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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번 님의 서재입니다.

마음을 울리는 음악

웹소설 > 작가연재 > 팬픽·패러디, 현대판타지

김현우
작품등록일 :
2015.04.16 13:27
최근연재일 :
2015.06.01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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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4.16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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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9쪽

마음을 울리는 음악 52장-54장

DUMMY

제52장 드라마 촬영에 들어가다




“괜찮은데?”

수연의 테스트를 끝낸 창현은 녹음실로 돌아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수연이 많은 준비를 했다는 것이 창현에게 느껴졌던 것이다.

흔히 군대에서 말하길, 일병이 이병의 행동을 훤히 내다보고, 상병이 일병의 행동을 내다본다. 그리고 병장은 상병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눈앞에 동영상이 재생된 것처럼 알아내고는 한다.

창현도 노래를 부르는 가수인 만큼 수연이 얼마나 열심히 준비를 해왔는지 알 수 있었다.

그렇다고 목이 상한 것도 아니었다. 아무리 열심히 한다고 해도 당일 날 목이 망가지면 결국 그것은 꽝이다. 그런 면에서 수연은 목을 철저하게 관리해서 테스트에 임했고, 열심히 준비한 흔적과, 테스트에서 임하는 모습 등이 마음에 들어 수락을 하였다.

녹음실에 도착하자 수정에게서 문자가 와 있었다. 잘 도착했다는 문자였는데, 하트 문양이 어찌나 많은지 문자 칸이 하트로 꽉 차 있을 정도였다.

창현은 수정의 모습을 떠올리고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귀여워라.”

수연을 그리 닮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의 매력을 지니고 있어 무척 귀여웠다. 아무래도 94년생이라는 말에 지영의 모습이 떠올라 그런 듯했다.

귀여운 동생을 알게 되어 기분이 상당히 좋아지는 걸 느낀 창현은 달력을 보고는 나직이 고개를 끄덕인다.

“드라마 촬영일이 멀지 않았군.”

이틀 후면 본격적으로 드라마 첫 촬영이 시작된다.

본격적인 시작을 앞에 둔 만큼 창현은 적잖게 긴장되는 것을 느꼈다. 이것은 무대 위에 설 때와 다른 또 다른 긴장감이었다.

그 긴장감에 창현은 두근거리는 심장 위로 손을 얹으며 중얼거린다.

“일단 중요한 건 최선을 다하는 거니까. 열심히 하기만 하면 되겠지.”

그렇게 말을 했지만 창현은 자신이 있었다. 기존에 연기력은 부족했지만 어린 나이답지 않게 자신의 감정을 다루는데 능숙한 창현은 빠른 속도로 연기력을 쌓아올릴 수 있었다. 탄탄한 밑바탕이 되는 만큼 연기를 배우는 속도가 빨랐던 것이다. 그렇다고 자만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실전을 겪어나가면서 자신이 배웠던 것과 차이점을 서서히 채워나간다면 웬만한 배우 못지않은 연기력을 보여줄 자신이 있었다.

물론 이것도 실전을 겪어보았을 때 확정되겠지만 말이다. 어떠한 일이 일어나던 간에 방심은 금물이었다.

“일단 아버지한테는 보고를 해둬야겠지?”

수연의 테스트를 끝낸 창현은 녹음실을 정리한 뒤 곧장 사장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창현이 보고하러 올 것을 알고 있었는지 사장실에 도착하자마자 곧장 안으로 들어가도 된다는 비서의 말이 들렸다. 살짝 고개를 끄덕인 창현은 곧장 사장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석규가 창현을 반갑게 맞이한다.

“어서 오너라. 제시카가 왔다고 하던데 테스트는 잘 봤고?”

자리 앉기 무섭게 물어오는 석규의 모습에 창현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잘 보고 못 보고를 따진다면 잘 봤다고 할 수 있죠.”

“그래? 그럼 테스트 결과는 어떻고?”

솔직히 잘 보고 못 보고는 석규가 알 것이 못된다. 석규가 알고 싶은 것은 테스트에 합격을 했는가 안 했는가였다. 만약 탈락하게 되면 SM엔터테인먼트에서 상당히 불편한 기색을 보일 것이기에 그렇다. 그렇다고 겁을 먹을 것은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좋게좋게 가는 것이 좋은 만큼 가급적 원만하게 처리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 석규의 심정이었다.

그런 석규의 불안한 마음을 덜어주듯 창현이 말한다.

“합격이에요. 준비를 열심히 했는지 제 예상보다 뛰어난 실력을 보이더라고요.”

“그래? 잘됐구나. 정말 잘됐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대답하는 석규였다. 이렇게 되면 SM엔터테인먼트가 내건 조건들을 받아낼 수 있으니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일단 합격 여부를 알려준 창현은 석규에게 다른 사실을 전달했다.

“대신에 피처링을 넣어야 할 것 같아요. 그걸 보완하기 위해 소녀시대 멤버 중 한 사람을 피처링으로 넣을 생각이거든요.”

창현의 말에 석규는 문제될 것 없다는 듯 말한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내가 말하도록 하마. 아마 이 회장님도 좋아할 걸? 한 명이 아닌 두 명이 참가하게 된다면 말이다.”

“그렇죠? 그럼 다행이고요.”

석규가 이렇게 말한다면 창현으로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다. 약간 변경된 점들 같은 것들이 발목을 붙잡는다면 상당한 고충거리가 되었을 테니 말이다.

노래 부분에 대해서는 일단락이 되자 석규는 한결 여유가 감도는 모습으로 창현에게 말한다.

“그래, 일단 테스트는 잘 끝났으니 다행이구나. 이틀 후 드라마 촬영에 들어갈 텐데 그건 어떠냐? 긴장되지는 않고?”

“긴장이야 당연히 되죠. 하지만 긴장감에 먹혀버릴 정도는 아니에요. 제가 제법 강심장인 거 아시잖아요.”

“음, 그건 그렇지.”

피식 웃으며 대답하는 창현의 모습에 석규가 고개를 끄덕인다. 창현이 강심장이 아니라면 다른 사람들은 모두 유리심장일 것이다. 어린 나이답지 않게 굳건한 마음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창현의 장점 중 하나였다.

“솔직히 제 연기력이 어느 정도인지 잘 모르겠어요. 그 부분만 확인하면 안도를 할 수 있을 텐데, 뭐 그건 이틀 후에 밝혀지겠지요.”

“기왕에 하는 거라면 성공하는 것이 좋겠지. 일단 네가 출연한다는 것 자체만으로 상당한 흥행 보증 수표니 최선을 다해야 한다.”

“물론이에요.”

어차피 하게 된 거라면 실패보다는 성공이 좋지 않은가? 그런 만큼 결코 대충할 생각이 없는 창현이었다. 애초에 슬럼프를 면하기 위해 받아들인 거라서 목적이 약간 흐트러졌지만 다른 목표를 세우면 되는 것이다.

자신의 또 다른 가능성을 발견하는 길이 될 수도 있으니까.

그런 창현의 모습을 슬쩍 보면서 석규가 농담을 던진다.

“김 감독이 참 좋아하더구나. 네 스케줄이 무척 넉넉해서.”

드라마를 촬영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주연 배우의 스케줄 여부였다.

그 점에 있어서 창현은 최고의 주연 배우라 할 수 있다.

연기가 뛰어나서? 아니면 성격이 좋아서? 다 아니다.

최고의 주연 배우라 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스케줄이 무척 넉넉했기에 그렇다.

주연 배우의 스케줄에 따라 촬영 일정이 조정되는데 창현 같은 경우 거의 스케줄이 없는 경우가 다반사니 드라마를 촬영하는데 있어 오히려 조연 배우들의 스케줄을 맞춰야 할 지경이었던 것이다.

물론 창현도 스케줄을 만들려면 얼마든지 만들 수 있지만 이미지 고급화라는 것 때문에 무분별한 스케줄을 잡지 않고 굵직한 것들만 수행하고 있었다.

그러한 것들을 수행해도 김지환 감독에게 있어서는 충분히 넉넉한 것이었다.

“스케줄이 없는 게 뭐가 자랑이라고 그러세요. 아버지 덕분에 음악 프로그램에도 나가지 못하게 되었잖아요.”

12월 말에 앨범을 내고 부지런히 음악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활동을 했다면 창현이 이렇게 한가하게 놀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방송 3사의 치열한 신경전으로 인해 출연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을 해버렸으니 이미 별 수가 없게 된 셈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창현은 떠오른 게 있는 듯 석규에게 말한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 앨범 백만 장 팔렸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왜 광고를 하지 않는 거예요?”

1월 중하순에 창현의 앨범이 국내에서만 백만 장을 훌쩍 넘겨 백오십 만장까지 찍어낸 상황이다. 월드 스타로서의 파워가 제대로 발휘된 셈이었다. 사실 노래가 좋다고 하여 이런 판매고를 올리기 힘들었지만 창현이 국가를 대표하는 가수로서 자리를 매김하였고, 여성들의 마음을 녹여버리는 비주얼을 지닌 탓에 판매가 무척 높았다. 재킷 사진들 같은 것 하나하나가 그야 말로 화보였으니 말이다.

심지어 앨범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화보를 사면 CD를 공짜로 준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그렇다고 재킷 사진만 화려하다는 것이 아닌, 노래도 좋았으니 사는 사람들이 만족하는 것도 당연했다.

인기가 자칫 시들해질 수 있지만 그럼에도 정상의 인기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외모도 한몫을 했다고 볼 수 있으니 말이다.

“그거? 국내에서 백만 장을 넘게 판 것도 대단하지. 하지만 그때 상황이 묘했거든. 게다가 내가 신혼여행을 떠나는 바람에 본격적인 언론 플레이를 하지 못했고. 그래서 극대화를 시키려고 생각 중이다. 내 예상으로는 이백만 장까지 갈 것 같은데 그때 한 번에 뻥! 하고 터뜨린다면? 아마 네 인기는 더 이상 치솟지 못할 정도로 올라갈 것이 분명했다.”

시기를 놓쳤다고 하여 버리기에는 아깝지 않은가? 그래서 조금 묵혀두었다가 뒤에 더 크게 터뜨릴 생각이었다.

“저야 이래나 저래나 상관은 없어요. 하지만 드라마 촬영을 하고 나면 음반 활동을 해야 할 것 같아요. 가수는 노래를 불러야 하니까요.”

“그건 나도 동의하는 바다. 전국 투어 콘서트가 끝나면 라샤가 일본에서 활동을 하게 될 테니 그때 일본으로 프로모션을 가는 것도 괜찮을 테고 말이다.”

국내로 돌아온 지 불과 반년 밖에 되지 않았지만 외국에서 창현에게 러브 콜을 보내오는 곳은 엄청났다.

일본은 물론이고 중국을 비롯하여 아시아 각국에서 오라고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중에서 석규는 아무래도 음반 시장이 활성화 된 일본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중국은 TTS 기획사 때문에 전면 보이콧을 선언했으니 뒷전이었다. 하지만 근래 들어 TTS 기획사가 거의 다 무너진 상태였기에 조만간 중국 시장도 개척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외국 활동이라… 하기야 국내로 돌아온 지는 좀 되었으니까요.”

국내 팬만 팬인 것이 아니지 않은가? 외국 활동도 조금씩 하면서 팬들을 확보해야 지금의 성세를 유지해나갈 수 있다는 것을 창현도 느끼고 있었다.

인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을 좋아할수록 자신의 음악을 들어주는 사람이 많아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게을리 할 수 없는 것이다.

“일단 중요한 건 드라마 활동을 성공적으로 끝내는 거다! 너무 앞을 내다보는 것도 좋지 않아. 당장 앞을 바라보면서 확실하게 끝내는 것도 중요하다.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란 말이 있듯이 말이다. 알겠지?”

“최선을 다해야죠.”

“그 태도면 되는 거다.”

의지를 되새기는 창현의 모습을 보면서 석규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지금 얼핏 보니 슬럼프를 벗어난 것 같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슬럼프를 벗어난 걸 확인했을 때 드라마가 창현에게 득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는 어떻게 하면 피해를 보지 않고 출연 취소를 할 수 있을까 생각했던 적도 있다. 하지만 지금 다시 보니 굳이 그것을 염려하지 않아도 될 듯 싶었다. 아직 창현의 나이는 어리지 않은가? 전력질주를 하다가 고꾸라질 수 있는 것이고, 그 역경을 다시 딛고 일어나는 것도 필요한 법이다.

물론 이것은 안 좋게 되었을 경우의 이야기고, 창현의 의지와 재능이라면 충분히 잘해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이 들었다. 드라마가 그에게 가져다주는 경험은 가수로서 겪었던 것들과 판이하게 달랐을 것이니 말이다. 그러한 경험들이 나중에 창현에게 살이 되고 뼈가 될 것이다. 자세히 아는 것은 아니지만 무언가를 창작할 때 자신의 경험이 녹아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어릴 때는 우선 무엇이든 경험을 해보는 것이 좋았다.

그런 면에서 김지환 감독은 믿을 수 있는 인물이니 배우로서 경험을 쌓는 것은 나쁘지 않을 것이다.

석규가 진지한 표정을 지으면서 창현에게 입을 열었다.

“한 가지 충고를 하도록 하마. 기분 나쁘게 듣지는 말고.”

“무슨 말씀인데요?”

진지한 석규의 모습을 보면서 창현이 긴장한 표정으로 묻는다.

그러자 석규가 창현에게 충고를 하기 시작했다.

“가요계에 있어서 네 위치는 정상급이지만 연기자에 있어서는 신입이다. 그런 만큼 감독의 지시에, 작가의 지시에 잘 따라야 한다. 가수로서의 네 프라이드가 적용되어서는 안 돼. 물론 그렇다고 무작정 따라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네 주관이 있어야 하니까. 하지만 중요한 건 네 기분에 좌우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이것도 너를 믿으니까 하는 이야기야.”

“그 점은 염려하지 마세요. 저도 연기자로서는 초보인 걸 알고 있으니까요.”

이미 숙지하고 있는 것이었지만 석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는 창현이었다. 자신도 알고 있지만 석규에게 들으니 다시 한 번 되새길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그래. 믿음직스럽구나. 아참! 그러고 보니, 후후후!”

창현의 의젓한 모습에 미소를 짓던 석규가 무언가 생각이 난 듯 돌연 음산한 웃음을 짓는다.

“왜 그러시는 건데요?”

그 모습을 확인한 창현이 흠칫하면서 묻자, 석규가 여전히 미소를 지은 채 창현에게 말한다.

“너 그거 알고 있느냐?”

“뭐, 뭘요?”

마치 ‘네가 모르는 걸 난 알고 있다!’ 라는 식의 모습에 창현이 불안함을 느끼면서 묻는다.

그러자 석규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더욱 짙어지며 말한다.

“드라마 흐름을 보니 말이다. 아마 키스신이 있을 것 같던데 말이다?”

“예? 키, 키스신이요?”

석규의 말에 순간 놀라며 되묻는다.

그러고 보니 자신이 잊고 있던 게 있었다. 사랑을 하는 드라마를 촬영하면 보통 주연 배우들 간의 키스신이 있지 않은가? 당연히 창현이 촬영하는 드라마도 그 요소를 빼놓을 수 없는 만큼 키스신은 당연히 존재한다.

“국민여동생과 키스신이라니, 내 아들이지만 참 대단하구나.”

“그게 대단한 건가요?”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되묻는 창현에게 석규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다.

“당연하고 말고! 그럼 너는 대단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거냐?”

“글쎄요. 그걸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뭐, 그 부분이야 차근차근 촬영을 하다 보면 알게 되겠지. 갑자기 생각이 나서 언급을 한 것뿐이다. 하다가 좋다고 계속해서 NG를 내면 안 된다? 아니, 이참에 내가 김 감독에게 말해서 그 부분 계속 NG 나게 해달라고 할까?”

아주 아들이 키스신을 찍을 수도 있다는데 그 부분의 불씨를 더욱 키워주는 석규였다.

이런 상황에서 좋아해야 하는 건가, 아니면 싫어해야 하는 건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혼란스러운 창현이었다.

그러다가 싱글벙글한 석규의 얼굴을 본 창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진지했다가 장난스러웠다가. 변덕이 죽 끓듯 이리저리 이동하는 지…….

석규는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참으로 사람을 곤란하게 만드는데 재주가 있다.


드라마 ost에 관련된 것과 드라마에 관련된 사항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창현은 남은 이틀 동안 본격적으로 드라마 ost를 구상하는 것과 연기수업에 박차를 가했다.

특히 드라마 ost 같은 경우 첫 스타트를 끊을 가수가 정해지자 작업이 빠르게 이루어졌다.

그러다가 문제가 발생했다.

곡을 만들다 보니 이리저리 욕심을 부렸는데 노래 분량이 너무 많아진 것이다.

창현은 완성된 노래를 보면서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이걸 어떻게 한다.”

이틀이라는 빠른 시간 동안 작곡과 작사를 완료하고, 가녹음까지 완료한 창현은 노래를 듣고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노래를 완성하기는 했는데 그 분량이 너무나 많았던 것이다.

우선 필요 없는 부분을 잘라냈는데 그 분량이 5분이 넘어갔다. 요즘 노래들이 짧게는 3분에서 많으면 4분대인 걸 감안하면 5분이라는 것은 무척 긴 노래에 속했다. 창현이 잘라낸 부분들을 합치고 살을 보태면 능히 두 개의 곡으로 분리가 될 만큼 말이다.

“잘라낼까?”

두 개로 잘라내더라도 자신의 능력이라면 3분대 중반 노래로 만들 수 있다. 하지만 두 개가 되면 수연이 두 개의 노래를 불러야 한다는 점이다. 그 부분이 신경 쓰이는 요소였다.

“일단 이대로 놔두도록 해야겠군.”

당장 조치를 취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 오늘 드라마 촬영이 있었기에 지금 주력해야 하는 것은 드라마 대본을 숙지하는 것이었던 것이다.

첫 촬영이니 만큼 무척 낯선 상황이 닥칠 것임이 분명했다. 그런 상황에서 어영부영한다면 자신의 이미지가 나빠질 수도 있었기에 일단 확실하게 드라마 대본을 숙지하는 것이 중요했다.

이미 드라마 대본을 완벽하게 외운 상황이었지만 첫 촬영을 앞에 두고 있는 만큼 불안한 마음이 무척 컸다.

“애드리브가 문제인데.”

드라마 촬영을 함에 있어 대본을 완벽하게 숙지한다고 해도 애드리브가 빛을 발해야 진짜 연기가 맛깔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창현이 가장 염려하는 것은 바로 애드리브였다. 드라마를 더욱 빛내주는 요소인 만큼 창현도 어떤 형식으로든 애드리브를 해야 하는데 그것은 경험이 축적되어야만 가능한 것이기에 그렇다.

근영이 나이가 어림에도 불구하고 연기력 논란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어린 나이부터 꾸준히 연기력을 다져왔고, 상황에 맞추어 빛나는 애드리브를 할 수 있었기에 그렇다.

연기력은 자신이 배역에 몰두하면 충분히 소화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애드리브가 부족할 경우 필연적으로 연기력 논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상대방 배우고 종종 이끌어주는 경우도 있다고 하는데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는 것은 창현의 성미에 맞지 않는 일이다.

“일단 어떤 식으로 하는지 봐야지. 그 점만 극복할 수 있다면 괜찮을 텐데, 후우!”

한숨을 내쉬며 이리저리 고개를 젓는 창현이었다. 첫술에 배부를 수 없는 법이지만 첫술에 배부를 수 있다면 좋지 않은가? 그렇기에 연습에 연습을 해왔지만 그것만으로는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는 사이 어느덧 촬영장을 향해 떠나야 할 시간이 되었다. 세희가 녹음실 앞에 도착했다고 연락을 보낸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선 창현은 흐트러진 옷차림을 정돈하고는 녹음실을 나선다.

녹음실 앞이 아닌 조금 떨어진 곳 마트에 벤이 자리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창현의 녹음실 위치가 철저하게 비밀로 부쳐진 만큼 녹음실 앞에 벤을 주차하다가는 금방 위치가 발각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 그렇다.

뒷문으로 돌아서 살짝 접근한 창현이 곧장 벤에 탑승한다.

“안녕하세요.”

창현의 인사에 로드 매니저와 세희가 반갑게 맞아준다.

“그래, 오늘 첫 촬영이니까 열심히 해보자.”

“물론이죠.”

“그런데 별로 긴장하는 기색이 아니네?”

세희가 창현의 얼굴을 살피더니 살짝 실망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그러자 창현은 피식 웃음을 짓더니 대답한다.

“무척 긴장한 상황이에요. 그런데 왜 실망한 표정을 지어요? 제가 긴장하지 않은 것 같으니까 실망한 거예요?”

“당연히 실망스러울 수밖에 없지. 웬만한 배우들도 촬영을 하게 되면 긴장을 하니까. 그런데 너는 별로 긴장한 표정도 하지 않아서 실망스러워.”

아무래도 연극영화과를 졸업했으니 그쪽으로는 경험이 풍부한 세희였다.

세희의 말에 창현은 자신의 얼굴을 가리키고는 말한다.

“긴장한 거라니까요? 단지 얼굴에 표가 잘 나지 않을 뿐이에요.”

“그래? 에휴! 긴장했다고 하니 알긴 하겠는데 그렇게 기복이 없으면 매력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어떻게 평소에는 장난기 넘치고 그러는 게 초등학생 같은데 일을 할 때는 애늙은이게 되는 거야? 너 자체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지정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야.”

그렇게 말을 했지만 창현의 경우가 최고의 모습이라는 것을 아는 세희였다. 평소에는 친근감이 드는 모습을 보이고, 일을 할 때는 프로다운 모습을 보이는 것. 이것이 얼마나 힘든지 모르는 사람은 언급도 할 수 없다.

그걸 알기에 세희의 말에는 감탄의 의미가 담겨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감정 컨트롤을 열일곱 살이 할 수 있다니. 정말 세계 7대 불가사의에 넣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란 게 세희의 생각이었다.

“세계 7대 불가사의라니 영광인데요? 그렇다고 진짜 그렇게 될 생각은 없지만요.”

“넌 이미 존재 자체가 불가사의야. 내가 보기에는 외계인인 것 같아.”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창현과 세희가 그렇게 투닥거리는 사이 벤은 본격적으로 촬영장을 향해 가기 시작했다.

처음 촬영하는 곳은 고등학교였는데, 그곳에서 촬영을 하고 세트장으로 이동하여 촬영을 하면 오늘 촬영은 끝이 난다.

창현이 촬영하기로 한 학교에 도착하자 학생들이 우글우글거리는 것이 눈에 보였다.

멀찍이 떨어져서 안으로 진입하는 벤을 보던 학생들이 뒤따라오기 시작한다.

썬팅이 되어 밖에서 안을 볼 수 없었지만 학생들은 커다란 벤에 탑승한 사람이라면 필시 범상치 않은 사람이 타고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하고 있나보다.

“이거 위험한 거 아닌가요?”

아무래도 연예인을 볼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인지 학생들의 기세가 심상치 않아보였다.

염려스러운 어조로 창현이 말을 하자, 세희가 고개를 저으며 말한다.

“괜찮아. 철저하게 준비를 했다고 하니까 괜찮을 거야.”

그렇게 말을 했지만 세희도 불안한 표정이었다. 자칫 학생들의 눈이 뒤집혀 난리를 치게 된다면 뒷일은 어떻게 될지 상상도 하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학교 안으로 들어선 벤은 곧장 지하주차장으로 향했다. 이곳부터는 학생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출입금지가 되어 있는 곳이다.

“아하, 이런 구조였구나.”

지하주차장에서 내린 창현은 대충 감을 잡은 듯 고개를 끄덕인다. 지하주차장에 곧장 연결된 건물로 올라가면 드라마 제작 측에서 빌린 교실이 있는데, 그곳은 학생들이 건너편 건물에서만 볼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이렇게 되면 학생들이 들어올 수 없고 멀리서만 구경을 할 수 있다.

그렇게 지하주차장에서 내린 창현이 위층으로 올라올 때, 잠겨있는 유리문 밖으로 수많은 학생들이 있는 것이 보였다.

벤이 방금 들어가서 연예인이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 기대하던 학생들은 창현이 모습을 드러내자 거대한 함성을 지르기 시작한다.

꺄아아아아아! 현이다, 현!

여학생들은 그야 말로 자지러지는 듯 소리를 질렀다. 단순히 외모뿐만 아니라 노래 실력은 그야 말로 천상의 그것! 게다가 천의 매력을 지닌 현을 실물로 본다는 것 하나만으로 가슴이 터질 것 같은 희열을 느껴야만 했다.

게다가 직접 보게 되니 카메라 빨이 아닌, 실물이 더 대단하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여학생들 모두 몽롱한 표정을 지은 채 창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남학생들도 질투어린 시선을 보낼 법 하건만 질투보다는 세계적인 업적을 남긴 가수를 본다는 것에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창현아, 인사 한 번 해줘.”

너무 과도한 반응에 창현도 약간 머쓱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옆에서 세희가 언질을 주었다.

그러자 창현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이더니 학생들이 있는 곳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꺄아아아아!

그러자 다시 한 번 자지러지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촬영장으로 올라가 감독과 스태프들에게 인사를 해야 했기에 서둘러 촬영장으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현입니다.”

촬영장에 도착한 창현은 김지환 감독을 시작으로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연기자로서 첫 걸음을 내딛는 것이니 만큼 예의바른 모습을 보이고 싶은 욕심이 강했다.

“그래, 마침내 첫 촬영이 되었군. 좋은 연기 보여주도록 해.”

격려가 담긴 김지환 감독의 말에 창현은 빙긋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물론이에요.”

첫 촬영인 만큼 주요 인물들 역할을 맡은 배우들만 나온 상황이었다. 창현이 가장 먼저 씬을 촬영하기에 가장 먼저 도착한 상황이었다.

창현이 김지환 감독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한 가지 물어볼 게 있는데요.”

“응? 뭔데? 말해봐.”

김지환 감독이 말해보라는 듯 눈짓을 주자 창현이 말했다.

“제가 연기자로서 애드리브가 없다고 해도 무방한데 이걸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다른 감독이었다면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김지환 감독은 석규의 후배였고, 자신이 잘 되야 드라마가 잘된다는 걸 알고 있는 만큼 진심이 담긴 조언을 해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김지환 감독은 창현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한다.

“흐음! 애드리브라. 확실히 그 점이 걸리기는 하지. 하지만 뛰기도 전에 날 수는 없지 않나? 지금 창현이 네가 해야 하는 것은 주어진 배역을 말끔하게 소화하는 거야. 우선 연기력이 입증 되야 한다는 점이지. 애드리브는 그 연기력이 밑바탕 되어야 할 수 있는 것이고. 무슨 말인지 알겠나?”

일단 연기력으로 인정을 받으라는 이야기였다.

그 말을 들은 창현은 김지환 감독이 아직 자신을 믿지 못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기야, 드라마 촬영은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부터 애드리브를 걱정하는 자신의 모습이 황당해보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자의 말은 설득력이 없다.

우선 실력을 보이고, 그러한 걱정을 할 위치에 도달해야 한다.

그 점을 깨달은 창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우선 그게 과제네요.”

“기대를 많이 하고 있으니까 멋진 연기 보여달라고. 그럼.”

격려의 의미로 창현의 어깨를 툭툭 친 김지환 감독이 몸을 돌리며 스태프들에게 이런저런 준비를 재촉하기 시작한다.

그 사이 또 다른 주연 배우 근영이 도착했다.

“안녕하세요, 조금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촬영장에 도착한 근영은 먼저 죄송하다는 말을 꺼내면서 김지환 감독을 시작으로 스태프들에게 인사를 하기 시작한다. 인지도 있는 그녀 같은 배우가 겸손하게 스태프들에게 인사하는 모습에 창현은 약간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뭐랄까, 역시 인정받는 배우는 다르다고 할까?

그렇게 인사를 마친 근영이 창현에게 다가와 인사를 한다.

“일찍 왔네? 난 길을 잘못 들었다가 학생들한테 붙잡혀 있었어.”

“지하주차장으로 바로 직진해서 오니까 전 별로 걸리지 않았어요.”

“그래? 에휴! 로드 매니저분이 1층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려고 해서 그랬나보네.”

“그럴 수도 있는 거죠, 뭐.”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을 하는 근영의 모습에 창현은 피식 웃음을 짓는다.

두 사람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 받을 때, 마침내 준비가 끝났다는 스태프의 외침이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들은 근영이 창현을 바라보면서 손을 내민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고, 파트너. 멋진 드라마 만들어보자.”

내민 손을 맡잡으며 창현이 말한다.

“최선을 다하도록 할게요. 아무래도 제가 초보자니 누나가 잘 이끌어주세요.”

“항상 자신감 넘쳐 보이더니 그런 말도 할 줄 아네?”

“이래 보여도 겸손함 빼면 시체거든요, 하하!”

“첫 촬영인데 그리 긴장한 것 같지도 않고.”

그러면서 피식 웃음을 지은 근영이 창현과 맞잡은 손을 흔든다.

“현실에서는 차였지만 드라마에서는 내 남자친구네? 잘 부탁해, 달링!”

“에?”

근영의 말을 들은 창현이 멈칫하자 근영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러는데?”

“아, 아니에요. 갑작스러운 말이어서요.”

얼버무리며 고개를 젓는 창현이었다.

하지만 근영의 말을 듣는 순간 창현은 근영을 보는 눈이 살짝 달라졌다. 그녀의 말을 듣고는 석규가 말했던 키스신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러자 방금 전까지 느껴지지 않았던 여러 가지가 느껴졌다.

특히…….

왜 이렇게 입술에 도드라지게 보이는 걸까?

자신도 결국 남자라는 동물이었던 것일까?

꿀꺽.

침을 삼키는 창현. 어째 자신도 속물에 불과하다는 것 같아서 기분이 묘했다.

잠시 후, 첫 씬 촬영을 시작하겠다는 외침을 듣자 정신을 차린 창현은 손바닥으로 뺨을 짝짝! 친 후 정신을 수습하기 시작한다.


드라마 첫 촬영은 다름 아닌 밴드 보컬로서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

첫 화 시작 내용은 국내 십대 그룹 중 하나인 한영 그룹의 회장이자, 주인공의 할아버지인 한상영 회장이 갑작스러운 사퇴를 표명함과 동시에 자신의 후계자로 숨겨졌던 손자 한지훈을 차기 회장으로 내정하는 장면이다.

그 장면을 끝으로 주인공 한지훈의 역을 맡은 창현이 모습을 드러낸다.

한지훈은 소위 말하는 엄친아로, 노래면 노래, 외모면 외모, 성적이면 성적, 삼박자를 고루 갖추고 있는 한영 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인 학생이다.

밴드부의 기타와 보컬을 맡고 있는 한지훈의 첫 등장은 밴드부실에서 연습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이 된다.

둥둥둥둥!

드라마 촬영을 위해 이름 있는 밴드를 섭외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창현 또한 실제로 선이 연결되어 있는 일렉트로닉 기타를 든 채 음을 맞춰보고 있었다.

김지환 감독은 드라마 시청률을 끌어올리기 위해 창현의 장점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창현이 다룰 수 있는 악기 종류에 대해 물어본 뒤, 시작 장면을 단순 노래만 부르는 것이 아니라,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수정을 한 상태였다.

아무래도 창현의 장점은 노래가 아닌가? 그런 만큼 밴드부의 보컬로서 노래를 부르는 장면을 종종 넣어 시청률을 끌어올리려는 속셈이었다.

이것은 드라마 시청률을 보장하기 위한 하나의 안전장치였지만 창현은 김지환 감독이 자신을 믿지 못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면서 주어진 배역을 확실하게 소화해야겠다고 생각하고는 본격적으로 연주를 시작하기 시작한다.

틱틱틱틱!

드럼의 스틱 소리에 맞추어 연주를 시작했다.

기타와 베이스, 키보드와 드럼이 어우러지는 연주는 지금 라이브 공연을 보는 것이라고 해도 다를 바가 없을 정도로 생생한 소리를 전달하고 있었다.

“…….”

특히 사람들은 창현이 기타를 연주하는 걸 보고는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칠 수 있는 것이 피아노인 걸로만 알았는데 일렉트로닉 기타도 그에 못지않게 잘 치고 있던 것이다. 현란하게 움직이는 소리와 함께 오늘 처음 다룬 기타를 마치 자신의 것처럼 능숙하게 다루는 모습에 사람들은 서서히 빠져드는 것을 느꼈다.

솔로로 치고 나오면서 기타 연주와 노래를 부르는 모습은 섭외한 밴드 사람들도 놀라서 바라볼 정도로 대단한 기교를 보이고 있었다.

둥!

그러다가 연주는 갑자기 멈추게 된다. 누군가가 밴드부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모처럼 좋게 연주가 되던 것이 끊기자 창현이 살짝 표정을 찡그리며 앞을 바라본다. 그것이 연기이건만 지켜보던 김지환 감독이나 스태프들 모두 아쉬운 기색을 띤다. 그 정도로 좋은 연주가 끊긴 것에 아쉬움을 느꼈던 것이다.

창현이 밴드부 안으로 들어온 사람한테 묻는다.

“무슨 일로 찾아온 겁니까?”

“아, 아니. 그게 그러니까… 한지훈 널 찾는 사람이 있어서…….”

평범한 학생 역할을 맡은 엑스트라 배우는 창현의 날카로운 눈빛을 받고는 한순간 압도되어 흠칫하고는 말을 더듬으며 말을 한다.

본래는 놀란 표정을 띤 채 말을 하면 되지만 창현의 눈빛에 압도당한 탓에 말을 더듬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지금 상황에 더 잘 어울리는 듯하였다.

“찾는 사람? 누구지?”

“그게… 외부 사람인 것 같아서 잘 모르겠는데…….”

한순간 창현에게 압도되어 자신이 말을 더듬었다는 걸 깨달았는지 엑스트라 배우가 정신을 되찾고는 대사를 해나간다.

그 말을 들은 창현이 아쉬운 표정을 짓다가 기타를 내려놓으며 동료들에게 말한다.

“난 찾아온 사람들을 만나고 올 테니까 연습하고 있어. 알겠지?”

“…….”

창현의 말을 들은 밴드 멤버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특별한 대사 없이 그 행동만 하는 것인데 창현이 분위기와 대사를 적절하게 조화시켰기에 분위기에 잘 어울리는 장면이 나왔다.

‘호오!’

그 장면을 지켜보던 김지환 감독은 속으로 감탄사를 터뜨렸다. 예의바른 모습을 보여 부드러운 이미지로 보이던 창현이 다른 사람을 카리스마 넘치게 대하는 것이 흥미로우면서 한편으로는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밴드 멤버들에게 말을 한 뒤 창현이 밴드부실을 나서자 김지환 감독이 외친다.

“컷! 거기까지!”

김지환 감독의 외침을 들은 창현의 시선이 그에게 향한다.

그 시선을 받은 김지환 감독이 창현에게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말한다.

“잘했어. 첫 촬영에 NG를 내지 않다니, 제법 연습을 열심히 했군.”

“부끄럽지 않기 위해 열심히 했는데 인정을 받으니 기분이 좋네요.”

살짝 웃음을 지으며 말을 하는 창현의 모습이 영락없는 평상시 분위기였다. 방금 전 타인을 압도하던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김지환 감독은 그런 창현의 말에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열심히 연습했다니 좋군. 첫 장면은 성공적으로 해냈으니 두 번째 장면으로 촬영 들어간다. 준비하도록 해.”

“네!”

설마 이렇게 빠르게 첫 장면이 끝날 줄 몰랐던 스태프들은 한동안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다가 김지환 감독의 외침에 일시분란하게 흩어져서 다음 장면 촬영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그도 그럴 것이 드라마의 첫 장면은 드라마의 절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중요한 이미지를 준다. 그렇기에 김지환 감독은 초반 시청률을 단단히 고정 시키기 위해 다소 욕을 먹더라도 창현의 라이브 장면과 기타 연주 장면을 넣어 붙잡아두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 말고도 순간적인 창현의 연기력을 확인할 수 있었으니 어느 정도 마음이 놓였다. 단편적이지만 결코 부족한 연기력이 아니라는 걸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라면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창현이 성공적으로 촬영을 끝내자 근영이 다가오면서 칭찬을 한다.

“너 정말 대단한데? 드라마 촬영 처음인 거 맞지?”

그녀도 창현의 연기력에 어지간히 놀란 듯하다. 김지환 감독과 같은 방향에서 보던 그녀는 순간 창현의 시선을 볼 수 있었는데 압도당했다고 느낄 정도로 강렬한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기에 창현의 연기 경험이 결코 짧다고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에게 들린 창현의 대답은 정반대였다.

“맞아요. 뮤직비디오나 CF 같은 건 촬영해봤지만 드라마는 처음이에요.”

“정말이야? 하기야… 그렇겠네.”

창현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고 말을 하려던 근영은 문득 그의 외모가 결코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자각하고는 나직이 고개를 끄덕인다. 낭중지추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창현과 같은 외모의 소유자가 드라마 촬영을 했더라면 비중이 없는 조연이었더라도 상당한 이슈가 되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그걸 깨닫게 되자 놀랍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게 첫 촬영인데 이렇게 안정된 연기력을 보여주다니. 단편적이어서 어느 정도의 연기력을 보유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지만 상당한 수준을 갖추고 있다는 것은 파악할 수 있었다.

창현은 놀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근영의 모습에 어깨를 으쓱한다.

“제가 그 정도로 잘한 거예요? 하기야, 제가 좀 뛰어나죠.”

이름값으로 주연을 차지한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실력이 있어서 주연을 차지한 것이라 생각하던 근영은 창현의 자화자찬에 입을 떡 벌리며 묻는다.

“헐! 정말 스스로가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정말?”

“그럼 제가 연기를 못한 거예요?”

“아니, 그것도 아니지만…….”

말끝을 흐리는 것은 아직 본격적인 연기를 보지 않았기에 하는 말이었다.

근영의 말을 들은 창현이 피식 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아니면 잘한다는 거잖아요. 제가 원래 좀 한다니까요. 후후!

“어휴! 못 말려. 너 알고 보니까 완전 초등학생인데? 별명으로 강초딩 어때?”

초딩이라는 말에 창현은 펄쩍 뛰었다.

내심 자신이 자부하는 것이 다른 동년배 친구들보다 성숙하다는 점인데 무려 다섯 살 이상 차이가 나는 초등학생 같다는 소리를 듣다니! 말도 안 되는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제가 왜 초딩이에요! 저같이 배려 깊고 착한 초딩이 어디 있어요.”

“지금 네 말 자체가 초딩 같아. 앞으로 네 별명은 강초딩이야, 강초딩.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고 하니 조금 더 겸손하도록 하라고. 초딩 소리가 듣기 싫다면.”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을 하는 근영의 모습에 창현은 어깨를 으쓱한다.

“이거 장난도 제대로 못 치겠네요. 에휴!”

그래도 첫 촬영을 NG없이 무사히 치러냈기에 한시름 놓은 창현이었다.

창현은 두 번째 촬영을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두 번째 촬영은 밴드부실이 있는 곳보다 한 층 높은 3층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본래 드라마에서 두 번째 장면은 교문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우선 교실에서 촬영할 수 있는 분량을 먼저 촬영하려는 방식이었다.

세 번째 장면에 해당하는 이 장면은 창현이 맡은 한지훈이 이 드라마의 여주인공 최예린 역을 맡은 근영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었다.

창현이 근영을 슬쩍 보면서 대사를 한다.

“야, 넌 또 왜 내 책상에 있는 거야? 귀찮게.”

한지훈은 엄친아의 능력을 지니고 있었기에 무척 까칠한 성격이었다.

그에 반해 최예린은 무척 착한 성격과 함께 모범생적인 이미지가 강한 학생이었다. 그녀는 학교 내에서 인기가 많은 한지훈을 무척 어려워하지만 한편으로는 사사건건 충돌하고는 한다.

근영이 창현의 말을 듣고는 다소 움츠러든 기색을 띠며 말한다.

“여, 여기가 왜 네 책상이야. 전에도 말했지만 내 책상이라고.”

그 말에 창현이 갖잖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전에 말했지? 내 자리는 항상 창문가 제일 뒤라니까? 선생님이 그렇게 정해줬다고 해도 이미 내가 낙점을 했으면 바꾸면 되는 거야. 너 범생이잖아? 너 좋으라고 제일 앞자리를 양보해주겠다는데 왜 자꾸 귀찮게 그러는 거야?”

상황은 창가가 자리하고 있는 제일 뒷자리를 한지훈이 강제로 빼앗고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최예린 또한 조용히 선생님의 설명을 들을 수 있으면서 간간히 창밖을 내다볼 수 있는 이 자리를 결코 쉽게 양보하려 들지 않았다.

한동안 실랑이가 이루어지다가 종소리가 들리고, 선생님이 온다는 목소리가 들려오자 창현이 표정을 구기면서 말한다.

“야! 너 다음 교시까지 자리 비켜. 알았어?”

“절대 안 비킬 거야.”

결연한 표정으로 말하는 근영의 모습에 창현이 미치겠다는 듯 머리를 긁적인다.

“아오! 저걸 그냥!”

그러면서 선생님이 들어서는 걸 본 창현이 후다닥 앞자리로 향한다. 그리고는 근영을 한차례 바라보면서 위협적인 눈빛을 보낸다.

그 눈빛을 받은 근영은 어림도 없다는 듯 살짝 콧대를 세우고는 혀를 날름한다. 그 모습을 본 창현은 더욱 분한 표정을 짓는다.

“컷!”

창현이 분해하는 표정까지 촬영한 김지환 감독이 컷을 외친다. 이번에도 NG를 내지 않고 무사히 한 장면을 촬영한 것이다.

김지환 감독은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 창현에게 말한다.

“대단한데? 연기력도 무척 훌륭하고. 드라마 해본 적 없는 거 정말인가?”

그 물음에 창현은 웃음을 지으며 근영을 힐끗 보고는 말한다.

“누구와 같은 질문을 하시네요. 다시 말하지만 이번이 처음입니다. 다만 열심히 연습을 했죠. 그 성과가 발휘되는 것 같아 기쁘네요.”

“이 정도면 연기력 논란은 나오지 않을 거야. 좋아, 계속해서 이 여세를 몰아나가자고.”

예상을 웃도는 창현의 연기력 때문일까?

김지환 감독은 무척 밝은 표정을 지은 채 말을 하고 있었고, 스태프들 또한 이 정도까지 할 줄은 몰랐다고 속삭이면서 감탄을 연발하고 있었다.

그런 창현에게 근영이 다가오면서 말한다.

“너 연기 진짜 잘하는데?”

“그래요? 누나가 그렇게 말해줄 정도면 정말 괜찮다는 건데. 고맙네요. 후후!”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자화자찬을 하는 창현에게 근영이 말한다.

“약간 부족한 점이 있지만 그건 경험이 쌓이면 자연스레 해결될 거라 생각해. 네가 캐릭터를 맛깔나게 표현해서 그런지 한 대 때려주고 싶더라니까?”

“컥! 때려주고 싶더라고요?”

웃음을 짓다가 목이 막힌 창현이 컥컥거리며 말한다. 자신이 표현한 건 여자에게 까칠하면서 한편으로는 미워할 수밖에 없는 나쁜 남자를 연기하는 것이다. 그런데 때리고 싶은 느낌이 들 정도라면 잘 표현한 것이 아니라는 뜻 아닌가?

그런 창현의 염려를 알아차렸는지 근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세하게 말한다.다.

“여자들은 나쁜 남자를 좋아할지 모르지만 난 별로더라고. 까칠하게 굴어서 실제 상황이었으면 주먹으로 때렸을 거야.”

“아, 누나가 싫어해서 그러는 거였군요. 난 또 뭐가 잘못된 줄 알았네.”

창현이 한시름 놓인 표정을 짓자 근영이 묘한 웃음을 짓더니 말한다.

“그런데 연기가 보통이 아닌 걸 보면 실제 성격이랑 비슷한가봐? 실제 성격도 나쁜 남자인 거야? 여자를 울리는?”

묘한 표정과 묘한 웃음이 거슬리게 만든다. 특히 마지막 말이 더욱 가슴에 걸렸다. 여자를 울라다니! 누굴 바람둥이로 만드는 말이란 말인가!

창현은 인상을 팍 일그러뜨리더니 말한다.

“제가 무슨 나쁜 남자에요. 전혀 다르거든요? 행여나 그렇게 생각할 생각은 꿈에도 꾸지 말아요.”

“알았어. 아니면 됐지, 왜 그렇게 과민반응을 해. 설마 찔리는 점이라도 있는 건 아니겠지?”

“아니라니까요.”

“알았어.”

펄쩍 뛰며 말을 하는 창현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이는 근영이었다. 하지만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그의 연기를 떠올리고는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핏 보기에는 그렇지 않을 테지만 누가 알겠어? 나 여자 하나 사귀어보지 않았어요, 라는 얼굴을 하고 실제로는 속 앓이를 하는 여자들을 양산하고 있을지? 때로는 그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라는 얼굴이 다른 사람을 더 괴롭게 할 때가 있다고.’

얼굴은 동안이지만 세월을 헛산 것은 아니었다.

창현의 주변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해내는 근영이었다.

어쨌든 창현의 연기력이 일정 수준 이상이라는 것을 깨달은 근영은 앞으로 촬영이 흥미진진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감정이 담긴 창현의 연기는 상대 연기자의 감정을 움직이는 묘한 힘이 있다는 것을 그녀는 느낀 것이다.

앞으로의 촬영을 기대하게 만드는 힘이 창현에게 있었다.

묘한 기대감에 근영은 입가에 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교내에서의 촬영을 순조롭게 끝마칠 수 있었다.


교내 촬영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교외 촬영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전에 촬영할 장면이 더 남아 있었다. 바로 교문에서의 촬영이었다.

드라마 두 번째 장면에 해당하는 이 촬영은 주인공인 한지훈과 한영 그룹의 회장인 한상영이 보낸 수행비서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었다.

여기서 한상영의 비서 중 수석비서 역을 맡은 사람이 바로 김승우였다.

촬영 전에 짤막하게 인사를 나눈 두 사람은 본격적으로 촬영을 위해 준비를 하기 시작한다.

창현이 교문으로 나오자, 승우가 다가온다.

그리고는 창현을 보더니 묻는다.

“한영 고등학교 3학년 2반 한지훈 학생인가?”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 자신의 정체를 단번에 알아차리자 창현이 경계어린 표정을 지으면서 묻는다.

“그렇습니다만 누구시죠?”

“나는 한지훈 학생의 할아버지가 되는 분을 모시는 차명후라고 한다. 수석비서의 역할을 맡고 있지.”

그러면서 승우가 창현에게 명함을 내민다.

그 명함을 받아든 창현이 승우의 정체를 확인하고는 묘한 표정을 짓는다.

“저한테 할아버지가 없습니다만? 그리고 한영 그룹이라… 수석비서라는 것은 한영 그룹의 회장님을 모시고 있단 이야기로군요?”

“맞다. 한지훈 학생의 할아버지가 바로 한영 그룹의 회장인 한상영 회장님이시다.”

“내 할아버지가 한영 그룹의 회장?”

승우의 말을 들은 창현이 기괴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더니 처음에는 표정을 일그러뜨리다가 이내 입가에 묘한 미소를 짓는다.

여기에서 연기의 관건은 혼란스러움을 느끼다가 차츰 강력한 권력이 자신에게 주어진다는 것을 자각하면서 그 감정의 변화를 표정에 드러내야 한다는 점이었다.

창현의 표정 연기를 보면서 승우는 이 녀석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처음에는 갑작스러운 할아버지의 등장으로 혼란스러움을 느끼다가 이내, 자신의 할아버지가 국내 십대 기업 중 하나인 한영 그룹의 회장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자신에게 떨어질 것들을 계산하는 모습이 생상하게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한영 그룹의 회장님이라… 이거 묘한 상황이군요. 자세한 사정을 설명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서 이내 담담한 모습을 보이는 것까지.

연기 하나하나가 정말 만만치 않다고 느끼면서 승우가 침착하게 설명을 해주기 시작한다.

