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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구에구 님의 서재입니다.

천군

웹소설 > 일반연재 > 대체역사, 전쟁·밀리터리

無明에구
작품등록일 :
2013.06.18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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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7.22 2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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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7.1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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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쪽

천군2부

DUMMY

모나코 공국 망통

슈레키가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도시 망통에 들어와 올리브 무역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장사를 시작한 지 8년이 넘었다. 그는 올리브 기름과 향신료만을 취급했다. 남부 프랑스와 모나코 주변에서 생산되는 올리브 기름을 수집하여 터키나 이태리에 팔고 그곳에서 향신료를 사다 유럽에 되파는 무역에 종사하는 슈레키는 망통에서 알부자로 속해 있었다. 그는 그리말디 왕가와 친분까지 두터웠다. 모나코는 스페인의 보호령으로 지정되어 있긴 하지만 전통적으로 제노바 그리말디 왕가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다.

"출항 준비가 다 되었다는 연락입니다."

빨강과 하얀색 마름모 꼴 휘장이 비스듬이 열리며 비서가 슈레키 집무실에 들어왔다. 항구에 있는 배에게서 연락이 온 모양이었다. 지중해 재해권이 유럽에 넘어가면서 그에게는 득보다 실이 많았다. 항로가 열리면서 다른 유럽 상인들의 도전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동안 터키에 있는 친구들의 비호아래 거의 독점적으로 지중해를 이용한 반면 다른 유럽 상인들은 안전상의 이유로 배 띄우길 꺼려했다. 하지만 재해권이 유럽에 있는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번에 출항하는 배에게 각별히 조심하라고 하게. 아무래도 또 한번 해전이 벌어질 것 같아. 들리는 소리들이 심상치 않아."

"네. 선장들에게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그리고 프랑스에서 인편으로 편지가 왔습니다."

"프랑스 ? 프랑스에 아는 사람이 없는데 누가 보냈지 !"

머리를 가웃뚱 거리며 슈레키가 편지를 받아 들었다. 납작한 것이 지인이 보낸 일상적인 편지라기보다는 무슨 초청장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겉봉투를 열고 안을 살펴보던 슈레키가 비서에게 손짓을 했다.

"그만 나가보게"

겉봉투에서 꺼낸 내용물은 봉인이 되어 있었다. 창과 방패 문장이 새겨진 봉인을 본 슈레키는 다시 겉봉투에 밀어넣고 눈을 감았다. 과거 10년 동안의 자신의 행적을 더듬어 가던 슈레키가 심호흡을 하고 봉인을 뜯었다. 반절로 접혀진 종이 안에는 동굴에 햇빛이 비치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지평선에 반쯤 얼굴을 내민 태양에서 뿜어져 나오는 밝은 빛이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그 중 한 줄기가 산 중턱에 있는 동굴 속으로 화살처럼 파고 들었다. 산 꼭대기에 올라선 사람이 대지에 찾아온 새로운 새벽을 감상하고 있었고, 그림 하단에는 MMMDLIX MCCXXXV라는 붉은색 표식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암호같은 표식을 살피던 슈레키는 책상 위에 백지를 올려놓고 뭔가를 끌적이기 시작했다.


단기3959년 영국 런던 이스턴 엔드

인구 40만이 몰려들어 북적대는 런던 동쪽 끝, 이스턴 엔드에는 주변 농촌지역에서 몰려든 사람들이 하루 일거리를 찾아 거리를 어슬렁 거렸다. 런던 중심부 서쪽에는 프랑스 신교도로 대표되는 부유한 이주민과 상공인들 그리고 귀족들이 자리를 잡은 반면, 동쪽은 그 반대 계층들이 다닥다닥 부대끼며 살고 있었다.

작달막하고 누더기 옷을 입고 있는, 술에 찌들어 사는 주정뱅이들과 창녀들을 언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거리가 바로 이스트 엔드 화이트 체프 거리였다. 그 거리에서 생활한 지 5년이나 지나서 인지, 휴즈는 잘 정돈된 웨스턴 거리보다 이곳 이스턴 거리가 정겹게 느껴졌다.

