문을 하는 창현의 모습에 이를 악 물어야만 했다.

창현의 말처럼 전쟁은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미 질문은 던져졌기에 그녀들은 웃음을 지으며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현 씨의 새로운 모습을 눈앞에 보게 되어 무척 영광이죠.”

“평소 존경(?)하던 현 씨의 새로운 모습을 볼 수 있을 것 같아 두근거리죠.”

“너무 기대가 되고 설레네요.”

여차여차 무난하게 넘어가는 소녀들의 모습에 창현은 만만하게 볼 것이 아니라는 걸 느꼈다.

“아, 그러시군요. 그렇게 생각해주시니 무척 영광이네요. 보니까 시청자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그중에서 고르고 고른 코디를 제게 적용시키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각자 어떤 컨셉인지 들어보아도 될까요?”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 창현은 먼저 그녀들이 어떤 수를 들고 나왔는지 파악하기 위해 질문을 던졌다. 갑작스럽게 그녀들이 선별해온 코디에 당하는 것보다 일정 부분 방어막을 쳐둔 뒤 임하는 것이 자신에게 유리했기에 그렇다.

창현의 물음에 소녀들이 당황한 표정을 짓는다. 이제 바로 코디로 들어가서 바비 인형 취급을 해줄라고 했는데 창현이 먼저 선수를 치고 들어온 것이다.

그렇다고 대답을 안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우물쭈물하는 그녀들에게 천사의 탈을 쓴 사악한 악마 같은 미소를 지은 창현이 콕 집어서 묻는다.

“대답 해주시겠어요, 순… 아니, 써니 씨?”

‘이것이 정말!’

순규는 의도적인지 모르나 자신의 실명을 언급할 뻔한 창현을 카메라 몰래 째려보고는 입을 열었다.

“에… 그러니까 제가 고른 컨셉은 나쁜 남자랍니다. 여자는 나쁜 남자에게 묘하게 끌리는 경향이 있잖아요? 그래서 나쁜 남자 컨셉을 선택하게 되었어요.”

순규의 대답에 창현으니 고개를 살짝 갸웃하며 묻는다.

“나쁜 남자라? 제가 그게 어울릴까요?”

그러면서 카메라가 순규에게 집중되었는데, 순간 카메라 범위에서 벗어나자 창현은 한껏 비웃음을 머금었다. 순규의 노림수를 알아낸 자의 미소였다.

‘으…….’

그런 창현의 미소를 본 순규는 속이 부글부글 끓는 것을 느꼈지만 애써 억누르며 활짝 미소를 지은 채 대답한다.

“물론이죠. 방송 제목이 천의 매력인 만큼 현 씨는 정말 많은 매력을 가지고 있으니까 나쁜 남자도 충분히 소화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속은 부글부글 끓는 것이 충분히 느껴지고 있었다.

분해하는 순규의 모습에 창현이 유쾌해지는 걸 느끼고는 웃음을 짓는다.

“그런가요? 감사합니다. 하하! 자, 써니 씨가 대답을 해주셨으니 이번에는 제시카 씨가 대답해주시겠어요?”

“…….”

창현의 대답에 수연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있었다. 창현과 순규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동안 한곳을 바라보며 멍 때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모습에 창현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아내며 수연에게 말한다.

“저기요, 제시카 씨? 제시카 씨!”

급기야 목소리를 높이는 창현이었다.

갑자기 소리를 지르는 창현의 행동에 멍 때리고 있던 수연이 화들짝 놀라며 대답한다.

“네? 아, 네. 저 부르셨어요?”

창현은 결국 웃음을 흘리며 수연에게 물었다.

“뭘 그렇게 쳐다보시는 거예요? 맛있는 거라도 있나요?”

“에… 그게 아니라…….”

당황하여 허둥지둥하는 수연의 모습을 보며 창현은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모습에 너무나 귀엽게 느껴진 것이다.

결국 창현은 소리 나게 웃음을 흘리며 허둥대는 수연을 도와주었다.

“쿡쿡! 그러지 마시고, 제 질문에 대답해주세요. 제시카 씨는 어떤 컨셉을 선택하셨나요?”

창현의 질문을 들은 수연은 허둥대다가 중심을 잡은 듯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대답한다.

“제가 선택한 컨셉은 귀여운 컨셉입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수연의 목소리는 눈에 띄게 작아졌다. 그도 그럴 것이 최종 컨셉을 선택하는 것이 그녀들인 만큼 그녀들이 선택하는 컨셉이 그녀들의 취향일 확률이 무척 높았던 것이다.

그런 수연의 말에 창현은 눈을 살짝 크게 뜨고는 묻는다.

“제시카 씨는 귀여운 걸 무척 좋아하시나보네요? 방송에서는 차가운 이미지여서 몰랐는데 조금 의외네요.”

창현은 수연이 귀여운 것을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지만 방송이기에 그렇게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수연은 그런 창현의 말에 고개를 푹 숙였다. 아무래도 방송 컨셉은 차가운 이미지인데 귀여운 걸 좋아한다고 밝혀버렸으니, 난감한 것도 있었고, 부끄러운 것도 있었다.

“네…….”

그렇게 반응하는 수연에게 더 이상 뭐라 할 수 없는 창현이었다. 뭐랄까, 마음이 약해진다고 할까.

조금 더 놀릴 수도 있지만 그렇게 되면 심하다는 소리를 들을까 싶어서 창현은 수연을 공략하는 걸 포기하였다.

“네, 그럼 잘 부탁드릴게요. 하하! 그럼 마지막은 윤아 씨네요. 윤아 씨는 어떤 컨셉을 고르셨나요?”

창현의 질문에 윤아가 기다렸다는 듯 대답한다.

“저는 섹시한 컨셉으로 골랐어요.”

“…….”

그녀의 대답에 창현은 한순간 할 말을 잃었다.

자신에게서 섹시한 컨셉이라니 언밸런스도 이런 언밸런스가 없을 것이다.

창현은 윤아를 보며 다시 한 번 물었다.

“그러니까… 섹시 컨셉이라고요?”

“네! 섹시 컨셉이요.”

아주 크게, 또박또박 대답하는 윤아의 모습에 창현은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물었다.

“아니, 제가 어딜 봐서 섹시함이 묻어 나와요. 아니, 정말 그런 의견이 있긴 있었나요?”

윤아가 가지고 나온 코디를 부정하다 못해 아예 존재 여부에 의혹을 드러내는 창현이었다.

그런 창현의 말에 윤아가 피식 웃음을 지으면서 대답한다.

“에이, 현 씨는 아직 잘 모르시는 게 있으신가 본데, 처음 데뷔를 하실 때 <Bad Boy>를 부르셨잖아요? 그때 입으신 옷 때문에 가슴앓이를 하신 여성분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코디 중에서 섹시한 것을 해달라는 요청도 엄청 많았다고요?”

그렇게 말을 하는 윤아의 모습은 창현을 놀리는 투가 역력했다. 아니, 적어도 창현에게는 그렇게 들렸다.

그에 창현은 윤아를 바라보면서 강력한 한 방을 날렸다.

“오, 그랬었나요? 설마 윤아 씨도?”

“…….”

강력한 일격.

그걸 얻어맞은 윤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창현이 날려도 정말 강렬한 한방을 날린 것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날린 질문이지만 그 속에 내포된 위력은 만만치 않았다. 자칫 윤아가 대답을 잘못할 경우 시청자들의 폭격을 맞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물론 윤아가 잘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창현의 믿음이 있었기에 이런 질문을 던진 것이다. 이상하게 대답하면 편집을 요청하면 되는 것이고 말이다.

어쨌건 창현의 질문은 아이돌에게 예민한 사항이라는 건 분명했다.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윤아가 애써 웃음을 지으며 대답한다.

“호호! 분명 좋긴 하지만 전 섹시한 것보다는 남자다운 게 좋아서요.”

정중한 거절이다. 아직 나이가 적은 창현에게 남자다운 매력은 부족한 편이니 보는 사람들도 그러려니 할 확률이 높다.

창현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아, 그런가요. 아쉽네요. 제 나이가 나이인 만큼 그런 면은 부족하니까요. 하지만 몇 년이 지나면 남자다운 매력도 생길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럼 그때는 어떻게?”

집요한 창현이었다. 윤아가 첫타를 잘 받아넘기니 곧장 두 번째 공격을 감행하는 것이다.

그런 창현의 말에 윤아가 움찔하였다. 스스로 생각해도 잘 넘겼다고 위안을 하고 있는데 쉴 사이도 없이 창현이 제2격을 가해온 것이다.

빠르게 머리를 굴리던 그녀가 이내 답을 찾아낸 듯 눈을 빛내며 대답한다.

“그건 그때 가서 대답을 하도록 할게요. 당장 결론을 내리기에는 사태가 중하니까요.”

적절한 회피였다.

창현은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대답한다.

“칫! 너무 잘 빠져 나가신다니깐.”

“컨셉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였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코디에 들어가는 것이 어떨까요?”

기회를 엿보고 있던 순규가 적절하게 치고 들어온다.

그런 순규의 개입에 수연과 윤아가 옳다구나, 싶어 동조한다.

순식간에 본 내용으로 들어가버리는 그녀들의 진행에 창현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다가 한 방 먹었다는 표정으로 변한다.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창현이 그녀들에게 부탁한다.

“다 좋지만 살살 부탁드릴게요. 이 방송은 엄연한 12세 관람가라니까요.”

시종일관 삐딱하게 나오다가 갑자기 굽실거리는 창현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순규가 입가에 한껏 악마의 미소를 달고는 말한다.

“저희가 어찌 세게 할 수 있겠어요. 저희는 그저 시.청.자.분들이 해주신 것에 충실할 뿐이랍니다.”

결론은 인정사정 봐주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런 순규의 말에 창현이 앓는 소리를 냈다.

“끄응…….”

“자! 그럼 본격적으로 코디를 위해 가보도록 해요.”

본격 창현 바비 인형 놀이를 위해 옷이 마련된 공간으로 들어서는 소녀들이었다.

그 뒤를 창현이 오만상을 지은 채 따라가고 있었다.


“와아!”

창현과 소녀들이 들어선 곳은 수많은 옷들이 진열된 곳이었다. Mnet에서 이번 방송을 하게 되면서 협찬을 받은 것이다.

주변을 둘러본 창현은 안색이 창백해진 채 PD를 바라보며 묻는다.

“서, 설마 이걸 다 입어보아야 하는 건 아니겠죠?”

그에 창현을 찍고 있던 카메라가 좌우로 움직인다. 아니란 이야기였다. 창현으로서는 정말 천만다행의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후우! 다행이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창현에게 세 소녀가 다가오고 있었다. 이토록 많은 옷을 본 소녀들의 눈은 뒤집혀(?) 있는 상태였다. 요리사가 요리 재료들을 보고 기뻐하는 것처럼 그녀들은 옷의 종류가 무척 많이 있는 것을 확인하자, 선택의 폭이 넓어진 것에 기뻐하고 있었다.

그런 소녀들의 모습에 창현은 불길한 표정을 지은 채 한걸음 뒤로 물러선다.

“왜, 왜 그런 눈을 하시는 겁니까?”

뒤로 물러나는 창현의 모습은 마치 사냥감에서 벗어나려 하는 겁먹은 토끼와도 같은 눈망울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지켜보던 여인네들의 마음에 불을 피우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런 창현의 말에 순규가 입가에 진한 미소를 띠더니 말한다.

“호호! 그렇게 겁먹을 필요가 없어요. 그냥 현 씨는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몸만 오시면 됩니다.”

그러면서 순규는 수연과 윤아에게 시선을 주며 말한다.

“그럼 누구부터 하도록 할까요?”

“간단하게 가위 바위 보로 정해요.”

윤아가 간단하게 정하자 순규와 수연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는 곧장 가위 바위 보에 돌입한 세 소녀들.

치열한 접전 끝에 선빵(?)의 권리를 획득한 것은 순규였다.

그녀는 자신이 이기자 주먹을 불끈 쥐며 승리의 포즈를 취한다.

“그럼 나부터… 후후후…….”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앞으로 나서는 순규.

마치 사냥감을 궁지에 몰아버린 맹수처럼 그녀는 여유가 가득 담긴 시선으로 창현을 바라본다.

그런 순규의 모습에 창현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지금은 당할 수밖에 없지만 그만큼 나중에 돌아오는 열매는 달콤하리라. 그럴 것이리라.

그렇게 스스로 위로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 순규는 카메라를 향해 정중하게 입을 열고 있었다.

“그럼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현 씨의 코디를 시작해보도록 할게요. 컨셉이 나쁜 남자인 만큼 시청자분들의 코디를 기초로 하여 하겠습니다. 코디 당첨자는 서울에 사시는…….”

그러면서 순규가 당첨된 사람을 말하기 시작하였다.

이번 이벤트 방송을 하면서 무려 십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응모를 하였다. 그리고 그중에서 최후에 남은 것이 딱 아홉 개다. 소녀시대 멤버 세 명이 각각 자신의 기준에 부합하는 세 가지 코디를 선별한 것이다.

물론 자신이 응모한 코디가 당첨되면 푸짐한 상품이 기다리고 있다.

바로 방송이 방영되는 시기에 발매되는 창현의 정규 3집 앨범 싸인본을 증정하기로 이야기가 되어 있던 것이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뒤늦게 Mnet 게시판에 난리가 났다. 현의 앨범이 선물로 걸려 있었다면 진즉에 응모를 했을 거란 불만이 담긴 글이었다. 싸인 앨범을 받는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지 않는가? 특히나 현의 싸인 앨범은 그 가치가 대단하여 판매가격보다 10배 이상 비쌀 정도로 대단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게시판이 다운 될 정도로 시청자들의 원망을 사게 되자 Mnet에서는 이것이 뒤늦게 결정된 사항이라고 말을 하면서 시청자들을 달래기에 나섰다. 설마하니 이 정도로 폭발적인 반응이 나올 줄은 그들로서도 몰랐던 것이다.

어쨌건 당첨된 사람들의 이름을 말한 순규는 당첨자들이 보낸 코디를 보여준다. 최후까지 살아남은 코디인 만큼 전문가가 한 것 못지 않았다.

순규는 코디를 보고 안색이 하얗게 변하는 창현을 보며 입가에 진한 웃음을 띠더니 말한다.

“자, 그럼 이제부터 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후후!”

그 말과 함께 창현은 순규에게 끌려가다시피 하여 코디를 받기 시작했다.

거기에 그냥 코디만 하는 것이 아니다. 순규가 고른 옷들을 입은 창현은 지정된 특정 포즈를 취해야 했다. 그것은 내용이 적히지 않은 종이 다섯 개 중에서 하나를 고르는 것인데, 한 컨셉에 세 번 복장을 갈아입어야 했기에 창현의 입에서는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특히 어떤 포즈를 취해야 하는지 보는 순간 창현의 안색은 놀라움이 가득하였다.

그리고 첫 번째 의상을 모두 갖춰 입자, 순규는 잔뜩 기대된 표정을 짓는다.

“자, 그럼 첫 번째 의상을 모두 입었습니다. 그 모습을 공개하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옷을 입은 창현이 앞으로 나오기 시작한다.

나쁜 남자 패션을 한 창현은 살짝 턱을 치켜든 채 한쪽 입 꼬리를 말아 올린 모습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착하고 순수해 보이는 이미지가 전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창현의 변신은 파격적이었다.

가죽 재질의 옷을 입은 창현은 모델 못지않은 기럭지를 뽐내며 앞으로 나왔다. 키가 작긴 하지만 상체보다 하체가 긴 그의 몸은 완벽에 가깝다고 할 수 있었다.

“…….”

그 모습을 지켜보던 촬영진들은 물론 수연과 순규, 윤아도 말을 잃었다. 그만큼 창현의 변신은 충격적이었던 것이다.

사람이 변해도 이렇게 변할 수 있을까.

정말 나쁘면서 매력이 넘치는 그런 창현의 모습에 소녀들은 넋을 잃은 표정이었다.

몇 걸음 앞으로 나온 창현이 주문된 포즈를 취한다. 속은 부글부글 끓지만 표정 관리가 철저하게 된 창현은 진정한 프로였다.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던 순규는 창현이 다시 탈의실 안으로 들어서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다.

그녀는 입가에 맺힌 침을 삼키며 표정을 수습한다.

‘헙! 내, 내가 뭔 짓을 한 거야.’

그러면서 순규는 본래 표정을 되찾으면서 다시 코디에 임하기 시작했다.

눈앞의 결과물을 보았기에 그녀의 의욕은 한 층 더 불타오르고 있었다.


‘대박이다! 이건 정말 대박이다!’

방송을 촬영하는 PD는 창현의 모습을 보고는 뇌리에 떠오른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이벤트 방송을 할 때만 해도 PD의 생각은 극히 부정적이었다. ‘천의 매력 현玄’이라는 타이틀로 현의 팬들을 끌어당겨 관심을 집중시키려는 것 그 이상 그 이하로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이번 기획에는 현이 직접 관여를 했다는 이야기에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현의 입지가 대단하다고 하나 각자의 분야가 있기 마련인데 곧 방영될 방송에 참가자가 참여한다는 것이 썩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아무래도 현의 나이가 어린 것도 있고, 현이 관여한 기획에서 대박이 나지 않은 것이 없다는 게 배가 아파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방송에 임하는 현의 모습을 보면서 차츰 희미해져갔고, 코디에 따라 의상을 갖춰입은 창현을 본 순간 말끔하게 사라졌다.

PD가 대박이라 생각할 만큼 창현은 완벽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그야 말로 대박.

단지 옷이 달라졌을 뿐인데 현의 이미지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방송 처음에 임한 현의 이미지는 뭐랄까, 그 나이 또래라 할 수 있는 단정한 옷차림을 한 모범생적 모습이라 할까.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면서 PD와 촬영진들은 과연 코디에 따라 그 매력을 살릴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단지 옷을 갈아입는다고 사람 자체가 완전히 달라지는 것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들의 염려가 무색하게 느껴질 정도로 창현은 옷을 갈아입음과 동시에 완벽하게 변신을 하였다.

정말 나쁜 남자인 것처럼 살짝 치켜든 턱과 말려 올라간 입 꼬리, 그리고 깔보는 듯한 눈빛은 대박이었다. 그리고 미션으로 주어진 포즈를 취함으로써 창현의 그런 매력 어필은 한층 강력해졌다.

나쁜 남자 컨셉 이후 이어진 섹시한 남자 컨셉 또한 대박이었다.

이제 갓 열여섯 살인 창현이 무엇을 알까 싶어 걱정을 했지만 그것은 기우였던 것이다. 상대를 유혹하는 듯한 눈동자는 당장이라도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매력적이었다. 과한 노출도 아니고, 마른 듯하면서 탄탄해 보이는 창현의 몸은 섹시함의 극치라 할 수 있었다. 섹시하다는 것은 약간의 노출로 강조하는 면이 많았기에 몸이 말랐다면 이미지를 깎아먹을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이제 열여섯 살인 창현에게 근육질 몸매를 바라는 것은 애초에 하자가 있다.

상대방을 유혹하는 듯한 눈동자와 결코 과하지 않으면서 시선을 사로잡는 의상은 방금 전 나쁜 남자를 연출하던 현과 같은 사람인지 의심이 들 정도로 사람이 달라보였다. 특히나 미션으로 주어진 포즈를 취할 때, 여성 스태프들이 꺄아! 하고 소리를 질러서 NG가 날 정도였다.

촬영에 임하고 있던 여자 스태프들이 자신의 처지를 잊을 정도로 창현이 주는 마력은 강렬하단 이야기였다.

그것은 그만큼 대박이라는 이야기!

웬만해서 확신을 가지지 않는데, 대박이라고 느낄 정도면 이미 대박은 따놓은 당상이나 마찬가지였다.

마지막 코디는 귀여운 남자였다.

앞서 나쁜 남자와 섹시한 남자를 훌륭히 소화해냈기에 귀여운 남자 코디를 하게 된 수연은 잔뜩 기대한 표정으로 코디에 임한다.

그리고 이것 또한 대박이었다.

본래 나이 대에 걸맞는 블링블링한 복장을 한 창현은 발랄하면서 상큼한 매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것이다.

카메라는 연신 최고의 각도로 창현을 잡기에 바빴고, 창현은 미션으로 주어진 포즈를 취하면서 최선을 다해 방송에 임하고 있었다.

그런 창현의 모습을 바라보는 수연의 얼굴은 토마토처럼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귀여운 것을 좋아하는 그녀가 충동에 휩싸일 만큼 창현이 주는 매력이 대단했던 것이다. 하지만 방송 중이었기에 그녀는 마지막 한가닥 남은 인내심으로 간신히 창현을 끌어안고 싶은 충동을 억눌러야만 했다.

그렇게 파란의 코디가 모두 끝났고, 아홉 번이나 옷을 갈아입는 동안 소요된 시간은 세 시간이나 되었다. 의상을 한 번에 고른 것이 아니라, 여러 차례 거듭 고르면서 가장 나은 의상을 선별하였기에 그렇다.

마지막 옷까지 입고 촬영을 끝마친 창현이 옷을 벗으면서 눈에 불을 켰다.

‘으으, 마네킹이 이런 심정이었구나. 이렇게 괴로운 일을 하게 될 줄이야. 하지만 이제 끝났다. 고생 끝 행복 시작이란 말이지.’

이제 다가올 장밋빛 순간을 떠올리며 창현이 처음 복장을 갖춘 채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자 세 소녀가 그런 창현을 열렬히 맞이한다.

“와! 천의 매력 현 씨가 다시 합류하였습니다. 정말 대단하셨어요. 어떻게 그런 다양한 매력을 지니고 계실 수 있을지.”

극찬을 하는 순규의 말에는 진정이 담겨 있었다.

그 말에 창현이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하하, 저는 잘 모르겠는 걸요. 그저 열심히 했을 뿐입니다. 예쁘게 봐주세요.”

“네, 마지막 복장은 정말 귀여웠어요. 아마 보시는 분들은 난리가 날 걸요?”

“그런가요? 좋아해주시면 저야 좋죠.”

미소를 띤 채 대답하는 창현을 보면서 순규가 입을 연다.

“오늘 정말 현 씨의 다양한 매력을 맛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마무리를 하려는 듯한 그녀의 멘트에 창현이 끼어든다.

“잠깐만요! 이대로 끝난다면 제가 조금 섭섭하지 않을까요?”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갑작스러운 창현의 난입에 순규를 비롯한 수연과 윤아가 움찔하며 창현을 바라본다. 그의 말에서 심상치않은 뉘앙스를 느낀 것이다.

그런 세 소녀를 보며 창현은 나름 음침한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세 분이 저를 코디해주셨으니 제가 이 은혜를 나 몰라라 하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

창현의 입가에 서린 미소가 더욱 짙어진다.