그리고 자신이 한영 그룹의 임시 회장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창현이 눈을 번뜩이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회장이라… 국내 십대 기업의 회장? 좋습니다. 제가 그 자리를 맡도록 하지요.”

젊은 패기가 그대로 느껴지는 젊은 사자의 포효였다.

그 모습을 보면서 승우는 한영 그룹의 회장이 젊었을 시절이 투영되는 것이 보이는 걸 그대로 연기해낸다. 그리고 그 장면의 촬영이 끝을 맺었다.

“컷!”

짝짝짝!

김지환 감독의 소리가 들리면서 촬영이 종료되자 스태프들이 감탄 어린 표정으로 박수를 치기 시작한다. 얼굴에 드러난 감정 처리가 그야 말로 예술에 가까웠던 것이다.

승우도 감탄 어린 표정으로 창현에게 다가온다. 그리고는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면서 말한다.

“너 연기 정말 잘하는데? 가수였던 거 맞지?”

자신을 칭찬하는 승우의 모습에 창현이 웃음을 지으면서 감사의 인사를 표한다.

“하하! 가수 맞습니다. 예쁘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야, 내가 예쁘게 본다고 이렇게 칭찬을 할 것 같아? 감정 처리가 생생하게 살아있는 모습이 아주 예술이었다. 이거 멋진 작품이 나올 것 같은 예감이 드는 걸? 잘해보자고.”

“네, 물론입니다. 잘해서 좋은 드라마 만들어야죠.”

그러면서 승우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창현이었다. 그리고는 세트장에서 촬영을 해야 하는 승우가 먼저 이동을 하였고, 창현은 남은 촬영을 하기 위해 학교에 남아 있었다.

학생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넓게 출입금지를 해놓은 상황이지만 그 반경에 수많은 학생들이 우글우글거리고 있었다. 그리고는 연신 핸드폰으로 창현의 모습을 담으면서 촬영하기에 바빴다.

창현은 그런 학생들에게 입가에 미소를 지어보이면서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인다.

그러던 중 마지막 장면을 촬영할 윤아가 도착했다.

급히 스케줄을 하고 온 상황이었기에 윤아는 스태프들에게 죄송하다고 하면서 창현과 인사를 할 순간도 없이 곧장 촬영 준비에 들어가기 시작한다.

드라마 중 주인공인 한지훈을 사랑하는 역할의 백은설 역이 바로 윤아였다. 드라마 1화에서는 나오지 않지만 2화 분량을 미리 촬영하기 위해 온 것이다. 아무래도 학교에서 촬영하는 것이 학교의 협력을 구해야 하고 여러 가지 번거로운 점이 많은 만큼 학교를 배경으로 하는 촬영은 가급적 몰아서 한 번에 끝내려는 생각이었다.

직접 인사 나눌 시간도 없이 가볍게 눈인사만 한 두 사람이 본격적으로 촬영에 들어갈 준비를 한다.

그러면서 윤아는 촬영장의 분위기가 무언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이건 내가 알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데?’

드라마를 촬영할 때 감독과 스태프들은 보통 신경이 날카로운 모습을 자주 보이고는 한다. NG가 나게 되면 배우들도 힘들지만 보조하는 스태프들이나 감독도 짜증을 내기 때문이다.

자신이 늦게 왔기에 그렇지만 이미 상당량의 촬영이 이루어졌을 텐데 감독과 스태프들의 얼굴에는 짜증이 서려 있지 않았다.

무언가 의아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럴 겨를도 없이 윤아는 곧장 촬영에 들어가야만 했다. 예정보다 늦은 상황이었기에 한숨 돌릴 시간도 없었다. 그래도 차 안에서 대본을 끊임없이 확인하고 연습을 한 상황이었기에 잘 해낼 자신이 있었다.

‘창현이랑 인사를 하지 못했지만 어쩔 수 없지.’

NG없이 성공적으로 촬영을 한 뒤에 인사를 하기로 생각하면서 윤아는 본격적인 촬영을 준비한다.

윤아가 맡은 백은설은 한영 그룹과 맞먹는 국내 십대 기업 중 한 곳의 영양으로서, 한영 그룹의 후계자가 된 한지훈과 정혼으로 맺어진 사이였다. 그녀는 한지훈이 한영 그룹의 후계자가 되었다는 소식에 자신의 약혼자가 될 그가 누구인지 살펴보고, 어떤 인물인가 평가를 내리는 장면이었다. 처음에는 도도한 모습을 보이다가 이내 한지훈의 매력에 빠져들고 모든 것을 다 해줄 듯한 지고지순한 모습을 보인다. 그러다가 그녀가 최예린과 사랑하는 사이라는 것을 알게 된 드라마 중반 이후에는 질투심에 사로잡힌 질투의 화신이 되어야 한다.

우선 소화해내야 할 배역은 도도한 모습이라는 점이다.

한눈에 보아도 상류 계층이 입을 법한 옷을 차려입은 윤아가 고급스러운 차에서 내린다. 그리고는 하교를 하는 학생들 중 창현을 알아보고는 말을 건다.

“혹시 네가 한지훈?”

평상시처럼 학교를 벗어나 집으로 향하려던 창현이 멈칫하면서 윤아를 바라보더니 입을 연다.

“그런데? 무슨 용무지? 너도 한영 그룹이냐?”

이미 1화에서 승우와 만났었기에 그 점을 떠올리며 묻는 창현이었다.

그에 윤아가 고개를 살짝 젓더니 말한다.

“아니, 나는 은영 그룹의 백은설이라고 하는데?”

“은영 그룹 내에서의 위치는?”

창현의 물음에 윤아가 망설임 없이 대답한다.

“후계자 1순위랄까?”

“그래? 은영 그룹이라면 국내 십대 그룹이군. 갑자기 십대 그룹 중 주축 멤버들을 왜 이렇게 자주 보게 되는 거지? 이것도 복이라면 복이군. 그래서 무슨 일로 찾아온 거지? 은영 그룹에서 나한테 볼 일이 없을 텐데?”

당당한 창현의 말에 윤아가 대답한다.

“널 찾아온 이유는 간단해.”

“무슨 이유 때문이지?”

“네가 내 약혼자니까. 이 정도면 찾아올 이유가 충분하지 않을까?”

윤아의 말을 들은 창현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린다. 어제는 자신을 찾아오더니 국내 십대 그룹 중 하나인 한영 그룹의 후계자라 언질을 주더니 오늘은 다른 십대 그룹 중 은영 그룹의 후계자가 자신에게 와서 자신의 약혼녀라고 하지 않은가? 충분히 우스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약혼자? 내가? 하아! 참 재미있군. 평생 겪어보지 못한 일들을 어제 오늘 다 겪고 있어.”

그리고는 창현이 윤아에게 다가온다. 불과 50cm도 벌어지지 않은 적은 공간을 두고 두 사람이 마주선다.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간격이었다.

윤아는 창현이 이렇게 가까이 다가오자 점점 긴장이 되는 걸 느꼈다. 연기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창현이 이렇게 다가오는 것 자체는 <가면의 기사> 뮤직비디오 촬영을 할 때 이후 처음이었던 것이다.

그녀에게 다가간 창현이 손을 뻗어 윤아의 턱을 살짝 받친다. 그리고는 그녀의 몸 전체를 훑어보면서 말한다.

“얼굴은 예쁘고 몸매도 어느 정도 되는군. 내 약혼녀로서 충분히 자격이 있어. 하지만 부족… 어?”

대사를 하던 창현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흘렸다.

창현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윤아가 놀라 움찔 뒤로 물러났던 것이다.

“NG!"

그러자 김지환 감독의 입에서 NG가 터져 나왔다.

윤아는 그것이 자신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황급히 사과하기 시작한다.

“죄송합니다, 제가 그만 실수를…….”

“잘 나오고 있는 장면이었는데…….”

김지환 감독은 윤아에게 아쉬운 감정을 털어놓으려다가 멈칫했다. 배우가 NG를 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좋은 장면이 나올 수 있었다고 하여 배우를 타박하는 것은 옳지 않다. 수십 번 NG를 낸 것도 아니고 고작 한 번 NG를 낸 것이었으니 말이다.

윤아가 재차 사과를 하려고 할 때 창현이 손을 들어 그녀를 제지하였다. 그리고는 김지환 감독과 스태프들에게 고개를 숙여 사과를 하였다.

“아니에요. 제가 실수를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주제가 넘었어요.”

사실 창현이 대본에 따른 것은 윤아에게 다가간 뒤 그녀를 훑어보고는 대사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배역에 심취한 창현이 손을 뻗어 윤아의 턱을 살짝 치켜든 것이 문제였다. 예상 외의 행동을 하니 윤아가 놀라서 그만 뒤로 물러나버렸으니 말이다.

김지환 감독은 창현의 사과에 고개를 저으면서 말한다.

“과하면 좋지 않지만 그 정도는 무척 좋았어. 나쁜 남자의 모습을 보여주려면 그 정도 행동은 오히려 효과를 살 수 있으니까. 다만 윤아가 놀라서 물러났을 뿐이고. 그렇지?”

“네? 네…….”

윤아가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대사 외의 행동을 창현이 갑자기 한 만큼 놀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소름이 끼칠 정도로 배역에 몰입한 창현의 모습에 흠칫한 것도 있었다.

그녀는 창현이 잘못한 것이 아닌,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알았지만 사과를 하는 창현의 모습을 제지할 수 없었다. 그만큼 창현의 연기에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그제야 왜 그녀는 감독과 스태프들이 놀란 눈으로 창현을 바라보고 있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상상을 뛰어넘는 연기력을 보여주고 있었으니 놀랍고, 주연 배우가 예상을 뛰어넘는 가능성을 보여주었으니 기분이 좋았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윤아는 자칫 잘못하다가는 자신이 방해물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발목을 잡으면 안 돼.’

그리고는 굳게 다짐을 한다. 최소한 방해는 하지 말자고 말이다.

그녀가 다짐을 하는 사이 연기는 다시 시작 되었다.

아까 전과 같은 대사를 한다. 그리고 약혼녀라는 말을 들은 창현이 윤아에게 다가온다. 그리고는 아까 전에 했던 것처럼 살짝 손을 들어 그녀의 턱을 치켜들며 그녀를 훑어본다.

“얼굴은 예쁘고 몸매도 어느 정도 되는군. 내 약혼녀로서 충분히 자격이 있어. 하지만 부족한 점이 있어. 그게 뭔지 알아?”

“뭐지?”

너의 약혼녀가 되기 위해서는 충분히 모든 걸 고칠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은 윤아였지만 지금은 윤아가 아닌 백은설의 역할에 충실해야 할 때였다. 그렇기에 살짝 도도한 눈빛을 띠며 창현에게 묻자, 여자가 빠져들 수밖에 없는 백만 불짜리 웃음을 슬쩍 지은 창현이 고개를 그녀에게 가까이 가져다대면서 말한다.

“넌 너무 도도해. 난 도도한 여자가 싫거든.”

흠칫!

갑작스러운 창현의 행동에 윤아가 반응을 보이면서 뒤로 한걸음 물러선다. 아까 전과 비슷한 양상이었지만 이 반응은 드라마 흐름에 있어 지극히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그런 윤아를 힐끗 본 창현이 뒤로 물러선다. 그리고는 몸을 돌리더니 손을 들며 흔들고는 말한다.

“날 약혼자로 삼고 싶으면 그 도도함부터 없애고 오도록 해. 그럼 고민을 해줄 테니 말이야. 하하!”

그러면서 창현이 멀어지기 시작한다.

“…….”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윤아는 양손을 들어 살짝 볼에 가져다 댄다. 붉어진 그녀의 얼굴이 클로즈업이 되면서 김지환 감독의 외침이 터져 나온다.

“컷! 잘했어!”

NG 났을 때보다 훌륭하게 연기를 소화해내자 김지환 감독의 입가에 만족의 미소다 서려 있었다.

그러자 몸을 돌린 채 멀어지던 창현이 입가에 슬쩍 미소를 띠고는 다가온다. 김지환 감독은 여전히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윤아를 보면서 농담조로 말한다.

“윤아야! 드라마 속에서 사랑을 한다고 정말로 사랑에 빠지면 안 돼! 알겠지?”

“네? 네.”

김지환 감독의 외침을 들은 윤아가 정신을 차리고는 대답을 한다. 그리고 이내 자신이 빠져있던 것이 현실이 아닌 드라마라는 것이 실망을 한다. 정말 드라마처럼 될 수 있다면 그럴 수 있을 텐데 현실은 그러하지 않다는 것이 아쉬웠던 것이다. 만약 이것이 현실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었다.

아쉬운 마음이 마음속을 가득 채웠지만 그것뿐이었다. 현실은 아직 멀고도 험난한 여정이 남아 있었으니까.

윤아는 서둘러 자신의 감정을 억누른 채 표정을 관리한다. 현실은 그러하지 않다 하여도 차근차근 나아가면 된다. 천리 길도 한 걸음이라 하지 않았던가. 그런 만큼 차근차근 나아가는 것이 중요했다.

‘드라마에서 나의 모습을 보면 창현이가 마음을 움직일지도 몰라. 힘을 내보자.’

속으로 각오를 다지는 윤아였다. 비록 드라마 속이지만 자신의 마음을 마음껏 내보일 수 있지 않은가? 그런 만큼 드라마와 현실을 반드시 일치 시키겠다는 굳은 각오가 그녀의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학교에서 촬영을 끝낸 드라마 팀이 본격적으로 세트장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세트장으로 자리를 옮긴 뒤 이어진 촬영도 순조롭게 진행이 되었다.

창현의 연기력이 일정 수준에 올라섰다는 것을 알게 되자 김지환 감독은 창현에게 이런저런 주문을 하면서 더욱 고급스러운 연기를 주문하였고, 그 이야기를 들은 창현은 이런 저런 방법도 있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그 지시에 성실하게 임했다. 그리고 예상을 뛰어넘는 연기력을 보여주면서 훌륭하게 촬영을 마칠 수 있었다.

짧은 시간 동안 연기수업을 받았지만 감정 몰입이 자유자재로 되는 이상 창현이 배역에 몰두하게 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미 전체적인 시나리오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고 있고, 자신이 맡은 한지훈이라는 캐릭터가 어떤 캐릭터인지 연구를 끝마친 상황이기에 그에 따른 감정몰입이 상황에 따라 자유자재로 가능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창현의 연기가 완벽한 것이 아니다.

그의 연기는 캐릭터가 살아 숨 쉬는 듯한 생동감이 있었지만 그 표현력과 연기력이 제대로 일치를 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 배역이 실제로 살아 숨 쉬는 듯한 모습을 연출하는 것은 분명 대단하다고 할 수 있으니 어디까지나 한지훈이라는 캐릭터를 현이란 인물이 연기를 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실제 살아 있는 듯한 생동감이 들었지만 무언가 약간 모자란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물론 이것은 연기 경험이 풍족한 배우들이나 감독인 김지환 감독에게나 보이는 단점이었다. 일반 시청자들이 보기에는 느끼지 못하는 미세한 차이일 것이다.

그러나 한단계 올라서기 위해서는 그 미세한 차이를 극복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진정한 실력파 연기자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특히나 가수 출신인 창현 같은 경우 남들보다 더 잘해야 손해를 보지 않는 입장에 서 있다. 그런 만큼 그 벽을 넘어서는 것이 관건이라 할 수 있다.

‘지금 그걸 바라는 것은 욕심이라는 걸 알지만.’

그것이 자신의 욕심이라는 것을 김지환 감독도 알고 있다. 배역을 제대로 소화하기만 해도 감지덕지라 생각했는데 그 영역을 훨씬 뛰어넘는 역량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러니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다만 자신이 부족하다고 느낀 것은 창현이 차츰 연기 경험을 쌓아나가게 되면 자연스럽게 극복할 수 있는 사항들이었다.

성공적으로 장면의 촬영을 끝마치면 곧장 달려와 모니터를 하는 창현의 모습은 진지하게 연기에 임하는 배우들과 다를 바가 없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이 정도면 이미 훌륭한 연기자라 볼 수 있었다.

‘형님의 말이 맞았어. 창현이는 만능 엔터테이너의 자질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탁월한 연기력을 길러서 그의 재능이 비단 노래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는 거다.’

창현의 가능성을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게 되자 의욕에 불타오르는 김지환 감독이었다.

그렇게 창현은 성공적으로 촬영을 끝마칠 수 있었다.


“후우!”

촬영이 끝났다는 소리를 듣자 창현은 긴장감이 풀리는 것을 느끼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제야 끝났다는 것을 자각하자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자신의 실력이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인지 몰라 무척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던 창현이었다. 하지만 막상 촬영을 시작하자 그동안 해온 것을 성실하게 선보이면서 자신의 실력이 그리 얕지 않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노래를 부를 때 가사에 담긴 의미와 멜로디의 분위기를 파악하고 감정 몰입을 하고는 하는데, 그 감정 몰입이 드라마에서도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배역에 감정 몰두를 계속해서 해야 했기에 상당한 심력이 소모되었지만 자신이 다른 사람들 기대 이상으로 훌륭히 해냈다는 생각이 창현의 마음을 뿌듯하게 만들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아직 모자란 점이 눈에 보였지만 창현은 그답지 않게 만족의 의미를 띠었다.

처음 치고는 다른 사람들이 예상한 것보다 훨씬 뛰어난 역량을 보여주었다. 자신이 연기한 모습을 모니터 한 상황이기에 창현도 제법 괜찮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모자란 점도 눈에 보였지만 그것은 하나하나 보완해나가야 할 것들이다. 갑자기 많은 것을 먹으면 체하는 것처럼 하나하나 천천히 흡수를 해야 체하지 않고 자신의 것으로 소화해낼 수 있다.

“창현아.”

“어, 촬영 끝났어요?”

모니터도 끝낸 창현이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윤아가 그의 곁으로 다가온다.

윤아는 창현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모두 끝났어.”

“잘 됐네요. 일찍 끝난 셈이니 어느 정도 쉴 수 있겠네요?”

“응. 다행이지, 뭐야.”

창현의 말에 입가에 미소를 짓는 윤아였다. 그도 그럴 것이 드라마 촬영이 순조롭게 진행 되서 예상보다 일찍 끝난 탓에 이렇게 창현과 이야기를 할 시간이 생긴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제법 길게 될 것까지 염두에 두고 넉넉하게 시간을 비워둔 실정이기에 숙소로 돌아가 휴식을 취할 수도 있었다.

윤아가 창현을 바라보면서 감탄 섞인 어조로 말한다.

“그런데 창현이 너 연기 엄청 잘하더라. 완전 베테랑이던데?”

정말 창현의 연기력에 감탄을 금치 못한 윤아였다. 뭐랄까, 대본에 주어진대로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캐릭터가 실제로 살아 숨쉰다고 해야 할까?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렇게 연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상당한 연기력을 지니고 있다는 걸 뜻했다. 즉, 창현의 연기력이 보통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 말에 창현이 피식 웃음을 지으며 윤아에게 말한다.

“누나도 NG 별로 내지 않았잖아요? 연기가 많이 좋던데요.”

“그, 그래? 그럼 다행이지.”

의외의 칭찬에 윤아는 얼떨떨한 표정을 짓다가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사실 누가 되지 않기 위해 열심히 연기에 주력한 것도 있지만 창현의 연기를 보고 그녀는 다소 충격을 받았었다. 연기 경험이 일체 없다고 알려진 창현의 연기력이 웬만한 연기자를 상회하는 실력을 보였던 것이다.

이 얼마나 충격적이란 말인가.

그렇기에 윤아는 자신이 뒤처질 수 있다는 걸 자각했다. 그러다 보니 뒤처지는 걸 감안하더라도 발목을 붙잡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자연히 필사적일 수밖에 없었고, 그 필사적인 모습이 자신의 한계치까지 끌어올리는 결과를 낳았다.

창현에게 자극을 받아 어느 정도 보완을 한 셈이었다.

“시나리오도 괜찮고 촬영도 순조로우니 잘될 것 같은 예감이 드네요.”

“그건 나도 그렇게 생각해.”

첫 촬영부터 무척 순조롭게 잘 진행되는 걸 보면 드라마도 이대로 잘 진행될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러다 보니 창현과 윤아는 모두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드라마가 성공을 한다면 자신들로서는 부담감을 덜 수 있는 계기가 될 테니 말이다.

“아참! 그리고 말이야…….”

그 후에 윤아는 창현에게 숙소 내에 있던 일을 이야기해주기 시작했다.

수연이 피처링을 하는 것 가지고 태연과 미영에게 승부를 조장했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들은 창현은 웃음을 지을 수 있었고, 뒤이어 촬영을 끝낸 근영과 함께 즐겁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러다가 윤아와 함께 돌아가기 위해 온 태연이 근영과 친분을 나누고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두 사람이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촬영장을 벗어났다.

태연과 윤아가 떠나자, 창현도 근영을 힐끗 보면서 말한다.

“이제 슬슬 가봐야겠네요. 누나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나도 촬영 끝났으니 슬슬 가봐야겠지. 저녁 시간이 되었는데 같이 저녁이나 먹을까?”

그 말을 들은 창현이 피식 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스캔들이 나도 괜찮고요?”

스캔들이라는 말에 근영이 웃음을 지었다.

“스캔들은 무슨. 스캔들이 나면 나야 오히려 좋은 걸? 기자들이 단둘이 보이게끔 사진을 못 찍게 하면 돼. 그 정도는 할 수 있잖아? 안 그래?”

“흠! 그 정도는 어느 정도 가능하죠. 일단 제 매니저 누나한테 물어보도록 할게요.”

“그래, 나도 매니저한테 물어보도록 할게.”

스캔들로 위험할 수 있는 것은 단둘이 있는 사진이 찍혔을 때다. 하지만 매니저나 코디, 로드 매니저가 함께 자리에 앉아 식사를 하게 되면 스캔들거리도 되지 못한다. 사람들은 단둘이 식사를 해야 스캔들로 생각하지, 단체로 식사를 하게 되면 스캔들로 생각하지 않기에 그렇다.

세희에게 의견을 물어보니, 마침 저녁 시간이고, 집에 돌아가서 혼자 식사를 하기 싫다는 로드 매니저의 강력한 주장으로 인해 허락을 맡을 수 있었다. 근영 측 또한 무난하게 수락을 하여 함께 저녁 식사로 근처 한식집에 들려 식사를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식사를 끝낸 창현이 숙소로 돌아와 컴퓨터를 켰을 때였다.

언제나처럼 연예 뉴스란을 들어가던 창현의 눈이 크게 뜨였다.

“이건……?”

연예 뉴스란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바로 자신이었던 것이다. 거기에는 드라마 촬영을 하는 자신의 모습이 멀찍이서 찍혀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면서 연기를 너무 잘해서 감독과 스태프들이 감탄을 했다는 식의 기사가 적혀 있었는데, 아직 방영도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그 밑에 달린 리플들을 보니 현이라면 충분히 연기도 정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긍정적인 리플도 달려 있었지만 반대로 가수가 무슨 연기를 하냐는 식의 리플도 달려 있었다.

“칫! 잘해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게 해주겠어.”

노래에 관련된 악성 리플이었다면 신경도 쓰지 않았을 테지만 자신의 분야가 아닌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는 만큼 약간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창현이었다. 자신이 연기 실력을 더욱 늘려서 아무 말도 나오지 못하게 해주겠다는 전의가 불타올랐다.

“오늘처럼만 하면 될 테니까. 오늘처럼만 열심히 하자.”

그렇게 창현의 드라마 첫 촬영이 끝을 맺고 있었다.


“연기수업을 불과 한 달 넘게 받아놓고 이 정도 실력이라니. 정말 대단하단 말이야.”

김지환 감독은 오늘 창현이 연기한 장면을 보면서 감탄을 금치 못했다. 마치 드라마 속 캐릭터가 정말 살아 숨쉬는 것처럼 생동감을 불어넣는 창현의 감정 이입은 놀라울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오죽하면 자신을 비롯한 노련한 스태프들이 모두 놀란 눈으로 바라보겠는가. 창현의 깔끔한 연기로 행여나 일어날 수 있는 연기력 논란이 말끔하게 사라질 것이란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기술로 하려 들지 않고 마음으로 하려 들기 때문이겠지.”

창현이 연기를 하는 걸 중점적으로 보면서 묵묵히 그의 연기에 대해 평가를 내리는 김지환 감독이었다. 약간 까칠하면서 나쁜 성격임에도 불구하고 내면에 서려 있는 착한 마음씨로 여자들의 마음을 훔칠 한지훈이라는 캐릭터를 창현은 잘 소화하고 있었다.

세 번 반복해서 봤을 때, 무언가를 발견한 듯 김지환 감독의 눈이 가늘어진다. 그러더니 창현의 연기를 냉혹하게 평가한다.

“하지만… 부족해.”

한 번에 발견한 것이 아닌, 세 번째가 되어서야 발견한 단점이었다.

그것이 무척 심각한 단점이었기에 김지환 감독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설마 이런 단점을 발견하게 될 줄이야.

“큰일이군. 이걸 극복하게 되지 못하면 결정적일 때 벽에 가로막힐 텐데. 큰일이군.”

창현의 중대한 단점을 발견한 김지환 감독은 턱을 매만졌다. 이건 정말 심각한 단점인데 이제야 발견하게 된 자신의 눈이 어두웠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일단 지켜봐야겠군. 하아! 이제야 발견하게 될 줄이야.”

아닐 수도 있다는 일말의 기대감이 있었다. 그렇기에 김지환 감독은 지켜보기로 하였다.

과연 그가 발견한 창현의 중대한 결점이 무엇일까.

그것은 추후 두고 볼 일이었다.




제53장 세기의 대결




드라마 촬영이 순조롭게 이어지면서 촘촘하게 짜여있던 창현의 스케줄에 대대적으로 변화가 일어났다. 아무래도 연기 경험이 없다보니 스케줄 대부분을 드라마 촬영에 맞추었는데 상당히 잘 해내면서 스케줄이 대폭 조정이 될 수 있었다.

좋은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 몇 번이고 재촬영에 들어가기는 하지만 그것은 예상 범주에 들어가 있는 것이고, 다수의 NG를 고려하여 대부분의 일정을 거기에 맞추다가 여유 시간이 생기다 보니 자연히 뒤로 미룬 스케줄을 손쉽게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석규는 창현의 스케줄을 재조정하다가 눈을 빛냈다.

“흐음! 이거 거의 보름 정도 시간이 나는군? 그렇다면…….”

인터뷰 스케줄과 화보 촬영 스케줄도 무난하게 앞당겨 처리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김지환 감독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창현이 무척 연기를 잘해주어서 본래 예정하던 10화 정도 촬영을 하고도 방영 날짜까지 20일 정도 남을 것 같다고 하였다. 그 이상 촬영하는 것도 가능하긴 하지만 아무래도 드라마가 정식으로 방영이 되고 나서 반응을 본 뒤 조기종영을 할지 아니면 연장을 해야 할지 정해야 했기에 그 정도 선에서 끊기로 하였다.

그 이야기를 전달 받았기에 석규는 새로운 스케줄을 잡아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있었다.

“일단 차근차근 진행을 해봐야겠군. 갑작스러운 스케줄인 만큼 자칫 잘못하면 역효과가 날 수 있으니까.”

그러면서 석규는 신중한 얼굴로 창현의 스케줄 표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은 20일이라는 시간. 그것은 결코 허비할 수 없는 소중한 시간일 것이다.


드라마 촬영이 순조롭게 이어지면서 창현은 숨 막힐 듯 휘몰아칠 것 같던 일상이 한결 숨통이 트인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촬영을 거듭하면 거듭할수록 연기라는 새로운 분야에 대한 재미를 느껴나가는 것도 좋았던 것이다.

자신의 느낌을 음악으로 표현하는 것도 좋지만 자신의 배역을 표현하는 것도 하나의 예술 행위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연기도 제법 재미있네, 흠!”

처음에는 바짝 얼어서 연기에 임하던 창현이었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여유를 가지고 드라마 촬영에 임할 수 있게 되었다. 장족의 발전이라 볼 수 있었다.

창현이 수월하게 드라마 촬영에 임하게 되자 촬영장에는 연일 활기가 넘쳤고, 예정보다 많은 장면을 촬영하게 되면서 약간 힘든 것도 느껴졌지만 그런 느낌보다는 아무래도 연기를 하면서 한지훈이라는 캐릭터를 점점 알아나가는 재미가 있었다.

“덕분에 드라마 ost 진행도 수월하고.”

드라마 촬영 덕분인지 음악적인 슬럼프도 상당히 숨통이 트인 상황이었다. 자신 스스로에게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에 자부심을 갖고 작업에 임하는데 아무래도 그것이 주효한 듯하다. 연기에 대한 부담감을 떨쳐내게 되면서 덩달아 슬럼프도 사라진 듯하니 말이다.

“그나저나 암투가 매일 심해진다고 하는데 이걸 어쩐다.”

창현이 걱정하는 점은 피처링을 따내기 위해 연일 소녀시대 숙소 내에서 대결이 심화되고 있다는 이야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웃으면서 듣고 넘어갈 수 있었지만 점점 심화되고 있다는 이야기는 그냥 넘길 수 없는 사안이었다. 자칫 잘못하다가 태연과 미영의 사이가 틀어지기라도 한다면 더 이상 재미로 즐길 수 없는 상황이니 말이다.

“잘 해결 되야 할 텐데. 흐음!”

원만하게 해결이 되길 바라는 것이 바로 창현의 마음이었다. 아무래도 긴 시간 동안 함께 지내왔으니 잘 해결될 것이라 생각하고 있지만 사람 일은 모르지 않은가?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큰 법이라고, 자칫 잘못하다가 선택받지 못한 사람이 실망을 하여 제법 큰 분란이 일어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여차하면 파트 두 개로 나눠서 하면 되겠지. 아무래도 그게 괜찮을 것 같으니.”

처음에는 한 사람이 선택을 받으면 될 것이라 생각했지만 이렇게 대결 구도가 심각하게 되면 어느 한 사람은 크게 실망하는 상황이 닥칠 수 있다. 만약 그 상황이 되면 자신이 움직일 생각이었다. 원석을 다듬는 것은 전적으로 세공사의 실력에 따른 것이니 만큼 자신이 오랜만에 실력을 발휘해볼 생각이었다.

여차하면 파트 두 개로 나눌 수 있는 준비를 하면서 창현은 성실하게 촬영에 임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가 3월 20일 수요일, 마침내 창현과 라샤가 출연한 라디오 스타 마지막 방송이 방영되기 시작하였다.

3월 13일 두 번째 방송에서 창현이 기타를 연주하면서 라이브를 한 영상이 방영되었기에 현의 팬들은 본방 사수를 외치면서 라디오 스타를 시청하기 시작하였다. 이날 방영된 것은 창현의 라이브 장면과 함께 자신의 파급력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창현이 왜 공중파 음악 프로그램에 출연하지 않는가에 대한 해명과 한때 사람들의 궁금증을 자극하던 원더걸스와 라샤의 컴백 시기에 관련된 것, 그리고 지금 가장 화제가 되고 있는 드라마에 관련된 것도 있었다.

마지막 날 방영된 라디오 스타는 역대 시청률 중에서 가장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끝을 맺었다. 창현이 처음 출연한 3월 6일 방송에서 시청률이 31.2%를 기록하였고, 두 번째 방송은 35.8%, 그리고 마지막 방송은 창현의 라이브에 힘입어 무려 39.4%까지 치솟는 기염을 토한 것이다. 아쉽게도 40%의 벽을 넘지 못했지만 이것만으로도 엄청난 시청률을 기록했다고 할 수 있었다.

특히 이 방송으로 화제가 된 것은 창현의 <So Sick> 라이브 장면이었다. 원곡과 비슷하면서도 느낌이 다른 노래는 어느덧 mp3 파일로 변환되어 사람들에게 떠돌고 있었다.

그리고 두 번째로 화제가 된 것은 바로 창현의 성대모사였다. 이미 만원의 행복에서 태연의 성대모사를 함으로써 한차례 화제가 된 적이 있는 창현의 성대모사가 빛을 발했던 것이다. 김구라의 목소리와 행동을 그대로 복제한 듯한 창현의 성대모사에 많은 시청자들이 경악의 목소리를 흘려야만 했다.

이어진 드라마에 관련된 이야기는 이미 창현의 연기력이 상당하다는 증언과 관계자의 말까지 들림으로써 그 기대감을 고조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라디오 스타가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채 끝나면서 자신에게 긍정적인 역할을 끼치자 창현은 입가에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다행이네, 후우! 그때 발끈해서 자칫 잘못했으면 크게 지탄 받았을 수도 있는데.”

구라의 신경을 긁는 말을 듣고 순간 발끈했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는 창현이었다. 그때 주변에서 말리지 않았다면 심기가 불편한 모습이 그대로 방송에 나갔을 수도 있다.

분명 이유가 있는 것이지만 그런 상황이 닥치게 되면 자신이 손해를 보게 될 뿐이다. 그렇기에 자신의 실수를 자책하는 창현이었다.

라디오 스타에 관련된 연예 뉴스를 보던 중 창현은 윤아의 전화를 받을 수 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피처링 상대로 태연이 선택 받았는데 미영이 만만치 않게 실의에 빠졌다는 내용이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창현은 올 것이 왔다는 것을 느꼈다. 설마 했는데 정말 큰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역시나.’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 창현은 자세한 상황을 수연에게서 듣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미영이 벌였던 일들을 듣고는 입을 떡 벌릴 수밖에 없었다.

소녀시대 내에서 어벙함을 맡고 있는 미영과 묘하게 초딩 같은 이미지를 주는 태연의 대결이라서 수준 낮은 대결이 벌어질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의 예상을 철저하게 빗나가기라도 하듯 그야 말로 제갈공명과 사마중달의 대결이 펼쳐졌던 것이다. 특히 사람을 설득하는 미영의 모습을 전해 들으면서 창현은 경악의 마음을 접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미영이 이 대결에 걸었던 기대가 무척 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자신의 노래를 부르고 싶어하는 열정을 느낄 수 있게 되자 창현은 결심을 하게 된다. 자신이 직접 SM엔터테인먼트에 부탁을 하여 노래를 하나가 아닌 두 개로 나누어서 파트 원과 파트 투로 나누어서 두 색상의 노래를 보여주겠다고 말이다.

수연에게 그 의견을 전달하자 그녀는 좋다고 하면서 끊는다.

통화가 끝나자 창현이 생각을 정리하면서 중얼거렸다.

“일단 아버지한테 이야기를 해야겠군. 그래야 협의를 볼 수 있을 테니.”

SM엔터테인먼트의 태도가 어떤지 석규에게 전해 들었던 차였기에 적어도 그들이 거절하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에 창현은 거의 독단이라고 할 수 있는 판단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판단을 내린 창현이 곧장 AA엔터테인먼트로 향했다. 오늘도 연기 수업을 받아야 하기에 그렇다. 연기 수업을 받고 노래에 대한 작업을 한 뒤 석규를 만날 생각이었다.

창현이 어느 정도 수준에 올라섰기에 연기 수업은 다양한 캐릭터를 체험해보는 형식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그래야 여러 상황에서도 훌륭하게 연기를 소화할 수 있다는 말 때문이었다.

세 시간 가량 연기 수업을 받은 창현은 곧장 사장실로 향했다. 미리 석규에게 말해둔 뒤 작곡 작업에 몰두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사장님을 뵙고 싶습니다.”

비서에게 자신의 방문을 알려달라 말을 하는 창현이었다.

그 말을 들은 비서가 인터폰을 들고는 석규에게 창현의 방문을 알렸다. 여러 이야기를 나누던 비서는 인터폰을 내려놓으면서 창현에게 말했다.

“사장님이 업무를 보고 계신 중이십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네.”

고개를 끄덕인 창현이 석규의 업무가 끝나길 기다린다.

약 오 분여 정도를 기다렸을까. 비서가 들어가도 된다는 말을 하자 창현이 사장실 안으로 들어섰다.

서류가 넘쳐나는 책상 위로 석규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창현을 보고는 반갑게 맞이하였다.

“그래, 무슨 일로 찾아온 게냐?”

“할 말이 있어서 찾아왔어요.”

“그래? 흐음! 마침 잘 되었구나. 나도 할 말이 있었는데. 생강차 둘로. 차가 나올 때까지 잠시 기다려라. 정리를 마쳐야 해서.”

비서에게 생강차를 주문한 석규가 책상 위에 수북하게 쌓여있는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

잠시 후, 생강차가 나왔지만 아직 정리가 끝나지 않아 석규는 여전히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창현은 생강차를 홀짝 한 모금 마셨다.

그때, 정리를 마친 석규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창현의 맞은 편에 앉는다. 그리고는 생강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창현에게 물었다.

“그래, 할 말이 무엇인데 그러는 게냐?”

상당히 업무가 많아서 그런 걸까?

맞은편에 앉은 석규의 얼굴이 무척 피곤해 보였다. 근래 들어 업무가 그렇게 많지 않은 걸로 들었는데 도대체 무슨 일이 있는 것일까?

의아함이 들었지만 그것은 엄연히 석규의 업무였기에 창현은 일단 자신의 할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다름이 아니라 드라마 ost에 관련된 것 때문에요.”

창현의 말에 석규가 의아한 표정을 짓더니 물었다.

“드라마 ost? 갑자기 그건 왜? 무슨 문제라도 생긴 것이냐?”

“그건 아니고요. 음, 아니다. 문제라면 문제일 수도 있네요.”

“문제가 생겼다고?”

석규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했다. 드라마 ost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은 제법 심각한 사안이었던 것이다. 이미 드라마 ost로 SM엔터테인먼트에 도움을 받기로 했던 것을 받은 상황이었기에 드라마 ost에 지장이 생기면 큰일이 난다.

심각한 표정을 짓는 석규에게 창현이 말한다.

“네, 아무래도 드라마 ost를 두 개로 나눠야 할 것 같아요. 파트 원, 파트 투로 나눠서요. 그리고 메인은 제시카 누나가 맡고, 파트 원의 피처링은 태연 누나가, 파트 투의 피처링은 티파니 누나가 맡아야 할 것 같거든요.”

본래 하나였던 곡을 두 개로 나눠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를 들은 석규가 심각하게 굳었던 표정을 풀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거였나? 후…….”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오는 석규였다. 자신은 또 심각한 일인 줄 알고 가슴이 철렁하지 않았던가? 괜히 가슴 떨리는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부분은 상관이 없다. 오히려 두 곡을 맡게 되면 SM엔터테인먼트에서 좋아하겠지. 돈 문제는 이쪽에서 충분히 해결할 수 있으니까 그 부분은 네 마음대로 해도 좋다. 내가 SM엔터테인먼트에 말해주길 원해서 이야기한 거겠지?”

“네, 아무래도 제법 큰 사안이니 만큼 해결해주셨으면 해서요.”

“그래, 문제가 될 것 없으니 이 부분은 내가 해결하도록 하마.”

문제가 되기는커녕 오히려 SM엔터테인먼트에서 좋아할 것이 분명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석규가 창현에게 시선을 주며 말한다.

“그 이야기는 그렇게 끝내도록 하고, 너한테 전해줄 소식이 있다.”

“전할 소식이요? 저 서류랑 관련된 건가요?”

자신에게 전할 말이라는 말에 창현이 멈칫하더니 책상 위에 쌓인 서류를 가리키며 묻는다.

그러자 석규가 고개를 끄덕인다.

“맞다. 서류랑 관련되었다고 할 수 있지. 제법 큰일이기도 하고.”

“뭔데요?”

제법 큰일이라는 말에 창현이 궁금한 듯 묻자, 석규는 잠시 멈칫하더니 목을 가다듬고는 창현에게 말한다.

“4월 초중순에 라샤가 일본으로 진출하지 않느냐? 그때 너도 같이 일본에 프로모션을 갈 생각이다.”

석규가 남은 20일 동안의 스케줄을 잡은 것!

그것은 바로 창현의 일본 활동이었다.

그 말을 들은 창현이 흠칫한다. 설마 일본 프로모션 이야기를 언급할 줄은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일본이요?”

“그래, 드라마 촬영이 순조롭게 진행되어서 20일 정도의 시간이 남지 않았더냐? 그 기간 동안 그냥 보내느니 일본 프로모션에 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그렇다.”

어차피 드라마 촬영도 당분간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고, 그렇다고 한국에 있어봤자 이렇다 할 일거리도 없을 것이다. 본격적인 터닝 포인트가 드라마 방영 이후가 될 것이니 만큼 일본으로 프로모션을 가는 것은 지금이 적기라고 볼 수 있었다.

창현은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일본 프로모션이라… 괜찮기는 하네요. 그러고 보니 반년 동안 외국에 나가본 적이 없고, 일본은 가본 지 무척 오래되었으니까요. 일 년반 정도 되었으니…….”

긍정적인 창현의 대답에 석규가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것뿐이겠느냐? 일본에서 너의 인지도가 그야 말로 대단하다. 일본에서 네 앨범이 백만 장 넘게 나갔으면 말을 다한 셈이지. 쟈니스에서 어찌나 와달라고 부탁을 하는지 네가 겪어보지 않았으면 말도 나오지 않을 것이다. 어쨌든 일본에 가는 걸 긍정적으로 생각하니 다행이구나.”

창현이 일본 프로모션을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한결 마음이 놓이는 석규였다.

옆나라이고, 음반 시장이 한국보다 활성화 되어 있는 일본은 앞으로 개척해야 할 시장이었다. 거기에서 얻는 수익이 만만치 않은 만큼 말이다. 특히 창현 같은 경우 일본에서 인기가 절대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본인 스스로가 가수이기 전에 일본에서 절대적인 인기를 과시하고 있는 아사미 유키의 데뷔곡과 2집 앨범 전곡을 작곡 작사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 내에서 상당한 인기를 얻고 있는 라샤의 프로듀서이기도 했기에 그렇다.

게다가 한류의 또 다른 주역을 맡고 있는 시점이기도 하기에 일본 시장은 창현에게 있어 큰 수익을 안겨다줄 곳이었다.

“일본은 저도 나쁘지 않아요. 반일 감정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다만 국내에서 활발하게 활동을 하지 않았는데 일본에서 활동을 한다는 것이 마음에 조금 걸리네요.”

창현이 마음에 걸려하는 점이 바로 그것이었다. 바로 국내에서는 활동을 하지 않다가 일본에서 프로모션을 하겠다고 하면 어떤 말이 나올지 몰랐던 것이다.

그런 창현의 말에 석규가 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그 말이 나올 것 같아서 미리 준비를 해둔 상황이다.”

“네? 준비를 하셨다고요?”

석규가 준비를 했다는 말레 놀란 얼굴을 하며 묻는 창현이었다. 설마 거기까지 염두에 두고 있을 줄 몰랐던 것이다. 그러면서 석규가 여태까지 무척 믿음직한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것을 떠올리며 충분히 준비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이미지에 금이 갈지도 모르는 일인데 석규가 호락호락 준비를 했을 리가 없는 것이다.

놀란 창현에게 석규가 말한다.

“일단 네가 20일 동안 시간이 남게 된 것은 드라마 스케줄이 일찍 끝나서다. 그건 알고 있지?”

“물론이죠. 드라마 촬영이 순조롭게 진행되어서 가는 거니까요.”

그 점을 창현이 모를 리가 없었다.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석규가 다음 말을 잇는다.

“네가 일본 프로모션에 출연하다고 해서 단순히 노래만 부르는 것이 아니야. 너의 대외적인 목적이 프로모션에만 치중 되어 있다면 이미지에 손상이 갈 수 있지만 만약 드라마 홍보를 겸하는 것이라면?”

“아!”

석규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차린 창현이 감탄사를 터뜨렸다. 그는 지금 창현의 이미지가 나빠지지 않기 위해 한 가지 방안을 마련함과 동시에 더욱 더 수익을 극대화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던 것이다.

그의 말은 간단했다. 바로 창현이 프로모션을 목적으로 해서 일본으로 간다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리는 것이었다.

현이 일본에 가는 것은 두 가지 이유다. 한 가지는 바로 프로모션을 위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드라마 홍보를 위한 것이다.

이미 석규는 20일의 여유기간이 생겼을 때 이와 같은 발상을 한 상황이었다. 창현이 드라마 촬영을 하고 있는 만큼 그 드라마를 일본에도 방영할 수 있게 힘을 써볼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부탁을 쟈니 회장에게 한 상태였다. 창현이 일본에 프로모션으로 가는 만큼 그 부분을 알아봐달라고 한 것이다.

창현이 일본으로 오길 원하던 쟈니 회장은 이와 같은 석규의 제안을 흔쾌히 응했다. 창현이 일본에서 인기를 끌게 되면 쟈니스에도 상당한 이득으로 남는 것이기에 망설일 부분이 아니었던 것이다.

석규는 창현의 목적을 살짝 바꿈으로써 비난을 피하고, 오히려 일본에서의 인기를 더욱 확고하게 굳힐 방안을 마련했던 것이다.

정말 놀라운 발상이 아닐 수 없었다.

“정말 대단해요.”

경악이 섞인 창현의 감탄사였다. 설마 이런 발상을 할 줄이야, 이렇게 사업적인 발상을 하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놀란 창현의 표정을 보면서 석규가 웃음을 지었다.

“후후! 이 정도야 기본이지 않겠느냐? 어쨌든 그 부분에 대해서는 네가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게다. 다만 한 가지 준비해야 할 점이 있는데…….”

“뭔데요?”

준비해야 할 점이라는 말에 창현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묻는다.

그러자 석규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창현에게 말한다.

“일본에 가면서 두 곡 정도를 준비해야 할 것 같다. 아사미 유키의 곡을 달라고 쟈니 회장님이 부탁을 한 상황이거든. 아무래도 너의 일본행에 상당힌 힘을 써준 만큼 그 부분을 거절할 수 없어서 말이다.”

사업이라는 것이 서로에게 이득이 되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것이다. 드라마를 일본에 방영하는 것이 창현에게 이득이 되고, 쟈니스에게도 이득이 되지만 엄연히 부탁하는 측은 석규였다. 일본에 오는 요청을 들어준다고 하지만 그것만으로 명분이 약했다. 그렇기에 쟈니 회장의 곡을 달라는 부탁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일본 내에서 엄청난 인기를 일으키고 있는 아사미 유키의 곡을 작곡하는 만큼 다시 한 번 창현의 능력을 입증하는 계기가 될 수 있기에 석규는 흔쾌히 수락을 한 상황이었다. 창현이 아직 수락을 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흐음! 유키의 곡을요? 하기야 만난 지 오래 되었으니… 일단 곡을 준비하도록 할게요. 일단 유키의 이번 앨범 테마 같은 것 좀 가르쳐주시면 제가 준비에 들어갈게요.”

창현이 자신의 말을 받아들이자 석규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래? 그렇게 해주면 고맙지. 일단 그에 대해서는 빠른 시일 내에 준비를 하도록 하마. 아마 소식을 전하면 바로 알려줄 게다.”

염려하던 부분이 해결되어서 그런지 석규의 표정은 한결 밝았다. 일본 진출부터 창현이 받아들일지 고민이 되는 부분이었는데 창현이 흔쾌히 받아들이는 것도 모자라 곡을 주는 문제까지 모두 받아들였으니 말이다.

석규는 더 이상 창현에게 사각이 없다는 것을 느꼈다.

‘잘 됐어. 슬럼프는 모두 극복한 것 같군.’

슬럼프를 극복한 창현을 당해낼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현재 드라마 ost와 드라마 촬영, 그리고 아사미 유키에게 줄 곡 준비까지 무척 바빠질 테지만 창현은 그 상황에 오히려 빛을 발하는 타입이니 만큼 석규는 창현을 믿었다.

“그러고 보니, 일본 이야기가 나와서 그런데 말이죠.”

이야기가 모두 끝난 차에, 창현이 무언가 떠오른 듯 석규를 바라본다.

그러자 석규가 눈짓을 하며 물었다.

“뭔데 그러느냐?”

“그 중국 기획사는 어떻게 되었죠?”

창현이 묻는 것은 TTS 기획사와의 문제를 말하는 것이다.

그 물음에 석규는 웃음을 지었다.

“중국 기획사? 후후! 그것 말이더냐?”

