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협
지부장에게는 애초에 선택지가 없었다.
‘휴우~’ 하고 한숨을 내쉰 지부장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본부에서 온 지시요. 제국 근처, 즉 대륙 서부 어딘가에 있는 자의 의뢰라는 거지.”
너무 막연하다.
눈치를 보니 더 이상 추궁해도 나올 게 없을 것 같다.
‘제국 근처라면 게이드가 얘기한 대로 로든 일당일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 게이드가 죽은 게 알려진 모양이군.’
그렇다면 어쌔신 길드와 불필요하게 소모전을 벌이는 것은 피해야 한다.
“본부에 연락해. 지금까지 일어났던 일은 백지로 돌리고 여기서 끝내자고. 다시는 나를 찾지 말라고 해. 그럼 금고를 돌려받게 될 거야.”
“알았소. 다시 오지.”
지부장이 힘없이 일어났다.
‘빌어먹을. 강등은 당연하고, 그래도 살려는 주겠지. 전서응까지 써야겠군.’
자신의 소관이 아니다.
본주에서 결정할 중요한 사항이다.
레이는 길드의 답을 기다리며 힐링 매직을 연구했다.
토끼 한 마리를 사 왔다.
내부를 스캔한 후 장기 하나에 미세한 충격을 가했다.
피가 쏠리며 탁한 기운이 생긴다.
여러 번 연습한 대로 흙, 물, 그리고 미미한 양의 불의 마나를 조합하여 해당 부위에 불어넣었다.
충격받은 부분을 힐 마나가 덮으면서 탁기가 약해진다.
붉게 물든 표면이 조금씩 정상으로 회복된다.
이상이 생긴 부위가 정상으로 돌아오는 데는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나무 상자 안의 토끼는 아무것도 모른 채 돌아다니고 있다.
‘이정도면 그냥 낫는 것과 다를 바가 없잖아? 뭐가 잘못된 거지?’
토끼의 다른 장기, 내부 혈관 등 어디에 시험해 봐도 마찬가지이다.
무언가가 빠져있는데 그것을 발견할 수가 없다.
3일 동안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시도해도 실패를 거듭했다.
저녁 식사를 위해때 식당으로 내려왔다.
입맛도 없어 삶은 감자에 옥수수, 콩을 섞은 샐러드를 깨작대고 있는 참이었다.
지부장이 땀을 닦으며 앞에 앉는다.
지난번보다는 조금 여유가 생긴 태도다.
“본부에서 소식이 왔소. 당신 제안을 받아들였소.”
“잘됐군. 밤에 방으로 와서 시신과 금고를 가지고 가시오. 나는 옆방으로 가 있지.”
“고맙소. 휴우우~~”
지부장이 일어서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병을 고치려면 뭐가 필요할 것 같은가?”
엉뚱한 질문에 지부장의 얼굴에 황당하다는 표정이 어린다.
그가 불퉁하게 내뱉는다.
“그걸 내가 어찌 아나? 치료사에게 가보시게. 그러고 보니 나도 물을 게 있소. 밀실에 있던 병기들과 장비도 모두 없어졌던데, 그건?”
‘치료사라? 좋은 생각이다. 내일 치료사를 찾아가 봐야겠군.’
레이는 들은 척도 안 하고 남은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한숨을 내쉰 지부장은 할 수 없다는 듯 돌아섰다.
“어디가 아파서 오셨소?”
접수대의 젊은 직원이 장부를 펼쳤다.
“치료사께 몇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소.”
직원이 레이의 위아래를 훑어본다.
“특별히 아픈 데는 없어 보입니다만.”
“속이 좀 이상해서요.”
고개를 끄덕이며 장부에 몇 가지를 기록하더니 안으로 안내하며 덧붙인다.
“상담만 해도 기본 치료비는 내야 하오. 30쿠퍼요.”
“알겠소.”
비싸다.
잠깐의 상담만으로 30쿠퍼라면 어지간한 평민들은 치료사를 찾기 힘들 것 같다.
“그래. 속병에 대해 상담하고 싶다고?”
50대쯤 되어 보이는 강퍅한 인상의 치료사가 대뜸 묻는다.
“친구가 일하다가 배를 나무통에 부딪혔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뭐 이런 놈이 있나’ 하는 표정이다.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입을 연다.
“뭘 원하는지 모르겠군. 와서 치료를 받으면 될 것 아닌가?”
“병을 낫게 하는 치료의 원리를 알고 싶어서요.”
갈수록 태산이라는 듯 치료사가 고개를 흔든다.
“허. 치료라는 게 뭐가 있나. 어디가 아픈지 보고, 약을 지어 주면 먹으면 될 일이지.”
“약을 먹으면 아픈 곳이 저절로 낫는 겁니까? 빨리 낫기도 하고 늦게 낫기도 하지 않나요? 뭔가 차이가 있을 것 같은데요.”
