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아마 기계가 오작동을 일으켰겠지
“알겠습니다.”
정 실장이 사무실을 나가고 난 뒤 잠시 후 강영훈의 새로운 계측결과치가 전 팀장의 컴퓨터로 들어왔다.
전 팀장은 모니터에 나타난 강영훈의 계측결과를 살펴보다가 속성컬러에서 시선을 멈췄다. 거기에는 분명히 ‘White’라는 단어가 적혀 있었다.
‘화이트라…….’
그는 손으로 턱을 만지작거리면서 생각에 잠겼다.
‘정 실장의 말을 믿고 다시 불러서 계측을 해봐?’
전 팀장이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게 하기에는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만약 기계오류로 밝혀지면 말 그대로 난 좆 되는 거야. 이 자리에서 쫓겨날 수도 있어. 그건 절대로 안 될 일이지.’
전 팀장이 마우스를 움직였다.
- 관리자 권한으로 이 계측결과를 완전히 삭제하시겠습니까?
잠시 고민하던 전 팀장은 결국 ‘Yes’를 눌렀다.
위대한 발견이 될 수 있었던 강영훈의 계측결과는 이렇게 빛을 보지 못하고 철밥통 속으로 삼켜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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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 존재하는 능력자들의 숫자는 얼마나 될까?
등록자들을 기준으로 하면 약 63,000여 명이다. 암흑기 이후 살아남은 대한민국 인구가 3,500만 명가량임을 감안하면 0.2%에 근접하는 숫자다.
전 세계 능력자들의 숫자가 인구 대비 평균 0.1%인데 비해 대한민국은 그 두 배에 이른다.
정권이 붕괴된 후 능력자들이 중심이 된 군벌들이 나라를 장악하고 있는 북한도 대한민국과 비슷한 능력자 비율을 보이고 있을 것이라 예상하지만, 정확한 숫자를 파악하기 어렵다는 점을 감안하면 오직 대한민국과 이스라엘만이 인구대비 평균 이상의 능력자를 보유하고 있는 셈이다.
이에 대한 정확한 원인은 파악되지 않았다. 단지 유대인과 한민족이 지닌 고유의 유전자가 각성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 추측만 하고 있을 따름이다.
어쨌든 강영훈도 이제 63,000명 중 한 명의 능력자가 되었다. 63,000이라는 숫자가 언뜻 보아서는 상당히 많지만 전체 인구를 따지면 무척 귀하다. 1천 명 중 단 2명에 불과하니 말이다.
현대에서 능력자의 숫자가 국력을 상징하듯 기업도 마찬가지다. 굴지의 대기업들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정부도 능력자를 확보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능력자는 자신이 마음먹은 대로 골라서 취업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러나 강영훈은 자신의 진로에 대해 쉽게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우선 능력자도 예거가 될 수 없는 이상 특별한 전문지식이나 기술이 필요했다. 그게 없으면 강건한 신체를 이용하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대기업에 들어간다고 해도 주로 비서실 쪽으로 빠져 의전을 담당하거나 오너 일가의 2세들을 경호하는 게 전부였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특채로 경찰이 되거나 군에 투신해 나라를 위해 일하는 게 나았다.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이른바 극한직업에 종사하거나 막노동을 하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었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지만 강영훈은 하늘이 내려준 능력을 그런 일에 소모하기는 싫었다.
강영훈이 보기에 가장 바람직한 건 능력자가 지닌 능력특성과 직업이 맞아 떨어지는 경우였다. 예를 들면 의사가 힐러로 각성한 경우가 대박이었고, 극한의 환경을 지닌 지역에서 근무하거나 열악한 환경에서 강도 높은 노동을 하는 사람이 각성하는 것도 꽤 괜찮은 일이었다.
바꿔 말하면 능력자가 열심히 노력해서 지식을 쌓거나 기술을 익히면 일반인에 비해 훨씬 높은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쉽지가 않다.
능력자로 각성하면 조금이라도 우월감을 가지게 되는 게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지켜야 할 자존심이 커지고 체면도 차려야 하는데, 노력해서 얻기 보다는 주어진 것을 누리려고만 한다.
언노운들 중 상당수가 어둠의 길로 들어서는 것도 결국 이 때문이다. 최소한의 노력으로 많은 돈을 벌 수 있고, 어깨에 힘까지 줄 수 있다는 건 쉽게 떨쳐버리기 어려운 유혹이니 말이다.
강영훈은 결코 어둠의 길로 들어설 생각이 없었다. 그것은 하늘이 내려준 축복을 모독하는 일이었다.
‘그냥 단순하게 생각하자. 내가 하던 일을 계속하는 거야. 일반인들보다 체력적으로 훨씬 앞설 테니 오랫동안 집중적으로 공부를 할 수 있겠지. 그럼 빠른 시간 안에 고시를 패스하고 변호사가 될 수 있을 거야. 만약 더 좋은 길이 보이면 그때 가서 진로를 바꾸면 되겠지.’
일단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정하자 마음이 편해졌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가족을 건사하는 일이다.
16. 내가 괜찮은 일거리 하나 소개해줄까?
강영훈은 어머니가 다시 일을 나가시게 하기는 싫었다. 폐의 상당부분을 들어내는 바람에 예전처럼 일을 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능력자를 아들로 둔 어머니가 호강은 못할망정 돈을 벌기 위해 힘든 일을 하는 모습은 결코 보고 싶지 않았다.
‘일반인이라면 고시공부와 일을 병행하기 어렵겠지만 능력을 얻은 지금은 가능하겠지. 뭐든 좋으니 보수가 좋은 시간제 일을 찾아봐야겠다.’
결심을 굳힌 강영훈은 곧바로 어머니에게 가서 자신의 생각을 말씀드렸다.
“…그렇게 하면 우리 가족이 생활하는 데에도 아무 문제가 없을 거예요.”
“우리 영훈이가 아주 기특한 생각을 했구나. 사람이 한결 같아야 해. 힘 좀 생겼다고 날로 먹으려 들면 그때부터 인생은 삐딱선 타는 법이여. 그런데 한 가지는 반대다.”
“반대라니요?”
“이 어미도 일을 시작해야겠다.”
“어머니!”
“건강도 되찾았고, 사지도 멀쩡한 내가 왜 뒷방 노인 취급받아야 해?”
“이젠 제가 돈을 벌 수 있다구요. 명색이 능력자 어머니신데 편하게 사셔야죠.”
“편하게 살려고 일하려는 거다. 이십 년 가까이 일을 했는데 갑자기 그만두면 오히려 병이 나.”
“하지만 몸도 불편하시면서…….”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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