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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번 님의 서재입니다.

마음을 울리는 음악

웹소설 > 작가연재 > 팬픽·패러디, 현대판타지

김현우
작품등록일 :
2015.04.16 13:27
최근연재일 :
2015.06.01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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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4.16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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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쪽

마음을 울리는 음악 7장-9장

DUMMY

제7장 윤아의 생일, 공포의 재회




현이 모습을 드러내며 노래를 부르자 거대한 물결이 일어났다. 바로 현의 모습과 노래 실력 때문에 일어난 물결이었다.

라샤의 첫 데뷔 무대에 현이 모습을 드러낸다는 소식에 많은 팬들이 주목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파급력은 상상을 초월하는 걸로 나타났다.

평소 5% 아래던 음악 프로그램이 현이 출현한 날 물경 36%까지 치솟았던 것이다. 특히 라샤와 현이 등장했던 순간 시청률이 50%에 달했다. 엄청난 대기록이 아닐 수 없다.

사람들은 현이 십대란 사실에 경악했다. 놀라운 가창력으로 인하여 적어도 이십대 초중반의 나이일 거란 추측이 가장 신빙성 있게 들리던 와중이라 더욱 그러한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현만 돋보였던 방송도 아니었다.

현의 위세를 등에 업긴 했지만 그녀들은 최고의 실력으로 무대를 성공리에 끝마쳤다. 호평의 기사가 줄을 이어 나왔고, 노래를 듣고 매료되어 팬으로 전향한 사람들도 많았다.

하지만 그건 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음악 방송이 끝나고, 현이 반쪽 가면과 외안경을 쓰고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 일면에 장식되면서 그에 대한 추측성 기사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대표적인 기사들이 이러했다.


-가수 현!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다!


-가수 현. 알고 보니 십대?


-한국에 세계를 노릴 만한 스타가 등장하다.


-수많은 팬들의 기대를 받던 대형 신인 라샤(AA엔터테인먼트)가 드디어 데뷔 무대를 가졌다.

라샤는 시린(20), 미란(19), 세룬(20)으로 구성된 여성 그룹으로서 데뷔 초부터 탁월한 가창력과 안무 능력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받아온 여성 그룹이다.

리더는 시린이 맡았으며, 부산 출신으로 중학생 때부터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던 그녀는 삼 년 전 AA엔터테인먼트의 사장 강석규(45)에 의해 스카웃 되었고, 첫 데뷔 무대에서 압도적인 매력을 뽐내며 리더로서, 라샤로서 그 존재함을 확고하게 각인 시켰다.

미란은 영덕 출신으로, 가수가 되기 위해 AA엔터테인먼트에 들어와 연습생으로 활동하였다. 도도하고 새침해보이는 그녀는 무대 위에서 수줍은 표정 연기로 인하여 츤데레(일본의 신조어. 츤츤이란 ‘퉁명스럽고 쌀쌀맞다.’ 란 뜻을 가지고 있으며 데레는 ‘이성 앞에서 약해지는 모습’을 가지는 단어)적 모습으로 인하여 벌써부터 수많은 남성 팬들이 매료되었다.

세룬은 서울 출신으로 어릴 적부터 명문 중학교와 명문 외고를 갈 정도로 공부를 잘했지만 자신의 꿈인 가수를 위해 두 마리의 토끼를 동시에 사냥하고 있다. 누나 같이 포근한 미소와 눈웃음은 다소 도발적으로 보일 수 있는 라샤의 매력을 순화시켜주고 있다.

이들은 23일 M본부 음악 프로그램에서 데뷔 무대를 가졌다. 라샤가 부른 <Laser>는 처음 ‘라샤’의 존재를 확고하게 만든 것으로 각 멤버들의 매력을 돋보여주는 안무와 스피디한 멜로디로 강력한 중독성을 가진 곡이다. 그 뒤 타이틀 곡 <Yesterday>를 얼굴 없는 가수 현과 불러 평균 시청률 5%내외던 음악방송의 시청률을 36%, 순간 시청률 50%까지 끌어올렸다.

라샤의 데뷔 무대에서 당연 화제가 되었던 것은 가수 현이 모습을 드러내었던 것인데, 이날 현이 모습을 드러낸다는 사실에 팬들의 수많은 기대를 모으고 있었다.

그동안 추남이라는 사실과 거짓된 가창력이 아닐까 의심을 받고 있던 현에게는 다소 부담되는 무대가 아닐 수 없었다. 그만큼 대중은 탁월한 가창력을 지닌 현의 능력에 대해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의심을 종식시키듯 현은 반쪽 가면과 외안경을 쓰고 나타나 최고의 무대를 선보였고, 그날 시청하던 모든 관객과 시청자들은 한동안 넋을 잃어야만 했다.

최고의 무대를 선사한 현은 무대를 끝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반쪽 가면과 외안경으로 모습을 감추었지만 현의 정체는 곧 밝혀질 것으로 예상된다.

현은 약 175cm의 키에 십대 후반 정도의 소년으로 생각되며 그의 탁월한 작곡능력과 가창력을 생각하면 대한민국은 미래의 빌보드 차트 1위를 차지할 수 있는 한국 최초의 가수를 보유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현재 현의 공식 데뷔에 대해 AA엔터테인먼트는 이렇다 할 언급이 없는 상태다.


[email protected]

소미정 기자.



“이거 일이 생각보다 커지고 있는데?”

무대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온 창현은 포털 사이트에 올라온 기사들을 하나씩 읽으며 표정을 바꾸었다.

기사 대부분은 라샤의 데뷔를 긍정적으로 호평해주는 것과 자신의 정체에 관한 것이었다.

반쪽 가면과 외안경으로 모습을 감추었다고 하나 지금이 어떤 세상인가.

모습을 감추면 여러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강제로 모습을 노출(?) 시키게 하지 않던가.

하지만 창현에게도 나름대로 노림수가 있었다.

“훗! 현의 추정 키가 175cm 정도에 십대 후반 같다라? 어느 정도 먹힌 것 같네.”

처음부터 현은 반쪽 가면과 외안경을 착용해도 자신의 얼굴이 어느 정도 드러날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창현의 처음 노림수는 그것이 아니었다. 화장을 한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175cm로 의심받는 상황. 현재 창현의 키가 163cm인 걸 감안하면 무려 12cm나 차이나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열다섯 살의 나이면 십대 중반이지 십대 후반이 아니다. 무대 위에서 나이 대를 설정하고 시뮬레이션을 한 결과 기사들의 추측 범위 밖으로 벗어나는데 성공했다.

“그렇다고 방심할 수는 없지.”

아직 초기 단계에 불과하다. 기자들이 언제 냄새를 맡고 포위망을 좁혀올지 모른다.

하지만 자신이 잘 행동만 하면 괜찮을 것이다.

현으로 보일 접점만 남기지 않으면 될 테니까.

창현은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그리고 눈을 감는다.

“어떻게든 되겠지. 그리고…….”

무대 위에 올랐을 때의 느낌을 떠올려 본다.

수천 수만 쌍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던 그 순간. 전신의 감각이 팽팽하게 당겨지면서 기분이 최고조로 향했다.

그런 기분은 여태까지 느껴본 적이 드물었다.

음향총서를 얻고 자신의 길을 발견했을 때나 느꼈던 기분이랄까.

단 한 번 무대 위에 올랐지만 창현은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은 무대 체질이라는 것을.

좋아하는 작곡을 하고 좋아하는 노래를 부르는 것도 다 좋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무대 위에 섬으로서 관객들의 폭발적인 반응을 받을 때 자신의 가치가 비로소 완벽하게 인정받는 기분이었다.

무대 위에 섰을 때 느꼈던 그 짜릿함은 아직도 잊기 힘들었다.

마치 마약과도 같은 그 기분. 다시 느껴보고 싶었다.

그러다 돌연 창현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진다.

“젠장. 아버지는 설마 이걸 알고 계셨던 걸까? 내가 무대 위에 서면 계속 하고 싶어하리란 걸.”

애초에 자신의 성격이 성향이 그러했다. 무언가를 이룩하면 내보이고 싶어하고 인정받고 싶어 했으니까.

자신의 성향이 아니라 인간의 성향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확실한 건 이미 고기 맛을 알아버린 거다.

그 맛을 알아버렸으니 유혹에서 헤어나오기 힘들 것이다.

창현이 거칠게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젠장! 그래. 참는 거야. 중학교 마칠 때까지 참아보자.”

창현은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리고 이내 잠이 들었다.


빠르게 주말이 지나가고, 월요일이 찾아왔다.

학교에 등교한 창현은 교실이 온통 현과 라샤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남자 녀석들은 라샤 멤버들이 선보인 무대를 보고 매료된 듯했고, 여자들은 가수 현의 정체에 대해 토론을 나누기 바빴다.

창현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자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석규의 부탁에 의해, 무대 위에 한 번 서보고자 모습을 드러낸 창현이었지만 내심 정체가 다 들킬까봐 조마조마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반쪽 가면과 외안경, 그리고 짙은 화장이 제몫을 한 듯 했다. 거기에는 나이에 비해 성숙한 표정연기를 한 것과 두둑하게 깔아둔 남자의 깔창의 숨은 공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현재 사람들이 현의 나이를 대략 십대 후반에서 이십대 초반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뛰어난 실력자들에 의하여 어느 정도 얼굴이 드러났지만 그것만으로 창현의 정체가 드러날 확률은 적었다. 반쪽 가면과 외안경의 효과를 톡톡히 본 것이다.

“안 들킨 게 다행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것 나름대로 섭섭하네.”

무대 위에 오르고, 사람들의 폭발적인 반응을 본 창현은 내심 안들키기를 바랬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의 정체를 못 알아봐주는 사람들에게 실망하는 이중적인 감정을 느꼈다.

“실없는 소리하지 말자. 일 년만 버티면 되는 거야. 그때까지 열심히 실력을 기르자.”

근래 들어 창현은 일본어를 배우고 있었다. 어릴 적 조기교육을 받으면서 영어는 마스터하였고, 한자도 어느 정도 기본 바탕이 되었지만 일본어는 백지 상태였기 때문이다.

가수로 정식 데뷔를 하고 노래를 부르게 되면 창현은 가장 먼저 인근 국가인 일본과 중국으로 진출을 꾀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아직 먼훗날의 이야기. 당장에 충실하는 게 창현의 목표였다.

“그나저나 내 팬 카페가 있었을 줄이야.”

자신의 정체가 들켰을까 싶어 인터넷을 이리저리 뒤적거리던 도중 창현은 자신의 팬 카페가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것도 작년에 설립된 팬 카페였다.

그 숫자는 큰 곳만 약 다섯 곳이 되었는데, 다섯 곳 회원을 모두 합치면 오십만 명이 넘을 정도였다.

엄청난 숫자에 창현은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호기심에 회원이 제일 많은 곳에 가입한 순간 창현은 다시 한 번 멍해졌다.

팬 카페 다섯 곳이 통폐합을 시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카페 체제로 가는 것이 아닌 독립적인 사이트로 나아갔다. 그곳에 접속한 순간, 가입 인원이 이십오만 명이란 사실에 창현은 경악했다.

팬 사이트의 이름은 다크 스타였다. 이름도 얼굴도 없는 게 마치 캄캄한 밤하늘 같다고 하였고, 엄청난 가창력은 그 어둠 속에서 빛나는 별 같다고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불과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사이트 대문에 걸려 있는 자신의 모습. 다각도로 캡쳐되어 홈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는 모습에 창현은 감격하였다.

자신을 위해 이 정도 수고를 해준다는 것이 마냥 고마웠다. 그리고 새삼 자신이 가수란 것도 느낄 수 있었다.

수십만 사람들에게 열정적인 사랑을 받는…….

“홈 페이지 주인에게 선물이라도 해야겠어.”

책상에 엎드린 창현이 눈을 감았다.

무대 위에 선 후 부쩍 생각할 일이 많아진 그였다.

지금은 휴식을 취해야 할 때였다.


“그러니까… 삼 일 뒤 윤아 누나 생일이라고요?”

점심시간.

창현은 학교 뒤 정자에서 오랜만에 주현과 만날 수 있었다.

근래 들어 연습이 더욱 강도가 높아졌다며 학교도 곧잘 조퇴하곤 했기에 창현은 주현과 만날 기회가 드물었다.

가장 최근에 만난 것이 수연, 윤아와 함께 할 때였다.

라샤를 곁에서 본 창현은 그러한 생리를 잘 알고 있다.

보이지 않는 또 하나의 전쟁터, 연예계.

언제 도태될지 모르는 그곳은 하나의 처절한 전쟁터와 다름없다.

창현은 주현의 눈에 서린 피곤함을 읽을 수 있었다.

언젠가 그녀가 이렇게 쌓아온 노력들이 한순간 꽃을 피우게 되리라.

“요즘 연습량이 늘어났다면서요. 힘들죠?”

라샤는 평균 삼 년의 연습생 기간을 거치고 데뷔를 했지만 소녀시대는 라샤보다 더 긴 오 년의 연습생 기간을 거치고 있었다. 당연히 언제 데뷔할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미래의 불투명함이 그녀를 괴롭힐 것이다.

그럼에도 그런 모습을 티내지 않는 것이 대단했다.

주현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힘들지 않아. 정말 힘든 건 따로 있으니까.”

창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후! 누나의 안색이 그 말을 설득력 없게 하는 거 아세요?”

“이건…….”

자신의 얼굴을 매만지며 말끝을 흐리는 주현에게 창현이 말했다.

“손 줘보세요.”

“손은 왜…….”

주현의 대답을 듣지 않고 그녀의 손을 잡아든 창현.

순간 그녀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창현은 그런 주현의 손을 꾹꾹 누르며 지압을 해주었다. 하루종일 악기를 다루느라 피로가 쌓이는 악사들을 위해 음향총서에는 몇 가지 피로해소 방법도 친절하게 적혀 있다. 그걸 주현에게 해주는 것이다.

“아…….”

주현은 창현이 자신의 손을 지압하기 시작하자 몽롱하던 머릿속이 뻥 뚫리는 듯한 상쾌함을 느끼고는 탄성을 흘렸다. 창현의 손이 자신의 손을 꾹꾹 누를 때마다 몸에 무겁게 내려앉아 있던 피로가 걷히는 느낌이다.

한동안 주현의 손을 지압하던 창현은 차츰 피곤의 기색이 가시는 그녀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조심스레 손을 놓는다. 주현은 아직 몽롱한 표정을 짓고 있다.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건 이 정도밖에 없네요. 그리고 삼 일 뒤 윤나 누나의 생일엔 제가 끼어들 틈이 없지 않아요?”

“…아! 그러네.”

창현의 물음에 주현이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고 보니 윤아의 생일에는 그녀의 집에 갔다가 밤에 멤버들과 파티를 열기로 했다. 창현이 끼어들 틈이 없다.

창현은 그런 주현의 모습에 미소를 지었다. 저런 주현의 모습에 섭섭한 게 아니라, 함께 축하해주고 싶은 마음에 다른 생각 할 겨를 없이 자신에게 말한 것인 걸 알았기 때문이다.

마음 같아서는 직접 찾아가 축하해주고 싶지만 아직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주현이 미안했는지 더듬거리며 말한다.

“그, 그럼 언니들에게 양해를 구해서라도…….”

창현이 고개를 젓는다.

“그건 별로에요. 굳이 저 때문에 그러실 필요도 없고요. 남자인 제가 끼어들면 불편할 수도 있잖아요. 그냥 제가 숙소 근처로 찾아갈 테니 누나가 잠시 나와 주세요. 그럼 제가 선물을 전해드릴게요.”

주현도 그게 좋다고 생각했다. 윤아가 직접 나와서 받으라고 하면 더 좋겠지만… 왠지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응. 그리고 미안.”

“아니에요. 누나가 안 알려줬다면 그냥 지나쳤을 일 아니겠어요? 그러니 미안해하실 필요 없어요.”

더 이상 부담을 느끼지 않게 하기 위해 창현이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 모습에 주현은 미안하면서 고마웠다.

미안해하는 자신의 모습을 배려해주는 모습이 참으로 따뜻하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주현과 헤어져 교실로 돌아온 창현은 고민에 빠졌다.

“그런데 뭘 선물하지?”

생각해보니 여자에게 선물을 해본 적이 없다.

윤아가 뭘 좋아하는지, 여자들이 기본적으로 무얼 좋아하는지 알 리가 없지 않은가?

창현이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는다.

“하다 못해 뭘 좋아하는지 물어볼 걸.”

아는 게 없으니 자신이 생각해야만 한다.

윤아라면 뭘 좋아할까.

고민을 해보았지만 그것은 헛된 노동에 불과했다.

생각해보니 윤아와 만난 것도 단 한 번밖에 되지 않을뿐더러 그때 미처 취향을 파악할 겨를도 없이 노래 연습만 봐줘야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취향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임의대로 정해야 한다는 말이 되는데, 참으로 난감한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천천히 생각해보자.”

우선 옷을 선물할까 생각해봤다.

하지만 결과는 No였다. 윤아가 어떤 옷을 좋아하는지 모를뿐더러 그녀의 사이즈를 창현이 알 리가 없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옷을 선물하려면 값비싼 걸 선물해야 하는데, 중학생인 자신이 그런 걸 선물하면 받는 사람이 부담스러워 할 것이다.

그렇다고 반지나 목걸이를 하자니 그것도 가격이 비싸다.

창현의 고민은 계속해서 이어졌고, 오후 수업이 다 끝날 때까지 고민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여자 선물 고르는 게 이렇게 어려웠다니. 으으.”

학교가 끝나고 집으로 향하던 창현은 무언가를 떠올리고는 소리친다.

“아, 맞다! 그게 있었지. 내가 왜 그걸 생각하지 못했지.”

창현이 생각해낸 것은 바로 라샤의 싸인이 담긴 CD였다. 음반 자체의 가격이 그리 부담되지 않지만 라샤의 싸인이 담기면 그 가치는 무궁무진하 그츠솟을 것이다.

바로 CD를 들고 라샤를 찾아가 싸인만 받아오면 되니 이 얼마나 합리적이란 말인가.

무엇을 선물할지 결정한 창현은 그대로 전화를 걸었다. 아무래도 라샤를 장악하고 있는 카리스마(?) 리더 시린을 공략하는 게 제일 나을 듯 했다.

전화를 걸자 흘러나오는 <Yesterday>. 그것도 하필 자신의 파트였다.

“이 누난 왜 하필 이걸 벨소리로 한 거야. 전화 거는 사람 무안하게…….”

컬러링이 흘러나온지 약 십 초 정도 지났을 무렵, 딸칵 소리와 함께 시린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여보세요, 창현이야?

“네, 누나, 저에요.”

-무슨 일이야? 창현이 네가 먼저 연락하는 경우는 별로없잖아. 무슨 부탁할 거라도 있는 거야?

평소 먼저 연락을 하지 않는 창현의 습성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기에 바로 그의 의도를 짚어내는 시린.

명탐정 코난 저리갈 정도로 예리한 그녀의 추리에 창현이 식은땀을 흘리며 대답했다.

“어, 어떻게 알았죠?”

-그럴 것 같아서. 무엇보다 네가 용건없이 전화한 적이 없잖아.

정말 그랬는지 지난 일들을 떠올려본다. 그리고 시린의 말은 사실인 걸 알게 되자 앞에도 없건만 절로 미안한 표정이 지어졌다.

“미안해요. 그러고 보니 상황이 그렇게 되었네요.”

-으이구. 미안하면 앞으로 연락 자주하라고!

“네. 알았어요. 그런데 지금 촬영 있어요?”

-응? 아, 아직은 없어. 지금 가는 중이야.

“요즘 많이 바빠졌나봐요.”

정식 데뷔가 며칠 되지 않았음에도 라샤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

창현의 말에 어이가 없었는지 시린이 맥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너 진짜 TV안봐? 어제 우리 1위 했어.

“어? 그, 그래요? 축하해요.”

보질 않았으니 알 리가 없다. 하지만 창현은 그녀들이 1위를 했다는 것을 기뻐해주었다. 그동안의 고생이 드디어 결실을 맺은 것이다.

-후훗! 원래 같음 용서하지 않았을 테지만 반성하는 듯하니 용서해줄게. 그래, 할 부탁이란 게 뭐야?

시린의 웃음소리를 들은 창현은 그제야 자신이 전화 건 목적을 떠올리고는 말한다.

“아, 누나들 싸인이 필요해서요. 아는 사람에게 선물하려고요.”

-엥, 겨우 그거야? 그 정도면 쉽지. 사장님한테 드릴 테니 받아가도록 해.

흔쾌히 자신의 부탁을 들어주자 창현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고마워요, 누나. 나중에 밥 한 끼 살께요.”

-흥! 당연하지. 하지만 우리 요즘 유명인 되어서 나가기가 힘들걸? 그래도 네가 산다니까 꼭 시간 내도록 할게. 아참!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한 소리를 흘리자 창현이 반응했다.

“네, 왜요?”

-조금 있다 전화 할 내용이 있거든. 그때 받도록 해. 알았지?

