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알렉스
깁스가 다시 앞장을 섰다.
대수림 안에서 방향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은 깁스밖에 없다.
함정에서 그랜트 팀마저 잃었다면 곤란했을 것이다.
한낮이 되어 휴식을 취할 때 그랜트가 일어선다.
“그동안 신세만 졌는데 작은 도움이라도 되어야지. 먹을 만한 놈 하나 잡아옴세.”
사냥이라면 자신이 있는 레이도 일어서려는데 트레비가 어깨를 누른다.
알렉스가 귀에 속삭였다.
“조금이라도 신세 진 걸 갚겠다는 의도이니 나서지 않는 게 좋겠어.”
‘아’ 하고 레이가 그대로 앉았다.
30분 정도 지날 무렵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깁스와 알렉스, 트레비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른다.
제법 큰놈을 잡았다는 과시의 발걸음인 것이다.
큼지막한 멧돼지였다.
불을 피우고 멧돼지를 구워 오랜만에 고기로 모두 포식을 했다.
며칠 후.
깁스의 안내로 대수림을 무사히 빠져나온 일행의 앞에 헌터 마을이 나타났다.
살아서 돌아왔다는 걸 실감한다.
목에 뜨거운 것이 올라온다.
위험과 위기의 연속.
아슬아슬하게 목숨을 건진 것이 몇 번인지 모른다.
레이를 쳐다보았다.
‘그가 아니었다면 벌써 몇 번 죽고도 모자랐을 것이다.’
숙소를 잡고 뜨거운 물에 몸을 씻은 후 식당에 모였다.
“어떻게들 할 생각인가? 내일 당장 영주성으로 가서 보상을 받아야 하지 않겠나?”
그랜트의 말에 모두들 동의했다.
프레드먼이 황제의 신물을 가져갔으니, 기사들을 몇 명 잃기는 했어도 분위기가 나쁘지 않을 것이다.
이럴 때 얼른 보상을 받는 게 현명했다.
알렉스가 곧장 대답했다.
“맞습니다. 내일 말을 달려 모두 함께 영주성으로 들어가죠.”
그랜트가 기뻐하며 맥주잔을 들었다.
“자, 첫 잔은 우리의 무사 귀환을 축하하며!!”
모두 맥주잔을 들어 단숨에 잔을 비웠다.
잔이 다시 채워지자, 이번에는 깁스가 이었다.
“이번 탐사를 성공으로 이끌고, 우리의 목숨을 구해준 레이를 위하여!!”
모두들 힘차게 레이를 위해 건배를 외쳤다.
레이는 담담한 표정으로 잔을 들었다.
껄껄대며 즐거워하다가, 잃은 동료들 때문에 금방 슬픈 분위기로 바뀐다.
떠들썩하게 겪었던 일들을 나누는 시간이었다.
식사를 마칠 때였다.
레이가 방으로 사람들을 불렀다.
의아해하며 레이의 방 테이블에 둘러앉자, 레이가 배낭을 가져와 테이블에 놓았다.
“던전 석실에서 보물함을 두고 와서 모두들 아쉬웠을 거예요.”
“당연하지. 그걸 어떻게 잊겠소. 금과 보석이 가득 찬 함이었는데 말이야.”
깁스가 제일 큰 목소리로 받아쳤다.
다른 사람들도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어찌 아쉽지 않으랴.
손에 다 들어온 보물들이었는데.
레이가 배낭에 든 것을 테이블에 쏟았다.
찬란한 빛이 방에 퍼졌다.
금괴였다.
로잔느가 흠칫 놀라며 탄성을 터뜨렸다.
“헉. 이게 다 뭐야? 레이, 석실에 있던 금괴들 아냐?”
“정말 금괴 맞는 거야? 다 무너져서 가라앉았을 텐데?”
한편 놀라고, 또 한편 기뻐하며 모두들 한마디씩 했다.
“그럼 탈출할 때 약간 시간이 걸렸던 게 이걸 챙기느라?”
트레비가 알겠다는 듯 중얼거리자 그제야 모두들 이해한 눈치이다.
금괴 하나면 얼핏 보아도 금화 100개의 무게는 나갈 것 같다.
배낭에서 주머니를 꺼내 한 사람당 5개씩의 금괴를 넣어 나누었다.
“가져가서 개인적으로 쓰시고, 필요하면 죽은 용병들의 가족을 위로해 주세요.”
깁스가 주머니를 품에 꼭 끌어안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헛웃음을 뱉는다.
“레이에게 빚을 졌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보물까지 받는군. 고맙소. 평생 갚지 못할 신세를 졌소. 이제 와서 하는 이야기지만 이번 일에 성공하면 보수로 받을 금액이 거금 5골드였다오. 흐흐흐.”
