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그럼 나도 글이나 한번 올려 볼까?
“그래? 오늘은 바쁜 모양이네. 그건 그렇고, 진도 좀 나갔냐?”
“네? 진도라뇨?”
“에이, 다 알면서. 남녀가 그렇게 오랫동안 붙어 있었으면 일이 나도 벌써 났어야지.”
“어머니!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쯧쯧쯧, 말 하는 걸 보니 아직 손도 한 번 못 잡아봤겠구나.”
“참내! 승연이는 그냥 친구예요. 그리고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거든요?”
“남녀 사이에 친구가 어디 있고, 만난 시간이 뭐가 중요해? 삘만 통하면 게임 끝이다.”
“삐, 삘요?”
“그래. 삘!”
강영훈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어휴! 답답한 눔……. 지 애비 닮아서 완전히 숙맥이라니까. 저러니 대학 3년 다니는 동안 애인 하나 없었지.”
“제발 그만 하시고 나가세요.”
강영훈이 어머니의 등을 떠밀어 밖으로 내보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휴우! 도대체 못 말린다니까.”
강영훈은 다시 침대 위에 앉아 명상을 시도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집중이 제대로 되지 않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눈을 뜨고 말았다.
‘왜 이러지? 자꾸 승연이 얼굴만 떠오르고……. 승연이 같은 여자에게 내가 눈에 차기나 하겠어? 예거라도 되면 모를까. 에이! 일단 잊고 명상수련에나 집중하자.’
그는 다시 눈을 감고 명상을 하려 했지만 결국 얼마 버티지 못하고 침대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휴우! 왜 이렇게 허전하지?”
강영훈은 쓴 입맛을 다시며 머릿속으로 차승연의 예쁜 얼굴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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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성장통을 겪은 지 2주일이 지났다.
이제 명치 제법 묵직하게 느껴졌고, 몸에 힘이 붙었다. 능력자가 되어간다는 명확한 증거였지만 강영훈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원래 성장통을 겪은 지 보름이 지나면 기운의 특성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 특성을 미약하게나마 발휘하기도 한다.
그러나 강영훈은 기운의 특성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몸이 조금 강해졌다는 느낌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건 자신이 언노운이 될 가능성이 극히 높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요란한 성장통을 겪었는데도 언노운이라니…….’
강영훈은 한편으로는 실망스러웠지만 또 한 편으로는 안심이 되기도 했다. 예거가 되어 괴수와 싸워야 할지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물론 예거가 되기에 충분한 능력치를 지녔어도 굳이 레이드에 참가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건 자신이 용기가 없다는 것을 내보이게 되는 것이니 창피스러운 일일 터였다.
‘내가 예거가 되어야 승연이에게 어울리는 남자가 될 텐데…….’
아쉽기는 하지만 예거가 되는 건 하늘이 정하는 것이니 어쩔 수가 없었다.
강영훈은 마음을 다잡고 힘을 냈다. 어머니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학업도 중단한 채 전전긍긍해 하던 자신을 생각하면 지금의 아쉬움과 고민은 복에 겨운 어리광에 불과했다.
그는 컴퓨터를 켜고 인터넷에 접속했다.
언노운들이 주로 어떤 일에 종사하며 또 가장 보수가 좋은 직업이 무엇인지 찾아보기 위해서였다.
‘어디 보자. 능력자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구인구직사이트가 어디더라……. 옳지. 여기군. 일단 들어가 보자.’
딸칵! 딸칵딸칵!
컴퓨터 화면에 능력자들이 올린 게시물 목록이 나타났고, 새로운 글이 실시간으로 계속 올라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마치 대화방에 들어온 것 같았다.
- 화성 계열의 원거리 딜러입니다. ESP 470대예요. 레이드 다섯 번 참가해서 호그 한 마리, 앤트와 웜 각각 한 마리씩 사냥한 경험 있어요. 레이드 참가하고 싶습니다.
댓글 1 아직 초보시네요. 경험 좀 더 쌓고 오세요.
