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
로든이 다시 오러를 모으며 비기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위험하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다.’
10분의 1 정도에 불과한 마나가 불안하다.
하지만 승부를 낼 때다.
상대는 아직 오러에 여유가 있는 상태.
더 시간을 끌다가, 로든이 숨겨둔 수라도 있다면 자칫 당할지도 모른다.
정신을 집중한다.
마나를 전신에 회전시켰다.
로든이 막 준비한 수를 펼치려 하고 있다.
‘블링크!’
검을 들어 올리는 로든의 눈이 찢어질 듯 커진다.
그의 시야에서 레이의 형상이 흩어지고 있는 것이다.
로든의 등 뒤에서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다.
동시에 그의 검이 로든의 허리를 횡으로 벤다.
공간에 퍼뜨려 놓은 로든의 오러 기운이 급하게 위기를 알렸다.
찬물을 끼얹은 듯 전신이 찌릿찌릿하다.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다.
돌아볼 시간조차 없다.
들어 올린 검을 황급히 등 뒤로 내리쳤다.
‘쉬익’하는 바람소리와 함께 그의 검이 허공을 스친다.
아무것도 걸리지 않았다.
로든이 가진 극도의 반사신경과 감각.
블링크조차 통하지 않는다.
로든의 반응을 예상한 듯 레이는 왼손에 매직 완드를 소환했다.
메모라이즈된 블링크를 활성화했다.
막 형상화되던 그의 인영이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로든의 감각이 이상 신호를 보낸다.
믿을 수 없게도 이번에도 다시 등 뒤에서 위험이 느껴진다.
재빨리 몸을 돌리며 횡으로 검을 그었다.
그 순간 ‘퍽’하며 뭔가가 팔을 때린다.
아랫배가 따끔하다.
레이의 검이 로든의 팔뚝을 가르고 회전한 후 그의 복부에 박혔다 빠져나왔다.
남은 마나를 모두 쏟아부어 전력을 다한 검격이었다.
로든의 감각조차 따라오지 못한.
그때 ‘툭’하며 로든의 팔뚝이 땅에 떨어진다.
질린 팔에서 피가 솟구쳤다.
오러 홀이 깨진 아랫배에서 오러가 분수처럼 새 나간다.
로든은 마치 석상으로 변한 듯 검을 휘두르던 자세 그대로 굳었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배를 내려다본다.
‘오러 홀이 깨졌다!’
남작가의 하녀에게서 서자로 태어나 핍박과 멸시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머니가 천대받으며 궁핍 속에 죽고.
뒷골목에서 어울리던 놈들에게 구한 독을 남작의 자식놈들 음식에 풀고.
도망쳐 나와 타지를 떠돈 지 십여 년.
천운으로 얻은 검법으로 천신만고 끝에 쌓은 오러였다.
잘린 팔에서 피가 펑펑 솟는 데도 보이지도, 아프지도 않았다.
마음 깊은 곳에 응어리졌던 증오가 치솟았다.
모순투성이 세상에 대한.
타고난 혈통에 대한 아집으로 가득 찬 귀족들에 대한.
없는 자를 무시하던 가진 자들에 대한.
그의 분노와 증오가 자신을 허물어뜨린 자에게 집중된다.
허공에 가득한 흙먼지 속에 그자가 보인다.
검을 땅에 꽂고 기대어 숨을 몰아쉬고 있다.
‘모두 죽이고 싶다. 내가 이렇게 되도록 만든 놈들. 한 놈도 남기지 않고 모두 죽이고 싶다.’
로든이 품에서 사각형의 상자를 꺼냈다.
오른쪽 겨드랑이에 끼우고 상단부 안전장치를 푼다.
가운데 손잡이에 손가락을 끼웠다.
마나도, 체력도 거의 고갈 상태인 레이가 로든을 쳐다보았다.
생명이 위독한 심각한 부상을 입고도 쓰러지지 않는다.
비틀거리면서도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더니 전면으로 내민다.
가슴이 덜컹했다.
머릿속에 급박한 경종이 마구 울린다.
불길한 예감이 덮친다.
“위험해! 모두 엎드려!”
자신도 모르게 크게 외치며 몸을 던졌다.
갑자기 조용해진 전장.
흙먼지 속을 바라보던 사람들에게 엎드리라는 고함이 들린다.
몇 명은 재빨리 몸을 낮추었지만, 머뭇거리던 사람도 있었다.
로든이 손잡이 위쪽의 버튼을 눌렀다.
- 콰아앙!
폭발음과 함께 전면의 강철 덮개가 튀어 나가더니 ‘타타탕탕!’하는 발사음이 한동안 이어졌다.
로든이 뒤로 돌았다.
그를 중심으로 사방에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의 철침 수천 개가 공간을 메웠다.
완갑으로 머리를 가린 레이의 팔과 다리에 손가락 반 정도 굵기의 철침이 박혔다.
철침이 사방으로 쏘아졌고, 일부는 담 아래에 앉은 사람들에게 퍼부어졌다.