그랜트도 진심 어린 감사를 표했다.
“레이, 정말 고맙네. 다음에 자네가 필요하면 언제든 나를 불러주게. 무슨 일이든 돕지.”
로잔느가 주머니를 안고 레이의 자리를 보았다.
“레이, 네 몫은?”
“나는 미리 챙겼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자, 이제 푹 쉬고 내일 일찍 출발해야죠.”
“고맙네, 잘 자게.”
“고맙소, 레이.”
피곤하면서도 설레는 마음에 일행은 뒤척이며 밤을 새웠다.
모두 아침 일찍 말을 빌려 리몽으로 달렸다.
이번에는 레이도 직접 말을 몰았다.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오면서 자세히 관찰한 덕분인 듯했다.
그랜트가 예상한 대로였다.
프레드먼은 일행들이 빠져나온 것을 듣자, 한걸음에 달려왔다.
던전이 무너질 때 혼자 탈출한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던 탓이다.
루드니아 백작이 던전에 관한 일을 철저히 비밀에 부쳐서 자세한 내막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성내의 분위기는 분명히 약간 들떠 있었다.
그랜트 팀은 보상을 즉시 받았고, 알렉스 역시 예전에 살던 저택을 하사받았다.
단순히 백작 소유의 집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소유권을 아예 알렉스에게 넘긴 것이다.
외성 주택가에 위치한 저택은 그간 방치되었는지 잡초가 자라고 내부는 먼지가 가득했다.
사람을 사서 앞뒤의 마당과 내부를 청소하는데 3일이 걸렸다.
3일째 되는 날 오후 알렉스와 일행이 저택에 들어섰다.
현관까지 깔린 포석은 이끼를 깨끗이 닦아냈다.
좌우의 화단에는 잡초가 제거되고 키 작은 풀과 꽃씨를 뿌렸다.
거실로 들어가니 남은 가구나 장식품이라고는 낡은 소파와 테이블이 전부다.
색이 떨어져 나간 벽화가 집의 상태를 알려준다.
그래도 청소를 마친 뒤라 내부는 먼지 한 톨 없이 깔끔하다.
테이블에 둘러앉아 알렉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무 말 없이 집안만 둘러보는 알렉스의 얼굴은 잔뜩 상기되었다.
대대로 내려오던 집을 완전히 되찾았다.
더구나 내일이면 기사 서임식.
조부와 부친이 이 모습을 보았다면, 완고한 두 양반도 아마 눈물을 쏟지 않았을까.
1층은 거실과 방이 하나뿐이지만, 2층에 방이 5개나 있어 일행이 머무르기에 충분했다.
저택 뒤의 마당은 널찍하다.
기사 가문의 저택답게 후정을 연무장으로 썼던 모양이다.
다음 날 오후 영주성에 다녀온 알렉스는 드디어 알렉스 레만티온이 되었다.
가문의 옛 성을 찾은 것이다.
영주에게는 계약에 의한 의무만을 이행하는 자유 기사의 지위를 받았다.
백작의 인장이 찍힌 기사 서임 증서와 뒷면에 풀 네임을 새긴 반지를 보는 순간 로잔느가 고함을 질렀다.
“와아아! 이게 바로 기사의 증명이군!!!”
티탄과 트레비도 박수를 치며 호응했다.
거기에 평기사들에게 수여하는 검.
레이는 마치 가족 중의 한 사람이 집에 좋은 소식과 선물을 가지고 들어온 것 같았다.
고향 마을에 있는 듯한 푸근한 느낌이랄까.
‘이들과 같이 대륙의 구석구석을 여행하고, 모험을 찾아다닐 수 있다면 그것도 행복한 삶이겠구나.’
일이 마무리되면서 레이의 마음 한구석은 텅 비어갔다.
떠날 때가 다가온 것이다.
정보 길드 카나인에는 이미 다녀왔다.
게이드에 대한 정보는 없었다.
‘이 정도면 엘바어넌 왕국에는 없는 것이 확실하다. 셀로포네 왕국에 있기를 기대하는 수밖에.’
거실 테이블에 맥주와 안주를 펼쳐놓고 밤늦게까지 알렉스의 복위를 축하했다.
새벽 먼동이 틀 무렵 레이는 짐을 챙겨 방을 나왔다.
티탄의 방에는 던전 석벽에 걸려있던 방패를 두고 나왔다.
거실에는 네 사람이 여기저기 쓰러져 코를 골고 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보며 작별 인사를 하고 조용히 거실문을 열었다.
알렉스의 작은 목소리가 들린다.
“레이, 이제 여기가 우리들의 집이니, 여기로 소식 전해. 몸조심하고.”