자신의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었다. 게다가 친분도 상당하여 걸려오는 전화를 마다할 리 없는데 굳이 확답을 바라는 듯하여 창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응. 그럼 이따 다시 통화하자.

그 말과 함께 전화가 끊겼고, 창현은 핸드폰을 바라보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뜻이지? 뭐, 조금 있다 전화 한다고 했으니 기다리지 뭐.”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한 창현은 그 길로 모닝 글로리로 향했다. 싸인 앨범을 받으면 그것을 포장할 포장지를 사기 위함이다.

수십 개의 포장지를 놓고 치열한 고민 끝에 하나를 선택하고 집으로 돌아와 일본어를 공부하고 있을 때였다.

♩♬♪

벨소리가 울리며 통화가 왔다는 걸 알리는 핸드폰.

보니 아까 전 연락을 하겠다고 말하던 시린의 번호다.

창현은 핸드폰을 열고 통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그때, 시린의 핸드폰에서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십니까! 놀러와 MC 유재석입니다. 가수 현 씨의 핸드폰이 맞습니까?

“……!”

창현의 눈이 부릅 뜨였다./

-여보세요? 현 씨의 핸드폰이 아닙니까?

‘하! 이거였나.’

창현은 거듭 들려오는 목소리에 자신이 속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하니 싸인 앨범을 미끼로 자신을 방송의 희생양으로 삼을 줄이야.

창현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네, 맞습니다. 시린 누나의 핸드폰 번호던데 방송인가요?”

-네, 맞습니다. 시린 양의 핸드폰으로 전화 연결을 하였습니다. 실례지만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가수 현 씨가 맞습니까?

뒤에서 ‘정말 현이래?’, ‘정말 현? 거짓말 아니지?’ 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창현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맺혔다.

“맞습니다. <Go&Stop>를 부른 현이라고 합니다. 통화하게 되어 반갑습니다.”

-하하! 반가워요, 현 씨. 유재석이라고 합니다. 실례지만 지금 통화가 가능한지요?

아니오! 라고 말하고 싶은 충동에 휩싸이는 창현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그런 말을 했다가는 나중에 후환이 어떻게 될지 두렵다.

“네. 가능합니다.”

-그럼 몇 가지 질문을 드려도 될까요?

“그러세요.”

어차피 그럴 생각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방송이고, 상대가 예의를 지켜주자 창현은 기분이 풀리는 걸 느꼈다.

-좋다고 하시니 가능한 많은 질문을 하겠습니다. 하하! 어려운 질문이 아니니 부담가지지 마시고요. 자, 그럼 첫 번째 질문부터 하겠습니다. 작년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쭉 히트를 치고 있는 <Go&Stop>을 비롯하여 라샤의 앨범을 전부 작곡하셨다고 했는데 정말이십니까?

질문하기 전 약간의 웃음과 함께 상대방을 편안하게 해주는 재석. 그 뒤 질문이 이어지자 창현은 편안한 마음으로 대답할 수 있었다.

“네, 맞습니다. 부족하지만 작곡과 작사를 맡았고요, 프로듀싱까지 맡게 되었네요.”

그러자 놀란 재석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허, 프로듀싱까지? 어, 여기 라샤 멤버분들이 말씀하시는군요. 프로듀싱을 할 때 현 씨의 모습이 완전 호랑이 선생님이라고요. 하하! 알았어요, 미안해요. 미안!

라샤의 중얼거림을 그대로 말해버리자 그녀들이 재석을 노려보기라도 했나보다. 황급히 사과를 하면서 재석은 다른 질문을 하였다.

-무대 위에 섰지만 아직 현 씨에 대해 많은 것이 베일에 감싸져 있는데요. 보통 무대 위에 서서 좀 더 자신의 많은 것을 보이고 싶어하지 않습니까?

재석의 물음에 창현의 머리에 많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저 질문은 자신이 무대 위에 선 뒤 쭉 해온 생각이었다.

“그런 면도 있습니다. 부족하지만 제 노래를 들어주시고, 제가 만든 음악을 사랑해주시는 분들에게 항상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저 또한 무대 위에 오른 후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이대로 가수로 데뷔를 할지. 아니면 지금처럼 이름없는 가수를 할지 말이죠. 제가 정식으로 데뷔를 하지 않은 까닭은 저 스스로가 프로답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프로? 무슨 뜻이지요?

“전 연예인이 공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정식으로 연예인이 되면 모든 행동 하나하나를 조심해야 하지요. 하지만 전 아직 어리고,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즐거움을 느끼고 있기에 공인이 되기에 머뭇거리는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연예인으로서, 공인으로서 적합하지 않은 마음이지요. 저의 이런 마음이 제대로 정해지는 순간, 제가 연예계로 데뷔를 하려고 합니다. 대중들은 이런 저를 욕하실지 모르지만 제 스스로 부족함을 느꼈기에 그것을 채우기 위한 시간을 기다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것이 창현의 생각이었고 결정이었다.

무대 위에 선 순간 창현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오게 되었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란 말이 있다.

무대 위에 선 순간 창현은 즐거움을 느꼈고, 자신이 피할 수 있는 길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그랬기에 조금 더 투정을, 때를 기다리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

재석은 창현의 말에 잠시 조용해지더니 이내 감탄사를 터뜨린다.

-이야! 정말 멋진 말입니다. 사실 우리 연예인은 그런 면이 약간 부족하지요. 개인적으로 하나의 작곡가로서, 가수로서 뛰어난 실력을 지닌 현 씨의 팬인 전 이런 현 씨의 모습이 무척 좋네요. 언제 데뷔할지도 기대되고요. 자! 현 씨?

“네.”

-그럼 언제 데뷔할 생각이십니까? 팬들도 마냥 기다릴 수 없지 않습니까? 현 씨를 기다려주실 팬들에게 힌트를 주세요!

“아…….”

재석의 말에 창현은 그 점을 미처 생각하지 못한 듯 나직이 신음을 흘렸다.

자신의 노래를 들어주는 팬이 있기에 지금의 자신이 있는 것이다.

너무 자신만 생각했나보다.

미안한 감정을 가지며 창현이 말했다.

“내년까지 학교 생활을 하면 졸업을 하게 됩니다. 그 전에 확실하게 결정을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그 전까지 음반 활동과 작곡 활동은 계속 할 테니 많은 사랑 부탁드리겠습니다.”

일부러 중학교라는 단어는 집어넣지 않았다. 가수 현은 십대 후반으로 알고 있으므로…….

이렇게 떡밥을 뿌려놓았으니 분명 사람들은 현의 나이가 열여덟이라 생각할 것이고, 자신에 대한 의심은 한결 덜어질 것이다.

창현의 이야기가 마무리식으로 되자, 눈치 빠른 재석이 통화를 마무리 한다.

-아직 어리지만 자신의 소신이 있고 뛰어난 현 씨와 통화하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다음에 꼭 만날 기회기 있길 빌겠습니다.

“저도 국민 MC와 통화하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여보세요, 현아?

창현의 말에 재석의 웃음소리가 들려오면서 본래 주인인 시린에게 핸드폰이 갔다.

창현은 시린의 목소리가 들리자 불퉁한 목소리로 말했다.

“누나 두고 봐요. 이런 식으로 앙갚음을 할 줄이야.”

-하하, 미안해, 미안미안. 대신 확실하게 해줄 테니까. 응?

“알았어요. 방송 잘하시고요. 이제 바빠질 테니 몸 축나지 않게 몸 잘 챙기세요.”

-응, 고마워.

“네. 그럼…….”

그 말과 함께 창현은 통화를 끝내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자신이 했던 말들. 방송에 나올 테지.

무언가 저지른 듯한 기분과 함께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의 길을 확실하게 정한 기분.

자의 반에 타의 반으로 엮어버렸지만 확실하게 해야 한다는 목표가 생겼다.

줄곧 고민에 잠겼던 창현의 눈에 생기가 감돌았다.


다음 날, AA엔터테인먼트로 간 창현은 라샤의 앨범에 하나하나 싸인을 받았다.

본래는 싸인만 받기로 했는데 시린이 감히(?) 자신을 방송용으로 사용하였기에 싸인에 좀 더 정성을 쏟으라며 구박을 할겸 곧장 선물을 받아가기 위해 온 것이다.

라샤 멤버들은 싸인을 하면서 선물을 받을 사람의 정체(?)를 말하곤 몇마디 적어달라는 창현의 말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소녀시대 임윤아라고? 걔 유명한 애잖아. 게다가 소녀시대라면 SM에서 야심차게 준비하고 있는 아이돌 그룹이기도 하고. 어떻게 알게 된 거야?”

그 물음에 창현은 최대한 간략하게 설명하였다. 따지고 보면 별다른 관계도 아니었지만 이성 관계는 잘못 얽히면 헤어나오지 못할 지경에 이를 수 있다.

뛰어난 화술로 강력한 그녀들의 포위망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싸인 앨범을 들고 집으로 돌아온 창현은 그것을 포장하였다.

“이 정도면 준비 완료. 이제 건네주는 일만 남았네.”

마음에 걸렸던 일을 처리하고 선물 문제까지 해결되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창현이었다.


5월 30일.

오늘은 연습이 일찍 끝나는 날이다.

멤버 중 하나인 윤아의 생일이기 때문이다.

윤아는 생일 축하를 위해 일찍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멤버들은 숙소로 귀환하여 생일 파티 준비에 한창이다.

“일단 풍선부터 준비하자. 음식 같은 건 윤아가 오기 전에 장만하면 되니깐.”

그러면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소녀들. 풍선을 장식하고 파티에 필요한 여러 물건을 준비하는 그녀들의 얼굴은 밝았다. 윤아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함도 있지만 파티를 한다는 사실이 그녀들을 들뜨게끔 하였다. 연예인의 꿈을 위해 어린 시절부터 혹독한 연습을 겪어온 그녀들이지만 아직 호기심이 많을 소녀들이었다.

부지런히 준비를 하고 거의 마무리가 되어갈 무렵, 태연이 한쪽 구석에서 놀고 있는 유리와 뭔가 불안한 듯 초조한 기색을 보이는 주현을 보며 입을 열었다.

“자, 이제 준비들은 너희가 마무리 하도록 하고. 유리하고 주현이는 나랑 같이 장보러 가자.”

“엑? 왜 나야.”

“전 왜…….”

태연의 호명에 반발하는 두 소녀들.

하지만 그녀들의 반항은 태연의 말에 허무하게 사라졌다.

“시끄럿. 유리 넌 빈둥빈둥 놀고만 있었잖아. 그러니 힘 좀 써. 그리고 주현이 너. 평소 모습답지 않게 왜 그리 허둥대? 그걸 제하더라도 넌 막내니까 하라면 하는 거야.”

“나도 열심히 준비했는데.”

“…….”

강력한 태연의 카리스마에 유리는 정면으로 반박하지 못한 채 궁시렁거렸고, 주현은 표정이 여러 번 변하다가 이내 한숨을 내쉰다.

그렇게 카리스마로 두 소녀들을 진압한 태연은 두 짐꾼(?)과 함께 숙소 근처 마트로 향했다. 그리고 과자와 음식 재료들을 잔뜩 샀다. 세 소녀 모두 양손에 짐이 한가득이다.

짐이 제법 무거웠기에 유리가 인상을 찡그린다.

“끄응. 뭐가 이리 무거워. 난 힘윤아와 달리 섬세하다고. 이런 건 윤아를 시켜야 하는 건데.”

“걔가 오늘 생일이거든? 넌 생일인 애한테 심부름을 시킬 생각이야?”

“그게 안 되니까 이러는 거라고. 아으!”

“…….”

옥신각신 말을 주고 받는 두 소녀와 달리 묵묵히 짐을 든 채 숙소로 향하는 주현.

그녀는 드문드문 손목에 걸린 시계를 보며 시간을 확인하고 있었다.

그런 주현의 모습을 캐치한 태연이 묻는다.

“야, 서주현. 아까부터 무슨 일 있어? 왜 자꾸 시계를 보는 거야.”

“네? 아, 아니에요. 아무것도…….”

갑작스러운 태연의 물음에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젓는 주현. 하지만 그 모습이 매우 수상해보였다.

유리가 그런 주현의 모습을 보고는 눈을 가늘게 뜨며 콧소리를 낸다.

“흐흥! 우리 막내가 무언가 숨기는 게 있나보네? 보통 이럴 경우에는 남자 문젠데?”

흠칫.

아직 어리고 순수하기에 남녀 문제에 있어서 백지나 다름없는 주현의 반응은 너무나 솔직했다.

한눈에 보아도 알아차릴 만큼 격하게 반응을 하자 태연과 유리가 먹이를 발견한 하이에나처럼 달려든다.

“뭐, 뭐야? 정말 남자 문제였어? 우리 중에서 가장 자기관리가 철저한 막내가?”

“얌전한 고양이가 먼저 부뚜막에 올라간다더니. 하아! 정말 옛말 틀린 게 하나도 없다니까.”

삽시간에 언니들 몰래 남자 친구를 사귀어버리게 된 주현.

그녀는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젓는다.

“아, 아니에요. 사실은 제 학교 후배가…….”

창현에 대해 자세히 말할 수 없었기에 주현은 창현이 자신의 후배란 사실과 윤아랑 친분이 있다는 사실만을 말했다. 그리고 선물을 전해주기 위해 약속을 했는데 그걸 확인하기 위해 연신 시간을 확인했다는 내용이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유리가 표정을 찌푸린다.

“그러니까… 쳇! 남자 친구가 아니란 거네.”

“무, 물론이에요. 저랑 창현이는 선배 후배 사이일 뿐이에요.”

“뭐… 그렇다고 쳐도. 선물만 받는 건 뭔가 미안하지 않아?”

단순히 선물을 전해주기 위해 이곳까지 온다는 것이 못내 미안한 태연이었다.

그에 유리가 반박한다.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우리 숙소는 금남 구역이라고.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거야.”

“그래, 그렇지.”

태연도 그걸 알았기에 더 말하지 않는다.

마트와 숙소는 가까웠기에 그녀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어느덧 아파트 입구에 다다랐다.

“어?”

숙소로 향하던 주현은 아파트 앞에 서 있는 한 사람을 보고 반응을 보인다.

저번에 밖에서 만났을 때와 비슷한 복장이었다.

저 정도 키에 저런 복장을 할 만한 소년은 단 한 사람뿐이다.

주현의 얼굴에 반가운 기색이 서리며 걸음을 빨리한다.

그런 주현의 모습에 유리가 태연에게 말한다.

“막내가 왜 저러지? 아, 설마 저기 서 있는 애가 선물을 주겠다던 걘가?”

“그런가보네. 그런데…….”

유리의 말에 수긍하던 태연은 눈앞에 있는 소년의 모습이 묘하게 낯이 익은 걸 느꼈다.

“저 모습 묘하게 낯이 익은데. 마치 그 오만불손하던 녀석하고… 응? 오만불손한 녀석?”

오만불손한 녀석이라고 하니 한 사람이 떠오르는 태연.

그러고 보니 약 한 달 전 자신이 열다섯이라 밝히곤 자신에게 말을 터놓으려던 건방진 녀석이 있지 않았던가!

게다가 자신의 야옹이를 훔쳐(?)가기까지 했던 녀석!

무엇보다 마지막에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고 도망치기까지!

태연은 모든 시력을 집중해본다.

그리고 들어오는 소년의 모습.

확실하다. 그때와 비슷한 복장이고 얼굴은 똑같다.

설마하니 이렇게 만나게 되다니.

태연의 입에서 음산한 웃음이 흘러나온다.

“으흐흐.”

그 모습을 본 유리가 움찔한다.

“야, 야. 너 왜, 왜 그래…….”

하지만 태연은 그런 유리의 말을 듣지 않고 있었다.

태연은 키에 맞지 않는 엄청난 보폭을 선보이며 주현보다 빠르게 소년에게 접근해나간다.

자신에게 접근해오는 강렬한 기운을 느낀 탓일까.

소년의 몸이 움찔하더니 고개를 돌린다.

그의 시선은 정확히 다가오는 태연과 마주한다.

순간 몸 전체가 번개 맞은 듯 부르르 떨리는 소년.

태연을 못본 척하며 황급히 고개를 돌리고는 발걸음을 옮기려 한다.

허나, 이미 보법을 펼치듯 엄청난 속도로 소년에게 접근한 태연은 소년의 지척에 접근한 상태였다.

태연은 손을 뻗어 소년의 어깨를 잡는다. 그러자 소년의 몸이 석상처럼 굳어버려 움직이질 않는다. 세지도 않건만 어깨를 잡은 손에서 엄청난 압박감이 전신에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소년의 고개가 뻣뻣하게 돌아간다. 입가에는 어색한 미소가 맺혀 있다.

“하! 하! 아, 안녕하세요, 태연 누나? 오, 오랜만이네요.”

그런 소년의 모습에 태연이 만족의 웃음을 짓는다. 하지만 소년에게 있어 그 웃음은 악마의 미소와도 같았다.

소년, 창현에게 상큼한 미소를 지어준 태연은 상냥한(?) 목소리로 창현에게 입을 열었다.

“허허, 안녕하신가, 창현군. 우리 저번일로 인해 서로 해결해야 할 문제가 남았지?”

말을 건네는 태연의 모습은 마치 지옥의 야차와도 같았다.

창현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해갔다.


5월 30일.

창현은 방과 후 7시에 주현과 만나기로 하였다. 윤아의 선물을 전달하기 위함이다.

학교에서 전달하려고 했건만 오늘 주현은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연습도 연습이지만 윤아의 생일이 있었기에 전체적인 시간 조율이 있었던 것이다.

그걸 몰랐던 창현은 오늘도 주현이 학교에 나올 줄 알고 점심시간에 선물을 건네주려고 했다. 착각을 한 것이다.

“음! 준비는 완료했고. 선물만 건네주면 되니 오래 걸리지 않겠지.”

시간을 보니 넉넉하게 남아 있었지만 창현은 일찍 집을 벗어났다. 근래 들어 라샤의 인기가 절정으로 치솟다보니 석규의 업무도 바빠져서 자주 집에 못 들어오곤 하였다. 오늘도 못 들어온다고 하였으니 주현에게 선물을 건네고 근처 식당에서 저녁을 먹을 생각이었다.

창현은 주현이 말해준 장소에 도착한 뒤 시간을 보았다. 약속 시간보다 십 분 정도 빨리 도착했다.

“조금 일찍 도착했네. 지금 나오라기도 뭐하니 조금 기다리자.”

그러면서 창현은 슬쩍 아파트를 둘러본다. 약 26평형의 아파트다. 방이 세 개여서 4인 가족이 살 만하겠지만 아홉 명이나 되는 멤버들이 살기에는 좁아보였다.

일층집 배란다를 슬쩍 보면서 집 구조를 살핀 창현이 혀를 내둘렀다.

“이런데서 아홉 명이 살다니. 정말 대단하네. 뭐든지 열정을 가지면 이런 것도 감수할 수 있는 건가? 난 그럴 수 있을까?”

고민되는 대목이었다.

근래 들어 곧잘 하게 되는 고민이 바로 자신은 얼마만큼의 노력과 열정을 가지고 있느냐였다.

어릴 적 자신의 재능의 한계를 깨닫고 고통스러워하고 절망했다. 하지만 그것은 연예계에서 보면 딱히 유별난 게 아니다. 수많은 지망생들이 고통스러워하고 절망을 느끼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다만 그것이 자신의 일이냐 혹은 다른 사람의 일이냐에 따라 일의 중요성이 달라질 뿐이다.

만약 자신이 음향총서를 발견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직도 껍질을 깨지 못한 채 재능만을 탓하며 괴로워했을 테지.

“지금의 이런 고민도 행복한 고민일 거야. 다른 사람에 비한다면. 그러니 최선을 다하자.”

고개를 흔들며 상념에서 빠져나온다.

손목의 시계로 시간을 확인한 뒤 다시 기다린다.

약속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일곱 시가 되었을 무렵, 창현은 다시 한 번 시간을 확인하곤 고개를 갸웃했다.

“주현 누나가 늦네. 준비가 바빠서 그런가? 그렇다고 전화를 하면 실례가 될 것 같고. 음… 조금 더 기다려보자.”

그러면서 약 오분여를 기다렸을까.

뒤쪽에서 시끌시끌한 소리가 들려왔다. 어쩐지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음향총서를 익히고 가장 발달한 것이 청각이었기에 제법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목소리라면 전혀 잊어버리지 않는다.

“누구지?”

의문을 느낀 창현이 고개를 돌릴 때였다.

그러자 상냥한(?) 미소를 달고 자신에게 성큼성큼 다가오는 태연의 모습이 보였다. 그 뒤에는 주현과 일행으로 보이는 소녀가 있었다.

순간 눈이 마주쳤다. 그때 태연의 눈이 환희로 넘쳐난다고 느낀 건 자신의 착각일까.

‘헉!’

창현은 태연의 모습을 보고는 경악하며 고개를 홱 돌렸다.

설마 자신에게 다가오는 걸까? 아니다. 아닐 거다. 아니, 여기에 있는 건 자신 밖에 없다. 자신일 수밖에 없다.

