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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구에구 님의 서재입니다.

천군

웹소설 > 일반연재 > 대체역사, 전쟁·밀리터리

無明에구
작품등록일 :
2013.06.18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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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7.22 2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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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7.10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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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쪽

천군2부

DUMMY

쥬신대륙 동부해안 뉴암스테르담 항구

유럽 연합군 해군 사령부 소속 미켈란은 대서양을 건너와 뉴암스테르담을 비롯하여 몇몇 항구들을 조사하고 다시 대륙으로 돌아가기 위해 자신의 배에 올라탔다. 대서양에서 거듭되는 상선 실종사건을 조사 중이던 미켈란은 뉴암스테르담에서 유럽으로 출항한 배 목록을 작성해서 그들을 추적할 생각이었다. 그가 가지고 있는 목록을 훑어보던 미켈란의 마음은 착찹하기만 했다. 그가 언뜻 보기에도 대부분의 상선들이 유럽에 도착하지 못한 듯 보였기 때문이다. 지난 6개월간에 신대륙을 출항한 상선은 100여척이 넘었지만 태반이 도착항에 도착하지 않았다고 신고가 되어 있었다.

"돛을 달아라."

돛들이 올라가고 바람을 받아 부풀어 올랐다. 미켈란이 타고 있는 리치몬드호가 앞으로 나서자, 항구에 묶여있던 다른 상선들도 그 뒤를 따라갔다. 미켈란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선주들이 개별 행동을 자제하고, 상선단을 조직하여 대서양을 횡단하기로 결정을 하고 미켈란을 따라 나섰다. 뉴암스테르담에 있던 사람들은 대서양에서 배들이 사라지고 있다는 소식을 알 수 없었다. 유럽에서 들어오는 배들은 정상대로 대서양을 횡단하고 있었고, 그 배들은 다시금 물건을 싣고 대륙으로 출항을 했다. 요즘 들어 대륙에서 오는 배의 숫자가 줄어들었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것이 배가 부족해서 생긴 현상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미켈란은 뉴암스테르담을 떠난 지 며칠이 지났지만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자, 긴장감이 많이 수그러들었다. 밤낮으로 감시의 눈초리를 칼날처럼 세웠던 선원들의 눈도 많이 부드러워져 있었다.

"대서양에 해적이 출몰하고 있다면 이번 기회에 따끔한 맛을 보여줘야겠습니다."

이십여 척의 상선단을 이루고 있는 상선들 중 10척의 배를 소유하고 듀네딘 선주가 미켈란 바로 옆에서 파이프에 불을 붙였다. 파이프를 몇 모금 뻑뻑 빨던 듀네딘은 미켈란을 바라보았다. 미켈란은 파이프대신 담배잎을 말아 만든 시거를 입에 물고 연기 한 모금을 뿜어냈다.

"푸."

"담배 맛은 역시 슈마트라산이 최고지요. 그나저나 이번 일은 해적 짓이 아닌 듯 합니다. 해적이 설치고 다닐 만큼 만만한 곳도 아니고 짧은 시간에 그 많은 배가 당했다고 보기에는 그리고 흔적이 없다는 것이 이상합니다. 대한제국이 개입한 것 같은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설마요 ? 대한제국 함대를 보았다는 사람을 본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대한제국 함대가 뛰어나도 그 놈들은 중간보급기지가 없지 않습니까 ?"

정색을 하는 듀네딘의 얼굴에 불신이 가득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미켈란의 생각은 불가능해 보였다.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항구는 파나마나 지중해 크레타 또는 발틱해에 있다는 항구가 전부였고 그곳은 자신이 있는 곳에서 너무 멀리 있었다. 크레타나 발틱해 기지는 왕복 일만마일에 가까웠다. 파나마에서는 오천마일이 넘었다.

