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입
레이는 위에 있는 티탄의 발을 손을 대고 ‘스트렝쓰’를 다시 펼쳤다.
육중한 몸집의 티탄이 가장 위험했다.
순서대로 뽑히는 철정은 레이와 알렉스 팀원들도 허공에 띄워 흔들어댔다.
가장 위쪽의 프레드먼이 안타까운 목소리로 외쳤다.
“조금만 더 버텨라. 시간이 다 됐다. 곧 멈춘다!!”
그의 목소리는 아래에서 연속되는 비명 소리에 묻혔다.
버티던 용병들과 병사들이 하나씩 사라져갔다.
가장 위쪽 기사들의 위치에 있는 철정까지 뒤틀리기 시작할 때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바람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조금 후 밧줄이 서서히 밑으로 하강했다.
좌우로 왔다갔다 하던 밧줄이 드디어 본래의 자리에 멈췄다.
이미 탐사대의 숫자는 반 가까이 줄어들었다.
던전 입구에 도착하기도 전에 절반이 희생된 것이다.
용병들은 공포와 추위로 이를 부딪치며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밧줄이 끝나는 곳은 강풍에 깨지고 패인 구멍들 중의 하나였다.
튀어나온 바위 턱에 내려선 용병들은 황급히 안쪽으로 뛰어들었다.
협곡 쪽을 돌아보기도 두려웠다.
“허억 허억!”
“컥 컥~~”
그들은 그대로 드러누워 거칠게 숨을 내뱉고 기침을 해댔다.
온몸이 오들오들 떨렸다.
목구멍 안까지 얼어붙은 느낌이다.
마침내 기사단장까지 들어왔다.
동굴 밖에는 텅 빈 밧줄이, 빠져버린 철정들을 매달고 덜그렁거리고 있었다.
“여기 시신이!”
누군가가 동굴 안쪽에서 두 개의 시신을 발견했다.
시신들은 이미 꽁꽁 얼어있었다.
모두 다가와 시신 주위를 빙 둘렀다.
하나는 병사의 복장.
헤진 옷을 감싸 안고 웅크린 모습이 처연하다.
유일하게 여기까지 살아서 도착한 병사인 모양이다.
안쪽에 있는 또 하나의 시신은 더 험한 길을 헤쳐온 모습이다.
누더기가 된 갬비슨과 조끼는 그저 구멍난 천조각 같고.
얼굴과 찢어진 천 사이로 드러난 무릎, 글로브가 사라진 한쪽 손은 쩍쩍 갈라져 붉은 얼음으로 덮여있었다.
허리의 벨트에는 송곳, 끌, 망치 등 탐사 도구들.
트레저 헌터로 보인다.
처음 여기를 발견한 팀의 한명일 것이다.
두 시신을 석벽 아래쪽에 조심스럽게 눕혔다.
레이는 아공간에서 꺼낸 넓은 천으로 그들의 몸 위를 덮었다.
여기가 아무도 찾지 않는 그들의 영원한 안식처가 되리라.
인원을 체크했다.
기사단 5명, 알렉스 팀 5명, 그랜트 용병단과 퍼니발 용병단 각 3명 생존.
병사 전원 실종.
알렉스와 일행은 자신들이 무사한 것이 레이의 마도구 덕분이라는 것을 새삼 느꼈다.
단순히 몸을 따뜻하게 해주는 것 이상의 어떤 효과가 있는 것 같았다.
기사단과 다른 용병단은 뜻밖의 막대한 피해에 허탈해하면서도 한편 전원이 무사한 알렉스 팀에게 시선을 쏟았다.
프레드먼은 알렉스 팀을 다시 보았다.
전원 은급의 소수 정예.
실력이 뛰어나고 실적도 탁월한 것으로 알고는 있었지만, 이 정도로 다른 용병단과 차이가 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알렉스, 자네 팀의 상황이 제일 낫군. 가서 철정들 중 일부라도 다시 박아 넣고 오게. 저대로 두었다가 만일 바람에 쓸려가면 돌아갈 방법이 없네.”
그렇다.
탐사대의 귀환이 불확실한데 위의 병사들을 또 희생시키며 급히 철정을 복구하지는 않을 것이다.