창현은 불현듯 태연과의 첫만남에서 마지막 결정타를 먹이고 도망치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서, 설마 그때 일을 마음에 두고 있는 거였던가.’

그런 자그마한 일을 아니, 자신이라도 충분히 마음에 두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일단 도망치고 조금 있다가 몰래 주현 누나를 만나자. 그게 좋겠어.’

결심을 굳힌 창현은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듯 액션을 취하며 발걸음을 옮기려 하였다.

그때, 턱하니 자신의 어깨에 올라오는 손이 있었다. 어깨를 타고 전해지는 힘은 정말 별게 아니었다. 그런데 왜 움직일 수 없는 걸까. 왜 굳어야만 했을까.

게다가 그 거리를 순식간에 좁히며 자신의 뒤를 점하다니. 정말 무공 고수가 있다면 그 정체가 태연이 아닐까 의심될 정도였다.

이럴 경우 먼저 당하게 되면 끝없이 밀리게 되어 있다. 선수를 쳐야 한다.

창현은 돌아가지 않는 목을 최대한 부드럽게 돌리며 태연에게 인사를 건넸다.

“하! 하! 아, 안녕하세요, 태연 누나? 오, 오랜만이네요.”

떨지 않겠다고, 꿀리지 않겠다고 거듭 다짐을 했건만 이것이 한계였다. 자신이 보아도 방금 행동은 엄청 어색하고 뻣뻣했다.

자신의 인사를 듣자 미소를 지어보이는 태연.

평상시라면 더할나위없이 상냥해보이는 미소였을 것이다.

하지만 저 미소에서 살기가 느껴지는 건 자신 뿐일까.

이 순간 만큼은 탁월하게 예리한 자신의 감각이 싫었다.

환희에 잠긴 태연의 목소리가 창현의 귀에 스며든다.

“허허, 안녕하신가, 창현군. 우리 저번일로 인해 서로 해결해야 할 문제가 남았지?”

말을 건네며 웃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왜 저승사자처럼 보일까.

그때 키 작다고 애 취급하는 것이 아니었다.

단순히 장난으로 했던 것인데. 단지 그거였을 뿐인데.

그 말이 태연에게 있어 엄청난 원한으로 승화된 상태였나보다.

저 자그마한 체구에서 이런 뒤끝이 나올 줄이야.

새삼 자신이 잠자던 사자의 코털을 뽑았음을 느끼는 창현이었다.

젠장, 망할.


지금 상황을 최대한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것이 중요했다.

창현은 마음을 다잡으며 최대한 당당하게 행동하기 위해 축 처진 어깨를 쭉 폈다. 그러자 그 기세가 사뭇 당당해진다.

“해결해야 할 일이라니요? 전 잘 모르겠는데. 그런 게 있었나요?”

지금 같은 위기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싹싹 비는 것과 뻔뻔한 표정으로 상대방을 밀어붙이는 행동이 있다.

차마 대한의 남아로서 싹싹 빌 수 없다는 쓸데없는 자존심이 작용하였기에 창현은 뻔뻔한 표정을 지으며 태연에게 되려 물었다.

“…….”

그런 창현의 모습에 일순간 할 말을 잃은 태연.

그와 동시에 스산한 기운이 그녀의 얼굴에 감돈다. 동시에 그녀의 얼굴에 맺힌 미소도 한층 강렬해진다.

“호오! 차마 죄를 청할 수 없으니 뻔뻔하게 나오겠다 이건가? 그렇게 생각했다면 상대를 잘못 골랐어. 호호!”

자신의 마음을 정확하게 꿰뚫어보는 태연의 통찰력에 창현은 가슴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설마하니 자신의 작전을 바로 간파하다니. 괜히 여덟 명의 소녀들을 통솔하는 리더가 아니었다.

수연도 그렇고 태연도 그렇고. 소녀시대에는 만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는 듯했다.

지금 같은 일대일 상황은 자신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하다는 걸 느낀 창현이다.

이럴 경우 외세를 끌어들여서 상황을 뒤바꿔야 한다.

신라도 절대적인 열세 상황에서 탁월한 외교력으로 당나라라는 외세를 끌어들여 반쪽짜리지만 삼국통일을 이룩하지 않았던가?

후유증이 남겠지만 지금 상황을 벗어나는 것이 더욱 중요했다.

창현은 어느덧 자신과 태연 근처로 접근한 주현을 보며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주현 누나. 저 왔어요.”

“어? 으응.”

주현은 지금 상황이 당혹스러운 듯했다.

이러면 사태를 해결하기가 난감해진다.

창현은 재빨리 작전을 바꿔 태연과 함께 오던 소녀에게 시선을 옮긴다. 그리고 공손하게 인사를 하였다.

“안녕하세요? 주현 누나의 학교 후배인 강창현이라고 합니다.”

태연에게 보여준 뻔뻔한 모습과 달리 사뭇 정중하고 예의바른 모습이었다. 무엇보다 한점 가식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 최대 강점이다.

유리는 자신에게 인사를 건네는 창현을 보며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와! 안녕. 난 권유리라고 해. 저기 주현이보다 두 살 많은 열여덟 살이야. 창현이라고 했지? 너 진짜 귀엽다.”

“그런가요? 고마워요. 누나라고 해도 되죠?”

의외로 털털하고 좋은 성격을 가진 탓일까.

창현은 유리의 말에 호응을 해주며 순식간에 호칭을 정립하고 친분을 쌓아나갔다.

“…….”

현란한 창현의 사교성을 목격한 태연은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지었고, 주현은 아직도 당혹스러운 듯했다.

“아참, 궁금한 게 있는데 태연이하고 어떻게 알게 된 사이야?”

창현과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던 유리가 묻는다.

그에 태연을 한 번 힐끗 보고는 씨익 웃음을 짓는 창현.

대수롭지 않은 듯 입을 열었다.

“아, 그게 고양… 우웁!”

창현은 갑자기 자신의 입을 가로막는 손의 등장으로 말을 끝맺지 못했다. 갑작스러운 손의 정체는 태연이었다.

태연은 창현의 입을 막으면서 자연스럽게 시선을 마주하고는 엄포를 놓았다.

“너 그거 말하려고 한 거야, 지금?”

동시에 엄청난 압박감이 전해져왔다.

하지만 창현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누나가 제게 실력 행사를 하려고 하니 맞불 작전을 놓을 수밖에요. 오늘 절 놓아주신다면 누나가 고.양.이.를 매우매우 좋아한다는 사실을 묻어둘게요. 어때요?”

일부러 한글자씩 끊으면서 강조를 했다. 이런다면 고민이 될 수밖에 없겠지.

“으음!”

창현이 강하게 나오자 태연이 신음을 흘리며 고민에 빠진다.

이대로라면 창현의 폭로로 인하여 그동안 자신이 쌓아온 리더로서의 카리스마가 송두리째 무너질 수 있다.

내심 좋으면서도 대범해보이려고 귀여운 것에 환장하는 멤버들에게 얼마나 구박을 했던가.

그걸 들키게 되면 궁지에 몰릴 수밖에 없다.

‘어쩔 수 없지. 오늘은 그냥 넘겨주는 수밖에. 어차피 주현이의 후배라고 했으니 만날 일은 있을 거야. 그때를 노리자.’

자폭은 그녀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기에 결국 창현의 제의를 수락하는 수밖에 없었다.

“좋아. 수락하겠어. 대신 지금 말 조심하도록.”

“알겠습니다.”

창현의 입가에 웃음이 진해졌다. 협상 성공이었다.

“뭘 그리 속닥속닥하는 거야?”

뒤에서 유리가 말을 걸어온다. 갑작스러운 태연의 행동과 창현의 모습이 수상해 보였나보다.

“아니에요. 실은 예전에 태연 누나가 거리에서 어려움을 겪을 때 제가 조금 도와드린 적이 있거든요. 그때 알게 되었어요.”

“도움? 무슨 도움인데?”

무슨 낭만적인 걸 기대하는 걸까.

유리가 눈을 빛내며 묻는다.

그에 창현이 고개를 저었다.

“별 거 아니에요. 길을 가는데 태연 누나가 인파에 휩쓸려서 제대로 길을 못 가시더라고요. 그 모습이 안타까워서 도움을 드렸죠. 그것 뿐이에요.”

“호오! 그래?”

제법 잘 둘러댔지만 그것이 다가 아니란 걸 바로 간파한 유리였다. 고작 그런 일로 태연이 방금 전과 같은 반응을 보일 리가 없다.

‘오랜만에 재미있는 걸 건졌는데? 게다가 얘도 무척 좋은 애 같고.’

연습생 중에서도 이 정도 외모를 지닌 아이는 당연코 없었다. 외모가 좀 받쳐주면 싸가지가 없거나 성격이 모났는데 지금 보니 성격도 딱히 모나지 않고 무척 예의가 바랐다.

외모부터 성격까지. 마음에 안 드는 면을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유리가 창현에게 손을 내밀었다.

“핸드폰 좀 줘볼래? 오늘 만났지만 진짜 괜찮다, 너. 주현이의 후배면 사적으로 내 동생도 되니까 자주 연락하고 지내자.”

“네. 물론이죠. 저도 호방한 유리 누나 성격이 좋네요. 앞으로 친하게 지내요.”

유리는 완전히 자신의 편으로 기운 듯했다. 창현은 미소를 지으며 핸드폰을 내밀었고, 유리는 자신의 번호를 저장하고 전화를 걸어 자신의 핸드폰에도 저장했다. 그리고 핸드폰을 창현에게 내밀면서 말했다.

“그런데 주현이에게 그거 전하려던 거 아니었어?”

“아! 그걸 깜빡하고 있었네요.”

창현은 자신의 손에 들린 선물을 자각하고는 주현에게 다가가 내민다.

“이거 윤아 누나 선물이에요. 받으세요.”

주현은 그 사이 완전히 침착함을 되찾은 상태였다. 그리고 태연과 어떻게 만났는지에 대해 듣고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응. 여기까지 오느라고 수고했어.”

“괜찮아요. 대단하지 않은 일인 걸요. 아, 근데 저거 누나들 짐인가요?”

“…아!”

“맞다!”

뒤늦게 자신들이 내팽개친 짐의 정체를 깨닫고는 표정이 변하는 소녀들.

그 모습이 재미있어서 창현은 미소를 지은다. 저거 꽤 무거워 보이는데 이참에 점수나 따놓을까.

창현이 먼저 다가가 봉지를 각각 세 개씩 한손에 쥔다.

“얼마 안 되지만 저기까지 들어드릴게요.”

“그거 꽤 무거운데…….”

주현이 걱정하는 말을 했지만 창현은 빙긋 웃으며 짐을 거뜬하게 들었다. 무협 소설로 비하면 한줌 밖에 안되지만 그것만으로도 일반인을 상회하는 힘을 발휘할 수 있다.

호리호리하여 비실거릴 것 같은 창현이 세 명이 벅차하던 짐을 거뜬하게 들자 세 소녀가 놀란 눈으로 바라본다.

창현은 별로 힘든 기색없이 짐을 들어 엘리베이터 앞까지 들고갔다.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건 여기까지네요. 연습이 힘드실 텐데 오늘은 재미있게 노시길 바랄게요. 그럼 전 이만.”

짐을 내려놓은 창현은 인사를 건넨 뒤 물러났다. 파티에 있어 불청객인 자신은 금방 사라져주는 게 예의라 생각했다.

창현이 사라지자 세 소녀는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창현이 정말 대단한데? 저거 웬만큼 힘이 세도 못 들 텐데 말이야.”

“하아! 그러게 말이야. 오만불손에 두뇌회전도 빠르고 힘까지 세다니.”

“…창현이는 양파 같은 사람이니까요.”

천재적인 보컬 트레이닝 실력까지 알고 있는 주현이었기에 그런 말을 하였다.

“자자, 이만 올라가기로 하고… 태연양?”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짐을 들고 안으로 들어선 유리가 태연을 부른다.

그에 태연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자 유리의 입가에 음산한 미소가 걸렸다.

“나머지 일은 집에서 차근차근 취조해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우흐흐!”

호기심이 번들거리는 유리의 눈동자에 태연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오늘은 쉽게 넘기기 힘들 듯하다.




제8장 의심, 그리고 전진




숙소는 적막에 잠겨있다.

한점 불도 키지 않아 어둠이 짙게 내려앉아 있었고, 그 속에는 미묘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딸칵.

문이 열리면서 희미한 빛이 흘러들어온다. 그와 함께 한 명의 실루엣이 집안으로 들어선다.

그와 동시에 어둠에 잠겨있던 집이 환해지며 폭죽소리가 집안을 뒤흔든다.

파방! 팡!

“윤아야 생일 축하해!”

여덟 명의 소녀가 윤아를 둘러 싸면서 생일을 축하해준다.

윤아는 집으로 들어오면서 멤버들이 자신의 생일 파티 준비를 해줬다는 걸 알았지만 밀려오는 감동은 어쩔 수 없었다.

감동으로 인한 눈물이 그녀의 눈에서 흘러 나왔고, 멤버들은 그런 윤아를 웃음지은 얼굴로 바라봐주며 축하를 해준다.

“정말 고마워요, 언니들. 주현아.”

태연이 앞으로 나서면서 윤아의 눈물을 닦아준다.

“오늘 생일인데 왜 우는 거야. 웃어야지. 안 그래?”

“맞아맞아! 모처럼만의 파티인데 웃어야지!”

“윤아 넌 웃는 게 예쁘니 웃으라고.”

윤아가 눈물을 닦으며 웃음을 짓는다.

“네. 너무 기뻐서 그런 거에요.”

“자! 그럼 선물 증정식이 있겠습니다.”

태연의 외침과 함께 멤버들은 자신이 준비한 선물들을 하나씩 꺼내들었다.

옷을 비롯해서 구두, 목걸이, 귀걸이 등 각양각색의 선물이 윤아의 손에 의해 펼쳐졌다.

가격이 비싼 것은 아니지만 마음이 담긴 귀중한 선물이다. 윤아는 멤버 한 명 한 명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네며 소중히 선물을 갈무리했다.

모든 선물이 개봉되자 미영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선물도 모두 개봉했으니까 파티하자. 윤아를 위해 내가 오늘 실력을 발휘했어.”

순간 윤아의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녀는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 듯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어, 언니가요?”

“응! 누구 도움도 받지 않고 내가 만들었어. 아마 깜짝 놀랄 걸?”

‘놀라겠지. 음식으로 생지옥을 맛보게 해줄 수 있을 테니까.’

누구 개인의 생각이 아닌 미영을 제외한 다른 소녀들의 공통적인 생각이었다.

이대로라면 미영의 걸작을 먹게 될 판.

윤아는 언니들에게 구원의 눈빛을 보냈지만 모두 거절했다.

이 재밌는 순간을 어찌 놓치겠는가!

본의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미영이 세계최강의 생일빵을 먼저 날려주겠다는데 그 구경거리를 놓칠 리 없는 멤버들이었다.

수 년간 함께 연습을 해왔던 윤아가 그러한 언니들의 기색을 눈치 못챌 리 없었다.

그녀는 재빨리 계획을 바꾸었다.

‘아! 날 도와줄 언니들이 아니야. 막내밖에 없어.’

주현에게 도움의 눈빛을 보내는 윤아.

그 눈빛을 받은 주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전해줄 물건도 있었다.

“잠시만요, 미영 언니. 윤아 언니에게 전해드릴 선물이 있어요.”

“그, 그래? 알았어.”

지금은 선물 개봉식 중이다. 그랬기에 윤아의 선물이 남았다는 주현의 말에 미영은 힘없이 물러났다.

‘고마워, 주현아.’

고마움이 담긴 눈으로 감사를 표한 윤아가 고개를 갸웃한다.

방금 선물을 모두 받지 않았던가? 그런데 선물이 남아있던가?

의아한 윤아의 기색을 읽은 주현이 말했다.

“창현이가 준 선물이에요. 제가 말했더니 선물을 전해달라고 하더라고요.”

주현의 말에 윤아의 눈이 크게 뜨이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아, 창현이. 뭘 선물까지… 신세만 잔뜩 졌는데.”

“잠깐. 창현이가 누구야?”

자신이 만든 음식 시식회를 놓친 탓일까.

미영이 손을 들며 예리한 질문을 날렸다.

그에 윤아가 언니들이 더 파고들지 못하게끔 쐐기를 박았다.

“주현이 학교 후배인데 저랑 수연 언니가 곤란할 때 도움을 받았어요. 그렇죠, 언니?”

수연을 아군으로 끌어들이는 윤아.

그에 수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윤아의 말에 동조한다.

“맞아, 주현이 학교 후배인데 예의도 바르고 좋은 애였어. 설마 선물까지 할 줄은 몰랐네.”

아무 사정도 모르는 유리가 거든다.

“맞아. 밑에서 봤거든? 완전 귀여워. 연습생 오빠들이랑 애들은 상대도 안 된다니까? 당장 연예인 해도 되겠더라.”

“그 정도야? 이잉. 아쉽다. 나도 음식 안하고 장보러 갔으면 봤을 수 있을 텐데.”

귀엽다는 말에 미영이 반응을 보이며 아쉬워했다.

그 뒤 몇 가지 질문이 더 나왔지만 윤아는 무난하게 넘겼다. 그리고 수연을 비롯해서 유리와 윤아, 주현이 창현의 칭찬을 하니 자연스레 좋은 애라는 이미지가 박혔다.

“…쳇!”

그걸 본 태연이 혀를 찬다. 멤버들이 너무 순진해서 그런지 그 녀석의 양면성을 모르는 듯하다.

“그런데 선물 개봉 안 해볼 거야? 궁금한데.”

수연은 창현이 윤아에게 선물을 해줬다는 게 부러운지 얼굴에 부러움을 띤 채 재촉한다. 천재적인 보컬 트레이너인 그가 무엇을 선물했을지 궁금했다.

“네, 지금 풀어볼게요.”

윤아는 분홍색 배경에 앙증맞은 사슴들이 새겨져 있는 포장지를 한겹한겹 벗겨낸다. 포장지를 벗길 때마다 창현이 얼마나 정성스럽게 포장했는지가 손을 타고 전해지는 듯했다.

포장지를 다 벗기자 갈색 상자가 나온다. 아무래도 내용물이 손상되지 않게 방지하기 위함인가보다.

“어? 상자였네.”

“저 정도 공을 들일 정도면 뭘까?”

“목걸이 아닐까?”

“반지일 수도 있어.”

“바, 반지면 고백이잖아. 주현이 후배라면 못해도 두 살 차인데 범죄지. 범죄. 암.”

선물이 무엇일지 추측하는 소녀들의 말을 흘리며 윤아가 내용물을 꺼낸다.

그리고 내용물을 확인하는 순간 눈이 커진다.

“응? 이건…….”

윤아보다 유리가 먼저 외쳤다. 앞에 싸인이 있었기에 무엇인지 짐작이 가능했다.

“아앗! 라샤의 앨범이잖아! 그, 그, 그것도 싸인본!”

라샤의 노래를 너무 좋아했기에 앨범까지 구매한 유리는 단번에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보고는 외쳤다.

유리의 외침에 순식간에 시끌시끌해진다.

“라샤의 싸인이 들어간 앨범이라고? 와! 그거 귀하잖아.”

“갓 데뷔했지만 1위를 휩쓸고 있어. 게다가 정식 싸인회를 한 적도 없어서 싸인 앨범을 받은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일 걸?”

“와! 그 정도란 말이야? 정말 대단하다. 어떻게 이걸 선물한 거지? 나라면 보물로 간직할 텐데.”

멤버들의 감탄과 부러움이 가득한 말을 들으며 앨범을 열어본다. 그러자 앞장에 라샤 멤버 셋이 나란히 찍은 큰 사진이 있다. 윤아는 그걸 잡아서 뺀 뒤 펼쳐보았다.

그러자 쭉 빠진 라샤 멤버들의 사진과 함께 각각 자신의 모습이 있는 곳에 싸인이 되어 있었다.

싸인 아래에는 코멘트도 적혀 있었다.


*미래의 라이벌 윤아씨에게. 곧 데뷔를 하게 되면 정상을 노리고 겨루겠네요. 그때를 기다리며 윤아씨를 응원할게요. -시린


*SM의 연습은 고되지만 확실한 미래가 보장된 스타를 키우는 만큼 저희들은 늘 윤아씨와 소녀시대를 주목하고 있답니다. 부디 노래와 춤을 즐기는 실력파 가수로서 우리 앞에 서주시길 바랄게요. -세룬


*빨리 데뷔 안하면 일본으로 가버릴 테니 서두르세요. 결코 위협을 느껴서 그런 건 아니에요. -미란


각각 정성이 담긴 내용들이었다.

소녀들은 라샤의 싸인 아래에 적힌 말들을 보고 열광했다.

“와! 라샤가 우리들을 알고 있네. 이거 영광이지?”

“물론이고 말고! 게다가 미래의 라이벌이라잖아.”

“난 라샤 노래만 즐겨듣는 수준이었는데 이제부터 팬을 해야겠어.”