"땡땡땡"

"우측에 이상한 물체 출현"

거의 동시에 비상종과 더불어 망루에 올라가 있는 탐수꾼의 보고가 들려왔다. 미켈란이 급히 망원경을 들어 올렸지만 우측방에는 넘실대는 바다만 보였다. 망루의 높이에서 오는 거리 차이를 감안하며 물체가 망원경에 잡히길 기다리던 미켈란이 망원경을 내려놓았다. 시거를 한모금 길게 빨아드리고 나서 숨을 멈췄다. 다시 들어올린 망원경 안에 보일락 말락하는 하던 물체가 점점 그 형체를 드러냈다. 참고 있던 숨을 내쉬자 연기가 일순 시야를 가렸다. 희뿌연 연기가 거치고 대한제국군 파나마함대 소속 전투함이 그 위용을 나타내며 맹렬한 속도로 자신에게 다가왔다.

"상선단은 산개해라"

미켈란은 나타난 대한제국 함대가 불과 2척뿐이었지만 싸울 생각은 없었다. 이길지도 확실치 않은 적을 상대로 싸우기보다는 대한제국이 이곳까지 마수를 뻗쳤다는 것을 알리는 게 급선무였다. 그의 명령에 5척의 상선단이 선수를 돌려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고 나머지는 뿔뿔이 흩어져 제각기 살길을 찾아갔다.

"적이 함포를 발사했습니다."

"펑. 꽝"

소리보다 더 빠르게 날아온 포탄이 리치몬드호 우현에서 물기둥을 만들어냈다. 가뜩이나 주눅 들어있던 듀네딘은 아예 사색이 되어 있었다.

"좌현 80도, 함포 발포"

미켈란은 침착하게 리치몬드호를 지휘하며 전투에 들어갔다. 사거리가 짧았지만 헛되이 포탄을 낭비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포탄이 발포되면서 포성과 함께 연기가 리치몬드호를 휘감았다. 고막이 터질 것 같은 소리와 시야를 가리는 연기가 사람들의 공포심을 조금은 가시게 해주고 있었다.

"펑"

이번엔 제법 가까이에 포탄이 떨어졌는지 물기둥이 갑판까지 치고 올라왔다.

"노를 저어라, 전속력 항진. 함포 재장전. 대기"

일찌감치 선실에 들어간 듀네딘은 미켈란의 고함소리를 들으며 무릎을 꿇었다. 왼쪽 벽에 걸린 십자가가 배의 움직임과 함께 오른쪽, 왼쪽으로 움직였다. 살고자 하는 욕망과 죽음에 대한 공포심이 듀네딘을 사로 잡았다. 그의 간절한 기도때문인지 미켈란의 능숙한 조함 능력때문인지 좀처럼 명중탄이 나오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리치몬드호의 행운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꽝꽝꽝"

연이어 3차례의 폭음이 들리더니 이내 화약 냄새와 더불어 갑판이 불타 올랐다. 불길과 함께 매캐한 연기가 선실로 밀려들었다. 듀네딘은 이전과는 다른 냄새가 코를 자극하자 이내 자신이 탄 리치몬드호가 적 함포에 명중되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리고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붙잡으며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나 갑판을 볼 수 있는 창문을 열어 제쳤다. 돛들이 불타 오르고 수병들이 불을 끄기 위해 물동이들을 나르느라 분주히 뛰어다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어찌 된 일인지 불길은 물을 뒤집어쓰고도 좀처럼 꺼지지 않고 있고 있었다. 어수선한 갑판을 바라보던 듀네딘은 이내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또다시 날아온 포탄이 작렬하며 물동이를 들고 있던 수병하나가 그대로 폭사해 버렸다.


"흘수선을 맞추란 말야. 갑판에 떨구지 말고 흘수선을."

"알았나 ?"

정한성 대령은 일방적인 함포전을 바라보며 포술장에게 고함을 치고 있었다. 몇 번의 포격을 하고 나서야 비로소 명중탄이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적에게 최소의 포탄으로 치명타를 주기 위해서는 포탄이 흘수선 아래쪽을 파고들어야 했다. 그래야 갑판에 떨어지는 것보다 적함의 침몰을 앞당길 수 있었다. 두 척으로 20여척을 다 잡으려면 한 척당 할당된 시간이 많지 않았다.