“아, 이 사람아. 약 먹는다고 다 나으면 죽는 놈이 하나도 없게. 사람마다 선천적인 원기라는게 있네. 그게 강한 자는 얼른 낫고, 약한 자는 오래 걸리는 법이지. 약성과 체질이 맞느냐에 따라서 효과도 달라지고.”
“선천적인 원기? 일종의 기운인 모양이네요? 그게 어디 있는 겁니까?”
의술 배우러 온 어린아이 같은 질문에 짜증스럽게 답이 나온다.
“에잉. 그걸 어떻게 아나? 심장에 있든지, 배에 있든지 아니면 뇌에 있겠지. 아픈 데 없으면 일어나게. 다음 손님 모셔라!”
조금 더 묻고 싶기도 했지만 일어섰다.
답을 찾은 느낌이다.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선천적인 기운.
이 기운을 찾아야만 힐링을 온전하게 펼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체질이라···
마법은 자연의 마나를 조합하여 사용하는 보편적 원리.
‘체질에 따라 마법 원리가 달라질 것 같지는 않군.’
방으로 돌아가 짐을 챙기고 살펴보니 금고가 있던 방은 말끔히 치워져 있다.
‘허. 그 무거운 걸 감쪽같이 가지고 갔군.’
힐링 수련을 위해 도보는 포기하고, 테나르강 항구인 빌로프 행 여객 마차를 탔다.
마차로 이동하는 내내 눈을 감고 선천적 기운에 대해 고민했다.
마나의 흐름이나 혈액의 흐름 이외에 다른 기운을 느껴야 한다.
스캔으로 내부를 들여다보며 폐로 들어오는 마나 흐름을 잠시 막았다.
마나가 막히자, 페의 움직임이 느려지면서 숨이 답답해진다.
폐가 이상을 이겨내려고 안간힘을 쓴다.
순간, 몸 전체에 미세하게 힘이 빠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폐가 다소 힘을 되찾는다.
부족한 마나를 보충하기 위해 무언가가 폐로 공급되고 있는 것이다.
마나를 다시 흘렸다.
그러자 한쪽으로 집중되었던 힘이 다시 전신으로 분산된다.
‘저거다! 저 힘을 감각으로 느낄 수 있으면 될 것 같다.’
이후 레이는 몸 어딘가에서 흘러오는 기운을 느끼는 데 집중했다.
폐, 위, 간, 장 등 내부의 부위들에 작은 이상을 만들고 기운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1주일 후.
테나르 강에 도착했다.
100킬로미터가 넘는 대하의 시퍼런 물결은 다시 보아도 신비롭고 두렵다.
‘기회가 닿으면 물속에서 움직일 수 있는 마법도 찾아보아야겠다. 아무리 검술과 마법에 뛰어나도 물속에서 일을 당하면 낭패를 겪겠군.’
레이의 얼굴로 돌아와 범선을 수소문했다.
빌로프 항에서 강 건너 보넌 항으로 가는 범선이 다음 날 아침 출발이다.
자리는 많은지 곧장 표를 구할 수 있었다.
북대륙으로 올 때 탔던 배와 모습이나 항로가 유사하다.
아침 일찍 배에 올라 풍광을 구경했다.
대하의 거친 물살에 겁도 약간 나지만 흔히 보기 어려운 경치이다.
배는 마차와 사람들이 모두 탄 후 오전 느지막이 출발했다.
거친 물살을 헤치고 대여섯 시간을 운항해 오후 해가 얼마 안 남았을 무렵 보넌 항에 도착했다.
데나온 왕국에 도착한 것만으로도 어쩐지 마음이 놓인다.
마시장으로 갔다.
북대륙으로 이동하는 마지막 관문이라, 말을 사고파는 사람이 많은 마시장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고향 마을까지 10개 가까운 영지를 통과해야 한다.
튼튼하고 잘 달리는 말을 산 후 마크에게 주는 것도 좋겠다.
말들은 많았지만 크고 튼튼한 말은 흔치 않았다.
하긴 그 정도로 좋은 말이라면 시장에 오기 전에 귀족들이나, 군대에서 빼갔을 것이다.
시장을 거의 다 지나치는 데 괜찮은 말이 보인다.
낡긴 했지만 고급 재질의 의복을 걸친 사내가 말고삐를 잡고 있다.
옆에는 거간꾼인 듯 40대의 사내가 뭐라 흥정을 하고 있다.
“안된다고 하지 않았소. 그래도 이 말이 우리 가문에서 몇 대를 내려오며 새끼를 이은 명마요. 그런데 겨우 30실버라니. 말도 안되지.”
“허! 여기 시장을 보시오. 요즘 북대륙으로 가려고 말을 파는 사람이 하도 많아져 제값을 받을 수가 없어요. 30실버면 내가 많이 쳐준 거요.”