그리고 그는 세 소녀들을 보며 한글자씩 또박또박 말한다.

“이제부터 제가 세 분을 코디 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 순간을 위해 참아왔다.

파랗게 질려가는 소녀들을 보며 창현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자, 이제 반격의 시간이다.


예상치 못한 창현의 반격에 세 소녀의 얼굴에 당황이란 감정이 떠오른다.

실컷 즐겼고, 이제 상쾌한 기분으로 마무리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건만 창현이 이런 반격을 가해 올 줄이야.

“저, 저희를 코디한다니요?”

마무리를 하려던 순규가 창현의 말에 움찔하며 그를 바라본다.

변태도 아니건만 왜 그런 순규의 모습에서 창현은 묘한 쾌감을 느끼는 것일까. 미처 예상하지 못한 듯, 움찔하는 그녀의 모습에 창현은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말 그대로입니다. 세 분께서 저에게 아주 정성껏 코디를 해주셨으니 저도 코디를 해드리는 것이 예의가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말을 하는 창현의 어감은 무척 강렬했다. 특히 정성껏 코디를 언급하는 부분에서 아주 대놓고 악센트를 주고 있었다.

누가 봐도 그 부분에 마음을 두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그런 창현의 모습에 소녀들은 할 말을 잃었다. 척 보아도 창현이 아주 단단히 각오를 하고 말을 하는 것임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 코디를 해주겠다는 말 가지고 그녀들이 이렇게 얼어 있을 이유가 없다. 오히려 예쁘게 해주는 것에 고마워해야 하지 말이다.

그러나 지금 상황은 누가 봐도 창현이 정상적으로 코디를 할 리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저기 번들거리는 창현의 눈동자를 봐라.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그저 눈을 빛내고 있는 것이라고 착각하겠지만 창현과 햇수로 2년 동안 알아온 세 소녀는 알 수 있었다. 지금 창현의 눈에서 묻어나오는 것은 결코 정상적인 범주의 코디가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묵직한 분위기가 소녀들의 어깨를 강하게 짓눌렀다.

지금 그녀들의 머릿속은 어떻게 하면 지금 이 상황을 멋지게 타개할 수 있을지에 대해 쏠려 있었다.

방금 전까지 잘 즐기지 않았던가. 이제 웃으면서 방송을 끝내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창현이 초를 친 것이다.

수연이 창현을 보면서 말을 한다.

“하지만 이미 방송 분량은 다 뽑은 것 같은데…….”

세 시간 동안 촬영을 하고, 창현이 옷을 입는 것과 포즈 등을 촬영하였다. 충분히 방송 분량이 확보되었다고 생각한다.

그 말에 창현이 피식 웃음을 지었다. 참으로 불길한 웃음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수연을 보면서 말한다.

“방송 분량이 확보되다니요. 방영시간은 한 시간 정도 되는데 이걸 가지고 어떻게 방송 분량이 확보되겠어요. 보시는 분들에게 옷 고르는 과정을 보여 달라는 건 아닐 테고요.”

“으…….”

창현의 말에 아무 반박도 할 수 없는 수연이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앓는 소리를 내며 물러서는 것뿐이었다.

뒤이어 나선 것은 순규였다.

그녀는 창현을 보면서 말한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코디를 한다고 해도 준비가 되었을 리 없잖아요.”

“준비요?”

그 말을 들은 창현이 씨익 웃음을 지었다.

창현의 웃음을 본 세 소녀는 전신이 오싹해지는 걸 느꼈다.

저 웃음의 정체는 설마……?

“걱정하지마세요. 제가 미리 다 준비를 해두었으니까요. 후후! 세 분은 제가 아까 했던 것처럼 마네킹이 되어주시면 되는 거예요.”

모든 것이 계획이었다는 듯, 말하는 창현의 모습에 윤아가 비명과도 같은 소리를 질렀다.

“설마… 이 모든 게…….”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맞냐는 듯 윤아가 묻자, 창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것도 코너 중 하나랍니다. 방금 전까지 제가 매력을 뽐냈다면 저를 멋지게 코디해주신 세 분에게 보답을 해야 하지 않겠어요? 그래서 야심차게 준비했답니다. 이름 하여 현의 코디랄까요? 후후후!”

완벽하게 당했다.

설마 미리 준비해둔 코너일 줄이야.

그것도 모르고 즐겁게 창현을 마네킹 취급하며 바비 인형 놀이의 진수를 보여주지 않았던가.

“으으…….”

세 소녀는 다가올 미래를 생각하며 신음을 흘렸다.

그런 소녀들의 모습이 마냥 즐거운 창현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스스로도 놀라는 중이었다.

자신이 이렇게 남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즐기고 있다니!

이것도 다 친해서 그런 것이리라.

창현은 세 소녀를 보며 여유 가득한 모습으로 말했다.

“코디는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요. 본래대로라면 제가 했던 것을 그대로 전달해줘야겠지만…….”

말끝을 흐리는 창현의 모습에 세 소녀는 전신에 소름이 오싹 돋는 걸 느꼈다.

특히 윤아와 수연의 표정이 더욱 그러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당한 것을 그대로 돌려준다는 이야기는 창현에게 했던 코디를 그대로 반사 시켜주겠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순규는 나쁜 남자 스타일이었고, 윤아는 섹시한 스타일이다. 그리고 수연은 귀여운 스타일을 선택하였다.

나쁜 남자 스타일을 그대로 되돌려 준다고 해도 나쁜 여자 스타일일 것이다. 특별히 당황할 그럴 여지가 없다.

하지만 섹시한 스타일과 귀여운 스타일은 이야기가 다르다.

소녀 컨셉으로 데뷔를 하였는데 난데없이 섹시한 스타일이라니. 섹시한 스타일이라는 것은 노출도가 높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윤아로서는 가슴이 철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 윤아만큼 수연의 상황도 좋지 않았다.

수연의 컨셉은 다름 아닌 얼음공주다. 차갑고 시크한 모습으로 사람들을 사로잡아야 하는데 귀여운 컨셉이라니?

그리 길지 않지만 여태까지 쌓아온 컨셉을 와르르 무너뜨릴 수 있는 일이 될 수가 있다.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수연과 윤아의 표정에 창현은 피식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 되면 19세 이상 관람가로 바꾸어야겠죠? 그러니 제가 준비한 코디로 하도록 할게요.”

후우!

창현의 말에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수연과 윤아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이 순간 만큼은 창현의 결정이 고맙게 느껴졌다.

이래서 인간의 마음은 참으로 알 수 없다. 방금 전까지만 하여도 절대 안 된다는 생각이 뇌리를 지배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안도의 마음과 함께 고마운 감정마저 드니 말이다.

“자, 그럼 누구부터 시작해볼까요?”

그러면서 창현은 차례대로 수연과 순규, 윤아를 한 번씩 시선을 준다.

창현의 시선을 받은 세 사람이 움츠리며 뒤로 물러선다.

처음은 언제나 위험을 동반한다. 창현이 무슨 코디를 짜왔는지 모르나 며칠 전부터 준비해왔다면 필시 범상치않은 것을 준비해왔으리라.

주춤주춤 물러서는 그녀들을 보며 씨익 웃음을 지은 창현이 손을 들어 윤아를 가리킨다.

“처음은 아무래도 막내인 윤아 씨부터 하는 게 나을 것 같네요.”

“…네.”

창현의 호명에 윤아는 마치 삶을 체념한 것처럼 고개를 푹 떨구고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마냥 창현의 뒤를 따랐다.

코디를 위해 윤아와 함께 가던 창현은 수연과 순규에게 시선을 주더니 말한다.

“얼마 걸리지 않을 테니까 기다리고 계세요. 얼마 걸리지 않을 거니까요. 후후후!”

그러면서 본격적으로 윤아의 코디를 위해 사라지는 창현이었다.


“이, 이걸 입어야 한다고?”

창현이 내민 것을 본 윤아는 떨리는 눈으로 창현을 바라보았다.

그에 창현은 얼굴 한가득 웃음을 지은 채 고개를 끄덕인다.

“물론이죠. 제가 며칠 전부터 얼마나 열심히 코디를 했는데요? 아, 악세서리도 있으니까 이것들도 해주시고요. 쿠쿠쿠!”

그러면서 준비해둔 것들을 모조리 꺼내놓는 창현이었다.

“…….”

그 모습을 보며 윤아는 할 말을 잃었다.

설마 이런 코디를 준비해올 줄이야.

오늘 방송으로 확연하게 굳어질 자신의 이미지를 생각하니 암담하기 그지없었다.

그런 윤아의 모습을 보는 창현은 마냥 즐거울 뿐이었다.

“그럼 꼭 입어주시고요, 잠시 후를 기대할게요. 크흐흐!”

“으으으…….”

웃음을 짓는 창현의 모습에 분통 터지는 표정을 짓는 윤아였다.

그런 윤아를 뒤로한 채 창현은 수연과 순규가 있는 곳으로 향한다. 이제 윤아가 옷을 입고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기다리면 된다.

창현이 모습을 드러내자 수연과 순규가 떨리는 눈으로 창현을 바라본다.

도대체 창현이 어떤 코디를 준비했을지 짐작이 되질 않았다.

카메라가 촬영을 하지 않고 있었기에 수연이 조심스럽게 창현을 보며 물었다.

“창현아, 도대체 윤아한테 어떤 코디를 했어?”

조심스럽게 묻는 수연의 모습에 창현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게 심한 걸 하지 않았으니까 안심하세요. 후후후!”

“그래?”

창현의 말에 조금 안도를 하는 수연.

하지만 이런 말이 있지 않은가? 한국 사람의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한다고.

그녀가 안심하는 모습에 창현이 결정타를 날렸다.

“윤아 누나가 셋 중에서 가장 강도가 약하거든요. 그 다음은 수연 누나고 순규 누나가 제일 심하죠. 크흐흐!”

“뭐, 뭐라고?”

창현의 말에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짓는 수연과 순규였다.

특히 순규의 표정은 가관이었다. 셋 중에서 자신이 가장 심하다니. 당장 윤아의 코디만 하여도 창현이 웃음을 참지 못할 정도인데 가장 심하다면 도대체 어느 정도란 말인가.

가슴에 피어오르는 불안감에 순규가 말한다.

“왜 내가 제일 심한 거야.”

그녀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에 창현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누나가 저랑 전쟁선포를 했잖아요. 적의 수괴는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처리해야 하는 것이 저의 입장입니다.”

“으으… 두, 두고 봐. 반드시 복수할 거야.”

복수를 선언하는 순규의 모습에 창현이 코웃음을 쳤다.

“훗! 두고 보자는 사람 치고 무서운 사람 없지요. 어, 다 되었나보네요.”

윤아가 옷을 다 입었다는 신호를 스태프가 보내자, 창현이 밝은 표정으로 말한다.

“아, 윤아 씨가 옷을 다 입었다고 하네요. 제가 어떤 코디를 준비했을지 궁금하시죠? 하나 둘 셋 외치면 윤아 씨가 나올 거예요. 다같이 외쳐봐요. 하나…….”

“…둘, 셋!”

창현의 말에 불안한 마음을 부여잡으며 숫자를 외치는 수연과 순규였다.

도대체 윤아가 어떤 복장을 하고 있을까.

윤아의 복장에 따라 그녀들의 복장 수위가 정해질 확률이 높았다.

셋을 외치자 탈의실에서 한 사람이 걸어 나오기 시작한다.

그런데 어째 입고 있는 옷이 이상하다.

“……!”

윤아가 모습을 드러내자 수연과 순규의 눈이 크게 커지기 시작한다.

그녀는 다름 아닌 도복을 입고 있던 것이다.

그것도 꽤 오래 돼서 무척 낡은 도복 있지 않은가?

당장이라도 뜯어질 것 같은 너덜너덜한 도복에 검은 띠, 그리고 손에는 붕대를 이리저리 감은 채 머리를 살짝 산발로 만든 윤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모습을 보며 사람들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만큼 윤아의 패션은 파격적이었던 것이다.

윤아도 그런 자신의 패션이 부끄러웠는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창현은 할 말을 잃은 윤아와 수연, 순규를 보더니 싱긋 웃음을 짓고는 자신의 코디에 대해 설명한다.

“제 컨셉은 바로 파이터 윤아 양입니다. 소녀시대 내에서 철권으로 유명한 윤아 양의 이미지를 바탕으로 이런 코디를 짜보게 되었습니다. 어때요, 묘하게 어울리죠?”

“…….”

창현의 물음에도 불구하고 대답을 하지 못하는 수연과 순규였다.

저게 제일 수위가 낮은 거라니…….

그렇다면 자신들은 얼마나 더 심각한 것이란 말인가!

수연과 순규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한편 윤아는 자신을 철권이라 소개하는 창현의 말에 입술을 꼬옥 깨물었다.

아직 상용화(?) 되지 않은 자신의 별명을 창현이 이 방송을 틈타 멀리 퍼뜨리고 있던 것이다. 정말 마음 같아서는 공식 인증된 자신의 철권을 창현에게 한 방 먹여주고 싶었다.

‘이미 촬영이 되고 있잖아. 어쩔 수 없어. 포기하자. 포기하자.’

자기 최면이야 말로 가장 나은 위안이라 생각하는 윤아였다.

하지만 악마(?) 창현은 그런 윤아를 가만 놔두지 않았다.

그는 윤아를 향해 싱긋 웃음을 지어보이더니 말한다.

“자, 그럼 약속된 포즈를 취해주셔야죠.”

능글능글한 창현의 모습에 그렇게 얄미워 보일 수 없었다.

윤아는 속으로 이를 갈며 창현을 노려보았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좋아하고 자시고 그런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으드득!

‘강창현! 두고보자!’

속으로 칼날을 갈고 있지만 어쩌겠는가. 지금 상황은 꼼짝없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 신세인데.

이를 갈면서 결국 창현의 말에 응할 수밖에 없는 자신이 너무나 원망스러운 윤아였다.

그녀는 고사리 같은 손으로 쥔 주먹을 들어 보이더니 산발이 된 머리 사이로 드러난 눈동자를 날카롭게 빛내며 말한다.

“현의 음원을 불법 다운로드 하는 당신! 용서하지 않겠다!”

‘강창현 너를 용서하지 않겠어!’

겉으로 나오는 말과 속으로 나오는 말이 다른 윤아였다.

세일러문을 패러디 한 윤아의 대사에 촬영 스태프들은 빵 터져 웃음을 터뜨렸고, 수연과 순규도 그런 윤아의 대사에 멍한 표정을 짓다가 웃음을 짓는다.

그런 사람들의 모습에 윤아가 민망한 표정을 짓자, 창현이 그녀를 보며 말한다.

“수고하셨어요. 그럼 옷 갈아입고 오세요.

카메라 촬영이 끝나고, 창현이 윤아에게 말하자, 민망한 표정을 짓고 있던 윤아가 창현을 노려보더니 한 마디 한다.

“두, 두고 보자!”

그 말과 함께 후다닥 탈의실 안으로 들어서는 윤아였다.

예전 같으면 잔뜩 긴장했을 윤아의 경고였지만 지금 이 순간 만큼은 창현에게 가소로울 뿐이었다.

“두고 보자는 사람은 결코 무섭지 않지요. 후후!”

그러면서 창현은 시선을 수연과 순규에게 돌린다.

웃음을 짓고 있던 두 소녀는 창현의 시선을 받고는 그제야 자신들의 처지를 깨닫고는 움찔한 표정을 지으며 저도 모르게 뒤로 한걸음 물러선다.

그러한 두 소녀의 모습에 창현은 기분이 유쾌해지는 걸 느꼈다.

윤아가 끝났는데 아직 두 명이나 남았다는 그 즐거움.

입가에 맺힌 미소는 더욱 짙어진다.

창현이 수연과 순규를 한차례씩 바라보다가 이윽고 수연에게 시선을 고정하고는 말한다.

“이제 수연 누나 차례네요? 자, 순순히 따라오시길.”

“…….”

창현을 바라보던 수연의 안색이 파랗게 질리더니 이내 어깨가 축 늘어진다. 방금 전까지 즐거워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윤아도 저렇게 파격적인 복장을 했는데 그보다 더 심하다는 자신의 복장은 어떤 것일까.

상상만 해도 두려운 수연이었다.

잠시 후, 윤아가 탈의실에서 나오자, 창현과 수연이 안으로 들어선다.

윤아는 축 늘어진 수연의 모습에 안쓰러움을 느꼈는지 그녀의 어깨를 토닥여준다.

마치 그 심정을 모두 이해한다는 것처럼.

그렇게 윤아에 이어 수연이 새로운 변신을 위해 탈의실 안으로 들어섰다.

아니나 다를까, 창현이 한 코디를 본 순간 수연의 안색이 하얗게 질리기 시작한다.

그녀는 떨리는 눈으로 창현이 내민 것을 가리켰다.

“이, 이걸 입어야 한다고?”

창현은 입가에 호감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네. 무척 좋은 기회잖아요?”

“이게 좋은 기회라고?”

수연이 회심의 쏘아 붙이기를 시도했지만 창현에게는 어림도 없는 것이었다.

쏘아붙임을 미소로 대응하니, 수연의 어깨가 이내 축 늘어진다. 그것은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의 반응이었다.

창현은 그런 수연을 보며 친절하게 착용해야 할 것들을 건네주며 말한다.

“잊지 않고 모두 착용한 뒤 나와 주세요. 후후후!”

자신을 향해 백만불짜리 미소를 짓는 창현의 모습이 마치 악마의 미소처럼 보이는 수연이었다.


탈의실 밖으로 나온 창현은 예의 유쾌한 미소를 지은 채 윤아와 순규에게 다가간다.

순규는 떨리는 눈으로 창현을 바라보고 있었고, 이미 게임이 종료된 윤아는 창현을 표독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창현이 다가오자 윤아가 그에게 말한다.

“이대로 끝이라고 생각하지마. 반드시 복수를 해주겠어.”

“훗! 그게 가능할까요?”

오늘 방송은 자신을 위한 것이다.

훗날 보복이 두렵긴 하지만 오늘 만큼은 마음껏 기분을 내는 창현이었다.

그런 창현의 모습에 윤아는 분한 듯 인상을 찡그렸다. 당장 어떻게든 복수를 하고 싶은데 도저히 방법이 떠오르지가 않는 것이다.

그렇게 분해하는 윤아의 모습을 즐기듯 바라보면서 창현은 순규에게 말했다.

“수연 누나 패션을 보면 깜짝 놀랄 거예요. 아주 깜짝요. 후후후!”

수연이 옷을 입는 시간은 조금 오래 걸렸다. 윤아가 옷을 입는 시간은 채 5분도 걸리지 않았는데 수연은 무려 20분이 지나서야 옷을 다 입었다고 신호가 온 것이다.

신호가 오자 창현은 예의 미소를 지은 채 순규와 윤아를 보며 말한다.

“자, 제시카 씨가 옷을 다 입으셨다고 하니 불러보도록 해요, 하나, 둘…….”

“셋!”

순규와 윤아의 외침이 터져 나오자 탈의실에서 한 사람이 걸어나오기 시작했다.

먼저 보인 것은 다리였다.

응? 그런데 신은 것이 조금 이상했다.

부츠를 신기는 신었는데 평범한 부츠가 아니었다.

뭐랄까… 어디선가 본 듯한…….

그와 함께 탈의실에서 나오는 한 소녀.

다리에 이어 보인 것은 몸이었다.

그런데 몸에 걸친 것은 순백의 드레스였다.

더없이 고귀하고 더없이 아름다워 보이는 드레스 말이다.

하지만…….

뒤이어 모든 모습이 드러나자 촬영장은 일순간 진공 상태에 접어든다.

모두가 드러난 수연의 모습에 할 말을 잊고 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침묵도 오래가지 않았다.

수연의 모습을 지켜보던 창현이 먼저 웃음을 참지 못한 채 웃음을 흘린 것이다.

“풉!”

푸하하하하!

그것이 기폭제 역할을 하여, 삽시간에 촬영장 전체가 웃음 바다로 변해갔다.

웃음을 터뜨린 것은 창현과 촬영진 뿐만 아니라 순규와 윤아도 그러했다. 특히나 윤아는 어찌나 격하게 웃는지 아예 바닥에 쓰러져 데굴데굴 구르며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탈의실에서 모습을 드러낸 수연의 모습은 그야 말로 충격 그 자체였다.

수연이 몸에 걸치고 있는 드레스는 원피스 형식으로 된 것이었다. 무릎이 살짝 드러나는 치마에 어깨와 가슴을 모두 가리고 있는 드레스는 노출도가 없지만 무척 아름다웠다.

만약 드레스만 입었다면 웃음을 터뜨리지 않았을 것이다.

허나, 수연이 입고 있는 것은 드레스만이 아니었다.

우선 그녀가 신고 있는 것은 부츠였는데, 그것은 일반 사람들이 신는 부츠가 아니었다.

바로 권투 선수가 신는 부츠였던 것이다.

거기에 헤드기어를 쓰고, 권투 장갑을 낀 수연의 모습은 언밸런스함 그 자체였다. 순백의 아름다운 드레스에 권투 부츠와 장갑을 끼고, 헤드기어까지 착용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가장 웃긴 것은 수연의 허리에 착용된 챔피언 벨트였다. 특수 제작이라도 한 듯 WBA가 들어갈 자리에 SNSD가 들어가 있었다. 즉, 소녀시대 챔피언이라는 뜻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르고 넘어가겠지만 창현의 세심한 배려가 돋보이는 패션이었다.

“…….”

촬영진은 물론이고, 믿었던 멤버들마저 폭소를 터뜨리자 수연은 부끄러움에 고개를 떨구었다. 도저히 얼굴을 들 수 없었다.

그렇게 한바탕 촬영장이 웃음바다가 되고, 어느 정도 진정이 되고 나서야 창현이 수연을 보며 말했다.

“푸후후후! 이렇게 웃음을 주신 제시카 씨에게 정말 감사의 인사드립니다. 너무 어울리네요. 쿡쿡쿡!”

말을 하면서 웃음을 감추지 못하는 창현이었다.

그것은 순규와 윤아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 모습에 수연은 순간 울컥하여 한마디 쏘아주려다가 간신히 참았다. 지금 이것은 방송이다. 울컥해서는 안 된다.

애써 화를 억누르는 수연을 보며 창현이 말한다.

“제가 제시카 씨에게 시도한 코디는 언밸런스함이랄까요? 얼음공주란 별명답지 않게 제시카 씨가 무척 다정다감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겉으로 보이는 이미지와 속에 지닌 따뜻한 성격의 상반됨을 코디로 표현을 해보았습니다. 결과는 대성공인 것 같네요.”