"꽈광"

다시금 포성이 들려오자 정한성 대령은 거의 반사적으로 쌍안경을 들어올렸다. 맨 선두에 있던 적함은 명중탄을 3발 이상 맞고 있었지만 아직 침몰하지 않고 있었다. 활활 타오르고 있는 것으로 봐서 전투력을 완전히 상실한 것 같았지만 끈질기게 버티며 시야를 방해했다. 다행히 이번에 들어간 포탄은 정확히 흘수선을 파고 들었다. 곧 이어 우측이 부서지면서 선체가 우측으로 서서히 기울어졌다.

"표적 수정 030."

정한성 대령은 표적이 침몰하는 것을 확인하고 함포 표적을 바꿨다. 자연스럽게 함수가 방향을 바꾸며 가장 알맞은 함포각을 만들어 냈다.

"표적들이 흩어진다. 표적들 행적 잘 감시하고 추정 항로 산출해서 해도에 표기하도록. 한 놈도 빠져나갈 수 없다."

정한성 대령은 모처럼 바다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오는 심연의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산산이 부서지는 파편들 사이사이로 바닷물이 튀어올라 햇빛에 반사되었다. 물보라와 화염들이 뒤섞여 만들어낸 부조화의 조화는 정한성 대령에게는 예술 그 자체였다.


"부사령관님. 그만 내려가야 합니다."

"왜 ? 아직 한계선은 멀었잖아 ?"

정한성이 신경질적으로 물어왔다. 최초 교전이후 흩어진 표적을 추적하던 정한성은 대서양을 동서남북으로 종횡무진 돌아다녔다. 한 척 한 척을 찾아내 격침시키느라 수병들이나 선체에 가해진 피로도가 극심해졌다. 그것은 정한성도 예외는 아니었는지 시간이 갈수록 머리가 무거워졌다.

"보급품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기관실 소모품도 바닥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럴리가 ? 기관장 대."

함장의 이야기를 들으며 정한성은 기관실과 연결된 전화를 들었다.

"얼마나 버틸 수 있다고 ? 15일 ? 20일 ? 뭐라고 ?"

소리가 잘 안들리는 지 정한성의 목소리가 점점 커져 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통화를 마친 정한성이 힘없이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2415함의 함장을 빤히 바라보았다. 함장이 배시시 웃어보였다. 2415함이 아니라 전대를 구성하고 있는 4409함이 문제였다. 상대적으로 작은 4409함은 이미 보유 유류가 한계치에 다다르고 있었다.

"기지로 돌아간다. 우리가 놓친 표적이 몇 개야 ?"

"네. 처음에 후미로 빠진 5척을 제외하고도 4척입니다."

"그놈들. 매일 밤 악몽에 시달리면서 꽁지가 빠지라 도망가고 있겠군. 운이 좋은 놈들이야. 앞으로는 더욱 힘든 숨바꼭질이 되겠는데."

드넓은 대서양을 단 6척의 전함으로 완벽하게 봉쇄하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지금껏 파나마함대가 그나마 실적을 올릴 수 있었던 것은 길목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이제는 그것도 힘들어 보였다. 자신을 잡아먹을 늑대가 기다리고 있는 줄 뻔히 알면서, 그 길을 지나갈 순진한 양은 앞으로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단기 3959(1626)년 가을 로리앙 에드몽성

"자네는 어찌 생각하나 ?"

"신중하게 생각하셔야 합니다만 제 사견으로는 파리를 믿을 수 없습니다. 차라리 대한제국을 믿는 게 더 유리합니다."