석규의 웃음에는 많은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는 방금 전과는 다른 전의가 담긴 눈빛으로 창현을 보면서 말했다.

“아마 오래 버티지 못할 게다. 현재 자금줄이 말라서 파산하기 일보직전이라고 하더군.”

서서히 결말이 나오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웃음을 지을 수 있는 석규였다.

창현이 월드 스타의 반열에 오르면서 중국 쪽 기획사 수십 곳에서 AA엔터테인먼트를 향해 러브 콜을 보내왔다. 자신들과 함께 합작을 하여 현과 라샤의 프로모션을 주도하고 싶다는 말 때문이었다.

하지만 석규는 TTS 기획사와의 악연을 들면서 중국 측 활동의 전면 보이콧을 선언하였다.

TTS 기획사의 행동으로 인해 창현은 큰 위기를 맞이하지 않았던가? 그들이 공개한 사진으로 인해 창현의 정체가 이쪽의 주도적인 행보로 밝혀진 게 아니라, 강제로 밝혀진 셈이 되었다. 그것이 아직도 현에게 일말의 흉터로 남아있는 상황이었다.

연예인에게 있어 이미지는 누구보다 중요한 것이었다. 당시 현이 갖던 이름값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기에 직접적인 금액으로 손해를 본 것이 없지만 돈으로도 치유할 수 없는 큰 타격을 창현은 입어야만 했다.

그렇기에 TTS 기획사가 무너질 때까지 중국 활동은 아예 하지 않기로 하였다. 심지어 중국 시장에 앨범을 판매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상당한 손해였지만 그 정도 손해를 감수하지 않으면 TTS 기획사를 무너뜨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입가에 차가운 미소를 지은 석규가 창현에게 말했다.

“아마 일본 활동을 하게 되면 결말이 날 것이다.”

현이 여태까지 활동한 반경은 한국과 미국뿐이다. 유럽 투어 콘서트를 함으로써 유럽 활동에도 문을 열어놓았지만 아직 아시아 다른 국가에서 활동을 한 적이 없다.

그런 상황에서 일본 활동을 하게 된다면 TTS 기획사는 결정적인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현이 외국 활동을 하기 시작했는데 중국만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 것은 정말 TTS 기획사 때문에 활동을 하지 않는 것이라 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특히 창현이 나온 드라마가 성공까지 한다면 그 속도는 더욱 가속화 될 것이다.

그렇기에 석규는 창현이 일본을 갔다 오고 난 뒤 빠르면 5월 하순, 늦으면 7월 중순에 결말이 날 것이라 보고 있었다.

석규의 말에 창현도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됐네요. 그 느끼한 왕 사장이 충격 받은 얼굴을 생각하니 기대가 되는 걸요? 일단 중요한 건 일본 활동이군요. 그것이 중국 측에 큰 타격을 줄 수 있을 테니 말이죠.”

일본 활동이 결정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창현도 자각한 상태였다.

그 모습에 석규는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그래, 결정적인 타격이 될 테지.”

“만약 TTS 기획사가 망하면 어떻게 하시려고요? 그때부터 중국 활동도 하는 건가요?”

창현이 궁금해 하는 점이 바로 그것이었다. 정말 중국 측에서 활동을 할 것인지 궁금했다.

그 말에 석규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이야기 아니냐? 한 이야기가 있는 만큼 당연히 지켜야겠지. 이미 준비도 차근차근 진행 중이다.”

“준비요? 어떤 준비죠?”

처음 듣는 이야기였기에 창현이 놀란 얼굴로 석규를 바라보며 묻는다.

그러자 석규가 싱긋 웃음을 짓더니 목소리를 죽인 채 창현에게 말한다.

“TTS 기획사가 서서히 쓰러질 무렵부터 차근차근 회사를 인수 중이다. 왕지동 사장이 인간성이 안 좋아서 그렇지 회사 자체는 제법 튼튼했거든. 그 회사를 완벽하게 인수하게 되면 왕지동 사장을 밀어낸 다음에 마음에 드는 사장을 올려놓고 중국 활동을 할 생각이다. 이쪽이 주체적으로 운영하는 회사로 말이지.”

중국 기획사에 프로모션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아예 자체적으로 해결할 준비를 하는 석규였다.

그 이야기를 들은 창현이 놀라면서 말한다.

“그렇게까지 준비하실 줄이야. 정말 놀랍네요. 일단 이건 비밀이겠죠? 비밀로 하도록 할게요. 만약 그렇게 되면 엄청난 수익을 올릴 수 있겠네요.”

중국 기획사에 맡기는 것과 직접 해결한다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그런 만큼 막대한 수익을 올릴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당연하지 않느냐? 거기에 투자한 돈이 얼만데. 일단 투자한 것에 몇십 배 아니, 몇백 배는 뽑아낼 수 있으니 과감하게 투자를 한 거다. 당연히 비밀로 해야 한다. 아직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은 소식이니까.”

“네, 알겠어요. 비밀이라니 비밀로 하도록 할게요. 그런데 정말 놀랍네요. 설마 그렇게 준비를 하실 줄 몰랐거든요.”

“중국 활동은 너에게 엄청난 수익을 안겨다 줄 수 있을 게다. 그런 만큼 놓칠 수 없는 시장이지. 게다가 갖고 싶어도 네 음반을 갖지 못한 팬들이 넘쳐나는 상황이지. 아마 이 상황에서 단숨에 치고 나가면 돈을 쓸어모으는 상황이 연출될 거다.”

거대한 중국 시장을 겨냥한 석규의 말이었다. 애써 외면하고 있었지만 중국 시장은 세계 시장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거대한 시장이었다.

“딱히 돈에는 관심이 없지만 그 많은 사람들에게 제 노래를 들려줄 수 있다는 건 매력적이네요. 일단 알아두기만 할게요. 아버지가 때가 되면 가르쳐주실 테니. 그때 준비를 해도 되겠죠.”

노래는 있더라도 중국 사람들의 정서에 맞게 작사를 하는 것이 중요했기에 준비 기간이 필요하다.

그 말에 석규가 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미리미리 준비를 해놓아도 상관은 없다.”

석규의 말에 창현도 피식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미리미리 준비를 하도록 할게요.”

“너와 라샤 아이들이 있기에 이렇게 과감하게 진행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 만큼 앞으로도 철저하게 준비를 해야 한다.”

“물론이죠.”

두 사람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웃음을 짓는다.

전혀 다른 느낌을 주는 두 부자였지만 두 사람의 웃음은 부자인 걸 증명이라도 하듯 무척 닮아 있었다.


“이제 바쁘게 되었군.”

석규와 이야기를 끝낸 창현은 앞으로 무척 바쁜 나날이 이어질 것이라는 걸 느끼고 있었다.

드라마 촬영은 물론이고, 드라마 ost를 해결해야 하지 않은가? 거기다가 아사미 유키의 곡이 될 만한 노래들도 준비를 해야 한다.

이것만 해도 벌써 만만치 않은 일거리가 생긴 셈이다.

지금이 3월 중하순이니 4월 초중순까지 이걸 모두 해결해야 된다. 다행히도 드라마 ost에 필요한 곡들은 어느 정도 완성이 된 상황이다. 이미 테마가 주어진 상황이라 그런지 작업 속도가 느리지 않았다.

“그나저나 유키랑은 오랜만에 보는 건데.”

생각해보니 아사미 유키와 만난 지가 무척 긴 시간이 지났다. 햇수로 따지면 2년이 지났으니 말이다. 오랫동안 보지 못한 만큼 만나면 반가울 것 같다는 생각에 창현의 얼굴이 살짝 밝아졌다.

“오랫동안 보지 못했으니 선물의 의미를 담아 곡을 주면 괜찮겠네.”

그렇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아사미 유키를 위해서라기보다는 자신을 위해서였다.

의미를 부여하면 조금 더 곡이 잘 써질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랄까? 그런 느낌이 들었기에 창현은 선물의 의미를 담아 곡을 선물하기로 하였다.

석규와 이야기를 끝마친 상황이었기에 창현은 곧장 작업에 착수하기 시작했다.


창현의 요청이 담긴 부탁은 곧장 석규를 통해 수만에게 정해졌다.

곡을 하나에서 두 개로 늘려도 되냐는 말에 수만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면서 흔쾌히 수락을 하였다.

“복이 굴러들어왔군. 제시카 혼자가 아니라 태연이랑 티파니도 같이 합류하게 되니."

간단한 피처링이라고 해도 상관은 없다. 일단 현의 앨범 제작 참여에 합류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는 것이다. 게다가 여태껏 현이 직접 관여를 하여 실패했던 앨범은 없다. 특히 국내에서 그 이름은 절대적인 보증 수표인 만큼 성공은 의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예정과 달리 현이 직접 부르는 곡도 하나 들어가는 만큼 현의 팬들이 구매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소녀시대 아이들이 부른 것도 듣게 될 것이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름을 알리는 형태가 될 것이다.

모든 비용 부담은 AA엔터테인먼트에서 대고, 앨범의 수익은 그쪽에서 갖게 될 예정이지만 돈으로도 쉽게 할 수 없는 인지도 상승을 이루게 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 가창력으로 인정받는 계기가 되면 더욱 이름을 상승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고 말이다.

그걸 알고 있었기에 수만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을 수 있던 것이다.

“동방신기도 일본에서 인기를 얻고 있고, 슈퍼주니어M도 본격적인 중국 활동을 준비하고 있지. 이제 소녀시대가 국내에서 인지도를 쌓기만 하면 된다.”

동방신기는 확실한 돈이 되어 SM엔터테인먼트의 자금줄이 되어 주고 있다. 그리고 슈퍼주니어M이 중국 활동을 성공하고, 각각 유닛 활동으로 돈을 벌어들이고 있는 만큼, 소녀시대까지 성공하게 되면 SM엔터테인먼트는 단숨에 위로 치고 올라갈 기회를 잡게 될 것이다.

“보아의 미국 활동도 성공을 했으면 좋겠지만, 흐음!”

기왕이면 미국에서 활동을 하고 있는 보아도 성공을 했으면 좋겠지만 그 점이 불투명하였기에 수만의 마음을 답답하게 만들고 있었다. 슈퍼주니어M 같은 경우에는 멤버 중 중국인 출신인 한경이 있었기에 벌써부터 상당한 인지도를 쌓고 있었지만 미국이란 시장은 결코 만만치 않은 만큼 확실한 전망을 내놓을 수 없다는 것이 단점이었다.

그 점을 조금이라도 석규에게 도움을 받고 싶었지만 한발 늦게 도움을 얻으려는 것이기에 이미 늦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일단 중요한 것은 소녀시대였다. 국내에서 확실한 인지도를 쌓은 뒤 아시아를 무대로 활동하게 되면 엄청난 돈을 끌어모을 수 있을 것이다.

“김 실장에게 연락을 해서 오늘 맛있는 거라도 사주라고 해야겠군. 작은 것이라도 기분이 좋으면 의욕을 내게 될 테니 말이야.”

사람은 작은 배려에도 큰 고마움을 느끼고는 한다. 그것이 평소 가혹하게 스케줄을 시키던 기획사가 그렇다면 더욱 그러할 것이고 말이다.

현의 앨범을 성공적으로 따낸 보상이라 볼 수 있다. 앞으로 해나가야 할 일거리가 무궁무진한 만큼 어느 정도 좋게좋게 대할 필요가 있었으니까.

수만의 이러한 결정으로 소녀시대 멤버들은 스케줄을 끝내고 돌아오다가 모처럼 양질의 식사를 할 수 있었다.

그 영문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매니저에게 물어도 단지 위에서 내려온 명령이라고 할 뿐이었으니 말이다.

덕분에 예기치 않게 즐거운 식사를 할 수 있었다.


드라마 ost 녹음 작업은 빠르게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베테랑 가수 두 명은 역시나 이름에 어울리게 뛰어난 가창력을 보이면서 단 하루 만에 녹음을 끝내는 기량을 선보였다. 창현이 노래를 완성한 즉시 가녹음을 하여 보냈더니, 일주일 만에 완벽하게 노래를 익혀서 찾아와 하루 만에 녹음을 끝냈던 것이다.

창현이 기획하고 있는 드라마 ost는 총 여섯 곡으로 이루어져 있다. 두 곡은 베테랑 가수가 부르게 되어 있고, 한 곡은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빅뱅이, 두 곡은 본래 하나의 곡이었던 곡을 파트 원, 파트 투로 나누어 소녀시대 멤버 중 제시카가 메인으로 각각 태연과 미영이 피처링을 맡게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곡은 창현이 녹음을 하기로 하였다. 본래 다른 가수에게 보낼까 싶다가 아무래도 마지막 곡이 제일 잘 만들어진 것 같고 가수로서 부르고 싶은 마음이 들었기에 자신이 직접 참여하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다. 슬럼프가 완벽하게 극복되었다는 점도 있었기에 그럴 수 있었던 것이지만 말이다.

드라마 ost 녹음 작업은 3월 22일부터 이루어졌다.

단 이틀 만에 두 곡이 녹음을 끝냈고, 창현의 곡도 진즉에 녹음을 끝낸 상태다. 그리고 빅뱅도 삼 일이라는 시간이 걸려 녹음을 한 끝에 성공적으로 끝마칠 수 있었다. 그러던 중 나이가 별로 차이가 나지 않기에 친분을 나누어 형 동생 하는 사이로 발전하기도 하였다. 드라마 ost를 하면서 친분 관계가 늘어난 셈이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것이 바로 두 곡이었다.

3월 26일인 오늘부터 본격적으로 나머지 두 곡을 녹음하기 시작한다.

녹음을 하는 날이 되자, 녹음을 해야 하는 세 여인의 전신에 긴장감이 팽팽하게 당겨지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친한 동생이지만 프로듀서로서는 호랑이라고 소문이 자자한 창현과 함께 하게 된 것이다. 수준급의 프로듀서와 함께 하게 된 만큼 잘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가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어떻게 혼이 날지 두려운 마음도 들었다.

미영이 떨리는 눈으로 수연을 바라보면서 말한다.

“제시, 어떻게 하지? 막상 창현을 보려니까 막 떨려. 프로듀싱을 할 때 그렇게 무섭다면서? 정말 그렇게 무서워?”

그나마 경험이 있는 수연에게 조언을 구하는 미영이었다.

그 물음에 수연은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 하더니 미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프로듀싱을 할 땐 정말 무서워. 꼼짝 못하게 하는 카리스마를 발산하거든.”

수연의 말에 미영이 흠칫하더니 말한다.

“어, 어떻게 해. 그렇게 무서우면 압도 되어서 아무것도 못할 것 같은데.”

이미 피처링을 하기로 결정된 다음 날인 22일에 그녀들이 부르게 될 노래 파트 원과 파트 투가 가녹음이 되어 그녀들에게 도착하였다.

태연과 수연, 미영은 그 노래를 끊임없이 들었다. 태연과 미영 같은 경우 피처링이기에 그 분량이 많지 않았지만 수연은 틀렸다. 두 곡 모두 메인을 맡은 만큼 분량이 무척 많았던 것이다.

노래를 보내면서 창현은 수연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서 당부할 정도였다.

겁을 먹은 미영을 보면서 수연이 입술을 지그시 깨문다.

‘내가 가장 중요하니 노력하는 만큼 성과가 나타날 것이라고 했지.’

지금 저렇게 겁을 먹고 있는 미영보다 더 떨리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자신일 것이다. 자신이 제대로 하지 못하면 노래 녹음 자체가 진행되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렇다고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없다. 자신이 약한 모습을 보이면 지금 떨고 있는 미영은 물론이고, 힘든 순간에 자신에게 기대는 모습을 보이는 태연조차도 상당한 혼란을 일으킬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 만큼 자신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

수연이 미영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열심히 연습했잖아. 편하게 생각하고 파니, 네가 노력한 만큼의 실력을 보여주면 창현이도 널 인정할 수밖에 없을 거야.”

“고마워. 하지만 마음이 너무 떨리는 걸.”

피처링을 맡게 되었다고 해서 좋아했던 건 처음이다. 아직 이렇게 유닛별로 나뉘어서 활동을 한 적이 없는 미영은 가슴이 주체 없이 떨리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곧잘 태연이나 수연과 함께 팝송을 부르고는 했지만 이 경우는 본격적인 앨범 제작에 일조를 하는 것이니 그럴 수밖에 없던 것이다. 평소 자신의 목표가 솔로로 우뚝 설 수 있는 것이니 이번이 더할 나위 없는 기회였지만 한편으로는 창현의 앞에서 직접 노래를 불러야 한다는 점이 그녀를 혼란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창현에 관련된 문제에서는 지력이 99로 상승하는 미영이었지만 그의 앞에서 더욱 약해지는 면도 있었다.

“연습한 만큼 해. 그러면 잘할 수 있을 거야.”

그래도 솔로로서 드라마 ost에 참여한 적이 있는 태연이 침착한 얼굴로 미영을 위로한다.

그 위로에 미영이 호흡을 길게 하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응, 그렇게 해야지. 고마워, 태연아.”

“뭘 그걸 가지고 그래. 열심히 노력한 만큼 보여주면 될 거야. 그리고 어차피 창현이가 프로듀서인 만큼 부족한 점을 채워줄 수 있을 걸? 그러니 호랑이 선생님에게 혼나러 간다는 생각보다는 뛰어난 실력자에게 한 수 배운다는 마음을 가져. 그러면 편안할 거야.”

여덟 명을 이끄는 리더답게 태연은 호랑이 프로듀서라고 소문난 창현과 대면할 마음의 준비를 마친 상황이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이 있듯이 피할 수 없다면 왕창 깨질 것을 각오하더라도 이번 기회를 빌어 자신을 한단계 발전시키는 계기로 삼을 생각이었다.

그 모습을 본 미영도 굳은 표정을 지어보이며 고개를 끄덕인다.

태연이 저렇게 굳은 각오를 보이는데 자신이라고 못할 것 없지 않은가! 잘하면 되는 것이다.

예상을 뛰어넘고 부담감을 이겨낸 태연의 모습을 보면서 수연의 안색이 한층 어두워졌다. 태연과 미영은 안정이 되었지만 정작 자신은 불안한 마음이 더욱 강해진 것이다.

‘내가 잘해야 하는데.’

자꾸만 창현이 자신에게 연락해서 했던 말이 떠오른다. 자신이 잘해야 한다는 말. 그 말은 곧 창현이 기대를 걸고 있다는 말이었기에 수연은 자꾸만 그것이 부담으로 다가왔다.

연습? 당연히 열심히 했다. 그야 말로 필사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열심히 연습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부담이 컸다. 곡이 두 개여서 그런 것일까? 아무리 연습을 해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이럴 때는 차라리 곡이 하나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하나에만 전념을 하여 나름대로 완벽한 준비를 갖추었을 텐데 말이다.

괜히 자신이 나서서 일을 만든 것 같았다.

‘그렇게 되었으면 파니가 많이 실망했을 테니. 내가 잘하면 돼. 그러니까 파니 탓을 하지 말자.’

스스로 결심을 굳게 다지면서 녹음에 임하려는 수연이었다.

세 여인은 녹음을 위해 AA엔터테인먼트로 향하기 시작했다.


AA엔터테인먼트로 향한 태연과 수연, 미영은 곧장 석규를 만나기 위해 사장실로 향했다.

수만이 미리 일러두길, 이번 드라마 ost를 할 수 있게 된 것이 AA엔터테인먼트의 사장인 석규의 영향이 컸다면서 인사를 하라고 했던 것이다. 물론 그것이 아니더라도 드라마 ost를 맡게 된 만큼 인사를 꼭 할 생각이었기에 그녀들은 인사를 하는 것에 있어 망설임이 없었다.

이미 AA엔터테인먼트로 향하면서 자신들이 간다는 것을 알린 상황이었기에 석규를 만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세 여인은 사장실 안으로 들어서다가 한쪽에 창현이 서 있는 것을 보고는 흠칫한다. 그러다가 이내 평정심을 되찾고는 석규에게 인사를 하였다.

“안녕하세요, 소녀시대입니다.”

“하하, 반갑습니다. 부족하지만 AA엔터테인먼트를 맡고 있는 강석규입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태연 양, 제시카 양, 티파니 양.”

자신들을 알고 있는 듯한 석규의 모습에 세 여인이 놀란 눈으로 석규를 바라본다.

그러자 석규는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창현을 힐끗 가리키더니 말한다.

“이 녀석이 매일 소녀시대 하고 노래를 부르니 모를 수가 있겠습니까. 게다가 개인적으로 소녀시대의 팬이기도 하고 말이죠. 하하!”

옆에 서 있던 창현은 석규가 다짜고짜 자신을 희생양으로 내세우자 화들짝 놀라면서 강력하게 반발하였다.

“제가 언제 그랬어요!”

“그러지 않았더냐? 괜히 부끄러워 할 필요 없다. 후후! 아, 여태까지 세워두었군요, 일단 앉으시지요.”

“네.”

석규의 권유에 세 여인이 조심스럽게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그 모습을 보던 석규가 세 여인을 둘러보면서 물었다.

“그래, 이렇게 여기까지 왔으니 차라도 들지요. 무슨 차로 하시겠습니까?”

“저는 커피로…….”

“저도 커피요.”

아무래도 서구식 입맛이라 그런지 커피를 선택하는 수연과 미영이었다.

태연은 녹차를 선택하면서 석규에게 부탁을 하였다.

“전 녹차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편하게 불러주셔도 되요, 사장님. 저희가 창현이랑 나이 차이도 별로 나지 않는 걸요. 편안하게 대해주세요.”

석규는 한 회사의 사장이자 창현의 아버지이지 않은가? 그런 만큼 석규의 존대는 자신들을 어느 정도 존중해준다는 의미가 담겨있어 나쁘지 않았지만 한편으로는 살짝 부담이 되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존대보다는 편안하게 대해주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는 느낌에 평대를 해주길 원한 것이다.

그 말을 들은 석규는 입가에 미소를 짓더니 고개를 끄덕여 보인다.

“하하!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그러도록 하지. 태연 양이 듣던 대로 아주 의젓하고 책임감이 강하군. 키는 작고 때로는 욱할 때가 있으며, 사투리가 아주 예술이라고… 창현이 이 녀석이 그러더구만.”

말을 하던 석규는 키가 작다는 부분에서부터 태연의 기질이 변하는 것이 느껴지자 재빠르게 말을 바꾸어 창현이 말을 한 것으로 바꿔놓았다.

그러자 태연의 날카로운 시선이 단숨에 창현에게 향했다.

그 시선을 받은 창현이 펄쩍 뛰면서 석규에게 말했다.

“아니, 제가 언제 그랬다고 그러는 거예요? 전 그런 적 없어요. 정말이에요..”

창현이 그렇게 말을 한다 하여도 믿어줄 사람은 거의 없었다. 실제로 그라면 이런 식의 뒷담이 가능할 것이라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자신으로 인해 분위기가 악화된 듯하자 석규는 재빨리 수습에 나섰다.

“하지만 아주 속이 알찬 친구라고 하더군. 그러니 그렇게 날카로운 눈빛은 거두게나. 하하! 내가 말실수를 한 거니 말이지.”

“네? 아, 네.”

창현에게 연신 날카로운 눈빛을 보내고 있던 태연은 석규의 말을 듣고는 자신의 표정이 관리가 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서둘러 표정 관리에 나섰다.

그리고 석규가 수연과 미영을 번갈아 보면서 말한다.

“제시카 양과 티파니 양은 미국에서 왔다고 하던데? 그럼 영어를 무척 잘하겠구만?”

“네? 네. 아무래도 미국에서 살았으니 영어로 대화를 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죠.”

이야기의 방향이 자신에게 전환되자 수연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다.

“그렇게 되면 소녀시대가 미국에 진출할 경우 영어 소통에는 문제가 없겠군. 아, 이런 이야기는 약간 시기상조인가? 내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니 크게 신경 쓰지 말게.”

“네.”

그 사이 커피와 녹차가 소녀들 앞에 놓이기 시작하였다. 창현과 석규 앞에 놓인 것은 커피나 녹차가 아닌 생강차였다. 생강차 매니아인 만큼 이럴 때를 놓칠 수 없었다.

“…….”

창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생강차를 마시고 있었다. 이 자리가 인사를 하기 위한 자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 만큼 간단하게 인사를 하고 끝이 날 줄 알았는데 석규가 차까지 권하게 되니 묘하게 자리게 길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랬기에 석규가 말을 하지 않으면 사장실은 침묵이 감돌고는 하였다. 세 여인이 평소처럼 창현을 대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창현 자신도 나서서 하기에는 자칫 석규에게 빌미거리를 제공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이런 상황에서는 그저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생강차를 한 모금 마신 석규가 말을 이어나갔다.

“일단 이번 드라마 ost는 이 회장님께 전달 받았을지 모르지만 SM엔터테인먼트의 강력한 요청이 있었지. 그 부분은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네.”

“네…….”

수연이 처음 부탁을 하고, 드라마 ost가 소녀시대의 인지도를 높일 기회라는 것을 알고 있던 만큼 SM엔터테인먼트 측에서 강력하게 지원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세 여인 모두 알고 있는 바였다.

그런데 갑자기 이걸 언급하는 석규의 의도를 몰라 그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이어질 석규의 말을 기다릴 뿐이었다.

석규가 세 여인에게 말했다.

“사실 이 부분은 사적인 감정을 배제하고 사업적인 측면에서 보아야 하기에 무척 냉정하게 결정을 해야 했지. 왜냐하면 창현이가 우리 기획사를 제외한 첫 프로듀싱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니 말이네. 그래서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겠다고 하던 가수들도 무척 많았어. 아마 SM엔터테인먼트 측에서 요청을 하지 않았더라면 염두에 두지 않았을 만큼 말이네.”

“…….”

그 말을 들으면서 세 여인은 표정이 약간 어둡게 변했다. 석규는 마치 찬성하는 입장이 아닌 반대하는 입장이었다는 걸 의미하는 것 같았기에 그렇다.

그런 생각이 들자 한층 긴장이 되면서 몸이 빳빳하게 펴졌다. 잘못 보이다가는 상황이 좋지 않게 흘러갈 수도 있다고 느낀 것이다.

그 모습을 보면서 석규가 슬쩍 웃음을 지었다. 세 여인은 고개를 숙이고 듣는 탓에 그걸 보지 못했지만 창현은 그걸 볼 수 있었다.

‘하아!’

속으로 한숨을 내쉰 창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금 석규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행여나 프로듀싱에 성실하게 임하지 않을까봐 미리 엄포를 놓고 있던 것이다. 이렇게 하면 세 여인이 수월하게 프로듀싱에 따라올 것이라 생각했나보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잘 따라올 텐데 그러시네.’

자신이 끼어들어 중재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이미 판은 벌어졌고 상황은 진행되고 있었다. 그렇기에 끼어들면 방해만 될 뿐 누구에게도 이득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저 묵묵히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채찍질로 바짝 긴장하게 만들었으니 이제 당근으로 살짝 마음을 풀어줄 상황이었다.

석규는 입가에 웃음을 지우면서 다시 사무적인 모습으로 돌아와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개개인의 기량을 보니 결코 만만치 않더군. 창현이 이 녀석이 괜찮다고 한 것도 있고 말이지. 이 녀석이 사적인 친분에 얽매여서 평가를 하지 않는 만큼 괜찮다고 평가를 했다는 것은 뛰어난 빛을 발휘할 수 있는 원석이라는 걸 뜻할 테지. 그 이야기를 듣고 마음을 먹을 수 있었네. 소녀시대를 이번 드라마 ost에 합류시키기로. 그리고 각자의 기량을 시험해볼 수 있는 기회로 삼기로 말이야.”

그 말을 들은 세 여인이 모두 고개를 들어 창현에게 감사의 의미가 담긴 눈빛을 보냈다. 석규의 말로 인해 창현이 아니었더라면 자신들이 선택 받지 못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졸지에 감사의 눈빛을 받게 된 창현으로서는 머쓱할 뿐이었다. 지금 이것이 석규가 깔아놓는 밑밥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이상 그저 장단에 맞추어 입가에 웃음을 지어보일 뿐이었다.

완벽하게 그녀들을 다룬 석규는 입가에 지어보이며 사무적인 모습에서 ‘따뜻한 매혹의 중년 사나이’의 모습으로 그녀들에게 말했다.

“오랜 시간 동안 보컬 트레이닝을 받았지만 아직 자네들은 원석이라고 할 수 있어. 찬란한 빛을 발할 가능성이 있는 그런 원석. 그 원석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세공사의 실력에 달려있지. 아무리 뛰어난 가치를 지닌 보석이라 하여도 세공사를 잘못 만나면 그 빛을 발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야. 그러니 이번 기회를 발판 삼아 잘 해냈으면 좋겠네. 알겠나?”

“네. 알겠습니다.”

석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는 세 여인이었다.

그 모습을 본 석규는 무게감 있던 모습을 푼 채 말한다.

“좋은 태도야. 그렇게 열정적인 모습으로 임하면 되는 거네. 그럼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설명을 하도록 하지.”

그러면서 석규는 드라마 ost 녹음을 어떻게 진행할 것인가를 간략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수만에게 대충 듣기는 했을 테지만 구체적인 일정은 이쪽에서 정하는 것이기에 이쪽에서 하는 방식에 따라야 했다.

석규의 설명을 들으면서 태연과 수연, 미영은 굳은 태도를 풀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심신을 강하게 옥죄던 긴장감에서 벗어나게 된 탓일까? 태연은 묘한 느낌에 사로잡혀 있었다. 마치 지금 이렇게 자리에 있는 것이 사업적인 일로 온 것이 아니라 무슨 상견례에 온 듯한 느낌이 강하게 들었던 것이다.

그 있지 않은가? 결혼하기 전 양가의 부모가 만나 인사를 나누는 그런…….

‘내,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업무 이야기를 하고 있는 중에 엉큼한 생각을 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태연이 속으로 움찔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지워내기 위해 노력을 하였다. 하지만 이미 생각이 든 것을 마음대로 지울 수 없는 노릇이었다. 오히려 그 생각이 점점 뇌리를 지배해나가기 시작하면서 앞으로 십 년 후 아니, 앞으로 오 년 후 이런 자리가 생기면 어떨까 생각되었다.

‘그럼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겠지.’

그야 말로 핑크빛 미래. 그런 미래를 손에 넣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최선을 다해야 한다.

환상과 현실의 접점을 발견한 태연이 서서히 제 눈빛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런 느낌을 받는 것은 비단 태연뿐만이 아니었다. 수연과 미영도 묘한 느낌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녀들은 석규를 본 것이 오늘이 처음이다. 그런 만큼 어떤 사람일지 궁금증을 속에 품고 AA엔터테인먼트에 왔다. 수만이 그녀들에게 당부할 때 석규에게 허튼말을 하면 안 된다고 강조를 할 정도였다. 아직 나이가 어렸지만 그것은 수만이 석규를 만만한 인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느낌을 받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그녀들은 석규가 보통 인물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였다.

실물을 봤을 때 창현의 이십 년 후쯤을 기대한 것과는 약간 달라서 당황하기도 하였다. 창현은 약간 여성스러워 보일 정도로 호리호리한 몸매의 소유자였는데 석규는 달랐던 것이다. 떡 벌어진 어깨와 큰 체구는 일견하기에 창현과 부자지간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큰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자세히 지켜보고 있으니 확실히 부자지간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체구나 체격이 달랐지만 이목구비가 닮아 있었고, 사람의 심리를 잘 파악하여 사람을 다루는 것이 능숙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창현의 몸매가 호리호리하다고 하여 남자다움이 없는 것도 아니었으니 확실한 부자지간이 분명했다.

다만 수연은 석규에게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정말 사장님도 창현이처럼 여자의 마음을 잘 모르는 건가요?’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르는 말이었다. 정말 창현이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몰라서 그러는 것인지 말이다. 그리고 석규도 그런 것인지 묻고 싶었지만 그 질문은 이내 머릿속에 사라졌다. 정말 석규도 그랬다면 여태까지 결혼을 할 수 있을 리 없지 않은가? 그런 만큼 석규는 여자의 심리를 파악하는데 있어서 창현보다 한 수 위라고 할 수 있었다.

미영도 석규를 바라보면서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소녀시대의 어벙함을 맡고 있지만 창현과 관련된 일에 대해서는 지력이 99까지 치솟는 에디터 캐릭이 아니던가? 그런 만큼 그녀는 석규가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분의 마음에 들어야 해.’

눈을 빛낸 미영은 석규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파악한 바에 의하면 보이지 않게 창현은 석규에게 많은 의지를 하고 있었다. 그것이 제3자의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심리적인 면이나 기타 다른 면 등등을 눈에 띄게 의지하는 것은 아니지만 미영의 눈에는 그것이 보였다.

어떻게 보였나? 라고 말을 하면 할 말이 없다. 미영이 무슨 모 게임의 캐릭터처럼 사륜안이나 천리안 같은 특수 스킬을 가지고 있을 리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창현에 관련된 일이면 그녀는 초월적인 제6감을 얻는 듯하였다. 여태껏 그 느낌이 틀린 적이 없는 만큼 이것은 신뢰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일단 다소곳한 모습을 보이면서 차근차근 접근해야 해. 확 튀어나가려면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수 있어.’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이야기가 있는 것처럼 잘 보여야 한다고 지금 나서야 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판단이다. 우선은 석규에 대해 철저하게 파악을 한 뒤에 차근차근 접근해나가는 것이 더욱 효율적일 것이란 게 그녀의 판단이었다.

세 여인이 각각 생각에 잠긴 가운데 석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이번 드라마 ost에 관련된 이야기인 만큼 확실하게 들어두고 실천을 해야 추후에 있을 불이익을 받지 않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 만큼 이쪽에서 일방적인 스케줄 조정을 하지 않을 것이란 이야기지. 녹음 스케줄은 SM엔터테인먼트에서 이미 전달 받은 만큼 어떤 날은 이곳에서 녹음 작업을 진행할 것이고, 어떤 날은 창현이의 녹음실에서 작업할 때가 있을 것이네. 그러니 그걸 잘 파악하고 있어야 할 거야. 자칫 녹음실이 헷갈려서 녹음 작업에 지장을 초래하면 양쪽 모두 손해니 말이네. 알겠나?”

“네, 알겠습니다.”

석규의 설명이 끝나자 곧장 대답하는 세 여인이었다.

그 대답을 들은 석규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창현을 보면서 말한다.

“이제 내 이야기는 모두 끝났다. 나머지는 녹음실에서 네가 이야기를 하도록 하여라.”

“네, 알겠습니다. 누나들, 일단 녹음실로 가도록 하죠.”

고개를 끄덕인 창현이 세 여인에게 말을 하자 세 여인이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고는 석규에게 인사를 한 뒤 사장실을 벗어난다.

본격적인 드라마 ost 작업에 들어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창현의 안내 아래 태연과 수연, 미영은 녹음실로 향했다.

이미 수연은 한 번 온 적이 있어서 그런지 여유가 있었지만 태연과 미영은 처음 온 탓이라 그런지 긴장감을 가지고 있는 상태였다.

녹음실에 도착하게 되자 창현은 자리를 권하더니, 자리에 앉으면서 물었다.

“일단 제가 가녹음 해서 보내드린 노래는 들어봤죠?”

“응.”

창현의 말에 세 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녹음을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설마 창현이 여자톤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의 높은 톤으로 가녹음까지 해낼 줄은 몰랐던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가녹음을 한 노래를 들으면서 그의 소름끼치는 실력에 전율을 해야만 했다.

수연이 맡고 있는 메인 파트와 피처링을 맡고 있는 태연, 미영의 파트 톤이 각각 달랐기에 놀라움은 더욱 컸다.

그랬기에 그 노래를 들으면서 경악을 하는 한편, 창현의 가녹음보다 못할 수 없다는 승부욕이 치솟아 올랐다. 목소리 톤을 높이면서 제 실력을 모두 발휘할 수 없었을 텐데 적어도 그것보다 잘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물론 창현이 앞에서 깨질 수 없다는 집념으로 열심히 한 것도 있지만 그녀들이 열심히 연습한 것에는 여러 가지 동기가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들을 보면서 창현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열심히 연습했겠죠? 당연히?”

“무, 물론이지!”

창현의 말에 녹음실이 떠나가라 대답한 것은 다름 아닌 미영이었다. 오늘 녹음에서 가장 긴장을 한 모습을 보이던 것도 그녀였다.

“그렇게 큰 목소리로 대답하지 않으셔도 되는데 말이죠. 의욕이 넘치시나 봐요.”

“으응? 나, 난 그게 아니라…….”

창현의 말에 당황한 목소리를 내는 미영이었다. 이게 아니였는데 창현의 말은 묘하게 상황을 이상하게 만들고 있었다. 이런 식이면 실력 이상의 기량을 보일 수밖에 없는데 말이다.

얼버무리려는 미영의 모습에 피식 웃음을 지어보인 창현이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일단 아버지에게 들었겠지만 녹음 스케줄은 일주일이에요. 일주일 동안 두 곡의 녹음을 모두 끝내야 한다는 거죠. 이건 매우 스케줄이 촘촘하다고 할 수 있어요.”

일주일. 들을 때는 긴 시간처럼 느껴졌지만 실제로 그 시간은 그리 길다고 볼 수 없었다. 총 두 가지 곡을 녹음해야 하는 만큼 3일에 녹음을 하나씩 끝내야 했으니 말이다.

어디 그뿐인가?

그 기간 동안 녹음에만 전력투구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각각 자신과 소녀시대의 스케줄을 조율하여 녹음을 해야만 했다. 자칫 녹음이 늦어지면 밤샘 작업을 해야 할 수도 있었다.

키가 크기 위해 매일 밤 10시가 되면 곧장 수면을 취하는 창현에게 있어 이것은 치명적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창현은 가급적 수월하게 녹음이 진행되길 원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스케줄에 대해 언급을 했지만 두 가지 방법이 있어요. 하나는 3일씩 나눠서 곡 하나하나에 전력을 다하는 방법이 있고요, 다른 하나는 일주일 동안 두 곡을 모두 천천히 녹음하는 방법이에요. 어떤 방법이 나을 것 같아요? 제가 보기에는 누나들에게 있어서 전자의 방법이 더 나을 듯 싶은데.”

아무래도 그녀들도 각각 스케줄을 이행해야 하는 만큼 전자가 더 낫다고 생각하는 창현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두 사람이 있었다.

바로 태연과 미영이었다.

어떻게 잡은 기회인데 달랑 3일만 보고 그만 둘 수 있겠는가? 게다가 녹음으로 인해 한층 촘촘해진 스케줄망을 피할 수 있는 기회가 아닌가? 그런 만큼 절대 나눠서 할 마음이 없었다.

태연이 먼저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였다.

“나는 괜찮아. 일주일 동안 차근차근 공을 들여서 곡을 만드는 것이 더 완성도가 높을 것이라 생각해. 그런 만큼 일주일 동안 작업에 매진했으면 좋겠어. 3일 동안 벼락치기 식으로 하게 되면 두 곡을 부르는 수연이가 부담이 될 수도 있고 말이야. 그러니 일주일 동안 차근차근 진행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

수연을 팔아서 자신의 의견에 타당성을 부여하는 태연이었다.

그 말을 들은 수연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지만 무어라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저 태연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기에 이를 부득 갈 뿐이었다.

‘저게 날 팔아서…….’

자신을 노려보는 수연의 시선이 느껴졌는지 태연이 살짝 손을 모아서 비는 시늉을 한다. 하지만 지금 관건은 일단 그냥 넘어가는 것이 관건이었다.

수연도 태연이 그런 모습을 보이자 갈구지 않기로 하였다.

이미 피처링 문제로 제3자의 입장에서 상황을 면밀하게 바라본 결과 미영이 결코 만만치 않은 인물이라는 것을 느꼈기에 그렇다.

평소에는 허술한 모습으로 무방비의 극치를 보여주더니 창현과 관련된 문제에 있어서는 그야 말로 백만 대군을 통솔하는 듯한 신출귀몰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 만큼 미영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태연이 있어야 수월하다는 걸 수연은 깨닫고 있었다.

미영 또한 고작 3일 동안 창현을 보고 싶지 않았다. 일주일 동안 볼 기회가 있는데 무엇하러 3일을 선택한단 말인가? 만약 일대일로 3일 동안 보는 것이라면 수락을 했을 테지만 수연이 함께 하는 만큼 그 3일은 결코 기회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일주일을 택하여 차근차근 창현에게 지도를 받으면서 더 나은 앨범 제작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점수를 얻는데 도움이 될 것이리라.

“나도 괜찮다. 일주일도 어찌 보면 괜찮은 곡을 녹음하기 위해서는 짧은 시간이잖아? 그런 만큼 일주일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의 노력을 기울여서 최고의 곡을 녹음하고 싶어.”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감격을 받을 정도로 멋진 프로정신이 가미된 말이 아닐 수 없었다.

태연과 수연은 한때 한국말을 제대로 못해 ‘나 한쿡말 못해요’ 라고 말하던 미영이 이제는 전문 협상가를 해도 모자라지 않을 정도의 뛰어난 화술을 발휘하자 혀를 내두르다 못해 한 줄기 분노를 느낄 정도였다.

하지만 그 미묘한 신경전을 모르고 있는 창현은 미영의 말에 감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누나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 몰랐어요. 괜히 3일씩 나눠서 단번에 녹음을 끝내려던 제가 부끄럽네요. 알겠어요. 일주일 동안 각각 나눠서 곡을 최고의 기량으로 녹음하는데 전력을 다하겠어요. 수연 누나가 중간에서 고생을 좀 하겠지만 이번 기회가 기회인 만큼 열심히 해주길 부탁할게요.”

“응? 응. 알았어. 나만 믿어.”

미영의 말에 속으로 칼날을 갈던 수연이 창현의 말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고 보니 메인은 다름 아닌 자신이 아닌가? 그런 만큼 이번 프로듀싱에서 가장 많은 점수를 얻어낼 가능성이 있는 것도 자신이다. 태연이와 미영이의 의도가 앙큼하기는 했지만 그것을 짓누를 수 있을 정도의 견제를 하고, 자신이 앞서 나가면 된다.

그렇게 결심을 굳힌 수연이 창현에게 시선을 준다.

그러자 창현이 그 시선을 받고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일단 어느 정도 실력을 쌓고 있는지 볼 수 있을까요? 간단한 실력 테스트라 생각하면 되요. 알겠죠?”

“응!”

“열심히 할게.”

창현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인다. 미영은 실력 테스트란 말에 다소 경직된 모습을 보였지만 잘 해낼 수 있을 거라 스스로 위안을 하면서 용기를 키워나갔다.

그러면서 본격적으로 녹음이 시작하였다.

창현이 이번 드라마 ost를 준비하면서 수연에게 줄 곡의 제목은 다름 아닌 <내 마음속의 너>라는 곡이었다. 그리고 태연이 피처링을 하는 것은 <내 마음속의 너 Part.1>이었고, 미영이 피처링을 하는 것은 <내 마음속의 너 Part2>였다. 둘 모두 3분 30초 정도의 길이를 가지고 있고, 메인은 수연이, 태연과 미영이 각각 피처링으로 노래의 효과를 살려주는 역할을 맡았다.

실력 테스트를 받기 위해 태연과 수연이 먼저 부스 안으로 들어섰다. 미영은 두 사람의 실력을 보기 위해 앉은 창현의 옆자리에 은근슬쩍 앉았다.

그 모습을 본 태연과 수연이 순간 눈에 불을 켰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당장이라도 창현 옆에서 스리슬쩍 가까이 다가가는 미영을 패대기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그런 식으로 자신의 본성을 보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그저 이 폭발하는 감정을 꾹 억누를 뿐이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창현은 기계를 조작하더니 외친다.

“그럼 시작하도록 할게요. 시작.”

그러면서 MR을 재생하자 본격적으로 노래가 시작되기 시작한다.

박자를 맞추던 수연이 본격적으로 노래를 하기 시작했고, 옆에 서 있던 태연은 그런 수연의 노래를 들으면서 자신의 타이밍에 맞추어 노래를 하기 시작한다.

“…….”

그 노래를 들으면서 창현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역시, 수연이 혼자서 노래를 부르면 무언가 밋밋한 느낌이 들었지만 태연의 목소리가 가미되니 부족한 점을 훌륭하게 채워주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단점을 보완해준다고 해야 할까? 차츰 보완하면 솔로로서도 우뚝 설 수 있겠지만 당장에 그것은 힘들고, 아직은 서로가 서로의 단점을 보완할 때야 좋은 모습이 나올 듯 싶었다.

‘자, 잘한다…….’

창현의 옆에 앉아 노래를 듣고 있던 미영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가고 있었다. 자신이 듣기에도 태연이 수연의 목소리를 보완하면서 두 사람이 훌륭하게 조화되고 있다는 걸 느꼈던 것이다.

‘자, 잘한다.’

두 사람이 잘 해내는 모습을 보자 미영은 자신감이 사그라드는 걸 느꼈다. 이렇게 되면 자신도 잘 해야 하지 않겠는가? 자칫 자신이 잘못하다가는 점수가 마이너스가 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점수를 얻는 것은 어렵지만 점수를 까먹는 것은 무척이나 쉬운 일이다. 그런 만큼 최소한 태연만큼 해내야 한다는 중압감이 들었다. 자신이 못할 경우 확 티가 날 것이니 말이다. 아무리 못해도 태연만큼 해야 점수를 까먹지 않을 것임이 분명했다.

엄청난 압박감이 그녀를 휘감기 시작했다.

노래가 끝나자 창현이 박수를 치더니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잘했어요. 괜찮은데요?”

“정말? 다행이다.”

괜찮다는 창현의 말에 태연과 수연이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적어도 욕을 먹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이 두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창현이 마냥 당근만 주는 인물은 아니었다.

칭찬을 하며 마음을 풀어두었으니 곧장 조여야 할 때가 되었다.

“하지만 고쳐야 할 점들이 있어요.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있는 만큼 이건 차근차근 극복해나갈 수 있을 거라 생각 되요. 5분 정도 쉬고 <내 마음속의 너 Part.2>에 들어가도록 할게요. 태연 누나는 나오고, 미영 누나가 안으로 들어가세요.”

“응? 응!”

창현의 말에 태연이 헤드셋을 벗으며 밖으로 나왔고, 미영이 자리에 일어서더니 황급히 부스 안으로 들어선다.

밖으로 나온 태연이 자연스럽게 미영이 앉았던 자리에 앉으면서 창현에게 묻는다.

“나 괜찮았어?”

“네, 괜찮았어요. 하지만 고쳐야 할 점들이 있어요. 이건 딱히 단점이라 말하기는 뭣하고 노래의 특징을 살리기 위한 방편이거든요. 그런 만큼 하나씩 보완해나가면 훌륭하게 녹음을 끝마칠 수 있을 것 같아요.”

“역시 고쳐야 할 점이 많구나. 후우!”

가장 많이 듣는 말들이었다.

괜찮다고 하면서 하나둘씩 보완을 해나가야 한다는 것. 창현인 만큼 그 이야기가 신뢰는 갔지만 갈 길이 멀다는 것을 새삼 느끼고 있었다.

어쨌든 녹음은 이제 시작이었으니 차근차근 녹음을 해나가면 되겠지만 말이다.

태연과 몇마디를 주고 받은 창현이 5분이 지난 걸 확인하고는 말한다.

“그럼 곧장 시작하도록 할게요. 시작.”

그러면서 창현이 MR을 재생하자 두 사람이 바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Part.1에서 진행되었던 것처럼 수연이 먼저 노래를 시작하고 노래를 전체적으로 이끌어나가는 방향이었다. 그리고 미영이 수연의 부족한 점을 채워 넣으며 노래의 완성도를 높이는 과정을 보이고 있었다.

“…….”

그 노래를 듣던 창현의 얼굴이 점점 굳어가기 시작했다.

노래를 잘 듣고 있던 태연은 그런 창현의 표정을 확인하고는 무언가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을 느꼈다.

잠시 후, 노래가 모두 끝나고 수연과 미영이 헤드셋을 벗었다. 그리고 창현이 안쪽에 목소리가 들리게끔 한 뒤 입을 열었다.