참으로 말은 청산유수인 창현이었다. 이런 대폭소 코디를 가지고 그렇게 말을 가져다 붙이니 말이다.

창현의 그런 말에 스태프들은 물론 순규와 윤아 또한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설마 저 파격적인(?) 코디에 그런 의도가 숨어 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심지어 듣고 있던 수연마저도 창현의 말에 살짝 감동을 받았다.

‘정말 창현이가 날 그렇게 생각해주고 있는 걸까?’

기쁜 마음에 창현을 바라보던 수연은 순간 자신의 마음을 지배해나가던 생각이 와르르 무너지는 걸 느꼈다.

왜냐하면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창현의 입 꼬리가 부들부들 떨리고 있던 것이다.

누가 봐도 웃음을 참는 것이 역력한 모습이었다.

수연은 순간 창현에게 다가가 한 방 쥐어박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이게 진짜…….’

그런 수연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창현은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수연에게 말한다.

“자, 그럼 제시카 씨, 약속한 포즈를 취해줘야지요?”

이것이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부분이다.

수연은 창현의 말에 표정이 살짝 굳었다. 정말 이걸 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찰나에 마주친 윤아의 눈이 할 것을 종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뭐랄까, 마치 물귀신 같은 모습이었다. 같이 죽자는 그런 식?

그래, 윤아도 했는데 자신이라고 못할쏘냐.

결심을 굳힌 수연은 권투 장갑을 낀 자신의 손으로 주먹을 불끈 쥐며 파이팅 포즈를 취했다.

“현의 음원을 불법 다운로드 하면 챔피언인 저와 12라운드를 뛰어야 할 거예요.”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권투 장갑으로 얼굴을 가린 채 후다닥 탈의실로 가는 수연이었다. 그 모습까지 다 촬영이 되고 있어서 다시 한 번 촬영장이 웃음으로 가득 찬다.

잠시 후, 원래 복장으로 돌아온 수연이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나오자 창현이 그녀를 크게 반긴다.

“이야, 오늘 정말 운이 좋은 날인가봐요. 철권 윤아 씨에 챔피언 제시카 씨까지 저를 위해 불법 이용자들에게 전쟁을 선포해주시다니. 정말 고마워요.”

‘창현이 네가 시킨 거잖아!’

그렇게 소리치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못하는 두 소녀였다.

이제 두 명이 끝나고 마지막 한 명이 남았다.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창현의 시선이 순규에게 향한다.

창현의 시선을 받은 순규는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그래도 옆에 수연이 있을 때는 어느 정도 안정이 되었는데, 이제 자신만 남았다고 생각하자 심장이 걷잡을 수 없이 두근두근 뛰고 있었다.

그런 순규를 보며 창현이 빙긋 웃음 짓는다.

“이제 한 분만 남았네요. 자, 마지막인 만큼 하이라이트고요, 제가 가장 야심차게 준비한 코디이기도 합니다. 자, 써니 씨 저를 따라오세요.”

창현의 말에 순규가 더욱 안절부절 못한다.

분명 창현은 말했었다. 윤아보다 수연의 복장이 더욱 강렬하고, 수연보다 자신의 복장이 더 강렬하다고 말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자폭은 분명하다.

순규는 애원하는 어조로 창현에게 말한다.

“큰 웃음 줬는데 전 안 하면 안 될까요?”

창현의 입가에 순간 짙은 미소가 떠올랐다가 사라지고 서운한 표정이 자리한다.

“안 하다니요. 제가 준비한 코디가 마음에 들지 않으신다는 이야기인가요?”

‘마음에 들 리가 없잖아!’

속으로 소리치는 순규였지만 그것을 겉으로 드러낼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의 눈에 창현은 정말 고단수 중에 고단수로 보였다. 저렇게 말하면 자신에게 빠져나갈 구멍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어깨를 축 늘어뜨린 그녀가 현실을 받아들이고야 만다.

“후! 그럴 리가요. 네, 알겠습니다.”

“후후후! 그럼 저를 따라오세요. 같이 힘내서 마지막을 장식 해봐요.”

그런 창현의 모습에 순규에게는 저승사자와도 같이 보였다.

창현과 함께 탈의실로 향한 순규.

수연과 윤아는 그런 순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불안한 표정을 짓는다.

도대체 어떤 코디일까.

궁금한 한편 순규가 얼마나 큰 정신적 데미지를 입을지 상상조차 하기가 힘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탈의실 안쪽에서 순규의 절규가 들려온다.

“안 돼애애애애애애애!”

“헉! 써, 써니야.”

“언니, 어떻게 해요. 써니 언니가…….”

그녀의 절규만으로도 얼마나 절박한 상황에 처했는지 능히 잠작이 갔다.

그와 함께 창현이 탈의실에서 나오는데, 수연과 윤아의 눈에 창현은 그야 말로 악마 그 자체였다.

탈의실에서 나온 창현은 두 사람에게 웃음을 지어 보인다.

“순규 누나가 너무 좋아하시네요. 함께 기대 해봐요.”

“…….”

그런 창현의 말에 아무 말도 못하는 두 사람이었다.

약 10분 정도가 흐르고, 순규가 옷을 모두 입었다는 말에 창현과 수연, 윤아가 하나 둘 셋하며 외친다.

그와 함께 탈의실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순규.

그녀가 신은 신발부터 시작하여 하얀색 스타킹을 보고, 입고 있는 옷을 보는 순간 수연과 윤아는 할 말을 잃어야만 했다.

노랑색 티에 청 멜빵과 노랑색 가방, 노랑색 모자를 쓰고 있는 순규의 모습은 유치원생 복장을 하고 있던 것이다.

그야 말로 충격 그 자체.

수연의 복장이 엄청난 충격을 준 상태였지만 순규의 복장은 다시 한 번 폭풍이 되어 촬영장을 휩쓸었다. 그만큼 그녀의 복장은 충격적이었던 것이다.

그 모습을 보며 창현은 한가득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러면서 순규에게 한마디 던지는 것을 잊지 않았다.

“정말 잘 어울리시네요, 써니 씨.”

“…….”

아무 말도 못하는 순규였다. 지금 정신적 데미지가 너무나 컸다. 가뜩이나 키가 작아서 서러운데 설마하니 이렇게 강렬한 한방을 먹을 줄이야. 어떻게 하면 창현에게 복수를 할 수 있을지 영민하게 돌아가던 생각이 뚝 끊긴 지 오래였다.

그저 지금 상황을 가능하면 빠르게 벗어나고 싶을 뿐.

창현은 순규를 향해 말했다.

“자, 써니 씨. 준비한 포즈 부탁드릴게요.”

그 말을 들은 순규가 순간 움찔한다. 텅 비었던 머리가 창현의 말에 본능적으로 반응하면서 사고를 되찾은 것이다.

고개를 푹 숙인 순규가 고민을 하는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들며 눈웃음을 짓고는 말한다.

“현의 음원을 불법 다운하면 써니가 놀아주지 않을 거예요. 에헷!”

그렇게 말하고는 수연이 그러했던 것처럼 바로 몸을 돌려 탈의실로 향하는 순규였다. 자신이 말해놓고 극도의 민망함을 느끼고 있었다. 에헷은 창현이 특별 주문한 키포인트였다.

그런 순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창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조금 심했나?’

순규까지 모두 끝나자 그제야 자신이 심했다는 것을 느끼는 창현. 그렇게 생각하자 슬슬 후환이 두렵기 시작했다. 잘 생각해보니 절대 건드려서 안될 인물들을 건드렸던 것이다.

하지만 이미 기호지세가 아닌가. 여기서 약한 모습을 보이면 자신만 잡아먹힐 뿐이었다.

창현은 마음을 굳게 먹었다.

‘에이 어떻게 되겠지.’

잠시 후, 옷을 다 갈아입은 순규가 나왔다. 전신에는 힘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축 늘어진 그녀의 모습에 창현은 미안한 감정이 들었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은 채 말한다.

“자, 소녀시대 세 분의 다양한 매력을 맛볼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오늘 즐거우셨죠?”

“네.”

창현의 말에 밝은 표정을 지어보이며 대답하는 소녀들이었다.

거기에서 윤아의 표정에는 초조함이 가득하였다.

이대로 방송이 끝나면 안 되는데. 강력한 걸로 한 방 먹여주고 싶은데.

창현이 방송을 끝내기 전에 어떻게든 한 방 먹일 방법을 떠올리고자 윤아는 부지런히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그 사이, 창현은 웃음을 지으며 마무리를 하려고 한다.

“저도 오늘 함께 할 수 있어서 무척 즐거웠고요. 다음에 또 이런 기회가 왔으면 좋겠네요. 그럼…….”

“자, 잠시만요!”

그때 윤아가 창현의 말을 끊고 나섰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개입에 창현은 물론 촬영진과, 수연, 순규마저도 의아한 시선으로 윤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윤아의 입가에는 득의만만한 미소가 서려 있었다.

인간은 정말 놀라운 능력을 지니고 있다.

궁지에 몰릴수록 그 진가를 발휘한다더니 정말 막바지에 이르러서 기발한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윤아는 입에 한가득 미소를 지은 채 창현을 바라보더니 말한다.

“이대로 끝나기에는 너무 아쉽지 않나요?”

반드시 한 방 먹여 주리라.

우리를 웃음거리로 만들고 바비 인형 취급했던 것을 반드시 되갚아 주겠다.

사그라 들던 전의에 다시 한 번 불타오르는 윤아였다.

반전의 여지는 존재하고 있다!


“아쉽다니요. 충분히 방송 분량을 뽑지 않았습니까?”

윤아를 바라보는 창현의 표정이 살짝 불안감에 빠져든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그래도 일단 방송 분량은 충분히 확보가 되었기에 윤아의 말을 저지하려 든다. 뭔지는 몰라도 불안했다. 그러니 싹을 밟아놓아야 한다.

“방송 분량이 확보되었더라도 더 좋은 게 있다면 시행해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지금 상황에서 굳이…….”

완강하게 거부하려는 창현의 모습.

그에 윤아가 재빨리 수연과 순규에게 눈짓을 한다. 지원사격을 해달라는 의미였다.

그러자 수연이 재빨리 입을 열어 창현의 말을 끊는다.

“괜찮을 것 같네요.”

“저도 괜찮을 것 같아요.”

일단 윤아가 무엇을 생각하지 모르지만 순규도 지원사격에 나섰다. 이미 한배를 탄 동지인 만큼 윤아가 자폭을 할 리는 없으리라.

“일단 한 번 들어는 보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수연과 순규의 지지를 등에 업은 윤아가 기세등등하게 말한다.

“크윽…….”

그 모습에 창현이 표정을 살짝 일그러뜨렸다. 다수결에서 완전히 밀려버린 것이다.

더 우기고 싶었지만 그래봤자 먹히지 않을 것 같았다.

창현은 PD를 믿어보기로 하고 승낙을 해야만 했다.

“좋아요. 대신에 먼저 PD님께 허락을 맡고 오세요. 그리고 제가 승낙을 해야 합니다.”

“물론이죠. 후후!”

창현의 승낙이 떨어지자 입가에 짙은 미소를 띤 윤아가 PD에게 향한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PD는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다가 윤아가 다가오자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다.

속닥속닥 아주 작게 이야기를 한 탓에 윤아가 무슨 말을 전달했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윤아의 이야기를 들은 PD가 놀란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높여 물었다.

“그게 가능합니까?”

“네, 허락만 해주세요. 그러면 제가 반드시 성사시켜 보일 테니까요.”

굳은 의지가 실린 윤아의 목소리.

그 모습을 보며 창현은 불안감이 전신에 엄습하는 것을 느꼈다.

도대체 무슨 떡밥을 던졌기에 PD의 눈이 저렇게 변하는 것일까.

불안한 마음에 창현이 이야기를 좀 더 자세히 듣기 위해 다가가려던 찰나, 윤아의 시선과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움찔!

승자의 미소를 짓고 있는 윤아의 모습에 창현은 저도 모르게 소름이 돋아났다.

도대체 무슨 계획이기에 그런 것일까.

창현이 더 이상 다가가지 못한 채 우두커니 서 있자, 그 사이 이야기를 끝낸 윤아가 창현에게 다가온다. 그녀의 입가에는 미소가 한가득 맺혀 있었다.

윤아는 상큼발랄한 미소를 지은 채 창현에게 말한다.

“PD님 허락 맡았어, 창현아.”

도대체 무슨 계획이기에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일까. 팬들이라면 하악하악! 거릴 표정이지만 창현에게 있어서는 장난기 가득한 악동의 표정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약한 마음을 겉으로 드러낼 수 없는 법.

어떠한 경우에서라도 허장성세는 반드시 필요한 법이다.

침착한 표정을 한 창현이 윤아에게 말했다.

“무얼 허락 맡았다는 건지 이야기 해주시겠어요?”

창현은 마음을 굳게 먹으며 윤아에게 물었다.

그녀가 무슨 계획을 가지고 있건 간에 상관없다. 이야기를 들어보고 어렵다 싶으면 거절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선택권은 자신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자 창현은 마음이 한결 편안해지는 걸 느꼈다.

창현의 물음에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수연과 순규도 궁금함이 가득한 시선으로 윤아를 바라본다.

그 시선을 즐기듯 입가에 미소를 띤 채 윤아가 입을 열기 시작한다.

“내가 PD님에게 제안한 것은… 바로 현의 여장이야.”

꽈르르릉!

순간 창현은 머리에 천둥이 내려치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이게 무슨 어이없는 상황이란 말인가?

여장이라니? 지금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해서 하는 말이란 말인가.

창현은 그런 윤아의 말을 듣고는 격렬하게 반응하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여장이라니! 제가 그걸 할 거라고 생각합니까?”

격렬한 창현의 반응에도 불구하고 윤아의 안색은 변함이 없다. 오히려 그녀는 그런 창현의 반응을 즐기기라도 하듯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창현에게 묻는다.

“왜, 거절하려고?”

카메라가 꺼져 있기에 서슴없이 반말을 하는 윤아. 그 모습이 무척 으스스해보였다.

그런 윤아의 말에 창현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거 아니에요? 이미 누나들의 멋진 패션으로 방송 분량이 확보되었는데 제가 왜 여장을 해야 합니까? 전 싫어요. 절대 안 해요.”

창현은 촬영진 모두가 들으라는 듯 크게 소리쳤다. 그러자 촬영진 내에서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특히 움찔하며 아쉬워하는 PD의 모습을 창현은 똑똑히 목격할 수 있었다. 설마 기대한 것이란 말인가.

처음 본 창현의 이런 반응에 모두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수연이나 순규 또한 적잖게 당황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침착한 사람이 존재하였으니, 바로 윤아였다.

그녀는 평정심을 잃지 않은 채 평온한 얼굴로 창현에게 말한다.

“왜 싫은데?”

“누나가 남장하라고 하면 좋겠어요? 전 엄연한 남자라고요. 그런 취미는 절대 없습니다. 그러므로 반대에요. 무슨 말을 해도 절대 안할 겁니다.”

창현은 완강했다.

상상만 해도 오싹했다.

여장이라니. 살아오면서 이것을 할 기회가 올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도 해본 적이 없다.

상상만 해도 이 정도인데 실제로 하면 어쩌겠는가.

절대로 할 수 없다는 굳건한 의지가 창현을 휘감고 있었다.

당나라 30만 대군을 앞에 두고 성을 방어해낸 양만춘처럼 창현의 표정은 사뭇 비장하였다. 도저히 타협의 여지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그래도 할 수밖에 없을 걸?”

불길하기 짝이 없는 미소가 지금은 너무나 두려웠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기에 저렇게 자신감이 넘치는 것일까.

창현은 밑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며 윤아에게 물었다.

“왜 제가 할 수밖에 없는데요?”

창현의 질문.

그걸 기다린 것일까. 윤아는 씨익 웃음을 짓더니 창현에게 말한다.

“혹시 그거 알아? 만원의 행복이 끝날 때 창현이가 나한테 했던 말.”

뜬금없이 만원의 행복은 왜 언급하는 것일까.

창현은 고개를 갸웃하며 당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만원의 행복에서 제가 했던 말이라면…… 헉!”

그제야 윤아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떠오른 창현은 식은땀을 흘리며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서, 설마 이것을 노리고 있었을 줄이야.

“무엇인지 생각났나 보네.”

자신을 보며 함박웃음을 짓는 윤아에게 창현이 먼저 방어막을 친다.

“하, 하지만 분명히 그때 제가 말한 건 할 수 있는 범위 안이라고 했어요. 이건 할 수 없어요.”

“왜 할 수 없는데?”

“…….”

창현의 반박을 예상이라도 한 듯 곧장 흘러나온 윤아의 질문에 그는 할 말을 잃어야만 했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하기도 했지만 결정적으로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자신이 궁지에 몰린 것을 느끼며 창현은 그럴싸한 이유를 찾아내고는 윤아에게 말한다.

“마음에 내키지 않으니까요.”

순간 발견해낸 이유 치고 참으로 그럴 듯한 말이었다.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어떤 일이든 못하지 않겠는가?

찰나에 발견한 변명 치고 창현은 참으로 그럴 듯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창현은 상대를 잘못 만났다.

상대는 다름 아닌 윤아인 것이다. 그것도 창현의 철권 별명 상용화로 인해 독이 잔뜩 오른 상태였다.

당연히 순순히 물러설 리가 없다.

윤아는 그런 창현의 말에 생긋 웃음을 짓더니 친절하게 정리를 해준다.

“그럼 마음을 굳게 먹으면 되겠네.”

“하, 하지만 마음이 그렇게 쉽게 정리가 될 리가 없고… 무엇보다 제가 내키지가 않는 걸요.”

애써 반항을 해본다.

그런 창현의 반응에 윤아는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말한다.

“네가 말했었잖아? 들어줄 수 있는 거라면 들어주겠다고. 이건 몸만 가만히 있으면 되는 걸로 아는데? 필요한 건 굳센 마음이랄까?”

“크윽…….”

자신이 한 말을 그대로 기억한 채 말하는 윤아의 모습에 창현은 억눌린 신음을 흘린다.

그것이 항복 선언으로 들린 것일까.

윤아가 수연과 순규에게 시선을 주며 말한다.

“언니들, 도와주시겠어요? 이제부터 현 씨의 아름다운 여장이 시작될 테니까요.”

“알았어. 도와줄게.”

“물론이지! 내가 아주 세련되게 코디를 해주겠어!”

득의만만한 미소를 지은 채 달려드는 수연과 순규였다.

그녀들의 눈에는 ‘너 죽었어!’ 라는 눈빛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렇게 시작된 여장.

창현은 자신이 따뜻하게 보듬어(?)준 전력이 있는 수연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누, 누나. 도와주세요.”

애절한 창현의 눈빛을 받은 수연은 마음이 약해지는 걸 느꼈다.

하지만 아까 전 창현의 만행을 떠올린 그녀는 이내 제 안색을 회복했다.

허나, 자신에게 큰 도움을 준 창현을 망가뜨리는데 일조할 수 없었기에 그녀는 여장에 직접적인 참여를 하지 않는다.

팔짱을 낀 채 구경을 할 뿐.

그러나 그냥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묘하게 조언을 하는 게 아닌가?

한창 바비 인형 놀이에 빠진 순규와 윤아에게 다가간 수연이 예쁜 원피스를 보면서 중얼거린다.

“와 저거 참 예쁘네? 잘 어울리겠다.”

“…….”

누구에게 어울릴지는 말을 안해도 뻔했다.

혼내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미운 격이다.

파란만장한 여장은 끝났다.

여자 못지않은 각선미와 탁월한 비주얼을 자랑하던 창현은 세 소녀에 의해 예쁜 금발 미녀, 오피스 걸, 힙합 여전사로 변모해야 했다. 그리고 그것은 신이 난 촬영진에 의해 카메라로 촬영을 당해야만 했다.

바닥에 OTL로 쓰러진 창현이 세 소녀를 보며 절규를 토해낸다.

“두, 두고 보자! 언젠가 반드시 복수하겠어!”

“두고 보자는 사람은 하나도 무서울 게 없다는 말을 했던 게 누구더라?”

“…크, 크윽…….”

승리자의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는 순규의 모습에 철저하게 무너져내리는 창현이었다.

그렇게 소녀들을 발라버리던 창현은 역관광을 당하여 처참하게 침몰해야만 하였다.




제36장 어이없는 오해




치욕의 여장 사건을 끝으로 창현은 본격적인 앨범 마무리 작업에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창현의 이번 앨범 발매는 무척 빠른 시기에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정규 2집 앨범이라 할 수 있는 창현의 앨범이 미국에서 9월 달에 발매가 되었고, 정규 3집 앨범이 불과 세 달만에 나오게 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현의 팬들이 체감하기에는 무척 오래된 느낌이 들었다.

그동안 현이 발매한 앨범은 <Go&Stop>이 수록되어 있는 미니 앨범 1집과 정규 앨범 1집, 그리고 미국에서 발매한 네 장의 싱글 앨범이 끝이다. 현이 제작년 9월달에 미니 앨범으로 데뷔한 것을 감안하면 제법 꾸준한 활동을 한 셈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발매한 앨범은 작년에 발매한 정규 1집 앨범이 끝이었기에 한국에서의 공백기는 1년 7개월이란 시간이 존재하고 있었다.

창현은 정규 2집 앨범 발매를 준비하면서 한편으로 미국과 일본, 유럽에 앨범을 발매하기 위해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근래 들어 한국어를 포함하여 중국어와 일본어, 영어를 통달한 창현은 불어를 익히고 있는 상태였다. 불어와 스페인어, 포르투칼어 등 유럽 각지의 언어를 습득하여 미국과 유럽, 아시아를 넘어서 라틴 아메리카까지 진출을 꾀할 생각이었다.

물론 그것은 아직 시작 단계이지만 웅대한 포부가 있는 만큼 창현의 노력은 멈추지 않고 계속되고 있었다.

‘천의 매력 현玄’은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 때 Mnet에 방영되기로 결정이 되었다. 미리 편집본을 본 창현은 자신조차도 놀랄 만한 매력을 발산하는 여장 모습에 놀라야만 했다.

음향총서를 익히면서 뭐랄까, 남자다운 것보다는 아름다워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지만 여장이 저렇게 거부감 없이 이루어졌다는 것에 스스로도 놀랄 지경이었다.

“휴! 지난 일이니 어떻게든 되겠지. 하지만 다음에는 반드시 복수를 해주고 말겠어.”

창현은 자신의 여장에 앞장 선 세 악마를 떠올리며 이를 부득 갈았다. 자신이 먼저 한 방을 먹이기는 했지만 원래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 아닌가. 창현은 자신이 당한 것이 더욱 크게 느껴졌다.