알렉스가 밖을 쳐다보았다.
밧줄이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다.
“알겠습니다.”
레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렉스 팀에서 아마 자신의 몸 상태가 가장 나을 것이다.
“알렉스, 밑에서 줄을 잡아줘요. 내가 올라가서 철정 몇 개를 고정시키고 내려올게요.”
“안돼. 위험해. 내가 갔다 올 테니 밑에서 기다려.”
레이가 알렉스를 지나치면서 귀에 살짝 속삭였다.
“내가 마도구를 가진 걸 잊었어요. 걱정하지 말아요.”
레이는 밧줄을 잡고 훌쩍 몸을 띄웠다.
가장 아래에 있는 철정이 우선이다.
한 손으로 밧줄을 잡았다.
다른 손으로 철정을 구멍에 끼운 후 아공간에서 꺼낸 철판으로 머리를 쳤다.
철정이 머리만 남고 들어갔지만 한번 빠지면서 이미 구멍이 헐거워졌다.
워터 마법으로 물을 불러온 후 구멍 안으로 흘려 넣었다.
물은 삽시간에 꽝꽝 얼어붙었다.
‘이 정도면 됐군. 원래보다 더 튼튼하겠어.’
레이는 줄을 붙들고 위로 올라가 몇 개의 철정을 같은 방법으로 꽂았다.
알렉스의 고함 소리가 들린다.
“레이, 너무 위로 가지 마라. 곧 돌풍이 올 것 같아!”
“알았어요. 거의 다 됐어요.”
그렇게 백 미터 정도를 올라가니 이제 줄을 잃을 염려는 없어진 것 같다.
그때 윙윙거리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온다! 이제 윈드 쉴드를 시험해 볼 때가 왔군.’
윈드 쉴드를 소환해서 비스듬하게 바람이 오는 방향으로 몸을 가렸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의 소용돌이가 얇은 방패처럼 레이의 옆을 사선으로 막았다.
몰아치던 광풍은 쉴드를 깨뜨릴 듯 부딪쳐왔다.
- 까가강!
처음에는 쉴드의 방어력이 바람을 이겨냈다.
광품은 타다닥거리며 쉴드 위로 튕겨 오른 후 레이의 몸을 타고 넘어갔다.
하지만 창칼처럼 예리한 얼음조각이 쉴드에 연이어 꽂히자 ‘끼이익’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쉴드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조금 후 ‘쩌엉!’ 하며 쉴드가 깨져나갔다.
레이의 전신에 얼음창과 모래침, 돌덩이가 몰아쳤다.
‘으으윽!!’
재빨리 다시 쉴드를 소환하려 했지만, 냉기와 돌풍 때문에 마법의 소환이 평소보다 훨씬 느렸다.
몸이 옆으로 튕겨나갈 듯 휘어졌다.
‘윈드 쉴드!’
겨우 쉴드가 옆을 막으면서 몸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하지만 광품이 본격화되자 쉴드가 또 깨져나갔다.
앞의 쉴드가 형성되자마자 곧바로 다시 마법을 캐스팅했다.
세 개의 쉴드가 깨지고 나서야 광풍이 잦아드는 것이 느껴졌다.
온몸이 부서질 듯 쑤셔온다.
얼른 큐어 마법을 전신에 뿌렸다.
“레이~~”
소리치던 알렉스가 몸을 안쪽으로 숨겼다.
그는 강풍 속에 고개를 내밀어 걱정 어린 시선으로 올려다보았다.
레이는 빙벽에 달라붙어서 버티고 있다.
돌풍에 실린 얼음 조각과 날카로운 모래 알갱이들이 수도 없이 때려대고 있어 금방이라도 바람에 날릴 것 같다.
다행히 잠시 후 바람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윈드 쉴드의 방어력은 나쁘지 않지만, 아직 내구력이 만족스럽지 않구나. 소환할 때 더 강하게 압축할 필요가 있겠군.’
레이는 쉴드를 해제하고 천천히 내려왔다.
“레이, 위험했어. 적당히 해야지!”
알렉스가 레이의 손을 잡고 걱정과 책망이 뒤섞인 눈빛을 보낸다.
