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톡시피케이션
레이는 머리가 어지러워지며 속이 울렁거리는 것을 느꼈다.
‘몸이 왜 이러지? 예전에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는데··· 아, 디톡스 마법을 익힐 때다!’
디톡스로 해독하기 위해 독을 마셨을 때 몸이 이런 상태였다.
‘독이라고?’
위험하다는 감각의 경고가 머릿속에 강렬하게 울렸다.
즉시 디톡스 마법을 전신에 펼쳤다.
위잉거리는 마나의 유동이 전신에 퍼지며 불편했던 몸과 감정이 해소되는 것이 느껴진다.
‘숲에 독이 가득히 차 있구나.’
뒤의 일행을 돌아보니 다들 눈이 붉어지고 가까운 사람을 향해 적개심을 보이고 있다.
오러가 가장 약한 로잔느의 상태가 심해 보인다.
그녀는 알렉스를 향해 욕을 퍼부으며 검을 찔렀다.
“야 이 망할 새끼야! 네가 우리 레이를 사지에 몰아넣었지? 너도 죽어봐라!”
알렉스는 혼돈 속에서도 로잔느의 검을 막으며 물러선다.
독에 어느 정도 저항하고 있는 것이다.
티탄이 여기에 끼어들었다.
“다 죽어라! 이 나쁜 놈들!”
두 사람에게 달려들며 방패를 크게 휘둘렀다.
“카가강~~”
검이 튕겨 나가고, 로잔느가 방패에 부딪혀 뒤로 구른다.
레이가 뛰어들어 티탄의 어깨를 붙들어 움직이지 못하게 한 후 디톡스 마법을 펼쳤다.
잠시 후 티탄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자신이 한 일에 스스로 놀란다.
로잔느가 일어나 몸을 추스르더니 티탄에게 덤벼든다.
검을 옆으로 쳐낸 레이가 그녀도 붙잡은 후 디톡스로 해독을 했다.
다행히 견디고 있는 알렉스와 트레비는 쉽게 마법을 받아들였다.
“모두 숨을 멈춰요. 꽃가루가 환각을 일으키는 것 같아요.”
간신히 상황을 수습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병사와 용병들이 동료들끼리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다행히 마법사와 기사들은 마나의 힘으로 독에 저항하고 있다.
아케인은 멀쩡한 정신으로 싸움을 말리는 중이다.
“정신 차려라. 지금 동료들끼리 싸우고 있는 것이다. 검을 내려라!”
하지만 이미 환각에 빠진 탐험 단원들의 귀에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레이는 마나를 목에 응집한 후 숲이 일렁거릴 정도로 크게 소리를 질렀다.
“멈, 춰, 라~~”
아주 잠깐이나마 싸우던 사람들이 멈칫거리며 검을 내린다.
동시에 레이의 몸이 튀어 나갔다.
전력으로 디톡스를 펼친 후 사람들의 목을 건드리고 지나갔다.
짧은 순간의 마법으로도 용병들은 잠시 정신을 되찾았다.
병사들에게까지 디톡스를 시전하고 아케인의 앞에 섰다.
“꽃가루가 환각 작용을 일으킵니다. 숨을 멈추고 빨리 숲을 빠져나가야 합니다.”
그제야 아케인은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있었다.
필모어와 마법사들도 이를 들었다.
“이런! 꽃가루가 그런 작용을 하고 있단 말인가!”
필모어는 즉시 시동어를 외우더니 “파이어 플레임”을 머리 위로 펼쳤다.
일행의 주위에 있던 꽃가루가 순식간에 불에 타 사라졌다.
아케인이 전원에게 외쳤다.
“꽃가루를 마시면 안된다. 숨을 멈추고 즉시 숲을 빠져나가라!!”
알렉스 팀을 선두로 전원이 달리기 시작했다.
입을 열 수 없어 타닥거리는 발소리만 숲에 가득하다.
부상을 입은 자들은 피에 젖은 다리를 절뚝거리며, 혹은 살이 찢어져 너덜거리는 팔을 붙들고 뒤를 따랐다.
여기서 쓰러지면 누구도 돌아와 자신들을 부축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지막 부상자가 지나간 자리에 핏자국이 선명하다.
그 바로 옆 나무 아래에 꽃잎이 쌓인 곳이 불룩하게 솟았다.
용병 차림의 시신 두 개가 꽃잎 아래 나무뿌리들에 휘감겨 조금씩 땅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레이는 다시 앞으로 도약하여 병사들과 용병들에게 디톡스 마법을 전개했다.
중간중간 숨이 차 호흡을 하는 사람도 보였다.
마나 연공자가 아닌 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렇지만 필모어가 펼치는 파이어 플레임이 대부분의 꽃가루를 태우고 있어 이전처럼 정신을 잃는 자는 없었다.
전력으로 달린 지 대략 20분.
아케인의 목소리가 들린다.