“잘 들었습니다. 전체적으로 괜찮긴 하지만 문제점이 있어요. 미영 누나.”

“으, 응?”

그녀들이 모를 리가 있겠는가. 노래를 하던 도중 점점 굳어가는 창현의 표정을 보고는 무언가 문제가 있다는 걸 느꼈다. 다만 그 문제점이 무엇인지 잘 모를 뿐이었다.

창현이 자신을 호명하자 미영이 굳어서는 창현을 바라본다.

그런 미영을 향해 창현이 한마디 한다.

“부족해요, 아주 많이 부족해요.”

그 말을 들은 미영이 석상처럼 굳기 시작했다. 태연에게는 칭찬을 하던 창현이 자신에게는 독설을 퍼부은 것이다.

도대체 왜? 라는 의문보다는 자신이 창현에게 기쁨보다는 실망을 주었다는 생각이 전신을 휘감기 시작했다. 그러자 자괴감이 들었다. 자신이 이 정도밖에 하지 못하다니.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는 미영이었다.

창현의 말에 녹음실 분위기는 한순간 차갑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런 미영의 표정을 본 수연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무감각한 듯 늘 웃음을 지어도 미영이 실은 무척 세밀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수연은 서둘러 사태 진화에 나섰다.

그녀가 창현을 보면서 물었다.

“파니가 뭘 잘못한 거야? 이유를 가르쳐줘야지, 그냥 부족하다고 하면 어떻겠어?”

그러면서 수연이 미영을 툭 쳤다. 그리고는 그녀의 귓가에 입을 대고 속삭였다.

“그렇게 망연자실하게 서 있는 건 사태를 더 안 좋게 만드는 거야. 무엇이 잘못된 건지 물어봐.”

수연의 말에 미영이 정신을 퍼뜩 차렸다. 그리고는 창현을 바라보며 물었다.

“내, 내가 뭘 잘못한 거야?”

“정말 몰라서 묻는 거예요?”

여전히 굳은 표정을 지은 채 말을 하는 창현이었다.

그러자 분위기가 더욱 험악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창현은 창현 나름대로 자신의 잘못된 점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미영의 모습에 황당함을 느끼고 있었고, 영문을 모르고 있는 미영은 창현의 모습에서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서 오는 당혹감과 스스로에 대한 실망을 느끼고 있었다.

분위기가 좋지 않게 변하자, 태연이 창현에게 말했다.

“미영이가 무척 세심하고 소심한 부분이 있어. 그러니 창현이 네가 가르쳐주는 게 좋을 거야.”

평소처럼 말을 했지만 태연은 자신의 말이 사태를 악화시키는 것이 아닐지 염려를 하였다. 표정을 굳힌 채 자신의 잘못된 점을 되묻는 창현의 모습은 정말 무서웠던 것이다.

사람을 꼼짝 못하게 만든다랄까?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태연의 말을 들은 창현이 한숨을 후우! 하고 내쉬더니 미영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기 시작한다.

“가사에 전혀 감정몰입이 되지 않고 있어요.”

“감정몰입……?”

창현의 말에 미영은 의문을 표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런 미영의 모습에 창현이 말한다.

“제가 왜 누나 파트에 영어를 많이 넣은 지 아세요? 누나가 미국에서 살다 왔기에 아무래도 영어로 된 가사가 감정몰입에 익숙할 것이라 생각해서 그런 거예요. 그런데 지금 보면 전혀 몰입이 되지 않고 있어요.”

창현이 노래를 할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바로 가사에 담긴 의미를 목소리에 담아 그 감정을 표출하는 것이었다. 그래야 노래의 진정한 의미를 대중에게 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런데 그 점이 해결되지 않았다는 것은 가장 중요한 점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뜻했다.

창현이 말을 이어나갔다.

“가사에 담긴 의미를 곱씹으면서 불러야 해요. 누나가 부르는 파트는 누군가를 미치도록 그리워한다는 내용이에요. 그런데 전혀 그리워하는 느낌이 들지 않아요. 이게 제 착각일까요? 누나는 노래를 부를 때 무슨 생각을 했죠?”

“나는 당연히 노래를 잘하려고…….”

“단순히 잘하려고 하는 생각만 했다는 건가요?”

“…….”

창현의 말에 한순간 말문이 막힌 미영이었다. 무슨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의 말처럼 노래를 부를 때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아서 부르지 않았다.

“아!”

미영은 그제야 은근하게 느껴지던 위화감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태연과 수연은 창현에게 보컬 트레이닝을 받은 적이 있다. 그렇기에 창현이 중점적으로 두는 부분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던 것이다. 그에 반해 미영은 그 부분에 대해 잘 몰랐다. 그저 기교적인 면에서 완벽하게 숙달될 수 있으면 창현에게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창현은 기교적인 측면보다 노래 가사에 감정이 실리는 점을 더욱 중요시 여겼다. 그렇기에 감정이 담기지 않고 기교로 모든 걸 해결하려는 미영의 결점을 단번에 파악할 수 있던 것이다.

‘다르게 느껴졌던 건 태연이와 제시의 목소리에 감정이 실려 있어서 그랬던 거였어. 그에 비해 나는? 내가 잘못된 걸까 아니면 애들이 잘못한 걸까?’

답은 이미 나와 있다. 창현이 대하는 태도에서 정답이 묻어나오고 있지 않은가?

미영은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여태까지 이 점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했다니.

자괴감에 고개를 푹 숙인 미영이 창현에게 사과를 하였다.

“미, 미안. 내가 부족해서…….”

자신의 단점이 무엇인지 파악한 듯한 미영의 모습에 창현이 표정을 풀었다. 그리고는 작게 고개를 끄덕여보이고는 미영에게 말한다.

“제가 누나를 피처링 대상자로 꼽은 것은 호소력 있는 누나의 목소리 때문이에요. 기교로 모든 걸 해결하려 하지 마세요. 노래에 자신이 느끼는 그 감정을 담아내는 것이 중요해요. 제가 보는 재능은 그거니까요. 누나는 누구를 미치도록 그리워해본 적이 있어요?”

“누구를 미친 듯이 그리워해본 적……?”

“굳이 사랑하는 이성이 아니라도 괜찮아요. 다른 사람을 미치도록 그리워해본 적. 멀리 떨어져 있는 가족을 그리워했다거나 그런 적 없나요?”

순간 미영의 머릿속에서 번개같이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그런 적이 왜 없겠는가. 멀리 떨어져 있기에 가족들을 그리워한 적이 있다. 특히 다른 그런 쪽에서 절대적으로 그리움을 가진 적이 있지 않은가? 그렇기에 자신의 예명이 스테파니가 아닌 티파니가 된 것이었으니까.

미영이 표정을 굳히고는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있어.”

그녀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본 창현은 극복의 여지가 있다는 걸 느꼈다. 그리고는 한결 가라앉은 목소리로 침착하게 유도를 하기 시작했다.

“있죠? 다행이네요. 그 감정을 떠올려보세요. 천천히, 가슴 속 깊이 남아 있던 자신의 그리움을 끌어올리는 거예요. 그리고 그 그리움을 노래에 담아내는 것이 중요해요. 그리움이 슬픔으로 변하지 않게 조심해야 하고요. 그 그리움이 누나의 가슴속을 가득 채우고 있나요?”

“그건 잘 모르겠어……. 하지만 그 그리움이 느껴지는 건 사실이야.”

살짝 젖어드는 목소리가 느껴졌다. 그 목소리에서 창현은 그리움을 느낄 수 있었다.

“곧장 누나 파트로 가보도록 할게요. 그 그리움을 노래에 담아보세요.”

고개를 끄덕인 창현이 곧장 노래를 재개하기 시작한다.

MR이 흘러 나오자 미영은 한껏 감정에 몰입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그리움을 담아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

그 노래를 듣고 있던 태연과 수연은 미영의 노래가 놀랍도록 달라졌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단순한 감정몰입이 되었을 뿐인데 노래 가사가 마치 가슴 속에 스며드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미영의 파트가 끝나자 창현이 MR을 끄고서는 고개를 끄덕인다.

“방금 전보다 나아졌어요. 괜찮군요.”

“아…….”

다른 말을 하지 못한 채 미영은 고개를 끄덕인다. 창현의 말을 듣기 전에 자신 스스로가 나아졌다는 걸 느끼고 있던 것이다.

감정몰입이 되었을 뿐인데 노래의 느낌이 이렇게 틀려지다니.

정말 단순한 변화지만 그 단순함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미영은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창현이 감정몰입을 어설픈 기교로 포장되었던 자신의 노래를 듣고 왜 화를 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이었어도 화가 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가장 큰 단점이 될 뻔한 것을 해결하게 되자 창현은 표정을 피고는 말한다.

“이 느낌을 유지하면서 녹음 작업을 차근차근 하도록 하겠습니다.”

“응!”

그렇게 본격적인 녹음 작업이 시작되었다.


일주일 동안 이어진 녹음 작업은 세 여인에게 무척 많은 도움이 되는 유익한 시간이었다.

창현의 지적을 받으면서 자신의 잘못된 점이 무엇인지 절실하게 깨달을 수 있었고, 그것을 보완해나감으로써 한 단계 발전하는 자신의 모습을 느낄 수 있었다. 정말 많은 수확이라고 볼 수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각자에게 알맞은 보컬 트레이닝 법까지 전수받음으로써 한 단계 위로 도약을 노릴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

창현은 정말 꼼꼼하게 녹음을 하였다. 어제 완료된 부분도 오늘 불러보게 함으로써 느낌이 한결 나아지면 재녹음을 하는 것도 망설이지 않았다. 노래를 들으면 들을수록 미묘한 박자는 물론 음 조절까지 나아지는 면모를 보였기에 철저하게 녹음을 했던 것이다.

처음에 창현이 녹음을 상당히 차근차근 진행하겠다고 했던 말을 믿고는 날이 갈수록 스케줄이 촘촘하게 짜여지는 걸 피하고자 했던 세 여인은 재녹음이 거듭될수록 파김치가 되어갔다. 창현의 요구치가 자꾸만 높아짐으로 인하여 자신들이 그것을 맞춰나가야 했던 것이다. 이것이 무척 힘들었기에 세 여인은 하루하루가 무척 힘들었지만 발전하는 자신들의 모습이 보였기에 한결 나은 표정을 지을 수 있었다.

그렇게 사흘이 지나면서 녹음의 절반 이상이 끝났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점 녹음 속도는 가속도가 붙고 있었다.

마지막 날에는 녹음에 참여하는 세 여인 뿐만 아니라 나머지 멤버들도 참여한 상황이었다. 마지막 녹음 날인 오늘은 창현의 녹음실에서 하기에 응원 차 온 것이다. 우연찮게도 오늘은 스케줄이 없는 날이었기에 소녀들은 민폐를 감수하고 창현의 녹음실에 온 상태였다.

프로듀싱을 할 때는 절대적으로 조용히 해야 한다는 창현의 말을 들은 소녀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는 녹음 작업에 착수하는 멤버들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잘못된 점이 있으면 망설이지 않고 지적하는 창현의 모습에 식은땀을 흘려야만 했다. 왜 저것들이 나갔다 돌아올 때면 파김치가 되어 돌아오는지 몰랐는데 막상 보니 파김치가 될 수밖에 없던 것이다.

아주 잘못된 점이 아니면 창현은 지적을 하면서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한다. 그리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면서 기대를 거는 모습을 보인다. 그것이 은연중 큰 부담감이 되어 어깨를 강하게 짓누른다. 그리고 그 기대에 부흥하기 위해 자연히 필사적일 수밖에 없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창현의 언변에 휘말려 그의 마음에 들기 위해 능력 이상의 기량을 발휘해야 했던 것이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창현은 묵묵히 녹음 작업에 임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녹음 작업에 들어간지 약 두 시간이 되었을 무렵.

마침내 창현의 입에서 그녀들의 해방을 알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녹음 작업이 모두 끝났습니다. 일주일 동안 수고하셨어요.”

“끝이다! 꺄아!”

창현의 말에 태연과 수연, 미영은 초췌했지만 기쁜 얼굴로 해방의 기분을 맛볼 수 있었다. 자신의 실력이 늘어나는 기쁜 시간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자신들을 지긋지긋하게 옥죄는 일주일이란 시간이 모두 흘러갔던 것이다. 일주일 동안 어떻게든 창현과 친해져보려던 미영은 창현의 하이 페이스에 휘말려 쫓아가기에도 벅찼던 것을 떠올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걸 모르는 다른 멤버들은 녹음이 끝났다는 것을 기뻐하기에 바빴다.

녹음실은 녹음을 하는 데만 이용해야 한다는 창현의 말에 의해 1층으로 내려온 소녀들은 이야기를 나누기 바빴다.

그 사이 2층 녹음실을 잠근 창현이 1층으로 내려오며 물었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 거예요?”

“녹음이 끝났으니까, 앞으로 할 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거였지.”

“할 일?”

창현의 고개가 순간 갸웃거리며 기울어졌다.

녹음을 응원하러 온 것이 아니란 말인가? 녹음이 끝났다면 이제 할 일은 끝난 건데?

의아함을 느끼는 창현을 보며 유리가 웃음을 씨익 짓는다. 그리고는 창현에게 말한다.

“녹음도 끝났으니 기념 파티 하자!”

“기념 파티? 여기서요?”

창현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녹음을 하느라 지쳐 있는데 기념 파티를 하자고 할 줄 몰랐던 것이다. 파티보다는 쉬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에 창현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파티는 내일 해요. 전 쉴래요.”

그 말에 유리가 강하게 반발했다.

“안 돼! 우리 내일 행사 스케줄 있단 말이야.”

“그럼 다음에 시간 날 때 해요. 어쨌든 지금은 별로에요.”

“오늘 아니면 기회가 흔치 않은데…….”

유리가 창현에게 압도되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다른 멤버들에게는 강하게 나갈 수 있었지만 창현에게는 강하게 나갈 수가 없었다.

그런 유리를 지원하고 나선 것이 주현이었다.

주현은 창현을 바라보면서 물었다.

“그럼 이렇게 하는 게 어때? 창현이 네가 우리랑 내기를 하는 거야. 그래서 우리가 이기면 파티를 하는 거고, 우리가 지면 순순히 돌아갈게. 어때?”

창현의 중학교 선배인 주현이 정확하게 그의 성격을 꿰뚫어보고 하는 말이었다. 파티는 싫어하지만 내기를 좋아하는 창현의 성격을 슬쩍 자극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주현의 말을 들은 창현이 반응을 보였다. 귀찮은 표정을 지었던 그가 퍼뜩 깬 표정을 짓더니 주현을 바라본 것이다.

“내기?”

“응. 우리가 지면 파티를 안 해도 좋아.”

“내기라… 좋아요. 그게 낫겠네요.”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창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승낙을 표했다.

그 말로 인해 창현과 소녀시대는 본격적으로 파티를 걸고 내기에 돌입하기 시작했다.


내기를 한다고 하여도 서로가 만족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하지 않은가? 그런 만큼 내기 종목을 선정하는 것도 하나의 골칫거리라 할 수 있었다.

창현이 주현을 바라보면서 물었다.

“내기는 뭐로 할 건데요? 방식은 어떻게 하고요?”

막상 내기를 하자고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지 않은가? 자세한 룰을 세워야 했기에 창현은 룰을 궁금해하였다.

그 말을 들은 주현이 싱긋 웃음을 지었다. 이미 내기를 제안할 때부터 어느 정도 머릿속에 내기를 어떻게 해야 할지 그림을 그려두고 있었던 것이다.

주현은 잠시 생각을 정리하다가 창현에게 말했다.

“우선 내기는 총 다섯 판을 하는 거야. 그리고 먼저 세 판을 이기는 쪽이 승리를 하는 거고. 내기 종목은 처음에 가위 바위 보를 해서 이긴 쪽이 정하고 그 다음 내기에서 진 사람이 종목을 정하는 거지. 어때?”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처음에 가위 바위 보를 해서 선기를 제압할 수 있고, 패배한 쪽이 그 다음 종목을 제시할 수 있는 만큼 충분히 역전의 여지가 있는 것 아닌가? 다만 첫판을 제압하는 것이 관건이라 볼 수 있었다. 자신에게 유리한 종목을 번갈아 가면서 하면 결국 이쪽이 승리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창현은 불만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좋아요. 내기인 만큼 절대 져주지 않을 거니까 마음 단단하게 먹어요.”

승부에서 만큼은 결코 자비를 베풀지 않는 창현이었다.

그걸 알고 있었기에 소녀들은 바짝 긴장한 표정을 지으면서 한편으로는 기대감이 고조된 표정을 지었다. 질 경우 쪽박을 차겠지만 이것 나름대로 재미가 있다고 느끼고 있던 것이다.

“누가 저랑 가위 바위 보 할 거예요?”

창현의 소녀들을 둘러보며 묻자, 시선이 태연에게로 집중이 되었다. 소녀들 내에서 가위 바위 보 실력이 상위권이었고, 리더였기에 이런 중임(?)을 맡기에는 제격이었던 것이다.

자신에게 집중되는 시선을 느낀 태연이 한숨을 하아! 하고 내쉬더니 이내 앞으로 나선다.

“내가 할게.”

“좋아요. 아참, 대신에 한 가지 이점하고 핸디캡을 적용하도록 하죠. 제가 내기를 제시할 경우 누나들 중 아무나 나서도 상관이 없어요. 하지만 한 사람은 한 번밖에 나설 수가 없어요. 알겠죠?”

솔직히 별 거 아니지만 이런 룰이 있어야 공평할 것 같다는 것이 창현의 생각이었다.

소녀들은 핸디캡이라는 말에 순간 움찔했다가 창현의 제안이 별 거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가위 바위 보를 위해 태연과 마주 선다.

“전 져줄 생각 없어요.”

“나도 질 생각 없거든? 내가 왜 소녀시대 내에서 가위 바위 보로 무적이라 불리는지 가르쳐주마.”

그렇게 말해봤자 처음 만나는 사람끼리 하는 가위 바위 보는 결국 운이었다.

두 사람이 마주 선 채 가위 바위 보를 시작한다.

“가위 바위 보!”

허공에 펼쳐지는 두 사람의 손. 그리고 두 사람의 얼굴에 희비가 교차한다.

“……!”

“후후! 제가 먼저 선공이군요.”

태연은 보자기를 펼쳤고, 창현은 가위를 냈다. 선공을 창현이 쥐게 된 것이었다.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은 태연이 창현을 힐끗 노려보더니 말한다.

“남자라서 주먹을 낼 줄 알았는데…….”

“그런 논리로 말을 해봤자 전 신경 안 씁니다. 후후후!”

“이익…….”

능글맞은 웃음을 짓는 창현의 모습이 얄미워 이를 가는 태연이었다.

그런 태연의 표정을 오히려 즐기는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창현이 소녀들을 둘러본다. 그리고는 입가에 지은 미소를 더욱 진하게 그려내며 입을 연다.

“첫 판도 가뿐하게 이겨줘야겠죠? 첫 판은 바로 팔씨름입니다.”

“우우! 약았다.”

창현의 말에 소녀들 사이에서 곧장 야유가 터져 나왔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나? 자신들 같이 섬세하고 힘이 약한(?) 소녀들에게 팔씨름을 제안하다니! 이건 아주 날로 먹으려는 창현의 사악한 심보가 들어가 있는 것임이 분명했다.

야유를 터뜨리는 소녀들의 모습에 오히려 웃음을 지어 보인 창현이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그렇게 해도 제 마음은 변하지 않아요. 기권해도 상관은 없고요. 기권 하실래요?”

“기권 안 해! 이렇게 되면 믿을 사람은 하나 밖에 없지. 윤아야, 가서 창현이를 꺾어버려. 네가 우리 여자들을 대변하여 저 여자를 얕보는 녀석의 콧대를 눌러줘야 해.”

창현의 도발에 넘어간 태연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소녀시대에서 힘을 맡고 있는(?) 윤아를 출격 시켰다.

윤아는 태연의 호명에 약간 얼떨떨한 표정을 짓더니 자신을 가리키며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제, 제가요?”

“그럼 어쩌겠어? 우리들 중에서 네가 힘이 제일 강한데. 여기에 이의 있는 사람 있어?”

태연이 멤버들을 둘러보면서 묻자, 소녀들은 모두 태연의 결정에 동의한다는 듯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래도 윤아가 그나마 가장 센 힘을 지니고 있기에 윤아가 나서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었다.

멤버들의 의견이 통일된 듯하자 윤아는 그 의견을 마지못해 받아들이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여 보인다.

“알겠어요. 제가 이겨볼게요.”

그러면서 결연한 표정을 짓는 윤아였다.

하지만 그녀의 속에는 함박웃음이 가득하였다.

팔씨름! 이건 달리 손과 손을 마주잡아 서로의 힘을 겨루는 것이 아닌가?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서로의 힘을 겨룬다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손과 손을 마주잡는다는 것이 주요 포인트다.

이건 아주 대놓고 손을 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 별 거 아니지만 아주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걸리는 메리트 있는 대결이었다.

창현이 팔씨름을 외치는 순간 윤아는 자신에게 기회가 왔다는 걸 느꼈다. 소녀시대에서 힘을 맡고 있는(?) 자신이 아니면 누가 창현과 겨룬단 말인가.

그러나 그녀는 섣불리 앞으로 나서지 않았다. 어차피 내기에 혈안이 된 만큼 자신이 나서지 않아도 자연스레 자신이 당첨될 것이란 강한 확신이 있던 것이다. 그렇기에 조용히 침묵을 지키며 자신이 호명되길 기다렸다. 자신이 먼저 나서서 좋아하는 모양새를 보이면 분명 중간에서 견제가 들어올 것임이 분명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선택된 것은 바로 자신이었다.

윤아는 필사적으로 얼굴 근육을 컨트롤 하였다.

‘좋아하는 티를 내면 안 돼.’

그저 담담하게. 자신이 하는 것은 손과 손을 맞잡으며 스킨십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승부에 임하는 것이다. 대결이 성사된 뒤에 스킨십을 즐기면 되는 것이니까.

그렇게 윤아로 결정이 나자, 창현은 그녀를 바라보며 경고한다.

“살살하지 않을 거예요. 내기인 만큼 최선을 다할 테니까.”

“물론이야. 나도 최선을 다할 거야.”

자신이 패배할 것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스킨십을 길게 하기 위해서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

팔이 부러지는 한이 있어도 모든 전력을 끌어올려 버티겠다고 다짐하는 윤아였다.

‘강인 오빠를 이긴 창현이를 내가 이길 수 있을 리 없지.’

마음을 비우며 창현과 손을 맞잡는 윤아였다.

남자인데도 손이 어찌나 곱고 예쁜지, 잡는 것 하나만으로도 가슴이 두근두근 설레는 게 느껴졌다.

‘아직은 안 돼. 좋아하는 기색을 보이지 말자. 지금은 아니야.’

속으로는 웃음을 지으면서 윤아는 창현과 손을 맞잡으며 그 감촉을 한껏 만끽하였다. 그리고는 탁자에 팔뚝을 댄 뒤 본격적으로 팔씨름을 준비한다.

태연이 자연스레 심판이 되어 두 사람의 대결을 맡게 되었다.

그녀는 맞잡은 두 사람의 손을 붙잡고는 살짝 흔들어 힘을 주지 않게 하더니 이내 시작을 외친다.

“준비하고… 시작!”

그러면서 손을 놓는 태연이었다.

창현은 자신이 패할 리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자신의 근력도 웬만한 동년배 중에서는 그야 말로 발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거기다가 내공까지 동원할 수 있지 않은가? 물론 자신도 자존심이 있는 만큼 내공을 쓸 생각은 없었다. 자신은 남자고 윤아는 여자인데 남자가 여자에게 내공이라는 치사한 방법까지 동원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가뿐하게 넘겨주겠다고 생각하는 창현이었다.

‘아무리 윤아 누나라고 해도 날 이길 수는 없어. 첫 판은 가볍게 가져가주지. 문제는 두 번째 판인데…….’

애초에 이번 판은 자신이 이길 것이라 당연시 여기기에 두 번째 판이 무엇으로 나올지 고민이 되었다.

첫 판은 자신이 제시를 했다고 하지만 두 번째 판부터는 패배한 저쪽에서 제시를 할 테니 말이다. 만약 이상한 내기를 제시하면 자신이 이기기 힘들 수도 있으니 다른 내기들은 철저히 자신이 이길 수 있게 구상을 해놓아야 한다.

‘다른 두 개로 무엇을 한다? 일단 팔씨름을 이겨야겠군. 그 다음에 생각해도 늦지 않을 테니까.’

그러면서 팔씨름 대결에 집중하려는 창현이었다.

아무래도 적들의 전의를 꺾어야 하는 만큼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면서 넘겨줄 생각이었다. 그렇게 되면 더욱 흥분할 것임이 분명했고, 그렇게 되면 저쪽에서 제시하게 될 내기에 분명 영향을 끼칠 것임이 분명했다.

빠르게 판단을 내린 창현이 팔에 힘을 주기 시작한다.

‘여유가 가득한 모습으로 이겨주…….’

그 순간 태연이 시작을 선언하였다.

그리고는 묵직하게 가해지는 힘.

윤아와 손을 맞잡은 창현의 입에서 순간 당혹성이 섞인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어? 어어어!”

“와아아아아!”

바람 빠지는 창현의 목소리와 함께 그의 팔이 기우뚱 넘어가기 시작했다. 윤아의 팔 힘은 그의 상상을 초월하는 영역에 다다라 있던 것이다.

창현은 여유로운 마음으로 임했고, 윤아는 애초에 승리를 포기하고 조금이라도 대결을 지속하기 위해 숨겨진 잠력까지 모두 끌어올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으로 인해 그려진 구도가 지금의 상황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창현의 팔이 순식간에 절반 이상이 넘어가자 소녀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윤아를 응원하기 시작했다.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윤아가 예상 외의 선전을 선보이면서 창현을 이길 수도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고 있었던 것이다.

“큭!”

뒤늦게 자신의 실책을 자각한 창현이 신음을 흘리면서 팔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 번 꺾이면 제대로 힘을 주지 못하지 않은가? 게다가 윤아는 과연 힘윤아라 불릴 정도로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어서 창현이 쉽게 넘기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창현과 윤아의 팔씨름 대결이 장기화 되고 있었다.

“…….”

두 사람은 팔씨름에 집중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꺾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윤아는 이대로 자신이 이길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에 전력을 다하고 있는 실정이었고, 창현 또한 초반의 위기를 넘긴 상황이었기에 자신의 페이스를 되찾고는 침착하게 대결에 임하고 있었다.

그리고 꺾여있던 팔이 서서히 제 자리를 되찾아가고 있었다. 이대로 팽팽한 구도만 그려낸다면 자신의 승리다.

“아, 안 돼!”

대결을 지켜보고 있던 소녀들은 점점 창현이 역전하고 있는 모습에 비명을 질렀다. 윤아가 다 이겼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창현의 저력이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들의 애절한 바람이 담긴 외침은 허공에 산산이 흩어지고 말았다. 꺾였던 팔을 본래 자리로 되돌린 창현이 본격적으로 반격을 한 것이다. 그리고 힘과 힘이 충돌하게 되자 상대적으로 힘이 부족한 윤아의 팔이 서서히 넘어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내 윤아의 팔이 먼저 탁자와 맞닥뜨렸다.

쿵!

“창현이 승…….”

창현의 승리를 외치는 태연의 목소리에는 힘이 담기지 않았다.

자신의 승리 판정을 들은 창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윤아의 힘을 얕보다가 패배할 뻔한 위험천만한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후우!”

‘윤아 누나의 힘이 이렇게 셀 줄이야. 잘못하면 내공까지 쓸 뻔했네.’

위험천만했던 순간을 떠올리며 몸을 가늘게 떠는 창현이었다. 그리고는 소녀들을 둘러보며 자신의 승리 사실을 인지시켰다.

“제가 이겼네요? 이로써 1대 0입니다.”

자신의 승리를 말하는 창현의 모습이 참으로 얄미워보였다. 여성을 상대로 팔씨름을 이겼다고 좋아하는 모습이라니.

유리가 발끈하여 앞으로 나서면서 자기 마음대로 종목을 정했다.

“쳇! 가녀린 윤아한테 팔씨름으로 이겨서 좋아? 그럼 다음 종목은 이쪽에서 정하도록 할게. 다음 종목은 애니메이션 이름 대기야. 주현아, 네가 출격해! 그리고 창현이를 꺾고 소녀시대의 위상을 높이 세워줘!”

“어, 언니!”

갑작스러운 유리의 외침에 주현이 당황한 표정을 짓는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창현은 입가에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애니메이션 이름 대기라, 바로 자신의 주 종목이었다. 애니메이션을 무척 좋아해서 일본에 갔을 때 그에 관련된 팬시 물품을 살 정도가 아니었던가?

‘2대 0으로 내가 앞서나갈 수 있겠군.’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는 창현이었다.


찢어질 듯한 주현의 외침에 유리가 표정을 찡그렸다. 그리고는 주현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왜? 애니메이션은 막내 네 전문이잖아? 가서 창현이를 꺾어버려.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거야?”

주현이 파랗게 질린 표정을 짓고 있자 의아한 표정을 지은 유리가 물었다.

그러자 주현이 평소 얌전한 이미지를 탈피한 채 유리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어, 언니가 몰라서 그래요! 애니메이션은 창현이가 완전 박사라고요!”

그 말을 들은 유리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생긴 건 완전 고상하게 생겨서 애니메이션을 보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설마 주현이와 같은 애니메이션에 열광하는 그런 계열이었단 말인가?

유리가 창현을 힐끗 바라 보면서 주현에게 물었다.

“뭐, 뭐라고? 창현이 쟤가 애니메이션도 봐?”

“후후! 감사합니다, 유리 누나. 한판도 거저 주워 먹겠군요.”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는 창현의 모습을 보면서 유리는 주현의 말이 틀린 것이 아니라는 걸 느끼고 있었다.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자각한 유리가 창현을 보면서 말한다.

“어, 없던 걸로 하면 안 될까?”

“후후! 감사합니다. 두 번째 승리도 손쉽게 이루겠네요.”

이미 내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 없는 것이 세상의 이치, 자신에게 유리하게 기울어진 대결을 창현이 놓치려고 할 리가 없었다.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창현의 의지를 읽은 유리가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그런 그녀에게 멤버들의 구박이 이어진다.

“야! 어쩌자고 그렇게 말을 한 거야? 이렇게 되면 우리가 불리해지잖아!”

“나도 창현이가 애니메이션을 좋아할지 몰랐다고. 설마 애니메이션을 좋아할 줄이야.”

“일단 하게 되었으니 어쩔 수 없지. 주현이를 응원하는 수밖에.”

그것 밖에 방법이 없었다. 소녀들은 지금 다투는 것이 자신들에게 득 될 것이 없다고 판단하고는 주현을 응원하기로 하였다.

“후우!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건지.”

“뭐가 어쩌다가 이렇게 돼. 다 너 때문이잖아.”

옆에서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던 유리는 옆에 있던 효연의 구박을 듣고는 한숨을 푹 내쉰다. 자신이 이런 실수를 하는 날이 올 줄이야. 정말 꿈에도 상상 못했다.

어쨌든 지금 상황이 닥친 만큼 주현을 믿는 것밖에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애니메이션에 푹 빠져있던 주현을 믿는 수밖에.

두 사람의 대결이 시작되었다.


창현은 주현에게 간단하게 룰을 제시하고 있었다.

“그니까 애니메이션 종류는 한 가지만 된다는 거예요. 시리즈별로 연결되는 건 안 되고요.”

가령 짱구는 못 말려가 있다면 짱구는 못 말려 1, 짱구는 못 말려2, 이런 식으로 할 수 없지 않은가? 그걸 방지하기 위해 규칙을 정하고 있었다.

“알았어.”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차린 주현이 고개를 끄덕인다. 역시 주현은 논리적으로 이야기를 하면 대화가 통해서 좋다.

입가에 미소를 지은 창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그럼 시작할까요? 저부터 할게요.”

“좋아.”

그렇게 두 사람의 대결이 시작되었다.

창현과 주현의 대결은 그야 말로 박빙이었다.

어릴 적에 방영되었던 날아라 슈퍼보드부터 시작하여 머털도사, 은비까비, 꼬비꼬비, 달려라 하니 등 수많은 애니메이션 이름이 흘러 나오기 시작했다. 특히 둘리 같은 애니도 나오면서 대결은 제법 장기전의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창현은 주현과 겨루면서 경각심을 가져야 했다.

‘만만치 않은데? 이렇게 많이 알고 있을 줄이야.’

거기에 악재가 겹쳤다. 바로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소녀들이 합류하여 주현에게 애니메이션의 존재 여부를 알려주기 시작한 것이다.

그걸 목격한 창현이 거세게 항의했다.

“뭐에요! 저랑 주현 누나가 겨루는데 왜 누나들이 끼어드는 거예요!”

주현에게 조언을 해주던 효연이 눈을 부릅 뜨며 말한다.

“주현이도 소녀시대거든? 우리는 한몸이야. 안 그래, 주현아?”

“네? 네.”

주현이 그렇게 대답해버리니 무어라 할 수가 없었다.

창현은 속으로 이를 갈면서 이겨주겠다고 다짐을 했다. 이 부분을 제지하지 못한 자신의 잘못을 자책하면서 말이다.

대결은 중반을 향해 흘러가기 시작했다. 어릴 적 방영하던 만화들 중에서 상당한 고급 부분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창현과 주현은 아직까지 알고 있는 것이 많은 듯,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대결을 하고 있었다.

“천사소녀 네티.”

“세일러 문.”

“웨딩피치.”

“간호천사 리리카 SOS.”

순간 멈칫할 때는 소녀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주현은 착실하게 애니메이션의 이름을 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창현은 대결이 길어질 것을 예감했다. 주현 혼자서였다면 벌써 밑천이 드러났을 테지만 멤버들의 지원 사격이 함께 하니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특히 자신의 잘못을 갚겠다면서 유리가 주현에게 서포트 하는 애니메이션은 가관이었다. 전설의 용사 다간-지구용사 썬가드-지구용사 백터맨-로봇수사대 케이캅스는 창현의 넋을 빼놓기에 충분했다. 설마 이 애니메이션들을 알고 있으리라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창현도 순순히 물러서지 않았다. 주현이 로봇류 애니메이션 이름을 댈 때, 창현은 슬램덩크-테니스의 왕자-고스트 바둑왕 등 만화책이 애니메이션화 된 것들로 반격을 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주현에게 위기가 찾아왔다. 그녀에게 조언을 해주던 유리의 밑천이 마침내 바닥났던 것이다.

유리의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되니 주현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 그러니까…….”

“30초에요. 30초 안에 대답 못하면 지는 겁니다.”

창현은 여유 있는 모습으로 주현을 압박했다. 하지만 그도 지금 알고 있는 애니메이션의 종류들을 거의 소비한 상황이었다. 자신은 어릴 적 본 애니메이션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 대답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소녀들은 그 점을 파고들어 점유하고 있던 것이다. 만약 주현 혼자였다면 어렵지 않게 격파했을 수 있지만 여러 명이 힘을 합치니 만만치 않은 전력이었다.

주현이 우물쭈물거릴 때 그녀에게 도움을 주는 인물이 있었다.

바로 윤아였다.

윤아는 주현에게 다가와 그녀의 귓가에 조언을 해주었다.

주현이 눈을 빛내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창현에게 말했다.

“건담 Seed."

“…….”

설마 건담류가 나올 줄이야. 어이가 없어서 한순간 할 말을 잃은 창현이었다.

창현이 물끄러미 윤아를 바라보았다. 건담을 그녀가 어떻게 알고 있단 말인가?

그 시선을 받은 윤아가 부끄러운 듯 시선을 살짝 외면하면서 말한다.

“재미있다고 팬이 구워준 DVD를 본 적이 있거든…….”

“헐…….”

어이가 없어 무어라 말을 못하는 창현이었다.

윤아의 진입으로 대결은 다시 속행되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일본 애니메이션 이름이 점점 소진 되어 감에 따라 창현도 초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주현 또한 언니들의 지원 하에 근근이 버텨나가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런데 그 저력이 제법 매서워 창현은 자칫 잘못하다가는 자신이 질 수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창현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다가 하나를 발굴해내고는 외친다.

“오, 오란고교 호스트부!”

그가 말함으로써 주현이 말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주현은 멤버들을 둘러보았지만 소녀들은 전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었다. 더 이상 그녀들도 떠오르는 애니메이션이 없던 것이다.

그러자 주현의 얼굴에 차츰 절망이 서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창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내가 이긴 건가?’

참으로 힘든 대결이 아닐 수 없었다. 설마 주현이 이런 저력을 지니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당장 오란고교 호스트부 이후 떠오르는 애니메이션이 없었지만 주현을 비롯하여 다른 소녀들도 더 이상 알고 있는 애니메이션이 없는 듯하였기에 자신이 승리했다고 생각하는 창현이었다.

자신 또한 위급하다는 걸 감추기 위해 창현은 짐짓 여유가 있는 표정을 짓고는 주현에게 말한다.

“10초 남았어요.”

그러면서 속으로 카운트 다운을 세기 시작하는 창현이었다. 머릿속에는 자신의 승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더 이상 주현이 내밀 카드는 없었다.

“……!”

약 5초 정도 남았을 무렵, 주현은 순간 무언가 생각이 난 듯 번쩍 눈을 떴다.

그 모습을 보며 창현은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주현이 무언가 생각이 난 거란 걸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주현은 방금 자신이 떠올린 애니메이션의 이름을 외쳤다.

“Fate/Stay Night!”

설마 이 애니메이션을 알고 있을 줄이야.

창현의 표정에 황당함이 물들었다. 주현이 이걸 알고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자신 또한 이름만 듣고 본 적은 없었기에 떠올리지도 못했던 것이었다.

황당함이 가득한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자 주현은 입가에 미소를 짓고는 창현에게 말한다.

“창현이 네 차례야.”

“…윽!”

그녀의 말대로 상황은 역전되었다. 더 이상 내밀 카드가 없던 창현은 무슨 애니메이션 이름을 대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어느덧 그 또한 알고 있는 모든 애니메이션의 이름을 말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주현은 한결 느긋해진 표정으로 창현을 바라보며 말한다.

“15초 남았어.”

그녀의 말을 들은 창현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그러다가 이내 무언가 떠오른 듯 주현에게 외친다.

“키라링 레볼루션!”

국내에서는 이름이 다르지만 일본 애니메이션 이름은 그러했다.

자신이 애니메이션 이름을 댐으로써 창현은 자신의 승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착각에 불과했다.

그가 말하기 무섭게 주현이 대답한 것이다.

“진월담 월희.”

“……”

곧바로 대답해버리는 주현의 모습에 창현은 전의를 상실했다. 자신은 무척 힘들게 찾아내서 말한 것인데 마치 여러 개 더 알고 있다는 듯한 주현의 모습에 전의가 꺾여버린 것이다.

그런 창현의 모습을 보면서 주현은 카운트 다운을 세기 시작했다.

“10초 남았어. 9… 8… 7…….”

점점 줄어드는 숫자들. 그 줄어드는 숫자만큼이나 창현의 마음도 쪼그라드는 듯하였다.

무엇을 말해야 할까.

미친 듯이 머리를 굴렸지만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시간은 3초밖에 남지 않았다.

주현의 입에서 2초 남았다는 소리가 흘러 나올 때, 창현이 입을 열었다.

“야, 야근병… 크윽! 제가 졌습니다.”

차마 자신의 말을 잇지 못한 채 고개를 숙이며 패배를 인정하는 창현이었다. 이 영역을 넘어설 수가 없었다.

창현의 패배 인정에 소녀들이 무슨 가요 프로그램 1위를 한 것처럼 서로를 얼싸안았다.

그 모습을 보면서 창현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로써 스코어는 1대 1이 되었다.

상황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하아…….’

막상 상황이 끝나자 기억 저편에 잠재되어 있던 애니메이션 이름들이 떠올랐다. 이게 왜 그 순간에는 떠오르지 않아서 곤란하게 했던 것일까. 참으로 아쉬운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괜찮아. 아직 나에게 불리할 건 없으니까. 1대 1이니 아직 상황을 반전시킬 여지는 남아 있어.’

한판 졌다고 해서 불리한 것이 아니다. 상황은 원점으로 돌아왔을 뿐이고, 그 다음 대결의 선택권은 자신에게 있다. 그런 만큼 자신에게 아직 승리할 가능성은 무궁무진하게 남아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나에게 유리한 대결로 완벽하게 꺾어주겠어.’

그렇게 창현이 전의를 다지고 있을 때, 서로 얼싸안으며 승리의 기쁨을 나누던 소녀들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힘겹게 1승을 얻어내기는 했지만 아직 좋아할 만한 수준이 아니라는 것을 자각하고 있던 것이다.

그녀들은 긴장한 안색으로 창현을 바라본다. 다음 대결이 무엇이냐에 따라 어느 쪽이 확실한 승기를 잡을지 결정이 되었기에 더욱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그러다가 주현이 문득 궁금한 것이 떠올랐는지 고개를 갸웃하며 창현에게 묻는다.

“그런데 궁금한 게 있는데…….”

호흡을 가다듬고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 페이스를 끌고오려던 창현은 주현의 절묘한 커트에 멈칫한다. 그리고는 내심 혀를 내두르면서 주현의 질문이 무엇인지 묻는다.

“뭔데요?”

“아까 말하려다가 말았던 거 있잖아? 야근… 뭐라고 하던데 그것도 애니메이션 이름 아니야?”

“네?”

주현의 이야기를 들은 창현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주현이 그걸 들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아니, 들었다 쳐도 자신에게 질문을 하리라고는 예상을 못했다.

그걸 어찌 말한단 말인가. 입에 담기도 남사스러운 것인데.

물론 창현이 그 야근…으로 이어지는 애니메이션을 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워낙 유명한 애니메이션이었기에 언급을 하려다가 그 애니메이션이 몇 세 이상 시청 가능한지 떠올리고는 황급히 말을 잇지 않았던 것이다.

왠지 제목부터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자칫 잘못하다가는 변태로 낙인 찍히는 것은 그야 말로 식은 죽 먹기였기에 창현은 그걸 말하지 못하고 있었다.

창현은 재빨리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아, 아니에요. 실은 게임 이름인데 워낙 유명한 거여서 제가 순간 착각을 했어요.”

“아, 그렇구나. 어쨌든 내가 이긴 거 맞지?”

“네, 누나가 이긴 거 맞아요.”

더 이상 그에 대한 언급이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 창현은 순순히 승패에 승복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복병은 존재하고 있었다.

주현 옆에 서 있던 순규가 창현의 말에 고개를 갸웃하면서 의문을 표한 것이다.

“유명한 게임? 난 그런 거 들어본 적 없는데? 유명하다면 재미있나 보네? 무슨 게임이야?”

“…….”

순규의 물음에 창현은 한순간 할 말을 잇지 못했다.

도대체 무슨 게임이라고 말을 해주어야 한단 말인가? 절대 19세 게임이라고 언급을 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렇기에 창현은 고개를 저으며 말한다.

“저도 잘 몰라요. 그저 유명하다는 것밖에는.”

이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변명이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순규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순순히 끄덕였다.

“그래?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후우!’

순순히 납득하는 모습을 보이자 속으로 한숨을 내쉬는 창현이었다. 정말 가슴이 철렁하는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는 차분하게 숨을 고른 뒤 소녀들에게 말한다.

“제가 졌으니까 스코어는 1대 1이네요. 그럼 다음 종목은 제가 정하면 되는 거죠?”

“응.”

애초에 규칙이 그러했기에 순순히 창현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창현은 입가에 싱긋 미소를 지은 뒤 종목을 선택한다.

“제가 선택하는 종목은 바로 묵찌빠에요. 딱 한판으로 승부를 결정하는 거죠. 나설 사람은 누군가요?”

창현은 묵찌빠를 택했다. 그 이유는 자신이 승리할 절대적인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승리할 수밖에 없는 비법을 알고 있었다. 자신의 반사신경과 공식을 합치면 그야 말로 무적과도 다름이 없었기에 창현은 승리할 자신이 있었다.

묵찌빠 종목이 선택되자 소녀들은 다소 당황한 표정을 짓는다. 창현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종목이 선택되리라 생각했는데 도박성이 짙은 묵찌빠가 선택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그녀들은 당황한 모습을 보이다가 창현에게 말한다.

“자, 잠깐! 우리에게 시간을 줘.”

“네, 얼마든지요.”

승리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기에 창현은 여유가 넘쳤다.

그런 창현을 뒤로 한 채 소녀들은 본격적으로 묵찌빠 즉석 토너먼트를 하기 시작했다. 이미 윤아와 주현이 내기에 참여했던 상황이었기에 토너먼트에서 제외되었고, 소녀시대 내에서 묵찌빠의 강자로 통하는 수연이 부전승으로 올라가게 되었다. 그리고는 태연과 수영이, 효연과 유리, 순규와 미영이 묵찌빠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승리한 수영은 효연과, 순규는 수연과 붙었다.

결승전에 진출한 사람은 다름 아닌 수연과 효연이었고, 두 소녀는 치열한 대결 끝에 수연이 승리를 거머쥐었다.

‘내 승리야.’

묵찌빠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 창현은 자신의 절대적인 승리를 자신하였다. 그냥 하는 모습이 완전 초보였던 것이다.

누구도 묵찌빠 절대 승리 비결을 알고 있는 것 같지가 않았다.

그렇게 되면 승부는 더욱 쉬워지리라.

‘후후후!’

속으로 웃음을 짓는 창현이었다. 이런 걸 두고 거저먹는다고 하는 것이리라.

하지만 그걸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것이 묵찌빠 대결에 가장 적절했기에 미리 만전을 기하는 것이 중요했다.

창현이 수연을 바라보며 물었다.

“누나 묵찌빠 잘하시나보네요?”

그 물음에 수연이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잘 못해. 그나저나 창현이 네가 묵찌빠를 선택했다는 것은 네가 잘한다는 뜻 같은데?”

“저도 잘 못해요.”

일단 겸양의 말을 하는 창현이었다.

하지만 그 말이 수연에게 먹히지 않았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창현을 바라보며 말한다.

“거짓말 하지 마. 잘 못하면 왜 선택했겠어? 우리에게 승리를 쥐어주려고? 그건 아닐 거야. 그렇다는 건 창현이 네가 묵찌빠에 강한 자신감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지. 내 말이 틀려?”

“…….”

자신의 속을 훤하게 꿰뚫어보는 수연의 모습에 할 말을 잃은 창현이었다. 이렇게 말을 하면 자신이 무어라 말을 할 수 없지 않은가. 확실히 자신이 있어서 한 것이기에 묵찌빠에 임하는 것이지만 말이다.

창현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수연은 그를 힐끗 보더니 입을 연다.

“아무래도 좋아. 내가 잘하는 건 아니지만 최선을 다할 거니까. 나도 제법 재치가 있어서 빠르다는 소리를 들으니까 조심하라고.”

두뇌 회전이 빠르다는 것인가? 아니면 심리전을 거는 것인가?

순간 복잡한 생각이 창현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지만 그것은 한순간이었다. 자신이 굳이 수연의 말에 흔들릴 이유가 없는 것이다. 자신의 주관만 잘 지켜나간다면 수연을 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시작하죠.”

“좋아.”

창현과 수연의 대결이 임박하자 소녀들이 주변을 둘러싸며 두 사람의 대결을 관람하기 시작했다. 그 사이 창현은 머릿속으로 분주히 계산에 계산을 거듭하고 있었다.

‘내가 아까 가위를 냈으니까 이번에는 주먹을 낼 거라 생각할 거야. 그 점을 파고들어서 가위를 내겠어.’

가위 바위 보 하나도 철저하게 계산을 하는 창현이었다.

그 계산이 끝날 무렵, 창현과 수연이 가위 바위 보를 하기 시작했다.

“가위 바위 보!”

그와 함께 창현과 수연의 손이 허공에서 변화를 일으켰다. 창현은 자신의 결심대로 가위를 내고 있었다. 그런데 수연은 창현의 예상과 달리 보자기가 아닌 주먹을 내는 것이 아닌가?