팬 사이트인 다크 스타에 정규 2집 앨범 작업이 마무리 되어가고 있다고 하자 팬 사이트 자체가 들끓기 시작하였다. 미국으로 진출한 후 처음으로 한국에서 발매하는 앨범이었기에 팬들의 관심도는 그야 말로 하늘을 찌르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창현은 무척 바쁜 일정이 예약되어 있었다.

우선 정규 2집 앨범 재킷 촬영을 해야 했고, 음료 광고 대박 이후 밀려오는 CF제의로 인하여 미팅을 해야 했다.

뿐만 아니라 앨범 발매를 한 뒤 쇼케이스를 할 생각이었는데, 그것에 대해서도 계획을 세우느라 무척 바빴다.

단지 현이 앨범 발매를 앞에 두고 있음에도 AA엔터테인먼트 전체가 분주해질 정도였으니 말이다. 현의 행보 하나가 회사 전체를 바쁘게 만들 정도로 그의 인지도가 엄청나다는 것을 뜻했다.

“후아! 내일이면 되는 건가.”

오늘도 하나의 곡을 녹음한 창현이 기지개를 켠다.

내일이면 모든 녹음이 끝날 것 같다. 그럼 곧장 재킷 촬영을 하고, 뮤직비디오 제작과 앨범 제작에 착수하면 바쁜 나날이 시작될 것이다.

기지개를 키던 창현은 벨소리가 울리는 걸 듣고는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그리고는 전화한 상대를 보고는 머리를 긁적였다.

“이제부터 바빠질 텐데 그동안 많이 신경을 써주지 못했네.”

그러면서 핸드폰을 열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지영은 무척 난감했다.

자신의 잘난 오빠를 친구들에게 소개시켜준 직후, 친구들이 자꾸 오빠를 만나게 해달라고 조르고 있던 것이다.

“지영아, 우리 창현 오빠 한 번만 만나게 해주라. 예린아, 너도 만나고 싶지?”

평범한 중학생인 만큼 지영에게도 학교에서 친하게 지내는 두 명의 절친한 친구가 있다.

지금 이렇게 자신을 조르는 친구의 이름은 김아영으로, 167cm의 큰 키에 시원한 외모를 지녀 남자들과 여자들에게 무척 인기가 많은 친구였다.

“나도 만나고 싶긴 하지만… 우리가 이렇게 조르면 지영이도 난감하고 창현 오빠도 난감할 것 같은데…….”

아영이 말을 건 친구는 지영의 또 다른 절친한 친구로, 차예린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다. 160cm 정도 되는 키에 인형과도 같은 외모를 지니고 있다.

두 사람은 창현과 한 번 만남을 가진 적이 있다.

지영이 AA엔터테인먼트에 놀러가기로 한 날, 새로 생긴 오빠를 소개시켜달라는 두 친구의 성화에 이기지 못해 창현을 소개하고 만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지영의 실책이었다.

창현의 부탁대로 두 사람은 지영의 새 오빠에 대해 발설하지 않았지만 틈만 나면 창현과 만나게 해달라고 칭얼거렸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10대 여학생들이 가장 환호하는 인물이 바로 현이었다. 탁월한 비주얼과 도저히 끝을 알 수 없는 뛰어난 노래 실력은 연예인에게 환상을 가지고 있는 여학생들에게 상사병을 걸리게 하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2007년, 가장 많은 돈을 번 연예인 중에서 1위가 압도적인 차이로 현이 뽑혔다. 얼마나 많으면 추측이 불가능하다고 할 정도로 언급이 될 정도였다.

능력도 있고, 잘생겼고, 돈도 많은 현은 그야 말로 여학생들에게 있어 로망 그 자체였다.

아영과 예린도 지영과 함께 학교 내에서 귀엽고 예쁜 외모로 남학생들에게 인기를 얻고 있지만 그것과 현은 비교할 것이 되지 못했다. 그녀들도 한 사람의 평범한 소녀들이었으니 말이다.

특히 처음 현과 만났을 때 소녀들은 다정다감한 현의 성격에 매료된 상태였다.

“후! 알았어, 이것아. 오빠한테 한 번 전화해볼게.”

친구들의 성화에 지영은 마침내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처음 창현과 만남을 가진 직후 두 친구는 지영에게 조르고는 하였는데, 그도 그럴 것이 첫 만남 때 얼떨떨하기도 하고 어리둥절하기도 하여서 싸인을 받지 못한 것이다. 그랬기에 싸인을 구실로 다시 한 번 만나고 싶어 친구인 지영에게 협박 아닌 협박을 한 것이다. 물론 맨입으로 부탁하기 뭐하니 주번을 도와주거나 청소당번을 도와주는 행동으로 지영의 환심을 샀다.

그런 친구들의 지극정성에 감동(?)한 지영은 결국 시험이 끝난 뒤 창현에게 한 번 연락을 해보겠다고 이야기를 하였다.

그러자 아영과 예린은 좋아서 방방 뛰며 지영을 껴안기도 하고 볼에 뽀뽀를 하기도 하면서 수많은 시선을 집중시키기도 하였다.

“꺄아! 고마워, 지영아. 스피커 폰으로 전화하면 안 돼? 창현 오빠 목소리 듣고 싶다.”

지영의 말에 기쁨을 표현하던 아영이 부탁하자, 예린이 그런 아영을 타박한다.

“너는 못하는 말도 없어. 지영아, 그런데 창현 오빠 지금 한창 녹음 중이시라던데 바쁘지 않을까?”

80만에 육박하는 다크 스타 회원 중 20만 명이 넘는 숫자가 10대 여학생이다. 평소에는 무척 조용하고 내성적인 예린이지만 그녀는 현의 광팬으로, 다크 스타 정회원 중 한 사람이다. 그랬기에 현재 현이 한창 앨범 제작 중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상태였다. 괜히 자신들의 재촉으로 현에게 누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염려 섞인 예린의 말에 지영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한다.

“괜찮아. 아마 지금쯤이면 오빠가 점심 먹을 시간이거든. 그리고 생각났는데 오빠가 나 시험 끝나면 밥 사주겠다고 이야기 한 적 있어. 그걸로 부탁하면 될 것 같아.”

지영은 평범한 학생이지만 석규와 창현은 일이 무척 바빴기에 지영과 만날 기회가 많지 않았다. 그랬기에 석규는 종종 AA엔터테인먼트에 지영을 불러 라샤와 인사를 시켜주기도 하면서 친분을 키워나갔고, 창현 또한 종종 방과 후에 지영의 학교에 들려 함께 밥을 먹거나 하는 등 만남을 가지곤 하였다.

3학년은 일찍 기말고사를 치지만 아직 2학년인 지영은 이제야 12월 중순이 된 이제야 시험을 치고 있다. 중학교 기말고사는 4일 동안 시험을 보고, 현재 지영은 3일째 시험을 끝낸 상태였으니 내일 시험이 모두 끝난다.

내일 시험이 끝나니 창현에게 연락하여 시간이 되는지 묻고 친구들과 밥을 사달라고 할 생각이었다.

시험이 끝난 직후이고, 때마침 아영이 주번이어서 지영과 예린이 함께 하교를 하기 위해 청소를 돕기 위해 교실 에 남아있는 상태였다. 교실 문을 잠그고 출석부를 제출하는 것이 아영의 할 일이었기에 현재 교실에 남은 것은 세 사람뿐이었다.

지영은 핸드폰을 꺼내 스피커 모드로 전환한 뒤 창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가 흘러나오더니, 잠시 후, 통화가 연결되는 소리와 함께 창현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여보세요?

익숙한 창현의 목소리에 지영은 절로 미소를 짓는다. 반가운 마음에 활기찬 목소리로 대답한다.

“오빠, 나 지영이!”

-그래, 지영아. 무슨 일로 전화한 거야?

“오빠가 잘 지내고 있나 궁금해서 전화했지. 녹음은 잘 되고 있어?”

우선 속내를 숨기고 창현의 근황을 묻는 지영이었다. 일단 괜찮다는 말이 나와야 뭘 해달라는지 말라든지 말을 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런 지영의 말에 창현은 흔쾌히 대답한다.

-당연히 잘 되고 있지. 순조롭게 녹음이 되고 있어서 내일쯤이면 다 끝날 것 같아.

“그래? 축하해, 오빠!”

그렇게 말하면서 지영은 아영과 예린에게 시선을 주었다.

두 소녀는 그런 지영의 눈빛에 웃음을 짓더니, 작은 소리로 하나 둘 셋 하더니 인사를 한다.

“안녕하세요, 창현 오빠!”

갑작스런 인사에 순간 창현은 당황한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내 상황을 파악한 듯 지영에게 말한다.

-응? 뭐야, 지영이 너 친구들이랑 같이 있었던 거였어?

“응. 아영이가 주번이어서 같이 기다리고 있었거든.”

-친구란 게 좋네. 지영이 너도 친구 소중히 여겨. 오빠는 학교에 친구가 하나도 없어서 그렇게 해줄 친구도 없단다.

그렇게 말하는 창현의 어조가 조금 슬프게 느껴졌다.

지영은 본의가 아니지만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과 달리 오빠는 슈퍼스타이니 제대로 된 친구가 있을 확률이 극히 희박했던 것이다.

자신의 말이 창현을 자극했을 수 있다고 생각하자 지영은 괜히 미안해졌다.

“오빠, 미안…….”

-뭘, 별 것 아닌데, 뭐. 그나저나 무슨 일로 전화한 거야?

지영의 사과에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하는 창현이었다.

어둡지 않고 밝은 창현의 목소리를 들은 지영은 자신이 실수했다는 자책에서 벗어나 창현에게 전화를 건 목적을 꺼내놓았다.

“응, 오빠가 나 시험 끝나면 밥 사주겠다고 했잖아. 그래서 전화한 거야.”

지영의 말에 창현은 자신이 했던 말을 떠올리고는 생각에 잠겼다.

-시험이 내일 끝난다고? 조금 늦게 끝나네. 음 어디 보자… 지영아, 내일 몇 시에 끝나는데?

“시험 다 끝나면 12시쯤?”

참으로 애매한 시간이었다.

창현은 지영의 말을 듣고 고민했다. 내일 12시라면 조금 애매한 시간이다. 자신이 9시쯤에 AA엔터테인먼트로 나와 녹음을 하고 마무리 작업을 해야 할 시간이었으니 말이다.

다행히 오늘 스케줄이 없었기에 창현은 오후 휴식시간을 취소한 뒤 녹음을 속행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내일 오전에 최종 마무리 작업을 하면 되리라.

시간 계산을 마친 창현이 대답했다.

-알았어. 어찌어찌 하면 맞출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면 내가 몇시까지 학교에 가면 되는데?

잠깐 이어진 창현의 침묵과 맞출 수 있다는 말에 지영은 창현에게 일정이 있는데 무리하게 오는 것으로 들렸다.

“12시 30분까지 오면 될 것 같은데… 오빠, 나 때문에 무리하는 거 아니야?”

-하하, 내 개인 스케줄이라서 자율적으로 조정이 가능해. 12시 30분이라고? 그럼 그때까지 가도록 할게. 지영아, 둘이서는 심심할 테니 아영이랑 예린이도 데리고 오는 게 어때?

창현의 승낙이 떨어지자 아영이랑 예린이도 같이 가면 안 되냐고 말하려던 지영은 깜짝 놀란 표정을 한다. 그것은 아영과 예린도 마찬가지여서, 그녀들은 놀란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본다. 설마 창현이 자신들을 신경 써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한 눈치였다.

지영은 속으로 무척 기뻤지만 그 감정을 애써 숨긴 채 창현에게 말한다.

“나야 좋긴 하지만 괜찮겠어?”

-안 괜찮을 건 또 뭔데? 지영이 네 친구면 나한텐 동생이지 뭐. 부담가지지 말고 나오라고 해. 아, 혹시 시간이 안 된다고 하면 어쩔 수 없으니 무리하진 말고. 시간이 되면 나오라고 해. 알았지?

창현의 말을 듣고 있던 아영은 무리하지 말란 말에 버럭 외친다.

“저희 시간 많아요, 오빠!”

옆에 있던 예린도 질 수 없다는 듯 소리친다.

“저도 많아요! 내일 꼭 나갈게요.”

두 친구의 모습에 웃음을 지은 지영이 창현에게 말한다.

“히히, 그렇다는데?

-…스피커 모드였어? 난 그런 줄 몰랐는데.

“오빠, 고마워. 내일 애들 꼭 데리고 나갈게!”

창현이 스피커 모드인 걸 눈치 채자 지영은 서둘러 화제를 전환하였다.

지영은 자신의 친구들까지 배려해주는 창현이 너무나 멋있게 느껴지고 고마웠다. 정말 오빠 하나는 잘 뒀다는 자부심으로 어깨가 쭉 펴지고 자기도 모르게 의기양양해질 정도였다.

그런 지영의 말에 창현은 피식 소리를 흘리더니 말한다.

-그래, 알았다. 그럼 내일 보자, 지영아.

“응, 오빠. 내일 봐.”

그 말과 함께 통화가 끝났다.

통화를 끝낸 지영은 아영과 예린을 보면서 손으로 V를 그렸다.

“어때, 잘 됐지? 나에게 고맙게 여기도록!”

지영의 말에 아영이 코를 찡긋하며 말했다.

“너한테 고맙긴! 창현 오빠 완전 멋있다. 우리까지 배려해줄 줄은 몰랐어. 역시 월드 스타!”

“그러게. 역시 스타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닌가봐.”

옆에 서 있던 예린도 창현의 태도에 깊은 감명을 받은 듯 말한다.

“뭐야! 왜 내 공은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 건데?”

지영은 아영과 예린이 자신의 공을 인정해주지 않자 분한 표정을 지으며 두 사람에게 잔소리를 퍼부었다.

그에 아영이 김 빠진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에 비해 동생이란 것은…….”

예린이 옆에서 말을 이어주었다.

“세계 제일 잔소리 쟁이니 원…….”

“참 알 수 없는 가족 구도란 말이지.”

마지막 결정타를 먹이는 아영의 말에 지영이 눈썹을 꿈틀거리더니 성난 표정을 지었다.

“이씨! 너네 죽을래?”

“흥! 2대1이거든? 당하는 건 너야!”

숫자를 상당히 믿는 아영이었다. 하기야 지영보다 아영이 족히 5cm정도는 더 컸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런 아영의 말에 지영은 뿔난 표정을 지으면서 그대로 아영에게 달려들었다.

“오냐! 오늘 2대1 전설을 만들어주겠다!”

“꺄아! 어딜 만져! 예린아 헬프!”

“…당사자 일은 당사자들끼리 해결하도록.”

평범한 중학생들의 투닥거림이다.


“이거 지영이 덕분에 모처럼 타이트하게 일을 하게 생겼네.”

지영과 통화를 끝낸 창현은 오늘 내로 녹음을 끝낼 것을 생각하며 중얼거렸다.

타이트하게 움직이는 것도 결코 나쁘진 않다. 앞으로 무척 바쁜 나날이 이어질 것이기에 그에 대한 연습으로 삼으면 될 테니 말이다.

어차피 타이트하다고 해도 이제 막 점심시간이 지났을 뿐이고 아직 시간은 넉넉하게 남아있다. 결국 자신이 부지런히 녹음만 한다면 시간에 쫓길 일은 없다고 할 수 있다.

“지영이 덕분인가? 그래도 기분은 나쁘지 않네.”

원래 창현은 자신이 세워놓은 계획대로 움직이는 것을 좋아한다. 예정에 없는 변수란 존재를 무척 싫어하는 그로서는 오늘 일이 싫을 법도 하였지만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귀여운 여동생 때문에 일을 더 열심히 하게 되어서일까?

녹음을 하기 위해 부스로 들어서는 창현의 입가에 미소가 맺혀 있었다.

그렇게 녹음을 그날로 모두 끝마친 창현은 다음날 아침 일찍 AA엔터테인먼트로 와서 마지막 수정 작업을 한 뒤 최종 수정본을 석규에게 건넸다. 그리고 자신은 완전 무장을 한 채 지영의 중학교로 향했다.

빈둥빈둥 놀면서 어떻게 세희를 꼬실까 고민하는 로드 매니저 형을 구슬러 중학교 인근까지 차를 타고 온 창현은 평범한 중학생이 입을 법한 사복 차림에 털모자를 쓰고 목도리를 감아 눈을 제외한 모든 얼굴을 가렸다. 마침 한파가 들이닥친 시기였기에 이런 창현의 옷차림에 의문을 갖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시간을 확인하니 12시 25분이다. 약속시간에 일찍 도착해서 기다리는 창현치고는 다소 늦은 시간. 하지만 창현은 늦지 않은 것에 만족해야 했다. 오늘 수정 작업은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이었기에 자칫하면 약속시간에 늦을 것도 각오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한 3분 정도 기다렸을까.

날씨가 제법 춥다는 것을 몸으로 절실히 느끼고 있는 창현의 눈에 다른 여학생들보다 한층 더 예쁜 외모를 가진 세 여학생이 보였다.

바로 지영과 아영, 예린이었다. 평소에 장난식으로 학교에서 예쁜 축에 속한다고 자랑을 하더니 창현의 눈에 보기에도 정말 다른 여학생들보다 예쁘게 보였다.

시험이 끝나서 그런지 그녀들은 무척 밝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들은 창현을 보면서 그가 맞는지 아닌지 확신을 가지지 못한 채 힐끔힐끔 보면서 접근을 망설이고 있었다.

그 모습에 창현이 피식 웃음을 짓고는 먼저 다가가 말을 걸었다.

“뭘 그렇게 망설여. 궁금하면 와서 확 물어보면 되지.”

“오빠 맞아?”

지영이 확인하듯 묻자, 창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목에 감긴 목도리를 살짝 내려 얼굴을 보여주며 말한다.

“그럼 내가 오빠지 누구겠어. 오랜만이야, 지영아. 그리고 예린이랑 아영이도 오랜만이네.”

“와! 오빠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고작 한 살 차이밖에 안 나는데 왜 이렇게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동생들을 대하는 느낌일까.

창현은 자신이 애늙은이가 아닌가 싶어 무안한 마음에 볼을 긁적이며 말했다.

“그래, 그동안 잘 지냈고?”

“물론이죠. 저희는 건강 빼면 시체인걸요.”

“잘 지내고 있었어요. 오빠가 찍은 광고 봤는데 정말 대단하더라고요.”

예린의 말에 창현은 피식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하하, 그래? 음료수 광고 말하는 거지? 그거 내가 기획안 낸 건데 대단하다니 기분이 좋네. 하하!”

“흥! 대단해서 좋겠네요.”

자신은 쏙 빼놓고 친구들이랑 즐겁게 이야기 나누는 게 샘이 났는지 지영이 뾰족한 소리를 내며 타박을 준다.

그런 지영의 모습에 창현은 지영의 볼을 살짝 비벼주면서 말한다.

“뭘 그걸 가지고 질투를 하세요. 갓난아기도 아니고, 응?”

창현의 농도 짙은(?) 행동에 지영은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다.

“에… 그러니까…….”

말을 잇지 못하며 부끄러워하는 지영의 모습에 창현이 웃음을 지었다.

“쿡쿡! 지영이 아직 어린 애네. 이거 가지고 부끄러워하고.”

“어린애 아니거든! 그냥 오빠가 나 말고 애들이랑만 이야기 해서 샘이 좀 난 것뿐이야.”

“그랬어? 이거 미안해서 지영이랑만 이야기 해야겠네.”

그러면서 지영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창현이었다.

그 행동에 지영은 불퉁하던 표정을 풀며 웃음을 지었다.

“헤헤! 오빠는 이럴 때 보면 참 여자를 잘 다루는 것 같아. 정말 연애 한 번도 안해본 거 맞아? 숨기고 있는 과거가 있는 거 아냐?”

웃음을 짓던 지영이 갑자기 날카롭게 물어보자 창현이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지영아, 오빠랑 너랑 두 살 차이거든? 학년으론 일 년 차이고? 숨길 과거가 어디 있겠어.”

“그렇지? 그런데 난 오빠를 보면 무슨 고등학교 졸업한 사람 같이 느껴지더라고.”

그런 지영의 말에 창현이 피식 웃음을 지으며 지영의 머리를 계속 쓰다듬어준다. 머리를 쓰다듬어주니 마치 고양이처럼 갸르릉거리는 듯한 행동을 보인 것이다. 무슨 고양이를 쓰다듬고 있는 기분이다.

지영의 머리를 쓰다듬던 창현은 무언가 생각난 듯 지영에게 물었다.

“아참, 시험이 끝났다고 했지? 시험은 잘 봤어?”

“…….”

순간 아무 말도 못하는 지영. 미소를 짓던 얼굴은 굳었고, 몸도 빳빳해지며 힘이 들어갔다.

척 보니 시험을 망친 듯했다.

“…나 엄마한테 맞을지도 몰라, 오빠.”

요즘 기쁜 일이 너무 많다 보니 쓸데없이 들떠서 방방거리다가 공부를 못한 지영이었다.

그런 지영의 모습에 창현은 등을 토닥여주며 말했다.

“걱정 마, 지영아. 이 오빠가 어머니한테 잘 말씀드려줄게.”

창현의 말에 지영은 언제 어두웠던 표정을 지었냐는 듯 밝은 표정을 지으며 묻는다.

“정말?”

“응. 지영이 공부 소홀히 하고 있으니 좀 더 엄격하게 관리해달라고 말이야.”

“…오빠!”

버럭 소리를 지르고마는 지영이었다.

스스로의 행동에도 놀랐는지 깜짝 놀란 표정을 짓는 지영을 보며 웃음을 지은 창현이 아영과 예린에게 시선을 주며 말한다.

“자, 그럼 가도록 하자. 오늘 시험이 끝났으니까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

그 말과 함께 두 사람을 이끌고 가는 창현이었다.

“가, 같이 가!”

졸지에 혼자가 된 지영이 소리를 지르며 세 사람의 뒤를 따랐다.


네 사람은 먼저 큰길로 나왔다.

길을 걷던 창현의 눈에 아웃백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을 본 창현이 아웃백을 가리키며 말했다.

“우리 저기로 갈까?”

로드 매니저의 차를 타고 오기만 했지, 이 근방에 있는 먹을 곳을 잘 모르는 창현으로서는 가장 눈에 띄는 아웃백이 가장 무난하다고 여긴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십대가 그러하듯 아웃백 같은 곳을 무척 좋아한다.

창현의 말에 세 소녀가 동시에 대답한다. 아웃백이라면 몇 번 가보진 않았지만 무척 가보고 싶어하는 곳이다.

“네!”

“그래.”