그때, 조용히 보고 있던 유리가 입을 연다.

“잠깐! 라샤의 싸인이 저기 있는데 앨범 앞에 있는 싸인은 뭐였지?”

“……!”

예리한 유리의 말에 윤아가 무언가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지으며 앨범 앞으로 향한다.

그리고 보이는 싸인과 코멘트.

내용을 확인하는 순간 윤아의 입에서 절로 찬탄이 흘러나왔다.

“아……!”

소란스럽게 떠들고 있던 소녀들은 윤아의 반응에 놀라며 외친다.

“윤아야! 왜 그래?”

“이걸 보세요.”

윤아는 다른 말 하지 않은 채 앨범을 가리킨다.

그에 소녀들의 시선이 앨범 앞을 향한다.

그러자 그녀들의 시선에는 유려하게 쓰인 싸인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그 아래에 적힌 코멘트…….


*CF와 M/V에서 나온 걸 잘 보고 있습니다. 매일같이 고된 연습으로 힘드실 테지만 그 노력은 훗날 반드시 돌아올 것이라 생각합니다. 가수가 아닌 팬으로서 응원하니 부디 힘든 이 시기를 이겨내시고 꼭 데뷔하시길. -현


“와아! 현이래 현! 가수 현 맞지?”

“미, 믿기지 않아! 가수 현이 싸인을 하다니! 이건 가짜일 거야! 믿을 수 없어!”

“설마 가짜일 리가 없잖아?”

너무 놀라운 사실에 믿음이 가지 않는 까닭일까.

소녀들은 현의 싸인 진위여부를 놓고 갑론을박을 펼쳤다.

그때 주현이 싸인을 보더니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이거 현 싸인이 맞아요.”

“주현이 네가 어떻게 아는데?”

옆에서 유리가 끼어들었다.

“그거야 나랑 주현이가 현의 팬 사이트인 다크 스타 정회원이기 때문이지. 얼마 전에 다크 스타 팬 사이트 주인장한테 한 장의 앨범이 도착했다고 했는데, 바로 <Go&Stop>에 싸인이 담긴 앨범이었데. 주인장은 그걸 공개했고, 다크 스타에 현이 가입하여 정통성이 있다는 걸 증명했지. 나와 주현이는 당연히 그 싸인을 제대로 봤고…….”

라샤의 앨범에 시선을 옮기며 말을 잇는다.

“저게 진짜라는 걸 알 수 있지.”

“그러니까 진짜란 이야기잖아. 와! 대단하네, 윤아. 이런 선물도 받고.”

“‘저도 놀라는 중이에요…….”

라샤의 싸인도 놀랍지만 현의 싸인도 놀라웠다. 정식활동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싸인 받기 어려운 라샤는 둘째 치더라도 라샤의 데뷔 무대에서 잠깐 모습을 드러낸 것 빼고는 전혀 방송국에 나타나지 않는 현의 싸인은 연예계에서 아니, 대한민국을 통틀어 가장 받기 힘든 싸인일 것이다.

유리가 문득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 싸인을 도대체 어떻게 받은 거지? 라샤는 그렇다 쳐도 현의 싸인은 받기 힘들잖아.”

유리의 말을 들은 태연이 여태껏 조용하다가 입을 연다.

“그것도 그러네. 잠깐 혹시…….”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다.

태연은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연다.

“혹시 그 녀석이 현 당사자가 아닐까?”

“…….”

침묵에 잠겨드는 숙소.

잠시 후 대폭소가 터져나온다.

“푸하하! 말이 되는 소릴 해! 주현이 후배라며? 그럼 열다섯이야.”

“그러게. 그건 좀 심했다. 가수 현이 열다섯 살? 지나가던 꼬맹이도 안 믿어.”

제법 예리한 추리라고 생각했건만 여기저기서 찔러들어오자 태연이 머쓱한 표정을 짓는다.

“그, 그렇겠지? 하기야 열다섯 살 소년이 어찌 현이겠어.”

그렇게 태연의 추리는 일단락되었고, 소녀들은 라샤와 현의 싸인이 담긴 선물을 받은 윤아를 부러워했다.

그 속에서 유독 눈을 빛내는 두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수연과 주현이었다.

주현은 태연의 말을 듣는 순간 눈동자가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설마… 창현이가?’

단순히 후배라고 언니들에게 말했지만 창현은 주현에게 있어 특별하고 신비한 존재였다.

이곳에 올라오면서 태연 언니와 유리 언니에게 창현은 양파와도 같다고 하지 않았던가.

껍질을 벗기면 또 다른 모습이 나오는 그런 양파.

주현에게 있어 창현의 모습이 그러하였다.

자신을 비롯하여 윤아 언니와 수연 언니의 문제점을 해결해주었기도 하였고, 다른 방면에서도 쉬이 짐작하기 힘든 면모를 보였기에 더욱 그러했는지도 모른다.

라샤의 데뷔 무대에서 현이 출현한 걸 보고 굳이 창현이 현이 아닐 거라 부인했던 것은 키 차이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신빙성 있게 마음이 쏠려서이기도 하였다.

그러던 차에 나온 태연의 말은 주현의 가슴 속 깊게 잠재되어 있던 의심이란 씨앗을 싹 틔웠다.


수연은 창현이 현이 아닐까 하는 태연의 추측에 제법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십대의 어린 나이와 탁월한 가창력. 그리고 뛰어난 작곡 능력까지. 솔직히 분야는 다르지만 보컬 트레이닝도 그곳과 연관되어 있잖아? 태연이의 말은 충분히 일리가 있어.’

바로 창현에게 연락을 하여 물어보고 싶은 수연이었다.

평소 문자를 곧잘 주고 받았기에 문자로도 묻고 싶었지만, 이런 것은 직접 얼굴을 맞대고 물어봐야 한다. 그래야 상대방이 거짓말을 하더라도 얼굴 표정이나 행동으로 거짓 여부를 판별 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다음에 만나면 꼭 물어봐야겠어.’

유리와 주현이가 현의 팬이라면서 다크 스타 정회원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녀들은 모를 것이다.

수연은 다크 스타의 특별회원이라는 것을…….


시간은 빠르게 흘러 6월로 접어들었다.

대한민국 연예계에는 거센 폭풍이 몰아쳤다. 바로 대형신인 라샤의 등장이었다.

라샤는 신인으로서 가히 대형 가수와 맞먹는 신위를 선보이며 S방송국과 K방송국 첫 데뷔만에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앨범 판매까지도 순조로워, 앨범 발매 첫주 동안 10만장이 팔리는 기록을 세웠다. 이대로라면 50만장은 거뜬하게 팔릴 것이라 사람들은 예상했다.

라샤의 팬클럽도 본격적으로 규모를 키워나갔다.

그녀들의 팬클럽 이름은 다크 레이디스였다. 데뷔 전부터 현의 유명세에 편승한 것도 있지만 그녀들의 노래하는 장면이 처음 공개된 <Laser>에서 강렬한 검은색 의상으로 사람들에게 인상을 심어준 것도 있다.

압도적인 인기를 과시하며 연예계의 핵폭탄처럼 등장한 라샤.

처음에는 가수 현의 유명세를 등에 업었다는 등 비판적인 목소리가 있었지만 현대 사회에서 지연 지방 학벌 등을 고려하면 영업적인 측면에서 다른 이름있는 스타의 이름을 등에 업고 등장하는 것은 정석에 해당하는 수법이지 욕먹을 수법은 아니다.

그렇게 완벽에 가까운 행보를 거치면서 라샤 멤버들은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폭풍의 핵으로 떠올랐다.

라샤와 데뷔와 현의 등장으로 엄청난 이득을 얻은 M방송사에서 본격적으로 예능 프로그램에 라샤를 출현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엔 잘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지만 라샤 멤버들은 소탈하면서 담백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고,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잘 적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연예계에서, 팬들에게 있어 최고의 관심사인 가수 현과 유일하게 소통이 될 수 있는 인물들이다 보니 그 주가는 한층 더 높게 뛰었다.

특히 ‘놀러와’에서 라샤 멤버 중 시린이 가수 현과 통화를 시도하여 인터뷰 하는 장면을 방영함으로써 수많은 시청자들이 다음주 방송을 기다리며 게시판에 궁금증을 남길 정도였다.

가창력에서도, 예능에서도 인정을 받은 라샤는 그때부터 타 방송사 예능에서도 적극적인 러브 콜을 받게 되었다.

라샤의 스케줄이 바빠지자 석규는 담당 매니저를 하나에서 셋으로 늘렸다. 촘촘한 스케줄로 인하여 멤버들도 힘들지만 그런 멤버들을 챙기는 매니저도 그에 못지 않게 힘들기 때문이다.

몸은 고단했지만 라샤 멤버들의 표정은 밝았다.

자신들의 인기를 서서히 실감하고 있던 것이다.

무엇이든 흥이 동하면 더욱 열정적으로 변하기 마련이다. 그녀들은 몸은 힘들었지만 진심으로 즐거웠다.

연예인들에게 있어 인기란 것은 언제든지 변할 수 있는 요소였기에 그녀들은 지금의 인기를 확고히 하기 위해 더욱 열심히 활동하였고, 행동거지에 신경을 기울였다. 그러자 방송국 내에서의 평판도 상당히 올라갔고, 그런 라샤의 활동은 AA엔터테인먼트의 영업망 확대로 이어졌다.

라샤의 성공으로 석규는 차곡차곡 쌓여나가는 매출을 보면서 입을 함지박하게 벌렸다.

창현은 석규에게 당장 돈을 지급할 수 없다면 주식으로라도 돈을 달라 하였다. 석규는 어차피 아들인 만큼 아낌없이 창현에게 주식을 떼어 그의 명의로 해놓았고, 그 덕에 늘 자금난에 시달리던 AA엔터테인먼트는 자금에 여유를 갖추게 되면서 새로운 사업을 구상할 수 있게 되었다.

“해외 판로를 개척할 수 있다.”

석규는 자금의 여유가 생기자 해외 시장으로 눈을 돌렸다.

창현은 자세한 사정을 모르지만 가수 ‘현’은 외국에서도 큰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다.

중국과 일본, 미국 같은 거대시장에서 현과 연계하여 번역판으로 앨범을 발매하고 싶다고 제의가 들어올 정도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상대 회사의 이익을 더욱 확대시키는 것이라 생각하였기에 석규는 일단 라샤가 데뷔함으로써 자금에 여유가 생길 때까지 핑계를 대며 시간을 끌었다. 그리고 자금에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긴 지금, 본격적으로 해외 시장을 개척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중국은 잘못 진입했다가는 먹히기 십상이고 미국은 다른 나라에 비해 아직 인정을 못받은 편이니, 역시 일본 밖에 없는 것인가.”

대한민국에 비해 근 세 배에 달하는 인구 숫자에서 나오는 일본 시장 규모는 대한민국과 비할 바가 못된다. 성공만 한다면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거대한 이익을 챙길 수 있을 것이다.

석규는 당장이라도 일본 시장으로 진출하고 싶었지만 그것은 자신의 욕심이란 걸 잘 알고 있었다.

“천천히 확실하게 구성을 하는 게 좋겠지.”

어차피 창현은 자신의 아들이고, 사적인 관계를 떠나 확실한 대우를 해주고 있다. 아들이라는 결정적인 강점은 석규를 한 층 여유있게 만들고 있었다. 어찌 보면 자신은 가수 현이라는 절대적인 카드를 움켜쥐고 있는 셈이었으니 말이다.

사업자로서, 한 사람의 아버지로서 창현은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효자였다.

“이름도 알려지고 최고의 성세를 구가하고 있으니 정규앨범을 만들어보라고 해야겠군.”

<Go&Stop>, <Laser>, <Yesterday> 등으로 일약 최고의 작곡가로 자리매김한 창현이었지만 좀 더 확실한, 자신의 노래가 담긴 앨범이 있어야 한다는 게 석규의 생각이다.

지금 상황이라면 충분히 대박을 칠 수 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해외진출이 한층 용이해질 것이다.

“이왕 이렇게 시작한 거, 난 네가 세계 최고의 자리에 섰으면 좋겠다. 그걸 위해 내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겠다.”

가수 현의 정규앨범을 구상하며 자신의 각오를 나직이 중얼거리는 석규였다.


“경솔했네.”

지금 창현은 자신의 행동을 후회 중이었다.

윤아의 선물에 라샤의 싸인을 받고, 들뜬 마음에 자신의 싸인까지 넣어버린 것이다.

선물을 건네주고 나서 앗! 했지만 이미 저지른 상황. 덕분에 요 며칠 사이에 수연에게 시달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도 눈치는 있었기에 직접적으로 묻지는 않았다. 하지만 문자 도중 간혹 슬쩍 떠보는 문자들이 있었는데, 이걸 교묘하게 회피하기가 어찌나 어려운지 노래를 작사하는 것보다 몇배는 힘들었다.

그래도 그나마 수연의 경우는 낫다. 문자라는 특성상 수업시간을 가장하여 어느 정도 시간을 두고 답장을 하면 되니 말이다.

문제는 주현이었다.

윤아의 생일 이후 점심시간에 몇 번 만나게 되었는데 그때 자신을 바라보는 눈초리가 묘했던 것이다.

창현은 그런 주현의 눈에서 한줄기 의심이 깃든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왜 모르겠는가. 앨범을 건네준 순간 직감했거늘.

시간을 다시 되돌릴 수 있다면 싸인을 지워버렸을 테지만 이미 엎지른 물이었다.

“이것 참. ‘놀러와’도 그렇고 싸인 문제도 그렇고. 아직 멀었네, 멀었어”

조금 방심했을 뿐인데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기 직전까지 몰리자 창현은 자신의 행동이 경솔했다는 걸 깨달았다. 조금만 신경 썼으면 이런 일을 자초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약간의 우쭐함이 사태를 악화 시킨 것이다.

아무래도 이성에게 잘 보이고 싶은 남성의 원초적인 본능 때문에 그런 듯하다.

창현은 자신을 자책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자기 위로를 했다.

“조금만 더 참자. 내 준비가 끝날 때까지. 그럼 당당하게 공개하자.”

아직은 준비단계였다. 음향총서의 성취도 스스로가 만족하지 못할 정도였고, 외국어도 듣기는 어느 정도 되지만 말을 할 수 있는 정도는 안 된다.

그래도 당장 쓰기 정도는 가능했기에 영어나 일본어로 작사는 가능해졌다. 회화만 가능하게 하면 된다.

그럼 최소한의 준비는 갖추게 되는 셈이다.

‘좀 더 힘내야겠다. 그리고 모든 걸 털어놓자. 그게 최선이야.’

만난 기간이 길지 않지만 가수의 길을 걷고 있다는 점에서 무시하지 못할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그건 누나들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그랬기에 정체를 숨기고 있는 것에 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쩝, 설마 때리지는 않겠지.’

그러나 이내 고개를 젓는 수밖에 없었다.

생각해보니 태연의 경우가 있지 않던가. 만난 첫날부터 키 논쟁(?)으로 인하여 정강이를 얻어맞은 기억은 다시 생각해봐도 새로웠다.

그래도 태연은 그나마 성격이 털털한 편이다.

문제는 수연이었다.

차갑고 날카로운만큼 그 강도는 약하다.

자신이 속인 걸 알게 되면 분명 수연은 자신에게 엄청난 보복을 가할 것이다.

상상력이 뛰어난 탓일까.

그걸 생각하는 순간 창현의 뇌리에는 눈을 부릅 뜨고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할 수연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부르르.

차가운 표정과 함께 너무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자 창현은 몸을 떨었다.

정말 상상처럼 될 것 같았다.

“기, 기회가 되면 말하도록 하자. 수연 누나한테 가장 먼저.”

그게 창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인 듯했다.


집에 돌아온 뒤 가볍게 게임 몇 판을 하며 기분을 푼 창현은 그동안 자신이 작곡해온 곡들을 쭉 나열해본다.

“이제 보니 제법 많네?”

곡의 콘티를 짜고 곡 자체가 완성되면 다른 곡을 만들지 않고 곧장 작사에 들어간다. 그래서 창현이 보유하고 있는 곡은 하나하나가 곡부터 작사까지 되어 있는 완성품이라 할 수 있다.

창현은 자신이 작곡한 곡들을 보면서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예술가들의 감정이 이러할까. 미숙하고 부족한 것도 있지만 하나하나가 자신의 자식처럼 느껴졌다. 어느 하나 안 소중한 게 없다.

곡들을 휘휘 보던 창현은 곡 하나를 선택한다.

“이걸로 해볼까.”

곡을 선택한 창현은 그걸 재생 시킨다. 곧이어 흘러나오는 노래.

본래 정해진 노래 가사를 보고, 노래를 들으면서 창현이 공책에 부지런히 가사를 적어나간다.

공책에 적히는 것은 한글이 아니었다. 노래 가사 숫자에 맞춰 일본어로 고스란히 번역되고 있었다.

“일단 번역은 끝냈는데 괜찮을런지 모르겠네.”

비록 일본이 한국과 인접한 나라이긴 하지만 나라 특유의 인식과 감성 등을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보통 곡을 작곡하는 것이 어렵다고 말하는데, 작사를 하는 것도 그에 만만치 않게 어렵다.

작사를 어떻게 하느냐, 어떤 컨셉을 잡느냐에 따라 노래의 분위기가 판이하게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평소 애니메이션을 즐겨보는지라 대략 일본의 느낌이나 그런 걸 감잡을 수 있지만 모든 것을 애니메이션에 의존할 수 없었기에 다소 답답함을 느끼는 창현이었다.

“뭐 어때. 일단 지르고 보는 거지.”

곡 몇 개를 추려서 가사를 번역한 노트를 들고는 외출 준비를 하는 창현이었다.


창현이 향한 곳은 AA엔터테인먼트였다.

<Go&Stop>과 라샤의 앨범을 냄으로써 인기 작곡가로서 자리매김한 창현이었지만 아직 자신의 녹음실은 없었다.

그래서 창현은 곡을 작곡하게 되면 가장 먼저 AA엔터테인먼트 녹음실을 찾는다.

평소 같으면 주말에 들르곤 하였지만 오늘은 석규에게도 용건이 있었다.

AA엔터테인먼트에 도착한 창현은 곧장 석규를 만나고자 청했다.

라샤의 활동과 일본 사업 구상으로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던 석규는 창현이 자신을 찾았다는 말에 곧장 들여보낸다.

“네가 평일에 웬일이냐?”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창현을 맞이하는 석규.

라샤의 앨범 녹음이 끝난 뒤 당분간 편히 쉬고 싶다던 창현의 말을 상기하였다.

석규의 물음에 창현이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정규 앨범을 내고 싶어서요.”

“뭣? 정규 앨범을?”

석규는 창현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드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순간 석규의 뇌리에 여러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그런 걸까?

의문을 품었지만 석규는 대략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라샤의 데뷔 무대 위에 오른 뒤 창현의 태도가 묘하게 변한 걸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나이에 비해 몸가짐이나 언행이 제법 성숙한 창현이지만 아직은 변화가 심한 청소년기를 겪고 있다. 석규는 창현의 갑작스러운 변심을 대략적이나마 이해를 할 수 있었다.

“네가 음반을 낸다면 회사의 입장에서는 대환영이다. 라샤의 열풍이 식기 전이라면 충분히 너의 인기 상승에 도움이 될 테고 말이다.”

창현은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인기는 아무래도 좋아요. 아니, 솔직히 많으면 좋겠지요. 더 많은 사람에게 들려줄 수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무엇보다 전 제가 즐거워서 하고 싶은 거에요.”

“어떤 일을 하여도 즐기는 것만큼 좋은 게 없지 않겠느냐? 난 네가 좋다고 하면 당장이라도 작업에 들어가고 싶다. 하지만 아버지의 입장으로서 질문 하겠다. 저번 무대 위에 섬으로서 알게 모르게 기자들이 너에 대한 냄새를 맡고 있다. 이번에 하다가는 들킬 수도 있어.”

석규의 말은 사실이었다.

라샤의 데뷔 무대에 선 이후 기자들은 현의 정체를 밝혀내기 위해 눈에 불을 키고 있는 실정이었다.

심지어 AA엔터테인먼트에 잠복하며 드나드는 사람 하나하나를 체크할 정도였다. 그걸 알아차린 석규가 창현에게 충고를 해줘서 출입증을 끊어주었기에 망정이지 자칫했으면 진즉에 정체를 들켰을 것이다.

창현이 미소를 지어보였다.

“괜찮아요. 라샤 누나들이 ‘놀러와’ 출연할 때 직접 전화 통화로 떡밥을 뿌려놓았거든요. 아마 사람들 대부분은 가수 ‘현’ 이 고등학교 2학년 정도로 알 거에요.”

그러면서 창현은 시린이 통화 연결을 하여 자신이 했던 말을 석규에게 전달했다. 데뷔 무대에 함께 섬으로 인하여 현이 십대 후반으로 추측되던 것과 이제 갓 스무 살이 된 시린에게 누나라 부르면서 졸업이 일 년 남았다는 걸 말하여 교묘하게 오해를 유도한 것까지.