“괜찮았어요.”
알렉스에게 따뜻한 눈길을 건네고 레이가 안으로 들어갔다.
프레드먼은 레이가 들어오자 기뻐하며 어깨를 두드렸다.
“수고했네.”
던전의 위험을 새삼스럽게 깨달은 용병들은 탐사를 중단하고 싶은 눈치를 보였다.
프레드먼은 겁먹은 탐사대를 모은 후 힘찬 음성으로 기운을 북돋으려 애썼다.
“여기까지 오기 위해 너무 많은 피해가 있었다. 안타깝기 그지없지만, 이제 와서 탐사를 중단하는 것은 죽은 자들에 대한 모욕이자, 영주님의 신뢰를 배반하는 짓이다.”
탐사대원들의 얼굴이 시커멓게 변해갔다.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던전을 발굴하는 데 성공하여 백작 각하와 영지의 이름을 드높여야 한다. 저기 잠들어 있는 유물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자, 모두 던전을 돌파하는 데 힘을 합치자.”
용병들은 억지로 어깨를 폈다.
사실 돌아가기에는 너무 먼 길을 왔다.
안으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이제 수석 기사 잘렝과 그랜트가 함께 선두를 맡았다.
기사단으로서는 앞에 어떤 유물이 있을지 모르는데 용병들에게 선두를 맡길 수 없었다.
그랜트로서도 뒤로 물러서 공을 뺏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결국 선두에 두 사람, 그 뒤에 기사단과 알렉스 팀, 퍼니발 용병단이 따랐다.
40, 50미터를 들어가니 반쯤 깨진 문이 나타난다.
거대한 석문이었는데 주변의 우둘투둘한 회색 돌벽과 똑같은 형태로 만들어졌다.
만일 부서지지 않았다면 그냥 동굴의 벽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여기를 누군가가 발견한 모양이다.
“이 안에는 누구도 발을 들여놓았던 자가 없다. 어떤 함정이 있을지 모르니, 최대한 조심해서 전진하도록.”
잘렝과 그랜트가 검을 들고 조심스럽게 발을 내딛었다.
문 안은 바깥과 달리 직선으로 뚫린 통로이다.
사각의 통로는 바닥과 좌우가 모두 잘 다듬어진 석벽으로 이루어졌다.
티탄은 철 방패를 꺼내 양손으로 들고 앞에서 기사단을 따랐다.
나머지 일행은 검을 들고 그 뒤를 이었다.
통로는 그다지 춥지도 않았고 약간 어두울 뿐 곧게 뻗어있어 걷기도 편했다.
한동안 평탄한 경로가 이어지자 서서히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다.
가장 뒤 비교적 안전한 위치에 있던 퍼니발 용병단의 크라폰과 노아스.
두 사람은 걸으며 소근거렸다.
“이거, 걱정했던 것만큼 위험한 곳이 아닌지도 모르겠어.”
“글쎄 말이야. 협곡 자체가 무시무시한 곳일 뿐 던전은 문도 깨져있었잖아. 함정이 없을지도 모르지.”
노아스가 대답하며 벽 쪽을 볼 때였다.
매끄러운 벽 틈새가 벌어져 있고, 그 속에 반짝이는 보석 두 개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
벽면을 가리고 있던 무언가가 떨어져 나간 모양새다.
석벽을 파서 안에 보물을 숨겼던 것 같다.
탐사대는 모두 앞을 보고 전진하는 중이다.
앞의 일행이 지나갈 때는 틀림없이 아무런 빛도 없었다.
이를 알지 못한 노아스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크라폰의 어깨를 두드려 석벽을 가리켰다.
크라폰의 입이 떡 벌어졌다.
“헉, 보물···”
“쉿!”
크라폰의 입을 다물게 한 노아스가 속삭였다.
“얼른 챙겨서 나눠 갖자고.”
좌우를 두리번거리며 노아스가 손을 뻗었다.
패인 석벽 틈새의 보석에 손가락이 닿는다.
손에 힘을 주고 보석을 흔들었다.
“꿀꺽!”
침을 삼키며 손을 당겼다.