"안녕하세요 신부님?"

"물론이죠. 캐더린은 잘 지내죠 ?"

"네. 신부님의 기도 덕분입니다."

"다 하나님의 은총이십니다."

5년 전 처음 이곳에 왔을 때, 휴즈는 길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웃는 얼굴로 무조건 인사를 했다. 그러길 몇 달을 하자, 이제는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고 인사를 해왔다. 못살고 힘없는 자들인 그들은 병이 들어도 마땅히 갈 데가 없었다. 정주법을 어기고 런던에 들어온 농민들은 때때로 런던 경찰들에게 붙들려 작신 두들겨 맞고 신대륙으로 강제이주를 당하곤 했다. 세상에 악이 받친 그들에게 다가가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어쨌든 휴즈는 이제 이곳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해져 있었다.

"신부님 ? 신부님 ?"

휴즈는 헐레벌떡 달려오는 찰리가 좀 더 가까이 오길 기다렸다. 찰리는 이제 10살이 남짓으로 그 자신조차 나이를 몰랐다. 부모에게 버려진 찰리를 키우고 있는 휴즈였기에 찰리가 가까이 다가오자, 두 팔을 벌려 아이를 안으려다 멈칫했다.

"그런데 손에 들고 있는 게 뭐니 ?"

"이거요 ? 쥐잖아요."

찰리가 오른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 꼬랑지만을 묶어 거꾸로 들려진 쥐는 언뜻 보기에도 다섯 마리는 됨 직 했다. 빈민가에서는 배고픈 사람들이 남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쥐를 잡아 먹기도 했기에, 특이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휴즈는 찰리가 쥐를 어떻게 잡았는지를 묻고 있었다.

"누가 쥐인지 모른다더냐 ? 어디서 난 거냐 ?"

"저쪽에 가득해요."

찰리가 가리킨 곳은 화이트 체프거리가 끝나는 지점이었다. 그곳은 공터나 다름없는 곳으로 쥐들이 살기에는 안성맞춤이었기에 쥐들이 많이 살았다. 그렇다 해도 찰리에게 잡힐만한 쥐들이 아니었다. 그런대도 찰리 손에는 다섯 마리가 들려져 있었다.

"찰리가 이걸 잡았구나 ? 어떻게 잡은 거니 ? 참 대단하다."

휴즈의 칭찬에 찰리가 머리를 긁적거렸다.

"잡은 게 아니라 주웠어요. 여기저기 널려 있더라구요 !"

"뭐라고 ? 쥐들이 널려있다고 ?"

찰리의 말에 깜짝 놀란 휴즈가 찰리 손에 들려져 있는 쥐들을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쥐 입 주위에 거품을 흘린 흔적이 있었고, 어떤 놈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하얀 거품이 그대로 있었다.

"그 쥐들을 내려놓아라. 어서"

갑자기 휴즈가 고함을 치자, 찰리가 멀뚱멀뚱 휴즈를 쳐다보았다.

"내려 놓으라니까 ? 빨리"

칭찬을 받을 줄 알았던 찰리는 휴즈가 고함을 쳐대자, 손아귀에서 힘을 뺐다. 꼬랑지들이 손바닥을 스치며 빠져나가, 땅바닥에 팽개쳐졌다. 휴즈의 돌변에 두 눈에 눈물이 글썽였다.

"옷을 다 벗어라. 어서"

혹시 하는 마음에 휴즈는 일단 옷을 다 벗게 했다. 옷이라고 보기에도 민망한 넝마를 훌러덩 벗은 찰리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어물쩡거렸다.

"두 손으로 꼭 잡고 있어라. 가자. 어디에 쥐들이 있었는지."

