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갑이.
툭, 툭.
뭔가 이마를 건드린다.
툭, 툭.
- ... 일어$%, #@ 아.
뭔가 이마를 건드리면서 말을 거는 것 같다.
쿡!
“... 크으.”
계속되는 자극에 인상 쓰며 눈을 떴다.
- 일어났냐?
귀가 아닌 뇌리에 직접 전해지는 듯한 말소리.
소리의 주인공은 아마 내 얼굴 위 허공에 뜬 저 작은···.
“... 인형?”
- 아니다, 인간아.
주먹보다 작은 얼굴 속 눈, 코, 입이 일그러진다.
수염이 있긴 한데 얼굴은 영락없는 연분홍 피부를 가진 아이의 것이다.
머리 아래 많이 짧다 싶은 팔다리.
인상 쓰고 팔짱 끼고 내려다보는 게 무슨 인형 아니면 만화 캐릭터 같다.
거기에···.
“뿔··· 이 있네?”
- 그게 어때서?
“......”
잠시 말문을 잃고 바라봤다.
저번엔 머리만 있더니 이제는 말을 하는 아기 도깨비라니.
“... 혹시 너 저번에?”
- 그래. 머리만 있는 상태로 만났었지.
“그럴 리가. 그 머리는 꽤 늙었었다고.”
- 그게 원래 나야. 지금은 힘을 많이 잃어버려서 이런 꼴이고.
몸을 일으키니 도깨비가 허공에 뜬 그대로 물러나 거리를 둔다.
둘러보니 내 방 내 침대 위.
잠들기 전과 달라진 게 없다.
“... 설마 이거 꿈이 아니라 현실인가?”
- 아니. 꿈속이야.
“... 아닌 것 같은데?”
- 난 아직 현세에 몸을 드러낼 정도로 힘을 회복하지 못했어. 이건 네 꿈속이다.
말하는 공중부양 아기 도깨비에 현실 같은 꿈속이라니.
현실감이 없다.
그래도 정신줄을 아예 놓지는 않았다.
“설마 날 해치려는 건 아니겠지?”
- 해칠 생각도 없지만, 그럴 힘도 없다, 지금은.
“......”
진짜 묻고 싶은 걸 물었다.
“내가 과거로 온 것, 너와 관련 있냐?”
- 그래. 하지만, 내가 한 건 아니야.
“그럼 누가?”
- 너.
“... 나?”
- 응. 네가 죽는 순간 간절하게 원했다. 시간의 인과율을 거스를 만큼.
아이의 모습에 어울리지 않는 단호한 목소리로 도깨비가 설명을 이어갔다.
-----
원래는 아이가 아닌 아이 도깨비는 무려 도깨비 왕의 아들.
잘못을 저질러 서기(瑞氣)를 머금은 대추나무 고목에 가둬졌고, 그 상태로 오랜 시간을 보냈다나.
어느 날 나무가 베어져 조각조각 가공되었는데, 그 조각이 불에 타든지 부서질 때마다 나뉘어 깃들었던 도깨비의 힘, 그러니까 영기(靈氣)가 모여 해방이 가까워졌다.
내 펜던트가 마지막 조각이었는데 그게 총에 맞아 부서져 영기가 완전히 하나 되며 고대하던 귀천(歸天)을 맞으려는 순간.
엉뚱하게도 나무의 서기가 내 염원에 먼저 반응하고 말았다.
서기가 도깨비의 영기를 쪽 빨아가더니 그 힘으로 ‘시간의 인과율’이라는 걸 비틀어 나와 도깨비를 16년 전 과거로 보냈다고.
이 무슨···.
“... 시간을 돌려서라도 일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단 말이지, 내가.”
- 왜, 아닌 것 같냐?
“아니. 그랬던 것 같기도 해. 그런데, 그 염원에 대추나무의 서기가 제멋대로 응했다고? 왜?”
- 몰라. 알면 억울하지나 않지.
“......”
지난번에 본 도깨비 머리의 윙크는 ‘덕분에 이제 난 자유다. 고마워.’라는 뜻이었다고.
그런데, 녀석이 정신을 차려보니 대부분의 영기를 잃은 채 현세의 내 곁에 있었단다.
도깨비의 몸은 육체가 아닌 영체.
원래 사람 눈에 안 보인단다.
힘이 세면 보이게 할 수도 있지만, 지금은 간신히 내 꿈에 현신할 정도의 힘밖에 없단다.
그것도 지난 한 달 정도 이 주변의 영기를 티끌 하나까지 긁어모은 덕이라나.
“그래서 내 꿈에 나타난 이유는 뭐야?”