소녀들의 대답을 들은 창현은 아웃백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 소년이 세 소녀와 함께 길을 걷는 모양새여서 주변 시선이 조금 눈에 걸리기는 했지만 창현은 애써 내색하지 않은 채 아웃백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4인 좌석을 안내받아 자리에 앉은 창현은 메뉴판을 소녀들에게 내밀며 말했다.

“자, 내가 사기로 했으니까 먹고 싶은 거 주문해. 다만 한 사람당 메뉴 한 개씩만 골라야 해. 많이 시켜놓고 음식을 남기는 건 좋지 않으니까.”

“네에!”

창현의 말을 들은 소녀들이 메뉴판을 보며 음식을 고르기 시작했다. 무척 고급스러운 느낌 때문인지 들뜬 표정이 역력했다.

메뉴를 고르는 모습을 웃으면서 지켜보던 창현은 의아함을 느껴야만 했다. 지영을 비롯한 아영과 예린이 도통 메뉴를 고를 생각을 하지 않고 있던 것이다.

창현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안 골라?”

그 물음에 아영이 머뭇거리면서 말했다.

“좀 비싼 거라서…….”

“뭔데, 그래?”

도대체 무엇을 골랐기에 비싸다고 하는지 궁금한 창현은 아영이 가리키는 것을 보았다. 스테이크를 먹으려는지 계속 그곳으로 시선이 가고 있는데, 학생이 지불하기에는 제법 비싼 금액이 적혀 있었다.

“하하…….”

창현은 메뉴판에 적힌 가격을 보고는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아영을 보면서 말했다.

“아영아, 나 이래 보여도 돈 많이 벌거든? 그렇다고 딱히 낭비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이 정도 사줄 능력은 충분히 돼. 그러니까 부담 갖지 말고 시켜. 지영이랑 예린이도 괜찮으니까 시켜. 이 정도는 충분히 넘치도록 사줄 수 있으니까.”

“히히! 고마워, 오빠.”

“감사합니다.”

그의 말에 부담감이 덜어졌는지 음식을 시키는 소녀들이었다.

창현도 치킨 샐러드를 골랐고, 곧장 주문을 하였다.

먼저 나온 빵과 음료수를 먹으면서 창현과 소녀들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야기의 화제는 당연히 연예인에 관련된 것이었다.

소녀들은 연예계에 무슨 궁금한 것이 그리도 많은 지, 창현에게 쉴 틈없이 질문을 하였다.

“그럼 오빠가 SM엔터테인먼트와 계약이 되어 있는 거예요?”

“그렇지. 프로듀서로 계약되어 있어.”

창현의 말에 소녀들이 눈을 반짝반짝 빛낸다. SM엔터테인먼트라면 십대 청소년들이 가장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이 다수 포진되어 있는 곳이 아니던가?

아니나 다를까, 아영의 입에서 창현이 예상했던 질문이 그대로 흘러 나온다.

“그럼 막 동방신기나 슈퍼주니어도 알고 있겠네요?”

“알지. 프로듀서니까 노래도 봐주고 그러거든.”

“와아! 대단해요! 실제로 성격 같은 건 어때요?”

아무래도 동경의 대상이다 보니 여러 가지 궁금한 점이 많은가 보다.

그 물음에 창현이 웃으면서 대답해주었다.

“성격은 나쁘지 않아. 노래도 잘하고.”

“에이! 대답이 너무 뻔하잖아요. 그런데 정말 그 가수들이랑 친하다고 하니까 오빠가 대단해보이네요.”

아영의 말에 창현은 순간 어이가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나도 나름 유명한 가수라고. 원래 대단하단 말씀.”

창현의 말에 아영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거야 그렇죠. TV속에서 오빠가 데뷔 무대를 가질 때 봤는데 정말 압도되는 느낌이었거든요. 외모도 외모지만 정말 노래 실력도 상상을 초월한다고 할까? 그런 느낌이 강했어요. 그리고…….”

말끝을 흐리며 말하기를 약간 꺼려하는 느낌에 창현이 그 부분을 짚어냈다.

“그리고……?”

“에… 조금 나쁘게 들릴 수도 있는데.”

그렇게 말을 할 거면 애초에 말을 하지 말던가.

창현은 아영이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해서 그녀의 대답을 독촉했다.

“괜찮아. 화내지 않을 테니까, 말해봐.”

그 말에 위안을 얻었는지 아영이 용기를 내서 말한다.

“TV속에서 오빠를 봤을 땐 굉장히 성격이 안 좋을 것 같았어요. 왠지 그런 거 있잖아요. 나이 차이는 얼마 나지 않는데 마치 나와는 차원이 다른 듯한 그런 느낌. 그걸 보니까 괜히 질투가 나더라고요. 그래서 오빠 성격을 겪어보지도 않았는데 무작정 성격이 안 좋을 거라고 생각했죠. 여기저기서 좋다좋다 해도 다 가면을 쓰고 컨셉대로 행동하는 거라고 생각했고요.”

“그래? 흐음…….”

아영의 말을 들은 창현은 속이 조금 불편한 걸 느꼈다. 아무래도 인기를 얻다 보면 악플에 시달리는 건 어쩔 수 없는 일. 창현 또한 적잖은 악플을 보았고, 그 악플 대부분이 지금 아영이 말한 것처럼 자신의 행동 같은 것이 모두 가식이라는 등의 말이었다.

창현의 안색이 조금 어두워지자 아영은 자신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수습하기 위해 재빨리 입을 열었다.

“하지만 실제로 만나보니까 정말 편안하고 좋은 분이더라고요. 예전에 그랬다는 거지, 지금은 그렇다는 게 아니에요.”

“하하, 그래 무슨 말인지 알았어. 잠시 생각할 게 있어서 그런 거니깐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마.”

자신이 너무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고 생각한 창현이 아영을 안심시켰다.

아영의 말로 인해 분위기가 잠시 가라앉았지만 음식이 나오고, 다시 대화의 물꼬가 터지자 편안한 분위기에서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주문을 할 때는 종업원 때문에 목도리를 풀지 않고 있던 창현이지만 음식이 나오자 목도리를 풀고는 안경을 써서 얼굴을 가렸다. 그리고는 지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살짝 얼굴을 돌려서 자신의 얼굴이 노출되지 않게 하였다.

그런 창현의 모습을 보면서 지영이 물었다.

“오빠, 그렇게 하면 많이 불편하지 않아?”

지영의 말에 창현이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연예인이 조금 불편한 편이긴 하지. 사생팬이라고 해도 당장 내가 살고 있는 곳에 많은 사람들이 오거든. 그렇다고 나를 좋아해주니 함부로 말하기도 힘들고 말이야. 하지만 이것도 인기의 한 종류라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져. 연예인을 하려면 이 정도는 각오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 그리고 나는 소속사 사장님이 아버지니까 비교적 연예인 중에서 자유로운 편이고. 굳이 불편하다고 불만을 토로할 입장이 못 되지.”

“그래도 많이 불편해 보여.”

아무래도 은연중에서 주변 사람들을 신경 쓰는 창현의 모습에 눈에 밟혔나보다.

창현은 자신을 걱정해주는 지영의 모습이 귀여워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다 내가 좋아서 하는 거니까 걱정은 마세요.”

그렇게 식사를 마친 그들은 계산을 한 뒤 아웃백을 나섰다.

아웃백에서 나온 뒤, 지영이 창현을 보며 물었다.

“오빠, 오늘 많이 바빠?”

지영의 물음에 창현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오늘은 바쁘지 않아. 대신 내일부터 무진장 바빠져. 앨범 뮤직비디오부터 시작해서 쇼 케이스도 해야 되고 여러 일들이 많거든.”

“쇼 케이스? 그거 언제 하는데?”

지영의 눈이 빛나고 있었다.

갑작스런 그녀의 물음에 창현은 얼떨떨한 얼굴로 대답했다.

“음, 글쎄? 잘은 모르겠지만 크리스마스 전에 할 것 같긴 한데, 왜?”

“그거 결정되면 나한테 좀 알려주면 안 돼? 얘네들이랑 같이 보러 갈게.”

지영의 말에 아영과 예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끼어들었다.

“네, 저희도 보고 싶어요.”

“저도요.”

“알았어. 주말로 결정되면 말해줄게. 대신 평일로 결정되면 안 돼. 알았지? 학교를 빼먹는 건 좋은 게 아니니까.”

“응, 알았어.”

창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지영이었다.

쇼케이스에 대해서 답을 받은 지영은 원래 목적으로 돌아와 창현을 졸랐다.

“오늘 바쁘지 않으면 우리랑 같이 놀자, 응?”

바쁘지 않다는 창현의 말을 들은 지영이 창현의 팔을 붙들며 말한다.

그에 창현이 웃음을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가 그럴 줄 알고 내가 시간을 비워놓은 거다. 자, 놀러 가보자.”

“와! 역시 오빠가 최고야.”

지영은 물론이고 아영과 예린도 뛸 듯이 기뻐하는 모습이었다.

하기야 그녀들이 언제 잘나가는 연예인과 이렇게 놀아볼 수 있겠는가.

그냥 연예인도 아니고 그야 말로 최고의 주가를 달리고 있는 현과 함께 말이다.

창현은 피식 웃음을 흘리고는 그녀들과 함께 걸음을 옮겼다.

이 근처에 스티커 사진기가 있다면서 기념으로 사진을 남겨야 한다는 지영의 주장 하에 말이다.

그렇게 지영과 함께 스티커 사진기에 도착한 창현은 기계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저게 스티커 사진기라고?”

“응. 이렇게 놀러왔으니까 기념으로 한 장 남겨야지. 안 그래?”

“하하! 그런가? 난 안 찍어봐서 잘 모르겠는데.”

데뷔 전에도 그렇고 데뷔 후에도 딱히 친구가 없던 창현은 스티커 사진을 찍어본 적이 없다. 하기야 남자들끼리 스티커 사진을 찍으러 오는 것도 이상하고 말이다. 그래서 처음 보는 스티커 사진기는 무척 신기하고 낯설었다.

“오빠는 그냥 내가 말하는대로만 하면 돼. 자, 그럼 찍자.”

그러면서 창현을 비어있는 스티커 사진기 안으로 밀어 넣은 지영은 아영과 예린을 끌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는 각종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기 시작하였다.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우꽝스러운 포즈로 사진이 찍혀 나왔고, 창현은 그것을 보며 무척 신기한 표정을 지었다.

“이거 재밌는데?”

“그치? 다른 것도 해보자, 오빠!”

확실한 물주(?)가 강림하셨기에 지영은 평소 해보지 못한 것들을 하고 싶어 창현을 졸랐다.

창현 또한 스티커 사진을 찍는 게 무척 재미가 있었기에 함께 스티커 사진을 계속해서 찍기 시작하였다. 밀폐된 공간이어서 얼굴을 마음껏 드러내도 아무 상관이 없었다.

각종 포즈와 재미있는 그림들과 함께 찍은 스티커 사진은 무척 재미가 있었다.

‘이거 진짜 재미있네.’

창현은 처음 찍는 스티커 사진의 매력을 발견한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뭐든지 새로운 경험은 낯설지만 두근거리고 즐거움을 동반한다. 이런 감정은 마음 속에 차곡차곡 쌓여 자신의 재산이 되고 그런다.

물론 그것과는 별개로 스티커 사진을 찍는 건 무척 재미가 있었지만 말이다.

다 함께 찍기도 하고, 지영과 단둘이서 찍기도 하고, 혼자서 찍기도 하면서 약 한 시간가량을 스티커 사진기에서 보낸 창현은 노래방을 가자는 지영의 말에 아쉬움(?)을 접어두고 인근 노래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노래방으로 들어선 지영과 아영, 예린은 물 만난 물고기처럼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창현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리면서 계산을 하고는 음료수를 들고 방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창현의 눈에는 노래를 선곡하느라 바쁜 소녀들의 모습에 눈에 들어왔다.

창현은 탁자 위에 음료수를 올려놓으면서 지영에게 말했다.

“노래방 엄청 오랜만에 온 것처럼 행동하네. 그렇게 오고 싶었어?”

창현의 물음에 지영이 크게 고개를 끄덕인다.

“응! 중간고사 끝나고 한 번 간 게 끝이거든. 하! 노래방 정말 오고 싶었어.”

마이크를 잡으며 황홀한 표정을 짓는 지영의 모습에 창현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진짜 노래방 오고 싶었나 보네. 그런데 왜 안온 거야? 용돈으로 올 수 있잖아.”

“그렇긴 한데 저번에 노래방에서 놀다가 집에 너무 늦게 들어가서 엄마가 못 가게 하거든…….”

아무래도 서비스 시간을 받아서 정신없이 놀다가 집에 늦게 들어가서 혼난 듯했다.

창현은 풀 죽은 지영의 모습에 웃음을 지으면서 물었다.

“그런데 오늘은 왜 온 거야?”

그 물음에 지영이 환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한다.

“헤헤! 그야 오빠가 있잖아? 엄마한테 오빠랑 같이 놀았다고 하면 되지.”

“허… 날 방패로 사용하겠다고?”

창현은 순간 어이가 없어 아무 말도 못했다.

이 영악한 것이 자신을 방패로 사용할 생각을 할 줄이야.

어이없는 표정을 짓는 창현의 모습에 지영이 웃음을 지으며 양손을 모아 비는 시늉을 하였다.

“용서해줘. 꼭 오고 싶었단 말이야.”

“그래그래. 이해한다.”

중학생, 특히 여자 중학생들에게 있어 노래방은 시험 직후 반드시 오는 곳이 아닌가! 아마 지영은 그동안 노래방에 오지 못해서 많이 괴로웠을 것이다.

엄마 말쯤이야 어기면 된다고 생각할 사람이 많지만 지선이 자신을 뒷바라지하느라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알고 있었기에 지영은 지선의 말을 절대 거역하지 못한다.

하지만 오늘 만큼은 제외. 자신이 지선의 말에 껌뻑 죽는다면 지선은 창현의 말에 껌뻑 죽는다. 즉, 자신의 잘못이 창현의 존재로 인해 상쇄가 된다는 뜻!

모처럼 기회를 잡은 지영은 거칠 게 없었다.

그렇게 노래를 선곡한 소녀들은 노래를 하기 시작했다.

첫 스타트는 지영이 끊었고, 창현은 음료수를 마시면서 노래를 듣기 시작한다.

노래를 들으면서 창현은 눈을 빛냈다.

‘지영이 노래 잘하는데?’

창현 정도 수준에 이르면 상대방이 노래를 부르는 것만으로도 상대방이 지닌 재능과 연습 수준 같은 것들을 단번에 꿰뚫어볼 수 있다.

그가 본 지영의 재능은 상당했다. 보아하니 갈고 닦으면 매력적으로 변할 수 있는 보이스를 지니고 있었고, 수많은 노래를 하는 것이 아닌, 몇가지 노래를 중점적으로 연습하여 그 노래를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든 듯한 것이 눈에 보였다. 이런 사람들은 노래를 할 때 감정이입을 잘 시킨다는 장점이 있다.

노래에 감정이입을 할 수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 훌륭한 재능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탑 클래스 수준인 창현에게 있어 미흡한 면이 많이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대체로 지영의 수준은 무척 훌륭하다고 할 수 있다.

지영의 노래가 끝나자 이번에는 아영이 노래를 불렀다. 아영은 지영에 비해 감정이입 면에서 부족한 듯했지만 고음을 무척 잘 올렸다. 고음을 잘 올릴 경우 잘 부른다고 칭찬해주는 한국적 시각에서 볼 때 아영 또한 노래를 무척 잘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은 예린.

뭐랄까, 인형 같고 도도하다는 느낌이 드는 예린이 부른 것은 놀랍게도 랩이었다. 그것도 원곡과는 상당히 다른, 그녀만의 스타일로 랩을 하는데, 창현은 그것을 듣는 순간 어이가 없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스타일을 찾는다는 것은 그만큼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미숙한 점이 많았지만 자신의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훌륭했다.

뭐랄까, 각각의 개성이 뚜렷한 모습이 마치 라샤와 비슷해서 창현은 욕심이 나는 걸 느꼈다.

‘가수를 시켜볼까?’

세 소녀가 정신없이 노래를 부르는 것을 감상하며 창현은 이런저런 평가를 내리면서 어느새 프로듀서의 입장에서 소녀들을 평가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내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깨닫고는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조금 생각이 앞서 나갔던 것이다.

당장 지영과 아영, 예린 정도로 부르는 사람들은 많다. 그녀들만큼 재능을 지닌 사람들도 많고 말이다. 창현이 그런 그녀들에게 가수를 시켜볼까라고 생각한 것은 솔직히 잘 모르겠다. 인간적으로 괜찮다고 생각해서 그런 것일까?

철저한 트레이닝을 거치면 능히 실력파 가수급으로 성장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이 함께하고 있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창현이 그렇게 상념에서 벗어날 때, 노래를 끝낸 지영이 창현을 톡톡 건드렸다.

“응?”

상념에서 깨어난 창현이 옆을 보니 지영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창현이 왜? 하는 표정으로 지영을 바라보니, 지영이 창현에게 마이크를 내밀었다.

“노래방에 왔으면 노래를 해야지! 오빠가 노래 하는 거 보고 싶은데 불러주라.”

“내가? 음, 뭐 나쁘지 않겠지.”

그러면서 창현이 마이크를 받아들었다.

그때, 지영이 창현에게 말했다.

“오빠, 그냥 부르면 재미없으니까 우리가 원하는 곡 불러주면 안 돼?”

“너희가 원하는 거?”

“응!”

고개를 끄덕이는 지영의 모습을 보면서 창현은 구미가 당기는 걸 느꼈다. 어차피 노래야 녹음실에서 질리도록 부르니까, 이런 식으로 부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생각은 창현의 표정으로, 말로 그대로 투영되었다.

“재미있겠는데?”

“그치?”

창현의 대답을 기다리던 지영은 창현이 승낙을 하자 밝은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나야 상관없어. 하지만 내가 아는 곡으로 해줘야 하는 거 알지?”

“물론이지! 아참, 이거 녹음도 되는데 녹음 해도 돼?”

때마침 노래방 기기가 금영이라서 녹음 기능이 있었다.

지영의 물음에 창현은 상관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기능 중 하나니까 상관없겠지. 그런데 내가 부른 걸 갖고 싶어?”

“물론이죠! 다른 사람도 아닌 최고의 가수 현이 부른 건데요!”

조용히 있던 예린이 끼어들며 소리치자 창현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구나. 그래, 뭐 있는 기능이니까 상관없겠지. 그럼 뭐부터 부를까?”

“제가 먼저 선곡할게요!”

예린이 먼저 나서서 선곡한 곳은 바로 이은미의 ‘애인 있어요.’ 였다. 여자 노래인 것도 그렇지만 남자가 부르기에는 상당히 부담되는 곡이었다.

창현은 예린을 보면서 웃음을 지었다.

“하하! 예린아? 이거 꽤 어려운 곡인데 아주 망설임이 없네.”

“오빠라면 이 정도는 식은 죽 먹기잖아요. 호호!”

“끄응! 왠지 당한 느낌인데?”

웃음을 짓는 예린의 모습에 창현은 피식 웃음을 지으며 마이크를 들고 노래를 시작한다.

폭풍과도 같은 노래.

그것은 창현을 수식하는 단어였다.

매끄럽게 올라가는 고음과 절묘하게 꺾이는 음은 일자무식 생초보가 들어도 입을 떡 벌릴 만큼 엄청난 실력을 담아내고 있었다.

창현의 노래를 들으면서 노래를 선곡했던 예린은 물론 지영과 아영도 입을 떡 벌리고 있다.

그녀들도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고, 스스로가 어느 정도 실력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창현의 실력이 얼마나 대단한 지 알 수 있었다. 아니, 적어도 그녀들이 아는 선에서 창현의 실력을 측정하고 판단할 수 없다고 느꼈다. 그 정도로 창현의 실력은 대단했던 것이다.

“휴우!”

노래를 끝낸 창현이 가볍게 숨을 몰아쉬면서 미소를 짓는다. 그러자 멍하니 창현을 바라보던 예린이 극찬을 아끼지 않으면서 창현의 노래를 자신의 미니 홈피로 보내놓는다.

그런 창현의 모습을 보면서 지영과 아영이 달려들어 창현에게 노래를 불러달라고 한다.

지켜봐주는 관중들의 반응도 즐겁지만 뭐랄까, 자신 또래의 소녀들이 열광하며 자신에게 노래를 해달라는 모습도 나쁘지 않았다.

창현은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그녀들이 부탁하는 노래들을 불러준다.

미리 무대를 체험한 것 같다고 할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함께 노래도 부르고 선곡하는 노래도 부르면서 창현은 즐겁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즐겁게 하루를 보낸 창현은 택시를 타고 한 명씩 모두 바래다 준 뒤 자신의 집으로 귀가하였다. 그리고 모처럼 TV를 보면서 편안한 시간을 만끽 한 뒤 하루를 보내고 다음 날 AA엔터테인먼트로 향했다.

회사 안으로 들어서자 창현은 곧장 석규의 호출을 받아야 했다.

무슨 일이 있나? 싶어서 사장실에 들어선 창현은 심각한 석규의 표정을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을 불러놓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석규의 모습에 창현은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한 채 먼저 물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창현의 물음에 석규는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지은 채 창현을 바라보았다.

“허, 아무 것도 모르는 거냐?”

“뭐가요?”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을 짓는 창현의 모습에 석규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말했다.

“사건이 터졌다. 그것도 너랑 관련된 걸로. 도대체 어떻게 행동하고 다녔기에 일이 터지는 거냐?”

“에?”

뜬금없는 석규의 말에 창현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터진 것이란 말인가.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이었다.

그 모습에 석규는 머리가 아파오는 듯 컴퓨터 모니터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걸 보고 말해라.”

평소에는 회사 기밀 때문이라면서 보여주지 않던 석규가 컴퓨터에 앉으라는 눈짓을 하자 창현은 의자에 앉아 컴퓨터를 살피기 시작한다.

마침 석규가 보고 있던 것은 인터넷 뉴스 기사인 듯, 익숙한 광경이 창현의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인터넷 기사들을 확인하는 순간, 창현의 입에서 황당함이 가득한 말이 흘러 나왔다.

“허어…….”

정말 어이가 없어서 창현은 한동안 아무 말도 못할 정도였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얼떨떨한 안색을 지우지 못한 채 창현이 석규를 바라보자, 시선을 받은 석규가 창현에게 말한다.

“도대체 뭘 하고 다녔기에 저런 일이 일어난 거냐? 이야기나 들어보자.”

창현이 본 기사 내용은 간단하지만 매우 심각한 내용을 담아내고 있었다.

인터넷 기사란을 도배하고 있는 내용은 다름 아닌 자신과 연관된 내용으로 가득했던 것이다.

