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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무생인의 서재

읽었던 것과 다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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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무생인
작품등록일 :
2019.11.26 21:40
최근연재일 :
2022.10.23 22:16
연재수 :
132 회
조회수 :
4,709
추천수 :
85
글자수 :
529,736

작성
22.01.09 22:00
조회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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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글자
6쪽

7. 수상한 새를 키우는 방법 (21)

DUMMY

라야는 만감이 교차하는 듯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많은 일이 있었어요. 정말로.“


정호기는 말없이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그녀는 천천히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그 와중에 저는 제 편을 모았어요. 제 이야기를 믿어 주는 사람들을요...“


라야가 정호기를 바라보았다. 정호기는 라야의 눈동자를 보았다. 라야의 푸른 눈동자는 사람을 미혹하는 어떠한 힘이 있는 것만 같았다. 정호기는 홀린 듯이 라야를 바라보았다.


”그중에 한 사람이 마누아에요.“


[믿는다고 했잖아!]


‘아. 그건 이런 의미였던가.’


정호기는 그때에야 마누아가 했던 말들과 마누아가 취했던 태도들을 이해할 수가 있었다.


”정호기.“


”...네?“


라야가 섧게 웃었다. 평소의 맑고 깨끗한 웃음과는 달랐다. 평소의 라야의 웃는 얼굴이 새벽녘에 이슬을 매단 백합처럼 하얗고 깨끗했다면, 지금은 저무는 해를 슬퍼하며 고개를 떨군 해바라기 같았다.


”제가 얼마나 당신을, 이방인님을 기다려왔는지, 당신께서는 모르시겠지요.“


”네?“


”부족하고 모자라지만, 제가 예비해 둔 모든 것들은, 당신을 위해 예비해 둔 것이에요. 아니, 사실은, 저희를 위해 예비해 두었다고 하는 게 맞겠군요.“


”네?!“


”혹시 제 소원이 무엇인지 기억하시나요?“


”음... 가젠에게 들은 바로는 세상이 멸망하는지 지켜봐 달라고 했었다고... 그랬었죠, 아마?“


”네. 그런 소원을 빌었었죠. 하지만 제가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같은 소원을 빌지 않을 거예요.“


라야가 쓸쓸한 얼굴로 말했다.


”저희 세계를 지켜 달라고 빌었을 거예요.“


”그야....그랬겠죠?“


”하지만 저는 그때 확신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모호한 소원만을 빌었어요. 저는 계속되는 꿈을 꾸며, 제 말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정신병자 취급받으며 뼈저리게 후회했어요.

다시 없을 기회였을지 모르니까요, 어쩌면 제 꿈을 멈출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일지 모르는 일이었는데.“


라야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그래서 당신을 기다렸습니다. 정호기.“


”...저를요?“


”예.“


”왜 저를...?“


”사도님은 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이용할 만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에요. 저는 제 목적을 달성하기에는 부족한 소원을 이미 빌어버렸고, 사도님은 그 미흡한 소원만을 이뤄주시겠죠. 저는 사도님께 단순히 지나가는 계약자일 뿐이고, 사도님의 업은 계약을 충실히 이행하는 것일 뿐이니까요.“


라야가 조금 뜸을 들이더니 말했다.


”그렇지만, 그분이 아니라면. 평범한 사람일 ‘계약자’ 쪽이라면 호소해 볼 만 하다고 생각했어요.“


”.....어....“


”계약의 대가로서 바친 제 몸을 이용할 계약자를, 이용하고자 했어요.“


[저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좋은 사람이 아니에요.]


‘그건 이런 의미였던가?’


”호감을 사고, 친밀한 관계를 형성해 저희의 책임을 전가하고자 했던 거예요.“


라야가 눈을 내리깔았다.


”비겁한 짓이죠. 저에게 주어졌던 기회처럼, 당신께 주어진 기회는 온전히 당신만을 쓰여야 마땅한데. 저는 당신을, 저희의 문제에 끌어들이려고 했어요.“


라야가 시선을 올려 올곧게 시선을 마주쳤다.