레이가 고개를 끄덕이고 문을 나섰다.
로잔느의 감은 눈꼬리가 파르르 떨린다.
트레비와 티탄의 숨소리도 잠시 멈추는 듯했다.
대문을 나서기 전 후정의 공간 좌표를 계산해서 외웠다.
‘언제고 이곳에 다시 올 때는 마법으로 공간을 뛰어넘어 올 테다.’
레이는 말을 한 마리 사서 셀로포네 왕국 방향으로 달렸다.
그의 모습이 리몽에서 멀어져갔다.
***
“들어온 적이 없다고?”
허스틴의 목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새뮤어 백작령에서 보름여를 머물며 정보길드 카나인의 활동을 기다리던 허스틴 일행은 거의 진이 빠질 지경이었다.
이렇게 긴 시간이라면 조시를 죽인 자가 다시 이동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보름이 지나 길드 사무실로 간 허스틴 일행은 결과를 보고 받고 허탈한 심정을 어쩌지 못했다.
“이런 인상착의를 가진 자가 백작령으로 들어온 흔적을 뒤져봤지만, 전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이 정도라면 십중팔구 우리 영지로 오지 않은 것입니다.”
루번이 당황하여 정보원의 말을 반박했다.
“그럴 리가 없소. 우리가 이 자의 뒤를 계속 쫓아서 여기까지 온 것인데.”
정보원의 목소리는 서늘했다.
“믿지 못하신다면 어쩔 수 없죠. 다른 정보 길드에 의뢰를 해보시든가요.”
난감했다.
저 정도로 강경하게 나오는 것을 보면 길드에서도 결과에 대해 자신이 있는 것이다.
모르트가 퉁방울 같은 눈을 굴리며 재빨리 나섰다.
“잠깐만 기다리시오. 잠시 우리끼리 논의를 해보겠소.”
정보원을 기다리게 하고 허스틴에게 속삭였다.
“아무래도 ‘올빼미의 눈’에서 추측한 것이 잘못된 모양입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무작정 다른 영지로 갈 수도 없잖습니까?”
“그렇지. 그래서 어떻게 하는 게 좋겠다는 이야기인가?”
“그자가 아무래도 레이와 관계가 있어 보였잖습니까. 여기로 온 것이 레이와 연락하기 위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차라리 레이를 추적해달라고 의뢰를 넣으시죠.”
허스틴이 수염을 쓸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맞는 말이야. 그자가 사라졌다 해도 레이를 찾을 수 있다면 상관없지. 자네 말대로 두 놈이 관련이 있을 수도 있고.”
“그럼 의뢰를 바꾸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모르트는 카나인에 레이의 초상화를 제공하고 행방을 알아봐달라고 의뢰를 변경했다.
답답하기는 했지만 허스틴 일행은 다시 길드의 결과를 기다려야만 했다.
이번에는 결과가 아주 빨리 나왔다.
일주일 만에 레이의 행방이 밝혀졌다.
루드니아 백작령의 용병 길드에 나타났었다는 정보를 찾아낸 것이다.
정보원은 탐문 활동을 한 것처럼 보고했지만, 사실 의뢰를 위해 방문한 레이의 정보를 전달한 것에 불과했다.
레이는 정보를 보호할 만큼 큰 고객은 아니었다.
죽다가 살아난 기쁨이 이런 것일까.
허스틴은 뛸 듯이 기뻐했다.
“모르트, 네가 없었다면 얼마나 시간을 더 잡아먹었을지 모르겠구나. 잘했다!”
일행은 그날로 말을 달렸다.
새뮤어 백작령, 몽페르도 백작령을 거쳐 루드니아 백작령에 도착한 것은 3일을 밤낮으로 달린 후였다.
리몽에 도착한 이들은 곧장 카나인 지부로 가서 레이의 현 위치를 수소문했다.
“새뮤어 백작령 지부에서 연락을 받았습니다. 고객이 찾는 자는 아마 의뢰를 다녀온 모양입니다. 한동안 나타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내일 오시면 최종 위치를 확인해 드리겠습니다.”
다음 날 정보원은 레이가 있는 곳을 알아왔다.
최근 기사 작위를 받은 알렉스 레만티온의 저택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었다.
“저 집에서 지낸다 하니, 오늘부터 교대로 감시한다. 반드시 놈을 잡아야 할 것이다.”
허스틴 일행이 알렉스의 저택을 감시하며 레이를 찾고 있을 즈음.
레이는 엘바어넌 왕국의 서북쪽 방향으로 말을 달려 셀로포네 왕국으로 가는 중이었다.
허스틴 일행도 얼마 지나지 않아 정보 길드에서 이 사실을 전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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