"그건 나도 동감이야 하지만 지금 당장 급한 걸 피해가야지 않나 ? 대한제국은 너무 멀리 있어. "

에드몽은 파리에서 온 특사가 내민 당근을 가지고 고민 중이었다. 지금 위그노란 나라는 아직 나라로서 기틀이 마련되지 않았고, 주변국에서도 위그노란 나라를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군대를 보내 진압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에드몽은 새로운 전쟁이 시작되면 유럽 전체와 싸워서 버텨야만 했지만 그럴 자신이 없었다.

"대한제국에 미리 연락을 해서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

"그건"

지금으로서는 가장 좋은 생각이었다. 하지만 에드몽은 애써 얻은 지위를 대한제국 때문에 잃고 싶지도 않았다. 두 마리의 토끼를 다 잡으려는 에드몽의 머리 속이 복잡해졌다.

"대한제국을 버리면 소나기를 피할 수 있어도 장마비를 피하기는 어렵습니다."

위그노군 총사령관인 살라몽은 대한제국에 대한 절대적인 신봉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본 대한제국의 무력은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그런 군대를 상대로 싸워서 이길 수 있는 나라는 유럽 내에 존재하지 않았다. 설령 유럽이 하나로 뭉쳤다 해도 그건 반딧불이 수십 개 모아 보았자, 촛불하나에도 비기지 못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더군다나 대한제국은 촛불이 아니라 달빛이었다.

"다윗의 돌팔매는 성경에나 있는 이야기일 뿐입니다."

"나도 잘 알지. 문제는 위그노라는 나라가 소나기를 버틸 수 있냐는 거네. 이 나라의 군대를 책임지고 있는 총 사령관으로서 어떻게 생각하나 ?"

"힘은 들겠지요 ? 하지만 버티는 데 성공하기만 한다면 그 이후로는 대한제국을 등에 없고 크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대한제국. 대한제국. 대한제국."

대한제국을 뇌까리며 망설이는 에드몽에게 살라몽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내 뱉었다.

"넘지 못할 산입니다."

"빌라봉 성에 사람을 보내 약속시간을 잡게. 넘지 못 할 산이란 말이지, 대한제국이. 그리고 파리에는 우리가 협상할 의지가 많다는 정도만 흘리면서 시간을 벌고. 대한제국에서 무슨 국제 회담을 제안했다니, 그곳에서 이번 일을 마무리 지으면 좋겠군."

"알겠습니다. 현명하신 결정이십니다."

살라몽은 이제 안심이 되는지 얼굴 근육이 풀어졌다.


빌라봉성

"사랑하는 그대에게

사무치도록 보고싶습니다.

행여 갈대에 이는 바람에 님 소식 전해올까 창문너머 남쪽에 귀 기울여 봅니다. 이곳은 연일 우울한 날씨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어제는 올해 들어 처음으로 눈발이 비치더니 이내 축축한 가을비가 내렸습니다. 그곳은 그나마 따뜻한 곳이라 한결 마음이 놓입니다만 매일아침 따뜻한 국이라도 드셔야 할텐데. 언제쯤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 저는 조만간에 스웨덴 스톡홀롬으로 자리를 옮길 예정입니다. 그곳에서 스웨덴 여왕의 고문을 맡게 될 것 같습니다만 아직 확정되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파리를 떠나온 이래 줄곧 마음이 걸리는 바가 있는데 이곳에서는 제 힘이 미약하여 답답한 마음 그지 없습니다. 부디 저의 마음을 헤아려주시어, 제 식구들을 보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떠나올 때 살아만 있으면 언제고 찾아오겠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지금도 암흑으로 가득찬 곳에서 저를 기다리며 하루 하루를 힘겹게 보내고 있겠지요 ? 그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미어집니다. 이런 일이 아니더라도 힘드실 텐데 라는 생각이 들어서 여러 번 망설였습니다만 딱히 부탁드릴 곳이 없습니다. 부디 몸조심하시고 다시 만날 그날까지 안녕히.

모스크바에서 마리가"

이억만리에서 사선을 넘나들며 타향살이를 하는 고진영에게는 마리가 보내오는 편지만이 그의 시름을 씻어 주었다. 오늘따라 마리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더욱 간절한 고진영이 달력을 세어 보았다. 벌써 6개월이 넘어가고 있었다.