자신이 졌다는 것을 자각한 창현이 순간 빠르게 계산을 하려 할 때였다.

수연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바로 외쳤다.

“찌!”

“……!”

계산을 하고 있던 창현은 한순간 벼락을 맞은 것처럼 움찔 몸을 떨었다. 그리고는 아무 움직임도 보이지 않은 채 멍한 얼굴로 수연을 바라보았다.

창현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수연이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소녀들이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와아! 수연이가 이겼다!”

“만세! 우유빛깔 제시카 짱!”

수연의 승리에 소녀들이 환호를 하면서 그녀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대결은 그야 말로 순식간에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창현이 가위를 냈고, 수연은 주먹을 냈다. 그리고 그걸 확인한 순간 수연은 숨 쉴 틈도 없이 곧장 가위를 외쳐 창현이 이렇다 할 움직임조차 보일 겨를이 없었다.

그녀의 기습 공격에 창현은 대응조차 못한 채 처참하게 무너져 내린 것이다.

그가 생각하고 있는 필승의 방법은 다름 아닌 지고 있는 상황을 버텨내며 역전을 하는 것이었다.

창현이 가위를 내고 수연이 주먹을 냈으니 창현을 이기려면 수연이 가위를 외쳐야 한다. 창현은 그걸 기다리다가 그녀가 가위를 외치면 그 순간 주먹으로 바꾸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입장이 바뀌게 될 것이고, 여유롭게 공격을 펼칠 수 있게 된다. 자신이 지게 되는 상황이 닥치더라도 같은 방법으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 방법의 결정적인 단점은 적의 기습공격에 취약하다는 점이었다. 창현은 그걸 지금에서야 깨닫고 있었다.

멍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창현의 모습에 수연이 입가에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한다.

“묵찌빠를 하면 누구든 비법 하나쯤은 감추고 있는 법이잖아? 단판 승부에서는 이것만큼 좋은 방법이 없지. 승리 고마워, 후후후!”

“크윽…….”

자신의 속내를 훤하게 꿰뚫어보고 있는 수연의 말에 창현은 신음을 흘렸다. 설마 저런 검은 속내를 지니고 있을 줄 누가 알았단 말인가?

어이없게 한판을 내준 상황이라 볼 수 있었다.

창현은 절망했지만 수연은 소녀들 내에서 영웅이 되었다.

스코어가 2대 1로 앞서 나가게 되면서 주도권을 본격적으로 소녀들이 쥐게 된 것이다. 만약 창현이 승리를 하더라도 다음 대결에서 자신들이 유리한 종목을 체택하면 승리할 가능성이 비약적으로 높아진다.

그런 만큼 지금의 승리는 승기를 휘어잡는 값진 승리였다.

“자, 다음 대결은 무엇으로 할 생각인가, 창현 군?”

기세등등하게 변한 태연이 어깨를 쭉 핀 채 창현에게 묻는다.

그 모습을 보면서 창현은 속이 부글부글 끓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설마 자신이 이런 처지에 처하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일단 한판을 확실하게 이기는 것이 관건이었다.

그렇기에 고민에 잠겨있던 창현은 이내 무언가 떠오른 듯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내기 종목을 결정한 것이다. 그리고는 소녀들에게 시선을 옮기고는 말한다.

“다음 대결 종목을 정했어요.”

“뭔데?”

소녀들의 궁금증 섞인 표정에 창현이 차츰 평온한 표정을 되찾아가면서 내기 종목을 말했다.

“내기 종목은 바로 요리 대결이에요.”

“엑?”

창현의 말에 소녀들이 비명을 질렀다.

요리 대결이라니? 지금 그게 무슨 말이란 말인가?

뜨악한 표정을 짓는 소녀들에게 창현이 말한다.

“마침 간단하게 조리할 수 있는 조리기구가 있어요. 라면이나 3분 요리 같은 것밖에 구비가 되어 있지 않지만 라면을 끓이는 거로도 충분히 승부가 나겠죠? 대결 종목은 요리고, 라면을 끓여서 누가 더 잘 끓이나 대결하는 거예요.”

“심사위원은?”

효연이 궁금한 듯 묻자, 창현은 망설임 없이 대답한다.

“누나들 중 세 명이 심사위원을 해요. 저는 누나들의 양심을 믿으니까요.”

“그, 그래.”

자신들의 양심을 믿는다고 하자 움찔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소녀들이었다. 그리고는 창현에게 먼저 양해를 구했다.

“잠시만 기다려, 누가 출전할지 정해야 하니까.”

“물론이에요.”

요리에는 자신이 있었기에 창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양해를 구한 소녀들은 본격적으로 회의를 하기 시작했다. 우선 대결을 했던 수연과 윤아, 주현은 제외였다. 그렇다면 나머지 여섯 명 중 한 명이 요리대결에 나서야 한다는 건데.

“일단 난 대결은 나가지 않을래. 대신 심사위원을 할래.”

“나도!”

마침 출출한 상황이었기에 라면이나 시식할 요량으로 심사위원을 자청하는 수영과 효연이었다. 그리고 뒤이어 유리도 하지 않겠다고 하고 심사위원을 자청함으로써 심사위원을 맡을 세 사람은 정해졌다.

남은 것은 태연과 순규, 미영이었다. 세 사람 중 한 사람이 요리대결에 나가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태연은 멤버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누구로 하지?”

“난 별로 자신이 없는데.”

라면을 끓일 줄은 알지만 대결에서 승리할 자신이 없는 순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일종의 대결 포기 의사였다.

그러자 태연의 시선이 자연스레 미영에게 향했다. 그러자 미영이 밝은 미소를 지으며 손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그럼 내가 할래! 나 잘할 자신 있어!”

“…네, 네가?”

태연은 설마 미영이 먼저 하겠다고 나설 줄 몰랐기에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미영에게 묻는다. 다른 소녀들도 황당한 얼굴로 미영을 바라보았다. 소녀시대 내에서 요리 실력 최하위에 랭크된 그녀가 요리 대결에 나가겠다고 나설 줄 몰랐던 것이다.

그러자 미영은 살짝 눈썹을 찌푸리며 말한다.

“나 못 믿는 거야? 나도 라면 잘 끓인다고! 그러니 날 믿어줘.”

버럭 소리를 지르듯 말하는 미영의 모습에 소녀들은 압도되고 말았다.

태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미영의 대결 참전을 승인해주었다.

“아, 알았어. 미영이 네가 져도 다음 대결이 남아 있으니까. 대신 최선을 다해야 해.”

“물론이야! 나만 믿어. 후후후! 내가 반드시 승리를 거머쥐고 올게.”

주먹을 불끈 쥐며 전의를 불사르는 미영이었다. 하지만 그 모습이 믿음을 주기는커녕 왜 암담한 감정을 전달해주는 것일까. 참으로 미스터리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아직도 자신이 요리를 잘하는 줄 아는 미영의 모습이 그저 안타까운 소녀들이었다. 저러다가 진실을 알게 되면 충격이 만만치 않을 텐데.

전의를 불사르는 미영의 모습을 보면서 소녀들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절대로 승리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그녀들의 뇌리에 감돌고 있었다.

소녀들은 이번 판을 과감히 버리기로 결정하였다.


버리기로 했지만 그냥 순순히 당할 수 없는 법!

소녀들은 기왕 미영이 하기로 한 만큼 그녀에게 적극적인 코치를 해주기 시작했다.

살이 찌지 않는 우월한 신체구조를 지닌 수영이 미영에게 조언을 해주기 시작했다.

“일단 라면을 끓일 때 가장 중요한 게 물의 양을 조절하는 거야. 이건 감을 잡기 힘들면 커피 잔 있지? 저걸로 한 2/3 정도 채워서 세 번 정도 넣으면 돼. 그럼 적정량이 맞거든. 아니면 종이컵으로 3컵 채워도 되고.”

물의 양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수영의 코치에 미영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 또한 물의 양을 제대로 맞추지 못해서 종종 라면을 망치고는 하였기에 수영의 조언은 뼈가 되고 살이 되는 것이었다.

가장 중요한 물의 양 코치가 끝나자 소녀들이 달라붙어 이런저런 설명을 해주기 시작했다. 언제부터 노하우가 그렇게 쌓여있는지 각각 라면을 끓이는 비법이 존재하고 있었다.

“잠깐만! 이러면 내가 복잡해서 못하겠어. 그냥 내 마음대로 할래.”

“그, 그건 안 돼!”

자기 마음대로 하겠다는 미영의 외침에 소녀들이 일제히 외치며 제동을 건다. 그렇게 되면 십중팔구 자신들이 패배할 것임이 분명하였기에 확실하게 코치를 받아야 했다.

그럴 때 조용히 생각에 잠겨있던 효연이 나서면서 해결책을 제시하였다.

“그러는 게 아니라 차라리 이건 어때? 미영이 너가 창현이가 라면 만드는 걸 그대로 따라하는 거야.”

“……!”

절묘한 효연의 말에 모두가 눈을 번뜩인다. 그녀의 말처럼 물의 양을 맞춘 뒤 그 후의 과정을 모두 창현을 따라한다면 적어도 맛이 비슷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되면 확실한 승리를 장담하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무승부를 이룩할 수는 있을 것이다.

소녀들은 일제히 효연의 방법을 지지하고 나섰다.

“좋은 방법이야! 그렇게 하면 최소한 망작은 나오지 않을 걸?”

“멋진 생각이야! 굿! 이거면 충분히 승리할 수 있어.”

맛이 워낙 심하게 차이가 난다면 모를까 맛이 비슷하다면 결과는 뻔하지 않은가? 원래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니 말이다.

소녀들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리고 미영에게 본격적인 코치를 하기 시작했다.

라면을 잘 끓이는 법을 코치하는 것이 아닌, 창현을 잘 따라하는 법을 코치하고 있었다.

무작정 제멋대로 라면을 끓이려던 미영은 멤버들의 코치에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소녀들이 모두 정했다고 하자, 창현이 구체적인 룰을 설명하기 시작한다.

“딱히 시간제한은 없어요. 그냥 끓이면 시식을 하는 거예요. 하나를 끓여서 세 명이서 나눠 먹는 거니까 시간도 얼마 걸리지 않을 테고요.”

“좋아.”

그 후에 이어진 창현의 설명에 소녀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딱히 이해가 어려운 설명이 아니었기에 모두 이해하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규칙을 모두 설명한 창현이 소녀들을 둘러보면서 말한다.

“그럼 대결에 임할 사람은 누군가요?”

창현의 물음에 소녀들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태연이 장난스레 소개를 하기 시작했다.

“최종병기 출전이다. 뱃속에서 나와 이십 년 동안 라면만 끓인 라면 먹는 티파니 출진!”

“잘 부탁해!”

태연의 거창한 소개와 함께 앞으로 튀어 나온 인물은 다름 아닌 미영이었다.

그걸 본 창현이 다소 당황한 표정을 짓는다.

“미, 미영 누나가 출전한다고요?”

“응! 우리 멤버들 중 가장 라면을 잘 끓여. 그러니 긴장해야 할 걸?”

과대포장을 하여 미영의 라면 제조 스킬을 높이는 태연이었다.

그 말을 들은 창현이 미영을 힐끗 보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몰랐는데 그런 재주가 있었군요. 좋아요, 저도 최선을 다할 테니 누나도 최선을 다해주세요.”

“물론이야. 잘 부탁해.”

두 사람은 그렇게 페어플레이를 하기로 하였다. 그리고는 본격적인 라면 제조에 나서기 시작했다.

미영은 가스렌지를 차지하였고, 창현은 구매가 되어 있는 버너를 이용하기로 하였다. 멤버들에게 가르침 받은 대로 미영은 종이컵으로 세 컵 따라서 정확한 물의 양을 맞췄다. 그에 반해 창현은 직감적으로 물을 부어 물을 끓이고 있었다.

그리고 창현이 조미료가 있는 곳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리고는 자신의 냄비에 털어넣는 걸 느꼈다.

탁! 탁! 탁!

그 소리를 들은 미영은 힐끗 곁눈질로 창현이 무엇을 넣는지 확인한다. 그러자 창현이 조미료가 들어있는 곳이 후추 통을 넣는 게 보였다. 그걸 확인한 미영은 잠시 창현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향한 사이 재빠르게 후추 통을 꺼내들었다. 그리고는 냄비에 후추를 넣기 시작했다. 정확히 세 번이었다.

그렇게 후추를 넣은 미영은 서서히 물이 끓기 시작하자 창현을 힐끗 곁눈질 한다. 그러자 창현이 분말 스프를 넣고, 그 다음 건더기 스프를 넣었다. 그 후에 면을 넣는다. 딱히 특별할 것 없는 방법이었지만 미영은 그 방법을 그대로 따라했다. 그리고 라면이 어느 정도 끓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창현이 조미료를 꺼내드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통 안에 있는 티스푼으로 무언가를 뜨는가 싶더니 라면에 넣기 시작했다.

스윽! 슥!

그 소리가 무척 작았지만 미영은 귀동냥으로 두 번의 스푼질(?)이 오고갔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리고는 창현이 수납장에 넣는 것의 정체를 확인하고는 몰래 그것을 꺼내들어 두 스푼을 넣었다.

그녀가 넣은 것은 다름 아닌 가는 소금이었다.

이걸 두 스푼 넣으면서 미영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렇게 넣으면 짤 텐데?’

어느 정도 실력이 늘어서 이제 그걸 구분할 정도는 된 미영이었다. 하지만 창현을 따라하라고 엄명을 받은 상황이었기에 다른 기색을 보이지 않고는 라면을 끓이는데 열을 올린다. 그리고는 창현이 마지막에 고춧가루를 넣는 것을 보고는 자신 또한 고춧가루를 넣었다.

그렇게 두 사람의 라면이 완성되었다.

미영이 창현을 보면서 따라하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먼저 완성한 것은 창현이었다.

그는 능숙하게 그릇 세 개에 라면을 나누고는 쟁반 위에 올려서 그대로 소녀들에게 갖고 갔다. 그리고는 심사위원을 맡은 효연과 유리, 수영 앞에 각각 그릇을 놔두고는 말한다.

“다른 설명은 필요 없어요. 일단 먹어보시면 알 거예요.”

“자신만만한데?”

“먹어보시면 알 거예요.”

시니컬하게 묻는 효연의 모습에 창현은 어깨를 으쓱하면서 자신감 넘치는 표정을 선보인다. 요리사는 말로 표현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요리로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는 것이다. 그런 만큼 음식을 먹어보고 결정을 내리는 것이 옳으리라.

“…….”

창현의 말에 효연은 다른 말을 하지 않고는 곧장 음식 시식에 들어갔다. 유리와 수영도 뒤이어 라면을 먹기 시작했다.

후르릅!

라면을 먹은 그녀들의 얼굴에는 놀라움이 서렸다. 설마 라면에서 이런 절묘한 맛이 나올 줄 몰랐던 것이다.

면이 너무 익은 것도 아니고, 설익은 것도 아니다. 그야 말로 황금 타이밍! 게다가 물의 양도 적절하여 국물이 싱겁지도, 짜지도 않았으며 살짝 뿌린 듯한 고춧가루는 얼큰함을 키워줘 해장에 그만(?)인 듯하였다. 속을 확 풀어주는 듯한 국물과 절묘한 타이밍으로 익힌 면의 조화는 그야 말로 라면 중에서도 최고봉에 도달한 맛이라 볼 수 있었다.

세 여인은 무어라 할 말도 잊은 채 라면을 먹기에 바빴다.

그 모습을 보면서 다른 소녀들은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멤버들 중 나름 미식가인 애들이 저렇게 허겁지겁 먹을 정도라면 라면의 맛이 상상을 초월한다는 걸 뜻했던 것이다.

채 3분도 되지 않아 소녀들은 라면을 모두 비웠다. 그리고는 자신을 바라보는 창현의 시선에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대단해… 맛있었어, 정말.”

“라면 전문점에서 파는 라면도 이렇게는 못할 거야.”

“더 이상 말이 필요없다.”

이어지는 찬사에 창현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요리가 인정을 받으니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소녀들이 감탄을 하는 걸 보고는 자신의 승리를 직감할 수 있었다.

“후후! 맛있게 먹어주니 고맙네요. 이래보여도 몇 년 동안 집안 살림을 도맡아 했었다고요. 그런 만큼 요리에 있어 다른 사람에게 절대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

“…….”

창현의 말에 아무 반박도 못하는 소녀들이었다. 이미 창현은 자신의 실력을 만천하에 증명한 바였다. 그의 요리 실력은 웬만한 어머니의 손맛에 버금가는 지고한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그러다가 창현은 슬쩍 미영을 보고는 실수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차, 다음은 미영 누나였죠? 말을 하느라 실수를 했네요. 어서 미영 누나의 라면도 맛보도록 하세요.”

창현이 비켜서자 미영이 쟁반 위에 받친 그릇을 하나씩 멤버들 앞에 놔두기 시작했다.

그걸 보는 세 여인의 눈에는 기대감이 가득했다. 미영이라면 분명 자신들이 시키는 대로 라면을 만들었을 테니 창현의 것과 맛이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맛이 어느 정도 보장되어 있다는 뜻이니 만큼 기대감이 높은 것은 당연했다.

미영은 멤버들 앞에 그릇을 놓은 뒤 말한다.

“맛있게 먹어.”

“좋아! 먹어볼까!”

이미 창현이 끓인 라면으로 어느 정도 위를 워밍업(?) 시켜놓은 상황이었기에 세 여인은 젓가락을 들어 미영이 끓인 라면을 단숨에 먹기 시작한다. 그 모습을 보면서 미영은 다소 긴장감 서린 표정을 짓는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멤버들의 입에서 어떤 찬사가 흘러나올지 기대감 서린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미영이 기대한 그런 반응은 나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자신의 라면을 먹은 멤버들의 표정이 이상했던 것이다.

절묘한 맛의 배합에 나오는 탄성이 아닌, 뭐랄까,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걸 안간힘 쓰며 참는 모습이랄까?

그 모습을 보면서 창현은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무언가를 알고 있는 듯한 표정. 과연 그 표정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계획대로다.’

창현은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기 시작했다.


내기를 정하면서 창현은 많은 생각을 해야만 했다.

요리가 자신의 특기지만 결코 방심할 수 없다. 라면을 끓이는 실력이 특별히 요리 실력에 비례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창현은 기발한 생각을 해낸다. 바로 남은 멤버들 중 출전하는 사람이 미영일 것 같다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던 것이다. 요리 실력은 핵폭탄 급이지만 요리하는 것을 좋아하는 만큼 미영이 나설 확률이 무척 높았다.

그걸 깨달은 창현이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기발한 방법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래, 그거야.’

반드시 그렇게 될 거라고 생각을 하면서 창현은 대결 준비에 임하기 시작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대결에 나온 것은 다름 아닌 미영이었다. 자발적으로 나선 모습을 보고는 자신의 예감이 들어맞았다는 것을 창현은 알 수 있었다. 다른 소녀들의 표정이 그리 밝지 않을 걸로 보아 이번 대결에 희망을 걸고 있지 않은 듯하였다.

마지막 반전을 노릴 수 있을 만큼 창현은 이번 대결에 자신의 전력을 기울이기 위해 결심을 다지고 있었다.

그런데 소녀들이 갑자기 자신의 눈치를 보더니 쑥덕거리는 것이 아닌가? 분명 창현이 듣지 못하게 하려고 하는 이야기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들의 실수라고 할 수 있다. 창현의 청각은 보통 사람보다 훨씬 발달되고 예민했던 것이다. 예민한 청각으로 인해 곧잘 충격을 받고는 하기에 특별한 소리에 신경을 쓰지 않지만 한 번 집중하고자 하는 소리는 작게 속삭여도 들을 수 있는 능력은 되었다.

신경 쓰지 않은 척하면서 청각을 기울이자, 소녀들의 이야기가 그대로 전달되기 시작하였다.

소녀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주제는 다름 아닌 라면을 끓이는 것에 관련된 것이었다. 처음에는 물의 양을 가지고 코치를 해주기 시작하더니 이내 효연이 기발한 게 생각났다는 듯 미영에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닌가? 그 이야기를 나누는 주제는 다름 아닌 자신을 따라하라는 내용의 말이었다.

‘걸렸어.’

그 이야기를 들은 창현이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하려던 걸 설마 효연이 콕 잡아 말할 줄 몰랐다. 그런데 이렇게 자신에게 도움을 주다니 입가에 절로 미소가 맺혔다.

효연의 이야기를 들은 미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을 따라하겠다고 한다. 그때부터 창현은 자신의 계획을 수정하지 않은 채 대결에 임할 수 있었다.

미영에게 가스레인지를 양보하고는 자신이 버너를 이용하여 라면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코치 받은 것이 있는 만큼 물의 양을 적절하게 조절하는 미영이었다. 이대로 물이 끓으면 면을 넣고 스프를 넣으면 최소한 중간의 맛은 가게 될 것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자신을 따라하라고 들은 창현이었기에 곧장 작전을 개시하기 시작했다.

창현은 일부로 수납장을 요란하게 열었다. 그리고는 후추 통을 꺼내서 냄비에 털어 넣는 시늉을 하였다. 뚜껑은 열지 않은 채 넣는 소리만 낸 것이다. 비록 등을 돌리고 있지만 미영이 슬쩍 곁눈질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자신의 몸으로 후추 통을 가리고 있었기에 후추를 실제로 넣었는지 안 넣었는지 분간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너무 많이 털어 넣으면 미영이 간파할 수도 있기에 창현은 세 번 정도 넣는 시늉을 하였다. 그리고는 슬쩍 수납장에 후추 통을 넣은 뒤 모른 척을 한다. 그러자 미영이 슬쩍 수납장으로 다가와 후추 통을 꺼내 냄비에 넣기 시작한다. 창현과 달리 그녀는 후추를 듬뿍듬뿍 세 번 넣었다.

자신의 계획이 완벽하게 성공했다는 걸 깨닫자 창현은 입가에 진한 미소를 지었다.

‘흐흐! 이대로 끝낼 수 없지.’

저것만으로도 충분히 폭탄 라면일 테지만 기왕이면 좀 더 고성능 폭탄이 좋지 않겠는가? 오늘 저 심사위원을 자청한 소녀들에게 수소 폭탄 라면을 먹게 해주겠다고 결심하면서 창현은 수납장으로 가서 가는 소금을 꺼낸다. 그리고는 소금을 뜨는 시늉을 하면서 두 숟갈 넣는 척을 한다. 그리고 소금 통을 수납장에 넣자, 미영이 다가오고는 몰래 소금 통을 들고 간다. 그리고 소금을 넣기 시작한다. 이로써 후추와 소금이 결합 되었으니 그 맛은 최악을 오고갈 것임이 분명했다.

여기에 창현은 마무리 공격으로 고춧가루를 살짝 넣었다. 그냥 라면에 종종 넣기는 하지만 후추와 소금이 들어간 미영이 고춧가루를 넣으면 그야 말로 수소 폭탄에 버금가는 라면이 완성될 것이다. 매콤한 고춧가루를 넣을 때 얼큰함을 줄 수 있지만 과하면 그야 말로 입속에서 빅뱅이 일어나는 듯한 충격이 발생할 테니 말이다.

먼저 라면을 완성한 창현은 차근차근 그릇에 담아 소녀들에게 시식을 권유하였고, 상당한 반응을 끌어낼 수 있었다. 그러면서 창현은 미묘하게 소녀들에게 말을 걸면서 시간을 끌었다. 이것은 미영의 라면이 좀 더 퍼지게 하기 위해 시간을 끈 것이다.

그렇게 창현의 라면 시식이 끝나고, 미영의 라면을 먹게 되었다. 그리고 라면을 시식한 소녀들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다른 것도 아니고 후추가 왕창 들어가고 소금을 무려 두 숟갈이나 넣었으며, 마무리로 매콤한 고춧가루를 듬뿍 뿌려 넣은 라면이다. 게다가 창현보다 장시간 끓인 탓에 국물이 짜고 매운맛을 낼 텐데 그야 말로 맵고 짠 요소가 한데 어우러졌다고 할 수 있었다.

심사위원을 맡은 효연과 유리, 수영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누가보아도 결코 맛있어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치솟아 오르는 열기를 참아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었다.

그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창현은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간다고 하더니. 따라하라고 했다고 괜히 욕보는군요. 후후후!’

딱 봐도 자신의 승리가 분명한 것이었다.

그것도 모르는 채 미영은 멤버들의 얼굴이 붉어진 게 자신의 라면이 너무 맛있어서 그러는 것이라 착각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창현의 라면이 그렇게 극찬을 받았으니, 그대로 따라한 자신의 라면도 분명 대단한 맛을 간직하고 있었을 테니 말이다.

물론 그 대단하다는 의미가 약간 달라서 문제였지만.

“어때? 맛있지?”

‘너, 띨파니! 뭐를 넣어서 이런 맛이야! 오늘 죽어볼 테냐!’

이렇게 외치고 싶은 걸 간신히 참은 채 수영은 억지 미소를 지어보였다.

“으응. 마, 맛있네?”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 간신히 말을 내뱉는 모습은 결코 맛있어서 하는 말이 아니었다.

효연과 유리는 그런 수영을 보면서 독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설마 맛있다고 말을 할 줄 몰랐던 것이다.

창현이 그런 수영을 보면서 물었다.

“그럼 둘 중에 어느 게 더 맛있나요?”

너무나 당연한 물음. 당연히 창현이가 만든 라면이 압도적으로 맛이 있었다.

하지만…….

마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창현의 표정을 보면서 수영은 거부감을 느껴야만 했다.

분명히 따라하라고 했는데 이런 맛이 나왔다는 것! 그것은 창현이 라면 제조 중에 모종의 술수를 부렸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렇다면 창현이는 지금 이 라면의 맛을 알고 있을 확률이 높다는 이야기였다.

즉, 미영이 자신을 따라할 줄 알고 중간에서 수작을 부렸다는 이야기였다.

이런 골탕을 먹였다는 생각에 도달하자 수영의 이가 부득 갈렸다. 설마 자신을 이렇게 함정에 빠뜨릴 줄 몰랐던 것이다.

분한 마음에 수영은 편파 판정을 내리기 위해 입을 열었다.

“나는 미…….”

딱 말이 나오려는 타이밍에 창현이 절묘하게 치고 들어와 그 타이밍을 끊어버렸다.

“설마 다 먹지도 않고 미영 누나의 것이 더 맛있다고 하는 건 아닐 테지요?”

“…….”

창현의 말에 수영은 한순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의 말이 무슨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 뻔했던 것이다. 지금 창현의 말이 뜻하고 있는 것은 미영의 것이 더 맛있다고 할 거면 미영의 라면을 다 먹고 하라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고서 하면 인정할 수 없다는 모습이었다.

이 얼마나 잔인한 말이란 말인가. 그렇다는 건 이 폭탄 라면을 모두 먹어야 미영의 승리를 외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어쩔 수 없이 창현의 승리라고 외치려던 수영은 입가에 걸린 그의 미소를 보고 말았다. 그것이 마치 자신을 비웃는 것 같아서 수영은 순간 기분이 상했다.

‘내가 다 먹고 미영이 승리를 외쳐주고 만다!’

어차피 라면 한 개의 1/3 밖에 되지 않는 양 아닌가? 이 악물고 먹으면 되는 것이다.

갑자기 라면의 양이 너무 많아 보이는 것은 결코 두려워서가 아니다. 라면이 불어서 그런 것이다.

그러면서 수영은 돌연 미영의 라면이 담긴 그릇을 들더니 맹렬한 속도로 먹기 시작했다. 입천장을 태워버릴 듯한 매운맛과 미각을 마비시켜버릴 것 같은 짠맛이 해일처럼 몰려왔지만 수영은 억지로 꾸역꾸역 라면을 모두 먹기 시작했다.

“…….”

효연과 유리는 그 모습을 보면서 입을 떡 벌렸다. 설마 수영이 이 라면을 다 먹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쿵!

라면을 다 먹은 수영이 거칠게 접시를 내려놓았다. 얼굴에는 땀이 줄줄 흐르고 있었고, 입에서는 뜨거운 열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그릇을 내려놓은 뒤 필사적으로 의지를 발휘하여 창현을 바라본다. 그리고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마, 맛있네. 최고야. 너희들도 어서 먹어.”

억지 미소를 지으며 수영이 효연과 유리에게 권유하자 두 사람의 얼굴에 창백하게 질리기 시작했다.

방금 한입을 먹고 엄청난 충격에 빠져들었는데 남은 걸 어떻게 먹는단 말인가.

먹지 않겠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효연은 수영의 눈빛을 거부할 수 없었다. 자신이 미영에게 창현을 따라하라고 권유했다가 창현의 덫에 걸려버린 셈이었으니 말이다. 따지고 보면 이 라면이 탄생하게 된 것도 전부 자신 때문이었다.

‘그래, 먹고 죽어보자.’

입술을 질끈 깨물며 전의를 되새긴 효연이 그릇을 번쩍 들더니 라면을 먹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녀의 얼굴에도 땀이 줄줄 흐르기 시작했고, 얼굴이 붉게 상기 되면서 폭발할 것처럼 뜨거운 열기를 발산하였다.

“…….”

유리는 라면을 앞에 두고 많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수영과 효연은 라면을 먹고 있지만 자신은 먹고 싶지가 않았다. 방금 한입 먹어본 결과 충격이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다음 대결도 있는데 굳이 자신이 모험을 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그렇기에 굳이 라면을 먹고 싶지가 않았다.

‘여기서 창현이의 편을 들어주면 점수를 딸 수 있겠지.’

라면도 먹지 않고 창현의 편을 들어줌으로써 점수도 딸 수 있다. 이 얼마나 좋은 일이란 말인가.

하지만 그녀의 그런 생각도 오래 가지 못했다. 라면을 먹기 시작한 효연이 마침내 수소 폭탄 라면을 다 먹는데 성공한 것이다.

쿠웅!

“하아! 하아!

그릇을 거칠게 내려놓은 효연이 거칠게 숨을 몰아쉰다. 그리고는 힘겹게 손을 들어 엄지 손가락을 내민다.

“마, 맛있어!”

“유리 너는 안 먹어?”

효연이 다 먹자, 수영이 유리를 보면서 말한다.

그러자 유리는 다시 갈등에 빠졌다. 먹기 싫었는데 수영의 눈은 먹으라고 무언의 강요를 하고 있던 것이다.

‘창현이한테 점수를 딸 수 있는 기회인데…….’

그러다가 유리는 문득 주변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주변을 돌아보니 멤버들 모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들의 눈빛은 유리에게 어서 라면을 먹으라고 강요를 하고 있었다.

때로는 무언의 압박이 더 무서운 법.

유리는 멤버들의 압박에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여기서 먹지 않고 창현의 편을 들으면 점수를 딸 수 있겠지만 먹지 않으면 두고두고 멤버들에게 괴롭힘을 당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아직 내 속내를 들키면 안 돼. 먹어야겠어.’

어느 것이 더 이득인지 계산을 한 유리는 다음 기회를 기약하기로 결심하면서 라면을 먹기 시작했다. 맵고 짠맛이 무슨 해일처럼 몰려오는 것이 느껴졌지만 유리는 표정 변화 없이 라면을 먹어나갔다. 속에서는 당장 라면을 토하라고 요란한 경보음을 울리고 있었지만 유리는 그것을 내색하지 않은 채 꿋꿋하게 라면을 모두 먹어치웠다.

그리고는 차분하게 그릇을 내려놓는다. 라면은 깨끗하게 비워져 있었다.

여전히 표정 변화 없이 유리가 라면을 모두 삼킨 뒤 입을 연다.

“맛있네.”

“……!”

라면을 말끔하게 먹은 유리를 보며 창현은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 유리의 모습에 이 말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독하다. 정말 독해.’

“그럼 누가 이긴 거죠?”

라면을 다 먹은 모습을 본 창현이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러자 세 여인이 서로를 바라보더니 살짝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창현의 불안한 마음이 더욱 증폭되려 할 때, 수영이 대표로 입을 연다.

“우리는… 미영이 라면이 더 맛있었는데?”

“…그 말 진심인가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수영을 바라보는 창현이었다. 라면을 다 먹을 때부터 불안한 마음이 생겼는데 설마 수영이 이렇게 말을 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창현이 효연과 유리를 바라보자 두 소녀도 고개를 끄덕인다.

“맞아, 우리도 미영이 라면이 더 맛있었어.”

“정말 맛있던데? 미영이 요리 실력이 정말 많이 늘었어.”

이 말을 하기 위해 자신들이 꾹 참고 수소 폭탄 라면을 먹은 것이 아니겠는가! 역경을 이겨내고 라면을 모두 먹은 만큼 효연과 유리는 미영의 라면을 극찬하는데 망설임이 없었다.

다른 의미로 정말 대단한 것도 있었고 말이다.

“…하하!”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칠 줄 몰랐기에 황당한 표정을 지은 채 웃음을 짓는 창현이었다.

설마 이런 편파 판정을 할 줄이야.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짓고 있는 창현을 보며 세 여인은 슬쩍 그를 외면한다. 그리고는 미영을 보면서 최종 판결을 내린다.

“우리는 미영이 라면이 더 맛있었어. 그러니까 미영이의 승리야.”

“정말? 내가 승리지? 오예! 나도 요리를 못하는 편 아니라고! 이제 다 알아서 대접하도록 해!”

미영의 말에 세 여인이 속으로 이를 부드득 갈았다.

‘상식선을 지키지 못하는 너에게 대접을 해주도록 하마. 지옥에서 받을 수 있는 대접을 말이야.’

“그럼 파티네?”

“파티다! 파티!”

최종적으로 미영이 승리하게 되자 스코어는 3대 1. 소녀시대 팀이 승리하게 되었다.

“…….”

좋아하는 소녀들을 보면서 창현은 여전히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 땅의 정의는 죽었다.’

이런 생각이 창현의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내 피식 웃음을 지었다.

‘저렇게 하고 싶어 하는데 하지 뭐, 어려운 것도 아닌데.’

억울한 마음도 없지 않아 있었지만 결국 그렇게 납득을 하는 창현이었다.




제54장 일본으로 가다




드라마 ost 녹음을 성공적으로 끝낸 창현은 드라마 촬영도 무리 없이 병행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경험이 쌓이다 보니 창현의 연기 실력도 하루가 다르게 허점을 극복해나가고 있었고, 주연인 창현이 수월하게 드라마 촬영에 임하자 전체적으로 촬영에 탄력이 붙어 순탄하게 드라마를 촬영할 수 있었다.

특히 드라마 ost를 녹음한 걸 들은 김지환 감독은 크게 만족을 하는 기색이었다. 월드 아티스트라 불리는 창현이 직접 작곡 작사를 맡고, 프로듀싱까지 맡은 만큼 일단 널리 알려지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느낀 것이다. 게다가 노래 하나하나의 곡 또한 퀄리티가 좋다 보니 드라마 감독 입장에서는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석규가 일본에서 드라마를 방영할 수 있게 힘을 써준다는 말에 김지환 감독은 한 층 기쁜 마음으로 촬영에 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일본 프로모션을 가겠다는 석규의 말에 따라 창현이 등장하는 씬을 최대한 촬영하고는 4월 초부터 4월 말까지 스케줄을 모두 비워주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촬영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기에 그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드라마 쪽 스케줄을 정리하고, 드라마 ost도 성공적으로 녹음을 끝마치게 되자, 석규는 창현을 부른 뒤 물었다.

“아사미 유키에게 줄 곡은 잘 진행되고 있느냐?”

일주일 후면 일본으로 가야 했기에 석규는 창현이 곡을 어느 정도 완성했는지 궁금했다. 일단 창현이 프로모션을 가는 것으로 어느 정도 미끼 역할을 하는데 성공했지만 아사미 유키에게 줄 곡을 준비해야 쟈니스에 어느 정도의 요구를 할 수 있었기에 이 부분에 대해서는 무척 예민하였다.

그 물음에 창현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틀 후면 두 곡 모두 완성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생각보다 슬럼프에서 일찍 벗어난 듯해서요. 테마를 받고 구상을 하니까 금방 곡이 나오더라고요.”

“그거 잘 되었구나.”

석규의 입장에서 참으로 반가운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창현이 템포가 떨어지면 AA엔터테인먼트에도 큰 영향을 끼치니 말이다. 회사가 현과 라샤라는 두 가수만으로 버티고 있는 상황이니 만큼 둘 중 하나만 이상이 생겨도 회사에 큰 타격이 올 수밖에 없었다.

“잘된 셈이죠. 그나저나 라샤 누나들은 언제 합류하는 거죠? 투어 콘서트도 조만간 끝나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일본에는 창현 혼자서 가는 것이 아니었다. 전국 투어 콘서트를 한 뒤 곧장 일본에서 활동을 하게 될 라샤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자신의 활동을 성공리에 마무리 짓고 있는 창현과 달리 라샤는 아직 전국 투어 콘서트도 다 끝내지 않은 상황이었다.

“조만간 끝나고 합류할 거다. 아직 갈 날짜는 어느 정도 남아 있으니, 이틀 정도 쉬고 하면 바로 일본으로 갈 날짜를 맞출 수 있을 거다.”

“그건 다행이네요. 그런데 누나들도 워낙 바쁘게 움직이는 거 아니에요?”

11월부터 분주하게 움직이면서 쉬지 못한 채 스케줄을 해나가는 라샤가 안쓰러웠는지 창현이 한마디 한다.

그러자 석규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건 알고 있지만 어쩔 수 없지 않느냐? 마음 같아서는 국내에서 활동을 시키고 싶지만 그렇게 하면 이번에 라샤 아이들이 쉴 시기가 완전히 없어질 수 있다. 그러니 일본 스케줄을 끝마친 뒤 한국으로 돌아오게 하여 쉬게 하는 게 나을 게다.”

이미 계약을 하면서 1년에 어느 정도는 일본에서 활동을 하기로 결정을 했었다. 그렇기에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라샤가 바쁜 스케줄을 이행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창현도 그 말이 동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죠. 콘서트라는 것이 워낙 힘든 만큼 하이 페이스로 달린 뒤에 곧장 일본으로 가는 게 좀 걱정 되서 한 말이에요.”

“그 부분이야 어쩔 수 없지. 그리고 지금 네가 남을 걱정할 처지가 아니란 걸 알아라. 드라마 촬영은 아직 남아 있으니까.”

일본으로 가는 것이 일주일 남았지만 창현은 아직 드라마 촬영을 모두 끝낸 것이 아니다. 그런 상황에서 라샤의 스케줄을 걱정하는 것은 사치스러운 일이다.

“하하! 그건 그렇죠. 드라마 촬영을 모두 끝맺은 다음에 그런 이야기를 해야겠네요. 일단 외부에 아직 알리지 않으셨죠?”

인터넷 기사에 뜨지 않은 것을 확인한 창현이 언제쯤 외부에 알릴 것인지 궁금해 하며 물었다.

그러자 석규가 싱긋 웃음을 짓더니 말한다.

“한 3일 정도 더 지난 다음에 발표할 생각이다. 물론 일본 프로모션도 프로모션이지만 드라마에 관련된 목적도 포함이 되겠지. 아마 알려지게 되면 난리가 날걸?”

미국 말고 다른 곳으로 해외 진출을 해본 적이 없는 창현이 일본으로 진출한다고 하면 난리가 나게 될 것임이 분명하다. 사람들은 새로운 한류를 일본에 일으킬 것이라 생각할 테고, 일본 팬들은 현이 자국에 방문한다는 것에 들뜬 기색을 보일 것임이 분명했다. 일본 내에서도 현의 인기는 그야 말로 정상가도를 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일단 나쁘지 않게 발표 되었으면 좋겠네요. 첫 일본 진출이다 보니 좀 떨리는 것도 있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국내니까요.”

창현이 염려하는 것은 국내에서 자신의 인지도가 떨어지는 것이었다. 아무리 바깥에서 잘한다 하더라도 안에서 잘못하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런 말이 있지 않은가?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라고. 결국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잘해놓아야 바깥에서 무엇을 하더라도 성공을 할 수 있는 법이다.

“많은 가능의 수를 놓고 조율 중이니 그 부분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네가 중요하게 여길 것은 그것이 아니다. 그 부분은 나한테 맡기면 된다.”

“물론이죠. 아버지를 믿어요.”

석규가 기분 나빠할 수도 있는 사안이었기에 창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 후로도 창현은 석규와 여러 가지 이야기를 더 나누었다. 우선 구체적인 일본 스케줄과 앞으로 할 일에 대해서 말이다. 현의 정규 3집 앨범이 나온 지 제법 시간이 흘렀기에 슬슬 정규 4집 앨범 준비 이야기도 나오면서 여러 가지 사업적인 이야기를 하였다. 정규 앨범 이야기가 나오기는 했지만 창현은 아직 완전히 감이 돌아온 것 같지가 않아 자신 없는 모습이었다. 뚜렷한 테마를 잡아야 정규 앨범을 준비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만약 그것이 안 되면 작은 테마를 잡아서 싱글 앨범이나 미니 앨범을 낼 수 있다고 말을 해놓은 상황이었다.

석규는 창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앨범에 관해서는 전권을 주었다.

“앨범 부분은 네가 알아서 하도록 하여라. 추후에 외국으로 나가야 할 것도 있으니 말이다.”

한 번 정상에 섰다고 하여 영원히 그를 기억하는 것은 아니다.

창현이 몸을 담고 있는 곳은 냉혹한 연예계다. 그런 만큼 정상을 노리고 하루하루 노력에 노력을 거듭하는 인물들이 많다.

연예계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잊혀지는 것이다. 자신을 대체할 인물들은 세상에 널리고 널렸다. 그것은 창현이라고 해도 다르지 않다. 그가 압도적인 존재감으로 세계를 휘저어놓았지만 지속적인 활동이 이어지지 않으면 그것은 한때의 붐으로 끝날 확률이 높다. 특히 국내라면 모를까 외국같이 아직 인종 차별이 남은 곳에서는 더욱 그렇다. 부지런히 활동하는 것만이 정답이니 말이다.

아직 한국으로 귀국한지 반년 밖에 되지 않았지만 석규는 구 부분을 염려하고 있었다.

“물론이에요. 스케줄을 맞추기만 한다면 당연히 미국에서도 활동을 해야죠. 하지만 너무 오랫동안은 말고 한 달 정도로 끊어서 활동하는 건 어때요?”

아무리 인기를 얻고 그렇다 해도 가장 좋은 곳은 바로 고국이었다. 그런 만큼 창현은 장기간 외국에 나가있는 걸 원하지는 않았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 생각을 해봐야 할 듯 싶구나. 워낙 만만치 않은 곳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만요. 너무 길게 출국해 있는 건 좋지 않을 듯 싶어서 말했던 거예요.”

“그래, 그 부분은 차근차근 논의를 해보도록 하자. 아직 시간은 많이 남아 있으니 말이다.”

당장 미국으로 가는 것아 아니니 급할 필요가 없다. 여차하면 중국 시장을 개척하여 그곳에서 인기를 얻어내면 되니 말이다.

창현도 아직 자신에게 시간이 많이 남아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럴게요.”

그렇게 두 사람의 이야기는 끝을 맺었다.


“그러고 보니 4월에 나가 있으면 수연 누나는 생일은 제대로 축하해주지 못하겠네.”

녹음실로 돌아오면서 창현은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순간 멈칫하였다. 그러고 보니 자신이 4월 초에서 4월 말까지 일본에 있을 것이 아닌가? 그렇게 되면 수연에게 직접적으로 생일을 축하해줄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수연의 생일은 자신이 한창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을 때인 4월 18일이었으니 말이다.

일본과 한국은 거리상 그리 멀지 않지만 자신이 일본에서 활동하는 기간이 짧은 만큼 스케줄이 무척 촘촘하게 짜여 있다. 그래서 일본에 있는 동안 한국으로 돌아가는 건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결론은 수연의 생일을 직접 축하해줄 수 없다는 뜻이었다.

잠시 잊고 있던 사실이었기에 창현은 자책했다. 잊고 넘어갔더라면 수연이 크게 실망했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일던 전화를 해서 사정을 설명하는 게 낫겠지.”

괜히 자신이 일본으로 간다는 정보가 올라온 후 뒤늦게 연락을 하는 것보다 지금 말하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한 창현이 핸드폰을 열었다. 그리고는 수연에게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창현이 막 전화를 걸 때는 소녀들이 막 무대를 마쳤을 무렵이었다. 3월 초에 발매한 <Baby Baby> 리패키지 앨범으로 활동을 하고 있었기에 주말이 되면 무척 바쁘게 스케줄을 보내야만 했다.

특히 드라마 ost까지 참여해야 하는 태연과 수연, 미영은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녹음을 할 때는 그야 말로 호랑이 선생님으로 돌변하는 창현의 지적 하나하나를 모두 수용해야 했기에 녹음에 임하는 내내 잠시도 쉬지 못했던 것이다.

육체적으로 피곤하기보다는 정신적으로 피곤한 상황이었다.

특히 어제 파티를 하고 난 뒤에는 긴장감이 풀려서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곯아떨어질 정도였으니 말을 다한 셈이다.

덕분에 푹 자기는 했지만 그것만으로 피로가 풀리지 않았다. 아무래도 열심히 파티를 하느라 모든 심력을 소모해서 그런가보다.

태연이 초췌한 얼굴로 수연을 바라보며 말한다.

“그냥 쉴 걸 그랬나……?”

“그러게…….”

전신이 노곤한 걸 느끼면서 태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수연이었다.

미영도 힘든 얼굴로 태연의 말에 동조한다.

“너무 힘들어. 난 어제 요리까지 해서 그런지 더 힘들다고. 괜히 요리를 한다고 했나봐. 그래도 내 덕분에 이겼지만.”

그 말을 들은 세 명의 소녀가 순간 움찔한다. 그러더니 미영을 노려보고는 이를 부드득 간다.

미영을 노려보는 사람들은 다름 아닌 효연과 유리, 수영이었다. 어제 창현과의 대기에서 미영이 만든 수제 수소 폭탄 라면의 희생자들이었다.

그녀들은 매서운 눈으로 미영을 노려보았다.

‘뭐? 너 때문에 이겨? 북어포로 얻어맞고 싶느냐?’

‘너 때문에 다시는 네 요리를 먹지 않겠다고 결심했는데.’

‘인간이 먹을 음식을 내놓고 그런 말이라도 하지, 허참. 말도 안 나오네.’

미영의 말에 한순간 제대로 된 판단을 하기가 힘든 소녀들이었다.

그렇게 힘겨운 표정을 지은 채 소녀들은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벤에 몸을 실었다. 몇몇 멤버들은 숙소로 돌아가 쉴 수 있지만 다른 몇 명은 라디오 스케줄을 가야 했기에 벌써부터 한숨이 절로 나오고 있었다.

“으응?”

힘겨운 몸을 의자에 묻고는 잠깐이나마 잠에 빠지려던 수연은 핸드폰 진동을 느끼고는 눈을 떴다. 이 시간에 특별히 전화를 할 만한 사람이 없는데 누구한테 온 전화란 말인가?

의아한 얼굴로 핸드폰을 꺼내들어 전화를 한 사람의 정체를 확인한다.

그리고 그 사람의 정체를 확인한 수연의 눈이 부릅 뜨였다.

“차, 창현이?”

“……!”

수연의 외침에 잠에 빠져있던 소녀들이 벌떡 일어나기 시작했다. 잠을 자기 위해 눈을 감고 있던 소녀들은 물론이고, 피곤으로 인해 잠에 빠져있던 사람들마저도 일어났다. 알람을 해도 좋을 만큼 탁월한 효과를 보이고 있었다.

‘아차!’

자신에게 집중되는 시선에 수연은 자신이 실수를 했다는 걸 깨달았다. 이런 건 조용히 자신만 알고서 전화를 받아야 하는데 전혀 의외의 인물에게 전화가 오자 놀라 외쳐버린 것이다.

후회하면 뭐하겠나. 이미 자신의 외침을 들은 소녀들이 눈을 부릅 뜬 채 자신에게 시선을 주고 있는데 말이다.

수연의 옆에 있던 미영이 그녀에게 시선을 주며 묻는다.

“창현이한테 온 전화야?”

“응? 으응…….”