눈을 이리저리 굴리는게 썩 신뢰가 가지는 않는 얼굴이다.
레이가 다가가 이리저리 말을 훑어보았다.
망아지 시기를 막 벗어난 놈이다.
갈색 털에 윤기가 흐르고, 눈이 초롱초롱하다.
말발굽도 관리가 잘 되어 있고, 발목은 가늘지만 탄력 있어 보인다.
군살 없이 잘 발달된 근육이 단단하다.
말에 대해서 잘 알지는 못해도 이정도면 훌륭하다.
마주에게 물었다.
“얼마면 파시겠소?”
“이것 보시오. 흥정을 하는 중에 끼어드는 무례가 어디 있단 말이오? 얘기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시오.”
거간꾼이 당장 달려들 듯 째려본다.
“당신에게 하는 말이 아니오. 마주 분, 내 적당한 가격을 드릴 테니 파시겠소?”
그늘진 얼굴이지만 본 바탕은 잘생긴 40세 전후로 보이는 사내가 레이를 쳐다본다.
“이분이 제시한 금액의 딱 두 배만 받겠소.”
레이는 두 말 하지 않고 주머니에서 60실버를 꺼내 사내에게 건넸다.
말고삐를 잡고 돌아서려는데 거간꾼이 앞을 막아선다.
“이놈! 상도도 모르는 놈 같으니. 어디서 굴러먹던 놈인지 모르겠으나···”
거간꾼의 말을 다 들을 생각이 없던 레이는 그의 목을 잡아 올렸다.
“컥컥~~”
옆으로 그를 던져버리고 마시장을 떠났다.
‘좋은 말을 싸게 샀군.’
땅거미가 질 기미가 보이기에 얼른 숙소를 잡고 말을 맡겼다.
식사를 하려는 데 말을 판 사내가 바깥에서 식당 안을 기웃거린다.
그가 레이를 보더니 허겁지겁 들어왔다.
“이보시오. 당신이 가고 난 후 그 거간꾼이 마시장을 관리하는 폭력배들을 만나는 걸 보았소. 아무래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으니 일찍 떠나는 것이 좋을 듯하오.”
안타까와하는 사내의 눈빛이 느껴진다.
‘하, 오랜만에 겪는 일이군. 남을 위해 저렇게 뛰어다니는 성정이라···’
레이가 눈짓으로 자리를 가리킨다.
“알겠소. 일단 앉으시죠. 먹으면서 얘기합시다. 주인장!”
“아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걱정마시오. 나도 뒷배가 있으니.”
떠나려는 그를 붙잡고 식사와 맥주 한 잔을 시켜 나누었다.
술에 약한 듯 맥주 몇 모금만으로도 취하는 눈치다.
눈을 게슴츠레 뜨고 자신을 페리스라고 밝힌 사내는 한탄하듯 말을 꺼낸다.
“우리 집은 대대로 목마장을 운영해 왔소. 여기서 도보로 2~3일 정도 거리에 야산을 포함한 넓은 초원이지. 영지군에 납품도 하고, 상단에 공급도 크게 했었다오.”
의복은 낡았으나 마음씀씀이나 거칠지 않은 몸가짐을 보아 짐작이 갔다.
"그런데 3년 전 대수림 근방에 근거지를 두고 활동하던 마적떼가, 늘어난 마수로 치안이 혼란해진 틈을 타서 여기까지 진출했소. 마적들이 말을 보았으니, 마치 고양이가 생선을 본 격이었지. 저항하던 아버님과 경비원들을 도륙하고 말을 쓸어갔소.”
한 모금을 들이켜고 잔을 테이블에 ‘쿵’ 하고 놓더니 말을 이었다.
“마침 야산에서 뛰놀던 몇 마리가 남아 그걸로 죽거나, 부상당한 직원들을 보상해 주고 나니 빈털터리가 되었지 뭐요. 아까 데리고 있던 말은 우리 딸아이 생일에 선물로 준 놈이라 워낙 애지중지해서 팔지 못했었소. 그런데 운이 없으려니, 얼마 전 아이가 말을 데리고 산책하다 바위에서 굴러떨어졌소. 흑~”
사내는 감정이 북받치는지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치료에 몇 년이 걸릴지 모른다는군. 어쩔 수 없이 마지막 남은 말도 팔게 된 거요. 우리 아리안만 낫는다면 뭐든 바치겠는데··· 후우우!!!”
거기까지 얘기한 사내가 갑자기 머리를 탁자에 부딪히더니 그대로 잠들어버렸다.
‘맥주 한 잔에 이렇게 취하는 사람도 있군.’
사내를 들어서 방에 눕힌 후 힐링에 대해 고심하며 밤을 지샜다.
사내의 걱정과 달리 밤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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