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물의 이송
다음날 오후 팔찌를 활성화했다.
디스가이즈 마법을 풀었다.
떠오르는 좌표들 중에서 벨디아론 왕국을 찾는다.
‘벨디아론 왕국의 수도 오루아! 찾았다! 텔레포트!’
머리가 어지러워진다.
눈을 감고 귀에서 울리는 소리가 멎기를 기다린다.
감은 눈으로도 앞이 점차 환해지는 게 느껴진다.
눈을 떴다.
외성 안쪽 성벽 부근에 사림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구석이다.
대로를 통해 광장으로 향했다.
10월 말인데도 아직 날이 따뜻하다.
사람들의 옷차림도 가볍고, 얼굴도 대체적으로 환하다.
귀를 기울여보니 곧 열릴 추수감사절 축제에 대한 이야기가 한창이다.
들뜬 분위기를 보니 올해 작황이 좋았던 모양이다.
사람들에게 성내 지리를 물어 가볍게 돌아본 후 숙소를 잡았다.
다음날 들은 대로 곡물 시장을 찾았다.
한 바퀴를 둘러보고 난 후 가장 큰 상점을 확인하고 들어갔다.
“뭐가 필요하신가요?”
“곡물을 좀 많이 사려고 하오. 그 정도 재고가 있는지 궁금한데.”
직원이 빙긋이 웃는다.
“어느 정도를 필요로 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저희 상점이 왕국 최대의 곡물 유통 상단이 운영하는 곳입니다. 원하는 대로 공급해드리죠.”
“밀, 호밀, 콩, 귀리 각 5만 포대가 필요하오. 거래가 만족스러우면 추후 더 구매할 생각도 있소.”
직원이 잠시 눈을 깜빡거리고 있다가, 곧 얼굴이 하얗게 질린다.
“저, 이리 들어와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제가 지점장님을 모시고 오겠습니다.”
얼마 있다가, 넉넉한 인상의 중년 사내가 헐레벌떡 들어온다.
“오래 기다리지는 않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듣기로 곡물을 대량 거래하신다고 하던데, 죄송하지만 다시 한번 원하시는 양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밀, 호밀, 콩, 귀리를 각각 5만 포대 구입하겠소.”
지점장의 주름진 얼굴이 순간 활짝 펴진다.
“말씀대로 구매하신다면 제가 책임지고 최상급의 곡물을 일반 상품 가격으로 제공해 드리겠습니다.”
거래는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겨울을 대비한 곡물의 대량 구매처와는 이미 모든 거래가 끝난 후이다.
엄청난 곡물을 창고에 보관하고 수요가 다시 살아나는 봄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런데 재고를 즉시 현금화해 줄 대형고객이 나타났다.
지점장은 자신의 권한 내에서 가격을 최대한 인하해 주었다.
밀과 콩이 포대당 12쿠퍼, 호밀과 귀리는 10쿠퍼에 결정되었다.
레이의 입장에서도 나쁘지 않은 가격이었다.
그 자리에서 가격을 지불했다.
“곡물은 제가 지정하는 창고에 옮겨 주시면 알아서 운반하겠습니다.”
“네, 전체 인력을 가동하여 최대한 빠르게 옮겨놓겠습니다. 앞으로도 언제든 찾아주시면 가장 좋은 조건으로 물건을 공급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네, 저도 곧 다시 뵙기를 기대합니다.”
지점장과 직원들이 모두 문밖까지 레이를 배웅했다.
레이는 상점의 창고와 멀지 않은 곳의 대형 창고 십여 개를 빌리고 곡물이 옮겨지기를 기다렸다.
가까운 곳으로 운반하는 것이라 다행히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3일 후 레이는 아공간에 물건을 모두 저장하고 베론의 숙소로 텔레포트했다.
베론에 돌아오자마자 여기서도 대형 창고 열 개를 빌렸다.
아공간에 담아온 곡식의 3분의 1 정도를 여기에 쌓았다.
계획이 완료될 때까지 사용해야 할 공간이다.
적당히 고급스러워 보이는 옷을 입고 본얼굴로 라뮤즈 상단의 외성 상점을 찾았다.
지속적인 관계를 위해 본모습을 보여야 했다.
곡물을 취급하는 곳인데 매대가 거의 비어있다.
직원도 보이지 않는다.
문을 두드리니 안에서 직원 하나가 황급히 나온다.
얼핏 보아도 얼굴이 퀭하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보시다시피 물건이 이것뿐입니다. 여기서 맘에 드시는 게 있는지요?”
멋쩍게 웃으며 진열대를 가리킨다.
“물건을 사려고 온 것이 아니오. 곡물을 사둔 게 좀 있어서, 판매를 하려고 왔소.”
그다지 기대하지 않는 얼굴로 직원이 안으로 안내한다.