고진영을 비롯하여 빌라봉성에 남은 인원들은 봄 전투이래 몇 달간은 비교적 한가하게 시간을 소일하고 있었다. 파리에서 실종된 대사관 직원들과 외교부 특수부 요원들의 행방을 수소문하는 데 모든 역량을 집중시키고 있었지만, 그들의 생사는 여전히 불투명한 상태였다. 다만 당시 세느 강 하류에서 프랑스 정규군과 특수부 요원간의 전투로 보여지는 전투가 있었다는 것만 확인된 상태로 그 전투에서 생존자가 있었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었다.

"아무리 뒤져봐도 그들의 흔적이 없어. 이렇게 감쪽같이 사라질 수 있을까 ? 모조리 침몰했다 쳐도 시체라도 떠올라야 하는 것 아냐 ?"

고진영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프랑스가 그 정도로 정보를 차단할 만한 능력이 있다고 볼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강바닥에 고스란히 가라앉아있다고 보기에도 무리가 있었다. 굽이굽이 돌아나가는 강물 때문에 목선들이 침몰했다면 필시 강변으로 밀려나게 되어 있었다. 그렇게 되면 누군가에 의해 발견이 되었을 거고, 인양이 되었을 것이 분명했지만 어디에도 그 흔적이 없었다.

"똑똑똑"

"미치겠구만. 직접 가보면 좋을 텐데. 들어와 !"

몸을 벌떡 일으키며 고진영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감청색 상의와 바지를 입은 고진영은 175센티미터의 키에 딱 벌어진 어깨가 다부져보였다. 대한제국군의 평균 신장이 160센티미터임을 감안하면 그의 키는 큰 키에 속했다. 일본부의 평균 신장이 150센티미터를 밑도는 것을 생각하면 고진영은 키다리에 가까웠다.

"본국에서 암호문이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이건 최근 프랑스와 위그노의 동향 보고서입니다. 움직임이 활발한 것이 무슨 꿍꿍이를 벌이고 있는 듯 보입니다. 그리고 에드몽 측에서 사람이 왔다 갔습니다. 일간 뵙으면 한다는 전갈입니다."

"저기다 놓고 이리 좀 앉아봐"

좀처럼 오지 않던 암호문이 왔는데도 고진영은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책상 앞에 꼿꼿이 서있는 감숙민이 고진영을 빤히 쳐다보았다. 긴급을 요하거나 중요한 내용이 아니면 암호문이 올 리 없었다.

"이리 앉으라니까 ?"

"네."

우물쭈물하던 감숙민이 자리에 앉으며 무릎 위에 결제판을 올려놓았다.

"그림자 1선이 철수를 하고 있는데 새로운 거라도 발견된 것 없나 ?"

4군에서 프랑스로 파견된 특수여단 인원 대부분이 신성로마제국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그 와중에 혹시라도 새로운 소식이 있는 지 그걸 묻고 있었지만, 들려온 대답은 신통치 않았다.

"대사관 일행의 행적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4군이나 대명부에서도 실종처리 할 것으로 보여 집니다."

"이찬용이 이끄는 팀은 해외 특작팀중에 최고였어. 그런 팀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다니 도저히 믿기지 않는군. 알았네. 그리고 바스티유에 대해서는 계속 주시하고. 그만 가보게 그리고 에드몽에게는 내일 만나자고 하고"