얼떨떨한 마음에 수연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미영이 핸드폰을 가리키며 말한다.

“그런데 전화 안 받아도 되는 거야? 이러다가 곧 끊어질 것 같은데?”

“응? 아차!”

미영의 말에 수연은 자신이 실수를 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는 서둘러 핸드폰 폴더를 열고는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창현이?”

다행히 전화는 끊어지지 않고 연결된 상황이었다.

수연이 전화를 받자 반대편에서 창현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네, 저예요. 지금 스케줄 때문에 바쁜가 봐요?

아무래도 자신이 전화를 늦게 받으니 그렇게 생각을 했나보다. 수연은 창현의 말에 서둘러 부인을 하였다.

“아, 아니야. 지금 스케줄 끝나고 숙소로 돌아가는 중이거든. 스케줄 있는 사람은 태연이랑 써니랑 수영이 밖에 없어.”

잔인한 현실을 재차 확인시켜주자 지명 당한 세 사람이 입술을 삐죽 내밀며 투덜거린다. 아직 지옥의 스케줄이 남아 있다는 걸 자각한 것이다.

수연의 설명을 들은 창현이 다행이라는 듯 말한다.

-아, 그럼 다행이네요. 혹시 방해를 한 줄 알았거든요.

“전혀 방해가 안 되니 걱정 하지 않아도 돼. 그런데 무슨 일로 나한테 직접 연락을 한 거야?”

그러면서 살짝 턱을 치켜 든 채 도도한 눈빛으로 멤버들을 둘러보는 수연이었다. 그것은 명백히 한층 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기분 나쁜 눈빛이었다.

그 눈빛을 받은 소녀들의 표정이 팍 일그러졌다. 수연의 눈빛은 근래 창현에게 보컬 트레이닝을 받아 확실히 감정 전달력이 늘었다는 걸 증명하기라도 하듯, 자신들을 내려다보고 있다는 게 제대로 느껴졌던 것이다.

그녀의 눈빛은 마치 ‘너희들이랑 나랑은 차원이 달라! 내가 1순위거든!’ 이라고 말하는 듯하였다. 결국 너희들은 2순위라는 이야기였다.

그런 상황을 창현이 알 리가 없다. 그러니 창현은 이런 미묘한 분위기를 알아차리지 못한 채 수연의 물음에 답하기 시작한다.

-아, 다름이 아니라 4월 18일이 누나 생일이잖아요.

“응? 응! 맞아. 기억하고 있었네? 내 생일.”

자신의 생일을 알고 있자 기쁜 표정을 지으며 멤버들을 스윽 둘러보며 말하는 수연이었다. 그 말을 들은 소녀들의 표정이 다시 한 번 팍 일그러졌다. 지금 수연이 자신들을 놀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던 것이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가슴은 인정하지 못했다.

소녀들의 마음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으으! 전화 받는 상대가 싴병장만 아니었어도.’

‘저 얼음땡이만 아니었으면 사정없이 욕을 해줬을 텐데.’

행동을 함에 있어 무척 왕성함을 보이는 그녀들이 움직이지 못하는 이유는 수연이 소녀시대 내에서 1위를 다투는 강력한 스펙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가장 긴 연습생 생활과 특유의 차가운 분위기는 다른 사람들을 주눅 들게 만드는 무엇이 있었다.

리더인 태연마저도 수연의 분위기에 이따금 말릴 때가 있으니 그녀의 파워가 대단하다는 뜻이었다. 그럼에도 태연이 리더로서 소녀시대를 잘 이끌 수 있었던 것은 수연의 전폭적인 협력이 있어서 가능했던 것이지만 말이다.

“왜? 무슨 불만이라도 있어?”

수연은 소녀들이 자신을 불경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핸드폰을 떼고는 한손으로 자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막고는 한껏 눈에 힘을 주며 소녀들을 훑어본다.

그러자 수연을 속으로 열심히 씹어대던 소녀들이 분분히 고개를 돌려 그녀의 시선을 외면한다. 아직 자신들 단독으로 수연을 막아설 인물이 없었던 것이다. 효연이나 수영이라면 어느 정도 대적이 가능하지만 두 사람이 합공을 해야 수연을 꺾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만큼 수연의 파워는 팀 내에서 절대적이었다.

“훗!”

불경한 생각을 하는 멤버들을 가볍게 진압한 수연이 다시 통화에 집중한다.

그 모습을 보면서 소녀들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창현이 저 모습을 보면 정이 뚝 떨어질 텐데. 창현과 통화를 하는 수연의 모습은 그야 말로 친절함 그 자체였다.

‘저 모습을 언젠가 반드시 알리고 말겠어.’

그런 생각을 하건 말건 수연은 창현과 통화를 지속하고 있었다.

그녀는 창현이 자신의 생일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빙긋 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생일 기억해줘서 고마워. 그런데 무리하지 않아도 돼. 그때면 드라마 촬영을 하느라 바쁠 거 아니야? 그냥 알아주는 것만으로도 난 고마워.”

이건 사실이었다. 선물을 주거나 그러면 더욱 기쁠 테지만 우선 자신의 생일을 알아주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무척 좋았다.

그 말에 창현은 하하! 하고 웃음을 짓더니 말한다.

-드라마 촬영이 빠르게 진행되고, 드라마 ost도 준비를 마쳐서 시간은 남아요. 그래서 무언가 선물을 하려고 했는데…….

“했는데……?”

창현이 묘하게 말끝을 흐리자 수연은 한줄기 불안함이 엄습하는 목소리로 묻는다.

그에 창현은 머쓱하게 웃음을 짓는 어조로 말한다.

-하하! 죄송해요. 드라마 촬영이 빠르게 진행 되서 시간이 될 줄 알았는데 일본 프로모션을 가기로 했거든요. 그래서 아쉽지만 누나 생일에 제가 한국이 아닌 일본에 있을 것 같아요.

입가에 미소가 맺혀있던 수연이 표정이 빠르게 무표정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짐작을 하기는 했지만 창현의 말을 듣자 가슴이 짠한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미안해요. 대신 예쁜 선물 드릴게요.

수연의 목소리에서 실망이 실려 있다는 걸 눈치 챈 창현이 재빨리 말을 한다. 하지만 이미 실망을 한 수연이 그 말에 좋아할 리가 없다. 그녀가 좋아한 것은 창현과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이었는데 그날 볼 수 없다면 우울한 생일일 것 같았다.

“선물? 괜찮은데…….”

-그러지 않으면 제가 편하지 않을 것 같아서요.

그 말을 들으면서 창현이 미안해한다는 것을 수연은 느낄 수 있었다.

그러자 수연은 자신의 행동이 부끄러워지는 걸 느꼈다. 창현이 이렇게 신경을 써주는데 자신은 단지 생일에 볼 수 없다는 것만으로 실망하는 모습을 보이는 건 예의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아니야, 나는 괜찮아. 나는… 아, 아니! 그럼 이건 어때? 선물은 필요 없고 내 부탁 하나만 들어주는 건……?”

이미 스케줄이 정해진 듯하니 이 부분을 자신이 터치할 수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잘 활용하기만 하면 자신에게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 수연이 눈을 빛내며 창현에게 자신의 부탁을 들어달라는 듯 무언의 압력을 넣었다. 치사하다고 할 수 있지만 자신에게 미안한 감정을 느끼고 있는 창현이 자신의 말을 들어줄 확률은 99.9%다!

역시나, 수연에게 미안한 감정을 가지고 있던 창현이 수연의 말에 순순히 수락을 한다.

-부탁이요? 어렵지 않죠. 음… 좋아요. 대신 제 능력 범위 내에서 가능한 것만 하는 걸로 하죠. 이건 괜찮죠?

자신의 부탁을 들어주자, 수연은 속으로 Yes!를 외치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물론이지! 어려운 걸 부탁할 생각은 없어!”

물론 그건 자신의 생각일 뿐이지만. 창현이 보기에는 자신의 능력 선에서 아슬아슬한 범위일 것이다.

그런 수연의 속내를 모르는 창현은 수연에게 답을 얻자 순순히 수락한다.

-좋아요. 그렇게 할게요.

“응. 고마워. 내가 의기소침해질까봐 연락해준 거지? 고마워. 이렇게 먼저 전화를 해주니 힘이 나네.”

창현이 왜 전화를 했는지 통화를 하면서 깨달은 수연이었다. 그랬기에 그의 배려가 너무나 고마웠다.

그녀의 감사 인사에 창현이 짧게 웃음을 짓는다.

-하하! 알아주시니 고마워요. 일단 누나한테 말을 했으니 다른 누나들한테도 전해주세요. 아무래도 제가 전하는 것보다 누나가 전달하는 게 더 나을 것 같거든요.

한 명 한 명에게 모두 전화를 하는 건 좀 어렵지 않은가? 그러니 수연에게 먼저 나서서 말해주길 바라는 창현이었다.

“알았어. 그렇게 할게.”

자신에게 가장 먼저 이 사실을 알려주었다는 것에 수연은 다시 한 번 카타르시스적인 전율을 느끼면서 창현과 통화를 끝낸다.

그리고 멤버들에게 시선을 돌리며 입을 열 때였다.

“그러니까 얘…….”

수연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시선을 옮기는 순간 자신을 번뜩이는 눈으로 바라보는 사나운 맹수 떼를 본 것이다. 그것은 시니컬함으로 뭉친 수연조차 단숨에 압도될 만큼 강력한 파괴력을 지니고 있었다.

사나운 멤버들의 눈빛에 수연이 움찔하고는 묻는다.

“왜, 왜 그래?”

“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스산한 어조로 수연에게 말을 하는 인물은 다름 아닌 태연이었다. 태연은 평소에 볼 수 없었던 강렬한 기세를 발산하면서 수연을 압도하고 있었다. 홀로 수연을 압도하는 그녀의 기세는 강렬하다는 말로 밖에 설명이 되질 않았다.

수연은 태연이 이렇게 무서운 인물인지 몰랐기에 몸을 움찔 떨었다. 그리고는 화제를 돌리기 위해 서둘러 입을 열었다.

“자, 잠깐 난…….”

하지만 눈치 빠른 태연은 수연에게 그럴 틈을 주지 않은 채 외쳤다.

“문답무용! 일단 덮쳐! 숙소로 끌고 가서 처벌한다!”

태연의 명령에 수연은 삽시간에 양팔이 결박되었다. 그리고 때마침 숙소에 도착하였기에 양팔을 붙잡힌 채 앞뒤를 점거 당하고는 그대로 숙소로 연행된다.

마치 범인이 연행되는 것처럼 멤버들에게 둘러 싸여 숙소 안으로 들어간 수연은 분노한 소녀들에 의해 처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소녀시대가 결성된 이후 처음 아니, 연습생으로 들어오고 처음으로 집단 린치(?)를 당한 수연이었다.

분노가 때로는 사람의 눈을 뒤집히게 만들고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게 만들기도 한다.


“하아! 너희들…….”

소녀들의 최초 반란이 성공하면서 수연은 처참한 모습을 한 채 숙소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녀는 전신을 휘감는 모멸감에 입술을 질끈 깨물고 있었다.

설마 자신이 이렇게 처참하게 당할 줄이야.

늘 멤버들을 진두지휘하면서 진압하는 역할만 했지, 한 번도 자신이 당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당하자 그녀는 그동안 집단 린치를 당한 멤버들의 심정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하여 자신이 심했다거나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만 마음속에서 복수심이라는 감정이 뜨겁게 타오르고 있을 뿐이었다.

‘두고 봐.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만들어주겠어.’

하지만 지금은 잠시 그 결심을 접어둘 때였다. 자신을 제압하기 위해 하나로 일치단결한 멤버들을 상대하기에는 터무니 없었으니 말이다. 그 옛날 전국시대에 진나라가 전국칠웅 다른 여섯 개 국가의 동맹을 깨기 위해 서로를 이간질 시킨 것처럼, 앞으로 하나하나 복수를 하기 위해서는 우선 하나로 뭉친 멤버들의 유대를 깨뜨릴 필요가 있었다.

너덜너덜해진 수연이 힘겹게 몸을 일으키면서 입을 연다.

“끝난 거지?”

“…….”

수연의 말에도 불구하고 소녀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녀들의 얼굴은 다소 상기 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들의 반란이 성공했던 것이다.

수연이 자신들을 대할 때와 180도 다른 모습으로 창현에게 살살거리면서 부탁을 얻어내는 모습에 눈이 뒤집혀서 앞뒤 가리지 않은 채 수연에게 달려들었는데 멤버들이 모두 하나로 일치단결하여 수연을 성공적으로 제압한 상황이었다.

이것은 소녀시대가 결성되고 아니, 연습생으로 들어오고 나서 처음으로 성공한 반란이었다.

연습생 기간이 장장 7년 넘는 수연이 처음으로 무너졌으니 이 얼마나 값진 성과란 말인가? 이 여세를 잘 몰아서 밀어붙이면 권력의 구도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일이었다.

특히, 권력에 민감한 권력지향형(?) 인물인 태연의 두뇌는 빠르게 회전하고 있었다.

‘이대로 밀어붙여야 해. 이 여세를 잘 몰기만 하면 내가 완벽하게 소녀시대를 이끌 수 있어.’

자신이 권력을 장악하여 멤버들을 마구 부려먹는 상상을 하면서 태연은 이 여세를 몰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멤버들이 일치단결한 지금 상황에서 수연이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렇기에 지금 기세를 몰아 리더로서의 위엄을 찾는 것도 무척 유익한 방법일 것이다.

태연이 당당하게 앞으로 나서면서 수연에게 물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

“뭐가 남았는데?”

수연이 살짝 날카롭게 눈을 치뜨며 태연을 노려본다.

강렬한 그 눈빛에 태연은 순간 움찔했지만 자신의 뒤에는 든든한 일곱 명의 절대고수가 버티고 있다는 것을 상기하고는 어깨를 쭉 편 뒤 말한다.

“창현이랑 무슨 대화를 한 거야? 무슨 대화를 했는데 부탁을 얻어낸 거지?”

태연의 궁금증은 바로 그것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살살거렸기에 부탁을 얻어낸 것일까?

그 방법이 어떤 것인지 궁금했다. 그리고 부탁을 얻어낸 수연이 부러워서 배가 아플 지경이었다.

태연의 질문은 다른 소녀들의 궁금증이기도 하였다.

어서 말하라는 듯 무언의 압박을 가하자 수연이 입가에 진한 웃음을 짓더니 말한다.

“훗! 알고 싶어?”

“지금 그렇게 여유를 부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닐 텐데.”

그 말을 끝으로 살벌한 기세가 수연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태연을 비롯한 다른 멤버들이 수연에게 어서 대답하라는 듯 무언의 압박을 가하고 있던 것이다.

강렬한 압박감은 그대로 수연을 덮치기 시작하였다.

전신을 짓누르는 듯한 압박에 수연은 신음을 흘리며 표정을 찡그렸다.

“읏!”

“순순히 대답하시지? 그렇지 않으면 방금 겪었던 짜릿한 경험을 또 다시 겪을 수 있을 테니.”

초강수를 두며 대놓고 수연을 협박하는 태연이었다.

감히 자신에게 협박을 하는 태연의 모습에 수연이 눈썹을 치켜들었지만 이내 한숨을 푹 내쉰다. 지금 상황에서 자신이 어떤 움직임을 보이려고 해도 쉽지 않다는 걸 느끼고 있던 것이다.

어차피 알려야 하는 것이기도 했기에 수연은 한숨을 푹 내쉬더니 말한다.

“얼마 후면 내 생일이잖아? 그 정도는 알고 있겠지? 위대하신 소녀시대 리더 양?”

날카롭게 자신을 노려보며 묻는 수연의 모습에 태연은 자신도 모르게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서면서 대답한다.

“무, 물론이지. 4월이잖아.”

“왜 4월이라고 할까? 날짜는 모르나봐?”

눈을 가늘게 뜨며 묻자, 태연이 맹렬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한다.

“그, 그럴 리가! 4월 18일이잖아! 18일! 내가 왜 몰랐다고 그래?”

“호오! 18일이라고? 그거 확신할 수 있어?”

묘한 콧소리를 내며 묻는 수연의 모습에 태연은 자신의 말이 틀렸나 고민을 하였다. 18일인지 22일인지 묘하게 헷갈렸는데 갑자기 수연이 물음으로 인해 어느 날인지 확신을 못하던 것이다. 그러다가 태연은 이판사판이라는 마음에 외친다.

“왜 그래! 너 4월 18일이 생일이잖아! 그렇게 나온다고 내가 몰랐다고 할 것 같아?”

“칫! 알고 있었네.”

태연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수연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모른다고 했으면 단번에 전세 역전을 이룰 수 있었을 텐데 참으로 아까운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가까스로 수연의 생일을 맞추는데 성공한 태연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는 화제를 본래의 것으로 되돌리며 그녀에게 물었다.

“그래서 뭔데? 네 생일이 뭐?”

그 말에 수연은 야릇한 웃음을 짓더니 말한다.

“창현이가 내 생일을 챙겨주겠다고 하더라고.”

“뭐, 뭐라고?”

수연의 말을 들은 태연이 기겁하며 소리친다. 다른 소녀들도 모두 놀란 눈으로 수연을 바라본다. 정말 창현이 그런 말을 했단 말인가! 아니, 원래 그렇게 해주기는 했지만 막상 수연의 입에서 들으니 질투심이 확 치미는 것이 느껴졌다.

화들짝 놀라는 멤버들의 모습에 수연은 픽! 하더니 말한다.

“직접 챙겨주고 싶다고 했는데… 아쉽지만 그렇게 못하겠다고 하더라. 창현이가 그때 일본에 나가 있을 거라고 했거든.”

“…….”

일본에 나간다는 말에 소녀들은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외국으로 가서 활동하는 것이 결코 짧지 않으니 말이다. 자칫 잘못하다가 몇 달은 금방 지나갈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드라마 촬영을 하는데 외국 진출이라니. 드라마 때문에 금방 돌아올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불안한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어, 얼만큼이나요?”

평소 차분한 것이 특징인 주현이 말을 더듬으며 불안한 표정으로 묻는다.

그러자 수연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한다.

“그렇게 걱정할 필요 없어. 한 보름 정도 일본에 간다고 했거든.”

“보름? 별로 길진 않네. 후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소녀들이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수연이 말했다.

“생일 선물을 챙겨주려고 했는데 일본에 가게 되어서 못 챙겨주겠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부탁 하나 들어달라고 한 거야. 무슨 문제라도 있어?”

“…….”

수연의 말에 소녀들은 순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생일에 부탁 하나를 들어달라는 것은 충분히 있을 법한 이야기였기에 그렇다. 다만 그 상대가 창현이라서 문제가 되는 것이지만 말이다.

문제가 있어! 라고 외치고 싶은 소녀들이었지만 무어라 말을 할 수 없었다. 생일 선물 대신 부탁 하나 들어달라고 하는 것조차 무어라 한다면 자신들이 너무 팍팍하다는 걸 시인하는 꼴이었다.

결국 이를 갈면서 수연의 말에 비수를 넣어두는 수밖에 없었다.

그 분위기를 파악한 수연이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더니 말한다.

“더 할 말 있어?”

“없어. 알고 싶은 걸 알려줬으니까.”

질투가 치밀어 올라서 그런지 태연의 말투가 틱틱거리는 말투였다.

멤버들의 의문을 풀어주는데 성공한 수연이 슬쩍 윤아를 곁눈질 하더니 입을 연다.

“그럼 내 이야기를 해도 되겠지?”

“무슨……?”

의아한 표정을 짓는 멤버들을 보며 수연이 말한다.

“창현이 일본에 간다는 사실을 과연 내가 제일 먼저 알았을까? 난 방금 전에 통화했는데? 나보다는 창현이랑 일주일에 세 번 이상 만나는 직장 동료가 더 먼저 알아차렸을 것 같은데 말이지.”

“그 말은……?”

소녀들의 눈에 묘한 불길이 타오른다. 수연이 던진 불씨에 불이 붙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수연은 그 불길에 기름을 들이붓기 시작했다.

“나보다 윤아가 먼저 알고 있지 않았을까?”

“……!”

수연의 말에 소녀들의 시선이 일제히 윤아에게 향한다.

자신에게 시선이 몰리자 윤아는 양팔을 들고는 좌우로 저으면서 고개를 젓는다.

“저, 저도 모르고 있었어요! 정말이에요!”

윤아가 그렇게 말을 했지만 이미 흐름은 이쪽에 있었다. 수연은 지나가는 말로 윤아를 더욱 궁지에 몰아넣기 시작했다.

“글쎄, 과연 그럴까? 혼자서 알고 있으려고 한 게 아니라? 왜 그런 거 있잖아. 아무도 모르는 상황에서 혼자 공항으로 배웅을 간다거나 그런…….”

창현 정도의 인기라면 그렇게 공항에서 만나기도 쉽지 않아 납득하기 힘들 테지만 지금 수연의 말은 질투심에 타오르는 소녀들에게 가솔린을 들이 부은 격이었다. 왠지 그럴 듯하게 들리지 않는가?

분노로 타오르는 소녀들의 눈길이 그대로 윤아에게 향한다.

“윤아 너……”

“언니들! 오, 오해라니까요! 수연 언니! 전 정말 몰랐어요! 주현아 날 믿어줘!”

필사적으로 부인하는 윤아였지만 소녀들에게는 그 행동마저도 거짓으로 보일 뿐이었다.

“대답은 필요 없어! 너의 흔들리는 눈빛이 그걸 증명하고 있으니까! 제압해!”

태연의 진두지휘에 따라 소녀들은 수연을 제압하고 린치를 했던 것처럼 윤아를 제압하고 집단 린치를 가하기 시작한다.

그것을 보면서 수연은 눈을 빛내고 있었다. 즉석에서 짜낸 계략이었지만 성공적으로 먹혀든 것이었다.

그녀가 먹이를 노리는 맹수의 눈빛처럼 소녀들을 훑고 있었다.

우선 윤아를 떨어뜨렸으니 이제 하나씩 떼어내며 복수를 하면 된다.

‘너넨 다 죽었어.’

윤아를 시작으로 멤버들의 유대를 깨뜨리는데 성공한 수연의 눈이 빛났다.

그녀는 제법 뒤끝이 있는 여자였다.


수연에게 알린 이후 창현은 일본으로 떠나기 위해 차근차근 준비에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먼저 착수한 것이 바로 드라마 촬영의 빠른 진행이었다. 지금 일본으로 떠나는데 가장 큰 요인으로 작용한 것이 바로 드라마 촬영이 비약적으로 빠르게 촬영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 그렇기에 일정에 차질을 빚지 않기 위해서는 드라마 촬영을 순조롭게 넘겨야 했다.

오늘도 주인공이 나오는 씬을 촬영하고 있던 창현에게 뒤늦게 합류한 윤아가 다가온다. 감독을 비롯하여 스태프들에게 인사를 하던 윤아가 막 한 장면 촬영을 마친 창현에게 다가온다.

창현은 촬영장에 합류한 윤아를 발견하고는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손을 든다.

“누나, 왔어요?”

“…….”

반갑게 인사를 하는 창현에 반해 윤아의 표정은 그리 밝지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면서 창현은 순간 멈칫하였다. 윤아가 뚱한 표정을 지은 채 창현을 바라보고 있던 것이다.

‘왜 저러지?’

영문을 모르는 창현은 순간 고개를 갸웃했다. 윤아가 저런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까닭을 몰랐기에 그러는 것이었다.

의아한 표정을 지은 창현이 윤아를 보면서 물었다.

“왜 그러는 거예요?”

“…일본 간다면서?”

그 말을 들은 윤아가 더욱 인상을 쓰더니 창현에게 묻는다.

“정말 모르는 거야?”

“모르겠는데요?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나요?”

창현은 윤아가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몰랐기에 어깨를 으쓱하면서 그녀가 무슨 일로 이러는지 물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는 특별히 잘못한 게 없는데 말이다.

“하아!”

아예 영문조차 모르겠다는 듯한 창현의 모습에 윤아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어제 창현으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수모를 당했는가?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수연의 주동으로 인하여 자신은 멤버들의 집단 린치를 당해야만 했다. 창현이 일본으로 간다는 것을 숨겼다는 죄목으로 말이다.

하지만 윤아는 정말 창현이 일본으로 간다는 소식을 알지 못했다. 자신만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촬영장에 오는 사람들 대다수가 일본으로 가는 것 여부를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정말 몰랐음을 밝혔지만 그것마저 연기로 치부되며 처참하게 최후를 맞이해야만 했다. 특히 막내인 주현의 폭발은 윤아로 하여금 절망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주현을 무한태연교 제이교도로 받아들이면서 다시 한 번 굳은 우정을 쌓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었나보다.

‘난 정말로 몰랐는데.’

자신이 그 사실을 알고 린치를 당했더라면 차라리 덜 억울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정말 모르고 있는 상황에서 수연의 모함으로 당하지 않았던가?

만약 자신이 알고 있다면 말을 하지 않았겠는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순간 윤아의 표정이 진지하게 변한다.

‘으음… 생각해보니 말을 안했을 수도?’

이렇게 유용한 정보를 자신이 순순히 말할 리 없지 않은가? 정말 멤버들이 말을 한 것처럼 몰래 공항으로 나가서 감동의 배웅을 하던가 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이 미치자 절로 한숨이 나오는 윤아였다.

결국 자신이 정보를 알고 있어도, 모르고 있어도 상황은 같다는 것을 인지한 것이다.

‘결국 알고 있었어도 같은 전개였잖아? 후우!’

속으로 상황 판단을 한 윤아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워낙 억울한 상황이었기에 이래저래 툴툴거리고 싶었는데 차갑게 상황판단을 할 수 있게 되자 어차피 그게 그거였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윤아는 고개를 좌우로 저으면서 창현에게 말했다.

“아니야. 다만 수연 언니한테 들었어. 일본에 간다면서? 나한테는 이야기하지 않고…….”

섭섭한 의향을 비치는 이유는 엊그제에도 함께 드라마 촬영을 했기에 그렇다. 그렇다는 건 충분히 윤아에게 이야기를 해줄 수 있었다는 것인데 그걸 해주지 않자 섭섭한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아아…….”

창현은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윤아가 왜 섭섭한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아차렸다. 자신이 일본에 간다는 것을 이야기하지 않자 윤아가 섭섭함을 느꼈나보다.

그는 입가에 미소를 짓고는 윤아에게 자세한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아, 그거요? 제가 수연 누나 생일에 한국에 없게 되어서 이유를 설명하다가 말을 하게 된 거예요. 그리고 촬영의 마무리가 본격적으로 정해지는 오늘쯤에 다른 분들에게 말씀드리려고 했죠. 누나한테도 오늘 말하려고 했고요. 그렇다면 누나가 제일 먼저 알게 되었겠죠? 부득이하게 수연 누나가 먼저 알게 되었지만 그 점이 섭섭했다면 미안해요.”

“…….”

자세한 설명이 곁들어진 창현의 말에 윤아는 순간 움찔해야만 했다. 긴 창현의 말에서 자신의 귀를 달콤하게 자극하는 말이 있었던 것이다.

수연에게 전화를 하지 않았다면 자신이 제일 먼저 알게 되었을 것이라는 말. 그 말이 윤아의 마음을 사르르 녹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윤아가 자신에게 사과하는 창현을 보며 고개를 힘껏 저었다.

“아, 아니야. 섭섭하지는 않았어. 먼저 알려주거나 그런 게 아니라 나한테 말도 없이 일본에 떠나려는 것 같아서… 우리가 그, 그 정도 사이도 안 되는 것 같다고 말을 하는 것 같아서 조금 슬펐던 것뿐이야.”

그렇게 말을 했지만 결국 마음이 사르르 풀린 윤아였다.

그에 창현은 웃음을 짓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그걸 염두에 두지 못했네요. 미안해요.”

“으응…….”

너무 시원시원하게 대답을 한다. 그 모습에 윤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그 모습을 보며 창현이 말한다.

“그럼 된 거죠? 다음 촬영은 누나랑 저랑 하는 거니까 맞춰보도록 해요. 우선 촬영을 하는데 총력을 기울여야죠.”

“그래야지…….”

창현의 말에 윤아가 화들짝 놀라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고 보니 자신이 일찍 온 이유가 창현과 장면을 맞춰보기 위한 것이라는 걸 깨달았던 것이다.

그녀가 화들짝 놀라는 모습에 창현은 피식 웃음을 짓는다. 그리고는 윤아의 손을 잡아끌며 함께 장면을 맞춰보기 시작한다.


촬영이 끝난 후 창현은 같이 장면 촬영이 끝난 근영에게 가장 먼저 자신이 일본으로 간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 이야기를 들은 근영이 깜짝 놀라면서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창현에게 묻는다.

“일본으로? 어느 정도 가는 건데?”

“한 보름 정도 가 있을 듯 싶어요. 넉넉하게 잡으면 20일 정도?”

“20일? 아아… 그래서 그랬던 거구나.”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고 있던 근영은 창현의 말이 이해가 된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는 주연이다 보니 김지환 감독에게 많은 사실을 전달받고는 하는데, 4월 중순부터는 촬영이 창현과 함께 하는 것보다는 조연들과 함께 하는 장면이나 혼자서 활동하는 장면들을 촬영할 거란 이야기를 들은 상태였다.

왜 그렇게 촬영이 편성되었는지 의아했는데 그것이 다름 아닌 창현의 일본 진출 때문에 그랬던 것이다.

“그런데 일본에는 무슨 이유로 가는 건데? 보니까 평범한 이유로 가는 건 아닐 테고…….”

“그러고 보니 나도 궁금하네. 가르쳐줘.”

갑자기 끼어든 사람은 다름 아닌 윤아였다. 그녀는 창현의 장면 촬영이 끝났다는 것을 알고는 서둘러 촬영을 끝내기 위해 노력을 하였다. 창현과 근영이 단둘이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불안한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여 장면 촬영을 끝냈는데 자신의 궁금증을 자극하는 말을 들은 것이다. 갑작스럽다고 할 수 있는 일본 진출의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였다.

그 말에 창현은 약간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에… 드라마 광고하러 가는 거예요.”

“그, 그런가?”

창현의 말에 윤아가 순간 납득할 뻔하였다.

그러나 근영은 그 말을 듣고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거짓말. 드라마 광고를 하러 일본에 가는데 왜 우리는 몰랐던 건데? 우리는 드라마에 참여하는 배우 아닌가? 그런데 우리에게 비밀로 했다는 건 말도 안 돼. 자세한 사정을 이야기해봐.”

“욱…….”

은근슬쩍 넘기려던 창현은 정확하게 핵심을 잡고 넘어가는 근영의 모습에 신음을 흘리고 만다.

그러자 자세한 사정을 파악하는데 성공한 윤아도 눈을 가늘게 뜨고는 창현을 바라본다. 감히 자신을 속이려 들다니! 창현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는 절로 분노가 실리고 있었다.

지력(?)과 무력(?)을 맡고 있는 두 여인의 합공에 창현은 진실을 토해낼 수밖에 없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창현이 한숨을 푹 내쉬고는 말했다.

“사실은 라샤 누나들이 이번에 일본 진출을 하게 되었거든요. 그래서 저도 함께 가기로 한 거예요. 일본 기획사에서 제가 오길 간절하게 원하고 있었거든요. 원래는 거절하려고 했는데 드라마 촬영이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되어서 약 보름 정도의 시간을 낼 수 있게 되었고요. 그래서 일본에 가기로 한 거예요.”

창현의 말에 두 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이유로 일본에 가는 것인지 알게 된 것이다.

그러고 보니 창현은 세계적인 가수가 아닌가? 일본 오리콘 차트에서 1위를 했다는 소식도 들은 적이 있다. 한국보다 음반 시장이 훨씬 크기에 시장 관리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그런 만큼 일본에서 한 번 와달라는 요구를 거절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아… 그렇구나. 그런 이유였어.”

나직이 감탄사를 흘리며 고개를 끄덕이는 윤아와 달리 근영은 무언가 골몰이 생각에 잠겨 있다가 창현에게 물었다.

“라샤가 그러고 보니 나랑 동갑이었지?”

“누나랑? 그러고 보니 그러네요. 미란 누나는 88년생이지만 한학년 빠르게 들어갔으니 동갑인 셈이네요.”

전혀 신경 쓰고 있지 않던 부분이었는데 근영의 말을 듣고는 정말 그렇다는 것을 깨닫게 된 창현이었다. 라샤 누나들이 딱히 노안은 아니지만 근영은 좀 심하게 동안이 아닌가? 그래서 전혀 동갑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창현의 긍정에 근영이 창현에게 말했다.

“다음에 나랑 한 번 인사 시켜줘. 친하게 지내고 싶거든.”

“그러세요. 기회를 마련할게요.”

제법 그림이 그려질 것 같은 느낌에 창현은 순순히 수락을 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리고 드라마 홍보에 대해서는 거짓말을 한 게 아니에요. 왜냐하면 제가… 아니, 저희 소속사 사장님께서 이번 드라마를 일본에 방영할 수 있게 힘을 쓸 계획이거든요. 아마 조만간 보도 자료로 나갈 거예요.”

그 이야기를 들은 윤아는 입을 떡 벌렸다. 아직 방영도 안 된 드라마가 일본에 방영된다는 이야기는 말도 되지 않게 느껴질 정도로 큰 스케일이었던 것이다.

그녀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창현에게 물었다.

“일본? 그럼 일본에 방영된다는 거야? 아직 방영이 되지도 않은 걸?”

“그러게요. 저도 그 점이 의아하긴 했는데 충분히 성공 가능성이 있다고 해서요. 어차피 국내에서 성공하는 게 중요한 거 아니겠어요?”

“으응. 그, 그렇지.”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하는 창현의 말에 윤아는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아직 그녀에게 일본은 멀고도 먼 큰 시장이었다.

근영도 적잖이 놀란 듯한 표정을 지으며 창현에게 말한다.

“확실히 일본 시장을 개척하면 엄청난 거네. 설마 그런 걸 할 줄 몰랐어.”

그 정도로 일본은 큰 시장이었다.

웃음을 지은 창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부분은 확실한 게 아니에요. 그래서 드라마 홍보하러 간다고 하는 거죠. 아마 일본에도 방영한다고 하면 난리가 날 거예요. 홍보의 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을 테고요.”

“그렇지.”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이쪽이 알아서 할 계획이에요. 그러니 누나들도 제가 일본에 간다는 건 비밀로 해주세요. 조만간 회사에서 잘 정리해서 발표를 할 생각이거든요. 괜히 쓸데없는 구설수에 오르는 건 사양이라서요. 부탁드릴게요.”

그러면서 입가에 사람 좋은 미소를 지은 채 근영과 윤아에게 보이는 창현이었다.

그 미소를 본 두 여인은 순간 움찔한다. 창현의 미소는 여인의 마음을 단숨에 녹여버리는 듯한 강렬한 마력을 담고 있었다.

두 여인은 홀린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에 부드럽고 달콤한 말을 첨언하면 단숨에 마음을 빼앗을 수 있을 테지만 둔하디 둔한 창현은 그 모습을 보면서 그저 빙긋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3월이 끝나고, 4월에 들어서자 AA엔터테인먼트는 본격적으로 현과 라샤의 일본 진출을 밝혔다. 라샤는 애초에 목적했던 것처럼 일본 투어 콘서트를 비롯한 본격적인 활동이었고, 현은 일본에서 앨범 200만 장을 팔게 된 기념 방문과 드라마 홍보를 하기 위함이었다.

아무래도 드라마 방영을 따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기에 언급을 하지 않았다. 그걸 알고 있었기에 석규는 그것을 굳이 언급하지 않은 채 겸사겸사 시간이 나서 창현이 일본에 방문을 하는 것처럼 소식을 전달하였다.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상황이 절대 나쁘지 않았기에 석규는 입가에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이미 창현의 연기력에 관련된 말이 인터넷 곳곳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말들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니었다. 촬영 협조를 부탁받은 고등학교에서 어느 정도 일부 관람을 허용하고 있는 실정이었기에 그들은 멀찍이서나마 창현의 연기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창현의 연기력이 대단하다는 걸 눈으로 직접 보고, 증명을 해주었다.

현이 일본에 갈 수 있었던 것도 예상보다 뛰어난 연기 실력이 있었기에 이런 시간을 낼 수 있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렇기에 인터넷에서는 연일 현이 출연하는 드라마에 대한 관심이 하루가 다르게 높아지고 있는 실정이었다.

여기에 일본 진출 여부까지 살짝 심어준다면 아직 방영되지 않은 드라마에 대한 기대감을 한층 높여주기에 부족함이 없으리라.

어디 그뿐인가? 일본으로 가는 것 또한 소식이 전달되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일본 내에서 수위를 다투는 기획사인 쟈니스는 충분히 물밑 작업을 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창현이 일본에 가서 엄청난 폭풍을 일으킬 것임이 분명하였다.

일본 내에서 정상의 자리를 차지한 아사미 유키와 라샤의 곡이 모두 그에게서 나왔다는 것으로 인해 창현의 위치는 일본에서 절대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쟈니스에서 하는 물밑 작업은 창현에게 있어서 엄청난 도움이 될 것임이 분명했다.

그러다 보니 석규의 입가에는 미소가 절로 걸리고 있었다.

“후후! 일본 시장까지 확실하게 휘어잡을 수 있을 것이다.아주 좋은 현상이야.”

방 분위기가 어두웠다면 음모를 꾸미고 있는 모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사장실 안에 있던 라샤는 석규의 웃음을 보고는 곧장 지적을 하였다.

“사장님, 음흉해 보여요.”

“무슨 음모를 꾸미는 사람 같아.”

“정말 소름 끼칠 정도로 무서워요.”

한 마디씩 지적을 하는 라샤의 모습에 석규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너희가 그런 말을 하면 안 되지. 다 너희가 잘 되라고 열심히 뛰고 있는 사람한테 음흉하다니? 나는 무척 섭섭하구나.”

섭섭함을 토로하는 석규의 모습에 라샤는 동시에 움찔한다.

전국 투어 콘서트를 성공리에 끝마친 그녀들은 오랜만에 회사에 들린 상황이었다. 전국 투어인 만큼 엄청난 호응을 끌어내면서 콘서트를 끝마친 그녀들은 오늘부터 약 삼 일간의 휴식을 취한 뒤 곧장 일본으로 나갈 생각이었다.

그녀들은 섭섭한 표정을 짓는 석규에게 고개 숙여 사과를 하였다. 자신들이 조금 심했다고 느끼고 있었다.

“죄송해요, 사장님.”

“저희가 조금 심한 거 같아요.”

그녀들의 사과에 석규가 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하였다.

“괜찮다. 어차피 장난스럽게 말을 했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그나저나 시린이 네 표정은 좀 어두운데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게냐?”

석규는 방금 전부터 다소 어두운 안색을 하고 있는 시린을 보며 묻자, 시린은 깜짝 놀라더니 이내 고개를 좌우로 젓는다.

“아니에요. 특별한 일은 없어요.”

그렇게 말을 하지만 그녀의 표정이 다소 어두운 것이, 무슨 문제가 있는 것임이 분명하였다.

하지만 굳이 말을 하려고 하지 않는 모습에 석규는 깊게 파고들지 않았다.

“알았다. 그렇게 말을 하니 더 이상 묻지 않으마. 하지만 무슨 문제가 생기면 곧장 이야기를 해야 한다. 알겠지?”

석규의 당부에 시린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네, 물론이에요.”

‘이성 문제인가?’

그 모습을 보면서 석규는 자신의 날카로운 직감이 경고하는 것을 느꼈다. 시린이 저렇게 고민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그 문제가 바로 이성에 관련된 문제일 확률이 높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저런 반응을 보일 리 없을 테니 말이다.

물론 짐작일 뿐이었기에 언급을 하지 않았다. 그룹의 치명적인 단점은 한 명이 흔들리면 전체가 흔들릴 수 있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석규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다독이는 것밖에 없었다.

“일단 일본으로 가는 것에 대해서는 그리 알고 있도록 하여라. 어떻게 보면 너희들이 일본 활동에 대해서는 선배라 할 수 있으니 창현을 잘 이끌어줘야 하고. 내가 모든 걸 신경 써줄 수 없으니 너희가 잘 신경 써줘야 한다. 알겠지?”

석규도 일본으로 가긴 하지만 사업적인 제휴를 맺고, 여러 사람들을 만나 보아야 했기에 창현과 라샤를 신경 써줄 수 없었다. 그렇기에 일본에서 조금 더 오래 활동한 라샤에게 창현을 잘 부탁한다는 식의 말을 한 것이다.

“네, 알겠습니다.”

“일본 활동 경력으로 보면 저희가 선배죠. 선배고 말고요. 호호호! 창현이가 선배님의 말씀을 잘 따를지 모르겠네요.”

미란은 일본에서 선배 유세(?)를 하려는 생각에 입가에 묘한 미소를 지으며 좋아했다. 묘하게 창현과 앙숙인 그녀는 사사건건 치고받는 일이 잦았는데, 근래 들어 많이 당했기에 이번만큼은 자신이 승리하겠다고 다짐에 또 다짐을 하고 있었다.

시린도 고개를 끄덕이며 석규의 말에 수긍을 하였다.

“그래야죠. 최선을 다하도록 하겠습니다.”

‘철저하게 대비해야해. 그렇지 않으면 기습 공격을 당할 수도 있으니까.’

그녀가 고민의 기색을 띠고 있던 것은 석규의 예상과 비슷하지만 약간 다른 문제였다.

이성 문제이긴 하나 그 이성의 대상이 바로 창현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염려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창현과 아사미 유키가 만나는 것이었다. 아사미 유키가 저번에 방문했을 때 창현에게 어떤 행동을 했는지 보지 않았던가? 물불 가리지 않고 달려드는 그녀의 특성을 감안하면 자칫 창현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시린은 그 점이 염려되었다. 아사미 유키는 앞뒤 가리지 않는 경향이 있어서 자칫 잘못하다가 창현에게 돌이킬 수 없는 큰 스캔들로 번질 수 있다는 것을 은연중 느끼고 있는 것이다.

최선의 방법은 아예 만나지 않는 것이지만 그것은 힘들다는 걸 알고 있다. 왜냐하면 방금 석규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창현이 아사미 유키에게 곡을 줘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다. 그리 되면 아사미 유키와 자리가 마련될 수밖에 없을 것이고, 또 창현이 왔다는 이야기에 아사미 유키가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다.

그 점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에 시린은 자신이 창현을 잘 이끌어줘야 한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내가 도와줘야해. 그렇지 않으면 창현이가 고생할 거야.’

든든한(?) 라샤 멤버들의 말에 석규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희들이 그렇게 말을 하니 어느 정도 마음이 놓이는구나. 일단 그 부분에 대해서는 너희를 믿도록 하마. 어차피 창현이 그 녀석이 모나게 행동하지 않으니 잘 이끌어주면 알아서 잘 따를 것이다.”

석규의 말에 시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씩씩한 어조로 말한다.

“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염려하지 마세요. 저희들이 잘 이끌어줄 테니까요.”

“그래. 너희들만 믿는다.”

알 수 없는 박력이 느껴지는 시린의 모습에 석규는 약간 얼떨떨한 기색을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분이 좋았다가 나빴다가 오락가락하는 시린의 모습에 혼란함을 느끼는 석규였다.


순식간이 3일이 흐르고 마침내 창현과 라샤가 일본으로 가는 날이 되었다.

창현과 라샤는 큰 벤을 타고 공항으로 향하고 있었다. 제법 긴 시간 동안 일본에서 머물기에 차에는 짐이 가득하였다.

벤 안에서 창현은 라샤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다가 창현은 황당한 표정을 지은 채 그녀들에게 말한다.

“그러니까… 제가 일본에서 누나들의 말을 따라야 한다는 이야기인가요?”

황당함이 깃든 창현의 말에 미란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가 일본에서는 선배잖아? 그런 만큼 우리의 말에 따라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 왜, 무슨 불만이라도 있는 거야?”

“하아!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할 수 있는데요? 무슨 어려운 일을 한다고 누나들의 말에 따라요. 어차피 담당 매니저가 붙을 텐데 말이죠. 게다가 잊으신 것 같은데 저도 일본어 할 줄 알거든요? 그러니 활동하는데 무리가 없어요.”

미란의 앙큼한 속내를 한눈에 꿰뚫어본 창현은 곧장 그녀의 야심을 차단하였다. 감히 누가 누구에게 선배 행세를 하려고 한단 말인가! 전국 투어 콘서트를 할 때 자신에게 전화 연결을 하여 노래를 부르게 한 이후 미란의 전화를 번번이 무시했더니 이렇게 달려드는 듯하였다.

완고한 창현의 말에 미란은 다소 당황한 기색을 보인다. 그러다가 창현에게 이내 소리를 버럭 지른다.

“그런 게 어디 있어! 사장님이 특별히 지시를 한 사항이란 말이야.”

“정말 그러셨어요?”

창현이 앞좌석에 타고 있는 석규를 향해 물었다.

그러자 석규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라샤가 일본 활동을 오래 하지 않았더냐? 그런 만큼 너를 잘 이끌어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다른 말 하지 말고 잘 따르도록 해.”

석규가 이렇게 말을 하는데 창현이 무어라 말을 한단 말인가.

결국 한숨을 푹 내쉬며 일단 동의하는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에휴! 일단 그렇게 하도록 할게요.”

“잘 생각했어! 내가 잘 이끌어줄 테니 이 미란 누님만 믿으란 말씀.”

창현이 납득하자 신이 난 것은 미란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창현은 다시 한 번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런 모습을 보일 것 같아서 따르지 않겠다고 한 것인데.

‘두고 봐요. 내가 일본에서 누나 말을 따르나. 시린 누나랑 세룬 누나 말만 따르고 누나 말은 따르지 않을 테다.’

약간 청개구리 같은 면모를 지닌 창현이었다.

그 사이 그들을 태운 벤은 무사히 공항에 도착을 하였다.

공항에 차를 주차하고 짐을 끌어내린 뒤 곧장 공항 안으로 들어서려 하였다. 일단 안으로 들어서야 간단한 인터뷰를 하고, 성공적으로 일본을 향해 떠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러던 중 문제가 발생하였다.

공항 안으로 들어서려던 석규 일행에게 공항 직원이 심각한 표정으로 다가온 것이다.


그는 석규를 알아보고는 심각하게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게… 약간 예정에 틀어질 듯합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석규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묻자, 공항 직원이 안을 가리키며 말한다.

“안에 현 씨와 라샤의 팬들이 가득 있어서… 경계를 좀 더 강화해야 할 듯 합니다.”

“…….”

뜻밖의 사태에 석규를 비롯하여 창현과 라샤의 표정이 굳어갔다.

이런 일이 발생할 줄 몰랐기에 놀라움은 더욱 컸다.

석규는 굳은 표정을 풀지 않은 채 공항 직원에게 물었다.

“도대체 어느 정도이기에 그런 말이 나오는 것입니까?”

애초에 이런 사태를 예측하지 못한 것이 아니다. 상당한 정보망을 구축하고 있는 네티즌들로 인해 이미 창현과 라샤가 일본으로 출국하는 날짜가 암암리에 퍼져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다크 스타 간부들과 다크 레이디스 간부들이 특별회원들을 중심으로 현과 라샤의 출국하는 자리에 나오기 위해 준비를 하였다.

그런데 거기에서 뜻하지 않게 정보가 유출되는 사태가 발생했던 것이다.

정보를 접한 극성팬들은 공항으로 몰려들었고, 그 결과 예상보다 훨씬 많은 인원이 모여드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공항 직원은 어두운 안색으로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처음에는 어느 정도 예상 범위 내일 줄 알았는데 예상을 훨씬 초과하였습니다. 많아야 오백 명 정도로 생각했는데 현재 모여든 사람이 천 명이 넘습니다. 공항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을 정도입니다.”

“…….”

워낙 충격적인 말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설마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미란이 세룬을 툭 치면서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거… 좋은 거지?”

미란의 물음에 세룬이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입을 연다.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지. 이렇게 많은 관심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연예인에게 있어서는 영광일 테니까. 다만 너무 과분한 관심에 우리가 당장 비행기를 타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거? 그게 나쁘다면 나쁜 점이겠지.”

