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드의 아카데미
이제 긴 목함과 작은 상자 하나가 남았다.
긴 목함을 여니 고급스러운 새틴 천이 겹겹이 내용물을 둘러쌌다.
천을 들추고 속에 있는 것을 보았을 때 레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함에서 나온 것은 황제의 검과 인장이었다.
특히 반지의 헤드에 새겨진 선명한 제국 황실의 문장.
살아있는 듯 생생한 드래곤의 위용.
다만 드래곤의 눈 부분이 비어있다는 것이 약간 마음에 걸렸다.
그런데도 어쩐지 이것들이 진품 신물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그렇다면 석실의 벽에 걸려있던 검과 원탁 위의 인장은 뭐였지?’
너무 잘 보이는 자리에 걸어놓고 시선을 끄는 것이 이상했었다.
아무래도 지금 보고 있는 검과 인장을 숨기기 위한 모조품인 것 같다.
‘그냥 숨겨두고 모르는 척해야 하나··· 섣불리 진품을 공개할 수도 없고. 모르겠군.’
알렉스는 이걸로 작위까지 복위되었다.
일단 다시 함에 집어넣고, 작은 상자를 집었다.
다른 함들과 달리 견고한 사면의 조임쇠가 철저히 상자를 밀봉하고 있다.
조임쇠를 모두 풀어야 뚜껑을 열 수 있었다.
내부에는 다시 잠금장치로 꼼꼼하게 닫아놓은 덮개가 보인다.
조심스럽게 장치를 풀고 덮개를 젖혔다.
안이 드러나자마자 청아한 향기가 코를 스친다.
순간 정신이 맑아지고, 가슴이 트이면서 피로도 사라지는 기분이다.
‘향기만으로 이런 효과가?’
윤기가 흐르는 고운 검은 천에 두 개의 금환이 놓여있었다.
석류 크기 정도의 환은 섬세하게 금박을 입혀서 함부로 금박을 떼 내고 안을 볼 수도 없었다.
‘하~’ 하며 레이가 턱을 쓰다듬었다.
‘진귀한 약인 것 같기는 한데, 어떨 때 쓰는 것인지 알 수가 없군.’
모두 아공간에 잘 정리하여 차곡차곡 쌓았다.
팔찌를 보니 피식하고 헛웃음이 나온다.
트레저 헌터들이 평생을 걸쳐 찾아 헤매는 던전 몇 개가 통째로 팔찌 안에 들어가 있으니.
그런데 막상 레이에게는 당장 어디에도 쓸 데가 없어 아공간만 차지하고 있는 물품에 불과하다.
새벽 수련을 마치고 느지막이 식당으로 내려왔다.
삶은 감자를 으깨어 약간의 고기와 야채를 섞은 아침을 먹고 방으로 올라가려는 참이었다.
누군가가 옆으로 다가온다.
“길드에서 왔습니다. 결과가 나왔으니 방문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간단하게 대답했지만,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 같다.
일주일도 되기 전에 메신저를 보낸 것을 보니 성과가 있음이 틀림없다.
곧장 길드 사무실로 달려갔다.
어떻게 안으로 들어가 방에 앉았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직원을 기다리는 잠깐의 시간이 며칠은 된 것 같다.
문을 열고 들어온 정보원이 자리에 앉는다.
침착하자고 되뇌이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찾으시는 대상이 꽤 유명한 분이더군요. 서북쪽으로 300km 정도 가면 케른햄 백작령이 나옵니다. 거기 성도가 브리엔트인데 여기서 ‘슈나인’이라는 상당한 규모의 검술 아카데미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헤이든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고요.”
정보가 더 필요하다.
“아카데미에 관한 정보도 구할 수 있을까요?”
“추가로 구매하시면 가능합니다. 하루만 말미를 주시죠. 정리해서 드리겠습니다.”
“좋습니다.”
레이는 하루를 기다려 정보를 얻고 다시 말을 빌렸다.
브리엔트까지 달릴 시간이다.
이틀 후 성도 브리엔트로 들어갔다.
말을 반납한 후 인적이 드문 골목으로 들어간 레이는 용모를 바꾸었다.
흑갈색 머리에 갈색 눈동자, 눈이 가늘게 찢어진 20대 후반 사내.
그간 보아왔던 화려한 성도들에 비교하면 거리의 분위기는 소박하다.
석재가 부족하여 흙벽돌과 목재로 짓다 보니, 2층에서 3층 정도의 낮은 건물들이 주를 이루었다.
뾰족한 지붕에 키 작은 건물들이 줄지어 선 거리는 편안한 느낌을 준다.
셀로포네 왕국은 그다지 부유한 국가는 아니다.
낮은 산에서 기르는 양을 활용한 모직 등 고급 섬유와 의류가 유명하고, 목재와 약재 생산이 많다.
평야가 좁아 식량은 늘 부족하고, 철, 동 등 금속을 100% 수입에 의존해 상단을 소유한 소수 귀족들을 제외하면 평민들의 삶은 팍팍했다.