휴즈의 목소리가 많이 누그러들었다. 찰리를 앞세우고 화이트 체프 거리 끝 자락까지 걸어간 휴즈는 공터 주변에서 죽어있는 수많은 쥐들을 보고 다리에 힘이 탁 풀렸다. 공터를 뒤로 하고 뛰다시피해서 천막 교회에 도착한 휴즈는 구석에 쳐 박혀 있는 나무 상자의 자물쇠에 열쇠를 끼웠다. 상자 뚜껑을 열고 상자 안에 손을 집어넣은 휴즈가 뭔가를 꺼내 들었다.

"우리 목욕이나 하러 가자"

어느새 휴즈의 손에는 사각형 비누와 유리병이 들려 있었다. 유리병을 겹겹이 싼 하얀 종이가 벗겨지자 '농용산' 이라는 글씨가 보였다. 찰리는 휴즈가 건네준 비누를 손에 꼭 쥐고 휴즈를 뒤따라갔다. 가끔 강에서 신부님과 목욕을 하긴 했지만, 오늘은 특별한 목욕이 될 것 같았다. 휴즈가 향하는 곳은 강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신부님. 그런데 왜 그러시는 거예요 ?"

"왜 ? 아까 버려 둔 쥐가 생각나서 그러는 거니 ?"

"네. "

"잊어 먹어라. 그것보다 더 한 일이 앞으로 다가올 것 같구나. 신의 처벌이 !"

정확히 사흘 후 재앙이 시작되었다. 고열에 시달리며 피부가 검은 반점으로 물들어가며 사람들이 죽어갔다. 빈민가 이스턴 엔드 화이트 체프에서 시작된 페스트는 순식간에 런던 전체로 퍼져나갔다. 마주치는 눈빛만으로도 전염된다고 믿을 정도로 극도의 공포를 안겨준 페스트는 런던을 텅 비게 만들었다.


영국 스코틀랜드 북해 연안 에든버러

런던에서 페스트가 창궐하자, 찰스 1세는 부랴부랴 에든버러로 피신해 왔다. 스코틀랜드 왕국의 수도인 에든버러에는 스코틀랜드 왕궁 홀리루드하우스 궁전이 있다. 스코틀랜드는 찰스 1세에게 친가와 같았다. 그의 아버지 제임스 1세는 원래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6세였지만 엘리자베스 여왕이 죽자 혈통에 따라 잉글랜드 왕을 물려받았다. 그의 아들인 찰스 1세 역시 자연스럽게 양국을 통치하고 있었다.

"런던은 어떻습니까 ?"

찰스 1세가 시거에 불을 붙이며 들어온 윌리엄 총리에게 물었다. 페스트에 특효라고 알려진 담배는 요즘 없어서 못 팔 정도로 귀했다. 평소에 담배를 즐기지 않던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로 와서는 거의 입에 달고 살았다.

"점점 수그러 들고 있습니다. 일부 안전 지대에서는 시민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외곽에 거주했던 지방 영주들이나 귀족들은 자신의 영지로 되돌아갔고, 현재는 발병지역에 대한 통제가 강화되고 있습니다."

런던 시장의 요청과 찰스 1세의 명령에 따라 왕실 군대가 페스트 발병 지역을 외부와 격리시키기 시작하면서 페스트가 점점 그 기세를 누그러트리는 것 처럼 보였다. 최초 발병지로 지목된 이스턴 엔드 지역은 궁수들과 창기병들에 의해 외부로 나가는 모든 길이 봉쇄되었다.

"진작에 다 쫓아냈어야 했어. 그런 거렁뱅이 놈들이 언제나 문제였지. 이번 일이 진정되면 다 잡아다 버지니아로 다 보내버려. 유태인보다 더 유해한 놈들이야."

찰스 1세는 자신의 도시에 무턱대고 들어와 음식을 축내고, 거리를 더럽히고, 온갖 병들을 퍼트리는 지저분한 빈민자들을 발가락에 낀 때 만큼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찰스 1세에게 신민이 아니라 소각하고 매립해야 될 도시의 쓰레기들이었다.

"알겠습니다. 겨울이 오면 진정될 것이니 너무 심려 마십시오."

"그래야지. 이번 일이 대륙에 알려졌을 텐데, 유럽연합의 움직임이 어떻습니까 ?"