온통 ‘현, 일반 여학생과 교제 중?’부터 시작하여 온갖 자극적인 제목이 가득하였다.

기사의 내용은 이러했다.

어떤 경로로 인하여 현이 부른 일반 곡들의 음원이 유출되었다는 것.

뿐만 아니라 현과 함께 찍은 스티커 사진도 유출되어 있다고 하면서 친절하게 스티커 사진을 찍은 것도 자료 사진으로 첨부가 되어 있었다.

창현은 서둘러 기사란을 훑어보았다.

베스트란도 온통 자신의 것과 관련이 되어 있었고, 대부분이 자신이 부른 것으로 추측되는 노래와 스티커 사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하아…….”

머리가 지끈거렸다.

설마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이야.

사태를 보아 하니 지영 혹은 아영이나 예린이 중에 일을 저지른 듯했다.

비록 중학생이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주의를 줘서 말을 들을 줄 알았는데 그것은 창현의 착각이었나 보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창현은 석규에게 말했다.

“그저께 지영이가 시험이 끝났다고 저한테 전화를 했어요. 그래서 밥을 사주기로 했거든요.”

“들었다. 그것 때문에 녹음을 끝마치지 않았더냐?”

창현의 이야기는 석규도 알고 있는 바였다. 그것 때문에 석규에게 사정을 말하고 녹음을 일찍 끝마치지 않았던가?

녹음을 일찍 마무리하는 것은 앨범 발매에 좋은 현상이었기에 석규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오히려 피가 섞이지 않은 지영을 알아서 챙겨주니 흐뭇한 마음이 들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바로 다음 날 사건이 터진 것이다.

어느 정도 석규가 사정을 알고 있었기에 창현은 곧장 본론을 설명하였다.

“그런데 지영이가 학교에서 친하게 지내는 두 친구가 있거든요. 저번에 지영이를 여기로 데려오면서 함께 있기에 부득이하게 같이 데려오면서 제 정체를 알게 되었고요. 지영이랑 통화를 하는데 친구들도 옆에 있다고 해서 제가 같이 데려오라고 해서 점심을 먹었어요. 그리고 스티커 사진을 찍고 싶다고 해서 같이 찍었고요. 이건 제 생각이 짧았네요.”

외부로 유출될 수 있다고 생각은 했지만 창현이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던 것은 기본적으로 지영과 아영, 예린을 믿고 있었기에 잠자코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언급을 하여 답을 받기도 하고 말이다.

창현의 말을 들으며 석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계적인 인지도를 가짐과 동시에 창현은 청소년들에게 있어 아이돌적인 존재라 할 수 있다. 다만 그 실력과 인지도는 기존의 아이돌과 비교를 거부할 정도였지만 말이다.

다른 기획사에서는 아이돌의 이러한 신비함을 부각시키기 위해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만들어나가고, 한편으로는 불필요한 기사거리를 제공하지 않기 위해 사생활을 강력하게 통제한다.

창현 정도의 레벨이라면 자유도가 높아야 한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가 지닌 상품성을 생각하면 아이돌 같은 이미지는 쉽게 버릴 만한 성질이 아니었다. 당장 노래를 제외하고 그 이미지만으로도 각종 부가 사업이 무궁무진하게 가능하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석규가 그런 창현의 사생활을 통제하지 않는 것은 그 스스로가 자신을 잘 다스릴 뿐만 아니라, 행동 자체가 이슈거리를 만들어내지 않는다. 늘 모범적인 행동을 보이는 창현의 행동을 믿고 있었기에 석규는 창현의 생활을 통제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장 창현이 자신의 위치를 어느 정도 자각하고 있는 편이기에 사소한 몇몇 실수들을 제외하면 대체적으로 잘 해왔다고 할 수 있다.

석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같이 찍은 건 그렇다 치자. 노래를 부른 건 뭐냐?”

스티커 사진도 사진이지만 심각하게 부각되고 있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창현이 부른 노래였다.

방송 활동을 하긴 하지만 활발하게 하는 편이 아닌 창현이었기에 팬들은 그의 라이브를 무척이나 듣고 싶어 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만의 곡이 아닌, 기존의 다른 곡들을 어떻게 부르는가도 궁금해 하였다. 천의 목소리, 천상의 목소리 등 수많은 타이틀을 보유하고 있는 창현이 과연 다른 노래를 부르면 어떻게 느껴질지 팬들은 궁금해 하고 있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창현이 노래를 부르게 되었고, 그 음원이 유출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아직 무슨 음원이 유출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방금 전 기사에서 유출되었다는 이야기를 본 창현은 석규의 물음에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같이 노래방을 갔는데 제 노래를 녹음하고 싶다고 해서 해줬거든요. 개인 소장을 하고 싶다고 하기에. 그런데 그게 문제가 터졌네요.”

말을 하는 창현도 머리가 복잡하기는 매한가지였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터진 걸까.

마음 한편으로 배신감이 들면서 이번 일이 얼마나 심각 해졌는가 알아보기 위해 창현은 인터넷 기사에 몰입하는 한편 팬 사이트인 다크 스타에도 접속을 하였다.

다크 스타에도 난리가 난 상태였다. 처음 음원 유출이 된 곳이 다름 아닌 다크 스타였던 것이다.

유출된 스티커 사진은 넷이서 찍은 것이었고, 놀라울 정도로 빠른 정보의 전달로 인하여 창현을 제외한 세 사람의 간략한 정보가 벌써 공개된 상황이었다.

그걸 확인한 창현은 곧장 게시글을 작성하려다가 멈칫했다.

지금 이 사태를 완화시키기 위해서는 자신과 지영이 남매 사이라는 것을 밝혀야 하는데 자신과 지영은 성이 다르다. 자신은 강씨라면 지영은 최씨였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남매 사이라고 하면 누구도 믿지 않을 것이다.

그리 되면 석규의 재혼 사실을 밝혀야 하는데 그건 자신의 소관이 아닌 것이다.

창현이 난감한 표정으로 석규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버지, 이거 어떻게 하죠.”

“…….”

창현이 말하는 것이 무슨 뜻인지 석규가 모를 리 없다.

아마 자신을 생각하니 차마 뭐라고 말을 할 수가 없었으리라.

재혼을 한다는 것이 특별히 나쁠 것은 없지만 당사자들의 입장에서, 그리고 제3자들이 바라보는 시선이 마냥 곱지만은 않을 것이다. 특히나 이 사실이 다른 형태로 보도가 된다면 사람들은 석규가 아닌 석규와 결혼하는 지선을 비난할 수도 있다. AA엔터테인먼트의 사장인 석규는 엄청난 돈을 벌어들이는 회사의 사장이었으니 말이다. 뿐만 아니라 상장해놓은 주식은 엄청난 가치로 뛰고 있어서 새로운 주식 부자로 떠오르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에 반해 지선은 내세울 것 없는, 하루를 근근이 살아가는 평범한 중년 여성에 불과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네티즌들이 이유 없이 욕하기에 그럴 듯한 이야기 소재임이 분명했다.

창현의 시선을 받은 석규는 약간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라. 공식적으로 발표하기로 했으니까. 이미 지선이한테도 이야기를 해놓은 상태다. 다행히도 지선이가 인터넷을 하지 않는다기에 상처를 받을 일이 없을 것 같다.”

“그럼 게시글은 어떻게 하죠?”

“우선은 무반응으로 대응하는 것이 낫다. 네가 나선다고 해서 사태가 수그러들 것 같지도 않으니까. 내일 발표를 하면서 네가 같이 나선다면 어느 정도 진화가 될 것 같다. 네가 할 일은 어디서부터 유출이 되었는가를 파악하는 거다.”

“알겠습니다.”

석규가 말하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차린 창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장 음원이 유출된 발상지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게시글을 검색해보니, 기존의 게시글과 무려 천여 배 클릭 숫자가 차이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리플도 무려 삼만 여개가 달려 있었다.

한눈에 보아도 자신이 불렀다는 걸 뜻하는 제목과 클릭 숫자, 리플 숫자가 아닐 수 없다.

게시글을 클릭한 창현은 누구 때문에 일이 발생한 것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올려진 음원은 다름 아닌 ‘애인 있어요.’ 란 곡이었던 것이다.

이 곡은 창현이 예린에게 보내준 곡이다.

즉, 이 모든 일은 예린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뜻.

창현은 곧장 핸드폰으로 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통화중이다. 이미 인터넷에 신상이 공개되어서 그런지 핸드폰이 폭주하고 있나보다.

그에 창현은 지선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러자 무난한 연결음과 함께 통화가 연결되자 창현이 곧장 말했다.

“어머니, 저 창현입니다. 지영이한테 할 말이 있어서 그러니 좀 바꿔주시겠어요?”

-일이 벌어졌다는 걸 느끼고 있지만 정말 심각하더구나. 잠시만 기다리렴. 지영이 바꿔줄 테니.

그 말과 함께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지선과 지영이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잠시 후 지영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오빠?

“여보세요? 그래, 지영아, 오빠야.”

지영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창현은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이 연락하기 전까지 무척 심적 고생이 심한 것을 말이다.

창현은 지영을 향해 물었다.

“지영아, 괜찮아? 무슨 일 없고?”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물었다.

하지만 그것은 창현의 바람에 불과한 듯, 지영이 울먹이면서 말하기 시작한다.

-막 친구들한테 전화오고… 심지어 집까지 찾아오는 사람이 있어. 어떻게 하지, 오빠? 흑…….

지영은 자신이 이런 처지에 놓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녀에게 있어 창현은 그야 말로 슈퍼스타인 오빠였다.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 보는 그런 슈퍼스타.

그런 창현은 지영에게 있어서 자랑의 대상이었고,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랬기에 창현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동경해오던 스타가 어느 날 자신의 오빠가 되고, 함께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는데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하지만 무슨 일이든 간에 반대급부가 존재한다는 것을 그녀는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석규와 지선이 결합하지 않은 지금 상황에서 창현과 지영은 법적으로 엄연한 남남이었다. 남들 시선도 그러했고 말이다.

그러나 창현이나, 지영 둘 모두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고, 창현은 지영을 귀여운 동생으로, 지영은 창현을 자랑스러운 오빠로서 생각하고 있었다. 타인의 시선이나 법적으로 남남일지 모르나 두 사람은 서로를 남매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던 차에 일이 터졌다.

지영은 창현과 함께 스티커 사진을 찍은 것만으로 일이 이렇게 일파만파 커질 줄은 몰랐다.

이따금 전해지는 극성팬들의 이야기는 지영에게 있어서 남 이야기에 지나지 않았다. 결코 자신에게 일어날 일이라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허나, 그런 일은 지영에게도 발생하였다.

자고 일어나니 세상에 변해있다는 말이 있다.

창현과 워낙 즐겁게 논 탓에 집으로 돌아와 컴퓨터를 하며 하루를 보낸 지영은 다음 날 일어나면서 기겁하였다.

부재중 통화와 부재중 메시지가 산더미처럼 쌓여있던 것이다.

대부분의 메시지가 인터넷을 보라는 말.

인터넷을 확인하는 순간 지영의 얼굴은 백짓장처럼 새하얗게 변하였다.

자신과 창현이 찍은 스티커 사진이 인터넷에 떡하니 올려져 있는 것이 아닌가?

뿐만 아니라 어제 노래방에서 창현이 불러준 노래가 인터넷에 급속도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기겁한 지영은 지금 이 일이 아영 혹은 예린으로 인해 일어난 것이라 생각하다가 예린이라고 생각을 굳혔다. 인터넷에 올라온 ‘애인 있어요.’는 창현이 부르고, 예린에게 보낸 파일이었던 것이다.

지영은 예린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핸드폰이 꺼져 있어 통화가 연결되지 않았다. 자신의 핸드폰도 불통인 만큼 예린의 핸드폰도 그럴 것이라 생각한 지영은 답답한 마음으로 집에 있어야만 했다.

학교를 가고 싶었지만 갈 수가 없었다. 아침만 해도 집밖에 사람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몇몇 사람들은 지영의 집밖까지 와서 두들기며 욕을 퍼붓기도 하였다.

지선이 경비실에 연락을 한 탓에 문앞까지 오는 사람은 없었지만 베란다에서 내려다보면 아파트 정문에 사람들이 포진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결국 학교 가는 것을 포기한 채 창현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석규와 통화를 한 지선이 괜찮다고, 곧 가라앉을 것이라고 위로를 했지만 아직 어린 지영에게 있어서 이번 일은 쉽게 진정 시킬 수 없는 성질의 일이었다.

그러다가 창현에게서 전화가 온 것이고, 이렇게 통화가 이어진 것이다.

창현은 지영이 울먹이자 자신이 너무 부주의했다고 생각하면서 그녀를 위로하였다.

“지영아, 우선 진정해. 그렇게 큰 일이 아니니까. 응? 아버지랑 오빠가 지금 수습하려고 하니까 진정해.”

-으응…….

다른 사람에게 듣는 것과 당사자에게 듣는 것은 상당한 차이가 있다.

지선이 이미 앞서 말했지만 창현이 직접 말해주자 지영은 마음이 한결 진정되는 것이 느껴졌다. 슈퍼스타인 창현이 거짓말을 할 리가 없지 않겠는가. 그녀는 창현을 그만큼 믿고 있었다.

지영의 숨소리가 한결 고르게 변하자 창현은 본격적인 용건을 꺼냈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까 아무래도 스티커 사진 유출이나 노래 유출로 보아 예린이로 인해서 일이 벌어진 것 같은데 이야기는 해봤어?”

-아니… 나도 인터넷 검색을 해보고 예린이한테 전화를 했지만 받지를 않았어. 핸드폰이 꺼져 있었거든…….

“그래? 그렇구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어봤지만 역시나 통화가 되지 않았나보다.

창현이 난감한 목소리를 흘리자 지영이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입을 연다.

-예린이 핸드폰은 안 되지만 예린이 어머니 핸드폰은 알고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던 창현의 귀에 번뜩이는 소리가 아닐 수 없었다.

창현은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을 느끼며 지영에게 물었다.

“정말?”

-응. 생각해보니까 알고 있었어.

창현의 위로가 주효한 듯 지영의 목소리는 상당히 밝아져 있었다.

그것이 창현에게도 느껴졌기에 살짝 미소를 지으며 대답할 수 있었다.

“그래. 잘 됐네. 그럼 나한테 그걸 알려주지 않을래? 아무래도 예린이로 인해서 일이 벌어진 것 같으니 예린이랑 통화를 해봐야 할 것 같거든.”

-오빠, 설마 예린이 혼내려고 그러는 거야?

창현의 말에서 심상치 않은 것을 느꼈기 때문일까?

그에게 묻는 지영의 목소리가 떨려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사태로 예민한 지영의 귀에 들리길 이번 일의 책임을 예린에게 묻는 것으로 들렸던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지영의 입장에서 겁이 덜컥 날 수밖에 없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이번 일로 인해 두려워하던 자신이 위안을 얻었는데 창현의 말이 예린에게 책임을 묻겠다는 식으로 들리니, 마치 자신은 창현의 동생이라서 빠져 나가고 예린이는 남이라서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식으로 느껴졌던 것이다.

잘못은 예린이가 했지만 마음씨가 착한 지영은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 스티커 사진을 같이 찍고 노래방을 같이 가지 않았더라면 이번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

두려움이 담긴 지영의 목소리에 창현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지영의 말처럼 어떻게 행동을 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던 것이다.

만약 예린이 고의적으로 음원을 유포하고 스티커 사진 찍은 것을 퍼뜨렸다면 책임을 묻는 것이 옳다.

하지만 그럴 확률은 극히 적다고 생각하고 있다.

인터넷을 돌아다니면서 살펴본 결과 대충 어떤 식으로 일이 벌어진 것인지 예측하고 있는 창현이었기에 그는 지영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달했다.

“지영아, 일단 예린이랑 이야기를 해봐야 할 것 같아. 확실한 건 예린이 입으로 들어야 할 것 같거든. 그러니까 불안해 하지 말고 집에 있어. 알았지? 오빠 믿지, 지영아?”

-믿지, 당연히… 알았어, 오빠. 내가 문자로 예린이 어머님 번호 찍어줄게.

말을 하면서 지영에게 믿음을 강요하는 게 아닐까 싶어 걱정을 했는데 다행이 지영이 이해를 해주는 눈치였다.

창현은 그런 지영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그래, 고맙다.”

그 말과 함께 통화가 끝났다.

가볍게 숨을 몰아쉬며 창현은 석규를 바라보았다.

다른 일이라면 창현 혼자서 어떻게든 끝을 볼 수 있지만 일이 지영에게까지 번진 이상 석규의 도움을 받아야만 일을 해결할 수 있다.

창현은 석규에게 말했다.

“우선 이번 일은 지영이의 친구인 예린이란 아이 때문에 일어난 일인 것 같아요. 자세한 사정을 알아보도록 할게요.”

“그래라. 하지만 이번 일 수습에는 도움이 안 된다는 걸 알겠지?”

석규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지금 창현이 지영과 통화를 하고, 예린이라는 아이와 통화를 하려고 하지만 그것들이 사태를 수습하는 데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당장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창현과 지영의 관계를 먼저 해명해야 한다. 함께 찍은 스티커 사진이 존재하는 한 증거가 너무나도 확실하기에 어설픈 변명은 사태를 끝없이 악화시킬 가능성이 농후하였다.

다른 일 같으면 언론 플레이로 어찌어찌 넘어갈 수 있지만 가족이 얽힌 이상 어쩡쩡한 대응으로는 무마시키기가 어려워진다.

결국 재혼에 관한 것을 알려야 하는데, 사회적으로 재혼을 보는 시선이 결코 호의적이라 할 수 없으니 석규로서도 난감할 수밖에 없다.

본래 석규는 지선과의 결혼을 비공개로 하되, 지인들을 초대하는 형식으로 조용히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사실을 공개하게 되면 결코 조용하게 결혼식을 치를 수 없게 된다.

그것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게 될 것은 당연한 일.

특히 석규가 걱정하는 것은 창현과 피가 섞이지 않은 지영을 과연 사회에서는 어떻게 볼지 의문이었다.

현의 극성팬 입장에서 지영의 존재는 그저 운 좋게 현의 동생이 되어 그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에 지나지 않을 수 있으니 말이다.

이것은 지영에게 독만 될 뿐 결코 좋은 방향으로 끝을 맺을 수가 없다.

그야 말로 진퇴양난의 상황인 것이다.

석규의 고민은 창현에게 그대로 전해졌다.

“죄송해요, 아버지.”

그저 사과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모든 일은 자신으로 인해서 벌어진 것이다. 누굴 원망하고 탓해봤자 사태가 나아질 리 없지 않은가.

창현은 모든 일이 자신의 탓이라 생각했다.

조금만 신중했으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으리라 자책하면서…….

그런 창현의 모습에 석규가 고개를 저었다.

“네 탓이 아니다. 어찌 보면 결혼을 미루고 있던 내 탓이기도 하지.”

그렇게 말을 하지만 입맛이 쓴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결혼식이 한 달 정도 남은 시점에서 일이 터졌으니 말이다.

짧게 한숨을 내쉰 창현이 방금 도착한 지영의 문자를 확인한다.

예린이 어머니의 핸드폰 번호가 적혀 있었다.

눈으로 번호를 읽고 외운 창현이 번호를 누르고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역시나, 지선 때도 그러했던 것처럼 당사자의 핸드폰은 연결되지 않지만 가족들까지는 어찌어찌 괜찮은 듯했다.

상당히 길게 연결음이 이어지다가 통화가 연결 된다. 모르는 번호라 받지 않는 게 아닐까 염려했는데 다행이었다.

-여보세요?

착 가라앉은 중년 여성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에 창현은 예린이는 물론 그 가족들도 마음 고생이 심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것이고 사태 진위를 파악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가볍게 호흡을 한 창현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현으로 활동하고 있는 강창현이라고 합니다. 이번 예린이 일과 연류 된 연예인이라고 보면 되겠네요.”

-…….

창현의 소개에 건너편에서는 한동안 말이 흘러나오지 않았다.

기다려도 한동안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자 창현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한다.

“예린이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가능할는지요?”

용건을 전달했음에도 여전히 건너편에서는 답이 들려오지 않고 있다.

혹시 통화가 끊어진 게 아닐까 확인을 해보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창현은 건너편에서 예린이의 어머니가 듣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다시 말을 꺼낸다.

“지금 일이 무척 심각합니다. 한시라도 빨리 예린이에게 이야기를 들어야 수습을 하거나 그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조금 무례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대답이 듣고 싶은데요.”

재촉의 의미를 담았기 때문일까.

여태껏 침묵하던 예린의 어머니가 입을 연다.

-예린이한테 아무 일이 없는 거죠……?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라.

전날 연예인과 함께 점심을 먹고 함께 스티커 사진을 찍었으며, 노래방까지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다.

하지만 다음 날 일이 터진 걸 알았을 때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예린과 함께 놀았다던 연예인은 놀랍게도 현이었고, 예린이가 실수를 하여 일이 엄청나게 크게 번지고 있었던 것이다.

쉴 틈도 없이 전화가 계속해서 울려 퍼졌고, 어떻게 알았는지 집 주소를 알아내어 찾아오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다급한 마음에 예린이를 추궁해보니 잘못은 그녀에게 있던 것.

인터넷을 뜨겁게 달굴 정도로 일이 크게 번지자 아무것도 모르는 입장에서 겁이 덜컥 날 수밖에 없었다.

염려스러운 마음을 갖고 있던 차에 창현에게 전화가 오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전화를 한 이유가 책임을 물으려는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 물음에 창현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일순간 고민에 빠져들었다.

잘못이 예린에게 있는 이상 책임을 묻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만 그 책임이 금전적인 형태나 그런 것을 이루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평범한 집안에게 돈을 요구할 정도로 돈이 부족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번 일이 과연 고의적인 일인지, 실수인지 아직 모르고 있어서 그렇다.

창현은 사실대로 말해주었다.

“잘못했다면 혼내기는 할 것입니다. 그것이 당연한 것이니까요. 하지만 금전적인 책임이나 그런 것은 생각하지 않고 있으니 바꿔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순순히 바꿔준다면 모를까,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느릿하게 대답하는 모습에 다소 짜증이 난 상태였기에 창현의 목소리가 딱딱하게 변했다. 이번 일로 인해 자신은 둘째 치더라도 석규와 지선, 지영이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되었는데 우선 자기부터 생각하는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원래 인간이 자기부터 생각하는 동물이라고 하나, 당장 이번 일이 끼칠 여파가 어느 정도일지 쉽게 예측이 불가능할 정도였기에 창현으로서는 뿔이 날 수밖에 없었다.