엎드려도 장애물 뒤에 숨어도 소용없었다.
직선과 곡선으로 날고, 돌과 금속에 튕겨 나온 철침이 몸에 박혀 들었다.
그저 얼굴이나 노출된 곳을 가리는 게 최선이었다.
제국 최고의 금속 마스터가 수없는 실패 끝에 단 몇 개를 제작하는데 성공했다는 기계식 발사함.
루퍼슨 경매장을 북대륙에 알린 3대 경매품 중의 하나.
그 발사함이 로든의 품에 숨겨져 있었다.
사방에서 낮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일그러진 미소가 로든의 입가에 퍼진다.
빈통을 던진 로든이 짙푸른 포션병을 꺼내 팔과 배에 뿌린다.
“치이익!” 소리가 나자, 그가 허리를 푹 꺾는다.
앙다문 잇새로 신음과 기침을 내뱉었다.
잘린 뼈, 찢어진 근육들이 아물면서 그제야 끔찍한 고통이 전신에 퍼진다.
“끄으으윽~”
무릎을 꿇고 쿨럭거리던 로든이 억지로 다리를 폈다.
절뚝거리며 한 걸음, 한 걸음을 옮기다가 점차 걸음이 빨라진다.
몸을 움직이지도 못한 채 레이가 가까스로 고개만 들었다.
멀어져 가는 로든이 보인다.
피와 땀이 눈으로 흘러내려 뒷모습이 희미하다.
몸을 약간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온몸의 근육이 터져나가는 듯 통증이 솟는다.
눈을 꽉 감고 몸을 뒤집었다.
“끄으응!”
신음이 저절로 나온다.
아래에 깔린 왼손에는 다행히 철침이 박히지 않았다.
‘로든이 그대로 도망치도록 두면 안된다.’
팔을 눈까지 끌어올린다.
몸이 덜덜 떨려왔다.
철침에 마비독까지 바른 모양이다.
손과 발이 사슬에 묶인 듯 들어 올려지지 않는다.
옷소매가 눈에 닿았다.
‘됐다!’
눈을 닦아냈다.
피가 씻기자, 후정 쪽에서 말을 타고 나와 정문으로 달리는 로든이 보인다.
손목을 가까스로 들며 속으로 캐스팅을 했다.
‘제발 성공해라! 디텍트!’
손가락 끝에서 미약한 한 가닥 마나의 기운이 쏘아졌다.
손가락에서 로든의 몸까지 길게 선이 그어진다.
마나가 로든의 몸에 닿았다.
그 순간 추적 마나가 그의 몸 안으로 스스륵 파고 들었다.
레이가 털썩하며 다시 뒤로 몸을 눕혔다.
‘헉헉, 성공이다!’
왼손으로 천천히 오른팔과 다리에 꽂힌 철침을 빼냈다.
네 개나 되는 침이 깊이 박혀 있다.
마나 오브를 돌리며 몸 안의 독기를 내보냈다.
다행히 치명적인 독은 아닌 듯 서서히 통증이 사라진다.
아공간에서 포션 하나를 꺼내 상처에 부었다.
회복 속도가 더 빨라진다.
먼지가 가라앉고 시야가 환해지자, 상황이 눈에 들어온다.
끝까지 남았던 루퍼슨의 호위 두 사람은 이미 도망간 후다.
지금쯤은 지붕의 경비대원들도 아마 마비가 풀려 피신했을 것 같다.
허스틴의 종자 두 명과 애드먼, 트레비가 철침을 제대로 피하지 못했다.
다만 생명과 관계된 치명적인 부위는 아니다.
포션만으로도 치료가 충분할 정도.
알렉스가 지친 모습으로 레이에게 다가왔다.
“레이, 로든이 도망갔어. 어떻게 하지? 지금 추적할 수 있겠어?”
레이가 상반신을 일으키며 낮은 목소리로 만류했다.
“서두르지 않아도 돼요. 천천히 가도 추적할 방법이 있어요.”
알렉스의 얼굴이 환해진다.
“그래? 그러면 다행이고.”
“모두들 부상을 입은 상태이니 좀 쉬기로 하죠.”
저택의 석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마나를 회전시켰다.
‘현재의 몸 상태로는 로든을 쫓을 수 없다. 조금이라도 회복시키고 추적한다.’
당장이라도 로든을 뒤쫓고 싶어 조급해지는 마음을 다독였다.
눈을 감았다.
오로지 호흡으로 들어오는 마나가 오브 안을 통과하여 마나 로드를 순환하는 움직임에 집중했다.
레이의 정신은 조금씩 내면으로 가라앉았다.
루퍼슨도, 저택도, 방금까지의 전투도 잊혀지기 시작했다.
번쩍 눈이 뜨였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집중한 덕에 약간의 마나가 차올랐다.
포션과 약으로 임시 치료를 한 일행들이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허스틴 팀과 비올라 팀은 당장 저택을 뒤지려고 하는 참이다.