"템즈강이 봉쇄되었습니다. 그리고 템즈강 상하류에서 출항한 배들은 하역항에서 불가피하게 억류당하고 있습니다만 다른 지역은 별 특이사항이 없습니다. 다만 유럽 연합군 사령부 이전이 지체될 것으로 보입니다. 그라나다 공격도 늦춰질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스웨덴 여왕이 신성로마제국에게 전쟁 배상금으로 황금 십만 파운드를 지불하거나 발렌슈타인의 영지를 스웨덴에 넘기라는 요구를 해왔습니다."

"그 젓 비린내 나는 여자가 ? 아버지가 죽고 나서 실성을 했군. 허허 참 내. 스웨덴이 무슨 힘이 있다고 ? 대한제국에 빌붙어서 연명하기도 급급한 여자가 다시 군대를 조직할 힘이 있을 리 없잖아 ?그래, 신성로마제국에서는 이 일을 어떻게 처리했다던가 ?

찰스 1세는 기가 찬 듯 웃었다. 구스타프와 함께 발틱해를 건너온 군대는 아직도 스웨덴으로 복귀하길 거부하고 있었다. 실질적으로 그들은 스웨덴 왕가와 결별을 선언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버킹엄의 얼굴은 심각했다.

"어린 아이의 치기로 여기는 듯 합니다. 하지만 폐하 ? 스웨덴 뒤에 누가 있는가를 생각한다면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스웨덴 뒤에 ?"

"그렇습니다. 지금 신성로마제국 뿐만 아니라 전 유럽이 악마의 손아귀에 놓여진 바와 진배 없습니다. 호시탐탐 기회를 보고 있는 그 놈들은 실오라기만한 빌미만 있어도 공격해 올 놈들입니다."

스웨덴 뒤에는 대한제국이 있었고, 여왕은 스웨덴 재상으로 대한제국인을 임명했다. 여왕의 남편 역시 대한제국에서 강요했다는 소식이 파다했다. 지금은 폴란드 왕이 된 바쟈는 대한제국의 꼭두각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고, 실제로 폴란드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대한제국이었다.

"알고 있네. 하지만 우린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아. 그 동안 충분한 준비를 해왔어. 이제 받은 만큼 돌려주기만 하면 되는 거지. 페르디난트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전쟁은 신성로마제국 영토에서 끝나게 될 거네. 그것도 우리의 승리로."

"지당하신 말씀이시옵니다. 폐하."

"배상금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올해도 대한제국에서 배상금을 요구했지 ?"

"네. 올해는 이만 파운드를 내라더군요. 아주 웃기는 놈들입니다. 이제 그만 포기할 때도 되었는데 말입니다. 해마다 500파운드씩 오르더니 요새는 자기 마음대로입니다. 이번 회담에서 어떤 식으로든 결론이 날 것입니다."

3948년 말라카와 자카르타 주변에서 있었던 유럽 연합함대와 대한제국간에 벌어진 해전을 승리로 이끈 대한제국은 당시 해전에 참전했던 상대국들에게 해마다 배상금을 요구하는 문서를 보내고 있었다. 황금 오천파운드에서 시작한 배상금은 시간이 흐르면서 2만 파운드까지 이자에 이자가 붙어 있었고, 스페인과 네덜란드는 그보다 더 많은 배상금을 지불하도록 협박 문서를 보내곤 했다. 각국은 초기에는 나라간 해전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해적들의 싸움으로 몰고 갔으나 언제부터인가 대꾸도 하지 않고 있었다. 당연히 각국은 대한제국의 문서를 정식으로 접수하지도 않았다.


대명부 광주

대한제국 최대의 곡창 지대인 주장강 유역에서 걷어드린 쌀이 운하를 타고 광주로 모여들었다. 5만톤을 저장할 수 있는 곡물창고 수십 개가 항구 곡물 부두에 줄을 지어 건설되어 있었고, 하루 종일 마차와 소형 조운선으로 운반된 곡물이 창고에 들어갔다. 곡물창고에서 부두까지 이어진 컨베이어 벨트는 시간당 천톤의 곡물을 부두에 접안 된 화물선에 쏟아 부었다. 선적 작업이 있을 때면 나락들이 부딪히며 만들어낸 작은 먼지들이 부두 전체를 뿌옇게 만들었다.