조용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지만 이곳에 모인 사람들의 귀에 다 들리고 있었다.

석규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공항 직원에게 물었다.

“후! 그래서 준비는 어떻게 하고 있는 것입니까? 아니, 비행기에 무사히 탑승할 수나 있는 것입니까?”

공항에 먼저 여유 있게 진입한 뒤에 간단한 인터뷰를 하고 떠날 생각이었는데 그러한 여유는커녕 제대로 출국도 못할 처지에 놓이게 되자 석규의 안색은 침중하게 굳어 있었다.

그 물음에 공항 직원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지금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잠시 지체되기는 할 테지만 비행기에 탑승하지 못하는 문제는 발생하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부분만큼은 맡겨주십시오.”

이렇게 말을 하는 걸 보면 공항 측에서도 재빨리 대처하고 있다는 걸 뜻했다.

확신 어린 어조로 말을 하는 공항 직원의 모습에 석규는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좋습니다. 그럼 저희는 준비가 다 될 때까지 기다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때까지 좋은 소식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얼마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기다려주십시오.”

그 말과 함께 공항 직원이 고개를 숙이면서 안으로 들어갔다.

슬쩍 앞으로 나아가 공항 안쪽을 들여다 본 창현은 혀를 내두르며 감탄을 하였다.

“허어! 사람이 정말 많은데요?”

창현의 말을 들은 미란이 앞으로 다가와 그가 본 곳을 향해 시선을 준다.

“어디? 난 안 보이는데? 거짓말 하는 거 아니야?”

아무리 애를 써도 잘 보이지 않자 미란은 창현을 보며 그에게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냐는 의혹을 보냈다.

그러자 창현이 어깨를 으쓱하면서 말했다.

“누나랑 저랑 시력이 다르잖아요. 당연히 누나는 안 보이겠죠. 그런데 뿌옇게 안 보여요? 그 정도면 사람이 많은 걸 알 수 있을 텐데?”

“안 보여. 너 시력 몇인데? 나도 시력 나쁘지 않은 편인데…….”

창현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미란이었다.

그 모습에 창현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한다.

“전 양쪽 눈 모두 2.0이라고요. 누나는 몇인데요?”

엄청난 창현의 시력에 미란이 입을 떡 벌리면서 움찔하고는 뒤로 물러난다.

“나, 나는 0.6, 0.7인데…….”

“쯧쯧! 그러니 안 보일 수밖에요. 전 시력 하나는 자신 있다니까요?”

“무슨 시력이 그렇게 좋은 거야. 넌 TV도 안 보고 컴퓨터도 안 해? 완전 시력이 몽골인 수준이네.”

시력이 좋다고 하자 창현을 아예 몽골인 취급하는 미란이었다.

“그쪽은 6.0이 넘는다고요. 그쪽이랑 비교하면 안 되죠.”

사방이 확 트인 사막에서 살고 있는 몽골 사람들과 사방이 건물과 산으로 둘러싸인 한국 사람의 시력은 애초에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미란이 창현을 몽골 사람이라고 했다는 것은 그의 시력이 그만큼 좋다는 뜻이었다.

창현의 타박에 미란은 입술을 삐쭉 내밀며 궁시렁거렸다.

“그래, 어이구, 잘나셨어요.”

“제가 원래 좀 잘났죠. 후후!”

미란을 말싸움에서 꺾은 창현이 어깨를 쭉 피며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창현의 시력은 2.0이 되지 않았다. 기껏해야 1.0 정도? 하지만 그가 공항 안을 들여다 볼 수 있었던 것은 내공을 사용해서 순간적으로 시력을 극대화 시켰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내공이 얼마 되지 않지만 안쪽 상황이 어떤지 보기 위해 한 것인데 때마침 미란이 걸려든 것이다. 그리고 보이지도 않는 것 때문에 괜히 창현에게 타박을 당한 미란이었다.

괜히 창현 잡는 미란과 더불어 미란 잡는 창현이란 말이 생겨난 것이 아니다.

그렇게 투닥거리며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예의 공항 직원이 준비가 완료되었다는 말과 함께 일행을 안으로 인도하였다.

석규를 필두로 창현과 라샤, 그리고 매니저들이 그 뒤를 따르기 시작하였다.

뒷문 같은 사람들이 잘 드나들지 않는 곳으로 공항 안에 들어선 일행은 보안 요원들이 만들어놓은 길을 따라 걸어가기 시작하였다.

와아아아아!

보안 요원들이 길을 만들고 보호하려는 자세를 취하자 눈치 빠른 팬들은 창현과 라샤가 공항에 도착하기 직전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리고는 보안 요원들이 만들어놓은 길에 최대한 달라붙어 출국하는 연예인들을 보기 위해 몰려들었다.

공항 직원이 천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였다고 할 정도였기에 사람들의 숫자는 그야 말로 엄청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공항 전체를 까맣게 채우고 있는 걸 보면 천 명은 훌쩍 넘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놀란 미란이 주변을 둘러보면서 입을 연다.

“이거 천 명이 아니라 이천 명 정도가 모인 것 같은데?”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도 안으로 들어왔나 봐. 정말 많다.”

갑자기 사람이 늘어난 이유를 세룬이 정확하게 파악하면서 고개를 나직이 끄덕인다. 밖에서 현과 라샤가 들어올 것이라 생각하던 길에 배치되었던 팬들이 공항 안에 들어오면서 사람들의 숫자가 더욱 늘어난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팬들 중 3분의 2 정도가 여성 팬이었다. 그것을 보면서 라샤 멤버들은 그들이 본능적으로 창현의 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라샤도 많은 여성 팬들 거느리고 있지만 여성 팬들이 들고 있는 피켓에는 하나같이 현의 이름이 쓰여 있던 것이다. 라샤 이름도 함께 쓰여 있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현의 이름이 더욱 많은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라샤 멤버들은 창현의 인기가 얼마나 대단한지 몸으로 직접 실감할 수 있었다.

“창현이 팬 진짜 많다. 와…….”

“누나들 팬도 많아요. 그리고 뒤처지지 않게 잘 따라가요. 안으로 들어가야죠.”

감탄 섞인 목소리를 흘리는 그녀들을 향해 말을 한 창현이 부지런히 걸음을 옮긴다.

보안 요원들이 총동원 되어 길을 만들기는 했지만 워낙 많은 인원들이 동원된 탓에 넓게 길을 만들지 못한 상황이다. 그러다 보니 팬들은 손을 뻗어 창현과 라샤의 몸을 터치하기 시작했다. 실물로 한 번 볼까말까한 그들의 몸을 터치해보고 싶었던 욕구가 들었던 것이다.

그러한 팬들의 움직임을 본 창현과 라샤 멤버들의 움직임이 조금 빨라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완벽하게 팬들의 손길을 피할 수 없었기에 여러 손이 그들의 어깨를 터치하기 시작하였다. 터치에 성공한 팬들은 좋아하면서 환호성을 질렀고, 터치하지 못한 팬들은 터치를 하기 위해 더욱 애를 쓰는 모습을 보였다.

그렇게 팬들을 지나쳐 마침내 안전지대로 들어설 수 있었다. 팬들이 물리적인 힘을 이용하여 접근할 수 없는 곳이었다. 그곳에는 기자들이 자리하고 있었고, 창현과 라샤는 나란히 서서 잠깐의 포토타임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는 곧이어 인터뷰가 이어지기 시작하였다.

기자들의 관심은 당연히 창현의 일본 진출 여부였다.

“SA일보의 김여정 기자입니다. 현 씨가 일본 진출하는 것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하셨다고 했는데 궁극적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창현은 침착하게 목을 가다듬고는 생각을 정리한 뒤 질문에 답을 해주었다.

“일본에 가는 이유는 드라마를 홍보하기 위함도 있지만 제 앨범을 구매하고 저를 사랑해주신 일본 팬 분들을 만나기 위한 의도도 있습니다. 그동안 일본에서 활동을 하지 않았음에도 제 앨범을 구매하고 사랑해주신 팬 분들에게 이번 기회를 발판 삼아 만나보고 그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달하려고 합니다.”

창현의 답변에 다른 기자가 끼어들어 질문을 하였다.

“TP일보의 곽남희 기자입니다. 국내 음악 프로그램에서 활동을 일체 보이시지 않으시다가 일본으로 가는 것이 많은 오해를 낳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으신지요?”

“단면적인 면만 보면 오해가 생길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번 목적은 엄연히 말하면 드라마 홍보도 겸한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첫 미니 앨범을 발매하였을 때부터 꾸준히 사랑해주신 걸 보답하고자 하는 것이지, 정규 3집 앨범 활동 내용만 떼고 보시면 곤란합니다. 이 점을 잘 보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창현의 답변에 기자들이 부지런히 내용을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그 뒤로도 여러 가지 질문이 이어졌지만 창현은 오해성 발언이 섞이지 않게 잘 생각하면서 답변을 하였다. 이번 일은 자칫 잘못하다가 큰 오해를 낳을 수 있는 일이니 만큼 창현의 답변은 무척 신중하게 이루어졌다.

창현이 인터뷰를 하는 동안 라샤와 석규도 인터뷰를 하였고, 약 삼십여 분간의 인터뷰 시간을 갖게 된 일행은 비행기 시간이 다가온 것을 확인하고는 출국할 준비를 하기 시작하였다.

인터뷰를 끝마친 창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후우! 잘 해야 할 텐데요. 자칫 오해성 기사가 나게 되면 으으…….”

자신이 한 말을 곱씹어보면서 기자들이 잘못 잘라내기만 하면 오해할 수 있는 기사가 나갈 수 있다는 걸 깨달은 창현이 눈살을 찌푸리고는 괴로워하였다.

그 모습을 보면서 석규가 창현을 위로해주었다.

“잘 할 게다. 왜냐하면 오늘 온 기자들은 너에게 우호적인 기사를 쓰는 사람들이거든. 그러니 안심해도 좋을 게다.”

그 말에 무언가 골몰히 생각에 잠겨 있던 세룬이 주먹으로 손바닥을 딱! 하고 두드리더니 말한다.

“아, 그래서 다 기자들이 여자였던 건가요?”

“…….”

세룬의 물음에 석규는 노코멘트를 하였다. 하지만 대답을 하지 않았을 뿐이지, 그것이 정말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한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말을 듣고 나자 창현은 인터뷰가 끝나고 기자들이 왜 자신에게 싸인을 부탁했는지 알 수 있었다.

“하하…….”

사실을 깨닫게 되자 창현의 입에서 웃음이 흘러나왔다.

“험험!”

자신을 보며 웃는 창현의 모습에 석규는 헛기침을 흘리며 무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 사이 일행은 비행기에 탑승할 수 있었다. 어차피 일본까지 거리가 얼마 되지 않았기에 그들은 가벼운 마음으로 비행기에 탑승할 수 있었다.

창현은 일본행 비행기를 타자 예전에 일본에 한 번 갔던 것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일본은 거의 2년만이네요.”

“벌써 그렇게 되었구나. 시간 한 번 참 빠르네.”

“그러게요.”

옆에 앉은 시린이 그렇게 말을 하자 창현도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비행기에 탑승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비행기가 이륙하기 시작했고, 그들이 탄 비행기는 나리타 공항을 향하기 시작했다.

창현은 미리 준비해둔 mp3를 틀며 이어폰을 귀에 꼽고는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고, 라샤 멤버들은 소곤소곤 잡담을 나누면서 시간을 보냈다.

얼마 되지 않는 거리였기에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할 수 있었다.

승무원들의 친절한 배려에 비행기에서 내린 그들은 곧장 공항을 나서기 시작했다.

일행이 공항으로 나가려 하자, 공항 직원이 다가오더니 일번어로 그들에게 말했다.

“나가셔도 놀라지 마십시오.”

‘놀라지 말라고? 무슨 말이지?’

공항 직원의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은 일행이 막 공항에 모습을 드러낼 무렵이었다.

곧이어 엄청난 함성이 공항을 뒤흔들기 시작하였다.

와아아아아아아!

“……!”

엄청난 함성 소리를 들으면서 눈에 들어오는 광경에 일행 전체가 입을 딱 벌려야만 했다.

그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조금 전 출국할 때보다 더 많은 인원들이 함성을 지르며 피켓을 흔드는 모습이었던 것이다.

설마 자신들이 오기에 이렇게 모여든 것이란 말인가?

이렇게 많은 숫자의 사람들이?

라샤가 일본에서 절정의 인기를 누릴 때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 적이 없다. 그렇다는 건 창현의 방문으로 인해 이 정도로 많은 호응이 나왔다고 볼 수 있다.

상상을 초월하는 반응에 모두가 할 말을 잃고는 멍하니 서 있어야만 했다.


현이 일본에 온다는 소식은 한국에서 퍼져 나옴과 동시에 일본에서 본격적으로 퍼져 나오기 시작했다.

일본 내 대형 기획사 중 한 곳인 쟈니스에서 대대적으로 사람들에게 알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이 내세운 현의 타이틀은 아사미 유키와 라샤의 곡을 만든 자, 그리고 목소리 하나로 세계를 제패한 젊은 천재라는 점이었다.

더 많은 광고를 할 수 있을 테지만 쟈니스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자신들이 필요 이상으로 나서지 않아도 현의 열풍은 일본 전역을 뒤덮을 것이란 확신이 있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더 이상의 언급을 아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의 일본 방문 소식은 일본 전역을 뒤덮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이미 일본 내에서 절대적인 위치에 올라섰으며, 추후 빌보드 차트에 진출해도 손색이 없을 것이라 평가받는 아사미 유키의 곡을 만들어준 작곡가일 뿐만 아니라, 한국 출신 여성 그룹으로써 선풍적인 인기 몰이를 하고 있는 라샤의 프로듀서라는 사실이 널리 퍼져 있던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현의 정규 3집 앨범은 일본 내에서 2008년 최고 판매를 기록할 만큼 엄청난 숫자가 판매 된 상황이었다.

아직 일본 방문을 한 적이 없는 스타 중 스타였기에 일본에서 현에게 걸고 있는 기대감은 엄청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장 일본 내 팬클럽만 하여도 한국과 맞먹을 정도의 규모를 자랑하고 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런 거물급 스타가 일본에 방문한다는 사실은 일본 사람들에게 큰 파장을 일으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리고 현이 일본으로 오는 나리타 공항으로 모여들기 시작하였고, 무려 삼천 명이 넘는 팬들이 공항에 몰려든 것이었다.

기껏해야 오백여 명을 예상하고 있던 공항 측에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많은 팬들을 불러올 정도의 스타가 일찍이 방문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기껏해야 천여 명 정도가 와도 많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삼천 명이 넘는 숫자는 상상을 초월하는 숫자였다.

“하하… 이거 너무 많이 나오셨는데요?”

와아아아!

주변을 둘러보며 창현이 웃음을 짓자 팬들이 함성을 지른다. 사진으로, 기껏해야 영상으로 보아오던 스타의 등장은 그들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다 창현이 너를 보러 온 거야. 정말 대단한데? 이거 뉴스에서도 나오고 있어.”

시린이 슬쩍 한쪽을 눈짓하며 가리키자 그곳에는 일본 방송국에서 촬영을 나와 지금의 상황을 녹화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것을 본 창현은 정말 스케일이 크다고 느끼면서 한편으로는 감사한 마음을 느껴야만 했다. 자신이 이들에게 각별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이렇게 환호해주는 모습이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평범한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반일 감정을 조금씩이나 갖고 있다. 창현 또한 그런 면이 약간이나마 있었는데 지금 팬들의 모습을 보니 그런 감정이 사르르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창현은 팬들을 향해 일본어로 인사를 하였다.

“반갑습니다, 현입니다. 이렇게 저를 보기 위해 나와 주셔서 팬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꺄아아아아!

현! 현! 현!

유창한 일본어로 인사를 하는 창현의 모습에 다시 한 번 열광하는 팬들이었다. 창현이 자신들의 언어로 말을 하는 것이 그들로 하여금 열광하게 만드는 요소였던 것이다. 동경하던 외국 스타가 자신들의 말을 막힘없이 구사한다는 것 자체가 자신들 나라에 큰 관심이 있다는 것처럼 비춰졌다. 그리고 그것은 곧 자신들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처럼 그들에게 느껴졌다.

“하하…….”

단순하게 일본어로 인사를 했는데 반응이 뜨겁자 창현은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그런 창현을 보던 석규가 입을 열었다.

“우선은 당분간 머물 호텔로 가자. 라샤 아이들은 쟈니스에서 내준 숙소가 있지만 창현이는 아직 숙소가 없거든. 그래서 쟈니스 측에서 호텔을 잡아놓았다고 하는구나. 요 앞에 마중을 나왔다고 하니 곧장 나가면 될 것이다.”

1년에 일본에서 몇 달 동안 활동을 하는 라샤는 쟈니스에서 마련한 숙소가 있다. 하지만 창현은 이제 활동을 시작하고, 그 기간도 짧은 만큼 숙소보다는 호화 호텔에서 머무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

석규의 말을 알아들은 창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어요.”

그렇게 한 창현은 다시 한 번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면서 지나갈 수 있게 양해를 해달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앞으로 잘 부탁한다는 말과 함께 공항 보안 요원들의 호위 속에서 무사히 공항을 나설 수 있었다. 그리고는 미리 준비된 차 두 곳에 나눠서 탑승하기 시작하였다.

라샤 멤버들을 비롯한 멤버들은 한쪽 차에 탑승을 하였고, 석규와 창현, 세희는 다른 차에 탑승하였다. 그리고 곧장 공항을 빠져 나와 호텔로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차에 탑승한 창현이 세희를 바라보며 앞으로의 스케줄을 물어보았다.

“세희 누나, 앞으로 스케줄이 어떻게 되죠?”

“잠시만 기다려봐.”

간략하게 스케줄을 정리한 표가 있었기에 세희가 가방에서 다이어리를 꺼내려들자, 석규가 제지하면서 입을 열었다.

“우선 내일은 쟈니스에 들릴 예정이다. 너도 그렇고 라샤도 오랜만에 일본에 왔으니 쟈니 회장님에게 인사를 해야 하지 않겠느냐? 첫 날은 간단하게 인사를 한 뒤에 저녁에 일본 언론과 인터뷰를 할 생각이다. 그리고 이튿날에는 본격적으로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할 것이다. 여기에 동방신기도 함께 하기로 했으니 한결 나을 것이다. 그리고 셋째 날에는 네 앨범을 구매한 팬들과 함께 하는 팬 미팅을 할 것이다. 우선은 이 정도가 확정적이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라.”

창현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석규에게 물었다.

“일본에 머무는 날이 그리 길지 않아서 스케줄이 촘촘할 거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그렇게 촘촘하지 않네요?”

그 말을 들은 석규가 묘한 미소를 지으면서 창현에게 말한다.

“아마 한국 가기 전까지 쉴 날은 없을 것이다. 촘촘하지 않다는 말도 조만간 쏙 들어갈 테고 말이다.”

웃음을 짓는 석규의 모습은 불안한 마음을 심어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걸 본 창현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면서 석규에게 말했다.

“설마 날이 갈수록 스케줄 강도가 심해지는 건 아니겠죠?”

“…….”

침묵은 무언의 긍정이라.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석규의 모습에 창현은 자신의 예상이 사실이라는 것을 간파했다.

창현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며 괴로운 신음을 흘렸다.

“으으! 스케줄이 촘촘한 건 견디기 힘든데. 오랜만에 미국에서의 악몽이 재현되는 건가요?”

미국에서 스케줄을 하던 것은 창현에게 있어 두 번 다시 하지 못할 지독한 스케줄의 향연이었다.

최소 1년 동안 이행해야 할 스케줄을 무려 3개월로 압축하여 소화한 지옥의 코스였기에 그렇다. 하루에 많이 잠들어 봐야 2시간에서 3시간이었던 그때의 기억은 두 번 다시 떠올리기 싫은 기억이었다.

“악몽의 스케줄?”

창현이 미국에서 활동할 당시에 어떤 스케줄을 소화했는지 모르는 세희가 의문을 표했다. 대충 촘촘한 스케줄을 이행했다는 걸 알고는 있지만 어느 정도로 촘촘했는지는 알지 못했다.

세희의 물음에 창현은 진저리를 치면서 말했다.

“상상도 하기 싫은 기억이죠. 인간이 절대 해낼 수 없는 스케줄이랄까요?”

“그 정도까지는 아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설마 그때처럼 수면 시간마저도 깎아먹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냐? 충분히 여유 있게 할 것이고, 중간에 유명한 온천도 들려서 피로를 풀 생각이니 기대해도 좋다.”

“온천이요? 좋죠!”

“사장님! 저도 갈 수 있는 곳이죠?”

창현은 온천이라는 말에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고, 세희도 눈을 빛냈다. 일본 온천은 무척 유명하지 않은가? 게다가 좋은 곳은 가격도 만만치 않은 만큼 일본으로 관광을 오는 사람들이 반드시 한 번 가봐야 하는 곳이 바로 온천이었다.

세희도 평소에 온천에 한 번 가보고 싶어 하였기에 석규를 닦달하듯 물은 것이다.

석규는 갑작스러운 세희의 반응에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래. 윤 매니저도 같이 갈 거니까 그 부담스러운 눈빛 좀 어떻게 할 수 없나?”

그 말을 들은 세희는 자신이 과한 반응을 보였다는 걸 깨닫고는 얼굴을 붉히며 석규에게 사과를 하였다.

“네? 아, 죄, 죄송합니다. 제가 좀 흥분한 나머지…….”

“하하! 아닐세. 온천이 좋기는 하지. 피로도 풀어주고 건강에도 좋으니까. 기대해도 좋을 걸세.”

“사장님을 잘 모시게 되어 그런 호강도 하게 되니 정말 기쁘네요.”

온천을 가게 되어서 기뻤던지 세희가 미소를 지으면서 석규에게 아부를 한다. 석규가 유명한 온천이라고 할 정도면 보통 좋은 곳이 아닐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뜻하지 않게 호강을 하게 된 셈이다.

그런 세희의 반응에 창현은 약간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묻는다.

“아니, 그건 사장님보다 담당 연예인을 잘 만나서 그런 거 아니에요? 제가 일본에 오게 되니 누나도 일본에 오게 된 거 아니에요. 이거 아버지만 칭찬 받으니 난 무슨 꿔다 놓은 보릿자루 같네요.”

자신에게는 고마움을 표하지 않자 꽁한 표정을 짓는 창현이었다.

그에 세희는 웃음을 짓고는 창현에게 말한다.

“왜 아니겠어! 창현이 네 덕이 가게 되는 거지. 난 항상 창현이 너한테 감사한 마음을 느끼고 있다니까?”

“…일단은 넘어가도록 하겠어요. 정말 감사한지는 매니저 일을 하는 걸 보면서 판단하도록 할게요.”

“예, 알아서 잘 모시겠습니다. 월드 스타님.”

장난스럽게 말하는 창현의 모습에 장난스러운 모습으로 대꾸하는 세희였다.

“지켜보겠습니다.”

창현이 피식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세희도 마주 웃음을 흘렸다.

그 모습을 보던 석규가 한마디 던졌다.

“너희 사귀냐?”

“쿨럭!”

“쿠, 쿨럭! 켁! 아, 아버지!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씀을!”

갑작스러운 석규의 말에 창현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석규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아, 서로 바라보며 웃는 게 심상치 않아 보여서 말이다. 아니면 말고.”

“에휴! 세희 누나랑 저랑 무려 여덟 살 차이인데요.”

“어디서 나이를…….”

나이를 언급하는 창현의 모습에 세희가 날카롭게 눈을 뜨며 창현을 노려보았다.

석규는 그런 세희를 제지하면서 한마디 하였다.

“그러고 보니 한 마디 하지 않았는데. 윤 매니저, 우리가 갈 온천은 혼욕을 하는 곳이라네.”

“…….”

석규의 말을 들은 세희는 순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창현 또한 혼욕을 하는 곳인지 몰랐기에 멍한 눈으로 세희를 바라본다.

그 사이 세 사람을 태운 차는 목적지인 호텔을 향해 도달하고 있었다.


호텔에 도착한 세 사람은 곧장 두 개의 방으로 흩어졌다. 남자인 석규와 창현은 한 방을 사용하였고, 여자인 세희는 따로 방이 마련되어 있었다.

쟈니스에서 마련한 방을 보고 세희는 당황한 표정을 지어야만 했다. 들어선 호텔만 해도 최고급에 해당하는 곳이었는데 자신에게 주어진 방은 호텔에서 가장 화려하고 큰 방이었던 것이다.

사치도 이런 사치가 없었기에 세희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을 본 석규는 웃음을 지었다.

“쟈니 회장님이 선심 팍팍 쓰셨군. 윤 매니저, 괜찮으니 안으로 들어가서 푹 쉬도록 하게나.”

그 말에 세희가 당황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한다.

“사, 사장님. 하지만 이건 너무…….”

시설이 너무 좋은 것도 불편하게 느낄 수 있다는 걸 처음 깨달은 세희였다. 언젠가 한 번 이런 곳에 와서 푹 쉬어보고 싶다고 생각을 했지만 막상 이렇게 현실로 실현이 되자 적응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너무 화려한 탓에 방에 들어가는 것조차도 부담이 되었다.

“어쩔 수 없지 않나? 그렇다고 성의를 거절할 수 없는 노릇이고. 이런 기회가 아니면 편히 쉴 수도 없을 테니 편히 쉬게.”

“하아! 알겠습니다.”

너무 부담스러웠기에 이런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이미 방이 잡혀 있는 상황에서 자신이 어쩔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세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대로 방안에 들어갔다.

그 모습을 확인한 석규와 창현은 옆방으로 들어섰다. 한눈에 보아도 화려한 치장이 가득한 방은 높은 계층 사람들을 위해 마련된 곳이란 느낌이 물씬 풍기는 곳이었다.

창현은 약간 염려가 섞인 목소리로 석규에게 말했다.

“그런데 세희 누나는 괜찮을까요?”

석규는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부담스럽지만 괜찮지 않겠느냐? 처음에야 부담스럽겠지만 그 다음부터는 편안함을 느끼겠지. 좋든 싫든 이곳에서 머물러야 하니 익숙해지는 게 편할 테지만 말이다.”

석규의 말을 들은 창현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한다.

“그걸 말하는 게 아니라 세희 누나는 일본어를 못하지 않나요? 그것 때문에 염려하는 건데…….”

창현의 말에 석규가 시선을 주면서 물었다.

“너 그거 몰랐냐?”

“네?”

뭘 모른단 말인가?

의아한 표정을 지은 창현이 고개를 갸웃하자 석규가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윤 매니저는 영어를 비롯하여 일본어까지 구사할 수 있다. 현지인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나 정도는 구사한다고 할 수 있지.”

석규 정도로 일본어를 구사할 수 있다면 유창하지는 않더라도 의사소통을 하는데 무리가 없는 정도였다. 이 정도면 혼자서 일본을 여행할 수준이라 볼 수 있었다.

석규의 말을 들은 창현이 감탄 섞인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몰랐어요. 영어만 할 줄 아는 줄 알았는데 일본어도 할 줄 알았군요.”

“유능한 인재라니까? 그러니 스케줄 할 때 굳이 네가 나서지 않아도 된다. 스스로 행동할 수 있는 인물이니 말이다.”

창현이 고민하던 점을 정확하게 지적하는 석규였다. 창현은 세희와 함께 다니면서 일본어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을 하던 차였다.

그런데 세희가 일본어를 할 줄 알자 그 근심이 말끔하게 사라진 터였다. 그걸 굳이 내색하지 않고 있었는데 창현은 석규가 그 점을 간파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저도 그 점을 염려했는데 잘 됐네요.”

“그 점은 해결 되었으니 일단 편히 쉬도록 하자. 오늘은 아무 스케줄도 없으니 말이다. 대신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하니 일찍 자도록 하고.”

석규의 말에 창현은 씨익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일찍 자야 키가 크거든요.”

2월 말, 라디오 스타를 촬영할 당시 창현의 키는 175.7cm였지만 지금은 176.1cm였다.

키 크는데 도움이 되는 음식을 섭취하고 10시가 되기 무섭게 잠이 드는 습관으로 인한 성과였다.

180cm가 멀지 않았다는 생각에 창현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렇게 일본에 온 첫 날이 지나갔다.


다음 날, 창현은 아침 일찍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제 10시가 되기 무섭게 잠에 빠진 창현은 이른 아침에 일어날 수 있었다. 호화 호텔의 고급 매트릭스가 주는 푹신함에 더 오래 잠들 수도 있겠지만 습관이라는 것이 무서웠다.

시간을 확인하니 아침이라기도 뭐하고 새벽이라기도 뭐한 6시였다.

“일찍 일어났군. 두 시간 정도 여유 시간이 남는 건가?”

어제 석규가 8시에 깨워달라는 것을 떠올린 창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고는 명상에 잠기기 시작했다. 이른 아침은 세상이 무척 조용하였기에 명상에 잠기기 무척 좋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창현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 가볍게 몸을 푼 뒤 곧장 명상에 잠기고는 한다.

그것은 맑은 정신을 유지하기 위한 것도 있지만 명상에 잠기면 피로가 말끔하게 풀린다. 무협 소설에 나오는 운기조식 같은 그런 종류는 아니지만 명상을 함으로써 몸속의 노폐물이 말끔하게 사라지는 듯한 느낌이 들고는 했다. 아무래도 정말 무협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운기조식과 비슷한 효과를 지닌 듯하였다.

그렇게 명상에서 깨어나 시간을 확인하니 한 시간 정도 흐른 7시였다. 보통 명상을 잠기는 것이 약 삼십여 분인 걸 감안하면 오늘은 제법 길게 명상에 잠긴 셈이다.

“아직 한 시간 정도 남았군. 일단 씻은 뒤에 깨워야겠다.”

석규가 자신보다 늦게 잠든 것을 알고 있었기에 창현은 먼저 깨울 생각이 없었다. 그렇기에 화장실로 가서 먼저 씻기 시작했다.

간단하게 씻은 뒤 TV를 켜서 시청하기 시작했다. 일본어 리스닝도 완벽하였기에 방송을 시청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그리고 8시가 되자 창현은 석규가 자고 있는 방으로 가서 석규를 깨우기 시작하였다.

잠에 취해 있던 석규는 말끔하게 씻은 창현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곧장 화장실로 가서 씻기 시작했다.

석규가 씻는 것을 본 창현은 세희가 있는 옆방으로 향했다. 석규가 일어났으면 세희도 일어나서 준비를 해야 했기에 그렇다. 어제 언급을 하기는 했지만 세희가 일어나지 않았을 확률도 있었기에 창현은 곧장 세희가 있는 방의 초인종을 눌렀다.

♩♪♬

벨 소리와 함께 잠시 침묵이 찾아든다.

그리고 잠시 후, 안쪽에서 세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요?”

“누나 저예요. 자고 있던 거 아니에요?”

“아닌데? 잠시만 기다려.”

잠이 묻어나오는 목소리가 아니자, 창현은 그녀가 깨어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는 자신이 왔다는 것을 알리자 세희가 문을 연다.

딸칵.

“어제 이야기를 들어서 일찍 깨어 있었어. 들어와.”

문이 열리면서 옷을 차려입은 세희가 창현을 맞이한다. 방금 전 목욕을 했는지 머리는 촉촉했고, 바디 샴푸 향이 창현에게 흘러들어왔다.

안으로 들어서려던 창현은 그녀가 막 목욕을 마쳤다는 것을 깨닫고는 발걸음을 멈춘다. 그리고는 고개를 좌우로 저으면서 말했다.

“아니에요. 샤워를 한 것 같은데 제가 들어가면 방해가 될 듯하네요. 일단 아버지도 준비하고 있으니 누나도 준비를 하세요. 준비가 다 되면 다시 찾아오도록 할게요.”

그렇게 말을 한 창현이 곧장 자신의 방으로 들어섰다. 자신이 세희에게 방해가 되었다는 것을 느끼고는 말이다.

방으로 돌아온 창현은 곧장 준비를 하면서 석규가 준비를 마치길 기다렸다. 그리고 석규가 9시가 되어서야 준비를 마치자, 곧장 방을 나섰다. 방을 나서고 세희를 부르자 준비를 마친 세희도 방밖으로 나왔다.

세 사람은 어제 공항에서 마중 나온 차를 타고 곧장 쟈니스로 향하기 시작했다. 호텔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쟈니스 건물에 도착한 세 사람은 맞은편에 위치한 건물로 발걸음을 옮긴다. 남성 아이돌을 육성하는 쟈니스에 여성 그룹인 라샤와 아사미 유키라는 여성 가수가 등장하면서 맞은편에 여성 가수들을 집중 육성하는 건물을 새로이 마련했던 것이다. 하지만 아직 많은 사람들이 이 건물의 정체를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제지 없이 무난하게 건물 안으로 들어선 세 사람은 곧장 회의실로 향한다. 석규도 이 건물은 처음이었기에 쟈니스에서 나온 직원의 안내에 따라 걷고 있었다.

“이곳입니다.”

“수고하셨습니다.”

회의실까지 안내한 직원에게 수고했다는 말을 한 석규가 회의실 문을 열었다. 그러자 그곳에는 라샤를 비롯한 매니저가 자리에 앉아 있었고, 맞은 편에는 쟈니스의 기획부장 나카무라 준과 영업무장 사나다 료이치가 앉아 있었다.

그들은 석규를 비롯한 창현이 안으로 들어서자 곧장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석규와 창현에게 인사를 하였다.

“어서 오십시오, 사장님. 반갑습니다.”

“한국에서 뵙고 오랜만에 뵙습니다. 사장님.”

두 사람의 인사에 석규도 웃음을 지은 채 인사를 하였다.

“반갑습니다. 나카무라 부장님, 사나다 부장님.”

무난하게 인사를 하는 석규를 보면서 사나다 부장이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석규에게 축사 인사를 건넨다.

“결혼하셨다고 하시더니 신수가 훤하게 변하셨군요. 늦었지만 결혼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영업부장이다 보니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을 다루는데 능숙한 인물이 바로 사나다 부장이었다. 게다가 인상도 호감형인 만큼 그의 인사는 사람의 기분을 좋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석규도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인다.

“감사합니다, 사나다 부장님.”

사나다 부장의 말에 나카무라 부장도 예전에 들었던 정보를 떠올리고는 석규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그러고 보니 결혼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사장님.”

“감사합니다, 나카무라 부장님.”

그렇게 석규와 인사를 나눈 두 사람의 시선이 창현에게 향했다. 예전에 한 번 본 적이 있지만 제대로 인사를 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때 창현의 인지도와 지금의 인지도는 그야 말로 하늘과 땅 차이였다. 그때 보았던 어린 소년이 이렇게 대단하게 변할 줄 몰랐기에 사나다 부장과 나카무라 부장의 눈에는 놀라움이 서려 있었다.

먼저 인상이 좋은 사나다 부장이 나서서 인사를 하였다.

“예전에 뵌 적이 있지만 다시 인사를 하고 싶습니다. 쟈니스의 영업부장인 사나다 료이치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현.”

창현이 일본어가 능숙하게 된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일본어로 인사를 하는 사나다 부장이었다.

그에 창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받았다.

“반갑습니다. 현이라고 합니다.”

옆에 있던 나카무라 부장도 창현에게 인사를 하였다.

“기획부장인 나카무라 준입니다. 세계를 놀라게 만든 현을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약간 벗겨진 머리에 날카로운 인상을 하고 있는 나라무라 부장의 인사는 조금 차갑게 들리는 경향이 없지 않아 있었다. 하지만 그 속에 내재된 감정이 창현에게 전달되었기에 창현은 웃음을 지은 채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받았다.

“반갑습니다. 나카무라 부장님.”

인사를 무사히 나누자, 사나다 부장이 석규와 창현에게 양해를 구한다.

“곧 있으면 회장님이 오실 겁니다. 그러니 기다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석규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약속 시간보다 약간 빨리 온 경향이 없지 않아 있으니 기다려야지요.”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하!”

석규가 사나다 부장과 나카무라 부장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창현은 라샤 멤버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미란이 창현에게 궁금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창현이 너 어제 호텔에서 머물렀다며? 매니저 언니가 그러던데…….”

아무래도 창현이 호텔에서 머물렀다고 하니 그게 궁금했나보다.

창현은 미란의 물음에 고개를 나직이 끄덕였다.

“네, 호텔에서 머물렀는데 약간 부담스럽게도 가장 큰 방을 잡아줬더라고요. 덕분에 엄청 부담되는 하루를 보냈죠, 뭐.”

그렇게 말을 하지만 창현은 전혀 부담스러워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그 말을 들은 미란의 얼굴에 부러움이 떠올랐다.

“으으! 부럽다! 나도 그 호텔 스위트룸에서 한 번 자보고 싶었는데. 이럴 때는 일본에 숙소가 있다는 게 싫다니까. 칫!”

“그렇게 말해도 우리 숙소도 좋잖아? 그렇게 말하면 섭섭할 걸?”

옆에 있던 시린이 타박을 하자 미란이 입술을 삐죽 내민다. 하지만 그런 반응을 보여도 시린의 표정에는 변함이 없었다.

“스위트룸이라고 할 정도면 도대체 얼마나 좋은 거야?”

“TV에서 나오는 것 그대로였어요. 엄청 화려해서 분위기로 주눅 들게 만드는 기분이랄까? 그렇더라고요.”

“그렇게 말해도 넌 전혀 주눅 든 표정이 아니거든? 완전 팍팍 즐기고 왔겠구만.”

그 말에 창현이 입가에 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앞으로 여기서 머무를 거라고 하니 즐거운 마음뿐이죠. 후후후! 피할 수 없으면 즐겨야 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니까요.”

“부럽다, 으으!”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낼 무렵이었다. 약 십여 분을 이야기 했을까?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오더니 이내 정장을 차려입은 노인이 안으로 들어선다.

그 사람의 정체를 확인한 사람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다.

“회장님, 오셨습니까.”

“반갑네. 오랜만이구만.”

회의실 안으로 들어선 인물은 다름 아닌 쟈니 회장이었다.

그리고 쟈니 회장의 뒤를 따라 들어오는 한 여인이 있었다.

백설 같이 새하얀 피부를 지닌 청초한 외모를 지닌 여인이었다.

그 여인의 얼굴을 확인한 창현이 순간 멈칫한다.

안으로 들어선 인물은 다름 아닌 아사미 유키였던 것이다. 두 사람의 시선이 순간 허공에서 부딪쳤다.

시선이 마주한 순간 창현은 물론이고 라샤 멤버들도 긴장한 얼굴로 아사미 유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에서 한 차례 만난 적이 있을 때, 유키는 창현에게 곧장 안겼던 사건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그에 대한 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염려하던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예전에는 곧장 달려들었던 것과 달리 유키는 조용한 걸음으로 다가오더니 다소곳하게 인사를 했던 것이다.

유키가 먼저 인사를 한 대상은 바로 석규였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그, 그래. 만나서 반갑다.”

한국어로 인사를 해오는 유키의 모습에 석규가 얼떨떨한 표정을 짓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예전과 다르게 얌전한 모습으로 인사를 하는 그녀의 모습이 적응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외모와 매치되는 차분한 인사는 무척 잘 어울린다고 할 수 있었다.

석규에게 인사를 한 유키가 이번에는 라샤 멤버들에게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라샤 여러분들도 오랜만이에요. 반갑습니다.”

라샤가 일본에서 활동을 할 때 가장 많이 마주칠 수밖에 없는 연예인이 바로 유키였다. 그도 그럴 것이 쟈니스에서 몇 되지 않는 여자 연예인이었기에 부득이하게 유키와 자주 마주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외에도 여러 여자 연습생들이 있긴 하지만 연예계에 데뷔하지 않은 그녀들과는 사정이 다르다.

그녀들 또한 한국어로 인사를 해오는 유키의 모습에 얼떨떨한 기색을 띠며 인사를 받았다.

“그, 그래. 반가워. 오랜만이야, 유키.”

라샤에게도 인사를 한 유키의 시선이 이번에는 창현에게 향했다.

시선을 마주한 유키의 눈에는 잔잔한 파문이 일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을 겉으로 내색하지 않은 채 창현에게 인사를 하였다.

“반가워, 현…….”

“그래, 오랜만이지? 반가워, 유키.”

유키의 눈에 일어난 파문을 느끼지 못한 창현은 다소곳하게 변한 유키의 인사에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받아주었다. 유창한 한국어로 하는 인사와 얌전해진 모습은 창현으로 하여금 안도의 마음을 심어주기에 충분하였다.

그렇게 인사를 나누자, 창현은 쟈니 회장과도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오랜만이네. 그동안 제법 시간이 많이 흘렀지?”

창현은 쟈니 회장이 내민 손을 잡으며 악수를 하였다.

“예, 2년 만에 뵙는 것 같습니다. 제법 시간이 흘렀네요.”

생각해보니 자신이 일본에 온 것이 벌써 2년이 되었다. 그동안 많은 시간이 흐른 것이다.

그중에서 가장 변한 것이 있다면 바로 자신의 키가 아닐까 싶었다.

그때는 160대 초반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쟈니 회장의 생각은 다른 듯하였다.

그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면서 그때와 달라진 점을 언급한다.

“그동안 변한 게 있다면 인지도라고 할 수 있겠군. 다른 건 변한 게 없어.”

‘키가 무척 많이 자랐습니다만?’

그렇게 말을 하고 싶은 창현이었다. 자신의 자란 키를 알아주지 않는 것 같아 약간 섭섭한 마음도 들었고 말이다.

그런 창현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쟈니 회장이 말을 이어나갔다.

“2년 전 그대로 그 모습을 간직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 정말 놀랍군. 그때 간직하고 있던 열정이 그대로 내게 전해지는 걸 보니 말이야.”

“…….”

열정을 언급하는 쟈니 회장의 말에 창현은 순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설마하니 그가 자신의 변함없는 열정을 언급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옆에 서 있던 석규가 창현을 툭 친다.

그러자 창현이 정신을 차리고는 얼른 대답을 한다.

“감사합니다. 그때의 열정이라… 솔직히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제가 노력하는 건 언제나 초심을 잃지 않으려고 하는 것뿐입니다.”

창현의 말을 들은 쟈니 회장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세상의 모든 예술가들이 가장 지키기 힘든 것이 바로 초심이라 할 수 있지. 그걸 일찍부터 지키려고 하는 것 자체가 대단한 거야. 어쨌든 그동안 잘 지낸 듯하니 무척 마음이 흡족하군. 우선 앉게나. 그렇게 서 있으니 내가 미안하군.”

“네, 알겠습니다.”

창현이 자리에 앉자, 석규와 라샤 멤버들도 자리에 앉는다. 그러자 쟈니 회장과 유키도 자리에 착석한다.

공교롭게도 유키가 앉은 곳은 바로 창현의 옆자리였다. 그럼에도 유키의 안색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 모습을 확인한 라샤 멤버들은 불안한 기색을 띠다가 유키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창현도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자 이내 잠잠한 기색을 보인다.

자리에 앉은 쟈니 회장은 곧장 사업에 대한 부분을 언급하기 시작한다.

창현이 일본에서 보름 동안 머물면서 해야 할 일은 무척 촘촘하게 짜여 있었다.

우선 오늘 저녁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여 내일부터 촘촘하게 짜인 스케줄을 이행해야 한다. 그리고 석규에게 들었던 것처럼 방송 프로그램 활동과 팬 미팅 등 수많은 스케줄을 언급하고 있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유키와 라샤 멤버들의 표정이 점점 기괴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언급하는 스케줄의 양이 인간이 해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방대한 양이었던 것이다.

스케줄에 대해 언급한 쟈니 회장이 창현에게 묻는다.

“이렇게 정해져 있는데 스케줄을 이행할 수 있겠나?”

보름간의 스케줄을 하면서 제대로 쉴 수 있는 날은 하루밖에 없다. 석규가 온천을 간다고 했던 그날뿐이다. 그 외에는 모두 하루 네 시간 정도의 수면을 취하면서 스케줄을 이행해야 한다. 그마저도 준비 시간을 빼면 세 시간 정도밖에 휴식을 취하지 못할 것이다.

이동 중에 틈틈이 토막잠을 자야 할 정도로 촘촘한 스케줄이었던 것이다.

창현은 문제될 것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이십 일 동안 해야 할 스케줄을 보름으로 압축시킨 것 아닙니까? 덕분에 5일이란 시간이 생겼으니 저는 괜찮습니다. 미국에서 활동할 때도 이것보다 더 심했으면 심했지 덜하지는 않았으니까요. 다만 부탁드리고 싶은 점이 있습니다.”

“뭔가?”

쟈니 회장이 묻자, 창현이 슬쩍 세희를 가리키며 말한다.

“여기 계신 분은 한국에서 제 매니저를 맡고 계십니다. 저는 괜찮지만 매니저 누나는 따라오기 힘든 강행군이 될 듯 싶습니다. 그러니 두 명 혹은 세 명의 매니저를 붙여주셔서 여기 매니저 누나에게 가르침을 받고 교대로 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고집 부린 걸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끼치기 싫으니까요.”

제법 놀라운 제의라고 볼 수 있다. 자신을 위한 제의를 할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닌 매니저를 배려하는 제의를 할 줄이야.

쟈니 회장은 놀란 표정을 짓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수락을 한다.

“설마 매니저를 배려할 줄은 몰랐네. 좋아, 그 정도는 어렵지 않네. 현의 매니저를 하고 싶어 하는 매니저들이 많을 테니까. 나카무라 부장. 가능하겠지?”

준비하지 않은 일이었기에 충분한 인력이 있는지 나카무라 부장에게 묻는 쟈니 회장이었다.

그 물음에 나카무라 부장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예, 인력은 충분합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나카무라 부장이 그렇게 말을 하니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겠네. 일단 세 명 정도로 하도록 하고. 알겠지?”

“네, 알겠습니다.”

모처럼의 일이었기에 나카무라 부장은 고개를 숙이면서 대답을 하였다.

“그럼 스케줄의 구체적인 이야기를 하도록 하자.”

그렇게 매니저에 관련된 일을 마무리 지은 쟈니 회장은 세세한 이야기로 넘어갔다. 그리고는 석규에게 창현의 스케줄이 담긴 의미에 대해서 설명을 하기 시작하였다. 아직 현과 쟈니스는 계약을 맺지 않는 상황이었다. 구두상으로 계약을 했지만 서류로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았기에 최대한 창현을 배려하면서 그의 활동으로 많은 이익을 취하고자 하였다.

쟈니 회장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석규는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 하고, 때로는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하면서 계약을 위한 줄다기리에 돌입하였다.

그러던 사이, 유키는 옆에 있던 창현을 톡톡 쳤다. 그리고는 그의 귓가에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매니저 배려하는 모습 너무 멋있었어.”

유키가 이렇게 이야기하는 이유는 쟈니 회장과 석규의 이야기를 방해하지 않기 위함이었다. 그 의도가 한눈에 들어왔기에 창현은 미소를 지었다.

“그런가? 배려라기보다는 따라오기 힘들어서 그런 건데.”

“그래도 멋졌어. 결국에는 힘들 것 같아서 배려를 한 거잖아?”

“그렇게 말해주면 나야 좋지. 그런데 유키는 많이 변한 것 같아.”

창현의 어조에는 진심이 실려 있었다. 예전에는 닭 쫓는 병아리마냥 창현을 쫓던 유키가 이제는 차분해진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제법 오랜 시간이 흘렀기에 충분히 변할 수 있는 시간이지만 창현에게는 새롭기만 하였다.

하지만 유키는 그것을 모르나 보다. 그녀는 의아함이 담긴 눈으로 창현에게 물었다.

“내가?”

“예전보다 훨씬 차분하게 변했어.”

“그래서 싫은 거야?”

좋아서 그러는 것인지 아니면 싫어서 그러는 것인지 몰랐는지 유키가 창현에게 묻는다.

그러자 창현은 입가에 피식 웃음을 짓고는 대답했다.

“싫기는, 오히려 좋아졌지. 나는 다소곳한 여자가 좋더라고.”

“좋아졌다니 다행이네.”

좋아졌다는 말에 유키도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소곤소곤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좋게 보지 않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라샤 멤버들이었다.