“조금만 더 뛰어라. 거의 다 왔다!!”
가장 먼저 선두의 알렉스 팀이 나무가 사라진 풀밭 위로 발을 디뎠다.
그 뒤로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도착해 참았던 숨을 토해냈다.
가장 뒤의 부상자들은 나오자마자 쓰러진다.
“도, 도와줘!”
먼저 나온 동료들이 서둘러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았다.
“으윽! 살살!”
“아~~ 거기, 거기 조심!”
신음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그래도 은패 용병들의 상황은 병사들보다는 나았다.
최하급 이상의 포션을 가진 용병들이 많아 시간이 지나자 빠르게 회복이 되었다.
조심스럽게 전진할 때는 숲이 커 보였지만, 실제로 뚫고 보니 그리 먼 길이 아니다.
마치 경계선이라도 되는 듯 풀밭이 길게 뻗어있다.
맑은 공기를 마시니, 탐험 단원들은 점차 정신이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그제야 남은 사람들을 확인해 본다.
처음 100명이 넘었던 탐험 단원은 이제 겨우 30여 명으로 줄었다.
앞으로는 정보가 거의 없는 내수림으로 들어간다.
지휘부의 고심이 깊어갔고, 탐험단은 이쯤에서 포기하고 복귀하기만을 바랬다.
반대하는 마법사와 기사들도 있었지만 결국 필모어와 아케인의 주장대로 강행하기로 결정되었다.
“트롤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은 어떤 게 있나?”
필모어가 트래커들을 보며 물었다.
트롤.
신장 최소 3미터에서 5미터 이상에 이르는 인간형 몬스터.
가족 단위로 지내며 한곳에 머무는 습성을 가진다.
긴 털로 덮인 가죽은 오러에도 상당한 저항력을 가지며, 재생능력 때문에 상처가 나도 곧 회복되어 잡기 까다롭다.
머리나 심장을 터뜨려야만 숨을 멈춘다.
신장이 5~6미터 이상 되는 지상 최강의 몬스터 오우거와 비교되어 약하다고 오인되기도 한다.
하지만 실상은 오러 엑스퍼트 서너 명으로는 상대하기 어려운 괴력의 존재이다.
트롤이 휘두르는 길이 2~3미터의 몽둥이는 엄청난 속도와 파괴력을 지닌다.
몸에 스치기만 해도 근육과 뼈 모두 파열되는 심각한 부상을 각오해야 한다.
오랜만에 나설 기회를 찾은 사드가 먼저 입을 열었다.
“트롤은 두 마리 이상 모여 삽니다. 동굴 또는 나무들로 둘러싸인 안락한 곳을 거처로 삼죠. 의심되는 지형을 살펴 서식지를 찾아보면 좋겠습니다.”
필모어는 답 없이 에르고의 의견을 기다렸다.
“오우거는 이동형 몬스터이지만 트롤은 정착형입니다. 영역을 가지고 있죠. 오우거와 달리 잡식형이고 털이 길기 때문에 내수림 경계 지역을 탐색하면서 똥과 털 뭉치, 나무 열매 등을 살피는 방법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흠, 좀 더 가능성이 큰 방법은 없나?”
“내수림 깊이 들어갈수록 개체수가 많아집니다만, 아시다시피 방향감각이 흐트러져 복귀하기 어려워집니다.”
아케인이 나서서 슬쩍 정리를 했다.
“내수림 경계 지역을 따라 이동하면서 임시 거점을 마련하고 안쪽을 탐색하는 것이 무난할 듯합니다.”
필모어는 뭔가 아쉬운 듯 결정을 내리지 않고 망설이다가 결국 아케인의 뜻을 따랐다.
알렉스가 지휘부의 결정을 전달했다.
“트래커들 덕분에 그나마 무모한 탐색은 피했네. 내수림 안으로 전진하자고 할까 봐 조마조마했는데.”
로잔느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인다.
다른 용병들의 분위기도 비슷했다.
내수림 탐험이 강행되면 도망이라도 가겠다는 사람들이 나오는 상황이었는데 한숨 돌린 것이다.
결정이 내려지자 곧장 끔찍한 환각의 숲을 떠나 내수림 외곽을 따라 이동했다.
사방을 볼 수 있으면서도 나무에 가려진 곳을 찾아 임시 숙영지로 정했다.
다음 날 아침.
에르고가 용병들에게 트롤의 흔적을 설명했다.
“잡식성인 트롤의 똥은 크기도 수박 덩어리만 한데다가 냄새가 지독합니다. 보면 즉시 알 수 있죠. 나무에 털 뭉치가 사람 키 이상 높은 곳에 걸린 것도 트롤일 확률이 높습니다. 또 야생 열매가 열린 주변이, 열매를 딴 흔적이 아니라 아예 나무들이 쓸려나가는 정도라면 이것도 트롤이 먹은 흔적입니다. 특히 큰 나무들이 부러진 곳이 있다면 꼭 알려주셔야 합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카르타 팀의 용병 하나가 질문을 던졌다.