창현의 설명을 들은 석규가 웃음을 터뜨렸다.

“껄껄! 정말 대단한데? 그렇게 할 정도면 확실히 열여덟 살로 착각을 하겠구나. 그거 하나만으로 엄청난 시간을 벌겠지. 기사들은 열여덟 살이라는 단서 하나만을 놓고 조사를 할 테니 말이야.”

이 바닥에서 상당히 오랫동안 일해온 석규가 감탄하니 창현도 적이 안심되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죠. 하지만 이번에는 앨범과 함께 뮤직비디오도 찍어볼까 해요. 안 될까요?”

석규의 표정에서 웃음이 사라진다. 그리고 그는 고개를 저어보인다.

“그건 힘들 것 같다. 뮤직비디오 제작을 하게 되면 네 정체가 알려질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조심한다고 해도 힘들어.”

하지만 창현은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솔직히 정규 앨범을 욕심내는 것도 자신의 노래가 흘러나오는 뮤직비디오를 보고 싶어서이기도 했다.

라샤의 뮤직비디오를 보고 어찌나 부러웠던지.

그래서 창현은 자신이 마련해온 대책을 말했다.

“이건 어때요? 아버지가 아는 감독님을 섭외하고요. 제가 촬영장에 메이크업 상태로 가는 거에요. 라샤 누나들 데뷔 무대 때도 반쪽 가면과 외안경을 썼다지만 사실상 제 얼굴은 노출되었잖아요? 잘만 단속하면 괜찮을 것 같은데…….”

“흐음! 글쎄다.”

창현의 말에 석규가 구미가 동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썩 내키는 표정은 아니었다.

솔직히 석규도 마음 같아서는 뮤직비디오 제작을 하고 싶었다. 아니, 되려 권하고 싶었다.

지금 상승세를 타고 있는 라샤의 상승세와 현의 인기, 그리고 고퀄리티 뮤직비디오로 관심 몰이만 할 수 있다면 대박은 물론 초대박까지 노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걱정하는 것은 창현의 얼굴 노출이었다.

처음 곡을 낼 때 약속한 만큼 그 부분만큼은 확실하게 지켜주고 싶었다.

창현이 제시한 방법이 제법 괜찮았지만 세상에 완벽이란 건 없었다.

석규가 부정적인 방법을 보이자 창현은 다소 시무룩한 표정을 지어보인다.

“역시 안 될까요.”

“흐음!”

아쉬워하는 창현의 모습에 고민하는 석규. 그 또한 사업가의 입장에서 가수 현이 뮤직비디오를 찍었을 경우 파급력이 만만치 않을 거란 걸 알았다.

‘허허, 이런 행복한 고민이 있나. 아버지의 입장에선 아들의 폭발적인 인기를 걱정해야 하고 사업가의 입장에선 오히려 수익 증대를 도와주는 가수를 말려야 하는 입장이라니. …잠깐.’

고민하던 석규는 불현듯 자신이 무언가 한가지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바로 창현의 정체가 밝혀지지 않겠다는 건 창현 본인의 의지였던 것이다. 그리고 유명인이 될 경우 사생활에 불편함이 올 걸 알았기에 자신 또한 승낙했던 바이고.

그런데 창현이 이렇게 원한다면 자신이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지 않을까?

석규가 생각을 정리한 뒤 말했다.

“안 될 건 없다. 내가 아는 감독에게 부탁을 하고 스태프들에게 양해를 구해서 핸드폰이나 디카를 맡겨두고 촬영을 하면 어느 정도 괜찮겠지. 하지만 만에 하나라는 가능성이 있기에 조심해도 정체가 드러날 수 있다. 어쩌겠느냐?”

“서로가 조심만 하면 되겠네요. 들키면 어쩔 수 없는 거고요. 해볼게요.”

창현의 의지가 확고해보였다.

석규는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좋다. 그럼 해보도록 하자. 곡은 총 몇 곡으로 할 테냐?”

“열곡 정도요.”

“그래? 곡은 얼마나 완성되었느냐?”

곡의 완성도에 따라 시기가 달라질 수 있다.

석규는 이어진 창현의 말에 대경한 표정을 지었다.

“열 곡 다 완성되었어요.”

“뭐, 뭐라고?”

“곡이랑 작사는 다 되어 있어요. 녹음을 해야겠죠. 그리고…….”

창현이 석규를 힐끔 보며 말한다.

“일본어 버전도 있는데 일본 시장도 어떻게 안 될까요?”

“뭐, 일본어까지? 근래 일본어를 공부한다더니 벌써 그 정도 수준에 이른 것이냐?”

석규도 창현이 근래 들어 일본어를 공부한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일본어가 어느 정도 능숙해지면 일본어로 작사를 하여 앨범을 내보자고 하려 했는데 창현이 벌써 일본어로 작사를 해온 것이다.

창현이 웃음을 지었다.

“아직 회화는 부족해요. 하지만 쓰고 듣는 건 어느 정도 가능해요.”

“허허, 그래도 대단한 거지. 암. 좋다. 네가 한국어와 일본어로 각각 녹음을 완료하면 동시 발매를 해보자. 이참에 일본 시장을 개척해보려 했는데 너로 인해 그 시기가 앞당겨졌구나.”

가장 큰 난관이라 생각했던 창현이 적극적으로 나오니 절로 의욕이 솟는 석규였다. 창현이 준비를 해준다면 석규는 가수 현의 노래를 원하는 일본 팬들의 성원을 등에 업고 일본으로 판로를 개척할 수 있다.

그 뒤 석규와 창현은 대략적인 녹음 진행 속도와 뮤직비디오의 콘티 등을 이야기 나눈 뒤 헤어졌다. 둘 모두에게 만족스러운 하루였다.


시간이 빠르게 흘러 라샤가 녹화한 ‘놀러와’가 방영되었다.

근래 들어 인기의 절정을 달리는 라샤는 ‘놀러와’에서 유재석과 김원희의 노련한 진행 아래 톡톡 튀는 재치와 입담으로 방송을 재밌게 이끌어 나갔다.

특히 가수 현과 통화하는 부분이 나왔는데, 그와의 통화 내용에서 시청자들은 그동안 베일에 싸여있던 현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시청자들 대부분은 아직 십대에 불과한 현이 방송에 임하는 자세와 공인에 대한 의식이 제대로 박혀있다면서 호평을 하였다. 특히 현이 내년에 정식 데뷔를 한다는 말에 벌써부터 기대하는 사람들이 속속 생겨나기에 이른다.

이날 ‘놀러와’는 37%의 경이로운 시청률을 기록하고, 현과 통화하던 부분에서의 순간 시청률은 무려 50%가 넘어 방송관계자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뿐만이 아니라 기존의 팬 카페를 통폐합하고 회원들을 받아들이던 다크 스타의 규모도 눈에 띄게 커져갔다.

불과 한 달 전만 하여도 25만이던 회원이 무려 30만에 육박한 것이다. 다크 스타의 최소 가입 조건이 현의 앨범을 구입한 사람이었으니 현의 미니 앨범 <Go&Stop>의 구매자 중 거의 절반에 가까운 사람이 가입한 셈이다.

‘놀러와’에서 가수 현에 대한 이미지가 좋게 박혔는지 앨범을 구입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났고, 그에 따라 라샤의 앨범 판매도 순조롭게 이어지면서 AA엔터테인먼트는 하루가 다르게 상승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6월은 창현에게 있어 무척 바쁜 나날이었다.

앨범 발매를 위해 스스로가 가수가 되고, 프로듀서가 되어 녹음 작업을 반복하여 보다 완벽한 노래를 만들 수 있게 하였고, 아직 입에 덜 익은 일본어를 착착 감기게 하기 위해 하루종일 일본어 회화를 공부하곤 하였다.

정신없이 나날을 보내는 동안 연예계에서 다시 한 번 바람이 불었다.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한 라샤가 현이 정규 앨범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한 것이다.

이는 다분히 의도적인 발언이었다. 같은 소속사로서 어느 정도 밀고 당기기를 해줘야 했기에 석규가 라샤에게 부탁하여 이 사실을 슬쩍 흘리게끔 한 것이다.

그리고 그 여파는 대단했다.

라샤의 방송을 본 기자들은 냄새를 맡고 AA엔터테인먼트에게 인터뷰를 연일 요청하였고, AA엔터테인먼트 측에서는 현이 정규 앨범 준비를 끝마쳤으며, 조만간 뮤직비디오까지 제작한 뒤 티저 영상을 선보이겠다고 발표했다.

이것 또한 대단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AA엔터테인먼트에서 발표하길 뮤직비디오의 주인공이 현 바로 본인이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학교 생활을 하고 싶다는 본인의 바람대로 내년까지 신비주의 컨셉을 유지하겠다고 하였지만 세상 일은 모르는 것 아닌가? 뮤직비디오 제작 과정에서 사소한 ‘실.수.’가 일어나는 것 정도는 말이다.

현의 얼굴을 가장 먼저 밝히는데 경쟁이 붙은 기자들은 자신이 가진 모든 인맥을 동원하여 뮤직비디오 제작 스태프들을 달래고 어르기에 바빴다. 그 때문에 한동안 뮤직비디오 제작 스태프들은 공짜 밥을 두둑하게 먹었다는 풍문이 퍼질 정도였다.

일찌감치 한국어 버전 녹음을 끝마친 창현은 일본어로 녹음을 하면서 매일 교정하기에 바빴다.

노래란 것은 감정을 전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발음 또한 중요했다.

보기 좋은 떡이 맛도 좋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그보다 더 좋은 건 보기도 좋고 맛도 좋은 떡이다.

창현은 이 두 마리의 토끼를 모두 잡기 위해 어눌한 발음을 교정하고 또 교정하면서 가다듬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은 괜찮다고 말했지만 창현 본인 스스로가 만족하지 못했기에 녹음에 녹음을 거듭하며 차근차근 발음을 교정해나갔다.

그리하여 한국어 버전의 녹음은 채 일주일도 걸리지 않았지만 일본어 버전을 녹음 하는 데는 그 두배에 달하는 보름이라는 시간을 소모해야만 했다. 이미 한 번 녹음을 끝마친 곡을 다시 녹음하는데 이 정도 시간이 걸렸다는 건 창현의 노력이 그만큼 대단하다는 걸 뜻했다.

앨범 수록곡들의 녹음이 끝나자 석규는 본격적으로 뮤직비디오 제작진 섭외에 나섰다. 근 이십여 년 동안 이곳에서 일한 석규의 발은 넓었고, 평소 친하게 지내던 뮤직비디오 감독을 섭외하는데 성공했다.

석규는 감독에게 창현과 함께 구상했던 뮤직비디오 콘티를 보여주었다.

감독은 그 콘티를 보고 마음에 든다고 하면서 몇 가지 다듬을 게 있다고 하며 일주일 후 본격적인 뮤직비디오 촬영을 시작하자고 하였다.

그전에 창현이 요구한 조건들을 감독에게 말했는데, 감독은 신비주의를 컨셉으로 하는 가수들에게 있어 그러한 점은 생명과도 같았기에 전폭적인 협력을 약속하였다.

그리하여 창현은 약 일주일 정도의 휴가가 주어졌다.

정신없이 보낸 한달이었기에 창현은 몸도 마음도 피곤했지만 자신이 하고 싶은 걸 즐겁게 하고 있었기에 얼굴 표정은 밝았다.

일정을 계산하면서 달력을 보던 창현은 문득 6월28일에 시선이 고정되었다.

“그러고 보니 주현 누나의 생일이 얼마 안남았네.”

정신없이 6월을 보내다 보니 까맣게 잊고 있었다.

다행이라면 아직 며칠은 남았다는 사실이랄까?

당일날 축하해주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주현은 숙소 생활을 하고 가족들과 그리고 멤버들과 보낼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학교에서 알고 지내는 단 하나뿐인 선배인데 그냥 선물만 주고 땡치기에는 너무 아까웠다.

“같이 놀러갈까? 그러고 보니 내일부터 주말이네. 한 번 연락해보자.”

창현은 핸드폰을 열고는 곧장 주현과 통화를 시도했다.

♩♪♬

‘아직 안 바꿨나?’

주현의 핸드폰에서 흘러나오는 컬러링은 예전과 달라진 게 없는 <Go&Stop>였다.

약 십여 초가 흘렀을 무렵, 컬러링이 멎으며 주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창현이?

“네, 저에요. 주현 누나.”

근래 들어 창현이 바쁜 까닭에 학교에서도 자주 만나지 못한 주현이었다. 그랬기에 주현의 목소리에 반가움이 넘쳤다.

-갑자기 웬 전화야?

“아, 갑자기 생각나서요. 누나 지금 뭐하시나요? 연습 중?”

-응. 연습하다가 잠시 휴식 취하고 있었어.

공교롭게도 휴식시간을 잘 찾아서 연락하는 듯했다.

창현은 뭔가 자신이 타이밍이 좋다는 걸 느끼며 말했다.

“아, 제가 전화한 이유는요. 누나 다음주에 생일이시잖아요. 그래서 내일이나 내일 모레 시간이 되면 같이 놀러갈까 싶어서요.”

-…….

일정을 알아보는 걸까? 아니면 고민을 하는 걸까?

주현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주현이 다시 입을 열었다.

-토요일은 안 되고 일요일은 되는데…….

승낙의 표시에 창현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래요? 다행이다. 그럼 저랑 놀이공원에 놀러가요. 제가 쏠 테니 돈 걱정은 하지 마시고요.”

-그래도 돼……?

주현의 목소리가 떨린다고 생각한 건 창현의 착각일까.

창현은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대답했다.

“네. 저 따지고 보면 학교에 친구도 없고 아는 사람은 주현 누나밖에 없거든요. 이 불쌍한 중생이 부디 여신같은 누나를 에스코트 할 수 있게 기회를 주세요.”

익살스럽게 말하는 그의 모습에 눈에 그려지는 듯했다.

-쿡쿡! 알았어. 그럼 불쌍한 중생을 구원해주도록 할게. 대신 에스코트는 확실하게 해줘야 해?

주현이 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그녀의 승낙이 떨어지자 창현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네. 그럼 연습 열심히 하시고, 제가 장소랑 시간은 문자로 보내드릴게요.”

-응. 창현이도 열심히 해.

뭘 열심히 하라는 거지?

순간 창현은 의구심이 들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대답했다.

“네? 뭔진 몰라도 열심히 할게요. 그럼 일요일날 뵈요.”

-으응.

그 말과 함께 통화가 끝났다.

그 뒤 창현은 컴퓨터에 앉아 놀이공원으로 가는 버스를 알아보고 각종 행사 등을 살피며 일정을 짰다.

왠지 모르게 데이트 같은 기분이랄까.

창현은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


연습생들의 연습은 무척 고되다.

육체적으로 힘든 것은 연습생이나 데뷔한 가수들이나 비슷하다. 하지만 피로를 느끼는 것은 연습생들이 더욱 크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바로 미래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수많은 연습생들이 가수를 꿈꾸며 연예계에 입문하고자 하지만 그 벽은 높기만 하다.

그것은 주현도 마찬가지였다.

마지막 단계라 할 수 있는 그룹 조성까지 오는데 성공했지만 언제 데뷔할지 모르는 불투명한 현실이 그녀를 힘들게 하였다.

내색은 하지 않지만 다른 멤버들도 비슷할 것이라.

안무 연습을 한 뒤 잠시 휴식시간을 받았다.

고된 운동 후 취하는 휴식이라 그 느낌은 각별했다.

자리에 앉아 쉬거나, 친구들과 문자를 하는 사람, 밖에서 군것질을 하는 사람 등 연습생들은 각자의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주현은 먼저 핸드폰을 확인해보았다. 혹여 연락온 게 있으면 답을 한 뒤 편안히 휴식을 취하려는 생각이었다.

핸드폰을 열어보니 소소한 문자 몇 개만 온 상태였고, 답변을 모두 한 주현이 핸드폰을 내려놓으려 할 때였다.

돌연 핸드폰에 통화 표시가 뜨면서 진동을 일으켰다.

지이잉.

“누구…….”

전화 온 상대의 이름을 본 순간 주현은 말을 잇지 못했다.

바로 창현의 전화였던 것이다.

그걸 본 주현은 고민에 빠졌다.

‘받아야 할까?’

예전 같으면 당장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근래 들어 주현은 걸리는 게 있었다.

바로 창현이 가수 현일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윤아의 생일 날 태연이 스치듯 했던 말이지만 그것은 주현에게 큰 의혹으로 자리 잡았다.

수상하다고 할까나. 보컬 트레이닝 능력도 그렇고 라샤의 싸인을 받아오는 능력도 그렇고 모든 게 의문이었다.

확실한 물증은 없지만 심증은 있는 상태.

짧은 순간 여러 고민이 떠올랐고, 주현은 전화가 계속 울리고 있다는 걸 자각하자 화들짝 놀랐다.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때? 창현이는 창현이일 뿐이잖아?’

솔직히 창현이가 가수 현이라고 한다면 새삼 충격이 클 것 같다. 허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심증일 뿐이고, 지금은 자신의 후배 창현이다.

근래 연락이 없던 창현이 연락을 해왔다.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마음이 두근거렸다.

그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하면서 주현이 핸드폰을 열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창현이?”

그러자 건너편에서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학교에서 자주 만나지 못했기에 목소리라도 듣게 되자 무척 반가웠다.

-네, 저에요 주현 누나.

‘그런데 창현이가 왜 나한테 전화를 한 거지? 설마…?’

순간 무언가가 떠오른 주현. 입가에 절로 미소가 맺힌다.

그러다 이내 고개를 젓는다. 김칫국부터 마시면 나중에 돌아올 실망감을 견디기 힘들다.

주현이 용건을 물었다.

“갑자기 웬 전화?”

-아, 갑자기 생각나서요. 누나는 지금 뭐하시나요? 연습중?

연습하고 잠시 휴식을 취하는 중이다. 그러고 보니 창현은 연습시간을 곧잘 캐치하는 듯했다.

“응. 연습하다가 휴식 취하고 있었어.”

그러자 창현이 바로 말한다.

-아, 제가 전화한 이유는요. 누나 다음주에 생일이시잖아요. 그래서 내일이나 내일 모레 시간이 되면 같이 놀러갈까 싶어서요.

“…….”

창현의 말에 주현은 감동을 받았다.

언젠가 스치듯 한 번 말한 것밖에 없는데 그걸 기억해주고 있을 줄이야.

주현은 기뻐하면서 한편으로는 토요일과 일요일에 있을 일을 떠올려보았다.

주말은 보통 연습생들을 쉬게 해준다. 대신 자율 연습으로 대체하고는 하는데, 내일은 멤버 언니들과 함께 쇼핑을 가기로 했다. 그리고 일요일은 연습을 하려고 했는데 창현이를 위해 예정을 변경해보도록 하자.

하지만 창현이가 안된다고 하면 어쩌지?

그럼 무척 슬플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주현의 목소리가 조심스러웠다.

“토요일은 안 되고 일요일은 되는데…….”

과연 창현이도 시간이 될까, 안 될까.

-그래요? 다행이다. 그럼 저랑 놀이공원에 놀러가요. 제가 쏠 테니 돈 걱정은 하지마시고요.

시간이 된다는 창현의 말.

주현은 안색이 밝아졌다. 그런 반면 말투는 조심스러웠다.

놀이공원 무척 비싼데…….

“그래도 돼……?”

-네. 따지고 보면 학교에 친구도 없고 아는 사람은 주현 누나밖에 없거든요. 이 불쌍한 중생이 부디 여신같은 누나를 에스코트 할 수 있게 기회를 주세요.

말하는 게 재미가 있다.

창현이 정도의 외모라면 친구는 얼마든지 사귈 수 있을 텐데.

게다가 얼마 전에 알았지만 공부도 엄청 잘한다고 한다.

중간고사 때 전교 3등을 했다고 했었지, 아마?

깐깐한 선생들이 수행평가 점수를 깎지 않았다면 능히 전교 1등도 문제가 없었을 거라 한다.

웬만한 연예인을 능가하는 외모와 뛰어난 두뇌. 그리고 전신에 흐릿하게 감도는 고독한 느낌까지.

창현은 자각하지 못하고 있지만 그를 좋아하는 여학생들은 꽤 많을 것이다.

그런 그가 이런 모습을 보이니 주현은 절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자신의 목소리에도 장난기가 절로 서린다.

“쿡쿡! 알았어. 그럼 불쌍한 중생을 구원해주도록 할게. 대신 에스코트는 확실하게 해줘야 해?”

-네. 그럼 연습 열심히 하시고, 제가 장소랑 시간은 문자로 보내드릴게요.

세심한 배려까지 해주니 고맙다.

그러다가 주현은 문득 근래 가수 현이 앨범 준비로 바쁘다는 걸 상기했다.

한 번 물어보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주현은 슬쩍 물음을 던졌다.

“응. 창현이도 열심히 해.”

혹시 자신의 물음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차렸을까? 자신이 창현을 의심하는 사실도?

주현은 창현의 대답을 기다리면서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

그때, 창현이 대답했다.