그 순간 석벽이 가늘게 떨린다.
크라폰이 놀라서 뒤로 물러나며 물었다.
“엇, 무슨 일이야?”
석벽에서 ‘쉬이잇’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사방에서 한기가 쏟아져 나왔다.
“아악!”
손을 막 빼려던 노아스는 차가운 한기에 몸을 떨었다.
순식간에 그의 손이 얼음으로 변하더니 팔로 어깨로 번져왔다.
“크라폰, 도와줘. 으윽. 파, 팔이!”
크라폰이 노아스를 보았을 때는 이미 얼음이 어깨를 타고 목까지 올라온 상태였다.
눈을 깜빡이는 새에 노아스는 얼음 인형으로 변해버렸다.
경악하며 물러서려는데 발이 움직이지 않는다.
바닥에서 솟아나는 차가운 기운에 발이 얼어붙은 것이다.
“으악! 살려줘!!”
몸을 비틀어 빠져나가려는 크라폰의 비명이 탐사대의 눈길을 돌리게 했다.
뒤를 돌아본 사람들은 석벽에서 안개와 같은 냉기가 몰려오는 것을 보았다.
“크라폰!”
크라폰의 몸이 얼음으로 덮여가고 있었다.
깜짝 놀란 퍼니발이 크라폰에게 손을 뻗으려 했다.
그 순간 안개와 같은 냉기가 손끝 가까이 다가왔다.
“헉!”
퍼니발의 동공이 지진을 만난 듯 떨려왔다.
냉기가 접근하자 손가락이 얼어붙어 온 것이다.
후다닥 손을 뒤로 빼고는, 몸을 앞으로 날려 달리기 시작했다.
“뛰어! 아이스 포그다!”
정확히는 ‘헬 포그’였다.
녹지 않는 얼음 입자로 이루어진 지옥의 안개.
닿는 것은 무엇이든 순식간에 얼음으로 변한다.
끓는 물로도, 불로도 멈출 수 없다.
그 헬 포그가 바람을 타고 통로로 밀려드는 것이다.
위험을 느낀 탐사대 전체가 전력으로 통로를 질주했다.
함께 달리던 레이는 자신이 너무 휩쓸려 다니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냉기의 폭풍과 뽑혀서 휘날리는 밧줄,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사람들의 절망 어린 표정···
진입 전부터 희생이 이어지면서 몸과 마음이 잔뜩 움츠러들었다.
가지고 있는 능력을 잊은 채 수동적으로 앞의 대원들을 따라다니고만 있는 것이다.
감각도 마법도 쓰지 않은 채 말이다.
마나의 순환을 체크했다.
던전에 들어온 후 운용이 편해진 느낌이 든다.
혹시나 하고 스캔 마법을 발동하여 앞쪽으로 마나를 퍼뜨려 보았다.
‘된다!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
던전 안을 밖과 분리시키는 마법진이 설치된 모양이다.
앞에 작은 정방형 공동이 나타났고 두 개의 통로가 나타났다.
공동안으로 들어가 벽에 붙었다.
아이스 포그는 공동 가까이 오자 속도가 줄더니 정확히 경계선에서 무언가에 막힌 듯 멈췄다.
느릿느릿 아래로 가라앉은 아이스 포그는 바닥 어디론가 스며들었다.
통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탐사대의 입에서 긴 한숨이 터져나왔다.
“휴우우~”
“헉헉, 젠장! 얼어 죽는 줄 알았네···”
단원 전부를 잃은 퍼니발은 석벽에 등을 기댄 채 거의 넋이 나간 상태였다.
‘보물을 찾겠다는 욕심에 사로잡혀 핵심 인력인 은패 용병들을 이끌고 참가한 탐사였다, 그것도 단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런데 이런 참변을 당하다니··· 무슨 낯으로 돌아간단 말인가!’
프레드먼이 역정을 냈다.
“앞만 보고 따라오라고 그렇게 주의를 주었건만 도대체 무엇을 건드린 건가? 하마터면 다 죽을 뻔하지 않았나!”
그는 널브러져 있는 용병들을 보면서 그랜트와 알렉스에게 단원들의 행동에 책임을 지우겠다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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