”사실은 숨기려고 했어요.“


정호기는 라야의 이야기를 잠자코 들었다.


”지옥에 떨어질지언정, 저 하나만 진창에 뒹굴어서 이 세계를 지켜낼 수만 있다면 상관없었으니까요.

그런데 당신은....“


라야가 숨을 삼키더니 슬프게 웃었다.


”죄책감이 들 만큼 좋은 사람이었어요.“


”제가요?“


”그래요.“


라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만나 알지도 못하는 제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 주시고, 믿어 주시고, 관심 가져 주시고. 조건 없이 제게 마음 쏟아 주시고, 아껴 주시고.“


”-그런 걸로.“


”고작 그런 것- 으로 치부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정호기께서는 제가 만난 사람 중 손에 꼽을 만큼 따뜻하고 상냥한 사람이었는걸요.“


정호기는 멋쩍고 쑥스러워 뒷목을 문지르며 라야의 시선을 피했지만 라야는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저는.“


”무슨 말씀을 하셔도 괜찮아요.“


”여전히, 라야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라야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저는 비겁한 사람이에요.“


”라야가 이 세계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아요. 잘은 모르겠지만 만약 저도 라야처럼 이 세계를 사랑했다면, 이 세계를 지키기 위해 무슨 방법이든 썼을 거예요. 더한 방법이라도요.“


”그것뿐만이 아니에요.“


라야가 웃었다.


”저는 지금도 정호기의 상냥함을 이용하고 있어요.“


정호기가 고개를 기울이자 라야가 말했다.


”저는 당신께서 제 이야기를 받아들여 주실 것을 알고 있었어요. 정호기는 좋은 사람이시니까요. 이 거짓말쟁이를 감싸 줄 만큼 상냥한 사람이니까요.“


정호기는 여전히 고개를 갸웃했다.


”당신께서 지금보다 더 좋은 사람이셨더라도, 만약 당신께서 제 이야기를 듣고 돌아설 분이셨더라면, 저는 지옥에 굴러떨어질 때까지 입을 다물었을 거에요.“

...비겁한 일이죠.“


”어쩌면 상냥한 당신이 이 이야기를 듣고, 저희를 위해 움직여줄 가능성이 커질지도 모른다는, 비겁한 생각에서 출발한 비겁한 고백인 겁니다.“


라야가 입술을 물었다 놓았다.


정호기는 라야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눈앞의 라야가 낯설어 보였다. 그러나 묘한 익숙함이 느껴졌다. 정호기는 기시감에 눈을 가늘게 떴다.


‘이 느낌, 익숙한데...’


정호기는 어렵지 않게 기억 속에서 이 감각을 끄집어낼 수 있었다. 지금 라야의 모습은 묘하게도 가면이 벗겨진 가젠의 모습과 닮아있었다.


‘라야도 가젠처럼 가면을 쓰고 있었던 건가.’