-네? 뭔진 몰라도 열심히 할게요. 그럼 일요일날 뵈요.

“으응.”

예상과는 너무 다른 대답 때문일까. 주현은 힘없이 대답했다.

그렇게 전화 통화는 끝났고, 주현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허탈감이 온몸을 휩쓸었다.

“하아! 내가 잘못 알고 있던 걸까.”

혹여 자신이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

주현은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걸 느꼈다. 만약 자신의 착각이라면 창현을 볼 면목이 없다.

더군다나 단 둘이 만나는 것 아닌가?

마치 데이트 같았기에 주현은 혼자 나가는 것이 꺼림칙했다. 아니, 꺼림칙하다기보다는 의심했다는 게 미안해서 단 둘이 볼 자신이 없었다.

‘일요일날 시간 되는 언니가 있을까?’

주현은 일요일에 시간이 되는 언니가 누가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제9장 데이트?




일요일 아침 일찍 일어난 창현은 곧장 씻은 뒤 아침을 먹고 집을 나섰다.

오늘은 주현과 놀이공원을 가기로 한 날이다.

처음 통화했을 때 단 둘이 간다는 사실에 내심 가슴이 두근거렸는데 약속을 잡은 당일 밤에 주현에게서 연락이 왔다. 자신과 한 멤버인 언니도 함께 가고 싶다고 말이다.

그에 창현은 왠지 모를 아쉬움을 느꼈지만 승낙했다.

‘주현 누나의 생일을 축하해주는 자리니깐. 상관없지.’

그렇게 생각한 창현은 옷을 차려 입으면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흐흐! 역시 성장기란 말이지.”

새학기가 시작될 당시 창현의 키가 163cm이었다.

학급에서 중간 축에도 못끼는 작은 키였다. 심지어 요즘 여자 애들보다 작아서 자존심을 상하게 하였다.

이런 작은 키가 창현은 불만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창현을 버리지 않았다.

약 세 달 사이 무려 2cm나 큰 것이다.

자주 입던 옷이 약간 작아져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키를 재봤는데 약 네 달 사이에 2cm나 큰 것이다. 이대로 큰다면 180cm까지 무난할 듯했다.

“이제 키로 놀림 받는 일은 없겠지.”

키가 큰 기념으로 새로 옷을 산 창현은 그걸 입으면서 미소를 지었다. 키가 큰 만큼 남자의 자존심도 한층 힘을 얻어 창현을 더욱 크게 보이게 하리라.

집을 나선 창현은 약속 장소로 향했다. 놀이 공원으로 가려면 셔틀버스를 타야했기에 셔틀버스가 올 시간을 맞춰야 했다.

시계를 본 창현은 자신이 조금 일찍 나온 걸 알 수 있었다.

“한 삼십 분 전에 도착하겠네. 너무 일찍 나왔어.”

약속 장소에 도착하자 주현에게 말한 시간보다 약 삼십 분 먼저 도착한 걸 알 수 있었다.

“시간이나 죽이지 뭐.”

벤치에 걸터앉은 창현은 공책을 편 뒤 곡의 콘티를 짠다.

음향총서에도 그렇고, 작곡의 기본에도 이렇게 나와있다.

뭐든지 경험하는 만큼 나온다고. 뛰어난 가르침을 받았기에 작곡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지만 창현에게 있어 유일하게 부족한 건 경험이었다. 그 경험치를 따라잡기 위해 많은 책을 읽곤 하지만 아직까지 부족한 건 사실이다. 몇몇 방면의 곡은 뛰어난 곡이 나오지만 정작 사랑이라던가 이별 같은 애절한 장르의 음악은 약세를 보인다.

차근차근 극복해야 할 문제였다. 중요한 건 오늘의 만남으로 창현에게 얻어질 것이 분명 있다는 것이다. 자각하는 것과 자각하지 못하는 것에 큰 차이가 있듯이 무언가를 얻으려는 자세가 되어 있으면 사소한 것에서도 큰 깨달음이 되어 찾아온다.

곡의 콘티를 짠답시고 제법 거창하게 자세를 잡았지만 이내 창현은 공책을 접는다.

“에휴. 오늘은 될 것도 안 되나보네.”

약 이십 분 정도가 지났을까.

창현은 저 멀리서 두 소녀가 이곳으로 오는 걸 볼 수 있었다.

음공을 익히면서 청각이 비약적으로 발달 했지만 시각도 제법 괜찮았다.

살짝 눈을 크게 뜨고 시력을 집중시키니, 두 소녀 중 한 사람이 주현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창현은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녀들에게 다가갔다.

주현은 멀리서 다가오는 창현을 보고 설마 하다가 이내 그의 모습을 식별할 수 있게 되자 반가운 마음에 손을 흔든다. 혼자였다면 머뭇거렸을 테지만 든든한 지원군(?)이 옆에 있었다.

창현은 먼저 주현에게 인사를 하였다.

“오랜만이에요, 주현 누나. 아직 약속 시간이 남았는데 일찍 나와주셨네요.”

그 말에 주현은 시간을 확인하더니 웃음을 지어보인다.

“별로 일찍은 아닌데 뭘. 그나저나 일찍 나온 것 같은데 많이 기다렸어?”

이십 분 정도 기다렸지만 창현은 고개를 저었다.

“아, 별로 안 기다렸어요. 그런데 오늘 참 예쁘게 입고 나오셨네요.”

주현은 무릎 바로 위까지 오는 하얀색 주름치마와 분홍색 반팔 티를 입고 있었다. 귀여운 그녀의 외모와 무척 잘 어울렸다.

창현의 칭찬 탓인지 주현은 고개를 살짝 붉히며 감사의 인사를 건넨다.

“고, 고마워.”

“뭘요. 사실대로 말한 것뿐인데. 그런데 옆에 분은……?”

주현의 옆에 서 있는 소녀는 딱 달라붙어 골반과 각선미가 드러나는 청바지를 입고 있었고, 푸른색 블라우스로 시원한 이미지를 주고 있었다. 긴 머리를 늘어뜨리지 않고 틀어 올림으로서 드러난 목선도 무척 매력적이었다.

주현은 창현의 물음에 반응을 보이며 옆에 서 있는 사람을 소개하였다.

“아! 나와 같은 멤버에 속한 언니야. 이름은…….”

소개하려던 찰나, 소녀가 손을 들어 주현을 제지한다.

“내가 소개할게, 주현아.”

“언니가 원하시면…….”

주현이 한발자국 물러났고, 소녀가 창현에게 자기소개를 하였다.

“하이! 네가 창현? 내 이름은 스테파니야. 열여덟 살이고. 세 살 많으니 말 놔도 되지?”

자기소개를 하면서 살짝 눈웃음을 지어보이는데 무척 매력적이었다. 게다가 영어 발음을 하는 억양이 보통이 아니었다.

창현도 인사를 하였다.

“안녕하세요, 강창현입니다. 주현 누나 학교 후배고요. 저보다 나이가 많으니 말 편하게 당연히 편하게 하셔도 되요. 그런데 스테파니… 누나는 이름도 그렇고 영어 발음도 그렇고 미국에서 사셨나보네요? 발음이 예사롭지 않은데…….”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국에서 살다가 왔어. 보기보다 예리한데, 창현?”

그에 옆에 주현이 끼어들면서 핀잔을 준다.

“언니가 미국 이름으로 말하고 영어 발음을 많이 굴리니까 묻는 거잖아요. 게다가 스테파니가 뭐에요. 창현아, 언니는 한국 이름으로 황미영이니까 미영 누나라고 불러.”

원래 오늘 이 자리에 나오려고 했던 멤버는 총 셋이었다.

바로 태연과 유리, 미영이었다.

태연은 사적인 자리에서 만남으로써 창현의 만행(?)을 복수하고자 나오려 했던 것이고 유리는 첫 만남에서 창현이 무척 마음에 들었기에 나오려고 했다.

미영은 유리가 그렇게 극찬하는 창현에 대해 호기심을 갖고 나온 것이다.

결국 주현이 택한 것은 미영이었다. 태연과 유리도 함께 데리고 나올 수 있지만 그렇게 될 경우 창현이 느끼는 부담이 클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미영 언니도 조금 불안해. 창현이에게 호감을 갖고 있으면 아메리칸 스타일처럼 적극적으로 나설 것 같은데…….’

그래도 십중팔구 파이트를 벌일 태연이나 창현에 대해 이것저것 캐물을 유리보다 나을 거란 게 주현의 판단이었다.

주현이 자신의 모든 것을 폭로(?)하자 미영의 입이 삐죽 튀어나온다.

“이잉, 좀 멋지게 보이려고 했는데 막내가 방해하네.”

“투정도 참. 언니는 가끔 저보다 막내 같을 때가 있어요.”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보면서 창현이 웃음을 지었다. 스테파니… 아니, 미영이라 불리는 사람도 굉장히 좋은 사람 같았다.

한차례 주현과 티격태격한 미영이 주현을 일별하면서 창현에게 시선을 주었다.

“와! 유리가 극찬을 하더니 정말이네. 패션 감각도 있고. 비주얼도 뛰어난데. 창현이 넌 연예인 해볼 생각 없어? 하면 인기 많이 얻을 것 같은데.”

방금 만났음에도 편안하게 말을 건네오는 그녀의 친화력은 보통이 아닌 듯했다. 보통 급격하게 친한 척을 하면 일말의 거부감이라도 생기는데 말이다. 아무래도 선하면서 매력적인 눈웃음과 꾸밈없는 행동이 타인에게 친근감을 유도하는 듯했다.

창현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시켜준다면야 환영이지만 별다른 재주가 있어야지요.”

겸양의 뜻으로 말했는데, 주현이 곧장 반박했다.

“창현이 너 노래 잘하잖아. 그때 보니까 웬만한 가수 수준이던데…….”

수연, 윤아와 함께 만날 때 창현이 무아지경에 빠져 노래를 흥얼거리던 걸 떠올리며 한 말이다.

그때를 들고 나오면 창현은 난감해진다. 실수이기도 하거니와 묘하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주현에게 치명적인 증거를 제시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창현은 주현의 눈초리가 심상치 않다는 걸 느끼고는 재빨리 말을 바꿨다.

“하하! 노래라면 수백 번 듣고 수백 번 부르면 남들 정도는 해요. 하지만 누나들에게 내세울 정도는 아니에요. 일단 셔틀 버스를 타야 하니까 정류장으로 가요.”

“응, 그러자.”

미영은 창현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는지 옆에 붙어서 이것저것 이야기를 꺼낸다.

창현은 주현을 힐끗 보고는 살짝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미영과 대화를 이어나간다.

주현은 자신을 힐끗 바라보는 창현의 시선을 느끼고는 묘한 눈빛을 띠며 창현의 뒤를 따른다. 하지만 이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짓고는 이야기 대열에 합류한다.

잠시 후, 셔틀버스가 도착하였고, 세 사람은 그대로 탑승하여 목적지인 놀이공원으로 향했다.


셔틀버스에 탑승한 뒤 도란도란 이야기 꽃을 피우며 시간을 보내자 금세 놀이공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와! 놀이공원이다!”

“오랜만에 오네요. 놀이공원.”

미영과 주현은 오랜만에 놀이공원에 오는 탓인지 표정이 무척 밝았다.

그 모습에 창현은 피식 웃음을 지으며 표를 끊기 위해 줄을 섰다. 그리고 자유이용권 세 장을 구매하였다.

오랜만에 놀이공원에 온 탓에 자유로움을 만끽하며 즐기고 있던 주현은 창현이 내미는 자유이용권을 보고는 표정이 급변했다.

“왜 세 장 산거야. 한 장은 나랑 언니가 해결한다고 했잖아…….”

놀이공원의 자유이용권 가격은 무척 비쌌다.

커피 한 잔 사는 것과 달리 놀이공원 자유이용권의 가격은 웬만한 학생 한달 용돈에 비유될 만큼 고가였다.

“주현 누나 생일 기념으로 온 거잖아요. 그래서 조금 부담을 덜어드리려고 그런 건데…….”

창현은 예상 외로 과민 반응을 보이는 주현을 보며 말끝을 흐렸다. 괜히 돈 많다고 자랑한 것처럼 느껴졌을 뿐만 아니라 주현에게 부담을 준 듯한 기분이었다. 자신의 생각이 약간 짧았음을 느꼈다.

그런 창현의 모습에 주현은 황급히 손을 저어보였다.

“아, 아냐. 난 그저…….”

“…….”

창현과 주현 사이에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런 분위기를 타파한 것은 미영이었다.

미영은 조금 예민하게 반응했던 주현을 타박했다. 제3자인 그녀의 눈에 보기에는 창현이 조금 과도하게 주현을 배려한 것밖에 없었다.

“주현이 넌 왜 창현이의 호의를 거절하니? 이럴 때 해줄 말은 그런 게 아니라 당신은 매우 친절한 젠틀맨입니다! 이래야 하는 거야.”

미영의 말을 들은 주현은 자신이 조금 과민반응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미안해, 창현아.”

창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그 또한 자신이 너무 앞서나갔다는 걸 깨달았다.

“후! 아니에요. 제가 너무 제 생각만 했나봐요.”

“그, 그런 게 아냐. 난 그저…….”

주현은 약간 딱딱해진 창현의 태도에 안절부절 못했다.

가수 현이라고 생각되는 의심 탓일까.

한순간 감정이 격하게 변했고, 그로 인해 필요 이상의 반응을 보인 자신의 잘못이었다.

지금 주현에게 무엇보다 참을 수 없는 건 조금이나마 변한 창현의 태도였다.

‘창현이는 그저 날 배려한 건데 내가…….’

자신에 대한 자책은 실망으로 이어졌고, 주현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창현은 물론 미영마저도 당황했다.

“어, 어?”

“주현아! 왜 그래!”

“아니, 아니에요.”

두 사람의 반응에 주현은 눈물을 스윽 훔친다.

창현은 주현에 눈물까지 흘릴 줄 몰랐기에 당황한 채 말한다.

“제, 제가 실수했다면 사과할게요.”

“아냐. 내가 잘못한 거야. 창현이는 순수한 호의로 그런 건데…….”

“후우!”

자신을 자책하는 주현의 모습에 창현이 나직이 숨을 내쉰다. 그리고 양손을 뻗어 주현의 양어깨를 붙잡고는 주현과 시선을 마주한다.

나이답지 않게 차분한 눈동자와 마주하게 된 주현.

섬세한 조각상 같은 창현의 얼굴과 마주하게 되자 주현은 눈물을 흘리는 것조차 잊은 채 하염없이 창현을 바라보게 되었다.

쿵! 쿵!

거세게 뛰는 심장.

창현은 주현과 눈을 마주한 채 강한 의지를 담아 말한다.

“누나가 미안해 하지 않으셔도 되요. 누나의 기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제 잘못이 크니까. 오늘은 누나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이렇게 나온 거에요. 그러니 눈물보다는 웃음이 어울리죠. 누나는 웃을 때 더 예쁘고요.”

“창현아…….”

“그러니 웃으세요. 알았죠?”

“으응.”

강한 의지가 담긴 창현의 말에 결국 눈물을 그치고 고개를 끄덕이는 주현이었다. 코와 코가 맞닿을 정도로 가깝게 얼굴을 마주한 탓인지 주현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미영이 감탄했다.

“와우! 창현이 여자 위로하는 게 능숙하네? 방금 전에 카리스마 있었어. 여자 좀 사귀어 봤나봐?”

장난스러운 미영의 말에 창현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사귀기는요. 이제 열다섯 살인데요? 이것저것 공부하기도 바빠요.”

“헤헹! 내가 보기엔 보통이 아니던데. 뭐, 그건 그렇다 쳐도 솔직히 나도 창현이 무리한 건 미안하거든. 그러니 점심은 우리가 대접하도록 할게.”

그러고 보니 지금 시간이 늦은 아침 시간이었기에 입장하고 놀이기구 한두 개 타다보면 점심시간이 될 것이다.

창현은 그런 식으로 하면 주현이 부담을 덜어낼 수 있을 것 같았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좋겠네요.”

창현이 승낙할 줄 알았는지 입가에 미소를 지은 미영이 자신있게 외쳤다.

“그럴 줄 알고 우리가 맛있는 점심을 싸왔지. 이른바 미영&주현 더블 디럭스 콤보 샌드위치랄까? 이거 누구도 얻어먹어보지 못한 귀한 음식이라고!”

“이름이 거창하네요.”

“원래 이름은 거창할수록 좋으니까. 자, 주현이도 진정한 것 같으니 안으로 들어가자고. 빨리. 고고!”

미영은 활달한 얼굴로 창현과 주현의 손을 잡아끌고는 입구로 전진하였다.

창현은 웃음을 지은 채 미영의 뒤를 따랐고, 주현도 순순히 미영에게 끌려갔다.

울적했다가 한순간 풀어진 터라 생각하지 못한 탓일까.

주현은 창현에게 충고를 한다는 걸 깜빡했다.

바로 미영이 말한 미영&주현 더블 디럭스 콤보 샌드위치의 정체에 대해 말이다.

창현은 모를 것이다.

주현의 이름이 함께 하긴 했지만 미영이 싸온 도시락은 오로지 그녀의 손만을 거친 필생의 역작이라는 것을 말이다.

이른 바 Made in 황미영이었다.


놀이공원에 들어선 세 사람은 가장 먼저 회전목마로 향했다.

창현은 왜 회전목마냐고 했더니, 글쎄 미영이 하는 말이 가관이었다.

“실컷 타려면 워밍업을 해줘야 하잖아.”

세상에 놀이기구를 타는데도 워밍업이 필요하다니, 그런 말은 처음 들어보는 창현이었다.

그렇게 하여 회전목마에 줄을 선 그들은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미영은 미국에서 살다가 왔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간혹 말하다가 틀린 발음이나 단어가 나오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창현은 웃어주면서 그녀의 틀린 부분을 수정해주었다.

매력적인 눈웃음과 이따금 보이는 엉뚱함은 그녀를 무척 친근하게 만들어주었다.

그녀는 외국에서 온 터라 힘들 때가 많다면서 창현에게 투정을 부리곤 하였다. 오늘 아침에 처음 만난 거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발전이었다.

놀이공원 입장 때 눈물을 흘렸던 주현도 처음에는 미적미적하면서 잘 끼지 못했지만 창현의 배려와 미영 특유의 친근함으로 빠르게 분위기를 회복하고 이야기 대열에 합류할 수 있었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주현은 자신이 무언가를 잊고 있다는 걸 느꼈지만 잘 생각나지 않았기에 뒷전으로 밀어둔 채 지금 이 분위기를 즐겼다.

아침시간대이고 짜릿한 무언가가 없던 탓일까.

약 삼십여 분을 기다리자 셋은 회전목마를 탈 수 있었고, 짜릿하거나 스릴 넘치는 그런 것은 없었지만 오랜만에 어깨에 짊어졌던 것들에서 해방된 느낌을 받으며 즐길 수 있었다.

뒤이어 두 개의 놀이기구를 탄 그들은 시간을 확인하고는 어느덧 점심시간이 된 걸 알 수 있었다.

미영은 창현을 보며 감탄했다.

“창현이 너 대단하네? 보통 우리들끼리 놀이공원에 오면 막 몇 시간씩 기다리면서 타곤 했는데 별로 기다리지도 않고 놀이기구를 탔어.”

“인터넷을 보면 알 수 있어요. 몇 시부터 몇 시까지는 어떤 놀이기구에 사람이 많고, 어디는 사람이 없다는 걸 말이죠. 요즘은 그걸 조사하는 사람이 많은 덕택에 꽤 효용성이 줄어들었지만 그 틈새라고, 무난한 것들을 노리면 생각보다 큰 효과를 볼 수 있더라고요.”

“오! 멋지네. 그걸 다 조사해온 거야?”

창현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당연하죠. 오늘은 주현 누나의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모였는 걸요. 당연히 놀이공원에 왔으면 그걸 즐겨야 하고, 그러려면 최대한 많은 놀이기구를 타야죠.”

창현의 말에 미영과 주현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사소한 행동으로도 사람을 파악할 수 있다고, 그녀들은 창현의 말에서 그의 배려심과 준비성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자신의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이런 수고를 했다는 생각에 주현의 얼굴에 감동이 생겼다.

미영은 조사를 해왔다는데 궁금증을 느꼈는지 창현에게 물었다.

“오늘 몇 개까지 탈 수 있을까?”

“점심 먹고 부지런히 타면 한 열 개 정도요. 중간에 제가 세운 계획이 어긋나면 한두 개 줄어들 수도 있고요.”

“놀이공원 와서 그 정도 타면 대 성공이지. 안 그래, 주현?”

주현은 고개를 크게 끄덕여 보인다.

“물론이에요. 저번에 언니들이랑 왔을 땐 다섯 개 밖에 못 타고 집에 돌아가야만 했으니까…….”

두 사람의 대화를 보며 창현이 미소를 짓곤 그녀들을 이끌었다.

“그럼 점심 먹으러 가요. 점심을 먹고 부지런히 움직여야 하니까요.”