댓글 2 20인 공격대 모집해요. 원정대 꾸려서 강원도로 가려구요. 생각 있으시면 대화방 21345로 들어오세요.
댓글 3 ESP 500도 안되는데 예거가 된 걸 보니 마나 운용이 뛰어나시나 보네요. 대단하십니다.
댓글 4 ESP 470대가 예거냐? 잡캐이지. ㅋㅋㅋ
댓글 5 adx000님. 예의를 좀 지켜주세요. 예거답게 품격 있는 언어를 사용해 주세요. - 게시판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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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성형 탱커. 능력치 626입니다. 레이드 경험 30번 이상. 힐러 호위 전문입니다.
댓글 1 이틀 뒤 청계산 지역으로 레이드 갑니다. 쪽지주세요. 자리 비워두겠습니다.
댓글 2 청마 클랜 마스터입니다. 혹시 저희 클랜에 가입하실 생각이 없으신지. 참고로 우리 청마 클랜은…
댓글 3 15인 공격대 모집 중입니다. 힐러 네 분 포섭했는데 보조 호위로 님이 제격인 듯합니다. 꼭 모시고 싶습니다. 연락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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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버릭 클랜에서 유능한 스카웃을 찾습니다. ESP 최소 600이상, 레이드 20번 이상 유경험자 우대합니다.
댓글 1 화성형 딜러. ESP 595이지만 레이드 경험 30회 이상입니다. 유명한 매버릭 클랜에 꼭 가입하고 싶습니다.
댓글 2 목성형 근거리 딜러. ESP 630. 레이드 경험 42회입니다. 이상.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댓글 3 능력치 610. 레이드 경험 15회에 불과하지만 탐지성공률 90%를 자랑합니다. 매버릭 클랜에 가입할 수만 있다면 한 발 더 뛰는 스카웃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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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힐러예요. ESP 680. 12인 이하 막공 참가 원해요. 클랜 스카웃 제의 및 정공 사절입니다.
댓글 1 공격대 모집 완료되면 홍천지역으로 원정 갑니다. 현재 ESP 700이상의 탱커 1명, 경험 많은 딜러 3명, 스카웃 1명, 그리고 힐러 2명 모집 되었습니다. 힐러 한 자리 비었는데 님이 제격인 것 같습니다. 꼭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기다리겠습니다.
댓글 2 12인 공격대 모집합니다. 힐러분들께 수익배분 5% 더 드립니다. 연락주세요.
댓글 3 유니콘 클랜 제3 정규공격대장입니다. 대원 중 힐러 한 분이 당분간 자리를 비우게 되었습니다. 한 달 정도 임시로 일해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아무래도 막공보다는 정공이 안정적이죠. 연락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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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성 괴수 사냥을 위해 춘천호 원정 갑니다. ESP 700이상의 유경험자 모집합니다. 공격력 높은 토성형 탱커 우대. 10인 공격대.
댓글 1 수성 괴수는 사냥하기 어려울 텐데. 조심하세요.
댓글 2 수성 괴수 사냥은 위험해서 패스.
댓글 3 전문 장비와 기술이 있어야 사냥할 수 있을 텐데요. 갖춰져 있나요?
댓글 4 저도 위험해서 패스.
댓글 5 토성형 탱커입니다. ESP 673이지만 상당한 공격능력 갖추고 있습니다. 레이드 참가하고 싶지만 장비가 없네요. 빌려주실 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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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글과 댓글들을 살펴본 강영훈은 한 가지 확실히 알게 되었다. 힐러들의 인기가 하늘을 찌른다는 사실이다. 힐러는 그 자체로 희소성이 있어서 글을 올리기 무섭게 영입하고 싶다는 댓글들이 수십 개씩 달렸다. 그리고 능력치를 나타내는 ESP가 높고 경험이 많은 예거일수록 각광받는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딜러, 탱커에 막공이라고? 아주 게임 용어들이 판을 치는군. 어쨌든 레이드에서는 힐러가 갑이구나. 그럼 나도 글이나 한 번 올려볼까?’
강영훈은 곧바로 키보드를 두드렸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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