테이블에 앉아 차를 한 잔 따르고는 묻는 표정이 그다지 밝지 않다.
“어떤 곡물을 어느 정도나 가지고 계신지요?”
“밀, 호밀, 콩, 귀리를 각각 1만 포대 가지고 있소.”
직원이 갑자기 벌떡 일어서며 소리친다.
“일, 일만 포대라고요? 방금 일만 포대라고 한 게 맞습니까?”
“맞소. 각 1만 포대요.”
“저, 죄송합니다만, 포대가 혹시···”
“40킬로그램 포대요.”
여기서도 오루아의 상점과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
가는 눈에 볼이 홀쭉한 중년의 지점장이 허둥지둥 달려온 것이다.
“우리 직원 얘기로는 곡물 4만 포대를 파시겠다고 하셨다고요?”
“그렇소.”
“곡물은 어디에 보관하고 계신가요? 혹시 멀리 있는 건?”
“여기서 멀지 않은 창고에 보관하고 있소.”
지점장의 눈이 반짝인다.
“그렇다면 가격은 어느 정도를 생각하고 계시는지요?”
“시가의 절반이면 어떻겠소?”
“시, 가, 의, 절반? 정말입니까?”
“대신 조건이 있소이다. 상단주를 뵙고 거래를 마무리하게 해주시오.”
“상단주님을요?”
지점장이 눈을 이리저리 굴린다.
대량의 곡물 구매이다.
거기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가격도 저렴하다.
‘상단주님을 만나게 해드려도 괜찮을 조건이다.’
“상단주님을 만나시면 일단 거래는 확실히 종결되는 것이겠죠?”
“두 말 할 필요 없습니다.”
“좋습니다. 제가 일정을 확인하고 접견 시간을 말씀드리죠. 다만 물건이 멀지 않은 곳에 있다고 하셨으니 지금 가서 볼 수 있겠습니까?”
만일의 경우 거래 전체가 사기일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다.
적어도 물건을 두 눈으로 확인해야 안심이 될 것 같다.
“함께 가시죠. 보여드리지요.”
레이는 지점장과 직원 하나를 데리고 창고로 갔다.
“여기 있는 창고 10개에 제가 보유하고 있는 곡물의 일부를 옮겨 놓았습니다.”
지점장은 이곳 창고들이 베론에서 규모로 손가락에 꼽히는 것들임을 알아보았다.
순간 의심이 들었다.
‘여기의 창고 열 개라면 4만 포대를 훨씬 넘을 텐데, 그게 전부가 아니라고? 정말일까? 그 정도의 곡물이 성내로 운반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는데··· 심지어 그것도 일부라고?’
세 사람이 첫 번째 창고로 들어갔다.
직원이 뾰족한 원통형 색대를 포대에 찔러 넣은 후 내용물 약간을 꺼냈다.
지점장과 함께 만져보고 입에 넣어 씹어 본다.
직원이 지점장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지점장님, 상급 밀이 확실합니다.”
지점장도 고개를 끄덕였다.
“죄송하지만, 다른 곡물도 볼 수 있을까요? 저희가 아무 창고나 선택해 봐도 괜찮겠습니까?”
“괜찮습니다.”
두 사람은 창고 중에 끝에서 두 번째의 창고로 들어갔다.
“여기는 어떤 곡물이 보관되어 있습니까?”
“워낙 많은 양을 옮기다 보니 기억이 잘 나지 않는군요. 한 번 확인해 보시죠.”
직원이 다시 포대에서 곡물 약간을 빼내 살펴본다.
“이번 것은 콩입니다. 이것도 상급입니다.”
지점장의 얼굴이 발그레하게 달아올랐다.
“잘 보았습니다. 물건은 확실하군요. 말씀하신 4만 포대 외의 것들은 어떻게 처리하실 예정인지요?”
“그 부분도 상단주님과 상의하려고 합니다.”
지점장과 직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알겠습니다. 돌아가는 즉시 보고드리고 시간을 잡겠습니다. 저희 상점을 찾아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두 사람은 허리를 땅에까지 숙이며 인사하고, 서둘러 상점으로 돌아갔다.
라뮤즈 상단의 상단주 나하드는 장부를 보고 있었다.
흰머리가 살짝씩 섞인 단정한 머리카락, 깔끔하게 다듬은 수염.
약간 위로 솟은 눈썹 아래 눈빛이 형형한 중년 사내였다.
한숨을 쉬며 이마를 짚었다.
뜨겁다.
매출도 이익도 급전직하 중이다.
콩과 옥수수에 거금을 들여 입도선매했다가 유례없는 흉작이 든 것이 치명타였다.
겨울 동안은 변화를 줄 만한 특별한 상품도 없다.
오전 회의 때 체일론 백작의 질책이 아직도 머리에 생생하다.
“나하드, 주류 유통에 이어 이제는 곡물 시장도 뺏기는 건가? 총관, 지금 우리 영지 예산 사정이 어떻다고 했지?”