“알렉스도 함께 루퍼슨의 저택을 살펴 주세요. 저는 로든을 추적할게요. 일이 끝나면 나하드의 숙소에서 만나요.”
“레이, 함께 가는게 좋지 않겠니?”
레이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모두들 몸 상태가 좋지 않으니 여기 있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제 많이 회복되어 혼자라도 충분해요. 갔다 올게요.”
마사로 간 레이는 가장 튼튼해 보이는 말 한 마리를 꺼내 밖으로 나왔다.
미리 고용해 둔 용병이 골목에서 나오더니 남문을 가리킨다.
그쪽으로 달렸다.
‘디텍트!’
로든에게 남긴 마나의 기운이 아주 희미하다.
상당히 멀리 달아난 것 같다.
말의 속도를 늦추지 않고 인장 반지를 내밀며 성문을 나섰다.
뒤에서 뭐라고 소리치는 경비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급하다.
‘디텍트!’
미약한 기운이 북쪽으로 이어진다.
작은 마을과 타운들.
로든은 어디도 들르지 않고 곧장 달린 듯하다.
공국 수도 베론에서 곧장 북으로 두 시간 정도 달리면 마주하는 마슈르 강.
동쪽 타베라스 산맥에서 발원하여 바다까지 대륙을 관통하는 강이다.
강을 건너면 프란나 시.
작은 도시이지만, 페르세이언 제국, 엘디니아 왕국, 하르몬 왕국, 에뉴딘 왕국 등 북대륙 전역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이다.
로든이 강을 건넌다면 추적이 어려워질 공산이 크다.
미약한 마나로 시전한 디텍트 마법의 효력은 사라질 것이고, 어느 방향으로 피신했는지 알기에는 너무 많은 선택지가 있다.
“하아, 하아!”
레이가 채찍을 휘둘렀다.
로든은 적어도 30분 정도는 앞선 것 같다.
배를 탈 수 있는 포구까지 얼마 남지 않았는데도 로든을 발견하지 못했다.
‘시간상 지금쯤 포구에 도착했을 것이다. 하지만 배가 출발하기 전에만 따라잡으면 붙잡을 수 있다.’
언덕길을 올랐다.
시야가 트인다.
멀리 밭 사이로 구부러진 길이 보이고, 그 너머에 길게 뻗은 마슈르 강.
이제 20분 정도의 거리.
채찍을 들어올려 말 엉덩이를 때리려는 찰나였다.
통신 반지의 헤드에서 불빛이 번쩍였다.
마크의 연락이다.
마음은 당장 달리고 싶지만, 통신을 무시할 수는 없다.
헤드를 돌렸다.
급한 듯 마크의 커다란 목소리가 웅웅 울린다.
“레이, 큰일이다! 몬스터가 목장을 공격하고 있어!”
“네? 몬스터요?”
갑자기 몬스터가 나타났다는 말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목장은 대수림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데 어떻게 거기에 몬스터가?”
“몬스터 웨이브다! 과거에 있었다는 엄청난 규모는 아니고, 소형 웨이브가 발생했어. 경계 지역에 급파한 군대와 용병들이 막고 있는데 일부 지역이 뚫렸다. 북쪽 테나르강, 동쪽은 험한 산이고 남쪽에 계곡이 있어서 우리 목장은 안전할 거라고 생각했었지. 그런데 몬스터들이 목장을 지나쳐 수도 아헨다움 쪽으로 진행하다가 기사와 영지군에 쫓겨 거꾸로 이쪽으로 밀려온 거야.”
마크는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설명했다.
“삼촌, 다치신 거예요? 피해는요?”
“아직 마사와 숙소 주변의 목책을 넘어오지는 못했다. 큰일은 그게 아니다. 낮에 산으로 놀러 간 아이들이 위험해!”
“산이요?”
“그래. 아리안이 아이들에게 구경시켜 준다고 올라갔는데 이미 아래쪽에 몬스터들이 몰려왔어. 아이들을 구해야 해. 시간이 없어. 당장 이쪽으로 와라!”
“아, 알았어요. 곧 갈게요.”
레이는 반지의 통신을 껐다.
그의 동공이 갈등으로 흔들렸다.
마크는 당장 오라고 하지만, 오히려 여기 상황이 더 급박하다.
멀리 보이는 희미한 포구의 모습.
긴 시간도 필요 없다.
단 20분 정도면 로든을 잡을 수 있다.
‘아이들이 위험하다라··· 그렇게 짧은 시간에 큰일이 생기지는 않겠지.’
레이의 초조한 마음이 포구 쪽으로 기운다.
‘고민하는 시간에 얼른 달려가는 게 낫겠다.’
채찍이 말 엉덩이를 쳤다.
“히히힝~~~”
말이 앞발을 살짝 들었다가 발굽으로 땅을 박차고 뛰어나간다.
- 다각다각!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굽이친 길을 따라 퍼졌다.
밭일을 하던 농부들이 무슨 일인가 흘끔흘끔 쳐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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