바스티유 감옥은 샤를 5세의 명령으로 파리의 생탕트완 교외에 건설된 요새로 근래에 리슐리외에 의해 감옥으로 개조되었다. 주로 국사범이나 사상범을 수용하는 바스티유 감옥은 감옥이라기 보다는 호텔에 가까웠다. 스퀘델리가 질병 덩어리라는 콩세르주리 감옥에 갇히지 않고 바스티유에 투옥된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바스티유 감옥은 음식이나, 기타 내부 장식등이 호화로운 별장에 가깝게 제공되고 있었다. 물론 바스티유는 수감자들이 대부분 정치 사상범이라는 것과 출신 성분이 귀족이라는 점 그리고 요새로써 지어졌기에 자체 경비가 삼엄했고, 경비를 담당하는 수비군 역시 프랑스 정예군이 담당하고 있었다. 그래서 4군 사령부나 외교부에서도 당분간 몽블랑 식구들을 관찰만 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스퀘델리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중얼거리던 고진영이 감숙민이 놓고 간 암호문을 집어 들었다. 암호문을 읽어보던 고진영은 암호문을 해독하기 위해 책장에 끼워져 있는 삼국지를 꺼내 펼쳤다. 숫자와 문자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암호문과 삼국지를 넘기면서 한글자 한글자를 맞춰나가며 한 문장을 만들어냈다.

"3959년 12월 35일 그림자가 햇빛을 받는다."

올 말을 기해 2선에서 암약하고 있는 그림자들이 수면위로 부상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번 일만 끝나면 나도 스웨덴에나 가봐야지. 슬슬 철수 준비를 해야 하는데 에드몽이 어떻게 나오려나 ?"

2선 그림자들이 나타난다면 더 이상 고진영이 이곳에서 있을 이유가 없었다. 외교부와 4군에서 본격적으로 모습을 들어 내고 유럽을 압박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빌라봉 성은 유럽 연합군의 제 1 목표가 될 가능성 높았다. 빌라봉 성의 유실에 따른 정보 차단을 방지하기 위해, 빌라봉 성으로 집중되는 정보는 그림자 제2선의 정보선을 따라 움직이게 되어 있었다.


유럽 원정군 5군단 사령부

6군단과 임무를 교대한 5군단은 바르샤바에서 부대를 재정비하고 다음 임무를 기다렸다. 지난 전투에서 피해를 입은 5군단은 기병사단을 제외하고는 당분간 전투에 참가하기가 어려워 보였다. 폴란드군의 진격을 최전방에서 막아냈던 보병 4531사단이 그 중 피해를 가장 많이 입어서 사단 전체가 재편을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전투 중 일어났던 일련의 돌출 상황에 대한 평가가 병행되고 있어서, 4531사단장을 비롯한 각급 지휘관들이 조사관에게 시달림을 당하고 있었다.

"아무리 중대 본부가 와해 되었다 해도 2연대 3대대 2중대 병력이 아군 포화에 그대로 노출된 것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대대 공용 주파수로 교신을 했어야 하지 않았습니까 ? 그리고 전령을 보낸 시간이 너무 늦지 않았습니까 ? 예하 부대에 후퇴명령을 전달하기도 전에 대대가 후퇴를 먼저 한 것 아닙니까 ? 그래서 일시적으로 통신체계에 혼란이 초래한 것 아닙니까 ? "

포병여단 배치의 적절성과 기습을 허용한 초기 대응의 부적절성 그리고 기계화 사단의 대응 방법 등 군단 지휘부 및 사단급 지휘부의 조사를 마친 조사관들이 개별 전투에 대한 조사에 들어가 있었고, 그 첫 사례로 2연대 3대대 2중대에 대한 심도 있는 질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3대대장은 벌써 3시간 째 계속되는 조사에서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유독 사상자가 많이 발생한 3대대는 조사관의 집중 조사를 받고 있었다.

"워낙 창졸 간에 벌어진 일이고, 대대 전체가 적 포격에 노출된 상태였습니다. 당연히 대대 공용 주파수로 후퇴 명령을 내렸지만, 2중대만은 수신 하지 못한 것으로 파악됩니다. 대대본부는 후퇴명령 전파와 거의 동시에 후퇴를 하긴 했지만 통신체계에 혼란은 없었습니다. 교전이 벌어지고 있는 지역에 더군다나 시계가 극히 불량한 지역에 전령을 보내기가 위험하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에 전령을 보내기를 주저했던 것 입니다. 그리고 2중대 3소대의 유일한 생존자인 이완용 하사관의 말을 빌리면 후퇴명령이 3소대를 비롯한 2중대 예하 소대에 접수가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요 ? 그럼 이완용 하사관이 말한 당시 상황을 읽어 보겠습니다."