"마리포 ? 작업 중단."

갑판에 나가있는 작업반장에게서 작업 중단 지시가 확성기를 통해 들렸다. 선적기를 움직이던 마리포 기사가 컨베이어로 연결되는 동력선 손잡이를 아래로 내리자, 기계가 멈춰 섰다.

"3번 창으로 이동"

총 4개의 화물창을 가지고 있는 태평양 상선 소속 화물선 부산호 화물창이 꽉 차갔다. 이제 3번창에 1/3만 쏟아 부으면, 오늘 일은 끝이 났다. 입과 코를 막고 있는 먼지마개를 갈아 끼던 마리포가 선적기를 4번창에서 3번창으로 이동시켰다.

"그만. 천천히 부어."

작업반장은 허리를 굽혀 선창 안을 들여다보며 직접 작업을 통제했다. 끝부분이라 과선적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지만, 쓰고 있는 안경에 먼지가 달라붙어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멈춰"

먼지를 가라앉길 기다리던 일항사와 작업반장이 다시 선창 안을 들여다 보았다.

"저쪽에 조금 더 실을 수 있겠는데요 ?"

많이 실으면 실을수록 이익이기에 일항사는 측면으로 여유공간이 보이자 작업반장에게 조금 더 실을 것을 요구했다.

"더 실어봤자, 50톤도 안됩니다. 그냥 출항하시죠 ?"

작업반장이 일항사가 가르키는 곳에서 눈길을 떼었다. 50톤 더 실으려다 과선적이라도 되면, 문제가 복잡해지기 때문에 작업반장은 일항사의 동의에 아랑곳 않고 바로 선적기를 밖으로 뺐다. 아쉬운 입맛을 다시던 일항사가 손짓을 하자, 선원들이 다가와 선창을 닫기 시작했다.

"호주까지 가시려면 고생 좀 하겠습니다."

선적 서류에 서명을 마친 작업반장은 목적지가 호주 북부 담피아로 되어 있는 선화증권을 선장에게 내밀었다. 선주를 대신해 모든 권한을 위임 받은 선장은 증권 문구를 꼼꼼이 살펴보더니 맨 아래 서명란에 도장과 함께 서명을 하고 건네주었다.

"늘 지나는 길인데요. 파나마로 가는 것보다는 훨씬 수월합니다. 가끔 이상한 배들이 나타나서 집적대는 것 빼고는 말입니다."

선장이 말한 이상한 배란 동남아에서 활동하고 있는 해적들을 말하고 있었다. 뱃길이 알려지면서 아직까지도 남아있는 해적들이 화물선을 공격하곤 했지만, 선장은 지금껏 피해다운 피해를 본 적은 없었다. 자카르타 함대와 해적들간의 숨바꼭질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었지만, 대한제국 해군성에서 이곳 해역에 관심을 보이면서 해적들이 대거 토벌되고 있었다.

"안전항해 하세요 ? 전 그만 하선합니다."

부산호에서 사다리를 타고 부두로 내려가자, 마리포를 비롯한 기사들이 기계들을 대충 손보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루 일과가 끝났으니 어디 가서 한잔 할 기세였다.

'저 놈들이 또 ! 오늘은 무슨 핑계를 댄다.'

꼼생이로 소문난 작업반장이 기사들을 못 본 체하고 사무실로 들어가려하자, 마리포가 능글맞게 웃으며 뒤따라왔다.

"반장님. 제가 좋은 곳을 봐 뒀는데 말입니다. 꼭 반장님을 모시고 싶습니다. 오늘 괜찮으시죠 ?"

"어. 그래 ? 그런데 어쩌나 ? 오늘 밤에 약속이 있는데 ? 손님이 오시기로 했거든. 다음에 하지. 오늘은 자네들끼리 뭉치라구. 난 그럼."