옆에 있던 총관이 진땀을 흘리며 대답했다.
“이대로 간다면 연말에는 예산이 바닥날 것입니다. 빚을 지는 수밖에 없습니다.”
“나하드, 들었나? 나 체일론이 영지에 예산이 없어 돈을 빌린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리라고 생각하는가?”
물론 과장이다.
어렵기는 하지만, 설마 체일론 백작의 계좌에 자금이 빌 리가 없다.
나하드는 허리를 연신 굽혔다.
“송구스럽습니다. 어떻게든 방법을 마련하겠습니다.”
대책을 세우겠다고 말하고 물러났지만 막막하다.
과거 상단의 전성기였다면 넉넉히 보유한 자금으로 새로운 사업을 벌이기라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 사업이 하락세를 보이며 여유자금조차 부족한 상황이다.
“휴우~~”
저절로 긴 한숨이 또 나온다.
그때 복도에서 쿵쾅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의 이마에 주름이 잡힌다.
노트도 없이 덜컥 문이 열리더니 지점장이 들어왔다.
“단주님, 단주님!”
나하드가 벌컥 소리를 질렀다.
“한스, 자네 들어올 때 노크할 줄도 모르나? 무엇 때문에 이리 호들갑이야?”
“단주님, 죄송하지만 워낙 급한 일이라 실례를 했습니다. 곡물입니다. 곡물!”
“곡물? 곡물이 뭐 어쨌다고. 어차피 더 팔 것도 없는데 무슨 일이 날 게 있나?”
“곡물을 대량으로 보유한 자가 나타났습니다. 일단 곡물 4만 포대를 팔겠다고 합니다. 그것도 저렴한 가격으로요. 대신에 단주님을 뵙고 싶답니다.”
나하드의 귀에 오직 4만이라는 숫자만 들어왔다.
“4만 포대? 제법 많은 양이군. 어떤 자인가?”
“4만 포대는 그가 보유한 곡물의 일부라고 합니다. 단주님을 만나면 나머지도 넘길 의향이 있다고요.”
“무어라? 그게 일부라고? 그게 정말인가?”
“네. 제가 직접 보았습니다. 남문 쪽 대형 창고 10개에 곡물 포대가 가득 들어있었습니다. 임의로 선택한 창고에서 내용물을 확인도 해보았고요. 그런데 그게 일부만 옮긴 것이라고 합니다.”
나하드가 입을 벌린 채, 침을 꿀꺽 삼켰다.
‘대형창고 10 개면 아무리 적게 잡아도 5만 포대 이상이다. 그정도 물품을 보관하고 있을 정도면 나머지도 상당한 양일 것이다.’
곡물 시장의 판세를 한 번에 뒤집을 수 있는 기회이다.
“한스, 이상하지 않은가? 그 정도의 양이면 제국의 수도로 가면 훨씬 좋은 가격을 받을 수 있을 텐데··· 하필 우리 상단을 찾은 이유가 뭐지?”
“단주님을 꼭 뵙고 말하겠다는 것을 보면 뭔가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일단 만나서 들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당연히 만나기는 해야지. 좋아. 미리 생각해 본다고 해서 그자의 심중을 알 방법이 있겠나. 내일 오전에 보자고 연락하게.”
약속은 즉시 잡혔다.
다음 날 오전 레이는 내성 쪽 상단 본부 건물로 향했다.
얼마 전까지 공국 최대의 상단이었던 만큼 건물의 규모는 컸지만, 의외로 내부는 별다른 장식 없이 단순하다.
상단주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접견실에서 잠시 기다리니, 꼿꼿한 중년의 남자가 들어온다.
빗어넘긴 이마에 머리카락 한 올 흐르지 않는다.
레이를 쳐다보는 눈빛이 마치 먹이를 찾는 표범과 같다.
나하드는 레이의 얼굴을 보고 약간 실망감이 들었다.
‘대형 거래를 논의하기에는 지나치게 어린 자가 아닌가. 옷은 단정하지만, 최고급은 아니고. 눈이 맑고, 눈빛이 강렬한 것 빼고는 특이할 게 없군.’
그는 별 기대 없이 이야기나 들어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처음 뵙겠소. 나하드라고 하오.”
“레이입니다.”
“두 가지를 들었소. 먼저 4만 포대의 곡물 거래는 나와 만나 마무리하겠다. 그리고 보유하고 있는 곡물도 거래할 용의가 있다고 말이오.”
“맞습니다.”
“먼저 하나 묻겠소. 지금 시장 상황으로 보면 어디로 가져가든 높은 가격을 받고 물건을 넘길 수 있을 텐데 굳이 우리에게 와서 저가에 팔겠다는 이유가 뭐요?”
날카로운 눈빛이 마치 레이의 심중을 들여다보려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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