조사관이 서류철을 뒤적이더니 종이 한 장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거기에는 이완용의 진술 내용과 이완용의 확인 도장이 찍혀 있었다.

"적 포격을 받은 직후 적 보병의 공격을 받음. 포격으로 소대 병력의 반을 잃고 중대 본부와 교신을 시도. 소대장이 후퇴 권고를 종용하던 중 갑자기 중대장과의 무선이 단절. 곧이어 대대에서 보낸 후퇴 명령을 접수. 소대 후퇴 준비 중 진내 포격을 받음. 소대장 이하 소대원이 포격에 노출되어 전원 전사함. 자신은 천운으로 포탄을 피하고 무사히 후퇴함"

조사관이 당시 상황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증인의 진술이 끝났다. 대대장은 그것 보라는 듯 조사관의 눈을 응시했다.

"하지만 이완용의 진술에서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분명히 대대장님께서는 대대 공용 주파수를 이용했고, 3소대 역시 공용주파수를 이용해 후퇴명령을 접수했습니다. 그런데 왜 대대 통신대에서는 3소대의 무선을 청취했다는 기록이 없는 걸까요 ? 명령 접수 확인을 했을 텐데 말입니다. 그리고 2선에서 전투를 수행하던 다른 병사들의 말에 의하면, 이완용이 2선으로 후퇴한 시간이 당일 새벽 2시 전후였습니다. 다시 말해 진내 포격이 시작되기 전에 이완용은 이미 2선으로 후퇴했다는 결론입니다. 혹시 대대장님은 이완용의 진술에 압력을 행사 하지 않았습니까 ?"

"그런 적 없습니다."

"그래요 ? 그럼 이완용의 진술에 모순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까 ?"

"당시에는 몰랐습니다. 부하가 그렇다고 하는데 딱히 의심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

"단지 혼자만 후퇴했다는 데 전혀 의심을 하지 않았다는 것 입니까 ?"

"그렇습니다."

"좋습니다. 이 점은 나중에 다시 조사하기로 하겠습니다. 당시에 2중대에 보낸 전령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

이어지는 질문과 대답이 조사실을 가득 채웠다. 대대장과 조사관 사이에 드리워진 신경전이 팽팽이 맞서며 평행선을 그었다. 한 장교가 쪽지를 조사관에 건네기 전까지.

"이완용이 20분전에 자살을 했다는 소식입니다. 유일한 생존자였는데 안타깝습니다."

"뭐 이 새끼야 ? 안타까워 ? 니들이 진짜로 안타까운게 뭔지 알아 ? 사선에서 부하들을 죽음으로 몰아야만 하는 장교들의 고뇌를 니들이 알아 ? 그렇지 않아도 혼자만 살았다고 자책하고 있는데 그걸 들쑤셔서 자살까지 하게 만들어 ? 그러고도 니들이 대한제국 군인이냐 ? 이이이 !"

대대장은 이완용이 자살했다는 소식에 꾹꾹 눌러왔던 감정을 폭발시키며 조사관에게 폭언을 퍼 붇기 시작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조사관에게 다가가려다 제지 당하자, 대대장이 책상과 의자에 발길질을 해댔다.

"진정하십시오. 오늘은 그만 하겠습니다."

"진정 ? 너 같은 놈이 부하를 잃은 아픔을 알기나 해 ?"

길길이 날뛰는 대대장을 남겨놓고 조사실을 나온 조사관은 안주머니에서 궐련초 하나를 꺼냈다. 군에서는 흡연자에 대한 대우가 형편없었지만, 이런 일을 한다는 것 자체가 승진을 포기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했다. 그렇기에 조사관들은 대부분 흡연에 대한 강박관념이 없었다. 성냥 한 개비로 불을 붙인 조사관이 연기를 폐 속 깊숙이 빨아드렸다 내 뿜었다.