“트롤이 내는 소리는 어떻소? 엄청나게 큰 괴성을 낼 것 같은데?”
사드가 고개를 흔들었다.
“오우거 정도 되면 마음껏 소리를 내며 다니지만, 그 외의 몬스터들은 대부분 기척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트롤도 다른 몬스터와 먹이를 두고 다툼이 벌어지지 않는 한 평상시에는 조용합니다. 소리로 찾아내기가 쉽지 않죠.”
그렇지 않아도 긴장한 얼굴들에 찌푸린 기색이 더해졌다.
찾기가 너무 까다로울 것 같다.
탐색은 용병팀 셋의 몫이었다.
마법사 보호를 위해 기사와 병사들은 숙영지에 남고, 트래커가 한 명씩 용병단에 포함되었다.
알렉스 팀은 기존 인원만으로 구성하였다.
레이는 스캔 탐색이 어려워졌지만, 적어도 마기가 짙어지는 내수림 안쪽과 외수림 쪽의 방향을 찾을 수는 있었기에 트래커를 양보했다.
“자, 숙영지에서 한 3킬로미터 정도 온 것 같군. 이제 안으로 들어가보자.”
아케인의 지시에 따라 내수림의 경계를 따라 40~50분 정도를 걸은 알렉스 팀은 내부로 진입해야 할 지점에 도달했다.
“선두는 레이가 맡는다. 잘 부탁해. 좌측은 티탄이 맡되 필요한 곳에 즉시 지원하고. 나와 트레비 우측, 후미는 로잔느가 담당한다. 출발!”
처음 진입한 곳은 대수림의 일반적인 산림과 별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30분 정도 들어가자 갑자기 날씨가 바뀐다.
밖은 봄이 한창인 시기였는데 태양이 작열하는 한여름으로 변한 것이다.
나무들의 모습도 기괴해진다.
쭉쭉 뻗어오른 나무들이 줄고, 기묘한 나무가 많아지는 것이다.
줄기와 가지가 덩굴처럼 뻗어 나와 온통 비틀어지고 휘어진 기분 나쁜 형태이다.
얽힌 둥치와 덩굴들 속에서 금방이라도 뭔가 튀어나올 것 같다.
“아 씨! 분위기가 영 스산하네!”
로잔느가 낮은 목소리로 불평한다.
갈수록 분위기는 더 음침해진다.
풀이 없어지고 진흙밭이 되면서 땅이 질척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발이 푹푹 빠진다.
뜨거운 햇빛 때문에 물기가 증발해 그나마 땅이 질퍽이는 정도인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호수에서의 경험 때문에 물을 건너는 것은 정말 피하고 싶다.
‘여기서 전투가 벌어지면 빠른 이동이 곤란하겠군.’
걸음이 저절로 늦어졌다.
나무가 살아 움직일 것 같아 시선을 뗄 수가 없다.
‘스스스스~~’
레이가 그 자리에서 우뚝 서자 일행 전체가 걸음을 멈췄다.
“무슨 소리가 들렸어요. 분명히 뭔가 움직이는 것 같았는데···”
긴장한 채 사방을 경계하며 둘러보았다.
그 때 앞쪽 진흙이 소리 없이 부풀어 오른다.
“전면, 몬스터!”
소리치며 앞쪽에 윈드 쉴드를 불러냈다.
진흙 속으로 기척 없이 이동하는 몬스터인 것 같다.
진흙은 1미터 정도 높이로 둥그렇게 올라오더니, 그 안에 수 많은 점들이 빛을 받아 반짝인다.
‘위험하다!’
머릿속에 경고음이 울린다.
‘윈드 쉴드!’
재빠르게 더블 캐스팅으로 방어막을 중첩했다.
그 순간 ‘펑!’ 하는 소리가 나면서, 진흙 덩어리 속에서 수십 개의 날카로운 창이 터져 나온다.
지금의 실력이라면 바로 앞에서 쏘는 크로스 보우의 볼트도 잡아낼 것이다.
그러나 이 창들은 속도는 그 몇 배나 빨랐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수십 개.
소리가 난 순간 이미 1차 방어막이 산산히 부서진다.
중첩시킨 2차 방어막도 뚫리면서 십여 개의 창이 전신에 쏟아졌다.
“카가가강~~”
황급히 검을 휘돌려 원을 그리며 쳐낸다.
‘놓쳤다!’
‘퍽, 퍽!’ 하며 두 개의 창이 흉갑에 꽂혔고, 마지막 하나가 가죽조끼를 뚫는다.
크록 흉갑은 창을 막아냈지만, 조끼를 찢은 창은 옆구리에 박혀 들었다.
“우욱!”
깊이 박힌 창이 살을 헤집는다.
후끈한 통증이 머릿속을 태우는 것 같다.
신음과 함께 허리를 옆으로 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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