경직된 창현의 목소리 때문일까. 건너편에서는 알겠다, 라는 대답과 함께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다. 평범한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소리였지만 청각이 발달된 창현의 귀에는 그대로 들려왔다.

예린이는 지영이보다 더욱 심각한 분위기인가 보다. 하기야, 모든 일이 자신으로 인하여 발생하였다면 창현을 볼 면목이 없을 것이다. 평범한 중학생에게 있어서 이번 일은 무척이나 충격적이었을 테니 말이다.

잠시 후, 착 가라앉은 예린의 목소리가 창현의 귀에 흘러들어온다.

-…여보세요?

“오빠야, 예린아.”

-오빠… 흑, 정말 죄송해요.“

창현의 목소리를 들은 예린이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얼굴이 보이지 않지만 창현은 적어도 예린이 정말 미안해한다는 것이 목소리에서부터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적어도 고의적으로 일을 벌여놓은 것은 아니라는 뜻.

창현은 예린을 달래주면서 말했다.

“후! 예린아, 나한테 일의 전말을 알려줄래? 어떻게 된 건지 궁금하니까.”

“그게 그러니까요…….”

울먹거리면서 예린이 사태의 전말을 설명하기 시작하였다.

일은 이렇게 해서 벌어졌다.


창현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온 예린의 발걸음은 무척이나 가벼웠다.

평소에 너무나 동경하였던 현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었기에 너무나 기뻤던 것이다.

학교 내에서 다소 내성적인 면모를 보이는 예린은 현의 골수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처음 현의 미니 앨범 곡인 <Go&Stop>의 매력에 흠뻑 빠진 예린은 다크 스타 초창기 때부터 열심히 활동을 하였다. 현재 다크 스타 정회원이긴 하지만 곧 있으면 특별회원으로 등급 업이 가능할 만큼 예린은 다크 스타 활동을 열심히 하는 현의 팬이었다.

자신이 그토록 동경하던 스타와 함께 보낸 시간.

얼마나 기쁘겠는가.

마치 세상을 다 가진 듯한 기분으로 예린은 현과 함께 찍은 스티커 사진을 보면서 웃음을 연신 지은 채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곧장 컴퓨터를 키고는 싸이월드에 접속을 하였다. 그리고는 로그인을 한 뒤 곧장 노래방 코너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역시나, 창현이 불러준 ‘애인 있어요.’란 곡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을 재생하여 듣는 예린.

연속으로 열 번은 넘게 들었지만 질리지가 않는다. 그야 말로 이기적인 가창력이다. 사람을 이렇게 빠져들게 만들 수 있는 매력적인 보이스와 사람의 마음을 사정없이 뒤흔들어놓는 기교라니.

노래에 흠뻑 빠져있던 예린은 순간 불쑥 욕심을 갖게 된다.

자신만 듣기로 약속을 했지만 조금 욕심을 부려서 미니홈피 배경음악으로 하고 싶은 욕구가 치밀어 올랐던 것이다. 녹음한 곡은 5일 동안 보관이 되지만 구매를 하지 않으면 그 이후 삭제가 된다.

이렇게 잘 부른 노래를 삭제가 될 수 있게 내버려둘 수 없지 않은가.

그리고 또 한 가지. 다른 사람에게 자랑을 하고 싶었다.

어릴 적에 장난감을 사면 자신 혼자 보관하는 게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지 않은가? 그것과 같은 심리였다.

그 마음에 예린은 창현과의 약속을 망각한 채 노래를 결제하였고, 곧장 자신의 배경음악으로 등록을 하였다. 그리곤 아는 사람들에게 홍보를 하기 시작하였다. 자신이 아는 오빠가 있는데 노래를 무척 잘한다고 말이다.

예린의 말을 듣고 혹한 몇몇 친구들이 그녀의 미니홈피에 방문하였다. 그리고 창현이 부른 노래를 듣고 매료되기 시작하였다.

세계를 제패한 현은 그 이름으로 먼저 신뢰를 줄 만큼 탁월한 가창력이 밑바탕에 깔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죽하면 현은 세계에서 가장 타율이 높은 타자라고 하지 않겠는가? 한 음악평론가는 현을 9할 타자라고 부르면서 그의 노래를 듣게 되면 10명 중 최소한 9명은 음반을 사게 될 정도의 실력자라고 평가하였다.

그런 만큼 이름을 모르더라도 창현의 가창력이 가려지는 것이 아니었다.

창현의 노래를 들은 사람들은 감탄을 거듭하며 예린에게 누가 부른 것이냐고 궁금증을 표명하였다.

그 물음에 예린은 처음에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창현과 약속이 엄연히 존재하였기에 말을 하려 하지 않은 것이다.

친구들의 끈질긴 물음이 있었지만 예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문제가 발생했다.

메신저로 이야기를 나누다가 친구들이 그래봤자 현보다 떨어진다는 말을 한 것이다.

현의 광팬인 예린은 그 말을 듣는 순간 발끈할 수밖에 없었다.

저 노래를 부른 것이 현 본인인데 현보다 못하다니?

더군다나 다른 친구들조차 그 말에 동조하는 분위기를 보이자 예린은 발끈한 마음에 말하고 만다.

저 노래를 부른 것이 다름 아닌 현이라고 말이다.

말해놓고 예린은 아차 싶었다. 창현에게 비밀로 하기로 했는데 말해버린 것이다.

하지만 친구들은 그런 예린의 말을 믿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거짓말을 한다며 몰아세우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현이 누구라고 예린을 만나준단 말인가?

분명 학교 내 남학생들에게 인기가 많다고 하지만 연예계에서 예린 정도의 외모를 가진 여자들은 널리고 널렸다. 그리고 평범한 여자 중학생에 불과한 예린을 톱스타 중 톱스타인 현이 왜 만나준단 말인가?

여러 사람이 한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 것은 무척 쉬운 일이다.

예린도 괜히 현이라고 했다가 친구들에게 거짓말쟁이로 몰리기 시작하였다.

진실을 말했는데 거짓말쟁이가 된다는 것은 무척 짜증나는 일이다.

맞다고 말을 해도 믿어주지 않고 오히려 거짓말쟁이 취급을 하니 말이다.

결국 울컥한 예린은 증거물을 보여주겠다고 하면서 거듭 비밀로 할 것을 강조한 채 창현과 함께 찍은 스티커 사진을 보여주었다. 자신을 바보 취급한 것들을 비웃어주기 위해 말이다.

증거물을 보여주자 예린을 비웃던 친구들은 아무 말도 못했다. 정말 예린의 말이 사실로 드러났던 것이다.

정말 예린이 현과 함께 있었다니.

믿기지 않을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쉽사리 말을 잊지 못하는 친구들의 반응에 예린은 한껏 콧대를 높이며 자랑을 하였고, 그러면서 너희들만 알고 있으라고 강조를 하였다.

친구들이 모두 알겠다고 했기에 예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세상에서 가장 믿지 못할 것이 사람 아닌가?

앞에서는 알겠다고 했지만 뒤로 돌아서면서 예린에게 질투라도 느꼈는지 누군가를 통해서 스티커 사진이 유포되기 시작하였다.

그로 인해 예린의 미니홈피 방문자가 수십만에 이르게 되었고, 배경음악으로 한 노래도 누군가가 파일로 제작하여 유포하기에 이른 것이다.


…예린이 설명한 일의 전말은 이러했다.

명백한 예린의 실수임이 분명했다.

“…….”

하지만 창현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사태가 심각하게 변하면서 예린의 미니 홈피에 방문한 사람들이 방명록에다가 욕을 달기 시작한 것이다. 그걸 본 예린은 마음에 큰 상처를 받았고, 결국 미니 홈피를 일시적으로 폐쇄하기에 이른다.

별것 아닌 실수로 치부할 수 있는 일 치고는 너무나 많은 일들을 겪은 셈이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할까.

머리가 복잡했기에 결론은 쉽게 나지 않았다.

잠시 침묵하던 창현은 무언가를 결정 내린 듯 길게 한숨을 내쉰다.

“하아…….”

참으로 난감했다.

혼내기도, 혼내지 않기도 난감한 그런 상황.

길게 한숨을 내쉬는 것에서 복잡한 창현의 심정이 그대로 묻어나온다.

자신이 생각하고도 머리가 아픈 결론이었기에 창현은 머리를 부여잡더니 예린에게 말한다.

“이야기는 알겠어. 하지만 너에게도 책임이 있는 거 알지?”

-…네.

작은 목소리다.

마음이 약해질 법한 목소리였지만 이 점에 대해서는 창현도 양보할 수 없었다.

작은 실수로 인하여 잃을 법한 것들이 너무나 많았으니까.

마음은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예린이 두 번 다시 이런 실수를 하지 않도록 따끔하게 한마디를 해주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예린의 대답을 들은 창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이야기가 모두 해결된 셈이다. 어차피 자신이 통화를 한다고 해도 이번 사태에 도움이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알았어. 다음에 한 번 봐서 이야기 하도록 하자. 이제 일을 수습하도록 할 테니까 집에서 푹 쉬도록 하고. 알겠지?”

-…네. 죄송해요.

“후우…….”

한숨을 길게 내쉬면서 창현이 통화를 끝맺었다.

모든 전말을 알게 되었지만 하나도 통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슴이 답답할 뿐.

창현은 석규를 보면서 미안한 마음에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아버지. 이야기를 들어보니 실수라네요. 그것도 치기 어린 중학생이 저지를 법한 실수…….”

“그럴 것 같았다. 이제 알겠느냐? 너와 연관된 것이 사회에 얼마나 큰 파장을 끼칠 수 있는지.”

석규의 표정은 진지하였다. 여태까지 그가 창현을 대하던 모습은 창현이 하고 싶은대로 놔두는, 그런 모습이었다면 지금은 따끔하게 훈계를 하는 모습이었다.

창현은 그런 석규의 모습에 바짝 긴장한 표정을 지은 채 대답한다.

“…네.”

석규의 말을 들으며 창현도 많은 것을 깨닫고 있었다.

여태까지 국내 활동이나 미국 활동을 할 때 주변에 이렇다 할 지인이 없었던 창현은 본인 스스로가 철저히 관리를 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러하였기에 창현의 생각은 확고하게 굳어가고 있었다. 자기 자신만 조심한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창현 스스로가 조심한다고 하여도 주변 사람들로 인하여 이슈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던 것이다. 종종 석규가 창현에게 이런 말을 해주고는 하였지만 그 이야기는 창현에게 있어 그리 와 닿지 않는 이야기였다.

그도 그럴 것이 창현의 지인이라고 해봤자 가족으로는 석규가 전부이고, 다른 지인들은 전부 연예인들이 아닌가?

석규는 기획사 사장인 만큼 애초에 그 분야에 대해서는 창현보다 더 철저하게 관리하고 있는 실정이고 연예인들은 그 분야에 대해 잘 알고 있는 편이기에 두 말이 필요 없다.

머리를 긁적인 창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석규는 길게 한숨을 내쉰다.

그래도 창현이 깨달은 것이 있지 않은가.

아주 값비싼 과외였다고 석규는 스스로 위로했다.

그래야 마음이 편할 듯 싶었다.

이미 지난 일이었기에 더 이상 뭐라 하기도 그랬고,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은 사태를 최대한 완화하는 방법뿐이었다.

하아, 하고 길게 한숨을 내쉰 석규가 창현을 바라본다.

“이제부터 일을 안정시켜보도록 하자.”

“알겠습니다.”

이제부터 일을 수습해야 할 단계다.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는 현의 ‘애인 있어요.’ 음원 유출과 스티커 사진에 대한 AA엔터테인먼트의 공식적인 입장이 발표되었다.

그리고 그 내용은 사뭇 충격적이라 할 수 있다.

AA엔터테인먼트에서 밝힌 내용은 먼저, 스티커 사진에 찍힌 사람 중 한 사람이 바로 창현의 동생이라는 내용이었다.

그와 함께 덧붙인 내용은 AA엔터테인먼트 대표 강석규 사장이 중학교 동창과 재혼을 한다는 이야기가 들어 있었으며, 지영은 창현의 피가 섞이지 않은 동생으로, 남들이 생각하는 부적절한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였다.

이 이야기는 기자들에게 전해짐과 동시에 인터넷에 기재되기 시작하였다. 현에 관한 기사가 특종인 만큼 여태까지 숨겨졌던 가족사는 대박인 것이다.

삽시간에 인터넷 기사는 석규의 재혼설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그저 현의 소속사 사장이기 때문이 아니라, 현의 아버지이자, 떠오르는 기획사인 AA엔터테인먼트의 사장인 석규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석규의 재혼설이 인터넷에 올라올 무렵, 창현은 석규가 AA엔터테인먼트의 입장을 발표함과 동시에 다크 스타에 해명글을 남겼다.

다크 스타 내에서도 창현의 이야기로 인해 설왕설래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구체적인 증거물까지 나왔으니 충격이라고 할까?

운영진들이 안정시키는 분위기지만 창현의 글이 올라오지 않는 이상 절대 수습이 될 분위기가 아니었다.

평범한 여중생 세 명과 함께 찍은 사진이었지만 현이었기에 그만큼 파장이 큰 것이다.

그러다가 창현의 공식 해명글이 올라오자 조회수가 단번에 만단위로 넘어서기 시작했다.

창현이 올린 글의 내용은 간단하였다. 그리고 석규가 말한 내용과 일치하였다.

스티커 사진 파일을 올리면서 지영을 동그라미 친 채 자신의 여동생이라 밝히며 아버지가 이번에 재혼을 하게 되었고, 여동생이 시험이 끝나 기념으로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고, 스티커 사진은 기념으로 찍은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 AA엔터테인먼트의 발표가 이어졌다고 하면서 관련 기사를 첨부하여 사태를 해명하기 위해 노력을 하였다.

더불어 이번 일이 발생한 것은 지영의 친구인 예린의 사소한 실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해명하였으며, 큰 잘못이 아닌,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서 벌어진 사소한 실수인 만큼 네티즌들의 관대한 시선을 바란다는 말도 남겼다.

다크 스타에 가입한 현의 팬들의 장점이라면 현을 거의 광적으로 추종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

이것이 안 좋은 방향으로 뻗칠 경우 사태가 수습 불가능 할 정도로 커지지만 반대로 지금 같이 사태를 완화시키고자 하는 경우에는 큰 도움이 된다.

창현의 게시글을 읽은 팬들은 그에 공감하는 면모를 보이면서, 관련 기사로 흘러들어가 현의 이미지가 나빠지지 않게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 주었다. 더불어 맹목적으로 예린을 욕하던 사람들로부터 감싸주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비록 사태가 크게 벌어지긴 했지만 사소한 실수에서 일이 비롯된 만큼 맹목적으로 예린을 비난할 일이 아니라고 말이다. 일의 매듭을 풀어야 할 것은 다름 아닌 현과 예린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런 여론이 형성되자 인터넷 여론은 급격히 예린의 옹호론으로 향했다. 빠르게 타오르는 한국인들의 특성이 발휘된 것이다. 거기에는 그리 큰일도 아닌 것에 마녀사냥을 벌일 수 없다는 이야기가 함께 하고 있었다.

예린을 비난하던 여론을 돌리고자 한 창현의 의도가 어느 정도 성공한 셈이다. 그 또한 자신과 매듭을 지어야 할 예린의 일을 다른 사람이 왈가왈부하는 것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던 차였다.

간혹 지선과 지영을 욕하는 리플이 있었지만 대다수가 인정하는 분위기였기에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던 사람들의 말들이 급격히 정리되기 시작하였다.

창현으로서는 무척 다행인 순간이었다.

사태가 안정되는 것을 본 창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불과 몇 시간이 흘렀을 뿐이지만 석규와 공식 발표와 창현의 공식 게시글 작성은 사회에 큰 파장을 끼쳤다.

그 중에서 석규의 재혼 사실을 불가피하게 알려야 했지만 이미 일어난 일. 후회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창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석규에게 말했다.

“이 정도면 되겠죠?”

“될 듯 싶기는 하다만…….”

석규는 찜찜한 표정이었다.

인터넷 기사가 보도되고 석규에게 연락이 쇄도하고 있었다. 바로 재혼 사실을 알게 된 관계자들이 석규에게 연락을 하여 축하한다는 말과 함께 결혼식에 참석할 의사를 보인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결혼을 축복받는다는 것은 무척 기쁜 일이지만 재혼인 만큼 불가피하게 여러 말이 나올 것을 염려하였기에 석규로서는 꺼림칙한 것이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결혼을 축하해주는 사람들에게 매몰차게 대할 수 없는 노릇이 아닌가. 사회란 것이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다.

석규는 밀려드는 전화를 일일이 받으면서 좋게 해결하려고 하였고, 결국 지인들 몇몇을 초대하여 비밀리에 치르려던 결혼식은 공개적으로 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 와중에 지선의 의견을 받아야 했고, 여러 가지로 할 일이 무척 많았다.

“하아! 이번 일은 정말 생각하기도 싫네요. 악몽 같아요.”

창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하자 석규는 표정을 굳혔다.

“이 정도면 값싼 교훈이다. 다만 너의 음원 유출로 인해서 풀어야 할 매듭이 더 있다는 걸 알지?”

석규의 말에 창현이 표정을 굳힌 채 고개를 끄덕였다.

“…네.”

본의가 아니지만 창현이 부른 <애인 있어요.> 때문에 원곡을 부른 가수 이은미가 때 아닌 논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워낙 가창력이 출중하지만 창현이 부른 것 때문에 본의 아니게 논란이 일어난 것이다. 창현의 가창력이 워낙 넘을 수 없는 벽과도 같았기에 원곡을 뛰어 넘은 듯한 느낌을 주고 있는 것이다. 함부로 고하를 가리기 힘든 영역이었지만 고음처리를 말끔하게 하는 창현이었기에 그렇다. 이로 인해 네티즌들은 창현의 사기적인 가창력에 경외감을 표하면서, 그에게 별명을 하나 지어주었다. 원곡의 노래를 뛰어넘어 기존의 곡을 부숴버린다는 의미에서 ‘송 브레이커’ 라는 별명을 얻은 것이다. 창현에게 있어 나쁜 별명은 아니지만 다른 가수들에게는 가슴이 서늘한 별명이 아닐 수 없었다. 창현이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자신의 곡을 부른다면 지금 같이 논란에 휩싸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하물며 실력파 가수인 이은미마저 논란에 휩싸일 정도니 오죽하겠는가.

이 방법을 해결하기 위해서 고민을 하다가 석규는 결정을 내리게 된다.

바로 <애인 있어요.>란 곡을 창현 버전으로 발매하기로 말이다. 그리고 수익금 절반을 기부 형식으로 함과 동시에 나머지 절반을 원곡의 주인인 이은미에게 건네기로 말이다.

자칫 문제가 될 수 있지만 노래방에서 지원하는 시스템을 사용했을 뿐이고, 노래 음원 유출도 창현이 한 것이 아니었기에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 다만 이렇게 된 것은 이미 널리 퍼진 곡에 대해 창현과 AA엔터테인먼트가 사죄의 의미를 담으려고 하였기에 그런 것이다.

창현은 자신의 스케줄 표를 보고는 석규에게 말한다.

“오늘 스케줄은 구멍이 줄줄이네요.”

오늘 뮤직비디오 촬영 미팅과 재킷 촬영이 잡혀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일어난 일로 인해 펑크가 난 상태였다.

그 말에 석규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어쩔 수 없지. 이미 일어난 일이니까. 하지만 예상보다 빠르게 수습이 될 듯하니 내일부터 스케줄을 소화하면 될 것 같다.”

“그럼 내일 지영이를 찾아가 봐도 될까요? 예린이도 만나봐야 할 것 같고요.”

창현은 지영한테 찾아가서 위로를 하고, 예린에게도 찾아가 이야기를 나눠볼 생각이었다. 사소한 실수라고 하여도 실수에는 엄연히 경중이 있는 법. 따끔하게 나무랄 것은 나무랄 생각이었다.

그런 창현의 말에 석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여라.”

석규의 대답을 얻은 창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태가 완화된 이상, 이제 남은 것은 아이들을 만나보는 것뿐이다.


다음 날이 되자 여론은 창현과 석규가 예상한 것보다 좋게 흘러갔다.

자신들이 너무 과하게 의식 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석규의 재혼설은 나쁘지 않은 방향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오히려 중학교 때 서로를 좋아하던 사람들이 중년의 나이가 되어서 재결합을 하게 되자 중장년층의 열렬한 지지를 얻으면서 좋은 쪽으로 여론이 형성되었다.

뿐만 아니라 창현과 지영의 관계에 대해서도 나쁜 말이 나오질 않았다. 현의 팬들은 오히려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동생을 벌써부터 잘 챙긴다고 하면서 기특하다는 표현을 하였고, 저렇게 멋진 오빠를 둔 지영에게 부러움을 표하였다. 현 같은 오빠가 생긴다는 것은 여성들에게 있어 일종의 로망과도 같았던 것이다.

간간이 지영을 안 좋게 비유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세상을 삐딱하게 바라본다느니, 마녀사냥을 유도한다느니 하는 현의 팬들에게 묻혀버렸다. 다크 스타에 올린 창현의 글이 직접적인 효과를 발휘한 셈이었다.

“후우!”

생각보다 여론이 괜찮게 흘러가자 창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창현은 벤을 탄 채 지영의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사태는 어느 정도 완화되었지만 아직 완벽하게 수습된 것이 아니었기에 지영은 학교에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아영은 학교에 등교하기 시작했지만 지영과 예린은 등교를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지영이 졸지에 현의 동생이 되어서 그녀를 좋지 않게 보는 극성팬들이 존재하였고, 예린은 이번 사태의 주범이나 마찬가지였기에 사태가 어느 정도 완화되었다고 해도 그녀를 좋지 않게 보는 사람이 많았다.

지영의 집이 위치한 아파트 단지로 향하자 창현은 인상을 찡그렸다. 아파트가 무척 낡았던 것이다.

창현은 로드 매니저에게 물었다.

“형, 저 정도 아파트면 몇 평 정도 할까요?”

그 물음에 로드 매니저가 아파트를 바라보더니 대답한다.

“보니까 한 12평 정도 되는 것 같은데? 방은 하나려나? 확실하진 않아.”

로드 매니저의 대답에 창현은 고개를 나직이 끄덕였다. 그 또한 대충 윤곽을 보고 그 정도로 판단한 것이다.

그걸 깨달은 창현은 마음이 쓰라렸다. 설마했지만 지선과 지영이 이렇게 누추한 곳에 살 줄이야. 두 명이 살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할 수 있지만 창현에게 있어서는 무척 누추한 곳이었다. 지금 그가 살고 있는 곳만 해도 이곳보다 몇 배는 넓은 곳이었으니 말이다.

돈이 많으면 뭐하나. 가족들을 호강 시켜줘야지.