이걸 믿어야 하나 하는 마음으로 물었더니 녀석이 버럭 소리친다.
- 책임져라!
“......”
- 날 책임지라고, 이 영기 도둑놈아!
“......”
- 그러지 않으면 밤마다 꿈에 나와서 괴롭혀주겠다. 죽을 때까지 밤마다 날 만나게 될걸!
맙소사.
위엄 넘치던 도깨비가 본론에 들어가자 영락없는 땡깡쟁이 아이가 됐다.
- 너 이 #@$# 놈! &$#@ 새끼! $@#$ 인간 놈아!
이이치고는 욕을 아주 찰지게도 한다.
소리가 귀가 아닌 뇌리에 전해지는 통에 머리가 울리는 것 같다.
이건 지금껏 내가 경험한 최악의 개꿈이 아닐까.
씩, 씩, 씩.
한참을 그렇게 욕을 쏟아낸 녀석이 거칠게 숨을 쉰다.
정말 분하고 억울하고 원통한지 충혈된 눈에 물기마저 촉촉하다.
좀 미안하네.
“다른 도깨비에게 도와달라고 하면 안 되는 거냐?”
- 없어.
“없어?”
- 그래. 내가 안 찾아봤을 것 같냐? 네 몸에서 멀리 떨어질 수 없어서 이 근방만 살폈지만, 도깨비는커녕 잡귀 찌끄레기도 없어.
“......”
- 이상한 돌로 땅과 하늘이 다 뒤덮여서 생기(生氣)조차도 미약한데 영체들이 있을 수가 없지.
아스팔트 깔린 거리와 콘크리트로 된 높은 건물들을 말하는 건가?
그럼 그런 게 없는 데는?
오전에 추모공원에 다녀왔다.
시가지를 벗어나 한참을 논밭이나 야트막한 산 근처를 지나는 버스를 타고.
그런 곳은 좀 사정이 낫지 않···.
- 들판에도 산에도 약한 생기만 있지 영기는 찾아볼 수 없었어. 인간 묘지에도 흔적만 가득했고.
“......”
- ... 마치 이 세상에 나만 남은 것 같아.
... 아니네.
아기 도깨비는 잔뜩 풀이 죽었다.
축 처진 어깨를 보니 좀 더 미안해진다.
녀석 덕분에 난 2회차를 살 수 있게 된 건데, 그 때문에 녀석은 오래 고대하던 귀천을 못 했다니 말이다.
- 아무리 봐도 여긴 나 같이 영기에 기댄 존재가 살 수 있는 세상이 아니야.
“......”
녀석은 말이 없었고 나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한참 만에 마음을 추슬렀는지 녀석이 입을 열었다.
- 그러니까 책임져라, 인간.
“... 책임을 어떻게 지라는 거야?”
- 간단해. 내 귀천(歸天)을 도와.
“그러니까 어떤 식으로?”
- 힘을 모아야 해. 생기나 영기를. 서기가 가장 좋은데, 아무리 봐도 지금 세상엔 그런 게 흔할 것 같지는 않아. 그러니 생기나 영기에 집중해야 해.
“그걸 어떻게 하냐고?”
- 그건···.
이어지는 녀석의 말은 말 그대로 어이 상실.
뭐, 깊은 산중에 터를 잡고 고목이나 영초를 찾아?
아니면, 사람이 오래 사용한 골동품 같은 걸 찾아?
골동품 가게 많은 인사동 같은 곳을 가면 되나 싶었는데 오랜 골동품이라고 무조건 영기가 깃드는 것도 아니야?
100년 묵은 물건 100개 중의 하나에 영기 티끌이라도 있으면 다행이야?
그러니까 골동품이란 골동품은 다 뒤지라고?
이거 자연인 아니면 골동품 발굴자가 되라는 얘기 아닌가.
뭐, 우리나라 산이나 골동품만 가능한 게 아니니까 대상은 차고 넘칠 거라고?
참 위로가 되는 말이다.
어이 상실을 넘어 어처구니가 없네.
- 왜 그러냐, 인간?
난 녀석에게 내 사정을 말했다.
왜 총 맞아 죽어가면서도 무의식적으로 간절히 회귀를 원했고, 앞으로 같은 미래의 반복을 막기 위해 어떤 계획을 세웠는지.
당장 며칠 뒤에 대학에 입학할 거고 그 뒤로도 할 게 얼마나 많은데, 산속에 처박히거나 골동품 찾으러 돌아다닐 시간이 어디 있단 말인가.
- 너도 절박한 사정이 있었군.
“... 그래.”