능청스럽게 거짓말을 하며 작업반장이 기사들을 따돌리려 했다.

"참 아쉽네요. 제가 잘 아는 아줌마가 중매를 부탁하길래 반장님을 소개시켜주려 했는데 안되겠네요. 그럼 누굴 소개시켜 준다."

반장의 최대 약점을 살살 건드리며 마리포가 눈치를 살폈다. 의무 기간을 올해로 마치는 반장은 내년에는 쥬신 대륙으로 갈 거라고 했다. 올해로 24살인 반장은 쥬신 대륙으로 가기 전에 결혼을 할 생각이었지만 마땅한 혼처가 없어서 시간만 죽이고 있었다. 그가 결혼을 서두르는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대한제국에서는 조선인이 조선인이 아닌 사람과 결혼을 하면 적잖은 혜택을 주고 있었다. 민족간 융화를 목적으로 신설된 이족결혼장려기금에서 장려금이 나올 뿐 아니라, 자식들에게는 학교 입학 우선권이 주어지기도 했다. 대명부에서 사는 동안 세금 감면혜택도 받을 수 있었다. 그 외에도 잡다한 많은 혜택이 주어졌다.

사실 시집오겠다던 처녀는 많았다. 대명부 어느 지방에서나 그랬듯이 조선인은 조선인 자체만으로 최고의 신랑감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지금껏 만나본 처녀들은 하나같이 반장의 맘에 들지 않았다. 마리포의 말에 마음이 동한 반장이 마리포를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확실하다니까요 ? 심성도 착하고, 중학교까지 나왔답니다. 지금은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습니다. 집안이 넉넉한 것은 아니지만, 똑똑하다는 평도 인근에서는 자자하고요 !"

"이름이 뭔데 ?"

마리포는 반장이 관심을 보이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정도 관심을 보인다면, 오늘은 모처럼 반장 주머니에서 나온 돈으로 술을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임청영 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

"임청영 ? 아니 !"

"그럼 오늘 술은 반장님이 사시는 겁니다 ?"

"손님이 오시기로 했다니까 ?"

"에이 왜 이러세요 ? 다 안다니까요. 손님이 오시면 기다리시겠네요. 이런 일이 흔한 줄 아십니까 ?"

마리포가 옷 소매를 붙잡으며 반장과 실랑이를 벌였다. 반장은 못이기는 척 하며 은근 슬쩍 넘어갔다.

"그럼 그럴까 ? 먼저 가서 기다리라고. 내 이것만 처리하고 금새 뒤따라감세. 그리고 손님에게도 기별을 넣어야지."

"그럼 그곳으로 오시는 겁니다?"

"알았다니까 ? 내가 언제 간다고 하고 안간 적 있었나 ?"

반장은 꼼생이긴 하지만 자신이 뱉은 말은 꼭 지켰다. 반장이 사무실로 들어가자, 마리포는 동료들과 함께 항상 가던 술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대부분이 한족 출신인 그들 역시 반장처럼 의무기간을 채우고 있는 중이었다. 징병검사에서 불합격을 받은 그들은 군대 입대 대신 5년간 노력봉사를 하고 있었다.

"군대를 갔어야 하는데. 아이고 내 신세야 !"

마리포는 술잔을 받아 들고 신세한탄을 했다. 같은 동네에서 자란 불알친구 이소찬은 요행히 징병검사에서 합격해서 군대에 들어갔다. 지난 여름, 멋진 제복에 모자를 쓰고 온갖 선물을 들고 고향을 찾은 이소찬의 모습이 떠올랐다. 벽돌 3개를 쌓아놓은 모양의 계급장을 단 이소찬은 동네에서 10일을 머물고 부대에 복귀했지만, 동네 처녀의 마음을 온통 흔들어 놓았다. 어린아이들은 하루종일 이소찬 꽁무니를 쫓아다니며 이야기를 해달라며 졸랐다. 그런 아이들의 성화에 못 이겨 자리를 잡고 이야기 보따리를 풀라치면 어느새 주변에 마을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마을을 떠나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소찬은 거의 신적인 존재나 다름없었다.