“오케이! 렛츠 고. 어서 가자. 내가 준비한 미영&주현 더블 디럭스 콤보 샌드위치 먹으러!”

미영이 활달한 얼굴로 외치며 창현의 뒤를 바짝 따랐다.

“……! 아!”

미소를 지은 채 미영의 뒤를 따르려던 주현은 미영의 외침을 듣고는 멈칫한다. 미영의 외침에 자신이 무엇을 잊고 있었는지 상기한 것이다.

주현은 불안한 표정을 지으면서 미영을 따라갔다.

얼굴에 한가득 고민을 담은 채 말이다.

“저거 먹으면 창현이 죽을지도 모르는데…….”

그 말을 창현은 듣지 못했다.

극도로 발달된 그의 청각이 정작 필요할 땐 도움이 되지 않는 순간이었다.


세 사람이 도착한 것은 식당가였다. 이곳은 놀러온 사람들이 싸온 도시락이나 식당, 패스트푸드점에서 산 음식을 가지고 와 먹을 수 있는 곳이었다.

빈 테이블에 자리한 세 사람은 짐을 풀었다.

특히 미영은 무척 밝은 얼굴로 가방을 내려놓았는데, 즐거워하는 그녀의 모습에 창현은 자신도 즐거워지는 걸 느꼈다.

“자, 창현이랑 주현이 많이 먹어. 내가 오늘 놀러간다고 해서 실력 좀 발휘했어.”

자리에 앉자마자 음식이 담긴 도시락 통을 꺼내놓는 미영. 그 통의 숫자가 꽤 많았다.

창현은 미영을 보면서 말했다.

“미영 누나 정말 부지런하네요. 아침 일찍 일어나서 이렇게 많은 음식을 하다니.”

음식을 하면서 생전 처음 듣는 칭찬(?)에 미영이 밝게 웃었다.

“응! 나 음식하는 거 좋아해. 창현이가 그걸 알아주니 정말 고맙네.”

“기대되네요. 음식하는 거 좋아하는 사람 치고 못하는 사람은 거의 없던데…….”

눈앞에 거의없는 사람 중 하나가 존재한다는 걸 창현은 모르는 듯했다.

주현은 차마 창현에게 진실을 알려줄 용기가 나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현 누나 갑자기 왜 일어나시는 거에요?”

“응? 아 그게…….”

창현의 물음에 주현은 준비해두었던 말을 하였다.

“미영 언니가 싸온 양이 조금 부족해서 좀 더 사오려고. 그리고 음료수도 없으니까 사올게.”

주현의 말에 미영이 반응했다.

“응? 주현아. 음식이라면 세 사람이 먹을 만…….”

미영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은 채 주현이 재빨리 자리를 떴다.

그런 주현의 모습에 미영이 서운한 표정을 짓는다.

“이잉. 주현이는 항상 이런다니깐.”

창현은 주현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미영은 그물에 완전히 걸려든 창현을 보면서 매력적인 눈웃음을 지으며 외쳤다.

“자! 이게 바로 미영&주현 스페셜 디럭스 콤보랍니다. 개봉박두!”

미영이 도시락 뚜껑을 힘차게 열었고, 그걸 보면서 창현이 감탄사를 흘렸다.

“오!”

주현의 반응에 조금 의심을 했는데 모양새는 제법 훌륭했다.

‘괜히 의심했네.’

제법 안정감 있는 모양새를 유지하고 있으니 음식 내부에서 무언가 화학적 작용(?)만 하지 않았다면 괜찮을 것이다.

미영은 창현의 반응에 얼굴에 화색을 띠며 준비해온 음료수를 내밀었다.

“어때, 괜찮지? 자! 창현이 주려고 음료수도 가지고 왔어.”

집에서 얼린 탓인지 음료수는 무척 차가웠다.

창현은 미영의 세심한 배려에 미소를 지으며 음료수를 받았다.

“미영 누나는 참 세심하네요. 음료수까지 준비해주시고. 누나가 준비하실 줄 알았으면 주현 누나가 음료수 사러가게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그렇지? 주현이가 날 좀 얕보는 경향이 있어.”

미영은 창현의 말에 용기를 얻은 탓인지 두 어깨를 쭉 피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이 맛있는 음식을 다른 멤버들은 인정해주지 않는데 오로지 창현만이 인정해주는 것 같아 더욱 그러했다.

기분 좋은 김에 미영은 서비스 정신을 팍팍 살렸다.

그녀는 샌드위치 하나를 집고는 창현에게 내민다.

“자! 아- 해봐. 내가 먹여줄게.”

“아, 아니에요. 제가 먹을게요.”

창현은 그녀의 과도한 친절에 양손을 저으며 거절한다.

하지만 미영도 순순히 물러서지 않는다.

“누나가 호의를 베풀 때 받아들여요. 자! 아- 해봐.”

순순히 물러날 기색이 아니다.

창현은 미영을 말리는 걸 포기하고는 입을 벌렸다.

“아-!”

“에잇!”

그런 창현의 입에 샌드위치를 넣는 미영.

미영&주현 스페셜 디럭스 콤보 샌드위치-라 쓰고 Made by 미영이라 읽는다.-를 창현의 입에 쏙 넣었다.

입에 샌드위치가 들어오자 창현은 그걸 우물우물 씹기 시작했다.//

처음에 느껴진 맛은 빵 특유의 말랑함과 양상추, 햄의 맛이었다.

부드럽게 씹히는 것이 우유식빵인 듯했고, 양상추의 아삭함은 신선도가 제법 살아있는 듯하다. 햄 또한 그리 나쁜 맛이 아니다.

입에 샌드위치를 넣은 창현은 우물우물 씹으면서 나름대로 평가를 한다.

‘괜찮은데?’

대부분 홀로 식사를 해결하면서 쌓인 내공은 만만치 않다. 창현은 미영의 샌드위치가 제법 먹을만 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것은 페이크에 불과했다.

먹을만 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엄습해오는 시큼한 맛.

순간 후각을 잃게 할 만큼 강렬한 향기였다.

맛있게 샌드위치를 씹던 창현의 표정이 급변했다.

‘우욱!’

순간 입에 들어있는 음식을 토해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낀 창현.

그래도 아직은 버틸만하다.

눈앞에 태연하게 샌드위치를 먹는 미영이 있지 않은가?

그녀도 아무렇지도 않게 먹고 있는데 자신이 무너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게 쓸데없는 자존심을 발휘하며 먹고있을 때였다.

씹으면 씹을수록 배어나오는 시큼한 맛은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다 치자.

뒤이어 밀려오는 달콤 짭자름한 맛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 맛이 어느 정도 조화되면 말도 안 한다. 맛 하나하나가 제각각의 개성을 살리며 창현에게 엄습하고 있었다.

‘어, 어떻게 이런 맛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창현은 자신조차도 먹기 벅찬 샌드위치를 태연하게 먹고있는 미영이 그렇게 대단해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어떤 미각 구조를 가지고 있으면 저걸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걸까.

창현은 진지하게 미영의 미각 구조에 대해 고민하면서 가까스로 샌드위치를 삼키는데 성공했다. 그제야 왜 주현이 자리를 피했는지 알 수 있었다.

샌드위치 한 조각을 먹는데 성공했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다.

미영은 정말 음식하는 걸 즐거워하는지 샌드위치를 도시락통에 꽉꽉 채워서 무려 세 통이나 싸온 것이다.

한통에 최소 열 개는 되어 보인다. 문제는 세 통이니 총 삼십조각이란 뜻. 주현이 먹을 리는 없거니와 미영은 한통만 먹을 생각인지 두 통은 창현에게 밀어둔 상태였다.

그렇다면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너무 뻔했다.

자신 보더러 두 통을 다 먹으라는 것이다.

무려 이십 조각에 달하는 샌드위치를 말이다.

창현은 순간 엄습하는 공포에 어질어질하는 정신을 가까스로 붙잡으며 미영에게 물었다.

“미영 누나. 여기에 도대체 무얼 넣으신 거에요?”

“샌드위치에?”

미영은 한 조각을 아무렇지도 않게 먹은 뒤 다음 걸 집어서 먹고 있다. 도저히 인간으로 생각되지 않는 미각을 지니고 있는 미영이었다.

창현의 물음에 미영은 샌드위치를 씹으며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우물우물 삼키고는 대답한다.

“보통 샌드위치처럼 햄 넣고 양상추 넣고 토마토도 넣었어. 그리고 마요네즈로 간을 했지.”

‘그게 보통 정석으로 아는데…….’

창현이 알고 싶은 건 그게 아니었다.

분명 샌드위치에는 마요네즈 이외의 첨가물이 있었다. 안 그럼 도저히 이런 맛을 창조해낼 수 없다.

뒤이어 미영의 말이 흘러나왔다.

“그런데 한조각 먹어보니 맛이 이상하더라고. 그래서 약간 톡 쏘는 맛을 가미하려고 식초를 조금 넣었고…….”

‘아주 부어넣은 듯 싶은데요?’

따져묻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그리고 달달한 맛을 위해 설탕을 넣고 혹시 너무 달아질까봐 맛소금도 넣었고…….”

뒤이어 줄줄이 흘러나오는 첨가물들은 창현의 얼굴을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다.

어떻게 샌드위치에 후추가 들어갈 것이며 와사비는 또 왜 들어가는가!

하나하나 말하는 걸 들어보니 아예 집안에 있는 모든 조미료는 다 넣은 듯했다.

친절하게 설명해준 미영은 창현에게 내민 도시락 통을 보고는 말한다.

“창현이에게 준 게 한 조각 부족한 거네. 그것 때문에 물어본 거였어? 내 거 한 조각 줄까?”

그러면서 미영이 자신의 샌드위치를 하나 건네려는 걸 보고는 창현이 황급히 손을 저었다.

“아, 아니에요. 미영 누나도 배고프실 테니 드세요. 전 이걸로도 충분해요.”

충분히 마지막을 불사르기에 충분한 양이다.

지금만큼은 저 도시락 통에 샌드위치 하나가 적다는 게 이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창현은 떨리는 손으로 샌드위치를 잡아들었다.

그리고 두 눈을 질끈 감고 입에 집어넣었다.

창현에게 주어진 샌드위치 조각은 총 열아홉 개.

미영의 친절한 배려로 마지막 한조각까지 꼭꼭 씹어먹어야 했던 창현은 이미 하얗게 불태운 후였다.

‘다시는 미영 누나의 음식을 먹지 않으리.’

얻은 교훈에 비해 잃은 것이 너무 많던 순간이었다.


야속하게도 주현은 창현이 모든 샌드위치를 먹고나서야 나타났다.

창현은 주현이 미영의 음식 실력을 알고 있음에도 자신에게 알려주지 않은 걸 알고 말았다.

“주현 누나 너무해요. 어떻게 절 버리고…….”

미영의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태어나서 여태껏 흘린 눈물보다 많은 양을 마음 속으로 흘린 창현은 주현을 원망했다.

주현은 창현의 원망에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 그게 난…….”

설마하니 창현이 미영이 싸온 모든 샌드위치를 다 먹을 줄 몰랐다.

혹여 자신에게 불똥이 튈까 멀리서 지켜보다가 창현이 축 늘어지기에 다 끝난 줄 알고 다가왔는데 창현은 몸도 생각하지 않은 채 미영이 싸온 모든 샌드위치를 먹은 상태였다.

‘언니들도 한 조각이면 나가 떨어지는 샌드위치를 다 먹다니…….’

미안한 표정을 지으면서 한편으로는 창현이 존경스러운 주현이었다.

설마하니 미영 특제 샌드위치를 다 먹을 줄이야.

충분히 기네스 감이라고 생각했다.

미영은 주현이 오자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처음으로 자신의 음식을 다 먹어주는 상대가 나타나서 그런지 그녀의 기분은 한층 고조되어 있었다.

“주현이 왔어? 점심은? 내거 조금 줄까?”

“아, 아니에요. 전 저기서 간단하게 해결하고 왔어요.”

불똥을 피하기 위해 저쪽으로 가서 이미 식사를 해결하고 온 주현이었다.

미영은 그런 주현의 대답에 입술을 삐죽였다.

“칫! 너희들은 내 음식을 싫어하니까 어쩔 수 없지 뭐. 그래도 난 상관없어. 우리 창현이가 내 음식의 참맛을 알아줬거든. 난 앞으로 창현이한테만 음식을 해줄 거야.”

“허억!”

미영의 말에 사색이 되는 창현이었다.

여기서 발목 잡히면 지금보다 더욱 끔찍해질 수 있었기에 창현은 필사적으로 말했다.

“하, 하! 굳이 그러시지 않으셔도 되요, 누나. 누나는 연습하시느라 바쁘시잖아요? 전 그저 마음으로 충분해요.”

창현의 말에 미영은 아쉬워했다.

“그래? 으음! 하기야 연습하고 그러면 조금 바쁘니까… 어쩔 수 없지. 나중에 내가 시간 나면 음식 많이 해줄게.”

“네, 그때를 기다릴게요. 하하!”

미영이 시간 남게 되어 자신을 찾으면 반드시 도망치리라 결심하는 창현이었다.

그렇게 질풍노도와 같은 점심식사가 끝나고, 세 사람은 다시 놀이기구를 타러 다녔다.

창현의 가이드가 딱딱 들어맞아 얼마 기다리지 않고 그녀들은 놀이기구를 탈 수 있었다. 두 시간 동안 다섯 개나 되는 놀이기구를 탔기에 그녀들의 얼굴에는 화색이 감돌았다.

그리고 다음 놀이기구를 타기 위해 자리를 옮기던 중이었다.

미영이 놀이공원 위에 걸린 팜플렛을 보고는 말한다.

“으응? 노래자랑? 이거 오늘인데?”

“노래자랑이요?”

창현은 미영이 가리키는 곳을 보며 묻는다.

“응! 노래자랑한다고 하네. 상은… 에잇! 가서 보면 되겠지. 주현아, 창현아. 우리 노래자랑하는 거 가보자. 참가 되면 참가도 해보고.”

“참가는 좀 그렇고… 놀이기구 많이 탔으니 쉴 겸해서 구경가요.”

창현은 시간을 보면서 말했다.

“네 시부터니까 두 시간 정도 여유 있는데요? 놀이기구 한두 개 더 타고 구경 갈까요?”

“그러자! 이번에는 뭐 타러 갈 거야?”

“범퍼카요.”

“와우! 베리 굿. 어서 가자.”

범퍼카라는 말에 의욕이 넘쳐서는 창현을 질질 끌고 가는 미영이었다.

정작 그녀는 길을 몰랐다.


인기가 있는 놀이기구인 탓인지 범퍼카에는 사람이 무척 많았다.

생각보다 오랜 시간 기다린 끝에 범퍼카를 탈 수 있었고, 창현을 일방적으로 다굴 놓은 미영과 주현은 상쾌한 얼굴로 장소를 벗어나고 있었다.

“역시 부딪치는 맛이 좋아!”

“그러게요. 너무 재밌어요.”

즐거운 두 소녀에 비해 창현은 침울했다.

“누나들은 재밌었겠죠. 후우!”

처음부터 구석에 몰려서 끝날 때까지 박치기만 당했으니 오죽하겠는가.

“호호! 그럴 수도 있지. 너무 속 좁게 그러지마. 자! 어서 가보자.”

거침없이 창현의 팔을 잡은 미영을 보며 창현은 한숨을 짧게 내쉬고는 걸음을 옮겼다.

그들이 향한 곳은 노래자랑이 펼쳐지는 곳이다.

약 십 분여가 걸려서 무대가 있는 곳에 도착하였다.

노래자랑한다는 걸 알고 있는지 사람들이 군데군데 모이는 게 보였다.

미영이 창현의 팔을 잡아 끌었다.

“저기 봐! 아직 접수하는 중인가봐. 우리도 참가하자!”

아직 접수를 받고 있는 접수처를 보며 미영이 말했다.

그 말에 창현이 반색했다.

“참가는 무슨. 누나들끼리 참가하세요. 전 안 돼요.”

“에이, 그러지 말고 같이 해보자. 나랑 주현이 요즘 라샤의 <Yesterday> 연습한단 말이야. 창현이가 현 파트 좀 해줘. 어때, 주현아?”

하필 라샤의 노래가 나오고 현이 관련된 게 나왔다.

주현의 눈초리가 묘해진다.

“…좋을 것 같네요.”

창현은 그런 주현의 눈초리에 손을 저었다.

“전 필요 없다니까요. 게다가 저런 거 무대 크기로 봐선 상품도 별 거 아닐 거에요. 그러니 그냥 구경만 해요.”

“상품? 그러고 보니 상품이 뭐지. 아, 저기 적혀있네. 1등은 15회 자유이용권이랑… 케로로 가방?”

“……!”

미영의 말에 고개가 광속으로 돌아가는 주현.

그 모습에 창현이 아차했다. 이 누나 케로로 광팬이었지.

아니나 다를까. 주현의 손이 번개같이 미영과 창현의 팔을 잡는다.

그리고 탐욕(?)이 가득한 눈으로 강한 의지를 실어 말한다.

“당장 참가해요. 알았죠?”//

박력이 느껴지는 주현의 말에 미영은 한발자국 뒤로 물러나면서 말한다.

“난 원래 하려고 했었어…….”

그러면서 슬쩍 창현을 바라본다. 타겟을 창현으로 바꾸려는 것이다.

“……!”

강렬한 의지가 느껴지는 주현의 눈에 한 발자국 물러서는 창현.

용기를 가지고 말한다.

“누나들 둘이 해도 충분히…….”

강하게 말하면 부러질언정 구부러지지 않는 창현의 성격을 파악한 탓일까.

주현의 눈에 탐욕이 사라지고 본래 순진무구함이 들어찬다.

그리고 양손을 모으고 간절한 음성으로 말한다.

“부탁해. 같이 참석해줘. 나 저 케로로 인형 꼭 갖고 싶어.”

“으윽!”

소녀의 순진무구한 눈동자는 엄청난 파괴력을 가지고 있었다.

저 눈빛을 정면으로 받고 어찌 평정을 유지할까.

창현이 핀치라는 걸 알아차린 탓일까.

주현이 다시 한 번 부탁한다.

“부탁해. 내 생일 기념으로 온 거잖아. 그것도 힘들어? 같이 노래 한곡 해주면 되는데…….”

이렇게까지 부탁하면 정말 거절하기 힘들다.

창현은 자신의 정체를 의심하는 눈빛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어쩌랴, 백기를 드는 수밖에.

“아, 알았어요. 할게요. 후우!”

“와! 그럼 창현이도 함께 하는 거네?”

미영이 기뻐한다. 그리고 주현과 창현을 잡아끌고는 접수처로 향한다.

그리고 당당하게 라샤의 <Yesterday>를 적는다.

그걸 보면서 창현은 저질렀다고 생각하면서 길게 한숨을 내쉰다.

“하아!”

“그런데 연습을 해봐야 하지 않아? 아무 연습도 없이 하는 건 조금 힘들 것 같은데.”

“그것도 그러네요. 연습을 해봐야 할 것 같아요. 아!”

미영의 말에 수긍하던 주현이 무언가 떠오른 듯 눈을 크게 뜨더니 창현을 바라본다.

갑작스러운 시선에 창현이 입을 열었다.

“왜, 왜요?”

“창현아, 너 <Yesterday> MR 있지 않아?”

주현의 말에 창현이 움찔한다. MP3에 당연히 있다. 하지만 평범한 소년이 노래면 몰라도 MR을 가지고 있을 리 만무하다.

창현은 시치미를 뗐다.

“네? 제가 왜 그게 있겠어요.”

그렇게 말하는 창현의 모습이 눈에 띄게 수상해보였다.

주현은 물론 미영도 눈을 가늘게 뜬다.

“정말이야? 가만히 있었으면 몰라도 왠지 수상한데?”

“…있을 거에요. 아마도.”

확신에 찬 주현의 목소리를 듣자 창현은 더 이상 발뺌을 할 수 없었다.

“후우! 맞아요, 있어요. 즐겨 듣는 노래고, 연습을 하려고 MR을 넣어놨거든요. 그때 윤아 누나 만날 때 제가 부르는 거 보고 아신 거죠?”

창현은 변명거리를 만들기 위해 예전에 길거리에서 원맨쇼를 했던 부끄러운 경험을 떠올리고는 핑계처럼 말했다.

그에 주현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으응.”

솔직히 창현의 말을 듣고서야 기억이 났다.

주현이 창현에게 MR이 있다고 말한 것은 다른 의미로 했던 거니까.

그런데 창현의 말을 듣는 순간 주현은 그 말이 제법 그럴듯하다고 여겨졌다.

“음! 제법 뒷 번호니까 연습할 시간이 있겠네요.”

창현은 핸드폰을 열어서 <Yesterday>의 MR을 켰다. MP3은 외부 스피커 기능이 없어서 핸드폰에 저장된 걸로 재생한 것이다.

♩♪♬ ♩♪♬

노래가 흘러나오자 감정을 다잡고는 노래를 시작하는 미영과 주현.

차분하게 부르는 모습을 보니 평소 자주 불러본 듯했다.