- 서기는 상서로운 하늘의 기운이다. 때로 인간의 간절한 마음에 하늘이 응한다고도 하던데, 실제로는 처음 본다.
“마찬가지야.”
우리는 비슷하게 복잡한 표정을 하고 긴 시간 대화를 이어갔다.
서로에 대해 더 알기 위해.
그리고 혹여, 다른 방법이나 좀 더 빠른 방법은 없는지 알기 위해.
그런 길고 긴 대화 끝에···.
“어쩔 수 없네.”
- 동시에 할 수밖에.
“그래. 그러려면···.”
- 서로 협조해야겠네.
도깨비도 도깨비지만, 나도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협조하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매일 밤 꿈에 나와 괴롭히겠다는데 그걸 어떻게 버티겠냐고.
- 협조하는 데 조건이 있다.
“그렇겠지. 나도 마찬가지니까.”
우린 또 대화를 계속해야 했다.
서로가 내민 조건을 어디까지 수용할 것인지 타협해야 했으니까.
그 와중에 느낀 건데, 우리나라 도깨비 좀 어리숙하다더니 순 거짓말이었다.
닳고 닳은 장사꾼 저리가라였거든.
“딜?”
- 뭐? 달이 어쨌다고?
“... 아니. 동의하냐고?”
- 그러지.
내 손가락을 잡은 도깨비와 악수하는 것으로 합의가 성사됐다.
그렇게 2회차의 내 인생에 도깨비라는 작은 혹이 붙었고···.
- 살살 해줄 테니까 딱 대.
“... 진짜 살살해라.”
- 인간 아니랄까 봐 겁은 많아서.
“시끄럽고, 빨리해라.”
네 표정을 봐라.
그간의 스트레스를 이 한 방에 날리겠다는, 정말 야무지게 때려버리겠다는 표정이라고.
겁이 안 나겠냐?
무려 도깨비 방망이에 맞는 건데.
- 간다, 인간.
따악!
-----
다음 날, 아침.
‘... 혹은 안 났네.’
일어나자마자 정수리를 만졌다.
도깨비 방망이에 맞을 때 머리가 뚫리는 듯한 통증을 느꼈던 것 같은데 상처는 없다.
꿈의 내용은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서로의 사정을 확인하고 협력하기로 했다.
녀석은 귀천을 위해 힘을 모아야 하는데, 내가 줄곧 거기에만 매달릴 수 없다는 걸 이해했다.
우선 내 생활에 집중하는 동시에 주변에서 기운을 찾고, 정기적으로 시간을 내서 아예 기운을 찾을 목적으로 움직이기로 했다.
아, 도깨비의 이름은 갑이.
‘갑’이 아니라 ‘갑이’가 이름이다.
아이의 외모지만, 나이는 수백 살이 넘으니 애 취급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녀석에게 왜 도깨비 방망이로 맞았냐면 기운 모으는데 도움될 능력을 틔워준다고 해서다.
사람은 가질 수 없는 능력인데, 특이하게도 내 몸에는 대추나무의 서기 잔재와 갑이의 영기가 있어 가능하단다.
이 덕분에 녀석이 이 세계에서 소멸하지 않는 것이며, 알고 보니 내 몸이 좋아진 이유도 이거였다.
앞으로는 머리도 좋아질 거라나?
“어제 그냥 개꿈 꾼 거 아닐까?”
사실 지금도 확실히 믿는 건 아니다.
반신반의다.
아무튼, 녀석이 틔워준 능력은···.
똑똑!
아름이가 갑자기 문 열고 머리를 들이밀었다.
“남영훈, 빨리 준비해서 도서관 가자.”
“어, 알았···.”
고개 돌려 답을 하던 그대로 굳어졌다.
뭔가··· 보여서.
깜빡, 깜빡.
눈을 깜빡여도 보인다.
이상한 게, 아니 보이면 안 될 것 같은 게.
“......”
“야, 뭐해? 사람이 말을 걸었으면 대답을 해.”
“......”
내가 여전히 굳어져 있자 아름이가 문을 완전히 열었고 녀석의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다 보인다.
익숙한 후드 티에 낡은 추리닝 차림.
“얘가 왜 이래? 너 뭐 못 볼 거라도 봤냐? 나 어디 이상해?
“......”
살짝 당황한 표정으로 자기 몸을 살피는 아름이.
녀석의 전신에 어린 푸른 빛에 난 말문을 잇지 못했다.
- 작가의말
글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사건, 지명 등등은 사실과 관계없는 허구입니다.
선작, 댓글, 추천은... 감사합니다. ^^;
Comment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