게다가 엘디니아 왕국을 사이에 두고는 있으나, 페르세이언 제국이 강대해졌을 때 국토가 유린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반 제국 연합의 대응으로 왕실은 가까스로 유지되고 있다.
하지만 국경 방어에 전력을 기울이면서 경제력은 쇠해갔다.
왕실의 권위가 약화되었고, 귀족들이 권력을 나눠 가지며 정쟁이 빈번해졌다.
자연히 변방에서는 성 밖 마을뿐 아니라 도성 내도 치안이 어지러워진 상황이다.
레이는 정보 길드에서 받은 슈나인 아카데미에 대해 떠올리며 방향을 잡았다.
- 헤이든.
- 30대 후반 추정. 적갈색 머리에 가는 눈, 염소 수염. 학자를 연상시키는 온화한 인상. 외모와 달리 매우 냉정한 인물로 파악됨. 무기는 전형적인 바스타드 소드. 연원이 불확실한 정통 검법을 사용하며 무위는 소드 유저 최상급 내지는 엑스퍼트로 파악됨.
- 약 2년 전에 기존 검술관을 인수하여 백작령 최대 무관으로 확장.
- 로델리안 후작이 배경인 암흑조직 ‘붉은 맹세’에 인력을 공급.
슈나인 아카데미는 북문 쪽 상가 거리가 끝나고 주택가에 들어서기 전 너른 공간에 자리 잡고 있었다.
안쪽에서는 수련 중인 듯 내부가 보이지 않는 높은 담을 넘어 기합 소리가 들려온다.
마차를 위한 정문은 닫혀 있으나 그 옆으로 사람들이 오가는 제법 넓은 대문은 활짝 열려있다.
안을 기웃기웃 하니 경비 무사인 듯 갈색 무복을 입은 사나운 인상의 사내가 다가온다.
“어떻게 오셨소? 입관하시려는 거요?”
이틀간의 이동 후라 먼지로 덮인 행색이 찜찜하기는 했으나 고개를 끄덕였다.
“따라오시오. 접수대로 안내해 드리리다.”
사내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가장 먼저 수백 명이 동시에 수련을 할 수 있을 정도의 넓은 연무장이 눈에 들어온다.
먼지가 나지 않도록 포석이 깔린 연무장에는 50명가량의 훈련생이 사범의 구령에 따라 목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정면에는 위에 ‘연무관’이라는 간판이 달린 2층의 거대한 건물이 날개를 펼치고 있다.
여기도 일, 이백 명은 모여서 수련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건물 가장 구석에 작은 별실이 있고 거기에서 20대 초반 정도의 청색 무복을 입은 사내가 나온다.
칙칙한 눈빛에 쳐든 고개.
어깨에는 힘이 잔뜩 들어갔다.
“입관 문의를 하시고 싶다고?”
“네.”
바뀐 용모가 그리 만만치 않게 보이는 인상인데도 무복 사내는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콧김을 가볍게 뿜는다.
“흠. 따라오시게.”
40살은 넘은 중년들이나 쓸 듯한 거만한 말투이다.
무관의 위세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를 따라 연무장 주변을 돌며 수련 과정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수련은 실력에 따라 입문, 초급, 중급, 고급으로 나누어진다.
앞쪽 연무장은 주로 저급 과정의 수련생용.
후정에 더 넓은 연무장이 있는데 그곳은 고급 수련생 및 무관 소속의 검사와 사범들 용이다.
“여기서 중급까지만 마쳐도 영주성 병사나 상단 경비를 뽑을 때 거의 100퍼센트 합격된다네. 지금 우리 영지의 상근 병사 반 이상은 우리 무관 출신일걸세. 고급 과정 이상에서 수련하는 분들은 장차 기사단의 종자까지도 바라볼 수 있지."
수련비도 만만치 않을 것 같다.
"수련비는 어느 정도입니까?"
"과정별로, 입문은 달에 3실버, 초급 5실버, 중급은 10실버일세. 어떤가? 테스트를 받아 볼 텐가?”
월 3실버 이상.
어마어마한 금액이다.
일반 평민은 감히 쳐다볼 수도 없는 거액의 수련비.
그런데도 연무장에는 이미 많은 수련생이 훈련 중인 모습을 볼 수 있다.
사내가 자랑하는 걸 들어보니, 입문과 초급 수련생만 300명에 달한다고 한다.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연무장을 돌면서 슬쩍 보니 후정의 연무장 끝에 3층 저택이 보인다.
무관주 이하 무관 소속 검사들이 머무는 곳이라고 한다.
‘저기에 게이드가 있을 가능성이 크겠군. 내부 구조는 파악했으니 일단 물러난다.’
레이는 다시 들르겠다고 하고 무관을 나왔다.
숙소를 정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게이드가 무관에 있다고 하니 당장이라도 밤에 쳐들어가고 싶다.