"나도 의무 복무만 끝나면 다른 지방으로 가야지. 어디가 좋을까 ?"

"뭐니 뭐니 해도 조선부로 가는 게 좋지. 사람은 큰 물에서 놀아야 성공한다니까 ?"

"자넨 애기도 못 들었나 ? 러시아 쪽으로 가는 게 기회가 많아. 대한제국민이면서 중학교 졸업장만 있으면, 출신을 불문하고 관리로 채용한다던대."

"러시아부가 아니라 뭐라더라 폴란든가 우크라이난가 뭐 그런데라던데 ?"

"그게 그거지. 다 러시아부에서 관할하는 지역이잖아 ?"

"그런가?"

부두 선적기 기사들이 한 참 수다를 떨고 있을 무렵 작업반장이 술집 문을 열고 들어왔다. 술집 주인이 살갑게 아는 체를 하며 반갑게 맞이했다.

"아이고, 반장님도 오셨네. 하도 안 보이 시길래 술을 끊으셨나 했네요. 저쪽으로 가세요."

"네. 잘 계셨죠 ?"

"그럼요. 이곳을 뜨신다는 소문이 있던데 사실인가요 ? 서운해서 어쩐대요 ?"

"그렇게 되었습니다."

반장이 자리로 다가오자 마리포가 반장을 위해 자리를 마련한다, 안주를 하나 더 시킨다, 술을 더 가져오라는 둥 부산을 떨었다. 술집주인은 반장 앞에 술잔을 내왔다. 벌써 몇 순배가 돌았는지 마리포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 올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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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 천군2부 +2 15.07.06 3,554 80 20쪽
136 천군2부 +3 15.07.02 4,059 92 37쪽
135 천군2부 +2 15.07.01 3,580 92 15쪽
134 천군2부 +2 15.07.01 6,112 87 16쪽
133 천군2부 +2 15.06.23 3,654 97 16쪽
132 천군2부 +3 15.06.22 3,828 86 16쪽
131 천군2부 +2 15.06.19 3,647 108 15쪽
130 천군2부 +2 15.06.18 3,646 90 16쪽
129 천군2부 +8 15.06.17 3,449 102 14쪽
128 천군2부 +3 15.06.17 3,686 76 13쪽
127 천군2부 +6 15.06.10 4,275 81 16쪽
126 천군2부 +2 15.06.10 3,242 79 16쪽
125 천군2부 +2 15.06.10 3,502 80 16쪽
124 천군2부 +3 15.06.09 3,712 111 17쪽
123 천군2부 +3 15.06.08 3,901 98 16쪽
122 천군2부 +2 15.06.07 4,019 82 17쪽
121 천군2부 +1 15.06.06 3,520 79 17쪽
120 천군2부 +4 15.06.05 3,550 84 16쪽
119 천군2부 +2 15.06.04 4,256 82 16쪽
118 천군2부 +3 15.06.03 3,707 103 18쪽
117 천군2부 +4 15.06.02 4,241 99 17쪽
116 천군2부 +3 15.06.01 4,199 105 17쪽
115 천군2부 +4 15.05.29 4,300 98 17쪽
114 천군2부 +2 15.05.29 4,167 100 18쪽
113 천군2부 +5 15.05.28 4,632 131 17쪽
112 천군2부 +4 15.05.27 4,871 124 17쪽
111 천군2부 +3 15.05.22 4,553 93 18쪽
110 천군2부 +2 15.05.21 4,799 113 14쪽
109 천군2부 +5 15.05.20 4,704 112 12쪽
108 천군2부 +3 15.05.18 4,809 118 19쪽
107 천군2부 +3 15.05.10 5,279 117 19쪽
106 천군2부 +3 15.05.09 4,877 144 18쪽
105 천군2부 +3 15.05.08 5,101 104 19쪽
104 천군2부 +4 15.05.07 5,844 120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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