창현은 자신이 너무 무심했다는 것을 느끼면서 아파트 단지 내로 들어섰다.

그러자 지영의 집 앞에 포진해 있는 여학생들이 보였다. 어제 지영에게 듣길, 대부분 돌아갔다고 들었는데 그것이 아니었나보다.

여학생들은 갑자기 벤이 등장하자 눈을 빛내면서 벤으로 접근한다.

그보다 빠르게 벤이 열리면서 함께 한 경호원들이 여학생들을 막아선다.

경호원들에게 가로 막힌 그녀들은 벤에서 현이 보이자 환호성을 질렀다.

“꺄아! 현이다!”

“여기 좀 봐주세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곳에 있던 여학생들은 현을 볼 수 있게 되자 환호성을 지르며 창현에게 손을 흔들었다.

창현은 그런 여학생들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며 지나갔다.

“용건이 있어서 지나가볼게요.”

그 말과 함께 빠르게 아파트 안으로 들어선 창현은 엘리베이터에 탑승하여 7층으로 향한다. 그리고 낡을대로 낡은 703호를 보며 초인종을 눌렀다.

띵동!

벨을 누르면서 창현은 큰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 저 창현이에요. 문 좀 열어주세요.”

정체를 밝혔기 때문일까.

잠시 후, 달칵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문틈으로 지선의 모습이 보이자 창현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면서 말한다.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해요. 지영이와 이야기를 할 게 있어서요.”

창현의 사과에 지선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어제 온다고 했잖니. 잠시만 기다리렴. 차 좀 타올 테니까. 지영이는 방안에 있단다. 생강차지?”

자신이 즐겨 마시는 생강차를 말해주자 창현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네, 부탁드릴게요.”

그렇게 지선은 차를 타기 위해 주방으로 향하고, 창현은 하나 밖에 없는 방문에 노크를 한다.

똑똑!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고, 창현이 밖에서 나지막하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말한다.

“지영아, 오빠야. 들어가도 되겠어?”

“…들어와요, 오빠.”

지영의 대답이 들려오자 창현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창현의 눈에 전에 보았던 것보다 초췌해진 지영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틀 동안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기에 저런 모습을 하게 된 걸까.

창현은 자신의 실수 때문에 지영이 저런 모습이 되었다는 게 너무나 미안하였다.

“미안해, 지영아. 나 때문에…….”

그 사과를 들은 지영이 미친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오빠 때문이 아니야. 오히려 내가 부주의해서 일이 이렇게 된 건데… 부탁이니 사과하지 말아줘… 다 나 때문인 걸…….”

지영은 상당히 자책감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이번 일은 예린으로 인해서 벌어졌지만 지영은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

친구들이 오빠를 만나겠다고 조르던 터에 그녀 또한 묘하게 들떠서 승낙을 했던 것이 문제였다.

또한 자신이 스티커 사진을 찍자고 졸랐고, 노래방을 함께 가자고 했기에 예린이 일을 저질렀지만 원인은 자신이 제공했다는 생각이었다.

그랬기에 그녀는 창현이 사과하는 것이 견디기 힘들었다.

다 자신 때문에 일어난 일인데.

이미지에 타격 받기 쉽다고, 연예인이라고 사과하는 창현의 모습이 지영은 너무나 미안했다.

그런 지영의 말에 창현은 웃음을 지었다.

“하하, 그래. 지영이가 이렇게 말할 정도면 생각을 많이 했나보네. 하지만 내가 부주의한 것도 있어서 그러니 그렇게 알아둬. 내가 먼저 잘 말했으면 이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거잖아? 안 그래?”

“그거야 그렇지만…….”

말끝을 흐리는 지영의 모습에 싱긋 웃음을 지어보인 창현이 말했다.

“물론 지영이 잘못도 있긴 하지. 서로 잘못했으니까 없는 걸로 하자고.”

“하지만 내가 너무 미안한 걸…….”

여전히 미안한 표정을 짓는 지영의 모습에 창현이 손을 들어 그녀의 볼을 잡아 볼 살을 쭈욱 늘리며 말한다.

“으이구. 맨날 헤헤거리던 지영이는 어디로 간 거냐. 이렇게 우울한 표정을 짓는 동생을 둔 적은 없다고.”

“아으, 아파. 그만 좀…….”

웅얼거리며 반항하는 지영의 모습에 창현은 잡았던 손을 놓고는 싱긋 웃음을 짓는다.

창현이 손을 놓자 지영이 붉어진 볼을 부여잡고는 째릿, 창현을 노려본다.

그 모습에 창현이 양손을 들며 말한다.

“아이구, 화가 났네. 어쨌든 평소 지영이 같아서 좋네, 하하!”

비록 화가 난 듯했지만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는가.

창현이 웃음을 짓자 지영은 뭐라 말을 하려다가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웃는 얼굴에다가 뭐라고 할 수 없는 노릇이고, 무엇보다 창현의 이런 행동이 자신을 위한 것이란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참으로 미워할 수 없고, 속이 깊은 오빠였다.

그런 지영에게 창현은 다시 손을 내밀어 볼을 잡으려고 하였다.

화들짝 놀란 지영이 얼굴을 뒤로 빼자, 창현이 말한다.

“일이 원활하게 해결 되었으니 웃어야지, 그 모습은 뭐야.”

웃지 않으면 다시 볼을 잡을 기세였다.

지영은 억지로 웃음을 짓기 위해 얼굴을 씰룩였다.

“이, 이렇게?”

억지웃음을 지어봤자 억지스러울 뿐이다.

웃는 얼굴은커녕 우스꽝스러운 모습만 연출되었다.

창현은 그런 지영의 표정이 마음에 든다는 듯, 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그것도 귀엽네. 어쨌든 웃으니까 보기 좋다. 하하!”

방안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오자 지선이 방안으로 들어오면서 말한다.

“창현이가 오니 지영이 표정이 바로 밝아지네. 이거라도 마시렴.”

그러면서 창현에게 생강차를 내민 지선은 지영에게 주스를 내밀다가 멈칫한다.

“지영아, 그 표정은 뭐야?”

“으응? 오빠가 웃으라고 해서…….”

지영이 머뭇거리며 대답하자 지선은 창현을 힐끗보다가 말한다.

“그게 웃는 표정이라고? 웃지도, 우는 것도 아닌 아주 웃긴 표정인데.”

그 말에 지영이 정말? 하는 표정으로 손거울을 들어 자신의 표정을 살핀다. 그리고 자신의 표정을 확인한 지영의 표정이 점점 굳어갔다.

“오빠!”

버럭 소리를 지르는 지영의 모습에 생강차를 마시던 창현이 움찔했다.

“앗뜨! 왜 그래? 설마 표정 때문에 그런 거야? 귀여워서 그런 건데 뭘 그런 것 가지고 그래. 난 아무렇지 않으니 주스나 마시세요, 공주님.”

“히잉… 나는 상관 있다고…….”

그러면서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는 지영이었다.

그 모습에 웃음을 지은 창현이 지영에게 물었다.

“지영이를 위로해주려고 왔는데 잘 풀려서 다행이다.”

생강차를 후루룩 마시던 창현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지영이 고개를 빼꼼 든 채 창현에게 묻는다.

“오빠, 벌써 가려고?”

“가봐야지. 어제 스케줄이 펑크 나서 매꿔야 하거든.”

“미, 미안…….”

자신의 탓인 것 같았기에 지영은 사과를 하였다.

그에 창현은 손가락으로 지영의 이마에 딱! 소리 나게 튕겨주었다.

그리 아프지는 않았지만 갑작스러운 느낌에 지영이 놀란 눈으로 창현을 바라보자 그가 씨익 웃음을 짓는다.

“그런 말은 하지 말라고.”

“미, 으응…….”

자신도 모르게 미안하다고 하려던 지영은 창현의 눈치를 힐끗 살피고는 말한다.

창현은 황급히 말을 바꾸는 지영의 모습에 피식 웃고는 말한다.

“그럼 난 가볼게. 아, 깜빡한 게 있다. 지영아, 예린이 집 주소 좀 가르쳐줄래?”

전혀 예상 외의 물음.

지영은 예상치 못한 창현의 질문에 움찔 몸을 떨며 물었다.

“어, 어쩌려고?”

그 물음에 창현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 미소는 지영이 방금 전까지 보았던 따뜻한 미소가 아닌, 차가운 미소를 담아내고 있었다.

창현은 지영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대답했다.

“찾아가서 혼내줘야지.”

“혼낸다고?”

지영이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짓는다.

그녀는 지금 눈앞에 보이는 창현의 표정이 적응되지 않았다.

언제나 다정다감한 모습만 보여주던 창현이 이런 차가운 모습을 보이다니.

적응이 되지 않아 혼란스러운 지영이었다.

당혹스러워하는 지영을 보며 창현이 말했다.

“잘못을 했으면 혼나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그거야 그렇지만…….”

잘못을 했으면 혼내는 건 당연한 일.

지영 또한 그걸 알고 있지만 말끝을 흐린 것은 예린과 연관이 되어서 그렇다.

이번 일의 주범은 예린이라 할 수 있고, 그녀의 첫 실수는 그리 크지 않다고 하여도 그것이 주변에 끼친 여파는 어마어마하다. 지영은 모르지만 그로 인해서 석규의 재혼 사실까지 공개했어야 하니 창현이 입은 피해는 물론 석규가 입은 피해 또한 상당했다.

지영을 납득시켰다고 생각한 창현은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이 정도면 이유로 충분하지? 자, 말해줘.”

“…….”

창현의 물음에도 불구하고 지영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 모습에 무어라 말을 하려던 창현이 멈칫하였다.

그의 눈에 들어온 지영의 표정은 사뭇 비장하였던 것이다.

절대 말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창현에게 그대로 전해지고 있었다.

친구를 위해서인 걸까.

예린을 감싸주기 위해서인지 입을 열지 않고 있는 지영의 모습에 창현의 입가에 의미모를 미소가 걸렸다.

“말해주지 않을 생각이야?”

지영의 변화를 알아차렸기에 창현이 물었다.

그러나 지영은 그마저도 대답하지 않는다.

자신의 의지를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윽박질러도 입을 열지 않을 기세였기에 창현은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쉰다.

사실 지영이 말을 하지 않아도 창현이 예린의 집주소를 알아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제 한차례 소동이 발생하면서 예린의 집주소가 인터넷에 유포된 상태였으니 말이다. 창현이 구하고자 하는 마음만 있으면 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창현이 지영을 보며 말했다.

“대답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내게도 방법이 있으니까. 어쨌든 표정이 밝아져서 다행이다. 일은 잘 수습해뒀으니까 내일부터 학교 나가도 될 거야.”

미련을 두지 않는 듯한 창현의 모습에 다급해진 것은 지영이었다.

그녀 또한 인터넷을 하고 있기에 창현이 마음만 먹으면 인터넷에서 예린의 집주소를 구하는 것은 일도 아니란 것을 알고 있던 것이다.

지영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창현에게 말했다.

“…혼내지 않는다면 말할게요.”

일어서려던 창현은 지영의 말에 멈칫하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에요. 혼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오빠. 예린이가 실수를 하긴 했지만 잘 모르고 한 일이잖아요.”

사실 상황이 무척 난감한 것이, 예린의 실수 자체는 그리 크지 않다. 어찌 보면 치기 어린 중학생들이 한 번쯤 할 법한 실수인 것이다. 그러나 그 여파가 너무 커졌고, 그로 인해 창현은 물론 석규까지 피해를 입게 되었다. 처음 시발점이 되는 잘못이 작다고 하여도 피해를 입은 입장에서는 결코 가벼이 여길 수 있는 상황이 아니게 된 것이다.

“잘못을 했으면 혼내는 건 당연한 일이란다, 지영아.”

“하지만 혼내면 예린이가 너무 불쌍하잖아요. 많이 시달렸을 텐데… 혼내지 말고 훈계를 해주면 안 되요?”

“…….”

지영의 입장에서는 예린을 걱정해서 하는 말이었다.

그 말을 들은 창현은 눈가를 살짝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창현 또한 어찌 마음이 편하겠는가.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잘못은 잘못이었기에 따끔하게 혼내주려고 했는데 지영의 말을 들으니 창현은 맥이 탁 풀리는 걸 느꼈다.

혼내는 것과 훈계하는 것은 엄연한 차이가 존재한다.

잘못에 대해 꾸짖고 벌을 준다는 뜻을 지닌 혼낸다는 것과 달리, 훈계는 주의를 줌으로써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방지하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즉, 지영의 말은 몇 글자 차이였지만 창현이 예린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대해서 확실한 방향 전환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창현은 이윽고 고개를 끄덕인다.

잘못에 대해 훈계하는 선에서 그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하아! 알겠다, 알았어. 솔직히 나도 내키지는 않았으니까. 그렇게 하도록 할게. 됐지?”

“응, 고마워, 오빠. 역시 오빠가 최고야.”

창현의 항복 선언을 받아낸 지영이 활짝 웃으면서 엄지손가락을 든다.

그 모습에 피식 웃음을 짓는 창현이었다.

동생을 당해내기에는 아직 요령이 부족한가 보다.

그러면서 마음 한편이 편안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사실 창현도 예린을 혼낸다는 것이 그리 내키지 않던 차였다.

이번 일에 책임은 엄연히 자신에게도 있던 차였다.

예린에게도 분명 잘못이 있지만 결정적으로 자기 관리가 부족했던 자신의 잘못이 더욱 큰 바였으니 말이다. 엄하게 대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던 것은 일이 생각보다 커져 자신 스스로에게 실망을 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폭발적인 인기에 비해 자기 관리가 부족해도 너무 부족했던 것이다.

예린을 엄하게 대할 생각이었지만 지영의 부탁과, 자신의 진실된 마음을 깨닫는 순간 창현은 맥이 탁 풀렸다.

이거, 아무래도 자신은 모질지 못한 성격을 지니고 있나보다.

창현은 웃음을 짓는 지영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지영에게 예린의 집주소를 알아낸 창현은 곧장 집을 벗어났다.

밖에 모여든 사람이 점점 더 많아진다는 말 때문이다.

그 이야기를 들은 창현은 지선과 지영에게 인사를 한 뒤 곧장 아파트를 나섰다.

아니나 다를까, 처음 아파트 안으로 들어설 땐 십여 명의 사람들이 있었지만 아파트를 나설 때는 무려 오십여 명의 사람들이 아파트 앞에 우글거리고 있었다.

그들만의 자체 네트워크가 형성 되어 있어서 그런지 짧은 시간인데 많은 숫자의 사람들이 모여든 것이다.

창현이 아파트를 나서자 꺄아! 하는 소리와 함께 그에게 달려든다.

경호원들이 그런 팬들을 막아섰고, 그들의 어깨 사이로 파고든 손들이 창현을 스치고 지나간다. 창현은 그런 팬들에게 살짝 고개를 숙인 뒤 벤 안에 탑승하고는 사라졌다.

그가 향한 곳은 다름 아닌 예린의 집이었다.

예린의 집 앞에 사람은 거의 없었다.

어제만 하여도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고 했는데, 창현의 보도와 AA엔터테인먼트의 해명이 주효한 듯했다.

큰 벤이 모습을 드러내자 예린의 집앞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벤에 꽂혔고, 역시나 창현이 모습을 드러내자 예상치 못한 그의 등장에 환호성을 지르며 접근한다.

그에 아까와 같은 풍경이 연출되며 경호원들의 경호 아래 창현이 아파트 안으로 들어선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 창현이 곧장 초인종을 누른다.

띵동!

“…현씨인가요?”

벨을 누르자 예린의 어머니로 들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지영에게 사전에 연락을 받은 듯했다.

“맞습니다.”

창현의 대답에 더 이상 다른 말은 들리지 않은 채 문이 열렸다.

철컥.

문이 열리자 창현이 집안으로 들어선다.

그러자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어머니를 닮아 예린이 그렇게 예쁜 건지, 곱상한 외모를 지닌 예린의 어머니였다.

창현은 예린의 어머니에게 인사를 하였다.

“현이라고 합니다. 예린이를 보러왔어요.”

“지영이에게 연락을 들었어요. 안으로 들어오세요. 예린이는 방안에 있어요.”

“실례하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창현이 예린의 방문을 두들겼다.

똑똑!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고, 창현이 입을 열었다.

“나야, 예린아. 안으로 들어가도 되겠니.”

“…들어오세요.”

나직하지만 확실한 대답이 들려오자 창현이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다.

방안으로 들어선 창현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의 눈에 들어온 예린의 모습은 지영의 그것과 비교를 거부할 정도로 초췌해 보였던 것이다.

안으로 들어서던 창현이 놀라서 멈칫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보기 좋았던 얼굴은 창백하였으며, 볼은 움푹 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수면을 제대로 취하지 못했는지 눈밑에는 다크서클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모습만 보아도 그녀가 얼마나 심적 고생을 겪었는지 알 수 있었다.

처음에 따끔하게 혼내주려던 마음이 쏙 들어가는 창현이었다.

만약 이틀 전에 보았던 것과 다를 바가 없다면 화를 냈을 것이다. 미안하다느니, 죄송하다느니 말을 하면서 전혀 바뀐 게 없다면 결국 말뿐일 테니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초췌한 모습을 보이면 화조차 낼 수 없지 않은가.

창현은 한숨을 푸욱 내쉬며 예린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괜찮아? 밥은 챙겨 먹고?”

“…죄송해요.”

예린의 모습은 차마 보기 안쓰러울 정도였다.

창현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물었다.

“이거 몸이 많이 상한 것 같네. 예린아, 괜찮은 거야?”

“…제가 죄송해요.”

창현이 무어라 말해도 계속해서 죄송하다는 말만 하는 예린이었다.

그런 예린의 모습에 창현은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예린아, 내 말부터 대답해. 밥은 챙겨 먹은 거야?”

“…….”

창현의 물음에 예린은 대답하지 않은 채 고개를 숙였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차린 창현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설마 밥까지 거르고 있었을 줄이야.

그렇게 자책하고 있단 말인가.

초췌하다 못해 환자처럼 몸이 좋아 보이지 않는 예린의 모습을 보아하니 창현은 혼내고 싶은 마음보다는 안쓰러운 마음이 가득했다.

비록 한 살 차이에 불과하지만 어찌하여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동생처럼 느껴지는 걸까.

창현이 예린에게 말했다.

“예린아. 정말 미안하다고 생각하는 거야?”

“…네. 제가 너무 들떠서 실수를 했어요. 오빠를 너무나 동경하는 마음에…….”

예린은 더 말을 잇지 않았다.

이미 저지른 일에 대해서 뭐라고 말하던 간에 그것은 핑계에 불과하다. 자신의 행동 하나가 그렇게 큰 파장을 일으킬지 미처 생각하지 못했기에 예린이 받은 충격도 충격이지만 무엇보다 동경하던 창현의 이름에 흠집을 냈다는 것에 그녀는 큰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창현은 의자를 끌어당겨 의자에 앉아 예린과 눈을 마주하였다.

그의 눈과 마주하게 된 예린의 눈이 격렬하게 떨렸다.

그 모습에 창현은 직감적으로 예린이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자책하고 있었다니. 마음이 짠해지는 기분이었다.

창현은 살며시 예린을 껴안았다. 바들바들 떨고 있는 그녀의 몸이 느껴진다. 창현은 부드럽게, 그녀의 등을 토닥여주면서 그동안 쌓아온 내공을 조심스럽게 끌어올려 예린의 몸에 주입한다. 큰 충격을 받아 불안정한 상태일 때에는 내공이 심신의 안정을 되찾는데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본 것이다.

“괜찮아. 괜찮으니까… 처음에는 훈계를 하려고 했는데 그렇게 반성하고 있으면 됐어. 모든 일은 다 순조롭게 해결 됐으니까… 너무 자책하지 않아도 돼.”

그 말을 들은 예린의 몸이 눈에 띄게 안정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창현은 한동안 예린의 몸을 껴안은 채 부드럽게 그녀를 토닥여준다.

잠시 후, 잠에 빠진 듯한 그녀의 몸을 조심스럽게 침대에 눕히며 길게 한숨을 내쉰 창현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따끔하게 한마디를 하거나 훈계를 하려고 했지만 분위기 때문에 못하게 되었는데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정말 반성하는 듯한 예린의 분위기 때문에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창현이 방을 나서자 예린의 어머니가 불안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본다.

그에 창현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예린이를 용서했으니까 그런 표정 짓지 않으셔도 되요. 정말 많이 반성하고 있는 것 같네요.”

“자기 실수 때문에 일이 너무 커지다 보니… 무엇보다 자신의 행동으로 현씨가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고 많이 울었어요. 밥도 먹지 않고…….”

“예린이가 깨어나면 말해주세요. 전 용서를 했다고요. 이 일을 너무 마음에 두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전해주세요.”

그렇게 말을 한 창현이 집을 나섰다.

아파트를 나서고 벤에 탑승하는 창현의 마음은 그래도 한결 가벼웠다. 이로써 모든 일의 매듭을 풀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의자에 몸을 묻으며 창현이 눈을 감았다.

“값진 교훈을 얻었다고 생각하자.”

어이없는 오해는 그렇게 끝을 맺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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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마음을 울리는 음악 시즌2 제8화 +17 15.05.02 4,030 92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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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마음을 울리는 음악 시즌2 제5화 +15 15.04.27 3,713 97 9쪽
41 마음을 울리는 음악 시즌2 제4화 +7 15.04.24 3,978 89 10쪽
40 마음을 울리는 음악 시즌2 제3화 +6 15.04.22 4,425 82 10쪽
39 마음을 울리는 음악 시즌2 제2화 +9 15.04.20 4,515 91 11쪽
38 마음을 울리는 음악 시즌2 제1화 +10 15.04.17 7,375 95 10쪽
37 ▲▲▲▲▲시즌2 시작!▲▲▲▲▲ +5 15.04.17 5,423 65 1쪽
36 마음을 울리는 음악 106장-108장 +8 15.04.16 6,411 106 230쪽
35 마음을 울리는 음악 103장-105장 +1 15.04.16 4,242 82 314쪽
34 마음을 울리는 음악 100장-102장 +2 15.04.16 4,411 68 2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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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마음을 울리는 음악 94장-96장 +1 15.04.16 4,378 80 2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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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마음을 울리는 음악 13장-15장 +5 15.04.16 14,534 297 237쪽
4 마음을 울리는 음악 10장-12장 +8 15.04.16 13,736 352 171쪽
3 마음을 울리는 음악 7장-9장 +10 15.04.16 14,550 362 142쪽
2 마음을 울리는 음악 4장-6장 +11 15.04.16 16,834 421 120쪽
1 마음을 울리는 음악 프롤로그-3장 +47 15.04.16 29,895 545 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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