하지만 그의 검술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다.
오직 슈나우더 검법을 익혔을 거라는 점 외에는.
더구나 그와 함께 있는 무관의 사범들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
자꾸 급해지는 마음을 다잡았다.
게이드에게 접근할 방법을 좀 더 고심해야 했다.
오랜만에 통신 반지를 켰다.
청록색 보석이 반짝인다.
곧 마크의 목소리가 들린다.
“레이! 잘 있는 거지? 그간 별일 없었니?”
“네. 저는 지금 셀로포네 왕국의 케른햄 백작령에 와 있어요.”
“셀로포네? 들은 적이 있는 것도 같고··· 엄청 먼 곳까지 갔구나. 고생 많았겠다.”
마크가 걱정하는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푸근해진다.
잠시 마을 사정도 묻고 마크의 요즘 상황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힘든 일도 잠깐 있었지만, 이제는 돌아다니는 데 익숙해져서 괜찮아요. 그보다 놈들 중 게이드가 여기서 검술 아카데미를 운영하고 있는 걸 확인했어요,”
“검술 아카데미? 혼자서 하는 거냐? 아니면 다른 놈들이랑 같이?”
“혼자인 것 같아요. 다만 규모가 엄청 크네요. 암흑 조직과 연계도 되어 있다고 하고.”
“허어! 몇 년 되지 않았는데 벌써··· 조심해야겠구나. 급한 마음에 성급히 다가갔다가 다칠 수 있으니 신중하게 생각하거라. 위험하다 싶으면 아예 돌아왔다가 다시 가려무나. 이제 있는 곳을 확인했으니 서두를 것 없어!”
“네. 그럴게요. 건강 주의하세요. 다시 연락드릴게요.”
“그래. 꼭 조심해야 한다!!”
통신을 껐다.
마크 삼촌의 말이 맞다.
일단 게이드의 현 상황에 대한 정보를 더 수집해야 한다.
‘무관에 입문해서 내부 사정을 알아보자.’
다음 날 무관으로 가서 테스트를 신청했다.
너무 눈에 띄게 실력을 보이면 의심을 받을 테고, 너무 하급 수준이면 아예 내부에 접근할 기회가 없을 것이다.
적당히 중급 과정 정도면 괜찮을 것 같다.
‘그런데, 중급 수준이면 어느 정도지?’
무관에서 전수하는 검술의 수준을 알지 못하니 막막하다.
어제의 사내가 레이를 데리고 사범 한 명에게 안내한다.
가는 길에 얼른 물었다.
“저기, 중급 과정 정도에 들어가려면 어느 정도 실력이 있어야 합니까?”
사내가 곁눈으로 흘겨보며 입술 끝을 찡그린다.
“허허. 중급이라니? 중급이 어디 아이들 이름처럼 들리나? 내가 중급까지 오르기 위해 몇 년을 뼈를 깎는 노력을 했는지 아는가? 쯧!”
“그래도 일단 알아야 거기까지 가기 위해 노력하지 않겠습니까?”
“에잉. 말을 들어 먹질 않는구만. 사범님의 공격을 10합만 막아내게. 자네가 원하지 않아도 중급반에 넣을 걸세. 1합이나 제대로 막을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흐흐.”
사내의 비웃음을 흘리며 머릿속으로 계산을 했다.
‘10합이라···’
그는 적색 무복을 입은 30세 정도의 너구리 인상의 사내에게 다가가더니, 정중히 허리를 숙이며 레이를 가리켰다.
“오늘 테스트를 신청한 자입니다.”
사내가 레이를 흘끗 쳐다본다.
“이리 오게!”
심드렁한 표정으로 거치대에서 목검을 하나 던져주더니 한 손은 뒷짐을 진다.
“자, 자네가 가장 자신 있는 공격을 해보게.”
팔에 힘을 반쯤 실었다.
“하압~”
힘찬 기합과 함께 레드 베어 용병 검술을 기반으로 사내의 목을 향해 검을 찔렀다.
힘을 반밖에 싣지 않았다지만, 레이의 육체적 역량도 많은 실전과 훈련으로 이미 거의 정점에 다다른 상태.
‘허어억!’
여유 있게 상단 자세를 취하고 있던 사내가 속으로 헛바람을 내쉬었다.
목으로 날아오는 찌르기의 기세에 당황하며 뒤로 허둥지둥 물러난다.
찌르기에 이어 사내의 좌우 어깨로 베기 공격을 연속해서 던졌다.
정신없이 수비에 전념하여 간신히 레이의 공격을 막아낸 사내의 얼굴이 벌게진다.
레이는 일부러 숨을 약간 가쁘게 쉬며 자세를 가다듬는 척했다.
사내가 민망한 듯 청색 무복을 곁눈질했다.
‘이런 망할 놈 같으니! 가볍게 대해주려 했더니 화를 부르는구나. 혼 좀 나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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