라샤의 멤버가 세 명이라 파트가 드문드문 겹칠 거라 생각했는데 각자의 컨셉을 잘 잡아 부르는 걸 보면 말이다.

표정 연기도 제법 뛰어났고, 가창력도 괜찮았다.

창현은 목소리를 약간 바꾸고 기교를 줄였다. 최선을 다하는 두 사람에게는 미안하지만 창현은 여기서 정체를 들키고 싶지 않았다.

적절하게 조절했지만 창현의 노래는 훌륭했고, 미영은 그런 창현의 노래 실력에 감탄했다.

“노래 잘하네, 창현이. 가수 해도 되겠어.”

하지만 주현은 뭔가 이상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바로는 창현이 절대 저런 실력이 아닐 텐데…….

“부족하죠. 괜히 누나들 무대를 망치는 게 아닐까 모르겠네요.”

미영이 고개를 저었다.

“노노! 그 정도면 베리 굿. 나랑 주현이는 평소 라샤 안무도 연습했으니까 그것까지 곁들이면 1등은 우리 것!”

“그래요? 으음!”

노래를 맞춰보고, 안무 이야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사이 노래자랑이 시작되었다.

즉석으로 벌어진 이벤트 탓일까.

창현의 생각보다 참가자들의 실력이 썩 뛰어나지 않았다.

점점 자신들의 순서가 다가오면서 참가자들이 선보이는 무대에 주현이 중얼거렸다.

“…케로로는 내 거네.”

케로로에 대한 집착은 그녀에게 강렬한 자신감을 심어다주었다.

어떻게 보면 그저 그런 노래자랑에 지나지 않았으나 사회자가 재치있게 잘 진행하였기에 모여드는 사람은 점점 많아졌다.

창현 일행은 뒤에서 세 번째 순서다.

한 차례씩 무대가 끝나고 마침내 무대에 나갈 차례가 되었다.

사회자가 참가자 명단을 보고는 외친다.

“참가번호 15번! 아리따운 두 여성과 귀여운 소년의 무대입니다. 라샤의 <Yesterday>!"

자신들의 차례가 되자 미영과 주현은 힘차게 기합을 외쳤다.

“파이팅!”

“케로로!”

“…파이팅.”


처음 무대 위에 나간 것은 두 소녀였다.

파릇하고 예쁜 소녀들의 등장에 열광하는 관객들.

제법 자세를 잡은 뒤 음악이 흘러나오자 그에 맞게 안무를 한다.

이제까지 보였던 무대와는 무언가 달랐다.

미영과 주현은 라샤가 라이브를 할 때 선보이는 안무를 그대로 재현하였고, 때로는 수줍음이 담긴, 때로는 설레는 감정이 담긴 표정까지도 완벽하게 소화하고 있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시작된 노래. 안무도 안무지만 노래 실력도 뛰어났다.

전에 부른 사람들과는 비교가 힘들 정도로 고퀄리티 수준의 무대였다. 안무도 잘 맞아떨어졌고, 표정 연기나 가창력에도 흠잡을 데가 없다.

두 소녀의 발랄하고 귀여운 외모는 그런 실력을 한층 더 돋보이게 하고 있었다.

미영의 친근한 눈웃음은 라샤의 세룬을 표현하는 듯했고, 주현의 앙증맞다가도 한순간 도도한 표정을 짓는 표정은 시린의 양면성을 가진 매력을 잘 표현해냈다. 그리고 때로는 울상을 짓는 듯한 표정을, 때로는 새침한 표정을 짓는 두 소녀의 표정 연기는 미란의 표정을 완벽에 가깝게 소화해내고 있었다.

사람들은 두 소녀가 부르는 <Yesterday>에 열광하면서도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저렇게 잘하고 있는데 현의 파트는 누가 맡은 거지?

짧은 부분이지만 <Yesterday>에서 현의 파트가 맡는 부분은 매우 크다.

노래 자체가 남녀간의 달콤한 회상을 주제로 한 것이니 여성 파트가 아무리 뛰어나도 남성 파트에서 죽어버리면 전체적인 노래의 질을 떨어뜨리는 요소가 될 수 있다.

마침내 여성 파트가 모두 끝나고 현의 파트가 왔다.

지금까지는 너무나 훌륭한 무대였기에 사람들은 환호하면서 긴장감 어린 표정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한 사람에게 주목한다.


창현은 열성적으로 무대를 선보인 두 누나를 보면서 감탄했다.

“후우! 역시 가수가 꿈이라 그런지 무대 위에서는 전혀 다르네.”

무대 아래에서 그녀들의 모습을 말하라고 하면 또래 소녀들과 별다를 게 없는 평범한 소녀였다.

하지만 무대 위에 오른 그녀들은 달랐다.

오랜 시간 연습을 해온 듯한 안무와 표정 연기, 그리고 완급을 조절하여 적절하게 펼쳐지는 가창력까지.

무대 위에 오른 그녀들을 보면서 창현은 그간 자신이 보지 못했던 그녀들의 숨겨진 단면을 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저렇게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니 가슴 속에서 무언가 꿈틀하는 게 느껴진다.

자신의 가슴에 손을 가져가본다.

두근거리는 심장의 박동.

어느덧 자신의 차례가 다가오고 있다.

창현은 침착하게 호흡을 골랐다.

최선을 다하여 최고의 반응을 이끌어낸 그녀들의 무대다.

“…최선을 안할 수가 없잖아.”

관객의 시선을 받으면서 창현이 모습을 드러냈다.


현의 파트를 맡게 되면서 창현은 많은 고민을 해야만 했다.

본래 목소리로, 최고의 가창력을 뽑아내면 십중팔구 자신의 정체가 들킬 것임이 분명했다.

그렇다고 최선을 다한 누나들에게 건성으로 하는 모습을 보일 수 없었다. 그것은 누나들이 보여준 노력과 열정을 배반하는 꼴이 되니까.

그래서 창현은 여태까지 사용하지 않았던 음향총서의 무공 중 하나를 사용했다. 바로 천 개의 음을 낼 수 있다 하여 천음변성록(天音變聲錄)이라 불리는 무공의 발현이었다.

천음변성록은 그리 특별할 게 없는 무공이다. 다만 그 효능은 목소리를 자유자재로 완벽하게 바꿀 수 있다. 얼굴을 가리고 목소리만 들으면 절대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완벽한 음성변조가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단점도 존재한다. 지속적인 내공 소모를 한다는 점과 음향총서에 수록된 기교를 충분히 펼쳐내지 못한다는 점이다.

현은 노래를 할 때 자신이 익힌 모든 음향총서의 정화를 쏟아내곤 한다. 목소리의 떨림, 음의 강약 등 노래를 부르는데 수십 가지 방법이 존재하고, 수십 가지 기교가 존재한다. 그것 하나가 어긋날 경우 노래는 판이하게 달라지는데, 창현은 천음변성록을 펼친 후 부를 생각이었다.

기교나 가창력에서 현보다 떨어지겠지만 전혀 새로운 노래가 탄생하리라.

많은 관객들의 시선을 받으며 창현의 노래가 시작되었다.

가수 현의 목소리는 매끄럽고 스무스한 목소리다. 그래서 듣는 사람의 귀에 거부감없이 흘러들어오고, 그 음은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때로는 다급하게, 차분하게 만들어준다. 즉, 목소리로서 듣는 사람의 감정을 자연스럽게 어떤 방향으로 유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창현의 목소리는 가수 현일 때 내던 목소리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현보다 우선 목소리가 약간 묵직하다. 그리고 부드럽기보다는 거친 느낌이 든다랄까. 마치 가수 현이 가성으로 부른 것 같다면 지금의 창현은 낮은 진성으로 부르는 듯했다.

그랬기에 관객들이 느끼는 느낌은 달랐다.

하지만 그들은 창현의 노래에 숨겨진 에너지를 느낄 수 있었다.

음도 다르고 가창력도 달랐지만 자신만의 음으로 노래를 풀어나가는 창현의 감정은 생생하게 전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노래의 스타트를 끊으면서 창현은 천천히 미영과 주현에게 다가간다. 그리고 주현의 머리 끝을 살짝 매만지며 노래를 해나간다.

“……!”

갑작스런 창현의 행동에 대경한 표정을 짓는 주현.

그런 주현에게 창현이 살짝 눈을 찡긋한다.

‘아!’

창현의 행동이 가수 현이 한 번 보여주었던 안무란 걸 깨달은 주현. 그녀는 자신이 과민반응을 했다는 생각에 절로 얼굴이 붉어졌다.

그 모습을 보고 창현이 웃는다.

주현과 일별한 창현이 이번에는 미영에게 향한다.

창현의 행동이 대담하다고 느꼈던 것일까?

미영은 눈을 크게 뜬 채 창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을 동그랗게 뜬 그녀의 모습이 무척 귀여워서 창현은 피식 웃음을 지으며 주현에게 보일 때와 마찬가지로 눈을 찡긋한다.

확실히 주현과 미영은 달랐다.

대경한 주현과 달리 미영은 곧장 창현의 행동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차리고는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창현은 노래를 부르며 미영에게 안무를 선보이고 그 다음 주현에게 향하여 자신의 파트를 끝맺는다. 현과는 다른 창법이지만 보는 이에게 강렬한 여운을 남겨주는 순간이었다.

어떠한 노래든 간에 자신만의 창법이 존재한다.

지금 노래를 부르면서 창현은 그 점을 깨달을 수 있었다.

창현이 물러나자 미영과 주현이 다시 노래를 부르며 안무를 선보인다.

처음 시작할 때보다 훨씬 많은 관객들이 그녀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들의 뜨거운 열정이, 실력이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목을 잡아끈 것이다.

이윽고 노래가 끝났을 때,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성이 터져 나왔다.

짝짝짝짝짝!

와아아아!

잘한다! 멋지다! 예쁘다!

무대는 성공리에 끝을 맺었다.

미영과 주현은 이러한 환호를 받아보는 게 처음인지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무대를 벗어났다.

창현은 그런 미영과 주현을 보며 박수를 쳐주었다.

“잘했어요. 오늘 보니 누나들이 왜 가수를 꿈꾸는 지 알겠네요.”

“우리 잘했어?”

미영이 아직 흥분이 가시지 않은 표정으로 물었다.

창현이 고개를 끄덕인다.

“물론이죠. 관객들의 반응 못봤어요? 최고였어요.”

“아직도 그 많은 사람들이 박수를 쳐줬다는 게 믿기지가 않아.”

많은 사람들의 환호 속에서 무대 위에 서본 적이 없는 주현이 어색한 표정으로 말한다.

창현은 그런 주현을 보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아직 세 팀 정도가 더 남았기에 창현 등은 먼저 흥분을 가라앉히고 관객석 한쪽에 슬쩍 자리했다. 하지만 나머지 팀들은 창현 등과 같은 임팩트를 주지 못했다. 오히려 그들로 인하여 묻히는 감이 없지않아 있었다.

그런 무대를 냉정한 눈으로 바라보면서 창현은 주현에게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케로로 타겠네요. 축하해요, 누나.”

“응, 고마워. 그리고 참가해달라고 억지 부려서 미안해.”

그녀는 창현에게 참가하자고 했던 과정을 떠올리며 사과했다. 그리고 방금 전 노래를 듣고 그녀의 의심은 많이 희석된 상태였다.

창현이 정말 현이라면 그런 목소리로, 그런 가창력을 뽐낼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비슷한 나이와 라샤의 앨범, 그리고 천재적인 보컬 트레이닝으로 인하여 자신이 오해를 하고 있다고 주현은 생각했다.

내내 한줄기 의심이 깃들어있던 주현의 시선에 그러한 것이 느껴지지 않자 창현이 웃음을 지었다.

“하하, 누나 생일 선물인데요, 뭐.”

‘후! 이제 넘긴 건가.’

창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쉴 때였다.

저쪽에서 삼십대 초반의 남자가 시선을 두리번하다가 창현을 발견하고는 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자신들을 주시하는 시선에 창현이 그와 시선을 마주하니, 그가 흠칫하다가 창현에게 다가온다.

그는 창현의 앞에 서며 입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방금 전 <Yesterday>를 부르신 분 맞지요?”

“네. 그렇습니다만.”

창현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러자 그가 품속에서 명함을 꺼내며 창현에게 건넸다.

“전 YG엔터테인먼트의 이민석 대리라고 합니다. 혹시 가수를 하실 생각 없으십니까?”

“예?”

이민석이라 밝힌 사람의 말에 창현은 물론 곁에 있던 미영과 주현도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창현은 황당했다.

갑자기 스카웃이라니?

게다가 YG엔터테인먼트라면 창현도 익히 알고 있는 곳이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멤버인 양현석이 세운 회사이자 실력파 가수들을 양성한다는 기치아래 여러 실력파 가수들을 양성하는 곳이 아니던가? 대표적으로 지누션이 있었다.

대량의 연습생을 받아들이고 수 년간의 연습 끝에 그룹을 조성하여 데뷔시키는 SM엔터테인먼트와 달리 YG엔터테인먼트는 흔히 말하는 YG패밀리라는 말이 있을 만큼 극소수로 개개인의 능력을 확실히 증진시키는데 중점을 둔 것이다.

비주얼이 SM이라면 실력은 YG라고 할 만큼 실력파 가수들을 양성하려는 곳이 바로 YG엔터테인먼트다.

그런 곳에서 난데없이 스카웃이라니?

워낙 뜻밖의 말을 들은 터라 창현은 당혹감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갑자기 가수가 되볼 생각이 없냐니.”

창현의 물음에 이민석이라 밝힌 사내가 빙그레 미소를 짓는다.

“갑작스러운 제 말에 당혹스러우실 수도 있습니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갑자기 어떤 사람이 찾아와 가수가 될 생각이 없냐고 하면 기쁘다기보단 당혹스럽고 의심이 들 테니까요.”

‘이 사람 영업은 영 아닌가보네.’

창현은 초반부터 모든 걸 밝히고 이야기를 시작하는 민석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 또한 사업가의 아들이었기에 영업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대략적으로 잘 알고 있다. 영업을 할 경우 자신의 패를 보이는 것은 미숙한 사람이나 하는 짓이다.

그런 창현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민석은 자신의 말을 이어나갔다.

“사실 저도 무척 의외였습니다. 오늘 이곳에 온 까닭은 연인과 데이트를 하기 위해서였거든요. 그런데 이곳에서 노래자랑을 한다는 말에 호기심에 오게 되었습니다. 일종의 직업병이죠. 하하! 하지만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실망스럽더군요. 게릴라성이라고 하나 동네 장기자랑 수준에서 벗어나질 못했으니 말입니다. 솔직히 지루해서 그냥 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당신들의 무대를 보게 된 것입니다.”

민석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라샤의 <Yesterday> 안무와 노래를 완벽하게 소화하는 실력! 춤과 노래를 동시에 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고 있기에 그 가능성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현의 파트를 독창적인 자신만의 가창력으로 완벽하게 부른…….”

“강창현입니다.”

창현은 자신을 가리키며 뭐라 지칭하려고 하는데 자신의 이름을 모른다는 걸 알고는 자기소개를 하였다.

그에 민석의 표정이 밝아지며 고개를 끄덕인다.

“창현! 당신의 가창력에 감동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당신이라면 능히 뛰어난 가수가 되어 대한민국을 뛰어넘어 외국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요. 창현씨가 저희 YG로 오시면 능히 날개를 달아드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의를 한 것입니다.”

눈을 빛내며 말하는 민석의 칭찬이 고마웠지만 창현은 정중하게 거절했다.

“제의는 감사하지만 받아들이지 못하겠네요.”

“어, 어째서…….”

별로 고민하지도 않고 거절하는 창현의 모습에 민석이 충격 받은 표정을 짓는다.

십대 치고 가수 제의를 받은 사람 중에 창현과 같은 반응을 보인 사람은 맹세코 없었다.

대부분 자신의 재능을 알아주었다는 것에 기뻐하고, 치밀어오르는 희열을 삭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던 것이다.

그만큼 십대들에게 있어 가수란 직업은 매력적인 것이었다.

벙찐 민석의 표정에 창현은 엷은 미소를 띤 채 말한다.

“그 까닭은 간단합니다. 저를 제외한 여기 두분은 SM엔터테인먼트의 연습생이기 때문입니다.”

창현의 말에 민석의 표정이 흐려지며 신음이 흘러나온다.

“으음! SM……."

간만에 다이아몬드 원석을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헌데 SM엔터테인먼트 소속이라니.

과연 대단한 그룹들을 연거푸 배출하는 곳인 만큼 숨겨진 원석도 많다고 생각하는 민석이었다.

‘아쉽군! 그럼 포기해야 하는 건가.’

막 체념이 얼굴에 서리려던 찰나, 민석은 창현의 말을 곱씹고는 무언가 깨달은 표정을 지었다.

“응? 그렇다는 건 저 두 분만 SM엔터테인먼트 소속이라는 것 아닙니까?”

창현은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습니다만…….”

“두 여성분이 SM소속이라면 아쉽게도 포기할 수밖에 없지만 창현씨는 다르지 않습니까? 계약한 곳이 없다는 건 언제든지 계약할 수 있다는 뜻이고요.”

“하지만 전 가수를 할 생각이…….”

창현이 두 손을 저었지만 민석은 창현을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에게 말한다.

“천천히 생각 해보십시오. 창현씨라면 능히 아시아를 위진시키는 가수가 될 수 있을 겁니다. 고민해보시고, 마음이 동하시면 연락주십시오. 그럼 이만.”

민석은 길게 말해봤자 역효과란 걸 깨닫고는 재빨리 자리를 떴다.

그 모습을 보며 창현은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지었다.

“뭐지.”

“뭐긴. 창현이 널 스카웃 하려는 거잖아.”

미영이 팔꿈치로 창현을 푹 찌른다.

“부러워라. 스카웃 제의도 받고, 이제 가수가 되는 건가?”

“창현이 가수 될 거야?

주현이 창현을 보며 묻는다.

만약 창현이 가수를 하겠다고 하면 그녀는 YG말고 SM을 권유할 생각이다. 더 큰 가수가 되고 그런 건 모른다. 단지 창현이 가수를 하겠다고 하면 같은 소속사에 있고 싶어서이다.

이미 그녀는 창현이 가수 현이라는 의심을 깨끗하게 접어놓고 있었다.

주현의 물음에 창현이 빙그레 미소를 지어보인다.

“글쎄요. 생각 좀 해봐야겠네요. 사실 생각이 없는데, 저렇게까지 매달리니 조금 미안하기도 하고요.”

미영이 눈웃음을 지으며 창현에게 은근하게 말한다.

“잘 생각해봐. 나중에 가수 돼서 잘 되면 우리 모르는 척하기 없고?”

“하하! 아직 결정도 안했는 걸요. 천천히 생각해볼게요.”

대답을 얼버무리며 창현은 다시 무대 위에 집중했고, 당사자인 창현이 별 반응을 보이지 않자 그녀들도 마지막 공연을 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날 우승을 한 것은 당연히 창현 일행이었다.

창현은 주현의 선물이라면서 케로로 가방을 건넸고, 멤버들과 한 번 놀러오라면서 자유이용권을 미영에게 건넸다.

두 사람은 너무 기뻐하였고, 창현은 그런 두 사람으로부터 단단히 점수를 딸 수 있었다.

무엇보다 창현에게 있어 가장 큰 소득이 두 가지나 있었다.

한 가지는 주현의 의심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며,

또 다른 한 가지는 미영의 음식을 다시는 먹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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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마음을 울리는 음악 시즌2 제1화 +10 15.04.17 7,376 95 10쪽
37 ▲▲▲▲▲시즌2 시작!▲▲▲▲▲ +5 15.04.17 5,425 65 1쪽
36 마음을 울리는 음악 106장-108장 +8 15.04.16 6,415 106 230쪽
35 마음을 울리는 음악 103장-105장 +1 15.04.16 4,245 82 3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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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마음을 울리는 음악 37장-39장 +2 15.04.16 9,615 224 397쪽
12 마음을 울리는 음악 34장-36장 +8 15.04.16 9,524 189 322쪽
11 마음을 울리는 음악 31장-33장 +8 15.04.16 10,356 261 345쪽
10 마음을 울리는 음악 28장-30장 +5 15.04.16 10,660 260 277쪽
9 마음을 울리는 음악 25장-27장 +7 15.04.16 11,041 267 233쪽
8 마음을 울리는 음악 22장-24장 +4 15.04.16 10,924 261 198쪽
7 마음을 울리는 음악 19장-21장 +4 15.04.16 11,493 270 216쪽
6 마음을 울리는 음악 16장-18장 +5 15.04.16 11,544 242 163쪽
5 마음을 울리는 음악 13장-15장 +5 15.04.16 14,536 297 237쪽
4 마음을 울리는 음악 10장-12장 +8 15.04.16 13,739 352 171쪽
» 마음을 울리는 음악 7장-9장 +10 15.04.16 14,560 362 142쪽
2 마음을 울리는 음악 4장-6장 +11 15.04.16 16,843 421 120쪽
1 마음을 울리는 음악 프롤로그-3장 +47 15.04.16 29,910 545 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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