"젠장. 분명히 뭔가 있었어. 신변을 먼저 확보하고 조사를 시작했어야 했는데"

조사관 생활에서 오는 직감은 그에게 뭔가를 말하고 있었지만, 유일한 생존자가 죽어버림으로써 진실이 땅속으로 묻혀버릴 것 같았다. 그가 눈에 비친 대대장의 마지막 행동은 분명 과장된 연출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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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군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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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 천군2부 +45 15.07.22 7,504 103 15쪽
152 천군2부 +4 15.07.22 4,829 72 22쪽
151 천군2부 +3 15.07.20 3,894 74 14쪽
150 천군2부 +1 15.07.20 3,587 76 28쪽
149 천군2부 +2 15.07.17 3,847 82 26쪽
148 천군2부 +2 15.07.16 3,525 83 34쪽
147 천군2부 +2 15.07.16 3,334 89 20쪽
146 천군2부 +3 15.07.14 3,287 73 19쪽
145 천군2부 +2 15.07.14 3,329 72 19쪽
144 천군2부 +4 15.07.13 3,520 83 20쪽
143 천군2부 +6 15.07.11 3,673 97 21쪽
» 천군2부 +2 15.07.10 3,525 91 24쪽
141 천군2부 +2 15.07.09 3,626 100 24쪽
140 천군2부 +5 15.07.08 3,612 101 31쪽
139 천군2부 +1 15.07.07 3,457 93 25쪽
138 천군2부 +2 15.07.07 3,821 85 31쪽
137 천군2부 +2 15.07.06 3,554 80 20쪽
136 천군2부 +3 15.07.02 4,060 92 37쪽
135 천군2부 +2 15.07.01 3,580 92 15쪽
134 천군2부 +2 15.07.01 6,113 87 16쪽
133 천군2부 +2 15.06.23 3,655 97 16쪽
132 천군2부 +3 15.06.22 3,828 86 16쪽
131 천군2부 +2 15.06.19 3,648 108 15쪽
130 천군2부 +2 15.06.18 3,646 90 16쪽
129 천군2부 +8 15.06.17 3,450 102 14쪽
128 천군2부 +3 15.06.17 3,686 76 13쪽
127 천군2부 +6 15.06.10 4,276 81 16쪽
126 천군2부 +2 15.06.10 3,242 79 16쪽
125 천군2부 +2 15.06.10 3,502 80 16쪽
124 천군2부 +3 15.06.09 3,712 111 17쪽
123 천군2부 +3 15.06.08 3,901 98 16쪽
122 천군2부 +2 15.06.07 4,020 82 17쪽
121 천군2부 +1 15.06.06 3,520 79 17쪽
120 천군2부 +4 15.06.05 3,551 84 16쪽
119 천군2부 +2 15.06.04 4,256 82 16쪽
118 천군2부 +3 15.06.03 3,708 103 18쪽
117 천군2부 +4 15.06.02 4,241 99 17쪽
116 천군2부 +3 15.06.01 4,199 105 17쪽
115 천군2부 +4 15.05.29 4,301 98 17쪽
114 천군2부 +2 15.05.29 4,167 100 18쪽
113 천군2부 +5 15.05.28 4,633 131 17쪽
112 천군2부 +4 15.05.27 4,871 124 17쪽
111 천군2부 +3 15.05.22 4,553 93 18쪽
110 천군2부 +2 15.05.21 4,799 113 14쪽
109 천군2부 +5 15.05.20 4,704 112 12쪽
108 천군2부 +3 15.05.18 4,810 118 19쪽
107 천군2부 +3 15.05.10 5,279 117 19쪽
106 천군2부 +3 15.05.09 4,877 144 18쪽
105 천군2부 +3 15.05.08 5,101 104 19쪽
104 천군2부 +4 15.05.07 5,844 120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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