그녀들은 갑자기 변한 유키의 모습에 의아함을 느껴야만 했다. 유키가 창현을 만난 지 2년이라는 긴 세월이 지났기에 그동안 변한 것인지 감을 잡기 힘들었지만 그녀들은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일본에서 활동을 하지 않았던가? 그러면서 그녀들은 유키를 보면서 창현의 소식이 들릴 때면 격렬한 반응을 보이는 유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다소곳한 모습은 무엇이란 말인가?

너무나 차분한 유키의 모습에 감을 잡기가 힘들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속이 무척 불편한 걸 느껴야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다소곳한 유키의 모습은 남자가 보면 한눈에 반해버릴 만큼 절정의 싱크로율을 자랑하고 있던 것이다. 남자들이 한눈에 반해버릴 정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니 그녀들이 어찌 불안함을 느끼지 않겠는가. 자칫 잘못하다가 창현이 넘어갈 수도 있다는 기분을 받고 있었다.

그녀들은 자신들이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파악을 못하고 있었다. 그것이 질투심인지 아니면 유키가 내숭을 떨고 있는 것인지 섣불리 감을 잡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그녀들의 시선이 우연찮게 유키와 마주쳤다.

그때, 라샤 멤버들은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아야만 했다.

그녀들과 마주친 유키의 눈이 반달 모양으로 변하더니 눈웃음을 짓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눈에 보아도 비웃음이었다.

그걸 보는 순간 라샤 멤버들의 뇌리에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그 생각이 들기 무섭게 그녀들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신들이 순간 잘못 보았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눈을 비비고 다시 유키를 보았을 때 그녀의 눈에 서린 웃음은 사라져 있었다.

그러면 그렇지. 자신들이 잘못 본 것일 것이다.

그렇게 판단을 내리고 다시 창현과 이야기를 나누는 유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들은 자신이 착각 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번에는 입 꼬리가 묘하게 말려 올라가고 있던 것이다.

그걸 보면서 그녀들의 뇌리에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간 생각이 있었다.

예전에는 창현을 보자마자 달려들던 모습. 하지만 2년이 지난 지금은 그 모습이 사라진 채 다소곳한 모습만 보이고 있었다.

라샤 멤버들 머릿속에 경종이 울려 퍼졌다.

설마… 내숭이었단 말인가?


스케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뒤 창현은 쟈니 회장이 대접하는 점심식사를 하였다. 앞으로 잘해보자는 취지에서 함께 하는 식사였다. 식사에는 쟈니스 핵심 인물들과 창현 일행, 그리고 유키가 함께 하였다.

쟈니 회장이 함께 식사를 하자고 한 이유는 앞으로 협력하여 모쪼록 잘 해보자는 취지였다. 아무래도 라샤가 창현의 곡에 의해 움직이는 성향이 강했고, 그랬기에 창현과 돈독한 친목을 쌓으려는 것이었다.

라샤 멤버들과 유키가 작곡 작사에 대해 공부를 하고 있지만 아직 스스로 홀로 서기에는 부족한 면이 없지 않아 있었다. 게다가 창현의 곡은 ‘현’이라는 이름에 힘 입어 일종의 브랜드화가 된 상황이었기에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파워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뭔가 이상한데…….”

함께 식사를 하면서 창현은 의아함을 느껴야만 했다.

라샤 멤버들이 유키를 보는 눈빛이 심상치가 않았던 것이다.

어째서 저런 눈빛을 한단 말인가? 자신이 보기에 유키는 2년 동안 눈에 띄게 달라져 조신함의 대명사라 불려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변화를 보이고 있는데 말이다.

유키를 잡아먹으려는 듯한 눈빛을 하던 라샤 멤버들의 모습에 창현은 무언가 오해가 생겼다는 것을 느꼈다.

“무언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유키가 내숭으로 치장하고 있다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창현이었다. 이렇게 조신하게 변한 유키를 괴롭히려는 것 같아서 나중에 한마디 해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여자의 내숭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창현이었기에 생긴 오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점심식사를 끝낸 창현은 호텔에서 휴식을 취한 뒤 본격적인 스케줄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창현이 머물고 있는 호텔에서 마련된 기자회견에 창현을 비롯하여 라샤 멤버들이 함께 하였다. 그리고 앞으로 창현이 일본에서 보일 활동에 대해 간략하게 언급을 하면서 이번에 촬영하게 된 드라마에 대한 홍보를 하였다.

일본 내에서 창현의 인기는 정말 대단하였다. 그 인기를 실감할 수 있게 한 것이 바로 각지에서 모여든 수많은 기자들의 숫자였다. 한국에서도 절대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지만 이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 적은 없었다.

백여 명이 넘는 기자들과 함께 한 기자회견은 정말 대단하다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무려 세 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기자들과 이야기를 나눠야 했으니 말이다.

기자회견을 마친 창현은 고개를 저으며 한마디 하였다.

“일본은 다르구나. 한국보다 훨씬 대단해.”

그것이 좋은 의미인지 나쁜 의미인지는 본인만 알고 있는 이야기일 것이다.

확실한 건 이것이 시작이라는 점이었다.

다음 날부터 창현은 본격적인 스케줄을 이행하기 시작했다.

전날 기자회견에 관련된 이야기는 이미 일본 전역에 알려진 상황이었다. 일본 팬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담아 무대 위에 서겠다는 창현의 발언은 일본 팬들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현이 미국에서 활동을 하고 한국으로 돌아올 때, 그가 했던 말은 ‘짧은 기간 동안 너무나 쉼 없이 달렸기에 휴식이 필요하다.’ 라는 것이었던 것이다. 한국에서 앨범을 발매하였지만 실제로 그는 공식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러기에 일본 팬들은 창현이 자신들을 위해 직접 일본에 왔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것은 자신의 말을 절대적으로 지키는 그의 언행일치적인 모습이 밑바탕에 깔려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가 자신이 한 말에 대해서는 반드시 지키려고 한다는 것을 팬들이라면 이미 다 알고 있지 않은가? 한국 팬들은 모른다 치더라도 일본 팬들은 다 알고 있다. 이것은 그들이 해외 팬들이기에 그렇다.

해외 팬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외국 스타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자세히 알려고 하는 습성이 있다. 그러다 보니 인터넷 같이 정보가 범람하는 곳에서 정보를 찾고는 한다. 그리고 인터넷에서는 친절하게도 그런 해외 팬들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극성팬들이 자기과시욕으로 올리는 것인지 좋아하는 연예인에 대한 모음집 같은 것을 만들고는 한다. 안티들은 나쁜 언행에 대해서도 모음집을 만들지만 여기서는 팬들의 좋은 경우 모음이다.

그렇기에 해외 팬 중에서 현의 팬들은 그가 진정성 넘치는 인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가 일본 활동을 하는 것만으로도 감격을 받아야만 했다. 쟈니스에서 이미 그런 식으로 언급을 했지만 직접 언급하는 것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으니 말이다.

그것은 현의 인기를 일본 내에서 더욱 공고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었다.

라샤 멤버들은 이미 자유로이 일본어를 구사할 수 있었기에 이러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할 리 없었다.

이튿날, 창현과 만난 라샤 멤버들은 샐쭉한 얼굴로 창현을 맞이하였다.

“좋겠어, 슈퍼스타?”

가시돋은 미란의 말에 창현은 넉살 좋게 웃음을 지으면서 그 칭찬을 받아든다. 전혀 칭찬의 의미가 아니었지만 말이다.

“하하! 슈퍼스타라니, 감사합니다.”

“너 때문에 우리 컴백 사실이 완전히 묻혀 버렸는데?”

창현이 웃음을 지으며 받아버리자 미란이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말한다.

그러자 창현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그거야 각자 알아서 할 일이죠. 묻히기 싫으면 누나들이 더욱 분발해야 하는 거고요.”

창현의 말을 들은 세룬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한다.

“말 참 밉게 한다. 너 이럴 때 보면 참 미운 거 알아?”

“정말 미워서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죠? 세룬 누나가 그런 이야기 하면 전 슬퍼지는데…….”

눈물 연기를 보이는 창현의 모습에 세룬은 찌푸린 표정을 더 유지할 수 없었다.

입가에 피식! 하고 웃음을 지은 세룬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졌다, 졌어. 그나저나 너 연기 진짜 못한다. 설마 그 연기가 우는 시늉을 하는 건 아닐 테지? 제발 아니라고 해줘.”

“우는 연기 맞는데…….”

창현의 말에 라샤 멤버들이 잠시 벙찐 표정을 짓는다. 그러다가 시린이 진지한 표정으로 창현의 어깨에 손을 얹으면서 묻는다.

“그렇다면 연기를 포기해보는 건 어때? 창현이 너는 아무래도 가수만 해야 할 운명인가 봐.”

그 말의 의미를 단번에 파악한 창현이 인상을 살짝 찌푸리고는 물었다.

“그건 제가 연기를 못한다는 뜻?”

“본인이 더 잘 알지 않아?”

“전 잘하는 편인데…….”

“아니야. 다시 한 번 고려해보는 게 좋을 거야.”

그러면서 라샤 멤버들과 투닥거리는 창현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함께 방송 출연을 하기로 한 동방신기가 대기실로 놀러왔다. SM엔터테인먼트 프로듀서로서 계약이 된 창현은 종종 녹음을 봐주고는 하였기에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고, 라샤는 국내와 일본을 활동하면서 개인적인 친분을 쌓은 상태였다. 게다가 나이 차이도 한두 살 정도 차이였기에 오빠, 친구 관계를 맺으면서 친밀한 모습을 보였다.

동방신기의 리더인 윤호가 창현을 툭 치면서 말했다.

“드라마 ost로 다른 가수들한테도 곡을 줬다는 거 들었다고. 시간이 나면 나중에 우리한테도 한 곡 좀 줘봐. 우리도 프로듀서 덕 좀 보자.”

그 말에 다른 멤버들도 동조를 하면서 창현에게 곡을 달라고 한다.

그러자 창현이 피식 웃음을 짓고는 말했다.

“형들도 곡 쓰는 거 알고 있어요. 스스로 할 수 있는 사람에게 도움을 주면 자립할 여지를 빼앗아버리는 거잖아요? 저는 형들이 더 잘할 수 있다는 걸 믿기에 곡을 주지 않을 뿐이에요.”

“말이라도 못하면. 쳇!”

밉지 않게 거절하는 창현의 모습에 웃음을 지어버리며 더 조르지 못하는 동방신기 멤버들이었다. 자신들의 능력을 띄워주며 부드럽게 거절을 하는데 어찌 더 조를 수 있단 말인가? 그러다가는 괜히 자신들만 이상해지는 것 같았기에 더 이상 무어라 말을 하지 않았다.

그 후로 방송에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면서 함께 방송 스케줄을 하기 시작했다.

방송은 특집으로 마련된 것으로, 한류의 흐름을 가져오는 가수들에 관련된 특집이었다. 필두에는 현이 있었고, 근래 들어서 일본을 거의 제패했다고 과언이 아닌 동방신기와 라샤가 함께 하였다.

평소 궁금했던 점들을 물어보면서 한국에서도 친분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향후 활동에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면서 무사히 방송을 마칠 수 있었다.

질문이 창현에게 집중되는 모습을 보이기는 했지만 그것을 방지하기 위함인지 어느 정도 분산되는 모습을 보이고는 하였다. 그랬기에 창현은 별다른 어색함을 느끼지 못한 채 무사히 스케줄을 완료할 수 있었다.

그 후에는 창현 혼자서 소화해야 하는 스케줄들을 해나가기 시작했다. 방송 스케줄도 있었고, 화보 촬영 같은 것도 있었다.

그렇게 분주하게 움직이다 보니 어느새 하루가 다 지나가 있었다. 게다가 새벽 일찍 일어나서 스케줄을 해야 했기에 창현은 차에 타기 무섭게 수면을 보충하기 시작했다. 다행이라면 밤 10시부터 새벽 2시까지는 대부분 스케줄이 없다는 점이다. 이때가 키 크기 위한 시간 피크라는 것을 알고 있는 만큼 창현에게 있어서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차에서 잠시 눈을 붙였던 창현은 호텔에 도착하자 고단한 몸을 이리저리 풀기 시작했다.

“후우! 오랜만의 강행군이라 제법 힘들구만. 앞으로 남은 시간도 많은데 말이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호텔 안으로 들어선 창현은 곧장 씻고는 잠에 빠져든다. 석규는 개인적인 업무 때문에 아직 들어오지 않는 상황이었다.

잠이 들었던 창현은 새벽 3시가 되자 눈을 떴다. 그리고는 쟈니스에서 붙여준 매니저의 연락을 받은 뒤 곧장 스케줄을 위해 또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새벽과 오전에 스케줄을 각각 하나씩 해결한 뒤 점심 이후부터는 팬 미팅을 해야 했던 것이다.

각각 스케줄 하나씩 무사히 소화한 창현은 팬 미팅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늘 팬 미팅은 각지에서 모인 천여 명의 팬들을 모아놓고 하는 것이었기에 이리저리 준비할 것이 많았던 것이다. 한국에서는 벌써 두 차례에 걸친 팬 미팅을 해보았지만 일본에서는 처음이었고, 앞으로 자주 하기도 제법 어려웠다. 그랬기에 창현은 한국에서 하는 것보다 더욱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보기 위해 일본 각지에서 몰인 팬들에게 실망을 심어줄 수 없던 것이다.

간단하게 준비를 마친 창현은 본격적으로 시작된 팬 미팅에 순조롭게 임하기 시작했다. 현의 이름에 어울리게 일본에서 상당한 인지도를 지닌 MC를 고용하여 능숙한 진행을 하게끔 하였고, 때로는 위트 있게, 때로는 분위기 있게 팬 미팅이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게 조절하면서 무난하게 임하기 시작했다.

도중에 자신의 히트곡들을 부르면서 팬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였고, 이미 현의 특기로 인정받은 성대모사를 함으로써 수많은 팬들에게 웃음을 선사하기도 하였다.

“후우!”

자신이 준비해온 것들 하나하나에 열광하는 팬들을 보면서 창현은 가볍게 숨을 몰아쉬었다. 자신에게 이렇듯 열광해주는 팬들을 보면 어깨가 무거워지는 것을 느끼지만 한편으로는 더욱 더 의욕이 불타오르는 것도 느껴졌다. 이렇게 열광하면 다음에는 더욱 나은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그런 욕망 말이다. 아무래도 자주 볼 수 없는 현이다 보니 팬들이 더욱 열광하는 것도 있는 듯하였다.

다섯 시간 동안 이어진 팬 미팅은 끝을 보이고 있었다.

마지막 코너는 창현과 프리 허그가 가능한 코너였다. 팬들과 이야기만 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 것이 아닌, 소중한 추억거리를 하나라도 남길 수 있는 기회였다.

여기에는 현의 앨범을 구매한 사람만 참여할 수 있는데, 이미 팬 미팅에 참여한 사람들이 모두 앨범을 구매한 팬들이었기에 그에 관련해서는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 아니, 문제가 발생하긴 했지만 그와는 다른 문제였다.

과도한 팬심(?) 때문인지 창현의 앨범을 무려 백여 장 구입한 팬이 있었던 것이다.

설마 이 정도로 열정적인 모습을 보여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기에 창현은 당황하면서 한편으로는 그에 대한 보답을 해야 했다. 그래서 프리 허그는 물론이고 함께 사진도 찍어주며 싸인에 코멘트까지 달아주는 등 열성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에 다른 팬들도 더욱 열성적인 모습을 보인 까닭에 팬 미팅은 예정된 시간보다 좀 더 늦게 끝나야 했다.

그로 인해 창현의 쉴 시간이 줄어들었지만 창현은 개의치 않았다.

자신을 좋아해주는 사람들이 아니던가?

호의를 보이는 사람에게 결코 나쁘게 대하지 않는 창현이었기에 팬 미팅을 한다는 것 자체가 즐거웠다.

다만 문제는 피곤하다는 점이었지만…….

자신의 젊은 몸을 믿어보기로 한 창현이었다.

‘까짓 거 쓰러지겠어, 설마.’

그러다가 한방에 훅 간다는 사실을 아직 잘 모르는 창현이었다.


결론적으로는 한방에 훅 가지 않았다.

하지만 창현은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의 젊은 몸을 믿기에는 자신의 단련이 아직 부족하다는 것을 말이다.

창현은 전신을 축 늘어지게 만드는 피곤과 싸움을 벌이면서 인상을 찌푸렸다.

‘운동을 좀 열심히 해야겠어.’

팬 미팅에서 오버 페이스를 한 것이 문제였다. 팬 미팅에서 시간을 지체하다 보니 다음 스케줄을 쉴 틈도 없이 곧장 이행해야 했고, 그로 인해 오버 페이스가 되어 피로가 쌓였던 것이다.

물론 창현은 다른 사람들보다 체력이 무척 좋았지만 이것은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것이었다. 철저하게 계산을 하여 마치 톱니바퀴가 맞물리듯 움직여야 하는데 거기에 이물질이 껴서 결과적으로 전체적인 리듬이 어긋나버린 셈이었다.

명상을 하면서 내공을 쌓은 덕택에 상당히 튼튼한 몸을 지니고 있는 창현이었지만 운동을 하면 더 좋아질 수 있다는 걸 부인할 처지는 아니었다. 자신의 블링블링한 외모를 아끼는 편이었기에 창현은 근육을 길러 울퉁불퉁한 몸매를 지니는데 아직 편견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근육 운동을 하게 되면 키가 크지 않는다는 말도 있기에 될 수 있으면 운동을 하는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같은 처지에 처하니 아무래도 운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최소한의 운동으로 하드코어한 스케줄을 버텨내기에는 자신의 몸이 견뎌내지를 못하는 것이다.

당분간은 피로에 쩔어 지낼 듯 싶었다.

“아무래도 운동이 필요하단 말이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창현은 예고했던 것과 변함없이 스케줄을 해나갔다. 예상보다 더 피곤하다는 점이 있지만 피로를 가시게 하는 여러 조치를 취하니 한결 나아질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창현이 가장 애용하는 방법은 바로 커피를 마시는 것이었다.

아직 이른 나이어서 커피를 자주 마시지는 않지만 하루에 한 잔 정도는 커피를 마시는 창현이었다.

그는 주로 이른 아침에 커피를 마시는데, 일반 커피가 아닌, 향이 무척 좋은 종류의 커피를 즐긴다. 이른 아침에 향이 좋은 커피 향을 한동안 맡고 있으면 피로를 없애주는 효과를 발휘하기 때문이다. 예전에 미국에서 사용하던 방법이었는데, 임시방편이긴 하지만 제법 유용한 방법이어서 창현이 곧잘 애용하는 방법이었다. 피로를 쫓아낼 수 없다면 이리하는 것이 옳았기에 창현은 커피 향을 맡으면서 피로를 몰아내고 스케줄을 이행하였다.

그렇게 스케줄을 해나간 지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흘러갔다. 그동안 석규는 현에 관련하여 여러 가지 사업 제의를 해온 사람들과 만나면서 미팅을 하였고, 창현은 각종 방송 프로그램과 화보 촬영 등에 임하면서 틈틈이 그 미팅에 참여를 하였다. 그리고 3일이 더 지나자 숨 막히는 스케줄에서 어느 정도 해방을 맛볼 수 있었다.

오후 스케줄을 끝낸 창현은 드디어 달콤한 휴식을 맛볼 수 있었다.

“드, 드디어 휴식이다…….”

오후 스케줄을 끝냈다고 하지만 아직 저녁식사를 하기 전이다. 그런 만큼 저녁을 먹은 뒤에는 모두 자유시간이라는 이야기였다.

어디 그뿐인가? 오늘 저녁부터 시작하여 내일 저녁 직전까지 자유시간이 주어진다. 자유시간이라고 해봤자 석규가 잡아놓은 온천에 가기로 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온천에 간다는 것이 기대가 될 수밖에 없었다. 몸 전체에 쌓인 피로를 말끔하게 털어낼 수 있는 기회일 테니 말이다.

스케줄을 끝낸 창현은 저녁을 온천에 있는 여관에서 먹기로 하였기에 우선 호텔로 이동을 하기로 하였다.

차에 탑승한 창현은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오랫동안 수면을 취하지 못하다 보니 이렇게 이동을 할 때 토막잠을 자는 것이 창현에게 있어서는 무척 값진 경험이었다.

“…….”

수면에 빠진 창현을 보면서 그의 전담 매니저를 맡은 하나다는 감탄 섞인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십대 중후반인 하나다는 쟈니스에서 신입에 속한다. 근래 입사한 사원들 중에서 가장 막내였으니 말이다. 그랬기에 그는 처음에 위명이 자자한 현의 임시 매니저를 맡으라는 말에 기겁을 하였다. 현의 인지도가 엄청나서 막중한 책임감이 들었던 것이다. 게다가 한국인인 그를 어떻게 인도해야 할지 몰랐기에 앞이 깜깜해지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하지만 일본어를 현지인 수준으로 구사하는 현은 스스로 알아서 하는 타입이었다. 한국에서 현의 매니저를 맡고 있는 세희에게 간략한 정보를 전달받은 하나다는 자신이 나설 일은 거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현과 함께 다니면서 그가 일본 문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부분을 지적하는 것뿐이었다.

게다가 엄청난 인기에 비해 현은 무척 겸손한 모습을 보였다. 언제나 스스로 채찍질 하면서 한편으로는 자신에 대한 자부심을 지니고 있는 현은 무척 대단한 인물로 보였다.

어디 그뿐인가. 매니저들에게도 까칠하게 대하지 않았다. 피로가 쌓이면 보통 사람들은 까칠하게 변하기 마련이다. 하나다도 로드 매니저로서 여러 연예인들과 움직인 경험이 있었기에 그 부분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현은 다른 사람에게 화풀이를 하지 않은 채 본인 스스로가 알아서 처리하는 타입이었다. 이동 중에서는 토막잠이라도 자서 일시적으로 피로를 해소하는 타입이었고, 무대 위에 서면 프로로서의 모습을 유감없이 보였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고 스스로 알아서 하는 프로페셔널(Professional)한 그의 모습에 하나다는 세계적으로 인지도를 높이고 있는 현의 저력을 유감없이 느낄 수 있었다.

함께 하기에 자부심을 느낄 수 있으며, 그와 함께 한 시간이 자부심으로 남는 순간이었다.

그렇기에 하나다는 자신이 잡고 있는 핸들에 힘을 주었다. 국적을 떠나서 현의 존재는 사람들에게 있어 귀중한 보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에 더욱 더 그의 안전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현을 태운 차는 도쿄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두 시간 가량 이동한 끝에 창현이 도착한 곳은 유명한 여관이었다. 하루 머무는데 무려 20만 엔이나 든다는 여관은 한눈에 보아도 무척 고풍스러운 느낌이 드는 곳이었다.

여관 앞에 도착한 창현은 이곳까지 운전을 한 하나다에게 쉬라고 권유를 하였다.

“수고하셨습니다. 쉬고 가시지요.”

“아닙니다. 저는 내일 출근을 해봐야 해서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즐거운 시간 보내십시오.”

고개를 살짝 숙인 하나다는 그대로 차를 몰아 돌아갔다.

그 모습을 보며 창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나다는 약간 고지식하면서 융통성이 없는 사람이었기에 자신이 설득을 해도 원리원칙에 따르는 사람이란 걸 알고 있던 것이다.

“그나저나 아버지는 도착했으려나.”

석규를 비롯하여 세희도 온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창현은 여관 안으로 들어서면서 예약된 이름으로 석규의 방문 여부를 확인해보았다.

갑자기 등장한 창현의 모습에 여관 종업원은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짓더니 그대로 창현의 물음에 대답한다. 그리고는 나중에 싸인 하나만 해달라는 부탁을 한다. 먼저 싸인을 해달라고 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할 일을 한 후 싸인을 부탁하는 모습에 창현은 흔쾌히 수락을 하고는 안내에 따라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미리 도착한 석규와 세희를 보고는 슬쩍 미소를 지었다.

“미리 와 계셨네요.”

“어서 오너라. 그동안 제법 고생했다고 들었는데. 오늘 푹 쉬도록 하여라.”

“그럴 생각이에요.”

그러면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식사가 준비 완료 되었다는 말에 이동을 하였다.

그러자 그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상다리가 휘어지게 차려진 상이었다. 해산물을 중심으로 차려진 음식들은 웬만한 일식 전문점이 명함도 내밀지 못할 정도로 풍성하게 차려져 있었다.

회를 좋아하는 창현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오늘 입이 호강하겠네요.”

“그러게 말이다. 입이 호강하겠어. 후후후!”

“이런 일식은 처음인데 정말 맛있겠네요.”

석규나 창현, 세희 모두 일식을 좋아하였기에 음식을 먹는 것에 망설임이 없었다.

자리에 둘러 앉은 그들은 곧장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일본에서 겪은 일들을 이야기 하면서 맛있는 식사를 하였다.

식사를 다한 뒤에 어느 정도 소화할 시간을 갖고 온천에 들어가기로 하였다. 온천이 유명한 여관으로 예약을 한 만큼 온천에 반드시 들어 가봐야 했다. 이것은 모두가 같은 생각이었다.

전에 석규가 말한 것처럼 온천이 혼욕이었지만 수영복을 입고 들어가는 것이었기에 나쁘지 않은 곳이었다.

남자인 석규와 창현이 먼저 준비를 마치고는 온천 안으로 들어섰다.

뜨겁게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온천에는 별로 사람이 없었다. 아무래도 학기 중이고, 여관에 머무는 비용이 제법 나가서 그런지 사람들이 별로 없었던 것이다. 기껏해야 서너 명 정도의 사람들이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안으로 들어오는 석규와 창현을 힐끗 바라 보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창현의 얼굴은 알아보지 못했다. 아무래도 뿌연 김이 올라오고 있어서 얼굴이 제대로 식별 되지 않는 것이 한몫을 한 듯하다.

온천 물을 살짝 몸에 뿌려본 창현은 생각보다 뜨겁지 않은 것을 깨닫고는 석규에게 말했다.

“그리 뜨겁지 않네요.

“그래도 충분히 몸에 뿌린 뒤에 들어가야 한다.”

“물론이죠.”

사소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두 사람은 온천에 몸을 담갔다. 따뜻한 느낌이 전신을 감싸오는 걸 느끼면서 석규와 창현 두 사람은 눈을 감았다. 온천의 따스함이 전신으로 흘러 들어와 피로를 말끔하게 풀어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석규가 눈을 감은 채 온천의 열기를 음미하듯 느끼며 창현에게 물었다.

“일본 활동은 힘들지 않았더냐? 제법 고생을 한 것 같은데.”

부자 아니랄까봐 창현도 눈을 감은 채 온천의 열기를 한껏 느끼면서 대답했다.

“힘들기야 힘들었죠. 하지만 일본에도 절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기쁘더라고요. 힘들지만 그래도 유익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유익했다니 다행이다. 워낙 스케줄이 많아서 다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팬 미팅 때 좀 오버 페이스를 한 게 타격이 컸어요. 잘못했으면 다른 스케줄도 줄줄이 펑크를 낼 뻔했으니까요.”

힘들었다고 하는 것은 자신의 관리 부족을 시인하는 것이지만 무사히 스케줄을 다 해냈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석규는 그 말에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그래도 무사히 다 했다는 건 그만큼 프로 근성이 있다는 거지 그건 좋은 거다.”

“그거야 그렇죠.”

“…….”

그 말을 끝으로 한동안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감돌았다.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었던 것이다.

한동안 몸을 담그고 있던 창현은 눈을 살며시 뜨면서 석규에게 말했다.

“그런데 세희 누나가 늦네요. 무슨 일 있는 게 아닐까요?”

그 말에 석규도 눈을 뜨더니 게슴츠레한 눈으로 창현을 슬쩍 보고는 물었다.

“염려하기보다는 빨리 들어왔으면 하는 마음이 느껴지는데?”

“그럴 리가요! 제가 왜 세희 누나가 오길 기대하는데요.”

펄쩍 뛰며 말을 하는 창현이었지만 그렇게 펄쩍 뛰는 것 자체가 수상한 느낌이 들었다.

석규는 다 알고 있다는 듯 묘한 웃음을 지었다.

“다 이해한다. 그 나이 대 아이들은 한창 호기심이 왕성할 때지. 조금 있으면 들어올 테니 그 왕성한 호기심을 좀 다스리도록 하여라.”

자신의 생각을 다 알고 있다는 듯한 석규의 말에 창현은 빈정이 상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면서 석규를 보고는 말한다.

“그렇게 말하는 아버지도 기대하고 있는 거 다 알고 있다고요.”

“내가 뭘 기대한단 말이냐? 나에게는 지선이 밖에 없는데.”

능청스럽게 대꾸하는 석규였다.

그때, 입구 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석규와 창현의 시선이 빠르게 입구로 향했다. 그러자 뿌옇게 피어오른 김 속에서 한 여성의 실루엣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올 데 나오고 들어갈 데 들어간, 콜라병 몸매를 지닌 여성의 등장이었다.

꿀꺽.

모습이 드러나지도 않았는데 석규와 창현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었다.

부전자전이라는 말이 따로 없는 듯하다.


석규와 창현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실루엣만 비춰졌음에도 불구하고 늘씬하고 들어갈 곳은 들어가고, 나올 곳은 나온 몸매의 소유자였다. 멀리서 봐도 그 몸매가 범상치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 실루엣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그럴수록 석규와 창현의 눈은 차츰 커지고 있었다. 그들도 자각하지 못한 사이 남자로서 보일 반응을 보이고 있던 것이다.

그 사이 실루엣은 다가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당연히 세희일 것이라 생각하던 석규와 창현은 순간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어?”

그들이 그런 표정을 지은 것은 당연했다.

자신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인물은 세희가 아니었던 것이다.

오히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인물이 등장을 했었다.

석규와 창현 앞으로 다가온 인물은 정중하게 배꼽 인사를 하였다.

“안녕하세요.”

정중한 인사에 석규가 놀란 표정을 지우지 못한 채 입을 열었다.

“아니 여길 어떻게…….”

창현도 마찬가지로 경악한 표정을 지은 채 입을 열었다.

“유키! 유키가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거야?”

온천에 모습을 드러낸 인물의 정체는 다름 아닌 유키였던 것이다.

석규와 창현은 갑작스러운 유키의 등장에 혼란을 느껴야만 했다. 어떻게 유키가 이곳에 있단 말인가?

머리가 복잡했기에 창현의 눈도 거세게 흔들리고 있었다.

유키는 자연스럽게 다가오면서 말했다.

“현이 오늘 이곳에 머문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온 거야.”

“아무리 그래도…….”

창현이 무어라 말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말을 더 이을 수 없었다.

어느새 성큼성큼 다가온 유키가 온천에 발을 담근 것이다. 첨벙! 소리가 들리면서 새하얀 다리가 창현의 눈에 들어왔다. 그것이 제법 민망한 기분을 심어주었기에 창현은 고개를 돌려 외면하였다.

“후후! 부끄러워 하기는.”

웃음을 짓는 유키의 모습에 창현이 한마디 하였다.

“유키 네가 대담한 거야.”

“아닌 걸? 일본에서는 이런 건 당연한 일이야.”

그리 당연한 일은 아니었지만 창현이 그에 대해서 자세히 알 리가 없었기에 이렇게 말을 할 수가 있었다.

그 말을 들은 창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유키가 수영복을 입고 있었지만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처음 봤을 때는 얼굴이 예쁘고 노래를 잘하는 건 줄 알았는데…….’

그것도 맞는 사실이지만 결정적으로 한 가지가 틀렸다. 바로 유키의 몸매가 심하게 이기적이었던 것이다.

길게 쭉 뻗은 다리와 가느다란 허리, 그리고 차, 착한 가슴까지! 평소 하늘하늘거리는 옷만 입고 다녔기에 잘 몰랐는데 숨겨진 그녀의 면모는 가히 놀라울 정도였다.

창현은 자신의 생각을 조용히 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유키는 그런 창현의 반응을 정확하게 꿰뚫어보고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어떡해. 현이 너무 귀여워.’

여자의 가장 큰 무기는 눈물과 내숭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창현을 만나기에 앞서 내숭을 연마하기 시작했다. 눈물은 가장 극적일 때 사용해야 하는 일종의 필살기였고, 내숭은 평소 행동에 가미를 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곰곰이 생각해봐도 자신이 예전에 만났을 때 적극적으로 대시한 면이 없지 않아 있었기에 그 점을 약간 변화를 두어 행동하려고 한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자신의 내숭이 현에게 제대로 먹혀들었던 것이다. 예전에는 자신만 보아도 슬슬 피하던 현은 이제 거리낌 없이 대한다. 이것만으로도 장족의 발전이었다.

중간에 라샤가 눈치를 챘지만 뭐 별 수 있겠는가? 평소 자신이 행동할 때 그리도 방해를 하더니 오히려 쌤통이라고 생각하면서 곯려주고 있었다.

바쁘게 스케줄을 소화하다가 오늘 창현이 이곳에 온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이곳에 온 것이다.

들어가기 전에 매니저인 세희를 만났지만 이미 그녀를 아군으로 만들어둔 상황이었기에 막히거나 그런 것은 없었다.

모든 상황이 그녀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자신의 수영복을 입은 모습을 보고 부끄러워하는 창현의 모습에 유키는 껴안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아야 했다.

평소에는 그렇게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을 보이다가 지금은 이렇게 부끄러워하는 모습이라니?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과 부끄러워하는 모습에서 오는 이질감이 그녀의 전신을 강하게 강타했다.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다. 우선은 이미지를 최대한 개선해야 할 차례. 그랬기에 유키는 자신의 마음 속에 피어오르는 욕망을 억누르면서 살짝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는 창현에게 말한다.

“왜 그러는 거야? 설마 내가 와서 폐가 된 거야? 그런 건가요, 사장님?”

그러면서 고개를 푹 숙인다. 일부러 석규가 들을 수 있도록 느릿하게, 정확한 발음으로 말을 했기에 석규가 알아듣는 데에 어려움은 없었다.

그 말을 들은 석규가 정신을 차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응? 아, 아니. 그럴 리가 있나? 오히려 남자들 밖에 없는 온천에 유키가 와줘서 고마운데. 그러니 부담 가질 필요 없네. 창현이 이 녀석도 고마워서 그러는 것일 테니. 안 그러냐?”

창현을 툭 치며 그의 대답을 은연중 강요하는 석규였다.

그에 창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죠. 유키한테 고마워서 그런 거예요.”

솔직히 고마운 감정이 있었기에 말을 하는 데에 어려움은 없었다.

이렇게 피로가 쌓인 상황에서 자신의 피로를 풀어주고자(?) 와주었는데 어찌 고맙지 않겠는가?

게다가 이런 훈훈한 장면(?)도 보여주었는데 말이다.

여러모로 고마운 것은 고마운 것이다.

창현의 말을 들은 유키가 고개를 들면서 창현에게 물었다.

“그럼 나 여기 있어도 돼?”

순진무구한 눈동자가 창현의 가슴을 사정없이 뒤흔들었다. 여기에서 자신이 돌아가라고 하면 당장이라도 눈물을 쏟을 듯한 모습이었기에 창현은 감히 그녀에게 가라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 그래. 여기까지 왔는데 돌아가라고 할 수 없지.”

“고마워.”

창현의 수락에 활짝 웃음을 짓는 유키였다.

그 모습을 보며 창현은 살짝 고개를 돌리고는 헛기침을 하였다. 온천의 열기 때문에 붉게 달아오른 얼굴은 남자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험! 험험! 대신 오늘은 휴식하러 온 거니까 조용히 온천을 즐기면서 보내는 거야. 알았지?”

혹시나 유키가 다른 짓을 할 수도 있기에 미리 선수 치는 창현이었다.

그 말에 유키가 속으로 아쉬워했지만 겉으로 내색할 수 없는 노릇.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창현의 의견에 동의하였다.

“알았어. 그렇게 할게.”

빠른 접근은 창현이 원하는 바가 아니라는 걸 알았기에 유키는 조급한 마음을 드러내지 않았다.

우선은 이런 방식으로 다가가는 것이 중요했으니까.

유키가 그렇게 무사히 합류하고 재잘재잘 같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세희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 역시 유키와 비교해서 부족하지 않은 몸매를 지니고 있었다. 유키가 나이에 비해 글래머 한 몸매를 지닌 것이지, 세희도 글래머 한 몸매를 하고 있었다.

덕분에 석규와 창현만 눈 호강 한다고 할 수 있었다.

수영복을 입고 무엇이 그리 불안한 지 수건을 들고 와 살짝 다리를 가리며 안으로 들어온 세희가 석규와 창현에게 물었다.

“안 뜨겁죠?”

“처음 들어오면 좀 뜨겁긴 해요. 그래도 적응 되면 그렇게 뜨겁게 느껴지지 않으니까 괜찮을 거예요.”

“그래? 그럼…….”

창현의 말을 들은 세희는 온천에 발을 담갔다. 그의 말처럼 뜨거웠지만 발을 담그고 있으니 어느 정도 열기에 익숙해지는 듯했다.

온천에 들어온 그들의 이야기 주제가 살짝 변해갔다.

석규와 창현, 유키만 있을 때에는 근황에 대해 이야기를 했지만 세희까지 들어오게 되자 유키의 곡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하여 남은 일본 스케줄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창현은 자신에게 남은 스케줄을 떠올리고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남은 5일은 어떻게 보내야 할지 막막하네요. 남은 기간도 스케줄이 장난이 아닌데.”

“힘 내, 현.”

창현의 엄살에 위로를 하는 것은 유키뿐이었다. 석규나 세희는 우는 시늉을 하는 창현을 당연하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석규가 창현에게 한마디 하였다.

“어차피 네 녀석이 자초한 일 아니더냐? 힘이 들더라도 빨리 끝내는 게 낫다면서 그렇게 스케줄 조정한 게 누군데 그래?”

“창현이 덕분에 일본에서 여러 구경을 할 수 있어서 좋지만 어차피 자업자득이니까…….”

무서울 정도로 냉정하게 말을 하는 두 사람이었다.

유키에게 위로를 받던 창현은 두 사람의 모습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후! 이런 인정머리 없는 사람들. 위로를 해줄 수 있는 것 가지고 그렇게 말을 하면 제가 뭐가 되요?”

“뭐가 되긴. 사실을 말하는 것 가지고 뭐가 잘못되었다고 그러느냐?”

“에휴! 내가 말을 말아야지.”

심드렁하게 대꾸하는 석규의 모습에 창현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사실은 할 말이 없어서 그런 것이었지만 말이다.

“…….”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유키는 빙그레 웃으면서 바라보고 있었다.

참으로 보기 좋은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누가 저 사람들을 보고 한 회사의 사장과 세계적인 가수로 보겠는가.

유키는 소탈한 모습을 보이는 석규와 창현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녀가 창현을 좋아하는 것에도 그러한 이유가 섞여 있었다.

하늘을 나는 새를 떨어뜨릴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는 창현. 하지만 그 인기를 휘두르려 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발전을 위한 양분으로 삼는 그는 유키의 롤 모델이라고 할 수 있었다. 누구보다 뛰어난 실력을 지녔음에도 겸손한 그가 좋았고, 그대로 안주하려는 것이 아닌, 언제나 발전을 모색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러한 모습을 볼수록 유키의 결심은 더욱 확고하게 변할 뿐이었다.

‘반드시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해.’

마음 같아서는 한국 진출을 선언하여 사시사철 붙어 있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자신의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그랬기에 자신이 선택한 방법은 그가 일본에 최대한 자주 오게 만드는 것! 비록 자신의 선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만 쟈니스에서도 현을 원하는 만큼 살짝 충동질만 해줘도 상당한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창현에게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어주면 되지 않는가?

자주 볼 수 없다면 자주 볼 수 있게 만들면 되니까.

그렇게 유키가 다짐하고 있을 때, 창현은 석규와 말 다툼으로 번지고 있었다.

“계속 그렇게 말씀 하시기에요? 좋아요! 그럼 나가서 탁구를 하죠! 탁구로 승부를 내는 거예요.”

창현의 도전을 석규는 받아들였다.

“가소롭군! 감히 나한테 탁구로 도전을 하다니! 그 도전 받아들이겠다. 오늘 네 녀석의 버릇을 단단히 고쳐주도록 하겠어.”

젊은 시절 구 내 8개 동을 일통한 자신에게 도전을 하다니! 참으로 가소롭다고 생각하는 석규였다. 그렇기에 창현의 콧대를 눌러준다고 생각하고는 그 도전을 받아들였다.

두 사람이 곧장 탁구대가 있는 곳으로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유키와 세희가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고는 뒤를 따랐다.


탁구의 결과를 말하자면 석규의 승리였다.

창현의 운동신경과 반사신경은 놀라울 정도였지만 젊은 시절 8개 동을 일통한 석규의 실력에 비하면 부족하기 짝이 없었다.

승부에서 패한 창현은 이를 갈았다.

“으으! 내가 지다니…….”

“아직 나를 이기기에는 부족하다. 좀 더 수련을 쌓고 오너라. 흐흐흐!”

창현을 꺾은 석규는 입가에 진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 미소는 얄밉기 짝이 없어서, 창현은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석규를 노려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주변을 힐끗 살피더니 창현이 강하게 한 수를 펼쳤다.

“어머니한테 다 말할 거예요. 아버지가 세희 누나랑 유키 수영복 차림 보고 헬렐레 했다고요.”

그 말을 들은 석규가 펄쩍 뛰었다. 창현의 말은 자칫 가정파괴를 불러올 수 있는 강력한 말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거짓이 아니었기에 석규는 함부로 부인하기가 힘들었다.

“뭐, 뭐라고? 네 녀석이 감히! 누구 이혼 당하는 꼴 보고 싶어서 그러는 것이냐!”

“하지만 사실이잖아요! 이걸 알면 어머니가 얼마나 슬퍼하실까나.”

방금 전까지 석규가 승리를 하여 즐거워했다면 지금은 창현에게 그 승세가 넘어와 있었다.

석규의 입에 걸려 있던 얄미운 미소는 창현에게 옮겨와 있었다.

그런 창현의 모습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얄미운 느낌을 받은 석규는 인상을 한껏 찌푸리면서 말했다.

“그러는 너도 헬렐레 하지 않았더냐?”

“저야 뭐 한창 때니까 헬렐레 할 수도 있는 거죠. 그게 뭐 잘못된 건가요?”

태연한 모습으로 대꾸하는 창현이었다. 자신이 부인이 있는가 가정이 있는가? 있는 그대로 이야기를 해도 무어라 할 이유가 없다.

창현의 그러한 모습에 석규가 묘한 미소를 짓더니 입을 열었다.

“네가 그렇게 나오겠다면 나에게도 방법이 있다.”

“방법? 무슨 방법이죠? 과연 그 방법이 유효할지 궁금한데요?”

석규가 마지막 발악을 하는 것이라 생각하며 입가에 미소를 짓는 창현이었다.

하지만 석규도 만만치 않았다. 그는 미소를 짓는 창현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영향을 받지 않는 듯 여전히 진한 미소를 지어보이면서 창현에게 말했다.

“그래? 그럼 지금 너의 모습을 말해도 되겠구나? 소녀시대 분들에게?”

“…….”

순간 창현은 침묵을 하였다. 석규가 무슨 방법을 들고 와도 자신이 우세를 점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설마 이런 방법으로 나올 줄 몰랐던 것이다.

만약 소녀시대에게 이 사실이 흘러간다면?

왠지 모르지만 끔찍한 결과가 초래할 것 같았다.

왜 이런 느낌을 받는지 창현은 알 수 없었다. 자신은 소녀시대와 사귀는 사이가 아닌데 왜 이런 느낌을 받아야만 하는 걸까? 하지만 한 가지 사실은 확실했다. 이 사실이 만약에 소녀시대에게 알려진다면 자신은 분명 평탄하지 못한 나날을 보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것만큼은 창현이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설마 이런 방법을 가지고 나올 줄이야.

과연 제법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창현이었다.

안색이 변한 창현의 모습에 석규가 웃음을 지었다.

“어떻게 할 테냐?”

“…딜.”

그렇게 창현은 어쩔 수 없이 석규와 딜을 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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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마음을 울리는 음악 시즌2 제5화 +15 15.04.27 3,714 97 9쪽
41 마음을 울리는 음악 시즌2 제4화 +7 15.04.24 3,979 89 10쪽
40 마음을 울리는 음악 시즌2 제3화 +6 15.04.22 4,427 82 10쪽
39 마음을 울리는 음악 시즌2 제2화 +9 15.04.20 4,517 91 11쪽
38 마음을 울리는 음악 시즌2 제1화 +10 15.04.17 7,376 95 10쪽
37 ▲▲▲▲▲시즌2 시작!▲▲▲▲▲ +5 15.04.17 5,425 65 1쪽
36 마음을 울리는 음악 106장-108장 +8 15.04.16 6,415 106 230쪽
35 마음을 울리는 음악 103장-105장 +1 15.04.16 4,245 82 314쪽
34 마음을 울리는 음악 100장-102장 +2 15.04.16 4,413 68 229쪽
33 마음을 울리는 음악 97장-99장 +1 15.04.16 4,390 63 264쪽
32 마음을 울리는 음악 94장-96장 +1 15.04.16 4,379 80 230쪽
31 마음을 울리는 음악 91장-93장 +1 15.04.16 5,126 76 268쪽
30 마음을 울리는 음악 88장-90장 +1 15.04.16 4,930 98 332쪽
29 마음을 울리는 음악 85장-87장 +1 15.04.16 4,712 83 270쪽
28 마음을 울리는 음악 82장-84장 +2 15.04.16 4,914 85 261쪽
27 마음을 울리는 음악 79장-81장 +1 15.04.16 4,580 87 241쪽
26 마음을 울리는 음악 76장-78장 +1 15.04.16 4,753 74 244쪽
25 마음을 울리는 음악 73장-75장 +1 15.04.16 4,940 111 327쪽
24 마음을 울리는 음악 70장-72장 +1 15.04.16 4,755 82 200쪽
23 마음을 울리는 음악 67장-69장 +1 15.04.16 4,742 80 210쪽
22 마음을 울리는 음악 64장-66장 +1 15.04.16 4,956 75 282쪽
21 마음을 울리는 음악 61장-63장 +2 15.04.16 5,259 79 316쪽
20 마음을 울리는 음악 58장-60장 +1 15.04.16 5,251 74 186쪽
19 마음을 울리는 음악 55장-57장 +2 15.04.16 5,596 95 215쪽
» 마음을 울리는 음악 52장-54장 +1 15.04.16 6,511 110 349쪽
17 마음을 울리는 음악 49장-51장 +2 15.04.16 6,422 119 283쪽
16 마음을 울리는 음악 46장-48장 +3 15.04.16 7,158 149 347쪽
15 마음을 울리는 음악 43장-45장 +1 15.04.16 7,122 129 198쪽
14 마음을 울리는 음악 40장-42장 +3 15.04.16 8,909 183 320쪽
13 마음을 울리는 음악 37장-39장 +2 15.04.16 9,615 224 397쪽
12 마음을 울리는 음악 34장-36장 +8 15.04.16 9,524 189 322쪽
11 마음을 울리는 음악 31장-33장 +8 15.04.16 10,356 261 345쪽
10 마음을 울리는 음악 28장-30장 +5 15.04.16 10,660 260 277쪽
9 마음을 울리는 음악 25장-27장 +7 15.04.16 11,041 267 233쪽
8 마음을 울리는 음악 22장-24장 +4 15.04.16 10,924 261 198쪽
7 마음을 울리는 음악 19장-21장 +4 15.04.16 11,493 270 216쪽
6 마음을 울리는 음악 16장-18장 +5 15.04.16 11,544 242 163쪽
5 마음을 울리는 음악 13장-15장 +5 15.04.16 14,536 297 237쪽
4 마음을 울리는 음악 10장-12장 +8 15.04.16 13,739 352 171쪽
3 마음을 울리는 음악 7장-9장 +10 15.04.16 14,557 362 142쪽
2 마음을 울리는 음악 4장-6장 +11 15.04.16 16,843 421 120쪽
1 마음을 울리는 음악 프롤로그-3장 +47 15.04.16 29,909 545 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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