작가의말

살아간다는 게 왜 이렇게 힘에 겨운지 모르겠습니다... 삶이 길을 가는 것과 같다면 비가 오는 날도 있겠고 눈이 오는 날도 있겠고 맑은 날도, 터널을 지나는 날도 있겠죠.
길고 긴 터널을 지나는 것 같습니다... 맑은 하늘을 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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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서재에 가끔 등장인물 그림 올립니다. +2 20.05.18 144 0 -
공지 한 독자님의 의견을 반영해 전체적으로 조금 수정하였습니다. 20.04.18 88 0 -
132 7. 수상한 새를 키우는 방법 (48) 22.10.23 10 0 9쪽
131 7. 수상한 새를 키우는 방법 (47) 22.10.13 12 0 4쪽
130 7. 수상한 새를 키우는 방법 (46) 22.10.09 15 0 13쪽
129 7. 수상한 새를 키우는 방법 (45) 22.09.18 14 0 9쪽
128 7. 수상한 새를 키우는 방법 (44) 22.09.04 14 0 6쪽
127 7. 수상한 새를 키우는 방법 (43) 22.08.21 14 0 6쪽
126 7. 수상한 새를 키우는 방법 (42) 22.08.07 14 0 8쪽
125 7. 수상한 새를 키우는 방법 (41) 22.07.31 14 0 6쪽
124 7. 수상한 새를 키우는 방법 (40) 22.07.24 12 0 6쪽
123 7. 수상한 새를 키우는 방법 (39) 22.07.17 18 1 7쪽
122 7. 수상한 새를 키우는 방법 (38) 22.07.03 14 0 7쪽
121 7. 수상한 새를 키우는 방법 (37) 22.06.26 16 0 9쪽
120 7. 수상한 새를 키우는 방법 (37) 22.06.12 15 0 8쪽
119 7. 수상한 새를 키우는 방법 (36) 22.06.05 18 0 7쪽
118 7. 수상한 새를 키우는 방법 (35) 22.05.29 24 0 9쪽
117 7. 수상한 새를 키우는 방법 (34) 22.04.29 17 0 7쪽
116 7. 수상한 새를 키우는 방법 (33) 22.04.27 17 0 5쪽
115 7. 수상한 새를 키우는 방법 (32) 22.04.20 16 0 7쪽
114 7. 수상한 새를 키우는 방법 (31) 22.04.03 29 0 10쪽
113 7. 수상한 새를 키우는 방법 (30) 22.04.02 31 0 12쪽
112 7. 수상한 새를 키우는 방법 (29) 22.03.13 21 0 5쪽
111 7. 수상한 새를 키우는 방법 (28) 22.03.06 19 0 7쪽
110 7. 수상한 새를 키우는 방법 (27) 22.02.27 18 0 8쪽
109 7. 수상한 새를 키우는 방법 (26) 22.02.20 22 0 10쪽
108 7. 수상한 새를 키우는 방법 (25) 22.02.06 16 0 8쪽
107 7. 수상한 새를 키우는 방법 (24) 22.02.01 18 0 11쪽
106 7. 수상한 새를 키우는 방법 (23) 22.01.23 18 0 6쪽
105 7. 수상한 새를 키우는 방법 (22) 22.01.16 17 0 7쪽
» 7. 수상한 새를 키우는 방법 (21) 22.01.09 21 0 6쪽
103 7. 수상한 새를 키우는 방법 (20) 21.12.19 17 0 6쪽
102 7. 수상한 새를 키우는 방법 (19) 21.12.12 19 0 9쪽
101 7. 수상한 새를 키우는 방법 (18) 21.12.05 19 0 10쪽
100 7. 수상한 새를 키우는 방법 (17) 21.11.28 19 0 10쪽
99 7. 수상한 새를 키우는 방법 (16) 21.11.21 25 0 12쪽
98 7. 수상한 새를 키우는 방법 (15) 21.11.07 17 0 10쪽
97 7. 수상한 새를 키우는 방법 (14) 21.10.31 23 0 9쪽
96 7. 수상한 새를 키우는 방법 (13) 21.10.24 16 0 9쪽
95 7. 수상한 새를 키우는 방법 (12) 21.10.17 24 1 8쪽
94 7. 수상한 새를 키우는 방법 (11) 21.10.11 30 0 7쪽
93 7. 수상한 새를 키우는 방법 (10) 21.10.03 23 0 8쪽
92 7. 수상한 새를 키우는 방법 (9) 21.09.26 15 0 9쪽
91 7. 수상한 새를 키우는 방법 (8) 21.09.19 29 0 7쪽
90 7. 수상한 새를 키우는 방법 (7) 21.09.12 24 1 9쪽
89 7. 수상한 새를 키우는 방법 (6) 21.09.05 31 1 8쪽
88 7. 수상한 새를 키우는 방법 (5) 21.08.22 18 1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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